2009 하반기 성화반
(2009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9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성화반 I 1
성화반 Ⅱ 18
성화반 Ⅲ 29
성화반 Ⅳ 43
성화반 Ⅴ 55
성화반 Ⅵ 67
성화반 Ⅶ 79
성화반 Ⅷ 91
성화반 Ⅸ 105
성화반 Ⅹ 116
성화반 XI 130
성화반 XII 141
2009. 10. 10 하반기 성화반
성화반 I
여러분들이 잘 받으셨을 테니까 박재헌 전도사님이 일러준 대로 차근하게 공부를 하면 되고요. 지난번까지는 기독교강요를 최종본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이 최종본이 6권이에요. 그래서 전부다 2500페이지 정도를 읽어야하는데 바람처럼 가는데도 정신이 너무 없어요. 그래서 이제 기독교강요 초판을 가지고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부담이 훨씬 덜어진 것입니다. 기독교강요 초판을 구입하셨는데 가능하면 6권짜리 최종판을 한질 더 구입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이 기독교강요 초판은 1539년에 칼빈이 최초로 쓴 것이에요. 그 후로 이제 마지막으로 책이 나온 것이 1556년에 나오고 1559년에 죽으니까 약 20년 넘는 세월이 지나가는데 그 사이에 많은 논쟁들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많은 논쟁들을 거치면서 칼빈은 맨 처음에 소박하고 간명하게 제시했던 개혁신학에 대한 많은 생각들을 다듬게 됩니다. 다듬으면서 이제 좀 더 상세화 된 이야기가 나오고 그것을 다시 정리하면서 이제 배치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 배열이 모두 끝난 것이 마지막 판에서 끝나게 됩니다. 그때에는 우리들이 교리반을 거치면서 여러분들이 7개의 분과를 읽었지요. 그렇죠? 서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이렇게 되잖아요? 그러한 순서를 칼빈이 마련합니다. 그래서 칼빈이 이런 것을 마련하면서 그러면서 이제 기독교를 조직적으로 서술해가는 방식들이 체계를 갖추게 되요. 이에 비해서 루터파쪽에서는 이런 것들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교리를 배우는 게 굉장히 어려웠어요. 그래서 교리학 지망생들이 적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교리를 많이 지망하게 되지요. 그렇게 해서 이것이 발달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여러분들이 기독교강요를 가지고 교리반에서 배운 것들을 토대로 좀 더 진전된 이야기들을 우리가 공부해보겠습니다. 오늘은 서론적으로 이 기독교강요의 저작의 배경도 배우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이 기독교 신앙의 체계들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흘러와서 오늘 우리 손에 있게 되었는지? 그리고 오늘 우리들이 어떻게 이 교리들을 대하고 신학의 체계들을 우리들이 공부해 나가야지만 되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왜 그렇게 필요한가? 이런 문제들을 오늘 서론적으로 공부하고 오늘은 첫 시간이니까 조금 일찍 마치게 되지 않을까 하는데 그것도 마쳐봐야 알지요. 그렇죠?
우리같이 기도합시다. 고마우신 하나님 오늘도 저희와 함께 해주시옵소서. 은혜를 내려주셔서 저희도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깨닫고 또 알아갈 수 있도록 이 성화반에 부르셨사오니 이 고급 교리반에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온전히 배우고 세워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우리 박재헌 전도사를 통해서 다 전달받으셨겠지만 성화반에서는 성화되게 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고급 교리반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강좌를 들어 오셨는데 기왕에 오셨으니까 오늘부터 집에 가셔서 옛날에 교리반에서 배우신 루이스 벌 코프의 기독교교리 요약하고 노트필기 해놓은 것을 펼쳐놓고 이미 다 배운 것이고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마 한번 쭉 훑어보는데 별로 시간이 안 걸릴 것이에요. 제 생각에는 일주일만 마음을 먹으면 한번은 다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차근차근 이렇게 쭉 살피면서 그러면서 루이스 벌 코프의 기독교교리 요약을 이번 주에, 안 되면 다음 주까지라도 좋으니까 한번 쭉 읽으면서 옛날에 배우고 설명을 들었던 것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들이 지금 현재 공부하고 있는 것이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이죠? 그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을 매주 한과씩 읽어나가시는데 한번 그냥 각주를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쭉 읽어서 한 번에 읽어보세요. 그리고 이제 이 기독교강요 초판은 양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강의 진도에 맞추어서 읽어나가시면 되요. 요약을 하라는 숙제는 없어요. 읽고 오시면 되고 그것으로 이제 퀴즈를 봅니다. 그래서 그 퀴즈를 모두 합쳐서 90점을 맞아야지만 졸업이 가능해요. 그래야지만 수료증을 드립니다. 그 다음에 기왕 여러분들이 공부하는 이 시기에 집중을 해서 이 공부를 가장 우선순위에 놓고 하는 김에 요것만 달랑 달랑 읽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공부하면서 이야기하는 테이프이나 책, 설교들을 보충적으로 활용하고 읽으면서 보완해서 이것들을 완벽하게 정리해서 띄도록 그렇게 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들이 이 교리를 공부하면서 내일 우리들이 산상세미나를 가지요? 그 산상세미나를 가서 그 강의를 잘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렇게 교리를 배우는 것이 우리에게 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인가? 하는 이유를 여러분들이 내일 숲속에서 강의로 들을 수 있을 것이에요. 교리를 배우지만 삶이 함께 뒤따라오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공부가 되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교리공부를 하는 동안에 이때가 매우 특별한 경건의 훈련의 때라고 생각하고 기도도 많이 하시고 또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도도 실천하시고 성경도 읽고 묵상도 하시면서 삶 전체를 신앙에 바로 세우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이 성화반에 들어오셔서 공부를 하셔야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에게 오늘 제가 도대체 우리가 믿는 이 기독교 신학이라는 것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또 우리는 왜 그것을 공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 우선 우리들이 이 기독교강요는 칼빈이 원래는 가톨릭에서 사제가 되기 위해서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성견록을 받으면서 보좌신부라고 여러분들이 성당에 가보면 조그만 아이들이 신부들을 보좌하는 것을 보게 되죠? 그렇죠? 그런 일들을 하면서 어린 시절을 지냈고 아버지가 교회에서 일을 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귀족들과 많은 친분을 가지면서 칼빈에게 좋은 교육을 시킬 수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 칼빈이 그러다가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했든 것처럼 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어느 자료에 보니까 초창기에는 종교개혁의 사상들에 대해서 굉장히 비판적이었어요. 그러다가 이 칼빈이 후에 파리에 와서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 개혁신앙에 접하게 됩니다.
그 가장 커다란 영향은 그 당시에 있었던 인문주의 교육이에요. 인문주의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휴머니즘이라고 부르는데 이 휴머니즘이라는 것은 중세가 저물어가고 그리고 중세의 끝물에 새로운 인간의 발견이라는 기치를 걸고 그리고 말하자면 인본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휴머니즘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라는 명사에 사상이라는 ism이 붙은 것이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인문주의라고 하는데 인간주의라는 것이죠. 그러면 그 예전에는 인간주의가 아니었느냐? 물론 인간주의가 아니었지요. 그러면 신본주의냐? 그것은 신본주의보다는 교회주의였지요. 그래서 이제 인문주의자들이 크게 두부류로 나뉘는데 세속적 인문주의자들과 기독교 인문주의자들로 나뉘게 되요. 그런데 바탕은 같습니다. 그 바탕은 인문주의에요. 인문주의의 기본정신은 뭐냐 하면 인간이 이 모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고 근본이 되는 그런 사상과 문화의 체계를 가리키고 그것을 다시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것이 르네상스운동이었어요. 그러면 르네상스라는 것은 그러한 것들을 그렇게 다시 불러일으킨다는 것 아니에요? 그러면 그런 인간이 참 인간일 수 있는 인본주의를 다시 일으킨다는 것은 언젠가는 그랬던 때가 있다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것을 이제 서구사람들은 어디에서 찾았느냐하면 자기들의 사상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에서 그것을 찾은 것이에요. 그러면 그리스가 왜 그러면 그 사람들에게 그렇게 돌아가고 싶은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었는가? 하는 질문이 떠오르잖아요.
우리들이 이런 배경을 알아야지만 우리들이 믿는 신앙이 이것이 많은 스타일 중의 하나가 아니라 이런 스타일, 저런 스타일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아니라 아 그것이 필연의 길이구나! 하는 것을 역사와 성경과 이성을 통해서 우리들이 알게 되는 것이에요. 자, 그러면 왜 그리스가 그들에게 있어서 돌아가야 할 하나의 마음의 고향같이 되었느냐는 것이죠. 역사적으로 그리스는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작은 도시 국가로서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한 그리스 문명은 상당히 고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요. 그 그리스 문명의 발원은 우리들이 미케네 문명이라고 보는데 이 미케네 문명은 다시 거슬러 올라가면 크레타라는 섬에서 오게 되요. 그게 소위 얘기하는 에게문명이에요. 크레타라는 섬은 어떻게 그렇게 문명과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느냐 하면 크레타는 에게해 쪽에 있는 하나의 섬이에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전설에 나오는 아틀란티스…….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들도 바로 그쪽 지방의 이야기에요. 물속에 가라앉은 도시이야기죠. 그런데 거기는 이제 그리스 본토 쪽에 있는 많은 도시국가들이 바다를 끼고 있으니까 해양활동을 활발하게 했어요. 그렇게 해양활동을 활발하게 하면서 그 크레타 섬에 있는 사람들이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무역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때에 이제 그리스 쪽과는 비교될 수 없게 문명이 발달했던 이집트와의 무역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들 사이에 무역이 이루어지게 되면서 수학이나 천문학, 이런 것들은 이집트 쪽이 훨씬 발달했거든요. 그러면서 문화교류가 이루어지게 되면서 거기에서 크레타문명이 발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들이 거기에서 육지 쪽에 문화를 퍼트리고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서 부족을 이루면서 생활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주전 5세기에서 3세기 정도에 이르게 되었을 때에는 지구에서 가장 지성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던 시대가 되었던 것이죠. 그것이 여러분들이 잘 아는 그리스 철학자들의 시대에요. 저 위로 올라가면 파르메니데스, 그 위로 올라가면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시작해서 아래로 내려오는 자연주의 철학자들의 시대를 거쳐서 거기에 여러분들이 잘 아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런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활동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를 가볼 것 같으면 철학이 발달할만해요. 왜냐하면 그냥 획하고 씨를 뿌리면 돌보지 않아도 곡식이 그렇게 잘되는 비옥한 땅이에요. 지금도 땅 색깔이 새카맣습니다. 거기에 올리브를 비롯한 많은 열매들을 비롯해서 농작물과 식물들이 많이 자랍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삶이 아주 윤택한 것이죠. 그러면 잘 먹고 사는데 아무 염려가 없으면 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철학은 딴 생각을 해야지 발달하지 밥을 벌어먹기 위해서 그냥 코에 단내가 나는 나라에서는 철학이나 사상이 나올 겨를이 없는 것이죠. 그렇게 발달하는 것이에요. 사람들이 먹을 것이 충분하고 또 노예들이 있어서 언제든지 허드렛일들을 해주고 하니까 가만히 앉아서 인생을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왜 사는가? 도대체 이것은 누가 만들었나? 하나는 무엇이고 여럿은 무엇인가? 그런 것들을 고민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제 우리들이 잘 기억해야 될 것은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하늘만 쳐다보게 되지요. 그러니까 사고의 중심이 자연, 내지는 신 쪽으로 많이 가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집트의 왕은 거의 신적인 존재였지만 흉년이 많이 들면 자기의 왕의 지위를 유지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신이 버렸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거든요. 그런데 이쪽 크레타 사람들, 그리스에 있는 사람들은 그게 아니라 주산업이 농업이었지만 농업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무역을 한 것이죠. 그래서 여기서 싼 물건을 사다가 저 사람에게 비싸게 팔고 저 사람한테 싸게 사다가 이 사람한테 비싸게 팔면서 중간에 챙겨먹으니까 신을 많이 연구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많이 연구해야 되겠어요? 고객을 많이 연구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사람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했어요. 그리고 모든 사고방식이나 이런 것들이 물건과 물건이 오가고 하니까 사고방식이 물질 중심적으로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아주 현실적인 사고방식들이 싹트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물건을 거래하고 도량형, 그 다음에 이런 것들을 만들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이죠. 그러면서 뭐냐 하면 사고 속에 항상 그 중심 속에 사람이 있게 되는 것이에요.
이게 우주선이거든요. 이게 지금 여러분 앞으로 다가오고 있어요? 여러분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어요? 대답해보세요. 이 그림을 동양 사람하고 서양 사람하고 일반적으로 다르게 본답니다. 서양 사람은 이 그림을 보면서 우주선이 저 먼 나라에서 자기에게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하고 동양 사람은 이게 자기를 떠나서 어디론가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죠. 이처럼 사고의 중심이 근본적으로 서양사상의 뿌리가 되는 그리스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미 인간중심적인 사상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때의 역사를 보면 굉장합니다. 저는 정말 신앙을 제외하고 나면 인류역사에서 인간이 가장 사람답게 살았던 시기가 바로 그 시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계급이 있어요. 그렇지만 여러분들이 동양사회나 로마시대 이후에 볼 수 있는 그런 계급이 아니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아주 질서 있게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리고 인간의 기본권, 사람됨에 대해서 존엄성을 부여하게 되요. 그러니까 1715년 영국의 권리장전부터 시작된 그런 모든 민주주의의 역사, 시민혁명시대를 지나서 오늘날까지 오는 이 민주주의 역사에 있어서 근간을 이루었던 사상이 뭐냐 하면 인간은 존엄하다는 것이에요. 그런 사상이 그 때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 사람들은 노예들도 주인이 함부로 생명을 해칠 수 없는 그러한 기본권을 인정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어떻게 하면 이 도시국가가 도시국가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그러나 이상적으로 생각해서 일만 명 내지 이삼만 명 정도 되는 크기의 국가입니다.
그 국가가 모두 하나의 가족처럼 우리가 옛날에 볼 수 있는 씨족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렇게 하면서 일을 합니다. 우리와 똑같이 아침을 먹고 나가서 밭도 갈고 농사도 지으면서 장사도 하잖아요. 이 사람들이 저녁에 일찌감치 일을 끝냅니다. 그리고 어디로 모이느냐 하면 극장으로 모입니다. 극장은 항상 서쪽하늘을 바라보면 콜로세움이 만들어져요. 산이 이렇게 비탈이 되는데 이쪽으로 무대를 세우고 거기를 계단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듣게 하고 마이크가 없으니까 무대에서 ‘아’ 하고 소리를 지르면 그게 최상의 acoustic impact 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만들고 이게 사람이 소리를 내면 사람마다 소리가 340㎧ 이니까 어느 곳에는 음이 빨리 도착하고 늦게 도착하면 time delay 현상이 일어나잖아요. 그런데 놀랍게 이 거리를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측정해서 여기서 연설자가 소리를 내면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제가 갔을 때 실험을 해보았어요.) 기가 막히게 소리의 울림이 어우러집니다. 거기에서 무엇을 보느냐하면 당시 그 시대에 유행했던 비극을 관람하는 것이에요. 배우들이 준비하고 있다가 거기서 연극을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 연극을 보면서 사람들이 인생의 비애와 이런 것들을 보면서 펑펑 울면서 그러면서 지는 석양을 받으며 어두워진 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에요. 그런 삶이 이루어졌던 것이에요.
여러분들이 지금이야 안 보시겠지만 옛날에 학교 다닐 때에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보셨을지 모르겠어요. 어렸을 때에 보면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이상국가론이라는 책은 이후에 서구의 모든 철학이 그 한권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플라톤 이후의 모든 서양의 철학은 그 플라톤을 풀어서 설명한 그러한 책이 되는데 이 시간에 내가 시간이 없어서 다 말을 못하는데 이상 국가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논하고 있는 모든 것이 그럼 어떤 인간이 참 좋은 인간이냐?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람을 가지고는 설명할 수 없으니까 나라로 확장해서 나라를 가지고 설명했는데 그 설명한 그것은 결국 뭐냐 하면 좋은 사람이 모인 나라가 좋은 나라다. 좋은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는 것들을 이론적으로 다 설명해서 그렇게 하고 국가론을 만들면서 거기에서 선악을 비롯해서 윤리의 모든 기준이 전부다 나오게 됩니다. 정말 위대한 책입니다.
그런데 이제 인간에 대해서 최대한의 존엄을 부여하고 국가는 지금처럼 뭔가 목표를 세워가지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저 나라를 정복하고 그런 것이 국가가 아니라 인간이 사람답게 자기를 최대한 실현하면서 살도록 돕는 기능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국가라고 보고 국가가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왕이 철학자가 되어야하고 그 아래 있는 다스리는 통치자들의 계급, 그리고 싸우는 전사들의 계급은 거의 성자처럼 먹고 입고 마시는 일에 초연해지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가족도 갖지 말고 그러면서 사심이 없이 이 백성들을 위해서 온전히 이 나라가 참된 사람들이 살아가는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헌신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단 말이죠. 그렇게 나라를 이루면서 살아가던 그때가 르네상스 운동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돌아가고 싶은 때였다는 것이죠. 역사를 다 훑어보아도 다 질곡의 역사고 인간을 짓밟은 역사였어요. 로마가 생기고 나서 강력한 중앙통제국가가 되고 이미 마케도니아시대부터 시작된 것이죠. 그러면서 백성들의 자원을 빼앗고 그리고 자유를 구속하고 하면서 강한나라를 만들어가는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짓밟히고 그리고 기독교화 되면서 이번에는 교회가 세월이 흐르면서 그렇게 인간을 짓밟는 그런 상황이 된 것이죠.
그러니까 종교개혁이 일어날 당시의 교회의 부패상은 여러분들이 이렇게 부패했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성직자들의 부패가 있었던 것이죠. 왜 성직자의 그런 부패가 이루어졌느냐하면 성직자들이 그냥 처음부터 시작할 때에 성직에 대한 소명을 느끼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서 봉사해야겠다고 시작했다가 은혜가 떨어지고 타락해서 그렇게 해서 나쁜 성직자들이 된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그게 없는 사람들이에요. 왜 그러느냐하면 이제 나라가 있는데 나라가 땅을 다 가지고 있고 왕의 소유잖아요? 그런데 그것들을 다 떼어주잖아요? 그래서 각자 자기의 땅들이 생겨나게 되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이제 수도원이 생기는 것이에요. 그러면 사람들이 수도원에 가서 기도도 하고 그래요. 그 다음에 보면 여기에 보니까 세속의 도시에 있는 성직자들보다 수도원에 있는 사람들은 더 거룩해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가서 기도도 받고 인생 상담도 하고 은혜를 받고 그러지요. 그러면 어떻게 되요? 도와드릴 것이 있습니까? 하면서 땅도 바치고 돈도 바치고 그러는 것이죠. 수도원에 그런 것들이 쌓이는 것이에요. 처음에는 그것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에게도 나누어주고 그랬지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이에요. 그러면 교황의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나중의 일이지만 그 사람들은 결혼을 안 하잖아요? 종교개혁 때쯤에는 결혼을 안 하잖아요? 그러니까 수도원장이 땅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물려줄 사람이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죽으면 다시 교황 것이 되는 거예요. 그렇지요? 그러면 교황이 그 수도원장을 임명하면 그 수도원장을 임명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 사람 것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돌아가는 것이에요. 왕의 입장에서 보면 저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죠. 왜냐하면 거기는 완전히 세금을 자기에게 안내고 분명히 자기나라 땅인데 교황에게 가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요? 아들이 많은 놈 중에서 똘똘해 보이는 놈에게 ‘너 저기의 수도원장을 해라.’ ‘그러면 장가는 어떻게 가고?’ ‘아 그거 장가는 가고 싶으면 야매장가를 가고…….’ 그리고 가는 것이에요. 그러면 교황청에서 이런 사람은 임명을 안 해줄 것 같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고 돈을 잔뜩 싸들고 가서 뇌물을 먹이는 것이에요. 그러면 교황청에서 돈을 받고 성직 매매를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되요? 땅이야 이름은 수도원이름이지만 자기아들이 거기의 원장으로 있으니까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이죠. ‘야, 수도원에 있는 것 좀 왕궁에다가 집어넣어라.’ 그러면서……. 그러니까 어떤 때는 신앙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성직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굉장한 것이죠. 내가 확인은 안했는데 어느 교수님이 그러는데 마지막에는 교회 안에서 나체파티가 열어지기도 했대요. 나체파티를 열었던 기록들이 나오기도 했대요. 그러니까 상상할 수 없는 그런 타락과 부패 속에서 이 교권에 의해서 인간이 짓밟히는 것을 보면서 그 사람들이 진정으로 자신들이 돌아가야 할 인간성의 회복의 고향을 거기에서 찾는 것이죠.
그러면서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는 것이죠. 그러니까 당연히 무엇이 중요하게 되겠어요? 그 당시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을까?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을까? 이런 것들을 연구할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그 당시에 그런 것들을 연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지요? 문헌을 읽어야 되잖아요. 그러면서 고전읽기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 고전이라는 것은 무엇이에요? 대부분의 고전은 그리스어로 되어있는 것이죠. 그리스어도 우리들이 성경에 읽을 때에 쓰는 꼬이네그릭, 그 다음에 문학작품들을 읽는 에띡그릭이 있고 호모의 일리아드 오디세이 같은 아주 고대의 작품들을 읽을 수 있는 호메릭그릭이 있어요. 그런 그릭을 공부하면서 원전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뿐만이 아니죠. 결국 그 문화는 거슬러 올라가면 저쪽의 기독교 역사가 들어오면서 그리스를 중심으로 하는 헬레니즘 문화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하는 헤브라이즘 문화가 만나게 되는 것이거든요. 서양은 이 두 문명의 만남이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이제 히브리어도 공부하게 되요. 히브리어뿐만 아니라 히브리어, 아람어, 고대 근동어들, 르네상스의 붐을 타고 고대 근동에 대한 공부들이 막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고대 언어라는 것이 하나를 공부하면 옆에 것을 정복하는 것이 굉장히 쉽거든요. 그렇게 하면서 공부를 해나가는 것이에요. 원전을 읽기 시작하면서 그러면서 문헌을 비평하기 시작하면서 그 시대의 사람들의 삶과 사고방식이 교회의 폭압 속에 짓눌려있고 절대 왕정에 짓밟히면서 살아온 자신들의 구겨진 인간성이 활짝 펴졌던 시대를 보면서 그러면서 이러한 사회는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사회이고 그리고 인간으로서는 항거해야할 사회라는 인식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에요. 이것이 결국은 이러한 복고주의 운동들이 결국은 이제 인문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이것이 종교개혁 운동으로 일어나고 이 종교개혁 운동이 다시 18세기에 일어났던 프랑스 혁명을 비롯해서 유럽의 각처에서 일어났던 시민혁명으로 촉발되고 그리고 이것이 근대로 넘어오는 현대사회의 시민정신의 근간을 이루게 되고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모든 민주시대의 기본적인 정신들의 틀이 거기에서 갖추어지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 하면 그렇게 사람들이 이제 고대에 대한 소망을 품고 공부를 하니까 무슨 생각이 드느냐하면 ‘과연 교회에서 가르쳐주는 것이 진짜일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백성들을 그렇게 교회의 폭압적인 권세아래 굴복시키고 복종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논리가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그들 나름대로 논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정말 그런 것일까? 하고 그 다음에 성경을 원전으로 읽기 시작한 것이에요. 그것은 가톨릭에서는 제일 싫어하는 것이거든요. 왜냐하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교회만 가질 수 있고 최종적인 해석의 권세가 교황에게 있다고 믿었으니까 사람들이 그것을 직접 대하는 것은 절대 반대였지요. 그래서 오직 교회에서 해설되는 말씀만을 듣도록 하고 그리고 성경은 읽지 않게 하고 교리만을 가르쳤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이 과연 역사적인 기독교가 맞는가? 하는 의문을 갖기 시작하면서 그러면서 그 똑똑한 인문주의자들이 이번에는 기독교 고전을 읽기 시작한 것이에요.
기독교 고전은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크게 두 갈래로 내려오게 되요. 그 두 갈래는 뭐냐 하면 한 갈래는 헬라교부들이에요.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동방의 교부들이 있고 로마와 그리고 카르타고와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하던 라틴어를 사용하던 서방의 학파로 두 개의 커다란 그룹이 형성되면서 신학이 발전하게 됩니다. 그게 나중에 동방교회로 이어지게 되고 서방교회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죠. 물론 양쪽의 신학들이 약간의 차이가 있어요. 서방교회는 철학, 사상, 이것을 먼저 중심에 내세웠고 그리고 동방교회는 하나님과의 만남, 교통, 실천적인 것, 영적인 것들을 먼저 세웠어요.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 초창기에는 동방교회 교부들의 전통이 훨씬 더 성경적인 기독교의 가르침에 가까웠어요. 그러다가 이제 그러한 철학이나 사상의 틀이 약했고 그래서 신학교육을 하는 대신 사람들에게 오늘날로 말하면 영성훈련을 하는 데에 치중한 것이에요. 그러다보니까 어떻게 되느냐하면 이것이 처음에는 상당히 성경적인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상이지만 이것들이 신학이 발전하지 않으면서 신학이 내재화되고 유실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요. 왜냐하면 선반이 있어야지만 많은 물건을 얹을 수 있듯이 성경의 많은 가르침들을 깨닫고 배워도 이것이 어떤 철학과 사상이라는 논리의 틀 속에서 이것들이 집적이 되는 것이거든요. 그러면서 활발하게 신학의 토론들이 일어나면서 서방신학은 계속 발전하게 되어서 사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의 유산은 둘 다이지만 대부분이 사실은 서방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기독교 교리의 중심교리라고 할 수 있는 많은 교리들의 체계들이 이 서방신학을 통해서 완성되게 되는 것이에요.
그 나온 많은 저작들을 그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 중에서 기독교 신학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읽기 시작했던 것이에요. 늘 공부를 많이 했으니까 읽는 것은 일도 아니지요. 읽어나가는 것이에요. 지금도 그 전집이 남아있어서 그 전집을 사는 것이 소원인데 530권정도 됩니다. 그런데 그 전집 한질의 가격이 1억 원입니다. 그런데 지금 벌써 절판된 것들도 많아요. 우리나라에는 그것이 없어요. 최근에 총신에서 들여온다는 말이 있는데 들여와도 아마 벌써 빠져나간 것들이 많이 있지요. 아무튼 그것들을 읽어나가면서 이 역사적인 기독교의 모습이 사실은 이 사람들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이 기독교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 인문주의자들이 두부류가 있었는데 세속적인 인문주의자들은 그것은 곧바로 혁명과 그리고 투쟁, 그리고 이런 것들을 의미하는 것이었어요. 그렇지만 이제 이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그러한 인문주의 사상을 도구로 하여 이 사람들이 말하자면 교회의 개혁과 신앙의 쇄신을 위해서 이 모든 사상들을 기독교적으로 활용할 운동을 벌이게 됩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인문주의자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자들이 교육을 받았던 15세기 말 내지는 특히 16세기 초엽은 이미 벌써 인문주의가 무르익고 있는 때였고 지금 우리로 말하자면 대학마다 전부 IT를 전공하는 과가 없는 대학이 없는 것처럼 이렇게 이미 인문주의 없이는 당대의 사람들과 학문적인 소통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어요. 그랬기 때문에 이 인문주의 교육이 유럽 전체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면서 그런 인문주의 교육을 철저하게 받게 되는 것이죠.
그 전까지는 뭐냐 하면 중세 스콜라주의라고 하는 것이 있어요. 그러면 여러분들 생각에 ‘중세 스콜라주의를 반대해서 인문주의가 일어났구나!’ 사람들은 흔히 그렇게 이야기를 많이 해요. 그런데 그것은 ⅓정도만 맞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분명히 교회가 그 당시의 시민들을 억압하고 폭압하였던 그런 많은 논리적인 기초나 그런 것들을 중세 스콜라주의가 제공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중세 스콜라주의자들이 다 그렇게 불경건하고 나쁜 생활을 하고 있는 종교개혁 직전의 사제들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은 아니었거든요. 사실은 순 모리배 같은 사람들로서 학식도 없고 불교로 말하자면 땡 중 같은 사제들이 자리를 차지하고서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는 하나의 출세의 도구로 삼으면서 그렇게 성직을 세속화시켰던 것이죠. 그 중세 가톨릭에 의해서 아주 치밀하게 이 철학이 발전해오면서 신학을 정교하게 됩니다. 인문주의자들은 이런 중세 철학에 대한 반기를 들고 사상적 혁명을 일으킨 것은 틀림이 없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들이 새롭게 정립해놓은 사상적 개념들, 철학적 사고들 이런 많은 것들을 전부다 자신들이 만들어내는데 이런 것들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어떤 틀을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그 틀을 사용할 때 중세 스콜라주의의 틀을 사용하는 것이죠. 중세 철학의 틀을 사용하는 것이죠. 그래서 거꾸로 중세 철학의 틀이 중세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던 인무주의자들의 사상을 사라지지 않고 썩지 않게끔 보존하는 그러한 말하자면 보존제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드디어 이제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이 개혁은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보헤미아의 존 후스라든지 윌리엄 틴데일 이라든지 놀라드파 라든지 그 다음에 더위로 올라가면 왈도파 라든지 이런 불란서의 위그너들, 그들의 선조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마르틴 루터 이전에 활동하고 있고 그런 개혁사상 같은 것을 외치다가 결국은 죽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외치고 죽어간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제가 쓴 사람 기롤 라모 사보나롤라라는 사람이에요. 서점에 책이 있는데 내가 그 책을 읽으라고 강조를 안 해서 그러는데 이런 설명을 듣고 가서 읽어보세요. 굉장히 흥미진진할 것이에요. 그런 기롤 라모 사보나롤라는 피렌체의 설교자였지요. 그런 사람들이 피를 뿌리고 지나가면서 그 피를 머금으면서 이제 이 마르틴 루터 같은 사람이 나오게 되는 것이죠. 지금 이 시간에 마르틴 루터의 생애를 다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마르틴 루터가 맨 처음에 종교개혁을 일으켰을 때에는 마음먹고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한번 토론해보자고 생각한 것이에요. 그래서 95개 조항을 내건 것이죠. 그런 일은 그 당시에 너무나 자주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아니었어요. 마르틴 루터는 굳게 믿었어요. 교황 성화는 생각이 똑바른 분인데 그 밑에 있는 아랫것들이 생각을 잘못해서 일을 그르치고 있다고 믿고 있는데 나중에 로마 교황청에도 가보고 그 상황을 다 살피면서 마지막에는 이것이 아랫것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황 자신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될 때에 그 시발은 우리들이 면죄부 판매라고 하지만 그러나 면죄부 판매는 루터 자신이 내가 너무 많이 비난했다고 사과할 수 있을 정도의 문제에요. 나중에 진짜로 사과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근본적으로 이것은 기독교 사상의 문제라는 것이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인간이 무엇으로 구원을 얻는가? 하는 문제였어요. 그러면서 마르틴 루터의 생애에 보면 나오는 탑의 경험,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극기경험을 하는 이러한 모든 구원을 찾아가려는 인간적인 자기의 노력이 실패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결국은 탑의 경험을 통해서 복음의 진수를 만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 만난 복음의 진수가 무엇이었느냐 하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의 교리였어요. 그런 이신칭의의 교리를 만나고 나서 그 다음에 이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에요. 여기에는 이 시간에 다 밝힐 수 없는 정치 사회적인 많은 요소들이 작용하면서 그러면서 루터는 처음의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러면서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종교개혁을 추진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제가 항상 말씀드리는 것이 뭐냐 하면 목회자들을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해야 돼요. 그리고 목회자들이 공부를 많이 해야 됩니다. 이다음에 여러분이 다른 교회를 가서도 공부를 잘하는 목회자가 모두 진실할 수는 없지만 학위나 그런 것을 보지 말고 저 목회자의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지성이 들어있는가를 보고 그것을 교회를 결정하는 중요한 표준으로 삼아야 해요. 그런데 지금 보면 너무 공부를 안 해요. 우리 신학생들을 만나기만 하면 공부 안한다고 매일 욕을 하지요. 만날 내가 혼내는데 하도 혼을 냈더니 이제 이골이 나서 별고 자극도 안 받아요. 아무튼 공부를 해야 돼요. 마르틴 루터는 그런 점에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었어요. 갖추어진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마르틴 루터가 당대에 에라스무스와 자유 의지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고 그리고 그 루터를 죽이기 위해서 파송한 말하자면 지적으로 매장시키기 위해서 파송한 그 유명한 라이프니츠의 토론에서 엥골스타트 대학의 교수 에크와 논쟁을 하게 되지요. 그러한 정도의 실력 있는 사람이었어요. 제방에도 마르틴 루터의 전집이 있는데 전부 다 100권정도 됩니다. 무지하게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평범한 사람이 베껴 쓰는데 20년이 걸린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얼마나 그 격동기 속에서 한번 필을 잡으면 날아가듯이 막 써내려간 것이지요. 이번에 제가 휴가 때 여행을 하면서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마르틴 루터가 공부하던 책을 봤는데 피터 롬바르드의 명제집이라는 책인데 귀퉁이에다가 선생님이 강의하니까 깨알같이 다 적어놓은 것을 보았어요. 굉장히 감격스럽더라고요. 그게 벌써 500년 전의 일인데……. 그렇게 공부를 해나간 것이에요. 그래서 신학을 새로 세우게 된 것이죠.
마르틴 루터는 종교 개혁을 일으켰지만 그러나 종교개혁 신학은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모두 완성된 것이 아니었고 마르틴 루터는 굵직굵직한 그루터기들을 놓았다면 칼빈은 지성적으로는 마르틴 루터에 뒤지지 않는 천재적인 지성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이 사람은 천재적일뿐만 아니라 말과 글에 있어서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아주 간명하고 호소력 있게 말할 수 있는 글쓰기와 말하기의 재능까지 함께 가진 사람이었어요. 이 사람이 이제 그런 모든 신학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지만 그 후에 마르틴 루터를 따라서 종교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여기저기서 그런 종교개혁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에요. 그러면서 그 당시에 탁월한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던 그 놀라운 천재들이 여기저기서 주님을 만나면서 그 탁월한 학문을 가지고 성경을 연구하고 참된 기독교의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기독교 발전 약 1500년사의 역사를 더듬으면서 참된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재구성해내는 운동을 벌이게 되는 것이죠.
칼빈은 그런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에요. 늘 말씀을 드리지만 어떤 의미에서 칼빈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신학적 독창성에 있어서는 마르틴 루터에게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전사적인 삶에 있어서는 까펠전투에서 사위와 아들과 함께 장렬하게 피를 흘리며 죽었던 츠빙글리 같은 사람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목회적인 역량과 포용하는 가슴에 있어서는 마르틴 부처와 같은 스트라스부르그의 목회자를 능가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사실은 칼빈이 스트라스부르그의 마르틴 부처를 영적인 아버지처럼 생각했단 말이죠.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천재였습니다. 그러니까 마르틴 루터보다는 한세대 아랫사람이었지요. 그때는 벌써 많은 신학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신학자들과 함께 굉장히 많은 서신교류를 하게 됩니다. 제방에도 지금 칼빈의 서신 전체가 거의 보관되어 있는데 약 4000통 정도의 편지를 씁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상당 부분이 당대에 유명한 신학자들과의 서신교환이었어요. 신학적인 내용에 대한 서신교환이었어요.
그러면서 이 칼빈이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업적을 이루게 되요. 그것이 뭐냐 하면 기독교 강요라는 책을 쓴 것이에요. 이 책을 쓴 것은 칼빈이 제네바에서 목회하기 전이었어요. 이 책을 쓰기 전까지 칼빈은 무명의 사람이었어요. 원래 이 사람은 인문주의를 공부했는데 이 칼빈이라는 사람 안에는 두 개의 인문주의 사조가 만나요. 그게 뭐냐 하면 법학적 인문주의와 수사학적 인문주의라는 것이 만납니다. 법학적 인문주의는 이 사람이 법학을 공부하게 되는데 나중에 제네바를 다스리는데 있어서 그 법학 지식이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고 기독교강요를 기술하는데 있어서도 상당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수사학적 인문주의인데 이것은 언어에 대한 훈련으로 나타나요. 특별히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희랍어에 대한 지식은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봐요. 히브리어에 대해서는 그 정도까지는 평가하지 않지만 희랍어에 대해서는 이미 상당한 실력에 올랐고 그리고 희랍의 고전들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제 기독교 강요를 쓰게 되는데 이 기독교 강요는 이제 쓰게 된 목적 자체가 크게 두 가지에요. 우선 첫째는 뭐냐 하면 당시의 일어나고 있는 프랑스 안에서의 커다란 핍박과 관련이 있어요. 프랑수와 1세라는 사람이 당시의 왕이었는데 이 왕이 이제 기독교에 대해서는 그저 그렇게 썩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적대적이지도 않고 중립적인 입장이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이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종파가 많이 있잖아요? 종교개혁이 일어났지만 일사불란하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저기 신비주의자들을 비롯해서 토마스 뮨초와 같이 미래의 왕국사상에 사로잡혀서 농민혁명을 일으키고 지주와 성직자들을 다 칼로 처단하고 도끼로 때려죽인 그런 기독교 지도자가 있었는가하면, 극단적인 금욕을 강요하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또 거기에는 재세례파주의자나 이런 열광주의자들도 있었고, 아무튼 층차가 다양해요. 그런 사람들 중에 과격한 어떤 사람들이 이제 문제를 일으켜요. 벽보사건을 일으키는데 그것을 보면서 프랑수와 1세에게 사람들이 꼬드기기를 사람들이 당신에게 반역을 일으키려고 한다. 이렇게 잘못된 소스를 주지요. 누가 그랬겠어요? 가톨릭 사람들이 그랬지요. 그러면서 이제 대대적인 박해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죠. 그런 박해중의 유명한 것이 바로 바돌로메 학살의 날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이루어지느냐하면 미리 약속을 하고 딱 어느 날 그날이 되자 새벽 세시에 일제히 가톨릭 사람들이 일어나서 개신교 사람들을 불문곡직하고 쳐 죽이는 것이에요. 그게 파리 안에서만 3000명이 죽임을 당하는데 당시 파리 인구가 삼십만 명이었으니까 100명중의 한사람이 죽임을 당한 것이고 전국적으로는 기록에 남은 것만 이만에서 삼만 정도 된다고 하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날 도끼와 창에 찔리고 맞아 죽었는지 모르는 것이에요. 이게 가톨릭의 역사에서도 아주 부끄러운 역사로 남는 날이에요. 그런 일들이 있었어요. 어쨌든 거두절미하고 이제 이렇게 프랑스 왕이 이제 기독교를 박해하는 데는 상당히 근거 없는 정보에 접해서 오판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변증의 목적으로 우리는 사실은 그런 일을 할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쓰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여기에 보면 맨 뒤에 국가론이 나오는데 (사실 80년대에 우리들이 이것을 읽으면서 고민을 무지하게 많이 했어요. 왜냐하면 그때에 막 독재가 난리를 치고 최루탄이 터지고 여기저기서 화염병에 맞아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때였는데 이 신학가지고 되겠느냐는 분노를 할 정도로…….) 그렇게 아주 국가에 대해서 순종적이고 뚜렷하게 교회와 국가 사이에 구분이 있는 그런 신학을 개진하게 되는 것이죠.
이제 변증의 목적이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개혁신앙을 가졌는데 가톨릭이 싫다고 하는데 그러면 너희들은 무엇을 믿느냐고 할 때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한번 총정리를 해본 것이에요. 그 총정리 할 때에 기본적으로 어떻게 했느냐하면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중심으로 그 뜻을 풀어서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살아야하는가? 이웃에 대한 삶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어떤 사랑을 가지고 살아야할까? 하는 것을 십계명이 보여주고 그 다음에 주기도문이 보여주고 사도신경이 보여주잖아요. 이 세 개를 해설을 해서 우리 개신교가 믿는 신앙이 가톨릭이 믿는 신앙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문제를 한번 분별해보기를 원했던 것이죠. 그렇게 하고 그 다음에 가장 문제가 되었던 가톨릭의 미사문제를 비판해서 그것을 공격하고 바로 세우고 그 다음에 국가의 문제를 다루고해서 거의 5부작과 서론을 하나 붙여서 6부작 정도로 만들어서 이것을 성립시키게 된 것이죠. 이것이 딱 나왔을 때 사람들에게 그렇게 놀라운 충격을 주었던 것이 뭐냐 하면 여기저기서 가톨릭은 틀렸고 이것이 맞는다고 하고 이신칭의를 이야기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러면 개신교는 무엇을 믿는가에 대한 통일적인 이야기가 없었어요. 그런데 이 한권의 책이 골격을 보여준 것이었어요. 가톨릭을 반대하는 개신교 신앙이 믿어야할 바와 살아야할 생활이 무엇인가를 보여줌으로 가톨릭과 대조를 이루게 된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책이 믿어야할 기독교의 내용을 다 다루고 있겠어요? 아니면 일부만 다루고 있겠어요? 일부만 다루고 있었지요. 다는 못 다루었어요. 그래서 가톨릭과 별 차이가 나지 않는 교리들은 내버려두고 차이가 나는 것들만 구성한 것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해서 기독교 강요가 나오게 되요.
이 책이 나오면서 다 하나님의 뜻이었어요. 이 사람이 등장하기 얼마 전에 구텐베르크의 인쇄기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대량으로 찍어내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마어마한 부수를 찍어낼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에요. 그런데 뭐냐 하면 나라에서 못 찍게 하지요. 나라에서 못 찍게 하는 책이 비싸요. 그러니까 출판업자들은 야매로 숨어서 그것을 찍어서 만들어 내기만 하면 불티나게 팔리고 돈을 버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정부에서 색출을 하든지 말든지 뇌물을 주면서 이게 이것을 찍어서 확 퍼뜨리게 되는 것이에요. 어마어마한 양을 퍼뜨리게 되었어요. 정확한 통계인지는 모르겠는데 마르틴 루터가 살아있을 때 종교개혁을 하면서 퍼뜨린 인쇄물이 3억 부랍니다. 그 당시에 인구가 얼마나 되었다고……. 그러니까 길거리에 널브러진 것이 루터의 글이었다고 보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렇게 이 기독교강요가 퍼져나간 것이에요. 그러니까 벌써 칼빈이 제네바로 갔을 때는 이 기독교강요가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고 이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알려지게 된 것이죠. 이게 몇 년 전에 발표가 나왔는데 천년동안 세계를 바꿔놓고 움직인 열권의 책 가운데 하나에요. 그러니까 예수님 오신 이후로 이천년 동안에 20권 안에 드는 책이에요. 대단한 책이죠. 그렇게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제 칼빈이 그렇게 하면서 생활을 하면서 칼빈의 이러한 사상을 열렬히 추종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러나 이 칼빈의 사상을 공격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 아니에요. 총체적으로 공격하는 사람들은 가톨릭의 사람들이었고 같은 개신교 안에서도 이런 식의 기독교는 너무 가혹한 기독교라고 생각하고 반발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나왔던 것이에요. 그렇게 나오는 사람들에 대해서 칼빈이 이제 도전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응전을 안 할 수가 없겠지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과 함께 논쟁을 하게 되고 논쟁을 한 것들이 여기에 들어가게 되고 논쟁에 나오면서 예전에는 내가 너무 간단하게 이야기했던 것을 이놈들이 꼬투리를 물고 늘어지는구나 하면서 그러면 내가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해주지! 그러니까 그것이 분량이 계속 늘어나게 된 것이에요. 그래서 요것밖에 안 되던 것이 적어도 이것의 세 배 내지 네 배 정도로 늘어나게 된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1559년에 이루어진 마지막 기독교강요의 형태 속에 정초되어 있는 것이죠.
자 이제 문제는 이것이에요. 우리들은 개혁신앙! 그러면 칼빈 한사람만 생각을 하게 되요. 그런데 칼빈이 중요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칼빈 하나는 아니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하면 이렇게, 이렇게 직조된 상태에서 옷감이 짜지듯이 이렇게 칼빈이라는 사람이 여기에 있지만 이 사람이 동시대에 있는 많은 신학자들과 함께 연결을 이루면서 자기의 신학을 형성해갔고 또 위로는 이 사람이 그 이전에 있었던 칼빈과 같은 선배 종교개혁가 같은 사람들도 있고 그 위로 올라가면 중세의 사람들도 있었겠죠. 그중에 어떤 것들은 받아들이고 어떤 것들은 버렸겠지요. 그렇게 하고 여기에 인문주의도 있고 그 다음에 여러 가지 많은 요소들이 다 겹치면서 칼빈이라는 사람이 여기에 있고 사상이 형성되고 그리고 기독교강요라는 책이 나오게 된 것이죠. 그러면 한번 잘 보세요. 칼빈이라는 사람이 여기에 있으면 우리는 이렇게 보지 않고 그냥 다 잘라내고 칼빈 한사람만을 보고 이 사람에게서 모든 개혁신앙의 완성된 형태를 찾아내려고 하고 그 형태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발전해오게 되었고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나타난 그것이 후대에 오면서 어떻게 발전되고 이러한 앞뒤좌우의 연관관계는 상관없이 context를 끊어내고 그리고 이제 칼빈을 보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보게 되면 안 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제 칼빈은 더군다나 사람들은 칼빈 그러면 이 기독교강요 밖에는 읽지 않아요. 그것도 최종판 밖에는 안 읽어요. 그러나 칼빈은 이것만이 아니라 많은 설교집들과 주석들을 남겼어요. 모든 59권의 책을 남깁니다. 그것들을 골고루 모두 보면서 칼빈 사상을 균형 잡히게 전체적으로 이해해야지만 칼빈이 우리에게 물려주려고 했던 이 개혁신앙이 어떤 것이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하고 칼빈은 결국 죽게 됩니다. 이 이후에 이미 칼빈이 죽기 전에 이제 역사는 바뀌게 됩니다. 어떻게 바뀌게 되느냐하면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종교개혁은 가톨릭에 회복하기 어려운 커다란 타격을 주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정치적으로 이 개신교도들을 압박하고 핍박했어요. 가장 좋은 방법은 왕을 설득해서 그 나라에서 개신교도들의 씨를 말리는 것이었죠. 그러니까 그런 작전이 잘 성공한 이태리나 그리고 프랑스(프랑스는 지금도 90%가 가톨릭교도에요.), 그 다음에 저쪽 스페인 같은 데서는 이미 정치적으로 단속을 잘해서 이 개혁신앙이 발을 못 붙이도록 만들었어요. 그러면서 다른 곳에서는 이 두 개가 싸우면서 치열한 투쟁이 일어나게 되고 그러면서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이제 그 종교전쟁의 와중에서 살해당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리처드 도킨슨 같은 사람이 ‘종교가 인간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냐?’ 그러면서 그런 역사의 예를 들거든요. 그런데 사실 그것은 가톨릭과 개신교가 싸웠기 때문에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에요. 그런 요소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거기에는 항상 왕의 야심이 개입하는 것이에요. 그렇게 해서 일어났던 여러분들이 잘 아는 30년 전쟁은 이제 독일 안에서 일어난 루터파 신자들과 그리고 가톨릭 신자들 사이의 갈등, 많은 영주가 있었는데 영주마다 통일이 안 된 것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에서는 가톨릭을, 저기에서는 루터파를 그러면서 싸움을 벌이게 되는 것이에요. 그때에 유럽에 있는 각국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혹은 종교적인 이유로 ‘루터파를 후원한다.’ ‘가톨릭을 돕는다.’는 미명하에 군인들을 파병해서 30년 동안 독일을 그라운드 삼아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하게 되고 독일 국민 중의 ⅓이 살해당하게 됩니다. 그런 끔찍한 전쟁의 역사를 치르게 됩니다.
그것이 끝나고 나서 이제 가톨릭은 전열을 가다듬어서 이번에는 이제 아주 유능한 가톨릭의 학자들이 일어나서 조직적이고 논리적으로 두 가지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어요. 하나는 로마 교회안의 반성의 목소리를 높이며 로마가톨릭교회 자체의 개혁운동을 일으킨 것이었고 트랜트공의회 같은 것이 그런 결과로 맺어진 것이었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사상적으로 개신교를 공격하는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중세철학에서 잔뼈가 굵은 그 방면의 대가들인데 그 사람들이 예리한 논리로 개혁신학을 공격해올 때 그것을 맞서기 위해서는 이제 단순히 로마 가톨릭의 비윤리적인 면들을 한두 개를 들춰내서는 되었겠어요? 안되었겠어요? 안되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그 다음에 이 사람들이 그 사람들의 논리를 파하기 위해서 공부하면서 자기들이 믿는 바를 정교화 하는 과정이 발생하게 된 것이에요. 이것이 이제 마르틴 루터의 경우에는 루터의 제자인 매왕히튼부터 시작되고 그리고 칼빈의 경우에는 그의 제자인 베자 혹은 베스라는 인물부터 시작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제 예전에는 붉은 깃발을 들고 열혈남아로 가톨릭에서 뛰쳐나오고 싸우기만 하면 되었는데 이제는 때가 변했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우리가 왜 가톨릭으로 돌아갈 수 없는지? 우리의 신앙과 가톨릭은 무엇이 다른지? 왜 우리가 훨씬 더 성경적이고 역사적이고 이성적으로 합당한지를 증명해야 했으니까 이 사람들은 어떻게 공부를 해야겠어요? 철저하게 인문과목들을 공부해야 했어요. 왜냐하면 그 당시의 논쟁의 틀이었으니까. 그리고 중세철학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상들을 물려받은 사람들이 공격을 하면서 싸움을 걸어오니까 이제 그들도 중세에 있는 스콜라주의의 유산들을 공부해서 그 속에 있는 긍정적인 것들을 틀로 삼아서 그들과 함께 논쟁해서 개혁신학이 역사적인 뿌리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했다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제 칼빈이 대충 그려놓은 그런 굵직굵직한 그림들, 루터와 칼빈 1, 2세대가 그려놓은 그림들을 3세대부터 상세하게 그리기 시작하면서 교리들의 발달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지난 월요일에 불순종하고 세미나에 나온 사람들 손 들어봐요. 괜찮아요. 용서할게요. 손 들어봐요. 몇 분들이 있네요. 그곳에서 아셨겠지만 ‘아! 저렇게 정교하게 논리가 펼쳐지는구나!’ 하는 것을 느끼셨을 것이에요. 그런 시기가 온 것이에요. 그런 과정이 바로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이에요. 우리들이 흔히 개혁신앙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너무 스펙트럼이 커요. 그러면 가톨릭에서 뛰쳐나온 모든 것들이 전부 개혁주의에요. 그러니까 개혁주의 중에서는 불건전하고 옳지 않은 것들이 아주 많아요. 그래서 양쪽을 다 뜯어내면 그 다음에 우리의 신앙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뭐냐 하면 개혁파 정통주의라는 것이에요. 개혁파 정통주의는 크게 네 지역에서 발달하게 되는데 스위스 쪽에서 발달하고 스위스도 다시 나눠지지요. 그래서 취리히 쪽에서 그리고 또 제네바 쪽에서 발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독일 쪽에서도 발달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후기에는 화란으로 가서 화란에서 아주 발달한 형태가 됩니다. 그 다음에 다시 영국에서 발달하게 됩니다. 물론 프랑스에서도 그런 발달이 있습니다만 대개 이렇게 크게 네, 다섯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서 종교개혁자들이 믿던 커다란 신학이 굵직굵직하게 정리되어 있던 것들을 세밀하게 정리해가면서 교리에 아주 폭발적인 발달이 일어나게 됩니다. 물론 거기에는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그런 번쇄적인 요소가 들어와서 사람들의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그 유산은 우리가 정말 오늘날 우리의 이 개혁신앙의 뿌리라고 말할 수 있는 선조들의 아름다운 유산을 이제 그때부터 구체화시키기 시작해서 그것이 1590년경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해서 1600년대 1725년까지 그런 유산들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이후에는 이것들이 붕괴돼요. 왜 붕괴가 되는지는 내일 강의를 들으면 알게 되요. 그게 뭐죠? 계몽주의에요. 계몽주의의 물결이 밀려오게 되는 것이에요. 굉장히 무서운 것이에요. 계몽주의는 결국 역사적으로 보면 어떻게 될까요? 그 뿌리가 르네상스 인문주의 운동의 근대적 형태라고 보는 것이죠. 그 사이에 데카르트라는 중요한 인물이 나와서 판도를 바꾸어 놓는 것이에요. 내일 왜 이렇게 오늘날 얼짱, 몸짱의 시대가 되었는지까지 여러분들에게 가르쳐줄 것이에요. 다 알게 되요. 그러니까 로마서 12장에 나오죠.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그러잖아요. 알아야지 안 본받지요. 본받는 것은 몰라도 되요. 그냥 몰라도 따라하면 되니까. 그러나 ‘본받지 말고…….’ 이것은 보통문제가 아니에요. 이것은 안 본받으려면 그것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해요. 이제 아주 명쾌하게 오늘날 이렇게 그런 시대가 되었을까? 누가 그러더라고요. 남녀가 만나면 여자들은 ‘남자 만나서 선을 보았어.’ ‘그래.’ ‘어느 학교 나왔어?’ ‘뭐 하는 사람이야?’ 그런대요. 남자는 여자를 만나고 와서는 ‘그 여자 예뻐?’ 두 번째 질문도 ‘진짜 예뻐?’ 세 번째 질문도 ‘정말 예뻐?’ 그런대요. 어느 여자가 막 사기치고 강도를 하고 도망 다녔대요. 용서해달라고 네티즌들이 막 탄원서를 올렸잖아요. 왜냐하면 예쁘니까! 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었는지 내일 답이 다 나와요. 내일 올 때 오버코트를 입고 와요. 코트를 두툼하게 입고 산속이니까 3, 4도 이상 떨어질 거예요. 두툼하게 입고 담요도 큼직한 것 한 장 가지고 와서 푹 덮고 털신 신고 푸근하게 듣는 것이에요. 절대 안 졸지요. 한 네, 다섯 시간쯤 시간을 주면 내가 충분히 풀어주는데 굉장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계몽주의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제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가 끝이 나는 것이에요.
그 이후로는 기독교 신학인 교리가 발전을 안 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런데 발전을 안 해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관심사가 다른 데로 가요. 소위 얘기하는 성서학 분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자유주의 신학들이 꽃을 피우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 개혁파 정통주의 시기 때에 독일, 화란, 스위스, 영국, 프랑스 등지에서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이 아주 상세하게 발전하기 시작하는데 그러한 탁월한 발전기 속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시던 분이 바로 여러분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존 오웬 목사님이 바로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제가 쓴 존 오웬의 신학이라는 책이 있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워도 여러분들은 이해하기 쉬울 것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존 오웬의 책을 읽을 가능성은 없고 그 어려운 400년 전의 영어를 지금 무릎에 갖다놓고 누가 스물 몇 권을 읽고 있겠어요? 그런데 이제 제 설교를 듣는 데는 아주 탁월하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 책을 꼭 읽어요. 이렇게 읽으라고 그럴 때 즉시 읽기 시작하라고요. 이게 나중에 읽으려고 하면 안 돼는 것을 알잖아요. 이 교리반 할 때는 내가 다른 것은 다 끊는다고 생각하고 약속도 안한다고 생각하세요. 누가 그러더라고요. ‘우리 동창회인데…….’ 그러니까 ‘나 성화반이라서 못가.’ ‘언제 끝나는데?’ ‘석 달 후에 끝나니까 그때 보자.’ 학생이 그 정도는 되어야지요. 마음먹고 딱 앉으면 세 시간이면 볼 텐데 쭉 볼 수 있잖아요. 그러면 거기서 담임목사가 죄에 대해서 그렇게 얘기하는데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가가 나와요. 조금 어려워보여도 찬찬히 읽어보면 이해가 되요. 그런 글을 쭉 읽으면서 그러면서 통일된 생각을 갖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그게 여러분 내가 이 책 저책을 보면서 쓴 것이 아니라 딱 그 한권을 쓰는데 이틀 만에 썼거든요. 그러니까 이 안에서 정리된 생각을 확 쏟아낸 것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에게는 그것이 수준이 떨어지는 글이 아니라 그게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좋게끔 한 번에 확 쏟아내서 정리를 했기 때문에 평소의 설교하는 것과 매치가 되는 것이에요. 그것을 읽어야 해요. 그래야지만 왜 설교를 그렇게 하는지 안다니까요. 그래서 작년 이맘때에 우리가 진리의 전달자 세미나를 갔었잖아요. 기억 안나요? 9월 14일인가 갔었잖아요? 그때에 어느 형제가 간증을 썼잖아요. 자기는 그렇게 생각했대요. ‘열린 교회는 이과 나온 사람들은 신앙생활하기 힘들다.’ 그렇게 생각했대요. 거기 가서 그 강좌를 듣고 나서 우리가 왜 이렇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 왜 이렇게 두꺼운 공과 책을 가지고 각주까지 새까맣게 달린 것을 가지고 교회를 가야하는지 자기는 알게 되었다고 해요.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에요.
그런데 사실 나도 처음에는 이 개혁파 정통주의를 잘 몰랐어요. 그런데 여러 가지로 오늘날의 이런 신학이 충분하지 않다는 갈증을 계속 느끼고 종교 개혁자들의 책을 보면서도 무엇인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항상 갈급하게 느꼈는데 이제 존 오웬 목사님을 만나면서 아주 탁월한 해결을 보게 된 것이죠. 나중에 공부를 더해 보니까 존 오웬 목사님이라는 이 분이 역사적으로 그렇게 개혁파 정통주의라는 거대한 물줄기 속에서 거대한 산맥 중의 대륙에서 영국으로 건너가는 갈려지는 산맥에 아주 커다란 봉우리의 한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나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보는 것이죠. 나는 아우구스티누스, 조나단 에드워즈를 비롯해서 중세의 철학과 그 다음에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 그렇게 공부를 하면서 현대는 내가 많이 공부를 못했지만 아무튼 이렇게 오늘까지 왔지만 이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거룩한 학문의 체계가 나의 인생에 있어서 종착적인 지평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에요. 지금 무엇을 다시 시작하겠어요? 지금부터 시작해서 한 10년 정도 깊이 파헤쳐가면서 또 여태까지 배운 것들도 있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참된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진술해내는 그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소원이고 그리고 언제부터 시작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 70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을 열두 권 정도로 기독교신앙 전체가 무엇인가를 그렇게 교리를 써내고 싶은 것이 사실 내 마음이에요.
자 어쨌든 그렇게 해서 개혁파 정통주의자들 안에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사상의 내용을 토대로 하고 거기에서 탁월한 천재적인 지성들을 활용해서 수많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공격들을 막아낼 수 있는 성경적인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어서 진리를 조직화한 것이 이것이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이런 개혁파 정통주의가 우리나라에 많이 알려지지 않고 또 알아도 사람들이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들이 많지 않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의 하나가 현대화의 연관성에 있어서도 문제가 되겠지만 또 하나는 이것을 공부할 수 있는 모든 자료들이 너무나 옛날 것이에요. 영어로 된 자료들이 30%정도 있지만 대부분의 모든 자료들은 전부다 라틴어로 되어있고 그렇지 않으면 중세영어, 아니면 중세 독일어, 그리고 불어, 이런 것들로 되어있는 언어의 장벽 때문에 넘기가 매우 힘들어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제 여기에 있는 것들을 끊임없이 천착해서 거기서 무엇인가 좋은 것들을 기로 올려서 그것을 가지고 이제 무엇인가 잘 세워서 여러분들에게 이 격동하고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 어두운 시기에 참된 진리가 어떤 것인지를 여러분들에게 전수해주는 것이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이제 이렇게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까지 달려오게 되었는데 그러면 도대체 우리에게 계몽주의와 함께 다 신학의 맥이 끊어져버렸는데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물려받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죠. 거기에 대한 답변이 뭐냐 하면 18세기에 계몽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19세기에는 그 계몽주의의 영향이 기독교에 자유주의로 나타나게 됩니다. 잘 알다시피 여러분들은 19세기에 인류역사를 뒤흔들어놓을 만한 중대한 사건이 있었어요. 프랑스의 절대 왕정이 무너지고 소위 얘기하는 앙샹레짐이라는 구체제가 전복되고 순수하게 시민들의 힘에 의해서 일으켜진 프랑스혁명이 성공을 거두게 되는 것이죠. 프랑스혁명은 1789년에 일어나지만 완성되는 것은 훨씬 더 후의 일이에요. 왜 그러느냐하면 그 사이에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중단되었던 시민혁명이 완성되어서 구체제가 완전히 무너지게 되요. 그렇게 되면서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혁명이 1792년인가 1793년에 완성을 이루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 이후의 프랑스가 유럽 사람들의 눈에는 가시였거든요. 왜냐하면 저런 기운이 유럽 전체에 번져가고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그 유명한 오스트리아 연합군이 십 몇 개 국가의 연합군이 말도 안 되는 병력으로 이 프랑스 시민혁명군을 몰살시키기 위해서 오지요. 이 프랑스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전부 자원입대를 해서 전쟁을 하러 나가는 것이에요. 이 사람들이 800㎞를 걸어서 전선까지 오게 되는 것이에요. 오자마자 전쟁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에요. 누가 이겼겠어요? 시민군이 이겼겠어요? 아니면 연합군이 이겼겠어요? 쉬지 않고 800㎞를 걸어와서 바로 전쟁을 했는데……. 객관적으로 보면 사실 이길 수 없는 전쟁이거든요. 그런데 이기게 됩니다. 더욱이 프랑스는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면서 군 지휘자들을 모두 사형시켜 버렸어요. 그러니까 그야말로 오합지졸인데 이긴 것이에요. 그 프랑스 사람들은 자신들에 대해서 갖는 자부심이 굉장해요. 여러분 프랑스 국가를 들어보셨어요? 프랑스 국가가 번역된 것을 읽어보면 완전히 골수 운동권 노래에요. ‘시체를 밟고 피를 묻히며 넘고 넘어 우리는 간다.’ 이런 식이에요. 그렇게 피를 통해서 쟁취한 자유에요. 그 사람들이 모든 질곡의 역사를 거치면 무엇을 확인하겠어요? 인간의 존엄과 가치, 위대한 가능성, 그 다음에 인간의 중심성 이런 것들을 확인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그런 것들이 계몽주의와 함께 활짝 꽃피는 시대가 18세기말에서 19세기로 넘어가면서 그게 자유주의로 연결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신학이 실종되어 버리고 옛날 신학은 환영을 못 받게 되는 것이에요. 그 명맥을 유지한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미국사람들이에요.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교를 중심으로 유치하고 있는 것이죠. 그 다음 줄이 누구냐 하면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신학이었어요. 그것들을 잘 보존되었던 것들을 가지고 이제 미국이 계속 자유주의화 되어가는 데에 있어서도 끝까지 그것을 지켰던 소수의 신학교들에서 이것들이 보존되고 그것을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한국에서 개혁신학을 퍼뜨린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이르게 된 것이죠. 그래서 지금 이제 미국도 그것들을 지탱할 수 있는 능력들을 거의 잃어버렸고 이제 그것은 또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대학 안에서의 개혁 신학이 말하자면 유실되게 되는 것이죠. 이제 그 점에 있어서는 미국도 신뢰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된 것이죠. 오히려 우리들은 그런 면에서 옛날 자료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화란이나 이런 쪽에 신학의 뿌리들을 우리들이 찾아보는 것이 훨씬 더 좋겠다는 것이지요.
아무튼 제가 간절히 소망하는 바는 무엇이냐 하면 저도 여러분과 똑같이 학생의 입장에서 저도 부지런히 공부를 하고 그래서 내가 살아있는 날 동안 간절한 소원은 태만하게 살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공부를 해서 지금도 그런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에 아주 황금같이 찬란한 유산들을 지금도 읽고 연구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번에 발표한 논문은 교인들에게 다 나누어주면 너무 혼란스럽고 머리아프다고 할까봐 원하는 사람만 한권씩 사서 볼 수 있도록 500부 정도 찍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보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그 황금기의 아름다운 신학을 보면서 내가 그랬어요. 플라톤을 읽으면서나 공부하면서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감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를 공부하면서는 그리스도인인 것을 무한히 감사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혁파 정통주의를 공부하면서는 우리가 개혁파 교인이라는 것에 대해서 무한한 자부심을 느꼈어요. 저는 누구에게 가서도 자랑할 수 있어요. 이분들이 우리 조상이라고……. 무슨 순복음교회, 무슨 감리교, 턱도 없어요. 그 유산의 깊이와 넓이가 장난이 아니에요. 정말 장난이 아니에요. 그 어마어마한 유산들을 그것을 나같이 저는 유능하지도 않고 저는 항상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그래도 열심히 공부해서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박사를 받을 것도 아니고 나는 욕심 없어요. 어떻게 하든지 그것을 잘 배워서 그래서 그 아름다운 신학의 체계들을 잘 공부해서 여러분들에게 믿어야 될 내용이 무엇이고 살아야 될 방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가르쳐주어서 그래서 적어도 여러분들이 내일 오전에 설교를 잘 들으세요. 적어도 여러분들이 스스로 여러분들이 죄에 빠져서 스스로 택한 어두움은 내가 해결해줄 수 없지만 그러나 깨닫게 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어둠속에서 사는 사람은 없게끔……. 비유를 하자면 눈이 멀어서 책을 못 보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전기불이 없어서 책을 읽고 싶어도 못 읽는 사람은 없게끔 그렇게 해주고 싶은 것이 나의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는 소원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열심히 공부를 하고 그리고 또 담임목사를 위해서 기도를 하고 그리고 이 조국교회에 있는 목회자들이 공부 좀 하도록 기도해야 되요. 그래서 머리에 든 것이 없이 감히 목회를 하는 그런 오만불손함을 하나님 앞에 저지르지 않도록 그렇게 하고 그리고 힘이 닿는 대로 우리 신학생들을 도와서 책 한권이라도 읽게 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정말 이 탄탄한 신학의 훈련과 체계를 밟으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도록 그렇게 해야 돼요.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신앙의 사상의 체계를 세우면서 그러면서 우리들이 가야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절대로 쉽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기를 비교해서는 안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그런 사람대로 놔두고 ‘너는 나를 따르라.’ 이제 열심히 공부하고 항상 이 책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는 이런 진리의 책인 성경이 우리의 품속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돈 벌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기 위해서 책을 사서 공부하고, 그 돈으로 주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뿌리를 공부하기 위해서 이것을 하는데 이것은 이제 출발점일 따름이라는 이야기에요.
자 어떻게 이해가 됩니까? 자 예정한 시간이 거의 되었는데 수업은 항상 7시에 오셔야지만 출석 체크가 되고요. 그리고 퀴즈하고 다하고 그 다음에 7시 30분에 제 강의가 시작되고요 항상 9시 15분경에 끝난다고 생각하면 되요. 조금 일찍 끝나서 9시에 끝날 수도 있고 조금 늦어서 9시 30분이 될 때도 있지만 기준은 9시 15분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질문 있습니까? 질문이나 혹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해보세요. 질문이 없다는 것은 강의가 워낙 시시하거나 워낙 명쾌하거나 둘 중의 하나인데 질문 없어요? 제 강의가 질문을 유발 못시켰네요. 자, 그러면 질문이 없으니까 맥이 빠지지만 오늘은 첫 시간이니까 다음시간에 올 때 숙제를 꼭 해가지고 오고 그리고 절대로 책을 안 읽고 오는 일이 없도록 그래서 시험에 꼭 합격하시고 다 모은 점수 + 경건실천 점수 + 기말고사 = 이 세 가지를 다 합해서 90점이 넘어야 합니다. You know?
