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경외합니까?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이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라”(말 3:17)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 본문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가 기록한 내용입니다 때는 이미 유다 나라가 망해 버린 가운데 백성들의 신앙은 제각기 흐트러지고 이합집산처럼 사람들은 각기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린 채 살아가는 것을 대단히 마음아파 하시면서 그들에게 잘못된 삶을 보여주시고 그들을 강력하게 탄핵하셨습니다. 결국 그들이 모두 하나님을 버리는 죄는 사실 그들 안에 있는 자기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물질로 하나님 섬기기를 마다하고 율법을 지키기를 거절하면서 제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사실 나라가 망한 것도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어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나라가 망한 가운데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범죄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버렸는지를 상세히 탄핵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 안 섬긴 것이 있으며, 우리가 언제 불순종했으며, 우리가 언제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느냐고 하나님 앞에 질문 아닌 질문을 했습니다. 그 질문은 진짜로 무엇인가를 알고 싶고, 그 뜻대로 무엇인가를 행하고 싶은 마음으로 올린 질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판단하는 그 판단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질문을 통해 이 질문을 통해 하나님을 조종해 보려는 아주 오만한 심사가 이 속에 깃들여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대해서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런 사람들과 섞이지 않는 경건한 무리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들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아끼시고 그들을 마치 자기를 섬기는 아들처럼 대하시겠노라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의 마지막 영광을 보게 되는 것이죠. 이 세상은 어차피 불완전하고 죄와 욕심이 가득한 세상이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보이는 이 세상을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섞여 있기 때문에 모든 것들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비단 하나님의 백성과 이단 백성 사이에만 나타나는 그런 구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함꼐 한 언약 안의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그런 내용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로부터 이런 말씀의 경고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울타리 안에서 함께 생활했지만 모두 같은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의 제사 제도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한 언약의 백성으로 할례를 받고 함께 생활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모두 같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중 아주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죄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모두 깨뜨려진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자기 사랑에 골몰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형식으로 신앙을 대신하고 외식과 거짓으로 진실을 바꾸며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언약 백성으로서의 겉모습은 있었지만, 실제로 그 안에 언약에 대한 깊은 기쁨과 그런 언약관계로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에 대한 충성,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로는 하나님을 섬겼고 형식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입술로는 하나님을 높인다했지만,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과 매우 먼 사람들이었고, 교제가 끊어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외치는 선지자의 음성을 듣고도 하나님께 대들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런 두 종류의 사람들을 함께 있게 하십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은 세상에 있는 사람과 교회에 있는 사람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사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인해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바로 이런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자기를 위하는 이기심 때문에 하나님 앞에 마땅히 행해야 할 십일조를 드리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많을 헌물들을 삼켜버렸습니다. 탐욕이 그렇게 시킨 것이죠. 그런 불신앙이 대세를 이루고 있을 때 거기 속하지 않는 경건한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망가진 교회의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남겨두시고 마치 주님이 모두 떠나버리신 것 같은 비관적인 교회 안에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남겨두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마음을 바라보시는 분이시고, 그 분이 사람을 바라보시는 그 시선과 판단은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판단과는 같지 않습니다. 이것이 자신의 백성을 향해 가지고 있는 마음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편에 서있는 경건한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의 정한 때에 그들을 특별한 소유로 삼으리니.,....여기서 특별한 소유라고 하는 것은 아주 자주 나오는 표현인데 이것은 보화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 집안에는 많은 물건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이 나게 되면 그 모든 물건을 가지고 밖으로 튀어나가는 게 아닙니다. 여력이 있어 물건을 가지고 가게 되면, 보화를 가지고 나가는 것이죠. 가장 소중한 보석이나, 값나가고 부피 작은 물건을 가지고, 다른 모든 것은 타게 내버려 두고 나오는 것, 그것이 특별한 소유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특별한 소유로 삼겠다고 말씀하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득한 시대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소중하고 고귀한 존재로 여김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특별한 소유로 삼으리니 라고 미래형으로 말씀하고 계시는데, 이것은 지금은 내버려두고 나중에만 그들을 특별한 소유로 삼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그들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셨는지를 모든 사람들이 의심할 수 없이 모두 확인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보여주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언제나 잊으시는 법이 없습니다. 사람은 사랑을 사랑하고 그에게 헌신했는데도 그 사람이 잊어버릴 수 있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당신께 헌신한 사람들을 한번도 잊어버리시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정하신 성품이십니다. 더욱이 이렇게 희망적이지 않은 시대에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특별히 기억이 되는 것이 마치 아직도 햇빛이 남아있는 하늘에는 별이 보이지 않지만 그 빛이 모두 사라지고 온 하늘이 어두워지면 별빛으로 찬란하게 보이듯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어두운 시대도 그런 것입니다. 