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학대학 섬김의 날
녹취자 : 김세나
레위기 24장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전에 관한 규례를 일러 주시는 가운데 나오는 구절들입니다. 그 중에서 특별히 이 앞부분은 바로 성전, 성막에서 등불을 켜는 규례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는데,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해서 감람을 찌어낸 기름을 가지고 오라고 그래서 그것으로 성막의 불을 계속 밝히라 그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학에 주는 도전이 적지 않아서 오늘 이 본문을 여러분들에게 잠시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이 기름이 쓰여 지는 목적은 불을 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불을 환하게 밝혀 그 성막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이 등잔불의 목적입니다. 신학은 하나님의 학문이죠. 우리들이 이렇게 부지런히 신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그 지식이 없으면 캄캄할 이 세상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세상을 밝힌다기 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밝히기 위해서 우리들이 신학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어두움은 빛이 살아지고 나면 생겨납니다. 정신적인 어두움은 지식의 빛이 사라지면 곧바로 어두움이 오는 것이죠. 우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무엇일까요. 우리의 중요한 사명, 특별히 목사가 될 사람의 중요한 사명은 불우이웃을 돕고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 첫 번째 임무가 아닙니다. 목사의 첫 번째 직무는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계 요한에 대해서 요한 사도는 말하기를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사람이 났나니, 이름이 요한이라. 저가 증거 하러 왔으니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자기를 인하여 많은 사람들을 믿게 하려 함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그러니 목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진리를 증거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여러분들이 신학의 도상에서 공부를 하면서 지금부터 이 진리에 대해서가 아닌 다른 것에 대해서 많은 관심사를 갖고 있으면서 목회를 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질 미래의 교회는 어두움을 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은 교회가 진리와는 상관이 없는 이 세상 사람들을 살기 좋게 해주는 한 사회를 개선하는 매개적인 기관처럼 사람들에게 비치고 있습니다. 세속주의라고 하는 것은 나쁜 것을 해야지만 세속주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셔야 할 중심 자리에 인간을 대신 있게 하면, 그것이 사람 보기에는 아름다운 미덕일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세속 주의인 것입니다. 사람이 중심된 기독교는 어떠한 식으로든지 진리의 내용을 외면하거나 훼손하지 않고는 그러한 세속적인 기독교를 만들 수가 없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의 교회 안에서는 세상과의 끊임없는 타협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화) 얼마 전 차를 타고 가다가 사거리에서 잠깐 정차를 했는데 옆에 봉고 버스가 휙 달려오더니 서요. 교회 버스에요. 이름을 보고 졸도 하는 줄 알았어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신나는 교회라. 어떻게 사람들이 그렇게 경박할 수 있습니까.
교회마다 붙어 있는 수많은 구호들을 보십시오. 꿈과 행복이 있는 교회. 행복을 원하십니까. 교회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이게 도대체 누가 중심이 된 신앙사상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니 사람이 본위가 된 그 곳에는 진리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절대적인 진리를 내세워서는 많은 사람들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죠. 오늘날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마케팅 교회, 심리학적 치료, 그리고 이머징 처치 그 다음에 불길처럼 번지고 있는 예언 운동, 신사도 운동 한걸음 더 나아가서 다시 리바이벌 되고 있는 성공주의적인 번영 복음들, 이러한 것들은 지금 얼마나 강력한 힘을 얻으면서 이 교회를 잠식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1960년대의 은사 운동은 병원 갈 돈이 없는 사람들이 병 고치기 위해서 그 몰두하던 운동 성격이 강했고요. 70년대의 번영 복음은 그저 의식주를 해결해 보기 위한 그러한 차원에서의 꿈과 소망을 가지려는 하나님 앞에서의 번영에 대한 기복신앙이었어요. 그런데 20세기에 재현되고 있는 이 은사 운동이나 번영 주의 복음에 대한 운동은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지금 자기 자신을 마음껏 실현함으로 그 자기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이고 자기의 행복이 이 세상의 최고의 가치라는 것을 입증하고자 하는 그러한 포스트모더니즘 적인 욕망에서 오는 것이에요. 이러한 속에서 진리는 점점 설자리가 없고, 모든 것은 상대주의화 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우리가 진리를 외치고 개혁신학을 부르짖는다면, 목회가 안 될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까지 나오게 되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두 이 세상의 풍조의 속삭임입니다. 세상은 변해도 진리는 시퍼렇게 살아있고 오늘도 그 진리는 사람들을 깨워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는 유일한 힘입니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 우리 시대의 형편은 등불이 꺼진 성막과 같습니다. 어둡고 캄캄한 그러한 성막과 같습니다. 이러한 속에서 목회자는 목회자의 목회자가 밝히는 이 진리의 등불은 그 교회가 밝아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러면 이 등불은 어떠한 것일까요. 이것은 한 사람의 자기 사상이나 자기 철학, 자기주의가 아닙니다.
