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30
목 차
건지시고 고치시는 하나님(시 30:1-2) 63
영혼을 건지시는 하나님(시 30:3-5) 66
침체에 빠졌을 때(시 30:6-7) 70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시 30:8-12) 74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시 30:12) 77
건지시고 고치시는 하나님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시 30:1-2)
하나님에 대한 경험의 핵심
신자의 일생은 하나님을 높이고 기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높이고 기리면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은 누구든지 일평생 계속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하나님 앞에 낮아지지 않고는 하나님을 높이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자신은 아주 하찮아 보이고 주님이 위대해 보일 때, 비로소 복종이 나옵니다. 자신은 아주 비천하고 더러운 존재이고, 하나님은 순전하신 분이시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와 주님 앞에서 참회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험의 핵심입니다. 사실 깊은 신앙의 단계는 아무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수시로 깨닫는 것입니다. ‘아, 내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구나. 주님은 위대하시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은 위대하고 순전한 분이시며 우리는 미천하고 불결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깊이 느끼지 못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만약 지속적으로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 깊은 죄에 빠지게 되고 우리의 인간적인 성품들은 망가집니다. 그래서 때때로 하나님은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가 삶 속에서 경험하게 해주십니다. 이것이 신자의 구원경험입니다. 구원은 죄 가운데 있다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회적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마음과 영혼, 육체의 환경을 열어주시고 구출해 주시는 구원행동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끌어내심
첫 번째 찬송의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끌어내셨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 시인이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 내사 원수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끌어내셨다’는 것은 누군가 깊은 웅덩이나 함정을 놓았는데 시인이 거기에 빠졌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자력으로는 도무지 빠져나올 수 없고 젊은 사자라도 나올 수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어느 한순간 찾아오셔서 인생의 커다란 위기 속에서 시인을 건져주신 것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구원행동을 보면서 ‘아 하나님은 참 위대하시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고난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점입니다. 구원행동을 경험하면서 ‘나는 정말 더러운 존재이고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순전하신 분이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고난에서 벗어나 찬송하게 됩니다. 환란이나 시련은 우리가 어떤 태도로 맞이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침체된 영혼들을 쇄신시키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치려하심
두 번째 찬송의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를 고치려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외부와 접촉하고 감흥을 받습니다. 그렇게 반응하고 과정을 통해서 사람 자체가 변화됩니다. 많은 환란과 시련이 닥치면 그것을 견디고 이겨내는 가운데 사람이 아주 강한 사람으로 변합니다. 밖에서는 밀려오는 끊임없는 유혹으로 인해 쓰러지기를 거듭하는 상황 속에서 살아가게 되면 유혹에 약한 사람으로 변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감흥과 변양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격도 변하고, 성품도 변하고, 식성도 변하고 모든 것들이 변합니다. 그런데 깊은 웅덩이에 빠진 것 같은 고통스러운 때가 되면, 그것과 더불어 씨름하는 동안에 자신의 내면세계가 얼마든지 망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그렇게 환경과 더불어 분투하며 사는 동안에 얼마든지 거칠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한편으로는 세워지면서 한편으로는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존재입니다. 예민하고 날카롭던 사람들도 안락하고 염려가 없는 환경 속에서 살면 유순해지다 못해 심지어 우유부단하고 게을러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인은 환란과 시련 속에서 망가졌을 경우에 하나님이 고치심을 경험했습니다. 것입니다. 의사가 환자를 고쳤다는 의미로 ‘라파’(ap;r:)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성경에서 ‘라파’사상은 인간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과 마음까지 고치는 전인적인 치료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치료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끊임없이 의지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환란과 고난의 때 자기를 건져주시고 망가진 자기 자신을 고쳐주시기를 갈구하면서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영혼을 건지시는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시 5:3-5)
