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대학원 섬김의 날
제가 요새 신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 그리고 또 현재 부목사로 사역하고 있는 우리 지체들에게 협박성 발언을 좀 많이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제 큰일 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제가 볼 때에는 여러분도 오늘 강의를 들으면서 여러분 자신을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신학대학원을 마치고나서 갈 길은 뻔합니다. 선교사로 가든지 목회자가 될 텐데 물론 개중에는 졸업하고 세속적인 직업으로 돌아가실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분들은 극소수이고 어쨌든 어찌되었든 결국은 목회를 해야 될 텐데 지금의 상황과 환경이 이렇게 목회를 할 수 있는 상황과 환경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여러분 믿어지지 않겠지만 우리나라에서 교회가 현재 매일 100개씩 문을 닫고 있습니다. 일 년에 3,000개의 교회가 문을 닫는데 그중의 70% 이상이 개척한지 3년 미만 된 교회에요. 교회는 성도가 안모여도 교회가 운영이 되면 교회는 절대로 문을 닫지 않습니다. 아주 쉽게 얘기해서 목회자가 생활비만 교회에서 받을 수 있으면 교회는 문을 닫지 않습니다. 그런 유지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누가 그래요. 믿음으로 개척을 하라고 해서 ‘믿습니다.’ 그러면서 교회 개척의 문을 확 열었더니 절벽이 기다리고 있었대요.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이 있으시면 오늘 강의가 충격이 될 것입니다.
자, 뭐 나는 큰 교회를 바라지도 않고 그저 사례금도 원하지 않고 그저 시골의 목회자를 돈이 없어서 못 모시는 교회가 있으면 내가 그곳에 가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봉사하리라. 그런 교회가 전혀 없거든요. 저희교회 부목사님들이 이제 개척을 나갈 때가 되어서 내가 알아보니까 제가 목회하는 16년 동안에 얼마나 이 세상이 변했는지 이제 시골에서 열 명의 교인만 모이면 이력서가 20통이 들어온답니다. 그러면 도대체 10명이면 생활비도 안 줄 텐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이력서가 들어오느냐 하면 그것은 간단해요. 그게 뭐냐 하면 어차피 이제는 개척되지 않는 교회들은 도시교회의 보조를 받으면서 생활을 하는데 생활을 할 만하답니다. 심각하고요. 최근에 우리 노회에 있는 시찰회의 한 교회에는 우리 부목사님이 가시게 되었는데 교인이 40명 정도 모이는 교회인데 이력서가 60통이 들어왔습니다. 그중에서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이 세 사람이에요. 저희 교회에서 부교역자도 아니고 일 년 교역자 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원서모집을 했는데 세 명을 뽑는데 60명이 원서를 냈습니다. 지금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닙니다. 의심이 되면 여러분들이 한번 어떤 상황인지 직접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심각한 상황 속에서 결국 교회는 점점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교회가 유지되기 위해서 몸부림쳐야하는 현실이 되다보니까 이제는 교회를 원래의 교회 되게 했던 본질적인 문제들을 접고 어떻게 하든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현실이 된 것이죠. 이것이 바로 세속주의의 현실이에요. 그런데 이것은 사실은 목회의 본질로부터 아주 멀리 벗어난 것이죠. 목회의 본질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미 벌써 자신이 목회자가 되겠다고 할 때에는 엄밀하게 말하면 사실은 목회의 소명이 있기 전에 먼저 전도자의 소명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금 신학대학원을 다니는 이 시절이 마지막 시기에요. 왜냐하면 회가 모여야지 목이 될 것이 아니에요. 회가 안 되는데 무슨 목을 하느냐는 것이에요. 양떼가 없는데 무슨 목을 하느냐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생각은 무엇이냐 하면 점점 내가 졸업을 했으니까 가서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 복음을 전해서 전도해야 된다는 열정이 가득했을 때에는 신학교를 졸업하면 개척을 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여러분 가운데 몇 명이나 졸업한 후에 즉시 개척을 꿈꾸는지 나는 궁금해요. 아마 아주 극소수만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예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구원을 받은 사실이 너무 감격스럽기 때문에 이 구원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 그래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계속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니까 골방에서 모이고 그러다가 천막이라도 치고 하면서 그것이 목회가 이루어지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처음부터 그런 복음의 열정이 없어요. 나는 여러분들이 최근에 영혼이 불쌍하다는 마음 때문에 눈물을 흘려본 적이 언제인지 묻고 싶어요. 그리고 여러분들 가운데 정기적으로 전도를 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는지 그리고 최근에 여러분들이 전도했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게 된 사람이 그 마지막 열매가 언제인지 묻고 싶어요. 이런 본질적인 것들이 거의 밖으로 밀쳐진 채 그러면서 이곳에서 공부만 합니다. 그런데 공부도 옳게 하느냐하면 어제도 교수님들을 만나서 이야기해보았는데 학생들이 공부에 관심이 없어요.
예전에는 학문을 많이 한 선생님들을 존경했지만 이제는 그런 분들을 존경하지 않습니다. 교수님들이 있어서 죄송하지만 목회를 크게 하는 사람들이 존경을 받습니다. 그분들이 mentor에요. 무엇이든지 거기에 가서 배우려고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한창 몸과 마음을 바쳐서 이론을 연구하고 공부를 해야 되는 이 시기에 무슨 훈련이니 무슨 훈련이니 하면서 보따리를 싸가지고 돌아다닌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껍데기가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신학이고 뭐고 기반이 거의 안 되어 있는 상태에서 졸업을 하고 그 다음에는 전도의 뜨거운 열정도 없고 신학적인 기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자기를 모두 희생할 수 있는 그런 어떤 순교자적인 그런 심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얼치기가 된 다음에 가서 복음사역이라고 시작을 하게 되는데 그나마도 어느 교회에 들어가서 전도사생활을 하고 부목사생활을 할 때에는 괜찮아요. 왜냐하면 그냥 그 틀 안에서 해나가는 것이고 못한다고 해서 교회에서 물론 쫓아내는 교회도 있습디다만 그냥 쫓아냅니다. 어림없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교회에서는 교역자가 한 120명이 되는데 구조조정 담당목사가 따로 있어요. 그래서 매년 한칼에 정리하는 것이에요. 웃음이 나와요? 웃음이……. 그게 뭐가 우스워요? 아니 무슨 대목을 알고 웃어야지 지금 그게 뭐가 우스워요? 얼마나 가슴 아프고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데……. 여러분들이 만약에 삼 년 후에 구조조정을 당한다고 생각해봐요. 그게 웃음이 나오는 이야기인지…….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듣지 말라는 것이에요. 단칼에 정리해버립니다. 매 12월마다 불러서 ‘너 담당이 어디야?’ ‘초등부입니다.’ ‘지금 몇 명모여?’ ‘200명…….’ ‘연말까지 얼마 할 수 있어?’ ‘300명이요.’ ‘안 돼 350.’ ‘알았습니다.’ 350이라고 말하는 그 순간 350명이 안되면 그냥 깨끗이 나가는 것이에요. 그게 여러분들이 모르고 있는 현실이에요. 엄격한 현실이에요 이런 속에서 우리들이 목회의 본질을 벗어난 것이죠.
