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에 은혜 받을 준비Ⅰ
(1999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9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은혜 받기 위한 두 가지 준비(행10:24) 1999.3.3 수요예배 1
2. 말씀 주시기를 기도하라(행10:33下) 1999.3.10 수요예배 12
3.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행10:33) 1999.3.17 수요예배 14
4. 하나님 앞에서 듣는 설교(행10:33) 1999.3.24 수요예배 25
1. 은혜 받기 위한 두 가지 준비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행10:24)
오늘부터 몇 주간에 걸쳐 ‘십자가 사경회’를 어떻게 준비해야지만 하나님 앞에 은혜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한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10장은 신약 전체를 통 털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 하나를 기록하고 있다. 그 사건은 다름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최초로 복음이 전파되는 사건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이방인들이 복음을 전혀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서도 유대인들만 예수님께 나아와서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구원의 역사는 이미 구약시대부터 이방인들을 겨냥하고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10장이 신약 전체에서 기념비적인 장이 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다음에 성령에 의해 예루살렘과 유다에서 강력한 부흥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복음에 도에 굴복해서 주님을 영접하는 구원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는데 이 10장은 그러한 복음의 불붙는 불길이 이방인들의 사회를 향해서 본격적으로 번져 가는 시발점이 되었다는데 있다.
우리들이 분명히 아는 사실 하나는 10장 바로 앞에는 그 유명한 사도 바울이 빛으로 나타난 그리스도를 만나고 이방인 사도로 부르심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그를 통해서 이방 선교의 새 장을 열지 않으시고 예루살렘의 목회자였으며 사도들 중에 우두머리였던 베드로를 통해서 이방 선교의 장을 여셨다는 사실이 우리들에게는 매우 흥미롭다.
그러면 베드로가 이방 선교를 위해 계속 사역을 했는가? 그것은 아니냐 문만 열어주고 열어 놓은 문으로는 사도 바울이 나가서 선교를 했다.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주 세심한 선교의 배려와 질서를 보게된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께로 분명히 소명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사도 바울의 의해 이방 선교의 새 장이 열렸다면 아마 교회는 상당한 혼란을 겪어야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열 두 제자도 아니었고 12제자와는 별도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독립적으로 사도로 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랬더라면 아마 이방 선교를 위해서 애쓰는 사도 바울이 이끄는 선교 팀들과 그리고 본국에 남아있는 예루살렘과 유다를 중심으로 하고있는 기존의사도들과 아마 상당한 부딪힘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선교의 문을 열어주는데 베드로를 사용 하셨다. 그래서 그가 돌아와서 자기도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정말 율법으로 따지자면 이방인들과 함께 사귀는 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권위 있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계시를 보여 주셔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게끔 문을 여셨다는 소식을 그들에게 전해 줌으로써 이방 선교에 대해서 예루살렘 교회가 도장을 찍도록 만드셨던 것이다.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방식은 무질서하지 않다. 교회에서도 뜻만 좋으면 아무래도 괜찮은 방식으로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아주 질서로운 하나님이시다. 이 속에서 화평을 이루어 가신다. 이러는 가운데 복음의 역사가 행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들에게 관심이 끄는 것은 이 집회가 이방인들을 위한 첫 번째 사경회였다는 것이다.
이방인들을 위한 첫 번째 사경회였다. 그런데 이 사경회가 불발로 끝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찾아 오셔서 오순절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경험한 것과 꼭 같은 성령의 강력한 부으심이 베드로가 인도하는 이 이방인들을 위한 첫 번째 사경회에서 나타났다. 이 사경회가 실패한 사경회 같으면 우리들이 본받을 이유가 없다. 반면에 ‘이렇게 하면 안 된다’라고 하는 배울 점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경회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사경회였다. 그래서 고넬료의 가정이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성령의 강력한 부어 주심을 경험함으로 캄캄한 이방 선교의 역사에 찬란 불길이 당겨지는 역사가 일어났다.
오늘도 제가 춘천을 다녀왔다. 새벽에 출발하여 세시간 동안 연속해서 강의를 하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농부들이 넒은 들판에서 잔디밭을 태우기 위해 불을 붙이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그런데 불을 붙이기에 노력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한번 댕겨진 불로 바짝 바른 잡초들이 순식간에 타들어 갔다. 거의 몇 백 미터를 계속 타 들어갔다.
이러한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지는 시발점이 된 것이다. 아마 우리의 십자가 사경회가 이 정도만 된다면 기념비 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고넬료의 가정에서 있었던 사경회에는 특징이 있었다.
우선 첫째는 집회를 인도하는 강사가 기도 중에 집회를 시작했고, 그 사경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참석했다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방 선교의 놀라운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 졌는가? 베드로가 기도시간에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할 떼에 이상이 보였다. 즉 하나님께서 이방인 선교의 비전을 베드로에게 보여 주셨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이상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율법에 의하면 먹을 수 없는 짐승 곤충 같은 것들이 잔뜩 있는데 그것을 먹으라는 소리만 세 번 들리고 사라진 것이다. 이해를 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데 왜 이해를 못하였는가? 그것은 베드로의 사고가 편견으로 꽉 차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될 수 없고 이 복음은 오직 유대인들만에 것이라는 것과 그들에게는 구원이 있을 리 없고 성령의 부어주심이란 더더욱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는 편견이 꽉 차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정말 예수님께서 그러셨는가? 아니다. ‘오직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했다. 그런데 희랍어 성경에 보면은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에서’이란 말이 ‘예루살렘에서도 온 유다에서도 사마리아에서도 그리고 또한 땅 끝에서도’ 라는 말로 되어있다.
즉 이 말은 예루살렘에 다 전파되고, 유다에서도 다 전파되고, 사마리아에서도 다 전파된다는 뜻이 아니라 어디에서든지 너희들은 흩어진 그곳에서 거기가 예루살렘이든 유다이든 사마리아이든 땅 끝이든 내 증인이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러한 분명한 사실을 말씀해주셨는데도 편견이 워낙 두터우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는 들리는데 머리에는 입력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뭍든 베드로는 기도를 했다. 같은 시간에 부흥회에 참석할 고넬료도 기도를 하고 있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이 두 사람을 짝지어 주신 것이다. 고넬료에게 구체적으로 제시하기를 욥바로 내려가면 거기 베드로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불러다가 사경회를 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는 사경회는 기도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경회이다. 강사는 이미 정해졌다. 제가 인도합니다. 응답을 받을 필요가 없다. 실컷 기도하고 찾아와서 “목사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십자가 사경회를 인도하시래요” 라는 기도 응답을 받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역사의 하나 하나를 이루어 가실 때 기도를 사용하신다. 이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세례요한의 잉태를 보면 샤가랴가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서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통 속에서 탄생이 예고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에게 ‘지극히 큰 능력이 너를 덮을 것인데 네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을텐데 그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하고 메시야의 탄생이 예고되었을 때 노래방에서 그 예언을 받았는가? ‘보고 또 보고’ 텔레비젼 드리마 보다가 받았는가? 이니다. 그것은 분명한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 속에서 주어졌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신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즉 이미 오시기로 되어있는 성령님이신데 기도라고 하는 발판을 사용해서 오신 것이다. 이방 선교의 장을 여실 때에도 똑같이 기도를 통하여 여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경회가 정말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사경회가 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된다. 사경회하기 전 주일에 와서 “어 사경회 하네!” “벌써 그렇게 됐나!” 물론 이렇게 하고 참석한 사람들도 가운데도 은혜를 받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외적인 일은 하나님께서 그를 너무 불쌍히 여기시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 사람 수준에서는 미리 기도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수준에 맞춰서 주시는 것이다. 즉 “그래 너는 기도는 그만 두고 참석이라도 하면 참 장하다.”라는 것인데 이러한 수준으로 하나님께 대접을 받고 싶은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기도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몫은 자기가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여러분의 몫은 여러분들이 해야된다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고넬료가 제 구시에 기도할 때에 환상을 보았다고 했다. 이와 같이 시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니까 틀림없이 유대인들이 기도하기로 정해 놓은 기도 시간을 따라서 기도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기도는 앞서 베드로가 기도한 시간이 6시라고 한 것을 감한 해 볼 때 세 시간 이상 계속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이 사람은 정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그 사경회에 참석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경회에 기도한 사람이 인도하고 간절히 기도한 사람들이 모이니까 하나님께서 거기에 역사하신 것이다. 즉 그 사경회에 하나님의 축복이 부어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우리 십자가 사경회는 여러분들이 전심으로 이제껏 태어나서 내가 한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그렇게 많이 오래도록 간절히 은혜 받기 위해 기도한 경우가 없을 정도로 간절히 하나님 앞에 메달리고 기도하면서 참여하는 그런 사경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이제 이러한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아니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였으면 하나님께서 그냥 은혜를 주시면 되지 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는가? 라는 질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사경회를 하는 것을 모르시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간절히 기도하면서 준비한 사람들에게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부으시고 그 사경회에서 하나님을 마나나게 하시는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사경회에 참석하는 개인에게 적용하여 생각을 해 보면 이런 이유가 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은혜가 마음이 빗장을 잠그고 있을 때에라도 하나님께서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억지로 마음의 문을 여시고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를 원한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런 것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이다.
여러분 성화 가운데 예수님께서 등불을 들고 닫힌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성화를 본적이 있을 것이다. 그 성화를 자세히 보면 밖에서 잠그거나 잡아당기는 손잡이나 문고리가 없다. 안에만 있다. 예수님께서는 안으로 들어가시기 위해 문을 두드릴 필요가 없으신 분이시다. 닫힌 문을 그대로 통과하실 수도 있는 분이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두드리신다. 이 사실은 말할 수 없이 감동적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한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라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은 신앙의 인격적인 면을 보여준다.
예외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기대하는 바는 신앙생활이 인격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설교를 할 때에도 인격적이다. 즉 설교에 있어서 공갈이나 협박이 없다는 것이다. 설교를 통하여 할 수 있는 대로 설득을 하는 것이다. 이해를 시키려고 애를 쓴다. 설교자의 마음은 성령을 성도들에게 부어 주어야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자신이 설교하는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성도들이 잘 이해 할 수 있도록 할까 하는 마음이다. 물론 이해해서 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인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곳에 성령의 역사가 동반될 때 믿음이 생기게 된다.
주님께서 두드리신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두드리시는 분이 우리의 이웃이라면 이해가 간다. 그러나 두드리시는 분은 우리의 창조주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시며 우리를 위해 자신을 모두 주신 분이시다. 그런 분이 겸손하게 두드리시는 것이다.
주 예수 대문밖에 기다려 섰으나
단단히 잠가두니 못 들어오시네
나주를 믿노라고 그 이름 부르나
문 굳게 닫아 두니 한없는 내 죄라
그렇기 때문에 노예 근성을 가지고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한다. 기억해야 된다. 노예 근성을 가지고 하는 신앙생활은 겨우 실컷 두들겨 맞고 교회 나와서 펑펑 울고, 또 맞을 짓을 하고 또 교회에 나와서 펑펑 울고, 또 맞을 짓 하러 또 가고 눈물 닦으면서 맞을 짓 하러 가고, 이러한 노예 근성을 버려야 한다. 이러한 근성을 가시고는 신앙생활을 못한다.
우리는 깜짝 놀랄만한 간증을 만들려고 예수 믿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노예처럼 산 것을 간증하느라고 입에 침이 튄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더 큰 간증 거리가 생기게 된다. 갈수록 새롭게 얻어맞는다. “왜적으로는 기곡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였다. 내 면에서 주님과 나눴던 사랑의 놀라운 역사, 또 사랑을 잃어버렸던 아픔의 역사, 이런 것들은 다른 사람들이 두들겨 맞고 눈물 펑펑 흘린 반복적인 역사의 파노라마 보다 훨씬 가슴 저미고 가슴 떨리는 역사였다”고 고백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참으로 훌륭한 인격적인 생활을 하였다는 표증이 되는 것이다.
(예화) 아버지 차를 타고 나가서 사고를 내고 아버지께 사고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 다고 말한 아들과 그 말에 “나는 거실 의자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다”고 말한 아 버지 이야기
어느 것이 더 귀한 신앙인가? 물론 사고가 나고도 못 깨닫는 짐승보다는 짐승이었던 아들이 더 낫다. 그러나 더 훌륭한 사람은 거실의 의자에 앉아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한 아버지이다. 사실은 세 번째 사람이 간증 거리가 제일 많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이상하게도 두 번째 첫 번째 해당되는 사람들이 간증하느라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그런데 사람들 마음속에는 신앙이란 인격적으로는 안 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맞아야 되!” “그것밖에는 소망이 없어!” 라고 생각을 한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신앙은 인격적인 것이다.
우리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그런데 왜 기도하게 하시는가? 그것은 신앙의 인격적인 면과 관련된다. 즉 예수님께서 문을 두드리실 때도 문고리 없는 밖에서 초라하게 두드리고 계신다. 이것은 결국 신앙이 인격적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럼 이것과 기도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인격의 자리는 마음이라는 사실이다. 마음에는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의지 즉 지. 정. 의가 그 속에 함께 들어 있다. 아니 함께 들어 있다기보다는 그것들을 움직이는 중심 사령부가 마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마음을 통해서 온다. 즉 이해를 통해서 마음으로 내려가고 마음에서 변화가 일어나서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움직여서 인생을 변화시킨다. 이것이 바로 변화의 통로이다. 다시 말해면 머리로 들어가서 마음으로 마음에서 인격으로 인격에서 삶으로 사람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그냥 밀려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세례요한은 목이 잘리어 그 목이 소반에 받쳐져서 비참하게 죽었다. 왜 예수님 오시는 앞길에 꽃을 뿌리고 성가대의 합창이 울려 퍼져도 시원치 않는데 세례 요한에 목잘린 핏 길을 따라서 예수님이 오셔야 했는가?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이것이 바로 마음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온 인자 메시야 이고 너희에게 이 복음을 전한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할 때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된 마음을 가졌던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 때 그 준비되지 않는 마음의 길을 내기 위해서 온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세례요한이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왔다기보다는 그들의 마음을 깊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그 음성을 듣고 자신들의 마음의 잘못된 것을 고치고 삶을 고치면서 메시야을 맞을 수 있는 준비를 하게끔 한 것이다. 똑같이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일반적으로 준비된 마음을 타고 흘러 들어온다.
(예화) 섬기던 교회에서 삼 년에 한번 있는 중고등부 연합 수련회 때 섬기던 고등부 아이들 이 수련회 전에 매 주일 마다 많이 회개하고 수련회를 위한 기도를 하게 하심으로 신 기할 정도로 수련회의 마지막날 강력한 성령의 임하심이 섞여 앉아있는 아이들 가운데 고등부 아이들에게만 임한 이야기
여기서 뼈저리게 경험한 사실은 준비 없는 수련회, 준비 없는 사경회와 준비된 마음으로 참여하는 사경회가 이렇게 엄청나게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이다. 물론 준비되지 않은 마음으로 참여했다가 은혜 받은 아이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공식이 거의 맞아떨어진다. 그 다음부터는 수련회 가기 전에 누가 은혜 받을 것인지 다 짚어 내나고 그러면 거의 짚어 낼 수 있을 정도로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졌다.
왜 기도하던 사람에 의해서 인도된 기도한 사람이 참여한 그 사경회가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가 부어진 사경회가 되었는가? 오래도록 기도하면서 마음의 밭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릴 수 있는 밭으로 기경 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들이 아무리 집중력이 뛰어나고 영혼의 상태가 좋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아이처럼 사모한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받아들여서 심겨지는 말씀보다는 놓치고 흘러가는 말씀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정말이다. 그러니 우리 마음의 밭이 놀랍도록 기경되지 않으면 수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져도 길가에 뿌리워진 씨앗과 같이 그냥 듣다가는 사라져 버리는 것이 된다. 즉 아무 유익이 없게 된다. 이런 식으로 사경회를 한 두 번 치르고 나면 사경회를 통해서 변화 받을 것이라는 기대가 사라지게 된다. 왜 항상 가면 남에 잔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은 남의 잔치가 아니라 그 사람들은 그렇게 기도하면서 주님을 만나기를 사모하고 한달 전 심지어 두 달 전부터 기도하며 준비한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로 수련회를 앞두고 40일전부터 기도 카드를 만들어서 릴레이로 금식기도 하면서 아이들을 훈련시켰다. 그러니까 이미 수련을 8월 달에 간다고 치면 6월 5월부터 벌써 기대에 부풀기 시작한다. 기도하기 시작한다. 기도하는 동안에 무엇이든지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그 말씀을 받아드리지 못하게 했던 마음의 많은 패역과 굴곡, 거친 마음, 하나님을 향한 반항심, 이런 것들이 다 그 기도의 눈물을 통해서 무너뜨려 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높은 교만은 낮아지고 주저앉아 절망하는 마음들은 절절히 돋우워지면서 평평한 땅이 된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은혜의해가 떠오르면 자신의 마음 어느 구석에든지 안 비치는 곳이 없이 하나님 앞에 준비되는 것이다. 이번 사경회에도 하나님께서 준비되지 않는 사람은 그냥 지나쳐 버릴지도 모른다. 즉 한 쪽에서는 생애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서 어쩔쭐 몰라하는데 어떤 사람은 찬밥인 경우가 있다. 그리고 돌아갈 때에는 하나님이 자기만 소외 기키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된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소외 시키기 전에 자기가 마음속에서 먼저 하나님을 소외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고 사경회에 참석하려고 하는 것은 종교적인 요행수를 바라는 것이다. 어떻게 깜짝 수가 일어나기 않을까 하는 것이다. 어떻게 무심코 내 질은 황소 뒷발질에 돌맹이 하난가 날아가서 개구리 뒤통수에 맞는 것과 같은 역사가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왜 이렇게 비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주님을 만났을 때 “오 주님 이게 누구십니까?” 왜 이런 식으로 만나려고 하는가 하는 것이다. 주님과 만났을 때 “주님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주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미천한 인생을 불쌍히 여기사 이번 사경회에 저를 찾아 주셨으니 우리 여기다 기념비를 세우십시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 맹세를 세우십시다. 이제는 내가 똑바른 신앙생활을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인격적인 만남을 가져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신앙의 인격적인 부분을 배워야하겠다. 이것은 정말 중요하다. 한국교회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열심히 충만하다가 털석 주저앉으면 더 이상의 기쁨을 발견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믿는 기쁨이 교회 나와서 봉사하고 직분이 올라가는 즐거움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도 주님의 사랑이 동기가 될 때는 이것도 신앙의 도움이 되지만 그런 사랑이 식고 신앙이 잠들게 되면 남는 것은 차가운 일인 것이다.
