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3편 강해Ⅱ
(1997년 2월 17-21일 울산교회 사경회설교)
설교기간|1997년 2월 17-21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4월 16일
목 차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➀ (시 23:1上) 1997.2.17 울산교회 사경회 1
2.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② (시 23:1下) 1997.2.18 울산교회 사경회 18
3. 그가 나를 푸른 초장과 (시 23:2) 1997.2.19 울산교회 사경회 30
4.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시 23:3) 1997.2.20 울산교회 사경회 40
5.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시 23:4) 1997.2.21 울산교회 사경회 57
6. 주께서 나를 내 원수의 목전에서 (시 23:5) 1997.2.21 울산교회 사경회 66
7.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시 23:6) 1997.2.21 울산교회 사경회 78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시 23:1上).
오늘서부터 제가 여러분과 함께 한 4일간에 걸쳐서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뭐 저 얼굴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 그렇게 생각하실 것은 없고 마음을 푸근하게 가지시고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23장 1절을 우리 한 번 큰소리로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예화) 어느 중년신사가 있었습니다. 이 중년신사가 세상에서 한창 잘나가던 사람이었는데 그만 병에 덜컥 걸리게 되었습니다. 무슨 병인지는 의사도 모르겠다고 해요. 그런데 점점 더 병세가 심각해졌습니다. 낮에는 가슴이 벌렁벌렁 뛰고 불안증이 나서 도저히 앉아있을 수가 없고 밤에는 불면증에 걸려 시달리다가 잠이 들면 목을 조르는 것같이 식은땀을 흘리다가 깨어나고……. 하는 그런 정체불명의 병이었습니다. 그런 병에 시달리다가 결국 이 병원, 저 병원 다녀봤지만 병원마다 하는 이야기는 신경성이라는 것이 결론이에요. 자기도 모르니까 신경성이라고 그런다고 그래요. 그래서 이제 이 사람이 결국은 직장도 더 다닐 수가 없어서 한창 세상에서 출세가도를 달리던 사람이었는데 일신상의 이유로 사표까지 내고 이제는 집안에서 병명도 모르는 병과 더불어 투병을 하며 괴로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주위에 누가 아주 독실한 기독교인 의사가 운영하고 있는 병원을 소개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병원에 갔더니 젊은 의사가 앉아있는데 얼마나 친절한지 자기가 거의 한 시간 반이 넘도록 자기가 그 병에 걸려서 시달려온 이야기이며 그리고 또 이병에 걸려서 자기가 고생한 이야기를 모두 할 때에 이 의사가 아주 깊이 경청해주었습니다. 아주 친절하게 귀를 기울여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제 이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의 사연을 다 이야기했어요. 그랬더니 이 젊은 의사가 다 듣고 나서 자기 자리로 가더니 거기서 무엇을 쓰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어서 ‘선생님 어떻습니까?’ 다 이야기를 듣고 난 젊은 의사가 아주 단호하게 나지막한 소리이기는 하지만 아주 단호하게 이야기를 했어요. ‘선생님 잘 오셨습니다. 그 병은 제가 고쳐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이 환자 생각에는 이것 또 내가 아프다고 하니까 돈푼 좀 있어 보이니까 봉 잡았다고 그러는 것 아닌가……. 그랬더니 책상위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어요. ‘선생님 입원을 해야 되겠지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편지를 써내려가요. 그러면 ‘통원치료를 해야 되나요?’ 그러나 대꾸도 안하고 그냥 무엇을 써내려가고 있어요. 그래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까 서랍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더니 여태까지 자기가 쓴 것을 집어넣고 풀을 붙여서 환자에게 주었습니다. ‘선생님 여기에 어떻게 약을 처방해서 어떻게 먹어야할지 여기에 들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가지고 가셔서 바로 약국으로 가지 마시고 집안에서 조용한 저녁시간에 펼쳐서 읽어보시고 처방전에 기록된 대로 복용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편지를 넣어가지고 와서 이제 앞뒤로 보는 것이에요. 도대체 이 속에 무엇이 들어 있기에 이것만 먹으면 낫는다고 그러니 참 신기한 약인가보다 하며 주머니에 넣고 왔어요.
그리고 밤중에 조용한 시간에 아이들도 다 물리고 그리고 침대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경건한 마음으로 스탠드에 불을 키고 칼로 살살 봉투를 뜯어보았어요. 그랬더니 진짜 그 속에서는 처방전이 나왔습니다. 병원에서 쓰는 처방전이 틀림이 없어요. 병원에서 쓰는 처방전인데 -이름은 아무개, 나이는 몇 살, 성별은 남자, 귀하의 신속한 쾌유를 기원하오며 하기와 같이 처방하오니 속히 쾌차하시기 바랍니다. 처방-1.약의 이름: 구약 2.약의 종류: 시편 23편 3.용법 및 용량: 하루 다섯 차례씩 공복에 물 없이 천천히 씹어서 드십시오. 4.부작용: 없음 5.기타: 꾸준히 복용하셔야 뚜렷한 효과를 볼 수 있음.
그 사람도 아멘을 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꾸겨가지고 쓰레기통에 던졌습니다. 그리고는 엎드려서 분을 누르지 못하고 삭히느라고 고생을 하고 있었어요. 내가 그래도 세상에서는 잘나가던 사람이었는데 내가 몸이 아프고 인생의 막장에 오니까 별 거지같은 의사 놈이 희롱을 하는구나 하면서 집어던졌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잠을 청했습니다. 잠을 잤을까요? 못 잤을까요? 여러분들은 확실히 눈치가 빠르십니다. 잠을 잤으면 얘기할 것도 없지요. 밤새도록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새벽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악몽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와서 목을 조르는 것 같아서 식은땀을 흘리다가 소리를 지르면서 깨어났는데 시계를 보니까 새벽3시 반이에요. 그래서 이 사람이 그 새벽에 엉금엉금 기어서 윗목으로 기어갔어요. 무엇을 찾았을까요? 쓰레기통! 쓰레기통에서 그 종이를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의사가 돈을 벌려면 약을 잔뜩 지어주어야지 돈을 버는데 약이라고 그래놓고는 ‘구약’ 이렇게 지어주었으니 이 의사 말을 들어보는데 무슨 손해 볼 것이 있을까? 하는 이런 착한마음이 생겼어요.
그래서 저 책꽂이 꼭대기에 올려놓았던 먼지 묻은 성경을 꺼냈습니다. 이 사람이 두 달에 한 번씩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었거든요. 펼쳐놓고 이 성경을 들고 다니면서 다섯 번씩 이것을 펼쳐놓고 보자니 창피하니까 요만한 카드를 꺼내서 거기에다가 써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요만한 카드를 만들어서 품에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이제 공복에 먹으라고 했으니까 식전 공복에 한번, 아침 먹고 점심 먹기 전 공복에 한번, 점심 먹고 저녁 먹기 전 공복에 한번,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한번 아무튼 그렇게 해서 다섯 번을 이제 읽는 것입니다. 그러니 숙제처럼 읽으니 그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그런데 이게 하루에 다섯 번인데 일주일이면 서른다섯 번이고 네 주면 140번 아니에요? 그러다가 두 달 가까운 시절이 흘렀어요. 그러니 280번을 읽었잖아요? 머리가 돌이 아닌 다음에야 저절로 외워지지 않겠어요? 그런데 한 한 달쯤 지난 후에는 이 카드가 필요 없고 시간이 되면 그냥 눈을 조용히 감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렇게 외우게 되었단 말이죠.
그러던 어느 날 새벽이었는데 생전 태어난 이후로 경험해보지 못한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그날 새벽에도 일어나서 이제 돈이 좀 있는 집안이었나 봐요. 넓은 정원을 걸어가면서 그 시편 23편 구약을 복용하고 있었습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나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시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그런데 생전 경험해보지 못하던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이상하게 성경을 읽는데 갑자기 이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북받쳐 오르기 시작하더니 그 다음에는 속에서 단단하게 응어리졌던 차가운 덩어리 같은 것들이 뜨겁게 확 풀어지는 느낌이 일어나더니 그 다음에는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자기는 사실 무슨 일을 만나서 그렇게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어린아이같이 태어나서 생전처음으로 대성통곡하면서 울었어요. 너무나 북받쳐 오르는 나머지 걸어가다가 그 풀밭에 주저앉아서 통곡하면서 울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우는 동안에 뭔가 자기의 마음 속 내부에서 큰 콘크리트 같은 덩어리들이 소리를 내면서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는 많이 마음이 아팠어요. 그리고 그 풀밭에 주저앉아서 통곡하면서 1시간을 울었어요.
그러면서 그렇게 흐느끼면서 깨닫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이제껏 까지 나의 불행의 원인은 나의 질병이나 혹은 또 내 주위에 있는 사람 때문에 이런 고통을 겪는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나의 모든 이 불행과 고통의 원인이 목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그 품에서 떠나서 길 잃은 양같이 살아가고 있는데서 비롯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에요. 그러면서 거기서 그가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했습니다. 병이 나았을까요? 안 나았을까요? 참 잘 아세요! 집회를 다녀보아도 이렇게 딱딱 맞추는 교회는 하나도 없는데…….
시편 23편을 다윗이 썼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주일 학교 때부터 늘 흥얼거리던 찬송이 그런 것 아닙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지금부터 한3년 전에 제가 어느 교회에 집회를 가서 새벽기도시간에 집회를 인도하다가 기도하는 시간에 엎드려서 성경을 탁 폈습니다. 사실 시편 23편을 피려고 핀 것도 아니고 손이 이렇게 탁 펴졌어요. 그래서 다른 데로 넘기려고 하다가 그냥 읽었지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시작했어요. 거기에 엎드려서 한없이 말씀이 쏟아지기 시작해요. 그 교회 목사님은 아침 먹으러 가자고 저기서 기다리고 계시는데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이에요. 밥 먹으러 가야 되겠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되겠어요? 예! 그것도 잘 맞추시네요. 그 다음부터 본문을 정리해서 설교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성경 본문이 사실은 우리가 거의 그 문에도 들어가 보지 못한 본문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23편을 대하면서 여러분들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구약을 연구하는 성경학자들 사이에서 다윗이 이 23편을 언제 썼느냐는 아주 심심치 않은 논쟁거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이것은 다윗이 이새의 집에서 목동 생활하던 초기작품은 아니라는 것이죠. 오히려 이것은 다윗이 환란과 시련을 많이 겪은 인생말년에 자기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여호와를 회상하면서 지은 시라고 보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몇 개 나오는데 하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니는 이야기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했으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많이 넘나든 것입니다. 이것은 진짜 물리적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기보다는 오히려 상징하는 것이죠. 인생을 살아가면서 너무나 힘든 고비, 고비를 넘긴 것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묘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했는데 이것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복수로 나옵니다. 나를 괴롭게 하는 많은 자들의 눈앞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그랬으니까 목동시절에야 괴롭히는 자를 얼마나 만났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그가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고 신앙으로 인생을 살기위해서 결심하고 공적인 생애에 들어서기 시작했을 그 때에 이제 많은 대적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 23편은 다윗의 인생의 말기에 쓰인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23편은 세 토막으로 나눠지는데 1절은 총론적인 선언입니다. 서론이라기보다는 총론적인 선언이고 그리고 2절,3절,4절,5절은 그 총론적인 선언, 다시 말해서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는 사실이 왜 옳은지를 설명하고 있고, 마지막 6절은 미래에 대한 확신과 결심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1절 상반절만 하고 내일은 하반 절을 하고 그 다음부터는 한절씩, 한절씩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오늘 성경은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어려움 속에서 호소하고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도움을 호소하는 대신에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신앙의 작용, 영적인 상태를 하나님 앞에 그대로 고백하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결국은 남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내가 느끼는 것입니다. 남이 알지 못하고 남이 경험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믿지 못하는 하나님으로부터 경험하고, 그것을 받고, 그리고 남이 알지 못하는 그 비밀스러운 세계 때문에 남이 이해할 수 없는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시인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제일 먼저 시인이 이 위대한 시를 쓰면서 첫 번째 부르는 호칭이 여호와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왜 시편23편에서 첫 번째 시작이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가 아니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시작하고 있을까? 하고 묻는 것은 얼핏 보면 말장난처럼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가장 필요한 언어를 다른 단어로 대치될 수 없기 때문에 바로 그 단어를 성경 거기에 심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말장난 같은 질문이지만 계속해야겠습니다. 왜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라고 말하지 않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구약성경 속에서 하나님이라는 이름과 여호와라는 이름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두 낱말은 각기 어느 정도 구별된 용도로 쓰여 진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대개 온 땅과 만물위에 초월해계신 권능의 하나님을 말씀 하실 때 그 때에 많이 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이스라엘에게만 계시된 이름이 아니라 다른 구원받지 못한 모든 이 세상열방을 향하여도 얼마든지 계시된 이름입니다. 그러나 야훼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들을 별명으로도 부르고 호칭으로도 부르고 애칭으로도 불러도 주민등록을 떼어보면 이름이 나오듯이 말하자면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성함은 하나님의 가장 고유한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 여호와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것은 언약관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신 백성인 그들에게 여호와를 보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여호와라고 하는 이름은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이름이 아니라 언약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불릴 수 있고 그렇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실 때에 즐겨 쓰시던 당신 자신의 성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 그 여호와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됩니까? 오늘날은 하나님을 자기의 친구처럼 생각하거나 맘씨 좋은 이웃아저씨처럼 생각하는 경박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여러분이 오늘 경배하는 하나님? 오늘 이 교회당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 제가 왔습니다.’ 라고 아뢸 때에 여러분들이 부른 그 하나님 그분은 도대체 어떤 분입니까?
얼마 전에 해외토픽에 보니까 사진이 하나 나왔습니다. 뭔가 허연 것이 이렇게 터지는 것 같은 사진이 나오고 그 밑에는 제목이 붙어있었는데 ‘슈퍼스타의 탄생’ 이렇게 붙어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설명이 붙어있었는데 지금 우주에서는 대 폭발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에요. 그 폭발을 통해서 큰 별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에요. 그 뒤에 덧붙여진 말이 재미있습니다. ‘이 광경은 지금으로부터 2000만 광년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폭발광경을 미 천문대의 허블망원경이 잡은 것이다.’ 그러니까 우주공간 어디에선가 큰 폭발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 폭발을 통해서 큰 별이 생기고 있는데, 그 거리가 2000만 광년 떨어진 곳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1광년은 빛이 1년을 달려가는 거리입니다. 자동차 한대를 사서 구두쇠의 구두쇠라고 해도 이십만 킬로를 타면 폐차처분을 합니다. 보통사람들은 십만이나 십오만을 타면 폐차처분을 합니다. 그 차가 폐차할 때까지 타려면 6년을 타야하는데 두 번 폐차하면 12년을 탄 것이죠. 그 12년을 달린 거리인 30만 킬로미터가 빛이 1초 동안에 갈 수 있는 거리에요. 달나라를 정복했다고 그러는데 그것이 1.2초에 갈 수 있는 달나라를 정복을 했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빛이 1초 동안에 평범한 사람의 자동차가 12년 동안 타고 다녀도 달릴 수 없는 정도의 거리를 1초에 달려가는데 그게 2000만년을 달려왔으니까 얼마나 긴 거리인지 상상이 안가죠? 상상이 안가요! 2000만년인데 2000은 그만두고 만년만 남겨두어도 만년이 얼마나 긴 세월인지 아시죠? 그것을 다시 반으로 잘라도 단군이라는 사람이 나타날까 말까입니다. 그 엄청난 거리를 빛이 달려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우주공간에서는 지금 폭발이 일어나고 있어요? 안 일어나고 있어요? 호산나? 어떻게 생각하세요? 폭발이 일어나요? 안 어나요? 대답을 안 하네요. 끝났죠? 폭발이……. 2000만 년 전에 폭발이 일어났는데 그 광경이 2000만년동안 빛을 달고 달려와서 오늘 우리 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게 엄청난 거리겠죠? 그런데 그게 우주 전체에서는 이웃집 거리에요. 우주 끝에서 끝까지 얼마를 가는지……. 과학자들이 무엇을 얼마나 알겠습니까마는 말하는 사람들마다 말이 다 틀리더라고요. 그런데 대충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150억년을 빛이 달려가면 끝에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과학자한테 ‘그럼 그 끝 밖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하고 물어보니까 ‘그것을 알면 내가 이러고 있겠느냐고…….’ 최근에는 새로운 이론이 나왔는데 가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이에요.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초당 2000킬로미터씩 이 우주가 폭발을 하면서 커지고 있다는 것이에요. 무한대로 계속 커지고 있다는 것이에요. 초당 2000킬로미터씩 커지고 있답니다.
그 어마어마한 우주 거기에 일천억 개의 은하계가 있어요. 그리고 그 은하계 속에 일천억 개의 별이 있는데 그 중의 한 별이 지구에요. 그리고 그 지구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이 오늘 저고, 여러분이에요. 물리시간에 중학생이 선생님한테 물어봤어요. ‘선생님 우주가 얼마나 커요?’ 선생님이 한참 쳐다보더니 ‘야! 너희 집이 어디냐?’ ‘서울 목동아파트요.’ ‘그러면 목동아파트 있지? 전 세계에 목동아파트가 꽉 찼다고 치고 그리고 화장실에 노란 전구가 있을 것 아니냐?’ ‘있지요.’ ‘거기에 아홉 마리의 하루살이가 돌아가거든 그중에 세 번째 하루살이가 있는데 그 세 번째 하루살이를 지구라고 한다면 온 세상 아파트가 우주다.’
저의 처갓집에 할머니가 계신데 돌아가셨어요. 그분은 산 너머 동네에서 태어나셔서, 산 너머 동네로 시집오시고, 거기서 돌아가셔서, 그 앞 동네에 묻히셨어요. 94세까지 사셨는데……. 왜 그러느냐? 차만 타면 뒤집어지시는 거예요. 여기에 아직도 해외에 못나가 보신분이 계시죠? 제주도 말고……. 또 해외에 나가본들……. 그 하루살이만한 요만한 지구에 거기에 다닥다닥 52억이 붙어사는데 요즘은 뭐라고 말 하냐면 지구는 만원이니까 그만 낳자고 해요. 만원 아니에요. 여러분 지구에 52억이 있다고 그러는데 그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사람인 것 같아요? 체조대형으로 벌리면 충청 남, 북도면 뒤집어쓰는 거예요. 고런 인생들이 오늘도 모여서 ‘야! 너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하니?’ ‘나는 있다고 생각한다. 너는?’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 우리 다수결로 해보자.’ 다 손들었어요. ‘예, 하나님은 없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이가 웃으십니다. 하나님이 그 위대한 세상을 어떻게 만드셨어요? 몇 번씩 만들려고 애를 쓰고 땀을 흘리시다가 망치다가, 망치다가 간신히 만드셨죠? 그럼 어떻게 만드셨어요? 어떻게? ‘있으라.’ 하시니 생겨났어요. 마지막에 심판하실 때에 어떻게 해요? 아! 이것을 부숴버려야 되는데 어떻게 하나? 철거하기 위해서 고생하셔요? 아니죠! ‘사라져라!’ 하시면 사라지는 것이에요. 오늘도 여러분 ‘얘야! 괴로움과 죄만 많은 이 세상에 그만 살고 와라.’ 그러면 만날 먹던 밥숟가락 놓고 우리 집 앞에 노란등 하나 걸리는 것이에요. 그분이 누구에요? ‘하나님!’ 그 위대한 분이 바로 하나님이에요.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시편 23편을 들어가기도 전에 그 입구에서 웅장한 문을 만나게 되요. 시편 23편을 펴서 첫 단어를 읽는 순간 폭풍과 같은 질문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그 사람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신앙의 깊이를 말해주고 그 사람의 수준을 말해줍니다. 그 사람의 신앙이 어떤가는 그 사람이 아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모두 말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다윗을 통해서 ‘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인간과는 도저히 비교될 수 없는 그 크고 높고 위대하시고, 비교될 수 없는 그 하나님을 향해서 어떻게 감히 ‘나의’(마치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나의’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오늘 그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 위대한 하나님이 다윗이 살아가는 인생,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고,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고, 눈물을 흘리는 모든 과정에 개입하고 계시는 것을 지금 고백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 위대하고 놀라운 하나님,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 하나를 아는 것 가지고는 우리 자신의 삶이 바뀔 수가 없는 것이에요. 문제는 그 하나님이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인생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계시는가가 중요한 것이에요. 하나님을 바로 알기 전까지 하나님을 알았더라도 그 하나님은 위대하고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절대자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우리같이 낮고 천한 죄인들로 하여금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그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을 때에 우리는 그 안에서 그 하나님이 나의 이 비참한 인생과 관계를 맺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목회자의 가정에도 그렇고, 교회에서 신앙생활 잘하고 있는 가정에서 의외로 전혀 불순종하고 패역한 자식들이 출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우리들을 겸비케 만드는 그러한 일들을 하는 자식들이 있다는 말이죠. 왜 그렇게 경건하고 좋은 신앙을 가진 부모 밑에서 자랐는데 그 형편없는 놈이 나와서 집안망신을 시키고, 교회를 망신시키는 것일까? 사람들은 혀를 차면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해 못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이해 잘되는 것입니다. 왜? 아버지가 만난 하나님을 가지고는 오늘 내 삶이 새로워질 수 없어요. 엄마가 만난 하나님은 엄마가 만난 하나님이지 내 하나님은 아니죠. 매 시간마다 설교자가 눈물로 감격하며 설교하는데 그 하나님은 설교자의 하나님이지 내 하나님은 아니죠. 그래서 어때요? 엄마 아버지가 신앙을 가지고 있어도 그 자식이 자기의 하나님을 만나야 되요. 그래서 그 하나님을 이제는 어머니의 하나님, 할머니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러한 신앙의 관계설정이 되어야 된다고 하는 것이에요. 믿습니까? 그렇지요. 그것이 없이는 안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억지로 안 돼요. 어렸을 때까지는 회초리로 패고, 용돈을 가지고 달래면서 교회학교를 내보내 보는데 커서는 안 되는 것이에요. 그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깊이 체험하고 그 하나님을 이제는 어머니나 아버지 때문에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그 하나님을 알아서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는 자리로 데려가야 된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남다른 신앙적인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그 하나님이 위대하시고 그 위대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입을 쩍쩍 벌리는 감탄 가지고는 우리의 인생이 새로워질 수 없어요. 그 하나님이 이전에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하나님이었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 위대한 하나님이 나에게 오늘 이 시간에 찾아오시고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의 옥체를 깨뜨려서 뿌리신 그 피의 길을 걸어서 휘장을 찢고 보좌에 이르는 산길을 열어주신 보혈의 공로로 아버지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그분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개인적인 관계의 설정이 되지 않으면 그는 결코 신앙이 시작된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신앙을 가지고 오늘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의탁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처럼 남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이 있고, 하나님이 자기를 만나주신 비밀을 간직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비밀이 없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살아서 여기까지 오시게 되었습니까? 언제든지 교회의 문은 열려있습니다. 세상에 나아가도 누가 와서 잡아당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끌려서 하나님의 교회를 떠나지 못하고 세상을 향하여 타락의 길로 달려가지 못하고 믿음을 따라서 살려고 애를 쓰게 만드는 것은 세상의 법이나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와 만나주셔서 어둠속에서 내 인생을 이끄시고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모든 사람들이 나를 버리고 떠날 때에 내 곁에 계셔서 내 인생을 붙들어주시는 하나님!
(찬양)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이 대목에서 아멘을 해야 되는 것이에요. 그렇게 눈치가 없어요? 할렐루야! 자 그러니까 말이죠.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과 만나서는 할 얘기가 없어요. 우리 안에 있는 이 놀라운 은혜!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나를 사랑하셔서 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낮고 천한 세상에 오신 그 하나님 아버지, 아들을 보내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 아는 사람끼리는 눈빛으로 알아요. 저 설교자가 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말하면서 눈물을 흘리는지……. 그리스도를 만나서 신앙의 비밀을 소유한 사람들은 안다는 말이에요. 이것이 바로 나의 하나님의 신앙이에요. 이런 신앙을 회복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오늘 그 하나님을 뭐라고 부르죠? 뭐라고 부르고 있지요? 목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목자라고하면 우리는 누구라고 하는 것입니까? 뭐요? 양이요? 그런데 23편을 눈을 씻고 뒤져봐도 양이라는 얘기는 안 나옵니다. 돼지를 키우는 사람도 목자고, 소를 키우는 사람도 목자고, 개를 키우는 사람도 목자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여러분 23편을 읽으면서……. 호산나! 대답을 안 해요? 호산나! 그 23편을 읽으면서 나는 돼지요, 주님은 목자니…….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어요? 없어요? 돼지같이 생긴 사람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어요. 그럼 나는 개요, 생각한 적이 있어요? 없어요! 그러면 여러분 23편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나는 여러분들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왔어요. 양이에요. 양! 그렇지요! 양은 어디서 놀아요? 풀밭에서! 그렇지요. 그때 여러분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풀밭은 우리나라 대관령 같은 그런 풀밭이 아니에요. 최소한 호주나 아니면 무공해 뉴질랜드 풀밭! 파란 풀밭 그리고 노란 꽃들이 피어있고, 파란 풀밭인데 요만한 풀밭이 아니라 하늘과 하늘이 맞닿은 끝없는 풀밭, 거기에 하늘에는 새파란 맑은 하늘에 흰 구름이 몇 점 떠가고, 그리고는 방금 하이타이로 목욕하고 드라이로 말리고 나온 것 같은 순백의 하얀 양이 이쪽서부터 저쪽까지 슬로우비디오로 뛰어가는 모습을 생각하면서 23편을 읽는 것이죠. 벌써 다 들켰지요? 그러면서 그 양이 누구라고 생각해요? 착각은 자유에요. 사는 것은 엉터리없이 살면서 또 자기는 순백의 양이래? 무공해 풀밭이 아니면 상대를 못하겠대요. 그렇게 착각하는 인생이 하도 불쌍해서 하나님이 오늘 비행기를 태워서 여기까지 보내신 것 아닙니까. 어쨌든지 간에 분명한 사실 하나는 목자라는 말 자체가 우리가 양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만은 사실이에요. 그렇지요? 하나님이 목자시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우리가 양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면 여러분 양이라는 짐승이 긍정적인 짐승이에요? 부정적인 짐승이에요?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가시죠? 예를 들면 호산나! 뱀이 긍정적인 짐승이에요? 부정적인 짐승이에요? 부정적이에요? 예쁜 뱀은 어때요? 꽃뱀! 그리고 알록달록한 비단뱀, 소리 나는 방울뱀, 그래도 부정적이에요? 이중에는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거예요. 여름 수련회를 갔는데 그 수련회장소 뒤에 뱀이 많이 나온대요. 그래서 교인들을 모아놓고 제가 얘기를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뒷산에는 뱀이 많답니다. 조심하십시오. 그랬더니 뒤에 있는 남자집사님이……. ‘목사님’ ‘예!’ ‘뱀이 많다는데 그게 정말입니까?’ 그런 분들한테는 긍정적인 짐승이겠지요.
그런데 이 성경은 코리안 콘텍스트에서 쓰인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콘텍스트에서 쓰였어요. 다시 말하면 한국 사람의 문맥에서 쓰인 것이 아니라 저쪽 중동사람들의 문맥에서 쓰인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양이 결코 긍정적인 짐승이 아니에요. 여러분 제 동생이 중동지방에 가서 오래 살다 왔거든요. 돌아와서 하는 얘기가 ‘형! 그 동네 사람들의 제일 험한 욕이 무엇인지 알아요?’ ‘몰라.’ ‘양 같은 놈’ 그러면 그렇게 싫어한대요. ‘양 같은 놈’ 하면 더럽고, 지조 없고, 지저분하고, 돌대가리이고, 처신도 못하고, 게으르고, 분별력도 없고, 그러면서 고집만 센, 그런 것의 대명사가 ‘양 같은 놈’이라는 것이에요. 성경도 그런 증거가 나와요. 이사야 53장에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같거늘’ 잘 갔다는 거예요? 잘못 갔다는 거예요?
그렇지요! 양이 그래요. 하필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에 비교하셨을까? 그것을 생각하면 아주 훌륭한 메시지가 나와요. 이제 양은 뚜렷하게 분간할 수 있는 시각거리가 2,3미터밖에 안됩니다. 그게 양이 길을 잘 잃어버리는 이유에요. 성경에 양 이야기가 나오면 꼭 나오는 이야기가 무슨 양? ‘길 잃은 양’ 그런데 그 양 이야기 중에서 돌아온 양 이야기가 있어요? ‘돌아온 탕양’ 들어보았어요? 그러니까 그 양이라는 짐승에게는 스스로 돌아올 수 있는 능력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에요. 그게 바로 양이 보여주는 그림이에요. 그리고 말이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동물들이 한가지씩은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었어요. 그렇지요? 고슴도치 같은 것, 아니면 빨리 달릴 수 있는 치타, 표범의 이빨, 하다못해 스컹크는 방귀라도 뀌어서라도 자기를 보호하는데 이 양은……. 전에 저희 집 뒤에 목장이 있어서 알아요. 아무것도 없어요. 뛰지도 못해요. 종종걸음을 칠뿐이에요. 뿔은 있는데 염소 뿔은 그래도 죽더라도 한번 받아보고 죽을 수 있는데 이것은 호떡처럼 이렇게 말려가지고 아무 쓸모가 없어요. 이빨도 풀을 뜯어먹기에 적합한 이빨이기 때문에 물어봐야 상처도 안 나는 그런 이빨이에요.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여러분 얼룩말하고 사자하고 싸우면 누가 이길 것 같아요? 사자가 이길 것 같지요? 맞았어요. 그런데 한번은 동물의 왕국에서 한번 보여주는데 사자가 (얼룩말은 사자의 밥이잖아요?) 저기 나타나니까 얼룩말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모이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가운데다 새끼들을 집어넣고 엄마, 아빠들이 뺑 둘러서 기다리는 것이에요. 누가 망을 보는지 사자가 저기에서 보통사자도 아니고 위엄 있게 갈기가 있는 수사자가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더니 그 다음에 돋움 닫기를 시작하는 것이에요. 점프를 해가지고 목덜미하나를 물어서 쓰러뜨려가지고 저녁을 먹겠다는 것이죠. 막 달려오는 거예요. 말이 무슨 대책이 있어요? 그런데 대책이 있더라고요. 딱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니까 누가 ‘발사’ 그랬나 봐요. 뒷발로 흙하고 돌멩이를 마구 뻥뻥 차는데 그 중의 돌멩이 하나가 쏜살같이 날아오더니 위엄 있게 달려오는 사자의 왼쪽 눈퉁이에 정통으로 맞았어요. 그러니까 고기를 먹으려고 달려왔다가 눈퉁이를 맞아가지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애꾸눈이 되어서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는 말이죠. 이런 다리도 없어요.
결국 이 모든 그림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싶어 하는 바가 무엇이냐 하면 ‘봐라! 나는 목자고 너희는 양이다.’ 무슨 뜻이냐 하면 양이라고 하는 그 피조물 자체가 하나님이 만드실 때에 누군가의 보호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말 자체가 규정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니 ‘너희는 나 없이 못산다. 왜냐하면 내가 너희를 만들 때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 그것이에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제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세요? 그 사람들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교회 안에 있어요. 씩씩하게 잘 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싫어하세요.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어요.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씩씩하게 잘 살 수 있다고 ale는 사람, 주님의 도움이 필요 없을 정도로 혼자 이 세상에 잘 적응한다고 믿는 사람, 주님의 도움 같은 것을 의지할 정도로 나약해본 적이 없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일 멀리 있는 사람들이에요.
여러분들은 신앙생활을 오래하셨으니까 경험이 있겠지요? 언젠가 하나님 앞에 말씀을 들으면서 뭔가 자신의 잘못된 신앙의 모습을 깊이 회개하고 뉘우치는 역사를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그 때에 제일 먼저 가슴깊이 파고드는 것은 무엇이죠? ‘아! 나 혼자도 잘 살 수 있어!’ 누구 말 맞다나 하나님 도와주시는 것은 제가 바라지도 않습니다. 훼방만 놓지 마십시오.
(찬양)
주 없이 살수 없네. 내 주는 아신다.
내 영의 깊은 간구 마음의 소원을
주 밖에 나의 맘을 뉘 알아 주리요.
내 맘을 위로하사 평온케 하시네.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나서 우리의 마음속에 파고드는 확신이 그것이에요. ‘주님 없는 세상은 평화 없네. 오! 주 없이 살수 없네!……. 하나님 내가 주님 없이 천국의 길로 걸어가기 보다는 오히려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며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것이 제게는 훨씬 쉬운 것이옵나이다.’ 이런 신앙의 고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말이죠. 은혜가 임해서 하나님 앞에 사로잡히기 전까지는 정말 잘났어요. 엄청 잘났어요. 호언장담도 잘해요. 그리고 뭐 큰소리 뻥뻥 잘 치고 좋게 얘기하면 인생의 박력이 팍팍 넘쳐요. ‘어! 그것 내가 할게! 걱정 마 집어치우라고 그래 때려치워 내가 다 할 거야!’ 이런 사람이 목자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신앙이 깊이 들어가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되요? 김장철의 보쌈김치처럼 변해요. 여러분 배추 담글 때 말이에요. 김장철에 소금을 풀어가지고 거기다가 막 배추를 옛날에 우리 집은 김치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200포기씩 했어요. 자르면 4토막이나요. 800쪽이에요. 그것을 큰 드럼통에다가 집어넣고 돈이 없으니까 그것만 죽이는 것이죠. 막 눌러요. 잘 들어가요? 안 들어가요? 안 들어가죠. 세게 넣으면 막 부러지지요. 하루저녁만 자고나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되요? 여기로 넘기면 여기로 넘어가고, 저기로 넘기면 저기로 넘어가고, 입에 착착 감겨요. 보쌈 맛있겠다!……. 은혜가 딱 들어가니까. ‘김 집사님 우리 이것 합시다.’ 그러니까 ‘예 기도를 해보겠습니다.’ ‘당신이 이거 할 수 있잖아’ ‘저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주님이 다 하시지요.’ 이런 사람으로 바뀌어요. ‘어머 당신 어쩜 이렇게 큰일을 해놨어?’ ‘제가 무엇을 했겠습니까? 우리 주님이 다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100점 나는 0점입니다.’ 이런 사람으로 바뀌어요. 할렐루야! 싸움날 일이 있나? 만나자마자 ‘내가 죄인입니다.’ 그러는데 무슨 싸움이 나겠어요. 잘났다고 그래야 싸움이 나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깊이 임하고 나면 사람들 속에 고백이 두셨는데 그 고백이 무엇이냐 하면 ‘주님 없이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이죠.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생이 막차를 타고 절벽을 향해 달려갈 때에는 커브가 없어요. 오라이, 오라이 밟아! 밟아! 죽기 아니면 살기지 이러는데 은혜가 쭉 들어가면 주님이 이렇게 내려다보시면 신앙이 충만해서 이제 혼자 잘 살 수 있을 터인데도 늘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눈물 없이는 기도를 못하는 것이에요. 하나님 이 험한 세상에서 오늘 하루도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주님 저희를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남편을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아내와 우리 어린아이들은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그리고 멀쩡히 서있는 교회를 붙들고 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거예요. 하나님 이 교회를 붙들어주셔야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신앙인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갖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 가까이 계십니다.
또 보면 목자라는 단어가 우리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가하는 것입니다. 자! 잘 들어보십시오. 다윗은 말이죠. 이중적인 목양의 관계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목자로서는 자기가 양을 쳤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고, 또 신앙적인 차원에서는 하나님 앞에 양이 되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죠. 그렇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인생을 회고해보니까 자기가 어린 양떼들을 인도하고 목양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자기의 인생을 이끌어 오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에요.
그러면 목자가 양을 어떻게 인도하는가? 여러분 영화나 TV에서 카우보이들이 목장에다가 말이나 소를 잔뜩 풀어놓았다가 이제 그 우사나 마사로 집어넣는 장면을 보신 적이 있을 것이에요. 그 때 카우보이들이 채찍을 들고, 그 다음에 총도 가지고, 개도 풀고 해서 여러 명의 카우보이들이 넓게 원을 그리면서 말에게 겁을 주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채찍을 흔들고 그 다음에 총까지 쏘면 말들이 두려워서 한군데로 모이면서 막 달려갑니다. 그러면 점점 더 거리를 좁혀오면서 마사의 문으로 인도해서 다 들어가고 문을 잠그면 목동의 하루 일과가 끝나는 것이에요. 맞아요? 틀려요? 맞는다는 것이 정답이에요. 맞아요? 틀려요? 맞지요? 그런데 양은 어떻게 인도해요? 양은 그렇게 인도할 수가 없어요. 어느 관광객이 팔레스타인을 여행하고 나서 글을 썼는데 참 재미있어요. 고속도로가 이렇게 있는데 이쪽에도 풀밭이고 이쪽에도 풀밭이래요. 그런데 양떼들이 이렇게 가다가 한 천여마리 되는 양떼가 도로에 걸쳤어요. 이제 이쪽으로 건너가야 되는데 목동이 갑자기 볼일이 급해진 거예요. 그래서 화장실을 찾아서 내뛰었는데 벌판에 무슨 화장실이 있어요? 그러니까 개방변소에서 볼일을 보시고 그리고 돌아오는데……. 차들이 가다가 못가잖아요. 빵빵하고 경적을 울려도 양들이 움직였을까요? 안 움직였을까요? 맞아요. 안 움직였어요. 운전사가 나와 가지고 양을 밀어도 양은 안 움직이는 것이에요. 할 수 없이 창밖에 손을 내밀고 목동이 돌아오기만 한 시절을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 지난 다음에 목동이 와서 그 양을 인도하는데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아니고, 가자고 꽥꽥거리는 것도 아니고, 채찍을 흔드는 것도 아니고, 그 춤에서 피리 하나를 꺼내더니 그 피리를 삐리리하고 부는 것이에요. 그랬더니 그 많은 천여마리가 넘는 양떼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다시 말하면 첫 번째 생각해 봐야 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신앙으로 인도하실 때에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이에요. 이것이 시편 23편 1절의 결정적인 메시지입니다. 인격적으로 인도하신다. 자 잘 들으세요. 제가 이 예화를 듣는 것을 가지고 어떤 사람은 실족하는 사람이 있는데 왜 그렇게 이해력이 떨어지는지 모르겠어요. 여러분들은 그래도 울산에서 제일 머리가 뛰어나신 분들이 모이셨으니까 실족하지 마세요. 알았지요? 대답에 확신이 없어요. 알았지요?
주일날 어디 가야 되요? 확실해요? 주일날 교회에 가야 되요? 맞아요? 언제 가야 되요? 낮에 가야 되요?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가고, 저녁에도 가고, 그래요. 주일날은 교회에 가야 되지요. 그런데 주일 하루를 안 지키면 어떻게 되요? 1번-큰일 난다, 2번-괜찮다 어떤 것이에요? 호산나! 1번이에요? 2번이에요? 1번? 그런데 지난주 주일 빠진 사람이 수십 명이 그 다음 주에는 큰일이 안 나고 잘 오대요. 이 근처에 아름다운 산이 무슨 산입니까? 호산나! 무슨 산이 있어요? 가야산? 나를 놀리는 것 같아요. 어쨌든 지간에 한울 산이 있다고 칩시다. 주일날 교회를 가야되겠는데 교회 예배시간이 11시 아니에요. 버틸 수 있는 데까지 이불속에서 버텼는데 10시 40분이에요. 이제 10분밖에 안 걸리지만 세수하고 옷을 입는데 10분이 걸리니까 이제 마지노선까지 다 버텼어요. 그래서 이제 막 일어나서 세수하고 옷을 챙겨 입고 나오려고 하는데 따르릉 전화벨이 울려요. ‘여보세요’ ‘너니? 나야!’ ‘누구냐?’ ‘아니 얘야 너는 나도 모르냐? 고등학교동창 아무개야 나도 모르냐?’ ‘아! 그래’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지?’ ‘주일이지’ ‘주일은 무슨 주일이야 오늘이 일요일이지 지난번에 동창들 만났을 때 모두 만나서 한울 산인지 무슨 산인지 등산하기로 한 것 기억하지?’ 아무래도 그 산이 아닌 것 같아요! 누구에요? 내가 아는 산으로 바꿔야겠어요. 토함산으로 바꿔요. 토함산! ‘그런데 너 그 산으로 우리 등산가기로 했잖아? 너 나와야지만 우리가 딱 정원이 맞는데 너 안 나오면 안 돼.’ ‘안 돼! 나 교회에 가야돼 주일인데 안가면 큰일 나려고…….’ ‘야, 너 주일날 교회 가니’ ‘그럼 교회가야지’ ‘야 너희 하나님은 11시에만 오시냐?’ ‘그건 무슨 소리야?’ ‘내가 너 저녁예배 안 다니는 것 다 아는데 낮에는 우리랑 놀고 저녁시간에 가서 만나면 되지 7시에는 하나님이 안 오시냐? 안 오시면 저녁예배 나오는 사람은 누구를 만나러 오는 거야?’ 신학적으로 할 말이 없어요.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그래도야 너 12시까지 토함산 그 아래로 와! 안 오면 너 우리가 다시는 너를 안 본다. 올 줄로 믿는다.’ 그러면서 철커덕 끊었어요. 시계를 딱 보니까 벌써 그러는 사이에 11시 3분전이에요. 잠시 30초 동안 망설여요. 교회당에 가서 또 쭈그리고 그 1시간 30분을 참을 생각을 하니까 ‘에이 오늘은 일반은총 쪽으로 나가보자’ 그리고 성경찬송을 접어놓고 등산복을 입고 토함산에 놀러갔어요. 무슨 일이 생길까요? 안 생길까요? 생겨요? 안 생겨요?
여러분은 아마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원할 것이에요. (상상) ‘그 다음 주일날 11시 10전이 되었는데 웬 응급차가 교회로 와요. 아니 이것이 무슨 일이야? 딱 서더니 문이 열리고 머리끝부터 다리까지 깁스한 사람 하나가 주위의 부축을 받으면서 들어오는 것이에요. ‘안녕하세요?’ ‘누구요?’ 누구인지 알아야지 미라처럼 눈만 이렇게 나왔는데……. ‘저 아무개 자매에요.’ ‘그런데 이게 웬일이에요?’ ‘예배 끝나고 간증 할게요.’ 예배 끝나고 나서 간증을 하는데 이 자매가 그 깁스한 붕대사이로 한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간증을 해요. 자기가 눈에 뭐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지! 몇 년 동안 주일을 빠진 적이 없었는데 졸더라도 꼭 교회에 와서 졸았는데 그날따라 이상하게 교회에 가기 싫어서 친구들하고 어울려서 등산을 가서 얼른 등산하고 내려와서 2시 3부 예배를 드리려고 생각하며 올라가는데 마침 친구들이 물가지고 온 것이 없다면서 요즘 맥주가 술이냐고 물이 없으니까 이것이라도 마시라고 해서 맛이 괜찮아서 4, 5통 먹었는데 그리고 나서 아주 재미있게 오래간만에 정말 하나님이 교회가 아니라 이 토함산으로 불러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그리고 내려왔는데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다 놀고 마지막 이제 집에 와서 씻고 교회에 가려고 했는데 그리고 내려오는데 마지막 계단에 흙 묻은 까만 껍질하나를 밟은 것이에요. 쓰러지는 것은 잠깐이었는데 깨어나니까 병원이었습니다. 뇌수술도 하고 갈빗대 2대가 나가고 척추가 부러지고 발톱까지 빠져서 온 몸에 깁스를 하게 되었는데 저는 이제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일은 꼭 지켜요. 그러면 여러분 같은 사람들이 아래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간증을 들어요. ‘할렐루야! 주님 감사합니다. 여보, 여보 우리가 얼마나 잘했어? 무엇을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교회에 와서 졸았더니 하나님이 축복해주셔서 아는 것은 없지만 그래도 온 몸은 무사하게 이렇게 다음 주일날 나가게 되었잖아요.’
