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안에 행하게 하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 1:4).
I. 본문해설
오늘 이 말씀은 가요라고 하는 믿음의 성도에게 요한 사도가 보낸 편지입니다. 극히 개인적인 서신으로 여겨지는 이 서신은 아마도 이들 가정을 문안하면서 그러면서 믿음의 형제들에 대한 안부를 묻는 가운데 오늘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참 부모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오늘 소개하고 있습니다.
II. 참부모의 기쁨
비록 가요와 그의 집안사람들이 요한의 혈육으로서의 자녀는 아니었지만 요한은 영적인 부모로서 자녀처럼 가요에게 편지하면서 그러면서 다른 형제들을 통해서 들은 가요와 그 집안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그의 믿음에 관해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영적인 부모로서의 참된 기쁨이 그 영적인 자녀들이 진리가운데서 행하는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을 때에 그보다 더 즐거운 것이 없다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한 가정의 부모로서 자녀들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참 부모인가 하는 것입니다.
A. 자녀사랑
만약에 우리가 참된 부모라면 자식을 향한 사랑이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고 묻지만 그러나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도 많이 있습니다. 자기만을 위하는 이욕에 사로 잡혀서 자식같은 것들은 안중에도 없는 부모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부모들은 참된 부모가 아닙니다. 자연적인 의미에서 참된 부모라면 본성의 빛으로라도 자녀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만을 위하는 이욕이 가득하게 될 때에 이 본성의 빛 마저도 눌러버리고 자녀들을 사랑하지 않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참된 부모는 자녀를 사랑합니다. 자녀들을 모든 희생과 그리고 자녀들을 위한 모든 헌신이 사랑이라는 동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추호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신은 손해를 보더라도 자녀들은 이익을 얻기 원하고 부끄러운 일이 있으면 자신이 수치를 당하더라도 자녀는 명예롭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 그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자녀를 사랑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자녀를 사랑할 때 올바른 질서를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그 사랑안에서 올바른 질서를 따라서 자녀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에 대한 잘못된 사랑이 자녀로부터 그릇된 기쁨을 얻기를 원하고 그래서 그 자녀를 불행하게 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이 못 이룬 꿈을 자녀의 마음이나 의지, 꿈과는 상관이 없이 자녀에게 투사해서 그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누려보려고 하는 것도 역시 자녀를 올바르게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도록 공부를 가르치고 특기를 익히고 남에게 없는 것들을 갖추게 하여서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자녀 사랑의 전부는 아닙니다. 오늘 사도는 영적인 자녀인 가요에 관해서 누군가 형제가 전해주는 모종의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의 기쁨이 가득차고 넘쳤습니다. 그것은 가요가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아니었고, 또 높은 벼슬에 올랐다거나 아니면 사업을 잘 해서 경쟁자들을 모두 물리쳤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B. 진리 안에서 행함
요한은 가요를 영적인 자녀처럼 생각하고 있었는데 들려오는 이야기가 가요 그 사람의 모든 삶은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삶이었습니다. 누구든지 가요의 인격과 삶을 보는 사람마다 진리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영향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소식이 들려 왔을 때 요한은 큰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 사도 안에 있던 거룩한 기쁨의 마음은 바로 주님이 우리를 바라보실 때에 주님이 갖고 계시던 그 마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늘도 우리의 영적인 부모로서 우리를 볼 때에 우리 모두 진리가운데서 행한다는 소식이 들릴 때, 진리이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거예요.
하나님이 아버지시라면 교회는 여러분의 어머니에요. 그러면 어머니인 교회가 진짜 애미다운 애미가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품은 그 소원을 그대로 품고 있어야 해요. 그래서 그 마음을 자기의 자녀들에게 전달해 줄 수 있어야 해요. 그래서 교회는 예수 믿고 부자가 되었다는 간증보다도, 예수 믿고 출세했다는 간증보다도, 공부 못하던 애들이 예수를 믿고 인류대학교에 갔다는 간증보다도 더 값진 간증은, 더 본질적인 간증은 예수를 믿고 진리를 따라 행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 사람을 보는 자 마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더라. 이것이 주님의 교회가 성도들을 돌보는 궁극적이고 유일한 목표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고 해서 성도들이 언제나 진리가운데서 살아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부패한 마음은 끊임없이 한때는 진리를 알았어도 그 진리의 참 맛을 잊어버리게 만들고, 또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그렇게 하는 마음을 갖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그 영혼들을 끊임없이 말씀으로 깨우치고 하나님의 은혜로서 새롭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말씀을 많이 깨달은 사람들은 언제나 교만하기가 쉽습니다. 모든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기 때문이에요.