우리가 더 많이 배워야할 기쁨은 “나 같이 멍청하고 돌 같은 인간이 여기에 와서 하루하루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주님을 닮아가고 있구나!” 하는 성화의 즐거움을 가져야 한다. 이런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구속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기도가 한계에 도달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인식이 깊고 풍부하게 살아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할 말이 많아지게 된다.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오늘은 나를 어떤 모습으로 보실까 라고 하는 인격적인 관계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예화) 한 자식이 아버지에 대한 인격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이 아버지에게 자신이 필요한 것 만 조르며, 심지어는 신앙생활까지도 들먹이며 자신의 요구만을 아버지께 구하는 이야 기
우리의 기도도 이와 같이 비인격적인 기도가 아닌가? 이와 같은 비 인격적인 기도에는 향기가 없다. 맨 청구서만을 찢어서 던지는 격이 된다. 이러한 기도는 응답을 받을 리가 없다. 그러면 인격적인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만 살아있어서는 인격적인 기도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타내야겠다는 목표 하나만을 가지고는 인격적인 기도가 안 된다. 인격적인 기도가 되려면 기도 속에서 자기 비추임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풍부하게 자기가 어떤 사람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기도하는 가운데 기도 제목을 통해 나 자신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깨닫게 된다. 나는 하나님의 호주머니만을 쳐다보고 기대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제목을 가지고 매일 당신에게 나아오는 우리 모습 전체를 보시면서 안타까워하시는 부분이 무엇인가? 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기도의 제목은 갈망하였지만 정말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갈망했는가? 내가 정말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었는가?
이런 반성이 풍성한 빛으로 계속 더 일어나게 된다. 그 때에 우리의 기도가 풍성하고 인격적이 기도가 된다.
사경회 하기 전에 이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 뭐가 필요한지를 생각나게 만드신다. 나는 공부를 간증할 정도로 잘한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예습과 복습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필연적으로 예습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고 오기 때문에 공부를 할 때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를 알고 빠뜨리고 지나가면 손들고 질문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공부를 할 때만이 예습을 할 때 하는 것도 나오고 모르는 것도 있을 것이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여러분들이 깊이 기도하기 전 까지는 여러분들에게 정말 무엇이 필요한지 잘 모른다. 여러분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그것이 절대로 필요 없는 것 일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을 해야 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깨어지게 만들고 또 깨어나게끔 만들어 주는 중요한 수단이 바로 스스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높아졌던 마음이 낮아지고 낮아졌던 마음이 돋워지고 그리고 착각했던 것들은 모두 내려놓고 그럼 결국 마음이 고루어 지면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착한 마음으로 그리고 촉촉이 은혜로 사모하는 눈물로 젖은 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경회 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그 눈물은 굳어진 마음 밭에 내리는 이슬비와 같아서 눈물 흘리는 기도 없이는 말씀을 듣도록 마음을 준비하라고 외쳐는 소리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흘리는 그 눈물은 설교를 잘 들을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준비케 한다.
겨울에 땅이 꽁꽁 얼었을 때 곡갱이를 가지고 힘껏 내리치면 불이 번쩍 난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여름 땡볕에도 일어난다. 즉 바짝 가물 때 땅을 파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장정이 있는 힘을 다해 내리쳐도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데 비가 내리어 마른 땅속으로 스며들면 위는 아직 마른 땅 같지만 아니다. 곡갱이도 필요 없고 삽을 가지고 파도 깊이 들어간다. 사경회 하기 전에 돌 같고 마른땅과 같은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심길 수 있도록 자기를 준비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있는데 왜 짐승처럼 살다가 하나님 앞에 막 나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할 수 있는데 왜 하지 못하는가? 인격적인 신앙생활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적당히 몰아 부치는 교회를 좋아한다. 이런 사람들은 심리적인 불구자들이다.
지금부터 기도해야 된다. “하나님 이번 십자가 사경회에 제가 정말 주님을 만나야겠습니다. 물론 주님을 한번도 안 맞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껏 내가 맛보았던 만남 가지고는 정말 제 결심을 유지할 수 없었고 또 주님이 주신 은혜를 잘 지키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 제게 필요한 것은 늘 있는 만남이 아니라 생애적인 만남입니다. 하나님 제게 그런 만남을 주십시오.” 라고 하면서 기도하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이 모두 기도해야 한다.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렇게 기도로 뭉쳐지는 가운데 그 기도 속에서 흘리는 삼 사주 동안에 눈물과 땀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져서 여러분의 가슴에 떨어지고 교회 전체 위에 떨어져서 마음 밭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게끔 준비되고 그렇게 기도의 온기가 따듯하게 베어있는 그 곳에 성령이 오실 때 잘 역사 한다.
(예화) 수영 선수들이 경기에 앞서 두꺼운 코트를 입고 땀을 흘리는데 그 이유는 땀으로 말 미암아 물의 저항을 덜 받아 기록이 좋아진다는 수영경기 해설자와 목사님의 목욕탕에 서의 실험이야기
마찬가지이다. 성령이 사경회 하기 전에 깊은 기도로 하나님 앞에서 산란했던 마음을 끊고. 사경회에 주님을 만나야겠다는 굳은 마음을 가지고 그 동안의 실패로 인한 비참한 삶을 생각하면서 겸비한 마음으로 주님께 메어 달리며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정말 사랑하신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는 가운데 여러분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가 밀려올 수 있도록 기도로 준비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 전체에 기도의 눈물과 땀으로 촉촉하게 젖어있는 그곳에 성령께서 오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역사 하시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고넬료의 가정의 사람들처럼 잘 준비했다가 정말 은혜 받는 그런 사경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의 집회 참석을 위해서 이렇게 오랫동안 정성껏 마음을 다해 기도한 적이 없을 정도로 깊이 기도하고 은혜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두 번째로 이 고넬료의 가정에 은혜가 넘친 것은 고넬료가 사람들을 다 초청했기 때문이다. 24절에 보면 “이튿날 가이샤랴에 들어가니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일가와 친구들을 모두 모아서 열린 사경회였으며 그리고 또 하나는 기다리던 사경회 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선 두 번째로 이 고넬료의 사경회의 특징은 고넬료 혼자 한 사경회가 아이였다. 기도한 사람은 고넬료이다. 그런데 고넬료가 데리고 온 사람들도 은혜를 놀랍게 받은 것이다. 기도를 많이 하고 기도를 한 사람이 그 사람들을 인도해서 데리고 오면 그들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인생을 살면서 벼랑 끝에 내 몰린 적이 많을 것이다.
(예화) 어느 해 사경회 금요일 밤중에 평소에 교회에 잘나오지 않던 성도가 밤에 벼랑 끝에 가서 떨어지려고 하는 꿈을 꾸고 교회를 찾아 왔는데 그때 마침 사경회 주제가 ‘벼랑 끝에 선 인생’ 이었고 그 성도가 죽기살기로 기도해야되겠다고 말한 이야기.
우리는 모두 이렇게 인생에 벼랑 끝에 서 본적이 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즉 위기가 변하여서 기회가 된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은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왜냐하면 주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벼랑이라고 하는 말은 죽음 끝을 의미한다. 벼랑 끝에서 만난 하나님의 은혜를 돈을 주고 바꾸겠다는 것은 지금 살만하니까 할 수 있는 말인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지금 벼랑 끝에 서 있다는 생각을 보자.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다가 데리고 와서 하나님을 만나면 여러분들은 그 사람에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인생 자체를 새로 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니엘서에 보면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사람들은 별과 같이 빛나리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가장 커다란 상급이다. 그까지 것 돈 가지고 구제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벼랑 끝에 몰리 사람이 돈 백 만원 가지고 살아날 수는 없는 것이다. 벼랑 끝에서 조금 앞으로 나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벼랑은 벼랑이다.
눈을 들어서 우리의 주의를 봐야 한다. 우리의 일가 우리의 친적 그리고 우리의 친한 친구들을 돌아 보야야 한다. 정말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이 너무 많다. 리차드 백스터는 “그런 사람들이 불쌍하지 않느냐! “만약에 불쌍하지 않다면 당신이 불쌍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주님의 사랑을 말로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간절히 기도하고 데리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큰 비용이 드는 것이 아니다.
(예화) 동창생 가운데 불교계에서 꽤 높은 지위 있던 사람이 감옥에서 전경이 전해준 파란 성경책을 읽다가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는 말씀에 회심하여 목사가 된 이야기
결국 하나님의 역사는 모르는 것이다. 고넬료는 집회를 열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은 다음에 혼자 온 것이 아니라 일가와 친구들을 다 모았다. 여기는 그 이야기가 나오니 않지만 고넬로는 성령의 지시를 받아 시몬 베드로를 초청하는 이 사경회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을 확신했을 것이다. 그래서 다양한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들을 달래고 구슬려서 어떻게 하든지 이 축복된 자리에 참여 시켜야겠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방인이었던 일가와 친구들을 모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여기서 무엇을 말하는지 생각해 보라.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 앞에 경배하면서 주님의 사랑에 목메인적이 많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만 그렇게 사랑한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오해이다. 주님께서 “내게는 아직 우리에 들지 않은 양들이 있다.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이 내게 있어서 그들도 내가 안 목자에게로 인도하여야 할 터인데” 라고 말씀 하셨다. 누구를 통해서 그 일을 하시는가? 우리를 통해서 하시는 것이다. 문제는 무엇인가?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복음이 아니면 아무런 희망이 없는 저 인생들을 주님이 사랑을 만나지 않으면은 아무런 소망이 없는 저 비참한 인생들을 위해서 손을 내밀지 않은 것이다. 핑계될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 없음이며 그리고 그것은 불순종이었다.
그러니까 이때를 하나님 앞에 깊이 참회하는 마음으로 이번 사경회는 우리의 일가와 우리의 가정 그리고 우리의 친구들을 두루 두루 다니면서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진 사람들까지 다 돌아보면서 이 복음에 잔치에 참여해서 약속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그리고 이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우리가 벼랑 끝에서 주님의 손에 이끌려서 광활한 곳으로 들어 섰던 것처럼 마라와 같은 광야를 지나면서 우리 앞에 샘을 터뜨리듯이 은혜의 생수를 주셔서 우리를 살게 하신 그 하나님을 우리가 만나게 해 주어야겠다는 내가 바로 그러한 도구로 내 친구와 내 가족 그리고 내 일가 그리고 내 친척 내 사랑하는 동기간들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 라는 마음을 가지고 뜨거운 마음으로 그들에게 전해야 한다.
여러분은 아직 이 공간이 차지 않은 것을 보면서 슬픈 마음이 들은 적이 있었는가?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 층이 저렇게 기다리고 있다. 그래도 우리가 감격하고 은혜 받는 동안 우리의 일가 우리의 친척 우리의 친구 우리의 직장의 동료 스치고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 속에서 내게도 그 피묻은 복음을 들려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우리의 귀에 들려오고 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 사경회는 우리 식구끼리 조촐하게 하는 그런 사경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사경회, 생애 벼랑 끝에까지 몰린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광활한 곳으로 걸어가게 되는 그런 놀라운 사경회, 나아가서는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해 마라와 같이 쓴 물을 머금은 고통스러운 길을 걸어가다가 터치는 생수를 만나고 거기에서 임마누엘의 샘에서 목욕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물 붙듯 성령의 은혜를 부으시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시다. 그러나 여기에 사람들을 가득 채워서 이 피묻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이다. 우리의 책임이다.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간절히 집회를 위해서 우리 자신이 기도 속에서 주님을 뵈옵게 되도록 하나님 앞에 메달리면서 또 한편으로는 눈을 들어서 주위에 있는 많은 곤고한 영혼들을 돌아봐야 한다.
이런 사경회가 되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기다렸다고 했다. 이 고넬료의 사경회는 기다리는 사경회였다. 이것은 기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기대를 가지고 고대하는 마음을 가진 사경회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경회를 준비하면서 여러분들이 사경회를 통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원하는가?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그래야 기대를 가질 수 있다. “아 나는 오늘 내 힘으로 몸부림 쳤지만 도저히 벗아날 수 없었던 이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주님의 음성만 들을 수 있다면 나는 좋다. 그리고 주님이 음성만 주시면 순종할 각오가 되어있다“ 라고 심리적으로 기다리는 사경회가 되어야 한다.
D-20, D-16, D-15, D-5. D-4, D-3, D-2, D-1, “오늘이 그 날이구나!” 라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환경도 열어 주신다. 우리에게는 받은 증거가 많다. 왜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시지 않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것보다도 주님이 우리를 만나기를 더 간절히 원하시는데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왜 길을 안 열어 주시겠는가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기다리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 사경회를 고대하면서 기다릴 때 주님이 바쁜 일이 쏟아지다가도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신다. 그래서 참석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다. 그래서 하나님 만나게 해 주신다.
이렇게 기다리는 마음으로 고대하고 고대하는 그런 사경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말씀 주시기를 기도하라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10:33)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 이 시간에 이방 선교에 첫 장을 열었던 고넬료 집안의 이 말씀 사경회를 살피면서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준비했기 때문에 이방 세계에 성령의 불길이 전해지는 첫 번째 도구가 되었는지 오늘 우리가 한 번 더 깊이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고넬료는 이제 베드로를 불러다놓고 자기가 어떻게 베드로를 여기까지 모셔오게 됐으며 그리고 베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이고, 정확히 말해서 베드로를 자기에게 보내신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이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간단한 말로 고백을 했습니다.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모였습니다.” 아주 짧은 문장이지만 여기에는 어떻게 우리들이 다가오는 사경회를 기다려야 하고 ,또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가장 훌륭한 은혜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되는지에 대해서 거의 완벽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선 이 고넬료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것을’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자기 발로 갔지만 ,그러나 고넬료는 이미 베드로가 자기 말을 하기 위해서 거기 온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고넬료가 듣고싶었던 것은 베드로의 말이나 베드로의 충고가 아니라 베드로를 통로로 해서 주시는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고넬료가 궁금한 것이 얼마나 많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점들이 제일 궁금했을까요? 고넬료로 돌아가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방인인데,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도,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속했는데, 더더군다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잃은 양을 위해서 오셨다고 유대인들이 이야기를 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 말고는 은혜 받은 사람들이 거의 없는데, 그런데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정말 경외하게 되었습니다. 깊이 기도하면서 그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만져주심을 경험했을 겁니다. 아마 이스라엘 사람보다 더 많은 만져주심과 성령의 은혜 주심은 그 확증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신앙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기도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주님을 묵상할 때에는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분명한데 이방인인 나도 정말 구원을 받는 건가, 저 인간들 이야기대로 나는 아무리 이렇게 하나님을 잘 믿어봐야 괜히 나 혼자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 얼마든지 교리 적으로 할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또 그 사람이 이달리야대의 백부장으로서 그렇게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신령한 신앙 생활을 이어갈 때에 그는 자기 동료들에게는 피지배 국의 이방 종교를 따라가는 아주 지조 없는 군인으로 비춰졌을 겁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런데서 오는 여러 가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리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 기록이 있지 않지만 묵상을 해보면 우리는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얼마나 궁금한 것이 많았겠습니까?
더군다나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임한 이래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는 이 그리스도 교회의 말하자면은 가장 중요한 우두머리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우두머리였습니다. 얼마나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겠습니까? 하나님까지 갈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그냥 그 사람한테 물어보면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궁금한 게 많았겠습니까? 저 같으면“베드로 선생, 이거 헛다리 집는 거 아닙니까? 내가 이렇게 믿어도 구원을 받긴 받는 겁니까? 하나님이 기도하고 깊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만져주시고 그리고 나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강한(?) 증거를 보여주셔서 의심할 수 없는데, 이게 결국 이 땅에서만 이러다가 천국에 갔을 때에는 딱지맞는 거 아닙니까?” 이런 거 같으면 물어봤을 것입니다.
똑같이 이 사람에게도 정말 알아보고 싶고 물어보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완성된 것도 아니고 풍부한 설교자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이때까지는 아직 이방인들과 함께 먹고 이방인들과 함께 교제하는 것 자체가 예루살렘 교회에서조차 허락이 안됐단 말입니다. 그냥 그 기독교를 아는 지식으로부터 소외되어있었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안 그런 것 같습니까? 그렇지요? 얼마나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관심은 베드로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 관심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점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도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점입니다. 이 사람이 만약에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베드로가 오는 것을 보고 ‘아, 끝났다.’ 그랬을 것입니다. 이제 원조가 왔는데 무슨 필요가 있냐는 것입니다. ‘풍월로 주워듣던 복음을, 풍월로 주워듣던 기독교의 진실을, 이제 원조가 왔는데 더 이상 염려할 것 없다.’ 그러고 ‘당신에게 듣고싶습니다.’했을 것입니다. 고넬료의 관심은 베드로가 아니고 누구입니까? 베드로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에게 관심이 있었습니다.
