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그마타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10:17)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갈라디아서 문맥에 놓여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갈라디아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싫어하고 다시 유대 완전주의자들의 가르침과 꼬임에 빠져서 율법으로 돌아가려던 교회였습니다. 따라서 친절한 인사의 문안도 없이 격렬하게 편지를 써 내려가던 바울의 가르침 속에는 많은 책망과 격렬한 훈도들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끝에 와서 사도는 다시금 그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을 향한 자신 안에 있는 말할 수 없는 애정을 표한 후에, 이 모든 육체의 흔적들을 통해서 우리들이 참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을 말하면서 이 본문을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후로는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10:17)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타 스티그마타 투 예수’(ta. sti,gmata tou/ VIhsou/)라고 하는 이 예수의 흔적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요약을 하자면 사도 바울은 아주 뛰어난 수사학적 기교를 사용해서 그들이 자랑하고 있는 육체의 흔적과 대비되는 의미에서 자기 안에 있는 흔적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이야기하는 흔적이라고 하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할례의 표입니다. “너희들에게는 할례의 표가 있지만, 나에게는 예수의 흔적이 있다. 너희에게는 육체의 표가 있지만, 나는 내 안에 영의 표가 있다. 나도 유대인이기 때문에 물론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할례의 흔적이 있지만, 그것은 나에게 이제 의미가 없다. 너희가 여전히 육체의 흔적을 자랑한다면, 나는 내 안에 있는 영의 흔적을 자랑할 것인데, 이것을 이름 하여 나는 ‘타 스티그마타 투 예수(ta. sti,gmata tou/ VIhsou/)’라고 부른다.”라는 이야기입니다.
II. 스티그마(sti,gma)의 두 해석
A. 육체의 고난의 흔적
이 갈라디아서 5장 17절의 해석의 역사를 살펴보면, 어떤 주석가들은 여기서 나오는 ‘타 스티그마타 투 예수’(ta. sti,gmata tou/ VIhsou/)라는 것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애쓰는 동안, 핍박을 받은 육체의 상처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그 해석을 전적으로 배재하면서 말도 안 된다고 반론을 제기할 근거는 별로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사도의 진정한 의도는 육의 율법에 대응하는 영의 복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신체의 어떤 특정 부위에 유대인으로서 표가 난 그 할례의 표를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자기도 팔뚝을 걷어대면서, “나도 흔적이 있다.”라고 이야기했다는 것은 수사학적으로 자연스럽지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난 후, 고난으로 점철된 인생을 산 것은 우리들이 충분히 동의합니다. 그러나 문학적으로 볼 때, 이런 방식의 논리를 사도가 개진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여겨집니다.
B. 그리스도의 형상(形象)
그렇다면 이 ‘타 스티그마타 투 예수’(ta. sti,gmata tou/ VIhsou/)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저는 이것을 예수 닮은 형상이라고 확정짓고 싶습니다. 사도는 “예수를 닮은 형상, 그것은 너희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육체의 표피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나는 내 안에 부인할 수 없는 ‘스티그마타’(sti,gmata)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문화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노예들이 자꾸 도망을 치니까, 도망가던 노예를 식별하기 위해서 등이나 이마에 노예 주인이 가축에 도장을 찍듯이 불도장을 찍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노예의 등을 벗겨보면, 그 가문에 고유한 문장(紋章)이 나옵니다. 그 문형을 보고 사람들이 “아, 이 노예는 어느 가문의 노예 구나!”를 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독자들이 이미 다 알고 있는 당시 로마 시대의 ‘스티그마타’(sti,gmata) 문화를 사용해서, 자기에게 그러한 ‘스티그마타’(sti,gmata)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비누로 씻거나 지우거나 해도 사라지지 않는 그 ‘스티그마타’(ta. sti,gmata)가 있는데, ‘스티그마타’
