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변하는 섬김의 정신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행 20:17-19)
시대는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섬김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조국에서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시대가 바뀐 것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세 많으신 장로님과 교회 어른들은 옛날의 자신들의 방식을 고집하고 새로운 세대는 옛날을 모르고 새것만을 주장합니다. 본질적이지도 않은 문제를 가지고 교회는 부딪치고 싸움을 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교회의 영적인 번영은 지체되고 사람들은 곤고한 영혼을 끌어안고 교회를 떠납니다. 이러한 일들이 교회 안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이런 일들 속에서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하늘과 그리고 이 땅의 많은 자원들이 낭비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것을 기억을 하고 자꾸 이 시대가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를 이해하면서 새로운 자세로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본인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교회에 매우 심하게 고통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되듯이 이제는 정말 새로운 시대이기 때문에 바뀌어가는 이 시대를 이해하고 바뀌어가는 이 시대를 깊이 깨달으면서 이 달라진 시대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고 그리고 이 달라진 시대의 교회는 어떻게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주님의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서 또 달라져야 하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제도와 체제라고 하는 것은 생선과 같습니다. 생선을 가만 내버려 두면은 썩습니다. 마찬가지로 시대에 따라서 가변적인 교회의 체제와 운영 방식 그리고 한 시대를 끌어안고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을 돌보는 이 시스템들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고 매일 매일 바뀌어나가지 않으면 반드시 썩게 되고 어제는 영혼들을 돌보고 교회를 주님의 교회로 만드는데 대단히 유익을 주었던 방법이나 도구들이 오늘은 매우 부패하게 하고 교회를 망가뜨리는 방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달라진 시대에는 달라진 섬김이 필요하고 바뀐 시대는 교회가 바뀐 마음으로 교회를 바라보고 새로운 생각으로 교회를 진단하면서 앞으로 우리들이 어떻게 이 세상에 변화를 읽고 섬길 것인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쓸모없는 일로 소모적인 논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을 충분히 인정을 하면서 바뀐 시대에는 새로운 생각이 필요하고 따라서 새로운 목회의 방식이 필요하며 또 성도들에게는 새로운 섬김이 요구된다고 하는 것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어떻게 모양이 바뀌었든지 간에 시대를 초월해서 그 모든 섬김과 지도력 속에 똑같이 흘러가야 할 불변하는 섬김의 정신의 성경 속에는 면면히 흐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섬김의 불변하는 정신이 그 안에 배어 잇을 때에만 방법을 바꾼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불러오는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지 방법을 아무리 바꾸고 시대를 아무리 잘 따라간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 성경이 얘기하고 있는 불변하는 섬김의 정신이나 지도력이 사라지고 나면 그것은 모두 인간의 간사한 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 와서 3년이 넘는 기간 동안에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에베소 지방에서의 복음 사역은 특별히 19장에서 있었던 큰 부흥과 함께 에베소 지방의 복음 사역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은 에베소 도시의 수많은 사람들이 마술하는 책들을 산더미처럼 도시 중앙에 쌓아놓고 불을 지르면서 도시가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에베소 교회가 서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을 거기에서 영혼들을 돌보고 교회를 세웠지만 성령이 강권하시는 초청이 있었으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도록 마음에 매임을 받았는데 그 매임을 주시는 성령님께서 친히 예언하여 이르시기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이런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이미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것을 조금도 아깝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예루살렘을 올라가기를 원했습니다. 