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시작하며
(2018년 주일오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8년 1월 1일-3월 4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8년 3월 9일
목 차
1. 수치를 굴려버릴 때(수 5:9) 2018.1.1 송구영신 1
2. 다시 할례를 행하라(수 5:1-8) 2018.1.7 주일오전 9
3. 여리고의 유월절(수 5:10-12) 2018.1.14 주일오전 17
4.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수 5:13-15) 2018.1.21 주일오전 24
5. 승리를 앞둔 때(수 6:15-19) 2018.1.28 주일오전 29
6. 여리고성이 무너질 때(수 6:20-27) 2018.2.4 주일오전 35
7. 실패를 딛고 일어날 때(수 7:1-12) 2018.2.11 주일오전 46
8. 다시 승리하게 하실 때(수 8:1-17) 2018.2.25 주일오전 56
9. 말씀을 따라 살라(수 8:30-35) 2018.3.4 주일오전 65
한 해를 시작하며1 2018. 1. 1 송구영신 예배
< 수치를 굴려버릴 때 >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수5:9)
I. 본문해설
-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지도자 된 때였음
- 하나님이 가나안 정복에 앞서 행하셨음
- 강력한 원주민 마음을 두려움으로 물 같이 녹이심
- 가나안에 대한 정탐도 마치고 공격을 앞둔 때였음
- 문득 여호수아에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
- “오늘 애굽의 수치를 떠나게 하였다…길갈이라 하느니라”(9)
II. 수치를 굴려버리심
- 큰 정복 전쟁을 앞두고 먼저 말씀을 주심
- 우리도 새로운 한 해 말씀을 받아 시작하자
A. 애굽의 수치
- 먼저 “애굽의 수치”에 대해 말씀하심
- 이스라엘의 애굽에서의 생활과 관련된 수치임
- 그들은 “애굽의 노예들”로 알려짐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출2:23)
- 애굽에서 학대를 당하는 백성들이었음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출5:22)
- 성경 외의 문헌에는 “떠도는 이주민”들로 불리움
- 이것들은 400년 이상 된 긴 세월의 수치였음
- 또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때 받을 수도 있는 비난의 수치였음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출32:12)
- 무엇 때문이었을까?
- 비록 약속은 있으나 그 땅에 못 들어갔기 때문임
- 약속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노예로 살아갔기 때문에
- 궁극적으로 이 땅은 곧 그리스도이심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민13:33)
-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우리의 운명적인 수치를 생각하라
- 우리가 구원받고 예수 안에 살지 않음이 수치가 됨
B. 수치를 굴려버리심
-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된 때였음
- 불세출의 지도자 모세가 죽고 없는 상황임
- 어린 아이 같은 믿음으로 주를 따르게 되었음
- 이제 이스라엘을 기적 아닌 믿음으로 훈련시킴
- 구하지도 않았는데 약속을 해주심
-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게 하였다”
- gilgal “똥을 굴려버리다”
- 운명처럼 따라다니던 수치를 벗기심
- 수백년 동안 벗어날 수 없었던 불명예
-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면 받을 수 있는 수치들
- 우리 운명처럼 따라다닌 수치는 무엇인가?
- 하나님이 그것을 똥처럼 굴려버리심
- 더 큰 애굽의 수치 이스라엘 내면에 있었음
- 더 무서운 수치는 패배주의에 빠짐
- 가나안 정탐시 아낙 자손을 보고 낙심함
“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세 사람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세 사람이 나아가매” (민12:4)
- 우리 안에도 애굽의 수치 있는가?
- 하나님은 그것도 똥처럼 굴려버리고자 하심
- 순수한 믿음의 때에 큰 약속을 성취케 하심
III. 적용과 결론
- 지금도 주님은 우리의 수치를 살피심
- 우리를 명예롭게 하사 영광 받으심
- 낙인처럼 찍힌 수치 단번에 굴리심
- 능력의 주님은 그리 하실 수 있으심
- 순수한 믿음으로 수치를 벗기시길 기대하자!
한 해를 시작하며2 2018. 1. 7 주일낮 예배
< 다시 할례를 행하라 >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수5:1-8)
I. 본문해설
-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하나님이 앞서 행하심
- 원주민들을 두려움으로 녹여 정신 잃게함(1)
- 역사적 강복 “애굽의 수치를 떠나가게 하셨다”
- 운명같았던 애굽에서의 수치의 굴레를 벗기심
- 큰 복을 주시기 직전에 내리신 하나님의 명령임
-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다시 할례를 행하라”(2)
II. 길갈에서 할례를 행함
A. 하나님의 명령
- 여호수아가 “할례산”에서 명령을 준행함
- 애굽에서 나온 군사들을 광야에서 죽였음
- 광야길에서 태어난 자들은 아직 할례를 못 받음
- 이스라엘의 대를 잇게 한 자손들이 할례 없는 자들임
-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다시 할례를 명하심
- 왜 이제야 할례를 명하셨을까?
- maybe 할례 후 패역한 조상을 따를까 염려하심
- 그들이 거의 다 죽은 후 약속의 땅 앞에서 명하심
-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온전히 순종하였음
- 이 때 약속을 주심 “애굽의 수치를 벗어버리게…”
B. 할례의 의미
- 할례는 창세기 17장 아브람부터 시작
- 불신앙으로 이스마엘을 낳은 후 침체
- “전능한 하나님…완전하라”(17:1)
- 꽃같은 언약의 개화 제시(17:8∼9)
a. “나는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된다”
b. “땅을 영원한 기업으로 주리라”
c. “너와 후손은 내 언약을 지키라“
- “모든 남자는 포피를 베어라”(11)
- 아브람 자신 99세 개명 후 할례를 받음
- 부인병 예방을 위한 위생학적 고려가 있음
- 그보다 더 큰 신학적인 의미가 있음
- 생식으로 번성하는 후손들에게 표를 주심
a. 구별된 백성이라는 자기 인식
b. 오직 하나님께만 바쳐진 사람들
c. 후손들에 대한 교육에 책임을 짐
- 불순종하던 광야 세대가 죽은 후에 명령하심
-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다시 할례 받게 하심
- 언약 백성의 정체성에 대한 확인의 기회
- 애굽의 수치를 떠나 보내시기 직전에 행함
III.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
- 할례는 옛 언약표, 예수 안에 성취되었음
- 우리를 향한 적용은 마음에 받는 할례임
- 예수님 오신 후엔 우리는 할례 받지 않음
- 그러나 그 신학적 의미는 더욱 요구됨
a. 우리는 예수 안에서 구별됨
b. 하나님께만 바쳐진 백성임
c. 우리뿐 아니라 교회에 책임
- 우리 마음에 할례 받고 하나님께 돌아가자(렘4:4上)
-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IV. 적용과 결론
- 한 해의 새로운 시작이 앞에 있다
- 이제껏 계속된 수치를 굴려버리자
- 위대한 승리를 꿈꾸며 살자!
- 마음에 다시 할례를 받자!
한 해를 시작하며3 2018. 1. 14 주일낮 예배
< 여리고의 유월절 >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수5:10-12)
I. 본문해설
-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말씀을 주심
- 애굽의 수치를 떠나가게 하실 것을 말씀하심
- 큰 약속을 주시기에 앞서 할례를 받게 하심
- 그 약속 받은 후 길갈에서 유월절 지켰음
- 유월절 이튿날 그 땅의 소산을 먹자 만나가 그쳤음
II. 여리고에서 지킨 유월절
A. 유월절의 의미
- “유월” passover의미 “넘어가다”
- 애굽에서 10번째 재앙 기념(출12장)
a. 가정마다 어린양을 위해서 잡음
b. 그 피를 좌우문설주와 인방에 바름
c. 무교병, 쓴나물, 띠, 신, 지팡이
d. 그 달이 한 해의 시작이 되게 하심
- 애굽에 임한 보편적 죽음을 벗어나게 하심
- 이스라엘의 장점이나 공로 때문이 아니었음
- 양의 피를 바른 문은 선택과 믿음을 입증함
- 이 때 무교병과 함께 “볶은 곡식”을 먹었음
B. 가나안 정복과 유월절
- 출애굽 시 홍해 건너기 전, 요단강을 건너고 나서
유월절을 지켰음
- 애굽의 수치를 떠나게 하실 약속에 대한 반응이었음
- 출애굽, 광야생활, 그 땅에 주신 은총을 기림
1. 어린양 희생을 기림
- 유월절 준수의 강한 인상은 어린양의 죽음
- 자신들도 죽어야 했는데 하나님이 살려 주심
- 예수님은 죽으실 뿐 아니라 양식이 되어 생명을 주셨음
- 새해에는 성공과 기대가 아닌 예수로 가슴 뛰라
- 죄로 죽을 우리를 대신한 하나님 아들의 죽음
- 잊지 말라! 우리가 산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2. 그 땅의 소산을 먹음
- 이튿날 그 땅의 소산을 먹자 만나가 그침
a. 무교병 : 누룩 없는 빵
- 거짓이 없는 참 교훈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마16:12)
- 부도덕 없는 참 생활
b. 볶은 곡식 : 고난과 연단
- 유월절 이튿날 무교병과 함께 먹었음(11)
- 볶은 곡식을 바치며 애굽과 광야에서의 고난을 생각함
- 죄와 불순종 뿐 아니라 거룩하게 연단하신 세월을 생각함
- 한편으로는 순종을 결심, 또 한편으로는 감사함
III. 적용과 결론
- 유월절은 어린양 예수를 죽음으로 바라 본 것임
- 영광스러운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구속을 기렸음
-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를 생각하라
-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기리며 시작하자!
한 해를 시작하며4 2018. 1. 21 주일 낮 예배
<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수5:13-15)
I. 본문해설
- 약속의 가나안 정복에 앞서 할례를 명하심
- 여호수아와 온 백성이 그 명령에 순종함
- 애굽의 수치를 굴려 버리겠다고 약속하심
- 위대한 약속에 대한 반응으로 유월절을 지킴
- 만나는 그쳤고 가나안 정복은 피할 수 없는 사명
- 뜬금없어 보이는 기사가 등장함 : 여호수아와 군대 대장
- 그러나 이 사건의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II. 하나님의 사자를 만남
A. 그는 누구인가?
- 칼을 빼어 든 “한 사람”, “여호와의 군대 장관”
1. 현현과 군대 장관
- 구약 성경에 “군대 장관”이 9회 등장(창21:22, 삿4:2 등)
- 이는 모두 사람인 군대의 지도자를 가리킨다
- but 여기서는 여호수아가 알지 못하는 사람임
- 두 가지 해석 : (1) 하나님이 보낸 천사 (2) 하나님 자신
- 구약시대 하나님의 구원 계시 방법들이 있음
- 구속 계시로서 현현, 직접적 전달, 이적
- 인간이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형체를 빌어
나타나심
- 그룹 가운데 불과 연기, 폭풍 속에 나타나심(시80:1)
- 주의 사자는 (1) 하나님과 구별됨(출23:20-23), 혹은
(2) 하나님과 동일시됨(창16:13)
- 하나님의 현현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에게서 정점 이룸
-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천사가 아닌 하나님 자신이심
2. 사자와 하나님의 약속
- 그는 하나님이 보낸 사자가 아니다
- 이스라엘에게 사자만 함께 가게 하는 것은 징벌이었음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출33:2-3)
- 모세가 용서를 빌며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음
- 다시 응답하심. “내가 친히 가리라”(출33:14)
- 따라서 “한 사람”은 하나님 자신임
B. 왜 나타나셨나?
- 여호와는 이스라엘에 앞서 싸우시는 분 “만군의 여호와”
- 구약과 전쟁 : 용사이신 하나님을 보여줌
- 이스라엘을 홀로 보내지 않으시는 하나님
- 백성에게 기적만 보이신 것이 아니라 친히 동행하심
- 불세출의 지도자에게 가려진 여호수아, 백성, 그 자신
- 정복 앞두고 지도자로서 두려움과 떨림이 있었던 때
- 가나안 정복 전쟁을 앞둔 때에 하나님과의 만남
- 여호수아에게 승리에 대한 확신을 주시기 위함
- 전심으로 의지하고 확신하며 백성들을 이끌게 하심
III. 적용과 결론
-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15)
- 호렙산 모세 소명의 데자뷰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3:5)
-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a. 하나님의 거룩하심 b. 가나안 땅의 거룩함
- 소명지로서의 가나안임을 확신하게 함
- 2018년 : 고난의 광야냐? 영광 돌릴 땅이냐?
- 한 해 시작하며 거룩한 주님 만나라!
한 해를 시작하며5 2018. 1. 28 주일 낮 예배
< 승리를 앞둔 때 >
“일곱째 날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 성을 일곱 번 도니 그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 날뿐이었더라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하니라” (수6:15-19)
I. 본문해설
- 가나안 정복 앞두고 하나님이 특별히 만나주심
-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용사가 됨을 알게 하셨음
- 가나안은 하나님의 땅, 거룩한 소명지였음
- 세상은 탐욕으로 전쟁하나 이스라엘은 소명을 위함
- 첫 번째 임무는 큰 여리고성을 공격하는 것이었음
II. 승리를 앞둔 때
A. 순종을 시험하심
- 이상한 전투 명령이었음. 여리고성을 돌게 함
- 군사가 아닌 “온 백성”이 성을 매일 한 번씩 돎(10,20)
- 매우 위험함. 성 위로부터 공격 당할 수 있음
- 양각 나팔을 불었음
a. 이스라엘에는 커다란 은나팔이 있었음(민10:2)
b. 전체 회중 소집, 행운의 출발 시 사용(4-6)
c. 혹은 대적을 치러나갈 때에 사용(9)
- but 작은 양각 나팔을 제사장들이 불게하심
a. 하나의 나팔 소리는 하나의 복음을 예표함
b. 온 백성이 묵묵히 듣고 믿음으로 순종함
- 대열 중앙에 법궤가 있음
a. 길이 1.2m, 너비와 높이는 각각 0.7m 금 테두리
b. 뚜껑이 금으로 된 두 그룹 천사와 날개(시은소)
c. 모세의 두 돌판+아론의 싹난 지팡이+만나
- 하나님의 능력+선택(민16-17장)+돌보심을 상징함
d.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함
- 양각 나팔은 신약의 복음 전도를 예시함
- 하나님을 중심에 모신 싸움을 해야한다
- 법궤
- 6일간 군대와 제사장들의 나팔은 조용하였음
- 제칠일에 7바퀴를 돌고 온 백성이 크게 외침
- 왜 이런 이상한 명령을 하셨을까?
a.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보이심
b. 하나님을 중심에 모신 삶
c. 이스라엘의 순종을 시험하심
- 한 해를 시작하면서 순종을 결심하자
B. 자비를 명령하심
- 수 2장 여리고성이 정탐과 관계됨
- 두 사람의 정탐꾼을 수색에서 보호
- 기생 라합의 믿음과 정탐꾼의 약속
- 언약 백성의 신실성으로 약속을 지킴
- 주님께 피하는 자는 이방인이라도 보호하심
- 질주하는 정복 속에서 이방인에게 자비를 베푸심
- 이는 복음의 축복과 자비를 보여줌
- 주님과 함께함으로 자비를 베푸는 신앙.
- 자비를 베푸는 삶에 도전하라. 깨어진 관계로 고통함
a. 오직 복음 밖에 희망이 없음
b. 언약 백성의 삶은 자비 실천
- 한 해를 전도와 이웃 사랑으로 살자
C. 탐욕을 경계하심
-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탐욕을 경계하심
- 할례를 생각함 : 주께 구별됨+바쳐짐
-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지만 탐욕 대상이 아님
- 모든 것을 후히 주심. but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딤전6:17)
- 성공과 번영이 아닌 사명이 삶의 동기
- 후일 이스라엘의 멸망은 탐욕 때문이었음
“그러나 네 두 눈과 마음은 탐욕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압박과 포악을 행하려 할 뿐이니라”(렘22:17)
- 윤택과 성공은 사명을 위한 것. 탐욕은 품지 말라
- 번영과 누림이 아닌 사명을 위한 싸움임
III. 적용과 결론
- 하나님이 우리에게 한 해를 주셨다.
- 불순종으로 고통했으니 이제는 순종하자.
- 자비를 베풀라. 그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 탐욕을 버리라. 오히려 구원의 부르심을 생각하자!
한 해를 시작하며6 2018. 2. 4 주일 낮 예배
<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 (수6:20-27)
I. 본문해설
- 여리고 전투를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침
- 제7일 새벽에 7번 성을 돈 후 나팔을 불며 소리 지름
-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리는 기적이 일어남
- 당시 성벽은 이중벽 : 안쪽으로 붕괴됨
II.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A. 정결하게 하심
-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칼날로 멸하니라”(20)
- 왜 여리고를 심판하셨을까?
a. 범죄로 패역해짐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더러 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 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레18:24-25)
- erets, 인간과 함께하는 땅의 운명
- 아담과 하와의 타락 : 땅이 저주를 받음
- 땅을 더럽힘은 하나님의 영광을 모욕함
b. 당신의 영광을 위해
- 땅이 저주를 받음 : 범죄와 패역으로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가 있기 전 주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레18:28)
- “땅이 토해냄” 역겨움 하나님의 거부
- 인간의 타락 때문에 땅은 일방적으로 피해를 받음
- 땅과 인간이 공존하는 운명을 주심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 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 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 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 루려 하심이니라”(신9:5)
- 거룩하신 하나님은 일방적 피해 당사자임
- 가나안에서 하나님 백성의 소명을 실현하게 하심
- 신약의 영적 전쟁에서 요구되는 정결
- 승리와 번영을 주실 때 탐욕에 빠지지 말라
- 또 다시 승리하기 원한다면 정결하라
- 마음이 깨끗한 자와 동행하신 주님
B. 자비를 베푸심
-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라합의 가족을 이끌어냄
-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25)
- 기생 라합과 가족에게 자비를 명함
- 이스라엘을 정탐하려고 온 사자들을 도피하게 해줌
- 그녀는 왜 이 반역적이고 위험한 일을 하였을까?
- 인본주의 선행이 아닌 믿음의 행동임
- 라합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었음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 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히11:31)
- 비록 기생이었으나 예수 가문에 오름 : 고조할머니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롯에게서 오벳 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마1:5)
- 그는 동족을 배반했다. 더 큰 사회를 원했다 : 하나님나라
- 보다 더 큰 기업이신 하나님을 믿고자 했음
- 이방인들을 품어 차별 없이 복을 주심을 보여줌
- 지금도 구원에 목마른 비천한 자들을 부르심
- 이 세상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다
C. 영광을 보이심
- 여호와께서 오셔서 여호수아를 높이심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수6:27)
- 완전한 승리 주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남
- 여호수아를 큰 지도자로 세우신 사건이었음
- 신자는 하나님이 쓰심과 함께 성장함 : 섬김 필요
- 자신을 드린 섬김과 생사를 오간 전투로 영광 돌림
- 전투적 삶이 없이는 영적 성장이 없음
-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살자
III. 적용과 결론
- 여호수아는 여리고 재건을 엄금함
-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26)
- 이스라엘은 이제 처음으로 제대로 된 땅을 얻음
- 당시 그들의 기쁨을 생각해보라!
- 이제껏 무너지지 않은 당신의 여리고 성은 무엇인가?
- 하나님과 함께하는 믿음을 가지라
한 해를 시작하며7 2018. 2. 11 주일 낮 예배
< 실패를 딛고 일어날 때 >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수7:1-12)
I. 본문해설
- 여리고 전투의 기적적 승리로 힘을 얻음
- 이어서 벧엘 동부에 있던 작은 성을 공격함
- 아브람이 하란을 떠나 잠시 거주한 곳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
의 이름을 부르더니”(창12:8)
- 여리고 전투 큰 승리 짧게(6장), 아이 전투 길게(7-8장)
- 작은 사건에 담긴 큰 교훈 때문이었음
- 구속사 전개에 매우 큰 의미를 가짐
- 하나님 백성과 교회의 소명을 보여줌
II. 실패를 통해 가르침
A. 교만함
-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3)
- 승리에 도취한 이스라엘의 가벼운 처신
- 여리고 전투 승리가 은총이었음을 잊음
- 삼천명 중 36명 죽고 패배 후 도망감
-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5)
- 충만한 믿음과 두려운 공포는 매우 가까움
- 하나님께서 붙드실 때만 믿음으로 행함
- 큰 복을 받을 때 인간은 착각에 빠짐
- 자신을 도구 아닌 능력의 원천인 줄로 생각함
- 교만은 모든 패망에 이르는 첫 걸음이다
- 교만의 지적 성격을 깊이 생각하라
- 이것을 극복하는 길
a. 기억하라 : 노예의 상태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 나님 여호와라”(신5:6)
b. 잊지 말라 : 구원의 은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 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 제를 보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 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 다”(신26:7-9)
- 주셨어도 성공과 번영은 교만하게 함
- 매일 십자가의 현재적 은혜로 생활해야 함
- 십자가의 지혜 앞에 무지와 교만을 깨달음
B. 부정함
- 실패 후 엎드려 슬퍼하는 여호수아
-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10)
- “범죄하여…언약 어기고…도둑질 하였기에”(수7:11-12)
a. 언약을 어김
b. 도둑질하였음
c. 바쳐지지 않았음
- 그 순전한 시기에 탐욕 범죄 나타남
- 주님이 온유하게 아이 타이르듯 지도하심
- 언약 위반으로 부정하게 됨 : 사람+땅
- 가나안 땅을 주신 소명에 배치된 행동
a. 하나님께만 바쳐진 땅
b. 하나님께만 바쳐진 사람
- 가나안 타락은 그런 탐욕의 극대화로 멸망함
- 정복을 시작할 때도 소명을 방해한 사탄의 계교
- 조상들이 꿈꾸던 큰 일이 작은 탐욕으로 방해
- 아간 : 요단도하, 할례, 언약, 유월 함께 참여했음
- 습격하듯 다가와 싹이 나듯 자라남
- 신자 자신의 삶에 정사(精査)가 필요한 이유
a. 누구도 자신 정확히 판단할 수 없음
b. 객관적 진리 빛에 매일 자신을 비춤
c. 이때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사랑
- 우리가 매일 성령의 은혜 아래 있어야 할 이유임
- 사랑은 말씀을, 말씀은 사랑을 주기 때문임
C. 정결함
- 죄인의 색출 : 지파-족속-가족-남자(14)
- 색출의 결과 : 유다-세라-삽디-아간(17-18)
- 따뜻한 영적 지도자의 단호함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청하노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가 행한 일을 내게 알게 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 하니”(수7:19)
- 자복하게 한 후 탈취물+가족 : 아골의 심판
- 인간에 대한 사랑과 죄에 대한 심판
- 탈취물과 범죄자들이 불타는 광경
- 잠시 세상 번영에 흔들렸던 이스라엘의 심령이 부흥됨
- 이러한 마음을 놔두고 파죽지세로 갔다면?