(ta. sti,gmata) 뒤에 나오는 ‘투 예수’(tou/ VIhsou/)라는 소유격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그 ‘스티그마타’(ta. sti,gmata)를 가지고 있는 노예의 원주인이 누구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스티그마타 투 예수’(ta. sti,gmata tou/ VIhsou/)라는 표현은 ‘둘로스 크리스투’(dou/loj Cristou/)라는 표현과 문학적으로 같은 관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서신을 기록하면서 항상 그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 나 바울’이라고 표현했던 것이 오늘날의 문맥에서 보면, ‘주의 종’, 심지어 ‘주의 종님’이라고 이야기하니까 존귀해 보이는 것일 수 있지만,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사실 종이라는 단어보다 더 가슴에 와 닿는 단어가 노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인 나 바울은, 이것이 바로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들의 정체성(identity)이었습니다. ‘에베드 야훼’(hw"±hy>-db,[,(), 즉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노예입니다. 그 당시 ‘에베드’(db,[,)는 노예입니다. 아주 천한 일에 종사하는 노예입니다. 사람에 대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사상이 똑같이 ‘둘로스 크리스투’(dou/loj Cristou/)로 이어지고 그 사상을 배경으로 해서 “‘타 스티그마타 투 예수’(ta. sti,gmata tou/ VIhsou/)를 내가 가졌다. 내가 ‘스티그마타 투 예수’(ta. sti,gmata tou/ VIhsou/)를 가졌기 때문에 예수의 종이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스티그마’(sti,gma)가 단수가 아니라 ‘스티그마타’(sti,gmata)라는 복수로 나온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격이 여러 면에 있어서 총체적으로 예수를 닮아간 흔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을 말합니다. “너희들은 지금 다시 율법을 따라서 할례를 받고 구약으로 돌아간다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 예수의 충족하신 속죄의 공로를 버리려고 하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속하셔서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가려고 했습니까? “내가 그 율법 아래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그 율법을 익숙히 알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요,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교회를 핍박할 정도로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든 것은 그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 안에서 만나, 나의 모든 삶에 있어서 그분을 닮으려고 분투하며 일생을 구도의 길을 따라 살았는데, 그것이 나에게 예수 닮은 수많은 특성들을 내 정신과 영혼 속에 남겨 놓았다. 내가 바로 그 일에 증인이 아니냐?”하는 것입니다.
목회가 무엇입니까? 조직을 이끌어 가는 보스나 흔히 오늘날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커다란 경영적 조직의 리더가 아닙니다. 그런 성격이 없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것은 아주 주변적인 것이고 목회자의 임무는 그것과는 틀립니다. 하나님의 사람 존 오웬(John Owen) 목사님은 자신의 책 속에서 ‘하나님이 왜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에 목회자를 두셨을까?’에 대해서 간단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인간인 목회자를 두신 것은 참으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고 또,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참 신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목회자를 거기에 세우신 것입니다.” 또한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23년간 정들었던 노샘프턴 교회(Northampton Church)를 떠나는 고별 설교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그러므로 목사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전심으로 진리를 탐구하여 전심으로 그리스도를 닮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두 가지 일에 전무할 수 있도록 설교자를 도와야 합니다.”
