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리는 말씀
2022-2023년
주일오전설교
설교기간 | 2022년 12월 11일 – 2023년 03월 19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3년 05월 31일
목 차
1. 고난 중에 위로하심(시 119:49-50) 2022.12.11 주일오전 17
2. 인생의 밤에 기억한 것(시 119:54-55) 2022.12.18. 주일오전 25
3. 선대하시는 하나님(시 119:65-67) 2023.01.01. 주일오전 32
4. 주의 법을 배울 때(시 119:70-71) 2023.01.08. 주일오전 41
5. 말씀을 일으켜 세우실 때(시 119:38) 2023.01.16. 주일오전 49
6. 말씀의 인도를 받으라(시 119:105-106) 2023.01.22. 주일오전 63
7. 영혼이 진토에 붙었을 때(시 119:25) 2023.01.29. 주일오전 70
8. 내 영혼이 녹을 때(시 119:28) 2023.02.05. 주일오전 81
9. 고난을 이기게 한 즐거움(시 119:92-93) 2023.02.12. 주일오전 92
10. 내 눈물은 시냇물처럼(시 119:135-136) 2023.02.19. 주일오전 101
11. 말씀을 깨닫게 한 것(시 119:145-146) 2023.02.26 주일오전 111
12. 부르짖고 묵상하라(시 119:147-148) 2023.03.05. 주일오전 120
13. 간구하고 깨닫게 하소서(시 119:169-170) 2023.03.19. 주일오전 127
<설교 프레임>
나를 살리는 말씀1 2022. 12. 11 주일 낮예배
< 고난 중에 위로하심 >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시 119:49-50)
I. 본문해설
시편 119편은 ‘하나님 말씀의 영광의 장’이라고 일컬어진다. 표제어에 작시자(作詩者)가 누구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다윗(David)의 작품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이들이 많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다양한 삶의 상황(狀況)에서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된 경험들을 노래하고 있다.
특히 본문에서는 고난(苦難)을 통해 새롭게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의 세계를 깨달은 경험을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II. 고난 중에 위로하심
시인이 어느 시기에 어떤 상황을 겪으며 이 시를 썼는지 명확하지 않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받은 위로(慰勞)를 찬송하고 있다.
A. 말씀으로 위로하심
고난받기 전에는 마음에서 잊고 있던 어떤 말씀이 시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그 말씀 때문에 소망(所望)을 갖게 되었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시 119:49)
시인은 자신을 ‘종(servant)’이라고 칭하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한다. 이는 너그러운 상전의 자비(慈悲)를 덕 입어 살아가는 노예를 떠올리게 한다.
시인은 고난을 통해서 배웠다. 하나님을 의지(依支)하는 마음이 얼마나 컸는지를 깨달았다. 고난은 우리 마음을 낮아지게 한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라는 간구는 아마도 언젠가 받았던 신탁(神託)의 말씀이나 성경을 통해 특별히 깨달은 약속(約束)을 가리키는 듯하다.
시인은 그 약속의 말씀 때문에 은혜(恩惠)를 받았다. 절망 속에서 변화된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고백한다.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시 119:49下)
고난 속에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 살아갈 희망(希望)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고난을 해석하며 살아갈 마음의 힘이 남아있는 동안에는 견딜 수 있다.
신앙은 희망으로 자신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 희망은 믿음에서 오는 것이고 그 믿음(faith)은 말씀을 깨닫는 데서 온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삶의 현실이 내 뜻대로 전개되지 않을 때가 있다. 어떤 때는 현실을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어떤 때는 한걸음 떨어져서 인생을 바라보아야 할 때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가 겪는 어려움들을 통해 이제껏 익숙해진 관점(觀點)과는 다른 방향에서 자기 인생을 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약사인 사형수의 회심
사는 것이 힘들 때마다 지난날을 추억하라. 인생(人生)의 위기 속에서 주님이 만나주셨던 것을 기억하라.
그때 은혜를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지금 그 약속의 희망으로 자신을 설득(說得)하라.
어떤 처지에 있든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라. 말씀 앞으로 다가가라.
책이든, 성경이든, 설교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일에 마음을 기울이라.
B. 내 영혼을 살리심
시인은 그렇게 기억난 말씀으로 고난 중에 위로(慰勞)를 삼았다. 그것은 “낙심하던 날의 위로”였다.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끝없이 이어지는 메마른 사막 위에 오아시스이며, 밤 깊은 나그네 산길에 저 멀리 눈에 띄는 오두막집의 불빛이 아닌가?
시인은 자신을 조롱하는 교만한 자들과 율법을 버린 악인(惡人)들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시 119:51,53).
만약 고난받을 때 외롭지만 않다면, 그것은 진짜 못 견딜 고난은 아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 고통과 함께, 모든 사람에게서 버림받은 것 같은 고독감이야 말로 절망(絶望)의 입구다.
그래서 외로움은 진리의 대문으로 들어가는 앞마당이 되기도 하고, 절망의 어두움 속으로 도망치는 뒷마당이 되기도 한다.
절망은 육체와 마음이 죽음(death) 앞에 서게 되는 경험이다. 거기서 희망으로 자신을 설득할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事實)이 아니다. 영혼의 어두움 때문에 그리 생각하는 것이다. 절망감 때문에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위로(慰勞)다. 힘들고 상한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위로다.
*고난과 위로의 경험
절망에 빠진 상황에서 사람의 위로도 그런 힘을 발휘한다면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 인생을 얼마나 많이 바꾸겠는가?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시119:50下)
1. 말씀으로
고난 속에서 생기를 잃어가던 시인의 영혼을 말씀으로 변화시키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은혜받기를 원하신다. 말씀을 깨닫고 감화(感化)를 받아 당신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세상 사랑에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진리의 미각(味覺)을 잃어버린다. 영적 양식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진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때려서 일깨우신다. 영적으로 깨우셔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우리 인생(人生)을 보게 하시기 위함이다.
2. 생명으로
하나님의 말씀에는 영적 생명(生命)이 있다. 죽은 영혼을 살리셔서, 우리의 병든 마음을 고친다. 우리의 삶을 바꾸신다.
*마음의 병과 의지
선(善)한 일을 생각할 때, 그렇게 하고자하는 마음과 실제로 할 마음이 같지 않는 것이 마음의 질병이다.
우리의 생각과 의지(意志) 사이의 모순이 거기서 생겨난다. 그것은 영혼의 생명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은혜는 생명을 준다.
하나님은 말씀을 깨달을 때 생명(生命)을 주신다. 이 생명은 성령을 통해 주신다. 말씀의 은혜만이 영혼을 살린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이 신앙적(信仰的)으로 잠든 우리를 어떻게 깨우시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심으로 멀었던 마음의 눈을 뜨게 하신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비우라.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다가가라. 하나님은 고난 중에 위로하셔서 다시 살게 하신다.
나를 살리는 말씀2 2022. 12. 18 주일 낮예배
< 인생의 밤에 기억한 것 >
“내가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들이 나의 가 되었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시 119:54-55)
I. 본문해설
인생은 여행과 같다. 항상 밝은 햇살이 비치는 날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비 내리고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비바람과 눈보라 몰아치는 어두운 때를 지나기도 한다.
깊은 밤 끝 모를 어두운 골목을 홀로 걷는 것과 같은 인생(人生)을 지나야 하는 때에 어떻게 세상과 자신을 이기며 살 수 있을까?
II. 인생의 밤에 기억한 것
시인도 그런 때가 있었다. 근본적으로는 이 세상의 불완전함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악인의 불법과 자신의 허물 때문에 그런 때를 지났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던 시인에게는, 인생(人生)의 어두운 밤을 지나는 비결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의 은혜(恩惠)였다.
A. 율례가 노래가 됨
먼저 시인은 자기가 사는 세상(世上)을 규정한다. 그것은 또한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세상 사람과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는지를 말해 준다.
“내가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들이 나의 가 되었나이다”(시 119:54)
그는 자기 인생을 “내가 나그네 된 집에서”라고 말한다. 이 표현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어쩌면 중의적(重義的)으로 사용했을 수도 있다.
좁은 의미로는, 시인이 자주 박해(迫害)를 당해서 이리저리 도망 다니던 경험을 반영하는 것이다.
넓은 의미로는, 인간의 운명(運命)을 가리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서 죽는다. 산다는 것은 그 출발에서 종착을 향해가는 것이다.
시인에게는 거기가 대적에게 쫓기는 광야(曠野)의 동굴이든지, 왕궁이든지 마찬가지였으니, 모두 나그네 길에서 잠시 머무는 집이었을 뿐이다.
“이 사람들은 … …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11:13~14)
그 고달프고 외로운 인생길을 어떻게 위로 받지 않고 지날 수 있겠는가?
그렇게 강한 사람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위락(慰樂)과 쾌락에 빠진다.
시인도 그런 인생길을 지났다. 비록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으나, 그 역시 인생길에서 기뻐서 웃고 괴로워서 울며 외로워서 고뇌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은혜(恩惠)의 비밀이 있었다.
“주의 율례들이()”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여기서 “율례(律例)”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삶의 규칙을 가리킨다.
나그네 인생길에서 고난 받던 날에, 시인(詩人)은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를 삼았다. 거기서 위로를 받고 힘을 얻었다.
인생의 무게를 줄이는 방법이 둘이 있다. 짊어질 필요가 없는 것을 내려놓아 무게를 덜어내거나, 짊어져야 하는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다.
B. 주의 이름을 기억함
나그네와 같은 시인이 인생길에서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비결(秘訣)이 있었다. 그것은 기억하고 지키는 것이었다.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시 119:55)
여기서 밤은 실제로 밤중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은유적으로 절망적(絕望的)이던 고난의 시기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시인은 자신이 그러한 때를 어떻게 견디며 살 수 있었는지를 고백한다.
“여호와여, 그 밤에 내가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였고, 당신의 율법을 준수하였습니다”(시 119:55, KNJ 私)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구약에서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한 기억을 뜻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기념(紀念)하는 것이다.
과거의 기억(記憶)이 현재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신앙에 있어서 지성(知性)의 헌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구약에서 “잊지 말라”, “기억하라”는 명령이 그토록 많이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억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거나 원한을 품는 것이다.
*애굽에서의 종살이/ 구원과 해방의 경험
성경에서 이름(name)은 단순한 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의 고유한 존재(存在)와 성품(性品)을 가리킨다.
누군가의 이름을 마음으로 부를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존재와 성품을 상기함으로 현재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좋은 뜻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곧 그를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과 완전히 동의어(同義語)이다.
시인은 어두운 밤 같은 인생의 날에 여호와의 이름을 기억(記憶)하였다.
자기 조상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기억하였다. 또한 그 언약(言約)을 따라서, 나그네 같은 인생길에서 언제나 신실하게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였다.
그때 받은 은혜와 감격을 다시 기억함으로 현실을 극복할 힘을 얻었다.
*김일성의 도움을 거절한 오정모 여사의 신앙
주기철 목사님은 일제의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7년간 옥살이를 하며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4월 21일 감옥에서 순교하셨다.
산정현교회에서 동상을 세우려했을 때 사모님은 호통치며 거절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일제와 투쟁한 것에 감사하며 상을 주려했으나, “목사님은 항일 투쟁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거부하였다.
해방 후 사모님은 유방암 투병 끝에 1947년 1월 28일 돌아가셨다. 죽기 직전 북한군 장교 2명이 찾아와서 가방 2개를 건냈다.
김일성이 보낸 것이었다. 지폐, 논밭과 적산가옥의 집문서가 가득 들어있었다. 그러나 받기를 거절하였다.
이 광경을 보고 어머니를 원망하는 아들을 앞에 앉혀놓고 시편 37편의 한 구절을 읽게 하였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 37:25)
이처럼 사람이 경건하게 산다는 것은 경건한 회상(回想)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 말씀 속에서 약속을 따라서 과거(過去) 거기서 행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기억함으로써, 그분의 존재와 성품을 지금(只今) 여기서 경험하는 것이다. 그때 현실을 이길 새 힘을 얻는다.
III. 적용과 결론
시인은 고난(苦難)의 날에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했다. 그 기억은 사랑이었고, 그 사랑으로 더욱 말씀을 지키며 살았다. 말씀으로 노래를 삼으며 위로를 받으며 살 수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인생의 어두운 밤을 이기며 살 수 있는 비결(秘訣)이다.
나를 살리는 말씀3 2023. 1. 1 주일 낮예배
< 선대하시는 하나님 >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믿었사오니 좋은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5-67)
I. 본문해설
묵은 해는 지나고 새해 아침이 밝았다. 한 날의 삶은 아침이 결정하고 한 해의 삶은 첫 달의 결심(決心)에 달렸다
어떤 일은 소원(所願)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뜻은 세워야하지 않겠는가? 당신은 무슨 뜻으로 한 해를 시작하려는가?
시인은 인생의 위기 속에서 수많은 고난을 겪었다. 거기서 아주 엎드러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영혼을 살리는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II. 선대하시는 하나님
시인은 고난을 겪으면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事實)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 우리를 다루신다는 것이었다.
모두 풍족함과 평안을 원하지 가난함과 불안을 바라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비록 악인(惡人)들에게 둘러싸이고 고통을 받았으나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거기서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시 119:65)
A. 종을 선대하심
그 모든 일을 겪으면서 시인은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는 자기가 하나님의 종(servant)이라는 사실과, 둘째는 그분이 언제나 자신을 선대(善待)하였다는 사실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되고 형통할 때에, 분수를 잊어버리고 교만하게 된다.
그러면 시련을 만나는 모든 사람이 겸손해지는가? 아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만이 겸손(謙遜)을 배운다.
겪은 고난의 시간을 돌아보니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를 지켜주셨다. 말씀의 약속대로 자기를 선대(善待)해주신 것을 깨달았다.
고난과 시련 속에서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는 사람들도 많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잊었다.
그런데 어떻게 시인은 지나온 인생길에서 선대(善待)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찬송할 수 있게 되었는가?
B. 계명을 믿음
그것은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다. 악인(惡人)들에게 시달리며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하나님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시인이 보여준 계명들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표현이었다.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할 때 우리는 그분께 대한 신뢰(信賴)를 토대로, 말씀을 믿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무한히 신뢰할 때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게 된다.
*하나님 사랑과 말씀의 경험
하나님을 만나면 말씀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믿음은 곧 하나님을 사랑(love)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그 사랑에 자기를 붙들어 매는 것이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자신이 하나님 사랑 안에 있음을 믿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God)의 품을 떠날 수 없음을 믿은 것이다. 그 사랑 안에서 태어나고, 살아있고, 죽을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기도한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믿었사오니 좋은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시 119:66)
시인(詩人)도 처음에는 시련 속에서 고통 받았으나, 나중에는 거기서 고난의 의미를 배웠다. 거기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배웠던 것이다.
말씀에 은혜를 받을수록 더욱 순종(順從)하기를 원했으니, 더욱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분투할 수 있었다.
그러면 시인이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가? 그렇지 않다. 원래 그가 고백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릇 행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말씀의 은혜를 받으며 주의 율례(律例)를 배우게 된 것이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
그의 삶의 동기는 이기적이고 마음은 바르지 않았다. 그러나 역경 속에서 자기를 살리는 말씀을 만났다. 변화를 받았다. 그러자 선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다.
고난(苦難) 당한 모든 사람이 말씀을 따라 살게 되는가? 그렇지 않다. 시인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영혼을 살리는 말씀을 만났기 때문 이다.
시련과 고난이 그를 고쳐준 것이 아니라 거기서 깨달은 말씀이 그의 죽어가는 영혼을 다시 살려주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下)
III. 적용과 결론
나를 살리는 말씀4 2023. 1. 8 주일 낮예배
< 주의 법을 배울 때 >
“그들의 마음은 살져서 기름덩이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0-71)
I. 본문해설
‘철 들자 죽는다’는 말이 있다. 젊었을 때는 열정(熱情)과 힘이 있다. 그러나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가 입체적이지 않다.
나이가 들면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생각이 바뀌어 성숙한 지혜에 이르게 되는데, 그때는 죽음을 앞둔 때라는 의미다.
이것은 꼭 부정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진리(眞理)는 탐구만 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산 세월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 세월이 무엇인가? 겪음이 아닌가? 온갖 일들을 겪으면서 성숙하게 된다.
그러면 그 겪음(passion)이라는 게 무엇인가? 그것은 놀고 먹고 누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만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인생을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하게 된다.
II. 주의 법을 배울 때
A. 말씀을 즐거워함
시인은 고난 속에서 믿음을 지켰다. 악인들은 하나님 앞에 교만한 자들인데 거짓으로 시인을 모함하며 괴롭혔다.
그들은 미워하며 악을 행하여 시인을 해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악을 악으로 갚아 복수(復讐)하는 대신 하나님의 품으로 피했다.
그는 말씀을 갈망하였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악인과 자신의 마음을 대조하여 고백한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들의 마음은 기름 덩어리처럼 살쪘으나, 나는 당신의 율법을 기뻐합니다”(시 119:70, KNJ 私譯)
악인(惡人)들의 마음은 기름 덩어리처럼 살쪘으나, 시인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가난한 심령이었다.
기름은 부유와 안락의 상징이다. 악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갈망(渴望)하지 않고, 세상 번영에 취해 있음을 보여준다.
악인들은 하나님 만나기를 간절히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일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가난으로 마음이 각박해져서 하나님(God)을 찾을 여유가 없다고 말하지 말라. 현실이 힘들어서 신앙생활을 못한다고 말하지 말라.
인생이 힘들어서 예수를 믿지 않았는가? 그렇기에 더욱 신앙이 필요하지 않은가? 인생이 힘들지 않았더라면 예수를 믿었겠는가?
신앙은 초월세계에 대한 믿음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죄(罪)와 함께 신령한 영혼의 감각은 무디어지게 된다.
*회심과 신령한 감각
그렇게 되면 자기의 현실을 하나님과의 관계(關係)로 연결시킬 수 있는 힘을 잃게 된다. 그 힘이 말씀을 믿는 신앙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을 향하여 선하게 질서 지워진 삶’이다. 그 삶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聖靈) 안에서 사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은혜에서 떠나면 이런 삶의 질서가 흐트러진다. 생활은 무질서해지고, 영적인 감각은 잃어버리게 된다.
*맹인과 손가락 지문
악인(惡人)의 마음은 기름에 잠겨 스스로 배부르고 만족하였다. 그러나 시인의 마음은 가난하고 궁핍하여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다.
그러나 시인의 갈망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제(交際)를 나누는 것에 대한 갈망이었다. 그런 갈망은 말씀을 깨닫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시119:70下)
세상 나라에서는 목마른 사람이 행복(幸福)하지 않고, 배고픈 사람이 만족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런 사람이 행복하다.
하나님 만나기를 사모하는 사람은 말씀을 깨닫기를 갈망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지성(知性)에 말을 거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기름진 현실을 꿈꾸지만, 마음이 기름져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징후인지를 잘 모른다.
활이 바이올린의 현(絃)을 긁고 지나갈 때 아름다운 곡조가 나오는 것처럼, 고난이 우리 마음을 긁고 지나갈 때 찬송이 울려퍼진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당신의 마음은 어떠한가? 여전히 그 법(法)을 즐거워하는가? 깨닫는 기쁨이 있는가? 하나님을 만나려는 갈망이 있는가?
B. 고난을 통해 배움
악인의 마음은 평안 속에서 기름 덩어리처럼 살쪘으나, 시인의 마음은 고난(苦難)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였다.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나의 영혼이 주의 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시 119:81)
시인은 고통 받는 삶의 과정들을 통과하면서 자기가 이전에 겪은, 그리고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의 의미(意味)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시인도 고난은 피하고 싶었다. 원수들을 멸하고 싶었다. 그래서 한때는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시 3:7)라고 찬양하지 않았는가?
고난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사실(事實)이 있다. 그것은 시인의 육체를 괴롭게 하였지만, 영혼에는 유익을 주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고난을 통해 무슨 유익(有益)을 받았는가? 무지를 깨우치게 되었다. 깨닫지 못하던 하나님의 율례들을 배우게 된 것이다.
고난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은혜(恩惠)를 갈망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결코 이해할 수 없었을 말씀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이로써 시인은 하나님을 새롭게 만났다. 영혼은 강한 힘을 얻었다. 고난 속에서 말씀에 은혜(恩惠)받기를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난(苦難)은 그에게 보다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주었다.
고난 속에서 말씀을 깊이 깨닫고 보니 그전에는 자기가 그릇 행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겪음 속에서 마음의 거울이 닦여 자기를 정확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狀況)에 있든지 하나님을 알기를 힘쓰라. 풍요 속에 기름진 마음이 되지 말라. 시련 속에서 낙심하고 좌절하지 말라!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 없이 세상(世上)에 만족하는 마음이나, 번영하기에 자신에 만족하는 마음은 모두 기름 덩어리처럼 살찐 마음이다.
신자가 그런 마음으로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낼 수 없다.
인생은 고통의 바다다. 그러나 그 바다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희망을 가지라.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라.
말씀을 깨닫고 은혜(恩惠)를 받으라.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새로운 인생을 살라.
나를 살리는 말씀5 2023. 1. 15 주일낮예배
< 말씀을 일으켜 세우실 때 >
“주를 경외하게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시 119:38)
I. 본문해설
시인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 말씀에 깊은 은혜(恩惠)를 받았다. 시련 속에서 그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있었다.
시인이 바라는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과 순종(順從)하는 것이었다. 33절부터 이어지는 기도가 이를 입증한다.
“주의 율례들의 도를 가르치소서 …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시119:33~34)
이제 시인의 시선은 자기 내면(內面)을 향한다. 말씀을 깨닫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 모두 마음의 문제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간구하였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 ”(시119:36~37)
II. 말씀을 일으켜 세우실 때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은혜를 받을 수도, 순종할 수도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특별한 기도를 드린다. “주를 경외(敬畏)하게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시 119:38)
간절한 기도다. 이 구절을 히브리어 성경에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당신의 한 말씀을 당신의 종에게 일으켜 세우소서, 그 말씀은 당신을 경외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시 119:38)
A. 말씀을 세우심
먼저 시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힌다. “당신의 종(your servant)”이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면서 자기가 누군지를 깨닫게 되었다.
자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통치(統治) 아래 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그 종은 억압받고 자율성(自律性)을 상실한 노예가 아니었다.
자유인이 될 수 있었으나, 기쁨으로 하나님의 집에서 그분을 섬기고 싶은, 자원하여 종이 된 자였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누구인가?
그는 하나님께 간구한다. “주의 말씀을 … 세우소서”. 여기서 “세우소서”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하켐()”인데 이 단어는 “일어나다, 서다”를 뜻하는 동사의 명령형이다.
이 단어의 원형은 문자적으로 “일어나다, 일어서다”는 뜻으로도 쓰이지만, 성경 여러 곳에서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결단(決斷)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스 10:4, 눅 15:18).
여기서 “말씀을 … 일으켜 세우소서”라는 간구는 자기 심령 깊은 곳에까지 감화(感化)를 끼치는 말씀의 은혜를 달라는 기도다.
시인은 누구보다도 말씀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더욱이 고난(苦難) 속에서 더 깊이 깨달았다. 말씀이 그를 일으켜 세워 주신 경험이었다.
시인은 많은 말씀을 깨달았다. 그러나 실제로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는 말씀은 따로 있었다. 지금 마음에 물결치는 말씀이었다.
설교를 얼마나 많이 들었는가? 성경(聖經)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가? 성경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는가?
그런데 지금 당신의 마음에 일으켜 세워진 말씀은 무엇인가? 어떤 말씀이 당신의 마음을 흔들어 깨워 힘을 주고 있는가?
한때 살아있었지만, 지금은 단지 지성(知性)의 창고에 누워 있는 지식으로는 신자의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
말씀이 마음 안에 일으켜 세워져야 한다. 지성을 때리고 깨달은 말씀은 마음에 세차게 물결쳐야 한다. 그 말씀이 신자의 삶을 살아내게 한다.
지금 당신의 마음에 우뚝 일으켜 세워진 말씀(Word)이 있는가? 그것은 무슨 말씀인가? 그 말씀이 파도치고 있는가?
B. 경외하게 하심
시인은 하나님께 자기의 마음에 말씀을 일으켜 세우시는 뜻을 생각한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告白)한다. “…그 말씀은 당신을 경외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시 119:38下)
성경이 가르치는 가장 이상적인 삶이 무엇인가? 그것은 삶의 동기(動機)가 하나님에 대한 경외에서 질서 지워진 생활이었다.
*경외의 두 요소 :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그 뜻이 마음에 물결치게 하심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敬畏)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경외의 삶은 떨리기까지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이끌리기까지 그분을 사랑하여 그분께만 붙어있는 삶이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사람만 그분을 참되게 사랑(love)할 수 있으니, 당신이 완전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下)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말씀을 주신다. 성령께서 은혜를 주셔서 그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강하게 물결치게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感化)다.
하나님은 이러한 은혜의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시고 친교(親交)를 누리게 하신다.
경외하는 자에게 더 깊은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깨달은 자의 마음에 말씀이 물결치게 하신다. 그가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있는가?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가?
마음을 오롯이 하라.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라. 당신의 마음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일으켜 세워지도록 간구하라.
나를 살리는 말씀6 2023. 1. 22 주일낮예배
< 말씀의 인도를 받으라 >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에 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시 119:105~106)
I. 본문해설
살다가 보면 갈 길을 알지 못하는 때가 있다. 오래 살아 왔고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었는데도, 어느 길로 가야할 지 판단을 내리기 어려울 때가 있다.
인생에서 불행(不幸)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만나는 불행의 수를 줄일 수는 있다. 악한 길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불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그 길이 옳지 않음을 알고도 걸어가는 사람은 스스로 불행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모르고 그렇게 하는 사람보다 더 불행해진다.
어떤 불행은 피할 수 없지만 겪어야 하는 고통(苦痛)은 줄일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정신의 훈련이 필요하다.
시련 앞에서 이렇듯 담대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양심(良心)을 거슬러 사는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다. 따라서 먼저 양심에 책망받을 일이 없도록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말씀에 은혜(恩惠)를 받고 하나님 사랑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 사랑으로 율법(律法)을 완성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사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靈)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지성(知性)을 통해 주의 말씀을 깨닫게 하심으로, 우리가 마음을 다해 하나님 뜻을 따라 살게 하신다.
II. 말씀의 인도를 받으라
시인은 자기가 당한 고난(苦難)에 관한 경험에 대한 얘기를 잠시 접는다. 오히려 자신이 고난 속에서 맛본 말씀의 은혜가 얼마나 컸는지를 말한다.
말씀을 깨달을 때 자신의 영혼을 깨쳤던 신령한 기쁨에 대해서 노래한다.
그에게 현실의 고난은 쓰디썼으나 깨달은 말씀은 꿀송이 같았다(시 119:103).
A. 인생의 등불과 빛
고난 속에서 깨달은 말씀은 시인(詩人)을 지혜롭게 하였다. 이전에 빠졌던 악을 철저히 미워하게 되었다.
앞으로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새롭게 이해하게 해주었다. 그것은 신령한 지혜(智慧)와 하나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에 이니이다” (시 119:105)
불행(不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자연적 불행과 도덕적 불행이다.
a. 자연적 불행 : 자연에 관한 지혜를 통해 막거나 최소화할 수 있다.
b. 도덕적 불행 : 도덕에 관한 지혜를 따라 막거나 줄일 수 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등불과 빛”이었다고 고백한다. 시인이 얼마든지 넘어질 수 있는 상황에서 지켜 주었다.
대낮의 큰길을 걸어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밤중이며, 한밤의 오솔길을 걸어도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대낮이다.
저 사람은 빛 아래서도 넘어지며, 이 사람은 어둠 속에서도 걸어간다.
당신의 인생(人生)의 등불은 무엇인가? 당신의 인생길은 빛 가운데 있는가?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으며 살라.
B. 말씀에 뜻을 정함
시인의 말씀에 대한 경험은 단지 고백(告白)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결단하여 뜻을 정하였다. 의지(意志)로 굳게 한 것이다.
시련 속에서 자기를 살려준 하나님을 기억했다. 말씀의 은혜를 되새기며 굳게 정한 결심(決心)이었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시 119:106)
여기서 “규례들”ּ이 히브리어로 미쉬페테(מִשְׁפְּטֵ֥י)인데, “공의(公義)들, 판단들”이라는 의미다.
“당신의 판단들과 의로움을 지킬 것을, 나는 맹세하였고 확정하였습니다" (시 119:106 KNJ 私譯)
그는 깨닫게 해주신 말씀대로 살 것을 하나님께 맹세하였을 뿐 아니라, 그 뜻에 순종하도록 자기의 마음을 굳게 확정(確定)하였다.
이는 마치 오늘날 맹세한 약속(約束)을 기록으로 남기고 법적 책임을 기꺼이 지겠다고 다짐하며 공증(公證)까지 한 것과 같다.
하나님은 뜻을 정하는 사람들에게 확정할 마음을 주신다. 다니엘이 그랬다.
“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단 1:8~9).
시인은 또 다른 고난의 상황에서 똑같은 경험(經驗)을 노래하였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시 57:7)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동굴에 숨어 지내던 때였다. 그의 영혼은 억울했고 원수들은 시인을 잡으려고 그물을 치고 깊은 웅덩이를 팠다.(시57:6)
그러나 시인은 그때 낙심하고 좌절하는 대신, 자신의 마음을 확정했다.
마치 흔들리는 물건을 벽에다 못으로 박아 고정시키듯이, 흔들리지 않을 결심(決心)을 했다.
오직 진리(眞理)의 말씀을 보내시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기로 했다.
그러자 시련 속에 도망 다니던 시인(詩人)의 마음에 찬송이 터져 나왔다.
“내가 만민 중에 오 주께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하리 영광 중에서 주의 인자는 커서,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넓은 궁창에 이르나니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당신의 마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확정(確定) 되었는가? 상황에 흔들리는 마음을 약속의 말씀에 고정하였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 마음은 지금 어디를 떠돌고 있는가?
“말씀에 은혜를 받자, 은혜를 받아야 해.” 말로만 하지 말자! 뜻을 세우라! 온 마음으로 말씀의 인도를 받도록 마음을 확정(確定)하라!
마음이 흐르는 강물 위에 지푸라기 같은데 어디서 안정을 찾을 것인가?
당신 자신(自身)이 마음을 확정하려고 하지 않는데, 누가 그 가련한 방랑자 같은 인생을 바꾸겠는가? 말씀에 뜻을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하고자 하는 자에게 할 일을 주시고, 가고자 하는 자에게 길을 인도해 주신다.
말씀을 등불 삼으라. 빛을 삼으라. 말씀을 듣기만 하지 말고 그 말씀대로 살기로 다짐하고 마음을 확정하자.
나를 살리는 말씀7 2023. 1. 29 주일낮예배
< 영혼이 진토에 붙었을 때 >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시 119:25)
I. 본문해설
앞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기쁨에 대해서 노래하였다.
그 말씀으로 자기 행실(行實)을 깨끗하게 하고 싶었고(시119:9), 눈을 열어서 율법을 깊이 깨달아 더 놀라운 것을 보고싶어 했다(시119:18).
말씀과 함께 사는 것이 시인에게는 행복(幸福)이고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말씀을 따라 살려는 시인에게도 영적인 위기가 있었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시 119:25)
II. 내 영혼 진토에 붙었을 때
이것은 외적인 환란보다도 시인의 영혼의 상태를 보여준다. 자신을 성찰하며 느낀 영적인 위기의식(危機意識)을 보여준다.
파도치는 시련 속에서 믿음을 지키는 것보다, 안락한 생활(生活) 속에서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더 쉽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이다.
A. 진토에 붙은 영혼
1. 진토와 같은 영혼
여기서 “진토(塵土)”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아파르'(apar)인데, 원래 ‘티끌, 먼지’를 가리킨다. 구약성경에서 이것이 비유적으로 쓰일 때는 흔히 “하찮은 것, 가치가 없는 사물”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영혼(nepesh)”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뜻이 다양해서, 주석가들에 따라 “영혼, 사람, 목숨, 목” 등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2. “붙었다”(dabeka)
이 말은 두 개였던 것이 마치 접착(接着) 되듯이 하나가 되어 버린 것을 가리킨다. 물리적으로가 아니라 가치에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혼이 진토에 붙었다는 것은 고귀(高貴)했던 자신의 영혼이 무가치하게 되어 티끌과 다름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두 의미를 종합해 볼 때 “영혼이 진토에 붙었다”는 것은 시인의 마음이 얼마나 절망적이고 비참(悲慘)한 상태인지를 암시한다.