본성을 거스르는 은혜
시인은 4절에서 감격에 차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라고 사람들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없으면 그분을 향한 특별한 마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출생할 때부터 하나님과 마음으로 원수 맺은 관계에서 태어납니다. 어느 대학실험실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고양이 새끼와 쥐새끼를 태어나자마자 한 유리관 속에서 자라도록 만들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고양이는 쥐를, 쥐는 고양이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친구처럼 잘 자라다가 고양이가 쥐를 죽여 버렸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바로 천적이라고 합니다. 경험에 의지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본성적으로 적대감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 그래서 공격적이 되는 것을 가리켜서 천적이라고 부릅니다.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향해 이런 천적의 상태입니다. 그런 인간이 하나님을 높이고 찬송하며 또한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게 하라는 것은 본성을 거스르는 무슨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음부에 내려가지 못하도록
그래서 시인에게 어떤 은혜가 주어졌습니까? 그가 음부에 내려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구해주셨습니다. 구약에서 ‘음부’라는 말은 ‘스올’이라고 표현됩니다. 구약에서는 지옥에 대한 개념이 명백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가 진전되면서 점점 더 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직 묘목이고 어릴 때는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잘 모르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스올은 비유적으로 많이 쓰였습니다. 스올은 원래 ‘솨알’(la'v;)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는데 ‘요구한다’는 뜻입니다. 입을 쫙 벌리고 인간의 영혼이나 인간의 육체를 요구하는 이미지입니다. 그래서 구약 사람들은 스올은 사람이 죽으면 가는 곳이라고 생각했고, 스올에는 죽음의 기운이 가득하고, 생기가 없고 하나님이 비추는 지붕에 빛조차 없는 아주 음산하고 누추한 상태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슬프고 괴로운 일이 있으면 ‘내가 스올에 내려가는 것 같나이다’라고 고백이 성경에 여러 번 등장합니다. 요나 선지자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기도할 때 “내가 스올에서 죽게 기도하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영혼이 깊은 침체 속에서 환경적 깊음과 영적인 깊음이 동반된 불행한 상황에 빠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거기에서 시인을 건져주셨습니다. 영적인 소생과 육적인 구원이 함께 어우러진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했습니다. 이로 인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영혼의 깊은 침체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회복되면 우리는 나를 하나님께서 특별히 생각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심을 뼈저리게 느끼고 찬송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라고 외치는 이유입니다.
노여움은 잠깐이요 은총은 평생이니
이 과정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성품을 새로이 발견했습니다. 시인은 “노여움은 잠간이요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계속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건져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스올과 같은 상황에 들어가게 되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노여움 때문에 영혼의 깊은 침체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큰 환란과 어려움을 만나면 육체적으로 영향을 받지만 영혼도 깊은 침체 속으로 들어갑니다. 영과 육은 서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으나, 만일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순종하고 있다면 육신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영혼은 결코 기쁨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시인은 영혼과 육체가 아울러 스올 가운데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시인이 하나님 앞에 무슨 잘못을 하였기에 하나님의 노여움을 받았는데, 그는 마치 스올에 들어가는 것 같은 깊은 침체에 빠졌습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앞에 거스름으로 인해 영혼의 침체에 빠지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수하신다고 여기는데, 사실은 그것은 복수라기보다 하나님의 사랑 없이 살아가는 영혼의 비참함과 곤궁함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세상이 주는 그 어떤 기쁨과 즐거움보다 훨씬 큰 것임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 곤경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성품을 경험함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인해 영혼의 어둠에 빠졌는데, 처음에는 이것이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실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향해 침묵하시고 영혼의 침체를 허락하신 그 자체가 일평생동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잠간 있는 것이고,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임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의 새로운 성품에 눈을 뜹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계속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하나님은 자기를 의지하는 모든 언약백성들에게 어머니 같은 아버지가 되십니다. 