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능력
(2016년 주일오전설교)
설교기간|2016년 2월 14일 - 4월 17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6년 4월 27일
목 차
말씀의 능력 1 (2016.2.14 주일오전설교)
말씀의 능력 2 (2016.2.21 주일오전설교)
말씀의 능력 3 (2016.3.6 주일오전설교)
말씀의 능력 4 (2016.3.13 주일오전설교)
1. 영혼을 소성시킴(시 19:7) 2016.2.14 주일오전설교 1
2. 인간을 지혜롭게 함(시 19:7) 2016.2.21 주일오전설교 9
말씀의 능력 5 (2016.4.3 주일오전설교)
3. 마음을 기쁘게 함(시 19:8) 2016.3.6 주일오전설교 19
4. 눈을 밝게 함(시 19:8) 2016.3.13 주일오전설교 29
말씀의 능력 6 (2016.4.10 주일오전설교)
5. 경외하게 하는 말씀(시 19:9) 2016.4.3 주일오전설교 41
6. 진실하고 의로운 말씀(시 19:9) 2016.4.10 주일오전설교 51
7. 말씀의 능력(시 19:10) 2016.4.17 주일오전설교 59
말씀의 능력 1
말씀의 능력 1 (2016.2.14 주일오전설교)
말씀의 능력 2 (2016.2.21 주일오전설교)
말씀의 능력 3 (2016.3.6 주일오전설교)
말씀의 능력 4 (2016.3.13 주일오전설교)
말씀의 능력 5 (2016.4.3 주일오전설교)
말씀의 능력 6 (2016.4.10 주일오전설교)
말씀의 능력 7 (2016.4.17 주일오전설교)
말씀의 능력1 2016. 2. 14 주일오전예배
< 영혼을 소성시킴 >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시 19:7)
I. 본문해설
- 하나님은 율법으로 자기를 알리심
a. 피조 세계의 증거:1∼6
b. 영혼을 위한 효능:7∼11
c. 말씀에 대한 사랑:12∼16
- 영혼을 위한 말씀의 효능을 제시함:7∼10
- 소성+지혜+기쁨+밝음+영원+사랑+만족
II. 영혼을 소성시킴
- 영혼의 소성이란 무엇인가?
A. 영혼의 침체
1. 영혼의 특성
2. 영혼의 생명
3. 영혼의 침체
B. 영혼의 소성
1. 소성의 원인: 하나님의 사랑
2. 소성의 작용: 성령의 은혜
3. 소성의 공로: 예수의 중보
4. 소성의 목적: 하나님의 영광
III. 말씀, 영적 소성의 도구
- 말씀으로 세상의 모든 만물을 창조하심
-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도구인 말씀
- 만물을 붙들고 움직임도 말씀을 통해서임
a. 생각을 방치하지 말라
b. 지성을 통해 소성케 하심
c. 말씀에 마음을 기울이라
- 이성의 이해가 곧 은혜의 보증이 아님
- 그러나 모든 은혜는 이해를 통해 옴
-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의지하라
- 성령의 은혜에 목마른 자가 되라
d. 주일, 은혜의 작은 불씨를 간직하라
- 마음을 실어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함
- 작은 깨달음이라도 적용하고 순종함
- 매일: 성경을 읽음+간절히 기도함
e. 말씀을 깨닫는 기쁨 속에서 살아감
f. 신앙으로 자기를 완성해 가는 보람
IV. 적용과 결론
- 온 땅과 하늘에 웅장한 아름다움의 정체
-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붙드시는 하나님
- 그 모든 우주의 아름다움의 진수는 성경임
- 곤고한 영혼으로 승리하는 인생은 없다
- 다시 말씀 앞에 서서 영혼의 생명을 누리라
말씀의 능력 2 2016. 2. 21 주일오전예배
< 인간을 지혜롭게 함 >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시 19:7)
I. 본문해설
- 땅에 뿌린 씨앗과 생명의 능력을 숙고함
- 진리의 능력은 물리적 능력이 아님
- 그러나 인간의 본성과 인생의 방향을 바꿈
- 신자는 이런 비밀스런 능력을 안 사람
- "증거"(edut): 법령, 증언(돌판)
- 총체적 계시⇒생활의 표준을 제시함
II. 인간을 지혜롭게 함
- “왜,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A. 지식과 지혜
- 두 가지 인식 능력: 신앙+이성
- 두 가지 판단 능력: 인식+애혐
- 지식은 사물에 대한 인과율의 인식임
- 지혜는 지식을 사용하는 원리를 뜻함
B. 지혜와 미련함
1. 인과율에 무지
- 자연적 인과 관계에 대한 무지와 미신
- 도덕적 인과 관계에 대한 무지와 불행
2. 욕망에 휘둘림
- 지혜로 사물의 질서를 명정하게 보고 판단함
- 욕망의 투사로 사물의 질서를 전복해서 봄
- 저급한 가치가 고상한 가치를 밀어냄
C. 말씀의 확실성
- “믿을 만하오니” 신뢰할 만한 성질
- 증거를 따르는 삶이 확고한 기반을 가짐
- 말씀하신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신뢰임
- 매일의 경건 속에서 주님을 경험함이 중요함
III. 지혜롭게 하는 말씀
- 인생의 행복은 지혜의 소유 여부에 달림
a. 총체적 지혜
b. 지혜로운 실천
- 말씀이 세상과 나의 근거를 가르쳐 줌
- 모른다 할지라도 어떻게 살지 보임
- 단순 믿음의 순종 > 번쇄 사색의 불순종
- 믿음으로 말씀을 붙듦과 지성의 탐구
- 체계화된 지식과 교리를 앎의 중요성
- 일상의 판단은 인생을 보는 지혜와 관련됨
- 어떤 의미 있는 삶을 살 것인지 생각함
IV. 적용과 결론
- 말씀에 마음 젖지 않는 신앙은 없음
- 말씀에 깊이 감동을 받고 있는가?
- 자신의 어리석음에 아파하는가?
- 진리와 상관없이 어찌 신자인가?
- 모든 분요함에서 조용히 물러나라
- 어미젖을 더듬는 아기처럼 찾으라
말씀의 능력 3 2016. 3. 6 주일오전예배
< 마음을 기쁘게 함 >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시 19:8)
I. 본문해설
- 하나님의 말씀의 효능 세 번째: 기쁨
- 참된 기쁨이 없는 건조한 삶의 연속
- 가슴 벅찬 환희와 기쁨을 아는가?
- 쾌락과 헛된 일의 추구는 이런 반영임
- 성경은 진리가 주는 기쁨을 제시함
- 신자는 그런 기쁨의 비밀을 안 사람임
II. 말씀, 정직한 교훈
A. 두 가지 가르침
1. 믿음의 규칙
-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가르쳐 줌
- 이것은 이성을 설득하는 것이 아님
- 믿음은 성경의 사실을 근거로 함
2. 생활의 교훈
- piqqud: 가르침, 명령(시103:18)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 “여호와의 교훈들” 언약 관계+pl.
-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생활
- 은혜의 목표는 내적 변화와 외적 생활임
B. 올바른 생활의 가르침
- yashar: “올바른, 곧은, 의로운"
- 도덕 생활의 불변의 기준을 제시함
- 어린 아이 같은 믿음이 주는 유익함
III. 마음을 기쁘게 함
A. 마음, 영혼의 기능
- leb: 마음, 영혼, 의지, 지혜, 심장
- 객관적 정보와 주관적 정신이 만남
- 온갖 행동을 산출하는 공장과 같음
- 인간의 주체성이 마음에서 행사됨
- 마음이 기뻐하는 바가 그의 삶이됨
B. 말씀이 주는 기쁨
- 진리에 대한 기쁨과 혐오가 공존하는 인간
- 다층적 껍질의 인간의 기쁨과 혐오의 기쁨
- 하나님께로 온 영혼은 진리가 고향임
- 진리를 기뻐하는 깊은 속의 자기를 깨움
- 말씀의 은혜를 받는 자 계속 기쁨을 얻으라
IV. 적용과 결론
- 기쁨의 방향이 그의 나아갈 길을 정함
- 그것이 세상이면 세상으로 나감
- 신자는 진리로 인한 기쁨을 안 사람임
- 은혜에서 멀어질 때 기쁨의 감각이 떨어짐
- 다시 말씀의 기쁨으로 돌아가라!
말씀의 능력 4 2016. 3. 13 주일오전예배
< 눈을 밝게 함 >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시 19:8)
I. 본문해설
- 말씀의 효능 네 번째 “눈을 밝게 함”
- 육신의 눈 밝음 “개안수술의 경험”
- 마음의 눈 어둠과 인생의 비극적 삶
- 오경의 다른 측면들shades 드러냄
- “율법, 교훈, 법도, 계명, 도”
II. 순결한 계명
A. 여호와의 계명
- mizwah yaweh 신적의존의 복종
- 좁게는 십계명, 넓게는 오경 전체임
- 신적 위엄과 사랑 아래, 부복한 복종
- 여호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지시함
- 계명에 대한 순종과 하나님을 사랑함
- 그 사랑의 질서 안에서 행복한 삶임
- 신자의 삶은 신앙 게토화의 삶이 아님
- “언약의 생활” 온 인류적 삶의 선취
B. 순결한 계명
- barah(f)bar “순결한, 사랑받는, 빛나는”
- a. 계명 자체 b. 계명을 지킨 순전한 생활
- 순결은 단지 외적 도덕의 상태가 아님
- 순결, 순수하고 마땅한 사랑의 충만함
- 사욕과 이기심을 배제한 신적 질서를 따른 삶
- 타인과 비교한 우월적 자기의 없음
- 삶의 빛남, 명예 아닌 계명 사랑의 결과임
- 주님 사랑+계명 지킴의 일치(신5:10)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 순결한 삶∼순전한 사랑∼순수 사랑
III. 눈을 밝게 함
- meilat “빛을 주는”, 계명은 빛을 줌
- “빛”: a. 자연적 b. 윤리적 c. 신학적
- 거룩한 삶: 윤리보다 신학의 결과임
- 하나님의 말씀은 신학적인 눈을 뜨게 함
- 구원받기 전 우리의 불행은 무엇이었나?
- 자신의 근원과 세계 존재의 의미를 모름
- 삶의 지침을 어디에 둘지 몰랐었음
- 자기의 이성을 믿고 자기 좋음에 따라 판단함
- 마음에 진리가 없고 빛 보다 어둠을 더 사랑함
- 말씀의 계명 작용: 지성에 이해를 더함
- 어두운 마음은 학문으로 해결이 안됨
- 지식이 도구이지만 성령의 역사가 필요함
IV. 적용과 결론
- 말씀을 배우나 성령의 역사를 갈망하는가?
- 성령의 비췸이 없는 지식으로 교만해짐
- 탐구는 지식을 획득, 은혜는 사랑하게 함
- 말씀의 빛을 사모하자
-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살자
말씀의 능력 5 2016. 4. 3 주일오전예배
< 경외하게 하는 말씀 >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시 19:9)
I. 본문해설
- 다섯 번째 말씀의 효능은 경외하게 함
- “야웨의 경외는 정결하여 영원히 서 있으며”
- 말씀의 효능을 계속해서 다루고 있음
II. 경외하게 하는 말씀
- 하나님의 말씀은 주님을 경외하게 함
A. 경외란 무엇인가?
- “yrat”: 떨리는 두려움+이끌리는 사랑
- 존재적 격차를 느낀 데서 온 두려움
- 도덕적 격차를 느낀 데서 온 의존감
- 아무런 두려움이 없는 것은 영적 깊이가 아님
- 거룩하심에 대한 경험만큼 신자가 됨
B. 말씀이 경외하게 하는 방법
1. 진리를 알게 함
- 성경을 통해서 깨달음: 믿음+이해
- 어느 쪽이든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함
- 지식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님
2. 감화를 받게 함
- 지해(믿음+이해)를 행하기까지
- 마음: 감화를 통해 의지를 불러일으킴
- 감화의 핵심: 하나님을 사랑함
- 그 사랑이 동기가 됨: 모든 말씀에 순종함
- Neopuritanism의 해로운 영향력
- 참된 신앙: 충만한 사랑+생명력
III. 영원까지 서 있음
- 말씀의 작용은 한시적인 것이 아님
- 인간의 마음이 부패하여 말씀의 능력이 없음
- 오랜 세월이 지나 우리를 다시 회심시키심
- “omedet, 서 있다”: 변함이 없음+견딤
- 진리의 가치는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
- 절대 가치와 규범을 거부함: 자유+소외
- 어머니같은 진리는 언제나 거기 있음
IV. 적용과 결론
- 끝없는 소외감은 어디서 오는가?
- 진리를 멀리하고 그 사랑을 받지 못할 때
- 지금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부르심
-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지름길로 삼으심
- 말씀을 깨닫고 성령의 은혜를 받자
말씀의 능력 6 2016. 4. 10 주일오전예배
< 진실하고 의로운 말씀 >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시 19:9)
I. 본문해설
- 말씀의 효능 6번째: 삶을 의롭게 함
- 사실 효능이라기보다 말씀의 성질임
- 말씀에서 비롯된 신적 명령의 성질
- 명령은 말씀에 입각한 판단에서 옴
- 그 판단이 어떠함은 곧 말씀의 효능임
II. 말씀과 여호와의 법
A. 여호와의 법
- mishpat “공의, 심판, 판단, 정의”
- “계명, 교훈”으로 지칭되는 명령
- 우리성경 “규례”,“법”으로 번역함
- 말씀의 판단을 따라 구체화된 명령들
- 누구의 판단을 따르며 믿고 사는가
- 말씀을 안다는 것: 성경+교리+적용
B. 믿을 만한 법
- emet 참된, 확고한, 믿을 만한
- 말씀이 참되기에 교훈과 계명을 신뢰함
- 말씀의 이해 없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함
-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신뢰
- 인격에 대한 신뢰와 말에 대한 믿음
- 성경대로 살지 않음이 불신앙인 이유
-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함
- 예수를 깊이 만나야 할 이유를 알자
III. 의로운 하나님의 법
- 성경신학적 “의”: 율법에 부합함
- 결국 “의”: 주께 받아드려질 상태
- 절대적 의(롬3:21)+상대적 의(마1:19)
롬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
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마1: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 하나님의 의로우심=율법도 의로움
- 신앙은 말씀의 옳음을 인정하는 것임
- 자기부인이 없는 시대와 영적 미성숙
- 그러나 하늘의 복은 언제나 그런 자들 것임
IV. 적용과 결론
- 생명과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옴
- 신자의 관심사는 말씀을 체득체행 하는 것임
- 변천하는 세상에서 말씀으로 살자
말씀의 능력 7(마지막) 2016. 4. 17 주일오전예배
< 말씀의 능력 >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시 19:10)
I. 본문해설
- 말씀의 효능들에 대한 언급이 끝남
- 그런 말씀을 어떻게 사모할지 보임
- 순금보다도 꿀보다 더 사모할 말씀임
II. 순금보다 사모함
A. 가장 소중한 것의 상징
- 금은 고대부터 불변하는 부의 상징임
- 화폐 발명 이전까지 유동성이 제일 큼
- 순금은 육신의 행복을 위한 물질을 보장함
- 부의 축적 수단으로 탐욕의 상징이기도 함
- 육적 욕망과 영적 욕망 사이의 유사성
- 소유하기까지 욕망은 잠잠하지 않음
B. 진리를 통한 참 행복
- 하지만 인간은 영적 존재임: 금 이상이 필요함
- 육적 욕망이 큰 자에게는 금이 행복의 조건임
- 영혼의 필요를 아는 자는 그렇지 않음
- 진리가 없어 고통을 받아본 자는 앎
- “소록도 이야기”에서 깨닫는 진리
- 물질의 부족은 욕망을 줄이면 해결됨
- 진리가 없는 곤고함은 금으로 해결 못함
- 이는 객관적 진리가 아닌 체험된 말씀임
III. 송이꿀보다 말씀
- 송이꿀은 채집하기 전 벌집형의 꿀임
- 당시 꿀은 식용뿐 아닌 약용이기도 함
- 설탕과 단맛의 발견이 인류사에 끼친 영향
- 맛과 함께 에너지를 얻는 중요한 수단임
- 단맛과 함께 음식의 섭취를 즐겁게 함
- 말씀에 대한 시인의 체험을 보여 줌
- 영혼의 기쁨이 없는 건조한 삶의 고통
- 중생과 함께 말씀의 미각이 주어짐
- 말씀의 미각이 뛰어나던 때를 생각함
- 그 단맛이 삶 갈피에 배어서 힘을 줌
- 현재 우리 영혼의 미각은 어떠한가?
IV. 적용과 결론
- 우리의 삶의 본질적 문제는 힘이다
- 인간의 삶을 위한 힘은 마음에서 옴
- 진리를 통해 새롭게 부어지는 힘이 필요함
- 말씀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힘을 주심
말씀의 능력 1
말씀의 능력 1 (2016.2.14 주일오전설교)
말씀의 능력 2 (2016.2.21 주일오전설교)
말씀의 능력 3 (2016.3.6 주일오전설교)
말씀의 능력 4 (2016.3.13 주일오전설교)
말씀의 능력 5 (2016.4.3 주일오전설교)
말씀의 능력 6 (2016.4.10 주일오전설교)
말씀의 능력 7 (2016.4.17 주일오전설교)
영혼을 소성시킴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시 19:7)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 당신에 대해서 아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 지식을 통하여 우리는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도 배우게 됩니다. 결국 그 지식 안에서 우리는 사람다워지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9편은 가장 애송되고 있는 시편의 시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시편 19편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그 말씀의 효능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가 마땅히 그 말씀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시편 19편은 크게 세 토막으로 나눠지는데 1절부터 6절까지는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7절부터 11절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영혼에 어떤 효능을 가져오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2절부터 16절까지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어떠해야 할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시편 19편 7절 본문이 담겨 있는 7절부터 11절까지 사이에는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혹은 하나님의 말씀의 효능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짧은 성경 구절 속에서 오늘 말씀은 최소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효능이 일곱 가지나 된다고 가르쳐 줍니다. 첫째는 영혼을 소성케 하는 것이고, 우리를 지혜롭게 하고, 기쁘게 하고, 우리를 밝게 하며, 영혼으로 인도하고, 사랑하게 하며, 만족을 누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일곱 가지 말씀의 위대한 효능에 대해서 우리들이 차례대로 매주 살펴보려고 합니다.
II. 영혼을 소성시킴
우선 오늘 성경에 나오는 영혼을 소성시킨다는 것, 이게 무슨 말일까요? 다시 말해서 우리의 영혼이 소성된다고 성경이 묘사했는데 그 소성이 무슨 뜻이냐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 단어가 ‘마시바’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돌아오게 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New International Version을 비롯해서 여러 영어 성경이 이 단어를 ‘reviving, revive’라는 단어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살아나게 하다, 혹은 부흥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창조하셔서 우리 영혼에게 어떤 상태를 주셨는데 어떤 이유로 이 상태에서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영혼에 영향을 주어서 원래의 상태로 다시 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기에서 우리말로 소성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뭔가 어색하기는 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의 영혼의 부흥이기도 하고, 영혼의 재생이기도 합니다. 혹은 영혼을 소생시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A. 영혼의 침체
우리는 여기에서 영혼의 소성, 혹은 소생을 발견하게 되고 이것은 결국 영혼의 침체라고 하는 것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의 침체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흙을 빚어 사람의 몸을 만드시고 영혼을 창조하셔서 둘을 결합하게 하심으로 살아있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육체는 물질에 속하고 영혼은 영적인 세계에 속합니다. 둘은 육체와 영혼으로 결합되어 만나고 그래서 영혼은 열등한 기능으로는 먹고 마시고 자고 숨 쉬는 배설하는 이런 기능을 하고, 고등한 기능으로서는 사물을 인식하고 의미를 파악하고 무엇이 도덕적으로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를 판단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원래 이런 아주 완전한 영혼을 가지고 완전한 육체를 가지고 불멸하는 인간의 몸으로서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죄를 지었습니다. 결국 이 영혼과 육체의 아름다운 결합은 깨뜨려지게 되었고, 육체에는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죽음의 기운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영혼에는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육체의 죽음이라는 개념을 영혼의 죽음에 그대로 도입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영혼은 육체처럼 죽지 않습니다. 우리는 몇 십 년을 살고 나면 호흡이 끊어지고 심장의 박동이 멎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상태로 들어가고 몇 시간 지나면서 우리의 육체는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소멸되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체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영혼은 신자의 영혼이든 불신자의 영혼이든 불멸합니다. 결코 육체와 같은 방식으로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육체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을 말하지만 그 죽음의 의미가 서로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육체는 죽어버리면 아무 행동도 못하지만 영혼은 죽었을 때 수많은 죽음의 행실들을 열매로 맺습니다.
그러면 영혼의 죽음의 개념은 무엇일까요? 영혼은 전원 없이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전자 제품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참 영혼다운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그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 하나님께로부터 끊임없이 영향을 받으며 생명과 사랑의 충만함 속에서 영혼이 기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 영혼은 육체를 온전히 장악하는 주인이 될 수 있고, 육체는 영혼에, 영혼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주인으로 모심으로써 인간은 온전한 인간다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그를 거듭나게 하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관계가 끊어지고 죽어있었던 영혼인데 하나님이 그를 중생을 통해 살리시고 회심을 통해서 자신이 살아난 것을 의식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을 갖게 하셨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가 수립되어 그 하나님께로부터 영혼의 생명을 끊임없이 공급받도록 만들어 주신 사람이 신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영적인 생명의 정체를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새로운 생명을 받은 신자라 할지라도 그가 자기 안에 남아있는 죄와 잘 싸워서 이기고, 세상의 유혹을 극복하고, 죄로 가득 찬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면서 새 생명의 원리를 따라서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그 신자 안에 하나님의 생명은 더욱 충만하게 되고 그 충만한 생명의 힘으로써 죄악된 세상을 이기고, 죄된 육체를 장악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 안에서 그 신자는 행복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에게 기쁨을 주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러한 영적인 생명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매일매일 충만하게 부어지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바로 하나님이 이렇게 당신의 자녀들에게 충만한 영적 생명을 부어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무기고이고 영적인 충전의 장소입니다.
가끔 기도회나 예배 시간에 대표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그 대표기도는 너무 중요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자기의 감상에 취해서 공동체 전체를 잘못된 길로 이끌어 가기도 합니다. 개척한지 얼마 안 되어서 금요기도를 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뜨겁게 기도할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 나와서 그리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합니다. 그때에 한번 간절한 기도가 끝나면 한 사람씩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기도만 시키면 늘 그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는 일주일 내내 죄만 짓다 왔습니다. 우리는 힘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살 의욕도 없습니다.” 나중에 그 기도가 끝난 다음에 사람들이 자꾸 뭐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목사님 저 사람 좀 기도시키지 마세요. 자기는 일주일 내내 죄만 짓다 왔지만 우리는 안 그런데, 자기는 어디로 가야될지 모르지만 우리는 너무 분명하고 그 길을 알았으니까 이제 능력을 받으려고 왔는데 마치 이렇게 기도회로 모여도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듯이 그렇게 기도를 하니까 기도회 와 가지고 의욕과 용기가 생기기보다는 있었던 믿음도 반납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러니까 자신이 없으면 기도를 못하겠다고 그래야지 그렇게 말하자면 패배로 가득 찬 그 의식을 가지고 마치 마귀에게 자기 인생을 반납하는 것처럼 그런 패배 의식을 가지고 기도를 하는데 그게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기도겠습니까?