자,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주님 사랑하는 종들을 꼭 붙들어주셔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은혜를 내리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자, 수고하셨습니다.
2009. 10. 17 하반기 성화반
성화반 Ⅱ
1장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오늘은 49p부터 61p까지 공부하게 됩니다. 칼빈이 이 기독교강요의 맨 앞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게 1536년에 초판이었고 마지막으로 1556년 판에 가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다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문제를 덧붙여서 훨씬 논의가 상세해지기는 하는데 여기서 이미 이런 골자가 다 마련이 되요. 그래서 이제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의무이고 그리고 인간의 삶의 질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데서부터 그의 삶의 질이 결정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원천이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것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옵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알 수 있도록 계시해주시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죠. 하나님뿐만 아니라 크게 몇 가지의 대상이 있을까요? 인간이 여기에 이렇게 있다면 제일 먼저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나오겠지요. 대상이 하나님. 그리고 또 누가 나올까요?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에 대한 지식, 그 다음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세계에 대한 지식, 이렇게 되겠지요. 이 인간에 대한 지식은 다시 둘로 나눠지겠지요. 어떻게? 인간 일반에 대한 지식과 ‘나’라고 할 수 있는 자기에 대한 지식으로 나뉘겠지요. 결국 인간이라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 인간, 자연세계 이것을 이렇게 아는 것이죠. 아는데 이 아는 것을 가리켜서 지식이라고 불러요. 그런데 이 모든 지식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 자연세계 모든 것들을 알게 하는 지식의 원천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하나님 때문에 인간의 일반에 대해서 알고, 하나님 때문에 자기에 대해서 알고, 또 하나님 때문에 자연세계에 대해서 알고, 이렇게 되는 것이 이것이 지식의 체계라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 하면 잘 들으세요. 이 지식을 얻는 방법인데 이 지식을 얻는 방법이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이성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오직 이성을 통해서만 지식이 얻어진다. 이렇게 보는 것이거든요. 잘 봐요. 이성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감각기관과 관계가 있는 것이에요. 감관이라고 그러죠. 그래서 어떻게? Sense. 그래서 five senses가 되겠지요. 그러면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에 의하면 우리 인간이 이렇게 되고 여기에는 정보가 들어오는 문이 외부 세계와 인간의 내면이 접촉을 하게 되는 문이 있는데 이 문이 다섯 개에요. 그래서 우리가 보고, 듣고, 접촉하고, 냄새를 맡고, 먹고, 맛보고, 이렇게 해서 우리들이 오관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이것은 육체를 통해서 들어온다고 해서 육관이라고도 불러요. 육체의 감각기관이라고 해서 육관이라고도 해요. 자, 그런데 이 문을 통해서 외부세계의 정보가 들어오는 것이에요. 들어온 정보들을 가지고 해석을 하는 것이에요. 해석을 하는데 이 해석이 뭐냐 하면 원인이 있고, 여기에 그 다음에 그 원인의 결과가 있고, 결과는 다시 그 다음 것들에는 원인이 되는 것이죠. 이것을 가리켜서 causality 라고 하지요. 즉 인과관계라고 불러요. 이런 인과관계를 이성은 밝혀내는 것이죠. 그래서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고 결과가 원인이 되어서 그 다음의 결과를 만드는 그런 연쇄작용들을 이해하는 것이에요. 원인→결과, 결과→원인 이렇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추론해가서 원인→결과→원인→결과 이렇게 되는 것을 이성이라고 그래요. 이것이 우리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얻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지요. 그렇지요? 그래서 지식은 이성을 통해서 계속 습득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것들은 감각적인 사물들을 볼 때에는 이런 것이 되는데 우리들이 이것들을 가시계라고 그래요. 그런데 이것 말고 가지계가 있어요. 이것은 지식은 지식인데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니라 지성으로 알 수 있는 세계라는 말이에요. 이것은 이런 식으로만 보는 것은 어려워요. 그래서 여기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오성이라는 것이 들어가요. 그래서 신학공부를 잘하려면 철학공부를 좀 해야 돼요. 오성이라는 것이 들어가는데 이 오성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뭐냐 하면 이렇게 어느 순간에 논리가 없이 확하고 깨달음이 오고 직관적으로 알게 되는 형태를 가리키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자폐아들이 아주 뛰어난 직관력이 있는 것을 아시죠? 그래서 비밀도 풀고 수수께끼도 풀고 그렇잖아요? 그런 방식을 우리도 오성이라고 그러는데 이것을 우리들이 성경과 관련해서는 이런 오성의 역할이 신앙적으로는 믿음으로 나타나는 것이에요. 그래서 신앙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 이성과 믿음 이 두 가지는 지식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두 가지의 중요한 원리에요. 그래서 믿음은 이성의 측면에서 볼 때는 어리석게 여겨지고 또 믿음의 측면에서 보면 이성이 더 유치해보일수 있지요. 왜냐하면 이성은 아무리 원인과 결과를 따져도 높은 것들을 찾아갈 수는 없으니까 유치해보일수 있어요. 물을 분석해서 무슨 요소로 되어있는지는 알 수 있지만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는 우리가 가르쳐주지 못하잖아요. 어떻게 지구가 생기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왜 이 세상이 존재하는지는 우리들이 설명해주지 못하잖아요. 그것들은 이성으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이런 믿음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에요. 그런 이야기에요. 그러면 결국 첫 번째 인간이 하나님을 알아야한다 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 다음에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그 다음에 인간에 대해서 아는 것 그 다음에 자연세계에 대해서 아는 것 이렇게 해서 인간이 이런 범주에 대해서 지식을 갖게 되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우리 자신을 알게 되요. 우리 자신을 알게 되는데 우리 자신을 아는 가장 중요한 자세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칼빈은 말해요. 그러면 자신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 형상과 모양이라는 것은 두 개가 다 비슷한 말이에요. 둘 사이에 특별히 구별이 없는 같은 의미의 말인데 이것은 하나님을 닮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특별히 지성적인 특성을 가리키는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가슴에 새겨야할 사실이라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우리가 타락한 이후로는 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뭉개져서 하나님이 그런 형상과 모양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할 이 세 가지 대상 즉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세계에 대해서 적절하고 올바른 지식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에요. 아래로 내려올수록 즉 자연세계에 내려올수록 엄격하게 모든 것들이 존재함의 인과관계를 많이 따르게 되요.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과학적이고 인과관계에 많이 한정되어있는 자연세계에 대해서는 우리가 타락했어도 여전히 많은 지식들을 가질 수가 있다는 것이죠. 그렇지만 이제 위로 올라갈수록 인간을 알고 더욱이 하나님을 앎에 있어서는 특히 하나님은 완전히 영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에 이것은 가시적인 사물을 통해서 가시적인 사물을 보듯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그런 오성의 능력이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신앙의 기능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인데 타락하면서 인간은 이것을 모두 상실한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물질세계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당한 지식들을 섭취할 수 있어도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어둡고 눈먼 존재가 되어서 외부로부터 오는 도움이 아니면 적절한 지식을 가질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칼빈은 타락 때문에 인간의 영혼 전체의 기능이 절망적으로 무너지는 것을 보여주어요. 그래서 영혼이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두 가지 기능이 있어요. 이 기능이 뭐냐 하면 알고, 즉 지성적이고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의지적인 기능이에요. 그런데 이제 이 사이에 감정이라는 것이 들어갈 수 있지요. 그렇죠? 사실 이 감정은 의지의 일부분이에요. 그래서 감정이 애호하는 쪽으로 가면 그러면 이것을 의지가 행할 가능성이 많아지고 이것이 싫다는 혐오의 감정으로 가면 행하지 않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죠. 그래서 감정 자체를 많은 철학자들이 의지 안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영혼의 기능인데 죄로 말미암아 영혼 자체가 망가졌기 때문에 이 망가진 효과가 지성과 감정 의지에 모두 나타나는 것이에요. 그래서 타락하기 전에는 지성이 제일 우위에 있고 감정이 그 다음이고 의지가 그 다음이에요. 그래서 지성이 제일 먼저 판단하고 이것에 대해서 정당한 감정이 뒤따라오고 감정이 충분히 생겨나면 의지로 이것을 행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영혼의 기능의 질서가 잡혀있었는데 타락하면서 이 질서에 혼란이 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하면 감정이 의지를 능가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도 악을 행하고자 하는 감정이 생기면 지성을 굴복시켜서 이 감정이 의지를 불러들이는 것이죠. 그리고 오히려 형 노릇 하던 지성은 뒤에서 퍼지는 것이에요. 이렇게 되면서 혼란이 생겨나게 되요. 그래서 이것을 우리들이 흔히 쓰는 말로하면 지성은 어떻게 되요? 어둡게 되고요. 그 다음에 감정은 혼란스럽게 되고요. 그리고 정욕에 끓게 되고 그리고 의지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려는 절망적인 완고함을 갖게 되는 것이죠. 그런 상태 속에서 이렇게 영혼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영혼이 인간 존재를 굴리고 있으니까 이것이 올바르게 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망가진 인간의 상태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천지창조의 목적과 관련해서 생각해보자면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어요. 그리고 창조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도록 분명하게 이 사람을 위한 창조의 목적을 하나님이 정해놓으셨죠. 이렇게 인간이 있으면 인간이 세계 안에서 살아가잖아요? 그러면 인간의 존재의 목적과 세계의 존재의 목적은 하나로 통일이 되잖아요. 그래서 이 인간이 이렇게 하나님이 지정해놓으신 목적을 따라서 살도록 정해놓으신 것이에요. 그렇게 살던지 안 살던지 나중의 문제이고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여러분들이 지난 시간에 집에서 열심히 들었던 뭐지요? 창조의 목적……. 이 창조의 목적을 모르면 나머지는 왜 그렇게 살아야하는지 잘 안 풀리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것은 first에요. 그런데 second stage에서 이 인간이 죄를 짓잖아요.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되느냐하면 인간이 이렇게 새빨갛게 죄로 물들어요. 얼마나 죄로 물들었는지 얼굴까지 새빨갛게 물들었어요. 그 다음에 어떻게 되지요? 이 사람이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갈 수가 없게 되는 것이죠. 창조의 목적과 이렇게 빗나가는 것이에요. 사실은 이것이 죄에요. 그리고 악이고……. 그래서 이게 타락전이라면 그러면 이것은 타락후가 될 것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너희들은 타락한 다음에는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수 없구나! 할 수 없구나. 그러면 창조의 목적을 바꾸어서 너희들에게 맞춰주지.’ 그리고 창조의 목적이 1에서 2로 바뀌었어요? 대답을 해봐요. 바뀌었어요? 당연하지요. 그래서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추론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되요. 창조의 목적을 하나님이 움직여 놓을 수 없다면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을 바꾸어 놓으셔야 되잖아요.
그래서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이제 구원의 개념이 들어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제 도저히 자기의 힘대로 살 수 없는 이 인간을 하나님께서 돌이켜서 다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시는데 이렇게 돌이키는 이 지점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회심이라고 부르는 것이에요. 내부적으로는 이것이 중생이라는 개념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여기까지의 전 과정 전체를 가리켜서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렇게 굉장히 폭넓은 개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그렇게 되면 결국은 하나님이 이 구원해주신 즉각적인 은혜와 이후에도 계속 베풀어지는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방법이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은혜는 창조의 목적으로 우리를 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에요. 그것이 결국은 뭐냐 하면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에요. 무슨 사랑이냐 하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나요. 이것이 결국은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나요. 이것이 바로 ‘까리따스’의 사랑이지요.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돌아가게 하시는 것이라는 거예요. 그것이 53p에 나오는 내용이에요.
그 다음에 54p로 넘어가게 되면 이 인간으로 하여금 이렇게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방법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에요. 그것은 구원이지만 결국은 그 구원은 우리가 스스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인간에 대해서도 올바르게 알 수 없고, 자신에 대해서는 더더욱 잘 알 수 없고, 사물들에 대해서도 온전히 알 수 없는 사람들을 그 온전한 지식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무엇인가 당신 자신의 어떠함과 당신의 뜻이 무엇임을 사람들에게 알리셔야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지식을 통하여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구원받을 수 있게끔 해주셨다는 것이에요.
그 다음 것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그것을 오늘 칼빈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율법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 율법이라는 것은 무엇이냐는 것이죠.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첫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그러니까 하나님의 존재와 그리고 성품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그 다음에 여기에서 비롯되는 지식인데 하나님이 뜻하시는 것, 이것을 보여준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여기에 인간이 있어요. 이 인간이 어쨌든 하나님과 자기가 있고 세계가 있잖아요. 그럼 이 세계에 대해서 지식을 갖는 상관관계에 대해서 오늘 우리가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 세상에 보여주시는데 만약에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적절하게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지를 않고 있는 영광 그대로 인간에게 나타나신다면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도 없거니와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영광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의 지성의 크기가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이지요. 개미가 인간을 연구한다면 여러분 얼마나 웃음이 나겠어요? 그런데 개미와 인간의 차이는 인간과 하나님의 차이보다 훨씬 적다는 말이에요. 우리의 지성의 크기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그 존재의 양태나 이런 것들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적절하게 이렇게 인간의 의해 파악될 수 없는 무한차원의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실 때에는 적절하게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인간이 이해하기 좋게끔 인간의 이해의 수준에 맞추어서 자기 자신을 보여주시는 것이죠. 이것을 가리켜서 좀 어려운 말인데 accommodation이라고 그래요. 우리말로는 적당한 말이 없어요.
그래서 예를 들자면 하나님이 슬퍼하였다든지 가슴아파하였다든지 기뻐하였다든지 하는 표현들이에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어서 인간들에게 보여주셨는데 이제 문제는 뭐냐 하면 이 인간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어떻게 아느냐하면 세계를 통해서 세계를 알고, 그 다음에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유추해가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던 중세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는 안 되고 그래서 세계를 보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어려운 말로 존재의 유비라고 그러는데 그것을 종교개혁자들은 다 불가능한 것이라고 버려요. 그래서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할 때는 어떻게 되지요? 하나님을 아는 길은 비록 뛰어난 믿음이 없어도 세상을 잘 공부하면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잘 찾아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죠. 그러니까 당연히 믿음보다는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보려고 하는 노력들이 많아지겠지요? 그래서 중세시대에 철학이 발달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이 이것을 거부하고 그리고 이 순서를 바로잡아요. 그것이 뭐냐 하면 인간이 그렇게는 알 수 없고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된다는 것이에요. 이렇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은 이 하나님 자신이 이렇게 육체의 감각기관으로 사물들을 아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니잖아요? 이해되지요?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소용없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크기, 모양, 맛, 단단하고 무른 것, 그런 것으로 되어있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니까 뭐냐 하면 여기에서는 하나님을 만나긴 만나는데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성을 통해서라기보다는 무엇을 통해서일까? 오성을 통해서라기보다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죠. 그러면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데 그럼 도대체 무엇을 믿느냐? 라는 문제가 나와요. 무엇을 믿어야지만 하나님을 만나느냐는 문제가 나와요. 그렇지요? 그 믿는 대상이 무엇이냐 하면 다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 믿음의 대상으로 떠오르는 것이에요. 그러면 잘 들으세요.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게 되느냐 하는 것이죠.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여기에 계신데 여기에 있는 인간에게 당신 자신의 성품을 인간에게 계시해주실 때에 당신의 모든 성품의 찬란한 빛을 한 사람에게 집약시키셨어요. 그분이 바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요. 그래서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이 계시해주고자 하시는 모든 지식의 빛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되고(성육신하신 그리스도에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인간에게 이렇게 전달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하심 그의 십자가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어떠하심이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의 어떠하심과 함께 찬란하게 우리들에게 전달됩니다. 이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이유에요. 그래서 신약시대 성도들의 행복이 바로 이것이에요.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된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번호를 붙이면 여기가 1번이 되겠지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겠지요. 그렇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난 다음에는 처음에 아직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기 전에 세계를 쳐다보았을 때는 잘 모르겠는 거예요. 잘 모른다는 무슨 뜻이냐 하면 공기의 성분이 무엇이고 나무의 성질이 무엇인지 하는 자연적인 지식들은 아는데 이것이 어디서 태어났고 왜 여기에 있고 인간과 이것의 관계는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그 원천을 잘 모르는 상태란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0에서 시작해서 1, 2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나면 그 다음에 여기에서 세계를 볼 수 있는 지식을 갖게 되는 것이죠. 이런 지식이 빛이 되어서 이것이 창조세계를 쭉 비추면서 바라보게 될 때에 이렇게 잘 몰랐던 세계가 ‘아하, 그래서 존재하는구나! 아하,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이용해야 되는구나!’ 이런 깨달음들이 오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하면 창조주를 아는 지식, 구속주를 아는 지식, 이런 세계를 보고 하나님에 대해서 희미한 지식을 갖는데 완전히 올바르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는 창조주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다가 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는 이 지식은 구속주를 아는 지식이에요. 그래서 이 두 개를 순서적으로는 이것이 먼저이고 이게 두 번째 이지만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먼저 알아야지만 이 창조주가 어떤 분이신지를 올바로 알게 된다는 것이죠.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이중의 신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이에요. 여기에서 지식의 통합이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하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올바로 알고 난 다음에, 구속주에 대한 올바를 지식을 알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는데 이 때 세계를 다시 새롭게 보게 되는 것이죠. 그 때에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과 세계에 대해서 올바로 알게 되고 자기에 대해서도 올바로 알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되어서 인간은 자기가 이 온 우주에 있어서 자기가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버리고 자신은 이 온 우주에 있어서 하나님이 중심이시고 자기는 피조물로서 어떤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고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질서 속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기를 꿈꾸고 이바지하면서 살아가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라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시간이 좀 바쁘기는 하겠지만 2005년도에 설교를 한 것인가요?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을 꼼꼼하게 들으세요. 제가 시간이 나는 대로 그 때에 한 설교를 한 삼일 만에 쓸 수 있을 텐데……. 그래서 그것을 빨리해서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처럼 그렇게 책으로 묶어서 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어젯밤에 했어요. 그것을 잘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것이 이해가 잘 될 거예요. 자, 그러면 결국은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 신앙은 구체적으로 어디서 오느냐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뵈옵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 자체가 성경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성경의 계시에 대한 믿음이라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화반을 공부하는 동안에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을 가능하면 두 번 정도 읽으세요. 그래서 매일 아침마다 조용한 시간에 홀로 앉아서 한 chapter씩 묵상하면서 읽어 나가세요. 꼭 그렇게 하세요.
자, 이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앎, 세계에 대한 앎, 자기에 대한 앎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 때에 비로소 자기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하는 존재인가 하는 것이 분명해지게 되는 것이죠. 아까 우리가 비전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오늘날 비전이라고 하는 것의 대부분은 양상의 문제에요. 내가 정치가로 인생을 살 것이냐, 농부로 살 것이냐 하는 것은 궁극적인 비전이 될 수는 없어요. 그것은 정치를 하면서 살아도 하나님의 가슴에 못 박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삶을 살아도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의 큰 기쁨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지요. 삶의 양상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마음의 합당했던 이새의 아들 다윗은 양치는 사람에 불과했어요. 그렇죠? 그러니까 우리들이 그 비전을 양상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양상으로 인생을 살든지 본질에 속한 비전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분명해야 되는 것이에요.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며 인생을 사는 것 이것이 말하자면 우리의 궁극적인 비전이지요. 그리고 양상으로써의 비전은 그러한 궁극적인 비전을 이루는 데에 잘 사용될 수 있는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우리에게는 감사한 것이죠. 우리가 이런 식으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이죠.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세계를 올바로 알고 세계를 올바로 아는 것만큼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일에 이바지하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신앙생활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 하나님은 우리들이 향유하고(즐거워한다는 뜻이죠.) 하나님이 주신 세계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유하기 위해서 사용하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이죠. 이것이 창조의 목적을 이루어 가는 것이에요.
자, 이렇게 하고 그러면 율법의 세 가지 용도의 이야기가 나와요. 자, 그 다음에 율법이 있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와요. 율법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렇게 지키면서 살라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명령이죠. 이 명령은 율법으로 나타나는데 이 율법은 하나님이 왜 주셨을까? 우선 첫째로는 인간이 어차피 타락한 이후로는 지키면서 살아갈 수도 없는데 하나님이 왜 주셨을까? 첫째는 뭐냐 하면 시민생활을 위해서 주신 것이에요. 이것을 가리켜서 율법의 ‘우스스폴리티쿠스’라고 그래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정치적인 용도로 주신 것이다. 그래서 시민생활을 위해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이에요. 하나님의 율법은 그것이 어디에 쓰여 있느냐에 따라서 둘로 나뉘어져요. 하나는 하나님이 돌비에 쓰셨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어디에다가 쓰셨나요? 혹은 신비라고도 하지요. 마음에 새기셨어요. 그래서 뭐냐 하면 나라의 법이 어떻게 되어있든지 이웃에게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악한 일을 했을 때에는 양심이 판단해서 너는 틀렸다고 고발해요. 그래서 마음속에 고통이 주어지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마음에 율법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오늘날 우리들이 세상에서 만드는 많은 법들은 바로 이러한 율법을 주신 첫 번째 용도인 ‘우스스폴리티쿠스’ 에요. 직역을 하면 정치적인 용도에요.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다는 것을 사람들이 다 보여주는 것이죠. 그래서 세상의 법이 어느 나라든지 조금씩 틀리지 비슷해요. 동양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그러는데 서양에서는 반쯤 죽이라고 하지 않잖아요. 서양에서는 남의 것을 훔치지 말라고 하는데 동양에서는 얼마든지 훔쳐도 잘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이것이 모두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겨놓으신 율법이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법의 감정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자연법사상이라고 부르는 것이에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성화반에 들어와서 이렇게 라틴어도 한 번씩 공부해보는데 ‘우스스 파이다고쿠스’ 영어를 하시는 분은 알지요? ‘파이다고지’ 그러면 무엇이지요? 교수학이에요. 그래서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죠. 그래서 뭐냐 하면 교수적인 용도 즉 교훈적 용도에요.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결국은 예수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는 것이에요. 몽학선생은 뭐냐 하면 옛날에 귀족집안의 아이가 학교 갈 때에 딸려 다니는 인도자가 있어요. 장난치고 까불다가 사고날까봐 보내는 보디가드 비슷한 나이 많은 종이에요. 종이지만 그러나 ‘도련님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집에 가서 마마님께 이르겠습니다.’ 말하자면 이렇게 규제를 하는 것이죠. 그런 사람을 ‘파이다고쿠스’라고 그랬어요. 교훈적, 몽학적인 용도에요. 그래서 뭐냐 하면 율법을 아무리 하려고해도 우리가 타락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율법을 모두 준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또 외면적으로 어떤 것을 했다고 하더라도 내면까지를 바라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그것을 온전히 수행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율법을 지켜보면서 자기가 도저히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자기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예수를 의지하여야 되겠구나하고 예수께 이끌리는 삶을 살라고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다는 이야기에요.
그리고 세 번째 용도가 뭐냐 하면 ‘우스스노르말리스’ 이것은 뭐냐 하면 규범적 용도에요. 자,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구원을 받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었잖아요. 애굽의 종 되었던 집에서 구원해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하셨으니까 너무너무 감사한 것이죠. 그런 큰 은혜를 입은 다음에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큰 은혜를 주셨는데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그것을 보여주는 규범적 용도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에요. 자, 그래서 어떻게 되요? 이제는 그 율법을 행해서 구원을 얻으려고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현재와 과거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고 싶은데 창조의 목적도 모르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런데 백번을 양보해서 창조의 목적을 안다고 칩시다. 창조의 목적을 안다고 하더라도 여기에 있는 인간이 어느 길로 가야지만 창조의 목적으로 갈까? 이것이 자기의 머리로 아무리 생각을 해도 알 수 없는 것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니까 그렇게 살고자하는 의지와 믿음은 있어요. 그런데 성경을 펼쳤더니 이런 것을 다 가르쳐주는 것은 아닌데 ‘도둑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간음하지 말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여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어떻게 해라…….’ 이렇게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의지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으로써 아멘, 아멘, 아멘, 이 앞은 잘 모르지만 그러나 매 순간 하나님을 믿는 단순한 믿음으로 순종하면서 은혜 안에서 걸어갔더니 이렇게 이어지면서 결국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아주 선한 존재가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 선을 행하는 과정에서 이 사람은 말하자면 행복을 얻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 용도로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이에요.
첫째는 하나님이 정치적 용도로, 둘째는 교훈적 용도로, 마지막에는 규범적 용도로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에게 주신 것이에요. 그래서 율법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를 칼빈이 이렇게 세 가지로 정돈해 놓은 것이에요. 그 이야기가 쭉 나오게 되지요.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잘못하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죽고 싶은 것이죠.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판단이에요. ‘네가 이렇게 커다란 잘못을 했다.’ 율법이 우리에게 이런 판단을 내려요. 그래서 양심을 거스르면서 살면 마음의 평안이 없는 것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 율법을 안다고 해도 그 율법대로 살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알아도 지킬 수 없는 인간을 하나님이 그렇게 지키고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인간을 만지시는 것이죠.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으로 나타나고 이것이 인간 개인의 영혼과 관련될 때에는 특별히 회심과 그리고 중생으로 나타나는 것이에요. 이것은 죽었던 영혼 즉 죽은 상태에 있는 영혼을 하나님께서 확 살아나게 하시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죠. 이때에 지성에는 밝은 빛이 들어오게 되어서 예전에는 알 수 없던 것을 알 수 있게 되고 믿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조명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중생과 함께 인식기능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 의지가 변해요. 하나님을 거스르던 완고한 의지가 하나님의 은혜의 힘에 의해서 의지기능에 큰 변화가 오게 되요. 의지기능에 큰 변화가 와서 의지기능도 스스로 할 수 없었던 것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그런 의지능력의 변화가 오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전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살 수 있는 능력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생명의 상태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죠. 이런 영혼 안에 일어나는 무의식적인 작용이 이제 인간의 의식 세계 속으로 들어와서 인간이 그것을 감지하게 되는데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회심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그래서 이 회심은 자기의 죄에 대해서 율법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고 회개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죄의 상태에서 나를 구원해주실 이가 오직 예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사랑을 깨달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온전한 의존의 믿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이 둘을 합쳐서 우리들이 conversion이라고 부르는 것이에요. 회심이라고 부르는 것이에요. 이렇게 됨으로써 인간은 예수를 통해서 자기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구원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의존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천지창조의 목적중의 하나인 절대의존의 마음이에요. 이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죠. 자 이런 내용이 57P에 나오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제 58P로 넘어가면 그리스도가 나와요.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율법의 의를 이루시는 유일한 길’ 나오죠? 그래서 그리스도는 어떤 위치에 있느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과 불결한 인간이 있는데 이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자가 되셔요. 그래서 어떻게 중보자가 되시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에게 전달해주는 통로가 되고, 인간의 기도와 간구를 하나님께 올리는 통로가 되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모든 좋은 것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통로가 되고, 또 인간이 행하는 선한 것을 하나님께 올려주는 통로가 되요. 왜냐하면 인간이 아무리 선한 것을 행해도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 열납 되기에는 너무나 부족해요.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를 통해서 하나님이 받으실만하게 변해서 하나님 앞에 이것이 선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는 한번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으로 끝나지 않고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각양 좋은 것이 인간에게, 인간이 하나님께 올려 드려야 할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절대의존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된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 안에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예수께 바쳐지도록 그렇게 절대의존 속에서 살게 하셨는데 이게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구원의 경륜이라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인간은 이렇게 의식 세계 속에서 회심을 경험하고 중생 속에서 인식의 기능과 의지의 기능이 변해서 볼 수 없었던 것을 조명으로 보고 할 수 없었던 선한 일들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할 수 있게 될 때에 그 때에 비로소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그를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를 힘입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받고 또 인간에게 있는 것들을 하나님께로 올려 보낼 수 있는 관계가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의존 속에서 삶으로서 창조의 목적에 이바지하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전체적인 뜻이에요.
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59p를 보면 6번에 ‘만약 우리가 큰 신뢰로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탁하고 즉 맡기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분의 말씀은 능력이며 진리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고 확실한 믿음으로 품어 받아들인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우리에게 제시하시며 우리 주 그리스도 안에서 수행하신다. 마지막으로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통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생명과 구원으로 인도하는 모든 하늘의 보화들과 은사들을 그분 자신 안에서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한 모든 은총은 그분 자신에게 있음과 참으로 그분 자신 안에서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천국의 후사가 된다는 것을 확실한 것으로 붙들 것이다. 거꾸로 말해서 그리스도와 함께하지 않는 사람은 그들의 본성이 어떻던, 행하고 노력하는 것이 무엇이든 파멸과 혼동, 그리고 영원한 사망의 심판으로 빗나갈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내침을 당해 모든 구원의 기대로부터 끊어진 사람들이다. 우리가 자신과 우리의 무능과 재앙을 앎으로써 하나님 면전에서 우리 자신 자체를 낮추고 죽이는 것과 자비를 간구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이 지식,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자와 자비의 맛을 제시하심으로 자신께서 기름 부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시는 믿음, 이것들은 우리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며 우리의 재능가운데 놓여있는 것도 아니다. 회개할 분이 하나님이시니 그분께는 거짓 없는 회개로 우리 자신을 아는 한 지식과 확실한 믿음으로 그분 자신의 온유하심과 그분 자신께서 기름 부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달콤함을 아는 다른 한 지식에 이르도록 인도하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신 그리스도 자신께서 지도자가 되심으로써 우리가 영원한 복락에서 계속해서 이끌림을 받게 하신다.’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에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공경하면서 살아가게 될 때 이때에 참된 경건의 삶, 그 안에서 우리들이 창조주에 의해 빚은바 된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지복한 행복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질문?
질문-XXXX
대답-없는 게 있어요? 많구나! 그것은 뭐냐 하면 제가 설명해드릴게요. 기다리세요. 이게 어떻게 되느냐하면 옆의 61, 62 이렇게 나오는 것은 빨간 것 옆의 원문이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62p 옆에 보면 나오지요?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이 없이는’ 그게 이렇게 되면 ‘구데 아세뀌므르’라고 나오잖아요. 그것을 번역한 것이 바로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이 없이는 이라는 것이에요. 62번은 번역자가 밑에 설명한 것이에요. 이 단어는 진리를 받아서 좆는다는 뜻이다. 63번은 이제 앞의 부분이에요. 하나님 면전에서 우리 자신 자체를 낮추고 죽이는 것. 그것이 앞의 ‘노스메소스 휴밀리아레 아끄이익께레 꼬람데오’ 라고 나오는 것이고 그 다음에 ‘자비의 맛’을 의 맛이 ‘꾸스데루스다’ 그렇게 연결되는 것이에요.
질문-XXXX
대답-그런 것도 있고요. 너무 중요하거나 뜻이 미묘해서 원래 원문에 어떻게 되어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을 때 참고하라고 그렇게 해주는 것입니다.
질문-XXXX
대답-아니에요. 덧붙인 것도 있고 아니면 없는 것도 있잖아요. 그것은 이제 겹치는 것은 마침 빨간 것으로도 되어있고 역자가 설명도 보태고 싶은 것이고 빠져있는 것은 본문에는 문제가 안 되는데 역자가 다시 더 설명을 하고 싶은 내용들로 이루어진 것이에요. 그 다음에 69명은 각주에 설명해 놓았고요. 68번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랬잖아요? 라틴어 원문에 보면 ‘인크리스토수’ 그랬어요.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번역을 했지만 그러나 이것을 직역하면 ‘그리스도 자신 안에서’ 가 맞아요. 66번도 마찬가지로 똑같이 ‘인크리스도수’ 이것도 ‘그리스도 자신 안에서’ 가 되지요. 그렇게 어려운 것은 없어요. 그런 뜻이에요.
질문-XXXX
대답- 설교시간에 내가 그렇게 얘기했어요? 설교시간이 아니고 논문을 발표할 때 그렇게 했는데……. 그 내용을 오늘 숙제로 내드릴게요. 그래서 서점에 가서 제 이름이 쓰여 있는 것을 사세요. 거기에 보면 ‘마스티리어트’ 부분에 나와요. 그것은 여러분들이 70p 인데 좀 꼼꼼히 읽으셔야 될 거예요. 그러니까 고시공부를 하듯이 12주를 하는 것이에요. 놀면서 하면 안 되지요. 70p짜리인데 다음 주까지 아니 두주 안에 다음 주에 내셔도 되고 아니면 그 다음 주에 내셔도 되요. 그래서 다다음주까지 쭉 읽고 한 페이지에 소감을 써서 내세요. 될 수 있으면 논문도 읽고 그 다음에 강연도 듣고, 강연은 너무 압축되어 있어서 사실은 내용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A4용지 1장으로 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논문 중에서 ‘마스트리어트’의 중생론에 ‘영’ 부분을 찾아서 꼼꼼히 읽어보시면 조금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열린 교회 성도들 정도면 이해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질문-지난주 설교에서 XXXX
대답-그렇게 하면 안 돼요. 개혁주의 인간론에서는 인간을 3요소로 안보고 오직 2요소로 보거든요. 그래서 혼적인 것들은 그렇게 하면 안 돼요. 그래서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존재고 나머지 정신적인 것들은 영혼의 작용이라고 보는 것이죠. 그것은 내일 다음 절을 더 설교합니다. 그러면 답이 나올 것이에요.
자, 다음질문? 질문이 없는 것을 보니까 오늘 강의가 신통치 않았나? 명쾌했나? 질문이 없으면 내가 오늘 공부한 내용을 물어볼게요.
서성하 집사님! 질문 할게요. 이중의 신지식이 무엇이에요? 그렇지요! 창조주를 아는 지식과 구속주를 아는 지식이에요. 김명숙학생! 질문 하나 할게요. 인간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변했어요? 안변했어요? 내가 변하겠네……. 새로운 신학자가 나왔어요. 어떻게 변했는지 설명해보세요. 아, 안변했어요? 금방 신념을 바꾸셨네요. 마지막으로 박선희 학생! 율법을 하나님이 주신 세 가지의 용도는 무엇이었죠? 첫째 정치적 용도 혹은 시민 생활적 용도 둘째 교훈적 용도 혹은 몽학적 용도 셋째 규범적 용도지요. 구원받은 우리가 가장 가슴에 새겨야할 세 가지 용도중 하나는 어느 것일까요? 규범적 용도지요. 다른 학우들이 대신 대답을 해주었어요. 자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남은 시간 저희와 함께 해주시고 잘 깨달아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09. 10. 24 하반기 성화반
성화반 Ⅲ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신 책의 61p부터 보겠습니다. ‘십계명은 두 돌판으로 배분되었다. 첫 번째 네 계명들로부터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해야 할 것을 배운다. 즉 오직 하나님 자신을 인정하고 고백하며 모든 것보다 위에 그리고 모든 것보다 먼저 그분 자신을 사랑하고 찬미하며 두려워하며 우리의 모든 소망과 도움을 오직 그분 자신에게 두며 항상 그분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둘째 돌판은 사람과 하나님을 위하여 이웃에게 지켜야할 사랑의 직무들을 설명하는 나머지 여섯 계명들을 포함한다. 이 같은 맥락에서 주님께서는 율법을 두 가지의 주제 아래 모으셨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법이 두 주제 아래 포함된다고 할지라도 그분께 속한 찬미와 두려움과 사랑과 관련되고 그분 자신으로 말미암아 이웃을 향해서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포함하는 십계명을 더욱 광범위하고 명확하게 해석하기를 원하셨다. 서두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를 애굽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낸 하나님 여호와니라.’
우선 이 십계명을 이야기하기 전에 십계명은 보다 더 넓은 범주이고 율법 속에서 나옵니다. 율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게 됩니다. 율법이 세 종류라는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율법 안에 세 가지 종류의 율법으로 범주가 나눠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첫째는 시민법이에요. 이것은 시민생활을 규제하는 법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율법을 보면 이웃 간의 분쟁이 생겼을 때, 상처를 입혔을 때, 손해를 주었을 때……. 이런 형벌 조항들이 나오잖아요. 그것이 시민법이고 두 번째가 의식법이에요. 이것은 제사와 정결의 규례에 관한 법들이지요. 이것보다 중요한 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도덕법이에요. 이 도덕법은 말하자면 십계명으로 집약되는 것이죠. 엄밀하게 말하면 이 나머지 두 법은 십계명의 시대적 적용 내지는 확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십계명이 중심이 됩니다. 그래서 결국 이 시민법과 의식법은 이제 모두 지금은 효력이 없고 마지막 도덕법은 아직까지도 효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죠. 그래서 효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효력이라기보다는 지난 시간에 율법의 세 가지 용도에 대해서 말씀드렸죠? 그런 세 가지 용도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는데 그 중에서 교훈적, 교육적, 혹은 교수적 용도, 정치적 용도, 마지막에 규범적 용도 이렇게 주셨잖아요? 그런 것들이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유효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도 율법대로 행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결코 자신이 도저히 그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께로 돌아가게 되고 지금도 여전히 시민생활을 어떻게 규제할 수 있을까, 모든 사람들이 안정된 가운데 생활하는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까 할 때 이 도덕법이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것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 이제 그렇게 되었는데 이 계명이 두 개의 돌판으로 되어있어서 하나에 네 계명이 들어있고 또 하나의 돌 판에 다섯 번째 계명부터 열 번째 계명까지 들어있는 것이죠. 이 계명을 우리들이 하나님과 관련된 대신적 계명이라고 보고 이것은 사랑과 관련된 대인적 계명이라고 보지요. 우리들이 흔히 십계명을 이해하는 것은 이런 식이거든요. 1, 2, 3 중요한 것부터 시작해서 차례대로 해서 마지막으로 10번까지 온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고 사실 이 계명은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 계명이 이렇게 직선적인 하강구조가 아니라 1번에서 2번, 2번에서 3번, 3번에서 4번, 마지막 10계명에서 다시 1계명으로 돌아가는 이러한 회귀적이고 순환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하고 마지막 십계명은 탐내지 말라고 하시면서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라 하면서 이렇게 곧 일 계명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이에요. 이것이 바로 계명이에요. 이런 형태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두 계명이 돌판은 둘로 나눠지지만 결국은 하나의 계명인데 쓸데없는 상상이긴 하지만 왜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돌판을 나누셨을까? 돌판을 크게 해서 한꺼번에 기록하시든지 글자를 조그맣게 써서 작은 판에라도 열 개를 다 써넣으셨으면 좋았을 텐데 왜 이렇게 두 개의 돌판으로 만드셨을까?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뜻을 주느냐하면 통일성과 구분성을 우리에게 함께 생각하게 하시기 위함이에요. 그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이 지켜야 될 우선적인 계명이 하나님께 대한 계명이고 또 인간에게 지켜야할 계명도 가볍지 않은 계명인데 그래서 이 두 계명은 여기 B의 해석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통합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계명은 여전히 구분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1, 2, 3, 4 계명에 충실하지 않고도 5, 6, 7, 8 계명에 충실할 수 없지만 그런 점에서 이 계명은 일치를 이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대한 계명과 인간에 대한 계명이 구분은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것이 첫 번째 돌판이고 이것이 두 번째 돌판에서 하나님을 향한 계명의 우선성은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이야기에요.
자, 그러면 이제 그 다음에 1, 2, 3, 4는 종교명령이 되고 5∼10계명은 윤리명령이 되는데 그런데 이게 결코 나눠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결국 이 자체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이렇게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과 그 신앙생활의 열매로써의 참되고 착한 삶인 두 개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연관관계에 있다는 것이 십계명 자체의 구조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에요. 좀 더 설명을 하면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서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와 사랑이 동시에 인간에 대한 그런 사랑과 관계로 떨어질 수 없도록 하나가 되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 보여주느냐 하는 이야기에요.
이것을 칼빈의 경우는 이것을 어디에서 찾았느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데서 찾았어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는 이번 사경회 때 열심히 설교했기 때문에 더 설명을 안 하겠어요. 그래서 이것을 우리들이 라틴어로 ‘이마고’라고 그래요. 그 다음에 ‘데이’ 즉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에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 이 사람의 사랑이 이 사람 자신에게서 시작되면 이 사랑은 자기 자신의 만족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자신에게 만족을 주는 것은 이 사람에게 자기가 판단하기에 아름다운 것이 있기 때문에 만족을 주는 것이에요. 좋은 것이 꼭 예쁘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유익이 되고 좋은 것이 있는 것이에요. 마치 편안하게 살고 싶은 여성이 돈 많은 남자를 만나면 갑자기 잘생겨 보이고 호감이 가는 것과 마찬가지고 그러다가 한 푼도 없다더라. 그러면 정나미가 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이제 만약에 이 사람의 사랑이 이게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시작된 사랑이라면 하나님께 사랑을 받음으로써 하나님 때문에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종류의 사랑이라면 이 사람은 이렇게 사랑할 때에 이 느낌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게 되요. 그래서 이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에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사랑하게 되고 그리고 만약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게 되면 이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사랑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볼 수도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이 사랑이 하나로 통합을 이루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필연적인 관계에요. 그래서 만약에 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반드시 사람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와요. 이렇게 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 통합을 이루게 되는 것이에요.
이런 예를 들면 이해가 잘될까요? 예를 들어서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외국에 나가면 다 애국자가 된다면서요? 태극기만 보면 막 가슴이 뛰고 눈물이 난다는 말이죠. 나라를 향한 사랑과 그런 외국에 나가서 국기를 볼 때에 그 마음에 다가오는 애정이나 느낌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죠. 똑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면 사람을 참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이렇게 해서 결국은 두 개가 통합을 이루게 되는 것이에요.
그 다음을 보겠습니다. 이제 십계명은 두 군데에서 나오지요. 출애굽기 20장에 한번 나오고 신명기 5장에 또 한 번 나와요. 그래서 구약에서 이 십계명이 두 번 나오는 것이 무슨 이유냐고 논란이 되는데 어떻게 해결을 보느냐하면 두 가지의 설이 있어요. 하나는 하나님이 십계명을 두 번 주셨다는 것이고 물론 돌판을 두 번 주셨다는 것이 아니라 돌판은 한번 주셨지만 다시 한 번 그 계명을 들리도록 이스라엘에게 부여하셨다는 설이 있고요 또 하나는 십계명은 한번 주셨는데 신명기에 나오는 것은 그것을 다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복하셨다고 보는 것이죠. 어떻게 보든지 십계명의 서두에는 똑같은 말이 나와요. 그것이 뭐냐 하면 ‘나는 너희를 애굽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니라.’ 이렇게 나오지요. 그래서 이제 이것이 십계명을 수여하는 근거가 구속임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래서 십계명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면서 십계명뿐만 아니라 모든 율법을 주시면서 그 율법을 지키라고 주신 것, 특별히 이 도덕법인 이 십계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근거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극히 큰 능력과 권세로서 애굽의 종 되었던 종살이에서 그들을 건져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에요. 십계명은 그렇게 애굽에서 종 되었던 자리에게 건져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키라고 주신 것이죠. 그러면 우리는 이런 출애굽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 사건을 통해서 구원을 얻은 우리들이 이제 하나님과 이웃을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사랑하도록 우리를 불러내시는데 불러낸 우리들이 그러면 어떤 규범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그런 삶을 살 것인가 하는 그것이 바로 이 십계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체적인 삶의 한 규범이 되는 것이라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시면서 왜 창조주 당신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먼저 계시하지지 않고 ‘내가 너희를 애굽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해낸 하나님 여호와다.’ 이렇게 구속을 먼저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에요. 이것 자체가 우리가 첫 시간에 이야기했던 이중지식을 공부했지요? 그 때 우리는 창조주를 아는 지식이 시간적으로는 먼저이지만 창조주를 아는 지식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기 때문에 구속주를 앎으로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 창조주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이중의 지식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러니까 똑같이 창조주이시기도 하고 구속주이시기도 한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을 구속주로 먼저 계시를 하셔야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길이 있다는 것을 이 구약에서도 벌써 보여주는 것이에요. 무슨 뜻인지 아시죠? 만약에 그런 원칙을 무시한다면 어느 종교든지 열심히 신을 탐구하면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을 것이 아니에요? 그런 얘기를 많이 들잖아요? 그러니까 다원주의적인 생각이에요.
자 그 다음에 그래서 결국은 그 창조주 하나님이 이러한 애굽땅 종 되었던 집에서 그들을 인도해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 알려주심으로써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 가지를 생각나게 하시는 것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함께 생각나게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종 되었던 거기서 건져내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동기고 또 하나는 건져내시는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충만한 신으로서의 능력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충만하게 보여주셔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할만한 분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십계명에 주시는 서문이에요.
이제 1계명이 시작됩니다. 63p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그랬습니다. 옆의 라틴어에 보면 ‘논 하베비스 데오스 알리노스 꼬람메’ ‘꼬람메’ 이것은 ‘나의 앞에’ 라는 뜻이에요. ‘나의 앞에’ 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혹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어디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정면에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즉 아주 노골적인 죄가 된다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 64p로 넘어가면 ‘이 계명은 우리가 전적으로 그분께 드려야할 신뢰를 다른 신에게 돌리는 것, 도움을 구하여 피난처로 삼는 것, 찬양을 다른 신에게 올리는 것을 금한다. 모든 것보다 더욱 그분을 두려워하며 사랑해야함이 마땅함으로 우리의 모든 소망과 신뢰의 뿌리를 그분 자신에게 내리면서 우리에게 선한 것은 오직 그분 자신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전적으로 그분만을 영접해서 찬미하고 예배하며 그분을 우리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언어와 몸짓과 외부적으로 표출되는 모든 의미로 우리에게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선언해야할 뿐 아니라 우리의 정신과 온 마음과 모든 열심으로 이와 같은 것을 나타내야한다. 우리의 말과 외부적 사역이 그분의 면전에 나타날 뿐 아니라 가장 깊은 마음자리와 가장 깊은 영혼의 사유가 우리 자신에게 보다 그분 자신께 더욱 훌륭하고 더욱 확실하게 드러나야 한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을 모든 신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신으로 생각하고 섬기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이외에 아무것도 신적인 존재로 인정하지 말고 거기에 권위를 부여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기냐? 이방신을 섬기냐? 그렇게 생각하는데 결국 이방신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섬기는 것이에요. 왜 이방신을 섬기는 것이 자기 자신을 섬기는 것이냐?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겠지요? 먼저 이방신을 섬기는 것이 자기를 섬기는 것이라는 이유는 이럴 수 있잖아요? 고대에서 이방신들을 섬기는 모든 동기는 무엇 때문이지요? 자신에게 이익을 주기 때문에 그 신을 섬기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자신에게 이익을 주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참신이 없고 그 하나님이 유일하게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자기를 구원하신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대가와는 상관없이 섬기는 것이에요. 이게 성경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기본적인 원칙이에요. 그런데 이방신들은 그렇지 않거든요. 이방신을 섬기는 것은 항상 자신의 이익과 관계가 있어요.
그러면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분은 이런 반론을 제기하겠지요. 물론 그렇게 하등한 종교도 있지만 자기가 그 신을 섬김으로써 더 고행을 하고 자기를 포기해야하는 소유로부터도 멀어지고 인간의 모든 육적인 만족으로부터 멀어지는 고행을 하면서까지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해야 됩니까? 그것도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훨씬 더 신뢰하는 그것을 포기하지 아니하는 자기주장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런 것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이방신이 있고 별 신이 다 있지만 인간은 참신을 섬기느냐 이방신을 섬기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결국은 하나님을 섬기느냐 자기를 섬기느냐 둘 중의 하나라는 이야기에요. 자기를 신으로 생각하느냐? 하나님을 신으로 생각하느냐? 둘 중의 하나라는 이야기에요.
자, 이런 생각을 해보십시오. 성경에서 이렇게 말하지요. ‘세상을 사랑치 말라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없다.’ 그러면 여러분은 우리 안에는 세상 사랑도 있고 자기 사랑도 있고 이렇게 나눠질까요? 그렇지 않지요.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수단일 뿐이고 결국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에요. 이해되지요? 그래서 세상은 하나의 수단일 뿐이고 세상을 사랑함으로써 그렇게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으로부터 만족을 얻는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죠.
그 다음에 그러니까 오늘날 이 십계명을 너무 좁게 해석하면 원래의 십계명의 의도와는 다른 것이에요. 훨씬 넓게 해석해야 되요.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십계명을 어떻게 해석해야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여기서는 이방의 우상들을 섬기는 것을 ‘내 앞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한 사람이 재물에 대해서 탐욕을 갖는 것도 그것이 결국은 그의 종이 되는 것이고 그것을 섬기는 것이라고 보시잖아요. 그렇게 확장해서 생각해야 되는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생각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이 훨씬 더 많이 있고 자기 자신의 행복에 대해서 더 많이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우상숭배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에요. 그런 생각은 별로 안 해보셨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현대 복음주의의 흐름에 대해서 강의를 하면서 이제 결국은 객관적인 진리와 이런 것들을 모두 거부하고 나니까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 속으로 몰입하고 자기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상태가 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래서 소유의 문제도 나오고 그렇게 산업화 사회에서 심리학의 문제도 나오잖아요. 그게 결국은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을 우상화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이런 것들은 이제 우리의 시대적인 지평으로 이것을 확장해나가면 한없이 펼쳐지면서 우리 안에 얼마나 이 우상숭배적인 요소가 많은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2 계명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아래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이것을 지나치게 해석해서 어떠한 형상을 만드는 것도 그것은 죄라고 하는데 액세서리도 있고 예를 들면 물병이 있는데 물병을 물고기 모양으로 만들었다든지 생선회 담는 접시를 물고기 모양으로 만들고 생선회 초장 담는 조그만 접시는 오징어모양으로 만든다든지 그런 것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런 것들도 모두 다 잘못된 것이라고 그것을 배격하지요. 그러면 무엇을 쓰겠어요. 동그란 것은 그것도 보름달처럼 생겼으니까 어쨌든 형상일 것 아니에요.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니고 2계명을 읽을 때에 이렇게 읽어야 해요. 너를 위해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강조) 이러이러한 형상도 만들지 말고(강조) 이렇게 읽으면 안 되고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만들지 말며 절하지 말며(강조) 그것을 섬기지 마라(강조). 이렇게 읽어야 해요. 강조점이 다르죠. 그러니까 이것은 예배와 관련된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냥 하나님이 자연 속에 베푸신 아름다움을 우리들이 감상하고 그 하나님을 기릴 목적으로 만든 것이라면 상관없고 그 자체가 아름답다는 것이죠. 물고기 모양의 접시에 생선을 담아먹던, 고구마모양의 접시에 찐 고구마를 담아먹던, 꽃모양의 병에다가 꽃을 꽂던 문제가 없다는 것이에요. 이것은 예배와 관련된 것이라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왜 이러한 형상들을 만들어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도움을 받는 것을 절대적으로, 아주 강력하게, 심지어는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까지 말씀하시면서 강력하게 이것을 금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이런 궁금증이 있게 되는 것이죠.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몇 가지의 이유가 있는데 우선 첫째는 여호와를 믿는 종교의 고도의 영적 성격을 유지하시기 위함이었어요.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은 우상 자체가 아니라 형상화를 반대하신 것이죠. 아론이 모세가 계명을 받으러 올라갔을 때 산 아래서 백성들의 성화에 못 이겨서 금송아지를 만들지요. 그때 이 금송아지는 하나님이 아닌 또 다른 신을 만든 것이 아니라 볼 수 없는 너희들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시고 가나안으로 이끌어 가실 하나님이 바로 이 형상이 바로 그 하나님이시라고 한 것이에요. 논리적으로는 아무 무리가 없는 것이죠.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길 목적으로 또 다른 신을 형상으로 도입한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는 그 신을 형상 있게 만들어서 이렇게 형상화 되는 신이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이 너희를 애굽에서 건져내었고 그리고 이제 가나안으로 데려가실 신이다. 논리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형상화하는 것 자체를 금지하신 것이죠. 왜냐하면 여호와의 종교는 고도의 영적인 종교였기 때문에 물질의 도움을 받아서 신을 파악하는 그런 형식의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 감각에 빠지기 쉬운 인간들을 위한 배려에요. 보십시오. 여호와의 종교는 지성적 종교에요. 그러니까 구약부터 가장 강조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올바로 알려면 여기에 인간이 있는데 눈이 두 개가 있잖아요. 하나는 감각적인 눈이 있고 또 하나의 눈은 지성의 눈이 있단 말이에요. 자, 잘 들으세요. 본래의 의도는 이것이에요. 그러면 감각으로는 눈에 보이는 물체를 보잖아요. 존재하는 물체에요. 사물이라는 것이에요. 물체를 이렇게 본단 말이에요. 이것은 특별히 노력을 안 해도 눈으로 보는 것이니까 눈이 멀지 않는 한 보일 것 아니에요? 그러면 마음의 눈으로 보는 하나님은 이렇게 보이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이게 지성 안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맨 처음의 의도는 뭐냐 하면 이렇게 해서 어떤 물체를 통해서 형상을 보고 그 다음에 이렇게 해서 하나님 자신을 이렇게 생각을 한다면 이 하나님을 이렇게 보는 것보다는 쉽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은 논리일 뿐이고 실제의 경험에 의하면 인간이 감각적인 것으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물질을 보여주면 이 지성의 눈으로 봐야할 필요를 안 느끼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기서 멈추는 것이에요. 그러면 물질=신이 되는 것이에요. 여기에서 미신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자신의 지성과 믿음으로써 알아가기보다는 보이는 형상으로써 그 안에 하나님이 갇혀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거기에서 감각으로 멎는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것을 높이고 경배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에요. 예외 없이 미신에 빠지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못하게 하시는 것이에요. 감각적인 인간들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동기는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이렇게 우상을 허용하면 인간이 미신에 빠질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고도의 도덕성도 유지할 수 없고 삶과 유리된 종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베드로 성당에도 가보면 마리아상이 있잖아요? 얼마나 키스를 했는지 발가락이 다 닳았어요. 그렇게 하고 가면 복을 받는다고……. 여러분 산에 있는 절에 가보면 부처의 코가 다 나갔잖아요? 그것을 망치로 깨뜨려서 삶아먹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코가 다 부서졌어요. 남아나지를 않아요. 남아있는 것은 요새 세워놓은 것이에요. 밤중에 몰래가서 딱 때려서 돌멩이를 자져다가 아들을 낳는다고 생각하고 끓여먹는 것이에요. 그런 식으로 미신이 거기에 멈추게 되는 것이에요. 그렇게 되면 이제 지성을 통해서 부지런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지신 분이시고 인간을 향하여 어떻게 대하시고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그런 개념들이 사라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 지성을 게으르게 만들어버리는 것이죠.
마지막 줄을 보겠습니다. ‘나아가서 영이신 하나님을 성령과 진리 가운데 숭배하자. 그러므로 1계명은 하나님이 한분이고 다른 신도 생각하거나 품지 말라고 가르친다. 2계명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떤 종류의 예배로 찬미를 받아야하는지를 가르쳐서 우리가 감히 육신적인 것을 그에게 부착하거나 그분 자신을 우리의 어리석은 머리로 이해할 수 있듯이 그분 자신을 우리의 감각적 지식에 종속시키거나 그분을 어떤 외양으로 표상하지 못하도록 한다.’ 67P로 넘어가면 ‘모든 우상숭배자들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자신들의 마음의 공허함이 배태하는 만큼 신이 감동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 공허함에 사악함이 덧붙여졌다. 마음은 우상을 잉태했고, (우상은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헛된 욕망이 만들어낸 투영된 결과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신들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욕망을 밖으로 표출해서 만들어낸 신들이라는 것이에요. 마치 그리스의 신화처럼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이 같은 조상들로 한분 영원하신 하나님과 하늘과 땅의 참 주님을 예배했다고 생각했다.’ 68P로 가서 ‘참으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자신들을 본다고 생각했음으로 우상들 가운데서 그분을 예배했다. 마침내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과 눈을 (여기에 나오잖아요?) 그 형상들에 고정한 채 더 잔인해졌으며 그 물질 안에 신성에 속한 어떤 것이 내재해있는 듯이 그것에 압도해져서 그것을 숭배했다.’
69p로 넘어와서 ‘이것들은 무식한 사람들의 책이라는 말이 그들의 궁극적인 도피처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서방교회는 초기부터 그것을 엄격하게 금해요. 그런데 동방교회에서는 이런 화상을 상당히 폭넓게 허용하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주장했던 이유가 뭐냐 하면 아직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에게, 무지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글로 쓰인 것과 같은 책의 효과를 갖는다. 그래서 지성이 모자라서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형상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나게 만들고 성모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만들고 예수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만들고 그래서 나중에는 그것을 버리겠지만 그러나 당장은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에게 (옛날에는 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잖아요.) 그것이 도움을 준다는 생각이에요. ‘그러나 우리는 화상들이 어떤 열매를 낳게 할 수 있다고 그렇게 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쭉 그런 이야기들이 나와요. 그래서 결국은 이 우상이 얼마나 옳지 않은 것인가 하고 나와요. 69p에 밑에 보면 그렇게 나오죠. ‘특히 화상들은 그것들로 하나님을 묘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신인동형론자 안드로모르피즘이라고 그러는데 하나님을 마치 인간의 모습인 것처럼 묘사하는 것…….’ 그렇게 해서 사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하기위해서는 그들의 눈높이에서 말씀하시고 설명하셔야 됐거든요. 그것을 가리켜서 영어로 accommodation 이라고 해요. 그렇게 해서 낮추셔야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해주신 것이죠. 마치 우리들이 동화책에 보면 그런 accommodation이 많잖아요. 태풍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요? 바다 아저씨가 너무 더워서 그래서 열이 받으면 그 열기가 올라와서 태풍이 되거든요.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바다아저씨가 어디 있어요? 그냥 바다면 바다지. 아이들이 그렇게 말해야지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accommodation을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 설명해버리면 즉 그 형상을 허락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맞춤으로 눈높이 설명을 한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본질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에요. 무슨 얘기인지 아시죠?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 애가 교육을 잘 받아서 그것을 벗어버려야지 대학생이 되었는데도 바다에 가서 ‘아저씨 빨리 좀 나와 보세요.’ 그러면 그게 어떻게 되겠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것을 금하게 하신 것이라는 거예요.
그 다음에 3계명으로 넘어가면 72p에 나오지요. 너는 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이것이 일컫지 말라 그러는데 히브리말로는 ‘나사’입니다. 이것은 ‘번쩍 들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는 것이죠.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이렇게 높이 들 때에는 분명히 거기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는 아주 뚜렷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보탬이 되는 분명한 의도와 목적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에요. 예를 들자면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가 너희에게 명하건대…….’ 이것은 너희는 이제부터는 이 계시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듣지 말고 하나님이 직접 너희들에게 오셔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권위 있게 받아들이라는 뜻이에요. 그렇죠? 그런 분명한 의도가 있는 것이죠. 이것은 괜찮은 것이죠. 주님의 이름을 거론하는데 ‘그분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며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을 보라.’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데 분명한 의도와 목적이 있는 것이에요. 이것은 괜찮아요.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것이 강조점이 아니라 ‘망령되이’가 강조점이에요. 그래서 올바르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문제가 없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들이 농담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고 그 다음에 분명한 의도와 목적이 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죠. 그뿐만이 아니죠. 우리들이 이제 정당한 진리의 가르침이 아닌 것을 그분의 이름으로 들먹이면서 사람들에게 신용을 얻거나 아니면 권위를 부여하고자할 때 그것은 모두 세 번째 계명에 위배되는 것이에요.
엊그제도 편지를 하나 받았는데 자기가 꿈을 꿨는데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쓰랬다고 하면서 주일을 똑바로 지키라고 막 썼어요. 전부다 마지막 날에 문제가 되는 행동들이에요. 자기의 사상이나 생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이유 없이 헛되게 거명하는 것이에요. 말하자면 하나님의 것인 것처럼 오용하고 그 다음에 말의 오용하고 제도의 오용하는 것이에요. 사람이 세워놓은 제도를 거기에다가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모두 다 3계명에 위반되는 것이에요.
그 다음 74p ‘그러나 행정관리에 의해서 수행되거나 요구되는 맹세를 하는 것은 계명에 위반되지 않는다.’ 당연하지요. ‘결국은 맹세는 정욕이나 쾌락이 아닌 필연성에 동기로 허용된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4계명은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이에요. 76p로 들어가면 ‘의식의 시대를 위하여 유대인들에게 명령된 것으로써 이것에 대한 외형적 춘수로써 예배를 표상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그림자의 빛이며 형상들의 진리인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바울이 명확하게 증거하듯이 본 계명은 모세법의 남은 그림자로써는 폐지되었다. 안식일의 법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셔서 선한 일을 하시고 자신의 성령의 인도로 우리를 다스릴 수 있도록 이 같은 종류의 노예적인 일들을 모두 그만두라고 명령한다. 이것이 참 안식일이며 유대안식일은 그 모형 환원하면 그림자였다.’ 무슨 뜻이냐 하면 안식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육체의 쉼과 영혼의 쉼이 모두 이루어져야합니다. 그게 안식이에요. 그런데 사실 저 같은 경우는 주일날 훨씬 더 피곤하거든요. 육체의 안식이 없어요. 그러나 이제 더 중요한 것은 육체가 쉬고 말하자면 육체가 쉬는 목적이에요. 육체를 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것은 단순히 육체를 의무로부터 속박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쉬게 해주는 것이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일 때문에 영혼이 하나님 한분만을 응시하고 예배하기에 방해를 받던 육일과 같은 상황을 만들지 말고 우리의 정신과 영혼으로 하나님 한분만을 온전히 바라기에 육체의 일에 매달리는 것이 방해가 되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 안식을 정하신 것이에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 주일이 태양신을 숭배한 날이며 등등 막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다 쓸데없는 이야기이고 중요한 것은 몇 번째 날이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안식 후 첫날이 주님이 부활하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모였겠지만 그렇지만 지금 지키는 그날이 그날이라고는 말할 수 없잖아요. 왜 그래요? 시간차도 있잖아요. 오랜 세월이 지나가면 윤차도 생기고 말하자면 시간이 생겨서 날짜가 변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많은 변화들이 있잖아요. 그래서 중요한 것은 처음에는 그렇게 생겼을지라도 지금은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그것이 안식일 다음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죠. 그러면 지구가 둥근데 저 반대편은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니까 이런 논쟁들이 의미가 없는 것이에요. 그리고 또 날짜선이 생긴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으며 고대의 날짜 같은 것이 없었을 때는 그것이 어떻게 되겠어요. 그것이 다 의미가 없는 것이고 중요한 개념은 일주일의 하루를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쉬셨고 또 우리를 구속하신 것을 기념하여 그 하루를 육체에 정신이 매여 노예 살이 하기 쉬운 환경에서 벗어나서 우리의 정신과 영혼이 하나님 한분을 온전히 바라기에 충분한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누군가가 아무 일도 안하고 주일날 빈둥거리고 논다고 하더라도 영혼이 하나님을 앙망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을 안식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육체의 일로부터 해방된 가운데 바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을 유대인들이 안식을 지키던 그런 개념으로 율법주의적인 견지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가 그런 이야기를 하지요. ‘만약에 우리의 주일이 안식일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런 저런 일들을 금하여야 한다고 말한다면 나는 안식일 날 술도 마시고 춤도 추겠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목적은 이제 유대인들이 율법에 의존해서 안식일을 지키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동기에서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죠. 주일날은 하나님 한분을 온전히 바라보고 앙망하는데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흩어놓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주일날 쇼핑을 간다든지 아니면 주일날 놀러간다든지 아니면 예배를 간단하게 드리고 이후의 순서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무엇을 한다든지 이런 것들은 모두 주일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에요.
그 다음 제5계명으로 넘어가는 것이에요. ‘네 부모를 공경하라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랑해야함이 마땅함으로 부모를 무시하거나 화나게 하지 말아야한다. 공양하고 존중하며 순종하고 섬기며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 마땅히 공경하는 사람은 장수할 것이다.’ 그러면서 부모 공경을 강조하지요. 그런데 이게 재미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인간을 향한 계명 6개중에 제일 첫 번째 나오는 것이고 두 번째 돌판의 제일 머리에 있는 계명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에요. 이것은 바로 우리의 모든 인간사회의 질서의 원리가 가정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 부모를 공경하고 자식을 사랑하는 그 기본적인 가정의 원리가 이 모든 인간사회 질서를 세우는 근간이 된다고 보는 것이죠. 그러면 여러분들은 헷갈리기 시작하겠지요. 왜냐하면 제가 가정설교를 하면서 가장 가정의 근본이 되는 것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고 그랬어요? 부부관계라고 그랬잖아요. 그것 좀 이상하지 않아요? 이상한 것이 아니라 가정이라는 하나의 단위를 보면 부부의 관계가 가장 중심이 되고 기본이 되는 핵이에요. 그러나 그 가정이 어떻게 해서 아내는 남편에게 어떤 아내가 되어야할지, 남편은 내가 어떻게 해서 아내에게 참된 남편이 될 수 있을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아는 모든 지식을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제공받는 것이에요.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가요? 한 부모에게 좋은 딸이 되었던 사람이 한 남자의 좋은 아내가 될 수 있는 것이에요. 그 정도면 이해가 되지요? 부모에게 좋은 아들이 되었던 사람이 한 여자에게 좋은 남편이 될 수 있는 것이에요. 이해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가정 하나를 떼어놓고 보면 아내와 남편이 핵을 이루지만 계대적인 관계에서 남편과 아내가 자기의 자리와 삶이 어떠해야할지를 하나님의 법도에서 배우는 그 통로가 부모라는 통로에서 배우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는 이게 깨뜨려져서도 안 되고 깨뜨려질 수도 없는 관계여야 된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 부모가 그것을 자녀들에게 올바로 가르쳐주지를 못해요. 그러면 부모로부터 그런 교양을 물려받지 못하는 것이죠. 그것을 우리들이 가정교육이라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그 다음에 이탈되겠지요. 그런 남자가 둘이 만났어요. 참된 아내의 자리가 어디인지도 부모로부터 배운 적이 없고 남편도 그래요. 그러면 그런대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잘 믿고 목양을 받으면서 말씀대로 살면 그러면 끊임없이 깨뜨려지면서 부모들에게서 잘못 심겨진 것을 버리면서 자기 자리를 찾아갈 수 있어요. 그런데 그런 것이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지요. 자기들이 생각하는 대로 질서가 세워지는 것이죠. 헤어지지 않는다면 대가 센 사람이 이기는 것이에요. 안 그래요? 당연하지요. 그러니까 아내들도요 편하게 살려면 처음 육 개월 동안에 남자를 기도 못 피게 밟아버려 봐요. 평생가요. 길들여 봐요. 남자도 마찬가지에요. 처음에 세게 나가는 것이에요. 삼일 만에 국을 올려놓으면 발로 상을 밀어놓고 조용히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는 것이에요. 몇 번만 하면 열심히 요리를 배워서 반찬을 해준다고요. 물론 돈을 벌어다 주어야 그것도 해주겠지만요. 그렇지 않으면 보따리 싸서 가버리겠지요. 둘 중의 하나지요. 힘센 사람이 이기는 것이에요. 그리고 잘못된 질서가 생기는 것이에요. 그러면 자식들이 또 그것을 보겠지요. 그러니까 계속 굶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거기에서 인간사회가 다 망가지는 것이에요.