이는 시인이 겪고 있는 영적 침체(spiritual depression)를 보여준다. 그의 마음 안에서 은혜로운 사랑의 질서가 흐트러진 것을 보여준다. 그때 시인은 자신의 존재(存在)가 무가치하게 여겨졌다.
신자가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되면, 이처럼 하나님 사랑으로 질서 잡혔던 마음의 질서는 무너지고, 자존감은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로는 평화로운 인생(人生)을 살 수 없다. 더욱이 자기 인생의 가치를 확신하지 못한다.
자기 존재의 가치를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어찌 인생의 의미(意味)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 결국 방황하게 되고, 삶은 목적을 잃게 된다.
어떤 사물이든 빛으로부터 멀어지면 반드시 어두워진다. 말씀의 빛에서 멀어질 때 마음은 영적인 어둠으로 가득하게 된다.
자기(自己)가 누구인지,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지 잊어버리게 된다. 비록 지식(知識)으로는 알아도 그렇게 살아갈 힘을 잃어버린다.
신앙으로 고난을 이겨내던 시인은 지금 깊은 영적 침체 속에 있다.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미래에 대한 희망(希望)을 잃어버렸다.
지금 당신의 영혼은 어떤 상태인가?
B. 말씀으로 살리심
시인에게 이런 침체 경험(經驗)은 처음이 아니었다. 일찍이 고난 속에서 은혜에서 멀어져 시험에 들었을 때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말씀을 깨닫는 생활이 사라질 때 영혼의 침체는 깊어진다. 마음은 혼란(混亂)을 겪게 되고 생활은 질서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그런 무질서한 삶은 우리로 하여금 무기력하고, 불순종하며 살게 한다. 그것들은 반드시 고통으로 돌아온다.
1. 살아나게 함
시인에게 자신의 영혼이 진토(塵土)에 붙은 것처럼 비참하게 되는 이유는 그때마다 각각 서로 달랐다.
때로는 안일한 삶 때문에, 어떤 때는 힘겨운 고난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서 영혼을 회복(恢復)시키시는 방법은 언제나 동일했다. 하나님께서 말씀(word)으로 영혼을 살아나게 해주시는 것이었다.
*영혼의 존재와 힘
인생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에너지(energy)를 필요로 하는가? 악(惡)을 행하기 위해서는 필요 없지만, 선(善)을 행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올바른 힘이 필요하다. 그 힘이 어디서 오는가?
영혼이 죽은 자처럼 되는 것은 우리의 죄(罪)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확 살아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恩惠)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에 은혜를 받을 때 죽은 자와 같았던 자가 새 생명을 얻는다.
그 영혼 안에 이 생명(生命)이 힘차게 역사하는 사람만이 큰 사랑(love)의 힘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 힘으로 환경의 시련을 이기고 연약한 자들에게 손 내밀어 줄 수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품에서 그분의 사랑의 고동(鼓動) 소리를 느끼는 사람들만이 사랑으로 힘찬 인생을 살아간다. 우리는 그를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 사랑의 힘으로 죄와 정욕(情慾)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된다. 그것이 거룩한 삶이고, 열매가 윤리적인 삶이다.
2. 말씀을 따라
그러면 진토에 붙어 버린 것 같은 영혼(靈魂)은, 무엇으로 다시 살아나는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리신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당신의 말씀을 따라(kedebareka)”라고 하였다.
이것은 “당신이 말씀하신 그대로”, 혹은 “당신의 말씀을 따라서”라는 뜻이다. 이는 약속을 지키심에 결코 어김없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준다.
이것은 진토에 붙은 것처럼 비참한 영혼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은 말씀의 능력(能力)을 통해 신실(信實)하심을 보여준다.
그의 신실하심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다. 그분의 말씀하심에는 거짓이 없고, 약속하신 바는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말씀을 믿는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이 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따라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과 및 과 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당신의 영혼은 어떠한가? 곤고하여 삶의 무게에 눌리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지 않으면, 은혜로 충만하여 주 예수의 생명으로 넘치는가?
어떻게 하면 그 지겨운 무게가 사라지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잊지 말라. 그것은 당신의 삶의 무게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마음의 무게고, 그 무게는 이 세상 사랑(love)의 무게다.
III. 적용과 결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력(生命力)이 있다. 생명을 잃어버려 진토에 붙은 것과 같이 된 자에게 새 생명을 주셔서 살아나게 하신다.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라. 오직 그것이 당신이 살 길이다.
하나님께서 비참하고 곤고하던 시인의 영혼도 살려냈으니, 반드시 당신의 영혼도 살려내실 것이다.
나를 살리는 말씀8 2023. 2. 5 주일낮예배
< 내 영혼이 녹을 때 >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시 119:28)
I. 본문해설
시인은 진토에 붙은 것과 같이 되어버린 자신의 영혼을 보게 되었다.
그는 극심한 영적 침체에 빠진 경험을 고백한다. 그때 자기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 말하면서, 회복을 위해 간구한다.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시 119:28)
“나의 영혼이 무거워 (방울 방울) 떨어지오니 당신의 말씀을 따라 나를 일으켜 주옵소서”(시 119:28, KNJ 私譯)
II. 내 영혼이 녹을 때
본문 바로 앞에서 자신의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라고 고백했다.
그것이 영적 상태의 미천함과 절망감(絕望感)을 보여준다면, 본문의 고백은 그의 내면 상태의 비참함과 무력감을 그림처럼 보여준다.
A. 눌림으로 녹음
그는 먼저 자신의 영혼과 마음, 정신세계에 대해서 말한다.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1. 영혼의 눌림
먼저 그는 “영혼의 눌림”에 대해 말한다. 여기서 “영혼(靈魂)”이라는 단어는 영혼의 고유한 실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기능인 마음과 정신세계까지를 아우르는 표현이다.
*영혼과 마음, 정신의 관계
자기 안에 있는 영혼과 밖에 있는 세계는 마음 안에서 만난다. 따라서 “영혼이 눌린다”는 표현은 “마음으로 그 눌림을 지각한다”라는 의미다.
우리말 성경에서 “눌림”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투가( )”인데, 원뜻은 “무거움(heaviness)”을 뜻한다.
그러면 시인이 느낀 무거움의 정체(正體)는 무엇인가? 그것은 두려움이 주는 무게였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방향의 두려움이었다.
외적으로는 자기를 둘러싼 환경(環境)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내적으로는 자신의 죄로 인한 심판(審判)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이것은 양심의 작용이었다. 양심에 가책에 따른 두려움은 종종 마음의 중압감을 넘어서 신체에까지 영향을 준다. 뼈까지 상하였다거나 냉과리 같이 되었다는 표현이 그것이다.
“대저 내 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냉과리 같이 탔나이다”(시 102:3, 개역한글)
이런 영혼의 무거움과 고통을 느끼게 하는 것은 양심(良心)이다. 때로는 무거움을 넘어서서 창으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을 함께 경험하는데 이는 양심이 사용하는 율법(律法)의 작용이다.
다시 말해서 의식 속에 있는 하나님의 법(法)이 죄를 콕 찍어 지적함으로써 변명할 수 없도록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느끼는 두려움의 감정이다.
이런 경험은 무지(無知) 속에서 더욱 큰 두려움으로 무게를 더한다. 때로는 숨을 쉬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기까지 신체에 영향을 끼치고 기절을 하기에까지 이르게 하기도 한다.
다시 평화를 누릴 가능성이 없을 것 같은 절망감(絕望感)은 이 무게를 더욱 심하게 해서 자신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 자체를 감당할 수 없을 무거움을 느끼게 한다.
산이 높으면 골짜기도 깊다. 시인은 하나님의 영광(靈光)을 깊이 경험한 사람이었기에 이러한 영혼의 눌림을 더욱 크게 느꼈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love) 안에서 영혼이 얼마나 가벼운지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이런 무게를 느낄 수가 없다.
하나님 사랑은, 우리의 영혼을 가볍게 하고 세상 사랑은 무겁게 한다. 이러한 고백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
이것이 바로 구원받았으나 죄와의 싸움에서 지고 있는 신자의 현실이다.
구원(救援)은 완전하고 안전하지만, 잔존하는 죄(罪) 때문에 불완전하기에 이런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더욱이 불완전한 세상에 살아가지 않는가?
하나님과의 신령하고 탁월한 교제(交際)를 누렸던 시인은 시련이라는 외적 환경과 두려움이라는 내적 무게를 동시에 느꼈기에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질서가 없는 곳에 불안이 있고 질서가 있는 곳에 평안이 있나이다.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이니 그것이 어디로 이끌든지 나는 끌려가나이다.”
A. Augustinus,『고백록』13. 9. 10.
2. 마음의 녹음
시인은 두려움 때문에 비상한 마음의 무거움을 경험하였다. 이 영혼의 무게는 마음이 자유(自由)를 상실했음을 뜻한다.
누가 시인에게 이런 속박의 짐을 지워주었는가? 누군가가 감당 못한 짐짝을 그의 어깨에 메워주었는가?
아니다. 그가 느낀 무거움은 정신의 억압이었고 마음의 강제력이었다.
거긴 자유가 없다. 자유란 “스스로 원하는 바를 선택하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상태다.”
시인은 그릇된 사랑의 무게로 두려움의 속박을 받고 있었다. 시인은 이러한 마음의 무게로 자신의 영혼이 “녹고 있사오니...”라고 고백한다.
이 표현의 동사는 히브리어로 “다레파( )”인데, 원뜻은 “(액체 따위가) 떨어지다, 떨어뜨리다”이다.
이것은 절망적 상황 때문에 마음이 놀라서 기운(氣運)이 뚝 떨어지고 지친 것을 의미한다. 비록 같은 히브리어 단어는 아니지만, 성경에서 “마음이 녹는다는 것”은 “큰 낙심으로 절망한다”는 뜻이다(수 2:11, 5:1).
당신의 영혼은 어떤 상태(狀態)인가? 마음은 가벼운가? 자유를 누리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무거운가?
그 무게로 마음이 방울방울 떨어지기까지 지쳐있는가? 절망하고 있는가?
B. 말씀으로 세움
시인(詩人)은 비상한 두려움을 경험하였다. 마음이 눌리는 것 같은 무거움과 영혼이 녹는 것 같은 두려움이었다.
시인은 자기가 의지할 분이 하나님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시 119:28下)
“...당신의 말씀을 따라 나를 일으켜 주옵소서”(시 119:28下, KNJ 私譯)
그가 직면한 문제는 단지 자기가 처한 현실(現實)이 아니었다. 고민은 현실에서 시작되었지만 그것은 시인의 내면세계가 얼마나 불안(不安)한지를 드러내 보여주었다.
거기서 시인은 현실과 싸우는 것만큼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자신의 영혼의 상태였다. 사랑의 무게로 인한 눌림과 두려움으로 녹는 마음의 문제였다.
그에 대한 해결책은 단지 원수가 멸망하고 교만한 자가 처단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영혼(靈魂)이 살아나야 했다.
그의 영혼은 쓰러졌고 마음은 무너져 있었다. 그래서 간구한다. “...당신의 말씀을 따라 일으켜 주소서”(시119:28下)
이는 앉아있거나 누워있는 자를 일으켜 세우는 것을 뜻한다. 비유적으로는 약한 자를 “강하게 한다(strengthen)”는 의미다.
뜻을 잃은 자로 하여금 다시 뜻을 세우게 하시고, 마음이 무너져버린 자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신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고난(苦難)에 처한 자들을 도우신다. 성령 충만할 때뿐만 아니라, 영적 침체에 빠졌을 때도 도와주신다.
이러한 영혼의 회복은 “당신의 말씀을 따라” 이루어진다. 주께서 언약하신 말씀을 따라서, 우리가 깨달은 말씀의 감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때때로 현실은 우리의 마음을 쓰라리게 한다. 우리가 기대하는 바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릇된 사랑의 무게로 상처(傷處)받고, 믿음 없는 두려움으로 마음은 녹아내리게 된다.
이때 해결책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 말씀으로 영혼이 다시 소생(蘇生)하는 것이다. 그 말씀에 은혜를 받는 것이다.
III. 적용과 결론
거기서 은혜를 주신다. 말씀을 깨달음으로 지혜를 얻으며, 뉘우침으로 용기를 얻게 하신다. 이것은 다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용기다.
나를 살리는 말씀9 2023. 2. 12 주일낮예배
< 고난을 이기게 한 즐거움 >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로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시 119:92-93)
I. 본문해설
시인은 많은 고난 속에서 어떻게 견디고 이기며 살 수 있었는지를 말한다.
그리고 그런 경험(經驗)을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되었는지를 고백한다.
II. 고난을 이기게 한 즐거움
시인으로 하여금 그 큰 고난(苦難) 속에서 외로움을 이기며 살아낼 수 있게 한 것은 즐거움이었다.
육신의 괴로움을 능가하는 영혼의 즐거움이 이었기에, 그는 힘든 시련의 시기를 견디어 낼 수 있었다.
A. 말씀의 즐거움
시인에게 시련 속에서 견딜 수 있는 힘을 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시 119:92)
1. 고난 중에 있음
시인은 고난(苦難) 중에 있었다. 상황은 너무나 심각하여 하나님께서 특별히 도와주시지 않으면 고난 중에 멸망할 지경이었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연기 속의 가죽 부대 같이 되었고”라고 하였으니 가가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있었는지를 보여준다.(시 119:83)
그는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핍박자(逼迫者)들에게 에워싸여 있었다(시119:83~84). 심지어 그들은 시인의 목숨을 노리기까지 하였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살고자 하였으나, 그는 세상(世上)에서 나그네처럼 살아야 했고 원수들에게 심한 박해를 겪어야 했다(시119:107).
2. 말씀의 즐거움
그러나 시인에게는 그 모든 시련과 고통을 이기게 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것은 세상 기쁨이 아니었다. 물질이 주는 만족도 아니었다.
더욱이 시인 자신의 강함을 믿는 자신감이 주는 즐거움도 아니었다.
그것은 “주의 법(法)”의 즐거움이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즐거움이었다.
비록 시인이 당하는 고난(苦難)은 매우 컸다. 그러나 그것을 능가하는 큰 기쁨이 있었기에, 자신이 멸망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사람들을 보다 평안하고 풍요로운 환경(環境)에서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마음이 무너지면 아무것도 아니다.
절망으로 마음이 무너지면 삶의 모든 상황들을 비관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절망(絶望)은 희망에 이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닫아 버린다. 고난에 지친 마음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때 세상의 즐거움은 사라진다.
평소 탐닉하던 육체의 즐거움조차도 이 절망을 이기는 데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그러나 신령한 기쁨은 하나님 때문에 희망을 갖게 한다.
여기서 “주의 법”은 율법(律法)을 가리킨다. 율법은 가장 좁은 의미로는 십계명(十誡命)을 가리키고, 그다음으로는 모세 오경(五經)을 가리킨다.
가장 넓은 의미로는 “하나님의 흠 없는 계시(啓示)의 총체”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마지막 의미로 사용되었다.
시인은 고난 중에서도 말씀에 은혜(恩惠)를 받았다. 고난 속에서 혼란을 겪고 정신이 분산되는 대신 말씀에 집중하였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그 말씀들 중 대부분은 이미 알고 있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시인은 고난과 역경(逆境)을 통해서 한 말씀, 한 말씀이 어떻게 자신의 삶과 연관되는지 깨닫게 되었다.
모든 말씀이 자기(自己)를 향하여 주시는 것으로 느껴졌다.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意味)를 완전히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움(beauty)이 드러났다. 그분의 성품의 탁월함을 깨닫게 되니 영혼의 즐거움이 넘치게 되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기쁨으로써 커다란 고난과 시련을 넉넉히 이길 수 있게 되었다.
B. 말씀을 기억함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었지만, 시인의 기억(記憶)에 남는 것은 고통(苦痛)과 아픔의 흔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신비함과 아름다움이었다.
“내가 주의 법도를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로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시 119:93)
1. 잊을 수 없는 말씀
시인은 고난과 시련을 통해 많은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고난을 이기게 한 말씀은 그의 마음에 커다란 감동(感動)을 주었다. 은혜의 감동이었다.
그래서 고백한다. “내가 주의 법도(法度)를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이것은 약속이 아니라 그의 마음의 상태에 대한 자연스러운 진술이었다.
그 말씀들 중에는 시인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 그의 마음은 더욱 가난해졌다.
그것들 중 대부분은 이미 시인이 알고 있었던 말씀이었지만, 이 일을 통해 그 의미(意味)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다.
2. 말씀으로 살리심
시인(詩人)이 많은 고난을 당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영원히 잊지 않게 되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을까?
“...주께서 이것들로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시 119:93下)
여기서 “이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복수로 나온다. 이는 시인이 시련 속에서 깨달은 말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에게 닥친 시련(試鍊)이 혹독했지만, 그 속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런 말씀의 경험은 잠시 죽은 자와 흡사했던 시인의 침체된 영혼을 완전히 다시 살아나게 해주었다.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였다.
시인의 믿음도 항상 충만하지 않았다. 자신의 죄(罪)와 원수의 괴롭힘으로 깊이 침체되었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시인은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그의 영혼(靈魂)을 살려주셨다.
따라서 영혼(靈魂)은 하나님의 생명 없이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영혼은 결코 육체처럼 죽지 않는다. 멸절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혼이 죽었다는 것은 그것이 고유한 기능(機能)을 할 수 없도록 활기를 잃어버린 것을 의미한다.
영혼이 생명을 가진 증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는 말했다. “말씀으로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
이 고백은 고난 속에서 시인이 받은 은혜(恩惠)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보여준다.
이 고백은 영적으로 회복시켜 새로운 힘을 얻어 살게 하셨음을 보여준다.
시인이 고난을 통하여 거짓된 것에 대한 사랑(love)을 내려놓았다. 세상의 허무함을 새삼 깨달았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시인은 자기에게는 오직 하나님밖에 없음을 다시 한 번 알게 되었다.
비록 고통을 겪고 있었으나 말씀의 은혜는 더 큰 즐거움을 주었다. 침체에 빠졌던 시인의 영혼을 다시 살아나게 하여 하나님만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하였다.
시인의 마음에 기쁨이 넘쳤다. 이러한 은혜(恩惠)의 힘으로 그는 시련과 역경을 넉넉히 극복할 수 있었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의 힘이 무엇인가? 우리의 능력(能力)이 무엇인가? 시련과 고난을 넉넉히 이길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
어떤 시련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Word)을 깨닫는 자에게 기쁨을 주신다. 영적 기쁨이다.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가? 그 말씀을 통해 주시는 은혜가 아닌가? 그러므로 은혜를 받자.
나를 살리는 말씀10 2023. 2. 19 주일낮예배
< 내 눈물은 시냇물처럼 >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시 119:135-136)
I. 본문해설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받으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다.
인간은 그런 사랑 안에서만 행복(幸福)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은혜, 곧 사랑의 감화는 말씀을 통해서 주어진다.
시인은 말씀을 통해 받은 은혜를 찬송하면서, 자기를 박해(迫害)하는 자들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한다.
“사람의 박해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법도들을 지키리이다”(시 119:134)”
그러면서 시인은 한편으로는 극심한 고난 속에서 당신의 친밀함을 보여주기를 간구(懇求)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멸시 받는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
II. 내 눈물은 시냇물처럼
박해의 고통 속에서 그는 하나님만을 의지(依支)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A. 얼굴을 비추심
오직 하나님께 대한 시인의 의존(依存)은 마음을 다해 전심으로 그분의 말씀을 붙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시 119:135)
1. 얼굴을 비추심
히브리어 성경에는 “당신의 얼굴( )”로 되어 있다. 구약에서 얼굴은 그 사람의 인격(人格)을 대표한다. 그것은 영혼의 반영이다.
구약 성경에는 “얼굴을…비추시고”, 혹은 “얼굴빛을 비추시고”라는 표현(表現)이 자주 나타난다(시 80:3).
하나님께서 당신 얼굴을 보여주시는 것은 영광(榮光)의 광채가 발산하는 것을 뜻하며, 이는 최고의 사랑의 표현 중 하나이다(시 31:16).
반면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얼굴을 숨기시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 버림 받는 것을 의미하였다(시 27:9).
하나님의 자녀가 범죄(犯罪)하면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이 당신의 얼굴을 외면하시는 일이었다. 다윗은 범죄했을 때 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주의 얼굴을 내 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악을 지워 주소서”(시 51:9)
하나님의 백성의 가장 큰 행복(幸福)은 당신의 얼굴빛 앞에서 행하며 사는 것이었다. 그것을 잃어버리게 된 시인에게는 아무런 기쁨이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팔복(八福)의 정점에 있는 복을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으로 밝히 제시하셨다.
“복이 있도다. 그 마음에 있어서 청결한 자들이여. 왜냐하면 그들이 그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마 5:8, KNJ 私譯)
2. 주의 종에게
핍박으로 인한 고난 속에서 구원을 호소하면서, 시인(詩人)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종(servant)일뿐임을 깨달았다. 이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은 것이었다.
시인은 하나님의 통치(統治) 아래 살아가야 할 사람일 뿐임을 깨달았다.
더욱이 그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안에서 많은 은혜를 입었다. 그러한 사실은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더욱 하나님(God)을 섬기며 살아가야 할 사명자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모든 불행(不幸)은 우리가 자신의 위치를 떠나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 자체이신 하나님을 떠나, 그분 밖에서 행복해지고자 하는 것이다.
* uti와 frui
향유(享有)해야 할 하나님을 이용하고, 이용(利用)해야 할 사물을 향유하려고 할 때 사랑의 질서는 뒤집히고 불행하게 된다.
이때 겪는 고통은 본래 있어야 할 사랑의 질서(秩序)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어리석은 우리는 종종 핍박과 고통을 통해서 비로소 자신이 이런 잘못된 질서 속에 있음을 깨닫고 돌이키게 된다.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구절을 직역하면, “당신의 종 속으로 비춰 주시고”이다(시 119:135).
하나님과의 만남은 내면세계(內面世界)를 새롭게 한다. 망가진 인생을 사는 것은 망가진 마음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과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 영혼(靈魂)을 변화시켜 주신다.
그래서 망가진 우리의 마음(heart)이 고침받아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신다.
이처럼 시인은 박해 속에서 고통(苦痛)받으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더욱 철저히 느끼게 되었다.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
시인은 채찍과 몽둥이가 아니라 하나님 사랑(love)에 붙잡혀 종이 된 사람임을 깨닫게 되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3. 율례로 가르치소서
박해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시인의 간구는 또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다. 자신이 깨닫지 못해 불순종하며 사는 일이 없도록 간구한다.
“…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시 119:135)
여기서 “율례( )”는 “법률의 제정된 것들, 구체적인 명령들”을 뜻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총체적 개념으로만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삶의 작은 부분까지라도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B. 눈물을 흘릴 때
시인은 악인들에게 끊임없이 핍박(逼迫)을 받으며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내적으로 자기가 당하는 고통보다 더 큰 아픔을 느꼈다.
그것은 시인이 세상(世上)을 보면서 느낀 것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짓밟히는 하나님의 이름을 보는 것이었다.
“물의 강들이 나의 두 눈에 흐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당신의 율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시 119:136, KNJ 私譯)
1. 강물처럼 흐르는 눈물
시인의 두 눈에서 눈물이 강물처럼 흘러내렸다. 그것은 박해 받는 자신의 고난 때문에 흐르는 눈물이 아니었다.
원수들에 대한 복받치는 미움 때문에 흐르는 눈물도 아니었다. 저들의 악행(惡行)으로 짓밟히는 하나님의 이름 때문이었다.
율법을 어기며 살아가는 불법한 자들의 무법한 행실(行實) 때문에 흐르는 눈물이었다. 우리에게 이런 눈물이 있는가?
2. 주의 법을 지키지 않음
그들은 이방인들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言約) 관계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선택(選擇)된 백성들로서, 이스라엘과 열방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도록 살아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율법(律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통치(統治) 아래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보여주기 위해 부름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었다.
* 하나님과 이름의 신학
시인은 비록 박해로 고난(苦難)받고 있었지만, 모욕 받는 그분의 이름 때문에 눈물이 강물처럼 흘렀다.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신자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 안에서 이루어진 만큼만 세상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信仰)은 너무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만족적이다. 모든 초점이 자신의 문제 해결과 행복에만 맞춰져 있다.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것이 모두 자기의 평안함과 풍요함을 얻는 것에 쏠려 있다. 그런 관점으로 살아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III. 적용과 결론
아무리 도덕적(道德的)으로 살아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에 관심이 없다면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 사랑 없이 영광의 갈망도 없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눈물이 있는가?
나를 살리는 말씀11 2023. 2. 26. 주일낮예배
< 말씀을 깨닫게 한 것 >
“여호와여 내가 전심으로 부르짖었사오니 내게 응답하소서 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키리이다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지키리이다”(시 119:145-146)
I. 본문해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現實)에 안타까워하며, 강물 같은 눈물을 흘리던 시인의 마음은 다시 말씀으로 향한다.
본문은 시인이 고난 속에서 말씀을 어떤 방식(方式)으로 깨닫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말씀의 감화 없이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II. 말씀을 깨닫게 한 것
시인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자 하였다. 그러면 그 동기(動機)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단지 지적인 호기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함이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자 갈망하는 것만큼 두 가지를 간절히 추구하였다. 그것은 간절한 기도와 온전한 순종(順從)이었다.
A. 부르짖음
첫째로, 기도(祈禱)였다. 그것은 평범하게 드린 것이 아니었다. 마음을 다해 간절한 부르짖음으로 올린 기도였다.
주의 말씀을 깨닫고자 하는 시인의 갈망은 간절한 기도와 함께 시작되었다.
“여호와여 내가 전심으로 부르짖었사오니 내게 응답하소서 …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나를 구원하소서…”(시 119:145-146)
1. “여호와여”
먼저 시인은 하나님을 친근히 부른다. “여호와여…” 이는 이스라엘과의 언약관계(言約關係) 안에서 계시된 이름이었다.
따라서 여호와를 부름으로 시작하는 이 기도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확고한 믿음(faith)을 보여준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자기를 버리지 않을 것이며, 모든 대적으로부터 지켜주실 것이라는 신실성(信實性)에 대한 믿음을 보여준다.
2. “전심으로”
시인은 전심(全心)을 다해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말씀을 깨닫고자 할 때에 마음을 다했던 것처럼 간절히 매달렸다.
“전심으로”라고 번역된 부분은 “모든 마음 안에서”( )이다. 이는 시인의 마음 중 어느 한 부분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고 있는 부분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問題)를 정확히 보여준다. 교회 생활은 하지만 하나님을 향해 전심으로 다하지 않는 것이다.
말씀과 예배, 섬김과 기도 어느 것도 안하는 것은 없지만 전심(全心)으로 하는 것도 없다. 마음이 세상 사랑과 염려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자 할지라도, 마음을 바치는 간절한 기도(祈禱)가 없는 것은 그냥 알고 싶은 호기심일 뿐이다.
“… 기도 없이 사는 사람을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호흡이 생명의 자연스러운 증거인 것처럼 기도는 믿음의 마땅한 증거입니다.” J. Edwards, Fifteen Sermons On Various Subjects, 75.
기도의 간절함은 그가 말씀을 깨닫고자 하는 동기(動機)가 하나님 사랑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으라!
3. “부르짖었사오니”
시인이 기도한 방식은 간절히 부르짖는 것이었다. 그는 마음을 다해 부르짖었고 세상만사를 주관하시는 주님께 부르짖었다.
시인이 보여준 경건의 특징은 하나님을 향하여 수시로 마음을 쏟는 것이었다. 기도에 있어서 이런 간절함은 일찍이 그가 경험했던 바다.
시인은 이처럼 전심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을 향해 억제할 수 없는 갈망(渴望)의 정이 마음에 넘치는 것을 느꼈다.
한마디로 물처럼 녹은 마음을 모두 쏟아 붓는 기도였던 것이다. 잠시 기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스치듯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말씀에 대한 사모함만큼 가볍고 일시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생각은 가볍고, 신앙(信仰)은 얄팍하며, 그만큼 인생은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무엇 때문인가?
말씀을 배운다고는 하지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얼굴빛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B. 말씀을 지킴
시인은 말씀을 사랑한 것만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내기를 원했다.
“… 내게 응답하소서 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키리이다 …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지키리이다”(시 119:145-146)
시인은 악인들에게 에워싸여 난관을 겪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한다.
그러나 시인의 궁극적인 소원은 편안(便安)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었다.
오늘날 넘쳐나는 말씀의 가르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영적으로 메마른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현실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들 때면, 곤충이 꿈틀거리듯이 하나님을 찾는 척한다. 자신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이 나아지거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응답(應答)되지 않으면 그마저도 기도를 그만둔다.
이러한 자기 중심성 때문에 거룩한 삶은 진전이 없고, 영적으로는 메마른 상태에서 힘겨운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말씀을 깨닫기를 원했고 또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다. 이는 오직 성도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내기 위함이었다. 순종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는 “주의 교훈(敎訓)들을 지키기”를 원했고, “주의 증거(證據)들을 지키기”를 바랬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단지 개념적으로만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삶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행복(幸福)은 진리를 사랑하는데 있고, 진리에 대한 사랑은 자신의 마음과 생활을 그것에 맞추게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살아갈 때만이 자신이 가장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기억하고 바라보고 사랑하려면...자기의 전존재를 연관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A. Augustinus,『삼위일체』15. 20. 39
하나님을 기억하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存在)와 살아가는 모든 삶을 그분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참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며, 그런 사람들을 만나주신다.
또한 하나님과 자신의 삶을 연결(連結)해서 생각할 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새롭게 깨닫게 되고 그분을 더욱 사랑하게 된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는 살기 위해서 말씀(Word)의 은혜를 받아야 하고,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진리를 깨닫기 위해 기도(祈禱)해야 하고, 기도하기 위해 순종해야 한다. 삶으로 순종하지 아니하고 어찌 간절한 기도를 드릴 수 있겠는가?
먼저 순종(順從)하고자 하라. 자기 능력을 의지하지 말라. 순종할 수 있게 하는 은혜의 힘을 구하라. 그리하면 순종할 수 있게 해주실 것이다.
나를 살리는 말씀12 2023. 3. 5. 주일낮 예배
< 부르짖고 묵상하라 >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시 119:147-148))
I. 본문해설
고난받을 때 시인의 태도(態度)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 부르짖는 기도와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시인은 그렇게 하기로 뜻을 세웠다.
이어서 그는 자신이 세운 이러한 뜻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實踐)했는지에 대해 기도의 형식을 빌어 고백한다.
II. 부르짖고 묵상하라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 사는 것이다. 그 평화 안에서 언제든지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뜻한다.
A. 부르짖고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시 119:147)
1. 날이 밝기 전에
그의 갈망(渴望)은 밝아오는 새벽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었다.
오직 하나님과의 온전한 사랑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갈망이었다.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찬 시인의 마음을 보여준다.
모든 죄를 용서받고 더 큰 사랑(love)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갈망은 시인으로 하여금 깊이 잠들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그의 심정에는 자신과 이웃의 죄(罪)에 대한 경건한 염려와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사랑이 함께 있었다.
당시 경건한 백성들에게 아침은 신비로운 시간이었다. 하루의 시작이었을 뿐만 아니라 어제와는 다른 새로운 날의 태어남을 알리는 시간이었다.
다윗은 후일 있을 성전의 낙성식(落成式)을 위해 지은 시에서 이러한 자신의 심정을 고백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기를 건져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 그 시(詩)에서 시인은 노래하였다.
“그의 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춥고 긴 밤 시간동안 외롭게 밤새도록 성(城)을 지킨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같이, 시인은 하나님을 갈망하였다. 하나님의 무엇을 갈망하였다는 말인가? 그것은 것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인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사람이 되고, 온전히 그분의 사랑을 받는 것이었다.
이 밤은 자연적인 밤뿐 아니라 또한 환경적인 밤중을 암시한다. 밤중은 절망(絶望)과 고독을 상징한다.
또한 세상(世上)에 있는 것들로부터 방해받지 않는 영혼의 평화로운 상태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 좋은 때다.