이런 것들은 모두 영혼이 깊이 침체되어 있는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영혼이 침체될 때에 가장 심각한 문제는 뭐냐 하면 신령한 것들에 대한 감각이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회심과 함께 하나님은 불신자 때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실제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죄, 하나님 사랑, 용서, 은혜, 영광, 이런 것들에 대한 아주 탁월한 감각을 갖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영혼의 침체가 오면 이런 것들에 대한 감각이 아주 흐려지고 혹은 무디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이 아주 딱딱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으면서 감화를 받습니다. 영혼의 무디어진 감각이 깨뜨려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어둡던 눈이 밝아집니다. 하나님 앞에 말씀대로 살 수 없어 패배의식으로 가득 찼던 그의 의지에 새로운 힘이 부여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가장 치열한 영적인 전쟁터는 여러분의 마음과 교회입니다. 죄악으로 가득찬, 환락의 도시는 영적인 전쟁이 없습니다. 이미 거기서 마귀가 이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후방에서 아군이 총 쏘는 것을 보셨습니까? 최전선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한편으로는 신자들을 공격해서 이런 영적인 침체에 계속 머물러 있도록 유혹하고, 혹은 두렵게 만들고, 그리고 그를 불순종하게끔 이끕니다. 무지한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 말씀의 눈을 뜨지 못하도록 어두운 덮개로 그의 영적인 눈을 가리워버립니다. 그리고 교회가 모였을 때에 이런 하나님의 말씀의 놀라운 은혜가 나타나서 하늘의 신령한 것들로 그들의 마음을 채워 침체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도록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지 않고 교회를 부패시키거나 영적으로 무력화시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세상의 박해와 핍박도 사용하지만 교회에 있는 지체들을 사용해서 이런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이런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러한 영적인 침체의 상태에 있는 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영적인 침체 속에 있으면 여러분의 가족들이 피해자가 됩니다. 여러분이 영적인 침체 속에 있으면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피해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곳 어두운 세상에 부름 받은 빛이기 때문입니다.
B. 영혼의 소성
영적인 침체 속에서 비겁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울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아우라가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능하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한 영혼이라도 영적으로 소생하고 새로운 생명을 다시 충만하게 받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인간 같지 않은 삶을 사는 것, 성도답지 않는 삶을 살아서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밟혀 사라지는 맛을 잃은 것 같은 소금이 되지 않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간절한 기대는 참으로 여러분이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깔보이거나 무시당할 수 없는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의 영혼을 침체에서 벗어나 다시 부흥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침체에 빠진 영혼을 소생시키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성령의 은혜를 주십니다. 누구든지 성령의 은혜가 없이는 침체된 영혼으로부터 다시 영적인 활기와 생명력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죄인이고 쓰레기 같은 인간들인데도 그들 자신이 소중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으셨기 때문에 그 공로를 의지하여 그분의 중보 때문에 우리 모든 성도들을 영적으로 소생시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비록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리 떠나 침체에 빠졌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쓰레기 같은 사람들이 변하여 하나님의 교회의 기둥들이 되었고, 예전에는 정말 쓸모없는 자들이었는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요긴한 일군이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영혼의 침체로부터 벗어나게 하시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이유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아무리 많은 것을 배우고 또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높은 지위에 올랐다고 할지라도 그 자체가 그 사람을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게 만들어 주지는 못합니다. 침체된 영혼으로서는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없습니다. 애국심을 잃어버린 군인에게 최신 무기가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정치가에게 높은 권력 그 손에 들린 지휘봉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높은 지위와 그리고 많은 대접은 그 어떤 것도 그에게 애국심을 창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침체된 영혼으로 우리가 그런 당신의 목적을 위해 살 수 없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지금도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셔서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그 분의 이름의 높아짐을 위해 살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영혼이 침체에 빠져 있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한번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침체된 영혼으로 살아가고 있는 내가 행복한가 말입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행복하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는 신자가 아닙니다.
III. 말씀, 영적 소성의 도구
자,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해서 깊은 침체에 빠진 우리의 영혼을 다시 부흥하게 하실까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무엇을 사용해서 우리의 침체된 영혼에 소생을 주실까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은 영적인 소성의 도구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이 모든 세상의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아무것도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모든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 심지어는 인간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사고까지도 모두 원 저자가 하나님이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 하나님이 다른 것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지 않으시고 오직 당신의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까요?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도구가 왜 말씀으로 지정되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직접 보아서 알 수 없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이렇게 위대하다는 것을 물질의 세계를 볼 적마다 영적인 세계를 경험할 때마다 알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 이외에 모든 것을 말씀을 통하여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제가 처음 봉사하게 된 신학교가 있었습니다. 교수로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서 그 학교가 대학 인가를 신청했습니다. 그랬더니 문교부에서 ‘다른 조건들은 잘 갖추었기 때문에 대학으로 인가해 줄 텐데 운동장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만한 크기의 운동장을 만드십시오. 그리고 신청하면 인가를 해주겠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운동장을 만들 곳이 없습니다. 그러더니 학교에서 결정하기를 학교 뒤에 있는 산 하나를 드러내고 거기다 운동장을 만들겠다고 합니다. 산이라고 그러지만 사실은 태백산이나 무슨 백두산이 아니라 엄밀하게 말하면 동산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동산 하나를 다 드러내서 운동장을 만드는 줄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날 공사가 다 완공이 되었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한번 올라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산이 이렇게 있는 것에 윗부분을 잘라내서 그리고 축구장과 농구장 등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리 크지 않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란 것은 산을 깎아서 그 운동장을 만드는 데 그 당시 돈으로 30억이 들어갔답니다. 멀리서 내려다보니까 그것도 그런 게 우리가 보기에는 산 위를 살짝 잘라냈을 뿐인데 그 공사가 아주 오래 걸렸습니다. 손톱보다 더 작아 보이는 멀리서 보면 그렇게 조그만 트럭들이 수십 대가 줄을 이어서 그 산에서 깎아낸 흙을 어디론가 퍼 옮기고 있는데 아무리 퍼 날라도 산의 크기가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때 저는 시편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는 시편의 노래가 생각이 났습니다. 물론 그 산은 시온산을 가리키는 것이기는 하지만 왜 시인은 인생의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에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보리라고 노래했을까요?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그 시온에서 당신의 임재의 축복을 약속하셨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산을 볼 때마다 그 산을 만드신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배당에 와서 겨우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신앙은 좋은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천하에 있는 모든 만물들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그리고 창조하신 만물들을 붙들고 그것이 규칙적으로 운행되게 하시는 것도 당신의 말씀의 능력으로 붙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헤르만 바빙크라고 하는 신학자는 모든 학문이 가능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라고 설파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로고스가 원리가 되어 모든 자연계의 만물, 인간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규칙성들이 발견되고 그 현상 속에서 어떤 특정한 원칙들을 터득할 수 있으며 이것들을 분석하고 종합하여 체계화함으로써 학문이 성립한다고 본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과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는 엄청난 세기적인 발견이 보도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중력파 발견이었습니다. 중력파는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원리를 발표할 때에 가설로 세운 개념입니다. 즉, 모든 물질은 중력을 가지고 있고, 질량의 크기는 중력을 가지고 있고, 그 중력은 공간을 휘게 함으로써 사실상 시간과 공간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이론이 바로 상대성 이론이었습니다. 이 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상세히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게끔 어려운 상대성 원리를 한 마디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예배 공간 전체에 아주 얇은 말랑 말랑한 고무로 만든 막이 팽팽하게 펼쳐져 있다고 가정을 해보십시오. 그게 우주의 공간입니다. 그 위에 쇠로 만든 동그란 물체를 올려놨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오. 콩알만 한 쇠구슬을 만들어 그 말랑말랑한 고무막 위에 올려놓으면 고무가 약간 내려앉으면서 콩알 같은 쇠구슬이 올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콩알만 한 쇠구슬이 있는 그 지점과 이쪽 끝에서의 거리는 숫자가 나올 것입니다. 그것을 올려놓고 재도 거의 길이가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축구공만한 쇳덩어리 구슬을 만들어서 그 막 위에 올려놓았다고 칩시다. 그 막은 뜯어지지 않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전혀 다른 일이 생길 것입니다. 그 말랑말랑한 고무막 위에 축구공만한 쇳덩어리가 올라갔으니까 굴러가다가 이렇게 밑으로 쭉 빠지는 주머니 같은 것들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구슬이 있는 그 지점에서 여기까지의 거리를 재면 A였다면 그 구슬을 올려놓고 재면 A+a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됐던 것이 자루가 생겨서 그렇게 되었으니까 그게 바로 중력파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그 중력이 이 공간을 굽게 만들어서 빛까지 휘게 만들기 때문에 시간이 빛에 의해 측정되므로 시간의 길이까지 공간이 좌우한다는 뜻입니다. 그 중력파가 가설로만 상정되었는데 이번에 과학적 실험을 통해서 양쪽 블랙홀이 융합하면서 거기서 나오는 파장이 검출이 된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이 중력파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고, 그 기원을 끝까지 설명 못하지만 우리는 아주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힘입니다. 그런 힘들로 이 모든 우주 만물들을 장악하고 계시기 때문에 결국은 이 모든 세계의 만물들이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운행하고 그리고 자신의 자리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말씀으로 이 모든 것들을 움직이시고 없는 것들을 창조하고, 있는 것들을 붙드시는 원리는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혼에 대해서도 진실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으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살리실뿐만 아니라 살아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에 꽉 붙들려 있을 때에 그 충만한 생명과 능력을, 아름다움을 유지하게끔 만드시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처럼 중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고 계십니까? 정말 여러분의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에 장악되고 그 말씀에 은혜를 받고 그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의 생명의 충만함을 누리고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주일은 세속의 정신으로 혼란스러워졌던 우리의 마음이 세탁되는 시간입니다. 사람들은 주일날 일을 해도 되나, 저 일을 해야 되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주일은 영혼의 날입니다. 그래서 이 하루를 온전히 비어 우리 주님께 드리고 노동으로부터 일체의 쉼을 얻고 영적이고 신령한 일에 집중해서 자신의 영혼의 건강 상태를 말씀으로 점검하고, 망가진 부분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수리하고, 다시금 성령의 충만한 기름부음을 가득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온전한 인생을 살 수 있는 힘을 공급받는 그 재충전의 날이 주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주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습니까? 마음을 실어서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그리고 일주일동안 그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대로 살도록 간절히 열렬히 기도하고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주일날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지 못하니까 일주일 내내 무엇을 붙들고 기도해야 될지 기도의 제목이 없습니다. 열렬한 기도의 제목이 없는데 간절히 매달릴 이유가 없습니다. 간절히 매달리지 않는데 능력이 주어질 리가 없습니다. 패배는 이미 보증되었습니다. 그리고 쓰레기처럼 너절한 삶을 살다가 회개하는 마음도 없이 예배드리니 주님의 은혜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옆에서는 회심하고 주님을 만나도 자신의 마음속에는 찬바람이 돌 뿐입니다. 온갖 불만과 불평, 그리고 미움의 말들이 가슴 속에서 쓰레기처럼 솟구칩니다. 그리고 또 다시 죄 짓고, 죽은 자처럼 인생을 살다가 무엇에든지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서 예배당에 나와서 출석도장을 찍고 돌아갑니다. 그래도 주일을 지켰다는 양심을 달래며 돌아갑니다. 그런 신앙이 우리의 인생을 사는데 도움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더욱 더 심각한 것은 여러분 중 상당수가 하루에 30분도 성경을 읽는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에 나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배에 대한 기대가 없습니다. 또 그렇게 살았는데도 예배에 대해서 기대를 갖는다는 것은 은혜를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잔재주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나는 음악과 조명의 도움을 받으면 30분 안에 여러분을 울릴 자신이 있습니다. 그렇게 운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닫고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데 울음과 눈물, 기쁨과 환희, 즐거움,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냐고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난 한 주를 돌아보며 매일 조용히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하루에 단 석장이라도 성경을 읽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더욱이 그 성경을 읽으며 마음의 감화를 받았던 사람, 그래서 자기도 예기치 못하게 그 성경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리며 열렬한 기도를 드렸던 사람이 여러분 가운데 얼마나 될까요? 하나님 앞에는 말 한 마디도 안하던 사람들이 사람 앞에서는 입을 열고 수없이 말들을 쏟아냅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던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능란한 말들이 거기에 생명이 있겠습니까?
마음을 실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원래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있을 그때에만 겨우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매일매일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속에서 은혜를 받고, 그 말씀이 자기를 사로잡아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그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힘으로 고난도 이기고, 역경도 견디고, 아픔 속에서 성숙으로 나아가고,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연약한 우리들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말씀의 능력을 통해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경험했던 바이고, 그래서 그들은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서 인생을 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의 영혼의 닻을 하나님의 말씀에 내리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성경은 밥이라고 비유했고, 경건 서적은 반찬으로 비유했습니다. 밥맛이 없어도 반찬이 너무 맛있으면 수저를 들게 됩니다. 그리고 몇 번 반찬을 먹고 나면 밥 생각이 나고 밥이 맛있어서 먹게 되면 반찬에 손을 대게 됩니다. 제가 목자로서 마음을 다해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공적인 예배를 통해서 말씀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개인적인 예배 속에서 성경을 읽을 때나 묵상할 때나 경건서적을 읽을 때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 없이는 여러분이 영혼의 침체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침체 속에 오래 머무는 사람의 신앙생활은 성공하면 외식하는 생활이고, 실패하면 배교에 가까운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붙들려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그래서 결심하십시오. 일주일 내내 간절히 ‘주일에 예배를 받도록 하나님 내게 말씀의 은혜를 주옵소서.’ 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오늘도 이 말씀에 깨달음이 있게 해 주시고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순종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시간을 내십시오. 고요히 문을 닫고 홀로 가만히 앉아서 묵상하며 혹은 음악을 들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정독하십시오. 그리고 거기서 주님을 만나기를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IV. 적용과 결론
온 땅과 하늘이 하나님의 웅장한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아름다운 하나님의 능력이 바로 이 말씀 속에 있습니다. 곤고한 영혼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는 인생은 없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곤고하고 힘든 인생을 산다고 말하지만 그 문제가 해결된다고 여러분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시련과 고난 속에서 믿음을 지키는 사람은 얼마간 있지만 신앙 없이 영혼의 침체 속에서 번영과 형통의 길을 걸어갈 때 순결한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쁜 일이 일어나든 슬픈 일이 일어나든 우리를 붙드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일 때에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다울 수 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십시오. 거기로부터 충만한 영혼의 생명을 누리며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인간을 지혜롭게 함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시 19:7)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의 두 번째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병행법으로 이루어진 이 1절은 여호와의 율법과 여호와의 증거가 짝을 이룹니다. 그리고 ‘소송케 하고’와 ‘지혜롭게 하고’가 짝을 이룹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같은 말의 반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한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물리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관해 말씀하실 때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농부가 뿌린 씨앗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 씨앗이 길가에 떨어졌을 때 새가 와서 먹어버리거나 사람에 의해 밟혀버려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옥토에 떨어졌을 때 그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잎과 가지가 무성하여 커다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 안에서 위대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진리의 말씀은 아무리 올바르게 증거된 것이라도 여러분의 마음을 드릴처럼 뚫고 들어가 무슨 일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그 말씀은 포근한 여러분의 마음의 밭에서 사랑을 받고, 지성을 깨우치고, 의지를 움직여서 그 말씀이 여러분 안에 작용합니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아주 드넓은 숲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름드리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서 있고 빽빽한 나무의 군락을 이루지만 그 모든 나무들은 한때 한 알의 씨앗이었습니다. 그 씨앗이 자라서 그렇게 거대한 나무의 숲을 이루게 된 것처럼 그 말씀의 씨앗이 여러분의 마음에 떨어져 자랄 때 아주 훌륭하게 성숙하여 새들이 깃들 수 있는 그러한 커다란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지탱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지탱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신자는 누구입니까? 신자는 바로 이러한 말씀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담겨진 신비한 능력을 체험한 것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신자를 얘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신자 됨은 바로 그렇게 심겨진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고 그 말씀의 현재적인 경험 속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이런 비밀스러운 능력을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 교회에는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에게는 회심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비밀스러운 은혜의 작용과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바로 이러한 진리를 깨닫습니다. 이 세상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오늘 성경은 ‘여호와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히브리말로 ‘에듀트’라고 하는 이 단어는 그야말로 증거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증거하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법궤를 가리켜 증거궤라고도 부른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법궤에는 세 가지 물건이 들어있었습니다. 십계명의 돌비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만나를 담은 항아리였습니다. 왜 이 법궤를 증거궤라고 불렀는지 우리가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법궤라고 불렀을 때에 그것은 바로 그 법궤 속에 들어있는 십계명의 돌비가 가장 중요한 물건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돌비는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증거하는 만나,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함께 십계명의 돌비는 여호와에 관한 증거였습니다. 즉, 십계명의 돌비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이 선악 간에 인간을 심판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십계명은 모든 인류의 가슴속에 새겨져 있는 율법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은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이 두 군데에 십계명을 새기셨는데 하나는 돌비에 새기셨고, 또 하나는 인간의 양심 속에 새기셨습니다. 그래서 이 십계명은 인류의 마음속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또렷이 아로 새겨져 있고, 그래서 하나님을 안 믿는 이방인이라도 이미 그런 율법을 마음에 새김 받았기 때문에 그 율법을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유대인과 그 율법을 받은 사람들은 그 돌판의 계명을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그 돌판을 직접 받지 않은 사람들도 가슴에 새겨진 율법이 있기 때문에 그가 행한 악과 잘못에 대해서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뜻입니다. 아무튼 그렇기 때문에 법궤는 증거궤라고 불렀고, 그래서 시편에 나오는 이 증거라고 하는 말씀은 넓게 보면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가리키고, 좁게 보면 바로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도리를 따라야 인간답게 살 수 있는지를 가르치는 최소한의 계명인 율법, 십계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II. 인간을 지혜롭게 함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 율법이, 그 증거가 인간을 지혜롭게 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많은 명제들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 등등의 많은 명제들을 가지고 살아가야 됩니다. 그러나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를 모두 이성으로 증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중의 하나는 동성애입니다. 동성애자들은 말합니다. ‘똑같이 세금을 내니까 똑같은 권리가 우리에게도 있다.’ 그래서 미국의 동성애자들이 항상 데모할 때 내걸었던 캐츠프레이즈가 ‘equal tax, equal right' 똑같이 세금을 내고 그러므로 우리는 똑같은 권리가 있다 그러고 주장합니다.
제가 여러 해 전 호주에 갔을 때에는 거기서 100만 명의 동성애자들이 모여서 세계 동성애자 대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묻습니다. ‘왜 동성과 동성이 결혼을 해서 부부가 되는 것이 안 되냐?’ 그 이성으로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에이즈에 걸리고 굉장히 위험하다’ 그러면 완벽하게 AIDS를 예방하는 방법을 만들어 내면 그것은 괜찮은 것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럼 왜 아니냐는 것입니다. 왜 남자가 여자처럼 살면 안 되고, 여자도 남자처럼 살면 안 되냐 이것입니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sex라고 하는 것은 생물학적인 성입니다. 이것은 바꿀 수 없습니다. 성을 나타내는 또 다른 영어 단어 gender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전에는 sex와 gender가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sex는 타고나는 것이지만 gender는 사회적인 성이기 때문에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렇지 않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거나 위협을 하면 서구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현행법 위반입니다. 심지어 영국에서는 교회가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남자 둘이 와서 결혼 주례를 서달라고 그래서 목사가 싫다고 그러면 현행범입니다. 차별법에 의해서 체포됩니다. 그러면 왜 동성애가 나쁜가를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영국의 사상가 체스터 턴이라는 사람이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대부분 사회적인 약속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약속이다.” 무슨 뜻인지 아세요? 왜 우리가 싸우면 안 되는지를 이성으로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많은 고대의 사람들은 신전에서 서로 다투다가 신 앞에서 우리가 이렇게 싸우면 신이 화를 내신다 하고 우리가 화목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인용하면서 그러면서 도덕적인 것들의 대부분의 근거는 이성으로 입증될 수 없는 종교성이 있다고 규정을 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왜 그런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마 이성만을 가지고 동성애자와 그 동성애자 아닌 사람들이 논쟁을 하면 판단이 흐린 사람들은 그 토론을 많이 듣고 있을 때에 오히려 동성애자들의 의견에 훨씬 동정을 표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옛날에 아름다운 인생이니 뭐 이런 TV 드라마 속에도 동성애를 옹호하는 작품들이 아주 버젓이 소개되는 일들이 가능했던 것이 바로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런 모든 것들에 미혹되는 것이 지혜가 없기 때문인데 결국은 이 지혜가 없이는 우리들이 이런 미혹의 삶을 살게 되는데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는 신앙은 이성으로 논증하지 못해도 이런 것들을 판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갖게끔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A. 지식과 지혜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지식과 지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맨 처음 창조하실 때에 사물들을 인식할 수 있는 두 가지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신앙과 이성입니다. 신앙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인 사실들을 받아들이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이성은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없는지를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유추해서 자기가 결정하게 만듭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겸하여져서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적인 사물들은 이성을 통해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터득해서 이런 꽃이나 나무에서도 뭔가 약용 성분을 찾아내어서 약으로 사용합니다. 모두 사물들의 자연적인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찾아냈기 때문입니다. 그 방대한 발견들을 같은 것끼리 묶고 달라 보이지만 같은 것을 묶고 같아 보이지만 다른 것들을 나눕니다. 이것들을 종합과 분석이라고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인류 사회의 기술 문명과 사회적인 지식이 폭발적으로 증진하고 학문의 체계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이런 자연적인 현상에 대해서 많이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지는 않습니다. 제가 한때 관심이 있어서 과외 선생님을 불러서 한 1년 동안 생물학을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지금보다 나이가 젊었기 때문에 아주 열렬하게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요새는 힘이 없어서 공부를 잘 못합니다. 어쨌든 열심히 하는데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뭐냐 하며 그렇게 생물학을 많이 공부한 사람이 1년 내내 가르치는데 내가 질문을 하나 했습니다. “선생님, 생명이 뭡니까?” 이 분 대답은 간단합니다. “생물학은 그런 것 다루지 않습니다.” 생명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못 다루는 것입니다. 규명을 못하는 것입니다. 아마 지금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만큼 내리기 어려운 게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분야마다 다 그것을 정의하는 게 의학자가 다르고, 생물학자가 다르고, 다 다릅니다.
