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 시작하는 한 해
2022년
주일오전설교
설교기간 | 2022년 01월 09일 – 02월 06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2년 03월 03일
목 차
1. 말씀과 함께 시작하라(수 1:1-6) 2022.01.9. 주일오전 5
2. 강하고 담대하라(수 1:7-8) 2022.01.16. 주일오전 15
3. 두려워하지 말라(수 1:9) 2022.01.23. 주일오전 24
4. 약속을 이루는 생활(수 1:16-18) 2022.02.06. 주일오전 39
<설교 프레임>
말씀과 함께 시작하는 한 해1 2022. 1. 9 주일 낮 예배
< 말씀과 함께 시작하라 >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 강하고 담대하라 …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수 1:1-6)
I. 본문해설
II. 말씀과 함께 시작하라
A. 말씀하심
1.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다.
2. 약속의 땅으로 가라.
B. 약속하심
1. “약속의 땅을 줄 것이다.”
2. “떠나지 아니 할 것이다.”
C. 담대하라
III. 적용과 결론
말씀과 함께 시작하는 한 해2 2022. 1. 16 주일낮예배
< 강하고 담대하라 >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7-8)
I. 본문해설
모세를 뒤이어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에게 첫 번째 주신 말씀이다. 기적을 일으키는 카리스마(charisma)보다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신다.
말씀으로 하나님의 약속(約束)을 상기시킨 여호수아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마음으로 가나안을 정복해야 할지를 가르친다.
II. 강하고 담대하라
그것은 이스라엘이 “강하고 극히 담대해지는” 것이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하고 소심(小心)해질 위기에 놓였음을 말해준다.
전설적인 지도자 모세는 죽었다. 더 이상 그런 기적을 일으키는 큰 지도자는 없을 것이다.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들 앞에는 이제껏 광야에서 겪은 일과는 비교되지 않는 엄청난 과업(課業)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더 큰 기적이 필요했다. 가나안을 정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적의 능력을 주시는 대신, “강하고 극히 담대하라”고 명령하셨다. 강(强)함은 외적인 기상이고 담대(膽大)함은 내적인 마음의 상태다. 그러면 어떻게 강하고 담대할 수 있을 것인가?
A. 말씀을 묵상하라
가나안 정복의 대업을 앞두고 여호수아에게 상기시키신 것은 말씀을 묵상(默想)하는 것이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8)
묵상(默想)이란 “진리에 정신을 모으고 잠잠히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適用)시키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책을 읽고 설교를 듣고 성경(聖經)을 읽을지라도 그것은 비가 쏟아지는 것과 같다. 자기 것으로 받지 아니하면 기갈을 면할 수 없다.
*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충고 “책을 많이 읽지 말라. 바보가 된다”
묵상의 대상은 율법책이었다. 모세가 명령한 법도였다. 그 “율법을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고 밤이나 낮이나 묵상하라”는 것이었다.
묵상은 머리의 지식이 가슴으로 내려오게 하는 것이다. 가슴은 모든 행동의 공장들이다. 그러므로 묵상(默想)을 통해 마음을 말씀 속에 스며들게 하라. 이때 또한 말씀은 마음에 스며들어 우리를 다스리게 된다.
* 성경 읽기, 설교듣기와 묵상
B. 말씀에 순종하라
말씀을 묵상하면 그것은 우리 마음에 스며들어 순종(順從)할 힘을 준다.
강하고 담대(膽大)한 마음은 그렇게 한다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關係)를 붙들어야 한다. 그럴 수 있는 힘은 오직 마음이 하나님 말씀에 붙잡힘으로써만 가능하다.
신자 안에 있는 은혜(恩惠)가 좋아하는 것은 죄죽임과 순종하는 생활이다.
의지의 불순종은 마음을 바르지 않은 정서(情緖)에 불붙게 하고 맑은 지성(知性)에 구름을 드리운다.
마음을 드리는 순종의 실천은 양심을 평정(平靜)하게 하고 정서를 안온(安穩)하게 하고 생각을 가지런하게 한다.
삶이 혼란스러운가? 먼저 순종(順從)하라. 자신을 신뢰하지 말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라.
삶의 방향(方向)을 정하라. 자신의 뜻을 따라 살기 원하는가? 모든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대로 살기를 결심하라.
주시는 말씀을 따라 계명을 지켜 순종함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라.
III. 적용과 결론
삶의 엉클어진 매듭은 순종(順從)에서 풀리기 시작한다. 선한 뜻을 세우고 그 뜻을 지탱할 수 있기를 구하라.
순종할수록 기도하게 되지만 불순종할수록 기도할 수 없게 된다. 먼저 순종하라. 그것이 시작이다.
말씀과 함께 시작하는 한 해3 2022. 1. 23 주일 낮 예배
< 두려워하지 말라 >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I. 본문해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곧 가나안 정복을 위한 전쟁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모험이었다.
이때 여호수아에게 주신 첫 번째 말씀이 있었다.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그 비결로 두 가지를 제시하신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간곡히 부탁하신다.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II.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수 1:9). 이 말씀은 앞에서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치우치지 말라”고 명하신 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수 1:7).
하나님이 명하실 때는 거기에 숨겨진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 약속을 이루시겠다고 하셨으니 그것을 믿으면 강하고 담대할 수 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보태어 당부하듯이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함께하느니라”(수 1:9)
A. 두려워하지 말라
가나안 정복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전쟁을 해야 했다. 앞으로 눈앞에 전개될 상황은 전혀 새로운 것들일 것이다. 두 가지를 명하신다.
a.강하고 담대하라 b.두렵고 놀라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두렵고 놀랄 만한 상황을 자주 만나게 될 것을 암시해준다.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얼마나 가난해졌을까?
가나안 족속은 발달한 철기 문명으로 강한 군사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에 비해 이스라엘은 초라했다.
문명이 발달한 도시를 거의 보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큰 성 여리고를 보았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큰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큰 두려움을 하나씩 깨뜨려 주심으로써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셨다. 더욱 강하고 담대해지게 하셨다.
우리는 운명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인생을 개척해 나감에 있어서 가장 큰 적이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밖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있다. 그것은 두려움이다.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희망은 사라지고 절망에 빠지게 된다. 두려움은 누구나 느낀다. 때로는 좋은 경고의 감정이다. 그러나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이야 말로 가장 두려운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은 현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데서 온 것이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수 1:9)
두려움은 희망과 유사하다. 둘은 모두 현실 상황을 해석하는 힘이다.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모든 상황을 공포의 감정으로 해석하게 된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일이 실제로 두려운 일일 경우는 매우 드물다. 지레 짐작하고 무서워하는 것이다.
* 첫 번째 가나안 정탐꾼들의 두 종류의 보고
우리가 만약 작은 두려움에 굴복한다면, 그 속에는 더 큰 두려움이 찾아온다. 그러나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품고 살면 더 큰 희망이 생겨난다.
새로운 삶을 위해서는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 도전과 모험 없이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믿음으로 사는 길 이외에 무슨 다른 일이 있겠는가?
B. 함께하느니라
가나안 정복은 커다란 모험과도 같았다. 이 큰일을 앞두고도 이스라엘이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에 대해 말씀하신다.
“…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하느니라 하시니라” (수 1:9하)
“하나님이 함께하심”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복이다. 이것은 당신 자신을 주시는 것과 같다. 더 이상의 복이 없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그가 구원해 내신다”는 뜻이다. 이 책이 고대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눈의 아들 예수”로 번역되었다.
더 먼 훗날에 와서, 이 이름은 메시아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며 주어질 것이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이는 예수 오시기 약 700년 전에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되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인류가 죄 때문에 잃어버린 복이 있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임마누엘의 복이었다.
그 후로 인류는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것이 모든 인생의 비참과 고통의 궁극적 원인이었다.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은 다시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무엇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셨나?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왜 십자가에 못 박히셨나?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함이었다.
우리 때문에 생긴 죄의 담을 허무시고 다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후에는 약속대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 주셨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함께하게 하셨다. 성령으로 생명의 능력을 주셔서 모든 역경을 이기며 살게 하셨다.
우리는 얼마나 연약한가? 담대하지 못하고 소심하며 겁이 많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세상에서 승리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한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을 보시고 우리와 함께해 주신다.
우리는 약하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며 강한 삶을 살 수 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야말로 세상에서 누리는 최고의 축복이 아니겠는가?
III. 적용과 결론
예수께서 모든 대적들을 이기시고 승리하셨다. 연약한 육신의 몸으로 세상에서 고난 받으셨으나 영혼에는 하나님이 함께하셨기에 승리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승리를 주신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모든 것을 주고도 살 만한 가치가 있지 아니한가?
말씀과 함께 시작하는 한 해4(끝) 2022. 2. 6 주일 낮 예배
< 약속을 이루는 생활 >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우리는 범사에 모세에게 순종한 것 같이 당신에게 순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당신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강하고 담대하소서”(수 1:16-18)
I. 본문해설
하나님께로부터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확실한 약속(約束)을 받은 여호수아는 구체적인 정복계획을 세웠다.
그는 먼저 백성의 관리들에게 가나안 정복 전쟁을 위한 전투에 필요한 식량(食糧)을 준비하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이미 가나안 이쪽 땅을 분깃으로 받은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가나안 정복을 위한 전투에 병사들이 참전(參戰)하도록 지시하였다.
우리도 한 해를 잘 살아내기 위한 결심(決心)을 굳게 해야 한다. 또한 실제적인 준비를 구체적으로 철저히 해야 한다. 그래야 한 해를 정복하고 승리할 수 있지 않겠는가?
II. 약속을 이루는 생활
하나님의 약속은 주어졌다.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 땅을 정복하기 위해 스스로 싸워야 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경험할 것이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세상과 마귀와 죄와 싸워서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약속(約束)도 주셨다. 그러나 스스로 분투하고 싸우는 자만이 그 약속의 성취(成就)를 볼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는 그 약속을 이루는 생활(生活)을 해야 한다. 그것 없는 믿음은 결코 우리의 삶을 승리로 이끌지 못한다.
가나안 정복을 이끄는 새로운 인도자 여호수아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한 마음이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지도자에 대한 순종(順從)이 아니었다. 하나님 앞에서 보여준 그들의 순수한 믿음이었다.
A. 사명감
첫째로, 그들은 사명감으로 가득 찼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으며 가나안 정복을 사명(使命)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수 1:16)
지도자 여호수아가 그들을 어디로 보내든지 가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명령을 따라 모두 행할 것을 천명했다.
애굽에서 탈출한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이렇게 한 마음이 된 적이 언제였던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이스라엘의 사명감(使命感)이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를 의지하며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굳게 신뢰하는 것이 아닌가?
또한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삶을 거는 것이다.
올바른 믿음(faith)은 반드시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한다. 그 뜻을 받아들여 자신의 삶의 목표로 삼는 것이 사명감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감동(感動)을 받는 것은 일시적인 믿음으로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감동을 간직하며 거기에 자신의 삶을 거는 것은 지속적인 은혜생활로써만 가능하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인간의 행복(幸福)은 손에 붙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어느 지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지점에 도달하면 또 다른 것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과정(過程)에 있다. 순간의 인생을 살아도 거기서 영원한 의미를 느끼며 살아가는 데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사는 것이 행복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들이고 군사들이다. 우리의 보람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사람은 세 번을 태어나야 한다. 육체로 태어나고, 영혼으로 거듭 태어나고, 사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우리가 비록 연약하지만,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어야 하는 고귀한 이유와 목적(目的)을 발견해야 한다.
신앙으로 그것을 깨달아 사명(使命)으로 여겨야 한다.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믿음생활이다.
아무리 바쁘고 치열하게 살아보라.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使命)과 상관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단지 세상과 육신을 위한 노예살이일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탈출했으나 사명감 없이 살아갈 때는 광야에서 노예살이보다 낫지도 않은 삶을 살았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삶은 놀이가 아니다. 사명을 따라 사는 삶은 소꿉장난이나 오락이 아니다. 그것은 훨씬 진지한 것이다.
믿음으로 그것을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분투하는 정신(精神)과 생활(生活)이 요구된다.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수 1:16하) 그들의 사명은 개인적인 동시에 공동체적인 것이었다.
이것을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꺼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목숨을 건 전쟁이었다. 이런 사명감을 되찾으라.
B. 순종함
둘째로, 그들은 순종(順從)하기로 결심했다. 가나안 정복이라는 사명을 받아들이면서 그들은 순종하기로 결단했다.
“우리는 범사에 모세에게 순종한 것 같이 당신에게 순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수 1:17)
전설적인 지도자 모세에 비하면 여호수아는 작은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정복이라는 사명을 이룰 것을 다짐했다.
그것은 단지 한 사람 여호수아에 대한 순종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하시는 하나님(God)께 대한 전폭적인 순종이었다.
그들은 오직 한 가지 소원(所願)을 갈망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하시던 것 같이 여호수아와 함께해 주시는 것이었다(수 1:17).
여호수아와 더불어 온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함께하기를 원했다. 가나안 정복의 약속이 이뤄지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이스라엘의 용기와 자신감만으로 이뤄질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함께해 주셔야만 이룰 수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모든 소원은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광야에서 자라나면서 모든 광경을 보았다. 자기들의 조상들이 하나님께 불순종(不順從)할 때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보았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믿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뜨거운 사명감으로 불탔다. 충만한 믿음과 순수한 사랑으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순종(順從)하기를 원했다.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를 원했다.
그들의 조상(祖上)들은 단지 약속을 받았으나 이 사람들은 이제 그 약속의 열매를 받게 되었다.
하나님은 모세와 비교되지 않는, 연약한 지도자 여호수아를 통해서 모세가 이루지 못한 일을 계승하게 하셨다.
이 일이 단지 지도자의 능력(能力)이 아니라 이스라엘 온 백성들의 믿음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을 보여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의 맹세는 개인적인 동시에 공동체적인 것이었다.
개인의 순종도 기뻐하시지만,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한 마음이 되어 바치는 공동체적 순종의 결단을 기뻐하신다.
순종하는 한 해가 되자.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하자.
III. 적용과 결론
이제 새롭게 시작된 한 해를 어떻게 살 것인가? 인생이라는 광야(曠野)에서 불순종으로 방황하며 고생할 것인가?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것인가?