물론 사도는 죽으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유대인들이 있는 그 중심지에 가서 그리스도 예수의 그 복음을 그들에게 피를 토하듯이 전하고 싶어서 그는 예루살렘 행을 택했습니다. 밀레도라는 곳에 바울이 있으면서 에베소에 있는 교회들을 청해서 자기에게 오게 하였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생애에 마지막 전도 여행이 될지도 모르는, 그 죽음을 앞에 둔 전도여행 그 길에서 사랑하는 에베소 교회에 장로들을 불러서 유언과 같은 설교를 그들에게 했습니다. 그는 먼저 말합니다. “아시아에 들어 온 첫날부터 내가 너희 가운데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사회자가 읽은 이 영광스러운 본문을 해설하기도 전에 사도 바울의 이 서론적인 고백이 우리의 가슴을 때립니다. 그는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내가 아시아에 온 첫날부터 이제까지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그는 마치 뚜껑이 없는 집 속에 혹은 유리로 만든 교회 속에 사는 사람처럼 자신의 온 삶이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방식의 삶을 살았습니다. 목회를 할 때에나 복음을 전할 때에나 집에서 쉴 때에나 가정에 있을 때에나 모든 삶이 한결같이 모든 성도들에게 노출되어도 좋은 그런 방식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은 그가 삶의 모든 방면에서 얼마나 진실하기를 원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진실의 정신이 결핍된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식과 위선 거짓과 허위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마음으로는 진실을 찾아가지만 실제의 삶에 있어서 진리를 버리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 거짓이요 허위요 위선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으로 진실을 추구하는 데는 비용이 들지 않지만 삶으로 진리를 붙들고 살아가는 데는 피 흘리는 희생이 뒤따르는 것이죠. 진리를 붙들고 산다고 하는 것은 곧 진리와 함께 죽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를 향해 죽고자 하는 사람이 산 사람이고 진리를 향해 산 사람만이 죽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진실을 찾아가는 이 마음의 경향들이 외적인 행동과 합치됨으로써 그 사람의 삶을 진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 너무 부족한 덕목이 이것 아닙니까? 교회에서는 열심이 있고 칭찬을 듣는 교회의 일꾼이지만 집에 가서는 아내에게 말할 수 없이 고통을 주는 남편, 그리고 교회에서는 상냥하고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여종이지만 집에 가면은 자녀들에게 고통을 주는 어머니, 교회에서는 목사님에게 인정받지만 회사에서는 고용주가 하루바삐 나가기를 바라는 그런 쓸모없는 직장인,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퍼져있고 우리의 삶의 이런 면에서 불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삶의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 앞에 진실해지기를 추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신자가 된다는 것은 온전한 신자가 된다는 말과 똑같고 온전한 신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은 물론이고 삶의 모든 방면에서 진실을 추구하고 그렇게 진실해지기 위해서 그를 진실하게 만들어주는 진리를 붙들고 진리와 함께 죽고 사는 신앙의 결단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오늘 사도는 자신 있게 그러나 절대로 교만한 태도가 아니라 진실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아시아에 온 첫날부터 이제까지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말이 본문이라면 그의 삶은 주석입니다. 설교가 좀 어눌하고 부족해도 삶이 워낙 훌륭하고 아름다우면 사람들은 말로 형용되지 못하는 설교의 행 사이의 진실을 읽어내고 무릎을 꿇습니다. 설교가 유려하고 문장이 화려하고 듣는 사람의 마음에 큰 감동을 주어도 일주일 동안에 써 내려가는 삶의 주석이 옳지 못하면 그 비쳐진 많은 진리의 관한 지식들은 거짓말로 사람들의 가슴에 오해됩니다. 어찌 이런 일들이 목사에게만 있는 일이겠습니까? 여러분은 크고 작은 직분을 맡고 그 직분을 가지고 사람들과 함께 사명을 감당하자면 많은 사람들에게 말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설득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지체들을 하나님의 일로 함께 부르고 주님의 일에 동참하도록 격려하고 슬픔에 쌓인 지체들을 위로하고 낙심한 자에게 용기를 주는 이 말은 얼마나 훌륭한 섬김입니까? 그러나 그것은 본문일 뿐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은 그 본문에 이어서 써 내려가는 주석입니다. 그 주석이 오늘 사도가 이야기하고 있는 “내가 너희 가운데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가슴에 와 닿을 수 있도록 이 말을 한 번 변경시켜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남전도 회장이 된지 2년 동안 어떻게 여러분을 섬긴 것을 여러분도 알지 않습니까? 