요즘도 그렇잖아요. 전에는 부부가 헤어지려면 부모들이 가서 울고불고 음독자살한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어떻게 둘이는 살아보려고 그러는데 친정엄마가 와가지고 ‘야야 때려치워라 집어치워라 애초에 글렀다.’ ‘그래도 그이가 요즘에는 잘해.’ ‘야, 개꼬리가 3년 굳어서 황모 되느냐 집어치우고 새 삶을 살아라. 애들은 내가 길러줄게 다 집어치워라.’ 부모들이 그래요. 나는 실제로 목회를 하면서 많이 만나고요. 뭐냐 하면 자식이 나쁜 것이 아니라 부모가 사람이 덜되었어요. 내가 얼마나 화가 나는지……. 아유, 다독거려서 겨우 살려고 하는데 시어머니가 와서 남편한테 ‘야야 관둬라 집어치워라. 애들은 내가 봐줄게 관둬라.’ 친정엄마가 와서 ‘야야 그놈과 살 바에야 나와 살자.’ 부모들이 그래요. 그래서 기본이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의 통로가 이어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인간으로 태어나는 최고의 행복은 일반은총 차원에서 보면 인간이 사는 도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것이 최고의 축복이에요. 그래서 자식이 그 부모를 존경할 수 있다면 부모는 그 자식에게 거의 모든 것을 다해준 것이에요. 충분히 해준 것이에요. 빈털터리에요. 여러분들이야 늘 잘하고 있지요? 찔리죠?
자, 84p 6계명은 살인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함이 마땅함으로 사람을 해롭게 하지 말고 부당하게 대하지 말고 폭력을 행사하지 말아야한다.’ 살인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잖아요. 인간의 생명에 대한 주권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것을 물론 누군가에게 살해당해서 죽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의 일부지만 그러나 인간이 짐짓 자기가 사람의 생명을 주관하는 것과 같은 태도를 지니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살인을 여기서 살인이라고만 묘사하는데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미워하는데서 찾는 것이죠. 그렇지요? 미움의 감정이 살인의 감정과 똑같은 것이에요. 살인의 감정은 무슨 감정이냐 하면 비존재를 희망하는 감정이에요. 저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감정이에요. 그래서 안 없어지니까 자기가 없애주는 것이죠. 자기가 도저히 그 사람을 없앨 수 있는 권력이 없을 때 그러나 그 사람이 존재하는 것을 차마 견딜 수 없을 때는 자기가 자살해 버리는 것이죠. 그렇게 불행한 것이죠. 그러니까 사랑이 없으면 마지막에 그렇게 가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 7계명은 간음하지 말라고 했지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성의 용도는 세 가지로 나뉘어져요. 세 가지의 목적 때문에 성을 주신 것이고 이 세 가지 용도에 부합하게 성을 사용해야 해요. 첫째는 뭐냐 하면 자녀의 생산이에요. 두 번째는 정욕을 피하는 용도에요. 세 번째는 성례전적인 결합이에요. 자, 첫 번째는 뭐지요? 자녀를 낳기 위해서 성을 이용하는 것이죠. 그것이 아니면 안 되니까.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정욕을 피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소극적인 필요지요.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에게 정욕이 일어나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그 정욕을 피하는 길이 자기가 열심히 기도하고 정결해지면 가능해지겠지만 굉장히 어려운 시험이 되겠지요. 결혼생활은 소극적으로 그런 것을 덜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마지막에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성례전적인 결합이에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부부가 마음이 갈리고 나뉘어졌을 때에 성적인 결합을 통해서 그 다음에 자신들이 부부임을 확인하고 정신적인 결합을 이루는 것이에요. 이것이 성례전적인 결합이에요. 이 세 가지용도 이외에 성을 사용하는 것은 악이라고 보는 것이죠.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런 얘기를 해요. ‘부부라 할지라도 이 세 가지 용도가 아닌 성 자체의 즐거움에 탐닉하는 것이면 나는 아내와 남편이 결혼했다고 말하지 않고 간부와 간부가 결합하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 얘기에요. 그러니까 막 성 자체를 억제하고 죄악시하라는 뜻이 아니라 부부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남용함으로써 마치 부부의 관계를 자기 속에서 끓어오르는 정욕을 한없이 북돋아서 하수도에 쏟아버리는 것처럼 쏟아버리는 것이 그것이 부부의 관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이해가 되세요? 제 가르침이 여러분들이 기존에 알고 있었던 가르침과 좀 다르지 않아요? 별로 반응이 없네요. 오늘날은 그런 식으로 안 가르치지요. 왜냐하면 성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선물이니까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마음껏 누리라고 가르치지요.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이 세 가지 용도로 성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에요. 되게 감동적인 것인데 별로 그렇게 감동을 안 받는 눈빛이네요.
그 다음에 87번p로 가서 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 ‘이 계명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랑해야하기 때문에 다른 이에게 속한 것을 가로채서는 안 되며 권력으로 강탈하지도 말아야한다. 거래와 계약을 하면서 물건에 가격을 모르는 사람에게 더 비싼 가격을 받는다든지 정당한 가격보다 싸게 하기 위해서 경험 없는 사람들을 후려치는 것이라든지 거짓말이나 교활함으로 선한 사람들의 것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옳지 않은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이 아무 의식 없이하는 도둑질이 무엇이죠. 인터넷에서 금지되어 있는 남의 저작권을 함부로 다운로드 받는 것이죠. 그리고 그 다음에 남의 책을 무단으로 복사해서 상업에 활용하는 것이에요.
한국이 얼마나 웃기는 나라인지 미국에서 저작권문제를 전 세계에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나라가 우리가 거래하는 나라 가운데 미국이 유일할 것이에요. 왜냐하면 미국이 최대의 피해국이에요. 어느 정도냐 하면 미국에서 나오는 의학이나 공학계통의 책들은 굉장히 비쌉니다. 의학책은 우리나라에서 나도 인체생리학이라는 책 한권을 가지고 있는데 한권에 이십만 원입니다. 한글로 된 책인데 한글로 된 책은 그렇게 비싼 책이 없잖아요. 외국어로 된 책은 제 방에도 한권에 육십만 원 하는 책이 여러 권이 있는데 한글로 된 것은 한권에 이십만 원씩 하는 책은 없어요. 그런데 의학계통의 책은 한글인데도 그래요. 그런데 얼마나 재미있느냐하면 그것을 외국에서 갖다가 여기서 복사판을 찍어서 한국 사람한테 팔면 그러면 누가 미국에서 그 책을 수입하겠어요? 그렇잖아요? 여기서 복사판을 찍어서 팔면 종이 값밖에 안 드니까 한권에 오만 원씩 파는데 저쪽 수입해서는 십오만 원을 줘야하는데 수입을 하겠어요? 안하지……. 그런데 그 정도가 아니라 한창때에는 여기서 불법복사판을 찍어가지고 비닐을 포장해서 미국으로 수출을 해요. 그러니까 미국에서 수입을 해서 출판사에서 십만 원씩 나오는 책은 거들떠도 안보고 삼만 원에 수입해서 팔만원에 파는 것이에요. 그것을 거기에 있는 저자들이 돋보기안경을 쓰고 머리가 희도록 고생해서 일평생 책을 써서 자기 책이 그런 식으로 복사되어 나간다고 할 때는 여러분들은 책을 써보지 않아서 그 심정을 모를 거예요.
어떤 사람이 내 책을 그렇게 찍어내서 한 십 년 전에 발칵 뒤집힌 적이 있는데 내가 혼내려고 하다가 용서해주었어요. 잘못했다고 해서 용서해주었는데 그것은 말도 안 되지요. 그럴 수가 있어요. 나쁜 사람들이에요. 그 다음에 또 뭐지요? 논문을 쓸 때에요. 언젠가 한번은 잡지가 나왔어요.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보던 글이 들어있어요. 그래서 내가 잡지를 펼쳐서 누가 썼는지를 가린 다음에 우리 연구실 직원들보고 읽어보라고 그랬어요. 한 페이지를 쭉 읽히고 ‘누가 썼느냐?’ 그랬더니 ‘목사님 글이잖아요.’ 부흥에 대한 글이었는데……. ‘이거 목사님 글인데…….’ ‘봐라 누구 이름으로 되어있는지…….’ 다른 사람이름으로 되어 있어요. 그런 것들이 전부 다 8계명에 위반되는 것이에요. 누가 또 그런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 이런 것도 8계명에 위반될까요?’ ‘무엇이?’ ‘교회에 왔는데 어떤 사람이 옷을 새로 사 입었는데 너무 예뻐요. 그래서 그 다음 주일날 저도 똑같은 옷을 사 입고 왔거든요.’ 괜찮아요. 그것은 8계명을 위반한 것이 아니에요. 그냥 따라했을 뿐이에요. 괜찮아요.
그러나 법적으로 보장되어있는 마크 같은 것을 도용해서 이익을 남기는 것은 전부다 도둑질이죠. 사람들의 착각을 이용해서 하는 것도 도둑질이지요. 지금은 우리가 Made in U. S. A를 쳐다보지도 않잖아요. 옷을 살 때 ‘이거 우리나라에서 만든 거예요?’ ‘이거 우리나라 것이래.’ 그러면서 사잖아요. 옛날에는 U. S. A를 찾잖아요. 옛날에는 램프를 썼잖아요. 호야 알잖아요. 전기가 안 들어오는 동네에서 살았기 때문에 중학교 1학년 때인가 시장에 갔는데 램프가 잘 깨져요. ‘튼튼한 것 없어요?’ 그랬더니 ‘여기 튼튼한 것 있어요. 미제입니다.’ 그래요. 보니까 진짜 U. S. A에요.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왔는데 진짜 괜찮아요. 그런데 이제 그을음이 끼니까 씻다가 손을 베었어요. 미제는 이렇게 안만들 텐데 그러면서 보니까 끝에를 잘 갈아서 처리해야지만 손이 안 베는데 어린 나이에도 아무리 봐도 미국사람 솜씨가 아니에요. 그리고 자세히 보니까 Made in O. S. A 에요. 오성산업주식회사래요. 대단하지요? 이런 것들은 다 도둑질이에요. 그리고 짝퉁 그렇죠? 그런 것은 나쁜 것이에요. 그런 것을 이용하는 것은 생산을 촉진하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잘하는 것이 아니에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에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줄까요? 센스가 있어야지 웃을 수 있어요. 이 예화를 듣고 뱃살을 잡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상당히 센스 있는 사람이에요. 대부분이 아마 멀뚱멀뚱 할 거예요. 긴장하세요. IQ test에요. 여자가 과년해서 시집을 갈 때가 되었는데 (그런데 내가 왜 성화반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지요?) 사람들을 만나는데 신통한 사람이 없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 여자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짝퉁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만났는데 구두를 신고 나왔는데 아디도스, 나이스, 이런 것을 신고 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집어치우고 며칠 지났는데 좋은 혼처가 있다고 해서 나갔어요. 그런데 전혀 그런 것을 안 입고 나온 것이에요. 아디도스, 나이서, 프로스피스 아니고 버버리도 명품처럼 보이는 것을 입고 나왔어요. 그래서 재미있게 데이트를 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빨간 목도리를 잘 걸치고 온 것이에요. 그래서 나이스도 안 입고 오고 사람이 명품은 아니어도 사람이 참 괜찮아 보여서 호감이 갔는데 바람이 훅 불었어요. 이 목도리가 획 날아간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여자가 센스 있게 막 뛰어가서 목도리를 잘 털어서 남자 목에 걸어주면 좀 가까이 가볼 수도 있잖아요. 그 정도로 호감이 갔어요. 그래서 목도리를 틀어서 먼지를 털었는데 거기에 메이커가 딱 나와요. ‘영칭피아노’ 두 번 꼬였지요? 웃는 것을 보니까 여러분들은 대단해요.
자, 그 다음에 9계명이에요. 거짓증거하지 말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랑해야함이 마땅함으로 거짓된 비난으로 사람을 억압 말고 다른 사람들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아야한다.’ 우리들이 남의 돈을 훔친 것에 대해서는 죄의식을 느끼는데 명예를 훔친 것에 대해서는 추호도 죄의식을 안 느껴요.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에요. 그래서 오히려 지금과 같은 시대에는 돈이 없어서 죽는 사람도 있지만 돈이 있어도 명예를 잃어버린 수치심 때문에 죽는 사람들이 더 많잖아요. 지난번에 장자연씨 같은 경우도 그런 경우가 아니겠어요? 돈이 없어서 죽었겠어요? 그래도 배우인데……. 수치스럽고 괴로우니까 죽은 것이죠.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 돼요. 다른 사람들의 명예를 아름답게 잘 보존해주는 것도 이웃에 대한 사랑의 아주 고귀한 표현이에요.
다음 10계명은 여기서는 탐욕을 금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탐욕 그자체가 결국은 하나님 앞에 다른 신을 있게 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90p로 넘어가면 ‘의지 자체와 욕망 그리고 소유하려는 생각이 금지된 것에 행위로 옮기는 일이 허용될 수 없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니까 그런 마음을 품지 말라고 주님이 단언하셨다면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더 많이 금지하셨겠지요? 당연하지요. 그래서 이것이 이 세상의 법과 하나님의 법의 차이점이에요. 이 세상의 법은 인간 내면의 세계에 무엇이 있든지 신경 쓰지 않아요.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지 않는 한 자유에요.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양심의 자유라고 하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내면의 세계부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죠. 밖으로 실행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의도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명백한 죄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세상은 법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인간의 죄나 악을 소멸할 수 없어요. 미국이 굉장히 법을 잘 지키고 질서가 있는 나라지요. 지난번에 까뜨리나 태풍이 일어났을 때 완전히 무법천지가 되었잖아요. 상점은 다 털리고……. 그렇잖아요. 그것이 결국 인간의 본 모습이에요. 여러분들은 기억이 나지 않겠지만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잖아요. 구조대들이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서 들어갔을 때에는 건물이 다 무너져서 깔렸는데도 돈 통은 다 비었더래요. 참 놀랍지요. 사람이 거기에 들어갈 수도 없는 상황인데도 돈 통은 다 꺼내간 것이에요. 얼마나 어마어마해요? 그래서 결국은 탐욕이 인간을 그렇게 악하게 만들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못하게 하시는 것이죠.
92p로 넘어가면 이제 91p의 두 번째 단락부터 93p의 4번 바로 위에까지는 전체적으로 이 10계명을 사용함으로써 사회와 나라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되어야하는지를 서술하고 있어요. 조금만 읽어보도록 하지요. ‘이런 이유로 백성들은 자신들의 왕, 군주, 통치자들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복종하고 거절하지 말아야한다. 다스리는 자들은 평민들을 지속적으로 돌보고 선한 것을 보호하고 정의를 행해야한다. 교회의 사역자들은 신실하게 말씀사역에 몰두하여야한다. 부모는 자녀들을 올바로 양육하고 가르치고 다스려야한다. 젊은이들은 나이든 세대들을 공경하여야한다. 종들은 주인에게 순종하는 모습이 되어야한다. 각자는 자신의 지위와 자리에서 자신이 이웃에게 빚진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 빚을 갚도록 노력하여야한다. 이것이 결국은 십계명을 준수하는 삶을 통해서 이것을 확장하여 이 모든 이웃들이 내가 그 모든 계명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지킴으로써 유익을 얻도록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삶의 규범이다.’ 이것을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에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질문? 없어요?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붙들어주시고 오늘도 함께해주셔서 우리들이 주님의 모든 계명으로 우리의 삶의 규범을 삼고 그 뜻대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2009. 11. 28 하반기 성화반
성화반 Ⅳ
오늘 93p 4번부터 121p까지 나가게 되어있는데 자 93p를 보겠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율법 전체의 완성이라는 것이에요.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이죠.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율법중 제일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예수님이 ‘첫째는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그랬거든요. 강령이 희랍어로 ‘크레마티’라는 단어인데 못이에요. 벽에 박힌 못이에요. 그래서 여기에다 옷을 걸잖아요. 그러면 바로 그 사랑이라는 계명에 율법과 선지자들의 많은 계명들이 거기에 걸려있어야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지 거기서 땅에 떨어지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이야기에요. 그 핵심을 보여주신 것이죠. 그것을 하는데 이 계명이 잘 입증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십계명 돌판이에요. 돌판이 두 개로 되어있는데 그 첫 번째 하나님께 대한 대신적 계명이 첫 번째 돌판에 들어있고 대인적 계명이 두 번째 돌판에 들어있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 두 가지의 계명이 전부 하나의 원통형구조로 되어있고 그 계명이 하나하나가 전부 다 사랑이라는 뿌리에 박혀있다는 것이에요. 이것을 그림을 그린다면 이런 식이 되는 것이죠. 계명이 1계명, 2계명, 3계명, 4계명……. 이런 식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1계명, 2계명, 3계명, 4계명 이렇게 해서 결국은 여기에 십계명이 되어서 십계명이 이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란 말이죠. 그리고 이제 그렇게 하고 그 다음에 이렇게 무슨 계명이든지 여기 가운데 하나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는데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1계명이 내 앞에 다른 신을 있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마지막에 10계명이 탐내지 말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라 그러면서 다시 1계명으로 넘어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 전체가 말하자면 이렇게 휘도는 그런 계명이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여기에 사랑이 들어가는 것이에요.
사실 이 문제를 상세히 다룬 적이 있거든요. 그것이 어디냐하면 제가 알려드릴 테니까 적어놨다가 시간이 나는 대로 도서관에서 빌려서 들으시면 되요. 그게 뭐냐 하면 아가서 설교가 있어요. ‘잠근 동산, 봉한 우물’ 인가? 시리즈가 5개정도로 되어있어요. 거기에 들어가 보시면 되고요. 책은 어디에 잘나와 있느냐하면 대상이 둘이지만 사실은 대상이 하나의 뿌리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하라.’ 라는 책이 있지요? 도서관에 다 있어요. 몇 달 전에 조그맣게 나왔는데 그 책속에 들어가 보면 그게 어떻게 둘이 하나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이제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거기에는 별문제가 없지요. 그렇지요?
94p를 가서 밑에서 세 번째 줄을 보면 이렇게 됩니다. 뭐냐 하면 ‘자기애의 경향을 가진 채로 보내졌음으로 자신들의 뜻대로 이 사랑을 더욱 과도하게 태울 필요가 율법에도 없었다.’ 성경에 보면 자기를 사랑하라는 이야기가 안 나와요. 그렇지요? 그런데 이제 요즘 책에 보면 ‘자기 사랑의 비결’, ‘자기를 사랑하라’, ‘자존감’, 이런 등등의 것들이 나오지요. 그런 책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닌데 사실 대부분은 성경이 말하는 가르침으로부터 대부분 멀어진 책들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야 해요. 성경의 입장에서 보면 주님은 우리에게 자기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실 필요가 없어요.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우리 자신은 사랑의 궁극적인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에요. 칼빈은 오히려 모든 불행이 자기사랑에 있다고 보는 것이에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따르는 것이죠. 그러면 결국은 여러분 인간이 있으면 하나님을 사랑하잖아요?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사랑한다는 것이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까지 사랑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사랑이에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좋으면 그 사람의 냄새도 좋고 그 다음에 얼굴도 좋고 모든 게 다 좋은 것이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니까 그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당연하잖아요. 성경이 하나님이 하나님이에요? 왜 대답을 못해요? 아니죠.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도 사실은 하나님은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내가 강의한 내용이 글로 나왔다고 하더라고 그것을 집에 펼쳐놓아서 김 남준 목사가 여기에 있다고 말하지 않잖아요. 정신이 약간 돈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파악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 아닌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죠. 그러면 결국은 그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이유는 하나님 자신을 그 속에서 보여주셨고 그것들 속에 하나님을 알게 하는 질서가 담겨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당연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그러면 하나님의 그런 질서를 사랑하게 되고 결국은 궁극적으로 그 질서는 하나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란 말이죠. 고린도 13장 강해를 하면서 사랑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했잖아요? 그게 결국 뭐냐 하면 사랑이 결국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이 와서 우리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를 입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데 그렇게 휘돌아서 하나님 자신에게로 회귀하는 그 사랑 안에 교회도 있고, 우리의 이웃도 있고, 모든 것이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와서 휘돌아가기 때문에 어디에서도 그것이 멈춰서는 안 돼요. 별로 가슴에 안다가오는 것 같아요. 자, 어찌하여야할꼬…….
자, 하나님이 계신데 이 하나님이 계신데 여기 하나님이 계신데 이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이렇게 펼치시는데 온 우주를 다 휘감아서 당신 자신께로 돌아가는 것이에요. 그렇다고 여기가 하나님 밖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지요.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시니까.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휘돌아오는데 이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 나에게까지 있는 것이에요. 나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렇게 사랑하심은 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심이고 또 만물들을 사랑하게 하심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또 사랑하게 되요. 이렇게 사랑하면서 결국 하나님 자신에게로 회귀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자기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필요가 없지요. 왜냐하면 자기를 사랑하라고 그러는데 하나님 밖에서 사랑하면 불행해지는 것이고 그게 바로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는 것이고 만약에 그렇게 자기를 향한 사랑이 하나님 안에서의 사랑이라면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그 안에서 자기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사랑 자체가 이렇게 자기에게서 멈추는 사랑이 아니라 회귀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자기를 포함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하든지 저렇게 하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미 올바르게 자기를 그 사랑의 질서 안에서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굳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필요가 없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면 그게 자기를 향한 가장 훌륭한 사랑이라는 것이에요. 그렇게 모든 인간의 불행은 자기를 이 사랑의 끝이라고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에요.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테이프를 들은 다음에 그 정도로 여러분들이 열정이 있을지 모르지만 어떤 하나의 의문이 생기면 끝까지 파고들어가서 그것을 해결 봐야 해요. 그때에 신앙의 다른 부분들도 쭉 성장을 하게 되요. 그래서 그때 이런 것들을 이해하고 들은 다음에 고린도전서 13장을 들어가서 차례대로 들으면 이 사랑이 어떻게 개인적인 사랑이 아니라 우주적이고 교회적인 사랑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그 다음을 보겠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과 부패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 사랑의 경향성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에요. 운명적으로 이 자기사랑의 경향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이것이 결국은 파쇄 되어서 하나님을 향한 우주적인 사랑으로 자기를 합일시키게 되는 놀라운 변화가 바로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도입되는 변화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중생은 크게 두 가지의 변화를 인간에게 도입하는데 하나는 존재론적인 변화이고 또 하나는 인식론적인 변화라고 그랬지요? 존재론적인 변화는 무엇이냐 하면 성향의 변화에요. 자기사랑의 성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향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에요. 인식론적인 변화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 눈이 멀었던 사람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말하자면 미감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다음에 95p로 넘어갑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하는 것이 계명들을 준수하는 것임이 극히 명백하므로 자신을 위해서는 될 수 있는 한 적게 살고 적게 열심을 내는 사람이 거룩하게 최선을 다하여 사는 것이다. 그러나 은연중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법에 의해 명령되거나 금지되는 것은 외부적인 행위들이 아니라 생각들 자체이며 마음속 깊은 곳의 정서 혹은 정동이므로 단지 손을 대서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율법을 완전히 지킨 것으로 헤아리지는 말아야한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가게 되요. 그래서 모세는 인간의 외면에 대한 강조를 통해서 내면을 지향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내면의 대한 강조를 통해서 인간의 외면을 지향했다고 대조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율법과 복음은 사실은 두 개가 하나지만 그러나 율법은 외면을 통해서 우리의 내면을 인식하게 만들어주고 복음은 우리의 내면을 통해서 외면으로 나오도록 만들어주는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신약과 구약의 계시의 방식의 차이라는 것이에요.
자, 그 다음에 96p로 넘어가게 되면 97p까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96p 맨 위의 4번째 보면 ‘그러나 영혼을 다하여 살인의 숨을 내쉬고…….’ 이것이 무엇이죠? 미움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 ‘정욕에 불타고 눈을 비껴 뜨고 모든 사람들의 선한 것들을 엿보고 욕심으로 삼킨다.’ 이것은 뭐에요? 실제적으로는 도덕적인 삶을 살지만 마음 안에는 악이 가득한데 이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 전혀 도덕적인 것이나 혹은 율법을 지키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에요.
97p로 넘어가면 칭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여기에서 나오는 칭의의 교리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미 칼빈 당시에도 칭의 교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 칭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전가된 의의 개념이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 구원받을 수 있을 만큼 의로워질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그 일을 대신해주셨다.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정죄당하고 죽으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지은 죄에 대해서 대가를 치르심으로 하나님 앞에 의를 이루신 것이에요. 그것이 우리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인데 하나님은 우리가 이제 철저히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고 도저히 우리를 하나님 앞에 용납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분께 완전히 복종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믿을 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준다. 그렇게 전가되어서 사실은 의롭지 않은데 의로운 사람이라고 불러주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칭의라고 말하는 것이에요. 혹은 득의라고 말해요. 혹은 의인이라고 해요. 칭의는 의롭다고 칭하다. 득의는 의를 얻다. 의인은 의롭다고 인정한다. 다 같은 뜻이에요. 그렇게 구원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실 때에 왜 그런 식으로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을까? 그렇게 가르쳐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절대로 우리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주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의존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에요. 그럼 왜 그렇게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갈 수 있는 아무것도 자신에게는 없다고 해서 예수님만을 의지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어요? 그것은 바로 완전한 의존의 마음이 완전한 순종의 마음과 일치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독립하려는 마음이 결국은 자기 사랑하고 통하고 그리고 독립하려는 마음 그 자체가 결국은 교만이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것이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식으로 설명해요. 왜 모든 죄의 근본이 교만이냐? 죄를 짓는다는 것은 하나님하고 견해가 다른 것이에요. 하나님은 이것은 하지 말라고 하는데 이것을 하는 것이에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의 생각보다는 내 생각이 옳다는 판단이 먼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것은 시작이 교만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에요. ‘하나님 말씀이 맞습니다.’ 라고 무릎을 꿇게 되면 그럴 수 없지요. 그래서 모든 죄의 뿌리가 교만, 자기사랑이고 모든 범죄의 뿌리라고 보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너는 철저하게 희망이 없는 인간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거울이 있는데 뭐냐 하면 율법이에요. 그래서 율법을 모르면 사람이 용감해지는 것이죠. 어떤 일이 있었느냐하면 저희 집안에서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고모님과 함께 살았어요. 이분이 한때 아주 열심히 교회를 다니셨어요. 그때는 새벽기도가 굉장히 빨랐어요. 4시 반에 새벽기도를 했는데 새벽에 교회를 갔는데 맨 앞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박수를 치면서 찬송을 하고 열렬히 기도를 하다가 집에 왔는데 먼동이 훤히 트잖아요. 그리고 집에 들어와서 거울을 보니까 원피스를 뒤집어 입은 것이에요. 그런데 그 원피스가 보통 원피스가 아니라 옛날에 안감이 있는 원피스 있잖아요. 그것을 새벽에 일어나서 엉겁결에 뒤집어 입고 보무도 당당하게 맨 앞자리에 은혜를 받는다고 앉아서 실밥이 나온 그 원피스를 보고 사람들이 얼마나 웃었겠어요. 나중에 만났는데 ‘아니 아무개 집사는 왜 옷을 뒤집어 입고서 새벽에 열심히 찬송을 한 대?’ 거울을 안보면 자기가 잘못되었는지 모르는 것이에요. 담대하게 그 옷을 입고 어디는 못가겠어요. 뭐든지 하지요. 그렇게 담대해지는 것이에요. 그런데 만약에 거울을 봤더라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 못하지요. 그 거울의 역할이 바로 율법의 역할이에요. 이 율법의 거울을 하나님이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모두에게 주신 것이에요.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양심이라는 거울을 주시고 이미 믿은 사람들에게는 성경의 기록된 율법을 거울로 주시는 것이죠. 그래서 율법을 거울로 비춰보면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인간이지 하나님 앞에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과 그리고 죽음에 이르도록 정죄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또렷이 알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율법은 거기까지만 해주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는 희망이 없는 인간이고 아무 쓸모없다. 그리고 나의 여태까지 행한 모든 죄와 잘못으로 볼 때 나는 사형에 처해져야 마땅한 존재일 뿐이다. 나에게는 영원한 지옥의 형벌밖에는 없다고 깨닫게 될 때 인간은 절망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 절망할 때 거기에서 끝나면 그것은 멸망으로 통하는 것이에요. 가룟 유다가 그런 경우였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그 절망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데 그게 뭐냐 하면 복음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으로 초청하시는 것이에요. 그러면 왜 그렇게 율법을 통해서 우리를 철저히 우리를 정죄하신 후에 복음으로 우리를 부르시는가? 그래야지만 그 복음 이외에, 그리스도 이외에는 천하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없다고 믿을 것이고 그렇게 믿어야지만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성도의 삶 가운데 최고의 아름다운 삶이 뭐냐 하면
(찬양)
주님 없는 세상 평화 없네. 오 주 없이 살 수 없네.
리처드 십스 라는 청교도는 자기의 책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해요. 우리가 기도하거나 말씀을 들을 때에 혹은 혼자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할 때에 우리가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 품으로 막 파고드는 것 같은 마음의 녹아내리는 것 같은……. 아까 우리 집사님도 이렇게 간증하시면서 상태가 좋았을 때는 기도하면 눈물도 많이 나오고 그랬다고 했잖아요? 우리가 그런 은혜아래 있을 때에 그렇게 나타나는 우리의 마음에 녹아내리는 마음, 이런 마음의 이런 변화들을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라고 보는 것이에요.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렇게 될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 마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이에요. 그게 바리새인과 세리들은 아주 도덕적이었지만 이런 마음을 한 번도 경험을 못해본 사람들이에요. 그러나 이제 세리와 창기들 중 구원받은 많은 사람들은 도덕적으로는 그들만큼 올바르지 못했지만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녹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에요. 그게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그것이에요.
그래서 101p에 보면 맨 위에 ‘따라서 단지 율법만을 고려하면 우리 영혼은 낙담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는 단죄되었으며 저주받았다. 율법은 모든 사람을 마지막 한사람까지 정죄하고 비난하며 단죄되게 하는 일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께서만 의로우신 분으로 여겨지시며 모든 육체는 그분의 얼굴 앞에서 잠잠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누구든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그렇게 주님이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이에요. 그 내용들이 거기에서 쭉 다루고 있는 내용들이에요.
그래서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느냐하면 103p로 가면 이렇게 되는 것이죠. ‘누구든지 자신을 가운데서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배반하여 자랑하는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께 속했고 바울이 그랬듯이 사람들은 자랑거리들을 절대적으로 박탈당했다. 그토록 대단한 불명예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정죄 받은 사람들이 감히 행할 일이 남아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104p로 넘어가면 ‘실로 자신에게 남은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겸손하다고 부르지 않는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뭐가 남아있다는 뜻이냐 하면 내가 노력하면 내 힘으로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에요. 하나님 앞에 내가 내 힘으로 노력하면 하나님께 용납될만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는 근거가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들은 모두 전적인 그리스도의 공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원의 조건으로 보지 않는 태도라는 것이죠. 그것은 교만이라는 이야기에요.
이것을 어떤 식으로 칼빈이 문제를 풀어 가느냐 하면 이렇게 하는 것이죠. 이런 예를 들면 참 좋겠네요. 방금 좋은 예가 생각났어요. 저는 깨끗한 것을 참 좋아해요. 여러분 중에서는 그렇게 말하면 목사님 우리는 더러운 것을 좋아합니까? 그러는데 저는 음식점에 들어가도 깨끗하기만 하면 맛이 없어도 용서합니다. 그런데 불결한 것은 정말 싫어요. 깨끗한 것을 원해요. 누구다 다 마찬가지죠. 그런데 누구나 다 깨끗한 것을 좋아하지만 치우기를 좋아하지는 않잖아요? 그렇지요? 언젠가 교회의 가정주부들을 만났어요. 그래서 같이 밥을 먹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래 요새 가끔 외식들을 하나?’ 그랬더니 ‘네. 아니요.’ 서로들 그래요. ‘어떤 것이 제일 맛있어요?’ 그랬더니 그중의 한 자매가 대답을 해요. ‘목사님, 저희는요 우리가 하지 않은 밥은 다 맛있어요.’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해가 가요. 대답이 명답이다. 우리가 하지 않은 밥은 다 맛있어요. 그런데 나는 내가 한 것이 제일 맛있던데……. 그런데 깨끗한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청소도 좋아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사랑이 좋아요? 미움이 좋아요? 왜 대답을 못해요. 다 같이 대답해요. 무엇이 좋아요? 그런데 미워하는 것이 쉬워요? 사랑하는 것이 쉬워요? 그러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겠지요. ‘목사님, 사랑하는 게 훨씬 쉽지요. (단,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그것은 자기 이익과 관계있는 것이죠. 그런 것은 저의 판단으로는 사실 저의 판단이라기보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에 의하면 그것은 자기만족적 사랑이에요. 그 사람이 좋아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얻을 이익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죠. 그러니까 사랑은 항상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고 미워하는 것은 그냥 오물을 배설하듯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에요. 물론 그것도 변비에 걸리면 자연스럽게 안 나오지만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에요. 노력해서 재채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냥 자연현상으로 그렇게 나오잖아요. 그렇게 되는 것이죠.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지요? 아! 그런데 깨끗한 것을 좋아해요. 그래서 저는 청소하는 것을 좋아해요.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처형간사하고 둘이 청소를 했는데 나는 걸레질을 하고 저는 청소기 돌리고 저는 청소하는 것을 좋아해요. 그런데 우리들은 그냥 이렇게 닦아서 먼지 없으면 깨끗하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렇지요? 병원에 가면 무균실이라고 있어요. 거기는 면역력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방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의료보험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한 15년 전에는 그 방이 하루에 삼십 만원이었어요. 거기는 간호사도 들어올 때 멸균하고 그 다음에 우주복 같은 것을 입고 들어와서 주사를 놓고 그러는 방이에요. 그러면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하면 우리가 보기에는 좋고 아름다운 행동들이 많이 있지요. 왜 아주 더러운 인간들만 모여 사니까 그게 예뻐 보이고 아름다워 보일 수 있지만 완전히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 깨끗해 보이는 것도 그분이 보기에는 아주 불결하고 더러울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어떤 가장 선한 일을 행하고 심지어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그런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피의 중보를 통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하게 되는 것이지 직통으로 하나님께 올려져서 받아들여질 만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아주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위해 봉사해도 그것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세탁되어져서 그 공로 때문에 불결하고 모자라는 것이 깨끗하게 정화된 가운데서 덕을 입어서 하나님 아버지께 이르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아주 충성스럽고 자기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순교 속에서 자기 자신을 드렸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그렇게 하게하신 이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 하신 것이고 또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결함이 많은데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올리어지는 것이니까 우리가 아무리 자신을 희생하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도 그리스도께 대한 전적인 우리의 의존의 필요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우리가 씩씩하게 사는 것이에요. 하나님 없이 자신만만하게 사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 세상은 우리에게 그렇게 살라고 말하잖아요. ‘너를 믿어. 네가 생각하는 대로 되는 거야.’ 그게 포스트모더니즘의 아주 기가 막히게 핵심을 찌르는 카피에요. 그러니까 그런 카피가 뜨는 것이에요. ‘생각대로 T’ 그래야 뜨지 ‘말씀대로 T’ 그러면 안 뜨잖아요. 그런 것이에요.
그래서 여기에서 지금 나오는 게 105p를 보세요. ‘그러므로 순수하고 완전하며 어떤 흠으로도 더럽혀지지 않는 것 외에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진실이 그러하므로 우리의 모든 것은 만약 그 가치를 헤아린다면 단지 오염과 찌꺼기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의 의는 불의이며 우리의 온전함은 오염이며 우리의 자랑은 불명예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내놓을 최상의 것이라도 우리의 불순함으로 썩었으며 마치 찌끼가 섞인 무엇과 같은 것을 가지지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은 수 없게 되는 그것이다. 그 다음에 자, 그렇게 해서 28번, 29번 계속해서 다 같이 넘어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30번까지 다 같은 내용으로 계속 이어지는 것이에요. 계속 같은 이야기들을 반복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제 결론을 도출하는데 115p그래서 32번으로 가면 결론이 거기에 나와요. 그게 뭐냐 하면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실로 우리의 어떤 가치나 우리로부터 나온 어떤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한다. 따라서 우리의 행위들을 바라보거나 그것들에게 어떤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줄치세요. ‘우리의 전 소망을 하나님의 자비에 두고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소망을 그것이 깊이 부착시키는 것이 합당하다. 과연 믿음의 본성을 귀를 곧추세우고 눈을 감는 것, 즉 약속에 주의를 집중하고 인간의 모든 가치나 공로로부터 딴 데로 생각을 돌리는 것이다.’ 줄치세요. ‘우리에 대해 심각하게 회의를 품지 않고는 절대 하나님을 충분히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회의를 품지 않는다는 것은 뭐냐 하면 불신하다는 것이에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이며 또 우리가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을 심각하게 품지 않는다면 절대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것’ 이라는 이야기에요. ‘우리 안에서 절망하지 않고는 절대 그분 자신 안에서 우리가 충분히 위로를 받게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자랑을 내버리지 않는다면 절대 그분 자신을 충분히 자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실로 우리에 대한 신뢰는 전적으로 버리고 반면에 그분의 인자하심에 확실히 기댐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소유하게 된다.’ 거기 줄치세요.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것과 같이 우리의 공로는 잊고 그리스도의 은사들을 품는다는 것 자체가 참 믿음을 온전하게 갖는 것이다.’ 모든 것을 주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그렇게 봐야한다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문제는 그럼 그런 확신이 그렇게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그분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길밖에 없다고 하는 이 절대적인 믿음 이것은 무엇을 통해서 오느냐?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오게 된다는 것이에요.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그 십자가 안에서 발견하게 되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공부를 할 때에 의지를 가져야해요. 의지. 그게 뭐냐 하면 그냥 되면 하고 안 되면 말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의지를 가지고 내가 집중적으로 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되겠다는 의지를 가져야해요.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잖아요. 왜냐하면 이 설교는 수많은 책들을 다 녹여내서 쉽게 설명한 것이잖아요. 그런데 원천을 찾아가려면 여러분들은 더 많이 해야 하잖아요. 그렇지요? 그리고 그것도 읽는 것은 쉬운데 정리하는 것은 더 힘들잖아요. 그런데 정리해서 주었으니 얼마나 좋아요. 거기서 어디를 찾아가느냐하면 그 부분을 ‘경건의 비밀 그리스도’를 찾아가세요. 거기를 찾아가면 그 경건이 어떻게 해서 시작되는가 하는 것을 2번 테이프에서 다룬 것 같아요. 1번이나 2번 테이프에서 다루어요. 그리고 설교정리본도 있잖아요. 그렇지요? 공부도 했잖아요? 그렇지요? 거기에 가서 찾아가서 한번 보세요. 그러면 거기에 그 부분이 상세히 나와요. 그런데 거기서 어떻게 해서 그 십자가를 통해서 이 율법과 복음을 한꺼번에 보게 되는지를 거기에 나온단 말이에요.
누가 해볼까요? 자매가 한번 대답해보세요. 청년 2부 김 주희? 안 왔어요? 큰일 났네. 한 윤정? 안 왔어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이 주영? 안 왔어요? 김 희영? 청년1부 김 희영? 안 왔어요? 여기에는 왔다고 되어있는데……. 김 희영? 출석 안 불렀어요? 박 동숙? 지금 얘기한 것 숙제니까 잘해 와서 다음시간에 발표하세요. 전도사님 적어놓으세요. 그렇게 해서 찾아서 이쪽으로 이동해서 같이 공부하면 한꺼번에 전체적인 입체적인 이해가 생긴단 말이에요.
자, 그 다음에 ‘그리스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이 확신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그분의 은총으로만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이 저주는 우리 모두에게 정해졌으며 선포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담부터 유산으로 받았던 연약함 때문에 우리의 행위로는 율법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줄치세요. ‘그런데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 우리 자신은 의롭게 되고 율법의 성취자들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의로 덧입으며 실로 하나님은 이것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말씀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고 순결하고 무죄하다고 여기시기 때문이다.’ 이게 뭐냐 하면 구원교리에 있어서 내포적 대신의 문제에요. 그래서 구원론을 설명하면서 어디에서 설명했느냐하면 십자가와 하나님의 계획 중의 하나로 책과 mp3로 같이 들은 것 있지요? 그것의 맨 마지막 9번째 달린 설교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어요. 그러니까 가서 읽어보세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정죄되실 때에 우리를 모두 끌어안고 우리를 모두 당신 자신 안에 끌어안고 우리를 내포하신 가운데 우리를 대신해서 저주를 받으심으로 그 저주가 그 형벌을 우리들이 담당한 것이 된다는 것이에요. 단 우리가 그분을 믿을 때에 그것이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분이 살아나실 때에도 역시 우리를 모두 내포적 대신으로서 살아나심으로써 그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과 우리의 구원과 관계를 갖게 된다는 것이에요. 그 문제를 거기서 상세하게 설명했어요. 거기서 그 문제를 보고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에서도 몇 과인지는 생각이 안 나는데 그 과에서도 그 문제를 다루고 있어요. 찾아가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정죄와 부활이 우리의 구원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구명해가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 넘어가면 115p로 넘어갑니다. ‘첫째로 자비로우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탕감해주시고 우리를 은혜롭게 받으신다.’ 두 번째가 어떻게? ‘성령의 은혜를 통해 우리 안에 거하시고 다스리신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계속 우리를 다루어 가시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주님의 능력가운데 걷는 동안에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기 위하여 불안전한 것을 남아있게 하셨다.’ 그게 뭐죠? 잔존하는 죄. 구원은 받았지만 아직은 완전하지 않은 우리 자신의 연약함 같은 것들을 남겨 두셔서 하나님 앞에 교만하지 않고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도록 그렇게 만들어주신 것이에요.
자, 117p로 넘어가게 되면 이제 여기에서는 율법의 삼중적 용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삼중적 용도는 세 가지로 나오는데 ‘첫째로 율법은 하나님의 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의를 나타내시는 동안 각자를 그 부리에 따라 권계하고 죄를 따라 판결하십니다. 이같이 함이 마땅한 것은 주님께서 그들의 덧없음을 논증하지 아니하시면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과다한 신뢰로 기고만장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118p 둘째로 넘어가면 ‘율법은 하나님을 복수 자가 되실 분으로 선포하는 한 범죄자들에 대한 형벌을 정해놓고 사망과 심판으로 위협해서 만약 강제로 자극을 받지 않게 된다면 의로운 것과 올바른 것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최소한 형벌의 공포에 의해 제지되도록 하는 작용을 한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율법의 세 가지 용도를 주시는데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용도로 율법을 주시느냐하면 우리에게 ‘시민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무슨 뜻이죠? 종교와 상관없이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안인정하는 것과 상관없이 사람들은 사람을 죽이거나 남의 물건을 빼앗는 것을 두려워하지요? 왜 그렇지요? 그것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양심이 그렇게 하면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나라가 실제로 그런 법을 가지고 집행을 하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죠. 그게 바로 율법의 한 용도에요. 그런 것들이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죄를 막도록 만들어주는 그런 어떤 정치적인 용도로 쓰이는 것이죠. 그것을 둘째로 이야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율법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뭐냐 하면 도저히 우리는 그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 그것을 깨달아서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주시는 방법이 있어요. 그것이 여기 117p 첫 번째에서 다루는 것이에요. 이것을 몽학적 용도, 또는 규범적 용도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에게 율법을 지켜도 도저히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결국은 우리를 의지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끔 만들어주는 것이 율법의 몽학적 용도인 첫 번째 용도에요. 두 번째 용도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시민적 용도 혹은 정치적 용도에요. 마지막 119p 세 번째 보세요. ‘마지막으로 마음에 이미 그리스도의 영이 살아서 역사하고 다스리는 성도들에게 율법은 하찮지 않은 용법을 제시한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고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큰데 그러면 이제 이 큰 사랑과 은혜를 받았는데 어떻게 살아야할까? 그것을 가르쳐주는 기능을 율법이 하게 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제 이런 경우에 율법을 지키는 것은 그것을 지켜서 구원을 얻고 내 힘으로 하나님께 도달하기 위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너무 큰데 내가 어떻게 살아야할까? 그 방향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게 해주시는 것이에요. 첫 번째 117p에 나오는 용도가 첫째가 몽학적 용도, 118p에 나오는 두 번째 용도가 시민적 용도, 혹은 정치적 용도, 그 다음에 119p에 나오는 것이 규범적 용도에요. 이 세 가지의 용도를 위해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이에요. 참고로 하자면 루터는 첫 번째 용도를 아주 중요하게 다루었고 칼빈은 첫 번째와 두 번째를 중요하게 다루면서도 세 번째를 아주 훨씬 더 중요하게 다루는 그런 비중의 차이를 우리에게 보여주었어요.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121p를 보면 ‘요약하면 율법은 성도들에게 하는 권고이다.’ 그렇지요? 그래서 ‘이것은 사람들의 양심을 저주로 묶는 것이 아니라 쉼 없이 탄원함으로’ 왜 쉼 없이 탄원하게 되요? 도저히 율법을 못 지키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런 것인데 나는 거기에 다 이르지 못하는구나! 결국은 구원받은 사람도 완전히 하나님을 만족하게 할 수는 없지요. 그러니까 결국은 무슨 필요를 느끼게 되요? 그렇죠.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구원받아서 하나님이 나를 새사람으로 만들어주셨는데도 그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끔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는 없고 현재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게 매일 매일 그런 은혜가 진리와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부어져야지만 그 율법의 요구대로 내가 살아 드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에 구원받은 이후에도 구원받았으니까 이제는 내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주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이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게 될 때에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람이 서로 사랑하면 그 사람 없이 살기가 굉장히 힘든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야만 그게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지요. 그 사람이 없어도 넉넉하게 살 수 있고 필요하지도 않다면 어떤 사람이 TV에 나와서 자기네들의 부부생활에 대해서 간증은 아니고 얘기를 하는데 남편은 일본에 살고 자기는 한국에 사는데 가끔 오면 그렇게 귀찮을 수가 없대요.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변하지 않고 있대요. 그게 말이 되요? 아휴 내가 잠깐 들여다보는데 짜증이 확 나더라고요.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그럴 수는 없는 것이죠.
121p를 보죠. 중간에 ‘이는 칭의가 선행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듯이 아무 선행도 행해져서는 안 된다거나 선한 행위가 존재한다거나 하는 것을 부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의지하지 못하도록 자랑하지 못하도록 구원을 행위에 돌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그러니까 인간이 아무런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선을 행하는 것이 자기의 구원의 근거가 된다는 생각을 못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해 놓으셨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구원받은 이후에도 자기가 그렇게 하면서 결국은 자기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그 일을 하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러한 교리는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사상에 있어서 아주 필수적인 교리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인간은 악한 일은 자기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고 선한일은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으로 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이 있으면 악한일밖에 못하는 인간도 선을 행할 수 있고 지금 아주 탁월한 삶을 사는 사람도 주님이 은혜를 거두시면 아주 나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지만 된다는 것이에요. 그것을 칼빈이 자기의 생애 속에서 ‘솔라그라티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혹은 ‘솔로스크리스토스’ (오직 그리스도로써만) 그것이 어떻게? ‘솔리데오글로리아’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게 되는) 그런 신학적인 구도로 데려갔던 것이죠.
그래서 오늘 배운 전체가 뭐냐 하면 율법도 복음도 우리를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으로 우리를 보여준다. 그래서 그분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때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이웃도 함께 사랑하게 되어서 하나님 안에서 한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공동체가 되어 가는데 이것이 바로 교회다. 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에요.
질문? 몇p이죠? 121p.
그러니까 ‘칭의가 선행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듯이’ 칭의와 선행은 관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칭의와 선행은 멀리 떨어져있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이 칭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이 선행은 뭐냐 하면 아무 선행이나 선행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기 위해서 자기가 이것을 행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선행이에요. 그러니까 이 두 개는 아직 멀리 떨어진 극단이잖아요. 하나는 은혜로만의 구원이고 하나는 자력구원이잖아요. 이렇게 떨어져있는 것처럼, 이 두 개가 떨어져있듯이 나는 구원받았지만 혹은 사람이지만 그러므로 아무 선행도 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에요. 왜? 우리 인간에게는 비록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도 어느 정도는 선을 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신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들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몰고 가면 안 돼요. ‘자, 너는 예수를 안 믿는 놈이지? 그러니까 무슨 선한 일을 하든지 그것은 의미가 없어.’ 그렇게 말하면 되요? 안 돼요? 안되지요. 물론 앞에 단서를 붙이면 되지요. ‘자, 네가 예수 안 믿는 사람으로 나보다 훨씬 도덕적인 삶을 살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네가 구원을 얻으려고 한다면 너의 선행은 의미가 없어.’ 그렇게 말해야지요. 그러면 그것은 정확한 표현이에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당신을 믿는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믿지 않는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심판하시지만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사람들을 당신의 도덕의 기준에 어느 정도로 부합하고 사느냐에 따라서 불신자들도 하나님이 각각 다르게 다루시는 것이죠.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우리가 볼 때에 공평하게 보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하나님이 보기에는 절대적인 공평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죠. 그 문제를 논증한 것이 바로 도덕적인 통치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와 상벌로 사람들을 다루신다고 그랬잖아요. 그렇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도 어떤 사람이 비록 하나님은 안 믿지만 그러나 어떤 의도에서 순수하게 행동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접한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복 받으면서 살 수 있게끔 하나님께서 돌봐주시는 것이죠. 그런데 만약에 악을 행하게 되면 하나님이 벌을 주시는 것이죠. 그것은 당연하지 않아요?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사람은 이것을 일차적 선, 이차적 선 이렇게 나누었던 것이죠. 일차적 선은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서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선, 이차적 선은 그렇지는 않은 것. 그러면 왜 그런 차이가 있느냐하면 일차적 선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선을 행하면 이것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실현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안 들었으면 천지창조의 목적시리즈 8개를 반드시 들어 야해요. 열린 교회에서는 꼭 들어야 됩니다. 오늘 벌써 몇 달치가 나왔지요? 열심히 공부해야지요. 그리고 이차적 선은 어느 정도까지는 거기에 도움을 주지만 그러나 끝까지 가면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는 그런 종류의 선이에요. 그게 이차적 아름다움이라는 것이죠. 이 문제를 어디서 상세히 다루었느냐하면 도덕적 통치 제 3장 천지창조의 목적에서 상세히 다루었어요. 그러니까 이 설명을 듣고 집에 가서 읽어보면 이해가 빨리 될 것이에요. 안 읽었죠? 꼼꼼하게 읽으면서 하고 필요하면 수요일에 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감’ 그게 바로 스물 몇 번에 걸쳐 설교한 도덕적 통치거든요. 그 부분을 들어가서 상세히 들어보세요. 그게 머리에 정리가 되어야 되요.
자, 다음질문?
무슨 뜻이냐 하면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법에 있어서 고려되어야할 것은 행위가 아니라 계명입니다. 따라서 만약 율법으로부터 의가 추구된다면 한 행동, 또 다른 행동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영원한 복종이 의를 이룰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예를 들어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게 계명이라고 쳐요. ‘아, 하나님 했습니다.’ ‘어떻게?’ ‘내가 오늘 십일조를 확실하게 했습니다.’ 아니면 ‘오늘 내가 엄청난 돈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것은 한 행동이에요. 그런데 주님은 그 한 행동으로 합격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일생동안 계속 지속되어야 될 계명이에요. 무슨 이야기인지 알죠? 그 한 행동으로 하나님께 영웅적인 어떤 한 행동으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에요. 행동이 아니고 계명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에요. 그래서 그 계명은 율법에 대한 영원한 복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의에요. 그러니까 율법을 통해서는 의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이 없잖아요. 가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왜 없겠어요? 그러나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 언제나 그렇게 변함없이 사랑하는 분은 하나님 한분밖에 없는 것이에요. 하나님 당신 자신만 그렇게 할 수 있지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에요.
아까 우리 첫 번째 발표한 학생도 보면 두 달 전에는 사랑했는데 요새 조금 식었다가 또 다시 뜨거워졌다. 그런다면서요. 그렇게 우리 자신이 그렇게 변하는 것이죠. 그렇죠? 그러니까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는 하나의 프로그램적인 우리의 푯대에요. 푯대. 예를 들면 화살을 겨눌 때 어느 쪽으로 쏠까요? 관악산 정상을 바라보고 쏘아라. 그런데 실제로는 활을 쏘아서 관악산까지 안가잖아요. 목표는 관악산꼭대기와 정확하게 같은 방향에 목표가 있는 것이에요. 그쪽으로 쏘면 화살이 거기에 맞는단 말이에요. 그런 것과 똑같은 것이죠. 그것은 우리들이 바라보아야할 하나의 푯대인 것이죠. 그러니까 율법의 의를 가지고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에요. 처음부터 율법은 그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게 하실 목적으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것이 아니에요.
또 질문?
믿지 않는 사람이 많은데? 지금 질문한 내용이 기독교 2000년 역사에서 블랙홀 중의 하나에요. 그렇기 때문에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것을 요약해서 정리하자면 이런 것이에요. 뭐냐 하면 그게 인간의 의지와 그 다음에 하나님의 구원의 문제인데 문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은 하실 수 있지요.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다 구원받아라.’ 그 한마디만 하시면 다 구원을 받는 것이죠. 그렇죠? 못하실 수 있는 게 어디 있겠어요? 못하실 수 있는 게 있다면 말이 안 되잖아요. 제가 교회에서 술을 먹고 취할 수 있어요? 없어요?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치매가 걸리기 전에는 그런 일이 안 일어나겠지요? 그럼 제가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까?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성품과 모든 판단 상 절대로 그렇게 안하는 것이죠.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 것 하나님이 ‘다 구원받아라.’ 그러실 수 있는 것이죠. 그렇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안하셔요. 그 이유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만드시지 않고 인간 자신에게 자율적인 인격과 의지를 주셔서 자기 자신이 행한 것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짐으로 어떤 사람은 진노로 심판하시고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이 세상에서 선명하게 드러내주심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요번에 쓴 회심, 돌이킴 있지요? 거기의 1장에 보면 어떻게 하나님이 지옥의 형벌 받는 현장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지에 대한 기록이 나와요. 그것이에요. 그러니까 관점 자체를 인간에게 두고 생각하는 한 그 의문은 풀리지 않는 것이죠. 왜 많이만 구원하셔야 되요? 다 구원하실 수도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그렇게 안하시는 것이죠.
그리고 결국은 어떤 식으로든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태도에 따라서 인간의 구원의 여부가 결정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인간이 한껏 자유롭게 살아도 결국은 하나님이 정하신 뜻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의 문제에요. 어떻게 생각할까요? 비유가 될지 모르겠네요. 학교에서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지요. 그러면 숙제를 모든 학생들이 잘해왔을 때도 교육적인 효과는 높아지지만 그중의 몇 놈이 숙제를 안 해왔을 때도 효과는 더 높아지지요? 이해가 되었으면 여기서 수업을 마치죠? 이해가 되지요? 왜 대답이 없어요. 그냥 한 서너 놈 골라가지고 반쯤 죽여 놓으면서 모든 학생들이 ‘저 선생님은 정말 무섭구나! 숙제는 제대로 해야 되겠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 모든 학생들이 숙제를 해온 것보다 뛰어난 교육적 효과가 있잖아요. 그래도 이해가 안 되면 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배운 이 교리들이 우리의 마음에 깊이 아로새겨져서 잘 기억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2009. 12. 12 하반기 성화반
성화반 Ⅴ
아마 여기에 다섯 개의 설교로 구성되어있지요. 사실은 좀 더 상세하게 하면 10번이나 15번에 나누어서 했으면 좋았는데 또 이렇게 압축해서 하면 빨리 한눈에 들어오는 장점도 있어요. 모든 것이 다 그렇지만 아마 1, 2, 3, 4, 5번 중에서 3번이 가장 핵심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제 이런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개념 자체가 거의 없기 때문에 결국 상식을 가지고 만나게 되거든요. 그런데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은 결국은 하나님이 하시려고 하는 그 일에 결국은 충돌을 일으키게 마련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참된 성도가 되어가려는 그 개인적인 것이 없으면 교회는 절대적으로 일치를 이룰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제가 이 설교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한 교회에서 참된 진리가 가르쳐지고 있다는 것이 삶의 질을 보증해요? 안 해요? 보증하지는 않지요. 그것은 이제 제시하고 가르쳐주고 성령이 역사하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지 결국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질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부합하는 정도가 삶의 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고 자기 자신을 그 진리의 객관적인 기준에 계속 합치시키려고 할 때에 그것이 바로 삶의 질의 상승을 가져오는 것이에요. 그것을 가리켜서 ‘뵈룸’ 진실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사실 오늘날 가만히 보면 우리 교회에서는 굉장히 환영받고 많이 사용하는 용어들을 사실 일반적인 오늘날의 기독교 세계 속에서는 거의 잊혔어요. 이 진실하다는 말도 예전에는 굉장히 많이 썼는데 별로 그렇게 안 써요. 훌륭하다, 진실하다, 참되다 학교에 가면 항상 교훈이 ‘참되게, 바르게, 굳세게’ 그렇잖아요? ‘참되다’ 그것은 진실하다는 것이거든요. 그런 것들이 기독교 신앙에서의 가치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 다섯 편의 설교 전체를 들으면서 우리들이 깨닫는 것이 뭐냐 하면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교회를 통해 얻는 신앙생활의 유익의 강조점과 그 다음에 이런 속에서 제시되고 있는 성경적인 강조점이 사뭇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잖아요. 그래서 뭐냐 하면 얼마나 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진실하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영광이고 사랑이고 그런 성도들이 교회의 일치를 이루면서 살아갈 때 교회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아주 훌륭한 토대가 되는 것이에요. 그것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오늘날도 보면 굉장히 발달한 시대 속에서 살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좋은 기계들, 핸드폰, 컴퓨터, 인터넷, 아주 빠른 교통수단, 이런 것들이 있지만 결국은 이런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사람들 사이의 관계들을 현저하게 파괴하고 그리고 우리 분량 이상으로 우리 자신을 소진하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관계를 갖으면서 살아가는데 현저하게 방해를 주고 있는 것이죠. 그 속에서 인간은 본질적이지도 않은 것에 매도되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죠. 거기에서 묻히고 사라지는 가장 소중한 가치들을 어떻게 우리들이 성경을 통해서 다시 찾아내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성공주의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의미의 행복이 아닌 참된 성경적인 행복에 이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관건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참 그런 것을 생각하면 어떤 때는 절망적일 정도로 우리 조국의 교회가 무지하고 그리고 진리에서 너무 어리석을 정도로 멀리 떠나있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될지 모를 정도로 그렇게 혼란스러운 영적인 상황 속에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열린 교회에서 배우고 듣고 하는 이런 내용들이 절대로 보편적인 내용들이 아니에요. 그래서 자부심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파요. 그래서 마음이 너무 아파요. 어디서든지 그런 복음을 듣고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언제나 있어요.
제가 한 400시리즈 정도를 했거든요. 그 400개 시리즈를 4000편의 설교를 했는데 그 400개가 넘는 시리즈 중에서 모든 것이 다 사랑스럽지만 가장 사랑하는 10개의 시리즈 중의 하나가 이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제가 아마 열린 교회를 하지 않았더라면 죽을 때까지 별로 눈뜨지 못했을 아마 지적으로는 책을 읽고 공부를 했어도 그 진실한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정말 뼈저리게 느끼지 못했을 그런 시리즈에요. 그래서 성화반을 하면서 제 마음의 결심이 서기를 이것을 빠른 시간 내에 책을 완성을 해서 그래서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다음으로 교재로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은 절반쯤 나갔어요? 1/3정도 나갔어요. 그러면 열심히 하면 할 수도 있겠네요. 그래서 완성해서 이 책을 가지고 우리들이 모두 함께 나누면서 공부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할 때 박사논문 8개를 읽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쓰고 그것을 인쇄할 때쯤 조금 후에 제가 아우구스티누스의 박사논문 150편을 입수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읽은 것도 있고 못 읽은 것도 있지만 어쨌든 저 자신이 깊은 새로운 세계를 보았어요. 제가 이렇게 표현한 것은 그중의 일부일 뿐인데 그것을 깊이 표현하면서 여러분들이 이 시리즈를 들으면서 꺾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을 위해서 제가 잘 조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약을 내게 먹이셔서 그래서 내 마음에 쓴 것들을 모두 토해내게 하시고 그래서 그렇게 많이 울었어요. 이 시리즈를 준비하면서 3일 동안에 원고지 천매를 썼다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정말 무지하구나!’ 그래서 진리의 세계는 한이 없고 우리는 너무나 무지한 인간일 뿐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사랑과 은혜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우리 기독교 강요로 들어가야 되겠지요. 오늘 공부할 곳은 122p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선배들에 비하면 행복한 것이에요. 선배들은 3000p를 했거든요. 하루에 한 200p씩 나갔어요. 요약을 한 것만 이렇게 두꺼운 책으로 한권이었어요. 여러분들은 얇은 것으로 하기 때문에 (얇다고 그러면 좀 이상하지만…….) 작은 것으로 하기 때문에 한 1/4정도 되는 것으로 하니까 훨씬 더 쉬운 것이에요. 자, 그러면 122p에 9항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그리스도의 희생이에요. 무름이라고 되어있는데 이게 결국은 그리스도의 대리적 만족,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렸다는 그런 이야기지요. 그 문제를 여기에서 다루고 있어요. 그러면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 그리스도의 대리적 만족인 이 만족은 인간의 죄 때문에 손해를 입으신 하나님께 대해서 자기를 희생해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러주심으로 하나님에게 만족을 드렸다는 뜻이에요. 그렇게 하심으로써 이 칭의와 성화를 위한 즉 우리를 의롭다 칭함을 받고 하나님을 닮아가게 하는 그 칭의와 성화의 값을 주님이 대신 지불하셨다는 이야기를 지금 9항에서 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면 여기에서 무슨 이야기를 다느냐하면 34장에 보면 이런 이야기들이 쭉 나와요. 여러분들이 다 읽고 오셨겠지만 우리가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죄를 지었고 우리의 죄지은 것에 대해서는 죄를 지었을 뿐이지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보상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능력이 없다는 것이 지난주까지 계속되는 내용이잖아요. 그래서 선행으로도, 지식으로도, 우리의 어떤 봉사로도 결코 우리가 지은 죄를 속해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를 받아들여질 만한 존재가 되게 할 수 없다는 그것이 지난시간 내내 계속된 사도바울의 강조점이었어요.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해결하셨다는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대리적 만족 혹은 대리적 무름이에요. 그 기초 위에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그렇게 우리를 위해서 대신 하나님께 희생하심으로 만족해하신 그리스도의 그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킴으로써 우리가 이제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이 9항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에요.
123p의 밑에서 중간에 보면 이렇게 나오지요.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사실은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렇게 얻었음으로 우리는 스스로 여전히 어리석다할지라도 그분 자신께서 하나님 면전에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신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잘 모른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할 수 없는 죄인을 하나님 앞에 다시 용납될 수 있는 사람으로 의롭게 만드시는 지혜를 가지고 계셨고 그 지혜의 나타남이 바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것이라는 뜻이에요. 그 다음 줄치세요. ‘우리는 죄인이지만 그분 자신께서 우리에게 의가 되신다. 우리는 정결하지 못하나 그분 자신께서 거룩함이 되신다. 연약하고 무장 없이 사단에게 노출되었지만 우리를 위해 사단을 짓밟고 지옥의 문을 파괴하신다. 우리는 죽음의 육신으로 세상을 다님에도 불구하고 그분 자신은 우리에게 생명이시다. 간단히 말해서 그분 자신께 속한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고 그분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우리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 이야기입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께 성전으로 자라가기를 원한다면 바로 이 기초위에 우리가 세워져야 마땅하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구원받음에 있어서나 구원받은 이후에 하나님 앞에 계속해서 받아들여질 만한 존재가 됨에 있어서나 또 그 구원이 모두 완성됨에 있어서나 그 모든 영원한 전 과정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과 그분의 인격을 의존하여 이 일들이 이루어지게끔 하셨다는 이야기에요. 이해가 되시죠?
그래서 이 의존의 개념이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천지창조의 목적도 결국은 천지창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이에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주님을 의존하는 사람들이 되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주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것이에요. 그런 의존이 아주 마음 깊이 그 의존이 파고들었을 때 우리는 아주 열렬히 기도하게 되는 것이에요. 무슨 뜻인지 이해되시죠? 그리고 그렇게 온전히 의존하게 될 때에 열렬히 주님을 의존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런 의존의 마음이 가득할 때 기도를 열렬히 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게 되고, 그 다음에 주님의 일을 할 때에도 온 마음을 다해서 충성하려고하는 이 모든 것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깊이 임하면 그 사람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약해지는 것이라고요. 강해지는 것은 악을 향하여, 핍박을 향하여, 시련을 향하여 강해지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서는 아주 약한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그게 바로 의존이에요. 사랑하는 사람하고 가까이 있으면 힘이 나요? 힘이 없어져요? 중요한 퀴즈에요. 이 자매는 사랑을 해본 자매에요. 그렇죠? 그것까지는 고백을 안 해도 되요. 힘이 난다는 사람은 아직 멀었어요. 힘이 없어져요. 왜냐하면 사랑은 의존의 감정이고 의존할 수 있을 때 그 안에 쉼이 있기 때문이에요. 재미있어요. 뻗어나가면 정말 재미있어요. 자, 그런 것이에요. 그리스도를 향한 전적인 의존 속에서 살게 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언제나 마음에 눈물이 가득하지요. 그렇죠? 마음에 가득해요. 같이 해볼까요.
(찬양)
주 없이 살 수 없네. 내 주는 아신다. 내 영의 깊은 간구 마음의 소원을 주 밖에 나의 맘을 뉘 알아주리오. 주님을 의지하여 지혜를 얻으리.
주님을 향한 의존의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에요. 그때에 참 영혼이 아름다워요. 총신대학교에서 이번 한 학기 종강을 했는데 수업이 기도였어요. 그러니까 제대로 걸렸지요.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강의를 하고 숙제를 내주었는데 7명씩 조를 짜서 매주 기도를 하고 보고서를 내고 그 다음에 mP3 파일을 주어서 한주에 기도 설교를 하나씩 듣고 오게 했어요. 그런데 아주 놀라운 변화가 있었어요. 거칠고 그러던 애들이 지금 한 것처럼 똑같이 나와서 하는데 울먹울먹하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깨달은 것을 쭉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그때 그 영혼이 정말 아름다운 것이에요. 은혜 받은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면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지 보여요. 그러니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겠어요. 그렇죠?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영혼일 때가 둘인데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불붙을 때 주님의 사랑에 목 메이며 감격할 그 때와 또 하나는 죄인의 마음이 깨뜨려져서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그 참회의 순간 그 영혼이 이 세상에 있는 어떤 피조물보다도 그 마음에 그런 작용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에요. 정말 아름다운 것이에요. 그래서 참 놀랍지요. 좀 더 하고 싶은데 그냥 나가겠어요.