III. 신자의 영광: 그리스도를 닮음
신자로서의 최고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목회자로서의 최고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신학교 다니던 시절, 영여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시면서 교수가 되고자 하는 꿈을 한두 번쯤 꾸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생각처럼 그렇게 큰 영광이 아닙니다. 정말 고달픕니다. 저는 교수가 된 첫해, 처음 간 학교에서 5년간을 재직했습니다. 5년 동안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흘렸던 눈물이 10년 동안 목회하면서 흘린 눈물의 갑절쯤 됩니다. 너무 괴로웠습니다. 또 졸업반 때쯤 되면, 그 꿈을 접고 현실로 돌아와 목회를 해보겠다고 맘을 먹습니다. 그 때는 큰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님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큰 교회를 목회하는 것은 행복하고 영광이 됩니까? 아닙니다. 오죽했으면 사랑의 교회를 시무하셨던 옥한흠 목사님께서 사석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현대 3D 업종이 있는데, 첫째가 대학교 총장, 두 번째가 종합병원 원장, 세 번째가 대형교회 목회자라고 말입니다. 정말 힘듭니다. 저는 그리 큰 교회도 아니지만, 항상 작은 지하실의 개척교회 시절을 그리워합니다. 목회자 개인을 위해서는 큰 교회를 목회하는 것이 불행입니다. 그런 것이 영광이 아닙니다. 그것을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따르며, 그 곳에서 본받을 사람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은 난센스(nonsense)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영광입니까? 로버트 머리 맥체인(Robert Murray McCheyne)이라고 하는 17세기의 청교도는 자신의 책 속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은 예수님을 많이 닮아 가는 것입니다.”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주님 닮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영성이 있는 교수님이나 대형교회 목회자가, 현란한 방법론으로 한 시대를 풍비하는 방법론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많이 닮은 사람, 그 사람 앞에 서면 예수님이 생각나는 사람! 그 사람을 멘토(Mentor)로 삼으십시오. 스코틀랜드(Scotland)의 목회자 맥체인은 24살에 목사가 되어, 2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그분이 설교하러 단상에 올라오면 아직 설교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성도들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얼굴에서 찬란한 빛이 나왔다고 합니다. 성도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기도실에서 올라 온 우리 목사님의 얼굴에 남은 저 흔적이 저렇게 영광스럽다면 그 골방에서 저 분을 대면하시던 영광의 원주인이신 하나님은 얼마나 거룩하실까?’ 그러니까 설교가 시작되기 전에 성도들은 자기들의 죄가 생각납니다. 거룩함의 영향력이 원래 그런 것입니다. 주님을 많이 닮는 것,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최고의 영광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일생의 비전이 무엇이었습니까? 선교, 혹은 교회의 개척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비전들은 더 높은 비전을 성취해 가는 한 과정에서 생겨난 지류(支流)적인 비전입니다. 궁극적인 비전은 무엇입니까? 빌립보서 3장에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노라”(빌 3:10-14) 그가 정말 추구했던 것은 ‘그노시스 크리스투 예수’(h` gnw/sij Cristou/ VIhsou/)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테스 그노세오스 크리스투 예수 투 퀴리우 무, th/j gnw,sewj Cristou/ VIhsou/ tou/ kuri,ou mou)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이것을 구약적인 용어로 설명하면 ‘다트 엘로힘’(~yhil{a/ t[;D;),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을 닮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지 예수님을 닮을 수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예수님을 닮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그분을 알아가는 지성의 헌신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중 무엇이 제일 큽니까?”라고 묻는 율법사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여기서 마음이 ‘카르디아’(kardi,a)가 아니고 ‘디아노이아’(dia,noia)입니다. 지성을 가리킵니다. 먼저 지성이 헌신하면 그것이 여러분께 사랑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지성의 탐구를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리이신 당신이시여, 내가 님을 너무나 늦게 알았나이다. 내가 당신을 찾고 발견하기 위하여 오늘도 헐떡이나이다.” 그러한 진리 탐구에 대한 처절한 염원(念願)이 구도의 길을 가는 사람의 기본입니다. 지혜에 대한 사모함, 그리고 삶을 거기에 합치(合致)시켜야 합니다.