노예로 살고 방황하며 고생하는 대신,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1. 말씀과 함께 시작하라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수 1:1-6)
I. 본문해설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가까운 광야 생활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가나안 정복을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불세출의 지도자로 이스라엘을 애굽의 치하에서 해방시키고, 광야의 길에서 인도해오던 모세는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모압 평지에서 느보산에 올라갔고, 그 꼭대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정복하게 될 땅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모세는 장사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120세였지만 그의 눈은 흐리지 아니하였고, 그 기력은 쇠하지 않았습니다. 즉, 그는 기력이 진하여 조상에게 돌아간 것이 아니라 아주 강한 기력과 총기를 가진 그 때에 하나님이 돌연히 데려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모세의 시대는 끝나고 여호수아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여호수아를 들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작정이었습니다. 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수아는 얼마나 작은 지도자처럼 보였겠습니까? 가는 곳마다 기적을 행하고,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하기까지 하던 사람, 시내산에서 율법을 수여받았던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 비하면 일생 그의 수종자 노릇이나 하던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얼마나 연약한 지도자로 보였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사명을 거기까지 자리매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부르시고 여호수아에 의해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하셨습니다. 자, 그러면 연약해 보이기 짝이 없는 지도자 여호수아와 함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새 땅으로 인도하셨겠습니까?
II. 말씀과 함께 시작하라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시작하라> 이것이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는 설교제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여호수아가 연약해 보였을 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 자신은 생각하기에 어땠겠습니까? 그렇게 큰 산처럼 느껴지던 모세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마 자기를 에워싸고 보호하고 있던 성벽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생각하기에 너무나 어리고 부족한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더욱이 이제 드디어 광야 40년의 마지막 목적인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에 지도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여호수아가 한순간이라도, '나는 모든 것이 준비된 지도자다.'라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그는 한없이 자신의 연약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기 위해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아야 할지 자신도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놀라운 일을 이루셨습니다.
A. 말씀하심
그것이 바로 '말씀하심'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1절은 말합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수 1:1) 이 구절로 막을 내린 모세의 시대를 뒤로 하고, 새로운 여호수아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자, 이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모세의 시대와 여호수아의 시대를 갈라놓는 분기점이 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이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모세는 하나님이 기적을 보여 주시고, 백성들이 믿고, 그러면 모세가 말씀을 들려주어, 말씀대로 순종하게 하는 구도를 가지고 인도하셨습니다. 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살았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나타났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만났는데 너희들을 데리고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 하더라고 할 때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 말씀이 기다리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던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뜬금없는 소리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돌이키고, 또 한 편으로는 애굽 사람의 마음을 녹여 놓기 위해서는 기적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모세에게 능력을 주셔서, 모세가 간구하면 기적이 일어나게 하였습니다. 그 기적을 보고 크게 놀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운 마음과 함께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자기들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며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가르쳐 순종하게 하는 구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여호수아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하나님은 모세의 시대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기 시작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선포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으로 믿으면 하나님이 기적을 보여 주시는 구도로 전환이 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사건과 맞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기 전 이스라엘 백성은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애굽에서 탈출해서 모세의 인도를 받으며 홍해 앞까지 왔습니다. 앞으로 가자니 바다가 가로막고 있고, 뒤로 돌아서자니 애굽의 병거들이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갈 수도 없고 되돌아 설 수도 없는 상황에 놓여 있을 때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밤새도록 동풍이 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새벽이 되자 그 물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양쪽의 물이 벽처럼 서고, 그 사이로 마른 길이 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 기적을 보고서야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자기들을 과연 일도 하신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께 불평을 쏟아 놓았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마른 땅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모두 건너고 애굽의 군사들이 수장되었을 때, 그 바다 건너편에 이르러 성가대의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다짐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로 역사가 바뀌고 이제 여호수아 시대의 막이 오르면서 전혀 다른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이 먼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법궤를 메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 요단강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무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때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법궤를 메고 약속에 의지하여 발을 요단강에 내디뎠을 때, 요단강이 마르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먼저 말씀이 주어지고,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고, 이후에 기적을 보이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경륜이 변경된 것입니다.
자, 그러면 도대체 이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은 기적을 보았지만, 여전히 그 믿음은 유아기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광야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온갖 시험을 당하고, 시련을 겪고, 때로는 하나님의 징계가 있는 가르침을 먹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은 무럭무럭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쯤 와서는 하나님 말씀의 진실성을 믿는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불신앙하는 많은 사람은 죽었지만, 새로 태어나는 세대는 하나님의 말씀에 훈련을 받으면서 그들은 믿음에 믿음을 더하여 갔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는 기적에 의해 겨우 믿음이 생기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기적을 보는 백성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일 먼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믿게 하신 후에 기적을 보게끔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유아기의 신앙입니까? 아니면 청년기의 신앙입니까? 작년까지 여러분이 유아기 신앙을 가지고 살았다면, 그래서 하나님이 뭔가 큰일을 보여주셔야만 겨우 겨우 믿을 수 있는 믿음이었다면, 이제 올해는 청년기 같은 믿음으로 사십시오.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을 것이라는 신앙, 말씀에 내 자신을 맡기면 그 약속이 반드시 성취되고야 말리라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한 해를 시작하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한 해를 시작하지 않는다면 올해는 작년과 별로 달라질 것이 없을 것입니다. 작년의 부끄러움이 올해도 계속될 것이고, 그 수치를 굴려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을 시작했던 것처럼, 올 한 해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시작하며 2022년을 정복하려고 한다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당신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고, 놀라운 일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오늘 마음에 깊이 새기십시오. 이제 한 해를 새롭게 맞이하며, '내가 올 한 해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시작하리라.' '주님의 말씀과 함께 동행하면서 그 말씀에 감화를 받고, 그 말씀에 사로잡혀서 올 한 해 인생을 하나님을 향하여 청년 같은 믿음으로 살리라.' 다짐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하나님 말씀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예배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큰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감동으로 한 주 동안 성경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여러분의 마음을 꼭꼭 붙들어 매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때 여러분은 꿈꾸지 못했던 놀라운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제껏 알지 못했던 새로운 인생의 지경을 여러분에게 보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속에 갖고 있던 꿈들은 현실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에 가지고 있던 무거운 짐들은 내려놓아질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시작하는 믿음에서 시작되는 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올해가 다른 해가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시작하십시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 말씀의 은혜 없이는 내가 올 한 해를 다르게 살 수 없습니다.' '예배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주시옵소서.' 내게 불덩어리를 주시고, 그 불을 지피며, 한 주 동안을 하나님의 성경과 함께 살고, 말씀의 감동으로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 달라고 비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올 한 해 말씀과 함께 시작하셔서 올 한 해를 정복하는 여러분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약속하심
두 번째는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 너희에게 주었노니"(수 1:3) 완료형입니다.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수 1:4)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오늘 여호수아에게 약속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이 주신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자손들에게 주신 약속이고, 또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미 주신 약속입니다. 그러니 엄밀하게 말하면 이것은 약속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신 약속을 하나님이 상기시키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도 끊임없이 그 언약을 배반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약속을 한 번도 어기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결국 성취하도록 이스라엘 백성을 여기까지 데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상기시키는 약속은 두 가지였습니다. "약속의 땅을 너희에게 반드시 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결코 너희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다."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이미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주신 그 약속, 모세에게 하셨던 그 약속을, 오늘 이 여호수아에게 들려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너는 이 약속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하여, 이스라엘의 마음에 내가 맺은 약속을 상기하게 하라." 무엇 때문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의 약속에 자기의 마음을 붙들어 매게 하시기 위해서 약속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위대한 기적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이 탈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뜨거운 마음으로 광야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광야에서 유리방황하면서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 이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광야에서 죽어갔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성경은 그들이 광야에서 약속의 땅을 밟지 못하고 죽은 이유를 그들이 불순종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왜 불순종했습니까? 왜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우(愚)를 저질렀습니까?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자신의 마음속에 살아있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목마를 때에는 목마르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 약속의 땅을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굶주릴 때는 굶주림 때문에, 고기가 먹고 싶을 때는 고개가 먹고 싶은 탐욕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할 수 없었습니다. 용감하게 애굽을 탈출했지만,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갈 용기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광야에서 유리하는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불순종으로 모두 죽었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이 구원받은 자녀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여러분에게 주님이 주신 약속이 있습니다. 그 약속이 구원받을 때 여러분의 마음을 뛰게 만들었고, 은혜 받았을 때 여러분의 가슴이 두근거리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을 세상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과 땅의 복을 여러분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이 임마누엘로 동행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모든 약속들이 여러분의 마음을 뛰게 하고 있습니까? 지난 한 해 잘 살았다면, 여러분이 그대로 그렇게 살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러나 잘못 살았다면, 그 원인을 한번 물어보십시오. '도대체 내 인생이 왜 이런가?' 질문할 수 있는 마음이야말로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는 용기로 연결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광야와 같은 길을 걸으면서 원망만 했다면, 여러분이 올해는 다른 삶을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을 상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약속을 상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광야에서 모두 죽어갔습니다. 하나님 원망하고 불평하며 지나갔습니다. 그들도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반석에서 난 물을 마셨습니다. 그들도 애굽에서 일어난 열 가지의 끔찍한 재앙을 보고 하나님의 위대한 권능이 모든 애굽의 신들을 위에 뛰어나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똑바로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마음의 약속을 상기 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멸망하고 죽어갔던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고 새 시대를 여는 여호수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도 한때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처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갈 때 열두 지파에서 파송된 정탐꾼 중 한 사람이 바로 여호수아였습니다. 모두 정탐하러 들어갔습니다. 과연 그 땅은 너무 놀라웠습니다. 너무 기름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고, 광야와 비교할 수 없고, 애굽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름지고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포도송이 하나를 꾈 채에 사람들이 메고 나오는 것을 보지 않았겠습니까? 지금도 이스라엘의 에스골 골짜기에 가면 한 송이에 6kg짜리 이상의 포도송이가 자라고 있답니다. 그러니 그 때는 얼마나 더 컸겠습니까? 그런 놀라운 기적을 본 것은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동시에 절망할 만한 사건도 만났습니다. 그것은 자신들과 신체적인 조건에서 비교되지 않는 엄청나게 큰 아낙 자손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그들은 메뚜기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결국 돌아왔을 때 열 사람의 정탐꾼들이 그 땅이 그렇게 좋은 땅이 아니라고 악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갈렙, 이 두 사람은 진실하게 보고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열 명의 정탐꾼들은 거짓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이 그 마음속에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그 땅은 정말 기름진 땅이다.' '거기에 우리와 비교도 안 되는 강한 백성들이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떠나신 백성들이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니,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러면서 용기 있게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열 사람의 마음속에는 기적도 보았고, 능력도 만났지만, 약속의 말씀이 살아 있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머리에 있는 것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타오르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생의 엔진은 가슴에 있습니다. 가슴이 어떤 엔진으로 불붙느냐에 따라서 삶의 동력이 하나님을 향하기도 하고, 세상을 향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한 해를 시작하면서, 동시에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 약속의 말씀에 묶어 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약속이 여러분의 마음을 뛰게 만들고, 여러분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으로 하여금 인생의 살맛이 나게 만드는 살아있는 말씀의 체험이 여러분 속에 생생하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불순종했던 이스라엘 백성들, 광야에서 눈을 부릅뜨고 죽어 갔던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다른 삶을 살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젊었을 때 읽었던 니체를 다시 탐독하고 있습니다. 이제야 니체가 뭘 말하려고 했는지가 또렷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몇 권의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부터 시작해서 한 두 권의 책만 읽어보아도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신론자로 사는 삶이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준수하여야 할 규칙도 너무나 많습니다. 소위 니체가 얘기했던 위버멘쉬(Übermensch), 초인(超人) 혹은 극복인(克服人)이라고 불리는 자유인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보통 열렬하게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날 방탕하게 사는 무신론자들은 사이비 무신론자입니다. 진짜 무신론자는 니체 같은 사람이 무신론자입니다. 철저하게 자기 규칙을 만들어 놓고, 그 규칙에 맞춰서 끊임없이 병적인 자아(自我)와 건강한 자아(自我)가 투쟁하듯이 싸우면서, 건강한 자아(自我)가 병든 자아(自我)를 이겨야지만 살아낼 수 있는 삶이 무신론자의 삶입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다 읽고 제가 혼자서 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휴, 이 열심으로 예수를 믿으면 성인이 될 텐데." 예수를 믿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의 이야기도 들었을 것입니다. 한두 번쯤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자기와 함께 한다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런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약속의 말씀에 꼭꼭 붙들어 매고, 그 약속의 말씀에 자신의 심장이 뛰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하나님 말씀의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의 약속이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이 말할 수 없이 행복하고, 소망이 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한 해를 정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직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가슴에 식어진 엔진을 강하게 운전하십니다. 그리고 불같은 열정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약속의 말씀에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마음을 묵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 특히, 애굽을 탈출한 때부터 시작해서 여기에 올 때까지 이스라엘의 모든 40여년의 역사를 통틀어서 이때가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던 때입니다. 이 기간이 말하자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연애 기간입니다. 어쩌면 이때가 첫사랑의 때입니다. 아주 어린아이 같이 때 묻지 않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있는 이스라엘을 우리는 여기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정복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아무리 이성적으로 계산해도 자신의 힘으로는 이 전쟁에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은 너무나 아름다운 땅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면서, 정결한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을 앙망하고 있는 순정(純情)적 사랑의 때입니다. 그때 그 약속의 말씀에 자신을 꽁꽁 묶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올 한 해를 말씀으로 승리하려면 이렇게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의 약속에 꽁꽁 묶어 두어야 합니다. 느슨해져서 약속에서 떠나 정욕에 치우치고, 세상의 유혹에 빠지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갈 길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 년 동안 여러분이 광야에서 고생했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그렇게 한 해를 보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삶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그 따위 삶을 우리들이 갈망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삶은 새 마음에서 시작이 됩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 약속의 말씀에 꽁꽁 동여매십시오. 어디 가든지 그 말씀이 여러분의 심장을 뛰게 하고, 그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여,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담대하라
마지막 세 번째는 '담대하라'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수 1:6) "강하고 담대하라." 히브리어로 보면 이 말은 같은 말의 거의 반복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게 미묘한 뉘앙스 차이가 있습니다. "강하고"라는 이 말씀이 하자크(חֲזַ֖ק)라는 말씀입니다. 이건 뭐냐면 그야말로 무엇과 싸워서 그것을 부서트릴지언정 자신은 부서지지 않는, 그야말로 강함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외적인 상태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 두 사람의 검객이 각각 칼을 두 손에 움켜쥐고 칼싸움을 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검(劍)은 대충 만들어진 검(劍)이고, 한 사람의 검(劍)은 명검(名劍)입니다. 허공을 가르면서 두 사람이 공중에서 커다란 곡선을 그리면서 후려칩니다. 허공에서 불이 번쩍 튀면서 두 개의 검이 마주 부딪칩니다. 그때 강한 검은 그대로 있을 것이고, 아무렇게나 만든 연약한 검은 부서지고 말 것입니다. 부서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는 검의 상태, 그게 강함입니다. 이것은 외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잠시 후 싸움을 하게 될 텐데 그때 외적인 상황과 맞닥뜨렸을 때 그것에 꺾이지 않는 강인함, 그것을 가지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에 비해서 "담대하라"라는 것은 아마츠(וֶאֱמָ֑ץ)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무모함, 대담함, 그런 걸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면 초점 자체가 환경과 만나는 외부적 요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구조에 와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전형적인 사물을 묘사하는 관습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강함이 무늬이라면, 담대함은 강한 사람의 내적인 결입니다. 결은 내적인 구조입니다.