- 번영할 때 탐욕 대신 소명을 생각하라(딛2:14)
- 우리를 구원하시고 양육하시는 하나님
a. 경건치 않은 것과 세상 정욕을 버림
b.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기다림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 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 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2:14)
III. 적용과 결론
- 크고 작은 성공은 우리 교만하게 함
- 잠깐의 성공보다 소명을 생각하라
- 승리 속에 세상 정욕을 경계함
- 한 사람의 부정으로 더럽혀지지 않도록
- 사랑을 정결하게 한 후에 다시 승리를 주신다
한 해를 시작하며8 2018. 2. 25 주일 낮 예배
< 다시 승리하게 하실 때 >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의 백성과 그의 성읍과 그의 땅을 다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아이와 벧엘에 이스라엘을 따라가지 아니한 자가 하나도 없으며 성문을 열어 놓고 이스라엘을 추격하였더라” (수8:1-17)
I. 본문해설
-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끝난 후 상황
- 패배로 잠시 멈췄던 가나안 정복이 재개됨
- 이 사건이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각성시켰음
- 이 사건을 통해 용기보다 중요한 순결에 눈 뜸
II. 다시 승리하게 하심
- 한번 실패한 자를 다시 세우시는 주님
- 실패한 자를 불러 새 인생을 살게 하심
A. 약속을 주심
- “내가 아이 왕과…다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1)
- 가나안은 이미 주셨으나, 다시 아이 성을 주심
- 정복의 약속 성취가 순종에 달렸음
- 약속 없이 순종은 의미가 없고 순종 없이
약속 성취되지 않게 함 : 주권+순종
- 불순종과 악으로 잠시 승리가 멈춤
- 주님은 복 주는 기계가 아닌 인격체임
- 마음과 뜻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함
- 약속을 주심은 그것 믿고 자만케 하심이 아님
- 오히려 약속 성취의 은혜를 갈망하게 함
- 주님은 온 인류가 약속에 참여하기 바라심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 큰 역사 상황에서 뿐 아니라 작은 일상에서도 약속을 믿음
- “믿음으로 산다” → 약속을 붙들고 살아감
- 모든 약속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다
- 세상 바다에서 약속의 닻을 믿음으로 내리라
B. 지혜를 주심
- 여리고 전투에서와는 달리 구체적으로 지시하심
- 탈취물과 전투 작전 명령에 관해서 말씀하심
1. 탈취 : 모든 것 멸함+탈취물 주심
- 첫 정복 여리고성을 맏물로 받으심
- 여리고는 부분이지만 가나안 전체를 대표함
- 헌물의 의미 : 일부로서 전부를 대표
a. 헌금 : 수입 전체에 대한 주권의 인정
b. 모든 것을 은혜로 주셨다는 고백
c. 나머지를 주 뜻대로 쓰겠다는 고백
d. 인간의 모금 아닌 하늘에서 주신 것
- 탈취물 갖게하심. 약탈 아닌 하나님의 분배
- 승리를 갈망하나 탈취 아닌 복을 바람
- 하나님을 인색한 이로 여기지 말라
-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딤전6:17)
2. 전술 : 매복-기습-후퇴-역습
- 여리고 전투 : 순전한 믿음과 순종 보심
- 아이 성 전투 : 지혜도 요구하심
- 오직 은혜로써, 분투하는 순종!
- 은혜로 얻은 구원 사랑과 순종으로 응답함
- 이 전술로 아이 성 함락의 감격을 누림
- 여기서 은총과 순결, 지혜와 분투를 배움
- 지혜 없음으로 낭비되는 인생을 보라
- 시험과 시련으로 잠시 망가져도 희망이 있음
- 쓰러진 자를 다시 세우시는 과정에서 영광이 드러남
- 훔치지 않아도 모든 것을 누리게 하심
-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지혜를 구하라(약1:5)
C. 승리를 주심
- “성읍으로 달려 들어가서 점령하고…”(19)
- “아이 왕을…시체를…돌로 큰 무더기를…”(29)
- 가나안 정복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심
- 땅을 더럽힌 자들을 멸하고 이스라엘에 주심
a. 땅을 목적대로 쓰지 않은 자는 멸하심
b. 땅을 목적대로 쓸 자에게 승리 주심
- 세상은 한치 땅도 하나님의 소유 아닌 것이 없음
- 무단 지배하여 오용함으로 땅은 고통함
-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승리하여야 할 이유
III. 적용과 결론
- 이런 세상을 해방하도록 부르셨음
- 우리의 일상의 승리는 이것을 위함
- 다시 순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자!
한 해를 시작하며9(끝) 2018. 3. 4 주일 낮 예배
< 말씀을 따라 살라 >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모세가 명령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 앞에서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 (수8:30-35)
I. 본문해설
- 아이 성 전투에서 승리 후에 행한 일을 보도함
- 아이 성의 교훈은 순전함에 대해 큰 도전을 주었음
- 하나님 말씀에 대한 헌신을 공동체적으로 다짐함
II. 에발 산에서 있었던 일
A. 제단을 세움
- 아이 성 전투에서 승리한 후 제단을 세움
- 모세가 이미 명령한 대로 세워짐(신27:2,4)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신27:2)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신27:4)
a. 요단 도하 후 큰 돌을 세울 것을 명령함
b. 쇠 연장을 대지 않아 다듬지 않은 돌
- 기적 은총에 대한 반응 : 말씀 지킴
- 다듬지 않은 돌은 우상에 대한 경계를 의미함
-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라”는 뜻
B. 율법을 선포함
- 모든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모였음
- 법궤 좌우로 도열함 : 그리심 산+에발 산
a. 그리심 산 : 축복을 선포함(신11:29)
b. 에발 산 : 저주를 선포함(신11:29)
- 요단 도하 후 큰 돌을 취해 석회를 바름(신27:2)
- 거기에 율법의 말씀을 기록하였음(신27:4)
- 십계명, 혹은 신28장의 축복과 저주 말씀으로 추측됨
- 이스라엘을 다루심 : 일방 축복 vs 조건 축복
1. 일방적 축복 약속
- 아브람에게 일방적 언약을 약속하심(창12: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2-3)
- 그의 후손 이삭-야곱-요셉에게 이어짐
2. 조건적 축복 제시
- 이스라엘의 해방과 시내 산의 언약
- 언약 당사자로서의 의무가 강조됨
- 의무를 조건으로 축복과 심판이 제시됨
-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 축복과 저주를 선포함
- 축복과 저주는 율법의 양면을 보여줌
- 인간은 연약한 존재 : 신령한 자극이 필요함
- 말씀이 이스라엘 마음에 울려 퍼지게 함
- 언약 백성으로서 나태함을 버리고 긴장하게 함
- 다시 말씀을 붙들고 살 때 살아갈 힘을 주심
- 다시 말씀이 마음에 울려 퍼지게 하자
C. 제사를 드림
- “번제물과 화목제물”드림
- 제사 종류 : 방식+목적
- 번제는 화제로서 불태워 바치는 제사 : 온전한 헌신
- 그 제사의 목적은 화목제 : 하나님+사람 사이의 평화
- 가나안 정복의 첫 장을 끝내며 영적 쇄신을 경험함
- 기적적 승리와 함께 탐욕과 불순종을 경고
- 승리와 탈취물에 도취하지 않고 영적으로 각성함
- 요단강을 건너던 초심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함
- 자신을 바쳐 정복의 소명을 끝까지 성취하게 함
-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는 제사는 무엇인가?
III. 적용과 결론
-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붙잡혀야 한다
- 거룩한 소명을 따라 하나님께 헌신하라!
한 해를 시작하며(2018.01.01. 송구영신예배1)
수치를 굴려버릴 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수 5:9)
녹취자 : 조원정
I. 본문해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 40년 동안의 광야의 방황을 끝내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불세출의 지도자 모세는 죽고 그들의 눈에는 어리고 어린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된 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나안 정복에 앞서 당신이 먼저 행하셨습니다. 강력한 원주민인 가나안 사람의 마음을 두려움으로 물같이 녹이셨습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고 그들이 어떻게 광야에서 만난 수많은 왕들과 나라들을 격파했습니다. 요단 강물을 말리는 기적 속에서 그들이 강을 건넌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나안에 대한 정탐도 모두 끝내고 본격적인 공격을 앞둔 때였습니다. 길고 긴 세월 동안 계속 되었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실현될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문득 여호수아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읽은 모든 구절을 설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마지막 구절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는 이 말씀을 오늘 설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바로 여호수아에게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떠나가게 하였다고 하시고 결국 그곳 이름이 이 성경이 기록될 때까지 ‘길갈’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수치를 굴려 버리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미 그 수치를 벗어버리게 하셨다고 하나님이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II. 수치를 굴려버리심
A. 애굽의 수치
오늘 하나님께서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애굽의 수치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은 두 개의 수치도 말씀 안 하시고 오직 하나 애굽의 수치가 여태까지 너희를 따라 다녔는데 오늘 애굽의 수치를 벗어 버리겠다. 너희에게 그것을 떠나가게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과 관련하여 가지고 있는 수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야곱과 그 모든 족속들이 애굽으로 들어가고 그들이 모세의 지도력에 의해서 해방을 선언하고 애굽을 탈출하게 될 때까지 약 4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정확하게 몇 년인지를 잴 수는 없지만 요셉을 알아보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우해 주는 시기는 매우 짧았습니다. 요셉이 섬겼던 바로가 죽고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나왔을 때에는 그들의 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운 물건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430년 동안 땅이 없이 남의 나라에 더부살이를 하면서 애굽에서 노예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430년 동안 긴 세월 동안 온 땅에 두루두루 이스라엘이 알려졌습니다. 그것은 나라를 갖지 못한 애굽의 치하에서 비참하게 종살이를 하는 그런 불쌍한 민족들이라고 하는 수치였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노예로 팔려졌습니다. 출애굽기 2장 2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얼마나 그들이 고통 받는 비참한 신음소리가 가득했으면 그것이 외침이 되어서 하나님에게까지 들렸겠습니까? 출애굽기 5장 22절에서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출5:22)
이로 미루어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아무 희망이 없이 노예로서 짓밟히고 있었고 학대당하고 있었던 수치 이외에는 어떠한 영광도 이스라엘에게는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 이외의 문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을 탈출한 후에는 떠도는 이주민들이라고 불렸습니다. ‘히브리’라고 하는 말 자체가 히브리어 ‘이브리떼’에서 온 것인데 이것은 강을 건넌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일찍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것은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실현되지 않았고 그들은 수치 속에서 긴 세월들을 살았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비록 그들이 약속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학대하고 박해했고 단지 자신들의 나라를 건설하고 험한 일을 시키기 위한 노동력 이외에 다른 아무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노예의 생활은 비참하기 그지없었고 그 백성들은 수치로 얼룩진 가운데 400년이 넘는 세월을 애굽에서 보냈습니다.
이스라엘 하면 애굽에서 수치를 당하며 살아가는 민족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었고 그들에게 어떤 희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도 그 놀라운 약속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이 실현될 거라고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겪은 수치였던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범죄 할 때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마주하여야 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중보자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며 이 백성들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퍼붓는 이방의 수치가 실현될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멸망할 이스라엘 백성들도 불쌍했지만 그 때문에 짓밟히게 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더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을 말리며 간절히 호소합니다.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출32:12)
그는 간절히 빌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큰 기적 속에서 애굽을 탈출하고 광야로 나왔는데도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수치를 짊어진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위기를 만나고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많은 나라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인도해 내긴 하였지만 광야에서 그들을 끝까지 이끄실 능력이 없기 때문에 광야에서 진멸시키고 말 것이라고 하는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영광은 아무 데도 없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때 이런 수치를 운명처럼 짊어지고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도 영적인 깊은 침체 속에서 죄에 빠지고 불순종의 길을 걸을 때 우린 역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임에도 불구하고 운명적인 수치를 짊어지고 실패를 자기의 숙명처럼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불순종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였지만 그 큰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지만 여전히 애굽의 수치를 짊어지고 살았던 것처럼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영혼의 침체 속에서 불순종하며 살 때 우리도 역시 수치를 짊어지고 살 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수치를 벗어 버릴 수 있는 힘이 이스라엘에게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애굽을 탈출하였을 때 애굽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심지어 함께 노예살이를 하던 중다한 잡족들이 이스라엘과 함께 출애굽에 동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었습니다. 애굽을 탈출하였으나 그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불신앙으로 가득 찬 이스라엘 백성들 중 어떤 사람들은 모세를 향해 대들며 요구했습니다. 애굽의 노예 살이로 다시 돌아가자. 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는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편이 낫다. 당장 우리 지도자를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모세에게 대한 도전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어디에 이스라엘 영광이 있었겠습니까?
불과 두 달이면 갈 수 있는 길을 약 40년 동안 방황했으니 이는 구약과 신약 모두 그들이 불순종하였기 때문이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심지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는 하나님이 애굽에서 나온 모든 군사들이 멸절할 때를 기다리기 위해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헤매게 하셨다고 까지 해석을 합니다. 어디 이스라엘의 영광이 있었겠습니까?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수치스럽게 그들을 위해 모든 험한 일들을 하며 짐승 취급을 받으며 살던 수치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이제 위대한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말씀하십니다. 수치를 벗어버리게 하겠다. 다시 말해서 수치를 굴려버리겠다고 선언을 합니다. 히브리어 동사에서 재미있는 것은 시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말이나 영어 대부분 모든 언어에서 볼 수 있는 과거, 현재, 미래, 이런 시제가 히브리어에는 없습니다.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생각하는 그 시점에서 행동이 끝났으면 완결 형이고 계속되고 있으면 미 완결 형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완결 형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아직은 그 수치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지만 시간을 초월해서 바라보는 나 여호와의 눈에는 내가 이미 그 수치를 벗겨버렸다는 것입니다.
B. 수치를 굴려버리심
이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던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난 때로부터 시작해서 왕국이 멸망하기까지 이렇게 한마음이 되어서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따르던 때가 없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때를 가리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연애하던 때라고 묘사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기적과 함께 따라다니던 거의 신적인 존재와 다름없던 불세출의 지도자 모세는 죽었습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 연약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여호수아가 지도자로 등극을 하였습니다. 아마 영적으로 영향력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던 강력한 담임목사가 죽고 전도사가 담임목사로 새로 왔을 때 교인들의 기분과 같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시대를 접으시고 여호수아의 시대를 일으켰습니다. 놀랍게도 ‘여호수아’는 ‘예수’라는 이름과 같은 뜻입니다. ‘구원’ 혹은 ‘구원자,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모세시절에는 하나님이 그 탁월한 지도자를 통해 기적을 보이시면 백성들이 옷깃을 여미며 두려워 떨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이제 그런 카리스마가 여호수아에겐 없었습니다. 그는 깊은 기도의 사람이었고 신실하도록 모세를 아버지처럼 따라다니며 배웠던 훌륭한 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오직 믿음으로 살려는 신실한 일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불세출의 지도자 모세가 죽은 후에 유약하기 짝이 없는 여호수아를 세우셨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새로운 섭리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적을 먼저 보여주셔서 순종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믿을 때에 기적을 보게 하심으로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것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른 땅을 밟으며 홍해를 건넜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요단강이 똑같이 말랐지만 요단강이 마른 것을 보고 강을 건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아멘하며 요단강을 건넜더니 강이 마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이제는 기적을 보며 겨우 하나님을 믿는 어린 아이 때와 같은 신앙을 벗어나서 어린 아이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을 때 하나님께서 약속을 따라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 간증을 갖게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이제는 기적이 아닌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으로 훈련을 시키시고 그들은 기적이 아니라 기적을 통해서 믿은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기적을 보며 가나안 땅을 정복해 나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수치가 있는지도 몰랐고 그 수치를 벗어버리게 해 달라고 기도한 기록도 없습니다. 구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약속을 주셨습니다.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나님은 이미 행해 버리신 것입니다. 이 땅 이름을 ‘길갈’이라고 불렀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수레바퀴 혹은 굴러가는 것에서 왔다고 보고 이 ‘길갈’이라고 하는 이름은 무엇인가를 하나님이 굴려 버리신다는 뜻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길갈’이라고 할 때 여기에서 ‘갈’은 ‘굴리다.’ ‘길’은 ‘똥’이라고 해석을 하면서 ‘길갈’은 ‘똥으로 표현되는 수치스러운 것들을 저 멀리 굴려버리는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더러운 것이 있으면 그것을 묻어 버리거나 혹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인근에서 아주 먼 곳에 갖다 버림으로 그 땅을 깨끗하게 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운명처럼 붙어 다니던 수치가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족속, 아무 쓸모없는 민족, 애굽 사람들에게 짓밟히면서 그들의 밥이 되었던 민족, 조상 적부터 40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운명처럼 수치스럽게 살았던 민족이라는 부끄러움 이외에는 아무것도 그들을 따라다니는 영광이 없었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큰 뜻을 세우신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면서 너희가 결코 벗어버릴 수 없었던 수치의 불명예의 멍에를 벗겨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굴려버려 다시는 너희에게 돌아오지 못하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애굽의 노예들이라고 하는 땅이 없어서 광야를 방황하는 방랑자들이라고 하는 수치가 따라 다니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들 운명처럼 따라다니는 부끄러움은 무엇입니까? 오랜 세월 예수를 믿어도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해도 결코 떠나갈 수 없이 붙어 다녀서 여러분의 양심을 괴롭히고 여러분들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고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하찮은 인간으로 보게 만들었던 운명적인 수치가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400년이 넘는 수치를 벗겨버리는 것처럼 오늘 당신을 어린아이처럼 의지하고 따르는 여러분들의 수치를 벗겨버리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더 큰 수치는 이스라엘의 내면세계에 있었습니다. 400여년 되는 세월 동안 종살이를 하면서 그들은 자존감을 모두 잃어버렸고 종처럼 살아가는 실패와 수치를 자신의 운명처럼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가나안 정탐꾼을 가나안에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열두 정탐꾼을 내 보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이외에 모든 정탐꾼들은 돌아와서 거짓 보고를 하면서 그들의 낙심을 드러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들이 갔을 때 정말 거기에는 기름진 땅과 끌채에 꿰어서 들고 운반할 정도로 큰 포도송이들이 가득 있는 아름다운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탐꾼들이 그것을 보고 실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 땅을 지키고 있는 아낙 자손들을 보았습니다. 마음이 물같이 두려움으로 녹아 버렸습니다.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는 메뚜기와 같았다고 민수기 13장 33절에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이 있는데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불가능하다고 믿었지만 애굽 전역을 뒤흔드는 위대한 재앙 앞에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셨고 변심한 바로가 600성의 병거로 추격할 때에도 홍해를 갈라 마른 땅을 만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너게 하셨는데 그까짓 아낙 자손들을 하나님이 못 물리치게 하시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이 사람들에게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애굽의 수치가 뼈 속 깊이깊이 배어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위대한 일에 대한 기대를 티끌만큼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주님 앞에 서게 됩니다. 왜 2017년 혹은 18년에 네가 그렇게 밖에 못 살았느냐고 부르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대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수치가 뼈 속 깊이 박힌 사람들은 온갖 핑계와 지저분한 이유를 대면서 하나님 앞에 말도 되지 않는 변명을 늘어놓을 것입니다. 평소에 일생을 살아간 태도가 그랬으니 마지막이 된들 그 태도가 바뀔 리가 있겠습니까? 애굽의 수치가 뼈 속 깊이 배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큰일을 행하실 위대한 축복의 땅을 그들에게 선사했는데도 그들은 뼈 속 깊이 사무친 애굽의 수치 때문에 그 하나님의 약속을 발로 차버렸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이외에 모든 사람들이 뼈 속 깊이 사무친 애굽의 수치 때문에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죽게 하였던 것입니다.
뼈 속 깊이 사무친 애굽의 수치는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장이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면 그와 함께 연결된 온 가족들이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살면서 방황하고 고통 받고 죽어갑니다. 화목할 가정이 깨어지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가정이 부서지게 됩니다. 사랑과 일치, 화합이라는 것을 모르는 불순종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애굽의 수치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붙들고 있는 한 결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땅은 믿음으로 들어가는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똥처럼 굴려 버리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한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불타오르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을 정복해 가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전쟁이 바로 여리고 전투였습니다. 전투라기보다는 여리고의 기적이었습니다. 큰 성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있었으니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는 이스라엘에게는 아마 그 성이 우리로 말하면 자금성 같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메뚜기 같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였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보십시오. 이들을 아직까지 따라 다니고 있었던 애굽의 수치를 모두 벗겨버리실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표징이 나타나사 가나안 정복의 역사를 새로 쓰게 하심으로 모든 가나안 원주민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해가 바뀐다고 새로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지만 현실을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새해를 맞이하면서 그렇게 새로운 한해 2018년을 바라보며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며 자기 스스로 메뚜기와 같다고 한탄하며 절망하며 뼈 속 깊이 애굽의 수치를 간직한 삶을 재현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린 그럴 수 없습니다. 2017년에는 믿음이 없어서 때로는 말씀에 무지해서 기도가 부족해서 목양을 제대로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때가 있었다고 합시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 이제 와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모든 어두움의 시절들을 뿌리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수치를 붙들고 살아가려고 애쓰는 동안에 하나님은 그들을 수치스럽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오늘 앞에 펼쳐진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자신들 힘으로는 도저히 정복할 수 없는 그 땅을 바라보면서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앙망하며 의지하는 연애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수치를 굴려버리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약속은 이루어지게 되었으니 발달한 병기를 가진 가나안 족속을 광야를 40년 동안 배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쓸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놀라운 기적으로 이들과 함께 하셔서 가는 곳마다 이기게 하셨고 패할 때는 그 패배를 통하여 뼈아픈 교훈을 그들에게 심어 주셔서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붙들고 살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수치 속에 살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나 짧지 않습니까? 젊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하여 애굽의 수치를 끌어안고 살았고 말씀을 깨달은 후에는 그렇게 살고자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랐기에 알면서도 죄에 이끌려가고 불순종에 이끌려 애굽의 수치에서 결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갔던 부끄러운 날들은 과거로 족합니다. 믿음이 충만한 이스라엘 백성들, 이제 이 생활이 너무 고달프니 애굽으로 돌아가 다시 종살이를 하고 그들의 고기 가마 곁에서 국물이나 먹자고 했던 사람들은 광야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주님을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광활한 땅 앞에 서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껏 불순종하고 애굽의 수치를 짊어지고 살았던 우리는 2017년 광야에 묻읍시다. 새로운 한 해를 새 사람으로 시작합시다. 우리 안에 여태껏 남아 있는 애굽의 수치를 모두 벗어버리도록 기도합시다. 오늘도 하나님은 어린아이처럼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은 약속을 주시니 이 주님을 믿고 오랫동안 여러분을 따라 다니는 수치를 굴려 버릴 수 있도록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지금도 주님은 우리의 수치를 살피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영예롭게 하심으로 당신이 영광 받고 계십니다. 우리가 애굽의 수치를 부여안고 뼈 속 까지 사로 잡혀 부끄럽게 살아가는 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받을 영광은 없습니다. 좋습니다. 이제까지 나를 어떤 사람이 저 실패한 신자, 희망이 없는 교인, 주저하고 기도도 안하고 늘 세속적인 교인, 하나님을 말씀 붙들지 않고 자기 꾀로 사는 교인이라는 애굽의 수치가 이제까지는 우리를 따라 다녔다고 칩시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까지의 수치로 족하지 않겠습니까?
새해는 우리 앞에 펼쳐져 있고 반드시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승리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쁨과 은혜의 삶을 살아도 부족 할 우리의 인생을 더 이상 방황과 부끄러움, 좌절과 분노, 미움과 원망 속에서 하나님께 대항하고 인생을 마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구원을 얻고 그 은혜로 사랑을 입은 성도들이 어떻게 광야와 같은 생활로 두눈을 부릅뜨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채로 눈을 감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낙인처럼 찍힌 애굽의 수치를 단번에 굴려버리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약하나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가 있으십니다. 어린 아이 같이 순수한 믿음으로 새해를 맞이합시다. 마음에 결심합시다
(찬양)
이젠 어두움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겠네
이제껏 우리를 따라 다녔던 애굽의 수치를 벗기실 하나님을 기대하면서 새해에는 오직 주님을 사랑하면서 믿음으로 순종하기를 꿈꾸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해를 시작하며(2018.01.07. 주일오전2)
다시 할례를 행하라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죽었는데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다만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음성을 청종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이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십 년 동안을 광야에서 헤매었더니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또 그 모든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머물며 낫기를 기다릴 때에”(수 5:1-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미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하나님이 요단강물을 마르게 하시며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원주민들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물같이 녹아 정신을 잃어버릴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찍이 없었던 큰 복을 내려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의 수치를 떠나가게 하시겠다고 하는 약속이었습니다. 애굽의 수치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땅에서 약 400년의 세월동안을 노예 살이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디에 가든지 그 애굽에서 노예 살이를 하였던 백성이라고 하는 수치와 불명예가 따라 다녔습니다. 우리는 일제 치하에서 36년을 살았는데도 그리고 해방된 지가 그렇게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수치들이 남아있습니다.
