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살리는 말씀
(201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5년 7월 12일 - 9월 20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5년 10월 6일
목 차
1. 인생이 곤고할 때(시 119:25) 2015.7.12 주일오전 1
2. 인자하신 하나님(시 119:159) 2015.7.19 주일오전 10
3. 만나로 먹이신 것은(신 8:2-3) 2015.7.26 주일오전 18
4. 그 마음을 아는 기도(시 119:146-148) 2015.8.2 주일오전 29
5. 주의 법도를 잊지 않음(시 119:140) 2015.8.9 주일오전 38
6. 말씀을 찬양할 때(시 56:3-4) 2015.8.16 주일오전 45
7. 진리를 보내심(시 43:3) 2015.8.23 주일오전 52
8. 마음이 뜨거워질 때(눅 24:32) 2015.8.30 주일오전 61
9. 말씀으로 고치심(시 107:20) 2015.9.6 주일오전 69
10. 여호와께 돌아올 때(신 4:30) 2015.9.13 주일오전 78
11. 자비하신 하나님(신 4:31) 2015.9.20 주일오전 86
영혼을 살리는 말씀 1 (2015.7.12 주일오전설교)
영혼을 살리는 말씀 2 (2015.7.19 주일오전설교)
영혼을 살리는 말씀 3 (2015.7.26 주일오전설교)
영혼을 살리는 말씀 4 (2015.08.02 주일오전설교)
영혼을 살리는 말씀 5 (2015.8.9 주일오전설교)
영혼을 살리는 말씀 6 (2015.8.16 주일오전설교)
영혼을 살리는 말씀 7 (2015.8.23 주일오전설교)
영혼을 살리는 말씀 8 (2015.8.30 주일오전설교)
영혼을 살리는 말씀 9 (2015.09.06 주일오전설교)
영혼을 살리는 말씀 10 (2015.09.13 주일오전설교)
영혼을 살리는 말씀 11 (2015.09.20 주일오전설교)
영혼을 살리는 말씀(1) 2015.07.12 주일오전예배
< 인생이 곤고할 때 >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시 119:25)
I. 본문해설
- 탄원과 찬송으로 이루어진 지혜 시
- 삶의 다양한 상황에서 계시와 만남
- 율법+증거+법도+율례+계명+판단
- 말씀 dabar, imra 발화와 생각 뜻함
- 행복∼8, 정결∼15, 고난∼22, 침체∼32
II. 인생이 곤고할 때
A. 영혼을 돌아보라
- napsi "내 목숨": 영혼이 곧 목숨임
- 외적 삶과 내적 삶의 조화가 필요함
- 감각의 힘과 표상적 삶의 힘이 크다
- 휘둘리면 신자도 다른 삶 살 수 없음
- 하나님은 육체 아닌 영혼과 교제함
- 영혼의 기능과 질서가 오롯해야 함
- 올바른 기능: 지성과 의지, 해석력
- 정결함과 생명력으로 삶을 지도함
B. 진토에 붙은 영혼
- apar 티끌먼지: 무가치함, 힘없음
- dabeka leapar: 티끌과 연합이 됨
- 죽음을 상징함 (시 22:15, 29, 30:9)
- 고귀한 영혼이 무가치하게 느껴짐
- 질서 따라 생각하고 살 능력 상실함
- 침체 속에 살 수도 죽을 수도 없게 됨
- 침체란 영적교제 단절 기쁨과 생명
- 아무런 만족과 보람 없음 육적 추구
- 지성 혼란 감정기복 의지 선함 상실
- 극단적 대적과 방탕은 신적 갈망임
- 마음 드릴 수 없어 형식적 종교생활
- 은혜의 수단들이 치료 역할을 못 함
- 곤고한 인생을 사는 자의 영혼상태
III. 영혼을 살리심
- 시인도 그러한 영혼의 회심의 순간 영적세계에 눈뜨게 됨
- 영혼이 하나님과 생명적 관계있음
- 비회심자+영적침체+본성과 활기
- 영혼에 눈뜸으로 하나님 의지케 함
- 시인도 영혼이 죽은 상태를 경험함
- 죄가 근본 원인이나 복합적 상태임
- 회개와 악기 조율하듯 종합적 다룸
- 영혼을 살림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
IV. 말씀을 따라서
- 침체에 빠진 영혼 회복시키는 방법
- kedebareka 당신의 말씀을 따라서
A. 약속의 말씀
- 하나님께서 영적 생명을 약속하심
- 당신 자녀들에게 은총 주시는 방법
- 영혼 소생 통해 고통과 사랑 알리심
-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믿음 필요
- 믿음 근거는 주관 아닌 객관에 있음
-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 인도하심
- 무지에 지식을 무능에 생명을 주심
- 자신의 처지 아닌 하나님 약속바람
B. 말씀의 능력
- 시인 생애는 말씀의 능력 체험연속
- 방패 18:30, 단맛 119:103, 등과 빛 119:105
- "여호와께 피하는 자" 복됨 (시 2:12)
- 주께 피함은 곧 말씀으로 돌아옴임
- 외적 행동 뿐 아닌 말씀의 정동 필요
- 영혼을 변화시키는 말씀 능력 경험
- 하나님 마음 앎이 자아로 돌아감임
- 말씀 통해 그 마음 알고 느끼게 하심
- 말씀 가까이함 없이 지속 은혜 없음
- 교만한 자신 버리고 하나님 품으로
V. 적용과 결론
- 침체된 영혼의 삶 끝은 어디인가?
- 믿는 것과 사는 것의 일치 없는 불행
- 곤고한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 삶의 벼랑 끝에서 건지심 기억하라
- 있는 모습 그대로 주 말씀 앞에 서라
영혼을 살리는 말씀(2) 2015.07.19 주일오전예배
< 인자하신 하나님 >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랑함을 보옵소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살리소서”
(시 119:159)
I. 본문해설
- 고난당하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함
- 악인들에게 에워싸인 채 홀로 있음
- 요동치는 삶의 상황과 말씀을 붙듦
II. 말씀을 붙들고 삶
- re'e ki piqqudeika ahabti
- "보소서 내가 당신의 교훈들을 사랑했습니다“
A. 요동치는 우리 인생
- 우리 인생은 어차피 요동치며 간다
-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그러하듯이
- 풍랑 속에서 우리 의지한 것들 버림
- 사람, 재물, 명예와 지위도 그러함
- 하나님밖에 의존할 자 없음 알게 함
B. 말씀을 붙든 믿음
- "사랑했습니다" 그것 없이 못 살음
- 시인 정황보라 말씀대로 살 수 없음
- 고난의 날 유일한 위로는 주의 말씀
- "주의 법도를‥" 당신의 교훈들을
- piqqudeika 율법을 삶에 적용한 것
- 삶의 끈을 놓지 말라 말씀을 붙들자
- 환경 탓하고 사람 원망하는 대신에
- 어떤 처지에서도 주 교훈대로 살자
- 세상과 사람에 눈 떼어 주를 향하라
III. 나를 살리소서
- ka hasdeika hayyeni
- 당신의 헤세드 따라 나를 살리소서
A. 살리시는 하나님
- 살아있다고 해서 모두 산 것이 아님
- "살았다는 이름 가졌으나" (계 3:1)
- 불신자들도 정신의 죽음을 경험함
- 안자가 절망을 통해 죽음은 경험함
- 절망은 모든 희망이 끊어진 지점임
- 홀로 버림받은 것 같은 상태를 경험
- 양심의 송사와 율법의 정죄의 심함
- 침체로 인해 하나님을 느끼지 못함
- 영혼 살리신 하나님 산 영혼 기뻐함
- 어떤 절망적 상태 영혼도 살리신 주
B. 인자하신 하나님
- ke hasdeika, 당신의 헤세드 따라
- according to (KJV,NIV,ASV)
- (1) 사랑으로써 (2) 사랑이 생명을 원하기에
- hesed 가치 없는 자 향한 값없는 호의임
- eleos, pity, mercy, compassion
- 사랑받는 자 공로 아닌 주 성품에서
- 신약서 아가페의 사랑으로 나타남
- 인간을 사랑 안에서 태어나게 하심
- 처음 배우는 사랑 값없이 자신을 줌
- 그리스도 통해 우주 휘돌아 회귀함
- 진정한 부모 사랑은 자식 향한 마음
- 자식 향한 마음 부부에 다르지 않음
- 하나님이 인간을 너무나 사랑한다
IV. 적용과 결론
- G.Voetius 침체는 주의 능력 자비와 지혜 드러내심
- 독과 상처로부터 유익한 양분 만듦
- 곤고해도 하나님 사랑 의심치 말라
-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시 63:8)
영혼을 살리는 말씀(3) 2015.07.26 주일오전예배
< 만나로 먹이신 것은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얻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 8:2~3)
I. 본문해설
- 이스라엘 가나안 정복을 앞둔 회고
- 그들의 본성을 겪어본 목자의 충고
- 명령 지키라 그것은 광야 교훈 반복
II. 광야생활의 뜻
- 전능한 주가 40년 광야 생활 주신 뜻
A. 낮추심
- 형통하고 번영한 날 교만해진 백성
- 시련과 역경 속에서 좌절하는 백성
- 진정한 낮아짐은 하나님 향한 마음
- 은혜 받은 자의 영적사고 방식 따름
- 자기 본위의 교만이 타락의 선봉임
- 인생은 광야생활 역경들로 낮추심
- 시련 자체 낮아짐 주지 않고 계기됨
B. 시험하심
- 진짜임의 여부를 가리기위한 작업
- 전지한 주님의 시험은 우리 위한 것
- 우리 안에 무엇 있는지 모르기 때문
- a 내면직시, b 삶 재해석, c 의지함
- 시험 당치 않은 위대한 인물은 없음
- 올바른 반응으로 영적 성장 경험함
III. 만나로 먹이심은
A. 알지도 못하던 만나
- 시련 통해 낮추시며 주신 은혜 만나
- 출애굽 후 양식 없던 백성들 돌보심
-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써
- 새벽에 내린 만나 어찌 만드는지 모름
- 만나에 불평 그걸 양식으로만 이해
- 신앙을 자기 성취 수단으로 사용함
- 출애굽 중요한 두 교육 a. 홍해 b. 만나
- 능력의 일시적 현시와 지속적 경험
- 기적보다 큰 능력 말씀 속에 주 만남
B. 말씀으로 살게 함
- 매일 먹는 만나의 감각적 경험 통해
- 돌봄 필요한 굶주린 영혼을 알게 함
- 주기도문 "일용할 양식" 해설할 때
- 일용 양식을 구할 때 영혼을 생각함
- 탈북한 어린 학생들의 식사와 눈물
- 말씀 은혜 있음 자기, 없음 남 위해;
- 인생 문제 때문 아닌 말씀에 핍절함
- 신자 무엇으로 빛과 소금으로 살까
- 팔복 맛본 자 무엇으로 행븍해질까
IV. 적용과 결론
-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고?
- 거창한 구호 외치는 운동하지 말라
- 다른 사람 어찌든지 나 자신이 하자
- 매일 말씀 앞에서 주 은혜를 바라자
영혼을 살리는 말씀(4) 2015.08.02 주일오전예배
< 그 마음을 아는 기도 >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지키리이다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떳나이다“(시119:146~148)
I. 본문해설
- 고난을 당하는 시인의 간절한 기도
- a.사람의 박해(134절), b.내 대적들(139절)
- 주의 긍휼을 기대할 정도의 고난(153절)
- 고난 받을 때 최초 믿음의 실천이 기도임
II. 고난 중에 부르짖음
- 고난 때 지성과 감정, 혼란, 의지의 격돌
- 고민과 자기자원으로써 맞섬 기도함
A. 부르짖음
- “qerabtika” 내가 당신을 불렀습니다
- 이름이나 외침을 큰 소리로 발화함
- 일상적 기도의 때 와 특별한 기도의 때
- 육체의 자의적이 아닌 마음의 부르짖음
- 고난을 당한 자의 최초의 믿음의 행동
- 마음으로부터의 기도와 섭리의 뜻
- 주님께 초점 맞춘 부르짖음과 마음의 쇄신
- 시련 속에 고민 하는 대신 기도 실천하라
B. 증거지킴
- 기도의 목표는 구원을 넘어 증거를 지킴
- 고난을 통해 하나님 뜻대로 살기를 구함
- ed, ‘ud’, dah / dah “지나가다” 뜻
- “증거” 하나님의 뜻의 생사적 표명
- 특히 언약관계의 엄숙성과 주님의 뜻
- 주님과 맺은 언약관계를 기억하라
- 십자가를 통한 언약의 실현을 잊지 말라
C. 말씀바람
- 밝기 전에 일어나 하나님 말씀을 바람
- ashawe’ah 내가 도움을 부르짖다
- 또 기도 언급 얼마나 간절한지를 보임
- “당신의 말씀을 향해 바램을 두었습니다”
- 그 바램의 구체적 표현이 다음절에 언급됨
- “조용히 읊조리려고” 히 lasiach
- “묵상하기 위하여” KJV, NIV, ASV
- 읽은 말씀이 지성에서 마음으로 내려감
- 결국 삶을 움직이는 것은 마음이기에
- 마음에 담겨 불타고 있는 말씀을 가지라
III. 적용과 결론
- 인생의 풍랑이 일 때에 하나님을 생각하라
- 그 마음이 어떤지 알려면 말씀을 보라
- 그 말씀에 마음을 깊이 잠기게 해 일체가 되라
영혼을 살리는 말씀(5) 2015.08.09 주일오전예배
< 주의 법도를 잊지 않음 >
“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시119:140)
I. 본문해설
- 고난 속에서도 빛나는 시인의 신앙을 보여줌
- 그의 관심은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임
- 삶의 상황으로 말씀을 묻어 버리지 않음
- 상황이 우리를 바꾼 것이 아니고 성품을 드러냄
- 어떤 처지에서도 주의 계명을 사랑하는 시인
II. 순수한 말씀
- tserupa merateka “연단된 약속”
- tsarap “시험하다”(시17:3) “단련하다”(105:19)
A. 연단된 약속
- “심히 연단된 주의 약속“을 의미함
- 시인과 수많은 성도들이 약속을 시험해 봄
- 약속과 성취를 통해 신실하심을 드러내심
- 약속을 믿음이 곧 주님께 대한 인격적인 신뢰임
- 신앙의 성숙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인격적 신뢰임
- 신자의 담대함은 눈앞의 상황보다 약속을 붙드는 것
B. 사랑한 말씀
- ahevah “그것을 사랑하다” 넓은 의미로 사용됨
- 말씀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경험에서 옴
- 주의 약속에 자신을 의탁할 때 사랑이 깊어짐
- 한 순간의 열정보다 말씀에 대한 인격적 사랑이 중요함
- 말씀을 통해 주님의 마음을 공감하는 깊이가 필요함
- 말씀의 행간에 담긴 주님의 희로애락을 공감함
-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 말씀을 사랑하라
III. 그 뜻을 받들며 삶
- abdeka “당신의 종” 주인과 노예 관계
- 출21장, 종에 관한 법과 7년째의 자유케 됨
- 아내와 자식 때문에 스스로 종이 된 자유인
- 그는 고용된 일꾼과 대등한 대우를 받음
- 귀를 뚫음은 주인 말씀에 복종 의미함 (출21:6)
- 모든 불순종은 우리가 누구인지 잊기 떄문임
- 고난에 처한 상황으로 모든 것을 덮지 말라
- 그렇다고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
- 어떤 처지에서도 우리가 누구인지 알라
-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임을 기억함
- 그 때는 목적이 없고 하늘자원이 결핍된 삶이였음
- 우리의 인생이 주의 뜻이 이뤄지기를 사모하며 사는 것
IV. 적용과 결론
- 곤고한 자신을 들여다보아야 아무 희망이 없음
- 자기 연민 속에 우는 것도 우리의 해결책이 아님
- 우리는 어둠 속에 갇히기 쉬운 존재임을 알라
- 하나님 말씀의 밝은 빛으로 자기를 비춰야 함
- 인생의 깊은 웅덩이 속에 드리운 밧줄인 약속
- 상황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라
- 성경 말씀을 사랑하던 첫 사랑의 때로 돌아오라
영혼을 살리는 말씀(6) 2015.08.16 주일오전예배
< 말씀을 찬양할 때 >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시 56:3~4)
I. 본문해설
- 다윗이 고난 날에 지은 탄원 감사시
- 삼상 21:10~15 사건을 배경으로 함
- 사울의 박해를 피해 가드로 도망감
- 신분 속이고 아기스 용병을 지원함
- 신하들 알아보자 미치광이 행세함
- 시 34편 배경 선하심 맛보아 알지라
II. 두려워하는 날에
- 다윗의 유일한 위로 요나단 이별 후
- 놉에 가서 제사장에 떡을 얻어먹음
- 사랑 잃어 외롭고 가난으로 곤고함
- 사울의 살해 위협으로 두려운 때임
- 우리 인생 항상 자신 넘쳐 살지 앓음
- 두려워 외로움에 위축될 때가 있음
- 믿음 있었는지 의심할만치 엄중함
- 바울, 약하고 두려워 떪 (고전 2:3)
- 은혜로 강함 아닌 약한 게 참모습임
III. 주를 의지할 때
- anoki eleika ebta 인칭강조법
- 내가 당신께 의지, 신뢰, 의탁하다
A. 의지함을 배움
- 신앙은 하나님을 절대의존하는 것
- 의존 안에서 신의 수납과 순종 배움
- 죄는 독립과 자유 가르치나 얽매임
- 교만한 우리를 시련으로 가르치심
- 하나님 위 아닌 아래서 속성을 배움
B. 말씀을 찬송함
- 4, "하나님 안에서 그의 말씀 찬양"
- ahalel, "찬송하다" 곧, 인정하다
- 이별, 가난, 생명 위협 이기게 한 힘
- "하나님의 말씀"의 힘으로 극복함
- 말씀 통해 주의 성품 앎으로 힘얻음
- 시편 34편에서 이 경험을 노래했음
- 경험의 한 일화 "호랑이를 증언함"
- 하나님께 영광 돌림 찬양함 인정임
- 말씀 찬송은 곧 하나님 자신 찬송임
IV. 적용과 결론
- "육체가 내게 무엇을 하리요" 5절
- basar "필멸할 존재인 인간" 뜻함
- 단순 사람 아닌 세상 모든 악의 질서
- 하나님 안에 있는 자를 삼키지 못함
- 하나님 말씀을 숙고하며 길 찾으라
- 고독, 가난, 시련을 통해 말씀으로
- 성경을 읽으라 거기 마음을 잠그라
영혼을 살리는 말씀(7) 2015.08.23 주일오전예배
< 진리를 보내심 >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시43:3)
I. 본문해설
- 구원의 탄원과 성전에 이르기를 갈망함
- 불의한 자들에 포위된 침제의 상태
a. 버림받은 느낌
b. 슬픈 마음(2절)
- 시련보다 두려운 것은 영적인 침체
- 애매한 고난을 당해도 침제가 올 수 있음
II. 빛과 진리를 보내심
- 그 상황에서 믿음의 상태가 드러남
- 시인은 전심으로 의지하며 기도함
-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최대의 의존임
A. 주의 빛
- 빛 or 진리, 인식하게 된 진리 포함
- 당신의 빛과 진리 그들을 보내소서
- 같은 의미의 반복이지만 측면을 드러냄
a. 진리에 대한 주관적 깨달음을 보여줌
b. 자기 밖에 있는 객관적 진리가 전제됨
- 진리와 상관없던 우리와 그리스도와 만남
- 회심은 자기를 객관화하게 해주심
- 믿음은 그리스도 가르침을 따르게 함
- 영적 침제의 특징은 자기 감정을 따름
B. 주의 진리
- 영적 각성과 회개는 삶으로 인도함
- 순종의 생활을 통해서 복된 변화 보존함
- 순종하는 삶은 진리를 따르는 생활
- 많은 기도와 열정은 진리 따를 때 의미
- 빛과 진리에 대한 즐김 아닌 “인도”
- 깨닫고 사랑하게 함으로 인도하심
- 고난 속에도 기꺼이 진리를 따르려 함
- 어떤 경우에도 생명의 끈을 놓지 말라
- 살아 있을 뿐 아니라 주체가 되어 살라
- 기쁜 뜻을 따라 소원을 두고 이루게 하심
- 주님이 인도하시나 대신 살지 않으심
III. 주께 이르게 함
- 시인 구하는 바 하나님 앞에 사는 것
- 시편은 복에 대한 독특한 관점 발전
- 복은 하나님 자신에 가까이 함.(73:28)
- ‘거룩한 산’ 예루살렘에 에워싼 시온
- 하나님의 언약과 은총과 신적 보호
- 공로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임
- 42편에서 회상 “기쁨과 감사 소리를 발함”
IV. 적용과 결론
- 영적침제는 운명이나 능력이 아님
- 문제는 그것을 극복할 지식과 의지임
- 사방을 에워싼 고난 속에서 희망을 봄
- 네 영혼아 네가 어찌해 낙심하느뇨
- 요동치는 마음이 아닌 약속을 바라라
- 진리를 보내사 위기 중에서 건지신다
- 마음 모아 말씀을 바라라, 기도하라
영혼을 살리는 말씀(8) 2015.08.30 주일오전예배
< 마음이 뜨거워질 때 >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눅24:32)
I. 본문해설
-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 엠마오의 위치 불명하나 예루살렘 근처임
- “이십오리” 헬라어 “60 스타디온” 약 11km
- 글로바: 부친 요셉 형제?(요 19:25)
- “그날”: “안식 후 첫날” 주일임(1절)
II. 십자가와 부활 사건
- 글로바가 예루살렘에서 된 일에 대해 말함
- 이스라엘의 속량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 부활하신 예수님의 개입 기독론을 강설하심
- 모세와 선지자의 글 모든 성경에 걸친 사상
- 몰입한 제자들이 함께 유숙 하시기를 청함
- 식사 할 때 떡을 떼어 축사 후에 눈이 밝아짐
-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으나 즉시 사라지심
- 성경과 예수의 중심성: 죽음 + 부활
III. 마음이 뜨거워 질 때
A. 성경을 풀어주실 때
- dia + anoigo “완전히 열어 보이다”
-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주실 때임
-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심
- 우리에게는 성경을 통해서 말씀해 주심
-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성경 이해의 첩경임
- 삶의 상황에 허우적거리지만 답이 없음
- 하나님의 시각에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봄
- 성경을 가까이 할 때 해석에 관심을 갖게 됨
B. 마음이 뜨거워질 때
- kaiomene “불붙는” (히 12:18, 계 8:8)
- 은혜 + 정동: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의미
- 마음을 바꿔 놓음: 지식 + 정서 + 의지
- 원하는 것을 선택을 하지만 실행할 힘이 없을 때
- 하나님의 은혜가 말씀을 통해서 주어짐
- 냉랭한 신앙생황은 사랑 없음을 보여줌
- 십자가를 삼자처럼 대하던 사람들이 있음
-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는 자들이 됨
- 성경을 읽으라 그리스도를 만나라
IV. 적용과 결론
- 낙심과 혼란에 찬 마음으로 지내던 사람들
-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눈이 열리게 됨
-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보고 깨달게 됨
- 목적이 없던 삶이 목표와 의미를 갖게 됨
- 즉시 성경을 읽으라 말씀에 은혜를 받으라
영혼을 살리는 말씀(9) 2015.09.06 주일오전예배
< 말씀으로 고치심 >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시 107:20)
I. 본문해설
- 시편 제 오권 시작하는 감사 찬양시
- 바벨론 포로 귀환 후 역사를 회고함
- 불순종과 포로 됨 및 예루살렘 귀환
- 이스라엘을 한 사람으로 의인화 하였음
II. 인생이 곤고할 때
A. 곤고한 상태
- 신자가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음
a. 흑암 chosheq, 물리적+윤리적+영적
b. 사망의 그늘 tsarmavet tser+mavet
c. 곤고 'ani 고통이나 괴롭힘 당함
d. 쇠사슬 barzel 운명적인 굴레를 씀
B. 곤고한 원인
- 하나님의 말씀 거역+지존자의 뜻 멸시
1. 하나님 말씀을 거역함
- 불순종과 말씀의 영향력 벗어난 삶
- 자유 찾아 신앙을 떠나지만 속박 받음
- 하나님 바깥에 진정한 자유는 없음
- 말씀의 미각과 감화 상실하는 침체
- 단지 환경과 인간관계의 문제가 아님
2.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
- 지존자 'eliyon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 뜻 'etsa 시편 1:1 "꾀" 경륜 혹 의지
- 말씀의 은혜 사라질 때 하나님 뜻을 멸시함
- 계시는 상식, 지식은 느낌으로 대체
- "기승전아몰랑"의 시대 지성 없음
- 신앙은 자기 중심성을 버린 신율적 사고
- 말씀의 지식과 성령의 감화 없을 때
- 하나님 뜻을 성취하는 보람으로 살아감
C. 곤고한 결과
- 세상에서 환란 고통당하게 됨 (13절)
- 엎드려 졌으나 돕는 자 없게 됨 (12절)
- 불순종과 말씀 거역은 자기 행복 위해서였음
- 돌아오는 결과는 환경과 영혼의 깊음
- 신자의 믿음은 고통서 주께 부르짖음 (13절)
III. 말씀을 보내심
- 하나님 자녀를 구원하는 방법 보임
- 흑암,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심+맨줄 끊으심
- 무지와 절망적인 상태로부터 이끎
- 운명처럼 얽매인 불행의 줄을 끊으심
- 하나님이 어떻게 이 일을 하시는가?
- 하나님의 말씀을 보냄+고침+구원함
- 끊임없는 실패의 삶은 망가진 본성에서 옴
- 우리가 운명처럼 포기한 본성조차 고치심
- 말씀의 능력,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함
IV. 적용과 결론
- 하나님 말씀에 은혜 받던 때로 돌아오라
- 위험한 지경 (shichth), “구덩이” 애 4:20
- 단수 아닌 복수, 헤아릴 수 없는 위기들
- 출렁거리는 삶의 상황들이 아니라 주님을 보라
- 하나님 말씀에 붙들린 사람 되라
영혼을 살리는 말씀(10) 2015.09.13 주일오전예배
< 여호와께 돌아올 때 >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의 말씀을 청종하리니” (신 4:30)
I. 본문해설
- 모세가 요단을 건너지 못하고 남김
- deuteronomion 둘째 율법 (17:18)
- 이미 주신 율법에 대한 상세한 해설
- 백성들에 대한 경험과 지도력 담김
II. 번영과 타락에 대한 경고
- 가나안 입성 후 번영과 타락 경계함
- 평안⇒부패(자기애)⇒우상⇒악
- 흩으심⇒목석을 섬김⇒주를 찾음
- 이스라엘이 최고의 신앙 가진 때임
- 그들 본성을 아는 모세에 보인 미래
- 광야 위기 중 주 찾듯이 그리 살도록
- 고난 의미 묻고 번영 의미에 맘 담금
III. 여호와께 돌아올 때
A. 환난을 당할 때
-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확실성
- 마음의 부패로 주 떠난 자들의 결국
- 자기 사랑에 우상 섬기나 배신당함
- 운명이라기보다는 본성을 직시함
- 은혜에 붙잡혀야 할 필요성 보여줌
- 환난과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아냄
B. 말씀을 청종할 때
- "그의 목소리를 들을 때" shamata
- "bekolo" 그의 한 목소리 속으로‥
- 마음 기울임+의미 새김+삶에 적용
- 귀에 들리는 것 듣는 것의 차이를 앎
- 말씀 실천하고 실현을 갈망하며 삶
- 주 뜻 이루어짐이 기쁨이 되는 생활
IV. 적용과 결론
- 침체 속에 고통 받을 때 자기 의 추구
- 정서와 기분전환 시도하나 떨어짐
- 아무리 멀리 떠나도 주 가까이 계심
- 은혜 시 자아 사이 거리보다 가까움
- 시련 중 말씀 찾음은 회복의 큰 조짐
- 말씀은 자신을 보여주는 은혜의 힘
- 말씀으로 돌아오라 여호와께 오라
영혼을 살리는 말씀(11) 2015.09.20. 주일오전예배
< 자비하신 하나님 >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신 4:31)
I. 본문해설
- 가나안 땅을 주신 은총을 잊어버림
- 번영 속에서 부패하여 우상을 숭배함
- 환란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찾음
- 그 때 하나님께 돌아와서 말씀을 청종함
- 시련을 통해 마음을 낮추시는 하나님
II. 자비하신 하나님
- rachum 긍휼히 여기는, rechem 태, 자궁(창20:18), 모태(민12:12)
A. 버리지 않으심
- rapah 떠나다, 포기하다 (수 10:6)
-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 언약 관계를 통해 신실성 보여주심
- 자비는 슬픔을 동반한 완전한 사랑
- 인간은 타인과 자신에 대해 슬퍼함
- 하나님은 오직 인간의 비참 때문에
-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느낌에 속지 말라
- 그것도 부르심의 증거 (삼상 12:22)
B. 멸하지 않으심
- shachat 죽이다, 파괴하다 (사 54:16)
- 인간 창조와 이스라엘 선택은 사랑에서 비롯됨
- 사랑은 관계를 맺고 심화하는 경향임
- 파괴 행위는 극도의 내적 미움에서 유래함
- 따라서 이스라엘 파멸은 하나님의 자기모순
- 불완전한 인간, 사랑이 변하면 그렇게 함
- 참 부모는 사랑할 뿐 아니라 두려운 존재도 되어야 함
- 어떤 경우에라도 복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C. 잊지를 않으심
- shakach 잊어버리다, 망각하다
- 단순히 자연 지식의 사라짐이 아님
- 단순한 사실과 의미상 잊음은 다름
- "잊지 말라"를 당부하시는 하나님
- 마음으로부터 지워져서 의지에 영향 미치지 못함
-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아로새겨진 존재임
- 하나님을 잊은 이스라엘과 잊지 못하시는 하나님
- 잊지 않으심은 인간에 대한 불변적 사랑의 표현
III. 엄마같은 하나님
- 만나를 준비하심, 병을 고치심, 귀가를 애원함
- 집나간 아들을 기다림: 아빠 아닌 엄마의 몫임
- 하나님은 우리 경험으로 아는 아버지가 아님
- 언제나 한결같은 엄마처럼 대하시는 하나님
- 정채봉 시인의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 고난, 시련, 억울함, 소외 이긴 힘
- 그 품 속에서 가슴 만지고 마음껏 욺
IV. 적용과 결론
-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택하신 백성들이여!