주일을 안 지키고 등산을 가면 하나님이 혼내실 수도 있지요. 그런데 확률적으로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날 확률보다는 안 일어날 확률이 더 많아요. 만약에 일어난다면 감히 어떻게 주일을 빠지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그 때마다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세요? 한번 주일을 빠졌는데 괜찮아요. 한번 십일조를 떼어놨다가 급한 일이 있어서 다음 달이 1월이니까 다음 달부터 잘해야지 하면서 챙겼어요.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요? 무슨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안 일어나거든요. 저도 옛날에 회개하기 전에 해보니까 별일 안 일어나더라고요. 그러면서 아무 일이 안 일어날 때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세요? 그 때에 아하! 신앙생활은 이렇게 요령을 부리면서 해도 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돌이킬 수 없는 길로 한 발짝 들어가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인격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없이 참지는 않으세요. 언젠가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하셔서 손을 보신다고요. 그게 바로 수많은 사람들이 간증하는 것이에요.
(찬양)
손들고 옵니다.
그 찬송은 왜 그렇게 구슬픈지 모르겠어요. 하나님께서는 왜 한번 주일을 어겨도 내버려 두시느냐 하면 하나님이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발모가지 부러질까봐 무서워서 교회에 나오는 것을 원하시지 않아요. 그러면 교회가 거기 하나님이 계시겠어요? 낚시를 좋아하는 최 집사는 어떻게 교회에 나왔어? ‘안 나오면 죽으려고? 지난번에도 내가 주일을 빼먹고 낚싯대를 들고 바닷가를 갔다가 그 큰 낚시 바늘이 내 코를 꿰는 바람에 병원비가 얼마가 들어갔는지 알아?’ 영화를 좋아하는 김 자매는 왜 교회에 나왔어요? ‘두 눈이 성하려면 교회에 나와야지요.’ 조기축구 좋아하는 최 집사님 어떻게 교회 나오셨어요? ‘몇 주 전에도 예배시간에 시합하다가 발모가지 부러지지 않았능교?’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겠어요? 하나님은 치사해서도 그렇게 안하셔요. 하나님은 우리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알고 승복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셔요. 따라 해보세요. ‘하나님은 인격적인 승복을 원하신다.’
집회를 열었습니다. 목사님이 기도를 얼마나 많이 하였겠어요? 그래서 여기까지 제가 왔잖아요. 그리고 금요일까지 계속됩니다. 거기에 앉으셔서 ‘집회는 무슨 집회여……. 내버려둬……. 이대로 살다가 죽을 껴…….’ 그러면 그 사람한테 이 집회는 물 건너 간 것이에요. 오늘 안 오나 그게 그거에요. 가서 한 푼이라도 더 버는 게 나아요. 하나님이 ‘성회여러분! 우리가 이제 기도해야 됩니다.’ 말씀하셔요. ‘기도는 뭐…….’ 그러면 물 건너 간 거라니까요. 여러분 예수님이 문 밖에선 문을 두드리는 그림을 보신 적이 있지요? 그렇지요? 그 그림을 잘 보면 밖에 자물통이 없어요. 그리고 안에서 열게 되어 있어요. 다시 말하면 교회의 주인이 누구에요? 주인이시잖아요?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보고 뭐라고 했어요. 내가 문밖에서 두드리노니 ‘어이구 답답해죽겠는데 뭘 두드리고 계셔요? 발로 뻥 차고 들어가 버리시지……. 어차피 주님의 교회인데…….’ 그런데 그게 아니죠. ‘내가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서 두드리노니…….’ 안 열어주면 주님을 못 만나는 거예요.
왜 신앙생활에 진전이 없는 줄 아세요? 노예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신앙에 진전이 없는 것이에요. ‘무엇을 하면 복을 받겠지! 무엇을 안 하면 큰일날거야!’ 이런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교회가 자기 집처럼 여겨지지 않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의 신앙생활을 원하시지 않아요.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자기가 깊이 깨닫고 그래서 깨닫는 것이 중요해요. 깨닫고 하나님의 마음을 내가 이해해야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설교를 들을 때에 무슨 생각을 하면서 설교를 들어요. 설교의 대지, 소지를 다 기억하고 있어도(그런 사람이 많지도 않지만…….) 그 성경의 본문 갈피갈피에 새겨진 그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받지 않으면 설교를 들은 것이 아니에요. 그게 바로 인격적으로 호소하시는 하나님의 만남이에요. 깨어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안타깝게 호소하시는 그 호소가 마음에 함께 전해와요. 잠자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소리를 지르시고 심판의 칼을 가는 소리가 나도 아무 감각이 없는 것이에요. 이게 죽은 신앙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인 승복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기를 바라시는 것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해요.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나를 사로잡으시고…….’ 그런 것은 거의 없어요. 강권적으로 사로잡힌 것도 누구를 하나님이 사로잡으셔요? 인격적으로 승복하지 않는 사람들을 잡으신다고요? 그런 것은 없어요. 어느 날 하나님이 갑작스럽게 찾아오셔서 깊이 회개시키시고 강권적으로 그 심령을 잡아서 역사하셨는데 그것도 하나님이 인격적인 승복을 갑작스럽게 받아내신 것이에요. 감화가 한꺼번에 확 밀려와서 하나님이 무릎을 꿇게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하나님께 무릎을 꿇은 것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은 경배하지 않겠다는 사람을 하늘에서 손을 내밀어서 머리채를 잡아 낚아가지고 땅에다가 쳐 박고 무릎을 발로 차서 그렇게 무릎을 꿇게 해서 하나님이 경배 받으시는 것이 아니에요.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되어도 바울과 같이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은 너무나 소수에요. 왜 그런 사람의 예를 상정하면서 자기의 안목의 정욕대로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불순종하는 신앙생활을 합리화시키려고 해요?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그 중심을 아신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인격적인 승복이 있고서야 우리의 마음속에 진정한 신앙의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의 마음속에 누리게끔 만들어주셔요.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내 인생이 이만큼 있는데 그 일부를 떼어서 하나님께 드리고, 돈도 이만큼 벌어서 얼마를 떼어서 주님 앞에 드리고, 시간도 있는 것을 떼어서 드리고, 하나님은 이것을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앞에 헌납증서를 쓰기를 원하시는 것이에요. (헌납증서 - 품명: 내 인생, 이름: 김 남 준,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내가 알았기에 주님 앞에 내 인생을 다 드리오니 내 마음대로 마시고 주님 마음대로 내 인생을 쓰시옵소서. 그리고 사인해요.)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깊이 승복된 사람들에게는 인생의 위기나 아니면 인생의 커다란 위기나 도전 같은 것이 있을 수 없어요. 어차피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의 인생이기 때문이에요. 신앙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대부분의 갈등이 이런 인격적인 승복이 안 되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말이죠. 여러분들이 그렇게 인격적으로 승복하는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에요. 믿습니까?
우리 주위에는 종종 큰 환란과 시련을 만난 다음에 크게 깨닫고 손들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다시 믿음을 찾고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 사람들이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간증하는 장면을 보면 보는 우리의 눈시울도 뜨거워집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아! 나도 저런 하나님을 만나야 될 텐데…….’ 그럽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세요. 그렇게 인생이 고달프고 거친 인생길에서 고생, 고생하다가 손들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되어서 큰 신앙의 기쁨을 회복하고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게 되는 사람들이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 뭐 특별한 것이 있겠어요?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목사님! 저는 이제야 깨달았어요.’ ‘무엇을 깨달았느냐?’ 사업도 날리고 가정도 막 풍비박산이 되고 심지어는 사랑하는 자녀들까지도 하나님이 데려가시고 낮아질 대로 낮아진 가운데 마지막에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요. 그리고는 하는 이야기가 ‘이제야 깨달았어요. 하나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신다는 것을…….’ 왜 말로 할 때는 못 알아들어요? 꼭 그렇게 고액의 과외비를 내야지만 깨달아요?
한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지 못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승복시키기 위해서 어떤 일을 행하는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요나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승복시키기 위해서 애꿎은 수많은 사람들이 고생하고 그 귀한 짐을 모두 바다에 버렸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생명이 경각에서 위태롭게 되는 그러한 시련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까요? 애 없는 집에서는 복 있는 사람은 아들, 딸이 수북한 집이에요. 그럴 수 있잖아요. 돈에 한이 맺힌 사람한테 복 있는 사람은 은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시편은 아주 간단하게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그러니까 말이죠. 오늘 여러분들이 말씀을 들을 때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목자이시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인격적으로 승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실 때에 그것 하나에 대해서만 깊이 깨닫고 ‘아멘’하면서 여러분들의 인생을 거기에 의탁할 수 있으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산을 절약하는 것이에요. 인생의 수많은 시간들을 절약하는 것이에요. 인격적인 승복이 없으니까 불순종으로 가는 것이에요. 불순종으로 가니까 그 다음에 우리의 인생이 어디로 갈 바를 알지 못하잖아요.
우리 집사람하고 차를 몰고 말이죠. 이천이 좋다고 해서 이천으로 가서 쉬려고 했으나 하루를 쉬지를 못했어요. 온천이나 하고 올까하고 차를 타고 들어섰는데 고속도로가 갈림길이 딱 나오는데 떠들고 이야기하다가 표지판을 못보고 지나쳤어요. 똑바로 가야하나? 이리로 가야하나? 어느 쪽이야? 어느 쪽? 에이! 하고 들어섰는데 20미터도 못가서 표지판이 딱 보이는데 그 길이 아니에요. 어떻게 해요? 뒤에서는 차들이 막 쌩쌩 150킬로씩 달려오는데 이리로 가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없이 수십 킬로를 내려가는 것이에요.
분당에 한번 심방을 갔는데 말이죠. 빙글빙글 돌다가 고속도로로 나왔거든요. 서울 양재동쪽으로 가야되는데 나왔는데 오른쪽으로 나와야 하는데 왼쪽으로 나온 것이에요. 그러니까 왼쪽으로 딱 나왔는데 나오고 보니까 톨게이트가 나오는데 어럽쇼! 이것은 신갈, 수원으로 가는 길이에요. 시계를 보니까 금요기도회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이곳으로 들어갔다가는 신갈까지 갔다가는 도저히 안 되니까 유턴을 해야 되는데 차선이 40개 차선은 되요. 톨게이트 앞이니까…….그러니 반을 가로지르는데도 15개 차선을 가로질러야 하는데……. 톨게이트는 바로 20미터 앞에 있는 것이에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시민의 의식으로서는 지켜야하는데 이것을 가고나면 예배인도는 누가 하나? 할 수 없다. 주님 이해를 해주십시오. 그리고 거기서 후진을 하는 거예요. 고속도로에서 아무리 끝 차선이라고는 하지만 빨간불을 키고 후진을 하니 다들 미쳤다고 그러죠. 그러나 어떻게 해요? 할 수 없어요. 주여! 도와주시옵소서. 후진을 이만큼 한 다음에 이쪽으로 유턴을 해야 하는데 15개 차선을 지나는 것이에요. 창문을 열고 비는 것이에요. 한번만 봐달라고……. 저쪽에서 차를 끼익 세우면서……. 들리지는 않아도 입이 씰룩씰룩하는 것을 보면 알잖아요? 유턴을 하고 나오는데 등골에서 식은땀이 쭉 나요. 그 때에 내가 또 설교 자료를 하나 찾았다는 것 아니에요? 인생의 유턴이 이렇게 힘들다. 생명을 안 걸면 유턴이 안 돼요. 불순종의 길로 갈 때는 쉬워요. 미끄러지듯이 달려가요. 그러나 이 길이 잘못된 길이구나하고 깨달아도 돌이킬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 때는 어때요? 생명을 걸고 딱지를 뗄 각오를 하고 딱지가 문제가 아니라 충돌도 각오하고 내가 이렇게 돌아서 도로 가지 못한다면 내가 여기서 죽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존심이고 뭐고 없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유턴을 해야 되는 것인데 이것 재고, 저것 재고 하다가 유턴을 못하면서 가는 것이에요.
여러분 10대에 예수님을 만나서 인격적인 승복을 경험하지도 못하고 20, 30, 40, 50, 60, 70이 지나가서 죽을 때에는 이것을 천국 갔다고 기도해 주어야하나? 갈 곳으로 갔다고 기도해주어야 하나? 목회자의 양심으로 판단이 안서는 죽음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아요. 여러분 인격적 승복을 해요?
예를 들어 봅시다. 10대에 고등하교 2학년 때 교회에 나왔다가 우연히 친구의 손에 끌려 나왔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어요. 여고시절에……. 그런데 가을부터 은혜를 주시는 것이에요. 겨울부터 신앙생활을 잘 하려고 하는데 엄마가 교회에 못나가게 하는 것이에요. 자기는 교회에 나가면서……. 왜 대학에 떨어지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니까 쉬었다가 대학에 붙고 나서 당당하게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래요. 학원선생이 영광을 받지 왜 하나님이 영광을 받아요? 그래서 고3때 그놈의 대학에 들어간다고 씨름하는 바람에 그 하고 싶던 신앙생활을 못해서 인격적인 승복을 못한 것이에요. 대학에 들어가니까 이제는 한국의 대학생들이 주로 하는 일이 없잖아요? 그러면 이제 인격적으로 승복하겠지. 메뚜기도 한철이에요. 미팅을 하네, 교제를 하네, 정말 저 좋아서 돌아다녀요. 시무룩해져 이제 3, 4학년쯤 되고 나니까 이제는 인격적인 승복을 하겠거니 했더니 웬걸? 요새 취직시험이 대학 들어가기보다 더 어려운거예요. 죽어라하고 공부해서 직장에 들어가면서 이제는 밥줄을 잡았으니까 이제는 인격적인 승복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겠지? 웬걸? 요새 직장은 말이에요.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서 섬기래요. 아침 6시 반에 통근버스를 보내주고 저녁에 집에 들어오면 11시에요. 그래서 퇴근할 때 ‘집에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퇴근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 인격적인 승복을 하겠어요? 그래서 이제 회사를 한3년 다녔어요. 안정이 되었잖아요. 그런데 이제 어려워도 좀 적응이 되었잖아요. 아 이제 인격적인 승복을 하나보다. 웬걸? 이번에는 또 인륜지 대사를 치러야 된다고……. 그래가지고 시집, 장가를 가느라고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에요. 아! 이제 시집, 장가를 가서 한 1년쯤이면 그것도 시들먹해지잖아요? 아! 그러면 이제는 두 부부가 인격적인 승복을 하려나보다. 웬걸? 어린아이를 낳는 거예요. 이게 끌고 와 가지고 유아 실에 앉아서 예배는 안 드리고 ‘까꿍, 까꿍’ 만하고 앉았어요. 그러면 인격적인 승복은 못하지요.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다가 이제는 애도 어느 정도 컸어요. 그러다가 보니까 40대 가까이 되었잖아요? 직장에서도 이제 안정되었어요. 이제 좀 인격적인 승복을 하려나보다 했더니 이제는 돈독이 오른 것이에요. 언제 명퇴 당할지 모르는 입장에 지금 돈을 안 벌어 놓으면 큰일 난다는 것이에요. 부인이 구멍가게를 내고, 남편은 월급 타러 다니고 ,애들은 학원으로 다니고, 이게 완전히 콩가루 집안이에요. 이게 어떻게 인격적인 승복을 할 상황이 안 돼요. 하는 얘기가 ‘우선 돈 좀 벌어놓고…….’ 그리고 50줄에 접어들었어요. 그랬더니 이제는 진짜 명퇴를 했어요. 그리고 나가더니 이제 여유가 있으니까 인격적인 승복을 하려나보다? 웬걸, 이제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 해외여행을 가네, 무엇을 하네, 그러면서 돌아치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제 60대에 접어들지요. 이제 애들도 다 커서 대학에 다 보냈어요. 이제는 인격적인 승복을 하겠지? 하나님이 내려다보시니까 왜? 시간이 없다고 그랬는데 이제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니까……. 웬걸? 한 오년쯤 지나니까 손자새끼들을 데리고 와서 맡기는 것이에요. 할머니 애 좀 봐줘, 할아버지 명퇴하고 뭐해? 애나보지……. 그냥 붙들고 뒤치다꺼리하는 거예요. 애들도 다 커서 중, 고등학교 갈 때가 되면 할머니, 할아버지도 싫어해요. 다 흩어졌어요. 이제는 진짜 시간이 있고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어요. 이제는 너무 늙어서 교회에 올 기운이 없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집 앞에 노란 외등하나 걸리고 교회 식구들이 성경, 찬송 들고 와서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그게 불꽃처럼 사는 인생이에요? 거품처럼 살다 간 인생이에요?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대부분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안 오는 것이에요. 한 번도 온전히 인격적인 승복을 못해보고 인생이 끝나게 되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섬길 자를 택하세요. 세상이 좋으면 누가 말리겠어요? 세상으로 가는 거예요. 그 대신 정말 내가…….
(찬양)
주님 없는 세상 평화 없네.
오 주 없이 살수 없네.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거들랑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 말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도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교회 안에 사실상 잃어버린 양떼와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면서 인격적인 승복 없이 신앙의 껍질만 쓰고 살아가는 불쌍한 인생들을 바라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을 나의 길이라 부르면서도 그 길로 가기 싫어 딴 길로 헤매네.
어둡고 캄캄한 그 곳 가시밭길에 길 잃은 양 한 마리 떨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우리가 하나님 없이 너끈히 살 수 있다고 장담하며 우리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고 있을 때도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얘들아! 나는 너희를 만들어 놓을 때 나 없이는 살 수 없도록 내가 만들어 놓았다.’ 하나님 아버지는 오늘 이 시간에도 교회 안에 잃어버린 수많은 양떼들을 찾아 나서시는 것입니다. 산 넘고, 물 건너 빈들과 산을 지나서 자신의 소견대로 옳은 대로 살아가다가 상하고 찢긴바 되어서 이리저리 할 키운 상처받은 심령들을 오늘도 찾아 나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고 나 같은 죄인을 불러서 인격적으로 승복시켜서 주님이 관계 갖으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참사랑을 알고 그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하기를 기다리면서 주님이 오늘도 그리고 어제도 그리고 그제도 하나님 자신을 향하여 여러분의 마음이 바뀌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의 태도로 바뀔 인격적인 승복만을 기다리시면서 오늘 여기까지 이끌어 오신 것입니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안 되겠으니까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인격적인 승복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불붙는 그 은혜를 말하게 하시는 것이에요. 저는 확신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 어떤 분들에게는 이 간절한 부르심이 유턴할 수 있는 최후의 경고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고 유리하는 이 인생들인 우리가 불쌍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XXX XXXX 낮고 천한 땅에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셨습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우리 인생들이 불쌍하셔서 (하나님은 자존심도 없으신가 보죠?) 우리가 잘못했는데 잘못했다고 고백도 하지 않는데 하나님은 스스로 화해의 손길을 내미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사셨던 세월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죄 없으신 그분이 왜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흠 없으신 그분이 무엇 때문에(나 때문에 오셔서) 나그네처럼 그렇게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사셔야했습니까? 주님이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병든 자들을 고쳐주셨고, 주린 자들은 먹이셨습니다. 버림받은 자들을 찾아오셔서 버림받은 자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자신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에게 있는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었습니다. 건강도 우리를 위해 쓰셨습니다. 주님의 생애에 안식이 있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 휴식이 있었습니까? 고통가운데, 죄악가운데 신음하는 우리를 건져내시면서 주님은 자기 땅에서 나그네와 같이 사셨고 울어야할 이유가 없으신 분인데도 불구하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일생을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인생을 넘치는 수고와 고생으로 다 사셨지만 마지막에 남은 것이라고는 통으로 짠 옷 한 벌뿐이었습니다. 그것도 군중들이 갖고 싶어 하니까 그것마저 벗어주시고 벌거벗은 몸으로 나무에 높이 달리셨습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누구 때문에 부유한 그분이 그렇게 가난해지셨습니까? 누구 때문에 하나님이신 그 분이 죄인의 형상을 입고 이 낮고 천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는 분명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와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의 몸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부요함을 위해서 가난해지셨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주님 자신은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어찌하든지 잃어버린 양과 같은 우리를 찾아서 목자 없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인생을 종식시키시고 그 사랑하는 그 품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거룩한 계획을 이루면서 이 땅에 살기를 원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것입니다. 순간을 살되 영원에 잇대어 살며 잠시 있다가 지나갈 육체를 쓰고 살지만 그 육체를 힘입어 영원을 향하여 값진 것들을 쌓아두는 인생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같이 연약한 인생을 불러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하시고……. 여러분 주님의 이 사랑을 거절하고 어디에 가서 더 많은 사랑을 얻고 주님께 꿇지 않은 그 무릎을 어디 가서 꿇어보시려고 합니까? 주님 앞에 승복하지 않은 그 인격 어디에 가서 한번 승복해보고 싶어서 그 마음을 아껴두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가슴이 저미는 심령으로 여러분들을 찾아오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여러분들을 보고 교회에 미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식구들은 여러분을 보고 예수에 미쳤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여러분 자신은 하나님 앞에 ‘오! 하나님 목마른 영혼을 주여 충만케 해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사람들에게는 예수에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오늘 말씀을 듣고 보니 내 신앙생활은 정말 승복이 없는 신앙생활이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마음에 손을 얹고 대답해보세요. 자기 손을 왼쪽가슴에 얹고 대답해보세요. 최근에 정말~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그 사랑이 너무 커서 나 같은 죄인을 건져주시고, 그렇게 품어주시고, 목자 되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인격적으로 주님 앞에 승복합니다. 내가 가진 것은 없지만 그러나 내 마음은 주님의 것입니다 라고 깊이 통회하며 마음이 물 같이 녹으면서 세상 사람은 다 나를 버렸어요. 내가 예수 붙들고 살리라는 인격적인 승복의 맹세를 해보면서 언제? 언제? 한번 대답해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것이 마지막이에요. 이번 집회 기간 중에 여러분 분명하게 하나님 앞에 빠지지 말고 집회에 참석하시면 여러분의 인생을 바꾸어 놓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은 사람으로 담대하게 불순종하며 죄악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순종만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인도하고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아버지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목 박혀 죽으심까지 승복의 길을 걸어가신 그리스도 예수의 뒤를 인격적으로 승복하며 걸어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승복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②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下).
오늘은 이제 그 뒷부분부터 해나가겠습니다. 그럼 장부를 맞추어봐야지요? 어제 어디까지 써내려갔는지……. 어제 말씀드린 내용은 그런 얘기지요. 여호와 하나님! 그 하나님이 정말 높고 위대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친구처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것은 그 위대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는 말씀을 드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신앙의 체험은 그 위대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게 한다. 그래서 개인적인 체험이 필요하고 목자라는 말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데 우리가 양인데, 하나님이 양을 특별히 사용하신 이유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어 놓으신 피조물이 바로 양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사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고, 그러니까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아야 된다고 말씀드렸고 그리고 그 다음에 내용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그럼 하나님이 목자로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그 어떻게 인도하시는가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는 첫째 인격적으로 승복시키셔서 인도하신다. 여기까지 했어요.
인격적인 승복 없이 신앙생활을 하면 말이죠. 노예적인 신앙생활인데 엄밀하게 얘기해서 그것은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없어요. 종교생활이에요. 왠지 내가 주일을 잘 안 지키면 뒤탈이 있을 것 같은 켕기는 마음, 그런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그것은 인격적인 승복이 아니고, 그런 인격적인 승복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전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인격적으로 승복하기 위해서는 뭐가 선행되어야하면 말이죠. 신앙생활에 있어서 여러분들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요소는 많지요. 우선 손을 걷어붙이고 열심히 봉사하는 것도 값지지요. 그런 사람들이 없으면 교회가 유지되기 힘들지 않겠어요? 그러나 말이죠. 모든 것에 뛰어난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따라 해보세요. ‘깨닫는 것이다.’ 깨닫는 것이에요. 그래서 깨달음이 없는 신앙생활은 전혀 진척이 없어요. 그것을 기억하셔야 해요. 지리멸렬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에요. 무엇인가 좀 불이 떨어질 것 같다가는 또 갑자기 지지하게 꺼지고, 그러다가는 또 무엇인가 해보려다가는 지지하게 주저앉는 견고함도 없고 일관성도 없는 신앙생활을 영위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깨닫는 것이에요. 가장 중요한 것은 깨닫는 것이에요. 그래서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하면 교회에 와서 예배시간에 조는 사람들이에요. 저희교회에서는 예배시간에 졸면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눈 뜨고 일어날 때까지 나는 이것을 두드려요. 설교하다가 말고……. 깨닫지 못하는 신앙생활은 목양이 아니라 사육을 받는 것이에요. 그런 사람은 희망이 없어요. ‘주님이 사랑하시지 않습니까?’ 주님이 사랑하시죠. 사랑하는데 사랑하셔도 희망이 없어요. 왜? 하나님이 우리를 아무리 사랑하셔도 우리가 그 사랑에 대해서 믿음으로 반응을 해야지만 그 사랑에 역사가 일어나요.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무엇을 붙들고 믿음으로 반응을 할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가 아무리 생기 있는 교회가 되려고 몸부림을 쳐도 예배의 회복이 없이는 그 모든 교회부흥의 노력들이 다 물거품에 불과한 것이에요.
하나님을 만나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승복하는 기쁨이 있는 예배는 살아있는 예배예요. 살아있는 예배……. 왜 우리가 예배를 60분에 다 해치워야 해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TV상자 앞에서는 두 시간씩 되는 드라마를 다 보면서 마지막에 입맛을 다시면서 ‘아휴 조금 더하지……. 왜 요것만 하나…….’ 그러잖아요.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기쁨을 소유한 사람들은 말이죠. 예배의 기쁨을 아는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는 사람들이 인격적으로 승복을 하지, 예배시간에 와서 졸고 바겐세일이라도 하면 문밖에서 문 열기 30분전에 가서 박 터지는 인생들이 예배시간에는 예배가 시작 되도 못 들어오고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 예배에 무슨 인격적인 승복이 있겠어요? 오늘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셔야 합니다.
험악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한번 말이죠. 우리가 어느 주일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아! 나는 하나님이 다시 한 번 일주일의 기회를 주셔도 이 정도밖에는 주님을 위해서 살수 없다.’고 고백하면서 하나님 다음 주일도 이번 주일만 같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해보신적이 있어요? 우리에게는 위로부터 내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자비를 힘입는 커다란 능력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인격적인 승복이 있어야 되는데……. 그 인격적인 승복을 위해서는 깨닫는 것이 있어야 된다고 하는 것이죠. 마음에 깊이 깨닫고, 그 깨달은 바에 대해서 깊은 감동을 받고, 그래서 그 하나님,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하기를 바라시면서 하나님이 우리가 잘못해도 참으시고 언제나 인격적으로 우리가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고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기르시고 인도하시는 것이죠.
저도 자식을 키우는 사람이니까 큰 소리를 쳤다가는 나중에 코를 꿸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확실한 것 하나는 오늘날 우리의 교육방법들이 매우 잘못되었습니다. 이것이 이 사회와 교회를 혼탁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어요. 그 이유가 무엇인가 가만히 들여다보았더니 요즘 애들이 다 많아봐야 하나 아니면 둘 아니에요? 그러니까 어렸을 때 말이죠. 무엇이든지 해달라는 대로 해주는 것이에요. 교회에 와서 떠들고 막 뛰어 돌아다녀도 그 부모가 야단을 안쳐요. 그러니 이상하게 아이들이 습관이 배기는 것이죠. 그러니까 모든 면에서 그래요. 음식점에 가서 들뛰어도 내버려 두지요. 아이들은 말이죠. 어렸을 때는 막 이러고 길러요. 그냥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고 그러면서 벌벌 떨면서 애들을 길러요. 귀하니까……. 예쁘니까…….
그런데 이게 중학교쯤 들어갔는데 하는 꼴을 보니까 이게 시건방지기 짝이 없거든요. 그래가지고 어느 날 아빠가 작심을 했어요. 야! 너 어떻게 공부하는 놈이 이럴 수가 있느냐? 뭐라고, 뭐라고 대들어요. 그래서 ‘이자식이!’ 한방치려고 했더니 이 아들놈이 벌써 말이죠. 키가 1미터 70에다가 80킬로가 되었어요. ‘이자식이!’ 치니까 손목을 잡더니 ‘허허 이거 왜 이러십니까? 고정하시지요.’ 뭐 게임이 안 되는 것이에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죠. 어렸을 때에 매를 대야 됩니다. 어렸을 때에…….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 웨슬레가 말하기를 어렸을 때에 불경건한 고집을 꺾는 것이야말로 자녀 교육에 성공하는 첫 번째 비결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19명을 낳았죠!) 그래서 어렸을 때에 매를 대서 그 부모의 수중에 아이를 딱 집어넣어야 되요. 그렇게 해놓고 점점 매를 줄여서 그래서 이제 6학년쯤 되면 거의 매를 대지 않고 중학교 2학년정도 들어가면 포기해야 되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인격적인 대화로써 아이를 설복시켜 나가야해요. 그리고 부모의 행실에 대해서도 비판할 수 있게 문을 열어주어야 해요. 그러니까 자기가 온전한 신앙생활을 안 하면 자녀교육에 성공해서 자녀를 온전한 신앙인으로 키우려고 상상도 하지 마세요. 그게 안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인격적으로 승복을 시켜서 그 놈에게 신앙 사상을 넣어주어야 되는데 이것이 거꾸로 뒤집히니까 교육이 안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말이죠. 매를 대야 되요. 뭔가 바르게 하지 않을 때에는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매를 대야 되요. 그리고는 인격적인 설복으로 나아가야 된다는 것이에요.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에요. 우리의 신앙이 어느 정도 자라고 나면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어린아이와 같이 다루지 아니하시고 인격적으로 우리를 다루신다는 것이죠. 그 때에 그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를 설복시키시는 음성에 민감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뭐 이렇게 주일을 빼먹고, 십일조를 떼먹어도 별이 없대……. 이렇게 생각을 하면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가는 것이죠. 그렇게 인격적으로 승복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에는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에 우리의 약점을 알면서 인도하신다는 것이죠. 제가 다니던 교회에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대학생들은 대개 둘 중의 하나입니다. 공부를 아주 잘하던지, 집안에 돈이 아주 많던지 혹은 둘 다 있는 경우입니다. 본 바닥에 있는 학생들은 기를 못 피고 시골서 올라온 학생들이 판을 치는 것이에요.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모이는데 말이죠. 그 중에 이제 젊은 애 하나가 있었는데 저하고 함께 중학교 학생들을 섬겼어요. 그런데 제주도에서 올라왔는데 공부를 참 잘해요. 저 사람은 공부를 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같아요. 공부를 얼마나 잘하는지……. 서울대, 서울대대학원, 지금은 박사학위를 받았을 거예요. 그렇게 계속 공부를 잘했어요. 남들은 군대 가서 3년 동안 죽는다고 고생을 하는데 이 친구는 그것도 시험으로 끝내더라고요. 지금은 없어졌는데 시험을 보고 나니까 다른 사람들은 논산훈련소에 들어가서 박박 기면서 고생을 하는데 그 시험은 무슨 시험인지 붙으니까 몇 달을 훈련 받더니 바로 중위가 되요. 중위가 되고, 그 다음에 6개월을 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제대를 해요. 그런 편리한 것이 있어요. 수십 명이 시험을 봐도 될까 말까한 시험을 붙었어요. 그런 식으로 공부를 잘하던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이 유치원 때부터 시작을 해서 운전면허까지 포함해서 한 번도 단번에 붙지 못한 것이 없었대요. 그러니까 떨어질 때 기분이 얼마나 나쁜지 그것을 한 번도 모른대요.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해서 그런지……. 그런데 자기는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없고, 고3때도 8시간씩 잤고, 그러면서도 공부를 잘한다는 것이죠.
그러던 어느 날인데 학부모가 와서 그 선생하고 저 구석에 앉아서 마냥 대화를 나누는 것이에요. 그래서 무엇인가 그랬더니 뭐 뻔하지 않아요? 아들놈이 하나 있는데 죽어라하고 공부를 못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선생이 공부를 잘하니까 사연을 하소연하면서 대책을 물은 것이죠. 다 상담을 한 다음에 와서 하는 얘기가(그 때 제가 전도사였거든요) ‘전도사님!’ ‘왜?’ ‘아니, 왜 애들이 공부를 못할까요?’ 그래서 가만히 있었죠. ‘저는요 사람이 공부를 못하는 게 이해가 안 돼요.’ 그런데 뭐 교만하고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그냥 담담하게 ‘왜 공부를 못할까 이해가 안가요.’ 그래서 나는 속으로 나는 이해가 잘 되는데……. 그래도 가만히 듣고 있었지요. ‘아니, 왜 공부를 못해요? 책에 다 나와 있는데……. 모르면 선생님께 물어보면 되고, 왜 공부를 못할까요?’ 자기는 고3때도 잠을 8시간씩 잤대요. 피곤하면 9시간까지 자면서……. 그러면서도 학원 안다니고 서울대에 들어왔는데 왜 공부를 못할까요. 그래서 내가 속으로 잘났다. 그리고 이제 헤어졌지요.
몇 주일 후에 다시 만났는데 코가 이만큼 빠졌어요. ‘왜 그래?’ ‘인생 살맛이 안나요.’ 내가 속으로 아니 공부도 잘하는 사람이 왜 살맛이 안나……. 공부만 너무하니까 몸이 약해져서 동네에 있는 테니스장에 칠만 원을 내고 등록을 했대요.(그때 한참 테니스 붐이 일었어요) 이렇게 테니스를 하는데 이주일쯤 되었는데……. 그 코치가 공을 쳐주면 그것을 맞춰서 쳐서 그 공을 건너편으로 보내는 것 아닙니까? 이주일쯤 되었는데 어느 날 코치가 공을 던져주다 말고 라켓을 집어 팽개치더니 씩씩거리면서 뛰어오더래요. 왜 그러나 했더니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고 그러더래요. 그래서 ‘아니,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아니 어떻게 못해도 그렇게 못할 수가 있느냐’고 그러더래요. ‘내가 이 테니스장에 와서 코치생활을 7년을 했는데 당신처럼 못하는 사람을 처음 봤다고, 아니, 그것을 왜 못하느냐, 다른 사람 좀 보아라! 들어와 가지고 두주가 되어서 다 다른 것을 하고 있는데 당신만 그렇게 못하느냐’고 그랬대요. 아니, 왜 못해 책에 다 나와 있는데……. 모르면 코치가 가르쳐주는데……. 태어나서 무엇을 못한다고 혼나보기는 처음이래요. 그래서 가방을 싸가지고 고개가 축 늘어지고 걸어오면서 자기가 하나 깊이 깨달은 것이 있대요. 아하! 공부도 이런 것이겠구나! 공이 날아오면 요렇게 하면 딱 맞을 것 같은데 그런데 아니란 말이죠. 여러분 자녀들 공부 못한다고 너무 야단치지 말아요. 제일 듣기 싫은 게 그것 아니에요. ‘야! 내가 너보고 돈을 벌어오라고 그랬느냐 땅을 파랬느냐?’ (그게 더 쉬워요. 공부하는 것보다 땅 파는 것이…….) ‘먹여주지, 재워주지, 등록금 다 대주지, 왜 공부를 못하냐?’ 자기도 못했으면서…….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물어보면 다 들통 나는데……. 그 때는 또 새카맣게 잊어버렸죠.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게 되면 말이죠.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큰 테두리는 같아요.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은 결코 획일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요.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도 획일적이지 않다는 거죠.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가장 맞는 방법대로 갈 길을 인도하시는 것이에요.
제가 9년 동안을 신학교에서 선생으로 젊은 시절을 보냈거든요. 세월이 좀 흐르고 나니까 요령이 생겨요. 그래서 학생들을 바르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순수한 열정만 있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을 배웠어요. 사실 그러면 안 되는데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 가운데 히브리어라는 과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성경의 원어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쓰고 있는 그 언어를 공부해서 구약의 원전을 읽는 것이죠. 그런데 좀 까다로워요. 글자도 생김이 이상하게 생겼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공부를 조금만 안하면 학점이 안 나와요. 보통 100명이 공부해서 40명이 학점을 받으면 그 방은 아주 우수한 반이에요. 그러니까 그러면 안 되는데 시험을 보다가 옆에 사람의 것을 봐야할 유혹을 느낄 때가 있다는 말이죠. 신학생들이……. 그래도 저에게는 그런 것을 잘 잡아내는 은사를 주셨어요. 그래서 잘 잡아냅니다. 그리고 수업 끝나고 ‘내 방으로 와라!’ 그리고 연구실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오지요. 그 때 빨리 파악을 해야 되요. 나한테 걸린 이 학생이 어떤 학생인가? 어떤 때는 리포트도 다른 사람 것을 베껴 써가지고 오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빨리 파악을 해야 되요.
그래서 어떤 학생인지 이렇게 눈치를 보는 거예요. 평소에 잘 알고 있는 학생이면 아주 더 편하죠. 문을 딱딱 두드립니다. 잘못하다 걸렸으니 얼마나 마음이 떨렸겠어요? 들어옵니다. 문을 딱 들어서자마자 모든 학생들을 다 똑같이 대우하는 게 아니에요. 딱 보면서, 그러면서 어떤 학생들은 거기다 딱 세워놓고 퍼붓는 거예요. 화난 척 하면서 퍼붓는 거예요. ‘야! 네가 신학교에 다니는 놈이냐? 너 같은 놈들이 이다음에 커서 목사가 돼서 우리 후손들에게 설교할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전화번호 대라, 전화번호…….’ ‘무슨 전화번호요?’ ‘너 신학교 갈 때 추천서에 도장 찍어준 그 목사님 전화번호를 대라고! 내가 너하고는 얘기할 가치를 못 느끼니까 도대체 어떻게 너 같은 놈이 소명이 있다고 도장을 찍어주었는지 내가 그 목사님하고 얘기를 해봐야겠다. 전화번호를 대라…….’ 그러면 이제 고개를 푹 숙입니다. 그러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용서를 비는 학생이 있지요.
그러나 어떤 학생은 그렇게 하면 안 돼요. ‘다 집어 치워’ 그러면 진짜 집어치우는 학생이 있다고요. 그러니까 딱 들어오면 리포트도 베껴 쓰고 잘못한 것으로 따지자면 호되게 꾸중을 받아도 시원치 않을 학생인데 (야단을 맞을 각오를 하고 들어왔지요) 얘는 앉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요. ‘이리와 앉아’ 그러면 앉습니다. 이제는 퍼부을 줄 알았지요. 왜? 친구가 말하기를 김 교수님한테 가면 혼난다더라. 너는 이제 큰일 났다. 그래서 왔는데 이제 소파에 다리를 모으고 앉아서 마음으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때 리포트 베껴 쓴 것 가지고 혼내지는 않고 물어보는 거예요. ‘커피를 마실래? 녹차를 마실래?’ 그러면 대부분 하는 말이 ‘아무거나 주세요.’ 그러면 아무거나 타서 한잔 건네주고 얘기를 시작합니다. ‘야! 공부하랴, 교회 봉사하랴, 틈틈이 아르바이트하랴 고달프지?’ 그러면 눈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그런 요령이 생기더라고요.
거기서 내가 하나님의 마음 하나를 읽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인격적으로 인도하시고 당신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이끌어주시지만 거기에는 획일적이지 않고 한사람, 한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인도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이 알고 그렇게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이에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셔요. 어느 부분이 약한지도 알고 어느 부분이 강한지도 알아요. 사람들은 모르고 부모와 남편이나 혹은 아내조차 모르는 살아온 인생의 수많은 상처들도 하나님은 모두 지켜보셨어요. 사람들은 우리의 상처와 허물을 볼 때에 그것을 까발리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와 모욕거리가 되기를 원하지만 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그렇게 대우하셔서 얻으시는 것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지내온 모든 날들도 알고, 모든 과정도 알고,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면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인격적으로 승복시켜서 인도해가시기를 원하시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 하나님 앞에 승복하고 그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 앞에서 감격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인간도 아니에요. 시인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런 것을 느낀 거예요. 왜? 자기가 그 양떼를 그렇게 인도해온 것을 알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바로 그렇게 자기의 약점을 아시는 사랑으로 인도해 오신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오늘 시인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인생에 목자라고 하는 사실이 이처럼 커다란 감격으로 자기의 심령 속에 다가오는 것이죠. 주님이 여러분들의 목자이신 것을 감사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또 하나는 말이죠.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에, 결국 이 목자라는 말은 우리가 양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목자가 양을 인도할 때 사랑으로 인도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에 사랑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이죠. 교회에서 청년 하나가 저보고 그래요. ‘목사님!’ ‘왜?’ ‘저는 요새 하나님이 너무 불쌍해요.’ ‘인마! 그런 소리하는 거 아니야. 하나님한테 감히…….’ ‘아니에요. 이것은 사실이에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이 우리 같은 사람을 구원하셔서 어디다가 쓰시려고……. 그렇게 타일러도 말 안 듣고 저렇게 회개라도 가끔 하면 소망이 있을 텐데……. 1년 365일이 지나도 망부석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기대하는 게 낫지 돌덩어리 같은 굳은 얼굴에서 눈물 한 방울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을 어디다가 쓰시려고 인도하시는지 모르겠대요.