II. 길갈에서 할례를 행함
A. 하나님의 명령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에서의 생활은 아무 희망이 없는 짓밟히는 노예의 처지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수치스럽게도 광야생활 내내 따라다녔습니다. 하나님의 그 큰 능력에 의해 애굽을 탈출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어려움을 만나면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꿈꾸었고, 그곳에서 노예로 사는 것을 약속의 땅에서 주인으로 사는 것보다 더 원했습니다. 바로 이런 애굽의 수치를 모두 굴려버리겠다고 약속해 주시면서 하나님께서는 그 직전에 한 가지를 명령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할례를 행하라고 하는 명령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때에 하나님을 가장 순수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따르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전심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리하여 길갈에서 할례를 행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부싯돌로 칼을 만들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금속으로 만든 칼로 할례를 행하게 되면 파상풍 같은 위험에 노출되기 때문에 아마도 그런 후유증이 없을 돌멩이로 칼을 만들어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신 것 같습니다. 이미 할례를 받은 사람들을 또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끊어졌던 할례의 실행을 이 시점에서 다시 하라는 의미에서 ‘다시’라는 부사가 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탈출하였지만 거기에서 나온 군사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광야 길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오늘 할례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광야 길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아직 할례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출애굽 하자마자 광야에서 태어났다면 지금 나이 40세쯤 되었을 것이고, 요단을 건너기 직전에 출생했다면 이제 1살일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대를 잇게 하신 하나님의 자손들인데 할례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들은 할례 없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하나님께서는 다시 할례를 명하셨고, 그 명령을 따라 이 사람들에게 할례가 행해진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할례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시면서도 그렇게 40년 동안이나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되도록 이스라엘 자손들을 내버려 두셨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민수기 14장 30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고 한 그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입니다. 즉, 이 이스라엘 백성들 중 애굽에서 탈출한 사람들은 이미 일찍이 첫 번째 가나안 정탐에서부터 불신앙과 불순종과 하나님을 향한 반역으로 이미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들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약속을 위반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한 약속은 지키셨지만 그 후손들 중 일부가 하나님의 큰 구원의 은혜를 입고도 불순종과 불신앙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자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겠다고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이제야 할례를 명하셨을 것 같습니까? 아마도 광야에 태어난 세대들이 거기서 할례를 받았더라면 아마 할례를 받은 후에 불순종과 불신앙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조상들을 보면서 그 조상의 패역한 죄들을 그대로 따를까 염려하셨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광야에서 어느 정도는 조상들의 죄에 참여하였다고 할지라도 이제 여기에서 할례를 처음 받게 하심으로 그 광야에서의 쓰레기 같은 삶을 모두 내어버리고 완전히 새롭게 된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을 상속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이외에 모든 사람들이 죽은 것은 아니지만 거의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죽은 이후에 약속의 땅 앞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첫 사랑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했고, 이때 주님은 애굽의 모든 수치를 벗어버리게 할 것을 약속하시고 복을 내리셨습니다.
B. 할례의 의미
그러면 이런 하나님의 큰 복을 내리시기 전에 먼저 할례를 행하셨는데 그러면 그 할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할례는 창세기 17장 아브라함이 아직 아브라함이던 시절에 시작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믿음의 조상으로 부름을 받아 실질적으로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창세기 12장에서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이미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그사라의몸에서태어난아이가이스라엘의자손들을하늘의별처럼땅의모래알처럼많게할정통적인후손이될것을약속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와 아브라함은 불순종으로 서로 협력하여 불신앙으로 이스마엘을 첩의 몸에서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86세였습니다. 그 후로 13년이라는 세월동안 기록이 빠집니다. 아마도 이 13년이라는 세월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매우 깊은 영적인 침체의 시기였을 것이고, 하나님과의 어떠한 만남도 없는 시기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17장 1절에서 드디어 침체에 빠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에 대해서 게시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기대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언명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이것은 결국 아브라함의 문제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가 불순종하게 된 것은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지 아니한 불신앙 때문이었으며 그래서 결국은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된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불완전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다시 새로운 관계 속으로 그를 부르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증거로 17장 8절에서부터 9절 사이에 이제 꽃 같은 언약이 활짝 개화하는 것이 제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소 긴 이 내용을 짧게 요약하면 세 가지였습니다. “나는 내 후손의 하나님이 된다. 두 번째는 땅을 영원한 기업으로 주리라. 세 번째는 너와 후손은 나의 언약을 지키라.” 이것이 언약의 핵심이었습니다. 자, 나는 내 후손의 하나님이 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고 온 인류를 지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세계의 운명은 그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당연히 인류의 운명도 그분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독점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만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약속을 하십니다. 이것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백성들로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그 모든 하나님 안에 있는 유익들을 누리게 될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사실상 이것은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복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이 누리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성경 전체는 바로 이 약속이 어떻게 깨지고 다시 세워지고 실현되는지를 보여주는 드라마입니다. 구약은 옛날의 언약인데 그 옛날 언약도 바로 하나님이 너희의 하나님이 되겠다는 약속이며 신약은 이 약속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운 언약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신약이고, 이 두 개의 성경이 합쳐져 성경이 된 것입니다. 두 개의 약속이 합쳐져 성경이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땅을 영원한 기업으로 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스스로 “이 땅에 우거하는 나그네요”라고 고백을 할 정도로 그는 정처 없이 떠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후손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하였을 때 추수를 한 후 하나님께 올리던 원시 신앙 고백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가리켜 유리하던 아람 백성의 자손이라고 하나님 앞에 고백했습니다. 조상들이 이리저리 유리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이것은 바로 그들에게 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역사 속에 실현하시기 위해 아브라함 이후 약 700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정착하여 번영한 삶을 삶으로써 땅을 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이 실현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땅을 주시겠다고 하는 이 약속이 진실 된 것이었지만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사라집니다. 비록 1945년도 이후에 다시 이스라엘이 땅을 차지하기는 하겠지만 그것은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구속의 역사와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 땅을 이스라엘이 잃어버렸는데 하나님은 그 약속을 더 큰 땅을 통해서 실현하십니다. 그 땅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나안 땅이 기업이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영원한 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원한 기업이 되는 것이니 누구든지 그를 믿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사는 사람은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나그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의무를 요구했는데 이것은 바로 너와 후손이 내 언약을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언약하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을 사랑하고 순종함으로 당신이 주시는 계명을 따라 믿고 살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겠다는 언약의 표로서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11절에 모든 남자를 포피를 베어라고 명령을 하셨고, 아브라함 자신은 99세 때에 아브라함이라고 개명을 받은 후 할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할례라고 하는 것은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남자아이는 고추를 달고 태어납니다. 그때에 난지 8일 만에 이제 그 아이에게 할례를 행하게 됩니다. 그 어린 아이 고추는 모두 피부로 쌓여있습니다. 그 중에서 앞부분에 해당되는 것이 포피인데 이것을 난지 8일 만에 둘레를 잘라서 앞부분을 노출시키는 것입니다. 이게 왜 그렇게 중요하셔서 하나님이 기묘한 방법으로 인간의 그 특정한 신체에 이 언약의 표를 새기셨습니까? 아이 적에는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데 만약에 포피가 덮인 채 아이를 내버려 두게 되면 청소년으로 성장하면서 성징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많은 분비물이 나오게 됩니다. 그것이 생식기와 포피 사이에서 찌꺼기처럼 쌓여서 아주 독한 냄새가 나고 부패합니다. 그래서 피부의 발진과 같은 여러 가지 질병을 일으키고 세균의 감염을 가져오게 됩니다. 자, 이런 몸으로 만약에 결혼을 하여 아내와 성관계를 맺게 된다면 그 몸에 있는 모든 불결한 것들이 아내에게 전달되고 온갖 부인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태어난 아이에게 할례를 명하십니다. 물론 그 어린 아이의 포피를 베지 않고 내버려 두어도 성인이 되면 그 아이들의 대부분은 스스로 그 고추의 앞부분이 바깥으로 나오고 스킨이 뒤로 말리게 됩니다. 그것이 안 되는 사람들을 오늘날 포경수술이라고 해서 아예 의학적인 시술을 통해서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할례는 그것과는 좀 다른 의미입니다. 비록 그렇게 포피가 벗겨진 사람들도 모두 그 포피를 잘라내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할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할례는 어떤 의미에서는 부인병의 예방을 위한 위생학적인 고려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큰 의미인 신학적인 의미가 이 할례 속에 담겨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생식으로 번성하는 모든 후손들에게 이 표를 주게 하여 다음 사실에 대해서 자각하게 하신 것입니다. 첫째는 그 할례를 통하여 그가 하나님 앞에 구별된 백성이라고 하는 자기인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즉, 아이가 태어나서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그리고 그 할례를 행할 때 부모는 이 아이가 하나님께 바쳐진 아이이며 누구도 이 아이에게 주인 노릇을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가슴에 새깁니다. 그리고는 아이는 그 집안에 자라서 부모에게로 부터 교육을 받고 율법을 학습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 앞에 구별된 백성이며 모든 이 세상의 이방 백성과는 다른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번째 사실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바쳐진 사람이라는 표입니다. 구별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라는 표입니다.
우리도 식당에 가게 되면 예약을 하게 됩니다. 극장을 갈 때에는 예약이 거의 필수입니다. 자, 어느 식당에 예약을 해 놓습니다. 이미 한 몇 주 전에 예약을 해놓았습니다. 당일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문 바깥에서 장사진을 치고 식당에 들어가려고 애쓰지만 식당 주인은 절대로 비어있는 식탁을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아무에게나 내어주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우리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예약이라는 팻말이 붙어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약을 하는 순간, 그 식탁이 우리에게 바쳐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이것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예약을 해 놓고 사람들이 안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밖에 있는 사람도 못 들어가고 그 다음에 있는 사람은 한 시간씩, 두 시간씩 테이블을 비어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새로운 법이 만들어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나타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위약금을 물리는 것입니다. 이게 서양에서는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웬만한 식당에 예약을 하면 카드 번호를 요구합니다. 카드 번호를 불러 주면 그때까지 오도록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가다가 차가 막히면 다시 전화를 해서 “15분 정도 늦겠습니다.” 하는 것은 괜찮은데 나타나지 않으면 그 카드 번호에서 일정액을 인출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바쳐진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과 자손들에게 그 생식기에 행한 할례를 보면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아, 나는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다. 다른 것은 나에게 주인이 되겠다고 요구할 수 없다.’ 이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그 아이에게 목욕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면서 그 아이의 고추에 난 그 할례의 표를 보면서 부모는 그 아이를 하나님께 바쳐진 자손으로 길러야 할 교육의 책임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할례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 할례의 제도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담겨진 제도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소위 ‘실연식 교육방법’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real play입니다. 실제로 행하게 하사 그것으로서 자신이 가르치고자 하는 교육의 내용이 실제로 자신의 몸의 신체의 일부분에서 매일매일의 상황 속에서 경험되게 하시는 교육 방법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죽은 많은 사람들도 바로 이렇게 이런 의미를 가지고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순종과 불신앙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선언하시고 어떻게 보면 그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광야를 방황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때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모두 죽고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선 후 그들에게 다시 할례를 받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언약 백성들로서 정체성을 확인하게 하고, 그리고 자신들이 하나님께만 바쳐진 사람들이니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신 모든 복을 누리면서도 이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뜻에서 할례를 행하게 하셨고, 이 할례를 명령을 내리셔서 그들이 모두 순종하여 그 할례의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모든 수치를 굴려버리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의 마치 할례를 통하여 베어낸 포피를 벗어 버림 바와 같이 하나님이 이제까지 씌워져서 매달고 다녀야 했던 애굽의 수치를 굴려버리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III.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
자, 그러면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어떤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바로 우리에게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해줍니다. 할례는 옛 언약을 따라 우리가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이 되었다는 표입니다. 그러나 이 옛 언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고 이제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새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할례를 받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의 자녀들에게 위행학적인 고려 때문에 써컴(circumcision)을 산부인과에서 행하게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신학적인 의미나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그 일을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이 모든 할례의 우리를 향한 적용은 마음에 받는 할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 우리의 모든 율법의 요구를 감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는 우리는 더 이상 할례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고유하게 지니고 있었던 신학적인 의미는 더욱더 우리에게 강력하게 요구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아있으나 영원히 세상과 섞일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로 구별되어 하나님 앞에 살도록 부름 받은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오직 하나님께만 바쳐진 백성들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바쳐진 백성들이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에게 주인 노릇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요구를 매일매일 마주합니다. 그것도 우리 바깥에서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우리 자신 안에서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에게 번영과 성공의 노예가 되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부귀와 영화에게 자신을 바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또 다시 한번 어딘가에 바쳐질 수 없는 사람입니다. 배타적으로 하나님께만 바쳐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또 다른 그 무엇이 우리에게 주인 노릇 하도록, 하나님 이외에 또 다른 어떤 것이 우리의 인생의 목표가 되도록 우리는 그렇게 우리 자신을 허용할 수 없게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우리의 신앙으로 세례를 받게 한 우리 어린 아이들에게 우리는 책임을 지고 있고 교회 전체는 자신의 후손에 대하여 신앙적인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뿐만 아니라 우리 후손이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오직 하나님께만 바쳐진 삶을 살도록 그렇게 섬기고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불순종과 불신앙으로 점점 하나님을 멀리 떠나 이제 나라를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진심으로 이스라엘을 사랑하였던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점점 심판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눈물로 외칩니다. 예레미야 4장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의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이 선포를 눈물로 외칠 때 예레미야의 마음에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혹은 많은 사람들에게 행하던 할례의 기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할례를 행할 때 그 포피를 베어내기 전 그 포피 아래 쌓여있는 온갖 이물질과 구역질나는 냄새를 동반한 모든 불결한 물질들이 그 모든 생식기를 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그 포피를 베어내고 깨끗이 씻어냄으로써 이제 그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정결한 사람이 되었던 것처럼 이제 진정으로 다시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렇게 마음 가죽을 베어내라는 것입니다. 그 가죽이 마음에 덮여 있어 그 가죽에 부패와 탐욕과 정욕과 세상 욕심과 모든 악한 것들이 가득한 그 마음을 가지고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여호와와의 연합 속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마음의 가죽을 벗기고 그 모든 더러운 것을 씻어내라고 외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을 잃어버리고 이방 민족에게 다시 짓밟히고 노예로 끌려갈 처지에 이르게 되었을 때 민족을 사랑했던 예레미야의 마음은 칼로 찌르는 것과 같았습니다. 눈물로 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침으로써 오늘 이제 하나님의 언약의 후손인 우리가 옛 언약의 할례를 따라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으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우리들이 어떻게 마음 가죽을 베고 다시 그리스도께 속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한 해가 바뀌고 새로운 1년이 우리 앞에 있다고 해도 결국은 우리 앞에 펼쳐진 한 해를 살아가는 것은 우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마음의 지시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았는데 달력이 새로워졌다고 새로운 인생이 펼쳐질 것을 우리들이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은 하나님이 주시는 2018년이라고 하는 새로운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그 영토를 누리기 전 우리가 먼저 마음의 할례를 받은 후 한 해를 시작하여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한 해의 새로운 시작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지금 막 2018년과 2017년 사이에 가로놓인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과 같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막 요단강을 건넌 여러분들, 2018년의 문턱을 들어선 여러분들에게 한 해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이제껏 계속 되었던 여러분들의 모든 수치를 굴려 버리겠다고 약속 하십니다. 그 전에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요구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의 마음 가죽을 베어버리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아까워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당신의 아들까지도 십자가에 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위해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모든 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모자람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께 이미 바쳐진 사람답게 살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수치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세상의 자녀처럼 살고, 하나님의 사랑에 매였으면서도 이 세상의 성공과 번영에 대한 욕심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수치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불결을 안고 있는 우리의 가죽입니다. 이것을 베어버리고 여호와께 속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위대한 승리를 꿈꾸며 새로운 한 해를 살아서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여러분들에게는 일생의 잊혀 지지 않는 축복의 한 해가 될 수 있도록 그렇게 변화된 삶을 살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으십시오.
한 해를 시작하며(2018.01.14. 주일오전3)
여리고의 유월절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수 5:10-1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가나안 정복을 앞둔 때에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만 바쳐졌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할 사람들임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놀라운 축복의 말씀을 선언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운명처럼 따라다녔던 애굽의 수치를 굴려버리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명하셨는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그 여리고 평야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온 첫 번째 유월절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II. 여리고에서 지킨 유월절
A. 유월절의 의미
여리고에서 지킨 유월절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우선 유월절의 의미부터 우리들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유월’이라고 하는 것은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혹은 ‘건너뛴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유월절을 “the passover”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살이를 하던 때 하나님이 그들을 구출해 내기 위해 행하신 애굽의 열 개의 재앙과 관련이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준엄한 책망이 있고 난 후에야 그는 깨닫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할 사명을 자신의 의무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가 놀라운 웅변과 재능으로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야 할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가 누구입니까? 들어보지도 못한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라는 분이 그 백성을 놓아주라고 명령했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줄 바로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인구가 어림잡아서 250만에서 300만 명 된다고 치고, 그 중의 2/3가 노동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치면, 약 180만 명에서 200만 명 되는 노동력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온 땅과 하늘 위에 높으신 한 분 여호와이심을 보여주어 신앙심을 갖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애굽의 사람들에게 여호와가 애굽의 모든 신보다 뛰어나심으로 두려워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게 하시기 위해 애굽에서의 열대 재앙을 시작하셨습니다.
제일 먼저 애굽 백성들이 숭상하던 신들이 깃들어 있는 애굽의 나일강부터 시작해서 우물에서 떠오른 물까지 모두 피로 만드는 하나님의 재앙이 있었습니다. 이어서 개구리, 이, 파리, 악질, 독종, 등등의 재앙이 계속 상승적으로 이 애굽 땅에 내렸습니다. 그때마다 애굽 사람들은 큰 고통을 겪었고, 결국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 주라고 청원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행하신 아홉 번째 재앙은 흑암의 재앙이었습니다. 물리적으로 보자면 앞에 일어난 여덟 가지 재앙에 비해서 큰 해가 없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애굽 사람들의 마음에 커다란 공포를 심어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애굽 사람들이 모든 신들 중에 가장 뛰어나게 섬기고 두려워하는 신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태양신이었습니다. 그 태양이 한 번에 빛을 잃고 온 세상이 흑암 속으로 들어가게 되어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 태양신조차 이기지 못하는 여호와라는 신이 내린 어두움의 재앙 앞에서 여덟 번의 끔찍한 재앙을 회상하면서 그들은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 다가올 열 번째 재앙의 예고편에 불과했습니다. 드디어 이 재앙을 내린 후에야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줄 것을 아신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대로 이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것은 바로의 첫 아들로부터 모든 장군과 귀족들, 그리고 일반 백성들과 평민의 처음 낳은 아들, 심지어는 짐승들의 첫 새끼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들이 죽임을 당하는 재앙이었습니다. 그 재앙이 있었으니 어느 가정도 사람이 죽지 않은 재앙을 당하지 않는 가정이, 아들이 죽는 재앙을 당하지 아니한 가정이 한 가정도 없었고, 모든 가정이 탄식하고 통곡하며 장례의 슬픔에 잠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이 재앙을 피할 수단을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2장에서 이스라엘은 첫 번째 유월절을 지키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열 번째 장자가 죽는 재앙이 일어나기 직전에 계시되었습니다. 그 규례는 이러하였으니 그들이 문지방에다가 어린 양을 놓고 잡은 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면 죽음의 사자가 그 피를 바른 집을 넘어감으로써 죽음이 임하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 애굽에서의 죽음의 재앙은 보편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도 포함하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는 그 죽음을 피할, 다시 말해서 죽음이 유월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린양을 잡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인방에 칠한 후 여호와의 죽음의 사자가 자기의 집은 유월할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장점이나 어떤 공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언약을 실행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엘의 집을 넘어감으로 그 날이 유월의 날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이었는지 하나님은 이 날을 이스라엘의 1년의 첫 달로 삼으셨으니 지금 우리 달력으로 2월쯤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첫 번째 유월절에서 무교병과 쓴 나물을 함께 먹었는데 허리에 띠를 띠고 신을 단단히 신고, 그리고 지팡이를 든 채로 먹어야 했으니 이 유월절과 함께 드디어 그들이 지긋지긋하던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탈출하게 되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양의 피를 바른 문은 곧 하나님의 선택과 믿음을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 뜻 깊은 유월절을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기 직전에 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한 해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그 피로 우리의 마음에 발라 우리를 구속하신 은혜를 생각하며 한 해를 시작한다면 우리도 승리하는 한 해를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B. 가나안 정복과 유월절
그러면 가나안 정복과 유월절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출애굽기 12장에서 행한 첫 번째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홍해를 건너기 직전에 행한 예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요단강을 건너고 난 후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둔 채 여리고 평야에서 유월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의 수치를 멀리 굴려버리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이 있고 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지켰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한 믿음의 반응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유월절을 행하며 그들은 출애굽과 광야 생활에서 베푸셨던 하나님의 은총을 회상하며 자신들이 구속 받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다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1. 어린양 희생을 기림
제일 먼저 그들은 유월절의 어린양의 희생을 기렸습니다. 유월절의 모든 예식 중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강력하게 사로잡은 장면은 바로 어린양을 죽이는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기르던 양들을 어린 양을 가져다가 바로 문지방에 놓고 죽이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죽음을 넘어가게 하기 위하여 그 일과 아무 상관이 없는 어린 양이 문지방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의 집에서 기른 양들은 아마 주인을 알아보았을 것이고, 그리고 온순한 이 양은 주인이 이끄는 대로 문지방에 와 목을 드리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 어린양을 죽여 모든 피를 흘렸습니다. 그 피를 인방과 설주에 발랐고,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죽어야 하는데 어린 양이 대신 죽음으로 자신들을 살게 하셨다는 현실이었습니다.