제가 언젠가 목자와 양 시리즈를 설교하면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은 죄가 마지막 주님 앞에 갔을 때 얼마나 큰 죄인지를 불현듯 깨닫는 날이 오리라고 제가 누차 여러분들에게 경고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설사(?)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한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기도하지 않으면, 그 설교자를 위해서 그 설교자를 통해서 말씀해주시는 하나님 앞에 설교자를 의뢰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하나님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설교자의 설교 재간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반복하겠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달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만약에 여러분들이 설교자를 위해서 설교자를 붙들어주셔야 할 하나님께 그를 의뢰하며 간절히 기도하지 않고 설교하는 그 현장에 나와서 귀를 기울인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이 아니라 한 설교자의 설교의 재간을 의뢰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 앞에서는 설교자 앞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정말 하나님 앞에 설교자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했다면 사람 앞에서 그렇게 흥분하지 않습니다. 누구 앞에서 충분합니까?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 아, 하나님, 주님, 어쩌면 그렇게 대단하십니까? 어쩌면 그렇게 내 마음을 파헤치셨습니까? 주님이 내 마음을 녹이십니다. 주님 때문에 얼어붙은 것과 같았던 수십 년의 신혼 생활이 이제 녹고 있습니다. 주님, 계속해서 이렇게 일해주시기를 저는 하나님 앞에 기대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너무 힘듭니다. 그것을 여러분 기억하셔야 됩니다. 정말 기억하셔야 됩니다. 왜냐하면 이 인간들에게는 인간에게 예속되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매일 목회자하고 대들고 대거리하고 싸우자는 얘기가 아니라 정확히 하자는 겁니다. 모든 목회자의 마음속에는 -저는 이야기하는 게 참 조심스러운데, 잘 새겨들으십시오.-모든 설교자의 마음속에는 교주가 되려는 욕심이 조금은 있고 모든 교인들의 마음속에는 그 교주의 지배를 받는 예속된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욕망이 조금은 있는 겁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만나면 안돼는 겁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거기에 없는 겁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그럴 리도 없지만- 한 설교자를 계속 주목하고 그에게 계속 열망한다면 하나님이 결국은 그 설교자를 껍데기로 만들어 버리고야 말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지만 여러분이 하나님을 바라볼 테니까 말입니다. 이것은 지금 굉장히 심각하고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제 평생에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온 교회의 성도들이 저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께 의뢰하며 뜨겁게 호소하고 있다는 것을 불길같이 느껴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런데 아직은 못 느꼈습니다. 조금씩 느낄 때는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내 영혼을 압도하듯이 느껴본 적은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멀었다는 이야깁니다.
10장 시작할 때부터 고넬료는 두 가지 점에 있어서 이 사도행전 저자인 누가의 주목을 받았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기도하는 것과 구제하는 것 두 가지 였습니다. 깊은 기도와 진실한 구제, 이 두 가지가 고넬료의 경건의 특징이었습니다. 기도가 나온 겁니다. ( ? ) 그러니까 이방인임에도 ( ? ) 불구하고 아주 정확하게 보는 것입니다.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이것이 베드로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기분 나쁜 이야기입니다. “베드로, 당신은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된 기독교의 원조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당신도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줄 수 있는 도구가 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런 고백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감탄이 터지지 않습니까? 저만 감탄이 터집니까? 정말 이 시간에도 가슴이 저며오는 것처럼 감동이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멋진 분이고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성령님께서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지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참 놀랍습니다. 지금 제가 이렇게 천천히 웃으면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하지만, 이것은 울컥 쏟아지는 피로 써야지 될 글들입니다. 이 진리만 바로 깨달아도 조국 교회가 이처럼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깊이 기도하니까 벌써 사람이 다르지 않습니까.
옛날에 저녁에 설교를 통해서 감화를 주시던 목사님 한 분이 신학교에 계셨습니다. 그 분이 내내 강조하는 이야기가 “교회에 부임할 때 보따리를 받기 위해서 맨발로 뛰어나오는 그 첫 번째 사람, 그 사람만 조심하면 목회에 성공합니다.” 저는 맨 처음에 그것이 농담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주 신학적으로-신학적으로라면 너무 거창하고-그것이 성경 적으로 ,종교 심리적으로 입증이 되는 진리입니다. 그것이 무슨 이야기냐 하면 처음 부임하는-제가 이렇게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저는 보따리 들고 온 사람 아니고, 보따리 받아준 사람 여기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종교 심리적으로 자기가 신앙에 대한 깊은 관심, 목회자에 대한 깊은 기대가 없다, 복음 전하는 자에 대한 깊은 기대가 없다면 왜 맨발로 뛰어나오겠습니까? 그 버선도 빨라면 다 비누 들어가고 물 들어가는데 말입니다. 종교심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대하는 바가 큰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다행히 사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역사 하는 하나님을 기대하는 이러한 고넬료와 같은 기도의 세계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러한 환영이 문제가 안 되는데, 이것이 위의 것이 잘라지고 사람을 향해서만 주목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모두 잘합니까? 실망도 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목사님이 하신 이야기가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입증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고넬료가 기도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새 종교에 원조-물론 베드로가 원조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 원조라고 할 수 있었던 그 사람이 왔을 때에도 이 고넬료의 관심은 베드로가 아니라 베드로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옛날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싫어하시면 하늘을 닫으시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심으로 그들에게 양식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만약에 한 교회를 하나님이 문을 닫으셔야되겠다고 마음먹으시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핍박을 받게 하면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더 불길같이 신앙이 일어납니다. 어떻게 해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쉽게 얘기하면 그 교회의 강단에 감화를 말려버리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그것을 듣고 싶습니다.’ 그랬으니까 이 고넬료는 베드로가 분명히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음성을 그대로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던 것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이 고넬료는 하나님이 말씀해주신 것이 있을 때에 이 사경회가 성공할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목회자의 그 말씀의 세계에 감화가 끊임없이 마르지 않도록 얼마나 기도하고 계십니까? 혹시 설교만 잘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설교자가 여러분들에게 풍성한 꼴을 먹이기 위해서는 설교를 잘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설교자가 하나님의 설교를 잘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자가 설교를 잘 하게 해달라고만 기도하는 것은 모든 말씀의 감화가 설교자의 입술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되면 안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설교자가 사경회를 위해서 준비할 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어야 됩니다. 사경회 뿐만이 아니라 살아가는 삶 자체입니다.
그렇다면 전자와 후자를 비교해봅시다.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없는데 설교를 잘한다라고 하면 결국은 샘 없이 퍼내는 것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마르게 되어있고, 마르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꽃을 만들어내는데 그 꽃이 가짜 꽃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결국 자기도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말씀이 없으니까 메마르고 회중들도 파멸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말씀은 풍성한데-그런 경우가 흔치는 않겠지만-여러 가지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면 최소한 그 설교자는 살아남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원래 한 가닥 하니까 그 사람 불러오면 뭐가 되겠지’하는 마음으로 집회를 하는 교회들이 상당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느껴질 때는 가지 않습니다. 목사님 모셔다가 집회에서 한 번 긁어 얻으려는 겁니다. 이것은 전부가 다 동기가 순수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화) 전주에서 목사님 초빙한 얘기
아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불러오면 목회자 자신이 ‘주님이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 까?“ 이러고 기다려야지 그 사람 불러다가 얼굴 마담 세워 가지고 뭐 어떻게 좀 한 번 해보려고, 그것이 뭐냐 이겁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동기를 순수하다고 보겠느냐 이겁니다. 영혼에 대한 깊은 아픔도 없고, 설교자를 통해서 자기에게 말씀해 주셔서, 자기와 함께 자기 모든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변화될 것이라는 기대도 없고 , ‘당신 한 번 여기 와서 재주 한 번 부려서 내가 못 모으는 교인 한 번 우리 교회에 등록 좀 시켜보시오’ 라는 것이 사경회의 목적일 수는 없는 겁니다. 그것은 상업입니다. 아무리 그것을 통해서 교인들이 혜택을 받든 안 받든 그것은 그 사람들 문제이고 그런 마음으로 집회를 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저는 그런 부탁 받아본 적도 없는 저한테 해봐야 저는 가지도 않지만, “목사님, 오늘 우리 교회 집회에 꼭 오십시오.”, “목적이 뭡니까?” 목적이 어디 있습니까. 목적을 가지고 여는 것은 안됩니다.
제가 전에 있던 교회에서 건축 헌금을 걷으려 하면 꼭 모 부흥사를 모시는 겁니다. 아주 질색을 했습니다. 목사님께도 그렇게 하시면 안 된다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설교자를 부를 때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겠다 라고 하는 이유 이외에 그를 부르는 것은 모두 외도입니다. 신앙적인 간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모여서 예배하는 자리는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의도 그 하나여야지 다른 목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냔 말입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하면 하는 거고 못하면 할 수 없는 것이지 뭐 칼 들고 빼내겠습니까,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안돼는 겁니다. 여기에 앞으로 목회 하실 분들 많으실 겁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보십시오. 이 고넬료는 하나님이 그 베드로를 통해서 말씀을 주심으로써 자신들의 집에서 열리는 사경회가 정말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사경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이번 사경회에 여러분들이 은혜를 박고 싶으면 -죽을 쑤고 싶으면 안해도 되지만-정말 은혜를 받고 싶고 하나님이 우리 사경회, 십자가 사경회를 통해서 우리를 만져주시고 또 우리의 이웃들과 지체들을 만져주시기를 원하는 소원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먼저 여러분들이 저로부터 설교를 듣기 전에 제가 하나님의 설교를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될 수 있으면 ‘하나님, 우리 목사님은 머리도 좋지 않으니까 대충 말씀하지 마시고 상세하고 풍부하게 말씀해서 저 사람이 먼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저 설교를 듣고 녹아지기 원하는 그 이상으로 하나님 앞에 녹도록 도와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하는 교인이 몇 명이나 될지, 저는 한국 교회에서 이런 교인이 얼마나 될지 의심스럽습니다. 매일 ‘영육간에 강건하게 하옵시고….’ 매일 하는 얘기, 아니, 그 기도가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라 뜻도 없이 계속 뭐 ‘절대 피곤치 않게 해주시옵소서.’ 그것은 창조 원리에 어긋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말이지 저는 그런 기도들을 그 사람들은 그런 기도 할 때 속보입니다. 꼭 자기네 부흥회 갈 때만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자기네 부흥회 올 때만, 부흥회 하는 동안에만 절대로 피곤치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고 나면 다시는 기도 안 할 겁니다.
여러분, 좀 생각을 하면서 목회자가 정말 어떠한 기도를 필요로 하고 있는가 헤아려야 됩니다. 제가 여러분을 위해서 이름을 부르며 기도할 때 “하나님, 아무개 아무거나 잘 먹게 하시고 잘 자게 하시고 튼튼하게 하시고 그저 만사 형통하게 해주시옵소서. 그 다음 형제도 똑같습니다. 그 다음 자매도 이하 동문입니다. 328명 이하 동문입니다. 아-멘.” 그렇게 하면 여러분들이 ‘우리 목사님께서 날 위해 중보기도 하시는구나.’ 하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우리 김영수 전도사님 앞에 앉으셨는데, “하나님, 우리 김영수를 기억해주시고 그저 잘 하게 해주시옵소서. 그저 영육간에 강건하고, 원래도 잘 먹지만 잘 먹게 하시옵소서. ” 그게 뭡니까? 좀 헤아려야 됩니다. 저 형제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가, 저 형제가 간절히 하나님 앞에 아뢰고 있는 소원이 무엇인가, 그리고 어떠한 것들이 부족한가, 그러한 것들을 헤아리면서 기도해야 됩니다. 정 모르겠으면 불러다가 “무엇이 필요합니까?” 물어보고 그렇게 하면서 기도해주어야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기도가 되는 겁니다. 매일 ‘영 육 간에 강건하게 해 주시옵시고 오늘도 절대 피곤하지 않게 해주시고….’ 어떻게 절대 피곤하지 않겠습니까.
이 고넬료는 확실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로부터 아주 훌륭한 기념비적인 설교를 듣기 전에 어떤 의미에서는 기념비적인 청중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이렇게 말하면 또 여러분 중 어떤 사람은 ‘아, 제기 그러면 내가 만약 죽 쓰는 회중이라면 나는 그런 것밖에 못 듣겠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의( ? ) 하나님이시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 수많은 일하는 중에 한 사람을 택해서 이방 선교를 위한 성령의 불을 붙이는 첫 번째 불쏘시개로 사용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고르셨겠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준비시키시고 나서 사람을 사용하시지 아무나 들어 가지고 그렇게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한 번 탁 불붙어서 불꽃처럼 타오르는 것은 이삼년 살다가 죽어버리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삼십 년을 준비시키셔서 한 번 불꽃처럼 살게 하십니다. 참 이 고넬료의 이 시각은 정말 대단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람이 무엇을 기도했는지 이미 알게 된 것입니다. 그냥 무식하게 “주여, 그저 부어주시옵소서. 설령 충만 주실 줄 믿습니다.”. 그는 갈피갈피 사경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겁니다. 여기서 평소에 고백하던 것이 고백으로 나타난 겁니다.
여러분, 저를 얼마나 생각하십니까? 제가 여러분들 앞에 저를 얼마나 생각하느냐고 이렇게 간절히 목 메이면서 물어도 저는 하나도 자존심 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때문에 저도 여러분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해달라고 부탁해도 기도해주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에는 ‘치, 자기 기도 없으면 죽나 봐라( ? ).’ 그러한 생각이 들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오늘도 날 위해서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을 위해서 그런 것을( ? ) 해야겠습니다. ‘저 사람이 무슨 기도를 필요로 하는가’ 그리고 마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 원천을 깊이 뿌리박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사람으로 일평생을 살기 위해서 그가 정말 필요로 하는 기도가 어떤 것들인가 말입니다.
이 사람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그 말씀을 듣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전해주는 충실한 도구가 되어달라는 것입니다. 충실한 도구가 되어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지요? 저는 이 음향 기기가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정말 우리 교회에서 설교할 때처럼 편한 교회가 없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더군다나 추가로 이 모든 것을 비치하고 나니까, 잃어버려서( ? ) 속은 쓰렸지만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고장나기 전에는 여러분이 이 마이크를 주목합니까? 무엇을 주목합니까? 마이크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저를 쳐다보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최상의 설교자는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고자하는 그 음성을 음색하나 변하지 않고 최대한 원음에 가깝게 전해주는 그 설교자가 바로 하나님이 말씀해주신 설교자입니다. 그러니까 때로는 설교자에게 대드는 것은 하나님께 대드는 것입니다. 때로는 설교자에게 대드는 것이 하나님 자신에게 대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자의 가장 커다란 고민이 뭐냐하면 어떻게 청중들에게 감동적인 설교를 할 것인가는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 앞에 멋있게 설교할 것인가 그것은 다 사건( ? ) 설교자들의 관심거리입니다. 설교자의 최고의 만족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오늘도 이 강단에서 위로부터 부어 내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인간관계나 또 다른 여러 가지 교회 운영상의 이유나 혹은 여러 가지 자신의 결점이나 혹은 여러 가지 물리적인 요인에 의한 타협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변질시키지 아니하고 그대로 전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데 중간에 끝내지도 않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으시는데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어필하지도 않고 주께서 붙잡으신 그 때에, 주께서 붙잡으시고 있는 동안에, 주께서 말씀하실 때까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전했으며 나는 하나님 앞에 구김이 없다, 내 양심에 구김이 없다.’ 그것이 훌륭한 설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가장 훌륭한 설교도 모든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을 수 있고, 전혀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지 않는 설교자의 입바른 이야기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열광을 일으킬 수 있다는 개연성을 인정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두렵습니까. 이번 사경회에 여러분들이 깊이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제가 은혜를 받아야 됩니다. ‘원래 그래도 좀….’ 원래 뭐가 있습니까. 책을 읽거나 묵상을 하다가 목사인 제가 ‘내가 정말 그리스도인 맞아?’ 라고 물을 때가 있는데, 여러분은 어떻겠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라고 그런 때가 없겠습니까? 제가 얘기했었습니다. 작년에는 루이스 베일리의 ‘ Practice of quirty( ? )'를 미국에서 읽으면서 ‘오라!’ 계속 부흥회를 했었습니다. ‘내가 목사인가!’ 그런 증언을 감히 하지도 못하겠었습니다. 계속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 저 그리스도인 맞습니까?’ 계속 반문( ? )했습니다. 여러분들이라고 그런 때가 없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기본적으로 뭐가 있다, 그러한 생각을 하지 말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시는 동안에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주님이 놓아버리시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고 감통( ? )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공급해주시고 계시는 동안에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번 사경회에서는 여러분들이 정말 기도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설교자의 손을 이끌고 깊은 진리의 숲 속으로 들어가셔서 정말 이제껏 만나지 못했던 그 십자가의 온유한 비밀들, 그런 세계를 맛보게 하셔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 될 때에 정말 하나님의 그 피묻은 생생한 음성이 우리에게 들려질 때 우리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의 지평을 폭발적으로 확장시키고 우리의 인식의 지평을 새롭게 열어주어서 도저히 한계에 부딪혀서 더 이상 산출되지 않던 주님을 아는 지식, 거룩한 삶이 쏟아져 나오도록 기도해야 됩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지방에 내려가거나 동역자들을 만나면 목사님으로부터 받는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는 무엇이냐 하면 ‘언제 글을 쓰느냐’ 이고, 두 번째는 무엇이겠습니까? ‘설교 준비 언제 하느냐’입니다. 왜입니까? 교회(→목회)하고 강의 다니고 집회 다니고 그리고 글을 쓰면서 -일년에 많으면 6권까지 썼지 않습니까. 자기는 읽기도 전에 새 책이 또 나오더랍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이야기하면 재미가 없지만은 , 좀 베일에 싸여 있어야지 재미있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가르쳐주지 않고 여러분들에게는 가르쳐 주겠습니다. 아니 그 분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설교 준비를 위해서는 시간을 아낍니다. 그 대신 성경을 깊이 깨닫는 데에 시간을 더 많이 투자합니다. 그래서 설교를 염두에 두고 성경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 설교자는 마르는 겁니다. 얼마 못 가서 바닥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되고 성경을 필 때 설교를 하려는 마음으로 피면 안되고 설교를 들으려는 마음으로 펴야됩니다. 그렇게 하면 어느 순간에 하나님께서 아주 평범하던 본문을 ‘쾅’하고 열어주십니다. 그렇게 하면 죄송한 이야기인데 이 맥체인(?) 성경표 가지고 성경 못 읽습니다. 한 서너 절, 너 댓 절에 붙잡혀서 한 주 이상을 지나는 때가 있습니다. 많은 case 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 예를 들자면
(예화) 기도원에서 사도행전 26장으로 하나님께 말씀 받았던 이야기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 어떤 때에는 아침에 터지고, 저녁에 터지는 겁니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봄에 터졌는데 여름에도 터질까 말까합니다. 그러니 기도 안 해야 되겠는가 생각해보십시오. 물론 조금의 깨달음은 있지요. 그런 거 말고, 큰 금광을 만나는 겁니다. 하나 만나고 나면 놀랍게 저 자신이 새로운 신앙의 세계를 보는 것 같은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것들을 계속 쌓아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설교할 것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잘 안 갑니다. 그것은 설교 준비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살피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경, 살필 ‘사’자에다가 성경(聖經)할 때 ‘경(經)’자입니다. 사경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살피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실 때에는 막 쓰다가 하루에 넉 장 읽느냐,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루에 한 장도 못 읽습니다. 쏟아지는데 앞으로 더 나가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막 쏟아지면 그것을 노트에 막 씁니다. 그러면 그렇게 한 단락정도 해서 하나님께서 확 열어주실 때- 그 때에 제가 그러한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비행기를 타고 산꼭대기에서 이렇게 내려다보면 아무리 심신(?) 산골 높은 산에도 다 사람 다니는 길이 있습니다. 신기합니다. 그리고 그곳이 여름에는 가려서 안보이지만 겨울에는 또렷이 보입니다. 눈이 오기 전에는 아주 확실하게 보입니다.