자, 그러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그 어떤 것들의 깊은 의미, 우리에게 생명의 현상들은 생물학이 연구하지만 그 생명이 무엇이고 더욱이 그 생명이 어디로부터 왔고 어렵습니다. 이름만 대면 다 알 수 있는 우리나라의 아주 유명한 과학자입니다. 제가 만났습니다. 그 분 전공이 재료공학인데 진짜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박사님 최고의 학자인데 나는 신학자이지만 하나 물어봅시다. 에너지가 뭡니까?” 마지막 그 분 대답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게 무엇인지를 한 마디로 말하는 것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합니다. 최고의 과학자인데 에너지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보니까 그 본질을 설명하기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신학자에게 신은 누구입니까? 신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보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들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파악이 안 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믿는 인격적인 신앙과는 다르기는 하지만 확률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많은 사회적인 생활과 지식들이 이러한 믿음으로부터 획득한 지식들을 기초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자, 물어봅니다. 우리 모두 생년월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도 생년월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나는 내가 그때 그 시간에 내가 태어났다는 사실에 대한 목격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너무 의식이 없고 어리니까. 그러면 몇 사람만 조작하면 내 평생 동안 몇 년 몇 월 며칠 생일이라고 믿어오던 나의 이 지식이 완전히 다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우리 어머니 얼굴과 아버지 얼굴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도 몇 사람만 함께 모의를 해서 조작을 하면 충분히 다른 집안 아이를 다른 사람 엄마 아빠의 아들인 것처럼 일평생 믿으며 자손 대대로 그렇게 생각하며 살게끔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것들이 우리에게 도사리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 믿음을 기초로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뉴스를 보면서 “어제 앙카라에서는”이라고 할 때에 ‘나는 앙카라에 못 가봤으니까 나는 저 뉴스를 믿을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자기가 직접 가보지 않고 확인해도 그냥 믿습니다. “동해바다에서 태풍이 일어나고 있습니다.”라고 실시간으로 텔레비전으로 비춰주지 않고 방송으로 해도 우리는 진짜 그럴 거라고 믿어버립니다. 이러한 많은 믿음을 통해서 획득한 혹은 확률에 대한 신뢰를 통해 획득한 지식들을 기초로 우리의 사고와 판단들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떠한 것들에 대해서 판단을 내릴 때 우리에게 두 가지 능력을 주셨는데 하나는 이런 인식 능력과 또 하나는 마음의 기울기입니다. 어떤 것들은 좋아하고 어떤 것들은 싫어하게 함으로써 어떤 사물에 대해서 판단을 하게끔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에 있어서 온전한 성화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물을 바라보시는 것 같은 동일한 인식으로 우리가 바라보고, 하나님이 보시고 좋아하는 것을 우리도 좋아하고, 하나님이 보시고 싫어하시는 것을 우리도 싫어하게끔 하는 것이 성화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그런데 언제나 우리에게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A라고 생각하시는데 나는 B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은 나는 싫다고 말씀하시는데도 나는 그게 너무 좋은 것입니다. 요즘 금연 광고에 나오는데 별로 유쾌하지 않습니다. ‘담배가 몸에 해롭습니다.’ 이렇게 설명을 하면 될 텐데 가게에 가서 ‘폐암 한 갑 주세요.’, ‘뇌졸중 두 갑 주세요.’ 그러는 것입니다. 무슨 광고를 그렇게 하나 들으면서도 마음이 좀 섬뜩합니다. 다른 훨씬 좋은 방법으로 금연을 호소할 수 있을 텐데 뭐 그렇게 나쁜 것을 왜 그렇게 팔게끔 합니까? 그런데 담배가 몸에 나쁘다는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커피는 몸에 좋은 성분과 나쁜 성분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담배는 좋은 성분이 그 안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직까지도 못 끊고 있는 분 계시죠? 오늘 주님의 음성인 줄 알고 끊으세요. 제가 다 압니다. 끊으세요. 그런데 다 나쁜 줄 알면서 그게 그렇게 좋아 보이는 것입니다. 막 마음이 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갖 낭만적인 서술들을 하는 것입니다. 담배에 대한 예찬을. 그런데 그렇게 좋아하면 담배가 가지고 있는 명확하게 우리의 몸을 해치는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잘 생각을 안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럼으로써 어떤 사물에 대해서 판단을 하게 하는데 이것을 바로 애혐의 감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좋아하고 혐오하는 감정을 통해서 판단하게끔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정말 하나님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과 정반대의 싫어하고 좋아하는 경향을 가지면 가질수록 아주 사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는 그것을 계속해서 하나님께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자신도 싫어하고 주님이 좋아하는 것을 자신도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지식은 사물에 대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아는 것이라면 지혜는 그 지식을 사용하는 원리를 아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지식이 구슬이라면 지혜는 그 구슬을 어떻게 꿰어서 목걸이를 만들까, 팔찌를 만들까 하는 것을 아는 원리에 대한 이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B. 지혜와 미련함
성경은 지혜와 미련함, 이 두 가지를 대비시킵니다. 그래서 지혜롭다의 반대말이 우둔함, 혹은 미련하다입니다. 자연적인 인과 관계에 대해서 무지할 때 거기에 수많은 오류와 미신이 생겨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서 우리의 육신은 심각하게 피해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마리 퀴리 부인이 인류 최초로 방사능 원소를 발견합니다. 그게 처음 발견되었을 때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물질이기에 이렇게 끊임없이 방사선을 발산하고 그런 물질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후일 엄청난 에너지가 나온다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을 극대화 시킨 것이 핵폭탄이고, 수소 폭탄은 핵폭탄을 기폭 장치로 해서 터뜨리는 능력입니다. 그러니까 그 수소 폭탄은 핵폭탄하고는 비유가 안 되는 것입니다. 핵폭탄이 터져야 수소 폭탄이 터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것을 발견했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게 원인과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 바보 같은 사람들이 방사능이 나오고 나서 그 방사능을 쏘이면 몸에 참 좋다는 속설이 퍼진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입증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역사를 보면 방사능 크림, 방사능 로션, 무슨 방사능 립스틱, 심지어는 방사능이 나오는 것을 몸에 차고 다니는 것, 이런 것들이 아주 고급 백화점에서 고가의 제품으로 팔렸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근처도 못가고 부자들이 계속 방사능 크림을 바르고 로션으로 치장을 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피부암 그리고 뇌암, 이런 것들로 죽어간 것입니다.
파퓨아뉴기니아에서 선교사역을 하던 한 선교사의 보고는 우리의 가슴을 찢어놓았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아이가 갑자기 신열이 나면서 아이의 눈동자가 뒤집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신열이 나면 그럴 수 있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고열이니까 빨리 얼음이나 이런 것으로 열을 낮추고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엄마가 얘를 끌어안고 막 눈물을 흘리면서 바닷가로 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입을 벌리고 모래를 쑤셔서 아이의 입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귀신이 역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바다의 신이 관장하는 그 바다의 해변의 모래를 쑤셔 넣음으로써 이 귀신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게 신열이 나 가지고 온 몸이 완전히 늘어져 가지고 죽어가는 아이를 입을 벌리고 그 흙을 집어넣으니까 애가 호흡이 막혀 가지고 절명하고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마는 이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연적인 지혜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 애정이 이 아이를 오히려 죽음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C. 말씀의 확실성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뭐냐 하면 도덕적인 인과 관계에 대해서도 이러한 이치가 성립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몸에 안 좋은데 계속 니코틴을 섭취하거나 아니면 방사능을 쐽니다. 그러면 결국은 인간의 몸에 심각한 문제가 옵니다. 기껏해야 자신의 육체가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덕적인 것에 있어서는 더 심각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고 할 때 하나님의 이기심의 표현이 아닙니다. 어거스틴이 말했듯이 하나님이 뭐가 부족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그러십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사는 것을 우리에게 좋아하신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렇게 살아드릴 때에 최고의 수혜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그 혜택을 처음 입는 사람은 우리입니다. 우리 자신을 꺾습니다. 그것은 고통스럽지만 말씀의 은혜를 받습니다. 그래서 어두운 세상에서 자신이 어떻게 빛으로 살아야할지를 깨닫습니다. 그렇게 삽니다. 첫 번째 수혜자는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에게 악을 행한 사람에게 쳐 죽이고 싶습니다. 저 나쁜 자식, 저 죽일 놈, 그리고 복수심이 이글거리고 타오릅니다. 그럴 때 그 복수를 실행에 옮겨서 주먹으로 쳐서 턱뼈를 부러뜨렸다고 칩시다. 자기가 미워하는 그 사람은 주먹에 맞았을 때 턱뼈가 부러졌지만 자신의 속사람은 그렇게 해야 되겠다고 맘먹을 때 이미 무자비한 폭력을 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나쁜 일을 행할 때 그 사람에게보다 더 나쁜 일이 이미 자신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계명을 가르쳐 주시고, 증거들을 제시하는 것은 이기적인 행위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사물을 볼 때에 우리의 마음은 일체의 흔들림이 없이 사물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떤 사물을 볼 때에 끊임없이 출렁거립니다. 어떤 사람은 그 출렁거림이 아주 심하고 어떤 사람은 작고, 어떤 사람은 이럴 때 출렁거리고 어떤 사람은 저럴 때 출렁거리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누구에게나 그런 사물들을 대하면서 마음의 출렁거림이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렇게 될 때에 우리의 욕망이 우리의 마음에 투사되어서 사물들의 질서를 뒤집어서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인간의 많은 불행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교인 한 사람이 좋은 직장에 오래도록 잘 다녔습니다. 그런데 엄청나게 많은 회사의 돈을 관리하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욕심이 생겼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회사 돈 몇 억씩은 이게 장부를 어떻게 적느냐에 따라서 며칠 정도는 써도 자기가 사용을 해도 표가 나지 않습니다. 그 며칠 동안 주식에다가 집어 넣어놨습니다. 올랐습니다. 며칠 만에 팔아서 이익을 챙겼는데 몇 달치 월급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욕심이 생겼습니다. 더 많은 돈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재미를 보다가 주가가 떨어지면서 주저앉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또 다른 거짓말을 하고 또 다른 서류를 조작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결국은 들통이 났습니다. 그리고 모든 삶이 다 무너져 버렸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 것이 아닙니다. 욕망이 투사되니까 자기 것처럼 사용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 드리는 게 공짜를 좋아하지 말라고 말씀 드립니다. 제가 죄 다음으로 싫어하는 게 공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왜 공짜를 좋아할 때 문제가 생기냐 하면 공짜를 좋아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사물들에 대한 욕망이 투사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사람이 공짜를 바라게 되고 다른 사람이 은혜로 무엇인가 자기에게 해 주어도 감사하다는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이 남에게로부터 많은 것을 은혜로 공짜로 받았으니 자신도 그것을 본받아서 그렇게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엄격하고 그런 공짜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더 너그러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어떤 사물을 볼 때에 자꾸 우리의 마음이 출렁거리면서 움직여서 욕망이 투사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 흐려지는 우리의 판단을 올바로 잡아주게 만드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는 우리 안에서 스스로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리의 빛을 받을 때 거기서 그 말씀의 빛을 통해서 우리가 지혜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III. 지혜롭게 하는 말씀
성경은 오늘 왜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지혜롭게 하는지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기 때문에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합니다.”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확실하다는 것은 히브리말에서 읽어보면 ‘믿을 만 하오니, 신뢰할 만 하오니, 믿고 의지할만한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말씀 그 자체가 아니라 말씀하신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믿음이 투철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심이 큰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심이 없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한 사람이 좋으면 그 사람의 목소리도 듣기 좋습니다. 한 사람이 싫으면 목소리도 싫습니다. 심지어 한 사람이 사랑스러우면 그 사람의 냄새도 향기롭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늘 생각나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한 5~6년 전인데 자매 한 사람이 자매라도 해도 벌써 50대가 훨씬 넘었을 것입니다. 저를 꼭 만나고 싶다고 연락을 보내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만날 시간이 없어서 제가 어떤 약속 모임에 나갔는데 거기를 일부러 찾아왔습니다. 저는 그 자매를 아주 잘 알지는 못합니다. 같은 교회에서 그냥 먼발치에서 얼굴만 보고 생활하고 몇 마디 나누었을 뿐인데 그렇게 지하실의 교회를 개척했을 때 한번 꼭 찾아왔었습니다. 그리고는 저도 반가웠습니다. 그때 자매하는 이야기가 자기는 미국에 살고 있는데 “목사님한테 꼭 이 말씀을 드려야 될 것 같아서 일부러 왔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시련이 많은 인생에 하나님의 말씀이 저에게 큰 힘이 되어서 저의 인생을 지켜주었습니다.” 그 얘기를 남겼습니다. 그 분은 저와 함께 제가 전도사로 있던 그 교회에서 그 당시에 30대 중반이 됐을까 약간 안됐을까 했던 그런 자매였습니다. 아마 온 교회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부러워하는 부부였습니다. 남편은 의사였고 아내는 음악을 좋아해서 늘 성가대에 같이 봉사하고 그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하나님이 그 남편을 불과 한 4~5개월 사이에 불러가셨습니다. 그 형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암이었는데 “제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죽을만한 어떤 잘못이 나에게 있었는지를 생각해 봤더니 가족을 너무 사랑한 것밖에는 지은 죄가 없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제가 가족을 사랑했나 봅니다.” 사람이 3년, 4년, 5년 앓다가 정을 떼면서 떠나면 마음에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슬프긴 슬프지만 덜합니다. 그런데 한숨에 가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속에는 그 사람을 늘 느끼는데 그런데 현실은 그 사람을 잃어버렸습니다. 더군다나 아이가 서너 살짜리가 있었는데 매일 저녁마다 “엄마, 아빠 보고 싶어. 아빠 언제와? 아빠 어디 있어?” 그러면 엄마가 “아빠 보고 싶어?” “응 보고 싶어.” 그러면 양복장에서 남편이 즐겨 입고 다니던 가죽 잠바를 꺼내주었답니다. “냄새 맡아봐. 아빠 냄새나지?” 그러면 아이가 그 잠바에 얼굴을 묻고 막 킁킁 거리며 냄새를 맡습니다. “야, 아빠 냄새 참 좋다.” 그래서 제가 지하실 교회에서 그 이야기를 하고 돌아가 한참을 울었습니다.
이렇게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 것, 그 사람의 음성을 좋아하는 것, 그 사람의 냄새를 좋아하는 것, 다 하나입니다. 그런데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 냄새 좋아하세요? 하나님 냄새 좋아하시냐고요? 그런데 왜 이렇게 사람 냄새 풀풀 풍기면서 우리는 살까요? 하나님 음성 좋아하세요? 그런데 어쩜 드라마를 볼 때는 빛나던 눈동자가 말씀 앞에서는 게슴츠레해집니까? 나는 웃음도 안 나옵니다. 뭐가 그렇게 우스우세요? 제가 묻고 싶은 게 이것입니다. 기독교는 진리 자체입니다. 기독교를 통해 배우는 것은 진리의 신비한 힘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모든 사물의 이치를 꿰뚫는 차원 높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진리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여러분은 지혜로운 인생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단 15분, 30분이라도 세상의 번뇌와 속쓰러운 생각이 접근할 수 없도록 조용히 비워진 공간에서 하나님의 음성만을 듣고 그 진리의 증거 만에 귀를 기울이는 그런 시간이 있느냐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한 2년 전에 여러분 ESV라는 스터디 성경 산 기억나시죠? 우리 교회에서 엄청 팔았습니다. 한 교회 마당에서 거의 1억 원어치가 팔렸습니다. 오늘 집에 가셔서 ESV를 꺼내서 아무 페이지든지 딱 펴보세요. 그 책이 소리칠 것입니다. “아, 처음 보는 햇빛이구나.” 안 읽을 거면 선교지에 보내게 가져다주세요. 읽으세요. 조용히 단 30분이라도 20분이라도 세상 번뇌와 속쓰러운 잡생각이 접근할 수 없도록 조용한 골방에 들어가
(찬양)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매일 그럴 수는 없지만 며칠에 한 번씩은 그 말씀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지혜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리고 그 말씀의 거울을 비춰보니까 자신의 삶이 너무 부끄러워서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되잖아요. 그리고 그 진리의 기운으로 자신의 마음이 꽉 채워지는 그래서 자신의 지성이 하나님과 뜨겁게 연해야 하는 기쁨이 있어야 됩니다. 연애의 경험이 있는 분들이 있죠? 사랑하는 사람과 생전 처음 키스를 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 그 마음이 어떨까요? 이해하십니까? 이 세상에 있는 어떤 물질과 명예가 그의 마음을 그렇게 벅차게 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은 성경 말씀을 통해 그런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야지만 그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진리의 힘으로, 그 진리의 참된 맛으로서 그렇게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그 말씀이 자기를 지혜롭게 한다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말씀을 지혜롭게 하는 말씀이라고 가르칩니다. 비록 그 모든 하나님의 지식의 비밀에 대해서 다 알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단순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번쇄한 사색으로 불순종하는 것보다 훨씬 훌륭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매순간 붙들고 하나님을 경험하고 지성으로 그 말씀을 탐구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간을 끊임없이 지혜롭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시고 그리고 우리 인간이 누구이고, 그리고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왜 이 세상으로부터가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오는지를 깨닫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랑한 많은 사람들은 그 말씀으로 시련과 고난 속에서 이겼고, 그리고 핍박과 고통 속에서도 견뎠으며 이 모든 것들을 다 감내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얻었습니다. 그 말씀이 그를 지혜롭게 했기 때문에 한 순간에 욕심이나 혈기로 인생을 망치지 않고 말씀을 꼭 붙들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며 이길 수 없는 시련을 이기고 견딜 수 없는 고난을 견뎠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면서 살았습니다.
IV.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마음이 적지 않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말씀에 깊이 감동을 받고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기를 사모합니까? 천년을 황제로서 살기보다는 단 하루라도 도를 깨달은 사람으로 살고 싶어 합니까? 그 말씀 속에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는 아픔이 있습니까? 우리가 만약 진리와 상관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겪고 있는 많은 불행 과 고통은 그 중 상당 부분이 과거 어느 시점에서 지혜롭지 못한 선택을 하거나 지혜롭지 못하게 살았기 때문에 겪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오늘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그 지식의 참된 빛 안에서 지혜로워지는 것은 미래에 삶에 얼마나 커다란 보상으로 돌아오겠습니까?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의 젖을 더듬어 찾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아이가 그 젖을 마음껏 먹고 젖에서 입을 뗀 후 엄마와 눈을 맞추며 웃는 그 모습 속에서 아이는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품 안에서 그 말씀의 참된 미각을 회복하고 진리가 주는 말할 수 없는 기쁨 때문에 행복해 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기쁘게 함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시 19: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의 세 번째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제시되는 말씀의 효능은 그 말씀이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는 이런 말들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슴 벅차는 환희, 기쁨, 희열, 말할 수 없는 기쁨, 이런 것들은 이미 우리에게서 잊혀진 단어들이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점점 이런 기쁨 대신 싸구려 즐거움을 찾습니다. 맛있는 음식에서 기쁨을 찾는 방송들이나 혹은 아름다운 여행지에서 얻는 기쁨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프로그램들이 그런 것들입니다.
성경은 진리가 주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는 바로 진리가 주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안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나고 회심한 신자의 특징입니다. 중생과 회심은 우리 인간에게 아주 중요한 두 가지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하나는 인식론적인 변화입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게 되는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엄위하심, 영광, 은혜, 죄, 용서, 사랑, 이런 것들에 대한 탁월한 인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던 것들에 매여 살던 사람이 이제는 이런 하늘의 영광스러운 가치를 따라 살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존재론적인 변화입니다. 예전에는 자기 사랑이 운명처럼 박혀 있어서 그것을 따라 살아가던 사람의 성향이 바뀌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은혜가 떨어지면 잠시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할 수 있고 자기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깊은 속에는 하나님 사랑 이외에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그 어떤 것들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의 거듭난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바로 이런 변화된 본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신비한 기쁨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자녀는 이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가 준 기쁨에 중독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진리가 주는 그 참된 기쁨과 희열을 비교할 수가 없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II. 말씀, 정직한 교훈
A. 두 가지 가르침
1. 믿음의 규칙
오늘 그런 사람으로서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의 특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정직한 교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성경 안에 있는 지식이 두 가지 가르침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 가르침이 무엇이냐 첫째는 성경이 우리에게 믿음의 규칙을 가르칩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아무리 믿음을 강조해도 믿어야 하는 대상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없는 믿음은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정확한 지식이 믿게 만들고 믿었기 때문에 그 지식을 알게 되는 것이 믿음과 이성의 상관관계입니다. 원래 인간은 창조될 때부터 믿음과 이성, 이 두 가지가 사물을 인식하는 능력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죄를 지음으로 이 신앙이 완전히 붕괴되고, 이성의 기능도 현저하게 훼손되어 버렸기 때문에 판단의 착오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 첫 장을 넘겨봅시다. 창세기가 나오고 그 첫 번째 장의 첫 절은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명료하게 제시해 줍니다. ‘너희들이 바라보고 있는 이 모든 세상의 기원에 대해서 너희는 설명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그 모든 사물이 존재하는 궁극적인 원인이다.’ 그렇지만 왜 그런지를 성경은 우리에게 설득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엇을 우리가 믿어야 하는지 그 사실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이것은 이성을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 인격에 대한 신뢰를 토대로 그 분이 어린아이 같은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말씀을 사실로 맏아들임으로 그것들을 하나하나 토대 삼아서 이 세계와 인간, 하나님에 관한 체계적인 사상의 정확성을 가진 체계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상의 정확성의 체계를 가지고 사물을 보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가치관과 새로운 인생관, 세계관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지식인 믿음의 규칙입니다.
2. 생활의 교훈
그리고 두 번째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지식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생활의 교훈입니다. 오늘 교훈이라고 하는 이 하나님의 말씀은 히브리어 성경에 ‘피쿠드’라고 나옵니다. ‘가르침, 명령, 법도’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03편 18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라고 말입니다. 자, 여기 나오는 여호와의 교훈들이라고 했습니다. 교훈이 어떻게 믿음의 규칙이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생활의 교훈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 아니 모든 인간의 삶은 결국은 무엇을 믿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할지 두 가지로 귀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함이 성경에 크게 세 가지로 제시됩니다. ‘여호와’ 혹은 ‘야훼’라고도 하고 ‘하나님’, ‘엘로힘’이라고 히브리어 성경에 나옵니다. 그리고 ‘주님’, ‘아도나이’라고 나옵니다. 이 세 가지 성함이 하나님의 성함중 대표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 성함입니다. 이 성함들이 의미하는 바는 약간씩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세 번째 ‘아도나이’ 혹은 ‘주님’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성함은 모든 세계의 만물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신 분이 바로 그분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면 그 지배권을 인정하면서 사는 삶을 강조할 때 우리는 ‘아도나이’ 혹은 ‘주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엘로힘’이라고 하는 하나님이라는 이 단어는 이방과 언약 백성을 막론하고 모든 만물과 신들 위에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지신 신임을 지시합니다. 그래서 이 ‘엘로힘’, ‘하나님’이라는 성함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만 계시되지 않고, 이방 백성들에게까지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이에 비해서 첫 번째 성함인 ‘여호와’ 혹은 ‘야훼’라고 하는 이 성함은 오직 언약 백성들에게만 계시된 하나님의 본명입니다. 이 하나님의 본명은 언약을 맺은 백성들에게만 계시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여호와’라고 부를 때 그것은 바로 언약 백성들이나 그 여호와를 진정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지 다른 이방 사람들이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성함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성함은 워낙 거룩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명을 함부로 소리 내어 부르기를 두려워했던 이름입니다.
이 ‘여호와’, ‘야훼’라고 하는 성함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넓게 말하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지시합니다. 그래서 여호와라는 이름이 계시될 때 ‘나의 이 본명을 듣는 것은 나의 택한 백성이기 때문이며 너희는 이 세상의 백성들과 구별되이 부름을 받은 나 여호와에게만 헌신하도록 부름을 받는 나 여호와에게만 매우 특별한 독점적인 사랑을 받도록 선택된 민족이다.’라는 신학적인 사실을 함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여호와의 교훈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우선 이것은 단수가 아닌 복수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교훈이 한 가지가 아니고 여러 가지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교양은 옷 잘 입고, 공부 많이 하고, 외모를 예쁘게 가꾸고, 사람들에게 세련된 것이 교양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의 교양은 바로 이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떠한 행동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구현되기를 원하는 생활의 지침이 무엇인가를 아는데서 오는 신령한 교양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련된 헤어스타일이나 이런 것 아닙니다. 물론 폭탄 맞은 머리로 교회에 나오라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학문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배움의 기회를 포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보다 높은 교양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와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선택된 자녀로서 어떤 방식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데서 오는 영적으로 세련된 교양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죄인들에게는 두려움을 주고,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무언가 진리의 기운을 느끼게 만들어 주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동료의식을 느끼게 만들어 주는 그런 종류의 아주 우아한 교양입니다. 그 사람을 무시할 수도 있고, 깔볼 수도 있지만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게 만드는 그 무엇, 그 어떤 힘이 느껴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오는 교양입니다. 이 교양은 자기 혼자 잘났다고 우기는 교만한 교양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교양을 갖추었지만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기꺼이 자기 스스로가 꺾일 수 있는 유순한 교양입니다.
오늘날 이런 교양을 갖춘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따라 살아가기 때문에, 그것이 자신의 제 2의 본성이 되었기 때문에 흘러나오는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보여주는 교양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하지 않습니까? 은혜의 목표는 단지 우리를 기쁘게 하거나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은혜의 목표는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대로 살 수 없는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바꾸어 놓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외적 생활이 내적으로 받아들인 진리와 부합해서 일체를 이루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은혜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항상 올바르게 삽니까? 여러분 중 누가 그렇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는 주님의 말씀과 함께 우리를 비추어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바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 사이의 차이를 객관적으로 보게 만들어 줍니다. 거기에서 회개하고 깨우치도록 만들어 줍니다. 뉘우치게 만들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 생활의 교훈을 목이 메도록 그리워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저는 지난주에 영국에 집회에 갔다가 아주 멀리서 온 성도 한분을 만났습니다. 이 분은 혼자서 자기 깨어짐이라는 책을 읽다가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열린 교회 설교의 청취자가 되었습니다. 그 저녁때마다 두 번 집회하고, 주일 오후에 한번 말씀을 전하는 그 세 번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6시간을 비행기를 타고 왔습니다. 엄청나게 큰 사업을 하는 매우 바쁜 사업가가, 그것도 부부가 그러면서 자기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는지 나에게 간증하였습니다. 그 분과 대화를 나누면서 느낀 것이 뭐냐 하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분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가르쳐 주면 그대로 살고자 하는 열망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게 신자입니다. 그게 신자의 건강한 상태입니다. “하나님, 한번 직접 섬겨보시죠. 그렇게 제가 그대로 살지 안 살지는 내 마음이고요. 일단 한번 읊어 보시라니까요.” 이것은 신자의 삶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주 교양이 아니라 야비함입니다.
