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2016년 청년부 여름수련회 저녁 / 새벽)
설교기간|2016년 8월 7일 - 9일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1 (2016.8.7 청년부 여름수련회 저녁집회 첫째날)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 2016년 8월 22일
목 차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2 (2016.8.8 청년부 여름수련회 저녁집회 둘째날)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3 (2016.8.9 청년부 여름수련회 저녁집회 셋째 날)
1. 그리스도와 성육신적 연합(히 1:3) 2016.8.7 청년부 여름수련회 저녁집회 1
2016.8.8 청년부 여름수련회 새벽집회 첫째날
2.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골 2:9) 2016.8.8 청년부 여름수련회 저녁집회 20
3. 그리스도와 영적 연합(벧후 1:4) 2016.8.9 청년부 여름수련회 저녁집회 35
4. 십자가에 붙들려 살자(갈 3:1) 2016.8.8 청년부 여름수련회 새벽집회 48
5. 화평을 이루신 십자가(엡 2:13-14) 2016.8.9 청년부 여름수련회 새벽집회 53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2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1 (2016.8.7 청년부 여름수련회 저녁집회 첫째날)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2 (2016.8.8 청년부 여름수련회 저녁집회 둘째날)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3 (2016.8.9 청년부 여름수련회 저녁집회 셋째 날)
2016.8.8 청년부 여름수련회 새벽집회 첫째날
2016.8.9 청년부 여름수련회 새벽집회 둘째날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1) 2016.8.7 수련회 저녁 집회1
<그리스도와 성육신적 연합>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1:3)
I. 본문해설
- 말씀으로 구원을 계시하시는 하나님
- 구약 시대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심
-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
- “만유의 상속자”, “창조의 중보자”
- 상속자와 창조의 중보자되심의 의미
- 그보다 중요함은 인간과의 관계임
- 성육신 안에서 인간과 새로운 관계
- “하나님 영광의 광채, 본체의 형상”
a. 만물을 붙듦 b. 죄 정결케 함 c. 좌정
II.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됨
- 하나님을 닮은 영혼과 정신의 특성
- 만물을 통치: 하나님+인간+자연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 창조됨
- 하나님의 형상: 넓은 의미+좁은 의미
- 성육신은 구속 계획과 관련됨
a. 그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b. 성육신: 인간과 연합-우주 통치
c. 본체의 형상: 지식+의+거룩함
III. 성육신적 연합
- 그리스도의 인성과 인간의 연합됨
a. 성육신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
b.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교회와 연합
c. 우리를 거룩케 하심으로 온전한 연합
-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길이 열림
- 사람되심: 인간 하나님처럼 되게
A. 참 사람으로 오심
- 인간의 모든 고통, 슬픔, 시험을 겪음
-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심”(히5:8)
히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 인간에게 참 사람+하나님을 보이심
- 인간을 자신과 연합: God의 통치 구현
B. 하나님을 닮을 길 여심
- 성육신 안에서 온 인류와 연합하심
- 성육신은 단순히 속죄의 수단이 아님
- 그분 안에 우리를 거하게 하셔서 존귀케 하심
-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의 존엄
- 타락으로 형상의 존귀한 부분을 상실함
- 인간의 악함+행복 추구+형상 파괴
- 주님 형상의 회복을 위해 성육신하심
- 성육신적 연합과 주님의 성품에 참여함
IV. 적용과 결론
-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임
- 그 자체로 존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임
- but 성육신 통해⇒인간과 하나됨
a. 성육신 안에 온 인류와 연합하심
b. 인성 안에서 교회를 통해 신자와 연합하심
- 우리가 영적으로 누구인지 알라!
- 그리스도와 연합된 운명으로 살자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2) 2016.8.8 수련회 저녁 집회2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골2:19)
I. 본문해설
- 로마 감옥의 투옥 중 62년경 기록됨
- 옥중 서신+에베소, 빌립보, 빌레몬서
- 골로새 교회 침투한 이단 반박이 목적임
-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머리되심을 변증
- 성육신적 연합과 신비적 연합의 차이
II.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
-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요15:5)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 참감람나무와 접붙임(롬11:17)
롬11: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 신랑과 신부의 비유(마25:1)
마25: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 머리와 몸의 비유(엡1:22)
엡1: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 “생명, 연합, 사랑, 질서” 의미함
III.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
A. 중생과 칭의의 연합
-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을 예정함
- 그 예정이 중생과 칭의로써 실현됨
- 은총에 대한 반응인 믿음으로써 됨
B.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
-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
-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신비이기에
-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는 방식
- 그리스도의 신성과의 동일시 아님
- 전기의 통과와 인입선의 시공 비유
- 삼위의 생명과 사랑이 흘러들어감
- 새로운 성향 도입과 새 자원의 공급
- 새로운 자원을 힘 입는 새로운 생활
IV. 적용과 결론
-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라
- 우리는 그분께 접붙여진 예수의 몸이다
- 그 생명과 사랑을 누리며 살게 하심
- 신령한 자원이 없던 때를 기억하라
- 그 연합 안에서 생명과 사랑을 누리라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3) 2016.8.9 수련회 저녁 집회3
<그리스도와 영적 연합>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후1:4)
I. 본문해설
II. 그리스도의 인성과 교회의 연합
- 인성, 영혼+육신 통해 교회와 연합
- 성육신 안에서 인성이 하나님 되심
- 그 안에서 인간 하나님처럼 되게 함
- 그가 우리 안에 우리가 그 안에 있음
- 그래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공유함
III. 신의 성품에 참여함
- 성육신적 연합+신비적 연합 비교
- 신비적 연합+영적 연합을 비교함
A. “참여함”
- 그리스도 안에서 신의 성품에 참여
-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삼위 관계
- “참여”는 본질적인 섞임 아닌 본받음
-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음
B. 영적 연합의 성질
- 칭의를 통해 접붙여진 연합의 발전
- 신비적 연합:
a. 이성적인 이해를 초월함
b. 연합의 결과가 신비적임
1. 본질상 그리스도 인성과의 연합
2. 신자의 성화와 영화를 포함함
3. 성령으로써 이루어짐
4. 영적 자원의 증진에 관련됨
5. 인간성의 완성을 목표로 함
IV. 연합 안에서의 삶
- 순종과 믿음으로 살아가야 함
- 원리적 연합을 넘어 실제적 연합으로
A. 예수 몸에 접붙임
- 연합 안에서 하늘의 자원을 공급 받음
-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실제로 연합
a. 그리스도와의 관계
b. 사람들과의 관계
- 실제적으로 연합되게 하시는 주님
- 연합의 궁극적 목적은 창조 세계 통치
B. 온전한 인간이 되게 하심
- 하나님을 닮은 지성과 의지로써
- 지혜로 이해하고 사랑으로 통치함
- 그분의 몸인 교회 안에서 연합을 구현함
- 온전한 인간됨+온전한 지체가 됨
- 이미 온 천국⇔도래할 천국: 성화
- 영원한 천국: 영화로 완성하심
- 그때까지 은혜로 죄를 이기며 생활
- 지성의 밝은 빛+사랑이 감화로써
- 성령 충만은 그 온전한 교통의 선취임
- 주의 몸의 일부로 살며 사람이 되어 감
- 불완전한 교회+온전한 삶의 이상
- 끊임 없는 은혜 생활이 꼭 필요함
V. 적용과 결론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2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1 (2016.8.7 청년부 여름수련회 저녁집회 첫째날)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2 (2016.8.8 청년부 여름수련회 저녁집회 둘째날)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3 (2016.8.9 청년부 여름수련회 저녁집회 셋째 날)
2016.8.8 청년부 여름수련회 새벽집회 첫째날
2016.8.9 청년부 여름수련회 새벽집회 둘째날
그리스도와 성육신적 연합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녹취자: 백지영
I. 본문해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삼일동안 설교하기 위해서 여기 섰습니다. 많은 신학적인 설명들이 필요하고 또 논쟁들이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자칫 상세히 설명하면 여러분이 미로에 빠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제가 마음을 잘 다스리면서 골자를 가지고 이 어려운 교리의 길을 잡아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래서 삼일 동안 여러분이 열심히 기도하시면서 이 말씀을 깊이 청취하고, 또 다음에 이것을 교제로 만들어서 구역공부에서 좀 더 심화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우선 오늘 히브리서를 본문으로 읽었습니다.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아마 히브리 사람들, 유대인들 중에서 핍박과 시련 속에서 믿음이 흔들리고 다시 그 핍박을 피하여 평안한 삶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요동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신앙을 굳게 하기 위해서 쓴 책이 히브리서입니다. 그리고 이 히브리서를 쓴 사람은 사도 바울부터 시작해서 많은 후보자들이 거론되지만 결정적으로 누가 이 책을 썼다고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통일된 주장을 내놓지는 못합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것을 쓴 사람은 구약의 제사 제도에 대해서 그냥 들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해박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유대인이라고 보고, 그것을 신약으로 해석해 내서 그리스도를 변증할 수 있는 복음에 대한 상당히 해박한 이해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며, 이방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신실한 믿음으로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성결의 욕구와 목회적인 통찰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아주 탁월한 인물이 이 히브리서를 썼을 것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추측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히브리서를 이야기하면서 첫 장과 2장을 상당부분 할애하면서 어떻게 보면 히브리서 전체를 제사의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유일성과 그 완전성을 변증하는데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시작하자마자 인사말도 없이 곧바로 기독론으로 들어갑니다.
지금 읽은 3절 앞에 있는 1, 2절의 내용을 모두 설명하는 것은 제게 주어진 시간과 여건으로서 가능하지 않습니다. 핵심을 이야기하자면, 눈에 보이는 이 모든 세계의 만물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창조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중보자 되심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삼위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는데, 그 말씀이 바로 성자이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을 통해서 이 모든 세계가 창조가 되었고, 그분이 그렇게 모든 세계를 창조하셔서 그래서 창조된 모든 세계와 연관을 갖고 계신데, 그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신데 어떤 식으로든지 이 모든 세계의 로고스로서 실재해 계시기 때문에, 그것이 이 모든 세계가 진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질서에 붙들려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계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되었고 그렇게 때문에 그리스도가 이 모든 세계를 창조의 중보자로 창조하시고, 동시에 그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세계를 다스리신다는 것, 그러한 그리스도께서 그 만물 속에 그렇게 계시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 그리스도가 그 모든 만물들을 다스리고 그 가운데 계시므로 학문을 통해서는 진리를 찾아낼 수 있고 자연의 법칙이나 이런 것들을 발견해서 학문의 구성이 가능해 진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그리스도가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심으로서 육신을 입으십니다. 인성을 가지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인성을 가지심으로써 인류와 예전에 없던 매우 특별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 이번 수련회 저녁집회의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II.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됨
히브리서를 이 정도로 설명하고 창세기로 넘어가면 창세기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을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우리가 우리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하시고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으로 나옵니다. 이 형상은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인간의 영혼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닮은 특징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이 모든 다른 피조물들과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형상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독립적인 사고와 의지, 결단, 이해 이런 모든 능력을 소유하고 그것을 마음에서 종합하여 자신이 원하는 무엇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것입니다. 그러한 존재로 인간이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은 그 인간을 완전한 독립적인 인간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은혜를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닮은 특성, 하나님처럼 이해하고, 하나님을 닮은 방식으로 이해하고, 하나님 닮은 방식으로 무엇인가를 느끼고, 하나님 닮은 방법으로 자신이 주체성을 가지고 무엇을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그런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형상을 주신 목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이 세계를 하나님 대신해서 다스리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런 당신을 닮은 형상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형상을 가지고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통해 교통하고, 또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계획과 의도를 알고, 하나님이 이 피조세계를 사랑하시는 것 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피조세계를 돌보고 가꾸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인남식 교수님의 강의를 매우 인상 깊게 들었습니다. 그분 덕분에 오늘 저의 설교가 훨씬 쉬워졌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한 인격체라고 보는 종교도 흔하지 않지만 그 인간의 존재를 그런 하나님을 닮은 한 인격적인 존재로 보고 그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에 존귀한 존재라고 가르치는 종교는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생각하기에는 이렇게 어마어마한 무슬림이 들어오면서 기독교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 같지만, 무슬림에 의해서 무너지는 서구의 기독교 세계는 무슬림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다 무너져버린 그 땅 위에 이슬람들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이란이나 무슬림들 속에서, 특히 아주 엄격하게 근본주의 신앙을 지키는 이란은 한 10년 전에 그 선교사를 만났을 때에 자기 선교사들이 추정하기로 삼천 개의 지하교회가 매주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잡히면 사형입니다. 그런데 상상할 수 없이 폭발적인 속도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까도 임현식 교수와 대화를 나누다보니까 사막에서 아예 유목하는 민족들이 자생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선교사가 전해주고 간 아랍어로 된 복음전도나 성경책 일부를 보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이란 지방의 여성들이 복음을 접하면서 놀라운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슬람에 대한 설명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은 복종을 위해서 태어난 존재입니다. 종교적인 열심을 갖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끊임없이 노예적인 종교생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너무나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가르칠 때 그때에 어마어마한 흡인력이 나타나는데, 그게 한국에서도 나타난 것이고 중국을 비롯한 많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여전히 기독교의 복음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바로 복음이 가지고 있는 그 어마어마한 인간 이해에 대한 파괴적인 사회의 영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인간이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처럼 이해하고, 사랑하고, 판단하고, 관계를 맺고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이 세계를 자신이 한 주체가 되어서 다스리지만,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뜻을 끊임없이 이해하면서 하나님의 그 의도와 뜻을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이 세상 속에서 구현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 말씀드리지만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안 해도 되는 어떤 사건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원래에 참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그 본래의 도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주셔서 우리를 창조하셨는데, 결국은 하나님을 알고 자연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를 가꾸고 돌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런 일을 함에 있어서 인류가 계속 번성하면서 사회를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그 사회가 진정한 사랑의 사회가 됨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의 그 사랑의 관계를 이 지상에 투영시켜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며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두 사람도 창조하지 않으시고 딱 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아담이고, 두 번째 하와를 창조하실 때에는 그 사람의 일부를 취하여 여자를 지으심으로 사실상 하나님이 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육신적으로 이런 인간들이 사람이 사람을 낳는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도 예외가 아니게끔 성령으로 잉태케 하셔서 똑같이 죄는 없으시지만 사람의 몸을 갖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너희는 한 몸임을 알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하와가 창조되어 이끌려 나올 때에 그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합니다. 만약에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더라면 아담과 하와는 서로 이 고백을 영원히 유지하며 살았을 것이고, 타락하지 않았어도 자녀들은 생산되었을 것이니 어떤 방법으로 생산되었든지 생산이 되었고, 그러면 태어나는 아이는 또 자신의 엄마를 보고 아빠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고 생각하면서 자랐을 것입니다. 그것은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카인도 아벨에게, 아벨도 카인에게, 셋에게 그러면 그 인류가 확정된 상태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인류가 그렇게 티끌만한 흠이 없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온전한 사랑의 일치 속에서 온 인류가 하나의 가족처럼 살아가게 되었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가족 구성원들 하나하나가 하나님이 주신 독특한 달란트를 가지고 학문과 예술과 과학과 이런 모든 것들을 발전시키면서 이 땅에 문명을 건설하고 살았다고 생각해 보라 이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지으셨을 때에 의도하셨던 인류에 대한 계획이셨습니다.