결국 '무모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누가 보더라도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결코 승리할 수 없는데, 혹은 오히려 그렇게 하면 커다란 손해를 보게 되어 있는데도, 더 큰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까짓 희생쯤은 감수하고 덤벼들어 보는 것, 그게 무모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대담한 것입니다. 대담한 것은 어떤 것입니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워낙 강렬하기 때문에 그 일을 이루지 못하고 안전할 바에야 작은 가능성이라도 도전하며 용기를 갖고 싶다는 것이 대담함입니다. 그런 담대한 마음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강한 것은 준비하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을 할 때 기도만 하고 전쟁을 했겠습니까? 칼도 만들었을 것이고, 창도 만들었고, 방패도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을 하려면 더 많은 무기를 만들어야 되고, 병법도 연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그냥 외적인 강함입니다. 그들이 진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담대함이 필요했습니다. 이 담대함은 자기 스스로 갖는 담대함이 아닙니다.
전투는 미치지 않고는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전투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참전 용사였는데, 어렸을 때 물어봤습니다. '전투하면 무섭지 않습니까?' '무섭지, 무섭지'.' '엄청나게 무섭단다.' 그런데 어떻게 전투가 가능하냐고 했더니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명령이 중대에 떨어집니다. '몇 일, 몇 시까지 고지를 점령해라.' '이유 없다.' 그리고 영화에서 보면 중대장이 앞서면서 나를 따르라고 달려가지만, 전투에서는 그런 상황이 거의 없습니다. 중대장은 항상 뒤에 서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따르라고 하면 군인들이 다 도망가도 찾아낼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뒤에 서서 '돌격'하고 이야기 했는데, 어디서 찾아냈는지 기가 막힌 바위를 찾아내서 거기 딱 달라붙어서 아무리 총탄이 날아오는 결코 맞지 않는 자리를 기가 막히게 온 중대원이 찾아냅니다. 그리고 거기에 딱 붙어 앉아서 건빵을 꺼내 먹는 것입니다.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지는데도 먹습니다. 뒤에서 중대장이 빨리 가라고 총을 쏘는 것입니다. 그러면 총알이 막 날아오니까, 엉겁결에 돌격하려고 일어납니다. 그런데 '드르륵' 날아오는 중공군의 기관총에 맞아서 동료가 피를 쏟으면서 죽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때 일종의 광기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중대원들이 '이놈들' 하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때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기는지 그 사람들이 전혀 다른 마음이 되어서 돌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전투가 가능해 진다는 것입니다. 전투가 가능해지는 건 일종의 광기에 의해서 가능해진다고 합니다. 셰익스피어가 남녀 간의 사랑도 광기로 묘사했습니다. 미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 광기 때문에 용기가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적인 경우는 전혀 그런 용기가 아닙니다. 이 담대함은 자기의 내적인 성품 속에서 솟아나는 광기적인 욕망의 발현이 아닙니다. 이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에서 오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대담함입니다. 그것이 어디서 생깁니까? 자, 아침에 동쪽을 향해 내가 섭니다. 해가 찬란하게 떠오릅니다. 그리고 내 등 뒤로 엄청나게 큰 그림자를 남기면서 해가 떠오를 것입니다. 반대로 해가 질 때는 내 앞에 상상할 수 없이 거인 같은 큰 그림자를 남기면서 해가 질 것입니다. 결국 떠오르는 해는 질 때까지 우리에게 그림자를 남깁니다. 그런데 그 해가 바로 내 머리 위에 있을 때는 아무런 그림자를 남기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책망할 것이 없는 순전한 마음을 갖게 될 때, 그때 우리는 담대함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겁함은 결국 그릇된 욕망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욕망을 버리고 나면 결국 비겁해질 수 없고, 모두 용기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해가 머리 위에 떠 있을 때 아무 그림자가 지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구김이 없는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명징(明澄)한 삶을 살 때, 그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놀라운 용기가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신의 욕망에서 오는 광기가 아니라, 복수심에서 불타는 미친 기운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러나오는 영적인 용기입니다. 대담함입니다.
(찬송)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하나님 밖에 사랑하는 분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순수합니다. 그러면 두려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잃어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하나님을 훔쳐가겠습니까? 거기에서 영적인 대담함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담대하라"고 여호수아에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멸망했던 이유는 이러한 담대함이 없었습니다. 늘 환경의 노예가 되고, 상황의 포로가 된 채 끌려 다닌 것입니다. 애굽에서는 바로의 노예였고, 광야에 끌려 나와서는 환경의 노예가 되었던 것이 광야에서 죽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었습니다. 결국 장소는 애국 땅이냐, 광야냐, 바뀌어졌지만, 주인은 결국 마찬가지로 자기가 아니라 환경과 상황이 지배하고 있는 삶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유인의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 자유로운 존재로 사는 주체의 삶이 아닙니다. 그런 삶을 살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시켜 보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결국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한 해를 시작하고, 변하기 쉬운 마음이니 우리의 마음을 매일매일 약속의 말씀에 붙들어 매어서, 그 약속의 말씀에 우리의 심장이 뛰게 해야 됩니다. 동시에 담대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을 조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결국 여러분이 하나님을 거의 생각하지 않고, 여러분 젊음의 욕정을 따라 살고, 인간의 상식을 따라 산다면, 여러분은 결코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실패한 기독교인은 성공한 무신론자보다 불행합니다. 미래만 그런 것이 아니라, 현재적으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 앞에 살 것이냐? 말 것이냐? 만약에 우리가 인생을 더 이상 살 의욕이 없다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됩니다. 어차피 살 의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살아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우리의 길은 외통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 이외에 또 다르게 사는 길이 없습니다. 그것이 있다고 믿었을 때는 여러분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함께 그 모든 인생의 다른 길을 기꺼이 포기한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구원의 길입니다. 그때 구원은 지금 여러분이 생각하는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는 길이 돈 많이 버는 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는 길이 여러분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돈 많이 벌고, 멋있는 남자 만나고, 예쁜 자매 만나서,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며 사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혹은 그 길이 학문이나 예술이나 혹은 자신의 외모에 반한 아름다움일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이것이 결코 구원의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것입니다. 그 모든 가능성을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가 문제지만, 만약에 산다고 할 때 거기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산다면 그것은 무조건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 그것 이외에는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 길이 아직도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혹시 그리스도인이라면 사실상 그리스도인이 아닌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두 개로 찢어졌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머리와 정신이 각각 다르게 노는데, 가슴이 뛰는 이유가 다르고, 머리가 생각하는 이유가 다른데, 어떻게 그 혼란 속에서 그가 행복하고 평안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죽지 않고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 이외에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응석부리지 마십시오. 칭얼거리지 마십시오. 아무도 들어주지 않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자유로운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살며 저 가나안 땅과 같은 새해를 정복하고 누릴 것인가? 아니면 광야에서 불순종하다 죽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렇게 허무한 인생을 살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담대하라"는 것은 바로, "넌 내 앞에 서라. 내 앞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서라." 절대적인 의미에서 우리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뒤에서 호박씨 까는 일은 하지 말면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결코 담대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왜 살아있는지, 나의 삶의 이유를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 마음을 아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기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최소한 뒤에서 호박씨 까는 삶을 살지 말아야 됩니다. 그것을 오늘 말하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실패에 익숙해진 사람은 운명처럼 실패의 길을 갑니다. 누구도 바꿔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랫동안 익숙했던 그 실패의 수치를 굴려버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갈에서 그것을 굴려버린 것처럼 굴려버려야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예수와 함께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온 마음을 다해 내가 하나님 앞에 한 번 밖에 없는 일생을 살 것이며, 그리고 가장 좋으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니 나도 그분을 사랑하여 순정(純正)의 삶을 살리라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은 나에게 가장 큰 복을 주실 것이며, 나는 가장 보람 있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 해가 밝았습니다. 그리고 한 해가 여러분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비어 있는 땅이 아닙니다. 이미 가나안 땅에 수많은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온갖 위험과 모략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담대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주 앞에 구김이 없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래서 올 한 해 간절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일평생 보지 못했던 완벽하게 아름다운 한 해를 살아서 두고두고 2022년에 만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강하고 담대하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7-8)
I. 본문해설
모세를 뒤이어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에게 주신 하나님의 첫 번째 말씀이었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카리스마보다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신 것이 우리의 눈에 들어옵니다. 말씀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킨 하나님은 여호수아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떠한 마음으로 가나안 정복의 대업을 이루어야 할지를 가르치셨습니다.
II. 강하고 담대하라
그것은 바로 "강하고 담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강하고 극히 담대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이것은 역설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약해지고, 마음이 매우 소심해질 위기에 놓여 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은 사실 성공할 확률이 별로 없는 게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온 사람들이었고, 가나안 백성들은 오랫동안 문명을 이루며 살고 있는 아주 높은 성(城)을 가지고 있는 요새로 가득한 나라였습니다. 그런 나라를 정복하고자 그들이 요단강 앞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미 그 나라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었을 것이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 앞에 놓여있는 그 과업 앞에 마음이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첫 번째 주신 말씀에서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큰 기적의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전설적인 지도자 모세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런 기적을 일으킬 것을 여호수아에게 기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세에 비해 한참 연약해 보이는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앞에 놓여 있는 일은 이제껏 겪은 일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험난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엄청난 과업이었습니다. 광야는 고생하고 헤치며 걸어오면 되는 길이었지만, 이제는 커다란 전쟁을 앞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모세 때보다 오히려 더 큰 기적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큰 기적을 기적으로 역사하시는 대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부하는 시대를 열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적의 능력을 주시는 대신, "강하고 극히 담대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강함"은 외적인 기상을 가리키는 것이고, "담대하라"는 것은 내적인 마음의 용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A. 말씀을 묵상하라
자, 그러면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강하고 담대할 수 있겠습니까? 제일 먼저 하나님은 말씀을 묵상(默想)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가나안 정복의 대업을 앞에 두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상기시키신 것은 모세보다 더 큰 기적을 일으켜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홍해를 가르신 것 같은 기적을 가나안 땅에서 두루 행하여 애굽에 내린 10대 재앙을 퍼부어 너희들이 빈손을 들고도 이 가나안 땅이 멸망하는 것을 볼 것이라는, 이런 유(類)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어마어마한 민족의 대과업을 눈앞에 두고 있는 때에 주님이 주신 명령은 어떻게 보면 그 상황과 동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을 묵상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여호수아 1장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8) 그러면서 지도자 모세에게 제일 먼저 주신 말씀이 큰 위업을 앞두고 네가 해야 할 일은 모세를 통해 너희에게 베풀어준 율법책을 묵상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위대한 믿음의 시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이 유아기일 적에는 하나님이 기적과 능력을 베푸셔서 그거를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청년기로 들여보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을 믿는 신앙으로 아버지 앞에 나아갈 때, 아버지께서는 모세가 행했던 기적보다 더 놀라운 일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으로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기적이 사라져도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 의지하며 살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모세가 온 이유이기도 하였습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묵상(默想)"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정신의 진리를 모으고 잠잠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 가지입니다. 진리, 정신, 생각입니다. 아무 일이나 골몰하게 생각하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묵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독교적으로 묵상이라고 할 때 그것은 진리의 말씀,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묵상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평소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며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본성으로만 본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많이 생각할 사람이 아닙니다. 눈을 통하여 들어오는 수많은 광경, 귀를 통해 들려오는 수많은 소리, 코를 통해 들어오는 수많은 향취, 그리고 피부에 와 닿는 수많은 감각적인 것들이 우리를 잡아끄는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우리는 그것들에 마음이 쉽게 빼앗깁니다. 보이지도 않고 냄새 맡을 수도 없는 하나님을 많이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깊은 사람이라는 것은 그저 단순합니다. 하나님을 많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많이 생각하므로 사랑하게 되고, 많이 생각하므로 그분에 대한 생각이 자신의 삶에,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신앙심이 깊은 사람입니다.
신앙심이 옅은 사람은 하나님을 거의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꿀처럼 달았던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보든지 하나님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맛있는 걸 먹어도 그 사람 생각이 나고, 예쁜 것을 보아도 그 사람 생각이 나고, 경치 좋은 장소에 가도 그 사람이 생각이 나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과 연관 지어서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의 원래 본성에는 어울리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이 묵상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특히 시편에는 이 묵상이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운 기술이었습니다. 이 묵상의 힘으로 현실의 고단함을 이기고 신앙적인 명랑성(明朗性)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이 묵상을 사용해서 그들은 눈앞에 닥쳐오는 커다란 위협으로부터 초월하는 마음을 가지고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인생을 대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또 이 묵상의 힘으로 가볍게 대할 수 있는 일상을 묵직한 명상으로 대하며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일구어냈던 것입니다.
