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26
목 차
마음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시 26:1-2) 3
진리 중에 행하는 사람(시 26:3-4) 6
주에 단에 두루 다닐 수 있는 사람(시 26:5-7) 9
영혼을 주님께 부탁할 수 있는 사람(시 26:8-12) 12
마음을 연단하시는 하나님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시 26:1-2)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유익
누구든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큰 유익을 얻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환경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당신의 살아계심을 지극한 공의와 사랑 가운데 현시하십니다. 원래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곧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의존하지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라고 항상 좋은 환경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그것이 마음에 평화입니다. 평화란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에서 오는 생각과 마음과 정신의 안정입니다. 이런 마음의 평화는 인생에 많은 시련과 파도가 와도 그것이 하나님의 큰 계획과 그분의 장중에 있다는 믿음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향을 우리 마음에 가지고 있으면 우리가 환란이나 어려움을 만날지라도 주님의 품을 파고드는 유익을 얻게 됩니다.
인생의 지난날을 회고해보면, 하나님과의 밀월을 즐기던 때가 언제였냐면 고난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한없이 약해지던 때입니다. 이처럼 누구든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생각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고 싶다는 것과 마음이 진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사는 것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면서 사는 것 자체가 은혜의 작용입니다. 하나님을 마음 깊이 의지하며 마음에 눈물이 흐르는 내면의 세계를 은혜 없이는 아무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찾고 다시 은혜를 받게 되면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게 됩니다.
나를 살피고 시험하소서
그런데 그 마음이 왜 계속 유지되지 않는 것입니까? “나를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사람은 자신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자기도 모를 때가 많습니다. 마음이 우리의 삶을 움직여서 우리의 인생의 길을 이끌고 갈 때 그것을 보면서 우리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종종 깨닫게 됩니다. 시인도 주님의 마음에 합하게 살고 싶은데 마음은 심연과 같아서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시험하사 단련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영혼 자체는 물질이 아니기에 아무것에도 영향을 안 받을 것 같지만, 물질이 아닌 정신이기에 영혼에 다른 것들이 달라붙고 이런 것들이 우리의 삶을 굳어버리게 만듭니다. 육신의 때는 씻어서 금방 떨어버릴 수 있지만 영혼과 마음과 정신에 묻은 흔적들은 그렇게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마음과 뜻을 단련하십니다. ‘단련’이라는 단어는 금과 은 같은 것들을 제련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단련되기 위해서 반드시 고통이 필요합니다. 고통 없이는 절대로 단련되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기쁨이 올 때 그리고 마음속에 고통이 올 때, 이 둘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습니다. 기쁨을 통해서는 우리가 마음속에 어떤 잘못된 것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고통을 통해서는 반응하는 자신을 보면서 옳지 않은 많은 것들이 마음과 정신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깊이 뉘우치면 하나님 앞에 자기 안에 있는 것들을 어떻게 해달라고 매달립니다. 어떤 불결이 우리의 마음과 뜻에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흔히 “나도 마음을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말하듯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은 우리가 다룰 수 있지만, 마음 자체는 영혼의 경향성의 반영이기 때문에 흘러가려는 마음 자체의 성향을 스스로 다룰 수 없습니다.
나를 연단하사 정결케 하소서
그래서 시인이 자신 속에 있는 이와 같은 것들을 하나님께서 연단하셔서 정결케 해달라고 빌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고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옳지 않은 것과 더러운 것들을 빼내십니다. 그것이 바로 시인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바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지 못할 때는, 세상의 평화, 자신의 형통, 소원의 성취 등에 대한 사모함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을 갖게 되면 우리가 구하는 바는 영혼의 순전함입니다. 왜냐하면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할 때 환란이 와도 주님을 만날 수 있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의 불결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깨끗함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연단을 통해 마음을 정화시켜달라고 왜 지속적으로 구하지 못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나의 완전한 중에 행하였사오며” 우리는 삶에 공을 들여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막 살면서 마음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온전함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그렇게 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정도면 됐지.’하며 자기 머리를 쓰다듬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온전해지고자 하는 사람들은 온전함 가운데 거하려고 애써야합니다. 물론 그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환경이 주님만 전심으로 의지하면 충분하다고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깊이 의지하야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방패 나의 영광과 내 머리를 드시는 자시며 하나님만이 내 삶의 이유이십니다.” 내적인 고통과 시련으로 인해 아무렇게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깊이 의존하는 마음을 견지하기 위해 분투해야합니다.
