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동행하는 삶
(1999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9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하나님의 말씀의 위로(시119:19) 1999.7.4 주일오후 1
2. 말씀과 동행하십니까?(시119:105-106) 1999.7.18 주일오후 11
3.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시119:126-127) 1999.7.25 주일오후 23
4. 경건한 자가 눈물 흘릴 때(시119:135-136) 1999.8.1 주일오후 32
5. 하나님께 피하는 길(시18:30) 1999.8.4 수요예배 41
6. 고난 속에서 잊지 못할 말씀(시119:153) 1999.8.15 주일오후 50
7. 말씀의 미각(味覺)을 점검하십시오(시119:143上) 1999.8.18 수요예배 56
8. 말씀의 미각(味覺)이 사라졌습니까?(시119:143下) 1999.8.22 주일오후 65
9. 말씀과 동행하는 길(시119:97) 1999.8.25 수요예배 75
10. 지혜롭게 하는 말씀(시119:98) 1999.8.29 주일오후 88
11. 말씀의 꿀맛을 느끼려면(시119:103) 1999.9.1 수요예배 99
12. 당신의 기업은 말씀입니다(시119:111) 1999.9.5 주일오후 110
13. 말씀을 지키려고 마음을 기울이시니까(시119:112) 1999.9.8 수요예배 121
14. 말씀이 해석될 때(시119:130) 1999.9.12 주일오후 133
15. 위기에서 구원을 경험하라(시119:174) 1999.9.26 주일오후 142
16.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복하라(시119:87-88) 1999.9.29 수요예배 153
17. 예루살렘으로 모이라(스10:7) 1999.10.17 주일오후 163
18. 하나님을 아는 길Ⅰ(요14:21上) 1999.10.24 주일오후 174
19. 하나님을 아는 길 Ⅱ(요14:21下) 1999.10.27 수요예배 183
20. 진리를 가르치시는 성령님(요14:26) 199911.7 주일오후 194
1. 하나님의 말씀의 위로
나는 땅에서 객이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시119:19)
고난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성숙하게 만들고 우리의 인격에 주님을 닮은 향기가 깃들이게 하는 훌륭한 도구입니다. 시편 119편을 대할 때마다 우리가 받는 큰 인상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 사랑이 온실 속에 갇혀서 화초처럼 자란 사람이 아니라, 거친 들판과 망망한 바다를 한없이 휘돌던 사람, 그리고 아무도 없는 외딴 섬에서 홀로 신앙을 배운 사람이 아니라, 원수와 수많은 대적과 미워하는 자들에게 에워싸이고, 그 속에서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신앙의 동지들로부터 오는 진실한 위로와 감화를 받은 흔적이 있는 성도라는 사실이 우리의 마음에 다가옵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의 유명한 구절이 한 두 구절이 아니지만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고난을 당한 후에는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피하는 것, 구설의 다툼 속에서 주를 위해서 예비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의 품으로 도망치는 것 이런 것들은 모두 시인이 평탄한 인생을 걸어온 사람이 아니라, 환난과 시련의 비바람을 맞으면서 지나온 삶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들꽃과 같은 인생을 사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됩니다. 우리는 소위 얘기하는 돌봄과 섬김이라는 이름아래 우리는 강한 야생초와 같은 생명력으로 질기게 이어가는 그러한 신앙을 전수 받지 못하고, 섬김과 돌봄이라는 미명아래 오래도록 교회 안에서 유아와 같이 취급받는 것이 신앙 생활에 가장 중요하고 바람직한 조건인 것처럼, 그렇게 이해하는 세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앙을 가지고 이 세상을 헤쳐나간다고 하는 적극적인 의미보다는, 안팎으로 당하는 많은 어려움들을 그저 신앙의 이름으로 눈물을 머금으며 소화해 내야 하는, 소극적인 그리스도인의 상으로 변해가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좀더 강해질 필요가 있고, 교회는 성도들을 조금 더 강하게 훈련시켜야할 필요가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웬만한 비바람이나 따가운 태양 아래에서 자생력을 가지고 잘 견뎌 나가는 성도처럼 되는 것이 이 시련과 풍파가 많고 고친 세상을 마주하며 살아야 할 성도의 부르심에 훨씬 부합하는 인생을 살게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 주위에서 신앙의 인격이 고매한 사람들을 몇 사람 알고 있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환난과 시련을 많이 당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거친 인생을 살아왔고, 누구보다도 시련과 어려움을 많이 당한 분들이었기 때문에 고매한 신앙의 인격을 지니게 되었다 라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이 세상에서 눈물 흘리는 쓰라린 고통과 아픔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 증거하는 신앙의 증거는 삶의 끈끈함이 녹아있지를 않습니다. 실험실에서 발견한 공식이나 온실에서 예쁘게 자란 화초 같은 사람들이 간증하는 신앙의 간증은, 끈끈한 삶 속에서 우러나오는 간증이라기 보다는 한편의 문학작품을 읽는 것 같은 감상을 느끼게 만듭니다. 물론 문학을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말장난으로서의 문학과 깊은 삶의 경험에서 우러난 인간사에 성찰에 대한 문학이 동일한 것일 수 있겠느냐 라는 반문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어찌하든지 우리는 고난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답게 빚어내고 거룩한 성도로 우리를 데려가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수단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게 됩니다.
하나의 산에서 깎여 나온 아무렇게 생긴 돌멩이 하나가, 아름다운 형상을 가진 석상으로 다시 태어나기까지는 석수장이의 무수한 망치질과 정으로 내리쪼인 모든 아픔을 경험한 후에 아름다운 형상을 가진 하나의 석상으로 태어나듯이 우리의 신앙 생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제대로 따라간 성도들의 살아온 주님을 섬긴 발자취는 모두 감동적입니다. 그가 비록 죄의 어두운 길에서 헤매는 이 세상에서 소문난 죄인이든지 의를 위해서 살았던 사람이든지, 분열한 세상에서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 온몸으로 자기를 던진 평화의 복음을 나누어 준 사람이든지, 그가 살아온 인생의 발자취는 고난과 떼어놓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시인도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알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애원하고 있는데, 어떤 상황에서 그런 애원을 하고 있냐하면 ‘내가 땅에서는 객이 되었나이다’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땅에서 객이 되었다 라는 표현으로 말하자면 이 시편 119편의 저자라고 믿어지는 다윗만큼 이 세상에서 나그네 취급을 받으면서 산 사람도 흔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생애를 우리들이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는 실로 이 세상에서 마음 붙일 곳이 없는 생애를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고, 동기간과의 사이도 원만했던 것 같지 않습니다. 아내와의 관계도 행복했다고는 전혀 말할 수 없고, 자식들은 그의 마음에 기쁨이 되기보다는 많은 슬픔과 고통과 죽음을 능가하는 아픔을 가져다주는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여인을 만나서 사랑에 빠지게 되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죄였고, 그래서 그는 구원의 기쁨을 빼앗길 것 같은 영적인 위기를 경험하면서 쓰디쓴 대가를 치루어야 했습니다.
그가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는다는 고백이 그의 시편 속에 자주 등장하게 된 것도 영원을 향한 성도의 진실한 사모함이 가져다 준 고백일 수 있지만, 또 하나는 실제로 다윗의 삶은 이 세상에서 마음 둘 곳이 없는 삶이었기 때문에 남보다 더 이 세상보다는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에 대한 연모의 정이 더 깊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땅에서 그는 나그네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나그네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그렇게 가슴에 깊이 와 닿지 않습니다. 그러나 타의에 의해서 고향을 떠나고 자의에 의해서 도저히 돌아갈 수 없는, 그렇게 강요된 타향살이를 살아본 사람들은 나그네의 설움이 얼마나 큰지를 압니다. 돌아갈 수 없이 고향을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겨서 실향민의 신세가 되어버린 사람들도 나그네의 설움을 너무나 잘 압니다.
누구보다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그네의 설움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가깝게는 가나안에 들어와서 정착하기 전에 이방의 땅 애굽에서 살던 나그네의 생활, 선조들의 신앙의 생활을 비롯해서 또 유리하며 방황하면 많은 선조들의 날들, 목축을 하며 정해진 곳이 없이 유리 방황하던 많은 나그네의 날들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손바닥만큼이나 작은 땅을 주셨을 때 그렇게 감격하고 하나님을 찬송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나그네가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나그네의 설움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아는 이 시인이 오늘 자신이 이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예사로운 고백이 아닙니다. 시인은 오늘 우리에게 성도의 처지와 본분이 이 세상에서 어떠한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를 기록한 연대가 언제인지, 우리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확신할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이 시편은 절대로 다윗의 생애의 초기의 작품은 아니라는 사실이 확실합니다. 저는 확실히 23편이나 119편 같은 시편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후대에 다윗의 말년에 쓰여진 작품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이 시는 다윗이 왕이 되고 난 후에 쓰여졌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지금 이 시인이 자기가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다고 하는 이것이 단지 돈이 없고, 권력이 없어서 원수의 추격을 받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나그네가 되고 있다라고 하는 고백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해지지 않습니까? 진정한 성도의 마음은 이 세상에 있는 소유나 이 세상의 지위에 의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쉽게 망각해 버리거나, 혹은 사실 이상의 것을 상상하지 않는 정직한 마음이 성도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삶을 한번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때때로 잊어버리고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때로는 이 세상에서 너무나 고난을 많이 당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볼 겨를이 없을 때도 있지만, 모든 일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진행되어지고 모든 것들이 형통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인생을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괴로운 날은 괴로워서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고, 즐거운 날은 너무나 즐거운 나머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기억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 두 날들을 빼어버린 행복하지도 않고, 불행하지도 않은 평범한 날에는 주님과의 관계가 더 많이 생각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형통함 속에서 하나님을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삶 속에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를 성찰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환난이 와도 하나님 앞에 쉽사리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일들이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환경에 얽매일 필요가 없이 성도가 이 세상을 지날 때에 그는 이 세상에서 마땅히 어떤 존재로 자신을 생각해야 하는 지를 배워야 합니다. 성경에 거듭된 증언, 믿음을 따라 살던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의 공통적인 자기 고백은 이 세상에서 자신들이 나그네라고 하는 지혜를 일찍 터득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성공과 실패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자신의 인생의 성패를 내건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신앙에 여러분들의 인생의 진정한 성공이 어디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인생에 있어서 어떤 일들을 성취하면 여러분 스스로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불변하는 성경은 시인을 통해서 우리에게 성도가 이 세상을 지날 때에는 자기를 스스로 나그네와 같이 여기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모두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코 이 세상의 길을 나그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이 목적지이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가야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단지 잠깐 지나는 인생의 길이고, 우리는 이 인생을 다리로 해서 하나님과의 영원한 만남과 안식이 있는 영원한 세계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곳이라고 믿는 성도들은 필연적으로 이 세상에 살기 위해서 보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어떤 독특한 방식으로 이 세상을 지나가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관심은 갖지만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집을 짓고 정착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정체를 물을 때 그들은 나그네라고 일컬음을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남들이 자기를 나그네라고 불러주는 그 호칭 속에서 스스로 찾아갈 본향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자기 의식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인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는 나그네일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가장 중요한 비결 가운데 하나는, 잠시 지나는 이 세상 나그네길을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덧없는 인생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라고 하는 공간과 시간에서 주님을 섬기면서 살 때에는, 이 섬김과 헌신이 영원을 향해 계속될 것처럼 섬기지만, 우리를 위해서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소유하고, 우리를 위해서 세상에서 스스로 만족하게 한다는 유혹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에 그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이 세상이 잠시 지나는 나그네길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붙은 헛된 것들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아니하고는 주님을 진실로 사랑할 수가 없고, 잠시 머무는 세상에 대한 미련을 우리의 마음에서 거두지 아니하면 우리의 마음의 사랑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에 뿌리박을 수가 없습니다.
왕위를 누리고 이 세상의 누구도 누려본 적이 없는 영광을 누렸고, 하나님의 많은 사랑을 받아 한 나라를 다스렸던 제왕이었던 이 사람이 자기는 이 땅에서 단지 나그네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고백할 때 왕위에 앉아있는 자기를 향해 수없이 손을 흔드는, 자신을 존경하는 백성들, 자기를 믿고 따라주는 수많은 대소 신료들, 그리고 자기를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주를 경외하면서 사는 수많은 백성들이 자신의 곁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이 시인이 잠시 잊어버렸던 것 같지 않습니까?
시인은 오늘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누리는 많은 것들, 우리들이 집착하고 마음에 하나님을 두는 대신에 근심과 염려로 우리의 살을 썩이고 우리의 뼈를 깎는 수많은 관심을 넘어선 근심과 걱정거리들이, 사실은 잠시 지나는 이 인생길이 아무 것도 사랑하며 걸어서는 안 되는 나그네길이라는 사실을 잃어버린 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도가 이 세상을 지날 때에 가끔 우리는 사랑하는 것들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아끼던 소유를 뜻하지 않게 잃어버리고 가난해질 때도 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받던 존경과 인정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손가락질을 받는 비참한 인간으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전날의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받던 관심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주어야 하는 외로운 때도 있고, 사랑하던 사람들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환경에 의해서 결별해야 하는 외로운 날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때마다 그러한 모든 상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이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이 세상에 있는 인연들을 너무나 많이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생각나게 해주시는 은혜의 손길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며 사는 것 이외에는 인생에 아무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정말 이 세상에 있는 헛된 것들을 잃어버려도, 그는 스스로 상실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우리가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 잃어버린 것이 우리의 마음의 고통이 된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이미 우리가 이 세상을 본향처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시시때때로 우리를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 세상이나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잠시 지나가는 것들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도 지나가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사랑도 모두 지나가고,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진실로 사랑하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관계만 남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죄를 이기는 비결을 설명하면서 존 칼빈은 말하기를 “우리는 수시로 이 세상이 얼마나 헛된 것이며, 우리 앞에 있는 이 세상이 얼마나 잠시 지나가는 것인지를 알고, 지혜를 가져야 한다” 고 권면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도는 이 세상에 살아 있으나 시선은 하늘 나라에 둔 사람입니다. 발을 디디고 이 세상을 걸어가지만, 그러나 항상 그의 발뒤꿈치는 하늘을 향해 들려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은 이 세상이 주는 만족을 기대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구원해 주신 좋으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조금 더 살면서 당신을 섬기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의 성도들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나 이 밤 같은 세상에 보내시지를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태어나게 한 모든 사람이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그저 세상 속에 던져진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우리와 같이 쓸모 없는 인간들을 향한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으면, 잠시 있다가 사라질 풀꽃처럼 하나도 가치가 없는 이 인간 하나가 하나님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인지를 알게 될 때에, 그래서 주님이 이 세상에 우리를 태어나게 하신 것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짐승처럼 먹고살다가 죽게 하심이 아니요. 쓰레기와 같고 한 바가지의 거름만도 못한 이 비참하고 더러운 인생을 향한 찬란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은혜의 심장의 박동소리를 듣는 것 같은 교제의 친밀함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기가 이 세상에 단지 우연히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밀한 계획 속에서 주님의 깊은 사랑을 맛보았기 때문에 나그네와 같은 이 세상에 파송된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가 사는 것은 자기가 산 것이 아니요,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며, 육체 가운데 거하며 죄와 슬픔이 많은 세상에 살고 싶어하는 것은 자신의 만족과 영광을 위함이 아니요, 자기 안에 그리스도만 존귀히 되게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참다운 인격적인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 그분께 받는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어떠한지를 모르고, 그 사랑 없이 살아가는 날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모르는 사람들은 백 번 죽었다가 깨어나도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이 살 마음이 들지 않는 것입니다.
시인을 비롯해서 우리는 종종 그러한 깊은 하나님의 사랑, 누구도 헤아릴 수 없고 이 세상의 어떤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도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인격적이고 깊은 사랑을 받고 이 세상의 보냄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자신들의 모두인 것처럼 살게 하시려고 보내신 것이 아니라, 잠시 머무는 세상, 잠시 있다 사라지는 젊음, 그리고 꽃처럼 쉽게 시들어 가는 우리의 건강과 우리의 육체의 모든 힘이 하나님을 위해서 쓰게 하심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그네와 같은 이 세상에서 모두들 주인 행세하면서 살 때에, 멸시받고 천대를 받고 혹은 이 세상이라고 하는 공간에 자기 몸 하나 깃들일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을 인해서 조금도 서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고백하신 말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느니라” 하실 때 우리가 아무리 그 성경을 읽어도 주님이 불쌍한 분으로 생각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이 세상에서 머리 둘 곳이나, 깃들 곳을 찾았던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 우리를 섬기는 것을 기쁨으로 알고 사셨고,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어, 두루말이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것이 그분의 마음에 기쁨이었음을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인은 자기는 이 땅에서 객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진실한 성도에게는 모두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이 세상 속에서 경건한 외로움을 느껴보지 않는 사람들은 신령한 사랑을 하나님을 향해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깊이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우리는 이 세상에서 외톨박이가 되어지는 것 같은 경험을 합니다. 당연히 이 세상을 뜨겁게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은혜의 세계에서 소외되고, 하나님 앞에서 거절당하고 있다라고 하는 느낌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든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든지 그들을 살게 하는 힘은 사랑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힘으로 삼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들은 환난과 시련과 어려움을 당하지만 그들을 극복하며 이길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야망이고, 이 세상에서의 꿈이고, 굽힐 줄 모르는 이 세상에 대한 집념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우리의 인생의 길이 나그네길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통해서 성도들이 이 세상을 이기며 살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래서 오늘 시인은 말하기를 자기가 이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사오니 하나님이여 자기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 달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 세상에서 나그네 된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이 세상에서 나그네가 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위로이고, 격려이고, 나그네의 설움을 풀어줄 만한 어떤 오락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시인이 자기가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이 되었으니,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보여달라고, 가르쳐 달라고 애원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영적인 생활의 놀라운 진리를 하나 발견하는 것입니다.
경건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소외될 때마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과 화해해서 자기들도 이 세상의 사람들이 세상으로부터 받는 사랑과 귀여움을 받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지만, 경건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소외되면 소외될수록 더 빨리 하나님의 품으로 도망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많이 의지했던 것들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거나, 사랑했던 사람들로부터 결별해야할 때, 성도의 마땅한 반응은 하나님께로 속히 피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가장 못나게 생각하는 것은, 성도가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에서 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어느 한 순간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하고 이 세상 자녀의 명분을 버리고, 거룩한 성도의 명분을 가지고 살기로 결심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이 세상과는 결별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신자의 가장 큰 삶의 오류는 자기가 이전에 이렇게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위해서 세상의 가슴에 칼을 꽂았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은 것입니다. 성도는 그 사실을 잊고 세상으로 돌아가지만 세상은 하루도 그 사실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으로 돌아가도 우리는 충분히 옛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이 이미 옛날의 주님을 몰랐을 때의 그 세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몰랐던 시절에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했습니까? 술 마시고 노래하면 허무한 마음 없이도 하룻밤을 지낼 수도 있었습니다. 육체의 쾌락에 자신의 몸을 던지면 조금도 후회하는 기색이 없이 새로운 하루를 맞이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모두 최소한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지나가 버린 옛날입니다. 그리워해도 그때는 다시 돌아오지 않고, 그렇게 살아갈 수 없는 처지를 한탄해도 다시 한번 그렇게 살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오로지 이 거친 세상, 시시때때로 사랑하던 것들을 잃어버리도록 강요받고, 사랑하던 사람들과 헤어지고, 깊이 애착하던 것들로부터 떠나있도록 강요를 받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의 성도의 유일한 위로가 있다면 하나님의 친밀함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친밀함이 하나님의 성도들에게는 유일한 위로입니다. 나그네길을 지나는 길손들에게는 화려하게 잘 지어진 집도 그들에게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는 어차피 자기들이 살 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목적지를 찾아서 길을 지나는 나그네들에게는 어느 고장에서 풍년이 들었다고 하는 것도 전혀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한 그릇 식물을 먹은 후에는 다시 길을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집, 엄청난 부, 말할 수 없이 사랑하는 수많은 관계들 보다 더 나그네에게 소중한 것은 목마를 때에 한 모금의 물과 허기질 때에 시장기를 채울 수 있는 한 그릇의 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도로서 인생의 길을 살기 위해서 너무나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우리에게는 이 나그네 인생 길을 지날 때에 도저히 길이 곤하여 갈 수 없는 갈 한 때에, 한 모금의 생수와 같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필요합니다. 도저히 우리 스스로 우리 가야할 길은 알지만, 그러나 그렇게 그 길을 걸어갈 힘이 없을 때에 우리에게는 한술의 밥이 필요하고, 우리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나그네 인생 길을 지나면서 이런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누구보다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우리지만, 사실 세상을 향해서는 너무나 친근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향해서는 낯설어지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광야의 길을 걷는 나그네의 물주머니의 물이 떨어지고, 도시락에 양식이 떨어진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한번 여러분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끝없이 이어지는 거친 광야의 길을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여러분은 걸어가고 있습니다. 허리에는 가죽물주머니를 차고 뒤에는 망태를 짊어졌습니다. 약간의 음식과 약간의 물들이, 광야의 길을 지나서 영원한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전부입니다. 그러나 물주머니에는 물이 없고, 망태에는 먹을 양식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 햇빛 심히 쬐이고 또 짐이 무거워
이 광야 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에
주 십자가의 그늘에 내 쉴 곳 찾았네
이 나그네길을 간단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피를 말리는 길이고 우리는 죽이는 길입니다. 먹을 양식과 든든히 준비된 물이 있는 나그네에게는 걸을 만한 길이고, 시시때때로 뜨거운 태양이 비췰 때에 구름을 보내며 우리의 앞길에 서늘한 그늘을 드리우시고, 어두운 밤길에는 찬란한 진리의 불기둥으로 그 앞에 비취는 하나님의 현존하심과 함께 나그네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이 나그네의 길이 기쁘고 즐거운 길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피를 말리는 길이요. 도처에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사망의 음침한 길을 지나는 것과 같은 길입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여기에서 넘어졌고, 수많은 믿음의 백성들이 여기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시인이 자기가 이 세상에서 잠시 머무는 나그네임을 자각하면 자각할수록 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싶었던 거예요. 왜요?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요? 여러분들은 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친밀함을 보이시고, 자기는 거절하시는 지에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왜 어떤 사람들은 한번 하나님이 주신 친밀한 은혜를 오래도록 간직하며 사는데,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하나님과의 그런 친밀함을 잃어버리고야 마는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아무렇게나 살기 때문입니다. 아무렇게나 살기 때문에 그들은 정미한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습니다. 어차피 계명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그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상품 하나를 사고하면 뒤에 깨알같은 글씨로 소비자 보호를 위한 약관이 붙어있는 것 같은, 그러한 가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어차피 자기가 알아서 대충 살기로 뜻이 세워진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는 것은 까다롭기 짝이 없는 것이고,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은, 좁쌀영감과 같은 까다로운 태도의 다름이 아닙니다.
그러나 시인은 비밀을 알았습니다. 나그네와 같은 인생의 길에서 누가 그 나그네와 같은 사람들에게 친밀함을 보여주시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어떻게 나그네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친밀함을 보이시고,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신령한 힘을 공급해 주시는지를 배웠습니다. 슬픔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은혜의 비결이 무엇인지를 배웠고, 원수에게 에워싸인 가운데서도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여호와의 친밀한 사랑은 그의 계명을 지키며 순종하며 살기 위해서 주님의 말씀에 착념하는 사람들의 소유입니다.
주님은 공평하고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잠시 머무는 세상에서 존재하는 부당하기 짝이 없는 구차한 방법으로 우리 인간들을 대하시지를 않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평등한 사회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여러분, 얼마나 이 세상이 소유의 있고, 없음에 의해서 사람들이 차별을 당하고, 지식의 많고 적음에 의해서 사람들이 하찮게 여김을 받거나 대단히 여김을 받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되는 그 순간 많은 소유를 가진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소유가 없는 사람들을 그 소유로 섬겨야 합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지식이 없는 사람들 밑에서 섬기고, 그 지식을 통해서 그들이 부요해 지도록 자기 섬김의 생애를 살아야 합니다. 심지어는 능력과 권능이 충만한 사람들은 아무 능력이 없는 성도들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능력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도구가 되도록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인생의 길은 가진 사람이나 없는 사람들에게나 모두 나그네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열 다섯 시간, 열 여섯 시간 비행기를 타고나면 공항에 도착하면 빨리 내리고 싶은 생각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제일 마음이 상하는 것은 삼등석에 탄 사람들이 아무리 빨리 내리려고 입구로 달려가서 줄을 서도 일등석과 이등석 손님이 꿈지럭거리면서 모두 내리시기 전 까지는 문을 나가게 허락을 안해 줍니다. 그래서 한번은 미국을 가다가 그게 마음에 안 들어서 일착으로 뛰어나갔어요. 그랬더니 우람한 승무원이 나와서 제지를 하면서 “손님 아직 멀었습니다. 일등석이 다 내리고, 잃어버린 것까지 다시 찾아 가지고 내리고, 이등석 이층에서 다 내리고 잊은 게 있다고 하면 다시 올라가서 찾고 나서 그 다음에 내리는 겁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기로 스스로 타일렀습니다.
여러분, 성도들에게는 이 세상이 어떤 훌륭한 사람들도 가지지 못한 비밀스러운 샘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시시때때로 보이시는 친밀함입니다. 고난에 처했을 때 고통에 능가하는 하나님의 자비를 보이시는 비밀스러운 만남의 샘입니다. 무지와 어둠 속에서 방황할 때에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인생의 가야 할 길을 다 알고 계시다고 하는, 하나님이 미리 아시는 은혜의, 미리 예비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은혜의 비밀입니다.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느껴집니다. 신앙이 깊으면 깊을수록 하나님이 왜 우리를 양이라고 부르셨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인간,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시선을 받지 아니하고는 인생의 행복과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깊이와 비례합니다. 그런데 나그네길에서 물병과 같고, 도시락과 같은 우리의 나그네 인생 길에서 유일한 도시락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물병에는 물이 가득 찼고, 얼마든지 이 나그네길을 더 걸어갈 수가 있습니까?
오늘 시인은 이 위대한 비밀을 알았습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의 정미한 것까지라도 깨달아서,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계명을 좇아서 순종하며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셔서 자기의 친밀함을 보이심으로 나그네길에 목을 축이게 하시고, 굶주린 세상에서 유리하며 쓰러지지 않도록 만들어 주신다는 비결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고난을 당하면 고난을 당할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견딜 수 없는 역경과 시련에 에워싸였지만 시련과 역경과 더불어 분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깨닫고, 그 말씀 안에 거부하는 자신과 싸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고난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더니, 고난 당한 후에는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노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위로를 받고 그 진리의 은혜 속으로 피하는 영적인 세계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고난이 그를 거룩한 성도 만드는 비결이지만 이 성을 잃은 짐승과 같아서, 도무지 어떤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피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당하는 고난과 시련이 그를 더욱더 미친 동물처럼 만들어 버리는 효과를 가져다 줄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들 수밖에 없습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를 노 저어 가는 사공이 물위에 떠 있지만 그 물을 먹으며 살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역시 먹을 수 있는 수많은 물들이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배에서 영원하도록 솟아 나오게 만드는 생수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도 나그네길을 걸어가게 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 그러면서도 이 세상에는 없는 물, 한 모금의 물, 한 조각의 양식을 위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는 생활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아침마다 우리에게 교훈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저녁마다 우리를 깨우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도 우리를 사랑해주지 않고, 이 세상에 우리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2. 말씀과 동행하십니까?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시119:105-106)
시편 119편은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의 장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복된 성경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면 119편 전 편을 설교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54절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그네 된 인생의 길에서 어떻게 노래가 되고 위로가 될 수 있는 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시편 119편 가운데 또 다른 유명한 구절 중에 하나인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라는 말씀을 가지고 오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두움 속에서는 사람들이 길을 잃기가 쉽고, 잘 아는 길이라고 하더라도 어두움 속에서는 헛디디기가 쉽습니다. 지금은 비교적 골목마다 도로가 포장되어 있고, 집을 나서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흙을 밟아볼 일이 없는 아스팔트, 보도 블럭, 콘크리트 건물 속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이 말씀이 우리에게 적게 다가올 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가로등도 없고, 밝은 손전등이나 자동차의 서치라이트도 없었던, 해만 지만 캄캄하던 옛날에 등불, 이것이 얼마나 중요 했겠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더욱이 길은 오늘날처럼 잘 포장된 길이 아니라, 생긴 그대로 울퉁불퉁한 길들이 많았고, 사람들이 많이 사는 민가를 지나서 빠져나가고 나면 그나마 들길, 혹은 산길을 걸어가는 나그네의 발걸음은 위태하기 짝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길을 다윗이라고 믿어지는 시인은 많이 다녔습니다. 특별히 그는 양을 치는 목자였기 때문에 목초지를 따라서 많은 길을 걸어다녔을 것이며, 목동의 생활을 그만두고 난 다음에도 그는 사울의 추격을 받으면서 끊임없는 망명의 길을, 도망의 길을 떠나야 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남들의 발길을 닿지 않는 험한 언덕이나, 험한 산길, 그리고 험한 광야를 두루 다녀야 했던, 길에 대해서는 이골이 나 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많은 어두움을 경험해 본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이렇게 고백을 할 때에 그에게 있어서 빛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빛과는 달랐을 것입니다.
저는 시골이 좋습니다만 해지기 전까지만 좋습니다. 해가 지고 나면은 싫은 이유중의 하나가 빛이 없이 캄캄해지는 것이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가슴 시리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황혼이 질 때까지는 좋은데 어두움이 떨어지고 나면 도시가 훨씬 좋습니다. 왜냐하면 도시에 오면은 불이 밝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의 발의 등이요 길의 빛이라 그랬는데, 만약에 우리들이 말씀의 찬란한 빛 가운데 거한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활기차고, 거짓이 없는 삶이 될 수 있을까!’ 합니다. 우리들이 흔히 ‘아무 아무개는 진실해, 아무 아무개는 참 신실해’ 이렇게 말하는데 사실은 주위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신실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그저 정직하기는 하지만 신실하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을 저는 많이 만났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실하다, 진실하다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원래 태생이 우직하기 때문에 고지 곳대로 산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자연적으로 가지고 나오는 성품은 신앙의 세계에서는 높이 평가될 것이 못됩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관심을 기울여야할 중요한 성품은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그분의 성품을 본 받아서 새롭게 빚어진 성품이 신앙의 세계에서는 가치 있게 취급 되어야할 성품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이 신실하다라고 할 때 그 사람의 특징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이 없는 사람들의 진실은 진실이 아닙니다. 이것은 생리적으로 우직하고 고집스럽게 그냥 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지, 그것은 신실한 것이 아닙니다. 진실한 사람의 삶은 우직한 사람의 삶하고는 다릅니다. 곧이곧대로 하는 그 삶하고는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신실한 삶은 고착되어 있는 삶이 아니라, 역동하는 삶입니다.
오늘 이 시를 쓴 시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면서 내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고, 받는 감동과 변화와 은혜와 역사의 소용돌이가 외부적으로 인생을 살면서 겪는 격변의 인생과 비교도 안될 정도로 다이나믹한 인생을 살았단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인생이 실패를 곤두박질을 쳐야지만 회개하는 것도 아니고, 승승장구하듯이 갑자기 금시발복을 하는 역사가 일어나야지만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저 외부적으로 볼 때에는 삶의 환경의 큰 변화가 없습니다. 작년 다니던 직장에 올해도 아니고, 십 년 전에 다니던 교회에 지금도 다니고 있고, 8년 전에 집사였는데 지금도 집사로 있습니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외면적으로 볼 때에는 사람이 조금씩 늙어간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여오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만나고 경험하는 그 사람의 삶은 이미 이번 주에 나온 이 교회가 지난주에 나온 교회가 아니고, 오늘 집에 가서 자기 아내나 남편을 만나도 어제의 자기의 남편이나 아내가 아닙니다. 왜? 아침마다 그들의 만남을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봉사의 손길을 새롭게 하시는 말씀과의 만남이 있기 때문입니다.
직장을 오래 다녀서 승진도 못하는 것 같고, 똑같은 월급 받으면서 꾸준히 다니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에게는 작년의 직장이 올해의 직장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의 목표는 거기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돈을 많이 모으는 것이 직장에 다니는 목표가 아니라, 거기에서 자기를 사용하셔서 일하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주님 섬기는 것이 자기가 직장 다니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자기를 새롭게 사용하시고 역사하시는 놀라운 증거와 간증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새롭게, 새롭게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볼 때에는 지루한 삶 같아도 속으로 보면 지루한 삶이 아니라, 아침마다 새로운 감동이 있고, 작년에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었던 새로운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단 말입니다. 이것이 진리의 세계가 없는 사람들 속에 이러한 새로운 하나님과의 경험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없다 이것입니다.
말이 많아도 사실은 한 가지입니다. 결혼한지 얼마 안되어서 저희 집 사람이 ‘오늘은 이것도 떨어지고, 저것도 떨어지고,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그렇게 말을 복잡하게 합니다. 그냥 ‘돈이 없다’ 그렇게 한마디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신앙 생활이 건조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는 것인지, 안 믿는 것인지, 교회 나와서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고, 기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믿느냐 하면 안 믿는 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안 믿느냐 하고 물어보면 믿는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내버려두셔서 그러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스릴 넘치는 모험 영화 같은 삶의 장면이 되풀이되어야만 겨우 건조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 그렇게 건조하고 지리멸렬하기 짝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느냐 하면 그것은 하나입니다. 왜 기도를 해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왜 그럴까요? 섬겨도 하나도 기쁨이 없고, 그렇다고 그만두자니 뒤가 켕기고, 하자니 힘이 들고, 왜 그렇게 불투명한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끔 됐을까요? 궁극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감화가 사라지고 나면 모두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심장 하나가 멎으면 모두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를 받으면서 사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박동하는 심장과 같습니다. 저의 얘기가 과연 그러한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 심장의 박동이 저혈압과 같이, 박동을 치는데 피가 끝까지 안가는 것입니다. 힘이 없으니까 노폐물 등이 운반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력이 없고 바보처럼 되어 가는 것입니다. 힘껏 ‘쿵’하고 쳐주어야만 피가 모세혈관까지 뻗어가면서 피가 구석구석 돕니다.
우리의 말씀의 감화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 집에 성경을 읽을 때 금싸라기가 쏟아진다는 말은 다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풀을 때 감화를 못 받는 사람들이 혼자서 무릎을 꿇고 성경을 읽으면서 얼마나 감화를 받겠느냐는 말입니다. 공적인 예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감화를 받는 것은 우리의 경건 생활의 심장부에 있는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꽝’하고 감화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피가 쫙 뻗어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생활까지 미쳐서, 기도를 제대로 하지 않고 살았던 양심에 가책을 주면서 기도하지 못하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았던 노폐물들을 끌어서 다시 잡아당기는 것입니다. 섬기는 생활도 지리멸렬하게 섬기는 것도 아니고, 안 섬기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 하려니 내 주장이 아깝고, 혼 자 하자니 힘들고 그렇게 지리멸렬하게 섬기는 생활에 '쿵‘하면서 말씀의 감동의 피가 뻗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막혔던 혈관이 뚫리면서 돌아가지 시작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거룩을 향한 노력도 마찬가지예요. 때로는 거룩하게 살아야 된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나 사실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그런 거룩의 삶을 실천하면서 거룩한 삶을 도달하고, 미래의 거룩한 인격을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본 받는 인격을 소유하기 위해서 현재에 지불해야할 대가들이 너무 크다는 사실들을 깊이 알게 됩니다. 힘겹다는 사실을 압니다. ‘오늘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되겠다.’ 결심을 해도 몇 일 지나고 나면 흐지부지하고 지난 주일에 무슨 설교를 들었는지, 한국 교회 교인가운데 100명 가운데 98명은 잊은 채 그 다음주일날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통계가 그렇습니다. 그것도 후하게 주었을 때에 2%가 기억을 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삶을 살려고 주일날 결심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지속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해결되는 길은 말씀의 강력한 감화가 주어지면, 1주일 동안에 하나님 앞에 나태하게 살았던 죄를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뉘우치게 됩니다. 새롭게 결심을 하게 되면서 우리의 삶 전체 구석구석에 박동 치는 말씀의 감화가, 다시 말하면 은혜의 피를 실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러운 것들을 모두 빨아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몇 주 째 상한 심령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 이 주제에 대해서 깊이 발견하기를 원하시면 문서 선교부에서 ‘마음을 다하여’라는 시리즈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하나님을 추구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나, 사실은 전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준 시리즈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시리즈는 ‘하나님을 찾으라’ 두 시리즈입니다. 꼭 들어보시기를 바라되 첫 번째 시리즈를 먼저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찾으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되는데 그런데 그러한 사람의 특징이 깨뜨려지는 마음이라고 하는데, 그 마음이 왜 깨어지느냐는 것입니다. 마음이 상한다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 앞에서 마음이 상하는 것은 성질 난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상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면서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질적인 차이를 인식하는 데서 오는 자기비하, 자기의 비참함을 깨닫는 깨어짐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깨어짐은 성질 나는 상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을 돌아보는 마음 상함이라는 말입니다. 왜 그런 마음이 들겠는지 생각을 해보십시오.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지도 않았는데 어느 순간에 횡단보도를 건너가거나, 지하도를 지나거나, 전철을 타서 사람들에게 떠밀리거나, 바쁘게 직장 일을 하면서도 ‘나는 정말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구나!, 정말 내 영혼의 상태는 너무 위험하구나! 그리고 내가 이러이러한 점에서 너무 교만해 있기 때문에 지금 내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벼랑 끝에 몰린 것 같은 특정한 위기를 만났구나! 여기에서 돌이켜 서지 않으면 내 인생에서 희망이 없겠구나!’ 그런 것을 느끼면서 일하다가 바닥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해 본적이 있습니까? 물론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희귀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들려오고, 하나님의 거룩한 규례가 자기의 눈앞에 있을 때에 그 말씀을 사용하셔서 일깨우시는 성령에 의해서 자극되지 않을 정도로, 두텁고 무딘 영혼을 가진 사람이, 왜 길을 걸어다니는 가운데 자신의 죄를 자각하게 되고, 상한 마음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있을 수 없다고는 단정할 수 없지만, 그러나 늘 있을 수는 없다고 단정할 수는 있습니다.
여기에서 얘기하는 등이라고 하는 것은 ‘발의 등이요 길의 빛이니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를 쓰는 방법 가운데 병행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같은 사상을 번복하면서 고조시키거나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자로서 고조시키는 방법입니다. ‘내 발의 등이요’ 이것은 작은 불빛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띄어놓는 데에 등을 가지고 가는 길을 비춰 주면서 발자국을 옮기는 것입니다. 거기에 사용되는 등이고, 길을 비추는 빛이라고 하는 것은 큰 빛입니다. 큰 빛이 환하게 비춰서 우리의 길 전체를 보이는 것입니다. 커다란 모닥불이든지 하늘의 해가 비춰서 길을 보게 한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굳이 기계적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과 연관을 시켜서 이야기를 한다면, 한 걸음, 한 걸음 옮겨 놓으면서 등불을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우리에게 다가오는 선택의 기로들 앞에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하고 그 말씀의 등불로 인해서 우리들이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리에 우리의 발걸음을 떼어놓으므로 안전한 곳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우리의 인생 전체를 비추는 찬란한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필요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여러분들이 선택할 때마다 막 선택하면 안됩니다. 막가면 안됩니다. 다 정확한 길 같아도 사람의 생각이지, 하나님 앞에 기도해 보고 말씀에 점검해 보면은 인간의 눈에는 매우 옳은 길 같으나 하나님의 눈에는 매우 사악한 길이 우리의 인생 속에는 너무나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말씀의 등불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상식적으로 신앙 생활하면은 마지막에는 최상의 작품이 나오면 길들여진 짐승의 발자국이 나오는 것입니다. 최상의 작품이라야 겨우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상식에 의존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해서 살고, 하나님의 말씀과 이 세상의 상식이 충돌할 때에는 언제든지 진리의 편에 서서, 그 진리를 따라서 살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구절을 보면서 우리는 세 가지 강력한 도전을 보게됩니다. 첫째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인생의 걸음, 걸음이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정확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활을 했는지 살펴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저는 이 성경을 볼 때마다 우리 사극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인들이 주인 가는 길을 비춰주는 등불이 생각이 납니다. 유사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들이 매 순간 선택할 때, 우리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항상 우리는 어떤 누를 범하느냐 하면, ‘이런 것까지 성경에 나오겠는가 내가 알아서 하면 되지!’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사업을 시작한다든지 아니면 공부를 시작한다든지, 진로를 바꾼다든지, 직장을 옮긴다든지, 이사를 간다든지, 결혼을 한다든지 다양한 삶의 결정들을 내릴 수 있을 겁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인도 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아니 무슨 학교 입학하는 것이 성경에 나왔으며, 이사 갈 때는 동쪽으로 가라 서쪽으로 가라 무슨 날은 피하라 그러는 것이 성경에 나옵니까?’ 그런 것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성경책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은 성경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지식들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또 한가지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자기의 인생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좇아서 주님만을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작은 뜻들로 잘 보이시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성경을 한번도 읽지도 않고, 예배 시간에는 매일 졸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되겠다 라는 생각을 하지도 않으면서 어느 날 다짜고짜 무슨 사업을 하는데 이게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알고 싶은 것입니다. 평소에 그런 것을 가지고 고민을 해본 적도 없고, 훈련받아본 적도 없고, 다른 사람들을 보면 기도하면 안다고 하는데 기도하면 할수록, 오리무중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우발적으로 어떤 일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다는 얘기는 ‘순종하고 싶다’라고 하는 의미가 아니라, ‘망하고 싶지 않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평소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일에 아무 관심이 없다가 중대한 이익이 걸린 어떤 문제를 놓고,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알고 싶다라는 얘기는 순종하고 싶다라는 얘기가 아니라, 혹시 손해보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당신을 깊이 사랑하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서 살아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기뻐하시는 뜻을 수수께끼나 비밀 문자처럼 그렇게 감추어 두시지 않습니다. 진실하게 구하면 하나님이 아무리 돌 머리 같은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길이 이것이고, 하나님이 안 기뻐하시는 길이 저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런 순간 순간의 위기를 닥쳤을 때, 항상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성경 속에서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은 없는가, 있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했는가, 그 결과는 하나님이 기뻐하셨는가 슬퍼하셨는가를 찾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삶, 그 점을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발의 등이요’ 한 걸음, 한 걸음 옮겨놓으면서 자신의 선택에 도움이 되는 등불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면 등불이 없이는 한 걸음도 옮겨놓을 수 없고, 어떠한 발걸음도 떼어놓을 수 없다라고 하는 말씀에 대한 절대 의존적인 마음이 깃들여져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마음이 있습니까? 삶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을 때, 어떤 선택을 할 때 계속 조이는 마음으로 걸어가서 갑자기 뭔가 날아올 것 같은데도 아무 일 안 일어나면 ‘잘 걸었구나!’ 그리고 뒤통수를 때리는 망치소리가 들려오면 ‘아, 이 길이 아니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원시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항상 그리스도인은 삶에 있어서 경계해야 될 것은 조급함입니다. 세속적인 조급함, 신령한 조급함은 필요합니다. ‘왜 교회가 부흥되지 않을까!, 왜 우리가 맡고 있는 영혼들이 변화되지 않을까! 나는 언제까지나 이렇게 더디게 밖에 신앙이 안 자라나는가!’ 이런 조급함은 필요합니다. 그런데 세속적인 조급함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해가 됩니다. 조급하니까 기도하기 전에 결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기 전에 걸어가고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없이는 내 인생의 선택 단 한가지라도 온전히 할 수 없고, 어느 한 순간이라도 내가 올바로 발걸음을 떼어놓을 수 없다’라는 고백이 있습니까?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를 성경을 열면서, 예배에 나오면서 ‘오늘도 하나님이 내게 하루를 살아갈 말씀의 빛을 주시지 아니하시면 수많은 선택으로 점철된 오늘 하루의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발자국을 떼어놓을 자신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그러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고백이 있느냐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도전을 시인을 통해 받게됩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인생의 신앙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의 밝은 빛 가운데 거하는 삶이 되어야지만 우리의 인생길이 정오의 대낮과 같이 햇빛 아래서 걸어가는 인생의 길이 될 수 있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고, 흘려보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감화를 받고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차곡차곡 마음속에 보존하는 지식의 정리가 필요합니다.
책이 수 만 권의 책이 있다고 하더라도 주제별, 저자별로 잘 분류가 되어있는 책은 만 권밖에 없어도 몇 만 권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있기는 있는데 몇 트럭으로 쏟아 부어서 산더미처럼 쌓여있다면 그것은 휴지값 입니다. 뭐가 있는지를 어떻게 찾겠습니까?
신앙생활 하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왜 견고하지 못합니까? 그렇게 많이 울고, 그렇게 은혜를 많이 받고 수시로 입술을 깨물면서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데 왜, 그것은 머리에서만 움직이고 여러분들의 삶 자체가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히 저장되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체계화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탐구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고, 외우고, 공부하는 종합적인 작업들이 여러분들의 생애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자리에 와야 됩니다.
한 해가 시작되어서 6개월이 지났는데 신약도 한번 못 읽고, 경건 서적도 거의 읽지 못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서 자신의 인생의 길에 밝은 빛이 있기를 원하는 것은 공상이지 신실한 신앙이 아닙니다. 노력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도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신앙의 도리를 깨닫고, 이치를 깨닫고 어떻게 하면은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력을 내 영혼 속에 부여받아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없을까!’라는 신앙생활의 노력이 계속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오늘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아홉 번째 재앙이 큰 어두움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어두움 속에 있었습니다. 삼일 동안의 어두움 속에 있으면서 그들이 얼마나 공포에 떨었겠습니까? 철저한 어두움 속에서, 밤에 어두운 것이야 덜 무서웠겠지만 대낮에 해가 빛을 잃고, 캄캄한 어두움이 뒤덮었을 때에, 저 멀리에서 밝은 동리가 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그 땅이었습니다. 찬란한 빛이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렸을 때에 우리 가운데 즐겨하던 놀이 하나가 한 사람을 수건으로 눈을 동여매고 술래잡기를 할 때 다른 친구들은 원 밖에서 박수를 치면서 뱃살을 잡고 웃습니다. 눈 하나를 가려도 대낮에 코미디언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눈만 가리고 빛을 못 보게 만드니까, 그 사람의 행동자체가 웃음을 참을 수가 없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광장에서 깨닫는 말씀이 없는 사람들은 눈을 가리고 천국을 찾아가는 사람과 같아요. 수많은 하늘 나라의 성도들이 얼마나 안타까울까요.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성도들이 보기에 그 꼴이 얼마나 우스울까요. 여러분도 어느 정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나니까,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지 않고, 어두움 가운데 가리워 져 있는 사람들을 볼 때에 참 한심하고 답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도 옛날에 살았으면서 ‘왜 사나!’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답답해 보이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각성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그러한 무지몽매한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진리의 빛 가운데 비교적 거하고 있는 성도들이 보기에도 그렇게 답답한데, 완전하신 하나님이 그 인생을 내려다보실 때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무슨 기대를 거기에 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어떻게 패역을 고치고 존귀한 자가 되는지를 생각을 해 보세요. 그리고 그렇게 패역을 고치고 존귀한 자가 되고 나면 그 존귀한 자는 비천하고 더러운 자와 무엇이 구별되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물론 패역을 고치고 더 정결해지고, 더 순결해 졌을지 모르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되고 진실한 지식이 없이는, 그의 거룩한 삶에 있어서 어떠한 개선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여기에서 얘기하는 ‘내 길의 빛이요’ 라고 하는 것은 시인이 빛은 큰 빛을 경험한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결국 우리의 인생 전체가 찬란한 하나님의 빛 가운데 거하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여기에 나와서 설교를 한다고 할 때, 여기에 초등학생들이 앉아있다면 여러분들은 자신 만만해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등뒤에 사도 바울이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앉아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오금이 붙어서 말이 잘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래요? 겁나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이 분들은 진리에 대한 많은 빛을 받은 사람이고, 나는 잘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이 두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뒤에 누가 있든지 상관없이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상한 사람입니다. 자기 분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지나친 교만은 정신병의 일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의 인생이 정말 하나님의 찬란한 빛 가운데 거하는 인생이 되기를 원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마음에 부딪히는 듯이 신앙생활을 하는, 자극적인 신앙생활을 가지고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 진리에 대한 깊은 사모함, 누군가가 나에게 이 어두운 영혼에 인생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의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뭔가 빛을 던져주기를 원하는 사모함들이 있어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아이들이 교사인 여러분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해주고 있습니까? 동화 잘해주는 선생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마음씨 좋은 아저씨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교회오기만 하면 소리 지르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자녀들은 여러분들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 아버지는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부하직원들이 봉투 들고 오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습니까? 엄마인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습니까? 어떤 모습으로 여러분들은 자녀들의 마음속에 최종적으로 기록되고 있습니까? 아무 교회에 열심히 나가서 항상 출근하는 사람, 교회일 이라면 뭐든지 다 팽개치고 나가는 사람으로 기억됩니까?
예수 세상계실 때 많은 고생 보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그때 일은 지나고 다만 눈에 환하오 어머님의 말씀 기억하면서
나도 시시때때로 성경말씀 읽으며 주의 뜻을 따라 살려 합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살다가 마지막에 가지고가는 것은 성경책 한 권입니다. 여러분 자녀의 모습 속에 늘 인생에 환난이 오고, 비바람이 닥쳐도 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이 가정을 풍파와 싸우는 용감한 선장처럼 낙망의 어두운 그림자 없이 우리의 가족을 이끌어 가시던 아버지,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녹아지던 우리 아버지, 우리들이 고이 잠들고 난 밤에 홀로 윗목에 앉으셔서 예수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보시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고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던 어머니의 모습, 그래서 그분의 최고의 관심은 어떻게 이 어두운 세상에서 우리가 풍파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진리의 편에 서는 성도가 될 수 있겠는가, 그 말씀 속에서 은혜를 받고, 그 말씀 속에서 깊이 깨닫던, 그러한 부모의 모습으로 자녀들에게 남아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가정이라고 한다면, 목사의 울려 퍼지는 설교가 사람들의 가슴속에 쓰여지는 설교의 본문이라고 말한다면, 그 설교를 들으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은 자기가 들은 설교의 주석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들을 때에 깊은 감동을 받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설교 아래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을 보면서 자신의 삶이 얼마나 황폐했는지 발견합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성도들, 진리를 위해서라면 하나님 앞에 생명을 걸 각오가 되어있는 진실한 성도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하루를 승리하며 살아가는 그 날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승리 없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천 날의 영화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성도들, 진리로 말미암는 깨달음을 발견하고, 보화를 발견한 거보다 더 기뻐하는 성도들, 그리고 그 말씀의 은혜 속에서 견고하게 서가는 진리의 빛 속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이것이 설교의 ( ? 훈 노트)입니다.
설교가 훌륭하다면 더 훌륭하게 주석을 써야할 것이고, 설교가 후지면 ( 훈 노트 ?) 그래서 체험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성도들의 삶을 보면서 ‘아, 말로는 다 표현되지 못했지만 결국은 목회자가 가지고 있는 말씀의 세계가 성도들에게 녹아든 모습이 이 모습이구나!’ 그리고 거기에서 자기가 신앙이 잘못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변화가 일어나야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주님을 깊이 사랑하면 어찌하든지 참된 진리의 빛 아래서 살고 싶어합니다. 어둠 속에서 전에는 살기를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지식이 없으면 양심의 가책도 적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식의 빛이 들어오고 나면 양심의 가책이 증가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할 더 큰 의무들을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 지를 많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되겠다’라고 하는 신실한 결심을 우리에게 불러일으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 전체가 빛 가운데 거하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됩니다. 잘 배워야 됩니다. 그리고 탐구해야 됩니다.
한 달에 한 권씩이라도 책을 안 읽으면 회개하십시오. 세상을 보십시오. 일간 스포츠하고 결혼하고, 여성 잡지하고 약혼했습니다. 밥 먹고 앉아서 사명감을 가지고 끝에 사람 찾는 것까지 다 읽습니다. 여러분, 그 사람들이 뭘 하려고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정말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탐구하지 않는 것은 문제라는 말입니다. 손만 뻗으면 읽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고, 귀를 기울이면 가르쳐 주는데 그것도 하지 않으려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얼마나 나아졌는지 모르지만 극동방송 중에 성경을 읽어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중국 오지에서는 성경을 구할 수가 없어요. 그 방송을 들으면서 쓰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읽어주면 대조를 하고, 그러면서 너덜너덜 떨어진 노트에다 써 가지고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
정말 우리들이 빛 가운데 살라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까? 혹시 아직까지도 어두움 속에 거하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서 지식의 빛보다는 무지의 어두움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니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해야 되요. ‘뭐라고 목사가 말하든지 순종하겠다.’ 아주 갸륵한 뜻이지만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지식 속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사람을 보내었는데 그게 바로 목회자를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보내주신 것입니다. 목회자의 가장 커다란 직무는 여러분들이 빛 가운데서 살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빛 가운데 살기에 가장 좋은 방법, 필수적인 방법은 여러분들에게 참된 지식을 전달해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넣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지식을 습득하고 깨달아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빛 가운데에 거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라고 있습니까? 말씀의 빛 가운데 거하고 무지 가운데 살았던 옛날의 고통스러웠던 삶, 하나님이 누구 신지를 모르고, 하나님이 누구 신지를 알고 싶으면서도 참된 빛이 없어서 어두움 속에서 헤매던 옛날을 정말로 단호하게 미워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 생의 어떤 고통과 그리고 내 살의 찢어지는 아픔이 있을지라도 내가 다시, 하나님 없이 살았던 그 무지한 옛날로는 돌아갈 수 없다’라고 하는 사무치는 결단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결단이 있다고 한다면 말씀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는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기에 너무 바쁜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기에는 너무나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뵈올 감격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심각할 정도로 게으른, 진리 탐구에 대해서 깊이 성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최근에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성경 어느 페이지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말씀으로 여러분 속에 찾아오셔서 여러분들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손길, 피묻은 손길이 성경 속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눈만 뜨는 하나님이 누구 신지를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는데 이것이 지식의 교만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기도는 무지 가운데 용감한 삶을 살면서 용기를 달라고 하는 사람의 기도보다도,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기도는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뵈올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주님 제게 친절히 말씀 해 주시옵소서, 제가 무릎을 꿇고 주님의 뜻대로 살겠나이다.’ 이런 고백이 있는 성도들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일에 치이고 힘이 들지 않습니까? 사실입니다. 눈코 뜰 새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평생 그렇게 살다가 죽을 테인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인생은 자꾸 흘러가는데. 여러분, 새롭게 각오를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시인이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말장난 같을지 모르지만 시인은 ‘우리 발들의 등불이요 우리 길의 빛이니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시인의 개인적인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랐지만 시인은 알았습니다. 확연하게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로 떼어야 할지를 모르는 들고 있는 발이 어디를 디뎌야 할지를 가르쳐 주더라, 너무 어두워서 엎드러질 것 같은 길에서 찬란하게 우리가 걸어가야 할 삶의 도리를 일어주더라’ 그러면 여러분들은 ‘아니 사람들은 말하기를 말씀 체험이라고 하는데 누구 말을 들으면 말씀 듣다가 가슴이 찢기고 말씀이 떠올라서 인생의 길을 인도 받는 다는데, 나는 왜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나!’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대답을 다음 성경 구절 106절 주고 있습니다. ‘주의 의로운 규례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기로 굳게 다짐하고 실제로 순종한 삶을 사니까 말씀의 효능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되겠다’라고 하는 진지한 고민이 없는 사람이 말씀을 인해서 죽음을 각오한 적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것을 일평생 고민한 사람만이 비로소 그 말씀을 위해서 죽을 용기가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한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지키면서 살려고 하는 성도의 순종하는 실천 속에서 말씀이 발의 등이고, 길의 빛이 되는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에 자신과 비슷한 인생을 살아온 노련한 인생의 선배가 생각나는 사람은 선배의 마음속에 있는 생을 사는 것입니다. 인생에 어떤 위기를 당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들이 된다면 그들은 순종을 위해서 고민하는 사람들이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고뇌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고민을 많이 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고민이 살아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죽은 신자입니다. 살아있는 신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진지한 고민이 없는 사람에게 참회가 있을 수 있겠어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의 삶을 참회하지 않는 사람에게 ( ? ) 있을 수 있느냐 이것입니다. 불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오늘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길의 빛이 되고, 우리의 인생의 살아가는 다양한 상황에서 우리의 발등을 비추고 있는 등불과 같이 효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구체적으로 그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책망하고 있으며, 무엇을 좇아서 살아가라고 명령하고 있는지 그것을 우리들이 신실하게 깨달으면서 한 순간, 한 순간 걸어가는 성도들이 되어야하지 않겠느냐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져 있는 놀라운 능력을 우리들이 충만하게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산 자로서 투쟁하는 자들에게서 풍부한 감정을 우리들이 듣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소금이 어떻게 그 맛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요? 성도가 어떻게 더러운 물결 속에 떠밀려 살면서도, 성도로서의 본분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겠으며,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벌어먹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단지 밥벌이하는 기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도구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지속적인 감화, 그래서 우리의 인생의 참된 가치가 진리를 따라 사는 삶이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이 결단하는 고백 없이,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저희가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의 일하실 때니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을 금 곧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시119:126-127)
시험을 많이 받으면서 인생이 한없이 곤고해질 때에 그때마다 우리를 살려주신 말씀도 있지만, 우리에게 힘을 주는 적합한 찬송들이 있습니다. 저는 십여 년 전에 큰 시험을 지나면서,
인간 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
이 찬송을 자주 불렀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 세상이 너무 많이 변한다. 그리고 믿음을 지키며 살기에는 너무도 힘이 든다. 옛날처럼 믿기에는 시대가 그때와는 다르다.’ 이러한 얘기들을 합니다. 사실 알고 보면 변한 것도 많이 있습니다. 많이 변한 것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이 매우 느슨해 졌다는 말씀입니다.
판단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만 오늘날은 교인들이 자꾸 교회에 나오지 않으니까, 제가 깊이 존경하는 연세가 많으시고 은퇴하신 목사님이 계시는데 진실한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분과 대화를 몇 년 전에 나누면서 경악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분이 세계를 두루 다녀보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결국은 국민소득이 늘어나면서 다 빠져나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당신이 보기에는 한국도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거기까지는 어느 정도 동의를 할 수 있겠는데, 그래서 그 사람들을 붙잡는 방법이 뭐냐하면 300억을 들여서 교회가 콘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형 예배당을 만들어서 기왕에 교회에 나오지 않을 거면 토요일 날 그쪽으로 가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풀장, 테니스장, 축구장, 사우나 실까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놓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토요일 날 가서 식구들하고 놀고, 주일 늦게까지 푹 자고, 11시에 예배당 건물로 나오면 인공위성을 통해서 주일 예배의 실황이 생중계가 되는 것입니다. 큰 대형 스크린에 투사되어서 생생하게 담임목사 설교를 듣는 것입니다. 다 예배를 드리고 또 놀고 주일 저녁에 돌아온 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제 은퇴를 하고 마지막 작품인데 여기에 온 힘을 기울여서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김으로서 45년의 사역에 종지부를 찍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시대입니다.
저는 그 계획이 실패한다고 확신합니다. 놀러 가는 것도 장소를 바꾸어서 놀러 가야지 갈 때마다 똑같은 데 가는데 애들이 좇아가겠어요? 결국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도저히 30여 년 전에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발상들을 우리들이 하면서 ‘어떻게 하면 느슨하게 신앙생활을 하기 좋아하는 현대인들의 구미에 맞혀서 교회가 다음 시대에 생존해 남는 어떠한 전략을 세울 수 있을까’하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든 예가 극단적이라고 말씀하실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사실은 오늘날 일고 있는 전원 교회의 붐이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겉보기에는 삶 전체를 끌어안는다고 하는 면에서 긍정적인 것 같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주일을 사라지게 만드는 중대한 요소가 거기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 문제 하나를 가지고 물고 늘어질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주님이 이미 예고하신 바와 같이 마지막 때가 다가오면 사람들은 이처럼 편의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하기를 좋아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주님을 믿는 신앙의 도리를 따라서 살아가는 일이 너무나 힘겹고 어렵다고 생각을 하고,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시대에 뒤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런 방식을 취하는 것이 교회의 생명을 죽이고 있다라고 생각하면서 더 좋은 방법들을 모색해 내는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문제의 껍질만 보지 말고 문제의 속으로 들어가 보자는 말씀입니다. 저 개인적인 생각에서는 그렇게 해서 그곳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주일이 사라지는 것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의 감격에 사로잡힌다면 그게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문제는 꼭 그것만이 아니라 모든 생활의 방식에 있어서 자꾸 편의주의적인 신앙의 태도들이 누룩처럼 번져가고 있는 이 상황에서 우리들의 그 껍질을 붙들고 씨름하지 말고, 그 본질을 보자는 얘기입니다.
슬픈 얘기가 됐습니다만 주일 낮 예배에 1천명씩 나오는 교회에 주일 오후예배에 2백 명 나오기가 힘들고, 수요일에 백 명 넘기도 쉽지가 않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하는 말이 ‘이제는 지역교회의 개념이 무너졌고 먼 곳에 살고, 교통이 막히기 때문에 못 온다고 그래서 가까운 교회에 나간다.’ 그것도 거짓말인 것이 그러면 자기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는 자기네 교인들로는 안차도 동네에 사는 다른 교회의 교인들이 자기 교회를 채워줘야 합니다. 그러면 양쪽 다 마찬가지 얘기가 나와야 하는데 그 사람이 사는 동네에 있는 교회나, 그 사람이 살지 않는 동네의 교회나 수요 예배에 비기는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이미 사람들은 수요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의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이겁니다. 그런 경향이 지금 강력하게 흘러가고 있는 대세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우리들은 정말 믿음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그러한 실의와 거슬러서 싸운다고 하는 것은 정말 쉬운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을 다시 찾기는 힘들어도 신앙을 잃어버리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우리보다 높고 경건한 수준의 사람들의 맞춰서 신앙생활 하는 것은 힘이 들지만, 우리보다 훨씬 못하는 수준의 사람들과 어울려서 놀 듯이 신앙생활 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경의 영향을 받습니다. 세례문답 할 때에 분명히 “교인의 의무가 무엇이냐?”라고 물어보면 “모든 예배(새벽예배, 주일 낮 예배, 주일 밤 예배, 삼일예배, 금요예배, 기타 각종예배)에 참석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응답을 하고 나서 즉시 새로운 신자들은 혼돈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대로 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수요일 날 와 보니까 삼분의 일도 안나오는 것입니다. 금요일 날은 오 분의 일도 안됩니다. 새벽기도에 나오는 사람은 세어보니까 몇 명이 안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깨닫는 것이 ‘어떻게 하라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문답을 비롯해서 성경에 있는 지시 사항은 지키면은 괜찮겠다 라고 하는 헌법 비슷한 거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 중에서 여러분, 헌법을 어겼다고 딱지 끈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못살 것을 하나님도 아셨지만 될 수 있으면 사는 방향으로 해 보라고 주신 거라’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오늘 성경의 시인이 얘기하는 것과 같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정확하게 오늘날의 시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까 말씀드린 편의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본질을 뚫고 들어가 보십시오. 어떻게 하면 더 예수그리스도를 잘 믿기 위해서 콘도를 짓는다는 겁니까? 아니면 금요일이나 토요일은 보따리 싸 가지고 서울을 떠난다는 것입니까?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근본적으로 무엇을 고민하든지 간에 그의 마음속에 어떻게 하면 신앙의 도리에 더 충실하고, 어떻게 하면 주님을 더 잘 믿어서 이 땅에 있는 동안에 더 주님의 마음에 합한 온전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일을 섬기는 것을 고민하는 고민의 결과가 아니다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정확하게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누가 무슨 말을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은 그의 말은 가치가 없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매우 적은 가치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상황을 보면서 정말 우리들이 믿음을 지키면서 우리만이라도 잘 살아가 되겠다 라고 하는 이것이 얼마나 힘겨운가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이는데 하나는 쉽게 야합해 버리는 것이고, 그리고 또 하나는 쉽게 절망하는 것입니다. ‘나 혼자 기도한다고 해서 조국의 교회가 깨어나겠는가! 나 하나가 무릎을 꿇고 매달린다고 해서 잠든 이 교회가 일어날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점점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 시대의 흐름에 자기도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은 생각이 전혀 달랐습니다. 같은 상황을 바라보는 시야 자체가 달랐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같이 복음의 본질로부터 멀어지고, 참된 영혼의 변화보다는 단지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를 알고 사귀는 종교적인 위안 거리나 문화현상으로서의 이 기독교적인 생활의 분위기를 보면서 ‘그 힘이 굉장히 크다 우리가 어떻게 거기에 저항하며 살수 있겠는가!’ 그러면서 시대가 기울어져 가는 것을 한탄하는 대신에 이 시인은 ‘하나님,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폐했습니다.’ 이 뜻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이 없는 것처럼 막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특별히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겨냥한 다윗의 관찰이었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구속하신 백성들이 당신의 말씀이 없는 것처럼 아무렇게나 막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방을 돌아보아도 경건한 친구를 찾을 수 없고 시대를 보고 아파하는 사람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시인은 낙망할 만한 충분한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지금이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생각이 다르지 않습니까?
