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27
목 차
빛이신 하나님(시 27:1-2) 17
여호와께 구하였던 일(시 27:3-4) 21
하나님의 집에서 받는 은혜(시 27:5-6) 24
내가 부르짖을 때에(시 27:7-8) 27
나의 도움이신 하나님(시 27:9-10) 29
여호와를 바라는 자의 기도(시 27:11-14) 33
빛이신 하나님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나의 대적, 나의 원수 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시 27:1-2)
본문해설
시인이 수많은 고난과 시련을 경험하면서 지은 시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또 나의 생명의 능력이시니” 여기서 빛은 다른 사람은 잘 알 수 없지만 빛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인생에 갈 길을 알려주는 그런 종류의 지혜의 빛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지혜의 빛을 하나님께서 춰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겠는가 하는 뜻입니다. 다윗은 구약의 여러 인물 가운데 이런 계시의 빛, 지혜의 빛을 많이 받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이 이런 하나님의 지혜의 빛을 전달해주는 도구이기는 하지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성경을 아는 지식이 곧바로 우리에게 이런 빛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강단에서 늘 설교하더라도 청중이 말씀을 듣고 나면 나면 언제나 마음에 밝은 빛이 들어오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말씀을 도구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빛을 보여주시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초자연적인 은혜가 있을 때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는 새로운 빛이 다가오게 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해주시기를 시인이 간구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를 들면, 늘 듣던 말씀인데 어느 순간에 그 말씀이 자신의 가슴 깊숙이 빛을 던져주면서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하고 회개하게 하고, 성찰하고 돌아보게 하는 그런 놀라운 변화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빛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니”라고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찬란한 빛을 비춰주어서 자기로 하여금 어떻게 지혜롭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해주십니다. 그런 것이 바로 지혜의 빛입니다. 이러한 빛이 우리 속에 강하게 비출 때 인간만의 무지, 영혼의 어두움과 같은 것들로부터 헤어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우리가 사물을 보려면 빛이 필요합니다. 시력이 아무리 좋아도 캄캄한 방에 있으면 장님과 다름이 없습니다. 실제로 물체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해도 빛이 없으면 물체에 대한 정보를 전달해주지 않음으로 제대로 인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빛을 비춰주실 때 우리는 영적인 눈의 시력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 시력이 가끔은 나빠집니다. 우리는 가끔 쓰는 표현 중에 “재물에 눈이 어두워서”라는 표현은 재물에 대한 욕망이 너무 크기 때문에 인륜, 사람의 도리, 올바른 이성적인 판단이 방해 받는 상태를 말합니다. 욕망에 눈이 멀어서, 명예에 눈이 멀어서, 자식사랑에 눈이 멀어서, 사업에 눈이 멀어서, 어떤 하나를 과도하게 욕망하게 되면 인간이 모든 사물을 판단하는 정신적인 기능이 어두워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하나님께서 진리의 빛이 확 비쳐서 우리로 하여금 올바로 볼 수 있게 해주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우리의 눈이 이끌리는 것과 똑같은 의미를 갖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을 제외하고 그 사물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보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그 물체를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지혜의 빛입니다. 지혜의 빛이 비출 때 비로소 그 사물이 인새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시인은 18편에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을 정말 뜨겁고 진실하게 사랑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빛이 되셔서 사물을 올바로 볼 수 있는 시야가 열어 주십니다. 그러면 주님의 큰 사랑과 은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이런 것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우리에게 빛을 비춰주시는 분입니다. 다윗은 그 빛 때문에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왕보다 더 높으신 지존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위에 계시다는 것을 늘 기억하며 진귀한 금은보화와 그 많은 비빈들에게 둘러 쌓여있으면서도 그것들이 영원하고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시요
두 번째는 ‘구원이시니’라고 말할 때,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의 위기에서 시인을 보호하고 건져주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세상의 만사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되는 것 같습니다. 힘이 없는 사람은 힘이 있는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것 같고, 머리가 나쁜 사람은 머리가 좋은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이 사람의 눈에 안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그들을 통치하십니다.