오늘날 잃어버린 것은 이 묵상의 기술입니다. 이 묵상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은 가나안 정복이라는 위대한 대업을 이루시면서 하늘에서 열두 영(靈)이 넘는 군사를 보내 주신다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커다란 우박과 천둥 번개를 준비하셨다거나, 아니면 여호수아 네가 손을 들어서 펼치면 수많은 사람이 죽게 되리라는, 그런 식의 말씀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마음을 하나님의 율법책으로 향하게 하고, 그 율법책이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는 것입니다. 늘 입으로 그 율법을 읽고, 율법을 암송함으로써, 그 율법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생각이 마음에 스며들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너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이 묵상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말씀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책을 읽고, 또 설교를 듣고, 심지어 성경을 읽을지라도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고, 설교를 들어도, 그것은 비가 쏟아지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가뭄에 반가운 빗소리가 들립니다. 후두둑 빗소리가 들리면서, 쏴아 비가 쏟아집니다. 마치 함지박으로 장독을 덮어 놓듯이 모든 그릇을 덮어 놓았다면, 그 비는 가뭄을 해갈하는 데 아무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무언가 그릇을 열어서 빗물이 담기게 비치해 놓을 때 가뭄을 해소할 수 있는 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이 강의를 듣고, 책을 읽고, 설교를 들을지라도, 성경을 읽을 지라도,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묵상의 과정이 없다면 많은 지식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기갈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최근에 책을 읽다보니까 같은 이야기를 쇼펜하우어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니체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책을 많이 읽지 마라. 바보가 된다." 그런데 실제로 이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독서가였습니다. 특히 니체는 당시에 발달한 자연과학에 대해서 아주 훤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독서를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절대로 책을 많이 읽지 말라고 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아무 책이나 읽지 말라. 바보가 된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결국 두 사상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뭐냐 하면 지식 무용론(無用論)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지식은 머리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수단에 불과하고 책을 읽었으면 읽은 그 책의 내용을 자신 속에 소화하기 위한 시간을 반드시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결국 많은 지식이 오히려 그에게 지혜를 빼앗아가고, 어리석은 사람이 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묵상의 대상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의 심정을 알기 위해서는 그분이 우리에게 보내신 글을 읽어야 됩니다. 그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남자 성도님들은 군대에 가보신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자유롭게 뛰어놀다가 군대에 가서 무시무시한 환경 속으로 들어갑니다. 여기저기서 두들겨 패는 소리가 들리고, 기합이 바짝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훈련소에서 한 일주일 쯤 생활을 하고 나면 집 생각이 납니다. 편지를 쓰라고 합니다. 그때 맨날 엄마한테 반말하던 아들들이 편지를 씁니다. 뭔지 아십니까? <어머님 전(前) 상서(上書)> 이등병 때 쓸 때는 <어머님 전(前) 상서(上書)> 그 다음에 일병 쯤 되고 나면, <엄마 보세요> 상병 쯤 되면 '엄마', 병장 쯤 되면 아예 엄마도 안 부릅니다. <아래의 계좌로 돈 부치세요.> 그렇게 편지를 쓰면 그 편지가 옷과 함께 옵니다. 그리고 엄마는 그걸 보고 펑펑 웁니다. 그러고 나서 엄마가 편지를 씁니다. 꼬불꼬불 하게, 작은 편지지를 아끼려고 빼곡하게 써서 보냅니다. 그게 두 주 만에 도착을 합니다. 쉬는 시간에 편지 왔다고 우편물을 나누어 주면 아들이 그 편지를 뜯어봅니다. 엄마의 글씨체를 보고 펼칩니다. 빼곡한 글씨가 편지 한 장 가득히 써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읽는데 벌써 눈물이 확 쏟아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문장 하나하나 속에 담겨진 엄마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얼굴을 보고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도 더 엄마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글이 아니라 대놓고 이야기를 하는데, 모두 다 잔소리처럼 들리고, 바가지 긁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그래서 엄마한테 함부로 말했습니다. 이번에도 광주에서 건설 현장이 무너져서 인부가 깔렸는데, 딸이 애절한 사연을 보냈습니다. 말했습니다. 마지막 끊은 전화가 아빠한테 짜증을 내면서 끊는 전화가 마지막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마음 아파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지 않으면 하나님의 성경은 영원히 남입니다. 사랑스러워지질 않습니다. 그 속에서 어떠한 향취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진 주님의 심정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군생활에 고달픈 훈련병이 엄마가 보내준 그 편지를 보면, 이미 군대 오기 전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다 들은 이야기였습니다. 그때는 잔소리로 들렸고, 가난한 마음으로 그 편지를 통해 엄마의 심정을 느끼니까 눈물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딴 데 가 있으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잔소리처럼 들립니다. 내 인생을 방해하고, 귀찮게 하는 것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묵상은 이 벽을 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모세가 명령한 법도(法度)였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큰 기적을 주신 이유는 아마도 그때까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앙을 주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수 1:8上) 늘 그 입으로 그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외우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밤이나 낮이나 그것을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묵상은 머리에 있는 생각이 가슴으로 내려오게 하는 깔때기입니다. 깔때기에 무언가를 부으면 병 바깥에서 부었는데 병 속으로 들어갑니다. 기름 같은 것이 들어갑니다. 마찬가지로 묵상이라는 깔때기를 통해서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많은 생각이 서서히 묵상을 통해서 우리의 가슴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이 가슴은, 이 마음은, 모든 행동이라는 제품을 만들어내는 생산 공장입니다. 모든 정신의 생각, 행동, 모든 것들은 머리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에 어떤 좋은 생각이 있어도 이것이 삶으로 실천이 되기 위해서는 묵상이라는 깔때기를 거쳐서 마음으로 내려오기까지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머리에 있으면 내려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머리에 있는 모든 것이 내려오는 것은 아니고, 머리에 없는 것이 가슴으로 내려 올리는 더더욱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지성적인 지식의 유용성이자 한계입니다.
그래서 우선은 많이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는데 사용하는 시간만큼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내려오게 사용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상가가 있고, 그 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머리에서 그친 사람들은 어느 사상가에 대한 연구가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묵상을 통해서, 사색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으로 끊임없이 흘려보내서 새로운 사상으로 살았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진정한 사상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상가들에게는 수많은 깨달음이 있고, 그 학자들은 그 깨달음들을 연결하면서 논쟁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되겠습니까? '성경을 읽으십시오.' '설교를 들으십시오.' '성경 공부를 하십시오.' 그랬는데도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고, 여전히 침체된 영혼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삶에 무슨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가 빠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공부한 것이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를 들은 것이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은 것이 소용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과 함께 당연히 그 지식을 자신의 마음으로까지 내려보내야 할 한 가지가 빠진 것입니다. 그게 바로 묵상입니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찬양)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에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의 마음을 기뻐하신다.' '그의 마음을 받으셨다.' 그럴 때 그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무슨 의미겠습니까? 그 의미는 아주 간단합니다. 아무 마음이나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아무 마음이나 기뻐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 마음 안에 있는 당신 자신을 거울처럼 보시면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한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기쁨이 되었다고 할 때, 필연적으로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꽉 차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묵상을 촉진하는 방법은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을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마음속으로 깊이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무엇이라도 좋으니까 자기가 생활하는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하나님에 대해 깨달은 것을 한 가지씩 적어 가지고 오라고 숙제를 냈습니다. 그 중에 한 교인이 집에 갔습니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다 지나고 토요일이 됐는데 아직도 숙제를 못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을 새롭게 깨달을 수 있는 시간도 없었고,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토요일 날 저녁에 책상을 놓고 앉아서 '도대체 어떻게 하나.' 했습니다. 그런데 여 집사님 앞에 티슈가 있었다고 합니다. 티슈 한 장을 뽑았습니다. 하나를 더 뽑았습니다. '도대체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건가?' 계속 뽑으니까, 280장 쯤 뽑으니까 통이 다 비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치면서 "야! 크리넥스는 끝이 있는데,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구나." 오죽 궁색했으면 그렇게 끼워 맞추었겠습니까? 결국 신앙의 깊이는 자신의 일상적인 삶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연관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깊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르는 순간이 많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도, "오! 주님." 지체들로부터 기쁜 소식을 들어도, "할렐루야! 내가 그 일을 위해서 오랫동안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구나." "너무나 감사하다. 할렐루야." 이런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묵상하는 사람에게는 일상의 삶이 아주 알록달록하고 형형색색의 장식품으로 가득한 세상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의 빛깔입니다. 삶의 갈피갈피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알지 못했을 때라도 알고 보니까 하나님이 세심하게 간섭하셔서, 알지 못할 때에도 우리를 돌보아 주신 하나님, 가슴 아프고 맘에 안 드는 일이 일어났는데도 결국 돌이켜보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기 위해서 막으신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 갈피갈피에 담겨진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을 묵상하는 사람들은 읽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상의 삶이 꽃밭을 지나가는 것 같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왜 그렇게 표정이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입니까? 야생화가 가득한 꽃밭을 지나갑니다. 사람들이 일부러 지어 놓은 꽃밭이 아닙니다. 야생화의 특징이 뭐냐 하면 규칙이나 법칙이 없습니다. 그냥 뿌려진 대로 막 자라는 것입니다. 내버려두니까 군락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갖 색깔의 꽃이 군락을 이루면서 쫙 피어 있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이 그런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하나님이 말씀하신 소리가 모든 삶의 상황들을 통해서 들리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아낀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이런 것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걸어가는 것이,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걸어가는 발자국 하나하나가 너무나 감사한 것 투성이입니다. 너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나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느끼는 것입니다. 느끼니까 하나님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생각의 분량만큼 사랑의 크기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생각이 거의 나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늘 그 생각이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것이 사랑의 극치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삶의 모든 구간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묵상이 주는 유익입니다.
그래서 묵상에도 어떤 원칙이 적용되냐 하면 있는 자는 있는 것에 더하여지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게 되는 것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무슨 뜻입니까? 묵상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가 없고, 느낄 수가 없으니까 묵상이 더욱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한 번 돌아보십시오. 이렇게 살고 나서 저녁때가 되어 취침 기도를 하려고 하면 오늘 하루가 너무 아름답습니다. 매 순간순간 내게 일어나는 일상 속에서 다른 사람들은 평범해 보이는 많은 일들 속에서 하나님이 세심하게 나에게 사랑을 표현하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나에게 용기를 주시고, 희망을 주셨던 발자취로 가득한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매일 저녁마다 그 일상의 꽃밭에서 따온 하나의 꽃다발을 주님께로부터 받으면서 잠자리에 드는 것입니다. 마음은 감사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그것이 묵상하는 삶의 유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기적으로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해 주던 시대는 점점 지나갔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렇지만 이제 그 기적을 의지하는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함으로 어디서든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음의 눈으로 보면서 만지면서 살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올 한해 살면서 여러분이 담대하고 강하게 되는 비결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꽉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옆에 작은 노트를 하나 두십시오. 설교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깨닫는 것이 있으면 그 옆에 아주 작게 적어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경을 다 읽고 난 다음에는 마음을 움직이는 그 말씀을 자기의 마음에 꼭 담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묵상의 실천입니다. 이 묵상으로 올 한 해 강하고 담대하게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말씀에 순종하라
마지막 두 번째는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면 우리가 받는 큰 유익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의 마음에 걱정과 근심이 사라집니다. 내가 고난과 시련을 겪어도 그것을 믿음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 순종할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강하고 담대한 마음은 "내가 먹어야지" 한다고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힘은 오직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힘으로서만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똑같이 내 마음에 오기를 품고, 아니면 마음에 독을 품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당신 자녀들의 마음이 아닙니다. 모든 선한 결심이 미움과 원망, 투기에서 나오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결심이 선한 마음에서 나오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선한 결심은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신자 안에 있는 은혜가 점점 융성해지기 위한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를 죽이는 생활과 순종하는 생활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죄와 씨름하며 회개하고, 자기가 깨어지는 죄죽임의 생활이 우리 안에 주신 은혜의 불길을 더 활활 타오르게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순종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죄죽임과 순종의 생활이 우리 안에 있는 은혜가 융성해지는 비결입니다. 의지의 불순종은 마음에 바르지 않은 정서를 불붙입니다. 다시, 의지의 불순종은 마음을 바르지 않은 정서에 불붙게 하고, 지성에 그 구름을 드리우게 합니다. 마음을 드리는 순종의 실천은 양심을 평정하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그 순종이 힘들어도 양심은 자유를 얻습니다. 그런데 불순종하는 사람은 몸은 편해도 양심이 끊임없이 요동칩니다. 그래서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정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드리는 순종의 실천은 뛰놀던 정서를 안온(安穩)하게 만들고, 생각을 가지런하게 해줍니다. 그래서 순종이 먼저입니다.