어린양은 그렇게 그 집안에 죽음을 보게 하지 않기 위하여 대신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 구속의 예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율법의 요구대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의 문에 바르심으로 이제는 죄와 사망의 법이 물러가고, 생명과 성령의 법이 우리를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생명이 되어 주셨습니다. 하나님 없는 번영과 신앙을 떠난 성공으로 가슴이 뛰는 한 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예수 없는 성공과 하나님 떠난 번영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동행할 아름다운 꿈을 구며 신앙에 가슴이 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죄로 죽을 우리들을 대신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공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영원 전에 우리를 선택하고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번영한 가나안의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바로 그렇게 유월절 예식을 행함으로 과거에 하나님이 어떤 사랑으로 자신들을 구원하여 여기까지 인도하셨는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린양을 죽여서까지 자신들을 구원하사 죽음을 보지 않게 하신 하나님의 그 큰 은혜를 찬양했고 그 재앙 때문에 결국은 애굽에서 탈출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이르게 된 것을 생각하며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확인하였던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한 해를 이제 것까지 운명처럼 따라 다녔던 애굽의 수치를 굴려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양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그 피로 우리를 구원한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이 여기에 이렇게 살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며 은혜 속에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살게 하시는 소명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오늘도 그런 놀라운 은혜로 우리를 기다리시고 또 우리와 함께 동행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니 올 한 해를 십자가의 감격으로 시작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그 땅의 소산을 먹음
두 번째는 그 땅의 소산을 먹은 것입니다. 유월절 지난 이튿날 그들이 그 땅의 소산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만나가 그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곡식이 다 떨어졌을 때 하나님은 예전에도 보여주신 적이 없고, 이후로도 다시 보여주신 적이 없는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먹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만나’였습니다. 아침마다 들판에 가득 내리는 그 ‘만나’로 이스라엘 백성은 40년의 세월을 굶어 죽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언제 만나가 내렸는지 아십니까? 매일 새벽에 만나는 내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할 때만 만나가 내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순종하고 대적할 때에도 하나님은 만나를 주셨으니 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대적하였던 그 모든 육체의 기력도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를 먹고 낸 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을 숭배하시고, 또 이방의 여인들과 간음을 한 그 이튿날 아침에도 어김없이 만나는 내렸으니 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당신의 신실하심을 따라 만나를 내려주셨고, 그 만나는 곧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함의 표현이었습니다.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여리고 평지에서 정말 오랜만에 그 땅에서 난 곡식으로 양식을 삼았습니다. 그러자 그 다음날부터 만나는 그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매일 광야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식탁을 차리시는 하나님을 만났고, 그런 하나님의 세심한 보살피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까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신 공급과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호세아 선지자를 생각하게 됩니다. 음란한 여자 고멜을 취하여 장가를 들게 하신 하나님은 선지자의 가슴 아픈 결혼 생활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향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을 알게 했습니다. 수시로 집을 뛰쳐나가 외간 남자와 간음하고 애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새끼를 배어가지고 돌아오는 고멜을 끝까지 눈물로 사랑한 사람이 바로 호세아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끊임없이 우상을 숭배함으로 영적으로 간음하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눈물 어린 사랑이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아내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눈물로 이렇게 말합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호 2:8) 라고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그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이 공급해 주신 만나가 끊어지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약속대로 그 땅의 소산을 먹게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난 한 해 어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원망과 불평,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지 않는 한 해였을지 모르나 생각을 바꿔놓고 한 해를 회상해 보면 언제나 하나님은 신실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미끄러지고 범죄하고 하나님을 원망할 때조차도 그럴 수 있는 기력은 하나님이 주신 양식을 먹고 낸 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육체를 위해서만 양식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마치 한술의 밥을 떠서 굶주린 아이에게 먹이려고 할라치면 아이는 이를 앙다물고 고개를 흔들며 손으로 엄마의 수저를 쳐버립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매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떠먹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그 말씀과 하나님이 주신 육신의 양식의 공급에 감사하지 않고 살았던 날이 많지 않습니까?
2018년이라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같은 시간이 펼쳐졌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던 2017년의 부끄러운 수치를 계속 짊어지고 수치스러운 한 해를 살 것인지, 이 마음의 할례를 받고 이 모든 것을 떨쳐버린 후 새로운 인생을 살지는 전적으로 여러분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를 찾고 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후히 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그 땅의 소산을 먹을 때 그들은 무교병을 먹도록 지시되었습니다. 이것은 누룩이 없이 구운 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반적으로 이런 빵을 먹지 않습니다. 누룩을 넣고 구운 유교병이 그들의 주식이었고 이것이 소아와 건강에 매우 도움이 됩니다. 따라서 누룩이 없는 빵은 두 가지를 의미하는데 거짓이 없는 참된 교훈과 부도덕함이 없는 참된 생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2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누룩이 없는 빵은 거짓이 없는 참된 교훈과 선한 양심에서 나오는 깨끗한 참된 생활입니다. 그들은 예외적으로 그날 누룩이 없는 그 무교병을 먹으면서 마음속에 깊이 다짐했을 것입니다. 조상들은 자신들의 죄와 불순종의 누룩 때문에 광야에서 이 약속의 땅을 보지 못하고 모두 죽었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 온 즉 이제는 거짓이 없는 참된 진리를 따라 선한 양심을 좇아 참된 삶을 살아가자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 해를 시작하며 다짐하여야 할 바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누룩이 없는 빵을 먹듯이 순전한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한 해가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이 유월절에 볶은 곡식을 먹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불에다가 태운 곡식을 먹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고난과 연단을 기억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성경은 유월절 이튿날 무교병과 함께 이렇게 불에 탄 곡식을 먹었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불에 그을린 검게 탄 곡식들을 먹으며 애굽에서의 고난과 광야에서의 연단을 생각했습니다. 때로는 죄와 불순종 때문에 진노하사 하나님이 내린 쓰라린 징계와 그렇지 않았을 때에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누리면서도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소명대로 살게 하기 위하여 주신 연단이 있었습니다. 모진 연단을 받으며 신앙을 돈독해 가고 삶의 모든 동기를 정화시켜 주신 하나님이 연단시킨 세월들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볶은 곡식을 먹으며 한편으로는 이제는 다시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결심을 하였을 것이며 또 하나는 그렇게 쓰디쓴 세월을 고난과 연단 속에서 지켜주시는 우리 하나님을 찬송하였을 것입니다.
자, 한 해를 시작하면서 혹시나 하는 요행으로 한 해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서도 비트코인의 광풍에 날밤을 세우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꿈 깨십시오. 설령 백 번 양보해서 2년 후에 비트코인이 만 불이 된다고 할지라도 그 소득은 그리스도인이 취할 소득이 아닙니다.
(찬양)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정확하게 말하면 불에 탄 그 거친 곡식을 씹으며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애굽에서 받은 수치와 광야의 그 심한 연단, 그 고난의 세월, 그 속에서도 자기를 버리지 아니하고 지켜주셔서 그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오게 하신 하나님의 찬송했을 것입니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여러분도 이 볶은 곡식, 정확하게 말하면 불에 그을어 탄 곡식을 씹어야 합니다. 꽃길만 걸어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은 꽃길을 걸어가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때로는 쓰러지고 넘어지고, 때로는 칼과 칼이 맞부딪치는 전쟁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깃발을 날리며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살기 위해 이 어두운 세상 위에 빛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성공, 신앙을 버린 번영, 결국 그것을 추구하다가 도달하는 마지막은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원망하며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바로 그 조상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순종하다가 눈을 부릅뜨고 죽어간 그 광야의 세대들이 그들의 조상입니다. 그러기엔 우리들이 살아온 삶, 주님을 믿으며 살아온 신앙이 아깝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절대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한 우리는 살아가야 하고 살아가야 하는 한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분과 함께 동행하는 것 이외에 어떤 희망도 없습니다. 그래서 한 해를 들어서는 이때에 다시 한 번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여러분들을 구원하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셨는지를 회상하며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며 한 해를 맞이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유월절은 어린양 예수의 죽음을 바라본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에는 어린 양으로 죽음의 사자가 유월하는 임시방편의 복을 받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의 마음에 피를 발라 구원하신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부름 받았음을 기억하십시오. 영광스러운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그들은 그렇게 하나님이 자기들을 어떻게 구속하고 당신의 자녀를 삼으셨는지를 기렸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의미에 자신들을 붙들어 매고 하나님의 소명에 자신의 마음을 단단히 묶었습니다.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젖과 꿀에 심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해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경륜을 생각하며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발하는 민족으로 살 다짐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그들은 그 몸에 할례를 행하였고, 그 할례는 곧 마음의 할례였으며, 유월절을 지킴으로 자신들이 구속의 은혜에 참여한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 때문임을 가슴에 새겨 더욱 주님을 붙들 결심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이 어떤 사랑으로 여러분들을 구원하셔서 여기까지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연단하고 또 거룩하게 만들어 오셨는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의 은혜를 생각하며 그 십자가의 감격으로 한 해를 시작하셔야 합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음으로 그 더러운 마음의 죄의 가죽들을 벗겨내고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가치를 생각하며 그 소명을 따라 살 결심을 하는 여러분들이 되신다면 올 한해 이전까지 있었던 모든 애굽의 수치를 굴려버리시고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한 해를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삶을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한 해를 시작하며(2018.01.14. 주일오전3)
한 해를 시작하며(2018.01.21. 주일오전4)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수 5:13-1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때에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들 중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을 할례 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께만 바쳐진 사람들이고, 하나님께만 헌신하며 살아야 할 족속임을 일깨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후에 전무후무한 복을 이스라엘에게 선언하십니다. 운명처럼 그들을 따라 다니던 애굽의 수치를 굴려 버리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 위대한 약속을 받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써 그들은 유월절 절기를 지키게 됩니다. 어린양을 잡아 피를 흘리고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으며 그들은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자신들을 애굽에서 구출하여 여기까지 인도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는지를 회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교병을 먹으며 순전한 신학적인 생활과 그리고 도덕적인 생활에 대해 도전을 받았으며, 볶은 곡식을 먹으며 광야에서의 그 수많은 연단의 세월들을 상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큰 복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고 드디어 6장부터 본격적인 가나안 정복 전쟁이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좀 뜬금없이 불쑥 튀어나온 것처럼 앞뒤 문맥에 안 맞는 것처럼 여기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전해주고 있고, 또 가나안 정복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그러하였습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풀어 보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II. 하나님의 사자를 만남
A. 그는 누구인가?
이 기록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는 누구였을까요? 오늘 성경에는 ‘칼을 빼어든 한 사람’이라고 나오고, 또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라고 나옵니다. 성경에는 이 군대 대장과 같은 의미로 군대장관이라는 표현이 약 아홉 번쯤 등장을 합니다. 창세기 21장 22절, 사사기 4장 2절 등에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사람인 군대의 지도자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여호수아가 만난 이 여호와의 군대대장은 그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를 만났을 때 여호와는 그가 아군인지 혹은 적군인지 물었던 것입니다. 이 군대대장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보낸 천사라고 해석을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 자신이라고 봅니다. 나는 두 번째 해석이 훨씬 더 올바른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구약 시대에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계시해 주십니다. 타락한 이후로 모든 인간은 눈이 어두워져 하나님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알려주시지 않으면 그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아야 할지 하나님이 누구이고, 자신들이 누구이고, 이 세상이 어떤 의미가 있는 세계인지를 몰랐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위한 계시로써 특별히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알려주시는데 이것을 특별 계시라고 합니다. ‘특별하다’라고 하는 말은 계시를 전달하는 방편이 초자연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아무나 접근할 수 없다는 점에서 특별 계시입니다. 즉, 모든 인간의 본성, 역사, 마음의 구조, 자연 세계에 드러난 하나님의 존재의 흔적 같은 것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접근이 가능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일반 계시라고 불립니다. 그래서 이것은 특별 계시라고 불리우는데 이때에는 아직 성경이 없거나 완성되지 않은 때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때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직접 말씀하시거나 그 말씀을 기록하게 하심으로 당신의 구원의 계시를 전달하셨고, 큰 이적을 행하심으로써 사람들에게 구원의 지식을 전달받게 하셨습니다. 이것보다도 더 월등하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당신의 뜻을 보이시는 것인데 이것을 ‘현현’이라고 합니다. 혹은 ‘신현’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는 전혀 다른 존재의 양식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두 눈으로 보거나 혹은 만질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차원으로 나타나시지 않으면 인간과 소통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때로 하나님은 천사의 모습으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는데 이것을 현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주의 사자, 곧 천사는 출애굽기 23장에 의하면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그야말로 천사인 존재를 의미하기도 하고, 창세기 16장에 의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 자신과 동일시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현현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오늘 여호수아가 만난 한 사람, 그리고 여호와의 군대 대장은 천사가 아닌 곧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론을 지지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매우 중요한 성경의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산으로 올라갔고, 그리고 거기에는 아론과 미리암을 비롯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올라간 지가 오래 되어도 내려오지 않자 이 백성들은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를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든 것이니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금송아지 사건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행태에 대해 깊이 마음 아파하셨으며 진노하셨습니다. 마땅히 하나님이 한 번에 이스라엘을 모두 쓸어버리실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언약 관계에 있었으니 이스라엘이 언약을 파기하면 당연히 하나님도 그 언약을 지켜야 할 의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이상의 것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큰 범죄가 행해졌을 때에 조용히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이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면서 33장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히 슬퍼하며 단장품을 제거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세는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이 선언이 있고 나서 비로소 마치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하나님이 거기 없는데 그까짓 땅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하는 마음으로 통회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세는 이때 용서를 빌며 하나님께 이들을 용서해 주시고 다시 은혜를 베풀어 주시도록 간곡히 목숨을 걸고 매달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마음을 푸시고 창세기 33장 14절에서 “내가 친히 가리라 너를 편하게 하리라”고 선언을 하십니다.
말씀드리려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동행하여 가나안 땅을 가겠다고 말씀하셨지 당신의 사자를 보내어 이끌겠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당연히 오늘 싸울 준비를 하고 나타난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라고 하는 사람의 모습은 곧 하나님의 현현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군대 대장이면 많은 군사들을 거닐어야 하는데 그는 홀로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이것은 하나님의 천사나 사자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현현이라고 해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B. 왜 나타나셨나?
그러면 궁금한 것은 그가 그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정확하게 말하면 여호와께서 왜 나타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여호와는 종종 ‘만군의 여호와’, ‘야훼 쩨바우트’로 묘사됩니다. 이것은 많은 군대를 거느리신 여호와를 뜻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구약 성경은 용사이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전쟁의 기록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음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고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이 세계를 굴러가지 않게 하려는 대적하는 세력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 집단적이고 체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나라를 토벌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이 용사가 되어 이스라엘과 함께 싸우셨으니 때로는 이스라엘이 이 주권을 거스를 때에는 이스라엘을 대항하여 그들을 치시기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께 반역한 이 세상의 토벌군의 사령관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단번에 이 반역하는 세력들을 독특한 방식으로 무너뜨리고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을 사회를 집단적으로 일으키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창과 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보여주셨으니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사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새 생명을 주셔서 그렇게 다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을 홀로 보내시지 않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함께 하신 하나님이시지만 가나안 정복의 첫 번째 전투를 앞두고 하나님 자신이 직접 나타나셔서 당신 자신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이미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요단강 물이 마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는 것을 보았고, 그 소식을 들은 가나안 원주민들은 마음이 물같이 녹아 내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기적으로 만족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에게 당신이 친히 동행하시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목사들이, 목회자들이 사역지를 찾아갈 때에 담임 목사로서 가장 힘들어 하는 사역지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교인이 많은 곳, 적은 곳, 혹은 일이 많은 곳, 적은 곳, 그런 곳이 아닙니다. 물러난 전임 목사님이 혹은 돌아가신 전임 목사님이 워낙 탁월하게 목회를 하시던 교회입니다. 웬만큼 잘해서는 빛이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의 전임자는 불세출의 지도자였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 말하였을 뿐만 아니라 카리스마에 있어 그를 능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으니 그는 이후의 모든 선지자들의 비조였던 것입니다. 그런 모세의 지도력 아래 광야 40년 세월을 겪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수아라고 하는 사람이 눈에 차기나 하였겠습니까? 아마 매우 탁월한 담임 목사의 지도력 그 뒤에 신출내기 부목사가 온 것처럼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안하고 그리고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러가셨습니다. 그리고 이 연약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제는 기적이 아니라 믿음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이제 정복을 위한 가나안 전쟁을 앞두고 지도자로서 두려움과 떨림이 없었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함께 하신 것처럼 동일하게 여호수아와 함께 할 것이라는 확신을 주시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을 힘 있게 인도하시기 위하여 이 사건을 만드신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이 사건을 통해 여호수아로 하여금 전심으로 당신을 의지하며 또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하는 가운데 백성들을 이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어디서 많이 들었던 말씀 같지 않습니까? 마치 호렙산에서 불붙고 있으나 타지 않는 가시나무 떨기 사이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소명을 받았던 모세의 그 소명 사건의 데자뷰처럼 느껴집니다. 출애굽기 3장 5절에서 완고하기 짝이 없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입니다.
여호수아가 기록을 통해서든 혹은 전승을 통해서든 혹은 모세 자신의 간증을 통해서건 이 자신의 전임자의 소명 사건에 대하여 듣지 못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똑같이 나타나셔서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러했던 것처럼 여호수아도 그 발에서 신을 벗으면서 얼마나 떨렸겠습니까? 하나님이 자신을 거의 모세와 같은 수준으로 대해주시는 것을 지금 바로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하신 것은 바로 거기에 임재하신 하나님이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었기 때문이었고,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실 가나안 땅이 거룩한 곳임을 상기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후 젖과 꿀이 무진장으로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인데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이유는 먹고, 마시고, 흥청망청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 아님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열방에 보여줄 영광스러운 소명지 임을 다시금 확신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렇게 모세와 똑같은 소명의 체험을 가나안 정복에 앞서서 경험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이 연약하지만 승리를 이룰 수 있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부름을 받았다고 하는 것과 또한 하나님께서 어떤 처지에서든지 자신과 함께 하셔서 당신의 위대한 언약을 이룰 것을 가슴에 새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 이제 한해는 이미 시작되었고, 2018년이 여러분들의 눈앞에 광야처럼, 여러분 앞에 새로운 땅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그 땅이 눈을 부릅뜨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죽어가야 했던 고난의 광야가 될 것이냐, 혹은 젖과 꿀이 흘러 부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땅이 될 것이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여러분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한 해를 여러분들에게 살 기회를 주신 것은 당신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함이고 여러분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을 펼치기 위함이니 하나님은 간절히 여러분들이 올 한 해를 승리하며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자, 우리 앞에 펼쳐진 2018년이 그냥 고난의 광야가 될 것인가 혹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가나안 땅이 될 것인가, 여러분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습니다. 이제 6장부터 파죽지세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며 전개되는 이 위대한 전쟁의 승리의 서막은 이렇게 하나님이 은밀히 여호수아를 만나 주심으로 시작이 됩니다.
한 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알 수 없고 또 무슨 일을 겪게 될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이 동행하신다면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반드시 이길 것이요, 승리하고 말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보십시오. 이 위대한 가나안 정복에 앞서 여호수아는 조용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불세출의 지도자였던 전임자 모세가 경험했던 똑같은 소명의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 번 자기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붙들고 믿음으로 이 위대한 역사의 한 장으로 쓰기로 다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한 해를 시작하며 거룩한 주님을 깊이 만나고 그 분이 주신 말씀을 붙들고 한 해를 산다면 2018년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올 한 해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며 살게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해를 시작하며(2018.01.28. 주일오전5)
승리를 앞둔 때
“일곱째 날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 성을 일곱 번 도니 그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 날뿐이었더라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 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하니라”(수 6:15-1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깊이 만나 주셨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정복의 전쟁이 이스라엘만 보내는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용사가 되어 그들과 함께 싸우심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땅이었고, 이스라엘에게는 거룩한 소명지로 주어질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탐욕 때문에 전쟁을 하지만 이스라엘은 사명 때문에 전투를 하여야 했습니다.
참고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단강 도하에 이어진 경로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들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왔고, 첫 번째 도착한 곳이 길갈이었습니다. 거기에서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을 듣게 됩니다. 애굽의 수치를 굴려버렸다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거기서 여리고 땅이 보이는 곳에서 유월절을 지키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리고성을 공격하고 점령한 후 아이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다시 공격하여 점령을 합니다. 그리고는 가나안 땅 북부 지역인 벧엘로 공격하여 거기를 점령함으로 위대한 가나안 정복의 역사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II. 승리를 앞둔 때
A. 순종을 시험하심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들에게 승리를 약속하셨고 지금은 승리를 앞둔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승리를 앞둔 때에 이스라엘을 향해 세 가지를 하셨습니다. 첫째는 순종을 시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 정복에 있어서 첫 번째 전투지인 여리고성을 앞에 두고 작전 명령을 시달하셨습니다. 여리고성은 가나안 땅의 성들 중 결코 작은 성이 아니었습니다. 그 전투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전투였고, 거기에서 반드시 승리를 거두어야 하는 전투였습니다. 시달된 작전 명령이 황당하기 그지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하시기를 군대가 앞서고,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일곱 명이 불고, 그 뒤에 법궤가 가고, 그 뒤에 다시 군사들이 가고, 아마도 그 백성들이 그 뒤를 따르며 성을 매일 한 바퀴씩 도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만약 성벽 위에서 그들을 향해 공격을 한다면 큰 피해를 볼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전투 준비도 명령하지 않으시고 그저 여리고성을 돌게 하셨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어 마음이 강퍅하던 시절에 모세를 통해 하나님이 이 명령을 내렸으면 어땠을 것 같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의하거나 불순종하였을 것이고, 심지어 모세를 대적하고 하나님께 대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할례를 받고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있던 때에 이스라엘은 어린 아이처럼 순전히 하나님을 믿음으로 따르던 시기였습니다. 불합리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이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받들며 그들은 조용히 양각 나팔소리와 함께 여리고성을 매일 한 바퀴씩 돌았던 것입니다.
사실 민수기 10장에 보면 이미 이스라엘은 커다란 은 나팔이 있었습니다. 이 나팔은 이스라엘 모든 회중을 소집하거나, 혹은 행군의 출발을 알리거나, 혹은 적들을 치러 나아갈 때에 부는 나팔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랍게도 이 은으로 번쩍이는 큰 나팔을 불게 하시지를 않고 짐승의 뼈로 만든 양각 나팔을 불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조국 교회 한 모퉁이에서 가냘프게 설교하는 한 목회자의 외침이 무슨 큰 효력을 발휘하겠습니까? 완고하기 짝이 없는 외국 사람들에게 서툰 언어로 복음을 전할 때 그 결과가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성도들이 마음이 차갑게 식은 동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이 집, 저 집에 초인종을 누를 때 그 성과는 얼마나 미미합니까? 그러나 결국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이 땅에선 세상 나라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우리 주님의 방법입니다. 가냘 퍼 보이는 목회자의 외침을 통해 별로 효과가 없어 보이는 선교사들의 설교를 통해, 성도들의 전도를 통해 바로 이 양각 나팔소리같이 울려 퍼져 성을 무너뜨리듯이 그렇게 세상의 나라를 무너뜨리고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는 것입니다.
나팔은 일곱 개였지만 그 소리는 한 가지였으니 이는 사람마다 여러 사람이 복음을 전해도 복음은 하나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온 백성은 그 양각 나팔소리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청종하며 묵묵히 믿음으로 하나님의 이 불합리해 보이는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대열 중앙에는 법궤가 있었습니다. 길이는 1.2m, 너비와 높이는 각각 70cm, 어린 아이의 관 정도의 크기라고 보시면 됩니다. 테두리는 금으로 둘러져 있고 뚜껑은 금으로 되어 있어서 두 천사가 마주보는 날개를 가진 형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시은 소, 은혜를 베푸는 곳이라고 불렀고, 혹은 긍휼의 자리라고 일컬어졌습니다. 이 법궤는 지성소에 있었고 거기서 1년에 한 차례씩 대제사장이 하나님을 뵈옵는 곳이었습니다.
이 법궤 안에는 세 가지의 물건이 들어있었습니다. 첫째는 모세가 쓰던 지팡이(성경에는 두 돌판으로 나와있음)였습니다. 모세가 바로 그 지팡이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고, 홍해를 건너고, 광야 40년을 인도하던 지팡이였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물건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였습니다. 이것은 민수기 16장과 17장에 일어났던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고라와 그 도당들은 모세의 리더십에 도전했고, 특히 제사장직을 독점하고 있는 아론의 가문에 도전장을 내었습니다. 너희가 뭐가 잘났기에 너희 집안만 제사장 노릇을 해먹느냐 하는 반항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매우 악하게 보셨습니다. 그리고 고라와 반항하고 모세의 리더십에 도전하고 제사장직에 도전하는 그 악한 일당들을 전대미문의 방법으로 심판하셨습니다. 그 족속들이 진치고 있는 그 땅에 지진이 일어나 모든 족속을 다 쓸어 넣어버리고 지면이 입을 닫아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각 지파에서 지팡이를 가져오게 하시고, 그 중에서 유일하게 아론의 지팡이에서만 싹이 나게 하심으로 아론의 가문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제사장으로 선택되었음을 입증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물건이 만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을 때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와서 그 땅의 소산을 먹을 때까지 매일 새벽마다 내려 온 이스라엘을 먹여 살린 만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능력, 선택, 돌보심을 의미하는 이 세 가지 물건이 법궤 속에 있었으니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 대열의 중앙에 있었으니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 양각 나팔은 신약에서 외면적으로는 어리석은 것처럼 울려 퍼지는 복음 전도를 예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 말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그렇게 살아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시기에 앞서 첫 열매로서 여리고성 전투를 앞둔 때에 이스라엘의 순종을 시험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놀랍게도 그 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광야의 조상들의 때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린 아이처럼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주님을 따랐습니다.