내가 권사가 된지 18년 그동안 이교회에서 내가 어떻게 여러분 가운데 행하며 주님을 섬긴 것을 여러분들이 보았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존귀한 사랑을 받으실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 대충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그 분께 최선의 것을 드리는 그런 삶을 살아서 우리의 안과 밖이 하나님 앞에 항상 일치된 그런 섬김과 그런 마음 이런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자신도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성경 구절을 여러 번 설교했습니다. 그때마다 마음에 깊은 찔림이 있습니다. 내가 교회를 개척한지 12년 그동안 내가 여러분 가운데 어떻게 행한 것을 여러분도 알고 있습니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저도 굉장히 아픕니다. 그런데 언젠가 하나님께서 저에게 그런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말했는데 왜 나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을까?’ 제가 지하실에 교회를 7명의 지체들과 함께 교회를 세운지 12년이 지났습니다. 12년이 다가옵니다. 그동안 내가 여러분 가운데 목회자로서 어떻게 행한 것을 여러분도 압니다. 왜 그렇게 말하지 못하겠습니까? 잘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가만히 생각했습니다. ‘정말 내가 잘 못했을까!’ 12년이 가까워오는 동안 나는 교회밖에 없었는데…… 좋은 학교에서 나를 불러도 다 싫다고 그러고 나는 이 교회밖에 몰랐는데…… 돈을 많이 지불했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교회 세우기 전에 집이 한 채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도 다 팔아서 교회다가 바쳤습니다. 무주택자였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저는 수입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다 없어졌습니다. 근데 왜 나는 이 교회를 세운지 12년 가까운 동안은 내가 그대들 가운데 어떻게 행한 것을 여러분도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까! 그 때 섬광처럼 하나님의 마음이 제 가슴에 비쳤습니다. 내린 결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는 그 긴 세월동안 주님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확실합니다. 자나 깨나 내가 목회하는 교회밖에 없었습니다. 물질과 명예에 대한 탐욕 없이, 사심 없이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러나 깊이 깨달은 것이 뭐냐 하면 ‘완전히는 아니었습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비수처럼 가슴에 깊이 꽂혔습니다. 그리고 여러 날을 울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사심도 없이, 유명해지고자 하는 욕망도 없이 지하실에서 한 교회를 바라보고 11년 이상을 달려왔는데 그래서 집도 없고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렸는데 문제는 대체로 그렇게 산 것이었지’ 왜냐하면 완전히 그렇게 산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강대에 엎드려서 많이 울었습니다. ‘하나님! 내가 고단하게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이렇게 젊은 시절을 불태우며 살아왔는데 완전히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은 결핍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한 1,500 가까이, 1,000명이 모인 집회 장소에 오랜만에 설교하러 갔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선명합니다. 올라가서 말씀을 전하려고 하는데 가슴이 그렇게 아프고 서러웠습니다. 목회를 하는 동안에 여러 가지 많은 힘든 일들이 생각이 나면서 가슴에 밀려왔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이 목회의 길이 너무나 많이 힘이 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울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강대를 딱 섰는데 한 선명하게 마음속에서 주님의 말씀이 느껴졌습니다. “얘야, 나는 십자가에서 다 버렸단다. 나는 십자가에서 다 버렸단다!”
오늘 사도는 구체적으로 자기가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보여주었던 모범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겸손과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겸손은 사람 앞에서 낮아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유 없이 사람 앞에 낮아지는 것, 사람 앞에 낮아지기 위해서 낮아지는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비굴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 겸손은 그리스도 예수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즉 성도의 겸손의 근거가 그리스도 예수이시며 또 성도에게 원하는 주님의 겸손의 가장 아름다운 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겸손은 먼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달은 자의 겸손입니다.