때로는 악인이 번성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악인을 멸하시고 자기의 의로운 백성들을 도탄에서 건져내십니다. 시인은 그것을 경험합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부터 그를 미워하던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다윗은 오래전에 밟혀 죽었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끊임없이 건져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시요”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생명의 능력이요
세 번째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이 생명은 영적 생명을 말합니다. 우리가 힘든 일을 한다고 해서 모두 건강을 해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양과 힘이 계속 공급되면 힘든 것은 힘든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능력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오는 영적 생명의 능력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는 아무런 희망이 없고 정말 죽을 것 같은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주시면 마음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교통 그 자체가 생명과 사랑이기 때문에 거기로부터 생명을 공급받고 그로 인해 살게 됩니다.
그래서 시인을 해치려고 왔던 사람들이 넘어지는 이유는 그에게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가 있고 생명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겉보기에는 단숨에 공격해서 삼켜버릴 수 있었을 것 같이 약해빠진 사람인데, 실상은 “약한 자 같으나 강한자요 밟히는 자 같으나 일어서는 자요 쓰러뜨릴 수 있는 자 같으나 사실은 결코 쓰러뜨릴 수 없는 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어야할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항상 하나님을 깊이 의지해야 합니다. 환란의 날에, 고난의 날에만 주님을 찾는 사람들이 아니라, 평소에 ‘하나님이 내 인생에 영원하신 기업이다, 내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매일매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여호와께 구하였던 일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 27:3-4)
전쟁 중에도 안연하리로다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과 신뢰 때문에 시인이 미래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사람들에게 제일 무서워했던 것은 바로 전쟁이었고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은 정말 미친 짓입니다. 곳곳해서 학살이 자행되고 인간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게 됩니다. 전쟁을 경험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리학적인 정신병에 시달립니다. 특별히 살인을 해본 사람들은 정신과 치료를 요하는 전쟁증후군의 양상을 보입니다. 다윗은 무수한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이었기 때문에 전쟁의 참상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소수의 도망자를 추격해서 죽이는 것은 전쟁 축에도 들지 않겠지만, 어마어마한 적군에 포위되어 있다면 그것은 곧 몰살을 의미합니다. 도단 성에 있던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아침에 일어나 성을 에워싸고 있는 아람 군대를 보면서 “아, 주인님, 이제 우리는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탄식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런데 본문에서 시인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나는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이것은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니 누가 나를 대적하리요”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대적이나 우리의 삶에 펼쳐지는 극한 상황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하나님께는 큰일도 없고 작은 일도 없으며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에 비하면 모두 작은 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여호와는 내 편이시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이시며 나의 구원이시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있다면 에워싼 원수들의 수나 힘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깊은 사랑과 신실한 믿음 안에서 시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군대가 진칠 지라도 나는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하나님의 뜻 안에 내 인생이 있다는 믿음에 비롯된 믿음입니다. 내가 주님 편이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노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관상함
그리하여 시인에게는 전쟁이 일어나고 시련과 환란이 다가오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일평생 평생의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전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사모하게 해 주옵소서” 시인이 시편 18편에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는 고백과 유사한 표현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관상하면서 한없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데 그 장소가 바로 여호와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온 천지에 깔려있습니다. 그 어디에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아름다움은 자연적인 아름다움과 도덕적인 아름다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자연적인 아름다움은 하늘의 달과 별, 바다와 바람, 물과 구름, 새들과 벌레들, 아름다운 숲속, 향기로운 공기, 그리고 꽃 냄새, 흘러가는 물, 풀포기와 예쁜 돌들, 대지를 가로지르는 폭풍, 바다 위를 지나는 수많은 바람과 물결, 반짝이는 햇빛, 하지만 도덕적 아름다움은 그것보다 훨씬 더 깊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연에서 잘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집 안에서 발견됩니다. 다시금 하나님 앞에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도록 베푸시는 용서, 거칠고 험악한 세상에서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너무 힘든 사람들에게 이길 힘을 공급해주시는 은혜, 그와 같은 것들을 가장 아름답게 경험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앙망하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가는 것은 주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지 배워가는 것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매일 배우면 배울수록 날마다 새록새록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됩니다.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