(예화) 저희 집안에 없는 게 있는데 가훈이 없습니다. 그래서 애들이 맨 날 학교에서 가훈 써오라고 하면, 없다 그래라. 그게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또 교회 표어도 없습니다. 한 번도 그러한 표어를 붙여 본적이 없고, 누가 자꾸 목회 철학이 뭐냐 그러는데 없습니다. 무슨 철학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철학이 뭐라고 물으면 ‘태멘’ 이라고 대답합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부터 시작해서 계시록 마지막 절의 아멘 할 때 멘 자까지. 충분합니다.
교회 안이든 세상이든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어두움은 두 가지에요. 첫째는 객관적인 어두움이고, 두 번째는 주관적인 어두움이에요. 객관적인 어두움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이 시편 119편에서 시인이 고백한 말 속에 나타납니다. 여호와여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에 기이한 것을 보게 해 주시옵소서. 이것은 바로 객관적인 어두움이에요. 그래서 순수한 무지일 뿐이에요. 가르쳐서 이해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살아질 어두움이죠. 그러한 어두움들을 물러가게 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성경을 연구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절대 간단한 책이 아닙니다. 비록 이렇게 얇은 책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그 책은 그렇게 간단한 책이 아니에요. 부지런히 성경 자체를 읽을 뿐만 아니라 올바르게 탐구된 많은 신학은 우리 맨눈으로 보아서는 알수 없는 성경의 진리를 깨달음으로 객관적인 어두움이 물러가게 해주는 훌륭한 하나님의 도구에요. 그리고 바로 교수님들은 이 일들을 위해 부름을 받은 것이죠. 온 마음을 다해서 연구하여야 합니다. 교수가 되고, 10년 20년 세월이 흐르도록 확실하게 무엇인가 정리된 책 한권 내시지 않는 분들이 있는데 이것은 명백한 직무유기입니다. 신학교 선생님들 뿐 이겠습니까. 모든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신학을 부지런히 탐구함으로써 성경 말씀을 더 잘 깨닫는 사람들이 되어 객관적인 어두움이 자기 속에서 물러가야 해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그것을 쉽고 그리고 정확한 언어로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어서 받아들여지기만 하면 어두움을 물리칠 수 있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깨우치는 그것이 설교자의 사명이고, 목사의 사명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우리에게 말씀하시되, 우리의 지성에 말을 건내십니다” 즉,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성이에요. 이 지성으로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과 세계와 인간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그리고 그 지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는 깨달으려는 자세가 모든 진리를 알고 영혼이 자유를 얻는 첫 번째 길이라는 것이에요. 세속의 지성은 완고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어떠한 방면을 전공하고 나면, 자기의 뚜렷한 주장이 있어서 웬만한 자의 설득에 의해서도 자기에게 오류가 있는데도 꺾이지 않는 것이 세속의 지성이에요. 그러나 기독교적 지성은 유순함이 있어요. 자기가 온 마음을 다하여 학문적으로 탐구하고 그리고 이것이 분명한 사실이다라고 붙잡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설득하면 언제든지 그것을 꺾을 수 있는 신앙적 유순함을 함께 가지고 있는 지성입니다. 그러니까 부지런히 공부해. 부지런히 공부해야 됩니다. 특히 나이들어서 신학을 하시는 분들은 내가 나이가 먹었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젊은 사람들이 4시간 공부할 때 나이 든 사람들은 8시간은 공부해야 합니다. 이해력도 떨어지고 그 다음에 정신도 옛날같이 맑지 않고 그러니까 더 열심히 탐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성경과 신학을 탐구해서 이러한 객관적인 어두움들을 물러가게 해서 그래서 그것들이 신학의 체계로 자신 속에 분명하게 살아있어서 성경 어디를 펼치든지 자유 자제로 동일한 사상으로 설교할 수 있는 말씀의 사람이 되어 가야 하는 것이에요.
두 번째 어두움은 주관적인 어두움이에요. 이 어두움은 몰라서 어두운 것이 아니라 가르쳐 줘도 계속 되는 어두움이에요. 이 주관적인 어두움은 단순한 지식의 무지가 아니라 인간의 영혼의 부패와 마음의 죄로 말미암아 도입된 어두움이에요. 이 어두움은 지식적으로 배운다고 해서 물러나는 것이 아니에요. 이 어두움은 평면적인 신학의 지식을 아무리 축적해도 물러가지 않는 어두움이에요. 오히려 이 어두움은 인간의 부패성과 죄 때문에 도입된 영적인 어두움이에요. 이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물러 갈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신학 공부를 마음으로 하는데 어떠한 마음일 때가 이 신학이라는 학문이 가장 잘 되냐 하면 순전한 믿음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을 때, 그때에 이성의 활동도 아주 활발해 지면서 최고의 신학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에요.