본문은 환경적으로 깊은 밤중과 같은 상황을 지나는 때에 어떻게 요동치지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신자가 고난과 시련 속에서 무엇을 갈망(渴望)하고, 누구를 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2. 부르짖으며
이러한 시인의 갈망은 기도의 부르짖음으로 나타났다. 하나님을 추구하기에 억제할 수 없는 정(情)이 하나님께 대한 의존으로 나타난 것이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 부르짖는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절실한 의존의 감정을 동반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만을 온전히 의지(依支)하는 우리의 마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을 의지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것은 가졌어도 그분을 의지하나, 사랑하지 않는 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도 그분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인의 부르짖음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의존(依存)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것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없다.
여기서 부르짖음은 단지 육체의 외침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외침이다. 그래서 신음을 동반한 침묵의 기도도 부르짖는 기도다.
우리가 이런 기도(祈禱)를 언제 드렸는가? 언제 그렇게 마음을 쏟으며 주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렸는가? 우리에게 그런 때가 있기는 있었는가?
B. 묵상하라
부르짖음과 묵상(黙想). 시인에게 이 두 가지는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항상 같이 가는 것이었다.
그에게 부르짖는 기도와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
“나의 두 눈은 야간 경비를 설 순서를 기다리는 것처럼 떠져 있었으니, 이는 당신의 말씀을 묵상하기 위함이었습니다.”(시 119:148, KNJ 私譯)
그는 마치 깊은 밤, 파수꾼이 경비를 설 순서를 기다리는 것처럼, 밤에도 눈을 붙이지 아니하였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Word)을 묵상하기 위함이었다. 시인이 눈을 뜨자마자 하나님을 찾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사정을 낱낱이 아뢰면서 하나님을 바랐다.
이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오직 시인이 하나님께만 희망(希望)을 두겠다는 믿음의 표현이었다.
시인에게 묵상은 하나님을 향한 사색(思索)의 시간이었다. 시인 자신은 자기 내면의 깊은 속으로 들어가고, 또 거기로부터 다시 나와서 하나님을 향하여 상승하는 정신의 운동이었다.
“믿음 없는 사색은 공허하며, 사색 없는 믿음은 자기 것이 아니다.”
믿음이 없는 사색은 마치 항구에 닻을 내리지 못한 채 떠도는 배와 같다.
정착할 의도는 가지고 있으나 자기를 붙잡은 말씀이 없기에 방황(彷徨)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 없이 사색하는 것도, 사색이 없이 하나님을 믿는 것도 온전한 경건(敬虔)이 아니다. 참된 사색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것을 우리는 묵상(黙想)이라고 부른다. 경건한 묵상과 철학적 사색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자기가 인식한 사실들을 하나님과 연결 지어서 삶을 해석하느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엇을 행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스스로 주체적으로 결정(決定)하는 것이다. 그러한 결정의 반복이 그의 일생을 만들어간다.
묵상이 없는 말씀 생활은 우리의 신앙을 단지 이성에 머물게 하며 이는 신앙의 피상성을 벗어날 수 없게 한다.
참을 수 없으리만치 가벼운 생각들을 미워하는 사람이 참으로 진리(眞理)를 찾는 사람이다. 이러한 진리는 어떻게 터득되는가?
“참된 신앙이란 하나님과 영혼의 연합이며, 하나님의 성품, 곧 인간의 영혼에 요구되는 그분의 형상에 실제로 참여하는 것이다.” Henry Scugal,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 p.34
신앙은 ‘영적 생명(生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앙은 내적이며, 자유롭고, 스스로 움직이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살과 뼈로 이루어진 몸을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생명을 가지고 있기에 ‘살아있는 영혼’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왜 마른 뼈와 같은 영혼(靈魂)으로 살아가는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통해 영적 생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말라깽이처럼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영혼 안에 충만한 생명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그 충만한 생명(生命)은 은혜를 통해서 부어진다. 시인은 그렇게 풍성한 생명을 기도의 부르짖음과 말씀의 묵상(黙想) 속에서 누렸다.
그에게 묵상은 머리에 있는 지식을 가슴으로 내려가게 하는 깔때기였다.
묵상 없는 말씀의 습득은 마치 소화되지 않은 채 뱃속에 남아있는 음식과 같다. 그래서 경건한 시인들의 묵상은 애통하는 기도와 함께 거룩하신 하나님께 바쳐지는 훌륭한 제물(祭物)이었다.
“…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下)
사랑은 생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제일 먼저 사고기능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충만한 사랑의 증거는 생각이 그것을 지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달콤한 묵상은 그가 하나님과 연애하고 있다는 증거다. 우리의 묵상 생활은 어떠한가?
III. 적용과 결론
나를 살리는 말씀13-끝 2023. 3. 19. 주일낮 예배
< 간구하고 깨닫게 하소서 >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나의 간구가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시 119:169-170)
I. 본문해설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간절한 기도가 함께 간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본문은 8절씩 총 22연으로 되어있는 이 시편의 마지막 연의 시작이다. 여기서도 경건(敬虔)에 있어서 말씀과 기도가 함께 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II. 간구하고 깨닫게 하소서
A. 주 앞에 이르는 간구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 나의 간구가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시 119:169-170)
1. 부르짖음과 간구
“여호와의 율법(律法)”으로 첫 연을 시작한 시는 “여호와여!”라는 부르짖음으로 마지막 연(联)의 첫머리를 장식하여 끝을 맺는다.
“여호와” 하나님의 본명(本名)을 부르며 기도를 시작한다. 이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 그 언약 안에 있는 자신을 기억한 것이다.
그의 간절한 기도 제목은 자기의 기도(祈禱)가 하나님 앞에 이르게 해달라는 것으로서 소위 “기도를 위한 기도”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 드린다. 그러나 그 모든 기도가 항상 하나님(God) 앞에 드려지는 것은 아니다.
“주의 앞에 이르는” 기도는 평범한 기도가 아니다. 하나님의 임재(臨在) 안에서 바쳐지는 기도다. 그 속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도다.
기도하는 자는 기도한다. 그러나 모든 기도자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지는 않는다. 임재 안에서 기도하지 않는다. 기도라는 행위는 하나인 듯하지만 그 깊이의 층차(層差)는 다양하다.
단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외식(外飾)하는 기도나, 단지 입술로 기도할 뿐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기도도 있다.
그러나 영적으로 가장 높은 경지(境地)의 기도가 있으니, 자기의 마음 중심(中心)을 모두 쏟아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다.
영으로는 기도하나 마음으로는 깨달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방언(方言)기도도 있다(고전 14:14).
그러나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서 드리는 기도인데, 신령함에 있어서 기도의 가장 높은 단계다.
시인은 단지 겉모양으로 기도하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샘솟듯 솟구쳐 터져 하나님의 보좌(寶座) 앞에 이르도록 기도하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그런 기도 속에서만 사랑하는 하나님과 완전한 연합(聯合)을 누리며 친밀한 사랑 속에서 자기의 소원을 아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도하는 마음은 오직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이며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依支)하는 마음이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는 간절한 기도로 주님만을 찾는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에 가장 좋은 마음이다.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주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모두 순종(順從)할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 나를 하는 자는 내 께 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2. 주 앞에 이르기를 구함
시인(詩人)은 자신의 기도와 간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이르기를 원하였다.
시인이 생각하는 기도, 곧 보좌 앞 하나님의 면전(面前)에까지 이르는 기도가 어떤 기도였을지 생각해 보라.
그가 드리고 싶었던 기도는 단지 혼자 중얼거리는 기도가 아니었다. 헛되이 허공(虛空)을 맴돌다가 다시 땅으로 떨어지는 기도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마음도 움직이지 못하고 자기 마음도 변화(變化)시킬 수 없는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다.
하나님과의 어떤 낯섦이나 거리감도 느껴지지 않는, 완전한 사랑(love)의 연합 속에서 심령(心靈)으로 드리는 기도였다.
그런 기도는 즐겁다 못해 달콤(sweet)하기까지 하다. 그런 기도 속에서 우리는 시간(時間)과 공간을 초월한다. 영원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영적인 사랑(love)의 교제를 나누게 된다. 그런 기도를 통해 우리는 거룩해진다.
그렇게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대면하는 기도를 드려보라. 신령한 것들에 눈 뜨게 될 것이다. 세상의 헛된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게 된다.
그러나 그런 상태로 들어가는 것은 시인(詩人)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죄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시고 찾는 자에게 발견(發見)되신다. 그런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를 간절히 매달리는 자에게 허락해 주신다. 이것이 또한 우리가 소망해야 할 기도가 아닌가?
B. 구원하는 말씀
이어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한다. 마음을 다 드리는 부르짖는 기도로써 시련과 위기 속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빈다.
“…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시 119:169~170)
시인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를 시련 속에서 구원(救援)해 주시는지를 알았다. 그 말씀, 약속(約束)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이 이뤄져서 원수들에게서 건짐 받기를 간구한다.
1. 깨닫게 하심
그가 먼저 구한 것은 말씀을 깨닫는 것이었다. 여기서 “말씀”은 모든 율법(律法)을 가리킨다기보다는 그것들 중 특별히 약속(約束)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현실적으로 시련과 고난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피하게 해달라는 것이 첫 번째 기도 제목은 아니었다.
현실적인 비관을 낙관으로 바꿀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었다. 시인에게는 “악을 따르는 자들이 가까이 있었고”(시 119:150上), 또한 그를 “핍박하는 자들과 … 대적들”도 많았다(시 119:157).
그렇지만 그의 눈은 하나님을 향했다. 그는 시련과 고난 속에서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았다.
그런 현실 속에서 시인의 마지막 희망(希望)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이처럼 믿음(faith)은 주님의 약속을 현실로 소환한다.
*깊은 웅덩이에 빠진 사람
사방(四方)을 둘러보아도 모두 흙뿐이고 내려다보면 물이 말목까지 올라오고 있다. 눈이 닫는 거기엔 어떤 희망(希望)의 증거도 없다.
그러나 눈을 들어 위를 보면 하늘이 보인다. 이때 비록 하늘의 크기는 손바닥만 할지라도 거기서 새로운 희망을 갖는다. 자신이 갇힌 구덩이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현실로 소환(召喚)하는 능력이다. 신앙은 이렇게 소환되는 약속을 따라 현실보다 더 현실처럼 여기는 것이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2. 건지심
시인이 간절히 바라는 바는 고난(苦難)과 위기에서 건져주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하는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아 주시는 것이었다.
본문에서 “건지소서”는 난관과 위기로부터의 구출(救出)을 뜻한다. 시인은 원수들에게서 핍박받고 고통받는 상황에서 자기를 건져주시기를 구하였다.
하나님은 왜 이런 어려움을 주실까? 우리는 그 모든 질문에 만족스러운 답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마음이 병들었을 때 시련을 주신다. 영혼의 질병보다 육체의 어려움에 보다 민감하기에, 때로는 그 고통 속에서 헤어 나오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셔서 영혼을 고치신다.
우리의 구원이 늦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能力)이 모자라서도 아니고, 지력(知力)이 미치지 않아서도 아니다.
고통을 통해 우리를 변화시키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우리가 믿음으로 응답하지 않기 때문이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는 하나님을 이용해서 상황(狀況)을 바꾸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바꾸고자 하신다.
그래서 근심할 환경을 주시고, 낙심(落心)하는 대신 믿음으로 기도하게 하신다. 간절한 기도로 더 매달리게 하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고치고 영혼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신다.
새 마음으로 새롭게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하셔서 이전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새로운 능력(能力)으로 새 삶을 살게 하신다.
나를 살리는 말씀 12 (2023.3.5._주일오전)
1. 고난 중에 위로하심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시 119:49-50)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시편 119편은 하나님 말씀의 영광의 장이라고 일컬어집니다. 표제어에 작시자가 누구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다윗의 작품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를 통해 느끼는 그 모든 감정과 문체가 다른 다윗의 시를 몹시 닮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다양한 삶의 상황에서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된 경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본문에서는 고난을 통해 새롭게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이 어떻게 죽을 것 같은 처지에서 살아나게 됐는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 은혜의 세계를 깨달은 경험을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II. 고난중에 위로하심
시인은 본문에서 고난 중에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위로하셨는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느 시기에 이 시가 쓰여졌는지도 알 수 없고, 누가 이 시를 기록했는지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받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위로를 찬송하고 있습니다.
A. 말씀으로 위로하심
먼저 그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자기를 위로해 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고난 받기 전에는 마음에서 잊혀졌던 어떤 말씀이 고난중에 시인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사면을 돌아보아도 낙망할 이유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그 말씀이 시인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시인의 마음은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시인은 자신을 종이라고 지칭하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위치를 확인합니다. 형통할 때, 모든 것이 뜻대로 전개될 때는 자기 분수를 잊어버렸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자기인 듯 여기고 하나님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하여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달으며 생사 간에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연약한 인간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는 마치 너그러운 상전의 자비를 덕 입어 살아가는 종을 떠올리게 합니다. 상전의 마음이 너그럽고 즐거우면 종은 행복한 하루를 보내게 되고, 상전이 심술 사납고 마음이 상하게 되면 지옥과 같은 하루를 보내게 되는 것이니 시인이 고난을 통해서 자기가 하나님의 종일뿐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시인은 평안할 때 배우지 못했던 것을 고난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으니, 이는 형통할 때에 미처 알지 못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난은 우리의 육신에는 고통을 주지만 때로는 우리의 영혼을 비옥하게 하는 비료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형통할 때 높아졌던 우리의 마음은 낮아지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자신의 처지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고, 자신의 위치를 떠났던 교만을 뉘우치게 되는 것이니, 고난을 당하지 않고 겸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래서 고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서 고난을 당할 뿐 아니라 때로는 자신의 잘못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고난을 겪었습니다. 어떤 종류의 고난이든지 그 고난을 인하여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되었으니, 겸손해지기는 매한가지였던 것입니다. 이 잘못으로 낮아진 사람은 용서를 빌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동안에 겸비해지는 것을 터득했습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의로운 이유 때문에 고난을 받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달으며 주님의 손에 자신의 영혼을 맡기며 겸손을 배웠습니다.
시인이 바로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이 시인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마음이 높아질 즈음에 하나님은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이전에 보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의 밑바닥을 보게 하셨고, 거기서 절망하게 하는 만큼 하나님을 향해 희망을 갖게 하셨던 것입니다. 시인이 말하기를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 간구는 아마도 언젠가 받았던 신탁의 말씀이거나 고난을 통해 성경을 보며 특별히 깨달은 약속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시인은 그 약속의 말씀 때문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고난받을 때 하나님이 그렇게 나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셨으니 내가 오랫동안 그 약속의 말씀을 잊고 살았구나 하고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고난 속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약속의 말씀이 마음속에 불끈 솟아오르기를 마치 어두운 밤바다에 밝은 태양이 불끈 솟아오르듯이 그렇게 약속의 말씀이 솟아올랐던 것입니다. 그 말씀이 시인의 마음에 절절히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하며 받았던 은혜를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고난 속에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고난을 해석하는 힘입니다. 고난을 신앙으로 해석하며 살아갈 마음에 힘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그래도 견딜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고통에는 뜻이 있고 이 뜻이 이루어지면 그것은 반드시 좋은 것일 것이니,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기에 좋은 뜻밖에는 품으실 수 없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나를 연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과 같이 나오리라고 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고난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해석하면서 땅에서 일어나는 자신의 고난을 붙들고 계시는 하늘의 하나님을 의식할 때 그는 땅에서 사건이 일어나지만 의미는 하늘에서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이 생깁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의 힘이 남아있는 동안에는 견딜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신앙은 희망으로 자신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바위처럼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물처럼 우리의 마음에 흐르는 것입니다. 믿음을 배신하게 할 상황들이 수시로 일어나지만 신앙은 믿음으로 희망을 갖도록 자기를 설득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내가 겪는 이 모든 고난이 의미가 있을 것이며,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믿음, 그리고 좋으신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당신의 말씀으로 이끄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며 하나님의 선하심에 내 인생을 던지면 그분이 나를 박대하실 리가 없다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희망으로 자기를 설득하는 것이며 그 희망은 믿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 신앙으로 자기를 설득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데서만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로마서 10장에서 말합니다. 누군들 삶의 현실이 자기의 마음이 원하는 바와 같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일상은 삶의 현실이 내 뜻대로 전개되지 않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럴 때마다 우리는 종종 현실을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무엇을 고쳐야 할지를 찾아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고칠 희망이 없기 때문에 한 걸음 떨어져서 마치 남의 인생을 보듯 자기 인생을 바라보아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 앞에서 할 말을 잃어버렸던 것처럼 그런 삶의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는 너무나 단순합니다. "이제 네 앞에 전개된 현실을 보거라." "이전에 네가 보았던 관점과 다른 관점에서 네 인생을 생각해 보거라."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가 겪는 어려움들을 통해서 이제껏 우리에게 익숙한 관점이 아닌 다른 방향에서 우리의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렇게 관점을 바꿔 놓으시기 위해서 우리를 죽음 앞에까지 데려가시는 적이 있습니다. 우리를 버리셨기 때문도 아니오, 우리를 잊으셨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바꿔 놓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때로는 우리의 마음을 때리셔서 아프게 하여 이제껏 보지 못했던 우리 인생의 다른 면들을 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일류대학을 나온 여자 약사가 있었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이 성공을 했고 큰 약국을 경영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행복은 얼마 가지 않았습니다. 결혼한 남편과의 갈등은 골이 깊어졌고, 정신적인 고통이 심해지면서 남편을 미워하다 못해 원한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 여자는 견디다 못해 살인 청부업자를 고용했고 남편을 무참하게 살해했습니다. 사건은 묻히는 것 같았는데, 이번에는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의심하며 자기 아들의 죽음을 캐기 시작했습니다. 여자는 두려운 마음에 어머니까지 살해하려다가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사형이 집행되던 때였고 그는 사형 언도를 받았습니다. 교도소에 수감 된 그는 모든 사람에게 골칫거리였습니다. 수시로 머리를 벽에다 찧고 입술을 깨물며 자결을 하려고 소동을 벌였습니다. 혼자 갇혀있는 동안에는 온몸을 벽에 부딪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다가 실신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녀 때문에 괴로움을 겪고 있던 중 교도소에서 일하는 사람이 지나가면서 그 여자 감방에 성경을 건네주면서 한번 읽어보라고 타일렀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성경을 건네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독실한 불교 신자였습니다. 잡히는 것이 근처에 있는 것이 성경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 경전이라도 읽고 저 여자가 마음의 안정을 찾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건네준 것입니다. 여자가 성경이 바닥에 떨어진 것을 발로 차고 손으로 밀어 던지며 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눈만 뜨면 보이는 것이 성경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성경을 펼쳐서 읽기 시작하다가 거기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거기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형당하기 직전까지 약 서른 번 성경을 읽었다고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님을 찬송할 찬송가를 정하고 하루 종일 그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많은 시간을 기도로 보냈습니다. 드디어 그는 독방을 떠나 공동 감방으로 이송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아름다운 모범을 보였습니다. 변기를 닦고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죄수 중 한 사람이 아프면 밤새도록 물수건을 머리에 얹으며 기도하고 간호해 주어서 감방에 있는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형 집행일은 다가왔고 그녀는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저는 가본 적이 없습니다마는 당시를 목격한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한 사람이 사형을 당할 때는 약 일곱 명의 참관인들이 동원된다고 합니다. 법관 검사 그리고 교도관 심지어 의사까지 두 명이 동원이 되어서 마지막에 이 사람이 확실히 죽었는지를 검시하는 것입니다. 당시 처해진 형은 교수형이었습니다. 교수대에 매달리기 위해서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올라가면 올가미가 머리에 씌워지고, 집행관의 명령에 따라서 바닥이 내려가면서 허공에 매달려. 삼십분 후면 시신이 되어서 가족에게 인계되었다고 합니다. 그 올라가는 계단이 죽음의 계단이라고 불렸습니다. 많은 사람은 그 계단을 오르며 소리소리 지르거나 악을 쓰거나 혹은 졸도를 했다고 합니다. 이 여자는 이름이 ‘강한나’였습니다. 예수를 믿고 개명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녀는 조용히 그 죽음의 계단을 기쁨으로 가득 찬 얼굴로 올라오면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녀는 성령 충만한 얼굴로 기쁜 모습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판사도 울고 검사도 울고 거기 왔던 의사도 울고 모든 사람이 통곡하는 가운데 이 여자는 그리스도 예수를 힘입어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자, 무엇이 이 여자를 이렇게 바꾸어 놓았겠습니까? 죽음의 공포가 아닙니다. 죽음의 벼랑 끝에 서서 이전에 바라보았던 것과는 다른 관점에서 자신의 인생을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이 세상은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었고, 누군가를 죽도록 미워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는 것이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추억에 잠기십시오.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을 베푸셔서 여러분을 인생의 위기 속에서 만나주셨는지를 회상하십시오. 그때 하나님이 어떤 사랑을 베푸셔서 여러분을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회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지금 보는 관점 말고 또 다른 관점에서 자기 인생을 볼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때 은혜를 주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그 사랑을 깨닫게 하였던 하나님의 말씀을 상기하십시오. 그리고 지금 그 약속의 희망을 가지고 자기를 설득하십시오. 주저앉아 있는 자신을 설득하십시오.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 길이며, 마음을 끓이고 염려하는 나의 이 인생의 문제도 결국은 나의 육체가 한 줌의 가루가 되어 허공 중에 흩어지는 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때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영혼은 남아서 하늘 가는 밝은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니, 나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다른 관점에서 여러분의 인생을 보십시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다가가십시오. 책이든 성경이든 설교든 은혜로운 지체들의 고백이든 찬송이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일에 마음을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이 반드시 여러분의 마음을 위로하셔서 다시 살려주실 것입니다. 아멘.
B. 내 영혼을 살리심
마지막으로 시인은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영혼을 살리신 것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그렇게 기억난 이전에 주셨던 약속의 말씀으로 고난 중에 위로를 삼았습니다. 그것은 시인이 고통 속에서 낙심하던 날의 위로였습니다. 그리고 그 위로는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겠습니까? 끝없이 이어지는 메마른 사막 위에 오아시스이며, 밤 깊은 나그네 산길 저 멀리 눈에 띄는 오두막집의 불빛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시인은 자신을 조롱하는 교만한 자들과 율법을 버린 악인들에게 에워싸여서 고통을 받고 있었다고 51절과 53절에서 말합니다. 만약 고난을 받을 때 외롭지만 않다면 그것은 못 견딜 고난이 아닙니다. 놀랍죠? 모든 것이 평온하고 넉넉할 때는 친구도 많았지만, 인생이 벼랑 끝에 서고 아무것도 없어진 다음에는 모든 사람이 타인이 됩니다. 그리고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나을 것 같은 고통과 함께 모든 사람에게서 버림을 받은 것 같은 황량한 고독감이야말로 절망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에서 절망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절망은 인간의 외로움을 느끼게 만들어주고, 이 외로움은 우리에게 두 길을 보여줍니다. 외로움은 진리의 대문으로 들어가는 앞마당이 되기도 하고, 절망의 어둠 속으로 도망치는 뒷마당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중 아무도 가슴을 에는 것 같은 외로움을 겪지 않은 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를 붙든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날 때는 항상 외로운 때였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의지할 사람이 없는 때였습니다. 캄캄한 우주 공간에 내동댕이쳐진 것 처럼 모든 인연이 끊어진 것 같은 절대적인 외로움 속에서 우리는 우리 존재의 근거를 묻고 답하고 싶었지만 어디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없었기에 또한 희망의 근거를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때 만약에 우리를 버려두셨더라면 그 외로움 속에서 절망 같은 죽음에 떨어졌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바로 그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희망에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의지하던 마음을 단숨에 끊어버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땅을 바라보지 않고 천국을 바라볼 희망을 주셨던 것입니다.
절망은 육체와 마음이 죽음 앞에 서게 되는 경험이니, 절망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거기서 희망으로 자신을 설득할 근거를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거기를 절망의 시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살아가야 하는 것이니 하나님이 살아갈 이유 없이 사람들을 이 땅에 남겨두셨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런 절망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이 아니라 영혼의 어두움 때문에 그리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뒤덮은 절망감 때문에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해서 이런 절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위로입니다. 힘들고 상하고 고통받는 마음에 양약은 회초리가 아니라 위로입니다. 그 위로를 통해서 힘들고 상한 마음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손길 때문에 우리는 바뀐 마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여유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연약한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슬픔에 처한 사람을 가엾이 여기며 위로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자격을 갖춘 사람입니다.
젊은 시절에 정말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특히 목회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모든 생업을 접은 후에는 가난이 친구가 되었습니다. 가난해서 먹지도 못하고 건장한 나이에 두 번 세 번씩 학교에서 영양실조로 졸도를 했습니다. 그게 쉽게 있는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지금보다는 여유가 없는 시대였지만, 1980년대였으니 우리나라가 제법 살게 된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난은 항상 옆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하나님이 이렇게 오늘날 나를 설교자로 만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음도 깨닫습니다. 그래서 목회를 하고 제일 불쌍한 사람들이 둘이 있었는데, 영혼이 방황하는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던 때였는데, 그때 저는 성자같이 훌륭한 당시 연세가 칠십 대 중반이나 되신 교수님을 조교로 섬겼습니다. 정말 훌륭한 인품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어느 날 교수님이 심부름을 시키며 저를 당신 댁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심부름을 처리하고 그 결과를 가지고 교수님 댁으로 찾아갔습니다. 사모님은 7년째 병상에 누워 목사님의 수발을 받아야 하는 처지였고, 목사님은 연세 많으셨습니다. 일 처리한 것을 전해드리고 인사를 하며 나오자 교수님이 따라 나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셨습니다. "김 전도사, 사는 게 많이 가난하고 힘들지?" 그러시면서 봉투 하나를 건네셨습니다. 그리고 헤어져서 나오는데 편지일 리는 없고 돈 같은데 얼마인지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골목을 나오자마자 한 길가에 주저앉아서 봉투를 펴보았습니다. 만 원짜리 스물다섯 장이었습니다. 당시 등록금의 딱 절반에 해당하는 액수였습니다. 그 학기의 등록금은 장학금으로 백퍼센트 해결을 했는데, 살림할 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25만 원이 그 봉투에 들어 있었습니다. 가로수에 기대어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게 돈 때문에 감격해서 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고난 중에 나를 위로하시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에 그 사랑에 감격해서 울었던 것입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쳐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한 학기 동안 겪었던 가슴 아프고 서러운 일들이 빗물에 씻기듯이 쓸려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로가 마음에 충만하였으니, 이제는 그 돈 때문에 위로를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잊지 않고 사랑하신다는 위로의 징표가 내 마음에 힘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각도에서 나의 고난을 볼 수 있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절망에 처한 상황에서 사람의 위로가 그렇게 힘을 발휘한다면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의 인생을 얼마나 많이 바꾸겠습니까?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말씀으로 살리셨습니다. 고난 속에서 생기를 잃어가던 시인의 영혼을 말씀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받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을 깨닫고 감화를 받아 당신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세상 사랑에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그렇게 살 힘을 잃어버립니다. 그 무기력한 삶 한복판에는 진리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린 불신앙이 있습니다. 그렇게 고난과 시련을 이기고 고통 속에서도 감사의 찬양을 드렸던 때는 항상 말씀에 은혜를 받는 때였습니다. 한 주간의 내 삶을 모두 망원경으로 살펴보신 것처럼, 그렇게 나를 혼자 예배 시간에 세워놓으시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깨닫게 해주시는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녹였기 때문에 고난 속에서도 고난보다 더 큰 위로를 발견했습니다. 그 위로의 힘으로 현실을 다시 해석할 수 있는 마음을 먹게 되었던 것입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왔던 예배당을 떠날 때는 주님이 의로운 손으로 나를 붙드시는 것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눈에는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었으나 마음에는 이미 천국이 와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떠날 때 우리는 이 세상 것에 몰두하면서 영적인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리고 하나님 생명의 말씀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마치 간식의 맛을 안 강아지들이 사료를 먹지 않으려 들듯이 그렇게 우리는 간식 같은 세상의 즐거움을 위해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팽개친 채 어둠 속으로 어둠 속으로 걸어가며 물 없는 땅을 헤매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때려서 일깨우십니다. 영적으로 굶주려 있는 우리의 마음을 때리셔서 다른 각도에서 우리의 인생을 보게 하시고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눈물로 예배를 드렸던 지난날 예배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시고, 흐느끼지 않고는 기도할 수 없었던 진실한 날의 그 기도로 돌아가도록 우리에게 격려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녹아지고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만 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팔은 하나님의 말씀이오, 그 팔을 붙드는 것은 우리의 믿음으로 주님께 드리는 지성입니다. 그 지성으로 주님 말씀의 팔을 붙들 때 우리는 운명과 같은 수렁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과 혼과 골수를 찔러 쪼개고, 우리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고, 우리가 보지 못했던 우리의 모습을 깨달아,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인생의 국면에 눈을 뜨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죽은 것 같은 영혼을 살리시고, 병든 것 같은 우리의 마음을 고치시는 것이니,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입니다.