그 다음에 35번으로 가게 되면 여기서는 9항에서 무엇을 전체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느냐하면 그 앞에서 설명한 것 즉 어떠한 인간의 공로로도 하나님 보시기에 받아들여질 만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지난 시간에 계속해서 논증한 것이었잖아요. 그런데 칼빈과 같은 입장을 다른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너는 인간의 선행을 무시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렇게 인간의 선행을 막 짓밟고 무시해버리면 그러면 너는 결국은 선행무용론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35항에 보면 이런 이야기를 해요. 잘 들어보세요.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좇는 제자들을 원하신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이것은 모든 것이 한꺼번에 말해진 것입니다.’ 줄치세요. ‘자기를 부인한 사람은 더 이상 자신에게 속한 것을 추구하지 않으려고 모든 악의 뿌리를 잘라버렸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 사람은 모든 인내와 온유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모본은 이것들과 경건과 거룩함에 속한 모든 다른 직무를 아우릅니다. 그분께서는 자기를 내어놓아 죽기까지 아버지께 복종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자기의 전부를 하나님의 일을 완성하는데 쏟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가슴 전체로 아버지의 영광을 숨 쉬셨으며 자신의 영혼을 형제들을 위해 바치셨습니다. 그분께서(옆에 보면 일레호스티부스스이스베네에스떼베끼 뭐냐 하면 그분께서는 자신의 원수들에게도 선을 베푸셨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진정 위로의 유익이 있을진대 다음 말씀은 우리에게 놀라운 위로를 줍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치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겸손하나 부끄럽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의 몸에 나타나게 하려함이라.’ 맨 마지막 단락에 줄치셔야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 면전에서 행위로 사람을 의롭다 할 수 없습니다. 실로 하나님께로 난 모든 사람들은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죄의 왕국에서 의의 나라로 옮겨갑니다. 이 증언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소명을 확실한 것으로 받습니다. 그리고 나무와 같이 그 열매로 알리라는 것입니다.’
36번에서는 그 전개한 것들을 반박하는 장면이에요. 자,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결국 그렇게 해서 잘 들어보세요. 우리는 구원받을 때나 구원받은 이후에나 그리고 구원이 완성되는 모든 과정에 있어서 전체를 그리스도께 대해서 온전히 의존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것이거든요. 그런 주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 속에서 살아갈 때 그리스도의 생명은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 속에서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은 우리에게 부어져요. 그리고 그 생명과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그렇게 그의 사랑과 은혜로 충만해지게 될 때 우리에게는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데 어떻게 순종할지를 율법이 우리에게 가르쳐준다는 것이에요. 우리의 삶의 표준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는 것이에요. 그때에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움직여서 우리로 하여금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 율법을 (정확히 말하면 십계명을) 북극성 삼아서 항해하는 배처럼 그렇게 그 방향으로 우리의 삶을 순종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에요. 그때에 아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아름다운 삶의 열매들이 전체적으로 맺히게 된다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구원과 선행의 관계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제까지 가톨릭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이 선행관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선행관을 복음에 입각해서 제시하는 것이란 말이죠. 그럼 가톨릭에서는 어떻게 생각했느냐하면 인간은 이 선을 행한 것에 대해서 어떤 보상을 해준다고 제시하지 않으면 절대 인간은 선을 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에요. 그러면 인간이 만약에 선을 행하게 하고 싶으면 대가와 보상을 제시해야 된다는 것이에요. 그 제시하는 대가가 구원이라고 제시하는 것이에요. 그럼 구원받지 못했을 때 그 멸망의 심각성을 생각하면 인간은 구원받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그 몸부림이 선한 행실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결국은 무슨 얘기냐 하면 인간은 충분히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인간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요. 그러면 하나님이 많이 깎아주셨든 깎아주지 않으셨든 어쨌든 자기가 선행을 해서 자기가 죄를 지은 모든 것들을 다 속하고 그것을 보속이라고 그래요. 보상한다는 보자와 대속한다고 할 때의 석자에요. 보석은 자기가 하는 것이에요. ‘제가 거짓말을 했는데요.’ ‘제가 사람을 죽였는데요.’ ‘그러면 성지순례를 한번 갔다 와.’ 그런 것이죠. ‘제가 거짓말을 했는데요.’ ‘그러면 주기도문 100번을 외우고 가난한 사람을 10번을 구제하여라.’ 이렇게 해요. 그러면 그것을 통해서 전에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사람이 그 보속의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결국은 하나님이 그 기준을 깎아주셨든 안 깎아 주셨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어쨌든 자신은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사람이 된다는 것 아니에요?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설자리가 없는 것이에요. 그리스도의 죽음은 고작해야 이렇게 사는 것이 너희들이 선행을 해야 하는 모본이라는 정도를 위해서 즉 Example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신 것이에요. 이게 바로 그 이후의 18세기 이후의 도덕적 자유주의 같은 것들이 일어났을 때 그리스도의 신성을 다 부인하고 십자가 대속의 이 신비적인 교리들을 다 부인한 사람들이 주장했던 바와 일치를 이루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가톨릭은 그리스도 의존적이 아니에요. 현저하게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뭐냐 하면 인간의 선행은 참된 나무가 잘 자라면 열매를 맺게 되듯이 그렇게 영혼의 근본적인 변화를 그리스도를 통해 경험하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덧입게 될 때에 거기에 열매가 과일 나무에 매달리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나를 선행무용론자라고 공박하는 그 사람들은 뻔뻔스러운 자들이며 후안무취한 사람들이라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에요.
자, 그 다음에 뒤를 넘어가면 128쪽으로 넘어가서 중간입니다. 줄 치셔야 되겠죠? ‘이런 취지에서 우리는 인간의 열심을 단죄한다. 즉 사람, 그 자신 자체로 무엇을 행하고 가지든지 그것은 저주받은 것이라고 우리는 선포한다. 그 밖의 점에 있어서 우리의 다음 교리에 의해서 성도들의 영혼은 특별한 위로 가운데 격려를 받는다. 이 선행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에게 주어지며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에게 주어졌음으로 그들의 것이라는 가르침과 동시에 선행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그것들 가운데서 그분이 자신들이 그분을 기쁘게 하는 것은 공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가 그것을 그들을 위한 속전으로 여기셨다는 가르침, 더 나아가 아무런 믿음 없이 어떤 일을 시도하거나 시작해서는 안 된다.’ 뿌리를 점검하라. 그래서 무슨 선한 일을 행하든지 구원이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그 구원의 은혜를 유지하는 것도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그 구원의 계획이 완성되는 것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니 우리가 그렇게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의존하게 될 때 하나님의 은혜로써 우리의 의지는 하나님을 위한 선을 행할 수 있도록 준비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선을 행해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큼 이 일을 이루었나이다.’ 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가 이것을 하셨습니다.’ 고백을 하게끔 되는 것이라는 거예요.
그 다음 뒤로 넘어가면 130p 중간 두 번째 줄을 보면 ‘우리가 덧붙여 봐야할 것은 우리의 더러움은 그분의 가장 순수한 피의 샘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세척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우리의 하나님 앞에 지은 죄는 우리와 하나가 되어버렸는데 그것은 우리의 고행의 땀으로도 씻길 수 없고 우리의 선행이라는 흙탕물로도 씻길 수 없고 무엇으로도 깨끗케 될 수 없어요.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임마누엘 피의 샘물로써만 씻길 수 있는 것이죠. 왜 그럴까요? 만약에 우리의 고통이나 고행의 땀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씻겨서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존재가 된다면 우리는 누구를 의존하는 존재가 되겠어요? 자기 자신을 의존하겠지요. 자기 자신을 의존하는 것이 교만이에요. 그러면 자기 자신을 의존하는 교만한 인간이 되었을 때 그가 과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너희의 인생의 목적, 창조의 목적은 이것이다. 라고 할 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순환논리에 의해서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죠. 왜냐하면 그렇게 죄에 빠지게 된 것 자체가 자기를 의존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죄에 빠졌는데 그 죄를 씻는 방법을 통해서 또 자기를 의존하는 존재가 되게 된다면 하나님의 계획은 모순 덩어리죠.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오직 하나님의 의해서 주어진 구원의 방법에 의해서만 그의 죄가 씻기게 하심으로써 그래서 정신만 차리면…….
우리 어렸을 때 박수치면서 무지하게 많이 부른 찬송을 요즘에는 안 불러요.
(찬양)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사죄 하는 증거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여러분 그런 찬송이 계속 잊히는 것은 우리에게 굉장히 많은 것들을 가르쳐줘요. 신앙의 강조점이 이동한 것이에요. 그래서 요즘 복음성가를 보면 맨 자기중심적인 찬양들을 많이 하지요. 그런 것들은 얼마나 뜨겁게 불렀는지 몰라요.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인간의 교만이 십자가를 만나서 자기가 무너지기 전까지는 인간의 교만은 끝이 없는 것이에요.
자, 그래서 131p로 넘어가면 이런 것이 나와요. 줄을 치셔야 됩니다. ‘우리가 선행의 공로에 대한 편견을 버릴 때에 이를 바르게 하려는 정서를 사람의 영혼으로부터 드러내버리려는 것은 아니다.’ 이를 바르게 하려는 정서라기보다는 ‘선을 행하려는 정서를 인간의 영혼으로부터 빼내버리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보상에 대한 소망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삶을 바르게 세우고자하는 어떤 관심도 없을 것이라는 그들의 말은 전체적으로 오류에 빠져있다.’ 물론 인간에게는 이런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보상을 제시해주어야지만 열심히 하게 되는 일도 있지만 먼저 은총을 베풀어주면 거기에 감사해서 잘하는 것이 있어요. 제가 교수생활을 할 때인데 어떤 교수님이 한분 계셨는데 식당에 가면 종업원들에게 팁을 잘 주시는 교수님이 있어요. 물론 개인돈은 안주시고 공금을 가지고 갈 때만 그렇게 잘 주셔요. 그날도 한학기가 끝나면 교수들이 모두 온천이나 그런 데를 가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세미나라기보다는 한 학기를 결산하는 것이죠. 그러면 돈을 주어요. 그러면 각과 교수끼리 저녁을 먹으러가서 봉투를 하나씩 주면 그것을 가지고 가서 일식집을 갈 사람은 일식집을 가고 갈비 집을 갈 사람은 갈비 집을 가고 거기서 저녁을 먹으면서 한 학기동안의 일들을 과별로 정리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들어갔어요. 그때가 벌써 20년 전인데 그때 오천 원이면 꽤 컸어요. 작은 돈이 아니었어요. 교수 생활할 때도 우리 집사람한테 한 주에 이만 원씩 타서 다녔거든요. 나중에 도저히 이만원가지고 안된다고 데모를 해서 조금 올렸습니다만 물 컵을 가지고온 아줌마에게 봉투에서 오천 원을 꺼내서 애를 많이 쓰신다며 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팁을 먼저 준 것이죠. 그분의 지론은 뭐냐 하면 다 먹은 다음에 주어봐야 소용없다는 것이죠. 미리 주어야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 미리 주면 팁이 아니라 뇌물인데요. 어쨌든 오천 원을 주었어요. 그 아줌마가 그 당시에 파출부를 하면 한 20,000을 받을 때였나? 지금은 5, 6만원이 되지요. 오천 원이니까 그 당시에는 그 아줌마에게는 굉장히 큰돈이었지요. 교수월급이 백만 원 정도밖에 안되었으니까 그런데서 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받겠어요. 큰돈이지요.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저 사람들이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저 사람들은 장사가 잘되는 것도 원하지 않아요. 왜? 힘드니까. 너무 안 되는 것도 원하지 않아요. 왜? 잘리니까.’ 망하지 않을 정도만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에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래요. 그러더니 반찬을 내오는데 이건 뭐 아낌없이 내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교수님 한분이 게장이 먹고 싶으니 좀 더 달라고 그랬어요. 게장을 두 번인가 세 번인가 계속 시켰어요. 그랬더니 저 주방에서 무슨 게장만 그렇게 자꾸 가지고 가느냐? 이제는 없다고 그런 모양이에요. 큰소리가 나는 거예요. ‘손님이 왔으면 반찬을 줘야지…….’ 그 아줌마가 거기서 막 싸우는 것이에요. 그것 봐요. 감사하니까 보상이 제시가 안 되도 받은바 은혜가 있으니까 가서 반찬을 가지고 오잖아요.
먼저 베풀어 봐요. 부부싸움의 원인이 만날 그것이잖아요. 심방을 갔더니 그래요. ‘정말 제가 웃겨요.’ ‘왜 그래요?’ ‘아름답게 성경이 제시한대로 교회가 예수께 순종하듯이 제가 저에게 순종해보세요. 제가 얼마나 사랑하겠습니까?’ 그랬더니 아내가 하는 말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먼저 목숨을 버림같이 그렇게 나를 사랑해봐 내가 순종하지 말라고 그래도 순종하지.’ 만날 똑같은 싸움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이 반드시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선한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자연적으로도 옳지 않은 생각이에요. 그것은 충분히 입증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팁을 하나 하자면 우리의 인간관계를 진통제처럼 인간관계를 하면 세상에서도 늘 실패해요. 진통제는 아프기 전에는 절대 안 먹는 약이잖아요. 저녁때 아플지도 모르는데 진통제를 미리 두어 개 먹어두어야지 그러면서 먹는 사람이 있어요? 아니죠. 아파도 어느 정도?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정도로 아플 때에 찾는 약이 진통제에요. 인간관계를 꼭 그렇게 해요. 그러면 어디 가서 환영을 못 받아요. 갑자기 와서 전화를 하고 너무 보고 싶다고 그러고 그래요. 만나자고 그러더니 밥도 사주고 그래요. 그러면서 ‘돈 좀 있니?’ 그게 진통제 같은 관계에요. 그러면 안 되고 보약과 같은 인간관계를 가져야해요. 그래서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보약은 가을에 먹고 그다음 봄과 여름에 힘을 내는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당장 먹고 힘을 내려고 하면 안 되지요. 베풀면서 계속 살아가는 것이죠. 그러면 그것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성실하게 자기를 위해 봉사해주는 것이죠. 우리 사회에서도 그러는데 왜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선행을 안 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하느냐는 것이에요. 자기들이 그렇게 야박하니까 그렇게 밖에는 못하는 것이에요. 그러니 이것은 틀린 것이에요. 자기이익이 동기가 된다면 이 논리가 성립하지만 감사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은 정 반대의 논리가 되는 것이죠.
자, 그래서 이제 같은 이야기들이 쭉 증거가 되요. 그래서 134p로 넘어가면 38번에 이런 말이 나오죠. ‘성경은 어떤 종류의 권고도 제외하지 않고 매우 자주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고 상기시킨다.’ 이것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마찬가지잖아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계시와 상벌로써 우리를 다스리시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올바르게 하나님 앞에 행한다면 거기에 대한 보응이 주어지지만 그렇지만 선행을 하면 구원의 보응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자. 왜냐하면 그렇게 구원이 주어지고 천국을 유업으로 누리는 것은 우리의 선행을 주고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고 다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루신 의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서 그 자녀에게 주어지는 유업 안에서 그렇게 구원을 받는다고 보는 것이죠. 그런 것 아니에요? 누가 누구의 상속자가 되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집의 법적인 양자가 되면 그 아버지의 집에서 정식 자녀의 명분을 가지고 자식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공유하게 되잖아요. 그 결과로써 주어진 것이 구원이라고 봐야지 선행을 주고 거래해서 우리가 구원을 샀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또 하나님이 혹시 우리가 어떤 선행을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 보기에는 그것이 너무 아름답고 놀라와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것이 얼마나 너절하고 지저분한 것일지 생각해보세요. 그래서 우리의 선행도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세척되어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짐으로써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보를 그렇게 전 포괄적으로 보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기서 하고 있는 것이에요.
자, 그러면 이제 결론이 나와요. ‘그러므로 성령께서 보상을 받는 것이 마땅하기라도 하듯이 우리의 행위의 가치를 칭찬하고 싶으셨다고 여기지 말자.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면전에서 높아질 것을 행할 여지를 남겨두지 아니하셨다. 전체 성경은 교만을 억제하고 겸비하게하며 우리를 내던지고 궁극적으로 자아를 부서뜨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는 가운데 자신을 유지하고 위로하지 못한다면 무너지고 소멸될 우리의 연약함이 있는데 이것은 다음과 같이 고쳐진다. 첫째로 모든 사람 각자가 자신에 대하여 소유뿐 아니라 자신을 버리고 부인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생각하게 하자. 이것이 예수께서 자신의 제자들 즉 모든 경건한 사람들의 훈련을 시작한 초보였다.’ 이것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이죠. ‘자기를 버리고 부인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생각하게 하자.’ 그러면 결국은 어떻게 되지요? 어떻게 해야 해요? 그렇지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내 마음을 때려주셔서 바꿔주시지 않는다면 나는 나 자신을 부인할 수도 없고 십자가를 질수도 없고 예수님을 따를 수도 없습니다. 또 한 번 내가 설령 나를 부인했다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자기를 부인하는 정신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이죠. 제가 그런 질문을 했지요. 다시 한 번 질문해볼까요. 철천지원수처럼 미워하던 사람을 깊이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으면 그를 완전히 용서할 수 있어요? 없어요? 그를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러면 도대체 왜 교회를 다녀요? 용서할 수 있어요? 없어요? 그러니까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어요? 없어요? 있지요! 그런데 그 사람을 다시 미워할 수 있어요? 없어요? 그것 봐요. 아주 힘차게 이야기하네 뭐 그리 한이 맺혔어요? 그래서 결국은 뭐지요? 한번 나를 꺾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꺾은 나를 계속해서 꺾인 상태에 있게 하는 것은 더 큰 은혜가 필요한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올바르게 살려고 할 때에 은혜의 필요성을 아주 절감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런 생각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면서 의지하면서 살아가게 만들어준다는 것이에요.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일생을 통해 져야할 십자가 아래서 훈련을 받도록 가르치심으로 그들이 현존하는 은총들에 대한 욕망이나 신뢰의 마음을 던져버리지 못하게 하신다.’ 그랬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그 옆에 보면 ‘아드보노룸쁘라이젠띠웅벤꾸삐띠따뎀’ 이라고 나오거든요. 이것이 번역이 좀 그런데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쁘라이젠띠웅’ 현존하는 ‘보노룸’ 현존하는 선이나 혹은 ‘꾸삐띠따뎀’ 이것은 ‘까리따스’의 반대지요. ‘꾸삐띠따스’ 육욕적 욕망이에요. 그래서 현존하는 선이 아니라 아주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이렇게 되겠지요. ‘눈에 보기에 좋은 것에 대한 욕망이나 신뢰에 마음을 던져버리지 않게 하신다.’ 그게 현세욕이에요. ‘꾸삐띠따스’가 정욕이라기보다는 현세욕이거든요. 그래서 뭐냐 하면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일생을 통해서 져야할 십자가 아래서 훈련을 받도록 가르치셔서 현세욕이나 세상에 대한 욕망이나 세상에 대한 것들을 의지하는 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신다.’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여기에 십자가가 나와요. 여기에서는 상세하게 설명이 안 나오는데 최종판에서는 이 십자가를 설명하는데 이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섭리 속에서 우리 신자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모든 고통을 총칭하는 것, 거룩한 것을 총체적으로 말하는 그것이 바로 이 십자가에요. 십자가를 지면서 고통을 받으면서 그러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고 죽어갈 때에 현세욕도 함께 사라지는 것이라는 이야기에요.
자, 이제 그렇게 진행되고요 그 다음에 139p로 넘어가면 ‘믿음’ 이게 2부에요. 여기에서 사도신경을 쭉 다루게 됩니다. 2장 전체에서 223p까지 사도신경을 다루어요. 자, 우선 사도신경을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이렇게 나오겠지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제가 믿사오며…….’ 시작이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그게 라틴어로는 믿는다는 동사가 제일 먼저 나와요. ‘크레도’ 나는 믿는다. 그 다음에 ‘전능하시며 천지를 창조하시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이렇게 나와요. 그래서 믿는다는 말을 먼저 해설했어요. 이해되시죠? 외국어에서는 동사가 앞에 나오니까 믿는다는 것부터 설명하는 것이에요. 무엇을 믿느냐 무조건 자기의 마음에 스쳐간 인상이나 어떤 감상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에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 그 믿음을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자 그러면 한번 보겠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데 결국은 믿음의 대상이 무엇이지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이렇게 되지요? 무엇을 먼저 믿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존재를 먼저 믿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먼저 믿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 두 번째는 또 무엇에 대한 믿음이 나올까요? 그렇게 믿는 하나님의 존재뿐만 아니라 또 무엇? 그러니까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두 가지를 믿어야 된다고 그랬지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뭐죠? 존재, 그분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 그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또 하나를 이야기하지요. 그게 뭐죠? ‘자기를 찾는 이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할지니라.’ 그러면 그것은 무슨 뜻이에요. 반대로 하나님은 벌을 주실 수도 있는 분이시잖아요. 그렇지요?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성품을 가리키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이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어떻다고 생각하고 믿느냐 이것에 의해서 그 믿음의 성격은 현저하게 달라지는 것이죠. 그것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믿음이 될 수도 있고 구원을 얻기에 적합하지 않은 믿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면 하나 더 나아가봅시다. 그러면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성품을 놓고 볼 때에 그럼 하나님은 과연 존재하신다는 사실과 그 다음에 하나님은 어떤 성품을 가지신 분이신가 할 때에 그 두 가지 사실에 대한 믿음은 무엇을 통해서 그 두 가지에 대해서 알 수 있어요? 그렇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이에요. 그 말씀은 곧 무엇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무엇이에요? 왜 그래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에요? 왜 그렇게 오락가락해요? 하나님의 말씀이 더 큰 범주에요? 성경이 더 큰 범주에요? 말씀이 더 큰 범주지요. 그것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어요? 다시 질문할게요. 하나님의 말씀이 더 큰 범주에요? 성경이 더 큰 범주에요? 말씀이 더 큰 범주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훨씬 더 큰 범주이고 성경은 그보다 적은 범주인데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성경과 일치를 이루는 부분을 떼어내면 포함되지 않는 나머지 초승달 같은 부분은 무엇이에요? 큰일 났다. 대답해놓고 책임을 질 수 없잖아요. 원래 맨 처음에 존재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훨씬 크지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것은 남아있지를 않아요. 남아있는 것은 오직 기록된 계시의 형태로만 남아있는 것이에요. 그것이 성경이지요. 그러니까 결론적으로는 처음 생성된 때를 기준으로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보다 큰 범주이지만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은 곧 기록된 계시인 성경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지요. 그러면 그 말씀은 무엇과 무엇으로 나눠지지요? 율법과 복음으로 이루어져요. 그게 말씀이에요. 그리고 율법은 다시 둘로 나눠지지요. 어떻게 나누어져요? 좁은 의미의 율법과 넓은 의미의 율법으로 나뉘죠. 좁은 의미의 율법은 바로 도덕법, 의식법, 시민법 이런 것들이고 넓은 의미의 율법은 하나님 자신에 관해서 제시된 흠 없고 순전한 구약 계시의 총체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시인이 그 율법을 통해서 위로와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할 때의 그것은 좁은 의미의 율법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에요. 그래도 최고의 클래스를 공부하는데 이 정도는 머릿속에 두어야지요. 여러분 이제 이 기독교강요 정도는 탁 펼쳐놓고 가르칠 수 있겠지요? 왜 웃어요?
자, 그래서 이제 142p로 넘어가게 되면 3번 줄치세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겨냥해야할 믿음의 대상이며 목표이다. 말씀은 믿음을 떠받치고 지지하는 기초이므로 전자가 없이는 후자는 존재하지도 못한다. 따라서 이 참 믿음은 영혼의 확고한 감화로써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가운데 이루어질 것으로써 우리 자신이 수납한 것보다 더 앞서는 것은 없다는 하나님의 진리에 우리 자신을 세운다. 바울은 이를 가르치기를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증거라고 부른다. 실상, 혹은 헬라어로 실체라는 단어를 우리는 의지하고 기대는 지주와 흡사한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바울은 믿음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들에 대한 확고하고 확실한 소유라고 말하고 있는듯하다.’
자, 이렇게 해서 하나님에 관한, 그리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요구되는,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신앙의 유익들에 대한 진술의 토대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1항에서 강조하고 그 다음에 145p로 넘어와서 제일 먼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 그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여기에서 삼위일체를 거론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제 한분 하나님께서 세 위격으로 계심을 믿는다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이제 하나님은 몇 분이시죠? 한분이라고 이야기를 해야 돼요. 그러면 우리들이 삼위일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은 인격이 몇 개에요? 한 인격이에요? 세 인격이에요? 세 인격이에요. 그럼 삼위일체라고 할 때의 이 위는 위격, 혹은 인격을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한분이신데 그 한분의 존재의 양식이 삼위일체로써 존재하신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여기에서 삼위라는 것은 인격이 셋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그렇게 되어야지만 성부와 성자 사이의 교통이 가능하고 성령과 성부, 성자 사이에 교통이 가능해서 그래서 결국 삼위가 되실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 뒤에 나오는 일체는 뭐냐 하면 체는 신적 본질을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인격은 셋이지만 신적 본질은 하나인 양상으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이 삼위일체의 교리에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하나의 신적인 본질이 있는데 그 신적인 본질이 성부가 신적인 본질이신데 그 본질에게서 아들이 나오실 때에 신적 본질이 또 다른 신적본질을 생성해내는 것이 아니에요. 신적 본질이 또 하나의 신적 본질을 생산해내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어떻게 되지요? 이신이 되는 것이죠. 성부에게서 성자가 나오셔서 신적 본질을 같이 가지면 이신이 되는 것이에요. 이해 안 돼요? 되지요? 그러면 거기서 다시 또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성령이 나오시니까 삼신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성자의 낳으심과 성령의 발출은 신적 본질이 또 다른 신적 본질을 생산해내는 그런 방식의 삼위가 아니라 신적 본질은 하나로 그대로 있고 거기서 위격이 나오시고 발출하신 것이죠. 그래서 신적 본질 자체에는 변함이 없고 인격만 생겨나는 것이에요. 그렇게 해서 성자는 성부에게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심으로 신적 본질 자체는 변함없이 하나의 신적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 이게 삼위일체라는 말의 의미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한분이시라고 말해야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세 하나님이라고 해도 안 되고 그 다음에 단위신론이라고 그러는데 위격의 구별이 없이 하나님은 하나일 뿐이라고 말해도 안 된다는 것이에요.
자, 그렇게 해서 이제 151p로 넘어가게 되면 다섯째 줄 줄치세요. ‘반항적이거나 완고하지 않은 사람들은 성부가 하나님이시고 성자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시며 그래서 하나님은 한분이 아니라고 가정하지 않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삼위이시지만 하나의 신적 본질을 가지고 계신 한분이신 하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한편 그들은 셋으로 불리고 셋이고 기술되며 셋으로 구별됩니다. 그러므로 한분이시며 셋이십니다. 그분께서는 한 하나님 한 본질이십니다. 어떻게 해서 셋입니까? 세 하나님이 아니고 세 본질이 아니시다. 고대의 정통 교부들이 말했듯이 양자는 한 본질 무시한 세 위격 휘포스타시아 즉 한 실체가운데 세 위격적 존재이다.’ 위격은 인격이라는 말과 같이 통하는 것이에요. ‘라틴교부들은 의미에 있어서는 헬라교부와 일치했지만 한 단어를 또 다른 이름으로 옮기고 그 이름 가운데 어떤 다른 것을 표현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헬라이름에 부합하는 한 실체에 세 인격이 있다고 믿었으며 이로부터 어떤 관계를 지시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를 이야기하는 것이죠.
자, 그다음에 중요한 내용이 158p에 나와요. ‘이단인 아리우스는 명확한 성경 본문들에 대항해서 싸울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의 모종의 일치를 가장했습니다.’ 줄치세요. ‘그러나 한편 그는 그리스도는 창조되었으며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같이 존재의 시작을 가졌다고 뇌까리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은신처로부터 사람의 교활한 꾀를 끌어내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영원한 아들이시며 아버지의 동일 본질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로부터 아리우스주의자들의 불경건이 끓어올랐습니다. 그들은 동일 본질이라는 이름을 극악하게 혐오하면서 저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호모웃시우스’ 그랬지요? 읽을 수 있겠지요? 호모+오유=호모우에요. 호모웃시우는 동일본질이라는 것이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아들은 아버지가 아니시지만 위격이 다르시기 때문은 아들은 아버지가 아니지만 본질은 동일한 하나님의 본질이라는 그것을 말하기 싫어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기에다가 i자 하나를 집어넣게 되요. 어디에 넣느냐하면 호모웃시우스 오오 두 개 들어간 사이에다가 i자 하나를 더 집어넣어요. 이어타라고 그러는데 호모이웃시우스가 되요. 그것은 유사하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그것 하나를 가지고 큰 싸움이 일어나요. 그래서 로마황제가 ‘저기가 왜 그렇게 시끄럽느냐?’ 그러니까 ‘이오타(영어의 i) 알파벳 하나를 가지고 싸우는 줄 아뢰오.’ 그러니까 ‘쩨쩨하게 그 까짓것 가지고 왜 싸워? 아무렇게나 하면 되지…….’ 그런데 사실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 존립의 기반이 좌우되는 중요한 것이에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호모웃시우스’는 그리스도는 아버지가 아니시지만 동일 본질이시다. ‘호모이웃시우스’는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유사한 본질이시다. 신에 가깝지만 신은 아니시다. 그러니까 무서운 것이죠.
그러다가 이후에 누가 나타나느냐하면 샤벨리우스라는 사람이 나타나요. 그 사람은 양태론자에요. 뭐냐 하면 하나님은 아버지 한분밖에 없는데 아버지가 언제는 아들로 언제는 성령으로 나타나신다는 이야기에요. 똑같은 남자가 회사에 가면 사장님, 교회에 가면 장로님, 집에 가면 아빠 이렇게 되듯이 같은 존재가 시대에 따라서 양상을 바꾸어서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죠. 이단이에요. 이단입니다. 이게 샤벨리안이즘이라고 그러는데 세르베투스라는 사람이 칼빈이 교회를 스위스에서 섬기던 시절에도 이단을 퍼트려요. 그리고 사형을 당하지요. 조금 읽고 마치겠어요.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이후에 샤벨리우스가 일어났지요.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 쓸데없는 것이라고 논박하며 복수의 이름들이 고려되는 것은 구별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들의 서로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논쟁 가운데 서기라고 할라치면 아버지도 하나님 아들도 하나님 성령도 하나님이시고 그래서 한 하나님이 각각의 세 모양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뒤로 160p로 넘어가면 ‘아리우스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며 따라서 시작을 가졌다고 중얼거린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한분이시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그 밖의 믿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한분이시나 다만 고유한 대권을 가졌다고 은밀히 수군거린다. 유사본질이라고 말하지 말고 동일본질이라고 말하라. 그리하면 당신은 둔갑하는 가면을 벗어내게 될 것이다. 샤벨리우스는 아버지, 아들, 성령은 하나님께 어떤 구분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셋이 존재한다고 말해라.’ 다 쓸데없는 이야기라는 말이에요. 이렇게 해서 삼위일체가 된다는 설명을 들으신 것으로 사도신경 해석의 서론이 끝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제 다시 한 번 정리를 하자면 하나님은 하나의 신적 본질이시고 삼위는 신적 본질이 각각 다른 존재로 삼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적 본질 안에 세 인격을 가지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한분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삼위를 가지신 한분 하나님이라고 말해야한다. 잘 들으세요. 하나님의 존재가 이러하니까 성부가 계신 곳에는 반드시 성자와 성령도 계신 것이죠. 그러니까 그래서 이제 제가 여러분들에게 유명한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삼각형을 들어서 설명했잖아요? 기억나지요? 안 해도 되지요? 그래서 그 하시는 일에 따라서 성부가 우선적으로 혹은 성자가 성령이 우선적으로 개입하시지만 그 개입하시는 곳에는 결코 성부와 성자는 배제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창조는 성부가 우선적으로 개입하시고 성자와 성령이 부차적으로, 구속은 성자가 우선적으로 나머지 두 위가 부차적으로, 그 다음에 믿음을 주시는데 있어서는 성령이 우선적으로 그 다음에 성부와 성자가 부차적으로 이렇게 해서 삼위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과 완성의 경륜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 삼위일체 교리를 우리들이 굳게 붙들 때 그것이 우리의 참된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질문? 없으면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내려주셔서 잘 감당하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저희들이 날마다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아름답게 자라나도록 하나님이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09. 12. 19 하반기 성화반
성화반 Ⅵ
오늘은 162p입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지요. 사도신경 해석Ⅰ로 들어갑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여기에서는 이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그리고 하나님의 그 전능하심이 창조와 그리고 보존으로 나타난다는 것, 보존은 하나님의 섭리인데 하나님이 만물을 아무렇게나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이유와 목적이 있게 만드셨고 그래서 피조물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인간이 살아가는 그 모든 과정은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그 뜻을 성취해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여기에서 논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 꽤 길게 이야기합니다. 그 다음에 성자 하나님이 되겠지요.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여기에서는 주로 그분이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이시라는 사실을 길게 논증해가요. 오늘 이 두 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162p를 보겠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창조된 모든 것들 전체의 창조주로서 인정하는 하나님 아버지를 변함없이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거기 줄치세요. ‘하나님은 이 피조물들을 아들이신 말씀과 자신의 영원한 지혜와 성령이신 자신의 능력으로 지으셨습니다.’ 창조지요. ‘그리고 한번 지으신 대로 이제는 자신의 인자하심과 능력으로 이것들이 없으면 모든 것은 즉시 파멸되고 무로 돌아갈 것이다.’ 칼빈의 이러한 언급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되 법칙만 창조하시고 그 다음에 그 법칙에 의해서 인간과 모든 만물이 움직이도록 만드셨다는 마치 시계에 태엽을 감아놓거나 아니면 어떤 프로그램을 입력해놓으면 그러면 기계 같은 것들이 그 입력된 대로 움직이듯이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다는 사상을 배격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 피조세계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 피조세계 안에 피조물들과 구별되시는 분이시지만 이 피조세계 안에 초월자이면서도 이 피조세계 안에 계셔서 그래서 이 피조물들을 당신의 자비와 사랑으로 그리고 지혜로써 이 만물들을 당신의 목적에 맞게끔 움직이시는 분이시라는 것, 이 두 가지를 여기서 얘기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제 하나님은 Creator 창조주이시며 또한 Upholder 유지자이셔요. 그것을 우리들이 신학적으로 보존이라고 불러요. 이것은 아주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매우 중요한 것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을 법칙만 창조해놓으신 분이시고 나머지는 이제 이 세상은 그 법칙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것은 제가 작년에 산상세미나에 갔을 때 진리의 전달자를 공부하면서 데카르트의 사상에 대해서 설명해준 적이 있을 것이에요. 거기에서 나오는 영혼진리창조설이라는 이론이 있어요. 그것이 사실은 현대의 문명을 폭발적으로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던 이론이에요. 그것을 다시 인터넷에 들어가서 다시 한 번 상세하게 들어보면서 공부하세요.
그러니까 공부할 때는 항상 어떻게 해야하느냐하면 적극적인 마음을 가지고 집중해서 공부를 해야 해요. 그러면 여기 이것이 반쪽밖에 안되는데 이게 얼마나 중요한 언급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인터넷에 들어가서 보면 거기서 데카르트 사상의 영혼진리창조설에 대한 이야기가 쭉 나와요. 그런 사실을 알고 나면 이 짤막한 몇 줄 안 되는 이 문장이 이미 그런 사상들을 염두에 두면서 왜 그런 사상들이 구체화 된 것은 18세기에 나왔지만 그러나 벌써 그러한 사상의 씨앗들은 인류역사 이래 계속되었거든요. 아! 그런 사상을 배격하는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아주 짧은 문장이지만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오게 되요. 그래서 공부를 할 때 항상 책 하나를 가지고 하나를 공부하는 것은 잘하는 것이 아니고 책 하나를 공부하면서 열권 이상의 책을 옆에 놓고 건너뛰고 건너뛰면서 여기 이 속에 들어있는 내용들의 풍부한 것들을 같이 보아가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공부할 수 있는 기회나 나이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렇죠? 이렇게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워요. 그렇지요? 복이잖아요? 가르치는 사람만 복이라고 그러지 배우는 사람들은 복이라고 생각을 안 해요. 이렇게 공부를 하고나면 설교가 아주 빠르게 들어오죠. 그래서 여기는 교리반보다 더 위로 올라간 반이자만 교리반을 들어오기 전까지는 설교를 들어도 무슨 소린지 모르던 사람들이 교리반에 와서 쭉 정리를 하고나서 그 다음에 설교를 들으면 설교가 정리가 빠르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진리의 달콤함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에요. 다시 한 번 이야기할게요. 진리의 달콤함을 느끼지 못한 사람은 결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면 공부를 못하면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까? 그게 아니라 사람이 태어났어도 공부를 하는 사람이 있고 안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런데 일단 사물을 볼 수 있고 냄새를 맡을 수 있어야지 태어난 것이죠. 죽은 사람은 그런 것을 할 수 없잖아요.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가장 중요한 의무는 무엇일까요? 박수 한번 쳐주세요. 크게 쳐주세요. 얼마나 정확해요. 인간이 태어난 가장 중요한 의무는 무엇인가?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에요.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최고의 보람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아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이에요. 그것이에요. 저렇게 명료하게 답이 딱 나와야 해요.
자, 그 다음에 중요한 이야기가 나와요. ‘참으로 우리가 그분을 전능하시며 모든 것들의 창조주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께서 모든 것들 가운데서 모든 것을 행하실만한 전능하심과 모든 것을 다스릴 섭리를 스스로 가지셨다고 사유함이 합당하기 때문이다.’ 섭리는 무엇이지요? 만물을 하나님이 질서지우는 것이 섭리에요. 그래서 어떻게? 내 인생에 어려운 일이 일어났는데 나보기에는 재수 없는 그 녀석이 나타나서 나를 괴롭히는 바람에 어려운 일이 일어났는데 한 십년을 살고 보니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는 결말들이에요. 십 년 전에 그 일이 안 일어났더라면 내가 여기에 있지 않았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될 때 그때에 그 하나하나가 전부 엮어져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시계가 있잖아요. 시계의 뒤 뚜껑을 열어보면 복잡하지요. 톱니바퀴가 여러 개가 막 돌아가고 그래요. 그것을 보고는 그것이 왜 그렇게 움직이는지 몰라요. 앞을 보면 아 이게 이렇게 움직여서 바늘 세 개를 움직여서 우리에게 시간을 가르쳐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그것이 섭리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섭리하신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해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가르쳐드릴 때 하나님이 이 세상을 무엇과 무엇으로 창조하셨다고 했어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혜와 사랑으로 창조하셨어요. ‘능력으로 창조하셨다 매요?’ 물론 능력으로 창조하셨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능력으로 창조하신 것은 창조의 힘이고 그 힘이 실행되는 방식이 바로 지혜와 사랑 안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에요. 그래서 이유 없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이 뜻이 있으셔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섭리는 하나님이 지혜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지혜의 표현이에요.
그 다음에 163p 맨 아래로 내려가면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다스리시는데 그 다스리시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냐 하면 선이에요. 선. 선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뜻대로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움직이시는 것이죠. ‘참으로 이 모든 것들이 그분에 의해서 우리에게 된 것은 우리 가치나 공로나 우리 편의 값으로 헤아려질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런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우리 가운데 이렇게 역사하시는 그분의 인자하심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로서의 선하심과 너그러우심으로 인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사하고 음미하고 선포하고 그분을 높이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의무가 어떻게 되느냐 하는 질문이 나오겠지요? 이렇게 설명을 하면 되요. 나오지요? ‘이와 같이 우리는 기꺼운 경건과 불타는 사랑으로 아버지를 예배함으로써 우리 모두를 헌신하여 복종하며 모든 것을 통해 그분을 경외하게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요. 자,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렇지요? 여기에 인간이 이렇게 있어요. 인간이 있는데 그럼 이 하나님을 향해서 인간이 이제 예배하게 되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 하나님 앞에 예배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질적인 차이를 깊이 인정하고 그분의 전적인 은혜와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의존의 표현인 동시에 존재와 모든 능력과 선하심에 있어서 자신과는 비교될 수 없는 탁월한 분이시라는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있는 절대적 차별성에 대해서 차별성을 인정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이 정신이 바로 다른 것이 아닌 이 예배의 정신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러한 예배에 의해서 이런 정신이 아주 구체적으로 형체를 갖추고 나타나는데 그게 바로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에요. 그런데 이런 예배가 여기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런 예배가 밖으로 뻗어나가게 되는 것이에요. 이 예배의 정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절대적인 차별성,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될 때라는 이 예배의 정신을 가지고 우리는 이것보다 더 넓은 의미의 예배를 드리게 되요. 이것도 우리들이 예배라고 불러요. 그러면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삶으로써의 예배에요. 이것은 넓은 의미의 예배지요. 그럼 똑같이 이렇게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하심과 자비를 의지하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비교할 수 없는 차별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분 앞에 엎드리는 이런 예배의 자세를 삶속에서 그대로 구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게 결국 무엇으로 나타나느냐하면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순종, 그 다음에 선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보는바와 같이 우리는 이렇게 예배가 삶으로 이렇게 뻗어나갈 때에 이것이 이중의 예배라고 우리들이 보는 것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하면 이렇게 삶으로써의 예배를 올바르게 드릴 때 좁은 의미로써의 이 예배를 드리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는 것이죠. 그러면 예배시간에 이런 삶을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부어지는 것이에요. 지성의 깨달음과 정서의 불붙음, 의지의 선한 상태가 되는 것이죠. 이런 좁은 의미의 예배를 올바른 정신으로 드릴 때 그때에 이런 삶을 넓은 의미의 예배를 올바르게 드릴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는 것이죠. 그러니까 오늘날도 보면 예배를 아무렇게나 드리거든요. 그래서 만날 지각하고 예배시간에 졸고……. 옛날에 여러분들이 왕 앞에 가서 졸았다면 아마 왕궁을 나가지 못할 것이에요. 아마 죽여 버리지 않겠어요? 왕이 얘기하는데 계속 졸고 있다면 말이에요. 예배를 그렇게 드리는 것은 뭐냐 하면 일주일의 그 사람의 삶이 그러했다는 것을 예배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에요. 자기 스스로 확인하는 것이에요. 이 문제는 사실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그 책의 일장에 상세하게 쓰여 있어요. 가서 읽어보세요. 그것도 필요한 것을 이 책에다가 책을 아끼지 말고 새까맣게 옆에다가 써놓는 것이에요. 교리를 배우다가, 설교를 듣다가 생각나는 게 있으면 옆에다 새까맣게 쓰고 안 되면 옆에다가 종이를 계속 붙여서 이것 한권을 보면 되게끔 써놔요.
그리고 이렇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이 한복판에는 뭐가 있느냐하면 ‘유세베이아’ 이것을 가리켜서 경건이라고 그래요. 자, 이 경건의 핵심은 무엇이었지요? 두 가지죠. 정확해야지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향해서 떨리는 두려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치고 싶지 않은 이끌리는 사랑 이것이 십자가에서 정확하게 구현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 십자가를 통해서 이 두 가지를 느끼기 때문에 경건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게 핵심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에요. 이해되지요?
그 다음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쇠락하는 모든 것도 평온하고 잠잠한 마음으로 마치 그분의 손으로부터 받듯이 한다. 그때 우리는 고통스럽고 역경을 주는 동안에도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예비하시는 그분의 섭리를 또한 사유한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라도 우리가 관대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과 이에 못지않게 그분으로 말미암는 구원이 대망되어야한다는 사실을 결코 의심하거나 불신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이것이 각자가 가진 것으로써 사도신경의 첫째부분에서 우리가 배우는 진정한 믿음이라는 것은 가장 확실하고 참되다.’ 이렇게 설명을 해나간 것이에요. 간단하지요. 그러면서 이 부분은 핵심을 찌르고 있는 것이에요.
그 다음 사도신경 해석Ⅱ 입니다. 성자 하나님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저리로써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그 다음에 11번을 보겠습니다. ‘그분을 독생자(모노게네스라고 그러는데)라고 부를 때 우리는 그분을 다른 모든 사람들과 구별합니다. 그분께서 하나님이신한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와 한분이셔서 아버지와 동일한 본성과 본체 혹은 본질이십니다.’ 옆에 보면 빨간 부분이 있지요? 빨간 부분에 여러분들이 잘 아는 세 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와요. 라틴어는 그냥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되요. 되게 편해요. 밑에서 4번째 줄에 ‘에이우스뎀 라뚜라이’ 이게 뭐냐 하면 본성이에요. 영어의 nature 에요. 그 다음에 ‘스부스딴띠아이’ 이것은 뭐냐 하면 본체에요. 혹은 철학에서 실체라고도 하지요. 그 다음에 ‘세우에센띠아에’ 아까 그것은 Substance고 이것은 뭐냐 하면 ‘에센띠아에’ 그랬는데 이것은 Essence에요. 이것을 우리들이 여자들 화장품에 에센스 있지요? 아주 아름답게 해주는 본질적인 화장품이에요. 비싸다고요? 비싸겠지요. 에센스니까……. 찌꺼기까지 다 주면 쌀 텐데 에센스만 주니까 비싸지요. ‘에센띠아’ 이것은 본질이에요. 조금씩은 차이가 나지만 같은 말이에요. 그러나 여기서는 같은 뜻으로 쓰고 있어요. ‘아버지와 동일한 본성과 본체, 혹은 본질이시다.’ 라고 그랬는데 본질하고 본성의 차이는 뭐냐 하면 본질은 사물의 무엇이고 본성은 그 무엇임이 작용하는 방식이에요. 그러니까 본성은 기능과 관련이 되고 본질은 그 사물의 정체와 관련이 되는 것이죠. 그렇지요? 본질은 사물의 무엇임이고 그 다음에 본성은 그 사물의 어떠함이에요. 그러니까 본성은 기능과 많이 관련되어있는 것이죠. 본질은 그 사물의 정체와 관련이 되어있어요.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에요. ‘야, 저게 지금 뭐야? 지금 움직이는 저게 뭐야?’ 그럴 때 ‘사람이야.’ 그것은 뭐냐 하면 정체에 관한 질문이지요. 그렇지만 ‘저 사람이 왜 공부하는 시간에 다리를 덜덜 떨어?’ 그러면 그것은 작용에 관해서 묻는 것이에요. 그러면 예를 들어 ‘루게릭병에 걸렸대.’ 아니면 ‘파킨슨병에 걸렸대.’ 아니면 ‘그 집안의 피가 좀 그렇대.’ 그런 것은 모두 기능과 작용에 관한 것들이에요. 그렇지요? 그러면 사람의 본질이 같아도 성질은 좀 다를 수 있잖아요? 그렇지요? 그런 식으로 사물들을 볼 때 나누는 것이에요. 성경에 어디에 그런 것이 나오느냐고 자꾸 그러는데 성경은 철학책이 아니니까 그런 것까지는 설명을 안 하지요. 우리가 이성으로써 그런 구분을 하는 것이에요. 이것은 옛날에 설교시간에 다 이야기한 것이에요.
그 다음 ‘그래서 그분께서는 자신에게 고유하며’ 자신에게 고요하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에게만 있는 것, 그러니까 성자의 인격은 성자의 것이지 성부의 것이 아니고 성령의 것도 아니에요. 그런 점에서 고유한 것이죠. 그 다음에 ‘고유하며 아버지로부터 구별된 인격 외에 어떤 것으로도 아버지와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면 이게 도대체 무엇이냐? 굉장히 어려운 것이에요. 그러니까 설명을 잘 들어요. 그럼 이게 무슨 뜻인지 잘 들어보세요. 여기에 이렇게 하나님이 계셨어요. 어휴, 너무 불편해요. 말로 설명할게요. 사실 말로 설명하는 것이 정신을 집중하게 되고 좋아요. 하나님은 원래 한분이시잖아요? 그렇지요? 지금도 한분이시고 옛날에도 한분이시고 그런데 순서상으로 보면 성부가 먼저잖아요. 왜냐하면 성자가 성부에게서 나으셨기 때문에 그래요. 그 다음에 성령이 나중이잖아요. 왜냐하면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으시니까…….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러므로 성부에게서 성자는 나시고 성부와 성자에서 성령이 나셨으므로 그러므로 성부는 성자와 성령 없이 계시던 때가 있었고 그리고 성자와 성부는 성령 없이 계셨던 때가 있었고 그리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계셨다고 말할 수 있어요? 없어요? 확신을 가져야지요? 교리반을 다 했잖아요? 그런 말이 성립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다고 큰소리로 말한 사람이 누구에요? 정 집사님이죠? 박 집사님? 그게 어떤 의미에서 말이 안 돼요? 그렇지요!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때’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자는 성부에게서 나시고 성령은 성자와 성부에게서 나셨지만 성자와 성령 없이 성부가 계시던 때가 없었어요. 그 이야기입니다. 이해되세요? 옛날에 사각형의 비유도 생각이 나지요? 사각형의 비유가 생각 안나요? 차원을 달리하게 되면 우리들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모든 질서가 다 다르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과학의 세계가 들어가 보면 굉장히 놀라워요. 시간조차도 상대적인 것이잖아요? 그렇지요? 모든 것이 상대적인 것이에요.
시간이 어떻게 상대적일 수 있느냐고 사람들이 막 그러니까 아인슈타인이 그랬는데 아인슈타인은 굉장히 유머러스한 사람이었대요. ‘아니 시간이 상대적이지요.’ ‘어떻게 상대적일수가 있습니까?’ 그 당시 뉴턴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이야기에요. ‘당신 무릎에 50㎏의 물건을 올려놓는다고 칩시다. 돌멩이 50㎏를 올려놓았을 때하고 애인 50㎏를 올려놓았을 때 기분이 똑같겠습니까?’ 그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몰랐던 것이에요. 그 무게 자체가 상대적이라는 것이에요. 안 그래요? 오늘 저녁에 가서 실험을 해보세요. 무게가 많이 느껴지면 에베소서 5장을 다시 읽어야 해요. 참 재미있네요. 그리하여 이렇게 늑장을 부릴 때가 아닌데…….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하면 자, 여기보세요. 아주 중요해요. 성부가 이렇게 계신데 본질이 있을 것 아니에요. 아들이 이 본질이 분리되거나 증진되어서 아들이 되었다면 그러면 그것으로써 또 다른 신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아니 집사님하고 나하고 있는데 우리들이 끌어안고 있다고 해서 한사람이라고 그럴 사람이 누가 있느냔 말이에요. 벌써 본체가 둘이 되었는데……. 여기까지 이해되지요? 그러면 성령은 또 다시 성령도 같은 하나님이니까 동일 본질이어야 하잖아요. 그러면 그 본체에서 또 다른 본질이 나와서 하나의 신을 형성했다면 이번에는 삼신이 되는 것이에요.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지요? 그러면 ‘아, 그것은 아니구나! 그럼 하나다.’ 그러면 삼위일체가 안 되는 것이죠. 그런데 성경은 성부는 성자와, 성부와 성자는 성령과, 의사를 교통하고 서로 교제할 수 있는 독립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면 인격이 있어야 될 것 아니에요. 그것을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위격이라는 것이에요. ‘페르소나’ 위격이라고 그래요. 그러면 하나님은 인격이 몇이에요? 셋이에요. 그런데 셋인데 그 본질은 하나라고 그러는 것이 삼위일체의 신비에요. 그래서 삼위일체라고 할 때 삼은 셋이고, 위는 인격이고, 일은 하나고, 체는 신적 본질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조롱하는 것이 이것이에요. ‘너희가 말하는 하나님이 무엇이냐? 그러면 몸뚱이가 하나고 몸이 셋 달린 괴물이 너희가 말하는 하나님이냐?’ 이것이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사람들의 조롱이었거든요. 그것은 뭐 사람들이 몰라서 그러는 것이죠. 성경이 분명히 성부, 성자, 성령 각 하나님을 다른 분으로 묘사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도 완전히 다른 분이 아니라 인격을 가지고 계시고 서로 교통하시지만 하나의 실체를 가지신 분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에요. 이해되세요?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렇게 되는 것이죠.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은 불변하시기 때문에 신이 변한다면 이것은 신이 아니죠. 변해서 무엇이 생겼으면 예전에는 결함이 있는 것이고, 왜? 있어야 될 것이 없었으니까. 이해되지요? 그 다음에 만약에 있던 것이 없어졌다면 무슨 문제가 되지요? 예전에 없어도 되는 것인데 있었으니까 예전의 신이 불완전해지는 것이에요. 이해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일단 하나님의 신적 본질에는 변함이 없어야 된다고 보는 것이에요. 그리고 ‘태어났다, 발출되었다’는 이 모든 것들은 무엇을 가르치느냐하면 위격이 생겨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에요. 그러면 사람들이 이렇게 물을 수 있겠지요. ‘아니 그러면 아까의 논리대로 한다면 하나의 위격인 하나의 인격을 가지고 계신 성부가 두 번째 인격인 아들이 필요했다면 그러면 그 하나님이 모자라는 것이었고 만약에 필요가 없는데도 생겨났다면 아버지의 의지 없이 생겨났으니까 아버지의 능력에 문제가 있든지 아니면 예전에 한 인격으로 계셨던 것이 결함이 아닙니까?’ 그러면서 이제 세 번째 위격이신 성령에 대한 논증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 것이에요. 그러면 얼마든지 사람들의 입장에선 이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 아니에요. 그렇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답변할 수 있느냐하면 그것은 신적 본질에 변화가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그렇게 설명할 수 있지만 이것은 신적 본질 자체는 불변한데 인격을 만드신 것은 하나님 당신 자신 안에서 아들과 교통하시고 또 성령과 교통하시는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으시고 성령이 나오시게 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답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면 그것은 하나의 본질의 쪼개짐이나 새로운 본질의 증대가 아니라 하나의 본질이 새로운 인격을 본질의 변화 없이 나으심으로 궁극적으로는 그 세 인격이 교통하심으로써 사랑이 되시고 그리고 이 세상의 생명이 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자, 이렇게 되지요. 이런 질문을 하잖아요. 사랑할 대상이 없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사랑이셨을까? 이런 질문이 나오죠. 어떻게 생각하세요? 인간이 생겨나자 하나님은 사랑이 되신 것이에요? 아니면 사람이 생겨나기 전에도 하나님은 사랑이셨어요? 후자에요? 그럼 사랑할 대상이 없는데 어떻게 사랑일수 있어요?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할 대상이 있기 전에도 영원하신 삼위의 교통 안에서 스스로 사랑이셨던 것이고 세계는 하나님의 그 사랑이 밖으로 드러나는 표현이에요. 이것은 무궁무진하고 엄청난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어요. 무슨 이야기인지 알지요? 부부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동물의 세계, 식물의 세계까지 모든 세계를 연장해서 보면 그런 사랑의 확장이 이제 이 창조 세계의 탄생이라고 보는 것이에요. 어쨌든 그렇게 정리를 하면 되요. 인격으로는 구별되지만 그러나 본체로는 구별되는 분이 아니다.
166p로 넘어가면 ‘성자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한분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그분을 참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로 여긴다. 우리의 모든 신뢰를 그분 아버지께 세우듯이 또한 그렇게 아들에게 세워지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한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에요? 인격이 셋인데도 한분이시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그렇지! 일체이시기 때문이에요. 신적 본질이 동일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은 한분이시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도 잘 해야 해요. 예수님 우리의 예배를 받아주시옵소서 이것은 적합한 표현이 아니에요. 하나님이라고 그래야지요.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위별로 첫 주에는 성부께 둘째 주에는 성자께 그런 것이 아니라 한 본질이신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이제 교통은 다르지요. 그것이 이제 개별적 위의 교통 교리에요. 그래서 우리가 성부, 성자, 성령은 항상 같이 계시지만 우리가 우선적으로 삼위 중 어느 위와 교제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영혼과 마음에 각각 다른 특징들이 주어지는 것이죠. 그래서 성부와 교통할 때는 하나님의 사랑이, 성자와 교통할 때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고 성령의 교통할 때는 위로가 있는 것이죠. 그러면 사실은 이 세 가지의 경험이 각각 다 완전히 구별될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죠. 은혜가 있는 곳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고 고난을 받는 나에 대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되지요? 왜 그렇게 생뚱맞게 모른 척 해요. 이해되지요? 이해를 못할까봐 걱정이에요. 여러분들은 교리 반에서 공부를 잘하시는 분들만 모였으니까 말이죠.
167p 셋째 줄 ‘뿐만 아니라 이 세 인격들의 공동행위가 천지창조에 있었으니 아버지의 이 음성으로 명확해집니다.’ 그 다음에 12번으로 가면 ‘나아가서 우리는 고백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로 아버지로부터 우리에게 보내지셨으며’ 누가? 예수 그리스도. ‘자기의 신성을 우리의 육체와 연합시키기 위해 육신을 입으셨다고 믿는다.’ 우리의 육체와 연합시킨다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의 육체와 연합시키셨다기 보다는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으심으로써 자기의 신성을 인성과 연합시키셨다고 믿는다는 뜻이에요.
그 다음에 169p로 넘어가면 여기에서 이중의 신지식 문제가 나와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하면 이렇게 나옵니다. 169p 다섯째 줄 줄치세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는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바울은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최소한 하나님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이 이름을 생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 중보자를 어디에서 찾아야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분께 이르게 되는지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고 그분께서는 사랑이라고 덧붙이셨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의무가 무엇이라고요? 하나님을 아는 것이에요. 그것을 좀 더 확장하면 어떻게 되요?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이라고 표현하면 되요. 그 삶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삶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의 모든 고통은 이 세 가지의 결핍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에요. 이 세 가지가 온전해지는 것이 성화의 삶이에요. 맨 선두에 가는 것이 아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일차적 대상은 지성이에요. 자, 그러면 계속 보겠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러면 구원을 받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을 앎으로써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에요. 그렇지요? 알아야지만 믿을 수 있고 믿을 수 있어야지 순종할 수 있으니까 그러면 구원을 받는 것도 하나님을 알아야지 받는 것이고 그 다음에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야 하잖아요? 당연하잖아요? 그러면 그런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말하는데 그러면 이 지식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겠느냐? 그거에요. 그러면 가능성은 무엇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 이게 가능성이지요. 또 하나의 가능성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당신께 가는 길을 가르쳐주시는 것이죠. 이것을 가지고 이제 인간이 그렇게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혹은 없다. 그것을 가지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는 것이죠. 이것은 기독교 안에서도 논쟁이 벌어져요. 그러니까 그럼 우리는 어떻게 볼 수 있겠어요?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바는 타락한 인간의 절망적인 상태는 가장 으뜸가는 것이 지성이 더렵혀져서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 마치 캄캄한 밤의 장님과 같이 되어버린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 인간의 마음속에는 이중의 어두움이 들어오게 되는 것이죠. 자, 이중의 어두움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 비슷하기는 해요. 그러나 정답은 아니에요. 뭐냐 하면 인간의 어두움은 결국 영혼의 어두움과 지성의 눈멂이에요. Darkness of soul, blindness of mind.가 되는 것이에요. 그게 아까 저 형제가 이야기한 주관적인 어려움과 객관적인 어려움과 연결이 되고 저 자매가 이야기한 오성의 어두움과 이성의 어두움이라는 말과 같아지지요. 오성과 지성의 어두움이라고 그러면 안 되고 오성과 이성의 어두움이라면 말이 되지요. 그래서 이제 그렇게 설명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런 어두운 상태가 되는 것이죠. 그러면 어두운 밤 이것은 저 형제의 표현대로 객관적인 어두움이고 장님 이것은 주관적인 어두움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영혼의 어두움과 지성의 눈먼 상태가 되는 것이에요.
자, 그러니까 결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을 더듬으려고 할 때에 우리는 오류에 빠지게 되고 그 오류가 경건을 대치한 많은 부산물들을 만들어내는데 신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불분명한 공경이에요. 이렇기 때문에 이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인간이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는 그것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래서 하나님은 그러면 우리들이 알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무엇을 믿어야할지 명료하게 당신께로 오는 길을 알려주셨는데 그분이 바로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시간적으로 보면 창조주에 대한 앎에서 시작을 해요. 그런데 창조주에 대한 희미한 앎의 기억으로는 그분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리만치 확고한 지식을 가질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그분을 우리들이 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또 무엇을 원하시는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명료하게 보여주어요.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창조주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라고 말하고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대조되는 것이에요. 잘 들으세요. 시간적으로는 창조주에 대한 지식이 먼저이고 그 지식을 배경으로 직접 그분을 찾아갈 수 없어서 구원에 이를 때에 구속주에 대한 지식이 우선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시간적, 논리적으로는 창조주에 대한 지식이 먼저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구속주에 대한 지식이 먼저 있고 그 구속주를 통해서 창조주를 알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이것을 전부다 시간 순서대로 본다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희미한 지식은 구속주를 앎으로써 그분이 어떤 분인가 알게 되고 그분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되면서부터 그분이 창조하신 모든 이 세계와 구속받아야할 인간들에 대한 보다 더 분명한 이해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렇게 해서 결정되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만약에 시험문제가 나올 때 인간이 구원에 이르는 길에 있어서 창조주에 대한 지식과 구속주에 대한 지식 중 어느 것이 우선하느냐? 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되요? 그렇죠. 구속주에 대한 지식이라고 말해야 됩니다. 또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시간적으로 창조주에 대한 지식이 먼저이냐 구속주에 대한 지식이 먼저이냐? 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되요? 그렇죠. 창조주에 대한 지식이 먼저라고 대답해야합니다. 그 다음에 또 나올 수 있는 시험문제가 무엇이죠? 창조주에 대한 지식으로써 구속주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느냐? 가질 수 없지요.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모든 종교는 믿어본 다음에 마지막에 예수께로 와야 합니다. 그런데 안 오잖아요. 그렇게 믿으려고 했던 사람일수록 더 예수께 안 나오는 것이에요. 그렇죠.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여기에 나와요. 그것을 가리켜서 이중의 신지식이라고 불러요.
자, 그 다음에 171p로 넘어가면 ‘나아가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자가 되실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셨음은 우리를 위함이셨다.’ 왜 그럴까요? 결국은 중보자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위하셔야했기 때문에 하나님이셔야 했고 한편으로는 우리를 위하는 분이어야 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인간이어야 했잖아요. 그래야지만 진정한 중재자가 될 수 있잖아요. ‘그래서 결국은 참 하나님과 사람이셨음은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또한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그분의 일은 죽음을 삼키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을 삼키는 것은 생명이 하는 일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그분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느냐하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은 죄란 말이죠. 죄의 결과로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죠. 그래서 사망은 육체의 사망이 있고 영혼의 사망이 있는데 본질적으로 우리들이 두려워해야할 사망은 두 번째 사망이에요. 육체의 사망은 첫 번째 사망이지만 다시 몸을 덧입을 수 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에요. 마지막 날에는 주님을 믿었던 사람들만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불신했던 사람들도 부활하지요. 그래서 각각 육체를 다시 덧입어요. 그래서 불신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받기에 적합하도록 육신을 입고 그리고 또 주님을 잘 믿는 사람은 영생을 누리기에 적합하도록 몸을 입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누구도 진정한 의미에서는 죽는 사람은 없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첫째 사망은 그렇게 중요한 사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단 말이에요. 그러면 두 번째 사망이 중요한데 그 두 번째 사망은 죄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영원한 형벌이라는 것이에요. 그러면 모든 인간이 그 죽음의 효력아래 있는데 그것을 무효화시키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인류의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감당하시면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들을 위한 형벌을 감당하시면 그러면 그 덕 때문에 이제 죄를 범한 사람이 용서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런 것 아니에요.
우리가 교통위반을 하면 딱지가 날아오잖아요. 그런데 내가 범칙금이 오만원이 나왔는데 우리 집사람이 가지고가서 은행에 가서 돈을 내려고 하니까 ‘당신은 본인이 아니기 때문에 돈을 안 받아요.’ 그래요? 그러지 않잖아요. 요즘은 뭐 인터넷뱅킹으로 입금을 해도 되더라고요. 엊그제도 김 기성 간사가 내 차를 몰고 어디 서있는데 주정차 위반이라고 딱 찍혀서 32,000원이 날아왔어요. 그것도 내야 되는데……. 그것을 내잖아요. 그러면 우리 집사람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내 범칙금 나온 것을 내주어도 나는 이제 그 범칙금에서 자유로워지잖아요. 그게 대속이에요. 그래서 그런 대속의 원리를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형벌을 그리스도께 담당시키신 것이고 그것의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한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죄에 대한 무름이에요. 무름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대가를 지불해서 배상을 해주어서 각주204번에 보면 ‘싸디스빠게레’ 라는 단어가 나오잖아요. 여기서 영어의 Satisfaction이 나오는 것이에요. Satisfaction이 무엇이지요? 만족이에요. 만족은 무엇이냐 하면 만족을 안했던 사람이 만족하는 것이에요. 왜? 손해를 입힌 것이에요. 마음이 상하고 손해를 봤어요. 누군가 그것을 물어서 보상을 해주는 것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되지요?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서 만족이 되는 것이에요. 그렇죠?
옛날에 내가 직장에 다닐 때 여직원 하나가 있는데 그렇게 돈을 잘 꾸러 다녔어요. 여러 사람이 돈을 떼먹혔어요. 가끔 그 자매이야기가 나오면 욕을 하는 것이죠. ‘그렇게 칠칠맞고 그러더니 남의 돈만 떼어먹고 갔어!’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내가 빌려주는 것이 아닌데…….’ 그러고 나서 여러 해가 지났어요. 한 5년쯤 지났어요. 어느 날 나타났어요. 그러더니 자기가 돈을 꾼 사람들을 다 불러내서 빚진 것을 다 갚고 그 다음에 롯데호텔에서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고 그리고 그 다음에 봉투 하나씩을 다 돌렸어요. 나중에 준 봉투가 처음 빌려간 돈을 갚은 것보다 더 큰 봉투였어요. 별 볼일 없던 자매였는데 한국말도 잘 못하는 웬 일본 남자가 열심히 따라다녔는데 나중에 시집을 가서 보니까 돈 많은 재일동포였어요. 나도 한번 만나서 차만 얻어마셨어요. 그런데 돈이 많으니까 그 때……. 그때가 언제야? 1979년인가 1980년인데 한국에 와서 백만 원을 쓰고 간다고 그래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액수의 돈이었어요. 그때 태어났어요? 그때 몇 살이었어요. 다섯 살? 십 원만 주어도 감지덕지할 때인데 백만 원을 쓰고 간 것이에요. 충분히 Satisfaction이 되었지요? 물러주었으니까……. 별로 다투고 그래도 충분히 Satisfaction만 해주면 다툰 게 오히려 더 좋은 사이가 될 수도 있어요. 그렇지요?
자, 그 다음에 172p로 넘어갑니다. 이것은 그냥 읽어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 다음에 176p로 갑니다. ‘그러나 속성들의 특성들의 교류는 하나님이 자기피로 교회를 사셨다는 말씀과 영광의 주가 못 박히셨다는 말씀에 나타난다.’ 거기 줄치세요. 눈여겨 보셔야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고유한 특성에 따라 피도 없으시고(당연하지요.) 고통을 겪지도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자신의 피를 쏟으셨으므로 그분의 인성으로 수행한 것은 신성으로 옮겨진다.’ 이게 바로 속성교류의 교리에요. 자, 성부는 한 성품을 가지고 계신데 그리스도는 두 성품을 가지고 계시죠? 그게 무슨 성품이에요?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신 것이죠. 인성은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시기 위해서 취하신 인성이에요. 취하신 후에는 나중에 없애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인성을 영원히 계속해서 가지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신성만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인성도 영원하신 것이에요. 자 그러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신데 인격은 몇이에요? 하나죠. 두 인격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되지요? 다중인격이 되잖아요. 그러면 안 되죠. 한 인격 안에 두 성품이 존재하는 교리를 가리켜서 양성일인격의 교리라고 합니다. 혹은 양성교리라고 말합니다.