참된 인생의 행복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그분을 사랑하며 사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의 번영과 가난, 형통함과 막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는 우리들이 모든 것들을 초월해서 언제나 꼭 붙들어야할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임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을 깊이 의지하고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침체에 빠졌을 때
“내가 형통할 때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시 30:6-7)
영적 침체에 빠진다는 뜻
시인은 앞에서 침체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어 “주의 노여움은 잠간이고 은총은 평생이다 저녁에는 울음이 계속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침체에 빠지게 되었습니까? 가까운 원인은 자신이 죄를 짓고 잘못했기 때문이지만, 더 먼 원인은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내가 형통할 때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형통하다’는 것은 모든 일들이 막힘없이 잘 풀린다는 뜻인데 육신적으로 돈 벌고, 생활하는 것만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과 관계가 건강한 상태에 있음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영적 침체에 빠지면 제일 먼저 내면세계가 어지럽고, 혼란스럽고, 질서들이 깨지는 혼란들이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내적으로 형통할 수 없습니다. ‘형통하다’는 것은 히브리말로 도로에 장애물이나 막힘이 없으면 한 번에 쭉 뚫리는 것처럼 거침없이 목표를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내면세계는 영혼과 정신의 질서에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영혼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고, 말씀에 잘 비췸을 받고, 올바른 삶의 질서들을 갖게 될 때 내적으로 형통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올바른 내면의 질서가 삶에 투영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올바른 관계를 맺은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깨어졌습니다. 그때 비로소 예전에 내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영원하리라고 착각하면서 살았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설마 내가 범죄하랴, 내가 침체에 빠지랴, 내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랴,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겠는가?”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마음이 미끄러지고 범죄하여 영혼의 깊은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때 제일 먼저 영혼과 정신과 마음 모든 것 사이에 균형과 질서가 깨뜨려지면서 내면세계 속에서 이미 장애가 발생합니다. 우리들이 은혜로 충만할 때는 눈으로 본 바를 신령한 쪽으로 생각합니다. 신령한 해석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에 평화를 주면서 또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가 가능해지고, 진리의 말씀에 대한 묵상이 가능해지고 하나님 앞에 코람데오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침체에 빠지고 죄에 들어가게 되면 이런 것들이 균열을 일으킵니다. 우리의 육욕이 죄에 대한 욕망을 갖게 만듭니다. 무엇인가 옳지 않은 것을 보았을 때 이것이 우리의 정신에 강한 흔적을 남겨서, 우리가 마땅히 집중해야 할 것에는 해이해지고 집중하지 말아야 될 것에는 골몰합니다. 그처럼 영혼이 혼란에 빠지면 당연히 내면의 질서는 형통할 수 없습니다. 잘못된 내면의 질서들은 우리의 삶으로 표출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형통한 질서들도 깨뜨려집니다. 왜냐하면 악인이 마음에 품은 일은 대부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막으시고 형통함이 깨뜨리시며 더 도전하면 도전할수록 간섭하셔서 실패하게 만듭니다. 물론 어떤 것은 성공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결국 그 속에서 형통함이 없습니다.
과거의 은혜의 때를 회상함
모든 것들이 물 흐르는 것처럼 잘 될 때 ‘아 뭐 영원하겠지, 내가 미끄러질 리가 있나?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데 안 되는 일이 있을까?’라고 생각하지만, 미끄러져서 깊은 어두움에 빠지면 울음이 계속하는 영혼의 밤을 맞이합니다. 그것은 잠간이나 하나님이 자기를 노여워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7절에서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비로소 시인은 깨달았습니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과 화목해서 내 영혼의 질서들이 올바르고 형통하게 되고 인해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서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셨던 모든 것들이 여호와께서 산을 세우신 것처럼 굳게 세우셨기 때문이었구나. 아, 주님의 은혜로 나를 붙들어주셨기 때문에 나의 믿음이 든든할 수 있었고, 나의 내면의 질서가 견고할 수 있었고, 주님을 따르는 나의 순종의 삶이 확보될 수 있었구나.’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아, 그것이 주님의 은혜였습니다.’라는 깨우침이었습니다.