목회의 본질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회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큰 사랑을 알고 그리고 그 사랑을 알고 나니까 이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 가슴에 연민을 느끼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제는 다른 세속적인 직업으로는 도저히 이 열정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나의 안일과는 상관이 없이 이 모든 것을 쏟아서 내 마음 안에 불타고 있는 이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 그것이 목회의 소명이에요. 그러니까 목회의 소명은 무의식적인 것이고 환경에 의해서 인도받는 것이 아니에요. 자의식적인 것이에요. 자기에게 분명히 신적인 부르심이 있고 그것은 영혼에 대한 사랑, 진리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나는 것이에요. 그렇게 해서 복음을 전하는데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돌아올 수 있겠어요? 그것은 간단하지요. 그것은 회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에요. 더군다나 성결교단인 여러분들은 어느 교단보다도 이 회심을 강조하는 교단으로 내가 알고 있는데 이 개혁신학에서 보면 이 회심은 사실은 중생한 영혼의 첫 번째 움직임이에요. 그래서 중생이라는 것은 영혼에 관한 문제이지만 이 회심은 의식세계와 관련된 문제에요.
이 회심은 신학적으로 둘로 이루어져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는 처절한 회개와 그리고 돌이킴, 그리고 구원을 얻을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절대의존적인 확신 속에서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 이 두 가지가 말하자면 회심의 요소에요. 그러니까 회개와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이 회심은 좁은 의미로는 일회적이에요. 구원에 이를 때에 그 한번 경험하는 것이죠. 그런데 넓은 의미에서는 이러한 회개와 믿음은 끊임없이 반복이 되요. 이것을 광의의 회심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우리들이 어떤 죄가 생각나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할 때는 내가 철저한 죄인이라는 사실과 함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이분밖에는 나를 구원하실 분이 없다고 하는 절대의존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들이 일생동안 계속 반복되는 것이에요. 이것이 바로 회심이에요. 엄밀한 의미에서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에요. 그런 사람을 수천 명을 모아놓고 교회를 해도 그것은 사육이지 목양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양이 된 적이 없는 무리들이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목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죠. 목양은 양떼, 주인을 알고 주인 가까이에 있는 양떼를 목양하는 것이지 개새끼들을 모아놓은 것은 목양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식육용으로 쓸 개들을 우리 안에 수천마리를 놓고 사료를 먹이는데 그것이 어떻게 목양이에요? 사육이지……. 양으로 변화되는 일이 먼저 일어나야지 목회가 가능해지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보십시오. 이러한 본질적인 것이 확실하게 무시되고 있는 것이죠. 제가 지방에 있는 어느 교회에 집회를 갔어요. 담임목사님은 없고 부목사님만 있는데 다 우리 후배들이죠. 같이 대화를 하면서 자기네 교회 자랑을 많이 해요. 이 도시에서 자기네 교회가 최고로 뜨고 있는 교회라고 자랑을 해요. 그래서 나는 그런가보다 하고 나는 무엇이든지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니까 이것저것 물어보았어요. 그러다가 내가 물어보았어요. ‘당신은 무엇을 담당하고 있는 목사입니까?’ 그랬더니 ‘저는 장년교구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돌보는 영혼이 얼마나 됩니까?’ 한 800명쯤 된다고 그래요. 그러냐고 하면서 ‘당신도 신학을 공부했으니까 회심이라는 것을 알지요?’ ‘예 그럼 알지요.’ ‘회심이 없이도 구원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돌보는 800명 가운데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갑자기 우울해져요. 한 20%쯤 된대요. 그래서 내가 거기서 혼을 냈어요. ‘당신이 지금 그것을 말이라고 하느냐 지금 방금 당신은 당신 교회가 이 도시에서 최고로 뜨고 있는 교회고 이 교회에 대해서 당신이 자랑을 했는데 지금 어떻게 내 앞에서 내 양떼 중 20% 그러니까 800명중 160명만이 구원받은 사람이고 나머지는 구원과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당신이 나한테 자랑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참된 목자는 어려서부터 참된 목자의 표가 나요. 무는 팔뚝만한 큰 무도 무고 뷔페에 가면 무 싹이 있잖아요? 앞니로 잘근잘근 씹어 봐요. 그러면 신기하게 거기서 무즙 냄새가 나요. 지금 여기서 여러분들을 잘근잘근 씹어서 선한 목자의 맛이 나야 되요. 무 싹이 자라서 무를 생산하는 것이지 콩나물이 자란다고 무가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내가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어요. 어디선가 교회를 섬기고 있겠지요? 그리고 영혼을 돌보고 있겠지요? 여기에 대해서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즉시 회개하고 영혼들에게 돌아가야 해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유년부를 하든지 중등부를 하든지 청년부를 하든지 할 것 아니에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영혼들의 명단을 쭉 놓고 이 사람은 회심을 했다, 안했다 대충 가려낼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해서 회심한 사람이 얼마정도라는 것을 파악해본 적이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들 앞에 있는 양떼가 여러분하고 밥 먹고 이야기하는데 저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관심도 없는 사람은 아닌지 한번 되물어 봐요. 우리교회에서 목회자 internship을 일 년에 한기씩 하는데 지난 기수에 들어온 학생들한테 그것을 조사해보라고 숙제를 냈어요. 그리고 갔다 와서는 충격을 받는 것이에요. 자기가 돌보는 양떼들 중에서 35%밖에 회심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적게는 25% 많게는 45%…….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한 번도 그 영혼들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에요. 그것이 여러분들이 지금 세속주의에 물들어있는 상태에요.