이 전보다 더욱 사랑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서 인생길을 가면서, 날마다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기를 시인은 갈망했습니다. 창과 창이 맞부딪히고 칼과 칼이 소리를 내는 전쟁터와 방불한 인생에서도 세상살이에 속박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영원히 계속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곤고해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면 그것이 우리의 영혼에는 양식이 됩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를 배우면서 아버지의 뜻을 좇아서 살 수 있는 놀라운 은혜가 우리 안에 생겨납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받는 은혜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시 27:5-6)
환난을 이길 힘을 공급하심
인생을 살다보면 환란은 반드시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징벌하시는 환란을 당하게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도 환난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올바로 산다는 것은 곧 사명을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사명을 향해 나아가려고 하면 환경이나 조건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한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올바른 뜻을 세우고 목표를 향해 나가면 그것 때문에 또 시련을 겪게 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바람이 부는 대로 정처 없이 떠돌면 시련은 안 만날지도 모릅니다. 핍박이 오면 요리 피하고 고난이 오면 조리 피하고 요령이나 부리면 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살면 하나님이 징벌하십니다. 그런 식의 삶은 하나님을 거스르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도 시련을 만나고 저렇게 해도 환란을 만나고 인간이란 것은 항상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런 시련을 만날 때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느냐 입니다. 물론 힘이 있어야 환란과 시련을 극복해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모두 돈이 없고 음식이 없어서 환란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순간에 도저히 자신의 인생을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게 되면 주저앉게 됩니다. 역시나 시인도 하나님을 경외했던 사람으로서 자기 힘으로는 더 이상 그 시련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한계상황을 여러 번 경험했을 것입니다.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심
그런데 그런 환란과 고초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비결은 바로 다름 아닌 하나님이 당신의 교회에 베풀어주시는 위로와 능력이었습니다. 다윗시대에는 아직 성전이 지어지기 전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쓰던 것 같은 성막이 있었는데, 사람이 보기에는 크고 화려한 건물도 아니고 보잘 것 없는 천막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이 임재가 머물던 곳입니다. 구약성도들은 성막에서 주님을 만나고 위로와 힘을 얻었습니다. 시인은 원수에게 죽임당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자기를 비밀이 장막에 감추시고 자신을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의 힘을 공급해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가치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창조하신 목적,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매일 매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생의 문이 활짝 열리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에게는 고난이 없겠네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한 선교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셔서 14년을 푸에르토리코에서 선교했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끊임없이 고치시어 온전케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한없이 그것을 견딜 수 있느냐, 그리고 하나님이 세워주신 그 자리에 서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가 있을 때는 “주님이 고난을 당하셨으니 나도 고난을 당한다. 그리고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시고 참고 견디셨으니 나도 참고 견딘다.”는 일사각오로 하나님 앞에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은혜가 떨어지고 나면 인간이란 누구나 고통은 피하고 편안하고 안락한 것을 선택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져야 합니다. 은혜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도록 만들어 줍니다. 시인은 고난과 시련을 많이 겪었지만 남들이 알 수 없는 비밀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집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친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끊임없는 시련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기를 선택하신 목적대로, 세상을 창조하신 계획대로 살고자 하는 강력한 소원이 생겨났습니다.