진리 중에 행하는 사람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시 26:3-4)
자비로우신 주님
앞 절에서 시인은 “나를 시험하사 내 마음을 단련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살고 싶다.’는 소원이 아니면 이렇게 기도할 수 없습니다. 단련이란 말을 요즘 잘 안 쓰는데 예전에 저희 할머니께서는 많이 쓰셨습니다. 고통당하는 저에게 “단련을 너무 많이 받는구나.”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일본 속담에 ‘고통이 너를 보배로 만든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일단 그 상황이 종료된 다음에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상황에 빠져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단련되어 하나님을 향하여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시인의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데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은 그분이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가깝게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를 힘입어 우리들이 매일매일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정말 주님을 의지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쉽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하면 그 마음을 먹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가까이에 있음을 친히 보여줍니다.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시인이 “허망한 사람들과 같이 앉지도 아니하였사오며” 그리고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 하리이다”라는 두 가지 결심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이 되면 즉각적으로 삶 자체에 아주 중요한 변화가 생깁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운데 자신의 인생을 영위하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그런데 ‘허망하다’란 말은 가치가 없는 목표를 추구하면서 사는 것을 이릅니다. 쉽게 말하자면 악을 행하는 사람들과 함께 앉지도 아니하고 동행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는데, 무엇으로 인해 이런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진리의 말씀입니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비록 하나님을 향해 돌아섰다하더라도 얼마든지 세상을 향해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의 힘이 그들로 하여금 돌아가지 못하도록 지켜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비추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빛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인간은 어둠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의 육체밖에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한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빛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빛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마음에 다시 어둠이 내리고 자기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계속 진리의 빛을 받으며 진리 가운데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도 목회를 하기 전에는 잘 모르다가 나중에 이 비밀들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고 정말 인생이 바뀐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인간적인 따뜻한 위로나 정 같은 것들이 아니라 정말 진리의 말씀 하나로 인생이 바뀐 사람, 자기의 모든 것을 토하며 회개하고 주님을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하게 되었던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깊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어둠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번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말씀이 찬란한 빛을 계속 비추어서 반복적으로 참회하고 돌이켜야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진리 중에 계속적으로 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갑니다.
하나님을 향한 회귀적인 사랑
왜 진리의 빛이 비출 때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까? 진리의 빛은 하나님의 아름다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시고 또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깊이 깨닫게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진리의 빛이 비출 때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지극히 크고 무한하고, 자신은 정말 추하고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진리의 말씀의 빛이 그치고 어둠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가 없습니다. 진리의 빛이 없으니 자신의 추함도 볼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눈이 감겨지고 나면 모든 것은 육신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영혼은 영적인 아름다움 보는 것에 실패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빛이 비출 때만 빛을 받은 모든 사물들의 참된 가치와 빛을 주는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진리의 빛이 사라지게 되면 육신의 눈만 남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에 비추는 것들이 갖는 영적인 의미는 깨닫지 못한 채 물질적인 아름다움에 현혹됩니다. 거기서 육욕적인 사랑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세상에 있는 것들을 많이 사랑한다한들 그 사랑이 자기에게 돌아오는 회귀적인 사랑이 됩니까? 회귀적인 사랑은 하나님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은 하나님 당신 자신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귀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에 부합시켜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사랑하시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때 인간에게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육욕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갚은 어둠속을 들어갑니다. 그렇게 주님을 끊임없이 사랑하면서 살기위해서는 육에 속한 결단만으로는 안 됩니다. 진리의 끊임없는 빛 아래서 하나님의 영적인 아름다움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에 단에 두루 다닐 수 있는 사람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감사의 소리를 들리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이르리이다”(시 26:5-7)
은혜의 지배아래 있으면
어려움 속에서 시인이 하나님께 호소하면서 “나는 무죄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입장에서 감히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사람이 누구관대 죄가 없겠으며 또 설령 자기가 죄가 없다 해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언제나 “제가 죄인이오니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 죄인중의 괴수입니다.”라고 기도해야합니다. 그런데 시인의 이 호소에는 다른 의미가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의 도우심을 구할 때 큰 문제는 자기의 양심을 거스르는 의식 안에 있는 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고 은혜의 지배 가운데 있으면 파악이 되는 죄가 있고, 은혜의 지배 아래 있어도 결코 파괴되지 않는 죄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갈 때 후자는 덜 문제가 되지만 전자는 큰 문제가 됩니다.