이 사람은 제가 부른 찬송하고는 또 다릅니다. ‘인간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소극적인 독야청천 입니다. 세월아 갈 데로 가라, 난 안 좇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이 시인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 버렸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이 없는 것처럼 신정국가에서 무정부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사람들이 짐승처럼 날 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내 믿음을 지키겠나이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 이제는 일 하실 때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 당신의 말씀을 다 폐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좋은 하나님의 신앙을 모두 버린 짐승 같은 사람들이 막 살아가는 시대인데 하나님, 기회는 바로 이 때입니다. 이때가 바로 하나님이 오셔서 일하심으로서 이렇게 거슬리는 백성들을 변화시키시고 하나님의 말씀 없이 짐승처럼 살아가는 이 인간들을 뒤집어 엎으셔서 단정한 주의 백성으로 만드시옵소서. 그러면 하나님,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이 크겠습니까?’ 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신앙이 필요합니다. ‘인간 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라’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아요. 한국에서 보수 신앙이 내리막길을 가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 풍조는 갈리어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라’ 생각이 너무 소아적이고 자기 중심적입니다. 마치 자기 한 사람만 구원받고 믿음을 지키면 그것으로 다다.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세상과 나는 점점 거리가 멀고 상종하기 싫은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 드리고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면 매우 우울해요. 왜냐하면 저 세상으로 내려가야 하니까. 그런다고 해서 교회 올 때에 행복하냐하면 그것도 아닙니까. 잘못됐다는 얘기입니다.
뭔가 시대가 신앙의 본질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막판으로 내려가는 느낌이 들 때에 우리는 이 시인과 같은 적극적인 신앙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지금이 하나님이 일하실 때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이 세대와 흘러가는 이 세상의 풍조를 보면서 우리의 신앙이 바르지 못한 것에 대해서 합리와 시킬 수 있는 구실을 찾는 동안에 이 시인은 분명하게 말하기를 ‘이 때는 하나님이 일하실 기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다르면 기도도 다릅니다. 엄청나게 다릅니다. 이번에 어느 잡지사에서 권두 대담에 기도에 대해서 저하고 우리 교단의 총회장 지내던 목사님하고 같이 대담을 했어요. 대담하는 가운데 그 목사님이 자기가 목회하면서 너무 힘든 기도가 장로님들의 대표기도였답니다. 뭐가 그렇게 힘드셨냐 하니까. 당신들의 기분에 따라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열심히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갑자기 일어나서 하는 말이 ‘하나님, 우리 교회 지금 다 무너져 갑니다.’ 이런 식으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있습니다’ 목자가 뒤에 앉았는데 말입니다. 목사님에게 밀실에서 하고 싶은 얘기를 기도 시간에 공개 방송한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말씀이 그런 사람들이 기도하러 올라가면은 불안하다고 합니다. 교회에 하고 싶은 얘기를 자기가 올라가서 자기의 기분에 따라서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현실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인식을 하고 있든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들을 어떻게 보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상황을 바라보는 시야가 다르면 기도도 엄청나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두어 번 예화를 드렸지만 그 중에 대표적인 게 청교도들이 미국 신대륙에 건너갔을 때, 한해가 지나고 나서 흉년이 들어서 굶주림 속에서 어린아이들이 죽어가고 풍토병에 걸려서 사람들을 수 없이 떠 매어다가 장례를 지내는 것입니다. 인디언들의 습격, 맹수들의 습격 속에서 한 해가 지나는데 양식이 턱없이 부족하고 사람들은 깊은 시름에 잠겼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지도자가 하는 말이 “이건 분명히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정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일주일 동안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 앞에 통회자복 하기로 하자” 그때에 그 옆에 있던 한 사람이 “난 싫소” 왜 싫으냐 그랬더니. “아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 해 준 것이 뭐가 있느냐, 우리가 여기에 건너올 때에 좋은 농사 지어서 잘 먹고 잘 살라고 여기에 건너 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경이 지시하는 방식이라고 믿는 대로 우리의 방식대로 진리를 따라서 하나님 만나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우리가 여기에 오지 않았느냐. 하나님이 다 해주시지 않았느냐. 우리가 거기에서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서 도주해 올 때에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면 뭐든지 견딜 수 있다고 하면서 오지 않았느냐. 하나님이 다 들어주셨는데 조금 흉년이 들어서 배고프다고 우리들이 죽는 것이 아닌데 우리 그러지 말자 우리 날짜를 정해서 일주일 동안 하나님 앞에 잔치를 벌리자.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축복해 주시고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신 것에 대해서 우리 마음껏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자” 수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서 환호를 했습니다.
생각의 차이가 기도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생각의 차이가 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인가 좌절할 것인가를 깨닫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깊이가 있다고 할 때에 이런 판단을 정확히 읽어낼 줄 아는 사람이 그걸 제외해 놓고는 신앙의 깊이를 얘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상황이 다 일어난 다음에 ‘그때는 그래서 하나님이 일하셨구나!’ 그 얘기는 누구는 못하겠습니까. 신앙의 깊이가 있고 자기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이면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을 때에 이미 예고적인 상황을 보면서 이 상황이 우리의 반응에 따라서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를 예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우리들이 하나님의 믿는 백성들을 지도해 나가고, 믿지 않는 백성들의 삶이 어때야 된다고 하는 것을 우리들이 가르쳐 줄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시인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안 지키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갈 때에 실망했느냐, 그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잠시 뒤에 시인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저의 눈에는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릅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기도 너무 괴로운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렇게 신앙생활 해 나갈까!.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렇게 아무렇게나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갈까!’ 그것을 한없이 괴로워하고 아파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객관적으로 ‘시대가 썩었구만!, 하나님이 일하시면 되겠네!’ 그렇게 객관적으로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 깊은 아픔 속에서 믿음이 열어준 시야입니다. 그래서 그 상황을 보는 것입니다.
엊그제 출판 관계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를 하는데 제가 그랬습니다. ‘내 말을 믿을 지 안 믿을지는 모르지만 나는 도움이 되기 때문에 책을 찍는 오늘날의 기독교의 출판사의 현실을 보면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처럼 아프다 그리고 읽혀서는 안될 독초와 같은 책들이 베스트 셀러가 되는 날에는 잠이 안 온다.’ 세 번을 내가 같은 얘기를 했습니다. ‘당신이 충분히 이해를 못하겠지만 하나님은 내 마음을 아신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많이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우리 혼자 기도하는 것으로는 만족이 안됩니다. ‘왜 저 사람은 기도 안 할까! 세상에 저렇게 중대한 사역을 지고 있으면서 아니 어떻게 저렇게 기도 안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면 난 행복한데 그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을 보면은 너무 불쌍한 것입니다. 혼자만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요 예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기도 안하니까 남들이 기도하든지 말든지 아무렇게나 살아가고,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 안하니까 하나님을 사랑 안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냥 같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지키면서 살아가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순종하며 지키며 살아가는 영적인 생활의 순종함이 만약에 우리의 신앙의 중심에 서 있다면 다른 사람들의 불순종을 보면서 내버려두라고 말하지 못한다는 얘기입니다.
시인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 사랑하니까 자기 눈에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함으로 나의 눈에는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르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지금 영웅주의적인 생각에 들떠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폐하고 짐승과 방불하게 마구 살아가고 있을 때 이 시인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고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은 주께서 그들에게만 주신 율례와 법도를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거늘 그들이 그 법도를 따라서 살기를 거절하고,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살기로 작정하고 그 길로 걸어가고 있었을 그 때에 시인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고, 다리는 후들거리며 떨리고, 눈에는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모든 하나님의 사람이 그러하듯이 이 시인 역시 그 절망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만 발견하는 낙관을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 그렇다 하나님이 하시면 된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더 이상 인간에게 맡길 수가 없기 때문에 주님이 직접 내려오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하나님이 직접 일하신다면, 이렇게 하나님의 법을 폐하고 짐승과 방불하게 살아가는 인간들이 뒤집어져서 정말 선조들의 거룩한 말씀의 도를 새롭게 먼지를 털며 붙들고, 그 율례대로 살기를 다짐하는 하나님의 율법에 충성하는 시대가 새롭게 오리라’ 하는 소망을 가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시각에 상황을 봐요.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안목으로 그 시대가 처한 어려움을 읽어내고,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기회와 자리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오늘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들에게서는 시인 속에 있는 이런 역설적인 희망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도 우리의 신앙을 보면서 낙담할 때가 많잖아요. ‘내가 그렇게 큰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아왔는데, 정말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라고 느낄 때가 있잖아요. 자신의 모습을 너무 비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계의 고치려고 하지만 진전이 없거나, 기도하고 싶지만 이상하게 깊이 있는 기도로 안 들어가고 하나님의 차가운 거절감이 느껴진다든지, 사역을 하는데 진전이 없고 계속 퇴보하고, 예기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면서 우리의 마음이 근심과 걱정이 휩싸일 때 우리는 한계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왜 우리들에게는 ‘아, 그래 지금 하나님이 내게 오셔야 할 때구나!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 주님이 오셔서 나의 이 한계 상황을 단숨에 뒤집어 주실 것이다. 결국은 하나님이 이 결론 내리게 하시려고 나를 여기까지 데려오셨구나!’ 그런 생각이 어쩌다 한번씩밖에 들지를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침체가 오기 시작하면은 사람들에게 감으로 전달이 됩니다. ‘우리 교회 요즘에 힘들어, 봐 누구누구도 힘이 들고, 누구누구도 시험에 들고, 중심을 못 잡잖아!’ 그러면서 불길한 감이 깃드는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불안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부실한 사람들은 이렇게 분위기에 휩쓸립니다. 그래서 누가 올라가서 ‘하나님, 우리는 다 지쳐서 힘이 듭니다.’라고 하면 축 쳐집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깨어있는 사람들은 누가 얘기한다고 해서 거기에 그렇게 동요되지 않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상황을 해석하고 그것이 옳은가하는 것을 받아드립니다.
제가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저의 약점이기도 한데 저가 두 가지를 힘들어하는데 하나는 저한테 상처를 받았다는 얘기를 들을 때 그 사람보다 훨씬 더 상처가 되고, 그리고 또 하나는 부당한 비난을 받는다고 생각될 때 가슴이 떨리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 나를 이렇게 생각한다라고 생각할 때 견디기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신 것이 있는데 누가 저에게 지적을 해 준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얘기가 맞는 얘기 같습니다. 그러면서 얼굴을 들 수 없는 창피함과 그것과 연결이 되 있는 사역과 신앙생활의 문제들이 다 드러나기 시작해서 고민을 했습니다. 그리고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께서 제 마음속에 분명하게 생각나게 해 주시는 말씀이 ‘야 내가 너에게 말씀으로 지적할 때 그렇게 벌벌 떨어본 적이 있느냐?’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없습니다. 양심에 들려오는 또 하나의 외침은 ‘너가 하나님의 사람이냐? 사람의 사람이냐?’ 그때 저는 생애적인 깨달음을 얻었어요. ‘아, 내가 누군가가 뭐라고 했을 때 이렇게 불안하고 흔들렸는데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렇게 불안하고 뿌리 채 흔들려본 적이 있는가!, 내가 살아온 삶이 정말 하나님 앞에 살아온 삶인가!’ 그리고서 다음부터 아주 안전한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누가 비난을 하면 일단 가만히 다 듣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반론을 제기하지 말고 하나도 잊어버리지 말고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라고만 물어봅니다. 그러면 어떤 때는 ‘야, 그 사람을 내가 보냈다’라고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마음에 ‘야, 그거 괜히 하는 얘기다. 내 생각은 전혀 다르다’ 하시는 적도 있고, 또 하나는 ‘그 중에 몇 가지는 맞는데, 다 맞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 얘기는 재료만 얘기했지 내가 하나님 앞에서 깊이 기도하고 몸부림치면서 그 사람의 말이 되게 하지 말고, 그것을 소재로 삼아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회로 삼습니다. 그러면 내가 뭔가를 고쳤어도 그 사람의 얘기를 듣고 고친 것이 아니라 기도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고친 것입니다.
저는 그 후로부터 평정을 유지하는 법을 배웠고,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좋지 않는 얘기를 하거나 혹은 쓰디쓴 충고를 할 때에도 기쁘게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물어봄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오늘 시인이 그런 발상을 가진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일하실 때입니다.’ 감으로 잡은 것입니까? 아닙니까? 왜, 말씀을 다 버리고, 폐하고 짐승과 방불하게 살아가는 시대 속에서 하나님이 이 시대를 버리셨는가 생각을 했더니,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고 어그러진 길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돌이킬 방법을 준비하고 계시는 것을 찾아낸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 앞에 깨달은 깨달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깨달은 깨달음입니다. 그것을 이 시인이 깊이 경험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정말 주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니까 이때가 하나님이 일하실 때구나 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기회로 삼아가 하나님께서 일해주시도록 그리고 역사 속에서도 이스라엘의 역사가 바닥까지 기울어서 완전히 배교할 민족과 같이 되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다시금 부흥의 모닥불을 지피셔서 큰 불기둥이 되게 하셔서 그 민족을 새롭게 살리시는 역사들을 이 시인은 알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하나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 폐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일하실 때입니다.’ 라는 결론을 얻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시인이 이런 것을 갖게 되었느냐, 그 뒤편에 보면은 얘기한 것에 대해서 구체적인 이유가 언명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금 곧 정금 보다도 더 귀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 그렇게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면서 자기가 세속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니까,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말씀을 버린 이 세대를 보면서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하나님이 일하실 기회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그 시대에 이 시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시인에게만 이처럼 유독 친밀함을 보여주셨어요?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도 한 대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버리셨습니다. 엘리도 기름을 부음 받았습니다. 이것은 단지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사람이 이 세상 사람들이 어떠하든지 간에 자기가 홀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면서 순종하며 그 말씀을 깊이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이 시인에게 친밀함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말씀을 폐한 그 시대를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되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할 마음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무엇을 해야할지 알 수 있습니다. 손만 뻗으면 성경이 있고, 손만 뻗으면 책이 있고, 카세트만 틀면 테이프가 있고, 지천에 널렸습니다. 이 얘기를 듣고 나서 저에게 상담 안 올 필요가 없지만 그렇게 어렵게 해서 상담을 하겠다고 해서 마주앉았는데 얘기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다 가르쳐 준 얘기입니다. 책만 펴면 나오는 얘기고, 테이프를 들으면 다 나오는 얘기입니다. 이 설교를 듣고 있는 분 가운데서도 저희 교회에 와서 혹은 오기 전에 목사님 한번 만나서 상담을 해 달라고 전도사님을 통해서 한달 두 달 조르다가 잠깐 얘기하고 책하고 테이프를 주고 나면 답이 다 나왔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고자 하면 그 경외하는 도가 무엇인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갈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해야지 하나님이 그런 능력을 주시는지 배워가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해야 됩니다. 열심히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는 것을 인생의 가장 커다란 즐거움으로 삼으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여름에 태만하지 말고 더 많은 시간을 하나님의 말씀과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 속에서 책을 읽고, 설교를 듣고, 좋은 지체들과 하나님의 말씀의 풍성함을 나누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무더운 수련회를 가는 것도 우리에게 이러한 충전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을 푹 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듣고, 자연 속에서 많은 시간을 명상하면서 반년동안 살아오면서 우리의 영혼에 묻은 더러운 찌끼들을 털어 내 버릴 수 있는 정화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새롭게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충성을 다짐하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됩니다.
그렇게 여러분들이 가을을 새롭게 맞으면, 하나님이 얼마나 많이 가을에 복을 주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4. 경건한 자가 눈물 흘릴 때
주의 얼굴로 주의 종에게 비취시고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시119:135-136)
지난 시간에는 모두들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황폐한 시대에 낙망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때가 바로 하나님이 일하실 때라고 주님을 불렀던 시인의 신앙생활의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살펴본즉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살아가기를 힘쓰는 개인적인 경건이 있었기 때문에 시대를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야를 갖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시편 119편중에서도 유명한 몇 구절가운데 한 구절입니다. ‘저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에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르나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 시인이 흐르는 이 눈물은 단순한 낙망의 눈물만은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자기 앞에서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가지 않고 있는 인간들이 알고 있는 지식의 격차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기도 하였습니다. 시인은 지금 밝은 진리의 빛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었고, 시인의 눈에 눈물이 흐르게 하는 이 세상에서 여호와의 법을 폐한 악한 사람들은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이 시인이 빛 가운데 살고 있고, 그 시인의 눈에 눈물이 흐르게 하는 많은 사람들이 어둠 속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서 어느 곳에서도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자들을 통해 교만해 하는 시인의 모습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어둠 가운데 살아서 하나님의 백성들임에도 하나님의 법을 폐하는 동물과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고, 자신은 깨어있는 신앙의 양심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고있지만 그러나 그는 결코 자기가 누리고 있는 지식의 빛과 그리고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무지의 어두움을 비교하면서 교만해지지 않았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만해지는 사람은 신앙의 세계에 아직 깊이 들어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지식을 많이 터득하고 교만해 지는 사람들은 그 지식이 은혜의 물에 잠긴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도덕적인 죄를 짓거나 주위의 사람들에게 비난받을 만한 행실을 한 경우에는 즉시 그 사람의 잘못이 눈에 띠지만 마음속에 있는 우리 자신들의 교만은 대수롭기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에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이 듭니까? ‘저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해서 어둠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짐승과 같은 인생이요, 나는 빛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라고 교만해 집니까? 아니면은 한 걸음 더 양보해서 성전에 올라가서 바리새인이 세리와 비교하며 기도했던 것처럼 그렇게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 불법하고 하나님의 법을 폐하는 막 사는 인간들을 볼 때에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 저는 저 자와 같지 않게끔 구별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외식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시인의 영성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경건한 영성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의 영성은 자기만 하나님 앞에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아가지 못하는 신앙생활 의 모습이나,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교회 밖에서 아무렇게나 살아가도 마음 아파하지 않는 것을 보면, 우리의 영성이 상당히 성경이 얘기하고 있는 영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폐하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살아갔기 때문에 시인에게 어떠한 고통을 주었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짐승처럼 막 살아갔기 때문에 시인에게 어떤 물질적인 손해나 명예의 손해를 입혀 주었습니까?
오늘 시인이 이렇게 그들을 바라보면서 흘리는 눈물은 하나님의 법도를 모르고 막 살아가는 가는 사람들 때문에 짓밟힌 자신의 비참한 인생, 자신이 손해본 물질적이고 명예, 혹은 신분상의 불이익 때문에 지금 흐느껴 우는 것입니까?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가지 않는 것이 여러분에게 무슨 불이익을 가져다줍니까? 물론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지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살아간다고 해서 내가 먹고 사는 것을 먹고 살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다니던 직장을 쫓겨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인이 경영하는 회사에서 고통을 받는 근로자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까? 그것은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불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지금 흐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이 만드신 하늘아래 함께 살아가면서 더군다나 하나님이 구속하신 백성으로서 그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존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폐하면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보는 그 자체가 시인의 마음속에는 고통이었던 것입니다. 왜?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세계와 이 시인의 마음속에 있는 세계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사는 곳은 똑같은 세상이었지만 시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의 나라가 이루어져 있었고, 시인의 마음속에 피눈물이 흐르게 만드는 하나님의 법을 폐한 사람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경건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고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사람들로 가득 찬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놀라운 지름길은 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그들을 현혹시키거나 그들을 호감을 삼으로서 이 세상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단지 도구에 불과하고 하나님의 법을 폐하고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이 세상을 고치는 가장 훌륭한 비결은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그런 세상을 마음 아파하면서 바라보는 눈물의 기도가 있을 때에 이 세상은 고쳐지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이 말했습니다. ‘내 눈에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르나이다’ 여러분들은 팔레스타인의 기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요? 비가 많지 않은 곳입니다. 우기 때는 비가 옵니다. 그래서 소위 무수천이라는 곳이 많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비가 안 오는 철에는 물이 없는 개울 모습인데 비가 오면 그곳으로 물이 내려가는 시내입니다. 시인이 그것을 생각하면서 오늘 말하는 것입니다. 비가 오면 물이 모여서 메마르던 시대에 물줄기를 대면서 흘러가던 모습을 보면서 자기가 하나님의 법을 폐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지 않는 인간들을 바라보면서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그래서 눈에 뜨겁게 흐르게 하는 눈물을 시냇물에다 비유한 것입니다. 그칠 줄 모르고 흐르는 시냇물처럼 시인의 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지 않는 하나님의 법도를 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눈물이 비오듯 쏟아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거룩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면 시인에게 어떠한 이익이 돌아올까요? 어떤 유익에게 시인에게 있을까요? 손에 만져지는 어떤 이익이 정말 있을까요? 그러나 시인의 마음은 그런 것과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기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자기가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 이외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주셨던 하나님, 그래서 그 하나님의 법도를 통해서 인생을 사는 진정한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달았던 이 시인의 마음속에는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오로지 그의 마음속에 불타고 있는 소원의 이 세상이 하나님을 알고 마땅히 하나님 아버지께 드려야 할 영광과 경배를 드리고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충성된 마음으로 그 율법과 율례를 지키면서 살아가는 세상이 되는 것 그것이 시인의 마음속에 있는 가장 커다란 소원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런 세상이 될 때에 시인에게 그 세상이 무엇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세상을 통해서 하나님이 가장 많이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왜 주님이 때로는 울기도 하셨습니까? 그분에게는 회개할 일이 없었습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고 죄를 모르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시인의 이 마음이 바로 예수님이 늘 기도하던 마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 기도를 드렸을 때에 주님의 마음이 이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두 기록하지 않고 있지만 우리는 기도를 아는 사람이라면 직감적으로 예수님이 이 세 마디의 기도를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드렸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법을 폐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마구 밟아버리고 살아가고 있는 주님과 관계없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눈에 눈물이 시냇물처럼 흘렀던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고 그들에게 생명 주시려고 하늘의 영광의 보좌까지 버리고 이 슬픔이 많은 죄악 된 세상에 내려오신 자기도 몰라보는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주님께서는 틀림없이 이 세 마디의 기도를 펑펑 우는 고통스러운 아픔과 통곡 속에서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을 향하여 가져야 할 말씀의 태도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짧은 세상을 살면서 다양한 종류의 이유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 사는지 모릅니다. 시시때때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아픔들이 우리의 마음에 많은 눈물이 되게 합니다. 시시때때로 우리를 향한 고난과 시련이 우리를 눈물 없이는 이 인생의 골짜기를 지나지 못하게 할 적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물론 주님께서는 그런 모든 눈물을 받으십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약하고 고난과 시련 속에서 눈물을 흘릴 때에 주님이 우리를 외면하신다면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면서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겠습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들이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이처럼 우리들이 흘리는 눈물의 이유가 다양하지만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진정으로 주님의 마음으로 가득 차고 주님의 성품을 닮은 거룩의 마음으로 가득 찰 때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느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 살아있지만 세상 속에 속한 사람이 아니며, 세상없이 살수 없지만 그러나 삶으로서는 결코 세상없이는 살수 없다고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 세상과 더불어 살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 이외에는 희망이 없다고 고백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보고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경건은 진정한 의미에서 경건이 아닙니다. 경건한 것은 하나님의 법을 버린 세상을 향해 분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의분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경건이 더 깊어지면 하나님의 법을 폐한 세상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영혼에 아픔을 보면서 자신의 것처럼 느끼며 탄식하고 통곡하게 되는데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경건이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러한 신앙의 정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안다면 우리는 시인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이 우리의 모든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 때문에 영혼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 마음 때문에 영혼들을 사랑하고 영혼들을 돌보고 영혼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비록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정말 더럽고, 추하고 그리고 끊임없이 우리의 눈에 눈물이 흐르게 하는 세상이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그런 마음으로 영혼들을 섬기면 후일에는 그 영혼들이 자라서 그렇게 눈물 흘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 의지하면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이 오기를 꿈꾸는 마음으로 우리는 매일매일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궁금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시인이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고 주의 법도를 지키지 않는 자들을 바라보면서 마음 아파하며 눈에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르게 되었는데 그는 그런 상황에서 무엇을 기도하고 있었습니까? 그는 그런 상황에서 무엇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그가 기도한 것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주의 얼굴빛을 자신에게 비춰달라고 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주의 율례를 자기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살아가는 세상을 향해서 눈물을 흘리는 순결하고 깨끗한 경건한 영혼을 소유하기 전에 그는 먼저 끊임없이 하나님의 얼굴빛을 구하고 주의 율례를 하나님 앞에 깨닫기 원하는 삶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경건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를 매어서 쓸 수 없는 것처럼 아무리 이 세상이 썩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버려도 원리를 뛰어넘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부흥은 부흥의 필요를 느끼는 사람의 마음속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걸 깨뜨리고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패역을 고치는 과정도 그것을 깨뜨리는 과정입니다.
이 시인이 갑자기 어느 날 인생관을 바꾸고 신앙관을 바꾸었기 때문에 세상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그런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를 보십시오. 끊임없이 하나님의 얼굴빛을 구하고 주의 율례를 깨닫기를 원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루 이틀이나 한 두 달이 아니라 장구한 세월들을 그렇게 살아오면서 그는 거룩하고 신령한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질과는 전혀 다른 이 세상의 질을 보면서 그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그들 속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고,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지 않고 거역하며 사는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시인이 기도한 두 가지는 우리의 영적인 생활에 중대한 도전을 주는 요소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얼굴빛을 구하는 것인데 이것은 신령한 신자의 영혼 속에 일어나는 신령한 부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가 우리를 향해 얼굴빛을 비추실 때 그것은 분명하게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이고, 죽은 영혼을 살리는 영혼의 축복이며 어둠 속에 있는 자들에게는 빛을 주시고 곤란 속에 처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표증입니다.
얼굴빛이라는 말이 들어가지 않고 얼굴 혹은 낯을 돌리실 때에 성경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자기의 얼굴, 당신의 낯을 돌리신다고 말하는데 첫째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얼굴을 돌리시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진노하신 인간들을 징벌하시기 위해서 얼굴을 돌리시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전자의 경우에는 대개 빛이라는 말이 함께 따라와서 주의 얼굴빛이라고 말합니다. 이 빛은 거룩의 빛이며, 하나님의 성품으로부터 우러나온 영혼의 감화를 주는 능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한 사람의 영혼 속에 일어나는 부흥을 가져오고 잊을 수 없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만남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고수하는 오늘날의 보수주의자나 오늘날의 정통주의자나 오늘날의 수구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교리적으로 지키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얼굴빛을 구하는 주님의 거룩의 빛 아래서 살고 싶어하는 신령한 한 사람의 성도였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신자의 참된 행복이 어디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우리는 신자의 참다운 행복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비가 쏟아지고 폭우가 물난리가 일어나는 지금의 상황에서 평안하게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도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요 복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가장 커다란 행복은 하나님이 개인을 향해서 얼굴빛을 비추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그 얼굴빛을 비추시는 것입니다.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졌던 하나님이 우리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이 느껴지고, 죄와 우리의 허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해서 가질 수 없었던 우리의 예민한 감격이 모두 사라졌을 때에 다시금 하나님께서 그 감각을 회복시켜주시고, 우리에게 당신이 우리를 매우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하나님과 매우 특별한 관계에 있는 당신의 자녀라는 사실을 보여주실 때 우리는 그거보다도 더 큰 행복을 맛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을 읽어보면은 이러한 영적인 비밀을 알았던 시인들은 끊임없이 헐떡이는 사슴처럼 목이 갈하여 헐떡이는 짐승과 같이 주님의 얼굴빛을 구했습니다. 한번 만져주시는 주님의 손길에 헐떡거렸고 한번 안아주시는 하나님의 포옹을 그리워하며 그들은 목 메이게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를 사모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은 지푸라기와 같이 생각하며 오히려 주님을 보기를 원했고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했고, 주님의 그 품에서 주님의 박동하는 고동소리를 듣고 싶어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진정한 행복은 주님이 주시는 선물들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비밀을 모르는 사람들은 껍데기만 가지고 얼마든지 신앙생활 해 나가지만 그러나 주님의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 더러운 인간이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아서 주의 거룩의 광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맛본 성도들은 주님과의 그 짜릿한 만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거룩의 빛이 우리 영혼에 두루 비췰 때에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얼마나 하나님의 백성다워지는지를 아는 사람들은 주님의 얼굴빛을 구하는 이 시인의 기도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압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만남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손을 귀에 대고 여러분의 영혼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영혼의 탄식소리와 여러분들의 영혼 깊은 곳에서 메아리치는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영혼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듣기를
주님을 만져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외면하면 외면할수록 들리지 않지만 귀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흐느끼는 울부짖음이 되고 그 울부짖음은 피 어린 통곡이 되어서 우리의 마음에 울려 퍼집니다. 그렇게 되면 오늘 이 시인처럼 간절히 흐르는 눈물을 간직한 채 ‘당신의 얼굴빛을 내게 비추어 주소서, 주님이 없는 세상에서 주님의 등뒤에서 일생을 영화롭게 사는 것보다는 주님의 불꽃같은 눈빛 앞에서 한시간이라도 주님의 교제의 행복을 맛보며 살고 싶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모든 것 주 송축하리
거룩하신 주 이름 송축하리라
언젠가 수련회에서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셨는데 그 중에 한 지체가 그랬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나서 “기분이 어떠냐?”, “너무 행복해요” 그리고 막 울었습니다. “어떻게 행복하냐?” 굉장히 말도 못하고 수줍던 지체였는데 “목사님, 전에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셨는데 지금은 제 안에 계셔요” 시인은 이것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백성들 속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교리 속에 묵힌 하나님이나 혹은 그들의 차가운 율법 베끼기 속에 묶여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에서 나오셔서 지금 우리가 만져보고 느낄 수 있도록 실존하시는 하나님, 죄인들을 압도하는 찬란한 영광의 빛으로 그 앞에 나타나게 하셔서 주님의 성품에 어울리는 삶을 살지 않고는 베길 수 없게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얼굴을 지금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기도는 모두 보조적인 기도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혹시 이런 기도를 드려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 저를 한번 안아주세요. 하나님, 저를 향해서 얼굴을 한번만 돌려주십시오. 하나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내게 주시고 이 세상에서 어떤 영광과 영화를 누리게 하시고 수많은 사람들이 내 인생을 향해 박수 갈채를 보내도 그 장시간 동안의 이어지는 박수와 수많은 갈채보다는 한번 스치듯 지나가는 주님의 눈빛이 더 좋사오니 주여, 당신의 얼굴빛을 나에게 비추어 주소서, 주께서 그 눈빛으로 내 영혼에 비추시기 전까지 나는 이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나이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처럼 주님의 얼굴빛을 구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그렇게 주님의 얼굴빛을 구하는 과정을 통해서 거룩한 사람으로 변해갔습니다. 치열하게 울부짖으며 주님의 은혜로운 얼굴빛 아래서 말할 수 없는 지고의 행복을 느끼며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 이 시인을 비롯한 구약의 성도들의 기도는 주님에 의해서 응답되었는데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요’ 말씀하셨습니다. 주는 사랑이시지요, 주님처럼 우리를 어루만지고 지나가시는 분은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눈에 눈물이 흐르기도 전에 우리가 울 것을 아시고, 그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지, 자기를 낳아준 부모는 모르고 같이 살고 있는 가족들은 몰라도 주님은 압니다.
만약에 우리가 정말 이 시인과 같이 주님의 얼굴빛을 구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그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소원이 이 세상에서 우리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백은 죄를 용서받게 만들고 불결했던 인간을 정결케 하고 죄 가운데 살았던 사람들을 성자와 같은 사람들로 만들어 주는 정화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의 의로운 사람들이 아니라 이 세상의 불의한 사람들, 이 세상에서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죄인이라고 생각하며 가슴을 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이 주님의 얼굴 앞에서 살수 있었던 이유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시인은 이런 지고의 행복을 구하면서 아울러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라고 말합니다. 이게 말씀의 세계하고 하는 것이 머리로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교만해져요. 그런데 온 인격으로 성경을 배운 사람들은 설령 머리에 탁월한 지식이 쌓인다고 할지라도 교만해질 수가 없어요. 여러분, 언제 여러분들이 설교를 듣거나 말씀을 읽으면서 ‘아, 나는 정말 짐승과 같구나!’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이 언제입니까? 진짜 짐승처럼 살아갈 때 ‘그래 맞아 나는 짐승이야’ 그렇게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어떻게? 조금이라도 말씀의 빛이 들어와서 지식이 쌓이고 성도다운 사람으로 변해 가는 것 같은 자극이 있을 때 그때에 ‘아, 나는 인간이 아니구나!’ 라고 깨닫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그리스도인이 성경공부를 많이 하면서 자기는 일평생 교회만 위해서 살았답니다. 돈 벌어서 교회 갖다 주고 시간 나면 교회 가서 봉사하고, 교회에서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천한 일들은 다 자기 몫이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진짜 교인 아닙니까? 진짜 신자 아닙니까? 성도가 그만큼 살면은 됐지 뭘,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누구한테 ‘죄 죽임의 교리’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것을 듣고 나서 펑펑 울면서 말하는 것이 자기는 옛날에 자기가 성도인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보니까 막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짐승입니다. 짐승같이 살았어요” 만약에 그 사람이 깨닫기 전에 그 사람에게 짐승이라고 그랬으면 난리 났을 것입니다. 여러분 참 신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 모를수록 깨달아야 할 필요를 못 느끼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성도다워지면 질수록 자신은 정말 희망이 없는 인간이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깨닫고 주님의 그 말씀으로 우리를 도전하셔서 새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이고, 성도의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지 않으시면 아무 희망이 없다라고 하는 고백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언제? 희망이 있을 때 그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않으면 도저히 주님의 자녀답게 살수 없습니다. 언제? 제법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고 있는 그 시간에 그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요즘 제가 교사에 대해서 책을 쓰고 있는데 책을 쓰면서 한가지 마음이 아팠습니다. 왜냐하면 그 중에 하나가 지겹도록 책을 안 읽습니다. 안 읽기로 뜻을 굳게 세웠습니다. 뭘 보면 알 수 있느냐 우리 나라에서 기독교인이 1200만 명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믿지도 않지만 한 달에 책 2000권이 팔리면 베스트셀러 차트에 오릅니다. 얼마나 안 읽는지, 교사들도 그러니 교사가 아닌 사람들은 오죽하겠습니까. 눈으로 무엇을 보면서 그렇게 열심히 살까요? 눈으로 무엇인가를 보면서 살기는 사는 것입니다. 주의 율례를 배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하다못해 보자기라도 공짜로 나눠준다고 하면 머리가 터져도 공짜로 성경 가르쳐줄 테니까 모이라 그러면 파리를 날립니다. 정말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시대이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시대입니다. 그런 때를 저희들이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오늘 시인을 보십시오. 이만하면 되지 않습니까? 우리 가운데 시인의 영성을 따라갈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 하나님의 율법을 폐한 무리들을 보면서 저 인간 쓰레기들 주님, 한꺼번에 종량제 쓰레기 봉투에 넣어서 폐기처분 하십시오.’ 그렇게 기도하지 않고 그들을 보면서 한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만들어 놓으신 땅에 살면서 저렇게 살아가서 주님을 욕보이다니, 또 한편으로는 저렇게 살아가는 죄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하는 탄원의 기도입니다. 그런데도 이 시인은 무얼 깨닫습니까. 자기는 주의 율례로 하나님 앞에 가르침을 받아야할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때 시인의 마음은 어떨까요? ‘주님 제게 율례를 가르쳐주시기는 가르쳐 주시는 데요. 초보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저는 그래도 꽤 하잖아요. 저들하고 수준이 다르게 저를 가르쳐 주셔야 되요.’ 이런 태도로 한 수 배우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이제껏 알고 있는 율법에 대한 많은 지식과 그것을 하나도 염두해 둔 것이 아닙니다. 이제껏 까지 진리를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율례를 따라 살아왔던 삶에 대한 기억도 시인의 마음속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 말씀을 지키고 진리를 따라 살기 위해서 세상에서 고난과 박해를 받았던 그의 과거는 더더욱 그의 마음속에 없습니다. 지금은 오직 ‘주여 오셔서 오늘도 나를 깨우치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나는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주님의 은혜에서 멀어진 삶을 살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오늘도 나를 깨우쳐 주시옵소서’,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맞을까! 정말 우리가 애굽에서 가지고 나갈 때에 준비했던 양식이 다 떨어졌는데 무슨 곡식이 하늘로부터 내린다는 말이 정말 맞을까!’ 생각하면서 기대감을 가지고 바가지를 들고 들판으로 나아갔다가 하얗게 쌓인 만나를 거두어들이면서 눈물을 흘리며 환호성을 외쳤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를 원합니까? 그리고 깨달을 때 그 환희가 여러분들 속에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런 것이 없으면 우리는 세상을 위해 흘린 눈물도 없고, 우리들이 주님을 거슬리고 살아가는 이 세상을 향해 눈물이 없으면 시간의 차이는 있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주님이 가슴아파하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십시오. 그 율례를 배우기를 정말 힘쓰십시오. 여러분 오늘 이 시인이 여러분들을 얼마나 부러워했을까요. 신약의 시대에 찬란한 복음의 빛 아래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들을 얼마나 부러워했을까요. 그리고 이제는 모든 것들이 손만 뻗으면 주님의 말씀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우리의 게으름과 야합하지만 않는다면 언제든지 그 진리의 세계 속에서 주님을 뵈올 수 있는 여러분들의 시대를 얼마나 부러워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이렇게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주님의 율례 안에서 배우기를 힘쓰는 그런 성도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5. 하나님께 피하는 길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시18:30)
한 사람이 얼마나 열심히 있는 신앙 생활을 하는가 하는 것은 한 사람이 얼마나 거룩한 성도로서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그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삶을 지속적으로 오래도록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향기로운 신앙의 인물들을 많이 만난다. 크고 놀라운 일들을 한 사람들은 우리가 성경을 잘 몰라서 그렇지 우리의 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큰 일을 한 사람들이 성경에는 많이 있다. 정치적으로 커다란 의미를 남겼던 임금과 같은 인물들이 성경에는 많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성경은 역사적으로 그가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 그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고 있다.
그 한 예가 북왕국 이스라엘 왕국의 오므리 왕조 같은 것이다. 굉장히 번창한 왕조였지만 그래서 성경밖에 기록에는 많이 나오지만 성경에서는 거의 언급이 되지 안는다. 예후와 같은 왕도 커다란 일들을 많이 이루었지만 성경에 많이 언급이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의미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성경은 이 세상에 있는 시각과는 다른 시각에서 사람들을 보고 기록을 해 나가기 때문이다.
다윗 같은 경우는 역사적인 중요성과 신앙적인 중요성이 아울러 갖추어진 사람이었다. 우리는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이 살펴보려고 하는 이 본문도 다윗의 시이다. 성경 속에서 끊임없이 성경을 기록하고 있는 포커스가 다윗을 쫓아다닌다고 해서 그것이 곧 이 세상에서 의미 있는 큰 임금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만약에 다윗이 큰 임금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아마 유명하지 않은 한 선지자로서 한 시대를 살다가 갔다 고할지라도 다윗과 같은 사람이었다면 아마 성경이 동일하게 성경의 포커스를 동일하게 그에게 맞췄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신앙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인생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세상 적으로 보면은 유명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은 무명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세상에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을 만한 존재가 되지 못한 나머지 인생이 살아갈 맛이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런 시야와는 다른 시야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 시야가 무엇이냐고 한다면 하나님의 시선아래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의 진정한 가치라고 믿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임금들이 꽃으로 꾸며 쓴 저 황금의 면류관은 광채를 잃겠네” 정 반대로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말씀한다. “그 정욕도 지나가고 세상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영원히 있느니라” 다윗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성경이 주목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물론 성경은 반대로 주목을 하기도 한다. 저렇게 살면 안 된다는 초점을 맞춰준다. 비참한 아합이나 사울의 말로 같은 것이 그런 것이다. 가룟 유다의 말로와 같은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부지런히 성경이 초점을 맞춰갔지만 마지막에 그 긴 기록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저렇게 살면 끝이 저렇게 비참하게 되는구나!”, “저렇게 살면 성령으로 시작했어도 능히 육체로 마치는 구나!” 하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떤 초점 아래서 살고 싶은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전자이다. 그 비결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시선 아래서 주님이 인정해 주시는 눈빛 아래서 살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을 찾은 것이다. 뛰어난 천재가 있는가 하면 무식한 사람도 있다.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다. 건장한 체격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곧 쓰러질 것 같은 검불과 같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시선 아래에서 산 사람이 있다.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다. 어린아이도 있었고 할아버지도 있었다. 임종이 가까운 성도들도 있었다. 누가 이들의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거룩한 성도들이 된 것은 아니다. 재미있는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이단에 속한 교파일수록 성경만을 믿으라고 말한다는 사실이다. 책도 읽지 못하게 하고 성경만을 파라고 말한다. 나는 자신이 성경을 수백 독을 했다고 그라는데 전혀 신앙이 바르지 못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즉 성경을 사랑한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이 들어내 주는 진리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눈으로 본 성경을 사랑한 것이다. 성경을 사랑한다라고 하는 말은 성경이 가르쳐 주는 진리를 올바르게 사랑한다는 것이지 성경책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하나님의 눈빛 앞에 합당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 인정받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었다고 할 때 이것은 단지 말씀을 향해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올바른 의미를 깨닫고 올바르게 사랑한 그 사람 그래서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살던 사람들의 공통점이었다.
다윗이 성경의 초점을 그렇게 붙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정말 말씀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저는 다윗의 시편을 볼 적마다. 신약에 태어난 것이 한없이 창피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이유인 즉 그리스도가 아직 오시지도 않은 때에 신약의 찬란한 계시가 아직 비추기도 전인 그 때에 아마 그는 계시의 점진 성을 알았기 때문에 먼 후일 우리 같이 찬란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 신약에 빛 아래 살아갈 성도들을 한없이 부러워했을 그 사람이 본 하나님 아버지의 인식의 세계를 넘어 서기는커녕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시편을 묵상해도 시인이 경험한 영광이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시편 23편을 읽으면서도 한없이 부끄러웠다. 주님이 이 찬란한 복음에 계시를 받으면서 겨우 그가 쓴 시편을 그저 조금 이해하는 정도라 하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차가운 교조주의자가 아니라 주님의 율법을 지키는데 열심을 내고 그 열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그러한 율법주의자가 아니라 항상 다윗의 진리의 세계 속에는 하나님과 만나는 환희와 기쁨이 있고 주의 사랑 앞에 무릎을 끓고 펑펑 우는 감격이 있다. 자기의 죄를 드려다 보는 차가운 통찰이 있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기 위해서 자기를 버리는 극기와 자기 부인이 있다. 정말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람이었다. 그 시인이 인생에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 가운데 한 때에 바로 우리들이 읽은 이 말씀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에게 피하는 자에게 방패가 되시는 도다.”여기에서 ‘하나님의 도’라고 말했는데 히브리어에는 ‘그분의 길’이라고 나와 있다. 그런데 그 길이 여러 길이 아니라 단수이다. 한 길이다. 하나님의 길은 완전하며 그 하나님의 말씀은 정미하니 여기에서는 ‘말씀’이라고 했는데 히브리어에는 ‘말씀들’ 복수로 되어있다. ‘정미하니’라고 했는데 이 말은 금을 제련할 때 쓰는 말이었다. 즉 금을 불에 넣고 불순물을 걸러낸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순수하게 된 것, 즉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에게 방패가 되신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다가 갑자기 하나님에게 피하는 자에게 방패가 되시도다 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는가? 시인은 정말 고난에 넘치는 인생을 살았다. 오늘 이 시편에 배경도 그러하다. 원수들에 의해서 고난과 독한 박해를 받으면서 자기의 생명의 날을 보장받기 어려운 역경으로 가득한 인생을 살았다. 다윗 한 사람만을 보면 한 나라에 제왕이 그를 죽이려고 했는데 왜 그를 파멸시킬 수 없었겠는가? 한 나라의 제왕이 그를 파멸시키려고 했고 그 계획을 따라서 순종하려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을 때 다윗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사 조직이 있어서 경호원들이 다윗을 지켜준 것도 아니었다. 얼마든지 파멸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셨다.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뚜렷한 계획표는 없다. 그러나 방패와 같이 다윗을 보호하고 막아 주셨다.
고대의 방패는 작은 방패가 아니다. 굉장히 커다랗다. 창이나 화살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방패이다. 그래서 방패를 세워놓고 자신의 몸 하나를 능히 감출만한 방패들을 사용했다. 그러니까 전사였던 다윗은 전쟁을 하면서 비오듯 쏟아지는 적군의 공격, 돌이나 화살이나 창 같은 것의 공격으로부터 방패가 얼마나 요긴한지를 아마 몸소 경험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소나기 쏟아지듯이 돌멩이가 날아오고 화살이 날아와도 커다란 방패를 앞에 놓고 바짝 붙어 앉아 몸을 쪼그리면 능히 자신의 생명을 보호할 수 있는 그러한 방패를 떠올리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큰 전쟁 가운데서 구해내고 그들로부터 어떤 보복을 받을지 몰라서 두려워 떨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아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 하셨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런 분이시라는 사실을 깊이 경험한 것이다. 사실 다른 사람들이 이 말을 했으면 그렇게 감동적이지 아닐지 모르겠지만 우리들이 거짓이 없이 정직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면 대적 자에게 둘러싸인 그 다윗에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이 다윗의 인생은 수많은 군사들이 에워싸서 돌멩이를 던지고 화살을 날려 버릴 때에 벌거벗은 어린아이처럼 한 복판에 서 있는 것과 같은 신세였다. 그를 보호할 사람, 정치적인 세력, 보호할 군사,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사실 다윗은 너무나 억울했다. 왜? 그가 만약에 기름 부음을 받지 않았더라면 사울이 그를 그렇게 미워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다윗은 왕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생각지도 않던 때에 하나님이 몸소 찾아오셔서 주권 적으로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다. 기름이 부어 졌을 때 그의 인생은 평안한 포구에 거하는 것 같은 포구에 피한 배와 같은 처지에서 변하여 강한 파도가 몰아치고 노도와 같은 폭풍우의 위협이 실제로 가해지고 있는 망망한 대해에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 없이 내 동맹이 처진 쪽배와 같은 신세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과정을 통해서 다윗에게 호위 해 주는 사람 없고 인간 중에는 아무 돕는 사람이 없어도 어떻게 하나님께 피하는 것인지 그것을 철저하게 하나님이 다윗을 훈련시킨 것이다. 그 결과 제왕이 되었는데도 대체적으로 자신의 번영하는 왕국이나 자신이 세운 나라에 국력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자기는 궁핍하고 하나님의 종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삶을 살았다. 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방백을 의지하는 것보다 낫고 이 세상에 있는 힘을 의지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는 사실을 체험한 것이다.
우리들에게도 피난처가 필요하지 않는가? 곤고하고 고달픈 것은 우리가 걸어가는 그 길에 우리의 힘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지치고 피곤한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쉼이 없는 삶을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그 쉼 없는 삶이 주를 위해 분투하는 삶일 경우에는 쉼 없는 삶을 살기 때문에 쉼 없이 솟아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생수를 맛본다. 그러나 주님을 등지고 살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면서 부지런히 분투하는 삶을 살아봐야 몸부림칠수록 자신의 영혼은 햇빛 심히 쬐이는 광야의 길을 걷는 것과 같이 곤 고한 것이다. 그에게는 피난처가 필요하다. 그에게는 쉴 수 있는 자리 쉼을 줄 수 있는 그늘, 물이 있고 음식이 있고 안식이 있어서 그의 영혼과 육체를 회복시킬 수 있는 쉼터가 필요하다. 때로는 거기서 한 걸음 더 지나가서 뙤약볕이 내리 쬐는 광야에서 주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것도 힘이 드는데 그 한번 더 보태어서 자신의 인생의 계획표에는 전혀 없던 시련의 폭풍이 몰아치고 환난의 우박이 떨어질 때에는 그는 정말 피할 곳이 필요하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오늘 여기에 나와서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 가운데 이렇게 햇빛이 심히 쬐이는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메마르게 살아갈 뿐 아니라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감당하기 힘든 시련과 고난의 파도를 한 몸에 받으며 산 곧 죽어 버릴 것 같은 인생의 골짜기를 지나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도움조차 끊어진 것 같은 어디론지 찾아가고 싶어도 날이 흐려져서 단 하나 자신의 길을 인도하던 별빛조차 보이지 않던 인생의 때가 왜 없겠습니까? 피난처가 필요한 것이다.
여러분, 인간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이 오래 견딜 수 있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견딜만한 한계를 주신다. 그것을 지나치게 해서 견디면 마음의 병이 되고 성격이 휘고 사람이 이상하게 변해 버린다. 여러분 정말 시련에 비바람이 몰아치는 인생의 길을 쓰러지면서 하나님 없고 피나 처도 없이 죽어라 하고 가는 사람들이 있다. 환난에 바람이 다 지나가고 나면 환난은 지나갔는데 인간성이 완전히 망가져 버린다. 그 밑에서 태어나는 자식도 망가진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다윗이다. 다윗이 만약에 하나님을 몰랐으면 주정뱅이가 되든지 문제아가 되든지 깡패가 되든지 아니면 펑크 족이 되었을 것이다. 왜? 어렸을 때부터 상처투성이었다. 아버지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형들은 항상 미워하였다. 그의 아내는 나중에 변심하여 그를 비웃었다. 사울은 그를 죽이려고 쫓아다니고 자식들은 서로 강간하며 살인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 다윗이 돌아 버리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었다. 그런데 다윗은 더 순결해지고 정결하여졌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피난처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고생을 많이 한 아이들이 다 성격이 이상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고난이 오고 시련이 닥쳐도 가족들끼리 뜨겁게 사랑하면서 함께 그 고난을 통과한 아이들은 절대로 성격이 이상하게 되지 않는다. 그러나 홀로 버려진 아이들, 혼자 그 고난을 다 맞고 부모를 배신하고 도망한 아이들, 그런 아이들의 성격이 이상하게 변하게 되는 것이다.
큰 풍파와 곤 고한 시련의 계절을 성도가 지나면서 가족과 같은 관계를 하나님과 유지하면서 주님과 함께 이 고난의 풀무 불을 결핍과 시련으로 가득한 인생의 길, 마라와 같이 쓴 물을 머금어야 하는 외로운 광야를 지나가면 고난을 받으면 살았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이상한 사람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거룩한 성도들은 모두 고난의 풀무 불을 통과하였다. 그렇다고 이 지상에 고난받은 모든 사람들이 성도가 되느냐? 그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되는 것은 고난받는 자들에게 피난처가 있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나 잘난 사람들인가? 얼마나 오래 견딜 수 있는 사람들인가? 우리들이 아무리 시련을 견디고 개인의 고통과 어려움 들을 참고이기며 인내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이를 악물고 고난을 견디며 참는 자들을 칭찬하시지도 않고 기대하시지도 않는다. 그는 다만 고통을 받아도 늦게 죽는 이상 체질을 갖는 사람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피난처가 없다면 우리는 혼자 그 환난을 다 당해야 한다.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쓰러질 듯 고난을 받아도 십자가 그늘이 없다면 할 수 없이 살아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셨다. 더군다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오라” 주님께서 부르시는 것이다. 큰 물결이 일어나 산 위에 넘쳐도 두렵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피할 곳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련회를 가는 것도 피난처를 제공받기 위함이다. 복잡하고 각박한 삶 속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이 모진 광야와 같은 인생의 길을 걸어가다 보면 ‘피난처 있음 여기서 쉬어 가시오’ ‘물과 그늘과 잠자리와 양식이 준비되어 있음’ 이라는 표지판이 시시때때로 나타난다. 그런데 그 표지판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자기가 걸어가는 그 길에 골몰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잠시 가던 걸음을 멈추시고 우리의 생활 전체를 정지시키실 필요가 있는 것이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병원에 드러눕게도 만드신다. 한번 자신의 길을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일상의 일을 모두 버리고 깊은 기도원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우리의 생활이 계획을 정지시킨 상태에서 우리를 한번 돌아보면서 피난처로 가는 이정표를 찾아보는 것이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생각해야 한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고 그리고 어떤 사연을 안고 인생의 굽이굽이 골짜기를 지나서 오늘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 주님이 인도하신 발자취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들을 여기에 세우신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세워 주실 때 내게 기대하셨던 모습이 무엇인지 마음에 선명하게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지금 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을 한번 돌아보면 우리들의 마음속에 틀림없이 이제껏 까지 내 인생의 최고의 관심사는 내가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과 괴롭다고 하는 것과 지쳤다고 하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보니까 주님이 나를 거기에 세워 주실 때 기대하셨던 대로 살지 못했구나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 모든 영혼의 곤고함에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 이제 주님께 피하기만 하면 된다. 피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언제는 하나님께서 방패가 아니셨는가? 언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실 수 없으리 만큼 연약해진 적이 있었는가? 항상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우리의 방패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피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태도를 바꿈으로서 우리가 피난처 되신 주님께로 피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이유가 본문 30절에서 갑자기 시인이 “여호와의 도는 완전하며 여호와의 말씀이 정미하니 그에게로 피하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신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성격을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피난처가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처절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피난처로 삶아 피하고 쏟아지는 시련과 어두움 속에서 방패로 자신을 보호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피할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왜 하나님의 말씀의 속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들이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성경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말할 때에 결국 그것이 우리를 향해서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고리를 발견하면 같은 공식이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서도 적용이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당신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가? 당신처럼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게 하시려고 보여 주시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죄 가운데 살아가는 “나 하나님은 의로운 여호와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품을 상기시켜 주시는 것이다. 즉 막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에게 찾아 오셔서 “너 그렇게 살면 죽어” 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나 여호와는 의로운 여호와라” 당신의 성품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즉 그분의 성품에 합당하게 살라는 의미이다. 왜? 너희가 넓게는 창조주 나 여호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적게는 내가 구속 하여낸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성경 구절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니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도’ ‘하나님의 길’ 그것이 완전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을 보여 주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준 인생의 길이 있는데 그것은 완전하단다”. 여기서 ‘완전하다’고 하는 것은 ‘순전하다’는 의미이다. 나 여호와의 길은 순전하다. 그러니 너희도 순전하게 즉 말씀에 표현대로 하면 온전하게 살아라 라고 하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이 환난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피난처로 삶는가?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이 고통받는 그들의 인생의 삶의 현장에서 정말 그들에게 피난처가 되고 방패가 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오늘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들어가도 오늘 예배를 드린 것이 내일의 문제 속에서 살아가는 여러분들의 인생에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하는 사람들도 여기에 여럿 있을 수 있다. 아무리 목이 터져라고 믿습니다를 외쳐도 이상하게 그 믿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 신앙과 삶의 도가 인생이 걸어가야 할 길이 온전한 것처럼 그렇게 온전한 삶을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피난처가 되시는 것이다. 주님이 수많은 성경 곳곳에서 죄인들을 한량없이 용납해 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어 주고 계신다. 신앙의 감격을 맛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그 말씀이 보여 주신 용서의 약속을 믿으면서 진실로 회개하는 사람들이 용서와 사죄와 다시 은혜를 베푸시는 감격을 맛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오늘 하나님의 도가 ‘순전하다’‘, ’완전하다‘, ’온전하다‘ 라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은 우리들이 그 하나님의 말씀에 성격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드러난 그 성품에 어울리게 살 것을 하나님께서 요구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흘려 보내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보호해 주시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한 것처럼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시련 속에서도 시련 자체가 아니라 시련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진리를 붙들고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삶을 살려고 결심하고 돌이켜 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놀랍게도 방패가 되어 주신다. 우리들은 인생을 살면서 종종 나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 주님의 도우심이 이제는 끝난 것 같다.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나를 거절하신다. 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때 우리들은 말씀을 향한 우리들의 태도를 돌아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도가 완전한 것을 보이셨으니 그 도를 온전히 기키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될 때에 여러분들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시련과 위기 속에서 방패의 그늘 뒤에 우리들을 숨기시는 하나님의 보호를 경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시인은 하나 더 추가하여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정미하니” 라고 말씀한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여호와의 말씀들은 제련되었으니 또는 순결하니, 정제되었으니 라는 뜻이다. 마치 금을 연단한 것과 같이 순수하게 갖추어 놓은 것을 의미한다. 앞에 나온 것이 온전한 삶에 대한 지침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 뒤에 나오는 ‘정미하다’라고 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순전하게 살아가는 성도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흙 도가니에 일곱 번 연단한 은과 같다는 것이다.
아주 여러 번 연단해서 순결하고 깨끗하게 된 혹은 금과 같은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성도들도 순도 높은 삶을 살아야 한다. 물론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라고 물으면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만 사랑하십니까? 라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곤란해진다. 말씀을 사랑합니까? 라고 물으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데 진실로 그 말씀을 붙들고 사십니까? 하면 왠지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순종하면서 살고 싶습니까? 라고 하면 ‘아멘’이라고 말하는데 정말 순종하며 죽는 것을 불순종하며 사는 것보다 더 낫게 생각합니까? 라고 물으면 대답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모두 다 순도가 떨어지는 신앙인 것이다.
수많은 성도들이 죄를 죽이기 위해서 죄를 죽이는 삶을 희망하고 은혜 속에 사는 삶을 희망한다. 죄와 더불어 싸우기를 원하는 사람도 많지는 않지만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승리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죄를 죽이는데 중요한 원리 하나를 놓쳤기 때문이다. 즉 죄를 죽임에 있어서 진정으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완전하고 순전한 순종을 지향하지 않으면 정말 안 되는 것이다.
(예화) 장마철 물을 거슬려 올라가는 물고기 이야기.
마찬가지로 온전한 삶에 대한 기대가 없이 그냥 사는 사람들은 제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미끄러져 내려가게 된다. 결국 나중에는 성도들의 무리가 아니라 침륜에 빠진 자들의 무리 속에서 발견되게 된다. 100%의 금은 없다. 그래서 순금이라는 말은 거짓말이다. 99.9%이다. 100이라 고하는 것은 영원히 인간의 힘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즉 인간의 기술을 거쳐야 되는 것은 100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순금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렇게 완전한 금을 만들기 위해서 모든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는 ‘라벨’이다.
우리는 영원히 완전한 신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는 완전한 신자가 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정미한 것처럼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성품, 말씀을 어떠한 태도로 지키면서 살아야 할 지를 계시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완전해 지리라고는 믿지 않지만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완전해질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완전해지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더 순전하게 더 온전하게 더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살려는 끊임없는 몸부림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만 우리들이 살아있는 신자가 되는 것이다.
일단 멈추면 뒤로 물러나게 된다. 왕년에 받은 은혜가 있다면 얼마나 되겠는가?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오늘 성경이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들, 인생을 사는 길은 하나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정해 주신 인생의 길을 따라 걸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말씀들이 필요하다. 십자가 설교를 몇 편 듣고 인생이 ‘평’ 뚫렸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는 한없이 무한하다. 그리고 진짜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항상 진리 앞에서 교만해 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 알수록 자신이 아는 것은 너무나 작은 것이고 또 그것이 큰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자기에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시다. 그러면 성도가 주님을 피난처로 삼으면서 살아가는 실제적인 방식이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주어질 때 그 하나님의 아버지의 말씀대로 열심히 노력하면 살 수 있을 것이며 그리고 주님의 도우심이면 내가 온전히 하나님 앞에 순종한 삶을 살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되는 순수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어느 때에도 나는 그런 삶을 살았다 라고 이야기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의 경우 그는 이미 얻은 줄로 이룬 줄로 완전하게 된 줄로 여기지 않고 또한 이렇게 될 가능성이 전혀 없지만 그렇게 될 것처럼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굳게 믿었었다. 그렇게 때문에 그는 물결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와 같이 자신을 지키면서 순전한 성도로서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완벽한 피난처가 되신다.
죄악된 세상을 방황하면서 천국과 지옥도 모르면서 살았던 거지발싸개와 같은 인생을 살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나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시고 우리 같이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서 생명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그때 그 은혜 아래로 들어와서 구원을 받고 뒤를 보니까 그때 정말 내가 살아 있었던가? 정말 주님을 모르고 그렇게 살았더라면 내 인생이 얼마나 비참했을까 그러면서 살다가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닌 것 같은데 하면서 그런데도 꾸역꾸역 사는데 어느 순간 하나님께서 ‘꽝’하고 진리의 빛으로 우리에게 복음에 보다 깊은 의미를 깨닫게 하시고 이 시대가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가려진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새롭게 눈뜨게 되었을 때 우리는 또 한번 각성하게 된다.
우리는 정말 짐승처럼 막 살았구나 어떻게 그것을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라고 하면 다 온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한이 없다. 다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처럼 온전한 삶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순전한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의 거룩한 삶의 진보도 없고 진리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도 멈추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이전과 꼭 같이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 뜨거운 햇빛과 목마름에 노출되어 버리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지금이라도 우리의 경박한 말씀 생활을 뿌리치고 처음 하나님의 말씀에 감격하던 때로 돌아가서 오늘 아침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그럴 수만 있다면 내일 죽어도 좋습니다 라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도’ 안에서 온전히 성도답게 살기를 죄인처럼 천 날을 사는 것보다 영광스럽게 여기는 온전한 삶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순전한 삶이 진리 속에서 이루어져야지 만 시인이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의 도가 완전하고 그의 말씀이 정미해서 그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가 되어 주시고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고 고백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이 여름에 이 신앙을 회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6. 고난 속에서 잊지 못할 말씀
나의 고난을 보시고 나를 건지소서 내가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시119:153)
경건한 시인은 고난 당할 때에 해결책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애를 쓰며 살던 이 시인을 인생의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호소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똑같이 고난 당했을 때에 고난 당한 가운데서 하나님께 자기의 고난을 돌아보아 주시도록 호소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지킬수록 우리는 점점 하나님을 의뢰하는 마음이 깊어져 갑니다. 오늘은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말씀 생활과 우리들이 고난 중에서 담대하게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고난을 보시고 나를 건지소서’라고 말합니다. 이 시인은 지금 많은 고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건져주시지 않으시면 위기에 빠질 수 있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경험하고 있는 고난과 어려움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우리들이 119편 문맥에서 이미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자신의 신앙과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 살지 못하게 하는 이 세상의 많은 사람, 이 세상의 많은 구조와 사이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장면을 봅니다. 지난번에 저희들이 살펴본 봐와 같이 저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에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르나이다 라고 고백을 했던 것처럼 이 시인은 안 믿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지키지 않는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 쌓인 가운데 하나님 앞에 분투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인생과 신앙생활의 대부분의 어려움은 사람을 통해서 오게 마련입니다. 안 믿는 가족과의 관계,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직장과의 관계, 그리고 변화되지 않는 친구들과의 교제 이런 것들은 우리들을 신앙적으로 갈등하게 만들어 주기에 충분합니다. 더군다나 부부가 온전한 신앙 속에 들어가지 못했을 때에는 남편이나 아내로부터 받는 괴로움과 고통은 그야말로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을 잘 이해하지 못할 때 그래서 마음속에서는 사람을 향해서 미움이나 원수 맺고자 하는 의도가 없는데 이 신앙의 길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해가 쌓이고 원치 않는 불화한 관계가 될 때 우리의 괴로움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겪는 괴로움과 고통은 시대가 많이 달라져도 이처럼 유형이 거의 비슷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여러 모양으로 살아가고 각기 자기의 꿈을 말하지만 그래도 결국은 이 세상에 있는 주님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결국은 육체를 위해서 살고, 세상을 위해서 살고, 자기의 만족을 위해서 사는 것처럼 동일하게 하나님을 믿고, 주의 거룩한 자녀가 된 사람들도 역시 동일하게 여러 모양으로 분투하면서 살아가지만 그러나 그 분투하고 고통하는 이유들이 대부분 다 유사하다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삼 천년 정도의 간격을 뛰어넘고 있지만 역시 이 시편 속에서 시인이 괴로워하고 고통하는 이 모습이 삼 천년의 간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전혀 우리와 간격이 있는 사람의 또 다른 어떤 사람으로 느껴지지 아니하고, 곧바로 우리들의 가슴에 와 닿는 본문이고 우리들의 가슴속에서 계속되고 있는 고통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자기가 고난 당하는 이것을 하나님 보아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자기가 처한 이 모든 상황이 모두 알려지기를 원하는 그 마음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시인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당하는 모든 인생의 고통과 그리고 모든 괴로움을 다 보십니다. 고통과 고난만 보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즐겁고 행복한 일까지도 하나님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에게는 그늘진 곳이라고는 없고, 하나님의 눈길이 미치지 못하는 후미진 곳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종종 나의 억울한 사정이 하나님에게 숨긴바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후일 그 고난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사실은 그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장 잘 분명하게 지켜보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오늘 하나님 앞에 자기의 고난을 보아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자기가 처한 모든 상황을 알리고 싶은 성도의 마음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마음이 있습니까? 남이 알지 못하는 괴로움이나 고통, 그리고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번민과 괴로움, 풀려고 애를 쓰면 애를 쓸수록 점점 더 꼬여가고 실타래처럼 엉켜 가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 놓여있을 때에 그 상황이 하나님께 모두 보였으면 좋겠다, 하나님이 이 상황을 모두 지켜보고 계셨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소원이 여러분들에게 있느냐는 말씀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지켜봐 달라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처한 상황과 우리들의 모든 여건들을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주님께서 통촉해 주시도록 기도하는 기도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부르짖을 때에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의 환경을 바라보시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일단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상황을 노출하고 싶어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부끄러운 것이든지 그것이 자랑스러운 것이든지, 혹은 많은 고통이든지 행복이든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상황이 모두 알려지기를 원하는 마음은 하나님 눈빛 앞에서 살기를 원하는 마음과 통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의 경험도 이것을 말해줍니다. 우리들이 인생에 곤고하고 어려움이 많이 겹쳐서 고통스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고 하나님 앞에 나의 고통스러운 상황이 하나님께 알려졌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될 때에 우리는 그 고통을 하나님께 돌아 보아주시기를 간절히 원한 나머지 주님이 우리의 고통하는 상황을 눈길을 돌리시면 그 눈길 앞에서는 고통하는 우리의 상황만 나타나지 않고, 때로는 우리의 죄, 우리의 감추었던 허물도 드러날 것이라는 사실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억울한 과부가 불의한 재판장에게 가서 하소연 한 광경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막무가내로 재판장에게 매달렸습니다. 늘 와서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불의한 재판장에게 호소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양심에 호소하고 있을 때에 그는 자기가 그런 특별한 방식으로 불의한 재판장에게 호소하면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며, 자신의 그런 모습이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좋지 않는 모습이 되어서 구설수에 오르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자기가 그 재판장에 앞에서 풀기를 원하는 원한은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받는 그 정도의 오해나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정도의 체면 깎이는 것과 같은 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시인은 지금 하나님 앞에 완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기의 고난을 보아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당하고 있는 고난이 워낙 크기 때문에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고통을 견디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창조된 모든 피조물에게 어느 정도는 고통을 견디는 은사를 주시는 것 같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 세상 있는 많은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단지 고통을 견디는 대서 인간의 위대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의미를 알고, 그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이 세상에 있는 다른 동물들과 동일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인간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성숙하게 만들고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인격을 갖추게 만들며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의 소중함에 대해서 새롭게 일깨움을 받게끔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모든 고통이 우리를 그렇게 하나님께로 가까이 인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을 많이 받아서 오히려 인간성이 심하게 휘고, 마음속에 패역이 굳어진 사람들은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고통을 통해서 한 사람이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고통과 고난 속에서 이처럼 하나님의 눈빛을 그리워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시인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일 경우에 그 고통이 그에게 양약이 되어서 그를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은 그러한 신앙의 비밀을 터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자기의 고난을 돌아보아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의 고난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생 전체를 주님의 밝은 눈빛 앞에 나타나게 해 달라고 호소하는 장면입니다.