그런데 죄 때문에 깨뜨려졌습니다. 죄를 짓고 깨뜨려짐으로써 그 첫 번째 결과가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로 온 것입니다. 그래서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습니다. 그 파괴된 정도가 각각 다른데, 자연적인 형상은 그러니까 어떤 사물의 이치를 판단하고 원인과 결과를 추론하고 하는 능력도 상당한 손상을 입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인간은 문명을 건설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정도의 자연적인 능력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도서관에서 수많은 책을 보면서 이 지식의 세계가 무한하다는 것을 느끼면서 좌절해 본 적 없습니까? 나보다 나이가 20년 혹은 30년 어린데 처음부터 쓴 책의 끝부분까지 내가 아는 것이 절반도 되지 않을 때 좌절을 느껴보지 않았습니까?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인류의 이 지상의 발자취 가운데 얼마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지, 그리고 그것들을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도 부분적으로 알겠지만 그러나 나의 아는 것이 얼마나 없는가 하는 것을 깨닫고 좌절해 보지 않은 사람은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최소한 그 좌절이라도 해야지 인간의 체면이 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놀라운 능력은 구석구석 파고 들어가 보면 연구가 안 된 곳이 거의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연구가 안 된 부분이 있다는 생각할 때는 이미 그 방면에 상당한 지식을 소유하고 난 후의 일입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이 여전히 인류 안에서 얼마나 커다란 힘을 발휘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도덕적인 면에 있어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심각한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사람이 사는 도리가 무엇인가?’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이렇게 없을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정말 몰(沒) 지혜적인 사람들이 수없이 양산되고, 이런 사람들 손에 과학기술이 들어갈 때 가공할만한 나쁜 결과들을 인류에게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많은 과학의 수단들을 통해서 인간이 욕망을 충족시키고, 타인을 파괴하고, 하나님이 이 세계를 만드신 계획과는 정반대되는 일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입게 된 최초의 가장 근본적인 파괴이고, 이것이 오늘날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모든 인류의 공통적인 숙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돈이 아무리 많아도 돈을 물 쓰듯 쓰면서 살아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혹시 그 사람이 그것을 행복이라고 느낀다고 할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서 동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현실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인간이 자연적인 형상은 남아 있어도 도덕적으로는 거의 다 파괴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파괴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의문점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 형상을 해석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론적인 측면을 강조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타락하기 이전에 아담이 의로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그 관계에 의해서 의로운 사람일 수 있었는데, 타락함으로 그 관계가 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형상을 잃어버렸다고 보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설명하게 된다면 좋은 점이 있을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이야기하는 칭의의 개념,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 완전히 희망이 없는 말종과 같은 인간이었는데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가 주어짐으로 인간 자신 안에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완전히 밖으로부터 부어진 그 의에 의해서 새사람이 되었고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매우 커다란 의문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 세상에는 두 종류 사람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모두 깨어진 것은 모든 인류의 기본적인 전제이고, 예수를 믿고 그 관계가 복원되어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과 아직 의롭다 함을 못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그 형상을 회복한 사람 그래서 앞으로 그 형상이 더욱 온전하게 회복되어 갈 사람인데,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없습니다. 그러면 짐승하고 그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그렇게 루터의 해석을 전적으로 따르기 보다는 조화를 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개념을 존재론적으로 볼 것이냐, 관계론 적으로 볼 것이냐에 대해서 두 개를 함께 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비록 하나님의 형상, 도덕적 형상을 거의 다 잃어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어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뭔가 동물들과 구별되는 잔존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은 비록 불신앙의 상태에서, 혹은 이교도이고, 아니면 끔찍한 도덕적인 죄를 자행하고 저지르는 그런 흉악범이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가 있고 인권을 존중받아야 한다고 하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해석을 따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아주 엄격하게 오직 영혼과 정신에만 국한시켜버리면 육체에 대한 가학 이런 것들을 설명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후에 와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이 개념을 영원과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에 까지 확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면 육체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한 인간을 설명함에 있어서 영원과 정신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고 보지를 않고 육체조차도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했기 때문에 그를 매우 소중한 존재로 인식하고 귀하게 여겨야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 같은 사람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주신 새로운 계명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극대화된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의 윤리적 표준으로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제시하십니다. 그러한 근거를 존 칼빈은 자기의 기독교 강요 속에서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형상을 사랑할 것이고,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이 모든 피조물들 중에 가장 하나님을 닮은 것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형상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나뉠 수 없는 하나의 사랑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따로 따로 추구해야 할 두 개의 계명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똑같이 그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을 향한 구체적인 사랑으로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 사랑은 나눠지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인류에 대한 사랑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설명해 놓고 보면 어떤 결론에도 도달하게 되느냐?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심에 있어서 완전하신 분인데 그 당신 자신을 닮은 유일한 최고의 작품이 인간입니다. 그 형상 때문에 지존하신 하나님이 낮고 천한 인간과 교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이제 손녀가 세 살이 되었는데 아이들을 기르면서는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을 경험합니다. 그때는 너무 바쁘게 살고 현실에 거의 몰입되다시피 해서 공부하고 사역하고 사니까 아이들이 귀여운 줄도 몰랐습니다. 지금은 한가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도 바쁩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고 보니까 인간에 대한 경외심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조그만 아이가 벨을 딩동 누르면 '할아버지'하고 뛰어 나옵니다.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의 언어로 말을 걸어옵니다. 무슨 질문인지 뜻을 이해를 못하지만 반응합니다. 그리고 단어를 익히면서 서로 대화를 하면서 이야기가 소통하기 시작할 때 그 사랑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가슴이 저리도록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아, 정말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런 것이구나!" 우리가 그냥 하나님과 교통도 잃어버리고 이 세상에 망가진 인간으로 살아갔을 때도 하나님이 눈물겹게 우리를 사랑하셨지만, 그 사람이 돌아와 회심하고 하나님에게 말을 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수준에는 말도 되지 않는, 어법도 잘 맞지 않는 기도일지 모르고 당신의 마음도 제대로 모르는 기도일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 자식이 당신 안에 태어나서 당신에게 말을 건네고,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그 모습이 하나님에게는 얼마나 감격스러울까?
그 대표적인 것이 기도생활과 말씀생활입니다. 그러니까 이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생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믿음으로 지성이 이해를 하고 깨닫고 감동을 받고 하는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최고의 발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성결하게 살고 순전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면 기도처럼 하기 쉬운 것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순간처럼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형상이 망가집니다. 죄가 들어옵니다.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도 하기 싫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자 하는 마음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이유이고, 그리스도인은 일평생 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라고 하는 이 사실을 정말 간직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거스틴을 공부하면서 그렇게 여러 해 동안, 지금도 감격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내가 열다섯 살에 논둑에 엎드려서 그렇게 울고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하게 만들었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정말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한 방식으로 답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 인간은 종종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너무나 죄인이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구해주신 그 은혜가 너무 감격스럽기 때문에 우리를 쓰레기에 비유하고, 또 우리를 아주 흉악한 죄인에 비유하고, 혹은 우리를 심지어는 사단의 자식으로 비유하면서 주님의 구원을 높입니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하나님 앞에 구원받기 전에 자신의 비참함과 구원받은 후에 주님이 나를 존귀케 하신 것을 대비하기 위해서 생각하는 것은 좋지만, 그런 것을 사람들이 불신자라는 이유 때문에 그런 시선을 가지고 사람들을 바라보고 이교도들을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신앙의 깊이는 얼마나 종교적인 열심히 있는가 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사람의 신앙은 인간을 보면서 겉으로 포장된 것에 현혹되지 않고, 그가 인간이라는 그 사실 자체 때문에 그를 얼마나 존귀한 자로 여길 수 있고 그 존엄과 가치를 마음 깊이 인정할 수 있느냐 거기에 신앙의 깊이가 달린 것입니다.
수많은 껍질들이 인간들을 싸고 있습니다. 예쁜 외모와 좀 아름답지 않은 외모, 날씬한 몸매와 뚱뚱한 몸매, 아주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과 아주 무식한 사람, 가문의 예의범절이 바른 것으로 자란 사람과 좀 상스럽게 자란 사람, 우리는 그런 것에 의해서 너무나 많이 현혹되기 때문에 사실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그것을 절대적으로 피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그가 그렇게 하나님을 닮은 형상을 가진 한 인간이라는 것, 그 형상은 모든 인류에게 주셔서 그 형상을 가진 존재 자체가 하나님처럼 소중하게 여김을 받아야 할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자신의 책에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이웃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서 근거를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형상을 담지한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것이고, 그리고 그 형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형상을 담고 있는 질그릇과 같은 그의 육체도 매우 소중히 여길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슬람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배울 기회가 없었습니다. 요즘 접하면서 이슬람에서 온 선교사들 하고도 만나고 그리고 가까운 장래에 중동국가도 가서 집회도 하고 그럴 기회를 가지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오늘 인남식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느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절망적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삶이 저렇게 라마단을 하고 그러는 것 같지만, 사실 여러분이 이미 교회에서 배웠지만 우리 인간 안에 있는 죄는 저런 식으로 파멸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어마어마한 정욕과 그런 죄악과 무질서가 난무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 그리고 외적인 조건에 상관없이 그가 한 인간이기 때문에 존귀하다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편적으로 인간은 존엄하고, 인간으로서 살아갈 권리는 기본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그 근거를 우리가 어디서 찾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회계약설을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불완전합니다.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느냐? 그것을 성경이 아주 명백한 답변을 준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고, 그래서 그는 인간이라는 사실 그것하나 때문에 정말 하나님 앞에 존엄하고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 종종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관용하는 마음을 가지고 지켜보아도 악 그 자체인 것처럼 여겨지는 사람들, 악의 화신처럼 여겨지는 사람들, 그래서 사회에 어마어마한 해악을 끼치고 주위의 이웃의 행복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해야 될 것이냐?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정의라고 하는, 정의는 하나님의 올바른 도덕 원칙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인신매매하고 살육하고 그리고 끔찍하게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자신의 작은 이익을 위해서 사람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안겨다 주는 사람들, 정의의 관점에서 고려하면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망가뜨린 것에 대한 응당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수의 행복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보면 그렇게 무자비하게 나쁜 짓을 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사람들에게 비참한 결과를 가져다주어서 정의의 측면에서는 제거되어야 하고 응징되어야 하는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의와 포용, 그 사이에서 우리는 고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있습니다. 비록 그 사람이 정당한 형벌을 받고 그리고 인류 사회에서 제거되는 그 순간조차도 그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리고 인권을 가진 존재라고 하는 사실은 부인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만약에 그렇게 이웃에게 악을 행한 사람들을 끓어오르는 복수심으로 응징하는 방식으로 정의가 구현된다면 그것은 폭력입니다.
III. 성육신적 연합
사람은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숙고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숙고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 1장에 의하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기 전에 창조의 중보자가 되어서 이 모든 세계를 만드시고, 당신이 친히 그 모든 만물 속에 계셔서 그들을 붙드심으로 이 모든 창조의 세계 속에서 질서가 이루어지게 만드시고, 그렇게 모든 만물들을 붙들고 계신 분인데 그분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인간과 그리스도의 연합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크게 세 가지로 나누는데, 첫째는 오늘 다루는 내용으로 그리스도와 성육신적 연합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와 신비적인 연합, 세 번째는 그리스도와 영적인 연합니다. 어차피 이것을 세 개를 다 삼일 동안에 설교를 들을 테니까 우선 설명을 하고, 그리고 오늘 성육신적 연합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기 전 하나님의 아들 성자로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시고 모든 세계를 다스렸는데, 그분이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궁극적으로는 사람을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돌아가게 만드셔서 이 모든 세계를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끔 통치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을 취하시게 됩니다. 그 인성은 온 인류,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공통된 인간 본성입니다. 그 본성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심으로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와 연합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적 연합입니다.
그러면 이제 어떤 것을 발견하게 됩니까? 우리가 아까 이야기한, 하나님이 우리가 우리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어 만물을 다스리게 하자 하셨을 때 인간에게 주셨던 그 형상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인성을 취하심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그리스도 예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형상이 바로 그 우리에게 주신 형상의 완전한 본보기입니다. 그 형상을 가진 분으로서 우리 인간과 똑같은 인성을 가지심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신으로서는 그렇지 않지만 인간성으로서는 우리 모든 인류의 인성과 연합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만의 머리가 아니라 모든 인류의 머리가 되시는 것입니다. 형식상.
그래서 이 안에서 우리는 이런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저 불신자, 저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고, 사단의 자식이고, 어두움의 종이고, 진노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다가 하나님의 형상 개념을 배우면서, 그게 아니라 저 사람이 불신자이지만,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지만, 이교도이지만, 말할 수 없는 악을 행한 인간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잔존하는 형상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요, 그래서 저 사람은 여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하나님 앞에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갈 가능성이 있는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느냐 하면, 그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이 말이 바로 인성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고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 믿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온 인류가 인성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성육신하심으로, 인성을 취하심으로, 인성을 가지고 있는 모든 인류와 연합을 이루셨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사랑의 범주가 예수 믿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 불신자 심지어는 이교도들에게까지 확장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의와 진리의 문제는 또 다른 문제이고, 어쨌든 그렇게 온 인류가 연합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선교하고 전도하는 것은 바로 그렇게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심으로 자신의 인성 안에서 모든 인류와 이루신 연합을 실제로 신비하고 영적인 연합으로 만들어가는 구원, 선교, 양육, 교육, 성화 이런 모든 과정이 바로 그 연합을 궁극적으로 성취해가는 과정이라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무엇을 발견하게 됩니까? 이제 우리가 정의를 구현하고 또 사랑하고 그리고 인간이 참된 진리를 따라서 인간답게 살아가게 하여야 할 의무와 사명이 우리 교회 안에서의 지평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를 향하여 그러한 의무와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지평을 우리가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인류 사회를 바라보아야 하는 시각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삶의 모범을 우리에게 훌륭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종교적으로는 거의 폐기된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세리, 창기, 간음하던 현장에서 잡혀온 여자, 이런 사람들을 만나시면서 그들을 당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들로 보고 그들을 위해 눈물 흘리시고 기도하시고 참고 용서하고 사랑하시면서 우리에게 이러한 사랑의 정신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서 구속사적으로 온 인류에게 나타날 비전을 예수님이 먼저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서, 오늘 아침에 설교한 것처럼 고넬료의 사건을 통해서 이방인들에게 똑같이 복음이 전파되고, 차별이 없이 유대인에게 부어진 것과 똑같은 성령의 은혜가 쏟아 부어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 안에 있는 이 비전이 실현돼 나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교회의 소명,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의 소명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단순히 희생 제물로 죽으시기 위해서만 오신 것이라고 보면 안 됩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 위해서는 사람의 몸을 입으셔야 했고, 속죄를 위해서는 속죄의 제물이 되셔야 했기 때문에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렇게 제물이 되기 위해서 육신을 입으신 것, 육신을 입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 그리고 인간의 참된 모본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든 것까지도, 사실은 그보다 더 상위에 있는 궁극적인 하나의 목적을 향해 가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결국 온 인류가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다시 돌아와서 그렇게 처음 창조되었던 것처럼 하나님을 이해하고, 세계를 이해하고, 온 인류를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 속에 살아가는 인류사회가 되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두 번째 연합이 바로 신비적 연합입니다. 그렇게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심으로서 우리가 인성을 입고 오신 예수 안에서 인성을 가진 모든 인류가 함께 연합을 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하나님의 참된 생명과 사랑이 그 사람들 속에 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가 재미있게 이것을 비유로 설명을 했습니다. 그 설명을 백퍼센트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그러나 러프하게 한번 들어보십시오.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성육신적 연합이 한 동네와 각 가정에 전기가 지나가는 것이라면 신비적인 연합은 그 전선에서 선을 끌어내어 자기 집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인성을 소유하게 되셨을 때 그 인성을 가진 모든 인류와 연합을 이루게 되었지만, 여전히 인간은 거듭나지 못하고 의롭다 칭함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 안에 있는 생명과 사랑은 누리며 살아가지 못합니다. 자기 자원으로 누리며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과 칭의에 의해서 연합이 됩니다. 이때에 엄밀하게 말하면 이미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만 예수를 통한 삼위의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접붙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비적 연합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차원이 영적 연합인데,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고나면 하나님의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에게 심겨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그에게 흘러들어옵니다. 그래서 그것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생명의 능력은 놀랍습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시련과 역경을 이기게 만들고, 우리의 삶의 상황을 새롭게 해석하게 만들고, 우리의 삶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시련과 난관을 이 세상 안에서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맥락 적으로 이 세상 바깥에 있는 영원한 세계의 빛 아래서 우리의 인생의 의미를 깨닫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잠시 있다 지나갈 인생인데 우리 육신이 죽고 나면 우리는 찬란한 영광의 부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사단이 우리에게 제시할 수 있는 마지막 가장 위협적인 카드가 죽음이었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가 그런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에 죄의 종노릇하면서 살았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육신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할 때는 육체의 생명의 존재 여부만큼 우리에게 무서운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이 세상에 창조된 존재라고 보니까 사실은 우리가 불멸하는 존재로 태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은 사라지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그 형상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어떤 장점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당신의 형상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기애적인 사랑 때문에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폐지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순과 불합리가 지배하는 이 시련과 고난의 날을 통과하면서 육신은 쇠해가고, 결국 우리는 죽고, 그리고 우리가 다시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의 날에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카드가 두렵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이 신비적인 연합입니다. 그러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는 첫 번째 연합, 이것이 바로 신비적 연합입니다.