그렇게 우리들이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겁니다. 걸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는 이 세상에서 좀, 제일 그-이 세상에서까지 라고 얘기할 것이 없지만은- 제발 어디 가서 성경 몇 번 읽었다고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할 일 없으면 몇 번 읽었는지 자랑하고 앉았겠습니까. 아니, 그렇게 많이 읽었는데 깡통입니까. 누구의(?) 성경을 읽었느냐가 몇 번 읽었느냐보다 중요한 겁니다. 물론 안 읽고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제 얘기는 성경을 통해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도 읽기 싫으면 관둬야됩니다.
그런데 제가 성경을 읽고 생각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다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여기 앉아 계시는데 쭉 설교를 하는 도중에 ‘그건 내가 다 생각한 건데’ 하시면 그것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어느 청년이 저에게 그랬습니다. 자기는 너무 괴롭답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자기 QT가 목사님 설교보다 훨씬 나은 것 같아서랍니다. 교만하다고 제가 얘기했지만 , 진짜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제가 생각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다 생각하는 겁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런 얘기가 됩니다. 새까만 것으로 천장이 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부터 찬란한 햇빛이 비췹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성경만 이렇게 뭐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설교자는 뭐냐하면 거기를 사닥다리 타고 올라가서 그것을 성경에다 칼을 대면서 쫙 찢는 겁니다. 그리고 쫙 벌리면 거기서 찬란한 빛이 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때에는 다섯 번의 성경을 읽는 것보다 딱 한 번의 핵심을 찌르는 설교를 듣는 것이 자신의 인생의 방향 전환을 하게끔 만들어주는 경우가 있는 겁니다.
그렇지만 이 얘기는 설교가 성경보다 낫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설교는 하나님이 말씀이지만 성경의 권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종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와 신앙의 세계에 대한 풍성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성경을 항상 봐도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슴이 찢어지도록 토로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 본 사람들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름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이 얘기 나오면 ‘아, 그거!’하고 안단 말입니다. 멀뚱멀뚱 다니는 사람들은 ‘사슴이 시냇물을….’,‘웬 사슴?!’ ‘웬 녹용?!’ 그럽니다. 그러니까 까만 것은 글씨고 하얀 것은 종이 바닥입니다. 무엇을 알겠습니까. 그래도 우리들이 구원받는 길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조명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성령의 조명이 풍부하게 비춰져서 성경이 풍성하게 해석된 그 결과가 설교될 때에 많은 사람들에게는 아주 강력한 말씀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구약을 그렇게 많이 읽었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데 ‘웬 부활?!’ 그랬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쫙 풀어주시니까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생애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얘기를 아까 하다가 말았지만 늘( ? ) 사람들이 걸어갑니다. 산길도 가보면 꼭 남이 걸어가는데, 아주 얼마나 걸어가는지 모릅니다. 저는 올라가는 것도 힘들어서 잘 안가지만, 이런 시시한 산을 말입니다. 사람들이 하도 밟고 다녀서 재미없어서 안갑니다. 돌멩이까지 반들반들하게 닳았습니다. 발을 옮겨놓는 지점까지 똑같습니다. 반들반들하게 닳았습니다. ‘거기라도 올라가라.’ 우리 집사람은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런 대로 가는 겁니다. 대동소이합니다.
(예화) 군산에 있는 어느 교회 초빙 강사 세 분의 설교 본문과 내용이 겹친 이야기
그래서 그 사람들은 ‘분명히 저것은 한 원조 설교가 있고 그것을 보고 베낀 것이다.’라고 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대개 생각하는 바가 비슷비슷합니다. 대동소이합니다.
왜 입니까? 다 이렇게 그 길로 걸어가는 겁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특별히 은혜를 내리는 겁니다. 우리들은 그곳을 걸어가는 겁니다. 터덕터덕 하도 걸어서 그냥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는 겁니다. 신작로처럼 나있는 그 길을 걸어가다 보니까 옆에 있는 그 말씀의 숲 속에 그 나무가 있는데 다 뽀얗게 먼지가 쌓이는 겁니다. 더 뽀얗게( ? ) 원래 ‘성경 읽는 것이 이런 것 인가보다.’ 하고 터벅터벅 걸어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인생이 그렇게 사는 것이 하도 불쌍하고 또 그 설교 들으면서 저렇게 타박타박 살아갈 영혼들이 하나님께서 불쌍하셔서 하나님께서 숲 속에서 손을 ‘삭’ 내미시는 겁니다. 탁 붙들고, ‘이리 와라.’ 그러면 깜짝 놀랍니다. ‘이게 웬 숲?!’.‘이리 와라’.‘예?’‘들어와라.’‘괜찮을까?’‘들어와라, 들어와라, 들어와라….’ 탁 들어 가보니까, 몇 미터 딱 들어갔는데 ‘와~.’ 이건 십 년씩, 십 오년 씩 걸어다닌 길하고는 완전히 다른 길이 나온 겁니다. 무슨 길이 나왔냐하면 진짜 그 길을 걸어가면서 볼 수 없었던 아주 희한한 숲이 나온 겁니다. 파란 창파( ? ) 그리고 영롱하게 이슬 맺혀있는 보석과 같은 이슬방울들, 피어오르는 아침 안개 그리고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아름다운 새들의 노래 소리, 풀벌레들의 합창소리. 갑자기 먼지 같은 것들은 찾아볼 수가 없고 ‘후~’ 신선하게 흐르는 그 기막힌 숲 속의 그 아침 내음. 들어가 보니까 글쎄 그쪽 바깥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런 아름드리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서있는 겁니다. 그런 숲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그 나뭇잎 사이로 아침 햇살이 쫙 비치면서 파란 풀밭에 다이아몬드를 뿌려 놓은 것과 같이 영롱하게 반짝이는 이슬방울들이 반사( ? )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 더 들어가 보니까 웬 아름다운 호수가 그 숲 속에서 찬란하게( ? ) 펼쳐져 있는 겁니다. ‘누가 왔나’ 이렇게 보니까, 밟고 지나간 자국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없는 게 아니라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 제가 첫 번째 방문자였습니다.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인생의 그 찌들고 찌든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고 그리고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혼란들은 모두 정리되면서 그 참( ? )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에서 한없이 감격하면서 혼자 막 겅중겅중 뛰어 다니는 겁니다. 나무토막, 커다란 나무를 끌어안고 ‘나무야, 나무야, 너만은 나의 이 기쁨을 알지.’ 끌어 앉고 좋으신 하나님, 나무 만드신 그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셔서 이 숲 속에 들어왔단 말입니다. 펑펑 우는 겁니다. 거룩한 환희. 때로는 그 아름다운 호숫가에 주저앉아서 조약돌과 이야기하는 겁니다. ‘얘야, 너는 내가 왜 우는 줄 알지. 내가 그 먼지 많은 신작로 길을 걸어다닐 때는 내가 죄인인줄 몰랐는데 이 숲 속에 와보니까 나는 내가 얼마나 불결한 줄을 알겠다. 조약돌아, 너는 여기서 이 맑은 창파에 조용히 너의 몸을 씻으면서 긴 세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니 너는 나보다 낫구나.’ 이런 대화가 오가는 겁니다. 그러면 며칠 그런 속에서 지내다가 그 신작로로 다시 탁 나오는 겁니다.
사람들이 탁 보니까 다르긴 다릅니다. 저 사람이 어디가 다른지 모르지만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왜 이 먼지 많은 길로 계속 가지 그 아름다운 숲 속으로 들어갔어, 너 이단이지.’ 그럽니다. 가소롭습니다. 진리가 어쩌구 저쩌구 저쩌구 저쩌구 이야기할 때 그 숲 속에서 진리를 경험한 사람은 웃고있습니다. 웃고있는데 사람들이 되게 기분 나쁜 겁니다. 왜입니까? 저 사람은 말을 안 하는데 다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진리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진리를 진실로 경험한 사람이 옆에서 팔짱끼고 웃고만 있어도 압도됩니다.
방위 갔다 와 가지고, 군대에서 자기가 용맹했다고 막 얘기하는데, 저 사람이 계속 웃으면서 듣더니 가려워서 ‘슥’ 벗는데, 특수부대 문장이 여기 탁 써있는 겁니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얘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 사람은 한 마디도 안 했습니다. ‘방위도 군대냐!’ 한 마디도 안 했습니다. 저도 방위 출신이기 때문에 자신 있게 얘기 안 합니다. 군인은 무슨 군인입니까. 6개월 동안( ? ) 청소만 하다( ? ) 왔는데 말입니다. 저 사람은 한 마디도 안 했습니다. 그냥 웃고 있는데 그 웃음에 오금이 저린 겁니다. 왜입니까? 저 사람은 군대가 뭔지를 알았고 적을 죽이는 것이 무엇인지를 체험했습니다. 그 포탄이 비오듯 쏟아지는 전쟁터를 어떻게 누비고 살아남는지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옆에서 무용담을 늘어놓는 이 사람은 계속해서 화장실 청소하고 풀 뽑다 온 사람입니다. 이것이 비교( ? ) 되겠습니까.
그런 그는, 그 숲 속에서 경험하고 온 사람들은 거기 걸어가는 사람들하고 이야기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이 진짜 하나님을 만나고 참된 신앙의 세계와 말씀의 세계가 얼마나 장엄한지를 깨닫고 나면 그 다음에 제일 답답한 것이 사람들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돌대가리들입니다. 얘기는 해도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 ) 제가 한참 성령에 감동돼서 이야기하고 나면 “야, 너 이상해진 것 같다.” 이런 ( ? ) . 그것이 말씀을 깨닫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서 막 부어주시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그냥 외워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말씀이 일로( ? ) 드러나서 이 가슴을 파헤치면서, 오장 육부를 그냥 파헤치면서 새로운 사상과 기운을 불어넣고 강도가 높은( ? ) 체험을 불어넣어서 내 자신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고쳐지는 놀라운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원고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됩니다. 탁 서면 자기가 만난 그것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 자기는 눈을 지긋이 감으면 이 황톳길이 생각나는 게 아니라 그 숲 속이 생각나는 겁니다. 그리고 한없이 얘기해도 끝이 없이 쏟아져 나오는 겁니다.
그런 역사가 설교자 속에 계속될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납니까? 주일날 끝나고 성경 찬송을 걷어서 내려올 때 걱정이 가슴에 ‘삭’ 밀려오는 겁니다. ‘주일이 언제 또 오나. 할 것은 이렇게 많은데, 사람들이 예배 시간이 2시간 반만 넘으면 눈치를 주는데, ( ? ) 내려가나 ( ? ).’어떤 때는 한 번 모이라고 해서 싫을 때까지 주 예수 크신 사랑, 주 예수 놀라운 사랑, 우리와 같은 죄인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시고 짐승과 같이 무지한 우리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그 한없는 사랑 전하고 싶습니다. 어떤 때는 생기 없이 살아가는 인생들 앞에 놓여있는 그 수많은 사단의 덫, 내가 침묵하고 내버려두면 반드시 오른발이 치어서 피투성이가 되고 말 그 궤케들, 내일로 미루지 않고 오늘 막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조건은 무엇입니까?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실 때 그러한 일들이 가능해집니다. 말씀 안 하시면 성경이 콘크리트처럼 생각되어집니다. 완전히 생소해집니다. 눈물을 펑펑 쏟으며 읽던 성경이 차갑게 다가옵니다. 아무리 찾아도 설교할 본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는 여러분이 기도 안 하는 때입니다.
여러분, 정말 이 고넬료는 지금 우리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이 놀라운 진실을 본( ? ) 사람입니다. ( ? )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집에서 이루어지는 이 사경회에 하나님께서 이 베드로에게 분명히 명하신 바가 있고 만약에 없으셨다면 자기가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자기들에게 보내주셨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나는 당신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을 말해주십시오.’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겁니다. 이 사경회는 미리 준비된 사경회가 아니라 성령께서 갑자기 시키신 사경회였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준비되어 있습니다. 스케줄도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더 여유가 많고 성령이 역사 해주시기를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또 말씀드립니다. 아무리 말해도 지루하지 않은 이야기를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기도하지 않고 집회에 나오신다면 그것은 설교자를 바라보는 것이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자가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 없이 성도들 앞에 서면 그것은 장기자랑이지 설교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있으면 설교자를 그것보다도 덜 가치가 있는 잡다한 일로부터 해방시켜줘야 됩니다. 쉽게 얘기하면 좀 놀고먹게 만들어줘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지만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 예민한 마음, 기도하고 싶을 때 충분한 시간동안 기도하고, 성경을 탐구하고 싶을 때 한없이 기도하고, 그렇게 말씀이 열려서 막 쏟아져 들어올 때, 그 때 좀 복잡한 일을 떠나서 훌쩍 어디로 가버릴 수 있게끔 만들어주어야 됩니다.