생각으로는 무엇이 옳은지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그 생각을 따를 수 없으니, 이는 안 하기 때문이 아니라 할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음이 손과 발더러 명령하면 어김없이 듣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마음에게 명령을 하면 듣지를 않는데, 이것은 마음이 질병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으나 하고자 하는 마음이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의지에 모순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생각할 때 그렇게 하고자 하는 마음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은 능력으로 충만해 있지 않기 때문에 결국 모든 선한 일에 대한 결심은 미수에 그치고 맙니다. 우리의 생각과 의지 사이의 모순이 거기서 생겨나는 것이니, 혹은 우리가 이러한 모순 속에서 수없이 많은 인생의 날들을 허비하며 살아갈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죽을 의지가 있는 것도 아닌 채 좀비처럼 살아가는 때가 바로 그런 때인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죄에 가까워지나니 이는 인간의 육체가 자연으로부터 멀어질 때 질병에 가까운 것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이 모든 의지의 모순은 영혼의 생명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생명의 원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죽은 자의 마음에 임할 때 하나님의 생명이 주어집니다. 예전에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는 은혜의 힘이 그에게 주어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은혜의 힘으로 우리는 고난을 해석하고 역경을 이기며 하나님 앞에 살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니, 말씀을 깨달을 때 하나님은 이 생명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찬양)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
흙 같은 이 몸을 정금같게 하시네
들에 핀 백합을 입히시는 하나님, 공중에 날다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새들을 먹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를 주셔서 그 생명으로 우리를 사셨으니, 하나님이 어찌 여러분을 버리시겠습니까? 죄를 지었다면 용서하심으로 다시 살게 하실 것입니다. 죄와 상관없이 의를 위해 고난을 받고 있다면, 모든 능력에 뛰어나신 하나님이 여러분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고 싶어 하는 여러분의 마음에 의지를 북돋아 줄 것이니, 악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단은 우리에게 아무 분깃도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주님 사랑의 생명싸개에 감추어져 주님의 품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품 안에 안긴 어린아이와 같은 우리의 영혼을 누가 해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생명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세상에 희망을 갖는 대신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희망을 가지시며 소망을 얻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말씀의 은혜만이 여러분의 영혼을 살릴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이 신앙적으로 잠든 우리를 어떻게 깨우십니까? 말씀을 생각나게 하심으로 감았던 우리 마음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세상의 허무함을 보게 만드시고 하나님 사랑의 무한한 가치를 눈 뜨게 하십니다. 잠시 심호흡을 하십시오. 삶이 어렵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처지를 공감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믿음의 사람이 여러분처럼 사연 많은 시련의 길을 걸어간 것을 기억하십시오. 죄 없는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신 세상이니, 우리가 이 땅에서 나그네 같이 취급을 받는 것은 우리에게 또 다른 본향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정신을 차리십시오. "하~" 깊이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비우십시오.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다가가십시오. 그 말씀에 은혜를 받으십시오. 다시 한번 여러분을 살려내실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인생의 밤에 기억한 것
“내가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들이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시 119:54-55)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인생을 사는 것은 여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항상 밝은 햇살이 비치기만 하는 날들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비바람과 눈보라가 몰아치는 어두운 인생의 때를 지나기도 합니다. 깊은 밤 끝을 알 수 없는 어두운 골목길을 홀로 걷는 것과 같은 인생의 때를 지나야 하는 경우에 어떻게 세상과 자신을 이기며 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자신의 인생의 주체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인 또한 그런 질문을 하면서 119편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II. 인생의 밤에 기억한 것
인생의 밤을 지나면서 그가 기억한 것이 있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이 세상의 불완전함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악인들의 불법과 혹은 자기 자신의 죄 때문에 그런 어두운 밤을 지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던 시인에게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는 비결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말씀의 은혜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 힘으로 어떻게 자신의 인생의 난관을 극복하고 고난이 많은 상황 속에서도 주체성을 잃지 않고 인생을 살게 되었는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A. 율례가 노래가 됨
제일 먼저 시인은 "주의 율례가 자신의 노래가 되었노라"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먼저 자기가 사는 세상을 규정합니다. 이것은 그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는지를 말해줍니다. 5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모두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들이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시 119:54) 그는 자기 인생을 “내가 나그네 된 집에서 ···"라고 합니다. 이 표현은 두 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첫 번째 의미로는 시인이 자주 박해를 당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던 경험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추측하는 바와 같이 119편의 저자가 다윗이라면 이 해석은 아주 딱 맞아떨어집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후 다윗은 사울에게 까닭 없이 미움을 받았고, 자객들의 추격을 피해 그는 광야 이 동굴에서 저 동굴로,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도망을 다니며 모든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심지어 남의 나라 땅으로 도망쳐서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니까 수염에 침을 바르고 미치광이 행세를 하면서 난관을 이겨야 했습니다. 그런 시인에게 인생은 나그네 길이었고, 산다는 것은 곧 이 세상에서 나그네의 집에 거하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모든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서 죽습니다. 그리고 출생을 시작으로 해서 마지막에 죽음을 종착역 삼아서 떠나는 것이 인생의 길이니, 그 모든 길이 결국은 여행길과 같았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지나는 길이니 영원한 거처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에게 인생은 나그네 된 집이었던 것입니다. 시인에게는 거기가 대적에게 쫓기는 광야의 동굴이든지, 잘 지은 화려한 왕궁이든지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두 나그네 길에서 잠시 머무는 집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시인만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구름같이 허다한 많은 증인들을 언급하는 가운데 그 사람들이 어떤 방식의 삶을 살았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 ···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 11:13)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 11:14)
고달프고 외로운 인생길에서 위로를 받고 지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중 그렇게 강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사람에게부터 오는 위로도 우리에게 힘을 준다면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위로는 우리의 인생을 얼마나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위로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렇게 택하는 것이 위락과 쾌락에 빠지는 것입니다. 시인도 그런 인생길을 지났습니다. 비록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으나 그 역시 인생길을 지나는 나그네였고, 기쁘면 웃고 괴로우면 울며 외로우면 고뇌하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은혜의 비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난으로 가득 찬 나그네 인생길을 걸으면서 누구도 알 수 없는 말씀의 위로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로는 곧 하나님의 위로였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 주의 율례들이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시 119:54 下) 여기에서 율례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삶의 규칙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계명이 가장 큰 하나님의 법이고, 그 계명을 준수하기 위해서 실천할 세부적인 실천의 규칙들을 율례라고 부른 것입니다. 나그네 인생길에서 고난을 받았던 시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위로가 되었고, 마음의 위로가 되었기에 그는 말씀을 노래했습니다. 거기서 위로를 받고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노래 속에서 다시 한번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까이 다가가게 하였고, 말씀의 위로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정동을 느끼며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비밀을 아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고단한 인생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죽은 것 같은 우리의 영혼을 살려내고 낙심하는 우리의 영혼의 위로를 베풀 수 있는지를 우리들이 체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깊이 잠드는 시간까지 온통 이 세상의 것들로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운다면 우리는 하늘의 위로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인생의 무게를 줄이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짊어질 필요가 없는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짊어질 짐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라고 무게를 덜어내는 것입니다. 덜어내고 덜어내도 도저히 더 이상 덜어낼 수 없는 필수적으로 우리 인간이 살아있는 한 짊어져야 하는 짐이 있습니다. 그런 무게는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짊어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제가 다니던 학교가 아주 축구를 잘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훈련장에서 선수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모래주머니 같은 것을 발에다 찹니다. 그리고 축구 연습을 합니다. 동작이 느려 보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연습을 하다가 대회 시작하기 하루 전날쯤 풉니다. 그러면 선수들은 몸이 훨씬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만큼 다리의 힘이 길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도저히 더 이상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은 이걸 운명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그런 인생의 무게를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는 정신과 육체의 힘을 우리가 길러야 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런 힘을 위로해서 찾았습니다. 주의 율례를 노래로 삼으며 살았습니다. 거기서 시인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았고, 그 감동을 통해서 시인은 자기의 거친 현실을 극복해 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의 율례를 노래 삼아 말씀의 위로를 받으며 이기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주의 이름을 기억함
마지막으로 두 번째는 주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나그네와 같은 시인이 인생길에서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비결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억하고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55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시 119:55) 여기에서 밤은 실제로 밤중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 낮 동안에는 모든 사물의 물상으로 우리의 정신이 가득 찹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세상에 흩어지게 됩니다. 밤 시간에는 모든 것들이 고요하고 눈에 보이는 것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마음은 내면으로 향하게 되고, 정신은 자신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들 너머에 있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실제로 시인들은 밤에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되돌아보면서 진실함을 회복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또 이 밤은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절망적이었던 고난의 시기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 시인은 그러한 때에 어떻게 자신이 현실을 견디며 살아낼 수 있었는지를 고백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옮기면 이렇습니다. “여호와여 그 밤에 내가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였고 당신의 율법을 준수하였습니다."(시 119:55)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성경에서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에 생각이 남는다는 뜻을 가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보다 더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바로 기념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생각을 통해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신앙에 있어서 지성의 헌신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구약성경에서 “잊지 말라”, “기억하라”는 명령이 매우 자주 등장하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광야에서 방황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과거를 생각나게 하시는 명령입니다. ‘너희는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사람들이었느니라.' ‘이것을 잊지 말라.' 무슨 의미입니까? 그렇게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그 기억을 떠올리면 그때 얼마나 비참하게 노예로서 설움을 받으며 살아갔는지를 정동으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정으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자식을 낳아도 희망이 없습니다. 그 아이들도 똑같이 조상들을 따라서 노예가 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혹사당하며 자유도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의 운명이었습니다. 너희가 그런 사람이었던 것을 잊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끊임없이 그 기억의 정동을 현재로 소환하여 ‘너희들의 지금 처지와 그때 종 되었던 시절에 신분의 차이가 얼마나 놀랍게 변했는지를 잊지 말아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기억하라는 명령이 나오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디어 광야의 모든 방황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말하자면 추수감사절이 됩니다. 그러면 그들은 처음 곡식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와서 제물로 드리며 다른 짐승과 함께 제사를 드리면서 원시신앙 고백을 합니다. ‘우리 조상은 원래 유리하던 아람 족속이었는데···' 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것은 애굽의 생활과 거기에서 종살이하는 비참함을 거쳐서 광야에서 인도하신 것과 마지막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된 축복까지를 모두 망라하는 긴 고백입니다. 그거를 조상 대대로 낭송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억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비참한 처지에서 구원해주신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바로의 치하에서 벗어나 애굽을 탈출할 때 그 벅찬 자유의 기쁨, 그리고 홍해 앞에 섰을 때 그 절망과 거기서 길을 내셔서 바다에 난 길을 걸어서 양쪽에 벽처럼 선 그 물을 지나며 걸어왔던 기억들, 광야에서 수많은 원수들과 싸워 이기게 하시고 가나안 땅을 점령하게 하셨던 모든 기억들을 현재로 소환하여 그 감동을 느끼게 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현재적으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판단하게 만든 것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그들로 하여금 과거를 현재로 소환하여 그때의 정동을 현재 느끼게 해주었습니까? 무엇으로 그것이 가능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자기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마지막에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신 것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히 명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름을 가진 주체의 고유한 존재와 성품에 대한 경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본 적도 없고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의 이름 석자를 들었을 때는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명사(名詞)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이 함께 오랫동안 사귀어 왔던 사람을 오래도록 못 만났는데, 그 사람의 이름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 이름과 함께 그와 함께 있었던 시간들, 그의 성품이 나타나서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졌던 모든 관계와 행동의 기억들이 소환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이름을 들었을 때는 마음에 기쁨이 몰려오고, 또 어떤 사람의 이름을 들었을 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장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보지 못한 지역의 이름을 떠올렸을 때는 그냥 이름일 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가서 모든 풍경을 보고, 더욱이 거기서 어떤 사건들이 있었고, 그 속에서 여러분이 기쁨을 느꼈다면, 의미를 발견했다면, 또 그 도시에서 문화를 깊이 심취할 기회가 있었다면, 거기서 삶의 교훈까지 얻었다면, 그러면 어떤 도시의 이름을 여러분에게 말해주었을 때 그 도시의 이름은 여러분이 그 도시에서 경험했던 모든 것을 현재로 소환합니다. 느낌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뜻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잊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과 완전히 동의어입니다. 시인은 어두운 밤 같은 인생의 날에 여호와의 이름을 기억했습니다. 자기 조상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어떻게 행하셨는지, 어떻게 그들을 도우시고 돌보셨는지를 기억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기억이 현재로 소환되어 시인의 마음에 정동을 불러일으켰고, 바로 그 정동을 따라서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의 언약을 따라서 나그네와 같은 인생길에서 자기를 신실하게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으로 가득 찬 현실, 짊어지기에 너무 무거운 현실을 살아갈 수 있었던 시인의 위로의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면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위로를 받을 수 있었고, 그 은혜의 감격을 다시 소환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일제시대 때 신사 참배를 반대하다가 7년간 옥살이를 하셨습니다. 모진 고문을 당하셨고 1944년 4월 21일 감옥에서 순교하셨습니다. 그때 그분은 평양의 산성현교회를 담임하고 계셨습니다. 그 교회는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결국 전대미문의 박해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얼마나 심하게 고문을 받으셨는지 일설에 따르면 목사님의 마음이 흔들릴 것 같은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그분을 순교할 수 있도록 붙들어주신 분이 바로 사모님이신 오정모 여사였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면회하면서 남편에게 말했답니다. “목사님! 무죄 판결을 받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감옥을 나올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거기서 순교하십시오." “그러면 조선의 교회가 살 것입니다." 결국 목사님은 순교하시고, 그분을 존경하는 산정현교회 성도들은 주기철 목사님의 동상을 세우고자 했습니다. 이때 사모님은 호통을 치며 반대하셨습니다. 정부에서 일제와 투쟁한 것에 대해 감사하며 상을 주려 했지만, 오정모 사모님은 말했습니다. “우리 주 목사님은 항일 투쟁을 하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다가 죽은 것입니다." (이렇게) 주장하며 일체의 상훈을 거부하였습니다.
결국 일 년 후 해방이 되었고, 해방된 후 사모님은 불행히도 유방암에 걸리셨습니다. 첫 번째 수술을 받으셨는데, 나은 듯하다가 그 암이 재발하면서 투병 끝에 1947년 1월 28일에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있었던 한 일화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분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일깨우는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사모님이 돌아가시기 직전 북한군 장교 두 명이 집에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가방 두 개를 건넸습니다. 당시 북한을 지배하고 있었던 김일성이 보낸 것이었습니다. 열어보니 그 가방에는 지폐, 논밭 문서 그리고 일본 사람들이 버리고 간 적산 가옥(敵産家屋)의 집문서가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만 받으면 온 가족들이 편안하게 부자로 살 수 있을 정도의 재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정모 사모님은 그것을 받기를 거절하면서 군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일성 장군께 돌아가서 내 말을 전해주시오. 마음은 감사하게 받겠습니다만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리고 이 재물은 돌려드립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어린 아들이 그 어머니를 원망하였습니다. 단둘이 남게 되자 어머니는 자기를 원망하는 아들을 앞에 앉혀 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아들에게 시편 37편의 한 구절을 읽게 하였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 37:25) 그분은 나중에 장로님이 되었고, 그 후에야 비로소 그 재물을 받지 않은 어머니의 큰 뜻을 높이 칭송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사람이 경건하게 산다는 것은 경건한 회상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세속적으로 산다는 것은 죄를 많이 짓는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경건한 회상이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 구원받은 백성들을 위해 어떻게 행하셨는지 그리고 하나님께 구원을 받은 나를 위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그 기억을 현재로 소환하여 그때 나를 위해 그렇게 돌보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나를 돌봐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그 믿음이 현실을 극복하게끔 만들어주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 말씀 속에서 약속을 따라 과거 거기서 행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기억에 대한 믿음으로 그 하나님이 지금도 여기서 그렇게 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현실이 어려울 때마다 항상 마음을 굳세게 하십시오. ‘인생은 원래 다 이런 거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지만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냉정하게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나의 가장 큰 의무는 내 인생의 무게를 내가 주체적으로 감당해 내는 것이다.' 그래서 필요 없는 무게는 줄이고, 짊어질 수 없는 무게는 기꺼이 짊어지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과 정신의 팔과 다리에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련과 역경도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며 견디고,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인생의 무게를 줄이는 길이라고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무리 명랑하게 살려고 애를 써도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렇게 명랑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 지금 자기 의지를 반해서 악하게 살아가면 그는 결코 명랑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양심을 거스르는 삶을 산다면 그는 결코 명랑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시 119:9)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 (이러한) 시인의 고백을 떠올려보십시오. 하루 중 찬송을 부르는 때가 있습니까? 산란해진 마음을, 이 세상의 근심과 염려로 초토화된 마음을, 어지러워서 자기가 어디 있는지 산란해진 마음을 다스리는 비결이 있습니까? 하루에 몇 번씩은 조용히 눈을 감고 가슴에 손을 얹고 정신을 하나님께로 향하여 떼어놓아야 합니다.
(찬양)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사건은 땅 위에서 일어나지만 의미는 하늘에서 주어집니다. 우리의 삶에 우연이라는 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그분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은 그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일어난 수많은 일들의 의미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파악합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에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던 시인도 이렇게 고난의 길을 걷고 현실의 무게에 눌려 아파하고 흐느낄 때 주님의 율례를 노래로 삼아 부르며 위로를 얻었고 주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하면서 삶을 살아낼 용기와 힘을 얻었다면 오늘날같이 이렇게 물질주의적인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이러한 경건한 은혜가 얼마나 더 많이 필요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 말씀을 지킴으로 인생을 살아갈 담대한 힘을 얻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시인은 고난의 날에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했습니다. 주님의 율례를 노래로 부르며 위로와 용기를 얻었으니, 말씀의 은혜로 현실을 이기는 비결을 터득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했으니 그 기억은 사랑이었고, 그 사랑으로 더욱 말씀을 지키며 삶으로써 현실을 살아낼 수 있었습니다. 말씀으로 노래를 삼으며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며 이길 수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도 인생의 어두운 밤을 이기며 살 수 있는 비결이 아니겠습니까? 하루 중 찬송하는 시간을 꼭 가지십시오. 부르기 싫으면 듣는 시간이라도 가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담궈 보십시오. 정신없이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과 잠시라도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으며 시작하는 사람의 하루가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일들에 대한 분주한 생각으로 하루를 허둥대며 시작하는 사람과 천국의 이슬로 자신의 마음을 말씀에 적시며 시작하는 사람 사이에 삶은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힘든 때일수록 이렇게 하나님의 율례를 노래 삼아 위로를 얻고 주님의 이름을 기억하며 용기를 얻어 여러분의 삶을 승리하며 살아내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선대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믿었사오니 좋은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5-67)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묵은해가 지나고 새해 아침이 밝았습니다. 한 날의 삶은 아침이 결정하고, 한 해의 삶은 첫 달의 결심에 달렸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새해 첫날을 맞이하셨습니까? 어떤 일은 우리의 소원대로 이루어지는 일도 있겠지만, 어떤 일은 우리의 뜻대로 안 되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뜻은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해를 시작하면서 뜻을 세우지도 않고 하루를 보낸다면 한 해 동안 무엇을 푯대로 살아가겠습니까? 새해 첫 주일에 첫날을 맞이하는 여러분은 오늘 무슨 뜻을 세우며 하나님 앞에 한 해를 살려고 하십니까? 오늘 시편에서 시인은 인생의 위기 속에서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당했습니다. 거기서 아주 엎드러지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시인은 그럴 수 있었습니다. 시련과 고난이 있었지만 받은 은혜가 훨씬 더 컸기 때문에 시인은 거기서도 살아남아서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해서 시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대해주셨나 하는 것입니다.
II. 선대하시는 하나님
그러면서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를 선대해주셨다고 고백합니다. 많은 상황을 겪으며 역경을 지나면서 시인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고난 속에서 자기를 다루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의 마음이 똑같습니다. 모두 풍족하고 평안한 것을 바라지 가난하고 불안한 것을 바라는 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시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자기가 바라는 것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련과 고통을 겪어야 했고 친구들의 배신과 악인들이 자신을 에워싸는 것을 봐야 했습니다. 많은 시련과 역경을 겪으며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시인은 뜻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살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 치열한 삶이 결국은 뜻을 세운 데서 시작되었고, 그런 치열한 삶을 살아냈기 때문에 오늘 시편 119편 같은 글을 써서 3천 년의 간격을 뛰어넘어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서 시인은 지난날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러자 거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시 119:65)
A. 종을 선대하심
‘선대한다’라고 하는 것은 ‘좋게 대해준다’ 이런 뜻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후하게 대우해준다.’라는 뜻이 됩니다. 원하지 않는 슬픈 일을 만나고 겪지 않아도 되는 시련을 겪으면서 시인은 가시덤불과 같은 인생의 길을 지나야 했습니다. 꽃길을 걷던 때도 있었는데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몰랐으나 그런 때를 믿음으로 지나고 난 후에 과거를 돌아보면서 시인은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과 둘째는 그 하나님이 언제나 자신을 선대해 주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되고 만사가 형통할 때 자기 분수를 잊어버리고 교만하기 쉽습니다. 시인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원만하고 꽃길만 걷는 때는 그의 마음이 결코 겸손해지지 않았습니다. 자만했습니다. 그러나 시련을 통과하면서 가시밭길 같은 인생의 역경을 지나면서 그는 하나님 앞에 겸손을 배웠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종은 상전의 손을 바랄 수밖에 없고, 여종은 주모의 표정을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상전이 화나고 주모가 마음이 편하지 않게 되면 고달픈 종살이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역경을 통과하면서 겸손을 배웠습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아십니까?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를 믿고 씩씩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고난의 때를 지나며 역경을 겪으며 시련을 통과하면서 비로소 겸손을 배웠습니다.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오, 하나님이 지으신 종에 불과하고 그분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시련을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겸손을 배우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역경을 많이 통과하고 시련을 겪고 고통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누구든지 그 마음과 성품이 망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망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평탄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대부분 마음이 유합니다. 여유가 있습니다. 우리처럼 시련의 가시밭길을 걸으며 일생을 살아온 사람들은 거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거친 마음을 거두시고 겸손하게 하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를 믿음으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인이 겪은 고난으로 보면 상처투성이의 인간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고난 속에서 겸손을 배웠습니다. 이런 시련과 역경을 통과하지 않았더라면 자기가 교만한 줄도 모르고 살았을 그 사람이 비로소 자신은 하나님의 종에 불과하다고 고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 자기가 겪은 고난의 시간을 돌아보니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에게 선을 베푸셨습니다. 언제나 지켜주셨고 도와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대로 자기를 선대해주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큰 고난 속에서 겸손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고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달았습니다. 고난이 그것을 저절로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고난의 때를 하나님 바라보며 견뎠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이 자기를 선하게 대해주신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십시오. 안 그런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지난 한 해를 돌아볼 때 눈물밖에 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자기를 사랑으로 돌봐주셨는지 감사할 마음밖에 없어서 찬송만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면 지난 한 해 동안 정말 가슴 아픈 일은 없었겠습니까? 쓰라린 마음으로 탄식하던 때는 없었겠습니까?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입니까? 하나님은 좋아 보이는 것을 통해서만 우리를 좋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도 우리를 좋게 해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자신의 지난날들을 해석하고 나면 가시밭길을 걸었던 날이든지 꽃길을 걸었던 날이든지 그 모든 길이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걸어온 때였음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석이, 해석이 자기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무슨 해석입니까? 자신의 인생의 불행에 대한 해석,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믿는 데서 나오는 그 신앙의 해석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해를 이렇게 돌아보면 불평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안타깝고 쓰라린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내게 전달해주는 도구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50대 중반까지 소원이 병원에 입원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1인실에 조용히 연약하게 누워 있으면 성도들이 와서 손을 꼭 잡아주면서 '목사님 건강하세요.' 나도 그렇게 한번 위문을 받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때까지 그럴 기회가 오질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드럽게 건강했습니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된다고 그다음부터 11년 동안 열두 번 입원하고, 열 번 수술을 했습니다. 그때 칼로 살을 찢고 그 다음 뼈를 깎아내고 심장 옆에 있는 혹을 떼어내고 수술을 합니다. 그리고 수술하고 나서 간호사가 와서 약을 주면서 '환자님, 이거는 마약이에요.' '이건 시중에서 구하지도 못하는 약인데 엄청 독한데 가능하면 적게 드시는 것이 좋아요.' 그리고 그 마약성 진통제를 건네줄 정도로 그렇게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게, 그런 일들이 당연히 나빠 보이는 것이지 않습니까? 수술실에 들어갈 때 그 기분 묘한 거 아십니까? 딱 들어가면서 '어쩌면 이게 내가 마지막 보는 세상일지 모른다.' 그리고 수술실로 들어갑니다. 한 15% 정도는 제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들어갔습니다.(2014년에) 그렇게 들어갈 때 그게 어떻게 좋게 느껴지겠습니까?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빠 보이는 걸 통해서 하나님이 정말 좋은 것을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그 전까지는 제가 진짜 무자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교역자가 새벽기도 안 나오면 집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왜 안 나오냐 그러니까 아팠었다고 합니다. '지금 전화를 받고 있다는 것은 안 아프다는 증거다.' '빨리 나와라.' '그리고 네가 나오다가 쓰러져야지 교인들이 은혜를 받는다.' 이게 과장이 아니라 실화로 내가 주고받은 대화입니다. 나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던 말이 그것입니다. '모든 아픈 것은 정신이 약하기 때문이다.' '이차돈은 목이 잘리고도 걸어갔댄다.' '그런데 너는 목도 가지고 있으면서 왜 못 걷냐?' 제가 하여튼 깊이 은혜를 받고 3년 동안을 순교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도 안 죽어서 이제 그만뒀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교인이 심방 가서 아프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저게 틀림없이 정신 상태가 희미할 거야.'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열 번이나 겪고 나서 그 다음에는 아프다는 사람 이야기를 들으면 집에 돌아올 때 그렇게 마음이 아릴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아플까?'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게 지금 말하는 순간에도 눈물이 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빠 보이는 거를 통해서 좋은 것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여러분 진짜 죽어났습니다. (저한테) 겸손하게 되었습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쓰라린 마음으로 교회 와서 엎드려 흐느낄 때도 있었고, 너무 가슴이 아파서 괴로워하던 날이 왜 없겠습니까? 우리 모두 불완전한 세상을 살아가는 죄인들인데, 제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억이 안 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덮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다 덮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한 해를 이렇게 돌아보면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은혜의 파도가 1월 달력부터 12월까지 출렁거렸던 것 이외에는 기억이 안 납니다. 누군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도 있었지만 기억이 안 납니다. 왜냐하면 그가 날 아프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억이 안 나는 게 아니라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그런 것쯤은 용서할 수 있기 때문에 기억이 안나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하나님이 선대해 주셨습니다." “말씀을 따라서 나를 선대해주셨습니다. 아멘."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시인이 그렇게 쓰라린 가시밭길 같은 고난을 통과하면서도 지난 인생길에서 자기를 선대해주셨다고 그렇게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되었겠습니까?
B. 계명을 믿음
그 비결에 대해서 성경이 말합니다. 계명을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말합니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믿었사오니 ···"(시 119:66 上) 시인이 역경과 고난 속에서 자기 아픈 것만 바라보고 살았더라면 아마 이 고백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환란을 당하고 고통을 겪어도 그가 붙든 것은 거친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걸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랬더니 악인들에게 시달리고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불행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걸 우리들이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새롭게 해석하는 능력입니다. 어떻게 신앙이 없을 때 자기의 인생을 해석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새롭게 해석하는 능력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믿음이 큰 사람은 이 해석을 아주 훌륭하게 해내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 해석을 못합니다. 그래서 해석이 뛰어난 사람에게는 시련의 아픔과 역경의 고통이 하나님을 찬송할 이유가 되는 것을 발견하지만, 해석을 못하는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아픈 거는 아픈 것대로 그대로 남고 좋은 것은 기억이 안 납니다. 그래서 한 해를 돌아보면 힘들었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마음에 없으니 상처밖에 기억나지 않는 것입니다.
시인은 많은 역경을 통과하면서도 하나님만 바라보던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시인이 보여준 계명에 대한 굳센 믿음이 역경을 이기게 만들었고, 새로운 각도로 자신의 인생을 해석하게 해주었습니다. 이 믿음이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말보다는 사람 됨됨이가 먼저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말이 청산유수입니다. 그런데 내가 이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이미 여러 번 겪었는데, 이 사람은 믿을 수가 없는 사람이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럴 경우에 그가 사실을 이야기해도 나는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의심하는 방식으로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깊이 신뢰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을 오래전부터 경험했는데,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내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내게 좀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저 사람이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 걸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일단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왜 그렇게 되는지 아십니까?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 신뢰가 사랑입니다. 사랑의 장(章)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의 특성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그랬습니다. 얼핏 우리가 듣기에는 ‘사랑하는 사람은 나쁜 짓을 하려고 마음을 안 먹는 거다.' 이렇게 해석하기 쉬운데, 그게 그리스 원어로 보면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무슨 뜻이냐면 ‘사랑은 나쁜 쪽으로 해석하지 않으며’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의심하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은 선한 말을 해도 자꾸 나쁜 쪽으로 해석을 하려고 드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저 사람이 나쁜 이야기를 해도 본뜻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선하게 해석하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의 표시입니다. 시인에게는 이런 하나님을 향한 무한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할 때 우리는 반드시 그분을 신뢰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지난 과거를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느끼며 늘 울어도 갚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감격하며 살았던 날들이 언제였습니까? 그때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던 때였습니다. 예배시간에 여러분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고, 성경은 늘 옆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에는 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찬송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던 때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음성을 듣고 목소리를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그 신뢰를 토대로 그분의 말씀을 “아멘" 하며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 믿음이 이 시인으로 하여금 역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과거를 해석할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가시밭길을 걷고, 친구가 원수가 되고, 외로운 인생의 길에서 홀로 방황하며 고통을 받고, 의롭게 산다는 이유 때문에 박해를 받으며 외톨이가 되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시나이까?"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렇게) 물을 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나 혼자 버려진 것 같은 날들도 알고 보니 하나님이 나를 선하게 대우해주셨던 때였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신뢰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무한히 신뢰할 때, 그때 우리는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성경을 펼치면 하나님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아시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뜻이 아주 분명하게 마음속에 떠오르고 자기를 꺾을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올 한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붙들려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산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무슨 하나님의 말씀이 커다란 손아귀라도 된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산다고 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지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인생을 묶는 것입니다. 말씀과 운명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이신지를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 전체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찬양)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그 믿음이 확실하게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에 자기를 붙들어 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이끄는 대로 내가 따라가겠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의 사랑을 배반하고는 내 인생도 없습니다.' 이 고백을 하며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어 매는 것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음을 굳게 믿는 것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꽃길을 걷는 것 같은 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찬송하고, 가시밭길을 걷는 동안에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지를 배우며 하나님 의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꽃길을 걷게 해줘도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가시밭길을 걷게 해줘도 전혀 겸손해지지 않고 하나님 원망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가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가 없는 사람은 좋은 것을 주어도 나쁘게 사용하고, 나쁜 것이 주어지면 나쁜 것 때문에 나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은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사랑에 자기를 묶고, 그 계명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나도 좋은 일로 하나님이 바꾸어주십니다.
결국 우리가 누구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온 땅과 하늘의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품 안에서 태어나고 살아있고 죽어갑니다. 그래서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님의 품 안에 있는 것이니, 우리가 주의 것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십시오. 이 깊은 고독 속에 내 인생이 끝나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이 주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 환난이나 ···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이 모든 시련과 환란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이러한 믿음이 생깁니까? 주님의 계명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그 말씀에 감화를 받아서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선하게 인도해 주고 계신지 그리고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자기를 구원하여 여기까지 데려오셨는지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해를 지나고 나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나쁜 일이 없었고 가슴 아픈 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변화시키시고 새사람 되게 만드셔서 인생을 새로운 각도에서 볼 수 있도록 나를 성숙시키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넘치는 은혜가 너무 커서 하나님이 나를 위해 행하신 모든 것을 좋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내게 일어난 모든 일, 심지어 내가 잘못해서 겪은 나쁜 일까지도 하나님이 어떻게 좋게 바꿔주셨는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없어지는 사람입니다.
(찬양)
늘 울어도 눈물로는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그 사랑의 파도에 떠밀려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인생을 해석하는 비결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가 없으면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좋은 일이 일어나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 배신하고, 나쁜 일이 일어나면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고 사람을 미워합니다. 그리고 원망과 원한을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예전에 하나님 없이 살았을 때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불행해졌고, 우리 인생의 벼랑 끝에까지 서서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인생의 절망을 느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거기에 사로잡혀 있지 않으면 우리는 똑같이 그 옛날 토해버렸던 자리로 돌아가고, 씻었던 자리 누웠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도 예수 안 믿기 전보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러한 모든 과정을 겪으면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그의 계명에 자신의 마음을 묶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인생의 유일한 소유로 여겼습니다. '하나님! 나의 재산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받은 은혜, 그 말씀대로 살려고 애쓴 것 이외에는 나에게 재산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나를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매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우리가 잊을 수 없는 고백을 합니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믿었사오니 좋은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시편 119:66) 시인도 처음에는 시련 속에서 고통스럽게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거기서 고난의 의미를 배웠습니다. 거기서 겸손해지는 비결을 터득했고, 거기서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지를 확인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시인은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 은혜가 클수록 자기를 그 계명에 묶었습니다. 더욱 그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했으니, 더욱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믿음으로 분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시인이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 고난을 겪으며 그 사랑이 온전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역경을 겪으며 그는 하나님의 온전히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자만하던 사람이었는데 고난을 통해 겸손을 배웠습니다. 원래 그 사람의 모습은 자기가 고백하는 바와 같이 그릇 행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의 은혜가 그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고난 속에서 상처를 배운 것이 아니라 주님의 율례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고백을 이렇게 감동적으로 합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편 119:67) 원래 그의 삶의 동기는 이기적이었고 마음은 바르지 않은 구석이 많았습니다. 평범한 우리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받으며 그는 자기를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변화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안목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으로 자기를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는지를 생각하며 그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고난 당한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게 됩니까? 아닙니다. 시인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 말씀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시련과 고난이 그를 고쳐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련과 고난 때문에 자기를 의지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 의지하는 마음으로 붙들었던 하나님 말씀의 은혜가 그의 마음을 고쳐주었던 것입니다. 병든 것을 고쳐 온전하게 해주었고, 또 상처를 바꾸어 영광이 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다시 살려주셨기 때문에 시인은 "고난당한 것이 내게는 유익입니다." "내가 전에는 그릇 행했었는데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손 바깥에 있었더라면 그냥 연약한 대로 망가진 채 상처투성이의 삶을 살았을 그 사람이 주님의 말씀에 붙잡히니까 이렇게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시련과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이 더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기를 가시밭에 백합화가 그 가시에 찔리며 더욱 아름다운 향기를 바라듯이 그렇게 변화된 인생을 살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새해가 밝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인생을 사시렵니까? 반복되는 실패를 운명처럼 여기며 하나님 원망하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사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이 세상에서는 가끔 시련과 고난을 만나지만 주님의 손에 붙들려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고 싶으십니까?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가 두 가지 사실만 잊어버리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실패하는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선이시기 때문에 나쁜 일을 하실 수 없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게 일어난 모든 나쁜 일은 하나님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고, 그런 일이 일어났어도 내가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악을 선으로 바꾸어주실 것이라는 그 신앙을 가지면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를 살릴 때 당신의 말씀으로 살려내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한 해 동안 낭비한 인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없었기 때문이고, 보람된 인생을 산 적이 있었다면 그것은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영혼을 살려냈기 때문입니다. 올 한 해 뜻을 세우십시오. 내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올 한 해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며 살겠노라.' '그 말씀에 붙들려 한 해를 승리하며 살겠노라.'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아멘'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과 함께 올 한 해를 믿음으로 살아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행복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주의 법을 배울 때
“그들의 마음은 살져서 기름덩이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0-71)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옛말에 철들자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열정과 힘이 있지만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가 그리 입체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편협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남을 배려할 줄 몰랐습니다. 그러다 세월이 흐릅니다. 나이가 들고 나니 많은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향한 배려도 생기고 보다 성숙한 지혜에 이르게 되는데, 그때는 애석하게도 죽음을 앞둔 때나 돼야지 그렇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건 꼭 부정적인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어떤 진리는 탐구하면 깨달아지지만, 어떤 진리는 실제로 인생을 산 세월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그 세월이 무엇입니까? 겪음의 시간이 아닙니까? 온갖 일을 겪으면서 성숙하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면 그 ‘겪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는 고통을 겪었다고 이야기는 하지만 ‘쾌락을 겪었다.', ‘친구하고 재밌게 노는 일을 겪었다.' 이렇게 말하진 않습니다. 그래서 이 겪는다는 것은 ‘놀고, 먹고, 누리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고통을 동반하는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만나는 것입니다. 만나면서 예전에 자기가 인생을 바라보던 시각을 가지고는 해석이 잘 안되기 때문에 다른 입장에 서볼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입체적으로 보고 나면 비로소 인생을 새로운 각도에서 볼 수 있고 해석을 하게 됩니다. 그때에 눈에 안 들어오던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텔레비전을 켜시면 가끔 포뮬러카(Formula car)들이 경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게 보통 340킬로미터 시속으로 달린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리는데, 레이서들이 레이싱을 한 번 하고 나면 4킬로에서 5킬로 살이 빠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한 340킬로쯤 달리면 눈에 보이는 게 4도에서 5도 각도밖에 안 보인다고 합니다. 옆에 뭐가 지나가는지 볼 수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한 시속 이천이백 킬로 정도로 날아가는 비행기에서 본다면 그건 또 다를 것입니다. 물론 그 비행기가 어느 위치에 떠 있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마어마하게 빠르면 빠를수록 시야는 좁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천천히 산책을 하면 모든 게 다 들어오는 것입니다. 소리도 들립니다. 새소리, 물소리, 그다음에 바람이 불면서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나뭇잎이 바삭거리는 소리까지 들립니다. 인생도 그런 것입니다. 시인이 바로 그런 많은 겪음을 통해서 인생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 경험을 오늘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II. 주의 법을 배울 때
그래서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배우게 되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A. 말씀을 즐거워함
여기서 크게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첫째는 그 말씀을 즐거워하였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고난 속에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 앞에 교만한 자들이었기에 거짓으로 시인을 모함하며 괴롭혔습니다. 그들은 시인을 미워하며 악을 행했을 뿐만아니라 그를 해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악을 악으로 갚아 복수하는 대신 하나님의 품으로 피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악인과 자신의 마음을 대조하며 고백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70절을 직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그들의 마음은 기름 덩어리처럼 살쪘으나, 나는 당신의 율법을 기뻐합니다"(시 119:70, KNJ 私譯) 악인들의 마음은 기름덩어리처럼 살이 쪘지만 시인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난한 심령이었습니다.