지난 한해 우리의 실패의 대부분은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고 불순종의 길을 갔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못된 것을 선택했고, 혹은 그릇된 줄을 알면서도 어리석게도 불순종의 길로 이끌려갔습니다. 만약 올 한해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한다면 지난해까지 계속되었던 이 불순종의 모진 밧줄을 끊어내야 합니다. 지난해에는 눈에 보이는 것대로 살았다면 올 한 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며 살겠다는 결심을 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자비를 명령하심
두 번째는 자비를 명령하셨습니다. 여호수아를 통해 하나님은 여리고성을 공격하되 거기서 라합과 그 집안의 식구들을 내게 자비를 베풀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여호수아 2장에 나오는 여리고성에 정탐을 간 이스라엘의 두 군사와 관련이 있는 사건입니다. 외모와 얼굴 생김새가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성에 정탐하러 가자마자 발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군대의 추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기생 라합의 집에 숨어들게 되고, 라합은 놀랍게도 이 사람들을 감추어 줍니다. 그런데 라합의 이 놀라운 행동이 믿음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거기에 가서 여호와의 신앙을 전파한 선교사는 아직 없었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소문을 통해서 풍문으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해내시고, 홍해를 갈라 그들을 건너게 하시고, 광야에서 수많은 왕들과의 싸움에서 그들을 격파하게 하시고, 만나를 먹이시고, 급기야 요단강 물을 마르게 하시며 이스라엘을 건너게 한 사건들을 들으면서 그의 마음속에 신앙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제껏 자신이 믿던 종교와 신들이 자기를 구할 수 없고, 자기 인생의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려준 것입니다. 이것은 이 사건을 통해서 여호수아는 라합의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고, 그때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을 공격할 때에 언약 백성의 신실함으로 라합과 그 가족들을 자비롭게 대해주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주님께 피하는 자는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어주시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질주하는 정복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그늘에 피하는 하잘 것 없는 기생인 이방 여인에게까지 자비를 베푸셨는데 이는 신약 시대의 복음이 혈통과 신분을 넘어서 모든 만민에게 전해질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주님과 함께 하며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삶입니다. 한번 눈을 들어 희어져 추수하게 된 세상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들이 영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모든 관계가 깨지고 인생을 도저히 살아갈 힘이 없어서 고통하고 있는 가족과 이웃을 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들은 때때로 그렇게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서 피하고자 쾌락에 빠지기도 하고, 그리고 가치 없는 허탄한 일들에 골몰하며 인생의 시름을 잊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은 어느 곳에서도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라합은 비록 기생이었으나 이런 환란의 때에 두려움으로 마음이 물같이 녹았던 때에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로 피할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신앙을 어여삐 여기사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비를 베풀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그런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무너져 가는 이 세상 나라에서 추수되어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옮겨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주위에는 이런 속에서 고통하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난 한 해를 여러분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자기 사랑에 빠져서 자신 만에 몰두하며 살고 그것도 믿음대로 바로 살지 못하여 그릇된 자기 사랑 때문에 인생을 허비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사랑하는 가족에게, 눈물 흘리는 지체들에게 삶의 갈 길을 잃어버리고 살 힘을 상실한 이웃들을 돌아볼 자비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올 한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 힘을 얻어 이웃들에게 그렇게 자비를 베푼다면 하나님이 올 한 해 여러분들의 삶에 얼마나 복을 많이 주시겠습니까? 어차피 그리스도인의 삶은 강물처럼 흘러가며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하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지난 한해 자기 사랑에 빠져 살다가 하나님의 복을 잃어버렸다면 올 한 해 은혜를 많이 받고 가엾은 여러분들의 가족과 교회의 지체들 삶의 핏기를 잃어버린 여러분들의 이웃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믿음으로 살아 복 받는 한 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탐욕을 경계하심
마지막 세 번째는 탐욕을 경계하셨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 말입니다. 가나안 정복, 특히 큰 성 여리고 정복을 앞두고 하나님은 탐욕을 경계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먼저 여리고를 점령하기 전 할례를 받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이 땅에 살고 있으나 이방 민족과는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들이며 이미 하나님께만 바쳐진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가슴에, 그들의 신체의 표에 새겨 주셨던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지만 그것은 결코 그들에게 탐욕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발달한 농경문화를 가진 여리고성에 들어가는 것은 북한에 있는 시골 주민이 뉴욕 한복판에 서는 것 같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 때문에 하나님을 덜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일들은 왜 일어납니까? 그것은 결국 탐욕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공하고 번영하게 하시면 그 받은 것 때문에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안 주시면 없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니 좋은 것이 있어도 결국은 그 사람의 불신앙으로 나쁘게 되고 나쁜 것이 있어도 나쁜 것 때문에 또 나쁘게 되는 것이 신앙을 떠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게 하라” 디모데전서 6장 17절의 말씀입니다.
성공과 번영이 우리의 삶의 목표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이 이 땅에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이 주신 사명을 이루며 살게 하시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후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하나님의 경계의 말씀을 잊어버렸습니다. 결국 그들의 멸망이 탐욕 때문이었음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신의 책 22장 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네 두 눈과 마음은 탐욕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압박과 포악을 행하려 할 뿐이니라” 이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윤택과 성공은 그 자체를 탐닉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리라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윤택한 삶이 필요하고 끊임없는 패배보다는 성공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탐욕을 품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번영과 윤택, 성공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구원해 주신 그 사명을 이루는데 이것을 쓸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싸움은 번영과 누림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어두운 이 세상에서 빛으로 하나님을 거스르는 세대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으로 살기 위한 거대한 영적인 전쟁인 것입니다.
지난해의 실패를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실패의 대부분은 불순종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탐욕 때문이었습니다. 비트코인이라고 하는 것이 나와서 광풍을 일으켰으니 5-60대 아저씨부터 시작해서, 고등학교 중학교 다니는 애들까지 거기에 돈을 걸고 밤새도록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진풍경이 연출되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일본에서 그 가상 화폐가 5700억 원어치 해킹을 당해 사라졌습니다. 물론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거기에 덤벼들어서 떼돈을 번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자기에게도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고방식이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익을 본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리고 망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탐욕입니다. 노동의 대가 없이 투기로 순식간에 돈을 움키고자 하는 그 과도한 탐욕이 바로 이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지난해에 실패한 것이 우리의 하나님을 떠난 탐욕 때문이었다면 그것과 단절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복을 받는 한 해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주는 마지막 메시지는 너무나 단순한 것입니다. 탐욕이 어디에서 생겨납니까?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탐욕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에게 간절한 소원이 있다면 이런 것
(찬양)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탐욕으로 실패했던 삶을 깊이 회개하고 올 한해는 여러분들의 마음의 시선을 하나님의 보좌에 고정하고 순전한 삶을 살아 복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이 올 해도 우리에게 한 해를 주셨습니다. 올 한 해는 작년에 죽어간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한 해입니다. 그들에게는 허락이 안 되었고, 우리에게는 허락이 되었습니다. 불순종으로 지난해에 고통 했으니 이제는 순종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기 사랑에 빠져 가족과 지체, 이웃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이제는 자비를 베풀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탐욕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리고 방황했으니 이제는 그 모든 탐욕을 버리고 정갈한 마음으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된다면 올 한 해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삶에 한없는 복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해를 시작하며 (2018.2.4 주일오전 6)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 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여호수아가 그 땅을 정탐한 두 사람에게 이르되 그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라 하매 정탐한 젊은이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의 부모와 그의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고 또 그의 친족도 다 이끌어 내어 그들을 이스라엘의 진영 밖에 두고 무리가 그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을 불로 사르고 은금과 동철 기구는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더라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수 6:20-27)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여리고 전투를 위한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매일 한 차례씩 여리고성을 6일 동안 돌았습니다. 제 7일에는 일곱 바퀴를 돌고, 마지막에 제사장들의 양각 나팔이 울려 퍼졌습니다. 그 소리에 맞춰서 온 백성은 소리를 질렀고, 놀랍게도 여리고성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저는 어느 공학자로부터 이 기적의 사건이 소리 공학에서 해법을 찾을 수 있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물리학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그런 설명이 가능할지 그렇지 않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백성들은 소리를 질렀고 여리고성은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적으로 있을 수 있는 한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능력으로 그 기적을 행하신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여리고성은 많은 고고학자들의 발굴 대상으로 관심을 끌었습니다. 발굴 결과 여리고성은 두 개의 성벽으로 이루어져 있는 복선이었음이 발견되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앞에 있는 벽과 뒤에 있는 벽이 동시에 축조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보다 더 많은 학자들은 앞에 있는 성벽이 훨씬 오래전에 축조된 것이라고 추정을 합니다. 아무튼 앞에 성이 둘러싸여 있고 뒤로 물러가서 두 번째 성벽이 있고, 그 성벽 안에 여리고 마을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에서 이런 건축물들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때 처음 본 여리고성은 큰 성이었고 아마 그들의 마음을 압도하는 높이의 성벽을 가진 성이었을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고고학적인 발굴 결과 성벽 두 개가 모두 성 안쪽으로 무너진 것으로 판명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벽이 성 바깥쪽으로 무너졌으면 성 주위를 돌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군사들에게 적잖은 피해를 주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섬세한 보호가 눈에 띄는 대목입니다. 요약을 하면 함성과 함께 여리고성은 무너졌고 앞에 있는 성곽이 무너져 내리면서 뒤에 있는 성벽으로 접근하기 좋게 만들어졌고, 뒤에 있는 성벽이 무너지면서 그들은 비탈길 같이 생긴 성벽이 무너진 흔적을 타고 손쉽게 여리고성에 침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경로를 거쳐서 여리고성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II.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A. 정결하게 하심
이렇게 하나님이 여리고성을 무너지게 할 때 하나님은 세 가지 일을 행하셨습니다. 첫째는 정결케 하신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명령합니다.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온전히 바치되 생명이 있는 사람과 모든 것을 칼날로 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 여리고 성을 이렇게 멸망시키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첫째로 이 여리고성 뿐만 아니라 가나안이 범죄로 패역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성을 무너뜨려 버리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오기 전 레위기 18장 24절과 24절과 5절에서 게시되었습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더러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가나안 땅이 모든 주민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패역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가나안 전체를 심판하셨고, 그 첫 번째 발자국이 바로 여리고성이었던 것입니다.
땅이라고 하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에레쯔’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 성경의 첫 번째 책, 첫 번째 구절에 나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할 때에 그 ‘지’, 땅이 바로 ‘에레쯔’입니다. 이 ‘에레쯔’는 공간의 개념인데 허공에 떠 있는, 허공과 구별되는 땅입니다. 그래서 이 땅은 아주 포괄적인 의미의 지면을 가르칩니다. 이 에레쯔라는 단어는 땅이라는 뜻도 있지만 그 땅에 사는 거민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에레쯔가, 이 땅이 인간과 운명 공동체로 창조된 것입니다. 이 땅은 모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의 어머니와 같습니다. 과일과 그리고 열매를 맺는 모든 과일과 채소들이 땅에서 나왔고, 심지어 하나님은 육축을 창조하실 때에 땅보고 그것을 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인간도 예외가 아닌 것이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지만 인간의 몸은 ‘아파르’, 티끌 혹은 먼지에서 지어졌으니 먼지는 흙에서 나오고 흙은 에레쯔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첫 사람을 지으시고 그 이름을 아담이라고 하셨는데 이 이름은 땅을 가리키는 또 다른 말인 ‘아다마’에서 옵니다. 아마도 에레쯔는 공간의 개념이고, ‘아다마’는 지명의 개념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붉다’라는 의미를 가진 ‘에돔’이라는 단어가 나오게 되는데 이 모든 것들은 다 동일 어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땅과 함께 운명 지어집니다.
인간의 구성 요소의 절반을 땅으로부터 받습니다. 그리고 영혼은 하나님께 불리어 가도 인간은 원래 자신이 돌아왔던 땅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소멸하여 흙으로 환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때 땅은 아무 잘못한 것이 없는데 저주를 선언 받습니다. 그리고 모든 그 땅과 관련된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땅은 모든 피조물의 어머니와 같은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하고 두 개의 악이 함께 들어오게 됩니다. 하나는 자연 악이고 또 다른 악은 도덕 악입니다. 자연 악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완전한 자연의 세계가 자연 자체는 망가지지 않았는데 도덕 세계의 영향을 받음으로 결함이 생겨나고 모순과 갈등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해일과 풍랑, 기상이변, 온난화, 이런 많은 것들은 인간이 타락함으로 들어오게 된 자연 악이고, 이 자연 악은 인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적절히 다루지를 않고 탐욕으로 낭비하고 자연을 훼손함으로 스스로의 법칙에 의해서 증폭됩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이 엄청난 자연의 문제입니다. 공해의 문제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인간의 세계는 차치해 놓고 자연 악이 어떻게 자연 세계에 절망적인 영향을 끼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물속에 있는 작은 곤충들의 세계에서도 어디서도 샬롬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죽고, 죽이고, 먹고, 먹히는 그런 긴장의 연속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타락과 함께 들어온 땅의 자연 악입니다. 도덕 악은 하나님께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관계가 깨지고 그리고 사람들과의 사랑의 교통의 관계가 깨진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자연 세계에 대한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마음도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이 자연의 세계를 폭력으로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부메랑처럼 인류를 덮쳐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미루어보면 하나님의 창조는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거미줄처럼 모든 것이 엮어져 있는 자연 세계와 도덕 세계가 엮어져 있는 그런 완벽한 그물망 같은 창조였고, 따라서 구속도 모든 불행한 인간을 낚시 줄로 하나씩 잡아 당겨서 천당에 보내는 식의 구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그물망처럼 이루어진 아름다운 질서를 전 우주적이고, 전 포괄적으로 회복하여 도덕 세계에서 자연 세계에서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드러나게 하는 그 마지막 성취가 구원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땅과 인간은 이처럼 운명 공동체가 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로마서에 의하면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면서 기다리는 날이 있는데 인간의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해결되고 하나님 앞에 완전히 구원을 받는 그날, 그때 이 모든 자연 세계에 맺힌 모든 부조화가 사라지면서 샬롬이 찾아오게 될 것이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이 자신의 불행한 상태의 궁극적인 원인자인 인간이 하나님 앞에 구속받을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전 포괄적인 세계관입니다.
그래서 인간과 땅은 이런 운명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이 멸망당하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땅이 그들을 토해내 버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범죄로 패역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을 하셨고, 또한 당신의 영광을 위해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땅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범죄와 패역으로 망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땅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정결케 하셔서 원래의 그 땅을 회복시켜 주시고 그 회복된 땅과 어울리는 인간을 그 위에 심으시기 위해서, 인간 사회를 건설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여기에 보내신 것입니다. 땅이 저주를 받는 것은 그 위에 살고 있는 인간 때문이고, 이것이 극심해지면 땅이 소리를 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의 고통을 하감하시면서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레위기 18장 2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가 있기 전 주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고 했습니다. 땅이 사람을 토해내는 것입니다. 토하는 작용은 우리가 음식을 먹었는데 그랬는데 들어갔는데 심지어는 먹을 때는 맛이 있었는데 속에서 우리 몸이 원하는 음식이 아닙니다. 그러면 내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수의근이 아니라 비수의근에 의해서 이 근육이 반사작용으로 움직이면서 이 위 속에 있던 물건을 바깥으로 밀어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만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와 접촉했던 모든 것까지 다 밀어내 버리고 마지막에는 다 토해버리고 아무것도 없어서 신물만 나오는데도 계속해서 위는 이것을 밀어내는 작용이 토함입니다. 그것은 결국은 땅이 그 사람을 역겨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주민에 대한 하나님의 거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 때문에 땅이 일방적으로 저주를 받고 피해를 입는 상황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 해 전 미국에 말씀을 전하러 갔을 때에 어느 국립공원에 있는 간판 하나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간판은 그 산에서 약 350년 이상 산 커다란 나무 하나를 횡단면으로 잘라서 똑바로 세워 놓은 간판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연대가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놀랍게 그 평화로운 때에는 정상적으로 나이테가 성장을 하고 전쟁과 많은 나라의 혼란이 있었을 때에는 뚜렷하게 그 나이테가 다른 것이 보였습니다. 물론 나이테는 그 해의 겨울의 추위와 여름의 습도, 온도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초심자가 보더라도 미국의 역사적인 사건과 나무테가 관계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하나의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가 가지고 있는 우주적 신학을 입증해 주는 한 자료를 발견하는 것 같은 기쁨이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피조물들이 도덕 세계와 자연 세계가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땅과 인간이 공존하는 운명을 주셨는데 역시 땅은 수동적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는 대로 입고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땅에서 평화롭게 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회가 되면 땅은 더 많은 소출을 내고 자연의 재해가 줄어들고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설명 드릴 수는 없지만 오늘날의 기후와 자연에 관한 문제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매우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개발에 의해서 끊임없이 훼손된 아마존의 밀림은 세계의 허파라고 불리는데 몇 십 년 전에 비해서 생산해 낸 산소 양과 흡수하는 이산화탄소의 양이 약 30%이상 줄어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지구 전체의 재앙인 것입니다.
아무튼 땅과 인간은 결국 공존하는 운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가나안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미 땅이 그 주민들을 토해내 버렸고, 땅은 소리치며 이 거민들이 더 이상 나를 더럽히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착각할 수 있었습니다. ‘아, 가나안 백성은 패역하고 나쁜 놈들이고 우리는 좋은 사람들이구나.’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9장 5절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율법을 모세가 설교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의롭고 정결하기 때문에 가나안 땅을 주신 것이 아니라 가나안의 주민이 워낙 불순종하고 패역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것을 주신 것이고, 이것은 그들의 선함 때문이 아니라 은총으로 주어진 것이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따르는 여호와의 신실성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땅과 거룩하신 하나님은 아무 잘못이 없이 인간에 의해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하거나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거나 혹은 하나님이 무능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보여주는데 첫째는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위대하게 창조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선하신 하나님이어서 악을 행하실 수도 없고 그 원인이 되실 수도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당신처럼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독립적으로 결정해서 행할 수 있는 그런 당신을 가장 닮은 완벽하게 지성적인 존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에게 자율을 주셨습니다. 그 자율의 정도는 얼마나 큰지 그가 대담하게 하나님을 배반하는 결정을 하더라도 그것이 가능하도록 그렇게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은 얼마나 위대한 존재입니까? 그래서 실로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인간만 못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역설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개도 돼지도 그만 못한 존재가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개만도 못한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반대로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을 반대로 생각해서 인간이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하나님을 높이고 그의 영광을 위해 개발하고 자연의 세계를 기가 막히게 조직화하고 발전시켜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람 없는 창조의 세계가 드러내는 영광보다 더 찬란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위대하게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이것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는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위대하게 창조하셨는지를 보여주고, 두 번째로는 하나님이 얼마나 지혜로우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 의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선한 것이 훼손될 때 그 훼손되는 것을 치료하시는 과정을 통해서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죄 지은 사람 이외에는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해 본 사람이 없고, 용서를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찬송하는 모든 사람은 전직 죄인이었지 의인이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도 눈물로 땀으로 눈물을 흘리며, 땀을 쏟으며, 피를 흘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던지며 사는 사람들은 모두 죄인들이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입니다. 그러니 죄는 인간 스스로 선택해서 지으나 그 죄의 어두움이 밤하늘이 되었기에 하나님의 은혜의 별빛은 찬란하게 빛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에 보내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소명을 실현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있을 신약에서의 영적 전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정결해져야 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약의 영적 전쟁은 정결을 요구합니다. 누구도 그 마음이 청결하지 아니하고는 신령한 빛을 받으며 하나님 앞에 영적 전쟁을 수행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하나님이 제일 먼저 하신 일은 인간들 때문에 더럽혀진 그 땅을 정결케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생명이 붙어있는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칼날로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의 무자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재창조의 놀라운 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승리의 감격에 들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이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승리와 번영을 주신 후에 탐욕에 빠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만약에 우리의 삶이 한 번에 승리로 모든 것이 결정 된다면 하나님 한번 보고 말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영원한 현재형입니다. 지금은 실패하고 은혜에서 미끄러져 불신자처럼 살아가는 신자가 있다고 칩시다. 그가 예전에 승리한 적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습니다. 아마 많이 승리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자의 일생은 숨 거두는 순간까지 끊임없는 새로운 영적 전쟁의 연속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또 다시 승리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정결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팔복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 여덟 개의 복중 최고의 복을 제시하셨는데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하나님을 뵈올 것임이요 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청결하다는 말은 ‘카탈로이’인데 원래는 더러웠던 것을 물 같은 것으로 씻어낸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카타르시스라고 하는 우리가 아는 단어가 나온 것입니다. 신령한 빛은 청결한 마음에서 비췹니다. 올 한 해를 이렇게 승리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청결해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서 있는 땅은 행복한지 되물어 보십시오. 땅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그 땅과 하나님과 행복하게 공존하는 정결한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자비를 베푸심
두 번째는 자비를 베푸심입니다.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라합의 가족을 이끌어 내게 하였습니다. 라합과 그의 아버지와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기생 라합과 그의 가족들에게 자비를 명했습니다. 그래서 라합과 그 가족 뿐 아니라 아버지의 가족, 친척, 친족, 아마 그 집에 있던 모든 친인척들이 모두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우양과 염소도 죽임을 당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자, 이 여자는 일평생 조상 대대로 여리고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발달한 문명을 가진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왜 이렇게 위험한 일을 행했을까요? 조상 대대로 살아온 살과 피가 섞인 그 민족을 배반하는 반역을 저질렀을까요? 놀랍게도 이 여자의 행동은 인본주의의 선행이 아닌 믿음의 선행이라고 성경이 규정합니다. 그의 믿음이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이 여자는 비록 풍문으로 들려왔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바로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셨는지, 홍해를 가르고 그들을 건너게 하시고 광야에서 수많은 나라의 왕들을 쳐부수고 그리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여 살리시고 그리고 요단 강물을 말리며 가나안 땅에 들어서게 하신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 속에 마음이 물같이 녹아 내렸고 이 여자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공포심에 사로잡혔지만 이 여자는 그 하나님이 누구실까, 내가 그 하나님의 사회에 속하고 싶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 여자의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히브리서 11장 31절은 이렇게 찬양합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히브리서 11장이 어디입니까? 구름같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이, 거장들이 어께를 겨루고 있는 영적인 아레나입니다. 거기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아레나가 아닙니다. 그런데 거기 이방의 땅에서 그것도 몸을 팔아서 먹고 살던 기생 여자 하나가 그 이름을 당당히 올리고 눈부신 믿음의 기라성 같은 믿음의 위인들과 함께 서 있습니다. 무얼 믿었을까요? 히브리서 11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살아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기라성 같은 믿음의 위인들의 아레나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 조항을 충족시킨 사람들이었습니다. 희미한 계시였지만 이 여자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그가 누구든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이심을 이 여인은 믿었던 것입니다. 그 믿음이 정탐꾼들을 살렸습니다. 그리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 여자가 여러분 누구인지 아십니까? 이 하찮은 여자가 이 믿음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구속의 가계 속으로 들어와서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 역사의 쌍벽을 이루었던 다윗의 고조할머니가 됩니다. 신약을 펴자마자 마태복음 1장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다윗이 바로 이새의 아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고조할머니가 된 것입니다. 그는 동족을 배반했습니다. 더 위대한 사회에 소속되기 원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그 자비가 있는 나라에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더 큰 기업을 위해서 사소한 기업을 포기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품어 차별 없이 하늘의 복을 주시는 광경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아가페를 안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 자비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하잘 것 없어 보이는 모든 사람들조차도 이런 하나님의 자비의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에게 임한 자비를 증거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구원에 목 말라하는 비천한 자들을 부르십니다. 이 세상의 재앙과 그리고 불행에 관한 소식을 들으며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리고 정신을 잃는 사람은 있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소문으로나마 하나님의 자비를, 그 능력을 들려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바로 이미 그런 자비를 입은 사람들이니 올 한해 이 자비를 전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영광을 보이심
마지막 세 번째, 영광을 보이셨습니다. 2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 하나님은 오셔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으로 위대한 승리를 주셨습니다. 결국은 여호수아를 높이셨습니다. 완전한 승리를 주심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 사건은 앞으로 이루어질 가나안 정복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한 계기를 이루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믿음을 주지 못했던 여호수아의 존재를 위대한 지도자로 부각시킨 것입니다. 불세출의 지도자 모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그의 손에 들린 지팡이를 무서워했습니다. 그 지팡이가 들리면 기상의 이변이 일어나고 홍해가 갈라지고 내리치면 반석이 쪼개져서 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지팡이로 명하여 메추라기가 몰려오게 하고 수많은 기적들을 베풀었습니다. 그 지도자는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그가 지명한 새로운 지도자가 세워졌습니다. 사람들 눈에는 한없이 작아 보이는 여호수아였습니다. 아마 수천 명 교회가 능력 있고 말씀의 권세가 있는 목회자의 설교를 듣다가 후임이 없어서 옆 교회에서 교육 전도사를 담임 목회자로 잠시 빌려오는 것 같은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옛날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 완전한 승리를 주심으로 여호수아의 지도력을 이스라엘 위에 입증하셨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따른 것같이 이 지도자를 따르며 가나안 정복의 위협 이룰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교회를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 하나님의 방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미래의 여러분들의 노년, 그리고 후에 태어날 여러분들의 자녀들을, 이미 태어난 여러분들의 후손들을 위해 하나님께 빌어야 하는 것은 한 가지 기도 제목으로 집약됩니다. 그것은 훌륭한 교회의 지도자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선물은 없고, 그 선물 하나만 주시면 나머지 모든 것들은 따라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교회의 지도자들을 위해, 지도자를 미래에 주시도록 기도해야 할 이유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쓰시는 것과 함께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자,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 전투를 위해 자신의 신명을 드렸습니다. 비이성적이어 보이는 하나님의 전투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돌면 성이 저절로 무너지고 우리는 무혈 입성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투인데 어찌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들은 피 흘릴 전투를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이 승리를 주심으로써 이들이 영적으로 큰 사람들로 자라나게 하였던 것입니다.