그러면 '내가 힘이 없는데 어떻게 순종할 것이냐?' 하나님이 순종할 힘은 순종하려는 사람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순종하려는 사람들만이 순종하게 하시는 은혜를 경험한 후, 내가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의 행사, 마음의 구조, 그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신비하게 함께 작동합니다. 그러면서 결국 하나님 앞에 뜻을 세우고 순종하려는 사람이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비록 실천하지 못해도 마음 깊은 곳에서 순종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굳세게 먹을 때, 그때 하나님이 그 결심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의 마음으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아! 이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구나.' 이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하려는 마음을 먹은 사람 이외에는 용기가 생길 수가 없습니다. 순종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감동이 주어지고,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기고, 그렇게 하고야 말리라는 용기도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의 전술은 이러한 특별한 용기를 못 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패를 반복하게 하고, 그 반복된 실패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보면 닭이 알을 낳습니다. 알을 품어서 병아리가 나옵니다. 엄마 닭이 병아리를 몰고 다닙니다. 하도 돌아다니니까 얘네들을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밭일을 가야 됩니다. 그러면 병아리체가 있습니다. 구멍이 뚫린 싸릿가지로 만든 게 있습니다. 거기다가 병아리들을 모두 모아놓고 탁 덮어 둡니다. 그리고 주인은 하루 종일 나가서 밭에서 일을 합니다. 와서 그냥 살짝 들어서 모이를 확 끼얹어 주고 그다음에 도로 덮어 놓습니다. 여러 날 그렇게 해 놓으면 어느 날 주인이 병아리가 가엾어서 이젠 한번 나가서 놀아보라고 병아리 바구니를 번쩍 들어도 병아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도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밖에 나가보려고 수없이 그 바구니를 쪼았는데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실패에 대한 경험이 학습이 되어서 이제는 바구니가 열렸는데도 그려진 원을 벗어날 생각을 못하는 것입니다. 사단의 전략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실패를 반복하게 한 후, '봐라, 너는 되는 것이 없다.' '너는 결국 성공할 수 없다.' '그리고 너는 이 실패를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순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순종하고 예전과 다름이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새해가 밝았어도 모든 여러분의 삶에 얽힌 문제들이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어떤 문제에 얽혀 있든지 간에 그 매듭을 푸는 첫 번째 비결은 여러분이 있는 그 처지에서 일단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를 작정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그 모든 삶의 매듭들이 풀리기 시작합니다. 삶이 혼란스럽습니까? 먼저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혼란스러운 삶의 매듭을 풀고, 엉킨 것을 정리하는 첫 번째 조치입니다. 자기를 신뢰하지 말고 그렇게 순종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일단 순종의 발걸음을 내딛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실 것을 믿으십시오. 삶의 방향을 정하십시오. 오늘도 세상으로 향하는 발걸음으로 한 해를 시작하겠습니까? 자기의 뜻을 따라 살기를 계속 하시겠습니까? 결국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지난 한 해도 수많은 슬픔과 고통을 겪었는데, 무엇 때문에 짧은 인생에 다 이미 경험해본 실패를 반복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지침으로 삼아 그 가르침대로 살기를 결심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겠다고 오늘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순종할 터이니 순종할 수 있는 힘을 나에게 달라고,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순종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이미 주신 줄 믿겠다고 고백하며 예전과는 다른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주시는 말씀에 따라 계명을 지켜 순종함으로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이야말로 우리 일생의 보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가나안 정복이라는 엄청난 대업을 앞에 두고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결코 그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며, 떠나지 아니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결국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능력과 자원, 하나님의 모든 지혜와 권능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것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약속을 주시면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새해를 시작하면서 이 말씀과 함께 깊이 묵상하고, 말씀에 붙들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삶의 엉클어진 매듭은 순종에서 풀립니다. 수많은 생각과 고민, 심지어 기도로도 풀리지 않습니다. 삶의 엉클어진 매듭은 순종이라는 가위로 끊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선한 뜻을 세우십시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한 해를 시작하겠다고 다짐하십시오. 그 뜻을 지탱할 수 있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순종할수록 우리는 기도할 수 있게 되지만, 불순종할수록 기도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먼저 순종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난해와 다른 삶을 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순종이 다른 삶을 가져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그 말씀에 붙들리십시오. 그리고 이 말씀에 순종함으로 올 한 해가 하나님의 복이 넘치는 한 해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I. 본문해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곧 가나안 정복을 위한 대장정으로서의 전쟁이 시작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땅을 점령하기 위한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길을 비켜 주지 않을 때, 하는 수 없이 전투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소규모의 적(敵)이고, 국지(局地)적인 전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일찍이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커다란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순순히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줄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모세의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에게 첫 번째 나타나셔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강하고 지극히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태산 같은 지도자 모세가 죽고, 연약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자기 같은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셨을 때, 여호수아는 몸 둘 바를 몰랐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말씀으로 그를 위로하고 강하게 붙들어 주셨습니다. 연약하기 짝이 없는 여호수아가 어떻게 그렇게 강하고 지극히 담대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두 가지 말씀으로 그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책을 입에서 떠나지 않도록 묵상하라는 것과 말씀에 기록된 모든 것을 순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II. 두려워하지 말라
A. 두려워하지 말라
이 모든 말씀을 주신 후에 마지막 마무리로 보태듯이 그에게 하신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전쟁을 앞두고 있었고, 아주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역설적으로 두려워할 만한 일들이 많이 일어날 상황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과 무서움이 그들의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붙들어 주어야 할지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이 두려움을 이기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어 있어야지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진짜 무서운 것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두려움 그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헤엄 못 치는 사람이 소용돌이에 말려들었을 때, 헤어나기 위해서 손을 휘저으며 발을 박차 보지만 점점 더 깊은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두려움은 그렇게 두려워하는 우리를 붙들고 공포와 절망 속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사람이 무엇인가를 매우 두려워 할 때,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날 확률은 십분의 일도 안 된다고 합니다. 사실은 환경이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게 아니라, 두려워하는 마음이 우리를 사로잡아 무섭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이 우리의 기를 죽이는 전형적인 방법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1장 7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
하나님이 주시는 두려움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고, 주님의 품을 더욱 파고들게 만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두려움이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를 파괴로 데려가는 두려움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스스로 두려움에 사로잡힘으로 한없이 나락으로 자신이 스스로의 무게에 의해 추락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젖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젖는 상호 침투를 통해서 우리는 그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여러분이 승리하며 살게 만드는 것은 여러분 손에 들려있는 성경책이 아닙니다. 여러분 머리맡에 수없이 많이 꽂힌 경건 서적이나, 신학책들도 아닙니다. 빨간 줄을 수없이 친 성경공부 교재도 여러분을 붙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 붙들어 주는 것입니까? 심지어는 여러분의 기억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도 여러분을 붙들어 주지 못합니다.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만 여러분을 붙들어줍니다. 그래서 신앙의 연조(淵照)라는 것은 오늘 그 말씀에 젖어서 살아가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오늘 그렇게 살지 않으면 그 신앙의 연조(淵照)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많은 신앙의 연조를 갖고 오늘 말씀이 마음에 없는 사람보다는 금방 예수를 믿었는데 하나님의 말씀 한 줄에라도 은혜를 받아서 그 말씀이 자신의 마음속에 스며들고 말씀이 자신의 마음속에 스며드는 상호 침투의 심리가 있는 사람이 훨씬 더 낙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벼랑에 우리가 있다고 칩시다. 간신히 발을 디디고 부스러지는 흙더미 벼랑 낭떠러지에 간신히 붙어 있는데 우리가 위로 올라가야지 살 수 있습니다. 굵은 팔뚝으로 위로 힘차게 뭔가를 잡아당기면서 위로 올라가는 힘이 믿음이라고 한다면, 그는 팔만 휘저어서는 위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의 손에 밧줄이 붙잡혀 있어야지만 굵은 팔뚝으로 힘차게 감아올릴 때 그는 벼랑 끝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팔뚝이 믿음이라면 그 손아귀에 붙잡힌 밧줄이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 약속의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말씀이 마음에 스며들고, 마음이 말씀에 스며드는 상호 침투의 심리 속에서 믿음을 행사할 때 우리는 모든 두려움과 어려움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이 신앙의 근처에 오지 못하고 언저리를 빙글빙글 돌면서 예수의 진정한 생명을 맛보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무슨 말씀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스며들고, 여러분의 마음이 그 말씀에 흠뻑 젖어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평강의 삶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손에 붙잡혀 있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버리시지 않고, 나를 강하고 담대하게 하신다는 것이 여러분에게 믿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는 믿음생활이 너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 약속은 암기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새빨갛게 줄 쳐놓은 신학책이나 경건서적을 옛날에 읽은 흔적이 아닙니다. 오늘 내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는 한마디의 말씀,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고 싶다는 마음의 소원, 희망,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 속에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의 말씀을 희망이라고 본다면, 하나님이 희망을 주시는 사람이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무서움에 떨어질 수 있겠습니까? 낙심하고 절망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소용돌이처럼 자신이 휘감겨 땅 속으로 꺼져 가는 좌절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이 희망과 절망은 전염병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옮깁니다. 그리고 그것은 대단한 영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오늘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희망이 있는 삶을 사는 것은 나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가족과 나의 지인들 그리고 나의 이웃의 행복에 관계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절망이 사람들을 전염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탈출해서 원래 약속의 땅까지 가려면 그냥 한두 달이면 충분히 갈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도착을 합니다. 그다음에 열두 지파에서 한 사람씩 사람을 선발해서 가나안에 정탐꾼을 보냅니다. 정탐꾼을 보낸 목적은 그 땅이 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냐,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 땅을 점령할 수 있겠느냐, 그 정세를 살피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갔습니다. 그런데 진짜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곳이었습니다. 포도송이가 얼마나 큰지 남자들이 꿸 채에 꿰어 메고 가야 될 정도로 기름진 작물들이 엄청나게 쏟아지는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열 사람이 거짓 보고를 합니다. '사실 그 땅을 가보니 매우 나쁘고 험악하더라.' '그리고 전혀 기름지고 아름다운 땅이 아니더라.' '그리고 거기에 사는 아낙 자손들은 어마어마하게 커서 우리의 체구에 비하니까 우리가 메뚜기 밖에 안되더라.' 그런데 오직 두 사람만 정확하게 보고를 했습니다. '그 땅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와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고 아주 기름진 땅이더라.' '땅의 소산이 철철 넘쳐흐르는 비옥한 땅이더라.' '그들이 우리보다 덩치가 크고 발달한 문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 '하나님이 저들에게서는 떠나셨고, 그 하나님이 우리와는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고를 합니다.
이스라엘의 큰 실수는 뭐냐면 그 중요한 일을 위해 대표단을 파송하는데 알곡이 아니라 쭉정이들을 골라서 보낸 것입니다. 두 사람만 알곡이었고, 나머지는 신앙이 없는 쭉정이들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거기에 가서 상황을 보고 결국 와서 거짓말까지 하게 된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땅이 나빠서였습니까? 곡식이 없어서였습니까? 아니면 땅이 진짜 젖과 꿀이 흐르는 게 아니라 정말 메마른 땅이어서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하나 때문입니다. 그 땅의 백성들을 보니 너무나 덩치가 크고 발달한 문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네들이 질 것 같았습니다. 두려움이 열 사람을 휩싸니까 그들이 와서 거짓말로 보고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열 명이 A의 의견을 말하고 두 명이 B의 의견을 말할 때, 다수결로 보더라도 누구의 의견을 따르겠습니까? 당연히 열 명의 의견을 따를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보고를 하는 그 순간 어마어마한 두려움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확 덮쳤습니다. 쓰나미처럼 덮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럽게 울면서 여호와가 우리를 죽이려고 여기까지 이끌어 오셨다고 탄식하며 극복할 수 없는 어떤 절망의 쓰나미가 그들 모두를 뒤엎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는 그 절망의 쓰나미 앞에서 터럭 같은 믿음이라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과연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본 사람들인가, 의심이 될 정도였습니다. 과연 홍해를 건너는 사람들인가, 애굽의 10대 재앙을 과연 목격한 사람들인가, 의심될 정도로 일체의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절망의 쓰나미가 전염이 되어서 열 사람이 아니라 나머지 모든 수백만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뒤덮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절망에 빠졌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어서 광야에서 모두 방황하다가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절망하는 것은, 낙심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동정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은 그렇게 봐도 됩니다.
그런데 자신을 그렇게 보면 안 됩니다. 그런 인생관을 가지면 아주 하류의 인생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희망이 있다.'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은 근거가 없습니다. '뭐가 희망이냐?' '그래도 희망이 있다.' 우깁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희망의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 하나님이 내가 어디로 가든지 내 하나님 여호와가 함께 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그 믿음이 우리를 모든 두려움에서 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마음을 먹는다고 그렇게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해 보십시오. 마음을 먹는다고, 생각을 잠깐 돌린다고 해서 절망이 희망으로 바뀐다고 치겠습니다. 그러면 그 생각은 얼마 후에 다시 원위치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닙니까? 그것은 궁극적인 처방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마음이 젖고,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젖어드는 상호 침투의 심리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지도력을 물려받은 다음에 첫 번째 만남에서 하나님이 율법책을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그 율법책을 네 입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입으로 읊조리는 것과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입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라고 하는 것은 입으로 나불거리라는 뜻이 아니라 마음에 두라는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마음과 언어에 관한 마인드(mind)입니다. 언어학적인 마인드(mind)입니다. 겉치레의 말(言)이 아닙니다. 말씀을 내 입에 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반듯하게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구역예배에 참석하고, 나름대로 의무감이 있어서 모든 사람이 두려워서 지금 못 나오는데, 마스크 쓰고 나와서 정자세로 예배드리는 것은 훌륭합니다. 아주 뛰어납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우리를 희망의 삶을 살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오늘 전하는 이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잔뜩 쌓아놓은 티슈 위에 물이 쏟아 부어질 때 흐르는 물은 없습니다. 그 티슈 속에 스며듭니다. 그리고 티슈는 물속으로 스며듭니다. 그래서 물을 모두 흡수해 버리듯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과 정서 속에 침투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것이 여러분에게 육화(肉化)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속에서 피가 되어 흘러야 됩니다. 그래서 내 인생을 거기 얹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있는 모든 것은 주님이 주신 것이고, 주님이 주신 모든 것 중에 아무 것도 필요 없는 것은 없다는 확신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은 내가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서 나에게 굉장히 좋은 것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그런 확신이 내 마음속에 드는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에 내 마음이 침투해 있기 때문에, 내 마음이 약속의 말씀 속에 상호 침투해 있기 때문에 나에게 그런 확신이 드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 믿는 비밀입니다. 이 속으로 들어오지 못한 사람은 진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영적인 승리의 맛을 못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가장 중요한 것을 위대한 대업을 앞두고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적을 일으키고, 기적 때문에 이스라엘이 겨우겨우 하나님을 따라가는 유아기적인 이스라엘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더 이상 홍해가 갈라지고, 그 다음에 하늘에서 불비가 내리는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나라, 그 땅에 들어가서 패역한 백성들을 모두 쓸어 내고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말씀을 붙들고 산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말씀이 무슨 밧줄입니까?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침투해서, 그것이 그 마음을 적셔서, 그 사랑으로 범사에 모든 삶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그들에게도 기쁨이 되는 삶입니다. 그런 삶은 옛날에 가나안 족속이 그 땅에서 보여줬던 인간의 더러운 삶과는 비교되지 않는 고결한 삶입니다. 그 삶을 통해서 많은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고백을 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의로워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그런 삶을 살라고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한번 말해 보십시오. 여러분, 예수 믿으면서 항상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가 어떤 때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침투해 들어가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마음에 있어서,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과 일치가 되어서, 하나님과 마음속에서 합일(合一)을 이루던 그때, 여러분의 마음에 놀라운 기쁨이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행복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행복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진수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모르는 사람, 모든 것이 개념으로만 떠도는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의 언저리를 돌고 있는 사람이지 거기에 풍덩 자기가 빠진 사람은 아닙니다. 임마누엘 피의 샘에서 돌고 있는 사람과 임마누엘의 샘에 풍덩 빠져서 그 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두 적신 사람,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그것이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 말씀은 결국 하나님의 약속을 붙듦으로써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자신이 스며듦으로써 모든 두려움과 시련을 극복하며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길거리를 지나다가 천 명을 붙들고 한번 물어보십시오. 만족합니까? 행복합니까? 여한이 없습니까? 아무도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 없습니다. 인생 그 자체가 자기 마음대로 안 됩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고통을 받습니다. 그 속을 헤치면서 살아야 되는 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해줘야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을 보고 예수 똑바로 믿고 희망을 가지라고 타박하듯이 말해서는 안 됩니다. 따뜻하게 돌봐주고, 희망이 있다고 말해주고, 그리고 내가 함께 하겠다고 말해 주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주고, 그리고 그를 돌봐야 됩니다.