어려운 시대에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수없이 많고 고단하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 시대에 많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로부터 받은 구속의 은혜를 기억하기 때문에 늘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 주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명의 자리를 알기 때문에 늘 하나님을 공경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은 그들의 마음 속에 주님이 아로새겨진 것보다도 더 분명하게 그들의 이름이 하나님 마음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십니다. 주께서 정하신 그 날에 당신이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얼마나 긍휼히 여기고 아끼셨는지를 언젠가는 드러낼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들을 귀한 소유로 삼을 것만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또한 그들을 매우 소중하게 그 관계를 여기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습니다. 한 아들은 늘 아버지에게 불순종하고 늘 아버지의 재산을 탐내며 아버지의 명예에 계속 오점을 남기는 행동을 하고 돌아다닙니다. 또 한 아들은 아버지 집에서 열심히 섬기면서 아버지를 돕고 공경하고 또 아버지의 재산을 증식시키고 아버지가 하는 모든 기업에 큰 도움을 줌으로써 아버지의 일을 번성케 하는 아들이 있습니다. 두 아들이 모두 자신의 뱃속으로 낳은 자식이지만, 아버지는 아마 두 아들을 대하는 마음이 틀릴 것입니다. 자기를 공경하고 자기를 위해 열심히 일해서 가문을 일으킨 그 아들이 백번이나 더 사랑스럽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어두운 시대,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인 시대에 하나님을 공경하고 끝까지 신앙의 정절을 지키며 살아가는 자기의 아들, 자기의 백성을 마치 그런 아들처럼 대해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최대의 행복, 최고의 기쁨은 하나님이 주시는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에서 오는 관계의 행복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기쁨이 될 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주님이 우리에게 아무 것도 바뀌는 것 없이 우리를 깊이 사랑해 주실 때 길가에 구르는 돌 하나 길가에 피어난 풀 한 포기도 사랑스럽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있는 모든 것들은 사랑스럽고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것들이 사랑스럽습니다. 그것이 우리 신자의 행복입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매우 슬픈 것이고 비극적인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이제껏 신앙생활 해오면서 하나님 앞에 무엇이 가장 귀한지 아마 느끼셨을 것입니다. 물질도 있다가는 없어지고 명예도 생겼는가 하면 없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반적인 섭리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들을 다 부패하는 것들이고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오직 변하지 않는 행복은 우리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받는 기쁨과 행복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것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축복이며 행복입니다. 이것은 오직 주의 말씀이 위탁된 교회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사람을 바꾸시고 본성을 변화시켜 당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살게 된 것들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안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입니다. 교회가 참으로 교회다워진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영혼들을 고치고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이 은혜로운 역사가 쉬지 않고 계속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바라는 것이며, 주님이 뜻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그 하나님과의 관계, 우리가 가장 좋은 것은 우리가 흔들리지도 않고 넘어지지도 않고 올곧은 걸음으로 걸어가면서 일평생 하나님께 헌신하는 생활이에요.
그러나 우리 중 아무도 그렇게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앞으로 그렇게 살겠노라 장담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교부 어거스틴이 말할 바와 같이 우리는 필연적으로 쓰러지더라도 쓰러진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 일어나게 하시는 그 일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일어나게 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고, 우리를 세워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가던 길을 돌이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지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그 은혜 안에서 우리의 의지가 세워지는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게 사경회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성경에 보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나의 정한 때에 정한 날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진정 경외하는 사람과, 진정으로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이 섞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이 두 사람들이 갈라져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대한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그 사랑으로 불리움을 받은 그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꽉 찬 사람과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전혀 경외하지 않는, 그야말로 겉모습만 교회에 나오는 이 두 종류의 사람들로 아주 정확히 갈라질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지 않죠? 그래서 우리들이 항상 이런 성경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다, 너희는 나를 경외하지 않는다, 악한 자들은 나를 경외하지 않는다, 라고 말할 때 통상 우리는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추호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그런 사람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항상 자신은 거기에 해당 사항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편에 들지만, 요즘 좀 연약해서 하나님 보실 때 별로 안 좋게 살아간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자의적인 판단입니다. 여기에 있는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타락하기는 타락했지만, 하나님의 큰 구원의 능력과 은혜를 경험하고 율법의 가르침아래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성령을 맛보고 다가올 하나님의 시대를 미리 경험하는 일에 있어서는 우리들보다 못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들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이 진짜로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경외하는 사람과 경외하지 않는 사람을 나누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따진다면 하나님이 경외하지 않는 사람을 찾아내는 것은 매우 불가능한 것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멀리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며 세상 사랑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너희 안에 나를 향한 인애가 아침구름과 같이 사라질 아침이슬과 같이 남아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지요.