그러면 여태까지 이야기했던 것을 종합하면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됩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하나님과 연합된 존재는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서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모든 인류가 성육신 안에서 예수의 인성과 연합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가지신 그분이 사실은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분의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의 온갖 빛나는 성품들이 찬란하게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연합은 우리에게 실제적인 생명과 사랑을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그들을 눈물겹게 사랑했지만 아직 그 사랑을 깨닫지 못했고, 예수 안에 있는 그 무한한 생명이 자신의 것으로 활용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의롭다 칭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 질 때 그때에 성령을 받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과 성령의 법, 생명과 사랑이 그 사람 속에 역사해서 이제 그것을 자신의 자원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연합이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을 입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죄에 둘러싸여서 살아갑니다. 세상도 여전히 악합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 은혜의 때가 지나가고 나면 자신 안에도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는 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쪽에서는 하나님의 생명과 성령이 역사하고, 또 한쪽에서는 여전히 기회만 있으면 틈타 우리를 지배하려고 노리는 죄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루신 그 인류와 연합을 이루는 성육신적 연합 안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형상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라고 가르치지만, 내 안에 있는 죄는 여전히 자신의 이익을 탐하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일조차도 서슴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비적 연합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두되는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세 번째의 연합이 영적 연합입니다. 이 연합은 성화부터 시작을 해서 마지막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활시키는 날에 우리의 얼룩졌던 모든 죄의 본성들이 사라지고 완성한 인성으로 회복될 때, 흠도 티도 없게 될 때에 그리스도와 갖게 될 그 범주의 모든 연합을 통 털어서 우리들이 영적 연합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삼일동안 하나씩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육신적 연합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의 모든 인류와의 연합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 인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당신의 인성 안에서 모든 인류와 연합을 이루심으로, 우리 모든 인간이 타락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어 하나님 닮은 그러한 사람으로, 더 심하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처럼, 하나님과 같은 성품으로 흡사하게 닮아서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온전한 연합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이레네우스라는 교부는 이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라고 까지 이야기하고, 여기에서 ‘테오시스’라는 교리가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염두에 두어야 될 것은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처럼 된다는 의미가 하나님의 신성과 꼭 같아진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매우 유사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죄 때문에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본래의 인간에서 멀어진 것만큼 우리 안에 주신 하나님의 모습을 잃어버렸는데 그것을 회복해 가는 과정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이미 성육신적인 연합을 이룬 사람입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예외이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은 신비적 연합을 이룬 사람들이고 이제 영적인 연합의 도상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성육신적 연합은 결국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으심으로 말미암아 가지신 인성 안에서 우리 모든 인류가 연합을 이루게 된 것을 의미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우리의 진정한 구원이 가능해졌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교부들을 비롯한 신학자들은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어도 아마도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인류에게 나타났을 것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A. 참 사람으로 오심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을 하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참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셨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고, 인격으로는 하나님의 인격 하나만을 취하셨지만 역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고 인간으로서의 영혼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참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으로서는 모르시는 것이 없었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당신의 모든 것을 아시는 신성을 인성 아래 감추시고 그분은 배우기도 하셨고, 히브리서는 심지어 고난을 통해서 순종도 배웠다고 말하고, 또 그렇게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 인간을 긍휼히 여기실 수 있는 분이 되셨다고 까지 말합니다. 그분의 하나님으로서의 불완전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참된 완전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5장 8절은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참 사람으로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볼 수 있게끔 가르쳐 주셨고 그리고 참 인간이 누구인지를 볼 수 있게끔 가르쳐주심으로, 그분을 만나는 모든 사람마다 하나님에 대해서 깨닫게 될 뿐만 아니라 참된 인간이 누구여야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당신을 배척하고 모욕하는 유대인들까지도 당신의 몸의 일부라고 여기시고 그들을 끔찍이 사랑하셨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사회 속에서 무한대의 갈등과 그리고 분쟁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참을성이 없기 때문에 아주 작고 사소한 잘못에도 무자비한 폭력을 가합니다. 공중전화 박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통화를 너무 오래한다는 이유로 사람을 살해하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사소한 주차문제를 가지고 시비를 벌이면서 참극을 빚습니다. 심지어는 층간에 소음이 난다고 내려가서 칼로 사람들을 찔러 죽입니다. 이렇게 끔찍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렇게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무자비한 폭력과 미움, 갈등 그리고 자신의 작은 손해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 생각의 지평을 가져야 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인류가 이익과 많은 정의, 불의, 도덕적인 문제에 얽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기계적으로 쉽게 판단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의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온 인류를 넓은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중동지방에서 선교하다가 온 선교사들이 중동 사회의 실상을 이야기할 때 저는 한편으로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정말 엄청난 일들이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 이슬람 세계 속에서 있는 여성들에 대한 무자비한 폭압, 심지어 명예살인이라는 이유로 죽이는 것이 사실상 허용이 되고 있습니다. 법이 통용되지 않는 그런 끔찍한 사회입니다.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는데, 사우디에서 선교하고 있는 선교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미국인 여자가 길거리를 지나가면 남자들이 수없이 달려와서 한번만 너를 강간하자고 하고, 그런데 주위의 많은 남자 이슬람 사람들은 웃으면서 그 광경을 지켜본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는 종교적인 교리 “이방의 여자들은 다 너희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인권이고 뭐고 없는 것입니다. 그런 무자비한 인격살인, 일체 인격적인 존재로 안 보는 것입니다. 그 화제의 사건은 이슬람의 세계를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도 사랑하는 아이들이 불에 타서 죽는 것을 원했겠느냐고 하는데, 악어의 눈물입니다. 그 뒤집어쓰는 것이 무엇인데 그것이 사람자체보다 더 소중하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종교의 이름으로, 정치의 이름으로, 사상과 이념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이 무자비한 인류를 향한 폭력 속에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렇지 않을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에게 직접 관계되는 게 아니면, 자기의 이익과 직접 관계되는 것이 아니면 외면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 불필요하게 그런 일에 말려들고 싶지 않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도 과연 그런 생각이셨을까요?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의 인성과 연합을 이루고 있는 이 모든 인류를 바라보실 때 예수님의 마음은 그런 무관심으로 일관한 마음이었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김용옥 씨가 쓴 ‘사랑하지 말자’라는 책이 그렇게 엄청난 공감을 얻는 이유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 사람이 본 것은 바로 그런 잘못된 종류의 사랑을 교회에서 본 것입니다. 자기들끼리만 위하고, 자기들끼리 해 먹고, 그리고 자기들끼리만 희생적이고 헌신적이지만, 이념과 신앙을 같이 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을 상관없는 사람으로 보든지 아니면 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종류의 사랑은 인류를 끊임없는 분열과 보복으로 몰아넣기 때문에 그런 사랑을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 책을 다 읽고 나서 제가 내린 결론은, “당신이 하지 말자고 그러는 그런 사랑을 예수님은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그 사랑은 참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사랑이 아닙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교리를 토대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는, 그러니까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을 위해서 제 3 세계에서 총을 들어야 할지 아니면 기도만 해야 될지 아니면 가서 복음을 전해야 될지 그것은 각자 자신의 양심과 신앙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우리가 지금처럼 보이고 있는 인류와 사회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어떤 일이 사회에서 일어나든지 간에 나의 이익과 직접적으로 관여되지 않는다면 나서지 않고 거기에 관련되고 싶지 않다고 하는 자기중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이러한 신앙은 진정한 기독교신앙이라고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중국이나 소련이나 이런 사회주의 국가에서 미국의 군사력보다 무서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복음입니다. 복음은 제대로 그 복음이 올바르게 들어가기만 하면 그것은 사회 자체를 가만히 내버려둘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 사회에 어떤 충격과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버려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슬람 사회에 거의 선교적인 영향력을 못 미치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뒤집어 보아야 아는 것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 교회의 지체들이 아프가니스탄으로 단기선교를 갔습니다. 그때가 바로 그 삼육교회 사건이 나던 그때 일입니다. 갔는데, 당연히 거기서 복음 못 전합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한국 문화를 소개하면서 그냥 데리고 놀아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슬람 사회에서는 아이들을 데리고 논다고 하는 개념이 없습니다.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 사람들이 모르겠습니까? 숙소에 있는데 이슬람 여자 청년 둘이 찾아 왔습니다. "당신들이 믿는 하나님을 내가 믿고 싶습니다." 발각되면 사형입니다. 그런데 무엇입니까? 그들 안에 없는 그 무엇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 그리고 모든 인간에 대한 예의, 그리고 그 인간을 존귀하게 여기는 인간에 대한 존중, 사랑 그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그 불신자들이 와서 그랬다고 합니다. 일주일동안 아무 상관도 없는 먼 나라에서 온 여러분이 우리 아이들을 우리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랑으로 그렇게 사랑해 주었는데 헤어질 때 다 울고 그랬다고 합니다. 그런 사랑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다고, 그게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면 적어도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행동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은 개인의 신앙과 양심 또 성경에 대한 이해와 신학에 달려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이 인류사회를 바라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탈북자 문제라든지 남북문제라든지 그리고 지금 들어와 있는 수많은 이민자들을 향한 우리의 이 말도 되지 않는 비인간적인 대우와 처우, 그런 것들은 나중에 칼날이 되어서 돌아올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회를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이 피부색이 다르고 우리보다 좀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우리보다 덜 교육받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우리와 모양과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들을 무시하고 짓밟고, 그리고 우리가 권력을 권한을 쥐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을 무시하고 짓밟는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 인간이라고 하는 공통점 그것을 생각하느냐 이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다.”, 우리도 한때는 구원받지 못한 그런 인생이었을 뿐입니다. 그때도 우리는 그리스도와 인성의 연합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사랑하셨고,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피부색깔과 문화, 종교 그것을 초월해서, 저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안에서 그분과 인성의 연합을 이루고 있고 하나님의 소원은 이 모든 인간들이 당신을 아는 데 이르기까지 구원받고 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음으로써 그들이 하나의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이었다는 생각을 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역량에는 한계가 있지만, 그러나 남북문제, 북한 탈북자들에 대한 문제, 다문화가정에 대한 문제, 그리고 중국으로 팔려가서 인권을 유린당하고 있는 탈북자들의 문제, 그런 사람들의 실상에 대해서 어떤 명확한 견해를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부의 높은 요직에 올랐다면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올바른 길을 가도록 해야 할 것이고, 우리가 그런 능력이 없어서 동네 사람 몇 사람과 만나 어울리고 살아간다면 그 몇 사람과 어울리며 살아가는 속에서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참된 도리라는 것, 그리고 모든 인류가 그런 하나님의 존귀한 형상을 가지고 태어나 성육하신 그리스도와 인성적으로 연합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의 존엄과 가치를 인정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 구체적인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할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의 기본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신앙생활에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으며, 은혜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구체적으로 그것을 어떻게 적용하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정치가도 아니고 그리고 어마어마한 식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언론사에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이라크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한국이 파병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했을 때 저는 단호하게 우리 하지 말자, 그 대신 전투부대가 아닌 사람들은 의료진라든지 이런 것은 괜찮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런 정치는 모르지만 이건 뭔가 잘못돼 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까 인 교수님 이야기를 들으니까 20세기 정치사에서, 근대 미국 정치사에서 최악의 수가 바로 전쟁이라고 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끔찍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서 이슬람 세력들이 그 속에서 극단주의들이 생겨나면서 알카에다, 탈레반, IS 같은 것들이 생겨나면서 지금 인류는 훨씬 더 어려움에 봉착된 것입니다. 4488명의 미군이 죽고, 1600명의 용역업체의 사람들이 죽고, 그리고 일조달러가 넘는 돈을 전비로 썼지만, 그리고도 매년 어마어마한 양의 돈을 들여야 되지만, 그러나 개선된 것이 없습니다. 미국도 안전해 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비록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구의 가장 작은 한 모퉁이를 살아가더라도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인류는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하면 피부색깔이나 국경이나 이런 얽매이는 것들을 다 제거한 채 그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라는 사실 때문에 존귀하게 여기며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실제적으로 이런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어디로 가든지 우리가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을 닮을 길 여심
바로 이런 일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참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 자체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나타남이었다고 성경이 그렇게 강하게 외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은 정말 놀랍게 입증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성육신하심으로서 예수님이 하신 일은 하나님을 닮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육신은 단지 죽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속죄의 수단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안에 모두 들어오게 하셔서 그들을 하나의 사랑으로 묶으셔서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게 하시기 위해서 거기 이르기까지 우리를 주님 닮은 존귀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모든 인간은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존귀하게 여겨져야 하고 누구도 다른 사람을 위한 행복의 폭력적인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우리의 정치, 사회, 법, 심지어는 학문, 모든 현실에 구체화 될 때, 우리 그리스도인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 싸우는 방법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리스도인들은 결연히 그리스도인인 나는 이 점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노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탈북자들을 대하고, 다문화의 자녀들에 대한 문제를 대하고, 노동운동에 대한 문제라든지 재벌문제라든지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해서 판단을 하는 중요한 기틀이 바로 그런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하부적인 것에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경제에 이득이 될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은 그 아래에 있는 차원의 문제들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인간답게 대접받지 못하도록 짓밟으며 살게 하는 모든 사회 구조에 대해서 우리는 온몸으로 저항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 집단적인 따돌림을 받고 교육의 혜택도 거의 못 받아서 지금 벌써 심각하게 교육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어차피 우리나라에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고 몇 십 년 후에는 지방에는 거의 절반 이상이 다문화가정의 아이들로 채워지게 되는데 그 후손들이 한 맺힌 사람들로 태어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외국에서 탈북자들도 만나봅니다. 한국은 마지막 선택지입니다. 호주나 영국 가고 싶어 합니다. 그게 안 되면 미국가고 싶어 합니다. 하다가 안 되면 송환당하는 것보다는 여기에 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하면 노골적인 차별과 비인간적인 차별 때문입니다. 그 속에서 한 맺힌 자녀들이 태어난다면 그 다음 세대의 한국사회가 그것을 감당할 수가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행복을 위l해서도 이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가 서 있는 삶의 영역에서 이런 문제가 예전에는 나와 상관이 없는 문제였는데 이제 이런 문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자녀를 학교 보냈는데 거기서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아이들이 왕따가 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그 아이들을 왕따 시켜야 되는 처지에 있게 될 때 이 자녀를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 그리고 그런 것들에 대한 불평등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항거할 것인가?
그래서 가장 소박하게 나 한 사람이 이렇게 인간이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인간성이 짓밟히는 이 폭압적인 현실을 보면서 자신만이라도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그런 다수의 옳지 않은 견해에 저항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빛 된 삶이 이런 것이라고 생각하며 인간의 도리를 따라 살아갈 때, 그가 어마어마한 일을 하지는 않더라도 그 자체가 그렇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존재의 울림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여러 가지 많은 불이익이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진리를 따라 살아가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제시하신 사랑의 계명을 따라가야 하기 때문에 만나게 되는 시련과 고난이라면, 그것을 회피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지혜가 아닙니다. 바로 그러한 현실에서 그들과 고통을 나누어 당하고, 인류를 향한 그리스도 예수의 한 몸 된 진정한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가 주님을 대신해서 우리의 삶에 예수의 분신으로 서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거창한 이념적인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이 비밀,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심으로 모든 인류와 인성으로 연합을 이루셨다는 사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렇게 이방의 여자도 불쌍히 여기고 돌로 쳐서 죽임을 당하여야 할 비참한 죄인도 가엾게 여기신 그러한 정신이 바로, 사람들에게는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구별이 존재했지만 그리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사람과 창기라는 구별이 존재했지만 종교지도자들과 세리라는 구분이 존재했지만 예수님에게는 그 모두 당신의 몸의 일부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율법을 지킨 사람이나 어긴 사람이나 모든 인류를 위해서 그들 중에서 구원받을 자들을 위해서 기꺼이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서 내어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내려주시는 은혜, 고난을 이기게 하는 용기, 그리고 내가 진리의 편에 서 있다고 하는 아름다운 확신, 그것들로 인해 나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외톨이가 되어도 나는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외롭지 않다는 불타는 확신, 이 모든 것의 가장 좋은 용도는 바로 그리스도의 그러한 사랑의 계명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존귀한 사람으로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종종 그의 죄를 미워하고 그의 악에 대해서 우리들이 비난할 때조차도 그가 존중받아야 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무례한 것은 폭력입니다. 인간을 향한 이해 그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받고 태어났기 때문에 그 자체가 매우 존귀한 존재이고 누구도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귀중한 존재인데,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인성을 취하여 이 세상에 오심으로서 인성을 가진 모든 인류와 하나로 연합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을 눈물로 사랑했고, 그들을 위해서 심지어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그 흉악한 죄인들을 위해서도 그들이 받을 심판을 가슴 아파 하시며 하나님께 용서의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리를 주신 것은, 그래서 우리도 한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은, 더욱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한 부분이 되게 하신 것은, 바로 이렇게 주님이 가르쳐주신 진정한 연합을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래서 그들이 정신과 영혼이 자유를 누리고 육체조차도 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며 살아가는 그런 사회가 되도록 우리가 바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주님의 사랑을 깊이 생각하며 무기력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고, 그리고 바로 이렇게 사는 것이 참 인간의 도리라고 하는 것을 이러한 미묘한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똑바른 기독교 정신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연합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골 2:19)
녹취자 : 오희열
I. 본문해설
어제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와 성육신적 연합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요약을 하자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존귀하고 소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타락해서 인간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되었고 그가 가지고 있는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은 망가지고 왜곡되어서 오히려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을 그대로 내버려두시면 도저히 본래 인간이 창조된 목적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의 말씀을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펼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모든 인간들의 인성은 하나의 연합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연합 때문에 모든 인류는 서로를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며 살도록 부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인성과 연합되었고 그래서 그들이 존귀하고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말씀, “마음과 성품과 뜻과 목숨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이 사실은 두 개의 별 다른 명령이 아니라 하나의 명령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사회의 정의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고 피부색깔과 지위, 남녀성별과 문명의 수준, 이 모든 것과 상관없이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고귀한 인간으로써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모두가 하나로 연합된 존재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람을 사람 그 자체로서 존귀하게 여기고 그를 가치 있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바로 그 문맥 안에서 우리가 왜 선교를 해야 하고 왜 이 모든 세계, 우리의 사회가 정의롭게 되어야 하고 또 빈부와 가난, 전쟁과 다문화, 이런 모든 문제들을 우리가 회피하지 않고 살아야 하는가를 어제 배웠습니다.