영적인 침체에 빠지면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떠오르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영혼의 호황기’를 회상하게 됩니다. 지금처럼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때가 아니라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살던 때, 지금처럼 곤고하던 때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하던 때, 지금처럼 혼란스러웠던 때가 아니라 주님 앞에 은혜에 힘입어 올바른 사랑의 질서를 가지고 살던 때를 말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칩니다. 내가 자신의 형통함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그 영적인 호황기 때는 하나님이 은혜로 나를 굳게 세우셨기 때문인데, 내가 그 은혜를 끊임없이 힘입어 살지 못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비참한 영혼의 깊은 갈수기를 맞았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고 은혜를 주셨던 영혼의 호황기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 때문임을 깊이 인식합니다. 그래서 “주께서 은혜로 산을 굳게 세우셨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마음과 정신을 묶는 신앙생활
이어서 시인은 “주께서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형통함 그리고 견고함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라는 것을 시인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모든 형통함은 주님이 당신 자신의 임재의 얼굴빛을 시인의 영혼에 비추셨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했습니다. 원래 ‘종교’라는 말은 라틴어로 ‘릴리가래’인데 묶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종교는 한 번 알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 안에 계속 붙들어 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종교이고 신앙입니다. 많은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정확하고 올바른 지식에서 이탈하려는 자신의 정신과 마음을 끊임없이 붙들어야합니다. 그래서 누구도 “나는 이미 이루었습니다. 나는 이미 성취했습니다. 나는 드디어 신앙생활의 궤도에 올랐습니다.”라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했겠습니까? 매순간 주님을 의지하며 아버지 앞에서 매일매일 신앙생활을 해나갈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매순간 오늘이라는 날이 우리가 쓸 수 있는 마지막 날입니다. ‘내일은 내가 신앙을 위해서 노력할 기회가 주어지겠지’하면서 오늘을 여유 있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흐트러진 내 마음을 주님께 묶으면서 ‘오늘이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마지막 날이다. 나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마지막 날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신앙생활이 되어야합니다.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시 30:8-12)
침체 속에 들어갈 때
시인이 자기가 영혼의 침체에 들어갈 때 하나님께 어떤 기도를 드렸는지 회상하고 있습니다.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 나의 피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라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피’는 생명을 나타내는 은유법적인 단어입니다. “내가 영적으로 침체되어서 죽은 자와 같이 내려갈 때 내가 살아있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내가 육체가 살아있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기도는 “그러한 영혼의 침체 속에서 내가 어떻게 주의 도를 진리를 많은 사람에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씀하는데 그것은 죽은 자와 같은 영혼으로는 그런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불순종하는 이유는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우리의 육체가 시키는 대로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저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영혼은 깊은 어두움과 침체에 빠집니다. 그때는 진정으로 자신의 육체가 만족하는 것을 얻는다할지라도 기쁘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시인이 바로 하나님 앞에 그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침체된 인생이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많이 섬기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인생이 짧게 살다가 죽는다고 해도 하나님을 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에 거하면서 있으면서 영혼과 육체가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 앞에서 행복하고 유익하게 살 수가 없습니다.