저는 최근에 이러한 성경의 문제들을 가지고 많이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분명히 신자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세상을 향한 사랑이 공존하는데 그렇다면 세상을 향한 사랑이 많은 사람 안에도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틀림없는데 왜 요한 일서 2장 15절과 16절에서는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한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없다고 단정을 내리시는 거잖아요. 그뿐만 아닙니다. 예레미야로 넘어가면, 너희 안에 나를 경외함이 없나니, 아주 단정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은 나를 버렸도다, 이 백성은 나를 경외하지 않는다, 단정해서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여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둘로 딱 나누어서 한 부류는 나를 경외하지 않는 백성, 한 부류는 나를 경외하는 백성이라고 딱 나누십니다. 그러면 분명히 신자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세상 사랑이 공존하는데 왜 성경은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일까요? 만약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 없는 것이니까, 그러면 신자 안에는 동시에 세상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공존할 수 없구나 그렇게 결론이 나는 것이죠. 그러면 더 의문이 많이 듭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자기 안에 죄와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죄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원인이 되고 은혜의 열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에요. 가장 나쁜 신자 안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있다 이거예요. 이걸 어떻게 풀어낼 거냐 이거예요. 더 큰 문제가 있죠. 신자가 하나님을 버렸어요. 그래서 죄의 지배 아래서 아주 비참하게 참회도 없이 살아가요. 어느 날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놀랍게 느끼지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걸 느꼈어요. 자기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죄를 짓지만, 정말 자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눈물을 닦고 나서 그 눈물이 채 마르지 않았는데, 자기가 지었던 죄로 다시 돌아가는 거예요.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깊이 사유하는데, 정리가 안 되요. 대개 그렇게 정리가 안 되는 것은 책을 찾아봐도 답이 없어요. 그날 밤에 깊이 기도 드렸어요. 하나님 제가 이 교리적 문제에 대해 정리를 해야지만, 저도 유익을 얻고 지체들에게 가르쳐줄 텐데 하나님 꼭 한번 도와주십시오. 간절히 말씀을 볼 수 있는 눈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그 다음날 하나님께서 열어주셨어요. 그래서 명쾌하게 이것들을 정리할 수 있었어요. 그것은 성경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 경외. 이 경외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에요. 그런 사랑 경외가 있다 없다는 것을 판단하는 세 가지 관점이 성경 속에 있어요. 성경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가 있다 없다는 판단할 때 세 가지 관점에서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있다 없다 한다 안 한다, 라고 하는 평가가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느 관점에서 이루어 진 것인가를 판단하면 아주 명료해지는 것이에요.
첫째로는 실제론적인 관점이에요. 진짜 있다, 라는 존재론적인 관점이에요. 존재론적인 관점에서는 성경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 안에 하나님과 세상을 향한 사랑이 같이 있다고 말해요. 그 증거가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도다, 라는 것이거든요.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악을 행하기를 원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예요. 자기를 사랑하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미워해요. 그러니까 동시에 신자 한 사람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자기를 향한 사랑, 그 두 개가 함께 공존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랑이란 것은 결국 자기 사랑의 또 다른 표출이에요. 있다, 이거예요. 아무리 망가지고 죄의 지배 아래서 배교할 것 같아 보이는 신자 속에도, 그 속에는 선한 의지가 있어요. 그 증거가 호세아서에도 나와요. 너희의 인애가 아침구름 같도다. 있다, 이거예요. 이슬과 같도다. 새벽에 나가서 잔디밭을 만져보면 온 손이 흠뻑 젖는 것이 이슬이에요. 실제로 존재한다 이거예요. 그런 점에서는 오늘 여기에서 너희는 나를 경외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사람들에게도 주님을 향한 경외심이 있고, 오늘 나를 경외하는 자들은 나의 정한 때에 나의 정한 날에 특별한 소유로 삼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식을 귀하게 여김같이 내가 그를 아끼리라 말씀하시며 칭찬을 받는 그 사람들 안에도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있다 이거예요.