여러분! 여태까지 신앙생활을 해오셨죠? 이제 대답을 하세요. 설교는 그래야 되요. 물어보면 대답을 하고, 웃기면 막 웃고, 옆에 사람 꼬집지만 말고 말이죠. 그리고 슬프면 울고……. 그러니 대답해보세요. 여러분! 몇 년 동안 예수를 믿었는지 빨리 생각해보세요. 대충 생각이 났죠? 그럼 시작해봅니다. 그래 여태까지 20년, 혹은 15년 신앙생활을 해온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려서 그래서 주님께 부족함이 없이 효도해본 적이 몇 년쯤 되는 것 같아요? 자, 속으로 대답하셨죠? 그 다음에 그러면 앞으로 몇 년 더 살지는 주님의 장부에만 기록이 되어있겠죠? 그러면 앞으로는 주님 마음만 시원하게 해드리면서, 최상의 효도를 하면서 살 자신이 있어요? 왜 대답을 안 해요? 있어요? 저는 대답을 할 때까지 물어보겠어요. 있어요? 없어요? 더 크게……. 그게 뭐 자랑이라고 큰소리로 대답을 해요? 그러면 우리는 도대체 뭐하는 사람들이에요? 옛날에도 그런 적이 없고, 앞으로도 효도를 못하리라는 것을 굳게 믿고, 그렇게 뻔뻔스러운 신앙생활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도 말이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 편에서 한번 생각해보세요. 어머, 세상에 이렇게 네가 잘사느냐? 내가 너를 구원 안했더라면 무슨 재미였겠느냐? 그렇게 생각하시는 순간이 많겠어요? 우리 살아가는 인생을 보시면서 맘 졸이면서 마음 아파하신 적이 많겠어요? 전자에요? 후자에요? 후자에요. 그런데도 왜 하나님께서 너 필요 없어, 구원 취소, 내 최대의 실수는 너 같은 인생을 구원해준 거야. 취소. 그리고 지옥으로 보내시지 않으시는 이유는 무엇이에요? 무언가 희망이 있기 때문에?
저희 집이 서울 강남의 방배동입니다. 부자가 많이 사는 동네라고 그러는데 그것은 모르는 소리이고, 집 한 채에 15억짜리부터 시작해서 200만 원짜리 사글세까지 함께 모여 사는 동네가 방배동입니다. 그런 그 방배동에 처음 이사를 왔는데 부자동네에 산다는 인사를 참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하루는 학교에서 수업을 끝마치고 겨울인데 점심을 먹으러 식당가가 있는 골목으로 걸어 내려오고 있는데 예쁘장하게 생긴 자매 둘이서 풀을 들고 다니면서 뭔가 포스터를 붙이는 거예요. 포스터를 이렇게 보니까 집에서 만든 포스터인데 현상금: 오십만 원 이라고 쓰여 있어요. 아하, 누가 또 집을 나갔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오십만 원이 생각이 나서 사실 그것을 쳐다본 것은 아닌데……. 이렇게 쳐다보니까 사진이 하나 붙어있는데 사람이 아니라 강아지새끼 한 마리를 찍어서 거기다가 붙여놓았어요. 그러면서 옆에 강아지를 보거나 보호하고 계신 분은 연락 주십시오. 후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밑에다가 ‘뽀삐야, 빨리 돌아오너라.’ 그리고 전화번호, 핸드폰번호, 그리고 삐삐번호까지 다 적어놓았어요. 저는 보신탕을 잘 안 먹습니다만 보신탕 좋아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한 그릇 거리밖에 안 되는 요만한 치와와 같은 강아지에요. 요만한 놈이에요. 큰 소시지만한 강아지를 거기다가 찍어놓고 오십만 원이라고 적어놨어요. 강아지가 얼마쯤 되는 강아지일까요? 두 사람이 하루 종일 풀을 붙이고 다녔으니까 일당을 십만 원씩 쳐서 이십만 원을 빼고 최소한 칠십만 원짜리는 되어야지 오십만 원 현상금을 주고 남는 것이 있을 것 아니에요? 아니 왜 대답을 안 해요? 울산 사람들은 대답을 안 해요. 칠십 만 원짜리쯤 되겠지요? 그 강아지는 사실 칠십만 원짜리가 아니라 친구한테 얘기해서 거저 얻어온 강아지일지도 몰라요. 그렇지 않아요? 시장에서 삼만 원만 주면 사올 수 있는 잡종일지도 모른단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잡종이냐, 순종이냐, 얼마짜리냐가 문제가 된 게 아니라 그 강아지를 잃어버린 게 지금 이 사람들에게는 큰 아픔이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강아지를 잃어버린 게 아니라 관계를 잃어버린 거예요. 늘 이 시간에는 품에 안고 자야 되는데 이게 큰 개한테 물려 죽었나? 보신탕 장수가 훔쳐갔고 갔나? 차에 치였나? 별아 별생각이 다 드는 것이에요. 두 자매가 눈물로 밤잠을 못자는 거예요. 생각하다 못해 풀 통을 들고 그것을 붙이러 거리로 뛰어나온 것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난 후에 본전을 생각하셨다면 벌써 떨이로 처분하고 끝내셨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우리 자신을 귀하게 여기시면서 하나님과 맺으신 그 관계를 하나님이 기억하셔서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이죠. 성경을 읽다보면 이해가 안 가는 게 가끔 나오잖아요? 그 중의 하나가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양의 비유에요. 다 알잖아요? 100마리의 양이 있어야 되는데 돌아와 보니까 99마리만 있고 한 놈이 없는데 목자는 직감적으로 그놈이 어떤 놈인지 알았죠. 산 넘고 물을 건너서 이제 그 양을 찾아 나선 것이죠. 틀림없이 때는 저녁이었을 것이에요. 그러면 찾다가 못 찾으면 밤이 될 수도 있고 그러다보면 맹수의 습격도 있고 도적의 위험도 있는데 이 양 한마리가 얼마가 된다고 넉넉잡아 이십만 원이나 받을까요? 이십만 원 없애버리고 마는 것이 낫지 그 이십만 원을 찾으려고 걸어가다가 발목이라도 삐어서 병원에 다니려면 치료비가 양의 값보다 더 든단 말이죠. 그런데도 찾아 나섰어요.
당시 이스라엘에는 말이죠.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자기 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어요. 대부분 마을에서 같이 살면서 공동목장을 하나 만들어 놓고 공동으로 양을 기르는 것이에요. 거기의 양을 지켜주는 사람은 돈을 주고 사온 목자에요. 그게 삯군목자에요. 삯군은 월급 받는 데에 정신이 팔려있으니까 맹수가 오면 월급 안 받는 것이 낫지 그 월급 받으려다가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날리면 되겠어요. 그러니까 도망을 가는 것이죠. 양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것이죠. 날짜가 차면 월급을 받아 가지고 가는 게 일이지요 .그런데 이 사람은 아마 자기 양이었던 모양이죠. 그렇죠? 그런데 자기 양을 기르는 사람에게는 애정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양을 보면서 그 양을 보며 이십만 원짜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양 자체가 귀한 것이에요. 여러분 이 다음에 자식 다 길러놓으면 한 달에 생활비를 얼마쯤 대줄까요? 한 삼십만 원, 아니 팍 써서 오십만 원. 그러면 여러분이 자식들을 볼 때 ‘아 저것이 앞으로 매달 오십만 원짜리인데…….’ 이렇게 생각하는 부모가 있어요. 있으면 정신병원에 빨리 가봐야 되요. 더 이해가 안 가는 것은 그 다음이에요. 양을 찾았어요. 찾아가지고 어깨에 메고 왔지요. 어깨에 메고 동네로 돌아오면서 말하는 것이에요. 자기네 동네에 돌아와서 요즘으로 말하자면 빌라가 집이라고 칩시다. 빌라에 있는 사람들한테 ‘야 문 좀 열어봐!’ 사람들이 빌라에서 문을 덜컹덜컹 열어요. 그리고 ‘왜 그래?’ ‘저녁 먹었어?’ ‘아니, 아직 저녁 전이지.’ ‘그러면 오늘 저녁은 하지 마’ ‘왜 무슨 일이 있어?’ ‘한 시간 반 후에 우리 집 뒤뜰로 다 내려와.’ ‘왜?’ ‘잔치를 할 거야.’ ‘왜?’ ‘잃어버린 양을 찾았거든.’ 양 한 마리에 몇 이나 한다고 동네사람들이 밥 먹겠다고 다 몰려오면 설마 그 양 잡아서 바비큐를 해준다고 하는 것은 아니겠죠? 그러면 양 한 마리에 이십만 원인데 빌라사람을 다 데려다가 뷔페로 대접을 하면 소 한 마리 값이 다 나갈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런 어리석은 계산이 성경에서는 통해요. 그러니까 양 한 마리 찾은 것이 너무나 기쁘고 좋아서 소 한 마리 잡아다가 바비큐를 해놓고 동네사람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이에요? 없다는 것이에요? 정답은 ‘있다’에요. 이게 바로 하나님이 양떼인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양떼를 이제껏 까지 기른 그 목자는 그 양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그리고 태어나면서 어떤 성장의 과정을 겪었는지, 태어나서 솜털이 젖은 채로 걸어 다니던 그 어린양도 생각하고, 그리고 그것이 어미 양의 젖을 먹으면서 자란 것도 생각하고, 병치레를 할 때에 그 놈을 끌어안고 수의과 병원으로 뛰던 일도 다 생각이 나는 것이에요. 여러분이 자녀들을 기를 때와 똑같은 사연을 안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이만큼 길러서 여기까지 데리고 오신 것이에요. 우리가 보기에는 다 우리 혼자 잘 자란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놀라운 사랑으로 인도하셔서 여기까지 지켜주시고 붙들어주신 것이에요. 이런 분이 바로 누구냐 하면 목자이신 하나님아버지라는 사실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부담스럽게 느끼는 게 바로 우리 인생들이라는 것이죠. 왜 하나님이 그렇게 목자 되신 하나님의 그런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돌봐주시고 인도해주시는데도 그 사랑에 기대어서 살지를 아니하고 오히려 그 사랑받는 것을 한없이 구속으로 여기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승복시키기 위해서 말씀하시는 그 모든 말씀들을 한없는 구속으로 느끼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려고 하는 심사는 도대체 무엇 때문이냐는 것이죠. 그렇게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언젠가 하나님이 나를 꽉 은혜 주셔서 사도 바울처럼 변화시켜 주실 것이라는 그런 환상적인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그런 불순종한 인생들이라는 것이죠. 신앙이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에요. 이전에는 나밖에 잘난 것이 없는 줄 알고 돌아다니다가 내가 죄인이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도 나 같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의 마음을 알게 되면서 그런 사랑을 깊이 느끼고 하나님 앞에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에요.
(찬양)
주님은 나의 길이라 부르면서도 그 길로 가지 싫어 딴 길로 헤매네.
어둡고 캄캄한 그곳 가시밭길에 길 잃은 양 한 마리 떨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우리는 주님을 버릴 적도 있고 다시 찾을 적도 있지만 그러나 주님은 당신과 우리와의 관계가 포기할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찾아 나서십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생활을 하면서 상처받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도 또한 상처받은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깨뜨려진 인간관계, 일그러진 자화상으로 말미암아서 그 상처 앞에 서기만 하면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은 그런 고통을 경험할 때가 있지요. 그런 상처에 매여 있는 동안에는 우리가 용사와 같은 삶을 살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신 것은 단지 예수 믿고 구원받는 표 딱지 하나 얻어다가 뒷주머니에 넣고 맘대로 살다가 천국 가는 열차를 타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드신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가슴에 불붙는 하나님의 긍휼을 알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참사랑을 깨닫는 우리로서, 이제는 그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충만하여져서, 그 사랑에 빚진 자 되어서 이제는 남은 생애를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사나 죽으나 주님만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이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에 두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살았으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남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놀라운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이제는 변화되는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주님을 위해서 살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그 참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그 사랑에 날마다 감격하며 주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서 나밖에 없는 것처럼 생각하시면서 그렇게 사랑해주시는 것이죠. 오늘도 우리는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구속한 주 만 바라보면서 일생을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 놀라운 사랑으로 구원하셔서 우리의 목자가 되신 것입니다. 믿습니까?
결국 상처로부터라도 해방되고 벗어나야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 상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그런 상처로부터 벗어나는 역사가 있기 위해서는 상처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상처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게 될 때에 상처는 물러가고 하나님의 사랑의 기쁨이 우리의 심령에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의 심령에 변화를 주시기만 하면 그러면 우리는 미워하던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평생 한 맺힌 관계 속에서 원망과 불평 속에 한을 품으며 살아가야할 그 관계들을 오히려 사랑과 용서와 회복이 되는 관계로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이죠. 오늘 여기 나와 계신 여러분들 중에도 아마 누군가와 가족이나 혹은 누군가 사람 때문에 한없는 고통을 겪고 계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내가 될 수도 있고, 남편이 될 수도 있고, 자식이 될 수도 있고, 부모가 될 수도 있고, 동기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지체들이 될 수도 있지요.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런 어려움을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의 참된 사랑의 깊이를 깨닫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자신이 그 사랑에 깊이 잠긴바 되어서 그 사랑을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의 근원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한 사람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고 변화될 때 소망이 없는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목자라는 말의 해석을 끝낼 때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이렇게 인격적으로 우리를 승복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참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또 우리의 약점을 알면서 우리를 인도해주신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라는 사실은 어제, 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그러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안에 이런 풍성한 삶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거의 그런 하나님의 풍성한 삶을 이어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자신도 그런 사람일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놀라우신 사랑을 가지고 계시고 인격적이신 하나님이시지만 그 하나님과 우리가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목자의 그늘 아래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 쪽에서의 뭔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여러해 전에 수련회를 갔는데 말이죠. 형제, 자매들이 모여서 수련회를 하는데 마지막 날 찬송을 부르는데 집에 가려고 보따리까지 다 쌌어요. 찬송을 부르는데 기분이 이상해요. 꼭 기도를 한 번 더 하고 싶어요. 우리 다 같이 기도합시다. 서서 막 기도를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조금 있더니 막 우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냥 이렇게 엉엉 우는 게 아니라 둘이 막 몸부림을 치면서 우는 것이에요. 남자 하나, 여자 하나가 듀엣으로 그렇게 우는 것이에요. 그러더니 조금 있다가 쾅하는 소리가 나요. 서서, 울면서 회개하다, 회개하다 진이 빠지니까 마룻바닥에 쓰러진 거예요. 둘 다 거구였어요. 쾅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졌어요. 그래서 두 사람을 들어다가 옆방에다 옮겨놓고 앉아서 기도를 하라고 시키고 가봤어요. 둘 다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면서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하나님 앞에 뭔가를 고백하면서 막 울고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형제도 심했지만 자매는 더 심했어요. 그래 이제 곁으로 갔어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다 물리고 그랬어요. ‘울어라. 울고 싶을 때는 우는 것도 주의 일이란다. 울어라.’ 실컷 울고 그 다음에 제가 물어보았어요. ‘사연이 무엇이냐? 내가 보기에는 이게 보통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네 안에 하나님이 오셔서 너를 회개시키시는 게 분명한데 너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게 있구나?’ 이렇게 한마디를 평범하게 했는데 막 비수를 찌르는 것처럼 말이죠.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서 서럽게 울어요. 그런데 한참을 두고 보았지요. 그리고 눈물을 닦고 눈이 부어서 눈도 못 뜨고 드러누운 상태에서 ‘사연을 이야기해봐라’ 그랬더니 울먹울먹하면서 첫마디 하는 것이 ‘저는요 하나님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내가 속으로 이게 뭐 이런 짐승이 있나?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 못한다고 그래도 이해가 가요? 안가요? 안 가는데 인간이 도대체 무엇이관데 언제 하나님이 용서받으실 일을 하신 적이 있어요? 그래도 그 자리에서 그렇게 말하면 또 상처를 받잖아요? 그래서 ‘그게 무슨 소린데?’ 그랬더니 이제 드디어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사연이 나와요.
고등학교 시험에 떨어졌으니까 공부를 잘한 자매는 아니었죠. 그리고 재수하는 시기에 시집 간지 얼마 안 되는 언니네 집에 놀러갔다는 거예요. 그런데 언니가 마침 아이를 낳았어요. 그래서 이불을 펴놓고 아이를 심장을 튼튼하게 키운다고 이제 겨우 목을 가눌까 말까하는 놈을 엎어놓고 키우는 거예요. ‘너 애기 좀 잘보고 있어라! 언니 잠깐 나갔다올게’ ‘응 그래 잘 갔다 와.’ 그리고 자기도 누워서 이제 어린애를 어르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에요. 그러다가 자기가 잠이 들은 거예요. 그 자매가 잠이 들은 지 한참 자다가 기분이 이상해서 딱 깼는데 보니까 아기가 두터운 이불에 코를 박고 있는 거예요. 죽었어요. 딱 보니까 벌써 사지가 축 늘어졌어요. 그래서 이 아이를 가슴에 안고 병원을 향해서 막 뛰는 거예요.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가 어려서부터 예수를 믿었지만 그 때의 기도는 정말 간절했다는 것이죠. ‘하나님 제 생명을 가져가셔도 이 어린아이가 무슨 죄가 있어요? 이 아이의 생명만 살려주십시오.’ 그리고 병원으로 뛰었는데 의사가 진찰을 해보더니 ‘너무 늦었다. 죽었다…….’ 죽었어요. 그러니 그 다음의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지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얼마나 기막힌 일이 벌어졌겠어요.
그 속에서 이 어린 자매의 마음속에 무엇이 생겼나하면 하나님은 선하시지 않다는 확신이 생긴 것이에요. 그런 잘못된 생각을 가슴에 확 부여잡고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목자이시고 그런 사랑을 가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 풍성한 삶이 자신 속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에요. 그렇게 고민하고 괴로워하다가 결국은 하나님이 그 수련회에서 가슴 깊이 있는 그 죄악의 덩어리들을 터뜨리시고 거기에서 회개하면서 하나님 앞에 뉘우치고 다시 하나님을 목자로 모셔 들이고 풍성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놀라운 사랑을 가지고 계신 그러한 목자이신 하나님이시지만 여러분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 앞에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말씀을 듣고 나서는 그 하나님을 목자로서 모시면서 살아가고 싶다는 결단이 있어야 되는 것이에요. 고백이 있어야 된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랑을 맛보면서 사는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 하나님이 목자로서 우리의 마음속에 오셔서 우리의 삶을 다스려주시도록 자신의 마음의 자리를 하나님 앞에 내어드리는 사람, 그래서 그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되고 그 사랑의 줄에 묶여서 살아가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하는 사람,
(찬양)
주의 사랑의 줄로 나를 굳게 잡아매소서.
그러한 고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 우리를 감격케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생각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여러분들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만드실 때에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로 만드셨습니다. 그런 사실을 깨닫고도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지 않으려고 할 때에 그 때에 우리는 늘 세상에서 곤고하고, 괴롭고 그리고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삶을 반복하면서 실패로 얼룩진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누구든지 ‘주님! 나의 황폐한 이 삶 한가운데 주님이 목자로서 임하시고 이제까지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버르적거리면서, 몸부림치면서 살아왔지만 남은 것이라고는 상처와 한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오셔서 내 인생의 목자가 친히 되어주시고 나를 다스려 주시옵소서.’ 그렇게 고백하면서 인생을 하나님 앞에 의탁할 때에 그 때에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풍성한 삶을 누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믿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그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니까 이제 시인이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이죠.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게는 모자라는 것이 없도다. 여러분! 다윗은 행복했던 사람이었던 같아요? 불우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누가 나더러 다윗과 같은 인생을 한번 재판해보겠느냐 하면 나는 아니올시다! 에요. 사양하겠어요.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서 부러워할 것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어요. 한 나라의 임금이 된 것도 부러우려면 부러울 수도 있겠지만 그 날들이 그렇게 편하지 않았고, 그저 부러운 것은 딱 하나 그가 워낙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것 하나만 부럽고 그가 지은 시편을 읽으면서 저는 좌절할 때가 많아요. 낙심할 때가 많아요. 아! 이 사람은 구약에 살면서도 이런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났는데 나는 은혜가 풍성하다는 신약시대에 살면서 이게 뭔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것 하나 빼놓으면 부러울 것이 없어요. 오히려 제가 훨씬 행복한 사람일지 몰라요.
왜 그랬는지 한번 볼까요? 어렸을 때 이 사람은 이새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이 다윗을 귀한 아들로 인정을 해줬어요? 안 해줬어요? 무엇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사무엘 선지자가 기름을 부으러 온 광경을 보면 수 있지요. 이새의 아들 중에서 내가 세우고자 하는 왕이 있다. 하면서 큰아들부터 기름을 부으려고 하면 하나님이 ‘아니다. 나는 걔를 버렸다.’ 다른 아들들도 다 아니에요. 그런데 분명히 하나님이 이 집에 있다고 했거든요. ‘아들이 이것밖에 없습니까?’ 하니까 한참 있다가 생각난 아들이 있었는데 누구에요? 다윗이에요. ‘아참! 하나 또 변변치 못한 놈이 있습니다만…….’ 이렇게 나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아버지로부터도 사랑을 잘 받지 못한 것이에요. 그러면 자라면서 동기간한테는 사랑을 받았느냐하면 그것도 아니에요. 동기간도 다윗을 대단하게 취급해주지 않았습니다. 잘 끼워주지를 않았어요. 그렇게 부모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은 이제 결혼에 대해서 희망을 갖게 되잖아요? 그래서 결혼을 해서 미갈이라고 하는 아내를 만났습니다. 여자는 남자로부터 사랑만 받으면 살 수 있지만 남편은 아내로부터 사랑만 가지고는 살 수 없어요. 사랑과 함께 존경을 받아야 해요. 그런데 이 여자 미갈은 남편을 마음 깊은 곳에서 존경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나아가서는 다윗이 가지고 있는 그 넓은 신앙의 세계, 깊은 영적인 은혜의 세계를 이해하고 함께 동참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아내로부터도 별로 그렇게 뜨거운 관계를 경험하지 못했어요. 사위사랑은 처갓집인데 처갓집은 또 어땠어요? 장인어른을 참 좋은 사람 만났죠? 죽이겠다고 자객을 풀어놓고 생명을 찾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장인이에요. 자기가 죽으면 자기 딸이 과부가 되는데 그래도 장인이 죽이겠다고 귀신들려서 미친 듯이 사위를 죽이려고 쫒아 다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아예 양쪽 부모들한테 질렸어요.
그래서 시인이 뭐라고 그래요?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 하시리로다.’ 이것이 피 눈물 나는 고백이에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 하시리로다.’ 나는 다윗의 그 고백을 읽을 적마다 눈물이 나요. 얼마나 가정적으로 상처가 많았으면 이럴 수밖에 없었을까? 그런 사람들은 결국은 자식에게서 재미를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건 또 어디서 태어난 자식이에요? 다 자기가 낳은 자식인데도 이게 인간이하의 자식들이 모인 거예요. 아버지가 딸이 얼마나 귀엽겠어요? 저도 지금 딸밖에 생각나는 사람이 없는데 다섯 살이거든요. 어제 밤에도 통화를 하지 않았겠어요? 그렇게 보고 싶은데……. 딸이 얼마나 귀엽겠어요? 그런데 그게 강간을 당했어요. 얼마나 괴로워요? 그놈이 누군가 했더니 자기 뱃속으로 낳은 자기 아들이에요. 인생을 살고 싶겠어요? 신앙이 없으면 꽥하고 죽어버리는 것이 낫지. 그렇지 않겠어요? 그러다가 또 조금 있으니까 반란이 일어났대요. ‘왜 일어났느냐?’ ‘당신을 죽이고 왕이 되겠대요.’ ‘반란의 두목이 누구냐?’ ‘당신의 아들이요.’ 드디어 한참 있다가 ‘반란군이 평정되고 수괴는 살해되었습니다.’ ‘그게 누구냐?’ ‘당신 아들이 비참하게 죽는 것으로 난이 평정되었습니다.’ 승전보와 함께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와요.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그러면서 통곡을 하는 거예요.
여태까지 열거한 것 중에서 하나만 우리의 인생 중에 확실히 일어나도 우리 인생을 살아갈 맛이 안 날거예요. 그렇지요? 그런데 이 사람은 그 모든 것을 다 겪은 거예요. ‘아! 인생의 곤고함이여…….’ 그러다가 말이죠. 단 한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 사람에게 온 시선을 빼앗기고 마음이 다 그에게로 갔어요. 뜨겁게 사랑하고 동침했어요. 그랬더니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불륜의 관계였어요. 그 순간의 범죄로 그는 잔인할 정도로 캄캄한 그 어둠속을 헤매면서 이제 부모도 자기를 버리고, 자식도 자기를 버린 상황에서 그런 인생길 속에서 유일하게 사이좋은 사이였고 유일하게 붙들고 살아왔던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파괴되는 비극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에요. 다른 사람이 ‘나는 부족함이 없도다. 남편이 월급도 잘 갖다 주고, 애들도 공부 잘하고, 건강하고, 교회에 잘 나가고…….’ 말발이 설 거예요. 딴 사람이 다 ‘나는 부족함이 없도다.’ 라고 말할 수 있어도 다윗은 그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그런 그 사람이 인생의 모든 불행을 뛰어넘으면서 한없이 괴로운 상처를 뛰어넘으면서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히브리말로 번역하면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 라는 번역도 가능해요. 지금 현재의 상태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도대체 무엇이 그런 결핍과 모자람과 아픔과 상처투성이의 인생을 지나면서 그러면서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는 부족함이 없도다.’ 라고 고백하도록 만들어 줄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에요? 세상의 물질이나 또 자식들의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나 세상 사람들의 자기에 대한 태도의 변화나 물질이나 환경이나 여건에서 오는 변화가 아니었어요. 이번 집회에 은혜를 많이 받는다고 칩시다. 기도도 많이 하시겠죠? 그러면 갑자기 우리 환경이 변할까요? 물론 변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내 인생의 목자로 모셔 들이면서 회개하는 순간에 갑자기 산을 옮겨서 평지가 되게 하시는 일을 자주 행하심으로써 우리를 승복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환경은 변하지 않고 있어도 우리가 먼저 변화되게 만들어 주십니다.
언젠가 교인 한사람이 저에게 와서 상담을 했어요. 우리 교회를 다니려고 하는데 자기 집안 식구들 때문에 자기가 얼마나 서러움을 겪으면서 비참하고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는지에 대해서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고백을 하는 것이에요. 그 때 목회자가 ‘그런 것을 가지고 뭘 그래요?’ 그러면 인생을 살맛이 더 안 나겠지요? 그래서 ‘맞네요. 나 같아도 못 살 거예요. 나도 목사지만 나도 만약에 그런 집에 시집을 갔다면 아마 나도 못 살 거예요. 그 속에서 그래 여태까지 살았어요? 어휴! 정말 대단해.’ 그러면 눈물이 더 나오는 모양이에요. 눈물을 흘리면서 세상에 ‘나는 정말 부족한 것이 없고 모자라는 것이 없는 사람인데 우리 가족들이 나를 이렇게 불행하게 만들었어요.’ 그러더니……. 그러고 나서 며칠 있다가 부흥회를 했거든요. 집회를 다 하고 나서 다시 한 번 눈물을 흘리면서 ‘목사님 알고 보니까 모든 문제가 나 때문이에요.’ 그래서 ‘정답을 찾았네!’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그러면서 인격적으로 승복되지 않는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그 세미한 손길을 보면서 우리는 이 세상의 환경과 여건을 바라보면서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나를 우리는 기대하지 맙시다. 세상이 어차피 우리의 편이 아니에요. 세상이 여러분 편이 되어주기를 바라면 여러분은 성도가 아니에요. 사람들이 무엇을 몰라도 한참 몰라요. 여러분 여러분이 세상 속에서 세상과 짝하고 살다가 어느 날 '손들고 옵니다.' 하며 주 앞에 회개하는 날 그 날이 무슨 날이었는지 아세요? 함께 얼싸안고 동침하면서 살던 여러분의 옛날 남편이라고 할 수 있는 세상의 가슴에 칼을 꽂고 예수님 앞으로 온 것이에요. 예수님을 한참 믿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뭔가 건조해지고 애급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나니까 다시 옛날 세상일하는 남편을 끌어안고 재미나게 살던 때를 생각하면서 이 건조한 신앙생활을 할 바에야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은 지금 여러분들이 자기의 가슴에 칼을 꽂고 돌아선 그 날을 기억하고 있다고요. 그리고 돌아갔는데 돌아가도 그 세상은 옛날세상이 아니에요. 거기에 가서도 환영받으리라고 생각해요? 아니에요. 그러면 성경을 고쳐 써야지요. ‘소금의 짠맛을 잃어도 세상의 바깥에 던져지면 신주단지처럼 모심을 받느니라.’ 그렇게 안 쓰시고 주님은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어디다 쓰리요. 밖에 버리어져 다만 사람들의 발에 밟히우느니라.’ 이미 거기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에요. 왜 아멘을 안 해요? 돌아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면서 우리는 세상이 뭔가 바뀌고 환경이 변해서 우리가 뭐가 부족한 것이 없다고 그렇게 말해주게 될 날을 기다리지 말라는 것이에요. 세상은 그렇게 변할 리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신앙의 길을 걸어가면서 우리는 하나님 때문에 한없는 축복, 그리고 평탄한 길을 걸어갈 것이라고 하는 기대만 하지 않아요. 때로는 시련의 파도를 헤쳐야 되는 때도 있어요. 그리고 때로는 역경을 헤치면서 나아가야 될 때도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 때문에가 아니라 내가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그리고 내 인생의 목자가 되어주신 그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나를 붙들고 계신 한 이 세상의 어떤 파도와 시련도 이기고 어떤 어려움이 나를 에워싼다고 할지라도 나는 부족함이 없다.’ 라고 고백하며 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걸어가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바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여러분들이 이런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그가 나를 푸른 초장과
“그가 나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2).
하나님께서 목자라는 사실을 어제 고백했고 그리고 또 그 하나님의 나의 목자라는 사실을 고백을 하면서 왜 하나님이 목자이신 줄을 2절 3절 4절 5절에서 계속 풀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밤에 3절에서 왜 하나님이 자기의 인생의 목자인가 했더니 그 하나님이 바로 자기의 영혼을 소생시켜주셔서 당신을 위하여 의의 길로 걸어가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자기의 인생에 목자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의 회복을 주시고 죽었던 자와 방불한 우리의 심령에 새 은혜를 부어주실 때 우리는 하나님이 정말 내 인생의 목자이시고 그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그 앞에 있는 2절에서는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이 왜 우리의 목자이신 줄을 공급해주시고 인도해주시는 은혜를 통해서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있는 중동지방에는 그렇게 목초지가 많지 않습니다. 족장들이 유리하면서 생활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목초지를 찾아서 유리하는 것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며칠 길을 가축을 데리고 가서 목초지를 발견하여 풀을 먹이기도 합니다. 풀이든지 물이든지 모두 그 지방에서는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목동들은 목초지를 찾아서 이제 양들을 데리고 떠나게 됩니다. 한번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만약에 그 목자가 선한 목자라면 양떼를 데리고 풀밭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그 풀밭에서 양떼들이 한없이 쉬면서 그 풀을 뜯고 잘 먹고 있을 때 이 선한 목자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늘에서 한참 퍼질러 낮잠을 자고 있겠습니까. 만약에 양떼들이 풀을 뜯어먹다가 풀을 거의 다 먹었습니다. 그때 목동에게 와서 이봐 목동, 왜 그래. 우리 풀 다 먹었는데, 내일은 뭘 먹지? 그것을 왜 너희들이 걱정하니. 산 입에 거미줄 치겠는가. 오늘 일은 오늘 염려할 것이고 내일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고 오늘 먹을 것 있으면 족하지 않은가. 선한 목자라면 양떼들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양떼들이 한가히 열심히 자기의 초장에서 풀을 뜯고 있는 동안에 그 목자는 언덕위에 높이 올라가서 사면을 이 목초지의 풀을 다 먹고 나면 그 다음에는 어디서 이 양떼들에게 풀을 먹일지를 찾는 법입니다. 그래서 그 양떼를 인도하여 가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에게서 이런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도저히 매일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원수들에게 쫓기면서 내일은 내 생명을 보존할 수 있을지 그렇게 너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서 하루, 하루를 인도를 받으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자신이 불안과 염려 속에서 보냈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루의 일이 끝나면 또 하루를 위한 은혜를 예비하시고 다윗을 위하여 먹고 입고 쓸 것들을 준비하셔서 공급해주시는 은혜를 이 시인은 풍성하게 체험하면서 과연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나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인도하시고 공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깊이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인생을 어떻게 인도해 오셨는지 한번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혼자 있는 것 같았으나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붙드시고 외로움 가운데 걸어가고 있는 것 같았으나 그러나 거기서도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우리의 재주로 우리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물질로 사는 것이 아니라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이렇게 세밀하게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6.25때 한국에 전쟁이 일어나서 미군들이 부모를 잃고 흩어진 수많은 고아들을 참 많이 거두어주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잊으면 안 되는데 언젠가 한번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6.25때의 참상을 보여주는데 정말 섬뜩했습니다. 엄마가 폭격을 맞아서 철길위에 쓰러졌는데 그 죽은 엄마의 앞가슴을 헤치면서 죽은 엄마의 젖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 전쟁 통에서 고아들을 거두어서 미국으로 보내주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모아진 어린아이들이 미국부대에 모아놓고 오랜만에 아이들에게 깨끗이 목욕을 시켜서 구호물자 좋은 옷을 입혀서 저녁을 먹이고 잠자리에 들게 되었는데 다 자야할 시간인데 어린아이들이 잠을 안자서 통역을 시켜서 미군병사가 물어봤습니다. 너희들이 왜 잠을 안자니? 아저씨 잠이 안 와요. 왜 잠이 안 오니? 몰라요. 그럼 내가 기도해줄게. 기도해주고 자장가를 불러주어도 애들이 도저히 잠을 안자는 것입니다. 다시 물어봤습니다. 너희들 왜 잠을 안자니? 그랬더니 그 중에 한 아이가 말하기를 아저씨, 우리는 내일 뭘 먹어요? 쉽게 얘기하면 전쟁 통에 하도 매일에 양식에 대한 보장이 없는 삶을 살았으니 오늘 배가 불러도 불안해서 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군병사가 설명해주었습니다. 이 부대에는 먹을 것이 많이 있단다. 내일도 오늘처럼 먹여주고 모레도 먹여주고 그러다가 글피에 비행기가 오면 그것을 타고 너희들은 미국에 가는데 미국에 가면 거기에 부모님이 계시는데 그 분들이 너희들에게 더 맛있는 것을 해주실 것이다. 그러면 너희들은 배고픔에서 영원히 작별이다. 그 이야기를 해주어도 알았어요. 하면서도 또 잠을 못 잡니다. 그래서 이 지혜로운 미군 병사가 취사반에 연락해서 머리통만한 햄버거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비닐봉지에 넣어서 아이들에게 하나씩 다 나누어주었습니다. 이게 바로 너희들이 내일 먹을 것이다. 그러니까 배가 부른데도 그 햄버거를 품에 안고서야 잠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그 신실한 사랑을 믿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시편에 보면 특별히
오 신실하신 주 내 아버지여 늘 함께 계시니 두려움 없네
그 사랑 변찮고 날 지키시니 어제나 오늘이 한결같네
시편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제목 가운데 하나가 신실하신 주여, 그렇습니다. 울산시민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그 신실하신 하나님이 시인들의 찬송 제목입니다. 시인뿐만 아니라 성경의 구약에서 아주 찬송제목입니다. 제가 오늘 하나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왜 그렇게 당연한데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믿을만하다. 그런 뜻이 아닙니까? 그게 왜 그렇게 시인이나 구약의 인물들에게 감격할만한 찬송제목이 되었는지 아십니까?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당시 중동지방에서 유행하던 종교들 속에서 그 신은 도대체 변덕이 팥죽 끓듯 하는 신들입니다. 그게 우리나라의 신관하고 아주 비슷합니다. 여러분, 지금 세상이 어느 때인데 빌딩을 지을 때보면 밑바닥에서 내려가서 돼지머리를 삶아놓고 정부고위 관련된 사람들이 굽어 절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바보들입니다. 그것을 누구에게 하는 것인가 하면 터줏대감 한테 인사하는 것인데 왜 터줏대감 한테 인사합니까? 잘 보여서 공사비를 줄이겠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일층 콘크리트 올렸는데 자고 일어나니까 터줏대감이 능력을 베풀어주셔서 3층으로 올라가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그런 개념은 없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가만히만 계셔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뭐 부르지 말고? 심술부리지 말고, 심술부리면 기둥도 무너지고 일하다가 인부도 죽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중동지방의 신관이 그런 것입니다. 늘 먹고 싶어서 걸근대고 잿밥 안 차려주면 깽판 놓고 이런 식입니다. 신들끼리 패거리 지어서 돌아다니며 쌈질이나 하고 도대체 믿을 수가 없는 폭력적이고 아주 우발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신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네 신께 제사하면서 전전긍긍합니다. 또 우리 신을 화나게 하지 않았을까. 오늘은 이랬다. 내일은 저랬다. 막 이러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보면 홍수설활(?)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경에는 노아 시대 때 하나님이 온 땅을 바라보시니까 너무나 패괴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해서 정리를 해야 되겠다. 마음을 갖고 하나님이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동기에서 타당성을 가지고 물의 홍수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비슷한 이야기가 바벨론 설화에 나오는데 거기서는 하늘에서 신들이 조용히 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시끄러웠습니다. 그 중의 한 신이 아니, 왜 그렇게 시끄러워, 물을 부어. 위에서 불을 확, 부으니까 홍수가 났더라. 사람들이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살아오다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 하나님은 한번 약속하시면 세월이 수없이 흘러도 변함없이 그 약속을 이루고야 마십니다. 한번 용서해주신다고 말씀하시면 끝까지 용서해주시는 분이십니다. 한번 사랑하겠다고 말씀하시면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막 한없는 감격에 사무칩니다. 그래서 오, 신실하신 주가 찬송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신실하심은 만약에 그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변화무쌍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그 모습 그대로 반응해주셨다면 우리 모두 지옥에서 동창회나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신실한 하나님이 오늘도 지켜주고 인도해오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이 좋을 때도 먹여주셨습니다. 신앙이 떨어질 때 하나님이 우리를 입혀주셨습니다. 곤고할 때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주시고 충만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건강과 명예를 보존하며 살 수 있는 필요한 것들을 우리에게 공급해주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할 때만 공급해주신 것이 아니라 기도하지 않을 때도 하나님께서 날마다 우리의 쓸 것을 공급해주셨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주님 늘 돌보아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매일매일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좋은 것 중에 아버지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없으니 모든 것을 아버지께로부터 왔으니 날마다 우리에게 공급해주시는 그 은혜로 우리를 살게 해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별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좋은 것도 아니고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데 그것과 결별하지 못하고 삽니다. 끌어안고 사는데 그것은 걱정입니다. 염려입니다 근심입니다.
어느 청교도 설교자가 기가 막힌 예화를 하나 들었는데 어느 날 마귀가 자기네가지고 있는 물건을 펼쳐놓고 경매를 붙였더니 순식간에 팔려나가는데 그것은 세상 자랑, 막 서로 사겠다고 머리가 터집니다. 교만, 와! 사람들이 비싼 값을 주고 다 사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까지 잡히고 사갔습니다. 탐욕 와! 경매 들어서 다 사갔습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팔았는데 나중에 안 팔리고 남은 것이 딱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염려, 염려는 절대 안 사갔습니다. 그래서 마귀도 이제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이것은 아무리 가격을 낮추어도 입찰하는 사람이 없다. 이것은 할 수 없이 사은품으로 나누어주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은품도 공개적으로 나누어주면 안 가져가니까 와서 교만을 사갈 때 주머니에 살짝 집어넣어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가 느끼는 것은 사단의 무기 가운데 염려라는 무기만 없었으면 그 왕국은 벌써 무너졌어도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그 강력한 무기 하나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 사람들이 뭘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다가 한 세월 다 보냅니다.
마태복음 6장 19절 이하 34절까지 보면 하나의 커다란 한 문맥이 나오는데 6장 33절에 바로 우리가 잘 아는 그 문맥에 핵심구절이 하나 나오는데 그것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과 사의 지표입니다. 그것 때문에 살고 그것 때문에 죽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그 위대한 교훈을 시작하실 때 19절 문맥에서 시작하시는데 그 19절의 시작이 무엇인가 하면 “너희를 위하여 땅의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 그러면서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땅의 보물을 쌓아두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그것은 염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 다음으로 믿을만한 게 무엇입니까? 동기간입니까, 남편입니까? 그것도 돌아누우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딱 돌아누우니까 집 반쪽씩 잘라야한다는데 무섭습니다. 그럼 자식입니까? 무엇입니까? 돈입니다. 정 목사님하고 저하고 포함해서 우리 모두 성도들 함께 일생 살면서 이런 이야기 한번 쯤 해봤을 것입니다. 야, 돈이 좋긴 좋구나. 그러면서 야, 역시 돈 같고 안 되는 것이 없구나. 여러분 한 번씩 해봤을 것입니다. 새로운 차 한 대 사서 뒤에 타면서 돈이 좋긴 좋구나. 돈이 그렇게 좋은 것입니다. 거의 세상에서는 돈 가지면 웬만한 일은 거의 할 수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지금 노예제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돈 아까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러라고? 그러면 아마 권사님이나 집사님은 걸어 나오실 것입니다. 아니 저는 좋아하는 것은 나중 문제고 돈의 위력이 이렇게 막강하다는 것입니다. 돈이 많으니까 옛날에 대통령도 한손에 넣고 막 주물렀습니다. 돈이 많으니까 권력도 한 손에 넣고 막 주무릅니다. 지금 노예제도가 없어도 돈만 많으면 노예제도 있을 때보다 더 상전노릇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돈이 그렇게 강력한 위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 돈에 대해서 계속탐심을 갖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보호해주리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어느 정도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돈만 있으면 안 죽었을 텐데 그런 사람들도 우리는 종종 봅니다. 돈의 위력이 이렇게 대단한 것입니다. 그렇게 돈을 이 땅에 쌓아두려고 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그렇게 돈을 쌓아두는 삶을 살기위해서는 돈을 사랑하지 않고는 쌓아두는 삶을 살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그러면서 하나님과 함께 대등하게 우리의 사랑과 경배를 받는 대상으로 그 자리다툼을 하는 것이 돈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부모자식 간에도 재산 가지고 고소하고 서로 철창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을 여러분 신문지상을 통해서 가끔 재벌들 싸움하는 것을 볼 것입니다. 뭐가 그렇게 만들겠습니까? 돈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그 6장 문맥에서 등불이야기를 합니다.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다가 그 다음에 본론을 말씀하시면서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피는 백합을 보라. 그러면서 말씀하시다가 “너희가 어찌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느냐 이는 다 이방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결론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을 하나님이 구원해놓으셔서 이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살게 하셨는데 그런 삶을 살지 못하도록 만들어주는 가장 커다란 방해요소가 무엇인가 하면 염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염려는 결국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염려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염려하느라고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그 나라를 위해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근심이 우리의 마음을 찔러서 불경건한 삶을 살아가도록 자극하고 영원한 것을 위해서 살기 보다는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들을 붙들고 살아가게 만들고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영원한 것들을 위해서 살기 보다는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들과 함께 씨름하다가 우리의 인생이 지나가버리도록 만들어버리는 것이 바로 사단의 궤계요, 염려가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이 염려 때문에 살아갑니다. 그러면 돈이 없는 사람만 염려를 하는가? 아닙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20억 빚을 지고 몰리다, 몰리다 자살했습니다. 죽은 다음에 정리를 해보니까 재산이 40억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40억 처분해서 20억 빚을 갚고 20억 통장에 집어넣으면 한 천 오백만원쯤 나올 것입니다. 그러면 십일조 백 오십 만원 하고 매주일 헌금 백 만 원씩 하고 선교비도 하고 나머지 갖고 살면 될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당신은 그러기 때문에 가난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부자가 되려면 40억 재산이 있어도 20억 빚 때문에 죽을 생각이 나야지만 그 사람이 부자 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자가 되기 틀렸습니다.