제가 존경하는 설교자 가운데 한 사람이 ‘기롤라모 사보나롤라’입니다. 서점에 책이 있습니다.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막 쏟아질 때에는 5일씩 6일씩 교회 강단을 비우고 숲 속으로 들어가거나 자기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숲 속에서 돌아오면 그 사람의 얼굴에서 찬란한 빛이 났다고 합니다. 우리를 어떻게 그런 사람하고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만은, 우리는 그 사람하고 비교될 수 없지만은 그들에게 역사 하신 하나님과 우리에게 역사 하신 하나님은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에게 그렇게 하실 수 있었으니까 이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말씀의 종들에게 왜 그 시대에 풍성하셨던 하나님이 왜 이 시대의 말씀의 종들에게 그것을 안 부어주시려고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때는 회의가 확 옵니다. ‘정말 목회를 하며 살아가는 것이 진리의 종으로 사는 길일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윗필드나 이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냐 하면 순회 설교자였습니다. 목회를 안 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집회만 다니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얽매이지 않습니다. 담대하게 자신의 할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목회?)를 하다보면 오만 잡다한 것, 물새는 것부터 시작해서 전깃불 나가고 정전된 것까지, 하다못해 변기에 구멍 막힌 것까지 신경을 써야됩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것에서 여러분들이 해방시켜줘야 됩니다. 그래서 설교자 자신이 진리로 풍성해서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설 때에 ‘오늘 우리는 신앙의 새로운 경지를 봤다, 우리가 오늘 그 말씀을 들으므로 정말 신기하나마 우리가 모르던 하나님의 성품을 새롭게 알게 되었고,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헌신과 순결을 다짐하게 되었다.’ 그럴 수 있는 만남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렇게 배려를 해야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풍성한 세계,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물론 그것은 해준다고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는 겁니다. 유명한 영적인 사람들이 숲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지만,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숲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지, 하나님을 간절히 추구하지도 않는 사람을 숲 속에 집어넣으면 삼겹살 생각밖에 안 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히 부어지기를 기도해야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뭐냐하면 ‘그것은 너무 좀 심하다, 왜? 우리의 신앙과 이 교회의 모든 영적인 것들이 어떻게 한 사람에게 달려있을 수 있냐.’ 그것이 성경적인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지시기 전에 왜 하필이면 그 때 건지셨을까요? 누가 있었기 때문입니까? 모세가 있었기 때문에 건지신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지려고 하시기 전에 모세 한 사람을,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갈대 상자에 넣어서 살려주신 겁니다. 그래서 교육을 받게 하시고 기다리신 겁니다. 어린아이처럼 걸어다니는 모세에게 ‘진리의 사람이 되라. 뿅~.’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안 하십니다. 제가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동그란 네모 만들어보라고 하면 만드실 수 있다고 했습니까, 없다고 했습니까? 제가 말이 안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말이 안돼는 겁니다.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통로로 사용하게 하시는데도 이러한 원칙이 적용이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역사상 교회가 경험했던 가장 뼈저린 손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영국의 청교도들에 대한 대박해 입니다. 박해를 통해서 2천 여명의 그 놀라운 진리의 종들이 강단에서 축출된 겁니다. 한 사람만 살아서 그 시대의 주님의 음성을 전해줘도 그 시대가 변하는데, 2천명의 진리의 종들이 강단에서 청교도라는 이유 때문에 쫓겨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슨 경륜이 계신지 우리는 아직 모르지만, 교회가 그보다도 더 커다란 손해를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경회를 준비하면서,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들은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을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라나는 신학생들이나 부교역자를 위해서도 여러분들은 이것을 기도해야됩니다. 그가 돈이 없으면, 집어주면은 해결이 됩니다. 먹고살 것이 없으면, 교회에서 사주면 끝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진리의 사람이 되는 것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진리 있다고 하는데 자, 이것 가지고 해.’ 그런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줄 수 없고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그것이 귀하고 본질적이고 소중한 겁니다. 우리 것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만 있는 그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집회 준비는 물론이고 목회자의 말씀의 세계를 위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여러분들이 기도해야 됩니다. 오늘 날짜를 기록해놓고 성경 끝에다, 여기 사도행전에다 하나 기록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목사님을 위해서 마음을 다해서 기도하기로 결심한 날. 내가 심장이 멎는 날까지. 내가 어느 한 교회에서 목양을 받는 그 날까지. 내 코의 호흡이 멎는 그 날까지 내가 그를 위해 기도하리라.’ 그렇게 열심히 해야 됩니다.
이번 사경회에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의 눈빛을 보니까 각오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아. 그렇구나. 바로 그거구나. 우리는 이때까지 설교자의 장기를 의지한 것이 아닌가. 아. 정말 설교자의 재주를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서 더 설교를 죽 쓰게 만드셔서 설교자에게 실망하게 하신 것이 아닌가. 그래 맞다. 우리의 참 소망은 저 설교자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이시구나. 오 주여, 우리가 기도하지 못한 것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의 기도가 의무적이었던 것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나님,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나의 생명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그런 결심이 보입니다.
3.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10:33)
지난 시간에는 고넬료 집안의 집회 준비를 살펴보면서 그가 ‘주께서 내게 명하신 것을’ 이라고 말한 부분 속에서 우리는 사경회가 복된 사경회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당신의 도구인 설교자에게 말씀해 주시는 일이 있을 때에 그 일이 가능하다는 말씀드렸다. 그리고 설교자가 혹은 우리 성도들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기이한 세계 속에 들어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말씀드렸다.
그래서 지난 한 주간 동안에 설교자를 위해 기도를 많이 했습니까?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이 맛을 아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무엇을 해 준다고 해도 신앙을 버릴 수가 없다. 그런데 다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이 하나님의 진리의 맛을 모르는 사람들은 항상 뿌리 없는 나무와 같다. 잠시 꽂아 놓은 막대기와 같은 신앙이다. 어디서든지 늘 흔들리는 삶을 면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 진리의 맛을 깊이 알면 그 진리를 향해서 우리를 열어 주시고 또 우리를 향해 진리를 열어 주셔서 그 진리의 숲 속으로 우리를 데려 가시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그 감격과 놀라운 은혜를 그 어디에다가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앙 생활은 억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잠시는 할 수 있는데 계속은 못한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피조물은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재미가 없으면 하지 않는다. 밤새도록 핏발이 서도록 ‘고 스톱’을 치는 사람에게 밤새도록 화투 패를 던지는 모습의 운동을 하라고 하면 하지 못할 것이다. 일당 5만원을 준다고 해도 차라리 드러누워서 놀망정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재미가 없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없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가운데 이러한 세계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신앙생활이 너무 재미있습니까? 신앙 생활은 분명히 재미있는 일이다.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하나님의 진리의 속으로 들어오면 이 재미를 맛볼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깊이 깨닫는 세계가 있을 때에는 커다란 신앙의 숲이 생겨나게 된다.
그 사실을 본문은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듣고자 하여’ 라는 말은 귀를 기울인다는 뜻이다. ‘듣는다’라고 하는 말은 이 고넬료가 비록 이방인이지만
이 ‘듣는다’는 말이 신앙적으로 사용될 때에는 들리는 것이 아니다. 즉 들리는 것과 듣는 것은 다른 것이다. 들리는 것은 그냥 들리는 것이다. 그런데 듣는 것은 마음을 기울여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것으로 흡수하려는 내적인 복종의 자세를 가진 상태에서 듣는 것이다. 이 희랍어 단어의 히브리적인 배경이 ‘샤마하’ 란 단어이다. 이 ‘샤마’는 ‘샤무엘’의 단어와 같은 경우이다. 즉 ‘엘’은 ‘하나님’이란 뜻이고 ‘샤마’는 ‘들으셨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뜻이다. 한나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신 것이다.
그럼 ‘듣는다’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반대편으로 놓고 생각하면 알 수 있다. 즉 ‘듣는다’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신다고 할 때에 쓰는 같은 단어이다. 그 ‘듣는다’를 잘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듣는다’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 수 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실 수 있는 최고에 태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기울이시고 ‘듣는다’ 라고 할 때 그 이미지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기도 들으시고
오 주여 이 아침에 내가 기도하고 주께 바라리이다
이 시인이 시편 5편에서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소서 부르짖는 나의 소원 들으소서!” 하며 하나님께 들어 달라고 할 때에 시인이 하나님께 대하여 기도하던 자신의 부르짖는 소원을 듣는 태도가 어떤 태도였는지를 생각해 보자. 어떤 태도였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부르짖는 그 기도 소리를 들으시는 분이실 것이다. 가장 작은 어린아이에 고통 하는 심은 섞인 기도소리부터 시작해서 아주 당신께 가까이 있는 신령한 종들의 부르짖는 기도의 소리까지 혹은 당신을 모시고 서있는 신구약 성도들의 거룩한 찬송 소리는 물론이고 그에게 이 땅 이대의 교회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도를 담아 하나님께 바치는 천사들의 보고에 이르기까지 주님께서는 두루두루 귀를 기울이실 것이다.
그런데 시인이 하나님께 필요로 하는 바는 이런 것들이 아니었다. 이 땅에서 하나님께 애원하며 들여지는 기도 소리가 내 소리 하나 밖에 없는 거처럼 내 기도뿐만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울어 나오는 내 심사까지도 깊이 통촉하시고 나의 기도의 내용에 마음을 기울이시고 들어 달라는 탄원이 이 시인이 시로 노래할 때 마음에 깃들여 있었던 생각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밤이나 낮이나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다른 일이 바쁘시다는 핑계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의 결심문 속에서 “나 한사람이 그토록 엄청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느냐?”하는 그 생각을 내 쫓도록 “열심히 노력하자!”라고 결심했다.
성경은 오히려 정말 한 사람의 기도를 통해서 역사를 바꾸고 나라를 바꾸고 전쟁을 승리로 바꾸는 위대한 일들에 대한 기록으로 가득한 책이다. 히스기야, 에스더., 에스라, 다니엘, 등 헤아릴 수 없는 믿음의 위인들이 이러한 일들의 증인들이다. 이들이 기도할 때는 내 개인적인 기도는 나혼자 하면 되지만 교회적인 기도는 우리 모두가 힘을 합해야지만 겨우 되고 국가적인 일은 민족 모두 힘을 합해서 기도해도 ‘될까 말까’ 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래서 사람이 은혜가 깊어지게 되면 역사의 주인공의식을 가진 기도의 사람이 된다. 나 한 사람이 무릎을 끓으면 세계의 선교의 지도가 바뀔 것이라고 하는 담대한 확신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가졌던 기도의 태도는 시편 5편에서 시인이 노래했던 태도였다.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잠시 멈추고 나 혼자 기도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마음을 다 기울이셔서 내가 기도하는데 언어 속에서 다 묻어 나오지 못한 깊은 내면에 심사 속에서 깃들여 있는 그 마음의 움직임과 그 영혼의 필요한 소원이 무엇인가? 까지도 하나님께서 깊이 헤아리면서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도 아니고 의지할 것이 없어서 기어 들어가는 판자 집에서 사는 사람도 아니고 인생의 커다란 위기를 만난 사람도 불쌍하지 않다. 이 세상에서 가장 측은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아무런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예배 중에 누군가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것은 설교자의 마음을 찢어지도록 아프게 하는 것이 된다. 왜냐 하면 그는 아무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이외에 우리의 희망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개선되는 일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일어나겠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는 짐승과 같은 삶을 살다가 거리에서 방황할 것이며 그의 죽음은 마치 이름 없는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포수에 총에 맞아 죽은 한 마리의 짐승과 같은 죽음이 될 것이다. 그런데 조국 교회에는 이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너무 마음이 아프다.
(예화) 어느 신학교 개강 예배 인도 때에 말씀을 듣지 않고 주보 가지고 비행기를 만들 었던 학생 이야기와 그 집회에 30여명이 회심한 이야기
이런 식에 태도에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그 사람이 그 집회에 나오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임을 확신케 한다. 그런 태도는 하나님 앞에서 패역한 것이다. 그는 두 가지로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즉 들이는 설교자의 음성을 인간의 연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첫째 잘못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 오는데 영혼이 변화 받을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떠나 버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어떠한 이유를 가지고 있든지 그가 어떠한 사연이 있든지 아무튼 그 태도는 어떤 식으로든지 정당화 될 수 없다.
우리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결국 부자는 음부로 떨어지게 되었고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다. 그가 거기서 간절히 요구한 것은 지상 세계의 자신의 가족들에게 가서 모세와 선지자의 율법에 기록된 것들을 전해주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살아생전 자신에게 귀에 들였던 수많은 말씀을 지나쳐 버렸는데 그 말씀들이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심판을 받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가 뼈저리게 다시 살아나 다면 살아있는 자기의 가족들 아직 심판에 이르지 않은 가족들의 하고 싶은 말이 딱 한 마디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얘들아 성경은 장난이 아니란다. 귀를 기울여라!”라는 말이었다. “그래야 나처럼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부패가 곰팡이처럼 온 조국 교회에 구석구석에 번져있다. 우리들은 비교적 좋은 현장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전혀 듣기를 포기한 무리들로 가득 차 있는 교회에서 무슨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겠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자기가 바뀌는 일들이 일어나겠는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일들이 일어나겠는가?
우리는 한국 교회의 교인들을 대신해서 회개해야 한다. 이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축복하시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고 진실한 변화를 경험하기 전에 어떤 일이 먼저 일어나는지 우리의 신앙생활을 조용히 회상해 보아야 한다. 거기에는 반드시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왠지 귀를 기울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 때가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그럼 거기에 실재로 무릎을 꿇고 마음을 다해서 귀를 기울이는 일들이 있고서야 영혼의 참다운 변화의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지 들리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침묵하면서 설교자를 주목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는 안 된다. 마음을 다 기울여서 순간순간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내 영혼 속에 깨달음으로 주시고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순간순간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자신은 멍청한 예배자가 되어서 텅 빈 가슴으로 예배의 현장에서 떠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절박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하는 마음을 가지고 귀를 기울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귀가 한 사람의 신자가 열매는 맺는 거룩한 성도로서 잘아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가장 치열한 공격점이 어디인지를 쉽고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일단 거룩한 삶이 열매를 맺히기 시작하면 마귀의 입장에서도 감당할 수가 없게 된다.
가을이면 감나무에 감이 빨갛게 열린다. 우리는 감나무의 감이 열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는 열매를 맺기 전에 즉 씨가 땅에 떨어져 착상을 하지 못하도록 집요하게 공격을 한다. 마치 예수님께서 길가에 떨어진 씨가 바람에 날리우고 새들이 먹어버리는 씨 뿌리는 비유와 같다는 것이다. 즉 마귀가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떨어지려고 할 때 가장 적은 노력으로 최선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말씀이 떨어지는 것까지는 내버려두는데 이 속에서 착상을 하지 못하도록 걷어가 버리는 것이다. 예배 시간에 어쩌다 한번씩 조는 것은 육체적인 문제이다.
(예화) 시골 교회에서 생활이 어려워 낮에 노동 일을 하고 설교하다가 졸은 목사님 이야기
인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거의 항상 설교 시간에 조는 일이 있으면 이것은 영혼의 문제이지 육체의 문제가 아니다.
(예화) 목사님께서 결혼하기 직전 설교시간 마다 졸음에 시달였던 이야기-처음에는 성가 대와 교사를 하기 위해 아침에 일찍 나오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섬김을 그만 두 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설교시간에 졸음이 와서 신앙의 문제가 아닌가? 라고 생각한 이야기.
지금은 분명하게 신앙의 문제이며 영혼의 문제임을 알게 되었다. 졸음이 와서 도저히 참을 수 없으면 자리에서 일어나서 뒤로 가든지 2층에 올라가서 예배를 드려도 괜찮다. 이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말씀을 놓치는 것보다는 백 번 나은 것이다.
우리가 잠자는 동안은 마음이 쉬는 때이다. 마음은 쉬고 귀는 기울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일 수가 없다.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그런 식으로 들으신다면 “하나님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느냐고” 화를 낼 것이다. 거꾸로 생각해 보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그렇게 한다면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 ‘듣는다’ 라는 말은 전 인격적으로 자기의 마음을 다 담아서 그 말씀이 들리면 듣겠다는 태도가 아니라 그 말씀을 흡수하듯이 빨아들이는 그러한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귀는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씨에 중대한 문제가 없는 한 반드시 착상이 되기 때문에 이일을 결사적으로 방해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마귀는 마음을 지키지 못하도록 마음을 자갈밭처럼 만들려. 그래서 즉 뿌리를 내리는데 깊이 뿌리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가 뻗어 나가고 그 다음에 잎과 줄기가 자라고 마지막 목표는 열매를 맺는 것인데 이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도 실패하면 가시와 엉겅퀴와 같은 세상에 염려들을 잔뜩 주어서 뿌리는 뻗어 나갈 수 있는데 잎이 뻗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사실 뿌리도 혼자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잎이 광합성 작용을 해야지만 양분을 끌어내려서 뿌리가 뻗어나가게 되는 것이다. 결국 마찬가지 결과가 되는 것이다.
사단의 집요한 공격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기가 막힌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예배를 드리고 나가는 95%의 신자가 예배 때 성경 본문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는 통계가 나왔다고 하면 이것은 예배가 아니라 조회인 것이다. 그렇게 하니까 성장이 없는 것이다. 교회에 익숙해지는 틀은 생겨나도 성장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니까 거룩한 마음이 생기지 않고 거룩한 마음이 없으니까 신령한 생활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훌륭하게 먹혀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한국 교회의 예배 시간이 한심할 정도로 짧아져 가지고 이제 55분에 끝나는 교회들이 많다. 55분만에 20가지 이상이 되는 예배 순서가 모두 끝나는 것이다. 왜 예배시간이 줄어드는가? 그것은 설교를 듣기 싫어하는 교인들의 성향에 맞추다가 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요즘 미국에서는 설교 없는 예배가 시작되고 있다. 즉 설교 시간이 되면 불이 꺼지고 영화가 상영된다.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영화가 끝나면 예배가 마쳐지게 된다.
그러니까 결국 마음을 기울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데서 오는 기현상들이 생겨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왜 그렇게 중요한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이유가 있다. 그런데 그 대부분의 이유가 마음의 문제라고 하는 것이다. 마음이 하나님을 기뻐하면 그분에게로부터 들려오는 그 음성을 얼마나 기뻐하겠는가? 생각해 보자. 사랑하는 사람의 음성이요. 내 님의 음성인데 얼마나 기쁘겠는가? 음성만 들어도 반가울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에게 점령되어지지 않으면 정말 마음이 기우려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 생활은 마음을 누가 점령하느냐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이다. 성령과 이세상 사랑, 자기 아집, 사이에 치열한 마음 정복 싸움이 벌어지게 된다. 자아가 지배하고 있으면 죽어도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다. 왜 자기를 모른다고 부인하겠는가? 자기가 최고인데 부인하겠는가? 세상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빼앗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여러분들은 똑같은 사람으로부터 설교를 듣거나 같은 성경 본문을 읽는데 아무 감동 없이 읽거나 듣다가 어느 때에는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이상하게 가슴을 파고 들어오는 그러한 말씀처럼 느껴지는 경우를 종종 들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일주일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일주일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삶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지키며 사는 것이 순환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대해서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가?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의식 속에서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되신 그리스도의 생각으로 가득 찬 삶을 산다. 그러다가 어쩌다가 잊어버리는 일들이 생겨야 한다. 그런데 우리들은 거의 잊어버리고 살다가 어느 날 교회에 오면서 내가 그리스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교회의 건물을 보고서야 자기가 그 교회의 교인임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이 공백 상태에 있는 적은 없다. 누군가가 점령을 하고 있다. 공백 상태에 있는 적은 없다. 그렇게 놔두지를 않는다. 이스라엘이 점령하기 전에 그 땅이 비어있는 땅이 아니었듯이 이스라엘이 그 땅을 점령하고 나니까 다시 그 땅이 빈 땅이 되니 않은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그러하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시든지 그 이외에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 즉 자기에 대한 집착, 이런 것들이 지배하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일단 내가 내 마음을 지배하고 통치하기 시작하면 다시 말해서 누구든지 일단 자기의 마음의 보좌를 일단 차지하면 치열하게 그 권력을 놓지 않으려고 한다. 마치 이 세상 정치인들과 매우 흡사하다. 죽어도 한번 잡은 권력은 놓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너무나 신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은 왕이 되어 본적이 없어서 잘 모를 수도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제일 부러웠던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선생님이었다. 왜냐하면 마음대로 하기 때문이었다. 벌주고 싶으면 벌주고, 칭찬해 주고 싶으면 칭찬해 주고, 부모 모시고 오라면 꼼짝없이 모시고 와야 되고, 또 부모님들 역시 선생님 앞에서 꼼짝 못하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이런 절대왕권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존재하겠는가?