프란시스 트레티니라고 하는 17세기의 아주 저명한 하나님을 정말 사랑했던 정말 이 세상에 몇 명 존재 하지 않았던 탁월한 목회자요, 신학자였던 개혁파 정통주의의 인물이 있습니다. 그분이 자기의 변증신학 강요라는 책속에서 이런 말씀을 남겼어요. 들어보세요. 성경에는 쉬운 구절과 어려운 구절이 있었습니다. 저 쉬운 구절속에서 성도들은 원기를 북돋우는 영향분을 섭취했고 그리고 저 어려운 구절속에서 겸손을 배웠습니다. 아멘 그래야지.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이 공과공부를 하면서 목사님이 쓴 책이 어렵다는 이야기가 들려올 때, 나는 그 위대한 프란시스 트레티니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위로를 얻어요. 내가 교인들을 겸손케 하고 있구나. 그래서 쉬운 말씀을 통해서 원기와 힘을 얻고, 그리고 모호하고 어려운 말씀을 통해서는 자기가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다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앞에 겸손해 지는 거예요. 아멘을 해야돼. 다시. 쉬운 말씀을 통해서는 원기와 힘을 얻고 어려운 말씀을 통해서는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요새 겸손하대매요? 구역예배 시간을 통해서 겸손하다며.
참 너무너무 아름다운 구절이에요. 그래서 그렇게 그러니까 자기도 알지 못하는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끊임없이 빛을 받을 때, 자신을 아는 지식이 확장되어 가고 그럴 때에 올바르게 행할 수 있는 삶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 이 진리 안에서 자녀들이 행하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얼마나 온 마음을 기울여서 성도들을 가르치고 돌보아야 할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자녀들이 태어나서 2kg, 3kg 밖에 안되는 갓난아이를 30kg만드는 것은 그것도 쉽지는 않지만,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에요. 좋은 분유 사다가 먹이고, 탈나지 않게 잘 돌보면서 이유식 시키고 그 다음에 영양가 있는 것들을 공급해 주면 그러면 됩니다. 요새 없어진 풍경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한 40년 전만해도 우량아 대회가 있었습니다. 기억나시죠? 분유 회사같은 데서 주최해서 갓난애기 백일쯤이나 돌쯤 되게 해서 누가 kg 많이 나가고 이렇게 하냐. 요즘 그런 아이들 그렇게 병원에 데리고 가면 아마 영아 비만이라고 그럴 거예요. 소아도 아니고 영아니까, 끔찍하게 생각할 거예요. 턱이 늘어지고 그 포동포동한 새끼돼지 같은 애들이 상을 받았다고. 지금은 그런 것 그렇게 대단하게 치지 않아요. 요즘은 TV에서 분유선전 나올 때, 젓가슴이 그렇게 뒤룩뒤룩한 포동돼지 같은 아이들이 절대 선전 안합니다. 그럼 부모들이 안사. 저 거 먹으면 다이어트가 안되겠구나. 부모들이 절대 안삽니다. 그것은 쉬워요. 좋은 분유 먹이고 그냥 실컷 재우고, 그렇게 운동안시키고 하면, 애가 순식간에 그렇게 되겠죠. 그러나 그 아이가 3살, 4살, 5살, 6살 나이를 먹으면서 진리 안에서 행하는 아이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 부모는 보통 자신의 온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는 안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육체안에는 살찌려는 인자가 있지만, 영혼 안에는 진리를 따라 살지 않으려는 인자가 있는 거예요. 유전 인자가 있는 거예요. 그것을 이기면서 진리 안에서 살게 하는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요. 모든 기독교 교육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입장의 차이는 있어도 공통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참된 부모가 아니면 참된 인간을 가정에서 길러낼 수가 없다 이거예요. 부모가 관심 갖지 않는 진리에 어떻게 그 자식들이 관심을 가지고 거기에 온 마음을 기울이게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일이 여러분들에게 일어났고 저에게 일어났다면 그것은 기적과 같은 하나님의 은혜라 이거예요. 그래서 교회가 이렇게 성도들을 모두 끌어안고 그 사람들 하나하나를 진리 안에 굳게 서는 자로 세우기 위해서 때로는 잘 가르치고 교훈하는 거예요. 그대로 살지 않았을 때에는 책망을 하고 꾸짖는 거예요. 잘못 살때에는 똑바로 살도록 붙들어 주고 바르게 하는 거예요. 어느 길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길인지를 주의 교훈과 교양으로 양육하는 그 일이 교회의 일인 것처럼 동일하게 그 교회의 일을 가정에서 부모는 자녀들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진리안에서 행한다고 했는데, 그 진리가 뭡니까. 성경은 그 진리를 그리스도라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 진리가 그리스도인가를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III. 진리이신 그리스도