자, 그러면 이제 신학교에 다닐 때 어떤 사람이 이렇게 질문했어요. 1학년이니까 그런 질문을 하지요. ‘교수님 예수님이 하늘에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내려오셨잖아요?’ ‘그럼요. 맞습니다.’ ‘그리고 또 보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사 그랬잖아요?’ ‘그랬죠.’ ‘그러니까 33년 동안 천국에서 출타하신 것이네요.’ 이렇게 여러분들에게 물었어요. 그러면 무엇이라고 대답할거예요? 자, 집사님 뭐라고 대답하시겠어요? 확실히 있을법한 질문이지요? 오호, 아주 정확하게 답변하셨네요. 이것을 무엇이라고 그러느냐하면 엑스트라 칼비니스틱꿈의 교리라고 그래요. 그래서 뭐냐 하면 그런 질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정확한 것이에요. 예수님은 인성으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한 공간 안에 머무르시는 가운데 신성을 지니셨지만 신성은 장소에 매이지 않고 온 우주에 편재하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33년간 인간으로 여기에 계실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온 우주의 하늘에 안 계신 곳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면 교리반 수료자다운 대답이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루터파 같은 데서는 이러한 교리들을 좀 다르게 해석해요. 어떻게 해석하느냐하면 신성은 편재하지만 인성은 장소에 한정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우리들의 입장이에요. 그런데 루터 파에서는 신성도 편재하고 인성도 편재한다고 보는데 이 교리가 왜 중요한가 하면 성만찬 이론에서 떡과 포도주를 이야기하면서 크게 세 가지 견해로 나누어지게 되지요. 교리 반에서 배웠지요. 첫째가 가톨릭의 화채설이에요. 거기서는 뭐냐 하면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라고 해요. 그런데 가시적인 형체로는 빵과 포도주의 양상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실제로는 예수의 살이고 예수의 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루터 파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네 가지로 이야기를 하는데 공체설이에요.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는 그 빵과 포도주가 축사함으로써 그 자리에서 사제의 축성으로써 빵이 예수의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예수의 살과 피는 바로 그 떡과 포도주 아래와 옆에 함께 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온 우주에 그리스도의 인성이 안 계신 곳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떼었을 때 그 빵 안에는 그분의 인성이 존재하는 것이죠. 그러면 그렇게 따지면 빵에만 인성이 존재하는 아니라 어디서나 인성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는 것이죠. 이안에도 그리스도의 인성이 있을 수 있는 것이죠. 그게 공체설이에요. 이해되지요?
츠빙글리는 완전히 그것을 밀치면서 ‘그것은 단지 기념일뿐이야.’ 그렇게 얘기해요. 칼빈이 그것들을 다 정리하면서 가장 성경적이고 은혜로운 교리를 세우는데 그게 무슨 주장이죠? 영적임재설이죠. 그래서 어떻게? 떡은 떡이고 포도주는 포도주일 따름이지만 그것이 상징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인데 믿음으로 이 성찬에 우리가 참여할 때 성령님은 우리에게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공로와 효력을 생각나게 하신다. 단지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기운과 부활의 능력을 영적으로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게 해주신다. 그래서 그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이게 가장 성경의 정신에 부합하면서도 탁월한 해석이고 견해인 것이에요. 그래서 잘 들으세요.
177p로 내려가 보면 밑에서 7째 줄을 보면 ‘확실히 우리는 두 그리스도를 만들지 않고 단순히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신 분이 이렇듯 우리의 육체를 입으셨다는 사실과 동일한 한분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사람으로서 양성이 하나이나 혼합되지는 않는다고 고백한다. 보세요. 그리스도의 양성교리는 수많은 이단들이 나오는 블랙홀이었어요. 대표적인 것은 이것이에요. 그리스도는 인간일 뿐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이것은 단성론이에요. 단성론인데 인성단성론이에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지 결코 인간이실 수 없다. 그러면 인간으로 나타난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의 환상처럼 나타난 것이지 그분은 하나님이셨을 뿐이다. 이것은 신성단성론이에요. 그렇게 이단으로 나뉘고 단성론은 전체가 이단이에요. 그러면 양성론이 있지요. 여기서는 무엇이 문제가 되느냐하면 양성의 관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 문제에요. 양성을 인정하는 사람은 모두 신성과 인성이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해요. 첫째 이단이 무엇이냐 하면 인성과 신성이 예수 안에 있지만 둘은 상관이 없다고 둘을 갈라놓는 것이에요. 속성교류를 거절하는 것이죠. 부인하는 것이에요. 상관이 없다는 것은 이단이에요. 두 번째 이단은 무엇일까요? 두 개가 섞였다. 잉크와 물이 섞이듯이 섞여서 그것을 구분해낼 수 없다.
그때 아우구스티누스가 아주 기가 막힌 비유를 들지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은 한 인격 안에 공존하는데 잉크와 물같이 섞이는 것이 아니라 빛과 공기처럼 섞인다. 아하! 감탄이 나오죠. 아하, 그렇구나! 빛이 공기의 본질을 바꾸어 놓아요? 빛을 비치면 공기가 독가스로 변하나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 다음에 공기가 빛을 바꾸어 놓아요? 빛이 물속을 비칠 때의 빛과 공기 속을 비칠 때의 빛이 본질이 달라요? 아니죠. 물속에 빛이 비칠 때 누가 그 물과 빛을 구분시킬 수 있겠어요? 갈라놓을 수 있겠어요? 그러나 누가 그 둘이 혼합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제 관계가 없다는 것도 이단이고 섞여서 혼합되었다는 것도 이단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두 개가 있으면서 서로 교류한다고 말해요. 이게 속성교류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인성으로 하신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신성으로 옮겨져서 하나님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실 수 없는 분이시지만 죽으심의 그 효과를 아버지께 올려 드릴수가 있게 되는 것이죠. 참 놀랍죠? 다 읽고 오셨지요? 그런 이야기로 계속 이어져요. 다 그런 것이고요.
그리고 184p로 넘어가면 ‘그 자신이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분명히 언급됩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연옥이라는 이름으로 조작된 어떤 장소로 옮겨가지 않으셨으며 설화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신빙성이 없다고 보는 것이죠. ‘이 설화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항상 내미는 베드로의 말도 이와 같은 의미에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2009. 12. 26 하반기 성화반
성화반 Ⅶ
오늘 진도는 190p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공부를 하고 발표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자, 190p입니다. 사도신경의 해석 세 번째입니다.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지금 제가 외운 그 부분을 오늘 공부할 범위에서 전부 다 해설을 하고 있어요. 자, 우선 제일 먼저 ‘내가 성령을 믿사오며…….’ 그랬거든요.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성령을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하나님이시고 줄치세요. 본질상 하나님이시며 거룩한 삼위일체의 셋째인격이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본질이시며 함께 영원하시고 전능하시고 모든 것들의 창조주시라고 믿는다고 고백한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말한 바대로 구별된 세 인격들이지만 본질은 하나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렇죠? 본질이 다르면 성부에게서 성자가 낳으셨다고 할 때 본질이 본질을 낳으셨다고 하면 무엇이 된다고 했죠? 이신이 되는 것이죠. 신이 신을 낳으니까 말이죠. 그 다음에 성령이 또 낳으셨다고 하면 삼신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안 되고 신적인 본질 자체는 분할되거나 증대되거나 나눠지거나 변형이 오거나 구획 지어지는 것 없이 하나의 신적 본질로써 인격만 셋이신데 이 세 인격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영원 전 피조물이 생기기 전에 아버지의 인격이 아들을,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성령의 인격이 이렇게 나으시기 때문에 성자와 성령 없이 성부 홀로 계시던 때도 없고 성자가 성부와 성령 없이 홀로 계시던 때도 없고 성령이 성부와 성자 없이 계시던 때도 없는 것이에요. 이것을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하기 매우 어려운 신비에요. 그래서 오늘 칼빈이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그 다음 줄에 ‘따라서 이것들은 깊고 숨겨진 비밀들로써 성찰되기 보다는 찬미되어야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믿음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지금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이 사실을 말하고 있지만 어떻게 세 인격이신 하나님이 하나의 신적 본질을 가지실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성경이 그 과정을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고 또 말해준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아마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에요. 그래서 이것을 우리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인다고 보는 것이죠.
그러면 이제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하지요. 성경에 삼위일체가 어디 있느냐?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신학자들이 만든 용어에요. 그런데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만들지 않으면 설명이 되게 길게 되는 것이죠. bus가 영어잖아요? 우리말로 풀어 봐요. 뭐라고 풀 수 있겠어요. 뭐라고 이야기를 해도 버스를 모두 우리에게 말해줄 수는 없을 것이에요. 그래서 편의상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에요. 그렇게 따지면 중고등부라는 말도 성경에는 안 나와요. 목사는 나오지만 담임목사라는 말도 안 나오잖아요? 그렇지요? 그렇지만 성경은 지금 말씀드린 하나님이 한분이시라는 사실을 시종일관 강조하고 그러면서도 아버지와 아들은 다른 분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해요. 성령도 다른 분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그것을 전체적으로 성경의 증거를 그릴 때에 우리는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그려내게 되는 것이에요. 이해되시죠?
자, 그다음 그 밑에 보면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감화된다. 다음과 같은 말에 설득된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길이 없듯이 우리를 아버지께 이르게 하시는 인도자와 지도자는 성령 외에 없으며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은혜 자체가 성령의 능력이며 작용입니다. 그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은총에 속한 것은 무엇이든지 실행하십니다. 그 은혜를 통하여 모든 것을 행하시고 지키시고 생기를 주시고 살리십니다. 그 은혜를 통하여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정결하게 하시고 자신에게 우리를 부르시고 이끄셔서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요.
자, 그러면 구원과 관련해서 삼위일체의 사역을 이런 식으로 정리할 수 있겠지요. 우리를 구원하심에 있어서 성부, 성자, 성령, 그렇게 되겠지요? 그러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원인이 되신단 말이에요. 원인이 되시는데 그러면 성부, 성자, 성령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모두 관여하실 것 아니에요? 그렇죠? 그러면 그 원인을 우리들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하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죠. 성령은 지금 여기서 말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작용하시는 것이잖아요. 작용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부르시고 믿어지게 하시고 은혜를 입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이렇게 우리를 데려가시는 것 아니에요? 그렇죠? 그러니까 뭐냐 하면 성령의 경우에는 우리들이 그 성령이 우리를 위한 작용적 원인이 되실 수 있다고 우리들이 말할 수 있는 것이죠. 그 다음에는 뭘까요? 성자의 경우에는 성령이 아무리 그렇게 우리를 믿게 하시려고 해도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아무리 믿어도 될 수 없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그분이 공로적 원인이 되시는 것이에요. 그러면 아들과 성령을 통해서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함께 연결되어서 우리를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성부는 시원적 원인이 되시는 것이에요. 성령은 작용적, 성자는 공로적, 성부는 시원적으로……. 아버지께서는 원저자이시죠. 그렇게 해서 이제 우리의 구원과 삼위적 원인이라는 제목을 붙이면 되겠지요. 우리들이 이렇게 분석을 해서 설명할 수 있겠지요.
그 다음에 성령의 중요한 작용에 대해서 나오는데 ‘그러므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 안에 머무시는 동안 성령께서는 자신의 빛으로 우리를 비추셔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부요함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배우고 명확하게 인식하게 하신다.’ 거기 꼬불꼬불하게 줄치세요. 아주 중요해요. ‘성령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불로 우리의 심장을 태우시고 나아가서 날마다 우리의 욕정에 속한 악행들을 푹 삶으시고…….’ 재미있지요? 푹 삶으면 어떻게 될까요? 죽잖아요. 여러분 나는 진짜 못 먹겠더라고요. 요리가운데 추두부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미꾸라지를 소금에 씻으면 죽으니까 그러면 요리가 안 되니까 물에 깨끗이 씻어서 큰 냄비에 넣어요. 그리고 불에다 올려놔요. 그러면 점점 뜨거워지니까 미꾸라지들이 난리가 나죠. 그때 차가운 두부를 집어넣어요. 그러면 미꾸라지가 어떻게 될까요? 두부 속으로 막 들어가는 것이죠. 그리고 삶아버리는 것이죠. 그러면 미꾸라지가 두부 사이사이로 들어가서 거기 동글동글 뭉쳐서 익어요. 그리고 그것을 잘라서 요리를 해서 먹어요. 나는 그것을 못 먹겠어요. 말하자면 그것이죠. 아무리 활발히 움직이는 고기라고 끊는 물에 푹 삶아버리면 고래라도 어디로 가겠어요? 죽지요. 그러니 우리의 정욕을 성령은 그렇게 푹 삶으시는 것이죠. 결국은 무슨 뜻이냐 하면 불태우는 것은 존재 자체를 없애는 것이고 삶는 것은 생명을 죽여 버리는 것이에요. 그런 묘사에요.
자, 여기서 우리들이 요새는 한동안 잘 안 쓰는 단어인데 그게 뭘까요? 사랑을 나타내는 두 단어에요. 어휴 학생들이 대답을 빨리 또렷하게 해야지만 선생님이 더 좋은 것을 가르쳐주지요. 그렇지요! 까리따스와 꾸삐띠따스라는 라틴어에 두 단어가 있어요. 둘 다 사랑을 가리키는 단어에요. 꾸삐띠따스는 어디서 많이 보지 않았어요? 그렇지요! 큐피드에요. 신화에 보면 큐피드가 어떻게 나오지요? 애기천사인데 화살을 들고 있잖아요? 그게 큐피드거든요. 큐피드가 화살을 쏘면 그 화살을 맞은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 화살을 들고 있는 큐피드를 자세히 봐요. 그러면 애기에요. 애기다리의 애기 몸집에 날개가 있는데 화살을 이렇게 겨누고 늘 다니는데 조각상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봐요. 얼굴은 늙은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꾸삐띠따스의 사랑을 가지고 장난을 하면 늙지를 않아요. 좋게 얘기하면 늙지 않는 것이고 나쁘게 얘기하면 철이 안 드는 것이에요. 그래서 늙은이가 되었는데도 늘 불장난이나 시키러 다니는 거란 말이에요. 가슴에 안 와 닿아요?
그래서 까리따스는 제가 번역을 해드렸지요. 뭐라고 했어요? 지순애, 꾸삐띠따스는 무엇일까요? 그렇지요. 육욕애에요. 욕자를 잘 봐요. 욕자가 이렇게 쓰는데 이것도 욕자고 이것도 욕자인데 구별하기 굉장히 어려울 것이에요. 맞지요? 그런데 두 개에 차이가 있어요. 그러면 제가 한자 퀴즈를 낼게요. 이렇게 합하면 욕망이 되겠지요? 욕망이라고 그럴 때 1번을 써야할까요? 2번을 써야할까요? 2번. 또 반대의견 없어요? 1번? 정답은 무엇일까요? 하하, 둘 다 됩니다. 둘 다 되는데 밑에 것은 죄를 동반한 욕망이에요. 성적 욕망 그러면 두 번째에 해당하는 욕자를 써요. 그런데 정상적인 부부관계에서도 이 두 개를 써요. 그 다음에 물을 마시고 싶은 욕망 이럴 때는 1번을 써요. 몰랐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내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이것은 1번이죠. 그 정도의 미세한 구분까지 알정도로 한자를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그런데 이렇게 여러분들도 별로 없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된 것이에요. 성화반의 보너스에요. 그러니까 식욕이라고 그럴 때는 1번을 써요. 성욕 그럴 때는 2번을 써요. 두 자가 틀려요.
자, 어쨌든 까리따스는 지순애, 꾸삐띠따스는 육욕애에요. 잘 들으세요. 그런데 성령이 인간의 마음속에 임하시게 되면 까리따스는 up되고 꾸삐띠따스는 down되는 것이에요. 똑같은 욕망인데 성령이 오시면 까리따스는 확 일어나고 꾸삐띠따스는 삶아지고 불태워져서 없어지는 것이에요.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뭐라고 그래요? 은혜라고 그래요. 은혜의 정체는 성령님이에요. 신자의 마음 안에 주관적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은혜의 정체는 성령이시다. 그래서 죄 죽임의 교리에서 이런 것들이 집중적으로 나오잖아요? 그렇죠? 죄는 죽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불러일으키는 것이에요. 그래서 교회가 이렇게 끊임없이 각사람 각 사람이 성령의 은혜 안에서 까리따스는 살아나고 꾸삐띠따스는 죽어갈 때 사람들을 섬길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수 있고 버릴 수 있는 이런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에요. 이해되지요? 이것은 다 배운 것이에요. 종합이에요.
192p 4번 사도신경의 해석 네 번째입니다. 거룩한 교회와 (공교회로 나와요.) ‘끄레또 쌍담 에끌레시앙 까똘릭깜’ 끄레도=나는 믿습니다. 쌍땀 에끌레시앙=거룩한 교회 그런데 어떻게 ‘까똘릭캄’ 이것은 가톨릭을 믿는다는 것이네? 그런데 사실 가톨릭이라는 단어는 총체적인, 보편적인, universal의 뜻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뭐라고 번역했느냐하면 ‘거룩한 공교회와 혹은 보편교회와 거룩한 보편교회와 성도들의 교통과 죄를 사하여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193p 맨 윗줄에 보면 까니스 렉스레찌오넴 이라고 나오잖아요. ‘육체의 다시 사는 것과 육체의 부활과’ 비땀 아이떼루남 ‘영원한 생명 혹은 영생을 믿사옵나이다.’ 이렇게 되는 것이에요.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여기서 교회를 말하고 있지요. 교회를 말하고 있는데 이 연합체는 보편적 즉 전체적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둘, 혹은 셋이 발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것이에요? 서울에만도 오천 개가 넘는 교회가 있는데 두, 세 개가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그것은 지역에 있는 눈에 보이는 교회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실제의 영적인 면에서 보면 교회는 모두 한분이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고 할 때는 열린 교회의 머리가 따로 있고 닫힌 교회의 머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시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는 이 보편교회를 가리키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이 이렇게 교회의 이기주의에 빠져있는 것들은 매우 잘못된 것이에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교회가 신앙을 양보하고 무조건 연합을 이루는 종류의 연합도 바람직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교회를 일체되게 하시는 방법이 있어요. 무엇과 무엇을 통해서 교회가 하나가 되게 하실까요? 새가족반 부터 만날 배우는 것인데……. 그렇죠. 진리와 성령. 예배에서도 목양에서도 그 다음에 모든 은혜생활에서도 모두 이 두 가지죠. 진리와 성령 안에서 교회를 하나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게 되고요. 194p로 가게 되면 맨 윗줄에 ‘한 머리에 달려서 한 몸으로 결합되듯이 함께 짜임으로써 상합한다. 믿음, 소망, 사랑 그리고 같은 영생의 상속으로 부름을 받아서 같은 하나님의 영으로 함께 사는 사람들은 참으로 하나가 된다.’ 22번 ‘그리고 바울은 이 하나님의 자비의 순서를 기술한다. 사람들 중에서 선택한 자들을 부르시고’ 선택 나오지요? 두 번째 부르심, 그 다음에 의롭다하심, 그 다음에 영화롭게 하심 그렇게 나오지요. 이렇게 하신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맨 밑에서 셋째 줄 ‘그들은 자신들의 완전함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의로써 함께 장식되고 그들 모두 함께 그리스도의 의로써 자신들의 불완전함을 숨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의롭게 된 사람들을 자신들의 육체’ 이 육체는 이런 살코기의 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육욕을 따라 살려는 죄 된 본성을 가리키는 제유법적인 용어에요. 예를 들자면 빵을 달라 그러면 진짜 빵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살게 해달라는 것이잖아요. 그 빵 속에는 먹는 것, 마시는 것, 소금, 간장 다 들어가잖아요. 그래서 루이 14세 때 그랬대요. 백성들이 빵을 달라고 막 난리를 치니까 그랬대요.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지 왜 저렇게 빵을 달라고 난리냐고 물정을 모르니까 그랬잖아요.
여기서는 육체가 그런 뜻이에요. ‘육체의 부패로부터 정화되고 생명의 새로움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면전에서 분명히 거룩하고 흠이 없이 나타날 때까지 그들을 자신의 성령의 축복으로 스며들게 하십니다.’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밑에 보면 토투스크리스투스의 교리가 나오는데 이번에 들으신 게 토투스크리스투스 아니에요? 지난번이었죠. 그 토투스크리스투스에 나와요. 우리는 대개는 이 사람이 보이는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눈으로 보이니까 누군지 다 알잖아요. 아무개는 요즘 나오네, 안 나오네, 누구는 죽었지……. 그럼 이 교회에서 제명된 것 아니에요. 죽었기 때문에 아주 없애지는 않고 사망자 명부인 별명부로 넘어가요. 그렇지만 이렇게 정해지잖아요. 그러나 영적으로 정말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붙어있는 영적인 유기체의 몸인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 알지요. 그것은 모르지요. 몸인지 아닌지는 몰라요. 그래도 일단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신앙을 부정하는 악행이 없는 한 우리는 그를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라고 보고 섬기고 사랑하고 불쌍히 여겨야한다는 것이 토투스크리스투스의 교리잖아요. 그 이야기를 지금 195p 마지막 단락에서 하고 있는 것이에요.
196p로 넘어가면 하나님의 교회의 영원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이기 때문에 참으로 그분의 지체들은 종국적으로 멸망하거나 악한 재앙으로 인하여 파멸되거나 할 수 없다. 그들의 구원은 확실하고 견고한 침상에 받혀져있으므로 심지어 세상이라는 구조물이 쓰러진다고 해도 무너지거나 붕괴되지는 않는다.’ 그러면서 첫째 이렇게 나옵니다. 왜 그러느냐는 것이죠. ‘첫째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과 함께 서있으므로 저 영원한 지혜가 아니라면 변화될 수도 끝날 수도 없다.’ 즉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교회가 영원한 이유는 하나님이 교회를 의지적으로 선택하고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교회의 역사를 보면 기독교는 곧 멸절될 것 같았어요. 로마시대 때에 8번의 어마어마한 박해가 가해지잖아요? 피비린내 나는 박해가 가해져요. 그런대도 기독교인들의 수는 계속 늘어나고 교회는 그 핍박 속에서 그 피를 먹으면서 계속 강해지는 것이죠.
최근에 제가 들은 이야기인데 이란에서는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이 확인되면 사형이거든요. 그런데 지하에 3,000개의 교회가 있답니다. 선교사의 보고에요. 이 기독교의 복음은 한번 들어가면 핍박 속에서도 어마어마한 생명력을 갖는 것이에요. 지금 이북에서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약 이십만 명이 될 것이라고 보잖아요. 이십만 명 정도 될 것이라고 보고 매 주일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지하의 조직이 2,000이상 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에요. 찬송도 못 부르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에요. 굉장합니다. 결국은 로마가 무릎을 꿇잖아요. 그것이 교회의 모습이에요. 이슬람에 의해서도 교회가 멸망될 것 같았는데 절대 그렇게 되지 않고 복음은 또 다른 곳으로 또 다른 곳으로 전파 되요. 부패하고 썩어도 하나님께서 그루터기를 남기셔서 다시금 부흥을 주시고 다시 살리시고 하는 놀라운 일들을 지금도 하시고 계신 것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이 직접 선택하셨고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에요.
두 번째는 197p로 넘어와서 ‘주님께서는 자신이 선택하신 자들을 아들에게로 넘겨 도움과 보호가운데 두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면 그리스도의 보호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선택 때문에,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보호 때문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시는 것입니다.
198p 세 번째로 가면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자. 우리가 또한 교회로부터 나왔으며’ 그러니까 우리의 구원은 교회와 함께 시작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지금처럼 이렇게 교회에 대한 아무 생각이 없이 그저 자기 좋은 대로 헬스클럽을 옮겨 다니듯이 그렇게 옮겨 다니고, 다니고 싶으면 다니고, 다니고 싶지 않으면 집어치워버리고 그렇게 거의 전혀 절제되지 않는 그런 식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식의 교회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할 교회들이 일그러진 모습으로 있는 것이죠. 그래서 개신교에서는 거의 교회론이 없어요. 개신교가 교회론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개신교 신자들이 교회론에 관한 한 아무 개념이 없이 그냥 자기의 육욕을 따라서 마구잡이로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교회가 이렇게 질서가 없고 아주 추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에요. 그리고 개신교 교인들만큼 이기적인 사람들이 없어요. 그러니까 오늘 내가 은혜를 받았어도 내일 이 교회가 나에게 무엇인가 좋은 것을 주지 못하면 언제든지 버리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런 식의 교회론을 가지고 있으니까 결국 자기는 믿는다고는 하는데 그 믿는다는 행동 자체가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 박는 그런 행동들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에요. 굉장히 잘못되고 있는 것이에요.
그 다음을 보겠습니다. 24번으로 넘어가면 그래서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죠. 그것이 뭐냐 하면 우리가 구원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으니까 이제는 건강한 몸의 일부를 이루면서 살아야 할 것 아니에요. 그렇지요?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지금 제가 이렇게 강의를 하고 있는데 어디 몸의 지체 가운데 한부분만 많이 아프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온 몸이 하는 이 역할을 해낼 수가 없잖아요. 해낼 수 없지요.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로 넘치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이에요. 그게 바로 은혜의 계획을 따라서 사는 삶이에요. 그것이 필요한 것이죠. 그래서 24번에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므로 한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선한 의지 즉 생명, 구원 그리고 마침내 천국 자체를 우리가 발견하게 될 때 그리스도 자신 홀로 우리를 위하여 넉넉하고 넘쳐야한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로 충만한 삶이죠. 성령으로 충만한 삶, 은혜에 넘치는 삶을 살게 될 때에 그 은혜의 계획을 따라 살게 될 때에 우리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에요.
자, 그 다음 201p로 넘어가면 교회의 지체됨에 대해서 우리들이 여기서 진리를 보게 됩니다. 잘 보세요. ‘다른 관점에서 말해보면 우리 각자가 자신을 교회의 지체라고 믿지 않는다면 우리가 교회를 보편적이라고 믿는 것이 헛되며 무익할 것이다.’ 당연하잖아요.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교회는 지역마다 그리고 교파마다 여러 교회가 있지만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오직 한분이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거기에 모두 접붙여져 있다. 나는 그런 보편교회가 있는 것을 믿는다. 그럼 자기도 거기에 속해있다는 사실을 믿어야지 자기는 천사처럼 하늘에 높이 들려있거나 아니면 그 교회와는 상관없는 구도자인 것처럼 생각하고 공교회를 고백해보아야 의미가 없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되요? 그렇게 그리스도의 몸이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에게 붙어있는 모든 보편교회가 하나라는 사실을 믿고 자기가 그중의 일부라고 믿으면 자기는 이제 자기 홀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홀로 존재하는 신자가 아니라 위로는 그리스도와 성령, 성부 하나님과 연관해서 그 질서 속에서 내가 있고 그 다음에 나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다른 보편교회의 모든 지체들과의 질서 속에서 내가 있는 것이죠. 어떤 식으로든지 그들과 나는 생명적인 연결을 이룬 사람들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요. 이해되시죠?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에서도 배웠듯이 그런데 이 나라는 세상의 법에 의해서 통치되는 그런 나라가 아니에요. 사랑에 의해서 통치되는 나라에요.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아까 이야기한 꾸삐띠따스는 삶아지거나 불태워 없어지고 까리따스는 살아나게 될 때에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하나가 될 때 그때에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할 모든 사람들을 함께 사랑하는 전체성을 갖게 되는 것이에요. 이게 바로 진정한 기독교신앙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아마 이 부분이 테이프를 안 들었으면 이해가 잘 안될 텐데 테이프를 들으셨기 때문에 이해가 빨리 될 것이에요. 그리고 이런 것들을 보충해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스물네 번을 설교했던 고린도전서 13장 강해가 이런 부분들에 대해 하나의 보충이 되는 것이겠지요.
그 다음 203p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러면 어떻게 되어야 되느냐 하면 우리의 신앙의 고백과 삶의 증거, 성례의 참여함 이 세 가지 요소에 의해서 공통적으로 똑같은 것을 지향하는 무리들로 나타나게 될 것이 아니에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한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지체들이라는 한 증거지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하겠지요. ‘목사님, 그러면 이런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신앙고백이 교파마다 다르고 교단마다 다른데요.’ 그것은 이렇게 생각해요. 이런 조항들 가운데 근본적인 조항이 있고 비 근본적인 조항이 있어요. 근본적인 조항이 다르면 그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한 지체일수 없어요. 그러면 그런 근본적인 조항은 무엇일까요? 예를 들면 아까 우리들이 공부한 삼위일체 하나님,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이시며 동시에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그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우리를 구원했다는 대속의 교리 등등 이런 것들은 근본조항에 속하는 것이에요. 여기에서 어긋나게 되면 이단이 되는 것이고 그들은 우리와 한 지체일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러나 비근본조항도 있지요. 예를 들자면 세례를 줄 때 물에 풍덩 담글 것인가? 뿌릴 것인가? 교회 정치체제를 택할 때에 장로제를 택할 것인가? 감독제를 택할 것인가? 회중제를 택할 것인가? 이런 것들이죠. 예배를 드릴 때에 악기를 쓸 것인가? 안 쓸 것인가? 이런 것들은 비근본적인 조항들이죠. 그렇죠? 그러면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형제이고 접붙여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지요. 사도신경에 들어가 있는 내용들은 전부 다 본질적이에요. 오히려 사도신경에 들어가지 않아도 본질적인 것이 많아요. 왜냐하면 지금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잖아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그럼 거기에서는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고 참 하나님이시며 인성과 신성이 연합하여 한 인격이 되셨다는 이야기는 안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이 사도신경만 동의하면 이단이 아니라고 말하면 안 되는 것이에요. 이해 안 돼요? 무슨 이야기인지 알지요. 그래서 제가 언제 말씀드렸잖아요. 19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이단 가운데 단 한군데도 사도신경을 부인한 이단이 없었다는 것이에요. 거울이 되는 것이죠. 또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굉장히 넓은 틀들이 생겨나요. 어떤 사람이 최근에 책을 냈는데 사도신경을 그대로 믿으면 모두 지옥 간다고 책을 냈어요. 그러면서 뭐냐 하면 사도신경은 삼신론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그랬어요. 우리는 그렇게 믿지는 않는데 거기에 삼위일체를 믿는다는 분명한 사상이 없지 않느냐? 그래서 ‘첫 번째 신은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 두 번째 신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세 번째 신은 성령을 믿사오며 이렇게 믿는 것처럼 사도신경에 묘사되어 있다.’ 그렇게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에요. 사도신경 하나를 고백하면 우리 모두 형제로 받아들이자는 것은 너무 경솔한 발언입니다. 그래서 더 깊이 들어갑니다.
자, 26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비록 믿음의 확신으로는 선택된 자들이 우리에 의해 인식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어떤 확실한 표지들을 위하여 우리들에게 기술한다.’ 다음 그 다음 줄 줄치세요. ‘신앙고백과 삶의 증례들과 성례에 참예함을 통하여 우리와 같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고백한 모든 사람들은 어떠한 사랑의 심판을 따라서 선택된 자들과 교회의 지체들로서 여겨져야 한다. 비록 그들의 품행에 불완전한 것이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자신들의 악행을 지나치게 즐기거나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보아야한다.’ 토투스크리스트의 교리를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 다음에 뒤로 넘어가서 204p에 보면 출교의 문제가 나와요. 그래서 토투스크리스투스를 이야기하면서도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에요. 그게 누구냐 하면 넷째 줄에 보면 ‘동일한 믿음의 관하여 우리와 의견을 달리하거나’ 이게 근본조항에 있어서 어긋나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입술로는 고백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동들로써는 부인하는 사람들, 전 인생을 통하여 사악하고 타락한 자들로서 죄를 짓고자하는 욕심이 들끓고 자신들의 악행들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있는 사람들, 이러한 종류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표를 통하여 그들이 현재 교회의 지체들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해요? 끊어냄으로써 나머지 교인들을 보호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을 가리켜서 출교라고 합니다. 출교는 excommunion이라고 합니다. excommunion이 무슨 뜻이냐 하면 communion은 교통이지요. ex는 떼어내는 것이에요. 그래서 성도의 교통에서 떼어내어 버리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에요. 그래서 출교된 사람들을 만나고 교제하는 것은 그 사람도 벌을 받아야하는 것이에요. 출교된 사람은 할 수 없어요. 그러나 출교된 사람들은 성도들과 교제하고 만나고 함께 먹고 마시고 예배하고 그럴 수 없어요. 그렇게 된다면 권징의 의미가 유명무실해지잖아요. 그렇게는 못해요. 그렇지만 교회는 그 사람이 끊임없이 진리의 빛에 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어서 회개하고 돌아오게 되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교통은 할 수 없어도 책을 보내준다거나 설교를 듣게 해준다거나 편지를 보낸다거나 등등의 이런 활동들을 통해서 그가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 말하자면 출교의 권징적인 목표라는 것이에요. 아주 멸망하게 두는 것이 아니라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207p를 보면 ‘출교는 다음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줄치세요. ‘사람들 면전에서 교회의 무리로부터 끊어진 사람들이 출교로 말미암아 구원의 소망으로부터 내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전의 삶의 오물들로부터 길로 돌아갈 때까지 징계를 받는다. 바울이 쓴 바와 같이 그들이 사람을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함이라. 실로 내가 해석하기로는 일시적인 저주로 그들을 내몬 것이 영혼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다.’ 무슨 뜻이죠? 만약에 그들이 excommunion 출교를 했을 때 그 좋은 성도의 교통에서 단절되었을 때 그들이 만약에 진정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이라면 그때 비로소 예배도 드릴 수 없고 사랑하는 지체들을 만날 수도 없고 목양을 받을 수도 없는 그러한 단절된 환경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될 것이고 만약에 끊어졌는데도 ‘아휴 교회에 오라는 사람도 없고 참 좋네. 구역장도 전화 안 오고 목사님도 심방 안 오고 아휴 참 좋고 딱 맞네.’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에요. 이해되지요?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에요. 줄치세요. ‘그러므로 비록 교회적 권징에 따라서 출교되는 자들과 친근하게 사는 것과 내적인 교제를 갖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혹은 권고로 혹은 교리로 자비로 온유로 혹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기도들로 그들이 회심되어 더욱 좋은 열매를 맺도록 교회의 연합체와 하나 속으로 그들을 받아들이도록 힘써야한다. 이 사람들뿐만 아니라 투르크인과 사라센인 그리고 다양한 종교에 속한 다른 적들도 또한 이와 같이 다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교회를 믿사오며 거룩한 보편교회를 믿사오며 성도가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주시는 것과’ 할 때 맨 앞에 나오는 ‘교회를 믿사오며’ 할 때 그 의미라는 이야기에요. 깊지요?
자, 그 다음에 210p 30번입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 사실 여기서 옆에 보면 이렇게 나와요. ‘크레디무스 이뗌 꼬뮤니오넴쌍끄또름 호크에스트’ 크레디무스=우리는 믿습니다. 이뗌=마찬가지로 꼬뮤니오넴=교제를 쌍끄또름=복수인데 거룩하다는 뜻이에요. 성도의 뜻도 있어요. 그러니까 성도들의 교제를 믿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 꼬뮤니오넴이라는 말이 교제라는 뜻인데 사귄다는 것이죠. fellowship 이잖아요. 여기서의 꼬뮤니오넴은 그것보다 훨씬 더 영적인 것이에요. 누구하고, 누구하고 교제한다는 뜻의 social activity의 개념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연합된 가운데 한 지체로서 생명적인 작용에 참여하는 것이에요. 무슨 뜻인지 이해되시죠? 그래서 나는 교제라는 말보다는 교통이라는 말이 더 좋아요.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도의 교통을 믿는다.’ 그렇죠? 계속 줄치세요. ‘보편교회에서 참 믿음으로 동시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선택받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모든 선한 것들에 대한 교통과 참여가 있습니다. 이로써 성령의 은사들이 다양하며 다양하게 나누어졌다고 바울이 가르치듯이 개인적인 은혜들이 다양하다는 것이 부인되지는 않는다. 이는 각자가 시민 헌법을 통하여 자신의 소유물을 바르고 질서 있게 보유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이게 무슨 뜻이죠? 원시 공동체를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자기의 것을 다 팔아서 사도의 발 앞에 두고 그것을 다 같이 쓰는 공동사회가 나타나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모든 교회에 동등하게 모든 회중에게 적용되어야할 그런 원칙이라고는 칼빈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하면 개인적인 소유물을 바르고 질서 있게 보유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계속 줄치세요. ‘왜냐하면 사람들 가운데서 이 세상에 속한 요소들에 대한 소유들이 구별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 제일 중요한 부분이에요. ‘그러나 믿는 자들의 공동체는 영과 육 모두에 속한 이런 종류의 선한 것들을 그것들이 공평한 한 그리고 용도에 맞는 만큼 선하게 그리고 마땅한 사랑으로 서로 간에 교통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어떻게 해요? 이 교통은 우선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여 우리가 한 지체가 되면 우선 그리스도가 한분이시고 그 생명도 하나잖아요. 그 하나의 생명이 그리스도의 영적인 지체인 모든 보편교회에 함께 한 생명으로 모든 보편교회에 함께 스며들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의 생명으로 교통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영적 교통이에요. 그 다음에 또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이제 하나님이 은사를 주셔요. 그러면 그 은사는 모두 생명처럼 동일하게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에요. 손에게는 무엇을 붙잡을 수 있는 은사가 주어졌어요. 발은 찰 수 있는 은사가 주어졌지요. 코는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은사가 주어졌잖아요. 그 유익을 온몸이 다 누리고 있잖아요. 무슨 뜻인지 아시죠? 그게 뭐냐 하면 은사의 교통이에요. 그러니까 만약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노래를 잘할 수 있는 은사를 주셨다면 그것을 자기의 전유물이고 나만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고 내 소유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교회론적인 입장이 아니에요. 이해되세요? 그렇게 보면 안 된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은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전체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에요. 그런데 무슨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교회에서 일을 시키려고 하면 그렇게 뻗대요. 신앙이 안 들어가서 그래요. 신앙이 들어가면 ‘형제님, 첼로를 잘하는데 와서 반주 좀 해주세요.’ ‘아유, 저는 주일날 쉬어야 되고 바빠요.’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라.’ 그것은 전부 다 자기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 그러는 것이에요.
그런 영적인 은사도 있지만 자연적 은사도 있지요. 또 어떤 것들이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물질이나 등등 다양하게 있잖아요. 백수들은 시간이 많고……. 그렇죠?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물질이 있고 또 그다음에 물질도 없고 시간도 없는데 아이디어는 있고 이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주님의 것이라는 것이죠.
참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요. 지금은 그래도 교회가 커졌으니까 여러 가지로 어렵기는 하지만 그래도 옛날보다는 좀 낫잖아요. 그런데 지하실 교회에서 진짜 가난할 때였거든요. 그때는 제가 교수생활을 했잖아요. 온 교회에서 제가 제일 부자였어요. 만날 그래서 우리 전도사님들이 밥을 먹고 나면 항상 나보고 내라고 그러고. ‘왜 나만 내라고 그러느냐?’ 그때는 교수였으니까 ‘교수님이 제일 부자잖아요.’ 안수받기 전이니까……. 허긴 전 교인 중에 교수가 나 한사람이었으니까 그때의 일인데 문서선교부에서 테이프를 만들었어요. 지금은 mP3로 만들고 시설이 잘되어 있지만 복사기로 만드는데 5:1 복사기로 만드는데 이게 보통 많이 만들어야지요. 지하실 교회에서 교회 예산은 8,000만원인데 문서선교부에서 테이프를 판돈은 1억이었어요. 그래서 여러분 열린 신문을 매달 받아보지요? 처음에 그것을 교회가 너무 가난해서 문서선교부에서 만들어준 것이에요. 한 10호까지 만들어주었을 것이에요. 그리고 교회가 성장하면서 교회가 만들었지요. 그런데 테이프를 만들었는데 주별 회원이 많았어요. 많을 때는 한 150명까지 되었어요. 그래서 주별로 있으면 매달 통장에 넣어주면 테이프를 보내주었는데 부산에 있는 부부인데 부부가 교사에요. 남편은 나중에 총장까지 하셨는데 그분들이 그렇게 테이프를 통해서 은혜를 아주 많이 받으셨어요. 그런데 둘이서 부부가 차를 타고 테이프를 듣고 가는데 설교를 하다가 내가 그 이야기를 했나 봐요. ‘문서선교부에서 테이프를 만드는데 하도 많이 만들어서 기계가 망가졌는데 은혜 받은 사람이 있으면 그 테이프 복사기를 사놓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사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랬나봐요. ‘모든 것은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부부가 듣고 가는데 부인이 ‘여보! 저 가난한 교회에서 저것을 하나 사달라고 하는데 하나 사주면 안 될까?’ 남편이 ‘그게 얼만데?’ ‘한 150만 원쯤 된대.’ ‘그것 되게 비싸네.’ 그런데 마침 테이프에서 그 소리가 나오더래요. ‘모든 주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테이프가 계속 돌아 가야되잖아요. 그런데 가만히 둘이 앉아있는데 ‘모든 주님께로부터 온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딸각하고 다시 감기더래요. 그러더니 ‘다시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딸각. 다시 감기더니 세 번이 반복되더래요. 남편이 ‘여보 하나님의 뜻인가 봐 보내라.’ 그래가지고 그들 부부가 설교테이프 복사기를 기증한 간증이 있어요. 참 재미있잖아요? 세 번만 반복하고 그 다음에는 계속 앞으로 가더래요. 참 재미있어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 있으니까 그 지체로서 우리들이 그 질서 안에서 우리가 이바지하면서 살라고 우리에게 하나님이 젊음도, 시간도, 건강도, 물질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에요.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사용하면서 살 때에 그때 하나님께서……. 그래서 교회에서도 보면 은혜를 받았는데 구두쇠같이 사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시간을 내달라고 그래도 완전히 vvip에요. 얼굴을 볼 수가 없어요. 그 다음에 물질을 좀 바치라고 그래도 완전히 짠돌이에요. 재능을 쓰자고 그래도 완전히 구두쇠에요.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건강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까리따스의 사랑이 우리 안에 넘치게 될 때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살 때에 그때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까리따스의 사랑 자체가 포괄적인 사랑이기 때문이에요.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넘치기를 바랍니다. 이해되지요?
그 다음 211p로 넘어가면 죄 사함이 나옵니다. 우리는 죄사함을 믿습니다. 줄치세요. ‘그리스도의 공로가 중재함으로 신적 자유함 가운데서 교회의 몸으로 받아들여지고 심겨진 우리에게 죄사함과 은혜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어떠한 죄사함도 혹은 다른 데로부터 혹은 다른 방식으로 혹은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교회와 이 성도의 교통 바깥에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고 할 때 가톨릭이 말하는 의미와 개신교에서 말하는 의미하고는 좀 달라요. 가톨릭이 교회밖에 구원이 없다고 할 때는 눈에 보이는 제도로서의 교회에요. 그러나 여기에서 이야기할 때 이것은 영적인 성도의 교통 그 바깥에 구원이 없다고 보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 이제 그렇게 성도의 교통을 누리고 살지만 그 구원은 은혜로 주어진 감사한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살아가는 지체들이 완전히 거룩해진 사람들은 아니에요. 이미 거룩해졌지만 아직은 온전히 거룩해지지는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그 불완전한 사람들이 그 미완의 교회를 형성해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사람들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아직까지도 미완성으로 남겨놓으신 것이에요. 그 내용도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에 나오잖아요? 그렇죠?
자, 213p에 아주 감동적인 문구가 나와요. ‘그러하여야함으로 그들이 육체의 감옥에 사는 동안에 이 회개를 꾸준히 추구하여 계속해서 그리고 꾸준히 죄사함을 획득한다. 이렇듯 그들의 회개에 값이 매겨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을 사람들에게 이러한 순서로 드러내시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들이 그들 자신의 가난함을 깨달아 모든 교만을 벗고 전부를 버리고 확실히 자신들에 대하여 무기력하게 될 때에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주어지는 자비의 달콤함을 맛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맛이 감지될 때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과 복된 구원 모두를 확실하게 기대하면서 다시 숨 쉬고 위로를 얻는다.’ 참 소망을 우리에게 주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으나 아직은 완전한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기 때문에 날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그런 고난의 길을 가면서 살아가는 성도들로 아버지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214p 부활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부활을 믿는다.’ 이것은 뭐 그렇게 크게 별다른 것이 없어요. 33번에 가서는 ‘우리는 영생을 믿는다.’ 이것도 특별한 다른 것이 없어요. 우리가 늘 고백하는 것과 같은 내용이에요. 그래도 읽어보겠습니다. ‘즉 미래의 주님께서 몸과 영혼가운데 영화롭게 된 자들을 모든 변화와 썩음이라는 운명을 넘어서서 끝없이 계속되는 복락으로 받으신다. 우리가 마르지 않는 샘 같이 자신 속에 생명과 빛과 의의 부요함을 지니신 주님께 분리될 수 없게끔 부착하게 될 때에 영생은 그것들에 대한 참되고 확실한 완성이 될 것이다. 저 복락은 모두 밝음, 즐거움, 능력, 행복으로 이제 인간들의 감각적 지식으로부터는 가장 동떨어진 바울이 말한바와 같이 귀로 듣지 못하고 눈으로 보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 못한 것들로 가득한 하나님의 왕국이다.’ 이렇게 영생과 영벌을 반면에 여기서 대조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216p로 내려가면 서서히 결론부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종합을 하고 있어요. 35번에 줄치세요. ‘실로 우리가 위의 한분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로써 제시했던 살아있는 믿음이 어느 곳에 있든지 이제 그것은 동시에 소망과 사랑의 짝들을 가지지 않고 그저 있을 수 없음이 확실하다. 만약 이것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면 우리가 아무리 유창하고 우아하게 믿음에 대해 토론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아무 믿음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줄치세요. ‘우리 안에서 믿음이 소망과 사랑으로 태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소망과 사랑이 영원히 믿음을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먼저 소망에 관하여 증명해보자.’ 이것은 뭐냐 하면 믿음이 있다면 반드시 소망이 생긴다는 것이에요. 들어보세요. ‘만약 우리가 들은바와 같이 믿음이 거짓말하거나 속일 수 없고 무효화될 수 없는 진리에 대한 확실한 감화라면 이것을 품은 사람들은 동시에 의심 없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들을 성취하시리라 기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의견에 따르면 그것들은 참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소망은 다름 아닌 참으로 믿음이 하나님에 의해서 약속되었다고 믿은 것들에 대한 기대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을 참되시다고 믿는다. 소망은 그분께서 시의 적절한 사건으로 자신의 진리를 보이시기를 기대한다. 믿음은 아버지이심을 믿는다. 믿음은 영생이 주어졌음을 믿는다. 소망은 그것을 기대한다. 믿음은 소망이 기대하고 있는 기초이다. 소망은 믿음을 자라게 하고 보존하게 한다.’ 그러니까 소망은 믿음에서 생겨나는데 소망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믿음이 계속 자라나기에 좋은 환경이 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절망하는 것은 죄에요. 혹시 민수기 테이프를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절망의 끝이 무엇이지요? 죽음 말고 또 있어요. 절망을 하면 마지막에 인간은 무엇을 하게 되지요? 하나님을 욕하고 죽는 것이에요. 욕하고 스스로 파멸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절망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내포해요. 그래서 절망이 죄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하느냐 하면 칼빈이 그의 자살론에서 그런 주장을 해요. 자살을 못하게 했거든요. 자실이 대표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런 것이죠. 그것도 이제 오늘날에 와서는 많은 다양한 해석들을 요구하게 되요. 왜냐하면 지금 제가 보기에는 자살하는 사람의 80%는 우울증 경력이 있거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그런 경우에 옛날에 영화배우들이 한참 자살했잖아요. 다 정신과 치료를 받던 사람들이에요. 그럴 경우에는 우리는 이제 그 자살을 과연 구원받지 못한 증표로 볼 수 있겠느냐하는 많은 해석의 여지들을 남겨두는 것이에요. 자 이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느냐하면 칼빈은 이렇게 보는 것이죠. 인간의 인간됨은 하나님의 주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에요. 고난이 오든 슬픔이 오든 견디기 힘든 괴로움이 오든 그것을 끝까지 견디면서 그 견디는 모든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인간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에요. 그 고난이 자신의 죄 때문에 온 것이라고 할지라도 혹은 죄와 상관없이 온 것이라고 할지라도 상관없이 인간이 당하여야하는 그것을 그대로 당하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앞에 무릎을 꿇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이라는 것이에요.
그 다음 221p입니다. 이제 사랑과 믿음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죠. 자, 221p 밑에서 아홉째 줄이에요. 줄치세요. ‘바울은 사랑이 믿음보다 더 위대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믿음의 사용은 일시적으로 계속되는 반면에 사랑은 더욱 열매를 잘 맺기 때문에 또 왜냐하면 사랑은 더 넓게 뻗어나가기 때문에 또 사랑은 더 많이 섬기기 때문에 번성하기 때문에 건전한 판단을 가진 사람 누가, 온전한 뇌를 가진 사람 누가, 이것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에 있어서 사랑이 더욱 위대하다고 추론하겠는가?’ 그렇지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믿음은 사랑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요. 그런데 사랑을 하면 믿음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 점에서 사랑은 믿음보다 더 많은 열매를 맺고 뻗어나가고 확장하고 해서 놀라운 열매를 맺고 역사를 일으키지만 시원적으로 본다면 믿음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믿음은 반드시 사랑을 낳지만 사랑은 반드시 믿음을 낳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 시원적으로는 믿음이 사랑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에요.
그 다음 223p의 결론부분에 가서 마지막으로 저자가 부연하는 설명이 나옵니다. ‘부연하자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모두 성령의 은사들이며 하나님의 자비가 없다면 이것들 중의 어떤 것도 시작될 수도 계속 유지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우리 안에서 찾지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구하는 것을 배우자. 만약 우리가 우리 안에서 혹은 소망, 사랑, 믿음에 속한 것을 느낀다면 감사함으로 그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돌리자. 마음과 입으로 특히 마음으로 절제하면서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그것들을 지키고 날마다 더욱 향상시키기 원하기를 갈망하면서 그리하자. 왜냐하면 우리가 이 생명에 속해 있을 동안에 그것들이 계속해서 늘어나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최선으로 작용하는 동안에는 다름 아닌 우리의 모든 완전함이 놓여있는 하나님께 명백하게 이를 때까지 이르는 길이자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도신경에 대한 설명을 끝내는 것이에요. 칼빈의 이 기독교강요는 초기의 형태이기 때문에 많은 논쟁과 싸움 대신에 이제 순수한 마음으로 믿으면 경건하게 살 수 있을 정도로만 최소한으로 딱 제시를 하는 것이에요. 우리는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그 대신 핵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아주 훌륭한 자료가 되는 것이죠. 그것을 가지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믿음생활을 해나가는 것이죠. 자, 그러면 오늘 여기까지만 하고 마치죠.
2010. 01. 09 하반기 성화반
성화반 Ⅷ
이제 주기도문의 본문을 들어가기 전에는 기도의 일반에 대해서 먼저 설명을 하고 그 다음에 이제 2부에서부터 주기도문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설명하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주기도문에서 기도의 일반적인 것에 대해서 해설이 나오는데 이것은 무엇과 관련이 있느냐하면 당시의 사람들이 가톨릭교회에서 가르치는 방식으로 기도를 했던 것을 염두에 두면서 이 부분을 읽어야 해요. 가톨릭의 기도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몇 가지의 문제들이 여기에서 쭉 거론이 되는데 우선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기도가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진심으로의 기도라기보다는 형식적인 기도였어요. 그래서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안 그런 사람도 많지만 예를 들자면 기도 그 자체가 예배 속에서의 한 예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공동으로 기도문을 읽는 다는지 그런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기독론과 관련된 문제인데 기도할 때에 오직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와 그 다음에 그 은혜에 힘입어서 하나님께 간구해야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성인들을 의지해서 기도하면 그 기도의 공력이 더하여진다는 중보사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이런 것들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판하는 대목들이 눈에 띄어요.
그래서 우선 우리들이 오늘은 1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226p를 보면 아래 단락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 우리에게 모자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과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 확실히 그분 안에서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모든 관대하심의 충만함을 거하게 하시기를 원하셔서 마치 가장 풍부한 샘과 같은 이것으로부터 우리가 모든 것을 마시게 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믿음 가운데 인식하는 것을 배운 후에 우리가 하나님 자신에게서 찾는 것과 그분 자신 가운데 있다고 배운 것을 기도로써 그분께 요청하는 것이 남는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라는 수단을 주셔서 우리가 기도하면 그것을 하나님께 받게 하셨는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경륜하신 이유를 이제 칼빈은 두 가지를 들어요. 우선 첫째는 모든 좋은 것이 아버지께로 부터만 온다는 것,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함이고 두 번째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 자신을 하나님을 향하여 훈련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신다.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러면서 기도에 적합한 자세를 제일 먼저 2번부터 언급합니다. 우선 첫째는 우리의 영광에 대한 모든 신념을 버리는 것, 공헌에 대한 억측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가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 자기가 하나님 앞에 충분히 받아들여질 만한 그러한 가치 있는 존재라는 사상을 우리의 행위나 봉사, 또 다른 어떤 공로에 의해서 생각하지 말고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의 무한히 크심 앞에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비천한 존재가 되어서 낮아지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자세를 가질 것을 먼저 촉구하고 있어요.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요. 하나님이 아주 탁월하고 위대하신 분이시고 자기는 그분 앞에 아주 미천한 피조물이고 그분의 긍휼을 필요로 하는 아주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이제 고백하는 것이에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지금도 이야기가 나온 것인데 이렇게 말하죠. 228p ‘우리 자신의 빈곤을 의식하자. 그리고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간청하는 이것들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자. 그리고 그런 것들로부터 우리가 간청한 것들을 얻도록 하자.’ 여기서는 뭐냐 하면 의존성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미 있는 것을 선물로 달라는 사람이 있을까요? 통계가 나왔는데 애들이 제일 싫어하는 선물이 학용품이래요. 학용품, 신발, 이런 것을 제일 싫어하죠. 그래서 선물은 어떤 것을 선물로 받을 때 기분이 좋아요? 그것은 선물하는 사람한테 굉장히 부담되는 발언인데……. 물론 그런 것도 좋겠지요. 내가 돈이 없어서 차를 도저히 살수 없는데 누가 외제차 새 차를 주었다고 할 때 감동하겠지요.
제가 결혼하고 나서 한 3년 되었나? 저희 집사람이 저기 방배동에 있을 때에 중고차 아토스를 끌고 다녔는데 다 썩었어요. 그래서 고민 고민하다가 제가 지금 타고 다니는 아반떼 차를 샀어요.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갔는데 전시되어있는 차인데 싸게 해주겠다고 그래서 샀어요. 그때까지 내가 차를 사주겠다는 이야기를 한마디도 안했거든요. 그래서 마당에 갖다놓고 그때는 저희가 사택에서 살았잖아요. ‘여보, 내가 선물 하나를 사왔는데 내려와.’ ‘무슨 선물?’ 내려왔는데 차 키를 주었어요. 기분이 좋겠죠? 그것을 갚느라고 2년 동안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 것은 물론 좋겠지만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능력은 있지만 왠지 내가 사지는 않을 것 같은 것 그런 것들을 선물로 받을 때 좋아하는 것이에요. 가정주부에게 하이타이를 선물하는 것은 선물이 아니에요. 가정주부에서 쌀을 사다 주어 봐요. 그게 선물이 되겠어요? 그런데 만약에 값이 아주 비싸지는 않지만 자기가 절대로 자기의 손으로는 안살 것 같은 것 그렇지만 갖고 싶은 것, 그런 것을 선물하면 가격에 상관없이 기쁨을 주는 것이에요. 제가 생일이었나 봐요. 옛날의 연구실의 간사들이 돈을 모아서 요만한 만년필 필통을 하나 샀어요. 그런데 그것을 실수를 했겠지요? 가격표를 안 떼었어요. 그래서 가격표를 보았는데 마음이 편하지를 않아요. 그래서 ‘이런 것을 왜 샀느냐? 이렇게 비싼 돈을 주고 이렇게 작은 것을 살 필요가 있느냐?’ 그랬더니 지금은 시집을 간 어느 자매가 나한테 메모를 보냈어요. ‘물은 좀 사치스러운 것도 괜찮아요.’ 그것은 피천득 씨가 인연이라는 수필에서 선물을 이야기하면서 지금 우리가 한 것 같은 이야기를 했어요. 늘 가정주부에게 하이타이 선물하고 학생에게 필통을 선물하고 목사에게 성경책을 선물하는 것은 선물이 아니에요.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지금 뜬금없이 이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뭐냐 하면 우리에게 이미 있는 것을 하나님 앞에 구하지는 않잖아요. 없는 것, 모자라는 것이죠. 은혜를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한다고해서 은혜가 모두 똑 떨어진 사람들은 아니잖아요. 더 많은 은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죠. 요번에 한번 집에 가서 서로에게 감동을 줘보시죠. 그래서 선물을 하나씩 하세요.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그렇게 선물을 한번 해보세요. 시집 못 간 것도 짜증이 나는데 왜 오늘 성화반에서는 선물 이야기를 할까? 하나님께 자신이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될 때 그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에 적합한 마음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기도를 못하느냐하면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는 사람이에요. 모든 것이 있다는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은 기도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그렇지요? 그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경고 가운데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육적인 형편만을 살피기 때문이에요. 영적인 형편에 있어서는 어떻지요? 헐벗고 가난하고 눈이 멀었잖아요. 그런 것을 육체와 영혼 전체에 걸쳐서 공정하게 볼 수 있는 마을을 가질 때에 우리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실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에요. 이해되세요? 왜 이해가 안 돼요? 오늘 눈이 와서 기분이 좀 그래요? 그래서 의존의 마음 안에서 하나님을 갈망하게 되는 것이에요.
자, 그 다음에 230p로 넘어가면 기도는 명령이기도 하고 약속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여기서 강조하고 있어요. 첫째는 뭐에요? 기도하라는 명령이에요. 그래서 인간의 가장 하나님 앞에서 순수한 마음이 언제이냐 하면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하나는 뭐냐 하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할 때가 가장 순수하고 또 한경우가 있어요. 그게 언제냐 하면 하나님이외에 다른 것들을 사랑한 것을 회개할 때에요. 그 때 인간이 가장 순순한 마음이 되는 것이에요. 그 두 가지 경우에요. 그래서 물리적인 순수와 도덕적인 순수와 영적인 순수함은 달라요. 물리적인 순수함은 무엇일까요? 예를 들면 물이 순수하다. 그러면 어떤 물이어야 해요? 물이 물로서만 꽉 찬 상태지요. 거기다가 영양제를 넣고 몸에 좋은 정력제를 넣고 달달하라고 설탕을 넣으면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서 순수한 물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물이 아닌 것이 포함되지 않은 물을 우리는 순수한 물이라고 말하지요. 조금 더 들어가 볼까요? 그러면 이 세상에서 증류수가 제일 순수한 물입니까? 그럴 것 같아요? 증류수가 가장 순수한 물이에요? 그러면 순수한 물을 마시겠어요? 불결한 물을 마시겠어요? 우리는 증류수를 화학적으로는 순수한 물이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우리의 일상의 의식 속에서는 그런 물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면 우리는 어떤 물을 좋아할까요? 미네랄이 들어있는 것은 괜찮아요. 왜냐하면 그것은 물속에 자연적으로 들어있어야 하는 성분이니까. 벌써 여러 해 전인데 교인중 하나가 초창기인데 자기가 금강산을 갔다 왔다고 하면서 목사님 선물을 사왔다고 하면서 물을 두통을 가져왔어요. 그래서 자기는 금강산을 구경하고 나보고는 물을 먹으라고 그러나 그러면서 따서 한잔을 먹어보고 나서 머리에 물을 끼얹은 느낌이었어요. 나는 아직도 그렇게 맛있는 물을 먹어본 적이 없어요. 저는 물을 참 좋아하거든요. 물을 술보다 좋아합니다. 아주 물을 좋아하고 어떤 음식보다도 물을 참 좋아해요. 제가 좋아하는 것 몇 가지가 있는데 햇빛, 맑은 공기, 좋은 물 이 세 가지를 참 좋아해요. 왜 웃어요. 아무 부담을 안 느끼는 취미잖아요. 누가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고 부담을 느끼겠어요. 그것을 좋아해요. 물이 너무 너무 좋아요. 그래서 맛있다고 그랬더니 두통을 더 갖다 주어서 네 통을 먹었는데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런 것을 왜 안 파는지 모르겠어요. 팔면 사다 먹을 텐데 굉장히 좋아요. 우리는 여기서 대개 1급수밖에는 발견이 안 되잖아요. 금강산에는 특급수가 있어요. 아무 생물도 안 살아요. 너무 맑아서 아무 생물도 안 살아요. 그런 물속에 많은 성분들이 있는 것이죠. 오히려 그것은 괜찮아요. 우리는 섞였다고 말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물로서 갖추고 있어도 좋은 성분이기 때문에 그것은 물의 순수성을 해치지 않는 것이에요. 우리 중 누가 너무 사랑이 많기 때문에 너는 인간일 수가 없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누가 워낙 올곧게 살기 때문에 너는 사람 축에 들 수 없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 논리에요.
그래서 이제 물리적 순수함은 그것 이외에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것인데 영적인 순수함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있는 상태에요. 그러니까 인간의 마음은 두 가지 상태일 때 가장 순수하고 섞임이 없다. 첫째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때 둘째는 하나님 이외에 사랑하던 것들을 회개할 때 그때 인간의 마음이 가장 순수한 상태가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두 가지 경우에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가 아주 잘되지요.
자, 그 다음에 231p로 넘어가면 믿음의 중요성에 대해서 4번에 나오지요.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에게 약속된바 만약 우리가 확실한 믿음으로 기대하기만 한다면 의심 없이 이루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간청한 것들을 얻게 되는 공로나 가치가 기도에 속한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전체 소망이 이런 종류의 약속에 세워져있으며 우리는 이 약속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같은 믿음 동일하게 확고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탄원한다면 베드로 혹은 바울 혹은 다른 어떤 성도를 들어주신 것에 못지않게 비록 그들이 삶의 거룩함에 있어서는 우리보다 더욱 잘 갖추어져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것이 우리의 영혼가운데 확정되어야한다. 왜냐하면 기도하라는 동일한 명령에 따라서 기도하라는 동일한 약속가운데서 우리는 가르쳐지고 무장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인격의 가치로부터가 아니라 오직 믿음 때문에 이로써 사람들은 하나님 자신의 명령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합니다. 오직 믿음 때문에 기도의 값을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아멘 하는 말이 나와야지요. 그래서 이 기독교강요는 마음으로 읽어 야해요. 지금 읽은 이 구절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줘요? 바울이나 베드로나 이런 사람들은 우리와 비교될 수 없는 삶을 살았잖아요. 그리고 탁월하게 거룩하고……. 그런 점에 있어서 우리는 그분들에게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깊이 의지하며 그분의 약속을 순수하게 의심 없이 믿으면 우리의 인격이나 잘난 삶의 크기를 따라서 우리의 기도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순수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그 믿음을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의 값을 달아주신다는 것이에요. 위로가 안 돼요?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이런 믿음을 가질 때 그 사람은 이런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큰 위로가 되잖아요. 이런 것들은 천천히 마음속으로 소리 내면서 쭉 읽어가는 것이에요. 그런 속에서 우리 마음의 위로가 확 밀려오게 되는 것이에요. 잘 들으세요. 기도에 관한 모든 지식은 그 뿌리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지식에 닿아있어요. 그러니까 한 사람의 기도의 깊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깊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바운즈 목사님은 한 사람의 사람됨은 기도할 때의 그 사람됨을 능가할 수 없다고 그랬어요. 정말 아름다운 말이죠. 정곡을 찌르는 말이죠. 한 사람의 사람됨은 기도할 때의 그 사람됨을 능가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강요를 천천히 읽으면 눈물이 나요.
그러면 믿음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기도에 있어서 아주 중차대한 대적이 무엇이겠어요? 왜 이렇게 반응이 없어요? 뭐겠어요? 믿음이 기도에 있어서 그렇게 중요한 요소라면 무엇이 방해의 요소가 되겠어요? 의심이에요. 그러니까 이 믿음은 굉장히 신비한 것이에요. 이 믿음은 인간 편에서 불러일으키는 것은 절대 아니고 주님이 주시는 것인데 누구도 주님께로 부터가 아니면 이 믿음을 받을 수가 없어요. 믿음의 저자는 성령님이셔요. 성령님이 믿음의 저자에요. 그런데 문제는 신기하게 성경은 이 믿음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적인 측면을 배제하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너희로 하여금 믿어지게 할 것이니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고 하지 않고 믿으라고 하지요. 심지어 주님은 믿음이 없는 자를 꾸짖으시기도 해요. 그렇다면 믿음이 없는 것은 책망 받을 그 무엇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믿음을 갖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신과의 대화에요. 기술이라고 그러지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렇게 자기 자신을 타이르는 것이에요. 그것을 설명하면 굉장히 긴데 그러면 몇 장을 못나가요. 그래도 또 설명을 안 하면 안 되겠지요. 우리의 이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들이 우리의 해석을 요하잖아요? 그때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있을 때의 해석과 그렇지 못할 때의 해석이 달라져요. 그렇지 않아요? 기분이 좋을 때 애들이 깔깔거리고 놀면 ‘우리 가정은 행복하다. 애들이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지요. 그런데 사업도 꼬이고 부부싸움도 한판 했는데 애들이 깔깔거리면 ‘저놈들은 뭐가 좋다고 낄낄대는 거야?’ 뿔이 나잖아요? 그만큼 우리 자신의 마음의 태도가 중요한 것이에요. 그것을 다스리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에요. 그게 고도의 경건의 기술이에요. 타이르는 것이에요. 그 정도만 할게요.
그 다음을 보겠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거의 신뢰하지 않고 그분의 진리를 의심하는 가운데 부르며 따라서 그들을 들어주셔야하는지에 대해서 의심하고 흔들리는 자들은 하나님 자신을 부르지만 유익이 없다. 그들은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의 물결에 비교가 됩니다.’ 그래서 의심에는 두 가지 요소가 함께 들어오는데 그게 뭐냐 하면 회의하는 요소와 불신하는 요소가 함께 들어오는 것이에요. 회의하는 요소는 뭐죠? 안 믿으려는 것이 아니라 믿으려고도 하는데 잘 믿어지지 않는 것이죠. 그 다음에 불신하는 요소는 무엇이지요? 명백한 증거인데 아주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안 믿겠다고 고집하는 것이에요. 후자는 더 심각하지요? 그렇지요? 그러면 회의하는 것은 어디에서 오느냐하면 믿어야할 사실에 대한 인격적인 경험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에요. 우리는 어렸을 때 부모들이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후딱 하면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여러분들은 그런 얘기 못 들어봤어요? 우리 때는 그런 얘기를 되게 많이 했어요. 그런데 그게 말이죠. 가족들하고의 관계가 아주 좋고 서러운 일이 없었을 때에는 농담으로 들리는데 동생하고 차별대우를 받고 있는 느낌을 받고 나만 혼낸다는 느낌이 들 때는 고민이 되는 것이에요. 우리 동네에 다리가 셋이 있는데 어느 다리에서 나를 주어왔을까? 그래서 심지어는 지나다니다가 다리 밑을 내려다보면 다리 밑에는 거적때기를 치고 사는 걸인들이 있었어요. ‘저기에 우리 엄마, 아빠가 있는 것이 아닐까?’지금은 여러분들이 웃지만 그 어린 나이에는 굉장히 진지하게 그렇게 고민했어요. 그것은 굉장히 비교육적인 방법으로 애들을 혼내고 상처를 주고 그랬어요. 요즘은 잘 안 그러지요. 어차피 산부인과에서 낳으니까 병원에서 주어왔다고 그럴 수는 있지요. 그런데 그런 것이에요. 뭐냐 하면 부모와의 관계에 대한 경험이 결핍되면 잘 안 믿어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믿음을 잃지 않는 중요한 비결은 뭐냐 하면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성령은 믿게 하시는 주요 저자에요. 믿게 하시는 원천이 성령님이신 것이에요. 그게 중요하단 말이에요.