- 그대가 돌아오지 않아도 여전히 사랑하심
- 그러나 그 사랑을 알기까진 그대는 곤고함
- 하나님은 말씀으로, 정으로 우리를 부르심
- 어머니의 마음으로 그대를 부르시는 하나님
영혼을 살리는 말씀 1 (2015.7.12 주일오전설교)
영혼을 살리는 말씀 2 (2015.7.19 주일오전설교)
영혼을 살리는 말씀 3 (2015.7.26 주일오전설교)
영혼을 살리는 말씀 1 (2015.7.12 주일오전설교)
영혼을 살리는 말씀 4 (2015.08.02 주일오전설교)
영혼을 살리는 말씀 5 (2015.8.9 주일오전설교)
영혼을 살리는 말씀 6 (2015.8.16 주일오전설교)
영혼을 살리는 말씀 7 (2015.8.23 주일오전설교)
영혼을 살리는 말씀 8 (2015.8.30 주일오전설교)
영혼을 살리는 말씀 9 (2015.09.06 주일오전설교)
영혼을 살리는 말씀 10 (2015.09.13 주일오전설교)
영혼을 살리는 말씀 11 (2015.09.20 주일오전설교)
인생이 곤고할 때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시 119:2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시편 119편은 찬송과 탄원으로 이루어진 시입니다. 이 시 속에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시인을 어떻게 깨우시고 슬기롭게 인생을 살게 하셨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담겨있기 때문에 지혜시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영광의 장이라고 불리는 119편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다양한 용어들이 등장합니다. 원석은 하나이지만 그 원석을 잘 깎아서 여러 면을 가진 다이아몬드로 만들 때에 보석으로서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양한 면들은 다이아몬드의 독특한 아름다운 빛을 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이지만 그 말씀이 119편에서는 율법, 증거, 법도, 율례, 규례, 계명, 판단, 이렇게 다양한 용어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다양한 측면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19편은 1절부터 8절까지 성도의 행복을 노래하고, 15절까지는 성도의 정결함, 22절까지는 성도의 고난, 32절까지는 성도의 영적인 침체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우울하고 시름에 가득 찬 인생을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모두 행복하고 활기찬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실제 인생을 살아보면 활기차고 행복하고 기쁜 날도 있지만 침체에 빠져서 어둡고 칙칙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때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늘 진리 안에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영혼의 우울한 시기가 찾아옵니다. 이때에 인생은 곤고해지게 됩니다.
II. 인생이 곤고할 때
A. 영혼을 돌아보라
오늘 성경은 이렇게 인생이 곤고해질 때에 시인이 어떻게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그는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았습니다. 원수들에게 에워싸인 가운데 그는 고백합니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습니다.’ 여기에서 영혼이라고 번역된 ‘네페쉬’라고 하는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목숨’이라는 뜻으로 사용이 되기도 하고 ‘혼’이라는 말로 번역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어쨌든 이 ‘네페쉬’ 즉, 영혼은 결국 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 살게 하는 독특한 기능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세계 속에 우리 자신을 노출하며 외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돈을 벌고 사업을 하고 학문을 하고 매일매일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외적인 삶이 우리가 이어가는 인생살이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이런 눈에 보이는 외적인 삶은 결국 우리 안에 있는 내적인 삶의 반영입니다. 이 내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우리 영혼과 정신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로 살던 시대에는 이러한 내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희미하게 밖에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는 없다고 믿는 이성주의적인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영이신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우리가 바로 불행해진 것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추루해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우리의 죽은 영혼을 살리시고 새 생명을 부어주시는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안에 영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행복한 삶은 외적으로 펼쳐지는 우리의 삶과 내적인 영혼의 생명이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정신과 영혼, 그리고 우리의 외적으로 뻗어나가는 개척과 정복의 삶은 원심력과 구심력의 관계입니다. 아이들이 연줄에 연을 달아 하늘 높이 띄웁니다. 높이 올라간 연은 줄이 잡아당기기 때문에 더 높이 오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잡아당기는 힘 때문에 연은 하늘 높이 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외적으로 뻗어나가는 끊임없는 정복과 그리고 우리의 번영하는 삶, 우리의 외적인 활동은 우리의 정신이 그것들을 올바로 지도할 때에만 참으로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펼쳐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러한 인생의 비밀을 안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렇게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되 마음을 다 올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이유도 이것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주일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성경을 가까이 하며 살아야 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을 쏟는 우리의 기도도 역시 이렇게 우리의 영혼을 올바르게 가꾸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외적인 세계 속은 끊임없는 감각의 힘이 있고 그것들은 우리의 마음에 끊임없는 정동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먹고 마시고 쾌락을 즐기는 이 모든 일에 우리의 정신을 잡아끄는 위력을 발휘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이러한 감각과 표상에 휘둘리게 되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불신자와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와 교제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과 교제하시고 우리의 지성에 말을 건네시고 우리의 의지를 감화시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평범한 사실을 잊고 사는지 모릅니다.
제가 좋아하는 나무 가운데 하나가 남천이라는 나무입니다. 아주 좋아하는데 그래서 한 10년 전에 그것을 시장에서 하나 예쁜 것을 사다가 방에다가 두었습니다. 사무실에다가 두고 보니까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아침마다 일찍 방에 들어가면 그 나무를 보고 거기에 스프레이로 물을 뿌리면서 음악을 들으면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한두 달쯤 지나갔을 때 이 나무가 이파리가 시들기 시작하면서 자꾸 떨어지면서 붉게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나무를 판 집에 물어보았습니다. 이 나무가 왜 그러냐 그랬더니 이 나무는 햇빛은 좀 없어도 되는데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있어야지만 잘 자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낮에야 문을 잠깐 열어놓지만 대부분을 문을 닫고 있고 밤에는 문을 닫고 퇴근을 하니까 이 나무가 바람을 잘 못 맞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어쩔 수 없이 이 나무를 옥상에 올려다 두었습니다. 옥상에는 바람이 잘 부니까 올려다 두었습니다. 그리고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한 1년쯤 지났을 때 ‘아참 그 나무 옥상에 올려다 두었는데 어떻게 됐지?’ 그러고 가보니까 진짜 활기차게 살아있었습니다. 그런데 방에 갖다 두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전에 제방에 있는 나무가 아리따운 여인의 몸이었다면 옥상에 1년 동안 내버려둔 그 나무는 머슴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움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그냥 활기차게 자랐을 뿐입니다. 그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는데 어떤 사람의 말에 의하면 화초도 사람이 자기를 보아주는 것을 안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선을 주고 바라보면 자기가 예쁘게 자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사람들이 보니까 늘 물도 주고 이파리도 따 주고 하면서 가꿉니다. 우리의 영혼도 그렇게 가꾸고 돌봐야 합니다. 다른 일은 자기가 힘들면 돈을 주고 사서 사람을 시킬 수 있지만 자신의 영혼을 돌볼 분은 하나님이시고 또 자신이 하나님의 그 은혜에 화합함으로써 영혼을 아름답게 가꾸어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종종 왜 나만 이렇게 곤고한 인생을 사느냐고 불평하지만 그러나 영혼이 어떠하기 때문에 어떠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07편에서 시인은 인간이 곤고하고 쇠사슬에 메이는 것은 지존자를 멸시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영혼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하나님이 거듭날 때 주셨던 올바른 기능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거기에서 망가진 삶이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곤고한 인생의 때를 지나게 하시는 것은 이렇게 우리 자신이 그러한 곤고한 인생의 시련을 통해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돌아보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시인이 대적들로 에워싸인 시련과 고난의 때에 조용히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았던 것처럼 여러분도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는 삶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진토에 붙은 영혼
시인은 자신의 영혼의 처지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옵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진토’라고 하는 것은 ‘아파르’인데 ‘티끌’, 혹은 ‘먼지’를 가리키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없음’입니다. ‘무가치한’, ‘그 무가치함’, 그리고 없는 것과 꼭 같은 ‘허무’, 이런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습니다”라고 말하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다베카 레 아파르’라고 말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나의 영혼이 그것이 티끌과 연합이 되었습니다.’ 이 뜻입니다. 이 ‘다바크’라는 단어가 바로 창세기 2장 22절에서 그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연합하여 라고 할 때에 그 ‘연합하다’라는 그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그 분의 뜻에 합했을 때 그가 하나님께 다바크였다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이렇게 티끌과 연합이 되었다라고 하는 것, 진토와 같이 되었다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게 시편에서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시편 22편 15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 주께서 나를 죽음의 진토에 두셨습니다. 죽음이라는 진토 속에 나를 두셨습니다.’ 22장 29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30편 9절에서는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영혼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무가치한 상태가 되고 아무런 능력이 없는 그러한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 시인의 상태였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영적인 침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영적인 침체는 하나님과의 생생한 영적 교제가 단절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혼의 기쁨과 생명이 사라져 버린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때에 세속적인 것에 대해서는 아주 예민한 마음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매우 둔탁한 마음이 됩니다. 이런 속에서 아무런 만족과 영적인 기쁨 없이 힘겨운 하루하루를 이어가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생명과 은혜의 기쁨이 없기 때문에 그의 삶은 간신히 종교의 형식을 유지합니다. 그렇지만 이미 그 종교적인 삶 속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독특하게 깃들여야 할 천국의 향기, 하늘의 생명, 충만한 기쁨 같은 것들은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지난 한 주간동안도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가슴이 떨리도록 기뻤던 적이 있습니까? 예전에 알지 못했던 어떤 진리를 발견하며 영혼이 하나님을 향한 희열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혹은 나같이 미천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이렇게 훌륭하고 의미 있는 일에 사용하시는구나 하는 은혜 때문에 감격한 적이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영혼의 깊은 침체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여금 빛으로 살지 못하게 하고 소금으로 살아가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맛 잃은 소금, 불 꺼진 등불과 같은 존재가 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서도 이 세상 사람들과 꼭 같은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어두운 시대에 빛으로 살고 고난을 받으면서도 존재의 울림을 들려주었던 믿음의 사람들은 그가 누구든지 항상 하나님 앞에 충만한 은혜를 누리며 사는 영적 삶을 누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영적인 충만한 은혜가 없는 침체 속에서 우리의 지성은 혼란해지고 우리의 감정은 기복이 심해지게 되고 우리의 의지는 선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때로는 이런 깊은 침체 속에서 신자는 방탕하기도 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모두 하나님을 통해 공급받아야 할 충만한 생명과 사랑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오는 현상인 것입니다. 예배를 드려도 거기에는 마음이 담겨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고 마음을 쏟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는 거의 할 수가 없게 됩니다. 결국 신앙의 형식을 유지하며 다양한 은혜의 수단들에 참여해 보지만 자신의 영혼을 고치는 역할을 기대할 수 없게 되고 그래서 결국 신자는 이렇게 진토에 붙은 영혼의 상태에서는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난처한 처지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혼의 깊은 침체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향해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할 인생의 대부분을 방황과 시름 속에 보내게 만들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마음껏 이 세상의 쾌락을 즐기자니 양심이 자기를 붙들고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고 의지하자니 자신의 마음이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신앙을 따라 살 수도 없고 세상의 쾌락을 좇아 살 수도 없는 난처한 처지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성화의 삶을 살지 않으면 예수를 믿었어도 믿지 않은 자신보다 더 불행해진 때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III. 영혼을 살리심
그런데 오늘 성경은 하나님이 그런 시인의 영혼을 살리실 소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라고 말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강세형 동사가 사용되어서 “나를 확 살려주시옵소서.” 혹은 “나에게 생명을 주셔서 급격히 살아있게 하옵소서.”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골짜기의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지킬 군대가 필요한데 그 골짜기에는 모두 덜거덕거리는 마른 뼈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절망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물으셨습니다. “얘야, 나 여호와가 이것들을 살아나게 할 줄을 네가 믿느냐” 선지자는 이성적으로는 의심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러자 그 마른 뼈들이 뼈가 마디를 맞추며 일어서기 시작했고, 살이 입혀지며 용감한 군대가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죽은 영혼을 살리시는 영적으로 사망의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을 살아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고 오랜 세월을 통해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한 번에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그 모든 마른 뼈들이 군대가 되어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교회적으로도 일어나고 그리고 우리의 심령에도 일어납니다. 시인도 인생을 살면서 그런 영혼의 곤고한 시기를 지났지만 그렇게 죽은 자와 방불한 자신의 영혼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며 일생을 살아왔습니다. 회심하기 전에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라고 우리는 믿었고 영적인 세계 같은 것들은 있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혹시 그런 세계에 대해 어렴풋이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믿을 수 없는 희미한 인상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2000년 전에 죽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게 되었고, 그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면서 까지 우리를 구원하고자 했던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이 모든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보다는 훨씬 작은 세계이며 보이지 않는 그 영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들이 우리에게 진정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할 의미와 가치,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살 수 있는 생명을 불어넣어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모든 사상에 없다고 하는 그 하나님께 눈물로 빌었습니다. 신이 없다고 부르짖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였으면서도 우리는 까만 가죽으로 싼 한권의 책이 우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굳게 믿고 거기로부터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경험할 수 없는 영혼의 생명과 사랑을 공급받는 은총을 누리면서 일생을 행복하게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 말씀 속에서 우러나오는 충만한 생명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물질의 자원은 우리의 몸을 위해서는 무엇인가 유익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합니다. 시인도 영혼이 죽은 것과 같은 상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죄가 원인이지만 인생에 살아가면서 만나는 수많은 복합적인 원인들에 의해서 우리가 그러하듯이 이 시인도 영혼의 침체에 빠졌고 그때 시인은 자신의 침체에 빠진 영혼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자신의 영혼을 살려 달라고 아버지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의 어떤 사람들은 이런 영혼의 침체의 때에 대한 나의 묘사에 깊이 공감할 것입니다. 먹을 것도 있고, 입을 것도 있고, 살 집도 있고, 함께 삶을 영위해가는 가족들이 있는데도 누구와 나눌 수 없는 영혼의 고독, 그리고 핍절해가는 자신의 영혼의 상태, 그 속에서 이 세상 무엇으로도 자신의 상태를 개선할 수 없기 때문에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눈물만 흘리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을 것 같던 그때에 누가 여러분의 영혼을 그 침체 속에서 건져 내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생명의 기운이라는 티끌만큼도 없이 어둠 속을 헤매며 죽음을 친구 삼을 때에 여러분을 그 침체 속에서 건져내신 분이 누구이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나 이 세상의 사람들이 우리를 건져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그 죽은 것과 같은 영혼의 상태에서 우리를 건져내셨고 그래서 우리는 비로소 그렇게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은혜를 경험하면서 우리는 그 안에서 용서와 위로, 사랑을 경험했고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보다 더 위대한 능력이었음을 우리 자신이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따라 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가슴에 새기며 미력하나마 주님을 섬기며 살아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IV. 말씀을 따라서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침체에 빠진 우리의 영혼을 살리실까요?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라고 말입니다. ‘케데바래카’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는 ‘당신의 말씀’이라는 단어에 전치사가 붙은 것입니다. 그의 정확한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입니다. 그래서 킹제임스버전, NIV 성경을 비롯해서 ASV같은 유력한 영어 성경들이 이것을 'according to'라고 번역을 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나의 죽어있는 영혼을 확 살아나도록 도와 달라는 기도입니다.
A. 약속의 말씀
그러면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라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최소한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 약속의 말씀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당신의 자녀들이 죽은 것과 같은 침체에 빠진 영혼이 되었을 때에 살려주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니 우리를 거기서 살려 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당신의 말씀을 따라서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욱 풍성히 누리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자녀가 된 것은 너무 훌륭한 것이지만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보람을 이 세상에서 누리고 그 구원의 소명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종교적으로 착취하기 위해서 구원 받은 여러분에게 성화의 삶을 살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여러분이 죄와 싸우고 진실하고 거룩한 삶을 살 때에 그때 여러분이 가장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구원받은 여러분에게 성화의 삶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침체에 빠진 당신의 자녀들의 영혼을 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를 이런 침체 속에서 상당한 시간을 고통스럽게 보내게 만드실까요?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바로 그 깊은 고난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건강했을 때에는 우리의 힘으로 걸어 다니고 우리의 힘으로 밥 먹고 우리의 힘으로 화장실을 드나드는 줄을 알았습니다. 정말 건강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팔 하나 들어 올릴 수 있는 기운이 없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난 후에 우리는 비로소 두 손으로 밥을 먹는 것과 걸어 다니는 것, 숨 쉬고 말하고 배변하는 모든 것까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충분한 진리의 말씀, 은혜, 그리고 목양의 돌봄, 성도들과의 교제가 있는 동안에는 그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모릅니다. 그러다가 영혼의 침체에 빠지면서 다 잃어버립니다. 마음은 진리의 말씀을 싫어하고 그리고 의인과 함께 친구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미끄러져 방탕한 삶을 살다가 거기에서 세속의 기쁨을 느낄 때까지는 마취제에 취한 사람이 고통을 잊듯이 그렇게 견디는데 그 모든 마취의 효과가 끝나고 이제 그 고통이 엄습할 때에는 비로소 자기 자신이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평화가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자기의 힘으로 걸어 나와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는 이 주일을 누리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행복이었는지 곤고한 마음이 들 때 하나님 앞에 나아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이었는지를 그때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자녀들을 종종 그렇게 침체 속에서 살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바로 하나님이 바로 그런 처지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방법을 배우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육신의 것들이 부족할 때에는 상당부분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영혼이 깊은 침체에 빠져서 활기를 잃어버리고 죽을 것과 같은 영혼이 고통 받게 될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쁜 옷을 입은들 우리의 영혼에 위로가 되겠습니까? 맛있는 음식이 곤고한 우리의 영혼에 활기를 불어 넣을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죽음과 방불한 사망의 시간을 지나는 영혼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겠습니까? 영혼이 이런 깊은 침체에 있을 때에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내가 잘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자기 암시가 아니라 이렇게 곤고한 영혼의 처지에서 아파하는 자신을 향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약속을 하셨으며 그 약속을 붙들고 산 사람들이 어떻게 승리했는지를 성경 속에서 배우며 자신이 그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근거는 자기 암시적인 주관이 아니라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굳게 붙들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 지고 절망하고 있는 상황으로 성경을 덮는 대신 그 말씀으로 자신의 어두운 인생길에서 빛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처럼 이런 침체에 시달리는 영혼을 살아나게 하시겠다고 주님이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말씀의 약속을 따라서 나를 살아나게 해주십시오.”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여러분에게 충만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고 침체 속에서 일어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말씀의 능력
마지막으로 두 번째는 말씀의 능력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힘으로는 자신을 살아나게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니 그 말씀을 따라서 나를 이 죽어있는 것과 같은 침체의 상태에서 살아나게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이 시인의 생애는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고 살아온 체험의 연속이었습니다. 시편 18편 30절에서 시인은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한 능력, 그 말씀에 보호하는 힘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이면 토해놓을 수 없는 찬송입니다.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는 시련의 날에 하나님의 말씀의 방패 뒤에 숨었더니 수많은 화살들이 꽂혔으나 자신은 그 방패 뒤에서 안전하게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마치 고난의 날에 주님이 우리를 큰 바위에 숨기시고 그 손으로 덮어 우리를 보호하신 것처럼 이 시인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경험함으로써 고난과 시련의 때에 환란을 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같은 시인은 119편에서 시인은 말합니다. “주의 말씀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라고 말입니다. 시인은 쓰디쓴 인생의 날에 시련을 당하며 낙심하고 죽을 것 같은 때에 종종 하나님의 말씀의 젖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꿀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시련과 고난 속에서 살 힘을 잃어버렸을 때마다 하나님은 은밀한 곳으로 이 시인을 불러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말씀의 단맛을 보여주심으로 그것을 먹고 마시면서 고난을 이기고 시련을 극복할 영혼의 힘과 원기를 얻었던 것입니다. 시인은 시편 119편 105절에서 말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어둠 속을 걸어본 적이 있기 때문에 진리 없이 인생을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이 시인이 체험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의 발걸음을 한 걸음씩 옮겨놓게 하는 등불이었고 갈 길을 알지 못하는 어두운 인생의 길에 앞날을 밝히는 빛이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도저히 볼 수 없는 방식으로 진리의 빛을 통해 자기가 어떤 지혜를 따라 살아야 할지를 보이셨으니 이것은 체험하지 않은 사람이면 지을 수 없는 시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시인은 여호와께 피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했는데 여호와께 피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 그의 말씀으로 피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도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 자기가 원하지 않는 삶의 질서 속에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 뜻을 알 수 없지만 믿음으로 그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서 수고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의 이 다디단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낙심할 즈음에 희망을 주시고, 두려워할 즈음에 용기를 주시고, 물러 갈 것 같은 기력이 없는 그때에 하나님은 하늘을 열고 당신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의 일생은 이렇게 이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하늘의 자원을 공급받으며 그렇게 비밀스러운 생명의 능력으로,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때로는 슬픈 날도 있었고 때로는 폭풍과 같은 시련의 때도 지났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은 어둠 속에서 밝은 빛을, 시련 속에서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용기를, 악을 선으로 갚을 수 있는 너그러움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것은 우리의 인격의 품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돌 같은 우리의 마음을 녹이고 얼음 같은 우리의 마음에 온기가 피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영혼을 살리는 말씀 2 (2015.7.19 주일오전설교)
V. 적용과 결론
성도의 행복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이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그 은혜의 세계, 이 세상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그 말씀의 세계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침체된 영혼으로 사는 우리의 삶의 끝은 어디로 갈까요? 그리고 거기에는 정말 행복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누구 길래 감히 하나님 없이도 넉넉히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여러분은 모두 언젠가는 여기에서 주님을 만났고 그래서 그 하나님의 은혜의 사랑을 체험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이 죄인의 마음을 녹여 의인으로 살아가게 만드는지 이 세상에 진노의 자녀들의 마음을 녹여 하나님의 사랑스런 아들로 살아가게 하는지를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곤고한 인생의 때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돌아보십시오. 인생의 문제는 세상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지만 답은 이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 대답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있고 성경은 그 대답이 무엇일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삶의 벼랑 끝에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떻게 건져주셨는지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한번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은 성령 충만하고 주님을 잘 섬길 때뿐만 아니l라 낙심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서 미끄러졌을 때조차도 여러분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끊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찬양)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시시때때로 날 도우시네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시시때때로 주 만 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순간 우리는 그렇게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 주님만을 앙망하며 시시때때로 도우시는 주님의 그 은혜로만 살기로 다짐한 사람들입니다. 잠시 은혜에 미끄러져 곤고하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회개하십시오. 여러분의 삶, 갈피갈피 배어 있는 하나님을 향한 무관심과 그리고 자기만을 위한 이기심을 뉘우치십시오. 그리고 맨 처음 주님의 그 사랑을 알고 어린 아이처럼 주님의 품에서 울었던 그때를 기억하십시오. 그 사랑을 되돌려 달라고 그 은혜의 시기로 다시 돌아가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인자하신 하나님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랑함을 보옵소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살리소서”(시 119:15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시인은 고난당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시인은 악인들에게 에워싸인 채 고통과 시련을 당하고 있고 거기서 시인은 아무도 도울 자 없이 홀로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요동치는 삶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주님께 부르짖는 신앙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삶이었습니다.
II. 말씀을 붙들고 삶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랑함을 보옵소서”라고 말입니다. 거의 정확하게 히브리어 성경을 옮겼습니다. 더 정확하게 하자면 이렇게 됩니다. “보옵소서. 제가 당신의 교훈들을 사랑했습니다.” 과거입니다. 완결형입니다. 우리는 이 시편 119편에서 이 고백을 하고 있는 시인의 상황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요동치는 인생이었습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119편 절절마다 배어 있는 그의 한숨과 눈물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가 하나님 앞에 비통한 심정으로 부르짖는 신음소리를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인생은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A. 요동치는 우리 인생
우리의 인생도 어차피 요동치며 흘러갑니다. 항구를 떠날 때에 배는 잔잔한 바다를 미끄러지듯이 출발하지만 먼 항해의 길을 지나는 동안에 풍랑을 만나기도 하고 혹은 높은 파도를 만나 위험에 처하기도 합니다. 누가 일생을 지나면서 시련과 고통의 폭풍을 지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신앙의 유익은 이렇게 요동치는 수많은 삶의 상황 속에서도 도대체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 던져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신앙의 유익입니다. 그래서 내 인생에 일어나는 기쁘고 슬픈 한두 가지 일에 웃고 울고 요동치는 인생이 아니라 그 삶의 바다를 항해해 가면서도 우리의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바라보며 안정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없을 때에는 요동치는 삶의 상황에서 절망과 좌절 속에서 일어날 수 없을 때조차도 신앙의 힘으로 그 모든 것을 극복하며 우리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 신앙의 유익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순간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겠습니다.”라고 하는 장난스러운 서약에 의해 이런 신앙심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어 구원을 받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후의 삶이 끊임없이 그리스도 예수께 붙어있는 삶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도 그런 든든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B. 말씀을 붙든 믿음
시인은 이러한 인생의 깊은 풍랑을 만났고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우리도 그런 풍랑으로 가득 찬 인생의 항해를 합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가 의지하던 것들을 버리게 됩니다. 요나서에 보면 하나님께 불순종한 요나를 태운 배가 커다란 풍랑을 만나는 장면을 봅니다. 그때에 노련한 뱃사람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배에 있는 무거운 짐들을 모두 바다에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배는 무거운 짐을 아래에 많이 싣습니다. 그러면 홀수선이라고 그러는데 배가 이렇게 물에 많이 잠깁니다. 그러면 떠 있는 부분이 짧아집니다. 그러면 조금만 요동쳐도 물이 들어오게 됩니다. 일단 물이 들어오면 밑에 짐이 많으니까 그 짐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물이 덮여지면서 배가 전복되는 것은 순간입니다. 그런데 짐을 덜어냅니다. 그러면 배가 가벼우니까 물위로 많이 올라옵니다. 그러면 아주 큰 각도로 흔들려도 배가 복원이 되고 좀처럼 물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풍랑을 만날 때 결국 우리가 의지하던 것들을 버리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 풍랑을 만났는데도 끝까지 그것을 버리지 않을 때 인생이 파산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사람을 향한 사랑, 재물을 향한 사랑, 인간의 명예와 지위 같은 것들을 다 퍼내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이렇게 요동치는 우리의 인생의 항해에서 우리를 안전하게 붙드실 분이 우리 하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인은 그렇게 요동치는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보십시오. 제가 당신의 교훈들을 사랑했습니다.” 여기 법도라고 나오는 단어가 ‘피쿠데이카’라는 단어인데 교훈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준 그 율법을 따라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신 생활에 관한 교훈입니다. 그래서 킹제임스버전, NIV, ASV 같은 유력한 영어 성경에서 이 단어를 'precept'라고 번역을 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이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내가 당신의 교훈들을 사랑했습니다.” 사랑했다는 것은 그것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그것 없이 살 수 없는 게 사랑입니다. 없어져 버렸는데도 그것의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하면 예전에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사랑한 사람은 자기의 곁을 떠나가 버렸을 때 자기가 그 사람을 얼마나 깊이 의존하고 있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게 정말 사랑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지난주에 여러분이 공부했던 가족이라는 책을 완성을 했습니다. 그것을 쓰면서 어느 날 하루 종일 할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할머니는 저에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 분이었습니다. 살아계실 때도 할머니를 사랑했지만 돌아가신 후 지금 28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도 그리워합니다. 그것은 그때에 할머니를 향한 저의 사랑이 진실했다는 증거입니다. 사라졌는데 죽었는데 그립지도 않고 생각나지도 않는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사랑한 사람이 아닙니다.