이 세상에는 둘 중에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아요.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그런 사람이 없어요. 이게 성경의 존재론적인 관점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함과 그 다음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함께 공존해요. 그런데 성경은 또 하나의 관점을 가지고 있어요. 그건 평가론적인 관점이에요. 평가론적인 관점에서는 둘 다 있는 거 별로 없어요.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거예요.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데 두 사람 사이에 사랑하면 하는 거고 안하면 안 하는 것이지 중간은 없어요.
예화)하나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처녀가 있는데 어떤 남자가 자기를 너무 사랑하고 잘해 주어요. 그래서 사랑하게 되었어요. 이 처녀의 마음이 그 사람을 향해 꽉 찼어. 그래서 이제 그 사람과 결혼하기로 마음 먹었는데 어느 정도냐 하면, 이 사람과 한 달만 살다 이 사람이 죽어 내가 과부가 되어도 난 이사람과 결혼하겠다 결심했어요. 그렇게 결심을 하고 결혼을 하기 직전에 보니까 자기처럼 그렇게 똑같이 사랑하는 여자가 또 한명 있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럼 그 순간 그 여자는 무슨 생각할까요? 자기만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동시에 두 여자를 사랑한 거예요. 이 남자의 100%의 사랑은, 이 남자의 주장에 의하면 50씩 나누어 주었다는 거예요. 하여간 그 미친 놈이(웃음) 그렇게 말을 하는 거예요. 나누어 주었다, 그렇게. (웃음) 그런데 문제는, 두 여자는 하나도 받은 적이 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100이 어디로 간 거예요. 지금 묻고 있잖아요. 수학을 알면 답이 나올 거 아니에요. 100 을 50씩 갈라서 주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쪽에서 25 밖에 안 받았다고 하면 인식의 차이니까 말이돼, 그런데 50씩 나누어 주었다고 해서 분명 100이 지출 됐는데, 이 둘은 하나도 받은 적이 없다는 거예요. 1도 받은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100 이 어디로 간 거예요. 이게 바로 사람을 보는 평가론적인 관점이에요. 그러니 수학을 가지고 계산하면 안 되요. 이게. 50씩 나누어 주었는데 이게 어디로 갔을까? 아무리 찾아도 찾아내어 지지 않는 거예요. 자기와 똑같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안 순간 자기가 받은 그 모든 것은 사랑이 아닌 거예요.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당신과의 관계를 비유할 때 자주 쓰신 것이 뭐냐면 난 신랑이고 넌 나의 아내다. 내가 너와 혼인 하였다. 그게 뭐냐면 사랑에 대한 이런 평가론적인 관점을 보이신 거예요. 여기에서는 뭐 반쯤 있고, 뭐 아침 구름 같이 조금 있고 뭐 이런 거 없어요.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 오랫동안 여러분들이 궁금해했던 또 하나의 의문이 풀리는 것이에요. 그게 뭐냐면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의 사랑의 경험이에요. 제가 이번 사경회에서 왜 이렇게 자세히 얘기하는지 아세요. 이번에 회복하라 이거예요. 죄의 지배 아래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어요? 없어요? 있죠. 그러니까 죄와 은혜의 지배의 교리에서 죄의 지배 아래 있어도 가능한 경험, 그게 뭐냐면 정서의 놀라운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어요. 완전히 죄의 지배아래 있는데도 어느 순간 기도할 때 막 눈물이 나고, 하나님이 나를 너무나 사랑하고 지금까지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거예요. 문제를 뭐냐하면 그렇게 한번 느끼고 나서 이 머저리같은 신자가 기고만장해지는 게 문제라 이거예요. 두 가지 점에서 기고만장해지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매우 특별히 사랑한다........안 그래요. 다른 사람도 다 사랑하세요. 하나님이 자기를 매우 특별히 사랑하신다 이거예요. 또 하나는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특별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 계획 안에 있고,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이 나를 당신 곁으로 돌아가게 해 주신다는 거라 이거예요.
두 번째는 뭐냐하면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거예요. 이런 사랑의 경험이 있으니까 자기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다만 지금 상태가 좀 나쁘기 때문에 내가 세상도 조금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게 거짓말이라는 거예요.