앤드류 머리(Andrew Murray)라고 하는 목사님은 19세기에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불리 울 정도로 신실하고 비범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남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봉직한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말년에 그를 만났던 월터 바로우라고 하는 사람이 그를 향해서 회고했습니다.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작은 체구의 영적인 거인이 무릎 위에 두 손을 포개고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명상적인 분위기에 잠겨있었습니다.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는 친절한 미소를 우리를 맞이했습니다. 우리가 모두 앉았을 때에 그는 우리 모두 함께 기도합시다라고 말하였고 우리가 눈을 뜨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 앞에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거의 성자였습니다. 그 분이 자신이 쓴 책에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이 세상은 모두 죄인들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용서받은 죄인들이고 어떤 사람들은 용서받지 못한 죄인들입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람 앞에 서면 우리가 커 보일 때가 많습니다. 인간 앞에 서면 정말 그 인간처럼 망가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앞에 한번 서 보십시오. 그 분 앞에 한번 무릎을 꿇어 보십시오. 그 분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그 십자가에서 비치는 찬란한 복음의 빛으로 한번 비춰보십시오. 누가 자기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으며 하나님을 위해 이러 저러한 비천한 일을 위해 섬기기에는 자신이 너무 고급 인력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석양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 달려온 자신의 온 생애를 회고하였을 것입니다. 젊은 나이에 주님을 만나고 긴 세월동안 오직 예수 한 분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으며 죽은 자와 방불한 삶을 살면서 험난한 순교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런 그가 옥에 갇힌 채 순교의 종소리가 들여오는 인생의 말년에 뭐라고 고백했는지 기억하십니까? “미쁘다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함이로다”, “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이 쓰시면 쓰실수록 그는 예전에 자기가 핍박자였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의로는 심히 흠이 없으나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던 헛된 인간이었다는 것을 늘 가슴에 새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에베소에 와서도 모든 겸손으로 성도들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겸손함으로 영광을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뿐만 아니라 겸손이 모욕이 되고 수치가 되는 그 때에도 겸손할 수 있었으며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때뿐만 아니라 멸시를 받을 때에도 그는 겸손할 수 있었으니 이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깊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이 불멸의 아름다운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를 작사한 사람은 존 뉴톤(John Newton)이였습니다. 그는 원래 노예 상인이었습니다. 아프리카에 가서 노예를 잡아다가 문명세계에다 팔아먹는 아주 야비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폭풍 가운데서 주님을 만나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일생을 영혼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헌신하며 살았습니다. 오래 살아서 치매 까가 생기게 정신이 오락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기억력이 괜찮으냐고 물었습니다. 그때에 그 하나님의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나이가 많이 들어서 기억력이 쇠하여지는 사실입니다. 