그래서 어떻게 되지요. 사람들은 이제 세속주의라고해서 막 죄를 짓는 것이 세속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셔야 할 그 중심자리에 사람을 두는 것이 세속주의에요. 엊그제 차를 몰고 가다가 교회 앞 사거리에서 멎었는데 옆에 봉고버스 하나가 획 달려오더니 탁 서요. 보니까 교회의 봉고버스에요. 뒤집어지는 줄 알았어요. ‘대한예수교 장로회 신나는 교회’ 교회마다 ‘꿈과 사랑이 있는 교회’ ‘비전이 있는 교회’ 그것이 뭐하는 것입니까. 그까짓 구호가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실제로 그 안에서 뭐가 일어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그러한 교회의 이름을 짓는 이 모든 것들 속에서도 드러나는 것이 뭐냐 하면 철저한 인본주의에요. 그러니까 인간을 중심자리에 놓고 그 인간이 하나님과 교회와 목회자와 모든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그 사람을 세워주고 그리고 그 사람이 행복해지도록 도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끌고 교회에 모으려고 한다는 것이죠. 이러한 구도들이 사실은 그렇게 성경적이냐 하는 것이죠.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이 멀리 떠나서 인간에게 돌아오셔야 할 집나간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에 계서서 인간들에게 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선하신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우리에게 선포하신 진리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스스로 멀리 하나님을 버리고 떠났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깨닫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도록 그렇게 촉구하고 있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에요. 그리고 전도자인 우리들은 바로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알 수 없는 인간들에게 깨우쳐주고 그리고 그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그 길을 알려주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것이 바로 목회자요, 전도자라는 것이죠. 바로 이러한 상황이에요.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큰 것이 좋은 것이에요. 그래서 저마다 교회에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있어요. 여기에서 목회자는 진리에 사무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피를 토하듯이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를 경영하고 이 시대를 읽어서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교회들보다 더 효율적으로, 효과적으로 마케팅과 경영의 기법, 심리학, entertainment 산업 같은 것들을 동원해서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교회를 만들고 그들을 교회 안에 머물도록 붙들어주는 것이 목회자의 능력처럼 되어가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죠. 본질로부터 너무나 멀리 벗어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루살렘과 바벨론의 특징을 간명하게 묘사합니다. 바벨론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떠난 나라였기 때문에 바벨론의 이상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에요.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같은 능력을 본떠야 되고 권세를 본떠야 되고 하나님과 같은 많은 물량주의가 필요해요. 하나님 안에 있는 풍부함을 흉내 내는 것이죠. 그 위에 하나님이 보편적인 것처럼 다수를 만들면서 세상나라는 자기의 위력을 과시하는 것이죠. 그러나 예루살렘의 가치는 그렇게 크고 위대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왜 하나님이 하필이면 세계의 고등학교 역사책에 두 줄밖에 안 나오는 이스라엘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이 바벨론이나 이집트 같은 나라를 선택하셨다면 얼마나 하나님의 성경의 역사가 찬란하게 빛났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 작은 나라를 택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의 목표는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바벨론의 가치는 크기에 있을지 모르지만 예루살렘의 가치는 거룩함에 있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분명한 표지가 될 때에 그것으로써 예루살렘의 사명은 다하는 것이에요. 어두운 밤바다에 방황하는 풍랑을 만난 배들을 안전한 항구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바다전체 위에 수많은 조명탄을 쏘아서 항구까지 비출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의 등불이라도 올바르게 빛나고 있으면 그 등대를 보고 수십 척의 배들이 풍랑을 피해서 안전하게 항구로 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러한 물량주의와 이런 어떤 크기위주의 사고방식은 잘못된 것이라는 거예요. 물론 교회는 자기 마음대로 크게 할 수도 없고 작게 할 수도 없어요. 그렇지만 중심 그 자체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되어야지 된다는 것이죠.
오늘날 여러분들 다시 이 영적인 현실이 매우 혼탁해지고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70년대 60년대에 한국에 유행하던 기복주의, 성공주의 내지는 번영주의의 복음이 다시 고개를 들고 미국에서 일어나서 다시 한국을 휩쓸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공주의적인 복음의 대표적인 사람이 지금 미국에서 목회하고 있는 조엘 오스틴이에요. 요새 이 사람은 가는 곳마다 나한테 욕을 먹는데 어느 학생이 나한테 와서 목사님 조엘 오스틴의 신학을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해서 내가 그랬어요. ‘신학이 있어야지 내가 신학을 평가하지…….’ 내가 한마디만 이야기해주겠다. ‘그가 그리스도인이면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네가 생각할 때 내가 그리스도인이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내가 신학자로서의 명예를 걸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 사람은 절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 사람이 내세우는 오늘날의 성공주의적인 복음을 극찬하면서 따라하고 어느 출판사에서 그 책을 찍어내서 150만부를 팔아서 특별보너스까지 직원들이 받았다는데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 계산해야할 것입니다. 나는 분명히 그렇게 믿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기억해야할 것은 60년, 70년대에 일어났던 기복신앙은 오늘 2000년대에 되풀이되고 있는 이 기복신앙과는 완전히 다른 성질의 것이에요. 그때는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아주 순박한 번영주의였어요.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런 번영주의가 달동네나 철거민촌에서 환영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강남에서 환영을 받고 있어요. 여러분 강남의 압구정동이 현재 소비수준이 십만 달라가 넘는다고 해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그런 땅에서 왜 그런 성공주의 복음이 다시 환영을 받고 있습니까? 오늘날 꿈꾸는 이 번영주의 복음이라는 것은 옛날처럼 그렇게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생계형 번영주의가 아니에요. 이것은 Maslow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인간 욕구의 마지막 단계인 자기를 온전히 실현하는 것을 종교의 힘을 빌어서 실현하고 싶은 그런 욕구의 반영이라는 것이에요. 이것은 단순한 물질적인 문제가 아니에요. 이런 것들이 뉴에이지 운동이나 스피노자 이후에 이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이러한 영적 사상들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에요. 본인이 이것을 의도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것을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 이러한 혼동 속에서 우리들이 신비주의가 다시 복구되고 있는 것도 상당히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되는 것이에요. 정말 60년대 70년대의 신유운동이라든지 신비주의 운동은 대개 질병으로부터 벗어나고 싶고 또 아니면 불행한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러한 진짜 소박한 성공을 꿈꾸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희망을 주었던 면도 있어요. 그렇지만 오늘날은 그런 정도가 아니죠. 이러한 어떤 신비주의적인 운동들도 놀랍게 강남 쪽에서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물질주의 속에서 살면서 얼마나 심령이 곤고하게 비어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더욱이 그것이 하나의 목회의 성공인줄 알고 신학생들도 따라가서 그것을 배우고 그것을 흉내 낸다고 하니 교회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우리는 마음이 통렬하게 아플 뿐이에요. 그런 속에서 우리들이 보게 되는 것이죠.