IV. 그리스도 닮지 못하게 하는 것
그러면 이렇게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우리의 간절한 소원인데,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그리스도를 효과적으로 닮아가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육체의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모든 육체는 풀이요, 모든 육체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도다”(사 40:6-8)라고 말했습니다.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입니다.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일제(日帝)시대 때, 수많은 박해 속에 죽어간 성도들이 오늘날 뜻있는 많은 한국 성도들에게 존경을 받는 이유가 학벌 때문입니까? 목회에 성공한 발자취 때문입니까? 여러분들이 존경하는 한상동 목사님은 영어 시험에 낙제하신 분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존경을 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영혼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그 영혼의 아름다움은 우리들이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을 통해서는 빚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주 아름답게 깎은 조각을 보면서 그냥 커다란 돌멩이를 격렬하게 흐르는 시내에다가 놓았더니 몇 백 년 흐르고 나니까 이렇게 예쁘고 정교한 사람의 모양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의도를 가지고 깎고 쪼고 자르고 다듬지 않으면, 아름다운 조각은 탄생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영혼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지성으로 관상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진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뿜어져 나옵니다. 그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알아가고, 그분을 관상하고, 그분의 길을 따라가려고 하는 이 진리에 대한 집중된 인식 속에서 우리의 영혼은 깎여지고 다듬어지면서 아름다운 영혼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그런 변화의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그 안에 자기 깨어짐이라는 과정이 들어갑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자기는 중립적인 자기가 아니라 어거스틴이 모든 죄의 뿌리를 자기 사랑, ‘아모르 수이’(amor sui)라고 했을 때, 나오는 그 자기를 가리킵니다. 개혁신학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잔존하는 부패성, 부패한 본성을 가리킵니다. 육체의 본성, 옛 본성입니다. 그것이 깨어진다고 하는 것은 생명과 기능과 같은 것들이 파괴되어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종류의 자기 깨어짐이 끊임없이 신자 안에서 일어나게 될 때, 그의 영혼은 그 진리에 의해서 빚어져서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존재가 됩니다.
사도가 오늘 이야기하고 있는 ‘타 스티그마타 투 예수’(ta. sti,gmata tou/ VIhsou/)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그의 전 생애에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고, 예수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예수의 뒤를 따라가고, 예수의 길을 좇아가는 제자의 삶 속에서 필연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었던 그 흔적들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해가는 이 구도자의 길에서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바로 포착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장애물이 무엇입니까? 핵심적으로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A. 욕정(欲情)에 굴복된 삶
첫째는 욕정에 굴복하는 삶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와 정서에 관계하고 있습니다. 욕정에 굴복하는 삶을 통해서 우리들이 진리를 포착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참된 것을 찾아가려고 수고하며, 자기 안에서 불붙듯 일어나는 수많은 육체의 욕망(慾望)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참 진리가 아닌 것을 찾아가면서도, 욕정에 굴복하는 삶이 그것들을 발견해가는 삶에 방해가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이 진리라고 찾아갔던 것은 기껏해야 진리를 닮은 사진적인 사물들이었습니다. 진리와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사진적인 사물들이었습니다. 하물며 진리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찾아가고 그분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욕정에 굴복하는 삶을 산다면 그들은 진리를 도무지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고, 그리고 자기 학문을 자랑하는 것에서 기쁨을 얻고 있다면 벌써 생명의 길을 벗어나고 있는 중입니다. 참다운 기쁨은 오직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깨닫고 그분의 인격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 자신, 삼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우리들이 접하는 가운데 우리들이 아름다운 영혼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우리 안에서 매일매일 일어나는 수많은 욕정들을 내버려 두어서는 우리들이 그 진리를 포착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끊임없이 죽이는 삶을 살기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기 부인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오늘날 우리 시대의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성도들은 갈급해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외치는 자 많건 만은 생명수는 말랐어라
많은 가르침은 있지만, 그들의 어두운 영혼을 뜨게 해서 진리의 눈부신 빛을 비추어줄 사람은 부족합니다. 또한 많은 사역자들과 성도들은 욕정에 굴복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가볍게 생각하면서 삽니다. 그리고 정말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며 예수를 좇는 삶을 율법주의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면서 얻은 자유가 정말 예수 안에 있는 자유일 수 있습니까? 인간은 죄를 선택하고, 욕정에 굴복하는 그 순간 자유를 느끼지만, 그것은 감각일 뿐이고 영혼은 즉시 속박(束縛)의 상태로 들어가게 됩니다.