제가 오늘 1층에 계신 분들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여기 3층만 하나님 있고 1층에는 하나님이 반쯤 계신 것 아닙니다. 왜 예배 시간에 그렇게 늦게 오십니까? 그게 무슨 신앙생활이 그럽니까? 여러분의 예배가 담임 목사 앞에서 드리는 예배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예배입니까? 내가 거기서 설교할 때는 안 그랬습니다. 내가 하나님입니까? 이제 예배 시간 15분 지나서 걸어오는 것은 예사도 아니고, 축도 끝나기 전에 벌떡 벌떡 일어나서 나가는 것, 여기 3층에서는 그런 일 안 일어납니다. 그런데 3층과 1층 사이가 그렇게 멉니까?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의 교훈을 받은 사람들이냐고 내가 묻는 것입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렇습니다. 교회가 돈이 없어서 여러분이 모두 들어갈 수 있는 큰 예배당을 못 지었습니다. 그것 하나 극복 못하는 게 신앙입니까? 제가 내려가면 2주 안에 여러분을 그렇게 못하게 할 자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신앙은 바로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있지도 않는데 ‘무엇이든지 내게 말씀해 주십시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그렇게 믿고 살겠습니다’라는 복종의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한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동료들이 그렇게 예배를 드리면 여러분 중의 어떤 사람들은 그런 예배의 현실을 보면서 예배가 끝나도 자리를 뜨지 못하고 한구석에서 피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하여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되지 않습니까? 1층에 있는 분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예배입니까? 여러분이 지금 민방위 교육 들으려고 여기에 온 것입니까?
B. 올바른 생활의 가르침
성경은 우리에게 올바른 생활의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라고 했는데 이 ‘정직하다’라고 번역된 이 단어가 히브리어로 ‘야샤르’입니다. 이것은 원래 ‘올바른, 곧은, 의로운’이라는 의미를 가진 형용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고 곧은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고 곧다’ 무슨 말씀일까요? 이것은 인간의 도덕 생활에 있어서 불변의 기준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오늘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내일은 그르다고 여길 수도 있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다시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진리는 없고 모든 것은 사회의 합의에 따라 천천히 변해가는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대주의입니다. 진리조차도 상대주의이기 때문에 도덕 생활의 불변의 기준도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이 선각자일수도 있는 것이고, 과거에 옳게 살아간 사람들이 사실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일 수 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오류는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하면 불변하는 기준과 끊임없이 변하는 기준을 혼동 하는데 있습니다.
1960년대 윤복희라는 가수가 무릎 위에 올라가는 짧은 치마를 입고 명동에 나타났습니다. 신문이 대서특필했고 많은 사람들은 이제 말세가 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총 길이가 30cm짜리 바지를 입고 다녀도 사람들이 그렇게 눈길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기 때문에 그 당시 그렇게 분노했던 것들이 부당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이 무슨 내복이 보일 정도의 짧은 바지를 입고 교회에 와도 좋다고 제가 여러분을 설득하는 것은 아닙니다. 70년대에는 경찰관이 줄자하고 바리깡하고 가지고 다니면서 여자는 무릎에서 치마가 15cm이상 올라갔는지 안 올라갔는지를 재서 과태료를 먹였고, 남자들은 붙잡아다가 머리털의 길이를 재고 그리고 강제로 머리를 깎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소위 장발 단속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어떻습니까? 안 그럽니다. 일제시대에 머리를 깎으라고 일제가 명령하자 선비들은 차두가단(此頭可斷)이나 차발불가단(此髮不可斷)이라고 외쳤습니다. 모가지는 잘라도 머리칼은 자를 수가 없다고 얘기한 것입니다. 지금 오면 어떨까요? 아닙니다. 기르고 싶은 사람은 기르고, 짧게 깎고 싶으면 깎고, 빡빡 깎고 싶은 사람은 빡빡 깎고, 노란 물 들이고 싶은 사람은 노란 물 들이고, 보라색 들이고 싶은 사람은 들이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학에서 아디아포라입니다. “아무래도 좋은” 상관없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날 노란 머리를 하고 여기 섰다고 하더라도 좀 거슬릴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를 향해서 죄를 지었다고는 말하지 말아야 됩니다. 어느 날 머리털이 자꾸 빠지는 게 귀찮아서 확 밀고 빡빡 깎은 머리로 올라왔어도 말씀을 듣는데 별 지장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올바름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에 의한 논리가 우리에게 명백하게 구성력을 갖는 것 이외에는 그리스도인은 자유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를 서로 존중해주는 것이 진정한 복음의 자유스러운 정신입니다. 아직도 연세 드신 성도님들은 사람들이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면 날라리처럼 보는 기질이 있습니다. 머리 까만 날라리들 많습니다. 굳이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데서는 아주 통 큰 너그러움을 보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오히려 본질을 물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에 의해서도 쉽게 굽혀지지 않는 그런 어떤 불변의 기준을 제시하기 때문에 우리는 불안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확고하게 이것이 옳은 길이라는 것을 붙들고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 들어서 제가 14살 3개월 되었을 때의 이야기를 자주 회상하는데 요즘 자꾸 생각이 납니다. 그때 통곡하면 14년 3개월 인생을 산 아이가 빡빡 머리를 깎고 그 추운 겨울 2월 달에 논둑에 엎드려져서 통곡하며 울었을 때에 자신이 아무도 없는 허공에 내동댕이쳐진 느낌이었습니다. 거기서 오는 그 절대적인 외로움이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기준이 없는 것입니다. ‘너는 이래서 너는 이런 존재다. 너는 이런 목적으로 태어났다. 네 앞에 펼쳐진 세계는 이것이다. 네가 만나는 모든 불행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기준이 없는데서 오는 불안입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터득했던 복된 아이들은 방황을 해도 저처럼 인생의 근본적인 뿌리가 뒤흔들리고, 그리고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방황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찬양)
사랑의 하나님 귀하신 이름은 내 나이 비록 어려도 잘 알 수 있어요
아주 확고하고 올바른 기준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말씀을 거슬러 살려는 사람에게는 끊임없이 거치는 돌이 되지만 말씀 안에서 살려는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행복이고 평안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III. 마음을 기쁘게 함
A. 마음, 영혼의 기능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이 자신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 먼저 기쁨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마음이 무엇인지 좀 생각해 봅시다. 이 마음은 영혼의 대표적인 기능입니다. 우리는 바깥 물질세계에 대하여 다섯 가지 창문을 통해 정보를 습득합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보고, 그리고 감촉을 통해서 물체의 크기, 색깔, 따뜻함과 차가움, 무르고 단단함, 그리고 무슨 냄새인지, 무슨 맛인지를 파악함으로써 물질세계에 대한 정보를 습득합니다. 당연히 착시를 일으키거나, 후각에 이상이 오거나 감각이 마비되면 사물들에게로부터 오는 정보는 오해 되거나 혹은 차단됩니다. 그래도 어쨌든 그것들을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모두 물질세계에 대한 정보들입니다.
그런데 물질세계 말고 비물질적인 세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어떤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는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저 사람의 따뜻한 행동을 보면서 ‘저 사람이 나를 남다르게 생각하는구나.’ 그러고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의미의 도덕적 해석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 아무튼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그것들은 이제 이 모든 육체의 감각들을 통해서 전달되고, 전달된 것들이 마음이라는 스크린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이라는 것에 들어오게 되면 마음은 단순한 기계가 아닙니다. 눈은 단순한 기계입니다. 그래서 보이면 보이고 안 보이면 안 보이는 것입니다. 아무리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라도 불 끄면 밤중에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불 키면 보입니다. 보이는 것들이 마음에 들어옵니다. 그런 점에서 눈은 기계와 같습니다. 그러나 일단 들어오면 마음은 그렇게 기계적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들어온 사물들에 대해서 분석을 하기 시작하면서 최초로 인식을 합니다. 그것을 칸트 같은 사람은 범주로 설명을 했습니다. 자, 이런 것들이 들어오면 이 안에서 파일들이 막 움직이면서 이게 뭐지? 동물 아니야, 사람 아니야, 광물 아니야, 식물이구나. 식물 중에서 파일이 막 움직이면서 이거 풀이야, 나무야, 해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꽃이야. 꽃인데 한 송이로 된 큰 꽃이야? 아니야. 이것은 이전에 나무였어. 그러면서 이게 처음 보는 것이면 파일에 다시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범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범주에 따라서 사물의 크기, 넓이, 길이, 무르고 차가움, 이런 무슨 색깔, 이런 것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인식 되서 들어온 것들이 우리 마음 안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고유한 작용과 결합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상상력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어떤 사물들을 통해서 들어온 인상들을 가지고 스스로 생각을 해서 창조적으로 어떤 개념들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연결시키기도 하고, 관념과 관념이 말하자면 서로 이렇게 맥을 이으면서 어떤 인식의 체계들을 형성해 가는 것입니다. 그때 이 마음이 기뻐하고 싫어하는 감정, 그리고 그것을 행해야 할지 말아야 될지에 대한 의지, 이런 것들을 작용을 불러일으킴으로 수많은 행동들을 산출해 내는 공장과 같은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죄의 자리도 인간의 마음이고, 신앙의 자리도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인간의 마음이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도 마음속에서 일어납니다. 순종해야 할 결심도 마음으로 하고 불순종해야 할 결심도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마음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죄가 서로 우세하기 위해서 지배력을 다투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한 것을 이미 12년 전에 여러분에게 설교했고 그 설교의 집합체들이 『죄와 은혜의 지배』라는 책입니다. 꼭 한번 읽어보십시오. 어떤 사람의 이야기에 의하니까 부지런히 읽으니까 딱 8일 걸린다고 합니다. 꼭 읽어보십시오. 그런 것들이 우리 안에 일어나고 있는데 이런 것들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이 살아가니까 결국은 중요한 일들이 마음에서 이루어지는데 마음이 무엇인지 어떤 일들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지 조차도 몰라 그 모르는 무지도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입니다.
인간의 주체성이라는 것도 바로 이 마음에서 행사되는 것이고 결국은 인간의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그의 삶은 변화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이 마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고, 그래서 쓰레기 같은 것들 때문에 즐거워하던 마음을 바꾸어 하나님의 진리 때문에 기뻐하는 마음으로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B. 말씀이 주는 기쁨
인간은 진리를 항상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은 진리에 대한 기쁨과 혐오가 공존합니다. 양파 껍질 같은 다층적 껍질가진 인간의 마음 안에서 기쁨과 혐오의 감정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차하면서 거기서 수많은 도덕적인 결정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의해서 죄를 짓기도 하고 의를 행하기도 하고 믿음을 따라 살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잊지 말고 기억 하십시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 안에는 진리를 기뻐하는 자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가 아니면 무엇으로도 완전한 기쁨을 얻을 수 없는 그 거듭난 본성이 신자의 마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로 말미암는 기쁨을 상실한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곳을 여행했다고 칩시다. 마취제 역할을 합니다. 못 가본 곳에서 멋있는 것을 보고 아름다운 풍광을 보고 가보지도 못한 높은 건물에 올라가보고 쌩쇼를 하면서 당시는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물질과 환경이 주는 기쁨은 진리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마음에 깃든 우울함을 영원히 축출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즐거움이 끝나고 나면 즐거움보다 훨씬 큰 공허감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텔레비전에 방영되고 있는 먹방 프로그램의 정신적인 배경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현대인의 공허함입니다. 텔레비전 프로가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보십시오. 옛날에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뭐냐 하면 아주 옛날에 초등학교 때 헤어진 선생님을 찾는 것입니다. 방송국에서 천신만고 끝에 전국 방방곡곡을 혹은 미국에 이민 간 사람까지 찾아내서 방송국에 데리고 와서 만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막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렇게 기뻐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어렸을 때 소꿉친구를 찾았는데 한 사람이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 되어 있고 이렇게 하면서 자기 친구를 만나서 막 기뻐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보면서 우리 모두 다 그런 인간과 인간이 맺어지는데서 오는 기쁨 같은 것들을 느끼면서 했습니다. 지금 그런 방송 왜 하는지 아십니까? 지겹다고 사람들이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대안으로 내놓는 게 먹방입니다. 여러분 맨날 그 먹방 보면서 되게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왜 그런 방송이 이렇게 미친 듯이 인기몰이 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을 별로 안 해 보셨죠? 그냥 보면 텔레비전을 보면서 ‘어 맛있겠다.’ 침을 다시고 노트에 적어놓고 ‘저기 꼭 한번 가봐야지’ 가도 좋습니다. 그런데 그 이상의 무엇인가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그 뒤에 무슨 정신이 깃들어 있는지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맨날 백종원이 따라하면서 그 맛집을 전국을 투어한 들 소화되고 나면 뭐가 밀려오겠습니까?
(찬양)
말씀으로 고치시네 주는 나의 치료자
말씀이 주는 기쁨,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놀라운 기쁨을 줍니다. 다층적 껍질을 가진 인간의 마음 안에 기쁨과 혐오가 공존하는데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혼은 진리가 곧 고향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은 경험 없이 진리가 진리라는 사실을 알아봅니다. 플라톤의 국가론에 보면 유명한 비유가 나오는데 그게 동굴의 비유입니다.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동굴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앞에 그림자 연극이 이루어집니다. 그 그림자를 보면서 열광하고 울고 웃던 사람이 어느 날 고개를 돌려서 뒤를 보게 됩니다. 그러자 불빛이 있고 사실은 그 그림자를 비추는 어떤 실체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더 이상 그림자를 보지 않고 저게 뭔가, 어떻게 저 빛이 저렇게 현란한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급기야 이 사람은 이 그림자를 만들어낸 실체도 최종적인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동굴의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아나바시스’라고 합니다. 그리고 밖에 나가 보니까 그 쪼가리로 만든 그런 형상과 같은 진짜의 실물들이 동물, 풀, 꽃, 이런 모든 것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너무 감동한 사람이 ‘카타바시스’ 다시 동굴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너희들이 보는 것은 모두 그림자다, 사실은 너희들이 보는 그 그림자 뒤에는 실체가 있고 실체 뒤에 저 빛으로 나아가면 이 모양으로는 비교되지 않는 진짜 실체가 저 바깥에 있다고 외칩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렇게 외치기 때문에 거기서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게 ‘카타바시스’입니다.
그러면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도대체 그렇게 그림자를 보면서 만족하던 사람으로 하여금 고개를 돌려 실체를 보게 만들었던 힘은 무엇일까? 플라톤 연구가들은 교육의 힘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신학자로서 진리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끄는 힘이라고 설명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어떤 복음의 진리를 깨달았을 때 아멘하고 받아들입니다. 학습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미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의 마음의 본성 안에 하나님이 진리에 대한 감각을 주셨고, 어느 한 순간에 그것들이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받고 복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기쁨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말씀의 은혜를 계속 받아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계속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서 기쁨을 누리고 그것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이 바로 진정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한 사람의 마음의 기쁨의 방향이 그의 나아갈 길을 정합니다. 그 기쁨이 세상을 향한 것이면 그는 교회에 있어도 언젠가는 세상으로 갑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 기쁨이 하나님을 향해 있는 것이라면 지금은 세상에 잠시 있을지 모르지만 그는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신자는 진리로 인한 신비한 기쁨의 맛을 안 사람입니다.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태어나서 엄마의 태에서 떼어내자마자 엄마와 접촉 없이 고아원에 던져진 아이와 엄마의 품에서 한두 살까지라도 있다가 헤어진 아이들은 본인은 어차피 기억을 못해도 이 속에 모성에 대한 감각이 다르답니다. 왜냐하면 초월적으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나는 최근에 우리 며느리 통해 들은 이야기인데 손녀가 이제 두 살 정도밖에 안되었습니다. 동생이 태어난다는 것을 호르몬의 감각으로 안다고 그럽니다. 그게 의학자들의 설명이랍니다. 그러면 그 아이에게 그런 감각이 남아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바로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각을 잠재적으로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그것이 현실화 되어서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는 이제 이 세상에 있는 기쁨에 아무리 탐닉해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기쁨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에서 멀어질 때 기쁨의 감각은 떨어지게 됩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직업이 훌륭해서 365일 팔도를 돌아다니며 맛집을 여행할지라도 그것이 여러분의 영혼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주님의 자비하심으로 권면합니다. 말씀의 기쁨으로 돌아가십시오.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그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이길 힘을 얻던 때를 기억하십시오. 세상이 모두 여러분을 버리고 허공에 던져진 것 같을 때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 때문에 보이지 않는 그 분께로부터 받는 위로가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받는 위로를 능가했던 때를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그 말씀이 주는 기쁨의 힘으로 고난을 이기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견딜 수 없는 현실을 견디며 극복해 나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눈을 밝게 함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시 19: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의 네 번째 효능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눈을 밝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에는 육체의 눈이 있습니다. 그 눈으로 사물들을 분별하고, 크기와 빛깔, 거리와 모양새를 가늠하며 우리가 그 사물에 대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판단합니다. 만일 우리가 어두워서 사물을 볼 수 없거나 빛은 있지만 우리의 육신의 시력을 잃어버려서 물건을 찾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면 우리의 육신은 매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마음의 눈이 시력을 잃어버린다면 우리의 인생 전체가 어디로 가야할 지를 몰라서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육신의 눈보다는 우리의 눈의 밝음을 훨씬 중요하게 취급합니다.
II. 순결한 계명
A. 여호와의 계명
오늘 이 시인은 “여호와의 계명이 눈을 밝게 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 이 시인도 언젠가는 마음의 눈이 어두워졌던 때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위대한 신앙인이기는 했지만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욕망에 눈이 어두워지기도 하고, 교만에 눈이 어두워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그의 마음의 눈은 감겼고 빛을 잃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때마다 그의 영혼의 눈을 뜨게 해 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시인은 자신의 인격적인 체험 속에서 우러난 고백,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는 도다”라고 노래합니다. 오늘 이 계명을 시인은 순결한 계명이라고 말합니다. 이 계명을 여호와의 계명이라고 먼저 말합니다. ‘미쯔바 야훼’라고 되어 있는 이 표현은 그대로 번역을 해도 여호와의 계명입니다. ‘명령하다’라는 ‘짜바’라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형입니다.