오늘날의 신비주의는 그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신과 동일시하고 그 플라톤주의적인 상승의 사상으로 우리 인간의 영혼 자체가 하나님께 상승하여 합일을 이룰 수 있다고 하는 Postmodernism적인 영혼관과 관련되어 있는 신비주의가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상황 하에서 이제 세상의 인간을 성경적 관점으로 다시 돌아가서 너희는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인들이고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다시 돌아와 믿음을 갖기 전에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 수 없는 절망적인 인간이라는 개신교의 독특한 인간관을 제시하는 것이 이제는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죠.
그러면 왜 이러한 상황이 되었을까? 예전에는 ‘목회’하면 당연히 회심목회였지요. 그래서 목사는 온 힘을 다해서 동네사람들에게 매맞아가며 욕먹어가며 복음을 전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고 눈물로 전도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함으로 결국 그들이 예수를 믿고 회개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래서 복음의 말씀을 가르칠 때에 그것을 잘 듣고 깨닫고 그래서 그 목사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그렇게 하면서 한 교회를 이루면서 교회가 되어갔던 것이죠. 그러한 거룩한 사역에 그 사역의 크기 때문에 더 많이 존경을 받고 무시당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성경적인 풍조가 아니에요. 그런데 이제는 이런 회심목회가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는 것이죠.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설교를 하는 설교자이기도 하고 또 대예배시간에는 여러분들이 회중이 되기도 하겠지요. 한번 선명하게 어떤 설교자이든지 여러분들이 드리는 예배 속에서 저 사람은 정말 하나님 편에 서있구나 그래서 우리의 영혼을 진심으로 염려하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정말 불행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회개를 외치는 설교를 언제 들어보았는지 그리고 언제 해보았는지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에요. 더욱이 온 교회가 회개하느라고 눈물을 흘리며 예정된 예배시간을 훨씬 더 넘어서서 성령의 쏟아지는 은혜 속에서 자기의 죄와 악함을 고백하며 회개했던 그런 고전적인 회개의 부흥이 언제 여러분들의 예배현장 속에서 경험되어 보았는지 묻고 싶어요.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어린아이들을 돌보고 중, 고등학생들을 가르치든지 청년들을 돌볼 텐데 여러분들이 성경을 가르치거나 상담을 하거나 설교를 하거나 어쨌든 ‘전도사님 내가 전도사님 말씀을 듣고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라고 눈물을 흘리는 지체들을 언제 만나보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만나보았는지 묻고 싶은 것이에요.
여러분들이 존경하는 웨슬리 목사는 그 점에 있어서 우리에게 존경할 만한 귀감을 남겨준 사람이었어요. 그런 철저한 회개의 복음과 외침이 이제는 교파와 상관없이 어디서든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죠. 웨슬리 목사를 비롯한 청교도들이 즐겨 사용하던 선포가 있었어요. 'repent or perish' '회개하든지 멸망하든지 선택하라.' 는 것이었어요.
그러면 이러한 회심목회가 사라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시대적인 조류를 보자면 이것이 르네 데카르트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데카르트는 그 자신은 제가 보기에는 절대로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천재적인 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철학자들이 보는 데카르트와 신학자들이 보는 데카르트는 다릅니다. 우선 철학적으로도 다르지요. 철학자들은 이 데카르트가 이제 중세까지 내려왔던 모든 세계관과 존재론 중심의 사유의 체계를 극복하고 인식론 중심의 사유의 체계를 세움으로써 근대를 연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죠. 그래서 철학자들은 근대를 데카르트를 기점으로 나누는 것이에요.
데카르트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상당히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기본적인 골격을 이야기하면 이런 것이에요. 중세시대까지는 중심이 존재론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이런 어떤 존재가 있으면 나의 인식과는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에요. 존재하고 그리고 이것을 인식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도 인식해요. 그리고 각자 이것에 대해서 인식이 다를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은 신뢰하기 굉장히 힘들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요구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네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에 동의하든지 안하든지 계시가 그분을 살아 계시다고 말하니까 너는 믿어야한다.’ 라는 것이죠. 그래서 믿음은 이성을 요구하고 이성은 믿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 중세의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데카르트에 와서 완전히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하고 여기에 이렇게 존재가 있고 내가 많은 인식하는 주체들 속에서 돌아가던 존재였는데 나를 여기다 두는 것이죠. 그리고 수많은 존재를 나의 주위에서 움직이며 돌아가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것은 내가 사유함으로서 존재하는 것이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이 의식이 이 모든 사물을 판단하고 존재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는 인식론 중심적 사상을 세우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무슨 문제가 나오지요? 인식하는 것이 나만이 아니라 사람이 다 인식한다는데 그러면 보는 사람마다 보는 것이 틀리지 않겠느냐. 그런데 틀리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죠. 그리고 틀리는 것들 가운데 달라 보이는 모든 것들을 최대한 버리고나면 마지막에 공통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공통인식이 있는데 그것은 신뢰할만하다고 보는 것이죠.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인 ‘꼬깃도 에르그 숨’ 이라는 명제는 사실은 데카르트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이 명제는 이미 데카르트가 나오기 약1400년 전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시 폴리오 에르그 숨’ 이라는 명제를 만들어 냅니다. ‘내가 오류에 빠질 수 있다면 그러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을 흉내 내서 이제 이 데카르트는 ‘꼬깃도 에르그 숨’이라는 명제를 만들어내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명제는 정확한 번역이 아니고 ‘나는 회의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것이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인식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의심을 해라. 그래서 모든 믿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끝까지 모든 것을 의심해라. 그러나 의심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은 의심할 수 없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부동의 확신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는 것이에요. 그렇게 해서 끝까지 모든 것을 의심하고 나면 마지막에 도달하는 명석하고 판명한 법칙이 나오는데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죠.
여기에서 그 유명한 데카르트의 영혼진리 창조설이라는 교의가 나오는 것이에요. 이 교리에 다르면 그는 메르센이라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처음으로 신에 의한 영혼진리 창조설을 만드는데 신은 이 세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다 어떤 법칙을 만들어서 이 세계를 던지셨다는 것이에요. 그 세계 안에 있는 진리는 신이 만든 것이고 만들어진 그 법칙은 신을 인간이 인식하며 찾아낼 수 있도록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법칙을 발견하면 그것은 우리의 이성이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지경에 까지 가기만 한다면 그것은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이 세계 자체 안에 존재하는 그 모든 아름다운 법칙과 질서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법칙이 있을 뿐이고 하나님은 이 세계 안에 안계시고 그것은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종교의 영역이라고 줄을 그어버립니다. 이것이 데카르트의 사상이에요.