기름은 부유와 안락의 상징입니다. 악인들의 마음이 이렇게 부유하고 안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번영에 취해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들의 마음’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그들’은 복수인데 ‘마음은 단수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마다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이 기름덩어리처럼 살이 찐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마음입니다. 그게 어떤 마음입니까? 악인들은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일로 충분히 만족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찾으려고 들지 않는 마음을 가진 이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마음입니까? 가난하기 때문에 마음이 각박해져서 하나님을 찾을 여유가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경제적으로 부유할 때는 왜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았습니까? 현실이 힘들어서 신앙생활 못 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 인생은 언제나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다 눈물 나는 사연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도 편안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아니라 사는 게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인생이 힘들지 않으면 하나님이 필요가 있습니까? 예수를 믿을 이유가 있습니까? 힘들기 때문에 더욱 예수를 믿었습니다. 어렵기 때문에, 내 뜻대로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니 상황이 어렵다면 더욱 신앙이 필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생이 힘들지 않았더라면 누가 희망을 가졌겠습니까? 신앙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처음입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신앙을 완성하지 못합니다. 신앙이 완성되려면 하나님을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경건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엄 앞에 두려워 떨면서도 무엇인가 그칠 수 없이 하나님께로 이끌리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게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믿음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이 물이나 돌이나 풀이나 칼이 존재하는 것처럼 세상에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본떠서 만든 많은 형상들은 인간이 이런 걸 이해 못하기 때문에 감각에 호소해서 그래도 믿어보게 하려고 만든 것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싫어하셨습니다. 결국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으로 시작을 해서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그 두려움과 사랑이라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하나님의 성품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신앙생활입니다.
(찬양)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따라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깊이 경험하며 눈물을 흘리고 감격할 때, 그때 신앙은 결코 구태의연해 보이지 않고 아침마다 새로운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사랑의 특징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아름다움이 뻔합니다. 그래서 얼마큼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나면 끝없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더욱이 외모는 진짜 순간입니다. 잠깐입니다. 어느 자매가 신혼여행 갔다 와서 “목사님, 외모가 유효 기간이 6개월이라고 그랬는데 아니에요." “4박 5일이더라구여." 4박 5일 신혼여행 끝나고 나니까 외모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정신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계속 봄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살아있는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은 자신의 책 속에서 신자가 죄 아래 있다는 증거가 뭐냐 하면 ‘구원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 그게 신자가 죄 아래에 있는 증거다.' 은혜 아래에 있으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찬양)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네
주를 보낸 하나님 사랑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네
언제입니까? 옛날이 아니라 지금, 갈보리 구속의 사랑이 나를 살게 하는 것이 느껴져서 항상 기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연애하는 신앙생활입니다. 사람이 처음 하나님을 만나고 회심을 합니다. 비유를 하자면 닫혔던 하늘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의 소낙비가 퍼붓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이 벌어지면서 은혜의 샘이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그 물에 풍덩 잠기는 것입니다. 그게 회심의 경험입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에 예전엔 없었던 놀라운 감각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감각이 살아나고, 죄에 대한 감각이 살아나고, 그다음에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감각이 살아나고, 사랑에 대한 감각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다시 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죄, 용서, 사랑, 이런 감각이 확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감각이 살아나니까 이 성경이 예전에 있는 그런 성경이 아니라 살아 있는 책이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 위대하신 분인가 하는 거를 개념으로는 알았지만 실제로는 못 느꼈는데 감각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물 먹고 밥 먹듯이 죄를 지으면서 살았는데, 이 정체가 뭔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무엇인지를 알고 나니까 깊은 두려움이 생겨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거를 용서해주십니다. 그렇게 죄인이 용서받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경험하고 나니까 불화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하게 되면서 그 속에서 사랑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거를 한번 경험하고 나면 항상 그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진정으로 믿은 사람은 이 네 가지에 대한 맛을 본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신앙생활을 잘 안 하고 은혜에서 미끄러져 있을 때도 항상 그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그 인상을(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잘못 믿으면서 살면 예수를 안 믿었을 때보다 훨씬 불행합니다. 불행했는데 그걸 불행인 줄 몰랐는데, 지금은 불행인 줄 알고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더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령한 감각이 항상 살아있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성화의 삶입니다. 그런데 이거를 끊임없이 죄를 죽이고 은혜를 살려내는, 그러니까 죄는 죽이고 은혜는 많이 받아서 계속 살아나는 이런 일들이 우리 안에 있어야지만 이 감각이 보존이 되는데, 이게 내버려 두면 죄가 융성해지면서 이 감각들이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그다음에 죄, 용서, 사랑, 이런 것들에 대한 감각이 희미해지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냐면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게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이걸 묶을 수 있는 매듭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머릿속에서 돌고 그다음에 삶은 삶대로 흘러가서 예수 믿는 것이 내 삶과 아무 상관이 없는 두 개의 서로 다른 판이 내 머리와 마음속에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가끔씩 번뜩번뜩 이렇게 예배를 드리려고 하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내 신앙은 어디 있나?' 그런데 예배 끝나고 돌아가면 다시 이 두 개가 서로 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 두 개를 연결을 못 하니까 살아가는 삶에서 고민하는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해 봐야 되겠다는 결심이라든지 의지, 그런 것들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개념적으로는 있고 그다음에 기독교인으로서 어떤 문화는 지키면서 살아가는데,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는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말하자면 은혜를 멀리 떠난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현실을 하나님과의 관계로 연결시키는 수 있는 그 힘이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앙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을 주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을 읽다가 올 수도 있고, 설교를 듣다가 올 수도 있고, 경건서적을 읽다가 올 수도 있고, 아니면 찬송을 부르다가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실 때 하나님의 사랑이 밥이라면 그 밥을 떠서 먹여주시는 숟가락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거기에 담겨서 우리 속에 전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즐거움을 모르면, 그는 결코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배울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을 향하여 선하게 질서 지어진 삶입니다. 그리고 그 삶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인생입니다. 마음이 은혜에서 떠나면 이런 삶의 질서가 흐트러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마음을 붙들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생활은 무질서해지고 아까 말씀드린 영광과 죄와 용서와 사랑에 대한 신령한 감각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맹인들이 저녁마다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얇은 사포로 두 개의 손가락을 문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맹인들의 이 두 손가락에는 지문이 거의 없습니다. 지문이 이게(엄지) 필요하니까, 이건(검지, 중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굳은살이 계속 박이기 때문에 엄지발가락으로는 점자책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엄지손가락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중지와 검지의 굳은살을 매일매일 벗겨내서 얇게 사포로 밀어서 보들보들 아기살처럼 만들어서 읽을 때 점자가 읽히는 것입니다. 맹인들도 돈을 주면 이게 천 원짜리인지 오천 원짜리인지 만 원짜리인지 오만 원짜리인지 알겠습니까? 모르겠습니까? 너무 잘 압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아주 미세하게 손으로 만져지는 원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모습을 만지면서 얼마짜리 지폐인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크기가 아닙니다. 그걸 가지고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마음이 그런 신령한 감각을 유지하면서 살아야 되는데,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면 그 감각이 무뎌지는 것입니다. 악인의 마음은 기름 덩어리가 되어서 살쪘지만,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배부르고 만족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마음은 가난하고 궁핍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시인의 갈망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제를 나누는 것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그런 갈망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자 합니다. 그래서 70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시 119:70 下) 히브리어 성경은 이게 ‘율법’으로 나옵니다.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에서는 목마른 사람이 행복하지 않고 배고픈 사람이 만족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입니까?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기를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닫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를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만나주실 때 우리의 지성에 말을 걸어오십니다.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회개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기름진 현실을 꿈꾸지만 마음이 기름져 말씀을 갈망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징후인가 하는 것은 잘 모릅니다. 활이 바이올린의 현을 긁고 지나갈 때 아름다운 곡조가 나오는 것처럼 고난이 우리의 마음을 긁고 지나갈 때 찬송이 울려 퍼집니다.
그러면 모든 고난이 모든 사람을 찬송하게 합니까? 그러면 개고생한 사람이 신앙이 제일 좋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스트라디바리우스 같은 한 대에 45억 내지 50억 하는 바이올린이라 할지라도 활이 켜고 지나간다고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게 아닙니다. 조율이 잘 돼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연주자가 기가 막힌 기교로 연주를 해야 됩니다. 그때 아름다운 가락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고난이 지나간다고 우리가 모두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찬송이 울려 퍼지는 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은혜 안에서 잘 조율되고 그다음에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훌륭하게 연주하실 때 고난은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수십억짜리 바이올린이 있고 한 번도 누가 와서도 건드리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좋은 것임을 입증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셔서 우리의 마음을 조율하시고 그렇게 연주하실 때 고난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수많은 아름다운 가락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인생을 회고해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느끼며 감격하였던 때가 고난의 때였습니다. 어려움이 있고, 기도 제목이 있고, 나를 겸손하게 하는 간구의 제목이 있을 때 하나님을 찾았고, 그렇게 하나님을 찾는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 고난 속에서 찬송을 배우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도 자기가 누구인지는 거울을 봐야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거울을 봄으로써 비로소 자기의 모습이 어떤지를 깨닫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는 하나님 말씀의 거울에 비춰볼 때, 그때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시인처럼 여전히 그 법을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깨닫는 기쁨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려는 갈망이 있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새로운 한 해를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고난을 통해 배움
마지막 두 번째는 고난을 통해 배웠다는 것입니다. 악인의 마음은 평안 속에서 기름덩어리처럼 살쪘지만 시인의 마음은 고난 속에서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이 곤경에서 건져주시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입니다. 81절에서 말합니다.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시 119:81) 시는 고통받는 삶의 과정들을 통과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이전에 겪었던 그리고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시인도 사람이었기에 고난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때로는 자기를 괴롭히는 원수들을 멸망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한때 그는 말했습니다. “···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시 3:7) (이렇게) 찬양하였습니다.
고난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시인의 육체를 괴롭혔습니다. 그렇지만 영혼에는 커다란 유익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71절에서 말합니다. 같이 읽어봅시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고난을 통해 무슨 유익을 받았습니까? 무지를 깨우치게 된 것입니다. 고난 받기 전에는 결코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사랑하며 섬겨야 할지 그 계명들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눈물 흘리는 고난이 없었더라면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았더라면 결코 이해할 수 없었을 말씀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시인은 하나님을 그 말씀 속에서 새롭게 만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를 간절히 찾는 시인에게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영혼에 강한 힘을 주셨습니다. 고난 속에서 불평과 원망으로 세월을 보내는 대신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은혜를 간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그에게 보다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고난 속에서 말씀을 깊이 깨닫고 보니 예전에 자신이 보였습니다. 예전에는 자기 자신이 제법 하나님을 경외하며 잘 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악인들이 자신에게 모욕을 주고 고통을 안겨주었을 때, 그때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냐고 원망하며 불평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 말씀을 깊이 깨닫고 보니 비로소 그때에는 자기가 그릇 행하며 살았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 많은 겪음 속에서 마음의 거울은 반짝반짝 빛나게 되었고, 자기를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자신은 잘못 살았고 그릇 행했으며 지금 돌아보니 고난당한 것이 커다란 유익이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이 그리고 완전하신 하나님이 자기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권한을 주셨고, 그 고난 속에서 이제껏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전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시인이 되었고, 이전보다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이 나쁜 것으로 자신에게 다가와도 결코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믿음이 생겼으니, 여호와 하나님의 손이 자기를 붙들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난보다 하나님이 더 가까이 계셨고, 불행보다 큰 사랑으로 자기를 품고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친구가 찾아와서 위로를 해주었습니까? 누군가가 나타나서 자기의 원수들을 무찔러 주었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삶의 상황은 있는 그대로였습니다. 단 하나가 변했습니다. 그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어떻게 변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은혜를 받고 마음이 조율되자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연주해 주시기 시작하자 많은 고난은 심지어 악인들로부터 받는 핍박까지도 활이 되어서 아름다운 곡조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를 보면 세계가 전쟁이나 기근 혹은 핍박으로 고통을 받던 때에 아주 아름다운 찬송가들이 수없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개인만이 아니라 교회도 고난을 받으면서 예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찬송들은 모두 작곡가나 작사가들이 머릿속에서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해 지어낸 것들이 아니라 영혼의 깊은 울림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비명소리처럼 (나온 것입니다.) 그것이 찬양이 되어서 흘러나온 것입니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마음에 노래를 부르면서 찬송으로 기쁨을 삼던 때는 항상 울어야 할 이유가 있는 고난의 때였습니다.
(찬양)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따라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그러므로 현실에 매몰되지 마십시오. 삶이라는 것은 언제나 우리 뜻대로 안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 알기를 힘쓰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왜 이런 상황에 두셨을까? 그리고 이 고통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건은 땅에서 일어나지만 의미는 하늘에 의해서 규정이 됩니다. 풍요 속에 기름진 마음이 되지 마십시오. 오히려 모든 것을 주셔도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거기서 주님의 법을 배우고 고난을 통하여 예전에 보지 못했던 인생에 새로운 면들을 발견하면서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많이 배우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그렇게 한 해를 시작한다면 반드시 승리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 없이 세상에 만족하는 마음이나 번영하기 때문에 자족하는 마음은 모두 기름 덩어리처럼 살진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낼 수 없습니다. 인생은 고통의 바다입니다. 그러나 그 바다에서 신기하게도 하나님은 인생의 모든 고통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짜고 씁쓸한 것을 먼저 먹음으로 술의 달콤한 맛을 느끼는 애주가들처럼 하나님은 고통의 쓴 바다 위에서 하나님의 달콤한 사랑의 물을 부어주십니다. 어려움을 당하고 쓰라린 마음으로 탄식할 때 여러분은 하나님이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깊이 묵상함으로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증명하십시오. 말씀을 깨달으려고 애씀으로써 은혜를 사모하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이전과는 다른 인생을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일으켜 세우실 때
“주를 경외하게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시 119;38)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시인은 고난 속에서 말씀에 깊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시련을 당할 때 그의 관심사는 오직 말씀에 있었습니다. 그가 바라던 바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과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33절부터 이어지는 기도가 이를 입증합니다. “··· 주의 율례들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시 119:33)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시 119:34)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시인의 시선은 자기의 내면을 향합니다. 마치 어거스틴이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자신의 내면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말씀을 깨닫고, 순종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모든 것이 결국 자기 마음의 문제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시 119:36)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시 119:37) (이렇게) 간구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너무 잘 알았습니다. 한때는 하나님께 확정된 마음 같았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돌이키면 허탄한 것에 마음이 쏠리고, 마음의 조율이 깨지면서 은혜에서 미끄러지는 경험을 수없이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마음도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붙들어주셔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증거로 향하게 해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가치 없는 것들을 바라보며 소중히 여기고 마음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하나님께 이 간구를 올렸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말하는 것입니다.
II. 말씀을 일으켜 세우실 때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하나,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마음에서 일으켜 세워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시인은 경험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특별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주를 경외하게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시 119:38)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히브리어 성경에서 직접 번역하면 조금 더 마음에 와닿을 것 같습니다.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당신의 한 말씀을 당신의 종에게 이 세우소서. 그 말씀은 당신을 경외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시 119:38) “당신의 한 말씀을 당신의 종에게 일으켜 세우시옵소서." “그 말씀은 나로 하여금 당신을 경외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이 기도는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A. 말씀을 세우심
첫째는 말씀을 세워달라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드리기 전 시인은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힙니다. “당신의 종"이라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마음대로 되고 자기의 뜻대로 순풍에 돛단 것 같은 때는 자기가 누구인지 깜빡 속기 쉽습니다. 자신이 온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그리고 자신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련과 고난을 겪으며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당신의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종은 억압받고 자율성을 상실한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자유인이 될 수 있었지만, 기쁨으로 하나님의 집에서 그분을 섬기고 싶은 자원하여 종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구약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노예를 해방시켜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정 기간 노예로 살면 주인은 율법에 의해서 그를 해방시켜줘야 됩니다. 그런데 자유인이 될 기회를 주었는데, 이 종이 한사코 자신은 여기서 계속 종노릇을 하겠다고 합니다. 하는 말이 “내가 이렇게 인정하고 나를 사랑해 주는 주인님을 떠나서 어디서 내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나는 당신의 집에서 영원히 종으로 섬기겠습니다.” 그러면 맹세를 하고 증인을 세워서 그를 데리고 기둥에 가서 귀에다 송곳으로 구멍을 뚫고 서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영영 그 집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유인이지만 스스로 종이 된 사람입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모든 노예로 사는 사람들에게 희망은 자유를 누려보는 것일 텐데, 이 사람은 이 정도가 되기까지 주인과의 쌓은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 정도가 되면 주인에게 그는 신분은 노예이지만 노예가 아니라 사실은 사랑하는 자녀와 같고, 주인은 사실은 주인이 아니라 부모나 혹은 형제와 같은 사이이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단어는 ‘에베드(עָבַד)’라는 단어입니다. 이 ‘에베드(עָבַד)’라는 단어는 ‘노예'도 해당되고, ‘종'도 해당이 됩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 오게 되면 ‘둘로스(δοῦλος)'라는 단어가 됩니다. 이 ‘둘로스(δοῦλος)'라는 단어는 사도 바울이 서신서 시작할 때마다 자기를 소개하면서 쓴 용어입니다. ‘그리스도의 종 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따라 그의 종이 된 사도인 바울은 ···’ 할 때 그 종입니다.
1611년에 킹 제임스 버전이라는 영국의 첫 번째 공인 번역이 나오게 됩니다. 대단한 학자들이 모여서 이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인류 역사 이래 가장 완벽한 번역입니다. 물론 거기에도 틀린 부분이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가장 원문 성경에 가까운 번역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둘로스(δοῦλος)'를 무엇이라고 번역했느냐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는 ‘이퀴밸런트(equivalent)’는, 거기에 맞는 동치어(同値語)는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영국 사람들에게는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노예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예를 어떻게 대우했는지는 자신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자기 콤플렉스 때문에 그 단어를 ‘노예'라고 번역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종'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슬레이브(slave)’와 ‘서번트(servant)’는 다릅니다. 노예는 신분입니다. 종은 직업입니다. 그래서 종은 연봉을 계약할 수도 있고, 협상할 수도 있고, 심지어 출퇴근하고, 심지어 사표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예는 불가능합니다. 그 노예가 자식을 낳아도 그 아이는 노예인 부모의 소유가 아니라 주인의 소유입니다. 그런 처지에서 이 ‘종'이라는 단어를 쓴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종'이라고 쓴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에 자유인이지만 스스로 하나님 앞에 종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고 싶어서 쓴 용어입니다. 이 똑같은 일들이 어디에 일어났냐 하면 사도 바울이 예전에 그리스도를 만나고 구원을 받지 못했을 때는 오만하기 짝이 없고, 잔인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한때 핍박자요 포행자였다고 고백했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는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는 스스로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 사랑이 그를 노예로 만든 것입니다. 자유하라고 하셨으나 자기 스스로 그리스도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보다 더 행복한 길이 없었기 때문에 기꺼이 그 받은 용서의 감격을 노예의 삶으로 담았던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이 그를 종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 앞에 여러분은 어떤 신분입니까? 물론 주님은 여러분을 구원하셔서 모두 자유롭게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그 사랑에 감격한 사람은 그렇게 자유롭게 살 수 없습니다. 기꺼이 그리스도의 종으로 삽니다. 주님을 섬기며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즐거워하며 사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종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높으신 하나님 아래 부복한 채 자신의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기를 갈망하며 하나님 앞에 한 가지를 간구합니다. “주의 말씀을 세우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세우소서’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하켐(הָקֵ֣ם)'이라는 명령형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원형은 ‘캄' 혹은 ‘쿰(קוּם)'이라는 단어인데, ‘일어나다’, ‘일어서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입니다. 그 동사의 사역형 명령형입니다. 이 단어의 원형은 그냥 문자적으로 ‘앉았다 일어나다' 혹은 ‘누웠다 일어나다' 이런 평범한 뜻으로도 쓰입니다. 그런데 성경 여러 곳에서 이 단어는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결단을 내리는 광경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습니다.
그중에 한 예가 에스라서 10장에 나옵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바벨론 포로 치하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지도자였습니다. 너무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어려운 일이 많았지만 어쨌든 고향으로 돌아왔고, 하나님 앞에 제사도 드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극적인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이 타락했는데, 지도자들의 타락이 극도에 달했다. 이방 여인들과 정을 통하고 심지어 자신의 아들을 이방 여인에게 장가들게 만들고 며느리들을 맞이하는 있을 수 없는 무도한 일들이 일반화되고 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에스라는 경건하기는 했지만 현실 감각이 좀 떨어지는 사람이었습니다. 백성들 모두 알고 있는 세상의 처지를 그는 충격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곧장 하나님의 성전으로 향했고 들어가지도 못한 채 문 앞에 엎드려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고, 그 회개에 동참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무리가 흐느껴 울며 백성들의 죄를 대신 자복하며 통곡하다가 에스라가 일어나는 광경이 나옵니다. 이때에 바로 이 단어가 사용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소위 에스라의 개혁 운동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어로 쓰였지만, 사실 쓴 사람들의 깔려 있는 사유는 히브리적인 사유입니다. 탕자의 비유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는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모두 탕진했고, 마지막에는 빌어먹을 처지가 되어 유대인들이 가증하게 여기는 돼지를 치는 목부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먹어보려고 했지만 그것조차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그는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눅 15:17) “···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눅 15:18) 그때에 그 동사가 바로 이 동사를 그리스어로 옮긴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을 일으켜 세우소서"라는 사역형 명령형 간구는 이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 안에 어떤 말씀을 일으켜 세워주셔서 그 말씀이 자신의 심령 깊은 곳까지 감화를 끼쳐서 자기를 변화시켜 달라는 기도입니다. 시인은 누구보다도 말씀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고난을 받으며 말씀에 대한 이해의 깊이는 더욱 깊어졌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수시로 일으켜 세워준 경험이 쌓여서 오늘 그는 이 인생의 위기 속에서 낙담하며 불평하는 대신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수 있는 신앙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시인은 많은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말씀이 그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는 말씀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그 시인의 마음에 물결치는 말씀만이 그를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내게끔 만들어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설교를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열린교회를 개척하고 공식 설교를 7천2백 번을 했습니다. 모두 원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전혀 이 질문과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나는 묻습니다. 성경을 얼마나 많이 읽었습니까? 1년에 한 번씩 읽었으면, 30년 예수 믿었으면 서른 번은 읽었을 것입니다. 성경 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겠습니까? 열린교회에서 빠지지 않고 공과공부를 했다면 20년을 다녔으면 약 80권의 책을 성경 공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말씀이 모두 살아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고 있습니까? 그 말씀들 중 지금 내 마음에 일으켜 세워져 있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어떤 말씀이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마음을 흔들어 깨워 그렇게 살아갈 결심과 힘을 주고 있습니까? 한때는 살아있었지만 지금은 지성의 창고에 드러누워 먼지가 뽀얗게 쌓인 그 지식을 가지고는 결코 하나님 자녀의 거룩한 삶을 살아내지 못합니다.
한 십여 년 동안 욜로(YOLO)에 열광했습니다. ‘욜로(YOLO)’가 무슨 뜻입니까? ‘You Only Live Once.’ ‘너는 오직 한 번을 살 뿐이다.' 그래서 자기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서 끝나는지도 모른 채 입고, 마시고, 보고, 듣고, 즐기고, 쾌락에 심취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으며 살았습니다. 그것의 귀여운 버전이 소확행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학자들 사이에서도 공통적인 의견이 욜로의 시대는 이미 저물고 있다. 아직까지도 욜로를 따라하는 사람들은 10대인데, 핑클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웃음도 안 나옵니다. 그 아줌마들이 누군지 알 리가 없습니다. 원조 1세대 아이돌 가수입니다. 이미 끝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무슨 시대가 오고 있는가? 학자들이 욜로에 이은 시대를 ‘펌크라이시스’ 혹은 ‘퍼마크라이스(permacrisis)’ 시대라고 이야기합니다. ‘퍼머넌트(permanent)’, ‘항구적'이라는 말과 ‘크라이시스(crisis)’, ‘위기'라는 말입니다. 욜로의 시대는 지나갔고, 펌크라이시스 혹은 퍼마크라이시스(permacrisis) 시대가 왔습니다. 이제 한참 욜로를 하다가 보니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처처의 전쟁, 그리고 경제난, 환경, 지구의 기후 위기, 저출산, 그 다음에 고용의 불안,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불과 한 2~3년 사이에 쓰나미처럼 덮치기 시작해서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제가 똑똑히 기억합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일어나고 6개월 만에 전 세계에서 사라진 돈이 3만 6천조 원이 사라졌습니다. 그 누계를 내면 숫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경제적인 손실을 본 것입니다. 그 사이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습니다. 코로나로 공식 통계로 죽은 사람이 650만 명입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100만 명 정도 아마 더 죽을 거라고 보니까 한 750만 명 내지 800만 명으로 대충 마무리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통계에 안 잡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업이 망하고, 해고당하고, 비관하고, 알코올에 중독되고, 마약에 중독돼서 죽어간 사람을 헤아리면 그냥 커다란 수천만의 한 나라가 사라졌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걸 경험하면서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으면서 이제 이 욜로가 이런 시대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펌크라이시스 혹은 퍼마크라이시스의 시대를 맞이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욜로 시대의 대안은 먹는 것을 제시하고, 노는 것을 제시하고, 보는 것을 제시하고, 즐기는 것을 제시하면 그것이 욜로에 대한 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펌크라이시스(permacrisis)에 대해서는 누구도 대안을 내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을 끝내고 모든 자원의 값이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만들겠습니까? 누가 이 기후의 위기를 막겠습니까? 누가 이 고용의 한파를 막겠습니까? 누가 인구 저출산으로 결국 벼랑 끝으로 내려가고 있는 나라의 상황을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한번 얘기해 보십시오. 대안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직면한 시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욜로를 배우고 다시 그 욜로를 따라 하는 사람은 부동산 막차 타는 영끌 젊은이와 같은 것입니다. 언젠가는 영혼까지 다 털려버리는 상황이 나오고, 자기 혼자 완전히 시대에 뒤처진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제 질문이 무엇이고 화두가 무엇인가는 우리의 눈에 확 들어왔는데, 그리고 소름 끼치듯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느껴지는데, 문제는 대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외로움뿐이네.' 송창식의 ‘고래잡이'에 나오는 가사입니다. 그런 식의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건 뭐냐면 정신을 차리라는 얘기입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이제 여러분은 정말 비참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입니다. 그게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진 상황입니다. 그러니 아직도 욜로 타령이나 하면서 먹고, 입고, 마시는 세상 즐거움이 마치 허무를 이기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삶이 나는 너무 가엾습니다.(특히 젊은이들이) 늙은 사람들은 덜 가엾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조금만 더 살면 갈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아직도 원하든 원하지 않던 살아야 될 길이 아주 멉니다. 지금도 34분에 한 명씩 죽고, OECD 중에서 우리나라가 자살률은 제일 높고, 출산율은 제일 낮습니다. 500년 후에는 이 나라가 없어집니다. 이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이냐를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에 대한 답으로 내가 말하는 것입니다. 이 항구적인 위기의 상황을 직시하면서 이 현실이 얼마나 허무한가 하는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머리 깎고 산속에 들어가겠다고 결심하지 말고, 세상과 담쌓고 기도나 하면서 살겠다고 도피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어떻게 이 허무한 현실을 극복하면서 자기만의 독특한 인생을 살아낼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라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이 세상에는 두 종류 사람밖에 없습니다. 진리를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입니다. 진리를 안 믿으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허무함을 끝까지 들여다보고 풍덩 빠져서 죽든지 아니면 마지막까지 허무는 없다고 항변하면서 욜로에 취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욜로도 한계가 있습니다. 무슨 한계냐 하면 젊었을 때까지 욜로는 놀아주는데, 늙으면 욜로도 버립니다. 왜냐하면 좋은 데가 있는데, 갈 기운이 없습니다. 맛있는 게 있는데, 소화를 못 시킵니다. 재밌는 게 있는데, 눈이 흐려져서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욜로도 시한부로 여러분과 함께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거를 직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진리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진리로 이런 항구적인 위기의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고민하는 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인생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그리고 살고 죽는 문제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관점은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열네 살에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하게 해주었던 큰 요인 중에 하나가 교회 안에 생각 있는 사람이 없는 것, 그게 나로 하여금 무신론을 택하게 만드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인생에 대해서 열네 살짜리밖에 안 된 애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들여다보았는데 아무 생각이 없는 무뇌자들이었습니다. 뇌가 없는 사람들처럼 여겨졌던 것입니다. 물론 그중에는 박수치고 헌금 많이 하고 열렬하게 교회 봉사하는 사람들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거하고 그거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무신론의 길을 가게 만든 중요한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답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을 가지고 고민하지 않는다면 그럼 누가 우리의 인생을 대신 고민해 주겠습니까? 누가 내려준 정답을 여러분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인생은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그 사람의 인생이지 내 인생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데생(dessin)을 하고 있는데, 미켈란젤로가 나타나서 내 손을 붙들고 나보고는 가만히 있으라 하고 자기가 그림을 그리면 그게 미켈란젤로의 데생(dessin)이지 내 데생(dessin)이냐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리 그 사람이 위대한 예술가라도 그런 식으로 콜라보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콜라보도 아닙니다. 그 손에 붙어서 그림 그렸는데, 거기에다가 ‘K.N.J'라고 거기다가 공동 명함을 올리겠습니까? 만약에 그랬다면 그거는 얼굴에 철판 까는 것입니다. 개발새발 그리다가 끝나도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그려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냥 이해되고 흘러갑니다. 그때 나를 감동시켜서 새로운 결심을 하게 만들고, 눈물을 흘리고 선한 일을 하게 했지만, 그러나 지나간 다음에는 그저 지성의 책꽂이에 꽂혀 있는 것입니다. 시간에 먼지가 뽀얗게 쌓인 채 꽂혀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은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맹수처럼 다가옵니다. 그런데 어떻게 맞설 용기가 없습니다. 도망을 가시겠습니까? 그런 일도 없지만 여러분 맹수를 만나면 절대 등을 보이면 안 됩니다. 등을 보이면 바로 덤벼들어서 찢어버립니다. 어떻게 하느냐면 눈을 봐야 됩니다. 두 눈을 똑바로 쳐다봐야 합니다. 그리고 기죽지 말아야 됩니다. 이런 소위 얘기하는 항구적인 위기의 시대가 전방위적으로 도래하고 있음을 모든 젊은이들이 온 피부로 느낍니다. 그래서 하는 일이 뭔지 아십니까?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저기 멀리서 기차가 달려옵니다. 그런데 철길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저쪽에서 기적소리가 들리고 칙칙폭폭 그러면서 기차가 옵니다. 피해야 되지 않습니까? 피하기가 싫은 것입니다. 어떻게 합니까? ‘기차 없다.' 잠시 후에 사라진 건 기차가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허무한 걸 허무한 그대로 못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욜로가 대안이 아니라는 거를 뻔히 알면서 왜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인생의 마지막에 돌아올 수 있는 답이 무엇이겠는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 대답을 생각하는 게 일주일이나 한 달 단위로 끊으면 별 대답이 안 나옵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생각 없이 20년 살고 난 다음에 어떻게 될 건지 한번 생각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될 것인가? 계속 결혼 안 하고 비혼으로 20년이 지나고 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결혼해도 30년이 지나고 나면 내가 과연 그 가족들을 책임질 수 있는가? 책임까지는 아니더라도 각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정신적인 지주가 될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는 진리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결국 현실에서는 누구도 펌크라이시스에 대한 대안을 내놓을 사람이 없습니다. 이건 누가 하나가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최근에 잡지를 읽었더니 어떤 전문가가 짧으면 30년 내지 40년 동안 이 상황은 끝나지 않을 것이고, 길면 미중(美中) 사이에 엎치락뒤치락하는 이 정치적인 대결의 상황이 200년을 갈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무엇을 생각하지 않고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일으켜 세워져서 그 말씀이 우리의 지성을 때리고, 깨달은 말씀이 우리의 마음속에 세차게 물결쳐서 어디론가 자신 있게 항해할 수 있는 결단이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의 마음에 우뚝 일으켜 세워진 말씀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예전에 여러분에게 말씀이 은혜를 주었다고 하더라도 지금 그 말씀이 여전히 살아서 여러분 속에 일으켜 세워져서 여러분의 마음에 물결을 일으키고 있습니까? 거친 파도를 일으키고 있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기분 좋게 여행을 온 해변의 아침입니다. 바다는 잔잔하고 아침은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습니다. 셔츠 바람에 츄리닝 바지의 주머니에 두 손을 깊이 찌르고, 슬리퍼를 신고 해변을 걷습니다. 찰싹찰싹하는 물소리가 감미롭습니다. 방파제를 걸어갔습니다. 확 트인 바다가 삼면으로 보이고, 방파제를 따라 걸어갈 때 갈매기들의 우는 소리가 정겹게 들립니다. 그러나 다른 그림을 그려보십시오. 파도가 칩니다. 바람이 불더니 물결이 일기 시작하고, 물결은 파도가 되고, 그 파도는 너울성 파도로 변했습니다. 방파제의 왼쪽을 때린 파도는 포물선을 그리며 수많은 물보라를 방파제에 쏟아놓아 내면서 오른쪽으로 떨어져 터널을 이룹니다. 그때 여러분은 과연 그렇게 츄리닝 주머니에 손을 꽂아 놓은 채 슬리퍼를 끌고 여유 있게 방파제를 걸을 수 있겠습니까? 아마 그 파도에 떠밀려 바다에 쓸려가거나 바람이 불어 날아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 그런 현실입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이 어떻게 나의 삶에 적용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변천하는 세상에서 불변하는 진리에 우리의 마음을 꽂는 것 이외에는 우리를 붙들어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그 말씀이 그냥 여러분 귀에 스치듯 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말씀이 물결이 되고, 물결이 파도가 되어서 여러분 마음의 바위를 때리고,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물보라를 일으키며 여러분의 마음을 흔들어 놓아야 합니다. 바위 같은 여러분의 마음에 부딪히며 그 바위를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전에 가던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들어설 때에 여러분에게도 새로운 인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세움을 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경외하게 하심
마지막 두 번째는 경외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마음에 말씀을 일으켜주시는 뜻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 말씀은 “당신을 경외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가장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 어떠한 시련과 난관에도 비교적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그 삶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모든 삶의 원천적인 동기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가 있고, 이것이 동기가 되어서 모든 삶이 질서 지워질 때, 그 때에 가장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화두로 던진 욜로가 끝나고 펌크라이시스 상황이 화두로 떠오르게 된 이때에 우리의 대안입니다.