(예화) 옛날에 넝마주의자들이 메고 다니던 커다란 넝마주머니를 권사님이 메고 가시는데 앞에서 시커먼 자가 계속 시커먼 쓰레기를 뿌리면서 가는데 뒤에 따라가며 계속 담으면서 무게에 짓눌려 넘어지면서도 담다가 꿈에서 깼다는 내용.
마귀가 우리에게 계속 염려를 줍니다. 왜냐하면 염려하다가 주님 나라 위해서 살 기회를 다 잊어버리도록 지연 작정을 쓰는 것입니다. 짊어지고 짊어지다가 결국은 우리의 인생이 염려 속에서 우리의 인생을 마치는 거품과 같은 인생 만들려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어있고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승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내 인생이 주님의 것이고 주님의 꿈이 내 인생의 것이라고 하는 인격적인 승복, 그리고 내 인생이 곧 주님의 꿈이 되어버린 사람, 말씀으로 변화를 받아서 주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실 때 거셨던 그 거룩한 삶에 목표와 기대가 내 것이 된 사람들은 그런 인생을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도 흔치 않습니다. 사람들이 기업을 하는 이유는 돈 벌기 위해서 기업을 하는데 이 장로님은 특이하신 분인데 기업체를 하나 차려놓고 하나님 앞에 서원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회사니까 일해서 돈 벌어 물품대금 다 주고 그 다음에 종업원들 월급 주고 나면 자기 돈인데 그런데 그렇게 안 하고 회사를 하나님 앞에 바쳤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거기서 월급을 받아가는 것입니다. 돈 벌면 직원들에게 공개합니다. 일 년 동안 너희들이 열심히 일해서 이만큼 벌었다. 너희들 이만큼 나누어가져라, 주고 나도 월급 받아간다. 난 사장이니까 너희들보다 좀 더 받아간다면 몇 백 만원 더 한 달에 가져갑니다. 나머지는 주님 돈, 불경기가 닥치고 기업들이 도산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장로님 힘들지 않으십니까? 좀 힘들긴 힘들지만 괜찮습니다. 다 망하고 난린데 뭐 망하면 내가 망합니까. 주님이 망하시지. 어디에 간들 밥 못 벌어 먹겠습니까. 아, 거기서 번개처럼 스치는 느낌이 있는데 아, 그렇구나. 어디에 간들 밥 못 벌어먹겠습니까? 어디에 간들 월급 못 받겠는가 하는데 만약에 그 사람이 돈을 많이 벌어서 오늘은 별장 짓고 내일은 동남아에다 부동산 사놓는 꿈을 갖고 있다면 참 괴로울 것입니다. 자기도 월급 받는 처지니까. 망하면 주님의 회사가 망하는 것이지 내 것이 망합니까. 어차피 나는 관리인인데 그런 사람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겠습니까.
모든 더러운 죄악들이 돈을 사랑하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 만 악의 뿌리라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돈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염려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인은 말합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미리미리 인도해주셨습니다. 앞서 행하시는 그 하나님이 시인의 인생을 앞서 걸어가시면서 그의 가야 할 길을 인도해주시고 지켜주셔서 일평생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 있었던 그런 신앙을 오늘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의 인생이 정말 염려로 사는 인생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인생입니까? 염려를 끌어안고 사는 사람,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사는 마음에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은 마음의 염려와 근심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날마다 도우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루, 하루 살아갑니다. 모든 범죄는, 모든 탐욕은 미래에 대한 염려부터 생겨납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미래에 대해서 염려를 안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첫째 날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온전히 승복하고 내 인생에 꿈이 하나님의 꿈과 같아지고 나면 그러면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왜, 최악의 경우 죽기밖에 더하겠습니까. 죽으면 괴로움과 죄 많은 이 세상을 떠나서 주님 뵈올 날 기다리다가 가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날 우리 조국교회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신앙 두 개가 있습니다. 사실은 그 두 신앙이 바로 일제의 핍박을 견디게 만들었고 또 공산치하에서도 우리들이 신앙을 지키면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 그 신앙, 양극 신앙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는 십자가 신앙이고, 또 하나는 종말 신앙입니다. 내세 신앙, 그러니까 주님도 욕을 당했으니 나도 주님처럼 욕을 당하는 것이 옳다. 그런 사고방식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피 흘리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주를 위해 피 흘릴 차례다.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세상이 감당할 수 가 있겠습니까, 없습니까? 정답은 없겠습니다. 이렇게 친절한 부흥강사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답도 다 가르쳐드리고, 또 하나의 신앙이 무엇인가 하면 내세신앙입니다. 거기서 주님과 함께 살리라.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배는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문을 열고 나를 오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 둘수 없도다
오 주님 같은 친구 없도다 저 천국 없으면 나는 어떻게 하나
천국문을 열고 나를 오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 둘수 없도다
오늘날 이제나 저제나 주님이 오실까? 그리고 괴로움과 죄가 있는 이 세상의 수고를 끝내고 내가 광명한 천국으로 천사들의 손에 받들려서 올라갈 그날을 사모함으로 부르짖는 성도들이 몇이나 될까요? 내가 요즘 서울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말로는 안 하는데 신앙생활을 하는데 그렇습니다. 하나님, 여기도 살만합니다. 병만 안 나고 돈만 있으면 주님, 천국에서는 천사들과 사시고 우리는 여기서 영원히 세상과 함께 살도록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니 헌금생활이 인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벌어서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백성들입니다. 교인들에게는 저는 매주 교육시킵니다. 여러분, 헌금 하지만 교회는 돈 가지고 운영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은혜가 움직인 사람들만 헌금을 풍성하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움직인 사람들만 하나님의 돈을 아껴서 씁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움직이는 사람들만 하나님의 교회에서 봉사하고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제껏 까지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몸부림치고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근심했지만 우리의 염려가 우리의 인생을 지켜주고 보호해왔습니까? 우리는 걸어온 길, 알고 보니까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살렸습니다. 우리를 어두움 속에서 건져 빛으로 이끄시고 결핍의 빈들을 지나면서도 주님을 찬송할 수 있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시시때때로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붙드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총,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그 사랑 때문에 우리는 이제껏 살아오게 되었습니다. 의심하면서 어찌하든지 재물을 움켜쥐고 그것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보호받아보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지금도 있었고 옛날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그래서 그 재물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마음이 찔리는 사람들을 향해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는 믿으라.” 그런데 이런 주님의 부르심을 정말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예화) 목사님의 회심하던 때 다니시던 작은 교회의 어느 집사님의 내용 - 풀빵장수를 하며 어렵게 살아가던 집사님이 새벽예배 때 나와 예배를 드리면서 바닥에 떨어진 돈을 몰래 갖기 위해 눈치를 보며 자리를 이동하면서 찬송을 부르다가 찬송의 내용에 자신의 죄를 깨닫고 통곡하며 회개하였다는 이야기.
여러분, 우리가운데는 제법 신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려고 착한 신앙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염려하고 있는 한 진실한 삶을 살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이 염려로부터 해방되지 않는 한 그런 삶을 살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매순간순간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사는 그런 신앙가지고 주님 바라보면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게 바로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면서도 바로 내가 이 돈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사는 것이라고 고백하면서 매일매일의 삶을 이어가는 사람,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바로 믿음의 사람이라고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해서 이 세상의 물질로 자기를 보호해보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염려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궁극적인 삶의 목표를 따라 살지 못하는 불신앙의 사람들을 향해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을 보라. 길쌈수고를 하지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 아니하여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이고 입히고 기르신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귀하게 보시는지를 깨닫는다면 너희들이 그렇게 자신의 힘과 재주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믿지 못하고 살아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껏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은혜로 살아왔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은혜로 살아가리라는 사실을 굳게 믿습니다. 날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영육간의 은혜로 우리의 먹고 입고 마실 것들을 공급해주셔서 우리를 살게 하시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좀 파헤쳐야지 되겠습니다. 왜 그럼 염려가 나쁜데 그 염려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궁극적인 원인이 무엇인가? 처방이 나옵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그 하나님을 향하여 모든 인생의 꿈을 맡긴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고 주님께서 도와주신다는 신앙과 확신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이 안 된 사람들은 여전히 불순종과 고집 가운데서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가고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우리의 삶의 목표와 아직 합치하지 않고 있는 사람, 하나님을 내 인생의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수단으로 삼고 살아가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이미 자기의 마음자체가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않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언제나 도와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도 압니다.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담대하십시오. 우리가 무엇이 두려운 것이 있습니까. 앉아서 듣는 우리들은 두려운 것이 많습니다. 담대하라고 하는데 담대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살아가는 삶의 동기가 아직 정화되어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압니다. 이렇게 살면 하나님이 안 기뻐하시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나는 그대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담대함이 생기겠습니까? 담대함이 생길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관계에서 막히는 것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전폭적으로 나를 도와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으니까 우리는 순간순간 나의 재주, 나의 능력으로 스스로 나의 앞가림을 해야지 된다는 부담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서부터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 큰 균열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주님이 나를 왜 구원하셨는지 알고 나도 나를 구원하신 그 주님의 계획과 목표를 따라 살아야겠다는 분명한 삶의 푯대가 서있지 아니하면 그리고 날마다 충만한 은혜 가운데 삶의 목표가 나에게 거룩한 열망으로 불타지 아니하면 하나님만 의뢰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말뿐이지 실제 자신의 마음은 힘든 것입니다. 이게 바로 수많은 사람들이 물질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이 지고 있는 수많은 염려가 피할 수 없는 염려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그 하나님 앞에 온전히 은혜 받는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 앞에 맡길 수 있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맡기고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지만 비로소 주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어떻게 하신다고요? 그게 바로 무엇인가 하면 휴식입니다. 쉬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유치원에서 어떤 꼬마가 그림을 그렸는데 칠판이 없어서 제가 못 그리는데 네모나게 하나 그려놓고 밑에다 이렇게 발 두 개를 그렸습니다. 나도 그 그림을 봤는데 아무리 봐도 무슨 그림인지 모르겠습니다. 네모난 게 크게 두 개가 있고 밑에 발이 두 개가 있었습니다. 뭔 그림인지 이해를 못하고 선생님도 무슨 그림인지 몰라서 이게 무엇인가 그랬더니 선생님 이 그림의 제목은 우리 아빠의 휴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아빠는 휴일만 되면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데 발만 나옵니다.
제가 늦게 자는 편인데 보통 12시 전에는 자는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식구들이 저보다 먼저 잠듭니다. 우리 집사람, 우리 아들, 딸이 자는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는 사람의 모습을 오늘밤에 한번 보십시오. 아니 이것은 꼭 한번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남편의 주무시는 모습을 10분만 들여다보고도 눈물이 안 나오면 여러분은 사람도 아닙니다. 들여다보면 내가 눈물이 나옵니다. 왜 온 몸에 피곤에 절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잠꼬대까지 합니다. 야, 네가 높으면 다야. 직장에서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는가 봅니다. 그 얼굴에 말로 설명이 안 되는데 한번 불을 켜고 들여다보십시오. 피곤에 완전히 절어서 자는데 잠자는 시간이 정말 안식의 시간이구나 하는 것이 확실히 느껴지는 나이는 제가 보기에는 5세 정도가 끝인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만 들어가도 잠자는 얼굴이 평화롭지 않고 스트레스를 받아서 구겨져 있습니다. 고 3 아이 자고 있는 얼굴을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거기서 평화를 읽을 수 있다면 그 애는 분명히 대학에 떨어질 아이입니다. 쉼이 없습니다. 만물의 피곤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또 어느 사진작가는 샐러리맨의 휴일이라고 사진을 찍었는데 그것은 더 비참합니다. 어떤가 하면 잠옷을 입고 새우처럼 웅크리고 자는데 부인이 이불을 걷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상을 쓰고 누워있는데 완전히 시골에서 시래기 짜놓은 것 같은 그런 우거지상을 쓰고 누워있는 모습입니다. 너무너무 불쌍합니다. 이게 오늘 우리의 삶의 그림입니다. 여러분 자신도 그렇고 가족도 그렇고 다 그렇습니다.
환난과 고생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이 땅에는 그렇게 안식 얻기가 그렇게 힘듭니다. 정말 쉼이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굴리시고가 아니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그냥 걸어 다니면서 풀을 뜯어먹어도 황공무지한데 이제는 배를 죽 깔고 엎드려서 풀을 뜯어먹을 수 있게끔 목자가 그렇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확언할 수 있는 사실은 이것입니다. 주님을 자신의 삶에 온전한 목자로 받아들이면서 사는 사람 이외에는 휴식이 없습니다. 안식이 없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언젠가 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이 예배의 순서 가운데 설교시간에 은혜를 주시는 것은 가끔 경험을 하는데 예배의 부름에 은혜를 주시는 것은 처음 경험했습니다. 제일 처음 예배를 시작할 때 두 번제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너희는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지체 둘이서 한없이 우는 것입니다. 예배를 이제 시작했는데,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어떨 때는 이 예배의 부름을 할 때 저의 마음속에 사랑하는 자녀들이 겪고 있는 고통스러운 수고, 상도 없는 그 무거운 짐, 그 죄의 짐 이것이 예배를 인도하는 저의 가슴에 뜨겁게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너희는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러분, 주님이 우리의 인생을 바로 그렇게 보셨습니다. 주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영혼들이 죄 짐밖에 더 짓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행복하지 않게 사는 인생들이 염려에 수고의 짐밖에 더 짊어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고 살아가는 인생이 너무나 불쌍해서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수고와 슬픔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우리의 모든 환란과 질고에 그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위해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왜요? 다시는 우리가 세상의 염려와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대신에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가벼운 멍에를 메고 주님의 성품을 배우면서 하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친 백성 되게 하시려고 우리는 위해서 그 무거운 짐을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는 이 죄와 그리고 상급도 없는 이 쓸데없는 탐심과 탐욕에서 비롯된 염려의 짐을 지고 걸어가는 대신에 주님을 위해서, 아버지 나라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의 짐을 걸어가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쉼을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나면 그다음에 느끼는 것은 무거운 짐을 덜어버리는 느낌, 해방감을 느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진정한 안식을 우리의 마음속에서 한없이 누리면서 정말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다가 죄가 쌓여지면 염려가 보태어지고 염려가 보태지면 고난이 쌓이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삶 속에는 평화와 평정을 잃어버리고 불안과 근심과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이런 인생길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부르셨던 것처럼 저는 오늘도 시편 23편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초청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여러분, 여러분들은 모두 주님 앞에 나오셔야 거기에 진정한 위로가 있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안에만 참 안식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은혜를 깊이 받고 나면 그 다음에 하는 말이 내 영혼이 평안해. 평화가 밀려듭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온전히 승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안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 안식을 소유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사실 이것은 번역이 충분한 번역이 아닙니다.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 없지만 충분한 번역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당신이 나를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며 움직이는 물 가장자리로 나를 이끄십니다.” 쉴만한 물가라는 것이 쉴만한 물가라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물 가장자리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여러분, 저는 강원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서울에서 유학을 하다가 방학 때면 시골에 갑니다. 그런데 여름방학 때 시골에 가면 제일 재미있는 것이 물 구경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여러분도 아다 시피 화전민들이 있고 나무란 나무는 다 베어서 땔 것으로 썼습니다. 그러니까 아마 지금의 이북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해가 저렇게 많은 것도 산림녹화가 잘 안 되어서 그렇습니다. 산이 다 벌거숭이 산이 되어서 비가 오면 강원도는 산세가 가팔라서 물이 천천히 불어나는 것이 아니라 산이 물을 먹지 못하니까 한꺼번에 물을 확 토해놓습니다. 그러면 그게 갑자기 개울물이 불어나서 어마어마하게 밀려옵니다. 개울이라기에는 크고 강이라기에는 좀 작은 커다란 개울이 우리 집 뒷동네 있었습니다. 그때는 TV도 비디오도 없었기 때문에 동리 사람들이 둑 방에 서서 구경을 하고 그랬습니다. 구경나올 때 필수품이 있는데 기다란 막대기 끝에 갈고리를 하나 매달은 것. 떠 내려오는 것 중에 뭣이라도 건질게 있을까 하고,
그런데 그 동리에서 일어난 실화입니다. 개울물에 무가 하나 떠내려가는데 이상하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시골아저씨가 갈고리로 꺼냈는데 산삼인데 3.3킬로 짜리였습니다. 늘 드시는 것이 되어서 별로 안 놀라십니다. 오늘도 먹었는데. 그렇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데 거기에 짐승도 떠내려 오는데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여러분생각에는 어떻습니까? 제 눈으로 다 봤습니다. 소가 떠내려 오는데 소가 헤엄을 잘 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까? 500킬로나 되는데, 실험을 안 해봤으니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권위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헤엄을 잘 칩니다. 그 4-500킬로나 되는 거구가 어떻게 그렇게 헤엄을 잘 치는지 모릅니다. 목덜미는 올라오는데 음매음매 하면서 떠내려가는데 언젠가는 빠질 것입니다. 그런데 잘 칩니다. 돼지는 어떨 것 같습니까? 잘 칠 것 같습니까, 못 칠 것 같습니까? 돼지가 뭐 하는 게 있겠어요. 먹기나 잘하겠지. 그런데 아닙니다. 지방이 많아서 그런지 참 잘 뜹니다. 그리고 떠내갈 때는 무서우니까 정말 돼지 멱따는 소리를 합니다. 그것도 봤습니다. 닭은 어떨 것 같습니까? 우리 생각에는 그냥 물에 떠내려갈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닭도 잘 떠있습니다. 오리는 어떨 것 같습니까? 오리가 익사하는 것을 봤습니까? 제 세상 만났습니다. 개는 어떻습니까? 오죽했으면 개헤엄이라고 합니까. 양은 어떻습니까? 봤어야 이야기를 할 텐데, 양은 잘하는 게 딱 하나 있는데 수영 중에서 잠수, 그것은 천재입니다. 작년에 들어갔는데 아직도 안 나온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 중에는 수영 좀 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요즘 수영을 많이 하니까. 그런데 제 아무리 수영을 몇 번씩 왔다갔다 수영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무스탕 입혀놓고 물속에 집어넣으면 수영을 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그것은 수영선수가 와도 불가능합니다. 양은 털이 워낙 기니까 물에 닿는 순간에 스펀지가 되어서 물 덩어리가 되어서 잡아당깁니다. 그러니까 양은 본능적으로 흐르는 물을 무서워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목이 말라도 흘러가는 물은 못 먹습니다. 그러니까 양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서는 졸졸 흐르는 시내를 발견하면 목동이 돌맹이나 풀뿌리 이런 것을 갖다가 댐을 쌓아서 물이 모아지면 그러면 그것이 오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움직이지 않는 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막아놓고 비로소 양떼를 부르면 양떼가 그 가장자리에 와서 물을 먹고 가는 목양의 경험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유로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인생을 휘몰아 가시지 않으시고 이끌고 인도해 오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약점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약점을 아시고 시인을 인도해오셨습니다. 시인을 만드신 하나님이 무엇에 약하고, 무엇에 강한지를 아시고 어디까지 인내할 수 있고, 어디서부터는 견디지 못하는지를 하나님이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의 성품과 그리고 그의 특징을 따라서 그 인생을 인도해오시면서 승복시키면서 하나님 의지하면서 살아가도록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을 이렇게 하나님만이 아시는 방법으로 이끄시고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우리 교인들보고 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 자식 남의 자식과 비교하지 말고, 세상에 푼수 중 하나는 자기 남편하고 남의 남편하고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곱빼기 푼수는 자기 부인하고 남의 부인과 비교하는 사람, 그것을 비교해서 뭐합니까. 어차피 일수불퇴입니다. 끝난 것입니다. 비교하면 가슴 아픈데 뭘 비교합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생각하시는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나이기 때문에 기뻐하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 사연을 안고 여기까지 걸어왔습니다. 여러분 인생 하나, 하나는 모두 대하소설 감입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사연을 안고 여기까지 걸어왔고 그런 사연을 안고 신앙생활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누가 인도하셨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붙잡을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져있을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놓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태도에 의해서 당신의 은혜의 태도를 바꾸지 않으시고 날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붙드셔서 여기까지 인도해오셨습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무자비 하게 다른 사람과 함께 견주어보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우리일 수밖에 없는 사실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특질을 따라서 우리의 신앙을 따라서 그리고 우리의 인내의 한계를 알면서 당신과의 관계를 불러들이기를 원하시는 그 사랑 때문에 오늘도 여러분들이 나와서 이 말씀을 듣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뢰하면서 염려와 걱정은 주님의 손에 맡기고 잠시 있다가 사라져갈 이 세상을 주님을 위해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불꽃처럼 타오르는 염려를 가슴에 안고 그렇게 근심과 염려와 한을 품다가 지푸라기 같은 인생으로 한 생애를 마치겠습니까? 아니면 주님 앞에 인격적으로 행복하고 나의 모든 인생을 주님의 손에 맡기고 주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불꽃처럼 타오르는 인생으로 살다가 주님 앞에 가시겠습니까? 이제 이 2절의 말씀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대답해야 할 차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어제는 하나님이 왜 우리의 목자이신지 그리고 또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라고 하는 말씀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2절서부터는 그 하나님이 다윗에 있어서 목자이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2절부터 차례대로 5절 까지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2절은 제가 내일 아침에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목자가 어린양떼들을 양떼가 염려하지 않도록 각각 때를 따라서 먹을 풀이 있는 초장으로 인도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께서 시인의 인생을 공급하시면서 인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2절에서는 공급과 하나님의 인도, 이것을 통해서 염려를 극복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제 3절에서는 이제 영적인 회복의 문제를 다루고 하나님이 왜 그렇게 자신의 영혼을 새롭게 회복시켜주셨는지에 대해서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3절에서 시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나의 영혼을 살아있게 하시고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의의 길로 이끄시는도다.”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하나 3절에 들어서자마자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진리 하나를 발견합니다.
다윗은 이미 이전에도 하나님의 자녀였고 이후에도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언제나 그 목양 아래서 살아가고 그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는 언약 맺은 백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고백한 것은 나의 영혼을 하나님이 살아있게 하시기 때문에 나는 그 하나님이 나의 인생에 목자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고 오늘 우리에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아있는 것이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거의 죽은 자와 방불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자와 방불하여서 살아있는 사람의 숨결을 느낄 수 없는 죽어 엎드려진 영혼과 같은 그런 심령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들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오늘 성경을 열자마자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자신의 인생길을 시를 따라 때를 따라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공급해주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앞에서도 그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부를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신의 영적인 삶을 볼 때 그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어주신다는 사실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일단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구원을 받고 나면 마귀는 더 이상 우리를 구원을 취소하거나 어떻게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까 마귀의 입장에서 보면 차선의 대책은 마귀는 우리가 예수를 믿고 천당을 가는 것만 두려워하고 속상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앙이 제대로 들어가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옛날에는 자기네 나라의 백성인데 이번에는 자기네 나라를 부서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고 나면 마귀의 차선책은 우리가 구원을 받았어도 거의 무너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하면서 죽은 사람과 거의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서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국적은 천국의 국적을 두고 있지만 도무지 천국을 위해서 일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단의 작용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고 풍성한 영적인 삶을 살아가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마귀의 도전은 강력해집니다. 오늘 저녁에라도 생긴 대로 살지 뭐, 이러고 마음을 가지면 평화가 옵니다.
그러나 내가 이럴 수는 없어.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것은 이런 식으로 인격적으로 승복도 안하고 교회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마음에 근심만 시켜드리다가 인생을 망치게 하려 하심이 아닌데 이렇게 살다가 어떻게 주를 뵈올 수 있을까? 마음을 가지면서 뭔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환경과 상황을 타파하고 그리고 세상이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나는 믿음으로 살고 말거야. 결심을 하면 그 다음부터는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영적인 회복을 경험하는 것을 마귀는 매우 싫어합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제직이 되고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그러는 것을 마귀는 하나도 시샘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껍질과 속이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을 마귀는 치가 떨리도록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은혜를 받고 나면 이제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서 일할 수 있는 무장한 군인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눈을 들어 하늘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에 탄식소리 들려온다
지금 여러분들이 나와서 예배드리고 있는 이 울산시만 해도 지금 수많은 영혼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건져내려고 하나님이 여기에 피로 값 주고 세우신 우리에게 남이 알지 못하는 사랑을 보이시고 남이 깨닫지 못한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남이 갖지 못한 하나님의 사랑의 체험 속에서 오늘 여기까지 살아오도록 하나님이 이끄시고 도와주셨습니다. 이런 복음의 사명을 감당해나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교회가 그럴싸한 외형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매어있는 악한 세력들을 쳐부수고 그 사로잡힌 백성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건져내어서 구원받게 하는 교회의 영원한 사명을 감당해나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속사람이 살아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사람으로 붐비기만 하면 사람들은 스스로 교만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요한 것은 그 교회에 가득 모인 사람들이 서 말의 밀가루나 혹은 한줌의 누룩인가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모인 그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는 밀가루에 불과하다면 서 말이 아니라 세가마니의 밀가루가 교회에 가득차도 세상에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누룩과 같은 사람이지만 세상은 놀랍게 변화될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 무슨 간식이 있었겠습니까. 돌아가신 할머니가 늘 잘해주신 것이 집에서 만든 빵입니다. 목사님도 잡수어보셨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넣을 것이 없으니까 밀가루에다 물을 넣고 반죽해서 거기에다 이스트, 술 약을 집어넣습니다. 술 약을 한 양푼의 가루에다 술 약을 몇 공기쯤 집어넣습니다. 저 목사님 돌았나. 빵 반죽 망치려고 작정을 하셨나. 한 숟가락 집어넣고 반죽해서 뚜껑 덮어서 아랫목에 담요 덮어서 하루저녁 나두면 요만한 밀가루가 부풀어 오르면 그것을 가지고 프라이팬에 구으면 호떡이고 얼개미 넣고 찌면 찐빵이 되는 것을 여러분은 다 아실 것입니다. 그렇게 변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세상이 변화된 것도 없고 적기 때문에 안 변화된 것도 없습니다. 문제는 누룩의 질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의 영적인 생활을 봅시다. 남쪽 지방에는 제가 집회를 다녀보니까 열심히 있습니다. 그런데 위쪽 지방으로 집회를 다녀보는데 사람들이 참 다릅니다. 획일적으로 말할 수 없겠지만 열 명의 신자를 만나면 불붙는 기도의 영을 간직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한명도 안 됩니다. 백 명의 교인을 만나면 복음을 전하지 않고 배기지 못하는 뜨거운 가슴을 가진 사람은 한명도 안 됩니다.
(예화) 대학실험실에서 개구리를 잡아 실험을 하는데 개구리를 담아놓고 밑에다 약하게 불을 지펴서 온도가 올라가게 했는데 온도가 올라가서 뜨거운 줄도 모르고 무감각하게 있다가 삶아진 모습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습과 흡사하다는 내용.
그런데 이제 우리가 궁금한 것은 우리를 신앙생활하면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꿀 같이 달았는데 어느 날 불평하던 이스라엘 백성들 입에 만나처럼 맛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만 하면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의 제목들이 쏟아져 나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충만한 은혜로 기도하다가 돌아갑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고 영혼이 하나님을 믿고 변화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렇게 기쁘고 즐거웠는데 이제는 그런 사랑의 정서가 사라진 것입니다. 마음이 차갑고 딱딱해집니다. 이런 것들을 가리켜서 우리는 영적인 침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영적인 침체가 왜 오는가? 시편에서는 크게 세 가지로 영적인 침체가 오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중에 첫 번째 범죄로 말미암은 영적인 침체입니다. 이점에 있어서는 오늘 23편을 써내려가고 있는 다윗이 확실하게 경험을 했습니다. 어떻게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고 난 다음에 그는 서서히 영적인 침체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간음하자마자 그는 생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캄캄한 영적인 어두움의 나락에 떨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늘 찬양하던 그 입술은 천장에 붙어버리고 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서 손에 들고 킬 적마다 아름다운 가락을 만들어내던 그 고운 곡조를 내던 수금은 그 줄이 끊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찬송하던 그의 육신은 정욕을 향해 흐느적거리던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거룩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면서 하늘을 향해 눈을 들 적마다 영원한 것을 향하여 반짝이던 그 총명한 눈은 정욕과 탐욕으로 이글거리는 추악한 군주의 눈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서서히 찾아온 것이 아니라 한순간에 엄습한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우리의 생생한 영적인 삶을 앗아갑니다. 누구든지 죄를 이기는 승리를 경험하지 아니하고는 생기발랄한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순간에 범죄 했지만 그 범죄는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쌓아올렸던 아름다운 모든 관계를 단번에 처참하게 파괴해버렸습니다. 언제나 시냇물이 흐르고 새들의 노랫소리가 있고 풀벌레들의 노랫소리가 있던 꽃피고 새우는 그 아름다운 정원이 어느 날 시냇물 소리가 그치고 그리고 모든 초목들이 죽어버리고 가시와 엉겅퀴가 뒤엉켜버리고 까마귀만 날아와서 지저대는 황폐한 정원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죄는 이렇게 만들어버립니다.
오늘날 여러분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해서 안일한 견해는 그들 속에서 영적인 생명의 씨를 말려버렸습니다. 사랑이라고요? 물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우리들이 말하고 있는 사랑의 교리는 균형을 잃어버리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교리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주님은 사랑의 교리라고 하는 것이 쇠창살에 갇혀계시고 우리가 타락하고 죄의 길로 걸어가도 주님은 그 교리에 창살에 갇혀서 나오시지 못해서 눈물만 흘리면서 돌아와, 돌아와 눈물을 흘리시다가 스스로 주저앉으시는 그런 사랑의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은 그런 교리를 만들어놓기는 했지만 성경은 그런 하나님을 보여준 적이 없는 것입니다. 저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면 사정없이 두들겨 때릴 줄 아는 부모님, 왜 그것도 사랑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가 무너지고 신앙의 생기가 사라지게 된 궁극적인 자신의 책임에 대해서는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주님 사랑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기도는 성경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를 하나님만큼 두려워하는 사람들, 가까이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레가 한참 혼돈하던 영국 시대에 나타나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하나님과 죄를 동시에 두려워하는 사람, 일백 명만 주시옵소서. 이 세상을 변화시키겠습니다.” 시인은 그 죄 때문에 자기의 영혼이 죽은 자와 방불한 상태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고 그 높은 인식을 가졌던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비참한 나락에 떨어지게 되었을 때 그는 얼마나 처참했겠습니까? 그는 뼈저린 고통을 그 속에서 경험해야 했습니다.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웁니다. 부엉이와 같이 당아새와 같이 그렇게 외롭게 등 돌리고 앉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흐느끼며 울며 회개의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으나 범죄 하자마자 기쁨이 자기의 마음속에서 사라질 것 같은 위기를 느꼈고 그동안 하나님이 늘 자기와 함께 계셨던 주의 성령을 거두실 것 같은 깊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얼마나 민감한 생각들을 갖고 계십니까? 혹시 담대하지 않습니까? 이런 삶이 계속되면 영적인 삶이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런 영적인 침체의 원인은 죄의 길에서 회복되는 길은 다른 길은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회개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가 영적으로 얼마나 건강한가를 보려면 그 교인들이 얼마나 잘 회개하는 심령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야 그런 나쁜 짓을 했지만 나야 모범적이지. 교회에 빠진 적이 있나. 십일조를 삼킨 적이 있나. 나처럼만 목사님 말 잘 들어보라고 그래. 옛날에 어떤 목사님도 나보고 그러셨어. 당신과 같은 신도들만 있으면 목회 할 만하다고. 내가 무슨 죄가 있나.
(예화) 군대에서 지휘관이 졸병들 세 명에게 강가에서 부대자루를 주면서 강가에 있는 돌맹이를 50킬로씩 담아오라고 하자 첫 번째 경상도 사람은 큰 돌맹이를 담아 가져왔고, 두 번째 충청도 사람은 50킬로와 20킬로를 두개를 집어넣어서 두 부대를 가져왔고, 서울 사람은 강가에서 작은 돌맹이들을 천개쯤 담아서 가져왔는데 지휘관이 다시 명령을 하기를 가져온 돌맹이를 있던 자리에 갖다놓으라고 하자 두 사람은 그래도 자기들이 가지고 온 곳에 가져다놓았는데 서울 사람은 한 곳도 갖다 놓지 못했는데 죄는 크기가 달라도 질은 똑같은 것이라는 내용.
존 오웬이라는 목사님이 말씀에 의하면 죄는 그것이 크든지 작든지 그것을 범하는 순간에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 큰 죄를 지으면서 버리는 것이나 작은 죄를 지으면서 버리는 것이나 그 순간에 죄의 질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서울 사람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는 많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보십시오. 50킬로짜리 죄를 지은 사람들은 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무거운 죄들이 쌓이고 쌓여서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사람들은 죄 짐에 눌려서 영적인 생명이 다 고갈되어가면서도 나 같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늘 이 타령만 하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니 인격적인 승복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참회를 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떤 놀라운 회복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틀림없이 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고 겉모습은 예수 믿는 사람으로 남아있지만 그러나 내 속에서 왠지 이전에 나의 심령을 뒤덮어 흐르던 그런 놀라운 은혜와 영적인 충만함이 고갈된 심령에 메마름을 경험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없을 리가 없습니다. 그분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계시록에서 에베소 교회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그 교회를 향해서 엄중히 경고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해야한다고 그것이 처음이었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 내 길이 올바른 길이 아니구나. 이렇게 신앙생활을 계속하면 내가 주님을 만날 수 있는가. 주님은 지금 나의 믿음생활, 나의 기도생활, 나의 신앙생활을 인정해주시고 계신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말씀의 귀를 기울이면서 내 자신의 죄악을 드러내시는 그 놀라운 사랑 앞에서 나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생명이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렇게 행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회개 안하면 목사님 어떻게 될까요? 단기적으로는 회개를 안 하면 생명을 잃어버린 영적인 삶을 살아가야 되고 장기적으로는 하나님이 그래도 회개시키기 위해서 손 좀 보시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노예입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까? 우리는 주님의 인내를 시험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죄로 말미암은 메마른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가지고 나아가서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심령이 이처럼 황폐하고 메말랐사오니 주여, 이 시간에도 우리를 용서하여주시고 그 사랑으로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옵소서. 회개하고 참회하는 그런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어서 두 번째 시편 속에서 나타나는 영적인 깊은 침체의 원인은 무지입니다. 시편 73편은 아삽의 시라고 되어있는데 제가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이런 스토리입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신앙생활을 잘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하나님이 모든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에게 특별히 은혜를 주시는 것 맞습니까, 틀립니까? 더 크게 해보십시오. 정답은 맞습니다. 그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도 그렇게 믿고 살았는데 어느 날 경건하게 신앙생활만 하다가 세상 구경을 하려고 한번 나갔는지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한번 보니까 이제 내 신앙과 다른데 왜 그런가 하면 마음이 더럽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도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기에 생각하기를 이것은 잠깐이고 틀림없이 조금만 지나면 비참하게 사고가 나든지 죽음을 당하든지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렇게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데도 잘 먹고 잘 살고 마지막 죽을 때도 아주 웃으면서 편안하게 죽고 죽은 다음에는 꽃상여가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생각이 들었는가 하면 ‘난 뭔가? 매일 아침 나가서 하나님 앞에 하는 말이 하나님 어제도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 그게 뭐야. 내가 이렇게 은혜를 주었는데 그렇게밖에 못 살아.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너 그렇게 밖에 못 살겠어, 거룩한 백성이, 고칠 거야. 안 고칠 거야.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 용서해주옵소서,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한번만 봐주세요. 이렇게 하면서 아침마다 지냈습니다. 그런데 눈을 뜨고 보니까 자기같이 신앙생활을 안 하고 하나님 없이 마구 사는 인생들이 오라, 더 잘 삽니다. 그러니까 실족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는 아침마다 징책을 본다. 하나님께 야단맞는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아들들과 같이 궤휼을 행하였음이라. 무슨 뜻입니까? 이럴 바에야 막 살아버릴걸, 나도 한번 저렇게 즐겨보는 것인데. 이게 뭐야. 순간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모든 기쁨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이것은 무지에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가 성소에 들어가게 되는데 들어가는 순간에 커다란 깨달음의 빛이 그의 무지로 가득 찬 어두운 영혼에 빛이 확 비추니까 깨닫는 것이 있는데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가 고백하기를 하나님 앞에 거꾸러지면서 “여호와여 나는 깨닫지 못하기가 짐승과 같사오니” 그러면서 그가 깨닫게 된 것이 “여호와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하늘에서는 주밖에 내가 사모할 자가 없나이다.”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무지로 말미암아 침체가 온 사람들은 회개해도 안 됩니다. 왜? 죄가 있어서 침체가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를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회개해도 회복이 안 됩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안은 깨닫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깨닫는 것이 없는 사람은 그 신앙생활에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마음을 기울여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깨닫지 않으려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아무 희망이 없으니까 앞으로도 좋은 날 보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저는 우리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도 교회에 와서 앉아있는 사람들 중에 설교를 안 듣고 마음이 다른데 가있는 사람들은 아주 한심하게 생각하고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나는 불신자와 똑같이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쳐나갑니다. 변화가 안 일어납니다. 어떤 때 교회가 분위기가 잡히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눈물을 흘릴지 모르지만 그 사람의 눈물은 그 다음날이면 자기도 왜 울었는지 모릅니다. 소용이 없습니다. 진리를 깨닫는데서 오는 감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지를 이기는 방법은 진리의 빛이 그 어두움 속에 비추는 것입니다. 어두움 속에서만 사람들이 담대해집니다. 아십니까?
나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싶은데 일본에 한 도시에서는 시장이 취임을 한 다음에 공약대로 돈을 많이 들여서 가로등을 배로 늘리고 도시 전체에 가로등을 구석구석 비추어서 두 배나 밝게 했더니 범죄가 50%나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캄캄한 곳을 좋아하는 사람을 사귀지 마십시오. 캄캄한 곳은 카바레밖에 더 있겠습니까. 노래방, 저는 그래서 우리 교회를 24시 편의점처럼 만들었습니다. 환하게, 왜 안 웃습니까? 다른 대책은 없습니다.
목사님, 열심히 기도하면 안 됩니까? 안 됩니다. 저는 종종 교회 지체들에게 심방 가서 내가 목자의 권위로 말하는데 당분간 기도하지 말라, 기도하지 말라고 하는 목자는 저밖에 없습니다. 내가 허락할 때까지 기도하지 말라. 제발 철야기도 나오지 말라. 멍합니다. 극약처방입니다. 왜? 생각이 비뚤어져있습니다. 성경을 곡해해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기도를 열심히 하면 아집이 신앙화 되어버립니다. 왜 내가 그래도 그것을 붙들고 기도를 열심히 했는데, 하나님이 안 기뻐하면 내가 어떻게 철야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이 기뻐 안 하셔도 철야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우리 집에 두 사람을 불러놓고 엄중히 경고했습니다. 기도하지 말라. 두 사람 다 열렬한 기도의 사람들입니다. 기도하지 말라. 네가 나를 영혼의 목자로 생각한다면 내 충고를 받아라. 기도하지 말라. 목사님. 그럼 뭐해요. 생각해라. 기도할 시간에 생각해라. 나는 이제 너에게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다 가르쳐주었으니까 너는 기도할 시간에 조용히 눈을 감고 목사님의 말씀, 성경말씀을 생각하면서 네 생각이 옳은가. 생각하라. 그랬더니 그것 봐요. 생각하다가 깨트려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할렐루야! 정확하게 이틀 뒤에 걸어오더니 눈물을 펑펑 쏟으며 목사님, 인생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저는 여태껏 걸어온 길이 목사님이 그렇게 가슴아파한 그 길이 아버지의 뜻인 줄 알았는데 지난주에 하나님이 모두 드러내셔서 얼마나 하나님이 자기 때문에 아파하셨는지 보여주셨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그러면서 하는 말이 목사님이 저를 보고 교회를 떠나라고 그래도 나는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깨닫는 역사가 일어나서
무지가 사로잡힐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손에 성경의 진리에 사로잡히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사모해야 합니다. 오! 하나님, 하늘을 열고 우리에게 더 많은 진리의 빛을 주시옵소서. 더 찬란한 진리의 광채를, 더 아름다운 복음의 빛을 이 어두운 영혼 속에 부어주시옵소서, 다른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주셔서 생명의 길을 우리에게 보이셨는데 사람들은 주님께로부터 오는 지식보다도 세상이 주는 무지를 더 사랑하고 진리의 빛 가운데 나아오기보다는 죄악의 어두움 가운데 거하기를 사모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이 이렇게 어둡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고통은 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깨닫지 못하는데서 오는 고통입니다. 찬란한 진리의 빛이 우리의 영혼에 비출 때 우리는 지난 삶이 짐승과 같은 삶이었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이런 무지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분들이 여러분 가운데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고통은 기억하십시오. 울어도 못합니다.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입니다.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기도만 하면 다 된다고 옛날에 누가 그러던데요. 서있는 자리가 올 바라야지 기도하면 다 되는 것입니다. 다른 자리에 서있는데, 기도한다고 되겠습니까. 그런 분들은 오늘 가슴에 새기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를 엄청나게 바꾸셔야 합니다. 최소한도 1년은 몰라도 3개월의 설교는 거의 기억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지난 주에는 어떤 말씀으로, 그 이전에는 어떤 말씀으로, 그 전에는 어떤 말씀으로 말씀하셨으며 나는 거기에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실패하면서 살아왔는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앞자리에 나와 앉아서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금과 은은 없어도 살 수 있습니다. 진리의 빛이 내 어두운 영혼, 이 혼탁한 심령에 비추어주옵소서. 내가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고통입니다. 죄가 없어도 고통을 계속 두면 거기에서 침체가 옵니다. 그것은 뭔가 이렇게 대책이 없이 계속 고통이 지속될 때 있습니다. 그때는 그 고통이 물러가지 않은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문제는 심각하다고 생각되는데 기도는 심각하게 안 하고 장난처럼 하니까 문제가 해결이 안 됩니다. 여러분, 배가 고프면 무엇을 먹어야 합니까? 여기는 무엇입니까? 벧엘, 어제는 호산나더니. 그래요. 벧엘, 배고프면 어떻게 해야지 됩니까? 졸리면? 참 똑똑합니다. 그런 것을 어떻게 다 아십니까?그게 창조의 질서입니다. 밤에는 자야 합니다. 부부가 밤에 같이 잠자리를 안 하고 따로 떨어지면 됩니까, 안 됩니까? 같이 자야 합니다. 그게 순리입니다.