시인이 요동치는 삶의 상황 속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내가 당신의 교훈들을 사랑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이 저에게 이렇게 살아라, 이렇게 살아라 하고 말씀하셨죠. 제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사랑했습니다.” 시인의 삶의 정황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그는 악한 자들에게 에워싸여 있었고 시인을 돕는 사람은 아무도 없이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삶의 상황을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을 덮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고난 받는 날에 유일한 위로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환경을 탓하고 사람을 원망하는 대신에 그는 어떤 처지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이렇게 살아라 하고 주신 그 교훈을 꼭 붙들고 배반하는 사람들보다는 자신을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한분을 붙들었던 것입니다. 마치 비행기에 탄 조종사가 때로는 비행기가 뒤집히고 구름 속을 가르고 날아가며 어둠 속을 항해하여 전후좌우를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에도 그 조종간을 놓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사는 길입니다. 우리는 흔히 영혼의 침체가 찾아오면 너무 힘들고 정신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의무가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사람을 더 깊은 침체로 데려갑니다. 어떤 경우에도 주님의 말씀을 꼭 붙드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II. 나를 살리소서
시인은 말합니다. 나를 살리소서라고 말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당신의 헤세드를 따라서 나를 살려주십시오.”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만이 자신을 살리시는 하나님이라고 믿었습니다. 한 사람이 자연인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예전에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를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육신적인 삶이 우리의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정신은 그저 그 육신에 따라오는 작은 것이었기 때문에 그저 사업 잘 되고 돈 많이 벌고 애들 공부 열심히 하고 부부가 화목하면 그것이 행복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렇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는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세계이고 우리의 영혼도 그 영적인 세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죄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의미, 은혜가 가지고 있는 신령한 의미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서 회개할 마음이 생겼고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A. 살리시는 하나님
살아 있다고 해서 모두 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교회를 향해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신자들만이 아니라 불신자들도 이런 정신의 죽음을 경험합니다. 더 이상 자신의 삶의 모든 희망이 사라진 절망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때에 자신의 삶을 굳게 붙들었던 삶의 끈을 놓아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절망은 불신자들에게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도 이와 유사한 상황을 경험합니다. 모든 희망이 끊어진 것 같은 상태, 심지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아 자기 혼자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상태를 경험합니다. 양심은 끊임없이 칼로 찌르듯이 자신의 마음에 송사를 하고 율법에 엄중한 빛 앞에서 정죄를 겪습니다. 그 속에서 자신은 수많은 속삭임을 경험합니다. “너는 끝났다. 하나님은 너 같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다. 네가 지은 죄가 그렇게 큰데 어떻게 하나님의 은총을 받겠느냐? 너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속삭이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때로 우리의 정신으로부터 우리의 육체까지 심각한 영향을 가져다주어서 우리의 정신을 파탄의 세계로 몰고 갑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사이코소매틱한 존재입니다. 즉 사이코, 정신과, 솜, 소마 몸이 일체가 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영혼은 몸에, 몸은 영혼에 영향을 줍니다. 이렇게 복잡한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정신과 육체를 꼭 붙들어 주실 그때에만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지 주님이 이것을 놓아버리시고 우리가 그 은혜에서 떨어지고 나면 우리는 인간다운 삶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지탱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여러분의 중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아있는 영혼이 아니라 죽어있는 영혼의 상태로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정말 살아있는 영혼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죽음에서 여러분을 깨워 살리시는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기도 속에서 생생하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여러분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수많은 시련과 환란에 에워싸여 있을 때에 그 모든 것들을 꾸짖으며 여러분의 인생을 걸어갈 수 있는 어떤 영적인 힘들이 여러분 속에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떠밀리듯이 예배드리러 마지못해서 교회 오고 그리고 요새는 왜 그렇게 늦게 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되어야 그런 나쁜 습관을 고치겠습니까? 극장 구경 갈 때에는 10분 전에 가서 만만의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만나러 오는데 태도가 그게 무엇입니까? 사람이 마음속에 있는 이 정신과 이 마음의 올곧음은 결국은 자신의 행동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한 10분쯤 일찍 와서 앉아서 조용히 기도하면서 주님을 만나시는 것을 기다리면 안 됩니까? 여러분이 설교자를 위해서 기도하기는 기도하시나요? 설교자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의 설교에 대한 기대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아니라 인간의 재주에 대한 희망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기쁘게 받으시겠습니까? 캐리비안의 해적들이라는 영화를 보셨죠? 온갖 뼈들이 나와서 춤추는 장면을 보셨습니까? 죽은 영혼을 가지고도 온갖 일을 다 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그것을 죽은 행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행복합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소외되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없이 죽은 영혼으로 살아가는 것이 행복하냐고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이웃과 가족들에게 기쁨을 줍니까? 여러분 자신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죽은 채로 살아가려고 하십니까? 하나님은 영혼을 살리시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흘릴 눈물이 아직까지 남아있습니까? 살이 많이 쪄서 자기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마음이 기름져 있지는 않습니까? 도대체 그 속에서 우리들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 무엇일까요? 시인은 깊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매달렸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울부짖어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눈물 흘리는 기도를 보고 싶습니다. 어두운 밤, 교회든지, 가정의 한 골방에서든지 자신의 영혼을 긍휼히 여기며 살려 달라고 주님의 생명으로 자신을 가득 차게 해 달라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여러분의 가정에 생명의 기운이 흐르도록 도와 달라고 간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인자하신 하나님
시인은 이렇게 죽은 자신의 영혼을 살려달라고 호소하며 인자하신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인자’라고 번역된 단어가 ‘하스데이카’인데 당신의 ‘헤세드’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헤세드를 따라’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킹제임스버전, NIV, ASV 같은 유력한 영어 성경이 그래서 그 앞에 있는 ‘케’라는 전치사를 'According to'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헤세드를 따라 나를 살려주십시오.”라는 것입니다. 이 헤세드는 가치 없는 자를 향해 베푸는 여호와 하나님의 무한한 호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이것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기 전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런데 그게 여호와입니다. “여호와여” 그러고 부릅니다. 이 여호와는 하나님의 모든 존함 중 본명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존함은 모두 인류에게 게시되었지만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본명은 당신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게시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여호와라고 하나님을 부를 때에 시인의 마음속에 있는 믿음이 뭐냐 하면 ‘하나님 저는 당신과 언약을 맺은 은혜의 백성입니다. 나는 부족하고 공로가 없으나 나와 맺은 당신의 언약을 기억하셔서 나를 살려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헤세드는 사랑받는 사람에게 어떤 좋은 장점이나 특징이 있어서 거기에 마음이 끌리기 때문에 사랑하는 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성품이 헤세드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우러나오는 사랑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헤세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일 먼저 이 헤세드를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자기는 아무 공로가 없는 무가치한 죄인인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자기를 사랑해 주신다는 사실을 경험하면서 감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감격하고 있는 자기에게 하나님이 율법을 명하시는데 너도 그런 헤세드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이 너무 커서 정말 자신에게 어떤 좋은 것을 해주지도 않는 혹은 자신의 원수들까지도 긍휼히 여기고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 헤세드를 통해서 그 사람은 헤세드의 원 저자이신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헤세드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원 저자이기 때문에 거기로부터 시작을 해서 인류를 모두 휘돌면서 마지막에 그 헤세드의 사랑을 사람을 통해 경험한 사람들은 그 자기에게 헤세드를 베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또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사랑입니다. 그게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다루고 있는 사랑과 통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신약 성경에서 아가페의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랑은 이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머지는 전부 그 사랑이 관계에 적용되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대로 반영해서 적용하면 사랑할수록 행복해지는데 이것을 비틀어서 자기 욕망으로 변질시켜서 사랑하게 될 때 사랑할수록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몇 주 전에 부부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를 하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은 둘이 사랑하면 이 세상의 모든 걱정과 근심과 염려가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남녀에게 기대하시는 사랑도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맨 처음 인간으로 태어나서 바로 이런 종류의 사랑을 통해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태어납니다. 그러면 엄마가 그 아기를 한없이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아기가 어떤 좋은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아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에서 태어난 그 아기를 그렇게 눈물겹게 사랑하는 것이 엄마의 마음입니다. 만약에 좋은 장점을 가지고 있어서 사랑하는 거라면 그게 진짜 엄마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면 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이를 향한 엄마의 눈물겨운 사랑, 아니면 아이가 이미 죽었는데도 그 아이를 잊지 못하고 눈물겹게 사랑하는 그 부모의 사랑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되겠습니까? 이제 세월호도 다 잊혀졌습니다. 원래 인간이라는 게 이기적이어서 굿판 벌리듯이 꽹과리 칠 때에 한참 뜨겁다가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자기중심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제도 참 눈물이 났던데 아직도 자기 아이를 못 찾은 부모가 있습니다. 이제는 별로 기억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부모의 마음속에서는 그 자식이 어떻게 잊혀지겠습니까? 정말 죽은 자식의 잃어버린 생명은 살아있는 어미의 죽음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랑을 부모로부터 받습니다. 그러면서 처음으로 인간이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사랑을 기초로 사랑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십시오.
사랑은 결국은 하나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들이 부모에게 효도하라 부모를 공경하라고 배웁니다. 사랑 없이 공경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진짜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를 정말 공경하기 위해서는 자식이 부모 마음이 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효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한 사람의 마음속에 진실한 사랑이 있으면 그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두 그 사람을 아래로 보게 되는,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고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이해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게 바로 박애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이 위대한 아가페의 사랑을 듣기만 했는데 그것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시려고 그래서 말로만 들어서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던 사람들의 굳은 마음을 녹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이 아가페의 사랑의 화신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과 한 형제가 되어 그들이 울 때 함께 눈물 흘리시고 그들이 아파할 때 함께 고통을 받으시는 모습을 통해서 예전에 듣기만 했던 그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뺨에 흐르는 눈물을 보면서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사랑은 볼 수 있게 되었고, 굳은 손으로 발을 씻기시고 떡 덩이를 떼어 그들을 섬기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자입니다.
결국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은 그렇게 아무 자격이 없고 가치가 없지만 당신 자신이 온전한 사랑으로 가득 차셨기 때문에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너그럽게 대해주시는 하나님의 호의를 힘입어 사는 것입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영혼을 살리는 말씀 3 (2015.7.26 주일오전설교)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이방의 침략으로 말발굽아래 모두 짓밟혀 약탈당했을 때 예루살렘 성전이 겁탈당한 부녀자처럼 처참해졌을 그때에도 예레미야 선지자는 온 땅과 하늘에 가득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큰 시련과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남은 백성들을 보존하시려는 순결한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하나님께로부터 도움이 끊어졌고 주님은 우리를 버렸다라고 좌절하는 그 순간에 온 땅과 하늘위에 높고 뛰어난 우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우리 인생이 어떠한 상황에 처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성품 한 가지를 생각하면 살아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종종 우리는 버림받은 것과 같은 상태를 경험하고 삶의 모든 희망이 끊어진 것 같은 좌절과 고통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에 의해서 벌판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아서 하나님도 이젠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양심의 송사를 받습니다. 이것이 영적 침체의 결과입니다. 17세기 화란의 위대한 신학자 히스베르투스 푸치우스라고 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침체는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 그 지혜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우리의 몸이 독과 상처로부터 유익한 양분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침체를 통해서 당신의 성품을 보여주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곤고할 때 매일 생각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보라,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셔서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 화목 제물로 주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아끼시겠는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시편 63편 8절에서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십니다”라고 노래했습니다. 고난과 시련 속에도 인생의 먹구름으로 가득 차 희망이 없는 것 같은 어두운 날에도 사랑하던 사람들이 자기를 배신하고 친구들이 자신의 발뒤꿈치를 물어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모든 악과 불행을 초월해 언제나 거기 계셔서 당신께 돌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품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말씀 생활을 잘해야 합니다.
하루아침을 어떻게 시작합니까? 육신의 일에 대한 염려와 근심으로 침울하게 하루를 시작하지 마십시오. 맑은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펴십시오. 한 장 혹은 몇 절이라도 천천히 읽으며 마음을 그 말씀에 잠그십시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여러분의 마음을 주장하게 하십시오. 하루를 어떻게 닫으십니까? 불평과 불만, 염려와 근심 속에 고통을 받으며 잠자리에 드는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매일 저녁 시름을 모두 잊고 오늘 저녁 잠드는 것이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성경을 펴십시오. 혹은 책을 펴십시오. 그리고 한 장이라도 읽으면서 마음에 깊은 위안을 받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꼭 붙들도록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잠자리에 들어야 합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시련과 고난 속에서 영혼을 안전하게 보존하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 시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과 함께 울고 웃으며 고난과 시련의 폭풍을 지나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만나로 먹이신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얻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2-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광야 생활을 회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유언과 같은 설교를 남겼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내용이 아니라 광야에서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쳤던 내용을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명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본성을 뼛속깊이 경험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40여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목양하였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에 어떻게 될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이스라엘 백성과 헤어지는 시점에서도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한 가지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II. 광야생활의 뜻
신명기가 담고 있는 많은 가르침들 중 8장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매우 탁월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만나의 사건에 대한 영적 해석이었습니다. 모세는 이 뜻 깊은 사건을 해석하기에 앞서 그들의 광야 생활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 생활을 하게 하신 뜻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직선거리로 가면 2개월 정도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를 40년 동안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방황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깊은 뜻이 없을 리가 없습니다. 성경은 오늘 그 두 가지 뜻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들을 낮추시는 것과 그들을 시험하시기 위함이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을 통해서 애굽의 노예 생활 속에서 뼛속깊이 베인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과 반역의 본성들을 변화시켜 가셨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세대들이 광야에서 죽은 후 다시 태어난 세대들과 함께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반문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40년 동안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훈련하셨다고 할지라고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 하나님께 반역하고 우상을 섬겨 망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하나님이 40년 동안 그들을 연단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훈련시키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자마자 번영에 취하여 즉시 이방 백성들과 똑같이 되었을 것이며 믿음의 그루터기라고 할 만한 사람들도 남아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난 연대를 이른 연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15세기를 보고 늦은 연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13세기로 봅니다. 만약 우리가 보수적인 견해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이른 연대설을 따른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애굽을 떠난 것이 15세기이고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거기에서 정착을 하고 사사시대와 그리고 왕정시대를 거쳐서 10세기의 다윗 왕국이 서게 됩니다. 그리고 722년에 북 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되고 주전 586년에 유다 왕국이 망하게 됩니다. 물론 그 역사는 끊임없는 하나님을 향한 반역과 우상 숭배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도전이 섞여있는 시대였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 오염된 역사 속에서도 믿음의 그루터기를 남겨두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간 후에 오히려 신약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의 공동체들이 잔존하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천국 복음을 선포하셨을 때 기쁨으로 그 복음을 받아들이던 사람들이 바로 그 믿음의 뿌리로 내려오는 영적인 후손들이었던 것입니다.
A. 낮추심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방황하게 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 뜻은 그들을 낮추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형통하고 번영한 날에는 번영했고 시련과 역경의 날에는 좌절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교만의 결과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을 것입니다. 형통하고 번영한 날에 교만한 것은 정말 교만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시련과 역경 속에서 좌절하는 것이 어떻게 교만일 수 있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설명을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어떤 삶의 상황들이 있을 때에 하나님이 그 삶에 대한 궁극적인 해석자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의 상황을 해석해 주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우리의 삶의 상황에 대해서 자동 응답기처럼 말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지성으로 성경을 탐구하고 하나님 앞에 그 지혜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 지식의 빛을 통해서 자신이 처한 현실의 의미를 깨닫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신의 삶의 어떤 상황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판단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그리고는 마음이 이미 낙심하여 기울어졌기 때문에 자신의 삶의 상황을 자기 마음대로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쁜 일이 있어 마음이 들뜬 사람은 새들이 노래한 것처럼 들리지만 마음에 비탄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새가 우는 것처럼 들립니다. 즐거운 일이 있는 사람들은 산행길에 흐르는 물소리가 노랫가락처럼 들리지만 마음에 슬픈 사연을 간직한 사람의 산행 속에 들려오는 냇물 소리는 흐느낌처럼 들립니다. 이런 이치에 의해서 자신의 삶을 느낌으로 판단하고 더 이상 나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며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만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의 상황에 대해서 머라고 하시든지 그런 분이 뭘 알겠어? 내 느낌이 좌절스럽고 절망스러우니 이것은 절망하는 것이 맞다고 자기 판단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것도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낮아짐은 육체적인 낮아짐이 아닙니다. 진정한 낮아짐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낮아짐입니다. 그 하나님의 거룩한 위엄 앞에서 자신이 티끌뿐인 것을 알고 그 분의 거룩하신 성품 앞에서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인간에게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낮아짐이 없기 때문에 자기 본위의 교만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를 타락의 길로 인도하는 선봉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지만 그들을 광야 생활로 인도하셨습니다. 40년 동안에 인생의 수많은 역경들을 만났고 삶의 상황들을 만나면서 주님의 성품을 배워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새로운 유전자를 집어넣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따라 사는 본성이었습니다.
우리가 언젠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에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낮아졌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 앞에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닫고 주님의 위대한 능력 앞에서 자신은 티끌과 같은 존재임을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본위로 사는 삶이 정당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내 인생에 일어난 많은 불행한 일들과 관계의 깨어짐이 나 자신의 교만 때문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뉘우쳤습니다. 시련 자체가 우리에게 이러한 겸비함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시련 앞에서 그 시련의 의미를 하나님 앞에 묻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깨닫게 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낮아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여러분을 이 세상길을 걷게 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끊임없는 시련과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을 여러분에게 허락하시는 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삶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그 분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주님 앞에 여러분이 정말 낮은 위치에 처해야 하는 사람임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의 은혜는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하나님 앞에 겸비한 사람들에게 흐르기 때문입니다.
B. 시험하심
하나님이 광야 생활을 하게 하신 두 번째 뜻은 그들을 시험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리사’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시험하기 위해서 뭔가 어떤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한때 경제가 불안해지면서 금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던 때가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핸드폰으로도 금을 사라고 끊임없이 광고가 날아오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금을 사신 분들은 지금쯤 심쿵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창 때보다 금값이 40% 정도 떨어졌습니다. 저는 안 샀습니다. 투자의 귀재라고 하는 워렌 버핏도 말했습니다. 금값의 가격을, 미래의 가격을 예측하는 것은 신흥국의 채권의 앞날을 예측하는 것만큼 어렵다고 말입니다. 여러분이 캄보디아나 터키에 가면 깜짝 놀랄 일이 있습니다. 금 가게에 가보면 금값이 말도 안 되게 싸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말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한 움큼 금을 사 가지고 옵니다. 모두 밀수인 것 아시죠? 다행히 가지고 들어와서 며느리나 아들에게 줍니다. 다행히 부자여서 그냥 평생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끝납니다. 생활이 어려워서 금은방에 가지고 가서 팔려고 하면 욕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지 않거나 산다고 하더라도 아주 헐값에 사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전 세계에 우리나라처럼 순도 높은 금을 만들 수 있는 나라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금 가격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금을 가지고 갔을 때 색깔이 똑같다고 모든 값을 주고 살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달아보고 혹은 가루로 내보고 심지어는 녹여보고 중량을 달아보고 그 금이 어느 나라에서 생산됐는지를 확인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바로 ‘리사’,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는 의문이 들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신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해 보셔야만 겨우 파악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신가 하는 의문 말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는 이것은 하나님이 아시기 위해서 시험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우리는 우리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보이십니다. 이 시험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면을 직시하게 됩니다. 그 전까지는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고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도 잘 모르면서 삽니다. 그러다 시험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우리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우리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되면 우리의 삶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대한 해석이 생겨날 때에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될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삶의 관심은 우리의 내적인 세계에 대한 관심과 외적인 세계에 대한 관심이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우리는 덕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되게 극단적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외적인 세계에 대해서 인간과 세계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고 심지어는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자신의 내면의 세계만을 들여다봅니다.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시꺼먼 우물과 같아서 상상하는 데로 나오기도 하고 상상하지 않는 데로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런 것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좋은 삶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돌아보는 일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외적인 세계만을 생각합니다. 어떤 지위에 오를 것인가, 얼마나 많이 소유할 것인가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쾌락, 이런 것들에만 온 마음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알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의 객관적인 빛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존재를 조명할 때에 결국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아를 찾아가는 여행은 하나님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과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만 나 자신을 알 수 있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아는 것만큼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해할 수 있고 이 세계가 나에게 무슨 의미인지를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다양한 수많은 삶의 상황들, 우리의 손으로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측할 수 없이 일어나는 삶의 상황들 속에서 우리가 요동치지 않고 그것을 초월해서 삶을 해석하며 살아갈 수 있는 안정성을 얻게 되는데 이게 바로 우리가 신앙을 갖는 이유입니다.
제가 21살에 회심하고 주위에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의 몇 사람은 아주 친한 사람들이었지만 상당히 많은 수는 그렇게 친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몇 친구 빼놓고 모두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있는 아이들처럼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 중의 한 아이가 대학을 못 들어가고 재수를 하고 있었는데 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렇지만 같이 모이면 술도 먹고 담배도 피고 못된 짓도 했습니다. 그런데 얘는 어쨌든 교회를 다녔고 여름 수련회를 아이들을 데리고 가게 되었습니다. 양수리로 갔는데 수영을 워낙 잘하니까 아이들은 나무로 만든 배를 타고 노를 저어서 사공이 데리고 가고 자기는 헤엄을 쳐서 양수리를 건넜습니다. 그렇게 크고 넓은 개울이 아닌데 도착해 보니까 얘가 없어졌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바이지만 3일 만에 시신을 찾았는데 심장마비에 걸려서 물에 떠내려 간 것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못 본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애가 6대 독자였습니다. 2대 독자라는 이야기는 우리가 자주 들어보지만 6대를 한 사람 아들씩 물려 내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애가 죽었습니다. 우리 같이 아들 많은 집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안 죽습니다. 그 애가 죽었습니다. 회심하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는데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장로님이고 어머니가 권사님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6대 독자가 죽을 수 있느냐고 하고 신앙을 버렸습니다. 내가 회심한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정말 이해가 안되는 게 이거였습니다. 바로 그런 때를 위해서 신앙을 갖는 건데 왜 신앙이 없어도 될 때에는 신앙을 가지고 살다가 꼭 필요한 때에 신앙을 버리는 것일까? 제가 아직 말씀의 지식이 별로 없는 어린 때였는데도 그런 생각이 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서 항상 평탄한 길을 걷도록 만들어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항상 시련과 역경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 가시는 것입니다. 어제 텔레비전을 봤습니다. 이 설교하고 관련이 있어서 말씀을 좀 드리고 싶습니다. 101kg 나가는 자매입니다. ‘렛미인’이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프로그램이나 혹은 ‘힐링캠프’ 같은 것을 안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겨우 힐링이 되어야 하는 존재라는 그 설정 자체가 그게 기독교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실 인간에 대한 멸시적인 사고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렛미인’이라고 하는 것도 그게 미인이 된다는 건데 그게 정말 절대적인 가치일까 그런 것을 생각을 하면 사실 그런 프로그램도 약간 가학적인 프로그램입니다. 그렇지만 거기에서 그 사람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아주 가끔 뭔가 배우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세상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나, 그리고 인간이 불행해지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에 불행해지는가 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어쨌든 13살쯤 되었을 때에 아빠가 그렇게 딸을 사랑했는데 아빠가 죽었습니다. 그 슬픔을 감당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먹는 걸로 푸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몸집이 한없이 불어나는 것입니다. 친구들 앞에 자신감이 없으니까 다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연락하는 친구도 없이 9년 동안을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고 집에서 뒹굴 거리면서 그러면서 폭식을 하면서 절망적인 몸무게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다고 해서 여러분이 나를 바라볼 때에 목사님은 뚱뚱한 사람을 싫어하는구나 나는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자체는 문제가 안 됩니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자신이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신체에 대해서 그렇게 큰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니 뚱뚱하고 100kg가 넘게 살아도 좋습니다. 그런데 그 삶의 상황을 해석하고 자기가 그 안에서 그렇게 사는 의미를 발견하면서 살 수 있으면 괜찮은 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그렇게 사는 건가요? 그러니까 101kg까지 쪘습니다. 엄마는 너무 속상하니까 얼마나 많이 잔소리를 했겠습니까? 관계만 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설교시간이 훨씬 길어질 텐데 어떻게 하나? 어쨌든지 간에 그런데 요점은 이것이었습니다. 딸하고 둘이 같이 동일한 프로그램을 보는데 관점이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딸은 저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얘기합니다. 13살 먹은 애가 아빠를 잃어버리고 그리고 결국은 그 슬픔 속에서 저렇게 될 수밖에 없었지 않냐 그런데 나는 생각이 완전히 다릅니다. 13살이 아니라 12살이라도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운명입니다. 예전에 하나님 없을 때에는 하나님이 없이 우리가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 했고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서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입니다. 결국은 정신과에서 그 아이를 이제 진단을 하는데 인격 미성숙으로 진단이 나왔습니다. 정확한 진단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으로는 그것을 이해를 합니다. 어마어마한 슬픔을 당하고 인정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이 삶의 주체성으로 헤쳐 나가지 못한 그 모든 것을 다 덮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누가 그것을 동정해 준들 그 아이의 인생에 그것이 도움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엄청난 몸짓으로 엄마한테 꾸중을 들으면서 계속 눈물 흘리는 그런 자폐증적인 증상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올바른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모든 삶의 상황을 통해서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시험을 당하거나 시련을 당할 때에 우리는 그 안에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무언가 하나님이 능력이 모자라서 우리를 지켜주시지 못한다거나 혹은 과거에 내가 무언가 잘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복수하고 계시다는 그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히스베르투스 푸치우스가 말했던 것처럼 신자가 당하는 모든 시련은 무지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지혜를, 무능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을, 악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선을, 끊임없이 요동치며 변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시험을 당했을 때 그런 시험에 대한 해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해석을 통해서 자신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하나님 안에서 그 의미를 해석하고 그래서 결국은 자기가 직면하는 삶의 상황이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돌아보게 만들고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돌아보는 것이 그런 삶의 상황을 해치고 나가는데 도움을 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인간으로서 성숙해져 가는 과정입니다. 이것을 아주 어려서부터 배우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하는데 나 죽고 나면 이런 충고를 할 사람도 없습니다. 핸드폰을 버리면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그리고 책을 드십시오. 눈으로 보지 말고 마음으로 보는 훈련을 해보세요.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버린 문명의 이기들이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익사이팅한 세계가 열립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측은하게 보일 정도의 정신적인 성숙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데 매여서 살아가는 여러분을 보면 눈물이 흐릅니다. 그것은 거기 문명의 이기는 우리들이 이용을 하지 않으면 불평하지만 거기에 빠지면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완전히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항상 엄격한 거리를 두고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문명의 이기도 여러분을 자기의 노예로 만들지 못하게 해야 됩니다. 그게 참된 인간의 성숙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은 이처럼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시는 방법입니다. 두 가지가 있다고 했는데 또 한 가지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이미 알고 계시지만 어떤 좋은 것들을 시험을 통해 드러내게 하심으로써 우리 자신을 쇄신시키고 하나님 자신도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지만 다 알고 있는 그것들이 관념 속에서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실현될 때에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세계가 창조되기 전에도 하나님 안에 완전한 관념으로 세계는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것이 성취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매우 좋았었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줄을 모르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경외함이 시간과 공간속에 나타나서 자기의 독자 이삭을 죽여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려고 할 그때에 하나님의 마음에는 커다란 기쁨이 있었고, 이것이 아브라함의 마음에 전해져서 그의 영혼에 부흥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험하십니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 중 시험의 사람이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더 엄격하게 말하면 사랑하는 사람들일수록 하나님은 정말 많은 시험을 거치게 하셨습니다. 그를 끊임없이 시험하여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게 하셨고 또 끊임없이 시험하여 그로 하여금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표현하게 만드셨고, 그로써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지나는 동안 여러분이 수없이 시험을 만날 때에 그것을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그 시험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신앙의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이런 삶의 사태들이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 지를 물으며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성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찰을 가지고 삶의 지혜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뜻이 있어서 광야 생활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인생의 길을 허락하셨습니다. 나는 누가 다시 한 번 인생을 살아보겠냐고 묻는다면 'absolutely not.'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한번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생을 살게 하는 동기는 결코 이 세상에서의 행복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끊임없이 불만족 속에 시달리면서 살 것입니다. 이것은 인생에 대한 성숙한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광야와 같은 우리의 인생길을 걷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낮아져 그분께 순종하는 법을 배우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도 모르는 우리 자신을 시험을 통해서 끊임없이 보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낮아지고 끊임없이 시험을 당함으로써 주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서 삶의 모든 사태들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III. 만나로 먹이심은
A. 알지도 못하던 만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피곤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셨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그들을 낮추시기 위해서 시련을 만나게 하시고 시험하시기 위해서 고난만 당하게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주신 매우 특별한 은총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심오한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행동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만나로 먹이시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오늘 말합니다. “만나를 내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이것은 알지도 못하던 만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이전에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믿음의 조상들이 있었습니다. 일평생을 믿음으로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친구처럼 생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으로 일생을 살아온 순결한 믿음의 사람 요셉은 또 어떻습니까? 너절한 본성에서 시작했지만 수많은 시련과 환란을 겪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에서 자라갔던 야곱,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갔던 그 믿음의 조상은 또 어떠했습니까? 그러나 이들에게도 하나님이 만나로 먹이시지는 않으셨습니다.