(찬양 ) 우리 죄악과 강팍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우리가 성령의 은혜로 깊이 회개하고 자기의 죄에 대해서 깊이 통회하게 될 때에 그때에 하나님이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시면 두 가지 놀라운 마음의 변화가 우리에게 일어나게 되죠. 그게 뭐냐 하면 나의 영혼이 깃털같이 가벼워졌다라고 하는 느낌과 그리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예전에는 느낄 수 없고 알 수 없었던 그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에 대한 새로운 감각이 생겨나게 되요. 그게 신학을 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림을 그리는 화가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게 뭘까요. 두 가지죠. 하나는 사물을 남다르게 보는 것과 그것을 그려내는 손이잖아요. 똑같이, 똑같이. 우리의 이성은 이것을 그려내는 손이고, 우리의 영혼의 상태, 영혼으로 받아들이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우리의 시각과 같아요. 그래서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을 뵈올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그 두 어두움에서 물러가야 해요.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 자신을 짜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간절한 기도생활, 그 위에 부어지는 성령의 놀라운 은혜에요.
오늘 여기에 보면 성막에서 등잔불을 밝힐 때 감람유를 사용했습니다. 그 감람나무 기름을 감람나무 열매의 기름을 사용하는데, 올리브 기름이죠 그러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아주 특이한 표현이 하나 나옵니다. 감람을 찌어낸 순결한 기름이라는 말이 나와요. 순결한 기름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크라고 나오는데 무엇이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깨끗한 기름을 이야기 하는 거죠. 그런데 그 기름의 제조 방식이 뭐냐 하면 감람을 찌어낸 기름이에요. 이 찧는다는 것은 우리 뭐 방아 같은 것을 가지고 빻는 것을 이야기 하잖아요. 사실은 그 뜻이 아니라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이것이 까띠뜨라는 그 수동분사가 사용이 됩니다. 까띠뜨라는 이것은 까따뜨라는 동사에서 옵니다. 까따뜨는 무엇이냐 하면 때리다. 깨뜨리다라는 뜻이에요. 이것은 잘 익은 감람 열매를 탁하고 쳐서 나오는 기름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통용되는 본래의 기름을 짜내는 방식과는 다른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통상적인 기름제조 방식은 이것을 찌어서 그 다음에 틀에 집어넣고 프레스로 누르는 거예요. 꽉 짜서 누르면, 그 사이사이에 있는 기름이 압착기로 압착이 되어서 쫙 빠지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은 지금 이러한 기름은 성소에 쓰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그렇게 압착기를 돌려서 무리하게 짜내면 기름은 최대한 짤 수 있겠지만, 그 안에 불순물이 섞여 나오겠죠. 그러면 여러분들이 옛날 우리 어렸을 때, 시골에서 살 때 등불을 켜보면, 좋은 기름을 사다가 켜면 불꽃이 밝습니다. 싸구려 기름으로 켜면 불도 흐리고 시커먼 그을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은 순수한 불빛이 아니기 때문에 성소를 밝히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본 거예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대충 신학을 하면 안 된다 이야기에요. 그렇게 해서 대충 밝히는 등불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 어느 목사든지 교회가면 성경책가지고 설교하지, 국어책 가지고 설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당연하지. 그런데 문제는 뭐예요. 불꽃이 틀려요. 한쪽은 불빛은 조금맣게 나오고 온통 그을음 투성이에요. 세속주의, 인본주의 무슨 다 더러운 그을음들이 올라와요. 잘 보이지는 않고 뭐좀 듣겠다고 머리를 기울이고 나면, 마음속에 시커먼 그을음들이 가득 차는 거예요. 얼마나 커다란 죄악이겠느냐. 말씀의 사람이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힘썼노라고 고백을 하는 거예요. 순수하게 그러니 자기 자신의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깨달으려고 하는 개인적인 노력이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설교를 할 수 있겠어요? 안 되는 것이죠. 그러니 그런데 이 하나님이 지금 성소를 밝히라고 하는 것은 커다란 절구 같은 곳에 놓고 그 감람 열매 잘 익은 것을 집어넣는다 이거예요. 그리고 공이로 바스러뜨리려는 요량으로 깨는 것이 아니라 툭툭 치는 거예요. 뚝뚝뚝뚝 부러지고 깨드려지면서 원래의 감람나무 열매 속에 있었던 기름이 저절로 흘러나오는 거예요. 그 기름은 어떻겠어요. 아주 순수한 기름이에요. 자연적으로 흘러 나왔으니까. 그 기름으로 밝히라고 하는 것이죠.