그런데 그 순리를 거슬러 살아야 될 때도 있습니다. 왜? 뭔가 나에게 커다란 시련이 있고 여기에서 하나님이 온전히 마음과 뜻을 다해서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야곱과 같이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는 역사를 경험하지 않으면 해결이 안 될 것 같은 어려움이 있을 때는 밤이면 자야지 되는데도 자지 말고 철야를 해야 합니다. 배고픈데 먹지 말고 금식해야지 됩니다. 직장에 가야하는데 휴가를 내고 기도원에 올라가야지 됩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있는데도 여보, 이해해, 하고 보따리 싸갖고 나와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부르짖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비상의 상황에서 통하는 도덕이 있고 평상시 생활에서 통하는 도덕이 있는 것입니다. 뭔가 위급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전폭적으로 매달려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기를 원하는데 나는 기도하는 시간은 2분이고 한숨 쉬는 시간은 30분입니다. 하나님이 해결해주시겠습니까? 내가 늘 기도제목인데, 기도 제목이라고는 기도해야 기도제목이지, 기도 안하는 제목이지 그게 무슨 기도제목입니까? 솔직히 고백하십시오. 한숨 제목이지 그게 무슨 기도제목입니까. 내가 다니면서 조사를 해보니까 근심하는 순서가 기도하는 순서하고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뭘 의미하는가 하면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식 때문에 속 썩는 부모가 속 끓이는 동안에 그놈 붙들고 하나님 앞에서 속 끓이는 기도를 하면 더 빨리 변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는데, 주여, 내가 이 어려움 속에서 벗어나야 되겠습니다. 주여,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기도해보십시오.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런데 나는 교인들 중에서 그냥 마음속에 찰떡같이 딱 달라붙는 교인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누군가 하면 설교를 잘 듣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얼굴이 예쁘게 생긴 사람도 아니고 누군가 하면 새벽기도 시간에 나와서 주님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 난 돈 주고 살 수 있으면 교회 예산에서 한사람을 10만원씩 산다면 내가 한 100명쯤 사겠습니다. 곤장 한 대 맞고 그런 사람이 한사람씩 생긴다면 어느 목사님 말처럼 매일 10대 정도씩 맞을 각오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이 듭니다. 그 새벽기도에 힘들게 나와서 어떤 사람은 한참 기도하나 했더니 쿨쿨 자면서 잠꼬대까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뭐라고 그랬는데.’ 어찌하오리까? 그런데 하나님이 인정해주신 사람들은 새벽시간에 나와서도 설교를 5분 10분 에 안 했는데 빨려 들어갈 듯이 듣고 나서 거기서 기도제목을 찾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시작하면서부터 마음이 녹아집니다.
우리 교회는 이렇게 소리를 지르면서 기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여튼 그렇습니다. 그런데 훌쩍훌쩍 하면서 기도를 해도 벌써 도란도란 들려오는 음성이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벌써 가슴에 밀려옵니다. 그러면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투신합니다. 가다가 아파트 경비원들에게 쫓겨나기도 하고 개에게 물리기도 하고 이러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렇게 마음속에서 뜨겁게 사랑이 솟아날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것이 주님의 마음이라고 확신합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 심령을 다해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오늘도 마음이 괴로워서 주의 집을 찾았습니다. 성전에 계신 여호와여 나의 형편을 돌아보시고 나를 이 깊은 고통과 시련에서 건져주시옵소서.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오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시리
오 주여 아침에 내가 기도하고 주께 바람이라
이렇게 물리쳐버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에는 이유가 없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너무 중요하니까 따로 해야지 됩니다. 따라 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모든 은혜로운 행동은 계획이 없는 것이 없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구원해주셨습니다. 구원해주셨는데 우리는 생각을 좀 고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무엇인가 하면 구원받았고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셨고 우리의 공로 말고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구원에 골인했다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 애굽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10대 재앙을 경험하면서 보무도 당당하게 홍해를 건너고 광야로 빠져나가는 것이 끝인 것처럼 보이지만 땅 주시려고 하는 하나님이 가나안에서 보시면 그것은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탈출하자마자 광야 길은 생각도 안 하고 젖과 꿀, 그것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젖과 꿀은 거기에 가야 합니다. 그동안에는 광야 길을 가야 합니다. 오늘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인생이 거의 대부분은 헛되게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거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거저 구원하셨다고 해서 아무 계획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날 엄마가 아침에 세수하고 애들을 학교에 보내고 화장을 하려고 경대상에 앉았는데 쪽지가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재미있는 게 쓰인 글이 “아래와 같이 첨부하오니 엄마는 속히 결제하여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써 있는데 1.엄마 심부름 하러 슈퍼에 다녀온 것 600원, 엄마 없을 때 동생 봐준 것 800원, 아빠 출근할 때 구두 닦아준 것 300원씩 두 번 600원, 집안 청소한 것 300원, 가로열고 쓰레질 100원 걸레질 200원, 그렇게 하고 마지막에 2600원”이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밥 먹으려고 학교에 가서 도시락을 열어보니 쪽지가 하나 나오는데 엄마가 아들에게 보내는 청구서, 1. 너를 배속에 넣고 10달 동안 데리고 다녔던 것, 어려서 아팠을 때 병원으로 업고 뛴 것 공짜, 그동안에 유치원에 다니게 해준 것 공짜, 야구놀이를 하다가 뒷집 유리창을 깨서 15만원 물어준 것 공짜, 다 하는 마지막 말이 공짜, 아들아 엄마는 너를 사랑한단다. 애가 쇼크를 받았겠습니까, 안 받았겠습니까? 완전히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입니다. 같이 밥을 먹던 친구들이 이렇게 보더니 와! 너희 엄마 마음 좋다. 그래서 보무도 당당하게 와서 엄마 품에 안겨서 막 울었습니다. 엄마, 나는 엄마의 사랑을 너무나 몰랐어. 엄마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지를 몰랐어. 그랬는데 바로 그날 저녁에 숙제 안하고 말을 안 듣는다고 죽도록 맞았습니다. 모자가 끌어안고 눈물로 감격하는 것을 상상 속에서 내가 봤는데 막 때리니까 으악!
어떤 애가 일기를 썼는데 선생님이 일기를 보더니 깜짝 놀랐습니다. 그 다음날 일기를 내놓았는데 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가정을 방문을 했습니다. 왜 그러나 했더니 일기를 썼는데 오늘은 엄마한테 야단을 맞았다. 말을 안 듣는다고 산수를 가르쳐주시다가 그것도 모르냐고 내 머리통을 망치로 마구 두들기셨다. 그 다음날은 숙제를 안 해났다고 아버지께 맞았다. 야구방망이로 머리 어깨, 허리, 다리 삼십대쯤 두들겨 맞았다. 나는 왜 이럴까? 그래서 선생님이 놀래서 찾아왔습니다. 세상에 이 집안이 짐승들만 사는 집안인가 보다. 나에게 일기장을 보여주면서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엄마가 죽겠다는 것입니다. 무슨 망치냐고 그러면서 상황을 말씀하시는데 가내수공 할 때 요만한 고무망치를 톡톡 때렸는데 이놈이 망치로 머리를 마구 때렸다고 했습니다. 야구방망이는 플라스틱 야구방망이였습니다. 하여튼 그날 밤에 야구방망인지 망치인지 모르는데 억수로 맞았습니다. 그 애만 맞은 것이 아니라 그 동생까지 막 맞았습니다.
여러분, 그것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사건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왜 모든 것을 다 공짜로 주었다고 그러고 또 죽도록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다가 몇 시간 있다가 밤에 기다렸다는 듯이 때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것은 사실인데 계획이 있습니다. 그냥 사랑만 해주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사랑을 부어주는데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이놈이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 계획하고는 안 맞는 길로 자꾸 가려고 합니다. 그때는 모든 것을 공짜로 주고 앞으로도 공짜로 주지만 매도 공짜로 먹어라. 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셨을 때는 세상에 있는 우리의 처음 조상들이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언제든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풀을 보고 공중에 별, 해와 달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를 보고 거기서 하나님과 사귈 수 있었습니다. 죄가 들어왔습니다. 이제는 눈이 흐려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달을 보고 그 달을 숭배합니다. 만드신 자는 못 보고 그 만든 것을 신처럼 떠받듭니다. 그렇게 어리석은 삶을 살아가니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니까 당신이 누군지를 보여주어야지만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을 텐데 이제는 이 세상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믿는 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택하시고 한 백성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었고 그것이 오늘날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하나님이 직접 혹은 천사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지 않으시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서 영적인 이런 놀라운 은혜를 받으면서 살아가도록 만들어주심으로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창조주 하나님을 섬겨서 피조물과 창조주의 그 본분으로 돌아오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시려고 예수 믿는 사람을 여기에 두신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니까 인생을 사는 목적은 분명해졌습니다. 예수 믿고 이 세상에서 잘 먹고 배 두드리며 살게 하시려고 이 땅에 두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이 어떻게 그 칠흑과 같은 사망에 어두움에서 건져내어서 이 기이한 구원의 빛에 들어가게 하셔서 또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 아름다운 나라에서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는지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시려고 우리를 구원해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고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으면 삶의 목표가 하나님의 것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살아있게 하시는 동안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분명한 태도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매일 은혜 타령만 하면서 세파에 밀리듯이 흔들흔들 사는 것입니다.
우리끼리 모였으니까 분명히 얘기해봅시다. 아주 정직하게 대답해보십시오. 예수 믿으면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를 안 믿는 사람보다 반듯이 행복해 보인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벧엘,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대답을 안 하시면 정말 벧엘로 올려 보낼 것입니다. 말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가 만약에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라면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보고 내가 절대로 예수를 안 믿겠습니다. 왜 예수 믿는 효과가 없습니다. 효험이 있어야지만 약도 써 볼 텐데 그런데 구약, 신약이 좋다고 하면서 자기들은 별로 애용을 하지 않습니다. 말로는 자기는 천국백성이라고 그러는데 지옥백성인 내가 더 행복해 보이는데, 자기들은 영생 길로 걸어간다고 그러는데 왜 그렇게 매일 죽상입니까? 영생 길 안 걸어가고 멸망 길을 걸어가는 나도 이렇게 신나는데 영생 길을 걸어간다고 그러는데 왜 그렇게 죽상입니까. 또 복음 없이 세상을 소망이 없다고 하는데 아니, 나는 내 가게 물건 이렇게 선전하면서 다니는데 그 좋다는데 왜 또 선전을 안 해. 행복해보이지 않고 우울해보입니다. 뭔가 세상에 살아갈 때 오히려 불신자는 자신이 넘쳐 보입니다. 걸리는 게 없으니까 밀어붙여 해 보는 거야. 어차피 이판사판 공사판 아니겠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죄를 지을 때도 이렇게 못 짓습니다. 결국은 다 지면서 떨려서 수전증 걸린 사람처럼 한마디로 재미가 없습니다. 내가 예수 안 믿었다면 예수 믿는 사람을 보고 매력을 느낄만한 사람을 못 만났습니다. 몰라 또 울산에 오면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르게 해야지 됩니다.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보다는 압도적인 다수가 하나님 때문에 말할 수 없이 기뻐한다고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뭐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럼 왜 그럴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구원하신 목적에 부합하며 살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때 하나님이 가지셨던 그 관심이 그 사람에게 관심거리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적을 보고 광야에 들어섰는데 그들이 뭐하는 사람들입니까? 광야 길을 걸어가는데 그 광야 길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놀라운 이적을 아침마다 새롭게 보는 것입니다. 저 멀리 가나안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낙원, 얼마나 영광스러운 백성입니까. 내가 그 광야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났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을 인터뷰를 해봤습니다. 소망이 무엇입니까? 애굽으로 돌려줘, 그게 뭡니까? 나는 그래서 모세가 너무 불쌍합니다. 남전도 회원들, 여전도 회원들, 주일학교까지 물어보기만 하면 애굽으로 가고 싶어. 그들을 데리고 광야를 누볐습니다. 바뀌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안 바뀌면 행복은 없습니다. 매일 갈등하고 우울하게 보냅니다. 그러나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인도하셨을까?
오늘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적인회복의 길을 주시고 목자로서 우리에게 공급해주신 그 놀라운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의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려고 의의 길이 무엇인가? 불의한 길의 반대입니다. 불의한 길은 무엇인가? 의의 길의 반대입니다. 그렇게 밖에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무엇인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알리는 방법은 말로만 알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방의 백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볼 때 이 민족이 즉각적으로 받는 인상이 무엇인가 하면 이 민족은 아주 특별한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선 첫째는 자기들에게는 없는 어떤 권세가 이 백성들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최고의 자산은 그것입니다. 유능한 행정과 이름은 성령이 아니더라도 세상에서 돈 주고 사올 수 있지만 교회를 뒤덮는 장엄한 권세, 울산에 있는 수많은 시민들로 하여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놀라운 교회를 뒤덮는 권세, 영적인 권위, 복음의 위대한 권위, 말씀의 위대한 권위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이 영적으로 바른 관계를 가지고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삶을 살아가면 이런 백성들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것이 끊어져버리면 그러면 이방백성과 똑같은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혼잡한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겉으로 드러난 삶이 의롭고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의롭고 올바른 길을 걸어가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혼하고 나서 16년 만에 하나님의 은혜로 방배동에 작은 빌라 하나를 샀습니다. 계산을 해보니까 결혼생활 16년 동안에 8번을 이사를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아들놈이 그게 좋은 것인 줄 알고 이사 가면서 야, 너희 몇 번 이사 갔니? 애, 우리는 14년 동안에 7번쯤인가 이사 갔다고 우리가 얼마나 이사를 자주 다녔는지 알아. 임마. 얼굴이 화끈거려서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학교에서 전세로 얻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큰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집을 사는 것은 엄두도 못 냈는데 그런데 한번 전세를 들어가면 한번 전세금으로 인해 거리로 쫓겨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다음부터는 세상 사람을 믿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불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앞집에 신앙이 좋으신 대학교수 집안에 부인이 집사님인데 집을 팔려고 내놨는데 아무에게나 팔려고 하는 게 아니라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집을 살 사람이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이 와서 이만큼 돈을 주고 괜찮은 값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니까 그 사람에게 집을 팔지 말라. 그러시기에 안 팔았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합니까? 저 건너편 3층이 김목사의 집이니까 거기에 가서 사라고 그러라고 해서 우리 집에 와서 사라고 하는데 1500만원인가 더 사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참 이웃도 잘 만나야지 됩니다. 그래서 어째든 그 집을 근근덕심으로 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충격 받은 것은 세금이 그렇게 비싼지 몰랐습니다. 나는 집을 사 본 적이 없어서 몰랐습니다. 그런데 작은 빌라인데 법무사 사무실에 우리 집 사람이 갔더니 세금이 690만원이라고 하는데 700만원이 아닙니까. 그래서 입이 벌어졌습니다. 사실 세금을 한 150만원 생각했는데 700만원이라니까 그런데 법무사 직원이 하는 말이 아줌마, 다 낼 필요가 없습니다. 무슨 말이냐고 이미 했는데 그것은 집주인한 것이고 관공서에 집어넣는 계약서를 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촌사람이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뭔 소리입니까? 그러니까 집값을 반으로 떨어트려서 가짜 계약서를 가지고 가면 400만원만 세금을 내면 된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냥 집으로 왔는데 서재에서 책을 보고 있는데 와서 여보, 법무사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그래서 제가 그것도 질문이라고 해. 로마서 13장을 봐. 공세를 바칠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를 바칠 자에게 국세를 바치라고 그랬는데 말이라고 하냐고 그랬더니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러면 안 되겠지.
그런데 700만원이 어디에 있겠어요. 정말 거짓말 안 보태서 아들놈 저금통까지 다 터니까 간신히 700만원이 되어서 세금을 냈습니다. 그러니까 아줌마 계약서 써왔습니까? 아닙니다. 아니 그러면 어떻게 하려고? 그대로 해주십시오. 그래서 700만원을 낼 때 그 법무사 직원이 우리를 보면서 어머! 존경스러워. 그랬겠어요? 아님, 병신! 그랬겠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아니, 심각합니다.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그러니까 거두절미하고 딱 잘라서 말하면 나는 400만원 내고 병신! 이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400만원이면 석 달 치 생활비입니다. 그리고 사인하나 하고 가짜 계약서 쓰고 400만원 챙기면 그 다음 주에 강단서부터 하나님이 하늘을 막아버리시고 설교하러 올라가서 입은 벙어리가 되어버리고 설교를 못하게끔 만드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인하나 하면 되고 세상도 다 그러려니 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그렇게까지 살면 누가 의의 길을 걸어가겠습니까? 세상은 희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의로운 길을 걸어가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들 가운데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삶을 살지 않으면 세상은 희망이 없습니다.
제가 지방에 집회를 다니니까 그러면 안 되는데 과속을 합니다. 스케줄이 쫓기니까 하는데 될 수 있으면 차를 안 가지고 다니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럴 때가 있는데 몇 년 치가 누적이 되어서 운행정지라고 내려왔습니다. 면허를 갱신하려고 갔더니 컴퓨터에 면허정지 대상자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경찰관이 그렇게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웃으면서 정지가 됐네. 이것 봐 정지야. 그래서 아니, 왜 자기가 그렇게 좋아해. 운전하고 처음인데. 그래서 며칠 차를 놓고 다녀야겠구나. 그런데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지 컴퓨터에서 용지를 빼갖고 오더니 정지입니다. 면허증 놓고 가시면 35일 후에 와서 찾아가십시오. 그러면 될 것인데 이게 무슨 방법이 있을 텐데 그러더니 결론이 무엇인가 하면 이따 퇴근 후에 사진 두 장을 가지고 찾아오세요. 왜 퇴근 시간에 안 될 일이 퇴근 후에는 되는지. 법대로 하십시오.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니까 공중 가격이 10만원이라고 합니다. 많지도 않습니다. 10만원을 주면 어떻게 해주는 모양입니다. 35일 동안 택시비가 10만원 나오겠습니까?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까지 그렇게 산다면 세상에 희망이 없습니다. 의로운 길을 똑바로 걸어가서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아직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이 타락한 도시에 살아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가슴이 섬뜩하게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두 달 전에 노사분규가 한참일 때 이 아무개라고 하는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사람이 자기 돈을 들여서 광고를 냈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노사분규를 해서 안 된다고 하면서 신문에 광고를 냈는데 그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다시 한국에서 공장하면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연인즉 1억 3천만 원 짜리 공장을 짓는데 3천만 원이 뇌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소방서, 공무원, 경찰서 할 것 없이 온갖 잡동사니들이 다 와서 뜯어갔다고 합니다. 수출을 해야지 되는데 수출품이 안 나가다가 다서 돈 봉투를 주니까 그날 저녁부터 도장이 찍히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울분을 털어놓습니다.
여러분, 일본에 있는 어느 건축가가 와서 삼풍 사고 때 와서 그곳을 돌아보면서 하는 말이 한국의 건축현장은 범죄 현장이라고 했습니다. 삼풍백화점 무너졌습니다. 무너지는 날 바로 제가 그 옆을 운전하고 가고 있었습니다. 삼풍백화점에 들어갔지만 이슬로 사라질 뻔 했는데 하나님이 울산교회에 오게 하시려고 살려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5층 빌딩의 철근이 2층의 연립주택 지을 때 쓰는 철근이라고 합니다.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환장한 사람이 아닙니까. 지금도 건축하는 사람들이 뇌물을 안 주고 건축할 수 있다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연립주택, 아파트 현장 감독 판공비가 한 달에 천만 원인데 그것가지고 모자란다고 합니다. 화투하면서 잃어주고 이러면서 뇌물 바치느라고, 이런 생활에서 10원 하나 뇌물 안 주고 중견건설 업체를 이끌어가는 회사가 있다면 여러분은 믿겠습니까, 안 믿겠습니까?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있습니다.
그 회사에 지은 빌딩에 제가 들어가 봤습니다. 빌딩 주인이 장로님인데 어째든 돈은 자기가 주는 것이 아니지만 자기 돈이 뇌물로 들어가는 게 견딜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회사를 수소문해서 맡겼는데 그 회사에서는 어떻게 하는가 하면 법대로, 돈이 더 들어가지 않은가. 돈이 더 들어가면 건축자에게 더 달라고 합니다. 그럼 건축자들이 아깝지 않은가. 아깝지 않다고 합니다. 왜 법대로 하면 폭탄을 집어넣기 전에는 안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그게 왜 무너지는가 합니다. 삼풍백화점 무너질 때 일본 사람이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그런 것은 들어본 적도 없고, 읽어본 적도 없고, 상상해본 적도 없다고 그런데 상상 속에서 떠오르지 않은 일들이 우리나라에서는 수시로 일어납니다. 이게 총체적으로 부패한 나라의 모습입니다. 이게 건져낼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가, 그랬더니 간단한데 법대로 짓는다고 합니다. 모르면 가서 이렇게 지으면 법이 맞는가 물어보고 또 짓고 또 지으면서 다 짓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준공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하여튼 재량건이 허락되는 범위 안에서 안 내주는데 약이 안 들어갔으니까. 그러면 이쪽에서는 죽어도 안 준다는 것입니다. 가서 턱 받치고 준공 검사 좀 내달라고, 그리고 가서 이야기를 하면서 왜 안 내주나. 뭐가 잘못되었나. 건물이 잘못 지어진 것이라면 허물고 다시 짓겠다. 얘기하라. 뭐가 잘못되었나. 견디다, 견디다 결국은 내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관공서에서 그 회사 사람이 나타나면 얼마나 겁나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운영하는 건설업체,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 역사에 대해서 책임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드신 것은 이 세상에서 공의와 그리고 정직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자비를 실천하면서 살도록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예수 믿게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놀라운 영적인 은혜를 주셨습니다. 남이 보지 못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만드셨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을 모두 잃어버려도 하늘에 속한 신령한 은혜와 하늘나라의 분깃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저렇게 회개만 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삶으로서 회개를 보여야 합니다. 이런 길을 하나님께서 걸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 믿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데는 비용이 듭니다. 거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길을 걸어가는데도 인정을 받기는커녕 욕먹고 사람들에게 경우에 따라서는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예화) 주님을 섬기는 집사님이 대기업에 요직으로 들어가서 구매를 담당하는 부서의 요직에 있으면서 계약금조로 10%의 뇌물을 주는 것을 거절하고 그 대신 물건 가격을 낮추라고 하면서 입찰을 하자 물건 가격이 20% 이하로 떨어지면서 납품이 되자 경쟁력이 올라감으로 회사에 이득이 됨에도 불구하고 회사에서 해고가 되는데 그 이유는 그 자리를 거쳐서 승진한 많은 사람들이 작당해서 잘리게 된 것인데 그가 정직하게 행한 일들로 인해 자신들이 불의를 행한 것이 드러날까봐 모함을 한 것이라는 내용.
이게 정직한 사람이 받을지도 모르는 공의를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대가입니다.
여러분, 죽어라 대학시험 공부하고 코피 터지게 공부해서 대기업에 입사했습니다. 몇 달 다니면서 몰랐는데 한참 지나고 보니까 자기 친구들은 영업사원이 되어서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니는데 좋은 부서에 빠졌습니다. 매일 와이셔츠를 입고 나오는데 뭔가 했더니 경리부입니다. 한참 지나가는데 돌아가는 사정을 보니까 탈세를 하는 이중장부 담당입니다.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고치든지 자기 힘으로 고칠 수 없으면 그거 계속해서 밥 먹고 살기 위해서 거기서 탈세를 방조하면서 그 돈으로 십일조를 하고 신앙생활을 해야지 되겠는가 하겠습니까, 아니면 풀빵장수를 해서라도 집어치워야 되겠습니까? 말은 쉬운데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좇을 것이라고 그랬는데 주님은 도대체 그 십자가를 지고 어디에 가셨습니까? 천당에 가셨습니까? 아니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 훼퍼라는 신학자가 말했습니다. 정직하게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게로 와라. 그리고 나와 함께 죽자. 하나님께서는 그렇지만 우리에게 이런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놀라운 영적인 회복을 주십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불꽃처럼 살아갈 수 있는 건강한 능력을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서있을 때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이 충만해지고 우리는 연약하지만 그러나 이 연약한 인생 속에 깃들어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용사와 같이 살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말 의의 길을 걸어가면서 살기 위해서는 착한 순례자와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용사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영적인 회복은 단지 마음의 고통이 사라지고 평안을 회복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복음의 전신갑주를 입은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울산 교회는 은혜로운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교회니까 그렇지 않겠지만 저는 지금 말씀드리려고 하는 그런 고통스러운 예배를 드리는 교회에 오래 동안 다녔습니다. 그 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분통이 터지는 것 중의 하나가 대표기도입니다. 올라가서 기도를 하는데, 오래 기도하시는 것은 내가 이해를 하는데 왜 그때 그 장로님들은 올라가기만 하면 하나님이 파짠지입니다. 하나님, 우리는 지난 일주일동안도 다 실패하고 낙심하고 찢겨서 오늘 나왔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죄밖에 지은 것이 없고 죄악을 물먹듯이 먹고 마셨습니다. 주여, 힘이 없어서 그랬으니 용서해주옵소서. 그 다음 주에 또 아버지, 도대체 맥이 빠져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서밖에 하소연할 때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용서도 빌고 은혜도 구하고 그리고 은총도 하나님 앞에 구하면서 사는 것인데 좀 그래도 가끔은 이런 기도도 드리면 어떻습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를 거룩한 주일에 불러주시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주님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지난 일주일 동안 이 세상에서 최선을 다해서 싸우다가 돌아왔습니다. 직장에서 사회에서 가정에서 우리는 언제나 전투적인 용사로서 믿음의 싸움을 싸웠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하나님께서 평안한 후방에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적군들이 득실거리는 그 곳에 낙하산으로 떨어트리시고 주님, 다 보셨지요. 제가 얼마나 멋있게 싸우는지, 예수 안 믿는 놈들 그놈들을 내가 가만히 내버려두었습니까. 그 부패의 소굴 한가운데 들어가서 하나님, 혹시 람보라는 영화 보셨습니까? 주님 나가는 곳에 파죽지세처럼 무너지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다 때려눕히고 하나님, 오늘 보십시오. 제가 그 세상 나라에서 15명이나 되는 적군에 부역하며 살던 어리석은 백성들을 굴비처럼 새끼줄로 꿰어서 오늘 교회에 데리고 나온 것 아닙니까. 저 새 신자 석에 앉아있지 않습니까? 왜 아멘을 안 하십니까? 할렐루야! 와 웃노? 웃을 대목이 아닌기라.
그 다음에 기도가 우리의 심령에 와서 하나님, 그렇지만 주님 승리는 했지만 한번 제 모습을 보시옵소서, 이게 사람의 모습입니까? 주님이 지난 주일날 제게 쓰여 주신 구원의 투구는 나를 위한 집중사격을 받고 벌집이 되었습니다. 주님, 제 가슴에 달아주신 의의 흉배는 내 심장을 노리는 악한 세력들에 저격수에 의해서 수없이 맞아서 이제는 흉배의 현상조차 잃어버림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신겨주신 이 복음의 신발은 산 넘고 물 건너 가시밭길을 헤치며 복음을 전하는 동안에 너덜너덜해졌습니다. 주님이 주신 이 믿음의 방패에는 수많은 악한 자들이 쏜 화살이 꽂혔고 주님이 제 손에 들려주신 말씀의 검은 얼마나 수많은 놈들의 목을 베었는지 그 빛나는 칼이 날이 다 빠져버렸습니다. 주님, 이 예배 시간에 우리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금이나 은 같은 것들은 저 쓰레기 같은 세상 사람들에게 퍼주시고 하나님, 오늘 이 거룩한 예배 시간에 목사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선포하실 때 하늘의 무기고를 여시고 최신병기들을 이 백성들에게 내려주시옵소서. 주님, 오늘도 우리를 보내주시기만 하면 모두 초토화시키고 다음 주에 돌아와서 승전의 보고를 올리겠사옵니다. 아멘. 전 몇 달에 한번쯤은 이런 기도 자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말인데 예배 끝나고 돌아갈 때는 말은 안하지만 사람들 마음속에 하나님 우리는 이제 세상으로 갑니다. 질 것 뻔하지만 가고 봅니다. 다음 주 와서 회개할 테니 예약을 받아주세요. 그러니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겠습니까? 정말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이 교회에 수두룩하게 많습니다. 마른 뼈들과 같습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온 땅에 가득해지기를, 외치는 자 많건 만은 생명수는 말랐도다. 길을 잃고 헤매니 수많은 영혼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도다. 모두 화살 한방씩 맞고 야전침대에 누워있는 사람들뿐이라면 어떻게 이 세상에 변화가 오겠습니까. 그렇게 예배 시간에 와서 천국의 무기고를 탐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머리속에 온통 부식창고 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니 좋은 시절을 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게 갈아 끼지 않으면 소망이 없습니다. 영적인 회복의 완성은 단지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강하고 거룩한 용사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설교자로 하나님 앞에 매일 소원하는 바가 있습니다, 나는 내 이름이 천국에 새겨진 것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바라는 바는 내 이름이 지옥에 게시판에 새겨졌으면 좋겠습니다. 악한 마귀는 말했습니다. 내가 바울도 알고 예수도 알거늘 너는 누구냐. 그들은 아마 지옥의 게시판에 두 분의 이름을 새겨놓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바울, 졸개들에게 아마 명령했을 것입니다. 너희는 지상에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면 싸우는데 바울을 만나면 도망가라. 만나면 그날은 너희가 죽는 날이다. 나도 도와줄 길이 없다. 만약에 설교자로서 저의 이름이 지옥의 게시판에 붙어서 악한 세력들이 지상으로 출전할 때마다 저 사람을 만나거든 너희는 속히 도망가라. 뼈도 못 추린다. 그렇게 지옥에서 인정받는다면 나는 천국의 천사들이 내 이름을 인정해주는 것을 양보할 수 있겠습니다.
왜, 이렇게 변하지 않습니까? 목에 피가 터지도록 외치고 쏟아지는 눈물로 끌어 오르는 피로 부르짖어도 이제는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사람들처럼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사람들처럼 흔들리지 않는 이 백성들을 볼 때마다 저는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 앞에 너무 부끄럽습니다. 지금도 이런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늘을 가르시고 내려주시는 거룩한 성령의 능력, 회복된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는 심령 속에 부어지는 거룩한 은혜와 그리고 장엄한 성령의 물 붓듯 부으시는 은혜, 그것으로서 교회를 뒤덮고 온 세상을 뒤덮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지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꿈꾸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형적인 회복의 마지막입니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그렇게 영적으로 회복시키셔서 우리로 하여금 왜 그렇게 고달픈 의의 길을 걸어가게 만들어주는지에 대해서 오늘 저는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저녁 집회를 마치겠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의 이름을 “자기의 이름을 인하여”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구약에 나타난 이름 신앙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들에게 아버님의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 하고 물어보면 세자를 나란히 대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무슨 자, 무슨 자, 무슨 자입니다. 왜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그로 하여금 이름 세자를 붙여서 말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준 것입니다. 똑같은 신앙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쓰는 말 중에 제일 애매모호한 말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입니다. 영광을 돌린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영광을 돌린다는 것입니까.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 혹시 이런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데 우리 모두 영광을 각출하는 것입니다. 여전도회에서 좀 내고 목사님도 좀 내고 성가대도 벧엘로 올라갔으니 좀 내야지 될 것이 아닙니까. 다 내서 한 쟁반 모아서 영광을 올려서 머리위에 부어드리면 잠시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한 빛을 발하고 떨어지면 다시 또 식으면 다시 또 영광을 거두어서 주여, 돌려드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영광스러워지는 것, 신학을 공부 안 하셨어도 확실히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게 무슨 뜻인가? 하나님은 인간이 무엇을 해서 영광을 더 받고 덜 받고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이 세상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든지 하나님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곳에 계셔서 홀로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고 우리는 땅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에 이름을 두셨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은 하나님은 그럴 수 없는데 이름은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따라서 높아질 수도 있고 낮아질 수도 있고, 짓밟힌 수도 있고 찬란한 빛을 발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 울산교회에 다니다가 서울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 보니까 신앙생활을 참 잘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왔는가 물어보니까 울산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왔습니다. 아니 교회에서 사람들이 보니까 너무 확실합니다. 그러면 울산 교회는 서울에 없어도 사람들은 울산 교회에 가보지 못했지만 그 교회는 얼마나 좋은 교회일까. 그러다가 다른 교회에 가서 울산 교회에서 몇 사람이 왔다고 하면 다들 뭐라고 하는가 하면 아, 그 사람들 참 좋은 사람들이다. 그러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는 여기에 있는데 이름은 서울에 있는 것입니다. 정반대의 경우가 되면 상상하지 않겠습니다.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치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당신의 이름을 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향한 충성과 당신 자신을 향한 충성을 구별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의 이름도 사랑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은 당신을 위해 사랑하십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한번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우리를 가장 사랑하십니다. 믿습니까?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를 그만큼 사랑하십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을 건지려고, 그런데 우리보다 하나님이 더 사랑한 것이 있다면 여러분 거짓말이라고 그러시겠지요. 들어보십시오. 요한복음 21장을 읽다가 큰 걸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네가 나를 사랑하는가? 하는 질문이 나오는 그 성경입니다. 예수님이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에게 다가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묻는 사람이 사람이라면 자매는 예수님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아멘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묻는 분이 우리의 영혼 깊은 곳을 감찰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가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어보셨습니다. 그때 사랑합니다. 대답하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쉽겠습니까?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뭔가 중대한 개인적인 결단을 가지는 고백이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네, 정말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지. 네, 그렇게 어려운 고백을 하고 났으면 예수님이 그래 됐다. 이제 네 죄는 용서받았고 네가 이렇게 어려운데도 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했으니 하늘의 보화는 다 네 것이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맞는데 주님이 뭐라고 그러십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젊어서는 네가 네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사람들이 너를 띠 띄워서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리고 가리라. 그것은 초등학생이 성경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 다 압니다. 그것인 무엇입니까? 순교입니다.
거두절미하고 요약을 하면 이런 것입니다. 네가 날 사랑하느냐,, 정말 네, 정말 날 사랑하느냐. 네, 그럼 잘됐다. 죽어버려. 그것을 읽다가 마음이 걸리는 것입니다. 이것 무서워서 사랑을 고백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고민하다가 성경을 읽어가면서 그 뒤에 답을 발견했습니다. 요한의 해석이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미리 말씀하심이더라.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보다 더 사랑하시는 것은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당신 자신의 영광, 당신 자신의 이름이 연애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쓸어버리실 수도 있습니다. 교회를 세우셨는데 교회가 도저히 하나님께 영광 돌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되시면 촛대도 옮기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택해서 양육하신 백성인데 끝까지 불순종하고 당신의 명예가 이 백성들 사이에 보존될 수 없다고 생각하시니까 이스라엘을 악한 자들의 손에 붙여서 멸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러분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인생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잘 먹고 지내는 것입니까. 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대통령 선거를 했습니다. 난 그때 깜짝 놀랐습니다. 오랜만에 한 선거이기도 했지만 선거를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많이 모이는지 한사람의 이름, 석자를 부르면서 수백 명이 모이는 것입니다. 종교집단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태극기를 흔들며 아무개, 아무개 하면서 기뻐합니다. 그게 헬기에서 찍었는데 새카맣습니다. 서울만 그런 게 아니라 여기도 그랬고 전국방방곡곡에 그것을 보면서 제 마음속에서 기도했습니다. 주님, 보시옵소서, 바로 저것입니다. 저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바로 저런 것입니다. 지금은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대통령될 한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일당 몇 푼에 팔려 나와서 태극기를 흔들고 있지만 하나님, 우리가 바라는 나라는 그런 나라입니다. 남과 북이 통일되어서 아오지 탄광마을로부터 시작해서 제주도 서귀포 앞바다의 어촌에 이르기까지 예수 우리 왕이야 이곳에 오셔서 보좌로 임하시고 이 민족의 왕이 되소서. 손에, 손에 태극 깃발을 흔들고 또 손에 십자가의 깃발을 흔들면서 예수 우리 왕을 부르는 인격적으로 승복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왕 되심을 기뻐하는 나라가 이 세상에 오게 하시고 종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그런 영광스런 부흥의 때를 보게 하여주옵소서.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다윗이 블레셋과 싸우고 있는 전쟁 통에 나아갔을 때 그는 엄청나게 키가 큰 장수 하나가 나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아무도 뛰어나가지 않는 그 전선에서 물맷돌을 들고 뛰어나갔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싸움터에 잔뼈가 굵어온 상대할 수 없는 그 적장 앞에 감히 물맷돌을 들고 뛰어나가게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그로 하여금 뛰어나가게 만든 것은 그렇게 한번 만세에 영웅이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민심을 사로잡아서 다음 대선에 득표를 해보려는 심사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가 그렇게 뛰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 받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칼과 단창으로 네게 나와 오거니와 나는 네가 모욕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간다고 하면서 그는 뛰어나갔고 하나님은 바로 그 한사람의 손을 붙들어서 위대한 일들을 이루어나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인의 인생을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게 하시려고 어둠 가운데서 건져주시고 시련의 골짜기에서 붙들어주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허기진 배를 안고 도망 다니던 시기에도 끼니를 굶기지 않으시고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 삶을 살게 하시려고 곤고한 영혼을 회복시키시고 죄 가운데서 사죄의 은총을 베푸시고 무지 가운데 진리의 빛을 비추셨습니다. 어려움 가운데 건져주셨습니다.
여러분 놀라운 은혜를 어찌 시인만 받았습니까. 우리가 바로 이런 은혜를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할 때 어두움 속에서 찬란한 복음의 빛을 주신 분도 우리 하나님이셨습니다. 가치 없는 죄인을 향한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의 빛이 우리를 사로잡게 만들어서 복음을 위해서 살게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헤매던 인생을 당신의 빛으로 불러서 거룩한 조국교회에 그 피로 씻은 공동체에 일원으로 만들어주시고 험악한 세월을 사는 동안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이 교회를 통해서 이루면서 살아오게 하셨습니다. 죄 가운데 있을 때도 고백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언제든지 다가오시고 말씀해주시는 그 주님의 자상한 사랑의 은혜는 이유 없이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사는 동안 왕이신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이 땅에 이루어지지 못한 하나님의 나라를 인하여 애통하는 자로서 전에는 자신의 욕망이 성취되지 못하는 것을 인해서 한탄했지만 이제는 이루어지지 못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며 아파하고 왕이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가슴아파하면서 한번밖에 없는 이 생애를 우리의 몸도, 우리의 마음도, 우리의 생명도 다 드려 주님 영화롭게 하며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오늘도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이 시간에 마음을 다하여 여러분들에게 권합니다. 우리는 눈을 들어 위의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땅에 살고 있지만 그러나 바다 위를 헤엄쳐가고 있는 배위의 사람들이 타는듯한 목마름 속에서도 그 물을 먹고 살수 없는 것처럼 이 땅에 살아가지만 우리는 세상의 물을 먹고 해갈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거룩한 계획과 목표가 이 땅에 모두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나님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몸과 우리의 심령과 우리의 온 영혼과 우리의 호흡까지 주께 바치오니 왕이신 하나님 남김없이 우리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고백하며 우리는 이 어두운 세상을 지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편 23편 3절이 가지고 있는 의미의 일부인 것입니다. 같이 우리 왕이신 나의 하나님을 찬송 부르고 기도하는시간을 갖겠습니다.
5.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 4).
우리가 오늘은 4절을 낮에 하고 밤에는 마지막으로 6절을 하겠습니다. 순서가 좀 바뀌기는 했습니다만 마찬가지입니다. 시인은 4절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인생의 혹은 신앙의 음침한 사망의 위협이 깃든 그런 그 골짜기를 지날 때에 함께 해주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더욱 목자로 신뢰하고 고백할 수 있었다고 오늘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중동지방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나 혹은 영화 같은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골짜기를 지나서 통행해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지방의 골짜기는 우리나라의 골짜기와 같이 어디가든지 물이 흐르고 그리고 시냇물이 흘러가는 노래 소리가 들리고, 새들이 날아다니고, 풀벌레들이 있고, 아름다운 화초와 수목이 자라는 그런 골짜기는 아닙니다. 때로는 풀 한 포기, 물 한 방울 나지 않는 깎아지른 협곡을 양떼를 이끌고 지나야 되는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목자가 특별한 계획이 있기 때문에 이 양떼들을 이끌고 그 골짜기를 지나는 때도 있지만 때로는 양떼를 떠난 이 양이 길을 잃어버리고 그런 골짜기로 들어설 때도 있습니다.
다윗은 목동으로서 양떼를 데리고 이렇게 맹수의 위협이 있고 또 도적의 위협이 있는 그러한 골짜기를 많이 지나다닌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골짜기를 지날 때마다 선뜻 떠오르는 것은 죽음입니다. 어디선가 엄습할지도 모르는 맹수의 습격, 그리고 어디선가 닥쳐올지도 모르는 도적들의 위협, 이런 것들이 이 시인에게, 오늘 이 다윗에게 커다란 두려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길을 지나면서 언제든지 이 다윗은 하나님이 그 음침한 골짜기에서 함께 해주시는 그러한 경험들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 시인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목자 곁에 있는 양임에도 불구하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들어가는 적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목자로 우리들이 모시고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항상 평탄한 길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가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그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평탄한 길로만 걸어가게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우리를 골짜기와 같은 인생의 길을 지나게 만들 적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까지나 풀밭에서 꽃이나 따면서 소꿉장난이나 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것도 어린애들이 풀밭에서 꽃을 따고 소꿉장난을 하면 귀여워 보여도 머리가 허연 사람들이 소꿉장난이나 하고 벽돌이나 부스러뜨려서 고춧가루라고 하면서 소꿉장난을 하면 노망이 났다고 합니다.
우리는 신앙이 점점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의 신앙생활을 향하여 원하시는 기대도 그만큼 높아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즘에는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보면 잘 쓰는 말이 있습니다. ‘모르겠어, 상처받았어, 힘들어, 피곤해, 쉬고 싶어,’ 이런 말들 많이 듣지요? 이것은 다 지옥의 방언입니다. 지옥방언. 그래서 저는 성격이 못돼서 그렇겠지만 가끔 젊은 청년들이 ‘아휴 피곤해’ 그러면 ‘뭘 하는 것이 있다고 피곤하냐?’ 우리가 말이죠. 육신의 요구에 응하기 시작하면 한이 없어요. 세상의 요구에 응하기 시작하면 마지막에 통째로 다 달라고 그래요.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어렸을 적에는 풀밭에서 꽃도 따고 그리고 소꿉장난도 하지만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좀 크면 말이죠. 이제는 바닷가에서 모래성이나 쌓아놓고 물장구나 치는 그런 것 말고 이제는 신앙의 배를 몰고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로 나아가서 그 폭풍을 어거하며 이 인생의 배를 항해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선장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되잖아요? 폭풍을 잔잔케 하시는 주님의 오른손에 붙들려서 이 거친 인생길을 항해하고 그리고 결국은 천국의 포구에 이를 수 있는, 가족을 그렇게 이끌어갈 수 있고 또 교회를 그렇게 이끌어 갈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가 인격적으로 주님 앞에 다 승복하고 주님을 진정으로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삶을 살아도 하나님은 특별한 계획이 있으셔서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곳으로 데려가실 때가 있습니다. 그곳을 지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를 확인하게 만들어주십니다.