그러나 나는 묻고 싶습니다. 언제까지 남의 도움으로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그것은 하나의 인생을 사는 윤활유입니다. 너무 낙심이 됐었는데 친구가 와서 '힘들지?' 하고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함께 물어 봐 줄 때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아! 이제 내가 믿음으로 살아야지.'라는 마음을 가져서 내가 바르게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남의 동정을 구걸 받으면서 그것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진짜로 우리의 인생을 바꿔놓는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자동차가 도로 위를 달리는 것은 자력이 아니라 타력으로도 달릴 수 있습니다. 큰 자동차에 망가진 자동차를 묶고 달려도 그 자동차는 끌려갑니다. 장정 열 명이면 승용차 한 대 정도는 막 밀고 달리면 한 20킬로로 달릴 수 있습니다. 20킬로까지는 안 되도, 10킬로는 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자동차를 그렇게 끌고 다닐 겁니까? 누가 그렇게 밀어준 답니까? 자동차라면 마땅히 시동을 걸면 '부웅'하고 시동이 걸려야 합니다. 그래서 밟으면 50킬로, 60킬로, 100킬로, 달려갈 수 있어야 그게 자동차입니다. 언제까지 남이 밀어주고, 남의 자동차에 끌려가는, 그런 자동차를 타고 다니겠습니까? 누가 그런 자동차를 타겠습니까? 여러분도 인생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믿음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대신 남이 믿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스며들게 하십시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요즘 여러분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시고 있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 말씀을 생각하면 왠지 마음이 뭉클해지고, 눈가에 이슬이 맺히게 되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고 치겠습니다. 둘이서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3년이 넘도록 아무도 아무에게 감동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 사랑이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유지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끊임없는 감정의 교감으로, 감동의 상호 작용입니다. 내 마음이 저 사람의 마음에 침투하고, 저 사람의 마음이 내 마음에 침투하는 합일의 경험을 통해서 사랑은 발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보면 대판 싸우지도 않았는데 슬며시 끝나버리는 인연이 많습니다. 결국은 감동이 없어서 끊어지는 것입니다.
신앙도 똑같은 것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 앞에 대들면서 저처럼 '하나님, 당신이 뭐라고 말하든지 나는 오늘부터 무신론의 길을 택합니다.'라고 절교하고 돌아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신앙을 버리는 게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감동이 없어서, 메말라 버려서, 결국 스르르 끊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언제 끊어졌는지도 모르게끔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원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이 없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숙제입니다. 책을 읽고, 성경을 공부하고, 통독을 하고, 신학 공부를 하고, 심지어 상담을 하는 것도 결국은 수단이 지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중에 어떤 말씀이 내 마음을 촉촉이 적셔서 내 마음을 꽉 붙들어 주게 하기 위해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의 수단에 많이 참여하면 많이 참이 할수록 그렇게 될 확률이 높은 것입니다. 드넓은 바다에서 낚싯대를 딱 하나 놓고 고기를 잡는 사람과 이십 개쯤 펼쳐놓고 뛰어다니면서 고기를 잡는 사람 중, 누가 고기를 낚을 확률이 높겠습니까? 두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열심을 품고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마음 자세가 그런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는 것 자체를 목표로 하고, 그게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면 아무것도 안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두 개 할 것을 하나 하더라도 거기에 마음을 실어야 됩니다. 세 번 예배드릴 것 한번 예배드리더라도 눈물로 예배를 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자신 속에 쓰며 들어서 침투하게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때 거기에서 삶이 폭발적으로 변합니다. 자기를 짓누르는 것 같은 태산과 같은 두려움이 변해서 거기에서 자유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놀라운 용기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정리를 하자면,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전의 실패 때문에 오늘의 생각을 좌우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 인생을 운명에 매어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지난 시간에 아모르 빠띠(Amor Fati)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가르쳐드렸습니다. 정해진 운명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운명처럼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그것을 주님과 함께 손잡고 약속의 말씀을 붙들며 헤쳐서 이제껏 살아보지 못했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개될 자신의 운영, 그렇게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모르 빠띠(Amor fati)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이 진정한 주체성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앞에 두 번의 설교에서는 사실 안 했는데, 여러분에게만 하겠습니다. 니체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인간의 삶을 세 가지 비유로 설명을 합니다. 낙타의 삶, 사자의 삶, 어린아이의 삶입니다. 낙타의 삶은 뭐냐면, 낙타는 혼자 걷는 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낙타는 처음 태어날 때부터 고기를 먹으려고 태어나는 짐승이 아닙니다. 사실은 고기도 먹지만, 젖도 먹지만, 짐을 지고 가게 하기 위한 운송수단입니다. 그래서 낙타는 철이 들면서부터 엄청나게 무거운 짐을 얹고, 사막을 가로질러서 살아가는 것이 낙타의 삶입니다. 첫 번째 유형의 사람이 낙타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왜 나에게 이 짐이 지어졌는지, 그리고 이게 진짜 짊어져야 되는지, 그리고 이렇게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이 좋은 것인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리고 아무 생각이 없이 그냥 고통을 받으면서 그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뚜벅뚜벅 걸어가느라고 온갖 괴로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니체는 인간 말종의 삶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등장하는 인간 유형은 사자와 같은 인간입니다. 여러분, 그럴 리는 없지만 길거리에서 사자를 만났다고 치겠습니다. 사자가 입에 마개를 씌워서 여러분을 물지 않는다고 치겠습니다. 여러분이 배낭을 메고 짐을 잔뜩 들고 가다가, '아, 힘들어. 사자에게 한 번 지고 가게 해야지.' 그리고 사자에게 짊어지게 하면 사자가 순순히 그걸 짊어지겠습니까? 아니면 난리를 쳐서 다 집어 던져 버리겠습니까? 전자(前者)입니까? 후자(後者)입니까? 전자(前者)입니까? 후자(後者)입니까? 후자(後者)입니다. 그런 정도가 아니라 입마개가 없으면 자기에게 짐을 지어준 사람을 물어뜯어 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사자의 용기입니다. 내게 이 짐을 지어준 주체가 누구냐? 그리고 이것이 내가 진짜 짊어져야 되는 짐이냐? 그거에 대해서 자기반성을 통해서 항거(抗拒)하는 것입니다. 물론 니체의 의미는 내가 말하는 의미와는 많이 다릅니다. 모든 도덕에 대해서 항거한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많이 동의 되는 부분은 그것입니다. 어떤 도덕이라도 그것은 우리의 수용을 통해서 들어와야 됩니다. '넌 남자니까 이런 삶을 살아야 된다.' '여자니까 이렇게 살아야 된다.' '며느리니까 이렇게 살아야 된다.' '딸이니까 이렇게 살아야 된다.' '그리스도인이니까 이렇게 살아야 된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아무런 점검과 동의도 없이 삼자(三者)의 말을 듣고 그걸 짊어지면서 사는 것은 우리의 인생을 사는 게 아닙니다. 남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남의 인생도 아닙니다. 남의 인생을 살면 그 사람이라도 고마워 할 것입니다. 내 인생도 아니고, 남의 인생도 아닌, 이상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점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세 번째 제시되는 유형이 뭐냐면 어린아이 같은 인간입니다. 어린아이가 놀고 있습니다. 누가 아이에게 놀이를 강요를 합니까? 엄마가 안 놀면 혼내 준다고 했기 때문에 과제하느라고 아이가 노는 것입니까? 그렇게 논다면 그것은 놀이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이는 스스로 그것이 좋아서, 스스로 관심사를 따라가면서, 놀이를 즐기면서, 지루한 줄 모르고 하루 종일 놀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아이들의 놀이와 우리의 인생을 완벽하게 똑같이 획일화 시킬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전개되는 인생이 항상 아이들이 소꿉장난 하고 노는 것처럼 항상 즐거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난과 슬픔의 현실이, 그리고 고통과 좌절의 현실이 우리 앞에 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나에게 주어진 것인가?' '이것이 내가 정말 짊어져야 되는 것인가?' '이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지기를 원하시는 것인가?' 이런 것을 생각하고 깊은 점검을 하고 받아들인 후에는 그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돼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을 주체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유인입니다. 그게 니체가 얘기하는 위버맨쉬(Übermensch)입니다. '극복한 사람', 번역이 어렵지만 어쨌든 뭔가를 넘어선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그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그것이 가지고 있는 형식은 놀라울 정도로 기독교의 가르침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에 매여서 거짓 신앙생활 하고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통렬하게 공박했던 사도 바울의 그 논쟁도 바로 그런 짐을 누가 지어주었냐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도, 우리에게 지어 주지 않은 조상의 근원도 알 수 없는 멍에를 짊어지고, 예수를 믿었는데도 아직까지도 그 율법을 지키면서 심지어 할례를 받고 살아야 한다고 하니, 그게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이 그런 삶을 살 수 있느냐고 통렬하게 반박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 중 사도 바울이 복받치는 분노로 그렇게 쓴 글은 없습니다. 그게 얼마나 그가 자유를 사랑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뼛속까지 자유인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것을 그냥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하고, 맘에도 없는 짐을 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격체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기 어려운 짐을 지라고 하셨을 때는 그것을 지고 사는 것이 안 지고 사는 것보다 훨씬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행복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걸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을 내가 느끼지 않으면 외식하는 사람이 되는 거고, 그 마음을 느끼면 주님께 효도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의 주체성을 위해서도 너무 너무 중요하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누리면서 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니체가 절대적인 자유를 부르짖으며 모든 도덕을 다 파괴한 사람이라고 얘기하는데, 거짓말입니다. 그런 사람 아닙니다. 그는 우리의 자아(自我)를 둘로 나누었습니다. 퇴화하는 자아, 부패한 자아와 자유를 찾아가는 참된 자아로 나누었습니다. 'all for me, 모든 것은 나를 위해 있고, 너희들도 나의 행복을 위해서 봉사해야 된다.' '나는 너를 지배하리라.' '내가 고혈(膏血)을 짜서라도 나는 내 행복을 찾기 위해 너희들을 이용해 먹을 거야.' '내가 너에게 빨대를 꽂고 내가 원하는 걸 다 빨아먹어 버릴 거야.' 이것은 바로 퇴화하는 자아가 시키는 미친 짓입니다. 이것은 세계를 망가트리는 거고, 자기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인간말종(人間末種)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정으로 깊이 생각하면서 이러한 퇴화하는 자기는 거절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자유케 하는 진정한 자아를, 건설적인 자아를 굳게 붙들고 그 믿음을 가지고 누구에게도 강요받지 않는 자유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게 자유인의 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놀랍게 우리들이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 기시감(旣視感)이 느껴집니다. 자기 깨어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육신적인 자아와 신령한 자아의 다툼, 감각으로 살려는 자아와 믿음으로 살려는 자아 사이의 갈등이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자아, 믿음으로 살려는 자아,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의존하며 살아가는 자아가 우리에게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마음이 침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은 머리에 A라는 생각이 있고, 가슴에 B라는 생각이 있으면, A를 따라가지 않고 B를 따라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나안 정복의 대업을 앞두고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하시면서 모세의 갑절의 기적의 능력을 주겠다고는 한 말씀도 안 하십니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 위대한 약속을 하십니다.
B. 함께하느니라
"··· 내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 1:9末) 함께 하겠노라는 약속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수 1:9上)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냐 하면 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오직)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수 1:7) '아무리 가나안 족속이 강하고, 가나안 정복을 위한 숙제가 아무리 엄청날 지라도 반드시 형통하게 될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느냐고 상기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下) 이스라엘의 하나님, 너희들의 하나님이 아닌, 여호수아 혼자를 놓고 말씀하시듯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 여호수아의 하나님인 나 여호와가 여호수아 너와 함께 하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펑펑 울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기적, 홍해를 가르는 능력, 하늘에서 내리는 불,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능력의 일부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고 하셨을 때는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것으로 전용(專用)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독점적으로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기만 하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놀이 공원에 갔습니다. 놀이기구도 타고 싶고, 장난감도 사고 싶고, 풍선도 사서 손에 걸고 싶습니다. 그리고 밀고 다니면 날개를 팔락팔락거리는 나비 굴리개도 사고 싶습니다. 핫도그도 먹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는 한 가지 조건만 가지고 있으면 그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아빠와 같이 가면 됩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아빠가 그렇게 해주겠다고 해야 됩니다. 그날 기분이 상해서 안 해준다고 그러면 안 됩니다. 아빠와 같이 가면 모든 게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최고의 축복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국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의 행복입니다.