비록 우리에게 큰 권력이 있어서 이런 문제를 일시에 다 해결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있는 그 곳에서 이렇게 온 인류가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하나의 성육신적 연합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이웃을 자기의 몸과 같이 사랑하며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갈 때 우리가 존재의 울림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시간으로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골로새서는 사도바울이 로마에 투옥된 62년경에 기록되었고 에베소서, 빌립보서, 빌레몬서와 함께 감옥 속에서 썼다고 해서 옥중서신이라고 불립니다. 골로새서는 아주 우주적이고 신비한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를 담고 있습니다. 아주 웅장하고 어떤 면에서는 철학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아주 깊이가 있는 사상적인 서신서입니다. 사도바울의 사상이 한참 무르익었을 때 이 편지를 썼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를 쓴 목적은 역시 골로새 교회에 침투한 이단들을 반박하고 흔들리는 골로새교회를 굳게 복음진리로 붙들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머리되심을 변증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골로새서 하반부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에 대해서 아주 많은 그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교한 논리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보다는 하나의 그림과 같은 언어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신자의 관계를 설명해 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우리에게 제시되는 신약성경의 다양한 그림들을 어느 하나가 모두라고 생각하지 말고 퍼즐을 맞추듯이 모두를 함께 살펴보면서 큰 그림을 그릴 때 신약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말할 수는 없지만 대충 가장 중요하게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연합을 묘사하고 있는 그림 네 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II.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
우선 첫째는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많은 열매를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래서 포도나무와 가지에 우리를 비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입니다. 가지와 포도나무는 생명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어서 포도나무에서 끊어지는 순간 그 가지는 독자적으로 생명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생명적인 연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당신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고 말씀하셨으니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 무엇을 하는지 생각해보라.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다. 그냥 예수께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에게 접붙여져 있으면 우리는 아무 할 것이 없다.”고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절반은 맞지만 절반은 맞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런 오류는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에 관한 가르침을 어느 하나의 그림만을 보고 거기에 자기가 원하는 모든 내용을 다 쑤셔 넣으려고 할 때, 거기에서 신학적인 오류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 우리 신자들의 연합이 “생명”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비유,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연합의 비유는 각각 그 연합에서 중요한 점을 우리에게 부각시켜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퍼즐처럼 다 맞춰서 연합 안에 그 모든 그림이 함께 들어간다고 생각할 때,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이 무엇인가 하는 그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비유에서 나오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생명적인 연합”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이 무엇입니까? 정말 어렵습니다. “life”, 생명이 무엇입니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설명은 어렵지만 죽은 것을 보면 확실히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죽음과 대조되는 그 무엇입니다. 그 생명은 사람에게 생명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삶이라는 것이 가능합니다. 생명이 없는 사람에게는 삶이라는 것을 말할 수 없습니다. 삶이라고 할 때는 자기가 살아있을 뿐 아니라 살아있어서 생명이 있고 의식하고 외부의 세계에 대해서 반응하면서 지성으로 이해하고 의지로 결단하고 감정으로 사랑을 느끼는 것, 이런 것이 삶입니다. 그래서 그 삶에는 언제나 의미가 따라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올바른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구현해가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자, 그런데 육체적인 생명은 그냥 살아있어서 움직이고 감각하게 하지만 그런 육체의 생명을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게 만드는 생명은 또 다른 생명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영적생명, 혹은 영원한 생명, 혹은 하나님의 생명, 그리스도의 생명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와 그리스도가 연합됨으로써 그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것으로서 우리들이 삶을, 그런 하늘의 생명을 가지고 그렇게 우리들 앞에 직면하는 모든 삶의 현실들에 의미를 찾으며 자기가 원하는 어떤 삶을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주체성을 갖게 만드는 힘이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로마서 11장 17절에 보면 참 감람나무와 접붙임의 비유가 나옵니다. 11장 17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였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으니” 여기서는 참감람나무가 있는데 돌감람나무가 접붙여집니다. 이 감람나무는 이스라엘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접붙여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뿌리입니다. 그 뿌리에서 진액을 올리시는 분입니다. 그 진액을 함께 받아서 누릴 수 있는 그러한 존재들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 “진액”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이것 역시 “생명”입니다. 그 나무가 자랄 수 있는, 그 속에서 뿌리가 양분과 수분을 빨아들여서 그것을 나무인 몸에 맞게 공급합니다. 봄이면 청진기를 나무에 대고 귀를 기울여보면 물이 올라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것을 채취하는 것이 고로쇠 물입니다. 그런 것을 빼내면 그 나무는 죽거나 매울 해로운 것입니다. 나무에게 몹쓸 일을 하는 것입니다. 봄에 한참 올라와서 나무가 살아야 하는데 진액을 다 빨아먹는 것입니다. 이 돌감람나무와 그 뿌리의 진액의 비유 역시 생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마태복음25장에는 신랑과 신부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때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에베소 교회에서도 “그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라” 하고 “이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의 비밀이라”하고 말씀합니다. 여기서는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여기서는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연합에서 나오는 가장 중요한 주제가 두 개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생명”, 또 하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신자가 연합하면 그리스도는 그렇게 당신에게 연합된 신자들을 특별히 사랑하시고 그렇게 연합된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그 그림을 인간이 가장 이해하기 쉽게 인종과 모든 문화를 초월해서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선택한 비유과 “신랑과 신부의 비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의 몸에서 뼈를 취하여 하와를 만드시고 그 두 사람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한 것처럼, 또한 그리스도는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당신과 인성 안에서 연합을 이룬 인류 중 일부가 떼어져 나와, 어떻게 보면 그 일부에게 하나님의 직접적인 생명을 부여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갖게 하심으로 그 신자들이 실제적인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누리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야기하는 신자가 거듭나고 회심할 때, 의롭다 칭함을 받으면 그리스도 예수께 연합되는 “신비적 연합”입니다. 이것을 “신비적 연합”이라고 부릅니다.
마지막 네 번째 비유가 에베소서 1장에 나오는데 22절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의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이번에는 아주 훌륭한 비유 하나가 나오는데 몸이 있고 머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몸은 그리스도의 교회라, 그리고 우리는 그 교회에 붙어 있는 몸의 일부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완성을 보여줍니다. 아까 포도나무의 비유와 감람나무의 비유에서는 무엇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무엇을 보여주었다고 했습니까? “생명”, “생명”을 보여주었다고 했습니다. 좀 생기발랄하게 해 보십시오. 왜 노년 수련회에 온 것처럼 그렇게 합니까? 무슨 경로수련회에 온 것 같습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두 비유, 포도나무의 비유와 감람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본질 중 어떤 것을 보여준다고 했습니까? “생명” 따라해 보십시오. “생명” 생명을 보여주고 있다면 신랑과 신부의 비유를 통해서, 아내와 남편의 비유를 통해서는 무엇을 보여준다고 했습니까? “사랑”. 그런데 머리와 몸의 비유를 통해서는 무엇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까? 사랑도 아니고 생명도 아닙니다. 무엇이겠습니까? 머리가 이 온 몸을 통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질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머리가 어떤 판단을 하고 그 머리가 원하는 삶을 온 지체로 구현해 가는 것입니다. “질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관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 사랑, 질서, 이것입니다. 생명과 사랑, 질서입니다.
내가 시간이 나면 생명에 대해서 별도로 시간을 내서 한 시간을 강의를 하겠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면 오늘 밤 새워야 합니다. 나는 어제 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두 시간을 설교를 하는 바람에 고생을 했을 것입니다. 오늘은 좀 일찍 끝내려고 합니다. 그 생명을 설명하고 싶은데 다음에 해 드리겠습니다. 생명, 사랑, 그리고 질서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머리와 몸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불가분리입니다. 머리가 없는 사람은 사람일 수가 없고 몸이 없는 머리,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파격적인 비유입니다. 우리 인간 없이는 그리스도를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이 말이 됩니까? 그리스도 없이 우리 인간을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말이 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없는 예수를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이것이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의미에서 운명적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런 것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래서 어제 어느 신학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육신의 연합을 듣고 어제 깜짝 놀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나?’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이 보편적으로 다 받아들이던 교리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한계를 이야기할 시간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모든 인류가 연합되는 것이 그 동네로, 그 집으로 전기가 지나가는 것이라면, 신비적인 연합은 그 선을 끌어다가 자기 집에 연결을 시켜서 불을 켜고 에어컨을 돌리고 히터를 켜고 인덕션 렌지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렇게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모든 인류가 연합을 이루었다는 것이 정말 우리에게는 감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우리를 멸시하고 욕해도 우리는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가는 이교도들과 불신자들, 심지어는 아주 사악한 사형수들까지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인간이라는 엄숙한 사실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인류 전체의 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나라의 국민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이 땅에 남기고 싶어했던 참 인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관점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누가 깃발을 하나 들고 막 휘두른다고 해서 부르르 끓어서, 마치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응원하는 것 같이 그런 피 끓는 국수주의자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제 인남식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서 새로운 사실을 받았습니다. 어제 들으셨겠지만 부시가 일으킨 전쟁을 나는 최악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곤돌리자 라이스가 책을 썼는데 그 책을 보면서 그리스도인인 것에 대해서 미묘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그때에 그 백악관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나라를 위해서 염려하면서 전략을 짰는데 그 분위기가 마치 수련회하는 분위기였다는 것입니다. 찬송하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마지막에 결정을 내린 것은 전쟁이라고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그 교수님에 의하면 심지어 아버지 부시도 반대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국제 정세에 잔뼈가 굵은 사람을 보내어 그렇게 하지 말라고 아들 부시에게 전했더니 아들 부시가 하는 말이 “하나님이 이 전쟁에 서명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올바른 신학적 관점,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그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 꿈꾸는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에 대한 진정한 성찰이 없을 때, 그때에, 그런 판단력이 없는 신앙은 확 휘둘려서 국수주의 쪽으로 가서 극우로 치우치거나 반대로 극좌로 치우치거나 하면서 오히려 사회를 병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오래전에 이 교리를 알고 있었고 그러면서 언제가 한 번 이것을 설교할 기회를 계속 찾았습니다. 그러면서 오래된 일이지만 그런 것을 이해하면서 들었던 생각은 하나입니다. ‘정말 우리 그리스도인이 별 생각 없이 인생을 살아가고 있구나!’였습니다. 국부적으로 착하게 살고 정직하게 살고, 솔직히 얘기해서 정직하지도 않습니다. 주차할 때 남의 차를 쿵 받아놓고 쳐다보다가 도망가는 그리스도인들도 있고, 적당히, 적당히 하려고 합니다. 그런 것은 그래도 작은 윤리적인 문제인데, 똑같이 예수 믿는 사람들도 탈북자들에 대해서 냉혹하고 예수 믿는 사람이 회사를 경영하면서 오히려 사람들을 더 괴롭히고 악랄하게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끔찍한 모든 일들 속에 그리스도인들이 아무 생각 없이 가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잣대를 가지고 판단을 해보면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사는 것은 그를 구원하신 계획뿐만 아니라 창조하신 목적과도 정면으로 위배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회와 정치와 경제와 모든 문제들을 그렇게 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있다고 해서 이 세상이 나아지지 않는 것이 뭐가 이상한 일이겠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너희는 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독특한 정체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도, 혹은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쳐도 그것 때문에 그 일을, 그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삶이 무엇이지 판단하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III.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
A. 중생과 칭의의 연합
그래서 성육신적인 연합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모든 인류의 인성의 연합이라면, 그리고 그렇게 연합이 되었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서로 유통하지는 못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유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신비적인 연합입니다. 이것은 중생과 회심, 칭의, 양자됨, 이것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연합입니다.
자, 그런데 이런 연합을 유효하게 만드시는 분이 누구인가 하면 성령님입니다. 그래서 창조될 때에 이 모든 세계가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지만 성부하나님에 의해, 세 개의 전치사가 들어가는데 by, through, in, 성부 하나님에 의해, 성자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성령 안에서 이 세계가 창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아들이시고, 말씀으로 세계를 창조하셨을 때 그 모든 세계가 창조되면서 질료가 창조되는데 하나님의 신이 그 위를 운행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사역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삼위일체의 사역입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항상 함께 계십니다. 누구도 배제하고 이 사역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동일하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실 때에도 아버지에 의해 보냄을 받고, 그 말씀이신 성자가 성령 안에서 잉태되어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시며 인성을 소유하게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인성은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입니다. 그 인성 안에서 온 인류가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온 인류 중 어떤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듣고 진정으로 구원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이 실제적으로 그들의 영혼 속에서 역사하여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던 그 삶을 다시 재현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비적 연합”입니다. 중생과 회심을 통한 칭의의 연합입니다. 그 연합을 통해서 이제 신자는 예전에는 자신에게 없었던 특별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생명과 사랑을 자원으로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데 이것을 바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이 당신이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충만한 생명과 사랑, 이것은 우리에게는 원래 없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감으로 인간이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행위나 공로에 의존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당신과 그리스도를 연합시키심으로 우리에게 이 생명과 사랑을 실제로 누리면서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본질이 “성령”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본질적으로 성령의 교통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받아들이는 수단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었어도 우리가 그것을 공로로 내세울 수 없는 이유가, 믿음자체가 이것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그 생명과 사랑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믿었을 때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시고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B.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
그러면 이제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림을 이렇게 그려보면 됩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인성과 모든 인류가 인성적인 연합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충만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인성으로 연합을 이루고 있지만 이것이 이 생명과 사랑이 사람들 속에 파고 들어가서 그들로 하여금 그 자원을 누리며 살게 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집을 뚫고 동네의 전선이 지나왔습니다. 지나갔을 뿐입니다. 저쪽 집에는 전기불을 켜는데 우리는 촛불을 켭니다. 저 집은 인덕션 렌지를 켜서 밥을 하는데 우리는 장작을 가져다가 불을 피워서 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전기를 끌어와서 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예수의 생명”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그 다음에 “생명과 성령의 법”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 자신 안에 성령이 충만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과 생명이 충만하신 분인데 믿음으로써 성령 안에서 우리가 그분과 연합됨으로써 이제는 성육신적 연합 안에서는 도저히 누릴 수 없었던 그런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회심하고 의롭다 칭함을 받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 성경이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묘사할 때,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머리와 몸이 공유하고 있는 하나의 생명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사랑입니다.
우리 몸이 질서로만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컴퓨터처럼 장착하게 되어서 우리 몸이 기계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너무 기뻐서 가슴이 뜁니다. 이것은 머리가 아닙니다. 생각하면 기뻐서 가슴이 뛰는 것입니다. 그리고 땀이 납니다. 그러면 말을 막 더듬고 헛 나오고, 헤어졌는데도 밤에 잠을 못 이룹니다. 사랑입니다. 너무 사랑하니까 만지고 싶고 머리로 그 사람을 기억하고 사랑하고 이미 죽었는데도 사랑하고 만지고 싶고 목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제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아시겠습니까? 이 머리와 몸의 비유는 우리에게 질서를 보여주지만 그 질서는 기계적인 질서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을 공유하며 하나의 사랑으로 교통하는 질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성육신적 연합을 이루고 있는 모든 사람이 이 신비적 연합 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금도 많은 불신자들이 존재하고 심지어는 교회에 나오면서도 아직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그리스도인 비슷한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과 사랑의 경계는 분명합니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가진 사람은 가졌고 안 가진 사람은 안 가진 것입니다. 반쯤의 생명, 반쯤의 중생, 이런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진짜로 중생하고 회심한 사람, 그래서 의롭다 칭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이 생명이 있습니다. 이 생명과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을 통치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예수께 순종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이외에는 마음에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온전히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삶을 살 때, 그때 이 생명과 사랑은 그 사람 안에서 아주 충만하게 되어서 이런 사랑과 생명이 있었을 때의 삶과 없었을 때의 삶이 얼마나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지 그 사람을 보면서 이렇게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성경에서 “보라” 라는 이 단어는 뭔가 비범한 것이 도입될 때 쓰이는 말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 “새것”이라는 말은 흔히 있을 수 있는 개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궤짝에 짓눌려서 파리가 꼬이고 눈이 다 터져버린 썩은 냄새가 나는 생선이, 살아나서 물속을 헤엄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정도의 놀라운 변화입니다.
자, 그런데 이제 이러한 신비적인 연합이 결국은 몸을 이루게 되는데 성경은 이 몸을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우리가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여기서 성경이 가르쳐주는 “교회”는 단순히 건물로 된 사람들의 회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중생하고 회심하여 의롭다 칭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그분께 접붙여져서 그분의 생명과 사랑이 흘러들어가고 있는 그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사람에게는 이 생명을, 저 사람에게는 또 다른 생명을, 이 사람에게는 이 사랑을, 저 사람에게는 저런 사랑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누구든지 간에 같은 생명과 같은 사랑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분이신, 사람은 각기 달라도, 그 한 분의 생명을 충만히 누리면서 한분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받고 진리의 빛이 충만하면 충만할수록, 사랑의 열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그들은 모두 한 분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입니다. 그것이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그러한 사랑과 생명을 우리들이 누리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바로 그런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누리며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몸을 만드십니다.
자, 그럼 어떤 그림이 나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하나의 커다란 연합, 인류 중 어떤 악인도 제외되지 않는, 성육신 안에서 그리스도의 인성과 연합된 온 인류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 일부는 실제로 그 생명을 누리면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창조하신 이 세계의 계획을 따라서 살아가려고 하는 열망을 가진 공동체가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 그리스도의 인성적인 연합을 커다란 범주라고 본다면 그것은 아직까지 적은 범주입니다. 그것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 선교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같은 사람은 전도를 “사랑의 확장”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얘기는 생명의 확장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 영적인 교회가 이렇게 보이는 처소 안에서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래서 항상 눈에 보이는 이 교회와 보이지 않는 진정한 교회는 대부분이 겹치지만 항상 겹치지 않는 상이한 부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 그 남은 부분만큼은 성육신적 연합 안에는 있지만 신비적 연합 안에는 있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죄를 죽일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참된 생명과 그 가슴 벅찬 사랑을 실제로 모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러한 신비적인 연합을 우리에게 주신 그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일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실제로 누리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확장하심으로써 타락해서 인류가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갈 수 있는 고귀한 가치와 이상을 따라 살 수 있는 실제적인 힘, 곧 생명과 사랑을 온 인류가 누리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사람들이 전도를 하고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나와서 큰 교회가 된다고 하는데, 저는 그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단일한 교회가 크게 되는 것, 그것이 아니라 그가 어디에 속했든지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실제로 접붙여져서 그 생명과 사랑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져서 그의 지체가 된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생명, 똑같은 사랑을 누리면서 살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부인해도 부인할 수 없이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현저히 그 생명이 부족한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서 살아도 가족들과도 수시로 부딪힙니다. 그러니 악만 남습니다. 은혜를 가끔 받기는 하는데 가족들의 모든 어려운 것들을 끌어안고 그것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그 무엇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안에서 악이 받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에 와서 은혜를 받고 조금이라도 양심의 깨우침을 받고 나면 눈물이 납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면 또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데 실제 삶에 있어서 생명과 사랑이 현저히 모자라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이것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지 않았더라면, 아니 은혜가 없었더라면 도저히 참고 넘어갈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을 참으면서 기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도들이 성령강림 후에 복음을 전하는데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령이 임하시기 전까지는 무서워서 숨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시고 나니까 떳떳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아서 고난을 겪으면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이 옳겠느냐,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옳겠느냐? 생각해봐라!” 그리고 더 매를 맞습니다. 그러다가 풀려나면서 예수를 위해서 고난을 받을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그 사람들 안에 있는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혀온 그 여자를 나무라지 않고 용서하시면서 보내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그런 충만한 사랑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구속하셔서 다시 누리게 하고 싶으셨던 생명과 사랑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의 인생의 모든 문제는 모두 하나님께로 귀결이 됩니다. 오스 기니스 라는 사람이 자기의 책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이외에 잃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 그리고 하나님 이외에는 우리가 변명할 것도 없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랑과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며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나쁜 일이라는 것이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쁜 일이 일어나도 신앙으로 그 나쁜 것들이 결국은 자신에게 선을 가져오게 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또 그것을 그렇게 만듭니다. 예수 믿고 주님의 은혜로 충만하게 사는 사람에게도 어려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렵습니다. 그 사람은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고통을 신앙으로 해석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더 충만히 누리는 기회로 삼기 때문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몸에 어떤 상처가 생기면 살이 찢어지면서 순식간에 피가 쏟아집니다. 그러면 몸 전체에 전투령이 내립니다. “팔뚝에 심각한 상처가 났다. 이제 균들이 쳐들어 올 테니 모두 모여라!” 그리고 그 상처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균에 저항하는 것들이 상처로 모입니다. 그래서 막 쑤십니다. 침투하는 균들과 그것을 막는 우리의 피의 성분들이 치열하게 싸우는 것입니다. 그 다음날 보면 허옇게 곪아 있습니다. 그것은 전사한 시체들입니다. 그리고 몸이 건강하면 그것을 이겨냅니다.