저는 나이는 얼마 안 먹었지만 나름대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은 말이죠.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저는 어떤 때는 교회를 한 8년 섬기다가 심장병까지 생겼어요. 목사님이 얼마나 까다로우신지, 얼마나 야단을 치시는지 하여튼 지금도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따르릉 하고 벨소리가 울리면 가슴이 철렁해요. 교회 안에서 전도사를 하면서 사찰같이 그렇게 한 3년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참 유리그릇처럼 깨뜨려지기 쉬운 저의 성품을 하나님이 아시고 그리고는 직장을 딱 그만두고 나니까 저를 그 교회에다가 집어넣으셔서 저를 혹독한 불에다 구우셨어요. 그렇게 한 8년을 지나고 나니까 이제는 교회 안에 존재하는 어떤 까다로운 사람하고도 최소한 치고받고는 하지 않고 목회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어려움이 와도 묵묵히 견뎌나갈 수 있는 슬기가 생겼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특별히 우리가 불순종하고 죄악가운데 있지 않아도 우리를 특별히 인도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데려가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이 내 인생에게 있어서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내가 어떻게 의뢰하면서 살아야 될지도 배우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인생을 걸어오면서 평탄한 길을 걸어오면서는 배운 것이 별로 없어요. 한창 고생스러울 때 교회에 와서 전도사 생활을 14년간 했습니다. 참 심히 험악한 세월을 보냈어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도 다 목사가 되었는데……. 강도사 고시를 보러갔더니 대학교 동료 교수가 감독을 왔더라고요. 그런데 한참 고생이 심할 때는 매일 예배당에 오는……. (찬양)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항상 찬송 부르다가 날이 저물어 오라 하실 때 영광중에 나아가리. (거기는 그래서 눈물이 좀 덜 나요. 그런데 2절인가 3절에 내려가면…….) 눈물골짜기 더듬으면서 나의 갈길 다 간 후에……. 끝 날에 주께서 나를 부르시면 영광중에 나아가리.……. 하튼 참 14년 전도사 생활에 흘린 눈물이 한 양동이는 될 거예요. 눈물의 이유도 가지가지 총 천연색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고비고비마다 순간순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곳으로 들여보내셔서 거기서 하나님을 붙들고 살지 않고는 살수 없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거기에서 정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 없이는 내 인생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곁에 계시면 나도 있고 주님이 내 곁에 없으시면 나도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것을 처절하게 느끼도록 만들어 주셔요.
여러분 가운데도 틀림없이 지금 뭐 특별히 범죄 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닌데 특별히 고통스러운 사망의 골짜기 같은데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신 분들이 여기 계실 것입니다. 죽음의 위협이 드리워진 것 같고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이 끊어진 것과 같은 상황에 계신 분들이 왜 없겠습니까? 주님을 따라 살고자하고,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살고 싶어 하는데도 불구하고, 때로는 별빛조차 사라진 것 같은 캄캄한 밤바다에 돛대도 없고 삿대도 없이 쪽배 하나에 몸을 싣고 망망대해에 떠있는 것과 같은 그러한 막막한 상황에 놓일 때가 우리는 있다는 것입니다. 죄가 없어도 우리는 그런 때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데도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답은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과 같은 절대적인 절망, 절대적인 외로움 속에서 서있을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거기서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기에 들여보내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죄와 많은 허물과 불순종이 스스로 우리를 양떼를 떠나서 먼 길로 걸어가게 만들고 그리하여 양떼를 버리고 멀리 떠난 그 목자 잃은 양과 같은 삶이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데려다 놓기도 합니다. 우리의 죄악이 우리의 허물이 우리의 불순종이 어두운 그 사망의 골짜기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욕심에 미혹이 되어서 그런 사망의 어두움에 들어갔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오늘 성경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양쪽 다 경험해본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죄 때문에도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인구조사를 실행에 옮김으로써 징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좋으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과 같은 처참한 외로움 속에서 캄캄한 골짜기에 들어섰습니다. 이제는 노래를 불러도 하나님의 응답이 없고, 기도하여도 하나님의 대답이 없는 완전한 어두움 속에서 주께서 자신에게 기름을 부을 때에 부어주신 성령을 거두실 것 같고 그리고 구원의 기쁨을 거두어 가실 것 같은 위기와 시련을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말할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이 가시가 되어서 그의 심령을 찔렀습니다. 그런 속에 있을 때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신 것 같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원래 서울에 있는 사람들이 서울에 있는 관광지에 잘 못 가는 법이 아닙니까? 저는 용인 자연농원이 생긴 지가 도대체 언제인지도 모르는데 한 2년 전에 처음으로 가보았어요. 서울에서 차를 몰고 가면 그저 한 시간 정도밖에 안 걸리는 거리인데도 한 번도 못 가봤어요. 그러다가 처음 가봤는데 거기를 가니까 그 수많은 놀이기구들이 있습니다. 그 수많은 놀이기구들을 사람들이 줄을 쭉 서서 탔습니다. 저도 이제 한번 같이 간 우리교회 전도사님들하고 타보려고 12000원을 주고 3000원짜리 표를 4장인가 끊어가지고 거기에 탔습니다. 그런데 우리교회 전도사님들이 ‘목사님! 이 동네에서는 저것이 제일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데리고 가는데 3000원을 내고 탔어요. 그것의 이름이 독수리요새라는 코스였습니다. 그런데 아! 딱 타고 출발할 때까지는 그저 가슴이 두근거릴 뿐이었는데 출발한지 15초 만에 뼈저리게 후회하기 시작했어요. 그냥 이렇게 보기 좋게 재미있게 데리고 다니는 것인 줄 알았어요. 아 시속 100킬로도 넘을 정도인데 그냥 기차처럼 도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빽빽하게 있는 그 나무 사이를 마치 야구공을 던진 것같이 빠른 속도로 이 구루마같이 생긴데다가 사람을 다섯 명인가 여섯 명을 집어넣고 총알처럼 달리는데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아요. 그런데 겁이 나더라고요. 만약에 여기서 심장마비로 죽으면 어떻게 하나? 그러면 내 장례식에 많은 동역 자들이 와서 ‘김 목사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느냐’고 그러면 ‘참 불철주야 복음사역을 위해서 수고를 하시다가…….’ ‘아! 목사님이 어느 교회에 집회를 가서 피를 토하듯 설교를 하시다가 돌아가셨군요.’ ‘그게 아니라 평소에 불철주야 복음사역을 위해 수고하시다가 놀이기구를 타다가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천국에 가서 어떻게 주님의 얼굴을 뵈옵겠어요? ‘김 목사 어찌 죽었느냐?’ ‘주여 놀이기구와 함께 고난을 받다가 왔나이다.’ 다음부터 정 목사님 그런 것 타지 마십시오. 가문의 망신입니다. 그래서 이제 나는 절대로 죽음의 위협을 느끼는 놀이기구는 안타기로 했어요. 그런데 3분을 도는데 2분 40초를 눈을 감고 있었어요. 차마 주여! 소리는 못했어요. 거기서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자체가 참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꽉 붙들고 이를 악물고 다 타고 왔는데 ‘목사님 재미있으셨어요?’ 아유 눈을 떠야 재미있든지 말든지 하지……. 그러면서 하나의 믿음이 있었어요. 그 얼마나 고난을 받는 코스를 돌면서 믿음이 있었어요. 설마 죽이기야 하랴? 그런데 심장이 콩알같이 오그라드는데 뒤를 보니까 그것을 타겠다고 줄을 새까맣게 선거에요. 내려오는 사람들이 전부 다 고개를 절래 흔드는데도 좋다고 표를 사서 또 자기네끼리 새치기하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그것 왜 그래요? 아마 평범한 방법으로 그렇게 괴롭힌다면 돈 주고 그 괴롭힘을 받을 사람이 없을 것이에요. 그런데 표를 끊고 그렇게 사람들이(어떤 사람들은 졸도도 한다고 그래요. 졸도하면 박카스하나 사 주고 오만 원을 준다고 해요) 그래도 그것을 타겠다고 줄을 서가지고 새치기를 하지 말라고 싸우면서 그렇게 기다리는 이유는 무엇이에요? 위험은 있으나 해는 없어요. 그러니까 거기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이죠.
그런데 말이죠. 신앙생활에서는 그렇지 않거든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접어들면 웬만해서는 해를 보지 않기가 어렵단말이죠.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문 가운데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그 다음에 무슨 기도를 가르쳐주셨지요? 그게 왜 그래요? 성경은 아무렇게나 쓰인 게 아닙니다. 시험에 들면 악에 떨어질 확률이 그만큼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시련에 직면하면 악에 빠질 확률이 많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 기도를 차례대로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는 믿음을 지키면서 올바로 정신을 차리지 아니하면 그 캄캄한 골짜기에서 맹수들에게 먹히고 도적들에게 공격을 받는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다윗에게 이것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전혀 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굳은 심령을 가지고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주님이 자기를 강하게 하시는 그 신앙의 연단을 배운 이 다윗은 한 가지 확신은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하는 것입니다. 사망과 시련이 깊이 시인을 에워쌀 때에 시인이 놓치기 쉬운 확신은 바로 임마누엘의 확신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와 같습니다. 시련이 우리를 에워싸고 환란이 극하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이고 하나님이 우리가 부르짖을 때에 언제나 가까이 계셔서 우리의 소리를 들으시는 분이시라고 하는 신념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그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에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나는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여기서 환란과 어려움 속에서 벗어나는 매우 실제적인 교훈하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육신 따로, 영혼 따로, 신앙생활 따로, 세상생활 따로 그렇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이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삶에 있어서 커다란 위기를 만나고 어려움이 올 때에 우리의 믿음이 거기에 대해서 올바로 반응하지 아니하면 반드시 우리의 실제적인 삶속에서 일어나는 커다란 어려움들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영향을 미치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반대도 성립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면 반드시 우리의 인생전체에도 뭔가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삶의 그 무언가 변화가 반드시 일어나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전혀 해를 받지 않고 그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때문에 강건해지는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 골짜기에서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시련이 오고 어려움이 올 때에 우왕좌왕하고 허둥지둥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아니하니까 하나님이 그 사망의 골짜기에서 자기를 도와주시고 자기와 함께하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런 삶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죠. 그것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점점 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붙들며 살아가지 못하도록 상승작용은 하는 것이에요. 우리는 말입니다. 정말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섰을 때에야 어떤 의미에서는 비로소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평탄할 때에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드러나지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시련에 접어들 때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백일하에 드러나 버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어렸을 때에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어머님, 아버님이 아주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계신 장로님이고, 또 권사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얘가 3대 독자입니다. 그런데 꼭 무슨 일이 있어서 죽으면 꼭 그런 애들이 잘 죽지요. 우리같이 아들이 수북한 집안의 사람들은 어디다가 내굴려도 죽지도 않아요. 그런데 수양회를 가서 죽었어요. 그래서 저는 목회를 하면서 절대 물가로 수련회를 안 보냅니다. 잠시 애들을 즐겁게 하려고 하다가 왜 그런 시험을 당하랴? 하는 마음에서……. 물가에 가고 싶으면 너희 엄마, 아빠하고 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물이 많기로 유명한 양수리로 갔어요. 그런데 이 친구가 수영을 아주 잘합니다. 강을 한두 번 정도는 쉬지 않고 건너갈 수 있을 정도니까……. 그런데 애들을 배에 태워서 이렇게 저쪽 강 건너로 보내는데 자기는 배의 뒤를 따라 온 거예요. 그게 큰 강이 아니라 작은 개울이었어요. 그러니까 뭐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그러니까 그 뒤를 헤엄치면서 가는데 심장마비로 죽었어요. 이 사람들이 참 나쁘더라고요. 죽는 것도 장소를 골라서 죽어야지 물에서 죽으면 보통문제가 아니에요. 죽었는데 다 연락하고 사람들이 모였는데 어스름해요. 저녁때라는 말이죠. 이 시체를 찾아야 되잖아요? 잠수부를 동원하는데 엄청나게 비싸게 달라고 해요. 그런데 이 잠수부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시체를 찾아가지고는 끈에다 묶어서 저 물속 깊은 곳의 돌에다가 매달아놓고 안가지고 나오는 것이에요. 찾아도 없다고 그러는 것이에요. 그러면 할 수 없이 이제 시체를 찾아야 될 사람들이 돈을 걸기 시작하는 거예요. 백만 원, 이백만 원, 이렇게 거는 거지요. 한껏 올려놓고 그 다음에 가서 끌러가지고 나오는 것이에요. 아무튼 그렇게 해서 그 아이를 온 교회가 눈물을 흘리면서 양수리 양지바른 언덕에다 묻었습니다. 장로님인데, 권사님인데, 평생 믿음을 따라서 살아온 사람들인데 실족하고 교회를 떠났어요.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라 신앙을 떠났어요. 신앙생활을 아예 떠나버렸어요. 그런 일도 있을 수 있더라고요.
그런데 거의 같은 시기에 동두천에 있는 어느 기도원으로 제가 기도를 하러 갔습니다. 기도하는데 기도회가 끝난 다음에 난롯가에 쭉 모여 앉아서 그 중에 한 권사님이 눈을 지그시 감고 찬송을 하는 거예요.
(찬양)
큰 풍파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그러면서 간증을 하는데 자기 딸이 있었는데 자기가 그 딸을 그렇게 사랑했더래요. 자기 딸을 그렇게 사랑했는데 그 딸이 그만 어머니 앞에서 먼저 하늘나라에 갔어요. 그런데 그 고달프고 그야말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과 같은 인생에 그 비참한 속에서 (왜 말이 있잖아요? 부모는 산에 묻고,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그 시련이 올 때에 자기가 이 찬송을 부르면서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감사했는지 모르겠대요. 하나님이 내 딸을 데려가지 아니하셨으면 내가 하나님 앞에 인격적인 승복도 모르고 어두움 속에서 살았을 텐데……. ‘이 풍랑 인연하여서 주께도 더 빨리 갑니다.’ 이 얼마나 대조적인 신앙생활입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어떤 방식으로 지나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우리의 인생길에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 될 매우 귀중하게 주님을 체험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붙드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잘못된 방법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 그 속에서 신앙을 잃어버리고 한이 맺히고 사람을 향한 미움이 생겨서 주저리, 주저리 가슴 속에 한이 서리고 인격적으로 뒤틀린 사람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어떤 이유로든지 들어서시는 분들이 여기에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에 아무도 그 골짜기에서 나와 함께 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남아서 그 골짜기에서 우리와 함께하며 우리를 지켜주시는 분은 오로지 예수님 한분밖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찬양)
이 세상에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날 사랑하는 이는 오직 예수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시인은 말합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있었습니다. 그는 불행하게도 사랑받아야할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존경받아야할 모든 사람들로부터 어떤 의미에서 철저할 정도로 버림을 받았어요. 그럴수록 그는 하나님 한분을 붙들며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쓴물을 머금으며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걸어야하는 시련의 빈들을 지나면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경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신앙생활을 사모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버리고 누구도 나를 기뻐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폭풍도 지날 수 있고 사망의 골짜기도 노래하며 걸어갈 수 있습니다.
제가 초창기에 설교자로 부름을 받고 강단에 서기전까지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도 평범한 사람입니다만……. 어느 해엔가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제 영혼을 만지고 지나가셨어요. 그리고 난 다음부터는 여태까지 내가 신앙 생활한 것이 모두 거짓투성이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하나님이 저에게 영적인 각성을 주신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설교자로 부름을 받게 된 동기였습니다. 그리고는 교회에 가서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막 설교하는데 설교는 내가 하는데 내가 아니에요. 내 안에 주님이 오셔서 당신이 하시고 싶은 말씀을 다 하시고 예배가 끝나면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과 같은 그러한 느낌을 받은 때가 꽤 오래 계속되었습니다. 나는 자기네들을 너무너무 사랑해서 눈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데 왜 그렇게 미워해요? 어휴! 사람들이 너무너무 미워하는 거예요. 그래서 ‘에이 오늘은 설교단에 올라가서 열 받지 말아야지!’ 그리고 올라가서 해보려고 하면 하나님이 사실상 하나님을 떠나서 목자 잃은 양 같은 인생들의 비참함과 그 비참한 형편의 원인이 되는 죄악들을 보이시기 시작하셨어요. 처음의 결심은 간곳없고 다시 하나님의 심정으로 말하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아! 막 무섭더라고요. 그 도전이 굉장해요. 제가 교회생활하면서 그런 인격적인 모독을 받아보기는 처음인데 그 인격적인 모독을 받은 원인은 설교를 너무 세게 한다는 거예요. 설교가 세면 회개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위로는 아무것도 없어요. 집에 돌아와서 아침마다 책상에 엎드려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눈을 들어 어두워진 이 세상에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이 영혼들을 위해서 나를 주의 말씀을 증거 하는 선지자의 후예로 세우셨는데 하나님! 이 영혼들이 곤고함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막 기도하면 하나님이 기도 중에서 제게 하나님의 심령을 들려주시기 시작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 나는 네가 하는 일을 기뻐하노라, 너는 말하라, 잠잠하지 말고 외쳐라!’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해 주시고 우리와 함께해 주시기만 하면 시련이, 시련이 아닙니다. 기쁨이 슬픔보다 더 크면 눈물을 흘리면서도 우리는 노래할 수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놓치기 쉬운 확신이 무엇이냐? 그게 바로 거기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시인이 고백했던 것처럼 ‘내가 새벽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의로운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나이다.’ 라고 고백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시련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해주시는 임마누엘의 확신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구체적인 설명이 무엇이냐 하면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신다는 것입니다. ‘지팡이와 막대기’ 비슷한 단어 두 개가 나오면서 ‘그것들이 나를 위로합니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 지팡이와 막대기가 무엇이냐? 지팡이는 지팡이고, 막대기는 막대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고 다니던 지팡이는 우리나라 만화영화에 나오는 지팡이하고는 틀립니다. 우리나라 산신령들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는 대개 고목나무로 만든 지팡이지요. 자기얼굴처럼 쭈글쭈글한 나무뿌리 같은 것으로 만든 지팡이를 폼 나게 들고 나타나서 그것으로 ‘퉁’치면 구름도 나타나고 비도 내리고 번개도 치지요. 빨리 가야 할 텐데……. 급하면 그 지팡이를 가랑이 사이에 집어넣으면 하늘도 날아다니는 그런 지팡이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다니던 목자들의 지팡이는 그런 지팡이가 아니에요. 단장이 아니라 긴 지팡이입니다. 자기키보다 오히려 더 클 정도로 그렇게 긴 지팡이입니다. 끝이 이렇게 휘어있는 지팡이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림에서 보셨을 것입니다. 그 지팡이를 짚고 다닙니다. 물론 언덕을 올라가거나 혹은 힘이 들 때 그 지팡이를 의지하여서 걸어가기도 하지만 그 지팡이의 가장 좋은 용도는 무엇이냐 하면 양떼는 원래 눈의 시력이 나빠서 그렇게 양떼를 스스로 떠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그 때에 저기로 걸어가는 양에게 지팡이를 쭉 뻗어서 그 휘어진 부분으로 목에다가 거는 것이에요. 그것은 남녀 공용이고 노소 프리사이즈에요. 딱 걸치면 맞게 되어있어요. 그리고 딱 목에다 걸고 잡아 다니는 것이에요.
여러분!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해서 양떼를 떠나거나 신앙생활을 게을리 할 때 목자가 나타나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대열에서 10센티만 이탈해도 쏜살같이 달려와서 야구방망이 같은 것으로 머리통을 후려쳤습니까? 만약에 조금만 이탈할 때마다 그렇게 두들겨 팼으면 교회에는 장애자들의 천국이 되었을 거예요. 머리 터진 양, 발모가지 부러진 양, 눈 찢어진 양, 선한 양이 오면 별도의 자리에 앉혀야 될 정도로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주님이 말이죠. 우리가 잠시 그릇된 길을 행할 때도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은 언제나 인격적이고 끈기 있게 인도하셔요. 목에다가 탁 걸고 계속 가고 싶은데 이상하게 일이 안 풀리고 안 가지는 거예요. 정신을 차리고 보면 주의 지팡이가 내 목을 탁 걸고 있어요. ‘좋은 말할 때 돌아와라!’ 그러면 그렇게 불순종하며 살려다가 또 하필이면 그날 오래간만에 교회에 나왔는데 설교제목이 ‘돌아온 탕자’에요. 기가 막히게 맞아요. 구구절절이 목사님이 내가 올 것을 예상해 놓고 원고작성하신 것 같아요. 한마디 한마디가 찔리는 거예요. 그것이 하나님의 지팡이에요. 지팡이가 우리를 인도하는 거예요. 이것이 지팡이입니다. 그러니까 이 지팡이는 양떼를 인도하는데 쓰여 지는 것이죠.
그런데 또 하나의 물건이 나오는데 이것은 막대기입니다. 이 막대기는 끝이 뾰족하게 생긴 흉기에요. 흉기. 목동이 양을 치는데 가끔 맹수들이 덤비는 적이 있지요. 그럴 때 맹수가 덤벼들 때에 사자 목에다 지팡이를 딱 걸고 ‘얘야 저기로 가거라. 내가 인격적으로 너에게 말하노니 저기로 가라. 승복할 수 있겠지?’ 그러면 사자가 승복을 해요? 안 해요? 사자는 원래 그런 것을 모르는 짐승이에요. 먹기만 하면 최고입니다. 그런 것은 없어요. 맹수를 향해서는, 양떼를 위협하며 달려드는 맹수를 향해서는 사전의 경고라든지 아니면 인격적인 설득이라든지 목동이 그런 것을 안 해요. 어슬렁어슬렁 사자들이 나타나고 맹수들이 우리를 넘어와서 양들을 넘보면 밤중에도 눈을 딱 뜨고 있다가 저놈이 어두움 속에서 눈을 껌벅거려? 한번 맛 좀 볼래? 휙! 휙! 획! 무엇을 돌려요? 물매에요. 왼쪽 눈퉁이를 맞힐까? 코뼈를 꺾어 버릴까? 이빨을 옥수수처럼 왕창 날려버릴까? 생각하는 거예요. 때에 따라서는 물맷돌로 공격하기에 너무 가까운 거리에까지 다가오면 백병전도 서슴지 않는 것이 목자에요. 그러니까 목자는 마음만 착한 목자는 안 돼요. 소용이 없어요. 삯군으로나 쓸모가 있지 선한 목자는 안 돼요. 선한목자는 모두 용사여야 되요.
목회자도 마찬가지에요. 목회자도 똑같아요. 심성만 곱고, 법 없이 살 사람 같고, 그런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앉았으면 너무 착하고 예수향기 나는 것 같은데 목회지에 가보면 어지러워요. 왜 그래요? 목회는 착한 심성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양떼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랑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용사와 같이 용력이 있는 사람들이 목장을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믿습니까? 바로 그것이에요. 헌신만 가지고도 안 돼요. 헌신만 가지고 되겠어요? 헌신만 가기도 안 된다고요. 헌신만 가지고는 안 되고 실제로 싸워서 때려눕힐 수 있는 용력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에요. 다윗이 양들을 어떻게 지켰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양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 목자인 다윗이 어떻게 양을 지켰겠는지 한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맹수가 오면 막대기를 들고 나아가서 으르렁거리는 맹수의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고 덤벼들어서 싸워서 맹수들을 개 패듯 때려눕혔을 거예요. 혹시 양떼를 물고가면 ‘그래 그것만 먹어라.’ 그랬겠어요? 어림없어요. 쫒아가서 허리를 분질러버리고 아가리를 찢어버리고 거기에서 삼킨바 된 양을 찾아내고, 싸매고, 고쳐서 걸어가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에요. 착한 성품 하나만을 가지고 목회를 하려다가 성공한 사람을 나는 하나도 못 봤어요. 모두 훌륭하게 목회하신 분들은 모두 용력이 있는 용사와 같은 목자였어요. 영력이 있는 영사와 같은 목자, 교인들을 향해서 양떼들을 향해서는 한없이 인자하지만 다가오는 죄악과 마귀의 도전 앞에서는 성난 사자와 같이 덤벼들어서 처치해버릴 수 있는 그 막대기로 악한 놈들을 찌르고 때려눕혀서 잠시 후에 피 묻은 막대기를 들고 교회로 돌아올 수 있는 이러한 목자가 지키는 교회만이 승리하는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 저의 꿈입니다.
저는 뭐 심성이 착하지도 않으니까 ‘하나님! 착한 심성을 주시고 그 대신 착한 심성을 능가하는 용력 있는 목회를 감당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영력이 있는 목양의 사역을 감당해 나가지 아니하면 주님의 양떼들을 지킬 수가 없나이다.’ 그래서 말이죠. 명절이면 무엇을 사가지고 저를 찾아오는 교인들도 있고 그것도 좋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목회자의 영력을 위해서 쉬지 않고 기도하는 성도들의 부르짖는 기도소리가 있는 교회, 이것이 바로 정말 진정한 승리가 보장된 교회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사방의 으르렁거리는 울부짖는 짐승의 울부짖음 소리가 있는데 양떼가 누구를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단합하자고요? 단합해서 해결될 일이 있고 안 될 일이 있어요. 사자가 우는데 양들이 단합하면 뷔페거리밖에 더 되요? 뭐가 되겠어요. 이놈은 지져 먹고, 이놈은 볶아먹고, 이놈은 수육 해먹고, 이놈은 사시미 쳐 먹고, 그럴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힘을 합해도 안 돼요. 그러니까 누구만 봐요? 목자만 바라보는 거예요. ‘목자여! 우리를 도우소서.’ 그 때에 그 목자가 달려 나아가서 잠시 으르렁거리는 사자의 울부짖음과 고함치는 목자의 소리가 어우러지는 것 같더니, 한참 투덕거리더니 조용해졌는데 어떻게 되었을까? 드디어 목자가 피투성이가 된 막대기를 들고 나타나요. 그 때에 양떼들은 얼마나 기쁠까요? 할렐루야! 그렇지요. 우리 주님이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이런 목자들을 조국교회에 많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다윗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이러한 목자이셨던 것처럼 오늘도 하나님은 용사로서 여러분을 대신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여러분들의 생명을 노리는 악한 대적들과 싸우시는 주님이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를 의뢰하는 사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는 승리를 만들어낼 수 없지만 용사와 같은 목자가 우리에게 계시기에 그 분이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주셔서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분과의 관계를 점검하고 또 점검하고 또 확인해서 주님과의 관계를 붙들고 살아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안위하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시편을 열어보십시오. 시인도 이것을 믿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멀리 계시나이까? 어찌하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시나이까? 어찌하여 하나님 멀리서 계시며 나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시나이까?’ 시인 자신도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곳에서 믿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려움 속에 있을 때에 임마누엘의 신앙으로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최대의 적은 고독감입니다. 고독감……. 주님 없이 나 홀로 있다는 이 고독감은 절망에 이르는 병이에요. 어디로 가든지 주님이 함께 하심을 언제나 느끼고, 느낄 수 없다면 무엇이 내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못하도록 가로 막고 있는지 면밀히 찾아내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면서 그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지나고, 광야도 지나고, 시련의 폭풍도 지나면서, 주님을 찬송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러한 승리하는 삶을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불러내신 것입니다. 이렇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축제의 장소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 같이 기도합시다.
6. 주께서 나를 내 원수의 목전에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에 넘치나이다”*시 23:5).
불꽃놀이를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불꽃을 펑! 쏘면 휙! 하고 맨 꼭대기까지 올라가서는 펑! 하고 터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화려한 불꽃이 펼쳐지고 그리고는 그 다음에는 다시 획! 내려오면서 불꽃의 일생을 마치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에서 이 5절은 말하자면 하늘높이 솟아올라서 마지막에 장엄하게 찬란한 빛을 발하며 폭발하는 불꽃에다가 비교할 수 있는 절이 바로 이 5절입니다. 오늘 이 5절을 못 들으신 분은 아주 중요한 말씀을 놓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인생에 목자가 되어주신다는 사실은 이미 다윗이 1절에서 고백을 했습니다. 2절서부터 왜 그 하나님이 자기의 목자가 되실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차근차근하게 고백해 내려갔습니다. 공급해주시고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주시는 물가로 이끌어주시는 하나님의 공급하시고 인도하시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을 목자로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인격적으로 승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죽은 자와 방불한 영혼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회복시켜주시고 그래서 지푸라기와 같은 인생으로 하여금 장엄하게도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걸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목자로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 살펴볼 4절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주님께서 보호해주시는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목자로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만 해도 충분한데 오늘 이 5절은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기분 좋은 월급은 본봉이 아니라 보너스입니다. 보너스가 얼마나 기분이 좋겠습니까. 그것만 해도 충분한데 하나님께서 5절의 은혜를 부어주시니까 이 시인이 졸도할 지경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어떻게 감당하라고 이 큰 은혜를 자꾸 부어주십니까. 주님 이제는 넘칠 것 같습니다. 아버지 그냥 좀 해주십시오. 고백할 정도로 차고 넘치는 은혜가 오늘 5절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차고 넘친다. 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 이유가 뭔가 대단한 것이어야 하는데 그렇게 불꽃처럼 심령이 폭발할 것처럼 너무 감격스러워 심장이 터질 것 같이 그렇게 행복하게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 성경에 보니까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도다.” 그 위에 두 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말하는 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의외로 많은 사람이 이 상은 학교 졸업식 때 학교장으로부터 받는 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집회할 때마다 확인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 23편을 읽으면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할 때 학교 졸업식 때 교장선생님이 학생에게 상을 주는 우등상이나 개근상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히브리말로 “슈하”(?)인데 이것은 유대인의 밥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밥상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번역하면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는 자들의 면전에서 내게 한 밥상을 베푸시고” 그런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밥 못 먹다 죽은 조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밥 한 그릇 차려주는데 뭘 그렇게 감격하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은가. 물론 오늘 저녁에도 우리 장로님에게 대접을 받았는데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러나 심장은 안 터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인은 마치 심장이 터질 것처럼 억누를 수 없는 기쁨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는 그 이유가 먼저 “주께서 나의 원수들의 면전에서 한 밥상을 베푸시고” 그랬습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 속에서 흐르고 있는 밥상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아래쪽이 보수적인 동네가 아닙니까. 아직까지도 그런 가풍이 남아있는 그런 대갓집이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저희가 어렸을 때 시골에 내려가면 꼭 이런 풍경을 봅니다. 밥상을 하나에 차려서 아버지, 할아버지, 손자, 며느리, 삼촌, 누나 모두 모여서 밥 먹지 않았습니다. 물론 식구가 대가족이니까 그렇게 큰 상이 없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런데 그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잘 맞나 들어보십시오. 우선 안방에 상이 차려집니다. 거기는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도 있는데 어머니는 거기에 안 들어가 계십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반찬도 좀 틀립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아무나 못 올라갑니다. 작은 손자나 깍두기로 가끔 올라갈까 다른 사람은 근처에도 못 갑니다. 그리고 저쪽 작은 방에 다시 상이 차려지는데 삼촌, 고모, 어머니, 며느리 이런 사람이 밥상이 차려집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마당이나 부엌에 멍석 깔고 밥 먹는 사람들이 있는데 누른 밥 긁어서 잘 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집에서 일하는 머슴이나 일군들 이런 사람들입니다. 이 상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십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올라가시고 그 다음에 아들인 내가 거기에 올라가고 부인은 못 올라갑니다. 제 말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정답은 맞는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런 사고방식이 있었습니다. 즉 우리나라에서는 지체가 다른 사람끼리는 밥을 같이 안 먹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먹는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사람들끼리 언약을 맺을 때 밥 먹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이 밥 먹는 의미는 그렇게 간단한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일이 거의 없을지 모릅니다만 저도 신학교에서 선교역사를 가르치는 어느 선생님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초창기 중국선교를 할 때는 문화를 몰랐기 때문에 순교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제일 좋은 것은 선교하러 가려고 하는 그곳의 언어를 여기서 먼저 배우고 그리고 들어가서 의사소통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면 좋은데 그 나라의 말을 아는 사람이 문명세계는 없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글자도 물론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하면 무조건 거기에 들어가서 어떻게 하든지 그 사람들하고 친해져서 거기서 붙어서 살면서 손짓발짓 의사소통을 하면서 언어를 배우는데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5-7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글자를 만들고 해서 복음을 전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 사람들의 문화에 대해서도 잘 모르지만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손짓발짓 하면서 자기가 먼 나라에서 왔는데 함께 살고 싶고 함께 살면서 내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싶다. 이제 하루 종일 손짓발짓 하면 그래도 원래는 온 땅에 언어가 하나였기 때문에 통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그 동네 사람들이 이해를 한 다음에 할아버지들을 데리고 온답니다. 그 고을에 촌장입니다. 잠시 후에 많은 사람들이 쑥덕쑥덕 하더니 수염이 긴 촌장들이 속속들이 공회당에 모여서 장시간 동안 회의를 하고 아마 이 사람들을 우리 마음에 받아들여서 살게 하는 것이 가하겠는가, 불가하겠는가 하면서 하루 종일 회의를 한 다음에 드디어 이 사람들이 환한 얼굴로 웃으면서 이전에 경계심을 풀어주고 그 선교사에게 다가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손짓발짓 하면서 당신이 우리와 함께 살자고 고백을 하면 이제 좋아서 서로 얼싸안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예외 없이 데리고 가는데 그게 바로 연회장입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하는데 연회장에 앉아서 접시에 음식을 들고 날라 오는데 앞에 쭉 차려놓는데 문명세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음식이 막 나옵니다. 그 음식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모르지만 아마 예를 들자면 우리가 도저히 먹을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것, 구더기, 아니면 개미새끼, 도마뱀 요리 별 이상한 것을 다 들고 나옵니다.
여러분, 언젠가 한번 어떤 사람이 TV에 나와서 홍콩에 유명한 요리 집에 들어가서 요리를 다 시켜놓고 마지막 스프가 나왔습니다. 종업원이 큰 냄비에서 떠주는데 너무 너무 스프가 맛있어 한 대접을 먹고 또 한 대접을 먹고 마지막에 이게 무슨 스픈데 한국에서는 먹어보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맛있냐고 하니까 냄비뚜껑을 열어서 보여주는데 그 속에는 요만한 거북이 한 마리하고 바퀴벌레가 한 열 댓 마리가 있다고 합니다. 중국은 이 세상에서 가장 상상하기 어려운 재료로 요리하는 나라로 정평이 나있습니다. 지금도 만주 지방에 가면 아들, 딸 시집장가 보낼 때 꼭 등장하는 우리나라의 옛날에 잔치국수 같은 음식이 무엇인가 하면 큰 구렁이를 잘라서 푹 고은 뱀 국입니다. 그것 한 그릇씩 안 내놓으면 시집장가 무효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갈비탕 안 끓이고 결혼식 하려고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 음식이 나오는데 먹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같은 사람이야 눈을 질끈 감고 심방 간 기분으로 먹을 텐데 서양 사람들은 싫은 것은 또 각득하게 싫다고 합니다. 난 못 먹는다. 그 신나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바짝 얼어붙습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구석구석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나옵니다. 어디론가 끌려가고 죽임을 당합니다. 왜 그 식탁은 그냥 식탁이 아니라 식탁을 베풀어주는 자체가 어떤 의미인가 하면 우리는 형제라는 제의입니다. 그런데 그 음식을 거절하는 것은 형제 됨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같이 살겠다고는 그러고 형제는 되기 싫다고 하니까 첩자가 아닌가. 처단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양반과 상놈이 잠은 같이 자도 음식은 같이 안 먹는 것을 봅니다. 이런 문화가 성경에 그대로 배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비난을 받으셨던 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 선생님은 어찌하여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면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있다. 인자가 온 것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그러면서 계속 잡수셨습니다. 식사를 하시는 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 일이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소외당하고 버림받은 그들에게 찾아가셔서 누구도 나누어주지 않는 식탁을 나누시면서 당신이 그들을 건지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시고 그들을 구원함에 있어서 그들을 친구처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과 한 형제임을 보여주시고 그 식탁을 통해서 그들을 자신의 형제로 받아들이고 용납하시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교제를 위해서 그 영혼을 회개시키시고 아버지 앞에 돌아오기를 만들어주시는 것이 예수님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인을 찾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을 그림처럼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사상은 요한계시록 3장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아시다시피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영적인 상황을 보니까 예수님이 교회 안에 계십니까, 교회 밖에 계십니까? 임마누엘, 예수님이 교회 안에 계셔야 합니까, 밖에 계셔야 합니까? 어디에 계셔야 합니까? 교회, 아멘 그런데 예수님은 교회를 떠나셨는데 자기들끼리 모여서할 것을 다 합니다. 그런 교회에서 뭘 안 했겠습니까. 주일 예배를 안 드렸겠습니까. 선교사 파송을 안 했겠으며, 당회를 안 했겠으며, 제직회를 안 했겠으며, 졸업예배를 안 드렸겠으며, 요즘으로 말하자면 성가대를 안했겠습니까. 구제헌금을 안 했겠습니까. 그런데 답답하게도 우리 주님은 당신의 교회의 열심에도 불구하고 문밖에서 두들기시는 것입니다. 전도지에 많이 찍히는 이 성경구절은 교회가 다시 들어야 할 음성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여기서도 밥 먹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결국 밥 먹는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성도의 최대의 기업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약속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약속을 위해서 나머지 모든 약속들이 존재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는 그 유명한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도 한 가지 약속을 위한 실행과정에서 나온 약속입니다. 그 약속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내 말을 듣고 순종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 최대의 약속입니다. 나머지 모든 약속은 이 약속을 이루기 위한한 방법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혹시 슈퍼맨처럼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린아이들이 위급할 때 잘 부르는 뽀빠이처럼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려움에 처했을 때 손을 벌리고 슈퍼맨, 하면 훅 날아와서 문제를 해결해준 다음에 그 사람하고 같이 살아요. 슈퍼맨은 다시 자기 집으로 갑니까? 도로 자기 집으로 갑니다. 오늘 날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이 이런 것이 아닙니까? 주여, 도와주시옵소서. 다 도와주셨습니다. 주님, 끝났으니 이제 가보시지요. 다음에 부를 때 그때 오십시오. 하나님, 제 기도가 천국에 삐삐인 것, 다 아실 것입니다. 교인들이 나보고 삐삐를 가지고 다니라고 합니다. 전화가 많이 온다고, 김목사가 그것을 받았겠습니까, 안 받았겠습니까? 내가 무슨 졸병입니까. 난 삐삐칠 일이 없다고, 핸드폰 가지고 다니는데 켜놓는 법이 없습니다. 왜 나 필요할 때만 사용하고 꺼버립니다. 내가 그것을 왜 골치 아프게 받고 있겠습니까. 기도는 삐삐가 아닙니다. 핸드폰이 아닙니다. 기도가지고 하나님을 얽어매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만 좋고 그리고 간섭하지만 말아주십시오. 나도 주관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호주머니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안 믿는 사람도 목사님이 기도해준다고하면 좋아합니다. 찬송 불러준다고 그러면 싫어하는데 기도해준다고 하면 좋아합니다. 왜 복 받을 줄 알고, 하나님의 호주머니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요즘 얼마나 잘난 신자들이 많은지 내가 다 알겠습니다. 살아가는 모습을 이렇게 보고, 기도한다고 그러는데 기도는 하는데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그것이 잘못되어있습니다. 하나님, 슛은 제가 쏩니다. 센터링이나 똑바로 해주십시오. 골인이 되면 내가 화려한 슛 솜씨 때문이고 노골이 되면 패스한 당신 책임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기도를 많이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나라가 늦게 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이 다가오시는 것처럼 우리가 당신에게 다가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다가오셨습니까? 인격적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오늘도 빨리 끝내고 집에나 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마음을 갖고 있으면 옆에 있는 사람들은 다 은혜를 받아도 그 사람은 끝입니다. 하나님은 그 문을 부수고 들어가시는 법이 없습니다. 이렇게 인격적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이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 앞에 돌아갈 때는 인격적으로 다가가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성령받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령을 받으실 수 있습니까? 찾으라, 구하라, 두드리라 동사가 세 번씩 나오는데 그것은 결국은 눈으로 찾고, 입으로 구하고, 손으로 두드리고 전 인격적인 접근을 통해서 성령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호주머니를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제가 제일 민망할 때가 언제인가 하면 할아버지가 우리 집에 오셨는데 우리 애들이 할아버지를 맞이하는 것을 보면 얼굴이 뜨뜻해집니다. 할아버지가 손자가 보고 싶어서 오셨습니다. 애들아, 누구세요? 할아버지 왔다. 두 놈이 비명을 지르면서 할아버지다, 하면서 문을 향해 뜁니다. 문을 찰칵 열면 손자들은 할아버지의 허리정도밖에 안 됩니다. 고개를 들어야지만 할아버지를 보는데 한 번도 고개를 든 적이 없습니다. 손 붙드느라고, 악수하자는 것인지, 선물 사갖고 온 그것을 뺏으려고, 그리고는 후다닥 자기 방으로 가서 뜯어서 먹느라고, 여러분,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이러지 않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 존재자체가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해볼까요? 사랑은 존재 자체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그것을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중세에 경건했던 신학자 가운데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니까 이 수도사가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하는데 금식하면서 고행하면서 하나님 앞에 뭔가 애절하게 부르짖습니다. 이상 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사랑하는 아퀴나스야 네가 나에게 무엇을 원하기에 그렇게 애처롭게 기도하는가. 아퀴나스는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아무 것도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네가 그렇게 기도하는가.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기를 원하는가. 하나님 아무 것도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오늘도 금식하며 어린아이와 같이 눈물로 나를 향하여 부르짖는가. 아퀴나스는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아무 것도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만약 저에게 무엇을 주시려거든 주님 자신을 저에게 주시옵소서.