그러니까 오늘 이 설교를 듣고 아, 그래서 자꾸 이 세상 철학과 사상에서는 진리가 마치 산속에 깊이 묻혀 있는 광석이나 보화와 같아서 객관적으로 있기 때문에 계속 인간이 탐구해야지만 꺼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우리 기독교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진리 그것은 그리스도야. 이렇게 말할 수 있구나 이런 정리된 생각을 가지라 이 얘기에요. 그러면 진리라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진리는 움직이지 않는 이치에요. 여기에는 자연적인 진리가 있고, 도덕적인 진리가 있어요. 자연적인 진리는 자연적인 사물속에 있는 일정한 상황안에서 변하지 않는 법칙이에요.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죠. 계절의 변화, 생물의 원리, 생명의 작용 이러한 것들은 놀라운 규칙성들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그러한 자연, 그러한 것들을 가리켜서 자연적인 진리라고 불러요. 그러나 그러한 자연적인 진리들을 모아서 그래서 이루어진 학문의 체계를 자연학이라고 부르는 거죠. 그러한 자연적인 이치들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사회속에서도 존재해요. 그것들을 모아서 우리들이 인문학이라고 이야기 해요.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진리는 그러한 진리를 이야기 하는 게 아니에요. 관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지만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진리는 도덕적인 진리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무엇 때문에 우리가 선하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착하게 살아야 한다면 그 근거는 무엇이고, 악하게 살아서는 안된다면 그 이유는 무엇때문인가. 그리고 무엇을 기준으로 우리의 삶에 대해서 이것은 악하다, 저것은 선하다라고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등등 이러한 많은 질문들에 대해서는 자연적인 진리 이러한 것들은 대답을 주지 못해요. 그래서 그것은 도덕적인 진리에요. 그것이 바로 결국은 궁극적으로 찾아가면 결국 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도와 덕이 합쳐져서 도덕이 되는 거예요. 도는 하늘에 의해서 정해진 길이에요. 기준이에요. 덕은 인간이 거기에 끊임없이 합치하려는 정신과 마음의 작용에 대한 평가에요. 그러니까 이 객관적 기준과 거기에 부합하려는 인간의 주관적인 덕이 합쳐져서 도덕이 되는 거예요. 그 도덕에서 나오는 그 도가 길이에요. 그분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 세상을 향한 그러한 도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그리스도라는 말로 간단하게 설명이 될 수 있을까. 이제 여러분들에게 제가 해설해 드리겠어요. 이렇게 되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 인간이 타락한 다음부터 인간이 눈 어두워 하나님을 찾아올 수 없기 때문에 인간에게 당신자신에 관해서 알려 주셔야 했어요. 그것이 계시에요. 그 계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향해 가지고 계신 의지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자기 표현이었어요. 그 계시들을 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워갔던 거예요. 제사와 선지자들의 예언과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와 일어났던 놀라운 기적과 때로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사람들에게 들려주셨던 음성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던 거예요.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어요. 다만 몰랐습니다라고 말하기에는 당치않을 정도로 분명했지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기에는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그러한 하나님의 자기 표현속에는 선과 악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는 했지만 그 뜻대로 살 수 있는 힘을 공급해주지는 않았어요. 이것이 율법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그래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지 더 분명하게 알고 당신을 따를 수 있도록 독특한 방식으로 당신에 관한 모든 것을 보이는 사람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싶으셨던 거예요. 그 하나님의 자기 표현을 모두 농축해서 가지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예요. 