인류는 범죄하기 전까지는 이 복을 누렸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예배의 시간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현존을 대면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별도의 예배 시간을 마련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불순종이 들어왔습니다. 제일 먼저 사라진 것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었습니다. 사라졌습니다. 정신과 마음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사라지자 인간의 마음은 통제할 수 없이 팥죽 끓듯이 소용돌이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삶을 이리저리 휘몰아 가는데, 미친 기수가 말을 괴롭히는 것처럼 그렇게 자기의 몸을 괴롭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불행해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사치와 향락에 빠지고, 미친 듯이 쾌락을 추구하고, 어떻게 인간으로서 저럴 수 있을까 하고 일어나는 끔찍한 범죄와 타락, 말할 수 없는 부도덕들, 그리고 인간의 불행을 우습게 여기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이웃을 짓밟는 모든 만행은 바로 한 가지 복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삶, 그걸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하자마자 이것을 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구원의 계획을 준비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는 없지만, 함께하는 맛이라도 보여주고 싶으셔서 만드신 제도가 제사입니다. 그리고 메시아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 인간에게 항구적인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성취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지 아십니까? 마태복음 1장 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임', 히브리어 전치사입니다. '함께'라는 뜻입니다. '마누'는 '우리'라는 뜻이고, '엘'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자로 아기 예수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에게 계시된 이름이 "임마누엘(עִמָּ֥נוּאֵֽל)"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이 예수 때문에 인류와 함께 해 주시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여기에 주목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순간에 갑자기 생겨난 말씀이 아닙니다. 우발적으로 주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이 오시기 700여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이 약속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마음속에 인간을 버리고 싶은 마음은 티끌만큼도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을 회복시킴으로써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누리며 살아가는 인간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임마누엘"로 지어서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최고의 행복을 우리에게 주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이 사람이 "여호수아"라고 불립니다. 그 이름의 뜻이 '그가 구원 하신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을 히브리어에 익숙하지 않은 포로시대의 이스라엘 후손들을 위해서 고대 그리스어로 번역한 책이 있습니다. 70여 명의 학자들이 모여서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을 합니다. 그거를 70인역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이게 뭐라고 나오느냐 하면 제목이 '눈의 아들 예수'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예수는 '여호수아'와 동일한 이름입니다. 결국 이 여호수아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주 탁월한 그림자입니다. 모세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준 것보다도 여호수아가 그리스도를 더 잘 보여준 인물이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회복하고자 하시는 것이 바로 당신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충만하게 누리게 하기 위해서, 가나안 정복에 앞서서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셔서 획기적으로 중요한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적을 보면 겨우겨우 움직이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유아기적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의 등장을 계기로 청년기의 신앙으로 넘어가면서 인격적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소통할 수 있는, 말씀으로 인도하시고, 믿음으로 모세의 기적보다도 더 큰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전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아는 이 종교는 훨씬 더 외면적인 화려함에서 내면의 찬란함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여러분 중에서는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예수 오기 전에는 우리와 임마누엘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런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왕 다윗과 같이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의 일대기에는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라',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셨더라'. 이런 이야기가 다윗뿐만 아니라 히스기야를 비롯해서 많은 믿음의 인물들에게 따라오는 전기(傳記)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여기에서 예수가 "임마누엘"로 불려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함께 하심을 선물하신다는 것과 구약의 사람들이 누렸던 함께 하심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솟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떠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이런 것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이 그냥 일반적인 의미에서 함께 해주셨습니다. 사물들의 질서를 움직여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의 편이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물론 마음에도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윗과 같이 훌륭하게 기름부음 받은 사람들에게는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충만하게 하셔서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는 것을 비상하게 느끼면서 살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성령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에게 그 직무를 감당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 능력과 통찰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지도력을 주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다릅니까? 그 당시엔 성령이 부어졌어도 항상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어떤 사람에게 성령이 부어지면, 하나님이 하고 싶은 일을 끝낸 다음에는 하나님이 그 성령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그것은 징벌을 통해서 사울처럼 걷어 가실 수도 있고, 징벌이 아닌데 하나님의 경륜이 끝나서 걷어 가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게 구약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한계였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주어지게 됩니다. 그게 굉장히 신령한 방식으로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하나님과 함께 함의 이 비밀은 구약의 사람들이 누렸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내주(來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방황하다 예수를 믿습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거듭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이 우리의 마음 안에 거하십니다. 그 성령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가집니다. 그리고 그 성령은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인간말종의 삶을 살아도 여러분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성령이 계십니다. 슬퍼하면서 계십니다. 괴로워하면서 계십니다. 그런데 떠나지는 않으십니다. 거기 계십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과제는 성령의 탄식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느끼는 비결이 뭐냐 하면 이성으로 머리를 굴려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진 말씀이 자신의 마음속에 침투에 들어올 때, 그리고 내 마음이 그 말씀 속에 상호 침투해 들어갈 때, 그때 거기에서 성령의 탄식하시는 모습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성령이 슬퍼하시는 것에 동참하면서 자기 자신을 슬퍼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회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놀라운 증거를 어떤 식으로 보여주시느냐 하면 그냥 일반적인 섭리를 움직여서 돈을 좀 더 벌게 해 주시고, 건강하게 해 주시고, 사업이 잘되게 해 주시고, 좋은 혼처를 만나서 시집 장가 가게 해 주시고, 이런 식으로만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해석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경제적으로 매우 쪼들려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뜻밖의 수입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너무 감사합니다. 그런데 돈 자체 때문에 감사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의 기도도 들어주시는구나.' '나를 하나님이 정말 가엾게 생각하시면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구나.' 이걸 느끼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닫혔던 샘이 터지면서 뭔가 속에서 기쁨과 새로운 힘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생명입니다. 그걸 성경에서 '예수생명'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8) 여기서 넘쳐나는 생수의 강과 같은 기쁨과 희망 그리고 소망과 사랑이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건성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절대로 그 진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진심을 다해서 주님을 찾고, 내가 아직 완전히는 모르지만, '오늘 설교자가 말하고 있는 저것을 내가 진짜로 내 마음속에 경험하기까지는 내가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나에게도 저것을 주시옵소서.' 이렇게 매달리는 사람들이 그것을 경험하고, 거기서 예수의 새 생명을 경험하게 됩니다.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결국은 끝났습니다. 그 전투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십 수 명의 군인이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고, 그리고 무기도 총알이 떨어져서 다 버리고 정처 없이 적군을 멀리 떠나서 어디론가 도망을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침판도 이미 없고, 어디로 가야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밤이면 별을 보면서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떴다가 지는 해를 보면서 방향을 결정하며 아군이 있을 거라고 추측되는 곳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 지쳤습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흙길 밖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먹을 것도 없습니다. 툭툭 쓰러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전우들이 도저히 걷지 못해서 쓰러지면서 눈을 부릅뜨고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돌봐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돌봐줄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약도 물도 양식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정신적인 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쓰러진 사람은 내버려두고 그냥 계속 앞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병사가 소리를 칩니다. '야! 민가다.' 소리를 칩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게 우물입니다. 그래서 이 군인들은 사력을 다해서 우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두레박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싸움하듯이 매달려서 앞섶을 흥건히 적시며 그 시원한 우물의 생수를 마셨습니다. 그 광경을 보던 동네 주민이, '저걸 어떻게. 우리 새끼 같은 아이들이, 저 군인들이 저렇게 굶주렸구나.' 그러면서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감자를 함지박에 하나 가득 삶아서 뜨끈뜨끈한 걸 가지고 온 것입니다. 병사들은 걸신들린 사람처럼 모여서 한 손에는 물컵을 들고, 한 손으로는 감자를 들고, 뜨거운 감자를 불면서 입에 처넣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이제 더 이상 못 먹을 정도로 배가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눈이 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죽어갔던 전우들 생각에 눈물이 납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찌 가든지 살아서 가족들에게 돌아가야 되겠다는 마음이 솟구치는 것입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육체의 생명입니다. 육체의 생명이, 마시고 먹으니까 육체의 생명의 힘이 다시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강철 같이 사는 사람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대게 과로사합니다.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항상 지칠 줄 모르게 사는 사람 없습니다.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짐짓 지어낸 행동일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그 사람 내면은 안 그렇습니다. 가장 명랑한 애들이 어두운 그림자가 있는 거 아십니까? 감추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력도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남의 도움은 너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설교 시간에도 몇 번 얘기했지만, 남에게 감동을 주는 삶이 존재감이 있는 삶입니다. 최근 한 석 달 동안 여러분 때문에 누군가가 감동의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까? 그런 삶을 사셔야 됩니다. 그게 돈으로만 하는 게 아닙니다. 마음 씀씀이, 그리고 이 고단한 인생길을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자비로운 마음, 진정한 건설적인 자아가 자신에게 시키는 말하자면 감동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감동을 받고, 연약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서 일으켜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픈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어깨에 손을 얹고 따뜻하게 위로하고, 밥이라도 함께 먹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계속 남의 일에 오지랖 넓게 나서면서 자기를 낭비하는 삶을 사는 것 같지만,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자존감이 있습니다. '나는 굉장히 쓸만한 사람이다.' 그게 교만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나는 하나님 앞에 쓰임 받고 있는 사람이다.' '내 주위의 이웃을 위해서라도 내가 살아있는 것이 훨씬 좋은 것이다.' 이런 자기 암시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이 참 특이한 게 자기에게 골몰하고 들이파게 되면 아무리 손톱이 다 빠지고 피가 철철 흐르도록 땅을 파도 행복이 안 나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파 보십시오. 거기에는 파자마자 놀라운 행복의 보화들이 쏟아서 나옵니다. 그리고 '나라는 인간이, 내가 섬기는 저 사람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소중한 사람이었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게 삶의 환희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에베소서(2:10)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셨다"라는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돕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연약하니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살아가면서 윤활유와 같은 것입니다.음식을 먹는데, 그냥 먹어도 먹을 만 합니다. 그런데 향신료 하나만 더 치면 그렇게 풍미가 좋고, 너무 너무 맛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조금만 했는데(맛이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런 섬김들은 우리의 인생에 놀라운 풍미를 더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착한 삶을 살라고 하신 뜻입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언제까지 그렇게 인생을 살겠습니까? 남이 얼마나 도와주면 내가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과연 남의 동정심을 힘입어서 내가 영원히 내 삶을 지속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기 인생은 결국 자기가 살지 않으면 아무도 대신 살아주지 않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두 번 반복하겠습니다. 살아가지 않으면서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살아가지 않으면서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살아가지 않으면서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기를 파괴하는 행복입니다. 마약 중독 같은 게 그런 것입니다. 살아가지 않아도 행복한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금기(禁忌)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어느 때든지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자기의 삶에 자신이 주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삶이어야 됩니다. 그래서 광신(狂信)을 성경이 책망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광신(狂信),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모든 것들이 너무 좋은 섬김이지만, 그것으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대안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 안에서도 내게 있는 것 같은 생수의 강이 터져서 속에서 현실을 이길 수 있는 어떤 신령한 힘들이 내 안에서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내 앞에 많은 난관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내 운명을 낙타처럼 운명으로 받아들이면서 괴로움을 모두 짊어지고 생각 없이, 있지도 않은 대상에게 충성하면서 그런 식으로 살지는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싫다고 산산이 해체했지만 자기가 살아갈 삶을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는 사자 같은 그런 광포한 삶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 태어난 아이처럼 자기 앞에 펼쳐지는 모든 세상의 상황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어떤 일이든지 소외되지 않고 자기가 거기 참여하면서,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이 일치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호하게 내가 살아있는 것이 인류의 행복을 위해 분명히 내가 없는 것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는 주체적인 판단을 가지고 살아가는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그것이 아모르 빠띠(Amor fati)입니다.
바로 그런 삶을 주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그 임마누엘을 우리 배에 생수의 강처럼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하나님의 이 생명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나타나고, 그것을 우리가 우리의 것으로 쓰는데 있어서 절대적인 방해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옥체를 깨뜨리심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죄의 담을 무너뜨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과 뜨거운 화해의 포옹을 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사랑을 느끼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제 한 번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품에서 그분의 가슴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분의 마음이 내 마음에 침투하고, 내 마음이 그분의 마음속에 들어가, 그분은 하나님이고 나는 사람이지만, 두 마음이 하나가 되어서, 주님이 이 세상이 계셨더라면 살았을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처럼 주체적으로 하나님 사랑을 마음속에 가지고 모든 사람들의 짐을 지며 아무것도 남의 짐이라고 여기지 않고 자신의 삶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아모르 파티(Amor fati)의 삶입니다. 그게 결정된 삶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동행 하면서, 그 임마누엘 때문에 내가 예전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새롭게 전개되는 새로운 의미와 새로운 행복을 가져다주는 삶을 헤치면서 내 자서전은 내가 써내려 가는 것입니다. 예수가 함께 (쓰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모르 파티(Amor fati)의 삶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은 일생동안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가운데 남의 삶도 아니고 자기 삶도 아닌 우울한 삶을 살아갑니다. 자기도 왜 살아 있는지 이유를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 버리기에는 한 번 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너무 너무 아름답고, 너무 너무 소중한 것입니다. 한순간 한순간이 (소중합니다.) 죽음 앞에 서 본 사람들만이 이 말의 의미를 압니다.
III.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여러분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평화, 그리고 마음속에 어떠한 그림자도 없는 삶입니다. 완벽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적어도 하나님 앞에 뒤에서 호박씨 까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을 모두 보여 드리며 주님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고, 내 슬픔을 주님의 슬픔으로 삼아 주시도록 자신 있게 소통할 수 있는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내 행복은 하나님 바깥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주님과 함께 살면서 나는 그 안에서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내 인생은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의미를 내 마음에 간직하면서 사는 길이다.' 이렇게 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을 아이가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도 놀이하지 않듯이 그렇게 주체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면서 살아가는 삶, 그게 연약하지만 위대한 성도의 삶입니다. 여러분이 지난해까지의 삶은 세월의 강물에 떠내려 보내십시오. 그리고 이 삶을 선택하십시오. 그리고 주님과 함께 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침투하고, 여러분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젖으십시오. 그래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약속을 이루는 생활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우리는 범사에 모세에게 순종한 것 같이 당신에게 순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당신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강하고 담대하소서 아멘.”(수 1:16-18)
I. 본문해설
하나님께로부터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확실한 약속을 받은 여호수아는 구체적인 정복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먼저 백성의 관리들에게 잠시 후 시작될 가나안 정복을 위한 전투에 필요한 양식을 준비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모세 시대 때 이미 가나안 이쪽 땅을 분깃으로 받은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 사람들에게 땅은 여기에 이미 받았으나 가나안 정복을 위한 형제들의 전투에 함께 참전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얼마나 구체적입니까? 우리도 한 해를 잘 살아내기 위해서는 결심도 필요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계획하고 실천할 것인가 하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이 한 해를 정복하고 승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II. 약속을 이루는 생활
하나님의 약속은 주어졌습니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 스스로 싸워야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경험하며 이스라엘의 신앙은 더 돈독해질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구원에는 이미 죄와 더불어 싸워 이길 수 있고, 세상과 겨루어 승리할 수 있으며, 자기 자신과 더불어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약속의 보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약속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은혜를 구합니다. 이 은혜는 우리에게 사랑을 주고, 사랑은 우리의 선한 의지를 강하게 하여 예전에 할 수 없었던 일을 위해 분발하여 살게끔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은 약속을 받은 것에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 약속을 이루는 구체적인 생활과 실제적인 실천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이 역사하는 위대한 증거를 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의 삶을 승리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약속을 받았어도 그 약속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실제적으로 생활할 계획을 갖지 못한다면 그 약속은 성취되지 못합니다. 그 삶은 결코 우리를 승리하는 삶으로 이끌지 못하고 한 해를 정복하며 승리하게끔 하지 못할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을 이끄는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구체적으로, 실제적으로 이루기를 계획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도자에 대한 순종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말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자기들에게 말씀하고 계시고, 이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크게 두 가지를 보여 줍니다.