B. 말씀으로 살게 함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식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광야 생활에 접어들어서 얼마 안 되자 양식은 떨어졌습니다. 아무도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해결해주실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300만 명은 족히 되었을 그들이 매일매일 마주해야하는 이 식량의 문제는 전쟁보다도 더 현실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전대미문의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만나입니다. 그 사건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얼마나 인상 깊고 충격적이었는지는 명칭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만나’라고 하는 말 자체가 ‘마제’,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의문문에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만나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곡식의 첫 소산을 거둘 때까지 내리셨습니다. 새벽마다 아침마다 나아가 그 만나를 거두었지만 그들은 그 만나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밤중에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슬 같은 것들이 내리고 그리고는 하얗게 쌓였습니다. 그것들을 모아 가지고 와서 과자도 만들고 떡도 만들어서 먹었습니다. 맛있었습니다. 후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에 질리기 시작했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만나를 그냥 양식으로만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사건과 관련해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두고두고 교육에 화두가 된 두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신 사건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처럼 진도에서 물이 빠지는 것처럼 그렇게 갈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양쪽에 물이 벽처럼 섰고 마른 땅이 났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기를 걸어서 건넜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이 정도의 사건은 그 이후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준 사건이었지만 이것은 단회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만나의 사건은 광야 생활 동안에 40년 동안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안식일을 제외하고 그것을 거두어서 그들은 배불리 먹을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를 낮추사 주리게 하시며” 굶주리던 때에 그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눈물 나는 하나님의 은총이요 기적의 떡이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양식을 직접 공급해주신 민족이나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침마다 만나를 거두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독점적인 은혜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이 만나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에게 만나는 매일 먹는 맛대가리 없는 음식 중의 하나가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언젠가는 영혼이 굶주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 방황을 하고 핍절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그 피 묻은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깊이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주홍과 같은 죄를 눈같이 희게 씻어주셨고 자격 없는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지체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교회에 보내셨고 어머니 같은 교회는 우리를 자기의 품에 안고 핍절하도록 죽어가는 깡마른 우리의 영혼을 위해 자기의 가슴을 풀어 헤쳐 넉넉한 젖을 우리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신령한 젖을 먹으며 신앙 안에서 성숙해져갔습니다. 그때 누리던 만족과 기쁨이 오늘도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 나 같은 죄인을 불러주셔서 이 풍성한 말씀으로 나를 먹이고 입히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하는 마음이 여러분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손만 뻗으면 읽을 수 있는 책, 클릭 한번으로 10년 전 설교까지 들을 수 있는 혜택, 언제든지 예배에 참석하면 들을 수 있는 설교, 손만 뻗으면 펼칠 수 있는 여러 가지 성경책, 이런 것들이 여러분에게 언제든지 이용 가능하도록 배열되어 있는 이것이 여러분을 망가뜨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정말 우리의 인생이 곤고함의 벼랑 끝에 섰다가 하나님의 말씀의 만나를 먹으며 배부르던 때에 그 절실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주림이 정말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만나를 주신 것은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한 바와 같이 사람이 다만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으로 나오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것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말씀으로 살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매일 먹는 만나의 감각적인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영혼도 이러한 하나님의 진리의 양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탈북을 해도 별로 화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드물 때에는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습니다. 한 가족이 탈북을 하고 일부는 북에 남았습니다. 그들이 잘 대접을 받았고 하루는 우리도 못 가본 63빌딩에 갈비집에 그들이 초청되었습니다. 사진에 보니까 정말 화려하게 차려진 식탁입니다. 한 가운데서 아주 맛있는 갈비가 구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먹으라는데 아이들이 울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북에 두고 온 굶주리는 가족들 생각이 나서 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없으면 모든 관심사는 자기밖에 없습니다. 자기 상처, 자기 아픔, 자기 시름, 자기 좌절, 자기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에 잠기게 되면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눈물 흘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그 분을 깊이 만난 가장 중요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서 무엇인가 봉사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물을 것입니다. 목사님 그러면 다른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사랑이 별로 안 생기고 그를 위해서 무언가 봉사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안 들면 우리는 은혜를 별로 못 받은 것입니까? 맞습니다. 못 받은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나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다른 사람들의 핍절한 그 영혼을 보며 슬퍼하게 되고 무엇으로든지 그들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 속에서 수많은 문제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사실은 문제 때문에 우리가 불행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 인생은 수많은 문제들을 만나게 되어 있고 그것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할 수 없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신앙을 갖는다고 이런 인생의 문제를 비껴가거나 피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이 의미가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리고 이 삶의 사태들이 내가 원하지 않는 사태가 발생했을 때에는 이것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한 상태가 되면 그 행복한 상태 속에서도 자기를 잃지 않고 지탱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영혼을 살리는 말씀 4 (2015.08.02 주일오전설교)
사실 우리나라는 사실 유명해지고 인기가 있다고 그래봐야 버는 돈이나 팬들의 수가 한정되어 있습니다. 온 국민이 팬이라고 그래봐야 한 오천만 밖에 안 되니까 외국은 다릅니다. 한번 인기를 몰아서 스타가 되면 그냥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휴가를 갈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가끔 그런 유명 인사들을 신문 지상이나 혹은 유튜브에서 봅니다. 그때 머리가 하얗게 되도록 견실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엄청난 정신의 크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어마어마한 돈, 그 어마어마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그 대단한 정신의 크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신앙인이든지 신앙인이 아니든지 간에 굉장한 크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크기가 모자랄 때 자신의 행복한 상태도 감당을 못합니다. 누구 이름을 거론해서 안됐지만 엘비스 프레슬리나 휘트니 휴스턴 같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 아닙니까? 자기 자신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이클 잭슨 같은 사람도 그런 사람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삶 속에서는 불행한 일이건 행복한 일이건 끊임없는 삶의 사태들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해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해석해 내서 그런 출렁거리는 삶의 수많은 사태들을 꿰뚫고 있는 어떤 삶의 원칙들을 발견하고 흔들리지 않고 인생의 기쁨과 슬픔의 일이 일비하지 않고 안정성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 일을 위한 최고의 선택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에 있어서 수많은 문제들을 만나지만 문제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삶의 상황들을 해석해낼 수 있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의 빛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우리들이 핍절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지 않은 사람들은 어차피 좋은 일이 일어나도 나쁜 거고 나쁜 일이 일어나도 나쁜 것입니다. 왜냐하면 좋은 일이 일어나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정신이 그것을 지탱하지 못해서 엄청나게 교만해지거나 쓰레기 같은 인간이 될 것입니다.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좌절하고 주저앉아서 불행해질 것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들에게는 좋은 일이 일어나도 좋은 일이고 나쁜 일이 일어나도 시험을 통해서 무언가를 깨닫고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에 좋은 일입니다.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무엇으로서 이 세상의 소금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무엇을 가지고 어떤 사람이 될 때에 우리가 이 세상에 빛일 수 있겠습니까? 팔복을 맛본 사람들이 무엇으로 그 행복을 본뜰 수가 있겠습니까?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먹이신 것은 매일 아침마다 이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광야로 나아가 만나를 얻게 하신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흔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거창한 구호나 운동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을 읽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라는 것입니다. 하루 시작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열고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닫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마음을 채우며 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모든 감각을 닫고 잠자리에 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살든지 우선 자기 자신이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렇게 자기 자신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로부터 삶의 모든 상황을 헤치고 극복해 나갈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은혜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이 삶의 상황들을 헤치고 나아가서 그래서 이 세상에서 비굴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시련과 어려움을 만나든지 가슴이 터질 것 같이 벅찬 기쁨의 날을 만나든지 간에 그것에 의해서 나의 삶이 뿌리째 흔들리는 법이 없이 견실하게 우리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로 먹이신 이유이고 우리는 오늘도 우리의 영혼의 만나인 이 말씀을 힘입어 이런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늘 당장 돌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마음을 아는 기도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지키리이다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떳나이다”(시119:146-14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고난을 당하고 있는 시인의 간절한 기도가 실려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시인이 이렇게 힘들어 하는지 명백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134절에서 그는 자신이 사람의 박해를 받고 있다고 고백했고, 139절에서는 내 대적들이 자기를 에워싸고 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156절에서는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고난을 당하고 있음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받을 때에 고통을 느끼는 것은 짐승도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그 고통 속에서 벗어나 평안한 상태에 도달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믿음으로 하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냥 평안하고 행복해지려고 하는 인간의 본성을 따르는 것입니다. 신자는 고난을 받을 때에 최초의 믿음의 행동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최초의 믿음의 행동이 바로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II. 고난 중에 부르짖음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많은 날들을 고난과 시련 속에서 고민하는데 보냅니다. 때로는 우리의 밤들을 하얗게 세우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수많은 시간들을 그 고뇌와 아픔 속에서 떠나보냅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낸 시간들 중 절반만큼이라도 마음을 모아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이 바뀌었을까요? 시인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난 중에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고난과 역경 속에 있지만 그 자신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사람임을 입증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특별한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에 우리의 외적인 환경의 변화는 우리의 내면의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우리의 생각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하고 우리의 지성에 혼란한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좋으신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런 나쁜 일을 허락하실까? 그리고 내게 일어나는 이 고통스러운 일은 도대체 왜 일어나는 것일까? 때로는 그 고통의 원인이 되었던 사람을 원망으로 번지기도 합니다. 이럴 때는 우리의 감정이 혼란한 생각과 함께 널뛰기를 하면서 그러면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미움과 애착, 그리고 후회와 원한의 감정을 출렁거리게 만듭니다. 이미 지성과 감정이 이렇게 불안하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올곧고 침착한 의지가 균일하게 우리 속에 작용하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결국 의지는 어느 한 순간에 충동을 경험하게 되고 그리고 좌절하게 될 때에는 의지가 한없이 약화되고 오히려 그 속에서 악한 의지가 생겨 병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인간은 그런 고난과 시련을 당하며 자신의 자원으로 맞서고자 합니다. 때로는 이 세상에 있는 자신의 자원으로 모자라면 다른 사람의 자원을 빌어서라도 이 고통과 시련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 주신 고난일 경우에는 이러한 시도가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결국은 삶 속에 찾아왔던 환경적인 모든 어려움들은 내면의 어려움으로 발전하게 되고 그 속에서 안팎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가운데 모든 자원을 허비하고도 자신의 삶의 상황을 개선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지게 됩니다. 이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하며 낙심하여 절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 속에서 그들이 하지 않는 또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련을 당한 인간의 영혼의 최초의 움직임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입니다.
A. 부르짖음
이 시인은 이렇게 자신을 미워하는 원수들과 박해하는 자들로 에워싸인 시련으로 가득 찬 삶의 상황을 지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의 현실과 맞서 싸우면서 그는 세 가지를 하나님 앞에 실천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그는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말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깨라티카’라고 나오는데 직역을 하자면 ‘내가 당신을 불렀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어떤 누군가의 이름이나 혹은 자신 속에 있는 간절한 바람의 외침을 큰 소리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기도가 필요하지 않은 때가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하여 기도해야 되는 때이고, 그런 기도 없이 우리의 인생을 살아도 되는 평안한 때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우리들의 삶의 경험을 통틀어 보면 우리의 인생에는 마디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일상적인 기도로 충분히 극복하며 살 수 있는 때가 있는가 하면 특별히 마음을 모아 비상하게 기도에 집중하지 않으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적인 감각은 이런 것들을 분별해 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하여 기도해야 할 특별한 기도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을 향해 부르짖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십니다. 이것은 육체의 자의적인 부르짖음이 아닙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난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간절한 탄원이 그것을 억제할 수 없는 정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여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터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말하는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을 당하는 신자의 최초의 믿음의 행동입니다. 부르짖는 모든 기도가 이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 터쳐 나온 기도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경건의 정이 억제할 수 없이 가득 찰 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울부짖음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들의 시련과 고난 속에서 낙담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시련과 고통 속에서 사람을 원망하고 원수를 미워하고 그들에게 악으로 갚으려고 하는 우리의 마음을 접기를 원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런 속에서 자신의 인생의 고통의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규정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 고통이 자신의 삶에 주는 의미를 터득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당신의 자녀들을 성숙시키시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자녀들은 그 고난과 시련 속에서 자신의 인간적인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해결의 시도를 하지만 결국 실패합니다. 그리고는 결국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의 눈을 듭니다. 영혼의 초점을 주님께 맞춥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한분을 향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 삶의 모든 문제들을 토로하고 싶어 합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영혼의 초점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이 언어는 수많은 정동 속에 풍부해지게 되고 결국은 인간의 마음의 정으로 억제할 수 없는 한계를 넘게 됩니다. 이때 그는 성령이 자신 안에서 간절하게 피를 토하며 기도하게 하시는 것을 체험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시인이 이야기하는 울부짖음입니다.
이런 간절한 부르짖음 속에서 하나님은 당신만이 아는 위대한 비밀을 우리의 마음속에 행사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을 쇄신시키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삶은 그 사람의 마음이 그린 궤적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삶 밖에 살 수 없었습니다. 어디서도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신이 고칠 수 없는 우리의 마음을 기도라고 하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우리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바닥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의 마음의 틀들을 바꾸며 하나님 앞에 쏟아 놓아 기도합니다. 마음이 물같이 녹으며 나로 하여금 실패한 삶을 살게 만들었던 내 삶의 모든 원인이 되었던 마음을 들여다보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회개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을 부정하고 미워하게 하십니다.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하게 부르짖는 기도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인생을 사는 사람들 중 시련과 역경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시련과 역경은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는 도구입니다. 그것이 시금석이 되어서 우리를 시험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아라. 이것이 너희 모습이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당하고 있는 삶의 사태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때로는 이 시련이 당연히 우리들이 지은 죄의 결과일 수도 있고 혹은 그것과는 상관없이 악한 자들이 나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서 행한 끔찍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하나님은 이것들을 향해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던 이 모든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칼빈 선생은 자기의 책, ‘기독교 강요’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시련과 고통이 닥칠 때에 우리는 잠잠히 생각하자. 그리고 모든 일이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자.’ 그것입니다. 이것은 운명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시련 속에 간절히 추구하며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련 속에 고민으로 보내버린 수많은 날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고 우리의 육체를 병들게 만들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고민하고 아파하는 시간에 우리 자신의 마음을 쏟으며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했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이 바뀌었을까요? 시련과 고난 속에서 주님 앞에 부르짖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증거지킴
두 번째 시인이 한 일은 증거를 지킨 일이었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지키리이다”라고 말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이 나옵니다. 율법, 말씀, 율례, 규례, 법도, 계시 등등 말입니다. 그 중에 이 증거라고 하는 표현은 매우 특별한 것입니다. 히브리말로 ‘애드’, 혹은 ‘애다’라고 있는 단어, 혹은 ‘우드’라고 하는 동사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단어들은 ‘다’라고 하는 하나의 동사를 어근으로 합니다. 그리고 이 뜻은 ‘지나가다’라는 뜻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증거는 하나님의 뜻에 관한 생사적 표명입니다. 이 증거는 하나님의 뜻에 관한 생사적인 표명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자기 스스로 믿음을 창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로써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그에게 설득했고 그러자 그 하나님의 계시가 그의 마음에 믿음을 불러일으켰던 것입니다. 그저 메소포타미아에서 이방신을 섬기며 살던 조상의 자손으로 태어나서 그냥 그렇게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여호와라고 하는 신이 나타나셨습니다. 이런 저런 놀라운 감당할 수 없는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호락호락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어려서부터 경험한 그 메소포타미아의 수많은 신들은 그렇게 믿을 만한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제삿밥을 먹기 위해 개떼처럼 몰려다니고 그리고 탐욕으로 서로 시기하고 싸우고 그리고 인간을 겁주고 닦달하여 자기를 섬기게 하는 그러한 욕망으로 가득 찬 신이었습니다. 전혀 도덕적이지 않고 그리고 자기중심적이었으며 더욱이 신실함 같은 것들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놀라운 축복을 말씀하셨지만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그저 단 한 번에 믿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번에는 아브라함의 눈높이로 당신 자신을 낮추어 주셔서 소위 신학적으로 ‘아콤모다치오’를 하기 시작하십니다. 우리말로 말하자면 눈높이 교육을 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 체결 의식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말씀하신 후 짐승들을 잡아서 갈라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불의 임재로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가십니다. 이것은 고대 근동의 언약 체결 의식과 관련이 있는데 왕이 큰 영토를 차지한 후 봉신을 임명하여 한 땅을 다스려 영주가 되게 합니다. 그 지역의 백성들을 다스리고, 재판하고, 또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무관의 평범한 백성이었던 어떤 사람이 봉신의 자리로 부름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가문의 감당할 수 없는 은총입니다. 그리고 왕은 그 은총의 표시로서 그를 제후의 봉신에 임명하고 그리고 약정을 하게 됩니다. 서약입니다. 제일 먼저 역사적으로 자신들이 둘이 어떠한 사이인지를 표명한 다음 그 다음 의무 사항들을 열거하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혜택들도 제시합니다. 이 문서들을 작성한 후에 그 왕과 봉신은 이제 소 같은 짐승을 머리부터 엉덩이까지 쪼개 놓은 그 제물들 사이를 걸어갑니다. 물론 거기서 쏟아지는 피가 그 쪼개진 제물 사이를 핏 길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핏 길을 밟으며 이제 이 왕과 봉신이 양손에 조약 문서를 들고 지나갑니다. 제사장이 이 일들을 주관하고 이제 이 세부의 문서를 작성하여 당사자들이 두 부를 갖고 한부는 신당에 보관하게 됩니다. 그렇게 피로 가득 찬 언약 체결 의식을 할 때에 그 의식의 핵심적인 표명이 뭐냐 하면 바로 이렇게 쪼갠 고기 사이를 우리가 지나가는 것처럼 언약을 우리 중 이 언약을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신들의 저주를 받아서 이렇게 온 몸이 찢어지리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저주에 대한 맹세에 자신을 묶는 것입니다. 이 때 자신들만이 이곳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언약 체결 의식에 대한 증인을 부릅니다. 그것이 바로 천지신명입니다.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땅과 하늘을 불러 자신들의 이 언약 체결 의식의 증인으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존재의 끝이신데 하나님이 약속하셨고 그것을 반드시 이루시지만 또 그렇게 하시지 아니한다고 한들 누가 하나님을 벌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눈높이로 아브라함에게 설득하고 믿음을 갖게 하시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아브라함에게 어려서부터 익숙한 생애에 가장 진지하게 경험했던 언약체결 의식을 사용해서 하나님이 신실하고 변함이 없는 분이라고 하는 것을 이 약속을 통해서 제사를 통해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때에 이루어지는 이 언약 체결의 의식을 모두 지켜본 사람들이 증인이고 그리고 거기에서 맹세한 그 표명들이 바로 증거입니다. 당연히 이 증거는 율법의 내용들이지만 그러나 율법의 내용 중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에 대한 생사적인 표명을 뜻하는 것입니다. 언약관계의 엄숙성과 그 언약 관계를 맺은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준엄한 뜻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과 맺은 언약의 관계를 고난 속에서 이 시인이 기억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배반하지 않고 그 증거에 충실하기로 다짐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래서 시련과 어려움을 만나면 고통 받고 있는 자신에게 온갖 시선이 다 쏠리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에게는 더더욱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종종 자신을 이렇게 내버려두시는 하나님을 향해 토라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오늘 믿음으로 고난과 역경의 시기를 지났던 이 시인을 보십시오. 그는 원수들이 에워싸고 박해자들이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그때에도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을 뿐만 아니라 그 언약의 증거들을 지키기로 다짐했던 것입니다. 시인이 그렇게 붙들고 사랑했던 언약이라고 해봐야 그것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이 맺으신 옛 언약에 불과하였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나타나게 될 새로운 언약의 그림자에 불과했고 그들은 바라보았지만 우리는 오늘날 그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셔서 우리에게 맺으신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맺은 언약입니다. 그 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음으로 이루신 언약입니다. 이 언약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한한 생명과 은혜를 베푸시기로 한 약속입니다. 바로 이 언약에 참여한 사람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언젠가 여러분은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많은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떻게 살 수 없는 비참한 인생을 찾아오셔서 은혜를 베푸신 구원의 하나님을 만났을 것입니다. 그때에 이제까지는 여러분의 인생밖에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 십자가를 통해서 이제 이 온 우주의 중심이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나의 모든 불행이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향해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 언약 안에서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제 이 모든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할까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에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주셨고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이 증거는 여러분의 마음에 모든 것이었습니다. 산 것은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죽은 것이었고, 그래서 인생의 삶의 보람은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시인이 아직 계시의 희미한 빛 밖에 없는 어두움 속에서도 이 옛 언약의 증거들을 굳게 붙들고 살기로 다짐했던 것들을 보십시오. 그가 바라던 것들을 우리는 받았고 그가 소망하던 것들을 우리는 성취된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 십자가를 통한 언약을 실현하면서 살아야 할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은혜를 생각할 때에 다짐했던 것,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누구라고 증거 받았던 것,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던 그 증거들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로 다짐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시련과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을 폐하지 못합니다.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것들 우리들이 당해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를 굳게 붙들고 믿음으로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말씀바람
마지막 세 번째는 말씀을 바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님의 말씀을 바랐사오니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라고 말입니다. 밝기 전에 일어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였습니다.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로 새벽을 열었고 거기서 자신의 삶에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면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한계를 보았습니다. 그는 시련으로 에워싸인 삶의 상황 속에서 희망이 세상이나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붙들고 세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도움을 부르짖었습니다.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시인은 또 다른 곳에서 이러한 자신의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시리
주여 아침에 내가 기도하고 주께 바라리다
이 시인은 자신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한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람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당신의 말씀을 향하여 저의 바램을 두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이 세상이나 세상의 있는 것들 속에서 소망을 발견하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해주시는 말씀 속에서 희망을 찾기를 원했습니다.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삶의 상황이 아무리 모질고 거칠지라도 그는 듣고 싶어 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를 아노라. 그리고 내가 너의 눈물을 보았고”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 말입니다. 그는 모든 소망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면서 그 말씀의 깨달음으로써 극복할 수 없는 이 현실의 사태를 극복할 수 있는 사랑과 생명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택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어떤 특별한 그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새벽에 눈을 떠서 근심과 염려 시름 속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이었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조용히 읊조리다’라고 번역된 이 히브리어 번역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좋은 번역이라고 칭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옛날 번역이 훨씬 잘된 번역입니다. ‘라 샤흐’라고 하는 이 단어는 목적을 나타내는 전치사와 ‘샤흐’가 결합된 것인데 ‘샤흐’는 ‘생각하다’입니다. 숙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킹제임스버젼, NIV, ASV 같은 탁월한 영어 성경들이 이것을 모두 'meditate'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여 한 행동은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눈을 뜨는 것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서부터 서서히 마음으로까지 내려오도록 묵상하였습니다. 묵상이라는 깔때기를 통해 머릿속에 있는 이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이 자신의 가슴에 내려와 가슴속에서 그것들이 움직여 마음의 동력이 되도록 하나님 앞에 말씀을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의 의미에 대한 깊은 숙고와 그 말씀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을 알고 선심 쓰듯이 사람들에게 선물처럼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머리로 들어간 말씀을 입으로 떠들어 대지만 그러나 그 말씀이 그 사람 자신을 녹이고 뼛속까지 스며드는 변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 깨닫고 그것을 입으로 토해 칼로 혹은 몽둥이로 삼아서 수많은 사람들을 찌르고 때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은 그 말씀을 통해 추호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읽어서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이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은 언제나 자신 속에 깊은 죽음을 가져옵니다. 그 진리에 합당하지 않은 자신을 발견하고 거기서 흐느끼는 눈물과 후회하는 회한, 그리고 거기에서 돌이켜 새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는 몸부림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작용들은 머릿속에서 시작이 되지만 그러나 가슴을 내려와 마음을 움직이기까지는 실제로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것은 우리의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인은 고난 속에서 자신이 고난 받고 있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바랬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붙들어 주도록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마음을 움직여 그 속에서 주님의 마음을 불타게 하도록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영혼을 살리는 말씀 5 (2015.8.9 주일오전설교)
III. 적용과 결론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시련과 어려움을 당하고 하나님 앞에 원망하는 마음과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까? 그렇게 해서 여러분이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이 어디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의 풍랑이 이는 때가 왜 없겠습니까? 어차피 불완전한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시련과 고통을 당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경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실망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가지고 있던 것들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예전에는 당하지 않던 시련과 고통을 당하며 신음해야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 이런 풍랑이 일어날 때 해결의 길은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며 연민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생에 아무 문제도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어차피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 하나님이 죽음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날까지 우리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주체는 우리일 수밖에 없고 이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입니다. 우리들이 좋아하는 삶의 사태에서만 우리가 주인공이 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치욕스럽고 때로는 죽어버릴 것 같이 괴롭고 때로는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맞닥뜨릴 때에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그게 남의 인생이 아니라 내 인생이고 그 인생은 남이 살아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인이 되어 살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만나는 상처와 고통, 불행과 수많은 모순들의 궁극적인 원인들을 어쩌면 이 세상에서 끝까지 발견할 수 없는 것도 많을 것입니다. 거기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모자라기 때문에, 그 분이 신실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라고 믿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 자신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떼어 불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티끌과 같은 나의 인생을 향해 가지고 계신 마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이 못 헤아려주셔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이 시련을 만날 때에 깊은 수렁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마음을 보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영성의 끝은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눈물 흘리시는 그곳에서 똑같이 눈물을 흘리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곳에서 기뻐하고, 주님이 쓰라려 하시는 곳에서 함께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렇게 나의 잘못도 없이 그렇게 우리의 인생에서 고통을 받고 어둠 속에서 피해자가 되어서 신음하며 피를 흘릴 때에 하나님은 어디계셨느냐고 말입니다.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이라는 신학자는 나치 치하의 그 끔찍한 모든 잔혹 행위를 겪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오랜 세월 고뇌했습니다. 그렇게 나치가 끔찍한 만행을 저질러 600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그렇게 죽일 때에 하나님은 어디 계셨느냐고 말입니다. 후에 그가 신앙 안에서 답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때에 그렇게 고통당하고 죽어가는 사람들 그 안에 함께 계셨다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를 보여주어도 하나님을 믿을 수 없지만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의지할 때 하나님이 그 시련과 고통 속에서 함께 하시는 증거를 어디서나 발견하고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됩니다. 주님은 당신의 마음을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이시지만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보이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시련과 고난이 겹칠 때에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매일 성경을 읽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성경을 읽음으로 하루를 닫고 혹은 하루 동안에 삶의 리듬을 잠시 끊고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경 속에 자신의 마음이 녹아들어 스며들기까지 그래서 말씀과 그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분의 정서가 여러분의 마음에 느껴지기까지 그렇게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책을 읽어야 합니다.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과 함께 강조되어야 할 것은 말씀의 내용에 대한 깊은 숙고와 자신의 삶에 대한 철저한 적용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 말씀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마음이 여러분을 잠기게 할 때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나에게 일어난 우연적으로 일어난 일처럼 보이는 이 많은 고통스러운 삶의 사태들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 나를 변화하여 새 사람이 되시게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렇게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 당신의 자녀들이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마음을 모르면서 드리는 일천마디의 화려한 기도는 삶의 사태를 바꾸어 놓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러한 삶의 상황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을 깊이 알고 드리는 한 마디의 간절한 기도는 닫힌 삶의 상황을 여는 열쇠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시련 가운데 있는 여러분이 이렇게 당신 앞에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 말씀 속에 담겨진 당신의 마음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 앞에 마음을 녹여 기도함으로 여러분이 새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주의 법도를 잊지 않음
“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시119:14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시편 119편은 고난 속에서도 빛나는 시인의 신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환란과 역경을 만났지만 그의 관심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너무 고통스럽고 시련으로 괴로울라치면 우리의 삶의 상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묻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시련과 고통, 혹은 박해와 고난 속에서 그 모든 삶의 상황들을 통해 하나님의 속성을 맛보는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삶의 상황이 너무 힘들고 고통이 많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다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상황은 우리를 만들지는 못합니다. 이미 우리 안에 오래전부터 있었던 어떤 본성들을 상황을 통해서 드러나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의 생각대로만 자기 인생을 보지 않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자기 바깥에 있는 진리의 빛으로서 자기 자신을 인식함으로 우리들이 살면서 만나는 수많은 역경과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배워가는 것이 신자의 일생입니다. 시인처럼 어떤 처지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러면 오늘 여러분이 처한 시련과 고난이 언젠가는 이런 기회를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제목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II. 순수한 말씀
이런 시련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중요한 고백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다고 하는 고백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함으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그런데 이 번역은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에 번역된 순수한 말씀이라고 번역된 부분을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체루파 메라테카(tserupa merateka)’라고 기록을 합니다. ‘메라테까’는 말씀이라기보다는 약속입니다. 물론 말씀이라는 뜻이 있지만 특별히 약속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당신의 약속’ 이런 뜻이고 ‘체루파’는 ‘차라프’라고 하는 동사에서 옵니다. 이 동사가 시편 17편 3절에서는 ‘시험하다’라는 말로 번역이 되었고 105편 19절에서는 ‘단련하다’라고 번역이 됩니다. 혹은 다른 성경에서는 연단하다라고도 번역을 했습니다.
A. 연단된 약속
원래 이 ‘차라프’라고 하는 단어는 금속을 제련하여 어떤 물질을 순수하게 추출하는데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예를 들자면 오늘날 금을 제련할 때에는 화학 약품을 사용을 합니다. 그래서 금이 아닌 것들로부터 금을 뽑아내는 것입니다. 여러 번 반복을 해서 그래서 순수한 금을 만들어 냅니다.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광석을 불에 달궈서 도가니에다가 녹여서 비중의 차이를 가지고 금속들을 구별해서 순도를 높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여러 번 연단했다라고 하는 것은 순수한 은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의미심장한 단어가 여기에 쓰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를 제대로 번역을 한다면 시험된 약속, 혹은 연단된 약속이라고 번역을 해야 됩니다. 자, 그러면 그게 무슨 의미일까요? 직역을 하자면 심하게 혹은 아주 많이 연단된 혹은 제련된 당신의 약속 이런 뜻입니다. 자, 그러면 이게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약속이 여기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약속을 시험해 본 것입니다. 즉, 오늘 시편 119편의 저자인 이 시인이 이미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함을 경험하기 오래 전에도 이 말씀의 약속을 시험해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시인뿐만 아니라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그 약속에 자신의 인생을 걸어보았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렇게 시험을 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신실한 것으로 진실한 것으로 판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반드시 그 약속을 성취하심으로 약속을 주신 하나님이 믿을만한 아버지시라는 사실을 드러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연단된 약속 혹은 제련된 약속의 의미입니다. 물론 금속을 여러 번 제련하고 연단을 하면 순수해지니까 이렇게 번역한 것이라고 우리들이 이해를 합니다. 그런데 원래 의미는 그런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에서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믿을 만하면 우리는 그 사람의 말도 믿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믿음성이 없으면 우리는 그가 무어라고 말해도 마음속에서 저 말은 완전히 사실은 아닐 것이야 라고 삭감하고 우리의 마음속에 의미를 다시 해석합니다. 결국은 신앙의 성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얼마나 인격적으로 신뢰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결국 열렬한 기도생활, 뜨거운 헌신, 생애를 건 결단, 이런 것들은 훌륭하기는 하지만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관계로 데려가지 않으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그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태도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연애의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기억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서 잠깐 이야기한 것 같은데 시간이 다섯 시간, 여섯 시간 흘러갔습니다. 내가 말을 하는 것만 즐거운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며 듣는 것도 매우 큰 기쁨입니다. 이것이 바로 서로 인격적으로 사랑할 때의 일어나는 관계입니다. 우리가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시련과 고난을 만나고 다양한 삶의 사태 속에서 때로는 기뻐하지만 때로는 외로워하고 홀로 눈물을 흘려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신자의 담대함은 눈앞에 있는 상황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모든 신앙의 담대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수많은 사람들이 시험해 보았고, 결국은 그 약속을 붙드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배반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입증하셨던 것입니다.
사람은 종종 약속을 어깁니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주었던 깊은 신뢰를 배신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사람 자신이 아주 야비한 사람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우리를 속이려고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 그가 어떤 약속을 했을 때에 그때에는 둘 정도의 희생이면 그 약속을 이행할 수 있었을 때였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그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팔의 희생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때에 그런 희생을 감당하면서까지 신뢰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은 아주 신앙심이 두텁고 덕스러운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절하고 배신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삶 속에서 이런 일들을 당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도 한때는 누군가를 속이고 그렇게 불신실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람들로부터 받는 이런 더러운 배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우리의 소망을 두게 만들고 사람을 의지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약속은 수없이 연단해 보면 결국은 그 약속이 신실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연단된 약속입니다.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거기에 믿음의 닻을 내렸고 자신의 온 마음을 다했습니다. 삶의 상황이 자신을 아무리 속일지라도 그들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그 말씀에 자신을 던졌습니다. 누구도 그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배신당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시련의 처지에 있든지 그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사랑한 말씀
두 번째로 시인은 그 말씀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말씀이 매우 연단되었기 때문에 당신의 종이 이것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번역됩니다. 여기에서 ‘아헤바(ahevah)’라고 하는 그것을 ‘사랑하다’라고 하는 이 단어는 ‘아하브’라는 동사에서 온 것인데 ‘사랑하다’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어에서 이 ‘아하브’는 아주 폭넓은 의미를 가진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도 이 단어를 쓰고,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이 단어를 쓰고, 사람끼리 사랑하는 것도 이 단어를 쓰고, 연인사이에 뜨거운 사랑도 이 단어를 사용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나오는 유명한 화장품 메이커가 있는데 그게 바로 ‘아하바’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이 시인이 그 극도의 시련과 수많은 대적들에게 에워싸여서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도 그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삶의 모든 상황이 그 사람을 생각나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내가 너무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아주 기쁜 일을 만났을 때 제일 먼저 그 사람에게 이 기쁜 소식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시련을 당하거나 상처를 받았을 때 그 사람에게 제일 먼저 나의 아픈 마음을 쏟아놓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의 위로를 받고 싶어집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아도 그 사람이 여기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이 납니다. 사막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상황을 만나도 그 사람이 여기 나와 함께 있으면 얼마나 큰 힘이 될까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삶의 상황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게 하는 구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이 시인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시련을 만나면 시련 때문에 하나님께 피했고, 고난을 만나면 그 고난이 너무 아프기 때문에 주님께 피했고 원수를 이겨 승리의 노래를 부를 때면 너무 기뻤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것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일생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오만가지 삶의 사태를 다 겪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꽃밭과 같은 인생길을 걸어가며 잔치나 할 것이라고 하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을 이렇게 모든 상황 속에서 사랑한 이 시인은 왜 그렇게 눈물 흘리며 인생의 굽이굽이를 지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겠습니까? 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깊이는 하나님의 마음을 갖는 깊이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지 단순히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결국 신앙의 크기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 분의 마음과 공감하는 능력의 크기입니다.
우리 인간은 마음에 없는 이야기를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슬프지 않은데도 슬픈 것처럼 안됐다고 생각을 전혀 안하면서도 매우 애석하다고 말하는, 정치인들이 특히 잘하는 거 마음에 아무 유감도 없으면서 유감스럽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허사입니다. 가화조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음 없이는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신앙의 깊이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진 그 분의 마음을 깊이 공감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깊이입니다.