무위도식하는 삶의 최대의 피해자는 하나님도 아니고 교회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무위도식하는 사람은 열렬한 기도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를 위해 사는 목표가 없기 때문입니다. 육으로 하는 기도는 영을 불붙일 수 없습니다. 마음의 영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의 제목이 영혼의 기도의 불꽃을 비춥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무위도식하는 삶을 사는 이유는 그게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는 거기서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처음 내미는 손은 ‘쉬어라. 좀 편안해져라’하고 손을 내밉니다. 그 손에 자신의 손을 맡기고 아무것도 안하고 편히 쉬면 그 다음에 그 손을 이끌어 유혹으로 데려갑니다. 그래서 게으름의 애인이 정욕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 섬기는 기쁨이 없기 때문에 죄짓는 즐거움을 찾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래로 입증된 죄의 술책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섬길 마음이 없어서 무위도식하면 하나님이 여러분 밀고 여러분보다 못나 보이는 사람을 세우셔서 당신의 일을 해나가십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여러분들은 소외되어 버리고 맙니다. 최대의 피해자는 본인입니다. 삶의 모든 열렬함은 이루어야 할 목표를 갖는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예쁜 곳을 가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렇게 목표를 찾아가는 휴식의 한 과정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목표가 되면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사실은 죽은 자의 삶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드린 철저한 섬김과 생사를 오가는 전투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전투적인 삶이 없이는 영적 성장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스무 살, 스물다섯, 혹은 서른다섯, 사십, 오십이 넘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 뱃속에 갓 태어나서 엄마의 젖을 물고 있거나 우유병을 두 손으로 빨고 있는 모습은 얼마나 예쁩니까? 그러나 여러분 나이에 기저귀를 차고 교회에 누워서 젖병을 빨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재앙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너무나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는 믿었지만 하나님은 살아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기에 미적거리고 교회에 남아있지만 진짜 그가 살아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심은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 라합처럼 자신을 던지거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온전히 순종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리고 새해가 바뀌며 금년에는 복을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택도 없는 소리입니다.
묻습니다. 무얼 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하고 있는 그 일이 무릎을 꿇으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 눈물이 나오는 일입니까? 그 일의 성패가 여러분들의 인생을 갈라놓을 수 있고 하나님께도 지대한 관심사가 되고 있다는 심정적인 확신이 있습니까? 무엇입니까? 정체를 분명히 합시다.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은 복권처럼 나타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연단을 받았고, 그리고 그들은 범죄한 세대들이 모두 죽고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단련되고 단련된 상태에서 할례를 받으며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고 구별된 백성으로 자처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리고성 전투에 자신 전부를 던졌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렇게 일치한 마음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당신의 위대한 영광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실패를 운명처럼 여기고 살 거면 신앙이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운명은 있는 것이고 그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굳이 신앙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끊임없는 분투이며 투쟁이며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고, 우리를 억압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위대한 항거입니다.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지지 않고 무엇을 여러분들이 얻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뜨뜻미지근한 신앙으로 여러분도 동의할 수 없는 삶을 매일매일 살아가면서 진실한 회개와 뜨거운 눈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늘 듣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마음에 간단한 위안으로 정리하고 그리고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살았던 삶을 계속 살아갑니다. 매일매일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우리가 살아있는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한해가 새로 시작되어도 무심코 사 놓은 복권처럼 대박이 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올 한 해에 하나님 앞에 복을 받기 원한다면 아멘으로 대답해 보십시오.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원합니까? 이렇게 살면 6개월쯤 하나님이 큰 복을 주십니다. 그때 여러분 뭐라고 말하면서 다니는지 아세요? ‘와, 나는 행운아야 대박 났어. 나에게 이런 놀라운 일이 생겼어. 이건 완전히 재수야.’ 그러고 다닙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복 주시는 것만큼 하나님을 덜 의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을 붙들고 진실하게 자신을 드리며 매일매일 분투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6개월 후에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제일 먼저 교회로 달려올 것입니다. 눈물을 펑펑 흘릴 것입니다. 복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그 복으로 자신의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렇게 작은 복을 받았는데도 하나님 앞에 너무 감격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더 정결하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땅의 신음소리는 그쳐가고 하나님을 향한 찬송의 사회가 건설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이 땅에 보이시는 방법입니다.
전투적인 삶을 살지 아니하고는 누구도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눈물의 기도가 없는 생활은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 찬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찔림이 없는 생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쫄병으로 생각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의 재건의 가능성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리고 온 이스라엘에게 맹세하게 했습니다. 이 성을 다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는다. 기초를 놓을 때 맏아들이 죽고 문을 세울 때 막내아들이 죽을 것이라고 했으니 이는 최악의 멸문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때 이스라엘의 기쁨을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아마 불가능할 것입니다. 땅을 얻은 기쁨, 그들이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설움을 당하며 살아야 했던 이유가 오직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땅이 없는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가족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들어온 이후로 430년 동안을 자기 땅이 없이 애굽에서 살았고 약 40년 동안에 광야 생활에서도 자기 땅이 없어서 방황했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이들은 470년 만에 땅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빛도 들어오지 않는 지하실의 단칸방에서 벌레와 퀴퀴한 냄새, 습기 속에서 다섯 식구가 부채꼴로 잠을 자다가 강남의 압구정동에 새로 신축된 32평의 아파트에 입주했을 때의 기쁨을 무한대로 확장시키면 될 것입니다.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들이 무슨 건물을 보았겠습니까?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땅에 들어갔을 때에 저 멀리 보이는 여리고성은 그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건축물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무너져 버린 적이 없는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건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너지지 않고는 그들은 진정한 하나님의 유업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도대체 마음속에 무너지지 않는 어떤 여리고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수년 아니 내 평생 수십 년을 살아왔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고 서 있는 내 마음의 여리고성, 그 앞에 서기만 하면 왠지 한없이 초라한 자신이 느껴지고 무엇으로도 공략할 수 있지 못할 것 같은 성,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은 그 성이 상처일 수도 있고, 성격일 수도 있고, 본성일 수도 있고, 여러분들이 처한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비밀을 알려드리죠. 그 성이 거기에 그렇게 서 있는 것은 성이 견고하기 때문이 아니라 순종하면서 그 성을 돌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그 성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그 성이 주는 위압감에 노예가 되고 실패를 운명처럼 여기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들에게 도전합니다. 오직 순종 하나로 그 엄청난 성을 무너뜨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보라고 말입니다. 그 믿음위에 역사했던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직시하라고 말입니다. 올 한 해 여러분들이 이렇게 순종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위대한 승리를 보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해를 시작하며 (2018.211 주일오전 7)
실패를 딛고 일어날 때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 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아이 사람이 그들을 삼십육 명쯤 쳐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가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주여 이스라엘이 그의 원수들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수 7:1-1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여리고 전투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 이스라엘은 의기충천하였습니다. 이어서 그들이 공략 목표로 정한 것은 벧엘 동부에 있었던 작은 성, 아이라고 하는 곳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조상의 역사를 익히 알고 있었던 여호수아에게는 이 성을 정복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가 남다르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성은 자신들의 최고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이주 역사와 관련이 있는 의미심장한 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장 8절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정식적인 예배의 행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확고한 유일신 신앙을 기초로 그곳에 도착하여 재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하였던 역사 깊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치 못하게 커다란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아이성은 여리고에 비하여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큰 성이었고, 기적의 내용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여리고성의 이야기는 6장 한 장에 나오고, 실패했던 아이성 전투의 이야기는 7장과 8장, 두 장에 걸쳐서 상세히 보도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이성 전투가 갖는 교훈적 의미가 그만큼 많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의 기적적인 승리보다는 아이성 그 작은 전투에서의 실패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가르쳐 주실 바가 더 많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속사의 전개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교회와 세상을 향한 그 소명이 무엇인지를 풍부히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II. 실패를 통해 가르침
A. 교만함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을 포함해서 7장 전체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주제는 이것입니다. 실패를 통해 가르치신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이 아이성 전투의 사건을 통해 다음 세 가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첫째는 교만함입니다. 당연히 이스라엘에게도 군사 전략가들이 있었을 것이고, 아이성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정탐이 필요했다는 사실쯤은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상식을 따라 정탐꾼들을 보냅니다. 모든 정보를 다 수집한 후에 지휘부가 결정을 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건의했습니다. “이 전투에 온 백성을 끌고 나가 수고롭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우리에게 붙여주어서 아이성을 점령하게 하십시오.”라는 건의였습니다. 여호수아 역시 아직 여리고의 승리에 감격에 들뜬 마음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흔쾌히 제장들의 건의를 수락하고 삼천 명을 파병하기로 결정을 합니다. 이것은 승리에 도취한 이스라엘의 가벼운 처신을 보여줍니다. 여리고 전투에서의 승리가 전적인 하나님의 기적이요 은총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삼천 명의 군사를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36명이 맞아서 쳐 죽임을 당하고, 패배 후에 그들이 스바림까지 도주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백성들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된지라 했으니 이것은 얼마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성을 공격할 때 온 가나안이 겪던 경험이었습니다. 정신을 잃고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렸다고 했는데 역지사지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일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충만한 믿음과 두려운 공포는 남과 북처럼 멀고 동서처럼 서로 만날 수 없는 곳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둘이 매우 가까이 있습니다. 믿음과 의심, 확신과 불안, 그리고 미래에 대한 낙관과 비관이 종이 한 장 사이로 우리의 마음에 공존하고 있는 이 엄연한 현실을 한번 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붙드실 때만 이스라엘이 믿음으로 행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큰 복을 받기를 원하지만 복을 받을 때에 더욱이 그 복이 반복해서 주어질 때 인간은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큰일을 한번 할 때에는 모르지만 두 번, 세 번, 큰일을 하고 나면 자신이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가 아니라 그 위대한 일의 성취에 원천인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자가 이른바와 같이 그래서 교만은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패망의 앞잡이입니다.
‘교만’이라는 말은 희랍어로 ‘휘브리스’이고 라틴어로는 ‘수페르비아’(supérbĭa)라고 부르는 신학에서 아마 가장 흔히 쓰이는 단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원래 이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지성과 관련된 것입니다. 자, 맨 처음에 인류가 겪었던 죄의 유혹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그것들을 주셨습니다. 그것들을 다스리고 지배하며 거기서 효용을 누리도록 허락을 하셨습니다. 다만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으니 이는 그 한 나무를 볼 때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격차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뱀이 하와에게 유혹의 말을 건넵니다. ‘동산 나무에 있는 실과를 먹어봐라. 하나님이 먹지 말라 그러셨지만 그것은 너희가 하나님 같이 될 것이기 때문에 금하신 것이다. 먹으면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같아지고 너희 눈이 밝아지리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설명을 듣는 순간 하와의 마음에는 오직 하나의 실과만이 가득 차올랐습니다. 인간이 특정한 죄를 짓게 되면 비상하리만치 그 죄에 집중을 하게 됩니다.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오직 그 죄 하나만을 지어야겠다는 욕망에 치열하게 타오르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회심을 할 때에 은혜를 받을 때에 하나님 한분 이외에 아무것에도 마음이 쓰이지 않는 것과 매우 유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하나님을 섬지기 않으면 죄를 섬길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사단의 유혹이 파고 들어온 것은 하와의 지성이었습니다. 과일을 보니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그렇지 않았는데 매우 보암직하였다고 했으니 아름다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먹음직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판단의 오류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셨지만 하와는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아, 먹는 것이 훨씬 더 내게 좋을 거야.’ 하나님의 판단보다는 자신의 판단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고 자유로운 의지로 죄를 선택한 것입니다. 이게 교만, ‘수페르비아’의 정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죄가 들어오는 통로가 우리의 지성이라고 하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죄가 근접하기 가장 좋은 사람은 정신세계가 혼란스러운 사람입니다. 일관성이 없고, 생각이 진리에 대해서는 닫혀있고, 그리고 비진리에 대해서는 열려 있는 사람이 죄가 접근하기 가장 좋은 사람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을 정복을 하게 되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를 지도자 모세는 이미 내다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광야 40년의 세월 동안에 이스라엘 족속이 누구인지를 뼛속 깊이 알고 있는 영적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숨을 거두기 전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남긴 신신 당부하는 마지막 설교를 통해서 이러한 교만으로부터 이스라엘 자신을 지키는 두 가지 교훈을 주었습니다.
첫째는 노예의 상태였던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신명이 5장 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고 말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누리고 번영을 구가해도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됐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누리고 사는 번영한 모습이 우리의 원래 정체가 아니라 우리는 애굽 땅에서 종이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동전의 양면과 같이 또 다른 처방을 그들에게 주었는데 이것은 잊지 말라 즉, 하나님이 그 상태에서 너희를 구원하신 구원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26장 7절에서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시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자신들은 유리하던 아람 족속이었고, 애굽 땅에서 노예로 살면서 온갖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이었는데 하나님이 그 신고와 울부짖는 소리를 기억하셔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명령은 우리에게 매우 특별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이 재능이나 은사, 혹은 번영과 달란트,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주셨어도 그것의 사용하는 용도까지를 선하게 보장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번영을 주셔도 그 번영을 어떤 기회로 삼느냐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 번영을 누리며 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달려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 은혜로부터 멀어져 주님이 주신 성공과 번영을 타락의 기회로 삼는 것은 절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후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왕국의 부귀와 영화, 그리고 능력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이 자신에게 지혜를 주사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처럼 다스리게 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드리는 그 번제의 제사에 깊은 감동을 받으시고 그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어지는 승리와 번영에 취했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는 그릇된 방법으로 사용되어 왕국이 거짓된 이교 사상에 오염되게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 살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교회로 들어와 이 땅을 정복하면서 사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우리는 아담의 후손으로 이런 교만의 죄에 늘 빠질 수 있고 그래서 우리는 더 큰 정욕과 그리고 불경건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만, ‘수페르비아’에 대한 가장 탁월한 처방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이었던 것을 기억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으로부터 멀어진 희망이 없는 영적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육체의 원하는 것을 따라 행하며 사실상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들의 조정을 받는 희망이 없는 존재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죄의 노예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희망이 없는 쓰레기처럼 이 세상에 버려진 사람들이었지만 우리를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셔서 예수 믿고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진 백성들이 되었고, 진노의 자식에서 사랑받는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의 후사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번영과 성공을 구하고 패배보다는 승리하는 생활을 이어가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매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었던 사람들인지를 기억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잊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찬란한 진리의 빛 앞에 자신들이 얼마나 무지한 사람들이었음을 깊이 깨닫고 교만을 뉘우치며 생활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교만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붙듦으로 승리하며 사는 한해가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부정함
두 번째는 부정함입니다. 능히 정복할 줄 알았던 아이성을 결국 함락시키지 못하고 하늘보다 귀한 서른여섯 명의 동족을 쳐 맞아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실패한 후 그는 엎드렸고, 다른 지도자들도 법궤 앞에 티끌을 무릅쓰고 머리를 조아리며 하나님 앞에 간구하였으니 이는 회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을 회개해야할지를 몰랐습니다. 오히려 여호수아의 마음이 흔들리며 하나님 앞에 이런 불평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아버지처럼 따뜻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야 일어나라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려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왜 하나님이 아이성 전투에 함께하지 않으셨는지 그래서 이스라엘이 대패하게 되었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리고성이 하나님 앞에 바쳐진 성인데 거기서 탈취한 물건을 도둑질했고, 결국은 그것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것이 되어서 아이성에서 대패하게 되었다는 충격적인 진상이었습니다. 주님은 여호수아는 물론 아무도 알지 못하던 이 사실을 온유하게 어린 아이를 타이르듯이 지도하시며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온 백성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순전하게 사랑하던 때가 구약에 한번 있었는데 그때가 바로 이때였습니다. 그리고 호세아 선지자가 이스라엘이 첫 사랑으로 연애하던 때가 바로 이 시기를 가리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순전한 시기에 탐욕으로 인한 범죄가 나타났으니 이는 교회의 공동체를 더럽히려고 하는 부정하게 하려는 사단의 세력이 얼마나 강력하고 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단은 종종 그리스도인과 맞서서는 승부를 볼 수 없다는 지혜로운 판단을 내립니다. 그리고 정면으로 공격하는 대신 그들의 마음에 부정한 것을 던져 그 물을 더럽힙니다. 원천이 되는 호수가 오염되면 그 물을 마시는 모든 사람이 오염을 피할 수 없듯이 신자의 마음에 부정함을 주어 마음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향해 타오르던 찬양의 불길은 꺼지게 되고 충천하는 화염과 같이 불타오르던 기도는 쇠약해지게 됩니다. 섬김에는 열정과 힘이 없고, 형식에 치우치게 되고,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양 무리를 치는 악한 목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을 함께 위반함으로써 부정하게 되었고, 이는 사람이 부정하게 된 것이며 그들이 정복할 땅까지 부정하게 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부정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아이성을 그들에게 주셔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가나안 손에서 떼어내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넘겨주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배치된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별하여 그들이 하나님께만 바쳐진 사람들, 백성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배하는 땅이 오직 하나님께만 바쳐진 땅이 되게 만드시고자 그들에게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가나안이 타락하고 오늘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짓밟히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아이성을 공격할 때에 실패하게 만들었던 이런 탐욕의 극대화가 가져온 멸망적인 결과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따라 가나안을 정복하는 시작의 시기에 눈처럼 순결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던 시기에 작은 탐욕으로 공동체 전체를 방해하게 됩니다. 조상이 꿈꾸어오던 위대한 비전이 이제 한 사람의 작은 탐욕으로 위협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어떤 죄를 지으면 그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를 짓기로 작정하고 뼛속까지 죄로 가득 찬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기는 예외지만요. 그런데 물론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양심에 화인을 맞은 사람, 멸망하기로 작정하고 태어난 이성 없는 짐승 같은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도 아가는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였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언제쯤 태어났는지는 우리가 가늠할 수 없지만 아무튼 전쟁에 나간 것을 보아서 그 사람은 이미 성년이 된 사람이었을 것이고, 그러면 20세에서 40세 정도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요단강 물이 마르며 법궤가 건너간 것을 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길갈에 함께 도착해서 할례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나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만 바쳐졌습니다. 우리가 정복할 이 땅도 하나님께 바쳐져야 할 땅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대미문의 약속,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겠다고 하는 약속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린양 희생을 기리는 유월절의 제사를 드리며 아마 틀림없이 오실 구속주에 대한 희미한 믿음을 다졌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가 아간을 이처럼 변호하는 이유는 아간의 이 범죄는 끔찍한 것이었지만 오랜 세월동안 아주 정치하게 준비된 것이 아니라 아간의 입장에서 보자면 습격하듯이 기습을 당하는 것처럼 이 죄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가능성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부정함의 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정사의 삶입니다. ‘꼼꼼히 살핀다’는 의미의 ‘정사’는 ‘스쿠르티니’(scrutiny)라는 단어입니다. 죄는 아주 놀라운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밖에 있을 때에는 나와는 구별되는 존재이지만 그게 일단 우리의 마음에 받아들여지고 나면 죄는 우리의 마음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리고 죄인 자기 자신을 구별된 것으로 간주하지 못하도록 마음의 본성에 친화적인 작용을 일으켜서 동화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이제는 자신이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모든 것이 그 죄를 옹호하고 그 죄와 친화적인 견해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많이 흐르고 깊어질수록 그것은 아주 놀랍게 우리 마음속에 숨으며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정사의 삶입니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봅니다. 글씨가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스탠드에 불을 켭니다. 아니면 돋보기를 놓고 봅니다. 그러면 일상적인 방법으로는 보이지 않던 물건의 흠집이나 혹은 글씨가 보이기 시작하고 의미가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정사, 'scrutiny' 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비췬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들을 비취는 것인데 우리 본성의 빛은 최를 사랑하는 우리 마음과 일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본성의 빛만으로는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옛 선현들이 지혜라고 하는 것을 최선을 다해서 자신을 진리에 의해 객관화시키는 것을 성찰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에 세 번을 반성을 한다면 그 마음이 유리 거울과 같은 마음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진리가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진리는 아니지만 하나님이 일반 은총의 빛 가운데서 우리에게 주신 계시의 일부였다는 사실은 우리가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진리의 말씀의 빛으로 우리 마음을 비추는 작업을 매일매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교만과 부정함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한 것과는 상관없이 비췹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비췹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에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는 성경이 우리를 읽게 하려고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궁극적으로 성경이 우리를 읽게 하려고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의 마음을 쭉 읽으면서 진리의 빛으로 무엇이 오류이고 잘못인 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나 우리의 마음의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온전하게 살면 살수록 그 즐거움을 많이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우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 진리의 말씀이 우리에게 또렷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거기에서 고통을 느끼는 것이 그 깊이만큼 우리의 마음이 병들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 15년 전에 일이었는데 저는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이 설명을 아무리 교인들에게 이야기를 해도 알아듣는다고 고개는 끄덕거리는데 가슴에 다가가는 것 같지를 않았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 명제입니다. “하나님이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신다. 그러니 우리도 그래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에게 잘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기가 막힌 비유를 하나 생각해 냈습니다. 선남선녀가 사랑에 빠졌습니다. 둘 다 아주 잘생긴 젊은이였습니다. 사랑이 점점 깊어져 가던 때에 그들은 각자 차를 몰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두 차 중 한 차를 세워놓고 드라이브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남자는 성공한 사람이고, 젊고 아주 훤칠한 키에 아름다운 미남의 풍모를 갖춘 남자였고, 남자가 그 정도였으니까 여자가 비슷한 수준을 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가 먼저 도착해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드디어 여성이 왔습니다. 차를 세우고 자기가 너무 보고 싶었던 사람을 향해 달려가는데 역시 예전에 자기가 보았던 그 모습니다. 까만색 핏이 딱 맞는 아름다운 슈트에 넥타이를 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하얀 셔츠를 받쳐 입고 머리숱이 많은 그는 무스로 한창 멋을 냈고 얼굴은 깎아놓은 석고 같이 오후의 햇빛에 티 없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웃을 때에 가지런한 이빨은 더욱 그의 미모를 빛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근사하게 어울리는 선글라스 하나를 끼고 왼손을 흔들며 자기를 반겨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너무 반가운 마음에 걸어가면서 자기가 오늘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나온 것은 기가 막힌 선택이었다고 생각하며 그 남자에게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왼손으로 자기를 반가워하며 흔드는데 오른손에 무엇인가 들려있었습니다. 한쪽 다리가 너덜하게 떨어지고 피가 뚝뚝 흐르는 한 마리 토끼였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말했습니다. ‘내가 오늘 고속도로에 막 들어오는데 이 입구에 길을 건너던 토끼 한 마리가 로드킬을 당해서 죽어있는 거야. 내가 토끼탕을 워낙 좋아하거든. 이거 완전 득템이야. 우리 스케쥴 다 취소하고 우리 집에 가서 이거 끓여서 같이 먹자.’ 미안하게도 이 여자는 아주 철저한 동물 애호가인 휴머니스트였습니다. 이 남자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지만 그 피가 뚝뚝 떨어지는 토끼를 들고 있는 동안에는 어제처럼 그 남자의 품에 안길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 상태 때문에 정말로 그 사랑이 우리의 상태에만 달려 있다고 하나님의 사랑을 규정하면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던 하나님을 변덕쟁이로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은혜를 받아 눈물을 흘리면 하나님이 예뻐하시고, 오늘 집에 가서 컴퓨터를 틀고 이상한 것을 보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내일 아침에 회개하면 다시 예뻐하시고, 직장에서 거짓말하면 또 미워하시고 수요 예배에 와서 회개하면 하나님이 다시 예뻐하시는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이 언제나 자기의 사랑을 보이신다면 그것만 하신다면 우리를 도덕적으로 교훈 하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오늘 생각한 건데 그 다음 스토리를 만들어 봤습니다. 이 남자가 토끼를 들고 있어. 그런데 이 여자가 가서 기겁을 하면서 비명을 지르는데 얘기하는 것입니다. ‘아니, 이 토끼가 차에 치였어. 그래서 내가 가보니까 아직 목숨이 붙어있어. 야, 우리 이거 빨리 안고 병원에 가서 고쳐주자. 너무 불쌍하잖아.’ 그랬더라면 하얀 원피스에 토끼의 피를 묻혀도 그 남자의 품에 안겼을 것입니다. 이게 바로 죄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미움과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양립하는지를 보여주는 그림 같은 비유입니다.