게르나(?)라는 사람의 판화를 여러분이 한번 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투박한 모판화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계시고 어떤 남자가 십자가에 매달려있는 예수님의 가시관 쓰고 계신 그 목을 끌어안고 흐느껴 우는 그 장면을 투박하게 그려놓은 목판화입니다. 저는 그 그림을 참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밑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독일어로 헤르 이히빈다인 두비스틱 (?)이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인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 그런 관계 그것이 바로 사랑의 관계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사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예화를 들려고 일부러 가져온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제 성경 갈피에 구두티켓에 한 장 들어있습니다. 이게 왕년에는 10만 원짜리가 들어있었습니다.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선사해서 없습니다. 이게 언제 놓였는지 모르겠는데 5월 15일 인쇄에 집에 가서 성경을 읽으려고 폈는데 이게 나왔으니까 아마 교회에 누군가가 스승의 날 나도 모르게 강대위에 있는 성경책에 살짝 끼어났는데 나는 지금도 이 사람이 누군지 알 수가 없고 확인하려고 애도 쓰지 않는데 뭔가 가려짐 속에 묘미가 있는 것은 아닌지 집에 가서 열어보니까 쪽지가 하나 나왔습니다. 누가 보냈다는 것도 없고 아무 것도 없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제 영혼의 스승이신 목사님 저는 목사님이 그냥 거기 계셔서 감사합니다.” 감탄을 전혀 안 하십니다. 그럼 도로 집어넣겠습니다. 내가 이것을 보면서 속으로 그랬습니다. ‘지체여 나도 네가 누군지 모르지만 네가 거기 있어서 좋다.’ 이게 사랑입니다.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여기 있어서 좋고 주님 우리는 주님이 거기 계셔서 좋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기도를 많이 하십니다. 하루 저녁에 와서 하루 밤에 한 8시간씩 기도를 하십니다. 목사님이 여쭈어봤습니다. 집사님, 무슨 기도를 그렇게 많이 하십니까? 정말 그렇게 기도제목이 많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4-6시간 기도하면 기도하고 싶은 것은 다 합니다.그러면 나머지 4시간은 뭐 하십니까? 이 집사님이 빙그레 웃으면서 4시간은 기도하고 나머지 시간은 저는 하나님을 쳐다보고 하나님은 나를 쳐다보고 우리끼리 쳐다보면서 남은 시간을 보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속에서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정말 알고 있는 사람들인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인지 의심해볼 정도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너무 사무적이 아닙니까. 일주일에 한 번씩 뒷방에 있는 노인네에게 가서 문안하듯이 교회에 나와서 예배한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여기에 있어서 좋고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한없이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은 비록 꽃처럼 향기 나는 생활이 아니어도 우리 주님이 거기 계시고 주님이 우리와 맺어주신 이 언약이 즐거워서 하나님이 나를 즐거워하시는 것처럼 나도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낙망하지 않고 마라와 같이 쓴물을 머금어야 하는 빈들을 지나면서도 오히려 한숨이 변하여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서 베풀어주시는 이 식탁 앞에서 이런 관계를 확인합니다. 하나님과 나는 한 가족이다. 이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메시지는 그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그 식탁을 아무도 없는 골방에서 베풀어주신 것이 아니라 누구 앞에서 베풀어주셨다고요? 원수의 목전이라고 그랬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릅흐므네 조레라인라이(?)나를 괴롭게 하는 자들의 면전에서 내게 한 상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것입니다. 시인은 살아오면서 수많은 원수들을 만났습니다. 그 원수들이 이를 갈고 이 다윗을 처치해버리려고 돌격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식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식사하는데 하건 말건 반쯤 죽이려고 덤벼들었는데 혼자가 아니라 둘이서 식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식탁을 마주하면서 정답게 이야기하며 다윗 맞은편에 계신 분이 애야 이것도 먹어라. 이것도 몸에 좋단다. 하면서 숟가락에 올려줍니다.
생각납니다. 할머니가 물 말은 밥 위에다 때 국물 흐르는 손으로 김치를 찢어서 올려주신 그 밥은 왜 그렇게 맛있는지, 그렇게 먹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 혼자만 있으면 가서 박살을 내겠는데 앞에 계신 분이 어디서 많이 뵌 분입니다.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 그러니까 그 광경을 원수들에게 보여주심으로 우리는 밥상공동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한 가족이다. 만약에 이 아이 혼자 돌아다닌다고 이 아이를 해치면 그것은 진짜 나에 대한 도전으로 알고 내가 가서 가만 안 나두겠다. 그런 메시지를 생생하게 볼 수 있도록 원수 앞에서 식탁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좋은지,
그런데 이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느 날은 시편 23편 늘 읽던 이 성경을 히브리어 성경으로 읽다가 너무너무 가슴이 터지는 것처럼 기뻐서 성경을 머리에 이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그게 무엇인가 하면 베푸시고, 그 베푸시고 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아라크’라는 말인데 그것은 군대를 정돈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직역을 하자면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한 상을 벌여놓으시고” 그런 뜻입니다.
제가 여러분 같은 고신측 교단에 있는 어느 잘 알려진 교회에 제가 수련회 예배를 인도하러 갔습니다. 그 교회에 두 번 갔는데 한번은 제때 밥을 안 주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열심히 먹습니다. 나보고 먹으라고도 안 합니다. 간식도 자기들끼리 먹고, 그래서 강사 주제에 가서 밥 좀 주세요. 그러다가 알아보면 다행인데 모르고 당신 누구냐고 그러면 얼마나 무안하겠습니까. 그래서 슬그머니 나가서 이틀 동안 밖에 나가서 밥을 사먹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에 또 수련회를 오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고 싶겠습니까, 안 가고 싶겠습니까? 아니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 것이야 천국에 가서 상이나 있지, 그래도 목사 체면에 그때 밥 안 주었기 때문에 못 가겠다고 그렇게 말할 수 없어서 이리저리 핑계를 댔는데 얼마나 물불 안 가리고 돌진하는지 목사님 안 오시면 우리 수련회 안 올 것이라고 하면서 그러기에 갔습니다. 가면서 이제 농담 삼아 그 이야기를 했더니 교역자도 바뀌고 다 바뀌어서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밥은 확실하게 주었습니다. 아니 식권만 주면 내가 식당에 가서 먹으면 되는데 다 올라와서 기다립니다. 목사님, 밥 먹으러 갑시다. 그것도 또 일이었습니다. 혼자 있을 때는 안 먹고 싶으면 안 먹으면 되는데 꼭 쫓아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이 되었는데 식당에 갔는데 식당은 원래 밥 냄새가 나야 하고 사람이 법적대어야 하는데, 여러분 설교하는데 이상하게 에너지가 많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아침을 먹어야 하는데 사람이 아무도 없고 냄새도 안 나고 숟가락 소리도 안 납니다. 왜 그러나 했더니 식권을 주니까 밥을 안 주고 빵, 샌드위치 한조각 주는 것입니다. 이게 뭐냐고 하니까 아침에 일하러 오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이게 아침이니까 서양사람 기분으로 아침을 때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제가 제일 고문처럼 여기는 것 하나가 아침에 빵 먹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밀가루하고 못 사귀었습니다. 정말 싫은데 제일 싫어하는 빵, 죽이면 그래도 제가 괜찮겠는데 빵을 들고 차 한잔을 타서 들고 와서 식탁에 앉아서 먹는데 된장찌개를 보글보글 끓인 그 밥상 생각이 너무 났습니다. 그것도 상은 상입니까, 아닙니까? 그것도 상입니다.
여러분, 누구네 집에 갔습니다. 혹은 여러분이 시집가셔서 남편을 데리고 친정에 왔습니다. 어머니가 마당에 계십니다. 엄마 우리 왔어요. 김서방이 왔구먼, 점심은 먹었는가. 아니요. 아직 식전입니다. 그래, 내가 금방 밥 차려줄게. 장모님, 간단히 차려주십시오. 걱정 말게. 간단히 차려줄게. 간단히 차리는 게 내 전공 아닌가. 마루에 올라가있게. 그리고는 밥을 차려왔는데 밥상에 반쯤 먹다가 숟가락 꽃아 놓은 찬밥을 들고 어디로 가나 그랬더니 펌푸물을 푸더니 시원한 물을 받아서 말아서 갖다 주고 고추장 하나 다 놓고 찬이 변변치 않네. 요기나 하게 그러면 여러분의 딸인 여러분은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우리 엄마 (?)다시 생각해야겠네. 그러지 않겠습니까.
한사람이 그 집안에서 어느 정도 중요성을 가진 인물이라고 하는 것은 뭘 보면 알 수 있습니까? 밥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가끔 집회에 나가면 정성껏 저녁을 차려놓고 와서 드시라고 그럽니다. 그러면 참 부담스럽습니다. 집회에 전념을 해야지 되는데 음식을 만드십니다. 큰상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잘 차렸습니다. 감사 기도를 한 다음에 평상시에도 내가 이렇게 먹는가. 그렇다는 것입니까. 안 그렇다는 것입니까? 아니 무슨 기둥뿌리 뽑을 일이 있습니까. 부흥강사가 왔으니까 상을 차려준 것입니다.
시인이 받은 식탁이 어떤 식탁일까요? 부산에 집회 내려가서 한정식 집에 갔는데 경상도 말로 억수로 반찬이 나옵니다. 하도 질려서 한 상에 그릇이 몇 개나 되는지 세어봤습니다. 100개입니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인데 저쪽에는 손이 안 닿습니다. 누가 도와주어야 먹습니다. 그것도 상이고 찬밥에 펌푸물을 부어서 손가락 집어넣은 것도 상입니다. 원수가 시인을 해치려고 달려왔는데 만약에 그 펌푸물에 말은 그 찬밥을 먹고 있으면 원수가 뭐라고 그러겠습니까. 흥! 너는 하나님 앞에 찬밥이구나. 그런데 시인이 받았던 그 상이 화려한 정찬이었다는 사실을 “베푸시고” 라는 “아라크”라는 낱말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는 자들의 면전에서 상을 벌려놓으시고 원수가 저놈은 아무리 하나님이 밥상을 마주하시지만 하나님도 귀찮게 생각하시는 그런 비참한 존재일거야. 밥상만 보면 알 수 있어. 분명히 하나님이 찬밥에다 물 말아 주셨을거야. 그런데 웬걸 서빙을 드는 수많은 천사들이 계속 접시를 나르는데 이 끝부터 저 끝까지 자동차 타고 다니면서 반찬을 골라 먹어야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반찬을 차려놓았는데 그런 식탁은 자기가 예전에 그 하나님이 누구에게 베풀어주신 적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식탁은 예전에 그 하나님이 누구에게 베풀어주신 것을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서 깨닫는 것이 파짠지같이 후줄근하게 돌아다니는 것으로 우습게 봤더니 알고 보니까 하늘나라의 VIP구나. 감히 덤빌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러니 제가 이렇게 방을 한 바퀴 돌았겠습니까. 안 돌았겠습니까?
예수 예수 예수 내 마음을 녹이셨네
예수 예수 예수 내 마음을 녹이셨네
하나님은 이 사랑으로 우리의 영혼을 녹이십니다. 여러분 예수 믿기 전에 누가 알아주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나는 하나님 만나고 변화받기 전에 젊은 시절에 수만은 꿈들은 좌절되고 죽기위해서 자살까지 하고 육체는 병든 생을 포기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분만은 나에게 참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 자신을 목적이라고 생각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나인 것 때문에 만족하시며 사랑하십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시인으로 하여금 감격하게 하고 있는 이 놀라운 은혜의 시간, 시인에게만 베푸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베푸셨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진토에 떨어진 것같이 살 힘을 잃어버렸을 때 피골이 상접하여 엎드려져서 죽어버릴 것 같은 영혼에 상태에 있을 때 풍성한 말씀의 식탁을 베푸셔서 생명을 되찾게 해주신 분이 누구셨습니까? 우리 주님이셨습니다.
세상 속에서 찢기고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불순종의 길을 가며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 곤고와 쇠사슬에 매어 갈 바를 몰라 그 죽음과 같은 어두운 길에서 우리에게 진리의 빛을 보내셔서 목마른 우리의 영혼을 해갈시켜주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어두운 길을 헤매는 우리의 인생이 불쌍하셔서 찾아오신 분도 주님이셨습니다. 바람과 같이 지나는 우리의 인생길에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면 그것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신 순간들이었습니다. 수많은 세월을 고난과 시련과 원망과 한 맺힌 길을 걸어왔지만 단 한번 하나님이 우리 앞에서 우리를 미워하는 원수들 앞에서 은혜의 식탁을 베푸시자 우리는 그 식탁에서 배부르게 먹고 우리에게 식탁을 베푸시는 그 말씀의 하나님, 말씀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심령은 녹아지는 역사가 일어났고 그래서 좋으신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기를 결심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 아무리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해도 오늘 23편에서 감격하고 있지만 제가 받은 사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다윗을 향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고 나니까 어떤 고백이 나오는가 하면 만약에 이 세상에 나 하나밖에 없어서 우리 주님은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서 이 낮고 천한 세상에 오셔서 나 하나를 위해서도 십자가에 달리실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세상은 물질주의가 팽배한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보다는 세상을 더 사랑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자기의 본분조차 잊어버리고 세상에 아부하며 살아가는 이 모습은 우리를 위해서 이 놀라운 식탁을 베풀어주셔서 우리의 원수를 시기 나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등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세월이 흘러가도 요한 사도의 불붙는 외침은 언제나 진리로 우리의 가슴에 다가옵니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의 자랑이니 이는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니라. 세상도 지나가고 그 정욕도 지나가고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영원히 있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의 식탁, 오늘도 영원히 허기지고 굶주린 여러분, 여러분들을 배부르게 하고 여러분들을 이 험한 세상을 헤치면서 주님 위해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이 은혜의 식탁을 여러분 앞에 놓고 와서 이 식탁을 누리기를, 그리고 시인이 경험했던 이 감격을 여러분들이 맛보기를 주님이 여러분을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여러분의 심령의 잔이 넘치는 일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하나님께서 시인을 통해서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내 머리에 기름을 바르셨으니”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름 부으신 사건, 이것이 다윗에게 그 터질 듯이 가슴벅차오르는 감격에 한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5절을 장면은 잔칫집 장면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오면 주인이 성대한 식탁을 베풀고, 그 다음에 공경하는 의미로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시는 것입니다. 4절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였는데 5절은 갑자기 맹수들의 울부짖는 소리도 사라지고 그리고 노리는 도적들의 발걸음도 사라지고 이제는 가슴 벅찬 환희의 송가가 울려 퍼지는 잔치자리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기름부음은 다윗 자신의 능력으로 볼 때는 단지 잔치자리에서 기름을 바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생의 세 번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9)번 시작제사장을 임명하는 사람들에게 기름 붓는 관례가 있었다는 사실은 여러분들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상징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름을 부으실 때 그로 하여금 그 직분을 감당해나가는 거룩한 성신의 권능을 그에게 함께 임하여 자기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에 필적할 수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이 바꾸어놓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자 여호와의 성신이 다윗위에 충만하게 임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신이 늘 다윗과 동행하며 다윗을 놀라운 지혜 있는 사람으로 놀라운 용기를 지닌 사람, 놀라운 감화력을 지닌 사람 놀라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한 사람으로 바꾸어놓으셨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성령의 체험을 했겠습니까. 오늘 다윗은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는데 회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21살 되던 해에 아침에 말씀드린 그 교회에 나가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젊은 청년이 열심히 교회에 나오니까 목사님이 얼마나 귀엽게 보셨겠습니까. 문답을 마치고 그리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용서함을 받아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말할 수 없이 감사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전날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깨끗이 하고 평상복을 입고 그리고 이제 그 의자도 없이 비닐장판을 깐 맨 바닥에서 예배를 드리는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이제 세례를 받을 때가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오셔서 세례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불만이 하나 있는데 세례를 줄 때 왜 그렇게 물을 조금씩 바르는지, 그래서 제가 목사가 된 다음부터는 물을 많이 붑니다. 그때 한이 맺혀서, 물이 뭐가 비싸서, 그래서 나는 세례를 줄 때 물을 많이 부니까 옷차림을 생각해서 입고 오라고 그러면서 요렇게 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퍼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그런데 해보니까 성에 안 찹니다. 두 손으로 성부와.... 그래도 성에 안 찹니다. 다음 부활절 세례식 때는 조그만 바가지 하나 동원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어째든 아쉽기는 했지만 세례를 주십니다. 내가 오늘 예수를 믿는 자 김남준에게 성부와 또 성자와 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그런데 생전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목사님의 손이 딱 닿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는데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뭔가 뜨거운 기운으로 꽉 찼습니다. 그러면서 내 마음 속에서 커다란 감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걸어온 길이 평탄한 길이 아니었는데 나같이 버림받은 인생을 주님이 찾아오셔서 이 몸이 무엇이 관대 고귀한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살 찢고 피 쏟게 하셔서 나가같은 죄인 구원하셔서 오늘 주 백성 삼으신 것을 생각하니까 눈물이 흘렀습니다. 이 목사님은 옆에 사람 세례를 주고 떠나는데 이 젊은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껴 울었습니다.
내 평생 사는 동안에 주 위해 살리라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소원이 있다면 나를 구원해주신 예수님처럼 순결해지고 그리고 예수님만 사랑하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신 것처럼 나도 그 예수님을 위해서 죽고 싶은 것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누가 이 세상에서 낙심한 젊은이를 그런 사람으로 만드셨을까요? 성령님께서 나를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화) 화급한 기도제목을 위해 새벽예배 시간에 기도를 하다가 성령의 불을 경험하면서 방언을 받은 내용.
어떻게 하면 나를 사랑하셔서 이렇게까지 나를 선대해주시는 하나님만 위해 살 수 있을까 만약에 내 몸에 있는 살 중에 단한점이라도 주님을 위해서 쓰여 지기를 싫어하는 살이 있다면 찢어 내버리고 내 몸에 흐르고 있는 피 중에서 단 한 방울의 피라도 주님을 위해 흘리기 싫다는 피가 있다면 주사바늘로 뽑아내버리고 싶었습니다. 생사 간에 나의 생명도, 나의 젊음도, 그리고 나의 인생도 모두 주님을 위해 바치고 싶었습니다. 누가 하신 일입니까? 성령이 하신 일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진정한 만족이 없기 때문에 그 만족을 위해서 세상에 있는 것들로 만족을 얻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마약과 같은 것입니다. 잠시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성령이 충만하지 않은데서 오는 마음의 공허함을 메꿀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만족이십니다. 성령만이 우리의 진정한 만족의 생수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에 있어서 성령만이 우리의 진정한 만족이십니다. 성령만이 우리의 삶의 동기를 정결케 하여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만을 위해 살게 하십니다. 성령만이 우리의 심령을 변화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 앞에 바쳐져도 아깝지 않은 그런 인생이 되도록 만들어주시는 신이 오로지 성령께만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선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만족이 없습니다.
(예화) 수유리에 있는 어느 병원에 환자가 실려 왔는데 심장마비로 죽었는데 한손은 펴고, 또 한손은 꼭 쥐고 죽어서 이상하게 생각해 의사가 손을 펴보자 화투 두 장이 있었는데 이유인즉 상갓집에서 화투를 하면서 판돈을 다 날린 상황에서 생각지 않은 화투 패 두 장으로 많은 돈을 얻을 기회가 되자 놀라움에 심장마비로 죽은 이야기.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화투 두 장 대신 집문서 맡겨놓고, 땅문서 맡겨놓고 내 땅, 내 땅 그러고 죽는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바라보면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게 바로 참된 하나님과의 만족을 모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슬픈 모습입니다.
(예화) 교회 집사님이 교회에 오시는데 하늘에서 초록색 비가 마구 쏟아져 무엇인가 했더니 어느 사람이 만원짜리 돈을 마구 뿌리는데 사람들이 돈을 줍느라 난리가 났지만 그 집사님은 안 줍고 왔는데 이미 오래 전에 그런 일화를 목사님을 통해 들었기 때문인데 믿는 사람으로서 세상 사람과 구별된 모습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는 내용.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것입니다. 사는 게 얼마나 재미없고 시시하면 그 짓을 하겠습니까. 이게 바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몸부림입니다. 그런데 오늘 결국 성경에 비추어본다면 그 사람이 왜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가. 그것은 가슴이 허하기 때문입니다. 이 심령이 비어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 영혼에 잔이 있는데 이 잔은 하나님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잔입니다. 하나님 없으면 채워질 수 없는 잔이 비어있는 것입니다. 견디지를 못하고 괴로워합니다. 인간이라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 없이는 도저히 못살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는 심성이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그 하나님께로부터 도망가려고 애를 쓰는 불순종하고 반항하는 성품이 거기에 또 같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가 잘 모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런 존재입니다.
시인은 오늘 이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빈 마음의 잔이 하나님께서 부으시는 그 놀라운 성령의 은혜로 충만해졌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나의 이 빈 잔을 채울 길이 없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원수의 면전에서 그 큰 상을 내게 베풀어놓으시는 것을 보며 하나님만으로 말미암은 만족을 얻게 되었고 그 관계에서 오는 만족이 자신의 목마른 영혼에 해갈이 되었다고 하는 그것을 오늘 시인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불행한 것 같습니까? 왜 속상하고 그리고 왜 인생사는 것이 왜 그렇게 시시하고 재미없고 예수를 믿어도 기쁘지 않고 그런 게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월급 적게 타오는 남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업의 위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과외를 시켜도 성적이 자꾸 떨어지는 자식 놈들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영원한 만족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없기 때문에 인생 살아가는 것이 고달프고 괴롭고 힘든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신령한 은혜와 축복이 내 마음을 채우고 위로부터 시시때때로 내리시는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그 하늘에 기쁨이 신령한 은혜가 내 인생을 지배하게 될 때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마라와 같이 쓴물을 머금어야 하는 광야에서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예화) 독자라고 하면서 전화온 여자 분과 교수실에서 만나 대화를 하는데 그는 미술을 전공한 인테리 여성이고 남편이 사회적으로도 성공하고 부부가 교회에서도 열심히 섬기고 부부가 큐티도 하고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여유 있게 사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힘든 과정을 겪는데 그것은 삼년에 한 번씩 내부에 생기는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으면서 남모르는 마음의 힘든 상황을 겪는 가운데 그때 책을 통해 십자가의 복음에 눈을 뜨면서 새로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어 고난의 때를 감격으로 이기게 되었는데 그가 섬기는 교회의 목사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돈으로도 부요함을 누리고 남편의 사랑을 받고 사람들의 칭찬이나 인정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데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지니까 자신이 힘든 과정을 이길 수 있게 되었음을 감사한 내용.
오직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이 빈 잔은 하나님이 스스로 채우실 수 있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하나님만,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오늘 이 시간에도 갈망합니다.
여러분, 오늘 여기에 나오신 분들 중에 금이나 은을 얻기 위해 나오신 분이 있다면 손을 들어보십시오. 세상에 썩어질 것들을 얻기 위해서 마지못해 나온 분이 있으면 한번 손을 들어보십시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것들이나 썩어질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심령을 소성케 하고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그리하여 위대한 식탁을 베푸셔서 우리의 인생을 부요케 하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 없이 살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 은혜에 목말라서 나온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 아닙니까.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형통하게 살아가는 그 기쁨, 그것은 이미 우리와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만족은 이 세상에서 부하고 형통한 삶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의 만족은 우리 안에 주님이 가득히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소유가 되고 우리는 주님을 소유하고, 우리는 주님의 것이 되고 주님이 우리의 것이 되어서 주님과 우리가 하나 되어서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아버지께서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셔서 이루시려고 했던 그 거룩한 뜻, 그 거룩한 계획, 이루실수 있도록 그렇게 내 인생을 살아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을 위해서 사는 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아직까지도 여러분의 영혼의 그 목마름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 채워볼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먹어도, 먹어도 해갈할 수 없고 마셔도, 마셔도 그 갈함이 그치지 않는 샘을 마시는 것이 이제 지겹지도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습니다. 주님을 목자로 살아가는 이 시인을 위하여 원수가 시기 나는 식탁을 베푸시고 그리고 그 영혼에 진정한 만족이 되는 성령의 기름을 한없이 부으셨던 그 하나님이 오늘도 목자와 관계 속에서 혼자 살아갈 수 없다고 고백하며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고 싶어서 당신 앞에 나아오는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는 버리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껏 세상에서 고달픈 길을 걸어오며 살았지만 성대한 진찬, 그 위대한 식탁 앞에서 우리는 잃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배려와 선하신 인도하심과 은총이 원수를 시기 나게 할 정도로 충분한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그 성대한 식탁 앞에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의 삶이 무엇일까요? 꽃처럼 향기 나는 생활이 아닙니다. 그런 삶은 세상에 있습니다.
주여 꽃처럼 향기 나는 나의 생활이 아니어도
나는 주님이 좋을 수밖에 없어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세상 사람이 우리를 부럽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안 부럽습니다. 남이 받지 못한 사랑을 우리가 받았고 남이 알지 못한 그 만족한 은혜의 세계를 우리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에 다른 길은 없고 오직 가장 선하신 목자이신 우리 주님의 뒤를 따라서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면서 한세상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 23:6).
이렇게 해서 우리는 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고 하는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시인의 고백으로부터 시작해서 그가 왜 하나님을 그렇게 인격적으로 목자로 모시고 그 앞에 승복하며 사는 인생을 행복하다고 고백했는지 우리는 2절서부터 5절까지 실로 긴 길을 걸어왔습니다. 때를 따라서 공급해주시는 푸른 초장을 지나기도 했고 양떼의 연약함을 기억하여 수고스럽게도 댐을 쌓는 움직이지 않는 물가를 지나기도 했습니다. 죽은 자와 같이 곤고하게 된 상황에서 영적인 소생을 주셔서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의의 길로 걸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영혼의 회복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홀로 있다고 생각할 때 사실은 거기서도 하나님이 의로운 오른손으로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를 위해서는 지팡이로 인도하시고 우리를 대적하고 도전하는 무리들을 위해서는 막대기로 그들을 물리치사 그들을 모두 거꾸로 트리고 피 묻은 막대기를 들고 우리에게 돌아오셔서 우리를 안심시키시는 목자이신 하나님의 용맹스러운 목양의 사역도 우리는 살펴보았습니다.
그 후에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를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그 놀라운 식탁을 베풀어놓으셔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보여주시는 영광스러운 가족관계도 확인하였습니다. 허기지고 굶주린 영혼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을 향해서 넘치도록 식탁을 베풀어주심으로 세상도 이기고 원수들도이기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나라를 위해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보면서 우리는 그 말할 수 없이 성대하게 차려진 밥상 앞에서 우리의 마음의 상처가 아무는 것도 경험하였습니다. 그 위에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성령의 은혜를 물 붓듯 부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말할 수 없는 기쁨을 간직한 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해서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영혼의 만족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찬송하며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그런 놀라운 기록들도 살펴보았습니다.
주님을 몰랐더라면, 성령의 은혜를 몰랐더라면 한을 머금고 사람을 원망하고 환경을 미워하다가 좌절 속에서 한 맺힌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던 불행한 사람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놀라운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우리에게 새 기쁨과 소망을 주신 것도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이 긴 여정을 모두 지난 후에 우리는 드디어 이 영광스러운 시편의 마지막 장면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광스러운 시편에 비해서는 이 마지막이 너무나 초라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내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르리니” 그리고 마지막 나오는 말은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한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마치 장엄한 오케스트라로 시작된 웅장한 교향곡이 마지막에 장엄하게 마쳐야 하는데 마지막 소절에 가서 피리소리로 그 교향곡을 마치는 것 같은 부조화를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을 늘 읽어가면서도 불만은 맨 마지막이었습니다. 그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다음에 기껏 고백하는 내용이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교회에 잘 다니겠습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까? 그러나 어느 날 이 6절의 영광스러운 의미가 제 앞에서 한 꺼풀씩 옷을 벗으며 다가올 때 저는 압도당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시편 23편을 가지고 쓴 책이 바로 영적회복은 불꽃처럼 번져간다는 것입니다. 저는 아직까지도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도 23편을 생각하면서 이 영광스러운 23편을 겨우 350페이지 책에다 기록했다는 것은 본문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라는 것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 같으면 한 1000페이지는 써야지만 겨우 본문이 우리를 향하여 한 꺼풀 벗는 것인데 왜 사람들은 이렇게 얇은 책을 좋아하고 설교자는 짤막한 설교를 좋아하고 회중들은 압축한 설교를 좋아하는지 그저 가슴이 답답하다는 느낌을 오늘 아침에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들의 교회에는 언제나 되어야지만 한번 하나님의 설교자들이 눈을 들어서 성경의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고 그리고 한없이 쏟아져 나오는 진리의 말씀을 성도들에게 토해놓는 때가 있을 것이며 그렇게 본문 속에서 만난 영광스러운 하나님과의 만남과 만남을 통해서 배우게 된 그 장엄한 의미를 성도들에게 풀어줄 때 설교자가 이렇게 길게 설교하고 자세히 설교하다가는 성도들이 지칠지도 모른다고 하는 부담감이 없이 마치 주님과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팔복산에서 장시간동안 그 영광스러운 주님의 설교를 들었던 것처럼 그렇게 장시간 설교를 듣고 그 말씀의 숲속에서 함께 기뻐하고 뛰노는 이 영광스러운 말씀을 보며 하나님, 언제나 우리 조국교회에 주시렵니까? 오늘 아침에 제 마음에 그런 소원이 간절히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 일부를 오늘 마지막 시간에 나누어보려고 하겠습니다. 1절이 총론적인 서론이고 2,3,4,5절이 그 총론적인 서론을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라”고 하는 그 고백의 이유를 해명하는 그런 부분이라면 6절은 미래에 대한 확신에 미래에 살아갈 삶의 결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6절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이 평범한 성경의 순서를 통해서 중대한 메시지 하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백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은혜를 체험한 사람에게는 숨겨둘 수 없는 고백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지 아니하고 배길 수 없고 주님이 듣지 않으셔도 토해놓을 수밖에 없는 고백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백이 없는 성도의 삶은 그 심령 속에 불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불을 가지고 있는 사람,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에 영혼 깊은 골수에 하나님의 은혜의 불이 간직된 사람, 그 불을 소유한 사람은 어찌하든지 말로서 자기 속에 일어난 이 놀라운 영혼의 변화를 실토하지 아니하고는 살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예배당에서 인도를 마치고 걸어 내려오면서 하나님, 왜 우리는 일주일에 세 번만 예배를 드려야 됩니까? 내 안에 쏟아져 나오는 이 진리를 하나님 나 혼자 어떻게 부둥켜안고 살라고 일주일에 세 번밖에 설교할 기회를 안 주십니까? 마음 같아서는 내 마음속에 끌어 오르는 말씀들이 너무 많으니까 여러분 나를 위해서라도 매일 저녁 교회에 나오십시오. 하고 싶습니다. 어떤 때는 오! 주님 일주일이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옵니까? 그런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고 주의 놀라운 인격에 대한 체험이 있을 때 그것을 고백으로 토해놓지 않은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을 모두 토해놓고 살아가는 삶의 고백이 있는 사람은 그 고백에 확신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고백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은 말할 수 없어서 나는 말할 수 있는 고백,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새로운 고백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매일 새롭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사람입니다. 20년 전 고백을 지금도 얽어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왕년에 은혜 받은 것 자랑하는 사람치고 금년에 신통한 사람 하나도 못 만났습니다. 아침마다 주님의 은혜가 새로운 것처럼 그 은혜에 대한 체험이 우리에게 새로울 때 우리는 매일매일 미래를 향한 삶에 결단이 있고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말로 고백할 수 있는 신앙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앙의 비밀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렇게 진실한 말에 고백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미래에 삶에 어떤 결단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주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지식에서 새롭게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어떻게 살아야할지 아무 결단도 내릴 수 없고 아무런 자신도 가질 수 없다면 그 고백은 거짓말입니다. 과거에 하나님의 은혜는 오늘 우리의 고백을 가지고도 오늘 우리의 고백은 내일의 삶에 대한 결단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에 삶에 대한 모든 불안과 염려는 오늘 하나님 앞에 아침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성실하신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는 은혜 체험의 부재에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이 6절에서 두 토막으로 나누어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르리니” 고백하고 있는 미래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리고 하반부는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미래에 삶에 대한 결단인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은 미래의 삶을 확증할 수 없습니다. 미래에 확신이 있는 사람은 그러나 미래에 삶의 대해서 확증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인은 먼저 우리에게 말합니다. “나의 평생에” 히브리어 성경에는 “나의 생명의 날 동안에” 되어 있습니다. “나의 생명의 날 동안에 하나님의 선과 헷세드가 영원히 나를 추격하고야 말리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선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나의 사는 날 동안에 시인이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불안은 죽음 이후의 불안이 아니라 살아있는 날 동안에 불안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죽음 이후에 대한 불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정말 믿는지 괜히 말로 그러는지 모르지만 신앙생활을 엉망으로 하면서도 천국에 갈 것을 믿는가 물어보면 모두 큰소리로 아멘을 외칩니다. 문제는 살아있는 날 동안에 우리들은 살아있는 날 동안에 우리의 확신 없는 삶과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분명하지 못한 태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고통을 경험합니다.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가지고 염려하는 기간도 살아있는 동안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입고 먹을 것 가지고 염려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살아있는 날 동안에 우리들은 그 염려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을 보라” 말씀하실 때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무로 잘 깎아놓은 목상이나 혹은 죽어서 박제가 된 새를 가리키면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살아서 공중을 나는 새 그리고 살아서 꽃피우고 잎사귀를 내는 풀을 보면서 말씀하셨을까요? 이게 바로 우리의 염려가 살아있는 인생의 날 동안에 집중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세상에 살아있으면서 영원한 미래. 죽음 이후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염려하는 사람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오늘 성경은 나의 생명 있는 날 동안에 바로, 여러분, 나의 평생이라고 말합니다. 평생에 시인이 다 살았습니까? 살기는 뭘 다 살기는 살아요. 몇 살에 이 시를 썼는지 모르지만 말년에 썼다고 할지라도 아직 얼마나 더 살지 기약도 없는 인생의 기간이 남아있습니다. 앞에서는 살아봤습니다. 살아봤으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도와주셨다. 하나님이 나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건져주셨다. 나를 공급해주셨다. 그리고 나에게 기름을 부으셨다. 말할 수 있지만 아직 살지 못한 날들은 자기가 경험한 날이 아닙니다. 경험하지 못한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허락하신 인생길을 돌아볼 때 하나님이 자기의 인생을 놀라운 은혜로 인도해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인격적으로 그 하나님 앞에 승복되었습니다. 이제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단지 보좌에 앉아서 백성들을 다스리고 기름진 음식으로 배부르며 백성들을 착취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절 받고 영광받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자기의 인생의 헌납증서에 서명하고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리고는 이 시인이 그렇게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확신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모두 하나님 앞에 의탁하고 목자 되신 하나님의 목양의 그늘아래서 살아가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을 때 놀라운 확신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염려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껏 까지 자기를 인도해 오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가 앞으로도 결코 자기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고 시련 가운데 좌절하여 쓰러지도록 원수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도록 버려두시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 그의 심령을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문제는 미래의 문제만 아니라 오늘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은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히브리어 성경에는 “추격하고야 말리니” 미사일 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신기합니다. 휙! 하고 비행기가 날아가는데 미사일을 펑! 쏘면 미사일이 총알이 똑바로 나가는데 이 미사일은 이렇게 날아가다가 비행기가 움직이면 또 쫓아갑니다. 움직이면 또 쫓아갑니다. 거리가 좁혀지다가 결국은 그 비행기와 만나서 장엄한 폭발을 일으킵니다.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미래에 자기의 인생을 이렇게 추격하고야 말리라는 것입니다. 시인이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승복하고 나니까 이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찾아다니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그 은혜를 달라고 구걸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자기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기필코 자기를 추격해서 자기의 인생을 사로잡고야 말리라는 불같은 확신에 사로잡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선입니다.
히브리어말로 “토브”라고 되어있는 이 선은 여러분, 창세기 1장에서부터 등장하는 선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날짜마다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좋았더라.”에 쓰여진 단어가 오늘 바로 여기 시편 23편 마지막 절에 기록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이 자기를 추격하리라고 할 때 이 선은 사람이 볼 때 선하고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선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인간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다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꼭 다르지만도 않습니다. 문제는 선하게 생각하는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속으로 들어가서 그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가 고도로 신령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가깝게 다가갔다면 하나님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을 자기도 선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여전히 세속에 속한 육에 속한 신자라고 할 것 같으면 그가 생각하는 선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악일 수 있겠고 하나님에게 있어서 선은 자기에게 있어서 고통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질문하나 해볼까요? 오늘은 어디입니까? 샤론 성가대, 대답을 안 하십니까? 큰 소리로 대답해보세요. 일치하지 않아도 되니까. 오늘은 정답이 없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시면 인생이 행복할 것 같습니까, 불행할 것 같습니까? 성가대 지휘자님이 대표로 대답해보십시오. 우리가 해달라는 대로 무조건 하나님이 그래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 우리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시면 우리가 행복해질 것 같습니까, 불행해질 것 같습니까? 불행해질 것 같지요.
어렸을 때 저희 고모집 식구와 같이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고종사촌 동생이 되는데 워낙 차이가 많이 나는데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였는데 그 애는 이제 태어나서 기어 다니며 온갖 말썽 다부리고 화장대 다 엎는 그런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구정이었는데 그때는 떡을 해도 엄청 많이 했습니다. 온 집안 식구들이 방안에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우며 떡을 썰고 있었습니다. 한 두 살쯤 되었을까 요놈이 울고불고 엄마에게 그 칼을 한번 자기도 잡아보겠다고 때를 쓰는데 주었을까요, 안 주었을까요? 나중에는 하다가 안 되니까 할머니에게 매달려서 저것 좀 달라고 하는데 안 되니까 벌렁 드러누워서 울고불고 난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참 일이 일어나려니까 이상한 일이 일어났는데 아니, 한사람 두 사람 밖으로 나가더니 다 빠져나갔습니다. 그런데 애만 혼자 거기에 남아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조금 있다가 비명소리가 들려 가보니까 아이가 그 잘 드는 칼로 떡을 안 썰고 손을 썰었습니다. 아니, 남은 피가 나는데 웃음이 나옵니까. 그런데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울며 매달려도 안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이 다 나갔습니다. 살금살금 기어가서 칼자루에 손을 대고 칼을 움켜잡는 순간 이 아이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을 것입니다. 왜 아, 드디어 이 장난감을 내가 한번 만져보는구나. 어른 용이라지, 딱 잡았을 때 기뻤을까요, 안 기뻤을까요? 말할 수 없이 기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30초가 안갈 줄 누가 알겠습니까. 주님이 만약에 우리가 해달라는 대로 논리적인 연결도 없이 그래 너희 마음대로 하라고 계속 달라는 대로 주시면 우리의 인생은 불행하다 못해 저주스러운 인생이 될 것입니다.
참, 이 세상에 피조물 중에 인간만큼 어리석은 피조물도 없습니다. 여름 수련회를 가면 전기등을 켜놓습니다. 거기는 몇 만 볼트가 흐릅니다. 짝! 하고 나방이 날라들면 부지직! 하고 타죽습니다. 자기 동료들이 수없이 타죽는데도 그 불빛을 보고 수없이 날아가서 죽는 것입니다. 비참합니다. 인간이 꼭 그와 같습니다.
여러분,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며 우리가 그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드려야 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 춤추는 대로 장단을 맞추어 주셔야합니까?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포기하기 싫은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일은 내가 저질러도 하나님은 뒷감당해주시고 사고 치면 주님이 다 물어주시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지 내 인생에서 발 빼실 수 없고 모든지 내 인생의 선도권은 내가 쥐고 내가 빨리 춤추면 주님의 장단이 빨라지고 느리게 추면 굿거리장단으로 때려주시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인생의 심사가 이해가 안 간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축복받기를 원하고 자기의 인생에 호응을 받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우리에게 선한 것이 하나님에게도 선한 것이고 그래서 내 인생이 성공할 때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내 인생이 힘이 나고 그래서 주님이 아파할 때 나도 충성스럽게 아파하고 내가 좌절할 때 주님도 아파하시면서 힘주시고 이런 삶을 살아야지 이게 동행하는 삶이 아닙니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인상을 그리면서 아무리 진지하게 예배에 참석해도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의 전부가 코미디가 되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는 성경에 있는 하나님에 관한 내용을 전달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용을 전달해줄 뿐만 아니라 설교를 통해서 본문 속에 숨 쉬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설교를 토씨하나 빼놓지 않고 기억해도 설교자의 마음속에 불타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나누어받고 돌아가지 못하면 그것은 헛것입니다.
제가 만들어낸 예화인데 이점에 있어서 여러분의 이해를 놀랍도록 정확하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부모들은 자나 깨나 걱정이 애들 공부가 아닙니까? 하여튼 참 신앙보다 공부를 더 염려를 합니다. 어떻든지 간에 염려를 합니다. 고등학교 다니는 딸애를 둔 아빠가 있었습니다. 늘 이 딸이 공부 잘하고 착실한 요조숙녀가 되게 해달라고 신앙 좋은 그런 자매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고 1까지는 괜찮게 나갔는데 반에서 그래도 몇 등 하면서 턱걸이도 했는데 2학년 올라가면서 땅바닥에 질질 끄는 힙합바지나 입고 다니려고 하고 도저히 눈꼴사나워서 볼 수가 없는데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니까 사춘기라고, 참고 참아도 도가 지나칩니다. 공부는 안 하고 매일 친구들하고 놀러나 다니고 TV중계방송이나 보면서 오빠, 오빠 이러기나 하고 가끔 TV에도 나오고 괴롭기 짝이 없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기도를 해도 안 되고 이제 드디어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이 되었습니다. 이상하게 겨울방학이 가까이오자 이 딸이 이상해서 살며시 그 방을 들여다보면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뭔가 창밖을 쳐다보면서 푸념에 잠깁니다. 어떻습니까? 그럴 듯 합니까?
아빠의 마음에 왠지 이 딸이 상념에 잠기는 것이 좋은 조짐처럼 느껴집니다. 아 애가 드디어 자숙하기 시작하는구나. 그렇지, 이제 고2학년 이 중요한 시기를 탱탱거리고 놀고 네가 생각에 안 잠기면 이 애비의 딸이 아니지. 그런데 횟수가 점점 늡니다. 이쪽으로도, 아, 그러더니 겨울방학이 다가온 어느 날 출근하기 위해서 가방을 들고 나가는데 아빠, 실로 얼마 만에 들어본 목소리인지 자기가 쳐다보면 늘 슬슬 피하던 애가 오늘은 다가와서 아빠 웬일이니? 아빠 오늘 일찍 들어오실 수 있습니까? 왜? 제가 아빠에게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너무 즐거워서 드디어 뭔가를 깨달았구나. 그럼 아빠 오늘 약속 있다고 그러시지 않았어요. 아니 그 까짓 것 취소하면 되지. 그래요 아빠 일찍 들어오세요. 제가 아버지께 꼭 말씀드릴게 있어요.