정말 오래전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한 26년 막 신학교 선생이 되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단칸방에서 세 식구가 같이 살 때였습니다. 일찍 자려고 누었는데 시간도 안 잊어버립니다. 10시 26분이 되었는데 도저히 잠이 안돼서 일어났습니다. 시계를 보니까 10시 26분이었습니다. 아내와 아이는 자고 있고 저는 벽을 마주보고 있는 책상에 앉았습니다. 스탠드를 켜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성경을 읽는 그 부분이 누가복음이었고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우시는 그 대목을 읽었습니다. 성경을 쭉 읽어 가는데 그 대목에 와서 무언가 마음에 감동이 왔습니다. 그래서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반복해서 읽기 시작했고 옆에 있는 헬라어 성경을 펼쳐서 다시 대조하며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깊은 감동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책상에 엎드려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는 내가 하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나를 껍질 삼아서 주님이 오셔서 당신 하시고 싶은 기도를 다 하시고 나가신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얼마를 울면서 기도를 했는지 거의 기력이 없을 정도가 되었는데 머리는 쇄락했습니다. 기도가 모두 끝나고 나서 이 깨달음이 내 마음속에서 사라지면 어떻게 하나 하고 그 깨달은 내용들을 작은 노트에 깨알 같은 글씨로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정리를 모두 끝내고 시계를 보니까 아침 8시 20분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의 생애에서 매일 일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공감이 우리를 얼마나 깊이 있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인식으로 데려가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마음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 말씀의 행간 속에 담겨져 있는 우리 주님의 기쁨과 슬픔, 안타까움과 눈물에 함께 동참하며 공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삶의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우리만을 위한 삶을 살지 않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고통스러운 상황 그 속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괴로워하는 자신의 처지 하나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며 살아가는 모든 삶을 정당화 해버립니다. 그런데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까? 언제나 다시 우리의 삶의 현주소로 돌아오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의 풀리지 않는 문제는 여전히 똑같이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변절하고 세상 속에서 방황하여 맛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도 그들을 깨우고 각성시켜서 돌아오게 만드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사랑해야 하지만 그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린 채 무미건조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십시오. 매일 성경을 읽고 그 양을 얼마큼 읽어야 되는지는 초등학생도 아니고 뭘 물어봅니까? 본인이 마음에 읽고 싶은 만큼 읽으세요. 그 대신 건성으로 읽지 말고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을 내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읽혀지도록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희로애락이 나에게도 느껴지도록 내 마음이 말씀 속으로 녹아들고 말씀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에 스며들도록 그렇게 읽어서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 그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원하는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릴 수 있어야 됩니다. 이런 일이 하루에 최소한 한번, 아니면 하루에 세 번, 수시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이렇게 자신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죄성이 남아있는 우리 인간들이 무슨 별다른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세월도 알 수 없이 오래된 옛날에 주님을 한번 만난 그거 하나 가지고 오늘 우리의 삶을 승리로 이어갈 수는 없습니다. 왜 안하십니까?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매일 말씀 속에서 자신을 비추어보려고 하는 말씀에 대한 사랑, 그 사랑을 가진 사람들이 시련 속에서 자신이 붙들어야 할 약속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그 뜻을 받들며 삶
마지막으로 한 가지는 그 뜻을 받들며 살아야 할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서 보여줍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당신의 약속이 매우 연단되었기 때문에 당신의 종이 이것을 사랑하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종이라고 하는 ‘아브데카(abdeka)’라고 하는 이 단어는 그야말로 노예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자기의 정체성을 “당신의 노예입니다. 종입니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리 119편을 여러 번 읽어보아도 시인이 자신을 하나님의 종 혹은 노예라고 표현하는 이 속에서 채찍에 피가 나도록 얻어맞으며 작대기로 수없이 구타를 당하면서 두려움과 공포에 질린 채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연상해 낼 수는 없습니다.
영혼을 살리는 말씀 6 (2015.8.16 주일오전설교)
출애굽기 21장에는 종에 관한 율법이 등장합니다. 특히 안식년을 맞아서 이스라엘의 종들이 속량되어서 풀려나 자유인이 되는 규례를 적고 있습니다. 종이 되는 것은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서 종이 될 것입니다. 그 중의 하나는 빚 같은데 팔리는 것입니다. 로마 시대에는 'self selling'이라고 해서 자기 자신을 노예로 매매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가족이 자유인인데 자신의 신분도 자유인인데 가족이 너무 가난해서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면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노예로 팔고 그 돈으로 가족을 섬긴 후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이 시대에도 그렇게 노예가 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노예 제도는 독특한 것이 있었는데 신분적으로 세습되지 않고 안식년과 희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식년에는 특히 자신이 7년 동안 종살이를 한 다음에는 자기 자신의 몸값을 지불하지 않고도 스스로 자유인이 될 수 있는 율법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 그런데 안식년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스스로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런데 그 7년 사이에 그 집에서 결혼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결혼을 했는데 그 집안의 종이었습니다. 그리고 자녀까지 낳았습니다. 주인이 아주 덕스럽고 너그럽습니다. 그래서 상전이지만 그를 의지하면서 사는 마음이 깊어졌습니다. 그때에 이 사람이 안식년이 되었을 때에 증인들 앞에 고백을 합니다. 자신은 자유인이 될 기회를 스스로 반납하고 평생을 이 주인을 모시고 가족과 함께 살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을 데려다가 기둥에 귀를 대고 뚫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귓바퀴를 뚫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이냐 하면 이 귀는 신체의 부위 중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귀를 뚫음으로써 이 사람이 자유인이 될 수 있었지만 스스로 종이 되기를 자처했고 그리고 이 사람은 평생 주인의 말에 순종하며 복종의 삶을 살 것이라는 것을 서약하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이렇게 서약을 하고 나면 신분은 여전히 노예인데 그렇게 평생을 서약한 사람은 그 집안에서 고용된 종이 아니라 노예가 아니라 고용된 일꾼과 대등한 대우를 받습니다. 그래서 신분으로는 상전보다 못한 종이지만 정서적으로는 그들과 함께 한 가족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시인이 하나님을 향해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나는 당신의 종으로서 당신의 말씀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그것은 바로 이런 시련과 역경을 만나기 전에 주님으로부터 입었던 그 한량없는 은혜와 자비, 그리고 그것 때문에 자신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종으로서 살기를 자처했던 소명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날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저지르는 모든 불순종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고달프고 괴로운 상황을 만났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것을 구실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덮어버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 옳은 태도가 아니고 우리의 인생에서도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자 그렇다고 해서 무엇이 바뀝니까? 어떠한 처지에서도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이 전에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 진노 아래에 있는 자식이었고 어두움의 종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창조의 목적을 거스르며 사는 것이 인생의 낙이었고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사는 것이 자신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도 우리가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다면 우리 중 아무도 예수를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복스럽게도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누군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이 고통의 근원이 무엇이고 내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몸부림치면서 살았지만 목적도 없고 또 목적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늘 자원이 결핍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 목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도 우리 자신을 행복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결국은 이러한 모든 처지 속에서 삶의 벼랑 끝에 있었던 우리들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그 죄에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우리의 마음에 빛을 주셨고 그 빛을 따라 살 수 없는 우리들에게 그 빛을 따라 살 수 있는 하늘의 힘을 우리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며 그리스도의 한 몸의 지체로 살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의 기쁨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대로 사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고 우리의 인생의 진정한 기쁨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시인은 시련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나를 이런 시련과 고난으로부터 막아주지도 못하는 그까짓 하나님을 내가 왜 섬기랴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시련과 고난과 역경을 만나도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하나님이셨고 그는 언제나 그 분의 종이었습니다. 자유인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스스로 종이 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우리는 종종 시련과 고난으로 가득 찬 곤고한 세월을 지날 때 고통 받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자기 연민 속에서 눈물을 삼키며 슬픔에 잠기는 것도 우리의 인생의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문제는 세상으로부터 말미암고 불행은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오지만 해결의 길은 세상이나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웅덩이에 빠졌다고 칩시다. 앞꿈치가 닳도록 손톱이 닳아 마디에 피가 맺힐 정도로 몸부림을 치며 기어 올리려고 했지만 번번이 떨어졌고 이제는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어서 탈진한 상태로 그 웅덩이에 누워 죽음의 때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때 만약에 누군가가 밧줄을 그 웅덩이에 내려 준다면 여러분은 사력을 다해 그 밧줄을 붙들지 않겠습니까? 혹은 자신이 힘이 없어서 그 밧줄을 놓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재빨리 그 밧줄을 여러분의 몸에 감고 누군가가 여러분을 끌어 올려주기를 갈망하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깊은 웅덩이와 같은 시련에 있는 여러분에게 밧줄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 밧줄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에 여러분의 자신의 몸을 단단히 묶기를 바랍니다. 상황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한때 지금보다 더 깊은 시련에 몸부림치면서 눈물을 흘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여러분의 눈빛은 진리를 향한 탐구에 빛났고 여러분의 마음은 눈물로 가득 차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향해 열려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던 때의 일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시련과 어려움을 만나는 것은 바로 여러분을 그렇게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약속을 붙드는 착한 자녀로 되돌리시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 그 말씀과 함께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말씀을 찬양할 때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시 56:3-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시편 56편은 다윗이 곤고하던 날에 지은 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탄원 시로 분류하지만 시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면 탄원의 내용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저 잠잠히 자신의 상황을 하나님 앞에 묘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히려 이 시의 전편에는 인생의 가장 고통스러운 한 토막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성품들을 생각하며 주님을 찬송하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시의 표제에 보면 믹담 시라고 되어 있는데 이 믹담 시라는 말은 경구, 금언, 격언과 같은 짤막한 내용들로 이루어진 시를 가리킵니다. 인생과 신앙에 관한 지혜가 함축적으로 담겨있는 내용들을 엮은 시라는 뜻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좀 어려운 히브리어, ‘유나 헬렘 르호김’이라는 단어는 지금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었던 어떤 노래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시의 내용을 이미 알고 있는 그 가락에 맞추어 부르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이 의미 깊은 시는 사무엘상 21장 10절에서 15절에 언급된 다윗의 생애에 일어난 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박해는 점점 심해졌고 그는 확실하게 다윗을 죽이고자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때에 다윗은 그의 박해를 피해 가드라는 곳으로 도망을 했습니다. 아마도 자신의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자기의 신분을 속이고 아기스왕의 용병으로 지원을 한 것 같습니다. 왕은 다윗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의 신하들은 다윗을 알아보았습니다. 신변의 심각한 위협을 느낀 이 다윗은 두려워 마치 미치광이처럼 수염에 침을 흘리며 다리를 긁적거리며 정신이상자 행색을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울의 박해를 피하여 가드로 도망을 갔는데 거기서 사울의 위협보다 더 심각한 생명의 위기를 느꼈던 것입니다. 가까스로 그 끔찍한 위기를 벗어나게 되었고 이때를 회상하며 지은 시가 바로 시편 34편입니다. 시편 34편은 여러분이 익히 알고 있는 내용 중 하나인데 특히 여러분이 잘 아는 구절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구절이 담긴 시편입니다.
II. 두려워하는 날에
이 시를 쓸 때 다윗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련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다윗은 고백하기를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이라고 묘사하였습니다. 즉, 믿음으로 살았던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에 두려운 날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시가 쓰여지기 전 다윗이 겪었던 일들이 사무엘상 21장 10절 그 이전에 나옵니다. 그렇게 사울의 박해를 받아 곤고하던 날에 그에게 유일한 마음의 위로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사울의 아들이며 자신의 절친한 친구였던 요나단과의 우정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자신의 아버지 사울을 향해 반역하기까지는 아니하였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를 버린 것과 그리고 다윗을 택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아버지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 다윗에게서 깊은 공감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을 깊이 경험하면서 다윗은 요나단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한 것을 알아차린 후 다윗에게 이 사실을 미리 알렸고 두 사람은 사랑하면서도 이별을 하게 됩니다. 눈물로 요나단을 이별한 그때에 바로 인생의 위기가 찾아왔고, 이 시를 짓는 배경이 됩니다. 요나단과 작별한 다윗은 노보로 가서 제사장을 만났고, 너무나 허기지고 굶주린 나머지 떡을 구걸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사울로부터 실질적인 살해의 위협을 느껴 두려움으로 가득 찼던 때에 이 시를 지었던 것입니다. 혹은 그때를 회상하면서 이 시를 읊었던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과 동행한 사람도 없습니다. 티 하나 없는 순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았지만 그에게도 두려운 인생의 날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한때는 주님을 만나고 그 은혜에 사로 잡혔지만 우리의 인생을 항상 자신감 넘치는 확신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헌신되었던 믿음의 사람들도 그런 침체를 경험했던 것처럼 우리도 때로는 이 세상에서의 두려움과 외로움에 위축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이러한 침체는 심각해서 정말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를 스스로 의심하게 할 정도로 엄중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바울은 불세출의 지도자였습니다. 지식에 있어서나 그리스도를 만난 영적인 깊이에 있어서나 견줄 데 없는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말 한 마디로 사람을 죽이고도 살릴 수 있을 정도의 위대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약하고 두려워 떨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덴에서 자신 만만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변증하기 위해서 철학자들과 논쟁하였습니다. 성과는 그리 탁월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그가 찾은 곳이 고린도였습니다. 그때 바울은 생애의 깊은 깨달음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그 탁월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연약한 인간인지를 배우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덴으로 나아갈 때는 자신 충만했지만 고린도 지방으로 나아가 갈 때에는 약하고 두려워 떨었노라고 고린도 전서 2장 3절에서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지고 있는 인생의 양면성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항상 성령 충만한 것은 아닙니다. 항상 우리들이 자신만만하고 확신에 찬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선지자 엘리야도 핍박받던 날에 낙심하여 하나님 앞에 실망으로 가득 찬 탄원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로 이런 두려움과 외로움 속에서 위축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종종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이렇게 두려운 날로 데려가실까요?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거나 혹은 우리에게 어떤 심각한 결함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들이 마음을 다하여 은혜 생활을 하려고 애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써도 때로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날을 맞이하게도 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을 때만 하나님의 사람들이지 주님의 손에서 놓여지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은혜 때문에 강할 때가 우리의 참 모습이 아니라 그 은혜에서 놓여져 두려움에 떨며 약해지는 것이 우리의 참 모습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강하고 은혜롭고 충만했던 때를 생각하면서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고백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III. 주를 의지할 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 시인이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던 날에 커다란 두려움에 직면하게 하심으로써 한 가지 사실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을 의지할 때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리이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내가 주를 의지합니다.’라는 이 구절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아노키 엘로에이카 에브타’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래 히브리어에는 동사 그 자체에 인칭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굳이 나라는 말을 사용할 필요가 없이 동사 하나로 주어가 표시가 됩니다. 그런데 종종 그 동작을 행하는 주체가 그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굳이 인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인칭 강조법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바로 그런 인칭 강조법이 사용되었습니다. ‘아노키’ ‘내가’, ‘엘로에이카’ ‘당신에게로’, ‘에브타’ ‘내가 의지하나이다’라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A. 의지함을 배움
결국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신뢰하며 살던 사람이 변하여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은 그냥 주입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고 그 분이 모든 창조된 만물의 근원이시고 나라는 존재도 그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따라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데서 오는 하나님을 향한 의존입니다. 나라는 존재, 이 세계의 기원이 발생적으로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결국은 이 세계와 나 자신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을 따라 흘러가고 그것을 성취할 것이라고 하는 점에서 목적론적으로 그 분을 의존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종종 죄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도록 요청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너에게 심각한 억압이라고 우리를 설득합니다. 그런 설득을 많이 당하고 나면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고 그 분께 순종하며 살았기 때문에 자기가 본 수많은 손해나 희생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자신이 정말 심각한 피해자가 된 것 같은 그러한 강박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사랑을 행하게 합니다. 상처받은 가족들을 용서하고 사랑하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어제 어느 한 신학교 교수인 독자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고등학교 후배이기도 했습니다. 정말 오래간만에 전화를 했습니다. 선배님 인터넷에 가족이라는 책을 쓰셨다고 하기에 얼른 사람을 보내서 서점에서 구해서 읽었습니다. 자신도 병원에 입원중이라고 고백을 하면서 그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도 이미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입니다. “목사님, 저도 2년 전까지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책을 읽고 나서 목사님하고 저의 차이를 발견했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고 목사님은 사랑하려고 노력을 하셨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렇게 긴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 책을 쓰고 나서 매일 아버지 생각에 어린애처럼 아침마다 웁니다. 아직 살아계시나요? 네. 잘 하십시오. 나중에 저처럼 많이 울지 마시구요. 이처럼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가족들을 사랑하게 하고 심지어는 자신에게 심각한 상처를 준 사람들도 용서하게 합니다.
은혜가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 때문에 그런 용서와 사랑을 베푼 것으로 만족을 합니다. 은혜가 사라지면 내가 그런 사랑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이 희생한 것이 생각이 나고 그 사랑을 받은 가족들이 얼마나 야비하게 자기의 너그러움을 이용했는지가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 때문에 사람을 사랑한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베풂을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용서하고 사랑을 베풀 때 메아리를 기대하면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냥 돌아올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을 베풀고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침마다 아버지 생각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때에는 아버지가 나에게 행한 그 모든 나쁜 일 중에서 어느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없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저는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바로 끊임없이 당신을 반역하며 살아가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종종 죄는 우리에게 독립을 가르치지만 그리고 자유를 얻도록 유혹하지만 그것을 따른 마지막 결과는 심각한 속박과 부자유와 고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진 우리를 이렇게 가슴 아픈 시련을 통해 보석과 같은 진리로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하나님보다 위에 있는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에 관해 배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언제나 그 분 아래서 복종하고 자기 자신을 낮추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속성을 배우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그 분의 끝없는 위대함 앞에서, 그 분의 완전하고 거룩한 사랑 앞에서 자신을 의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깨닫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름으로 가득 찬 인생의 길을 지나는 동안에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구속한 주 만 바라보며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B. 말씀을 찬송함
마지막으로 시인은 그런 두려움의 날에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무엇을 또 배우게 되었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고 말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하나님 안에서 그의 말씀을 찬양합니다.”라고 나옵니다. ‘아할렐’‘나는 찬송한다’라는 이 단어는 ‘할렐루야’ 할 때에 쓰인 그 단어와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찬송하다’라고 하는 단어는 반드시 소리를 내어 가락으로 노래하는 것만을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찬송의 깊은 의미는 찬송의 대상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보태거나 아첨하거나 사실 이상으로 과장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역사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됨,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바로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위대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당신의 자녀들이 이 세상의 인간들이 당신께 올리는 찬양의 내용 중에서는 새로운 사실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통해서 새롭게 그 사실을 아신 것처럼 기뻐하십니다. 이것은 당신에게 무엇인가가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하나님을 우리 마음속 깊이 의지하고 인정할 때에 우리의 영혼과 정신 안에 일어나는 어떤 변화, 그를 통해서 우리의 삶에 도입되는 어떤 변화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선 한일을 행해도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신다는 경험을 할 수 없을 것이며 실질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서 우리를 도덕적으로 교훈하시는 것이 불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시인은 여기서 그의 즉,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한다고 노래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 이 단어는 하나님의 일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의 하신 일 때문에 찬송한다는, 혹은 그의 하신 일을 찬송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존재와 그 위대한 성품들을 언제나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었지만 그 분이 언제나 그에게 베푸시는 말씀을 통해서 인생의 모든 시련의 고비들을 넘겼습니다. 피붙이처럼 사랑하던 정신적으로 유일한 혈육이나 다름이 없던 친구 요나단과의 가슴 저미는 이별의 고통도 이 말씀의 힘으로 이겼습니다. 가난한 자가 되어서 떡 한 덩이로 배를 부르기 위해 제사장에게 구걸을 해야 하는 그 끔찍한 가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겼습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을 의지하지만 매일매일 눈앞에 펼쳐지는 살해의 위협 속에서 이 시인은 그 불행한 사태를 찬송으로 이겼고 기도로 극복했습니다. 모두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의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삶의 시련을 겪을 때마다 예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새로운 말씀의 빛이 그의 마음에 찬란히 비췄습니다. 하나님의 다양한 성품이 바이올린의 현과 같다면 그가 만나는 이별과 가난, 생명의 위협과 같은 끔찍한 삶의 불행한 사태들은 그 현을 연주하는 활과 같이 그렇게 작용하였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가슴을 쓸어내려야 하는 고통스러운 삶의 사태를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위대한 성품들은 그의 마음속에 움직이는 현처럼 수많은 아름다운 가락들을 울려 퍼지게 만들었고, 고난과 시련은 그에게도 쓰라린 것이었지만 그것을 통해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속성의 아름다움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노래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그 끔찍한 인생의 위기를 통과하면서 죽음의 위협을 통과하면서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노래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선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인생을 다 던져 시련 속에서 하나님만 붙들어본 사람, 그 분의 선하심에 자신의 인생 모두를 걸어본 사람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우신 분인지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인의 말씀에 대한 찬송은 곧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찬송이었습니다. 여러분도 곤고한 인생의 날들을 지날 때에 이 시인처럼 하나님을 굳게 신뢰함으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영혼을 살리는 말씀 7 (2015.8.23 주일오전설교)
IV. 적용과 결론
시인은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육체가 내게 무엇을 하리요라는 의미입니다. ‘바사르’라고 하는 이 단어는 살, 혹은 인간의 육체를 가리킵니다. 혈육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제유법입니다. 영혼은 영원하지만 피와 살로 이루어진 우리의 혈육은 결국 시간과 공간속에서 언젠가는 사라집니다. 그래서 이 살을 가진 인간은 필멸할 존재입니다. 그래서 결국 의미는 이것입니다. 필멸할 존재인 사람이 도대체 나에게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의 하나님 앞에서 당신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나의 운명을 나를 에워싼 악인들이 바꾸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라는 확신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시인을 에워싸고 있는 악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시인을 박해하고 고통을 가하는 이 세상의 악의 질서를 통틀어 하는 말입니다. 결국 잠시 악이 이기는 것 같고 악인이 번성하는 것과 같은 때가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고야 말 것이라고 하는 시인의 확신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숙고하며 결국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그 분 안에 있기 때문에 잠시 패배할지라도 악이 그를 삼키지 못할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는 요나단과 헤어진 그 뼈아픈 외로움과 이별의 고통 속에서 선뜻 버림받은 자기에게로 가까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친근함을 경험했습니다. 떡 한 덩어리의 주림을 면하여야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을 때 도대체 누가 그 사람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부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그러나 그 가난함 속에서 시인은 왕궁에서 맛볼 수 없는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경험하였습니다. 살해의 위협을 느껴 살아있으나 매일매일 죽음에 직면하는 그 순간 수많은 무사들에게 에워싸여 왕궁에서 호위를 받을 때 도저히 경험할 수 없었던 하나님은 매일매일 자신의 생명이시라는 고백을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삶은 언제나 여러분을 속입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좀 더 나아지려나. 생각하지만 그러나 내일 살아보면 또 그 날이 아닌 또 다른 내일을 그리워하게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희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아무리 시련으로 가득 찬 인생의 어두운 날을 지내도 주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은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또 잠시 두려워하는 때를 만났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떠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두려움 속에서 교만한 여러분을 겸손하게 하고, 하나님 아닌 것들을 의지하던 여러분을 하나님 의지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시인이 그렇게 고독하고 가난하고 시련에 가득 찼던 그 모든 날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찬양했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습니다.
지난주에 했던 동일한 권면을 여러분에게 합니다. 성경을 읽으십시오. 지금은 너무 삶의 상황이 곤고하고 힘들기 때문이라고 변명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런 때에 여러분의 영혼이 위험하기 때문에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리고 그 성경을 읽으십시오. 얼마나 많이 읽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여러분이 읽는 성경의 내용에 마음을 잠그는가 하는 것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성경을 읽을 때마다 여러분 자신이 성경에 읽혀지기를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그 성경 갈피갈피에 담겨진 주님의 마음이 여러분의 마음에 스며들게 하십시오. 그러면 지금의 이 삶의 사태에서 방황하고 있는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마음이 전달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주님의 마음을 흠뻑 마시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그리고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여러분의 마음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과의 영적인 일치를 도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인생의 가장 곤고하고 시련으로 가득 찬 날에 오히려 당신의 말씀의 그늘 아래로 피하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주의 인자하심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진리를 보내심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시 43: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시편 42편과 43편은 쌍둥이 시로 불립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42편과 43편의 저자가 동일인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42편의 표제에는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받아서 요단강 건너편으로 망명의 길을 떠날 때에 그와 함께 동행 했던 한 측근이 지은 시로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은 이 시의 실질적인 저자가 다윗일 것이며 아마도 다윗의 시를 고라의 자손의 가문에서 보존하였기 때문에 이 표제가 붙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42편과 43편에 반복되는 후렴구,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라”고 하는 이 구절은 42편과 43편에서 반복됩니다.