침체에서 회복시키심
시인이 영혼의 깊은 침체에 빠져있을 때 하나님께서 자기를 계속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니라 다시금 회복시키신 것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를 띠우셨나이다” 슬픔, 베옷은 모두 상가 집의 문맥입니다. 하나님 앞에 참회하는 표시로 슬픔의 베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참회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것은 시인이 죽음과 같은 영혼의 침체를 벗어났을 때 하나님 앞에 올렸던 참회의 기도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하나님 죄를 참회하며 기도할 때는 베옷을 입고 슬픔 속에서 눈물을 흘리는 큰 고통과 괴로움으로 가득 찬 상황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그냥 두신 것이 아니라 다시 소생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셔서 자기를 건져주셨습니다. 시인은 슬픔 대신 기쁨을 주시고 또 베옷 대신 나들이옷을 입혀서 회복시켜주심을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침체와 침체로부터의 고통, 고통 속에서의 부르짖음, 부르짖음 속에서의 하나님의 회복시켜 주시는 은혜의 전 과정을 통해 시인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신자의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 많이 소유하게 되었고 그것을 사람에게 전파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가 인생을 살 때 참다운 지혜는 지금 우리의 일들이나 태도가 미래에 우리의 영혼과 육체에 어떻게 돌아올 것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결코 행복과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하나님과의 화목이 있고 진리의 빛이 있고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영혼의 침체에 빠질 때마다 우리를 거기에서 건져주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혼의 침체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붙들고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살아야하지만,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하나님 앞에 진실로 참회하며 영혼의 깊은 침체로부터 벗어나야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매일 걸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시 30:12)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본문은 “이는”으로 시작하는데 그것은 앞에 나온 “주께서 나에게 슬픔의 베옷을 벗기시고 기쁨의 옷을 입히셨나이다.”를 가리킵니다. 영혼의 깊은 침체로부터 벗어나서 회복되는 경험을 통해서 시인이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변화되었습니다. 영혼의 침체는 우리에게 늘 있는 일이지만 좋은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그것을 극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경험으로 신자의 내면세계가 가득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음부와 같은 침체 그리고 무덤 가운데 내려가는 것 같은 영혼의 깊은 어두움에서 건져내주시고 구원해주셨기 때문에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시인이 주님의 이름을 높이면서 살게 되었노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영혼의 깊은 침체 속에 빠졌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어내서 만약 다시 살려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데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깊은 계획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값없이 거저 주시는 분이시지만 그 은혜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 계획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내가 잠잠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겠다고 했습니다. ‘찬송한다’는 것은 단순히 노래를 부른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깊은 사랑, 그 감격을 억누를 수 없어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한이 있어도 그것을 바깥으로 계속 표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안으로 쌓여서 병이됩니다. 마찬가지로 기쁨과 사랑도 우리 마음에 가득 있을 때 어떤 식으로든 표현됩니다. 이런 식으로 흘러나와서 바깥으로 표현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시인이 지금 하나님을 향해서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기쁨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영혼의 소생 때문입니다. 음부의 내려가는 것 같은 깊은 영적인 침체, 깊은 영혼의 어두움 가운데 있었는데 거기에서 건져주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시인이 소생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할 수 있는 심령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복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복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일반 섭리의 복입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소원하는 바가 성취하거나 혹은 건강하고 일이 형통하다면 일반 섭리의 복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적인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영혼의 축복입니다. 영혼의 축복은 일반 섭리의 복보다 훨씬 큰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감격스럽고 큰일이라고 하더라도 일반 섭리의 복은 시간이 지나면 곧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영혼을 직접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축복이야말로 우리에게 하나님은 누구신지 그리고 인간이 누구인지에 대한 아주 뚜렷한 인상을 남기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이요, 생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영혼을 어루만져주시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이것을 경험하면서 시인의 가슴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가득 찼습니다. 수많은 대적에게 쌓이고 환란과 시련을 만나고 영혼이 침체되었을 때는 하나님을 향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영혼을 다시 살려주시니까 이런 은혜로 꽉 차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찬송하기로 결단함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 내가 잠잠하지 아니하고 찬송하겠나이다”라는 시인이 결심이 나옵니다. 후자의 내용이 시인 속에 우러나오는 감격의 크기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전자의 내용은, ‘내 영광’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볼 때 귀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다 바쳐서 주님을 찬송하겠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전심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겠다는 고백입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영영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라고 결단합니다. 그렇게 영혼의 침체 속에서 자기를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각인되었는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영혼을 만지고 지나간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합니다. 하나님이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회복의 은혜를 통해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많은데도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찬송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만져주실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그래서 영혼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합니다. 매순간 우리가 그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원하시고 바라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회복을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편30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