그러니까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성육신 안에서 그의 신성과 그의 인성과 이것이 결합되어서 행한 모든 일들과 말씀과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알려주신 보여주신 모든 모본 그 자체가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자신에게로 돌아오도록 알려 주시고자 했던 모든 진리의 총화요 엑기스였어요. 그러니까 그 엑기스로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이후에 인간들과 함께 살고 접촉하시고 그들을 가르치시고 돌보시는 것을 통해서 진리의 엑기스이신 그분이 진리가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어떤 형태로 드러나는지를 아주 다양한 빛깔로 보여주셨고,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는 하나님의 모든 뜻을 당신의 이 인성과 신성안에서 이 세계에 펼쳐가는 모든 역사 전개의 과정을 통해서 진리의 엑기스이신 그분 안에 있었던 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펼쳐지게 된 거죠. 그래서 펼쳐지는 구원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점점 더 또렷히 알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잘 들어 보세요.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에 육신의 몸을 본 사람들보다 우리가 예수님을 더 많이 알고 있는 거예요. 놀랍죠. 전혀 그렇게 생각해 본적 없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만져본 사람들이 더 많이 알았겠지. 만져봐야 사람의 살, 사람의 피일 뿐이야. 그런데 구원의 역사가 성령과 함께 전개되어 가면서 펼쳐지는 이 모든 선교의 역사, 구원의 역사, 말씀 해석의 역사, 신학적인 전개의 역사, 교회의 구령의 역사 이 모든 것들은 예수님 안에 있는 엑기스들이 쫙 풀려 나오는 거예요. 그거죠. 그러니까 우리 지금 이 시대에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앎은 우리 선조들을 능가하는 것이 되어야 해요.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에요. 왜냐 하면 모든 세상의 어떤 인간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리이신 그분을 알지 않고는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영생은 곧 나를 보내신 자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알면, 하나님의 그 엑기스를 알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진리이시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이 여러분들의 자녀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정말 기쁨이 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자녀가 볼 때에 정말 영적인 부모입니까. 우리 엄마는 내가 공부해서 100점 맞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이 가지고 계시다.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돈 많이 버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자녀들이 여러분을 그렇게 느껴야지만 여러분이 참된 부모라 이거예요. 그래서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인간의 모든 불행은 이 진리를 떠나는데 있어요. 이 진리를 떠날 때 그것은 곧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떠난 삶에 하나님은 안 계셔요. 하나님만이 만복의 근원이시니 진리를 떠나는 사람은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스스로 복으로부터 멀어진 불행의 길을 걷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우리의 자녀들이 그렇게 진리 안에서 행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진리를 만나야죠.
IV. 참된 회심에 이르게 하라
그래서 진리이신 그리스도,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것이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가장 절박한 문제라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이 자녀들이 주님을 만나는 때가 늦추워 지면 늦추어 질수록 이 진리 되는 그리스도를 만날 확률은 현저히 적어드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교회에서는 그래도 회심의 역사가 꽤 자주 일어나죠. 그런데 여러분 우리 교회에서 조차도 머리가 하얀 할머니, 할아버지가 회심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아요. 비율적으로. 그렇게 어려운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자녀들이 아주 어렸을 적에 그때에 자녀들이 주님을 깊이 만나고 회심하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해요.