우리가 이 모든 논쟁에 대해서 확고한 어떤 주장을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한 사실 한 가지는 시인이 지금 시련과 고난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거기로부터 구원을 하나님께 탄원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어려운 시련 속에서 영혼의 침체를 경험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 43편 시편에서 이러한 시련과 고난 때문에 침체에 가까워진 자신의 영혼이 경험하는 느낌을 두 가지를 서술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은 느낌과 자신의 마음을 압도하는 슬픔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영혼의 침체는 죄 때문에 온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주된 원인은 죄입니다마는 우리는 매우 복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이 영적인 침체의 원인도 복합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기계처럼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만물의 물상과 접촉하며 많은 지각과 인상을 겪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희로애락의 정동을 경험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기쁨과 슬픔, 좌절과 희망 사이를 오갈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시험이나 시련을 만날 때에 그 자체도 두렵지만 더 두려운 것은 그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 우리의 영혼의 상태입니다. 그것이 영혼의 깊은 침체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재를 상실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죄,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영적인 감각이 둔하여지게 됩니다. 이때 우리의 영혼은 곤고해지게 되고 결국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충만한 승리의 삶으로 엮어가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II. 빛과 진리를 보내심
A. 주의 빛
이 시인은 바로 이러한 대적들로 인한 깊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 영혼의 침체에 가까이 다가갔고, 거기서 그는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당신의 빛과 당신의 진리를 내게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소서”라고 말입니다. 그는 제일 먼저 당신의 빛을 구하였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주의 빛이라고 나오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2인칭 소유격을 사용해서 당신의 한 빛이라고 나옵니다. 히브리말로 ‘오르’라고 하는 이 빛은 아주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때때로 이 빛을 물리적인 빛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윤리적인 빛을 의미하기도 하고 신학적인 빛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또 영적인 빛을 지시하기도 합니다. 이 빛은 그렇게 단순한 물질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이슈타인도 자신의 광학이라는 책속에서 말하기를 빛은 단지 물질이 아니라 관념적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이 빛은 단순한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말 성경에 ‘주의 빛, 주의 진리’라고 되어 있는 이 부분, 히브리 성경에 ‘당신의 빛, 당신의 진리’라고 한 이 말은 어떻게 보면 같은 의미의 말을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좀 더 자세히 관찰해 보면 하나의 진리의 또 다른 측면들을 우리에게 골고루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빛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빛이 빛으로 인식되어야지만 우리가 빛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 빛이 객관적인 물질이어서만은 안 되고 그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빛이 우리 속에 와서 그 빛이 지각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시신경이 완전히 사라진 맹인들은 앞에서 섬광의 폭발이 일어나도 그 번쩍이는 빛을 지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전에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5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빛을 영접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이 어두움은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멀리 떠나 살고 있는 인간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의 그 옛날의 정체성에 대해서 말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었더니” 어두움이 사람 그 자체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빛은 자신 밖에 있는 진리가 자신의 지성 속에서 인식될 때에 그것을 빛이라고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께로부터 비취는 이런 진리의 빛을 많이 경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예전에는 진리와 상관이 없는 어두움의 삶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어둠 속에 살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임했고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만났습니다. 우리가 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에 비로소 이전에 어둠 속에서 알고 있었던 우리의 모든 생각들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예전에는 우리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인 줄 알았습니다. 우리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복음의 열쇠로 우리의 지식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거기는 찬란한 빛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가 이 모든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놀라운 질서가 이 자연과 인간의 정신, 그리고 이 모든 학문 세계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하나님의 아름다운 질서 그 자리에 있을 때에 우리가 가장 고귀하고 존엄한 존재가 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빛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빛을 몰랐던 우리의 옛날의 삶은 얼마나 비참한 삶이었는지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회심은 바로 이런 것들을 깨닫는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 어두운 우리의 지성이 열리고 찬란한 진리의 빛이 들어와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모든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신 것과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위해 만들어진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세계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하나님과의 관계, 인류와의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 바로 진리의 놀라운 힘이었습니다. 회심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던 모든 사고방식을 객관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위대한 아름다운 질서, 그 안에서 나는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속에서 의지할 수 있는 분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바로 그분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하는 삶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영적인 침체에 빠지게 될 때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진리보다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자신의 삶의 현실에서만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인을 보십시오.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억압을 당하고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어려움은 극단적인 것이었습니다. 예배할 수 있는 성전에서 쫓겨났고,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이방의 땅에서 사람들은 시인에게 물었습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때 그는 눈물로 음식을 삼으며 하나님 앞에 긍휼과 자비를 구해야 했습니다. 그는 원수들의 머리를 깨뜨리고 피바다로 만들어 달라는 그런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을 간구하는 대신 그는 자신의 영혼에 찬란한 진리의 빛을 보내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했습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자신의 영혼이 이 진리의 빛으로서만 모든 삶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삶의 상황에 있든지 간에 여러분이 이 진리의 빛이 있다면 반드시 그것을 극복하고 이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주의 진리
그는 이어서 주의 진리를 보내어 달라고 간절히 호소하였습니다. 보낸다고 하는 이 단어는 ‘샬라흐’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주인이 종들을 어디에 심부름 시킬 때에도 이 단어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심지어는 병사가 시위에 활을 먹여 적군에게 쏘는 것도 이 동사를 사용했고 용사들이 창을 던지는 것도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진리의 빛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추라고 명령하시면 비추는 빛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의 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전에는 우리가 이런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 자체가 어두움이었고 어둠 속에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들 중에 어떤 지혜로운 분들은 예술이나 문학, 철학이나 사상, 이 세상의 윤리와 도덕 속에서 어떤 희미한 빛들을 발견하고 완전히 속된 사람들과는 다른 그 어떤 참스러운 것들을 추구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시라는 것, 그 분이 인격을 가지신 분이시라는 것,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진실한 회개로 그 분의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까지 가르쳐 주지는 못했습니다. 더욱이 그것이 우리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긍휼을 입게끔 만들어주지는 못하였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때로는 생애적인 영적인 각성을 경험하고 하나님 말씀의 부흥을 체험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은혜를 오래도록 보존하고 어떤 사람들은 얼마 가지 못해서 다 잃어버리고 예전보다 훨씬 핍절한 삶을 살아갑니다.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한 10년 전에 읽은 어느 잡지의 이야기가 기억이 납니다. 어떤 한 집안에서 약 500년 가까운 세월동안 불씨를 보존해 온 이야기입니다. 성냥이나 라이터가 없던 시절에 불을 피우는 것은 대단히 고통스럽고 수고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비가 오거나 날씨가 눅눅한 날이면 불을 얻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아녀자들이 자기 집에 불씨가 없어서 누군가의 집에 불씨를 얻으러 가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 가문에 할머니는 시집와서 그 불씨를 받았는데 약 500년 동안 내려오는 불씨였다고 합니다. 하루도 꺼진 적이 없습니다. 저녁이면 밥을 하고 불을 다 땐 후에 그 불씨를 화로에 놓고 따뜻한 재를 두껍게 덮어서 불씨를 보존하면 아침에 구들장이 식고 모든 아궁이가 다 차가워져도 그 불씨는 다시 살아나서 그 불씨로 밥을 하고 그 불씨를 저녁까지 보관했다가 다시 저녁때 불을 때우고 이것을 500년 가까운 세월동안을 이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을 땔 필요가 없는데 그 할머니로부터 받은 그 불씨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괜히 불을 때서 그래서 물도 끓이고 소죽도 끓이고 하면서 그것을 보존해 오는데 자신은 죽을 때까지 불씨를 보존하겠지만 며느리와 손주 며느리들이 이것을 보존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자신은 확신할 수 없다 이런 이야기로 끝을 맺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아무리 크고 놀라워도 그 불씨를, 은혜의 불씨를 보존하는 일은 그 은혜의 불씨를 받는 일만큼이나 중요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의 불씨를 잘 보존하는 생활이 바로 순종하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자신 안에 있는 죄를 죽이고 은혜를 살리는 순종의 삶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그 성령 강림에 대해서 놀라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신 성령이라고 말입니다. 이 순종의 삶은 결국은 진리를 따르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 영적이고 초월적인 은혜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이 현실과 치열하게 싸우며 살아가는 순종하는 삶 속에서 아름답게 보존이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소원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치열하고 열렬하게 기도하려고 애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 신앙의 열렬함과 기도의 간절함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관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그것은 허공에 뜬 건축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잠언 28장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돌이켜 귀를 기울여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느니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을 알아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시는 것이 급한 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우리의 삶과 생활을 하나님께 초점 맞추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바다위에 떠 있는 돛단배를 보면 저까짓 게 몇 km나 나가랴 그렇게 생각됩니다. 그런데 바람이 한창 잘 부는 날은 그게 놀랍게도 30km~35km 이상의 속도로 달립니다. 여러분이 강변에서 타는 모터보트 같은 것 기껏 해봐야 한 50km 정도밖에 안됩니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지만 그렇게 달려주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35km 정도 되는 속도라고 그러면 얼마나 빠른 속도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돛 하나 방향을 잡아서 제대로 펼칠 뿐인데 아무 힘들이지 않고 그 바람에 그렇게 물 흐르듯이 떠내려가는 것입니다. 파도를 가르며 배가 항해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오늘 시인은 하나님 앞에 당신의 빛과 진리를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즐기고 엔조이 하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간절히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닫고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기 위해서 그 진리와 그 빛을 간절히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립니다마는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종종 우리는 사탕발림으로 복음을 변질시켜서 전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예수 믿고 내가 이렇게 성공했고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하고 궁핍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당신은 나보다 열등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당신도 나처럼 우등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도 고난과 시련은 있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때 모든 일들이 자기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인은 경건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원수들에게 에워 쌓이기를 원했습니까? 대적들로 포위되기를 그가 바랐습니까? 아닙니다. 이 사람도 평안한 삶을 원했고 행복한 삶을 원했고 그리고 여유 있는 환경을 원했습니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었는데도 이런 시련을 만났습니다. 왕위를 잃어버린 왕과 함께 요단강 망명의 길을 떠난 임금과 함께 그렇게 슬퍼하며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뇨?” 그때에 그는 대답할 말을 잃고 눈물로 음식을 삼았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것이 신앙이라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오늘 시편 43편을 쓴 이 시인 같은 사람들은 망가진 인생을 살던 인물들이었을 것입니다. 신앙의 가치와 의미는 그런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은 공과책을 한권씩 받았거나 받게 될 것입니다. 새 공과책의 이름은 “그리스도인의 아우라”입니다. 아우라는 많은 사람들이 일본말인 줄을 압니다. 일본말 아닙니다. 라틴어입니다. 영어에도 그 단어가 있는데 ‘오러(aura)’라고 발음합니다. 아우라는 원래 라틴어가 되기 전 그리스어였습니다. 고전 그리스어였고 이미 피타고라스 때부터 널리 사용되던 말이었습니다. 아우라라고 하는 이 단어는 원래 공기, 분위기, 태도, 이런 의미로 사용이 되었고, 구약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 역에서 욥기에 딱 한번 아우라라고 하는 단어가 나오는데 거기에서는 산들산들 부는 바람으로 표시가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의미가 은유적으로 사용이 되어서 어떤 사람에게서 나오는 영적인 기운, 혹은 그 존재에 어울리는 독특한 분위기, 존재감, 그런 것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우라라고 하면 매우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우라가 있는 사람들 중에는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종종 오늘날 대중과 소통하는 철학자들의 글들을 읽습니다. 그런데 읽으면서 어떤 사상들은 동조할 만도 하기도 하고 동조는 못하지만 깊이 숙고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주장점들도 나옵니다. 그런데 좀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뭐냐 하면 조금만 독특한 자기 이야기를 할 때쯤 되면 항상 욕설이 나옵니다. 이 새끼들, 자식들, 쓰레기들, 병신 같은 것들, 이런 이야기들이 책 속에 막 거르지 않은 채 쏟아져 나옵니다. 그리스도인의 아우라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 나는 이렇게 놀라운 철학적인 지식을 터득했고 인생과 그리고 역사의 이치를 발견했다. 그리고 너희들은 아직까지도 무지 속에 있다. 그리고 그것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 자식들은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다’라고 하는 그런 종류의 아우라는 기독교의 아우라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아우라는 그런 폭력적이고 대상 파괴적이고 상대방을 무시하고 폄하하는 그런 종류의 가학적인 아우라가 아닙니다. 이것을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책 속에서 유순한 지성이라고 했습니다. 오류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서도 오히려 그 속에서 무엇인가 배울 것을 찾는 사람, 이교도들에게서도 무엇인가 하나님의 어떤 희미한 진리의 조각들이 있고 그것들을 잘못 사용한다는 것을 보면서 그것을 확실하게 제자리에 갖다 둘 수 있을 리만치 배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리고 그러한 유순한 지성을 가지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완전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한없이 낮아진 아우라입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진리를 발견해 내고 그것을 발견하고 찾았다는 사실 때문에 진리 자체를 높이기보다는 그것을 발견한 자신을 높이지만 기독교의 아우라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진리의 찬란한 빛을 발견했어도 그것을 받은 것을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하고 못 받은 사람들을 그것 때문에 무시하지 않는 아우라가 그리스도인의 아우라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아우라는 항상 그런 아우라를 가진 사람 앞에 설 때에 그와 나는 다른 사람이라는 한없는 단절을 느끼지만 기독교의 아우라는 소통하고 싶은 아우라입니다. 아무리 저 사람이 신학적으로 뛰어나고 진리를 아는 지식이 탁월해도 왠지 나를 용납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종류의 사랑의 아우라입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은 이런 저런 일들을 만나게 되고 때로는 울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가슴 벅차고 기뻐하는 날들을 숨 거둘 때까지 겪으면서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이 많고 어떤 사람에게는 저것이 많을 수 있지만 우리 모두 그것을 겪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다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나이가 들면 미래와 현재에 대해서보다는 과거를 회상할 시간이 많다는 것은 정확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과거를 회고해 보면 잘 나가고 내 맘대로 되던 시기에 배운 것들은 별로 없습니다. 시련과 역경,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삶의 환경 속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선 상에서 절망의 벼랑 끝에서 배회하며 가슴이 터질 듯이 질문하고 몸부림 쳤던 어두운 날들 속에서 오히려 영적인 대안이 있고 지성적인 성숙이 있고 의지의 말하자면 무르익어감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의 유익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요동치는 우리의 삶의 수많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관통하고 있는 초월적인 어떤 일관된 의미를 찾는 것, 거기에다가 내 인생의 기대를 묻는 것, 그래서 가슴이 터질 듯한 행복한 시간이 와도 교만하지 않고 삶이 진흙창에 처박히는 것 같은 고난이 와도 거기서 그 자체 때문에 우는 대신 거기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다 살고 난 다음에 내가 왜 그렇게 살 수 없는지에 대해서 정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신앙의 힘입니다. 결국 우리는 살아있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물학적인 생존은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살아가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우리의 삶의 대해서 주체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만이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단지 생물학적으로 목숨이 붙어있는 생존의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짐승들을 창조할 때에는 간단하게 명령하셨습니다. “땅들아 그것들을 내라” 그러니까 수많은 짐승들이 땅에서 나왔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독특한 영혼을 창조하셔서 우리가 모두 같은 사람이 되지 않도록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하나님 닮은 존재가 되도록 허락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긴 인생을 살고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우리 자신이 나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된 인생이 아니면 그것은 산 것이 아닙니다. 의미로서의 인생은 정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체가 되어서 산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체가 뭐냐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매우 어려워합니다. 저도 어렵습니다. 어느 철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체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주체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자기 자신이라고 칭할 수 있는 영향을 가진 자기 안에 있는 누구 그것이 주체다”입니다. 어거스틴의 표현을 빌자면 자아입니다. 어느 날 깊은 밤 집으로 갔는데 딸 앞에 빈 과자 봉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밤중에 몸에도 안 좋은데 왜 그런 것을 먹니?” “아빠 내가 안 먹었어요.” “누가 먹었냐?”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아가 먹었어.” 그런 것 없습니다. 과자를 먹은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제가 정말 싫어하는 화법이 유체 이탈적 화법입니다. 본인이 그렇게 유체이탈적으로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책임 있는 사람은 말할 때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말 안한 것이 실제로 없는 것이 아니고 말 한 것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조용히 있어도 정으로는 소리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고 진실입니다. 뭘 그렇게 다른 사람의 눈빛에 연연해 가고 그렇게 살아갑니까? 어차피 한번 살고 죽는 건데.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기는 하시지만 대신 살아주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자살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자살 자체가 구원을 못 받은 증거라고는 신학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또 이 자살에는 수많은 다른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요인들도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경솔하게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그러나 잊지 말아야 될 사실 하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내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헤르만 헤세 같은 사람은 자신의 책 속에서 이 세상 모든 피조물 중에서 자살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유일한 존재라고 언급하면서 그것도 주체적인 결단에 의한 자유의 향유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젊었을 때 한 때 그 속삭임에 깊이 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인생을 주체성 있게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삶을 종식 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하면서 자신의 현존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에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는 자신의 고통의 의미를 못 찾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행복의 이유를 못 찾아도 결국은 자살합니다. 그러니까 이 의미를 찾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때로는 시련도 겪고 역경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미를 알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가치 때문에 가슴이 뛰었을 때에는 그 모든 고난과 시련도 견뎠습니다. 지금보다 더 나쁜 상황도 견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침체에 빠지게 되면 이렇게 자신의 현실적인 삶의 의미를 묻고 가치를 연결시키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에는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이루시는 방법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실 때 당신이 직접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기뻐하는 소원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의 의지도 그것을 하는 것을 좋아하도록 만드셔서 당신의 일들을 이루어 간다고 명백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삶에 있어서 정말 필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내가 두 발을 이 땅에 딛고 사는 날 동안 내가 써 내려가는 인생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는 누구도 대신 써 줄 수 없는 나의 인생이라는 생각을 하고 우리 모두가 톨스토이 같은 작품을 쓰겠습니까? 우리가 글을 쓰면 모두 섹스피어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모두 시를 쓰면 위대한 시인 바이런 같은 사람이 되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내 혈육으로 내 피와 내 살로 치열하게 써 내려간 나의 삶입니다. 그리고 인생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렇게 몸부림치며 진솔하게 써 내려간 그의 삶의 발자취에 대해서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그게 나의 인생과 남의 인생에 대한 예의입니다.
III. 주께 이르게 함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럴 수 있는 힘이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시편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아주 폭넓은 지식이 있습니다. 깊이 있는 지식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의 행복에 관한 담론입니다. 이 시편은 성경 66권 중 아주 독특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성경들은 대부분 객관적인 서술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 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경험들을 내적인 정동들을 그대로 토해 놉니다. 그러니까 주관적인 성격이 강하기는 하지만 그 속에서 감추어져 있던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풍부한 진리에 대한 그 인식의 빛깔들을 무지갯빛처럼 토해 놓는 것입니다.
원래 이 시편은 주전 1500년경부터 주전 1000년이나 그보다 좀 더 늦은 시기까지 다양한 저자들에 의해서 기록된 150쪽의 시입니다. 150개의 시들이 원래는 다 따로따로 작성이 되었지만 사람들이 이것을 후대에 편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질서해 보이는 시편들을 아무렇게나 묶지 않고 시편을 성질별로 분류했습니다. 그때에 그들의 마음에 딱 있던 틀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들의 모든 신앙과 삶의 기본이 되었던 율법이었습니다. 모세의 오경이었습니다. 그래서 1권은 창세기에 관한 내용이, 2권은 출애굽기, 3권은 레위기, 4권은 민수기, 5권은 신명기에 대한 내용들로 짝을 맞췄습니다. 자 이렇게 150개의 시편을 5권으로 배열할 때에 1권이 맨 앞에 오니까 1권 중에서도 첫 번째 시편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하는 것은 편집자들의 초미의 관심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편 1편의 이야기를 행복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을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이렇게 시작을 하는데 그 행복이 진리와 밀접하게 연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면서 시편을 시작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자, 그 율법을 즐거워하고 율법을 묵상하는 삶이 결국 한마디로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분의 면전에서 사는 그것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고 언약 백성의 특권이라는 사실로 시편을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은 언약 백성의 행복, 특히 영적인 행복에 대한 독특한 관점을 발전시키고 여기서 수많은 복음의 빛을 잉태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73편 28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이 곧 복이라고 아주 충격적인 선언을 합니다. 시인이 자신을 진리의 빛으로 인도하여 이르게 해 달라고 하는 곳이 거룩한 산이었는데 이것은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있는 산지를 지칭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시온이었습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언약과 은총이 보증된 곳이고 신적인 보호가 약속되어 있는 곳입니다. 인간의 공로와 인간의 재능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해서 그들에게 내리는 언약과 은총의 표인 것입니다. 시편 42편에서 시인은 예전에 성의를 지키는 무리와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올라가던 광경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발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생각하면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라고 노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수많은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어떠한 역경과 시련을 만나도 하나님의 사랑은 끊을 수가 없습니다.
영혼을 살리는 말씀 8 (2015.8.30 주일오전설교)
IV. 적용과 결론
종종 우리는 영혼의 침체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필연적으로 굴복해야 할 운명이거나 우리가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어떤 능력일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지식과 그것을 극복해야 되겠다고 하는 선한 의지입니다. 시인은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고난 속에서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상황을 바라보며 요동치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면서 매번 신앙의 언어로 자신을 설득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련과 고난을 만난 사람들 그 속에서 영혼의 위기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빛과 당신의 진리를 보내어서 이렇게 그들을 건지고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지난주에 여러분에게 권면했던 말을 반복합니다. 제발 성경을 읽으십시오. 책을 읽는 것도 좋고, 설교 테이프를 듣는 것도 좋지만 그것은 모두 반찬일 뿐입니다. 성경이 밥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루에 단 20분이라도 성경을 여러분 자신 앞에 놓고 이 세상의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고 마음을 모아서 하나님의 진리에 쏟으십시오. 천천히 천천히 성경을 읽고 그 속에 담겨진 그 성경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마음이 성령 안에서 여러분에게 전수되도록 간절히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여러분이 성경을 읽지만 이런 마음의 상태가 되면 성경이 여러분의 마음을 읽기 시작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던 자신을 발견하고 진리의 역동적인 힘이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때에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극복할 수 없는 현실들을 극복할 수 있는 영적인 에너지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지난 일주일동안 단 하루도 성경을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어느 시간이든지 성경을 읽으며 거기에서 기도 제목을 찾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던 사람들은 얼마나 소수입니까? 이제 그런 무기력한 삶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사는 것은 주체성 있는 인간으로 자기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삶이 아닙니다. 다시금 하나님 앞에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무릎에 놓으십시오. 그리고 다시 마음을 모아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이 여러분에게 진리의 빛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되어서 이 모든 삶의 상황들을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되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마음이 뜨거워질 때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부활하신 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엠마오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엠마오가 정확하게 어느 마을을 가리키는 지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우리말 성경에 ‘이십오리’라고 번역된 이 부분이 헬라어 성경에는 ‘60 스타디온’이라고 나오는데 이것을 우리말의 거리로 환산한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11km 정도 되는 거리에 떨어져 있는 예루살렘 근처의 마을이었습니다. 글로바라는 사람이 여기에 등장하는데 주석가들은 이 글로바가 어쩌면 요한복음 19장 25절에 나오는 사람과 동일한 인물로서 예수님의 육신의 부친인 요셉의 형제가 아닐까 하고 추측을 합니다. 아무튼 예수님이 이 두 사람을 만난 날은 바로 24장 1절에 나오는 안식 후 첫날 예수님이 새벽에 무덤을 찾은 여인들을 만나 주신 것과 같은 날로 여겨집니다.
II.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 두 사람은 무엇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거기에 예수님이 동행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분이 예수님인지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의 화제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었습니다. 글로바가 또 한 사람에게 예루살렘에서 된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무엇에 대해서 말하느냐고 대화에 끼어드셨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였던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거기 요즘에 일어난 일을 당신 혼자만 왜 모릅니까?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로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분이라고 우리는 생각했고 모든 말과 일에 능하신 분이었는데 그 분이 사람들에게 모함을 받아 사형 판결에 넘겨졌고 죽으셨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예수님의 시신을 찾으러 갔던 여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는 그 무덤에 안 계시다는 사실을 전해주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그 여자들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꾸짖으며 “너희는 참 미련하구나. 그리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구나.”라고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책들을 인용하면서 거기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들을 상세히 풀어서 해설해 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때까지도 그들은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이 유숙할 집까지 거의 이르게 되었을 때 예수님은 더 가시려고 하였습니다. 깊이 몰입하며 예수님의 성경 이야기에 빠져든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 간청하여 함께 유숙하자고 청했습니다. 아마도 숙소에 들어가서 다 못 다들은 성경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드디어 숙소에 들어왔고 계속 이야기는 이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식사할 때 떡을 떼어 축사하며 그들에게 나누어 주실 그때에 그들의 영안이 밝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껏 자신들과 함께 대화를 하신 그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자마자 예수님은 즉시 사라지셨습니다. 이 분은 육신을 가지셨지만 이 육신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그 육신이 아니었습니다. 몸과 살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은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영광의 몸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그 맛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랫동안 교회 생활을 자신의 종교로 삼으면서도 기독교의 중심적인 대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예수는 믿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자신의 인생 전체를 실어 얹을 만큼 무엇인가 확신이 없습니다. 도대체 기독교의 대의가 무엇이고 기독교 신앙의 골격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결국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모두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오래전부터 성경을 읽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신약 성경을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구약 성경을 그들은 읽습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많은 유대인들은 그 구약성경을 통해서 진정으로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싶어 했던 이 세계와 인류를 향한 경륜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눈이 어두워져서 구약 성경이 명료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에 대한 생각이 없이 성경을 읽기 때문입니다.
종종 유대인들 중에 구약을 연구하다가 이사야서 53장 같은데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읽으며 가톨릭으로 혹은 개신교로 개종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희귀합니다. 결국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의미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구약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예고하고 있고 신약 성경은 이것을 증거하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사랑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것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심을 경험하거나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체험하고 회심의 경험이 갱신되었을 때에 그때에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성경을 뜨겁게 사랑하는 심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성경을 읽는 것이 숙제처럼 느껴지지 않고 마음에 기쁨이요 위로와 안식을 얻는 시간이 되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여러분이 만약에 성경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리고 성경을 읽을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상실했다면 오늘 이 사람들처럼 희망 없이 슬픈 기색으로 엠마오로 가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마음이 뜨거워졌던 것처럼 다시 여러분이 은혜를 받고 새로워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마음이 뜨거워 질 때
오늘 성경에 보면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나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사라져 버린 다음에 두 사람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경험했던 내적인 체험들을 서로 간증하면서 은혜를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냉랭하고 식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는 했지만 확신이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을 구원해 줄 이스라엘의 메시야라고 하는 희미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에 그들의 마음이 혼란스러워졌고 그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도 그것이 정말 사실일까 아닐까 그러면 다시 살아나신 것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또 죽고 다시 살아나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방법이 될 것인가 하는 것들은 그들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할 수 없이 삶의 목적도 잃어버린 채 그들은 엠마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A. 성경을 풀어주실 때
그러던 그들의 마음이 확신에 불타고 그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언제였습니까? 오늘 성경에 보면 “성경을 풀어주실 때”라고 했습니다. ‘풀어주다’라고 하는 이 단어는 희랍어로 ‘디아노이고’라고 하는 단어인데 ‘완전히 열어 보이다’ 그런 뜻입니다. 무엇인가 가려져 있고 감추어져 있던 것을 뚜껑을 열어서 아무것도 감춘 것이 없이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그들도 성경을 읽었고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성경은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그 성경을 완전히 열어젖혀서 그 속살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이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고 그 분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은혜를 받으셨는지를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직접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성경을 풀어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마음이 다시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다시 구약성경을 해석해주시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해주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이 제자들에게 하시던 그 말씀이 신약 성경으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신약 성경은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옛 계시, 구약 성경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것들을 풀어서 상세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구약을 해석했고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해설함으로써 구약성경이 우리에게 예고한 바를 가르쳐 알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이 성경을 이해하는 첩경입니다. 사랑하는 이 두 사람은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왜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는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그 마음속에 깊은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또 그 분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있었는데 지금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더 혼란스러운 것은 죽으신 그 분이 다시 살아난 것을 본 사람들이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혼란스러웠고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다양한 삶의 상황을 만납니다. 때로는 자기 원하는 대로 인생이 펼쳐지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매일 눈뜨면 전개되는 우리의 삶의 상황이 우리가 원하는 상황이 아닙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결국은 그런 삶의 상황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보다 더 나은 상황에 도달해 보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불행의 요인은 제거하고 행복해지고 싶어 하고 고통의 원인은 없애버리고 행복을 찾고자 합니다. 그러나 마치 깊은 수렁 속에 빠진 사람이 몸부림치면 몸부림칠수록 수렁과 몸 사이에 공간이 생기면서 몸이 더 깊이 빠져들어 가는 것과 같이 무엇인가 우리는 혼란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삶의 상황에서 우리 스스로 어떤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허우적거리지만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때에 정말 필요한 것은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상황을 우리 자신의 눈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어두운 시각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에서 주님의 시야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자신의 삶의 상황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던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될까요? 어떻게 자신의 힘으로는 헤어 나올 수 없는 그 허우적거리는 삶의 상황에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서 떨어졌는지, 그리고 지금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이 인생의 고통과 시련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으로 가능해질까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성경을 직접 읽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 받은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가 그 성경을 풀어서 설명해 줄 때에 놀라운 은혜를 받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많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탁하셨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이 약속하신바 성령님의 강림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순종해서 많은 제자들이 오순절 날이 이를 때까지 열렬히 오직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때에 성령이 홀연히 임하셨고 그 성령이 임하셔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은 그 모여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서슬 시퍼렇게 예루살렘에 번져가고 있는 유대인과 로마의 박해를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이 없어진 것,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문을 내는 것에 극도로 예민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핍박의 소식이 이미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도 보았고, 승천하시는 것도 보았지만 그러나 그 분이 왜 메시야이신 그 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했고, 죽으시도록 하나님께 버림받으신 그 분이 어떻게 부활하셨는지, 부활하신 그 분이 무엇 때문에 자기들을 버려두시고 홀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시는지 그들은 혼란스러웠습니다. 엠마오로 올라가던 이 두 제자처럼 그들에게도 역시 똑같은 두려움과 슬픔이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런데 성경님이 오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마음속에는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는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완전히 새롭게 살아났습니다. 모든 두려움을 뿌리치고 그들은 그 다락방에서 뛰쳐나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먼저 그들이 선포한 것은 구약에 나타난 메시아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해석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성령님이 그들의 전도와 선포에 함께 하셨고 이것을 들은 사람마다 은혜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느 날 “집어라, 들어라, 읽어라”라고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달려가 편 성경이 로마서였습니다. 이것을 읽고 그가 놀라운 회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음성을 듣고 로마서를 펼치기 전 이미 상당한 기간 동안 밀라노에 머물면서 존경하던 암브로시우스의 성경에 대한 해석을 읽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웨슬리는 일찍이 목사가 되었고,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아메리카를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고 돌아오는 길, 배는 큰 폭풍을 만났습니다. 침몰할 것처럼 널뛰는 그 배에서 그는 죽음에 대한 극도의 공포 때문에 마음이 야위어졌습니다. 배 한편에 요동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평화롭게 찬송하며 기도하는 무리들을 보았습니다. 모라비얀 교도들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자신의 신앙이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올더스게이트(Aldersgate)에서 마르틴 루터의 주석 서문을 읽다가 성령을 체험하게 됩니다. 성경에 대한 풀어놓은 해석을 읽다가 주님을 깊이 체험하게 된 사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은혜를 받는 것과 성경을 잘 푼 설교, 혹은 경건 서적, 혹은 주석을 읽으면서 받는 이 은혜는 순환적입니다.
저는 몇 주 동안 여러분에게 매일매일 성경을 읽도록 강조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은 목회자의 권고를 따라서 매일 성경을 읽기 시작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 상당히 많은 분들은 성경을 읽어도 그냥 무감각하다라는 느낌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현재 여러분의 영혼의 상태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한번 지난날을 회고해 보십시오. 언제 성경을 아주 열렬히 읽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을 읽다가 마음이 뜨거워지고 감동을 받고 기뻤던 때가 언제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설교 시간에 졸 때였습니까? 세월이 많이 흘러도 책 한권 읽지 않던 시절이었습니까?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던 때에 여러분이 성경을 읽으면 그렇게 폭포수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질 때가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읽을 뿐만 아니라 설교를 귀 기울여 듣고 성경을 잘 푼 경건 서적들을 읽으며 마음에 경건한 온기를 회복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마음이 뜨거워질 때
두 번째 오늘 성경은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뜨겁지 아니하더냐”라는 이 말이 희랍어 성경에는 ‘카이오 메네’라고 나오는데 히브리서 12장 18절, 요한계시록 8장 8절에는 ‘불붙는’이라는 말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불붙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 어둠 속에 장작더미가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누군가 거기다 불을 질렀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이 차가운 장작은 열을 내며 타기 시작합니다. 캄캄하여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그곳에 밝고 찬란한 빛이 비취기 시작합니다. 장작은 점점 사라지지만 거기서 나오는 뜨거운 열기는 또 다른 물건에 옮겨 붙어 그 불길을 지속적으로 타오르도록 만듭니다. 고체를 액체로 바꾸고 액체를 기체로 만들어서 날려 버립니다. 이게 바로 불타는 것이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그렇게 타는 은혜의 불길은 우리의 잘못된 옛 본성, 더러운 본성을 불태워 사라지게 만들고 그리고 우리 마음에 없었던 새로운 본성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질 때에 그런 마음이 뜨거워지는 변화를 가져온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였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메시지였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지식과 성령의 감화로 뜨거워질 때에 우리의 생각이 바뀌게 되고 우리의 사랑의 방향이 바뀌게 되고 우리의 연약했던 의지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올바르게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의지가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올바른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가장 나쁜 상황에서도 지식적으로는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선택할 수는 있습니다. 물론 넓게 보면 그렇게 알고 선택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말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셔도 많이 배우고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이 정확한 선택을 합니다. 그런 정확한 선택을 할 때 선택은 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실현할 능력은 없습니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선택은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실현할 힘은 없습니다. 더욱이 주님을 사랑하는 동기에서 그것을 실현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의지의 무능력한 상태를 하나님의 은혜는 다시 의지가 힘을 갖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이런 의지의 놀라운 변화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은 마치 돌가슴 철마음 경연대회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신앙의 근본적인 대의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진실하면 진실할수록 거기에는 기쁨과 슬픔, 탄식과 후회 같은 인간의 수많은 감정들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동반될 감정도 없는 것입니다.
저는 결혼하고 나서 한 번도 개를 키운 적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개를 키우자고 하던 때가 몇 번 있었지만 제가 반대했습니다. 개를 싫어해서라기보다는 어렸을 적에 기억들이 늘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만 해도 우리 집에 개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개가 있다 혹은 죽으면 다른 개가 들어오고 해서 늘 강아지하고 살았습니다. 돌아가신 할머니도 강아지를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개가 꼭 죽습니다. 그 당시에는 집집마다 쥐가 엄청 많았습니다. 오죽했으면 초등학교 애들한테 숙제를 내줄 때 지금 아마 그런 숙제를 내주면 소송 들어갈 것입니다. 그 성냥갑에다가 파리를 가득 잡아오고, 쥐꼬리를 10개씩 잘라가지고 오라는 숙제를 내줍니다. 그것을 운동장에 쌓아놓으면 막 한보따리가 됩니다. 거기에다가 석유를 끼얹고 태우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쥐가 많았습니다. 집집마다 쥐약을 놓는 것입니다. 꼭 개가 그것을 먹고 죽습니다. 그러면 며칠 동안 밥을 못 먹을 정도로 특히 어린 아이의 마음에 슬픔에 잠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울고 그럴 쯤이면 할머니가 새로운 강아지를 가지고 오십니다. 그러면 다시 그 놈에게 정을 붙이고 또 하고 그게 너무 아픈 기억으로 남습니다. 그래서 개를 안 키웠던 것입니다.
아니 강아지 새끼하고 같이 살아도 그렇게 잃어버리면 울고 다시 만나면 기뻐하고 그런 것이 인간사는 것인데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면서 산다고 하는 사람들이 어쩌면 그렇게 망부석같이, 돌부처같이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잃어버려도 눈물이 없고 다시 찾기를 그리워하는 탄식도 없고 또 그것을 찾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도 없고, 그 사랑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눈물겨운 후회나 반성 같은 것도 없고, 그게 무슨 신앙생활이 그런 것이 있습니까? 너무 지성적이고 너무 차분해서가 아니라 한마디로 쳐버리면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주님의 생애는 우리를 사랑하신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통곡하며 우실 때도 있었고, 가슴 벅차도록 기뻐하신 때도 있었고, 마음 깊이 끓어오르는 슬픈 분노를 우리에게 표하실 때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 잡히시던 날 밤에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의 소원을 하나님 아버지께 올렸습니다.