이후에 칸트가 뒤를 이으면서 이것들을 보다 더 구체화합니다. 저의 개인적인 확신으로는 두 사람은 절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이 사람들이 인간을 중심에 놓은 것이에요. 그런데 사실 이 사람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로 이어지는 중세 스콜라주의가 끝나고 후기에 접어들면서 중세 철학 안에서 커다란 폭풍과 같은 변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유명론, 실재론의 논쟁이에요. 그러면서 결국은 존재론 중심으로 사유하던 중세의 철학의 체계들이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그러면서 상대주의적인 요소들이 막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여러분들이 역사시간에 배운 리미니에 그레고리 그 다음에 토마시오 깜바넬라 라든지 이러한 많은 중세의 철학자들 윌리엄 오컴, 그리고 그것을 후에 종합한 돈스쿠스투스 등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것들이 혼란스러운 양상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것이 역사적으로 커다란 하나의 진류가 되어서 르네상스를 탄생시키는 것이에요.
르네상스는 결국 인문주의 모토가 되는 것이죠. 인문주의는 결국은 인간이 그 모든 가치와 척도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지적인 운동이었어요. 그리니까 휴머니즘이에요. 중세는 인간의 자유를 하나님의 은총 아래에 둔 것이에요. 그것은 계시에 의해서 지배되는 그 아래서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제 접어들면서 종교를 폐기해서 밑으로 깔고 그 다음에 인간의 이성을 그 위에 놓는 것이에요. 이것이 결국은 이성주의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는 것이죠. 17,8세기에 일어났던 이러한 지적인 운동의 체계가 바로 계몽운동으로 나타나는 것이죠. 그래서 중세말기의 혼란스러운 양상이 르네상스로 르네상스가 휴머니즘으로 그리고 인문주의로 인문주의가 일어나면서 종교개혁인데 여기서 기독교적 인문주의와 세속적 인문주의로 갈라져요. 그래서 종교개혁, 인문주의 그리고 나서 계몽주의 그리고 자유주의로 뻗어나가는 것이죠.
이런 속에서 이제 이신론이 들어오게 됩니다. 이 이신론은 그래도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서구사회였기 때문에 데카르트의 이런 논리와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고 다스린다는 사상을 종합할 수 없을까하고 만들 것이 ‘떼이즘’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이 모든 세계 자체가, 우주 자체가 하나님에 의해서 지적으로 설계된 것이고 하나님은 법칙을 만들었고 그 법칙을 움직이시기 위해서 관여하실 뿐 세계에 직접 관여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잘 아는 디트리 보네프의 레지스탕스 운동 같은 것도 바로 이런 사상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죠. 미성숙한 시대에는 하나님이 그렇게 개입하셔서 역사 속에 자기의 뜻을 이루셨지만 신약과 같이 성숙한 시대에는 자연적인 법칙들을 만들어서 자동으로 돌아가게 하신 것처럼 도덕적인 법칙들도 그렇게 만들어서 인간들끼리 살게 만드셨기 때문에 히틀러 같은 나쁜 놈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죽여 버려야 된다는 것이에요. 그것이 성숙한 시대를 살고 있는 신자의 사명이요, 부르심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에요.
이렇게 하면서 결국은 이신론이 번져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낭만주의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 낭만주의는 경험주의의 한 현상이에요. 이 경험주의는 이제껏 까지 인간의 대한 모든 이해를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어떻게 바꾸어 놓느냐하면 예전에는 인간이 성선설이냐 성악설이냐가 만날 토론의 대상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경험주의에서는 그러한 인간에 대한 이해에 종지부를 찍어요. 그리고 뭐냐 하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따빌라라사’로 태어나는 존재다. 백색 서판의 존재로 태어난다. 그래서 결국은 가치중립적인 존재이고 그가 이 세상을 살면서 무엇을 경험하느냐에 따라서 그 인간은 이런 저런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라고 보고 인간 본성은 선이나 악한 것이 아니라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상을 낳게 되는 것이죠. 여기에서 이제 이 경험주의가 근대 국가론에 엄청 영향을 미쳐요. 그래서 그 후에 존 로크, 장자크 루소 그리고 토마스 홉스 등으로 이어지는 사회계약설에 모태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전까지는 하나님이 천국의 질서를 본받아서 이 땅에 만들어 놓은 것이 국가고 국가를 통해서 당신의 질서를 펼쳐 가신다고 생각했고 그랬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것은 왕이 예수 그리스도만 잘 믿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다 엎어버리는 것이에요. 이것은 단순한 계약관계일 뿐이다. 그래서 이 계약에 충실하지 않으면 국민은 언제든지 계약파기자인 국가를 징벌할 수 있다는 시민혁명의 길을 열어놓는 것이죠. 이것이 결국은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 되고 이런 성숙한 사상 속에서 이제 나폴레옹의 일시적인 통치 이후에 완전히 프랑스를 두 번의 혁명을 거쳐서 완전히 프랑스를 자유의 물결로 물들인 다음에 이 사상이 구라파 곳곳으로 실어 날라서 결국 근대 시민사회가 형성이 된 것이죠.
여러분들은 미국의 사회가 성립될 때에 그 국가 자체의 존립이 엄청난 기독교 사상에 기반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역사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토마스 제퍼슨 같은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은 완전 자유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인간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해줄 수 있는 야경국가의 개념을 외쳤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인간의 권리와 인간의 행복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서 필요한 도구가 국가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인간을 최대한 높이는 인본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단 말이죠. 이런 상황 속에서 결국은 근대 시민사회 자체가 이 자유민주주의 사회 자체가 이미 인간을 본위로 하는 사회라는 것이죠. 선교학자들은 국민소득 오천 불을 기점으로 봅니다. 국민소득 오천불이 마지막으로 복음에 대한 강한 관심을 갖는 정점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오천불이 넘어서면서부터 기울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국민소득 이만불이 넘어갑니다. 그러니까 다른 나라가 따랐던 모든 기독교의 쇠퇴의 과정을 우리가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에요.