실제로 나오는 의사의 이야기인데, 어떤 사람이 심심해서 코털 세 개를 탁 뽑았답니다. 그런데 48시간 후에 죽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패혈증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이들과 함께 여름휴가로 바닷가에 놀러가서 맨발로 걸어 다니며 조개를 주웠습니다. 하루 종일 재미있게 놀다가 집에 들어왔는데 여관에서 자는데 “여보, 나 이상하게 몸이 막 쑤셔.” 그래서 감기약을 사다 줘서 먹었는데 정확히 48시간 만에 죽었습니다. 패혈증입니다. 작은 상처를 통해서, 코털 세 개를 통해서, 발바닥에 난 상처를 통해서 균이 침투해 들어왔는데 그 균이 피 자체를 썩게 한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몸의 저항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정도가 침투해 와도 이깁니다. 우리 몸에 암세포가 10만개쯤 있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달고 그냥 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항력이 약해지고, 그런 면역력이 거의 바닥을 쳤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대상포진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무서운 병입니다. 병이 무섭다는 것이 아니라 나라로 말하자면 군대가 모두 휴가가고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적군이 쳐들어오면 파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패혈증입니다. 패혈증일 때 균이 들어오게 되면 균이 몸 안에서 돌아다니면서 맛있는 부분을 먼저 찾습니다. 그곳이 관절, 눈 껍질, 눈동자 같은 곳입니다. 그리고 막 파먹습니다. 한 번 먹고 나면 복원이 되지를 않습니다. 고쳐도 복원이 되지를 않습니다.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그러면 똑같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런 성육신적 연합을 누리는 것이 인간을 존귀하게 여겨야 할 근거라고 본다면, 그 신비적인 연합을 누리는 것은 존귀함을 받는 근거를 넘어서서 참 인간답게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종교와 함께 윤리적인 문제가 결부되면서 우리 인간으로서 참된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인 그 무엇이 신비적인 연합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 안에서 거듭나고 회심하고 칭의 되고 주님의 자녀가 되어서 예수께 접붙여지는 이 자체가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삶이, 좁은 의미에서 참 인간의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이런 의문이 들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런 신비적인 연합을 나는 분명히 누리고 있는데 왜 그런 생명과 사랑이 나에게는 이렇게 부족합니까?” 그래서 내일 “영적 연합”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일이 대미를 장식하는 날이니까 내일 빠지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어제만 참석한 사람은 거의 건진 것이 없습니다. 오늘 참석한 사람은 반쯤 건진 것입니다. 그 연관 관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다시 주제로 돌아갑니다. 그러면 그 신비적인 연합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누리면서 삽니다. 내가 늘 설교 때마다 강조하지만 어차피 우리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그림대로 우리의 인생이 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지 않는 상황을 만나게 되고 내가 싫어하는 상황을 직면하게 됩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과만 살과 사귀고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살아가게 됩니다. 수많은 난관과 역경을 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여러분은 청년이니까 여러분보다 어린 형제, 자매들이 부럽지 않을 때, 비로소 사람이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든 형들이나 언니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언니, 열여덟 살로 돌려보내주면 가겠어?” 할 때,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아직까지 인간이 되는 것이 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철이 안 든 것입니다. 미쳤다고 그리로 돌아갑니까?
영국에 갔는데 후배 목회자가 자기네 교회에 목회를 다 하고 70이 넘은 목사님들이 서너 분 출석한답니다. 이 분은 55세쯤 되어 보이는데, 그 분들은 모든 것을 완주하고 은퇴했다는 자체가 그렇게 위대해 보일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말했습니다. “목사님이 비로소 철이 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누가 나에게 20대의 쌩쌩한 나이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나는 사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러실 리도 없지만, “너는 정말 훌륭하다. 내가 다시 한 번 태어나게 해주마.” 하시면, “주여, 거두어주시옵소서. 한 번으로 충분합니다.” 왜 두 번을 살겠습니까? 어떻게 눈물 나게 헤치면서 여기까지 살아와서 여기에 섰는데 그것을 다시 무지와 무력, 무능력으로 다시 돌아가서 단지 젊다는 이유 하나로 돌아가서 살겠습니까? 왜 이렇게 이야기를 길게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어차피 우리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안에서 잘 살고 싶습니다. 지금 “인간과 잘 사는 것”의 속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잘 살고 싶습니다. 잘 산다는 보장만 있으면 왜 18살로 돌아갑니까? 14살로 돌아갈 것입니다. 더 어린 시절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우리는 인생의 모든 문제를 정말 낮은 차원에서 계산하는 것입니다. 왜 내 인생이 힘든가? 취업을 못해서. 취업을 못한 사람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취업하면 행복할 것 같습니까? 맨날 직장 나가는 사람들 중에, 나도 20대 때 사표를 써 놓고 오른쪽 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재미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재밌게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신 빼 놓으면 재미있어 보이는 것입니다. 가끔 회식하고 실업자들 보면서, 괴로워하고 술이나 먹고 처음처럼, 이슬같이, 그런 것을 먹고 골방에서 사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는 좀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혼자 돌아앉아서 가만히 생각하면 뭐 나아진 것도 없습니다. 실업자 시절에도 돈이 없었는데 직장 다녀도 돈이 없습니다. 돈을 써야하니까 말입니다. 골방에 있을 때는 이슬만 먹고 살면 되는데 이제는 이슬만 먹고 살지 못합니다. 돼지고기도 먹어야 합니다. 오늘 저녁에 장로님 두 분이 쏘셔서 통닭을 주신답니다. 왜 이 밤에 통닭을 먹이는지 나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쨌든지 그런 것도 먹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돈이 없는 것입니다. 가만히 깊이 있게 생각해보면 사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이런 것 때문에 내 인생이 힘들다고 하는 것은, 사실 그게 굉장히 비겁한 답변이지, 그게 해결된다고 해서 인간이 행복해지고 더욱이 잘 살게 되는 것이냐고 한다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곤고하고 어려운 것은 시집을 못가서 그런 것이다. 아무개 자매는 형제들이 일곱 명, 여덟 명이 대시를 해서 죽느니 사느니 하는데 왜 나는 일곱 명, 여덟 명에게 대시를 해도 한 명도 반응이 없나? 나이는 점점 들고, 이래서 내가 곤고한 것이다.’ 시집간 사람들도 곤고한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시집간 사람에게 한 번 물어보십시오. 이렇게 얘기하면 끝이 없습니다. 돈이 없어서 불행하다고 하는데 돈이 있는 사람들 중에도 불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모든 것들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있어서 우리의 어떤 일정한 행복과 안정된 삶에 영향을 주는 요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을 잘 살게 하고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결정적인 것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만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예수를 믿고 스물한 살에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읽던 철학책, 문학책을 집어던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때 내가 열린교회 같은 교회를 다녔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구역장을 통해서라도 아마 내가 갈 길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바보였습니다. 이런 모든 지성의 스위치를 다 꺼야만 예수를 잘 믿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온 것입니다. 처음에는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그게 얼마나 갔겠습니까? 한 9개월 정도, 너무 행복하고 날아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것도 필요 없고 주님만 바라보면서 일생을 독신으로 살아도 상관없을 것 같았습니다. 목회자가 되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너무너무 기쁘고 행복한 것입니다. 예전의 내 인생을 그렇게 괴롭히던 문제들, 가난, 배움의 기회, 나를 사랑하는 사람, 가족 등등,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데 그게 내가 예수님을 만나고 그런 연합 속으로 들어가게 되니까 나를 조금도 불행하게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져서 영적인 침체에 빠지고 나니까 다 죽었던 것들이 일시에 다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똑같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런 요인들 때문에 내가 회심하기 전에 힘들어했던 것들이 다시 또 시작되는 것입니다.
말하고 싶은 요지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이 힘들다고 생각하는 리스트를 적어보십시오. 그런데 그게 진짜로 여러분의 인생을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수없는 균과 접촉하면서 삽니다. 균 속에서 생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저항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불완전한 세상에서 불완전한 인간이 살아가는데 왜 문제가 없겠습니까? 모든 문제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문제가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고 또 아무리 고민해도 그 문제가 해소가 되지 않습니다. 돈이 없어서 미친 듯이 돈을 모았다고 합시다. 박진영이 한 이야기입니다. 20억을 벌면 행복할 것 같았답니다. 벌고 나니까 허무하더랍니다. 그 문제를 해결했다. 물질의 문제 때문에 괴롭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그 돈을 쓰면 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끝이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말입니다. 인생은 결국 수고와 슬픔이 계속 인간을 따라 다닙니다. 그것은 본질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 본질입니까? 진짜 본질적으로 인생을 힘들게 만드는 것은 그 생명, 그것을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는 생명과 사랑의 부족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에 창조될 때부터 육체는 이 땅으로 자원으로, 그리고 영혼은 하늘의 자원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자원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인데 그 하늘의 자원을 상실한 것입니다. 생명과 사랑에서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인생이 곤고하고 힘들다는 것은 압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 자원의 부족 때문이라는 것은 모릅니다. 어떤 의미에서 아직도 미성숙해서 자기의 인생의 불행의 원인이 돈이 없고, 지위가 낮고, 얼굴이 못생기고, 가문이 후져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희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살은 하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그것을 개선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에 부족함이 없는데도 살 수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뭐가 부족한지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이런 생명과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여 우리를 신비적인 연합 속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이 사실은, 더구나 그것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려서부터 박수치면서 불렀던 찬송중의 하나가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다함 얻음은 확실히 믿기는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받았네” 그래서 속죄를 그렇게 많이 찬송한 것입니다. 요즘은 속죄의 찬송을 잘 부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오늘 이 시간에 인생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해야 합니다. 어차피 인생은 이런저런 것이 모자라게 되어있습니다. 이 세상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육체는 많고 욕망도 팽창합니다. 그래서 그 한정된 자원으로 모든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 자원의 결핍이 문제가 아니라 그 결핍을 이기며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의 결핍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신자로서 인생을 잘 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그 생명과 사랑을 “앞으로 주실 것입니다”가 아니라 지금 이미 받았습니다. 주님이 여러분 안에 계셔서 그 충만한 사랑과 생명을 온전히 누리며 살기를 우리 보다 더 많이 말할 수없는 탄식으로 갈망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그런 신비적인 연합을 통해서 그 생명과 사랑을 충만하게 주시면 그 충만한 생명과 사랑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게 만듭니다. 잘 살게 만듭니다. 그런데 잘 산다는 것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의미 있게 살아간다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지 그것 없이 자연인으로서의 삶을 영위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살아가고 극복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 주위에 보면 이런 생명과 사랑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도저히 자신의 인생을 지탱할 수 없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만납니다. 극단적으로는 이 자원이 완전히 고갈되어버렸을 때, 자기 자신을 지탱하는 것이 너무너무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열다섯 살 때 경험한 것이 그것입니다. 제일 힘든 것이, 죽는 것은 하나도 겁이 나지 않는데 사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으로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이 현실을 해석하면서 그것을 개척하면서 어려움이 오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 의미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고 이루었을 때는 보람을 느끼고, 자신을 대견해하고, 누군가에게는 감사하며 살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과 생명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과 생명이 필요한 것입니다.
참다운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생명인데 생명 비슷한 것을 갖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라를 너무 사랑해서 무슨 일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엄청난 삶의 추진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게 참다운 삶으로 우리를 데려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단의 열심, 그들에게 있는 생명 비슷한 것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무시무시합니다. 선교지에서 진짜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이단의 교주를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차피 우리는 인생에서 난관에 부딪힙니다. 문제는 문제가 아니라 생명과 사랑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수없이 만납니다. 그런 사람들을 내가 그 생명과 사랑이 넘치면서 살 때 그 사람들에게 그 생명과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는 도구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그들을 예수 믿게 만들어서 그들로 접붙여져서 그 생명을 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 살 힘을 모두 잃어버려 죽고 싶어서 인터넷을 찾아봅니다. “자살하는 방법” 그러다가 ‘순장이라도 한 번 만나봐야지.’ 하고 만나서 같이 밥을 먹고 이야기를 하고 하룻저녁 같이 자고, 그래봐야 그 사람도 무슨 뾰족한 수가 없는데 어쨌든 함께 기도하고 눈물 흘리고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라고 생각을 하니까 다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힘이 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생명과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위로를 통해서, 돌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런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다시 흘러들어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지막에 이런 그림이 나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이 성육신적인 연합을 가지고 있는 모든 인류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된 뜻입니다. 결국은 다 구원받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든 최종적인 심판을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자신들도 다 이루지 못한 그런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단번에 누리게 만들어서 세계를 완성하시고 교회가 인류와 하나가 되도록, 그래서 교회와 세상의 구별이 사라진 세상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연합의 궁극적인 목적은 통치입니다. 창세기 1장에 이렇게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들어 그들로 다스리게 하자” 마지막에 하나님이 그런 형상을 주신 이유, 바로 그런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주시는 이유는 “통치”입니다. 무슨 통치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할 때 세우셨던 그 계획을 따라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세계를 다스리게 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이 땅을 바라보실 때, 정말 아름다운 세상이 되게 하는 것, 그 안에서 온 인류가 행복을 누리면서 끝없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향유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고 구속하신 목적입니다. 그래서 구속의 목적과 창조의 목적은 완전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 창조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자, 그러면 말씀을 맺어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본 것은 그저 전체의 전부는 아니지만 대강 살펴본 것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입니다. 이 연합은 우리들이 중생과 회심, 칭의와 양자됨을 통해서 하나님과 맺어진 연합이고 이 연합을 통해서 그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 그것을 가지고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와 그 하나의 생명과 하나의 사랑을 교통하며 그분의 계획을 따라서 한 몸 된 삶을 살아가는 것, 그 중의 한 지체로 부름을 받은 것이 나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에 오늘 마지막으로 도전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이 그런 생명과 사랑이라는 그 위대한 자원, 그것 없이는 참으로 인간의 삶을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런 생명과 사랑을 하나님이 우리의 공로와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전으로 우리의 몸으로 삼으시고 그래서 그 주님이 당신의 몸인 교회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 그 영을 우리가 함께 누리며 살아가는 그 몸의 일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연합시키실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아주 중요한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한한 생명과 사랑의 공급입니다. 끝이 없는, 분량의 한도가 없이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새 생명의 원리를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충만한 생명의 원리를 부어주셔서, 그 생명과 사랑을 부어주셔서 현실을 극복하며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핍박받고 순교 받는 사람들이 기쁨 속에서 그 모든 일들을 감당하는 것도 그 사람들의 위대함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의 충만한 공급 때문에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삶들을 극복하면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과 생명을 누려, 그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그 분이 우리 안에 함께 계시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지금도 죄를 회개하고 게으른 생활을 회개하고 다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면 다시 하나님께서 그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죄를 용서받게 해 주시고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하게 하시고 용서할 수없는 사람을 용서하게 해 주시고 감당할 수 없는 시련들을 기쁨으로 감당하며 의미를 부여하며 자신을 불사르며 살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오라, 운명이여! 오라, 이 세상이여! 오라, 이 인생의 운명이여! 나는 두렵지 않다! 예수 안에서 무한한 생명의 자원을 가지고 있다. 내 것은 없다! 그러나 내게는 없는 것도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 접붙여져 그분의 모든 것을 나로 하여금 누리게 하신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택하신 백성, 그분의 몸의 일부이다. 내가 망할 수 없는 것은 예수가 망할 수 없는 이유와 동일하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여러분 앞에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부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다!” 내가 지금 힘겹고 어려운 인생을 사는 이유는 이런 것, 이런 것, 저런 문제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늘 있는 것이고, 예전에도 나에게 있었고 지금도 모든 지체들에게 있는 문제이고 이런 것들을 직면하고 있는 많은 지체들이 지금도 오히려 그것 때문에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고 우리 자신을 설득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어느 때쯤 되면 그런 모든 형편이 나아지겠습니까? 나아져서 모든 것이 내 맘대로 될 수 있다면 여러분 안에 있는 부패성이 여러분을 내버려두겠습니까? 그게 바로 종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고 앞으로도 올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내 인생에 영향을 끼칠 수가 없다. 아멘!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생명과 사랑을 충분히 공급받도록 예수께 나를 접붙여 주신 사람이다.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이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신비적인 연합”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을 한 번 돌려보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무한한 자원을 생각하면서, 이런 인생을 살아내는 것쯤은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하도록 하나님이 예수 믿는 순간 나를 이 모든 벼랑과 같고 절벽과 같은 많은 문제들, 산 오르기 전에 밑에서 보면 너무 대단해 보입니다. 그런데 맨 꼭대기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면 다 발아래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생명을 충만하게, 그 사랑을, 이미 주신 사랑, 이미 주신 생명을 100% 나의 것으로 활용하면서 오히려 이 세상의 난관과 시련을 비웃으면서 우뚝 선 거인과 같이 살아갈 수 있는가, 내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와 영적 연합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 해설
베드로전후서는 핍박받는 성도들을 위하여 쓴 편지입니다. 베드로는 이미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커다란 핍박의 시련 앞에서 신앙이 흔들리며 타협하려는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관심을 가진 것은 우리가 읽은 4절의 뒷부분,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사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라고 번역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감히 참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은,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은혜와 평강을 우리에게 더욱 넘치게 주시는 그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신의 성품, 즉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Ⅱ. 그리스도의 인성과 교회의 연합
자, 그러면 우리는 먼저 지난 두 시간에 걸쳐 배운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인성과 교회의 연합에 대하여 다시 복습해 보겠습니다. 맨 처음 한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됩니다. 죄를 범하기 전 첫 번째 조상들은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과 진리로 옷 입은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아주 탁월하게 하나님을 닮은 영혼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과 세계 만물들을 이해하는 놀라운 지성의 능력과 또한 사람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이 이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만물을 사랑하시는 그 마음을 가지고 세계를 하나님의 의도대로 가꿀 수 있도록 그러한 사랑을 주님이 주셨습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는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죄를 짓는 사람조차도 존귀한 자요, 그는 그의 인간으로서의 인간된 권리를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마땅한 그러한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죄로부터 그냥 한번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를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심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이제 희망이 없었던 이 모든 인류들에게 계시하신 구원의 위대한 계시를 구체적으로 실현해 가십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이 참 하나님으로써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실 때 성령 안에서 인성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인성은 영원한 것입니다. 바로 그 인성 안에서 우리 모든 인류의 인성과 연합을 이룸으로써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아무 희망이 없는 인간들이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창조시에 그가 누렸던 그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다시 자신의 자원으로 삼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연합, 그리스도와 모든 인간의 성육신적 연합이라고 우리는 부릅니다.