한번 우리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봅시다. 성경을 읽으라고 지금 7주째 여러분에게 설교하고 있지만 아직도 한 주간동안 성경을 읽지 않은 채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그것도 겨우 형식적으로 읽으면서 그 의무도 채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세상에서 먹고 입고 마시는 일에 대해서는 좋아하고 기뻐하고 눈물을 흘리고 분노하고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우리에게 일어났습니까? 지난 한 주간 동안에도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 때문에 눈물 흘린 적이 있습니까? 그 분이 우리를 위해 버리신 십자가의 그 죽으신 자신의 목숨, 그 분이 이 세상에서 당하신 고난, 그리고 오늘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우리와 함께 그 남은 고난을 받으시는 머리이신 그리스도 때문에 슬퍼한 적이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신앙은 사랑입니다. 그 신앙의 깊이는 사랑의 깊이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고 큰 권력을 손에 넣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여러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시베리아 벌판과 같은 냉기가 교회에 가득하게 되었을까요? 예전에 그렇게 피 끓는 열정을 가졌던 사람들이 싸늘하게 식은 마음이 된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왜 그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던 그 마음이 변하여 그렇게 냉랭한 사람들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은혜의 체험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슬픔과 실망에 가득 찬 채로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될 지도 모르면서 그냥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성경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신학적인 의미를 깨닫게 되었을 때에 그들의 마음은 기쁨으로 뜨거워졌습니다. 그리고 불붙었습니다. 예전에 있는 회유와 근심, 염려와 고통을 모두 태워버렸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희망과 열정으로 다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하는 또 다른 증인들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영혼을 살리는 말씀 9 (2015.09.06 주일오전설교)
IV.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낙심과 혼란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인생길을 지나고 있습니까? 그것이 여러분도 싫을 것입니다. 그 상황을 개선해 보자 몸부림치고 허우적거리지만 그럴수록 신앙의 항구에서 멀어져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다시 성경을 읽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을 담아서 대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풀려진 설교와 책을 가까이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그 뜻을 이해하는 것을 다시 좋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오늘 이 사람들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그들의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자신의 인생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목적이 없었던 삶에 목표와 의미가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다른 것이 이 놀라운 일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주셨기 때문에 그 해석을 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새롭게 터득했기 때문에 그들의 냉랭한 마음은 다시 불타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오늘부터라도 성경을 읽으십시오. 이 세상에 모든 들리는 것들, 보이는 것들로부터 모든 스위치를 끄고 홀로 있는 고요한 시간에 성경을 읽으십시오. 무목적하게 율법적으로 성경을 읽지 말고 성경을 읽으면서 그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를 힘쓰십시오. 거기서 깨달은 주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오늘 엠마오로 가던 이 두 사람처럼 실망과 슬픔으로 가득 찬 여러분의 마음이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말씀으로 고치심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 107:2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시편 107편은 제 오 권을 시작하는 첫 머리에 놓여있습니다. 이 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고 또 포로로서 귀환하는 모든 역사적인 상황을 돌아본 시입니다. 이 시는 이스라엘이 한 사람으로 의인화되어있고 그 사람의 개인적인 신앙의 경험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상황과 하나님의 그들을 훈련시키시는 정황들이 드러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았습니다. 아주 보잘 것 없는 작은 집안이었는데 그 집안 식구들이 애굽에서 거대한 민족을 이루게 되었고, 나라를 형성하였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비참한 노예살이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지극히 큰 능력으로 그들을 해방시켜 광야의 길을 모두 지나게 하시고 결국은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정복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살도록 복된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마는 곤고한 시기를 지날 때가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아 구원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과 이 땅의 모든 좋은 것을 기꺼이 주시는 분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곤고한 인생을 사는 것처럼 말입니다.
II. 인생이 곤고할 때
A. 곤고한 상태
사람이 곤고한 인생의 시기를 지날 때에 그들은 그 곤고함의 원인을 이 세상의 환경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찾습니다. 무엇인가 이 세상의 자원이 충분히 주어지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개선이 되면 충분히 자신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인생의 사태를 표면적으로 본 것입니다. 그 모든 삶의 사태를 관통하는 진실은 이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 진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메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흑암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 말고 ‘호쉐크’라고 하는 단어인데 자연적인 어두움을 가리키기도 하고, 윤리적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난 어두운 생활을 의미하기도 하고, 영적으로 신학적으로 어두워져서 무지무각한 상태에 있는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사망의 그늘은 두 가지 단어가 하나로 합쳐진 것인데 어떤 죽음의 위협이 있는 그러한 절망적인 상태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이 시를 기록할 때에 마음속에 있었던 것은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지하의 감옥에 온 몸이 쇠사슬에 묶인 채 언제 사형이 집행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구금되어 있는 어떤 죄수를 연상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쇠사슬은 죄수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얽어매놓은 사슬인데 이것은 결국은 그러한 곤고한 상태가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운명적인 굴레에 씌워진 것 같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한정된 일이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이러한 곤고한 인생의 길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곤고하다고 하는 것은 단지 환경적으로만 어렵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환경적으로 아무리 어려워도 마음이 기쁨과 소망으로 넘치고 충만한 믿음으로 살면 그것은 곤고한 것이 아닙니다. 저도 인생을 살면서 객관적으로는 살을 에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시기를 지났어도 주님의 은혜가 충만했기 때문에 말할 수 없이 행복을 느끼며 인생의 한 터널을 지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곤고한 것이 아닙니다. 곤고하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삶의 상황을 스스로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이 없는 그런 탈진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곤고한 때를 지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다 행복을 찾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곤고한 상태가 되면 그 상태에서 그저 멸망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그 상태를 개선해 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지만 그런 우리의 노력들이 아주 좋은 열매를 거두는 것은 극히 드뭅니다. 그리고 대부분 잠시 잊었다가는 다시 크게 떠오르고 잠시 극복하는 것 같았다가는 이전보다 더 깊은 영혼의 침체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의 인생의 곤고한 원인을 궁극적으로 해결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B. 곤고한 원인
오늘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곤고한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를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앞에서 사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자녀들에게는 어떠한 인생의 위기나 어려움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인생의 난관을 겪었고 시련의 골짜기를 지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다윗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났노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그 모든 인생의 시련보다 더 크게 그들을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왕궁에서 행복하게 살던 사람들보다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 오히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무엇인지, 그 사랑과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바로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하여 주님이 여러분을 불러내신 것입니다. 돈 많고 잘 살고 그리고 넉넉한 환경 속에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기 때문에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곤고한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하는 우리는 모두 무지한 상태에서 고난을 당하는 욥이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다고 그렇게 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단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력으로부터 떠나게 되면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불순종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의 법도대로 사는 일이 너무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유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 자유가 처음에는 정말 자유이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 자유는 속박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바깥에서 자유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진정한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이미 알았기 때문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눈물로 우리의 지난날들을 회개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 일단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이 사라지고 나면 진리로 말미암는 감화도 함께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위기의 때에 하나님이 주신 그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격과 감사를 안겨주었을 것입니다. 최소한 250만 명에서 300만 명 정도는 되었을 그 어마어마한 인구가 매일 먹을 양식을 이전에 어떤 조상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해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이제는 그렇게 매일 새벽마다 내리는 만나가 맛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을 때 일용할 양식을 위해 이른 아침 바가지를 들고 그것을 거두기 위해서 광야로 가는 일이 즐겁지 않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에 그들의 입속에서 그렇게 맛있던 만나는 맛대가리가 없는 음식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랬을 때에 그들의 마음속에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시절에 맛보았던 수많은 음식들에 대한 정동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왜, 부추, 마늘, 고기 같은 것들을 먹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에 그것은 단순히 음식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이미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의 미각을 상실해 버렸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한 주님의 준엄한 책망은 단지 음식에 대한 불평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관계에 있어서 중대한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살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은혜를 받고 그 하나님의 진리에 의해서 우리 자신이 매일매일 새로워지지 않고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뜻을 좇다가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을 생각하고 자기의 뜻을 꺾는 것 언제 일어납니까? 내 맘대로 살기를 고집하다가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겠다고 결단을 내는 일들이 언제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을 때가 아니면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단지 환경과 인간관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 기쁘고 즐거운 일을 만났을 때나 슬프고 외로운 일을 겪을 때나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말씀 앞에 감화를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우리가 매순간 주님의 뜻을 거슬러 살려고 하는 우리 자신의 의지를 꺾고 주님의 뜻을 좇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곤고한 두 번째 원인은 지존자의 뜻을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이 ‘지존자’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말로 ‘엘리온’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성함중 하나로서 지극히 높으신 분, 모든 만물위에 아주 뛰어나신 분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모든 만물위에 모든 인간들 위에 높임을 받으셔야 할 그런 탁월하신 분이시고, 그 분이 아닌 모든 것들은 그 분이 세우신 질서를 따라 자기 자리를 찾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엘리온’, 지존자이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수시로 그 지존자를 멸시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뜻 지존자의 뜻이라고 했는데 이 ‘에차’라고 하는 단어가 바로 시편 1편 1절에 나오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라고 할 때 바로 그 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계획 경륜, 의지 이런 것을 가리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독점적인 사랑을 힘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나라를 잃어버리고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된 것은 그들이 이 높고 지존하신 분의 뜻을 멸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을 붙들 때에는 여러분의 삶의 방향이 명료합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비록 이 지구 한 모퉁이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아가고 있지만 나같이 아무것도 아닌 인간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서 삽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이 되거나 혹은 모든 사람이 웅장한 박수와 갈채를 보낼만한 그런 커다란 어떤 사건에 개입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역사는 기억 못하고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지만 어떠하든지 자신이 있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사는 그런 삶, 그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자기 부모를 용서하고 자기의 자녀들은 진심으로 사랑하고 한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길이 남을 아주 위대한 섬김입니다.
요즘은 자식들이 부모에게 효도하지도 않고 부모도 자식을 그렇게 자신의 살이나 피를 나눈 자식처럼 사랑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는 수많은 이야기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부모가 되었는데도 자식을 버리는 이야기입니다. 자식인데도 부모를 버리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살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의 인생에 빛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유명해지고 이름을 내어본들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것이겠습니까? 한 사람이 자기는 사실은 그러한 존재가 되지 못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내고 그를 높일 때 결국은 나무 위에 높이 올라가는 원숭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밑에서 하늘을 쳐다보면 원숭이 시뻘건 궁둥이 밖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하든지 나의 삶의 진정한 가치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주님이 나에게 부여해주셨다고 믿는 내 인생의 목적을 따라서 확신 있게 살아가는 사람은 삶의 아우라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체가 아주 웅장한 선포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결국 우리는 이렇게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의 구원의 계획에 따라서 살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지속적인 감화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든지 자신의 뜻을 좇아 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마음에 사라졌을 때 계시는 상식에 의해 대치되고,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지식은 느낌으로 바뀌게 마련입니다. 옛날에 물론 주님을 깊이 만나셨을 것입니다. 옛날에 말씀의 은혜를 받으셨을 것입니다. 옛날에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은 지나갔습니다. 옛날에 성인이 지금 악인이 될 수 있고 옛날에 악인이 지금 성자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신자의 일생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일생 살았던 중에서 자랑스러운 한 토막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 중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그분으로부터 큰 상을 받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 중 모든 사람 중 한번쯤 신앙을 위해 목숨을 걸지 않았던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옛날이고 그 과거에 화려했던 신앙의 경험이 오늘 여러분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 앞에서 가슴 벅차도록 감격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은 지존자의 뜻을 멸시하는 사람들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중심성을 버리고 하나님의 신율적인 사고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한 순간에 해결이 되는 문제가 아니라 매순간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고 성령의 인도받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막 살아버리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살기에는 너무 깁니다. 회심하고 1년만 잘 살다 죽으라면 누구든지 잘 할 수 있겠는데 얼마를 더 살지 모릅니다. 어린 아이처럼 진실했던 사람이 아주 추루한 사람이 되고, 젊은 날에 그렇게 순수한 눈물로 어린 아이 같은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들이 이제는 차라리 저 사람이 그때 그 사람으로 머물렀으면 얼마나 좋을까? 무엇 때문에 저 사람이 저렇게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을까? 무엇 때문에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일을 하게 되었을까 후회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렇게 큰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순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여러분은 왜 인생을 살아가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은 무엇입니까?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사람들, 세상에서 짓밟히고 실패해서 낙오되었던 사람들이 이제 교회에 와서 자기의 뜻을 꺾는 것을 배워야 하는데 그것을 배우지 못한 채 세상에서 자기를 임금 삼으며 살던 습관을 교회에 와서 똑같이 하려고 할 때 그때 그는 매우 불행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감화를 상실할 때 우리는 자신의 뜻은 지극히 받들지만 여호와의 뜻은 쉽게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신자의 영혼은 곤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C. 곤고한 결과
그 곤고한 결과가 13절에서는 세상에서는 환란과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12절에서는 그 시련으로 말미암아 엎드려졌지만 돕는 사람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환란과 고통을 당하게 되었을까요? 왜 그렇게 엎드려졌지만 돕는 사람이 없이 버려진 사람이 되었겠습니까? 결국은 자기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불순종의 길을 갖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하나님 없는 행복을 추구하고 하나님 바깥에서의 기쁨을 찾았지만 돌아온 결과는 환경과 영혼의 깊은 침체였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모든 꾀와 지혜를 다해 몸부림쳐 본 후에 아무것도 자신을 도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후에 그들은 비로소 고통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게 바로 선택받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지만 영원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비로소 자신이 당한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난 힘이며 자신의 힘으로는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는 소싯적에 가졌던 그 믿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간절히 구하게 되고 거기서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의 기도가 터쳐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긴 세월동안 자신들이 고통을 당하고 시련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하시던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드디어 구원의 행동을 개시하기 시작하는 것도 바로 이때입니다. 그래서 갈망하지 않던 사람들을 하나님을 향해 갈망하도록 만드시고, 인생의 위기와 시련 속에서 하나님 없는 삶을 살며 인생의 해결을 꿈꾸던 사람들을 변화시켜서 하나님을 갈망하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III. 말씀을 보내심
그 방법을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 도다”라고 말입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십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을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흑암처럼 캄캄한 그들의 마음에 진리의 빛을 보게 해주십니다. 그리고는 절망적인 사망의 그늘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을 비추어주십니다. 하고 싶어도 도저히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운명처럼 얽어 매였던 쇠줄을 끊으심으로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 무지와 절망적인 운명적인 불행의 상태로부터 이끌어 내시고 얽매인 온갖 부자유한 사실들을 끊어버리시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제일 먼저 이 일을 어떻게 하시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시련을 만나고 곤고한 인생의 길을 걸을 때에 늘 하는 실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자신은 항상 옳고 있고 자신은 그 자리에 계속 있고 자기를 둘러싼 환경만 바꾸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렇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는데 이상하게도 그럴 때에 그 기도는 대부분 응답되지를 않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결국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게끔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보내어서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은 그런 불행한 삶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깊은 삶의 수렁에서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결국 끊임없이 실패하는 우리의 삶의 근원적인 원인은 우리의 잘못된 본성에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가 언제입니까? 교만했던 마음이 낮아지고 하나님이 아니라 이 세상을 향한 갈망으로 가득 찼던 그의 마음이 깨뜨려지게 되는 것이 언제입니까? 진공 상태에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묵상에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아닙니다. 진리의 빛이 그에게 비치지 않는 한 그에게는 어떠한 변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의 말씀의 빛이 그의 마음을 비출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이 모든 실패가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이 무거운 십자가가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도저히 자기 스스로를 고칠 수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자신도 어떻게 고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운명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고백과 함께 주님 앞에 치료하시는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치료한다는 단어가 의사가 환자들을 치료할 때 사용하는 바로 그 단어입니다. 그 하나님이 결국 그런 불행한 처지에서 곤고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을 하나님이 바꾸시기 시작합니다. 고치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30대부터 사업을 한답시고 해서 늘 실패만 하던 사람이 한 15년쯤 지나고 난 다음에야 하는 말이 이제야 내가 왜 사업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사람은 항상 자기편입니다. 그래서 인간으로서의 한 인간의 성숙함은 자기를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의 크기입니다. 근데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일을 해야지만 정확하게 반성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보내어져서 그 말씀 앞에서 자신을 깨닫고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 망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가 고침 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깨닫는 것, 그 깨달음의 크기만큼 하나님이 우리를 그런 환경의 깊은 시련 속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환자를 심방하러 갔을 때 빼놓지 않는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사람의 육체를 고쳐주시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이 사람의 마음도 고쳐달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건강을 회복했을 때에는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까지도 하나님을 향해 건강을 회복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잘못된 성품, 곤고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우리의 망가진 성품에 대해서는 거의 포기하고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이러한 우리 자신의 본성이 고쳐져 본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바꾸어 놓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다른 방법이 아니라 말씀하심으로써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그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할 때마다 세상을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모든 산과 바다, 하늘과 끝없이 펼쳐진 대지, 폭풍과 바람, 모든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말씀 한 마디로 이 모든 것을 없는데서 있게 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하기 위함입니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곤고하고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눈을 들어 산을 보았던 이유입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노래했던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번 주일에도 여러분에게 촉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던 그 신앙의 때로 돌아오십시오.
오늘 여기 ‘위험한 지경’이라고 번역된 히브리말로 ‘쉬히트’라고 하는 이 단어는 예레미야애가 4장 20절에서 ‘구덩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 도구가 없이 버려진 한 사람이 한 10m 깊이의 웅덩이에 홀로 빠져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위에서 누군가가 밧줄을 던져주지 않는다면 그는 거기서 굶어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로 자신의 힘으로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피가 맺히도록 몸부림을 쳤어도 실패했고 수없이 그 구덩이에서 벗어나오고자 까치발을 뜨고 벽을 기어올랐지만 끊임없이 떨어져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포기할 때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아들을 주시기까지 그렇게 사랑하셨던 하나님이 나를 왜 이 깊은 곤고한 인생의 웅덩이에 두셨을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매일매일 눈앞에 전개되는 출렁거리는 삶의 상황들이 아니라 여러분을 그 깊은 웅덩이에서 궁극적으로 건져내실 높으신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런 인생의 위기 속에서 절망적인 몸부림 속에서 곤고한 처지에 놓여있는 인생들에게 하나님이 말씀의 밧줄을 보내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 자신이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없이 인생을 살겠다고 하는 것은 자만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 자만한 삶에 결국은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옛날에 신앙생활을 잘했기 때문에 오늘 상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보다 더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그 십자가의 사랑에 깊이 붙들려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IV. 적용과 결론
여러분에게는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일단 모든 할 말을 접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모든 이 세상의 풍파와 근심, 들뜬 마음과 유혹으로부터 마음을 접고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다가가십시오. 그리고 성경을 읽으십시오. 매일매일 성경을 읽으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책을 펴고 거기에 마음을 깊이 복종시킨 채 우둔한 나의 영혼이오니 나의 영적인 눈을 열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성경을 차례대로 천천히 읽으십시오. 말씀을 얼마큼 읽었다는 자랑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기까지, 그 하나님의 말씀의 음성 속에서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눈물을 볼 수 있기까지,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탄식을 느낄 수 있을 때까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기쁨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까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잠기시기 바랍니다.
35년 가까이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만큼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한 가지 일을 35년을 했는데 맨손으로 올라온들 한 시간을 못 때우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아닙니다. 매순간 마음을 다잡습니다. 개척교회 할 때보다 설교를 준비하는 시간이 두 배 내지 세배 늘었습니다. 만약에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셨다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빛을 받고 더 찬란한 빛으로 나아가시게 하기 위함이지 이제 그만한 빛을 받았으니 이제 우리 어둠속에서 한번 살아보자 하고 물러가 침륜에 빠지게 하려고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주신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뭐 대단한 공동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땅에 기라성 같은 교회들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화려한 예배당에서 진리의 불꽃을 끄시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오늘날 관광객 입장료나 받는 건물론 전락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교회에서 모든 것을 가져가셔도 항상 그 안에 진리의 빛이 찬란하게 비치도록 도와달라고 목숨을 걸고 기도했던 이유입니다.
영혼을 살리는 말씀 10 (2015.09.13 주일오전설교)
성경에는 이 위험한 지경이라는 말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두 번 이런 위기를 겪은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위기를 겪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을 보내시면 그들을 고치셨고, 고치실 때는 항상 그 위험한 지경들에서 그들을 건져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만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놓여있는 고통스러운 삶의 상황, 자신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깊은 웅덩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속에서 여러분의 마음을 일깨워 예전에 깨달았던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게 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의 뜻을 여러분에게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으십시오. 마음을 한번 비워보십시오. 그리고 성경을 매일 읽고 은혜를 받으십시오. 만약에 여러분이 정말 혼란스럽고 인생이 곤고한데 어떻게 이것을 극복해야 될지 알 수 없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자신에게 적합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서 조용히 성경을 해설한 설교를 읽다가 보면 다시 마음속에서 성경을 알고 싶다는 뜨거운 열망이 솟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갈 때 하나님은 비로소 그들을 말씀으로 고치시고 여러분이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삶의 위험한 지경에서 건져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지난날을 회상하며 하나님의 인자와 은혜를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말씀 없이 불안과 염려, 그리고 불평과 괴로움 속에서 절망으로 인생을 마치시겠습니까? 아니면 말씀의 찬란한 빛으로 다시 한 번 나아오시겠습니까?
여호와께 돌아올 때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의 말씀을 청종하리니”(신 4:3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신명기는 모세가 남긴 다섯 권의 성경 중 마지막 책입니다. 모세가 이 신명기에 기록을 남길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 40년의 광야의 방황을 끝내고 가나안 정복을 눈앞에 둔 때였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은 역사 속에서 가장 순수하고 고양되었던 때였습니다. 애굽에서 떠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었고 광야에 태어난 세대들이 주축을 이루었습니다. 모세는 요단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도록 허락되지를 않았고 이제 그들은 새로운 지도자와 함께 위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 신명기는 모세가 남긴 유언적인 설교입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이 책의 제목이 이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나오지만 히브리 성경을 헬라어로 옮긴 70인 역에서는 이 모세의 다섯 번째 책의 제목을 'deuteronomion'이라고 적었습니다. 두 번째 율법이라는 뜻입니다. 첫 번째 율법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어졌고 모세는 그 율법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모세가 자신의 사명을 마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을 회고하면서 시내산에서 받은 그 율법을 재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II. 번영과 타락에 대한 경고
모세는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구인지를 어떤 사람보다도 뼈저리게 경험한 지도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이 한참 고양되고 가나안 정복의 위대한 꿈이 막 실현되려는 찰나에 모세는 우울한 이야기로 이 말씀을 엽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에 그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 번영하였을 때에 타락하게 될 것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광야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나안 땅은 정말 꿈의 나라였을 것입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을 받아 발달한 문명을 구가하고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에 비하면 그들은 너무 첨단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아주 훌륭한 신앙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정복의 역사를 기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들이 심지 않은 포도원에서 포도열매를 먹고 짓지 않은 집에서 살게 될 때에 그들이 타락하게 될 것을 미리 내다보았습니다. 순서는 이렇습니다. 모든 전쟁과 고통이 끝나고 평안한 삶을 살게 되면 자식을 낳고 손자를 얻게 되고 이렇게 되면서 그들은 자기 사랑 때문에 스스로 마음이 부패해지고 그 부패한 마음이 욕망을 낳아 우상을 섬기게 만들고, 결국은 악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흩으시고 그들은 결국 남의 나라의 군대에 짓밟혀 나라를 잃고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들이 섬기는 신들을 섬기게 되고,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실패한 후에 여호와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되는 때가 온다는 경고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최고의 신앙을 갖고 순수한 마음을 유지하던 그때에 모세는 그 조상 적부터 내려오는 이스라엘의 본성을 꿰뚫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처럼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세는 광야 생활 중 위기를 만났을 때에 영적으로 각성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을 간절히 찾았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하나님 앞에 다시 살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째 350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만 되겠습니까?