그런데 이와 같은 권력을 놓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다스리게 되면 그 재미는 대단하다. 자아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대로 명령하면 마음으로 전달되어 행동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행동은 자아로 하여금 한없는 만족을 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아 중심에 생활이다. 너무 신나는 일이다. 이 신나는 일을 그만 둘 리가 없는 것이다.
마귀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나면 예수님을 따라 다니고 사랑했던 제자도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버릴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즉 마음을 지배하여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한다. 무엇이든지 자기가 마음먹은 데로 할 수 있도록 그런 충성스런 도구가 되는 것이다. 마귀가 한번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면 그가 그 마음을 내어놓을 이유는 만무한 것이다. 한번 생각해 보자. 피 흘리는 싸움이 있기 전에는 절대로 내 놓지 않는다.
그럼 정 반대로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신다고 생각해 보자. 얼마나 신나는 일이 하나님께 일어나겠는지를 생각해 보자. 그렇게 개판을 치며 살던 사람이 성령이 오셔서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나 세상 자랑 버렸네 나 주님만 사랑하네 할 수 이 몸을 값지게 하셨네” 주님께서 정말 값지게 하신다.
(예화) 전에 알고 있었던 사람가운데 밥은 가끔 걸러도 술은 거르는 일이 없었던 술고래였는 데 변화된 그리스도인의이야기-“변화되고 나니까 자기처럼 술을 마시며 살아가는 사람 들이 불쌍하게 보여지고, 말씀의 맛이 달라지고, 술맛이 달라지더라”고 말한 이야기
마음이 성령 성령이 다스리니까 옛날에 좋아하던 것들이 다 싫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옛날에 자신을 그렇게 기쁘게 하던 것들이 다 슬픈 것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님도 우리의 마음에 계시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할 사실은 성경을 통해서 보면 이 마음에 대해서 우리 자신이 상당한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마음을 지키라.” “마음을 다하라.” “마음을 돌이키라.” “마음으로 회개하라.” “마음을 새롭게 하라.” 고 말씀하고 있다. 마치 마음 자체를 우리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굉장히 많은 명령을 마음에 대해서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말씀을 깨달을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성경을 읽다가 충격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옛날에 묵상해 놓은 노트를 대조하면서 성경을 읽다가 그 때는 이만큼 깨달았는데 오 년이 지난 지금에는 그 깨달음이 오지 않는 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은 나이가 더 먹고 경험도 더 생겼는데 그 이상에 아니 그 만큼도 깨달음이 오지 않는 것이다. 계속 진보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의 상태가 정말 하나님을 갈망하고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기를 늘 소원하고 하나님의 온 지배 가운데 있기를 간절히 소원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남김없이 빨아드리면서 또 우리들이 허락된 범위 내에서 최대한 그 말씀을 깨닫는 사람들이 되어 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듣는다’ 라고 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여러분 한 사람에 목회자가 있다고 가정할 때 인간 관계도 좋고, 얼굴도 준수하고, 단상에 오를 때마다 회중들에게 기쁨을 주는 등등 모든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여러분들은 그 목회자를 좋아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이 그 목회자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그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그가 다른 모든 것에 있어서 뛰어난 자질을 소유하고 있다할지라도 그가 하나님 앞에 서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신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즉 헌금도 척척하고,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봉사하고, 재주도 많고, 인간 관계도 좋고, 거의 모든 면에 흠이 없는데 설교를 잘 듣지 아니하는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용서할 수 있겠는가? 용서할 수 없다. 그래서 키더 민스터의 리차드 백스터는 “목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무이듯이 일평생 성도의 가장 커다란 의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듣기를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고넬료와 고넬료의 집안이 이러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인 것이다. 즉 베드로를 불러놓고 일단 그의 말씀을 듣고 난 후에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
집회를 다니다가 보면 집회를 앞두고 어떤 교회는 목회자의 지도를 통해서 기도를 많이 한 교회가 있다. 심지어 40일을 기도한 교회도 있다. 이런 교회에서 집회를 시작하면 모든 성도들이 숨죽은 콩나물처럼 되어있어 무치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볼 수 있고, 그들의 눈에서는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눈물 젖은 눈빛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자동으로 은혜를 주신다. 그런 곳에서는 말씀이 막히는 경우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설교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하시기 때문이다. 간절히 사모하는 영혼들에게 하나님께서 풍부하고 충만하게 채워 주시는 것이다. 소낙비와 같이 부어주신다.
(예화)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부흥회 인도에 관록이 있는 어느 부흥사가 전혀 들으려고 하는 의지가 없는 회중들을 향해 “아이구 웃기네, 너희들은 나보고 웃지만 난 너희들이 웃 긴다, 나 왜 불렀니”라고 야비하리만큼 책망한 이야기.
이러한 교회에서 변화가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이다. 오늘 이 고넬료 집안의 식구들은 이러한 태도로 귀를 기울인 것이 아니다. “듣고자 하여 모였나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전심으로 기도에 힘쓰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구제를 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복음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과 내가 이방 백성이고 할례 받지 않은 백성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 분에 사랑 안에 거하고 싶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는 듯한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뜻도 깨닫게 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를 불러오라고까지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비록 그가 유대인들이 읽는 구약성경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도리를 많이 이해하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이디오피아인 내시가 분명한 메시야 장인 이사야 53장을 보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일이 없이는 내가 어떻게 깨닫겠느냐?”고 말했던 것과 같은 그러한 유사한 상황을 경험하고 있었을 것이다.
즉 주님을 간절히 사랑하는 마음은 있는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께서 내게 어떻게 하라고 그러시는지, 왜 나 같은 이방 백성들에게 사랑을 주시는데 내가 정말 이스라엘 백성과 다름없이 주님을 섬길 수 있는지 하나님께서 정말 자기를 받아 주시는지, 궁금한 것이 매우 많았을 것이다.
그때에 복음에 원조인 베드로가 오게된 것이다. 그때 그의 마음은 베드로가 온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에 고넬료의 태도는 어떠했겠는가? 아마 자기의 온 마음을 쏟아 부어서 그로부터 들리는 메시지를 베드로의 음성으로 듣는 대신 하나님께서 이 사자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믿어야 할지를 모르는 나에게 지금 전달해 주신다 라고 하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아마 시간이 길다고 예화가 없다고 불평하지 않았을 것이다.
평생에 듣던 말씀 평생에 듣던 말씀 주 예수 크신 살랑 또 들려주시오
이 찬송을 알았으면 정말 그랬을 것이다. 좀더 자세히, 좀더 깊이, 좀더 많이, 좀더 심오하게 들려달라고 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아무나 골라잡아서 은혜를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이방인 선교의 첫 문을 여는 그 첫 번째 징검다리로서 전초기지로서 이 고넬료의 가정을 택하신 데에는 그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마음을 준비시키신 것이다.
대개 사경회에 열심히 참석하면서 은혜를 받지 못하는 이유가운데 중요한 것은 사경회의 첫날 사경회가 시작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돌 같은 마음 가지고 자리에 앉아만 있으면 은혜를 저절로 받는 줄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마음을 지금서부터 준비해야 한다.
천사가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인격적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씨뿌리는 비유를 보자. ‘조지 엘던 라더’ 라는 신학자는 그 부분을 해설하면서 “그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그 말씀은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땅으로 비유되는 사람의 마음을 드릴처럼 뚫고 들어가서 심겨지는 능력은 없다”고 이야기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모자란다는 얘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은 나타날 사람에게만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이다.
마음을 준비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서 화해를 해야할 필요성이 증대되는 때도 바로 사경회 전인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서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습관적인 죄를 끊어 버리도록 결단을 해야 되는 때도 사경회 준비 기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비같이 은혜를 주셨지만 습관적인 죄 속에 있었기 때문에 즉시 말라버리는 영적인 가뭄이 계속되었음을 인정하고 습관적인 죄를 버리겠다고 결심하는 것도 역시 사경회를 준비하면서 일어나는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러한 일들을 해야할 때이다.
그래야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질 때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일들이 일어난다. 그리고 게을렀던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는 것도 사경회를 앞두고 일어나게 된다. 새벽기도회를 잘 나오는 지체가 사경회를 앞두고 있는 새벽기도회를 쉰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 주간 새벽기도를 하면 다음 주에는 피곤할 것이라고 확실히 믿는 자들이 있다. 사경회가 가까이 다가오면 새벽 기도회를 못하던 사람들이 특별 기도를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자기의 오랫동안 굳어졌던 마음을 회개의 눈물로 비를 내려서 땅을 적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쟁기를 대어서 성령의 은혜로 그것들을 모두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언제 떨어지든 습기를 촉촉이 머금은 그런 부드러운 땅이 되어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어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사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려고 마음만 갖으시면 첫날부터 은혜를 주시리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딱딱하게 굳은 마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리는 만무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벌써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사람은 다르다. 하나님께서 미리 그 마음을 예비시켜 주신다. 그러므로 사경회는 벌써 시작된 것이다. 사경회가 되면 늘어나야 된다. 기도하고 간구 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이런 비밀들을 깊이 체험하고 나면 하나님께서는 정말 준비된 사람 준비된 마음을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것을 깨닫게 되면 사경회를 가든 수련회를 가든 미리 기도하는 것에 대한 엄청난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거져 이루어지겠는가? 거저 되지 않는다. 정말 여러분들이 미리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는 순간에 마음을 다 기울여서 이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무릎을 끊고 그렇게 간절히 마음으로 귀를 기울었던 것과 같은 태도는 그 날 그 시에 결심한다고 해서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집회가 시작되었을 때 성도들의 눈빛이 촉촉이 젖고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과 같이 정말 애절하게 “하나님 이런 사경회에서 말씀 이외에는 우리의 영혼을 치료할 도구가 없는데 하나님 말씀으로 나를 고쳐 주셔야 합니다.” 라는 마음으로 기도해서 마음을 촉촉이 젖은 눈망울을 가진 성도들이 모여있는 집회에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믿음 하나 가지고는 안 되는 것이다.
그냥 오면 해결될 것이다. 라고 하면서 아무렇게나 살면서 준비된 마음이 없이 덜컥 온다면 현수막은 요란하게 나부끼고 광고도 나가고 전단지를 돌리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아름다운 역사는 인간에 홍보와 스케줄에 메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홍보와 스케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은혜 받고자 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사모함 또 이런 깨달음조차 아예 없기 때문에 한번 출석하는 것만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저 인간이 여기에 나온 것은 기적이다.”할 정도의 사람들도 많이 있다. 이들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한다. 그때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내리시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금쯤은 정말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순절을 지나가고 있어야 한다. 정말 “내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말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빚졌는데 예수 죽인 것을 내 몸에 짊어지고 주님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삶을 얼마나 살았는가?” “정말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새우신 교회를 위해서 내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간 것이 얼마나 되었던가?” 깊이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반성하면서 사경회를 시작해야 한다.
개인의 사경회는 벌써 시작되었어야 한다. 아직 시작을 하지 않았다고 할 것 같으면 이제 시작해야 한다. 늦었지만 할 수 없다.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때 바로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온 마음을 기우려 정말 애절한 열망을 담아서 주님의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그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서 치워 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4. 하나님 앞에서 듣는 설교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10:33下)
우리는 지나 간 주에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대해서 장시간에 걸쳐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지난 세 주에 걸쳐 3번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 말씀이 됩니다. 그 동안에 설교를 듣지 못했거나 빠뜨리신 분들은 설교 테이프를 꼭 듣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은 단순히 사경회를 준비하는 자세만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말씀을 기다리며 사는 구도자의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오늘 이 시간에는 무엇을 듣느냐의 문제를 다룬다. 우리는 이미 지 지난주에 고넬료가 듣고 싶었던 것은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것이었다." 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 이어서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것을 듣는다." 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모든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다시 말해서 이 고넬료는 주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그 말씀을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인 것처럼 하나님을 본받아서 귀를 기울이기를 원했고 그가 듣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이 베드로에게 가르쳐 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일부가 아니라 모든 것이었다는 사실을 이 고넬료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 '남김없이' 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매우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말씀은 고넬료가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명하셔서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면 남김없이 모두 듣겠다고 고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고넬료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 싶어하는 그 심정을 보여준다. 그는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명하셨는데 베드로가 적당히 추려내서 다시 짜집기를 하고 편집을 해서 대충 던져주는 그런 종류의 변질된 말씀을 듣고 싶어했던 것이 아니다.
고넬료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 시몬 베드로를 불러오라고 말씀 하셨고 그래서 그로부터 참된 신앙에 대해서 무엇인가 가르쳐 주는 것들에 귀를 기울이라고 명하셨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은 자기에게 남김없이 전달되어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양적으로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자신을 향해서 자기에게 가르쳐 주도록 분부 받은 모든 것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참된 복음이 무엇이며 그리고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그의 구원받은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치는 것은 몇 번에 걸쳐서 모두 가르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은 정말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들이고 복음의 심오한 의미를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부요하게 체험을 한 사람들 이였기 때문에 일평생 외치다 죽었지만 그러나 한없이 많은 이야기들을 다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로마서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 로마서는 바울이 설교한 어마 어마한 설교들을 제목 내지는 골자만 추려서 모은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말할 필요도 없이 초대 교회의 설교들이 불신자들을 향해서 복음 전하는 것을 제외하고 믿는 사람들에게 사도들이 복음에 깊은 도리에 대해서 가르쳤을 때 틀림없이 그것은 이 삼 십분 동안에 간략하게 설명하고 끝나는 것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장시간에 설교였을 것이다. 졸다 깨어나도 또 설교하고 졸다 깨어나도 또 설교하고 결국 졸다가 떨어져서 죽는 일까지 생기는 정도였을 것이다. 좀 무리가 따르는 표현이지만 한 교회가 길게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살아있는 교회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고 있는 교회가 55분에 주일 예배를 마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것은 삼자가 허락을 하지 않는다. 우선 성령이 허락을 하지 않으시고 두 번째로 설교자가 허락할 수 없고 세 번째는 예배자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모든 것을 듣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할 때 이 고넬료는 식사하는 것도 문제가 아니고 몇 시에 시작해서 몇 시에 끝나는 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온 마음을 다 기울여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것들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베드로가 모든 것을 가르쳐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베드로를 고넬료의 가정에게 말씀을 전하도록 세워 주셨을 때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가르치도록 전하도록 명령하신 바가 있었다. 그것은 다 쏟아 넣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교회가 설립 된지 4년이 지나 가면서 변화되고 있는 것이 있다. 또 내 자신이 많이 타협하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진다. 그 중에 하나가 주일 낮 예배 때 시계를 보는 수가 많아 졌다는 것이다.그것은 여러분들에게도 상당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정말 거기서 자유 해져야 하는데 내 자신이 그 정도까지는 담대하지 못한 것 같다.
처음에 교회를 시작을 하고 상당히 여러 해 동안 아니 최근까지만 해도 나의 원칙은 분명 했다. 그것은 "시간은 상관이 없고 주님께서 분명하게 그 시간에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하셨다 하는 그 때가 나의 설교가 끝나는 시간이다" 라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어떤 때에는 그런 원칙을 적용시키기에는 내 자신이 메마른 적도 있었지만 그러나 어떤 때에는 불과 한 60분 정도밖에 설교를 하지 않았는데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자주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께서 충분히 말씀하셨다 라고 생각이 들 때까지 모드 쏟아놓는 것이 오늘 그 단상에 서있는 설교자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갖은 사람들은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계시다라고 설교자가 느낄 때 회중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 영적으로 미숙하기 때문에 말씀을 깨닫는 깊은 경지에 들어가는 못한 사람들과 예전에는 그런 경지에 들어갔지만 마음이 여러 가지 잡스러운 생각이나 시험 혹은 범죄로 말미암아서 더럽혀졌기 때문에 예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각을 잠시 잃어버린 사람들이 그런 시간들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설교자에게는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런 부담을 이 고넬료의 집의 집회에서 느끼지 않았다. 이것은 확실히 사실이다. 물론 길게 예배를 들여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저희 교회도 11시에 예배를 시작해서 12시 20분 경에 마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우리는 예배 시간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고 싶어하시는 그 말씀에 충분히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고 그 하나님의 말씀 집회 혹은 말씀이 있는 그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이 고넬료와 같은 마음으로 집회에 참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자세는 매우 중요하다. 물론 거기에는 그렇게 깊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들어온 사람들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가도 전혀 문제가 없지만 그런 말씀 속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고문을 당하는 것 같은 괴로움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교회에서 두 번 반 예배 드린 것만큼 시간이 지났는데 이제 겨우 한번밖에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저녁 예배에 또 가야하니까 부담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문제는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그런데 그럴 경우에 어떻게 그냥 밀고 나가면서 하나님께서 그 영혼들을 깨뜨리시도록 기도할 것이냐 아니면은 뭔가 그 영혼들을 위해서 어떠한 배려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두 번째 문제이다. 우선 첫 번째 원리는 그렇다는 것이다.