이것은 우리에게 최소한 두 가지를 가르쳐 줘요. 그것은 뭐냐 하면 성소의 불을 밝히는데 기름이 필요했듯이 우리가 오늘날 목회 사역에서 진리의 불을 밝히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학문만이 아니라 이러한 성령의 기름 부으시는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학문은 많이 알고 있지만, 감화가 별로 없는 학자들을 가리켜서 미국 사람들이 한 때 드라이 스칼라(dry schola)라 했다. 드라이 스칼라들이 양산되는 교회의 시대에서는 희망이 없어요. 머리로는 칼빈주의자인데, 그런데 몸으로는 펠라기우스의 삶을 사는 거예요. 머리로는 정통 신앙을 외치는데 삶은 세속주의에요. 그렇게 되는 사람, 그렇게 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죠? 우리의 말씀 선포 속에 학문 속에 그 자체 안에는 우리의 주관적인 어두움을 물러가게 하고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을 녹여 새로운 본성으로 만들어주는 그 힘이 학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 학문은 도구일 뿐이고, 그 도구를 사용하시는 성령님에 의해서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으로,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던 사람으로 주님께 충성하던 사람으로 그렇게 바뀌게 되는 것이에요. 이러한 사실을 오늘 이 그림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 한 가지 보여주는 사실 하나는 이렇게 찌어낸 이 기름이 감람에서 감람 열매에서 흘러나오기까지 깨뜨려지고 부서지는 감람나무의 열매가 있었어요. 진심으로 인간적인 생각과 인본주의적인 사고를 버리고 계시의 말씀을 충직하게 따르고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도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진리 하나만을 붙들고 살아가겠다라고 하는 담대한 용기는 신학을 하는 그 사람 자신이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깨뜨려지지 아니하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의 모든 과정 자체가 참회가 있는 신학의 과정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 앞에서 단 한 번도 깨뜨려져 본 적이 없는 사람, 그리고 진리 앞에서 하나님의 엄위와 사랑을 깨닫고 어린아이처럼 눈물 한번 흘려 본 적이 없는 사람에 의해서 쌓아 지는 지식은 결국 자기와 견해가 다른 사람들의 목에 겨누는 칼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는 지식에든지 지식이 없는 사랑이든지 무엇이든지 하나님 섬기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깨뜨려지는 적이 있죠. 그러한 깨뜨려짐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구체적인 형태로 우리 안에서 나타나게 되는 성화의 과정이 바로 기도 생활이에요. 기도생활. 기도 생활속에서 나타나게 되는 거예요.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은혜 받으셨나
자기가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깨뜨려질 때에 비로소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그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이 가슴에 다가오게 되고,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고 자기를 그 모든 죄에서 구원하고 건져주신 하나님의 그 큰 은혜만이 그 큰 은혜만이 자기에게 자랑거리다 라는 고백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제는 세상이 진리를 믿지 않는 세상이기 때문에 교회는 점점 기도 안하는 교회가 되어 갑니다. 이 기도는 진리에 대한 확신과 비례해요. 그래서 진리를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이러한 경건과 학문의 조화 속에서 여러분들은 비로소 이 세상을 향해 외칠 진리를 담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제가 교회를 개척한 것이 16년 전이었는데 여러분들이 4년 뒤에 개척한다고 하면, 꼭 20년 간격이 벌어지는데, 교회가 잘 안될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확신합니다. 지금 매년 교회가 3천개씩 문을 닫고 있습니다. 그 중에 대부분이 개척한지 3년 안 되는 교회들입니다. 안됩니다. 그리고 점점 더 안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목회의 어떠한 성공 같은 것들을 기대하면 안돼요. 그 보람 자체를 많은 사람들을 모으고 70년대처럼 부흥을 누리는데 목회의 보람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어디에 보람을 두어야 할 것이냐. 온 맘과 뜻을 다해서 내 마음 속에 불타고 있는 이 진리를 사람들에게 외치는 보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마치 예레미야가 시일의 뜰에 갇혔을 때에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할 낯이면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에 불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했던 것처럼 그 마음으로 외치면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믿지 않아도 진리를 외치기만 하면, 진리의 빛 앞으로 나오려고 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다가 죽으면 되는 것이지. 뭐 그렇게 큰 꿈을 갖겠어요.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을 가슴에 세기고 한 편으로는 진리의 빛이, 한 편으로는 성령의 충만한 기름을 자기 깨어짐 속에서 소유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