저희 집안에 큰 고모님이 계셨습니다. 돌아가셨는데 그분이 우리 집안에서 처음 예수를 믿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저가 ‘하나님 아줌마’라고 그렇게 불렀는데 둘째 고모는 학교를 다니니까 ‘학교아줌마’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덤벙대셨습니다. 교회가 성결교 교회였는데 열렬하게 뜨거웠습니다. 박수를 치고, 열심히 찬송을 하는데 새벽예배도 그렇게 드렸습니다. 그때는 새벽 예배가 4시30분인가 이었는데 눈을 떠보니까 4시 20분쯤 되어서 은혜를 사모해서 꼭 앞자리에 앉으셨습니다. 박수를 치고 열심히 찬송을 부르시는데 그 날은 온 교인이 수백 명이 모였는데 찬송을 부르면서 자기만 그렇게 쳐다보더랍니다. ‘내가 아무래도 오늘 새벽기도를 나왔더니 얼굴이 빛나나 보구나, 사람들이 나만 이렇게 쳐다보는구나!’ 그리고 제일 열렬하게 손을 흔들면서 기도를 하고 집에 돌아올 때쯤 되니까 날이 훤하게 밝아서 걸어서 나오다 큰 거울에 보니까 원피스를 뒤집어 입었더랍니다. 캄캄한 밤중에 아무렇게나 입고 간 것입니다. 골목길을 걸어가는 동안 여러 사람들을 만났겠지만 아무도 그 차림새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캄캄한 밤중이라 보이지 않으니까. 교회당에 들어가서 밝은 빛이 비칠 때에 그 원피스를 뒤집어 입은 속이 누더기 같은 것을 입고 있으니 사람들이 얼마나 가관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둠 속에서 있을 때에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할 때에 사람들이 많이 자기가 인정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많이 깨닫게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게 되면은 인생을 살다가 그저 우연히 만나는 고난인지 하나님이 우리를 고쳐 주시려고 주시는 고난인지는 벌써 처음부터 틀립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시려고 주시는 고난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용을 쓰고 피해도 결국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준단 말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하면 결국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면서 ‘하나님이 나를 봐 주십시오. 나를 좀 돌아봐 주십시오. 내게 눈길을 주십시오. 내가 이런 고난 중에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럴 때 그런 기도를 하기 전에는 별로 의식하지 않았던 하나님의 시선과 눈길이 자신의 삶 구석구석을 향해서 그 눈길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동일한 시인이 말합니다. ‘내게 고난 당하는 것이 유익이라, 고난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더니 고난 당한 후에는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무슨 뜻입니까? 자기의 모습을 고난 중에서 자기를 지켜봐 달라고 호소하면서 주님의 눈빛을 구해서 그 주님의 눈빛 앞에서 드러난 자신의 모습을 보니까 자신의 삶이 자기가 마땅히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규례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시인이 가슴이 녹으면서 하나님 앞에 호소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고난 중에 있습니까? 견디기 힘든 고통이 있습니까? 도움이 끊어진 것 같은 어려움이 있습니까? 희망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나를 돌아보시옵소서’ 그래서 고난뿐 아니라 그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눈빛 앞에 드러나기를, 그래서 ‘하나님, 이 고난의 때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정말 숨겨진 우리 자신의 허물과 죄와 이런 것들을 보게 하셔서 이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완전히 새롭게 다듬어지도록 도와 달라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 앞에서 고난을 통과하면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성숙해지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이런 고난을 통과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고 고난 중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관계가 깨뜨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고난 속에서 패역이 자리잡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더욱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눈빛을 구하고 그 눈빛 앞에서 이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삶 전체를 돌아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건져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본능적으로 고통을 당하게 되면 누군가의 도움을 기대하기 마련입니다. 처음에는 자기의 힘을 의지하지만 그러나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간절히 찾게 됩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동일하게 신자가 하나님 앞에 몸부림을 치면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도무지 건질 수 없다고 생각 될 때에 하나님을 향해서 구원을 호소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도 하나님 앞에 자기를 도와 달라고 간절히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고난 속에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는 기도가 모두 동일한 기도는 아닙니다. 어느 기도는 안타깝기는 하지만 힘이 없고, 어느 기도는 가련한 것 같지만 그러나 힘이 있습니다. 가냘픈 것 같지만 힘이 있고 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처한 이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 자기를 건져달라고 호소할 때 그 기도가 정말 간절한 기도가 되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보좌에 이르는 기도가 이르는 길이 무엇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교우들은 기도를 하늘을 향하여 화살을 쏘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쏘자, 쏘자 오늘도 우리 모두 기도의 화살을 쏘자, 새가 날아다니는 첫 번째 하늘을 지나 영적인 어둠의 권세들이 누비고 있는 두 번째 하늘을 뚫고 신령한 하늘의 세 번째 보좌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기도의 화살을 쏘자”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활시위를 팽팽하게 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우리도 그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많은 기도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도하지만 그 기도가 허공 중에 연기처럼 흩어지는지 모릅니다. 날아가 버리다가 떨어지고 마는 화살과 같이 쓸모 없이 바람에 날리는 기도가 될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믿음의 선조들은 그 기도의 활시위를 튼튼하게 하는 법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이 기도의 활시위가 튼튼하면 튼튼할수록 그 화살이 높이 날아갈 것이며, 과녁에 꽂힐 것입니다. 때로는 화살 끝이 매우 뾰쪽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활시위가 워낙 강력하면 아마 활촉이 다소 무디다고 할지라도 과녁의 한 복판을 꿰뚫고야 말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의 활시위를 팽팽하게 하는 비결이 무엇이냐 하면 많이 있습니다. 한 두 가지로 얘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끈기 있게 기도하는 것도 활시위를 탄탄하게 하는 비결이 되겠지요. 그리고 수많은 방법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인은 자신의 기도의 활시위를 고난 중에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이 구원하는 호소의 활시위를 담대하게 하는 방법 하나를 우리에게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삶입니다. 그것이 그의 기도의 활시위를 팽팽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고통 중에서도 모든 시련과 고통과 아픔을 뚫고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는 기도의 활을 쏘도록 만들어준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아무렇게나 살다가 고난을 당하고 난 다음에 그 고난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주시는 것을 담보로 ‘앞으로 기도 응답을 해 주시면 내가 참 잘 살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 시인이 경험한 바와는 다릅니다. 시인은 고난을 당하면서 고난을 당할 때 오히려 주님의 율례를 지키는 방법을 배웠고, 시련과 고통이 많으면 많을수록 거기에서 진정으로 자신의 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터득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핍박과 고난이 가득 찰수록 그때가 하나님 앞에 말씀대로 살아야 할 때이며, 그렇게 자신이 고난과 역경 중에서 말씀대로 살 그때에 하나님께 올리는 그 기도가 위대한 힘이 있다고 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의 기도가 정말 탄력성이 있는 시위의 살처럼 그렇게 인간의 여러 가지 한계를 끊어버리고 하나님의 보좌 위에까지 이르는 위대하고 살아있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에 있어서 만큼은 우리의 양심의 자극을 가장 많이 받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옳다 인정해 주셔서 우리에게 기도하게 힘, 능력에 의해서 강한 자극을 많이 받기도 하지만 우리들이 또한 하나님 앞에서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으면 우리의 기도의 힘은 더더욱 증가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양심이 거리낌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비결은 말씀의 법도를 따라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는 이것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시인의 처지를 개선하는데 당장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았지만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의 눈에서는 돌아가는 것이 질러가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시인은 자기에게 많은 사람이나 혹은 상황이 에워싸서 자신을 압제하고 핍박하고 고통을 받게끔 만들 때 그 상황과 더불어서 싸우는 것이 자기를 안전하게 지키는 궁극적인 비결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고통과 어려움 속에 있든지 자기를 돌아보시고 기억하시면 자신은 고난이 커도 반드시 이기고 말 것이며, 자기가 당하고 있는 시련과 아픔이 커도 하나님은 그 아픔과 시련을 훨씬 능가하는 함께 하심으로 이 시인에게 도움을 주시리라는 사실을 굳게 믿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상황과 싸우는 대신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자기를 구원해 주시도록 호소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그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도록 자신을 끊임없이 동요했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지키는 삶을 계속하면 계속할수록 시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그리고 자신의 모든 상황과 환경을 모두 눈동자와 같이 보살펴 주시기를 원하는 하나님께 마음이 모아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고난가운데 있습니까? 여러분 여태까지 우리들이 그 고통스러운 상황과 더불어서 씨름하고 고민하고 괴로워하면서 살았는데 이번에는 눈을 들어서 우리들이 그 고통과 더불어 싸우는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그 고통 속에서 잘 깨닫고, 우선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서 기도의 원기를 회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 기도가 놀라운 힘을 얻어서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여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팔이 우리에게 나타나서, 우리의 모든 시험과 어려움 속에서 건져주시도록 그렇게 호소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7. 말씀의 미각(味覺)을 점검(點檢)하십시오
환난(患難)과 우환(憂患)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시119:143上)
(예화) 결핵과 골수 암에 걸려 아무 것도 먹지 못하던 어느 칠순 노인이 우연한 계기에 새우 깡 과자 한 개를 먹기 시작하면서 병을 나은 이야기.
이 야기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순 없지만 중요한 사실은 병과 먹는 것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즉 병에 드는 것도 잘못 먹어서 병에 들고 고치는 것도 먹는 것으로 된다는 것이다. 의사에 아버지라고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도 음식을 바꾸지 않고 병을 고쳐달라는 로마황제에게 “음식이 고치지 못하는 병은 의사도 고칠 수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만큼 음식이 우리의 건강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쇠약해진 사람에게 음식을 잘 먹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그래서 아픈 사람 가운데 제일 불쌍한 사람은 위가 아픈 사람일 것이다. 겉은 멀쩡하지만 괴로운 것이다. 영양가 있는 음식은 먹기만 하면 소화가 되지 않는 것이다. 병을 들면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약을 먹다가 그 치료가 한계에 달하는 이유도 결국은 위가 그 약을 소화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치료가 불가능해 지는 것이다.
오늘 시인은 큰 환난과 시련이 자기에게 닥쳤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내가 주님의 계명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고통과 근심 그것들이 나를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계명들이 나의 즐거움입니다.”로 되어있다. 고통과 근심이 이 시인을 찾아 왔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고통과 그 근심이 나를 찾아내었나이다’ 라는 말이다. 이것은 다니다가 고통하고 만난 것이 아니라 빚쟁이가 빚진 자를 지겹게 찾아다니다가 집어내는 것처럼 고통과 근심이 이 시인을 집요하게 추적해서 잡아낸 것이다.
그러니까 이미 시인이 보기에 자기에게 닥친 이 고통과 이 근심은 인생을 살다가 우연히 부딪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신의 경건한 신앙을 파괴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린하기 위해서 그 악한 의도를 가지고 그 고통과 그 걱정거리가 집요하게 자기를 찾아내어서 자기를 향해서 찌르듯이 달려온 것이다. 결국 시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 고통과 시련은 우연히 만난 고통이 아니라 뭔가 자기를 파멸할 계획을 가지고 집요하게 자기를 수색하고 자기를 발견하자 그 고통과 근심은 이 시인을 신앙에서 떨어뜨리고 찍어누르기 위해서 강하게 시인을 향해서 공격을 해온 것이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하나님께서 축복을 해 주시려고 하는 사람은 사단이 그 사람을 죽이려고 해도 그러한 계략들이 그 사람을 축복하는 쪽으로 가게 한다. 그래서 고통을 당할 때에 신가하게 그 고통이 축복의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고난을 당했는데 그 고난을 통해서 놀랍게 사람이 바뀌어서 고난을 당하지 않으면서 거지같은 신앙의 인격을 갖는 것보다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 고난을 통해서 그를 고난으로 몰아 넣었던 악한 것들이 의도하지 않았던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또 반대로 아무리 인생을 살면서 잘 되는 일을 많이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파멸하는 사람들이 있다. 때로는 우리에게 시련과 어려움이 닥치기도 하는데 어떤 때는 그 괴로움과 그 고통이 지나가다 사람들과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집요하게 이 시인이 고백한 것처럼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자신의 인생을 찌르듯이 찾아오는 그 고통과 근심들이 있다. 그 목표는 그를 파멸시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인이 당하고 있는 이 환난과 우환이라고 표현된 이 고통과 근심거리는 시인이 인생을 살아 가다가 흔히 만나는 일상적인 근심이나 환난이 아니다. 이것은 아주 특별한 고통이고 특별한 환난이다. 이러한 것을 시인이 만난 것이다. 이것들이 자신을 의도적으로 찾아낸 것이다. “속에 근심밖에 걱정 늘 시험하여도”라는 상황을 만난 것이다.
우리 인간의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은 소위 우리들이 말하는 신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지 하는 것은 우리들이 고통을 당해보면 안다. 고통을 당해보면 내 속에 아무 것도 없음을 보고 놀라며 이렇게 내리막길로 달리다가 도대체 어디까지 갈까? 그렇기 때문에 사단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 구원을 치소 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단의 궁극적인 목적은 배교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게끔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결국은 나중에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이 대적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그를 밀고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적절하게 우리 자신의 신앙과 인생, 우리의 마음에 이 조정 관을 잘 조정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우리는 그러한 존재로 굴러 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정말 우리의 믿음이 아무 것도 아니구나 하는 것을 수시로 깨닫게 된다. 끊임없는 안팎의 시련과 고통이 우리를 격추시키려고 할 때에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시인이 이런 것을 만난 것이다.
그런데 이 시인이 결국 그런 시련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주의 계명을 사랑한 것이었다. 주의 계명이 자신에게 기쁨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당신의 계명들이’ 그러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자기가 강점을 가지고 있는 한 두 개의 계명이 자기에게 기쁨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인에게 지키며 살도록 주신 그 모든 계명,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모든 그 계명이 시인에게 있어서 즐거움들이 되었다. 기쁨들이 되었다. 히브리 성경에 나오는 이 ‘즐거움들’이라는 단어는 매우 기쁜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쾌락이 아니라 내면의 세계에서부터 솟아 나오는 그런 열렬한 기쁨을 의미한다.
시인의 마음이 그렇게 된 것이다. 죽을병에 든 사람도 새우깡을 시작으로 해서 그 새우깡이 개수가 늘어가고 미음을 먹게되고 죽을 먹게되고 밥을 먹게되고 기름진 음식을 찾게 되면서부터 기적적인 건강의 상태를 회복했다고 할 것 같으면 성경이 우리에게 여러 차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양식에다 비교하고 있는데 우리의 육체가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것 같으면 우리의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것을 달게 받아 먹을 때에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우리의 영혼이 죽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은 자명하다고 하는 것이다.
정말 우리의 육체에 대한 많은 관찰들은 우리의 영혼의 성질에 대한 통찰을 많이 가져다준다. 어떤 병이든지 간에 한번에 오는 것은 없다. 원치 않는 사고를 당할 때에는 건강을 순간적으로 잃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오랜 동안에 습관을 통해서 건강을 저해하는 요인들이 쌓여나가고 그리고 어느 순간에 그것이 밖으로 노출되었을 때는 이미 한 순간의 물리적인 힘으로서 그 병세를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성도의 가장 건강한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입맛을 늘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목회의 현장에서 매우 잘 증명된다. 갑자기 시험에 들고 신앙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즉 유혹이 온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범죄하지는 않는다. 유혹이 반복이 되면서 그 사람 안에 유혹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힘을 빼앗아 가고 유혹이 올 때 손잡을 수 있는 상황을 마음속에 다 만들어 놓은 다음에 유혹의 손길을 뻗었을 때 그때 범죄가 성립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한번쯤은 인생을 살면서 큰집에 살고 싶은 마음이 들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칼 들고 나가서 45평 아파트를 달라고 할 사람은 없다. 이런 식으로 범죄가 성립되지는 않는다. 갑자기 시험이 들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다 시험이라고 하는 기준을 외부적인 행동에 두기 때문에 나오는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모든 죄는 어느 날 갑자기 행하게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런 것들은 말씀에 대한 입맛을 잃어버림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이 오랫동안 계속된 것이다. 그것은 설교를 듣는 회중들은 잘 모른다. 그리고 웬만큼 정직하지 않는 사람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미 누군가가 밖에서 자기가 처한 환난이나 아니면 교회의 어떤 잘못이나 더 정확히 말해서 설교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다든지 아니면 그 이외에 가지 건강이든지 어려가지 많은 요인들이 있다. 그런 것들 때문에 말씀이 들어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 안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직하고 아름다운 반응들을 잃어버린 것이 내면적으로 시간이 상당히 흘러가고 난 다음에 그런 문제들이 생길 때 거기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고 말씀에 의해서 공급을 받고 그 말씀을 깨닫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이 있으면 가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생긴다고 할지라도 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에 대한 저항력이 충분하다. 그래서 그것들을 이긴다. 그것을 보고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산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산다고 그럴 때 어디를 본다는 것이겠는가? 말씀을 보고 현실보다는 약속을 붙들며 산다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리는 것이 신앙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밥을 먹다가 입맛이 조금만 없어도 난리들이다. 남편이나 식구들 가운데 입맛을 잃어서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게 되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입맛을 회복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우리 자신이 우리 식구들의 영혼의 입맛, 말씀에 대한 미각을 얼마나 잘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말씀에 미각을 잃어 버려서 비참한 몰골을 하고 있는 자신과 식구들과 지체들을 보면서 얼마나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시험에 지는 것은 시험 자체의 힘이 강해서가 아니라 시험에 질 수밖에 없는 여건을 자신의 영혼 속에 오랜 기간을 통해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어는 결정적인 시간에 와르르 무너져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시인은 그 고통과 근심이 자신을 파멸시켜 버리기 위해서 자기를 찾아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님의 모든 계명들은 나에게 있어서 큰 기쁨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당신의 그 계명 자체가 나에게는 기쁨이다라는 것이다. 이 시인의 영혼은 아주 건강한 것이다. 그러니까 환난과 시련이 아무리 사람을 찾아내도 그를 그 고통과 근심으로 찔러서 파멸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속에 근심밖에 걱정 늘 시험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많은 근심거리가 있다고 해서 깊이 실망하는 것도 아니고 큰 고통거리가 있다고 해서 지극히 괴로워하는 것도 아니다. 고통에 분량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에 분량에 비례하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 길을 돌아보면 지금 다시 과거에 고통스러운 상황이 주어지면 못살 것 같은 생각이 들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힘든지 모르고 지냈었다. 고통이 작아서가 아니라 고통에 양은 절대적으로 컸는데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계셨으니까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큰 시험을 이겼던 사람이 작은 시험에 넘어져서 파멸하는 경우를 얼마든지 볼 수 있고 큰 고통을 훌륭하게 감사함으로 견디었던 사람이 작은 시험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실족하는 예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의 일어나고 넘어짐은 단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고통의 크기와 근심에 크기와는 비례하지 않는다. 많은 고통이 있어도 하나님을 더 많이 소망하게 된다. 많은 걱정이 있으니까 더 많이 주님께로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런 마음이 생겨나면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능히 이길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 주의 계명이 자신에게 즐거움이 되었다. 하나님의 계명들이 곧 자기의 큰 기쁨이 되었더라고 말할 때 이것은 단지 이 시인이 가지고 있는 어느 한가지 정신적인 취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 시인이 환난 속에서도 커다란 근심 속에서도 그것들이 자신들 찾아낸 그런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명이 기뻤고 즐거움이 되었더라고 하는 것은 이 시인이 계명만 즐거워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계명을 가지고 섬겨야 할 자신을 즐거워 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바는 너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여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그것이 곧 나를 향한 마음이다라는 사실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조금 전에 말씀드린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리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우리들이 말씀에서 밥맛을 느끼지 못한다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밥맛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들이 무례하게 하나님을 향해서 “당신은 밥맛이 없습니다. 나는 당신 자신에게서 아무 기쁨도 느낄 수 없고 당신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면 그것은 이미 실패한 것이다. 실패할 조짐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껍데기만 남아서 신앙생활을 할 때 주위에 상황이 생겨서 툭 하고 한번 치니까 ‘우르르’하고 무너졌는데 어느 날 갑자기 무너졌다고 하는 것이다. 즉 상황이 닥치니까 빈 껍데기였다는 사실을 입증하듯이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들이 겪는 고통과 괴로움과 아픔과 슬픔 등과 같은 것들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도 다 겪는 것이다.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우리들 가운데는 남에게는 없는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고 있고 독특한 괴로움과 근심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내가 고민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고민하고 내가 시험에 든 것을 다른 사람도 시험에 드는 것이다. 내가 넘어진 자리에게 다른 사람들도 수없이 넘어지게 된다. 넘어져서 흘린 피 자국을 보면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천로역정 가는 길이 수만 갈래의 길이 아니라 한 길이다. 예수님 따라 가는 길이다. 넘어진 그 자리에서 많은 사람이 넘어진다. 쓰러진 자리에서 쓰러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내가 당하는 어려움은 남이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어차피 인생은 그런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 것만 독특하고 매우 크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제시되고 있는 성경에 방법 같은 것들은 자기에게 적용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돼는 것이다. 이미 벌써 그의 영혼이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리고 깊이 병들어 있으니까 내적인 모든 저항력과 그 다음에 말씀으로부터 공급을 받아서 환경과 상황을 이기면서 살아가게 만드는 어떤 영향력과 힘들이 다 빠져나간 상황에서 어느 날 무슨 사건이 생겨서 ‘툭’ 하고 친 것이 껍데기만 남은 자신의 영혼을 무너뜨리게 된 것이다.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증을 가지고 말씀에 대한 입맛을 유지하면서 꽉 채워진 삶을 살았을 때에는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는 자기가 ‘툭’ 한번 침을 당한 것보다 훨씬 더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는데도 그것들이 그를 거꾸러뜨리지 못한 것이다.
(예화) 찰스 스펄젼이 지상에서 온전한 교회를 찾아다닌다고 말하는 자에게 충고한 이야기.
결국 상당한 시간에 걸쳐서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리고 서서히 자신의 내면의 세계가 해체되어 가는 것이다. 심각한 것은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리고 사는 자신의 영적인 상태가 얼마나 심각하게 위험한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날 그 증상이 밖으로 표출되었을 때는 내면의 세계가 쉽게 고치기 힘들 정도로 많이 망가져 있는 것이다. 즉 벌써 밖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리고 말씀이 그 사람에 마음을 움직여서 삶의 영향을 미치는 말씀과 영혼의 유기적인 관계가 결단이 났거나 기능이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심각할 정도로 손상을 입어서 제대로 공급이 안 된다 상황이 행동으로 표출될 때에는 이미 표출되어서 밖으로 나타나기 전에 이미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린 날들이 오래도록 쌓이면서 내면적인 세계에서 해체되는 과정이 잃어 나면서 최종적으로 그것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번 말씀에 대한 입맛을 잃어버리면 회복이 어려운 이유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린 그 시점으로 돌아가서 자기가 왜 아무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에 자기의 마음이 어떻게 변질되어 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된 입맛들을 잃어버리고 그 말씀이 자신의 영혼의 양식이 되어서 믿음으로 은혜 속에서 죄를 만드는 기능을 잃어 버렸는가? 하고 거기서부터 찾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나서 자극을 받아서 와르르 무너진 그 시점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 시인이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고 이 고통과 근심 중에서 좌절해 버리고 신앙을 팔아먹고 쓰러져 버렸다면 이렇게 된 시인이 만약에 자신의 신앙의 실패의 시점을 고통이 다가오기 시작하고 근심이 다가오기 시작한 그 시점서부터 찾아내면 그것이 올바른 치료 방법이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공식도 성립되어야 한다. 즉 시련과 괴로움만 다가오지 아니하면 우리의 신앙은 옥토 밭에 잘 뿌려진 씨가 적당한 비와 햇빛을 받으면서 한없이 자라나는 식물과 같아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다라고 한다면 우리들은 신앙이 영적인 싸움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한 것이다.
고난을 훌륭하게 이기며 살았던 사람들이 유혹에 쓰러지는 경우가 더 많다. 비바람 몰아치는 그 시련에 때에 악마에 손톱에 얼굴이 할 키면서도 진리를 따라서 한 길을 걸어왔던 사람들이 나중에 핍박도 없는데도 허물어져 버리는 경우가 많다.
여호수아 24장에서 그 유명한 설교가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서 큰 믿음으로 싸울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거의 정복이 끝날 을 때에 이방 신을 섬기는 풍속들이 슬며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환난과 시련이 믿음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내면의 세계의 악한 마음이 신앙을 파괴하는 것이다. 어느 역사가의 말에 의하면 중국이 만리 장성을 쌓아놓고 중국이 다섯 번을 망했는데 한 번도 만리장성이 침범을 당하면서 망한 적이 없고 속에서 내란이 일어나서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성을 지키는 것보다 마음을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다. 거기서 찾으면 안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서 찾는다. 그래서 자기의 신앙을 이렇게 파멸로 몰아간 것을 막 찾아봐도 결국 거기에서는 결정적인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환난일 아닌가? 그러면 옛날에는 환난 가운데 어떻게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갔었는가? 그러면 나를 해하려고 하는 나쁜 사람 때문인가? 그러면 과거에 그 보다도 더 지독한 사람을 만 날을 때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 수 있었는가? 대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회복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영혼의 회복이라고 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 평생을 살아도 회복이 없다. 황소가 뒷발로 찬 돌멩이에 개구리가 맞는 그 같은 그런 회복은 없는 것이다. 그것은 회복이라고 자기가 생각을 해도 그것은 회복이 아니다. 능력 있는 집회에 쫓아다니다 보면 남들이 받던 불 가운데 불똥이라도 튀어서 머리카락이라도 타겠지 라는 생각은 망상인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데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바가지에 담아 가지고 가시다가 하나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은혜를 흘리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정확하신 분이시다. 즉 똑 같은 설교를 듣고 똑 같이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서 은혜 받을 자에게만 은혜를 주시고 곤 고한 가운데 있을 자를 곤 고한 가운데 두게 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지금 말씀에 대한 미각이 살아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들은 심각하게 생각을 하고 있는가? 우리들이 만약에 심각하게 생각을 하지 안는다면 그 자체가 심각한 것이다.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음으로 인해 금식기도를 해 본적이 있는가? 환난이 우리를 삼킬 수 없다. 우리가 말씀 붙들고 있는 동안에는 환난이 우리를 삼킬 수 없다. 우리가 말씀 붙들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무리 높이셔도 교만해 질 수가 없는 것이다. 십자가 앞에서 그 복음에 앞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고 그 앞에 엎어지는 감격이 있는 신앙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아무리 우리를 높이신다고 우리가 턱없이 교만해 질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냐? 는 것이다.
외로워지면 신앙생활이 안 된다고 한다.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 압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 뿐이라” 은혜가 충만할 때는 외로울 때가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 모른다. 주님과 같이 있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이 변해서 내 기도되고 전 날에 한숨 변하여 노래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있으면 좋으신 우리 주님 자랑하고 홀로 있으면 외로움을 느끼는 대신 홀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주님과 단 둘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요즘은 어떤가? 말씀을 읽거나 말씀을 들으면서 깊이 그 말씀 속에 들어가는 영혼의 미각을 가지고 있는가? 물론 요즘 요리가 신통치 않다.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불행하게도 여러분 자신이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정말 우리 자신이 어떠한 말씀의 미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한다. 견고함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불현듯 드는 시험은 없다. 그래서 현명한 목회자는 사람들이 시험에 들 때 거의 알아차린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을 불러서 충고할 때 그 사실을 받아 드리는 사람은 소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드리지 않는 사람이 말씀에 입각한 사람의 충고를 쉽게 받아드리지 않는 것이다. 왜 그 충고도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면 말씀에 성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가 싫으면 다 싫은 것이고 진리가 맛이 없으면 다 맛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상태 속에 있는지 깊이 돌아보아야 한다. 한 달 두 달 석 달이 지나도 감각이 없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이 왜 이럴까 에 대해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 않는 것이다. 요즘은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은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모든 요인을 밖에서 찾으려고 하며 심지어는 사람이 많이 모이니까 옛날같이 않다는 말을 하는데 이유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사 오기는 좋았는데 그 때 그 사람이 좋았던 때에도 안 좋은 사람이 있었다. 자신 속에서 명백하게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변화를 그런 식으로 호도하고 부정직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그를 회복시키려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들 자신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는가? 오늘 저녁때 집에 가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정말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건강한 채로 유지하고 있는가? 쓴 음식이 들어올 때 쓰다. 단 음식이 들어올 때 달다. 짠 음식이 들어올 때 짜다라고 분별할 수 있을 만큼 말씀에 대한 미각이 살아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요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만약에 이 질문에 더듬거린다면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생을 살면서 한 순간도 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없는 적이 없다. 정상적인 부모가 자식을 향한 기대를 어느 한 순간 공백 상태로 잃어버리는 것이 있을 수 없듯이 말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얼마나 치밀한 계획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구하셨는데 관심을 갖지 않는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계속된다.
그러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열망도 식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식을 때 하나님의 열망은 더 불붙게 된다. 그리고 그 열망이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미각을 잃어 버려서 듣지 않는 것이다. 그냥 소리로 들어오는 것이다. 읽어도 소설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소설은 오히려 재미라도 있다. 자기가 얼마나 이런 상태에 가깝게 가고 있는지를 판단하고 있는가? 누구에게 핑계할 수 있겠는가?
(예화) 목사님이 한국 교회에서 유일하게 강해 설교가로 인정하는 목사님이 시무 하는 교회에 가서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장로들을 혼낸 이야기.
정말 우리에게 이 말씀에 대한 미각이 살아있는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우리들에게 과연 무엇이 있는가? 신앙의 견고함이 있는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면 얼마나 있는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은 사람들이 엉뚱한 소리를 할 때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 사생 결단을 하고 주님을 사랑하면 얼마나 그것을 유지하면서 살았는가? 주께서 우리들의 어둔 영혼에 진리의 빛을 주셔서 그래서 우리들을 복음에 빛 가운데로 돌아오게 하셨다고 할 것 같으면 얼마나 그 복음대로 살아 왔는가? 우리들이 자고 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주님이 이 교회가 세워지기 전에 보여 주신 것이 있었다. 이 교회는 보통 사람들을 보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강적들만 보낸다는 것이었다. 목자 잃은 양과 같이 유리하고 고생하고 한 맺히고 패역이 속속들이 배겨서 아무 희망이 없는 그런 사람들을 보내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들은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보통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교회에 들어와서 신앙의 출발 자체가 믿음 안에서 곱게 잘 사람들하고는 출발점부터가 달랐다. 복을 깨달아서 빛을 알게 되었다고 하지만은 복음을 아는 빛만 받는 것이 아니라 패역하게 살아오고 아무도 고칠 수 없게 막무가내로 살아오던 자기 아집에 가득한 삶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었다. 그런데 이것을 믿음으로 잘 극복하고 아름다운 신앙을 갖고 나면 자랑거리가 되지만은 그러나 그렇게 못살아가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 모두가 부끄러움이 되는 것이다.
무엇을 믿을 것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주일 예배 한 번 달랑 나오고 그리고 그 다음 주일 오전 예배가 돌아 올 때까지 예배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는 것은 무슨 배짱인가? 믿음 생활은 배짱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빛과 성령의 은혜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리고도 그것이 자신의 영혼의 심각한 위기라고 생각하며 재위에 무릎을 꿇을 줄 모르는 것은 교만이라고 하는 단어 외에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장담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하늘의 양식을 생명의 만나를 맘이 빈자에게 내리어 주소서 낮고 천한 우리 긍휼히 여기사 주여 먹이여 주십소서” 우리들에게도 이런 고백이 있었다.
한 번의 말씀을 가지고 일주일을 살기에는 일 주일이 너무 길다고 생각하며 설교를 들으며 오늘도 우리에게 하루를 지탱할 말씀을 성경을 열며 오전에도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빛나는 눈빛으로 지키며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경을 편 적이 있다. 예배를 드리고 지체들과 토론을 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증을 잔뜩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서 밤늦도록 성경을 읽은 때가 있었다. 주의 말씀에 관한 밝은 빛을 비춰줄 수 있는 책이라면 돈을 아까워하지 않고 사서 읽고 그 진리의 빛을 깨달은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자신만으로는 만족하지가 않아서 그 말씀을 깨달을 때마다 이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수많은 고통을 지불하면서 아직 까지도 하나님 없는 어두운 길을 걷고 있는 수많은 지체들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눈물이 앞을 가렸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깨달은 말씀을 들려주고 싶어했던 적이 있었다.
그 마음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가? 그 질문은 여러분들이 이 예배당에 나오기 전에 걱정거리라고 생각했던 모든 고민에 대한 질문보다도 더 큰 질문이다.
8. 말씀의 미각(味覺)이 사라졌습니까?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시119:143下)
오늘 설교는 지난 수요일의 설교의 속편입니다. 환난과 우환, 즉 고통과 근심거리가 시인을 찾아왔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은 시인의 즐거움이었다는 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지난 시간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영적인 양식을 공급받는 생활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수요일에 우리들이 점검하였던 것이 정말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함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지난 수요일에 다루었던 주제였습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만약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고 그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공급받는 말씀에 대한 미각을 우리들이 만약에 잃어버렸다고 한다면 우리들이 그 일을 정말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해 놓고 보면 우리들은 실제의 삶을 보면 그렇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서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깊은 즐거움이 되고 말씀에 대한 끊임없는 깨닫고자 하는 욕구, 이것을 가리켜서 저는 영적인 미각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런 영적인 미각이 살아있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런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밥을 먹다가 입맛이 가시면 뭘 먹어볼까, 뭘 해줄까 수선을 떨지만 그러나 영적인 미각이 사라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모든 맛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대수롭게 않게 생각하면서 살아갈 때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모두 그 마음이 어느 정도 하나님을 떠난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을 경외했던 이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헐떡거렸다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헐떡거리는 모습을 연상할 때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크게 두 가지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사람의 헐떡임, 또 하나는 짐승들의 헐떡임이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둘 다 공통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목마름으로 말미암아서 그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서 헐떡거리는 것입니다. 물 이외에 어떤 것으로도 채워줄 수 없는 욕망을 가지고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해서 헐떡거리는 것 같은 내재된 육체의 욕망을 향한 헐떡임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성적인 욕망입니다. 성적인 욕망으로 헐떡이는 모습을 시인은 짐승들에게서도 많이 보았을 거고 자신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헐떡이고 있는 짐승이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 목표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서 시인이 이런 헐떡임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에 대한 간절한 갈증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얻고자 하는 평안을 향한 욕망이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욕구를 증진시킬 수도 있지만 보다 더 일반적인 것은 거룩한 삶을 살면 살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욕구가 생겨나게 됩니다. 주님을 닮는 경건한 삶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깨달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분투하면 분투할수록 우리에게는 좀더 많은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이 필요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경험하고 인격을 체험하기를 원하는 갈증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간절한 탐구를 소망하게 됩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향한 어떤 우리의 영혼의 추구가 있는데 그 영혼의 추구가 말씀에 대한 추구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추구는 매우 위험한 자리로 흘러갈 위험성이 아주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욕구가 진실한 것인가, 진실하지 않은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두 가지 시금석이 있는데 하나는, 그 영적인 갈망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하고 있는가 이고 말씀을 향한 사랑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깊이 다가오고 그 말씀을 통해서 날마다 깨닫는 것이 있는 그러한 감격적인 신앙생활을 혹시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어떤 특별한 때에 잠시동안 일어나는 것, 아니면 모르던 때에 신기한 어떤 것들을 대할 때에 잠시 느끼는 호기심의 만족 같은 현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는 것이 복음을 알고 은혜의 빛 가운데로 들어가는 초기현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성경에 의해서 지지를 받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들의 신앙의 커다란 실패, 인생의 비참한 패배는 크고 넓은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계속해서 영적인 싸움을 이겨나갈 수 있는 어떤 원동력을 공급받고 있는 한 우리를 쓰러뜨리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가 하는 가장 중요한 사업 중에 하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 받지 못하게 하는 그 일이 마귀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은 마치 전쟁이 일어나는 싸움터로 보급물자를 나르는 후방의 병참 기지를 폭격하는 것입니다. 마치 전방에 전투하는 군인에게 물자를 실어 나르는 보급로는 폭격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용맹스럽고 씩씩한 군인들이라 할지라도 보급로가 끊어지게 되면 그 용맹스러운 기운은 일주일도 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비참한 패배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귀는 이러한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귀가 이 어두운 세상에서 열심을 내는 일이 무엇일까요? 고린도서에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아직까지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받아드리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무지한 사람들을 뭐라고 가리키고 있습니까? 무식하고 아직까지도 깨닫지 못해서 그렇다고 말하는 대신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여전히 어둠 속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영생에 이르는 지식과 거룩하게 살수 있는 지식,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누리고 승리하는 삶을 살수 있는 지식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기를 원하시고, 물론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기를 원하시고, 사단 역시 이러한 은혜와 지식의 빛이 우리의 영혼에 비취지 못하도록 치열하게 가로막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영적인 세계 속에는 이 지식을 둘러싸고 있는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전쟁은 단지 감상적으로 소리를 지르면 귀신이 나가고 소리를 지르면 사람이 넘어지는 식의 원색적인 싸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치열한 싸움 이면에는 처절한 지식의 싸움이 있습니다. 성령은 어찌하든지 우리에게 좀더 말씀의 빛을 비추어서 우리로 하여금 어둠의 무지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계시고, 마귀는 어찌하든지 그 복음이 깨달아지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현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선교적인 영역에서 우리들이 ‘영적인 전쟁이다’라고 말할 때에 그것은 단지 귀신을 내어쫓는 그것만이 영적인 전쟁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선교적인 차원에서 영적인 전쟁이라고 말할 때에 그것은 지식과 무지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영적인 세력들이 강하게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에베소서에서 마귀를 대적하는 공격용 칼을 얘기하면서 전신갑주를 얘기할 때 대부분 전부다 방어용 무기입니다. 공격용 무기를 단 하나 얘기하는데 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검입니다.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의 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칼로 사용하셔서 무찌르시고 악한 세력들을 제압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지속적인 진리에 대한 깨달음의 통로가 막힌다는 것은 더 이상의 영적인 성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깨달음이 있다고 해서 그의 삶이 반드시 거룩하게 진보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단지 지식으로만 알고 머리에서만 맴돌 뿐 가슴으로까지 영향을 주시 못한 그런 식의 지식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날 같이 학교 공부하는 식의 성경공부가 유행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럴 수 있습니다. 더더군다나 이 무지는 지식이 사라진 그곳에는 영적인 악한 영들의 역사가 판을 칩니다.
여러분, 귀신들린 사람들을 여러분들을 종종 만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귀신들릴 수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다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얼마든지 예수 믿는 사람들도 귀신들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귀신들린 사람들이 공통된 특징을 보면은 대개 두 가지 정도로 압축이 됩니다. 첫째는 도덕적으로 매우 오랫동안 문란하거나, 쉽게 얘기하면 단정하고 매사 몸가짐이 정확한 사람들은 귀신이 들 확률이 적습니다. 또 하나는 머리가 혼돈스러운 사람들 속에 이런 악령들이 잘 역사합니다. 물론 머리가 똑똑한 사람들이고 해서 그런 일이 안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에는 머리가 혼돈 된 사람, 그래서 귀신이 들렸거나 귀신에게 잘 영향을 받는 사람은 함께 얘기할 때 혼탁스럽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논리가 선명하지를 않습니다. 그렇다고 교육수준이 떨어져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고학력을 가진 사람도 얼마든지 그런 현상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귀신의 한 속성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지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만약에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 무엇인지를 여러분들이 알았다고 한다면 매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하게 깨닫고, 그 진리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며 번뜩이는 복음의 진리의 빛을 발견하고 여러분들의 인생을 결단하게 되는 깨달음의 축복들이 성령의 지속적인 도우심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까? 다시 묻겠습니다. 성령의 지속적인 도우심이 있을 때에만 그런 일들이 가능하다는 것이 믿어지지요?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음에 별빛처럼 빛나던 눈동자를 희미하게 만들어 버리고, 아무 깨달음도 없이 터덜터덜 예배 시간에 걸어나오고 아무 것도 없이 돌아가는 그런 식의 삶을 계속 살아가서 무지와 어두움으로 다시 돌아가도록 만들 때에 누가 그 일을 하겠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깊이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능력 있으며, 그 능력을 통해서 우리들이 얼마나 커다란 유익을 얻는지를 알았던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신앙의 모습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정말 심각한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죄가 많은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알고 있는 신앙의 지식들은 너무 작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우리는 적극적으로 부지런히 참된 신앙이 무엇이고, 어떻게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생명을 유지하고 능력을 공급받으며 변하지 않는 이 세상과 우리 주변의 환경을 바꾸면서 살아가게 만드는가에 대한 진실한 탐구 없이 살아간다 하는 얘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여러분들은 아주 부지런한 성도의 경우에 세 가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간다고 봅니다. 공적인 예배와 개인적인 성경 읽기와 개인적인 책읽기 정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간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 더 든다면 교회에서 하는 구역공부나 성경공부가 들 수 있겠습니다. 그런 정도 네 가지를 다 활용하는 사람은 그래도 매우 부지런한 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 이외에 사람들은 겨우 예배 참석하는 것이 다이고 지난주에도 단 한번도 성경을 안 읽은 사람이 여기에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감화를 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시시때때로 우리의 마음을 향해서 말씀하시고 우리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들이 듣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엄청나게 중대한 위기라고 생각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냥 ‘옛날에는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이렇게 남의 얘기처럼 회상을 하고 있을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부터 20년 전에 위장병으로 굉장히 고생을 해 보았습니다. 직장에 출근해서 점심 시간이면은 골목을 누비면서 죽 파는 데가 없나 보면서 다녔습니다. 밥은 소화를 못시키니까 특히 봄이면 아주 심했습니다. 그러니 사는 것이 얼마나 힘이 없겠습니까. 신세가 참 가련하였습니다. 나는 그러고 싶지를 않는데 나의 몸이 더 이상 허락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때도 겪어 봤습니다. 얼마나 염려를 많이 하는지를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에 대해서는 얼마나 우리들이 너그럽고 아무렇게나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지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오늘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의 귀에 들리지 않으면 자신을 돌아보고 생명의 근원이 되는 내 마음을 어떻게 지키면서 살았는지를 돌아보면서, 내 안에 있는 어떤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들리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는가, 왜 진리의 말씀이 내 영혼 속에 심겨지지 못하게 되었는가, 말씀에 대한 영적인 미각이 왜 떨어지게 되었는가를 깊이 돌아보면서 여러분들이 안타까워하고 기도하고 자신을 성찰하느냐는 말입니다. 한끼만 굶으면은 껄떡껄떡하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이 환경, 저 핑계, 이 사람 저 사람의 이유를 달면서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을 정당화하면서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정직이 최선의 정책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르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발견하면서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리지 않는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려는 식의 시도는 하나님 앞에서는 가증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긍휼이 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하여도 말씀을 받아드리려고 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없습니다.
저는 이번 주간에 ‘신앙생활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목회의 세계에서 유명해 지는 갈까!’, ‘신앙의 세계에서 관록이 붙어서 어느 교회에서 한번 힘을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이 신앙의 세계에서 귀한 것일까!’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사역을 오래하면 할수록 정말 귀한 것들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천대받고 있는 것들이 오히려 귀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은 없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명예나 재산이나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로부터 받는 좋은 평판이나 그런 모든 것을 다 반납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름 없는 목회자가 된다고 할지라도 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늘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은혜의 세계, 그리고 말씀하실 때 내가 어린아이처럼 늘 하나님 앞에 무너질 수 있는 자기 깨어짐의 세계, 이 두 가지를 소유하고 사는 사람은 그 사람 자신이 하늘나라입니다.
거친 산이 높은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성경을 펴면 언제나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거기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이 음성을 들려주시면 거기에서 자신이 무너지고 자기를 향한 주님의 음성이 들릴 때면 자신을 돌아보고 고치고, 조국의 교회를 향한 음성이 들리면 냉담한 교회들을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고, 선교에 대한 위대한 비전이 들리면 아직까지도 어둠가운데 잠들어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이들을 자신의 형제처럼 보듬고 기도하는 자기 깨어짐과 하나님의 들리는 음성이 있는 세계, 넘쳐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른 삶을 살뿐만 아니라 말씀을 지키지 않고 살아가는 시대를 인해서 눈에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르고, 하나님의 은혜로 만나게 해 주신 곤고한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권면하여 바른길로 인도하여 이끌어내는 삶을 기쁨으로 여기면서 사는 것, 그러면서 주 오실 날 우리가 주께 가까이 갈 날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라고 가르쳐주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신앙을 좀더 단순화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죠나단 에드워즈가 ‘이제부터는 오늘이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했을 때 부끄럽게 생각될 것들,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하지 말자’라고 말했던 단순함을 우리들이 회복할 필요가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지 못하는 혼탁한 영적인 상태, 성경을 읽어도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고, 예배시간에 참석해도 설교가 그 소리가 그 소리 같은 위험한 때를 지나면서 여러분들은 그러한 영혼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하다고 생각합니까? 정말 그것이 심각하다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고치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있느냐고 제가 지금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여러분들이 고치려고 하지 않고 그런 문제들을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무기로 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까? 무엇을 가지고 이 신앙생활을 승리로 이어가려는 사람들입니까? 아마 여러분들은 싸우기를 이미 포기한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패배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승리하려고 분투하는 것보다는 패배 가운데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이 편안하게 느껴질 만큼 그렇게 망가진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일날 예배에 와서 늘 조는 습관이 있는 교인들을 향해서 어느 청교도는 금식을 하고 예배에 나오도록 충고하는 장면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한번도 하나님께로 돌아온 경험이 없고, 말씀을 통해서 승리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 제가 이렇게 말한다면 아마 이 이야기 자체가 여러분들의 경험 속에는 없는 수준 높은 이야기 때문에 말은 맞는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에게는 논리가 서지 않고 가슴에 호소력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맛보았고 마음을 낮추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모을 때,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들리고 어떻게 주님이 우리에게 진리를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고 말씀하시는지를 여러분들이 경험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늘날 그런 경험들이 여러분들에게 사라져가고 있는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삶이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진리를 들을 귀가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향해서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귀를 막아버린 사람들에게 그가 종종 하나님의 선하시다 라고 되 뇌이면서 이따금 흘리는 감정적인 눈물이 그의 영혼의 어둠 속에서 건져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여러분들은 죄 죽임의 교리를 배우면서 이따금 우리들이 죄 가운데 있으면서 처절하게 하나님 앞에 울부짖을 때에, 우리의 기도가 간절한 불길처럼 타오르고 이 순간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 라는 느낌이 생생하게 전해오는 그런 기도를 드릴 때가 있는데 그런 기도도 죄를 죽이는데 도움이 안 된다는 이야기를 여러분들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기도가 훌륭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구체적으로 죄를 죽이는 총체적인 삶이 병행해서 추진되지 않으면 그런 식의 기도가 하나님이 아무리 들어주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도 실제 우리의 삶은 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이기고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길로 걸어가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는 기도도 어둠 속을 헤매는 것과 같은 쓸모 없는 기도 투성이가 발견될 수밖에 없는 그런 중요한 은혜의 방편인데 그것을 잃어버린 채 ‘그래도 무슨 희망이 있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마치 치열한 육박전이 벌어지고 총탄이 퍼붓는 전쟁터에 부러진 다리를 가지고 창 대신 지팡이를 들고 걸어가다 보면 무슨 희망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과 꼭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신다’ 그것은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이지 하나님을 향해 귀를 닫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왜 긍휼히 여기십니까?
여러분은 온 교회가 정말 하나님의 터치하심이 있을 때 진정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여러분은 정말 경험해 보셨는지를 묻고 싶어요. 여러분들은 여러분이 다니던 교회가 정말 진리를 사모하는 성도들의 모임이라는 사실을 예배 속에서 혹은 모임 속에서 읽어본 적이 있습니까? 보십시오. 시인은 환난과 많은 근심 속에서, 히브리 성경에 의하면 고통과 근심이 시인을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딱 붙잡은 것입니다. 고통과 근심이 시인을 파멸시키고자 의도적으로 시인을 과녁으로 삼아서 날아온 것입니다. 찾아냈습니다. 달라붙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팔자였고 믿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섭리였습니다. 그리고 악한 자들의 공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 아니면 영원한 것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고통과 근심거리가 나를 찾아냈으나 나는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워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고통을 당하기는 했지만, 악한 자들이 이 시인을 공격하기를 했지만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 고통스럽게는 할 수 있었지만 그 고통스러운 순간을 통해서 시인이 놓지 않고 있는 신앙의 한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입니다. 119편을 편견 없이 천천히 묵상하면서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무슨 모습이 떠오르느냐 하면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시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금으로 유혹해도 쳐다보지 않고, 은으로 유혹해도 쳐다보지 않고 육체의 쾌락을 가지고 유혹해도 쳐다보지 않습니다. 그의 모든 재산, 그가 하나님 앞에 귀하게 여기는 모든 것의 전부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성경책을 많이 사서 모으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몇 번 성경을 읽었네, 몇 번 띠었네, 무슨 코스를 마쳤네 하는 세상 자랑이 아니라 자기는 무릎을 꿇고 듣고, 하나님의 말씀하시고 자기는 마음을 다해서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깨달은 대로 살아가는 삶, 이 세계를 시인이 금이나 은보다 더 많이 사랑한 것입니다. 가난하고 곤고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환경을 고치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병을 낫는 기적적인 축복은 질병으로 고통하는 사람들의 육체의 환경을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은 그 사람의 인생 그 자체를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언젠가 의사들이 모인 모임에서 괴변을 늘어놓았습니다. “당신들은 어떤 의미에서 중대한 범죄자다. 왜냐하면, 빨리 죽어야 할 사람들을 고쳐서 망가진 사람들이 세상에 나가서 나쁜 짓하며 살수 있는 기회를 자꾸 연장시켜주지 않느냐” ‘뭔 소리를 하나!, 어떻게 하라는 건가!’ 그 사람의 마음도 함께 고치는 사람이 아니면 진정한 의사일 수 없다 그 얘기를 한 것입니다.
그런 능력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입니다. 기적으로 나은 육체를 가지고 차라리 그냥 그대로 살았더라면 하나님 앞에 덜 범죄 하였을 텐데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적당히 고난을 받고 살면 그래도 겸손했을 텐데 졸지에 졸부가 되고 나서 눈에 뵈는 게 없는 인생을 살다가 결국은 물질과 함께 망하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왜? 그것들은 모두 인간을 부분적으로만 고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간을 근본적으로 고치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그러면 만약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속적인 깨달음이 없는 이 나태하고 태만한 식의 말씀생활, 이러한 삶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면 여러분, 우리의 인생의 결국은 살아보나 마나 마지막은 뻔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 만큼이라도 변화되어서 세상 사람들과 다른 성도가 되게 된 것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많은 교육이나 환경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이전에 이 세상에서 소문난 죄인이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될 훌륭한 소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어느 지점에서 멈추었습니다. 어느 지점에서 그가 고쳐졌습니다. 어느 지점에서 그가 새로워 졌습니다. 그래서 이제에는 부끄러운 사람들이었지만 지금은 성도라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이 그런 차이를 만들어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않았더라면 여러분도 여전히 그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죄인에서 거룩한 성도의 길을 걷는 진실한 사람들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요한계시록을 보겠습니다. 5장입니다.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또 보내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무슨 장면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시대에 될 일을 밧모섬에서 귀양살이하고 있는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당시의 두루말이는 인봉을 하고 붙여서 책임 있는 사람이 뜯지 않으면 뜯을 수 없도록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두루말이 속에는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될 일들을 기록하셨고 그래서 그것을 자신은 자기에게 부여된 명령은 그것을 잘 이해하고 편지로 적어서 일곱 교회에게 보내지도록 예수님께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런데 펼칠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디에서도 그 인을 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누군가가 열어 주어야만 자기가 그것을 깨닫고 깨달은 그것을 기록을 해서 일곱 교회에 보내는 것이 자신이 사명이었는데, 주님이 자신에게 사명은 주셨는데 실제로 그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길을 차단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 요한이 이때는 벌써 나이가 90이 훨씬 넘은 노령에 접어들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늙은 노 사도가 이제 동료 사도들은 모두 다 죽고 자기 혼자 남은 이 외로운 노사도가 이 외딴 섬 밧모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의 인을 떼기에 합당한 자가 없다라는 그 판단을 하게 되었을 때 이 노사도가 울었다 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흐느껴 우는 것이 아니라 대성통곡하며 우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의 굉장히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전승에 의하면은 이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기름가마를 준비했고, 기름을 펄펄 끓여서 이 사람을 집어넣었는데 두려움 없이 그 가마에 들어갔고, 그 가마로도 이 사도를 죽일 수가 없어서 결국은 밧모섬으로 유배를 보냈다고 전해 내려옵니다. 전승을 우리는 다 믿지는 않지만 이 사람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수를 다 누렸지만 그러나 살아 있는 순교자로서 순교한 사람이었습니다.
외로운 섬에 사랑하는 가족과 정든 교회의 식구들을 버려 두고 푸른 파도와 갈매기 우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 이 절해 고도의 외로운 섬에 유배 와 있으면서 외로움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두고 온 가족이 그리워서 눈물로 세월을 보낸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자신을 뭐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참음과 고난에 동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던 이 사람이 이 5장에서 무너지는 것 같은 통곡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지금 이 노사도가 완전히 몸이 흐트러진 채 자신이 무너져 내려버린 것처럼 그렇게 통곡하고 슬피 우 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두고 온 가족이나 교회의 식구들이 보고 싶어서 입니까? 아닙니다. 열악한 유배지의 환경 때문도 아니었고, 오로지 지금 이 사람이 통곡하고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열어서 자신에게 깨닫게 해 줄 그 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통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계시를 보기 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이고 주님의 진리를 깨닫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은 여러분의 자신이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고 더 이상 하나님의 음성이 공급되지 않을 때, 여러분들은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의 인생에 커다란 위기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위기가 시작될 때 그 파국이 일어나는 것을 미리 느끼며 그 파국을 보는 두려움을 가지고 위기를 수습합니다. 미련한 사람은 완전히 무너져서 파멸하기 전까지 수많은 조짐을 하나님이 보여주셔도 그는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깨달음의 은혜, 그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들려올 때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말씀 앞에 흐느끼는 반응하는 자기 깨어짐, 이것은 회심하는 순간에 몇 주일동안 갖거나 영적인 각성을 하고 몇 달 동안 소유해야 될 성질의 것이거나, 아니면 특별한 직분을 맡았을 때에 가지게 될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무엇을 하며 살든지 죽는 그 순간 하나님 앞에 설 그때까지 계속되어야 할 은혜의 세계입니다. 어른이 된 사람이건, 처음 믿은 사람이건 관계없이 목사이건, 장로이건, 집사이건, 평신도이건 그런 구별과는 상관없이 늘 유지되어야 할 은혜의 세계이고 그것 없이는 성도의 삶은 더 이상 진전이 없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깨닫는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그 말씀 앞에 어린아이처럼 자기가 부서지는 자기 깨어짐이 없이는 성도의 삶은 더 이상 성장이 없습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매우 작은 부분이거나 성장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순수한 성장이 아니라 잘못된 요소들이 많이 가미된 성장입니다. 적당한 비유가 될 지 모르지만 밥을 먹고 온 신체가 함께 크는 것과 이상한 종기가 생겨서 머리에서 붓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신을 깊이 성찰하십시오. 그리고 요즘 자신의 말씀의 세계가 건강한가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중요한 것은 교회도 성장이 문제가 아니라 건강이 문제입니다. 성도 한 사람이 직분이 올라가고 이런 저런 일들을 하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외면이 커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정말 건강한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저기에서 이렇게 저렇게 배운 잡다한 지식들을 가지고 폼이나 잡는 식의 신앙생활을 가지고는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깊이 자기를 돌아보아서 지난 수요일과 이번 주의 저녁 말씀을 통해서 들어 난 나 자신의 신앙 세계는 어떤가 깊이 점검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는 세계를 잃어버리고도 아무 일도 아직 안 일어났다면 다행입니다. 일어난 사람들은 상황을 보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될 것이고, 만약에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면 그러나 여러분 속에 이미 일어나고 있는 누룩과 같이 번져가고 있는 하나님 앞에서의 불결한 삶에 대해서 눈을 떠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이 큰 위기를 깊이 자각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아침이면 언제든지 저녁이면 말씀을 펴고 또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향해서 주고 계시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들을 수 있는 은혜로운 신앙의 세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 말씀 앞에 깨뜨려지는 자기 깨어짐이 있는 신앙생활을 다시 회복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것은 여러분들의 사업이 잘 되기 위해서 기도를 하고 가족 중에 누구 한 사람이 변화 받게 해 달라고 목을 메는 것 못지 않게 여러분들에게 있어서는 더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그렇게 변화되고 존재와 삶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될 때에 지금은 금식을 해도 안 들어주시는 기도를 그저 한번 간절히 기도해도 하나님이 들어주실 수 있는 사람으로,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로 얼마든지 변화되게 하는 원동력이 말씀의 세계의 회복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세계,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잠언의 기자가 ‘무릇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거기에서 난다’라고 할 때도 그 마음을 지키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을 받드는 삶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삶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언제 가장 확연하게 잘 드러납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이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높이고 싶고 하나님만 위해서 살고 싶은 것들이 언제 가장 잘 적나라하게 드러납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9. 말씀과 동행하는 길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黙想)하나이다(시119:97)
지난 시간에는 말씀에 대한 영적인 미각을 유지하며 점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다. 오늘 시인은 “내가 주의 율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라고 말하고 있다. 히브리어 성경에도 의문문으로 되어있다. 이것은 무엇인가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을 질문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시인은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한데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깊이가 얼마나 깊은 지를 자신도 측량하기가 어려웠다.
우리들이 진실로 마음을 바쳐서 사랑하는 것은 그것을 향한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 줄을 자가 자신도 잘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사랑을 노래한 수많은 노래들은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나도 모른다’는 식에 이야기들을 많이 담고 있다.
정말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리고 하나님밖에 자기의 인생에 희망이 없는 것같이 생각되는 사람들, 그래서 하나님을 정말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하나님을 자신이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지 자신이 모르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에 속성인 것이다.
오늘 이 시인은 시편 119편 전편에 흐르는 수많은 그의 진술들이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로 사랑한 한 사람의 성도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사랑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 점점 깊어져 가고 있는 이 시인이 사실은 자기도 얼마큼 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인은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깊이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는 이 시인도 알 수 없었다. 이 시인은 얼마나 자기가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지 모르겠다고 의문문으로 말을 했지만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답을 줄 수 있다. 즉 ‘주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이라고 간단하고 답할 수 있다.
그러면 만약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리고 신앙생활을 해 나간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예전에 하나님에 말씀에 대한 미각을 가지고 있을 때와 같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이 간단하고 성경에 의해서 명백하게 제시된 이 공식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 주님께서 요한 복음에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니라” 고 말씀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 ‘패역하다’라는 사실을 여러모로 입증하셨지만 그 가운데서도 선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스라엘의 태도를 보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그 율례를 떠난 것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입증하셨다. 이 명백한 공식을 우리들이 신앙의 양심 속에서 정직하게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이것을 인정할 때 우리들이 설자리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조금 잃어버린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내 마음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견디기 힘든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들이 참된 영적인 회복을 위해서는 정직히 최선의 정책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위선과 거짓 속에서 살고 자기의 의에 대한 만족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부흥이 없다. 바리새인들 속에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만약에 이 부분이 우리들의 영적인 생활에 얼마나 심각하게 영향을 주는지를 깨닫기 원한다면 “참된 신앙과 외식”이라는 설교 시리즈를 듣기를 권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린 것이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사랑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인데 그것을 정직하게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깊이 만족을 누리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감각이 없으면서도 사람들이 매우 열심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고 자기를 하나님의 일에 내어 던지는 헌신적인 삶을 사는 것 같은 모습이 가끔 보이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인격적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순종하는 하나님 사랑에 세계를 잃어버린 것을 그런 식으로 자기의 안목에 좋은 대로 빗나간 열심이나 성취욕 같은 것으로서 보상하려고 하는 심리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님께 열납되기 위해서는 목표 자체만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움직이는 동기와 성취해 나가는 과정 그 자체가 모두 하나님 자신이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영혼이라고 구원하겠다는 일념으로 교회를 개척한 목회자가 변심하여 자신의 윤택한 삶을 위해 교회의 성장을 위해 목표에 집착하는 사람이 되었다면 그는 처음 교회를 개척할 때부터 그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끝난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육체의 만족과 정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헐떡이면서 살아가서 육체의 욕망에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던 사람이 이제는 교회와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라는 영역 안에 들어와서 자기의 욕망에 노예가 되고 있는 것이다. 전에는 세상 적인 욕망을 세상 적인 껍질을 쓰고 추구했는데 이제는 세상 적인 욕망을 종교적인 껍질을 쓰고 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나 저렇게 되나 노예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없는 것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하나님이 “인생의 수고를 다 끝내고 너희들은 내게로 오라” 하시면 우리에게 무엇이 남겠는가 자기의 성취욕에 불타서, 요즘에 유행하고 있는 ‘꿈 장난’에 불타서 뭔가를 추구하며 살아가던 날들은 하나님 앞에서 없는 것이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이 세상에 그 무엇보다도 그 진리대로 사는 것을 가장 기쁘게 생각하는 사람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을 가장 행복하게 생각하고 그 말씀대로 살지 못했을 때에 가장 마음 아파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 앞에 열납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오늘날은 소위 이야기하는 ‘꿈 중독’에 걸린 시대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면 그 사람이 꾸는 꿈은 다 사람이 꾸는 꿈이다. 정말 자기가 꿈을 품고자 하는 열망도 없고 그리고 꿈 따라 살고 싶은 희망도 없었는데 주님을 깊이 만나고 그리고 그 하나님이 계시적인 비전을 주셔서 자기가 선택한 비전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가 그 꿈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자기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하나님 자신의 꿈을 이루어 가지는 그런 꿈이 아니면은 다 자기 좋은 대로 생각하는 육신에 안목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하나님을 향해서 갸륵한 꿈을 꾸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거기에는 함정이 있다. 그 사람이 진리와 말씀에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꿈은 신뢰할 수 없다. 그가 가지고 있는 비전을 정말 하나님께로 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그 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말씀을 통해서 주어졌고 그 꿈을 이루고 살고자 하는 사람이 그칠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동기가 된 꿈이라면 동일한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쏟아 부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기본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 다른 곳에서 이 찾아온 여러분들 가운데서 삼일 전에 들은 주일 낮 예배의 본문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 분이나 되는지 묻고 싶다. 100명에 5명밖에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 그 이유는 물론 설교가 신통치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예배가 예배 같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식으로 한 두 주 지나가는 것을 설교자의 탓으로 돌릴 수 있지만 삼 주 이상 계속되는 것은 그 사람도 똑같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라고 하는 증거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요즘 여러분들에게 개인적으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이 질문에 분명하게 대답할 수 없는 사람은 살아있는 영적인 신앙이 없는 것이다. 매일 새벽에 기도회에 나온다고 그 사람이 기도한다고 단정할 할 수 없다. 마찬가지이다. 설교 시간에 나와 앉아 있으면 우리들이 정말 예배자가 되는가? 무릎을 꿇으면 정말 기도자가 되는가? 하나님을 위해 살면 정말 그 사람이 주를 위해 사는 것인가? 착각해서는 안 된다.