B. 거짓된 표상(表象)을 좇음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바로 봄으로써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닮아가지 못하게 하는 또 하나의 방해가 있습니다. 그것이 ‘판타스마타’(fanta,smata, phantamata), 소위 이야기하는 표상들, 거짓된 영상들입니다. 이것은 사물의 속임과 관계됩니다.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인데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목숨을 겁니다. 본질이 아닌데, 본질인 것처럼 생명을 걸고, 본질은 헌신짝처럼 내팽개칩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교회는 잘 되는 것 같은데, 보이지 않는 교회는 망가집니다. 오늘날 모든 목회자의 마음에 떨쳐버릴 수 없는 부담이 성장이 아닙니까? 성장한 교회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그 교회의 목사는 존경을 받습니다. 성공하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한 교회는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목회자로 취급받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도대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비전을 만들고 성도들을 거기로 내모는 현대 교회의 목회의 방법이 제대로 된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지금 우리들이 돌아가야 할 곳은 비전이 아니라 핵심가치(Core Value)들입니다. 목회자도 인간이기 때문에 세상의 부귀와 영화, 성공과 안일한 삶, 세상의 인정과 명예 따위의 표상들이 끊임없는 떠오릅니다. 이들은 모두 현혹시키는 것입니다. 모두 무지의 소치입니다.
V. 극복의 길: 자기깨어짐
오늘날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날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피목회의 정신입니다. 얼마 안 되는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기독교의 참된 복음 진리의 핵심들은 액체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에 의해서 보존되어 왔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목회, 땀을 쏟는 사역,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선교 사역 속에서 복음의 가치는 보존되었습니다. 정말 오늘 우리에게 그것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오늘 이야기하는 ‘스티그마타 투 예수’라는 것은 예수를 닮기 위해서 예수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깨어짐 속에서 피목회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자신의 영혼과 정신 속에 새겨진 내면의 흔적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를 그리스도의 노예로 만들었고, 누구든지 그의 인격을 보는 사람마다 예수의 인격을 생각하지 않고는 사도의 인격을 대면할 수 없게 했습니다.
정말 우리에게 그것이 있습니까? “다 필요 없다. 이후로는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너희들은 나의 사도직에까지도 도전하고 내 가르침이 거짓이라고 말하는데, 이후로는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한 가지가 예수의 살아계심과, 내가 예수의 제자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보이지 않는 예수의 흔적이 내 안에 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내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은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피목회의 정신들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일제(日帝)시대처럼 피비린내 나는 핍박이 있고, 순교의 위협이 있고, 가난해서 신학교에 들어오는 것이 곧 굶는 것을 의미하던 때는 오히려 이런 피목회의 길을 가기가 쉬웠습니다. 지금은 배부른 시대입니다. 박해도 없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기독교의 자유를 구가하고 있는 나라가 바로 한국입니다. 이런 시대에는 모든 변전(變轉)하는 사물 속에서 본질을 바라보고 고뇌하는 소수의 사람만이 이러한 피목회의 길을 걸아갈 수 있습니다. 나를 죽이려는 일제의 박해가 없어도 범람하는 그릇된 이성의 사상적인 박해 앞에 피의 절규를 토하며 진리를 탐구하고, 나에게 박해하는 사람은 없어도 복음에 냉담한 채 살아가고 있는 이 만연한 물질주의의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슬픈 허상을 발견하면서 고뇌할 수 있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극소수일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의 정권 하에서 꾸준히 복음을 전하다가 투옥된 목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과 설교에 영향을 받으니까, “돌아서라 네가 여태까지 말한 것이 사실은 참된 것이 아니었다고 한마디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하려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증거 한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의 말씀이었다. 만일 내가 그대들의 협박에 굴복해서 신앙의 절개를 꺾는다면, 내가 외쳤던 수많은 설교와 글들은 단번에 빛을 잃어버릴 것이요. 만일 그대들이 나를 죽인다면, 나의 피는 내가 이제껏 외친 설교들과 기록했던 수많은 글들 속에 스며들어서 내가 죽어도 내가 선포한 진리들이 살아서 소리칠 것이다.” 안일한 길을 미워하십시오. 그리고 치열하게 사선을 넘나드는 길을 택하십시오. 그대들의 정신과 영혼 안에 그리스도 예수를 닮은 흔적이 나타나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며 매일매일 예수 따라 가는 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목회가 이루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