불행한 세상을 우리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떤 거는 우리들이 노력해서 피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우리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 전쟁 하나 막을 수 있는 힘도 우리에겐 없습니다. 그러니 그보다 더 큰 문제들은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능력 바깥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모든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견딜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크다고 해서 나에게 허락된 한 번 밖에 없는 독특한 내 인생이라는 이 삶의 가치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자기 죽음의 선언입니다. 그건 살아있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생각 없이 살아있는 것은 사실은 생각하다가 죽는 것만도 못합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생각 없이 살아있는 것은 생각하다 죽은 사람만 못합니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은 죽는 순간에도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장수하는데도 의미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그 경외(敬畏)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뱃속에서부터 하나님을 믿으면서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신에 대한 의식은 거의 모든 사람이 가지고 태어납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영혼이 육체와 결합되기 위해서 ‘레떼'라는 강을 건넙니다. 건널 때 헤엄치면서 건넙니다.(영혼이) 어떤 영혼은 수영하는 기술이 좋아서 강물을 별로 안 먹고 건넙니다. 이런 사람들은 육체와 합쳐졌을 때 영혼에 대한 기억이 너무 생생해서 영혼과 자신의 현재 이생에서의 삶을 연결시키지 않고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플라톤 자신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헤엄치면서 레떼의 강물을 아주 많이 먹습니다.(배가 터지도록) 그런데 그 강물이 가지고 있는 성분이 망각이라는 성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왔는데 아무 영혼에 대한 생각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조폭하기에 딱 어울리는 사람들입니다. 영혼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신성을 알 만한 그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엄밀한 의미에서 전도는 그걸 깨우는 것입니다. 그 의식을 깨워서 자기가 온 고향을 상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오늘 여러분에게 설교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것은 완벽한 새로운 경험입니다. 이전에는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완전한 새로운 경험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눈에 보이지는 않는데, 그분이 온 땅과 하늘 위에 아주 높으시고 자기와는 도저히 비교될 수 없는 아주 엄위로우시고 위대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도 서보지는 못했습니다마는 한 8천 미터 히말라야산 같은데 중턱쯤 올라가서 본다면 인간이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4천 미터까지는 올라가 본 적이 있습니다.(3천 8백 미터 정도) 올라가서 보니까 밑에 3천 미터의 영봉들이 줄지어서 거의 천 킬로가 뻗어 있습니다. 거기에 올라와 있는 순간에 나 자신이 아주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위대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딱 깨닫는 순간에 자기가 아주 티끌같이 연약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들어오는 첫 번째 감정이 미천(微賤)의 감정입니다. ‘나는 티끌같이 미천한 존재다.' 하나님은 높고 무한하고 위대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엄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화장터에 갔습니다. 울고불고 통곡하고 흐느꼈는데, 마지막에 돌아오는 것은 따뜻한 유골 한 상자였습니다. 뼈를 뿌리기 위해서 어머니가 평소 자주 오르셨던 산을 올랐습니다. 유골 뿌리기 좋은 날입니다. 아직 군데군데 흰 눈이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바람이 붑니다. 솔가지 사이를 스치는 바람은 죽은 자에 대한 그리움에 목이 쉰 소리를 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 엄마의 따뜻한 뼛가루를 움켜쥐고 공중에 뿌립니다. 뿌리기도 전에 손을 펴자 바람이 불고 그 뼛가루는 공중에 흩어집니다. 먼지처럼 사라집니다. 그렇게 몇 주먹 뿌리고 나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지막에 남은 엄마의 흔적은 내 오른손바닥에 묻은 하얀 가루밖에 없습니다. 그게 인간 육체의 본질입니다. 그 생각을 평소에는 안 합니다. 안 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영구가 없다.'라는 생각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직면할 운명을 직시하는 무서움을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게 오늘날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욜로를 따라가고, 취하고, 심지어 마약을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걸 생각하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손가락에 마지막 묻은 하얀 뼛가루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여러분 모두의 마지막 남은 운명입니다. 누구도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거를 생각하면서 그렇게 유한한 인간이 아니라 영원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보면서 자신이 아주 미천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벌컥 하고 막을 수 없이 일어나는 심리가 있습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의존의 심리입니다. ‘아! 내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구나.' ‘내가 의존해야 되겠구나.' ‘그 절대자를 의존해야 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의존하는 마음이 생겨날 때 신기하게 자기주장의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 순간만큼은 (포기하게 됩니다.) 그걸 하나님은 믿음이라고 보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너를 구원하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대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겪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무섭고 떨리는 두려움을 안겨 줍니다. 그런데 이거 하나만 있으면 이건 경외가 아닙니다. 이건 공포입니다. 그래서 경외는 또 하나의 감정이 따라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사실에 입각한 감정입니다. 그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손에 묻은 뼛가루에 불과하다는 사실만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는 자기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주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도저히 그 높고 위대하신 분 앞에 단지 존재만으로 미약한 게 아니라 존재 그 자체가 하나님의 커다란 진노 아래 있을 정도로 아주 불결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결하다고 깨닫는 것은 사실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래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말하자면 돼지우리 같은 데서 뒹굴며 살던 사람에게 노숙자들이 모여 있는 골목의 거처는 안식처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처럼 깨끗한 환경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바람직한 장소가 될 수 없습니다. 먼지 하나 없어야 됩니다. 깨끗해야 됩니다.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어땠습니까? 그냥 불결하게 살았습니다. 보는 거, 듣는 거, 먹는 거, 내가 아는 모든 것,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다 더러웠습니다. 내가 더럽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다 돼지우리에서 뒹굴고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내가 특별히 더럽다는 생각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흰옷을 입은 무리들이 가득하고, 하얀 예복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 찬 곳에 내가 진흙탕에 빠졌던 장화를 신고 온몸에 돼지 똥이 묻은 모습으로 나타날 때 자기가 몸 둘 바를 모르고 자기는 이 장소에 적합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처럼 그렇게 위대한 하나님을 만날 때에 도덕적인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어떤 마음이 생기냐면 아까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존재를 발견하면서 미천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번에는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하나님을 만나면서 자신이 비참하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용서'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깨끗케 해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스스로 그렇게 깨끗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나를 깨끗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를 용서하셔서 깨끗하게 해주시고 순결한 사랑이 생겨나게 하시는 게 하나님 구원의 한 국면입니다. 그때 어떤 마음이 생겨나느냐 하면 동일하게 미천하게 보일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생겼듯이 완전하신 하나님을 만날 때 내가 그분의 불쌍히 여기시는 은총으로만 살아남을 수 있구나 하는 의존의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쪽에 있는 두려움은 떨리는 두려움이고, 이쪽에 있는 것은 이끌리는 사랑입니다. 너무 무섭고 두렵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형언할 수 없는 사랑에 이끌리고, 여기서보다 다른 곳에서 더 큰 행복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의 경험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경험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 경외심이 생기고 나면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이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가 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한 국면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꾸 하나님의 사랑이라고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두 개가 공정하게 같이 이야기가 돼야 됩니다. 그때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에 의해서 삶의 모든 질서들이 상위로부터 중간, 중간으로부터 하위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질서로 전체적으로 가지런하게 정돈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퍼마크라이시스를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정신의 힘, 삶의 질서입니다. 이것이 포스트욜로 시대 때의 대안이 되는 것입니다. 행복한 삶은 길거리 노점상의 물건처럼 쉽게 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그 경외의 정신이 오늘 내 마음속에서 물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아무것도 두려움 없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언젠가는 우리도 한 줌의 뼛가루로 흩어지고 사랑하는 사람이 흐느끼면서 우리를 공중에 뿌릴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사랑하는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 엄마 아빠를 그렇게 했듯이 나도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흩뿌려집니다. 그게 불과 5년, 10년, 20년, 30년, 40년 후의 일입니다. 길어봐야 50년 후에 일입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그런 순간이 올지 모릅니다. 그러면 그 이후는 주님께 맡긴다고 하더라도 그전까지는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야 됩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결국 니체에 의하면 커다란 채석장에서 떠온 바위를 앞에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정을 들고 한 손으로 망치를 들고 자기만의 독특한 인생을 조각해 가는 것입니다. 누구도 콜라보 할 수 없습니다. 이건 베낄 수도 없습니다. 자기가 이거를 두드리면서 깨면서 자신만의 작품을 완성해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완성을 채 못한 채 죽을 것입니다. 미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걸작을 만들고, 어떤 사람은 처치 곤란한 쓰레기를 만들고 죽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런데 인생에서 겪는 허무와 고통이라는 것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끊임없이 망치를 두드리는데, 얻어맞으면서 깨뜨려지는 소리를 내며 비명을 지르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이 무엇인가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어떤 인간의 상(像)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인생에서 만나는 어떤 깨달음은 정을 정확하게 어딘가 대는 것이고, 만나는 우리의 고통 속에서 얻는 정신의 힘은 이 정을 망치로 두드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정의 대가리가 다 버섯처럼 펴졌습니다. 그런데도 더 때려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조각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결국은 어떤 목표를 가지고 그렇게 바위를 두드려 자신의 인생을 조각하듯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결국 무엇이 결정하냐면 망치가 결정하고 정이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이건 무생물입니다. 여기에 있어서 이거는 누군가의 손에 붙들리기 전까지는 아무 소용이 없는 물건입니다. 그것이 만들어주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카펫 깔린 욜로의 길을 걷고, 여러분이 아무리 고생을 많이 해도 그것이 여러분의 인생을 빚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망치에 불과한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것을 붙들어야 됩니다. 그리고 자기 의지를 가지고 그것을 내려쳐야 되는 것입니다. 치다 보면 수없이 정을 맞는 게 아니라 손을 때립니다. 장인의 손에는 시커멓게 멍이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두드려야 합니다. 살아있는 동안은 이것을 해야 됩니다. 이게 바로 대책 없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인생의 모든 위기에 대한 답입니다.
그거 말고 뭐를 할 수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백 명이 넘는 사람이 스위스에서 안락사를 택했습니다. 처음 듣는 얘기입니까? 합법적으로 안락사할 수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도 많이 갑니다. 그리고 그 죽음이 누군가의 강요에 의한 죽음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라는 것을 녹화로 다 남깁니다. 그리고 마지막 죽음에 이르는 수액을 여는 밸브를 남이 열어주는 게 아니라 자기 손으로 동영상을 찍으면서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30초 후면 영원한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항구적인 위기의 상황 속에서 욜로의 마약 같은 시대는 끝났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대안은 둘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살기를 그만두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살기를 그만두는 것이고, 두 번째는 죽기를 그만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미를 따라 살지 않는 모든 것은 죽기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걸 어느 한순간에 결단을 내야 합니다. 칼로 시장에서 큰 생선을 결딴낼 때 생선가게 아저씨가 큰 칼을 높이 들어서 내려치듯이 그렇게 결단을 내고 살기로 각오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저 경외의 질서로 돌아가지 않으면 여러분은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어느 곳에서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철학의 천재들이 그리스 시대 때 주전 5세기부터 3세기까지 살았습니다.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그 시대에 집중적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다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왜냐하면 답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경외 속에서 답을 찾는 것입니다. 물리학자가 하도 잘난 척을 합니다. 그리고 되게 아니꼬울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한 가지 질문을 던지면 그냥 쓰러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뭡니까?’ 물어보면 물리학자는 한마디도 답을 못합니다. 시간은 본질을 숨긴 채 흘러갑니다. 본질은 안 보여주는데, 시간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나의 퍼석퍼석한 피부 그리고 늙은 얼굴이 세월의 흐름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나의 변심이 시간이 흐른 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이소라의 말을 빌자면 ‘내게는 황금 같은 시간이 너에게는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시간의 본질은 안 보여주는데, 시간은 흘러갑니다. 그 흐름을 우리 모두 느낍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하는 것입니다. 두 눈을 가리고 ‘시간 없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자신은 죽음으로 가까이 다가갑니다.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결국 말을 아주 다양하게 해도 핵심은 오늘 하나입니다. 지금 말한 거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사랑의 원천으로서 그것이 동기가 되어서 모든 삶을 가지런하게 하고 그 질서를 잡아나가는 것입니다. 그게 나를 둘러싼 이 세계의 불안과 그리고 끝 모를 위험과 살아도 살아도 찾을 수 없는 의미를 밝혀내는 대장정입니다. 또 다른 길이 있다면 가보십시오. 아무도 그 길로 가서 그 길을 찾은 사람이 없습니다.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 질서대로 하나님 앞에서 살든지 질서를 떠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 질서는 생각 속에 있는 질서가 아닙니다. 그 질서대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 속에서 그 말씀을 깨닫고, 깨달은 그 하나님의 뜻이 내 마음속에서 물결을 쳐야 됩니다. 그래서 내가 진짜 그렇게 살고 싶어져야 됩니다. 내가 진짜 그렇게 살고 싶고, 너무나 너무나 살고 싶었던 삶은 대부분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시시때때로 말씀을 주셔서 우리의 마음에 물결치게 하시고, 그 물결이 우리에게 파도가 되어서 우리의 심정을 때리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경외의 삶은 떨리기까지 두려워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어린아이처럼 의지합니다. 그리고 이끌리기까지 그분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분께만 붙어 있는 삶이 바로 경외의 삶입니다. 무기력한 사람들은 모두 이 원천적인 질서가 잘못된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번뇌와 괴로움이 바로 이 질서에서 이탈하는 데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속박을 느끼는 사람은 불행해질 욕망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속박을 느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겠습니다. 이런 가지런한 질서가 속박으로 느껴지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불행해지게 하는 욕망이 너무 크기 때문에 속박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는 그 경외의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가지런한 삶들이 우리에게 정돈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참되게 사랑할 수 있고, 참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 두려움이 그를 행복으로 이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주시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자기를 감추지 않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거는 인생에 태어나서 아무에게나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下)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물결치게 하십니다. 이것이 사랑의 감화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은혜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러한 은혜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시고 친교를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더 깊은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깨달은 자의 마음에 말씀이 물결치게 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이 세상이 암흑으로 가득 둘러싸여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나라는 한 인간이 한 사람의 뱃속에서 잉태되어 태어나고, 태어나고 자라고, 자라고 변하고, 변하고 성숙하고, 성숙하고 늙어가고, 늙어가다가 마지막에 죽어 사라지고, 한 줌의 뼈가 되어서 소나무밭 사이로 흩뿌려져서 그 뼛가루를 삼킨 산속은 아무 말 없이 침묵을 흘려보낸다고 할지라도 내가 우주 안에 있다는 사실은 바뀔 수가 없습니다. 모두 그 품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이가 깨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보채기도 하고, 오줌도 싸고, 도리도리도 하고, 빵끗빵끗 웃기도 하고, 소리소리 지르고 떼를 쓰기도 하지만, 모두 엄마 품에서 일어나는 일인 것처럼, 우리의 육신도 그렇게 이 우주를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품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품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바보같이 이제 시세 다 지난 욜로나 따라다니고, 순간순간 즐거움이나 느끼면서 그걸로 삶의 허물을 잊어버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삶을 살면 결국 그때 허비한 수많은 지출은 30년 후에 지불 만기 어음이 되어서 여러분에게 돌아와서 여러분의 중년이나 노년을 파산으로 이끌 것입니다. 생각할 용기를 가지십시오. 생각할 힘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삶에 의해 가지런히 질서 지어진 삶을 사는 것 이외에 또 다른 대안이 없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마음을 오롯이 하십시오. 그리고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당신의 마음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일으켜 세워지도록, 그 말씀이 파도처럼 물결쳐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 의지하며 살게 되도록 매달리며 한 해를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6. 말씀의 인도를 받으라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시 119:105-106)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인생을 살다가 보면 그렇게 오래 살아왔는데도 갈 길을 알지 못하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긴 세월 여러 일을 겪으며 살았고 산전수전을 다 경험했는데도 때로는 어느 길로 가야 할지 판단을 내리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인생은 고통의 바다입니다. 그리고 그 바다에서는 불행의 파도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나는 불행의 수를 줄일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악한 길을 선택하지 않는 것입니다. 명랑한 삶을 위해서 그리고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서 담대하게 사는 것, 참 좋습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불행이라면 오라 그래라.' ‘내가 기꺼이 부닥쳐주마.' 이렇게 말하는 것은 훌륭하지만 그런 담대함은 양심을 거스르며 가책을 느끼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명랑함입니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은 양심에 책망할 것이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악한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반드시 불행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악한 길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옳지 않음을 알고도 욕심 때문에 그 길로 걸어가는 사람은 스스로 불행을 부르는 사람입니다. 어떤 불행은 피할 수 없지만 겪어야 하는 고통을 줄일 수는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정신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 그리고 우리 인간이 잠시 살다 사라진다는 것, 내 이웃에게 일어난 모든 불행한 일들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만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고 양심에 위배되는 일을 함으로써 불행을 불러들이는 일 같은 것들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피할 수 없는 시련 앞에서 “오라고 해라. 내가 부닥쳐주마." (이렇게) 담대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 양심을 거슬려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이런 담대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양심에 책망받을 일이 먼저 없도록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양심을 찌르는 죄는 무엇입니까? 수시로 여러분의 마음에 생각나는 양심에 위배되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부터 멈추십시오. 회개하고 돌이켜 사십시오. 그리고 바른길을 걸어가십시오. 불행의 수가 놀랍게 줄어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충분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성령께서 지성을 통해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는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뜻을 살아갈 때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인도를 받는 길입니다.
II. 말씀의 인도를 받으라
시인은 오늘 말씀의 인도를 받는 삶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당한 고난에 관한 쓰라린 이야기를 잠시 접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자신이 그 고난 속에서 얼마나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는지, 그 시련 속에서 맛본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었는지를 자랑하듯이 간증합니다. 말씀을 깨달을 때 자신의 영혼에 끼쳤던 신령한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현실의 고난은 쓰디쓴 한약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걸 통해서 깨달은 말씀은 꿀송이 같았다고 103절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A. 인생의 등불과 빛
먼저 그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등불과 빛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고난 속에서 깨달은 말씀은 시인에게 등불과 빛이 되었습니다. 무지했던 시인을 깨우쳐 지혜롭게 하였고, 이전에 빠졌던 죄를 인정하며 철저히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새롭게 이해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고난이 저절로 그걸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낮아진 그 마음에 부닥친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깨닫게 해준 것입니다. 신령한 지혜와 하나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는 사실을 고난을 통해서 말씀을 깨달음으로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105절에서 고백합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이 등은 긴 막대기의 끝에 등불을 매달아서 밤에 들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인이 상전의 발끝에 비춰주면 그 불빛에 드러난 길의 모습을 보고 헛딛지 않도록, 안전한 발걸음을 옮기도록, 한 걸음 한 걸음을 비춰주는 것이 등불입니다. 그리고 빛은 길 전체를 환하게 하여 다른 길로 가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광채가 바로 빛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매 순간순간 하나님의 말씀에 인도를 받으며 사는 것이 등불이라면, 빛은 인생길 전체를 비추어 어느 길로 가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삶의 도리 같은 것이었습니다. 시인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무지몽매한 자신에게 지혜의 빛이 되고 인도의 등불이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이전에 쓰러지고 넘어지던 때가 생각났을 것입니다. 어쩔 수 없었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달았다면 결코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시인이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인간이 세상에서 겪는 불행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자연적인 불행과 도덕적인 불행입니다. 자연적인 불행은 자연과 물질 그리고 인간의 육체로 겪는 불행입니다. 자연재해나 혹은 기후 위기나 이런 것들 때문에 커다란 쓰나미 혹은 커다란 폭우와 한파 혹은 이상 기온 현상 같은 것들을 겪으며 곡물의 수확에 피해가 오고 또 인간의 생태계를 위협합니다. 이런 것들이 자연적인 불행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 몸이 자연의 이치를 따르지 않고 멀어질 때 질병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자연적인 불행은 자연에 관한 지식을 통해서 막거나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지식이 있고 그 지식을 지혜로 잘 사용할 때 환경의 위기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고 인간의 건강도 지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도덕적인 불행은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마땅히 인간이 살아야 할 도리를 마음으로 기뻐하지 않고 다른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잘못된 도덕을 선택함으로써 일어나는 불행한 것입니다.
사실 이 두 번째 불행이 훨씬 인간에게 횟수도 많고 결과도 아주 심각하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재난 때문에 자살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도덕적인 불행 때문에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는 사람들은 아주 많습니다. 결국 이러한 불행은 도덕에 관한 지혜를 따라 막거나 줄일 수 있는데, 그 도덕에 관한 최고의 지혜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등불과 빛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시인도 연약한 인간이기에 얼마든지 넘어질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더욱이 때는 시련과 고난이 많은 때였고, 그는 외로운 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든지 넘어질 수 있었는데, 매 순간 하나님의 등불이 자신의 발걸음을 어디로 옮겨 놓아야 할지 비추어 주었고, 길을 비추는 빛 때문에 다른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대낮에 큰길을 걸어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밤중을 걷고 있는 것이며, 한밤에 오솔길을 걸어도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대낮에 길을 걷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빛 아래에서도 넘어지나, 이 사람은 어둠 속에서도 갈 길을 걸어갑니다. 여러분 인생의 등불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매 순간 인도를 받으며 살고 있습니까?
그 옛날 나라가 가난하던 시절에는 주민이 원하는 대로 다리를 놓아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주민들이 개울을 건너기 위해 할 수 없이 징검다리를 놓습니다. 커다란 돌멩이들을 밟고 지나가는 것이니까 아주 깊은 개울에는 쓸 수 없는 다리였습니다. 얕은 개울에 다리를 놓을 형편이 안 될 때 돌멩이들을 놓아 징검다리를 놓습니다. 여름에 비가 오거나 겨울에 살얼음이 얼면 그 징검다리를 건너다가 넘어지기 일쑤입니다. 징검다리를 건널 때는 많은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발걸음을 어디다 옮겨 놓을지, 징검다리에 있는 돌멩이 하나 중 어느 부분을 밟을지에 대해 집중하며 눈을 떼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면 어느덧 개울을 건너게 됩니다.
무슨 뜻이 있어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또 나의 내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인도를 받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옮겨 놓는 사람들은 후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자신의 뜻을 보여주셨고, 자기는 그 말씀의 뜻을 징검다리를 건너듯이 한 걸음 한 걸음 순종하며 걸었다면 좋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는 몰라도 당신은 알고 계시는 좋은 길로 걷게 하실 것입니다. 설령 그러다가 어려운 일을 만났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더 좋은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시기 위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의 그 모든 일들을 사용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 순간 하나님의 말씀에 인도를 받는 일이 필요합니다. '커다란 견지에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다.' '나는 천지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안다.' 이것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매 순간 하나님 말씀의 인도를 받으며 선택하고, 그 말씀을 따라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결정하며 사는 사람들이 바로 그 말씀의 등불로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입니다.
요즘 여러분의 마음에 감화를 주고 있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어떤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여 하나님의 뜻대로 선택하고 또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정하게 합니까? 여러분의 등불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인생길은 빛 가운데 있습니까? 욕망은 인간의 마음을 어둡게 만들고 사랑은 그 마음을 환하게 비치나니, 인간이 두 주인을 마음으로 섬길 수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매 순간 구원받은 것에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매 순간 하나님의 말씀에 인도를 받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옮겨 놓으며 사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말씀의 등불을 끄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길에 하나님 말씀의 빛을 거두지 말라고 하나님께 매일 기도하며 그 말씀에 인도를 받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말씀에 뜻을 정함
마지막 두 번째는 말씀의 뜻을 정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말씀을 우리의 등불로 삼아주셔도 걸음을 내딛지 않는다면, 길에 빛을 비추어 주어도 그 비춤을 받은 길을 따라 걷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 말씀의 유익을 찬송하면서 그 유익한 말씀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경험은 고백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시인은 스스로 결단하여 뜻을 정했습니다. 자신의 의지로 굳게 한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깊은 웅덩이에 빠졌을 때 하나님이 손을 내미셨고, 시인은 주님의 팔을 꽉 붙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련의 웅덩이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고난 속에서 자기를 살려주신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말씀의 은혜를 되새기며 그 말씀대로 살기로 굳게 의지를 가지고 결심한 것입니다.