시편에는 모세 오경에 대한 다양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은 모세가 남긴 다섯 권의 책이었습니다. 이것은 각기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성경에 등장하는데 율법, 교훈, 법도, 계명, 도, 이런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하나의 모세 오경의 다양한 측면들을 보여주는 명칭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여호와의 계명이라고 할 때의 이 계명은 아주 넓게 보면 모세 오경 전체를 가리키고, 좀 좁게 보면 십계명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의 계명이라는 말이 히브리어 성경에 단수로 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서는 이 계명을 집합적으로 보아서 여러 개의 계명을 단수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계명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게 됩니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며 물었습니다. “계명 중 가장 제일 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첫째는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실제로 두 계명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의 계명은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안에서 그 사람은 이웃도 사랑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주신 가장 제일 가는 계명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계명은 십계명보다도 더 뛰어난 계명으로서 십계명중 무엇을 지키든지 그 계명을 준수할 때 지배하고 있어야 할 인간의 마음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계명은 따라서 아주 넓게는 모세 오경 전체이고, 좁게는 십계명이며, 아주 좁게 말하자면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 십계명 속에 깃들여야 할 정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왜냐하면 그렇게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때에 하나님이 그 안에서 사랑을 받으시고 율법이 지시하는 모든 계명을 이룰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하나님의 높으신 위엄과 그 큰 사랑에 대한 자각을 얻은 사람이 그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엎드려져 부복하는 복종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계명의 주인을 여호와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사는 이유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들 위에 높고 뛰어나셔서 불꽃같은 눈동자로 감찰하시며, 악을 행한 자들을 가차 없이 징벌하시고, 자신에게 복종하시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는 두렵고 엄위하신 하나님 때문에만 이 계명에 복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내가 이렇게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도 나에게 상당한 대가를 주실 것이라고 하는 상업적인 거래 관계에 대한 기대로 복종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이 계명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 분의 위엄 앞에서 자신이 티끌 같은 존재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영광 가운데 엎드린 가운데 받드는 그것이 바로 계명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계명에 대해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중요한 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이 정하시는 질서도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이 어떠한 질서 속에서 살아야 할지를 계명에 대한 지식으로써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양육합니다. 그러면 자녀들에게 우리는 도덕을 가르칩니다. 남의 것을 훔치지 마라, 혹은 친구와 싸우지 마라, 거짓말하지 마라, 이렇게 가르칩니다. 아이는 아직 왜 거짓말하면 나쁜 것인지, 왜 친구와 싸우면 옳지 않은 것인지,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잠시 장소를 이동해서 자기 마음대로 쓰는 것이 왜 그렇게 큰 죄인지 아이는 아직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아이에게 설명해 주기도 어렵고, 또 설명을 해 주어도 아이의 지력으로는 아직 그런 도덕적인 원칙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아이에게 복종을 강요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따뜻이 사랑함으로써 아이가 부모가 자신에게 내리는 명령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고 신뢰하게 만들어 줍니다. 때로는 그 아이가 그 명령을 어기면 회초리를 들어서 때려서라도 그 명령에 복종시킵니다. 어떤 때는 왜 그래야 되는지를 설명하지도 않은 채 아이를 나무라서 아이가 매가 무서워서라도 그런 일을 하거나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아이가 어느 정도 성장하게 되면 우리는 회초리를 놓습니다. 왜냐하면 아이가 스스로 인간으로서 왜 그래야 하는지를 이제는 충분히 스스로 설명할 수 있을 나이가 되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매 맞을 나이가 아닌데도 자기가 왜 그런 삶을 살아야 될지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모든 인간의 비극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를 성경을 통해 명령하시지만 우리가 그 명령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심오한 뜻을 모두 다 완벽하게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도의 지성을 소유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삶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 하나님이 정하신 삶의 질서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바로 그 하나님이 정해주신 질서 안에서 살아감으로써 행복한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질서는 자신의 영혼과 육체, 마음속에도 하나님이 제정하신 질서가 있고, 교회 안에서도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따르고 지켜야 할 질서가 있고, 사회에서도 하나님께서 지키며 살기를 원하시는 차분한 질서가 있습니다. 자기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그것을 지키며 그 질서를 따라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만약에 그런 질서를 어기게 될 때 사회적으로는 국가 법률의 제제를 받게 되고, 내면에서 그런 질서를 어기게 될 때 우리는 죄의 융성을 경험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질서를 포기하고 하나님이 설계하신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질서의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들이 바로 계명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삶은 종교적인 영역과 종교가 간섭하지 않는 영역을 나누어서 그래서 종교에 관계된 영역에서만 신앙의 가르침을 따라 행하고, 나머지 영역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그런 종류의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는 언약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고 이 세계에 인간을 만드실 때에, 나라고 하는 존재를 지으실 때에 세계는 어떠해야 하고, 인류는 어떠해야 하고, 나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없이 세상을 만드셨다면 하나님은 생각이 없는 분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세계와 인간과 인생에 대한 설계를 가지고 사람을 만드셨고, 그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언약 안에 있는 인간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 관계를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깨뜨려 버렸습니다. 깨뜨려 버렸을 때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도 함께 깨졌습니다. 이제 그는 그 질서를 깨뜨려 버렸고, 또 그 질서를 모르게 되었습니다. 설령 안다고 할지라도 도저히 그 질서대로 살아갈 수 없는 힘이 없는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그 언약을 따라 오셨고, 언약을 따라 당신 자신이 희생의 재물이 되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언약을 다시 복구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그 분의 영적인 교회의 몸에 접붙여졌고, 그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음으로써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자신의 인생의 질서를 따라서 살고, 이 세계를 바꾸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게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이고, 그 인간으로 참으로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힘들었던 사람들만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의미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며, 그 언약의 경륜을 따라서 순종과 믿음으로 언약의 생활을 살아가겠다고 하는 다짐입니다. 바로 그런 언약적 생활은 하나님이 온 인류가 살아가기를 진정으로 바라시는 그 미래의 삶을 우리가 앞당겨서 살아가는 그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누구이십니까? 살다가 피곤하면 가끔 찾아가 떼를 부리고 불평이나 늘어놓고 하소연이나 하고 자기 필요가 채워지면 다시 뒷방 늙은이처럼 취급하는 그런 취급을 여러분에게 받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궁해야 겨우 하나님이 생각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그러나 오늘 시인은 말합니다. “자신에게 지키며 살 계명을 주신 그 분이 여호와”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지키며 살 계명을 주신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위에 높고 뛰어나서 두렵고 엄위로우신 분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한없이 자기를 사랑하는 엄마 같은 하나님이심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가장 가슴 벅차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 여러분이 맺고 있는 관계입니다. 적어도 나라는 인간이 비록 모자라고 부족해도 온 땅과 만물위에 높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를 맺고 있는 그 분의 자녀라고 하는 인식, 이것을 가지고 있을 때 주님의 계명을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이런 언약의 관계에 있음을 기뻐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순결한 계명
두 번째는 이 계명이 순결한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순결하다고 번역된 ‘바라’라고 하는 단어는 ‘바르’의 여성형입니다. 이것은 ‘깨끗한, 순수한, 순결한’, 심지어는 ‘사랑받는’ 혹은 ‘빛나는’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순결한 계명’, 이게 무슨 뜻일까요? ‘계명이 순결하다’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계명 자체가 순수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묻고 싶겠죠? 그러면 계명 중에서 순수하지 않은 것도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은 순수합니다. 그러나 계명은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비록 신앙이 없어도 우리는 삶에 있어서 자기 나름대로의 지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관, 혹은 우리의 세계관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시간 약속을 철두철미하게 지켜야 된다는 삶의 지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는 계명이 될 것입니다. 결코 사람과의 약속 시간을 어기는 법이 없습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돈 거래는 희미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편적인 도덕 감정으로 보면 우리 모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옳은 것이라는 생각은 다 가지고 있지만 약속 시간에 5분 늦는 것보다는 남의 돈을 떼어먹는 것이 더 큰 죄라는 인식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킬 수 있고 혹은 어떤 충격으로 말미암아 받은 인상 때문에 도덕 생활의 어떤 지침 하나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남의 돈을 떼어먹었을 때에는 그게 시간 약속을 지키는 것보다도 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 사람이 알토랑 같은 자기 돈을 친구에게 떠 먹혔을 때에도 네가 내 돈을 1억을 떼어먹은 것은 약속 시간에 5분 늦은 것보다도 적은 죄라고 생각할까요? 아마 그렇지 않고 펄펄 뛸 것입니다. 법정에 고소하고 어떡하든지 차압을 해서라도 1억을 받아내려고 몸부림칠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은 자신의 말과 생각들이 끊임없이 모순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사람들이 나름대로 자신의 계명을 가지고 있지만 그 계명은 이런 이유 때문에 그 자체가 순수한 생각 속에 나온 계명이 아닙니다. 물론 수준 높은 도덕을 이야기하는 종교나 아니면 수준 높은 윤리에서는 이러한 불균형들이 좀 줄어들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완전히 그것을 해소하기는 어렵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상 숭배하는 것을 왜 그렇게 철저히 금지하시는지 아십니까? 우상에게 우리가 절을 하면 하나님에게 무슨 어마어마한 손해가 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만약에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게 되면 우상을 숭배하는 과정을 통해서 잘못된 계명과 삶의 가르침들이 물밀 듯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약 성경에서는 이단에 대한 경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아니 내가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분명한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는데 이단에 가서 내가 그것을 다 듣고 잘못했다고 비판을 하면 되지 않느냐’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자신이 없어서 피하나보다 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이 이단과 그런 식으로 교류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네가 약해서 이단에 넘어갈까봐 하는 염려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단과 마음을 트고 사상을 듣고 나면 잘못된 계명과 삶의 가르침들이 스며들어오게 되고, 그것을 받은 사람이 교회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과 교제할 때 교제 자체가 잘못된 불결한 계명들이 유입되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있을 때였습니다. 신학교 초년생 선생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서른여섯 그때쯤 될 때인데 어느 신학교에서 강의를 와 달라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신학교에 어떻게 그런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이단에 빠진 학생이 제 강의를 듣다가 커다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이 사람이 이단에서 돌이킨 게 아니라 자기 선생님을 자기네 이단 교단이 속한 신학교에 강의를 나가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연락이 왔는데 충청도에 있는 어느 신학교인데 가서 1시간만 가르쳐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우리들이 잘못 믿고 있으면 바로 그 강의 시간에 올바른 것을 가르쳐 주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사례비를 제시했습니다. 한 시간을 강의하고 오는 게 다른 학교에서 받는 월급 정도, 그 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갔겠습니까? 안 갔겠습니까? 갔겠습니까? 안 갔겠습니까? 확신이 없으시네요. 안 갔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에게 물들까봐 무서워서 안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런 접촉 자체를 금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배려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순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명을 잘 받아들이고 진실한 마음으로 그 계명에 순종하면서 살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될 뿐만 아니라 모든 이웃도 행복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이웃은 예외 없이 행복해집니까? 아닙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고자 하는 모든 이웃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명이 한 신자의 마음속에 깊이 박혀 뜨겁게 이 계명이 마음속에서 역사하고 있을 때 그때 그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게 되고, 또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게 될 때에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계명을 사랑할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 원하시는 교회, 원하시는 가정,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가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사람의 존재는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이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깊이 사랑하고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살아가는데 어떤 사람이 그 계명에 어긋나게 잘못된 질서를 찾아가려고 할 때 어떻게 될까요? 이 사람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바르게 하라고 외치고 잘못되게 살아가지 못하도록 그를 가로막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사람 누구든지 간에 그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오셔서 모든 인간들을 만족시키시는 삶을 사셨습니까? 만약에 모든 인간들이 만족했으면 왜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를 죽였을까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워한 이유는 오직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들이 좋아하지 않는 계명을 따라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개혁주의를 비아냥거리고 그렇게 밖에 삶이 안 되는 사람들이 무슨 청교도를 말하냐고 비웃습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슨 성경을 들먹이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그런 모든 것들을 다 포기하고 그 사람처럼 누군가를 비난하면서 살면 성경이 제시하는 높은 도덕의 표준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논쟁하지 않는 것은 진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모르기 때문이고 싸우지 않는 것은 진리가 얼마나 우리의 행복에 결정적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잘못 살아가고 있으면 그것은 개혁주의가 시킨 것이 아닙니다. 그 삶에 미치지 못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청교도가 가르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의 윤리적인 수준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면 그것은 성경이 시킨 것이 아닙니다. 그냥 자신이 그렇게 살아갔을 뿐입니다. 그러면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집요하게 물어야 하고, 개혁자들의 가르침은 왜 가톨릭의 교리와는 다른가 하는 것을 밝혀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왜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청교도가 필요한지에 대해서 물어야 되지 않습니까?
순결은 단지 외적인 도덕 상태가 아닙니다. 우리는 나누기 좋은 말로 외적인 도덕의 상태, 내적인 도덕의 상태라고 구별하지만 그러나 외적으로만 되어 있고 내적으로 되어 있지 않으면 그게 이미 도덕 상태가 아니고요, 그리고 내적으로는 되어 있는데 외적으로 도덕상태가 아니면 그 내적인 것도 도덕 상태가 아닙니다. 순결은 마음에 모든 욕망을 비운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마땅히 있어야 할 순수하고 충만한 사랑으로 가득 찬 상태가 바로 순결입니다. 주전자에 공기를 모두 내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물을 붓는 것입니다. 무거운 물은 가라앉고 공기는 위로 올라갑니다. 물이 가득 찰 때 공기도 모두 바깥으로 밀려났습니다. 이처럼 순결은 사욕과 이기심을 배제한 신적인 질서를 따르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순결을 추구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기가 우월적인 지위에 있다고 자기 의를 내세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 하나님의 계명은 순결하다고 할 때 첫 번째 의미는 계명 자체가 순수하다는 뜻이고, 두 번째는 그 계명에서 비롯된 삶이 순결하다는 이야기를 지금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빛남은 높은 지위나 재산의 유무, 외적인 용모나 혹은 지식의 소유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삶의 빛남은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사랑한 결과입니다. 신명기 5장 10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계명을 향한 사랑이 나누어질 수 없는 일체를 이루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니”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삶의 감화를 주는 계명이 없다는 것은 그의 신앙생활이 허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또 자신의 삶의 상황이 아무리 위태로워도 인간에게는 인간이 넘지 말아야 할 금도가 있습니다. 설령 다른 사람이 그 도를 넘나드는 짐승과 같은 사람 속에 섞여서 살면서도 다른 사람이 그렇게 넘나들었기 때문에 나도 짐승이 되련다 하고 반응하는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의 존엄성은 이웃의 인정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해치는 이웃이 인간의 금도를 넘어서 동물처럼 행하며 넘나들어도 그와 똑같이 동물처럼 반응하면 그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게 바로 동물과 인간이 구별되는 분기점입니다. 개는 인간을 물어뜯습니다. 복수를 하겠다고 개다리를 무는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모든 윤리적인 행위가 주변의 사람이 자기에게 어떻게 하느냐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절대적인 삶의 계명이 있다고 믿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동성끼리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은 아직 주위에 동성끼리 결혼하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명이고 우리의 본성이 그 계명을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법이 통과되어서 우리 주위에 거의 모든 사람이 동성으로 결혼을 해서 산다고 해도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그것을 하지 않을 결심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짐승과 인간 사이의 금도를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 앞에서 발견한 사람입니다. 내가 사는 사회가 좀 더 도덕적이 되고 내가 사는 사회가 좀 더 나에게 예의 바르게 행하면 나도 이렇게 짐승처럼 대하지는 않을 텐데 하는 것은 신자의 생각이 아닙니다. 불신자였을 때 그 중에서도 우리의 마음의 도덕 상태가 매우 나빴을 때에 먹었던 생각들입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살면서 수많은 삶의 사태를 겪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했고, 믿었던 부하들에게 반역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반역을 당하기도 했고, 끔찍한 삶의 경험을 하면서 지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요동치는 삶의 상황은 그의 육체의 눈을 번뜩이게끔 불행과 행복, 좌절과 기쁨으로 그를 들었다 놨다 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어두운 영혼의 눈을 밝혀준 것은 이 세상에서의 행복이나 불행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순결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결한 삶은 순전한 사랑에서 비롯되고, 그리고 순전한 사랑이 순수한 계명을 붙들고 살 때 그때 거기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신앙은 남 때문에 내가 거기 서 있는 그런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 때문에 내가 거기 서 있고,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아무리 많이 바뀌어도 하나님께 대한 나의 태도는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 험한 세상을 믿음으로 지탱해 가며 살게 하는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계명은 정말 순수합니까? 정통적인 교리가 외쳐지는 예배당에서는 졸음과 지루함으로 예배를 억지로 견디던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세속적인 가르침과 이단의 설교 앞에서 한 번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중요한 표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거듭난 미각이 있습니다. 때로는 그 미각을 상실하고 곤고하게 살지만 어느 한 순간에 진리의 말씀이 그를 깨울 때 그때 그의 거듭난 본성은 함께 깨어납니다.
사람의 손에 의해서 늘 길들여졌던 사자의 이야기를 기억하시죠? 아주 갓난아이서부터 우유를 먹여주는 사람의 품에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강아지와 함께 어울려 놀며 사자는 자기도 그런 애완 동물중의 하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 야생에서 어미가 찾아왔고, 저 멀리 숲속에서 커다란 소리를 내며 울었습니다. 그 한 번에 표어가 어린 사자의 마음을 깨웠고, 그는 숲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하나님의 순수한 마음을 알고자 하는 간절함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그리고 어찌하든지 우리의 삶의 사태가 우리에게 좋을 때든지 나쁠 때든지 그 계명을 따라 살아야 되겠다는 불퇴전의 용기가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할 계명의 사람들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III. 눈을 밝게 함
성경은 마지막으로 그 계명이 눈을 밝게 해 준다고 가르칩니다. ‘메일라트’라고 되어 있는 히브리어 성경의 이 단어는 ‘빛을 주는, 비추는 혹은 조명하는’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 빛은 크게 세 가지 용례로 사용이 되는데 자연적인 빛, 윤리적인 빛, 신학적인 빛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한 덩어리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요구하는 삶은 도덕적인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거룩한 삶입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삶은 도덕의 결과라기보다는 신학의 결과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신학의 눈을 뜨게 만들어 줍니다. 여기서 신학은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커리큘럼, 목사가 되기 위해서 밟아야 하는 학제적 과정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이 세상과 인간,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사람이 다 신학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학은 온 인류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지식입니다.
저는 어제 제가 쓴 책이 출판이 되어서 그 첫 번째 책을 출판사로부터 받았습니다. 이제 것까지 1년에도 몇 권씩 책을 출판했기 때문에 그때마다 기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번에 나온 책은 제 마음을 이제까지 나온 책을 접할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습니다. ‘좋다, 너무 기쁘다, 보람 있다’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슬픔과 고통, 눈물과 한숨, 그리고 환희 같은 것들이 함께 뒤범벅이 되어서 웃고 싶기도 하고, 울고 싶기도 하고, 좋아할 수도 없고, 슬퍼할 수도 없는, 그런 형언할 수 없는 감정으로 오후 내내 밤까지 시간을 보냈습니다. 4년 전에 집필을 시작해서 출판된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해왔다』라는 책입니다. 모두 1500 페이지 정도 책인데 우선 1권이 650페이지로 나왔습니다. 저는 4년의 긴 시간을 단 하루도 그 책에서 자유로 날이 없었고 몇 달씩 한 줄도 못 쓰던 때도 있었지만 마음은 언제나 그 책 속에 있었습니다.
15살 먹은 어린 아이가 교회 가는 주일날 논둑에 엎드러져서 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그것은 가난했기 때문이 아니라 신학적인 고민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그리고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세계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 세계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신은 존재하는가, 이런 질문들입니다. 통곡을 하며 한참을 울고 난 다음에 뺨에 흐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훔치고 내가 일평생을 무신론자로 살기로 결심했을 때 나의 신학은 본격적으로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학은 신이 있다, 없다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신학이고 그와 상관이 있게 살아가야 되겠다,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신앙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인생의 행복은 그런 신학 지식의 깊이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구원 받기 전에 우리의 진정한 불행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물론 가난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질병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깨어진 인간관계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의 부족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중의 어떤 사람은 배가 고파서 예수 믿게 된 사람도 있고 질병에 걸려서 예수 믿게 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동기에 불과했습니다. 진짜 여러분을 예수 믿게 만들어 준 것은 그런 배고픔이나 가난, 질별, 혹은 인간관계의 고통 이런 것들이 동기가 되어서 신앙의 세계에 들어온 다음에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나의 불행이 그런 것 때문만이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가 기침도 하고 콧물도 나고 온 몸이 욱신욱신 쑤십니다. 감기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감기를 고치면 바이러스를 퇴치하면 그 증상들은 모두 사라집니다.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때 마지막에 우리들이 도달한 것이 뭐냐 하면 우리의 진정한 불행은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의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것은 증상에 불과하고 근원적으로는 신학적인 문제 때문에 우리가 불행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신학적인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무신론자로 인생을 사는 것도 나에게는 신학을 한 것이었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도 신학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한 번의 신학적인 놀라운 깨달음을 얻고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는 행복에 도달한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기 전 우리의 불행이 무엇이었느냐 하고 묻는다면 우리는 자신의 존재의 근거와 세계의 의미를 몰랐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미안하기 이를 데 없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듣고 깨뜨려지면서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나를 행복하게 하며 사는 것이 내 인생의 최고의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 땅의 자원으로 육체를 보양하듯이 하늘의 자원으로 우리의 영혼을 보양하면서 살 때 비로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러했듯이 그러나 나는 이러한 신학적인 사실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참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지를 몰랐습니다. 그냥 지성의 스위치를 끄고 미친 듯이 맹목적인 종교심을 가져야지만 신앙이 생기는 줄 알았습니다. 나의 선배들이 나에게 그렇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기독교의 유구한 역사도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깊은 깨달음을 얻고 나서는 견딜 수 없이 밀려오는 단 하나의 감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이러한 진리를 모르고 살아가는 곤고한 모든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불쌍한 정도가 얼마나 큰지 그들을 생각하면 먹을 수도 없고, 잘 수도 없고, 쉴 수도 없고, 이전에 그 주님을 몰랐을 때 나를 기쁘게 하던 모든 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안타까웠습니다. 그것이 교회를 세우게 했고 여러분을 만나게 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빚진 적은 없습니다. 주님에게 빚을 졌습니다. 그 어두움 속에서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의 돕는 사람 없이 인생이라는 거친 광야에 내동댕이쳐졌음을 알았을 때 그것은 완전히 고독한 존재였습니다. 죽는 것은 한 번도 두렵지 않았지만 언제나 사는 것은 온몸이 떨리도록 무서웠습니다. 그리고 겨우 빛을 발견하고 교회에 들어오니 교회에서 가르쳐 준 것은 빛이 아니라 어두움이었습니다. 그 긴 혼란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짐승 같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각별한 은혜가 없었더라면 아직까지도 나는 그런 어두움 속에서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모른 체 세계 어느 한 구석을 망가뜨리며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어두운 지성을 깨고 찬란한 진리의 빛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세계는 이전에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세계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세계를 보고 다시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이러한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말했을 때 놀랍게 그 사람들은 그 세계를 공감할 줄 몰랐습니다. 가슴이 미어질 듯 이 진리를 모른 체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가엾었고, 그래서 온 힘을 다해 설교하고 가르치려고 애써왔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나 자신도 아주 연약한 한 인간에 불과했지 그 이상 어떤 탁월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 매일매일 살아나는 자기 자신도 발견하고, 그리고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내 눈이 밝아졌다는 것, 그래서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그리고 이제는 나의 존재의 근원이 어디인지 이 세계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나의 인생이 내게 만족스럽지 않은 삶의 수많은 사태들이 일어나도 개의치 않고 살아갈 수 있는지 비결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나는 세속적인 의미에서 예수 믿기 전보다 지금의 내가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나는 그런 즐거움들 중 상당 부분들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사는 것이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 세상이 솟구쳐 일어나 나를 죽이려 할지라도 나는 내게 임할 그 결과를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신학적인 깨달음이 가져다주는 삶의 안정감입니다. 삶의 사태에 따라 요동치고 구비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이성을 믿고 자기의 좋음을 따라 판단하며 삶의 지침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다 알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그 빛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렇게 서 있는 것도 그렇게 여전히 신학적인 빛이 없기 때문에 여전히 인생의 불행의 원인을 엉뚱한 곳에 찾으며 12살 먹은 어린 아이처럼 그렇게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에게 티끌만한 도움이라도 주고 싶어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눈을 밝히는 것은 우리 속에 없는 무엇을 집어 넣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지성에 어떤 이해를 더해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여 내 눈을 열어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말입니다. 놀라운 것이라고 번역된 이 히브리어 단어는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에서 아주 탁월한 기적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남아서 회상되었던 기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신 사건, 만나로 그들을 먹이신 사건, 그리고 애굽에 내린 그 위대한 재앙 같은 것들입니다. 한 사람의 신앙의 깊이는 이적이나 기적을 얼마나 많이 체험했는가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모든 이적 그 속에는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한 지식이 묻어있습니다. 이적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사람들에게 전달하시기 위한 매우 특별한 방법입니다. 그런 기적을 보고 기적 자체에 감동을 받는 사람들은 그것만으로 신앙이 자라지는 않습니다. 기적 속에 함께 묻어있는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위한 지식을 섭취하고 그것을 확대시켜서 자신의 삶에 적용하게 될 때 그것이 믿음을 불러일으키는데 그런 하나님의 성품과 지식을 가르쳐 주는 최고의 지식의 보물 창고가 성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인이 그런 기적을 나타내는 단어를 여기에 사용하면서 주님의 법에서 그것을 보게 해 달라고 하는 이 기도는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밖에 일어나는 세계가 뒤흔들리는 위대한 이적보다도 자신 속에 말씀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영적인 놀라운 변화, 지성의 놀라운 변화가 자연 세계의 이적보다도 더 놀라운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어두운 마음은 학문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지식이 도구인 것은 틀림없지만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지식이 쌓일지는 모르지만 그의 영혼의 어두움이 물러가서 하나님이 내 눈을 밝게 하셨도다 라고는 고백하지 못합니다.
사도행전 9장 5절에서 그리스도를 믿지 않던 불신자였던 사울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결정적 사건이 실려 있습니다. 거기서 그는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향해 이렇게 묻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냥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탱해 오던 인생관과 세계관이 파괴되고 자기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인생관과 세계관이 들어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인데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그것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린 모든 사람이 예배를 드린 것은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고 끝난 후 적어도 두 가지가 가슴 속에서 살아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아, 사람이 사는 도리가 이것이었구나. 아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사람의 도리였구나.’ 라는 계명에 대한 순수한 깨달음, 두 번째 그 계명을 깨달았을 때 ‘참으로 내가 그렇게 진실로 살고 싶도다. 오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 라는 삶의 거룩한 욕구가 솟쳐 올라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고 적어도 나는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교리를 많이 알고 성경을 많이 배우고도 부패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아주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말도 되지 않는 패역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적은 지식을 가지고도 매일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이 그렇게 된 것은 본 적이 없습니다. 성령의 비췸이 없는 지식은 마지막에 우리에게 자기 같은 지식이 없는 사람들을 향한 우월감을 가져다주고 교만에 빠지게 할 따름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여러분에게는 이런 말씀의 빛이 있습니까? 그래서 마음의 건조함, 그리고 가슴의 답답함을 어느 한 순간에 모두 없애버리는 그 탁월한 무엇이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신이 처음 사랑한 남자와 생전 처음으로 뜨겁게 키스하고 골목길을 걸어오는 한 여성의 내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일이 있기 직전과 직후 삶의 상황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방금 영혼의 지축을 뒤흔드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키스를 한 것입니다. 걸어 나가는 그 골목길에 펼쳐진 새로운 세상은 그 남자를 만나서 키스하기 전의 그 세상이 아닙니다.
(찬양)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무슨 기대를 이 세상에 또 겁니까? 여러분이 원하지 않는 일이 인생에 많이 일어납니다. 만약에 그 일 말고 다른 일을 원한다면 그 일은 또 언제나 좋은 결과를 가져오겠습니까? 어차피 우리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안 됩니다. 끊임없이 우리가 원하지 않는 삶의 사태를 만납니다. 세상이 유일한 희망이고 사람이 유일한 소망인 사람들은 그래서 매일매일 절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 때문에 사는 것도 아니고 사람 때문에 사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은 전혀 알 수 없는 우리의 정신을 비치는 빛이 있습니다. 그 빛이 주는 아름다움과 감격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까짓 것 내 인생 좀 꼬여도 문제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방금 주님과 키스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추호도 이해할 수 없는 그 내밀하고 그 깊은 기쁨이 내 영혼 안에 파도처럼 밀려왔기 때문에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그 말씀의 기쁨과 사랑 때문에 인생을 살다보면 힘든 시간도 지나가고 힘들었던 순간들도 극복이 됩니다.