신자가 자신의 삶에 정사가 필요한 이유는 누구도 자신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자신은 영원히 자기편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솔직한 말을 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객관적인 진리의 빛이 매일 자신의 빛을 비춰야 할 필요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말씀의 은혜이고, 깨달음입니다. 이때 그 진리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지식을 증진하고 지식은 또 사랑을 순환적으로 불러오기 때문에 이 지식과 사랑, 항상 하나일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결합체입니다. 나뉘는 순간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 지식은 지식이 아닌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매일매일 성령의 은혜 아래 있어야 할 이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매일 깨달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정함은 결국 우리를 끊임없이 파고들어서 우리의 삶의 모든 동기를 왜곡시키거나 파괴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을 배반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하나님이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신의 부정함을 정확하게 발견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돌이키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정결함
마지막 세 번째는 정결케 하신 것입니다. 이제 죄인을 색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런 방식으로 하셨을까요? 그냥 모든 것을 다 가르쳐 주시는데 ‘야, 아간 저놈이다’ 하고 아간을 잡아다가 처치하면 될 텐데 하나님이 뽑기 하셨다고 했는데 이것은 제비입니다. 어느 집 할까하고 열두지파의 뽑기를 했더니 유다 지파가 걸립니다. 유다지파에는 족속들이 있습니다. 족속들의 장을 넣고 또 투표로 뽑기를 했더니 그 다음에 걸린 것이 세라 족속이 걸렸습니다. 세라 족속 아래 각 가족들을 모아 놓고 다시 뽑기를 했더니 삽디가 뽑혔습니다. 삽디 가족 중에 모든 남자들을 모아놓고 또 뽑기를 했더니 그 다음에 아간이 뽑힌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하나님이 리얼 플레이 방식으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죄를 찾아내시는 하나님의 방법, 그리고 자신이 그 죄에 가담되었을지도 모르는 긴장을 조성하심으로 훌륭하게 실연식 교육 방식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속에 잊혀질 수 없는 어떤 인상을 남겨 주신 것입니다.
누가 죄를 지었는지를 열두 가문에 뽑기를 했을 때 그 열두 지파에 속한 사람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그리고 그것이 유다 지파에 떨어졌을 때 유다 지파에 속한 족속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리고 그것이 이제 다시 가족들에게 던져졌을 때, 그리고 마지막에 삽디의 가족에게 최후로 그것이 떨어졌을 때에 그 가문에 있었던 남자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온 이스라엘을 그 부정에 집중하게 만드셔서 마지막에 불꽃처럼 터트려서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누가 뭐라고 해도 따뜻한 남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영적인 따뜻함이 지도자로서의 단호함을 훼손했더라면 그의 리더십은 빛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따뜻한 음성으로 시작했다가 준엄한 선포로 끝을 냅니다.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청하노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가 행한 일을 내게 알게 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 하니” 자복하게 한 후 그의 탈취물과 가족들을 아골 골짜기에서 심판을 합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사랑이었고, 죄에 대한 심판은 죄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탈취물과 범죄자들이 불타오르는 광경을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았습니다. 잠시 세상 번영에 흔들렸던 이스라엘 전체의 심령에 부흥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이렇게 흔들리는 아간과 같은 마음의 불씨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남겨둔 채 파죽지세 승리로 가게 하셨더라면 결국 가나안을 정복할 때쯤에는 가나안을 멸망시키지 않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 이스라엘이 도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번영할 때에 탐욕 대신 소명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서 사람다운 사람으로 양육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디도서 2장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양육하시는 것은 경건치 않은 것과 세상 정욕을 버리게 하심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이 죄악 된 세상에 살면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말할 수 없이 사랑하셨지만 이스라엘을 정결케 하기 위하여 아골 골짜기에 불타오르는 화염 속에서 이들을 심판하심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향한 신실함을 회복시키셨던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대체로 주님을 바라봅니다. 여러분들은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주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하고 이 설교자도 간절한 소원은 그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아간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반드시 우리 안에 아간이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큰 것을 탐하지 않습니다. 그까짓 거 시날산 외투 하나에 200세겔의 은, 50세겔쯤 나가는 금, 그까짓 거 그 소유의 재산의 가치가 여리고성의 전체의 노획물 중 얼마나 될까요? 아간은 여리고의 왕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아간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명을 방해하고 한 해를 전쟁에서 실패하게 만듭니다. 두렵지 않습니까?
(찬양)
주여 정결하게 하소서
오늘 하루 하루 순간을 주가 주신 힘으로 승리하기 원하네
주여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성공이나 번영, 위대한 업적이나 빛나는 섬김, 어느 것도 순결함을 능가할만한 가치를 가진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있어도 순결함이 없다면 그는 주님을 뵙지 못할 것이요 모든 것이 부족해도 순결하다면 그는 주님을 뵈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올 한 해 정결한 마음으로 범사에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크고 작은 성공은 우리를 교만하게 합니다. 그러나 잠깐의 성공보다 우리의 영원한 소명을 생각하십시오. 반복되는 승리 속에서 우리에게 스며들어오는 또 다른 작은 아간을 경계하여야 합니다. 그 작은 내 안에 있는 아간으로 나 전체가 더럽혀지고 결국은 공동체 전체가 부정함에 이르지 않도록 우리는 자신을 정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렇게 엄중하게 이들의 교만과 부정함을 처리하고 다시 정결하게 하신 후에 위대한 승리를 주셨습니다. 어떻게 승리를 주셨을까요? 다다음주에 계속됩니다.
한 해를 시작하며 (2018.2.25 주일오전8)
다시 승리하게 하실 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의 백성과 그의 성읍과 그의 땅을 다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아이와 벧엘에 이스라엘을 따라가지 아니한 자가 하나도 없으며 성문을 열어 놓고 이스라엘을 추격하였더라” (수8:1-17)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경험했습니다. 그 일이 모두 끝난 후의 상황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패배로 말미암아 잠시 멈췄던 가나안 정복의 역사가 다시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으로 크게 각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충격적인 아이성에서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정복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용기 뿐만 아니라 마음의 순전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II. 다시 승리하게 하심
잠시 불순종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패배하게 하셨지만 다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이 승리가 어떤 승리였는지를 말씀드리기 전에 이 사실 자체가 복음입니다. 한번 완전히 실패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신 후 다시 세우시는 주님을 봅니다. 우리도 실패한 자들이었으나 하나님이 다시 불러 세워주신 것처럼 오늘도 또한 모든 넘어지는 사람들을 다시 붙드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아이고성 전투에서 큰 교훈을 주신 후 정복의 역사를 계속하게 하셨습니다.
A. 약속을 주심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1절부터 마지막 29절 모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아이성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보여주실 때 우리에게 알게 한 교훈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약속을 주셨습니다. 1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의 백성과 그의 성읍과 그의 땅을 다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셨고, 그 안에는 당연히 아이성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맨 처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 그 약속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여리고의 전투에서 창 한번 던지지 않고, 칼 한 번 휘두르지 않은 채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나안 정복의 역사에서 아이성의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은 크게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정복의 약속이 저절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분투하듯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그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순종도 약속이 없이는 의미가 없습니다. 약속이 없는 순종은 의미가 없고 순종이 없으면 어떠한 약속이 주어져도 그것은 아름다운 열매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불순종과 죄악으로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승리가 잠시 멈췄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인격적인 성품, 다시 한 번 만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님을 복 주시는 기계로 생각합니다. 순종이나 혹은 헌신의 동전을 넣으면 자판기에서 물건이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을 주파수에 맞추면 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보십시오. 하나님은 지극히 인격적인 분이셨습니다. 아이성 전투에서 모든 조건은 이스라엘이 승리할 것을 보여주었지만 그러나 여리고성의 전투와는 정반대로 그 모든 승리를 알리는 지표들은 무시되었고 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복 주시는 기계가 아니라 인격체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그 분의 뜻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힘으로 성취할 수 없는 위대한 약속을 주시는 것은 그것을 믿고 자만하게 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위대한 약속을 가졌으니 자신을 다 드려 하나님께 순종하고 헌신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면서 그 위대한 약속의 성취를 위해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약속을 받았던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게으르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태만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분투하게 만들었고 그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불 가운데를 통과하고 물 가운데를 지나며 신앙의 정조를 지켰습니다. 모든 약속의 성취를 갈망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합니다.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의 손을 붙듭니다. 그리고 주님이 자신을 붙잡아 주시는 한에 있어서만 자신으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가 구원에 참여하기를 바라십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의 소식을 듣고도 거절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았는데도 약속을 붙들고 사는 일에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렇게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지만 당신 혼자 이 일을 하시지 않습니다. 선교사들에게, 전도자들에게 열정을 주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정하게 하심으로 믿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님의 마음으로 가르치고 목양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한 사람, 한 사람 무지의 어둠에서 깨어나 진리의 빛으로 나아가게 만들어 주십니다. 짐승 같은 삶을 버리고 참 사람의 길을 걸어가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이 위대한 약속과 성취는 커다란 역사의 상황에서 해당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신자가 매일매일 살아가는 작은 일상 속에서도 이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이미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시대에는 아직 성경이 없었으니 하나님이 그에게 직접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말씀을 받은 여호수아에게 지시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나오셔서 지극히 작은 일상에 대해서 이리저리하라고 훈계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주신 완전한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전달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제 이 하나님의 위대한 이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의 역사에 관한 설교의 끝자락에 오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가 승리하는 한해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매일매일 묵상하십시오. 뿐만 아니라 교리를 공부하고 성경에 관한 연구를 계속해서 어린아이와 같았던 신앙의 때에 깨닫지 못했던 보다 깊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마음을 다해 읽고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자신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붙들게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는 종종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의 삶에 처한 상황은 너무 특수하기 때문에 이렇게 일반적인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을 가진 사람을 놓치지 않고 파고드는 것이 바로 미신적인 신앙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처해있는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십시오. 그 중의 어느 말씀이 불쑥 튀어나옵니다. 그리고 내 손을 붙듭니다. 그리고 나를 이끕니다. 가볍게 성경을 읽을 때에는 내가 성경을 읽지만 깊이 성경을 읽을 때는 성경이 나를 읽어냅니다. 관절과 골수와 그리고 나의 혼을 쪼개며 나도 모르는 나를 보여주고 하나님의 뜻을 나에게 알려줍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약속의 말씀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붙들 수 있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이게 바로 승리하면서 사는 비결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세상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배를 탄 것과 같습니다.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항공모함과 같은 배를 타고 항해를 합니다. 웬만한 파도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그리고 바다를 가로질러 담담히 항진을 계속합니다. 어떤 사람은 쪽배를 탑니다. 아직 큰 바다에 나가지도 않았는데 뒤집어질 것처럼 요동하고 무서워 벌벌 떱니다. 모든 배가 바다에 나가지만 항상 바다에 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종종 항구에 귀향합니다. 그때 우리는 닻을 내려야 합니다. 작은 배이든 큰 배이든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믿음으로 닻을 내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그 닻을 어디에 내리시겠습니까? 속절없는 인간의 사상이나 그리고 근거도 없는 사랑의 철학에 인생의 닻을 내릴 수가 있겠습니까?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의 그 닻을 하나님의 말씀에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내렸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위대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며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지혜를 주심
두 번째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여리고 전투에서는 전략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성을 도는 것이 어떻게 전략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리고 전투에서는 구체적으로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복 작전을 지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성의 서쪽에 5000명 정도를 매복 시켜놓고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들이 아이성을 칩니다. 자, 오는 척 하다가 도망을 가면 똑같이 승리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만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스라엘을 추격합니다. 그들은 한 번에 이스라엘을 다 쓸어버릴 작정으로 모든 군대를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추격합니다. 그 군대가 완전히 아이성에서 빠져나와 멀어졌다고 생각되었을 때 여호수아는 칼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매복했던 이스라엘 군인들이 빈 성에 침투해서 성을 정복해 버렸습니다. 불타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성 군인들이 돌이켰지만 그러나 이스라엘의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에서 그들을 맞으러 나온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그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특이한 것은 하나님이 탈취물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거기에서 탈취한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가져라” 왜 그러셨을까요? 아니 좀 전까지만 해도 금덩어리하고 외투 좀 훔친 것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시고 아이성 전투에 패배하여 몇 십 명의 군사를 사망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왜 하나님이 모두 가지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이것이 바로 대표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을 드립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린다고 칩시다. 그것은 비록 우리의 수입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거지만 그것은 대표의 원리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러한 수입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거지만 그것은 대표의 원리로 드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러한 수입을 올리는데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셨으니 동업자의 몫으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떼어드리는 것이 아니라 십분의 일은 전체를 상징하는 대표로 드리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다른 나라에게 잘못했다라고 사과를 하면 온 나라가 머리를 숙이는 것처럼 그 수입의 일부가 하나님께 바쳐짐으로 자신이 번 모든 수입만 아니라 자신이 숨 쉬고 살아있는 이 생명까지도 하나님께 드려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입의 십 분의 구는 십분의 일을 하나님 앞에 드렸을 때 다 바쳐졌고, 십분의 구를 그 순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위탁하시는 것입니다. “자, 네가 나에게 다 바쳤지만 내가 이 나머지를 너에게 맡기마.” 그리고 그것을 받은 사람이 그 돈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것처럼 사용하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청지기의 원리입니다.
오늘날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부정직과 불의, 그리고 가난한 자에 대한 압제와 공로의 구분, 이 모든 것들은 대부분 한 가지에 뿌리를 내립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의 탐욕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은 자기의 것이고, 그것은 자기가 스스로 자신에게 주인이 되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인데도 큰 재산을 소유한 사람은 신앙이 없으니까 마지막에 하는 말은 ‘내 영혼아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리고 그 돈은 권력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물질에 대한 생각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가 교인들의 헌금으로 운영이 된다는 생각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사실 아닙니다. 성도는 교회에 헌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헌금한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으로 헌금을 했으면 그 돈이 어디로 흘러가든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바친 믿음 때문에 그는 상을 받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낸 돈이 교회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그렇게 바쳤을 때에 전부가 하나님께 바쳐졌습니다. 그 중의 대부분은 본인에게 하나님이 맡기시고, 그 중의 일부분은 하나님이 교회에 맡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교인이 낸 헌금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돈으로 운영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물질에 대한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위탁을 받은 이 물질 뿐 아니라 권력, 지위, 명예, 학문, 기술, 이 모든 것들을 사용해서 이 모든 것의 주인인 하나님을 드러내야 할 사명을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리고성에서 준엄하게 “모든 것은 나에게 바쳐졌다, 너희 몫은 없다. 모두 불태워 버리고 불타지 않는 보물들은 나의 창고에 넣어라.”라고 명령하셨을 때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 이제 이 점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끝났구나.’ 똑같은 원리가 모든 가나안 정복에 해당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신앙이 없던 아간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죽도록 순종하고 싸워봐야 남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하나님은 정말 인색한 분이시구나 하고 자기의 몫을 챙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마음이 아니셨습니다. 그 첫 번째 점령한 여리고 성에서 하나님이 그 원리를 적용하심으로 이스라엘은 가나안 전체를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여리고 성에서의 모본을 보여주심으로 너희들이 승리를 해서 얻는 모든 땅이 사실은 너희들이 이겨서 얻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하사한 것임을 기억하라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땅을 위탁 받은 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승리를 간절히 갈망하며 살아야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자신을 얻고자 하는 그 복의 근원을 향한 바람보다 크지 않아야 합니다. 승리를 갈망하지만 탈취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약탈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두 받으신 후 분배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색한 분으로 여기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종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아니하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아보려고 합니다. 이상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아도 안 걸립니다. 신기합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은 믿음으로 오래 살다가 어느 한 순간 딱 한번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아보려고 합니다. 딱 걸립니다. 그러면 온통 시련과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깨닫게 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이 미아리에 점치러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인이 네 명인가, 세 명인가 점을 치러 갔는데 막 흔들더니 점치는 통을 탁 내려놓더랍니다. “이것들이 너희 중에 예수 믿는 년이 있어?” 하고 물어 보더랍니다. 어느 한 사람이 교인이 있었답니다. “저요.” 그랬더니 야단을 치면서 이런 데는 왜 오냐고 너 때문에 점괘가 안 나온다고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 사람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여기 오지 마.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차피 점괘대로 살지 않아.” 그랬습니다. 그 점이라는 게 뭔지 아세요? 한자로 복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옛날에 상하시대에 갑골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래서 거북이를 갑골이라고 합니다. 거북이 등껍질, 거기에 놓고 구멍을 뚫고 불에다가 굽습니다. 그러면 푹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게 한자에서 발음이 ‘복’이 된 것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거북이 등을 확 줄로 갈라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어느 방향으로 갈라지느냐를 가지고 길흉을 점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주권 아래 사는 사람이 그 퍽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거북이 등의 그 줄이 어느 방향으로 나느냐에 의해서 운명이 결정이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야단을 치면서 그 분이 마지막 하는 말이 예수 잘 믿어라 그리고 보냅니다. 그게 신앙 부흥의 계기가 되었답니다. 목사의 설교를 듣고 각성을 안 하는 사람이 미아리 가서 점쟁이한테 야단을 맞고 예수를 똑바로 믿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인색한 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들은 그런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6장 17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입니다. 믿음으로 이 사실을 붙들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주신 전술입니다. 매복하고 기습하고 후퇴하고 역습하는 이 놀라운 전투의 작전을 짠 것은 여호수아였지만 그 얼개는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집니다. 여리고 전투에서는 순전한 믿음만 보셨지만 아이성 전투에서는 순전한 믿음뿐만 아니라 지혜를 보여주셨습니다. 비둘기처럼 순결할 뿐만 아니라 뱀같이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서 그리고 분투하는 순종으로서 우리는 매일매일 가나안을 정복한 이스라엘처럼 우리의 삶을 정복해 나갑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구원이 은혜로서 주어졌지만 그에 대해서 사랑과 순종으로 응답하는 사람들만이 그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며 살 수가 있습니다. 아무튼 이 전략으로 아이성을 함락시키는 대 감격을 누렸고, 거기서 얻은 엄청난 보물과 탈취물들을 나누어 가짐으로 기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에서 결국은 하나님의 은총과 순결, 용서와 지혜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오늘도 도처에서 지혜 없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조차도 종종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에서 떠납니다. 제일 먼저 사라지는 것은 지혜의 빛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인생을 허비하게 됩니다. 젊은 날에는 힘은 있었지만 무엇이 인생의 참 길인지 알지 못해서 인생의 방황을 했고, 나이 들어서는 인생의 길은 알았지만 그렇게 살 힘이 없어서 방황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이렇게 순전한 마음을 잃어버림으로 우리의 마음은 더럽혀지고 그 지혜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시험과 시련으로 잠시 망가진 사람들도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다시 그들을 회복시키시고 지혜가 사라진 그 마음에 지혜의 빛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늘 승리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 많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쓰러졌던 자를 다시 일으키시는 과정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훔치지 않아도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이성에 승리하고 모든 탈취물들을 나누었을 때 그들의 마음에 기쁨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시인이 노래하는 것처럼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기쁨은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더 큽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꼬인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문제는 지혜의 빛이 가려졌습니다. 무지하고 어두운 마음이 되었기 때문에 자기에게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인생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영광을 수치고 바꿉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은 시험에 들어서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는 대신 지혜를 구하도록 권면하였습니다. 1장 5절에서 말합니다.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들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충분히 지혜로운 인생을 살고 계십니까? 혹시 욕심과 태만한 마음으로 다시 어둠의 길을 걷는 빛의 자녀들은 아닙니까? 하나님께 이 지혜의 빛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승리를 주심
마지막으로 승리를 주셨습니다. 1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손을 드는 순간에 복병이 그들의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성읍으로 달려 들어가서 점령하고 곧 성읍에 불을 놓았더라” 29절에서 말합니다. “그가 또 아이 왕을 저녁때까지 나무에 달았다가 해 질 때에 명령하여 그의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그 성문 어귀에 던지고 그 위에 돌로 큰 무더기를 쌓았더니 그것이 오늘까지 있더라”고 말입니다. 보십시오. 가나안 정복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은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받들기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땅을 정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이 실현이 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승리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승리 안에 함께 하신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땅을 더럽힌 자들은 깨끗이 멸하고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셨습니다. 땅을 목적대로 쓰지 않았기 때문에 가나안 족속은 멸망을 당했고 이스라엘은 그 땅을 하나님의 뜻대로 쓰도록 소명을 다시 받았습니다.