기억하던 것도 이제는 잊혀지고 생각나던 것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기억력이 아무리 쇠하여도 나는 두 가지는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예전에 나는 아주 더러운 죄인으로서 노예를 팔아먹던 더러운 죄인이었다는 사실과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셨다는 사실, 이 두 가지는 영원히 내 마음 속에서 잊혀 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매 순간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난 생일과 그리고 졸업한 학교는 잊어버리고 심지어는 자기의 부모의 얼굴을 잊어버리는 때가 있다고 하더라도 오직 한 가지 내가 정말 쓰레기 같은 죄인이었다고 하는 사실과 하나님이 나 같이 망가진 죄인을 위해서 당신의 외아들을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셨다는 사실을 가슴에 깊이 믿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찰스 스펄젼(C. H. Spurgeon) 목사는 자신의 설교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마른 눈을 가진 성도에게는 하늘이 보이지 않습니다. 매 순간 예수 죽인 것을 자기 몸에 짊어지고 나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이기 전에 가장 더러운 죄인이며 쓰레기와 같은 죄인이며 하나님 앞에 아무 쓸모없는 그런 더러운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분의 십자가 앞에서 펑펑 우는 그 은혜의 눈으로 젖은 그 눈동자에 비로소 하늘나라가 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오시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그 분의 생애 전체는 멸시와 욕을 당하신 생애였습니다. 지금처럼 예수 덕분에 복 받고 배부른 생애가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멸시와 욕을 당하시고 마지막에는 당신의 몸까지 모두 찢어서 내어 주시는 생애였습니다. 만약에 그 분이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시는 겸비함이 없었더라면 아마 끝까지 그 삶을 성취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낮아지십시오. 낮아지고 또 낮아지고 더 깊이 낮아지십시오. 그래서 항상 나는 만물의 찌꺼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나를 위해 죽으셨고 내 손에는 그분을 죽인 피가 묻어있다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될 때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날마다 예수 죽인 것을 우리의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함이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두 번째는 그의 섬김에는 눈물이 있었습니다. 그가 흘린 눈물이 어떤 종류의 눈물이었을까요? 하나님의 사명을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고통이 없습니다. 고난과 시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정해놓고 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부딪치는 장애물이며 그리고 파도입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집어치울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 눈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 들어올 첫날부터 이 아시아에 있는 장로들과 작별하고 죽음이 기다릴지도 모르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까지 그의 마음에 불타고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이 지역에 전해져야 하고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듣고 주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 속에 이 복음이 살아 있어야 한다고 하는 두 가지 명제였습니다. 계속해서 그 두 가지가 사도 바울로 하여금 자신의 모든 열정을 교회를 위해 쏟아 붓게 만들었습니다. 그 일이 쉬었습니까? 아닙니다. 고난이 겹치고 시련의 파도가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죽음이 기다릴 줄도 모르는 예루살렘에 올라가기까지 그 기간이 눈물의 기간이었다라고 말합니다.
제가 너무 힘들어할 때는 저의 집사람이 저를 위로합니다. “여보, 그래도 당신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저는 되물었습니다. “왜 부러워하는데요?” 아내는 말했습니다. “뭐 교회도 열심히 잘 하고 있지, 또 책도 열심히 써서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지, 또 당신 아들, 딸이 당신 너무 존경하고 또 내가 사랑하지요. 그래서 당신 주위에는 당신을 사랑하고 돕는 지체들도 많고 그래서 아무개 목사도 당신보고 인복이 많다고 하잖아요.” 그 말해 저는 대답했습니다. ‘여보! 왜 그 사람보고 내 자리에 와서 있으라고 해! 아마 나만큼 오래 있지 못할 거야.’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주님 뜻대로 하소서