언젠가는 또 나쁜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는 또 믿음으로 살면 됩니다. 시인은 누구보다도 인생의 고난의 길을 많이 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며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뜻이 높았기 때문에 원수도 많았고 가치가 분명했기 때문에 미워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그의 기쁨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들은 생각이 나서 찾아가 보면 이미 가고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펼친 사람, 가난한 마음으로 그 은혜의 진리에 귀를 기울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그 마음의 어두움을 물러가도록 찬란한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세상의 근심과 염려 속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극한 아름다움,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난 주님의 기이한 영광을 보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이렇게 진리의 밝은 빛 아래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경외하게 하는 말씀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시 19: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하나님의 말씀의 다섯 번째 효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앞에 언급된 네 가지 하나님의 말씀의 효능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원래 히브리어 성경에는 ‘도’라는 말씀이 안 나오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경외는 정결하여 영원히 서 있으며”라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 구절이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경외의 성질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문맥상 하나님의 말씀의 효능을 이미 제시한 앞의 구절들을 계속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도’라는 말씀을 보충한 우리말 성경은 대단히 잘된 번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II. 경외하게 하는 말씀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만든다고 했는데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는 경외란 무엇일까요? 히브리어 성경에 ‘이라트’라고 되어 있는 이 경외는 히브리어 동사 ‘야레’에서 온 단어입니다. 이 ‘야레’라는 단어는 우리말 성경에서 대부분 ‘공경하다’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 공경의 대상이 하나님이기도 하고 또 인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모를 공경하라 할 때에도 이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자기가 인생의 주인인 줄을 알고 하나님 없이 막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에 그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 중요한 종교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A. 경외란 무엇인가?
첫째는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있는 존재의 격차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정말 대단한 존재인 줄을 알고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신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의 콧김 하나에 사라져 버릴 수 있는 아주 하찮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존재적인 격차를 인식하는 데서 하나님을 향한 무한한 두려움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은 때로 자신의 온 정신을 흔들어 놓는 마음 떨리는 두려움을 동반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을 이웃집 아저씨처럼, 친구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주 뛰어난 영성의 표인 것처럼 말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하는 경건은 그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떨리는 두려움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 그 분을 향한 거룩한 떨림이 없는 신앙은 하나님을 깔보는 믿음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믿음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약의 위대한 인물들부터 신약의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까지 그들의 족적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닫고 또 전파했으나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깔보거나 무시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것이 경건의 가장 중심적인 표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중간적인 결론은 이것입니다. 어떠한 식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거룩함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든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이 아니면 그것은 결코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신앙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주님을 의식하는 사람은 가장 기본적으로 주님을 향한 떨림, 주님을 향한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우리의 모든 시간과 존재는 구별됩니다. 24시간이 모두 시간입니다. 그러나 예배드리는 시간은 특별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떨림을 더 많이 느껴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도덕적인 격차를 느끼는 것입니다. 자신도 의롭게 살고 남에게 자비를 베풀고 불쌍한 자를 긍휼히 여기고 살아왔지만 주님을 만나고 보니 자신의 정의는 온전하다고 말할 수 없고 자신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자신이 행한 의로운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게 되고, 그 분의 완전하신 덕을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한 의지입니다. 이런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식하게 만들고, 그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 베푸신 무한하고 완전한 사랑을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만 있다면 노예적인 공포감 이외에 아무것도 아닐 텐데 그 두려움과 떨림이 있는 바로 그 시간에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리는 정서를 경험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경외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경외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작용과 정신의 품질을 제외할 수 없지만 그러나 내면의 세계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을 공경하며 사는 외적인 모든 삶의 태도까지를 아우르는 용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것은 내면과 외면의 태도를 모두 아우르고, 그 사람의 사람됨과 그의 행함을 모두 통합시키는 개념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인간은 참으로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생활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 대한 어떠한 두려움도 없는 것이 마치 복음에 대한 탁월한 이해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을 깔보는 삶을 서슴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능욕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막보는 삶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는 동안에 삶은 하나님의 경외로부터 한참 벗어나고 그래서 영혼은 추루해지고 마음은 죄에 속박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복음적인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하나님의 일꾼을 세우는 가장 중요한 자격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지도자로서의 가장 중요한 자격이었고 진실한 성도로서의 가장 중요한 내적인 품격이었습니다. 오늘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깔보고 그의 이름을 능욕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어떠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정말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며 떨리는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우리를 의식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되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함께 하나님의 두려운 떨림을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의 마음속에 함께 대면하기 두려운 하나님의 엄위와 존귀하심에 대한 경건한 떨림이 있는지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막 보는 사람은 죄를 막 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야 말로 그 두려운 것만큼 죄를 무서워합니다. 그래서 시인도 말했습니다. “두려워 떨면서 범죄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경외심을 회복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말씀이 경외하게 하는 방법
1. 진리를 알게 함
두 번째는 그러면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경외하게 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주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만들까요? 첫째는 진리를 알게 함으로써 입니다. 이 진리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이외에 모든 것들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의 흔적이 묻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진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진리의 흔적이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들 속에 인간이 의식할 수 있도록 묻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가 자연 세계 속에는 규칙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 속에서는 어떤 질서로 나타나서 우리에게 규칙으로 인식되는데 음악과 같은 것이 그런 예입니다. 지금이야 자기 좋은 대로 음악을 하지만 옛날 같으면 수학을 모르는 사람은 음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기하학을 모르는 사람들이 결코 광학을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습니다.
자연의 세계 속에 있는 질서가 있고 도덕의 세계 속에 있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질서는 모두 진리이신 하나님의 규칙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연적이고 과학적인 진리들을 잘 터득하고 거기에 맞추어서 살게 되면 우리 몸이 고생을 덜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이런 것들을 모르고 무시하면서 살면 우리의 몸이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유럽에 집회를 가서 아침 시간에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대부분 거하게 아침을 먹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박하게 차려진 뷔페로 된 아침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 옆자리에 우리 후배 목사님이 한분 있었고, 식사가 2/3쯤 끝났을 때 그 음식 코너에 가서 밥공기보다 훨씬 큰 그릇에다가 수북하게 과일로 만든 통조림을 담아왔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려고 하다가 그 분도 건강이 매우 안 좋기 때문에 제가 한 마디 했습니다. ‘목사님 무슨 생각으로 이 과일 통조림을 이렇게 수북하게 담아왔습니까?’ 그러니까 ‘왜요. 맛있잖아요’ 이게 절반은 백설탕입니다. 그렇게 설탕을 집어넣지 않으면 절대로 통조림이 안 됩니다. 그러면서 설탕이 몸에 들어가서 어떤 나쁜 역할을 하는지를 쭉 설명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앞으로 쑥 밀어놓고 포크도 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오래간만에 목에 때 좀 벗기자 하고 친구들하고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서 혁대 끄르고 도저히 못 먹을 정도로 퍼 먹고 나면 놀라지 마십시오. 6000~8000kcal입니다. 평범한 여성이 4일 동안 섭취해야 하는 칼로리의 양을 한 끼에 때려친 것입니다. 그리고는 집에 가서 그 다음날 아침에 배를 만지면서 이상하게 자기는 물만 먹어도 살이 찐다고. 어떤 사람이 토마토를 3개월을 먹었는데 살이 계속 쪘답니다. 그래서 의사에게 물어보았답니다. 그랬더니 의사가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어떻게 토마토를 먹었냐고 그러니까 토마토가 맛이 없어서 설탕을 계속 부어 먹었답니다. 그러니까 살이 찝니다. 예쁜 여성이 화장품 광고하는 것만큼 거짓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소비자는 그 예쁜 여성이 화장품을 들고 있을 때 저것을 바르면 자신도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하지만 그 여자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예쁜 엄마, 아빠의 유전자를 받고 태어났습니다. 종자가 우리와 다릅니다. 그것을 선전하기 위해서 그것을 들고 있는 것입니다. 예쁜 종자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스스로를 깎고 다듬고 정결하게 하기를 진실한 신자가 주님 앞에 서기 위해 성화되는 것만큼 그렇게 매순간 몸부림을 치다가 어느 순간이 오자 국화꽃처럼 활짝 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소비자는 자기 같은 사람도 그것을 바르면 그렇게 될 거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약간의 사기성이 있지만 더 눈 뜨고 못 봐주는 사기는 43kg내지 44kg쯤 되어 보이는 깡마르고 예쁜 자매가 피자를 마구 먹는 선전 포스터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한 사기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마구 먹고는 그 몸집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입에 착착 붙는 맛있는 피자 종류는 레귤러 한 판에 약 2600~3000kcal입니다. 그것 반판을 먹으면 여성도 하루에 섭취할 모든 칼로리를 다 섭취한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날 처음 피자를 들고 그렇게 연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절대 그렇게 먹으면 안 됩니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놀고 싶을 때 노는 것을 우리들이 자유라고 말합니다. 주체인 자신이 무엇에 의해 타율적으로 억압을 받지 않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때 그리고 그것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일 때 우리는 그것을 자유라고 부릅니다. 누려 보십시오. 그러면 조금 지나고 나서 뚱뚱해서 옷도 다 버려야 되고, 매일 화장실에 가서 샤워를 하면서 두 손으로 배를 움켜쥐면서 고민을 하고, 거기까지는 개인적인 문제니까 괜찮습니다. 그런데 질병이 생깁니다. 그래서 얼마 남지 않은 의료보험 공단 돈을 계속 탕진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데 그게 자유인가? 그래서 자유라고 할 때에는 그 결과가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범위 안에서의 자유여야지만 진정한 자유라고 합니다. 그런 질서의 흔적들이 이 모든 자연 세계 속에 있고 오늘날 인간의 수명이 이렇게 많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무언가 자신이 건강을 잘 관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엄청난 의학의 발전과 과학의 진전으로 사람들이 스스로 삶의 양식이 건강할 수 있도록 변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흔적들이 바로 이런 자연 세계 속에 묻어 있고 그것들을 인식하고 합치하는 삶을 살 때에 우리의 인간 존재중 인간의 육체가 비교적 안정되고 평안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보다도 더 중요한 질서가 있습니다. 그것이 영적이고 도덕적인 질서입니다. 진리는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런 질서는 인간이 눈에 보이는 자연의 세계나 혹은 자신의 마음을 끝없이 관찰함으로써 획득할 수 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20대 때에 제가 만난 친구 하나는 생물학을 전공하는 사람이었는데 특히 미생물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던 불신자였는데 그가 미생물을 연구하면서 어느 날 자신의 생애에 매우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미생물이 너무 예쁘고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의 이유 중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미생물은 결코 독단적으로 생존하지 않고 다른 미생물과 함께 끊임없이 공존하면서 자신의 생존을 유지해 간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에 강렬한 빛이 들어오면서 자신의 인생도 홀로 독단적으로 살아가는 인생이어서는 안 되고, 끊임없이 주위의 사람과 공존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도덕적인 깨달음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깨달음이 아무리 확장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어떻게 거룩하신 분이고, 우리가 얼마나 죄인이고, 그런 죄인을 위해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그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참 구원과 생명을 얻는 비결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우리의 진리에 대한 인식이 자연적인 것으로부터 시작되기는 하지만 그리고 양심에 대한 의식으로부터 시작되기는 하지만 이것으로서 종결되어 질수는 없고, 반드시 그 불완전한 지식의 상태에서 구속 주 예수그리스도께로 돌아가 그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과 이 모든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는데 이것을 우리들이 진리 인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와 사물들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는 창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 창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묻어있는 진리의 흔적들을 통해서 그 진리의 본체이신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경을 강조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깨닫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인 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또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들 중 어떤 것들은 우리의 참다운 이성의 탐구를 통해서 그것이 과연 그러한가 하는 것을 추론해 나감으로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강화합니다. 어느 쪽이든 성령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이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이해하는 일에 힘써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본분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인데 누구도 그 진리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부름 받은 인간의 본분에 충실한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도시에 넘쳐나는 불경건과 치욕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무시하면서 살아갑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진리의 빛이 그들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비록 이 세상의 이치와 물정에는 밝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인 뿌리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진리와 관련지은 삶을 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난 이유는 진리를 탐구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부터 피곤한 몸으로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우리는 수많은 삶의 상황들을 마주합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도 우리의 마음속에서 진리를 알고 그 진리대로 살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사라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2. 감화를 받게 함
두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경외하게 하는 방식은 감화를 받게 함으로써 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받아들인 지식과 이해를 통해서 습득한 지식은 그것이 올바로 습득된 지식이라면 반드시 이 감화를 동반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감화가 동반되어야지만 비로소 그 지식을 따라 거기에 합당한 존재가 될 수 있고 합당한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은 바로 이 감화를 통해 자기가 받아들인 이 지식대로 살아갈 의지의 힘이 불러 일으켜집니다. 그리고 이 감화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알았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이 감화를 빼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충만한 하나님의 감화를 통해서 영향을 받고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돌이켜 그 방식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불일 듯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를 보면 청교도를 부르짖으면서 특정한 교파에 혹은 특정한 어떤 종류의 어떤 신학 사상을 절대화시켜서 그것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거의 배교에 가까운 길을 걷는 사람 취급을 하며 파괴적인 도전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진정한 퓨리탄의 후예가 아닙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합니다. “목사님이 청교도를 좋아하신다면서요?” “예 맞습니다. 난 청교도를 매우 좋아합니다. 그러나 청교도를 좋아하는 사람은 난 싫어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청교도를 올바른 방식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 세기에 영국의 걸출한 목회자, 윌리엄 스틸은 자신의 책 속에서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이런 잘못된 풍조의 퓨리타니즘을 가리켜 네오퓨리타니즘(Neopuritanism)이라고 불렀습니다. 신 청교도주의라고 번역될 수 있는 이 용어는 청교도들을 사랑하지만 청교도들이 동의할 수 없는 방식으로 청교도를 추종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제가 제일 처음 만난 위대한 신학자는 칼빈이었습니다. 저는 그 뛰어난 제네바의 목회자를 깊이 존경하고 그리고 그의 책을 숙독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강요는 내가 사랑하는 책들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가 보여준 경건의 모범을 따라 목회의 길을 걸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살아있을 동안이나 혹은 죽은 이후에도 칼빈주의자 김남준으로 불리는 것은 사절합니다. 나는 그의 추종자가 아닙니다.
일평생 그 분을 나의 담임 목사로 생각하고 나는 그 분이 목회하는 교회에 부목사라는 의식 속에서 살게 만들었던 위대한 청교도 존 오웬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저는 긴 세월동안 그 분을 열심히 탐구했고 지금은 어느 정도 그 분의 신학을 상당히 이해했다고 스스로 느낍니다. 그렇지만 오웬 주의자로 불리어지는 것은 싫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초가집 같던 나의 기독교 사상을 웅장한 성처럼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천국에 가서도 제일 먼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내가 기독교 작가들 중 유일하게 천재로 인정해드린 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나의 사후에라도 누가 내가 아우구스티누스 주의자라고 주장한다면 나는 천국에서 그렇지 않다고 외칠 것입니다.
18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가 제게 끼친 영향은 다른 신학자들 못지않습니다. 27권의 그의 방대한 저작을 거의 다 읽었고, 단 하루도 그의 신학과 철학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에드워드 주의자로 제가 불린다면 저는 화낼 것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때 제가 두려운 마음으로 존경했던 모세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모세의 추종자는 아닙니다. 탁월한 지성을 가지고 문학적인 감성으로 하나님을 노래했던 신령한 사람 다윗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다윗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사람은 아닙니다. 기독교의 기초를 놓았던 바울이지만 신약 성경의 절반을 썼고 누구도 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나는 바울주의자일 수 없습니다. 비록 지성과 덕에 있어 내가 언급한 위대한 사람들과는 어깨를 겨룰 수 없는 아주 미흡한 상태에서 내 인생은 끝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들은 모두 내가 목표로 삼고 추구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나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올라가도록 나에게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사닥다리일 뿐이었습니다. 나는 누구의 추종자도 어떤 청교도의 팔로워도 아닌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려고 애쓰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고 매일매일 몸부림쳤던 한 그리스도인인 구도자라는 칭호로 나는 충분히 만족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의 사상을 따르고, 판박이같이 그것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신앙, 참된 퓨리타니즘의 진정한 열매는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과 위대한 생명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들이 만난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의 삶의 질과 품격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 충만한 생명의 능력을 하나님과 이 세상 앞에서 보이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기억하지 않고 우리와 함께 했던 그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성품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주는 사람, 그 사람이 진리를 누린 사람이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감화를 받아 그를 사랑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경외심 결핍 현상들, 삶의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을 깔보는 무시하는 듯한 우리의 막된 삶이 그 뿌리를 결국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감화의 결핍에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오늘 이 시간 이런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지식과 은혜의 감화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깨달음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지금 이 순간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그의 마음을 때리고 지성의 어두움을 가르고 진리의 빛을 비추며 그들의 차가운 심령에 동토처럼 얼어붙은 그 마음의 땅을 녹여 생명의 물이 흐르게 하고 꽃이 피게 할 수 있다면 그들도 더 이상 하나님을 깔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변화되고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영원까지 서 있음
마지막으로 오늘 성경은 이 말씀이 영원까지 서 있다고 말합니다. 서 있다는 이 단어는 히브리말로 ‘오메데트’라고 하는 분사입니다. 이것은 변화 없이 모든 사태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그것들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작용이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가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의 작용이 한시적이 아니고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라면 지금도 역사하고 있을 텐데 왜 우리는 이렇게 변화되지 않는 것일까요? 기억하여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빛이나 진리, 모두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데 객관과 주관 사이를 걸쳐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찬란한 빛이 소낙비처럼 쏟아져도 시신경이 없이 어두우면 그 사람은 칠흑 같은 어둠속에 있는 눈뜬 사람과 일반입니다. 똑같이 진리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도 그 진리가 참으로 진리로 인식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그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입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사실을 마태복음 13장 씨 뿌리는 비유에서 그림처럼 설명해 주셨습니다. 씨가 떨어져 30배, 60배의 결실을 맺으며 커다란 나무로 변했습니다. 그것도 한 씨가 한 생명과 그 커다란 성장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길가에 떨어져 새가 먹어버리고 사람들에게 밟혀서 먼지가 되어 사라진 그 씨앗도 똑같은 씨앗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마음에서는 그 진리가 얼마나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그 생명과 성장의 위력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 마음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짓밟혀지고 새들에 의해서 삼켜져 버립니다.
우리가 하나님 없이 진리의 영향을 받지 않고 건조하고 거친 삶을 살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 은혜를 받고 회심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 회심할 때도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켰고 그 회심이 우리 안에 새로워질 때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진리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가치는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진리가 가진 최고의 가치는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물리적이고 자연적인 질서를 깨닫게 될 때에 우리의 삶이 행복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에 국한됩니다. 우리가 영적이고 도덕적인 생활에 있어서 진리의 비췸을 받고 무질서한 마음과 인간의 정신에 질서가 생기게 될 때 그때에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앞에 참으로 인간답게 사는 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사람들은 절대 가치를 거절하고 절대적인 규범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우리 인간의 자유를 심각하게 속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상하게 자유를 누리면 누릴수록 누리는 것만큼 견딜 수 없는 소외감이 현대인들의 가슴에 밀려옵니다. 20년 후에 한국 교회가 어떻게 될까요? 종종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저는 말합니다. 나의 신학과 지식을 총동원해서 엄밀하게 예고를 한다면 교회에 출석하는 절대적인 숫자는 깜짝 놀랄 정도로 줄어들 것이다. 두 번째 사람들은 교회의 필요성을 점점 못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 번째로 교회의 필요성을 점점 못 느끼는 것만큼 반비례해서 기독교 신앙의 필요성은 심각하게 증가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무엇입니까? 제가 15살 때 교회에 가던 주일 논둑에 엎드려져서 펑펑 울며 내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에 대해서 그렇게 의문을 가지고 소외를 느끼는 사람들의 수는 지금보다 훨씬 늘어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문제에 대한 답을 못 찾기 때문에 더 극단적인 쾌락주의로 흐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쾌락의 자유를 추구할수록 심각한 소외를 느끼며 그들은 종교의 필요성을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20년 후에 기독교의 인구가 급감한다고 할지라도 누군가 그 15살 먹은 어린아이에게 들었던 의문에 대한 그 심각한 해답을 들려주고 진리의 빛을 던져 준다면 그 교회는 시류의 영향을 받지 않고 푸른 바다를 항해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목회자를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라고 말입니다.
절대적인 가치성과 규범성을 거부하며 자유를 찾으면 찾을수록 인간은 미친 듯이 소외됩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자유를 그 속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받게 됩니다. 전 세계의 모든 인류가 특정한 진리에 대해서 옳고 그름의 찬반 투표를 던져 만장일치로 가결된다 할지라도 진리는 추호도 영향 받지 않습니다. 진리는 언제나 서슬이 시퍼렇게 거기에 있어서 그 진리를 떠나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어머니 같은 진리는 언제나 거기 있어서 영원히 거기 서 있어서 자기로 돌아오는 모든 사람들의 눈물을 씻기고 흐르는 이마의 땀을 씻겨 주어 쉼을 줍니다.
더욱이 오늘 성경은 그 말씀이 정결하다고 말합니다. 히브리말로 ‘타헤리’라고 하는 이 형용사는 예수님이 선포한 산상수훈의 첫 머리 팔복에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물론 거기서는 희랍어로 등장을 합니다. ‘마까리호이 호이 카탈로이’라고 되어 있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는 그 구절에서 청결이 바로 이 ‘타헬’을 번역한 것입니다. 때 묻은 불결한 상태를 물 같은 것으로 씻어내어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깨끗한 상태로 만드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로 받아들여질 만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성격입니다.
인간들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지키도록 강요하는 진리의 모양을 본뜬 법은 절대로 공정하지 않습니다. 가진 자의 이익을 대변하고 억눌린 자의 이익을 대변하는가 하면 때로는 입법에 영향을 준 사람들의 이익을 옹호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진리는 무사애인의 법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사롭지 않고 그리고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어떤 사람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는 그러한 실체가 바로 진리입니다.
참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전 이 깨달음을 얻는 순간 영혼에 아주 깊은 환희를 느꼈는데요. 어떤 한 사람에게서 사랑받는 사람들끼리는 언제나 시샘이 있습니다. 동의하시죠? 더군다나 한 남자에게서 사랑을 받는 두 여자일 경우에 그 시샘은 심각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시샘을 했다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습니까? 놀랍습니다. 오히려 이 사람이 주님을 깊이 만나고 사랑을 받으면 사랑을 받을수록 이상하게 하나님이 자기를 그만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사랑을 받을 때 나도 함께 그 사람과 함께 사랑을 받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진리가 주는 사랑의 작용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도 우리는 끝없는 소외감을 경험하고 우리는 흔히 이 소외감이 세상의 자원이 모자라기 때문에 혹은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 외롭고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깊은 사랑을 경험하며 그 모든 환경들을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기회로 활용하였습니다. 우리의 이 심각한 소외의 문제는 우리 스스로 진리를 멀리하고 진리의 사랑 대신 육체의 사랑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분이 바로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이성적으로 깨닫고 사유하지 못하는 많은 불쌍한 사람들도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 받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의 복음의 진리를 하나님의 사랑에 이르는 지름길로 삼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그가 누구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변함없이 서서 자기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성령의 은혜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영원히 서 있어서 자기의 인생을 붙들고 있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과 함께 살고 죽는 사람은 말씀처럼 흔들리지 않는 담대함과 그리고 용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거기 있어 변함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기도의 제목을 좌우로 밀치십시오. 그리고 하나의 기도의 제목을 피 저리게 붙드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나의 영혼이 다시 그 무한한 생명과 사랑을 얻도록 도와달라고 매달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진실하고 의로운 말씀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시 19: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은 하나님의 말씀의 효능 여섯 번째를 전할 시간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직접적으로 말씀의 효능을 설명한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을 추가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 중 가장 권위 있게 받아들여지는 킹 제임스 버전에서는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라고 하는 구절을 콜론으로 처리해서 상반절인 “정결하여 영혼까지 이르고”라고 하는 이 구절에 대한 설명으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보든지 간에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본질과 그것이 일으키는 역할은 일맥상통한다고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효능 여섯 번째라고 설명 드려도 그렇게 지나친 비약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하나님의 법은 진실하고 의롭기 때문에 그 법에 접근하는 모든 사람들을 또한 진실하고 의롭게 만드는 효능이 있다고 우리는 단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II. 말씀과 여호와의 법
A. 여호와의 법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과 여호와의 법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의로우니” 라고 말입니다. 여기 여호와의 법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미쉬파트 야훼’입니다. 특히 법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가 ‘미쉬파트’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성경에서 공의, 심판, 판단, 정의, 이런 말로 번역이 되었고, 특히 시편에서는 이 ‘미쉬파트’라고 하는 단어가 율법과 관련될 경우에는 규례, 법 등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율법에 기초해서, 십계명에 기초해서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이렇게 살라고 가르쳐 주시는 세부적인 계명과 교훈을 가르치는 명령입니다. 그래서 이 ‘미쉬파트’라고 하는 단어를 킹 제임스 버전에서는 ‘판단’, 'judgement'라고 번역했고, 현대의 성경에서 그래도 번역이 뛰어난 NIV성경에서는 명령을 의미하는 'decree'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이 단어의 뜻은 하나님의 십계명의 판단을 따라 구체화된 하나님의 명령을 의미합니다. 그 명령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또 어떻게 살아야 될 지에 대한 하나님의 분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과연 누구의 판단, 누구의 명령을 따라서 믿고 또 사는 사람들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신앙과 삶에 유일한 규칙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의 모든 상황에 대해서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지만 그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숙고하고 그 말씀의 원리에 따라서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 어떻게 행동하여야 할 것인지를 우리들이 생각한다면 적절한 판단과 결론이 도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알 뿐 아니라 성경에서 교리를 배우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에 적용하여 그 하나님의 말씀을 체득했다는 것까지 포함을 하는 것입니다.