사랑을 이런 식으로 볼 때에 있다 없다 하는 것이 경험론적인 관점이에요. 경험론적인 관점에서의 사랑을 성경이 여러 곳에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고, 이런 모든 표현들은 바로 실제 사랑 하냐 안 하냐, 하나님이 그것을 평가론적으로 볼 때 있다고 여기시냐, 없다고 여기시냐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사실을 또한 경험하는 거예요. 이건 실제론적으로 세상을 더욱 사랑해요. 99%. 그런데 1%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남아있어요. 신자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99% 가 계속 경험되다가도 이따금 1% 경험될 때가 있다 이거예요. 그런데 그건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 증거가 뭐냐면 그 사랑의 경험이 열매를 맺지 못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이 자기를 특별히 사랑해 주시고 자기가 하나님을 매우 특별히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삶의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아요. 정서의 변화만 있을 뿐이고 다시 죄의 지배 아래서 살아가요. 성경이 이렇게 세 가지 관점에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당신을 경외하지 않는 인간들과 당신을 경외하는 인간들로 딱 나눈 것은 무슨 관점일까요? 평가론 적인 관점에서 나눈 거예요. 이 평가론적인 관점으로 사람을 본 대표적 예는 마태복음 6장이에요. 너희를 위하여 땅의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니 이는 이를 중하게 여기거나, 이를 경하게 여기거나 혹은 이를 경하게 여기거나, 이를 중하게 여기기 때문이지, 한 사람이 동시에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이거에요.. 아주 간단하게 말씀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뭐라고까지 하시냐하면 이를 사랑하거나, 저를 미워하거나 둘 중 하나라 이겁니다. 히브리식 표현인데, 히브리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는 모든 것은 미워한다고 말을 해요. 그러니까 여기서 나를 경외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도 사실은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다 들어 있어요.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궁금증은 하나님이 무엇을 기준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세상을 간간히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인정해줄까 그 기준이 뭘까? 몇 대 몇이면 될까? 몇 대 몇이라는 원칙은 없어요. 그러나 한가지 원칙이 있어요. 그건 하나님의 선을 받아들이는 겅.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아멘, 하고 받아들이는 겅.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나를 향해 가지고 계신 선하신 목적이 있을 것 아니에요. 그 목적을 선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밖의 목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딱 확신을 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하나예요. 하나님을 향한 지고지순의 사랑만이 그걸 하게 하는 겅. 하나님을 향한 사랑만이 가장 중요하다는 겅.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본질 자체가 사랑이에요. 세상을 창조하기 이전부터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이 이 세상에 있을 때 부터만 그 사랑이 발동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사랑하는 대상인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은 사랑이었어요. 그 사랑이 영원한 세계 속에서 성자를 향한 사랑으로 나타난 겁니다. 창조되면서, 이제 이 세상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난 것이죠.
하나님이 그런 사랑을 가진 분이에요. 그런 사랑을 가진 하나님이 당신의 목적대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놓으셨어요. 여러분이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아주 작은 계획 중 하나에요. 그런데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면 자기의 계획을 모두 포기하고 하나님의 이 계획에 자기를 합치시킬 수가 없어요. 절대로 그럴 수가 없어요.
예화) 예를 들어 두 여자가 동시에 남편을 잃고 아들 하나씩 남기고 과부가 되었어요. 한 여자는 두 세달 아이를 기르다가 집어치고 아이를 고아원에 넣고 자기는 좋은 남자 찾아 시집갔어요. 한 여자는 수절을 하면서 이 아이를 끝까지 키웠어요. 그리고 이 아이를 길러 초등학교 고등학교 열심히 벌어 과외 시켜가며 좋은 대학교 보내고 그러면서 그 아이가 성장하는 것을 보고 행복해하다가 그 아이가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 보고 즐거워하고 마지막에는 그 아이가 예쁜 색시 만나 좋은 가정이루고 거기서 애들 낳는 것 보며 그 아이가 성장하는 것을 보며 행복해 하다가 죽었어요. 두 여자의 차이가 뭐에요. 시집 간 여자는 아이의 행복과 자신의 행복을 합치시킬 수 없었어요.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는 자기가 희생을 해서 이 아이를 잘 돌보아 훌륭하게 성장시켜야 한다는 것은 알았는데, 자기 사랑이 있기 때문에 이 아이의 행복과 자신의 행복이 합치가 될 수 없었던 것이에요. 두 번째 여자는 아이를 너무나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의 행복을 포기한 겅. 그래서 자기의 행복을 사랑하는 그 아이게 합치시켰어요. 그래서 자신의 그 행복은 돈 많은 집에 시집 가서 호위호식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아들이 불행하게 되지 않고 좋은 사람으로 자라는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자기는 자기대로 살고 싶은 생이 있었는데 죽어라고 희생한 것이 아니라 이 아이가 행복해지는 것이 자기의 행복이었기 때문에 그 아이가 하나 하나 성취하며 행복해 하는 그 과정에서 자신도 아이만큼이나 행복하다가 죽은 겅. 그게 바로 아이를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의 목표와 아이의 목표가합치된 것이죠. 정확히 말하며 이렇게 합치된 것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아이를 너무 사랑하니까 자기를 포기하고 여기에 합치되어 버린 것이에요.