그렇게 인성 안에서 모든 인류와 연합을 이루셨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원리적으로 그러한 것이지, 실제로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인성 안에서 연합을 이룬 인류가 실제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누리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또 하나의 연합을 구원서정 속에 준비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신비적 연합’입니다. 이 연합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중생함으로, 회심함으로, 칭의됨으로, 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그리스도와 실제적으로 맺게 되는 연합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한 사람 한 사람 구원은 개인적으로 받는 것이지만, 그 구원은 개인적으로 받는 것이지만, 그 연합은 나 개인과 예수만의 연합이 아니라 이미 있는 교회의 몸에 접붙여져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과 그리고 사랑을 우리가 실제적으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로마서 8장에서는 그렇게 신비적 연합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죄와 사망의 법에 지배를 받던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그리스도를 통해 중생하고 회심하고 칭의 되고 양자되어서 누리게 되는 그 연합을 생명과 성령의 법, 그것이 심겨졌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이 두 가지만을 가지고 본다면 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는 여전히 존귀한 존재이고 그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인간을 존엄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러한 요구, 인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를 존귀하게 생각하고 어떠한 죄인이라도 그를 미워해서도 안 되는 이유가 성육신 사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에 존엄하고 가치 있는 존재였지만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면서 그 인성 안에서 온 인류를 하나로 연합함으로써 그 인간의 고귀한 가치와 그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 놀랍게 드러났고 그것이 바로 새 계명의 요구입니다. 새 계명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바로 새로운 계명입니다. 옛 계명이 만약에 정의를 따르는 계명이었다면 새 계명은 그 정의위에 사랑을 따르는 계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면서부터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구약의 가르침을 예수님이 완전히 새롭게 파괴하고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는 것처럼, 심지어 새 종교를 말씀하시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계명은 새 계명인데” 거기에서 ‘새’라는 의미는 무슨 의미인가 하면 그냥 시간적으로 새로운, 다른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려내고 있던 최종적인 완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것은 질적으로 다른, 연속성이 있지만 질적으로 다른 그러한 계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새 계명’이라 하였습니다. ‘카이네’. 질적으로 새로운 계명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성경의 흐름이 이제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게 구약에서 마르틴 루터가 소리 지르기를 “하나님은 어찌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칼을 두셨습니까?”라고 울부짖던 그런 사람들처럼 그렇게 엄격하게 무서워만 보이던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께 와서 무한한 사랑으로 승화되었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더 말씀 드립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타락하였지만 여전히 넓은 의미에서 그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그 인간은 존엄한 존재인데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의 인성 안에서 모든 인간의 인성과 연합을 이루심으로써 주님은 구약의 계명을 완성하신 그 새 계명,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 안에서 당신의 인류를 향한 계획을 구체화 시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 그것이 지향하는 바가 결국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었을 때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하였던 그러한 인류의 사회로 돌려놓으시려고 하는 위대한 시작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어제 배운 부분입니다. 어제 나온 내용 중 하나가 이것이었습니다. 신비적 연합을 통해서 중생과 회심과 칭의와 양자됨으로써 그리스도와 맺어지는 특별한 관계, 그것을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단순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성령 안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결속시켜 그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주신 그 충만한 사랑과 생명이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전열 기구를 콘센트에 꽂아 컴퓨터도 치고 악기도 연주하고 렌지를 돌려 요리해 먹고 다 하듯이 우리 각자 사람의 달란트와 소명, 개성, 원하는 바, 모든 것이 달라도 거기에 꽂음으로써 거기에서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원래 주셨지만 죄 때문에 잃어버렸던 그 자원이 그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러한 자원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곤고하고 힘겨운 상황이 됩니다. 때로는 시련과 감당할 수 없는 비극적인 일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면 전 존재가 무너지는 것 같고 심지어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생존 자체를 지탱하기 힘든 상태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때, 그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없는 독특한 자원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예수 안에 있는 생명과 사랑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궁금할 것입니다.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지금 목사님은 시련과 역경, 그리고 슬프고 너무 고통스러운 상황을 만날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바로 그리스도께 접붙여졌기 때문에 그 생명과 사랑을 공급받으면서 그것을 해쳐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 희망이 없습니까? 제가 보니까 어떤 사람은 예수 전혀 안 믿는 사람인데 인생의 막다른 지경에 가서 뭔가 죽을 결심까지 하면서 낙심했던 사람이 뭔가 인생에 대한 의미를 예수 없이도 깨닫고 ‘아, 내가 살아야 되겠다.’ 그렇게 결심하고 인생을 해치면서 용기 있는 사람, 심지어는 새로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예를 들자면 아이가 많이 있는데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엄마입니다.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아, 나는 희망이 없구나. 얘들이 어떻게 되든지 나는 몰라.’ 그리고 목숨을 끊는 엄마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수의 엄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이 아이들이 내가 아니면 죽는다. 어떻게 하든지 내가 이 아이들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지난번에 중국에서 일어난 에스컬레이터 사건, 펑하고 푹하면서 에스컬레이터 발판이 빠져들면서 톱니바퀴 속으로 아이와 같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엄마는 하체가 톱니바퀴에 치이면서 아이는 밀어서 바깥으로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힘들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러한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힘이 작용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안에서 파멸로 갑니다. 이러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밤11시까지 설명해도 다 못합니다. 다음에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이런 질문입니다. “두 번째는 비슷한 질문인데요. 예수를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은 신비적 연합 속으로 들어가는데 목사님의 비유에 의하면 콘센트에 꽂은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자원이 없어서 자살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낙심하고 신앙을 잃어버리는 그리스도인들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자살한 사람은 절대로 신자가 아니었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자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자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도 보면 그러나 그것은 매우 커다란 죄입니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범죄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보면 그러면 왜 그런 사람은 신비적 연합 속으로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러한 자원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부여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자원이 없는가, 못 누리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이 대답을 하기 위해서 세 번째 연합에 대하여 우리들이 오늘 생각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입니다. 신비적인 연합은 중생과 칭의를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지는 연합입니다. 이 연합을 신비적 연합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러한 연합, 그 자체가 이성의 이해를 초월하는 사건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이성적인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의 연합이기 때문에 이것을 신비적 연합이라고 부릅니다.
이에 비해서 오늘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은 ‘영적 연합’입니다. 그러면 영적 연합은 신비한 것이 아닌가, 그것이 아니라 신비적인 연합이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예수께 접붙여지는 연합이라면 이 영적인 연합은 신자가 된 이후에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삶으로써 성화를 통해서 그리스도와의 실재적 연합을 증진하고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그를 완전하게 만드시는 영화를 통해서 그 모든 것을 완성하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물론 학자들에 대해서 이것을 다시 나누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인간이 성화의 삶을 살면서 자신의 죄를 죽이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며 자신의 인간의 전 본성이 거룩해져 가는 그 과정은 아직 완전에 도달하지는 못하였지만, 그것이 지향하는 마지막 목표점이 영화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사실은 성화에 있어서 경험하는 그리스도와의 실재적 연합은 그것이 최종적으로 완성된 형태가 영화에서의 연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정도의 문제이지 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로 보는 개혁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영적 연합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겠습니다. “신비적 연합은 영적 연합이 아닙니까?” 신비적 연합도 영적 연합입니다. 또한 그렇게 따지면 성육신적 연합도 영적 연합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의 인성을 만질 수 있습니까? 볼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모든 인류의 인성이 연합을 이룬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의 살과 예수의 살과 섞이거나 우리의 피가 예수의 피가 함께 뒤섞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미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육체의 혈과 육을 가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신비적 연합’과 구별해서 특별히 ‘영적인 연합’이라고 부르는 중요한 이유는 첫째는 이것이 영적 자원의 증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연합을 존 오웬 목사님은 중생과 칭의를 통해 맺어지는 이 신비적 연합을 원리적 연합이라 불렀고, 그리고 성화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써 증진되는 하늘의 자원, 생명과 사랑을 충만하게 공급받는 상태의 연합을 실재적 연합이라고 다른 명칭으로 불렀습니다.
우리는 잠시 전에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읽었습니다. 누구나 외우는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 성경 구절을 읽으면서 우리들이 느끼는 느낌은 뭐냐 하면 이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와 중생과 칭의를 통해 연합된 것뿐만 아니라 실재적으로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온 맘을 다해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온 맘을 다하는 사랑을 받으면서 그리스도와 사실은 혼연일체가 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는 이렇게 한탄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리요.” 어떤 사람은 이러한 사도바울의 탄식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즉, 중생하고 회심하기 전에 사도바울이 했던 율법으로 살아가면서 경험하였던 견딜 수 없는 고통을 회상하는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다수의 유력한 개혁자들은 이 성경구절을 중생한 사람의 고백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위대하게 생각하는 사도바울조차도, 순결을 마다하지 않던 사람도 곤고한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느 정도로? 선을 행하며 살기 원하는 간절한 소원은 내게 있지만, 그러나 내 안에 악이 함께 있는 것을 본다, 우리는 그것을 사도바울이 어마어마한 죄를 지었다는 증거로 채택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내적인 갈등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뭐냐 하면 이러한 갈등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 안에서 살려 하는 몸부림치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러한 단계를 지나고 나면 그렇게 자기가 깨뜨려지고 자기가 버리면서 그것을 이겨내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이겨낸 것은 어느 한순간에 이기면 그것이 영원한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일제시대에 어떤 사람이 순교의 각오를 하고 순교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 사람은 일생 살면서 그렇게 순교하기 위해서 처형대에 오르는 똑같은 심정을 가지고 일평생 살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그 신비적 연합이라는 게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연합은 비유를 하자면 어느 신학자가 비유한 것처럼 집을 뚫고 전선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끌어내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콘센트를 만들고 전열 기구들을 매답니다. 이것이 칭의적 연합입니다. 환하게 불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전기를 실재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 활용하게 되는 것이 이제 하나님이 조건적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조건이 뭐냐 하면 끊임없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에 의해서 그 공급은 풍성해 지기도 하고 아주 말하자면 빈약해지기도 합니다. 그것을 모두 사라지게는 할 수 없습니다. 신자는 어떤 식으로든지 그 생명과 사랑이 흘러들어오고, 그 생명과 사랑이 그의 마음속에 젖어 있습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너무나 커다란 인생의 시련을 만나거나 혹은 엄청난 에너지를 요구하는 인간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 사람 있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저 인간은 싫어. 죽여 버리고 싶어.” 이것 말고, “제발 우리 순이 되지 않길.” 그가 열린교회를 떠나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제발 우리 순에 오지 말기를.” 그렇다고 해서 “아주 못된 순장에게 가기를.” 이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진짜 헌신적이고 사랑으로 이끌어 줄 순장에게 가길 원합니다. 그런데 나는 그를 맡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엄청나게 많은 순장들이 공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해도 순원들은 자기가 거기에 해당되는 것을 모릅니다. 상태가 좋은 지체들은 열 명을 데리고 순을 하는데 힘이 들지 안 들고, 내가 힘이 없다고 주일에 와서 순 공부를 하고 나면 힘이 생기고 너무 감사합니다. 그런데 일곱 명 중의 하나가 무한한 힘을 빼앗아 갑니다. 전화 한번 오면 여섯, 일곱 시간을 통화를 합니다. 애인이 없는 것도 짜증나는데 문자가 새벽부터 밤 두시까지 수없이 날아옵니다. 이것이 정신과 의사도 감당할 수 없는 요구를 합니다. 자기 엄마도 할 수 없는 사랑을 요구합니다. ‘내가 낳았어?’ 여태까지 보낸 시간, 들인 빵과 밥, 그게 얼마인데, 내준 시간.. 무한대로 빨아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 되고 셋이 되고 넷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겠습니까? 결국 자원이 모자라면 상태가 나빠서 자원이 없으면 그런 사람들을 감당을 못하게 됩니다. 극단적인 예를 든 것입니다.
가정을 예로 들어봅시다. 여러분이 아들, 딸인데 엄마, 아빠가 저런 면은 안 된다는 것 있을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엄마, 아빠가 변합니까? 진짜 가랑잎에서 바늘 찾기입니다. 엄마는 평생 살면서도 자기 자신을 변화 못 시켰습니다. 여러분이 한 두 번의 기도로 엄마가 변화된다고 믿습니까? 그 믿음을 책망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대로 안 되어도 같이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한 사람이 아니라 아빠도 똑같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에워싸고 있는 것처럼 만납니다. 자,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의 생명이 있으면, 충만하면 가족들이 너무 불쌍해 보입니다. 그래서 태어난 순서대로 말하면 ‘딸’이고 ‘막내아들’이지만 내가 가장이 되는 것입니다. 아빠도 병든 사람, 엄마도 병든 사람, 동생도, 언니도 다 내버려 두면 다 콩가루 될 사람이니까 내가 희생하고 사랑하면 되는구나, 하면 됩니다. 그런데 내게 그러한 자원이 없습니다. 그러면 함께 콩가루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무슨 생각을 합니까? ‘빨리 시집이나 가서 지긋지긋한 집을 떠나야지.’ 하며 시집을 갑니다. 그런데 시집에 더욱 놀라운 강적들이 관계를 맺기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 지어낸 가공의 이야기가 아니라 매일 매일의 현실입니다.
이번에 검사 한 사람이 자살을 하였습니다. 법조계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해 보니까 이러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상사도 당연히 문제가 있는 사람이지만 아마 그 사람도 심적인 많은 문제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 하나는 뭐냐 하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합니다. “검사. 저런 사람이!” 거기에서 자존감이 구겨지고 자기가 짓밟히는 것 같은 아주 비참함과 모욕을 느낍니다. 왜 그럽니까?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때려치우고 변호사 개업을 하든지 아니면 어차피 그만두면 변호사도 될 수 있는데 한판 붙어 보든지 그래서 너 죽자, 나 죽자 해서 부장이 뭐 그렇게 대단한 거라고 한번 붙어 보든지, 한번 붙어서 부장검사라는 인간이 이렇게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고 인생 한번 끝판에 가보든지, 안 되면 변호사 개업을 하든지, 그렇게 하면 될 것 아니겠습니까? 뭐가 겁나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자신이 감당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저는 묻고 싶습니다. 그 사람만 유별난 상사를 만났을까? 직장 생활을 해 보면 알겠지만 상상도 못하는 인상한 인간들이 많습니다. 어느 인간이 저런 인간을 승진시켜 줬을까? 진짜 얼굴 한번 보고 싶다. 직장 다니면서도 그런 사람 많이 보았습니다. 저런 사람은 국가가 손해라고 생각한 사람, 올라갈수록 나라는 망한다고 생각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꼭 족집게처럼 승진을 합니다. 그렇게 시달리는 사람 많습니다. 한 사람이 전근가면 온 직원이 일어나 만세 삼창을 부릅니다. ‘할렐루야!’ 전근가게 해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런 사람 많습니다. 그런데 견딥니다. 왜입니까? 남이 모르는 힘이 자원이 우리에게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직장 생활 너무 힘들다, 때려 치고 신학교나 가고 싶다, 그런 사람이 신학교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면 그만 두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 보면 항상 ‘진짜 어렵겠지’, 라는 생각과 ‘자원이 없구나. 통장에 잔고가 없구나.’ 원래 세상이 다 그렇습니다. 어디 가면 안 그렇겠습니까? 그러한 것들을 이겨나가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도 그렇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영적 연합에서 조건으로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조건으로 제시하신다고 해서 우리의 공로로 얻어낸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주님이 일체의 순종과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그리고 일체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삶의 모든 방면에서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는 사람에게는 생명과 사랑을 충만하게 주십니다. 그래서 어떨 땐 내가 생각해도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이 너무 대단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나는 이것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을 이렇게 오래 참으면서 견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놀랍게 견디게 해 주십니다. 그러면 즐겁습니까? 아닙니다. 찬송가 가운데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즐겨 고난 길 가도록 나와 동행 하소서.” 거짓말입니다. 남들이 그래 주기를 바랍니다. 즐겨서 가는 고난 길? 그것을 쓴 사람이 가보라고 해 보십시오.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은 항상 고통스럽습니다. 그게 즐겁다고 생각하면 이상한 고행주의입니다. 그러면 즐거운 고행 길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고난이 즐거운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고 자원이 있으면 그 고난의 의미를 해석하면서 그 모든 굽이굽이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을 경험하게 만드니까, 고난이 날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이 계기가 되어서 내가 우리 주님을 찾고 주님께 매달리면서 주님과 경험하는 인격적인 경험이 나에게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즐거운 것입니다.