자, 그 다음에 235p로 넘어가면 이제 그리스도 이외의 대상들에 대해서 의존의 마음을 갖는 것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를 강력하게 탄핵하는 것이에요. 요즘 우리 입장에서는 가슴에 다가오지 않지만 당시로서는 칼빈 입장에서 보면 거짓된 가톨릭의 교리 때문에 한이 맺힌 것이죠. 좀 들어볼게요. 6번입니다. ‘죽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자들에 관한한 그들 자신에게 유일한 길이신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께 비는 다른 길이 있다거나 다른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고 꿈꾸지 말자.’ 가톨릭에도 보면 사람이 죽었을 때 연도를 합니다. 그래서 연도를 잘 들어보면 밤새도록 교인들이 돌아가면서 기도를 해요.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그런 것은 참 잘합니다. 계속 교대로 밤새워주고 그래요.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열렬하게 연도를 하는데 그 연도의 형식이 뭐냐 하면 이제 김 아무개가 죽었나이다. 이 망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하늘나라로 인도해주시옵소서. 그러면서 수많은 성인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에요. 마리아여 들으소서! 요셉이여 들으소서. 베드로여 들으소서! 수백 명의 이름이 밤새도록 계속 나오는 것이에요. 김대건 신부의 이름도 나와요. 시성된 복자는 전부 다 그렇게 통공하는 성인이 될 수 있는 것이에요. 죽을 때 죽은 직후가 굉장히 중요할 때라고 생각하고 그때 밑에서 드리는 성도의 간절한 기도로는 모자라고 그때 천국에 있는 수많은 성인들이 그를 끌어올려줄 때 그때 그가 지옥에 떨어질 사람은 연옥으로 연옥에 떨어질 사람은 천국으로 간다고 믿는 것이에요. 우리가 보기에는 굉장히 황당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에요. 우리는 그게 다 보이는 것이에요. ‘우리의 참되고 유일한 중보자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다.’ 그래서 그분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그 의지함을 나누어 갖게 하는 것이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아무것도 없어야 해요. 그때에 우리는 그 하나님만을 진실하게 따르고 그리고 의지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에요.
제가 한 주간 동안 기도원에 있으면서 사경회준비를 했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준비를 하면서 왜 그랬느냐하면 나도 개신교 신자지만 개신교 신자는 쉽게 얘기하면 이 교회에 대한 신앙이 개판이에요. 그래서 제멋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사실은 교회가 마지막에 하나님이 완성하실 이 우주적인 완성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알게 되면 교회를 그렇게 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요. 우리들이 굉장히 잘못된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 심하게 이야기하면 오늘날 현대 교회에는 교회론이 없어요. 어림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믿는 이 종교의 격이 그렇게 비참할 정도로 떨어지는 것이에요. 사실은 우리의 이 개혁파 정통주의의 유산은 절대 그렇지 않아요. 진짜 어마어마한 유산을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런 것을 생각하면 막 눈물이 나요.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얼마나 가르치고 죽을지 모르고 또 가르친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일지 모르지만 너무 많이 잘못되어 있어요. 그래서 신앙이 있다는 사람들이 교회를 짓밟는 일들을 하고 있는데 자신들의 이 잘못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모르는 것이에요. 그래서 너무너무 마음이 아파요. 그래서 여러분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이 끝나고 나면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공부할 것이에요. 지금 원고를 전부를 화요일에 넘기기로 했어요. 그러면 깔끔하게 나와서 여러분들이 공부하게 될 것인데 많이 공부해야 됩니다. 그리고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외로워지기를 각오하고 그리고 좁은 길로 걸어가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합니다. 정말이에요. 다른 성자들에게 비는 길은 없다. 우리는 이제 그런 사람들에게서 어떤 아름다운 본을 배우고 그리고 그들을 그렇게 훌륭한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신 그들 뒤에 계신 하나님의 은혜의 본질을 찾으려고 애를 쓰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려고 애를 쓰는 그런 삶을 우리들이 살아야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제 237p로 내려가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밑에서 4째 줄입니다. ‘참으로 이 성경 자체는 그리스도 한분만을 우리에게 제시하며 그분에게 우리를 보내며 우리를 그분 가운데 견고히 세웁니다. 그리스도 자신은 암브로시우스가 말했듯이 우리가 통하여서 아버지께 말하는 우리의 입이시며(참 명문이지요? 얼마나 멋있어요.), 우리가 통하여서 아버지를 보는 우리의 눈이시며, 우리가 통하여서 아버지께 우리를 바치는 우리의 오른손이시며, 친히 중보하지 아니하시면 우리에게나 모든 성자들에게나 하나님과 함께하는 아무것도 없게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중보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구원을 받는 것만 이야기하잖아요. 그렇지 않고 구원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우리에게 내려오고 우리가 주님께 올리는 기도뿐만이 아니라 모든 선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아버지께 올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인데 하나는 모든 좋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심에 있어서 그리스도 한분만을 의지하게 하시기 위함이며 두 번째는 우리가 주님께 올리는 가장 좋은 것조차도 거룩하신 아버지에게는 오를 수 없이 결함이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깨끗하게 되어 그분께 바쳐지는 것이에요. 이 대목이 너무 중요한 것이니까 잘 들으세요.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좋은 것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을 때에만 예수를 의지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최선의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 올릴 때조차도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게 하심으로……. 나는 이것을 쌍방적 의존이라고 불러요. 이런 쌍방적 의존 아래서 인간이 받을 때에든지 바칠 때에든지 오직 그리스도 한분만을 의지하게 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회개하여야할 가장 큰 죄는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고 혼자서 사는 것이에요. 주를 의지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정말 요체가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를 잘 안하고 은혜 생활을 잘 안할 때 어려움을 주시잖아요. 어떻게 하라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어려움을 주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런 절대적인 의존의 정서 아래서 살아가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한 것이에요.
(찬양)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240p 8번에서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간청과 감사함을 드려야한다고 묘사하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읽으면 진짜 좋은 책이 있는데 그것을 여러분들이 읽어야겠어요. 이번 주에 숙제는 아니고 권장도서에요. 꼭 읽으세요. 숙제라고 그래야 읽지 않을까? 그래요! 과제물 없는 숙제에요. 과제물은 없어요. 이제 저한테 이 설명을 들은 다음에 그 책을 읽으면 쏙쏙 빨려들어 오는 것이 느껴질 것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성화와 기도’라는 책이에요. 거기에서는 두 개의 주제를 다루는데 기도에 있어서 Fervency=열렬함과 Continuance=지속성이에요. 이게 기도의 요체거든요. 열렬한 기도와 지속적인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에 이르는 첫 번째 길이 뭐냐 하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를 진실하고 솔직하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에요. 무슨 뜻인지 아세요? 소리 지를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그게 마음에 아주 절실함이 있어서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어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것은 너무 좋은 것이에요. 그런데 바람 잡는 식으로 이렇게 흉내 내는 열렬함이 있잖아요. 그런 것들은 천박한 것이에요. 마음 깊은 곳에서 마치 시골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보았어요? 가뭄에 물을 기를 때에는 두레박이 풍덩하고 들어가지 않잖아요? 돌멩이에 걸리잖아요. 저 구석으로 밀어 넣으면 물이 고인 곳으로 가잖아요. 거기서 물을 길어서 잘 건져 올리는 것이에요. 그렇게 언어가 마음과 밀착된 가운데 속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에요. 요새 교회에서 대중기도 하는 사람을 이렇게 보면 그 사람의 평소의 경건이 보여요. 기도하러 올라가면 혼자서 별로 기도 안하는 사람들이 대표기도를 시켜놓으면 그렇게 오래해요. 자기가 평소에 안한 것을 반까이 하려고 그러는지 잘 못해요. 그 다음에 뭐냐 하면 미사여구에요. 그 다음에는 마음에도 없는 상투적인 말, 그런 표현을 뭐라고 그럴 수는 없지만 사람마다 각각 틀려요. 아버지를 한 문장 안에서도 대여섯 번씩 부르는 사람들은 거의 마음에 없이 아버지를 부르는 것이에요. 기도를 그렇게 길게 특히 대중기도를 그렇게 길게 많이 하려고하지 말고 오히려 젊은 자매들이 1부 예배 때 보면 정말 은혜를 받아요. 그렇게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기도를 하는데 써가지고 온 것을 읽는 것이거든요. 얼마나 가슴에 와 닿는지 몰라요. 그런 살아있는 기도를 드려야 해요. 그게 뭐냐 하면 한마디를 하더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리는 기도여야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까지 가는 것이지 입술에서만 나오는 기도는 자기의 마음에도 못가요. 그러고 보니까 그것도 문장이 되네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에까지 다다라도 입술에서만 나오는 기도는 자기 마음에까지도 못 떨어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기도할 때 누구를 움직이려고 해요?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하잖아요? 하나님을 기도를 통해서 누구를 움직이시려고 할까요? 우리 자신을 움직이게 하시고 싶은 것이에요. 아참 그것 참 좋네요. 써 놔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에까지 다다르지만 입술에서만 나오는 기도는 자기마음에도 다다르지 못하느니라.’ 괜찮네요. 써놨다가 누구에게 핵심을 찌르도록 이야기를 해주어요. 그러면 감동이 오잖아요. 그렇지요?
그래서 두 가지를 끊임없이 사용해야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간청과 감사함의 두 부분이 있다. 그 간청이 간청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해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함과 또 간청의 특징이 무엇이지요? 꼭 우리 집에 한번 와주세요. 그것은 내용이 좀 약하다. ‘꼭 제 사업자금을 빌려주세요.’ 마음 깊이 말하기는 했는데 짧은 시간에 한번 이야기 했어요. 그것은 간청이라고 말할 수 없어요. 간청의 특징은 뭐에요? 반복해서……. 그 불쌍한 과부에서 나오는 것처럼 끈질기게 매달리는 것이 간청이잖아요. 꼭 돈 좀 빌려주세요. 자기도 얼마를 빌려달라고 그랬는지 잊어버렸어요. 그것은 간청이 아니에요. ‘빌려주세요.’ 말로해서 안되니까 이메일로, 이메일로 안 되니까 전화로, 전화로 안 되니까 팩스로 자기 힘으로 안 되니까 친구를 동원해서라도 하는 것을 간청이라고 그러지요. 그렇지 않아요? 간청이에요. 간청하면 들어주게 되지요. 제가 어제는 너무 정신없이 바빠서 오늘도 새벽 4시 반에 일어났어요. 여태까지 계속 활동을 하는데 어디서 집회를 와달라고 하면 집회를 하는 것은 참 좋은 것인데 왜냐하면 여기 몇 명이에요. 백 명도 안 되잖아요. 그런데 집회를 가면 천명, 이천 명 모아놓으면 설교하면 허탕을 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은혜를 주시면 은혜를 받고 사람들이 도전을 받잖아요. 그중에 얼마나 오래갈지는 또 주님과 자신들의 관계지만 어쨌든 그런 것 하나는 너무 감사하잖아요. 저는 뭐 집회만 다니라고 그러면 행복하게 다닐 것 같아요. 그런데 그렇게 돌아다니면 일이 안되잖아요. 연구도 못하고 그러니까 너무 안타깝고 요즘은 사경회 때문에 꼼짝을 못하는데 엊그제도 팩스가 왔어요. ‘목사님! 부산의 어느 지역인데 교사들이 천오백 명 모이는데 세미나를 꼭 와주십시오.’ 우리 간사님께 ‘못 간다고 그래라.’ 밑에다가 메모가 달렸어요. ‘4년째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없이 거기다가 하나 써 붙여라. ‘내년에는 꼭 가기로 한다고 약속하면서 거절해라.’ 그래서 할 수없이 내년에는 가야해요. 그런 것은 어쩔 수 없잖아요.
지난번에 우리 여름 성경학교 때 누구지요? 중고등부 수련회 때 특강 강사로 김 영길 총장님이 오셨잖아요? 그분이 몇 년 스케줄을 가지고 움직이시는 분인데 저보다도 더 유명 인사잖아요. 저도 이렇게 바쁜데 그분은 얼마나 바쁘시겠어요? 저도 개인적으로는 알거든요. 그런데 여름수련회를 하겠다고 계획을 냈는데 들어보지도 못했던 사람들이에요. 내가 못 들어봤다고 별 볼일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 애들한테 좀 제대로 된 것을 들려줘라. 아니 김 영길 총장님 같은 분을 모셔다가 (TV에서 특강을 들으니까 정말 도전이 되던데…….) 그런 신선한 도전을 줘라. 그러니까 교역자들이 킥킥거리면서 웃었어요. 왜 웃었을까요? 그렇지!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그 웃는 것이 믿음이 없는 것이다. 김 영길 총장님이 아니라 아브라함 링컨이 와도 우리가 보기에는 위대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전부 다 종류가 다른 물건을 들고 있는 종들인데 어떤 사람은 똥지게를 지고 어떤 사람은 주판알을 가지고 있고 어떤 사람은 컴퓨터를 들고 있는 종이 들고 있는 도구의 차이일 뿐이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그분을 모실 수 있는지 내가 아예 그 자리에서 가르쳐주었어요. 첫째는 간절히 기도해라. 두 번째는 애원하고 간청하는 편지를 써라. 그러면 대개 움직여요. 그것은 경험이에요. 그래서 내가 오죽했으면 9명 모이는 교회에 부흥회를 갔었어요. 19명도 아니고 9명이에요. 그것도 삼일동안이나……. 그랬더니 내가 간다고 많이 모였어요. 15명이 모였더라고요. ‘목사님 집회 좀 와주세요.’ 그러고 뭐라고,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시간이 없어서 못갑니다.’ 라고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저희 9명밖에 안모입니다.’ 이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못가겠다는 이야기를 못하겠는 것이에요. 그래서 갔다니까요. 가까운데도 아니고 저기 충청도 한산으로 갔었어요. 그랬더니 놀랍게 그 총장님이 오셨어요. 어떻게 오셨느냐고 했더니 시간이 있어도 마음이 감동이 안 되면 강사는 안갑니다. 그런데 마음의 감동을 받았는데 하나님이 스케줄 하나를 취소시켜버리셨대요. 그래서 오셨잖아요. 그래서 내가 그랬잖아요. ‘봐라. 왜 안 되느냐?’ 그랬더니 ‘아휴 정말 목사님 말씀대로에요.’ 그래서 오셨잖아요. 그런데 이분이 오셔서 당신이 얼마나 은혜를 받고 가셨는지 다음에 부르면 꼭 오겠다고 그러셨대요. 그래서 이번 여름수련회에 오시라고 그랬어요. 그런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간청한다는 것은 두 가지에요. 마음 깊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심과 반복성이에요. 그러면 아주 황당해 보이는 기도인데도 하나님은 들어주셔요. 아멘을 해야지요. 쓸데없는데서 만날 아멘 하지 말고……. 그러면 우리가 황당해 보일 정도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해도 하나님은 들어주십니다. 들어주셔요. 그래서 ‘예수, 예수 믿은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그런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와도 그렇게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고통과 시련을 이기면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에요.
241p 이 두 가지 간청과 감사로 기도할 때에는 불만과 원망에 꽉 찬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은 땡깡이에요. 그런 것을 하면 안 돼요. 종종 그렇게 기도를 해서 응답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또 다른 요소 때문에 응답을 받은 것이지 그런 태도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에요. 어떤 생각을 해야되느냐하면 기도할 때에는 자기의 중요성을 다 버려야 되요. 그래서 주님에게 어떤 의무가 있는 것처럼 부과해서는 안 돼요. 그리고 오히려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느냐하면 ‘하나님! 이미 내게 주신 것만으로도 나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라는 마음을 가져야해요. 그게 정말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자세에요.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끊임없이 사용해야합니다. 우리의 무능력이 이토록 대단하고 일들에 대한 이토록 대단한 곤경이 모든 방면에서 우리를 강요하고 억누르므로 심지어 가장 거룩한 사람들에게 있어서조차 하나님께 한숨짓고 탄식하며 애원하는 자들로서 그분자신을 부지런히 부를 모든 이유가 충분합니다.’ 그렇지요. 거룩한 사람들일수록 더 많이 부르짖게 되요. 왜 그렇지요? 불결한 사람들은 눈이 어두워서 자기의 영혼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몰라요. 그런데 거룩한 사람들은 그것을 너무 잘 보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에요. 신실한 사람들은 자기가 부족하다고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해요. 순결한 사람들은 그 사람들만이 자신의 불결함을 볼 줄 알아요. 올곧게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만이 자기가 얼마나 수시로 믿음에서 변절하는 사람인지를 스스로 알아요. 그래서 주님을 더 많이 의지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게 신앙이에요. 그래서 모든 능력과 그리고 모든 지위 모든 이 세상에서의 기름진 복하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함이에요.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함입니다.
(찬양)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날 사랑하는 이는 예수뿐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질 않네! 온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진실하지 않고 능력 있는 사람은 능력이 그를 지켜주지만 능력이 없어도 진실한 사람은 하나님이 그를 지켜주세요. 하나님 자신이 그를 지켜주세요. 그러니까 이길 수 있는 것이죠. 세상에서 버림받고 외톨이가 되어도……. 그래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자기의 책에서 아주 멋있는 말을 남기셨어요. One man with god he is majority (하나님과 함께하는 한사람 그 사람이 곧 다수입니다.)
(찬양)
즐겨 고난길 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우리가 이런 모든 것을 배우는 과정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신학이라고 그래요. 신학을 배우는 것이라고 그래요. 그런 신학을 배우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위해서 배우는 것이에요. 그래서 책 밑에 메모를 해놔요. ‘신학(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의 기예입니다.’ 제가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누가 제일 먼저 이야기했느냐하면 마스트리트라는 위대한 신학자가 ‘신학이란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의 기예입니다.’ 그렇게 얘기해요. Art of living to God. 이렇게 묘사해요. 이것을 18세기에 와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 사람을 굉장히 존경했어요. 무엇을 추가하느냐하면 ‘The art of living to God through Christ.’ 이렇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해 사는 삶의 기예입니다.’ 이렇게 얘기했어요. 제가 거기다가 in sprit을 첨가한 것이에요. 그래서 제가 그것을 첨가함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이 완전히 잘 나타나죠. 그래서 제가 내린 것이 가장 잘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동의하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의 기예입니다.’ 기술 그러면 너무 천박하잖아요? 그래서 기예, Art에요. 어떻게 사는지를 아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 뭐냐 하면 신학공부의 목적이에요.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의 이유라는 뜻이에요. 하나님 앞에서 살기위한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교회에 가서 뭐 그렇게 많은 것을 배워야 되느냐? 뭐 그렇게 복잡하게 공부를 해야 되느냐? 그러면 뭐라고 그래야합니까?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의 기예를 익히기 위함입니다. 그런 올바른 기예를 가질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고 네 삶의 불안정함은 이런 기예를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이러면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죠.
자, 그 다음으로 넘어가면 243p 9번으로 가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나와요. 그리고 이것은 공적인 기도가 아니라 개인적인 기도의 연속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나옵니다. ‘이것이 바울이 모든 때에 모든 시간에 모든 곳에서 모든 일을 위해서 모든 사람들의 소원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세워지기를 원하면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다른 곳에서 명령한 이유입니다. 이 소원들은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을 기대하며 그분께 모든 것들에 대한 찬미를 돌려드립니다. 그러나 이 기도의 연속성은 개인적이며 사적인 기도들에 관련됩니다.’
자, 이제 그 다음에 245p로 가면 기도에 있어서 허례허식을 벗어버리도록 강력하게 촉구하는 종교개혁자다운 그런 본질의 강조가 245p 중간에 나와요. 굉장히 감동적이에요. 들어보세요. ‘나아가서 기도 자체가 본래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신 하나님 앞에서 부어지고 드러나게 되는 내적인 마음의 정서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그 옆에 보면 뭐라고 나오느냐하면 ‘쁘로쁘리에 인떼리오리스꼬르디스 아펙뚬 꾸비아쁘드데옴’ 하나님 앞에서 ‘꼬르디움 쓰꾸르땃데름’ 이라고 나오잖아요? 쓰꾸르땃데름이 뭐냐 하면 스쿠르티니 라는 정사에요. 자기를 말씀의 빛 앞에서 꼼꼼히 성찰하는 것, 그것이에요. ‘마음을 그렇게 드러나게 되는 내적인 정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 그리스도께서 최선의 기도의 법을 공표하시기를 원하셔서 골방에 들어가서 그곳에서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께서 우리를 들으시도록 은밀한 중에 우리의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명령하시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과시하는 기도의 허식으로 사람들의 호의를 끌려는 위선자들의 예를 떼놓아 말씀하시면서 골방에 들어가서 그곳에서 문을 닫고 기도하라는 더욱 좋은 말씀을 동시에 더하셨습니다.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이 말씀들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이러한 영혼의 정서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들이 그분의 성전이 되어야하는 우리와 가깝다고 약속하시면서 우리가 모든 신념을 다해서 우리의 마음속으로 내려가고 또 들어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로써 다른 곳들에서 기도하는 것이 또한 유익하다는 것을 부정하고자하신 것이 아니라 기도는 특히 영혼의 위치하는 또한 자신을 돌보고자하는 모든 소란함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그 고유함을 극히 요구하는 은밀한 무엇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다음에도 굉장히 감동적이에요. ‘만약 기도로 중재하되 깊은 마음의 정서로부터 나오지 않는다면 목소리와 노래는 하나님 앞에 중요한 것이 아니며 아무것도 유익이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게 아까 제가 말씀드린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되게 하라는 것이에요. 거기에서 모든 기도가 나오는 것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겨울에 불을 땔 때 보면 장작을 쌓아놓고 거기다가 성냥불을 붙이는 사람은 없어요. 그것은 바보지요. 마른 가지를 조금 얹고 거기에 성냥불을 켜면서 불잖아요. 그러면 불이 점점 더 커지잖아요. 그때에 조금 큰 나무들을 올려놓으면 이런 나무를 올려놓아도 불이 타는 것이에요. 그게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하면 마음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기도회에 참석을 하건 예배시간에 와서 빌건 혼자 무릎을 꿇고 간구하던 상관없이 마음에 밀착된 언어로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애를 써야 되는 것이에요. 천천히……. 하나님! 아버지! 그때에 하나님 아버지 이런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자기의 가슴에 충분히 적시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 13번으로 가면 기도의 형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면서 여기에서 주기도문에 나오는 기도의 형식을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칼빈도 마찬가지로 이 주기도문이 주문처럼 외워지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도의 패턴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기도문은 우리의 기도가 따라야할 패턴, 그 형식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라는 뜻이에요. 13번입니다. ‘이제 기도의 방법 뿐 아니라 형식,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무한한 인자와 온유를 인식하게끔 사랑하는 아들을 통하여 전하시는 것의(이게 주기도문이지요.) 형식 자체가 더 확실하게 가르쳐져야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마치 아들들이 부모의 보호 아래로 도피하기에 익숙하듯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그분 자신 안에서 찾도록 명령하시고 권고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가난함이 얼마나 궁벽한지 무엇을 우리가 마땅하게 간구해야하는지 무엇이 우리를 위한 것인지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셨기 때문에 우리의 이 무지를 막으셨고 능력으로는 부족한 것을 자신이 공급하고 채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 공식을 주신 것이라는 것이에요.
‘이 기도의 형식은 6개의 간구로 이루어졌다. 일곱 제목으로 구별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에서는 단지 여섯 가지만 읽혀지기 때문이다. 기도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의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렇게 되는데 이 뒤에 6번째하고 7번째를 떼어놓고 보는 사람도 있고 같이 보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거서이 6개냐? 7개냐? 는 이야기가 나오죠. 제가 보기에도 6번째와 7번째는 같이 연결되는 것으로 보아야하지 않겠어요? 왜냐하면 악에 빠지는 결과가 시험에 드는 결과이고 악과 시험은 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두 개를 하나의 기도로 보는 사람들도 많이 있어요.
자, 그 다음에 넘어가서 252p로 가면 제일먼저 주기도문의 해설이 나오면서 뭐가 나오느냐하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렇게 나오는데 여기서 칼빈은 ‘하늘에 계신’에 대해서는 별로 설명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오히려 저는 ‘하늘에 계신’을 가지고 한 시간 동안 설명을 했는데……. 기도할 때에 제일 먼저 압도되어야할 것은 무엇이냐 하면 ‘Heavenly father’ Heavenly라는 말이 Father보다 먼저 나오잖아요. ‘Our heavenly father’ 즉 ‘하늘에 계신’ 그럼 굳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아버지를 가르쳐줄 때에 왜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을 덧붙이셨을까? 이것은 어떤 뜻을 가지느냐하면 하나님과 모든 것을 간구하는 인간 사이에 있는 건널 수 없는 질적인 격차, 그 격차를 한마디로 말하면 거룩하심이에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에요.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압도되는 것이 기도할 때 그분 앞에서 가져야할 첫째가는 경외의 마음이에요.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은 아버지가 나오잖아요. 그런데 이 아버지는 우리가 가지 있는 아버지의 개념을 여기에서 생각하면 안 돼요. 우리 아버지들은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셨던 아버지로부터 너무 멀어진 아버지이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어요. 성경이 그리는 아버지는 우리나라 같은 유교사회에서 그리는 그런 정류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 다음에 여성우위적인 현대에서 남편이 부인의 눈치를 보면서 꼼짝 못하는 것이 있잖아요? 고개를 안 끄덕거려요. 그런 치하에서 월급통장이든지 뭐든지 손에 넣고 그 다음에 남편을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그런 상태 속에서의 아버지도 아니에요. 돈을 벌어오는 일에만 코를 박고 미쳐버려서 그냥 오직 그 일에만 보람을 걸고 가족을 몰라라하고 사는 그런 아버지도 아니에요. 그러니 결국은 그런 아버지는 찾기가 어려운 것이죠. 그래서 성경에서 그려내는 아버지는 모성과 부성이 결합된 아버지에요. 그것은 내가 가정의 달에 설교를 많이 했어요. 아들이 먼 나라에 갔을 때 매일 나가서 동구 밖에서 기다리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엄마가 할 일이지 채신머리없이 아버지가 거기까지 나가서 기다려요. ‘제가 왔습니다.’ 그래도 문 한번 열어보지 않고 밤에는 자기가 눈물을 흘리면서 고민을 했을지라도 ‘왔냐? 가서 씻고 자거라. 아침에 보자.’ 이래야지 우리나라의 아버지잖아요. 안 그래요?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는 세 가지의 용례가 있어요. 첫째는 위격들 안에서 아버지 되심이에요. 그것은 성부를 가리키는 것이죠. 성부, 성자, 성령에서 성부를 가리켜요. 그 다음에 양자적 관계 안에서의 아버지 되심이에요. 그것은 뭐죠. 성부지만 하나님 한분만을 지칭하는 것이죠. 삼위일체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 창조적 부성으로서의 아버지에요. 그렇게 따지면 이 세상에 불신자나 신자나 모든 사람의 아버지시고 심지어는 만물들도 그분에게서 났으니까 그분이 만물들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두 번째인 양자적 아버지 되심을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자, 그 다음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온전하지 못할 때 아버지와 자신 사이에서 깊은 간격을 느끼게 되는데 그럴 때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254p 마지막에서 기록하고 있어요. ‘죄들에 대한 양심으로 말미암아 어리석게 된 것이 마땅하다고 변명하지 말자. 그때에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갖느냐하면 만약 아들이 자신을 애원하시는 모습으로 낮추셔서 아버지의 자비를 인정하시며 우리의 죄책을 위해 비신다면 사람들 가운데서 누구도 그분께서 아버지 앞에서 자신들의 명분을 행하는 것보다 더 잘 행할 후원자가 없으며 파멸된 은혜를 자신들에게로 다시 이어붙일 더 좋은 해석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같은 아들의 기도들의 감동을 느끼지 못할 만큼 스스로 아버지의 속마음을 모르는 체 하지 못합니다. 저 자비의 아버지이시자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겠는가? 더욱이 그분께서는 우리를 다른 사람의 여하한 보호자가 아니라 특별히 기도로 초청하고 이끄셨으니 아들들의 자신들을 위한 눈물과 탄식을 듣지 아니하시겠는가? 이같이 다른 사람의 도움 아래로 도망치는 자들은 아버지의 자비를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에요. 우리가 그릇행하고 양심에 거스르는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우리가 괴로울지언정 우리의 양심의 괴롭힘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폐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더더욱 우리에게는 주님이 필요하시지 않습니까? 이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라는 단어에요. 우리라는 단어는 결국 우리를 어떻게 불러내지요?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이렇게 부르는 형제들이 아주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할 때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이야기는 기도 그 자체가 공동체적인 섬김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주님께 드리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떤 자세를 가져야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내가 돈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는 돈이 없는 다른 지체들을 생각하고 그들도 나와 같은 곤궁한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라는 것이에요. 반대로 내가 기도할 때 돈이 많은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그 친구들이 나한테 안 빌려주나? 믿음이 없는 나쁜 사람들이구만!’ 이렇게 생각하면서 기도하라는 뜻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모든 곤궁과 가난함과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 고통스러운 기도의 제목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동일한 고통으로 아파하는 지체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너무 과도하게 자기의 고통과 간구만을 가장 큰 것으로 여겨서 다른 사람들은 돌아보지도 않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에요. 저는 주기도문을 맨 처음에 배울 때 제일 충격인 묘사가 ‘우리’였어요. 우리 아버지……. ‘아 그렇구나! 지금 이 순간도 결핍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많은 지체들이 있구나. 내가 무엇인가 부족해서 이렇게 고통스럽게 비는 것처럼 저들도 또한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매달리겠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다보면 자기의 기도가 가벼워지는 것이에요. 그리고 충분히 감사한 마음이 이 안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아멘! 정말 뭐하나 버릴 페이지가 없지요? 정말 그래요. 그래서 258p에 보면 그 묘사가 나와요. ‘한 가족의 어떤 아버지를 참되게 마음속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동시에 그의 가정 전체를 사랑과 자비로움으로 껴안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늘에 계신 이 아버지께 그러하듯이 그분의 백성, 그분의 가족, 마지막으로 그분의 유업을 향하여서 열심과 정서를 보여야함이 옳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것들을 아주 영예롭게 하셔서 자신의 독생하신 아들의 충만함이라고 부르셨습니다.’
259p로 넘어가면 정리하는 것이에요. ‘모든 기도들은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왕국과 집에 세우신 그 공동체를 살펴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우리를 위해서나 어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하는 것을 허용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개인기도가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이에요. 아까 제가 드린 말씀이 나오는데 거기를 줄치셔야 되요. ‘그럴지라도 실로 우리의 마음이 이 공동체에 대한 고요로부터 떨어지거나 빗나가지 말아야하며 모든 것을 그곳으로 돌려야합니다. 비록 기도들은 개인적으로 품어지지만 이것들이 목적을 지향한다고 해서 공동체적이기를 그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기도도 지체들의 기도도 모두 한 몸의 기도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이제 261p에서 ‘하늘에 계시다.’ 라고 설명이 간단하게 나와요. 그렇지만 아주 중요한 언급이 여섯째 줄에 나와요. ‘이로써 그분께서는 자신께서 특정한 어떤 지역에 제한되지 아니하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흩어져 계신다는 사실을 의미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자체의 조악함을 인하여 달리 표현할 수 없는 그분의 영광을 다르게는 품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하늘이라는 말을 통하여 우리에게 지적되는 바는 아무것도 이것보다 더욱 숭고하고 존귀함으로 가득한 것으로써 우리의 시야 아래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의 뜻을 우리의 정서로 내몰지 않도록 우리의 생각이 더욱 높이 끌어올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시다는 그 표현 속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무한한 격차, 후 하고 불기만 해도 사라질 지푸라기와도 같은 인간들이에요. 그래서 수없는 사람이 죽고 사라져가도 세계는 계속 흘러가요. 내가 죽어도 그렇겠지요? 우리 모두가 죽어도 그렇게 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 인간은 자연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하나의 물방울처럼 사라지는 존재에요. 하나님은 그 모든 것들을 통치하는 그 중에 나 같은 인간도 그분의 통치의 계획 속에 들어있는 것이에요. 그것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의 충만하고 위대하심 앞에서 우리는 티끌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에요. 그때 우리 인간의 마음은 자기의 존재가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분을 깊이 의존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모든 가치를 그분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돌아가기를 원하는 우리 자신의 자리에요. 참 깊지요? 그렇지요? 별로에요? 깊지요! 그래서 설명을 들은 다음에 다시 읽어보세요. 그러면 가슴에 확 다가오게 될 것이에요.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다음시간에는 첫째 간구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달로써 모든 수업을 마칩니다. 그래서 한 시간이 모자라는데 그래도 하겠어요. 5주라서 설날 전주 1주는 휴강을 할 이유가 없지요? 해요? 그래요. 쉬어도 되지요. 우리는 설날과는 상관이 없네요. 1월 첫 주에 쉬었으니까 쉬지 말고 계속 해야지요. 그래서 어쨌든 1월 마지막 주로 끝납니다. 그래서 성화 반을 마치게 됩니다. 오늘 발표를 못했는데 다음 주에 두 개를 조금씩 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주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주님께서 사랑해주시고 오늘 이 시간에도 불러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하나님 오늘도 함께해주시옵소서 그래서 저희들이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우리의 기도를 열어주시고 주님을 의지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수고하셨습니다.
2010. 01. 16 하반기 성화반
성화반 Ⅸ
오늘은 262p부터 보겠습니다. 먼저 수업을 하고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262p입니다. 제일 먼저 첫째 간구가 나오지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나오고 그 다음에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렇게 나오지요. 이것은 어떻게 보느냐하면 그 앞에 나오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는 지난주에 해설했잖아요. 그렇게 하나님이 이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과 구별되어 그렇게 아주 탁월하고 만약에 뛰어나신 분이시라면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이 맞기 때문에 마태복음 6장 9절의 적용이라고 부르는 것이에요. 그러면 여기에서 왜 ‘당신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지 않고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렇게 말했을까요? 여기서 우리들이 알아야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그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셨고 또 이 땅에 지어진 모든 만물들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 모든 것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하나님과 같은 것이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결국 이 땅에 하나님이 계시지만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감으로써 높일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본질은 인간에 의해서 높아질 수도 없고 낮아질 수도 없는 것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은 그 이름과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높아질 수도 있고 낮아질 수도 있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우리가 월드컵에 가서 우승을 한들 대한민국이 높아지겠어요? 그러면 바다 위에서 10m쯤 올라올까요? 그런 것은 아니죠. 그러나 그렇게 해서 선수들이 나라를 위해 잘 싸우게 되면 나라의 명예가 높아지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이름을 높여드리고 명예를 높이면 주님이 무슨 덕을 받으시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녀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송축하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는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고 또 하나님의 자녀는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면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사람들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는 기도는 하나님을 위한 기도라기보다는 인간 자신을 위한 기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제 칼빈의 해석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의 모든 능력들, 권능, 지혜의 자비, 진리로 이루어지는 그분의 권세로 지시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위대하고 놀라우시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의로우시므로 그분께서는 지혜로우시므로 등등……. 따라서 이 존귀함이 이것들로 인해 거룩 여김을 받게 해달라고 간구해야한다.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그분의 존귀함이(여기서 칼빈이 얘기하는 그분의 존귀함이라는 것은 결국 이름을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모든 사람에 의해 거룩하게 여김을 받도록 즉, 참으로 인정받고 찬미 받게 되기를 간구하여야한다.’ 그것이지요.
263p로 넘어가면 그런 간절한 소원이 나오지요.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그분의 영광이 빛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도록 하자. 그리고 이같이 모든 영혼 가운데 모든 언어들을 통하여 그분에 대한 찬미들이 울려 퍼지게 하자. 마지막으로 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고 모욕하는 거룩히 여김을 희미하게 하고 약화시키게 하는 모든 불경건이 멸망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도록 하자. 심지어 이런 혼돈 가운데서도 주님의 존귀함이 점점 더 밝아지도록 하자. 그리고 이 간구에는 감사함이 포함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모든 곳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고 간구할 때 우리는 그분께 모든 선한 것들에 대하여 찬미를 드리며 모든 받은 것들로써 그분께 돌리며 우리를 향한 그분의 은총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무슨 뜻이에요? 제가 설교 속에서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지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는 자기 안에 이루어진 분량만큼만 기도할 수 있는 것이에요. 또 자기 안에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만큼만 기도할 수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한사람의 성도가 이 세상에서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기도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는 이 기도를 찢어지는 가슴으로 통곡하며 기도할 수 있을 때 그의 마음의 상태는 하나님이 인간을 이 세상에 보내신 그 상태에 가장 근접해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제 그런 상태에서 인간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하게 되어서 그 사랑이 워낙 탁월하게 될 때에 내가 회개하지 않은 것과 저 사람이 회개하지 않은 것 사이에 구별이 거의 사라지는 것이에요. 그게 바로 사랑이 가져오는 동일체의 의식, 혹은 동일한 지체의식이라는 것이에요. 나는 여러분들이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신앙의 경험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혹시 여러분 중에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무서운 기도이지는 합니다. 하나님 제가 지옥을 가도 좋으니 우리 아버지를 구원해주십시오. 그런 기도 말이에요. 그런 기도가 정확하게 바로 그 아버지를 통해서 모욕을 받는 하나님의 이름, 그 믿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서 모욕을 받는 하나님의 이름, 모욕을 하는 그 사람들이 받을 형벌, 그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가져오는 기도에요. 그래서 이 부분을 여러분들이 상세하게 찾아보려면 시편 23편 강해가 있는데 인터넷에 들어가서 시편 23편 3절 하반절의 강해를 들어보시던지 아니면 시편 23편 강해의 책에서 그 부분을 읽어보던지 하세요. 굉장히 중요한 것이에요.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아드비아트 레구눔뚜움’ 그랬어요. 뭐냐 하면‘당신의 왕국이 임하시며’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앞의 첫째 간구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하면 따지자면 첫째가 왕을 가리킨다면 둘째는 그 왕에 의해서 통치되는 영역을 가리키는 것이에요. ‘그런 나라가 임하옵시며’ 그런 뜻이에요. 어떻게 되지요? 인간의 타락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왕국 안에서 반역을 일으킨 것이에요. 이 반역을 주도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바로 사단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에 반역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나라에 반란이 일어나는 것이에요. 그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대장을 보내시는데 그분이 그리스도시지요. 그리고 그 반란을 토벌하도록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있는데 언약의 백성들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의 이 지상에서의 전투적인 삶은 바로 이러한 반역들을 토벌하기 위해서 치르는 영적인 전쟁이에요. 이런 전쟁을 하나님께서 우리만 싸우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셔서 그리고 교회를 위해 각종 은사를 주심으로써 그래서 이런 싸움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시는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이에요.
그러면 어떤 한사람이 주님의 분부를 따라서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이미 당신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는 그러한 반역과 더불어 싸우고 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리고 실제로 그런 삶을 살지 아니하면 이 기도를 할 수 없는 것이에요. 오늘날 이 주기도문이 철저하게 버림을 받은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신앙생활의 방향과 마음, 나아가는 길 이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의 정신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이탈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죠. 그것이 일치하면 기도가 나오게 되는 것이에요.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책, 좋은 필기도구, 정보, 이런 것에 관심이 많아요. 외모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새로 나온 옷, 기능성 화장품, 머리 잘하는 미용실, 재고의류 세일 등에 관심이 많아요. 병든 사람은 명의, 싼 약, 의료보험에 관심이 많아요. 그러니까 어떤 삶의 방향을 사느냐에 따라서 관심은 현저히 달라지는 것이죠. 그렇게 되는 것이에요.
제가 24일까지 예배를 드리고 25일에 화란을 갑니다. 화란에 갔다가 주일이 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오는데 가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것을 협의하러 가는 것이에요. 세계적인 종교개혁 연구가 한분이 계세요. 그 교수님이 자기가 평생 모은 책을 우리교회에 넘길 용의가 있다고 그러는데 물론 그것이 거저는 아닙니다. 상당한 돈을 주고 사는 것인데 하지만 그 돈을 한꺼번에 달라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그것은 나중의 문제인데 그 책이 13,000권정도 되요. 10톤 정도 되는데 여기에 꽉 찰 정도의 분량이지요. 그래서 그 교수님이 그 얘기가 돌아서 제가 Apply를 했어요. ‘우리교회로 넘기십시오. 나는 이것을 가지고 한국의 역사와 조직신학 교리학 전문도서관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랬더니 이분의 마음이 많이 흔들리셨어요. 나에게 넘길까? 자손들에게 줄까? 거기서도 팔수도 있는데……. 제가 영문편지를 간곡하게 썼어요. 그래서 ‘나에게 넘겨주시면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유용하게 쓰겠습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거의 협의가 끝났어요. 그런데 그것을 결정하기 전에 먼저 와서 봐라. 그래서 내가 ‘볼 필요가 없습니다. 교수님이 모은 책이면 내가 무조건 인수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선데이 서울을 모았겠어요? 아니면 주부생활을 모았겠어요? 그래서 그것을 인수하러 가요. 뭐냐 하면 연구하고 진리를 탐구하는데 관심이 있는 사람은 그것이에요. 나는 옛날부터 이야기를 했어요. 뭐냐 하면 교회 안에 학고방에 살아도 좋으니까 사택 사줄 돈으로 책을 사달라고 그랬어요. 지금 사는 집도 큰집은 아니지만 뭐 큰집에 살아봐야 청소하기만 힘들지 뭐가 좋아요? 그런데 책이 있어보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를 느낄 수 있는 그런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자기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서 그렇게 되는 것이에요. 제가 시간이 없어요. 그런데 일부러 시간을 내서 가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아요? 별로 안 놀라운 모양이네요. 구라파의 책들이 얼마나 비싼가하면 최근에 제가 학생들과 공부하기 위해서 새로 나온 책을 들여놓았는데 한권에 180,000원이에요. 무지하게 비싸요. 그게 13,000권이면 50,000원씩만 해도 얼마입니까? 6억 5천만 원어치의 책이에요. 그래서 어쨌든 하나님이 나에게 그렇게 허락해주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계약서까지 들고 가는 것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분의 은혜 안에 사는 것이 행복하면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보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세상을 보면서 너무 안타까울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 그렇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 수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런 나라가 자기 속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주기도문이 기준이 되어서 진짜 주님을 제대로 만나면 이 주기도문의 기도가 자기의 기도가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자기가 영적으로 멀어지게 되면 자신의 삶과 관심사와 이 모든 것과 기도는 일치하는 것이죠. 그렇지 않아요? 당연하잖아요. 2
64p를 보면 19번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한다. 즉 날마다 주님께서 새로운 믿음의 백성들을 자신들에게 더하셔서 그분 자신의 영광을 모든 방식으로 기념하게 하시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주님 자신의 은혜의 부요함이 항상 더욱 풍부하게 퍼져서 그 은혜를 통하여 그분께서 그들을 자신 전부와 완전하게 결합시키시는 일을 성취할 때까지 날마다 은혜가운데 살고 다스려지게 되기를 기도한다.’ 맨 밑입니다. ‘그날에는 오직 그분 자신만 높아지실 것이며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실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머리되시는 때를 의미하는 것이에요. ‘그때에 그분의 백성들이 영광가운데 모일 것이며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러나 사단의 왕국은 완전히 붕괴되고 쓰러질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간구로 넘어가지요. 첫 번째 기도가 하나님의 왕이 되심에 대한 기도라면 두 번째 기도는 영역에 관한 기도에요. 세 번째는 이 영역의 상태에 관한 기도에요. 자 예를 들어 봅시다. 나라를 차지하기만 한다고 해서 자기 나라가 되는 것은 아니죠. 대표적인 나라가 어디에요. 지금 필리핀의 민다나오라는 굉장히 큰 섬이 있지요. 그곳은 지금 반란군들이 지배하고 있어서 정부하고 수시로 싸우는데도 정부가 그것을 정복하지 못해요. 그리고 거기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세금을 걷어서 독자적인 나라처럼 살아가는 것이에요. 실제로 거기는 가게 되면 굉장히 위험한 지역이에요. 그러니까 필리핀의 법이 거기에서는 통용이 안 되는 것이죠. 그런 것처럼 아무리 땅이 있으면 무엇해요. 실제로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러면 그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주권이 펼쳐지는 나라라고 말할 수가 없겠지요? 그래서 안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제 그 나라의 성질상 이렇게 되기를 기도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당신의 뜻이에요. ‘띠아뜨 볼룬따스뚜아=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우트인 꼬엘르=땅에서도’ ‘이따인 떼라=그것처럼 또한 땅에서도’ 그렇게 되지요.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래서 이제 20번에 보면 ‘이로써 우리는 하늘과 땅 모두 즉 모든 곳에 계신 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모든 것들을 조절하시고 구성하시며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주장하시며 자신의 모든 피조물들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사용하시며 모든 사람들의 모든 뜻들을 당신에게 복종시키시기를 요청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나란히 그분 자신의 뜻에 복종하기를 요청한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동의함으로써 명령을 거절하고 피하고 이러이러한 사람들이 있을 때 하나님이 작정하신대로 이루어지기를 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뜻을 거역하는 우리의 정서들을 공허하며 쓸모없게 해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에게 속한 것들을 소멸시키시고 새 정신과 영혼을 창조하사 자신의 뜻에 대한 순수한 동의 외에 어떤 욕망에 대한 충동도 일체 의식되지 말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도 자기는 적어도 자기 안에 그 뜻이 이루어지고 혹은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면 기꺼이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 부복을 한 상태에서 이러한 기도를 하나님께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삶은 기도를 바꾸고 그 다음에 기도는 삶을 바꾸며 삶은 기도 안에 묶이고 그 다음에 기도는 삶 안에 갇혀서 기도하는 것만큼 살고 사는 만큼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에요.
그 다음 4번째 간구입니다. 이것은 크게 세 간구들 중 첫 번째입니다. 우리들을 위한 기도라는 것이죠. 이것들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고 우리의 필요를 돕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구한다. 그렇죠? ‘빠넴 노스트롬 꿔디디아놈 아노비스 호디’ 그랬잖아요. 호디는 오늘이에요. ‘오늘 우리에게 다 주시옵소서.’ 그게 뭐냐 하면 빠넴 노스트룸 그래서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우리의 빵 곧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그 빵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그런 것이죠. 이것은 결국 먹고사는 일이 가장 급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제일 먼저 하나님의 이름, 나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 그렇게 하고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는 이 간구가 이어지잖아요. 그러면 큰 첫 번째 간구는 하나님, 두 번째는 우리를 위한 간구, 마지막 간구는 송영이 되는데 두 번째 대목인 우리를 위한 간구에 있어서 제일 먼저 예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게 하신 것이에요. 그것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양식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양식을 위하여 살라는 것을 우리에게 지시하시기 위해서 이 기도를 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구하면서 결국 우리가 무엇을 알게 되느냐하면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체의 존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하찮고 미천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첫 번째로 보여주는 것이에요. 보십시오. 이 땅에 식물과 많은 것들이 있는데 하나님이 제때에 비를 내려주시지 않거나 햇빛만 제때에 내려주시지 아니하면 모든 피조물들이 결실할 수 없고 자랄 수 없어요. 그렇게 피조물이 주님을 의지하는데 인간도 하나님을 그렇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여기에서 첫 번째로 보여주는 것이에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우리의 생명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온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이에요. 만약에 ‘부자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라는 기도를 하면 일생에 한두 번밖에 안되잖아요. 그러나 이 양식은 매일 매일 구하면서 우리는 매일 매일 우리의 양식이 그분을 의존하여 우리에게 온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는 무한히 완전하신 분이고 우리는 그분께 기대어살아갈 수밖에 없는 비천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그것이에요.
그 다음에 세 번째는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이 양식을 구하는 것이 개인적인 기도가 아니라 우리에게 공동체적인 기도가 되잖아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금 인구가 64억이라는데 이 세상에서 나오는 곡식으로 인간이 다 먹을 수 있을까요? 조금 모자랄까요? 아니면 조금 남을까요? 모자랄 것 같아요? 아니에요. 충분히 먹을 수 있는 곡식이에요. 지금 현재 미국에서 5대호 연안에서만 땅을 풀로 경작하면 그것만 가지고도 전 세계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의 수확량이 나온다고 그래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분배가 제대로 안 되는 것이에요. 제가 미국을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너무 심해요. 어마어마한 음식을 차려놓고 이만큼씩만 먹고 다 쓰레기통에 넣는 것이에요. 그런 것들이 만약에 골고루 공급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뭐 사람마다 논리가 다 다르겠지만 나는 미국이 이라크를 상대로 전쟁을 한다고 할 때 하루에 전비가 1조원이 들어갔어요. 그러니 가난한 나라는 전쟁도 못합니다. 전쟁비용이 하루에 1조원이 들어갑니다. 그러면서 그런 생각을 해보는 것이에요. 1년을 전쟁하면 약 400조원정도의 돈이 들어가는데 우리나라가 이번에 무역을 많이 해서 돈을 벌었다고 그러는데 십년정도 벌어야할 돈이에요. 올해 50조 정도 벌었으니까 한 십년정도는 벌어야 되잖아요. 그래봐야 전쟁을 50일 정도하면 없어지는 돈인데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들어가는데 만약에 그 돈의 절반만이라고 이슬람에 있는 국가들을 재건하고 잘 올바르게 살게 하는데 만약에 투자한다면 갈등이 치료되지 않을까하고 생각했어요. 그 외에 다른 요소들이 있겠지만……. 그렇게 생각해보았어요. 모든 일용할 양식들이 한쪽에 쏠리는 것이에요. 그다음에 또 하나는 뭐냐 하면 곡식을 먹고 살면 문제가 안 돼요. 그런데 양질의 고기를 먹기 위해서 소 한 마리가 자기 몸무게보다 수십 배의 곡식을 먹어치워야 한 덩어리의 고기를 생산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어요. 이번에 아이티도 보니까 진흙에다 소금하고 마가린을 넣어서 과자를 만들어서 그것을 먹는다고 그러는데 너무 황당하지요. 그것도 굽고 튀기고 그런 것도 아니고 햇빛에 말려서 그 진흙으로 만든 과자를 판다고하니 그 삶이 얼마나 비참하겠어요.
여러분들은 별로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아마 안 믿을 거예요. 우리 어렸을 때에 미아리시장을 가면 구두를 볶아서 팔았어요. 황당하지요? 별로 안 믿으시네. 군인들이 신고 버리는 구두를 물에 오랫동안 불리면 그게 가죽 비슷한 모양으로 다시 돌아가요. 그러면 그것을 썰어서 거기다가 양념을 해서 볶아요. 나는 꿀꿀이죽까지는 못 먹어 보았어요. 그것은 우리보다 좀 더 앞선 사람들이 먹은 것이에요. 아 참 굉장합니다. 그것을 그렇게 해서 팔아요. 그러니까 피혁공장에서 가죽을 만들다가 망치는 것 있잖아요. 그것을 먹으면 암이 걸리고 죽는 것이에요. 진단도 못했으니까 무슨 병으로 죽었는지도 모르는 것이죠. 그 약품 처리한 것을 그런 것을 썰어서 볶아서 그것을 길거리에서 팔고 그랬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렇게 모든 것들이 균등히 배분이 안 되니까 그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더 많은 것을 누리려고 하는 인간의 악한 욕심 때문에 분배가 안 되기 때문에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에요. 전 세계의 80%의 부를 10%의 사람들이 누린답니다. 나머지 20%를 가지고 90%의 사람들이 찢어먹는 것이죠. 그러니까 계산이 안 나올 정도로 가난하게 사는 것이죠.
이게 공동체의 기도에요. 참 신기하잖아요. ‘우리, 우리’ 계속 나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이번에 레깔레탈레치오의 교리를 이야기하면서 말씀드렸습니다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개별적인 인간을 하나하나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로 창조하신 것이에요. 그래서 사랑의 연합 속에서 살아가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부르신 것이에요. 그래서 내일 예배시간에 신화의 교리라고 하는 독특한 전형적인 머리되심의 교리에서 아주 핵심적인 신화의 교리를 내일 가르쳐 드릴게요. 기대하세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인간 전체를 ‘우리’라는 공동체로 묶으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결국은 양식도 우리를 위한 기도가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나만 잘 먹고 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식탁을 대할 때마다 이 식탁을 누리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식탁에도 절차가 필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에요. 이해되지요?
그 다음 넘어가 보겠습니다. 제가 한 내용이 오히려 더 상세할거에요. 그래도 조금 읽어봐야겠지요. 24번을 보십시오. ‘이제 우리가 날마다 그리고 오늘이라고 말함으로써 이렇듯 지나가는 것들에 대한 과도한 욕망으로 우리가 불타지 않도록 배우게 됩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그러잖아요.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기도할 때 그 기도는 결국 하루하루의 양식을 위한 기도지요. 이게 나중에 종교개혁 때에 해석상에 문제가 됩니다. 이게 진짜 매일 매일이냐?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저축하는 것을 죄악시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것은 비성경적이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그러면서 선한 일에도 쓰지만 다 써버린단 말이에요. 그런 것이 과연 성경적이냐는 문제가 나오는 것이죠. 여러분들은 어떻게 답을 해야겠어요? 그래도 여러분들이 신학자니까 답을 해야지요. 뭐라고 대답을 하겠어요? 중요한 이야기는 거의 다 나왔네요. 한사람의 의견을 더 들어볼까요? 어떻게 생각해요? 이렇게 보지요. 우리 집사님이 이야기한 것처럼 문제가 된 것은 무엇이냐 하면 돈을 저축하면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덜 의지하게 되고 물질을 믿게 되면 그것은 악한 것이죠. 대부분 일용할 양식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돈을 잘 꾸러 다녀요. 그러니까 그것은 결국 무엇이냐 하면 저축하는 목표 그 자체가 내일 내가 이런 물질 때문에 흔들려서 요동치고 시험에 들고 사람들에게 기대는 그런 삶을 살지 않고 의연하게 흔들림이 없이 주님을 섬기며 살기 위함이라고 하거나 아니면 이렇게 모으는 것들을 가지고 후에 더 보람 있는 일에 쓰기 위함이라고 그러면 저축하는 것이 그렇게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없겠지요. 그러면서도 조심해야할 것이 무엇이지요. 예수님이 뭐라고 그랬어요?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그랬으니까 모아두면 그것이 우리에게 탐욕이 될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늘 하나님 앞에 깨어서 조심하면서 물질생활을 해야겠지요. 자, 그런 메시지들을 여기에서 찾아내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 271p로 넘어가면 ‘여기서는 우리의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절대 우리에게 빚지지 않는 것을 우리 것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인자가 훨씬 더 많이 드러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지기를 간구하는 그것은 무조건적인 거저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을 의미한다. 심지어 극히 우리의 기술과 부지런함으로 획득된 것처럼 우리의 손으로 마련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어느 면으로 보든지 그것은 우리에게 생긴 것이다.’
그 다음에 다섯 번째의 간구가 나오지요. 무서운 기도에요. ‘레미떼노비스데비따노스트라 시쿠트에띠노스 레미띠무스데비또리부스노스트리스’ 그러잖아요. 레미떼=탕감해주옵소서, 노비스=우리에게, 데비따노스트라=빚을 진 우리의 사람들을……. 뒤에 부터 우리에게 빚진 사람들을 우리가 탕감하여 주는 것처럼 우리를 우리의 빚진 것을 탕감하여 주옵소서. 이런 뜻이에요. 이것을 부정문으로 바꾸면 어떻게 되겠어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주지 않는다면 우리의 죄도 용서해주지 마옵시고’ 그렇게 되잖아요. 그렇게까지 바꾸어서 읽고 싶은 마음은 없지요? 그렇지요? 그래서 이것은 결국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이 기도 자체가 교회에 가르쳐주신 기도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교회에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육체와 영혼으로 대비시켜서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육체는 무엇이지요?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결국 이렇게 되요. 우리가 만약에 기도할 때에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렇게 기도한다면 나에게 양식을 주어졌으면 그것은 응답이고 더 이상 신경 쓸 것이 없지요. 그런데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그렇게 되면 이것은 아직도 응답되지 않은 것이 많이 있는 것이에요. 왜? 우리의 지체들 가운데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기도는 이루어진 것이 아니죠. 그러니까 이 기도가 마음에 중심에서 우러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되지요. 자기 것을 움켜쥐고 말하자면 탐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런 기도를 드릴수가 없잖아요. 이것 자체를 붙들고 있는 자기의 소유를 놓게 만들어주는 기도란 말이에요. 이 기도 자체가 말이에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없는 상태로 흘러들어가게 만들어주는 것이에요.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되지요?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우리의 육체를 위한 것이었다면 요번에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것은 영혼을 위한 것이에요. 뭐냐 하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결국 무엇을 가리키느냐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 줄 수 있는 권한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이어야 해요.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지으면 안 되지요. 그것은 자기의 소관사항이 아니니까 말이죠. 그래서 뭐냐 하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었을 때에는 우리도 그 죄에 대해서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 그때에 용서해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옵소서. 결국은 이 죄가 빚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좀 보겠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어떤 예외도 없이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죄 사함이 우리에게 주어지기를 간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죄에 대한 벌, 혹은 그 값을 빚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빚이라고 부릅니다. 이 사함으로 말미암아 해방되지 않으면 어떤 방법으로도 그것을 갚을 길이 없습니다. 이 거저주시는 은총은 그분 자신께서 이 빚을 거저 지워주시며 우리를 이 빚으로부터 방면해주시기 때문에 그분의 자비에 속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로부터 절대 값을 받지 아니하시며 오히려 단번에 자신을 아버지께 속전으로 드리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의 자비로 자신에게 무르시면서 이런 일을 행하십니다.’
마지막 26번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자신이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해준 것처럼 우리에게 상처를 입혔던 자들을 용서하거나 은총을 베푼 것과 같이 우리에게 사함이 있도록 기도합니다. 이 사람들을 위하여 범죄와 불법의 죄책을 사하는 것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속합니다. 참으로 분노, 미움, 복수에 대한 욕구를 자의로 내버리고 불의한 행위들에 대한 기억을 자원적 망각으로 부숴버리는 것이 우리의 사함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 자신이 우리에게 해를 끼치고 있거나 해를 끼친 모든 사람들의 불법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죄 사함이 하나님께 간구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미움을 담고 보복을 궁리하고 해를 끼칠 생각을 한다면(쭉 내려가서) 우리는 죄 사함이 있도록 하지 말아달라고 하나님께 탄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가 주기도문 중에서 이 기도가 가장 무서운 기도라고 그랬어요.
그 다음에 여섯 번째의 간구로 넘어가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많고 다양한 시험의 형식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어기도록 자극하면서 욕정이 권유하거나 마귀가 충동하는 악한 개념들이 시험들이다. 이 개념들은 자체의 본성으로는 악하지 않다. 그러나 마귀의 계교로 시험이 된다.’ 즉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는 살아가면서 유혹을 받는다. 너희 본성으로 유혹을 받기도하고 마귀에게 유혹을 받기도 하고 이렇게 자극을 받을 때가 있는데 이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니다.’ 만약에 그것을 악한 것이라고 하면 예수님도 시험을 받으셨으니까 악을 행한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 자체는 악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다만 그것이 악이 되는 것은 뭐냐 하면 마귀가 계교를 행해서 그것을 우리들이 마음속에서 의지적으로 그렇게 되고자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붙들 때, 의지의 선택이 있을 때, 그것을 행하게 될 때 그것은 악이 되고 그것은 또 우리의 책임이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이 개념들은 자체의 본성상 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귀의 계교로 시험이 됩니다. 이 시험들이 우리의 눈 속으로 던져지면 그것들의 장애로 말미암아 그것이 우리의 마음에 장애가 되어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눠지거나 혹은 우리의 삶의 방향을 빗나가게 됩니다.’ 여기서 나눠지게 되는 것은 근심이고 빗나가는 것이 바로 죄란 말이에요. 원래 죄라는 말은 ‘하마르티아’ 라는 희랍어 단어가 원래의 뜻은 miss the mark. 에요. 표적을 빗나가다는 뜻이에요.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저기를 가라고 그랬는데 활을 쏘는데 과녁을 향해 쏘아야 되는데 과녁 옆에서 깃발을 들고 있는 사람을 쏘아버리면 그게 뭐죠? 그게 바로 벌 받을 죄가 되는 것이죠.
이것은 옛날이야기인데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할게요. 우리 후배 하나가 있었는데 모여앉아서 군대 갔다 온 이야기를 하는 것이에요. 군대 갔다 온 이야기를 하는데 이 친구가 무엇을 하는 부대에 있었느냐하면 발칸포라고 알아요? 이렇게 의자 같은 데에 뚜껑을 타고 앉아서 이것을 겨눈 다음에 발을 누르면 총알이 1분에 수천 발씩 총알이 나갑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말하자면 유도탄으로 유도탄을 맞히는데 그래도 못 맞히면 유도탄이 날아올 때 화망 구성을 해서 그것을 맞힌다는 것이에요. 발전되어서 그렇게 된 것인데 아주 과장하면 한 3,4분만 쏘면 탄피가 한가마니씩 쏟아진대요. 그런 발칸포의 사수를 했는데 이등병이에요. 이등병이면 군기가 바짝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공중에 날아다니는 것을 표적으로 쏴야 하잖아요. 그래서 아무래도 안 되겠으니까 실감나게 하기 위해서 부대에서 그 당시에 삼백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서 무선으로 조정하는 비행기를 하나 산 것이에요. 그리고 뒤에 가벼운 스치로폼을 붙여서 비행기 모양으로 하고 이것을 끌고 가게 한 것이에요. 그런데 사수는 그 뒤에 오는 그 모형을 사격해야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게 이등병인데 군기가 바짝 들어서 비행기가 딱 뜨니까 사격 그랬는데 앞에 날아가는 비행기를 사격해서 박살을 냈으니까 거기에 육군 참모총장이 사열을 했는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막 박수를 치더래요. ‘아 괜찮아 사병! 휴가 보내’ 그러더래요. 특등사수라고 기분이 너무 좋아서. 이 부대장이 표정이 완전히 일그러졌어요. 그렇지 않겠어요? 거금을 들여서 샀는데…….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그랬더니 일주일 휴가 갔다 오고 돌아와서 한 달을 영창을 갔다 왔대요. 내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려다가 이 이야기가 나왔나요? 빗나가는 것. 그러니까 쏴야할 목표를 빗나갈 때 그 때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이에요. 모형을 맞추어야하는데 빗나가서 진짜 비행기를 맞추어서 박살을 냈으니 뭣도 모르는 참모총장은 박수를 치면서 휴가 보내라고 그러는데 사단장은 휴가 갔다 온 다음에 한 달 영창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군대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지요.
‘실로 이러한 시험들은 우로부터 혹은 좌로부터 옵니다.(그렇지요?) 어디에서 이런 시험은 언제나 있습니다. 자신들의 광채와 외양을 드러내 보이며 사람들의 통찰력을 현혹함으로써 그리고 자신들의 아첨들로 유혹함으로써 그와 같은 눈속임에 사로잡히고 그와 같은 달콤함에 취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하나님을 망각하도록 하는 부, 권능, 영예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칼빈이 재미있는 것이죠. 하나는 더하기의 시험이고 또 한쪽은 빼기의 시험이에요. 더하기의 시험은 많이 주어서 우리를 흔들리게 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빼기의 시험은 빼앗아감으로써 마음이 갈려서 신앙이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이에요. 그게 뭐에요?) 빈곤, 치욕, 모욕, 이런 것들이 속합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진 영혼들을 절망하게 하고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소망을 내어버리게 하고 심지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인디언에게 그런 풍습이 있대요. 인디언이 싸움을 하다가 포로를 잡잖아요. 그러면 양쪽에 인디언이 서서 포로를 지나가게 한대요. 그러면서 막 때려주는 것이에요. 양쪽에서 그러면 얻어맞으면서 긴 사람의 터널을 거기를 빨리 통과하는 것이에요. 우리에게 싸움을 건 적수를 벌주는 방법이 인디언이 양쪽에서 때리는 것인데 빨리 지나가지 않으면 계속 맞는 것이에요. 그래서 얻어맞으면서도 막 달리기를 해서 빠져나가는 것이에요. 신자의 신앙생활이 한쪽으로는 좋은 것들이 오면서 신앙이 흔들리고 한편으로는 고난이 오면서 신앙이 흔들리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러한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달으면서 이런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이에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그래서 이 시험이 사업이 안 되고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이런 것을 의미하는 그런 것만이 아니라 좋은 것으로 승승장구 잘나가고, 돈도 많이 벌리고 그렇게 되는 좋은 상황 속에 들어가는 것도 시험에 들어가는 상황일수가 있다는 말이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그렇게 나가지요. 그리고 이제 또 한 간구가 281p에 나옵니다. 뭐냐 하면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그랬는데 그게 뭐냐 하면 결국은 어떻게 되요? 시험에 들게 되면 대개 악으로 빠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결과가 이르지 말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이죠. 시험에 들면 대개는 악에 빠지게 되고 그 다음에 은혜 가운데 거하면 선으로 향하게 되지 않겠어요?
그 다음에 281p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이것은 견고하고 고요한 우리의 믿음의 휴식이다. 만약에 우리의 가치를 따라 기도들이 하나님께 위탁된다면 누가 중얼거리기라도 할 것인가. 가장 비참하더라고, 무가치하더라도, 무익하더라도 우리가 기도할 이유가 모자라지 않으며 우리의 신뢰도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우리 아버지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주시는 그 은혜의 축복들은 당신이 누구에게도 빼앗기시지 않는 상태에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기 때문에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잖아요. 이해되지요?
그 다음 마지막으로 아멘이 더해집니다. 이로써 하나님께 간구한 것들을 얻고자하는 열망의 뜨거움이 포함됩니다. 아멘이라는 것은 원래 히브리말이에요. 그래서 ‘아만’ 이라는 ‘굳게 하다’라는 동사에서 왔어요. 그래서 아멘 그러면 부사에요. ‘굳건히’ 혹은 ‘확실히’ 그런 뜻입니다. certainly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멘은 혼자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앞에 무슨 말이 있어야 합니다. 앞에 좋은 말이 있고 뒤에 따라오는 동의 내지는 그렇게 되기를 간구하는 부사의 표시에요.