중국의 의학과 농업을 가르쳐 준 전설적인 존재가 있는데 ‘신농’이라고 하는 인물입니다. 이 사람은 특히 중국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데 이 사람은 아직 의학 지식이 없었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의 질병을 고치기 위해서 어떤 약초를 쓰고 처방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이제 구체적인 이론으로 적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하는 방법은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고 이런 약초, 저런 약초를 발라보면서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시험하고, 그것을 체계화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몸을 마루타 삼아서 어떤 약효의 효능을 직접 체득하고 그것을 지식으로 남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똑같이 이 세상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체득해 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저기 진리가 있으니 가서 보라는 식으로 우리들이 그렇게 가르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 진리의 말씀을 온 몸으로 체득하고 그 진리가 주는 효과를 터득한 다음 자신의 뼛속에서 우러나오는 경험으로써 그 진리가 왜 필요하고, 그 진리를 어떻게 우리들이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가 자신의 인격과 삶 안에서 임상 실험된 후에 사람들에게 그 체득한 진리를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들에게 전하는 진리 속에서는 반드시 우리의 삶의 진액과 피가 묻어 있어야 합니다.
더욱이 이 진리는 우리가 공상 속에서 찾아낸 진리가 아니라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진리입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참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가르쳐 주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의 듣기에 좋은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들려주심으로써 진리를 체득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분은 그 진리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자신의 온 삶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주셨고, 마지막에는 당신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아 대신 죽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입증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신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 놀라운 진리를 우리가 어떻게 터득하고, 또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가고, 이것을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지는 매우 분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추상적으로 받아들이고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좋아한다는 고백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명령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우리의 삶 속에서 분명하게 실행해야 하고 그래서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진리의 법에 의해서 장악된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지못해서 지키는, 지키면 사람들을 정죄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지키지 못할 때에는 자신을 정죄하는 비관에 빠지는 신앙생활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법 없이 사는 짐승같이 방종하도록 버려두시지 않고 오히려 이 진리를 따라 살 수 있는 밝은 지식의 빛을 주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법대로 사는 삶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더 많은 지식의 빛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더 많이 필요하고, 그 말씀의 빛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는 사랑의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법을 사모하고 이 법에 붙잡혀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믿을 만한 법
성경은 바로 이 하나님의 법이 진실한 법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진실한’이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에메트’라고 하는 단어인데 ‘참된’ 혹은 ‘참스러운, 확고한, 견고한, 믿을만한’, 혹은 ‘신뢰할만한’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기 때문에 그 말씀에 입각해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교훈과 훈계의 명령들이 모두 진실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지만 또한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이 차가운 진리를 수납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수단이 되어서 거룩한 하나님의 인격과 만나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진리를 탐구하지만 이 탐구의 방식은 우리의 맨 지성으로 진리를 찾아가는 이 세상의 수양종교에서의 구도와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맨 지성으로 신을 찾아가거나 진리를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보여주셨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분의 참 사랑을 아는 것 없이는 복음의 진리를 알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하나님을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나뉠 수 없이 한 인격 안에 공존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 없이 사랑하는 것이 참스러운 사랑일 수 없고, 그리고 사랑하는 것 없이 아는 것이 진정으로 그를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은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져오고 이 인격에 대한 신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더 잘 믿을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대로 살지 않는 것을 불신앙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의 말씀 속에서 생명을 누리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신앙의 위대한 덕은 바로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위대한 하나님의 진리를 더듬어 알 수 없는 인간이 그리스도 예수의 피 묻은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이르는 참된 진리가 오직 그 분 안에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진리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주신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붙들고 그 사랑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참된 성품을 경험하고 그 진리를 따라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깨닫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리를 안 사람은 반드시 그 진리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를 갈망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것이 없다면 그것은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 선생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지식은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사람들, 믿음으로 역사하는 사랑이 없는 사람들을 이렇게 비유합니다. 거울을 보고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관찰한 후에 그 거울을 따라서 자신의 외모를 고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을 알지만 그 법에 자기를 복종시키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이게 믿음 없음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진실합니다. 그래서 이 법을 통해서 제대로 하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은 진실해지고자 고뇌합니다. 이른 아침 눈을 뜬 순간부터 마지막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고민해야 할 바가 바로 진실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알아야지만 진리의 축을 알 수 있고 그런 진리의 중심축이 굳게 서 있어야지만 자신이 그 진리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졌는지를 생각하며 자기를 반성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반성할 때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자기를 끊임없이 합치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인류학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지구상에 존재한 모든 인류의 수가 약 천억쯤 된다고 합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인간들이 태어날 것이고 역사를 이어갈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나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 천억의 사람들 중 누구와도 똑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지문이 다르듯이 나는 이전에 태어난 모든 사람과도 다르고 앞으로 태어나고 죽을 모든 인류와도 같지 않은 한 사람으로 창조되었고, 이런 나도 필요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한때 저는 아우구스티누스에 깊이 심취하면서 하나님께 약간은 불만이 섞인 기도를 한 6개월가량 드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런 기도였습니다. “하나님 아우구스티누스는 누구고 저는 누구인데 한 사람에게는 이렇게 뛰어난 천재성을 주시고 나는 그가 대충 이야기한 것을 씨름하면서 공부해야지 겨우겨우 이해가 되는 사람으로 만드셨습니까? 왜 인간을 이렇게 차별하십니까? 나에게도 그런 천재성을 주십시오.” 한 6개월 기도하고 난 후에 응답이 왔는데 허공중에 주님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나의 지성이 묻고 나의 마음이 대답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네 은혜가 족하다.” 사실은 그런 6개월이 있고 난 후에 아주 커다란 깨달음이 저에게 왔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그런 탁월한 천재와 똑같은 또 하나의 사람일 필요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나로 만드셨구나.’ 라고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내가 부러워하는 탁월한 지성과 천재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다른 내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좋아서 그와 다른 나로 창조하셨으니 나의 인생에 가장 큰 보람은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실 때에 내게 주셨던 참 나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는 어느 한 순간 커다란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지지난 주에도 설교했지만 그리고 마음속에 큰 깨달음이 되었습니다. 정말 칼빈을 사랑하고 그를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며 배웠지만 죽은 후에 나는 칼빈주의자 김남준이었다고 불러워지기를 원치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는 물론이고, 오웬주의자나 에드워드주의자라고 불리워지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단 하나 나에게 참 인간의 도가 무엇인 것을 당신 자신의 인격과 온 삶으로 가르쳐 주셨던 그리스도 예수, 그 분을 통해서 창조의 목적과 그리고 인류를 지으신 하나님의 계획, 그리고 아직까지도 분명하지 않은 그 수많은 인류 가운데 나 같은 인간을 나도 나 자신에게 만족스럽지 않은 이런 인간을 창조하신 것에 하나님의 크고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그 진리의 말씀에 비춰보면 참된 나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그 말씀 앞에서 내가 아닌 것을 끊임없이 주님의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깎아내고 어찌하든지 거짓된 나로 일생을 황제로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이 나를 빚으신 그 참된 나로서 단 하루를 거지처럼 살다가 죽어도 좋으니 그런 삶을 살게 해 달라는 것이 기도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나는 많은 책을 썼고 그리고 많은 설교를 남겼지만 나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내가 죽은 후에도 나의 추종자가 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남겨놓은 모든 책과 설교는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창조된 그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데 필요한 만큼 사용된 후에 휴지처럼 쓰레기통에 버려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위대한 지성과 위대한 영적인 인물들이 남겨놓은 모든 설교와 지적인 유산들을 사다리 삼아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참스러운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 그래서 이 땅에 그들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찬양)
우리를 사랑하신 자비의 주 아버지
주께로 나아갈 때에 기도 들으사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우리들이 살아온 모든 삶은 내가 그려온 궤적들입니다. 잘된 것은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진리에 합당한 참스러운 내가 되게 하셨기 때문에 살았던 삶이니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고백을 해야 합니다. 쓰러지고 넘어지고 오류에 빠져서 죄짓고 잘못 살아온 삶이 내가 살아온 삶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비겁한 것입니다. 그것도 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나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하나님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불순종했고 내 힘으로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산 것이었습니다. 회개하고 그것도 내가 살아온 삶임을 인정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그는 점점 진실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진실은 마음과 정신이 진리에 합치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최고의 가치는 유명해지거나 유능해지거나 심지어는 세상의 자원을 많이 소유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덕은 진실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진리에 대한 사랑 없이는 진실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를 깊이 만나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수놓았던 위대한 지성들도 결국은 이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했고, 깨달은 사람들 중에도 자신의 삶을 이 진리에 합치시켜 행복을 누린 사람들이 거의 없었지만 주님은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이 뛰어난 지성을 갖지 못한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도 어린 아이 같은 마음으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피 흘리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온몸으로 받게끔 만들어 주셨습니다. 아무것도 몰라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는 사실만 믿는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누리게끔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되 진실한 사람들이 됩시다.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질 때도 있고, 약할 때도 있지만 그 쓰러진 자리에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지팡이 삼아 일어섭니다. 상처받은 그 자리에서 주님의 진리를 고약 삼아 바르고 다시 주님의 일으키는 손을 붙들고 일어납시다. 그래서 그 진리에 다시 합치하며 살아간다면 한 때 넘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께 사랑받지 못할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이렇게 넘어지고 쓰러졌지만 주님의 은혜로 다시 일으킴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때는 범죄하고 하나님 앞에 길을 잃은 사람들이었지만 진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진리와 더불어 씨름하고 그 진리 앞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진실한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의로운 하나님의 법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의로운 하나님의 법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라고 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 의는 율법에 부합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의를 하나님에게 적용할 때에는 당신의 거룩함에 도전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당신 스스로를 보호하시는 성품이지만 우리에게 적용할 때에는 주께 받아들여질 만한 상태입니다. 결국 이 의는 성경에서 크게 하나님에게 속한 절대적인 의와 인간에게 속한 상대적인 의로 제시됩니다. 절대적인 의는 로마서 3장 21절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의로운 상태는 율법에 완전히 부합한 상태인데 인간이 그 율법을 지킴으로써는 도저히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상태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자비하심 때문에 그 의를 우리에게 은총으로 주셔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상태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끌어안고 율법 아래 태어나서 율법을 어긴 모든 것에 대한 죗값을 지불하심으로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공로 때문에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에 비해서 상대적인 의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도록 율법을 지키며 살아감으로써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하나님 앞에 더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된 것입니다. 인간의 의는 하나님의 의에 비해 비할 데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믿은 자녀들이 짐승처럼 살아가는 것이나 성자처럼 살아가는 것이나 하나님 앞에는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자처럼 살아도 그렇게 살았던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았던 그 삶은 하나님을 향한 훌륭한 헌신이요 찬양의 꽃다발입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이 기쁨을 받으시는 것은 짐승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받으신 고통과는 비교되지 않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19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렇다고 해서 요셉이 자신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상대적으로 아무렇게나 사는 많은 사람들에 비해 성결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시기 때문에 그 분이 주신 율법도 의롭고 그 율법이 의롭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렇게 살라고 주신 모든 계명이 의롭습니다. 그것을 지킴으로 예수 없이도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를 점점 더 깊은 죄의 수렁으로 데려가지만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이제는 이 큰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며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제사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삶에 괴리가 있을 때 자신은 틀렸다고 선언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오늘날은 자기 부인이 없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지만 영적으로는 매우 미숙하고 정신적으로 어린 아이와 같아서 진리를 주면 그 진리로 자신을 깨뜨려 자신을 빚을 생각을 하는 대신 그 진리로 큰 칼을 만들어 남의 목을 치고자 하는 신앙이 오늘 경건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위대한 복은 누려본 사람들이 압니다. 하나님의 진리 때문에 마음 아파본 사람들,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 큰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그 진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의 추루한 모습을 보며 마음 아파 애통하는 사람들, 하나님은 이들과 함께 우시고 이들의 눈물을 씻기시는 분입니다.
사람은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살아온 우리의 삶은 다른 사람을 배신하고 다른 사람에게 배신의 상처를 안겨주고 그런 아픈 기억들로 우리의 인생은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누구도 배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진리는 언제나 사랑과 함께 있어서 그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그 진리는 사랑으로 함께 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 세상으로부터 빼앗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길 것 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도는 빼앗기기도 하고, 우리의 명예는 사람들에게 더렵혀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이 진리는 누가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그 진리는 의로운 하나님의 법이고 그리고 우리는 그 진리를 사랑할 때 불의한 시대에서 의로운 사람들이 됩니다. 비겁한 세상에서 용기 있는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버리고 장수하는 것보다는 진리와 함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자신의 목을 드리고 붉은 피를 흘리는 것이 훨씬 더 큰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더욱이 오늘날처럼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불의를 따르는 이율배반적인 사람들이 많은 시대에는 더더욱 이렇게 진리를 사랑하고 의롭게 살 수 있는 사람들, 존재 그 자체가 의로운 울림이 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힘이 없어서 큰 소리로 피를 토할 듯 여러분에게 외치지 못하지만 제 마음은 정으로 이렇게 살기를 소리치고 있습니다. 생명과 사랑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안 사람은 그 생명과 사랑을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신도 포악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사람으로 남아야 합니다. 마른 뼈와 같은 시대이기 때문에 자신도 더 마른 뼈가 되어 악악거리는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하늘의 생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이렇게 진실하여 우리를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하고 의롭기 때문에 우리를 이 세상에서 의로운 자녀로 살게 합니다. 끊임없이 변천하는 세상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붙들며 사시렵니까? 이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말씀의 능력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 19:1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말씀의 효능에 대한 언급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사모하며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순금보다도 더 사모하여야 할 것이니 이 말씀은 꿀이나 송이 꿀보다 더 달다는 이 시인의 고백이 여기에 실려 있습니다. 이 시인은 힘들고 어려운 인생의 시기를 지나며 말씀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소생케 되고, 그리고 우둔할 때에 지혜를 얻고 슬픔에 잠긴 마음이 기쁨을 얻고 어두운 눈이 밝아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 말씀은 순금보다도 더 사모하여야 할 바라고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II. 순금보다 사모함
A. 가장 소중한 것의 상징
순금보다도 사모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가장 소중한 것의 상징입니다. 금은 고대로부터 불변하는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화폐가 발명되기 전까지 금은 모든 재화의 궁극적인 계산의 기준이었고, 유동성이 가장 큰 재화였습니다. 순금은 모든 금중에 순도가 가장 높은 금으로써 가장 값비싼 것이며 이것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가 원하는 모든 물질적인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보장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니 행복한 삶을 위해서 사람들이 이 금을 사모하였던 것은 동서고금이나 차이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우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금을 만들어 내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연금술을 연구했습니다. 그러나 현대 과학으로도 금을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과학자들에게 그 원인을 밝혔는데 원소의 변화는 열에 원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금이라는 원소가 생성되기 위해서는 50억 도의 열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열은 현대 과학으로도 만들어 낼 수 있는 열이 몇 만도, 제가 어렴풋한 기억에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3만도 정도까지는 인간의 힘으로도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태양의 온도가 5000~6000도 밖에 안 되니까 50억 도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상상을 초월하는 온도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금은 인류에 의해서 만들어 질 수 없고 그냥 땅에 묻혀 있는 것을 캐내어서 그래서 유통할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렇게 깊이까지 파 들어가면서 금을 채굴하는 이유입니다.
육적인 욕망과 영적인 욕망 사이에는 아주 놀라운 유사성이 있습니다. 한번 신문에서 우연히 연예인들이 빚에 몰려서 불행하게 되고 마지막에 자살하는 그런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중의 특이했던 것들은 여배우들이, 연예인들이 그렇게 명품을 갖고 싶어 한답니다. 그래서 무슨 몇 천만 원씩 하는 백, 이런 명품들이 너무 갖고 싶어서 사채를 얻어서 그것을 산답니다. 사채를 얻을 때에는 언제쯤 들어올 돈이 있으니까 들어오면 갚아 버리면 되겠구나 하고 사는데 돈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지 않습니다. 계속 도니까 돈입니다.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연리 이자 무슨 30~40% 계속 불어나면서 결국 그 부채를 감당할 수 없게 되어서 불행한 길을 걸어가는 이야기입니다. 명품의 세계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한번 잡지에서 보니까 한국에 오메가에서 나비시리즈라고 해서 여성 시계를 론칭을 했습니다. 제가 봐도 정말 예뻤습니다. 살 마음이 없었지만 너무 론칭 행사를 아주 거창하게 하고, 그리고 아주 VIP들을 불러서 행사를 화려하게 하는 것을 보면서 시계도 너무 예뻤습니다. 그래서 이게 얼마나 되나 너무 궁금했습니다. 가격을 알아보니까 3000만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디지털시계가 사실은 시간은 더 잘 맞습니다. 그런 것을 안차고 못 베기는 욕망이 있는 사람들은 그거 하나에 온 마음이 꽂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자신이 만족감이 없고 행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모든 자원을 동원해서 자기가 욕망하는 그것을 사야 합니다. 자기 돈이 없으면 다른 사람 자원이라도 빌려서 그것을 손에 넣어야지만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영적인 욕망도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사모하고 주님을 만나고자하는 욕망이 강렬해지면 태만하고 나태할 수가 없습니다. 그 온 영혼의 기대가 하나에 꽂힙니다. 그리고 값비싼 물질이나 맛있는 음식이나 가보지 못한 곳의 화려한 여행 같은 것들로도 그 욕망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시편에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라고 고백을 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것을 얻기 전까지는 이 진리를 사모하는 이 마음의 갈망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육적인 욕망과 영적인 욕망은 놀라운 일치를 보이는 것입니다.
제가 최근 몇 주 들어서 너무 슬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가 여러분의 예배 태도 때문입니다. 가관입니다. 나는 도대체 그 사람들이 왜 교회에 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괜찮아요. 교회를 생각해서 교회에는 나오지 마십시오. 자모실에 있는 분들에게도 말하고 싶습니다.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는데 여러분이 앉아있는 그 자리가 다과방이 아닙니다. 거기서 여러분의 선배들, 지금은 거기에서 예배드리던 애들이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된 사람들이 거기에서 눈물로 예배를 드리며 자기도 변하고 자기 자식들도 변했습니다. 무엇입니까? 도대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의 간절한 열망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자 해야 되는 갈망인데 그것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최근에 신천지가 심각한 문제를 일으켜서 교회 일군들로부터 보고를 받았습니다. 이미 교회 안에 교인을 가장한 상당수의 신천지 사람들이 들어와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명단도 대조를 했습니다. 거기서 지적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신천지 교인의 잠입해 들어오는 놀라운 특징이 두 가지인데 헌금을 거의 안한다, 밥은 많이 사는데 헌금은 안한다, 두 번째 예배 시간에 눈을 감고 자거나 설교자를 노려보고 껌을 씹거나 다리를 꼬고 아무 생각 없이 허공을 쳐다보는 것이 신천지 교인의 공통적인 예배 태도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잘해야 합니다. 이제 잘못 예배를 드리면 옆에 있는 교인들이, 교역자들이 신천지일지도 모른다고 의심을 할 것입니다. 한번쯤 너무 과로하고 심령이 곤고한 나머지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주일 그런다면 그는 근본을 의심해야 됩니다. 나는 도대체 설교 시간에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서 핸드폰을 만지는 사람들, 인터넷을 하고 있는 사람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예배의 장소에 나와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쌓는 것입니다. 차라리 주일을 빠지고 밤중에 성수주일 못한 것을 눈물로 회개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더 옳다 인정함을 받을 것입니다. 여기가 무엇입니까? 민방위 교육장입니까? 그리고 한층 밑에 텔레비전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유아방에 있다고 하나님 거기 안 계십니까? 여러분의 신앙이 그 정도밖에 안됐습니까? 열린 교회에서 말씀을 먹고 그 오랜 세월을 자란 사람들이 겨우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그것밖에 아니었냐고 묻는 것입니다.