교육학자들은 5살이 되기 전에 그 아이의 개별적 인성의 80%가 완성이 된대요. 난 할 수 있으면 그 나이 이전에 아이들이 회심하면 가장 좋겠다 생각을 해요. 그 다음에는 유치원 다닐때까지죠. 그 다음에 초등학교 들어가고 나면 그들이 만나고 접하는 사회 자체가 나이가 들어서 형성되는 사회일수록 인간안에 있는 본성적인 부패는 더 뚜렷한 특징을 드러내게 돼요. 이렇게 해서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자기들이 살고 있는 환경 그 자체가 회심하기에는 아주 적합하지 않은 환경으로 변해가는 거예요. 그래서 그 아이들이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만나야지만 진리안에서 행하며 복되게 살텐데, 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최초로 만나는 것이 회심이에요. 그 이 회심은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만나 자기의 죄를 깊이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심으로 의심하는 이 회개와 믿음이 회심인데, 이 회심은 중생의 결과에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 아이들의 영혼이 거듭나서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 졌을 때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이 그 아이 속에 불어 넣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보십시오. 회심한 아이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아이를 위한 부모의 그 아이를 위한 기도의 능력이 더 확실하게 잘 나타나는지 아니면 절대 하나님을 모르고 회심하지 않은채 살아가는 아이들을 위한 기도가 더 놀랍게 효과적인 능력을 나타내는지 한번 여러분들 수없이 시험해 보셨잖아요.
회심한 아이들 안에는 주님이 계셔요. 부모인 우리가 다 돌보지 못할 때에도 이 아이는 주님과 만나서 교통하면서 그러면서도 그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부모가 미처 그 아이를 다 돌보지 못할 때에도 성령께서는 그를 모든 진리가운데로 이끄셔서 데려 가셔요. 우리고 아무리 부모가 온 마음을 기울여 자녀를 돌본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렇게 다 돌보지 못합니다. 또 너무 돌보면 과보호가 아이의 정신을 망쳐요. 그렇잖아요. 덜 돌보면 소외감 때문에 망친대. 어디까지 돌보고 어디까지 나둬야 해. 물질을 너무 안주면 아이가 그것 때문이 찌그러지게 되고, 너무 많이 주면 그것 때문에 아이가 방탕하게 되고. 그러니까 환경이나 부모의 돌봄 가지고 자녀를 충분히 좋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교만이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말했던 것처럼 내가 너희를 주와 및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랬죠. 그런데 회심하지 못한 아이들 속에는 그러한 영적 작용이 없어요. 영적 작용이 있는 아이들은 부모가 열심히 기도하면 이 아이의 마음이 물결이 출렁 거리듯이 움직이는 거예요. 왜, 부모 마음에도 성령님이 계시고, 아이 마음에도 성령님이 계셔서 그 성령의 출렁거리는 역사속에서 전달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회심하는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거예요. 아이가 회심하기만 하면 저절로 모든 것이 된다, 그렇지 않아요. 않그렇다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증인이잖아요. 회심하고도 그렇게 많은 세월 동안에 방황하고 그리고 진리의 빛을 모르고 어둠가운데 행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불신자때도 안지었던 죄를 짓기까지 타락하는 사람들도 있었잖아요. 그러다 다시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게 되었잖아요. 그리고 회심하면 모든 것이 끝이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같은 생각이죠. 그렇지만 회심한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다루어져요. 여러분들은 결국은 완전히 버림받지 않고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왔잖아요. 그러면 아이들의 회심도 그래서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아이를 위해서 진리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께 접붙여지기 전에는 절대로 진리 안에서 행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 아이들의 회심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이에요. 