우리는 결핍과 고통 속에서 시련을 당하면 염려와 근심 때문에 마음이 뺏겨서 하나님을 섬길 여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번영과 평안을 주시면 마음에 기름이 끼어 부패의 흐름으로 스스로 하나님께로부터 굴러 떨어져 신앙을 이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는 순풍에 돛단 듯이 번영과 그리고 평안의 때를 누리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 경고를 가슴에 새기셔야 합니다. 공중의 나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누가 그런 번영을 주셨습니까? 그리고 누가 여러분에게 그런 평안한 삶을 주셨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에게 남들에게 주지 않는 많은 자원을 주시고 심령의 평안을 주시는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신자가 이 세상 사람과 다른 이유는 자신의 삶의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의미를 묻는 것입니다. 아직도 여러분의 번영과 평안이 마치 여러분이 신앙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때문에 쟁취한 탈취물처럼 자랑스러워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각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쓰레기 같은 인간에게 그러한 평안과 번영을 주신 것이 어떤 소명을 이루기 위함인지 생각하도록 촉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찌 이 말씀이 번영과 평안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말씀이겠습니까?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최고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뼛속까지 숨겨져 있는 죄의 유전자를 알고 있는 모세에게 이 모든 것을 폭로 당하고 있습니다. 결국 아무리 가나안 땅을 얻고 거기서 훌륭한 문명을 구가하며 번영의 삶을 살아도 하나님은 그것 자체를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찬양)
이 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하나님이 그렇게 고도의 물질문명을 구가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떠난 채 방종한 삶을 사는 그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의 존재의 아우라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광야에 방황하던 노숙자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만약 여러분에게 번영을 주셨다면 평안을 주셨다면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그것을 자랑하게 하시기 위함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런 번영과 이 세상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빛 된 삶을 살아가는지를 보여주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을 그렇게 높여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가난하게 살고 어렵게 살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한다고요.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번영을 꿈꾸고 그 탐욕을 신앙의 목표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말이 사실일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가치를 그런 식으로 계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이 그리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의 존재감은 이 세상에서 술수와 농락, 그리고 세상 방법으로도 모을 수 있는 재물의 크기나 이 세상의 권력의 자리에 의해서 아우라가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에도 굴복하지 않는 그런 대찬 자신의 존재감, 하나님과 맺고 있는 그 관계에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걸고 그리고 뚜벅뚜벅 진리의 말씀을 따라 확신 있게 길을 걸어가는 사람, 경우에 따라서 그 길이 불길 속으로 들어가나 혹은 칼날 위를 걸어가는 길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그 사람들을 통해서 존재감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 세상에 있는 권력이나 재력으로 꺾을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아우라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부한데 처하든, 빈 한데 처하든 우리의 삶에 번영이 오든, 혹은 궁핍함이 오든, 시련을 만나든, 혹은 승승장구하든지 간에 그 환경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예수 믿기 전에도 성공하고 부자가 된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를 믿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나보다 더 큰 시련을 당하는데도 꿋꿋이 살아가는 몇 안 되는 주위의 그리스도인을 보면서 하나님은 살아계실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이 불길한 생각이었던 이유는 내가 무신론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신론을 확신하는 나에게 만약에 신이 살아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럼 나는 어떻게 하나 라고 하는 불안한 마음을 주던 사람들이 그런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가난한 동네, 쪽방에 사는 사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어두운 새벽길을 뛰면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식구가 병들어서 병원에 엎고 갈 수도 없게 된 처지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그들이 나았을 때 하나님 앞에 감사드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는 불길한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런 존재가 되도록 이 세상에 부르신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광야보다도 더 지지리 가난하게 비참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삶의 상황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그들을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불러주신 그 존재의 목적을 따라서 사는 정체성 있는 백성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랬기 때문에 이러한 경고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25절 이후에 나오는 이 다양한 묘사들은 결국 이스라엘 역사에 일어날 불행한 일들을 전망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가나안을 정복합니다. 정복하고 불과 얼마 세월이 흐르지 않아서 그들은 그 이방의 땅을 하나님의 율법으로 변화시킬 소명에 충실한 대신 오히려 가나안의 부패한 정신에 전염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찬란한 문명, 그 속에는 농경사회가 있었고, 그 농경사회는 번영하는 사회였고, 그 번영을 주는 가나안의 신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알과 같은 신이 대표적인 신이었습니다. 제때에 비를 내려주고 햇볕을 줌으로써 온 농사가 풍년이 들게 하는 신이었습니다.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광야에서야 하나님이 주인이셨지만 이 가나안 땅에서는 이 가나안의 신들이 더 큰 권한을 갖고 있지 않을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만 굳이 이 신들에게 밉보여 우리들이 이 속에서 번영을 누리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가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환란을 당하게 됩니다. 그 환란은 바로 그들이 나라를 잃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솔로몬 이후에 나라가 남북으로 찢어져 둘로 나뉘면서 이러한 비극은 예고되었습니다. 결국은 우상을 섬기다가 그 죄로 말미암아 북왕국은 722년에 아시리아에게 멸망하고 남왕국 유다는 586년 명맥만 남은 채 유지되던 왕권이 끊어지고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III. 여호와께 돌아올 때
A. 환난을 당할 때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이것은 이러한 일들이 확실히 일어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음이 부패함으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왜 그들이 그렇게 많은 은혜의 추억이 있는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을까요? 우상은 도덕적인 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상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우상에게 투영시켜서 그래서 우상에게 아부하기만 하면 그 우상은 자기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비도덕적인 신이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없이 여김을 당하지 않고 언제나 당신이 이 온 우주의 중심이 되어서 당신의 뜻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의 뜻을 버리고 그 하나님께 돌아올 때에 하나님 안에서 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들은 자기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너무 싫었습니다. 이유는 자신들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그들이 우상을 섬긴 것은 자기를 사랑한 것이고 결국은 자신을 섬긴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우상이 자기의 욕망의 투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질문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시리아의 침략을 받아서 사마리아가 모두 멸망하고 피바다가 되었을 때에 그렇게 마음을 다하여 섬기던 우상이 그들을 막아주었나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사면서까지 우상을 섬겼습니다. 바알을 섬기고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벨론 군대에 짓밟혀 성전이 모두 파괴되었을 때에 그때에 우상은 어디에 있었나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해 주지 않았을까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정된 운명이라기보다는 미래사에 일어날 위대한 일들을 하나님께로부터 계시 받았고, 동시에 40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목회를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뼛속까지 스며들어있는 그 본성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도자가 미래에 전개될 일들을 예고한 것입니다. 이것은 움직일 수 없이 확정된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렇게 포로로 끌려가 짓밟히고 나라를 모두 잃어버리기를 원했을까요? 그랬다면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을 미리 경고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영할 때에 그 번영에 취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히라는 것입니다. 잘 나갈 때에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하나님 얕보지 말고 어린 아이처럼 주님께 매달려 그 은혜에 붙들려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환란을 당할 때에는 환란의 의미를 믿으며 자신을 올바르게 하고 번영의 때에는 그 번영 속에서 주님이 주신 소명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이 눈물어린 경고를 결국은 놓쳤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우려했던 이 가슴 아픈 일들은 역사 속에서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환란과 시련을 당할 때 애매히 고난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마는 아주 드뭅니다. 대부분 여러분이 뿌려놓은 어떤 삶의 씨앗들을 거두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사람에게 신실하지 않고 늘 배신을 자신도 모르게 배신하면서 살아온 삶이 사람들에게 복수를 당하게 만듭니다. 불친절하고 악을 행했던 것이 결국은 울림이 되어서 자신에게 돌아와 결정적인 순간에 사람들로부터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낭비하고 자신 맘대로 방종하게 살았던 그 결과가 돌아와 빚더미에 올라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기 보다는 탐욕을 따르면서 부자가 될 허황된 꿈을 꾸다가 실패로 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환란을 당할 그때에 여전히 자신의 잔꾀로 인생의 위기를 극복해 보려고 몸부림을 치며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멀리 떠나 방황하다가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때가 있는데 환란을 당할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해야 합니다. 내 인생에 일어나는 이 시련과 고난이 무슨 의미일까?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내가 비록 고통을 받고 시련을 당해도 하나님은 모두 옳고 나는 모두 잘못됐다는 고백을 하나님이 받아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진실한 회개입니다. 여러분이 시련을 당하고 환란을 당한다면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주었던 이 모세의 경고를 가슴에 새기십시오. 그리고 오늘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여러분을 환란 속에서 주저앉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거기서 여러분의 손을 이끌어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나아오게 하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B. 말씀을 청종할 때
또, 오늘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 돌아올 때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할 때라고 말합니다. “환란을 당하다가 끝날 때에 네가 네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그 말씀을 청종하리니”라고 말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때”라고 나옵니다. ‘샤마타’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그냥 들리는 게 아니라 마음을 기울여서 듣는 것입니다. 더욱이 ‘말씀’이라고 나오는 이 단어는 ‘베콜로’라는 단어인데 ‘그의 한 목소리 속으로’입니다. 그러니까 진정으로 듣는 것은 그냥 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뿐만 아니라 마음을 기울여 그것을 깨닫고 의미를 이해하고 그 말씀을 하시지 않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심정까지 헤아리는 것,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자신의 삶을 그 말씀에 복종시키려고 하는 것, 그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저는 수없이 많이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러나 부주의하거나 나의 어떤 잘못으로 비행기를 놓치거나 연결 편을 타지 못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한 6-7년 전 어느 날이었습니다. 상해에서 다른 도시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게 되어 있었고 저는 선교사 한 사람과 공항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아직 비행기를 탈시간이 한 시간 정도 남아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인가 찻집에 앉아서 열심히 이야기했는데 그저 그 내용이 무슨 내용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러나 대화에 아주 몰입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것이 개인적인 이야기였는지 선교적인 이야기였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어쨌든 우리는 대화에 몰입했고 백지를 꺼내놓고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서로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야기가 어느 정도 끝났을 때 비행기 탈시간이 되었을 텐데 그리고 시간을 보니까 비행기가 20분 전에 떠났습니다. 여러분 보딩을 끝냈기 때문에 이름이 컴퓨터상에 올라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비행기에 안 나타나는 것은 항공사로서는 큰 문제입니다. 더군다나 짐을 실었을 때에 우리는 그때 짐을 안 실었습니다. 짐을 실었을 때에는 그 짐을 다 내려야 됩니다. 왜냐하면 짐만 싣고 사람이 안 나타났다는 것은 폭탄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 짐을 다 내리고 안 탄 사람의 짐을 빼 놓고 그리고 다시 비행기가 떠납니다. 그래서 한 시간, 한 시간 반씩 늦어집니다. 다행히 우리는 짐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그 비행기가 떠난다는 방송이 나왔을 거고 우리 두 사람의 이름도 수없이 불렀을 것입니다. 못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들리기는 끊임없이 들렸는데 우리는 듣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안 들릴 때가 언제 있었습니까? 그러나 듣지를 않았습니다. 매주 설교가 울려 퍼지고 매주 공과를 하고 여러분이 매일 성경을 읽어도 여러분이 마음을 기울여서 그 말씀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마음까지 들으려고 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습니다. 그냥 들릴 뿐입니다. 오늘로서 이 시리즈를 열 번째 설교하고 있습니다. 매주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여러분에게 성경을 읽으라고 강력히 촉구하였습니다. 여러분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회자의 이 설교를 들으며 성경을 읽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의 다수는 이 성경을 왜 이렇게 매일 읽어야 되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이 옛날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입맛이 없을 때에 마른 모레를 씹는 것처럼, 밥 대신 톱밥을 씹는 것처럼 그렇게 성경을 읽어도 아무 느낌도 없고 그렇게 장수만 넘기며 하루하루 지나는데 그 말씀이 나를 움직여 설교자가 말하는 것처럼 무엇인가 힘을 주고 영혼의 능력을 주는 것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읽어도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무미건조하게 다가올 때 여러분은 그 성경을 읽으며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은혜 안에 있을 때 기도 시간은 어땠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끝없이 흘러들어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은혜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시간, 설교를 듣는 시간은 어떤 시간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속으로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말씀과 함께 하나님이 웃을 때 우리도 웃고, 그 분이 분노하실 때 우리도 입술을 깨물고 그 분이 아파하실 때 우리도 함께 흐느꼈습니다. 그게 은혜 안에 있는 성도의 삶이었습니다. 입에 거품을 물고 마치 하나님 가르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처럼 교회에서 가오를 잡지만 마음에는 공허가 깃듭니다. 한 주간동안 말씀을 읽으며 눈물 흘려본 적도, 말씀을 읽으며 가슴이 벅차본 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삶은 자기 꿈의 성취를 위해서 사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나같이 이 벌레 같은 인간을 통해서, 이 허물 많은 인간을 통해서라도 아버지의 뜻이 이 땅 어느 한 구석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가슴 벅차하고 이 땅에 살아서 숨 쉬는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할 때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마음에 다가오는 바가 없다면 오늘부터 성경을 다르게 읽으십시오. 성경을 다 읽고 반성을 하십시오. 이 말씀이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생명력이 있는 말씀인데 왜 나에게는 톱밥을 씹는 것과 같을까? 그리고 아무런 능력이 없을까?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다했을 리가 없고 분명히 이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는 자신의 마음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제발 이 돌 같은 마음을 녹여서 그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게 해 달라고 그리고 내 마음에 어떠한 것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심령에 생명이 되지 못하는지를 여쭈어 보십시오. 그리고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성경을 읽으십시오. 읽으셔야 합니다. 마지막 성경을 덮을 때 “아무것도 모르겠어. 아무 은혜도 없어.” 하더라도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 은혜가 없는 것에 가책을 받으십시오. 비참해 지십시오. 낙심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근심하십시오. 불안해하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데 하나님 왜 더 이상 나에게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며 당신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로 돌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V. 적용과 결론
침체 속에 고통을 받을 때에 성도는 종종 자기의 의를 추구합니다. 때로는 신비한 감정에 빠져서 정사나 기분의 전환을 시도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결국은 더 깊은 침체에 굴러 떨어지게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무리 멀리 떠나도 주님은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가 충만한 은혜를 누리며 살 때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는 우리 자신과 자아의 거리보다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고 거기서 답을 얻어 보려고 하는 것은 영혼의 회복을 위한 아주 바람직한 조짐입니다. 결국 문제는 이 세상 속에서 생겼지만 답은 세상의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발견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내가 오늘 당하고 있는 많은 시련과 고통이 무수한 나의 자발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을 돌이켜 진실하게 회개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을 믿지 마십시오. 문제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생겼지만 그 삶이 현실 속에 답도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끊임없는 문제를 양산하고 여러분의 영혼을 파괴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은 흘러가고 끊임없이 변합니다. 진리의 말씀은 불변합니다. 그 진리는 어떤 경우에도 여러분에 의해 꺾여 여러분에게 맞춰주지 않습니다. 신앙의 문제는 결국 풀지 않고 내버려두면 거기서 멈추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왔을 때 우리에게 숙제처럼 그 문제부터 우리에게 다시 내밉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 위해 세상의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담을 쌓고 침잠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달라붙으십시오. 그리고 찬찬히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깨달으십시오. 그 속에 담겨진 주님의 안타까운 마음도 느낄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결단하십시오. 여호와께로 돌아올 때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여러분에게 진정한 영혼의 번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신 4:3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간 다음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잊어버릴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그들이 심지 않은 포도원에서 열매를 거두고 짓지 않은 집에서 살면서 번영 속에 부패하여 우상을 숭배하게 될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환란과 고난에 처하게 하시고 거기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만드실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난 날 우상 숭배와 하나님 앞에서의 부패한 행실들이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가져다 준 것이 불행과 슬픔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예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하고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할 때 시련 속에서도 우리의 마음을 낮추셔서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II. 자비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징계와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벌벌 떨어 하나님 앞에 공포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협박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싶으셨던 당신의 한 성품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어떤 불행한 일을 만나고 슬픔을 만나든지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라는 사실을 기억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고 말입니다. 즉, 자비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와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인생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리 깨우쳐 주고 싶었던 것이 모세의 심정이었습니다.
여기 우리말 성경에 자비하신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말로 ‘라훔(rachum)’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불쌍히 여기는, 가엾게 생각하는 이런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레헴’이라고 하는 단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두 단어는 한 어근입니다. ‘레헴’이라는 단어는 ‘태’, 혹은 ‘자궁’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20장 18절에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말미암아 아비멜렉의 집에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고 했을 때에 이 태가 바로 ‘레헴’이라는 단어입니다. ‘자궁, 아기집’,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민수기 12장 12절에서는 ‘모태’라는 말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결국 긍휼히 여기는 것은 어머니가 아기집 속에 아기를 품고 있을 때에 그 아기에 대해서 갖는 어미의 감정과 같은 것입니다. 자비라고 하는 것은 슬픔을 동반한 사랑의 감정입니다. 그 슬픔을 동반한 사랑의 감정을 자비라고 부르고 그래서 자비하신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마음 아파하시는 분으로 성경에 묘사됩니다.
A. 버리지 않으심
하나님의 이 자비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세 가지로 성경은 오늘 말합니다. 첫째는 버리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말로 ‘라파’라고 하는 이 단어는 떠나다, 버리다, 혹은 여호수아 10장 6절에서는 ‘포기하다’라는 뜻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의문을 갖습니다. 어쩜 하나님의 은혜를 그렇게 크게 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집요하도록 하나님을 떠나려고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큰 구원의 은혜를 입은 백성들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집요하게 불순종하고, 집요하게 우상을 섬기고,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범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한 것이 없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입은 상처들로 가득해서 아주 더럽고 추루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신데 그 더러운 이스라엘을 포기하기 않으십니다. 결국 여러분이 궁금하게 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하나님의 은혜를 거스르는 완고함과 극에 달한 죄악과 추한 모습은 바로 여러분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차마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곧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특히 당신과 언약 관계를 맺으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신실성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은 종종 다른 사람 때문에도 슬퍼하고 마음 아파하지만 자기 자신 때문에도 마음 아파하고 슬퍼합니다. 자식이 무엇인가 고통을 받고 있을 때 부모는 함께 아파합니다. 왜냐하면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자식이 때로는 잘못해서 그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도 다른 사람은 ‘싸다 싸’ 라고 말해도 부모는 자기 자식을 그렇게 대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울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슬픈 감정은 자기 자신을 향해서도 생겨납니다. 그게 자기 연민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박복할까? 나는 왜 이렇게 불행한 인생을 살까? 나는 왜 이렇게 복이 없을까? 그러면서 슬픔에 잠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부족한 것이 없는 충족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 때문에 후회하거나 스스로 자기 연민에 빠지시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슬픔은 언제나 당신 자신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관계를 맺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 이 세상의 인간들로 말미암아 느끼는 슬픔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그렇게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면 그가 비참해지고 불행해질 것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심지어는 양심을 통해서 끊임없이 경고하고 그런 삶을 살지 말도록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듣지 않습니다. 그리고 불순종의 길을 갑니다. 그리고 상처를 입고 거기서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내 명령을 어기고 그렇게 말려도 불순종의 길을 가더니 잘했다 한번 거기서 고통을 겪어 보거라 그렇게 제 3자처럼 생각하지 않으셔요.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묻습니다. 그러면 그 능력이 많으신 위대한 하나님이 왜 우리로 하여금 불순종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반항하고 우상 숭배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무능하신 것 아닙니까? 사랑이라는 쇠창살에 갇혀서 차마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갇혀 있는 힘없는 죄수처럼 그냥 우리가 타락하고 잘못된 길을 걸어갈 때에 눈물만 흘리고 계시는 하나님은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이실 수 있을까요? 라고 말입니다. 사실은 거기에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떠 있는 별과 끝 모를 드넓은 우주는 인간에 의해 파악된 혹은 아직 파악되지 않은 법칙들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착오나 어떤 자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도는 것은 무슨 감정을 가지고 도는 것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수학적인 계산에 의해서 물리적인 법칙으로 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법칙을 통해서 당신이 이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만약에 지구가 행성에 부딪혀서 반쪽이 난다든지 혹은 지구 안쪽이나 바깥에 있는 위성들의 크기와 거리가 달라진다면 지금처럼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지는 않습니다. 어떤 과학자들이 목성이 없을 때에 지구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하고 계산을 했더니 두 가지 결론이 나왔는데 목성은 지구의 천배입니다. 그리고 태양은 지구의 천배입니다. 태양은 지구 크기의 100만 배입니다. 그 천배나 되는 목성이 지구를 어미 닭처럼 품고 돌면서 우주에서 날아오는 수많은 파편들을 막아주는 것입니다. 목성을 시뮬레이션해서 빼고 나니까 얼마 안 되서 지구는 그 천체에서 날아오는 수많은 운석들에게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고 그 다음에 두 번째 결과는 이 궤도에서 궤도가 태양을 도는 궤도가 점점 타원으로 변하다가 우주로 튕겨 나와서 미아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은 정확한 법칙에 의해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 인간은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지를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의지의 결정력도 주시고 하나님처럼 생각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무엇까지 허락하셨냐 하면 당신을 대적하는 것까지도 허락을 하셨습니다. 그게 좋아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당신을 닮아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을 거슬러 악을 행할 때에 역설적으로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였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이 기계처럼 하나님을 공경하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할 수 있는데도 선을 택하고 우상을 숭배할 수 있는데도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아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기쁨을 얻으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인간을 특히 당신과 언약을 맺으신 그의 자녀들을 버리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모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과 관계를 맺으시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하는 것은 느낌에 속한 것입니다. 그렇게 버림을 받았다는 느낌, 그 자체가 사실은 하나님이 여전히 그들을 간섭하고 계시고 부르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12장 22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결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을 수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그것을 느낀다면 하나님은 그렇게 스스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악을 행함으로 마지막 어떤 결과가 찾아오는지를 체험하게 해서 그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바였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자기 백성들을 버리시는 분이 아니시다는 것입니다.
B. 멸하지 않으심
두 번째는 멸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라고 말입니다.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라고 말입니다. ‘샤하트’라고 되어 있는 이 히브리어 동사는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4장 16절에는 ‘파괴하다’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인간을 창조하시고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이 사랑으로 하신 일입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타자와 관계를 맺고 이미 있는 관계는 그 관계를 심화시키려고 하는 마음의 경향성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아무 관심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랑의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 사랑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행복이 궁금합니다. 다른 사람이 불행하고 슬프지 않은지 염려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무엇인가 불편을 겪거나 어려움이 있을까봐 늘 염려가 되는 것이 사랑스러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늘 그는 다른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안녕하셨어요?”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지금은 건강하세요?” 그리고 “어제 보니까 아들이 붕대를 감고 내려가던데 어디 다쳤나요? 지금은 괜찮습니까?” “어제 저희 집 아이들이 쿵쿵거리고 뛰어 놓았는데 불편하지 않으셨어요?”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웃과 아무 상관없이 자기 길을 걸어가다가 위기에 처하면 도움을 구할 사람을 찾는 사람은 덕스러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완전하고 충족하신 하나님이시지만 넘치는 사랑이 인간과 관계를 맺게 하셨고, 넘치는 사랑으로 이 세계를 창조하셔서 그 창조세계 안에 하나님이 얼마나 선한 분이신지 아름다우신 분이신지를 드러내어서 그 모든 사람과 사물들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자기의 자녀들을 파멸하고 파괴한다면 그것은 자기모순입니다. 왜냐하면 파멸과 파괴의 행위는 극도의 내적인 미움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파멸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모순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그 인간의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벌하시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시는 하나님의 그 무시무시한 심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눈높이의 화법입니다. 어차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했고, 그리고 그 하나님께로부터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요구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을 행하고 불순종을 하다가 때로는 환란을 당하고 시련을 당합니다. 그것을 성경을 기록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징계로 해석을 하고, 글을 씀으로써 지각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은 우리가 함부로 깔보고 얕잡아 보실 분이 아니구나,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우리의 삶을 모두 내려다보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비와 은혜를 베푸시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은 불행하게 하심으로 그 길을 걸어가지 못하도록 지도하는 하나님이시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있고 인간은 인간대로 있어서 아무런 도덕적인 의미를 하나님의 통치에서 읽어낼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많은 하나님의 징벌과 진노에 관한 이야기가 하나님이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파멸하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사실들을 취소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인간들은 그렇게 합니다. 사랑하다가 그 사랑하는 사람이 악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배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전에 가슴 깊이 차올랐던 사랑은 미움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살면서 우리들이 가슴 깊이 한이 되도록 미워하는 사람들은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대부분 한때 우리가 깊이 사랑했던 사람들, 신뢰했던 사람들, 친구였던 사람들이 우리의 미움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변하면 복수를 꿈꾸게 되고, 그를 파멸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한 부모가 자식에 대해 그 자식을 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한없이 너그럽고 사랑스러운 부모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식들에게 두렵다는 느낌도 함께 갖게 만드는 존재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잠언의 말씀에 아이라도 그 작은 행실을 통해서 그 사람의 어떠함을 드러낸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제 다섯, 여섯 살 밖에 안 된 아이들에게 부모가 도덕적으로 원하는 것이 있으면 자기 의지를 아이에게 그 아이에게 실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설득하든 달래든 필요하면 꾸짖든 때로는 회초리로 때리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아이를 시종일관 억압하며 기르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의 불경건한 고집, 예의 바르지 못함, 이런 것들을 딱 꺾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보면 아이가 다섯 살, 여섯 살만 되면 엄마들이 무르팍으로 깁니다. 그리고 시중을 들고 그 아이의 비유를 맞추기에 급급한 것입니다. 좋은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옳지 않습니다. 부모는 진리가 아닌 문제를 가지고 자식들을 비참하도록 억압하거나 세세한 사항에 간섭해서 아이들에게 집요하게 무엇을 요구하거나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이가 옳지 않은 행동을 할 때에 부모가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영향력이 없으면 그 아이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부모는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아이들이 예절 바르지 못하거나 심히 버릇없습니다. 그리고 잘못합니다. 그런 아이들을 따끔하게 나무라서 올바르게 바로 잡을 때 여러분이 그 아이를 파멸할 욕망을 가지고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이를 매로 손바닥을 친다고 칩시다. 그럴 때에 이 매를 때려서 아이를 망가뜨려버리려고 그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자들인데도 부모로서 자식에게 선한 일을 행한다면 그러면 떡을 달라는 아이에게 돌을 주고 생선을 달라는 아이에게 전갈을 줄 부모가 있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면 완전하신 부모님이신 하나님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을 대하시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한 그리스도인이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면 고통이 따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징계가 있습니다. 그것도 대부분 보면 하나님이 뺨싸기를 후려치듯이 그렇게 후려갈기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런 결과가 오도록 자신이 끊임없이 선택하고 그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하나님 안 믿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서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면 마지막에 불행이 찾아오는데 하물며 매일매일 하나님의 섭리와 간섭 속에서 산다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을 파멸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자식이 아무리 잘못했어도 자식에게 복수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부모는 자식에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숙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잘못된 길을 걸어갔을 때 하나님이 때리시는 회초리를 맞으면서도 그 속에서 흐느끼는 부모로서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이 성숙한 신앙의 표지입니다. 그러므로 자비하신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을 파멸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시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C. 잊지를 않으심
세 번째는 잊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샤카흐’라고 하는 이 단어는 잊어버리다, 망각하다, 기억 속에서 사라지다 이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자연 지식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 예를 들어보십시다. 남편이 건망증이 심합니다. 리모컨을 어디다 두고 못 찾습니다. “여보 나 리모컨을 못 찾겠네. 내가 분명히 가지고 있었는데 잊어버렸어.” “어디다 뒀길래?” “생각이 안나.” 그런데 결혼기념일을 잊어버렸습니다. 그것은 싸울 일입니다. 결혼기념일뿐입니까? 처음 만난 날, 처음 키스한 날, 프러포즈한 날, 그 다음에 결혼식 한 날, 국경일처럼 표시를 해 놔야 됩니다. 아내는 한글날이나 삼일절, 남편이 잊어버렸다고 부부싸움 안합니다. 어떻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그런 행동을 할 수가 있느냐고 그러지 않습니다. 새 달력 오면 제일 먼저 그것부터 국경일처럼 표시해 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날을 잊어버렸다는 것은 리모컨을 잊어버렸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나와의 관계를 아주 가볍게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경에 보면 특히 신명기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시는 부정 명령어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잊지 말라, 잊지 말라, 잊지 말라, 잊지 말라, 계속 나옵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잊지 않는 여호와다, 여호와가 너를 잊지 아니하시며’ 심지어는 반대로 기억하라, 기억하라, 기억하라, 그 다음에 당신 자신에 대해서 ‘내가 기억 하리라, 기억하리라, 기억하리라’고 하십니다. 그게 단순히 생각 속에서 잊혀지지 않고 기억이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한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의미상으로 잊혀지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잊지 말라는 것을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잊혀진다는 것은 마음에서 지워져서 더 이상 의지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그런 존재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우리는 아로 새겨진 존재이고 그래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은 언제나 사랑을 동반한 지식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 때에 그 지식은 언제나 우리에게 사랑을 가져다줍니다. 그 둘은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어미의 마음에 자식의 이름이 완전히 객관적인 고유 명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아들, 딸이라는 단어가 그 엄마에게 보통 명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그렇게 자기 자식새끼의 이름을 불러도 마음에 동요가 없는 엄마라면 그것은 에미, 에비도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이스라엘과 어떤 경우에도 이스라엘을 차마 잊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끊임없는 갈등의 기록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사랑이 이기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이겨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셨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못 박혀 죽으심으로 범죄한 우리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는 그 날에 화해의 길을 그 피로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의 이름을 부르고 당신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자신의 의의 신발을 모두 벗고 그 분의 핏길을 걸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바 아버지라고 부름을 받으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되셨던 것입니다.
가슴 벅차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우리는 잊혀지지 않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할 때만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자기의 자녀들에 대해서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이 마음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불변하는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III. 엄마 같은 하나님
오늘 성경에 보면 결국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하는 예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성품을 보여주는 말로 끝납니다. “끝 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의 말씀을 청종하리니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 자비는 결국 엄마 같은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가 예수를 믿고 난 후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던 표현이 하나님 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무지하게 많이 만났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아버지를 아주 일찍 여의어서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을 통해서 아무것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제가 돌보았던 청년 중에 고아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얼굴도 못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을 그게 오래 예수를 믿는데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답니다. 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사실 이 부모는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다다르게 하는 아주 중요한 다리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태어나서 좋은 부모만 만나면 인생 100m 달리기를 50m에서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다가오는 것입니다. 더욱이 아버지가 있어서 고아가 아닌데 아버지가 엄청난 상처와 고통을 준 거면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라고 할 때에 그 성경이 나타내고자 하는 하나님의 그림이 제대로 안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돌아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선포할 때 그에 관해서 성경이 예고하기를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그렇게 돌리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 그가 말씀 사역을 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이것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돌아오게 한다는 것도 있고, 하나는 워낙 그 시대가 패역하고 망가져서 애비조차도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때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 복음에 회개하면 아버지로서의 진정한 사랑을 갖게 될 거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런 아버지가 되라고 가르치니까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을 하는데 나는 후자를 훨씬 지지합니다.
성경에 보면 사실은 하나님 아버지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그 아버지라는 단어에 우리가 이제껏 배운 아버지 상을 끼워 넣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정말 성경이 그려내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것을 가지고 아버지라는 말을 해석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해서 광야에 왔을 때 양식이 떨어지자 먹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앞치마를 두르고 가족들을 위해서 가족들이 잠들어 있을 때 살그머니 일찍 일어나서 가족들이 깰까봐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면서 식탁을 준비하는 것은 엄마의 몫입니까? 아빠의 몫입니까? 여성들이 대답을 안 합니다. 왜 그러십니까? 엄마의 몫입니까? 아빠의 몫입니까? 엄마의 몫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만나의 사건입니다. 곤히 자고 있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오니까 “너 깼니? 아우 이제 밥을 차려야 되겠네.” 그러시는 게 아니라 다 준비해 놓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이가 병들어서 누웠을 때 그 아이 옆에서 무릎을 꿇고 물수건을 머리에 올려놓고 약을 먹이고 약을 바르며 배를 문지르면서 손을 붙들고 밤을 새우는 것은 아빠의 모습입니까? 엄마의 모습입니까? 아니 엄마만 그렇게 해야 된다 그렇게 얘기하는 게 아니라 엄마가 상대적으로 더 자식을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큰 소리로 답변을 하란 말입니다. 엄마의 그림입니까? 아빠의 그림입니까? 아빠는 퍼질러 자는 것입니다. “아이 그거 약 먹으면 아침에 다 나아. 그러면서 크는 거지” 그리고 코골고 자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집을 나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오너라. 내게로 돌아오너라.” 그리고 눈물 흘리며 호소하는 것도 아빠의 그림이 아니라 엄마의 그림입니다. 유산을 나눠 달라 그래가지고 방탕한 길로 가서 다 허비하고 그 비참하게 병든 아들이 돌아오는 길에 행주치마를 두른 체 기다리면서 눈물을 닦는 그 그림은 엄마의 그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경험으로 아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엄마는 결코 중립적인 엄마가 아닙니다. 엄마는 언제나 중립이 아니라 우리 편입니다. 애들을 그렇게 교육시키면 안 된다고 가끔 엄청난 교육학자인 것처럼 충고하는 사람은 아빠지 엄마는 항상 아이편입니다.
어느 날 신문을 한 장 받아서 읽었습니다. 거기에 시가 하나 나왔는데 그 시를 읽으면서 가슴이 한동안 먹먹했습니다. 정채봉이라는 시인입니다. 2002년도에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이 분은 두 살 때 엄마를 잃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시를 한 편 썼습니다. 그런데 그 시를 읽으면서 아마 저는 최근에 한 2년 동안에 읽은 시 중 가장 감동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속에 안개처럼 늘 떠돌고 있었지만 그것을 뭐라고 명료하게 표현할 수 없는 그 말들을 아주 짧은 시 속에 담았습니다. 제목은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두 연으로 되어 있는데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정채봉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된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 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 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그게 엄마를 바라는 아이의 마음입니다. 두 살 때 엄마를 잃어버렸으니까 얼마나 외롭고 상처가 많은 삶을 이 시인이 살았겠습니까? 그런데 하고 싶은 일이 뭐냐 엄마가 해 주는 밥? 아니. 엄마가 주는 돈? 아니. 엄마가 사주는 과자? 아니. 그럼 무엇입니까? 얼른 그 품속으로 들어가 엄마의 품에 오른쪽 뺨을 젖가슴에 기대고 그리고 엄마와 눈을 마주치면서 그리고 한 손으로 엄마의 가슴을 만지고 ‘엄마’ 그렇게 부르고 이제껏 살아오면서 가장 억울했던 한 가지 일을 고자질하고 그리고 엉엉 울겠다 표현한 것입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모든 삶의 사태들이 우리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살다보면 우리가 고난도 당하고 시련도 겪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악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 고통을 당하기도 하지만 그렇게까지 의도하지 않았는데 억울하게 고통을 당할 때도 있고 때로는 전혀 잘못하지 않았는데 하나님도 잘못했다고 안 그러시는데 불완전한 이 세상, 악한 사람들 때문에 고통과 시련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혼자 소외된 느낌을 겪기도 합니다. 이것을 이길 수 있는 힘들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 만 바라볼찌라
그 어머니 같은 하나님의 품에서 그 분과 눈을 맞추고 그 분의 가슴을 만지며 이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우리 인생의 비통한 사연을 어린 아이같이 그 분께 일러바치며 펑펑 울면서 이 세상에 단 한분,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 때문에 위로와 용기를 얻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머니 같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고통을 당하거나 시련을 당하거나 혹은 사람들로부터 소외될 때에 복수를 꿈꾸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생각할 것입니다. 상처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잔인한 상황인가라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일을 당하고 하나님 없이 세상을 방황하는 사람들에게는 상처가 상처로 남지만 당신께로 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 상처와 고통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기회가 된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인이 두 살 때 엄마를 여의고 일평생을 살아온 설움을 마지막 문장에 담았습니다. 숨겨놓은 세상사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무슨 뜻입니까? 자기편이 되어주시는 엄마를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품속으로 피하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IV. 적용과 결론
여러분이 지난 11주 동안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리고 저는 마음을 다해서 이 말씀으로 여러분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여러분이 뜻을 세우고 이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알기까지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곤고한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지는 여러분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여러분을 향해서 사랑과 슬픔, 기쁨과 가슴 벅차는 감동, 그리고 안타까움과 눈물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 풍부한 정을 느끼면서 사는 사람들은 여러분 가운데 소수입니다. 한 주간동안 하나님의 마음이 여러분에게 전수된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그 마음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뻐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 마음 때문에 가슴이 저리도록 아파본 적이 있습니까? 그게 없는 것은 신앙생활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당신 안에 있는 풍부한 정을 언제나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분이십니다. 신앙은 어머니 같은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의 끝자락을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한복을 입고 있는 어머니의 가슴에 손을 고사리 같은 어린 아이의 손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의 말씀을 깨달음으로 당신의 품에 들어오게 하시고 그 말씀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마음을 느낌으로 그 가슴을 만지고 어머니의 체온을 느끼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이 시리즈를 마치며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성경을 읽으셔야 합니다. 매일매일 마음을 모아서 그 성경이 여러분의 마음을 적시도록 매일매일 마음을 다해 성경을 읽고 읽을 때마다 이 글자만이 아니라 이 성경에 담겨있는 어머니 같은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도 느낄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발 이 세상에 대한 관심사를 좀 끄고 하나님만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의 상황에 맞는 지나간 설교라도 한 시리즈 붙들고 일주일에 단 두 번이라도 조용히 산책하며 혹은 골방에 조용히 앉아서 들으십시오. 그리고 지금 오늘 살아가는 여러분의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한 지를 헤아리십시오. 여러분도 상상하지 못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렇게 하나님의 영혼을 살리는 말씀을 경험함으로 자비하신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