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말씀을 즐거워하는 길
복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1:1-2)
녹취자: 전병선
지난 시간에 묵상과 기도의 열렬함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말씀을 드렸고 오늘은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쳐드리겠다고 하면서 설교를 끝내겠습니다. 우선 그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서 오늘 이 시편 1편의 위치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편은 주전 16세기경부터 시작해서 약 주전 4세기경까지 쓰인 다양한 시대의 여러 저자의 한 편 한 편 된 시들을 모아서 4세기 이후에 이것들을 정돈했다고 보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150편의 시편을 아무렇게나 나열해 놓은 것이 아니고 더욱이 시대 순으로 나열해놓은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 시편 150개의 시편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커다란 존중심을 가지고 대했던 모세오경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성경에 장이라고 불러도 이것은 우리들이 편이라고 부르고 모든 성경에는 없는 또 다른 분류법이 여기에 들어갔는데 이것은 다섯 개의 묶음으로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우리말성경에서 일권 이권 삼권 사권 오권 이렇게 불렀습니다. 이 다섯 개의 분류는 매우 중요한데 150개의 시편을 분류할 때 일권은 모세오경의 첫 번째 권인 창세기에 부합하는 내용들을 모으고 이권은 출애굽기에 부합하는 내용들을 모았습니다. 삼권은 레위기에 부합하는 시편들을 모아서 제사와 관계되는 시들이 많이 나오고 그다음에 사권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과 반항을 그린 민수기에 해당되는 내용들이 모아져 있고 마지막 제 오권은 모세오경의 마지막 책이라고 할 수 있는 신명기에 해당되는 내용들이 모아져 있습니다. 그래서 일권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들어있고 이권에는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애굽의 압제에서 건져내시고 광야생활을 하는 이야기들이, 삼장에서는 제사에 관한 이야기들이, 사장에서는 불순종과 반영에 관한 이야기들이, 오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에 관한 이야기들이 모아져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일장을 보면 이 시편 일권의 첫 번째 장이기도 하고 시편 전체의 첫 번째 장이기도 한데 일편은 사실은 이런 분류법에 놓고 보면 사실은 일권에 들어가야 할 노래가 아니라 오권에 들어가야지 딱 맞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일권 제 첫 번째 장에다 올려놓아서 다섯 권의 시편 중 첫머리에 오르게 한 것은 편집자들의 공통된 의도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유력한 견해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은 진짜 하나님 앞에 복된 사람이 누구인가?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사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그려내는 거죠 1권부터 5권까지의 모든 시편이 우리에게 가르쳐줄 때에 그 시편의 교육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의도하려고 했던 하나님의 교육학적인 의도를 1편 속에 하나의 커다란 명제처럼 담았다는 것이 시편 편집에 관한 중요한 결론이 되는 것이죠.
그렇게 놓고 보면 여기에 나오는 이 시편 1 편에 나오는 내용 그중에서 우리가 특별히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이 말씀 “오직” 이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나”라고 번역을 하면 가장 좋은 번역입니다. 히브리어에는 순접과 역접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아요. 그래서 그러므로 그러나 그리고 무엇 무엇과 또 무엇 무엇을 이러한 것들이 분명하지 않아요. 그것은 이것을 문맥에 따라 번역하게 되는데 그리고 라고도 번역을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그러나라고 번역을 해서 1절하고 대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1절에는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랬는데 이 복이 “아쉐르” 인데 언약관계 안에서 성도들만 누릴 수 있는 복을 가리킵니다. 이런 복이 있는 사람들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리에 서지 않다. 오히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들이 금방알 수 있는 것이 뭐냐 하면 1절에서 나오는 이 삶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삶에 소극적 측면을 노래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사람들은 악인들의 꾀라 그랬는데 히브리말로 “에차”입니다. 악인들과 서로 악인들이 하는 그런 의도 혹은 모함 모의 악인들의 의문을 따라서 살지 않고 죄인 되게 살지 않고 하나님이 모든 사상에 없다고 오만하게 하는 자리에 앉지 않는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삶에 소극적 측면입니다. 이런거는 안하고 이런거를 하는 사람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렇다면 이 2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의 내면은 어떤 것인가 하는 적극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이러저런 일을 안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표라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어떻게 사는 사람인가? 이것과 정 반대로 악인의 꾀를 좇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죄인의 길에 서기보다는 의로운 백성으로 살며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기보다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리에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겠지요. 