106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시 119:106) 여기서 ‘규례들'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미쉬페테(מִשְׁפְּטֵ֥י)'인데 '공의들' 혹은 '판단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걸 직접 번역하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되는데, 우리 모두 함께 읽어봅시다. “당신의 판단들과 의로움을 지킬 것을, 나는 맹세하였고 확정하였습니다."(시 119:106 KNJ 私譯) 그는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깨닫게 해주신 말씀대로 살 것을 하나님께 맹세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맹세를 끝까지 지키도록 자신의 마음을 굳게 확정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오늘날 맹세한 약속을 기록으로 남기고 법적인 책임을 기꺼이 지겠다고 다짐을 하며 공증까지 받은 것과 유사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똑같이 움직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뜻을 정하는 사람에게 확정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진리를 찾는 사람에게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사랑하려는 사람에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다니엘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 당할 때 포로로 끌려갔던 젊은 친구였습니다. 워낙 재주가 뛰어나고 학문이 출중했기에 그는 친구들과 함께 바벨론에 봉사할 미래의 인재로 채택이 되었습니다. 선택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왕의 상에서 나오는 음식을 먹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학문을 공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생각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커다란 영화도 다니엘에게는 다르게 비쳤기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나라가 망했으니 이제 여기서 또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죄를 지음으로 내가 나라가 망한 그 악을 더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왕에게서 나오는 음식은 물론 훌륭한 음식이지만 율법의 금한 음식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먼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일 수도 있었기 때문에 다니엘은 그렇게 하지 않기로 뜻을 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서 1장 8절에서 9절 사이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다 1:8) “···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다 1:9) 시인은 또 다른 고난의 상황에서 똑같은 경험을 노래했습니다. 많은 고난과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고통스러웠고 내일 일을 알 수가 없는 때였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 57:7)
다윗의 시입니다. 언제 이 시를 지었는지 아십니까? 아직 왕이 되기 전 간악한 사울의 박해를 피하여 동굴에 숨어 지내던 때였습니다. 이 동굴 저 광야를 방황하며 자객들의 눈을 피하여 도망을 다니던 때 지은 시입니다. 그가 고백하듯이 그는 영혼이 억울하였고, 원수들은 시인을 잡으려고 그물을 치고, 깊은 웅덩이를 팠습니다. 그의 목숨을 노렸고 언제나 그는 자객들에게 표적이 된 채 숨어 살아야 했습니다. 시인은 낙심하고 좌절하는 대신 자신의 마음을 굳게 정했습니다. 마치 흔들리는 물건을 벽에다 못으로 박아 고정시키듯이 흔들릴 수 있는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말씀의 벽에 믿음으로 못을 삼아 단단히 박아두었습니다. 오직 진리의 말씀을 보내시는 하나님의 약속만을 의지하며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상황은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었습니다. 악인들은 시인을 에워쌌고, 자객들은 칼을 들고 시인의 목숨을 노렸습니다. 한순간도 마음 편하게 동굴에서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이 광야 저 동굴을 도망 다니는 신세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확정하게 되자 불안했던 시인의 마음은 바뀌어 찬송이 터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커서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넓은 궁창에 이르나니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하늘 위에 높이 들린 주님의 이름을 발견했고, 주님의 영광이 그 높은 궁창까지 이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울은 자기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풀고 잘못한 것 없이 그의 원한을 샀습니다. 하나님께 자기는 버림을 받았고 다윗은 선택을 받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집요하게 미워했고 살해의 의욕에 불탔습니다. 자기가 죽이면 자기 딸이 남편 없는 여인이 되는데도 그렇게 시인의 목숨을 노렸습니다. 시인이 아마 세상만 생각했더라면 마음 둘 곳이 없었고 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궁창 위까지 가득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랑으로 그 고난 속에서 아무도 모르는 인자하심으로 자신의 인생을 품고 계신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세상의 돈이나 명예가 권력이 그것을 가져다주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그가 붙들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그의 마음을 감화시킨 하나님의 말씀에 매 순간 등불 삼아 자기의 발걸음을 옮겼고, 그 말씀의 빛을 따라가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는 시련 속에서도 궁창에 가득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노래하고 감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아직도 흔들리는 마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확정되었습니까? 상황에 따라 늘 흔들리던 갈대와 같은 마음을 약속의 말씀에 붙들어 매셨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 마음은 지금 어디를 떠돌고 있습니까? '말씀의 은혜를 받자.' '은혜를 받아야 해.' 말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뜻을 세우십시오. 온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인도를 받도록 마음을 굳게 확정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렇게 마음을 확정하는 사람에게 확정된 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공급해주십니다. 마음이 흐르는 강물 위에 떠 있는 지푸라기 같은데, 어디서 안정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 자신이 마음을 확정하려고 하지 않는데, 그 가련한 방랑자 같은 인생을 누가 대신 살아주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십시오.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그 감동을 부여잡고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흔들리던 마음은 확정될 것입니다. 말씀에 뜻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뜻을 정하여 굳세게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하고자 하는 자에게 할 힘을 주시고, 가고자 하는 자에게 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지혜롭고자 하는 자에게 깨달음을 주시고, 굳세고자 하는 자에게 견고함을 주십니다.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은혜입니다. 그 말씀을 등불 삼으십시오. 그 말씀을 빛 삼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지 말고 그 말씀에 따라서 살기로 굳게 다짐하고, 변하지 않는 마음을 주님께 확정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영혼이 진토에 붙었을 때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시 119:25)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앞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기쁨에 대해 노래했습니다. 시인은 그 말씀으로 자기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고 싶었고 또 눈을 열어서 율법에 더 깊은 깨달음을 얻고 그래서 하나님의 더 놀라운 성품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말씀과 함께 사는 것이 시인에게는 행복이었고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건하게 살아가려는 시인에게도 영적인 위기가 있었습니다. 25절을 우리 모두 함께 읽겠습니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시 119:25)
II. 내 영혼 진토에 붙었을 때
시인은 자신의 영혼이 진토에 붙었을 때가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외적인 시련이나 환란보다도 시인의 영혼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기를 성찰하면서 느낀 영혼의 위기의식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파도치는 시련 속에서 믿음을 지키는 것보다 안락한 생활 속에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은 우리의 공통된 경험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연약함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련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굳게 지켜내는 것과 함께 아무 일 없이 평안한 때에 우리의 신앙을 더욱 견고하게 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사는 신앙생활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A. 진토에 붙은 영혼
가슴 아픈 사연을 털어놓는 이 시인은 진토에 붙은 영혼에 대해서 말합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 ‘진토'라고 번역된 이 히브리어 단어는 ‘아파르(עָפָ֣ר)'입니다. 이는 원래 ‘티끌, 먼지'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것이 비유적으로 쓰일 때는 흔히 ‘하찮은 것’, ‘가치가 없는 사물’, ‘있으나 마나한 물건' 이런 정도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이 단어가 구약 성경에서 제일 먼저 쓰여진 것이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으사”라고 했을 때 그 ‘흙'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바로 이 ‘아파르( עָפָר֙)'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흙이 아니라 먼지, 티끌을 사용하여 사람의 육체를 빚으신 것입니다.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결국 인간이 티끌로부터 먼지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은 육체의 덧없음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육체의 하나님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는 방식으로 영혼을 창조하시자 그는 엄숙하도록 존귀한 인간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영혼'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뜻이 매우 다양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문맥에 따라서 이 단어는 여러 가지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영혼' 또 다른 곳에서는 ‘사람' 혹은 ‘목숨' 혹은 ‘목'을 가리키는 단어로 번역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영혼'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자, 그러면 이제 진토가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고, 영혼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영혼은 우리의 몸 어디엔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장기처럼 눈에 보이는 형태로 부피와 크기나 무게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어리석은 사람들은 인간 영혼의 무게를 잴 수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죽기 전에 사람의 체중을 달아보고 죽은 다음에 사람의 체중을 달아보아서 차이 나는 것이 영혼의 무게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습기도 하지만 결국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몸 안에 영혼이 있는 것은 사실인데, 어느 부분에 있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문화에 따라서 어떤 나라 사람들은 창자에 영혼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간에 영혼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우간다의 이디 아민(Idi Amin) 같은 독재자는 정적을 처형하고 반드시 배를 갈라서 그 정적의 간을 씹어 먹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다시 환생하여 자기를 괴롭히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제의(祭儀)였던 것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심장에 영혼이 있다고 전통적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머리에 있다고도 생각했고 또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영혼이 등골 위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칼에 찔려서 그 칼끝에 실낱같은 것들이 묻어나올 때 그것이 영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늘어지기 쉬운 사지백체(四肢百體)를 등 뒤쪽에서 어떤 실로 잡아당기기 때문에 그 자리가 영혼이 있는 자리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이것입니다.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고 또 외과적 해부로서 우리들이 영혼의 존재를 찾아낼 수 없지만 나의 영혼은 내 안에 있고 결코 밖으로 다른 사람에게로 출장 가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의 육체는 영혼을 담고 있는 껍데기입니다. 그래서 영혼과 육체가 함께 연결되어 작용할 때, 그때 정신과 육체 사이에 조절 작용이 일어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카르트 같은 사람은 목 뒤에 송과선(松果腺)이라는 데서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서로 만나 정신을 이루고, 이 소통을 통해서 우리들이 생각하고 느끼고 또 행동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어거스틴는 자신의 글 속에서 말하기를 “육체의 주인은 영혼이오 영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라는 말로 간결하게 표현했습니다. 즉 영혼이 건강하고 올바른 상태로 육체를 장악하고 통솔할 때 인간은 덕스러운 삶을 살게 되고, 영혼은 홀로 그렇게 될 수 없으니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해서 그분의 생명과 사랑을 받음으로써 영혼이 영혼다워질 수 있고, 그럴 때에 인간의 삶이 덕스러울 수 있다고 올바르게 설명한 것입니다.
자, 이상으로써 진토에 대한 설명도 들었고, 영혼에 대한 설명도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라고 말합니다. ‘붙었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다베카(דָּֽבְקָ֣ה)’라는 단어인데, 풀이나 접착제를 이용해서 원래 따로 떨어져 있었던 두 개의 물건을 하나처럼 결합시키는 동작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물질과 물질의 관계에서도 사용되고 또 영혼과 정신을 가리키는 단어로도 사용됩니다. 그래서 ‘아무개가 일평생 하나님께 붙어 있었더라' 혹은 ‘부종하였더라'고 할 때 ‘하나님께 다바크(דָּבַק) 했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의 문방구에 가서 ‘텐 리 다베크(תן לי דבק)'라고 말을 하면 풀을 줍니다. 풀이 데베크(דבק)입니다. 그래서 두 개를 붙이는 접착제나 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라는 의미가 무슨 뜻이냐 하면 고귀했던 자신의 영혼이 티끌과 다름없이 되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붙었다’라는 것은 물리적인 의미에서 영혼과 진토가 붙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의미상으로 그런 처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종합해볼 때 영혼이 진토에 붙었다는 것은 시인의 마음이 얼마나 절망적이고 비참한 상태에 있었는지를 암시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영적인 침체라고 말합니다. 영적인 침체는 영혼이 생명력 있는 활기를 잃어버리고 힘이 없어져 무력하거나 혹은 영혼으로서 올바른 기능을 할 수 없도록 장해를 받고 있는 상태를 가리켜서 영혼의 침체, 영적 침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 안에서 은혜로웠던 사랑의 질서가 흐트러진 것을 보여줍니다. 그때 시인은 자신의 존재가 매우 무가치하게 여겨져서 티끌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신자가 영적인 침체에 빠지게 되면 이처럼 하나님 사랑으로 질서 잡혔던 마음의 정돈이 흐트러지게 되고 한 인간으로서 자존감이 사라지게 됩니다. 당연히 이런 마음의 상태로는 결코 평화로운 인생을 살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자신의 인생을 주체성 있게 사는 것은 불가능하고 자기 인생의 가치를 확신하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존재의 가치를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어떻게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가치라는 기준이 있어야 하고 현실의 생활을 그 가치에 대어봄으로써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가치를 찾지 못하니 의미를 발견할 수 없게 되고, 결국 그 사람은 세상에서 방황하게 되고 삶은 목적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사물이든지 간에 빛으로부터 멀어지면 반드시 어두워집니다. 가까이 있을 때는 무슨 물건인지 확실히 알 수 있지만 그 빛으로부터 점점 멀리 사라져 어둠 속으로 들어갈수록 그 물건이 무슨 물건인지를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것처럼 하나님 말씀의 빛에서 멀어질 때 마음은 지혜를 잃어버리고 영적인 어두움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마땅한지에 대해서 잊어버리게 됩니다. 혹은 열심히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지식이 남아 있다고 할지라도 그 지식대로 살아갈 힘 자체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로는 살아야 될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면서 그 머리 아래 몸으로는 자신도 생각하지 않았던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이율배반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으로 고난을 이겨냈던 시인이 지금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깊은 영적인 침체 속에 있습니다.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은 사라져 버렸고, 자신은 비참하고 무관심하다는 생각에 깊은 절망을 느끼고 있습니다. 일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주님을 의지하며 눈물과 탄식 속에서 회개하고 기쁨과 환희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살았던 시인이 이럴 때가 있다면 우리는 이럴 때가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이런 일들이 살아가면서 우리에게는 피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영혼의 침체에 오래 빠져 있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그는 행복하지 않을뿐더러 또한 하나님이 그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목적을 거스르며 살고 있기 때문에 삶은 끊임없이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인생은 드넓은 바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고통의 바다입니다. 고통의 바다에 불행의 파도가 그치지 않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영혼의 침체는 바로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모든 힘을 잃어버린 것을 영혼의 침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흔히 우울증이라고 합니다. 그 우울증을 영어 병명으로 디프레션(depression)이라고 표기합니다. 그런데 그 디프레션이 신학 쪽에서는 침체라고 번역이 됩니다. 그래서 영적침체는 스피리츄어 디프레션(spiritual depression)입니다. (일종의) 영적 우울증입니다. 우울증에 걸리는 것은 우리에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그건 병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마음의 감기라고 말합니다. 아직까지도 교회에서는 우울증에 걸리면 그 사람이 무슨 영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하고 그 사람에게서 뭔가 잘못의 원인을 찾고자 하는데,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울증은 누구나 걸릴 수도 있고, 극도로 명랑한 사람에게도 우울증이 올 수 있습니다. 이 우울증이 오게 되면 육체는 건강합니다. 아무 문제가 없는데, 삶을 살 정신적인 기력이 없습니다. 인간의 육체라는 것은 우리의 정신이 동기를 부여해야지만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동기 부여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우울증에 걸리게 되면 겉으로 볼 때는 사람의 신체가 멀쩡한데, 이 안에서 정신이 동기 부여가 안 되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큰 기차가 있고 아주 멋있게 달릴 것 같은데 발동이 안 걸리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걸 디프레션(depression)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게 우울증입니다.
영적 침체는 영혼의 우울증입니다. 결국 빛나던 삶의 목표, 가슴을 불타오르게 하던 인생의 도전 의식 그리고 자신의 삶의 존재의 이유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하게 쓰임을 받고 있는가 하는 생생한 생의 의식 같은 것들이 희미해져 버리는 것이 육적인 우울증과 영적인 우울증의 공통점입니다. 그래서 그거는 치료를 받아야 됩니다. 그리고 건강한 사람도 1년, 2년에 한 번쯤은 정신과를 찾아서 ‘제 건강 상태가 괜찮은지 한번 정신을 체크해주십시오.'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울증 증세를 저 같은 사람은 빨리 알아봅니다. ‘우울증 증세가 있으십니다.' ‘병원에 가보십시오.' 그런데 10명이면 7명은 인정을 안 합니다. ‘목사가 뭘 알겠나!' 그런 얕잡아 보는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런 우울증이 있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매우 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거는 중요한 게 생각이 아니라 팩트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침체는 영적 우울증입니다. 육적인 우울증은 결코 자기 자신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건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일입니다.
위로가 되는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아마 19세기의 설교가들 중 전 세계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사랑을 받은 설교자가 찰스 스펄전이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평생 약 3천4백 편 정도의 설교집을 남겼는데, 거의 다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3천4백 개의 설교 중 단 두 개도 본문이 겹치지 않습니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또 재밌는 일화는 우편배달부가 소포를 배달하다가 펑펑 울면서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소포 포장지가 스펄전 목사님의 설교집이었습니다. 배달하다가 그걸 읽고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평생을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우울증과 통풍에 시달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리고 절대 부끄러운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정신적인 우울증이 영적인 우울증을 동반하기가 매우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위해서라도 빨리 치료가 돼야 됩니다.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이러한 어떤 정신적인 우울증이 우리가 말하는 우울증이라면 영혼의 우울증이 영적 침체입니다. 당연히 우울증을 내버려 두면 그게 계속 심해집니다. 심하면 더 깊은 정신질환으로 발전할 수 있듯이, 영적인 침체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영적인 침체에 빠진 것이 잘못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엄청나게 비난을 받을 일은 아닙니다. ‘왜 너희는 그렇게 영적인 침체에 빠지느냐?'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불완전한 인간이고 불완전한 세상에 불완전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그럴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오래 계속되도록 내버려두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혼이 진토에 붙은 것 같았을 때 이런 영혼의 침체에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간절히 매달리는 이유는 이 상태에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고 더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문제가 뭔지 아십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침체 속에서 살아가는 게 그냥 당연하려니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 충만한 사람을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침체가 아니라 영적인 충만함 속에서 생명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냥 위인전에나 나타나는 사람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이 이상의 어떤 다른 삶이 있을까?'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동안에 영적인 침체가 더 깊은 영적인 병들을 불러옵니다. 호세아서에서는 그렇게 영적인 침체가 오래 계속되었을 때 찾아오는 마지막 절망적 질병의 징후를 뭐라고 얘기했냐면 ‘패역'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마슈브’라는 단어인데 확 굽어져서 다시 돌이킬 가능성이 없을 정도로 굽어진 것,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패역’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건 항상 도덕적인 성격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인간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좀처럼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침체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옛날의 믿음하곤 상관없습니다. 세례 요한조차도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옵니까'라고 여쭤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석가들이 공통적으로 해석하는 게 세례 요한의 믿음이 약해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오시는 앞길을 열렬하게 열변을 토하며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외치던 사람이 어느 한순간에 ‘정말 그분이 그분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 극적인 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사도로 삼으시면서 각양 병 고치는 능력과 그 다음에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권능까지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 그러십니까? 당신은 땀이 피가 쏟아지도록 기도를 하는데 잠자는 제자들을 보면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면서 안타깝게 나무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역시 영혼의 침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위대했던 사람들도 영혼의 침체에 빠졌다면 그 이야기는 내가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예레미야로부터 시작해서 엘리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위대한 사람들, 높은 산마다 깊은 골짜기를 가지고 있듯이 다 그런 깊은 영혼의 침체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위대한 사람의 특징은 그 영적인 침체를 하나님 말씀의 은혜로 벗어나서 그렇게 높은 봉우리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침체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진토에 붙어 있는 것 같은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깨달으면서 어떻게 하든지 이런 침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 결코 영광을 돌릴 수가 없고, 자신도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최악의 삶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돌이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B. 말씀으로 살리심
자, 그러면 시인은 진토에 붙어 있는 것 같은 영혼의 상태에서 어떻게 돌이켜 살 수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다시 살리심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시인에게 이런 침체의 경험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일찍이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져 시험에 들었을 때도 이런 침체를 경험했습니다. 말씀을 깨닫는 생활이 사라질 때 영혼의 침체는 더욱 깊어집니다. 마음은 혼란을 겪게 되고, 정서는 어지럽게 되고, 의지는 일관성이 없이 불뚝불뚝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됩니다. 당연히 내면의 질서가 엉클어지게 되면 생활도 함께 질서를 잃어버리게 되고 그는 선한 삶 대신 악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런 무질서한 삶은 우리로 하여금 영혼을 점점 무기력하게 만들고 불순종하며 마음으로 하나님을 거슬러 살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부메랑이 되어서 자기 자신에게 고통으로 되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에게 자신의 영혼이 진토에 붙은 것처럼 비참하게 되는 때가 있었는데, 그때그때마다 그 이유가 각각 달랐습니다. 어떤 때는 안일한 삶 때문에, 어떤 때는 힘겨운 고난 때문에, 감당할 수 없이 많은 대적들에게 에워싸여 있기 때문에 영혼의 침체를 겪었습니다. 이렇게 영혼이 침체되는 이유는 다양했지만 그런 영혼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언제나 동일했습니다. 그것은 말씀으로 그 영혼을 살아나게끔 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영혼은 반드시 우리 안에 있고, 그 영혼이 우리 안에 올바른 힘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의 육체를 선하고 아름다운 길로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많이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려는 이유는 그 말씀의 빛을 통해서 이러한 영혼의 힘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낙심했을 때 우리의 마음을 때리고 지나가는 하나님 약속의 한 말씀이 우리에게, 죽을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희망을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줄 때 우리는 그 이전에 그렇게 하고 싶었던 일을 기꺼이 버리게 되고 세상 사랑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지 않습니까? 이러한 영혼의 힘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은혜를 하늘로부터 직접 내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그리고 성찬 같은 것들을 통해서 그 의미를 깨달을 때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힘을 주셔서 깊은 웅덩이에 빠진 것 같은 침체의 상태에서 헤어 나오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인생을 산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악을 행하기 위해서는 무슨 힘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하면 됩니다. 악하게 살기 위해서는 특별히 훈련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망가진 영혼으로 살기 위해서는 특별히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영혼에 올바른 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힘은 우리 안에서 자가 발전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힘이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영혼이 죽은 자처럼 되는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니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어있는 우리의 영혼을 확 살아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아보십시오. 어제까지 죽은 자와 같았던 자가 충만한 생명을 가지고 살아납니다. 이것은 그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힘차게 역사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만이 사랑의 힘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영혼의 그런 힘 때문에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환경의 시련을 이길 수 있습니다.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그 의미를 찾아내면서 하나님을 찾으며 매달리며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자기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오히려 그 넘치는 사랑의 힘 때문에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연약한 자들에게 손을 내밀어줄 수 있는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어떻게 영혼의 모든 힘을 잃어버리고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때 그렇게 큰 힘이 솟아나서 살아야겠다는 영혼의 강한 힘을 갖게 되는지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저는 몸이 아프기 전까지는 먹는 것의 중요성을 잘 몰랐습니다. 그저 먹으면 먹나 보다 했습니다. 그랬는데, 몸이 많이 아프고 나서는 먹는 것과 건강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또 건강했으니까 항상 아까운 것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글을 쓰고 공부를 하는데, 밥 먹으러 가는 시간이 너무 아까운 것입니다. 그러면 그냥 굶기도 하고 아니면 전화로 짜장면 시켜서 비벼서 옆에 놓고 먹으면서 계속 할 일을 하고, 그렇게 하면서 아무렇게나 살았습니다. 결국은 그것이 마지막에 건강을 해치는 결과로 그대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한 끼 식사를 할 때 아주 정성을 들여서 식사해야 합니다. 비싼 걸 먹으라는 게 아니라 이것이 혀에 착착 감기는 맛으로만 먹지 말고 이 음식이 내 몸에 들어갔을 때 무슨 영향을 끼치는지를 곰곰이 생각하며 깨끗하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적정량을 먹어야 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게 그렇게 몸이 안 좋았을 때 한 끼만 함께 같이 식사를 해서 기분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한 끼를 억지로라도 먹지 않습니까? 그러면 확실히 몸에 힘이 나는 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영양학자들이 스테이크를 먹으면 여덟 시간 후에 힘이 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테이크를 점심 때 먹으면 밤에 힘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밤에는 자야 됩니다. 그래서 제일 좋은 거는 제 경험에 의하면 저녁 때 먹는 스테이크입니다. 그러면 아침에 일어나면 확실히 몸에 힘이 달라진 게 느껴집니다.
우리의 영혼도 똑같습니다. 영혼이 침체에 빠지는 것은 한순간이 아니라 서서히 서서히 침체에 빠집니다. 물론 덜컥하고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을 때는 즉각적으로 침체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천천히 천천히 침체에 빠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회복되는 것도 긴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한 번만이라도 잘 차려진 말씀의 식탁을 맛있게 먹고 나면 놀랍게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기 전까지 자살을 생각하던 사람이 그 말씀 한 번을 받아먹으면서 살아야겠다는 희망을 갖게 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한 끼 먹기 전까지는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고 가슴에 칼을 품었던 사람을 그 칼을 내려놓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할 수 있는 힘도 한 번의 말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기록들을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보게 됩니다. 몇 주 동안, 몇 달 동안 말씀을 들어서 예수를 믿겠다고 한 게 아니라 사도들의 한 번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회심을 하면서 3천 명이나 세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침체된 영혼으로부터 영혼의 활기를 얻는 믿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까?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용서를 빕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용납하시고 당신의 품에 안아주십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품에 기대어 그분의 사랑의 심장의 고동소리를 느끼는 사람은 모두 다시 생명으로 힘찬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데, 그의 마음은 사랑으로 충만하고 생명으로 충만합니다. 예수의 생명이 가득 차서 죽음의 위협을 이기고 절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가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안으로는 죄와 정욕을 이기고, 바깥으로는 시련과 환란을 극복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데, 이것이 거룩한 삶이고 그 거룩한 삶의 열매가 윤리적인 생활입니다.
그러면 진토에 붙어버린 것 같은 영혼은 무엇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은 그것을 “당신의 말씀을 따라”라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이 죽은 자와 같은 영혼을 살려내어 살아있는 자의 영혼으로 바꾸신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말씀대로’라고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라는 이 말은 원래 ‘당신이 말씀하신 것을 따라서’ 혹은 ‘당신이 말씀하신 그대로’ 혹은 ‘약속의 당신 말씀을 따라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이미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이 제시하는 약속을 따라서 하나님이 죽은 자와 같은 시인의 영혼을 살려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심에 있어서 결코 어김이 없으신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실하다'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이 ‘신실함'은 하나님의 진실성을 약속과 관련지어서 말하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반드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과 일차적으로 관계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는 당신의 마음 없이 말씀하시는 법이 없고, 마음을 따라서 말씀하신 바는 반드시 그 마음에서 말씀하신바 그대로 행하시는데, 이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진실성을 ‘신실함'이라고 묘사하는 것입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우리가 어디론가 떠나갔을 때 하나님이 거기 찾아오셔도 우리는 거기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약속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멀리 떠났어도 언제든지 돌아가면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에 계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인데, 이 신실하심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신실함을 저버리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신실함이 깨어지는 동안 관계도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수시로 깨뜨리지만 하나님은 한 번 맺은 그 언약의 관계를 결코 깨뜨리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의 신실하심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집니다. 그분의 말씀에는 거짓이 없고 약속하신 바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이 신실하다는 사실에 기대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은혜받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은혜가 충만한 사람은 그 신실함을 전적으로 믿기 때문에 자신을 주님께 전적으로 기댑니다. 그러나 은혜가 연약하거나 사라진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신실성에 대한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때 인간은 자신을 의지하게 되고, 자신은 끊임없이 자기를 배신하게 됩니다. 우리의 심리에 참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실 학자들 사이에 시간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냐에 대한 논쟁은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도 사실 시간이라는 것이 있을까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과거는 과거에 대한 현재의 기억이고, 미래는 미래에 대한 현재의 기억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결국 우리의 기억이 현재와 미래와 과거를 갈라놓는 것이지 정말 시간이 있겠느냐 하는 뉘앙스를 가지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 말씀을 왜 드리냐 하면 인간은 어리석게도 이미 지나간 과거를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오지도 않은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염려하면서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현재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못하고 흘려보냅니다. 그렇게 흘려보낸 현재는, 오늘 흘려버린 그 현재는, 내일 똑같이 후회할 과거로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신실하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달라고 간절히 매달리는 이유는 과거나 미래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를 잘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랍게도 자신의 죄 때문에 영혼의 깊은 침체에 빠진 사람을 당신의 약속을 따라 그의 영혼을 새롭게 해주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그 놀라운 능력을 말씀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을 큰 소리로 읽어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여러분의 영혼은 어떻습니까? 곤고하여 삶의 무게에 눌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은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여 예수의 생명으로 넘쳐나고 있습니까?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하면 그 지겨운 삶의 무게를 덜어내고 깃털같이 가벼운 영혼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생각하는 삶의 무게는 사실은 현실이 주는 무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이거보다 더 힘겨웠던 현실인데 그런 무게가 안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실패는 하나님의 바로 잡으시는 능력을 보여주시는 기회이고, 나의 가난함은 주님의 부요하심을 보여줄 기회이고, 나의 약함은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날 기회라고 생각할 때, 절대 현실의 무게는 우리 마음의 무게가 아니었습니다. 이 무게는 여러분 마음의 무게입니다. 그 마음의 무게는 세상 사랑의 무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영혼의 무게를 가볍게 하고, 세상사랑은 우리 영혼의 무게를 무겁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영혼의 침체에 빠진 채 살아가려는 사람은 온몸에 무거운 납덩이를 매달고 헤엄을 쳐서 물 위에 떠오르려는 사람처럼 힘겨운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의 은혜를 받고 매 순간 그분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튜브를 달고 헤엄을 치는 사람과 같습니다. 굳이 물에 뜨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 튜브가 나를 물 위로 떠올립니다. 그리고 발과 팔을 저으면서 나의 가는 곳을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영혼의 가벼움은 고통의 바다, 불행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우리의 인생에 구명조끼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 없이 헤엄치는 교만한 사람은 얼마나 위험합니까?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아멘.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자를 살립니다. 일평생 죄에 매어 흉악한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의 하나님 말씀이 사울을 깨뜨려 바울이 되게 만들었고, 그의 죽었던 영혼을 살려 자기가 그렇게 부끄러워하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사도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복음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드렸습니다. 이는 육체의 생명보다 더 큰 영혼의 생명이 그의 인생을 주관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에 기대를 더 많이 거는 사람들은 매일 상처를 받고 아파하게 됩니다. 블레즈 파스칼의 표현에 의하면 이유는 “현실은 때때로 우리를 쓰라리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대하는 바와 현실 사이의 격차가 희망에 차 있는 우리의 마음에 쓰라림을 더합니다.
쓰라린 게 뭔지 아십니까? 살갗을 면도칼로 싹 벗겨내고 거기에 소금을 뿌려보십시오. 상상을 해보십시오. 그게 쓰라림입니다. 굵은 소금을 뿌려서 손으로 벅벅 문질러 보십시오. 그게 쓰라림입니다. 그게 고통입니다. 현실은 언제나 우리에게 그런 쓰라림을 줍니다. 그런데 그래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위로를 주십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사람들은 세상이 자기를 배신하고 그렇게 쓰라리게 했던 것을 그 세상이 주는 즐거움 때문에 금방 금방 잊어버립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하면 그 사람은 천국의 아마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을 것입니다. 가장 좋은 자리에 앉을 것입니다. 그게 우리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결코 마비되지 않는 감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 아름다움을 보고 감격하는 것입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 말씀으로 살리심을 얻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력이 있습니다. 생명을 잃어버려 진토에 붙은 것 같은 영혼이 된 자를 새 생명 주셔서 살아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오직 이 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십니다. 그러므로 다시 마음을 새롭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십시오. 그 말씀에 여러분의 기쁨을 얻으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살 수 있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비참하고 곤고한 시인의 영혼도 살려내셨고, 더 비참하고 가엾던 우리의 영혼도 살려내셨습니다. 세상 사랑에 살 벗겨져 쓰라렸던 우리의 마음이 편안하게 치료된 것도 우리 주님의 품 안에서였습니다. 주님의 품 말고 돌아갈 곳이 어디에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누가 방황하는 우리 영혼의 손을 이끌어 그분의 품에 안겨드리겠습니까?
8. 내 영혼이 녹을 때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시 119:28)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지난주 시인은 자신의 영혼이 진토에 붙은 것과 같이 되어 버렸다고 탄식하면서 자기를 살려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극심한 영적인 침체에 빠진 경험을 고백하면서 자기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회복을 위해 간구합니다.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시 119:28) 이 구절을 좀 더 정확한 이해를 위해 히브리어 성경에서 직접 번역을 했습니다. “나의 영혼이 무거워 (방울방울) 떨어지오니 당신의 말씀을 따라 나를 일으켜 주옵소서"(시 119:28, KNJ 私譯)
II. 내 영혼이 녹을 때
시인은 자신의 영혼이 녹을 때가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진토에 붙었던 때가 있었던 것이 자기 영혼의 미천함과 마음의 절망감을 보여주었다면 본문의 고백은 그 정신의 비참함과 무력감을 그림처럼 그려서 보여줍니다.
A. 눌림으로 녹음
그는 먼저 자신의 영혼과 마음, 정신세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119:28 上) 먼저 그는 ‘영혼이 눌림'에 대해서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혼이라는 단어는 영혼의 고유한 실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이 가지고 있는 기능으로서의 마음과 정신세계까지 모두 아우르는 표현입니다. 어떤 물건이 몇 개의 부속으로 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공장을 방문하면 됩니다. 그 물건이 생산될 때 조립되는 과정을 보면 개수가 나오고 바로 그 부품의 개수가 그 한 제품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떤 요소들로 되어 있겠습니까? 먼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습니다. 이것을 육체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후~"하고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행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자신을 인간 속에 불어넣으시는 것이 아니라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방식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는 흙으로 만들어지고, 영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으로 육체와 만나 인간을 이루는 것입니다.
의문이 생깁니다. 흙으로 만든 물질인 육체와 크기와 부피 모양을 알 수 없는 영인 영혼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그리고 두 개가 어떻게 한 인간에게서 작동을 해서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게 할까?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과학은 아직 이것을 모두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고 서로 다른 육체와 영혼을 서로 관련이 있도록, 관계를 맺도록 만들어주는 기능을 하나님이 부여하십니다. 그게 바로 인간의 마음 혹은 정신입니다.