그래서 이제 부랴부랴 직장을 끝내고 돌아오면서 수많은 생각이 사로잡혔습니다. ‘애가 이제야 뭔가를 생각했구나. 그래. 우리가 먹고 사는데 골몰하는데 하나밖에 없는 딸애를 신경을 너무 못썼어. 그래 네가 일 년 남았으니까 이 아빠가 무슨 짓을 해서도 너를 밀어주마. 학원비를 달라고 하면 적금이라도 깨서 내가 한 달에 50만원씩 학원비를 주마. 연수가 필요하다면 그것도 보내주고’ 별 생각을 다하면서 딸애가 회개할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저녁상을 물리고 둘이 마주앉았습니다. 아빠, 왜? 제가 이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려고 수없이 밤잠을 안자고 고민했는데 결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빠의 마음의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그럼, 그런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해쳐나갈 수 있겠는가.’ 속으로 그런 것입니다. 아빠 이것은 아빠가 결정해주셔야 합니다. 아빠는 속으로 ‘그럼 네가 내 딸인데 결정해주고말고 네가 공부하겠다는데 뭐 결정할 게 또 있겠는가.’ 뜸을 얼마나 들이는지 그런데 아빠, 이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 말해봐라. 그런데 아빠, 도저히 저는 성숙하지 못해 결정할 수 없습니다. 알았다니까 말해봐라. 아빠, 그런데 이것은 정말 아빠가 가장 좋은 길이 무엇인지를 저에게 보여주셔야 됩니다. 알았다니까. 그만 말 좀 해봐라. 그럼 아빠 말하겠습니다. 아빠 올 겨울에 겨울방학이 길잖아요. 길지, 이 긴 겨울방학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요? 아빠가 드디어 핵심을 말하는구나. 그 다음에 딸이 하는 말이 아빠,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요? 한 달 내내 스키장에 가서 놀까요, 디스코텍에 가서 춤을 출까요? 그러면 아빠가 그때부터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둘 중의 어느 것을 시켜줄까? 그러겠어요. 에이, 얼마나 진지합니까. 이러고 두 달을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마음에 무슨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는 이 딸이 읽어 내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코미디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그런 대화가 많이 나옵니다. 너희는 나를 버렸다. 아니, 하나님 우리가 언제 버렸습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막 와서 정결하게 예배를 드리고 제사를 지내고 온갖 폼을 잡는데 하늘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대로 해라. 여러분, 순간순간 하나님을 향해서 갸륵한 마음을 갖는 것도 귀합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을 향해서 착한 마음을 갖는 것도 귀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을 내 선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나무 두 그루가 서있었습니다. 어느 날 왠 무지막지한 사람들이 쫓아오더니 도끼로 패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놈이 와서 다리를 자르는 것입니다. 쿵쿵! 하더니 하도 맞아서 까무러쳤습니다. 옆에 있던 친구나무하고 찍혀서 질질 끌려서 내려왔습니다. 그러더니 동강동강 톱으로 잘랐습니다. 그래서 친구하고 자기하고 이렇게, 그런데 친구는 도끼 한번 맞더니 짝 쪼개졌습니다. 그러더니 또 쪼갠 것을 가지고 그냥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양지바른 곳에 나란히 펴났습니다. 말리는 것입니다. 나도 이제 저 도끼 한번 맞으면 끝나겠구나. 웬 걸! 도끼로 몇 번 툭 치더니 옆으로 뉘어놓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껍질을 벗기기 시작합니다. 웬 칼을 가지고 와서 껍데기 붙어있는 것을 다 떼는 것입니다. 살갖을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픔에 이 나무는 두 번째 졸도를 해했습니다.
눈을 떠보니까 물속입니다. 어라. 소금물속에 집어넣고 푹 담가놓는 것입니다. 그러니 매워서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며칠 지나고 나니까 도로 꺼내서 뜨거운 태양 볕에 말리더니 그늘로 가져가서 말립니다. 다 까진 살갓에 소금기가 배어들어서 자지러질 것처럼 아픈데 며칠 지나고 나니까 작업실에 들어가더니 와! 여기는 정형외과도 아니고 별 이상한기구가 다 있었습니다. 구멍 파는 것, 뚫는 것, 쪼개는 것, 자르는 것, 찌르는 것 별것 다 있는데 자기를 고문하기 위한 도구들이 죽 있는데 하나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구멍으로 뚫고, 어떤 때는 파고, 어떤 때는 망치로 두들기고, 칼로 자르고, 난리를 칩니다. 세 번째 졸도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끝났나보다 했더니 웬걸 세워놓더니 세상에 이런 수고는 처음 봤습니다. 모래가 더덕더덕 배긴 수건으로 마구 문지르기 시작합니다. 알고 보니까 그게 사포라니, 와! 이제는 끝났겠나 했더니 이제는 라이터로 훅! 키더니 펄펄 붓는 불을 갖고 와서 자기에게 막 들이대며 굽는 것입니다. 세 번째 졸도했습니다. 아! 네 번째 그런 것은 또 잘 아십니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나 지났는지 눈을 뜨니까 꿈결인지 현실인지 귓가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눈을 살포시 떠보니까 뭔가 분명히 보이지는 않는데 하여튼 자기가 찬란한 조명을 받고 유리그릇 속에 앉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눈을 떠보니까 새카맣게 사람들이 모여서 입을 벌리면서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를 쳐다봅니다. 자기에게 종이와 명패가 하나 놓여있는데 뭔가 보니까 ‘손님 여러분께 알립니다. 대가의 명품이니 손대지 마십시오.’
여러분,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은 큰 계획 이미 3절을 하면서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어서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게 하고 싶어 하시는 그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일 때 주님의 선이 내 선이 되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선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가장 찬송해야 될 시간에 원망하고 그리고 깊이 엎드려야 할 시간에 좋다고 웃고 히히덕거리며 살아가는 이상한 코미디를 연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선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이 애통해하시는 자리에서 주님처럼 눈물 흘릴 줄 아는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슬퍼하고 한숨 쉬며 괴로워할 때 오히려 하늘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인생을 낙관할 수 있는 달관의 지혜를 가지고 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모두 울어야할 때 웃을 수 있게 만드는 것도 이런 선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모두 바울의 소망이 끊어졌다고 말할 때 오히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인하여 찬송과 영광을 돌리며 인생의 길을 걸어가게 만들어주는 것도 하나님의 이 선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선을 받아들이며 사는 삶을 가리켜서 불꽃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제가 불꽃처럼 쓰고 나니까 출판사에 갔는데 거기에 있는 편집부장이라는 사람이 익살을 떠십니다. 사장이 걸어 나오니까 악수를 하려고 하니까 사장님, 김목사님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깜짝 놀랐습니다. 왜 뎁니다. 불꽃처럼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이 특정한 성직자의 삶이 아닙니다. 불꽃처럼 사는 것이 아니면 그는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있다가 가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모두 산 것이 아니고 죽은 사람이 모두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을 따라 살다 믿음을 따라 죽은 사람은 죽었으나 오히려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고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살았으나 죽었다고 말합니다. 사데 교회를 향해서 주님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마음과 같은 심정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고 또 교회를 바라보고 또 나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을 받아들이고 불꽃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런 선을 받아들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뭔가 어려움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도와주십시오. 주실 줄 믿습니다. 쌍시옷을 수없이 발음하면서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심지어는 이루어주실 줄 믿사옵나이다. 하면서 일종의 뇌물의 심리가 깃들어있는 헌금까지 했는데도 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때는 여러분, 그런 것 가지고 안 되는 사실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총체적인 시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왜 내가 믿으면서 그리고 굳게 확신하며 그렇게 되리라고 믿고 기도하는데도 왜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그것은 뭔가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태까지 자기의 삶의 상황을 보던 인식을 완전히 한번 뒤바꾸어보십시오. 뒤집어보십시오. 내가 지금 나의 삶의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이것이 정말 하나님이 보시는 각도인가.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의 열심만 구하지 말고 아울러 지혜를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기도 가운데 어찌하든지 하나님이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기 전에 제가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드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해보십시오. 어떤 때 놀랍게 기도의 제목이 바뀌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선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렇게 사십시오. 그것이 자기를 추격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정말 우리 이런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제일 처음 책을 쓸 때 숲속에 들어가서 썼는데 막 사로잡혔습니다. 감격하면서 혼자 글 쓰다가 엎드려 울고 울다가 책을 쓰고 하루에 원고지 170매씩 썼습니다. 언젠가 두드리던 워드프로세스를 덮어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시려고 너무 많이 마음 쓰지 마시옵소서, 우리는 제 명대로 살다가 죽도록 내버려두시고 하나님, 주님의 선하신 뜻을 온전히 우리의 인생을 통해 이루어주시옵소서. 이게 인격적인 승복의 감격을 아는 그런 신앙 속에서 우리의 마음의 기도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선을 받아들이면서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무런 갈등도 없이 주님이 아파하시는 그 문제를 해결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 한길로 매진하기 하기 위해서 살면 모든 선조들의 피와 땀과 눈물은 모일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우렁찬 진군소리와 함께 확장되어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 울산교회 성도들만 모두 줄서서 장엄한 하나님의 나라의 군사로서 이 울산시를 한번만 밟고 지나간다면 어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까요? 할렐루야!
이어서 시인은 “인자하심이 나를 따르리니” 라고 말합니다. 이 인자하심이 여러분들은 잘 모르실 것입니다. 히브리어성경에 “헷세드”라고 나와 있는 단어는 여러분들에게 생소하지만 이것은 희랍어로 바꾸면 여러분이 잘 아는 “아가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가페가 정녕 나를 따르리니”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을 향해 하나님의 그 목 매이는 사랑,
여러분, 저는 요즘 하나님이 하늘에서 너무 많은 은혜를 주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아니고 사랑에 대한 많은 깨달음을 주십니다. 그런데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또 깨닫는 것은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거의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그 중에 일부를 말씀드리면 이런 것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제가 지금 써먹는데 오늘 집에 가서 예수 안 믿는 남편, 손을 꼭 잡고 여보, 눈감아봐. 그리고 말하십시오. 사랑은 이름 석 자만 불러도 그 이름이 내 가슴에 설음이 되어서 눈물이 되게 하는 것, 그게 사랑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라고 하는 18세기 미국의 대 각성의 도구로 쓰임 받았던 목사님이십니다. 그는 자기의 고백 속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크게 만져주고 가신 후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성경을 읽거나 책을 읽다가 혹은 대화중에 하나님, 이 한마디만 들어도 눈물이 왈칵 쏟아 졌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나를 사랑하심, 이런 말 한마디만 들어도 자기의 가슴이 물같이 녹았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감격하겠습니까. 여보, 나는 당신의 이름 석 자만 부르면 그 이름이 내 마음에 설음이 되어 언제나 그 이름 석 자가 내 마음에 눈물이 고이게 하는구려. 이렇게 하면서 전도를 해야지, 그런데 그 사람보다 더 진한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분이 계셔, 누군데? 우리 하나님 아버지, 그래야 남편이 예수를 믿게 될 것이 아닙니까. 인생아, 교회도 안 다니고 어구, 지겨워, 누구 집 아빠는 교회도 잘 다닌다던데, 가서 졸기는 하지만. 그러니 남편이 아내인 여러분들에게 인격적인 승복이 안 됩니다. 좀 감동을 주십시오. 샤론 성가대 믿습니까? 이미 충분히 감동을 시켰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의 감동이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 사랑, 얼마나 좋습니까.
예수 예수 예수 내 마음을 녹이셨네
예수 예수 예수 내 마음을 녹이셨네
난 말입니다.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협박에 못 이겨서 예수 믿게 된 사람들 거의 못 만났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날 예수 앞에 나와서 나를 죄인이라고 고백하기 전에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옥의 불길 가운데 고통 받아 마땅한 인생이지만 나 같은 죄인을 건지심으로 자기의 고귀한 옥체를 깨트리셔서 휘장을 찢으시고 피를 쏟으셔서 보좌 앞에 이르는 핏 길을 열어주셔서 공로 없는 죄인이 맨발로 그 길을 걸어 엄위로우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해주신 이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게 되었을 때 내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이 좋은 사랑을 내가 거절하면 어디에 가서도 이런 사랑을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나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했고 여러분보고 그 사랑에 매인바 되어서 오늘날까지 어찌하든지 주님이 우리를 불러서 애쓰면서 여기까지 걸어오지 않았습니까?
세상에 누가 우리를 이렇게 변함없는 사랑으로 사랑해주셨습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주님밖에 누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해줄 분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 사랑을 등지며 살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그래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정말 이 사랑을 등지고 살아갈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으면 한번 가보라. 비록 천사처럼 온전한 삶은 못 살아도 우리는 그런 사랑 떠나서 살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때때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이 모습 이대로 받아달라고 애원하며 하나님 앞에 새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껏 무엇으로 우리가 살았습니까? 우리는 사랑을 먹으며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값없이 베풀어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에게는 우리의 이름 석 자가 서러움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은 마음아파 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이름 석 자가 하나님의 마음에는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호세아서 11장에서 하나님은 범죄하고 하나님을 등진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마음에 불붙는 사랑을 알아달라고 하나님은 호소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무나 사랑이 진한 나머지 그 사랑의 마음이 고통이 되고 병이 되도록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심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해서도 그런 아가페의 사랑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주판을 두드리셨다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후회하시고 모두 폐기처분해버리거나 공개처분 해버리고 이 구원사역에서 손 떼시고 정리하시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이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그렇게 계산으로 처리해버리실 수 없는 불붙는 아가페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이 우리의 허물을 능가하고 그 사랑이 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끄려했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면서도 진멸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참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이름을 부르며 눈물겨운 설음에 겨운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알고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렇게 생사 간에 주님밖에 위로가 없는 것을 고백하며 순간순간 우리의 무딘 마음과 정신과 우리의 온 삶이 오로지 하나님의 것이 되기를 힘쓰며 그렇게 살아간다면 이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아가페를 받은 사람의 앞에 놓여있는 유일한 선택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우리가 먼저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그가 우리를 사랑하여 자기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로 삼으셨습니다.
영광가운데 천군과 천사의 경배를 받으며 홀로 영원히 그 자체의 영광을 이루셔야만 했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낮고 천한 이 땅에 내려오신 것도 사랑이 시킨 것이었습니다. 온 땅에 창조하신 그분이 이 세상에 (?)든 것처럼 낮고 천한 구유위에 뉘이신 것도 사랑이 시킨 것이었습니다. 불순종과 죄 가운데 고통 하는 수많은 흉악한 죄인들을 바라보시며 슬퍼하시고 통곡하셨던 것도 사랑이 시킨 것이었으니 일평생 사셨지만 아무 것도 주님이 자기의 것이라고 챙겨두신 것이 없었습니다. 그분이 가지고 있는 것은 다 우리 것이었습니다. 그 수욕된 십자가를 지신 것도 사랑이 시킨 것이었습니다.
사랑이 구주를 죽게했네 왜 날 사랑하나
주 용서하실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사랑은 주님을 죽게 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처럼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주신 것을 주신 주님을 원망하고 감사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 높고 높은 별을 넘어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만약에 외치며 자랑한다면 우리의 목구멍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도록 외쳐도 그 사랑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으며 바다에 먹을 뿌려 창공에 두루마리 삼아 글을 써도 우리가 어떻게 그 사랑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입니까? 남이 알지 못한 이 사랑을 안 사람들입니다.
시인은 오늘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를 인도해온 것처럼 또 앞으로 인생도 이 사랑이 자기를 인도할 것이라고 하는, 아니 추격할 것이라고 하는 확신에 불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랑의 추격은 시인에게만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사랑의 장을 썼던 고린도 전서 13장에 사도 바울이 같은 고린도서에서 감격어린 목소리로 사랑의 사도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을 우리에게 합니다.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치 않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찌니라.” 얼마나 그 사도의 가슴속에 이 목 매이는 하나님의 사랑,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울먹이는 아버지 하나님의 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이 영혼 깊이 밀려들었으면 사랑의 사도가 사랑 장에 쓴지 몇 시간도 안 되어서 저주를 선언하면서 주님을 사랑하도록 권면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될 사람입니다. 우리의 자랑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수고와 슬픔이 이제 우리는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자랑은 우리 일평생 변함없이 넘어지고 엎드려지면서도 늘 일어나서 한번만 사랑하여 살려고 하였던 그 마음을 환경이 좌절시킬 수 없었던 소원, 수많은 사람이 스쳐갔고 다양한 환경을 살아왔지만 일관된 소망, 주님만 사랑하고 그리고 아버지만을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싶어 하던 이 진실한 마음의 사랑만 남는 것입니다. 믿음도 끝나고 그리고 소망도 성취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죽음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갈라놓을 수 없다는 고백이 있는 사람들은 삶 속에서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며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인 것입니다. 세상이 다 지나고 정욕도 지나갑니다. 우리를 가슴 아프게 했던 수많은 인연도 끊어지고 오늘 우리의 가슴속에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조차 남기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점령해버린 세상의 염려와 근심, 그리고 거기로부터 비롯된 모든 기도의 제목들이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을 날이 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모든 것이 사라져도 끝까지 남는 것이 있습니다. 죽음이 갈라놓을 수 없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사망에게 삼킨바 될 수 없는 좋으신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
시인은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선은 자기의 선으로 받아들이고 그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는 것을 본받아서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주님이 사랑하는 보람으로 일생을 살겠다는 거룩한 결단의 의지가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어떻게 살아야지만 죽음이 흰 이빨을 드러내고 우리를 삼키기 위해서 다가올 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죽음의 파도를 잠잠히 잠재우며 우리의 삶의 목표이고 우리의 생전에 유일한 이유이셨던 우리 사랑의 대상이신 주님께 고요히 나아가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주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면서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드디어 마지막 미래의 삶을 향한 결단을 보게 됩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 싱거운 성경구절이 어떻게 이 장엄한 23편에 어울리는 마지막 성경구절이 될 수 있는지는 성경에 나타난 여호와의 집 신앙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됩니다. 우리가 지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같은 것은 아니지만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똑같은 생각으로 여호와와 여호와의 집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이 6절 하반부의 말씀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기만 해도 수많은 신앙의 실패들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교회를 사람들이 얼마나 잘 옮겨 다니고 철새처럼 돌아다니는지 한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은 교회를 옮기는 것을 헬스클럽 옮기는 것만큼이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어느 날 찾아와서 말합니다. 목사님, 이번 주가 끝입니다. 왜요? 이제는 교회를 더 이상 못 나오게 되었습니다. 왜요? 다음 주에 이사 갑니다. 여러분, 이사 가는 것이 교회를 옮기는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은 어디에 시작된 것입니까? 목사님, 이번 달까지만 이 교회 출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요? 주님이 저에게 새로운 교회를 주셨습니다. 집도 거기로 옮겼습니다. 왜 아멘안 하십니까? 아멘! 아니, 잘 안하시네. 서울에서는 잘 하시던데. 요즘은 서울에 있는 강북의 목회자들은 맥이 빠져있습니다. 모두 강남으로 아파트가 당첨되어있어서 다 간다는 것입니다. 아파트 옆에 있는 교회는 어떤가. 이사 왔기 때문에 어차피 하나 골라잡아야하는 성도들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까. 우리는 왜 지금 여러분들이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무모한 도전을 여러분들이 하는지 오늘 한번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구약에서 하나님의 집 신앙, 다시 말하면 성전신앙,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독특한 신앙이었습니다. 물론 다윗 때는 아직 성전 건축되기 전입니다. 성막의 상태인데 성막이든 성전이든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동식 성전을 짓도록 명령하십니다. 그리고는 이제 광야생활로 들어가게 됩니다. 광야생활로 들어갈 때 늘 가지고 다니는 것이 성전을 세우는 도구였습니다. 그리고 그 도구들을 가지고 가서 성막을 먼저 설치합니다. 성막에 가운데 있고 그 다음에 열두 지파들이 주위에 진을 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300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진하거나 유숙하는 광경을 여러분들이 헬기를 타고 내려 본다고 합시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수많은 텐트들이 펴져있는데 그 한가운데 색깔이 다른 하얀 천으로 울타리를 두른 그런 성막이 눈에 띄는 것입니다. 어디에 가든지 그 진을 치는 모습이 바뀌지를 않았습니다. 계속 그 상태로 이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으로 들어와서는 이제 고정된 자리에 성막을 갖게 됩니다. 거기 성막에 수종드는 사람들이 있고 이제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후일에 이제 많은 물자들을 준비해놓은 다윗의 헌신에 힘입어서 영광스러운 솔로몬의 성전이 지어지게 되는데 거기에 들어간 금만 2.5톤 트럭으로 80대분이 있다고 하니까 그 성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어느 목사님이 계산을 했는데 지금 시가로 90조 원 어치의 금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런 영광스러운 성전이 서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디로 가든지 그 성전이 자신들의 삶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성막으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은 단지 제사 드리기만 위해서 나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배드리기 위해서 교회에 나온다고 생각하니까 아무데나 가는 것입니다. 지하실 교회는 기관지에 안 좋아서 안 되고, 작은 교회는 건축헌금 할까봐 부담되고, 큰 교회는 또 교육관 지을까봐 안 되고 이리저리 다 자르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편의가 중요한 교회생활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풍성한 영적인 생활이 있다면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구약을 보면 결코 성전을 제사 드리기만 위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수없이 증거가 많이 있지만 예를 들어봅시다. 한명은 성막에서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취한 사람처럼 그렇게 정신없이 자기의 시름을 토해놓았는데 어마어마한 영광스러운 일들을 위해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첩한테 무시당하는 것이 너무 괴롭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었습니다. 올라왔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외적이 침입했을 때 굴욕적인 외교문서를 가지고 성전에 올라가서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했습니다. 국가적인 위기를 만났을 때입니다. 시편73편의 저자는 뭔가를 깨닫지 못해서 혼미한 상태가 되었을 때 성전을 찾아서 해결을 받았습니다. 이루 헤아릴 수없이 잡다한 이유, 다양한 사연을 안고 백성들은 하나님의 전을 찾았고 그 전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해결을 받는 영광스러운 간증들을 소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성전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이 신약에 시대에 왔다고 해서 단절된 것이 아닙니다. 제사의 개념 같은 것들은 물러갔지만 그러나 그런 성전신앙이 대부분이 옮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은 너무나 무시하는 것 같습니다. 철새는 날아갔다가 다시 돌아오지만 철새교인들은 메뚜기처럼 이리저리 설교를 주워 먹으며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피폐해 가는지 본인들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편리한 것이 다 좋은 것이 아니고 힘든 것이 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도 신앙생활이 있어서 교회는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언젠가 하나님 앞에 놀라운 은혜를 받고 말할 수 없는 기쁨 속에서 이 충만한 나날들을 보낸 적이 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몸담았던 교회가 있을 것입니다. 교회도 안 나가고 이리저리 유리방황하면서 말할 수 있는 기쁨을 맛보고 있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우리에게 있어서 안식처였습니다.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그 교회에 와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위로받고 그렇게 살아온 교회가 우리의 기억 속에 분명히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교회에서 우리를 만나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교회와 결탁된 삶을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사랑하시다가 커다란 위기를 만났을 때 여러분은 어디를 찾으십니까? 커다란 어려움을 만났을 때 여러분들이 찾는 곳은 어디입니까?
우리는 어려움의 예를 들지 말고 쉬운 예를 듭시다. 여러분들이 늘 경험하는 예를 들어봅시다. 오늘 우리 아들이 대학시험을 치르러갔는데 하나님 그 아들을 합격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어디에 와서 기도합니까? 교회 와서 기도합니다. 뜻밖에 남편의 사업이 위기에 부딪혔을 때 여러분들은 깨닫게 됩니다. 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나태한 신앙생활을 일깨우시려고 우리에게 이 어려움을 주시는구나. 어디에 나와서 용서를 빌며 하나님 도와달라고 기도합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남편이 그 어려운 경쟁을 뚫고 승진했다는 기쁜 소식이 들려올 때 여러분은 어디를 제일먼저 달려가시렵니까? 아마 여러분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라면 사람에게 먼저 그 기쁜 소식을 알리기 전에 하나님의 전에 나와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남편은 빽도 없고 누가 밀어줄 사람도 없고 뇌물을 바친 적도 없는데 늘 하나님의 은혜로 신앙생활을 하더니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람들 앞에서 높여주셨습니다. 하나님, 이 영광 주님 홀로 받으시옵소서.
딸애가 어려운 경쟁을 뚫고 훌륭한 회사에 취업했다고 하는 소식을 들을 때 여러분은 이 기쁜 소식을 누구에게 제일먼저 전하겠습니까? 오! 주님, 감사합니다. 날마다, 날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으니 모두들 대학을 졸업하고 실업자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는데 우리 딸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셔서 좋은 직장에 믿음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아프거나 병들고 시련을 만나거나 고난을 받을 때도 기쁜 날이나 괴로운 날이나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리의 모든 사정을 고백하며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우리는 교회 속에서 늘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회복하고야 말 것이라고 하는 불붙는 확신이 있어서 미래의 모든 염려를 떨쳐버린 사람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며 이 교회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그리고 이 속에서 하나님과의 축복된 만남을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좀 부실해도 교회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만들면 그 사람들은 언젠가 변화되고야맙니다. 이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입고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추억이 있습니다. 저는 한 교회에 다니면 한 8년, 5년, 7년 이렇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교회 안 옮겼습니다. 그런데 떠나온 교회는 잘 안 갑니다. 왜냐하면 새사람이 성도들을 데리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 부득이하게 교회를 방문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목사님이 돌아가셨다든지 또 큰일이 있다고 하면 방문을 합니다. 방문하면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충만한 삶을 살았던 그 교회당에는 들어설 때부터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아, 내가 여기에 또 왔구나. 본당으로 들어가는 그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하나님 앞에 은혜 받으면서 이 길을 걸어 나오던 나의 옛 모습이 생각납니다. 자주 앉았던 그 자리에 가서 앉아봅니다. 그리고 예나 다름없이 놓여있는 그 의자와 보면 대를 만져봅니다. 그래. 그 시절에 나는 여기에서 하나님을 만났지. 어두운 죄악 길에서 갈바를 모르고 방황하던 젊은이였는데 이곳에서 내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셔서 내 평생 사는 동안 어찌하든지 주님이 기뻐하시는 데로 살게 도와달라고 맹세하며 기도한 것이 바로 이곳이었어. 조용히 눈을 감으면 그때 들려오던 목사님의 카랑카랑한 설교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기도실로 내려갑니다. 아, 맞아. 여기에서 그 어린주일학교 영혼들과 고사리 같은 손을 부여안고 ‘예수 나를 위하여 세상 죄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당하셨네.’ 고사리 같은 손을 부여안고 예수 죽인 것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던 어린영혼들이 울부짖는 회개의 기도소리를 들었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눈을 감고 조용히 무릎을 꿇으면 지금도 그 어린 아이들이 애통하면서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사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그 추억이 떠오릅니다. 아, 그래. 이 골목길은 바로 내가 어린영혼들을 전도해서 데려온 골목길이고 이 앞자리가 바로 새 신자 석이었지. 그리고 이 강단이 바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곳이었고 여기서 외칠 때 누구도 회심하고 누구도 하나님을 만나서 지금은 시집장가를 가서 잘 살지. 여러분, 큰 교회면 어떻고 작은 교회면 어떻습니까. 대리석이 깔리지 않으면 어떻고 고급카펫이 깔려있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원목으로 만든 강대가 아니면 어떻고 고급 칠을 한 의자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그것은 거기에서 자기만 아는 사연을 간직한 채 예전처럼 거기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내 인생을 사로잡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이제 그 은혜의 사슬에 묶여서 이제 일평생 주님을 배반하고 살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나는 그 교회에서 확인했습니다. 하나님, 이 강대의 아랫자리가 바로 내가 매주 토요일 설교준비를 끝내고 와서 영혼들의 이름을 부르며 몸부림치던 그 자리입니다. 뜰 안에 있는 풀포기 하나, 굴러다니는 돌 하나도 무심하게 볼 수 없으니 왜냐하면 거기서 하나님을 만났고 그 참 사랑을 알았고 그리고 바로 거기서 하나님이 왜 나를 구원하셨는지를 깨달았고 거기서 하나님이 내가 어떻게 사는 것을 기뻐하시는지를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리고 교회당이 커도 작아도 그것과는 상관없이 사이사이를 지나고 가구 하나, 하나를 만질 때마다 가슴이 저미는 수많은 사연들이 귓전에 메아리치고 가슴에 울려 퍼집니다. 어떻게 그 성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요한 칼빈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교회를 어머니처럼 사랑하지 않는 신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말라. 저는 교회마다 그런 사연을 안으면서 그 세 교회를 옮겼습니다. 지금 다 헐고 다시 지은 교회들이지만 지금도 마음이 곤고하고 내가 앞으로 살아갈 결심이 흐려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옛날에 내가 충성했던 그 교회당을 생각합니다. 거기서 내 마음을 녹이셨던 하나님, 그리고 거기서 나를 사용하셔서 영혼을 바꾸셨던 하나님, 뒤돌아 회상하면 다시 한 번 내가 서있는 자리가 분명하고 어찌하든지 살든지 죽든지 이 시대의 조국교회와 함께 살고 죽는 것밖에는 내 삶에 아무 대안도 없고 기쁨도 없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작은 개척교회를 쳐다볼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 교회에서도, 저 지하교회에서도, 저 허름한 교회당에서도 이런 사연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도록 역사해주시옵소서. 1981년도의 일로 기억하는데 연도가 정확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예화) 기독교 신문에 실린 간증 내용: 전주에 있는 병원에서 일어난 소동인데 그 이유는 그 남자분이 시골에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목사님이 안 계신 공석인지라 당신 자신이 말씀을 인도하면서 사역을 하시지만 교회가 허술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려 어려운 형편으로 자신이 직접 벽돌을 찍어 교회를 지었지만 태풍이 몰아쳐 그 교회당이 다 부서져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리며 마음 아파하는 가운데 신문에 장기매매 광고를 보고 눈을 팔아서 교회를 지으려고 결심, 자신의 사정을 다 이야기를 하자 장로인 병원장이 감동을 받아 병원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내용을 전하고 헌금을 모으자 오백만이나 나와 다시 교회를 세웠는데 요즘같이 자기 편의대로 교회를 섬기는 사람이 많은 이때 그분의 교회를 향한 사랑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내용.
여러분,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목자로 모시고 인격적으로 승복하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사랑하는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 중에서 오늘 사랑하는 교회가 없는 분이 계시다면 여러분은 영적으로 가출한 분입니다. 잠시 가출했지만 사랑의 종소리가 울리면 이제 여러분들은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 교회에서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갔습니다.
자, 상상해봅시다. 젊었을 때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알고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참 신자가 되었으니 목사님에게 세례를 받고 그리고 잠시 후 좋은 자매를 만나서 그 교회당에서 목사님과 사랑하는 성도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얼마 지나고 나니까 다시 아이를 안고 와서 축복받으며 그 아이가 유아세례를 받는 장면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시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믿음생활을 해나가려고 애썼습니다. 때로는 실패할 때도 있었고 가끔 불순종할 때도 있었지만 그러나 늘 마음을 녹이던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 영광스러운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참 사랑을 깨달아서 변화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늘 하나님 앞에 회개의 눈물로 성령의 불로 죄와 허물을 태우며 주의 은혜를 힘입어서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살았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같이 하는 사랑하는 영적인 동기간들과 기쁨과 설음을 함께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어느덧 30대를 지나고 40대를 지납니다. 유아세례를 받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아이들이 점점 자라서 이제는 엄마 아빠 키보다 훨씬 커버린 것을 오늘날 발견합니다. 얼마 세월이 흐른 것 같지 않은데 이번에는 자기의 아들딸들이 그 교회당에서 목사님의 주례를 받으며 결혼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때 내가 안고 유아세례를 받았던 그 어린아이들이 이제는 자기의 자녀들을 안고 나와서 목사님에게 유아세례를 받는 장면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한 생명이 하나님께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늘에 천사들이 기뻐하는 것처럼 그렇게 서로 기뻐해서 어쩔 줄 모르고 누구 한 영혼이 실족했다고 그럴 때 함께 모여서 눈물로 기도하며 그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목 놓아 기도하며 구역이 부흥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왜 그렇게 교회당에 걸어가는 발걸음이 가벼운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교회에 큰 은혜와 변화를 주셨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날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날 같았습니다. 이따금씩 목사님이 바뀌는 경우는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성전에서 그렇게 하나님을 찬송하고 주님께 예배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곤고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내가 자녀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 이제 교회당에 오면 이미 중년이 되어버린 나의 자녀들이 나와 같은 믿음으로 자라가는 세대를 위해서 기도하고 교회에 영광스러운 부흥과 온 땅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우리교회 교인들이 어두운 세상에 불꽃처럼 살아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걸어가는 백성들이 되게 해달라고 결심을 새롭게 하는 광경을 날마다 봅니다.
일주일을 건조하게 살아가는 것 같아도 주일날 와서 하나님 앞에 찬송을 부를 때 그 찬송이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녹이는지 말입니다.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을 그 주일에 얻고 마음에 미워하던 사람들을 모두 용서하며 어깨를 두드려주고 그리고 연약한 자들을 돌보며 그렇게 인생을 살지 않습니까. 그렇게 은혜를 많이 받고 매일매일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예수 이름 찬송하고 힘닿는 대로 이웃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우리는 이 교회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됩니까? 죽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뭘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여러분 기대하십니까? 은혜 받고 그 은혜대로 주님 섬기며 주님을 찬송하고 순간순간 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불의한 세상에서 의의 길을 걸어가며 진리의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다가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즐거이 교제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출생 쪽에서 보면 멀리멀리 사라진 것 같지만 죽음 쪽에서 보면 우리는 죽음을 향해 다가오는 것입니다. 내가 분명한 예언하나 할까요? 70년 후에 여기서 만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아마 어린아이들은 있을지 모릅니다. 성인들 가운데는 70년 후에 다시 만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인생에 황혼이 깃들어서 이 땅에 수고가 끝날 때에
주님을 섬기다 평안히 가리라 사랑의 주 내 주님께
저는 말입니다. 제 인생의 기억의 맨 끝이 4살 때밖에 기억이 안 납니다. 그런데 그 시절에 제가 유치원을 다녔다는 것이 아닙니까? 놀라시지를 않네요. 제가 이제 유치원을 다녔다고 그러면 여러분들은 와! 그러셔야 합니다. 제가 유치원에 다녔다는 것이 아닙니까? 와! 그런데 사실 목사님도 아시겠지만 그 시절에 유치원 다닌다는 것이 지금 박사과정을 다니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것도 서울이 아니라 강원도에서, 그것도 관인 유치원에, 그런데 생각이 다 기억이 끊겨서 통일된 생각은 안 나고 그저 카트, 카트 생각이 나는데 교회당의 유치원이었는데 그 유치원에 불럭을 가지고 놀던 생각이 나고 선생님이나 친구들 얼굴은 기억이 안 나는데 그 불럭을 가지고 친구들과 함께 놀고 그리고 장난치던 생각이 그대로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거기에서 저는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유치원에서 일어나던 생각이 한두 가지가 다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생각이 납니다. 제가 자라온 그 고향은 너무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앞에는 큰 산이 있고 길가에는 하늘을 찌를 듯이 뻗어있는 미루나무가 있는데 여름이면 햇살을 받아서 그 미류나무가 반짝이는데 마치 수많은 은빛 고사리 손이 흔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뒤에는 맑은 개울이 흘러가고 그리고 그 건너편에는 다시 아름다운 동산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귀에다 토끼털 귀마개를 하고 그리고 건둥 거리고 뛰어다니는 동네 형들을 쫓아서 얼음을 지치고 팽이를 돌리고 연을 날리는 형의 모습이 너무나 신기해서 추운 줄도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며 논둑위에서 혹은 강가에서 겨울을 보내던 생각이 납니다. 꽁꽁 얼어있는 얼음 위를 걸으며 빠질까 안 빠질까, 형들과 함께 걸어가던 그런 생각도 납니다.
지금은 어딘가 살아있으면 이제 불혹의 나이도 지난 중년 부인이 되었겠지만 이름도 잊혀지고 얼굴도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는 개집아이 하나가 우리 뒷집에 살아서 늘 손잡고 함께 유치원에 다녔습니다. 아마 봄날로 기억됩니다. 유치원에서 마치고 걸어올 때 바로 집으로 오지 않고 누렇게 바랜 담장이 있는 유치원 그 뒷길을 걸어가면서 유치원 가방을 열고 거기에 풀인지 잡초인지 뜯어 담아서 우리 이것을 가지고 가서 엄마보고 떡을 해달라고 그러자. 하면서 그렇게 가방에다 이름 모를 풀들을 뜯어 담으면서 손을 잡고 버스 한 대가 지나가면 뽀얗게 먼지가 일어나는 그 신작로를 건너고 도랑을 건너서 집으로 돌아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눈 감으면 그 때 지나가던 버스 소리가 들리고 바람 불 때면 쏴 하고 흔들리는 미루나무 잎사귀들의 움직임이 들려옵니다. 유치원의 마루바닥의 색깔들도 생각이 나고 블록의 색깔들도 또렷이 기억이 납니다. 바로 지난주에 일어난 일인 것 같은 데 삼십 구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버렸습니다. 지금도 눈 감으면 재잘거리는 유치원 꼬마 친구들의 소리가 들릴 것 같고 뒤 개울에서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귀에 선한데 어떻게 그게 40년 전 일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느낌과는 상관없이 세월이 흘러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지난 세월만 속히 갈까요? 아니에요. 앞으로 남아있는 세월도 그렇게 속히 지나갈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 날을 기다리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매일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승복하며 어찌하든지 내 주되신 주를 사랑하고 그 예수를 위해서 살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거룩한 구원의 계획을 따라서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의 진실한 소원을 우리가 간직하고 살아가는 동안에 그 때에 우리는 겉 사람이 후패해도 우리는 거울을 보고 한 숨 쉴 일이 없습니다. 우리의 머리가 서리를 맞은 것처럼 하얀 백발로 바뀌어가도 우리의 마음속에는 주님을 만나 뵐 더 큰 기쁨과 소망이 우리 속에서 자라고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처럼 늘어나는 주름과 흰 머리를 보면서 한숨 쉬고 한탄하지 않을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곧 그에게 죄를 다 고하리라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내 평생에 힘쓸 그 큰 의무는 주예수의 덕을 늘 기리다가 숨질 때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자라나는 어린 세대들을 보면서 우리는 서서히 역사의 장에서 물러나는 것입니다. 장로의 직분도 물려주고 목사의 자리도 내어주고 집사의 직분도 물려주고 그러면서 우리는 서서히 역사의 뒷전으로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이 괴로움과 죄가 많은 세상 끝내고 너희는 이제 수고와 슬픔이 많은 세상을 이별하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예비한 영원한 안식으로 돌아오라 말씀하실 때 우리가 그 부름을 받으면 교회에서는 우리를 위한 장례를 거행할 것입니다. 목회자의 품에서 마지막 사랑하는 교우들에게 믿음을 따라 살라고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신앙을 떠나서 살지 말라고 당부하고 난 후에 숨을 거둘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을 세상은 기억해 주는 이는 없지만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온 한 성도가 죽었을 때 그는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죽음을 통해서도 하고 죽습니다. 마지막 자신의 죽음을 사용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교회에 알리고 자신의 장례를 통해서라도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사랑하는 교우들에게 알리고 그렇게 정들었던 예배당을 늘 눈물로 예배드리고 영혼에서 나오는 노래로 성도들과 아울러 찬송하던 그 교회당을 떠나서 이제는 부활의 명령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는 그날까지 잠시 묻힐 장지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 때 사랑하는 교우들에 의해서 정들었던 교회당에서 마지막 작별 예배를 드리고 그가 운구 되어 떠날 때 수많은 우리의 후손들은 우리의 주검에 도열하여 뜨겁게 흐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훔치며 맹세할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도 저 분처럼 살다가 죽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도 저분처럼 목자를 모시고 변함없이 주의 복음을 자랑하며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이 교회를 위하여 저분처럼 충성하다가 영광스러운 날에 주님 뵈올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잠시 부활의 나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머물 장지를 향해 떠나는 것입니다. 땅에서는 무명의 한 성도가 죽었으나 바로 그 날이 천국에서는 국경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주님을 목자로 모시며 믿음을 따라 살던 무명의 한 성도를 받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좌에서 일어나신 날이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천군 천사들의 손에 이끌려 정들었던 교회당을 떠나면서 땅 아래를 내려다 볼 때 사랑하던 성도들은 속절없이 울어도 우리는 죄와 눈물이 없는 주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만나보자 만나보자
저기 저 천국 위에서
우리는 잠시 정들었던 성도들과 다시 만날 날 을 기약하며 하늘에 오르는 것입니다. 땅에서는 주님을 위해서 종처럼 살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머슴처럼 봉사하며 살았지만 믿음을 따라 살다 돌아오는 성도의 귀국을 환영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에는 붉은 주단이 깔릴 것입니다. 천군 천사의 나팔 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질 것이며 국경일이 선포될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과 함께 어깨를 겨루며 이 땅에 있는 교회를 내려다 볼 것입니다. 아벨과 어깨를 마주하고 모세와 손잡고 바울과 악수하며 그 천국에서 우리는 그리워 하는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저도 거기에 있기를 원합니다. 나는 그 곳에서 일평생 가장 사랑하던 주님을 가장 먼저 뵈올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일생 살아가면서 일관되게 주님을 사랑하지 못한 것을 제일 먼저 참회할 것입니다. 사죄를 받은 후에 나는 주님을 찬송하게 해 주신 그 영광스러운 특권을 노래할 것이며 제 평생에 설교 사역에 스승
이 되는 세례 요한을 만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분에게 당신으로부터 받았던 위대한 감화에 대해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살다가 먼저 가신 저희 할머니를 거기에서 뵈올 것입니다. 다시는 병도 없고 눈물도 없고 죽음의 그림자도 없는 그 곳에서 우리는 지상에서 나누지 못했던 그 수많은 사랑을 나누며 천국의 한 구석에서나마 좋으신 주님을 찬양하고 일평생 의뢰하며 살아온 주님의 이름과 성호를 송축하게 해 주신 주님을 기뻐하고 자랑하며 우리는 그 천국에서 하나님 앞에선 노래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도 두고 온 우리의 교회를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 것입니다. 끝나지 않는 우리의 기도의 사역은 천국에서도 지속될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죽은 자와 방불한 이 시대의 교회 위에 물 붓듯 부어져서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와 방불한 신자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려내고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온 땅을 뒤덮는 영광스러운 ???를 우리는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온 세상이 좋으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온 세계 열방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위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그 날을 지상에서 보지 못했사오니 이 천상에서라도 보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우리는 이 땅에 펼쳐져 가고 있는 구원의 사역에 동참할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이 세상에 두고 온 교회를 기억하면서 차마 이 땅에서는 의무를 다 하지 못했던 중보의 기도를 거기서도 우리는 다할 것입니다. 사랑했던 지체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 영혼들이 어둠을 불꽃처럼 살아서 생명 있는 동안에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에 사로잡힌 삶을 살게 되도록 우리는 기도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성도의 마지막인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날을 기다리며 우리가 주님 앞에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346장 찬송하나 부르고 기도하겠습니다.
시편23편 강해Ⅱ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