정말 그 사람이 살아가는 동기가 주님을 향한 사랑이라면 그는 주님을 향한 그 사랑을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깊은 사랑을 통해서 입증해야 된다.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진실한 의미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종교적인 연애 감정에 불과한 것이다. 감상주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사춘기 때 충동적으로 사랑에 빠지는 특징)
오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이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사랑이 어느 정도의 깊이가 되는지 자신도 자신의 사랑을, 그 사랑이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되었지만 그 사랑이 자기 속에서 자라고 있을 때에 이미 자신의 생각으로도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입증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과연 우리에게도 이런 세계가 있는가?
우리들이 어떤 인생에 위기에 처해있든지 두 가지만 우리들이 놓치지 않으면 우리들은 결코 죽지 않는다. 하나는 하나님은 절대로 선하시더라고 하는 것과 두 번째로 그 선하신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를 구하신다는 사실이다. 그 두 가지만 잃어버리지 않으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래서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할 줄 모르는 그런 사람들보다는 오늘 나가서 죄로 인해 손에 피를 묻히고 내일 예배 시간에 정직하게 앉아서 주님에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주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천 배나 더 소망이 있는 것이다. 왜? 전자는 제 멋에 겨워 사는 것이고 후자는 어떤 기회서라도 반드시 그에게 말씀으로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반드시 돌아오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조국 교회에서는 참된 부흥이 일어날 가능성이 너무 희박하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그 미각을 유지하는 것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한다는 것은 세 가지 방면에서 입증이 된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깨달은 그 말씀이 마음에서 스쳐 떠나지 안이하고 계속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묵상이다. 오늘 시인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묵상은 머리에 남아있는 성경의 진리를 가슴 밑으로 내려오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는 통로이다. 흘려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묵상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머리 속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주일 동안 묵상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주일 예배에 말씀이 가슴에 새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머리 속에 지식이 없으니까 묵상을 할 재료도 없고 묵상을 하지 않으니까 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으로 흘려 내리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예배는 이해의 분위기가 아니다. 우리들처럼 이렇게 조용한 곳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말씀하였을 때 그 율법을 가지고 있었던 마음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찾기에 간절히 목말라했다. 아침에 읽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면 아침서부터 저녁까지만 사람답게 살다가 밤에 죽어도 여한이 없을 텐데... 이것이 진리를 구하며 사는 성도의 모습이다.
시편 119편 전편에 흐르고 있는 시인의 깊은 몸부림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대적들을 누르고 수많은 탈취 물을 얻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다는 이유 때문에 영광을 얻는 것이 아니다. 지키며 살 수 있도록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말씀을 한없이 사랑하고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묵상하고 더 많이 지켜서 더 거룩하게 살아서 더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겨서 이 세상에 살아있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싶은 것 이외에 어떤 희망도 이 시편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영혼이 진토에 구르는 것 같은 비참한 영적인 위기, 하나님과의 관계가 모두 끊어진 것 같고 하나님의 은혜가 이제는 자기에게서 완전히 떠나간 것 같은 그러한 진토에 떨어진 것 같은 영적인 깊은 위기 속에서도 자신의 영혼을 살리시는 방법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 여호와 능력의 주 내 영혼의 치료자 말씀으로 고치시네 주는 나에 치료자” 시인은 이것을 경험한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말씀으로 건지시고 고치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우리들이 오랫동안 하나님을 떠나서 우리의 영혼이 쇠약하고 곤고해져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건지시는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치료받고 영혼이 회복될 때가 되면은 이상하게 우리의 모든 지각이 깨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데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깨닫는 것밖에는 참된 소망이 없는 것처럼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게 된다. 즉 이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시인이 사랑한다고 그랬을 때 첫째로 중요한 개념은 이 시인이 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이해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준비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공급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은 영적인 미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격적인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증거였다는 것이다.
정말 사랑하게 되면 말을 해 주고 싶고 말을 듣고싶어 진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면 사람들은 다 시인이 된다. 이야기꾼이 된다. 주님을 사랑하는 깊은 신앙의 인격이 우리 가운데 충만할 때는 우리의 기도의 세계가 충분히 왕성하게 된다. 그래서 기도를 해도 해도 할 말이 많고 기도가 모자라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인격적인 사랑이 식고 나면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도무지 간절해지지 않는다.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통하는 공식이 하나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깨달음이 있는 사람들만 이런 기도의 세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이 시인이 말했을 때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 채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없이 교회당을 떠날 때 우리들의 마음에 좌절감이 생기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 말씀에 대한 미각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사람은 그 말씀에 뜻을 이해하고 싶어서 사모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말씀 자체를 가지고 승부 할 때보다는 말씀이 풀려질 질 때에 하나님의 충만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예화)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경우.
예배 시간에 설교에 집중할 줄 모르고 성경을 읽을 때에 집중하는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적어도 그의 삶은 중대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는 그 잘못된 자세를 고치고 바로 잡기 전에는 그는 결코 거룩한 그리스도인이 될 가능성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는 곳에서 하나님의 진리는 돼지우리의 던져진 진주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날 조국 교회의 평균적인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서 집중하지 않는 수많은 모습들이 생각날 것이다. 잘못된 것이다. 아무리 다수가 그런 식을 살아도 잘못된 것이다. 설교 시간에 졸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예배의 유익을 놓치는 것이 아니라 범죄하고 있는 현장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는 배교에 가까운 예배이다. 하나님은 거기에 계시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 드문 것이다. 그런 예배를 계속 들이면서 그 사람은 점점 마음이 돌멩이 같이 굳어져서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 돌 같은 신자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래서 철 가슴 돌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 바뀌는 것이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참 사랑을 잃어버리고 멀리 세상으로 떠나거나 교회에 나와도 우리가 하나님의 참 사랑을 잃어버리고 영적으로 깊이 잠들어 있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다시 당신과의 관계를 회복하시는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회개 없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은 없다. 깨닫는 것이 없이 자신의 죄를 인식하거나 뉘우칠 수 없다. 진실한 참회가 없이는 하나님과의 재회의 기쁨은 없다.
결국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도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와 똑같은 과정을 거친다. 즉 마음을 가난하게 하시고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그 깨달은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심으로 이제껏 인정하기 싫었고 볼 수 없었던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참회하도록 하시고 그래서 정결하게 하시고 하나님 자신으로 가득한 사람으로 고치시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렇게 태연자약(泰然自若)하게 살아가는 일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한 두끼만 식사를 걸으면 헛소리가 나올 정도로 정신을 못 차리는 연약한 인생들이 영은 그것보다 더 연약한지 모르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들의 말씀을 대한 미각이 살아있기 위해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가? 우리들이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안타까워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하고 있는가?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을 버린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면서도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진실한 심정으로 자신의 곤고한 영혼의 상태를 회복시켜 달라고 하나님 앞에 몸부림 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회복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고치시고 당신과의 관계를 회복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화) 시편을 다섯 권으로 편집한 배경 특히 시편 전편의 가장 중요한 주제로 1편을 제일 앞에 둔 이유.
이것이 바로 수천 년에 역사를 뛰어넘는 하나님을 사랑한 성도들의 공통적인 모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쉽사리 한국 교회에서 부흥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정확한 예측이 된다. 부흥이 일어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이 되어있는 않다는 것이다. 즉 너무 단순하고 간단한 말씀만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심리적으로 파고들면 그것은 결국 그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해서 진지하고 깊이 있게 고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인은 종일토록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고 했다. 과연 종일토록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묵상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함께 인식되어야 하는데 하나는 자신이 살아가는 삶과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에 말씀에 대한 묵상은 항상 우리에게 양심을 일깨우고 그것에 대한 반응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투영된다. 머리만 커지고 삶은 없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성경공부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참다운 지식은 그런 식으로 쌓이는 지식이 아니다.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교만과 위선으로 꽉 찬 신앙생활은 생명이 없다. 하나님의 자녀의 살아있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 즉각적인 경험으로 반응을 할 수 있는 것, 살수 있는 세계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예민한 반응을 보이면서 살아갈 수 있는 말씀이 들려올 때 그 말씀이 우리의 삶 전체를 보여주고 그 말씀에 잣대 위에서 말씀에 그 렌즈에 의해서 우리의 삶이 측정되고 보이고 그래서 그 말씀에 의해서 진리와 부합하지 못한 삶을 보면서 경건한 양심에 고통스러운 자극을 받을 수 있어야지 만 살아있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자극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없다. 실상 죽은 자와 같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어도 그 만큼은 행복했을 것이다. 전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온전한 삶을 살려고 깊이 몸부림치고 더 깊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합일된 생활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자기가 알고 있는 진리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부족한가 하는 것을 뼈아프게 깨닫게 된다.
오늘 이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사랑한다고 했을 때, 종일토록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경건한 말씀의 묵상에 의해서 지배받고 있는 삶에 대한 생각 없이는 이 성경 구절을 해석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청교도를 비롯한 신앙의 선조 들이 가지고 있었던 훌륭한 유산 가운데 하나를 거의 모두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묵상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묵상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너무 복잡하고 바쁜 기계문명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신앙의 선조 들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해야 밥을 먹고사는 사람들이었다. 기계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백수들은 논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과연 묵상에 사람인가? 그러한 외부적인 상황이 전혀 영향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단순히 환경에 핑계만 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묵상이 삶에 베인 생활을 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바로 말씀에 주일화 현상을 배격했기 때문이다. 주일 이후에 말씀을 통해 성찰하는 삶이 없기 때문에 묵상이 안돼는 것이다. 말씀은 말씀에 갇혀있고 삶은 삶대로 따로 도는데 삶의 현장을 아무리 뒤져봐도 말씀에 대한 고민이 없는데 무슨 묵상을 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결국은 말씀을 아는 지식과 동떨어진 삶과 연결이 된다. 많은 신앙의 요소와 다양한 신앙생활에 국면은 유기적으로 다 연결되어 있다. 인간 자체가 통째로 바뀌지 않으면 희망이 없는 것이다. 자기는 상당히 괜찮다고 생각하고 조금만 더 보완하고 보충하고 상당히 좋은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 같은 생각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으로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이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표현이 된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의 시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매일 살면서 하나님께서 요즘에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나의 삶을 계속 조율해 가므로 시험을 당할 때 그 말씀이 기억이 나고 시험에 이미 빠진 상황에서도 그 말씀이 생각나고 시시때때로 그 말씀이 나의 영적인 감각을 새롭게 하고 그 감각에 따라서 인생에 길을 지나면서 만나는 수많은 문제들을 해석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살아가니까 삶의 현장에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그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삶이 안 되는 이유는 삶을 대충대충 살기 때문이다.
(예화) 무교회 지역 전도를 떠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전국에서 몇 군데 안돼는 정부에서인 가 받은 지도 판매업소에서만 살 수 있는 지도(매우 세밀한 군 작전용 지도 같은) 이야 기.
대충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상세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 없다. 그리고 대충 사는 사람들은 그런 말씀을 싫어한다. 필요 없는 정보를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예화) 200페이지가 훨씬 넘는 외국 신문을 구입해서 잃은 이야기.
대충 살려고 하면 간단한 공식만을 배우면 된다. 예를 들어 “성령 충만하면 운수 대통한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예수 믿으면 천당 가고 안 믿으면 지옥 간다”라고 하는 몇 개만 알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줄서서 천당 가는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면 매 순간마다 내 마음속에서 하나님께서 기쁨을 받으시고 내 입술의 열매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리고 매일 반복되는 나의 생활 속에서도 예전과는 다른 하나님의 특별한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수 있을까? 이런 것을 가지고 고민하기 시작하면 그런 몇 가지의 공식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청교도들이 바로 이런 점에 눈을 떴던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청교도들을 너무 까다롭고 따지기를 잘하고 모레 알갱이 분석하듯이 파고드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비난을 받는 것은 삶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순수하고 정결한 삶을 살려고 몸부림 쳤기 때문인 것이다.
토마스 만 톤이라고 하는 설교자는 시편 119편 176절을 190회에 걸쳐 설교했다. 책으로 새 권이나 된다. 조나단 에즈워드가 아주 애독했던 책이다. 그러니까 시편 119편을 매주 수요일마다 설교했다 고치면 약 4년에 걸쳐 설교를 한 것이 된다. 그렇게 설교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설교를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답답하고 긴 설교를 그렇게 장시간동안 경청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깊이 파고 들어가는 설교가 자신들의 삶의 질문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답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요즘은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않는가? 삶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삶을 철저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다. 이것이 죄인가 아닌가? 이것이 순종인가? 순종이 아닌가? 가능한 두 가지의 삶이 있는데 어느 것이 더 영광이 되는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전에 사람들은 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다가 빗나가게 되었는가? 이런 모든 관심을 집중시킨 것이다. 왜냐하면 공리공담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삶을 그렇게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삶으로서 영광을 돌리고 싶어하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누군가를 많이 사랑하게 되면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을 참을 수 없게 된다. 더군다나 우리가 누군가를 진짜 사랑하고 깊이 존경하면 그 사람은 우리에게 아무렇게나 대접을 받아도 괜찮다고 말을 하여도 우리가 마음이 편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하고 깊이 존경하는 마음이 우리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우리가 온 몸으로 깊이 느끼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들이 얼마나 그런 마음을 갖게될지 생각을 해보자. 좋으신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깊이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아들까지 내어주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이신데 우리들이 그분 앞에서 대충 섬기며 살면서도 만족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에 세계에는 없다.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 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이 묵상을 잃어버리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고 나의 마음에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 시인은 자신의 삶이 열납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입술에 말 더 나아가서는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생각 자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했다. 오늘 저녁부터라도 수시로 “내가 여기 이렇게 서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그리고 정말 내가 하나님에 은혜를 입은 자답게 살고 있는가? 주님이 보실 때 나는 정말 순종의 사람일까? 이런 것들을 깊이 생각하면 우리는 즉시 말씀에 필요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고 하는 신전(神殿)의식이 있는 삶의 욕구가 말씀의 필요를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을 향한 솔직하고 진실한 깨달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삶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은혜를 받은 설교, 그리고 하나님을 만난 깊은 깨우침으로 하는 개인적인 성경 읽기, 그것에 최종적인 열매는 그렇게 살고 싶다는 것이다. 살다가 안돼는 일이 있어도 그 순간만큼은 정말 살고 싶다는 것이다.
우리의 사랑하는 것들을 다 가지고 가시고 이제껏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을 하나님이 다 잃어버리시게 해도 내가 이 말씀대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정말 그렇게 하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흐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훔치면서 예배당에서 일어나도 그 인생이 바뀔까 말까인데 무엇을 읽고 들었는지 아무 생각이 없이 수없이 교회를 다녀도 남은 것은 교만과 자랑과 허영뿐이라는 것이다 지가도 모르게 그런 것들을 배워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실하게 승부 할 수 있는 밑천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정직하게 반응을 할 줄 모르는 사람, 말씀 속에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거기에 양심에 가책을 받고 거기서 자신을 돌이키거나 고치거나 하나님의 시선에서 자기의 삶 자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반성에 세계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어떻게 진실할 수 있겠는가? 진실하지 않는 사람이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체면을 구기지 않고 남아있는 방법은 폼잡고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은 영적인 깊은 질병에 일종이다. 그 사람에 성격 탓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정직함은 한 순간에 만용으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깊이 깔려있는 인격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자신의 삶 속에 비추는 삶과 말씀에 대한 묵상에 세계가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라는 말과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깁니다”라고 하는 똑같은 말이 아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말씀을 좀 깨닫는 이해가 있다고 해서 말씀을 잘 깨닫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말씀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면서도 지키며 살지 못할 때가 많은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럴 수 없고 또 지켜서 순종하며 살았다고 하더라도 정말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지키며 순종할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깊이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불쌍하게 생각을 한다. 이것이 바로 아가폐의 사랑이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영혼이 지옥에 가는 것이 불쌍할 것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들은 집사 장로가 되지 못한 것이 불쌍한 것이 아니라 이미 믿고 구원을 받았어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사랑하는 도가 무엇인지를 몰라서 성도인데도 짐승처럼 살아가는 그 사람 자체가 우리가 눈물을 흘려야할 대상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우리가 불쌍히 여길 줄 모르면 우리가 불쌍한 사람들이다.
묵상이 잘 안돼는 사람들 가운데는 묵상을 배워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맨 처음 하나님의 깊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정말 주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았을 때에 묵상을 배워서 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삶을 비춰 보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들은 백 번 묵상을 해 보려고 해도 결국은 묵상이 아니라 공상이 되는 것이다.
교회역사 가운데 깊이 하나님을 만나고 진리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자연을 참 좋아했다. 로이드 존스는 숲에서 설교 준비하는 것을 좋아했고 특별히 찰스 스펄젼은 호수를 참 좋아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늘 숲 속에 들어가서 기도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그 말씀을 깊이 사랑하니까 한적한 사람들을 떠나서 숲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거치는 것이 하나님과의 더 가까움을 느끼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말씀 자체를 자신의 삶 속에 비춰보는 평소에 노력이 없는 사람들이 사람을 떠나면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숲 속에 들어가면 삼겹살 생각부터 나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119편 전편에 흐르고 있는 말씀에 대한 시인으로부터 배워야할 말씀에 대한 중요한 자세는 묵상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묵상은 삶 자체에 하나님의 말씀을 투영함으로서 묵상의 깊이를 더해가게 하는 자극을 가져왔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라고 말했을 때 이것은 깨달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노력이 동반된 삶이었다. 그것을 떼어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즐거움과 기쁨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말씀을 저장하는 창고가 따로 있고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통로가 따로 있는데 일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 저장 창고에 다 넣고 그 다음에 삶을 위한 말씀은 말씀을 받을 때에 즉각적으로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은 다 받아놓고 거기에서 지키며 살아도 피 흘리지 않을 수 있는 말씀을 다시 골라내어서 그것을 삶을 살아가기 위한 통에다 집어넣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항상 반쪽 짜리 순종이고 말씀을 들어도 항상 “주여 말씀하소서 저는 듣겠나이다 말씀대로 준행하리이다.”가 아니라 “일단 말씀을 해 보시옵소서 지키고 안 지키는 것은 제가 판단하겠나이다.” 그러니까 말씀에 감화가 번 번히 끊어지면서 메마르게 되는 것이다. 피를 흘리면서 순종하지 않으면 안될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다. 그런데 그것이 도저히 자기가 말씀을 받아서 자기를 움직이고 있지만 그러나 결단을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느끼게된다.
그런데도 아까 그 사람과는 다르게 순종을 하게 되면서 분명히 자신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믿으면서 아멘 해야겠다 라고 순종을 했는데 마지막에 나온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억울함을 느낄 것이다. 피 흘리기까지 순종하려고 결단을 하고 주님이 말씀하실 때에 그 말씀대로 준행하면서 살려고 몸부림 쳤는데 결과는 매우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런데 말씀을 지킬까? 말까? 생각하다가 반쯤 지키는 척 하다가 그냥 넘겨 버린 사람들은 왜 말씀에 능력이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차피 질문하기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자에 사람들은 자신이 지키지 못한 이유에 대한 해명을 성경 속에서 찾고자 할 것이다. 청교도들의 설교가 아주 부피가 많고 매우 정밀하게 되었던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심지어는 설교를 해 나가면서 이렇게 진리를 가르쳐주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반대할 것이다. 미리 반대할 만한 말들을 미리 다 막아 버린 것이다. 완전히 지적으로 항복을 시켜서 그것밖에는 진리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내어 무릎을 꿇게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이 실제로 순종하려고 한다면 실패하든지 성공하든지 반드시 유익을 얻게 된다. 성공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신뢰하기 때문에 유익이 되고 실패하게 되면 왜 내가 마음을 다해서 순종을 했는데 실패했을까?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해명을 찾는 동안에 영적인 통찰과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에 대한 풍부한 지식들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청교도들의 예배에 있어서 설교 단에 오를 수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회중들의 영적인 요구를 채워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릇 지킬만한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키라 이는 생명의 근원이 거기에서 남이니라”고 말씀한다. 잠언 그 자체가 하나님을 변호하고 살아가는 지혜의 도이다. 여기서 마음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주의 도에 착념하는 그 마음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렇게나 우리들의 마음을 다 도적질 당하고 그리고 깨달음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도 없고 말씀을 지키며 살겠다 라고 하는 거룩한 삶에 헌신도 없는 그런 생활을 계속하면서 우리의 영적인 생활이 건강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만용(蠻勇)인 것이다. 그런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지식에서 지식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에서 인격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지식도 포함되어있고 그러나 신앙의 원리라고 하는 것은 배운 것을 그대로 실천해 봄으로서 아주 정확하게 그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무엇이고 그 말씀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체험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보다 신앙이 어리고 말씀에 대한 체험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하면 실감나게 전해줄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정도에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확실한 것 하나는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으로 자신을 고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나면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서로 마주보면서 이심전심으로 말씀이 어떻게 우리를 고치는지를 말할 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만난 사람은 통하는 언어가 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에 의해서 기록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실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 말씀이 아니라 다른 말씀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느 상담 심리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당신이 성경을 읽고 무엇을 느꼈는지를 말해보라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다 가르쳐 줄 수 있다.” 이 말은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사람은 결국은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을 성경에서 찾아낸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무엇을 눈에 띠게 발견했는지를 말하면 그 인간에 심리를 추적해서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규명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 그래서 이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 그리고 그 말씀을 깨달은 대로 살아가는 철저한 삶의 실천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성경을 많이 읽어도 항상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을 성경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아무리 성경을 배워도 진보를 이룰 수가 없다.
이 시인이 시편 119편에서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싶어서 헐떡이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우리는 직감적으로 이 사람이 말씀에 세계에 대해서 굉장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높은 수준의 영적인 인물이라고 하는 것을 즉각적으로 알 수 있다. 그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니까 자기의 인생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 한 두 마디가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 전체를 볼 수 있는 시야를 하나님이 끊임없이 열어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 대한 시각이 하루하루 늘어난 다기보다는 어느 날 아침에 ‘확’ 열리는 것을 경험한다. 물론 꾸준한 진보도 있다. 정말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가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유지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있는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의 삶을 주장하고 있는가? 이것이 여러분들에 있어서는 지금 고민하는 모든 문제보다도 가장 먼저 고민해야할 문제이고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할 문제인 것이다. 이것을 건너 띠고 여러분들이 하고자 하는 모든 일들은 소기에 성과를 거둘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 이 가을이 시작되는 문턱에서 우리들은 이 가을에 이러한 영적인 말씀에 대한 미각에 건강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해서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 구체적으로 이해와 묵상과 실천으로 어우러져 나타나서 더 깊은 은혜에 속에 들어갈 수 있기를 갈망해야 하는 것이다.
10. 지혜롭게 하는 말씀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시119:98)
오늘 시인은 주의 계명이 항상 자기와 함께 하므로 그 계명이 자기를 원수들 보다 훨씬 더 지혜롭게 살아가도록 만들어 준다고 간증이 섞인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주의 계명이 항상 자기와 함께 한다.’ 무슨 뜻일까요? 그리고 어떻게 해서 이런 일들이 이루어질까요?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최대의 축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최고의 축복은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최대의 축복은 당신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오죽 했으면 예수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을 때 그분의 별명을 임마누엘이라고 불렀겠습니까? ‘임마누’ 우리와 함께, ‘엘’ 하나님이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신다 라고 말할 때 그것을 싫어한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신다 라고 말할 때 ‘좋습니다.’라고 말하는 상황이 문제입니다. 아무데서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를 우리가 원하지는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는 때는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폭풍우 흑암속 헤치사 빛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셔야할 필요가 있을 때, 자기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커다란 난관을 만나거나 위기에 봉착하거나 커다란 시련과 고통 속에서 속히 벗어나야 할 때 우리는 돈도 필요 없고 즐거움도 필요 없고 오직 하나님만을 필요로 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붙들리라’ 그 약속보다도 그 말씀보다도 우리를 더 기쁘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노래방에서 친구들하고 거나하게 걸칠 때, 그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하시면 부담스럽겠지요? 고스톱을 칠 때, 왠지 불안하지요? 이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는 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를 즐거워하는 것이 신앙의 핵심인데, 사실은 그러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다가 우리가 호출하면 내려오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나면 속히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가슴이 저릴 정도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한다는 고백이 있어도 그것이 우리의 일생을 사는 날 동안 언제 어디서든지 계속되는 갈망이 되었을 때 그것이 진정한 성도의 마음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이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하는 비결을 말합니다. 진정한 성도의 삶이 되려면 하나님이 우리의 전 삶을 지배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전포괄적으로 지배하시고, 우리는 우리의 삶 전체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앞에 전 방위적인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떨 때에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살고, 어떨 때에는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사는 이율배반적인, 이중적인 삶 속에는 투명한 영성이 깃들기 힘듭니다. 그래서 외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신령한 영성을 소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종교적인 하나의 폼일 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 주신다는 것을 원한다고 할 때에 우리의 마음이 임마누엘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생각이 많이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인생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래서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 훌륭합니다. 오죽하면 인생의 위기를 만났으면서도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도 모르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더 곤두박질치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은 때에 그래도 위기 속에서 간절하고 절박하게 하나님께 부르짖어서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들을 경험하고,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경험해서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 정말 훌륭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대부분 우리의 간증을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성경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성도의 삶을 이야기할 때에 그 정도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캄캄한 어두움이 가득하고 먹으면은 눈이 하나님과 같이 밝아질 것이요, 죽지 않을 것이라는 뱀의 유혹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듯이 창세기 5장에는 죽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새카맣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에 죽음이 멀지 않았던 한 사람이 나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구약에서 나온 하나님이 동행했던 상세한 기록이 나오는 첫 번째 사람입니다. 에녹입니다. 삼 백년 동안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365세를 향수하고 죽었던 사람,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가리켜서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던 사람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던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던 사람이다라고 말할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에녹의 생애의 그림은 어떤 것입니까?
유다서에 의하면 에녹은 캄캄한 시대에 주님의 진리,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외쳐서 그들을 회개의 길로 돌아오도록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진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칠 그 때에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을까요? 기적을 일으키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는 현장에서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열렬하게 구했고, 나머지 시간에는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산 사람이었을까요? 그런 사람을 성경이 삼 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을까요?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라고 하는 표현을 우리들은 성경에서 배워서 쉽게 쓰고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살아가는 삶 중에 어느 부분만 하나님이 특별히 함께 하셔서 증거를 보여주신 사람들이 아니라, 먹고, 입고, 자고, 입을 모든 순간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경험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 함께 잠들고 하나님과 함께 깨고 하나님 함께 먹고 하나님과 함께 마시며 하나님 함께 고난을 받고 하나님과 함께 즐거워하던 사람,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하나님과 함께 휴식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이 얘기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신약의 표현에 의하면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삶, 이것은 간헐적으로 인생에 어려움이 생겼을 때에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를 보여주는 삶이 아니라, 주 하나님이 늘 함께 계셔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밖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보일만한 큰 일이 일어나든지, 일어나지 않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늘 하나님의 임재를 자각하면서 사는 삶, 이것을 가리켜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삶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같이 걸어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모두다 동행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모르는 사람이 길 거리에서 우연히, 내가 버스를 타면 그 사람도 타고 내리면 그 사람도 내리고 지하철을 타면 그 사람도 타서 이 골목 저 골목을 계속 따라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같은 아파트 옆집 사람이더라, 그래도 그 사람은 동행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연히 같이 걸어 온 사람입니다.
동행한다라고 하는 것은 인격적인 교제와 결합이 있을 때 그것이 동행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동행한다는 말을 이렇게 부르는데 하물며 하나님과 동행했다 라고 할 때에 그 동행은 그냥 하나님이 그를 지켜보시고 그를 도와주시는 관계가 아니라, 늘 하나님이 자기 옆에 계시는 것을 자각하면서 살아가는 삶일 때 그 삶을 가리켜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렇게 불가능해 보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늘 자각하면서 사는 삶, 그래서 실컷 잘못하고 난 다음에 몇 달 있다가 깨닫고 보니 그때에 실수 한 것 같았던 삶이 아니라, 우리들이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 말 한마디를 잘못해도 즉각적으로 성령이 내 안에서 슬퍼하고 계시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믿음이 없는 얘기를 하고, 믿음이 없이 행동을 해도 성령께서 즉시 내 안에서 슬퍼하고 마음 아파하시는 것이 느껴집니다. 반대도 느껴집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행할 때, 한참 있다 보니까 그 일이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될 때도 있지만 성령이 함께 하실 때에는 즉시 하나님이 말할 수 없이 기뻐하시는 것이 느껴지고 우리의 가슴도 벅찹니다.
그렇게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소수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런 식의 삶을 살아야지만 그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런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과 항상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항상 동행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이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묵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에 늘 젖어있는 사람, 그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사건을 만나도 그 사건을 해석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떠오르고, 사건 하나 하나를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교훈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특공대 정신으로 돌격 앞으로 하다가 하나님 믿습니다 라고 하는 어쩌다가 하나님께서 밀어주시는 그런 것이 동행하는 삶이 아니라, 늘 젖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오늘 제가 심방을 하기 위해서 심방 할 때 한집, 두 집 심방을 할 때 심방의 정서가 온 마음을 감싸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고통하는 지체들을 찾아가면 함께 마음 아파하고 기도하고 기쁜 일을 만나면 더 기뻐하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느끼면서 심방에 대한 감각이 살아나서 그 정서로 차게 됩니다. 그때 갑자기 고스톱을 하면 잘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말씀이냐 하면 이 세상의 일들도 한 가지에 깊이 골몰하다가 갑자기 다른 것을 하려고 하면 안 되듯이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푹 빠져서 그 즐거움에 빠져서 감각이 깨어나면 밖에서 뭘 부르냐에 따라서 감각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개판 치면서 살아가도 붙들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고 은혜로운 성도들이 함께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곳에 와서 성령이 함께 하시면 마음속에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구나, 하나님 어떻게 합니까? 정말 잘 살고 싶습니다.’ 이런 소원이 나옵니다. 그러다가 신나게 두들겨 부수는 곳에 갖다 놓으면 그 죽었던 감각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어느 전도사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자기가 데리고 있는 지체들을 데리고 노래방을 갔다고 합니다. 가자고 할 때에 자신은 안 간다고 했더니 거기가면 가스펠송도 많다고 하면서 가자고 해서 갔는데 아무도 가스펠송을 안 부르더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모두 모여서 천사 같은 얼굴로 방긋방긋 하면서 ‘예수님 찬양’을 부르던 사람들이 그렇게 한가닥하는 줄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무엇이 밖에서 그를 이끌어 내느냐에 따라서 거기에 잠자고 있었던 여러 가지 많은 마음들이 일깨워지고, 그것과 접촉이 될 때에 끌어내지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쭉 끌려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확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정서에 젖어 있어야지만 생각도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되고, 판단도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되고, 사랑도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되고 모든 것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감화가 사라지고 차갑게 식고 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추운 겨울에 뜨거운 물이 필요해서 물을 끓여보시면 아실텐데, 차가운 수돗물을 부어서 올려놓으면 언제 끓을지 기약이 없습니다. 그런데 약간 미지근한 물을 끓이면 금방 소리가 나면서 끓기 시작한 원리와 유사한 것입니다.
저는 기도할 때도 그런 것을 느끼고, 설교할 때도 느끼지만 글을 쓸 때에 그런 것을 느낍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쁜 와중에 언제 글을 쓰냐 하는데 ‘나도 모른다’라고 대답합니다. 왜냐하면 어느 한 순간에 컴퓨터 앞에 앉아서 쭉 글을 쓰다보면 글 속에 빨려 들어가서 정서가 꽉 채워집니다. 그러면 정신없이 씁니다. 하루에 원고지 180매까지 써 봤습니다.
오늘 시인이 얘기하면 하나님의 계명이 함께 하므로 이것은 어쩌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아서 감격을 하고 잊어먹는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예배 시간에 훌륭한 설교가 울려 퍼져서 여러분들을 뒤집어 놓기만을 원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사람보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지 하나님을 보고 교회에 나온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천박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만약에 이번 주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를 새롭게 해 주시기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지난주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가지고 그 뜻대로 살고 싶어하는 갈망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다음주 하나님의 말씀에 큰 은혜를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번 주에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제대로 살기를 원하는 소원이 여러분들을 붙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은혜는 진통제나 아편 주사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은혜는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진리의 은혜이고, 그것이 우리 속에 계속 남아서 우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시인이 하나님의 계명이 자기와 함께 하므로 늘 함께 한다고 하는 고백은 어떻게 무생물인 하나님의 계명이 자기와 함께 하겠습니까? 들고 다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계명이 어떻게 함께 합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이 함께 한다면 아무렇게 살아가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이 함께 하지 않습니다. 계명이 있어도 그들이 그 말씀을 깊이 사랑하고 묵상하고 배우고 실천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격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면서 살아가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이 있어도 그것은 자기 밖에 따로 존재하는 존재물일 따름이지 그와 함께 하지는 않습니다.
함께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계명 자체가 아니라 계명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이 선행되어야 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계명을 알고 배우고 계명대로 살고자 하는 소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를 늘 지각하면서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순간의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슬퍼하실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수 있을까’ 하는 것들이 계속 점철되어질 때 그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 계명이 동행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오관의 모든 감각이 깨어 있어서 지성은 끊임없이 말씀의 빛을 받기를 원하고 감정은 말씀의 정서를 함께 느끼기를 원하고 의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대로 살고 싶어하는 상태, 거기에서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하시는 임재를 느끼고 온 인격을 바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어하는 상태, 그것이 성경이 얘기하고 있는 하나님의 계명이 함께 하는 삶입니다. 그런 삶을 가리켜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삶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위대한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남녀가 뜨겁게 사랑하면 큰 환난과 어려움을 만날 때 생명을 걸고 달려와서 사랑하는 사람을 건져주고 구해줍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뜨겁게 사랑한다고 해서 항상 폭탄이 쏟아지는 전쟁판을 지나는 것 같은 인생이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두 사람이 뜨겁게 사랑하는데 한 사람이 백혈병에도 안 걸리고, 사업이 망하지도 않고, 병상에서 죽어가지도 않을 때 상대방은 무엇을 합니까? 사랑을 한다고 해서 모든 상황이 영화에서 일어나는 극적인 상황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편한 가운데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라고 할 때 우리의 머리 속에 있는 고정관념은 큰 환난과 시련을 만나서 죽어갈 때에 하나님이 오셔서 기적을 일으켜 주시는 것으로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다 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것도 맞지만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그런 시련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라고 할 때 큰 환난의 그림, 거기에서 하나님의 능력 있는 팔을 펴서 원수들을 무찌르시고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셔서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러분들을 구원해 주시는 그림도 있지만, 여러분 인생 속에 커다란 위험이 닥치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습니까? 다음 시험에 들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점에 있어서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 속에서 신기하게 하나님께 매달리고 승리했던 사람들이 그런 모든 것들이 끝나면 스스로 무너져 버리는 경우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어떻게 보여줄 수 있습니까? 성경이 오늘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동행하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너 요즘 어떻게 지내니?”라고 물으면 “하나님이 동행하고 계셔”, “무슨 일을 하나님이 일으키셨는데?” 하고 질문하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시고 나는 그 분 곁에 있어서 행복해” 이런 얘기하면 다들 우습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간증을 해도 매일매일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마음속에서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야 하는 거룩한 소원이 일어나고 1년 전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하면서 진보를 보게 되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면 신문에 실어주지도 않습니다. 반드시 시작을 할 때 아주 극적인 상황을 묘사를 해야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시인의 입장에서 보면 다 웃기는 얘기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살아가는 인생의 와중에서 하나님이 자기와 평소에 함께 하심을 드러내시는 과정이지 오히려 더 많은 날들을 무릎꿇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하나님의 계명을 보면서 자신의 내면의 어두움들을 보고, 순전함과 신실함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깨우치고 그래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며 살아가야 할지를 끊임없이 깨우치고 깨닫는 삶, 그래서 정말 예전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주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즐거움, 이런 것들이 오히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대부분의 시간들이 그것으로 채워지는 것을 시인은 경험한 것입니다.
우리 조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은 영적으로 각성했다 할 때에는 항상 사고를 칠 때입니다. 사고를 쳤기 때문에 각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말씀에 의한 각성이라기 보다는 사고에 의한 각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해서 커다란 시련을 극복하고는 그 다음 시련이 올 때까지는 개장 휴업상태입니다. 그리고 열렬하게 기도해야 할 때에는 큰 문제가 생겼을 때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속에서는 중보기도의 개념이 생겨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위기에 처해야지만 겨우 기도하는 사람들이니까 기도의 에너지 자체가 남아있지를 않는 것입니다. 열렬히 기도할 때에는 자신의 문제를 메우기 위해서 정신이 없고, 사라지고 났을 때에는 기도의 영력도 함께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성경이 얘기하는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 주에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런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즐거움이 없이는 그런 생활을 꿈도 꾸지 마십시오. 일어나지도 않고 일어날 가능성도 없습니다. 시인이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늘 하나님의 계명을 지각하면서 살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강요나 강압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의 마음은 마치 기름기를 모두 뺀 솜과 같고, 마치 잔뜩 오므라든 스펀지와 같아서 하나님의 말씀에 깨달음이 떨어지면 확 빨아드리면서 그것을 흡수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과 같은 느낌을 받지 않습니까? 119편을 읽으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즐거움을 바로 앞 절에서 말하고 지금 시인이 그 하나님의 말씀의 즐거움 때문에 묵상한다고 말하고 그 다음절인 지금 우리가 읽은 성경에서 계명과 항상 함께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하나님의 계명과 동행하는 삶, 하나님의 임재를 지각하면서 사는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점에서 불가능한데 첫째는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이 없이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놀라운 축복을 주실 리가 없고 혹시 그런 축복이 우연히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예민한 깨달음이 없이는 주님이 주신 축복된 영혼의 상태를 오래도록 유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금방 더러워지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는,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이 없이는 결코 높은 수준의 영적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십시오. 요즘 여러분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성경을 읽든지 설교를 듣든지 책을 읽든지 지체들과 대화를 나누든지 누군가의 기도에 접하든지 하나님 앞에 매달려 간구하든지 이상하게 커다랗게 일치된 흐름들이 여러분들에게 들려오고 있지 않습니까? 인생의 어느 시기를 지날 때에는 교회 공동체를 향해서나 개인을 향해서 하나님이 항상 주도적으로 하시는 말씀의 맥이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내십시오. 그런데 그게 하나님 앞에 말씀을 즐거이 듣고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것을 깨달으려고 하는 하나님 말씀 자체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육 개월 전에 이미 세례요한이 왔습니다. 예수님 사역보다 세례요한의 사역이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었습니다.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만나서 밀실에서 합의를 한 것도 아닌데 세례요한의 메시지와 예수님의 메시지는 회개의 메시지로 시작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파송을 받아서 전하는 말씀도 회개에 관한 메시지였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시대를 향해서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들려주시고 싶으셨던 음성이 그 음성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받은 그 분들은 서로서로 왕래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이 한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읽어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종종 그런 하나님의 외침을 다수결로 결정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 때에 항상 다수 편에서 섞여 나온 목소리가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반영하지 않는 적도 많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소수가 다수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다. 여러분들에게 계속 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교회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주일날 가끔 나오는 사람은 전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차피 말씀을 지키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예배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의 미각을 잃어버리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시인이 말하기를 원수들 보다 나를 지혜롭게 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시편에서 시인은 원수들을 아주 미련한 사람으로 묘사하지만 아주 지혜로운 사람으로도 묘사합니다. 자신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묘사합니다. 원수들이 하는 일은 웅덩이를 파고 살짝 가려놓는 것입니다. 함정을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함정을 만든 사람은 함정을 밟는 사람보다는 지혜로워야 합니다. 가려서 보이지 않게 해 놓습니다. 자신의 지혜로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선 자기의 대적들이 너무나 많고, 그들이 자기 보다 더 악한 길에 있어서는 경험이 훨씬 더 많습니다. 세상은 세상이 더 잘 알겠습니까? 우리가 더 잘 알겠습니까? 세상은 세상이 더 잘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가 전공이냐 하면 그것도 쑥스럽습니다.
그래서 처음 믿은 사람이 들어와서 “이보게 형제 하나님의 나라 백성 맞아?”, “맞지”, “나는 세상에 있다가 처음 들어왔거든 어디로 가야지만 잘 믿는 길로 가야할 지 모르겠는데 나 좀 인도해 줄 주 있어?” 아는 게 있어야지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길은 나의 전공이야, 따라와 이리 가면 의심이라는 함정이 있고, 이리 가면 시험이라는 올무가 놓여 있는데 이것은 이렇게 피해가야 하고 지나다 보면 인생의 캄캄한 밤이 나오는데 그 때에는 말씀의 안경을 쓰고 잘 들여다보면 걸어갈 수 있어 여기 수많은 피들을 봐, 다른 길로 가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가다가 흘린 피야” 이렇게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희망이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비참한 것입니다.
시인이 얘기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행했더니 정반대의 삶을 살게 되는데 원수들 보다 훨씬 더 지혜롭다는 것입니다. 원수가 올무를 놓고 자기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함정을 팠는데 그게 보인다는 얘기입니다. 입증하기 위해서는 반대를 입증하는 것이 쉬울 것 같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지혜롭게 한다는 얘기를 굉장히 많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실제로 교육도 많이 받지 못하고 성격도 원만하지 못한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에 깊이 들어와서 진리를 깊이 사랑하는 인격으로 변하게 되면 어쩌면 그렇게 순전하고 순진하고 신중한 사람으로 변하는지 모릅니다. 초등학교를 나오지 않았어도 머리가 수그려지는 그리스도인들을 여럿 만났습니다. 그들이 만약 교육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세상 사람으로 살았더라면 정말 진리를 찾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배우니까 세상의 지식은 짧아도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지 도리는 아는 것입니다. 도리를 아는 것을 가리켜서 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를 얘기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 떠난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어지는 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또한 살고자 하는 용기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어두움 속에서 행하게 되는가를 보십시오. 우선 첫째로는 지적으로 매우 혼돈을 경험합니다. 부르짖는 말씀의 은혜,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인 변화는 사람으로 하여금 단정하고 가지런한 사고를 갖도록 만들어 줍니다. 서로 얘기하다 보면 머리가 아프고 황당무계하게 자신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감화가 사라진 사람들은 지적인 혼돈입니다. 판단을 제대로 못합니다.
어렸을 때 귀뚜라미를 가지고 장난을 쳤습니다. 친구들하고 둘러앉아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고 가위를 가지고 더듬이를 잘라버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귀뚜라미가 조금 위협을 느끼면 뛰는 것의 천재인데 두드리고 박수를 쳐도 뛰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더듬이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귀뚜라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보다 훨씬 더 지혜롭습니다. 뛰었다가 위험한 곳에 떨어지면 끝인데, 더듬이가 있어야만 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버린 사람은 말씀을 버렸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깨닫는 것이 없으니까 지적으로 더듬이를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앉아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든지, 목사님을 찾아서 자문을 구하면 수준이 귀뚜라미 수준쯤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 뛰는 것입니다. 온몸을 던져서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은 남을 위한 예증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 떠난 사람,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첫째 혼돈은 지적인 혼란이 오는 것입니다. 판단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도 되지 않는 논리를 가지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이단에 빠졌던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 황당무계합니다. 이단에 짜졌던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 믿어집니까? 그런데 거기에 대학교수, 저명한 정치인, 경제학 박사 그런 사람들이 연루돼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적인 혼란이 생기게 되니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버린 사람들이 그런 식입니다. 종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얘기는 “어떤 애가 비몽사몽간에 예언을 했는데 다른 애도 그러더라” 하는 것을 믿고 빠져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리면 지적인 놀라운 혼란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판단을 못하게 되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정적인 혼란이 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이 유지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정서와 일에 대한 소원은 상당히 신뢰할 만합니다. 그리고 지속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과 미각을 잃어버린 사람들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들은 상당히 충동적입니다. 어느 순간에 갑자기 “주를 위해서 죽을 거야” 라고 불붙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은 정욕에 불붙은 것입니다. 세상 사랑의 정서와 하나님의 이름을 빈 종교적인 정서가 일관성이 없이 밀려들어오면서 뒤죽박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순간적으로 굉장히 열렬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이런 것들을 내가 느끼고 있기 때문에 매우 특별한 수준의 영적인 삶을 이어가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깨달음에서 비롯되지 않는 체험들은 가치가 없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거의 가치가 적은 것들입니다. 애써서 추구해야 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버릴 것이다” 그럴 때 베드로가 펄쩍 뜁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저 인간들이 다 주님을 버려도 나는 주님을 안 버린다” 그렇게 장담을 합니다. 대제사장의 종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왔습니다. 단칼을 휘둘러서 귀를 잘라 버렸습니다. 굉장히 용기가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잡혀있는 대제사장의 뜰에도 칼을 들고 들어가서 작렬하게 순교를 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금방 멀리 숨는 것입니다. 살금살금 들어가서 아니라고 부인하고 대성통곡하고 울다가 고기를 잡으러 다시 바다로 가는 것입니다. 정신발작 증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짝이는 모든 것이 불이 아니고, 빛나는 모든 것이 금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과 미각이 없으면 이렇게 정서적인 반응들이 충동적으로 오게 됩니다. 여러분 자신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나와서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 은혜 받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은혜 받는 것이 급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결과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만 달라고 하는 사람들의 그 간구도 사실은 자신들의 종교적인 만족의 감정일 경우가 많습니다. 비인격적인 것입니다.
제가 섬기던 교회에서 한 형제는 찬송을 인도할 때와 기도할 때는 열렬하다가 예배시간이 되면 조는 것입니다. 찬송 시간에는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또 찬송을 합니다. 그것은 혼돈스러운 상태입니다. 신령하고 거룩한 정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도 왈칵 솟아오르면서 생명을 걸고 싶은 확신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말씀의 미각이 없는 사람들 속에서 솟아나는 것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말씀에 대한 미각을 유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도 신뢰하기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완전히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서, 모든 감정 자체가 악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는 감정의 체계가 파멸되고 죽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다 살아있습니다. 다만 기능을 성령이 온전히 지배하실 때에는 기능이 약화되고, 안 할 때에는 강화되는 차이이지 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과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이 없는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불같은 확신이 일어나는데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꼭 해야되고 꼭 믿어야 하는 일인데 내키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것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정, 하나님의 마음이 늘 흘러 들어가고 그 마음이 하나님께 전해지는 정서적인 교류를 하나님과 가지면서 살기 위해서는 성경에 대한 깊은 사랑, 진리의 말씀에 대한 살아있는 미각을 가지고 오늘 이 시인과 같은 정서가 될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마지막에 일어나는 것은 의지적인 혼란입니다. 무엇이냐 하면 분명히 해야 하는데 할 의지가 생겨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지가 너무나 쉽게 꺾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과 미각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말씀의 은혜가 깨달음이 들어오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화가 들어오면서 그것이 우리로 순종하며 살게 하는 힘을 공급해 줍니다.
언젠가 집회를 가면서 시골길을 갈려가는데 제 차보다 훨씬 좋은 그랜저가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뭘 도와드릴까요?” 했더니 정신없이 오다가 기름이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내 엘란트라가 당신의 그랜저보다 훨씬 더 낫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차가 좋으면 뭐합니까? 기름이 없는데.
우리는 몰라서도 순종을 못하지만 알면서도 순종할 힘이 없으면 순종을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옳다고 생각하는 데로 삽니까? ‘이 길이 맞는데’라고 생각되는 길은 다 걷습니까? 어둠 속에 있을 때에는 내가 몰랐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몸부림쳐 보십시오. 어느 순간에 눈을 뜨게 되는데 그것은 자기 안에 자기가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하고자 할 마음이 있고 그 길이 무엇인지도 아는데 힘이 없으면 그대로 살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힘이 뭐겠습니까? 의지입니다. 그 의지가 어떻게 충만하게 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계속 공급되는, 말씀 사랑의 통로를 통해서 공급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수 있는 의지를 공급해 주는 것입니다.
젊어서 건장하고 황소라도 때려서 눕힐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이 말년에 병들어 말라서 링걸 병을 꽂고 그들이 어떻게 걸어다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걸음을 떼어놓지 못해서 사람의 부축을 받으면서 계단을 올라가는 그 사람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왜 뛰지를 못합니까? 힘이 없어서 입니다. 할 수 없습니다.
순종하려고 해도 길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지식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길이 어딘 지를 알면서도 그 길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힘이 필요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의 미각을 유지하고 거기에서 끊임없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말씀의 은혜와 능력에 붙잡혀서 자기 속에 있는 죄를 회개하고 순간순간 자신의 영혼을 어둡게 만드는 세상의 유혹과 더러운 것들을 몰아내는 영적인 삶의 쇄신이 없이는 순종하며 살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을 보십시오.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나 사랑하니까 그 말씀을 묵상하게 되고, 계명이 자신과 함께 하니까 원수들 보다 훨씬 지혜롭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비록 원수들보다는 완력이 적고 무력도 없고 돕는 자도 없지만 그러나 원수들이 자신을 어떻게 넘어뜨리려고 하는지 예리하게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내고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움직이는 정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계명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그에게 있습니다. 그가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는데 뭐가 두렵겠습니까? 우리보다 강한 것들은 세상에 너무 많습니다. 우리 더 크고 권세 있고 힘이 있어서 우리를 짓밟아서 짓이겨 버릴 수 있는 원수들은 기라성 같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큰 원수는 아무 데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대적해도 누가 우리를 꺾을 수 있겠으며, 꺾어도 누가 우리를 파멸로 몰아갈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잠시 짓밟히는 자 같으나 일어날 것이며, 잠시 넘어지는 자 같으나 다시 일어설 것이고, 잠시 지는 자 같으나 반드시 이기고야 말 것이며, 잠시 무능해지는 자 같으나 유명한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유지하면서 살면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지혜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11. 말씀의 꿀맛을 느끼려면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시119:103)
사람들은 흔히 자기는 체질적으로 물만 먹어도 살이 찐다고 말을 하지만 먹지 않고 살이 찌는 사람은 없다. 무슨 반찬에 밥을 먹든지 이상하게 밥이 맛이 있을 때가 있다. 그래서 옛날 어른들은 제일 좋은 보약은 밥이라고 하면서 밥을 잘 먹는 그것이 보약이라고 말씀을 하신다.
금식을 하고 살이 빠진 상태에서 한 끼니만 잘 먹어도 금방 1킬로그램 이상 살이 찐다. 그러니 좋은 음식을 잘 먹는 것이 우리의 미치는 영향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한끼만 든든히 잘 먹어도 그 다음 한끼 정도는 안 먹을 수 있는데 늘 밥이 맛이 있어서 늘 끼니를 잘 챙겨서 먹는 사람은 얼마나 복된 사람들이겠는가?
그런데 오늘 시인은 우리로서는 샘 나는 고백을 한다.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리고 몇 주 동안 계속되는 말씀을 통해서 미각이 살아있느냐는 도전을 받았을 때 괴로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시인은 “주의말씀이 내 입에 어찌 그리 단지요 꿀보다도 더 답니다” 라고 말한다. 이런 성경 구절을 읽거나 들으면서 샘 나지 않는가? 샘이 나면 아직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들이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얼마나 샘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란다. 세상에 것을 초월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직까지도 우리 속에는 많은 욕망들이 남아있고 늘 사람들과 비교해서 거기에서 뭔가 자기가 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불안해하는 것이 우리들이다. 나보다 얼굴이 더 예쁜 사람들 만났을 때 샘이 나지 않는가? 나보다 더 많이 배운 사람이 나타나면 샘내지 않는가? 외국에 나갔을 때 유창한 영어를 쏟아놓는 사람들을 보면 샘이 나지 않겠는가? 심지어는 누가 무슨 살림살이를 장만하기라도 하면 얼마나 샘내 하는지 모른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이런 사실들을 상대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 된다. 고린도전서 13장을 90분 동안 강해하면서 저는 진정한 사랑은 왜 투기하지 아니하는가 하는 사실을 말씀드렸다. 그것은 그 사랑이 절대적인 것이라는 것을 자기가 경험하기 때문에 투기할 마음이 살아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고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말씀에 미각을 잃어버릴 리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에 민감함과 이 세상에 즐거움과 자랑에 대한 미각은 서로 반비례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의 미각이 세상 자랑과 사랑에 대한 미각을 죽이고 세상 사랑과 자랑에 대한 미각이 신령한 말씀에 대한 욕구를 억누른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감화를 받고 그 말씀 속에서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는 환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외적인 것에 신경을 많이 쓰지 않는다. 즉 수수하고 깨끗하고 단정하다는 것이다. 모든 관심과 즐거움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정말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은혜를 받고 그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자유와 그 놀라운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갈 때에는 자랑거리도 되지 않는 것들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을 보면 너무 불쌍해서 눈물이 핑 돈다.
나 세상사랑 버렸네 나 주님만 사랑하네
주님 이외는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일단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리고 나면 속히 그런 쪽으로 감각이 발달하게 된다.
(예화) 자매와 형제가 은혜가 떨어지면 여자와 사나이로 변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세상에 대한 욕구와 미각들이 사라진다. 우리 모두는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면서 그 말씀에 대한 미각을 간직하고 살고 싶을 것이다. 문제는 왜 그런 미각을 잃어버리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성경이 답을 주고 있다.
오늘 성경은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않았사오며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음으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않았나이다. 주의 말씀이 어찌 그리 내게 단지요”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면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사랑의 미각이 유지된다는 말씀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넘칠 때에는 그 말씀을 많이 깨달으면서 은혜를 받을 때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의 마음에 큰 기쁨이 된다.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해서 깊은 애정을 가지고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을 섭취하는 것이 영혼의 커다란 즐거움을 준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때에 큰 기쁨과 은혜가 밀려오는데 어는 순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미각이 사라지고 차디찬 마음이 된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데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원인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삶을 살다가 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달게 느껴지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그 말씀대로 살게 되면 그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썼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동안에 계속해서 삶을 위한 정보가 더욱 필요하게 된다. 예를 들어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설교를 통해 말씀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을 주셨고 그 말씀에 큰 은혜를 받고 정말 거룩하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해 회개를 하고 이제는 거룩한 삶을 사는 것만이 내가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며 사는 길이라고 하는 생애적인 도전을 받고 삶의 현장으로 가서 죄를 잘라내고 거룩한 삶을 살려고 애를 쓰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제껏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보면서 생전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상황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즉 말씀에 감화를 받고 거룩한 삶을 살려고 죄를 떨쳐 버리는데 어느 정도까지는 거룩하게 살려는 마음이 있는데 그 이상의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의 내면의 세계의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거룩하게 살아가겠다는 결심으로 살아가는데 어느 한 순간에 이렇게 뭔가를 해 보려고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노력들을 다 집어 던져 버리고 모든 말씀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방종한 마음이 울컥울컥 솟아 나오는 자기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은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크게 도전을 받았을 때는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다시 말씀을 들으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며 거룩한 삶을 살려고 마음을 먹으면 그렇게 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는데 생각지도 않던 대적들이 안팎에서 생겨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정체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하게 된다. 즉 자신에게 또 다른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다시 하나님께 나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그렇게 거룩한 삶을 가로막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주시고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하는 생각을 가로막을 때에는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이겨야하는구나 그리고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이런 상황이 닥쳐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면서 더 이상 거룩한 삶의 진전을 보지 못하게 할 때에는 우리들이 이런 식으로 물리쳐야지 만 다시 전진 할 수 있는 길이 주어지는 구나 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진전된 싸움을 싸우게 되는 것이다. 또 나아가면 더 정보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더 풍부한 정보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예화) 교회 신문에 실린 “기도 마스터”를 만든 출판사 책임자의 이야기.
정말 우리 신앙 생활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온전한 삶을 살려고 노력을 하다가 보면 우리에게는 더 정미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더 이상의 진전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때는 고급의 정보가 필요하게 된다.
그러니까 거룩한 삶을 살고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의지가 없는 성도들이 모인 곳에서는 그저 이야기 거리나 듣고 우스운 소리나 있는 그런 설교가 사람들에게 다가오지, 뒤진 바닥 또 뒤집고 캔 바닥 또 캐는 그런 설교는 지긋 지긋한 것이다. 그리고 화를 내게 된다. 왜냐하면 전혀 자신들이 그렇게 살 의지가 없는데 그런 식으로 설교를 하니까 듣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인 것이다. 자기의 관심사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는 설교자의 관심사가 일치하지 않을 때 그 교회는 결코 말씀의 부흥을 경험할 수 없게 된다.
말씀의 맛을 잃어버린 가장 커다란 이유는 설교를 듣다가 그만 두었기 때문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듣기만 할뿐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탁월한 의지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우리들에게 깨달음을 주시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기는 것은 아주 고급의 유흥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즐기는 거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치열한 삶의 현장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고 불꽃 튀고 폭탄이 날아오는 지극히 현실적인 삶을 위한 하나님의 목소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도 이 땅에서 살게 하시려고 구원해 주신 것이고 잠자는 영혼을 깨워 주시는 것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라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것이다.
시인은 차례대로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데 항상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동행하는 이유는 묵상 때문이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꿀과 같이 자신에게 느껴지는 것은 자신이 그 말씀을 지키지 위해서 자기의 발을 삼가고 주께서 자기를 가르치셨기 때문에 주님의 그 말씀을 지키면서 살려고 하는 실천적인 순종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송이 꿀처럼 단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하고 심각한 중간 결론이 나오게 된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리고 살면서 흔히 “나는 요즘 다 좋은데, 옛날처럼 말씀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것이 문제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삶 자체가 모두 불순종 덩어리가 되고 있음을 하나님 앞에 입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드리는 이 말씀을 가슴 깊이 느끼는 그리스도인들이 극소수라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우리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슬퍼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전체에 대한 ‘바로메타’가 된다. 그 사람의 몸 속의 어떤 병균이 흐리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한 방울의 피를 가지고 검사를 해보면 알 수 있다. 우리들의 영혼의 짧은 혀, 말씀을 맛보는 이 미각, 이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전체를 측정한다.
불순종하면서 살고, 순종하려는 실천적인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예전에 달고 맛이 있던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은 차갑고 아무 맛도 없이 느껴지는 것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전달해 주는 사람이지 우리의 입맛을 헤아려서 그 입맛에 맞게 말씀을 만드는 요리사로 부름을 받은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렸다 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이 중대한 위기에 봉착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설교를 들으면서도 내가 뭘? 주일을 범했어, 십일조를 떼어먹었어, 다른 사람들보다 열심히 섬기는데 내가 뭘?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언제까지 그런 초등학교 학생보다도 못한 투정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가? 우리는 결코 무엇을 보여 주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다. 과연 우리들의 신앙의 기준이 주일도 지키지 못하고 십일조도 떼어먹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주님은 말씀하시고 계신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린 것은 우리들이 상황이 바뀌었거나 하는 주변적인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말씀에 미각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갑자기 설교자가 곤두박질을 쳤다든지, 아니면 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교회로 옮겼다든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부수적이고 협조적인 문제이고 보다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똑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여오는데도 어떤 송이 꿀보다도 달고 맛이 있던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 맛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것을 듣고 이해하여야 하는 자신의 상황 자체가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그 상황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실천하는 삶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에 대한 미각까지 걷어 가신 것이다.
투쟁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주님이 주시는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몰라서 고민하면 신기하기 주일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대답해 주신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결단하게 하신다.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려고 하니까 의문이 생기고 의문이 생기니까 답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예 의지가 작동을 하지 않으면 바람이 부는 대로 김삿갓 같은 그리스도인은 자기 맘 내키는 살다가 주일에 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정답을 들려주어도 순종하려고 실천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질문이 생기지 않고 질문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대답이 주어져도 그 대답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점점 멀어지고 말씀에 미각은 점점 살아지게 되는 것이다.
짐승처럼 살려고 결심을 하면 아무 것도 필요가 없다. 짐승처럼 사는 사람에게는 교과서가 필요 없다. 그냥 살면 된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가고 싶을 때 가고 갖고 싶은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고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면 된다. 그리고 마지막은 죽음이다. 길 길이 뛰던 미친개가 경관에 총에 맞아 죽는 광경을 생각해 보자. 인생도 그렇게 끝나는 것이다. 정신병자들에게도 역시 교과서가 필요 없다. 막 사는 사람들에게는 경우가 필요 없다. 도리를 따라 살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금수보다 더 못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 제대로 살아 보려고 생각하면 “너에게 선하게 대하는 사람에게 선하게 대하고 악에게 대하는 사람에게 악하게 대하라!”라는 간단한 공식 가지고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된다. 십계명이나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만을 가지고는 신앙생활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밑바닥까지 탐구해 들어가고 싶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더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탐구를 해 보니까 새로운 것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예화) 전문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많은 도구들 이야기.
한 사람이 깊이 은혜를 받으면서 청취하는 설교의 내용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신앙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다. 매일 ‘성령충만’, ‘운수 대통’을 외치는 사람들은 소망이 없다.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다.
말씀의 미각을 유지하고 있는가?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깊은 사랑과 말씀에 대한 미각이 없다면 우리들의 삶은 총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있는 삶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삶을 고치고 돌이키지 않으면 우리들의 말씀에 대한 미각은 회복되는 않는다. 영원히 말씀이 맛이 없는 차가운 음식 덩어리처럼 느껴지면서 평생을 살다가 죽을 수도 있다.
마귀는 이 결정적인 일을 우리의 영혼 속에 행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보다 더 우리의 영적인 삶의 원리를 꿰뚫고 있다. 한 사람의 힘없는 신자가 어떻게 해서 영적인 거인으로 변하는지를 우리는 잘 몰라도 그는 기가 막히게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을 방해해야지 만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상실한 채 살아가게 만들 수 있는지를 안다. 그래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우리들 속에 있는 영적인 무장들을 해제시키고 우리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사랑의 미각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의 미각은 우리를 정결하게 하는 깨끗한 통로와 같다. 말씀을 사랑하는 미각만을 가지고 있으면 그 미각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면 더러운 우리의 마음들이 정결하게 해지고 혼탁한 우리의 영혼에 불결한 피들이 회개하고 뉘우침으로 깨끗하게 변하게 된다. 콜레스테롤처럼 혈관을 가득 막고 있는 이물질 같은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 말씀의 미각을 통해서 공급되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으로 깨끗이 청소되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든지 우리 안에 신진대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 일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한 번 범죄 하거나 실패한 사람들은 영원히 희망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 가망 없는 죄인은 없다. 쓰레기통을 굴러다니듯이 비참한 인생을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정결하게 되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이 신앙의 묘미이다.
아무리 정결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순수함에 넘치는 사람이었다고 할지라도 일단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리게 되면 더 이상 진리를 섭취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곳 그는 불결해져서 이전에 거룩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령한 은혜로 충만해져서 하나님을 찬송하던 사람이 육체의 정욕을 따라 흐느적거리는 고깃덩어리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린 것이 우선 신앙에 있어서 작은 하자가 생긴 것같이 그런 식으로 위선하고 자기 자신을 가장하고 그렇게 부정직하게 살아서 하나님 앞에 복을 받으리라고 생각하는가?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리고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설교자에게 미안한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다. 우리가 누구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인가? 정말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가? 양심의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정말 말씀에 대한 미각이 살아졌을 때 우리들은 정직하게 자신의 삶이 총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진리를 따라 사는 순종의 삶을 거부하고 있다고 그렇게 인정하느냐 것이다.
아마 이렇게 말하면 화를 낼 것이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보면 화를 낼 수도 없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말씀에 미각을 잃어버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삶 자체의 문제가 일어나니까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상실하는 것이다. 하루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고 해서 못사는 것인가? 라고 배짱 있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한 달을 깨닫지 못해도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잘 사는지 보면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사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죽은 자와 방불한 삶이라고 말한다. 심각하게 생각해야 된다.
하나님 앞에 그분의 인격 앞에서 지금 이야기를 비춰보라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이런 일을 하찮게 생각하는 것을 깊이 회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는 없는 것이다. 시인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러한 교리를 입증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단지 예배 시간에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느끼거나 성경을 펴는 동안에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느낀 것이 아니라 종일토록 주야로 그 말씀의 계명과 동행했다.
예배를 드리는 공간과 성경을 읽는 그 공간 속에 가두어 두지 않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을 자신의 전 삶의 현장에 끌어 들여서 그 말씀과 동행하게 한 통로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자기의 발을 지키고 자신의 삶을 지켜서 그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기 위해서 희생을 무릅쓰는 실천적인 순종의 삶을 이행하니까 오늘 당장 그 하나님의 말씀이 송이 꿀보다 더 달게 느껴진 것이다.
꿀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물질이었다. 그리고 야생에서 얼마든지 채취할 수 있었다. 그 꿀을 먹기 도하고 상처가 난 곳에 바르기도 하였다. 아주 요긴하게 사용되었던 물질이다.
(예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녀들에게 글자를 가르칠 때 율법을 사용하여 글자에 꿀을 발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이야기.