그러면 그런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그 내면의 움직임은 무엇인가하는 것을 보여주는 게 바로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로다 였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이다. 즉 첫 번째로는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경외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함이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겠죠.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함과 묵상 이것이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과 주야로 그 율법을 묵상하는 것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과 율법을 묵상하는 것은 떼어놓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엔조이라고 말하죠. 즐거워한다. 혹은 기뻐한다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기뻐하고 좋아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접하고 있는 것과 자신의 내면의 마음이 합치를 이루는 상태를 즐거워하는 상태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속히 헤어지고 싶은데 어떤 사람은 만나면 매우 반갑고 헤어지기 싫은 이유는 무엇 때문이죠? 이게 바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합치가 자기가 마주하고 있는 사람과 사이에서 이루어질 때 이것을 이때에 우리는 그 사람과의 만남을 즐거워하게 되고 좋아하게 되고 기뻐하게 되고 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화) 해릭 윌링크 박사가 이전에 우리교회에 오셨습니다. 화란에 오면 한번 들려달라고 해서 화란에 갈 길이 있어서 한번 만났습니다. 한시간 여덟시부터 아홉시 사이에 시간을 낼 수 있다 그랬습니다. 8시에 교수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한 시간이 금방 가지 않습니까.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다가 시간을 보니까 8시 45분쯤 돼서 헤어질 때가 다 됐습니다. 헤어질 때가 다 됐는데 그분 논문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깜짝 놀라요. 논문이 매우 어렵거든요. 논문을 읽으면서 의문이 들었던 것들을 토론하기 시작했습니다. 12시까지 놔주질 않습니다. 교수님한테 나는 지금 가야 된다 여기서 더 있으면 나는 약속을 못 지키게 된다고 하고 헤어졌습니다.
무엇 때문이냐면 무엇인가 마음에 합치가 있을 때 사람들은 그 시간을 엔조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한다는 것이 무엇이냐면 마음이 그 율법과 합치되는 것이기 때문에 악인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처음부터 악인의 마음의 구조와 율법의 구조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마치 애연가가 아닌 사람이 담배연기를 즐긴다는 것과 똑같고 단정한 사람이 술주정뱅이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을 기뻐한다는 것과 똑같은 거고 육식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이 고기파티를 즐거워한다는 것과 똑같은 거다. 즉 악인의 마음의 구조와 율법의 구조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즐거워하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거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결론에 다다르게 되냐면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보면 그렇지 않아요?
자매하나가 있었는데 키도 크고 아주 노래도 잘했습니다. 남편은 의사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정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아이도 하나 낳고 그런데 그 자매가 어느 날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하나님이 남편을 암에 걸려서 두 달 만에 데려가셨습니다. 이 형제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기는 이런 불행한 일을 당할 만큼 잘못한 게 없고 자기가 정말 잘못한 게 있다면 가족을 너무 많이 사랑해서 하나님 일을 소홀히 한 것 말고는 생각나는 죄가 없다 그랬어. 그래서 마스크를 쓰고 부축을 받으면서도 죽기직전까지 수요예배에 나왔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이 그 형제를 고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데려가시더라고요. 감당이 안됐습니다. 석 달도 채 안돼서 두달반 정도 만에 데려가셨습니다. 이게 사람이 너무 빨리 죽으니까 시름시름 앓다가 귀찮게 하다가 죽으면 죽은 게 실감이 잘나는데 한순간에 데려가니까 남편이 죽었는데 자매도 죽었다는 느낌이 안들고 아이에게는 더더욱 안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매를 내가 잊어버리지 않는 이유가 뭐냐면 그렇게 고통을 받을 때 우리 지하실 교회에 몇 번 나왔습니다. 내가 많이 위로를 했는데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나와서 그 자매를 마주볼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잊혀지지 않는 이유가 한 10년 뒤에 어느 교회에 특강을 갔는데 그 교회를 나를 만나려고 일부러 찾아왔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는 많이 늙었습니다. 만나서 어떻게 지내냐 그러고 물었더니 미국에서 결혼을 해서 새사람하고 같이 사는데 자기 아들 데리고 사는데 한마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서 목사님을 만나러 여기까지 왔습니다. 뭐냐 그랬더니 지난 10년 동안 하나님이 목사님 통해서 주시는 말씀을 붙들고 제가 죽지 않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잊혀지지 않아요. 그런데 그 자매얘기가 뭐냐면 애가 어리니까 아빠가 어디 갔는지 모르니까 엄마 아빠 왜 안와 아빠 보고 싶어 그러면 남편이 입던 옷을 꺼내서 아이 코에다 대주면서 아빠냄새 나지? 