낭만주의라는 것은 계몽주의 운동이 계속 진행되면서 그 자체에 쇠퇴의 요인이 있었어요. 이신론은 사람들에게 이제는 신은 없고 우리가 이 법칙을 의지하면서 살 수 있다는 확신은 가져다주었지만 그러나 종교를 통해서 위안을 얻고 정신적인 구원을 얻고자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만족을 줄 수 없었어요. 낭만주의는 결국 뭐냐 하면 인간의 모든 행복과 이런 것들이 결국은 자기의 만족에 있다고 보는 것이에요. 인간 자신의 아름다움에 도취해서 그 안에서 행복과 쾌락을 느끼는 거기에 선이 있다고 생각한 극단적인 자아 중심적 운동이었어요. 그게 낭만주의에요. 이것이 문학뿐만 아니라 미술, 음악, 복식사 모든 것까지 전부 다 퍼지기 시작하면서 말하자면 다음세기에 있을 그런 근대 시민사회, 인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중심으로 생각하는 그러한 사회의 건설을 위한 정신적인 토양들을 놓게 되었던 것이죠. 이런 속에서 자기만족적 행복관이 아주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고 인간의 아름다움 자체에 깊게 탐닉하는 그런 운동이 있게 되는 것이죠. 이런 낭만주의를 통해서 인간은 정신적인 것보다 훨씬 더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것 중에서도 고등의 가치가 있는 것들이 아닌 열등한 감각적인 것들에 몰입하는 그런 시대의 정신을 생산해서 다음세대에 물려주게 되는 것이죠.
이런 상황이 되었다가 그래서 극단적인 자유주의의 물결이 신학에도 닥치게 되면서 이제 역사적인 예수의 연구를 비롯해서 기독교의 모든 진실성들을 전부다 부인하는 것이죠. 그래서 소위 이야기하는 성서의 비신화화 운동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1942년 루돌프 불트만이 독일에서 발표했던 그 논문을 통해서 이 비신화의 작업이 아주 본격적으로 고개를 들게 됩니다. 이전부터 벌써 구라파에서 기독교의 역사는 기울기 시작해요. 그래서 결국은 성경의 초자연적인 사실들을 다 부인하고 그리고 그 시대정신의 눈높이에 맞추는 그러한 복음의 변절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계몽주의가 극단에 치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어떻게 되었지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인류는 미증유(未曾有)의 커다란 불행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러한 커다란 불행을 맞이하게 될 때에 인간이 가지고 있었던 중요한 신념하나가 부서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이성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신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성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 결과는 엄청난 파괴 그리고 끊임없는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광기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을 보면서 이제 인간의 이성에 대해서 심각한 회의를 품게 되는 것이죠. 과학기술은 폭발적으로 발전했는데 그로 말미암아서 인간관계는 다 파괴되고 그 다음에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다 깨뜨려지고 고독이 밀려들어오게 되어서 이제 심리학의 중요성이 등장하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날의 만연하고 있는 기독교의 수많은 프로그램들이 굉장히 많은 부분들이 이교적인 프로그램들이에요. 그런 심리학적인 기법들이 들어와서 사람들을 혼동시키는 것이죠. 이런 일들이 계속 있고나서 결국 마지막에 이제 여러분들이 잘 아는 Deconstruction 이라는 해체주의 운동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에요. 다다이즘을 비롯해서 허무주의, 해체주의, 니힐리즘, 이런 것들이 전후에 막 강력하게 고개를 들고 유럽 전체를 휩쓸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르트르에요. 그가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어요. ‘나는 일평생 나의 사명을 진리를 허무는 일에 바쳐왔다.’ 진리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허물어버리는 것이에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필연적으로 거기에 있어야하는 존재가 어쩔 수 없이 그냥 남아진 존재이고 근원을 알 수 없는 우연적인 존재이고……. 하이데거의 표현에 의하면 우주 속에 그냥 던져진 존재일 뿐이에요. 그런 속에서 목적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아주 우스꽝스러운 것이죠. 그래서 매일 인간은 그런 허무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 이성은 믿을 수 없다는 선언이 나오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마지막에 신은 죽었다는 이야기까지도 신학 안에서 나오고 이제는 예수를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신학을 전공하는 우스꽝스러운 사태까지 일어나는 것이죠.
그런데 결국은 그것도 우스운 것이 이성은 믿을 수 없다고 단언한 것도 이성인데 그것은 과연 믿을만한가? 그러면서 열린 것이 바로 Postmodernism이에요. 많은 책에서 이것을 후기 현대주의라고 그러는데 현대주의가 아니라 후기근대주의에요. 현대주의는 없어요. 근대주의의 핵심은 이성에 대한 신뢰에요. 그런데 이성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버리는 것이에요. 그러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 다음에는 이성을 무시하니까 나중에 남는 것은 감각이 남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어떤 사상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우주적으로 전체적인 것을 보는 시야들을 다 잃어버려요. 그리고는 기능위주로 가게 되고 지식 그 자체도 장중한 체계를 가진 지식이 아니라 단추를 누르면 물건이 쏟아져 나오는 자판기 같은 Automaton 같은 지식만이 많은 사람들에게 유행하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속에서 사상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죠.
그러면 기독교는 이런 것들을 보면서 오히려 사상의 힘으로 대적하고 이 초대교회 때에 그 수많은 이단적인 사상과 더불어 싸울 수 있게 만들었던 그런 사상의 힘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신학을 하고 목회를 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을 공부하지 않는단 말이죠. 내가 하도 답답해서 이름만 대만 다 아는 우리나라 신학대학원에 가서 ‘기독교강요를 다 읽어 본사람?’ 하고 손을 들라고 하니까 한 class에 두 사람이 손을 들어요. ‘신공론을 읽어본 사람?’ 그랬더니 이만큼이 모였는데 한사람도 없어요. 그러면 도대체 무슨 책을 읽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만큼 그러한 지식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시대가 된 것이죠. 이런 속에서 과연 우리는 목회의 본질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겠느냐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런 Postmodernism시대에는 근본이 뭐냐 하면 인간 자신이 하나하나를 신화하는 것이에요. 사실 스피노자라는 사람은 화란에서 기독교 신자였는데 파문을 당합니다. 그런데 지금 오늘날 이 시대에 그 스피노자가 화려하게 부활하는 것이에요. 그 스피노자의 사상은 여러분들이 한번 꼭 연구해볼 가치가 있어요. 그 사람은 신이 곧 자연이라고 본 것이죠. 자연 혹은 본성이라고 본 것이에요. 그래서 우주 이 자체는 신으로 가득 차 있고 그 신이라는 원천으로부터 우리 인간 하나는 빚어진 개별적 신적 존재에요. 그래서 이 속에서 우리들이 끊임없는 spiritualization을 꿈꾸면 우리의 영이 이렇게 해서 물질의 세계를 극복하고 초월하면서 그 거룩한 신과 합일을 이루게 된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한사람, 한사람을 굉장히 중요한 존재로 생각하는 이 사상은 기독교적 휴머니즘에서의 사상은 이것은 종교 개혁적인데 이런 스피노자식의 인간을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이런 것들은 굉장히 이교적인 개념이라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듣기에 굉장히 사랑을 받았던 가스펠송 하나가 있어요. 내가 불러볼까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입니다. 그 음악이 불신자들에게까지 열렬히 환영받는 이유는 뭐냐 하면 코드자체가 postmodernism 코드에 딱 맞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설교도 그런 식으로 하면 사람들에게 막 feel이 꽂히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인간이 죄를 지어도 죄인이라고 그러면 안 되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써 죄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이제는 죄를 지으면 지을 수밖에 없는 그것에 의해 그 사람도 피해를 받은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피해를 입은 사람……. 그렇게 설교하면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는 것이에요. 그 대신 회심은 절대 없는 것이에요. 눈물을 흘릴 수는 있어요. 그런데 회심은 없어요.