이들은 점점 크면서 이 말씀이 육신 적인 미각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의 의미가 자신의 인생을 슬기롭게 살아가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게 하는데 매우 커다란 도움이 된다라고 하는 기쁨을 느끼게 된다. 아이들이 꿀을 먹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에 그 꿀이 달게 느껴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말씀의 훈련을 받으면서 점점 잘아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순종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는 간절한 욕망을 갖게 되니까 그 하나님의 말씀 하나 하나가 깨달음으로 자신의 미각에 다가올 때 말할 수 없는 달콤함을 느끼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의 영혼에 비같이 내리고 혼돈과 무지로 가득 차던 우리들의 삶의 찬란한 복음의 불빛이 들어오고 그 복음의 빛 아래서 우리들이 어느 지점에 서있고 왜 하나님 사랑을 받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속을 입은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그늘 아래서 살아가는지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바로 그때에 세상도 없고 자신도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받아 드리는 이것이 내 인생 전체에 살고 죽는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그런 깊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사랑, 그때에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달게 느껴졌는지 생각해 보자. 물론 그 말씀은 우리에게 항상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말씀이 칼이 되어서 우리의 내면의 세계에 들어와서 관절과 골수를 찌르고 더러운 이물질을 꺼내는 살인적인 고통을 동반하기도 했다. 그러나 말씀이 우리를 고치고자 할 때 느끼는 고통은 잠간이고 즉시 순종하고 돌이키고 나면 고통과는 비교되지 않는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비롯되는 안식이 우리의 온 영혼을 가득 메웠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훈련을 받으면서 말씀의 칼을 들고 다가오시는 하나님 앞에 조용히 누울 수 있는 지혜를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실 때 고치심을 받고 순종하며 사는 그것이 망가진 채로 불순종하며 패역하게 사는 것보다 훨씬 미래가 있는 선택이라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즐겁게 받아 들였는지 생각해 보자. 그 순간을 다른 어떤 세상에 즐거움과 바꾸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받으면서 오랫동안 숙명처럼 실패를 받아드리면서 산 어는 순간에 사실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말씀의 치료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깊이 터득하게 되었을 때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아름다운 순간을 이 세상의 재물과 바꾸려고 했는가? 명예와 바꾸려고 했는가? 순간 온 몸을 떨게 만드는 잠시의 쾌락과 더불어 바꾸려고 했는가?
우리들은 그 시간을 사랑했고 그 시산 밖에는 없는 것처럼 생활했으며 그 하나님의 말씀에 단 일 점 일획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들의 온 몸과 마음은 스펀지가 되어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빨아드렸다. 식욕이 왕성한 아이가 순식간에 밥그릇을 비우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주모를 바라보는 것처럼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 여기에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흘러간 옛 이야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책망을 면할 수 없는 최고의 교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런 갈망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의 미각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은 사실 말씀을 버린 사람들이 아니라, 신앙생활에서 하나의 종교적인 의무를 버린 것이 아니라, 일부를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버린 것이다.
우리들은 ‘살아있는 신자’ 라고 할 때 어떤 사람을 생각하는가? 혹시 능력이 충만해서 기침만 해도 귀신이 나가는 그리스도인, 엄청나게 많은 재산을 아낌없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그리스도인, 무엇이든지 고난받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교회를 위해서 수고를 아끼지 않는 그리스도인, 입을 열면 예수의 복음전하기에 여념이 없는 그리스도인, 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물론 이런 사람들도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살아 있다’ 고 하는 것은 꼭 그 사람이 아주 정결하게 살아간다든지 높은 도덕적인 수준을 유지하는 삶을 산다든지 어마 어마한 헌신을 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런 것들이 포함될 수는 있겠지만 확실한 것은 그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화) 처음 다니던 조그마한 교회에서 추운 겨울 새벽 예배를 드릴 때 멀리서 교회를 다니 고 있는 국화빵을 파는 어느 여 집사님이 바닥에 떨어진 5000원 짜리 지폐를 방석 밑 에 넣고 난 후 찬송-“...우리 맘은 연약하여 범죄하기 쉬우니...”-을 부를 때 대성 통곡 하며 회개한 이야기.
바로 이런 사람이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다. 때로는 넘어질 때도 있고 울 때도 있고 아파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하나님의 법도를 깨닫고도 그대로 살지 못했던 자신의 삶을 깊이 뉘우치는 사람, 그래서 자기는 희망이 없기 때문에 위로 내리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밖에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 주제에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주께서 나를 주의 목전에서 쫓아 내실지라도 나는 예루살렘을 바랄 수밖에 없나이다 라는 마음으로 그 말씀 앞에 무릎을 꿇는 그 사람이 희망이 있는 사람인가?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반듯하게 신앙생활을 할 뿐 하나님의 사랑을 향한 감격이 없는 사람들은 잘 길들여진 짐승이다.
오늘 이 시인을 보자.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그 어린아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쓰면서 맛보던 그 꿀과 같이 그렇게 달콤하게 생각했다. 어려서는 그 꿀을 찍어 먹으면서 달콤하게 생각했지만 성장하면서 인생의 여러 굽이굽이 지나는 동안에 그는 이제 비로소 자신의 영혼 속에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욕구가 있고 그 욕구가 살아 있는 한 더 정미한 하나님의 말씀, 더 순전한 진리의 말씀, 우리로 하여금 온전히 이기게 하는 풍부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게될 때 그는 뛸 듯이 기뻐하고 송이 꿀을 맛본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알 수 없어서 살수 없었지만 이제는 깨닫게 되었으니 “내가 살리라” 고 말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 나라의 사람들이 구별되는 구별점이라고 하는 것이다.
오늘 다윗이라는 믿어지는 이 시인도 아마 틀림없이 어려서 말씀이 기록된 대로 꿀을 찍어 먹는 체험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에 신기하게 느껴지고 달콤하게 느껴지던 미각을 상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굽이굽이 대적들에게 둘러싸인 그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곳, 아무리 걸어도 풀 포기 하나 없고 물 한 모금 먹을 수 없는 황량한 벌판을 걷는 것 같은 시련으로 가득한 인생, 마라와 같이 쓴 물을 머금으면서 외로움을 벗삼아 그 긴 인생의 천로역정을 걸어야 하는 것과 같은 때에 이 시인에게 유일한 위로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말씀을 통해 우리의 영혼이 다시 산 영적인 회복을 수시로 결합하면서 사는 것은 단지 예배 시간에 나와서 또렷한 눈망울로 설교자를 응시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이 미각을 회복시켜 주시면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다음 주일 예배를 기다리며 살겠는가? 이제는 그렇게 깨닫게된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가지고 모든 성경으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며 살아야겠다는 삶의 예배가 하나님 앞에 드려져야 되는 것이다. 물론 말씀의 미각이 아무리 발달하고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이 정말 불같이 뜨거워도 그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감화를 받고 은혜를 받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의 공로 없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어떻게 깨달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은 송이 꿀같이 달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 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말씀이 미각이 살아있을 때에 주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을 삼키는 것은 한없이 달다. 그러나 삶은 그렇지만은 않다. 그래서 계시록에서 보면 사도 요한이 천사의 명령을 따라서 두루말이를 받아서 먹을 때 입에서는 너무너무 달았지만 배에 들어가서 고통스러울 정도로 쓴 것을 경험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말 달다. 그러나 그것을 이 시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의 도에 순종하면서 사는 삶은 송이 꿀 같지 않을 때가 많다. 그렇게 달게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인데도 그 말씀을 순종하면서 살다가 보면 마음의 큰 고통과 괴로움이 다가온다. 때로는 시련이 핍박이 온다. 그래서 오늘 시인이 말했던 것처럼 자신의 눈에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르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도에 행한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를 박해하고 공격해 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잠시동안 눈물을 흘리며 갈 길을 걸어 가다가 믿음을 지키고 법도대로 살다가 보면 그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이 그대로 살아있게 되는 것이다. 말씀이 주어지면 그 말씀이 기가 막히게 달게 느껴지면서 빨려 들어가는데 그 말씀에 깊은 은혜를 받들 때에는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받았던 고난이 생각나지를 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옛날에 믿음에 선조들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온전한 삶을 말씀을 따라서 살았던 이유이다.
고난이 겹치고 인생의 풍파가 몰려와서 우리의 인생이 만신창이가 되는 것 같은데도 “하나님은 나의 자랑은 오직 이 환난 속에서 이 시련 속에서 이 폭풍우 속에서 주의 말씀을 붙들고 산 것 밖에는 한 일이 없습니다” 하면서 살다가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더 풍성하게 들리면서 그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찬란하게 영혼 속으로 내려오게 된다. 그리고 그 말씀이 말할 수 없이 행복하게 우리의 영혼을 온전히 감싸는 것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전에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살면서 맛보았던 그 고난이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난번에도 그렇게 말씀을 지키면서 살다가 고난을 당했는데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취하고 나면 다 잊어버리고 다시 오늘 받은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야지 하고 걸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이다.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신자의 삶이다.
오늘 이 시인이 자기 입에는 이 말씀이 송이 꿀보다 더 달다라고 하는 이 고백은 그것만을 떼어놓고 그것만을 우리가 모방하려고 하면 우리는 결코 시인의 그 경험을 모방할 수 없다. 수시로 변하는 상황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깨어있는 자녀의 행복, 이것들은 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려고 애를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믿음이 없이 이를 악 물고 어떤 상황을 참을 때에는 반드시 가슴에 한이 맺힌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미움과 증오가 인내와 함께 자리를 잡는다. 그런데 말씀에 대한 이런 미각이 많이 살아 있을 때에는 그 세월들을 생각하면서 한없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싶어진다. 내 생의 여정을 다 끝나고 난 다음에 그렇게 말씀을 따라 산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다보면서 “예수 인도하셨네” 라고 찬송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말씀을 순종하며 고통을 받았던 그때가 하나님의 큰사랑을 경험한 때였다.
우리 가운데 무엇보다도 회복되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회복해서 언제 어느 때든지 이 곳에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무릎을 꿇고 성경을 펼 때 그 말씀이 꿀같이 달고 우리들에게 양 약이 되고 큰 기쁨이 되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우리들의 삶을 총체적으로 돌아보고 이미 우리들을 깨닫게 하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순종하고 실천하는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이 다음 주에 여기 나왔을 때에 우리들의 말씀에 대한 사랑과 감격은 배가 될 것이다.
12. 당신의 기업은 말씀입니다
주의 증거로 내가 영원히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시119:111)
어느 날 아침 시간에 저희 아버님이 “야, 아무래도 내가 갑부가 될 것 같다.”, “무슨 일 이십니까?” 어디에서 갑자기 전화가 왔는데, “당신이 굉장히 큰 땅을 가지고 있는데 알고 있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작은 땅이 아니라, 큰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흥분하셔서 갔다 오셨습니다. 갔다 오셔서 희색이 만면하셨는데, 큰 땅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 땅이 우리 땅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더니 우리 고향의 어떤 장로님이 서울에서 교회를 지어줘서 그 교회를 수양관겸 관리를 하시면서 지내시는데, 거기에 짐승도 키우면서 땅을 좀더 쓰고 싶어서 물어봤더니 그 땅 주인이라는 사람이 그 땅을 안 빌려준다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당신이 주인이냐고 했더니 주인이랍니다. 나중에 면사무소 가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뒤져보니까, 사실은 임자 없는 땅인데 그 사람이 정부에게 세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의 임자가 누구냐 해서 찾는데 찾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찾았더니 아무 아무개 씨가 나오는데 일제시대 때 소유했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상속자가 누구냐 해서 찾으니까, 우리 아버지가 나온 것입니다. 그 땅이 얼마나 길옆에 좋은 땅인지 못 받아도 십억은 받는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지금 소송중입니다. 틀림없이 찾을 겁니다. 우리 아버님이 “너희 열린교회가 그곳에다 수양관을 지어라” 하시는 것입니다. 가깝습니다. 서울에서 1시간 20분 거리입니다. 그것이 무슨 이유이든지 상속이 안 되고 중간에 유실돼 버려서 세금을 안낸 것으로 되어서 정부에서 차압을 했는데 변호사 얘기는 틀림없이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송중인데 연말쯤이면 판결이 납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기업을 찾는 즐거움이 얼마나 놀랍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땅’이라고 하면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알았는데, 특수한 사람들이나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는데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 땅에다가 무엇을 심을까, 저는 ‘기도원을 지으면 어떨까!’
여기에서 기업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증거로 자기의 기업을 삼았다’고 시인이 그랬는데 이 기업은 여러 의미로 쓰였습니다. 기업은 조상들로부터 자기에게 물려받은 유무형의 몫입니다. 어떤 때는 집안에서의 위치, 그런 것도 기업이라고 표현되기도 했고, 당연한 권리도 기업으로 묘사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우선적인 것은 기업은 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착한 적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것은 먼 후일의 일이었기 때문에 아브라함 자기도 방황하면서 바라만 보다가 죽었습니다. 물론 가끔 정착한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세 들어 사는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시대에 별명이 나그네였습니다. 이 땅에 우거하는 나그네라고 자신을 표현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가야할 곳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들어가지 못하고 후손들이 들어가리라는 약속만 받고 바라만 보며 즐거워 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자손들, 야곱에 내려와서도 마찬가지로 일정하게 기업이 없었습니다. 목축을 하니까 더더욱 그랬지만 돌아다니면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서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었고, 그 덕에 고센 지방에 가족들이 정착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들의 기업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도 남의 나라 땅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태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번성하게 되어서 애굽에 살았지만 자기의 땅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종으로 살았습니다.
역사를 자세히 보면은 땅과 신분 제도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땅을 소유하는 바에 따라서 지배자와 지배받는 자로 나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땅 보다도 자본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땅은 굉장히 중요하고 농경사회에서 이 땅은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대천덕 신부님의 ‘토지와 자유’라는 책을 읽어보면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는 얘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우리 나라가 공산화되지 않을 수 있었던 강한 힘이 미국의 지원이나 다른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볼 때 만약에 우리가 토지개혁을 하지 않았으면, 우리 나라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즉각 공산화되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한국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들을 외국인의 눈으로서 냉정하고 정확하게 보면서, 역사를 토지 문제와 관련해서 서술해 가는데 아주 읽을 만 합니다.
줄거리는 이런 것입니다. 전쟁이 났을 때, 이북사람이 왜 끔찍한 전쟁에 적극적으로 가담을 해서 그렇게 삼킬 듯한 기세로 사기충천해서 남한을 점령하려고 뛰어들었느냐, 그것은 김일성의 강요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북한의 굉장히 많은 주민들이 용기 백배해서 전쟁을 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토지개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렇게 만석군, 천석군 하면서 토지를 차지하고, 곡식을 거둬서 영원히 소작인으로 부리면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토지에 얽매여서 비참하게 살아가고, 좌식 계급들, 앉아서 먹고사는 사람들은 점점 부가 쌓여갈 때에 공산당이 들어와서 제일먼저 한 것이, 지주는 숙청하고 토지는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로 다 돌아가게 만들어준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도덕적으로 볼 때에 하나님의 공의면에서 그것이 옳을 것이냐 라는 것은 여러 가지 많은 문제가 제기가 됩니다. 그렇지만 그 일로 인해서 덕을 본 사람들은 평생 한 맺혀서 가난하게 살던 농민들이 제 세상을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충성을 맹세하고 밀고 내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기 잠깐 전에 남한에서도 토지개혁을 하게 됩니다. 토지개혁을 하는데 경자유전의 원칙에 의해서 합니다. 농사를 지은 사람에게 부당하게 소유한 땅을 빼앗아서 농사짓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지는 토지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획일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민주 국가이니까 예외를 인정합니다. 그렇게 라도 했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많은 농민들이 나라에 대한 가치를 가지고 공산당과 싸울 수 있는 발판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저는 상당히 그 생각에 대해서 동의하고 싶은 부분이 많습니다. 그만큼 땅은 농경사회에 있어서는 생명처럼 귀한 것 이였습니다.
우리의 맥락에서 보시지 말고, 이 시인이 살던 시대로 돌아가서 보면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제비를 뽑습니다. 제비를 뽑아서 얻게 된 땅이 기업입니다. ‘기업을 삼았다’고 하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나할티’라는 단어인데 상속했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증거로 재산처럼 내가 상속했사오니’ 그런 뜻입니다. 땅이 바로 기업입니다.
기업은 철저한 정신에 의해서 지켜집니다. 함부로 침범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역사에서 볼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사회입니다. 땅에 대한 개념이 레위기 25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성경이 얘기하는 것은 땅은 인간에 의해서 소유될 수 없다고 봅니다. 땅의 원주인은 오직 하나님뿐이고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세 들어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땅에 세 들어 사는 인간은 몇 가지를 지켜야 되는 것이 있는데, 첫째는 다른 사람이 차지하고 있는 기업을 넘보아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절대로 용납이 안됩니다. 두 번째는 자신이 차지하게 된 기업을 바보같이 다른 사람에게 빼앗겨서도 안됩니다. 잘 지켜야 합니다. 세 번째는 그 땅을 깎아먹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생태계를 잘 보존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시대 맥락의 사람들을 보면은 돈 몇 푼을 벌기 위해서 자기 땅을 파서 산업폐기물을 쏟아 붓고 나무를 심는 것은 돌에 맞아 죽을 정도로 나쁜 일입니다. 땅 자체를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연관된 굉장히 중요한 유기체로 봤습니다.
그래서 히브리말에 ‘에레쯔’라는 말이 땅인데, 땅이라는 말로도 번역이 되고, 사람이라는 말로도 번역이 됩니다. 땅과 사람은 하나라는 신토불이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아담이라고 지었는데 그것도 ‘아다마’라는 땅이라는 말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서는 인간과 땅이 중요한 존재입니다. 기업도 우선적인 의미는 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파 별로 땅을 나누고 지파가 다가 가족별로 땅을 나누면서 그 땅을 일구면서 살았을 때, 그때의 기쁨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실감이 잘 나지 않을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늘 남의 땅에서 붙여먹으면서 죽어라 일하고 조금의 사례를 받으면서 사는 사람이, 이제 자기 땅이 주어졌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교회의 기공식하는데 가보니까, 아무 것도 세워지지 않고 땅만 사두었는데, 거기에 삽을 꽂아놓고 예배를 드리는데 성도들이 한없이 우는 것입니다. 왜? ‘이 땅이 우리 땅이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이 땅, 기업이라는 말을 목이 메이지 않고는 읽을 수 없었을 지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도 쉽게 땅에 맺힌 이스라엘 백성의 한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생명 그 자체입니다.
시인이 ‘여호와의 증거로’ 히브리 성경에는 ‘당신의 증거들로’, ‘주의 증거들로’ 하나가 아니라 많이, ‘증거의 말씀들로 나의 기업을 삼았습니다.’ 그렇게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땅이 주어지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땅을 주었다면 우선 말뚝부터 칠 것입니다. ‘아무나 들어오지 마십시오. 주인이 있는 땅입니다.’ 그전에는 사람들이 어떻든 간에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이제는 지키려고 하고 좋은 나무들을 심으려고 할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땅을 잘 가꾸고 싶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땅을 기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을 사놓고 값이 오르기를 기다리는 투기 같은 것은 모르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팔고 살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팔리고 사는 경우에는 안식년이 되면 다시 돌려주어야 했습니다. 희년이 되면 돈이 없어도 그 땅을 돌려주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율법입니다. 하나님이 토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종속되는 것을 절대로 싫어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의 땅이니까, ‘영원한’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기업은 영원이라는 말이 항상 동반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외가 있습니다. 아예 빼앗아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언제이냐 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 빼앗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때를 제외하고는 기업은 자기의 몫입니다. 다른 사람이 침범할 수도 없고, 침범해서도 안되고, 빼앗아 갈 수도 없고 빼앗겨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기쁨을 가지고 자기의 땅을 가꾸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의 본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땅에 얽힌 장엄한 눈물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땅에 대한 아름다운 그림을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시인의 마음은 사람들이 자기가 차지한 땅을 더 기름지게 만들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의 땅을 더 넓게 차지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해치면서까지 남의 기업을 빼앗기를 원하고, 다투기를 원하는 탐욕으로 가득 차 있을 때에, 시인은 자신의 진정한 기업이 하나님의 증거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땅에 미쳐 있을 때에, 이 사람은 이스라엘 평범한 백성들이 땅을 깊이 사랑하고 그 땅을 떠난 삶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와 자신의 기업이 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그 말씀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지식의 밭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어느 날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기업,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지식의 밭에, 지식의 산에, 지혜의 산에 하나님의 지식의 나무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묘목 하나를 심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면서 물을 주고 거름을 줍니다. 그 작은 나무가 점점 커서 거목이 되면서 땅을 점점 기름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산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벌거벗은 민둥산과 각종 아름다운 화초와 귀한 약재와 귀한 향으로 가득 찬 나무가 많이 심겨진 산과의 값의 차이를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도의 진정한 기쁨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업으로 알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진정한 자랑은 이 세상에서 땅을 얻고 집을 차지하고 하는 것보다도 그에게 있어서 더 큰 자랑과 기쁨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지식이 점점 많아지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 가는 즐거움이 자기를 가득 채워서 행복하게 만들고, 날이 가면 날이 갈수록 이 세상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는 아름다운 산에 열매가 많이 맺히고 아름다운 약초들이 많이 나서 값이 올라가는 것처럼, 자신의 지식의 밭에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가 잘 심겨져서 점점 더 풍성한 말씀의 사람이 되어는 것, 진리의 사람이 되어 가기를 원합니다. 그것을 보면서 기뻐하고 그것을 보면서 즐거워합니다. 이전에 황무지와 같았던 땅에 아름다운 나무를 많이 심고, 나무를 심은 사람이 세월이 많이 흐른 다음에 젊었을 때 심은 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우람하게 커 가는 값진 산으로 변한 것을 보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자신이 일궈 놓은 숲을 대견해 하듯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오늘 이 시인은 바로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세계를 자신의 기업으로 살아간 것입니다.
시인의 가장 깊은 관심은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짐승과 다름없는 삶을 살면서도 잠시 있다 사라질, 헛된 세상의 꿈들을 붙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말씀을 기업으로 삼으며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기대하는 바입니다.
주식 투자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저는 국민주 한번 샀다가 3년만에 허탕치고 다시는 사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주식을 사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에 얼마나 마음을 빼앗기는지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사놓은 주식이 그의 기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집이라도 몇 채 있으면 부동산 뉴스를 보고, 공무원들을 내년 예산을 어떻게 짜는지를 봅니다. 그것이 기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에서 내가 자라가고 있는지를 스스로 점검하고 있습니까? ‘왜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 없을까! 왜 설교를 들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순수해지지 않을까! 왜 말씀을 들으면서 깨달음이 없을까!’ 이런 문제를 가지고 깊이 고민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의 삶에 기업이 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것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강한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부산으로 말씀을 전하러 갔는데 생전부지의 사람이 독자라고 하면서 “목사님 책을 읽고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봉투를 주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왜 받느냐? 싫다’라고 하면서 안 된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목사님, 이것은 돈은 아닙니다.” 뭐냐고 했더니 구두티켓이라는 것입니다. 받아달라고 통사정을 해서 고맙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엊그제 구두를 사 신었습니다. 그런데 자꾸 그 구두만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기업에 대한 사랑이 있으면 그 기업을 가꾸기 위해서 얼마나 수고를 하는지를 모릅니다. 직원 수련회에 갔다가 이천에 들렸는데, 빙수도 팔고 햄버거도 파는 제과점에 들렸습니다. 거기에서 애들이 생각이 나서 캔디를 넣어서 파는 것을 6,000원이라고 쓰여 있어서 달라고 했더니 잠구어 났는데 열쇠가 없어서 못 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우니까 슬러쉬 하나 달라고 하니까 기계를 잘못 작동을 해서 얼음이 안 얼어서 못 준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보면은 얼마나 마음이 상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자기 직업을 기업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너무 불행한 사람이고, 더 불행한 사람은 그런 사람을 고용한 사람입니다. 진짜 자기의 직업을 기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기업으로 삼으면서 믿는 사람들과 의무감으로 나와서 믿는 사람들은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납니다. 예수님을 기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대하고 신앙생활을 대하는 자세가 다릅니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생명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찬송에서는 그 기업이 주님입니다. “너 재산 있어?”, “있어.”, “땅이 몇 평인데?”, “없어”, “돈이 있겠구나?”, “아니”, “자식을 많이 낳았겠네?”, “아니, 하나도 없어”, “그럼 지위가 높아?”, “아니”, “그럼 너의 기업이 뭔데?”, “우리 주님,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나는 일생을 주님 한 분에게만 충실한 삶을 살았거든, 그 분이 내 기업이시기 때문에, 내가 농사꾼이라면 그분은 나의 땅이요, 내가 산지기라면 그분은 나의 산이요, 내가 고기를 잡는 어부라면 그분의 나의 바다이셨거든 그래서 내가 힘써 기업을 지키면서 살아, 지금도 나는 가진 재물이 없고 높은 지위와 꽃처럼 아름다운 면류관을 쓰는 세상의 영광은 없지만 그 분을 가장 사랑하고, 그분은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분이셔, 다른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나는 넉넉히 살수 있지만 그 분 없이는 살수 없어” 이것이 예수님 자신을 기업으로 삼으면서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모든 관심은 예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통해서건 누구를 통해서건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가 많이 맺는 삶을 내가 살고, 다른 사람들이 내 앞에서 살아주는 것, 그래서 영광을 돌리는 것이 예수님을 기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최고의 행복입니다.
일제시대 때에 구차하게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신사에 참배하고 변절한 사람들을 보면서 적개심에 불탈 때가 많은데, 그 사람들은 못한다고 하다가 그랬을지 모르지만 요즘에 이렇게 신앙생활을 해서는 순교의 위기 같은 것은 다가오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주를 위해서 죽을 마음이 없는 사람들인데 그런 질문이 필요하겠습니까? 정말 주님 자신을 기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삶, 그것은 성도의 본분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돈 몇 푼 때문에 언제든지 예수님을 팔 수 있고, 눈앞에 이익 얼마 때문에 성도의 명분을 언제든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일을 행할 준비가 갖추어진 사람들의 모습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주님 자신을 기업으로 삼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성도의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렇다면 그렇게 주님을 자기의 기업으로 삼으면서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내 인생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은 내 마음대로 삽니다.’ 그것은 주님을 기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을 사랑하는 인격으로 ‘하나님이 내게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주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내 마음에 고통이 되도 나는 행할 것이다. 주님의 마음의 아픔이 되는 일이라면 내가 즐거워도 안 할 것이다.’라는 구체적인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증거를 따라서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기업으로 삼는 삶과 하나님의 말씀을 기업으로 삼는 삶은 구체적으로 삶의 모습은 같은 모습입니다.
시인은 악인이 올무를 놓고 불의한 사람들이 시인을 죽이고자 협박하고 위협을 가할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놓지 않고, 법도 안에서 행하기를 힘쓴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충성심 때문이고, 그가 그렇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충성했던 것은, 하나님 자신을 기업으로 삼는 삶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무엇을 보시면서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무엇으로서 여러분들은 여러분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 진실한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신뢰를 고백을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 시인이 ‘하나님의 증거의 말씀들을 자기의 기업으로 삼았다’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자신의 기업으로 삼으면서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이 여러분들의 주인이 되십니까? 어떻게 주님이 여러분의 통치자이시지요 만왕이 왕이 되십니까?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신하처럼 엎드려 굴복하고 그의 통치를 받는 것을 말할 수 없이 행복해하며 무릎을 꿇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증거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기업으로 삼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없이 귀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의 진리의 말씀을 깨닫는 것을 많은 재물을 얻는 것보다도 귀하게 생각하고, 한가지 신앙의 도리를 깨우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길을 이 세상에 있는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부를 누리를 것보다도 귀하게 생각하면서 산 사람입니다. 그것이 이 시인의 모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깨닫게 하신 지식, 그런 것들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물론 그랬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어두움 속에서 벼랑 끝까지 내몰린 인생이 위기에서 영혼은 곤고하고, 심령은 어두운 가운데 흑암 속에 앉아있고, 마음과 온 몸은 쇠사슬에 매인 것처럼 저항을 하고 빠져 나오려고 몸부림을 쳐도 도저히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없는, 그러면서도 죽음과 방불한 인생의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그 때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여러분들을 부르셔서 그 진리로 여러분들을 고치실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죽은 자와 방불한 우리를 살리시는 지를 경험했을 때, 그 말씀을 무엇과 바꿀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죽고 사는 문제보다도 더 큰 문제가 없고 그때에 그 말씀이 죽을 자신을 살리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값으로 따지라는 얘기는 자신의 생명을 값으로 계산하라는 얘기하고 같은 얘기이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입니다.
시인 마음속에 있는 고백이 그러한 마음을 유지하면서 산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거룩한 증거의 말씀이 자신의 기업이라고 늘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목마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의 미각을 계속 가지고 사는 사람들, 헐떡이듯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때에 매순간마다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고 그 진리의 빛으로 자신의 어두운 영혼을 비춰서 참된 빛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기 전까지는 이름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름을 받지만 그러나 짐승과 방불한 삶을 살수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기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유지하는 일을 심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널려진 보화라고 말하고, 그 보화를 자기의 집에 있는 창고로 퍼 담는 삽이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가, 하나님의 말씀의 놀라운 역사가 임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할 지혜를 얻게 되었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누렸습니다. 확실히 말씀이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보석과 같이 소중한 진리였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깨닫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 삶은 내가 깨달아야만 변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아무리 많이 깨달아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보화와 같다할지라도 말씀을 사랑하는 미각을 잃어버리고 나면 삽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을 부요하게 하고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창고에 퍼 넣을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굳이 보석으로 비유하지 아니하고 석탄으로 비유를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퍼서 기관차의 아궁이에 계속 집어넣어야만 강하게 불이 타면서 열차가 달릴텐데, 주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아도, 얼음장같이 식어지고 주위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를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서 왕따를 당하는 것 같은 얼음장같은 소외감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동일하게 말씀하시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받을 수 있는 미각을 유지한 사람들이고, 자신은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가끔 하나님이 계속 저에게 말씀은 하시는데요.’ 무슨 뜻입니까? 지식적으로는 분명하게 내가 들어야할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겠는데 그게 맛이 없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입에 녹아서 자신의 마음의 혈관 구석구석을 찔러야 하는데 ‘저거 하나님이 내게 하시는 말씀이지!, 저대로 안 살다가는 내가 혼나지!’ 모두 ‘했으면, 할텐데, 그러니까’ 머릿속에서만 오고가는 사면인 것입니다.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리면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했고 말씀에 대한 미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말씀이 자신의 기업이라고 말했습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가 다윗이라고 생각하는데는 거의 대부분의 구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동의합니다. 문체가 이미 그것을 말해줍니다. 말년의 작품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한 나라의 왕이 그 모든 영광을 누린 사람이, ‘너의 기업이 무엇이냐?’라고 물을 때에 그 사람이 ‘나의 기업은 왕국이요. 나의 기업은 왕위요. 나의 기업은 왕손이들요’라고 말하는 대신에 ‘나의 영원한 기업은 지키며 살도록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입니다. 내 모든 즐거움은 그 말씀에 있고 내 인생의 모든 기쁨은 말씀을 알고 지식 속에서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은혜도 보여주셨고, 지키며 살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도 주셨고 지금도 주고 계시고, 아직까지도 복음의 도리를 모르고 어둠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데 우리의 어두운 눈을 떠서 참 복음이 무엇인지를 보게 해 주셨고, 진리가 어떠한 것인지를 맛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성도답게 사는 사람의 마지막 기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고, 짐승처럼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다가 죽은 사람의 마지막 형벌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이 없었던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혹시 열등의식을 가지고 계십니까? 정확하게 말해서 비교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는 교회에까지 와서도 ‘저 사람은 나보다 좋은 직장에 다니는데, 사업을 잘하고 있다지 난 실업자인데, 저 사람은 나보다 좋은 학교 다니지 나는 삼수 하고 있는데’ 그런 비교의식을 가지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이 부러워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박한 지식, 그 말씀 속에서 진리와 함께 진리가 인격화 된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주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성도다운 행복을 부러워하는 비교의식은 없습니까? 그런 것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가진 재물 없고 남에게 있는 많은 지식과 세상의 자랑이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업으로 삼고 그 기업이 날마다 아름답게 변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한없이 기뻐하는 성도는 얼마나 행복한 성도입니까? 지위가 높지 않다고 세상이 인정해 주지 않고, 많은 재산이 없다고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기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 편에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부러워하는 마음이 없습니까?
신앙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그래 네가 나보다 낫다.’라는 생각이 들 때에 그냥 자존심만 상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내가 가진 것도 없지만 그것을 가져 가셔서라도 나를 말씀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면 주님, 저를 그렇게 만들어 주십시오. 내게 아무 것도 없어도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성경을 펼 때에 주님이 제게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다리로 해서 제가 주님과 만나는 신앙의 감격이 있기만 하다면 하나님, 저는 아무 것도 없어도 살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주님과 제가 함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입니다.
7년 전에 강남의 어느 교회로 헌신예배를 인도하러 갔습니다. 그때 저는 개척하기 전이었습니다. 그 교회에 전도사님이 온 교인 다과를 준비해서 마루바닥에 앉아서 다과를 드는데 교회를 개척하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본대로 얘기를 했습니다. “요즘은 개척 교회를 해도 사람이 안 모인다.” 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큰 교회를 더 선호합니다. 가장 커다란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학생들이 돈이 없으므로 개척을 하지 못한다. 옛날에는 시유지에 ‘예수님 믿습니다’ 하고서 찬송을 부르면서 철거반원이 뜯어 가면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하면서 다시 텐트를 치고, 또 뜯어 가면은 또 치는데 하다하다 구청에서 항복을 했습니다. 그렇게 눈물로 기도하면서 성도들이 헌금해서 시내에서 모래를 퍼서 벽돌을 만들어 교회를 짓습니다. 그래서 저의 얘기는 “요즘은 이층 교회도 잘 안 옵니다”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가 “옛날에는 시유지에 말뚝만 꽂고 가마니를 깔고 박수만 쳐도 사람들이 모였는데 요즘은 이층 얻어서 카페트를 깔고 커튼을 달아도 사람이 안 온다.” 그런데 제 얘기를 듣는 사람이 집사님이었는데 경희대 교수였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지만 교수님, 요즘도 그때처럼만 설교하면 가마니에 올라가서 박수를 치고 천막 친 교회에서 신앙생활 할 평신도들이 아직은 많습니다.” 그래서 얼굴이 화끈거리고 달아올라서 ‘속으로 당신이 나보다 한수 위다.’라고 생각하고 항상 그 말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맞아, 우리는 모두 평범한 신자들이 편하게만 신앙생활 하는 것만을 좋아한다고 생각을 하고 그것이 교회를 왜곡되게 하는 주범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평신도가 옛날이 평신도가 아니듯이 지금 목사도 그때의 목사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걸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후히 누리고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교회라도 정말 살아있는 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말씀이 없으면 떠날 것이며, 다 쓰러져 가고 철거반원들의 휘두르는 해머소리가 사흘이 멀다하고 교회 벽을 두드리는 생명의 위협을 느껴도 정말 그곳에 진리가 살아 역사한다면 말씀을 기업으로 삼으면서 살아가고 싶어하는 성도들은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모든 기업으로 삼고 그 증거를 자신의 생명처럼 여기며 살아가고 싶어했습니다. 그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느끼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을 자신의 인생의 최고의 재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즐거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션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큰 기쁨을 의미합니다. 환희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주 커다란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리고, 맛을 잃어버린 삶을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업으로 삼고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아름다운 기업으로 삼으면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만족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배교할 수 없지만, 한 사람의 진실한 신자가 마지막에 배교와 같은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사단의 목표라면,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던 그 사람이 차갑게 식어진 마음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첫걸음은 어디서부터 시작이 되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리면서부터 하나님의 음성에 둔감해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쉽게 교정되고 고쳐지지 않는 돌덩어리와 같은 사람으로 변해가면서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린 사람의 마지막 가는 길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리면 둘 중에 하나가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그럴지 모르지만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리고 계속 살면 마지막에 하나님을 버리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버린 자와 다름없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아무 내용도 없고 형식으로 가득 찬 이중 인격적인 신앙생활을 해 나가다가 결국은 세상의 즐거움을 끊임없이 탐닉하면서도 신앙의 길을 떠나지 못한,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렇게 천로역정과 같은 신앙의 길에서 패배자가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들은 평안을 모를 것이며,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더 이상 깨달을 수 없을 것이며, 주님의 인격적인 자비하심과 거룩한 은혜를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진정한 기업이 무엇이 모른 채 슬픈 인생을 살 것입니다. 우리가 왜 그런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린 삶을 회복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20여 년 전에 몸이 약해서 밥을 거의 못 먹을 때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진찰을 다하고 이상이 없다고 했습니다. “젊은이 왜 밥을 못 먹나?”,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는 먹으면 소화를 시킬 자신이 없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맛이 없습니다.” 했더니 의사의 말이 미각을 회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젊은이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운동을 좀 하게 그러면 미각이 회복될 것일세.” 저는 당장 견디기 힘들어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의 말은 운동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의 미각을 회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때로는 말씀이 미각을 회복하기 위해서 이상하게 전혀 다른 곳부터 개혁을 해야만 말씀의 미각이 되살아 날수도 있다는 이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말씀의 미각을 회복하라니까 예배에 끊임없이 참석을 해서 말씀을 잘 들으려는 것, 가장 중요한 비결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미각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그냥 돌아가서 달리기를 열심히 하라도 충고했던 의사처럼, 여러분들이 말씀의 미각을 회복하기 위해서 매주 예배에 나와서 귀를 기울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데, 그래도 말씀의 미각이 회복되지 않으면 어쩌면 여러분들은 전혀 다른 분야에서 개혁을 해야할 지도 모릅니다. 당장 소화가 안되고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젊은이에게 달리기를 해보라고 권면한 의사처럼 말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구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린 이유가 무엇인지, 그것을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내 삶에 들어오시고 제게 가르쳐 주시옵소서, 내가 무엇이든지 고쳐서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회복하고 진리 안에서 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구하십시오. 다른 기도는 몰라도 그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주시리라 보증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은 그런 삶을 사는 사람도 고통이지만, 그런 하나님의 자녀를 바라보시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도 아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여러분 모두가 이런 말씀이 미각을 회복하고, 주님의 말씀이 ‘송이 꿀보다도 달다’고 고백했던 시인과 같은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3. 말씀을 지키려고 마음을 기울이십니까
내가 주의 율례(律例)를 길이 끝까지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시119:112)
앞 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즐거움이 되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다.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즐거움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는 자기의 영광스러운 기업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전대에 돈이 가득 차고 소유한 땅이 넓어지는 것에 꿈이 있었지만 시인의 마음은 그런 잠시 있다 살아지는 세상에 것이 자기의 영원한 유업이 아니라 자기의 영원한 유업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을 지키며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그것이 자신의 유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주일 오후 시간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기업이 되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우리의 즐거움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뜻밖에 많은 수입을 얻었을 때에 기쁨과 즐거움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어떻게 승리하며 사는지 비결을 배웠을 때 보다 더 기쁘지는 않는가?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 속에서 살아가도록 주님이 어둠 가운데서 건져내어서 복음을 알게 하시고 진리의 길을 들어서게 하신 것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마음으로 깊이 감사하고 있는가?
기업은 땅이라고 말씀을 드렸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의 땅을 지키기 위해서 애쓰고 수고했던 것처럼 그렇게 말씀을 아는 지식에서 진보를 이루기 위해서 애쓰고 힘쓰고 있느냐는 것이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 시인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움으로 삼고 살아갈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를 오늘 112절에서 밝히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시인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한 즐거움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마음을 기울이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서 마음을 기울이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 시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커다란 즐거움이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증진되고 거기에서 오는 즐거움이 이 시인의 마음과 삶 속에 내밀하게 쌓여갔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흔히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 버렸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우리들이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전에는 그렇게 달고 맛이 있다가 어느 순간에 아무 맛도 없는 무미 건조한 음식처럼 느껴지거나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리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향한 강한 반감들이 생겨나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런 맛이 없는 무미 건조한 사람의 이야기로 들리고 그리고 책으로만 읽히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서 이상한 적대감 같은 것들이 드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오늘 우리들이 여러 주에 걸쳐서 진리를 향한 미각을 잃어버린 것을 깊이 뉘우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일고 터득하는 이 영혼의 미각을 회복하여야 한다고 촉구 받고 있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잃어버리고 나면 시간이 흐르면 결국은 우리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강한 반감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인격적인 관계에서 그 사람이 하는 말에 대한 신뢰와 그 사람 자체에 대한 신뢰는 밀접한 연관이 있고 그 사람을 깊이 사랑하는 것과 그 사람의 말을 잘 듣는 것은 떼어놓을 수 있는 관계에 있다. 하나님과 우리의 신앙적인 관계도 인격적인 관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를 설명할 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경험하는 법칙들이 광범위하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적용된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혹은 순종도 마찬가지이다.
인격적인 관계에서 하나님 자신을 인하여 즐거워하는 그런 즐거움도 인간 속에서 얼마든지 경험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이 항상 신앙의 영역에서 자신의 당연한 의무인데도 행하지 못할 때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경험되는 인격적인 관계에서의 경험을 하나님과의 사이에 적용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랑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너무나 보고 싶은데 보지 못하면 병들기도 하는데 하나님과의 사이에서는 그런 일들이 생겨날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격적인 근거가 있는 사실이 아니라 우리의 편견이고 무지일 뿐이다. 개인적인 생각이고 느낌일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하라’ 에 첫머리에서 실연 당한 청년의 고백과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목메어 하는 시편 기자의 고백을 절묘하게 대비시켜 보려고 했던 이유도 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한 사람의 신자가 하나님 자신을 기뻐하지 않는데 그의 말씀을 즐거워 할 수 있겠는가? 그분의 말씀을 즐거워하지 않는데 그분의 뜻을 기쁘게 따를 수가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잃어 버렸다고 하는 것은 신앙 생활에 있어서 어느 한 부분이 문제가 생겼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미각 자체가 그 사람의 신앙과 인생 전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건강한지를 보여 주는 시금석이 된다.
(예화) 시금석-조흔석을 통해 금속의 원래의 색깔을 알아보는 이야기.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이 바로 이와 같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오늘날 영혼을 돌봄에 있어서 가장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이 자신의 영혼을 돌봄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이고 자기가 돌보고 있는 영혼들에게 있어서도 확인 해야할 가장 중요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미각이다. 우리들은 대체로 영혼을 돌봄에 있어서 뒷 북을 칠 때가 많다. 우리들이 감지할 수 있는 문제가 생기기 전에 이미 말씀에 대한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린 상태가 오래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 버렸다고 할지라도 자신들이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할 삶은 얼마든지 살아가는 것이다. 마치 달리던 자동차의 시동이 꺼져도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리던 관성에 의해서 고속도로를 미끄러지듯이 질주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이제껏 까지 해온 대로 몸에 벤 대로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남들이 하는 것처럼 교회에 나오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근거로 해서 자신의 영혼의 건강을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의 영혼의 건강도 그런 식으로 측정하고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들이 여기에 모여서 함께 예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이 늦은 시간에 여기에 모여서 10시 넘어서 갈 각오를 하고 유난히 늦게 예배를 시작하는 교회, 유난히 설교가 긴 이 교회, 이런 교회에 찾아와서 우리들이 앉아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우리들의 영혼의 건강을 입증한다고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다.
우리는 너무나 우리 자신의 모습과 그리고 영혼들의 모습에 잘 속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는 정직히 최선의 정책이다. 하나님께 긍휼을 입기 위해서는 정직해져야 한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솔직해져야 한다. 우리들의 영혼의 상태는 관연 어떠한가? 여기에 나온 것이 문제가 아니다. 물론 상습적으로 나오지 않는 사람들은 더 큰 문제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달게 느껴지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지속적인 깨달음과 기쁨이 있는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제는 우리들에게 무미 건조하게 들리고 매일 성경을 펼쳐서 읽어도 목표는 성경 읽기 표에 표기를 하기 위한 것으로 전락하고 있지는 않고 있는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경을 읽을 때 마음에 반감이 생기고 설교를 들을 때 뭔가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묘한 저항감 같은 것들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다 묻어 둔 채 그냥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지적이나 하듯이 오늘 이 시편의 기자가 우리에게 충격적인 단어를 하나 사용하고 있다. “마음을 기울였나이다” 히브리 성경에는 “내가 당신의 율례를 지키기 위해서 내 마음을 향했나이다”라고 되어있다.
그러므로 미련한 신자들은 벼랑 끝까지 굴러가서 떨어진 후에야 비로소 옛날에 자기가 대단히 위험한 절벽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지만 슬기로운 신자는 자신의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세미한 변화가 자기를 어디로 몰고 가려 하는지를 미리 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무릇 지킬만한 모든 것보다 마음을 지키도록 요구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 전체를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바르게 하라는 하나님의 강력한 요청이 없이는 성경을 읽을 수가 없을 정도로 성경 전편에 우리의 마음을 지키면서 살아야할 필요성과 당위성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강조하고 계신다. 그 이유는 그 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우리들이 지금 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마음의 상태가 얼마나 중대한 문제이고 그리고 이것을 적절히 조치를 취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마지막에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대항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가슴에 새기지 않으면 우리들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미각을 회복하지 못하고 살아갈 것이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기본은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듣는 것이 기본이다. 오늘날 조국 교회에서 무지로 가득한 신앙생활을 하는 커다란 이유 두 가지는 들을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의 부재와 말씀이 있어도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 청취자의 부재이다. 그것이 오늘날에 험악한 교회 생활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세상적인 재미와 즐거움을 얻으려고 생각해서는 인된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신앙의 길이 육신적인 즐거움과 자신의 만족을 줄 수 있는 상태로만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전쟁을 전자 오락과 혼돈 하는 사람과 꼭 같은 것이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가르치기 위해서 다양한 매체들을 동원하고 메시지 전달의 다양한 기법들을 찾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향해 말하고 있다. 그들의 노력의 일 부분은 일리가 있고 타당하지만은 그러나 어떻게 전달하여야지 만 이 사람들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를 가지고 고민하는 것만큼 전달할 진리의 내용과 그 내용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한다면 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T.V광고가 15초인 이유는 20초는 너무 길기 때문이다. 그것이 모든 심리학자들의 주장이다. 심지어는 아주 저명한 설교학자 조차도 예배 시간에 설교자가 25분 이상 설교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 구조를 모르는 소치라고 말한다.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 것과 하나님께 기하는 것과 주일을 지키는 것이 즐겁든 즐겁지 않든 상관없이 우리의 의무이다. 설교자가 설교하고 성도들이 그 설교를 듣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선택의 상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이러한 의무들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막 보는 행위이다. 그냥 단순히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작용이나 자기가 놓여있는 상황이나 상태를 가지고 얼버무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의무는 살아지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사정과 핑계만 잔뜩 남게 된다. 언제 이런 의무감을 회복할 수가 있겠는가?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회복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것은 취향의 문제나 특기의 문제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이 없이도 잘 할 수 있는데 그런 잘 신앙생활 하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서 매우 특별한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 사람들만 말씀의 미각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제나 자기에게 말씀하실 때 “내게 들리던 주의 음성이 늘 귀에 쟁쟁하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이 찬송가의 작시 자도 신앙생활에 눈을 뜬 사람이었다. ‘주의 음성이 늘 귀에 쟁쟁할 때’ 그때 그는 주님과 항상 동행하던 때였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이 말씀하시고 주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들여오면 우리는 말씀하시는 주님을 깊이 느끼면서 우리에게 그 말씀하시는 것을 인해서 기뻐하고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행하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 지를 알게 해 주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마음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자식은 부모가 가르칠 때 들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중에는 부모가 뭐라고 그르든지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옳은 것을 부모가 자녀에게 가르치고 자녀는 삶에 대한 올바른 교훈이 부모로부터 주어질 때 다소곳이 듣고 가슴에 새기고 그리고 인격적으로 자기에게 말해주는 부모님의 그 충고와 가르침을 잘 듣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물어보고 그래서 자신에게 받아드려지면 그것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는 것이 정상적인 자식의 도리이다.
이것은 유교적인 관점에서 부모가 무엇이든지 말씀하시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비인간적인 복종과는 구별된다. 즉 자식과 부모 두 사람이 각자를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귀중한 존재로 인식하고 자식을 돌보고 가르칠 의무가 있지만 그러나 한번도 그 자식이 자기의 소유라고 생각하지 않는 부모, 하나님 앞에 책임을 느끼고 자녀에게 바르게 인생을 살도록 도리를 가르치는 그런 부모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부모의 말을 들을 때 들리면 듣고 안 들리면 그만 두고 일단 듣고 그것이 생각나면 지키고 그렇지 않으면 지키지 않게 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미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는 부모의 가르침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부모를 막 보는 자식들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의 아버지이시다. 우리를 낳으셨다. 우리를 한번만 낳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구속하셔서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온 영혼에 주인이 되셨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우리가 죄인이요, 내가 이제 그리스도인 되었습니다’ 라고 하는 고백은 이 사실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주님이 나를 낳으셨고 그리고 나를 구속하셨으며 이제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주님의 은혜이며 내 인생에 무엇인가 행복하고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제가 주님에게 빚진 것들입니다.”라는 고백이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성도로서의 고백이다.
그러면 이제 말을 들으면서 살아야 한다. 그것이 도리인 것이다. 들리면 듣고 안 들리면 그만 두고 일단 듣고 마음에 내키면 순종하고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그러면서도 “내가 뭘!”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형편없이 낮은 도덕적인 기준을 가진 인간들조차도 부모에게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모든 자식들을 금수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면 모든 이 세상에 온전한 아버지들의 실체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도덕에 있어서나 인격에 있어서나 우리와 비교될 수 없는 완전함 가운데 계신 그 분의 시각으로 볼 때에 우리가 말씀하시는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이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우리의 삶, 하나님은 말씀하셔도 귀 기울여 듣지 않는 제멋대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바라보실 때 하나님의 평가가 어떠할지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그런데 사실은 이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 이 이야기가 과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 중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이 교회에 오기 전에 훌륭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말씀 중심으로 진실하게 살았던 사람들도 있지만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은 이십 년을 넘게 신앙생활을 했어도 자기가 들은 설교 중에 단 한편도 기억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상당할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주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하시는가?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떡해 하면 우리들이 잘 준수하며 살 수 있을 가를 가지고 고민하는 것은 낯선 것이었고 우리의 대부분의 고민은 “이렇게 내가 아픈데 하나님은 쳐다보시나 안 보시나,” “내가 이렇게 안타까운데 하나님은 나를 왜 돕지 않으시나” 하며 구체적인 대답도 찾아서 탐구하는 정신도 없는 어떤 자기 배설 적인 질문들을 가끔 던지면서 신앙생활을 해 오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아무 희망이 없다. 세월이 많이 지나도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깊이 깨닫는 마음이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 오래 신앙생활 한다고 해서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지금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이 이야기가 가슴 깊이 다가오며 이 이야기에 동의하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린 채 아니며 말씀에 대한 미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그런 식으로 오랜 세월 동안을 살아온 것이 이 사람들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진리를 깨닫는 기쁨, 그리고 그 진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인격을 우리에게 느끼게 만들어 주는지, 말씀으로 죄를 이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고, 진리의 권세로 악한 세력들을 퇴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미각이 우리의 영혼을 살게 한다는 그 사실 자체에 대해서 깊이 신뢰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 시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그의 삶은 율례를 지키기 위해서 마음을 기울이는 삶이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들리면 들리고 안들이면 안 듣고, 말씀에 대한 미각이 살아 있으면 살아있는 것이고 없으면 없는 대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린 그것이 우리들의 신앙에 있어서 심각한 위기요 매우 중대한 문제라고 하는 사실에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하는 사실이다. 모든 영혼의 심각한 질병은 항상 조짐이 없이 나타나는 적은 거의 없다. 반드시 조짐이 나타난다. 때로는 육체의 질병은 조짐을 즉 증상이 일어나면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치료의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영혼의 질병은 그렇지 않다. 즉 영혼의 질병은 질병이 시작되는 아주 초기부터 이미 그렇게 영혼이 건강하지 않다고 하는 조짐들이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미각에서 나타난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영혼의 상태의 건강함을 알려주는 조짐으로서 이 말씀에 대한 미각이 중요하다라는 사실을 이제 무시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실재로 자기가 심한 정도가 현실로 나타나야지 비로소 자기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말씀을 사용하신다. 그런데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리게 되면 수없이 경고를 하고 정확하게 그의 상태를 지적해 주어도 문제는 그가 마음을 말씀에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수많은 하나님의 경고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이제 물리적으로 하나님께서 손을 보셔야지 만 비로소 의식이 감각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혼내신다고 그래도 갑자기 걸어가던 사람을 쓰러뜨려서 숨이 막히게 하지는 않는다. 일이 생기는데는 항상 제 2의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즉 주체를 보지 못하고 개체들을 가지고 고민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화) 재산을 잃어버리는 일-갑자기 금고의 돈이 종이로 변한다든지 없어져 버리지 않고 이 러 저러한 일로 인해 즉 정당한 이유로 인해 재산을 잃어버리게 된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나이다” 라고 말한 이유도 하나님의 말씀의 이런 축복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편 119편의 전편을 보게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지혜롭게 하고 슬기롭게 하고 명철하게 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슬기’, ‘명철’, ‘지혜’, ‘분별력’ 이런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는가? 이런 것들은 그냥 머리가 좋아진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유지하지 못했더라면 보이지 않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이치들이 보인다는 것이다.
내가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매 순간 내 인생의 위기마다 인격적으로 찾아오셔서 삶의 벼랑에서 말씀해 주시는 주님의 그 음성을 깨달을 수 없었더라면 궁극적인 내 삶의 영향을 끼치는 요인도 아닌 쓸데없는 것들을 붙들고 몸부림쳤을 그런 인생이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미각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내 인생이 수많은 대적들에 의해서 둘러싸이고 행복과 불행이 교차하는 교차로 같은 곳에서 내가 정신없이 살아도 매 순간 내게 다가오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 성공과 실패의 의미를 찾으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자신의 인생을 움직이는 그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할 때에는 가끔 나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하게 보인다. 본인은 인식을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의 인생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이치를 아는 것이다. 그것이 신앙의 세계에서는 가장 커다란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시인이 한치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캄캄한 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발의 등이 되었고 어두운 길에서 찬란한 빛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발에 등불이요 우리의 길에 빛이 나이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 ‘나의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 나이다’ 라고 말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인생의 빛이 되고 자기의 발걸음에 등불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개인적인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 시인은 다른 모든 것은 잃어 버려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시인의 인생을 지혜롭게 하고 또 구원해 주는 도구가 되었다.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들이 어떠한 인생의 위기 상황, 그리고 어떠한 곤고한 상황, 심지어는 어떤 끔직한 죄악 가운데 빠져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유지하고 있으면 우리들은 반드시 거기서 건져냄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말씀을 타고 웅덩이에 빠진 여러분들에게 내려오시기 때문이다. 우리들 자신이 아니라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서 인생을 사는 이야기를 듣다가 보면은 목사인 저도 한숨이 나올 때가 있다. 그때는 정직하게 “나라도 그 상황에서는 못 살겠다” 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해 줄 말이 없을 때가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 유일하게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가운데 놓여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그 인생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구출되게 되는지 한번 생각해 보자. 흑암에 앉은 것과 같고 그리고 쇠사슬에 매인 것과 같은 비참한 인간이 자유와 해방을 얻게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회복하는 일없이 그것이 가능 하느냐는 것이다. 가능하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격적인 깨달음이 없는 영혼의 모든 변화들은 전혀 신뢰할 만한 변화가 아니다. 우리들이 그저 아무 것도 아니고 잠시 있다가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나이가 많이 들었어도 때로는 가을날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숲 속을 혼자 걸어가면 나이를 잃어버리고 어떤 감상에 잠길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영원한 감정일 수가 없다. 즉 숲을 빠져 나오면 또 생활 전선에 들어가서 바쁘게 사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이다. 그런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살다가 왜 그런지 비감한 마음이 드는 때도 있는가하면 왠지 오늘 아침에는 기도하지 않고 성경 한 줄 읽지 않았어도 좋은 일이 일어날 그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드는 날도 있다는 것이다. 어느 찻집에 쓰여 있는 것같이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진짜 그렇게 될 것입니다”라는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다양한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격적인 깨달음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마음과 영혼의 변화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거의 의미가 없는 변화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의 영혼이 정말 회복되기를 원한다면 제일 먼저 회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이 회복되면 우리들의 영적인 건강의 상태가 아무리 악화되어 있을지라도 시간이 좀 걸리지 모르지만 반드시 그 미각 때문에 자신이 살아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리고 나면 우리들은 결코 하나님 앞에 다시 살아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런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면 그런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이 시인이 유지하면서 산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길이 지키려고 마음을 기울였다” 라고 말한다.
우선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유지하는 비결 중에 첫째를 철저한 순종에서 찾고 있다. 여기에서 ‘길이’ 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히브리어에는 ‘영원히’ 라고 되어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키며 살도록 주신 율례가 있는데 그 율례를 시간적으로는 영원토록 다시 말하면 자기가 이 세상에서 숨쉬며 살아있는 동안은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로 다짐했으며 내용 면에 있어서는 자신이 보기에는 사소해 보이는 명령까지라도 모두 지키려고 철저한 순종의 삶을 꿈꾸었다는 것이다.
정말 우리는 시인이 자기가 이렇게 결심하고 있는 대로 다 살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다. 누가 하나님의 율례를 끝까지 영원토록 지키며 한 번도 하나님 앞에 그 순수함을 잃어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지 않는 절대적인 면에서 의인이겠는가? 그런 사람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로 그런 삶을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신자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욕구이다. 한국인에게 있어서 커다란 결함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법이나 규칙이 제시가 될 때 우선 처음서부터 이것을 다 지키지 않아도 될 거야 하면서 읽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일 경우에는 문제가 달라진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완전히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은 없지만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어떻게 이 많은 계명을 다 지키며 살수가 있겠어!” 하고 마음을 먹는 사람은 하나님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내가 그런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할 수만 있으면은 정말 하나님이 명령하신 가장 작은 말씀까지라도 순종하며 살고 싶습니다”라고 마음을 먹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신 사람이다.
두 사람의 마음의 차이는 무신론자와 유일신 신앙에 사로잡힌 사람의 차이다. 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헤롯에게로 끌려가셨다. 헤롯은 그가 평소에 궁금하게 생각하던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예수님에게 진지하게 물어 보았다. 예수님은 평생 사시면서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사명감을 가지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이것은 배우 쉽고 간단한 대답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진리이셨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답을 헤롯에게 해 주시지 않으셨다. 결국 헤롯은 답을 듣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대답을 하시지 않은 이유는 진리를 어떤 자세로 찾느냐 하는 것이 예수님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보실 때에 정말 진리가 무엇인지를 간절히 알기를 원하고 그 진리에 대한 지식에 자신의 인생을 얹고 싶은 사람들의 사람의 질문이었다면 십자가를 지고 끌려 가시면서도 여인들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이 최악에 상황에서도 진리가 무엇인지를 아마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헤롯은 그럴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지키며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진리가 무엇인지 알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급히 다가오셔서 알게 해 주신다. “일단 한번 이야기 해 보시라” 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진리에 대한탐구를 하나님께서 순수하게 받아드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되 순종함으로 그 말씀 안에서 온전히 살려고 하는 실천하는 몸부림이 없이는 지금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도 서서히 화석화 되어가서 삶의 영향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들이 첨가되지 안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요령과 눈치가 늘어 나는 것과 진리를 아는 지식이 늘어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교회 생활이 세련되어진다는 것과 그 사람의 신앙생활이 신령해 진다는 것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어떤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이 깨달으면 정말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내용적으로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작은 것까지라고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시간적으로는 생명을 다하기까지 영원히 그 말씀을 지키면서 살고싶다 라고 하는 그런 마음이 우리들 속에 있느냐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체험을 통해서 지식이 온전해지는 신앙이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 잘 배우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무엇이고 성경이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며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신 지를 배워 나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의 사랑에 우는 감격을 맛보아 야지만 비로소 그 지식이 온전해질 수 있고 감격스럽게 밀려오는 가슴 벅찬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나 혼자만 하나님께로부터 주체할 수 없는 대접을 받고 있다라고 하는 가슴의 벅찬 감격이 있기 전에는 그 지식이 온전해 질 수 없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도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권고하기를 진리와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자라가도록 그는 신앙의 성숙의 두 요소가 무엇인지를 잘 파악하고 자기의 자녀들에게 복을 빌었다.
그런데 그러한 체험이라고 하는 것들의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예화) 1970년대에 이름을 밝힐 수 없는 키가 작은 축구선수가 심하게 자신을 비판하는 팬에 게 경기 중에 “그렇게 잘하면 네가 한번 와서 해 보라”고 말한 이야기.
(예화) 교사들이 모인 곳에서 강의를 하고 돌아와서 설교를 듣고 자신이 처음으로 창녀와 같 고 걸레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는 여 교사로부터 받은 전화 이야기.
이 교사가 정말 창녀와 같고 걸레와 같은 사람인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예전에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지식이 심히 미천했기 때문에 자신은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하고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할 때도 자신은 어떠한 가책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주님의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깊이 눈을 뜨고 나니까 그 사랑에 반응하며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자기 자신도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불결하다는 사실을 진리에 대한 체험을 통해서 깨달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으로 깊은 영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만약에 삶의 현장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온전하게 살고자 하는 신앙의 양심과 죄를 탐지해내는 영적인 감각을 가지고 삶의 현장에서 살지 않으면 그 사람의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착각에 불과한 것이고 겉으로 부풀린 과시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려고 하는 자신의 현재적인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영성은 항상 자기 만족적인 영성이다. 영성이 뛰어난 사람들이 교만해 지는 것은 그가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영성이라고 하는 것이 진리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려는 처절한 삶의 추구 속에서 얻어진 결과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자 한 사람이 죽으면 속세에 사람들의 관심은 그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았는가에 있지 않고 화장을 한 후에 사리가 몇 개나 나왔느냐에 있다. 어느 의사에 의하면 사실 이 ‘사리’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신령해서가 참선하는 자세로 오래 앉아 있으면 자동적으로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 기도를 많이 하고 죽은 그리스도인도 화장을 하면 사리가 나온다고 한다.
오래도록 수양을 한 결과가 사리이지 그렇게 면벽 수도를 한 사람이 사리를 위해 고행을 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는 인간이 아닌 것이다. 똑 같은 것이다.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일생동안 한 사람이 하나님만을 추구하면서 산 결과로 맺어진 영혼과 정신의 특징이다. 그런데 그 ‘추구한다’라고 하는 그 말은 단지 생각이나 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가 즉 의식 세계와 자신의 삶의 세계가 거기에 모두 집중된 가운데 오늘 말씀에 표현대로 말한다면 ‘마음이 다 기울려진’ 가운데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산 결로 맺어진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특징이다.
말씀으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추구하는 삶의 추구가 동반되지 않는 사람들의 ‘영성 부풀리’기 경쟁이 얼마나 허황(虛荒)된 것인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의 탁월한 가치는 인격적인 것이다. 종처럼 얽매여서 사는 신앙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사람이 전심을 찾고 추구하면서 내용적으로는 끝까지, 시간적으로는 영원히 라고 표현하고 싶을 정도로 하나님 자신을 찾고 추구하는 그 삶이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양식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다. 요약해서 말을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다.
왜 이 늦은 시간에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가? 왜 설교를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설교 중에 메모를 하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왜 다 들은 설교를 테이프를 신청해서 다시 듣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들이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 사람, 하나님의 말씀의 모든 부분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심으로 지키고 그 뜻대로 살아야겠다고 결단하며 하나님의 뜻을 몰랐을 때에는 어쩔 수없이 살았지만 이제 주님의 마음과 뜻을 알았다면 나는 피할 수 없이 그 뜻대로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없으면 우리들이 말씀에 대해서 보이고 있는 진지한 태도는 모두 컴퓨터 게임에 깊이 빠진 아이들의 호기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의 그러한 신앙의 태도를 가지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서 스스로 우월해지고 교만해지는 기회로 삼는다면 그는 두 번 실수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기울였다고 말한다. 매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실 때 그는 벅차 오르는 기쁨 속에서 즐거워했다. 왜냐하면 이제는 바르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아야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달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순종하는 성도들의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체득하는 삶을 산 사람이었다. 우리도 그것을 배우고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어디로 기울어지고 있는가? 오늘 시인은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행해 기울어져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모든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에 붓고 있다. 말씀이 물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의 갈피에 즉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그 지면 배후에까지 스며들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신의 인식이 열리는 그런 안광을 소유하기를 갈망하고 있다. 철저한 삶,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삶의 전적인 추구가 있기에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온 마음을 기울일 수가 있었고 그것이 그가 일평생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리지 않는 비결이었다.
오늘 우리는 수많은 상대주의적인 사고방식의 혼란을 겪고 있든 시대이다. 너도 옳고, 나도 옳고, 그 말고 일리가 있고, 저말도 일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시인은 그에게 있어서 진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하나였다. 지키며 순종하며 영원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기를 원했고 그가 온전히 자기를 바쳐서 순종하면서 살 가치가 있는 말씀은 오로지 하나님의 계명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일, 그리고 그 말씀이 자신의 삶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서 순종을 창출해내는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에 온 마음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미각을 잃어버리지 않고 어떠한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들을 접할 수가 있었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통해서 시인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은 찾아 오셔서 그 시인과 함께 동행해 주셨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삶이 필요하다. 이 가을에 문턱에서 침잠을 배워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과 늘 어울려서 떠들고 노는 시간을 주려야한다. 고요히 홀로 있는 시간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해줄 좋은 인도자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 우리들의 영혼을 살찌게 할 하나님의 말씀에 지식에 마음을 쏟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빛을 우리들의 어두운 마음속에 비추기를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이제껏 우리들의 인생에 어떤 위기 속에서도 구해본 적이 없는 간절함으로 하나님 진리의 영을 내 마음에 비추시고 병든 내 영혼에 말씀을 향한 미각을 살아나게 하셔서 나를 향한 주님의 말씀을 놓치지 말게 하시고 그 말씀을 다리로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들이 그렇게 기도할 때에 비로소 ‘내 마음에 합한 기도로 너희들이 찾았구나’ 하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이다.
14. 말씀이 해석될 때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시119:130)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이해하는 현명한 지혜와 하나님의 나라의 도리를 이해하는 영적인 지혜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상당히 많은 경우에는 거의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더욱이 이 세상의 것들을 아는 지식이 뛰어나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지혜를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야 할 필요를 못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많은 지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가리워 지게 마련입니다.