오래 전에 7-8년 전에 수술을 하였습니다. 편도선 두 개를 떼어 냈습니다. 의사가 자기가 일평생 이비인후과 의사를 했지만 이렇게 큰 편도를 처음 본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고 어떻게 살았냐고 물었습니다. 심할 때는 두 개가 속에서 붙어버렸습니다. 떼어내서 보여줬습니다. 삶아서 썰어놓으면 두 접시나 될 정도로 그렇게 아주 넉넉한 고기 덩어리가 어린 애 주먹만 한 크기 두 개가 있었습니다. 꿰맸습니다. 의사가 신신당부 하였습니다. 설교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도저히 안 되었습니다. 일주일 쉬고 설교를 하였는데 막 힘차게 하였습니다. 툭 터졌습니다. 길거리에서 반 컵 정도의 피가 쏟아졌습니다. 할 수 없이 병원에 갔더니 병원에서 얼마나 야단을 쳤겠습니까? 결국 강원도에 누워있는데, 제가 많은 수술을 받았었지만 진짜 힘든 수술이 편도선 수술이었습니다. 먹을 수도 삼킬 수도 없었습니다. 혼자서 강원도 시골에서 앉아 고통을 참고 생각날 때 가끔 기도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책을 읽을 수도 없었습니다. 문자가 ‘띵, 띵, 띵’ 계속 왔습니다. 직원들과 교역자들이 보내는 문자였습니다. 그 중에서 한 문자가 생각이 납니다. “목사님, 고난을 통해서 달콤한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화가 났습니다. 차라리 인간적으로 얼마나 아프십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얘는 내 신앙을 얼마나 높이 평가 하였으면 고통에 비례하는 달콤함이 계속 밀려올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래서 답장도 안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을 이겨낼 수 있는 그러한 생명과 사랑을 주님이 조건적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생각할 것이 뭐냐 하면 이 교회를 떠나도, 이 교회에 평생 있을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자꾸 어느 교회를 추천해 달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프랜차이즈도 아니고 어디 추천해 달라고 막연하게 이야기 하는데,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구원이후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율법의 행위로 설명하는 교회는 참 복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두 번째, 예수를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저절로 잘 될 것이라고 하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뭐냐 하면 믿을 때나 믿은 후에나 영원히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하는 가르침, 두 번째 구원받은 이후에 순종과 믿음의 삶,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따라 살아가는 순종의 삶을 강조하는 균형을 이루는 교회.
그러면 보십시오. 여러분이 실제로 그러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부족합니다. 불순종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러한 생명과 은혜를 신자들에게 어떻게 주시겠다는 방법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러한 생명과 사랑을 풍성하게 누리도록 만들어 줍니다. 빈약하게, 혹은 풍성하게. 아주 사라지지 않지만 비교적 적게, 풍성하게, 아주 풍성하게. 어떤 때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그것이 자신 전체를 삼켜버릴 것처럼 그렇게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누리게 합니다. 그 생명이 어떠한 생명입니까? 그 생명이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을 따라서 굽히지 않고 계속 살아가게 만드는 힘입니다. 감동했던 적이 하나 있습니다. 설악산을 갔는데 벽이 모두 바위입니다. 거기에 나무가, 꽤 큰 나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사진을 찍어 왔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생명을?”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을 항거하는 성격을 가집니다. 살아내야 되겠다! 살아내야 되겠다! 단순히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창조된 목적,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 그리고 하나님이 내 안에 주신 존귀한 형상을 따라서 인생을 살아가는 의미를 스스로 찾아가면서 그렇게 나의 삶이 객관적으로 어떤 가치를 인정받고 동시에 나 자신이 이런 삶을 살아서 행복한 그런 사람이 되겠다고 하는 힘입니다. 이게 바로 생명입니다.
졸업식 때 꽃다발을 선물 받았습니다. 확 버리다가 아까워서 나뭇가지 몇 개 있기에 땅에 꼽았습니다. 나뭇가지에 본드를 붙여서 스티로폼 가루를 잔뜩 붙였습니다. 예쁘지 않습니까? 꽂아놓고 잊어 버렸습니다. 2월에 꽂아 놓았는데 봄이 되었는데 스티로폼을 찢으면서 싹이 나왔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생명입니다. 생명. 찢어졌습니다. 피가 철철 흐릅니다. 피를 닦아 내고 붕대를 감고 잤습니다. 며칠 지나고 나니까 붙었습니다. 그리고 새 살이 돋아났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생명입니다. 생명. 이게 생명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죽음의 요소를 수없이 만납니다. 아까 예로 들었던 내 순에 온 이상한 사람, 죽음의 기운을 안고 온 것입니다. 굉장히 말하자면 기분 나쁘게만 보지 말고 참 사랑으로서의 생명이 결핍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핍된 것만큼 죽음이 들어온 것입니다. 얼굴 예쁘장합니다. 일정 나이가 되면 아무리 발라도 표가 나지 않습니다. 피부에 죽음의 기운이 들어옵니다. 어린 자매들, 17살 18살 세수만 하고 로션도 안 바르고 뛰어 나오는데 눈에 눈곱이 붙어 있는데도 얼굴이 말끔하고 팽팽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이 충만하니까 복원이 되는 것입니다. 뭘 먹어도 살이 특정한 부위에만 찌지 않고 골고루 붙습니다. 생명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완전성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죽음의 기운이 얼굴에 깃드는데 그것을 가려 보려고 바르는 것이 바로 화장품입니다. 그렇게 해서 해 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의 기운을 안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그런 사람이 그런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면 죽음이 증폭됩니다. 그래서 서로 불행해 집니다. 놀라운 생명의 사람을 만납니다. 보면서 자신이 생명이 모자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일학교를 해 보면 아이들이 누구를 좋아하는가 하면 얼굴 예쁘고 공부 잘 가르쳐 주는 선생님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력이 충만한 선생님을 좋아합니다. 아이들이 막 달라붙습니다. 제가 주일학교를 할 때 열 명의 선생님이 항상 따라다녔습니다. 이쪽에 다섯 명 손가락 하나씩 붙들고 다니고, 자기는 꼭 붙들어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고서 골목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충만한 생명이 있는 선생님들을 좋아합니다. 그러한 사람을 만나서 그러한 생명을 베풀어주는 그 목적을 구현해 나가는 그러한 사람이 오는 게 죽음이 기운이 몰려오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해치고 그러한 것에 굴하지 않고 내 생명을 계속 살아냅니다. 내 삶의 의미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축해 나가는 것입니다. 짓밟고 누른 잡초가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계속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힘입니다. 그런데 생명이 힘이 없습니다. 한 사람만 만나면 함께 끌어안고 물속에 들어가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 됩니다. 그러면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랑은 관계를 맺도록 도와주는 힘입니다.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생명과 사랑의 힘이 결핍되면 조금만 잘못하면 안 보고 살고 싶습니다. 안 봐도 겁 하나도 나지 않습니다. 그게 부모라도 안 보고 살았으면 좋겠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랑이 없는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기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자기를 보면서 저 인간 안 보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자기만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책을 쓰면서 그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내가 살아있음으로 이 세상에서 너무 행복해 하는 세 사람의 이름을 써 보자.” 세 사람이 될까? 너무나 많은 사람이 아무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그러한 힘입니다. 사실은 생명과 사랑만 있으면 인생은 살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돈이 좀 없다고 칩시다. 그러면 토큰 들고 버스타고 회수권 타고 전철 타고 다니든지 그것도 없으면 걸어다니든지 하겠지, 돈이 있으면 BMW나 에쿠스를 타고 다닐 것입니다. 그러면 또 공부를 많이 했으면 비슷한 수준의 신랑이나 신부를 만났을 것이고, 못 하였으면 비슷한 수준의 사람을 만나 살 것입니다. 그래도 어떻습니까? 그러한 물질의 풍부와 부족함이 인간의 어떠한 삶의 질들을 어느 정도 좌우하기는 하지만 참 인간으로서 사는 것을 저절로 가능하게 해 주거나 불가능하게 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것을 살아낼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생명과 사랑, 이것을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 말씀에 대한 이해,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들이 실제적으로 이 삶을 누리게 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성령충만한 삶을 강조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 성령 충만한 삶이 바로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한 보람이 저로 하여금 이제껏 이 길을 걸어오게 했는지 모릅니다. 나는 많은 사람을 위해서 그러한 생명과 사랑이 넘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게 바로 생존하는 법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생명이 무엇인지 맛본 사람들은 그러한 생명과 사랑을 잃어버리고 살아갈 때 하나님의 일을 못해서 어떻게 하나, 그것이 걱정이 아니라 내 삶 자체가 행복하지 않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인생 살아가기가 쉽습니까? 모든 추억들이 다 있는데 우리같이 성인이 된 상태에서 한 번에 시력을 잃어버린 사람이 힘들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보지 못한 사람은 어차피 보는게 무엇인지 모릅니다. 내 눈에 보이던 아름다운 세상을 잊을 수가 없는데 지금 볼 수가 없습니다. 그 때 보았던 그 기억의 추억과 볼 수 없는 현실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가져 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생명과 사랑으로 충만해 질 때 자기는 인생을 살았을 뿐인데 지나가면서 나와 접촉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내가 살린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예수의 생명과 사랑이 그냥 그 사람을 살립니다. 그냥 살아갔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이 사람들을 살립니다.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삶이 이런 게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특별히 여기에 순장들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순원들이 잘못 적용하면 안 되겠지만, 순장들이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뭐냐 하면 순원들을 섬기는 게 어렵다? 원래 그렇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순원들을 섬기는 것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가족들 섬기는 것도 힘듭니다.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 다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이 이겨 나가도록 그 생명과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그게 충만하게 부어주는 것입니다.
Ⅲ. 신의 성품에 참여함
그런데 그것을 오늘 뭐라고 이야기 하는가 하면 ‘신의 성품에 참여함’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신의 성품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예수의 전 생애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생애였습니다. 그가 불쌍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슬퍼하실 때,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불의한 자들을 향해 진노하실 때 하나님의 의로움을, 정의를, 그리고 못된 사람을 오래 참을 때 하나님의 인내를, 그러한 다양한 것들을 보여 줍니다. 그러한 눈부신 무지개 빛과 같은 다양한 성품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비유로 이야기 하자면, 제가 즐기는 비유입니다. 햇빛은 보이지 않지만 프리즘을 통과함으로 일곱 개의 색 빛깔로 분광이 됩니다. 스펙트럼으로 말입니다. 똑같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성육신하신 예수를 통해서 당신의 찬란한 성품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A. “참여함”
참여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분의 성품을 닮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분의 완전하신 성품에 우리가 혼합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이고, 우리는 인간일 뿐이지만 놀랍게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긍휼을, 하나님의 인내를, 하나님의 자비를 닮아갑니다. 그래서 어떤 결과를 가져 옵니까?
(찬양)
너를 보는 이마다 주 생각하리
그렇게 우리가 주님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그 주님의 성품을 닮아서 사랑 없는 우리가 사랑 있는 사람으로, 의롭지 않은 우리가 의로운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긍휼을 여기지 않는 무자비한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성품으로 참지 못하는 우리가 인내하는 성품으로 변화됩니다. 이게 바로 행동의 변화가 아니라 성품 그 자체가 변화되면서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제2의 본성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그러한 것이 이루어지는 것만큼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은 우리에게 더욱더 충만하게 역사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B. 영적 연합의 성질
그러나 이것을 이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면, 예수님은 인성과 신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이 아니라 인성과 연합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다고 할 때 단순한 닮음이 아니라 예수와 우리가 인성에 연합을 가진 상태에서 닮아갑니다. 그 그림이 단지 어떤 도덕적인 위대한 인물을 보면서 그 사람과 비슷해 져 가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러한 성품의 변화를 바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바로 그렇게 만들고 동시에 그러한 성품을 본받아 성화되어 그 분을 닮는 것만큼 그 생명과 사랑이 증폭되어서 우리 안에서 더욱 충만하게 역사하면서 나타납니다. 이게 바로 영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연합의 성격입니다.
Ⅳ. 연합 안에서의 삶
그래서 이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영적인 연합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요구하십니다. 영적인 연합 안에서의 삶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무엇인가 하면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우리가 실제로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 것이라’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것은 위대한 사도나 겨우 고백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나는 이러한 고백을 일상적으로 하는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보았습니다. 실제로 교회에서도 지금도 보고 있습니다. 다만 그 사람들이 피켓을 들고 나는 이러한 상태라고 말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나 온 몸을 통해서 뿜어져 나옵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의 아우라입니다. 정확하게 2년 전에 저는 여기에서 베드로전서를 설교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참된 아우라가 무엇인가를 여러분에게 설명하였습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과 충만한 사람입니다.
Ⅴ. 적용과 결론
많은 말씀을 준비하였지만, 오늘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그러한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과 그러한 사랑을 누리지 못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의 인생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이미 신비적인 연합 속으로 들어간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한 생명과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주님이 우리의 내면의 영혼을 변화시켜 주신 사람이다. 그러면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이것이 결국 우리의 불순종, 우리의 죄, 그리고 그 죄라고 해서 어마어마한 것만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죄의 질이 같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공기를 마시면서 쉼 없이 병균과 세균들이 들어오고 유해한 요소들이 우리 속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것을 끊임없이 이겨낼 수 없는 저항력이 우리에게 음식, 건강관리, 이런 것들을 통해서 계속 주어질 때 우리는 그러한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무엇입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수없이, 수십만 가지의 생각들이 스쳐갑니다. 그리고 생각으로 우리는 눈으로 모든 것들로 하나님보다는 세상을, 그리고 육체를, 하나님의 영광 보다는 자기의 번영을 추구하면서 자기의 욕심대로 살아갑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는 무의식속에서 살아갑니다.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과 사랑이 부어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할 시간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결국 모든 가르침이 다시 집약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경건한 삶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시간 없이 이러한 생명과 사랑이 그냥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것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가는데 현실은 계속 아니라고 우리에게 입증을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살질 않습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지 않는데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고 그래서 자신의 중심을 통하고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뉘우치고 그리고 새롭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로 결심하고 삶을 반성하고 그리고 주님께 매달리고 하는 마음을 토하는 기도가 없는데 있어도 그 여기 생각에나 겨우 영향을 줄 정도이지 가슴에까지 내려가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무엇입니까? 형식주의입니다. 예배는 드렸는데 예배를 드릴 실제적 결과가 내 안에 없습니다. 기도는 했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에 조차도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하늘보좌는 그만두고라도 마음에까지 말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외식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은혜와 생명을 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 말고 하나님의 지도 위에 놓고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나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지, 내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의 게이지가 어느 정도로 되어 있는지. ‘그냥 있을 거야.’ ‘있겠지.’ 그게 아니라 진짜 얼마나 있는가,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것을 보면서 자기 안에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이미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그래서 객관적인 느낌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서 내가 어디에서 떨어졌는가, 그리고 내게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가, 이것을 재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을, 그러한 은혜를, 그러한 생명을, 그러한 총명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기도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아가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지혜의 웅장함을 알아가면서 순간순간 가슴이 뛰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과 연애하는 생활입니다. 그러한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오늘도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도 나의 게이지에 채워지는 것입니다. 은혜가 떨어질 때에는 정말 거지같은 상황이라고, 발길로 차 버리고 싶은 상황이라 생각하였는데 다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충만하게 넘쳐나면 하나님이 나를 이 문제가 있는 집안에서 나를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순에만 그 상태가 매우 안 좋은 사람들이 오는 것, 그 자체가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얼마나 갈 데가 없었으면.’ 물어 보십시오. 옛날에 있던 순장들 다 물어 보십시오. 머리를 막 흔듭니다. 그런데 내게로 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래도 너는 이 영혼을 돌보리라고 믿는다고 하시며 예수님이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얼마나 놀랍습니까?