내가 여러분들에게 진지하게 충고하는데요. 공부를 많이 해야 됩니다. 공부 안하고 진실해질 가능성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할 정도밖에 안 돼요. 한 3,40권의 책을 읽어서 내가 오늘 다섯 시간 이상을 강의해야할 내용인데 80분에 마치고 가는데 다 못하고 갑니다. 책을 읽어요. 책에 다 나와요. 그 대신 종합이 필요해요. 오늘날 헛소리하는 사람들의 책을 읽지 말고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들의 책을 읽으면서 공부를 해요. 우선 아쉬운 대로 데이비드 웰스의 5부작이라도 읽어요. 왜 안 읽어요? 그러니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고 그냥 그 교인들하고 묻어서 가는 것이에요. 만날 모여서 그런 노래나 부르고 말이지……. 뭐에요? 어떻게 하자는 거예요?
결국은 이제 문제가 뭐냐 하면 이제는 점점 절대적인 진리, 이런 것들을 싫어하는 것이죠. 이런 풍조들이 성서학 안에서도 일어나요. 이게 시대정신이라는 것이 세상에서만 도는 것이 아니라 교회도 시대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에요. 예전에는 뭐냐 하면 ‘기독교의 진리는 무엇이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조직신학 책을 써도 그렇게 쓰면 사람들이 안 읽어요. 그래서 예를 들자면 이렇게 말하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앙고백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초대교회 때의 신앙고백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실제로 그것이 무엇이냐를 가지고 따지지 말고 그 시대의 사람들이 믿었던 것을 우리도 물려받고 믿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들이 믿었던 것이 그것이 세상 밖에서는 전체적으로 객관적이라고 볼 수 없지만 christian circle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래도 객관적이 아니냐?’ 이렇게 해서 조직 신학서들을 다시 써내려가는 것이에요. 스탠리 그랜츠 같은 사람이 그런 대표적인 사람이에요. 이렇게 무섭게 변해가는 것이에요. 초신자들의 눈에는 이런 수많은 책들을 읽어도 그것이 이상하다는 느낌이 안 들지만 우리들이 보면 느껴지는 것이에요. 최근에도 케네서 헤긴 같은 사람의 책이 한국에서도 잘 팔리더라고요. 근본이 순 엉터리거든요. 그런데 말하자면 잘 믿고 말씀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잘 포장해서 수없는 책들을 뿌리는 것이에요. 그런데 기반에 깔려있는 것은 삼위일체로부터 시작해서 다 엉터리에요. 그런데 그것을 practical하게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배포하고 그것을 교역자들이 사서 교인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읽으라고 그래요. 이게 말하자면 독초를 사다가 죽을 쑤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란 말이에요.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요. 어느 교회에서는 온 교인이 조엘 오스틴의 책을 읽고 독후감 대회를 했다고 하는데 정말 정신없는 상황이에요.
이런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겠느냐는 것이에요. 우리는 지도자가 될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냥 자기만 진실하게 살면 안 돼요. 그리고 아는 게 없는데 어떻게 진실해질 수 있겠어요. 거의 힘든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시대를 분별할 수 있는 아주 예리한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그렇게 깨어 기도하고 끊임없이 이 시대를 탐구하면서 올바른 신학의 길을 가야하는 것이죠. 그러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죠. 먼저 이 문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인간관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성경은 절대로 주님의 도움이 없이 진정한 하나님을 향해 자기의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돌이키는 회심 없이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는 존재라고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신약에서 인간의 구원을 이야기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아름답게 부각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지 않을 수 없는 존재로 창조하신 것이에요. 그렇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살아가도록 창조하신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시는 과정도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주권적인 은혜의 역사를 충만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이에요.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희망이 없다.’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웨슬리도 철저하게 회개의 복음을 전했잖아요?
그런데 결국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자기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를 구원해주시는 유일한 하나님의 구원방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 예수만을 의지하며 살게 되는 것이에요. 세례 받을 때 그러잖아요. ‘이후로는 당신이 예수만을 의지하며 살겠습니까?’ 말로만이 아니라 삶 전체로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그런 인간이 되는 것이에요.
여기에서 이제 문제가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디모데서에서 이야기하는 소위 경건의 비밀이에요.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등지고 각기 제 길로 가는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스스로의 힘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결국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는데 그렇게 돌아오게 될 때의 핵심이 뭐냐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 사건이에요. 즉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일반 섭리의 방법으로 당신의 선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보여주셨어요. 그리고 또 역사적으로 사건 속에 직접 이적으로 개입하시기도 하셨지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을 모든 인간들이 감각을 통해서 직접 볼 수 있도록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에요. 그래서 그분의 섬김과 말씀, 사역과 인간들에 대한 모든 태도는 하나님의 성품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프리즘과 같은 역할을 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우리는 잘 몰랐지만 그 보이지 않는 햇빛이 프리즘을 통과함으로 7가지 색으로 분광이 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이 어떠하심이 찬란한 빛으로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죠.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야 했던 첫 번째 이유에요. 또 하나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이시기 때문에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성을 덧입지 않고는 죽으실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뵙는 순간 그 회개의 순간에 하나님의 성품을 두 갈래로 현재적인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에요. 그것이 뭐냐 하면 떨리는 하나님의 엄위에 대한 두려움이에요. 즉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분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을 때에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세상 죄를 짊어진 속죄양이었어요.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향한 아버지의 진노를 쏟아 부음 당하심으로 짓이기듯이 그의 육체가 깨뜨려지는 처절한 십자가의 죽음은 바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얼마나 커다란 간격이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나는 지극히 더러운 죄인일 뿐이고 하나님은 그 죄와 양립할 수 없는 완전하고 거룩하신 초월적이고 그리고 완전하신 분이시라는 인식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이죠. 이것이 거룩함의 경험의 한 국면이에요.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떨리는 두려움을 경험하면서 하나님 앞에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위치를 아는 영광스러운 자각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에요. 그 때에 철저하게 자기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존재일 뿐이고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희망이 있는 그러한 피조물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죠.