그 다음에 282p로 넘어가면 ‘말씀대로 기도를 드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구하여야하며 온전히 구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다. 이 기도의 공식에서 묘사되었으며 기도의 법칙으로써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교사로 세우사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고 듣기를 원하셨던 한분인 최고의 선생님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전해졌다. 그분의 영원하신 지혜는 항상 계셨으며 사람이 되셨고 광대한 계획의 사자로서 사람들에게 주어진바 되었다. 이 기도는 모든 측면에서 절대적이어서 덧붙여지거나 속할 수 없는 외부적이고 생소한 어떤 것도 불경하고 자격이 없음으로 용인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이 개요에 합당한 것, 받아들여지는 것, 필요한 것, 용인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을 내정하셨다. 이것들 외에 어떤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사람은 비정상적인 모독이 아니고서야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의 뜻 아래 붙들리지 않고 경멸당하게 하면서 욕망으로 방황하며 믿음 없이 기도함으로써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주기도문의 패턴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뜻이에요. 순서나 우선순위나 이 모든 것들이 거기에서 벗어나지 말아야한다는 것이에요. 그렇지만 중간에 보면 다른 이야기가 나와요. ‘그러나 이것들이 마치 이 기도의 공식에 우리가 묶여서 단어 하나 음절 하나도 바꾸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기는 원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외우면 어떻게 되지요? 그것은 주기도문이 아니라 주문이 되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 282p로 가면 32번입니다. ‘영혼이 하나님께 올려져 항상 탄식하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연약함은 많은 원조로 보양되어야할 그 무엇이고 무기력함은 박차를 가하여 충동되어야할 필요가 있는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가 훈련을 위하여 기도 없이 흘려보내지 않을 시간들과 모든 정서들이 절대적으로 여기에 몰두되도록 하여야할 특정한 시간들, 아침에 일어날 시간, 일과로 나가기 전, 식사를 위해 식탁에 둘러앉을 동안, 하나님의 축복으로 밥을 먹는 동안, 잠자리로 들어가는 동안, 이런 특정한 시간을 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이렇게 지키는 것은 미신이 아니다. 마치 하나님께 진 빚을 갚듯이 나머지 시간들은 이미 이행된 듯이 여길 것이다. 기도는 훈련되고 자극되는 훈육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혼으로 즉시 그분께 달려가기 위하여 신중한 주의가 기울여져야한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늘 기도가 필요할 때 자신을 쏟아 부어서 기도할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그렇게 살아야지만 된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33번입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기도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환경들에 묶어두기를 원하지 않도록 그분께서 어떤 시간에 장소의 이유로 행하실 것이라고 한정하지 않도록 주의해야한다. 우리는 그분을 위해 어떤 법도 만들지 말고 조건도 부여하지 말 것, 그것을 오직 그분의 시간에 그분이 행하시는 대로 맡겨야할 것을 배운다. 어떤 기도를 마음에 품을 때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라고 선창해야합니다.’ 그렇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그렇게 역사해주시지 않는 하나님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거기에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의존의 감정이 빠진 것이에요. 그것은 올바른 기도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래서 주님이 모본을 보여주셨지요.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게 해주세요. 그렇지만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 그렇게 하셨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어찌 행하시든지 내가 믿음으로 간구하지만 내가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어떻게 행하시든지 그것이 가장 완전한 것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나님 앞에 드리게 되는 것이죠. 참 위로가 되지요? 그렇지요?
자, 마지막 289p로 가면 마지막 인내의 이야기가 나와요. 인내의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즉시 들어주실 때도 있지만 우리를 바꾸시기 위해서 그 기도의 응답을 지연시키시는 경우도 있잖아요. 기도하면서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바꾸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기도하는 우리 자신을 고치고자 하시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에요. ‘실로 믿는 사람들은 이 인내로 인해 그분에 의해서 계속 지지되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그것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오랫동안 버틸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가볍지 않은 시험들로써 자신의 백성들에게 증거하시고 거칠게 훈련시키시며 종종 극단까지 몰아가시며 그들에게 자신의 달콤함에 대한 어떤 맛을 주시기 전에 오랫동안 진흙탕에 몰린 채로 붙들려 있게 허락하십니다. 한나가 말했듯이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상하고 버려졌으면 절반은 죽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지 않으신다면 그들의 영혼이 녹나서 그들이 절망 속으로 돌진하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뜻이에요. 기도하면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뭐냐 하면 우리의 기도에 즉각적인 응답이 없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무능 때문도 아니고 우리를 무시하기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이 듣지 못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기도의 응답의 즉각적인 실행과 상관없이 우리에게 계속 부어지면서 기도 응답의 지연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폐기되지 않고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주님이 왜 우리보고 당신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그런 뜻이에요. 그래서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그 의존 안에서 하나님은 가장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의 인생의 길을 이끄시는 것이에요.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지켜주시고 오늘 이 시간에도 아버지 앞에 간구하고 기도하게 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전능하신 주님!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로 우리를 인도해주셔서 우리 같은 죄인을 부르시는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 안에서 매일 살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2010. 01. 23 하반기 성화반
성화반 Ⅹ
오늘 우리가 배워야할 항목은 아주 중요한 내용인 성례입니다. 291p입니다. 우리가 교리반에서 성례를 배웠습니다. 우리 개혁교회에서의 성례는 무엇이라고 그랬습니까? 정확히 말해서 세례와 그리고 성찬입니다. 이에 비해서 가톨릭에서는 7개의 성례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거나 결혼하거나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견진성사, 사제들의 서품식, 성찬, 세례, 이런 모든 것들을 성례 속에 포함시킵니다. 그런데 우리는 2개 즉 세례와 성찬 이 두 개만이 개혁교회의 진정한 성례입니다.
그러면 이 성례가 칼빈이 여기에서 이 두께를 보면 일지만 대부분이 성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게 291p부터 300p가량이 성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몇 페이지까지 이어지느냐하면 577p까지 이어져요. 책의 5/2가 성례에 관한 이야기에요. 그러면 사실 이것이 우리가 두 지의 생각을 하게 되는데 우선 첫째는 뭐냐 하면 이 성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두 번째는 이 성례가 오늘날과 같이 이 성례가 문제가 안 되는 분위기가 아니라 성례가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왜 그럴까요? 왜 그것이 문제가 되는지 역사적으로 잘 살펴보세요. 가톨릭에서 그 많은 성례들을 베풀었잖아요? 거기에서는 이 성례가 이 자체 속에 아주 놀라운 힘이 있어서 사람들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주입시켜 그를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하게 변화를 가져다준다고 생각한 것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성례를 베풀 수 있는 권한이 교회에 있다고 본 것이죠. 교회에 있다고 본 것은 그렇게 잘못된 것이 아닌데 우리는 거기에 믿음이라는 요소를 개입시키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 성례에 참여하지 않으면 유익을 누리지 못하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고 믿음이라는 요소는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고 교회가 성례를 베풀 권세를 가지고 있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성례가 그가 알던지 모르던지 자동적으로 그 속에 주사를 놓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주입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해서 실제로 이것을 ‘그라티아 인 휴사’ 라고 그래서 주입된 은혜론을 이야기하는 그러한 교리에 근거가 됩니다.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되요? 은혜를 받으려면 성례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에요. 만약에 교회가 어떤 이유로 이 사람을 성례에서 배척시켜버리면 자기는 그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러니까 이 성례가 사람들로 하여금 잘못되게 맹목적으로 교회를 의존하는 사람들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교회는 그것을 이용해서 성도들을 말하자면 비인격적으로 종교적인 권력을 가지고 압제하는 하나의 종교적인 수단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러한 것들과 싸우는 것이 개신교이기 때문에 그러면 한편으로는 이러한 많은 것들이 왜 성례에 들어갈 수 없는가를 이야기하고 또 왜 우리가 두 가지 성례만을 이야기하는가 하는 것을 이야기해야 되고 그보다도 더 근본적인 것을 무엇을 이야기해야겠어요? 성례가 가지는 진정한 효과가 무엇인가? 그리고 참된 성례는 하나님이 무슨 목적으로 제정하셨는가? 그래서 본질적으로 성례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것들을 가르치고 규정하는 일들을 해야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려면 천상 거짓된 주장들을 논파하지 않을 수가 없었겠지요? 그러니까 이렇게 담론이 이렇게 길어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것들을 우리들이 모두 다 외우고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읽는 것은 여러분들이 어차피 읽으셔야 되니까 읽어야되요. 읽는 것은 읽어야 되는데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것을 우리들이 다 암기할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에요. 다만 우리들이 이해는 하고 있어야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이제 제가 왜 이렇게 성례를 깊게 다룰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당시의 사정을 말씀드린 것이죠.
여러분 교회사에 대한 지식이 많지는 않지만 여러분들이 상식적으로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나서 크게 세파지요. 루터파, 칼빈파, 쯔빙글리파 이렇게 있었어요. 츠빙글리는 루터파에 가까워요. 그때에 이제 어떻게 하든지 간에 이 개혁파가 모두 하나가 되어야한다는 공감대는 모두에게 형성되어 있었어요. 왜냐하면 칼빈, 루터, 츠빙글리 말고도 견해를 달리하는 수많은 분파들이 개신교 안에서 이단 같은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 주된 종교개혁자들이라도 연합을 이루어야 된다는 일치된 생각은 모두가 공유하는 바였어요. 그 연합을 가로막는 가장 큰 이슈가 무엇이었겠어요? 성찬의 문제에요. 그래서 결국은 루터파와 칼빈파의 논쟁도, 또 츠빙글리와의 논쟁도 전부다 이 성례에서 일치를 볼 수 없었던 것이에요. 그것 말고도 다른 요인이 있었지만 그것이 가장 주되고 큰 요인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뭐 그것을 그렇게까지 목숨을 걸고 교회가 연합을 못할 정도로 그렇게 그 견해가 그렇게 중요한가? 지금은 그렇지만 로마가톨릭에서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도 놀란다고 로마교회에서 이 성례문제에 대하서 하도 데었기 때문에 칼빈파에서는 루터파가 아직 로마가톨릭의 잔재에서 못 벗어났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성례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성찬에 있어서 공제설이잖아요. 그렇죠?
성찬에 관해서 크게 세설로 나뉘는 것은 기억하지요. 누가 한번 외워볼까요? 마틴 루터파는 무슨 설이에요? 공제설. 츠빙글리는 기념설, 가톨릭은 화체설, 칼빈은 영적임재설입니다. 그러니까 가톨릭은 모두가 다 비판했으니까 제쳐놓고라도 공제설만 하더라도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 눈에 보이는 데는 없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 떡 안에 그 떡과 함께 그 떡 속에 있다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이제 그게 뭐와 관련이 있느냐하면 기독론하고 밀접하게 관계되기 때문에 칼빈파에서 양보할 수 없었던 것이에요. 왜? 그러면 어디든지 계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화체설과 같다고 그러는데 화체설하고는 다른 것이에요. 화체설은 그리스도 예수의 살과 피가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것이고 공제설은 그리스도 예수의 인성이 온 우주에 가득 찼기 때문에 그 떡에도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 있다는 뜻이에요. 즉 인성이 있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이 칼빈파에서는 이게 나중에 개혁파에서 그리스도의 편재성에 대한 설명이 됩니다만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은 그렇게 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신성은 하나님과 동일한 신적본질로서 온 우주 안에 없는 곳이 없이 그렇게 무한하시지만 인성은 제한되었다고 보는 것이거든요.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없는 것이에요.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죠. 그런 기독론에 있어서 양성교리와 관련되기 때문에 합일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이에요. 그러나 이쪽에서 보면 루터파가 가톨릭을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였고 쯔빙글리파에서 보면 칼빈파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던 것이에요. 왜? 쯔빙글리파에서는 기념일뿐이라고 못 박았거든요. 그런데 칼빈은 그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성례에 참여하면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우리에게 임재하신다고 본 것이거든요. 그것이 바로 성례의 효과인데 그 심벌로써의 성례의 효과는 말씀의 효과와 동일하다고 보는 것이 칼빈파의 주장이었어요. 이 견해 차이를 결국은 좁히지를 못했던 것이에요. 그래서 지금은 그게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안 되는데 그때는 그렇게 심각했던 이유는 그 교리가 기독교 교리의 모든 것 중에서 2/5를 차지할 만큼 그렇게 중요한 교리였기 때문에 그랬다기보다는 그 당시의 문맥으로 볼 때 이 성례 문제가 그렇게 첨예한 문제였기 때문에 많은 논변을 펼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에요. 이해되죠?
자 그러면 칼빈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291p입니다. 제일 먼저 맨 앞의 목차를 보면 4장에 보면 ‘성례들’ 이라고 나오죠. 그 다음에 ‘성례의 본질과 의의’가 나오고 두 번째 ‘세례에 관하여’, ‘성찬에 관하여’ 이게 적극적인 논설이지요. 비판적인 논설로써 ‘가증함의 극치 가톨릭의 미사’ 왜 가톨릭의 미사를 이렇게 공격했느냐하면 미사 자체가 희생제사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희생은 한번으로 족하지 매번 그리스도가 죽어야지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미사를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의 완전성에 도전하는 교리라고 본 것이에요. 그 다음에 ‘오직 두 가지 성례’, 그리고 다시 한 번 세례와 성찬의 숫자에 대해서 강조하고 성례의 거행이 어떻게 되어야할지 설명하는 것으로 끝을 내게 됩니다. 그러면 한번 보겠습니다. 291p 성례의 본질과 의의입니다. 제가 읽어드리는 것은 줄을 꼭 치셔야합니다. ‘성례가 무엇인지를 주의하는 것이 합당하다. 진정 그것은 그것으로써 주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뜻을 표상하시고(표상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죠? 보여주는 것은 이 펜인데 의미하는 것은 글의 힘이라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게 바로 표상이에요. 보여주는 것이 더 깊은 뜻을 가진 것을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에요. 그게 표상이에요. 그래서 펜은 칼보다 강하다. The pen is stronger than sword. 그러면 펜하고 칼하고 들고 싸움을 한다는 뜻이 아니라 펜으로 글을 쓰는 것이 칼로 사람을 찌르고 공격하는 것보다 더 큰 힘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에요. 그런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문학적으로는 제유법이라고 하고 이렇게 성례와 관련지어서 우리들이 상징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것이죠.) 우리의 믿음의 연약함을 지탱하기 위한 외부적인 표징’ 즉 ‘시그눔 에스떼루눔’ 보이는 표상이라는 뜻이에요. 또 하나는 ‘또한 그것은 외부적 징표로서 선언된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라고 달리 정의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12번에 보면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무지함과 육체의 연약함을 위하여 이것을 주실 필요가 있으시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요. 여러분 외부의 어떤 메시지들을 접하게 될 때 글이 우리에게 더 많은 자극과 집중을 주어요? 아니면 소리가 더 직접적인 자극과 집중을 주어요? 소리죠! 그러면 소리가 자극과 집중을 많이 주어요? 아니면 보이는 그림 real play라고 그러죠. 실제로 하는 것들이 우리에게 더 많이 다가와요? 실연이지요! 그것을 여기에서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그러셨는데 나는 거기에 대해서 100% 동의되지는 않는데 어떤 사람이 아무리 말씀을 가르쳐도 회개를 안 하더래요. 그래서 팀을 짜서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를 연극으로 만들라고 그랬대요. 그래서 그 구역이 그것을 맡아서 하게 되었는데 아무리 가르쳐도 회개를 안 하던 그 사람을 탕자의 역할을 시켰대요. 그런데 연극을 하다가 회개를 하더래요. 너무 재미있지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그게 우리의 마음의 연약함이에요. 우리의 육체의 연약함이에요. 자, 이런 것 아니겠어요? 차를 몰고 가다가 위험 표지판이 하나 나타날 때는 ‘아이쿠 조심해야겠구나! 돌멩이가 내려오겠구나!’ 그러지만 계속 5m 간격으로 서있으면 없어지고 나면 ‘어! 이제 없어졌네.’ 그러면서 오히려 놀래지요. 그런 것이 우리의 마음의 연약함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시지만 눈에 보이는 징표로써 인 치심으로 우리에게 자극을 주시고 복음의 진리를 우리에게 시각적으로 그리고 촉각적으로 섭취하면서 느끼게 하여 복음의 본래의 정신과 의미로 돌아가도록 우리를 자극하시려고 이 성례를 만드신 것이에요. 그러면 이제 여기에 나오는 이 뜻이 이해되지요?
그럼 보겠어요. 아주 중요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례는 진리 자체를 확정하기보다는 진리 자체 안에서 우리를 확정하기 위해서’ 좀 더 정확히 번역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례는 진리 자체를 견고하게 하기 보다는 진리 자체 안에서 우리를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그 자체가 충분히 확고해서 그 자체가 아닌 다른 것으로부터 더 견고해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주는 수단이 아니라 진리를 아는 사람들에게 이 성례를 통해서 진리에 대한 견고한 확신을 전인적으로 경험하게 하고 알게 하는데 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면서 논쟁에 대한 이야기가 쭉 나와요. 그리고 293p에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게 뭐냐 하면 이렇게 얘기하죠. ‘공문서들이나 다른 공무상 첨가된 인장들은 만약에 양피지에 아무것도 적혀진 것이 없다면 쓸데없이 첨가되었을 뿐이므로 그 자체로서는 우리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295p로 넘어가면 2번에 이렇게 나옵니다. ‘따라서 성례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더욱 확실하게 하도록 시행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육신적이므로 그것들은 육신적인 것들에 의해 보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무딘 능력에 맞추어 우리를 교훈하고 교사들이 아이에게 그러하듯이 손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십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중요하게 거론되는 것이 무엇이에요? 믿음이에요. 믿음. 그래서 우리가 성례를 믿는다는 의미는 두 가지인데 우선 중요한 것은 그 성례가 있기 전에 성례가 무엇을 표상하는 것이라고 그랬잖아요? 그러면 이것을 이 표상부터 배워야 되는 것이 아니라 이 표상이 가르치는 원래의 사실들에 대한 지식이 먼저 있어야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 다음에 이 표상과 원래에 있는 사실들 사이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지식이 있어야하고 두 번째는 그 지식이 참되어서 흔들릴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 그리고 그 성례에 참여할 때 하나님께서 약속된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실 것이라는 신앙, 이것에 의해서 하나님은 성례에 참여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에요. 그러면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되지요? 성례가 표상하는 본래의 사실에 대한 참된 지식이 없이 성례에 참여하는 것은 분별없이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것과 같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 성례의 은혜는 복음에 대한 믿음, 사랑 이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십자가의 감격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이 성례가 엄청난 감동을 가져오는 것이에요. 이해되지요?
그 다음은 다 읽어보셨겠지만 또 중요한 내용이에요. 299p에 나옵니다. 8째 줄로 내려가면 다시 믿음에 대한 이야기에요. ‘그러므로 이곳에서 마음을 다하여 믿으라는 것은 완전하게 그리스도께 달라붙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직 영혼으로부터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안으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중요해요. ‘그분으로 말미암아 포만감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 각주 19번 라틴어를 보면 빨간 것으로 나오는 것 밑에 보세요. 빨간 것과 까만 것이 나오고 다시 빨간 것이 나오는데 이렇게 쓰여 있지요. ‘논에오싸쭈렘에쎄’ 무슨 뜻이냐 하면 에오=그분으로 말미암아 논=아니라는 뜻 싸쭈렘=충분히 배부름 에세=is to be 뭐냐 하면 ‘그분으로 말미암아 배부른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무슨 뜻이냐 하면 이미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이미 그리스도를 믿었고 또 지금 믿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더 많은 은혜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이런 영적인 자만심에 빠진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새드=오히려, 아덴티아펙뚜=우리의 정서가 불붙는 것처럼 되고, 그분에 굶주려하고 그리고 목말라하며 그분을 향해 탄식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믿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찬에 참여하면서, 성례에 참여하면서, ‘아 이제 나는 되었다. 나는 충분하다. 더 이상 나는 필요한 것이 없게끔 주님 자신으로 내가 채워졌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으로 더 내 영혼이 풍성해진다면 그리고 죄 때문에 아직까지도 주님 자신으로 채워지지 못한 내 마음이 변화될 수 있다면 주님을 지금보다 더 뜨겁게 사랑할 수 있다면…….’ 하는 타오르는 상태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주님의 성찬에 혹은 세례에서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신자의 모습이라는 것이에요. ‘이것이 모든 마음을 다하여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성경의 방식이 바로 마음을 다하여 믿는다는 것입니다.’
300p로 넘어가면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 다음 세 가지를 생각해야한다. 첫째 주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시고 교훈하신다. 두 번째는 주님은 그 진리를 성례로써 확정하신다.’ 확정하신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잘 이해를 해야 하는데 성례가 뭐 확정이 안 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그 옆에 보면 ‘꼼삐드마’ 라고 나와요. 영어의 confirm 이에요. 무슨 뜻이죠? 우리가 어떤 진리의 말씀을 배웠는데 ‘아, 이게 그런 거구나!’ 하고 알았는데 성례를 보여주심으로써 ‘아, 그거구나!’ 하고 자기의 마음속에 그것을 확고하게 붙들게 되는 것이에요. 성례가 없으면 그렇게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성례는 그런 약한 믿음을 강하게 해주고 강하던 믿음을 흔들리지 않게 굳게 붙잡아 주는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이에요. 제가 여러 해 전에 앨라배마에 집회를 하러갔는데 헬렌 켈러가 살던 집이 30분 거리에 있었어요. 그의 아버지가 신문사 사장이었어요. 굉장히 부자였어요. 지금도 헬렌 켈러가 어렸을 때 쓰던 방과 커다란 저택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그 사람을 가르쳤던 선생님이 설리번이었잖아요. 어떻게 교육을 했느냐하면 귀도 먹고 눈도 멀고 말도 못했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하면 water라고 손에 써주는 것이에요. 그리고 얘를 데리고 펌프 가에 가서 물을 퍼주는 것이에요. water를 써주고 그것을 설명해주는 것이에요. 이렇게 찰랑찰랑 액체로 되어있고 막 흐르고 네가 밥을 먹을 때 먹는 것이란다. 충분히 설명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물을 퍼서 쏟아지는 것을 보면서 ‘아, 이게 water구나! water!!!’ 그것을 성례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에요. 재미있지요.
그래서 예수를 잘 믿고 성화되면 사람들이 좀 섬세해지게 됩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면 그러면 막 대할 수가 없어요. 그렇지요? 사랑하면 막 대할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면 주의 깊어지게 되고 배려하게 되는 것이죠.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그만둬 나는 우등생이 아니면 필요 없거든.’ 그렇게 안하시고 그렇게 상세하게 이렇게 가르쳐주시는 것이에요. 교회도 그런 정신을 본받아야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아주 높은 학력의 수준을 가진 사람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교육을 시키고 한글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필요하면 그림책을 만들어서라도 그리스도의 복음과 진리를 가르쳐야 되는 것은 너무 분명하잖아요. 그렇죠? 언젠가 옥한흠 목사님이 그런 질문을 받으셨대요. 기자가 물어보았어요. ‘목사님, 목사님이 제자훈련을 가지고 교회를 그렇게 키워오셨고 이름을 날리셨지만 많은 사람들은 목사님 교회를 한 곳이 강남이었고 고학력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목회가 가능했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니까 옥 목사님이 너무 기자한테 너무 재미있는 질문을 했어요. ‘그럼 내가 반문을 해봅시다. 당신은 내가 만약에 저 시골교회에 내려갔더라면 옥 목사가 제자훈련을 했을까요? 안했을까요?’ 그렇게 물어보는 것이에요. 그러니 기자가 뭐라고 그랬겠어요? 했겠다고 그랬겠지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어보는 것이에요. ‘당신 설교는 너무 어렵고(사실 요즘은 어렵지도 않잖아요? 그렇죠?) 여기서 대학 나온 사람들하고 같이 목회를 하니까 가능한 것이지 시골에 가면 가능하겠느냐?’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러니까 교리목회가 도시니까 가능하지 시골이어도 가능하겠느냐고 물으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하겠어요? 그러면 김남준 목사가 시골에서 목회를 했더라면 교리목회를 포기하고 설교시간에 만담이나 했겠어요? 필요하면 설교시간에 지게도 갖다놓고 항아리라도 갖다놓고 설명을 했겠지요. 라틴어까지 나오는 이 책을 못 읽으니까 교리반 시간에 다 치워버리고 지게, 낫, 삽, 이런 것을 갖다놓고 시골 할아버지들을 모아놓고 설명하지 않았겠어요? 사랑은 모든 창조성의 원동력이에요. 모든 창조의 DNA가 사랑 속에 들어있는 것이에요. 나폴레옹이 그랬대요. ‘아휴 정말 덥다. 시원한 얼음을 먹었으면 좋겠다.’ 여름에 얼음이 어디 있었겠어요. 사람들이 전부 입맛을 쩝쩝 다시고 있었는데 나폴레옹을 사랑하는 병사 하나가 ‘폐하 제가 저기를 올라갔다 오겠습니다.’ 그리고 만년설이 덮인 산을 가리키는 것이에요. 가서 한 자루 지어온 것을 그냥 먹으려니까 좀 그래서 설탕도 넣고 한 것이 아이스크림의 시작이에요. 사랑에 빠져보지 않아서 잘 모르시는구나!
‘마지막으로 그분께서는 자신의 성령의 빛으로 우리의 마음들을 비추시고 우리의 심장의 문을 말씀과 성례들로써 여신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들은 단지 우리의 귀를 치고 눈앞에서 어른거릴 뿐 절대 속에 있는 것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참 은혜롭지요? 어떤 사람들은 이 성례를 반대하는 극단적인 사람들이 있었어요. 301p 끝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이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물들에게 돌리는 것이 된다. 그래서 마치 그 성례 안에 거기에 공여되는 떡과 포도주에 엄청난 능력이 있는 것으로 여겨져서 그만큼 하나님의 영광은 감소된다.’ 그럴듯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 다음에 나오지요. ‘하나님께서는 자신께서 모든 것들의 주님이시자 중재자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들이 그분의 영광에 복종하는데 유익하다고 미리 여기시는 수단들과 도구들을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떡과 다른 음식들을 통하여 우리의 육체를 먹이시며 태양을 통하여 세상을 비추시며 불을 통하여 그것을 따뜻하게 하신다.’ 여섯째 줄 내려가서 ‘이와 같이 그분께서는 성례를 통하여 영적으로 믿음을 양육하신다.’ 교리반에서 다 배웠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을 창출하지만 성례는 이미 있는 믿음을 견고하게 한다. 그것이에요.
자, 그다음에 그래서 성례의 결정적 특징이 뭐냐 하면 305p에 굉장히 중요해요. 열째 줄에 보면 ‘진정 성례들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섬긴다는 것이 첫 번째 것이다.’ 옆에 라틴어를 보면 에스트=it is 아우템=그런데 호크프리뭄=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It is first that. 아니면 It is first for us to. 그래서 이것이 첫 번째이다. 우트휘데이노스트라이아프드데움=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그것이 섬긴다는 것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자, 성례가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섬긴다는 것이 무슨 뜻이에요. 성례를 통해서 이미 있는 우리의 믿음이 더 굳건한 믿음이 되도록 도와주는 것 이것이 성례의 목적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일 년에 네 번을 성찬을 하잖아요. 저는 좀 더 자주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칼빈은 매주하다가 나중에 너무 회중이 많아지니까 한 달에 한번 정도 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우리도 교인이 200명 정도 되면 매주 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고요. 우리는 다른 교회에 비해서 성찬이 시간이 많이 안 걸리잖아요. 일사불란하게 하는데 15분정도 걸리는데 그것을 매주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예배를 최소한 두 시간은 드려야 해요. 그래서 그것을 준비하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겠지요. 매주 해야 되니까 늘 떡을 만들고 포도주를 만들어야 되지요. 그것도 목사가 설교준비를 하는 것처럼 생각하면 되겠지요. 좀 더 자주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거기 성찬 속에 우리를 충분히 적시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우리가 성례의 참된 의미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자, 그다음에 아직은 성례의 일반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308p의 8번에 보면 성례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성경적 성례들을 쭉 얘기해요. 성례의 범주에 해당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요. 그리고 오늘날에 와서는 딱 두 개가 성례가 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성례라는 이름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들에 관하여 분명하게 하시려고 사람들에게 표지하셨던 표징들을 포함한다. 때로는 자연적인 것 가운데 그것을 보이기 원하셨고 때로는 기적들 가운데 보이셨습니다. 첫 번째 생명의 나무를 불멸의 보증으로 주셔서 그들이 그 나무의 열매를 먹을 동안에 스스로에게 그 불멸을 확실하게 보증하도록 하셨을 때가 한 예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생명나무의 실과가 있는데 그것을 먹잖아요. 그것을 먹기 때문에 영생하는 것이겠어요? 아니면 영생은 원래 작정이 되어있었는데 그 생명나무 실과를 먹으면서 아, 하나님이 나를 영원히 살게 하셨구나! 이렇게 생명나무 실과를 사용하였겠어요? 전자에요? 후자에요? 전자라고 생각하면 너무 유치한 해리포터 같은 이야기가 아니겠어요? 어떻게 그 사과나 혹은 과일에 그런 효능이 있겠어요? 그러면 예를 들자면 처음 인간이 하나님이 영생불멸하도록 창조하셨는데 그 사람이 그럴 수는 없지만 극단적으로 예를 들어서 과일이 먹기 싫어서 물만 먹고 이파리만 먹었다고 칩시다. 한번 안 먹을 때마다 영생할 것이 점점 힘이 약해져서 언젠가 죽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영생이 아니지요. 아니 왜 그렇게 말이 없어요? 동의가 안 돼요? 말씀하세요. 그것은 이제 여러 가지 설들이 있어요. 난해한 구절중의 하나인데 저는 그렇게 봐요. ‘생명나무 실과를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그런 말씀이 나오잖아요. 그게 정말로 그것을 먹으면 영생할 것이냐고 보느냐에 따라서 견해가 나뉘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해요. 죄가 들어와서 영혼이 죽은 상태가 되었는데 그 생명나무 실과를 먹으면 다시 그 영혼이 살아날 수 없게 죽은 상태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동의하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아요. 그렇게 되면 그 해석을 제쳐놓게 되면 두 번째 해석은 뭐냐 하면 그 생명나무 실과를 먹게 되면 죄를 지어서 영원히 살수 없게 된 사람이 다시 살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사실 그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는 이 사람에게서 영원불멸할 육체의 생명을 박탈하실 것이었는데 그가 자의로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으면 하나님이 박탈하시려고 하는 생명이 그에게 되돌아온다면 벌써 해석상으로 말이 안 되잖아요. 그렇죠? 그것도 환영을 못 받아요. 그러면 어떻게 보겠느냐? 그렇죠? ‘이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이것을 따먹는 것과 영생하는 것을 성례전적으로 연결을 짓는 것이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생명나무가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생명을 가져다주시는데 생명나무 실과는 성례전적으로 하나님이 영생불멸할 그 덕을 입은 표징으로써 먹는 것인데 이 사람이 자기는 영생하지 못하면서도 그 생명나무 실과를 먹으면서 마치 영생할 사람처럼 할까 하노라 그렇게 해석을 해야 말이 맞는 것이지 그 생명나무 실과가 하나님보다 능력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해석해서 되겠어요? 그래서 성례전적으로 이 문제를 풀어야 된다고 보는 것이죠. 생명나무도 성례전적이지만 선악과도 성례전적이에요. 왜냐하면 그 선악과를 하나 따먹는 것이 하나님께 무슨 손해를 끼쳤느냐고 말하면 안 돼요. 하나님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신 것이죠. 그래서 제가 예를 자주 드는 것이 있잖아요. 황제의 궁에서 도자기를 청소하다가 떨어뜨려서 궁중의 가보를 깨뜨렸다면 죽을 수도 있고 살수도 있어요. 왕이 굉장히 기분 좋은 날이었으면 살수도 있어요. ‘아, 그래 사람이 어찌 실수가 없겠느냐’ 그러면서 ‘살려줘라.’ 그러면 살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황제가 없는 줄 알고 황제의 의자에 올라앉아서 다리를 꼬고 ‘흐흠’ 했다면 황제의 기분 여부와는 상관없이 반드시 죽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이 황제의 보위를 너를 죽이고 차지하고 싶다. 이 사실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해 되요? 그렇죠? 가슴에 다가와요?
자, 그 다음에 ‘노아와 그의 후손들에게 땅을 소멸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기념비로 무지개를 세우신 것도 그런 예입니다.’ 그렇죠? 311p ‘두 번째 종류에 속한 예들이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기드온이 양털을 놓고 기도하지요?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실 것입니까? 두 번 기도하잖아요. 이런 것도 바로 승리에 대한 예이고 또 하나는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 서원하며 기도할 때 해시계의 그림자가 10도 물러가게 하신 것도 하나의 표징이지요. 자, 그 다음에 ‘그러나 현재의 목적은 주님께서 자신의 교회에서 자신의 백성을 하나의 믿음으로 하나의 믿음에 대한 고백으로 양육하기 위해 일반적인 것들이 되기를 원하셨던 다음 성례들에 대해 특별히 논하는 것도 있다.’ 그게 뭘까요? 312p에 ‘할례가 있었고, 정결례가 있었고, 모세의 법에 따라 제사들이 더해졌는데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계속 성례였다. 그러나 그것이 폐지됨에 따라 현재 기독교교회에서 사용하는 두 성례 즉 세례와 주님의 성찬이 제정되었다. 이 두 개만이 성경에 근거가 있는 성례에요.
자, 그 다음은 314p의 10번에 보면 성례가 우리에게 지시하는 것이 나와요. 315p 네 번째 줄입니다. 줄치세요. ‘왜냐하면 세례는 우리가 정결하여졌으며 씻겼다는 것을, 그리고 성만찬은 우리가 구속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입증하기 때문입니다. 물에는 씻음이 피에는 무름이 표상됩니다.’ 그 옆에 빨간 것이 보이죠. 두 번째 단어 인아꾸바=물이에요. 물 안에서 휘구라뚜=표상이 됩니다. is figure 라는 뜻이에요. 아불루띠오=씻김 인쌍귀네=그리스도의 피에요. 혹은 무엇을 가리키죠? 포도주를 가리키죠. 피로써는 싹띠스빠띠오가 표상됩니다. 여기에 휘구라뚜가 생략되었어요. 싹띠스빠띠오=satisfaction이에요. 그러면 뭐겠어요? 만족이지요. 무름이라고 그랬는데 나는 만족이라는 것이 좋아요. 하나님이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손해를 보셨는데 그런데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대신 형벌을 지시고 하나님 앞에 대신 죗값을 치르셔서 그래서 하나님에게 만족이 되었다는 것이에요. 물에는 씻음이 피에는 하나님의 만족이 표상됩니다. 아주 그냥 간단하지요. 물은 뭐지요? 세례에서의 물이고 그 다음에 피에는 그리스도의 무름이 표상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물과 피는 곧 우리에게 정결케 하고 대속케 하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그이야기는 뭐냐 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오신 목적 자체가 어떻게? 물과 피로 어떻게? 깨끗이 정결케 하고 그 다음에 대속하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에요.
자, 드디어 316p입니다. 세례에 관하여 나옵니다. 세례는 두 가지 목적이 나오지요. 첫째 하나님 앞에 우리의 신앙에 이바지하게하기 위하여 섬깁니다. 섬긴다는 말이 좀 이상한데 이바지하게 하기 위하여 그러면 됩니다. ‘세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앙에 이바지하게 하시기 위하여 두 번째는 세례는 사람들 보는 앞에서 우리의 고백에 이바지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세례를 제정하신 것입니다.’ 그런 것이죠. 그러면 그것의 증표는 무엇이겠어요? 우리의 죄를 하나님이 씻은 표잖아요. 살인을 한 사람이 제일 먼저 가는 곳이 어디일까요? 살인을 끝낸 후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경험이 없으시니까 모르시겠지요. 무엇을 할까요? 목욕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입었던 옷을 버립니다. 심리에요. 그러면 결국 그것은 어떤 심리를 보여주어요? 범죄심리학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래서 항상 살인범을 찾을 때는 옷가지를 찾으러 다니는 것이에요. 사람들은 생각할 때 그 옷에 피가 묻었을까봐 혹은 DNA를 채취 할 수 있는 뭔가 흔적이 묻었을까봐 찾는다고 생각해요. 누구는 편지로 협박을 했는데 바보가 그 봉투에 침을 발랐대요. 거기서 유전자를 찾아내서 그 사람을 색출하다고 그래요. 과학자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한 십년만 지나면 우리가 하루 종일 여러 사람을 만나서 악수하고 돌아오면 우리의 손바닥만 검사해서 컴퓨터에 입력하면 우리 남편이 오늘 누구를 만났는지 컴퓨터에서 얼굴까지 나온대요. 나 같은 사람은 굉장히 어려워질 것 같아요. 특히 수요일 저녁에 우리 집사람이 검사하면 수요예배 나온 온 교인들이 컴퓨터에 다 떠요. 그게 가능해진대요. 그런데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인데 그런 우려도 없는데 살인자는 항상 그 일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씻기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죠. ‘마음이 정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거기 정결한 자 그것은 호의갓카탈로이에요. 거기서 영어의 단어 카타르시스가 나오는 것이에요. 씻어내는 것이에요. 특별히 물로 씻어내는 것이에요. 씻어내기 전에는 어떤 상태였느냐 하면 구약에서 타헤르의 상태에요. 구약에서 히브리어로 타헤르라는 말이 불결하다는 뜻이거든요. 그것을 씻어낼 때에 카탈로이는 그 불결함에서 씻긴 사람이에요. 수동태지요. 저희가 씻는 것이 아니라 씻긴 것이에요. 참 오묘하잖아요. 그래서 인간 안에 있는 그렇게 씻기고 싶은 그 의식을 주님이 그대로 대입하셔서 인간을 씻으시는 것이에요. 사실은 전체가 들어가서 씻기는 것도 세례의 원래적인 의미로써 굉장히 중요하지요. 나는 장로교 목사지만 침례를 줄 용의가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침례가 아니면 세례가 아니라는 것은 곤란하지요. 그래서 세례줄 때 그 대신 물을 좀 많이 충분히 부어주면 되요. 저는 다른 목사들보다 네 배 정도 많이 붓습니다. 그래서 씻기는 것이에요. 그게 세례의 의미에요.
자, 이제 14번 여기에서 고민이 나와요. 14번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시간은 계속 가고 큰일 났네요. 중세에 어떤 일이 있었느냐하면 이런 일이 있었어요. 세례를 받은 다음에 죄를 짓게 되면 이거 어떻게 하나? 우선 제일 시급한 것이 뭐냐 하면 교회에서 치리를 하죠. 경우에 따라서는 파문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 교회의 지체들 사이에서 말하자면 믿음을 배반한자라고 낙인이 찍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엄마들이 애들에게 유아세례를 안주는 것이에요. 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너무 고달플까봐 그래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면 세례를 안 받으면 천국에 못 간다는 교리를 가르쳤으니까 그때는 급히 세례를 주어도 이 아이가 충분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된 후에 세례를 줄려고 그러는 거예요. 사실은 그게 무서워서 세례를 못 받는 사람이 충분히 거룩해질 수 있겠어요? 굉장히 웃기죠. 그런 어리석은 일은 믿음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모니카까지도 따라했던 것이에요. 그래서 32살이 되도록 아우구스티누스가 세례를 안 받은 것이에요. 그래서 그랬잖아요. ‘절제를 주소서. 거룩함을 주소서. 그러나 지금은 마옵소서.’ 왜 그랬겠어요? 아직은 세상이 좋으니까 그렇죠. ‘믿음을 주소서. 절제를 주소서. 성결을 주소서. 그러나 지금은 마옵소서.’ 자기가 그렇게 기도했대요. 이 사람은 정신이 나간 사람이 아니에요? 그게 바로 그 당시의 풍조였어요. 세례를 주고 성경의 지시에 따라서 유아세례를 주고 믿었으면 세례를 받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되 안 될 때에는 은혜를 달라고, 용서해달라고 하면서 살아야지 그것을 죄지을까봐 세례를 안 받는 것은 말도 안 되지요. 누가 그래요. 왜 세례를 안 받느냐고 하니까 자기가 더 열심히 믿고 세례도 받으면 하나님이 자기를 목사 되라고 그러실 것 같대요. 그래서 걱정도 팔자다. 너 같은 사람을 누가 목사로 부르겠느냐……. 나는 그렇게 생각을 안 하고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주님이 보시면서 쟤가 내 허락 없이 목사가 된다고 그러면 어떻게 하지? 그렇게 걱정하실 것 같아요.
‘그러나 세례가 오직 지나간 시간에만 유익하기 때문에 세례 후 새로운 범죄에 대해서는 다른 처방을 찾아야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실로 이 잘못이 옛날에 봉해져서 어떤 이들은 극단적으로 곤경에 처해지거나 죽을 때가 되지 않으면 세례를 통해 입교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에 우리가 세례를 받든지 우리는 단번에 삶 전체동안 씻음을 받고 정결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범죄 할 때마다 세례에 대한 기억이 회상되어야할 것이며 그 기억으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이 무장되어야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죄 사함에 대해 확신하고 염려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15번입니다. ‘세례는 우리에게 또 다른 위로를 가져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죽어서 그와 장사되었나니 이는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함이라.’ 그래서 이제 세례는 둘로 나눠지잖아요. 물속으로 들어가고 죽음이에요. 다시 나와요. 이게 부활이에요.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 그 다음에 다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는 것, 그래서 이제는 사나 죽으나 내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 그것을 가슴에 새기는 것, 그것이 신앙이에요.
그 다음에 325p 17번입니다. ‘세례를 받은 다음에 우리들이 또 죄를 짓게 되고 세례가 우리로 하여금 완전히 새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 씻음을 받은 표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연합의 표징이에요. 그래서 결국 우리는 이 세례와 관련지어서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하느냐 하면 첫째 우리의 본성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타락했기 때문에 이 부패만으로도 비난받고 죄인으로 남는 게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분께는 의의 결백함과 순결함 외에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완전히 본성에 있어서 순결하고 결백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용서해주시고 씻어주셔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토대로 우리를 받아들이셨다는 것이에요. 맨 밑에 보면 이렇게 나오죠. 굉장히 중요해요. ‘세례를 통하여 믿는 자들은 자신들로부터 이 비난이 제거되었으며 격퇴되었다고 확신하는데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이 표징으로써 우리에게 전가되었어야할 죄책과 우리의 죄책 때문에 지불되었어야할 형벌에 대한 완전하고 순수한 죄 사함이 행해질 것이라고 약속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이 사악함은 결코(무슨 사악함이에요?) 부패한 본성의 사악함은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중단되지 않고 또 끊임없이 생산이 됩니다. 세례를 받았어도 327p 맨 마지막에 이러한 욕정들은 사람들이 죽음을 통해 완전히 벗겨질 때까지 죽지 않으며 소멸되지 않습니다.’ 세례 받은 자들도 그렇다는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해야 돼요.
(찬양)
시시때때로 주 만 봅니다.
신앙으로 살아야 해요. 327p입니다. ‘세례는 실로 우리에게 바로의 수장이며 죄의 죽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지 않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럼 무슨 유익이 있는 것이에요? 그럼 반문이 있잖아요. 세례를 받으면 무슨 유익이 있어요? 그게 뭐에요?) 우리를 압도하지 않는다.’ 그게 뭐냐 하면 우리를 절대적으로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이 부분을 상세하게 해설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죄와 은혜의 지배를 들어가 보면 죄의 절대적 지배와 상대적 지배가 나와요. 그런 절대적 지배는 믿음으로 세례 받은 사람에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러한 육체의 감옥에 갇혀 사는 동안 우리 안에 죄의 잔재들이 거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칼빈이 얘기하는 육체라는 것은 뭘까요? 꼭 이런 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로 표상되는 인간의 죄성을 가리키는 것이에요. 그런 것과 떨어질 수 없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 우리들이 그렇게 악을 행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자, 329p 19번으로 올라가면 ‘마지막으로 우리의 믿음은 세례로부터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에 접붙여졌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과 하나 되고 결속되어서 그분의 모든 선한 것들에 대한 참여자들이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증거한다는 위로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자신의 육체 가운데 세례를 바치시고 거룩하게 하심으로써 그 공여물을 그분께서 감히 우리와 함께 들어가신 가장 견고한 연합과 연합자의 고리로써 우리와 함께 가지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자, 이렇게 해서 세례에 대한 이야기들이 죽 지나갑니다.
그래서 이제 다시 성례의 일반으로 들어오면서 믿음과의 관계를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게 338p 23번에 나오게 됩니다. ‘이제 참으로 이로부터 앞에서 이야기를 하면서 두 가지의 용법이 있다고 전해지지요. 첫째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해서 우리가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어떻게 되겠어요?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나게 해주는 것이죠. 세례가 그런 것이죠.) 둘째는 사람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려면 모든 사람 앞에서 나의 신앙을 담대하게 고백해야 되잖아요. 그러면 박해의 위험도 있는데 그런 것과 상관없이 나를 구원하시는 분은 그리스도 한분뿐이시다. 내가 이 세상에서 박해를 당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믿는 것이다. 이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에요.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 다음에 뒤로 넘어가면 342p에 성찬이 나옵니다. ‘기독교회를 위해 제정된 또 다른 성례는 그리스도의 몸에서 거룩해진 떡과 피에서 거룩해진 포도주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주님의 성찬 혹은 만찬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 가운데 주님의 인자하심이 우리에게 먹여지고 자애로우심에 대해 그분께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자, 그리고 이제 내려가면 ‘이 성례들로부터 우리의 영혼이 모을 수 있는 달콤함과 위로의 열매는 참으로 크지요.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또한 우리가 그분께 접붙여져 그분 자신께 속한 것은 모두 우리의 것이며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은 그분의 것으로 여길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346p로 가게 되면 여기에서 칼빈의 해석을 정확하게 보여줘요. ‘성례들 가운데 주어지는 물질적인 것들은(눈에 보이는 것은 뭘까요? 떡과 포도주지요.) 유비에 따라서 영적인 것들로 해석되어야합니다. 그리스도 육체의 표징인 떡, 그 다음에 떡이 우리의 육체의 생명을 기르고 유지시키고 지키듯이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위한 음식이자 보호물이다. 피의 표증으로서 포도주를 볼 때 우리가 육체에 미치는 그것의 유익과 동일한 이익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우리에게 미침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신성한 몸을 주심이 무엇이며 피를 흘리심이 무엇인지 숙고한다면 떡과 포도주에 대한 속성들을 유비에 따라 이것들에서 가장 합당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자, 이것은 설명을 좀 할게요. 이것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우리는 사실 여기서 떡이라는 것이 ‘알토스’인데 빵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즐겨먹는 빵은 터키브레드 비슷합니다. 내가 터키브레드를 아주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아무것도 안 넣고 밀가루 반죽만 해서 좋은 밀가루로 해서 화덕에 그냥 구운 것 있잖아요? 설탕 같은 거 안 넣고 딱딱하지만 않게 만든 그것을 좋아해요. 여기는 그런 빵이 없어요. 터키에 가면 그런 빵이 있어요. 처음에는 아무 맛도 없어요. 설탕도 안 넣고 소금만 조금 넣었는데 무슨 맛이 있겠어요? 그런데 그 빵이 천천히 씹어 먹으면 먹을수록 구수합니다. 속이 편안해요. 먹을 때 아주 맛있고 달콤한 빵은 들어가면 속이 밍밍하잖아요. 천천히 씹어 먹으면 정말 맛있어요. 그런 빵이에요. 그 다음에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일 년에 강수량이 매우 적은 나라에요. 심지어 옛날에는 지붕을 비스듬하게 해서 비가 오면 그 빗물을 받아서 썼대요. 그리고 그런 물이나 우물을 잘못 파서 먹으면 다리가 퉁퉁 부어요. 석회물이 나오기 때문이에요. 유럽의 물이 다 안 좋아요. 에비앙생수를 사먹는 사람들을 보면 왜 사먹는지 이해가 안가요. 에비앙생수에는 무엇이 그려져 있지요? 프랑스의 알프스산맥이 그려져 있잖아요. 그 물을 어디서 떠오는지 아세요? 거기에서 떠오는 줄 아시오? 제주도에서 담습니다. 그래서 제주도 삼다수와 다 같은 물이에요. 잘 읽어보세요. 제주도에서 담았다고 쓰여 있습니다. 황당하지요? 상표만 빌려주는 것이에요. 그리고 설령 알프스에서 담았다고 하더라도 그 물이 유럽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물일지 모르지만 여기 우리나라의 시골 우물물의 수질이 훨씬 더 좋아요. 그래서 뭐냐 하면 물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되지요? 포도주를 담가서 그것을 물대신 마시는 것이에요.
그러면 생각해보세요. 왜 예수님이 예수님 살 닮은 것을 고르려면 빵보다 양고기가 더 의미심장하지 않아요. 이 고기는 너희를 위하여 주는바 나의 몸이니 또 예수님 자신은 성경에서 어린 양이잖아요. 어린 양의 고깃덩어리를 놓고 손으로 떼어먹으면 얼마나 실감나겠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안하시고 떡을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바 나의 몸이니’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소위 이야기하는 번역의 원칙에서 equivalence translation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등가번역이에요. 쉽게 얘기하면 예수님이 떡과 포도주를 제시한 것을 그래도 번역하면 안 맞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것을 등가번역을 하면 밥과 물이에요. 그러니까 당시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가장 필수불가결한 음료와 식품 두 개를 제시하신 것이에요. 우리가 뭐라고 그래요? ‘밥 먹었어?’ 그렇게 묻잖아요. ‘아침 먹었어?’ 그런데 밥을 안 먹고 빵을 먹었으면 안 먹었다고 대답해요.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되지요? 칼로리는 더 높은 햄버거를 먹었어도 ‘아침을 먹었어?’ 그렇게 이야기를 할 때는 찌개와 국이 있는 하얀 쌀밥을 먹어야지만 밥을 먹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똑같은 것이에요. 그것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주님이 우리의 생명을 유지함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불가결한 원천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누구에게? 믿는 우리에게……. 그래서 도서관에 가면 성찬과 언약이라는 시리즈가 있어요. 8개가 있는데 오래전에 설교한 것인데 들어보세요. 나중에 묵상집도 나왔잖아요. 굉장히 중요해요. 그리고 그때 아주 은혜를 많이 받았어요. 지하실교회에서 했나? 굉장히 은혜를 많이 받았어요. ‘이 밥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바 나의 몸이니 이 물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 이 물을 먹을 때마다 이 물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그럼 보세요. 우리는 그것을 일 년에 4번 먹잖아요. 예수님이 떡과 포도주를 주셨는데 돌아가셨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그 다음날도 다시 앉아서 그것을 먹었을 것 아니에요. 그럼 뭐에요? 그런 것을 먹을 때는 나를 기념하지 않아도 되고 부활절과 추수감사절 때에 교회에서 나누어줄테니 그때는 나를 생각하라는 뜻이에요? 그게 아니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그것을 당시에는 예수님이 그 메시지를 주실 때에는 공동체생활을 했잖아요. 문맥으로 돌아가서 성경을 이해하면 제자들이 공동생활을 했잖아요. 그럼 매일 매끼 밥을 먹을 것이 아니에요? 먹을 때마다 밥을 먹으면서 예수님이 살을 찢어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 이 밥이 내 입에 들어가서 몸에 소화되어서 내 육체의 건강에 이바지하는 것처럼 예수의 몸이 그가 죽으신 살의 찢으심이 나의 영혼에 원기가 됩니다. 내가 음식을 먹고 물을 먹을 때마다 이것 없이 내가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흘리신 그 피로 말미암아 나의 영혼의 생명은 시작되었고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그것을 먹을 때마다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우리의 육체가 밥과 물과 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예수로 충분히 먹고 예수로 충분히 마시고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언제 주셨지요? ‘잡히시기 전날 밤 축사하여 가라사대’ 그러면 거기의 중심에 무엇이 들어오는 것이에요?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이 들어오는 것이죠. 그래서 어떤 고백이 나오는 것이에요.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그런 고백이 나와요. 찬송 한 절만 불러도, 성경 한 구절만 읽어도 그리스도 십자가의 고난이 확 밀려들어와서 그래서 은혜를 받는 것이에요. 호주를 갔어요. 호주를 갔는데 참 세상이 좁아요. 어느 교인이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그래서 갔어요. 그랬더니 그 어머니가 그러는 것이에요. ‘목사님!’ ‘왜요?’ ‘얘가 쇠심줄 같이 예수를 안 믿던 애인데요.’ ‘그런데요?’ ‘교회를 다녀도 날라리로 다녔는데 지난해에 두주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요?’ ‘그런데요, 목사님 교회에 가서 딱한 번 예배를 드리고 회심을 했습니다.’ ‘어떻게 회심을 했습니까?’ 나는 어떻게 생각했느냐하면 열린 교회에 와서 한번 예배를 드리고 회심을 했다고 그러면 언제 회심을 했겠어요? 예배를 드리면서 설교를 듣고 회심을 했을 것이 아니에요? 당연히 그런 줄 알고 ‘그래요?’ ‘예배시간에 은혜를 많이 받았어요?’ ‘아니요.’ 썰렁했지요. 그런데 엄마가 대신 설명을 해주는 것이에요. 뭐냐 하면 얘가 예배를 다 드렸는데 새가족위원들한테 붙잡혔대요. 그래서 오셨으니까 새가족 공부를 하고 가라고 그랬는데 나는 곧 갈 사람이라고 그랬으니까 새가족 등록은 할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일대일 양육하는 형제가 가르칠 사람이 없었대요. 그래서 이 형제를 엮어주니까 유아실에 올라가서 얘기를 하면서 평신도인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르쳐준 것이에요. 그리고 자기한테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는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대목을 설명하면서 자기에게 설명하면서 자기 또래의 청년인데 한없이 울더라는 것이에요. 거기에서 충격을 받고 ‘아! 내가 뭔가 문제가 있는 교인이구나!’ 그것을 깨달으면서 ‘도대체 무엇일까?’ 그랬는데 하나님이 그 공부를 하면서 이 아이의 눈을 열어주신 것이에요. 자기도 무릎을 꿇고 회개하면서 교회는 그렇게 오래 다녔는데 생애 최초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영접했다는 것이에요. 아멘을 해야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사랑하고 그분의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한지를 우리의 성례를 통해서 보여줄 때 그때에 다른 사람들에게 각성의 효과도 있는 것이에요. 결국 말씀을 드리고자하는 요지는 뭐지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지신 십자가의 고난을 상징하는 이 떡과 포도주는 우리는 떡 없이도 살아요. 나는 제일 싫은 게 떡이에요. 내가 떡 장사를 했기 때문에 하도 질려서 요새 나오는 떡은 다 제가 만들 수 있는 떡입니다. 제가 어느 정도의 기술을 가지고 있느냐하면 밀가루를 가지고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먹어도 절대로 이것이 밀가루 떡인지 모르게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어요. 정말 몰라요. 그런데 예외가 있어요. 식은 다음에 먹으면 알아요. 그리고 그것을 팔 때는 떡국을 끊이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지요. 그러면 수제비가 되니까……. 다 만들어요. 어려운 떡 중의 하나가 봄에 소풍갈 때 가지고가는 개피떡 있잖아요. 그것을 여러분 중에는 만들 수 있는 분이 아무도 없을 거예요. 그것도 제가 잘 만들 줄 알아요. 그런데도 나는 떡하고 빵 없이도 살아요. 충분히 살아요. 평생 못 먹는다고 그래도 조금 아쉽겠지만 살아요. 생명에 지장이 없어요. 여기에서의 이 떡은 못 먹으면 살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식품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떡이 아니에요. 빵도 아니고 그럼 뭐에요? 이 밥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바 나의 몸이니……. 밥이에요. 포도주는 진짜 안 먹어도 살잖아요. 먹으면 건강에도 좋다고 그러니까 너무 피곤하고 그러면 집에 가서 잘 때 약으로 한잔 먹어요. 그런데 그것을 법으로 못 먹게 한다면 사는 게 괴로울 것까지는 없잖아요. 안 먹으면 말지요 뭐. 여러분 그러니까 포도주가 십만 원 십오만 원짜리를 사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안가요. 비행기를 타고 갈 때 보니까 포도주를 한 병에 159만 원짜리더라고요. 그러면 한잔에 얼마에요? 그것으로 성찬식을 하려면 한 삼천만 원어치를 사야할거에요. 다 쓸데없는 이야기죠. 다 포도주 없이도 살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 포도주는 없이 살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 물이란 말이에요. 그렇게 생각하면서 떡과 포도주를 묵상해야 해요. 빨간 빛만 보고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몸을 생각나게 한다고 떡을 만들 때 살색으로 만든다고 그래요.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 그렇죠? 가스테라를 슈퍼에서 사와서 도마에다 썰어서 올려놓고 떼어진 나머지는 자기가 거기서 쭉쭉거리고 먹는 것은 좀 그래요. 그래서 우리는 정성껏 하지요. 그리고 남은 성찬은 땅에다 묻어요. 들리는 얘기에 의하면 땅에 묻거나 목사님을 갖다드린다고 그러는데 목사님 갖다드리는 것은 목사들이 나중에 그런 것을 만들었나봅니다. 그래서 또 어떤 목사님은 성찬식 하는 날 집에 가다가 음주운전으로 걸렸대요. 복잡하다 복잡해! 왜 그렇게 복잡하게 해요? 실화에요. 누가 그랬느냐하면 다락방 하던 목사님이에요. 그래서 노회에서 발칵 뒤집히고 교경협의회에서 가서 사정을 하고 그랬다고 그래요. 이런 것은 방송하지 말아요. 어쨌든 그런 것은 필요 없어요. 물이에요. 물! 왜? 물 없이는 살 수 없잖아요. 강의하는 동안에 한통을 다 마셨어요. 포도주는 안 마셔도 되잖아요. 그런데 물은 없으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결국은 뭐냐 하면 우리는 전적으로 우리가 우리의 영혼이 전적으로 예수께 의존되어 있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며 살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한 교회가 가지고 있는 경건의 깊이는 성찬식에서 드러나요. 그래서 성찬을 하면서 온 교회가 나의 죄 때문에 죽으신 예수와 나 같은 인간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 때문에 비탄의 통곡을 혹은 감사의 눈물을, 비탄으로 통곡하고 감사로 눈물을 흘리게 될 때 그때에 그 한 교회의 영적인 상태와 복음을 아는 깊이가 드러나는 것이죠. 자, 오늘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미리 말씀드리는데 가톨릭의 성례는 건너뛰겠어요. 거짓성례들이죠. 그러나 집에서 꼭 공부를 하시고요. 박재현전도사는 이 부분을 문제를 어렵게 내요. 그래서 집에서 두 번씩 꼭 읽어야지 답을 쓸 수 있게끔 평소보다 조금 어렵게 문제를 내란 말이에요. 그래서 거짓성례는 여러분들이 집에서 읽는 것으로 끝내는 것으로 하고 다음시간에 성례를 모두 마치는 것으로 하고 그리고 건너뛰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 교회의 정치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MT를 가기로 했잖아요. 벌써 재작년 겨울이네요. 그때에 지금의 우리처럼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시리즈를 들으면서 공부를 했는데 그때 성화반이 지금처럼 많지 않고 50명 정도 되었었어요. 그런데 47명이 MT장소에 집합했습니다. 왜 그랬겠어요? 어떤 사람은 인천에서 택시를 대절해서 양평까지 왔어요. 왜 그랬겠어요?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을 듣고 은혜를 흠뻑 받은 것이에요. 그래서 모여서 그 다음날 출근해야 될 사람들은 열댓 명이 새벽에 가고 나머지는 그날 저녁에 우리들이 기도회를 하고 말씀을 듣고 그 다음날 오전 내내 거기서 나머지 공부를 하고 왔어요. 그래서 마지막 날 아침에 우리들이 다시 못 따라간 공부들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들이 MT갈 때 모두 다 참석했으면 좋겠어요. 거기가 조금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서 모두 참석해서 성도의 교제를 갖고 MT를 마무리하겠어요. 지금 시간이 밭기는 하지만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MT가는 것까지 다 계산하면 얼추 맞출 수 있을 것 같아요. 맞춰서 하고 이렇게 해설을 들은 다음부터 이것을 가지고 계속 읽다가 나중에 죽으실 때에 꼭 관속에 넣어 가시던지 아들이나 딸이나 며느리한테 물려주고 죽든지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죽으로 껍데기를 잘 만들어서 씌워놓고 늘 읽으면서 그렇게 일 년에 한 번씩 읽으시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오늘도 저희들을 붙들어주시옵소서. 내일은 주일입니다. 저희와 함께 해주시옵소서. 주님 없이 살 수 없는 너무나 연약한 저희들이오니 주님은 우리의 밥이요 주님은 우리의 물이시오니 하나님 저희들이 밥과 물 없이 육체의 기운을 유지할 수 없는 것처럼 주님이 또한 우리에게 그렇게 우리의 의지가 되어주시옵소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2010. 01. 30 하반기 성화반
성화반 XI
오늘은 이렇게 하겠습니다. 수업을 지난번에 말씀드린바와 같이 가톨릭의 거짓성례들은 뛰어넘겠습니다. 그냥 읽어보시면 됩니다. 어쨌든 성례는 딱 2개로 세례와 성찬뿐이라는 것과 그리고 어떤 사람이 세례와 성찬에 참예할 자격이 있는지 그리고 성찬에 참여하는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하는 것을 가슴에 새길 수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에는 579p로 넘어가서 6장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교회의 권세 정치적 통치에 대해서 우리들이 절반 정도를 공부하고 나머지는 다음 주 금요일에 MT를 가서 뒤의 남은 부분을 공부하고 또 질문도 받고 토론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제가 8시 15분까지 강의를 하고 그리고 시험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험에 대해서 너무 많이 스트레스를 받지 마시고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시험을 보시고 또 시험을 못 봐서 불합격했으면 또 다시 보면 되지요. 뭐가 문제겠어요? 그렇게 시험을 보고 출석을 안 하신 분들은 처음부터 해당이 안 되고 점수가 안 나오신 분들은 점수가 안 나왔으니 다시 시험을 보라고 직장이나 가정으로 연락이 갈 것입니다. 그러면 재시험 통지하는 날짜에 오셔서 문제는 틀리지만 또 똑같이 보시면 되요. 그래서 우리 박전도사님이 두 번 기회를 더 드릴 것입니다. 그때까지만 합격하시면 수료로 간주가 됩니다. 이 성화반 수료가 항존직 입후보자격에 들어간다는 것을 아시죠? 전혀 모르시나요? 반드시 마치셔야합니다. 그리고 수료한분들은 해당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졸업증을 정확하게 액자에 끼워서 침대위에 걸어놓았다가 항존직에 입후보하실 때에는 복사해서 제출하셔야합니다. 가문의 영광이고 명예잖아요. 그러니까 걸어놓고 그렇게 사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끝까지 해서 완주하세요.
자, 579p로 넘어갑니다. 여기에서 굉장히 중요한 내용들이 나오지요? 뭐냐 하면 그리스도인의 자유, 교회의 권세, 정치적 통치, 이런 문제가 나오거든요. 그러면 배경부터 먼저 보면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이야기가 나왔느냐하면 제가 이번에 화란에 다녀왔는데 여러분들도 궁금하지요? 얘기가 아주 잘되었어요. 11월에 전 책의 35%를 인수하기로 하고 내년 11월에 35%를 인수하기로 하고 그 다음해에 나머지 30%를 인수하기로 했는데 그 안에라도 당신의 건강이 안 좋으면 그냥 그 기간이 되기 전에라도 다 가져가라는 것이고 그 대신 건강이 허락하면 그 마지막 30%는 돈도 천천히 내고 나중에 가져가라는 것으로 합의가 잘 되었고요. 그런데 마음이 그냥 아릿하더라고요. 대대로 신학자의 집안이신데 사모님이 아주 굉장히 미인이셨어요. 사진으로 보니까 영화배우같이 미인이었는데 2년 전에 돌아가시고 목사님 혼자 사시고 자식은 아홉이나 나셨는데 얼마나 교육을 잘 시켰는지 자녀들이 외국에는 그런 일이 일절 없는데 요일별로 돌아가면서 와서 아버지께 문안하고 청소도 하고 가고 차도 끊이고 가고 그렇게 하는 것을 보았어요. 그리고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socialist가 와서 도우미처럼 거들어주고 가고 그렇게 사시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거기는 은퇴를 하면 자기 스스로 몸을 거동을 할 수 없고 또 은퇴를 해도 그 큰집의 엄청난 관리비를 물면서 그렇게 거기서 자기가 하나의 집을 쓰고 산다는 것 자체를 그 사람들은 불합리하게 여겨요. 그래서 요양시설인 양로원으로 들어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내가 책을 한꺼번에 가지고 오고 싶어 하니까 그분이 그러시는 것이에요. 집이 이렇게 큰데 책이 없으면 내가 여기 있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지 않느냐? 그런데 가슴이 굉장히 아릿하더라고요.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나머지 30%는 돌아가실 때까지 쓰셔도 괜찮다고 그랬는데 그분이 나보다 오래 사시면 난감하기는 한데……. 진짜 그런 일들이 있어요. 역사에 보면 유명한 인물인데 그분의 전기를 쓰기 위해서 전기 작가 열 명이 자료를 모았대요. 그런데 전기 작가들이 자기보다 훨씬 더 어리잖아요. 그런데 한명, 한명 거의 다 죽도록 글 쓸 대상인 본인은 아직 안 죽은 것이에요. 거기는 100세 넘게 사는 일들이 허다하니까 모르는 일이에요. 그런데 작년에 뵐 때하고 다른 것 같더라고요. 어쨌든 그러시면서 아주 따뜻하고 친절하게 아주 잘 대해주셔서 좋았고 또 하나의 질문을 하셨어요. 자료조사도 다 끝냈거든요. 9,000권정도 되는데 그럼 앞으로도 책을 계속 사는데 그것은 어떻게 할 것이냐? 그래서 걱정 마시고 사시라고……. 그것은 제가 다시 인수를 하겠다고 그러니까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올 11월에 가서 3,000권 정도를 인수하고 3,000권이면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3,000권 정도를 인수해오고 내년 11월에 3,000권정도 그 다음해에 3,000권정도 인수하기로 얘기가 되었습니다. 가서 서가를 상세히 돌아보았는데 의외로 값나가는 책들이 정말 많았어요. 그래서 어쨌든 행복하게 일을 잘 끝내고 목사님도 마음에 굉장히 흡족해 하셨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기도해주신 덕에 잘하고 왔습니다. 이 정도로 마치고요.
이 6장에서 다루는 내용은 뭐냐 하면 이 사람들이 칼빈은 종교개혁 2세대 사람이에요. 이 세대를 선세대, 1세대, 2세대, 3세대로 나누게 되는데 대개 4세대쯤, 5세대쯤 내려와서 이 개혁주의는 거의 막을 내리게 되는데 선세대는 누구냐 하면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이에요. 제가 쓴 책 중에 기롤라모 사보노롤라 라는 책이 있지요. 그 사람이 순교할 때 마틴 루터가 중학교 학생이었을 정도의 나이였어요. 그 어간에 있는 사람들이 선세대에요. 그 선세대 사람들은 훨씬 더 폭넓게 흩어져있어서 저 멀리 14세기까지 올라가요. 그래서 더 올라가면 올라가지만 대충 그래도 보면 15세기 초반까지 올라가요. 그러면서 분포가 되면서 16세기 초반에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사람들이 말하자면 르네상스의 물을 먹은 사람이에요.