언젠가 유장한 고린도 전서 13장을 저는 생애를 걸고 설교했습니다. 6개월쯤 설교할 때 그것은 분명히 성령의 응답이었습니다. ‘넌 설교하지 마라’ 그리고 그 설교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외쳤습니다. ‘여러분은 이 설교를 들을 자격이 없습니다.’ 덮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를 설교했습니다. 23년을 여기서 목회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누군가에 의해서 이 교회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에는 이 설교가 끝나기 전에 교인들이 나를 내쫓을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느끼면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쫓아내면 난 떠난다.’였습니다. 그게 단 하나의 시리즈였습니다. 왜냐하면 여기는 예배가 아닙니다. 배교입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일주일동안 세상에서 하나님 깔보고 살다가 이번에는 예배당에 와서 하나님의 영광을 짓이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것을 예배를 통해서 입증하는데 그것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얼굴에 가래침을 뱉는 것입니다. 그리고도 일주일 동안 복을 주시기를 기대한다고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망상입니다. 나는 이 교회를 떠나는 날까지 그러한 여러분의 풍조에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이 시인은 인생을 살면서 많은 사람들이 순금을 얼마나 갖고 싶어 하는지 그 욕망이 얼마나 크기에 때로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그 욕망을 위해서 버리는가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묻는 것입니다. 진짜 사모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여러분이 정말 사모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오늘 오셔서 여러분에게 소원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무어라고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B. 진리를 통한 참 행복
그러면 그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겨져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리를 통해서 참 행복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끊임없이 이 세상에 있는 금을 탐해서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육신을 위한 많은 자원들을 얻을 보증을 마련하고 그것으로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고 부귀영화를 누리지만 인간은 영적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 이상의 그 무엇이 필요합니다. 육적인 욕망이 큰 자에게는 금이 행복의 조건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없어서 영혼이 곤고해져 본 사람들은 그 원인이 진리의 결핍 때문이라는 것을 안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요새 최근에 마돈나에 대한 기사를 읽으면서 마음속으로 이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의 춤과 퇴폐적인 몸짓과 노래들을 전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단 하나 예외가 있는데 그 여자가 에비타에서 부른 주제가 ‘Don't Cry For me Argentina’였습니다. 나는 수많은 가수들이 그 노래 부르는 것을 들었지만 마돈나가 준 감동을 능가하는 가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 마돈나가 공연을 했습니다. 그런데 커다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이 거의 300불이나 되는 돈을 주고 표를 사고 극장에 들어왔는데 이 여자가 올라와서 성심껏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춰야 하는데 술을 퍼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주정을 하고 상상할 수 없는 몸짓을 하면서 무대를 비틀거리며 돌아다니고 심지어 관객에게 시비를 걸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욕을 하면서 일어나서 표를 바꿔달라고 환불 소동을 벌였고 끝까지 남아있는 사람들은 그 추태를 지켜봐야 했습니다. 사실 여기에는 아주 슬픈 가족사가 있습니다. 이 여자는 남자와 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자식을 너무나 갖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남자를 씨내리로 선택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씨를 받았습니다. 그 아이는 남자아이인데 자랐습니다. 모든 꿈을 이 아이에게 다 걸은 것입니다. 엄마의 그런 퇴폐적이고 자신의 명성을 이기지 못하는 그 모든 삶의 모습을 보면서 이 아이가 엄마와 같이 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빠에게로 돌아갔고 양육권을 놓고 소송을 벌여서 결국은 졌습니다. 여기에서 오는 견딜 수 없는 허탈감, 좋은 변호사를 선임해서 계속 양육권을 다시 뺏어오기 위한 법정인 투쟁을 하고 있지만 문제는 이 15살 먹은 아들이 엄마에게서 마음이 떠나버린 것입니다. 거기에서 자기 자신을 지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노래만 부르면 돈은 쏟아져 들어오고 세상에 아쉬울 것이 없는 여자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물질과 명성, 그 모든 좋은 것이 자기를 지탱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그 자신을 지탱해 줄 어떤 정신적인 행복과 진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가졌어도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자신을 지탱할 수 없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엄마로서 자식을 그리워하고 그리고 눈물겹도록 그를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식이 죽거나 사라졌다고 해서 자신의 인생이 통째로 흔들리는 것은 진리를 소유한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진리를 소유한 사람은 진리를 잃어버리지 않는 한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인생의 기둥까지 뿌리까지 뒤 흔드는 그런 삶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필요를 알고 진리가 없어서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생생하게 경험해 본 사람들은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라는 것을 압니다. 저는 14살 3개월 되던 해, 논둑에서 통곡하고 울면서 나 자신의 인생에 자각이 생긴 것을 느꼈지만 6년의 방황 끝에 다시 눈물을 흘리며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를 만나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난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예수 믿은 것은 아닙니다. 나는 행복하고 싶었습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은 내 행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교회에서 배우면서 나의 행복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과 결코 나뉘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진리가 없어서 영혼이 큰 고통을 받아본 사람들은 압니다. 지난주에 책을 한권 읽었는데 그 책에는 불자였다가 목사가 된 사람의 자기 간증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15살 나이에 인생이 무엇을 따라서 살아가야 될까 하는 견해를 명확히 했으니까 저보다 훨씬 영특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아야 된다는 신앙이었습니다. 이 아이가 좀 더 자라서 고등학생쯤 되었을 때 이모인가 누구인가가 여승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에게 ‘너도 이제 성인이 되어가니 네가 여태까지 살던 환경을 떠나서 한번 아주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인생을 한번 배우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추천해 준 여러 곳 가운데 한군데를 가게 되었는데 소록도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소록도에 들어가서 법당이 있더랍니다. 법당에 가서 예불을 올리고 그리고 이제 나이는 어리지만 불교 선교사로 살기로 다짐을 하고, 그리고 이제 소록도에 있는 사람들에게 불법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볼 때에는 너무 불쌍한 중생들이었습니다. 코가 떨어지고, 입이 다 비틀어지고, 그리고 고름에 국물이 줄줄 줄줄 흐르는 누가 보더라도 아무 희망이 없는 불행한 사람들이었는데 이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저들이 자신이 왜 저렇게 불행한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교리에 의하면 오늘날의 불행은 전생의 악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자신의 업으로 태어난 자신의 과거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선행으로 그것을 보상하면 이제 다시 환생할 때에 단계가 저 밑의 아주 더러운 것부터 시작을 해서 마지막에 나비나 나방, 곤충 같은 것들 그 위로 올라가면 짐승이 있고 위에 사람이 있는데 높은 단계로 태어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엄청난 선택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 불법을 전했습니다. 일주일이면 한 번씩 육지에서 나병 판명을 받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들어오는데 그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당신들이 왜 이렇게 비참한 나병에 걸린 줄 압니까? 전생에 여러분이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죄를 모두 뉘우치고 그리고 중생에게 선을 베푸시고 부처님을 공경 하십시오’ 설교를 합니다. 사람들은 짜증을 내면서 지나가는데 그 중에 육군 중사 한 사람이 군대에서 나병 판정을 받고 소록도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자신은 너무 서러운데 자기가 이런 불행한 처지에 있는 게 자기 죄 때문이라고 하니까 참을 수 없어서 뛰어올라가서 이 자식하고 그러고 반쯤 죽여 놨답니다. 그렇게 주먹질을 당하고 피를 흘리면서도 어쨌든 동네마다 다니면서 이 부처님을 믿으라고 전파했고, 심지어는 이 사람이 저 사람들이 부처를 안 믿는 것은 아마 내가 이렇게 멀쩡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하고 그 사람들의 고름을 자기한테 묻혀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흉한 얼굴을 무언가로 가리면서 이렇게 밭을 갈고 있는 그 사람들에게 ‘부처님을 믿으셔야지 희망이 있습니다.’라고 전하니까 다 듣더랍니다. 그리고는 쳐다보면서 하는 말이 그 사람 이름이 성민이었는데 ‘성민아 우리는 불행하지 않단다. 우리는 너무 행복하단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 안에 예수님이 계시 단다.’ 여러 사람에게 불법을 전해봤지만 똑같은 처지였습니다. 그리고는 오히려 자신을 성한 사람인 자신을 매우 측은한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언젠가는 너도 우리가 믿은 예수님을 믿게 될 거야. 그리고 그 예수님이 네 마음속에 계시면 너도 우리처럼 행복해질 수 있어.’ 한동안 불법을 전하다가 그 사람들을 만나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자기 방에서 홀로 조용히 앉아서 생각을 하는데 처음 소록도에 들어올 때 이 사람들은 작고 비참한 사람들이었고, 자기는 큰 사람이라고 생각이 됐는데 이제는 반대로 그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나병 환자로 살아가는 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한없이 작고 초라한 존재가 되는 것을 느꼈답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게 존재의 울림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경계해야 될 것은 성공주의와 엘리트주의입니다. 교회 안에 깊이 침투해 온 이 성공주의와 엘리트주의 사상입니다. “사업을 했더니 열심히 헌금하고 열심히 했더니 하나님이 복을 많이 주셨더라. 그래서 사업체를 크게 불어나고 돈도 많이 벌게 되었더라. 기도 열심히 하고 다니엘처럼 살았더니 하나님이 자기를 계속 승진하게 하셔서 장, 차관, 대통령까지 올리시고 회사에서도 승승장구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승진해서 CEO가 되었되더라.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그 아이들이 예수님을 만났더니 그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되어서 미국 애들도 감히 쳐다보지 못하는 좋은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더라.” 이런 이야기들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초라해집니다. 그래서 ‘난 아무래도 열심히 기도를 안하나보다. 난 믿음이 없나보다.’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큰 사업을 일군 모든 사람들이 투철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서 높은 지위에 올린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이 높여주신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도 공부 잘하는 아이들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여기 앉아있는 사람들의 자녀는 회심하고 하나님의 말씀 사랑해도 그런 대학에 못 들어갑니다.
어느 날 내가 아는 목사님에게 문자가 띵하고 왔습니다. 무엇인가 봤더니 ‘김 목사님 너무 기쁜 소식이 있어서 전해드립니다.’ 무언가 봤더니 자기 딸이 프린스턴 대학의 박사과정에 공부를 하고 있는데 사위도 그 어려운 프린스턴의 박사과정에 합격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한번 만나면 한턱 쏘겠습니다.” 내가 아주 따뜻하게 문자를 해서 정말 축하한다고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기도해 준다고 자신의 자녀들이 프린스턴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묻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가장 비천한 자리에까지 내려갔습니다. 온 얼굴이 다 뒤틀어지고 그리고 고름이 국물처럼 흘러내립니다. 죽음이 매 순간 삼켜옵니다. 발의 지체들이 떨어져 나갑니다. 그리고 옷을 뒤집어쓰고 밭에서 일하고 있는 그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그 존재의 울림, 자기는 불교에 확고한 진리를 붙들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을 한 없이 작고 초라해지도록 만든 그 존재의 울림은 사업에 성공했거나 직장에서 높은 지위에 올랐거나 공부를 많이 한 것이 가져다주는 울림이 아니었습니다. 어디에서 왔을까요? 그 분들이 붙들고 있는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 그것을 통해서 갖게 된 존재의 울림입니다. 이게 하나님을 섬기는 삶입니다. 예수 믿고 성공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성공 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진리를 우리의 마음에 모시고 그 진리와 함께 동행 하면서 내가 어디에 살든지 진짜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막장에까지 내려가서도 거기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존재의 울림,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예수의 울림입니다. 그런데 진리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물질의 부족은 욕망을 줄이면 해결이 됩니다. 그러나 생명의 부족은 그 욕망을 줄인다고 해결이 안 됩니다. 진리로 말미암는 영적인 생명을 누려야겠다고 하는 욕망을 줄일수록 죄의 크기는 더 커집니다. 그래서 죄의 노예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진리가 없는데서 비롯되는 곤고함은 결코 금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단지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라 체험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손만 뻗으면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진리를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시지만 모든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도록 그렇게 자동적으로 역사하도록 내버려 두시지는 않습니다. 진리를 싫어하고 그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드릴을 뚫듯이 그렇게 진리를 쏟아 부어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짓밟아 버릴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예배는 무엇입니까? 경외심에 넘치는 예배,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우리의 거룩한 하나님의 전에(? 33:25) 있다는 의식이 흐릿해졌지만 이 예배당에 와서 아주 초라한 곳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내가 하나님의 면전에 서 있다는 이 거룩함의 의식을 느끼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경외의 표입니다. “여기는 거룩한 곳이니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들려왔던 주님의 음성을 이곳에서 듣는 곳입니다. 잠이나 자고 딴 생각이나 하고 여러분이 여기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비웃기나 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배당에 와서 얻고 돌아가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III. 송이꿀보다 말씀
오늘 시인은 송이 꿀보다 더 단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마지막 고백하고 있습니다. 꿀은 우리가 아는 채집된 꿀이고, 송이꿀은 채집하기 전 벌집에 가득 차 있는 형태의 꿀입니다. 그것을 채에 밭쳐서 열을 가하면 그것들이 농도가 풀어지면서 그것들이 흘러내려서 밀랍만 남기고 꿀이 채집되는 것입니다. 이 꿀은 그들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한 그 당시 에너지원이었습니다. 어떤 인류학자는 인간이 단맛을 발견하면서 인류사의 전환을 가져왔는데 그것은 철기 문화가 가져온 전환보다도 더 큰 것이었다고 미식학사적으로 선언을 합니다. 그 내용을 읽어보니까 옛날에 수렵 생활을 할 때에는 그냥 짐승을 잡아서 날고기를 먹고 그리고 열매나 따먹으면서 채소나 먹으면서 삽니다. 그러나 특정한 어떤 열매를 먹어 보니까 아주 달고 맛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단 성분을 추출하는 기술이 발달되었고, 그것을 가지고 그 단맛을 달지 않는 음식에 섞어서 그것을 조리해서 먹을 때에 이 음식을 먹는 즐거움이 아주 놀랍게 배가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 단 맛 때문에 사람이 섭취할 수 있는 음식의 폭이 훨씬 넓어진 것입니다. 예전에는 먹는 데에 관심이 없으니까 그냥 먹을 만큼만 먹으면 짐승들이 그러하듯이 탐욕을 안 부립니다. 왜냐하면 그 먹는 것 자체가 그렇게 즐거운 것이 아니니까 그런데 이 단맛을 알고 난 뒤부터 먹는 맛의 즐거움을 느끼게 되면서부터 단맛부터 신맛, 짠맛 그 다음에 쓴, 신, 잔, 단, 이런 맛들, 혹은 기름 맛까지 느끼게 되면서 이제 식재료에 대한 욕구가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더 좋은 식자재를 얻기 위해서 전쟁이 벌어졌다라고 하는 이론입니다. 사실 그 이론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것이 히브리어에 전쟁이라는 낱말이 ‘밀하만’데 이게 공교롭게도 떡이라는 말을 의미하는 ‘레헴’과 같은 어근입니다. 전쟁은 떡을 얻는 것과 양식을 얻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맛과 함께 에너지를 얻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한 50년 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서 우리들이 초등학교 다니던 때를 생각해 보면 설탕은 부자들의 식품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단맛을 너무 먹고 싶을 때 당원을 사거나 사카린을 싼 걸 사다가 그 단맛을 보충했습니다. 에너지나 영양가 이런 면에서는 설탕하고 비교가 안 됩니다. 여러분도 기억이 날 것입니다. 어렸을 때 추석이면 송편을 만듭니다. 그러면 궁급합니다. 젓가락으로 한번 찔러보는 것입니다. 씹고 ‘아이 콩이네’ 노리는 것은 뭐냐 하면 달달한 설탕이 들어간 깨로 빚은 속을 넣은 그 송편입니다. 딱 찌르면 ‘야 이거 맛있다’ 하고 먹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에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설탕을 섭취하는 문화는 아주 잘 사는 사람들의 문화입니다. 아이들은 그것을 섭취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먹는 것이 밥, 된장찌개, 김치, 이 이상 아닙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종종 생선을 먹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맛하고 관계가 없습니다. 할머니가 외출할 때에 내가 너무 가엾으면 편지를, 쪽지를 하나씩 두고 가십니다. ‘남준아, 앞집 가게에 너 오면 5원어치 외상 주라고 부탁해 놨다. 그 범위 안에서 까 먹거라.’ 그러면 그 편지를 들고 가서 ‘아줌마 우리 할머니가 5원어치 외상 먹으라고 그랬어요.’ ‘아 그래 나도 들었다.’ 5원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바가지 과자 튀긴 거 아니면 캔디였습니다. 캔디 몇 개 안됩니다. 캔디 하나 넣고 오면 그 오후에 골목을 걸어오는 시간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돈을 주고 달달한 사탕을 사서 먹을 수 있는 아이들이 없었습니다. 돈 생기면 그때 아이들의 모든 표어가 우리 사탕 사먹으러 가자 단 것을 그렇게 그리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후 한 4시쯤 되어서 아이들이 점심 먹은 지도 오래되고 저녁 시간은 아직 멀고 머리가 찌릿찌릿해질 때 딱지치고 하고 구슬치기하고 망까기 하면서 새카맣게 놀고 있을 때 엿 장수 아저씨가 들어옵니다. 그렇게 엿들 놓고 아이들을 일렬로 쫙 세우고 그리고 하도 손이 더러우니까 자기 엿판을 만지는 것을 못하게 해서 열중쉬어 하라고 해서 다 열중쉬어 하면 딱 깨뜨려서 조그맣게 만들어서 입에다가 넣어주는 것입니다. 카톨릭에서 성찬 하듯이 넣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게 단거라고는 며칠 동안 먹어보지 못한 아이들이 단 게 딱 들어가서 녹으면서 이 쫄깃쫄깃한 울릉도 호박엿이 쫙 퍼지면서 온 몸을 휘감으면 세상 모든 만물이 고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 가서 멀쩡한 개 밥그릇, 엄마가 냄비 때우는 사람이 오면 때워 놓으려고 찬장에 올려놓은 그 냄비, 그리고 할머니가 벗어 놓고 낮잠 주무시고 있는 고무신, 이런 것들을 다 끌어가지고 와서 그 엿을 바꿔 먹는 것입니다. 한번 맛본 그 단 맛이 그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책에서 똑같은 고백을 합니다. ‘내가 님의 단맛을 조금 보았는데 그것을 맛보고 나닌 나는 더욱 단맛에 기갈 하여 미치도록 당신을 찾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게 뭐냐 하면 오늘 와서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완전히 사울이 바울로 변한 것처럼 그렇게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우리 교회에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는 안 바라더라도 어거스틴이 고백한 것처럼 ‘오늘 내가 주님의 단맛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를 더욱 기갈하게 만들어서 미친 듯이 달콤한 당신을 그리워하게 만듭니다.’라고 하고 그 마음을 품고 일주일동안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다음 주일날 주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하면 주님 반드시 만나 주십니다. 이것은 바로 말씀에 대한 이 시인의 절절한 체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살면서 꿀을 한 숟가락 떠먹고 싶다는 식욕을 느낀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문맥에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미 너무나 단 음식을 먹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반대로 저 시골스럽고 그냥 깔끔하게 맵고 짜고 그런 음식을 먹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 3000년 전의 문맥으로 돌아가면 그러면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꿀로부터 경험한 그 단맛의 이 미각이 그를 얼마나 크게 압도했는가 하는 것을 상상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영혼의 기쁨이 없는 건조한 삶을 살아본 사람들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예배 시간에 그렇게 다리 꼬고, 졸고, 늦게 오고, 하나님의 예배를 능욕하는 것처럼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신천지 교인인 듯한 그런 태도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보면 괘씸하기도 하지만 돌아서면 너무 가엾습니다. 얼마나 사는 게 곤고하면 주님 앞에 나와서까지 저럴까? 그런데 그래도 야단을 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예배를 드려서 마지막에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제가 묻고 싶습니다. 나는 목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깔보는 것입니다. 차라리 주일을 어기고 실컷 놀다가 밤중에 교회에 와서 눈물로 성수주일 못한 것을 회개하는 사람에게 더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전에 이런 진리의 맛을 몰랐습니다. 그 진리가 없기 때문에 괴로운 것은 14살 3개월 된 아이가 논둑에서 통곡했던 것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진리는 무엇인지 몰라도 왜 이렇게 내 영혼이 곤고할까라는 것을 느낀 사람들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은 모릅니다. 그리고 진리를 끊임없이 그리워하지만 진짜 진리가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우리의 죽은 영혼이 거듭날 때 우리의 미각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하기 전 아담이 가졌던 이 진리의 맛을 알도록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나에게 묻습니다. ‘목사님은 그렇게 진리를 외치는데 항상 행복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그게 뭡니까? 문제는 진리가 아닙니다. 햇빛이 좋은 것입니다. 15분만 햇빛을 쪼이면 불면증이 사라진답니다. 안질이 있는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죽도록 괴로울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이 나쁜 것입니까? 입안이 헐은 사람들에게는 음식을 씹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제가 편도를 수술하고 음식을 삼킬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인지를 경험했습니다. 먹을 수가 없습니다. 의사가 단단히 일렀습니다. ‘당신 설교하지 마시오.’ 내가 의사 말을 안 듣고 그 다음 주에 설교를 했습니다. 수술한 게 터져버려서 길거리에서 한 컵의 피가 쏟아진 것입니다. 먹을 수가 없습니다. 물도 마실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진리가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진리에서 어긋났을 때 그 진리는 나에게 약이 되는데 약을 복용하거나 치료를 받을 때는 아픈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길게 보면 그런 끊임없는 진리에 의한 치료가 있었기 때문에 건강한 사람으로 살 수 있었으니 진리는 한 순간도 우리를 배반한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누가 예수를 믿고 천사처럼 산 사람이 있다고 자부할 수 있겠습니까? 전 그럴 수 없습니다.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해왔다』 앞에도 썼습니다. 일평생 도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추구하고 살았지만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아파하고 때로는 쓰러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나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의 지팡이로 다시 딛고 일어서서 쓰러진 그곳에서 다시 일어나 주님을 붙들며 살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배반한 것은 우리이지 진리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의 미각이 아주 뛰어나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썼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일은 영혼의 장날이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이 어떤 말씀으로 나의 영혼을 부요하게 하시고 내가 알지 못하는 하늘의 위대한 비밀들을 나에게 가르쳐 주어 그 진리의 말씀으로 나의 영혼을 기름지게 하실까 가슴이 들떴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의 기름진 양식을 더할 때에는 패잔병처럼 왔던 우리가 용사처럼 변하여 내게 주어진 삶의 상황을 끌어안고 살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미각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단순한 예배의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의 영혼이 그 진리의 말씀의 미각을 간직하고 그 진리의 말씀을 기뻐하지 않고 있는 영혼의 병든 상태를 우려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전심으로 진리의 말씀을 접하기만 하면 영혼의 놀라운 변화와 행복을 주십니다.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해왔다』를 썼습니다. 다음 주에 여러분에게 배포가 될 것입니다. 교회에서 장로님들이 당회를 해서 사실 크게 쓴 것입니다. 몇 천만 원의 돈으로 그 책을 여러분에게 공급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그 책을 읽고 와서 이야기합니다. 두 번 놀랐습니다. 첫째는 평신도가 어떻게 이렇게 두껍고 어려운 책을 읽을 수 있을까 놀랐고, 두 번째는 너무나 쉽게 잘 읽혀서 놀랐습니다. 우리 교회 협동 장로님 중 한 분이 그 책을 읽으시고 일주일동안 읽으시면서 은혜를 많이 받았답니다. 그리고 마음에 느낀 게 ‘이런 책을 신학생들이 모두 읽고 변화되면 다음 세대에는 진짜 좋은 목사들이 많이 일어나겠다’. 5월 12일 날 아마 이번이 10회쯤 되는데 총신 섬김의 날을 합니다. 그때는 항상 식사 한 끼와 책 한권, 나의 설교 한 편을 들려주는데 너무 그 책을 주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계산을 해도 돈이 안 나옵니다. 정가로 계산하면 8100만원입니다. 할인을 해도 4천만 원, 오천만원 돈 가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기를 했습니다. 그 책을 주기로 한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이 제가 1800명의 모든 학생들에게 이 책 한권씩을 선물하겠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내가 속으로 이랬습니다. 돈은 이렇게 쓰는 건데 바보 같은 부자들이 미친 듯이 돈을 벌 줄만 알지 멋있게 쓰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 깊이 감사하면서 확신했습니다. 그 책을 받는 1800명의 모든 학생들은 아니겠지만 그 중의 어떤 학생에게는 이 책이 인생을 바꿔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진리를 섭취하고 그 진리가 우리의 영혼에서 우리의 삶 갈피갈피 배어서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힘을 줍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의 영혼의 미각은 어떠한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우리가 그렇게 곤고했던 우리의 인생의 어두운 길에서 진리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분의 말씀에만 붙들려 살고 싶어 했던 그때의 말씀에 대한 갈망과 미각을 간직하고 있는지 나는 묻는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그 진리를 경험하고 새 인생을 살았고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몇 달 동안 목회자인 저를 매우 슬프게 만듭니다. 그렇게 몸부림치며 탐구하고 나는 단연코 말씀 드리는데 나는 학문을 위한 학문은 한 적이 없습니다. 아주 더 쉽게 이야기하면 나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공부한 적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해 공부했습니다. 나는 내 양심이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고 사업가처럼 살았더라면 여러분의 절반은 여기를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어떡하든지 진리를 전하고자 몸부림 쳤는데 그 열매들이 정말 진실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진리의 맛을 느끼고 그 진리를 섭취해서 우리의 영혼과 마음에 채우는 것을 제외하고 어디서 우리들이 승리하는 삶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의 미각은 지금 어떠한 상태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리움과 갈급함, 그리고 그 말씀을 먹을 때에 영혼 깊이 저려오는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까? 내 인생을 뒤흔들어 놓고 어두움과 흑암 속에 있는 것 같은 절망이 바뀌어서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되고 노래가 되는 기쁨이 여러분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와 다시 그 진리에 붙잡혀 사는 착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IV. 적용과 결론
우리의 삶의 본질적인 문제는 힘입니다. 그리고 인간다운 삶을 위한 이 위대한 힘은 하늘로부터 와서 우리의 마음속에 부어집니다. 진리를 통해서 오늘도 이 진리를 깨닫고 교회당 한 구석에서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모든 사람들, 세상에서는 희망이 끊어지고 사람에게는 버림받은 것 같아도 그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경험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 우리를 이 건조하고 메마른 삶에서 건져낼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있는 자원이 아닙니다. 그것도 어느 정도는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그것이 해결되어도 주님 앞에 있는 우리의 관계까지 고칠 수는 없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만들어 주고 당신을 향해 돌이키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은 다시 사랑해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 이 진리의 말씀에 은혜를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주님을 깊이 만나고 생애적인 행복을 누리는 예배를 드릴 수 있다면 설교를 100번만 하고 주님께 가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당신의 피를 발라 교회를 세우시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어린양의 피를 발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아들을 아낌없이 모두 주신 하나님인데 여러분에게 아까와 하시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인색해 하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여러분이 당신의 진리의 품으로 돌아와 행복하기를 바라시나니 회개하고 우리 주님께로 돌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말씀의 능력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