경건의 또 하나의 국면이 뭐냐 하면 거룩함의 경험인데 이끌리는 사랑이에요. 그렇게 두렵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무엇인가 나를 사로잡아 끄는 놀라운 사랑의 흡인력이 있어서 그래서 그 흡인력을 강하게 경험하면서 도망치고 싶지 않고 오히려 그분께로 이끌리고 싶은 사랑의 경험이에요. 그러한 경험 속에서 우리들은 경건의 비밀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 안에서 예수만을 전적으로 의존하고 그분을 사랑하며 자기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그분의 그 큰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면서 주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거기에서 신실한 믿음과 거룩한 생활이 나오게 되는 것이에요. 거기에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의 독특한 세계관이 나오는 것이죠. 그래서 그 이후에 계속해서 깊이 있는 성경지식과 신학의 체계 속에서 선포되는 교리의 교육과 그리고 신앙의 훈련 속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로서의 독특한 세계관과 인생관을 가지고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그런 필연적인 사상인으로서 이 시대와 맞서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죠. 이런 상대주의가 교회 속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결국은 교회에서 회개도 사라지고 십자가도 사라지게 되었어요. 최근에 여러분들이 어느 부서를 담당하든지 십자가를 설교하면서 마음이 뜨거워본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십자가 없이는 아무 희망도 없는 이 세상이라는 아주 분명한 인식이 여러분들 안에 있는지 한번 스스로 되물어보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설교하셔야 합니다. 그것은 의무에요. 한번 온 마음을 다해서 기도하고 자기가 감격한 십자가를 설교 해봐요. 바로 반드시 그중의 몇 사람이 회심하는 사람이 나와요.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진리를 싫어해도 개중에는 그 진리가 선포되기를 기다리며 목말라하는 영혼들이 있어요.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찾아내는 것이에요. 몇 명이든지 그 사람들을 데리고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교회를 섬겨가는 것 이것이 신앙이라는 것이죠.
이것을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마지막 세 가지를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먼저 복음으로 무장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으로 무장하라고 그러는데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한 줄로 표현하면 Jesus died for us. 이 세 단어에요. ‘예수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이에요. 그러나 그것만을 아는 것으로써는 충분히 안다고 말할 수 없어요. 그래서 필요한 지식이 복음교리에 대한 지식이에요. 복음교리는 평생을 배워도 다 배울 수 없는 지식이에요. 그런 복음에 대한 철저한 확신과 지식, 그것을 굳세게 붙들고 두 번째는 아무리 공교한 말로 설복을 해도 사람의 말과 혀로 회심하는 적은 없어요. 여러분들이 무신론자와 논쟁을 해서 언변에 능하여 무신론자를 꺾었다고 하더라고 그가 예수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에요. 할 말이 없어서 꺾인 것이죠. 회심은 그렇게 꺾이지 않아요.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인간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회심의 역사는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에요.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해야 해요. 기도를……. 나이 들면 육체가 기도를 도와주지 않아요. 그리고 일이 너무 많아져서 기도하는데 방해가 되어요. 오라는데 없고 갈데없는 지금의 때에……. 뭐 바쁘다고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웃긴다. 하는 게 뭐가 있기에 바빠?’ ‘공부해야 되요.’ 그 공부는 살아있는 사람이 숨 쉬는 것과 똑같이 해야 되는 게 공부인데 그것은 당연히 바쁜 이유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죠. 온 마음을 다해서 공부하세요. 그리고 한 학기에 한 키 정도의 책을 읽어요. 그래봐야 3년 후 졸업해봐야 한 구루마도 안 돼요. 기본적으로 신학적인 사고를 가지려면 삼년은 쉼 없이 무게 있는 책들을 독서해야 해요. 열심히 해요. 나는 여러분들이 노는 것을 보면 가슴이 너무 아파요. 지금 낭비하는 시간은 30년 후에 갚기로 되어있는 지불만기어음이에요. 30년 후에 한꺼번에 추심이 돌아와요. 그때 인생이 부도가 나는 것이에요. 진리에 대한 지식도 없고 영혼에 대한 열정이 없는 사람이 마지막에 교회를 가지고 무엇을 하겠어요? 교인들이나 타고 다니려고 하지……. 성령의 사람이 되세요. 기도 많이 하세요. 여기 학교의 뒷동산에 올라가서 기도소리로 가득 메워요. 80년대 초까지 우리 총신이 그랬어요. 지금은 다 불이 꺼졌어요.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어요. 몸부림치면서 기도해야 해요. 신학교 다니던 시절에……. 저도 지금 새벽마다 너무 괴로워요. 왜냐하면 옛날처럼 그렇게 기도를 못해요. 신학교 다니던 시절이나 교수할 때 하루에 세 시간씩 기도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못해요. 매일 아침마다 마음이 계속 괴로워요. 이러면 안 되는데……. 물론 새벽기도는 나가지요.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안 되잖아요. 많이 매달려야 해요. 깊은 밤에 나와서 매달려 기도하고……. 건강한 사람이 6시간 이상씩 자면 죄 짓는 것이에요. 하다못해 땅장사를 해도 그렇게 하면 성공을 못해요. 어떻게 그렇게 하고 살아요? 그렇게 잘 것 다 자고 무슨 간절한 기도가 나와요? 열렬히 살아야지 간절한 기도가 나오지요.
마지막에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깨뜨려져야 해요. 회개하는 사람이 회개하라고 설교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를 왜 안하느냐고 교인들을 야단치고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안 읽어서 어떻게 새사람이 되느냐고 외치지 자기가 안하는 것은 안한다고요. 회개하세요. 끊임없이 깨뜨려져서…….
(찬양)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불꽃처럼 한 20년 확 사역하고 그냥 죽는 것이지 뭐가 그리 복잡해요.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