하나님이 여기 이렇게 있는데, 나는 나를 포기할 수 없어. 그래서 이리 가. 그러면 행복해 질 수가 없어요. 백날 신앙생활 해봐야 우울과 고민 사이를 오가는 사람이 되는 겅. 세상에 가도 만족이 없고 교회 와도 만족이 없어요. 자기는 왜 그런 식으로 사는 지에 대해 구질구질하게 핑계를 대고 이유를 붙이지만, 대답은 하나에요. 까리따스의 사랑이 없는 겅. 평가론적으로 볼 때 그 두 사랑이 양쪽을 기웃거리며 살아가지만,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없는 겅.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닌 겅. 좀 노골적인 예화를 하나 들까요?
예화) 이 여자가 수절을 하면서 아이 하나를 키웠어요. 젊은 여자에요. 30대 초반 밖에 안됐어요. 일찍 시집가서 아이가 벌써 초등학생이 되었으니까. 그때 자기 만한 또래 여자들이 자기 남편하고 팔짱끼고 쇼핑하러 다니고 그렇게 알콩달콩 사는 거 보면서 나는 너무 외롭다. 나도 저헐게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 안 들겠어요. 순간 순간 젊은 여자로서 정욕은 안 일었겠어요? 그럼 사람도 아니지. 그렇지만 결국은 자신의 행복을 그 아이와 합치시킨 거예요. 이해가 가리라 생각해요. 우리가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순전한 사랑속에 산다고 우리가 그 여자같은 마음이 안 되겠어여? 수시로 들죠. 그러나 그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이 있다 없다 라고 하는 평가론적 사랑의 기준이 뭐냐면 하나님의 목적을 받아들이냐에요. 그걸 받아들이는 비율이 문제가 아니에요. 받아들이면 그게 있는 거예요. 사랑하는 것이에요.
요한 사도가 편지를 쓸 때 수신자들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인 크리스찬들이었어요. 그들을 향해서 개연성을 가지고 말해요.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거다. 그러면 요한 사도가 말하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누구에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여러분들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나 사도 요한이 상정한 사람들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나 같은 것이에요. 차이점이 없어요. 어느 날 갑자기 사도 앞에 나타나서 나 이제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세상만 사랑하겠습니다. 각서 쓰고 배교하는 사람들 염두에 두고 그렇게 사랑하면, 의 뜻이 아니라 이거예요. 그러니까 세상을 사랑해도 같은 것이 아니네요.