결론과 적용
성도 여러분, 교회생활을 정말 우습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거기에서 이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진실한 사랑과 은혜가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생활을 그저 인생을 살아가는 생활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명줄입니다. 임산부의 태내에서 아이의 심장박동 소리가 들리는 것은 탯줄이 전부다 엄마의 몸과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로부터 모든 양분과 필요한 것들이 전달되듯이 교회가 그와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그런 개념이나 생각이 전혀 없이 그냥 함부로 생각하고 행동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집니다. 그러면 결국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나는데 마음이 돌같이 굳어지고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는 떠납니다. 은혜의 샘이 고갈되었는데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라도 일단 생명적인 연결을 통해서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좋은 것들이 중단되면, 마음이 굳어지고 영혼이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고 아주 추하고 더러운 쓴 뿌리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더 많이 죄 짖고 더 심하게 고통스런 일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할 수 있도록 주님의 교회에서 은혜의 양분을 공급받으며 또 순종을 식물 삼으면서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하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내가 부르짖을 때에
“여호와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시 27:7-8)
시인의 기도의 경험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기도의 경험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큰 위기와 고통을 당할 때, 성전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사모했던 이야기가 앞 절에 나옵니다. 그것이 흔들리는 시인의 인생을 붙잡아주는 결정적인 힘이 되었습니다. 그는 성전에서 이루어졌던 그 삶을 회상하면서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기도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은 나에게 응답해 주십시오. 주님이 너희는 나를 찾으며 나를 간절히 추구하거라고 말씀하실 때에 내가 주님을 찾았습니다.” 단지 성전이 있었기 때문에 이 다윗이 그 고난과 시련가운데서 극복하고 새 힘을 얻게 되었던 것이 아니라 그 성전 속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그런 추구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냥 습관과 끌려서 나오는 비자발적이고 비인격적인 신앙생활로는 안 됩니다. 시인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갈망하고 사모하고 간절히 추구했기 때문에 교회생활에서 힘을 얻은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생활의 원리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교회에 몸담고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 꾸역꾸역 살아간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을 믿으면서 신앙생활 해나가고 구원받고 변화 받는 것은 정말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마음, 고난을 통해서 주님께로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마음을 드리는 신앙생활
그러니 우리의 신앙생활이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바치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중심을 드리면서 주님을 간절히 찾는 것은 우리의 삶의 상황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주님을 간절히 찾고 사모하는 마음이 있으면 원수들을 만나서 핍박과 고난을 받을 때에도,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외롭고 곤고할 때에도, 주님께서 친히 오셔서 그에게 위로를 주시고 사랑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참된 신앙의 진수는 그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몇 년 동안 교회를 다녔다. 아니면 모태신앙이다. 오랜 생활 동안 교회를 지켰다.”하는 것이 신앙의 진수가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전 삶의 영역에서 주님을 전심으로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시인이 인생의 위기 가운데 하나님께로 피해서 여호와의 장막, 그 전에서 주님을 사모하고 하나님께 매달리고 주님을 의지했습니다.
시인은 주님을 찾고 의지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그에게 큰 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시련과 고난도 이기게 만들어주셨단 말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어떤 왕도가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의지하면서 믿음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자에게 진정한 축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과 행복은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을 추구하고 거기에서 주님의 은혜를 베풀어주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상처가 생기면 상처 때문에 망가질 사람인데 주님의 은혜 때문에 그 상처가 도리어 그 사람에게 향기가 되고 주님께로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서 실타래처럼 뒤엉켜있는 모든 인생의 어려움 속에 벗어나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생활을 하시길 바랍니다.
나의 도움이신 하나님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 27:9-10)
하나님께 대한 의존의 감정
시인은 환란을 통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알기에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에 대한 두 가지 감정이 엿보입니다. 첫 번째가 의존의 감정이고 두 번째가 사랑의 감정입니다. 의존의 감정은 “하나님 앞에 주님이 나를 찾으라고 하시기에 내가 주님을 간절히 찾았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그런데 내게서 주님 자신을 숨기지 마소서.” 두 가지 점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서 숨기시는 것 같은 것들을 경험합니다. 하나는 환란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을 경험하지 못할 때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구나.’, ‘정말 하나님이 나를 영영 떠나셨는가.’하는 하나님 자신을 숨기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위해서 진리를 탐구하는데 자신의 영혼의 어두움과 지성의 부족으로 인하여 진리를 잘 깨달을 수 없을 때 하나님이 자신을 숨기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우리가 환란이나 시련을 당할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던 진리의 세계에 대해서 눈을 뜨고 그 다음에 그 진리를 새롭게 발견하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것을 해주셔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것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환란과 시련을 당한다고 해서 하나님에게 나를 도와주셔야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시련과 환란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실 때에도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다.’라고 생각하며, ‘우리가 진리의 세계에 대해서 뭔가 잘 알지 못할 때에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셔서 우리에게 알게 하신다. 그것도 말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을 향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 감격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의 시련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하심, 그리고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우리를 보호하심, 무지의 어두움 속에서 우리에게 진리의 빛을 밝혀주시는 모든 깨달음의 은혜,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은총의 결과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은총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환란과 어려움 속에서 벗어나도 스스로 자랑할게 없고 또 우리가 알지 못하던 은혜의 세계에 깊이 깨닫게 된다하더라도 감히 하나님 앞에 자랑할게 못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라
두 번째로 10절에서 시인은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가족에서 상처가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어머니 이야기는 별로 안하지만 아버지에게는 버림받은 자식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왕으로 기름 부으러 왔을 때 아버지의 눈에는 다윗이라는 아들이 있는 것조차 기억이 안 났습니다. 어릴 적부터 형들의 미음을 사고 결혼한 후에는 장인마저 자기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가정에서의 깊은 상처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의 사건을 가져오게 만들었습니다. 이 여인에게 위로를 받는 것이 얼마나 큰 보상처럼 여겨졌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시인이 그런 인생을 살면서 마지막으로 깨달은 결론은 “세상에서 영원한 사랑도 없고 완전한 사랑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다윗이 아버지의 사랑을 얼마나 갈망했습니까? 그런데 결국은 아버지한테 버림을 받았고 깊은 상처 속에 자라나면서 이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결국은 내 부모마저도 나를 버리는 구나.’