사람마다 다 암세포를 조금씩 가지고 있는데, 그 것이 100만개 이하일 때는 큰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100만개가 넘으면 암세포가 세력을 형성합니다. 지금 시인이 그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모친이 나를 죄 중에 잉태하였으며”라고 했으니 원죄를 가졌으되, 시인이 말하는 내용은 “내 양심을 거슬러서 커다란 죄로 인해 내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하지 않았다.”는 고백입니다. 고난과 시련이 왔을 때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련과 고난이 와도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할 때 자신의 삶을 더욱 올바르게 하고자 애썼던 사람들의 기도가 강력하고 열렬하게 됩니다. 반대로 자신의 삶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큰 시련과 어려움이 왔을 때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힘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신앙의 삶은 하나로 묶여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렇게 살았어야하고 그렇게 살기위해 기도의 힘이 필요하고 이렇게 함께 휘돌면서 상승작용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 사는 즐거움
시인은 “내가 자유롭게 하나님의 단을 두루 다니며 찬송을 올리겠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인생의 기쁨이 참 행복입니다. 다른 곳에서 행복을 얻으려고 하면 실패합니다. 그래서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나에게 허락된 진정한 복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즐거움입니다. 이외의 즐거움과 행복은 내 것이 아니며 커다란 불행과 고통을 가져옵니다. 예를 들어, 담배를 피우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갑자기 어느 날 너무 담배를 피우고 싶어서 배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 담배연기가 처음 흡입되면 눈물도 나고 재채기도 하는데 무엇이 그리 좋겠습니까?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한 번 해볼까 생각합니다. 막상 피워보면 맛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이 멋지게 보아줍니다. 그러면서 담배를 배우는 고통을 이겨냅니다. 그리다가 어느 순간 그것과 단절할 수 없게 됩니다.
올바른 믿음생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같이 교회에 나온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세상이 주는 즐거움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사는 인생의 기쁨을 깨달아야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안 하니 기도 가운데 주님을 만나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말씀을 안보니 말씀의 은혜는커녕 게슴츠레 졸다가 심통난 사람처럼 있다가 예배가 마치가가 무섭게 쏜살같이 튀어나갑니다. 그래서 주님의 성품을 깨닫고 은혜의 세계를 맛보고 자기가 고쳐지는 기쁨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사는 즐거움이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등 뒤에서 사는 즐거움을 찾습니다. 아이들이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고 어울리고 대화하는 것을 싫어하면 그들은 대개 나쁜 친구들과 어울립니다.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근원이 따로 있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를 즐겁게 하는 것을 찾는 존재이기에 어디선가 그것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데서도 그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힘이 하나도 없어지고 나중에는 심해지면 우울증에 걸려 자살에 이릅니다.
좁은 길로 가기를 힘쓰라
마치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이 인간의 감정이란 자기에게 즐거움을 주는 곳으로 흘러가게 마련입니다. 하나님 앞에 맛볼 수 있는 기쁨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성도의 교제와 베푸신 축복”,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행복이란 그런 것들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감격, 지체들을 섬기는 기쁨, 이처럼 서로 마음을 합하여 주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도구로 쓰이는데 성도들의 행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생활도 다 집어치우고 말씀에도 도통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살이에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기본적인 삶의 태도가 안 되어 있어서 성도간의 관계도 깨어집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교회 안에서 성도의 교제와 생활이 행복할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시인이 “내가 무죄하오니”고 말하는 것은 “자기가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살려고 애써왔습니다. 하나님 단에 즐거이 그리고 자유로이 다니며 주님의 이름을 감사하며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있고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은 환란과 시련을 훌륭하게 이기며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다른 길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게으름 피우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언젠가 좋은 일이 생길거야.’라고 막연히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결코 신앙을 통한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 길은 좁은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길을 걸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인생을 마름하고 주님이 부르실 때 정말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가는 사람들이 되어야하겠습니다.