여러분 중에 어떤 결혼하지 않은 지체들이나 아직 자신의 아이가 청소년에 해당되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몰라요. 또 자식들 다 신앙 안에서 떠난 부모들은 자유로워질지 몰라요. 그거 아니에요. 이것은 가정의 문제일 뿐 아니라 교회적인 문제에요. 교회적인 문제. 만약 여러분들에게 살이 있는데 어느 한부분이 피가 안통하고 서서히 마비가 되고 있거나 썩어가고 있다고 치면 여러분 당장 병원에 가서 치료하지 않겠어요? 그 아픈데가 손이라는 이유 때문에 발이 협조를 안하겠어요? 발이 협조를 안하겠느냐고.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그러한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그 아이들을 내 새끼 인 것처럼 품고 그리고 자신의 영혼인 것처럼 끌어안고 그렇게 기도를 해야 해요. 그리고 그 모든 일에 있어서 육신의 부모들은 이중으로 강한 의무감을 느껴야 해요. 여러분 언젠가 하나님이 여러분 주님앞에 설때에 여러분 자녀의 회심을 위해서 노력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반드시 책임을 물으실 거예요. 반드시 책임을 물으실 거예요. 아무리 청소년을 위한 회심집회를 하고, 자기의 자녀를 위해 울면서 기도를 해도 자기 뱃속으로 나은 그 부모는 기도모임도 한번 나오지 않고 그 아이를 위해 울기는커녕 그 아이의 영혼이 망가져서 얼마나 고통하고 있는지를 생각도 안해. 그거 부모 아니에요. 그리고 영혼에 대해서 그렇게 대할 수 밖에 없는 그 영혼은 회심안한 영혼일지도 몰라요.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한없이 부패해서 처음 회심 집회 할때는 가장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왜냐 하면 진짜 통곡하며 울부짖었어요. 부모들이, 왜, 첫 번이니까 그러한 문제들을 가지고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한적이 없거든. 오다가다 한번씩 맞아 본적은 있지만 폭격을 맞아 본적은 없거든. 저녁때 오면 늘 한구석에서 부모들이 모여서 느끼면서 자기 아이들좀 살려달라고 빌었어요. 그리고나서 5년정도 지났잖아요. 이제는 교회의 프로그램 중 하나로 굴러 돌아가는 그러한 느낌이에요. 어떻게 할까요? 5년에 한번씩 할까요? 그 동안에 아이들은 어떻게 할까요?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부모들이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육신으로 내 아이가 아니더라도 교회에 지체들이라는 의식을 품고 그 아이들의 회심을 나의 회심인것처럼 간절히 기도하고, 오다가다 교회에서 복도에서 마당에서 만나면 활짝 웃고 따뜻하게 대해줘요.
그래서 우리 한번 물어봅시다. 내가 시범을 보였잖아요. 어린이 회심집회할 그때쯤에 만날 때마다 6개월동안 안녕하세요, 목사님. 어 그래 너 몇학년이니? 1학년 아무개에요. 너는 회심했니? 물어보는 거예요. 애들 뭐 자신만만하게 그럼요. 목사님 제가 열린 교회 나온지가 얼만데요. 그런 애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애들은 잘 모르겠어요. 그런애들. 또 어떤 아이들은 아니요. 아직 지금 할라고 막 그래요. 그러면 기도해 주는 거예요. 애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너 회심할 수 있도록 목사님이 기도해줄게. 기도할까. 네. 하나님, 천하보다 사랑하는 이 영혼 주님 만나고 이번에 회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어떤 아이는 막 뛰어 와서 목사님, 목사님. 왜, 저 어저께 회심했어요. 지난주에 회심했어요. 그 아이들 만나면서 늘 이렇게 강아지가 닭 보듯이 하지 말고, 이러면서 너 참 이쁘구나. 너 몇학년이니. 중학교 2학년이요. 그래. 정말 예쁘구나. 너는 회심했니? 아니요. 그럼 집사님이 너 회심하도록 기도해줄게. 아침마다 기도해줄게. 이름이 뭐지? 얼마나 이뻐요? 회심하지 않았어도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나를 사랑하는 구나.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하기 위해서 나의 회심을 위해서 기도해주는 구나. 그렇게 해요. 청소년 사역의 비결이 뭐냐 그러니까 우리 교회 전도사님이 그러대요. 입이 열려야 마음도 열린다. 먹을 것을 줘야지만 마음이 열린대요. 열린 공간에서 요새 새로나온 아이스크림 있잖아. 그거라도 하나 사주면서 얘야, 이것 먹고 회심하거라. 회심하거라. 그렇게 아이들을 따뜻하게 대해주면서 회심, 그 집회 자체를 공포분위기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 복음의 참된 뜻을 가르쳐 주어서 아이들이 정말 주님을 만나고 변화될 수 있도록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