다윗이 삼천년 전 사람이니까 만날 수는 없지만 미루어 짐작컨대 그는 아주 다양성을 가지고 있는 매우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신앙뿐만 아니라 탁월한 불굴의 지도력을 가진 강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살아온 인생역정 자체가 그렇게 강해지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골육지친들에게 거의 버림을 받고 왕이 되리라는 기름부음을 받고 사울의 집요한 추격 속에서 사회 밑바닥에서 상처받고 병들고 억눌린 사람들을 모아서 나라를 세웠으니 얼마나 고초를 많이 겪었겠습니까? 이것은 불굴의 지도력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자식들이 속 썩이더니 모반을 일으키는 등 시련과 환란의 연속이 끝날 날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아주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시를 지었다는 것 자체가 그런 것을 보여 줍니다. 지성과 감성의 크기가 워낙 큰 사람이었기 때문에 시련을 당할 때도 얼마나 더 아팠겠습니까? 가끔 무딘 사람들이 있습니다. 감정의 감각들이나 피부의 감각들이 무딘 사람, 물론 사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수해 전에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는 제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얼마 안 되었을 무렵, 어느 날 시장에서 생선을 다듬다가 칼로 손을 찍으셨습니다. 손이 덜렁덜렁해졌으니 빨리 병원을 가야하는데 그냥 시장에서 소독약 사다가 깨끗이 씻고 당신이 실로 꿰맸습니다. 나이 어린 저는 그때 “정말 나도 저렇게 독했으면 좋으련만. 사람이 왜 이렇게 무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꿰맨다고 됩니까? 의료용 특수실로 해야지 살도 안 벌어지는데 말입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그렇게 벌어진 손가락을 하고 다니셨습니다. 고통을 느끼는 정도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엄청난 일을 겪어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낙엽만 떨어져도 눈물이 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은 감성의 크기가 큰 사람입니다. 그러니 환란과 시련 때마다 상처들이 얼마나 크게 다가왔겠습니까? 이를 통해서 이 세상에 있는 사랑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폐부 깊숙이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 내 친구 나를 버리지 않네 ♬
온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그래서 인간은 세상에 있는 사랑이 신뢰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만큼 주님 품으로 나옵니다. 자신의 외로움과 고통과 상처들을 주님의 품안에서 승화시킵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늘 바치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 더 많이 의지하고 주님을 바랄 수 있습니다. 우리도 다윗을 보면서 인생의 많은 사연이 있더라도 다음 두 가지를 알아야겠습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결국 환란과 시련이 많은 세상에서 사는 우리의 유일한 위로라는 것을 말입니다.