오늘 시인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렬한 마음의 사랑을 131절에서 고백하기 앞서서 어떻게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토록 사랑하게 되었는지를 130절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열림으로서 말씀이 우둔한 자기를 깨닫게 한 것이 계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같은 열렬한 사랑을 가지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 저희에게 충격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교리반에서 30명이 함께 모여서 토요일마다 공부를 하는데 그 중의 한 10명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장년도 있고 청년도 있는데 “예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목사에게 무엇을 기대했느냐?” 물었더니 10명중에 8명 정도가 “아무 것도 기대한 것이 없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럴 리는 없다.” 그리고서 그 생각을 일깨워 드렸습니다. “아무 것도 목자에게 기대한 것이 없었다기보다는 정확하게 말하면 목자에게 무엇을 기대해야지 옳은지를 몰랐다고 말하는 편이 옳지 않느냐?” 했을 때 모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여러분들은 목자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크고 유명한 교회를 떠나서 쓰러져 가는 오두막집 같은 작은 교회를 찾는 사람들도 있고, 작은 교회를 훌훌 떨치고 떠나서 큰 교회를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큰 교회에 가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처음부터 작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고, 떠도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작은 교회를 찾는 사람의 심리와 큰 교회를 찾는 사람의 심리는 각기 상반적입니다. 자신이 목자에게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큰 교회를 찾는 이유는, 대부분 익명의 신자로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가도 왔는지 모르고 안 와도 안온 줄 모르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 묻혀서 누구의 주목도 받지 않고 좋게 얘기하면 자유롭게, 나쁘게 말하면 개판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작은 교회를 찾는 사람들은 정 반대입니다. 좀더 풍성한 서비스를 목자로부터 받고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친밀하게 지내면서 의논도 하고 인간적인 위로도 받고 교재도 하는 관계를 원합니다. 전자의 사람은 자기 혼자 편하게 나둬야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후자의 사람은 누군가 목자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느 쪽에 기대도 옳은 기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무엇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목회자에게 여러분들이 거는 기대는 무엇이고, 여러분도 똑같이 마음에 손을 얹고 예전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목자에게 무엇을 기대했는가를 생각해 보시면, 여러분도 그 지체들의 고백과 같이 별로 기대한 것이 없이 신앙생활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왜 갑자기 목자와 양떼들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의 놀라운 맛을 알게된 계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을 열어주셨습니다. ‘헤타’라고 하는 히브리 단어는 ‘해석’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열어서 그것을 풀어서 의미가 생각나게 해 주시니까, 그가 우둔하고 어두운 가운데서 신앙의 위치와 인생을 사는 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점점 깊이 깨달아서 깊은 신앙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알게 되어서 이제는 하나님이 속히 말씀해 주시지 않으면, 헐떡거리며 먹이를 구하는 사람과 같이 혹은 동물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의 사모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좌우의 날선 검과 같아서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인간의 깊은 뜻들을 드러내는 힘이 있다고 했는데 왜 하필이면 하나님의 말씀이 해석되어야만, 이렇게 우둔한 중에 밝은 빛이 들어오면서 그 빛 속에서 깨달음을 얻게 되는지!’ 궁금하게 생각이 되실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는 여러분들이 성경을 찬찬히 살펴보면 역사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하신 일은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해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문을 들었느냐고 물어보신 다음에 시편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푸시면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고난을 받고 죽으셔서,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실 것인지의 의미를 풀어서 해설 해 주실 때에 그들이 성령을 받고,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심령의 확신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사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해 진 다음에 제일 먼저 사도들이 한 일은 병을 고치러 뛰어나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애들아 하나님의 말씀에 보면 나무에 매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고 되어있지? 예수그리스도가 바로 저주를 받으셨는데 그 저주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성경의 어디어디에 나와 있단다. 그리고 너희들이 잘 알고 있는 이 성경 구절의 진정한 의미는 이런 것이란다.” 그러면서 이사야, 요엘 등등의 성경의 구절들을 쉽게 풀어서 해석 해 주니까, 성경만 읽을 때는 도저히 지나가는 얘기처럼 들렸던 것들이, 순간에 열리기 시작하면서 찬란한 복음의 빛이 품어져 나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빛이 캄캄하고 무지했던 그 시대 유대인의 마음속에 밝은 빛은 비춰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신앙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신약에서만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서도 입증이 됩니다. 에스라의 신앙부흥의 상황을 보면, 에스라가 율법을 낭독했습니다. 낭독한 후에는 반드시 율법에 대한 해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이 이방 여자에게 장가를 들고 혼혈아를 낳은 것에 대해서 뼈아프게 회개하면서 자신의 삶을 고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성경역사 전체가 자체에도 힘이 있지만 누군가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그 의미를 쉽게 해석 해 주어서 듣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게 만들어 줄 때에, 그들은 밝은 빛이 자신에게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지금은 시대가 좋아져서 정전이라는 거의 없습니다. 저가 초등학교 때만 해도 자주 불이 나가서, 집집마다 양초와 성냥은 손을 뻗으면 쉽게 찾을 수 있는 데에 보관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한 두간의 캄캄한 정전 속에서 작은 촛불 하나를 켜놓고, 책을 보다가 머리를 그슬리고 어두워서 무엇을 찾을지를 모릅니다. 그러다 두어 시간만에 불이 들어올 때의 느낌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살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참 지나고 나면 그저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캄캄하게 모를 때, 사람들 중에는 한번도 빛이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 인생이 끝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경배하고 싶어도 경배해야할 분이 누구이신지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힘을 다 기울여서 이 복음을 전파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교회 안에 들어왔으면서도 일평생 한번도 진리의 빛을 받아서 어두울 때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지 못한 채 인생을 끝내는 사람들이 교회에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아니 교회에 나오는데 왜 그런 진리의 빛을 못 봅니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때문이라고 봅니다. 첫째는 교회가 언제든지 교회에 오면 참된 진리가 무엇이고 인간이 누구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는 것을 정확하게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정확하게 가르쳐 주어도 사람들이 그것을 적극적으로 깨달으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한번도 자신의 영혼 속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깨닫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진리를 향해서 마음을 여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빌립보교회를 세울 때에도 하나님께서 자주장자의 마음을 먼저 여셔서 복음의 빛이 전해지고, 그 빛이 들어와서 하나님을 믿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마음으로 여기에 앉아서 말씀을 들으면서 깨닫고 싶어하는 의지를 가져야만 깨달아지지 ‘들리면 들으리라’하고 앉아 있으면 여러분은 아무 것도 모르게 됩니다.
요즘은 TV가 많이 있지만 옛날에는 저녁시간 때면 전부다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면서 연속극 방송을 들었습니다. 생각을 하고 몰두를 해야지 스토리를 알지, 다른 일을 하면서 도저히 그것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의지와 마음이 없기 때문에 참된 진리가 들려져도 사람들에 의해서 받아드려지지 않기 때문에 그런 빛이 들어오는 것을 경험을 못하고 일생을 끝내는 것입니다. 굉장히 불행한 일입니다.
여러분들은 두 번째로 “그러면 왜 꼭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누군가가 풀어주어서 의미가 잘 드러나야만 우둔한 마음이 깨뜨려지고 진리의 빛이 들어오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렇게 질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가장 커다란 이유는 우리의 자신을 보면 잘 압니다. 즉 우리는 아무리 지능지수가 낮은 사람도 우리들 중에는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심지어 오늘 교회를 처음 나온 사람이라도 이 교회에 대한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확신합니다. ‘이것은 내가 볼 때 좋은 교회다.’, ‘나쁜 교회다.’ 아니면 ‘아무려면 어때!’ 나름대로 사람은 자기의 생각을 하지고 있고, 고집을 가지고 있는데, 사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확신이요 생각이라는 것들이 대부분 성경 말씀을 통해서 빚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일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을 해 봅시다. 우리 모두 얼마 전에 쏘아 올린 인공 위성을 만드는 공장을 갔습니다. 다 해체시켜 놓았습니다. 그리고 알몸이 드러났는데 헤아릴 수 없는 나사, 회로, 반짝이는 수많은 불빛, 개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계기, 연결된 조인트 부분 등 어마어마한 로케트의 속 내장이 드러났다고 합시다. 한 가닥의 선을 이어야만 로케트가 정상으로 작동을 한다는데 한 줄을 어디다 이어야할지 이을 수 있는 지점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그 선과 이을 수 있는 가닥들이 수십 개가 되는데 그 중의 가운데 것을 집으면서 “나는 이거라고 생각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유를 물어봤더니 “나는 빨간색이 좋아!” 그랬다면 그것이 말이 되는 얘기입니까? 이런 사람들이 수백 명이 모여서 의논을 하면 로케트를 발사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런 데서는 우연이라도 있기 때문에 어쩌다 그런 상황이 벌어질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진리의 세계에서는 그런 것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강조하신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은 뭐든지 말하는 데로 믿으려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된다는 것은 자기의 생각을 모두 버리고 가르쳐주는 받아드리겠다 라고 하는 순진무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특별히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자신들이 신앙의 도리를 깨우치려고 의지를 갖지 않으면, 저절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되는 일들은 일어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향을 받지 않고,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려면 차선의 방법이 설득시켜 주는 것입니다. 얘기를 하면 그것을 가지고 성경을 잘 풀어서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자 보면서 얼마든지 오해를 하거나 제멋대로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을 잘 풀어서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것들이고, 어떻게 생각해야만 이 성경의 참된 의미이다라고 하는 것을 껍질을 벗기듯이 하나씩, 하나씩 친절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가 자기 속에 가지고 있던 잘못된 생각들을 버리고 포기하게 될 때에 진리의 참된 빛이 그의 어두운 지성을 비취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캄캄한 마음에 진리의 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을 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세상에서는 회전이 빠르던 두뇌가 교회에 오면 정지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얼마나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지 모릅니다. 누구를 만나도 돈 계산, 거래 관계에도 세 수, 네 수를 앞서가면서 머리 속에서 수많은 계산들이 오가면서 작동을 하는데 교회만 오면 정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주는 시간이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그냥 가둬두어도 괜찮은데 자꾸 푸느라 시간을 보내니까 짜증스러운 것입니다. ‘닫아두나 덮어두나 어차피 안 들을 거고, 안 지키면서 살 것인데 왜 그렇게 열려고 기운을 쓰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번도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들어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가끔 하나님의 은혜의 빛에 대해서 사람들이 오해를 합니다. 그런 것들은 먼저 믿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책임이 큽니다. 왜냐하면 황당무계한 간증 같은 것들의 영향을 받아서 잘못된 본보기를 가지고서 자신의 신앙생활의 도리로 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성경도 하나도 안 읽고 멍하니 지내던 사람이 기도원에 가서 몇 일 금식 기도를 했는데 비몽사몽간에 눈이 열리면서 뭐가 들렸다더라! 성경께서 오셔서 뭐라고 강하게 말씀하시더라. 이런 것들은 상당 부분은 잠꼬대 같은 얘기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의 종교적인 체험에 대해서는 거의 믿지 마십시오. 그게 여러분들을 위해서 안전합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그가 얘기하는 종교적인 체험을 예의상 들어주기는 해도 별로 신뢰하지를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이 잘못된 간증의 영향을 받아서 성실하게 늘 성경을 읽고, 정신 차려서 설교를 들으면서 말씀을 푸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 풀려지는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깨달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서 어두운 영혼에 진리의 빛이 비취는 진리에 대한 이해, 이런 것들을 추구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뭔가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발돋움하고 높아지려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추구자체가 너무 허황되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과 결별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보면 친구나 이웃, 가족 중에 한때에 정말 은혜를 받고 열렬한 사람들이었는데 불신자와 다름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런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알아도 지극히 아는 것이 감정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진리의 빛이 비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해도 항상 어떻게 하겠습니까?
누군가 하는 얘기가 집안에다 고추장이 빨리 익으라고 고추장단지를 놨는데 고추장단지와 오강하고 비슷하게 생겼고 둘 다 윗목에 있었답니다. 불이 나가서 찾으러가서 만져보는데 비슷한데 속에 집어 넣어봐도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깨달음이 없는 사람들, 그래서 자신의 우둔한 영혼이 하나님의 진리의 빛으로 밝아지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인생살이와 신앙생활은 찍어 먹어봐야 겨우 맛을 아는 것입니다. 한참 더듬고 윗목에 가서 오강 속에 깊이 손을 집어넣고 꺼내서 찍어 먹어보고 된장이 찍히면 ‘아, 된장 단지였구나!’하고 깨닫고, 다른 게 찍히면 ‘아, 다른 것이구나!’라고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웃지만 그렇게 웃기는 삶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금도 웃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신앙의 이치를 터득하고 나면 상대방이 모르는 문제가 보입니다. 저 사람이 믿음이 안 생기는 이유가 왜 안 생기는 것인지를 깨달음 사람은 금방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이렇게 하라도 방법을 가르쳐 주는데 그 사람은 그것을 안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 사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며 캄캄한 가운데서 원수들에게 찢기며 실패를 운명처럼 생각하며 사는 삶이 자기의 분깃이라고 한 것처럼 그런 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가끔 인생의 어려운 일들을 만나면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면서 매달리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는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마음속에 비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가끔은 하나님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종교적인 체험이나 감정이 있어도 그는 근본적으로 마음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때에 따라서 말씀의 깊이가 전혀 없으면서도 시시때때로 기도하거나 찬송할 때 언뜻언뜻 하나님의 따듯한 손길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착각일 수 있지만 사실은 진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비록 그것이 백 번 양보해서 감정적인 체험이 아니라, 진짜 찬송 속에서 그를 어루만져 주시는 위로와 따듯한 격려였다고 할지라도 그게 그 사람의 인생이 가는 길을 바꾸는데 거의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길이 아닌 길을 가다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길이 아닌 길을 잘못 걸어가다가 넘어졌을 때 까진 무릎에 약을 발라주거나, 웅덩이에 빠졌을 때 건져서 돕는 사람도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우리가 어차피 길이 아닌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려고 하면 그런 실패는 한 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기 직전까지 계속 되는 것입니다. 길을 잃은 사람에게 정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바른 길을 가르쳐주고 그 길로 데려다 주는 것이 그를 진정으로 돕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 이따금 언뜻언뜻 하나님의 따듯한 손길, 위로 같은 것을 느끼면서 멍한 상태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은 길이 아닌 길로 걸어가면서 무릎이 까졌을 때 가끔 고약을 발라주시는 정도로 하나님은 자기와 관계를 맺어주시고, 가는 길은 내버려두시기를 원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그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버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성향이 하나님을 버린 사람입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아도 부인하는 것이나 안 하는 것이 그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이 거의 같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신앙의 출발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아 아는 것에서 신앙이 출발하는 것입니다. 일단 이 길에 들어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신앙의 본분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비춰서 자신의 어두움을 밝히고 나면, 헐떡거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싶어하는 마음, 깨닫고 싶어하는 갈망을 갖게 됩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참 잘 먹습니다. 어떤 때는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만약에 저렇게 먹고 싶어하는데!’ 우리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잠을 잘 때에는 “엄마, 이제 그만 먹고 자는 거야?” 그리고 잠자리에 들고, 네 살쯤에 자다가 잠꼬대를 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러면 나는 뭘 먹으란 말이야” 아침에 일어나서는 “엄마 우유주세요” 그렇게 먹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만약에 먹을거리가 없어서 못 먹인다면 부모인 우리의 마음이 어떨까 생각해보니까 아직 경험하지 못했지만 굉장히 마음이 아플 것 같습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무엇인가 진리를 섭취하고자 하는 왕성한 식욕이 있는데 영적으로 먹을 것이 없던 때를 지내본 경험이 없습니까? 그때에 어땠습니까? 육체에 대한 욕망으로 끌어 내려서 생각해 보면 굉장히 쉬울 것입니다. 힘들게 운동을 하거나 일을 하고 너무 배가 고픈 상태에서 ‘집에 가면 그래도 있겠지!’ 그리고 뛰어왔는데 그날 따라 솥은 깨끗이 씻어서 엎어놓고 반찬은 하나도 없다면 성질이 나잖아요. 배고프면 성질이 납니다. 말씀의 은혜가 없는 교회에서 싸움이 많이 일어나는 이유가 배고파서 성질부리는 것입니다. 머리에 뿔 달고 교회에서 수시로 들이받는 교인들을 보면은 99% 이상이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만나는 교제가 거의 끊어진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머리에 뿔이 달리고 돌진할 때까지 그것이 짐승 같은 행동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수없이 말씀하셔도 들을 수 있는 귀가, 들을 수 있는 마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심령이 안된 것입니다. 그래서 각기 제 길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시인이 헐떡이듯이 영혼의 건강함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함이 있는데 그것을 헐떡이는 것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마치 야생동물이 교미기를 맞이해서 헐떡이는 것 같은 헐떡임, 이것은 대치할 수 없는 욕망입니다.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없는 욕망, 목마름이나 배고픔 같은 것으로 헐떡이는 것입니다. 그런 헐떡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이것은 미각을 회복하는 정도가 아니라 배고픔의 영이 들어 있어서 먹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땡기는 것입니다. ‘나에게 더 많은 빛이, 더 많은 진리를, 더 온전한 지식을, 더 아름다운 하나님의 말씀을 나에게 주소서 내가 전심으로 들을 것이고, 내가 전심으로 이해할 것이고, 말씀을 가지고 거룩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런 갈망이 속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모함이 생겨나게 된 것은 우둔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어서, 빛이 들어와서 깨닫게 되는 작은 일부터 그런 말씀에 대한 불같은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이지, 저절로 되는 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통해서 어떤 도전을 받게 됩니까? 말씀에 대한 열렬하고 헐떡이는 사랑은 다음에 얘기하겠습니다. 그런 헐떡임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지극히 굶주리고 말씀을 향한 갈망을 갖기 전에 먼저 이루어져야 할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술에 취한 것 같은 멍한 상태로 신앙생활 하는 삶을 미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어떤 일을 행해도 용서하려고 애를 쓸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저에게 모욕을 주거나 뒤에 가서 저에 대해서 안 좋은 얘기를 해도 용서하려고 애를 쓸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설교를 듣지 않는 것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하면서 오륙 년의 세월이 지나갔고, 제가 사역을 하면서 이 십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으니까 얼마나 많은 지체들을 만났겠습니까? 그런데 세월이 많이 흘러도 마음속에서 용서되지 않는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제 자신의 소관을 벗어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목사를 통해서 말씀하실 때에 그것을 듣지 않는 것은 목사를 향한 공손하지 못한 행동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두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용서받기 어려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더 나쁜 것은 받아드리는지 받아드리지 않는 것인지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고 그냥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더 나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인가 분명한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여기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진리를 말하고 하나님의 참된 복음을 여러분들에게 전하면 여러분들은 가능한 그것을 받아드리든지 아니면 ‘I don’t think so’ 나는 그렇게 생각 안한다 라고 말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해야 합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을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회복한 정도가 말씀에 대한 뜨거운 갈망으로 헐떡이는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일어난 단순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둔한 마음에 진리의 빛이 비취는 것이었습니다. 작은 빛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 빛이 너무 작은 빛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빛을 계속 응시해 보십시오. 찬란한 빛이 들어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지하 동굴을 관람하다가 ‘우르르 쾅’ 하면서 동굴이 막혔다고 할 때, 몇 일 동안에 그 속에서 소리를 지르며 혼자서 헤매고 다녔지만 한 점의 빛도 없고 아무 소리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지쳐서 동굴 속에 누워있는데 깨어나니까 착각인지 아니면 제대로 보는 것인지 저 멀리서 바늘 끝 같은 작은 빛이 들어 왔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디로 걸어가시겠습니까? ‘저기 빛이 있네, 그렇지만 저렇게 작은 빛으로 뭐해, 어차피 보이지 않는데!’ 그러시겠습니까? 아니면 그 빛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겠습니까? 작은 빛은 그 뒤에 큰 빛이 없으면 비취는 법이 없으므로 거기로 가서 통로를 찾을 것입니다.
한번에 놀라운 신앙으로 로케트를 타고 올라갈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그런 일은 여러분들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여러모로 허세를 부려도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객기 어린 신앙의 모험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오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도에 대해서 깨닫는 마음을 갖도록 노력을 하십시오. 그리고 설교자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인생의 도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절망적인 인간이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15초TV 상업 광고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리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영혼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진지하게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다면 문제가 안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올바르지 못한 태도는 인생 전체를 뒤집어 놓은 어마어마한 사건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에 의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어떻게 해야 하겠는지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선 여러분들의 영혼이 캄캄한 어두움의 상태에 있는가, 겨우 캄캄한 밤의 정전 상태에서 다 사위여 가는 초 동강 하나를 붙들고 어두움을 더듬는 신세 있는가, 밝은 대낮과 같은 지식의 빛 아래에서 매일 매일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경우라면 그 빛을 잃지 않기 위해서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도록 사모해야 할 것이고, 두 번째의 경우라면 그 정도의 초 동강을 가지고는 도저히 정상적인 문화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면서 전깃불 들어오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혀 빛이 없다면 여러분들은 아까 말씀드린 사람처럼 오강과 고추장 단지를 구별하지 못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어두움 속에 갇힌 인생입니다. 그 어두운 생활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불편을 모르고 있지만, 밝은 빛 아래서 그 어두움의 상태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는 빛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는 여러분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겠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외국의 어느 얘기에서 장난기 많은 백작부인 한 사람이 사람들을 초대하고 이상한 파티를 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가면을 쓰고 불꺼진 상태에서 입장을 하고, 파티를 하자는 제의를 했습니다. 그 부인은 모든 사람에게 그 규칙을 적용시킨 것이 아니라, 자기가 골탕을 먹이고자 하는 몇 사람에게만 적용을 시켰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우리가 어렸을 때 하던 놀이같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술래 두 사람을 세워놓고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한 사람은 박수를 치게 하고 한 사람은 잡으러 가라 하면서, 중간 중간에 장애물을 놓고 그것을 피해 다니며 한 사람은 도망을 다니고 한 사람은 잡으러 다니는데, 잡히는 사람도 잡는 사람이 어디 있는지를 모르고 잡으려는 사람도 잡아야할 사람이 어디 있는지를 모르는 게임 같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첫 번째의 경우의 사람, 캄캄한 어두움 속에 살아가고 있다면, 정말 경건한 성도들이 보기에는 짐승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다만 그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안 사람이기 때문에 조롱하지 않고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할 따름입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기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그 깨달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참된 진리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키는지 여러분들이 직접 경험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도 먹어봐야 맛을 알기 때문입니다.
15. 위기에서 구원을 경험하라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시119:174)
성경에서 구원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 말은 한가지 의미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구원의 여부와 관련지어서 말하는 구원,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던 사람이 주님을 믿고 회개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구원도 구원이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훨씬 더 많은 경우에는 커다란 곤란과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이 건져주시는 것을 구원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얘기하는 구원이라는 말은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커다란 어려움과 난관에서 하나님이 전적인 능력으로 팔을 내미셔서, 고통 당하는 하나님의 자녀를 건져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올 수도 있고 혹은 가족적, 국가적으로 올 수도 있습니다. 구원이라는 말의 의미는, 가장 중요한 배경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어려움, 또한 저항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을 분쇄하고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 하나님이 전적인 은혜로 도와주셔서,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을 가리켜서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원에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찬송이 뒤따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구출될 수 없는 상황에서 주님이 건져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통해서 시인을 비롯한 모든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몇 가지 사실들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기에 처했을 때 항상 도와주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세상이 이렇게 고통스러울 리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전체적으로는 하나님이 움직이고 계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도움을 기대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도움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것도 힘이 듭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혹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 구원을 받고 나면 제일먼저 하나님 앞에 찬송을 하게 되고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이,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 하나님과 우리 가정과의 관계,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과의 관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별한 사람이다! 하나님과 매우 특별한 관계에 있는 백성들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어려움 속에서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부르짖을 때에 우리를 그 위기 속에서 건져내어 주셔서 구원을 베푸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믿음으로 산다면 이처럼 주님께 구원받는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주님을 높이 찬송하게 되고, 하나님과 우리 자신과의 관계를 매우 특별히 확인하게 됩니다.
두 번째는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정말 가치 없는 인간들을 향하여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찬송하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 것은 떨어지지 않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경험하고 났을 때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간절히 원했으면서도 막상 구원을 받고 나면 항상 의외의 일이 일어날 것처럼 기뻐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국가적으로 큰 어려움을 당하거나, 외적들이 쳐들어 와서 국가적인 위기를 만나게 되었을 때, 자신들이 힘으로는 도저히 그 전쟁에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의 고백은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때에는 전쟁에 나아가서 싸움에 직면할 때마다 전쟁의 참된 승리는 자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계의 역사를 보면 월등한 군사력을 가지고도 비참한 패배를 면하지 못했던 역사의 예가 많이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전쟁, 히틀러가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했다가 수많은 군인들을 죽음을 몰아 넣었던 전쟁 등이 있습니다. 수만을 가지고는 전쟁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전쟁에 나아갈 때에는 승리를 기대하지만, 막상 하나님이 기대했던 승리를 주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당연하지 우리가 열심히 기도했으니까! 승리 못하면 이상한 것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기대하면서도 막상 그 일이 이루어질 때에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 하나님 앞에 행복해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장 그 전쟁에서 이긴 기쁨뿐만 아니라, 그것보다 더 큰 것은 그러한 전쟁에서 이기고 어려움 속에서 자신들이 구출 받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매우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강해하면서 제가 사랑이 왜 투기하지 않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랑은 투기하지 아니하며’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때에 드린 말씀은 왜 진정한 사랑은 투기하지 않느냐 하면, 그 사랑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배운 것인데 정말 주님의 사랑을 제대로 깨닫게 되면 우리 각자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무한하고 놀랍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을 깨닫게 되는 순간, 주님이 자기밖에 없는 것처럼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서로 비교될 수 있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어떤 하나님을 만나고 여기까지 걸어왔는지를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세히 알 일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해서 여러분의 인원수가 많기 때문에 내게 돌아오는 하나님의 사랑이 작았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큰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내가 받은 사랑이 줄어들지는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느낌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주위의 많은 사람이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할 때에 소외감 비슷한 것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그 자신의 사랑의 경험의 정도의 문제이지 하나님의 사랑 자체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풍성하게 경험하면 그런 비교의식이나 열등감 같은 것은 사라지게 됩니다. 절대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위기 가운데서 우리들을 건져주실 때 그런 절대적인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혹은 경건한 신앙의 자녀들이 구원받았을 때 하나님을 찬송하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원받았을 때에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찬송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역사에 하나님이 큰 위기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주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고 자부심을 갖게되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면서 충만한 기쁨을 얻게되면서 그들의 관심이 성경의 진리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이런 공식이 항상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면 심리적으로 볼 때 ‘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경험할 때에 관심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게 될까!’
우리의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신앙의 경험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자신의 신앙의 경험은 정확히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빛을 받기만 하면, 올바르게 해석되기만 하면, 성경 말씀 다음으로 우리에게 매우 귀한 신앙의 정보가 됩니다. 여러분 자신의 경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큰 어려움 속에 있었을 때 여러분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어서 눈물과 애달픈 호소로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데, 점점 여러분들의 매달리는 과정을 통해서 관심사가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께로 집중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상하고 깨어진 마음으로 주님이 여러분 자신을 건져주시도록 간절히 탄원해서, 이제 그 위기에서 하나님이 구원을 베풀어주시지 않으시면 살아있는 것이 세상에서 의미가 없을 것 같은 난관 속에 하나님 앞에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살면서 생명과 바꿀 수 있는 기도의 제목들이 자주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셔서 여러분들을 건져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나 같은 인간이 역사 하시는 한 복판에 있구나’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초라한 존재가 하나님의 시선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건져주셔서 한없이 하나님이 찬송합니다. 그리고 나서 드는 마음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기쁜 소식이라도 몇 일 지나면 시들어집니다.
한 20년 전에 결혼을 할 때, 제가 결혼한다는 사실을 많이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초청장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한참 지나서 나누어 준 것만을 가지고는 안 되고 확실하게 결혼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했는데 나하고 굉장히 친한 사람들이었는데 전화 받는 태도가 시큰둥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정말 팔불출 중에 팔불출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어른들의 충고가 결혼하는 청첩장은 자기가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랍니다. 친한 친구를 통해서 나누어주는 것이랍니다. 그래야만 받는 사람이 부담이 없고 편하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아무리 기쁘고 좋은 소식이라도, 맨 처음 들었을 때 좋은 소식이라도 두 번 세 번 듣고 나면 시들해집니다. 우리들이 어려움 속에서 구출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한없는 감격과 기쁨의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응답을 받게 되었을 때 여러분들은 무엇을 결심하게 됩니까? 만약에 그가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하나님이 그 뜻밖에도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어려움 속에서 건져내 주셨으면, ‘내가 잘 살아야 할텐데!’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무한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위기 속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구출 받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 감격이 깊이 밀려올 때, 마지막에 모든 감정이 정리된 가운데 돌아오는 관심은 ‘잘 살아야 할텐데!' 왜냐하면 특별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도 특별한 사랑을 받았지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것은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비교 개념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은혜 넘치게 받았을 때에 여러분들이 여러분보다 더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을 생각하면서 ‘저 사람도 저것밖에 안 사는데 내가 너무 잘 살면 손해잖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최선의 사랑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특별한 사랑을 받았으니까 나는 평범하게 살면 안 된다.’ 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특별한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평범하게 이 세상 속에서 오늘 아침에 설교한 것처럼 이것도 섬기고 저것도 섬기는 다신론 적인, 혼합주의 적인 신앙으로서는 하나님 앞에 특별한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 특별하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지고 깊이 고민할 때, 관심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단순한 이치입니다. 단순한 이치이면서도 우리들이 너무나 쉽게 잊고 있는 이치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 다음에는 항상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찬송한 후에, 즉시 그들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특별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가겠다 라고 하는 말씀에 대한 충성을 갱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단순히 ‘주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었으니까 우리는 잘 살아야 되겠다.’ 라는 부채 의식을 갖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그렇게 하나님이 특별한 관계를 자신들과 갖고 계시고, 자기들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매우 특별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을 통해서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며 살아가야 되겠다’라고 할 때 이것은 ‘주님의 특별한 은혜로 나를 건져서 호의를 베풀어주셨으니까, 나는 빚진 사람이니까, 빚을 갚는 부채의식에서 그렇게 살아가야 되겠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하나님의 백성들이 큰 위기 속에서 구출을 받고 나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가기로 다짐을 했는데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프라이드였습니다. 긍지였습니다. 이렇게 지키며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민족이 우리 말고 없다는 자부심을 동반했습니다. 부채의식을 가지고 빚진 마음으로 지키는 것과 자부심을 가지고 지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저는 못 들어 가봤는데 외국에 가면 정장을 하지 않고는 못 들어가는 식당이 있다고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하시는 얘기가 설교를 미국을 갔는데, 장로님이 강사님이 오셨다고 어느 식당으로 초대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넥타이를 매고 설교를 하다가 폴라 티셔츠에 양복 차림으로 갔습니다. 그곳에 여러 사람이 모였는데 다들 양복을 입었데 자기 혼자 폴라티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 때문에 그 많은 일행을 돌려보냈다는 것입니다. ‘이 식당에는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지 못하면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곳에 앉아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식당이 그런 식당일줄 알고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와서 식사를 했을 것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옷을 입고 그 식당에 갔을까요? ‘아이고, 지겨워 밥 먹는데 이렇게 요구 사항이 많아!’ 이렇게 투덜대는 사람들은 거기에 갈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곳에 간 사람들은 자신들이 수준 높은 식당에서 정장을 하고 정장을 한 사람들과 식사를 한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준비하고 갔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난 후에 그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과 함께 회복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대한 입맛, 이런 것들이 함께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야 되겠다 라고 생각될 때에 그들은 그것을 단순한 부채의식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긍지를 갖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우리를 차마 짐승처럼 사는 것을 보지 못하셔서 우리에게 엄격하게 이렇게 살아야지 하나님 자녀다운 삶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셨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교육을 받을 때에, 오늘날에는 더 많아지고 있을 것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도 항복한 애들이 있지 않습니까? 더 이상 그 아이를 교육시키기를 포기한 아이들, 굉장히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가르치는 선생님의 눈에서는 이미 포기한 아이들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어떻게 대우해 주셨으면 좋겠습니까? 포기한 자녀들로 대우해 주 주셨으면 좋겠습니까? 아니면 그래도 기대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회초리를 들어서라도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아직 종아리를 때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로 대접해 주었으면 좋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날 이 시인의 경험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구원을 사모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의 구조는 이렇습니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간절히 호소할 때 ‘하나님 저를 도와 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자신 있게 도와 달라고 매달리는 근거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거래 관계에서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켰으니까 이제 하나님은 어떤 의무에 매여야 합니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에 호소하면서 자신에게 은혜로운 행동으로 자비를 베푸셔서 자기를 어려움 속에서 건져달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항상 119편 뿐만 아니라 시편 전체에 흐르고 있는 공통된 고백은 ‘내가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주님, 저를 돌아보아 주시옵소서. 주님, 주님은 저를 돌아보셔야 됩니다. 왜냐하면 저가 고난 중에서도 말씀을 지키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우리의 실제적인 경험으로 끌어내려 보겠습니다. 우리들이 잘 살았든지 못 살았든지는 상관이 없어도 우리가 어려움 속에 처했을 때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밖에는 부를 이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애들이 항상 부모가 기뻐하는 일을 하다가 어려움을 당할 때만 “엄마!” 하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이런 일을 하고 있을 때 엄마에게 들통나면 안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다가고 어려움을 만나고 위기를 만나면 “엄마!”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 당하고 고통이나 어려움의 이유가, 올바른 신앙으로 살려고 당하는 어려움이든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당하는 어려움이든지 하나님밖에는 도움을 구할 때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쪽에 있든지 그 사람이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구할 때 하나님의 마음은 똑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밖에는 부르짖을 때가 없습니다.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바라고
주만 바라볼지라
어린아이를 기르는 엄마가 골목에서 나는 수많은 아이들의 소리 속에서 자기 아이의 울음을 정확하게 발견해 내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압니다. 그래서 그 고통의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들이 고통을 당했을 때에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주님의 이름을 찾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여러분을 구원하실 분은 오로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굳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건져주실 때 우리가 잘못해서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호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낯이 뜨겁기는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 저가 잘못했습니다. 지금 제가 죄송하지만 저를 구해 주십시오’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충분히 인정하지만, 시편 특별히 119편에서 보여주는 시인은 큰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어려움을 만났을 때에, 힘있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매달릴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시인의 마음에 담대함을 가져다 준 것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시인이 지키면서 살았다고 스스로 자부를 하지만 완전하게 지켰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체적으로 지키면서 살았지만 그러나 완전하게 지키면서 살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을 시작하면서 ‘행위 완전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기도 그렇게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완전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복된 사람들인가를 노래하면서 119편을 열지 않습니까? 시인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완전하게 살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지키면서 위기를 넘기고 어려움 속에서 살려는 사람들에게는 양심에 담대함이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큰 환난과 위기가 다가와도 ‘이 환난이 나를 삼켜서 내가 파멸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향한 징벌이나 불쾌감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은 아니다.’ 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도에 있어서 어마어마한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마음에 양심의 거리낌과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없는 어두움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도에 있어서 담대함이 떨어집니다. 물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호소하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그러나 항상 양심의 송사를 받습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 결국은 정말 인생의 어려움 속에서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들, 정말 자신이 당하고 있는 위기가 하나님 앞에 구원받는 기회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배워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기도가 힘을 얻습니다. 그렇게 순종하면서 사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구도는 그것은 위기 속에서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도와 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았으니까 하나님 저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경건한 성도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호소해서 내게 큰 구원의 능력을 베푸셔서 나를 어려움 속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하는데, ‘그렇게 건져주셔야만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 수 있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건져주시면 내가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나를 건져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과 기사를 대대에 전하겠습니다.’ 이런 구도가 함께 맞물리는 것입니다. 위기 속에 있을 때 하나님 앞에 강하게 호소하는 비결이 순종하는 진리를 지키면서 산 비결이었고, 위기 속에서 건져주시기를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데 그 위기에서 벗어나야만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지키면서 살 것이라는 구도가 함께 나오는 것입니다. 119편을 잘 읽어보십시오. 이 사상이 전체적인 줄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냐 하면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잘 지키며 산다는 것이 아주 쉽게 얘기하면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고, 하나님에게도 너무 좋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꿈을 꾸는 것과 같은 놀라운 구원의 행동을 보여주셨을 때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기대하신 최종적인 기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삶, 그것이 유지될 때 그것이 유일신 신앙입니다. 그것이 깨뜨려지니까 우상의 신들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는 것, 이것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위기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꼭 필요한 것이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경험하고 인생의 위기 속에서 헤어난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믿음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침체가 전혀 없는 신앙생활, 그런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적인 침체도 똑같지 않습니다. 어려움이 오거나 은혜가 떨어지면서 다시 회복하고, 떨어지다 다시 회복하면서 점점 상승 곡선을 그으며 나아가는 신앙생활, 그것과 한번 떨어지면 바닥까지 내려가서 신자인지 불신자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다 드러나는 침체는 침체가 아니라 그것은 추락입니다. 침체라는 것은 모양을 유지하면서 힘들어하고 다시 회복되는 것이 침체이지, 부도나서 사장이 도망가고 직원들도 도망이 갔다면 그것은 침체가 아니라 거덜난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입맛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사는 사람들은 거덜나지 않습니다. 말씀의 미각이 약간 떨어지면서 침체되는 경우는 있지만 아주 거덜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말씀의 입맛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면 침체가 아니라 추락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다시 시작하는 것은 새로운 시작이지 회복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후자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제가 제공해 드린 렌즈를 가지고 사람들을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침체라고 불렀던 것이 침체가 아니라 거덜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경우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차마 침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깊이 추락을 했습니다. 회복이라고 부르기에는 그것을 벗어나기에는 너무나 희미할 때 이미 그것은 거덜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덜나야만 정신을 차립니다. ‘아, 내가 아무 것도 없구나! 정말 아무 것도 없구나!’ 우리에게 뭐가 있습니까? 제가 이 설교단에서 수시로 느끼는 마음의 절망이 여러분들이 다 읽는다면 여러분들은 여기에 하나도 안 남아있을 지 모릅니다. 뭐가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래도록 설교하면서 살지 않았지만 그러나 어느 순간 ‘정말 내게 무엇이 있는가! 아무 것도 없구나!’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하나님의 사랑, 매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긍휼이 여기셔서 우리기 깨우쳐 주시는 그 은혜가 없이는 우리에게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위기를 만났을 때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며 사랑하며 살았으니 오, 주여 이 위기 속에서 나를 도우소서!’ 하는 담대함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원의 손길을 호소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그 위기 속에서 벗어나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사랑하며 살 결심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손길이 더디게 느껴지거나 아니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회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진리를 따라서 사는 것의 참된 기쁨과 보람을 깨달을 때까지 하나님께서 좀더 어두움 속에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참을 수 없는 경박한 신앙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에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설교와 수많은 한국 교회를 향한 도전들을 보십시오. 저는 어떤 때는 섬짓하리만치 겁나는 도전들을 봅니다. 사람들은 이제 자신이 변화되지 않고도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말합니다. 인간이 바뀌지 않고도 교회가 놀랍게 개혁될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깊이 파고들어서 우리 내면의 세계를 꿰뚫고 우리 속에 있는 죄성과 우리 안에 있는 패역들을 고치고, 우리를 새롭게 하는 진리에 의한 변화 없이도 얼마든지 이 세상에 신선한 도전과 영향을 끼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제 삼의 길이 있는 것처럼 우리를 손짓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로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살피고 또 살피며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찾아내고 우리를 정결케하고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변화시켜서, 하나님 앞에 정말 주님의 자녀다운 존재로 우리 자신을 드리고 싶어하는 끝없어 보이는 긴 투쟁들은 모두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이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이라는듯이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해 본적도 없고 의와 자신의 죄를 인해서 애통해 본적도 없고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앞에서 겸손이 무엇인지, 온유가 무엇인지를 배워본 적도 없고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뵈옵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 본적도 없는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삶의 태도 몇 가지를 바꿨다고, 캄캄한 숯덩이와 같은 어두움이 변해서 타오르는 횃불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성경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독교입니다. 그곳은 길이 아닙니다. 그런데 가기가 쉽습니다.
여러분들이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것이 쉽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쉽습니까? 저는 전자가 훨씬 더 쉽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태도를 바꾸시도록 만들어 드리는 것은 열렬하고 간절한 기도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누가 바꿉니까? 제가 아는 시골 교회에서 목회하는 어느 목사님이 설교집에 어느 장로님 한 분이 자신을 젊은 목회자일 때부터 험하게 괴롭혔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저 장로님도 바꿔 주시옵소서!’ 열렬히 기도했더니 어느 날 하나님이 응답하시는데 ‘애야, 걔는 나도 못 바꿨다. 니가 바뀌어라’ 하나님이 못하실 수 있는 일이 있겠습니까? 훨씬 어렵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고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의 싸움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주님의 사랑이 넘치고 구원의 감격이 넘치고 ‘어찌하든지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겠다’라고 하는 충성스러운 마음이 불붙을 때에는 너무 좋아요.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기쁩니다. 짐승처럼 편안하게 살기보다는 성도답게 피 흘리면서 살아가는 삶이 더 행복합니다. 그러나 그 은혜가 있을 때의 얘기입니다.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끝도 없는 이 길’ 그런데 끝까지 해 본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신앙의 성도들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그것은 신앙의 진실을 간파한 것입니다. 저는 섬짓 섬짓합니다. 자신이 바뀌지 않고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된 간증, 교회의 인간들을 변하지 않았는데 교회가 모범적인 교회가 된 사례,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이 중요하지도 않고 진리에 대한 충성심이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떻게 새로운 시대에 맞게 수시로 신앙의 옷을 갈아입으면서 시대와 어울리면서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유화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오늘 듣는 설교를 듣는다면 여러분과 같은 착한 성도들이 마음에 고민하는 것처럼 ‘아, 내가 어떻게 하면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회복하고 위기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충성하며 그 진리를 지키고, 위기 속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셨을 때 내가 정말 그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며 살 기회를 주신 것으로 알고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살아갈 것인가!’라고 고민하는 모습은 마치 힙팝 바지를 입고 머리에 물들이고 춤을 추는 아이들 틈에, 망건을 쓰고 도포입고 나타난 것 같이 한심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은 미련한 데 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가장 뼈아프게 가슴이 아픈 적이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애를 쓰다가, 어느 한 순간에 마음에 무거워지고 긴 침체에 들어가서 죄와의 싸움에 져서 허덕거리다가 ‘새로운 신앙의 길을 찾았다.’라고 길을 떠나는 사람들, 왜? 도저히 자기는 변화될 수 없는데 누군가가 옆에서 손짓을 하면서 “야, 그렇게 힘든 신앙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느냐? 요즘의 기독교는 너가 변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길이 있다. 전에는 피를 흘리면서 죄와 싸웠지만 이제는 함께 놀면서 죄를 설득하는 길이 여기 있다.”고 하면서 큰 새로운 세계라도 발견을 한 것처럼 그렇게 스스로 속는 사람들을 볼 때 가장 마음이 아픕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말씀의 미각을 회복시켜 주셔서 일평생 우리의 신앙생활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이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이미 붙잡았다 함도 아니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정말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언제나 유지하며 산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완전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영원히 살아있는 신앙은 말씀의 미각을 가지고 유지하면서 ‘어떻게 하면 더 하나님의 뜻대로 살까! 그리고 주님의 말씀대로 내가 살 수 있을까!’ 고민하고 몸부림치면서 살다가 어느 날 주님이 부르실 때 주님께 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삶을 제외하고는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부분이 없다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않는 우리의 인생의 열심과 우리의 신앙의 빗나간 충성심들은 어떻게 보면 모두 자기 좋아서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고 생각하는 굉장히 많은 날들이 막상 우리들이 인생을 마치고 나면 하나님의 장부책에는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길에서 호떡을 구워서 팔고 강냉이를 튀기면서 사는 사람의 삶이 주님을 경외하는 삶의 장부책에 올라와 있을 때, 교회에서 충성스럽게 설교하고 열렬하게 교회에서 봉사한 삶이 하나님을 섬기는 장부책에 나오지 않는 일들을 후에 경험하게 되더라도 여러분들은 조금도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정말 자기 좋아서 사는 삶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진정한 동기가 된다면 우리는 ‘내가 멋대로 살아가면서 이 삶에 대해서 하나님이 만족하는 마음을 갖도록 노력하시라’고 우리는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리고 정말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우리는 즉시 주님이 우리에게 거시는 기대가 무엇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인생을 살기 원하시는지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배우고 싶어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안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당신의 그런 기대를 보이신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주님 자신을 사모하는 것과 말씀의 미각을 유지하면서 사는 이것은 하나님의 틀 안에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유지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 한번 여러분들을 점검해 보시고,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여러분들의 영혼의 상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렸을 때 여러분들이 인생에서 어떠한 위기를 만났을 때에도 보인 적이 없었던 열렬하고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얼굴을 구하십시오.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위기 가운데 부딪혔을 때에도 기도한 적이 없었던 그 열심으로 말씀의 미각을 회복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되찾아서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회복하고,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헐떡임 같이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에 대한 욕구를 가슴 깊이 간직하고 헐떡이는 마음이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돌아오는 주일이 지루할 정도로 길고, 삼일에 한번씩 돌아오는 수요예배가 지루할 정도로 길게 느껴지도록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뵙고자 하는 갈망과 간절한 소원을 유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저는 압니다. 그는 비록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 희망이 없다 라고 하는 위기에 낭떠러지 끝에 매달려 있을지라도 그는 반드시 하나님이 건져주실 것입니다. 그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소문난 실패를 경험하고 모든 사람이 그를 버리고 짓밟아서 아무 희망이 없는 낙인찍힌 죄인으로 그를 취급한다고 할지라도, 말씀의 미각을 유지하고 헐떡거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말갛게 씻기셔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그리스도인들보다 훌륭한 성도다운 삶을 살아가게끔 그를 새롭게 만들어 주시리라 저는 믿습니다. 119편을 기록하고 있는 본인이라고 믿어지는 다윗이 바로 그런 때를 직면한 것입니다. 다윗이 그 큰 시험 속에 떨어졌지만 끝까지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깊은 수렁에 빠진 다윗에게 웅덩이에서 나오게 하는 밧줄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 인생의 위기와 고통을 만났을 때 우리 자신이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니고, 우리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면서 몸부림치는 꺼져 가는 심지와 같고 상한 갈대와 같은 존재들이 우리입니다. 날마다 오셔서 말씀해 주셔서 안락한 삶에 빠지기 쉬운 우리의 마음의 각질을 벗겨내시고, 실패와 좌절 속에서 포악해 지기 쉬운 우리의 마음을 주께서 말씀의 기름으로 부드럽게 하셔서, 주님의 진리를 따라 살고 싶어하는 속살이 돋아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한 은혜 없이, 우리들이 어떻게 강포한 죄인이 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어떻게 우리들이 하나님의 법도를 멀리 떠난 방탕한 인간들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장 하나님은 이러한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린 위기 속에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방법은 프로그램이나 계획을 가지고 하려고 하고 인간의 방법들을 의지하는 것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서 있는 자리가 높은 곳이면 높은 그 자리, 여러분들이 서 있는 자리가 진리의 빛이 비취는 곳이면 그곳,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어두움 속에 있다면 바로 그 자리, 죄의 수렁 속에 있다면 그 자리에서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내가 인생의 이런 자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몸부림 쳐봐도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한계를 느낍니다. 하나님, 말씀의 미각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정직하고 진실하게 부르짖는 울부짖음도 하나님의 시선을 끌지만, 진실한 마음 때문에 차마 말끝을 잇지 못하는 중얼거리는 기도도 하나님의 시선을 붙잡기에는 충분합니다. 정직하게 숨김없이 “하나님, 내 영혼의 빈 잔을 채우시옵소서, 말씀의 미각을 새롭게 회복시켜서 진리의 빛 가운데 살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거절하신다면 그분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실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소망을 가지십시오. 말씀의 미각을 회복시켜 주시도록,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이 인생의 위기를 진리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며 위기 속에서 건져주시면 그 은혜를 기억하며 내가 회복시켜 주신 말씀의 미각을 가지고 주시는 진리의 말씀을 따라 충성스러운 삶을 살겠나이다.’ 이 고백을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듣고 싶으신 것입니다.
16.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복하라
저희가 나를 세상에서 거의 멸하였으나 나는 주의 법도(法度)를 버리지 아니하였사오니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로 소성케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입의 증거를 내가 지키리이다(시119:87-88)
아무리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고난이 많이 겹치면 영적인 어려움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찾아오게 마련이다. 인간은 무쇠가 아니고 돌멩이가 아니다. 그저 질그릇 같이 연약한 존재일 뿐이다. 혹시 인간이 위대해 보이고 매우 강하게 보이는 때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인간 자신의 위대함과 강함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매우 특별하게 그를 붙들고 계셨기 때문에 우리들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자기 자신의 분수를 알고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질그릇 같이 연약한 존재인지를 알아서 곤고할 때는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고 형통하고 잘 살 때에는 질그릇과 같이 연약한 인간이 이렇게 잘 사는 것이 하나님 때문이라는 사실을 겸손히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 110편의 저자가 다윗이라는 사실을 많은 구약 성서 학자들이 생각을 같이 하고 있다. 오늘 읽은 81절부터의 말씀의 문맥을 보면 뭔가 이 시인이 깊이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보게된다. 다윗의 생애를 두 단어로 요약을 한다면 영광과 슬픔으로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장엄한 영광을 본 사람,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슬픔을 많이 겪은 사람, 한 나라에 제왕이면서도 부러울 것이 없는 영화를 누렸어도 이 세상에서 항상 나그네처럼 따돌림을 받았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들이 다윗의 생애에서 고통스러운 일들을 대체로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서 정처 없이 망명의 길을 떠났던 괴로움과 개인적으로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하고 나서 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깊이 고통 하는 두 가지를 거론한다. 그러나 그것은 대표적인 경우이고 성경에 기록된 경우일 뿐이다. 어디간들 슬픔이 없고 고난이 없겠는가? 다윗은 자기의 생애에 압살롬의 반역 말고도 세바의 반란을 경험했다. 간악한 무리들이 왕권에 도전하고 자기 배속으로 난 자식들이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광경을 보아야 했던 사람이다. 슬픔이 없었을 리가 없었다.
이 82절부터 87절까지의 상황이 다윗의 생애에서 어떤 시기를 염두에 두었는지를 정확히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은 확실한 것 하나는 그는 지금 이 단락을 써 갈 때에 염두에 두었던 것이 수많은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있고 자기는 외톨이가 되어있는 그런 상황을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시인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낙인이 찍힌 죄인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으며 죄의 대사를 치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기보다는 의롭게 살아가려고 애를 쓰면서도 하나님을 모르는 교만한 인간들의 의해서 고통을 당하고 압제를 당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시인을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은 악하고 야비할 뿐만 아니라 아주 영리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다윗이 어느 길로 걸어갈지를 알고 함정을 파 놓고 올무를 놓아서 그가 망하게 되기를 기다리는 그런 원수들이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사람일 수도 있고 또 그 악한 사람들을 움직여서 자신의 신앙에 도전하는 영적인 악한 세력들일 수도 있다. 둘 다를 모두 의미하는 것이다.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당할 때에는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믿음이 좋아지고 영적으로 펄펄 나르는 것처럼 묘사를 하지만 그러나 실제로 고난을 당해본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말하지 않는다.
오늘 시인은 원수들에게 에워싸이고 대적들에게 핍박을 받으면서도 진리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의로운 길을 걷는 하나님의 자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되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연기 속에 가죽병과 같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병은 가죽으로 만든 물통인데 그것이 사람들에 의해서 휴대되는 동안에 가죽에 손떼 가 묻게 된다. 물통을 차고 양을 치거나 먼길을 여행하게될 때 날이 추우면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모닥불을 지피면서 추위를 피하게 된다. 그 때에 그 가까이 에서 연기를 쏘이면서 가죽 병에 연기가 깊이 베이고 찌들게 된다. 손떼 와 먼지까지 묻게되어 더욱 까맣게 된다. 그리고 지저분하게 되면서 또한 열을 받으면서 가죽에 있는 습기들이 빠져나가고 이제 가죽은 비틀리게 된다. 그러면서 쭈굴 쭈굴 해진다. 볼품없는 모습으로 전락하게 된다.
다윗이 비록 의로운 사람으로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려고 했었지만 그도 역시 계속되는 고난에 직면하면서 그의 영혼이 연기에 깊이 뒤틀린 가죽병과 같이 곤고한 상태가 되었다고 오늘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죄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은 물론 곤고하다. 그러나 자신의 죄가 없다 고할지라도 의를 위해 고난을 받을 때 저절로 힘이 쏟아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문제는 고난이 찾아 온 이유 즉 고난의 종류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 앞에서 어떻게 그 고난을 감당하느냐에 따라서 그 고난이 우리의 영혼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게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이다.
오늘 이 시인이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려고 하지만 수많은 원수들에게 에워싸였고 비참한 박해와 핍박을 받고 수시로 파놓은 웅덩이에 떨어지기를 고대하는 원수들에 의해서 자신이 압제받고 있는 모습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토해놓으면서 그는 영적인 회복을 하나님 앞에 구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88절에 나오는 “주의 인자를 따라서 나를 소성케 하소서”라는 말씀이다. ‘소성케 하소서’ 라는 이 단어가 히브리 성경에는 ‘살게 하시옵소서’ 라고 되어있다. 시인은 거듭되는 고난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로 오는 구원을 간절히 갈망하면서 자신이 고난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죽은 자와 같이 되었음을 고백하면서 주님에 의해서 자신의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는 것 같은 소생을 경험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인생이 유난히 힘들게 느껴지고 믿음을 따라 살려고 할 때에 나를 박해하려는 사람들이나를 에워싸서 원치 않는 고통을 겪으며 주님이 아니었더라면 얼마든지 형제가 될 수 있는 사람들과 원수를 맺으면 살아가지 않으면 안돼는 상황에 떨어지게 되었을 때 우리는 제일 먼저 무엇을 구하게 되는가?
우리는 항상 상황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미워하는 사람을 멀리 보내 버리게 해 주시든지 돈이 없어 고통을 받으면 돈벼락을 맞게 해 주시든지 큰 고통과 어려운 한란이 오면 하나님께서 상황을 바꾸셔서 그 환난과 고통이 물러나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이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가장 다급한 기도 제목이다.
(예화) 교회와 붙어 있는 사택에 사시는 어느 감리교 목사님이 매일 밤마다 와서 큰소리로 아 들의 등록금을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던 성도의 기도를 우연하게 듣고 등록금을 주면서 다음부터는 열심히 일을 하고 기도할 때는 속으로 기도하라고 권면한 이야기.
사실 어려움에 처하고 나면 제일 급한 것이 현재 당하는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 문제를 위해 다급하게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 이 시인의 기도의 자세를 보면 참 신선한 충격을 받게된다. 그는 무엇을 기도해야 되는지를 알았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핍박과 압제를 당하고 그리고 자기 앞에 놓인 수많은 올무와 함정을 보면서 그는 그 원수들을 하나님께서 멸하여 주시고 그리고 그들의 궤계를 수포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과 함께 원한을 풀어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과 함께 그가 더 깊이 관심을 집중했던 것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연기 중에 가죽병과 같이 된 나의 영혼을 소생시켜 달라고 살아나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은 어떤가? 우리가 정말 영적인 사고방식을 갖은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우리 앞에 펼쳐지는 삶의 모든 환경의 변화, 때로는 형통함과 평화로움과 그리고 우리의 뜻대로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는 그런 삶에서뿐만 아니라 때로는 우리의 뜻이 좌절되고 고난이 겹치고 원수들에 의해서 조롱을 받는 악한 상황에서조차 우리의 가장 커다란 관심사는 우리를 핍박하는 악한 사람들이나 혹은 우리의 형통한 세상형편이 아니라 영적 사고방식으로 볼 때에 우리에게 있어서 우선 적인 관심사는 우리 자신의 영혼이 그 상황에서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는 것이 우리의 주된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움 속에 있을 때에도 단순히 그 어려움을 물리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대신에 우리의 어려움이 물러가는 그 과정과 함께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회복되기를 아울러 기도해야 된다는 것이다.
매튜 헨리 목사 자신의 주석에서 병든 교우들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들을 위해서 지체들이 병상에 누워있을 때 무조건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의 병을 고쳐 주시고 이 사람의 육신이 질병으로부터 건강을 회복하는 과정이 그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회복되는 과정과 하나 되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해야 된다”는 충고를 하였다.
우리들도 어떤 상황에 놓여있든지 우리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우리들의 영혼이 되고 있는가? 자신을 고통 가운데 몰아넣는 사람이나 환경과 더불어서 싸우다가 보면 때로는 우리의 영혼을 돌아보는 것을 매우 소홀히 하고 상황과 더불어서 씨름하다가 보면 우리도 우리의 원수들처럼 악해질 때가 많은 것을 발견하게된다. 상황과는 싸워서 이겼지만 은 마지막에 남은 것은 상황에서는 이기고 승리했지만 그러나 깊이 잠들고 상처받은 채 병들어 있는 자신의 영혼은 회복되는 못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병들고 잘못된 영혼을 가지고 형통함 속에서 사는 것보다는 약간 고통이 있고 시련이 있어서 눈물을 머금어야 하는 인생의 골짜기를 지나면서라도 건강한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는 더 복된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모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오늘 시인은 원수들에 의해서 에워싸이면서 한편으로는 언제나 이 원수들로부터 받는 핍박과 박해를 기억하시고 저들을 국문 하셔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죄 없고 정당한 것을 입증해 주시렵니까 하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면서 그는 연기를 깊이 마셔서 쭈글어 들은 가죽병과 같은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그는 당연한 관심을 기울이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먼저 살기를 소원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오늘 여기에서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켜 달라고 하는 이 동사는 하박국에서는 ‘부흥을 주소서’ 라는 말로 번역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냥 산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버려두면 깊이 죽어있을 수밖에 없는 그것을 한 순간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펄펄 살아있는 상태로 바꾸어 놓아 버리는 하나님의 영적인 부흥이다.
우리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태어나서 비교적 평탄한 인생을 살다가 가기도 하고 오늘 오면서 읽은 어는 간증집에는 정말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것같이 파란 만장한 생애를 산 어느 권사님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짤막하게 줄여서 쓴 글에도 파란 만장하다는 느낌을 받는데 실제 그의 인생의 길을 걸어온 본인이야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그러나 우리들이 잊자말고 기억해야 할 것은 조금 편안하게 살았던 사람이든지 조금 고통을 받으며 사는 사람이든지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동안에는 그것이 큰 의미가 있지만 얼마 안돼는 인생을 마름하고 나면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었는지 고난을 얼마나 받았는지 얼마나 호강을 누리며 살았는지는 지나고 나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늘 시인은 자기가 비록 원수들에게 에워싸이고 악한 자들에게 고난을 받으면서 살아가지만 그것은 잠시 지나는 상황이고 거기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그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영혼에 소생이라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우리들은 성도들을 고난 가운데 다루시는 손길들을 배워야한다. 한 사람의 신앙이 얼마나 깊고 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은 인간의 고통을 다루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얼마나 폭넓게 이해하느냐 와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신앙이 어렸을 때는 우리에게 시련과 고통이 올 때에 보이는 반응도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은 그러나 신앙이 성숙하면 우리를 고통을 통해서 다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보는 안목이 생겨나기 때문에 고통에 대한 반응도 성숙하게 마련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오늘 이 시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애를 쓸 때에 원수들에게도 에워싸이게 하시고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로부터 고통을 당하게도 하시고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거나 깊이 아꼈던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게 하기도 하신다. 그러한 우리의 변화무쌍(變化無雙)한 우리의 인생의 상황은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항상 맞물려 있다.
즉 다시 말해서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지 않을진대 사랑하는 자녀들이 애매하게 고통을 당하는 상황, 사랑하는 자녀들이 수많은 원수들에게 에워싸이고 아픔과 시련 속에서 고통 하여야 하는 그 상황이 그들의 영혼을 향해서 어루만져서 그들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관계가 없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이 이 고난을 통해서 내 영혼을 새롭게 하시기를 원하시는구나 하는 그 인식을 갖기까지는 그의 고난에 대한 태도는 단지 아픔만을 느끼는 동물적인 반응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는 것이다. 인간과 동물이 구별되는 것은 고통을 당할 때에 아픔을 느끼는 것은 인간과 짐승이 동일하지만 인간에게는 동물에게는 없는 능력이 있는데 그것은 고통의 의미를 생각할 줄을 아는 그러한 지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육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서 육신의 감각만을 의지하면서 살아갈 때에는 많이 고난을 받아도 그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모른다. 결국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들을 미워하고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신앙이 깊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돈독해져서 그의 사고 방식이 영적인 사고방식에 많이 기울어져 있을 때에는 작은 고난을 통해서도 커다란 의미를 깨달을 줄 아는 이 사고력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의 작은 고난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주님의 섭리가 무엇이고 하나님이 왜 사랑하는 자기에게 이러한 작은 고통을 당하게 하시는지를 깨달아서 고통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가 돈독해지는 그런 학습들을 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가졌던 이러한 영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우리들의 고난을 보기를 원한다. 무엇보다도 고통받는 문제 자체만을 보지 말고 그 속에서 우리들의 영혼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를 살펴보라는 말씀이다. 고난을 하나님도 다루시고 우리도 우리의 고난을 다룬다. 물론 하나님을 우리 앞에서 당신의 고난을 다루시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고난을 하나님과 함께 다루어 나간다. 그 과정을 통해서 그 고난 속에서 우리들을 구원해 달라고 호소하고 실제로 우리들이 그 고통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힘쓰고 애쓰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들의 영혼도 소생되어 가고 있는지 오늘 우리 자신이 점검해 보아야 한다.
두 번째는 지난주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시편 119편에 흐르고 있는 구원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의 관계를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원수들에게 둘러싸여서 압제를 당하고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에 이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 구원은 두 가지의 방향인데 하나는 육적인 어려움과 고통에서 하나님이 건져주시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연기 중에 메말라 버린 물병과 같이 되어버린 자신의 파리하게 된 영혼을 하나님께서 새롭게 소생시켜 주시는 구원이었다.
이런 것을 간절히 사모하는 이 시인이 어떠한 태도로 원수들로 말미암은 고난과 압제를 받으며 그 고통을 당할 때에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았는지 생각해 보자. 오늘 성경은 “주의 법도를 잊지 아니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고난을 당할 때에 우리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관은 항상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만들고 시험에 들면 우리는 악해지기 쉽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는지 상기해 보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다. 이 시험은 단지 자기가 욕심에 이끌리어서 미혹을 받아 떨어진 시험이든지 자기는 의로운데 외부로부터 큰 고통과 아픔이 찾아와서 시험에 들게 되었든지 그것은 주관성과 객관성이 문제이고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는 그 기도는 그런 식의 확연한 구분이 아니다. 비록 그것이 자기를 죄 가운데로 끌어가기 위해서 다가오는 유혹이라고 할지라도 그 유혹을 단 칼에 베어 버리고 좇아가지 않으면 그것은 테스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시험을 예수님도 당하셨다.
그러나 나는 의로운데 악한 사람들이 자기를 조롱하고 고통을 주는 가운데에 자신의 영혼이 깊이 병들고 그래서 결국은 시험에 들게되면 그것은 ‘테스트’로 시작되었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템프테이션’ 즉 유혹을 받아서 시험에 떨어지게 되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그 이유가 어디로부터 그 기원이 어디로부터 왔든지 그것이 우리들에 의해서 어떻게 받아드려지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죄로 이끌려 가는 시험이 될 수도 있고 또 우리를 연단하는 시험이 될 수도 있다. 어째든 그런 시험에 들게되면 악에 떨어지기 쉬운 것이 공통점이라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아셨기 때문에 시험에 들지 말게 해 달라는 기도와 아울러서 악에 빠지지 말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함께 하도록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이다.
그런데 이 시인이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절대적인 상황에서 자신을 점검하고 하나님께 고백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러한 시험 속에서 영혼의 회복을 간절히 갈망하는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지키면서 살아가는 거기에다 실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시인은 원수들에게 공격을 당하면서 영혼의 깊은 고통을 받고 어려움을 느끼면서 그가 그 속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면서 끝까지 잃어버리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 말씀에 대한 미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충성스러움, 그것 하나를 신앙의 마지막 보루(堡壘)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놓치지 않으려고 몸부림 쳤던 것이다.
큰 고통과 어려움 속에 있을 때에 망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기도를 한다. 그런데 고난이 많이 겹치면 우리의 기도의 더 힘이 솟아나고 열정이 솟아나야 되는데 그럴 경우보다는 사실은 육신의 힘과 함께 영적인 힘도 잃어버려서 기도의 영력도 약해지는 것이 연약한 인간의 고통적인 경험이다.
그러면 오늘 초점은 그렇게 뭔가 인생에 있어서 깊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그때에 정말 열렬하고 간절한 기도를 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는 것이다.
(예화) 가뭄에 물을 대기 위해 양수기의 시동을 거는 것을 기도와 비유한 이야기.