세상은 단 한 치의 땅도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두 없었던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그리고 이 땅에 있는 모든 부도 사실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은 아직 완전한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모든 부와 자원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흘러가지를 않습니다. 때로는 탐욕과 거짓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그것을 더 많이 점령하기도 합니다. 원래 수렵을 하고 매일 먹을 것을 채취하면서 살던 때에는 사실은 계급이라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농사 기술이 발달하게 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가서 채취하고 씨를 뿌리는 그것이 어떻게 물을 대고 가꾸면 농사가 잘 되는지의 기술이 어느 한 순간에 폭발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먹고 쓸 수 있는 이상의 수확을 거둬들이게 됩니다. 경제학적으로 소위 잉여 가치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원래는 그렇지 않았지만 소유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누가 지시해 주지 않아도 없는 사람들과 계급 차이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곡식이 없어 궁한 사람은 그 사람이 가서 무릎을 꿇고 사정을 해야지만 온 식구가 굶지 않고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급 관계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된 사람들이 작은 부락을 이루고 그 사람이 다시 작은 나라를 이루면서 그러면서 그 나라를 다른 나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혹은 더 많은 땅을 가지고 잉여 가치를 생산하기 위해서 정복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자로 나라 국이라는 이 단어는 속에 이미 창이 들어있습니다. 국가가 건설되는 과정이 무력을 동반한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게 국가입니다.
그런데 원래 이 모든 땅은 하나님의 땅입니다. 하나님의 국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주인이시니 그 한 왕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고 모든 자원은 왕이신 하나님께 의해 재분배되었고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위탁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며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땅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안 합니다. 그게 자기의 땅, 자식의 소유, 자기의 자기 뜻대로 처분할 수 있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그 소유를 기반으로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다행히 그렇게 땅을 많이 가지고 지배하는 사람이 생각이 비교적 건전합니다. 그러면 땅은 덜 신음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우리 조선 시대에 있었던 부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룰이 있었습니다. 사방 십리 안에는 굶는 사람이 없어야 된다. 자기네 재산을 풀어서 먹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땅이 덜 고통을 받습니다. 그런데 아주 포악합니다. 그럴 경우에 땅이 심하게 고통을 받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제자백가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경우에 왕을 정리할 수 있다는 저항권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신음하는 땅의 고통을 먹게 하시는 일반 은총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저항 사상입니다. 그래서 임금의 권력은 황제에서 나오고 황제의 권력은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황제가 백성의 말을 거스르면 그보다 더 위에 있는 백성이 황제를 제거한다는 사상이 넓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냐 하면 그 모든 것을 다르시는 왕 중의 왕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소명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땅인데 이런 사회에 이런 세상이 정말 하나님이 바라시는 사회일까? 아닙니다. 그럴 경우에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그 땅을 우리가 다시 정복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상황이 혁명을 일으킬 상황은 아닙니다. 가진 자들이 으스대면서 그러는데 그거 자체가 혁명을 일으킬 상황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불법한 방법으로는 할 수 없으니까 정당한 방법으로 경쟁을 해서 그들의 소유를 빼앗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자비하게 폭압적으로 그 땅에서 다스리던 그들을 몰아내고 그리고 그 땅에서 하나님이 직접 이 땅을 통치하셨다면 어떤 사회가 될 것인가를 꿈꾸면서 자기가 소유한 땅의 주인을 자기가 대신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인이시라고 생각을 하고 주님의 뜻이 자기의 소유지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그 정치의 권력으로 그런 사상을 구현하고, 뛰어난 지식을 가진 학자들은 학문의 세계에서 그런 역할을 하고, 심지어 연예인의 재능을 가진 사람들도 그렇게 활동을 하고,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사업의 확장을 통해서 그런 이상을 실현합니다. 그게 바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서 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을 멸하시고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셨습니다. 세상은 단 한 치의 땅도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무도한 사람들이 무단으로 지배하여 오용함으로 땅은 고통을 받고 신음을 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과 신음 소리가 커지면 결국은 그들이 정리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를 하염없이 기다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승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 땅을 다시는 고통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이 되도록 바꾸어 나가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고 이 세상에 두신 이유입니다. 어쩌면 우리 한 사람의 힘은 너무 미약해서 죽을 때까지 노력을 해도 단 10평의 땅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데 이바지하기 힘겨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마음으로 태도로 인생을 살았는지 아시는 분이시니 그 분 앞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오늘도 승리를 주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승리하며 아버지 앞에 당신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는 바로 그렇게 죄와 탐욕을 고통 하는 세상을 해방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일뿐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승리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일상의 작은 승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잠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탐욕과 하나님 앞에 잘못으로 잠시 승리의 행진이 멈췄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였더니 실패한 자를 일으켜 세우셔서 위대한 승리의 기쁨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다시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순전한 믿음으로 살아서 우리의 생애에 잊히지 않는 승리를 올해에 맛보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따라 살라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제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그 위에 드렸으며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한 대로 함이라 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모세가 명령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 앞에서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수 8:30-3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아이성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후에 일어난 일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아이성의 실패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순전함에 대한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결국 회개하고 다시 정결케 한 후 하나님은 큰 승리를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이런 승리를 얻은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헌신하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II. 에발 산에서 있었던 일
A. 제단을 세움
오늘 성경은 에발산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발산은 예수님 시대를 기준으로 사마리아에 있던 한 산이었고, 그 산은 그리심산을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산에서 모세는 어떤 일을 행하도록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이 에발산에서 있었던 일 세 가지를 오늘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제단을 세운 것입니다. 아이성 전투에서 승리한 후 그들은 다른 공략지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에발산으로 갔습니다. 거기에 제단을 세우게 되었으니 이는 이미 모세가 신명기 27장 2절에서 명한 바와 같았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하였습니다. 요단을 도하한 후 큰 돌을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요단강 옆에 세우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 에발산에 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우게 한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제단이기도 하였는데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제단을 만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쇠 연장을 데워서 곱게 제단을 다듬으면 무엇인가 형상을 새기고자 하는 유혹을 느끼게 될 것이고, 이것이 혹시 우상숭배로 이어질 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이렇게 지시하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아무튼 그들은 기적적으로 여리고성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또 불순종과 탐욕으로 아이성 전투에서 뼈아픈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많은 군사들을 잃었고 패배했지만 회개하고 죄를 처리하자 하나님은 다시 위대한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뜻밖에도 아이성에서 얻은 모든 탈취물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누어 갖게 하심으로 승리의 기쁨을 배가 시키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적인 은총에 대해서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제단을 세운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 산다 하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제단에서 드리는 제사를 통하지 아니하고는 이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으니 제단을 세운다고 하는 의미는 이미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 혹은 하나님 앞에 서서 살 것이라고 하는 결단과 확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유리하는 생애는 가는 곳마다 제단을 세운 것으로 나타났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어여삐 보셨습니다. 여러분에 비하면 매우 희미한 지식 밖에 없었지만 그 희미한 지식을 꼭 붙들고 그는 매사에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착한 마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올 한 해 우리가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비전 앞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야망과 꿈 앞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의 천지의 주재이시고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의 모든 승리도 의미가 없고 우리의 행복도 허무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올 한 해를 이미 시작했습니다. 올 한 해를 지나면서 여러분은 그 어떠한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서야할 사람임을 굳게 믿으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코람 데오’, 하나님 앞에서의 삶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은 쓰러지는 자 같으나 다시 세우심을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실패한 자들 같으나 다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다시 유명하게 하십니다.
저는 어느 한 신문사와의 최근 인터뷰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 거대한 구조악과 만나게 됩니다. 한 사람의 힘으로 거기에 항거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어려워 보여서 변절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많이 있지만 의외로 믿음으로 삶으로써 그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내고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많이 만나게 된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연약하지만 인간에게 은혜를 부어주시는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기를, 예배를 통해 기도를 통해 말씀을 통해 하나님 앞에 서기를 즐겨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율법을 선포함
두 번째는 율법을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라고 말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 궤가 있었고, 궤의 좌우에 이열로 도열을 했습니다. 한 열은 그리심 산을 마주하고 있었고, 한 열은 에발산을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심 산을 향하여는 축복의 말씀을 선포하였고 에발산을 향하여는 저주를 선포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리심 산은 복을 받은 산이요 에발산은 저주를 받은 산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율법 아래 있는 두 가지 성격을 한꺼번에 표현한 것입니다.
이 일이 있기 전에 그들은 일찍이 모세가 지시한 바와 같이 돌을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발랐습니다. 신명기 27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라고 말입니다. 요단 도하 때에 큰 돌을 취하여 그 돌을 에발산에 세우고 석회를 발랐습니다. 석회를 바른 후에 거기에 율법의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율법의 말씀이 십계명일 것이다 혹은 신명기 28장의 축복과 저주의 말씀일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그러나 가장 가능성이 있는 해석은 이 석회를 바른 돌에는 십계명을 기록하였고, 모세가 낭독할 때에는 이 십계명을 지키는 자의 축복과 불순종하는 자의 저주의 말씀이 담긴 신명기 28장을 낭독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합니다. 왜냐하면 한 돌에 새기기에는 아마도 28장의 말씀이 너무 긴 길이였을 것이고, 또 아주 분명하게 오늘 34절에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아마도 이때 낭독한 것은 십계명만이 아니라 28장 신명기의 말씀이었던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루실 때에 언뜻 보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셨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축복을 선언하신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조건에 따라서 축복과 저주를 명시하신 것입니다. 일방적인 약속은 대표적으로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은 원래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만들며 살던 가문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그는 특별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시기 전에 하나님을 갈망하였다거나 여호와를 앙망하였다는 이야기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는 조상들과 함께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왜 아브라함의 앞집 사람이나 옆집 혹은 뒷집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했는지 이 세상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다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어떤 장점 때문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선택하시는 은혜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 뿐입니다. 물론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의로 여기셨다고 되어 있지만 믿을 수 있도록 당신 자신을 계시해 주시고 믿을 수 있는 마음을 주셨으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하더라도 아브라함이 그 믿음 때문에 영광을 받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2장 2절과 3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하였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불현듯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일방적으로 복을 쏟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축복의 약속은 그의 아들, 이삭과 야곱, 요셉에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 후 사태는 중대한 변화를 겪게 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부터 해방이 되고 시내산에서 언약을 받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방적인 언약의 복도 말씀하시지만 동시에 쌍방적인 의무를 강조하면서 그 의무를 조건으로 축복과 심판이 제시됩니다. 심지어 그 의무를 다하지 아니하거나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할 때에는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임을 거침없이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렇게 하나님이 일방적인 언약을 주셨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시대와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를 조건적으로 제시하는 시내산의 언약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신학이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갈등을 일으킨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성숙의 과정에서 각기 다르게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겨우 태어나서 엄마의 젖을 물고 있는 아이를 야단치거나 때리지 않습니다. 아마도 돌이 되기까지는 아이를 좀처럼 야단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두 살, 세 살, 네 살 되고 꾀가 자라고 그리고 꾀를 피우며 부모의 뜻에 거스르고 잘못된 일을 행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때 아이를 야단치기도 하고 부모가 그가 하는 일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기는 표정을 지어보이기도 하고, 아이가 더 자라면 매를 때려서라도 그를 교정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시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전체의 영적 성장의 과정에서 볼 때 유아기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크고 놀라운 열 가지의 기적을 보고, 하나님이 애굽에 있는 모든 신들을 타파하시고, 하나님이 온 땅과 하늘 위에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이심을 출애굽의 과정을 통해 모두 보여주셨습니다. 열 가지 재앙 뿐 아니라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믿음을 갖게 되었고, 그들은 마땅히 성숙한 이스라엘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무를 조건으로 당사자의 의무가 강조되도록 율법을 제시하시고 그 율법을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주시지만 거스르고 거역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이스라엘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들 바깥에서 오는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게 하심으로 예수를 기다리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여하튼 뜻으로 하나님은 조건적인 축복을 제시해 주셨고, 이제 이스라엘은 그리심 산을 향하여 하나님의 축복이 에발산을 향하여 저주가 선포되는 것을 통해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헌신해야 될 신성한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 축복과 저주는 서로 다른 것이라기보다는 칼날과 같은 율법의 양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말씀을 거역하면 하나님의 커다란 심판이 임한다는 두려운 떨림을 주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이들이 말씀을 지키며 살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도 세상으로 흘러가고 하나님의 손이 그들을 붙들고 있는 동안에도 그리스도의 교회를 사랑하며 주님을 공경하지만 은혜에서 멀어지면 그들도 예전에 토해버렸던 자리로 다시 돌아가 예전의 악을 행하며 불신자처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렇게 연약한 존재인지를 아셨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의 마음은 물론 충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었고, 또 아이성에서 거둔 승리를 통해 감격을 누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만하여지지 않도록 율법을 낭독하게 하셨습니다.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함께 낭독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 마음속에 울려 퍼져 그들로 하여금 거룩한 긴장을 갖게 하셨습니다. 언약 백성으로써 하나님의 축복과 승리의 순간의 나태함을 버리고 오히려 영적으로 긴장하게 해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이 예식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자,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이제 한 해를 승리하며 살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그 세상 앞에 서 있는 우리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렇게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은혜를 받고 있는 동안은 하나님께 헌신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고 십자가의 피로 구원하셨으니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리라 다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하고 그 안에서 염려와 근심에 취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 즐거움에 마음이 기울어져 보십시오. 여러분은 미끄러지듯이 묶어 놓은 배가 다시 그 끈이 풀어지자 강물을 항해 떠내려가는 것처럼 세상으로 흘러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 우리 마음을 믿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 세상과 현실도 흘러가고 그 현실 앞에 서 있는 우리 자신도 신뢰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직 우리가 믿고 신뢰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뿐임을 여러분이 확신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 믿음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묶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우리는 이 은혜가 영원할 것이라고 우리 자신을 신뢰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매일매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것이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다시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려고 할 때 우리는 약하지만 우리는 흔들리지만 우리를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묶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다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게 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난 한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미끄러짐으로 충분히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황금보다 더 귀한 우리의 소중한 시간들을 실패 속에서 혹은 마음이 정함이 없이 흔들리는 상태에서 낭비해 버렸습니다. 우리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이 언제까지 우리를 이 땅에 살게 하시기로 작정되었습니다. 우리의 한 순간, 한 순간은 마치 정해진 길 위에 촛불을 태우며 사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긴 초로 태어났고, 어떤 사람은 매우 짧은 초로 태어났습니다. 불이 붙고 긴 초에게나 짧은 초에게나 동일한 타오름으로 그 초는 녹아갑니다. 그래서 재깍 재깍, 재깍 재깍 한 순간 1초가 흘러가는 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시간은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는 하나님께 연애편지를 쓸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어제도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살아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의미 없이 보내며 산 이 하루는 오늘은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몸부림치던 내일입니다. 그들에게는 허락이 되지 않았고 여러분에게 허락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우리의 인생을 또 다시 실패 속에서 허비하고 방황 속에서 낭비해 버리겠습니까? 지난 한해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올 한 해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이 말씀으로 이기며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제사를 드림
마지막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그 위에 드렸으며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은 후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는 놀랍게도 번제물과 화목 제물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제사의 종류가 수없이 많이 나와서 사람들이 구약성경을 읽을 때 막 헷갈립니다. 지금 제가 드리는 말씀을 기억하면 훨씬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구약 성경의 제사의 분류는 방식에 의한 분류와 목적에 의한 분류로 나누어집니다. 방식에 의한 분류는 제사를 드리는 방식이 어떤 방식이냐에 의해서 제사가 나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화제는 불을 태워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에 비해서 소제는 곡식을 드리는 제사이고, 관제 혹은 전제는 액체를 뿌려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에 비해서 목적에 따르는 제사가 있습니다. 속죄제는 죄를 속하기 위한 제사이고 속건제는 성물에 대해서 지은 불결한 죄를 씻는 제사입니다. 이에 비해서 번제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온전히 불태워 드리는 헌신을 상징하는 제사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 제사는 화제로 드릴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제단을 쌓은 후 하나님께 드리는 첫 번째 제사가 번제였습니다. 즉, 기적적인 승리와 함께 탐욕과 불순종 때문에 큰 경고를 받았습니다. 결국은 마지막으로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많은 탈취물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탈취물에 도취하지 않고 영적으로 깊은 각성을 하며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립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것이오니 우리 모두를 당신께 불태워 드리나이다 하는 헌신의 제사였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소명으로 모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바쳐 가나안 정복의 소명을 끝까지 성취하겠다고 하는 헌신의 다짐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왜 이들이 이런 소명이 자신을 묶으며 헌신을 다짐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하나님이 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의롭고 그리고 훌륭해서 그 가나안 땅을 주신 것이 아니었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이유는 단 하나, 가나안 백성들이 패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을 대적하고 온 백성들 사이에서 강포와 포악이 난무하고 자연 세계와의 화목한 관계를 모두 깨뜨려서 성경의 표현대로라면 가나안 땅이 그들을 토해버린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불결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땅을 쓸어버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심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가나안 정복의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을 언약에 묶는 이 지점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가나안을 정복하여 그 땅을 차지하고 난 후 하나님을 공경할 것이며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할 것이며 자연 만물을 일체의 선의로 대함으로써 하나님도 그 땅을 인하여 기쁨을 누리고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 자연 만물도 그 안에서 쉼을 얻게 하겠다고 하는 다짐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소명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이렇게 헌신의 제사를 드리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은 올 한 해에 무엇에 여러분 자신을 태워 바치려고 합니까? 치열한 경쟁에서 이기는 승리, 그것을 통해서 얻는 재물이라고 하는 탈취물 혹은 권력, 그래서 다른 사람 위에 지배자가 되어 보는 것, 그런 것들이 여러분의 삶의 목표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전에 이 세상에서 쓰레기와 같아서 배설물과 같아서 버린 것들입니다. 신자의 인생은 철저하게 소명에 묶여있어야 합니다. 맛 집이 있습니다. 먹고 싶습니다. 가십시오. 그리고 즐기세요. 좋은 관광지가 있습니다. 가세요. 보세요. 그리고 즐거움을 누리십시오. 예쁜 옷이 있을 것입니다. 사 입으십시오. 좀 더 좋은 물건을 쓰고 싶으세요? 쓰세요.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누리며 기뻐하며 사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면서 당신이 창조의 보람을 느끼십니다. 그러나 그것밖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면 그것은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아직까지 살게 하셨을까요? 확실한 사실 하나는 우리에게 아직 부르심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같이 믿음이 연약하고 쓰러지기 잘하는 사람들인데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이 땅에 살려두시면서 기대를 가지십니다. 내 자녀가 은혜를 많이 받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반드시 이 세상에서 나를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자연 만물을 선대하며 살아가서 이 땅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도움을 줄 것이라 기대를 가지고 저와 여러분을 살려 주시고, 쓰고, 입고, 먹고, 누리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셔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어제도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여기 살아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숨 쉬며 사는 오늘은 어제 죽어갔던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내일입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허락이 안 되었고, 여러분에게는 허락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들이 의미 없는 일에 우리 자신을 허비하며 살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이 에발산에서 제단을 쌓으며 하나님 앞에 첫 번째 번제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다시 한 번 자신들은 가나안의 정복을 위해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왕국의 소명의 성취를 위하여 선택된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자신을 묶어 버렸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자신을 드리며 신명을 바쳐 살기로 다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드린 제사가 화목 제사였습니다. 화목제는 샬롬의 제사입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평화 때문에 삶의 모든 방면에서 안녕을 누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웃과의 평화를 누리고 자연 만물과도 평화를 누려서 함께 평화롭게 공존하는 상태입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대적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 위에 머물러 있을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미 이때 보여준 구원의 여명이 성취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왜요? 무엇 때문에 그 분이 죄 없으신 그 분이 죄 있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오직 한 가지, 하나님과의 샬롬을 회복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 모든 것을 누리고 있어도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원수로 삼고는 행복해질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그 골 깊은 불화를 해결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찬양)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이렇게 수많은 짐승이 죽으며 드려졌던 화목 제사는 바로 오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 화목제를 드려도 이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화목 제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를 믿을 때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린 사람입니다. 어떠한 식으로든지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다시 우리를 심판으로 데려가시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과의 이 값지고 소중한 평화를 누리면서 사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승리의 탈취물에 도취하지 않고 영적으로 각성되어져야 했으며 어떠한 승리를 하나님이 주시더라도 거기에 심취하지 않고 요단강을 믿음으로 건너던 초심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자신을 모두 바쳐 가나안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야 했으며, 또한 그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면서 하나님과 평화로울 뿐만 아니라 모든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고 자연 만물들을 선의로 대하여야 했습니다. 이것을 제사의 그림 속에 모두 그려 넣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는 제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드리는 우리의 제사는 영적 제사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우리 자신을 바치면서 사는 것, 이것이 마땅히 드릴 영적 예배라고 성경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우리 여러분에게 요구되는 제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맛대가리가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과 부합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몇 주 전부터 여러분에게 무위도식하지 말라고 간절하게 호소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 상당수는 여전히 무위도식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부모라면 그렇게 무위도식하며 살아가는 여러분의 자식들을 볼 때에 어떤 마음이 들까요? 열렬하게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보람이 있는 일에 헌신하는 것도 아니고, 공부에 자신을 바치는 것도 아닌 그렇게 빈둥거리며 살아가는 여러분의 자녀를 보면서 여러분 어떤 마음이 드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구원하신 것이 무위도식하기 위함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우리를 나태하고 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의 욕심 거리로 삼아 하나님 앞에 태만하게 살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이미 태어날 때 수명의 길이가 정해져 있습니다. 아무도 자신의 앞날을 예측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모두 확실한 사실은 그 죽음의 순간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긴 촛대로 태어났기 때문에 아직 시간이 남아있을 뿐이고 어떤 사람은 짧게 태어났기 때문에 내일이나 모레는 하나님 앞에 갈 사람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매일매일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죽음으로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이고, 그렇게 우리의 삶은 하루하루 촛불이 타듯이 우리의 인생을 태워 들어가며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살고 있습니까? 일주일 내내 하나님을 향하여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이 무위도식하며 살다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달콤할 리가 있겠습니까? 분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며 그 약속에 자신을 묶어보고 투쟁해 보지 않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꿀 송이처럼 달 수 있습니까? 무위도식하면서 살기 때문에 고통이 없을지 모르지만 기쁨도 없습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정말 여러분이 생각하기에도 부러울 정도로 기쁨의 삶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나 보십시오. 그들 중에 단 한 사람도 무위도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살아야 할 삶의 이유를 가지고 어떤 목표와 의미를 향하여 분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진정한 삶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기쁨이 없이 감격도 없이 인생을 살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아깝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값 주고 우리에게 대신 사 주신 인생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드려 제사하는 것입니다. 매순간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며 영적 예배를 드리는 삶을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무엇이든지 하십시오. 무위도식하면 여러분 자신이 부패해 가는 것입니다. 아무거나 교회에서 무엇이든지 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삶의 처소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고 바로 그 일을 행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을 제사로 드리며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한 해를 시작한 지가 벌써 두 달이 지나 세 달째 접어듭니다. 연 초에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요단강을 건너는 것 같은 감격이었다면 오늘은 돌멩이를 세우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자신을 묶어야 합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나태해지기 쉬운 인간이니 매순간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아 그 말씀에 붙잡혀 사는 사람이 되어야 이길 수 있으니 꼭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묶으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소명을 따라 하나님께 헌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시기 위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못 박아 죽게 하셨사오니 우리는 이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를 본받아 거룩한 소명을 따라 하나님께만 헌신하며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