A. 사명감
첫째는 사명감입니다. 그들은 사명감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가나안 정복을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주님은 이미 주셨지만, 주신 것을 취하러 가는 것은 자신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16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수 1:16) 얼마나 아름다운 대답입니까? 지도자 여호수아가 그들을 어디로 보내든지 그들은 가나안 정복을 위하여 갈 것이라고 다짐했습니다. 물론 이 말은 바로 여기에 나오는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의 지도자들의 대답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함께하고 있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장들이 듣고 있는 대답이었으며, 이미 기업을 받고 전쟁에 참여하는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지도자들도 역시 이 고백에 동참했던 것입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지도자와 한마음이 되어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겠다는 순수한 열정에 불탄 적이 언제 있었습니까? 그러나 이들의 마음은 지금 하나님 앞에 한없이 순수해졌습니다. 그리고 바로 자기들 앞에 펼쳐진 가나안 땅이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땅이며, 아무리 강한 민족이 거기에 살고 있을지라도 자신들이 반드시 정복할 것이라는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바로 이들의 사명감이 되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사명감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소명에서 사명이 나오는데, 소명은 하나님이 불러 주신 것입니다. 불러 주신 하나님을 의식하지도 못하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사명감이 생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를 의지하며 산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굳게 신뢰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면서 자기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에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소명입니다. 그리고 이 소명을 깨달음으로써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시고, 여기에 살아 있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느끼는 마음의 의무감과 불타는 열정을 우리는 사명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올바른 믿음은 반드시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게 만들어 줍니다. 주님을 제대로 믿고 만나기 전까지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자기는 이 세상에 살아갈 뿐이라는 양자(兩者)의 구분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연결은 매우 희미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아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자신과 맺고 있는 관계가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믿음을 통해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에서 자신만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드릴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관계들을 바로 이 믿음으로 채우게 됩니다.
예전에는 그저 한 집안의 아빠요 남편이었는데,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이 가정을 주신 것을 깨닫고, 아빠의 소명을 주신 것을 깨닫고, 남편의 소명을 준 것을 깨닫습니다. 주께 하듯이 아이들을 양육하고, 주께 하듯이 직업에 봉사하고, 주께 하듯이 한 아내의 남편이 되고자 노력합니다. 이것은 아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도 은혜를 받아 보십시오. 예전에는 그런 생각 없이 살았는데 하나님을 만나고 보면 어린아이의 마음에 '나를 이 가정에 태어나게 해 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에게는 어떤 아들이, 그리고 교회에는 어떤 자녀가 되어야 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각자 각자의 사명입니다. 그것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감동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믿음으로도 가능한 것입니다. 이 약속을 받은 감동을 간직하고 실제의 삶에서 그것을 실천하며, 순종하며,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구체적인 생활이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일매일 자신은 죽고 예수가 사는 은혜 생활로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일매일 은혜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진정한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손에 붙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가 어떤 소원이 있어서 그 소원을 성취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성취하고 나면 이제 여한이 없다고 죽으면 행복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습니다. 살아있는 한 인간은 그 이상의 꿈이 생깁니다. 이것은 세속적으로도 마찬가지고,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에게 세속적으로 집을 하나 샀으면 좋겠다, 아니면 땅을 샀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다고 치겠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모두 얻었다고 치겠습니다. 그러면 기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쁜 것이 며칠이나 가겠습니까? 더 큰 집을 원하고, 더 넓은 땅을 원할 것입니다. 더 잘 되는 사업을 원할 것입니다. 욕심에 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령한 방식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섬깁니다. 교회가 부흥하기를 바라고, 또 여러분이 지체들을 돌보면서 그 지체들이 은혜받기를 원한다고 치겠습니다. 모든 지체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교회는 놀랍게 부흥했습니다. 거기서 끝나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욕심이 끝이 없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교회가 부흥해도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그를 눈물로 기도하게 만들 것입니다. 자기가 돌보는 구역의 식구들, 순의 식구들이 아무리 믿음 생활을 잘해도 더 온전한 믿음 생활하기를 바라게 될 것입니다. 변화받지 못한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모임에 와서 새 사람이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복이라는 것은 어디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 자체가 과정입니다. 꿈을 따라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하나를 이루고 또 하나를 이루어 가는 보람찬 과정, 이것이 행복입니다. 이 행복의 관점이 잘못되었을 때 인간은 증대되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비참한 삶을 살게 되고, 자신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꿈에 정초(定礎)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은 그 꿈을 찾아서 이루어 가면 이루어 갈수록 자신을 완성해 가는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사명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행복은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순간의 인생을 살아도 영원한 의미를 거기서 발견하며, 느끼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웬만하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행복입니다.
문제는 하고 싶어 하는 그 욕망이 파괴적이고 병리적인 자아가 시키는 것인지, 건강하고 신령한 자아가 시키는 것인지 구별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고, 구원받은 즉시 우리는 하나님의 군대에 입대한 군인들입니다. 우리의 보람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을 몰랐을 때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았지만, 이제는 사명감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르셨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은 세 번 태어납니다. 첫째는 육체로 부모의 몸에서 태어납니다. 두 번째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면서 사명으로 다시 한번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는 즉시 사명을 발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많은 성화의 생활을 거치면서 비로소 자기가 여기에 있는 것, 자기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 내가 바로 이 땅에 살아 있고, 나와 관계를 맺은 사람 속에 있게 하신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이 아니면 결코 살아낼 수 없는 독특한 하나님의 소명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믿음으로 사명감을 느끼고, 그 일을 통해서 이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라는 것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데에 인간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자존감이 있는 것입니다. 자존심과 자존감은 다릅니다.
며칠 전에 기사에 보니까 한 여자가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우측 깜빡이를 켰습니다. 뒤에 오는 차가 우측으로 이 여자가 가는 줄 알고 운전을 하다가 갑자기 깜빡이 킨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핸들을 틀고 자기 운전을 방해했습니다. 그런데 미친 듯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자 가는 길을 딱 가로막고 차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 막 소리를 치며 욕을 욕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성도 대단합니다.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막 삿대질을 했습니다. 여자가 막 삿대질을 하니까 남자가 여자의 가슴을 밀쳤습니다. 본네트에 쓰러뜨렸습니다. 여자가 막 손을 흔들면서 이 남자를 때리면서 대드는 것입니다. 이 남자가 발로 차서 길가에 쓰러트리고 밟아 버렸습니다. 그때 지나가는 운전사들이 놀라서 뛰어나와 싸움을 말렸습니다. 법원까지 갔습니다. 1년 6개월의 징역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화가 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운전하다보면.(화가 납니다.) 그런데 얘기를 걸어 봐서 저 사람이 내 이야기가 안 통할 사람 같으면 거기서 멈춰야 합니다. 그게 이성적인 삶입니다. 멈춰야 합니다. 그런데 멈추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끓어오르는 대로 폭발했습니다. 결국은 자존심입니다. 그렇게 뭐라고 하면서 내렸는데 여자가 창문 열고 방긋 웃으면서 “죄송합니다.” “제가 깜빡이를 켰는데 반대방향으로 운전했네요.” “마음 상하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그것도 모자라면 문 열고 나와서 고개 한 번만 숙이고 인사하면 될 텐데 그걸 안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남자도 여자가 벌써 대드는 게 범상치 않다고 생각되면 일이 나겠다고 생각하고 접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못 접는 사람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뚝 떨어진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자존심이 강할 때 파괴적인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자존심을 잘 꺾는 사람은 자존감이 충만한 사람들이 그것을 잘하는 것입니다. 그까짓 게 뭐 중요합니까? 한 번 내가 기분 상했어도 더 큰 일을 면하기 위해서 그냥 지나가자고 할 수 있는 아량과 관용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자녀의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고 사명감을 가지고 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존감을 충만하게 채워 주십니다. 그래서 어떤 정도의 생각을 갖느냐 하면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은 이렇게 아름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가진 자존감의 사람이 세계가 망가진 것에 대해서 책임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아서 여기에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아름답게 가꾸게 하기 위해서 나를 세우셨다는 사명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연약하지만 이 땅에 살아 있어야 하는 고귀한 이유와 목적을 발견하게 하고 그런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 사명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 코에 호흡을 주신 하나님, 아침에 나를 눈 뜨게 하신 하나님, 나를 입히시고, 먹이시고, 나를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이유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나는 바로 그 목적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사람들만이 자신감 있는 삶을 살 수 있고, 마지막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쁘고 치열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관계없는 것이라면 세상과 육신을 위한 노예살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게 미친 듯이 사업하고, 미친 듯이 돈 벌고, 전쟁하듯이 재산을 모으고, 혹은 여러분이 업적을 쌓아서 무엇하겠습니까? 오늘 밤에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결국 신앙의 근본은 사명감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내가 무엇을 하고 살든지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세우셨다는 믿음,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나는 지금 주님을 섬기고 있다는 확고한 신념, 그 속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위해 하나님 앞에 자신 있게 아뢸 수 있고, 하나님이 내가 하는 이 일을 도와주실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탈출했지만, 사명감 없이 광야에서 살아갈 때는 애굽의 노예살이보다 낫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그들도 다시 노예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삶은 놀이가 아닙니다. 사명을 따라 사는 삶은 소꿉장난이나 오락이 아닙니다. 인생은 훨씬 진지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명을 받아들이고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분투하는 정신과 생활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은 여호수아에게 말했습니다. "···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수 1:16) 이게 마음속에 사명감이 충만해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 사람들은 자기 가족들과 아이들은 다 이 땅에 놔두고 남자들만 출전하는 것입니다. 자기 땅은 이미 다 기업으로 받았고 남의 기업을 위해서 싸우는 데, 돌아올지 못 돌아올지 모릅니다. 전쟁에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뭐라고 그러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 우리가 ... 우리가 ... 우리가..." 마음속에서 사명감이 충만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의 사명은 개인적인 동시에 공동체적인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은 기꺼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목숨을 건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명감입니다. 그러므로 올 한 해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은혜를 많이 받고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나의 사명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나를 이 가정에, 이 직장에, 이 교회에, 여기에 세워 놓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무위도식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물어보며 하나님 앞에 사명감을 가지고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순종함
마지막으로 "순종함"입니다. 그들은 순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가나안 정복이라는 사명을 받아들이면서 그들은 제일 먼저 순종하기를 결단했습니다. 17절이 말합니다. "우리는 범사에 모세에게 순종한 것 같이 당신에게 순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 (수 1:17) 이 고백을 들었을 때 여호수아의 마음이 얼마나 가슴 벅찼겠습니까? 전설적인 지도자 모세에 비하면 여호수아는 아주 어린 지도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에게 순종한 것과 똑같이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순종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가나안 정복이라는 사명을 이룰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지 한 사람 여호수아에 대한 복종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복종이었으며, 사명감에서 우러나온 순종이었던 것입니다.
그 대신 그들은 오직 한 가지를 소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갈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해주셨던 것처럼 여호수아도 하나님이 그렇게 함께 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합니다. 다만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는 방식이 모세를 통해서는 기적을, 여호수아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통해 함께 해 주셨다는 사실이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용기와 자신감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무엇을 명령하시던지 순종할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어린아이 같이 착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사명감을 느끼고 온전히 순종함으로 기적을 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자라면서 모든 광경을 보았습니다. 조상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 어떻게 비참하게 죽어갔는지 보았고, 그들의 삶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목격하였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순종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병사와 군대, 무기를 믿지 않았습니다.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여호수아를 통하여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으면서 그들은 가나안 정복의 대업에 발자국을 들여 놓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면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은 단지 약속을 받았으나, 이들은 이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참이었습니다. 모세와 비교되지 않는 연약한 지도자 여호수아를 통하여 모세가 결코 이룰 수 없었던 위대한 일을 계승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능력을 행하는 모세보다는 자신들이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을 더 순종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지도자의 능력을 통해서 아니라 오히려 백성들의 온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위대한 일이라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깨워 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을 맹세한 것은 개인적인 동시에 공동체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우리가... 우리가... 우리가..." 라는 말을 네 번이나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개인의 순종을 기뻐하시지만 공동체적인 순종을 더욱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온 가족이 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가정생활을 이루어 가려고 꿈꿀 때 하나님은 여러분의 가정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가족들이 마음이 일치되지 않았을 때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놀라운 은혜를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순종은 너무 아름답고 고귀하지만, 그 사랑이 모두 합쳐져서 총화(總和)를 이루어 교회 전체가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할 때 하나님은 놀라운 은총의 증거를 그들에게 보여 주십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순종을 통해서 보다는 교회 전체 순종을 통해 하나님은 더 큰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해 잊혀지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교회와 기도』라는 시리즈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헌신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교회적으로 놀라운 은혜를 베푸셨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는 방임했던 우리의 많은 삶을 신앙의 밧줄로 묶어 하나님 앞에 가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통제할 수 없이 날뛰었던 우리 삶의 모든 상황들이 기도의 밧줄에 묶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들이 우리 주님이 주시는 능력 안에서 우리의 힘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수많은 간증들이 나왔습니다. 만약에 한 사람이 그렇게 기도했다면 아마 그만큼 효과를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리는 화살과 같습니다. 밀집 대형을 이루어 높이높이 화살을 쏘아 올릴 때 그 화살은 놀라운 능력이 됩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이르는 기도가 됩니다. 순종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의 순종은 너무 고귀하지만 손에 손잡고 모든 가족이, 손에 손잡고 모든 구역과 순, 손에 손잡고 온 교회가 한마음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순종할 때, 우리는 기대하지 못했던 놀라운 간증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올 한 해 온 교회 성도들이 이런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순종하는 한 해가 됩시다. 그래서 이제까지 불순종하며 살 때는 맛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을 맛봅시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나를 사람으로 만드시고 이 교회에 있게 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물읍시다. 사명을 받고 순종함으로 이기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이제 새롭게 시작된 한 해를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인생이라는 광야에서 다시 불순종함으로 방황하고 고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순종함으로, 사명감을 깨달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시겠습니까? 노예로 살고 방황하고 고생하는 대신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정복자의 삶을 살아서 올 한 해가 여러분의 해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