얼마 안되는 목회의 생활이고 내노라 할 것도 없는 미천한 섬김이었지만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목사인 내가 강대에 엎드려서 많이 눈물을 흘리면 그 눈물이 교회로 흘러 들어가고 쓴 뿌리가 그 눈물을 먹으면 죽고 건강한 뿌리인데 말라가던 뿌리가 그 눈물을 먹으면 살아납디다. 언젠가 교회 마당에서 묵상을 하고 있는데 어느 후배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생명이 있는 설교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제가 짤막하게 얘기했습니다. “죽음, 죽음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사람들은 성도란다. 왜냐하면? 죽음의 피가 베여 있는 설교만을 좋아해, 그냥 하나님의 말씀을 잘 도려낸 것은 싫어하고 거기에 설교자의 피가 묻어서 피가 떨어지는 그런 설교를 좋아해.” 강대에 엎드려서 어떤 이유에서든지 깊이 자신의 부족을 발견하고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칼을 대어서 마음의 가죽을 도려내는 아픔이 있고 난 다음에 그 설교는 성도들에게 생명을 주어, 생명을 주어, 그래서 설교자는 생사의 경계선이 없는 사람이야,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을 해, 오늘이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 날이라면 얼마나 사랑스런 소식일까, 아이들이 좀 어린 것이, 가족들을 남겨두는 것이 마음이 아프기는 하지만, 나머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피가 베인 섬김, 그 모본을 우리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주님이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3년 동안을 이 세상에 사시면서 웃으셨다는 기록은 한 번도 없는데 우셨다는 기록은 3번이나 나오고 그 중에 두 번의 기록은 심한 통곡으로 흐느껴 우신 것이 아니라 심한 통곡으로 울어 부르짖은 기록이 나옵니다. 일생을 사는 동안에 주님의 찢어지는 것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자기의 사랑하는 양떼들이 유리하고 고생하고 아파하는 것을 바라보시면서 일생을 사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이곳에 왜 교회를 세우십니까? 왜 여러분들을 주의 피를 발라 구원하셔서 이 교회의 그리스도의 한 지체가 되게 하셨습니까? 예수 믿고 구원받아서 천당이나 가고 그리고 이곳에서 교제하면서 엔조이 하라고 여러분에게 이 교회를 세우시고 그대들을 이 교회의 지체로 삼으셨습니까? 아닙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을 어두운 세상에 사도로 파송하실 때에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을 보시면서 주님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습니다. 그 마음으로 하나님이 여기에 오래전에 교회를 세우셨고 이전 시대에는 그 옛날 사람으로 교회를 섬기게 하시고 그들을 하늘나라로 부르신 후에는 이제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셔서 이 교회를 섬기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의 마음이 없는 신자는 색깔만 신자일 뿐이지 정말 신자 일 수 없습니다. 그 안에 예수의 마음을 품은 사람, 그의 눈에는 눈물이 있습니다. 많이 우십시오. 많이…… 자기의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흐느끼고 불쌍한 지체들 때문에 가슴 아파서 깊이 아파하며 울고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은 있는데 자신이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에 이 사명을 이루지 못하는 것 때문에 우십시오. 그 눈물이 여러분들의 섬김의 현장 속에 흘러 들어가서 그래서 영혼들이 살아나고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서 여러분의 육은 죽고 영은 살아납니다. 그래서 예수의 사람으로 닮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눈물이 있는 섬김의 길을 걸어오는 사람들은 그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거룩해져 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명을 올바로 크게 감당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섬김을 잘못 감당할 뿐 아니라 그렇게 잘못 감당해 나가는 동안에 사람들이 아주 나쁜 사람들이 되어갑니다. 성도가 복음을 전하는 것도 귀하고 성경 지식을 터득하는 것도 귀하고 물질로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것도 귀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하나님 앞에 더 고귀한 순간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누가 그에게 강요하지도 않았는데도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더럽고 부족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온 몸으로 흐느껴 울며 주의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을 바라는 것, 그 흐느끼는 영혼의 상태, 이것이 가장 고결한 순간입니다. 가장 고결한 순간입니다.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책망하는 마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든 자비한 마음으로 내가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오래 신앙 생활하셨죠? 잘 하셨어요, 교회 밖에 몰랐죠? 잘 하셨습니다. 많은 물질 이 교회 위해 드리시고 시간 바치셨죠? 잘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음도 주님 위해서만 바치셨습니까?” 