그것은 고난 자체를 주목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는데서 나오는 것이다. 모든 답은 거기에 있다. “주 여호와 능력의 주 내 영혼의 치료자 말씀으로 고치시네 주는 나의 치료자”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못하는 것이 이해가 간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회복되는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을 때에 말씀을 제쳐놓고 말씀에 미각은 어떻게 됐는지 관심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사랑은 제쳐놓고 “뭔가 요행수가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기대는 ‘혹시’ 하다가 ‘역시’ 하고 끝나게 마련이다.
간악한 원수들에게 에워싸여서 그는 “나는 이 세상에서 거의 죽게 되었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내가 그 땅에서 거의 끝장나게 되었다”라고 되어있다. ‘끝내버리다’ 라는 동사가 사용되었다. 다시 말하면 메 달려 있는 것을 끊어 가지고 간신히 메 달려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사면을 돌아보아도 돕는 자가 없다. 고난을 많이 당해보셨습니까?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성도들도 외로움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바로 그것 때문이다. 정말 고난이 겹치고 인생의 아픔이 겹치면 이 세상에 누구도 자기를 도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그렇게 가까이 느껴졌던 수많은 사람들이 심지어는 피붙이들까지도 자기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방에 땅에서 객이 된 것과 같은 고백을 시인과 함께 하게 되는 것이다. 나그네와 같은 처지에 있으며 누구도 나의 이 고통과 아픔에 동참할 수 없고 이 시험 속에서 당하는 거의 끝장나버릴 것 같은 죽음의 상태에 인박해 있는 자기 자신을 하소연 할 대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원수들에게 에워싸이고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삶의 벼랑 끝에 내 밀린 것 같은 위기감을 느낄 때에 이 시인은 무엇을 굳게 붙들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다. 얼마나 미련한 일인가? 악한 원수들에 에워싸였으면 빨리 마당에 나가서 칼을 갈아야 마땅한데 그래서 원수를 단 칼에 베어 버리는 것이 상황을 반전시키는 방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그는 칼 대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끓었다. 숫돌에 칼을 가는 대신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의 마음을 갈았다. 그리고 그 말씀 앞에서 온전하게 되기를 힘썼다. 그리고 고난 속에서도 말씀을 지키면서 살게 해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지혜를 얻었다. 이것이 성도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당하는 고난 속에서 경건을 잃지 않는 방법이다.
우리의 인생에 고난이 닥치고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깊은 심적인 고통에 시달릴 때 원수들이 흔히 하는 일은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나아가서는 우리의 머리를 흔들어 놓는 것이 원수가 하고 싶어하는 일이다. 흑암과 그늘에 앉은 사람들과 곤고의 쇠사슬에 메인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이다.
태국의 에이즈 예방 홍보이야기(“에이즈에 걸리지 않았으면 정말 조심하시오 그리나 걸렸으면 빨리 죽으십시오”)그런데 이러한 말씀은 저의 개인적인 견해를 들어내거나 목회적인 방침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곤고한 쇠사슬 가운데 메여있는 사람이 정말 자신의 영혼을 건지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의 소생을 위해서 정말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면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야 된다는 것이다. 그 이외에는 길이 없는 것이다. 없는 길을 있다고 가르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오늘 우리들은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손끝에 박힌 가시와 같이 아프고 어려운 상황들을 누구든지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어떤 사람은 손마디가 끊어져서 피가 뚝뚝 흐르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있는 사람들도 있고 작은 가시가 박힌 것과 같이 잊어 버렸다가는 혼자 있을 때 고통이 생각나는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도 있다고 믿는다. 거기에서 헤어 나오고 그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고통보다도 더 큰 위대한 구원을 경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시인에게서 우리는 이것을 배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우리로 하여금 귀 기울여 듣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회복하게 하셔서 말씀 속에서 우리의 악한 상황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우리를 고통 가운데 몰아 넣는 원수들의 마지막 운명에 대해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고난을 이기며 살아야 할지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어서 그 고난을 피할 길을 발견하게 만들어 줄뿐만 아니라 고난과 어려움에 봉착하면서 그것과 더불어서 싸울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것과 더불어 싸워서 이기고 극복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강한 힘을 하나님께서 부어 주신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정말 지니고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정말 우리는 우리 안에 이제껏 앞으로 남아있는 우리의 인생을 정말 승리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그 무엇이 하나님과 관계없이 우리에게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것은 없다.
이제껏 산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고 어둠 속에서 산 우리들이 이 만큼 빛 가운데로 걸어 나온 것은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우리는 약하다. 한없이 힘이 없고 모질게 부는 폭풍과 같은 바람 앞에 꺼질 듯 흔들리는 한 개의 등불의 지나지 않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자랑할 것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들이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말씀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를 붙드시면 우리는 이길 수 없는 상황을 우리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 때문에 이길 수 있다는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남은 우리의 미래를 과거보다 훨씬 더 잘 살아서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릴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을 당할 때 영혼의 회복을 원하는 사람들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더 깊이 회복하고 그 말씀 속에서 정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그것 하나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애써서 마음을 지키고 주의 진리를 붙드는 충성스런 말씀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로 오늘 시인은 하나님 앞에 주의 구원을 간절히 호소하고 자신의 영혼을 회복시켜 주시도록 간절히 호소하면서 “주의 증거를 지키리이다”고 다시 한번 아버지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고통에 빠졌을 때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고 고대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고대하는 것처럼 주께서 자신을 그 고난과 어둠 속에서 건져 주셨을 때에는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지금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기도의 제목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10월 10일을 기대하면서 이제껏 구원을 받지 못해서 늘 마음에 무거운 짐이 되었던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 여러 사람들이 눈물로 기도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런 마음에 깊은 고통이 되는 어려움 들을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셔서 우리들의 가정을 복음으로 모두 돌아오게 하면 우리들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겠는가? 그토록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시고 주님의 말씀을 더 깊이 깨닫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고 성령의 능력을 간구하는 우리들에게 충분한 하늘에 성령의 능력을 부어 주실 때 최종적으로 우리들의 삶은 어떻게 나타나야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오늘 시인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위급할 때에는 하나님 앞에 수많은 공수표를 남발(濫發)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어려움 속에서 건져 주시고 영혼의 회복을 주시면 이제 회복되었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미래가 없다.
(예화) 몇 해 전 필리핀에 갔을 때 필리핀 사람들이 얼마나 미래가 없는 사람인지를 선교사에 게 들은 이야기.
정말 피 눈물을 흘려서 위기와 고난을 크게 승리해 놓고 위기와 고난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놓고 막판에는 낙서하듯이 아무렇게나 인생을 살아서 다시 주님이 주신 구원의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시험 가운데 빠진 적이 얼마나 많은가? 무엇 때문인가?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들을 고통 가운데서 건져주시고 우리들의 영혼을 소생시켜주시고 우리들은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만을 가지고는 갚을 수가 없다. 온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 예전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은 예전 보다 더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며 주님만을 높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서만 충성을 고백하는 삶, 그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존귀하게 받들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들의 삶을 움직인다는 사실을 굳게 기억하면서 주께서 우리의 어려움에서 우리를 건져내시는 축복을 주셨을 때에 우리는 즉각적으로 우리의 마음이 피를 뿌리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로 충성을 다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들의 영적인 건강함이 유지되고 주님께서 우리를 더 깊은 은혜의 세계 속으로 데려 가셔서 우리로 하여금 성숙하고 찬란한 신앙생활을 이어가서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도록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다. 우리들이 이렇게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을 간절히 빈다.
17.예루살렘으로 모이라
유다와 예루살렘의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들에게 공포하기를 너희는 예루살렘으로 모이라(스10:7)
에스라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다가 70년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국으로 돌아올 때에 그들을 인솔했던 지도자였습니다. 이 사람은 선지자는 아니었지만 경건한 학사였고, 동시에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경건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진리의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지도자가 되기에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온 이후로 얼마간 세월이 흐르니까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근성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이방 여자들과 쉽게 혼인하고 이방 문화에 빠지는 습관이었습니다. 그런 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방 여인들과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 잡혼이 심각하게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많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경건한 지도자 에스라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에스라는 10장에서 하나님의 전으로 나아가서 거기에 엎드려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게 된 패역한 죄의 상태로 인해서 깊이 애통하게 되었고, 지도자가 그렇게 애통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다시 일어서서 여호하난이라는 사람의 방으로 들어가서 금식하면서, 이 민족이 처해져 있는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고 해결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깊이 고민하며 하나님께 고민한 후에 결단을 내리고 올라와서 한 얘기가 “너희는 예루살렘으로 모이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모여서 그 유명한 에스라의 집회가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추상같은 명령, “어디에 너희들이 흩어져 있든지 삼일 안에 오지 아니하면 너희 재산을 전부다 몰수하고 가만두지 않겠다” 그런 서슬 시퍼런 명령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보였을 때에는 비가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깊이 떨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내리는 비 때문에 육신이 너무 추웠기 때문이지만 그러나 심령적으로는 이제 이 경건한 지도자를 저토록 분노하게 한 것을 통해서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지은 죄가 얼마나 큰지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일이 주어질지도 모른다라고 하는 심적인 가난함과 비가 내리는 날에 온몸에 비를 맞으면서 떨고있는 육체적인 가난함이 함께 어우러져서 그들은 그야말로 하나님 앞에 초라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지도자 에스라가 입을 열면서 그들의 죄를 지적하며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라고 촉구했을 때, 거기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 일부의 사람들을 빼놓고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깊이 인식하면서 에스라의 지시를 따라서 자신의 삶을 바꾸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간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잘못된 결혼이었지만 결혼은 성립했고, 자신의 피를 받아서 태어난 아이들이 자라고 있었는데 그 아이들과 함께 여자까지 모두 내어쫓는다고 하는 것은 가족 관계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거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순종했고, 에스라에 의해서 소집된 이 집회는 성공리에 그들을 깊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세우고, 한번 더 나아가서는 그들 속에 오랫동안 뿌리박았던 깊은 죄악 된 생활들을 완전히 청산하게 만들어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설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에스라서 전체, 특별히 10장의 스토리입니다. 오늘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에스라가 깊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결단한 후에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모이라고 촉구한 사실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이라고 한 것은 단지 그들이 예루살렘에서만 정착했고 다른 곳에서 모일수가 없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모이라고 한 것만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은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서 일하시는 방법을 보여준다라는 점에서 우리는 매우 특이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하에서 이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이게 되었는지를 먼저 말씀을 드리고 두 번째로는 예루살렘으로 모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말씀을 드림으로서 오늘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우선 첫째는 어떤 상황에서 이 사람들을 예루살렘으로 모이라고 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상황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매우 잘못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들을 예루살렘으로 모이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이 아니라,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었다가 특별히 고국으로 귀환하게 되었는데 이 사람들은 자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성경은 하나님이 특별히 감동한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성령의 감동을 주신 사람들이 자신이 70년 이상이나 살아가던, 20년을 한 대라고 말한다면 할아버지, 아버지, 자기 때에 와서, 그 이상이면 증조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왔을 긴 세월동안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삶을 모두 정돈하고 재산을 정리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예루살렘은 활짝 열린 아파트 단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보면 알지만 이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후에 이들이 얼마나 이민족들에게 박해를 받고 어려움을 당하는지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그런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래도 많은 사람들 중에서 스스로 자원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된 것은 신앙심 때문이었다고 밖에는 우리는 해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단순한 향수만이 아니라, 이것은 분명한 신앙심 때문에 감화가 되어서 지존하신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중심으로 일하시던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되겠다 라고 하는 성소에 대한 열망을 가진 신앙이 이들로 하여금 안일했던 바벨론의 삶을 모두 청산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끔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런 신앙을 가지고 올라온 사람들이 시간이 점점 흘러가자 안일한 생활에 빠지게 되었고, 처음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의 도시로 바뀌어야 된다라고 하는 처음의 불타는 사명감과 구약종교에 대한 그리움들은 모두 사라지고, 이제는 이방 여인들과 짝하고 결혼을 하면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잡혼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런 현상들이 이제는 깊이 파고 들어와서 자신의 힘으로는 더 이상 그런 것들이 잘못되었다 라고 하는 사실을 안다고 하더라도 고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들이 예루살렘에 모이도록 오늘 에스라에 의해서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이유가 돼서 모이는 무리들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이 이유가 되지 않는 이유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을 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모으셔서 그들이 모였을 때, 하나님께서 들이 처한 신앙적인 위기를 깨닫게 하시고,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어려운 난관들을 헤쳐나갈 지혜를 하나님 앞에서 얻게 하셨습니다.
오늘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전에 크게 받고 예루살렘까지 올라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동안 자신들이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선택되어서 영광스러운 예루살렘에 발을 들여놓고, 여기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주님의 성전을 짓고, 경배하며 살수 있게 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감격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세상의 죄가 깊이 들어와서 자신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바로 그 때에 하나님께서 이들을 에스라를 통해서 예루살렘에 모이도록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정말 진실하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역시 가끔씩 모이는 이런 사경회는 필요합니다. 정말 제가 꿈꾸는 교회는 매주일 모일 때마다 부흥회이고, 수요일 모일 때마다 부흥회여서 이런 사경회가 필요가 없는 교회가 되는 것이 저의 진실한 꿈이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 있는 교회는 완전한 교회가 아닙니다. 대다수의 성도들이 승리하며 산다고 하더라도 실패를 숙명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불쌍하고 연약한 신자들이 어느 교회이든지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적절하게 교회의 도움을 받지 아니하면 그들이 실패하고 있는 신앙생활은 훨씬 오래 지속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못 만나면 그들의 신앙생활이 계속 절름발이 신앙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사경회를 엽니다. 어떤 사람들은 1년에 네 번이니까 너무 자주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것은 정말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말 곤고하고 어렵고 무엇인가 하나님께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깊은 죄와 악에 빠져있고 영적인 침체에 빠져있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스스로 일어나기에 너무나 힘겨운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는 언제든지 그런 도움이 교회로부터 주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처지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이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전에는 열렬한 신앙을 가지고 사명감으로 예루살렘에 올라왔지만 지금은 그런 사명감과 감격을 모두 잃어버리고,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죄악된 삶의 엉클어진 모습이 되었을 때 에스라는 예루살렘으로 모이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촉구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한때 은혜를 많이 받았지만 그 은혜를 여전히 유지하고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감격하면서 그 말씀 속에서 빛을 얻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도를 새롭게 깨달아 아는 일에 기쁨과 감격을 누렸는데 지금도 그런 일들이 계속되고 있습니까? 혹시 예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깊은 신앙의 감격을 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너무나 오랜 세월이 흐르고, 마음속이 이 세상이 더러운 욕심이나 혹은 여러 가지 죄로 말미암아서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감각이 여러분 마음속에서 사라져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신앙의 감격이 여러분 속에 식어지고 있지는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여러분 자신이 하루하루 의식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살다보니까,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예전이 풍성했던 신앙생활은 모두 사라지고 영적으로 매우 가난하고 곤비한 사람이 되어서 ‘이전에 내가 그런 깊은 은혜의 세계 속에 들어갔던 사람인지, 아니면은 전혀 그래 본적이 없는 사람인지’ 자신에게 물어봐도 대답할 수 없는 처지가 될 정도로 죄 가운데 있어서 곤고한 마음이 된 채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따금 영적인 회복을 위해서 움직여보지만 그러나 자기 힘보다는 훨씬 더 무거운 멍에를 메어서 주저앉는 것 같은 서글픈 신앙생활이 계속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랫동안의 침체를 털고 일어서서 열렬한 신앙과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영성을 가진 사람으로 다시 일어서는 신자들을 보면서 부러워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향한 추구를 대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때가 바로 교회에 모여야할 때라는 말씀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교회에 모여도 하나님의 관심을 전혀 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의미에서 관심을 끌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대회로 모이고 월삭과 절기로 모이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비난이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들의 신앙이 갈 길을 잃고, 여러분이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이전에 많이 알았어도 여러분 자신이 도대체 누구인지를 모를 때 정말 내가 이전에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 속에서 산 것이 꿈결처럼 느껴지고, 또 오늘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곤고한 가운데 살아가는 이것,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죄 속에서 매몰된 채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기만 하면 마음이 돌 같이 묵직해 오는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속에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그럴 때 여러분들이 돌아가야 할 곳은 교회입니다.
어디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도 하나님의 시선을 전혀 끌 수 없지만 그러나 진실로 자신이 삶을 돌아보면서 통회하는 마음으로,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집에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의 모임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냥 돌려보내시는 법이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가깝게는 여름 수련회가 지나가고, 멀게는 신년 사경회가 지나가는 이후로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남이 여러분들을 인정해 주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양심 속에서 들여오는 음성을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한 사랑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유지하면 살아오셨습니까? 얼굴은 악마의 손톱에 할퀴어졌고, 온 몸은 영적인 전쟁에서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그러나 승리하면서 살아왔습니까? 여러분들이 오늘 이 성경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깊은 영적인 침체에 빠졌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1년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에 산등성이를 넘었고, 지금은 마지막 고지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한번 더 고지를 넘고 11월, 12월은 미끄러지듯이 그 고지에서 달려 내려오면 이제 한 해의 산을 넘은 것입니다. 그렇게 한 해의 산을 넘고 나면 멀리 보이는 영원한 안식이 있는 가나안 땅이 훨씬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아무렇게나 살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나 짧고, 잘 살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나 깁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유능한 사람이나 무능한 사람이나 똑같은 사람에게 우리의 일생을 주셨고, 시간은 그들의 능력에 상관없이 공평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1년 동안을 죽지 않고 살아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에게는 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사랑을 받아서 주님이 공급해주시는 능력으로 한 해를 출발했어도 이제 모든 이 세상의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가는 이 때에 우리의 신앙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우리의 열매는 어떻습니까? 충분합니까?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고도 열매가 매우 적은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어서 다가오는 겨울이 우리에게 두려워진다고 한다면 결국, 그렇게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입고도 열매를 맺는 삶을 살지 못한 이유는 결국 우리의 침체된 생활 때문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분투하면서 1년을 살아왔고 우리가 이렇게 살수밖에 없었던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실패할 적도 있었지만 성공할 적도 있었습니다. 부끄러운 때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들은 모두 지나갔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불과 두 달 반 정도밖에 남지 않은 이 금년에, 우리들이 지난 십 개월 동안 나태하게 살았던 삶들을 보상하고,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과 나태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꼭 이루시고 싶으셨지만 이루지 못했던 일들을 남은 두 달 반 동안에 훌륭하게 이루어서, 우리들이 12월의 문을 나서면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고 한 해 동안에 마지막에 전심전력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찾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주님을 섬겼더니, 마지막 두 달 동안에 추수한 열매가 열 달 동안에 거둔 열매보다 훨씬 많았기에 ‘그래도 지난 한해는 하나님의 은혜에 참 감사하다’라고 회상할 수 있는 한해가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렇게 침체 속에 있는 성도들이 새롭게 일어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지금 죄와 불순종 때문에 깊은 침체에 빠졌고,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침체 속에 빠져 있어서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에 불러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들을 절망시키거나 자기의 죄에 직면하여서 낙망하게 하는 대신에 거기에서 주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율법의 요구를 따라서 이제껏 우리들이 살기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삶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부어지니까, 그들이 오랫동안 자신들은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해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방여인들과 은밀하게 교제하면서 자식들을 낳고, 부정직한 타락한 가정생활을 이끌어가던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시에 그 죄악에서 벗어나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공동체로 변모될 수 있었습니다. 잠깐 동안에, 단 몇 일 사이에 하나님께서 이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침체에 빠진 것은 죄와 불순종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 자기의 안목의 좋은 데로 여자들을 고르고, 자기의 육체가 원하는 데로 그 여자들과 함께 살면서 자식을 낳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막히고 주님이 은총으로 올려 보내주신 감동 받은 그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심히 근심시켜드리는 물건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깊은 침체에 빠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자기 육신의 좋은 데로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이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던 그 신앙의 감격, 성소에 나아가 하나님을 뵈옵는 감격을 잃어버리고 이제는 차갑고 냉담한 사람들이 되었고, 깊은 침체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영구히 우리들이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하는 보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셨어도 우리들이 매일매일 자기를 이기며 사는 극기 없이, 자기 부인의 승리한 삶이 없이는 진정으로 세상을 이기는 삶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런 침체 속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부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 다시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삼일 내에 올라 오라!” 저는 에스라가 가지고 있었던 이 권한이 매우 부럽습니다. “삼일 내에 올라오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으리라!” 저에게는 이러한 힘이 없습니다. 다만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이 에스라 보다도 훨씬 더 강한 힘을 가지신, 여러분 안에 있는 성령님,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에스라의 행정적인 권한보다도 더 큰 영향을 발휘하는 여러분의 신앙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이제 침체 속에서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쳐버리는 한 해로 끝내시렵니까? 아니면 이 시점에서 ‘내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이때에 이제껏 살아온 날들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남은 날들이라도 금년에 유종의 미를 거둬야 되겠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시렵니까? 나는 오늘 여러분들이 특별히 이 에스라의 명령을 듣고 순종하며 올라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천을 본 받기를 여러분들에게 강력히 촉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은 아주 패역하게 율법이 가장 혐오하는 죄들을 저지르고 전부다 특이들을 낳아서, 혼혈아들을 낳아서 가정 자체를 다 붕괴시켜버린 흉악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지도자의 음성에 순종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지금 에스라 앞에 떨고 서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보다는 훨씬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에스라의 백성들이 에스라의 명령을 듣고 ‘예루살렘으로 올라 오라’ 말했을 때 모두 순종했던 것처럼 여러분들도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리라고 기대합니다.
여러분,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올라오라고 강력하게 촉구했을 때 “삼일 안에 안 올라오면 재산을 전부다 빼앗고 가만두지 않으리라” 살벌한 엄포를 놓았지만 그것은 사실은 예루살렘에 모여서 하나님과 막힌 담을 풀고 그들을 복 주시려는 하나님의 강렬한 은혜였습니다. 나는 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렇게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일주일 동안 여러분들이 교회에 빠짐없이 새벽에 다섯 번, 저녁에 다섯 번 나온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새벽에 자기 위해서는 특별히 결심을 해야될 일이 없지만 새벽에 이불을 털고 교회에 나오기 위해서는 결심하고 자기와 싸워야 됩니다. 회사 끝나고 동료들과 어울려서 밥 먹고 차 마시며 놀러 다니는 일에는 특별히 결단해야 될 것이 없지만 ‘나는 교회로 올라가야 돼!’하면서 자기의 스케줄을 비우는 것은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뜻을 세우고 ‘나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하는 순종할 각오를 세우면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십니다. ‘아이고 김목사가 저렇게 나오라고 사정하는데 첫날은 그래도 얼굴을 보여줘야지!’ 누구를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까?
제가 집회를 나가보면 예전에는 부흥회가 첫날 사람들이 조금 모이고 갈수록 많이 모였는데 첫날이 최고로 나오고 갈수록 줄어드는 것입니다. 첫날 많이 모이는 변수는 교회의 제직들입니다. 목사님을 막볼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이 첫날이라도 가서 얼굴을 보이는 것입니다.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까? 여기에서 우리들이 깨닫는 사실은 단지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라고 하는 명령에 순종할 뿐만 아니라, 나아오는 마음의 자세가 달라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에스라 10장이 굉장히 기이합니다. 이것은 가족관계까지 결단을 내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놀라운 신앙적인 결단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는데 이 변화를 가져올 정도로 깊이 있는 말씀이 선포되는 부흥회였느냐 하면 사실 그런 얘기는 여기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사람들이 다 모이니까 에스라가 그들이 어떤 죄를 졌다는 것을 지적하고 어떻게 해야 되느냐를 얘기할 때, 이미 그들 속에서 보편적인 합의가 모두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체적으로 누가 이방 여자에게 장가들어서 아내를 얻었고, 자녀를 낳았는지 조사해서 모두 정리하고 내보내자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자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이 점에 있어서 우리들이 완전히 돌이키자’ 라고 하는 결단이 내려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간단한 몇 마디 안되는 에스라의 충고, 설교라기보다는 충고를 통해서 이런 놀라운 영적인 각성이 일어난 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스라가 나오기 직전까지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의 상태가 굉장히 많이 작용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에스라로부터 그런 명령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면서부터 그들의 마음에 반 이상은 녹아서 자신들의 죄에 대해서 깊이 후회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차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박자를 기가 막히게 맞혀주시는 분입니까? 사람들이 모였는데 햇빛이 나면 얼마나 분위기가 맞지 않겠습니까? 침침해서 비가 내리는 것입니다. 비가 내리면 과학적으로도 입증이 됐습니다. 비가 내릴 때에 서로 맺혔던 사람들이 만나서 이야기를 하면 오해가 잘 풀린다고 통계가 나왔습니다. 왜냐하면 비가 올 때에 음이온이 공기 중에 많아져서 머리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안정되게 만들어서 감정적인 동요가 적게 그 사람이 하는 얘기들을 받아드리게 해서 풀 수 있는 마음이 생기게 하는 것입니다. 비가 내려서 심리적으로는 초라한 느낌이 되었습니다. 그런 느낌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좋은 느낌입니까? ‘하나님, 저는 하나님 앞에 진짜 괜찮은 놈입니다.’ 이러고 나오는 사람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겠습니까? ‘하나님, 나는 이상하게 하나님 앞에 설 때가 되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저는 아무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최고입니다.’ 이런 마음이 드는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가난해진 마음입니다. 자신들이 지은 커다란 죄와 심각할 정도로 강도 높게 내린 에스라의 명령과 쏟아지는 비, 비를 흠뻑 맞고 에스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이들의 마음은 가난해 질대로 깊이 가난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미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곤고하고 비참한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방여인, 눈에 좋아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장가를 들었지만 혼혈아들을 낳고 보니 그들을 볼 적마다 ‘너는 율법을 범한 인간이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이방 여인을 얻어서 결혼을 했지? 그러고도 네가 선택된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냐? 그런 네가 정말 여호와의 감동을 받아서 바벨론 포로 생활에 모든 삶의 본거지를 버리고 이 원수들이 에워싸고 있는 예루살렘까지 올라왔단 말이냐?’ 하는 끊임없는 자극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졌을 것입니다. 그것은 가슴에 묻어둔 채 오랫동안 살아오다 이 순간에 그것을 들춰낼 때 그들은 처참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 마디의 작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설이 떨어져도 금방 만지면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잔뜩 간직한 어린아이와 같은 심령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스라의 짤막한 충고를 통해서 역사에 남을 만한 각성이 일어난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다음 주일 동안에 닷새 내내 교회에 나오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마음으로 나오는가 하는 것은 나오는 그 자체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마음에 예루살렘에 모이겠습니까? ‘아니 왜 또 올라오라고 하는 거야!’ 그런 마음으로 올라온 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가 올라오는 동기 자체를 하나님께서 인정을 해 주시겠습니까? 안 올라오는 것보다는 그렇게라도 올라온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들이 신앙의 이치를 알게 된 사람으로서 우리들이 굳이 그럴 필요가 뭐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낮춰야 됩니다. 그래서 주실 은혜를 바라보기 전에 잃어버린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금년 한해 얼마나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고, 내가 처음 이런 저런 모양으로 주님을 섬기겠다고 아멘 했을 때 어떻게 떨리는 마음으로 그 부르심에 순종했는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서 부르심에 대해서 얼마나 우리들이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왔는지,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우리들이 시종일관 우리의 마음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키며 하나님을 주목하는 마음의 자세를 잃어버리지 않았는지 우리 자신이 깊이 돌아봐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 중에 많은 것들을 값없이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하면서, 다음에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모였을 때 주실 은혜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에 기도하러 올 때에도 그렇습니다. 요즘은 위층에서 바로 내려오니까 시간이 안 걸립니다. 전에 멀리 떨어져서 살 때에는 교회에 기도하러 천천히 걸어가거나 차를 몰고 가면서 ‘오늘 가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골목을 천천히 걸어가면 마음에 비감한 생각이 확 밀려옵니다. ‘야, 지난 한 주간도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를 주셨는데 일반적인 삶밖에는 못 살았구나! 주님이 큰사랑이 주셨는데 그런 사랑에 전혀 부합하는 삶이 아니었구나! 왜 그럴까! 내 안에 있는 못난 자아는 아직도 추해서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아보려는 나를 이렇게 곤고하게 하는구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지리요!’ 그런 마음을 가지고 교회당 문을 열고 가서 무릎을 꿇으면 복받치는 슬픔이 쏟아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정말 내가 살고 싶은 삶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런 삶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지요? 그러나 하나님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은 이렇게 밖에 못 살고 있습니다. 주여, 도와주시옵소서!’ 그때에 마음 깊이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오르는 것도 중요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배워야할 것은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지도자를 기다리며,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주실 지를 생각하며 기다리고 있는 그들의 모습니다. 흉악하게 불순종하며 육체의 욕심을 따랐던 사람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풀죽은 모습, 그리고 쏟아지는 빗줄기 아래서 흠뻑 젖은 채로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그것이 하나님의 관계를 막보면서 살아온 마지막 결과였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그들이 그렇게 예루살렘에 보였을 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부터 마음을 잘 준비하십시오. ‘하나님, 가을이 깊어 가는데 정말 1년 동안에 맺은 열매들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정말 남은 날들 몇 달 더 하나님의 은총의 햇살을 섬김의 마당에 비취셔서 지금은 아직 영글지 않은 인격의 열매, 신앙의 열매, 섬김의 열매들이 두루 맺혀서 하나님이 금년에 마지막 날에 섬긴 섬김을 인해서 기뻐하실 수 있는 은총을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면서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나는 교회에 가야 되리라’ 그런 마음을 가지고 길이 열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늦더라도 와서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새롭게 ‘주님의 은혜 아니면 살 수 없습니다’ 라고 하는 고백을 당신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서 했을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 기도를 들어 주시겠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마음으로 모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의미입니다. 하필이면 예루살렘으로 모이라고 했을까? 예루살렘으로 모이라고 한 것은 성소신앙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성소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신앙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삶은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얽혀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는 문제를 느끼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크게는 국가적인 위기를 맞이하여 안타까운 심령이 된 임금으로부터 시작해서 아이 하나만 낳게 해 달라고 애원하는 아녀자들까지 성소를 앙망하면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왜? 그 성소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고상하고 심각한 문제만 가지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개인적이고 사적인 문제도 가지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들이 어렸을 때 조금만 이상하면 엄마를 부릅니다. 무슨 큰 일을 했을 때만 엄마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놀다가 넘어져도, 다쳐도, 벌레 한 마리 이상한 것이 나와도 엄마를 부르는 것입니다. 고상한 제목이 있을 때만 부모를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보호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스스로 생각을 하니까 부모를 그렇게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로 예루살렘을 생각할 때 똑같은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예루살렘을 어머니와 같이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어에서 예루살렘의 도시 자체가 명사가 여성명사입니다. 예루살렘이 수많은 백성들을 품고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커다란 국가적인 위기에 닥쳐서 역대하 7장에 이미 나오지 않습니까? 큰 재앙이 일어나서 염병이 돌거나 깜부기의 재앙이 내려서 곡식이 다 쓰러질 때 그때에 올라가는 곳이 하나님의 전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외적이 쳐들어와서 견딜 수 없는 모욕적인 외교문서를 내밀면서 항복을 요구할 때에도 히스기야 왕이 고요히 올라간 곳은 하나님의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굴욕적인 외교 통첩을 펴놓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던 곳도 바로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그해서 하나님의 집이 있는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쉽게 잃어버릴 수 없는 지명이 되었고, 예루살렘에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집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예루살렘’ 하면 가슴 깊이 스며드는 그리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꼭 그곳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자란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영적인 고향이었고 신앙의 고향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모두 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러한 신앙의 흐름이 교회를 통해서 상당부분 계승되고 있다라고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끝난 부분도 있지만 영적으로 계승되고 있는 부분도 많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됩니다. 증거가 무엇이냐 하면 교회의 영적인 상태와 개인의 영혼의 행복은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뿌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깊은 시험에 들면 이유 없이 교인들이 시험에 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려움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복을 주시기 위해서 손을 높이 드시고 빛을 비춰 주시면 이상하게 성도들이 놀랍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예배에서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자신의 삶 속에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 속에 있었던 사람들이 의외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건져주시고, 질병 속에서 아파하던 사람들이 일어나고,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서 마음에 고통을 받던 사람들이 그 마음이 풀려지고, 갈등을 빚던 가족들끼리 서로 화해를 해서 다시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변화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와 개인의 신앙은 깊은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의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하고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교회는 성경적으로 보면 이렇게 곤고하고 어려울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면 이상하게 각 사람이 가지고 있던 곤고하고 외롭고 많은 죄들이 모두 모여서 모임 자체를 눌러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마음으로 백성들이 모이면 그들이 하나님 앞에 각자 가지고 있던 허물과 죄 보다는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들이 모아져서 하나님의 관심을 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 교회 속에서 만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고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이 에스라를 통해서 당신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모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그들이 모였을 때 그들이 자신의 힘으로는 율법을 어기고 범죄하고 패역한 인간들로서 하나님의 영적인 은혜로부터 완전히 소외된 가운데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계는 거의 끝난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그렇게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 명령에 순종했을 때 에스라의 간단한 충고 한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놀랍게 변혁되는 영적인 각성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있는 흉악한 죄들을 모두 몰아내고 하나님 앞에 건강한 공동체로 태어나는 일들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일들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그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그 일을 행하셨다 라고 하는 인식이 더 깊이 박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러분들이 이 교회에 잘 모이는 것을 하나님은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24시간 매일 와서 먹고 노는 모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이 특별히 하나님 앞에 공통적으로 원하는 소원을 가지고 모이는 것,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경배입니다. 그때만큼 하나님 앞에 집중하는 때가 어디 있겠으며, 그러한 간절하고 가난한 마음을 가진 때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갈망하는 백성들이 모일 때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급하게 생각하시는 일은 당신이 갈망하는 백성들이 모여서 당신의 얼굴을 구하는 그 자리야말로 가장 당신이 시급히 찾아가야 할 장소라고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그런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이 생겼을 때 예루살렘에 모였고 성소에 모여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고, 인생의 문제를 해결 받았던 것처럼 여러분들은 교회 속에서 그런 삶을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한 주간동안 여러분들이 특별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여기에 모여야 됩니다. 모여서 하나님 앞에 정말 영혼의 진정한 회복,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남은 얼마 안되는 금년의 마지막을 승리로운 삶으로 장식할 수 있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부어주시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했을 때 성경은 말하기를 사로잡혔다가 올라온 자손들에게 공포했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예루살렘으로 모이라’ 그리고 ‘삼일 내에 올라오지 아니하면 그 재산을 적몰하고’ 9절에 가서 ‘유다와 베냐민의 모든 사람이 삼일 내에 예루살렘에 모이니’ 그랬습니다. 모였는데 특별한 열심을 가진 사람들만 모인 것이 아니라 온 백성들이 빼놓지 않고 모두 모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번 주에 여기에 모일 때에 여러분들은 눈을 들어서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주위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주님만이 저 갑갑한 인생의 유일한 대안이 되실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여러분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 눈은 눈도 아닙니다. 보십시오. 자신도 주님과 떨어져 살았던 날들이 얼마나 곤고한지 알지 않습니까? 주위에 보이지 않습니까? 그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와라, 가자! 우리가 말씀의 은혜를 받자!” 그리고 데려와서 그가 한번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이 은혜를 받아서 새로운 삶을 향한 갈망을 갖게 된다면 그것으로서 여러분들은 그 사람의 인생에 최고의 것을 안겨주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어둠 가운데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꾸 넘어지는 상처를 위해서 발라주는 빨간 약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빛으로 그들을 인도하는 것이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도 미국에서 두 분이 오셨는데 저희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싶다고 해서 극동 방송국에서 특별히 연락이 와서 예배에 참석을 했습니다. 테이프하고 책을 잔뜩 사 가지고 갔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의를 했습니다. 피닉스에서 오셨다고 해서 “피닉스에다 도서관을 하나 만들 생각을 없습니까?” 여기에 있는 책과 테이프를 싸게 드릴 테니까 사비로 사서 뒷방에 쌓아놓고 지나다니다가 곤고하게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씩 빌려주어라 그러면 우리가 선교적인 차원에서 거의 무료로 봉사해 주겠다 라고 했더니 “아, 그저 참 좋겠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매우 곤고해 진 사람을 불러서 저녁 한번 사줘봐야 다음날 아침이면 또 배고픕니다. 그러나 그 곤고하고 어두운 사람들에게 참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어서 목 메이도록 그 영혼을 사랑하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직접 느끼게 해주고,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가게끔 만들어 준다하고 한다면 하나님에게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 일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하나님 앞에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나의 간청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당연히 해야될 일입니다. 여기에 가득 차서 사람이 모인다고 해서 그것이 김목사의 영광이 되겠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그들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입니다. 여기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여러분 가운데에는 딱 한번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신앙을 돌이킨 사람들이 여기에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데에는 누군가가 여러분들을 위해서 섬겨 주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분명합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그런 섬김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눈을 들어서 보십시오. 주위에 있는 곤고한 사람들, 범죄만 아니라면, 납치만 아니라면 데리고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어두움 속에서 빛으로 걸어나와서 우리와 함께 복음의 빛을 누리며 찬란한 하나님의 은혜의 빛 아래서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으며,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에게는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어찌하시렵니까?
18.하나님을 아는 길 Ⅰ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上)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을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나면은 그 다음에 부러운 사람이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아는 사람들이 부러워요. 그건 여러분 모두 경험해 보셨을 꺼예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단 시일 내에 좀 많이 알 수 있을까 ? 그런 욕구를 갖죠. 그런데 그것도 잠깐 이예요. 신앙생활을 하면서 은혜가 떨어지고 그리고 믿음생활이 뒤로 물러가게 되면은 그런 사람 별로 부러워하지 않아요. “아무개는 예수 믿고 복 받았데.” 그때 강조점이 아무개는 예수 믿고 그게 아니라 아무개는 예수 믿고 ‘복’ 받은 것입니다.
신앙이 식어지고 은혜가 떨어지고 나면은 단지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을 전혀 사랑 안하고 다른 세계에서 사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착각도 유만부득이라 이거죠. 지금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 자신이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잖아요. 똑같은 거예요. 오히려 말이죠 우리가 은혜가 떨어지고 신앙이 딱 식고 마음이 강팍해지고 나면은 오랫동안 신앙생활 속에서 억제되었던 죄악을 향한 충동이 더 강력하게 발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 신앙이 살아지고 나면은 안 믿는 사람보다도 더 악날하고 예수 믿는 사람이 은혜에서 멀어지면은 인 믿는 사람보다 더 부도덕하고 야비하게 되는 거예요. 그동안 오랫동안 야비하고 싶었는데 못 야비했던게 한꺼번에 그냥 찐하게 야비해 지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충격을 받거나 놀래거나 전혀 그럴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붙들고 있는 동안에 그가 비로소 신자로서 바라야 할 것을 바라고 신자로서 미워해야 할 것은 미워하게 된다 그런 이야기죠.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고 은혜를 많이 받게 되면은 꼭 초기가 아니더라도 ‘정말 어떡하면 하나님 말씀의 깊은 세계를 한번 엿볼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깊은 은혜의 세계 속에서 사는 것은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운 일 인가? 그리고 정말 어떻게 저렇게 신앙생활을 잘 할까?’ 하고 보면은 함께 대화를 해 보면은 다 드러나잖아요. 자기는 그래도 딴 것은 몰라도 신앙 그러면 뭐 좀 한다 이렇게 생각을 했고 그리고 실재로 정말 젊은 날을 교회에서 다 보냈고 건축헌금을 위해서 집 팔아 적도 있고 누구 말대로 교회에서 안 해본 일 없이 다 해 보면서 살았는데 어느 날 형제하고 앉아서 대화를 쫙 나누는데 솔직히 자존심이 상해서 “야! 너 어떻게 그렇게 이 진리의 세계에 대해서 많이 아냐?” 이렇게 말은 할 수 없었지만 진짜 이상하게 이 사람하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까 껍데기가 다 벗겨지는거 같아요. 그러고 여태까지 자기가 긍지를 품고 잘 낫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그 형제의 신앙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 받아 질 때가 있단 말이죠. 그때에 굉장히 커다란 충격을 받는 거예요. 그러고 무슨 사모함이 생기냐 하면은 어떻게 하면 저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잘 깨달을 수 있을까? 그런 사모함이 생겨나잖아요? 그때에 가끔 저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누구누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아는데 농축해서 단 시간에 따라 잡는 비결이 없느냐? 학원으로 말하자면 단기속성. 취업반 렇게 할 수 없느냐? 그런 사모함들이 우리 모두에게 그렇게 생겨나죠.
전 가끔 청교도들의 글을 읽거나 이러면서 이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에 대해서 이렇게 깊이 파헤치고 지나간 사람들 쭉 뒤를 쫒아가 보면은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나는 당신이 발견한 진리를 이해하는 것도 이렇게 싶지가 않는데 내 앞에 간 당신은 누구시길래 어떻게 그렇게 우리들이 성경을 보아도 알 수 없는 깊은 진리를 파헤쳤습니까? 마치 탄광으로 말하자면 그 사람이 앞에 가서 곡갱이로 쾅쾅 찍어내면서 광석을 집어 던지는데 신기하게 그 새까만 흙탄 더미 속에서 금 들어간 덩어리만 뒤로 던지는 거예요. 그것을 받아 가지고 흙을 긁어내고 거기서 금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 광석을 고르느라고 쩔쩔 매는데 저 쪽에서는 새까만 흙을 곡갱이로 두드리면서 기가 막히게 금이 함유된 금광석을 캐내는 거래요. 어떻게 그렇게 깊이 하나님의 말씀을 파헤칠 수 있을까? 어떨 때는 책을 이렇게 읽다가 덮어놓고 한숨을 쉬어요. 왜냐 하면은 너무 깊이 들어가는데 쫒아가다 보니까 내가 어디로 걸어 왔는지 잘 모르겠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은 그 길로 쭉 들어 간 거죠.
오늘날의 문제가 뭐냐 하면은 너무 간단해요. 너무 간단하고 짧막한 이야기 거리 같은 신앙 지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것이에요. 여러분 기억을 해야해요. 제품을 만들 때 좋은 재료를 사용하면 겉으로는 똑 같은 거 같지만은 언젠가는 그 품질이 조잡한 원료를 만들어 사용한 제품보다는 훌륭하다는 사실을 입증 할 때가 반드시 있다 이거죠. 틀림없이 있다 이거죠.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을 믿고 그리고 어떻게 기도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배움에 있어서 그런 아주 진실하고 순수하고 참된 하나님의 풍부한 말씀을 성경 속에서 끌어내어서 그것을 소재로 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어떻게 살아야할까라는 이 신앙의 집을 짓는 것과 그냥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아주 간단한 재료들로 집을 짖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에요. 전혀 같은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더 자연스럽게 신앙의 눈을 뜨고 나면은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아는 사람들이 참 부러운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을 갖지요.
그 다음에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은 ‘성경공부를 열심히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되겠다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제가 의의를 제기 하지 않아요. 성경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은 잘못될게 없어요. 그러고 또 열심히 배워야 되구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은 진실한 하나님의 대한 말씀은 단지 공부를 통해서만 결코 습득되지 않는 다는 것을 함께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사람들이 공부를 하면 되나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신학교로 들어와요. 신학교에서는 성경을 가르쳐 주지 않거든요. 신학교를 들어오면은 몇 학기만 지나면 성경에 도사가 되는 줄로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런데 절대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신학교로 들어와요. 신학교에서도 이렇게 교수로 있을 때 면접할 때 보면 왜 들어왔냐? 그러니까 성경을 좀 깊이 깨닫고 알고 싶데요. 그래서 교회의 성경학교로 가라고, 요즘은 수강료 내고 성경 가르쳐주는 코스들이 많으니까 그런데 목사님하고 의논해서 잘 상의해서 가지 여기는 성경공부 하러 오는 데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가라고. 돌려보내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싶은 거예요. 공부도 필요해요. 체계적으로 공부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워야 해요. 그래서 교회는 배우는 곳이에요. 잘 배우는 곳이에요. 그런데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싶은데 그 알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마음의 문을 여시고 우리에게 성경에 관한 진리를 가르쳐 주어야겠다 라고 하나님이 마음을 먹지 아니하시면 객관적인 탐구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은 아주 얄팍한 한계가 있다 이거죠.
(예화) 청소년들은 어떤 연예인을 좋아해서 그들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열렬하게 탐 고한다고 하여 그 아이들이 한 번도 만나보지도 못한 연예인들을 안다고 하는 것은 정말 아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
차라리 그 아이가 그렇게 아는 것보다는 내가 그를 만나서 하루 정도라도 마음의 문을 열고 목사님! 제가 이렇게 수많은 청소년들의 우상이 되어서 이렇게 펄펄날고 있고 제가 아프면 자살할 사람들이 수없이 많지만은 그러나 저는 사실 이런 인생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신앙상담을 하고 인생상담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인생의 살아온 과거를 다 이야기합니다. 나는 또 내가 살아온 얘기를 다 하고 그리고 우리가 서로 깊이 알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내가 어느 교회 목사인지도 모르고 나는 그가 핫인지 쿨인지 몰라도 그래도 서로 이름도 모르고 주민등록 번호도 모르고 무슨 색깔을 좋아하는지 집이 어디 사는지를 몰라도 우리는 서로를 안다고 말할 수 있고 이렇게 하루 동안 안 것이 아까 그 연애인을 한번도 못 만난 청소년이 삼사년동안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정보를 수집해서 알고 있는 것 보다 훨씬더 많은 것을 아는 것 아니에요.
하나님은 이처럼 인격적인 분이세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성경말씀 자체를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이해한다고 하는 것하고 마찬가지 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은 우리가 말씀에 계시된바 그 한도 안에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해 주실 수 있는 방법은 성경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의지 적으로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도록 주님께서 성경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근데 그 행동자체가 인격적인 행동이에요. 여러분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다보면은 꼭 목회자가 아니고 여러분이 이 신자로서 교회 안에서 생활하다가도 어떤 때에 같은 구역에서 혹은 또 여러분들이 전도한 어떤 형제나 자매가 정말 자기 엄마 아버지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은 인생을 살아온 그 비밀들을 여러분들에게 얘기 할 때가 있어요. 그렇죠.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에요. 인격적으로 여러분들 깊이 신뢰하고 사랑하게 되니까 그리고 내가 이렇게 이야기 하므로써 저 사람으로부터 좋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드니까 마음을 열고 자기가 살아온 얘기를 쭉 하고 심지어는 자기의 부끄러운 과거까지도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얘기 들으면 자꾸 옮기면 안된단 말입니다. 혼자 조용히 알고 있어야 지요. 그렇게 자기 자신을 상대방에게 모두 보여주기 전에 뭐가 먼저 성립이 되냐면은 인격적인 관계가 먼저 성립이 되는 거예요. 생전처음 만난 사람 딱 붙들고 내 얘기 좀 들어줄래? 나 사실 오늘 사람을 죽였거든 과거는 이렇게 살아 왔거든 그러면서 자기의 부끄러운 과거를 다 얘기할 사람은 없어요. 혹시 있다면은 그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 정신상태가 약간의 혼돈의 빠진 사람이에요. 그 사람들은 횡설
수설 이야기하는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 믿을 것도 없다 이거죠. 그건 당연하지 않아요?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신에 관해서 누군가에게 깊이 뭔가를 있다가 가르쳐 줄 수 있기 위해서는 인격적인 관계가 먼저 성립을 해야 되잖아요. 그죠. 마찬가지예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세계 속으로 들어가려면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아야 되요. 하나님이 깊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해주실 수 있는 최고의 일이 무엇이냐면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깊이 깨닫게 만들어 줍니다. 어떤 사람은 그러죠. 나는 그저 주님밖에는 몰라 주님 정말 주님만 사랑해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성경도 몰라! 그거는 둘 중에 하나예요. 사랑이 아니라 충동이든지 혹시 사랑이라면 이제 막 시작한 초보적인 사랑이에요. 그 사랑이 지식에 의해서 온전해지지 않으면 시작은 순수한 사랑으로 시작 되었지만은 시작이 순수했던것 만큼 순수한 결과를 열매로 맺으면서 끝날 수는 절대로 없다 . 절대로 없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1장에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모든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케 하사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흠 없이 온전하여져서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거기 바로 앞 부분에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뭐라 말하냐면 내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우리 하나님이 증인이시라.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물려 받은거에요. 빌립보 교인들을 너무 사랑하는데 이 교인들을 위해서 빌어줄 축복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더니 지극히 사랑하는 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진심으로 빌어주고 싶은 축복이 무엇이냐면은 너희 사랑 위에 지식과 총명을 더하사 점점 더 풍성케 하시며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여 흠 없이 온전하여 져서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그런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우리의 사랑도 온전해 질 수 없는 것이에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침에 아버지께 기도 할 때는 가슴이 녹으면서 주님만을 사랑해야겠다 라고 하는 처절한 욕망에 불탔다가 오후에는 싸늘하게 식어져서 마음이 강팍해져 본적이 얼마나 많아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잖아요. 주님이 나만 사랑하는 것 같애라는 말과 하나님은 날 버리셨나봐 라는 말이 이틀도 안되어서 왔다갔다하는 신앙의 경험을 가진 사람도 많다 이거죠 . 그만큼 우리 속에서 솟아나고 끌어 오르는 이 사랑의 감정,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감정은 중요하기는 하지만은 그러나 지식의 도움 없이는 안된다 이거죠. 그런데 그 지식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수해주는 통로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 관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잘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그걸 안 거예요. 그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을 때 그때에 그 특징이 무엇이냐하면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서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금요일날도 말씀 드렸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같은 거예요. 왜냐하면은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드리게 만들고 그 말씀을 믿게 만들고 그 말씀대로 살고 싶은 마음을 우리에게 준단 말이죠. 그래서 말씀에 미각이 살아있습니까? 라고 이렇게 묻는 것은 주님을 변함 없이 사랑하는 그 사랑의 미각을 지니고 있습니까? 라고 묻는 것과 같은 것이에요. 제가 정말 주님을 정말 사랑하기는 하는데 저는 올래 학교 다닐 때부터 공부를 못해서 말씀에는 잼뱅이예요. 그것은 학원에 가서 공부 할 때나 통하는 이야기죠.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에요. 이 세상에서 교육의 높고 낮은 그 자체가 말씀에 대한 인식을 열어주고 닫아주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저는 오히려 교육을 거의 받지 못 했는데도 말씀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지고 풍성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들은 어려운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풀 수는 없고 말씀에 대한 지식을 자기 스스로 체계화 할 능력은 없지만은 용어는 잘 몰라도 감각이 있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진실한 사랑이 있고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릇된 것인가를 아는 판단력이 있으면 신앙생활의 기본은 이미 된거에요. 주님께서 오늘 말씀하시기를 나도 저희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수님이 자기를 나타내는 거에요. 내가 누구인지를 그에게 알려 주리라. 우리의 오늘 표현대로 하자면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요.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는 나도 또한 사랑하여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뜻을 나타내 보여 주리라. 주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아모스서에 보면은 내가 행하고자 하는 일을 나의 사랑하는 종에게 감출 리가 있느냐 할 때 그 종은 무슨 목사나 선지자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예요.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이 깊이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에요. 그러한 사랑의 관계에서 지식이 이렇게 흘러 들어가고 흘러 나와야지만 이게 말하자면 정상적인 교육이 되는 거예요. 오늘날 말이죠 많이 가르치잖아요? 그런데 신앙에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이 일반 세속 교육의 세계에서도 훌륭한 사상가들이 나오잖아요. 훌륭한 사상가나 아니면은 이 삶의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 나오지 않아요. 그래도 우리가 옛날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잖아요. 그러죠? 비록 세계적인 사상가는 아니더라도 모든 국민들이 바라보면서 그래도 저 사람은 우리의 정신적인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 그런 사람들이 있었잖아요. 그때 교육에는 어땠어요. 컴퓨터가 있었어요 학원이 이렇게 많았어요? 이렇게 교육이 체계적이였어요, 책이 또 많았어요? 오늘날 교육 전문가들이 토론하는 이야기들을 들어보면은 답답하잖아요. 뭐도 해줘야되고 뭐도 해줘야되고 그런데 결국은 온 가족이 그 아이 교육하나를 위해서 헌신을 해도 그 필요하다는 그 욕구를 다 채워 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했는데도 그런 사람들이 나오지를 않는다는 거예요.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나오질 않는다는 이야기에요. 뭔가 공부를 쭉 마치고 나면은 사상이 생겨서 그것에 따라서 자기가 살고 죽겠노라는 신념을 갖진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거죠 . 다만 사회에서 돈 벌어먹기 적합한 사람들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게 가장 커다란 원인이 뭐예요? 이게 선생은 있는데 스승이 없기 때문이에요. 선생은 있는데 스승이 없다 그 차이가 뭐예요? 선생이나 스승이나 가르치는 기능은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선생은 단지 그 기능만을 행한 사람뿐이고 스승은 기능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에 방법 자체가 삶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에게 녹아 흐르는 사람이 스승이에요. 그래서 자신이 스승으로서 아이들에게 교육 할 때에 자기가 이 아이들을 가르쳐서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 라고 하는 그 기대치를 내가 이미 살고 있어서 삶에 교류가 있는 교육을 통해서 자신의 삶이???? 전수 되는 거에요. 그게 교육 아니에요? 그런데 그런 기본적인 것들이 다 살아지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아이들 눈에 선생님이 기능공으로 보이는 시작 하는 거예요. 옛날에 우리 어렸을 때에는요 선생님이 얘 남준아 너 가서 물 좀 떠와라 그러면은 특권으로 생각했어요. 세상에 내가 뽑혔구나. 나보고 물 떠 오래. 그런데 요즘 아이들 물 떠와라 그러면 싫어요. 왜 나만 시켜요. 왜 이런 일들이 일어 났어요? 교육이 인격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더 잘 적용되어야 할 영역이 어디냐 하면은 이 신앙생활의 영역이에요. 여기는 여러분들이 숨질 때까지 잊지 말아야할 단어는 인격적이라는 말이에요. 인격적으로.. 인격적이니까 내 인격이 움직일 때까지 내 마음대로 살겠다 그런 면에서 인격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시는 통로도 인격 대 인격에 대면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내가 제일 이야기 하지만 신앙생활을 하기 싫은 사람을 교회까지 데려 올 수는 있지만은 신앙이 들어가게 할 수는 없는 것이에요. 그건 불가능 한 거에요. 그러니까 앞으로의 이 신앙생활은 교회 안 오겠다라는 사람을 잡아끌어다가 앉혀 놓는 방법의 사역보다는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자신의 신앙의 지식이 매우 미천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자신들이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갈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갈망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서 그들에 지식의 필요를 채우고 그 지식의 전수를 통해서 인격적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를 알아 가는 것에 촛첨이 맞추어진 그런 전인적인 교육이 사회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사모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실 때 또 그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때에 풍부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수되는데 그 방법 자체가 인격적이라는 것이죠. 인격적. 이런 생각을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교회 전체를 이끌어 가시는 방법은 모든 교인들을 향해서 인격적인 방법이 아닐 수도 있어요. 예를 들자면 이러 경우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주고 싶으셨어요. 성령을 보내어서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나면 성령을 보내어 주셔서 그 성령을 보내어 주시면 그 성령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성령의 충만함을 얻게 해서 그렇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들이 결국은 그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이스라엘을 뛰어 넘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되고 그래서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고 그래서 온 세상에 선교에 역사가 일어나는 것 그래서 복음을 통해서 새 사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였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에 경우에는 이런 사고방식을 향해서 마음이 열려 있지를 안았어요. 유대교라고 하는 것은 구약 종교가 계속되어 나아오다가 옆으로 휜거예요. 그래서 구약에 신앙이 그대로 전수 된 것이 아니라 당시에 사람들에게 유행하던 사고방식하고 합해져 가지고 참된 구약 종교에 계승자라고 할 수 없는 잘못된 신앙 사상을 만들어 낸 것이에요. 그런데 그 사고의 틀에서는 어떤 사고를 가지고 있었냐 하면은 민족적인 편견과 오만이 보태어 진거예요. 그것은 이제 고난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 이후에 역사에 배경과 관계가 있어요. 그게 구약의 몇 가지 요소들과 결합을 해 가지고 자신의 민족적인 우월성을 성경 전체가 증거하고 하나님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뿐이라는 사실을 조장한 것이죠. 그 사고의 틀 속에 바울과 같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있었던 거에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이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실려고 그러는데 아무래도 누구를 깨닫게 해서 그 일을 해야 될까 하나님이 생각 실 때 누구를 해야 되겠어요. 베드로를 하나님이 택하신 거예요. 베드로를 택하시지 않고 만약에 엉뚱한 사람 저기 오늘 처음 믿기 시작하는 갈릴리에 어떤 촌 노인네를 택했다고 할 것 같으면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그를 정죄했을 가능성이 많아요. 그런데 베드로를 택한 것이에요. 오순절 성령 사건의 장본인인 베드로를 택한 것이에요. 그 기도 중에 고넬료와 통하게 만들어 가지고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확인하고 자기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데 성령이 임하는 거예요. 그러까 베드로 자신도 막 뒤로 나 자뻐질 정도로 충격을 받은 것이죠 .우째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세례를 받을 수 있는가 ?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나? 그러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하나님이 자기가 기도하는데 생생히 환상으로 보여 주시는데 보자기가 쫙 있는데 율법에 의하면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그런 짐승, 벌레들이 있는 거예요. 그걸 먹으라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먹을 수 있습니까? 못 먹는다 그랬더니 그 일이 있고 나 가지고 그 고넬료의 집에 가게 된것이죠 가만히 해석을 해 보고 나니까 아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고 싶어 하셨구나 했죠. 그래서 결국은 이제는 우리가 할례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서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제 이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이 이런 구원을 주셨다 할 때에 그 이야기를 진술 할 때에 거기에 있는 모든 구약 종교를 가진 모든 종교인들이 그 사실에 대해 동의했을 리가 없죠.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끝까지 그 사실에 동의하지 못해서 이단으로 남았던 사람들이 있단 말이죠. 그렇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공동체 전체를 인도 하실 때에는 하나님이 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인격적으로 승복시켜서 이렇게 이 끌어 가지는 않아요. 왜? 거기에는 이제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많으니까 하나님이 내버려두시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해방시키고자 할 때에도 하나님이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격적으로 설복 시키신 것이 아니라 이 모세 한 사람을 설복 시키시는 거였어요. 그리고 거꾸러지게 만들어서 하나님이 너희를 애굽에 손에서 건져내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머리를 숙여서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렸고 많은 사람들은 끝까지 어려운 일 당할 때마다 왜 네가 우리를 끌고 왔느냐? 여전히 하나님이 자신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셨다 라는 사실을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거죠. 그렇지만 개인의 차원에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대하고 인도하실 때에는 인격적이에요. 쉽게 이야기하면은 오순절 성령 강림 세례가 난 아직도 믿을 수 없다. 어떻게 유대인도 아닌 우리 이 한국 사람이 예수 믿고 구원받을 수 있냐 난 지옥에 가서 불가마에 들어가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면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그런 것들을 잘 보여주는 예가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에요. 같이 이렇게 있다 이단에 빠지는거에요. 그 영혼이 얼마나 불쌍해요? 그러면 성경이 그 사람들 위해서 생명 내 놓아라 뭐 그렇게 얘기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한 두 번 경계하고 권한 후에 듣지 않으면 상종도 하지 말라. 그게 뭘 의미하는 것이에요? 신앙에 있어서 바르게 돌아오는 이 문제 더군다나 이단과 문제가 되었을 때에는 단지 그것은 우리의 애정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잘못된 이단에 빠지는 그 자체가 그 사람이 인격적으로 그 이단에 교리를 붙든 것이고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거절한 것이에요. 그러니까 얼마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격적인 결점이나 이런 것들을 존중하시는가? 옳은 결정을 하기 때문에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억압과 속박으로 우리를 인도하신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가 잘못한 것을 하나님이 책임을 물어도 할말이 없는 거에요. 이런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신앙생활 속에서 신앙생활 해 나가야 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죠. 여러분 내가 이렇게 신앙생활 하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실까? 이렇게 신앙생활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 하실까? 이런 것을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내가 열심만 품고 부지런히 선생님들 쫒아다니면서 공부하면 하나님 그분 정도는 내가 다 알아 낼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억지라 이거죠. 표현은 그렇게 안 하지만은 하나님의 대한 자신 속에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사랑이 있는가?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점검이 없이 성경 지식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우에 빠지고 있는 것이에요.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함께 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기 위해서는 물론 우리들이 인간적으로 부지런히 배우고 부지런히 노력을 해야 되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런 생각을 해야 해요. 전철을 타다가 이렇게 보니까. 하루에 15분씩 40년 책을 읽으시면 대학을 뭐 두 개 나온 것과 같습니다. 나는 그 말 믿지 않아요. 15분을 40년씩 읽으면은 요새 대학학생들 책 읽는 것으로 봐서는 10개쯤 나왔다고 그러대요. 지긋지긋 하게 안 읽어요. 컴퓨터 앞에 앉아서 뿅뿅뿅이나 하고 앉아 있지. 정말 지긋짓긋해 해요. 만화나 볼려고 하고 말이지. 물론 열린교회 다니는 학생들이야 그럴 리가 없죠. 제가 캠퍼스 심방 가서도 공부 열심히 하라고 당부에 당부를 하고 왔는데 근데 대부분 그렇게 산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기 위해서 우리도 진지하게 노력을 해야 되지만 근데 그 말씀에 참된 의미는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전수되는 것이에요. 그것을 기억해야 되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거룩에 대해서 성경 구절을 다 찾아 놓고 그걸 외운다 하더라도 거룩하신 하나님 한번 인격적으로 만나는게 그 모든 성경 지식에 불이 들어오게 한다구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창세기에서는 뭘 이야기하고 출애굽기에서는 뭘 이야기하고 거의 외우고 있다 하더라도 뜨거운 하나님의 품에 안겨 보면 이제껏까지 가지고 있던 성경지식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성경지식이 비로소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환하게 아 ~ 이거였구나 이게 하나님의 사랑 이였구나 .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교회 오면은 좋아하고 주 없이 살수 없네를 찬송하면서 눈물을 흘렸구나 . 이게 비밀 이였구나 .그걸 깨닫게 되는 거에요.
그러면 이제 결론은 거의 나왔잖아요. 그러면 이제 제가 강조하는 것이 뭐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달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인격적으로 주님을 깊이 사랑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주님을 실재로 사랑해야 되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사랑을 구해야 해요.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사랑이 형성되는 것이 하나님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흘러 들어오는 가장 중요한 말하자면은 통로가 되는 것이죠. 인격적으로 .... 우리들이 이런 생각을 해요. 내가 이렇게 깊이 신뢰해요. 깊이 사랑하면 저 사람이 쭉 이야기 할 때 그 듣는 것이 피곤하지 않아요. 아 그랬구나. 아 그랬지. 그래 .아이구 저런. 그런데 신뢰가 안돼. 좀 이상한 사람 같기도 하고 , 뭘 달라고 온 사람 같기도 하고, 사기칠 것 같기도 하고, 막 얘기를 해. 저 사람이 얘기하는 동안에 너무 피곤해 . 머리가 막 움직이면서 저게 진짜일까. 저게 맞을까. 제가요 정말 힘든 인생을 살고 있거든요. 돈 달라고? 자꾸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게 뭐가 형성이 안된 거예요?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가 형성이 안됐으니까 흘러 들어오지를 않는 거예요. 이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입증이 되잖아요. 어떤 사람하고는 비 오는 날 찻집에 마주 앉아서 잠깐 이야기 하다가 보니까 서너 시간이 흘렀는데, 어떤 사람은 빨리 얘기 끝나고 가야 될텐데 입에 발동기가 달렸는지 안 끝나는 거예요. 7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안 끝났어. 그건 뭐 예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깊이 스며 들어오고 우리가 인격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그 인격에 교류가 느껴지면은 성경을 읽을 때 주님의 마음이 쫙 흘러 들어오는 거예요. 깔대기를 통해서 기름이 흘러 들어오듯이 쭉 흘러 들어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쭉 흘러 들어오는 그 통로가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라고. 그런데 마음의 있어서는 하나님을 막 보면서 사는 사람들이 성경 지식만 습득하고 싶다는 것이에요. 교회를 맨 처음 세우고 나가지고 난감한 것이 뭐냐 하면은 사람들이 오는데 여기에서 신앙생활 잘 하고 그리고 목사님 도와 드리고 싶습니다. 그게 아니라 어떻게 오셨습니까? 배우러 왔습니다. 난 사실 학생이 싫어서 교회로 온 사람인데 뭘 또 배우러 오냐 이말이에요. 나 한테는 학생이 필요 없고 은혜 받고 신자가 필요한데 배우러 왔데? 그래서 속으로 그랬어요. 다 배우면 하산 할려고? 그런데 사실 그런 사람치고 다 배우고 하산한 사람이 없어요. 모두 절벽으로 뛰어 내렸죠. 하산하라는 말도 안 했는데. 어느 날 나무 해 가지고 오너라 했더니 절벽으로 다 뛰어 내렸어요. 그러고는 아무 말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사랑하는 관계에서 오고 가는 이 교훈이 아니에요. 신앙생활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구요.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는 속에서 주님의 말씀이 흘러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면 만약에 자 남자와 여자가 있는데 선을 봤어요. 아이 짤라버려? 그러면 저 쪽에서도 아이고 얼굴도 못 생긴게 짤라버려? 이게 서로의 생각인데 인격적인 관계가 되겠어요? 안되죠. 딱 만나서 사람 참 준수하다. 말을 하는 것도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좀 진실성이 있는 것 같고 어떻게 사겨 볼까? 그러면서 마음을 여는 것이에요. 조금씩... 이만큼 열었는데 그 다음날 결혼합시다. 그러면 또 탁 닫치는 거예요. 털도 안 뽑고 잡아먹을려고 그래. 그렇게 하면 안돼요. 그게 인격적이 아니죠. 시커먼 시 칼 하나 갖다 놓고 결혼하면 살고 결혼 안 하면 죽어 버리겠다고 그런게 아니에요. 여러분도 신앙생활 맨 처음할 때 그랬어요. 교회 처음 들어오는 그 날 주님 저를 통째로 갖으십시오. 그러지 안았다구요. 주님 이렇게 사랑 알게 되니까. 교회나 한번 나가 볼까? 예배가 괜찮은데? 다음 주 라도 와볼까? 이렇게 , 딴 짖하는거 보다 설교를 듣는게 괜찮을 것 같은데? 이만큼 , 새 가족교육을 받아봐?, 등록을 해봐? 이만큼. 심방을 오시라고 그래? 새벽 기도회를 가봐? 이거 너무 많이 양보 하는거 아냐? 금요 기도도 가고? 뭘 하라고? 집사를 하라고? 헌금을 하라고?