여호와를 바라는 자의 기도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 27:11-14)
내 원수를 인하여
원수들이 자기를 에워싸고 끊임없이 인생의 길에 올무를 놓고 함정을 파서 고통을 주는데 오히려 그들을 인해서 나를 인도해 달라고 하는 이 기도는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항상 옳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가는 길을 막으시는 방법 중의 하나가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맨 처음부터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만들어서 다가올 모든 흉년 속에서 민족들을 보존하고 당신의 영광을 만천하에 드러낼 뜻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요셉은 사랑하는 부모를 떠나서 애굽으로 가야했는데 그가 혼자서 갈 수 없었습니다.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절하는 꿈은 꿨지만 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야곱은 도저히 요셉을 보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수를 사용하십니다. 형제들이 그를 노예로 팔아서 애굽 땅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애굽에서 충성스럽게 봉사했습니다. 그런데 아주 간교한 여자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아주 신비한 인도, 악한 자들은 믿는 사람을 해치기 위해서 악을 행할 때 하나님의 뜻을 알고서 악을 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섭리의 바다, 은혜의 세계 속으로 당신의 자녀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의지하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합력해서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주님의 인도와 보호를 구함
시인은 악인들이 자기를 괴롭히는 것을 인해서 괴로워하면서 하나님 앞에 많이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에 가서는 악인들의 악을 인해서 “하나님이 나를 인도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우리의 가는 길, 우리의 나아갈 바를 미리 보여주시지만 어떤 때는 보여주지를 않으십니다. 그때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깨닫는 날이 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좀 더 넓게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악을 행하고, 우리의 심령에 깊은 아픔을 주고, 우리를 모략하고 비난하고, 우리에게 견디기 힘든 괴로움을 주는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이 우둔한 우리를 잘 깨우쳐서 당신이 원하시는 길로 가게 하는 훌륭한 하나님의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악인도 각각 자기의 날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두셨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시인의 고백에 우리도 동참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시인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생명을 빼앗지 못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함이니이다” 악한 자들의 궁극적인 소원은 그의 생명이 끊어져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움의 심리학입니다. 미움의 근본적인 본질은 존재가 거기 있지 않기를 바라는 갈망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존재가 거기 있기 때문에 너무 싫은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미움을 살인이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대적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시인의 생명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는 되지 않도록 자기를 보호해 달라고 시인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이 또 하나 바라는 것은 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생명이든 육적인 생명이든 끊어뜨리는 것이 악인들의 목표입니다. 그러면 이 생명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이 홀로 계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 하나님이 교통하시며 존재하시는데 그 교통의 본질이 생명과 사랑입니다. 이 세상이 창조될 때에 태어나는 모든 생명체는 영적인 생명체이든지 육적인 생명체이든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생명과 존재를 본 뜬 것입니다. 육체의 생명도 그 분의 뜻이 아니면 소멸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누구도 죽지 않습니다. 악인들이 아무리 겹겹이 에워싸고 그를 죽이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를 보호하고 계시면 결단코 죽지 않습니다. 영적인 생명들의 경우에야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 온갖 시험 내 맘을 흔들고 ♬
저 악한 원수들이 안팎에 있으나
겹겹이 다가오는 온갖 시험과 시련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다고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주님은 끊임없는 생명을 우리의 영혼 속에 부어 주십니다. 시인은 그것을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산 자의 땅에 있으며 내가 은혜 받기를 사모하였도다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으며 내가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이 세상 온갖 시험이 나를 흔들고 많은 고난과 괴로움이 있어도 내가 주님을 꼭 붙들고 생명의 은혜를 힘입어서 살아갈 것이라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여호와를 바라볼지어다
시인은 자신의 경험을 모든 환란을 당하는 사람에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볼지어다” 낙심은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원망, 사람에 대한 미움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영혼이 자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자기 자신을 계속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자기 스스로 계속 퍼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환란과 시련이 그 사람의 영혼을 말려 죽이는 역할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오히려 “아, 그렇구나. 이 세상은 이런 것이구나. 끊임없이 나를 배반하고 나를 버리는 곳이 이 세상이구나.”하면서 눈을 들어 주님을 앙망하면서 살아갈 때에 우리 안에 은혜가 가져다주는 생명이 역사합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인 동시에 생명의 감화입니다. 그래서 환란과 시련을 당하는 사람들도 이 은혜를 받으면 “짓밟히는 자 같으나 다시 일어서는 자요, 버림받은 자 같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는 자”로 나타납니다. 어떤 시련이나 역경이 오더라도 주님을 꼭 붙들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매일매일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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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27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