여러분들이 앉아 계신 그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거나 기도를 하면서 다른 이유 때문에 말고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사명,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이 섬김, 이것을 감당해야 할 텐데 내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한번 성경이 흠뻑 젖도록 눈물을 흘려 보신적은 언제이죠? 오늘 아침에 그러셨습니까? 언제 그러셨습니까? 언제입니까? 우리의 눈에 흐르는 눈물은 우리 영혼의 재초제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는 좋은 것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도 자랍니다. 거기에 우리의 진실한 참회의 자기 깨어짐이 있는 눈물을 뿌리게 될 때에 그 때에 독버섯과 같은 더러운 것들이 우리 안에서 죽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이 교회에서 주님을 섬기는 동안에 눈물이 있는 섬김의 종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섬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섬김에 대해서 사도는 말하기를 유대인들의 간계를 인하여 당하는 시험을 참고, 간계이던지 시험이던지 모두 원어 성경에 복수로 나옵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이 이 사도 바울을 아주 간사하게 괴롭히고 안팎으로 분란을 일으키고 모함을 해서 이 사도 바울에게 고통을 주고 주님의 일을 방해하려고 했는지 여러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갈 때에 그 이후로 전 세계의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은 어디든지 유대인들이 있었고 그들은 모여서 회당을 만들고 유대교 신앙을 신봉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신앙은 전혀 유대교 신앙이 아닙니다. 그 때에 그들은 아주 강한 혐오감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악랄하게 그 복음 사역을 방해했습니다. 사도행전에 있어서 고난의 역사는 대부분 유대인들로부터 받은 박해의 역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렇게 유대인들이 기독교의 복음에 칼을 들고 방해를 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키가 작고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목이 짧고 그리고 아주 다부지고 단호하며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졌습니다. 아마 회심하기 전의 성격으로 말한다면 자기가 뭔가를 하고자 하는 일에 그렇게 방해하는 그런 인간들을 향해서 아마 사생 결판하고 한판 했을 겁니다. 혈기 충천한 젊은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도 바울은 오늘 뭐라고 말합니까?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그 모든 시험들에 대적하라고 말하지 않고 참고, 참고, 그래서 이 사랑이 불멸의 위대한 사랑의 장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참아야 합니다. 참아야 합니다. 아주 많이 참아야 합니다.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하면 많은 비난을 받게 되고 억울한 일을 만나고 고통스러운 마음이 이 가슴속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합니까? 참아야 합니다. 깊이 참아야 합니다. 물론 아픕니다. 그러니까 참는 게 어렵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자꾸 사도 바울보고 12사도 중에 사도도 아닌데 저게 무슨 사도냐고, 이렇게 기가 막힌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교회를 목회하는데 교인들이 수군거리면서 저 신학교도 후진데 나온 저 목사가 진짜 목사야 라고 말한다면 그거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다. 그러니까 사도가 하도 답답하니까 나중에 편지를 했습니다. “나에게는 너희가 말하는 것처럼 사도가 아닌 사람이 아니라 나는 진짜 사도다. 나는 진짜 예수님이 불러준 사도다. 그게 증거가 있다. 그게 뭐냐 하면 두 가지가 있는데 참음과 기사와 기사란 뭐냐 하면 이적이 나타났다 이것이다.” 그런데 참음이 먼저 옵니다. “봐라, 나는 사도거든? 너희들은 내가 자꾸 어떻게 예수의 사도냐고 말하는데 내가 사도가 아니라면 이렇게 긴 세월동안 참을 수 있었겠냐? 내가 이렇게 인내한 것을 보면 내가 예수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이 분명하지 않냐?” 교인도 사람이고 성도도 사람이니까 때로는 교회를 정말 사랑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목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교회를 너무 사랑하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애야! 나도 너를 사랑하기 힘들 때가 많았단다.” 그런데 이겼습니다. 왜 주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이긴 겁니다. 결국 교회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사랑하기가 힘든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랑하기가 힘든 겁니다. 그래서 매 순간 사람을 바라보면 교회를 섬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시 때때로 주 만 봅니다.