그러면 이제 아이가 그걸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사람이 즐거워하면 그 사람의 냄새 그 사람의 말 그 사람의 형상 그 사람을 생각나게 하는 모든 것들을 즐거워하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당신의 심장을 인간에게 보여주시는 최고의 표현이 있는데 그게 뭐냐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이 즐거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정말 사랑하고 그리워한다면 타의에 의해서 헤어졌다면 그에게서 어떤 소식이 왔을 때 그 소식을 얼른 뜯어서 읽어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근데 이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이 오늘 성경은 묵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청교도에 의하면 묵상이 바로 인간의 인지 안에 있는 객관적인 지식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 안에 흘려보내는 깔대기라 그랬습니다. 우리의 행동은 이 머릿속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마음속에서 나와요 머릿속에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데 마음이 그래야지 하고 움직이면 머리를 따르는 게 아니라 마음을 따르게 되어있는게 인간입니다. 그러면 결국 무슨 뜻이냐면 머릿속의 지성의 창고에 드러 누워있는 일만 가지의 율법에 대한 지식보다는 지금 현재적으로 내 마음속에서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한마디의 율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실제적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뜻이냐면 끊임없이 이 속에 있는 지성에 누워있는 지식들이 살아나서 우리의 마음에 활동하도록 내려 보내야 되는데 이것이 묵상입니다. 원래 이게 히브리말에 나와 있는 묵상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묵상이라고 하는 것은 조용히 생각하는 거잖아요. 근데 이 원래 의미는 아주 야트막한 소리를 내면서 다른 사람에게 들려줄 목적이 아니라 자기의 귀에 들릴 목적으로 그것을 낭독하고 작게 반복해서 말하는 것 이것이 원래 히브리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 각주에도 보면 낮게 읊조리다 나와요. 그것이 묵상입니다. 그러면 시편 다른 곳에 나오는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열납 되기를 원하나이다.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이 묵상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혹은 읽고 휙 지나가 버리는 것은 우리에게 인상을 남기지만 인상을 남긴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활동하게 하기 위해서는 듣거나 읽는 것 말고 또 다른 매력을 필요해요. 그것이 뭐냐면 묵상입니다. 그 묵상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깊이 상념에 잠겨서 그것을 깊이 깊이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삶과 연결 짓는 것이 묵상입니다. 그러니까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고 높으심을 아무리 많이 알았다고 하더라고 그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자신의 비참함과 함께 연결시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묵상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지요. 오늘 새벽에 시편78편을 설교하면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뭐냐면 하나님 앞에 우리가 진정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솔직해져야 되는데 그 솔직해지는 것이 진리에 자기를 합치시키고자하는 반성이 없이 솔직해지는 것은 그는 정직이 아니라 뻔뻔스러움입니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그래 내가 죄지었다 어쩔래? 이런 것은 뻔뻔스러움이지 정직함이 아닙니다. 여기서 묵상이라고 할 때 그것이 가지고 있는 참의미가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것이라면 진리의 요소를 자기에게 합치시려는 노력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들의 인격의 특징이 뭐냐면 진실함입니다. 누구도 진실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뵈올 수 없고 누구도 진리에 자기를 끊임없이 합치시키지 않고서는 진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고하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처럼 묵상이 매우 중요한 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이 경건생활 한다고 하는데 기도를 하고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리지만 여러분들이 기도도 아니고 말씀을 듣는 것도 아닌 이미 알고 있는 이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체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성품이나 진리의 내용들을 묵상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아마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시간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말씀이 많이 지식을 부어주어도 마치 무엇과 같으냐하면 여러 달 동안 가물었던 땅위에 어느 날 먹구름이 끼면서 비가 확 쏟아져요. 한 20분 동안 땅 표면위에 물이 확 쏠려 내려가면서 골목골목이 물이 넘쳐나요 그럴 때 실험해봤거든요. 곡괭이를 들어서 마른땅을 파보세요 놀라운 게 딱 5센티만 물에 젖어 있습니다. 곡괭이만 들어가고 나면 그 속에는 예전에 마르고 퍽퍽한 땅에서 먼지가 나기 시작해요. 스며들어서 깊이 내려가는 그것은 소나기처럼 은혜를 받는 것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듣는 말씀의 양 읽는 성경의 양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얼마나 깊이 스며들었냐에 의해서 사람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그 말씀을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스며들어 그것을 우리에게 체화시키는 묵상을 할 수 있겠는가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