영혼을 주님께 부탁할 수 있는 사람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저희 손에 악특함이 있고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구속하시고 긍휼히 여기소서”(시 26:8-12)
영혼을 주님의 손에 부탁드림
시인은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했던 일을 생각나게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이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드립니다.”라는 기도였습니다. 시인도 똑같이 자기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동안에 우리의 육체는 사멸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우리의 영혼만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은 영원의 복사판입니다. 영혼, 그 자체가 영원에서 나온 것입니다. 영원은 처음부터 있는 것이지만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이 영원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은 고향을 끊임없이 그리워합니다. 영혼이 마지막에는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땅에 있을 동안에 우리의 영혼의 상태가 하늘 영원의 상태와 아주 유사할 때 우리의 마음과 정신과 육체가 아주 안정됩니다.
그런데 영혼을 자기 육체를 굴리듯이 막 굴리면, 사람들은 먹을 것이 있고 돈이 많아지고 지위가 높아지고 몸이 건강하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세계적으로 보면 국민소득이 아주 높은 나라일수록 자살률이 높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의 참된 안식과 쉼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시인이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부탁합니다. 원수들이 자기의 육체를 상하게 하고 세상에서의 자기의 삶에 대해서는 공격하고 구박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영혼은 원수들의 압제나 공격으로 부서지거나 강탈당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합니다. 그러한 인생의 위기를 만나서 아버지의 손에 자신의 영혼을 의탁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다음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앞에는 내가 사랑하였사오니” 그리고 “하나님이 계신 성전과 영광을 내가 사랑하였으니” 그래서 영광은 하나님이 거기에 계신 효과, 또 사람들이 효과를 인정하므로 말미암은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반응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집에 대한 뜨거운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면, 하나님의 집을 향한 영광, 하나님의 집을 향한 사랑, 영광을 향한 사랑이 가슴에 깊이 밀려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들에게 에워 쌓여서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합니다.”라고 기도했던 예수님과 동일한 기도, 곧 “내 영혼을 행악자들과 함께, 살인자들과 함께 있게 하지 마시고 특별히 보호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세상 온갖 시험 내 마음을 흔들고 ♬
저 악한 원수들이 안팎에 있으나
주 나와함께 하면 전진도 겁 없고
주 나와함께 하면 늘 안심하리라
온 마음 다해 하나님을 사랑함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하는 모든 일은 본업이 아니고 부업입니다. 우리의 본업은 온 마음으로 하나님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되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업을 잃어버리면 인생이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매순간 우리의 최고의 관심은 어떻게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에 있습니다. 시종일관 주님을 사랑하고 완전한 중에 거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의 차이점은 현저합니다. 인간의 사랑은 유한하고 언제든지 한계가 있어서 끝없이 자기를 버리는 사랑은 없습니다. 인간의 사랑에는 항상 인간저인 육욕적 사랑이 섞여있습니다. 저들의 육욕이 채워지지 못할 때 사람들은 상처를 받고 사랑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육욕적 사랑과 섞이지 않은 하나님 자신만의 사랑이고 그 사랑은 완전함과 영원함과 불변함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온전하고 영원하게 사랑하면 그 사랑이 우리에게 끊임없는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당하는 모든 고통은 결국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데서 비롯됩니다.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비극입니다. 우리의 직장을 잃어버리거나 사업을 잃어버리거나 건강을 잃어버려서 죽는 것보다 더 큰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지만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최고의 관심사여야 합니다.
주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하여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고통의 원인을 여러 가지로 이야기하지만 오직 고통은 하나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네 안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고통인줄 알라 그것이 악이요 그것이 고통인줄 알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경외함에 없는 것이 인간의 고통의 이유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완전함이 없는 행함이 인간의 고통의 이유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주님을 섬기며 사는 삶이 모든 방면에서 온전해지도록 그렇게 자기를 끊임없이 드리면서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 세상은 잠시 있다 사라지지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은 결코 잠깐 있다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구도를 놓아버리게 된다면 과거에 어떤 하나님을 만나고 어떤 경험을 했던지 간에, 마치 줄이 끊어진 연이 하늘을 날다가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것같이 처량한 신세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매일 알아가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매순간마다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은, 세상의 일이 잘 풀린다고 교만한 사람들, 그리고 세상의 일이 잘 안 풀린다고 그것만 붙들고 씨름하느라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둘 다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잠시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주님을 꼭 붙들고 오늘도 사랑으로 이기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시편26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