(예화) 오륙 년 전 지방 집회를 마치고 급히 서울로 상경하여 어느 기도원에서 어느 교회의 수련회 저녁 집회 때에 7시 20분부터 11시 40분까지 시계도 보지 않고 설교한 이야기- 그때에 회중들은 방석도 깔지 않은 마루 바닥에서 그 긴 시간을 석고상처럼 미동도 없 이 설교를 들었었다.
하나님께서 장악하시면 얼마든지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어느 설교자는 한참 성령이 충만했을 때에 7시간을 설교하였다고 한다. 결국 이것은 사람들이 깊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내리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이 그 말씀에 감동이 되고 듣는 사람들이 그 말씀에 깊이 사로잡혔을 때에 그 말씀이 깊이 흘러서 영혼을 향해서 빨려들 듯이 내려가게 된다.
이러한 일들은 충분히 가능하다. 심지어는 경건 서적을 읽다가 그 책에 빨려들어도 대여섯 시간이 지나가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 대망 같은 소설책을 읽다가도 그 내용에 빠지게 되면 수 십 권되는 그 책을 정신없이 읽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정말 때로는 흐느끼시고 때로는 탄식하시면서 때로는 격려하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주어지는 동안에는 여러분들이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자기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 속에 심겨지도록 그러한 사모함 들을 가져야 한다.
어른이 되면 아이들보다 집중도가 훨씬 높아지게 된다. 어느 의사에 의하면 아이들이 10분 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병든 것이라고 한다. 아이들은 에너지가 남기 때문에 무슨 짓을 해서라고 이것을 발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을 키우시는 분들은 잘 알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쉴새 없이 움직이고 장난을 치는 것을 어른이 흉내를 낸다고 가정을 해 본다면 어른들은 몸살이 날 것이다. 아무리 돈을 많을 준다고 해도 아이들과 같이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 행동을 한다. 이와 같이 아이들은 에너지가 남기 때문에 집중도가 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어른들은 다르다. 진중해지고 집중도가 높다. 그러면서 흔히 통용되고 있는 "어린이 설교학"이라고 하는 이론에 의하면 어린이 설교는 최고의 길이가 5분 내지는 7분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느 설교학 교과서에서는 25분 이상에 설교를 어른에게 한다면 그 사람은 대단히 설교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의학적으로 인간이 계속해서 집중할 수 있는 최대의 한계 치가 25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항상 설교를 25분내에 끝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사람의 이야기는 결코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한 가지를 잃어버렸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만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마음을 성령이 일깨우실 때 그의 능력이 어떻게 극대화되는지에 대해서는 이해를 못한 것이다.
제가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얼마나 심각하게 중요한가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설교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많이 말씀을 주시는 때이었기 때문에 설교 시간이 늘 부족했다. 담임 목사님께 야단도 많이 맞았었다.
내수동 교회 고등부를 섬길 때에 담임 목사님께서 15분만 설교하고 조용조용하게 하라고 하시고 늘 설교를 얼마나 했는지 물어보셨다. 그러나 한번도 목사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없었다. 즉 교회에서 한 정거장 떨어져 있는 거리에서도 설교 소리를 들을 정도로 소리를 쳤으며 한번 설교에 150분씩 설교를 했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15분도 견디기 힘들어하는 학생들이 말씀을 듣는 귀가 열리고 나니까 180분을 요동도 하지 않고 견디는 것을 보았다. 열린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가 탁월하다고 생각되지만 그 학생들에 비하면 70%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저는 태어나서 그 만한 회중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180분을 설교하고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아서 찬송 한 장 부르고 다시 설교를 한편 더 한 적이 있었다. 즉 주일 낮 예배 설교를 연달아 두 편을 했었다. 그 중에 움직이는 아이들은 견디다 못해 나가는 아이들이었다. 그 외에 앉아 있는 아이들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 설교를 다 들었다. 심지어 어느 학생은 더 집중하기 위해 안경테를 들고 180분 동안 설교를 들었었다. 앞자리를 차지하려고 9시 예배에 7시 30까지 나오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래서 주일은 기쁨과 슬픔으로 말미암아 눈물로 범벅이 되는 날이었다. 세상적으로는 아무 희망이 없고 주일이 저절로 거룩해 졌다. 그런 마음을 이 고넬료가 갖었었다.
문제는 지금 이 베드로로부터 주어진 그 하나님의 말씀이 이 고넬료에게는 살고 죽는 문제였다. 고넬료가 지금 인생을 살다가 잘못된 길로 걸어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서 살고 죽는 것이 아니라 너무 참된 신앙에 대해서 목마른 것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기는 하지만 기도는 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같은 사람의 기도를 받으신다는 표증을 보여주시고 또 구제할 때 자기 마음이 기쁘고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느껴지는데 참 신앙이 무엇이고 자기와 같은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인지 자기가 느끼고 있는 이 하나님이 자기를 좋아하신다는 감정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인지 유대인들에 의하면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를 물려 줄 수가 없다고 주장하는데 "잘 믿어 봐야 지옥에 땔감이다"라고 말하는데 즉 고넬료는 궁금한 것이 많았었다.
그런데 그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사람으로서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초대 교회에 복음의 원조라고 알 수 있는 베드로를 보내 주셨고 그의 말씀을 듣는데 이런 기회가 늘 있을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은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 유대인이 이방인을 상종하지 않는 법인데 왔다는 것이다. 이 만남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벽이 무너지고 종과 자유인이 하나되고 그래서 뭔가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어떻게 고넬료가 알 수 있었겠느냐 이다. 베드로도 몰랐었다. 다시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기회였다. 그래서 고넬료는 하나님께서 베드로에 주신 모든 말씀을 그대로 듣고 싶었던 것이다.
평생에 듣던 말씀 평생에 듣던 말씀 주 예수 크신 사랑 또 들려주시오
작년 9월 마지막 주에 죄 죽임의 교리를 설교하고 있었을 때 계속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절제를 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질 않았다. 1시까지는 마음을 조마조마 하다가 그대로 설교를 했었다. 설교가 끝나고 나니까 144분이라는 기록이 나왔다. 주일 낮 예배였다.
여러분 그런데 설교가 끝나고 났을 때 제 마음이 매우 자유로웠다. 할 일을 다했다는 느낌이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없거나 마음이 흩뜨려진 사람들은 견디기 힘든 날이었을 것이다. 분명한 사실 한가지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말씀에 귀를 기울일수 있을 만큼 그렇게 하나님이 음성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갖기를 원하고 계신다.
오래 전에 중국에서 온 편지를 보면서 혼자 많이 울었다. 그 편지를 기록해 두지 못한 것이 후회 막급하다. 그 편지의 내용은 우리에게는 목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극동 방송국에서 성경을 불러 주는 시간이 있었는데 성경을 구할 수 없는 그들은 불러주는 성경을 일일이 받아 노트에 적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삼삼오오 모여서 관원들의 눈을 피해서 손으로 받아쓴 성경을 같이 읽으면서 기도하였다. 어쩌다가 경건 서적을 한 권 구하면 그 책이 닳도록 돌아가면서 읽었고 예배 시간에는 설교할 수 없으니까 그것을 누가 읽어주었다. 그러면서도 은혜를 받으면서 예배를 들렸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한국 교회의 교인들이 부럽다고 쓴 내용 중에서 시로 표현했는데 지금 그것을 다 기억할 수는 없고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며 해메는 우리들 우리들은 주님이 아니면 살수 없는 존재들이 아닌가 하나님 우리에게도 목자를 보내 주소서 그 목자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고 우리를 인도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할까 라는 내용으로 장문에 시를 써내려 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다 곡을 붙였다. 그 곡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참 많이 눈물이 났었다.
언젠가 가 볼 기회가 있으면 기회가 닿겠지만 정말 그들에게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들은 얼마나 목마른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싶어하겠는가? 여러분도 오기 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가서 전하라고 제게 말씀을 주셨거든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다 전하기에는 여러분들이 너무 긴 시간을 견뎌야 하기 때문에 줄인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아마 소리치며 모두 들려달라고 말할 것이다.
여러분들은 이 풍요한 말씀에 시대에 물론 들려오는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단언 할 수 없지만 그러나 여러분들이 분명히 교회에 나오면 하나님이 복음을 들을 수 있고 또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책들 속에서 좋은 목회자의 지도를 받으면 우리의 영혼에 양약이 되는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는 그런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해 본 적이 있는가? 정말 우리는 풍성하게 내리는 이 만나를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사한 마음을 잊어버린 것처럼 우리들도 또한 그렇게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 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 오늘 이 고넬료는 모든 것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긴 것이 곧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라는 증거는 아니다. 그리고 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가지는 그것이 어떠하든지 간에 성도들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시고 싶어하시는 그 말씀을 모두 귀를 기울이고 싶다는 그러한 마음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모든 것을 들으려고' 이렇게 표현했을 때 이 모든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완전히 순복되어 있는 고넬료의 내면의 세계를 보여 준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하나님 앞에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것은 주님께로부터 온 말씀이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 완전히 부복하여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으며 또 들려주시는 대로 실천하면서 살겠습니다. 라고 하는 거룩한 다짐과 내적인 순복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필연적으로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 중에는 여러분에 마음에 맞는 것도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여야 할 것은 그렇게 여러분들이 들으면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골라내어서 이것은 내 마음에 맞기 때문에 듣고 이것은 내 마음에 맞지 않기 때문에 나는 받아드릴 수 없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 전체를 버리는 것만큼이나 나쁜 것이라는 사실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바보같이 설교에 맹종하도록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그래서 만약에 교묘한 이단이 와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잘못 가르쳐서 여러분들이 그 이단에 빠졌다면 여러분들에게도 상당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순종하라고 가르쳤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설교의 내용을 생각 없이 마음속에 집어넣으라고 가르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판단을 하는 것과 그리고 생각을 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설교를 '판단한다'고 할 때는 이미 자기 나름대로 기준이 있다. 그런데 그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인 경우에는 판단한다는 용어를 쓰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라는 용어를 쓴다.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앙관이 정확하게 성경적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늘 성경적인 원리에 맞게 해석되어서 들려올 때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성경적인 신앙관과 성경을 통해서 해석되는 성경 해석 사이에 충돌이 없게 된다.
그러나 판단하는 그 기준과 잣대가 자신의 신앙관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관,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철학,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의 아집, 그리고 민족적이고 문화적인 편견일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이 설교를 평가하기 시작할 때에는 '생각한다'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아니라 '판단한다'라는 단어를 쓰게 된다. 결국 이것은 범죄인 것이다.
이 사람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결국 성경을 깊이 이해를 못하고 성경으로부터 드려오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풍부하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와도 성경 속에서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고정되어 있으니까 이제 해석을 굳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 아집이나 사고 방식들이 성경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도록 교묘하게 피해 간다. 이것은 결국 모든 것을 듣고자 하는 태도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은혜는 많이 받는데 결코 변하지 않게 된다. 이유는 편식이다. 자기에게 맞는 것만을 계속 섭취하면서 피해 가는 것이다. 깨뜨려져야할 자신이 전혀 깨뜨려지지 않는 것이다. 자기를 깨뜨리기 위해서 다가오는 그 말씀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고 듣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그 말씀에 대해서 회피하고 다른 해석을 만들어서 자신을 합리화시키면서 피해 가는 것이 된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양심에 가책을 받는 다든지 도전을 받는 다든지 하는 것은 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계속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옳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앙관,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을 격려 받게 된다. 그런데 이런 식에 신앙에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온전한 성도의 삶을 사는 법은 전혀 없다. 즉 굽어진 지식 속에는 반드시 굽어진 삶이 있다. 그리고 막 가는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는 태도 속에는 반드시 막 가는 삶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모든 것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가 아니다.
우리 몸에 좋고 먹기에도 편하면 정말 좋다. 저는 약국에 가서 피로 회복제를 구입하는데 있어서 약사가 좋다는 것을 그냥 먹는다. 그런데 저희 집 사람은 그렇게 먹지 않는다. 입에 맛이 있는 것을 먹는다. 즉 약효보다는 맛을 더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 수 있다. 그런데 마약에 자신이 암에 걸렸다고 가정할 때 약효는 무시하고 입에 맛있는 약을 선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살고 죽는 문제이다. 약이 좀 쓰고 주사가 아프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말 하나님 앞에 은혜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이 누구이든지 또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든지 자기가 평소에 가지고 있는 인생관과 맞지 않아도 받아드리려는 마음을 갖게된다. 이 사람이 정말 복된 사람이다.
(예화) 유명한 부흥 강사가 인도하는 부흥회에 뭔가 자신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힘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참석한 자매가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부모를 공경하라'는 설교에 좌절하 고 부흥회에 참석을 포기하였다.
다시 그 목사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이 번에는 다른 날 참석했는데 역시 부모님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말라는 설교하였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할만큼 했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부모님들에게 피해를 받는 쪽이 자신이라고 생각한 이 자매는 또 참석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 후 몇 달이 지난 후 자기가 사는 동네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또 참석했는데 또 그 말씀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도망가지 않고 집회에 참석하다가 집회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회개하며 오랜 세월동안 용서하지 못했던 부모님을 용서하면서 집요하게 자신을 피해가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깨달은 이야기-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상황이나 생각에 맞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은 이를 물고 피하려는 패역한 습성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에게 원하는 것이 있었다. 특히 기득권 층이 선지자에게 가시고 있었던 생각은 특별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음성이 아니라 자신들이 듣고 싶은 음성을 하나님이 해 주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도권에 있으면서 그들이 주는 녹을 먹으면서 왕궁 가까이 살면서 그들이 그들에게 예언을 해주는 거짓선지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이 무엇을 우리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시는가? 가 관심이 아니었다. 왕이 무엇을 듣고 싶어하는가? 가 관심사였다
그러니까 주께서 명하신 것을 받아서 그것을 원판 그대로 쏟아 놓는 것이 선지자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명이었는데 이미 출발 자체가 하늘로부터 부어져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왕을 보면서 저 사람이 무엇을 말하면 좋아할까? 부터 시작을 하니까 계시에서 온 선포가 아니라 자기에 공교한 지혜에서 온 선포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수많은 타협을 거쳐서 쏟아져 나온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생명이 없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듣고 고침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배우게 된다. 설교를 듣는 사람에게도 가르쳐 주는 것이 있고 설교를 하는 사람에게도 가르쳐 주는 것이 있다.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바로 지금 말씀 드리고 있는 바로 그런 내용이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어디가 깨져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가장 안전하고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 부분을 하나님께서는 깊이 슬퍼하시면서 깨뜨려 지기를 기다리시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각성이 일어날 때는 평소에 생각하던 것이 드디어 터졌다는 식으로 일어나는 법이 없다. 각성은 항상 충격적인 깨달음을 동반한다. 즉 평소에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고 더 나아가서는 자랑할 만큼 생각했던 것들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중대한 문제가 되고 쓸데없는 것임을 깨닫게되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결국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그 사실이 아픔이 되는 일들이 일어난다.
설교자에게는 모든 사람이 만족할 수 있는 말씀을 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그런 기대를 갖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죄악이다. 불가능한 일을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한 설교자가 하나님 앞에 세움을 받아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정직하게 전하고 있다면 그 가운데는 반드시 그 음성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그 음성의 빛깔이 진해지면 진해 질수록 반감을 갖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는 것은 그 설교가 올바른 설교라고 하는 한 증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철저하게 복음을 외쳤던 로이드 목사님의 생에서 보면 그의 설교 내용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때마다 목사님은 그런 사실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설교가 차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설교라고 하는 증거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짓된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만족을 줄 수 있다. 참된 복음은 결코 모든 사람들에게 만족을 줄 수 없고 이것은 예수님도 하실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시대에 태어나서 하나님의 음성을 대변하고 죽은 사람들 가운데 모든 사람들에게 다 추앙을 받던 설교자는 없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
그 온화한 성품을 가지고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서 불붙는 마음을 가지고 영혼들을 뜨겁게 사랑했던 그 걸출한 설교자 스펄젼도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대적들에게 에워싸여서 고난으로 얼룩진 인생을 살았다. 즉 우울증에 걸릴 정도로 심각한 고통을 받았다.
윗필드 같은 사람은 아예 얼마나 많은 대적들에게 둘러 싸였는지 그 사람에 신조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을 험담하거나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일평생 살면서 단 한번도 그 비난에 대해서 해명하지 않았다. 또한 그 사람은 비난하는 사람들의 비난의 목소리는 그를 일평생 쉬지 않고 따라 다녔는데 논쟁에 휘말린 적은 없었다. 더군다나 헌금을 거두는데 탁월했던 그는 여러 형태에 비난이 그를 따라다니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그래도 일체에 변명을 하지 않았다. 말도 되지 않는 비난을 퍼부어도 거기에 대해 전혀 응수하지 않았다. 즉 논쟁에 휘말리지 않았다.