그러면 오늘 한번 여러분들이 가슴에 손을 얹고 여러분 안에 하나님 앞에 까리따스의 사랑이 다 있어요. 그 지순한 사랑이 다 있어요. 그런데 하나만 묻고 싶어요. 있고 없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다 있어요. 많은데, 다 있는데,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에요.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끔 경험하는데....그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거의 사라져가는 데도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 이거예요. 시집 갈래요? 아니면 그 아이만 키울래요? 시집 가면 지가 낳은 새낀데 잊어버릴 수 있겠어요? 밤마다 눈물 흘릴 거예요. 그리고 고아원에 옷이라도 싸서 찾아갈 거예요. 어떻게 안 그럴 수 있겠어요? 자기가 낳은 자식인데......맛있는 밥 먹다가도 목메어 눈물날 거 아니에요. 또 자식만 위해서 희생한다고 하더라도 가끔은 시집 가고 싶은 마음 생겨요. 그리고 성적 충동도 느낄 거고. 그래도 그 사람은 아들의 행복에 합치한 사람이에요. 둘 중 하나 밖에 없어요. 여러분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해요. 여지가 없어요. 나는 여러분들 중에 가려낼 수 없어요.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전자와 후자로 나누어서 일으켜 세우시라고 하나님께 부탁하면 하나님께서는 정확하게 일으켜 세우실 수 있어요. 여러분들은 누구에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한번 대답해보세요. 누구에요? 누구입니까? 정말 하나님이 당신이 정한 날에 정한 때에 주님이 떼어내어서 정말 소중하게 니가 고난의 길 헤치고 시련의 파도 헤치며 이 세상 풍조는 날마다 변하여도 니 믿음을 지키고 살았구나.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승리를 믿노라
그 소망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주신다
어둔 맘에도 주의 밝은 빛 인도하여 주신다
그런 사람들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요. 쓰러진 것 같고, 그 자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고 침 뱉아도 주님은 그의 방패, 그의 영광, 그의 머리를 드시는 자가 되시기를 부끄러워 하지를 않아요. 그들은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믿습니다. 누굴까요?
며칠 전에 하나님이 제 마음을 흔들어 깨우셨어요. 이 질문 보다 더 화급한 질문이 우리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는 누굽니까? 둘 중 누구입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후자의 사람들이라면 기뻐하십시오. 넘어질 때도 있지요. 미끄러질 때도 있죠. 그러나 여러분들은 반드시 승리하십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셔요.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만일 여러분들이 전자의 사람들이라면, 생각없이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무 의미 없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찰스 스펄전은 신앙에는 중간 지대가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우리가 모두 후자에 속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정말 좋겠어요.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믿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결국은 넘어지고 깨어졌지만, 하나님이 당신의 각별한 소유로 부르시고, 당신을 섬기는 아들처럼 친밀하게 대우해 주시는 그런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자식을 고아원에 버리고 시집 가 버릴 여자가 가기 전날 밤에 아이 데려다 이것 저것 먹여주고 사 주는 거, 그거 아이를 배신하기 위해 자기 양심을 달래는 행위 아니에요? 그렇게 눈물 겹도록 자기 새끼를 사랑하면 갈 길을 포기해야죠. 그렇지 않아요?
오늘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행하고 있는 선한 일들,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선한 시도들, 섬기려고 하는 각양의 모든 시도들이 정말 시집 안가고 그 아이들의 행복에 합치된 가운데 그 아이의 행복을 위해 애쓰던 그 여인의 섬김이었는지, 아니면 시집 가버리기 전날 밤 아이 불러다가 제과점에서 빵 사주면서 달래는 그런 종류의 섬김이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후자라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여기에 이렇게 우리가 모여 교회를 이루고 30-40년 동안 같이 살아갑니다. 저야 여러분하고 가장 오래 있고 하나님이 생명을 보존하여 주신다고 해도 나에겐 19년 밖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만날 수 없을 거예요. 그렇게 피눈물 나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 교회를 위해 많은 피를 그리스도 예수께서 흘려주시고 그 교회를 우리 주님이 눈동자처럼 사랑하시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성도들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기의 살을 찢어가며 뼈를 갈아가며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기게 하는 것이 무슨 목표를 위해선지 아세요? 바로 그렇게 당신 경외하는 사람들을 이 교회에서 만들어내서 주로 말미암아 망가진 이 세상을 고치고 새롭게 하기 위해서 살아가게 하시려고 주님이 불러주신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 앞에 최고의 섬김이에요. 그 일을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무지의 껍질을 벗어내고 영혼의 어두움에 하나님 진리의 빛을 밝혀두어야해요. 그래서 진실함을 추구하면서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진리를 버리는 그런 불학무도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렇게 사람들 안에 주님을 경외함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리고 정말 바뀌어서 연약하지만 중심축이 하나님께로 옮겨가서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을 오늘도 부르셔서 붙들어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들이 이 가을에 저와 함께 저와 함께 그런 사람들로 변화되어 갔으면 좋겠어요.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 한 마음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 오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까? 경외하지 않는 사람입니까? 내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있고 세상 사랑도 있지만, 주님 보실 떄 내 안에 주님의 사랑이 있는 사람입니까? 없는 사람입니까? 하나님 오늘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고 저희 눈을 뜨게 하셔서 우리 자신을 보게 해달라고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