그러면서 참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냥 참기만 했다면 그가 승리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래 참았는데 가슴에 피멍이 들고 성도를 그냥 원망만 하다가 에베소를 떠나게 되었다면 그를 본받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는 유대인의 간계를 인해서 많은 시련이 찾아 왔지만 참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고 하나님을 결국은 섬겼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섬김은 종으로서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를 주님 앞에 깊이 낮추고 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거룩한 사랑 앞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그리고 나는 그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서 찌꺼기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고 그리고 그 분이 이 쓸모없는 인간의 섬김이라도 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깊이 기억하며 자기를 바치는 삶, 그것입니다. 섬김의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에는 한두 달 전에 아주 사랑스런 성도 하나를 하늘나라에 먼저 보냈습니다. 정말 어둠 속에 방황하며 살던 사람이었는데, 아이도 없는 부부가 5년 전에 저희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받았습니다. 정말 놀라운 은혜 속에서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바꾸어 놓으니까 제일 먼저 생겨나는 게 뭐냐 하면 자기처럼 방황하는 영혼들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힘닿는 데로 자기 생업에 종사하면서 열심히 영혼들을 섬겼습니다. 그의 기도하는 시간은 차라리 신음소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는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은혜를 받은 그 때에 간암 말기의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말기 판정을 받은 후에도 일체의 흔들림이 없이 영혼들을 섬겼습니다. 토요일과 주일이면 그 아픈 몸을 이끌고 병원에 가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나도 죽어가면서 그대에게 복음을 전하노라고, 그는 온 마음을 다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구역을 그 분에게 맡겨주었는데 정말 회심하지 않은 진짜 어려운 사람들이 모인 구역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매일 심방하다시피 했습니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목사도 아니고 전도사도 아니고 웬 집사가 밤중 9시쯤 되어서 심방하겠다고 오니까 이상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 때가 되어야지 남편들이 퇴근을 하니까, 처음에는 이상한 사람 취급을 했는데 눈물로 기도해주고 그들을 위해서 성심으로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기적적으로 회심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영혼, 한 영혼, 한 영혼 추수되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에는 복수가 차올라서 임산부처럼 배가 불러서 움직일 수도 없는 때가 되었는데 지체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구역 모임에 나아가서 사랑하는 지체들을 모두 앉혀놓고 이불에 기댄 채 구역 모임을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처럼 주님을 잘 믿는 사람이 되라고 성심으로 타일렀습니다. 운명하기 전날 그에 병원에 제가 찾아 갔습니다. 산소 호흡기를 끼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의식은 남아 있었지만 고개만 끄덕거릴 뿐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위중한 상태였습니다. 가까이 가서 나를 알아 보냐고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먼저 가서 기다리라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심방을 마치고 나오는데 그 분이 나의 손에 남편이 마지막 목사님께 남긴 편지라고 그러면서 손에 들려주었습니다. 그것을 편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 편지에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편지 전문: 사랑하는 목사님께 드립니다. 제 육신과 영혼의 가장 힘든 상태에서 나락으로 내려가는 것 같은 상황에서 목사님께 펜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주 안에서 목사님을 사랑했어요. 깊은 웅덩이와 죄악의 수렁에서 헤매던 많은 영혼들에게 생명을 전해주시는 목사님을 사랑했어요. 저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이 인생의 막바지에서 흉한 몰골로 앞으로 많은 영혼들을 살리시기를 원합니다. 이제 새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순종하며 섬기고 싶었는데……목사님! 저는 이제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이 죄인이 다 못한 섬김까지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통해서 띄우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먼저 천국에 가서 후일에 많은 상급을 받으실 우리 목사님을 기다리겠습니다. 선한 싸움 다 싸우고 의의 면류관을 쓰실 때 까지 늘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목회하실 때 힘든 일이 많이 있겠지만 그 때마다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목사님 사랑합니다. -정명신 집사 올림
그리고 그날 이튿날 새벽에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시신까지 대학 병원에 해부용으로 기부하고 그리고 홀연히 하나님의 나라에 갔습니다. 며칠 전에도 아침에 제 방에서 그 편지를 꺼내어 읽으면서 울었습니다. 하나님! 그는 가고 나는 남았는데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내가 이 땅에 살아 있는 것이 먼저 간 그 형제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왜냐하면 내가 오늘 살고 있는 오늘이라고 하는 이 날이 바로 그가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 잠시 있다가 가는 것입니다. 너무나 속히 지나갑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고 두 번도 하나님을 섬길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누리고 영광을 받던 모든 것들은 그 날에 지푸라기처럼 불타서 없어질 것 들입니다. 주를 위해서 얼마나 많이 겸손하게 얼마나 많이 눈물을 흘리며 얼마나 많이 고난을 참고 얼마나 사명을 위해서 섬겼는지 그것만이 주님 앞에 우리를 세워주는 그 날에 자랑스러운 그것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 때까지 변함없이 흔들리지 말고 오직 주님을 위해서 섬기는 신실한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