논쟁에 휘말리는 과정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과 사단에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들릴 때 그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모두에게 항상 즐겁게 하고 만족을 준다면 그것은 설교자가 문제가 있든지 여러분 자신들이 문제가 있든지 둘 중에 하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고와 다른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질 때 자신의 내면 속에서 큰 은혜의 기쁨을 누리기 전에 자아가깨뜨려 지는 아픔이 있다. 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질 때 자신의 삶 속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고 방식과 아집 속에서 그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내려 올 때에 그 말씀에 빛 아래서 옳지 않은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혜 받는 사람들은 늘 아프다. 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서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말씀이 온전해 지면 온전해 질수록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받아 드리는 폭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온전해 지면 온전해 질수록 그 온전해진 자신의 삶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더 온전해지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쏟아지는 모든 말씀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깊이 하나님 앞에 깊이 몸부림치는 마음을 갖게 되고 더 온전해 지게 된다.
여러분 시편 51편에 나오는 "주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다." 라고 할 때 '상한 심령'의 뜻을 히브리 원문에서 살펴보면 '죽도록 두들겨 맞은'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실컷 두들겨 맞아 은혈이 든 상태를 말한다. 시커먹케 멍이든 상태를 말한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왜 시인이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죽도록 두들겨 맞아서 살갗조차도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아픈 심령이 되었는가?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는가? 양심에 가책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 양심에 가책은 무슨 빛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죄를 저지르고도 뻔뻔스럽게 얼굴 색 하나 붉히지 않던 다윗이 어떻게 해서 그 양심이 소생하게 되어 자신의 심령을 그렇게 상하고 아프게 만들었는가? 뭐가 그의 양심을 일깨웠는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온전해져 가는 비밀이다. 사도 바울을 보자. 그는 눌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고통이 무엇인지 알았다. 살 소망이 끊어진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죽고자 하는 욕망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살 소망이 끊어지고 견딜 수 없는 아픔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예수 죽인 것은 몸에 짊어지는 것이 무엇이고 그리스도에 남은 고난을 자기에 육체에 채우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괴로움 속에서 좌절을 맛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날마다 죽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신앙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고 권면한 바로 그 바울이 "이제도 내가 너희에게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라고 말했다. 기쁨을 이야기하는 그 장에서 그 성경 속에서 함께 눈물을 흘리며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비밀을 알았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모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내려오는 그 진리 앞에서 자신의 부족을 드려다 보는 것 없이 어떻게 우리가 온전해 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잘난 인간인가? 우리가 그렇게 완전한가? 하나님의 말씀도 피해가야 할 정도로 그렇게 완전한 인간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에나 개인적으로 성경을 펼 때에 항상 우리는 정말 하나님 앞에 주님이 진리의 빛을 비추어서 이제껏 까지 우리들이 깨닫지 못하던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정말 짐승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임임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주님 무엇을 제게 가르치시렵니까? 하나님, 모든 것을 제게 말씀 하시옵소서! 제가 하나님의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나에게 여전히 있는 편견, 인생관, 내가 살아온 경험 나의 욕망까지도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의 모든 말씀 앞에 복종시키겠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모든 하나님이 말씀이 우리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데 디모데후서에서 성경에 유익을 말하면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라는 말이 나온다. 종교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부르짖었던 성경에 관한 두 가지 슬로건이 있었다. 그것은 '모든 성경으로', '오직 성경으로' 였다. 거기에다가 '오직 믿음으로'를 더하면 그것이 종교 개혁자들의 구호였다.
종교 개혁자들이 개혁을 일으킬 때 제일 먼저 카톨릭에 도전했던 것은 카톨릭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책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라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이 66권의 성경이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나머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즉 카톨릭은 덜 믿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더 믿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제일 먼저 이점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의 투쟁은 성경의 권위를 위한 투쟁이었고 그 성경의 권위를 위한 그 투쟁은 어거스틴 사상을 보면서 성경을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고 어거스틴을 통해서 성경으로 돌아가서 사도시대의 신앙과 악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생명을 걸었다. 왜 우리들의 신앙이 이렇게 되었을까? 라고 생각해 보니까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들이 가르쳐지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 지고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들고일어난 것이다.
우리도 꼭 같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이 말씀, 모든 사람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내적인 순복의 자세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겸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말씀이 다 들어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결코 하나님 앞에 말씀으로 말미암는 은혜와 감화를 경험할 수 없고 경험한다고 하더라도 아주 적은 것에 불과 하다.
요지는 성경 하나하나는 진리다. 성경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생각하는 것이 맞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 하나 선택한 것을 이을 때 자기 마음대로 이어버리는 경우에는 완전히 다른 신앙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통제해 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모든 성경을 골고루 읽어야 한다. 복음이 신약에만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구약에서도 찾아내야 한다. 십자가는 믿어야지만 십자가만 믿으면 안 된다. 성경에 모든 진리들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이고 주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인생, 우리의 사고, 우리의 내면의 세계, 우리의 아집 등 모든 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우리 자신들 열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러니까 모범 답안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진짜 우리 자신을 살릴 수 있는 생명의 말씀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범 답안과 전혀 맞지 않는다. 사도 바울에게는 모범 답안이란 없었다. 즉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했는데 나왔다. 예수는 그리스도일 수 없다고 했는데 예수는 그리스도 이셨다. 부활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주님은 부활 하셨다. 하나도 맞지 않았다. 결국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나고 제일 먼저 찢어버린 것이 바로 자신의 모범 답안이었다. 그리고 "주여 어찌하오리까? 나를 인도하소서! 무엇이든지 당신이 누구이신지 나에게 가르쳐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제게 말씀하시옵소서! 내가 받아드리겠습니다. 당신에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진리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엎어진 것이다. 그 때에 계시에 밝은 빛이 그에게 밀려 들어왔다.
정말 우리는 깊은 은혜에 세계에 말씀에 깊은 세계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이 하나님에 말씀에 대한 이 선입견과 그리고 말씀보다 위에 서있는 우리들의 가치관, 그리고 우리의 사고 방식, 우리의 지난 경험 등을 다 버리고 그리고 말씀보다 위에 서있는 우리들의 가치관, 우리의 사고 방식, 우리의 지난 경험과 아집 등을 버리고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에 판단 되겠끔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아무데나 가서 배우는 것은 칼 든 사람이면 아무 에게나 가서 배 걷어올리고 수술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여러분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줄 수 있는 훌륭한 분들이 한국에 많이 있다. 그러나 요지는 배울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 데나 가서 아무렇게나 배우면 큰일 난다는 것이다. 즉 영혼을 팔아먹는 것이 된다. 잘못 배운 지식에 메여서 진리가 보이지 않기 시작한다.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크게 만나고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시 고민하면서 어두움 속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때 깊이 깨달은 것은 나를 이 성경에 대해서 무지 무식하게 만들어 버린 것은 예전에 잘못배운 성경 지식 때문이라는 사실이었다. 이 잘못된 지식이 눈을 가려 버린 것이다.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사도 바울이다.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은 머리가 텅빈 사람들이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는 성경자체가 허락되지 안았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천국 복음을 전파해 주실 때 그 복음을 곧 받아들였다. 그런데 바울은 성경에 대한 지식으로 꽉 차 있었다. 그러나 성경은 성경인데 다른 지식이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고 체계 속에서는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스도가 있을 자기가 없었다. 만약에 계시면 자기에 지식은 버려야 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진짜 일어났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었다.
이 세상에서 살인 강도보다 회개하기가 더 어려운 사람들은 철학자들이다. 그 사람들은 고집을 피우는 것으로 밥을 먹는 사람들이다. 철학자들은 다른 사람들에 이야기를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러한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있는 것이다. 아무데나 가서 성경을 배우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교 들어 올 때도 가정 좋은 학생들은 순수하게 신앙생활 하면서 성경 자체를 많이 읽다가 온 학생들이다. 그러나 이상한 곳에서 배워 가지고 온 사람들은 신학을 7년을 공부해도 바뀌지 않는다. 정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는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그런 틀을 가지고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리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심각한 문제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떠합니까? 여러분들도 동일한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까? 버려한 한다. 그런 태도를 가지고있는 것은 변화되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변화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교만에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 희망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번 사경회에도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다. 내일 아침 일어나서 성경을 펼 때에도 말씀하실 것이다. 마음에 드는 곳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주님께서 하시고 싶어하시는 그 말씀을 하시옵소서! 나는 언제나 정직하게 반응하겠습니다."라는 자세를 가져야한다.
이어서 나오는 또 한가지의 고백은 '다'라는 말이다.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우선 '다'라는 말을 해석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라는 말을 생각해 본다. 이것은 매우 의미 심장한 말이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있는가? 고넬료는 지금 베드로 앞에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고 이 고넬료가 지금 기도 시간도 아닌데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는 시간도 아니고 기도 속에서 이 베드로를 불러오도록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과의 이상 중에 교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지금 있는 것은 오직 베드로였다. 그런데 그가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한 지식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그래 한번 뭐라고 하는지 들어보자. 하나님 말씀 하시옵소서. 다 들을리도 없고 꼭 순종할 이유도 없지만 일단 한 번 말씀해 보십시오. 어느 것을 지켜야 할지 또 지킬까? 말까? 하는 것은 그 후에 제가 결정할 문제입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깔보는 행동이고 하나님을 자기 발아래 무릎을 꿇게 하려고 하는 태도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말씀은, 특별히 설교는 예배라는 형식을 통해서 주어져야 한다. 예배 자체의 의미는 하나님께 엎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는 질문을 하는 사람이 없다. 찬송을 다른 것으로 하자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청년들끼리 모여서 기타를 치면서 노래할 때에는 다른 것으로 하자고 말할 수 있다. 뭐가 다른 것인가? 똑 같은 찬양이지만 예배에 있어서의 찬양은 하나님께 엎드리며 드리는 것이다.
설교는 강의하고는 다르다. 설교는 항상 예배에 형태 속에서 주어진다. 왜냐하면 예배의 형식만큼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잠잠하게 하고 엎드린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하는 형식이 없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설교를 할 때 질문을 받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설교가 아니라 인생 강연을 한다면 얼마든지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배 시간에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실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무엄한 것이다. 지금 전 시간을 하나님 앞에 경배하고 살아 계신 그분의 임재 앞에서 그분의 존전에서 우리가 드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 여러분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는 이 자세와 그리고 제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있는 이 마음과 이 생각과 이 자세, 이 정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찬양하는 우리의 마음 갖음과 우리의 사고, 우리의 입술의 모든 찬양까지도 그분의 것이다. 그 분께 올라가는 중인 것이다.
고넬료가 그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했던 것이다. 과연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 부복한 마음인가? 얼마나 많은 세월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혹은 읽으면서 인생의 참고서정도로 지나간 적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해 보자. 일단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면 그 중에 어떤 것들을 취하고 말아야 할 지는 내가 판단한다고 생각한 이런 생각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많이 떠나가게 했는지 생각해 보기를 원한다. 우리가 그런 식에 위험한 삶을 살고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내밀한 음성으로 그 영혼에게 말씀해 주신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만약에 일어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예외적인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고 그 말씀이 무엇인지를 아는 우리들은 항상 부복하는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와야 하는 것이다.
(예화) 조지 윗필드가 영국이 나은 위대한 성경 주석가 매튜핸리의 성경 전권에 관한 주석을 일생동안 3번을 읽으면서 그의 신학과 신앙의 토대를 이루었는데 3번째 읽을 때는 무 릎을 꿇고 성경 전권의 주석을 읽은 이야기.
하나님의 말씀을 해설해 놓은 인간의 저술을 읽는데도 무릎을 꿇고 읽었다. 제가 아는 어느 극단적인 경건을 주장하는 교파는 많은 교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자를 놓지 않는다. 불경스럽다는 것이다. 누가 지금 말씀하시는데 버티고 등을 기대고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마루로 해 놓고 정 자세로 앉아서 무릎을 꿇고 예배를 드리는 교파가 한국에 지금도 있다는 것이다.
정말 우리는 그렇게 부복하는 자세가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자리가 하나님께서 계신 자리이고 여기서 내 마음이 하나님 앞에 전폭적으로 엎드려져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수 없이 우리에게서 떠내려가는 것이다.
고넬료를 보자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그 순간 베드로를 통해서 전해오는 하나님의 뜻이 자기에게 가르쳐주는 그 순간 이 고넬료는 하나님 앞에 서있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더 엄격한 의미에서 그것을 준비하고 있는 이 순간이 바로 하나님의 시선 앞에 서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거기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신다고 할 때 취할 바로 그런 자세로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서 주시는 그 말씀을 경청하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하나님 앞에 엎드려지는 부복하는 마음을 가지고 듣는 한 구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의식이 없이 뒹굴면서 듣는 수십 마디의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우리의 마음을 더 깊이 찌른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예배당에 예배 시작한지 5분 10분이 지났는데 헐레벌떡 뛰어와서 자기 자리 찾으면서 부산함을 떠는데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있겠는가 이다. 예배 시간에 늦니 말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 서있다고 이 사람은 말했다.
설교자는 자기가 외친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기록될 것이다. 회중들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가 하나님의 책에 기록이 되고 있다. 정말 하나님 앞에 부복하는 심정을 가지고 있기 전에는 생각 없이 다 떠내려보내고 예배 시간을 견디는 것이 고통스러웠는데 하나님 앞에 부복하는 심정을 가지고 말씀을 들을 때에 전에 들은 설교를 다시 들으면서 무너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부복한 마음을 가지고 듣는 것과 하나님 앞에 전혀 겸비하고 낮아진 마음이 아닌 상태에서 듣는 것은 어마 어마한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깊이 기억을 해야 한다.
오늘 이 고넬료가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주님을 대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찾아오셔서 우리를 대면하신 후에 아무 말씀 안 하시고 가버리시면 우리는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삶니까?" 라는 것이 고넬료의 고백이었다. 사경회를 앞둔 여러분들에게 그런 고백이 있는가? 하나님 새털 같이 많은 날, 이번에만 날입니까? 수요일은 교회 나오는 날이니까 참석하고 다른 날은 생각을 해 보겠다는 식에 태도를 가시고 있는가? 아닙니다 하나님 이번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해 주시지 않고 스쳐 지나가시면 안됩니다. 내가 주님 앞에 있습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하나님 책망에 음성이라고 좋으니 무엇인가 저에게 말씀하시고 지나 가시옵소서 그래야 그것이 저에게 소망이 됩니다. 라는 마음으로 고넬료가 이 집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원한다.
마지막으로 '다' 라고 말씀했다. 모두 이다. 즉 고넬료는 이 중요한 시간에 불러모을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나 혼자 은혜 받으면 된다라는 생각으로 뛰어 나온 것도 아니고 떠 다른 사람들을 은혜 받게 하기 위해서 너무나 분주해진 나머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서는 그것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함께 그 마음을 유지한 채 손 잡고 이 사경회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다 여호와 앞에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라고 고백한 것이다.
왜 고넬료가 그랬을까? 지금 주인공은 자신인데 왜 그랬을까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해 주시는 이때가 늘 있는 것이 아니고 늘 있다고 하더라도 그때마다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이 말씀을 놓칠 수 없다라고 하는 강한 흡인력을 이 사경회를 통해서 느꼈기 때문에 자기 혼자 나온 것이 아니라 다 데리고 나와서 주 앞에 세울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세운 것이다.
우리가 바로 이 일을 해야 된다. 만약에 우리들이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정말 나쁜 사람들이다. 형법에 자살 방조죄라는 조항이 있다. 예를 들어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을 말리지 않으면 3년 이하에 징역에 처하는 법이다. 즉 죽음에 처한 사람을 붙잡고 설득하고 권면할 의무를 법이 우리에게 준 것이다.
이와 비슷한 임무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심판의 경고를 받지 못해서 멸망을 받아 죽으면 그 사람은 그의 죄 때문에 죽지만 그 피 값은 우리에게 찾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우리 혼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 우리의 손길이 닿는 사람 그리스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 주님의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희망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알아도 너무나 희미하기 때문에 짐승 같은 삶을 모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불러 이끌어서 하나님 앞에 세워야 한다.
이러한 헌신을 가지고 익명으로 신문에 광고도 냈다. 방송에도 광고를 계속하고 있다. 이것은 결코 교회를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다. 어느 방송국에서 우리 교회를 50분 동안 취재해서 특집 방송을 보내 주겠다고 했다. 그 요청을 제가 거부했다. 그 시간에 시간을 줘서 복음을 전하게 한다면 그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 지만 교회를 자랑하는 일은 관심이 없다고 했다.
우리의 교회는 자랑할 교회가 아니다. 우리의 관심과 자랑은 이러한 것들이 아니다. 우리가 가장 고심하고 고대하는 바는 어찌하든지 사람들이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특별히 용서 받지 못한 수많은 죄인들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등지고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들, 하나님께 돌아가고자 하나 돌아갈 힘이 없고 또 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그 길이 어디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참된 복음에 길이 무엇이고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이 목 메이는 사랑으로 그들을 부르고 계신지를 그들의 마음속에 증언해 주는 것이다. 그들에 마음속에 들려주고, 그들의 마음속에 외치고, 그들을 설득하고, 그들에게 보여주고, 깨닫게 하고 돌아오지 않아도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이 일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부지런히 피 묻은 복음을 소개하고 그들을 불러다가 교회당에 앉혀서 복음을 듣게 하고 그 복음을 타는 듯한 가슴으로 어렵게 저희에게 찾아온 이 기회를 저희 영혼들이 놓치지 말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하며 중보 기도하는 것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함께 와야 한다. 우리가 우리와 함께 하나님 앞에 서야될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지 않으면 아무 희망이 없는 모든 사람들, 모든 사람들이 손에 손잡고 와서 거기서야 한다.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들려오는 그 음성 우리의 인생을 향한 그 모든 말씀을 들으며 우리들이 함께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복음에 빛 가운데 거하고 하나님의 그 은총의 햇살아래 거하며 이제는 어둠에 일을 버려야할 때이다.
말씀에 은혜받을 준비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