여러분 회사에서 가슴 벅차는 때가 있지 않습니까? 높은 사람이 불러서 “나 좀 봐다오.” “왜요?” “아무한테도 맡겼는데 못 하더라. 나는 너는 하리라 믿는다.” 그러면서 사장님이 과업을 맡깁니다. 원래 사장은 이사 상대하고 최소한 본부장 이상 상대하는 사람인데 과장인 나를 불러 맡깁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필요하면 내게 직접 전화해라. 내가 모든 것을 도와주마.” 여러분은 그것을 끌어안고 ‘에이씨, 왜 이런 것을 나에게 주는 거야?’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가슴이 벅차올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럼 한번 그 영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 돌다가 당구 치듯이 여기서 얻어맞고 저기로 가고, 저기서 얻어맞고 여기로 가고 막 그러다가 왔습니다. 바꿔서 생각해 보십시오. ‘야, 얘는 다 맡겼는데 전도사도 감당이 안 되더라. 너는 할 수 있을 거야. 은혜든 사랑이든 뭐든지 필요한 거 있으면 나한테 이야기 해. 부탁한다.’ 예수님이 맡기셨을 때 그것을 가슴에 끌어안고 가슴 벅차하기 위해서는 뭐가 있어야 합니까? 은혜가 있어야지만 자기 안에 이미 생명과 사랑이 있어야지만 그렇게 주님이 자기에게 부탁하는 게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지 깨닫게 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서 결국 이 세상 어디에 가서도 고쳐지지 않을 사람, 그러다 결국 외롭게 성경 구절 몇 개나 위로 삼으며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죽어갈 사람을 하나님이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삶을 살게 만드십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러한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찰 때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 개인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적으로 주십니다. 우리 공동체 모두가 너에게 준 그 생명을 모든 공동체가 누릴 수 있고 네게 준 사랑의 혜택을 모든 공동체가 받을 수 있고, 남다른 재능이 있어서 너에게 주신 그 놀라운 지식은 우리 모든 공동체의 것입니다. 그러면서 보이지 않는 교회, 그리스도의 몸 자체가 그러한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될 때 그 때 그 몸이 세상의 한 복판을 지나가면서 접촉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살려냅니다.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곳에 스치고 지나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살려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남을 위해 사는 인생입니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하여 주시는 제2의 삶입니다.
그러니 이제 왜 기도해야 하는지, 왜 성령 충만해야 하는지, 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주님의 아름다움에 매일 매일 감격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돕겠습니다. 우리 서로 도웁시다. 그래서 기도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린 사람은 격려해서 기도하게, 말씀을 볼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린 사람은 말씀으로 돌아올 수 있는 힘을 주고, 그리고 위로하면서 우리 모두가 함께 그렇게 참 내가 내 인생의 진정한 주체가 된 삶, 그 주체 안에 그리스도 예수가 함께 계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내 삶에 온전한 주체가 된 삶을 단 1년 만이라도 살며 죽는 것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보람이 아니겠습니까?
십자가에 붙들려 살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녹취자: 장주은
갈라디아 교회는 어떤 깊은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사도로부터 이 편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다름이 아니라 예전에 자신들이 받았던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믿는 믿음을 따라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변화가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유대주의자들이 이 교회에 스며들어서 너희가 이방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 라고 하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과 할례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할례를 받음으로써 자신이 율법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됨으로써 자신들이 그 율법을 모두 준수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가르침에 혹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사도는 말합니다. 너희가 구원을 받은 것이 율법으로냐 율법의 행위로냐 하나님의 은혜로냐, 라고 묻습니다. 그러면서 만약에 그들이 구원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은 것이면 율법을 계속 지키는 것이 맞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보혈의 공로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제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다, 라는 것이 사도바울의 논지였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도 맨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의 은혜를 누렸을 때에는 당연히 그 신앙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의미를 그들에게 새겨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물리적으로 지금 볼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이들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십자가에 담겨진 신학적인 진리를 경험했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없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구속의 공로로 자신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시간이 지나가면서 무엇인가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가지고는 자신의 구원에 충분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무엇인가 거기에 보태어야 될 것 같은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도바울은 이 유대인들의 그릇된 가르침이 교회를 심히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도바울이 많은 편지를 썼지만 이 편지처럼 그렇게 저주에 대한 이야기로 서신을 시작하는 것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복음을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 할지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인사말 대신 이렇게 끔찍한 이야기를 하면서 서신을 시작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바울은 이 편지를 쓸 때에 이 갈라디아 교회의 복음으로부터의 이탈에 대해서 마음 아파할 뿐만 아니라 아주 분노하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썼던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반부로 가면서 마음을 누그러뜨리며 이 사람들이 정말 얼마나 가엾고 불쌍한 사람들인지를 생각하면서 어머니의 마음을 가지고 훈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무튼 이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아주 분명하게 이들에게 선포되었고 또 이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을 알았는데 이렇게 이탈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버리고 율법을 행함으로써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십자가 구속의 은혜가 뭔가 충분하지 않은 것 같은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도바울이 그들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다시 말하면, 갈라디아 교인들의 요동하는 다수의 교인들을 품으면서 너희는 원래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착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예수를 사랑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이단의 무리들이 들어와서 교회에 분란을 일으키고 그들이 잘못된 가르침을 너희에게 전했고 너희는 연약해서 거기에 빠지게 되었는데 자, 누가 너희를 꼬이더냐. 다시 말하면 누가 너희에게 올바르지 않은 신앙의 도리를 가지고 유혹하더냐, 라고 사도바울이 물은 것입니다.
답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유대교의 유산을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과 섞어서 인간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에 전적으로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이단적인 가르침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자, 그러면 오늘은 우리의 신앙 속에 파고들어서 자, 너는 이것도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고 저것도 해야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이렇게 우리에게 가르치는 이단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교회에서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아주 의심할 수 없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말씀사역을 시작하던 한 35년 전과 지금 사이에 의심할 수 없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두가지 차이인데 하나는 설교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회중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설교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먼저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절절하게 외치는 사람들이 현저하게 많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35년 전에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렇게 절실하게 외치는 설교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 증거로 제가 대학원에 다닐 때 굉장히 순수하신 분이었는데 그 학우가 나한테 와서 자기는 어느 큰 교회의 목회자가 하고 있는 세미나에 갔다가 충격을 받았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뭘 그렇게 충격을 받았냐 했더니 교회가 진정으로 성장하려면 교회 성장학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당시에는 우리 공부할 때는 교회 성장학이 아주 인기 있는 학문이었습니다. 그런 교회의 성장학을 공부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더라, 하며 아주 놀라운 표정으로 나에게 와서 그 세미나를 설명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그것이 거의 한 30년 전이니까 그 때에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을 절실하게 전한다, 라고 하는 것이 모든 설교자들에게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을 그래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저도 많이 전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회중 속에서의 변화인데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면 그래도 사람들의 반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렇게 절실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하는 사람도 많지 않지만, 혹시 전했다고 하더라도 그 복음의 진수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교리를 전하는데 그 교리에 대해서 반응하는 태도가 예전 30년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흐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 사이에 뭔가 신앙의 가르침과 분위기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십자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이요 아무 희망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감격과 그 은혜에 대한 깊은 깨달음은 우리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나의 나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 때문이라고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이 선포되고 그 선포 앞에 감격하고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바로 회심과도 관련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들으며 주님을 새롭게 만나는 사람이 있고 처음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은 이미 만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자기 안에 새로워져서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고 은혜를 갈구하는 성화의 삶으로 나가게 만들고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서 복된 회심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고 죄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큰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께 의지하고 매달려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으로 나오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기도생활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현저히 흐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한번 여러분이 가슴에 손을 얹고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살을 찢고 피를 흘려 죽으셨다는 사실 때문에 눈물을 흘려본 적이 언제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흘러오는 강물 같은 은혜,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한없는 은혜를 입은 존재이고 이것은 나의 나됨 때문에 주어진 은혜가 아니라 오직 나는 아무 공로가 없고 하나님 앞에 절망적인 죄인이었으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 나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하는 구원의 감격이 우리에게 얼마나 남아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은혜와 감격은 이게 하나의 중추적인 것입니다. 건물의 뼈대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있으면 그 사람이 기도하고 싶어 하고 그런 감격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싶어 하고 그런 사람이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 예수께 복종시켜서 하나님의 형상이 자신 안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갈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주님을 섬깁니다. 혹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크고 작은 많은 시련과 역경을 만납니다. 그런 시련이 겹치고 어려움이 가중되면 살아있는 것이 매우 힘들고 귀찮게 여겨집니다. 왜? 고난과 시련을 당하는데 그것을 십자가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에 대한 구원의 감격이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역경을 당합니다. 시련을 당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주님을 생각합니다. 주님, 제가 이런 시련과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주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너에게 구원을 주기 위해서 더 큰 고난을 당했단다.
(찬양)
마지막 피 한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그러면서 자기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으로 투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고난을 당하지만 그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들었던 죄와 이기심, 허영, 분노, 세상에 대한 집착, 이런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오래 참으심으로 고난을 당하셨기에 우리가 그런 말할 수 없는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된 것처럼 하나님이 나도 참고 사랑하고 견디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눈물과 간구, 자기에 대한 부인, 그리고 이 갈등과 고통이 많은 이 세상을 넘어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의 정욕은 죽고 내 인생에서 내가 주인이 되어서 살려고 하는 이런 이기적인 욕망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하루에 한 번씩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왜 하나님의 아들이 나같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그 큰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나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그리고 내가 지금 받는 이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아직도 모르고 사는 이 세상 사람들은 얼마나 가엾은가 생각하면서 눈물 흘릴 수 있다면 그가 비록 좀 모자라고 부족하고 나쁜 사람이라도 그렇게 살면 그는 주님의 사람으로 변해 갈 것입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당시 갈라디아 교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순수한 복음 신앙은 유대주의자들이 유혹하고 꾀었기 때문에 십자가의 감격을 잃어버리기에 이르렀습니다. 자, 그러면 오늘은 누가 무엇이 우리를 끊임없이 꾀기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은혜의 감격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일까요? 이단에게 유혹을 받았습니까? 물론 그런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 대부분은 이단에 헌신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감격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이 세상의 염려와 근심, 그리고 유혹으로 말미암아 너희의 마음이 무뎌질 때가 온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 이 모든 일을 경계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히려 큰 이단이나 영향력 있는 거짓된 가르침에 집중적으로 빠져서 십자가에 대한 감격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매일매일 살아가는 감격이 없는 신앙생활, 그리고 마음에 끊임없는 미끄러짐, 그래서 세상의 근심과 염려 그리고 세상의 아주 작은 즐거움 때문에 복음이 주는 진정한 기쁨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삶,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대신 자신의 관점에서 인생을 바라보는데서 오는 그런 모든 갈등들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약 우리가 이러한 우리의 태만한 신앙생활에 대해서 무엇인가 정리하고 하나님 앞에 돌이키지 않으면 매우 무거운 짐을 진 것 같은 기쁨이 없는 신앙생활을 계속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언젠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신앙생활을 기쁨으로 하던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기쁨은 이 세상의 어떤 것들을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에 오는 일시적인 기쁨이 아닙니다. 참 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혀 사는 그런 영원한 기쁨이었고 은혜였습니다. 자, 그런데 그런 기쁨과 은혜의 중심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무엇이 있었습니까?
(찬양)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이 돌아온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에 대한 감격, 왜 하나님의 아들이 나같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을까, 이런 큰 은혜를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가, 하는 자각. 그리고 이제까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았던 모든 것이 나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있었기 때문에 감격에 넘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가 중심에 있는 사람은 회개합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하나님 앞에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이처럼 기뻐하고 감사하며 그 분의 고난을 함께 느끼면서 기도하던 신앙의 때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누리고 즐거워하는 모든 것들이 끝날 때 우리의 공로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세워주지 못하고 우리의 젊음과 우리의 소유도 우리를 주님 앞에 세워주지 못합니다. 그 때에 예수만 자랑할 수 있는 사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살아왔노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 시련과 역경, 고난과 아픔을 겪었지만 그리스도 때문에 행복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그 때 진정으로 복음에 붙들린 한 신자임을 입증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새롭게 붙들고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화평을 이루신 십자가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 2:13-14)
녹취자 : 장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이후와 그 이전의 상태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나뉘어진 구분 속에서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를 할례 받지 못한 무할례자들이라 여겨서 우리를 짐승같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우리는 멀리 있던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인 것처럼 보였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원 받는 적극적인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우리가 어디로 가까워졌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기준으로 볼 때 우리는 아주 멀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하나님과 가깝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방인인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차별이 없이 우리 모두를 당신과 친밀한 가족관계로 부르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까움으로 말미암아 예전에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우리의 삶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었는데 그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그것이 우리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편지는 불신자를 향하여 쓴 편지가 아니라 에베소에 있는 교인들을 향하여 쓴 편지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방인인 그 에베소 교회 교인들이 받은 구원이 가지고 있는 인생의 의미와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를 깨닫게 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우리의 것으로 누리게끔 만들어 주셨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그리스도의 피였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그 구속을 통해서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 우리에게 한 인간으로서 모든 하나님과 인류 앞에 존엄한 가치를 가진 사람으로 만들었다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육신의 몸을 입으심으로써 당신의 인성 안에서 우리 모든 인성을 연합함으로 이제 하나님 앞에 타락해서 그 형상을 지니고 있지만 하나님과 관계없었던 사람들을 그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 그런 기반을 마련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성육신적인 연합은 실제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충만히 스며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런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주셔야 했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 이상의 그 무엇을 하셔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구원받은 인간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십자가를 지고 우리의 죄를 위해 대속하심으로써 주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당하신 저주가 우리가 받은 저주가 되었고 그래서 우리의 죄는 속하시고 그 저주는 그리스도께서 당하시고 그 모든 죄에서 풀어주시고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충만한 것은 우리의 것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곧 우리의 죄에 대한 죽음이기 때문에 이제 그리스도의 그 피로 구원함을 받은 사람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셔야 했던 그 죄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사실을 믿을 때에 성령께서는 그 모든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우리 속에 침투하도록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여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마 당시의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은 오늘날 우리가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에 대한 생각을 무한히 확장시켜야지만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 반목과 미움, 이것이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갈등으로 존재했는데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이 두 사람들이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인간의 장점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을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허물어 버리는 것입니다.
‘원수’라는 생각을 해보십시오. 죽는 순간까지도 적대감과 미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미움의 관계를 우리들이 원수 된 관계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원수된 것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였습니다. 그것을 허물어버립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원수된 것을 허물어 버립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원수된 것을 허물어 버릴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셔서 일방적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원수 된 그 담을 허물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이제는 원수의 관계, 미움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으로 그 담장처럼 높이 쌓여 있던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구분을 허물어 버리시고 거기에서 우리와 화목을 이루셨습니다.
화목이 무엇입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 관계의 어떠한 장애도 없기 때문에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신뢰하고 이해하는 것, 그리고 이후의 삶에 있어서 생사고락을 함께 할 그런 사랑의 관계가 되는 것이 바로 화목입니다. 그런 화목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것을 허물어 버리고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지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흘러들게 되었고 그 사랑과 생명으로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구분이 철폐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참된 목적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성경은 뭐라고 말하냐 하면 15절과 16절에서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입니다. 바로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셨기 때문에 거기로부터 오는 그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능력이 그렇게 높고 높았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을 허물었고 그들이 서로 사랑으로 교통하며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바로 그런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로 은혜를 받아 예수의 몸의 일부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몸의 일부가 되었으니 이제 우리는 그 예수의 생명과 그 영원한 사랑에 참여한바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운명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져 그 생명과 사랑을 누리며 살아가게 된 사람들입니다.
나무에 생명이 있습니다. 땅 아래로부터 수분과 양분을 끌어올려서 나무인 자신의 몸에 공급해 줍니다. 나무에 가지가 있습니다. 분명히 나무는 살아있는데 어떤 가지는 양분과 물기를 흠뻑 머금고 꽃을 피우고 잎사귀를 나게 합니다. 어느 한 부분의 가지는 꼭 시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져 그 무한한 생명과 사랑을 공급받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그 생명과 능력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 그 생명과 사랑에 참여하기 위해서 믿음과 순종으로 살아가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이미 모든 포도나무 가지가 그 포도나무로서 생명을 누리며 살지만 그 생명을 더욱 잘 누리고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가지를 다듬고 그 나무를 돌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렇게 신비적인 연합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과 사랑에 접붙이게 되었고 그 충만한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셨지만 또한 우리를 또다른 연합으로 불러 우리가 실제로 그 생명과 사랑을 넘치도록 누리며 살게끔 만들어 주시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성화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바로 우리를 이렇게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에 연합되도록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와 한 생명을 누리고 한 사랑 안에서 그 피로 살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생각하는 것, 즉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그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누리게 하셨다고 하는 그 믿음이 있는 것, 거기에서 언제나 막혔던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회복되고 다시 그 생명과 사랑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배우는 것, 그리스도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하는 것, 그 십자가가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나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으로 만들어진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숙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생명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또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충분한 자원을 가지고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인생의 차이는 현저합니다. 자원이 있는 사람들은 그 자원을 힘입어 마음껏 도전합니다. 그리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자원의 끊임없는 공급을 받으면서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와 관계를 맺은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베풀고 그들을 이롭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인간이지만 바로 그 형상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신이 하나님처럼 높아지기 위해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으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늘 변하고 늘 바뀌지만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특별히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음으로 접붙여 당신의 한 몸의 일부가 되게 하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멈추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할 때도 사랑하셨고 우리가 그분을 미워할 때도 사랑하셨고 우리가 그분을 섬길 때도 사랑하셨고 우리가 그분을 심지어 부인할 때 조차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한번 선택하여 구원하신 그 구원의 은총을 거두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변하는 우리와 날마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조를 보게 됩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우리가 주님을 붙들 수 있을 때조차도 우리가 주님을 따를 수 없을 때조차도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당신의 한 몸 삼으신 것을 후회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만 있는 그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가지고 참 사람이 되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당신 대신 통치하도록 이 세상 망가진 어느 한 구석을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주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로 고치며 참 빛으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며 언제나 내가 예수를 죽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구원으로 우리에게 주신 그 충만한 생명과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생각하며 주님과 다시 화목을 누리는 삶으로 돌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