내 모든 것 주의 소유 삼으소서
누가 그 고백을 강요 할 수 있겠어요? 자기가 좋아하기 전에는 누가 그것을 내 모든 것 니 모든 것 주의 소유 삼으소서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신자들을 대할 때에도 그 사람의 신앙 인격이 신앙의 불량만큼 마음의 불량만큼 그렇게 되어야 해요. 그러니까 제가 가끔 조용히 불러서 막 야단칠 때 여러분들은 또 기뻐하고 기뻐해야 해요. 나를 얼마나 신뢰를 하시면 이렇게 몰아 부치실까?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해요. 그런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인격의 문이 열리면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에게 전수되는 것처럼 주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오고 그 인격적인 사랑의 통로를 통해서 서로의 말이 신뢰를 얻게 되는 것이에요. 마찬가지로 주님의 말씀도 그런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 속에서 흘러 들어오는 거라 이거죠. 괭장히 중요한 것을 여러분들 배우셨어요. 그러면 이제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해답 얻게 되는 것이에요. 왜 사람들이 그렇게 성경 공부에 열심을 내어도 뭐 3코스 4코스 띄고 성경을 성경 공부 반에서 몇 년을 했다 그러는 지나 별로 못한 내나 품질이 다를 것이 없는 불량품 그리스도인 밖에 안 되는 그러면 이제 입증이 되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식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예요. 제가 그래서 우리교회에서 서경퀴즈대회 전혀 못 하게 하는 이유가 그거에요. 그걸 뭐 하겠어요. 제가 어느 노회에 얘들 데리고 성경퀴즈대회 데리고 갔더니 가관이더라고, 다니엘과 세 친구가 몇 일 동안 물하고 채소만 먹었냐는 거예요. 몇일이면 어때요? 그게 그렇게 중요해요? 요셉이 몇 살 때 애굽으로 팔려 갔냐? 그거 몇 살이면 어때요? 그게 그렇게 결정적이예요. 그것은 뭐냐 하면은 성경 전체를 얼마나 그 중요한 내용들을 알고 있느냐를 평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르는 아이들을 골라내기 위한 것이에요. 그런 시험을 보게 하는 거예요. 그 문제를 다 맞춘 아이가 못 맞춘 아이한테 야! 나 100점이다. 그럴 때 뭘 느끼겠느냐고. 그렇게 가르쳐서는 안되는 거예요. 인격적으로 가르쳐 져야 되는 것이에요. 그런 사랑의 관계가 성립 되어야지만 그러한 인격적인 흐름을 타고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에 대해서 우리의 눈이 환하게 열리는 그런 축복들이 우리에게 온다 이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속으로 깊이 흘러 들어올 수 있는 이 사랑의 통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형성 될 수 있겠느냐? 다음 시간에 계속 하겠습니다.
19. 하나님을 아는 길②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下)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안다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지가 있을 때 더 풍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지 순수하게 성경자체를 탐구의 대상으로 생각하면서 그런 공부를 통해서 성경말씀이 깨달아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러면 어떻게 이 육체를 가진 인간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수가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은 신이시지만 그러나 그분은 인격체이신 신이시다.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육신의 모양을 해야지만 인격이 아니다. 인격은 독립적으로 무엇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의지가 있고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독립된 자기 결정의 주체이다.
그래서 그 인격적인 하나님과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교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도 아무리 오랫동안 잘 지내던 사람들이더라도 무례하거나 너무 부당하게 하면 그 인격적인 관계에 금이 가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어도 우리들이 어느 날 하나님 앞에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은 행동을 했을 때 인격적인 관계의 손상이 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불화 하게 된다. 다시 화해하면은 다시 인격적인 풍부한 교제가 이루어진다.
그런데서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을 이루어낸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할 때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들이 받을 때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성경에 많은 예언들의 참다운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관계가 될 때 그때 풍부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우리들이 갖게 된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는 이 일은 우리들의 전 존재를 걸고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우리의 인생의 목표로 생각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맺을 때 그런 교제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들이 성경을 탐구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많이 깨달아지게 된다.
그래서 양쪽 극단으로 치우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성경을 공부하지 않고 잘 깨달으려는 노력이 없이 느끼려고만 하는 것도 잘못 된 것이고 또 하나는 그냥 하나님께로 오는 깊은 그 사랑이나 체험 없이 단지 탐구하기만 하면 머리가 정리가 되고 그것은 곧 내가 아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 잘못된 극단인 것이다. 그러니까 지식과 체험이 함께 공존해야 된다는 것이다.
(예화)위 두 극단을 설명하기 위해 남편을 중동에 보낸 아내가 남편의 사고 소식을 접하고 후송되어 오는 남편을 맞으러 공항에 나가서 보이는 두 가지 반응을 비유로 든 이야 기.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고 탐구하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살아가는 것, 이 두 가지가 하나님의 말씀의 깨달음의 깊이를 더해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양극단으로 가면 안 되는 것이다. 성경도 부지런히 배우고 설교도 잘 듣고 그러면서도 이렇게만 하면 저절로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말씀의 감화와 무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이 깨달아져서 마음에 새겨지도록 해 달라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그런 사랑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의 깊이가 더해지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이 이성간에 사랑에 깊이 빠지면 모두가 어설픈 문학 소년 소녀가 된다. 대중 가요가 나오더라도 그 순간의 기분은 고귀한 것이다. 전에 읽었던 시나 유치한 유행가 가락이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사랑에 빠져서 이별과 좌절을 경험하게 되면 아무리 타락한 사람들의 정서에 흐르는 것이라고 해도 가슴 깊이 스며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적이 없는 사람과 유행가의 가락이 가슴에 스며들어오는 느낌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생을 말하지 말라”말한다. 사실이다. 왜냐하면 경험을 하니까 평범하게 귓전을 스쳐 가는 이야기들이 가슴속으로 깊이 스며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늘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깨닫는 사람과 성경 하나를 가지고 잘 공부만 하면 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사이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이 교회에서 성도들이 정말 필요로 하는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되 단지 그것이 탐구를 통해서 깨달은 평면적인 지식이 아니라 삶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거룩한 삶의 투쟁을 통해서 얻어낸 자신의 거룩한 삶을 구축해온 진리를 아는 지식인 것이다.
이런 지식을 가진 사람들의 가르침이 훨씬 더 뼛속 깊이 사무치게 된다. 즉 단지 신학의 과정을 마친 사람보다는 이렇게 하나님을 온전한 지식 속에서 성도로서 자신의 삶을 구축해온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기에 훨씬 더 적합한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 문제는 어떻게 해야지 만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면서 진리를 아는 지식의 깊이를 더할 수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거기에 대한 대답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고 계신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저를 사랑하여 저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말씀하고 있다. 아버지는 사랑하시는데 아들은 미워한다든지 아들은 사랑하는데 아버지는 미워하는 경우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마음과 아들의 마음은 하나이다.
예수님께서 요한 복음에서 자주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 말씀하셨다. 그러면 이제 그 앞으로 넘어가서 이런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은 예수님이 당신 자신에 대해서 많이 가르쳐 주려는 사람이며 그렇게 될 때에 그는 풍부한 예수님 자신에 관한 성경에 관한 지식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렇게 하나님께 사랑을 받아서 예수님께도 사랑을 받고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 많이 가르쳐 주고 싶어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여기서 ‘저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는 말은 ‘성경을 깨닫게 하리라’ 하는 말로 봐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의 주인공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냐? 그것을 오늘 성경이 이야기하기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결국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님도 사랑하신다. 그런데 그 사랑하는 사람은 구체적으로 그 사람이 감정의 움직일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그 사랑은 그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그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결론이 성립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도 저를 사랑하여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라고 되어있는데 예수님이 보실 때에 우리가 주님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사랑은 우리 속에만 갖혀 있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 생활 가운데 너무나 많이 남용되고 있는 말 중에 하나가 ‘사랑한다’는 말이다.
사랑에 있어서 질을 생각해야 한다. 사랑이라는 말 자체가 너무나 남용이 되고 있기 때문에 사랑은 이제 품질이 중요하다. 삼류 통속적인 잡지의 표지처럼 낡은 사랑이냐 아니면 지고하고 순결해서 그 한 분 이외는 누구에도 바쳐 본 적이 없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냐 하는 질 싸움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에 유무에 있어서는 단호하게 대답할 수 있지만 질에 있어서 우리들이 단호하게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사랑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한다면 우리들이 주님을 사랑한다 라고 고백하는 너무나 많은 말들이 오늘 만나고 다음 달이면 다시 만날 기약이 없이 헤어지는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연예 감정적인 사랑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라고 하는 것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우리들이 ‘좋아한다’라고 할 때는 다분히 자기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진정으로 ‘사랑한다’ 라고 할 때에는 자기를 유익을 구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다 라고 말할 때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의 삶의 목표를 바꾸어 놨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즉 삶이 동반되는 사랑이 있고 삶이 동반되거나 가치 체계가 새롭게 새워져야할 이유가 없는 사랑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서 볼 때에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아니다.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누구든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없나니”라고 말할 때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과 동일한 의미의 사랑이다. 너희들이 누구든지 간에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목적격의 소유격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누구든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치 체계의 전부다 가 변동을 일으킨 사랑이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사랑도 그런 종류의 사랑이다. 그렇게 사랑할 때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체험적으로 느껴지고 깨달음이 증폭되면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 함축되어 있는 진실한 의미들이 우리의 가슴에 조수와 같이 밀려드는 것이다.
우리들이 한 편의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는데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때 즉 뭔가 메시지를 향해서 결단을 해야 할텐데 쏟아지는 메시지들이 너무나 많은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렇게 오랫동안 듣고 읽으면서도 아무 것도 깨닫는 이유가 없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그만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누고 있는 이 사랑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흐르는 아주 힘찬 통로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절대 하나님의 진리는 개관적으로 단지 접근해서 탐구를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다라는 정신만 가지고는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에 깊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 예수님께서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이 아버지께도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그 사랑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가치체계가 뒤 바꿨느냐? 그것은 계명 중심의 삶이라는 것이다. 희랍어 성경에 보면 ‘나의 계명을’ 이라는 말이 복수로 되어있다. 즉 “나의 계명들을 소유하고 준수하는 자가 나를 사랑하는 자니” 라고 되어있다. 그러면 여기서 ‘나의 계명들’이라고 했으니까 이것은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계명들 중에 한 가지나 두 가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지키면서 살도록 주신 모든 계명, 나아가서는 전 성경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이 한 두 가지의 계명을 지키는데 있어서 자기가 장기를 가진 것 같은 특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으로서 자신의 신앙생활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원래 태어나면서부터 남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주기를 싫어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치면 그런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 당연히 ‘도적질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가슴에 다가올 것이다. 그렇다 고해서 그 사람이 어느 한 계명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나게 준수한다 고해서 그 사람이 높은 수준의 신앙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인데 하나는 그가 어느 한 계명을 탁월하게 잘 준수하고 있다 고할지라도 그가 그 계명을 준수하는 동기가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는데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천연적인 성품에서 비롯된 것인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자기에게 장기가 있는 한 두 가지의 계명을 탁월하게 지킴으로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전 성경 모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모두 동일한 무게로 그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지키며 살려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항상 자기에게 좋아하는 것만을 찾아내서 성경을 이해하고 성경을 읽으려고 하고 그것만을 크게 확대해서 신앙의 세계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구제하는데서 남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고해서 성경 전체가 구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신앙의 세계를 재구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우리 주위에서 보면 너무나 많다(전도, 기도, 헌신). 이런 식으로 성경에 어느 한 두 계명을 이해하면서 그것을 지키면서 사는 자신의 삶하고 결부시켜서 성경 전체 속에서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자기 중심적으로 재해석하려는 것은 거의 범죄에 가까운 것이다.
다만 이럴 수는 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이 참된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 하는 넓은 바다가 있는데 상황이 어떤 특정한 거들을 필요로 할 때 그것을 강조해서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서 해야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쉽지 않은 일 가운데 하나는 지금 성도들이 어떤 설교를 들어야하는 사람들인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께 민감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성도들이 하나님이 보실 때에 어떤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는 있을 것이다. 그 마음을 읽어내는 것, 그것은 설교하는 자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면 비슷한 방향으로 설교가 가는데 그 마음을 읽어내지 않으면 하나님은 심판에 대해서 이 사람들로 하여금 깊이 죄 의식을 느끼고 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두려움 속에서 떨며 나오기를 원하는데 만약에 정 반대로 현재의 삶의 안주하려는 성도들의 비유를 맞추는 설교를 하게 되면 감동을 받으면 받을수록 공동체의 상황은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터득하는 것이 설교 자체를 준비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하고 어려운 일인 것이다.
그래서 한 시리즈가 끝날 때쯤 되면 마음속에 두려움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들이 기도를 하지 않으면 설교자가 감각을 느끼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을 슬퍼하시면서 기도하기를 원하실 것이다. 그 때에 넓은 기독교 신앙에 지식에서 무엇을 꺼내 주어야 하겠는가? 기도라고 하는 창고를 열어서 나누어주어야 한다. 그때에 회중들은 기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이런 경우에는 한 주제를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처럼 자기에게 한 두 가지의 특기가 있다 고해서 그 세계 하나를 크게 확대해서 그 세계를 중심으로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매우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씀을 전하는 사람,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의 관건은 그 창고가 풍부하게 차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기도가 필요하면 기도의 박스를 성결이 필요하면 성결의 박스를 사랑이 필요하면 사랑의 박스를 열 때 막힘이 없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진리가 어떻게 쌓여지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신앙의 세계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자 하시는 풍부한 지식을 통해서 먼저 가르치는 선생이 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풍부한 가르침을 받은 체험적인 학습을 통과한 학생이 되는 기간들이 더 먼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작가들과 청교도들의 작가들의 비교하면서 느끼는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요즘에 작가들은 자기가 쓸 수 있는 방면에 몇 권의 책을 쓰면 고갈을 느낀다. 청교도 작가들은 그렇지 않다. 즉 교리면 교리, 삶이면 삶, 풍부하게 적용을 해서 끌어낸다. 바로 한 사람 속에 기독교 사상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상은 주님을 향한 사랑의 교제 속에서 흐르고 있는 주님의 관한 지식, 체험과 함께 전해지는 진리를 아는 지식의 이 역동적인 축적을 통해 한 사람의 커다란 신앙의 세계가 구축되어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지식은 단지 욕심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전 삶을 건 하나님의 추구이다. 한 두 계명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씀보다는 하나님께서 들려주고 싶어하시는 말씀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전 계명에 집착하는 것으로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중요한 단어가 나온다. 그것은 ‘가지고’ 라는 단어다. 희랍어의 뜻은 분사형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라는 뜻이다. 소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화) 도서관의 책과 집에 있는 책과의 차이를 말한 이야기.
자기가 그 말씀을 소유하지 못하면 그 말씀을 순종하는 동기가 순수하게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동기들이 들어오게 된다. 자기가 말씀을 소유하고 나면 “세상도 나도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 도다” 즉 전도에 있어서 전도를 못하는 자신을 나무라는 목사님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모습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즉 영혼이 돌아올 때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떠오른 는다는 것이다.
(예화) 학교시절, 종로 서점에 가서 책을 녹음해서 보고서를 쓴 이야기.
과거에 공동 수도에서 물을 길어 먹은 이야기.
쏟아지는 말씀 가운데 다른 사람이 감격을 한다 고해서 자신과 상관이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설교자가 설교하면서 감격하면 설교자의 말씀이다. 옆에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감격하면 그 사람의 말씀이다.
(예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구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배급하지 않고 매일 매일 새벽 미명에 자신들이 직접 나가서 담아 먹게 한 이야기.
이것이 바로 ‘가지고’ 이다. 남이 은혜를 받고 설교자가 설교를 잘 하는 것은 자기와 상관이 없는 것이다. 우리들이 소유하고 있는 말씀이 있는가? 자기의 재산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은 그 진리, 그것이 가슴에 새겨지고 가슴 깊이 스며들어서 이제는 우리의 인격과 말씀이 분리되지 않고 그 말씀에 의해서 좌우되는 우리들의 삶, 누구도 흉내낼 수 없고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삶, 오직 그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대로 산 사람들 만이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깨달음, 그런 종류의 나의 하나님의 말씀이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수많은 듣는 지식에 의해서 우리의 인생의 사령탑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수없이 아이들에게 바르게 살라고 교육을 시켜도 그 교육이 그들의 사령탑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본다. 자기의 것이 있느냐는 것이다. 왜 이런 것들이 없을까? 이런 것들이 없으니까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항상 연애 감정처럼 끝나고 인격화되어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하고 깊은 교제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서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타고 스며드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설교를 들을 때마다 우리들 혼자를 놓고 설교자도 없고 함께 드리는 회중도 없고 하나님 홀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그 대면이 우리들에게 있는가? 그래서 예배는 끝나도 우리들 마음속에 생생하게 들려주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의 영혼에 울려 퍼지는 공명이 있느냐는 것이다.
성경을 일고 깨달으면서 오늘은 하나님께서 나 한 사람을 위해서 성경을 쓰신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말씀이 가슴 깊이 새겨져서 도저히 떠나지 않고 우리의 것이 되는 그런 일들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가지고’라는 의미이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쇠뇌 된다’는 말과 그 말씀이 우리들 속에 깊이 들어와서 ‘박힌다’라고 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항상 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기 전 까지는 자기의 삶을 움직이는 말씀이 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사람들은 놀라운 특징이 있다. 그 사람은 그 말씀과 인격이 결탁을 한다. 그래서 거기에서 흘러나온다. 만약 이 사람이 기도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성경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 않고 자기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 만큼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삶과 체험이 하나로 붙어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가르치신 방법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셨다. 그리고 그 진리를 따라서 살고 그 진리를 체험하고 그 진리 안에서 그 진리와 함께 그 진리로 인하여 사셨다. 그래서 입을 열어 말씀하시면 한없이 말씀이 쏟아져 나왔다.
외운 지식을 말하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자기가 체험한 지식을 말하는 것은 한계가 없다. 왜냐하면 체험을 열 번을 이야기해도 열 번 다 묻어 나오는 색깔이 다르기 때문이다. 오늘 본 새와 어제 본 새는 같을 수 없다. 오늘 본 하늘과 내일 보는 하늘이 같을 수 없다. 그런 종류의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이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내면을 깊이 파고들어서 와서 이제는 우리 자신과는 도저히 떨어질 수 없을 정도로 용해되어서 우리들의 소유가 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느냐는 것이다. 성경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계명들을 가지고’라는 의미이다.
마지막으로 ‘지키는 자 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는 것은 상당히 수동적일 수가 있다. 주님이 우리의 마음속에 말씀을 실으시려고 할 때 우리들이 저항하지 않고 마음의 문을 열면 말씀이 심기는 것이다.
그러나 지키면서 사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상당히 능동적이다. 순종하는 삶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내 생각도 내 행동도 주님 마음대로 하시고 이제 다 드렸으니 주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면서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 주시지도 않지만 이렇게 생각하며 기도하는 것은 거의 이단적인 것이다.
주님께서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실 때 그 순종하려고 하는 의지는 전혀 없으면서 계명을 지킬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이야기이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성경 교리에 있어서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들이 순종하는 것만큼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사는 삶은 지키며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사람들은 결코 지키며 살 수 없다. 물론 지키며 살고자 하는 의지 하나만을 가지고는 이 계명을 모두 지키면서 살수는 없다. 결국 지키며 살고자 하는 의지와 함께 그러한 의지를 내가 먹지만은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의지를 가지고 순종하는 나를 복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은 이 계명을 순종하면서 언제나 이 계명을 지키면서 살수가 없다고 하는 노력을 하면서도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화) 술 담배를 끊은 사람들은 모두 끊으려는 의지가 있었다.
하나님은 계명을 지키면서 살 의지가 있는 사람들을 도우셔서 그 계명을 지키면서 살도록 하신다.
그러면 결국은 우리의 모든 삶이 주님을 아는 지식 속에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의 요소라고 하는 것은 결코 동떨어진 채로 존재하지 않고 모두 포괄적으로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동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가르침은 항상 나중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고 만다는 것이다.
원래 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배운 후에는 그 배운 가르침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그 과정에서 진리가 가지고 있는 참된 의미를 우리들이 깨닫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서 그 계명을 우리가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들이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달으면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미워하면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깨닫고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데 문제는 단지 그러한 사실을 교리적으로 알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용서에 관한 계명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우리는 충분히 말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는 순간에 이 사람이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자기 속에 오랜 세월 동안 매우 미워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어느 날 발견한다. 그러면 자기가 배운 대로하면 그 사람을 용서해야 되는데 용서가 안 되는 것이다. 너무나 가슴에 상처를 받고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용서가 안 되는 것이다. 자기는 여태껏 그 사람에게 복수하지 않는 것이 그것이 용서한 것인 줄을 알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보니까 그에게 혐의를 품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과의 기도가 막히는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이 전에 하나님과의 풍부한 기도의 교제를 누리던 풍성함이 오늘 왜 살아졌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때에 그 기도의 만회를 위해서 이 사람을 용서해야겠는데 그러나 사실 이 사람에 마음속으로 미워하는 것이 그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달래는 데는 특효약이었다. 어떤 사람 때문에 가슴이 많이 상처를 받고 아팠을 때 상처를 이기는 길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께 치료를 받는 길이고 또 하나는 자기에게 상처 준 사람을 지긋지긋하게 미워하고 보복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유가 온다. 즉 일시적인 평강이 온다. 그런데 이것을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깨닫는 것은 그럴 듯하게 살아가는 자신의 내면 속에 인간을 향한 처절한 미움이 뼈에 사무쳐서 자기화 되어서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떨쳐 버리는 것이 손가락의 살 절음을 잘라 버리는 것 보다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처절한 몸부림을 통해서 그 죄를 버렸다. 그 사람을 용서해 주는 대신 이제는 상처가 생각나도 미워할 수가 없는 새로운 의미의 상처를 자기가 부여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약속된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평강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가 용서의 계명이 갖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즉 지키며 살고자 하는 실제적인 삶 속의 실천을 통해서 그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가슴에 다가오는 것이다.
공경할 수 없는 부모를 가진 사람들, 화해할 수 없는 형제와의 관계를 가진 사람들, 용서할 수 없는 원수들을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런 종류의 하나님의 말씀은 그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죽지 않고는 성취할 수 없는 계명이다. 죽을 때에는 모두 처절하게 아픈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계명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입증하고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도 사랑하신다. 그러니까 항상 계명을 지키면서 죽는 아픔이 있지만 그렇게 계명을 준수하고 나면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놀라운 감격이 그 고통 뒤에 밀려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태어나셨을 때에 이 아들은 망하고 패하고 흥함을 받는 표적이라고 말씀하신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들이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가지 안이하면은 우리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는 깊은 한계가 있고 그리고 잠시 우리들 귀에 경쾌하고 즐겁게 들리던 달콤하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의 삶 속으로 흘러 들어가서 그 계명을 따라 살고자 하는 자기를 부인하는 절절한 복종의 삶이 없을 것 같으면 아름답게 들리던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우리의 마음도 금방 식어 버리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하게 깨닫다가 한 참 시간이 흐른 다음에 별로 깨닫는 것이 없다고 느껴질 때 사람들의 반응은 대게 세 가지로 나타난다. 그 첫째는 설교자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것이다. 두 번째 반응은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즐거움을 포기하고 다른 즐거움을 찾는 것이다. 세상에 걸어나가는 것도 포함이 된다. 세 번째는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리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들은 대로 살려는 몸부림이 거기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하나의 감상이 된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즐기는 사람들을 견딜 수 없이 싫어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깨달아 질 때에 동반되는 것은 맹서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읽어 주면서 피를 뿌리면 백성들이 아멘, 아멘 하였다. 피를 뿌리는 것은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율법을 생명을 걸고 지켜야 된다는 표시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 역사 속에 흘러나오는 주님께로부터 주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참 뜻을 읽어내는 진정한 깨달음에 세계가 있는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받는 방식이었다.
율법이 낭독되고 하나님의 말씀의 깨달음이 오고 “너희들이 율법을 어기면서 살기보다는 이 율법을 지키다가 죽는 삶을 택하겠느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율법을 너희들이 지키면서 죽어도 좋으냐?” 는 질문이 함축되어 있는 질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선지자를 통해서 들려올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은 저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성경에 전통속에 흘러 내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이 한 사람의 인격속으로 흘러 들어올 때 먹었던 마음가짐이라는 것이다.
오늘 성경은 “너희가 나의 계명들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왜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까지는 즐기고 성경을 읽으면서 이해하는 것까지는 즐기는데 그것이 삶으로 연결이 되지 않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그 다음에 실제로 삶 속에 살아가는 삶이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깨닫는 일에는 비용이 얼마 들지 않는데 살아가는데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유를 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지킴으로서 우리와 좋은 관계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과 깨뜨려지는 것도 경험해야 된다. 또한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버려야 한다. 때문에 힘든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뒤를 따라가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디트리히 본 회퍼’라는 신학자는 우리들이 복음서를 정직하게 읽으면 “너희는 나를 따라오너라 나와 함께 죽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영생이 약속되어 있고 이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이 진리를 따라 산 사람들에게는 짐승처럼 산 사람들과는 비교되지 않는 현재와 미래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렇게 그 계명을 소유하고 그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쓰라림과 고통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용서할 수 없는 사람 때문에 마음을 아파했지만 일단 용서하고 밀려오는 하나님의 기쁨과 은혜, 교제의 회복, 환희, 사랑, 은혜, 자비, 권능 이런 것들이 그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서 지불해야했던 고통보다 더 큰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대로 살고자하고 그 진리의 말씀 앞에 자신이 깨어지는 아픔은 잠깐이지만 그 말씀에 의해서 우리자신이 고쳐지고 그 말씀을 붙들고 살 때에 주시는 주님의 기쁨은 한없이 큰 것이다. 그것을 시편 119편에서 시인이 입이 닳도록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다음 주에 예배에서 큰 은혜를 받는 비결은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이제 내가 이 말씀을 들었으므로 이 방면의 그리스도의 삶에 있어서는 무지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살 수 없었다는 변명은할 수 없으리라 는 각오를 하면서 그 말씀대로 지키며 그 말씀을 깊이 소유하도록 기도하고 소유된 그 말씀을 따라서 살려는 실천적인 의지를 가지고 우리들의 삶 속에서 듣기 전에 우리들의 삶과 들은 후의 우리들의 삶이 구별되지 않도록 우리들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그 때에 그 다음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더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 다음에 읽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의 마음에 놀랍게 깨달아질 것이다. 주님이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들에게 베푸실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지식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열어 주셔서 그 풍부한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를 많이 깨달은 사람들이 순종하면서 그 계명을 지키고 살면 살수록 그들에게는 더 많은 진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스스로에게 깨달아 진다.
왜냐하면 대충 살고자 할 때에는 하나님의 지식의 말씀이 별로 필요가 없었는데 바르게 살고자 하니까 그렇게 바르게 살지 못하게 하는 요인들이 너무나 많이 있고 그리스도인의 항해하는 이 삶 속에 묻혀진 암초가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더 철저한 지식을 필요로 하게 된다. 더 풍부한 하나님의 계시를 필요로 하게 된다. 말씀에 대한 이해를 필요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더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 “주님 내가 이 만큼 주님의 계명을 순종하며 살았는데 주님 더 온전하게 살고 싶습니다”라고 할 때 하나님이 얼마나 잘 가르쳐 주시겠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에 관한 풍부한 지식이 있을 때 누구에게 그 지식을 많이 주겠는가? 그 지식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진보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더 온전한 삶을 살고 싶고 더 온전하게 살아서 더 좋으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래서 더 많은 빛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언젠가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길 것이다. 언젠가는 진리에 대한 감동이 왔다 고할지라도 그 진리대로 살지 않으면 우리들이 예전에 깨달은 것이 진리였나? 그것이 정말 진리에 의한 감격이었는가? 우리 자신들도 기억이 아련해 지고 말 것이다. 진리를 지키면서 순종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더 많은 빛을 받을 것이다. 한 쪽 사람은 점점 짐승이 되어갈 것이고 한 쪽 사람들은 점점 거룩해져 갈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인생의 차이는 이 세상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한 사람의 삶을 하나님을 버린 삶이고 한 사람의 삶은 하나님만 붙잡은 삶이다. 우리들은 과연 어떤 삶을 택하겠는가?
20. 진리를 가르치시는 성령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예수님께서 오늘 보혜사 성령님이 오실 약속과 그리고 그가 오셔서 하실 일들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예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리라”고 앞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계명을 향한 사랑은 하나님 자신을 향한 사랑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정말 조국 교회가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들이 배우고, 우리들 가운데 가르쳐지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경박한 연애 감정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에 비해서 거룩한 삶이 너무나 결핍되어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결코 그런 경박한 시류에 흘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할 세’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흔들려고 가지만 흔들리지 커다란 둥치는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떤 지체들 하나 하나를 보면서 견고하다고 생각되는 지체들을 보십시오. 물론 그들은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를 경험함에 있어서 경박하고 가벼운 것의 위험성을 충분히 파악하고 그 벽을 한번쯤 넘어선 사람들입니다. 그 벽을 넘어서지 않고는 결코 견고한 세계로 넘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실 그런 견고한 말씀의 세계로 들어가고 보면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는 이 일이 아르바이트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어서는 결코 그러한 견고한 생활에 들어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성도의 삶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오늘날 우리들이 흔히 하는 것처럼 주일날이나 와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한 두 번 씩 생각하고 눈물을 찔끔 흘리는 것을 가지고, 우리들이 만약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 속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피눈물 흘리면서 이 진리를 따라서 신앙의 길을 걸어왔던 성경의 수많은 사람들은 쓸데없는 신경 과민증 환자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더 진지해지고 경박한 시류와 결별할 수 있는 지혜로운 진리에 대한 통찰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생각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지난 세 번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반대로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해야지 계명을 지킬 수 있다. 반대로 계명을 잘 지킴으로서 주님을 향한 사랑을 우리가 입증할 수 있다. 우리가 그러면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 것이고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더 많은 하나님의 진리를 보여주실 것이다.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그러면 사랑하는 것도 우리 일이고, 사랑하면 저절로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가! 정말 그런가!’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성품을 바르게 알면서도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순결하게 사랑하던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만났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모르면서도 뭔가 그 사람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 있는 것 같다라는 느낌을 받는 성도들을 저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도 가끔 보게 됩니다. 어떤 거짓이나 허위가 없이 순수하게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지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한 또 하나의 답이 성령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이라고 하는 자판기에 사람이라는 동전을 집어넣으면 깨달음이라는 커피가 저절로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슬롯 머신에 동전을 집어넣으면 쏟아지는 것처럼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계적인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도 인격적이지만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것도 인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격적인 반응이 없이 우리들이 성경을 탐구해 갈 수는 있습니다. 구라파에 보면 하나님을 안 믿는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고 혼자서 신학교에 가서 신학을 하는 것입니다. 불신자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아주 자유스러운 신학을 가르치는 학교에서는 주일날 교회 안 나가는 신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그들도 물론 탐구를 하니까 성경에 대한 진리들을 발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발견되어지겠습니까? 성경 속에서 어떤 모티브를 찾아서 자신의 여러 가지 지식을 나열하는 것이지 정말 성경 속을 관통하고 있는 어떤 하나님의 마음과 밀착된 진리들을 추적해 낼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들키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 자신을 기뻐 보여주실 때 거기에 풍부한 진리의 지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개입되는 것이 성령의 문제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보혜사 성령 그분이 오시면”입니다.
보혜사라는 것은 히랍어에서 파라 크레이토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단어에 돕는 자 라는 뜻도 있고, 변호자라는 뜻도 있고, 상담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세 가지 뜻 중에 하나를 선택을 해서 번역을 하려니까 나머지 의미들이 빠져나가는 것이 번역자들에게는 너무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돕는 자, 상담자, 중재자 이 세 가지 의미를 포함하는 명사가 한국어에는 존재를 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보혜사라는 말을 한자로 하나씩 따서 세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하는 신조어를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보는 중재한다, 혜는 도와준다, 사는 상담해준다라는 것입니다. 결국 보혜사라는 것은 성령님이 어떤 분이 신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성령님의 성품을 알려주는 암시적인 단어라는 것입니다. 그게 파라 크레이토스입니다. 원어적으로는 파라는 옆이고 크레이토스는 변호한다는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너희에게 오시면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고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생각나게 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앞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어서 내가 너희에게 이렇게 가르치지만 너희는 이 의미를 잘 모를 것이다. 그런데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고 너희에게 가르친 것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지금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들이 두 세 주 동안 이 시리즈의 말씀을 들은 공식을 가지고는 해명이 안 되잖아요? 우리들이 두 세 주 동안 배운 중요한 공식은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우리들이 그 말씀을 잘 지키면 주님이 사랑해주시고 그러면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증가된다라는 공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예수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다 가르쳐 주시는데 이 제자들이 못 깨닫는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드리시는 것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이 잘못되거나 부족하거나 아니면 오해할 소지가 있는 결함이 있는 가르침은 아니었습니다. 순전하고 정확하게, 예수님 이후의 어떤 사람들보다 예수님이 가장 정확하게 진리를 가르치시고 하나님과 당신 자신이 누구 신지에 대해서 가르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분 자신이 진리이시고 그 분 자신이 하나님이셨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가르침에는 결함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못 깨달은 것을 예수님이 기정 사실로 생각을 하고 계시는데 그렇게 못 깨닫는 것이 제자들이 예수님이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잘라서 간단하게 얘기하기는 것은 부족하지 않습니까? 그 말이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왠지 그렇게만 간단하게 말하기에는 석연치가 않습니다. 그 간격을 메워지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령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은 성령도 없이 가르치셨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해져서 갈릴리로 돌아오셔서 메시아로 기름을 부음 받으신 후 첫 번째 말씀 선포하시는 장면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의 권세에 강하게 압도되는 현장을 우리들이 봅니다. 요지는 이것입니다. 그러면 이 제자들이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주님이 못 깨달을 것을 당연한 것처럼 말씀하시면서 “성령이 오시면”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그러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만 이 말씀을 못 깨달은 것이 아니다. 두 번째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으로 볼 때 성령님이 오시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고 하니까 결국은 성령이 대답이구나! 그럴 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해 지셨는데’ 우리도 성령으로 충만해 질 때가 있고 안 충만해 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대부분 우리들이 성령 충만하지 못한 것은 게으르고 나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마음속에 있는 쓴 뿌리, 불순종, 패역, 범죄, 유혹에 빠지는 것들 때문에 성령을 슬프게 하고 소멸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령을 슬프게 하는 생활을 하셨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분이었고,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에 하나님을 매우 근심 시켜 드렸기 때문에 성령이 충분히 역사하시기에 힘든 마음의 구조와 정신의 자세, 그리고 삶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신성에 문제가 됩니다. 그랬을 리는 없다 이겁니다. 그러면 그 때에 충만하게 받은 성령의 권능을 마태복음 4장에서 받은 그 분이 10장에서도 그것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부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셨는데 지금 와서 "성령이 오셔야만 너희들에게 내가 말한 것을 생각나게 하고 진리에 대해서 깨달을 수 있다.” 라고 말씀하실 때 왠지 논리적으로 부족한 생각이 들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기에 대한 대답이 뭐냐하면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과 권능을 충만하게 가지신 분이었는데도 사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실 수밖에 없었다 이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이상하다는 느낌을 가지면 더 이상한 것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만 성령의 그런 권능을 가지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일찍이 제자들에게 마태복음 10장, 누가복음 9장에서 성령의 놀라운 권능을 주십니다. 거기에 나오는 권능, 모든 병든 것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이라는 단어가 히랍어로 엑수시아 인데 이것은 상징적인 권능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향해 권세를 가지고 계시다 할 때 쓰이는 그 단어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가지고 있는 권세가 상징적인 권세입니까? 실제적인 권세입니다. 그런 권세를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실제로 병든 자들을 고치고 약한 것들을 고치고 심지어는 죽은 자들을 살릴 수 있는 권세를 주신 거란 말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성령의 권능을 가지신 분이었고, 제자들이 죄악 된 인간의 모습이었으니까 충만하고 충만하지 않은 상태의 굴곡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하여튼 죽은 자도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는 권능을 부여받은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예수님도 성령이 있으신 분이고, 제자들도 성령이 있는 사람이고, 또한 예수님이 그들에게 진리를 말씀하셨는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진짜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한 특수한 집단이었기 때문에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어도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다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렇게 말할 수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이 됩니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암시도 성경에 안나옵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이 세상에 구원의 참된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어떤 표증들이 나타난 것의 기준으로 볼 때에는 예수님이 오시는 것과 함께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열리지만, 그러한 그리스도의 복음과 왕국의 축복이 평민에게 느껴지느냐 부분적으로 느껴지느냐 하는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이 훨씬 더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구속의 역사적으로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탄생, 십자가의 죽음, 고난과 죽음, 부활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이 오순절의 성령 강림을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가셔야만 보혜사를 보내시기로 되어 있으므로 연속적인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무시하고 성령 강림 사건만을 굉장히 중요하게 취급하는 것은 이것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성령을 다루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결과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잡아 당이면 모든 성령 강림 사건까지 한꺼번에 따라오는 것이지 이것이 단절된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오히려 그 자체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잘라서 생각하면 안 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순절 성령이 오셔서 이제 사람들에게 역사 하시는 그것과 예수님이 계실 때에 성령께서 오셔서 역사 하시는 장면이, 성령은 동일한 성령이시지만 그러나 역사 하시는 방식과 이해하시는 주도적인 모습들이 상당히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대 때에 성령께서 오셔서 놀라운 이적을 행하게 하시고, 권능을 주시고 영적인 세계를 드러내시고, 세상을 사로잡고 있던 사단의 권세를 결박하고 깨뜨리시는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가시지만 그러나 똑같은 일들이 오순절 성령 강림이 오고 나서도 계속 행해지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성령이 오셔서 행하시는 그 일들이 예수님이 계속 계셨으면 하시고자 하셨던 예수님의 사역에 뒤를 잇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오시고 나셔서 일어나는 기적과 역사의 현장이 예수님이 직접 일으키시던 기적의 현장에 절대로 못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미 예고하신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보다 더 큰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온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를 통해서 성령으로 일을 하시는데 당신 자신이 지상에서 하셨던 일보다 더 큰 일들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라든지 이런 구속의 역사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건은 누구도 대신할 사람이 없지만 그러나 그런 복음들이 전파되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 면에 있어서는 훨씬 더 큰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인간의 입장에서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 예수님이 하시고 싶으셨던 그 일을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를 통해서 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것이 하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하신 이후에 성령이 하는 굉장히 두드러진 일이 병을 고치고 기적을 일으키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데 사실은 오순절 이후에 성령이 하신 일을 관찰할 때 그것이 일차적으로 우리의 시선을 모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진짜 성령님이 하시는 역사에 있어서 중심적인 것은 사실은 사람들을 죄에 대해서 책망하고 의에 대해서 책망하고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만들어서 그들을 깨닫게 하고 그들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성령님이 하시는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그러한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바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그 가르침을 누군가에게 생각나게 만들어서 그 가르침을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것들을 기록한 것이 이 복음서 이후의 서신서들입니다. 그리고 복음서에는 특별히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들에 대한 행적이, 가르침이 많이 실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신약과 구약이 상당히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은 중심적인 것이 모세의 율법이었고 그 율법을 그 시대에 특별한 성령을 받았던 선지자들이 그 시대에 모세의 율법을 적용시키고자 하는 몸부림들이 선지서들을 만들어냈고, 그러한 와중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들이 시가서들을 만들어냈다면, 이 신약 성경은 예수님의 근본적인 가르침과 그의 행하신 일, 그 전체의 복음이 있고 그 복음이 성령을 받은 저자들이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말씀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경험하고 그것을 그 시대의 교회에 적용시킨 이야기들이 서신서들이란 얘기입니다.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령이 오셔서 하신 우선적인 일은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기적을 일으키는 그것이 성령이 하신 우선적인 일이 아니라, 신약시대 오순절 강림 이후에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하시고 싶으셨던 그 사명은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을 깨달아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들을 생각나게 만들어 주셔서 그 의미들을 터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성령께서 하시고 싶으셨던 일들입니다.
이런 일들은 이미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도 조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전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을 만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예수가 죽으신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때에 예수님이 구약으로부터 메시아에 대해서 예언된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것을 그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풀었습니다. 성령이 역사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신기하게 그들이 구약 성경에 상당히 익숙한 사람들이었을 텐데 그것을 풀어서 설명을 해 주시니까 거기에 성령이 역사 하셨고, 말씀과 함께 성령이 역사 하시니까 그들이 이제껏 볼 수 없었던 구약 속에 도도히 흐르고 있는 메시아 사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 와서 이제 보편적으로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 속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부흥의 역사입니다. 앉혀놓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받아드릴 수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딱 한편의 설교를 들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인생관, 자신의 종교관 사상 속에 그리스도 예수라고 하는 사상이 들어오고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일시에 자기의 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능란한 설교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정확하게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도 필요합니다. 우물우물하고 헛소리 하는데 성령이 역사하실 리가 없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성령이 역사하신다고 해도 무엇을 깨닫겠습니까? 그러므로 정확하게 가르쳐주고 또 한쪽에서는 정확하게 깨달으려고 해야되는데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되는데 또 사랑하는 마음으로 계명을 순종해야 되는데 그러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주님에 대한 말씀이 깨달음이 증폭될 것이다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성령의 문제가 반드시 개입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어디서 읽은 얘기인데, 미국에서 자동차가 나온지 얼마 안된 때에 정비 공장에서 수리를 하면서 힘들어 할 때 양복을 입은 신사 한 분이 오더니 “그것은 그렇게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더니 밑으로 들어가서 만지니까 차가 “부르릉”하고 시동이 걸렸습니다. 정비공이 볼 때 자기는 정비공인데 양복입은 저 아저씨는 누군데 와서 그러나 했는데 포드씨였습니다. 자동차 만드는 회사 사장이었던 포드였습니다. 생산되는 모든 과정을 알기 때문에 소리만 들어도 어디가 망가졌는지 금방 아는 것입니다. 자동차에 대해서도 엔진소리만 들어도 고장난 부위를 알아맞힌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저자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시니까 저자의 확실한 도움을 받는다면 가장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가끔 제가 책을 쓰고 독자들을 만나면 어렵게 쓴 글은 이게 무슨 뜻이냐고 자기들끼리 토론을 한 답니다. 내가 봐도 조금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둘이서 서로 주장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얘기한 것이 맞습니다. 내가 그런 의도로 썼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이 책의 저자이므로 성령님의 도움이 없이 성경을 탐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불쾌하기 짝이 없는 오만입니다.
물론 성경은 암호는 아닙니다. 암호는 아니지만 누구든지 성실히 읽으면 깊은 세계속에 저절로 들어가서 깊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나면 ‘어 틀켰네!’ 그러실 수 있는 세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어떤 자세로 접근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윌리엄 와일러라는 사람이 벤허라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반 기독교적인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 성경을 한번은 읽고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삼분의 이 정도를 읽다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했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만약에 그 사람이 그렇지 않고 “아, 하나님 구원의 길을 내가 묻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주님 나에게 진리를 보여주시옵소서,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무릎을 꿇었으면 창세기 1장을 읽다가 변화 받았을 지도 모릅니다. 어떤 자세로 읽느냐 하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회복하고 깨닫는데 있어서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이다 이겁니다. 설교의 축복, 성령 읽기의 축복, 이 모든 축복은 절대적으로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이 절대적인 변수를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역사 하여 주시지 않으면 진리는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약시대를 보면서 성령의 역사를 굉장히 말을 많이 하는데 종교개혁자들 이후로 확고하게 붙들고 있었던 신앙관은 말씀과 함께 역사 하시는 성령님이라고 하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함께 역사하지 않는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흔하지 않은 것이고 있다고 하더라도 순수한 성령의 역사인가 하는 것을 의심해 봐야하고 더 양보해서 그것이 순수한 성령의 역사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영향을 미치는 것은 미미하다는 것을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주위에서 놀라운 기적적인 사건을 생애에서 많이 체험했는데도 그리스도인들 같지 않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을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다양한 영적인 체험들이 우리의 신앙을 성숙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하도 답답하면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일깨우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방법이지, 하나님을 믿고 성숙한 신앙이 되면 우리들은 성령에 의해서 병 나을 것도 기대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쳐주시거나, 기적을 일으켜 주실 것이라고 하는 것들을 우리들이 늘 믿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삽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와 관련지어서 생각할 때에 성령의 역사를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와 동떨어지게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마지막에는 불행한 신앙으로 떨어지고야 만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국민일보 같은 데서 펜사콜라에서 일어나는 기적의 현장에 초청한다고 하면서 비행기 표를 사서 빨리 날아가자고 수없이 날라 오는 데 그게 전부다 그런 계통입니다. 제가 94년도쯤에 오죽했으면 토론토에 갔었습니다. 40몇 개국에서 와서 2천명이 매일 모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쭉 세워놓고 쓰러지라고... 쓰러지면 뭐합니까? 거기에 한번 쓰러지고 싶어서 안달입니다. 나는 쓰러지는 사람들을 관찰했습니다. 앞에 일부러 나가서 눈치를 주던지 말든지 봤습니다. 그리고 쓰러졌다가 일어나는 사람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개꿈 꾸다 일어나는 사람하고 비슷했습니다. 회개가 있던지, 쓰러지는 것에 대해서는 사실 인정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 이겁니다. 그 사람들에게 그게 굉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우리들보다 굉장히 합리적입니다. 거기에서 일어나는 것을 백 번 양보에서 성령의 역사라고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한국에서 야산에 있는 불건전한 기도원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만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한국에서 일어났으면 전혀 눈에 띄지 않았을 텐데 합리주의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고, 기적을 전혀 믿지 않는 서구 사람들의 사회 중심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이게 엄청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해 동안에 20만 명이 비행기를 타고 그 교회를 다녀갔다고 하니까 관광수입을 엄청 올린 것입니다. 쓰러지면 뭐하냐 이겁니다. 그리고 막 웃고, 성령이 역사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라고 합니다. 거기의 관계자들이 죠나단 에드워즈의 부흥운동하고 연결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면 모든 시대에 부흥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죄에 대한 심오한 각성과 깊은 회개는 왜 없냐?” 그러니까 “우리도 그것이 의문입니다” 의문은 무슨 의문입니까? 그것은 부흥이 아니고 가짜니까 그런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오래 관찰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제가 마음을 다 열고 갔습니다. 기도 많이 하고 ‘이것이 부흥이면 내가 무릎을 꿇으리라’ 하고 갔습니다. 갔더니 역시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저런 거에 진짜 부흥이었으면 어떻게 할 뻔했는가! 부흥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했으면 어떡할 뻔했는가!’ 웃고 졸도하는 것은 죠나단 에드위즈 시대하고 똑같은데 죄에 대한 심오한 각성이 없다는 것은 부흥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요소가 빠진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에게 있어서도 하나님 앞에 깊이 생애적인 각성을 경험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저는 제 설교를 사람들이 듣다가 졸도하는 것도 봤습니다. 그런데 그런 격렬한 체험을 했다고 해서 말씀이 그 사람 속에 깊이 들어간 것이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런 신비한 체험이 하나도 없이 뒤에 앉아서 한없이 눈물을 흘리다가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두 번 세 번 꼭 설교를 들을 때 졸도하러 온 사람처럼 앞에 앉아서 쓰러지면서도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얼마나 열렬히 흥분을 했겠습니까? ‘와! 설교를 듣다가 졸도를 했으니 이제 완전히 인간 뒤집어져서 성자가 하나 태어나나보다!’ 그게 아닙니다. 그런 겉으로 드러난 체험의 깊이가 말씀이 심겨진 깊이와 비례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어떤 신비한 영적인 경험이 없는 것을 가지고 여러분 자신이 굉장히 부끄러워하거나 그런 것이 있는 것을 가지고 교만해 하는 것은 두 가지 점에서 대단히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그 체험의 주인이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고, 두 번째는 그 체험이 꼭 여러분들을 진실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말씀이 심겨지게 만든 징표가 아니라는 점에서 교만할 이유가 없고, 그리고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체험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은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비인격적인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했으면 그렇게 수없이 말씀을 듣고 성경을 읽으면서도 한번도 하나님을 못 만났겠습니까? 오죽했으면 주님이 안 찾아 오셨겠습니까?
하나님 자신을 경험한다는 것과 그분의 신비를 경험한다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너절하게 자기가 성령 체험한 것을 자랑하고 다니는 사람들의 발자취를 한번 보십시오. 정말 기독교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를 보십시오. 그것은 거짓입니다.
참다운 성령의 역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일어나기를 좋아합니다. 어떤 영의 역사가 일어날 때 이 역사가 진정한 성령의 역사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아주 순수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 회중 속에 던져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게 참된 성령의 역사이면 순수하고 참된 복음이 던져질 때 그게 강렬한 불로 타오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때에는 참다운 복음의 진리의 복음이나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진실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면 그 뜨거움들이 쫙 꺼지는 것입니다. 저는 굉장히 많이 경험을 했습니다.
1800년대 초에 켄터키라는 곳에서 부흥들이 일어납니다. 그 부흥이 참된 부흥이냐 거짓된 부흥이냐를 가지고 사람들이 확연하게 갈라지고 교회들이 찢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에 굉장히 혼란스러운 영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격렬한 종교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격앙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라헥스 파더라는 사람이 이것이 정말 성령의 역사라고 확신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일어서서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우리 전능하신 하나님은 거룩하시도다”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그 강렬했던 영적인 불이 확 꺼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참된 성령의 역사라고 할 것 같으면 그런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나게 할 때 강력하게 불붙는 것처럼 더더욱 일어나게 될 거라는 것입니다. 회개할 때 정말 십자가의 사랑에 사무쳐서 회개하는 회개일 경우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나게 하는 복음의 진리를 외칠 때 그 슬픔과 회개의 고통들이 증폭됩니다.
심지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귀신들린 사람을 분별해내는 방법으로서 그것을 얘기합니다. 그것은 로이드 존스 자신의 방법이기도 하고 키더민스터의 리차드 백스터의 오랜 목회이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정말 귀신 들린 게 진실이라면 그에게 선명한 복음을 말하면 반응을 한다는 것입니다. 반응하지 않으면 그것은 귀신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 그리스도와 함께 임하는 사단의 멸망, 그의 피가 우리를 죽음에서 건진 것 등 이런 복음의 진리들을 얘기할 때 강하게 반응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반응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가 정신병 증세를 보여도 그것은 어떤 물리적인 손상에서 오는 것이지 영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럴 정도로 이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진리의 역사는 함께 일어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절대 오늘날에 있는 이런 것들을 깊이 경계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냐 하면 이런 것입니다. 역사를 더듬으면, 50년대 이후 60년대 이후에 강력한 부흥 운동, 그런 말이 성립될 수도 없지만 어쨌든 잘못된 부흥 운동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순수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제쳐놓고 사람들에게 체험을 강조하고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는 것들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70년대 직후까지 그것이 유행을 합니다. 그러다가 70년대에서부터 굉장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은 6,25 이후에 불같은 한국 사람의 교육열이 아이들을 무조건 부모가 학교에 집어넣는데 그 애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오는 때가 70년대 초였습니다. 그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사회가 갑자기 고학력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빈도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받아드리지를 않고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난 젊은이들이 어디로 가냐 하면 선교단체로 가서 성경공부를 하거나 신앙을 버리거나 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의식이 있는 교회들은 1970년대 후반부터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아, 이제는 성령 받아라!, 불 받아라! 이것을 가지고는 안 되는구나! 기도원에 끌고 다니면서 금식 기도를 시키는 것으로는 안 되는구나!’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경 공부 등을 교회 밖에서 배워서 교회 속으로 끌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의식 있는 교회들에 젊은이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움직인 자체가 이미 성령의 역사하심, 잘못된 부흥의 대한 추구들을 보면서 강한 저항감을 가지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반드시 한쪽 극단으로 치운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성주의 쪽으로 다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기대가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니까 매일 모여서 성경 공부를 하고 5권, 6권, 7권 올라가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가보니까 신앙이 도대체 적용이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적인 사회 생활 속으로 들어가 보니까 굉장히 무기력한 그리스도인들 밖에는 안되고 자기 나름대로 성경에 대한 지식들은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삶 속에 깊이 용해되어서 승리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생각 있는 교회들이 눈을 뜨기 시작하는데 그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 이 대답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대답을 찾는데 두 갈래로 찾는 것이었습니다.
한 갈래는 이제 이것은 안 된다. 뭔가 사회와 세상의 문화와 접촉점을 찾아서 현실성이 있는 신앙교육으로 가야 한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쪽이 있고, 또 한쪽은 그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의 부재다. 그리고 어떤 데서는 그 두 가지를 절묘하게 결합을 시키려고 시도하는데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에 대해서 오픈을 하게 된 것입니다. 잠자고 죽어있는 교회가 성령에 대해서 오픈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반대로 튀는 것입니다. 항상 역사가 그렇습니다. 반대로 튀면서 이제는 영적인 것은 이제 뭐든지 상당히 폭넓게 받아드린다. 그러고 나니까 굉장히 위험한 요소들이 함께 딸려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단에 속해서 문제가 된 어떤 비슷한 종류의 운동 같은 것들이 들어오고, 영의 역사를 억셉트하는데 말씀에 대한 선명한 지식과 깊이가 있을 때에는 그것들을 정확하게 참되고 깨끗한 성령의 역사를 받아드리고 그렇지 않은 것들을 차단할 수 있는 능력이 교회에 있는데, 그런 기본적인 능력이 없을 때에는 결국 영의 역사를 받아드리면 함께 따라 들어오는 것이지 그렇게 선명하게 가를 능력이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에게 전에는 성경 공부를 몇 권을 했느냐가 교회에 있어서 자기의 그리스도인으로의 수준을 재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아니라 얼마나 체험을 했느냐 하는 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뭔가 하나를 해소하기 위해서 들여오는데 항상 이쪽에서 튀어서 저 반대쪽으로 가고 또 반대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영의 역사가 혼란스럽다고 생각하면 다시 영적인 은사를 차단하면서 다시 차가운 고백주의 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교회 안에 참된 하나님의 복음 진리에 대한 충만한 지식이 없을 때에는 항상 이런 식으로 극단으로 가는 것입니다. 계속 이러다가 한번도 정확한 방향을 못 잡고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혼재해 있는 굉장히 혼탁한 상황입니다. 악한 영들로 볼 때에는 지금이 아주 절호의 기회입니다. 뭔가 영적인 것들에 대한 메마름이 있고 사모함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분별할 수 없을 때, 아주 기가 막힌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것에 대해서 굉장히 갈급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성령도 잘 역사하시지만 악령도 잘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는 어떤 능력있는 교회 만들기, 강한 그리스도인 만들기, 이런 작업들이 정말 얼마큼 순수한 것인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문제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이런 기본적인 확신,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것이 교회를 강하게 만들고 전도에 능한 교회로 만들고, 병든 자를 고치고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 속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그러나 성령의 우선적인 역사는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도구로 사용해서 죄에 대한 각성을 일으키고 진실한 회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쫓아서 성결한 삶을 살아나가게 하는 것, 이 모든 작업들을 진리와 함께 역사해 나가는 것들이 성령이 하시고자 하시는 가장 주된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제쳐놓고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붙들고 우리에게도 그런 현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모닥불에 불 붙히듯이 그렇게 부채질하는 그것이 항상 건전한 성령 운동으로 이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성령 운동이라는 말 자체가 불가능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부흥이라고 말할 때에 꿈꾸는 부흥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많은 부흥들 가운데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역사한 부흥입니다.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강력한 설교자가 있는 곳에 함께 하는 곳에만 부흥이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어느 한 순간에 동네에 죄에 인식들이 확 밀어닥치면서 사람들이 각성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그들이 어떤 신비한 체험을 하고 하나님의 강한 임하심이 있을 때 아주 강하고 풍부한 진리를 그들에게 보여주는 말씀의 사역자들이 없는 부흥은 영향력을 오래도록 끼치지 못하거나 처음 시작은 성령으로 시작을 했는데 나중에 불건전한 방향으로 번져나가서 결국은 교회에 유익을 끼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입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경험한 부흥이라고 하는 것이 왜 그렇게 교회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느냐 하면 칼빈 이나 루터 이런 모든 종교개혁자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 속에서 말씀의 부흥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성령이 진리와 함께 자기에게 역사하신 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켰을 때 칼빈은 맨 처음에 아주 신랄하게 비난을 했습니다. 그가 파리에 있을 때 영적인 놀라운 변화를 받습니다. 그런 얘기가 시편 주석에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루터하고 틀린 것은 루터는 자기의 체험을 상세하게 얘기를 하는데 칼빈은 상세하게 얘기를 안 했다는 것만 틀립니다. 하여튼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고 스스로 말합니다. 그리고 그가 성경의 진리를 보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개신교의 신앙 사상을 발견하고 그것이 사도적인 신앙와 연결된다는 것을 붙잡은 것입니다.
마틴 루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종교개혁자로 돌아서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복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그가 자기의 자서전적인 기록 속에서 수도원에서 굉장히 고행을 많이 하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무릎으로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그렇게 고행을 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얻어보려고 했는데 늘 실패를 했습니다. 그리고서 너무나 쇠약하고 생명의 위험을 느낄 정도가 되니까 수도원 원장이 비텐베르그 대학으로 쫓아보내는데 거기에서 박사 과정을 밟으면서 끝나서 나서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거기에서 시편, 히브리서, 로마서 등을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체험한 것이 뭔가 진리의 말씀에 대한 굉장한 사모함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전에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그 시대가 가르쳐 주고 있었던 신앙의 어두움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성경이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로마서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나니”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복음에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은 우리에게는 굉장히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의롭지 않은데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의를 이루셨고 우리가 그 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구원받을 토대를 놓아준 것이므로 우리를 그것을 볼 적마다 너무 기뻐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그 성경을 읽으면서 막 울부짖는 것입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복음 속에다 시퍼런 칼을 두셨나이까?” ‘의’ 그럴 때 생각나는 것은 죄인의 목을 치시는 하나님밖에는 생각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그 시대가 그에게 가르쳐준 의에 대한 개념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충분히 파악이 안되니까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다 읽는 성경 구절이 그 사람에게는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깊이 눈이 씌어 있으니까 성경 전체가 안 보이는 것입니다. 막 몸부림을 치면서 하나님 앞에 굉장히 기도를 많이 합니다. “나에게 진리를 보여달라 그것이 무엇이든지 진리를 보여달라” 그때에 어느 한 순간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 가는 데 그가 어떤 고백을 하느냐 하면 갑자기 하늘이 열리면서 신비한 빛이 들어오는 것을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빛이 들어오는데 그것은 단지 신비한 영적 체험일 뿐만 아니라 그 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자기가 알고 있는 성경에 대한 인식의 지평이 확 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알고 있었던 수많은 성경의 참된 의미의 빛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발견한 것이 성경이 굉장히 일관성이 있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의 흐름이 인간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물줄기를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그 체험이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가 알고 있던 모든 성경에 대한 지식에 새로운 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구약 전체를 굽이쳐서 흐르고 있는 구약 역사의 물줄기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마주 닿아 있고, 성령 사건을 데리고 왔고, 세계 선교의 지평과 마지막 주의 재림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 사람이 없었는데도 깨닫게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서 성경 전체가 확 열리는 체험을 한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그 성당에 못을 박은 게 지난주입니다. 그러므로 처절하게 종교개혁을 하면서 써내려 간 것이 어느 정도냐 하면 저가 그 전집을 가지고 있는데 100권 정도 되는데 그 전집도 모두 포함을 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평범한 필사자가 25년을 계속 베껴 야지만 베낄 수 있을 정도의 분량입니다. 그것을 그 사람이 불과 짧은 53세 정도에 죽으면서 그렇게 어마어마한 저작을 남긴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마틴 루터의 학문적인 능력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씀 속에 흐르고 있는 일관성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이 성경 전체가 확 열리는 체험을 가져다주었고, 그 체험과 열린 성경에 대한 사상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 교회, 성경의 진리들을 볼 수 있는 안목을 열어주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을 마틴 루터에게 허락하신 주된 주인공은 성령입니다. 성령이 그것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마틴나 바울과 같은 극적인 체험을 우리들이 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사실 그들보다는 우리가 굉장히 유리한 위치에 서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라는 것이 뭐냐하면 도저히 성경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없고 그렇게 보일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것을 그렇게 보게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혼자 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사람들은 성경을 그렇게 볼 수 없었고 잘못된 사고 방식들이 성경을 바르게 알지 못하도록 가로막았지만 모두 그 사람들의 특징은 고전을 연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에는 고전 붐이 있었습니다. 원어를 공부해서 고전으로 들어가 보니 고전 속에 기독교 앞선 시대에 살았던 교부들이 떠오른 것입니다. 그 교부들이 성경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볼 때 자기들이 중세시대에 해석한 것과는 굉장히 다른 방향으로 해석을 했는데 그 안에 사도의 신앙과 맞닿은 진리들이 많다는 사실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틴 루터나 칼빈이 종교 개혁자들이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쳤지만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혼자서 성경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모두 어거스틴을 통해서 성경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거스틴이 바로 그 개혁자들의 정신 세계를 제공해 준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얼마나 비참하게 타락한 존재라는 것과 하나님의 은총 이외에 인간에게 아무 희망이 없다는 복음적인 교리들에 대해서 해박한 논증을 한 것입니다. 그것을 뛰어 넘어보니까 유래되어 왔다고 하는 카토릭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는 신앙이 결국은 곡해되어 온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가보니까 그 신앙이 사도의 신앙과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진짜 카톨릭이 사도적 신앙을 계승한 교회였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그러한 시대 속에 태어났지는 않았습니다. 굉장히 답답한 시대이기는 합니다.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다 이겁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무릎을 꿇고 승복하겠다는 자세를 가지고 진리를 찾으면 언제든지 접할 수 있는 열린 환경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대의 사람들보다 훨씬 덜 불행하다 이겁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신학을 공부하고 연구했어도 몇 사람밖에 안 나온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기독교 교리의 재발견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것 뒤에 말씀을 열어주시는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 정도는 아니지만 오늘날의 우리들의 시대가 복음으로부터 점점 멀어진 시대이기 때문에 뭔가 말씀의 깊은 세계 속으로 들어오기 전에 한 두 번쯤은 각성을 기억하고 ‘정말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이 신앙이 정말 성경에서 가르쳐 주려고 하는 기독교 신앙인가’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여러분들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깊이 각성시켜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빛을 보게 만들어주는 주된 역할을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내가 아무리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의 은혜를 받으려고 하고 정확한 진리를 대변하는 설교자가 있고, 내가 아무리 성경을 읽으면서 진리를 깨달으려고 하고, 정확하게 번역된 성경이 있다고 하더라도 성령이 역사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에 대한 사모함을 가질수록 성령에 대해서 닫히는 마음을 갖는 사람들은 바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에 대해서 바르게 깨달으려고 애를 쓰면 애를 쓸수록 절대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고 성령의 다양한 체험들을 하면 할수록 그 체험이 무엇인지를 밝혀줄 수 있는 진리에 대한 참된 지식이 너무나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과 함께 역사하는 진리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서 우리의 신앙은 뿌리를 내리고 견고해지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장기간 동안 계속됐던 시리즈를 여기에서 맺는 것은 이제 여러분들이 모두 말씀의 미각을 회복했기 때문에 이 시리지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또 다른 말씀이 시작되고 있기 때문에 시리즈를 여기에서 맺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고민은 이제부터 시작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회복하고 그 하나님이 계명을 지키면서 살도록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이 복스럽게 느껴지지 않고, 여러분들이 어떻게 성도로서 살아갈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르고 있는 자녀들에게 단 1년 동안만 가르침을 멈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학교에서도 가르침을 멈추고, 가정에서도 가르침을 멈추고, 교회에서도 가르침을 멈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아이는 그 공백기 1년 때문에 일평생 짐승과 같은 사고 방식을 가지고 살지도 모릅니다. 안 되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교육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하루라도 게을리 하면 짐승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본성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부지런히 가르치고 교육을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에 대한 깊은 사모함, 언제나 하나님의 음성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말씀의 미각, 그리고 진리대로 사는 단호한 삶, 그리고 그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동적인 역사, 이런 것들을 체험하면서 능력있는 삶을 살아가서 여러분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것 때문에 여러분들이 서 있는 그 자리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도록 그렇게 살아가시고 그 말씀 속에서 주님과 더 깊이 행복을 누리를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말씀과 동행하는 삶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