르네상스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제일 처음에 서양사 전체를 살펴보면 그 뿌리가 서양이라는 것은 원래 별 볼일 없는 것이에요. 그런데 동양을 오리엔트라고 그러고 서양을 옥시덴트라고 그래요. 그래서 옥시덴트는 해가 지는 나라고 동양은 해가 뜨는 나라라고 그러는데 이 동양의 문명이 서양으로 넘어가게 되요. 동양의 문명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이집트의 문명이 에게해를 타고 에게해에서 크레타를 타고 미케네문명의 모판이 되어서 그것이 그리스, 그리스에서 마케도니아에 의해서 제국이 통일되고 로마가 들어섰지만 다시 로마가 결국 그리스 문명의 토대위에서 이루어지면서 서양문명을 낳은 것의 기본이 사실은 동양문명이 씨앗이 된 것이에요. 다만 동양문명과 서양문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 로마 특히 그리스 문명이 둘이 만나서 인간중심적인 것들이 서양에서, 발달한 물질과 사고에 대한 것들이 동양에서 오면서 사람 중심적인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그것이 그리스의 고전 문화에요. 그래서 동양과 서양의 문물이 부어지면서 서양사가 만들어지는데 그러다가 그것이 중세로 넘어오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한분에 의해서 모든 것들이 통일되고 인간은 그 하부에 존재하게 되는 그런 기독교문명을 이루게 되고 그것이 서양사에 주축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동양에서 만약에 천지신명 이런 것들이 국가의 모든 핵심을 이루었다면 서양에서는 그것이 하나님으로 대치되는 것이에요.
그러다가 중세가 지나오면서 결국은 중세 말기에 균열이 일어나고 그러면서 거기에서 다시 우리가 그리스 로마의 고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신고전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되요. 신고전주의 운동에서 고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을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르네상스 운동이에요. 그러니까 이 르네상스 운동이 우리들이 학문적으로 인문주의운동이라고 그러는데 이 인문주의 운동은 다시 둘로 나뉘어져요. 세속적 인문주의와 기독교 인문주의로 나뉘어요. 세속적 인문주의자들은 그야말로 교회의 압제와 폭압에서 벗어나서 철저하게 사람이 중심이 되는 그러한 사회를 꿈꾸게 되는 것이에요. 그렇게 되고 기독교인문주의는 그게 아니라 그러한 인문주의에서 일어난 사상들을 걸러서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가지고 성경이야말로 참다운 휴머니즘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 참다운 휴머니즘은 결국 ‘데오센트리즘’ 신 중심주의와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이었거든요. 그러면 로마교회에 그 중세시대의 폭압으로 말미암는 백성들의 그 비참한 삶과 정신의 파괴는 무엇이냐 하면 이것은 교회가 참된 휴머니즘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는데 이게 바로 기독교인문주의자들의 해석이었어요. 그러니까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당시의 종교개혁사상을 가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 시대에서 보면 좌파사람들이었단 말이에요. 그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기독교권 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기독교인이었고 그 사람들은 모두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제 신 중심적인 사고에서 인간중심적인 사고로 넘어오게 되요.
그러면서 여기에서 제가 복음주의의 동향에서 설명했듯이 예술이 커다란 바람을 일으키면서 그 시대의 특징들을 드러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후에 나오는 것이 낭만주의에요. 낭만주의라는 것은 인간이 무엇을 느끼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낭만주의에요. 낭만주의로부터 시작해서 인상파, 그 다음에 입체파, 야수파, 그러면서 미술의 사조들이 계속 꼬리를 물고 나오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전체적으로는 결국은 인본주의에요.
그러면 여기에서 무슨 문제냐 하면 마틴 루터, 존 칼빈, 츠빙글리 할 것 없이 모든 종교개혁자들이 화두로 내걸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문제였어요. 그러면 사실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문제는 성경으로 돌아가 보면 또 사도 바울이 그 자유문제를 가지고 화두로 삼아서 갈라디아서 전체에서, 로마서에서, 그리고 고린도서에서 여러 곳에서 그 참다운 인간의 자유가 무엇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그 놀라운 자유에 대해서 설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단순히 르네상스주의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르네상스가 그 시대의 편견을 깨고 자유문제를 거론한 것을 기독교에 있는 종교개혁자들은 그것을 계기로 삼아 성경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인의 참 자유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참다운 성경적 휴머니즘으로 돌아가는 것이 된 것이에요. 그래서 뭐냐 하면 이 기독교는 사람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종교여야 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뭐냐 하면 다른 종교에서는 볼 수 없는 그런 어떤 인격성들이 이 기독교 안에서는 충분히 돋보여야한다는 것이에요. 다만 그 휴머니즘이 참된 휴머니즘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한분이 우리의 최고의 사랑의 대상이 되고 그 성경의 가르침에 의해서 그 사랑의 질서가 올바르게 방향 지워질 때에 그때에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높아지는 그곳에 우리의 인간의 인간되는 참된 휴머니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죠.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로마시대에는 사실 계급제도였거든요. 노예제도가 있었어요. 그리스시대에도 노예제도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리스시대의 노예는 맘대로 못했어요.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권한을 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자기 노예를 주인이 생사여탈권까지 쥐고 있는 체제가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노예의 도움이 없으면 그 사회를 꾸려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는 그 노예도 기본적인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인정하고 자격을 부여했던 것이에요. 그런데 이것이 바뀌게 되는 것이 로마시대로 넘어가면서 바뀌게 되요. 그래서 아주 잔혹한 노예에 대한 박해 때문에 스팔타커스의 반란을 비롯해서 많은 여러 차례의 로마의 대규모적인 반란들도 일어나게 되요. 물론 다 실패하지요.
그런데 그랬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사람들이 참다운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서 아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사실 일깨워주는 것이 기독교의 참정신이라고 보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것이 결국은 중세를 통해서 교회를 비성경적인 방법으로 강조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러한 성경의 보다 더 중요한 진리들이 가려지게 되고 그래서 백성들에 대한 대대적인 폭압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나중에 이게 관용의 문제와 연결이 되지만 똘레랑스라고도 그러는데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이 종교의 문제, 양심의 문제에 있어서 얼마큼까지 사회는 관용을 베풀어야하는가라는 문제에요. 그런데 근대시민사회로 넘어오면서 이것들이 확증이 되어서 이제는 인간의 자유가 충분히 보장받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지 못한 시대였단 말이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기독교역사를 잘 아는 것이 기독교신앙을 견고하게 갖는 아주 중요한 비결이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기독교역사를 잘 알기 위해서는 서양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도 웃기지만 어쨌든 유럽과 미국의 역사를 아는 것이 좋은 기독교 역사에 대한 이해를 갖는 중요한 비결이 되지요.
요번에도 가는 길에 비행기를 갈아타려고 독일에 들렀는데 거기서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뭐냐 하면 요즘은 다 어려운 시대이기는 하지만 조금 여유가 있어지면 성지순례도 가야되겠지만 교회 안에 5년 정도 한 달에 오만 원씩 드는 적금을 만들어놔서 그래서 5년 후에 교회의 종교개혁의 역사를 탐방하는 그런 여행을 하면 우리가 왜 이렇게 믿으면서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이해가 피비린내 나는 핍박과 개혁의 역사를 더듬으면서 훨씬 더 좋고 그것을 보면서 아름답고 굉장히 마음에서 부흥이 일어나더라고요. 그렇게 여러분들이 마음을 가질 때에 오늘날 이 작은 땅덩어리 속에서 예수를 믿고 사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원대한 이해도 생기고 참 좋아지겠다고 생각하고 이런 것들을 어른이 되어서 말고 어렸을 때에 그러니까 애들을 어학연수 보내지 말고 한 달 갔다와봐야 내 주위에 수없이 많이 갔다 왔는데 별 볼일 없어요. 그러니까 차라리 그 돈을 가지고 어렸을 때에 아이들의 가슴이 막 뜨거운 10대 때에 역사를 조금 이해할만한 중학교 3학년이나 고등학교 1학년 때쯤 해서 교회에서 한 달 동안 유럽의 역사를 가르치고 이것은 당장 대학시험 공부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잖아요. 유럽의 역사를 가르친 다음에 그 다음에 15일 정도를 잡아서 종교개혁을 돌면서 우리의 선조들이 어떻게 박해를 받고 진리를 위해서 피 흘리고 죽었으며 우리가 믿는 신앙이 왜 참된 기독교신앙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주어야해요. 이 안에서 막 불이 붙어 와서 정말 열심히 공부를 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해요. 그래서 그런 그리운 생각을 참 많이 갖고 갈 때마다 여러분들 생각이 많이 납니다. 그래서 누가 몇 년 전에 제안을 한번 했어요. 그래서 차라리 그러면 성화반을 마칠 때에 수학여행을 가시지 그러느냐고 그랬는데 그것도 생각해볼 문제죠. 성화반 들어오기 위해서 한 5년 동안 적금을 부었다가 어차피 가는 사람은 가고 못가는 사람은 못가니까……. 무슨 뭐가 남겠어요. 회갑이 되었다. 결혼 20주년이 되었으면 태국에 가서 놀다오면 남는 게 뭐가 있겠어요? 그런데 그런 곳에 가서 쭉 돌아보며 가슴에 불을 담고 오면 얼마나 뜨거워지겠어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그렇게 떠올랐던 것이에요.
그런데 그 다음에 교회의 권세와 정치적 통치의 문제가 나오는데요. 이 정치적 통치는 우리들이 소위 이야기하는 정체라고도 이야기해요. 교회의 권세 즉 교회가 가지고 있는 권세가 무엇이냐? 정치적 통치는 교회의 권세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권세의 성질을 말하는 것이고 정치적 통치는 무엇이냐 하면 그 권세를 어떤 방식으로 실행하느냐하는 것을 우리가 이것을 정치학에서 정체라고 그러잖아요. 국체, 정체 그러잖아요. 국체는 대한민국이고, 민주국가고, 이게 국체라면 정체는 공화정이란 말이에요. 모두 다 함께 사람의 의견을 물어서 의견을 수렴해서 정치를 이끌어가는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그러면 조금만 더 이야기를 할게요. 지금 제 이야기만 잘 들으면 이것을 읽으면 저절로 다 이해되는 것이에요. 기본적으로 종교개혁자들의 생각을 보면서 우리는 칼빈에 대한 잘못된 인상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칼빈 그 사람은 말을 들으니까 뭐 예배를 안 드린다고 그러면 곤장 10대, 20대 그리고 부모에게 효도를 안했다 그러면 감옥에 집어넣고, 그 다음에 자기 나름대로 믿는 다른 신앙의 도리가 있다고 그러면 불 질러서 화형을 시키고 그런 폭군과 같은 사람으로 묘사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그게 아니고 이 당시하고 지금하고는 다르다는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에요. 그게 무슨 얘기냐 하면 오늘도 오면서 신문을 보니까 그런 이야기가 나왔더라고요. 옛날에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가 김정일하고 무슨 약속을 했대요. 그게 뭔지 모르지만 약속을 하고 왔는데 보니까 총리가 약속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와서 이야기를 들으니까 국회에서 동의를 안 해주고 생난리가 나고 하니까 결국은 접었어요. 그러니까 고이즈미한테 그러는 것이에요. 물론 민주국가라서 이런저런 하는 이야기가 있지만 아니 그래도 나라에서 제일 높은 사람인데 그것을 당신이 한번 했으면 그것이 뒤집힌다는 것이 나는 너무 충격적이었다고 그랬대요. 아직까지도 그 사람들은 이해를 못해요. 그래서 심지어는 정상회담을 하는데 조선일보에서 사설을 거지같이 써서 정상회담을 못하겠다고 엉뚱한 소리를 하잖아요. 남한의 이러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해서 전혀 개념이 없어요. 통일이 되더라도 굉장히 걱정이 되요. 그런 것들이 왜 그러느냐하면 사회 자체가 이질적이기 때문에 이해를 못하는 것이에요. 지금도 이 사회에서 칼빈의 시대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면 칼빈은 굉장히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무엇을 생각해야하느냐 하면 그때는 아직까지도 민주정치가 확립되지 않은 군주들이 정치하던 시대였어요. 영국이 민주주의를 했다고 하지만 사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귀족들의 협박에 못 이겨서 왕들이 권력을 돈하고 바꾼 역사거든요. 그래서 세워진 것이 1215년에 마그나카르타가 있고 그 다음에 계속 마지막에 1628년에 Bill of right 라고 그래서 권리청원이 주어지게 되잖아요. 그때에 와서야 비로소 법률이 정하지 않고는 사람을 구속할 수 없다는 등등의 내용들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된 것도 17세기의 일이니까 칼빈이 활동하던 시대는 16세기잖아요. 그러니까 왕이나 그런 사람들이 다스리던 시대였단 말이죠. 그런 시대에는 결국은 지금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생각을 해보세요.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에는 한 나라가 있어서 그 나라의 왕이 다스리고 그 다음에 종교적으로는 누가 다스렸겠어요? 로마 교황청에서 이렇게 해서 나라의 통치가 다스려졌거든요. 그러면 스위스는 그 당시에는 굉장히 특수한 사정이 있었던 것이에요. 여러분들이 스위스의 역사를 보면 스위스는 26개의 canton으로 이루어져요. 그 canton이 뭐냐 하면 주 정부거든요. 스위스 자체가 조그마한데 그게 더 조그만 것으로 나눠지게 되요. 그런 식으로 나눠지게 되서 강력한 중앙정부가 있는 중앙집권의 왕정정치에 의해서 이뤄지는 나라가 못되고 그렇게 갈라지게 되고 그래서 스위스의 역사는 파란만장한 역사에요. 왜냐하면 스위스가 지정학적으로 보면 유럽에서 이 로마로 넘어가는 위치에 있어요. 그래서 지리적으로 굉장히 중요해요. 그 나라를 수없이 공격하고 침략하려고 그러는데 꿋꿋이 싸워서 그 작은 나라가 몇 번을 패배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대부분 이기고 결국은 훌륭하게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자기들을 지켜내는 것이죠. 이런 속에서 칼빈이 당시로써는 이런 민주사회 같은 것은 감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기독교강요 맨 처음에 보면 이 프란시스 1세에 대한 헌정이 나오잖아요. 여러분들이 읽었듯이 그 프란시스 1세는 당시의 프랑스의 왕이었거든요. 나중에 스위스의 종교개혁을 하게 되지만 원래 출신은 프랑스잖아요. 그래서 프랑스를 보면 왕이 강력하게 집권하고 다스리는 것이에요. 민주주의는 꿈도 못 꾸는 것이죠.
그런 속에서 결국은 종교개혁자들의 생각은 뭐였느냐 하면 하나님이 두 나라를 천상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를 세우신 것처럼 이 세상에는 땅의 나라와 하늘의 나라를 다시 세우셨는데 그 땅의 나라가 인간들의 사회와 질서를 좌우하는 국가고 그 보이지 않는 영혼과 같은 나라가 교회라고 생각한 것이에요. 그런데 이 교회가 가톨릭이 너무 잘못해서 말하자면 국가가 몸이라면 몸의 영혼의 구실을 제대로 못해서 미치광이 같은 삶을 산 것이에요. 그러면 교회가 올바로 되어야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건전한 국가권력, 그 다음에 하나님과 교제하는 신령한 교회의 영향력 이 두 개가 함께 합해져서 상호조화를 이루면서 백성들의 삶을 통치할 때 그것이 온전한 국가와 교회의 모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에요. 그래서 거기에서 국가와 교회가 구분은 되지만 분리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우리의 몸과 영혼이 구분은 되지만 구별되면 그 사람이 이미 사람이 아니듯이 그렇다고 생각한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 당시에 칼빈이 권력욕이 강해서라기보다는 칼빈은 한쪽 교회라는 쪽을 담당하고 있는 우두머리였어요. 그 사람이 끊임없이 교회와 국가가 대등한 하나님의 질서 속에서 학자가 올바른 질서를 갖고 서로 충고하고 협력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나라가 되고 또 하나님께 복종하는 교회가 되는 가운데에 하나님의 참된 통치를 실현해갈 수 있다고 본 것이에요. 그것을 이상적으로 이루어보려고 그 시대의 문맥 안에서 몸부림친 사람이 칼빈이지요. 그러니까 칼빈의 의도는 자기가 세상의 권력까지 모두다 손에 넣어서 교권과 왕권을 함께 가진 존재로서 제네바를 통치하고 다스리려고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인상이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칼빈이 원하는 것은 그것이 올바른 국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죠.
칼빈은 무엇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구약을 보는 것이죠. 구약을 보면 왕이 있었고 제사장 그룹이 있었고 선지자그룹이 있었잖아요. 다 하나님의 종들이에요. 그리고 각각 맡은 역할들이 달라요. 그렇게 하나님이 역할을 교회와 나라에게 맡기셨다고 보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칼빈을 보고 폭압 운운하면 안 돼요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이런 중대한 결정들은 ‘때려라.’ ‘감옥에 집어넣어라.’ 이런 결정들은 사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사항들이 아니고 시의회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죠. 그러니까 세르베투스의 화형이라든지 이런 것들도 칼빈이 사형을 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자료에 보면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구하려고 애를 많이 썼다고 그래요. 그런데 의회에서 결정을 하는 것이죠. 그것은 종교지도자로서 존중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에요. 자, 이해되시죠.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보겠습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다루어져야한다. 이것은 필요한 일이며 이것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양심은 아무 일도 의심 없이 착수하지 않으며…….’ 왜냐하면 이것이 이제 자유가 어떤 것인지에 따라서 양심은 엄청나게 귀속을 받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자기 깨어짐의 책 3장인가 2장인가 보면 양심이 어떤 때에 강해지고 약해지는가! 즉 가변적인가 하는 것을 상세하게 다루었어요. 집에 가서 꼭 읽어보세요. 이렇게 바로 표시를 해놓았다가 바로 가서 읽어야지만 공부가 되는 것이에요. 그렇게 해서 한번 정리해보세요.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할게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교역자가 있는데 교회 뒷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을 발견했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겠어요? 같이 한번 해보시겠어요? 제가 화란을 작년에 갔는데 세미나를 하는데 그 유능한 사람들이 나와서 그렇게 심오한 세미나를 하는데 끝나고 쉬는 시간이면 골목이 담배연기로 꽉 차는 것이에요. 목사들이 모여서 담배를 피는데 그중의 어느 목사는 담배를 하도 많이 피어서 이빨이 완전히 황금빛이에요. 그렇게 담배를 피워 대서 내가 그랬어요. 그중에는 젊은 사람도 있어요. ‘당신들은 참 대단하다. 그것이 무엇이 좋다고 그렇게 담배를 피우느냐? 한국에서는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기만 해도 목사가 잘린다.’ 그들은 깜짝 놀라요. 거기서는 허용이 되는 것이죠. 기독교 윤리상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면 뭐냐 하면 그 사람들은 그런 점에 있어서는 양심이 작동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양심은 선악의 구분선이니까. 그러나 이제 여기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런 것들이 잘못되면 어떻게 되느냐하면 자유로운데 자유해도 되는 것은 막 사람을 정죄하고 억압을 하고 꼭 지켜야하는 성경적인 선들은 무시되고 그러죠.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잘못될 때에 사람들의 삶은 공공연하게 하나님의 법도를 떠나게 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생각하는 좋은 사회는 어떤 사회냐 하면 선악의 기준이 최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상당히 부합해있는 상태 그것을 우리들이 좋은 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많은 경우 주저하고 움츠리며 흔들리고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모종의 논의가 야기되자마자 정욕들이 불타거나 무분별한 충동이 일어나 이러한 방자한 기질들에 반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사람들이 어떻게 되겠어요? 하나는 자유를 극단적으로 주장해서 어떤 쪽으로 가냐 하면 무율법주의로 나가는 것이죠. 율법이 없다. 그렇게 나가고 또한 쪽은 어떻게 되지요? 율법주의 쪽으로 나가는 것이죠. 율법은 하나님이 세우신 올바른 율법뿐만 아니라 사람이 세운 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모든 자의적 율법까지 포함하는 것이에요. 그렇죠. 예를 들자면 내가 교리반에서 그런 질문을 가끔 했어요. 뭐냐 하면 로또에 당첨이 되었을 때 십일조를 내야하는가? 어떻게 생각하세요? 감사헌금을 내야 되요? 그것도 명답이네요. 그러니까 성경은 그런 식의 소득을 추구하는 것 자체를 정당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식의 소득을 성경이 추구하는 그런 소득생산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올바른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죠. 우연히 장난삼아 샀는데 맞았다면 죄가 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만약에 그런 식으로 소득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했다면 올바른 것이 아니죠. 그래서 나는 그러죠. 그런 로또 같은 것은 사는 것이 아니야. 사지 말고 다른 사람들은 해도 되지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소득이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지 않는 것일 때 십분의 일 십일조를 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러나 대안은 있지요. 회개하는 마음으로 모두 내면 그러면 다시는 안 그러기로 하고 모두 내면 받아주죠.
그래서 율법주의는 무엇과 문제가 되느냐하면 이것도 어디에 나오느냐하면 자기 깨어짐의 죄에 대한 사랑에서 나와요. 뭐냐 하면 깨어진다는 것은 자기 의와 죄에 대한 사랑에 관하여 깨진다는 것인데 이게 결국은 자기사랑이나 죄에 대한 사랑이나 모두다 하나로 통하지만 그래서 연결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계속 나오는데 자기 의는 이런 것이죠. 하나님께 내가 충분히 받아들여질 만큼 주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은 적극적인 의죠.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 아니라는 것은 소극적인 의죠. 그러니까 이런 식의 것들을 계속 쌓아가는 역할들을 율법주의가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반대로 좌절하게 만들고 정죄의식에 빠지게 만들기도 하지요. 그래서 결국은 지난번에 율법의 기능들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만 그런 올바른 태도를 봐야하는 것이죠.
칼빈은 이제 2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세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칭의에 대한 확신을 갖는 가운데 율법을 넘어서서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모든 율법의 의를 잇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아무도 의롭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위의 논리도 절대 지지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를 얻기 위해서는 아주 사소한 일에 자신을 바쳐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 정도의 정도나 한계를 미리 꿸 수 없으며 자신을 모든 율법들에 대한 채무자로 세우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율법에 대한 언급을 제하고 행위에 대한 생각을 젖혀질 때 우리는 칭의에 관해서 논할 때 오직 하나님의 자비, 하나만을 안고 그리스도 한분을 바라보아야한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하면 그것은 이러이러한 질문이 아니라 불의하고 가치 없는 우리가 의롭다고 여겨지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다시 이게 쭉 율법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와요.
그 다음에 583쪽으로 가면 3번이에요. ‘두 번째 자유는 첫 번째 자유에 의거하고 있는데 양심이 율법의 필연성에 강제되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 자체의 멍에로부터 자유롭게 되어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법의 지배아래 있는 한 영원한 두려움 가운데 살아야하므로 이런 자유가 먼저 주어지지 않는 사람들은 열심히 기민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할 준비가 기어코 되어있지 않을 것이다.’ 자, 이런 이야기겠지요.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을 여러분들이 숙독하셨잖아요. 거기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셨다고 했을 때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셨느냐는 것이죠. 그렇게 나오면서 율법으로부터의 구속, 죄로부터의 구속, 비참으로부터의 구속, 등등 나오잖아요. 자유도 마찬가지잖아요. 우리가 흔히 배운 자유는 무엇이라고 그랬지요? 이중의 자유가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그랬는데 첫째는 무엇이지요? 신분의 자유. 두 번째는 상태의 자유지요. 신분의 자유는 외적신분의 자유와 내적상태의 자유에요. 외적신분의 자유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고 그 다음에 진노의 자식이었던 자리에서 사랑받는 자녀가 된 것이 외적신분의 변화라면 내적인 죄에 얽매여있던 우리의 사슬들을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끊어주셔서 그 은혜로 자신의 죄를 이기며 살 수 있는 이런 힘들을 제공해주신다고 말씀드렸죠. 이것이 무엇이지요? 내적 자유에요. 두 번째 자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에요. 첫 번째는 외적인 율법의 자유, 두 번째는 내적인 마음과 영혼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자, 그런 이야기들을 전부다 설명하는 것이에요.
588p로 넘어가면 4번이에요. 세 번째 자유에요. ‘세 번째 자유는 그 자체로 중립적인 어떤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종교적으로 매이지 않으므로 중립적으로 어떤 때는 사용하고 어떤 때는 넘어가는 것이 허용되는 것입니다. 이 자유에 대한 지식은 우리에게 지극히 필요합니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우리의 양심은 어디에도 쉼이 없을 것이며 끝없는 미신으로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그러느냐하면 4p의 원문을 보면 희랍어 하나가 나옵니다. 떼르띠아=4번째라는 뜻이에요. 우뜨눌랄레룸엑스떼르나눔=외부적인 것들 꾸바이뻬르세숨투아디아포라=아무래도 상관없는 뜻이에요. 이런 것이죠. 자,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자기 자녀를 공립학교에 보내야 되요? 사립학교에 보내야 되요? 사립학교를 보낼 수도 있고 공립학교에 보낼 수도 있는 것이죠. 그렇죠? 아디아포라에요. 자, 자매는 교회에 올 때 치마를 입어야 되요? 바지를 입어야 되요? 아디아포라지요. 그러나 너무 짧은 치마를 입고 오면 좀 그렇지요. 그 다음에 그런 아디아포라가 아주 많지요.
그래서 옛날에 교역자로 있었던 형제인데 집에 텔레비전이 없어요. 애들이 tv가 보고 싶어서 죽으려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그렇게 교육시키지는 말라고 그랬어요. 왜냐하면 아이들이 그런 식으로 집에서 생활을 하면 학교에 가서 사람들하고 문화가 안 맞아서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차라리 텔레비전을 갖다놓고 꼭 보아야할 것을 보게 하면서 통제해서 아이들을 이 사회 속에서 살면서도 유리되지 않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게 해야지 그것을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말도 안 통하는 그런 아이들로 만들면 안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 문화는 피하고 도망쳐야 될 대상이 아니라 극복하고 넘어야할 대상이기 때문에 그런 대처를 올바르게 하면서 교육을 해야 하는 것이에요. 아디아포라는 그 이외에도 많지요. 그러면 그런 아디아포라를 가지고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저도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우리 교회에서 지체들이 자기가 아는 지체가 하나님의 법을 어겼을 때와 자기의 인생관의 신념을 어겼을 때 어느 때에 더 분노하게 되지요? 전자에요? 후자에요? 그러니까 그게 이제 잘못된 사고방식이라는 것이에요. 그게 아직 자기 안에 세척되지 않은 죄의 오염들을 입증하는 것이에요.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것이죠. 그래서 자유 즉 아디아포라 문제를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자, 어느 교회에서 시빗거리가 일어났는데 왜 교회 강단을 나무에서 유리로 바꿨느냐? 그런 싸움이 벌어졌어요. 아디아포라지요. 강대가 유리냐 나무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곳에서 무엇이 울려 퍼지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죠. 개인적으로는 그럴 수 있지요. ‘나는 나무보다 유리가 더 좋아.’ 그럴 수 있지요.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생각이죠. 사람마다 생각이 다 다른데……. 그렇죠? 나는 별로 유리를 안 좋아해요. 좀 이상해요. 그렇지만 그렇게 한 교회에 갔을 때 나는 기분 나쁘게 생각하거나 이 교회가 좀 이상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왜? 뭐니까? 아디아포라니까. 그러면 나에게는 마음에 안 들어도 성경적으로 아디아포라기 때문에 저 사람을 충분히 자기가 기뻐하는 대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면서도 자기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데 하등의 방해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내가 더 많은 사랑과 이해심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그렇죠.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요. 독일 사람이 영국에 와서 잔디밭에 쓰인 팻말을 보고 충격을 받았대요. 그런데 잔디밭에 뭐라고 쓰여 있느냐하면 Do not enter.(들어가지 마시오.) 그렇게 충격을 받고 그러면서 너희 나라는 정말 부럽다고 그랬대요. 왜 그랬을까요? 좀 썰렁하지요? 뭐냐 하면 잔디밭에 들어가지 말라니 얼마나 좋은 것이냐? 그러면 딴 데는 다 들어가도 된다는 것이 아니냐? 우리 독일은 여기는 들어가도 됩니다. 그것은 되고 나머지 말 안하는 것은 다 안 되는 것이라고 그러더래요. 우스갯소리지만 실제로 그래요. 사람들이 좀 무뚝뚝하고 그래요. 그런 것이죠. 그런 자유를 충분히 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한 것이에요. 그런 아디아포라를 충분히 인정해주어서 누구도 성경말씀이 아닌 사람의 신념에 의해서 찌그러지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따돌림을 당하는 일이 교회에서는 없어야 된다는 것이에요.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에요. 이해되시죠? 그게 사랑이에요.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의 법도에 대해서는 투철해야 되는데 반대에요. 뭐 그냥 하나님의 법도에 대해서는 너그러우면서 그러죠. 그렇게 해서 세 번째의 자유가 주어지게 되요.
자, 그 다음에 우리들이 592p로 넘어가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유의 문제가 오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6번을 보세요. ‘오늘날 사람들은 더욱 심하게 죄를 짓습니다. 재력으로써 호화롭게 살 수 있는 사람으로서 호화로운 연회, 몸치장, 대저택으로 과도한 영화를 즐기지 않거나 모든 종류의 사치로 뛰어나기를 원하지 않거나 부로 놀라운 허장성세를 부리지 않는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이 자유라는 구실아래 변화되고 이것이 중립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누군가 그것을 중립적으로 사용한다는 조건하에 인정한다. 이런 경우 외에 과도한 정욕으로 추구되고 교만하게 자랑되며 사치스럽게 낭비될 때에 이런 것들은 죄악으로 더럽혀진다. 바울의 다음 말씀은 중립적인 것들을 가장 잘 구별해준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다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깨끗한 것이 하나도 없고…….’
7번으로 넘어갑니다. ‘영원히 이러한 절도에 이르도록 평온하게 될 때에 유익함을 얻는 합법적인 규범을 얻게 될 것이다. 절제가 결여되면 일상적인 즐거움조차 과해지게 된다. 비단과 자색 옷 아래 어리석은 영혼이 감추어있는 반면 거칠고 조야한 누더기아래 자색영혼(자색은 그 당시의 아주 고급직물의 상징이었어요.)이 깃든다는 말이 진실합니다. 따라서 약하게 보통으로 부요하게 자기 자리에서 살도록 하자.’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런 것 아니겠어요. 왕족이었는데 예수를 믿게 되었다. 한 끼 식사에 오천만원을 들여서 대신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이것은 말하자면 과도한 탐욕이 아닐 수도 있지요. 그러나 월수입이 십오만 원밖에 안 되는 사람이 한 끼에 오만 원짜리 밥을 먹겠다면 그것은 탐욕이 될 수 있잖아요. 그건 것들을 인정하고 그리고 자기 자리에서 살도록 하자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게 참 재미있는 것이 뭐냐 하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수도원을 차리잖아요. 그래서 수도원을 하는데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살다가 온 사람하고 귀족으로 살다가 수도사가 돼서 들어온 사람들하고 대우를 틀리게 해주었어요. 우리가 보면 말도 안 되잖아요. 귀족출신인 사람에게는 모포도 좀 더 좋은 것으로 주고 잠자리도 약간 더 편하게 해 주고 그랬어요. 아우구스티누스답지 않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런 이야기를 해요. ‘원래 가난했던 사람은 수도원에서 가난해져도 더 이상 내려간 것이 별로 없지만 귀족과 왕족의 자제들이 수도원에 들어왔을 때 여기서 아무리 뛰어나게 대접을 받아도 그들은 너무 많이 내려온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참 어쩌면 사랑을 보잖아요. 가난한 사람들만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높은 자리에서 낮아진 사람들의 고통까지도 헤아리는 것을 보게 되잖아요. 가슴이 뭉클하더라고요. 정말 그런 것이 사랑이구나! 했어요. 귀족으로서 내려오신 분들은 오늘 특별대우를 못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딱딱한 의자에 앉혀드려서 죄송합니다. 참 놀라워요.
그 다음에 쭉 넘어가시면 601p의 10번을 보면 ‘그러나 우리의 자유가 얼마나 절제되어야하는지를 정의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받아들이며 할례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디도를 할례주기까지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여기에는 다양한 행동들이 있으나 계획의 변화도 없고 마음의 변화도 없습니다. 디모데를 할례 주는데 있어서 다른 곳에서 쓴 것과 같이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노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을 얻고자함이요,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 내가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아래 있는 자들처럼 된 것은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이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를 얻고자 함이라.” 참 사랑의 원리를 보여주잖아요. 참 감사하지요.
그 다음에 13번을 넘어가면 이중적 통치가 나옵니다. 뭐냐 하면 ‘하나는 영적인 통치입니다. 그리고 이로써 양심과 경건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에 이르는 훈련을 받습니다. 또 하나는 뭐죠? 정치적 통치에요. 이것으로써 사람들 가운데 서로 섬겨야하며 사람으로서의 직분과 시민으로서의 직분에 이르는 교육을 사람이 받는다. 이것들은 보통 영적인 관할과 일시적인 관할이라고 불린다. 이것들은 부적당한 말이 아니다. 이로써 전자의 통치의 양상은 영원한 삶에 후자의 통치의 삶은 현세의 삶에 관련된다. 전자는 영혼 내부에 후자는 외부적 품행을 조절한다. 우리는 전자를 영적 왕국으로 후자를 정치적 왕국으로 부를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은 각각 고찰되어야한다. 한 가지를 다룰 때는 마음을 회심하고 돌이켜서 다른 것을 의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사람에게는 다른 왕과 다른 법이 다스리는 말하자면 두 개의 세계가 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이 이것이거든요. 칼빈의 이런 사상을 보면 잘 들으세요. 칼빈이 쓴 책 가운데 무슨 책이 있느냐하면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될 사람들에 대한 존경을 돌려야할 인간의 의무’라는 책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지금은 성경적인 기독교 휴머니즘이 아니라 세속적인 휴머니즘이 교회 속으로 들어오게 되요. 그래서 질서 같은 것들의 개념이 없고 마구 무시하는 것이죠. 이런 것들은 교회에서 중대한 범죄행위에요. 그래서 당시로써는 왕들과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 교회의 세운 직분들에 대한 깊은 존중심을 가지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철저하게 훈련되는 것이죠. 그리고 교회가 민주적인 방식으로 말씀중심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조정하려고 하는 그런 태도를 보이면서 교회가 교회다워져 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참된 기독교적인 휴머니즘으로 교회가 돌아가는 것이 정말 아름다운 것이고 그리고 세속적인 휴머니즘과의 차이를 발견하면서 예리한 지성으로 말씀에 입각해서 이 모든 것들을 여러분들이 판단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옳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지켜주시고 오늘도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옵소서. 잘 깨닫고 말씀 속에서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도록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화반 XII
607p입니다. 607p부터 시작을 해서 여기서는 교회의 권세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권세를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함께 이 교회의 권세를 다루고 있는 이유는 중세시대에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러한 다양한 자유들을 침해하는 일들이 교회의 권세라는 이름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그래서 그러한 진정한 자유가 교회에 의해서 어떻게 침해되지 말아야하는지 하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 다음에 XX의 정보를 다루는 것이에요. 그렇게 해서 이 기독교강요가 전체적으로 막을 내리게 되는데 같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사랑해주시고 오늘 아침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장소에서 그리고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나가게 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오늘 저희와 함께 해주시고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이 우리의 마음의 기쁨이 되게 하시고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깨닫는 것이 우리에게 커다란 행복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그래서 우리가 지난시간에 공부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시고 또 죄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고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본래부터 주신 아디아포라의 자유가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런 자유를 우리들이 온전히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받은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삶이에요. 지난시간에도 기독교 휴머니즘에 대해서 잠깐 말씀을 드렸잖아요? 그래서 굉장히 감동적이에요. 이 종교개혁자들은 지난시간에 역사를 잠깐 말씀드린 것처럼 휴머니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어요. 한명도 예외 없이 모두 휴머니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에요. 그 휴머니즘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휴먼=인간주의, 그래서 그것이 학문적으로 사용되면 인문주의라고 하고 그 다음에 그것이 특별히 기준점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될 때에는 인본주의라고도 번역합니다. 휴머니즘은 Humanitarianism이라는 인도주의라고 그러지요. 결국은 뭐냐 하면 모든 것의 기본과 기반을 인간에게 둔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게 어떻게 좋을 수 있냐는 것인데 사실은 그렇게만 질문을 하면 안 되고 이 휴머니즘은 기독교적 휴머니즘이 있고 세속적 휴머니즘이 있어요. 세속적 휴머니즘은 완전히 인간을 그 모든 사상과 사고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잘못된 것이고 그리고 그러한 인간이 모든 것의 근본이 된다는 절대적이고 인본주의적인 휴머니즘이 오늘날 자유시민주의 사회에 정신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런 인간이 중심이 되는 이것은 결국 뭐냐 하면 신이 중심이 되는 것과 대립이 된다는 것이에요. 인간이 중심이 된다는 것은 신이 중심이 되는 것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이고 중세사회를 신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였다면 여기는 이제 신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이에요. 그래서 지난시간에 잠깐 이야기했습니다만 이게 결국 서양의 정신문명이라는 것이 결국은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맨 처음에 그리스 문명이 이루어지는데 이 사람들의 사고가 인간중심이었거든요. 로마문명에도 마찬가지고요. 오늘날 우리들이 볼 수 있는 인간의 행복과 그 다음에 인간의 평화를 위한 종교개념들이 있잖아요. 우리들이 그것을 세속주의라고 그러는데 인간과 평화를 위해서 종교를 이용하는 이러한 개념들이 사실은 그리스시대부터 나타나요. 그러니까 거기에 나타나는 신들의 이름을 쭉 보면 전부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신들에게 할당하는 것이에요. 너는 지혜, 너는 전쟁, 왜냐하면 전쟁에서 이겨야하니까……. 그 다음에 너는 농사의 신 세레스는 농사의 신이잖아요. 그 다음에 사랑, 디오니소스 같은 수호신, 박카스 등등 이런 식으로 할당하는 것이에요. 전부 다 그래요.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있어요. 아테네가 아테네 이전의 전설에 포세이돈이라는 신이 찾아와요. 포세이돈은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바다의 신이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누구를 섬길까? 그러니까 신들이 입후보를 하는 것이에요. 이런 사고방식부터가 인간이 중심이 된 것이에요. 왜냐하면 저쪽에 영향을 끼쳤던 동방에 있는 이집트 같은 나라는 다 농사국가이고 당시의 대부분이 농사를 하는 국가죠. 그러니까 하늘에 자신들의 먹고사는 문제가 굉장히 많이 달려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리스 사람들은 그것이 아니라 자활해서 먹고 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 자기를 먹여살려주는 것이에요. 고객이 자기를 먹여살려주는 것이에요. 고객의 마음을 중심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고대사회에서는 전쟁에 지면 끝이잖아요. 수많은 백성들이 ‘와’하면서 ‘포세이돈을 신으로 섬기자!’ 그러니까 아테네가 아데나이가 말하자면 지혜의 여신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야, 나는 지혜를 주어서 전쟁의 피해가 없는 나라가 되게 해줄게.’ 그러면 전쟁을 해서 이기는 것을 원하겠어요? 아니면 워낙 지혜가 뛰어나서 아예 전쟁이 필요가 없는 나라가 되기를 원하겠어요? 전자겠어요? 후자겠어요? 당연하지요. 전쟁에서 이기려고해도 피를 흘려야 되는데 그러니까 ‘우리는 아데나이를 섬기겠습니다.’ 그것이 아테네가 된 것이에요. 그게 지혜의 신이에요. 그렇게 인간중심의 사회가 조성이 되요.
그런 것이 말하자면 처음에 어디서부터 나오느냐하면 예술서부터 나옵니다. 예술이 어떻게 되느냐하면 중세까지만 해도 신을 묘사하는 것 즉 하나님을 묘사하기는 어렵지만 예수 그리스도, 그 다음에 성인들, 천사들, 그 다음에 사도들을 그렇게 묘사하는데 그러다가 이제 르네상스가 오면서 다시 그런 조류들이 인간중심으로 넘어오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게 되요. 그래서 그때 된 것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에요. 건장한 다비드상 있잖아요. 그 당시로써는 왜 그렇게 큰 충격이었느냐 하면 이런 식으로 인간 자신의 몸을 들여다보면서 거기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은 사실은 중세의 분위기에서 보면 굉장히 불경스러운 것이에요.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고 보이지 않는 신들에 대한 아름다움보다는 보이는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표현하는 그런 것들이 봇물처럼 막 쏟아져 나와요. 돌멩이가 우리로 말하자면 아주 연옥처럼 부드럽기 때문에 아주 상세하기 때문에 칼로 긁으면 긁어지니까 그러니까 잠자리 날개 같은 옷이 펄럭이는 것까지도 전부다 조각으로 묘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이에요. 그런 것들이 르네상스운동이 일어나게 되요. 그런데 예술은 이런 것들 훨씬 이전에 12세기, 13세기경에 여러분들이 잘 아는 이탈리아의 가죽으로 유명한 피렌체가 있는데 옛날에는 플로렌스라고 그랬는데 그런 곳을 중심으로 메디치가 같은 사람을 중심으로 이제 계속 발전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그래서 예술작품을 만들고 그래요. 예술이 끼치는 영향은 굉장하고 어마어마한 것이에요. 그런 예술작품들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이 이 모든 세계의 중심이 된다는 사상을 일깨운 것이죠. 그런 것이 말하자면 르네상스에요.
그래서 이러한 르네상스에서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들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 종교개혁자들은 기본적으로 어떻게 생각했느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참된 인간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그것을 여태까지 가로막은 것이 로마교회였다고 보고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참 인간으로서 살기를 원하셨고 우리 인간은 참인간으로 살아갈 때 가장 하나님답게 섬길 수 있다고 생각을 해서 참다운 인간이 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참된 인간이 되는 것이고 인간의 진정한 행복의 상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질서로 인간이 돌아가는 것이고 그런 질서 안에서 하나님이 누리게 하신 자유는 하나님이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자유이고 또 진리와 함께 성령을 충만히 누리는 그런 종류의 자유인데 그 자유를 빼앗는 것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고 그 자유를 빼앗는 것 자체가 인간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지 못하게끔 찌그러뜨리는 그런 중대한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도전이라고 본 것이에요. 그러니까 기독교야말로 진정한 휴머니즘이라는 정신을 갖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부당하게 교회나 국가나 이런 권력에 의해서 침탈당했던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되찾아야지만 그래야지만 그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영혼과 삶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에요. 그러니까
저는 그 대목에서 굉장히 감동을 받아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만 제가 교회를 개척하게 된 여러 가지 원인이 된 것 중의 하나가 인격적인 그런 공동체가 되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살면서 그렇게 제가 목회하는 현장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보면 그런 요소들이 있겠지만 좀 인격적이고 싶었어요. 인격적이라는 말 자체를 그냥 교인들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둔다는 뜻이 아니라 이런 것이죠. 인간이 하나님 앞에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그리고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은 구속을 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마땅히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주신 의무를 태만히 하거나 위반할 때는 오히려 아주 너그럽게 봐주는 이런 것들이 인간의 모습을 그릇되게 망가뜨리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 것이죠.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모든 것들을 좀 이렇게 자유롭게 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었어요.
지금도 아이들을 기르면서 자꾸 아이들을 어떻게 기르느냐고 그러는데 나는 그 아이들에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속박을 하지 않는 것이에요. 그래서 뭐냐 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이런 것에 의해서 자꾸 아이들을 속박하니까 진짜 중요한 것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는 이렇게 하라고 가르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고 할 때 그것 자체가 잔소리의 연장선상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부부간의 관계에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올해로 결혼해서 30년을 살았거든요. 굉장히 오래 살았지요. 그때 결혼한 사람이 지금 살고 있는 같은 사람입니다. 30년을 살았는데 사람들은 내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잘 안 믿는데 제가 성격이 원만하고 그냥 그런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한 번도 ‘여보 와이셔츠 왜 안 빨아놓았어? 와이셔츠를 다리지도 않고 이게 뭐야? 여보, 반찬이 이게 뭐야?’ 이런 말을 한마디도 안했습니다. 그것은 본인도 동의를 해요. 그럼 나는 생각이 없는 사람이냐? 안 그렇거든요. 나도 다리지 않은 와이셔츠를 입을 때 기분이 나빠요. 그리고 어쨌든 당연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일체 말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사소한 일에 아내와 다투거나 강제를 하게 되면 진짜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양보를 해야 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저 사람도 사람으로 태어나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데 하나님 앞에서 살기 위해서도 웃기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겠어요. 어떻게 보면 인본주의 입장에서 보면 스트레스 아니에요? ‘하나님 내가 잘못했습니다.’ 그것도 쉽지 않은데 또 남편한테까지 와서 ‘여보, 잘못했어.’ 그것을 하게해야 되느냐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자유롭게 그렇게 하지요. 그래서 가끔 ‘여보, 집안일을 의논해야 될 텐데…….’ 그러면 ‘무엇인데?’ ‘아휴 당신 마음대로 해.’ ‘무엇을 사야 되는데…….’ ‘무엇을 해야 되는데…….’ 어차피 나는 교회에서 생활비를 주어도 나는 보여주지도 않으면서 나한테 그것을 허락을 받아요. ‘당신 마음대로 해!’ 나이 50이 넘어서는 수식어구가 생겼어요. ‘여보, 당신나이 이제 50이 넘었는데 뭐 그런 것을 나한테 허락을 받아? 당신 소신대로 해.’ 아이들을 기르면서도 그게 중요해요. 그런데 그런 것이 어떻게 하든지 자유롭게 살 때 그 아이들이 하나도 마음에 안 걸리면 그것은 애정이 없는 것이죠.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것이 싫지요. 그런 행동하는 것이 싫지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본질적인 것이 아닐 때에는 오래 참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것이 어떤 본질을 건드린다고 할 때에는 아주 명확하게 선을 확 그어야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저희는 감사하게 개척교회 때에 집사람하고 많이 싸웠습니다. 싸운다고 그래봐야 우리가 뭐 토닥거리고 그러겠어요? 그냥 말을 안 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 집사람하고 저하고 있으면 서로 말을 안 하고 있다가 누가 먼저 말을 걸 것 같습니까? 저는 한 달이라도 말을 안 하고 살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 집사람은 나보고 독한 사람이라고 그러는데 사람이 그러면 기도가 되겠어요? 부부가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그렇게 말을 안 해도 기도에 문제가 없는 것을 가지고 말을 안해야지 ‘반찬이 이게 뭐야?’ 그런 것을 가지고 말을 안 하면 저 구석에 가서 기도를 하려면 하나님이 ‘너나 잘해라. 부흥이 어쩌고 너나 잘해라.’ 그러시죠. 그게 뭐냐 하면 목회를 할 때 중대한 원칙이 있는데 그때는 나이가 어리니까 몰랐잖아요. 그런 선이 있는데 그것을 질서를 넘나드는 것을 보면서 하지 말라고 줄을 그으면 아파서 자지러지는 것이죠. 그렇지 않겠어요. 자기도 하고 싶은 바가 있는데……. 그런데 이것은 원리적으로 아니다. 그리고 교회 전체적으로 볼 때 이것은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줄을 쭉 그어버렸어요. 그때는 당황해지는 것이죠. 올라오지 말라. 여기는 침범하지 말라고 줄을 그어요. 그러면 많이 아파해요. 그래서 사실은 목회자의 아내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는 게 그렇게 엄청난 과외비를 지불하고 그것을 썼는데 그래도 정말 감사한 것이 그게 5년 안에 기본적인 라인이 서있어요. 그게 우리는 교통법규에요. 그래서 우리 집사람이 일 년에 한번 이상은 읽고 또 가르치니까……. 그게 라인이에요. 나머지는 자유하게 두는 것이에요. 그냥 자유하게 두는 것이에요. 그것을 이제 이 종교 개혁가들을 꿈을 꾸었던 것이에요.
사실은 이 대목이 별로 크게 감동이 안 되는데 나는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에서 어떤 때는 저리게 눈물이 나요. 왜냐하면 내가 그런 비인격적인 교회 속에 있어보았기 때문에 거기서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이 주시지도 않은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권위를 가지고 어떻게 그렇게 하는가? 이 세상의 부모들이 그것 자체를 하나의 권력으로 여기고 자식들을 폭압적으로 누르고 오히려 자식들이 그런 신앙의 규율들을 범하고 막살아갈 때에는 무기력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게 아파와요.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그런 점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누리는데 그 자유를 여기 기독교강요에서는 사실 그 문제를 상세하게 다루지 못하는데 제가 여러분들에게 쓴 은혜의 지배 같은 것은 그런 자유를 누리면서 사는 길 중에서 특별히 죄로부터 자유하게 해주신 영혼의 상태를 어떻게 유지하며 살 것인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 내용들이거든요. 그게 나는 단순히 자유롭다고 자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공산치하에서 살다가 아주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알코올중독에 빠져있어서 습관적으로 음주를 해서 자기 자신을 술독에 담그지 않으면 지탱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것은 진정한 자유를 가진 사람이 아니죠. 그렇잖아요? 그러면 그 자유라는 것은 내적으로 그가 그런 자유함을 얻지 않으면 진정한 자유가 아니죠.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는 이렇게 총 포괄적인 자유에요. 그런 자유함속에서 인간은 인간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게 드러난다고 보는 것이에요. 지금도 보면 목회자들인데도 남편이 눈에 힘을 주면 꼼짝 못하는 사모님들이 있거든요. 그런 것을 보면 내가 마음속으로 많은 분노하게 되요.
그래서 내가 항상 교회에서도 이야기하는 것이 한국에 있는 교회를 다녀보아도 아마 교회가 이정도로 모이고 장로님들이 10명 가까이 되는데 주일날 대예배시간에 젊은 여자 집사들이 나와서 수천 명을 위해서 대표기도 하는 교회가 아마 거의 없을 것이에요. 저는 의도적으로 기도하는 권한을 장로님들이 독점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왜냐하면 물론 교회의 질서는 있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고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구김 없이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갈 때에 그런 것들이 진정한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교회가 부당하게 가로막았던 것이에요. 그래서 교회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권세가 어떤 것인지를 이 2장에서 밝히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여기에서 보면 제가 지적한대로 그대로 나옵니다. 607p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서 우리가 말하는 것은 모두 이 영적인 왕국에 관계된 것임으로 본제에서 법들이나 입법자들에 관한 정치질서에 반대하는 어떠한 다툼도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의 다툼은 오히려 목사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는 권세에 관해서다.’ 이런 것은 복종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실상 그들은 가장 잔인한 도살군들이다. 자신들이 만든 법을 영원에 관한 영적인 것이라고 말하며 그것이 영성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로써 그리스도의 왕국은 능력이 없어지고…….’ 왜 그래요? 진정한 그리스도의 왕국의 능력은 교회라는 제도에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포기하고 그리고 그것이 억압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능력은 영적인 능력이기 때문에 각자가 교회 모두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고 그분으로부터 영적인 은혜와 능력을 진리 안에서 받아서 그렇게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진 자유를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는데 거기에 교회의 진정한 능력이 있다는 것이에요.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약에 전쟁이 일어난다고 가정하면 북한은 금세 무너집니다. 역사를 보면 자유를 억압했던 나라가 전쟁에서 강한 적이 없어요. 그것이에요. 그 대표적인 경우가 지난번 걸프전이나 이라크전이에요. 그렇게 군인들이 평화 시에는 사담 후세인을 위해서 죽겠다고 하고 그래도 전쟁이 막상 일어나면……. 그 반대의 경우가 프랑스죠. 그 프랑스 시민혁명이 일어났던 이후로 그 나라의 애국가를 보면 섬뜩하거든요. 뭐 피, 전우의 시체 그러는데 그렇게 불굴의 승리를 이루어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간으로서 자유를 누리는 것에서 굉장한 힘이 나오는 것이에요. 그러면 뭐냐 하면 그 후에도 역시 유사한 것이에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올바른 관계를 맺고 말씀과 성령 안에서 공동체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이 삶속에서 무한한 자유를 그리스도와 함께 누렸던 사람들이 사실은 거기에서 강한 능력이 나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렇잖아요. 예를 들자면 이런 것 아니겠어요. 여러분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죄에 빠지거나 은혜에서 멀어지면 자신의 영혼이 속박되는 것을 경험해요. 그래서 이렇게 속박을 받으면서 죄를 짓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 살면 약간의 편리함이 있겠지요. 불순종하며 살면 열렬히 기도를 안 해도 되고 물질을 하나님 앞에 안 바쳐도 되고 세상구경을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얻는 즐거움보다는 영혼의 자유를 잃어버린 속박이 너무 견딜 수 없이 어렵기 때문에 돈이고 명예고 나발이고 무엇이고 다 벗어버리고 나는 그 옛날의 자유를 찾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영화도 말이죠. 만날 울고 지지고복고하는 것 그것 말이에요. 영화 속에서 사랑하는 영화를 나는 별로 안 좋아해요. 오히려 옛날에 나왔던 더스틴 호프만이 나왔던 삐삐용이라는 영화가 있어요. 그런 영화를 보면서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에요. 이렇게 연결을 해보세요. Free has the wind. Free has the wind.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아보았던 사람들은 속박의 고통을 알기 때문에 속박의 고통 속에서 10년을 살고 천년을 사는 것보다는 자유롭게 단 하루를 사는 그것이 진정한 자기의 영혼의 평화라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그런 자유……. 그 속에서 인간의 무한한 힘이 솟아나는 것이죠. 그런 것이에요.
그럼 교회도 영적인 싸움을 싸울 때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자유롭게 사람들이 그 하나님 안에서 자유롭게 하고 그 사람들을 옷차림이나 그런 것을 가지고 판단하고 그러지 말고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두고 그리고 참된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의무들, 본질에 충실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교회의 참된 모습인데 이제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권세들을 오용하여 이 성도들을 교회의 통치아래 두고자 하는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성도들의 양심에 주어진 자유는 전적으로 억눌리고 폐기되었다. 나는 지금 그들이 얼마나 불경건하게 자신들이 율법에 순종했음을 조작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죄 사함과 의를 바로 그 순종으로부터 찾으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그 순종위에 종교와 경건의 전체 개요를 세웁니다. 나는 그리스도에 의해 자유롭게 된 것에 대해 필연성이 양심에 부과되어서는 안 된다는 한 가지 점을 주장한다.’ 이것을 이야기하면 길어지는데……. 종교개혁자들이 양심의 자유를 그렇게 강조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이 있거든요. 인간본성에 심어놓으신 하나님의 법이에요. 이런 양심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이게 기준선이 되어서 율법을 어기거나 하나님의 뜻을 거슬렀을 때 가책을 느끼는 것이에요. 그래서 양심은 우리를 송사하고 기준이 있으니까 송사를 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율법은 그것을 판결해서 우리를 정죄한다할 때 우리가 ‘아 잘못되었구나! 그리고 고통스럽구나.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겠다.’ 이런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 양심이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서 이 양심이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이 주신 많은 은사들도 이미 잊어버렸지만 양심은 상당히 신뢰할 수 있게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거든요. 그런데 이런 것들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고 주위에서 이것들을 찌그러뜨려요. 예를 들자면 어떤 식으로 찌그러뜨리느냐하면 자기 깨어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예를 들자면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죄잖아요? 그러면 당연히 남의 물건을 훔쳐왔으면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고 누가 문을 열면 깜짝 놀라야지 되잖아요. 그런데 이게 나는 안 가보았는데 몽골을 갔더니 소매치기들이 그렇게 많대요. 그 소매치기들이 대개 전문적으로 와서 채가는 것 아니에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이렇게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는데 별로 기술도 없이 꺼낸대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으면 ‘어!’ 그러면 웃으면서 계속 손을 집어넣는대요. 그런 사회는 어떠냐하면 도둑질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보편화되어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본래 주신 기준선들이 뭉개지고 있거든요. 또 약물에 중독된다든지, 또 성적으로 개방된 나라에서 그런 죄의식이 없다든지 하는 것이 그런 것 아니에요?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런 양심을 찌그러뜨리는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좋은 사회라는 것은 어떤 사회냐 하면 법이 법대로 실행되고 그 법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양심의 원칙과 최대한 일치하는 사회가 될 때 그것이 좋은 사회이고 그런 사회에서 살게 될 때에 인간이 일반은총의 차원에서도 말하자면 인간성이 덜 구겨지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 것이거든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자꾸 뭉개지게 되잖아요. 그런데 교회에서 정부나 교회나 잘못된 것을 인간에게 허용하지 말아야 될 것을 허용하고 그 다음에 강요해서는 안 될 것을 부당하게 강요하게 될 때에 이런 양심이라는 기준선이 이렇게 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되지요?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죄를 짓고 악을 행하면서도 가책을 안 느끼는 상태가 되잖아요. 그것이 공동체 전체적으로 형성이 된다고 하면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체계적인 반항이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 양심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에요.
그래서 보면 루터, 특히 루터는 ‘양심상 나는 그럴 수 없습니다.’ 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내주는 강한 성이요. 부를 때도 ‘양심은 자유를 얻었네.’ 나오잖아요. 그게 이런 배경과 관련되어요. 그런 기준선 즉 하나님이 세우지도 않은 그런 것들로 우리를 무르는 것은 아주 비인간적인 것이고 사실은 참다운 의미의 비인간적인 것은 반하나님적인 것이에요. 그럴 수 없다고 뿌리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독재국가나 혹은 사회의 악습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는 나라들이 이 기독교를 무서워하는 이유가 있어요. 기독교가 들어가서 그들이 덕을 보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굽게 만들어놓은 양심을 가지고 이득을 보고 사회가 구축되어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인도 같은 국가는 대표적으로 카스트라는 사성제도가 있잖아요. 그게 다 굳어지는 것이에요. 우리도 그러잖아요. ‘그분은 양반이야.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사는 것이야. 양반과 상놈은 씨 자체가 틀리니까.’ 그들은 하늘이 낸 사람들인 것처럼 복종을 운명화하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슬람에서 기독교를 너무 두려워하는 이유가 그 파괴력을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들어가기만 하면 그 휜 것들을 다 부숴버리니까 기독교인들이 데모를 하지 않아도 그 의식이 들어가면 그것들을 무너뜨려버리면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나라에서 그 정도라도 여권신장을 이루게 된 것은 전적으로 기독교의 도움이에요. 그리고 주민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것도 전부다 교회에서 학교로 흘러들어가게 된 것이에요. 이런 파괴력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에요. 이것을 교회와 정부가 이용하려고 하고 굽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에요. 이것은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구속하는 것이에요. 그것을 이제 잘못해석해서 모두 놔주어야 된다고 해서 이번에는 자유가 넘치는 바람에 그 기준선들이 오히려 거꾸로 방향을 바꾸게 되는 것이에요. 윤리적인 면이나 도덕적인 면에서 오늘날에도 이것은 또 찌그러뜨린 대로 놔두고 이것은 마냥 나두어서 교회와 이 세상 사이에 아무런 윤리적인 차이가 없고 어떤 의미에서는 더하고 그런 것을 비꼬고 그런 영화가 밀양이라는 영화잖아요. 나는 못 봤는데 사회적으로 그런 반감들이 그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에요. 바로 그런 것들이 잘못된 것이에요. 그것을 여기에서 지적하고 있어요. 우리들이 역사 속에서 그런 행간을 읽어야 된다는 것이죠.
보십시오. ‘나는 그리스도에 의해 자유롭게 된 것에 대해서 필연성이 양심에 부과되어서는 안 된다는 한가지점을 주장합니다. 앞에서 가르쳤듯이 자유가 없이는 하나님 앞에서 쉴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리스도 안에서 받았던 은혜를 지키고 싶어 한다면 해방자이신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유일한 자유의 법, 거룩한 복음의 말씀의 법에 의하여 통치 받아야한다. 어떤 예속에도 매이지 말아야하며 어떤 고리에도 묶이지 말아야한다.’ 그러면서 610p로 넘어가면 15번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인가? 교회는 권세가 없는가? 이런 인식은 좀 더 다수의 단순한 사람들을 염려하게 된다. 우리는 특히 그들에 대하여 글을 쓸 것이다. 우리는 대답한다. 명백히 그것은 있다. 그러나 바울이 증거하듯이 그것은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우기 위해 주어졌다. 합법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일군, 비밀을 맡은 자 이상이 아닌 것으로 여긴다.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정의는 목양은 바로 그 두 가지 목적을 계승한다. 그게 목양이에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우리들이 이런 배경 속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께서 성자를 우리에게 주셔서 그렇게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 이런 것을 주신 것들은 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라고 주신 것이에요. 그래서 죄에 대해서 지적을 하고 아주 무섭게 책망을 하는 그 자체가 말하자면 양심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비뚤어나가는 양심을 바른대로 돌아오게 하고 그릇된 삶의 습관에 빠지는 것을 올바른 것으로 돌아오게 함으로써 참다운 자유를 더욱 더 누리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지요? 자기 사상이나 생각들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되고 명확한 성경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서 그래서 그것을 가르쳐질 때에 그때에 그것은 오히려 억압을 받는 그것이 자유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것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게 진정한 기독교 휴머니즘이에요. 그런데 그렇지가 않으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죠. 죄에 대해서 항시 관대하고 너그럽고 그리고 오히려 아주 인간들이 세워놓은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아주 굉장히 큰 XX로 속박하고 그런 것들이 우리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 611p 두 번째를 보면 ‘교회를 맡았거나 맡고 있는 사람들은 이 계명의 법이 실행되도록 자신들에게 주어졌음을 기억해야하리라. 그러므로 참 목회자들의 존귀함의 가치는 월등하다. 독재자보다 더한 사악함으로 괴롭히면서 거짓 권세로 공치사해서는 안 된다. 어떤 곳에서는 지나치면서 지적했던 것을 기억을 되살려 반복해야한다. 성경에 어떤 권세와 존귀함을 선지자, 제사장, 사도 계승자들에게 돌릴지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사람들 자신이 아니라 그들을 덮고 있는 사역에 더욱 간편하게 말하면 그들이 부름 받은 하나님의 말씀에 주신바 되었다.’ 이것은 말씀의 권위에 호소하고 있는 장면이에요. 그러면서 이제 말씀의 사역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유를 주신다는 것 그것을 여기에서 계속 강조하고 그것이 성경적으로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모본에 의해서 어떻게 증명되는지를 여기서 쭉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618p에서도 역시 똑같이 그런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622p로 넘어가면 ‘다른 것들도 같은 식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양심이 그들의 통치권에 종속시키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떤 법을 가져오더라도 복종할 필연성이 우리에게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멸하면서 정욕을 따라 확실한 믿음이 요구되는 것들로 여겨지는 교리들을 제조합니다.’ 그래서 교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와야하고 나온 교리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펴져야하고 살펴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세워진 교리가 정당한지를 끊임없이 검증받을 그 때에 그것이 올바른 교리가 되는 것이에요. 여기서 이야기하는 교리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부당하게 성도들을 교회에 굴복시키려고 하는 그러한 종류의 억압적인 교리를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들은 새로운 교리를 주장하고 신앙의 조항들을 만드는 자격이 있다고 부당하게 자신을 내세웁니다. 우리가 이전에 밝혔듯이 이것은 사도들 자신들에게서도 제하여졌습니다. 여전히 그들에게 의심이 가시지 않는다면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교인들의 믿음을 주관하는 것을 그들의 사도로 임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부인했습니다. 만약 그가 이 가르치는 자유를 인정했다면 다음 교훈을 교회에게 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 것이다. 실로 이렇듯이 자신의 권위가 하나님의 말씀의 검열에 종속되지 않도록 허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명백히 믿음을 인간적 전통과 우상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어떻게? 아주 명료하게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그러면서 여기서 18번, 19번 이렇게 쭉 넘어가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런 내용들이에요. 왜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는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그 하부의 혹은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주어진 권위에 대해서는 그렇게 잘 복종하느냐고 반문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들을 찾아내어서 사람들에게 이것을 행하라, 저것을 행하라고 의무를 부여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게 하는 그것을 가르치고 강조함으로써 하나님 한분에게 묶여서 살도록 만들어 주어야하는데 그것은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사악한 마음으로 생각하면서 수많은 법도들을 만들어내고 규칙들을 만들어내어서 거기에 복종하는 것이 말하자면 하나님께 대한 복종인 것처럼 그렇게 강요하는 이런 것들은 잘못된 것이라고 그러면서 공격하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 한 3분만 더하고 밥 먹읍시다.
이제 628p의 20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사람들에게 교회의 거짓구실에 동요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이 구실로 더 위험하고 치명적인 교회의 적들이 아무 근거 없이 교만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한때 자신들의 눈멂, 불경건, 우상숭배로 선지자들에게 비난을 받았을 때 내세웠음이 분명한 것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주장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성전의식, 제사장직분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논거삼아 보이는 대로 교회를 측량했고 외부적 형식들이 참 교회 대신 우리에게 제시됩니다. 그들은 종종 교회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있으며 그것들 없이도 교회는 가장 잘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그릇된 제약들이 인간에게 주어지게 되면 신앙이 외형적이 됩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것들을 잘 지켰기 때문에 나는 훌륭하고 선한 사람이고 그리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라는 자기 의가 생겨나게 됩니다. 자기 의는 소극적으로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적극적인 의는 하나님을 충분히 잘 섬겼다고 생각하는 것이거든요. 그런 신앙이 외식하는 신앙이에요. 그런 외식하는 신앙에 빠지게 된다고요. 그래서 기독교신앙에 있어서 진실의 힘이 사라지게 되면 그러면 기독교는 힘이 없는 것이에요. 그 진실 속에서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것, 의지하는 것, 말씀에 나를 비추어서 변화되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이 거기서부터 나오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제 쭉 흘러가게 됩니다.
자, 그러면서 이제 우리들이 234p로 넘어가게 되면 여기서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나옵니다. 이게 뭐냐 하면 ‘교회는 그리스도로부터 버림받지 않고 인도로 진리에 이른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으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도 못하나니 이를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는 말씀을 열두 사도들에게 주셨습니다.’ 결국은 뭐냐 하면 우리가 그런 양심의 부당한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하는 것은 목적 자체가 나 자신의 뜻을 따라 방종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런 양심의 문제에 대해서 지극히 예민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속박을 다른 사람에게도 강요하지 않고 나도 그것을 거부하면서 사는 이유는 최대한 내 뜻대로 살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진리 하나에 복종하는 삶으로 만족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옷차림이나 이런 것, 스타일을 보면서 ‘저 자식 저거 날라리 아니야?’ 이렇게 판단하는 것은 잘못하는 것이죠. 그래서 웬만하면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만들고 그 진리에 집중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에요. 그게 사랑이에요. 그게 사실은 불편하죠. 그런데 사랑으로써 사람들마다 다른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각각 다른 사람들이 진리 하나를 찾아가는 것, 지난번에 들었던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에서도 나오잖아요. 획일적인 일치가 아니라 그 일치라는 것은 다름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리로 강요하지 않으신 모든 것에 있어서는 다른 것을 인정하면서 하모니를 이루는 그런 종교의 일치를 우리들이 진정한 ‘꽁꼬디아’ 즉 일치라고 부릅니다. 그것이 오히려 아주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것이죠. 그래서 오케스트라에 전부다 바이올린 100대가 나와서 전부 연주를 한다면 그것도 화음도 아니고 한음으로 바이올린을 켠다면 얼마나 웃기겠어요. 섬뜩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다양한 악기들이 각기 다른 선율을 따라 연주해가면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울려 퍼지는 것이죠. 그것이 굉장히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만들어내는 것이에요. 오늘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주님, 감사합니다. 남은시간을 주님께 부탁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붙들어주셔서 주님의 말씀을 아는 아름다운 지식에서 자라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주신 이 자유를 우리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말고 주님을 위해 쓸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2009 하반기 성화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