자, 이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름다운 바다를 향해 여행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 바다 앞에 서 있습니다. 끝없이 푸른 쪽빛 하늘과 에메랄드빛 바다가 만납니다. 그리고 파도가 출렁거립니다. 이 모든 풍경은 우리 육체의 시각을 통해서 우리 눈에 비쳐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모두 물리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람이 붑니다. 피부의 감촉으로 느껴집니다. 물리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바람에 숲에 나무들의 향기가 코끝을 흔들고 지나갑니다. 나무의 냄새가 느껴집니다. 물리적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모두 함께 어우러지면서 우리의 마음에 전달이 됩니다. 그리고 마음의 정이, 감정이 물결을 칩니다. 정동(情動)이라고 합니다. 감정이 물결을 칩니다. 너무 아름답습니다. 집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감정을 여행 간 바닷가에서 느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려고 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눈과 피부, 코와 귀를 통해 들어온 감각적인 세계가 대상들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그것이 우리 속에서 마음을 물결치게 만듭니다. 그렇게 물결치게 만듦으로써 우리 안에 희로애락의 감정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줍니다. 당연히 아름다운 것을 많이 보고 거기서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은 훨씬 더 좋은 영혼의 상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장 자크 루소(J. J. Rousseau)가 『에밀』라는 교육 철학서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한 아이에게 하루 종일 선과 악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것보다는 숲속에서 한 시간을 뛰어놀게 하는 것이 그 아이에게 선과 악을 더 많이 가르쳐 준다.’ 물론 그 사람의 말을 우리들이 완벽하게 동의할 수 없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히 마음에 들어오는 아름다움의 정동들은 우리로 하여금 아름다운 도덕적인 선택을 하는데 도움을 주고, 그러한 도덕적인 아름다움의 정동들이 우리의 영혼을 더 좋게 만든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의 상태는 다시 마음에 영향을 미칩니다. 영혼은 우리에게 파악이 안 됩니다. 그런데 마음은 어느 정도 파악이 됩니다. 그리고 이 마음도 확실히 파악이 안 됩니다. 그런데 그가 하는 행동을 하나씩 하나씩 연결해보면 그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우물의 깊이를 모르지만 우물을 보지도 않고 돌을 던졌을 때 그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우물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는 것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이라는 기능 안에서 인간의 육체와 정신이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고 이러한 학문들을 연구하는 것을 가리켜서 요새 슈퍼베니언스(Supervenience) 혹은 수반물리학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감정도 물질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심지어 사랑하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감정도 우리의 물질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물질 때문에 모든 것들이 일어나고 인간은 그 물질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기계 내지는 유물론적인 사물이라는 결론에는 우리들이 동의할 수 없습니다. 거기는 아직 파악되지 않은 아주 복잡한 정신세계와 물질세계의 만남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이 사변을 더 펼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결국 우리 인간은 영혼에 마음이라는 기능을 가지고 있고, 오늘 시인이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라고 말할 때 그 영혼은 이러한 영혼 그리고 영혼의 기능까지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영혼 그리고 밖에 있는 세계는 마음 안에서 만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영혼과 우리의 육체가 만나는 장소입니다. 따라서 영혼이 ‘눌린다’는 표현은 ‘마음으로 어떤 커다란 무게를 지각한다’라는 뜻입니다. 우리 말 성경의 ‘눌림’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의 히브리어는 ‘투가(תּוּגָ֑ה)’라는 단어입니다. 원래 이 뜻은 ‘무거움’, ‘헤비네스(heaviness)’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면 시인이 느낀 무거움의 정체는 무엇이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시인이 자신의 마음이 커다란 무게를 지니고 있는 것을 의식했겠습니까? 이것은 두려움이 주는 무게였습니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우선 외적으로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주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원수와 악한 자들이 자기를 에워싸고 있었고, 생명을 위협하고 있었고, 고통을 주고 있었습니다. 시인은 힘이 없었고 대항할 수 없었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내적으로는 자신의 죄로 인한 심판이 주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이것은 양심의 작용입니다. 양심의 가책에 따른 두려움은 종종 마음에 아주 무거운 중압감을 주고 때로는 이것이 신체까지 영향을 주게 됩니다. 양심이라는 단어 ‘컨시언스(conscience)'는 라틴어의 ‘콘스키엔티아(conscientia)'라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콘(con)'은 ‘함께'라는 뜻이고, ‘스키엔티아(scientia)'는 ‘지식, 의식'이라는 뜻입니다. 양심은 지식과 함께 붙어서 작용하는 그 무엇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짓고도 기억 상실증에 걸리면 절대로 양심은 작동 안 합니다. 의식이 있는 사람에게만 그 양심이 작동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양심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평균적인 양심을 안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우리는 양심에 털 난 사람이라고 말을 합니다. 모든 사람이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양심이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이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교통법규를 철저히 지키는데 자기가 혼자 위반했을 때는 더 크게 양심이 작동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교통질서를 어깁니다. 그때 양심이 아주 적게 작동합니다. 환경뿐만 아니라 또한 교육 그리고 본성 이런 여러 가지 조건들이 다양하게 영향을 미치면서 양심의 작용하는 힘은 서로 다릅니다. 그런데 어쨌든 이런 양심이 깊은 두려움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시인이 사실 바깥의 환경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적인 어떤 죄에 대한 가책들이 함께 이 고통을 통해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뼈까지 상하도록 고통을 받는다거나 혹은 뼈가 냉과리같이 되었다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시편 102편 3절을 지금 성경이 아닌 이전의 개혁 한글에서 읽어보겠습니다. “대저 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냉과리 같이 탔나이다"(시 102:3, 개역한글) ‘냉과리'라는 단어를 들어봤습니까? 순 우리말입니다. 이 냉과리는 숯입니다. 그래서 이번 성경에서는 숯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사실 이 냉과리는 뭐냐 하면 숯은 숯인데 질이 매우 안 좋은 숯입니다. 그래서 불이 붙었는데 타지도 않고 꺼지지도 않는 애매한 품질의 숯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의 영혼이 아주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애매한 상태에 있어서 끊임없이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시련과 역경 속에서 하나님께로 달려들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지도 못하는 그렇게 애매한 상태를 냉과리 같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영혼의 무거움과 고통을 느끼게 하는 것이 양심입니다. 때로는 무거움을 넘어서서 이 양심은 우리의 마음을 창으로 찌르는 것과 같은 통증을 주게 되는데, 이것은 양심이 사용하는 율법의 작용입니다. 자, 비유를 해보겠습니다. 법정에 서 있습니다. 그때 검사가 죄수를 앞에 놓고 최대한 그의 모든 죄를 가차 없이 재판장에게 고발을 합니다. 이것을 송사라고 하는데, 이게 양심의 가장 중요한 기능입니다. 양심은 끊임없이 우리를 하나님의 법정에 세워서 우리가 뭘 잘못했는지를 스스로 고발합니다. 고발을 하는데 그 고발이 허공에 울려 퍼지는 고발이 아니라 그 고발을 판사가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고발을 정당하다고 인정하면서 그 고발에 대해서 그런 죄에 대해서는 이런 벌을 받아야 한다고 판결을 내립니다. 그 기능이 바로 율법의 기능입니다.
이렇게 되면 명백하게 양심을 위반했기 때문에 양심의 끊임없는 고발에 대해서 피고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재판장이 판결을 내리는데 항거 할 수 있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누가 필요하겠습니까? 변호인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변호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우리 편이 누구입니까? 어떤 경우에도 나 자신의 편을 드는 그 하나가 있다면 그게 누구입니까? 나 자신입니다. 그런데 나 자신도 나를 변호할 수 없을 정도로 양심의 고소가 정확하고 율법의 정죄가 확실합니다. 그런데 나는 너무 두렵습니다. 그때 변호인을 구하는 마음의 빈 공간, 이걸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변호인을 하나님에게서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혜사라고 부르는 의미가 그 속에 바로 그런 거를 변호해주는 기능이 성령 안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렇게 하나님께 호소하면서 내가 양심의 송사를 견딜 수 없고 율법의 정죄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지만 ‘아무튼 나는 살고 싶습니다.'라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을 가리켜서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방식으로 도움을 청하겠습니까? ‘내 양심의 고발도 정확했고, 율법의 정죄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를 살려주십시오.' 그때 복음이 제시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너 같은 사람을 위해 대신 죽으셨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대신 죽으셨습니다.' ‘내가 그분의 보호 아래 숨고 싶습니다.' ‘면책되고 싶습니다.' 그럴 때 그것을 우리들이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식 속에 있는 하나님의 법이 죄를 콕 찍어서 지적함으로 변명할 수 없도록 막다른 골목에 몰렸습니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느끼는 두려움의 감정이 오늘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라고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을 때 더욱 커다란 두려움으로 무게가 증가합니다. 때로는 숨을 쉬기 어려울 지경까지 신체에 영향을 미치고, 경우에 따라서는 회개를 하다가 기절하기까지 이르기도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다시 평화를 누릴 가능성이 없을 것 같은 절망감은 이 무게를 더욱 가중시켜서 마지막에는 어디에까지 이르게 하는지 아십니까? 자기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 자체가 감당할 수 없이 무겁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이 극단적으로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돈이 없어서 죽거나 시련을 당해서 죽는 게 아닙니다. 돈이 없거나 시련을 당하거나 혹은 수치를 당하거나 그래서 죽는 게 아니라 살아있음을 감당할 힘이 없어서 죽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산이 높으면 당연히 골짜기도 깊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영혼의 침체 속에서 눌림을 더욱 크게 느꼈던 것입니다. 두 번 반복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영혼을 가볍게 하고 세상사랑은 우리의 영혼을 무겁게 한다.」 다시 한 번 더 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영혼을 가볍게 하고 세상사랑은 우리의 영혼을 무겁게 한다.」 이 얘기입니다. 세상사랑은 즉 자신에 대한 사랑, 죄와 자기의 의에 대한 사랑은 영혼을 한없이 무겁게 합니다. 이것은 마치 납덩이를 매고 물속에서 헤엄치는 것과 같고 바위를 다리에 매단 새가 하늘을 나는 것처럼 한없는 무게를 느끼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은 깊은 고독과 고통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도까지 되었는데, 그는 이러한 영혼의 깊은 침체를 경험했습니다. 그러한 중에 털어놓은 탄식이 로마서 7장 24절입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 이것이 영어 성경에 “Oh, miserable man that I am!"이라고 나옵니다. 그냥 곤고한 것이 아니라 비참한 사람,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느낀 때가 언제였냐면 불신자였던 때가 아니라 신자였던 때였습니다. 구원받았으나 영혼의 침체 속에서 죄와의 싸움에서 지고 있는 그의 현실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완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에 보탤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안전합니다. 하나님이 한번 구원하신 자를 취소하시거나, 취소하신 자를 다시 취소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구원받은 모든 사람이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행복하기 위해 예수를 믿었습니다. 행복합니까?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것입니다. 예수를 잘 못 믿으면 예수를 완전히 모르는 때보다 훨씬 더 불행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구원은 받았지만, 여전히 이 안에 남아있는 죄가 있습니다. 이렇게 남아 있는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통제되고, 억압되고, 죽임을 당할 때는 생명력 있는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시인이 표현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영혼을 살려주시는 때입니다. 그런데 반대인 경우에는 이런 갈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답이 없을 정도로 불완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고통의 바다입니다. 그 바다에는 파도가 그치지 않습니다. 불행의 파도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행복이라는 것은 결코 아무 근심과 염려가 없고 완벽한 만족이 환경적으로 주어지는 것, 거기서 완전한 쾌락을 느끼는 그런 종류의 행복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자가 이 세상에서 꿈꿀 수 있는 행복이 아닙니다.
시인 윤동주는 ‘십자가'라는 시에서 예수의 양면성을 노래했습니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라고 묘사합니다. 그러니까 그가 보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고통받는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인류 중 가장 행복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일단 예수는 이 세상에서 행복하셨다고 결론을 내려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불행은 죄 때문에 겪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죄가 없으십니다. 그리고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분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그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는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완벽한 인간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셨고, 완벽한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그분 자신이 사랑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행복하지 않다면 이게 형용 모순입니다.
그러면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불행이 삭제된 종류의 행복을 누리면서 이 세상에서 사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분도 이 세상에서 분노했고, 고통받았고, 눈물도 흘리셨습니다. 우셨다는 이야기가 세 번이나 성경에 나옵니다. 결국 완벽하게 행복하셨지만 그러나 그것은 모든 고통이 완벽하게 삭제된 형식의 행복이 아니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가 이 세상에서 꿈꿔야 할 행복이 바로 그분이 누렸던 그런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 고통의 바다를, 불행의 파도가 쉬지 않는 인생이라는 이 해양 위를 항해하며 가는 우리 인간이 꿈꾸어야 할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팔복(八福)에 담았습니다.
하나님과의 신령하고 탁월한 교제를 누렸던 시인은 시련이라는 외적인 환경과 두려움이라는 내적인 무게를 동시에 느꼈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의 영혼의 눌림은 영혼의 무게였고, 그 무게의 정체는 잘못된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 제 13권 9장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질서가 없는 곳에 불안이 있고 질서가 있는 곳에 평안이 있나이다.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이니 그것이 어디로 이끌든지 나는 끌려가나이다.” A. Augustinus,『고백록』13. 9. 10.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고백록에서 열 문장만 뽑으라면 그 안에 들어갈 정도로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입니다.' 그러면서 말하는 것이 ‘질서가 없는 곳에 불안이 있고 질서가 있는 곳에는 평안이 있나이다.' 이게 무슨 질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자, 이것입니다. 존재의 질서입니다. 자,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습니다. 그러면 확실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 모든 만물을 내신 하나님은 그분에 의해 생산된 모든 것보다도 더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존재 질서의 맨 꼭대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머지 모든 것들을 창조하십니다. 그러면 그것들이 모두 다 수평적으로 똑같은 존재의 위치를 가지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이 공중에 나는 새를 돌보십니다.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보다 귀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들에 핀 백합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가꾸십니다. 그런데 백만 송이의 백합보다는 꽃처럼 예쁘게 생기지 않은 여러분 한 사람이 하나님께 훨씬 더 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1억 마리의 공중에 나는 새와 한 사람 인간의 존재를 바꿀 수 없고, 1억 송이의 꽃보다는 꽃처럼 예쁘지 않은 한 사람이 존재의 질서 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존재의 질서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자리매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질서라는 것은 뭐냐 하면 존재의 질서가 곧 가치의 질서입니다. 그 가치의 질서를 따라서 많이 있는 것은 많이 사랑하고, 조금 있는 것은 조금 사랑하고, 덜 있는 것은 덜 사랑하고, 거의 없는 것은 거의 사랑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질서입니다. 인간의 불행은 이 질서를 뒤집는 데 있는 것입니다. 엊그제 며칠 전에도 가슴 아픈 뉴스가 나왔는데, 11개월 된 아이가 굶어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망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엄마가 얘를 버리고 그냥 어디론가 삼 일 동안 놀러 다닌 것입니다. 돌아와 보니까 죽었습니다. 이건 무엇입니까? 존재의 질서를, 가치의 질서를 뒤바꿔버린 것입니다. 거기서 인간의 불행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선이라는 것은 모든 질서를 그대로 따르는 상태가 선이고, 이 질서를 뒤집는 것이 악입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질서에 대한 사랑이 악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의 마음이 항상 이 존재의 질서를 따라서, 가치의 질서를 따라서 사랑을 하면 평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서를 끊임없이 뒤바꿉니다. 그러니까 결국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에 어긋났기 때문에 굳이 하나님이 후려치시지 않으셔도 그 질서에 어긋났기 때문에 계속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꼭 마귀가 와서 우리에게 뭘 줘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계속 단것만 먹고, 밤늦게까지 야식하고, 치킨으로 배부르지 않으면 잠이 안 올 정도로 그렇게 생활하면 건강에 문제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거는 마귀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자연의 법칙으로부터 벗어나고 거스르고 있기 때문에 그 결과를 몸으로 되받는 것입니다. 똑같이 그런 질서가 있는데, 그 질서가 있을 때는 평안합니다. 그런데 그 질서를 거스를 때는 불안합니다. 고통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이 고통이라는 것은 정체가 뭐냐 하면 질서에 어긋난 상태에서 질서를 찾아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그 고통을 겪으면서 그 질서를 찾아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질서를 좌우하는 중요한 주관적인 요소가 무게입니다. 그 무게가 사랑의 무게입니다. 크고 무거운 돌을 가지고 언덕에 서 있으면 당연히 붙잡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꾸 아래로 굴러 내려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내려갈수록 가속도가 붙어서 더 빠르게 내려갑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굴러 떨어지듯이 내려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무게이고, 이것이 사랑의 무게입니다. 그것이 어디로 이끌고 가든지 우리는 끌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영혼을 이 질서로 돌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깊이 회개할 때 가슴을 찌르는 통증이 느껴집니다. 그 통증이 뭐냐 하면 이 질서를 어겼기 때문에 자기가 받은 고통에 대한 기억입니다. 회상입니다. 그걸 회상하면서 고통을 느끼고 자기 자신이 그 질서를 떠난 것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 후회하는 것입니다. 그게 회개입니다. 그걸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 그게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다시 그 질서대로 찾아가고 싶어 하는 것이 그게 진정한 회개입니다. 시인이 지금 ‘영혼이 눌림'이라고 말하는 이 속에 바로 이런 개념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도 매일매일 경험하는 바입니다. 현실이 무거워서 힘든 것이 아닙니다. 돈이 없어서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외로워서 힘든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사랑의 무게가 여러분을 힘겹게 만드는 것입니다. 냉과리와 같이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마음의 상태가 어떻습니까? 시인처럼 영혼의 어떤 무게를 느끼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무게로 말미암아 눌리고 있습니까? 지금 이 시인이 경험한 바와 같이 이 속에서 헤어 나오고자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이러한 영혼의 무게에서 자유롭게 해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시인은 두려움 때문에 비상한 마음의 무게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이 무게는 바로 자유를 상실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누가 시인에게 이런 속박의 짐을 지어주었습니까? 그의 어깨에 감당 못할 짐짝을 누가 올려놨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느낀 마음의 무거움은 육체의 무게가 아니라 정신의 억압이었고 마음의 강제였습니다. 거기는 자유가 없습니다.
자유는 스스로 원하는 바를 언제든지 선택할 수 있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상태를 자유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무게 때문에 시인은 이것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이러한 마음의 무게로 말미암아 자신의 영혼이 “녹고 있사오니”라고 고백합니다. “··· 말미암아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녹사오니'라고 번역된 이 단어가 히브리어로 ‘다레파(דָּלְפָ֣ה)'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원래의 뜻이 액체 같은 것이 방울지어서 똑똑 떨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깨를 볶아서 넣고 압착기로 누릅니다. 그러면 거기서 기름이 한 방울씩 뚝뚝 떨어집니다. 그런 동작을 나타내는 단어가 ‘녹사오니'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절망적인 상황 때문에 마음이 놀라서 기운이 뚝 떨어지고 완전히 지쳐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마음이 녹았다'라는 것은 여호수아서 2장 11절과 5장 1절에 보면 큰 낙심으로 절망한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희망이 끊어진 것처럼 그렇게 낙심하여 자기의 마음이 녹는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히브리어 그 단어는 다르지만, 성경에서 ‘녹는다'는 표현은 바로 ‘절망'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어떤 상태입니까? 하나님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이 가볍습니까? 그 가벼움 때문에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고 무게를 느끼고 있다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무겁습니까? 그 무게로 마음이 방울방울 떨어지기까지 그렇게 지쳐 있습니까? 절망하고 있습니까? 그렇게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또 다른 삶을 꿈꾸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삶보다 더 나은 삶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 희망으로 자기를 설득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믿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러한 자기 영혼의 처지에 깊은 절망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의 소망은 한 곳을 향했습니다.
B. 말씀으로 세움
그것은 말씀으로 세워주시기를 바라는 소원이었습니다. 시인은 비상한 두려움을 경험했습니다. 마음이 눌리는 무거움과 영혼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이때 시인은 자기가 의지할 분이 오직 하나님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시 119:28下) 히브리 성경에서 직접 읽어보겠습니다. “··· 당신의 말씀을 따라 나를 일으켜 주옵소서"(시 119:28下, KNJ 私譯) 그가 직면한 문제는 현실이 아니었습니다. ‘요즘은 내가 왠지 기도가 안 돼.' ‘그리고 상황이 상황인지라 내 마음이 힘들어.' 상황이나 현실이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현실의 무게는 동일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내가 체력이 넘칠 때는 40킬로 가방을 둘러매고도 구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힘들면 노트북 하나가 든 가방도 들 기운이 없습니다. 그게 자기 몸의 상태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거보다 훨씬 더 어려운 현실이었는데, 이겨냈습니다. 왜냐하면 영혼 자체의 무게가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무거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으로 깃털처럼 가벼웠기 때문에 넉넉히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음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예배 들어오기 전 열린신문 마지막 면에 성도의 간증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닦았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꼭 읽어보십시오. 그게 하나님이 우리를 모든 시련에서 당신의 선하심을 따라 우리를 살리시는 방법입니다.
물론 고민은 현실에서 시작되었지만 그것은 계기였을 뿐이고 결국은 시인 내면의 세계가 얼마나 커다란 사랑의 무게에 눌려있고 또 불안해 있는지를 드러내 보여준 것입니다. 거기서 시인은 현실과 싸우는 것만큼 중요한 한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혼이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릇된 사랑의 무게로 인한 눌림과 두려움 때문에 녹아내리는 마음의 문제였습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이 무엇이겠습니까? 단지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원수들이 멸망하고 악을 행하던 자들이 처단 받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가벼워져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살아나야 했습니다. 눌림에서 해방되어야 하고 녹는 것 같은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과 같은 그런 고통의 상태에서 벗어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 당신의 말씀을 따라 (나를) 일으켜 주옵소서”(시 119:28下, KNJ 私譯) 이 동사는 앉아있거나 누워있는 자를 누군가가 가서 일으켜 세우는 동작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단어가 비유적으로 사용되면 ‘강하게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킹 제임스 버전에서 이 단어를 ‘스트렝슨(strengthen)'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뜻을 잃은 자로 하여금 다시 뜻을 세우게 하시고, 마음이 무너져버린 자의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에 처한 자들을 도우십니다. 성령 충만할 때뿐만 아니라 영혼이 깊은 침체에 빠졌을 때도 함께하셔서 도와주십니다. 다만 이 사람은 그것을 못 느끼고, 저 사람은 그것을 느낄 뿐입니다.
회심하고 몇 달 되지 않았을 때 친구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수요예배를 드렸습니다. 한 자매가 나와서 특송을 했습니다. 수수하게 생긴 자매가 부르는 그 찬송은 저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가슴에 뜻 모를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찬양)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마음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시시때때로 도와주시네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영혼이 깃털처럼 가벼워지기까지 하나님을 사랑할 때뿐만 아니라 큰 바위를 짊어진 것처럼 무게를 느낄 때조차도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무게를 어디에서 내려놓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인생의 무게는 현실이지만 그 현실을 이기게 하는 힘은 현실 안에 있지 않고 여러분의 마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혼의 회복이 없이는 마음은 가벼워질 수 없고, 현실의 무게는 증대할 것입니다. 이러한 영혼의 회복은 당신의 말씀을 따라 이루어집니다. 주께서 언약하신 말씀을 따라서 우리가 깨달은 말씀의 감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때때로 현실은 우리의 마음을 너무나 쓰라리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자주 우리가 기대하는 바와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우리는 현재를 거의 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제대로 살아내지 못한 현재는 다시 후회할 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를 살아가기보다는 과거를 소환하여 소용이 없는 후회 속에 가슴을 태우고 또 다시 오지 않을 좋은 기억을 떠올리면서 자족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현재라는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 물처럼 끊임없이 흘러가고 그것은 과거로 환원되며 그 과거는 언젠가 또다시 후회할 과거가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현재를 살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미래를 먼저 불러들입니다. 하지 않아도 될 염려를 앞당겨 하고, 근거 없는 희망을 품으며 꽃길을 걸어가기를 꿈꿉니다. 그러느라고 현재를 살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끊임없이 미래는 현재를 거쳐서 과거로 흘러가고, 우리는 과거는 지나갔기 때문에 살지 못하고, 미래는 오지 않았기 때문에 못 살고, 현재는 과거와 미래에 집착하느라고 살지 못한 채 덧없이 우리의 인생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릇된 사랑의 무게는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믿음이 없는 두려움으로 마음은 녹아내리게 됩니다. 이때 해결책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혼이 다시 소생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다시 태어나고, 그 은혜로써 우리의 무거운 영혼이 가벼워지고, 그 사랑으로 하늘의 사랑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다시 영혼의 깊은 침체에서 벗어나 영혼의 무게로 눌리는 그 마음을 벗어버리고 자유를 찾게 되고, 녹아내리는 그 두려움 속에서 다시 하나님 앞에 희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희망으로 자신을 설득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나는 비록 아무 공도 없고 나는 이 문제를 스스로 일으키기는 했지만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분 뒤로 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으니 나도 변호할 수 없는 나를 그리스도 예수께서 변호해달라고 매달릴 때, 그때 우리의 무거운 영혼은 가벼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복된 영혼으로 다시 현실을 넉넉히 이기며 사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거기서 은혜를 주십니다. 말씀을 깨달음으로 영혼의 어두움을 깨우치고 지혜를 얻게 하시며 뉘우칠 때 용기를 주십니다. 그것은 다시 현실을 살아낼 수 있는 용기입니다. 이 용기를 다시 회복하고 주님과 함께 말씀으로 이기는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9. 고난을 이기게 한 즐거움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로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시 119:92-93)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시인은 많은 고난 속에서 어떻게 그것들을 견디고 이기며 살아낼 수 있었는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시인의 그런 경험을 통해 자기가 무엇을 깨닫게 되었는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II. 고난을 이기게 한 즐거움
그것은 고난을 이기게 한 즐거움이 그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시인으로 하여금 그 큰 고난 속에서 그 척박한 외로움을 이기며 살아낼 수 있게 한 것은 즐거움이었습니다. 육신의 괴로움을 능가하는 영혼의 즐거움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힘들고 어려운 시련의 시기를 넉넉히 견뎌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A. 말씀의 즐거움
그 즐거움은 어디서 왔겠습니까? 말씀의 즐거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꽃길만 걷게 하신다고 믿지 마십시오. 세상에서 꽃길은 별로 없습니다. 결혼식 할 때 딱 30분 꽃길을 걷고 나면 그다음에 광야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런 시인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았지만 시련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련을 이기며 견딜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받는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92절에서 말합니다.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시 119:92) 뭐라고 말하는지 다시 한번 보십시오.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시 119:92) 여기서 "멸망하였다"라고 쓰여진 히브리어 단어는 아바드(אֲבַד)라는 단어인데, 아주 강한 단어입니다. '멸망·파멸' 혹은 '진멸·아주 왕창 망하는 것', 이런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건물 같은 것들이 흔적이 없이 무너져버리는 것을 나타낼 때도 이 단어가 사용이 됩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처한 고난이 얼마나 막중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동시에 그 고난을 이기게 한 하나님의 말씀이 시인에게 얼마나 큰 힘을 주었는지를 차례대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그는 고난 중에 있었습니다. 현실은 너무나 엄혹했고 하나님이 특별히 도와주시지 않으면 고난 중에 멸망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83절에서 "내가 연기 속의 가죽 부대 같이 되었으나 ···"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가죽 부대를 이용해서 음식물 같은 것들을 보관하기도 하고 또 특히 물 같은 것을 가죽 부대에 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가죽은 그렇게 깨끗하게 세척이 되는 유리 같은 물건이 아닙니다. 그것을 메고 모래바람이 부는 광야의 길을 걷고 혹은 양떼들을 치면서 여기저기 유랑을 하니까 이게 겉이 얼마나 더러워지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모닥불처럼 불탔는데, 거기에 연기가 잔뜩 묻습니다. 그러면 보기가 어떻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여기저기 다니면서 때가 묻어서 꾀죄죄한 그 가죽 부대가 연기에까지 거슬렀으니 이제 곧 해어질 지경이고, 터질 지경이고, 또 그 모양새도 아주 볼품이 없는 보기에 좋아할 만한 아무것도 없는 그런 물건이라는 뜻입니다. 가련하고 아주 비참한 상태를 연기에 그을린 가죽 부대로 묘사를 한 것입니다.
시인은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핍박자들에게 에워싸여 있었다고 83절과 84절에서 말합니다. 심지어 그들은 그의 목숨을 노리기까지 하였습니다. 하나님 사랑하고 그 뜻대로 살고자 했으나 시인은 세상에서 나그네처럼 살아야 했고 친구도 없었습니다. 이 광야 저 동굴을 도망 다니며 사울의 칼날을 피해야 했습니다. 원수들에게 심한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런 환경만 놓고 보면 그의 마음은 둘 곳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탄식하셨듯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것이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한 그 말씀이 그대로 이 시인에게 적용되어야 마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시련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시인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의 즐거움이었습니다. 이 모든 시련과 고통을 이기게 하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가 주는 만족이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시인이 자신의 강함을 믿는 자신감이 주는 즐거움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주의 법의 즐거움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에 은혜를 받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즐거움이 고난과 모든 시련을 넉넉히 이겨내게끔 시인을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그가 당하는 고난은 매우 컸고 고난을 당할 때 그는 외로운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가 외로운 처지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 그 비밀스러운 말씀을 통해서 시인에게 부어주시는 큰 은혜의 기쁨이 있었기 때문에 멸망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지금보다는 풍요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하고, 개인적으로 평안한 생활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일단 마음이 무너지고 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절망으로 마음이 무너지고 나면 삶의 모든 현실은 비관적으로 해석되기 시작하고, 그 비관의 끝은 절망입니다. 절망은 희망에 이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닫아버립니다. 그리고 고난에 지친 마음을 죽음에 이르게 하니, 몸으로는 살아있으나 마음으로는 죽은 자가 된 것입니다.
제가 열네 살 이 개월 되던 때 무신론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을 때 한 일 년 이내에 닥친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중3 때 같은 클래스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이는 우리보다 왜 그런지 세 살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한마디 말이 없이 조용했습니다. 그런데 음독을 했습니다. 담임선생님이 생물 선생님이었는데 문병을 갔다 와서 "얘들아 아무개는 아무래도 못 살 것 같다." "온몸에 이미 독소가 퍼져서 살 것 같지 않다." 그때 저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슨 충격이었냐 하면 두 가지 충격이었습니다. 하나는 '저런 용기가 나에게는 없구나' 하는 그런 충격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정말 살 수 있는 길이 없다고 판단되면 저런 거를 선택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것이 제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1년 후에 똑같은 사건을 고등학교 1학년 때 한 번 겪었습니다. 이 친구는 그 친구와는 정반대의 성격입니다. 싫어하는 친구가 없습니다. 경상도 출신의 아이였습니다. 고등학생인데도 하여튼 거무스름하게 구레나룻을 길렀습니다. 1학년 때인데 그러고 다니고, 신기하게 수염이 그렇게 많이 났습니다. 하여튼 공부는 그냥 그럭저럭 했는데, 하여튼 엄청 사교성이 좋아서 많은 친구들을 즐겁게 했습니다. 하여튼 한 번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하면 모든 학생들이 그렇게 즐거워했습니다. 하여튼 한 바케스의 막걸리를 그 자리에서 먹어 치울 주량을 가지고 있는 호탕한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자살을 한 것입니다. 몸에다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여서 그냥 분신해버렸습니다. 그리고 며칠 동안을 살아 있었는데, 거의 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병실에서 죽었습니다. 이게 저에게 두 번째 큰 충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걔가 괴로워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심지어 나는 '쟤는 너무 사교성도 좋고 내가 부러워하는 면도 많지만, 쟤는 거의 생각이 없는 아이 같다.' 그리고 나는 오히려 생각이 많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생각이 너무 많고 비관이 꼬리를 무는 나는 살아있고, 그렇게 생각이 없어 보이고 호탕해 보이고 낙천적으로 보이던 그 친구는 휘발유를 끼얹고 자살을 했습니다. 두 가지 생각이 겹쳤습니다. '아, 저렇게 남이 보기에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도 죽음의 고통을 가질 수 있구나!' 하는 것과 그다음에 '저럴 용기가 없는 나는 얼마나 부끄러운 사람인가!'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무신론으로 돌아서서 열심히 문학책을 읽고 철학책을 읽는다고 했지만, 거기서 살아야겠다는 어떤 엄청난 당위성은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그때 깊이 깨달은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의 마음이 지쳤을 때 그리고 절망에 다다랐을 때 인간은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이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지친 마음은 우리의 육체를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때 세상의 즐거움은 사라지게 됩니다. 즐거운 놀이, 게임, 명품, 아름다운 곳으로 떠나는 여행, 호화스러운 음식, 그리고 사람들 보기에 주목을 끌 수 있는 아름다운 옷이나 장신구 같은 것들,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평소 탐닉하던 육체의 즐거움조차 이 절망을 이기는데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그러나 신령한 기쁨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만들어주어 시인에게 희망을 갖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 법"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원래 "당신의 율법"이라고 나옵니다. "당신의 율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다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했을 것입니다." (시 119:92) 객관적으로는 고난의 크기가 너무 컸고, 주관적으로는 밖으로부터 오는 큰 고통과 시련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없었기 때문에 망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여기서 율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율법은 가장 좁은 의미로 쓰일 수도 있고, 약간 넓은 의미로 쓰일 수도 있고, 그다음에 아주 넓은 의미로 쓰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율법'이라고 이야기할 때 혹은 이처럼 '법'이라고 이야기할 때 히브리어로는 다 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법' 혹은 '율법'이라고 말을 할 때 그게 이 세 가지 중에 어디에 해당하는지를 생각하면서 읽어야만 의미가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가장 좁은 의미의 율법은 무엇인가? 십계명입니다. 이 십계명이 좀 더 확장된 것이 모세오경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모세오경을 핵심으로 그 이야기를, 그 계명의 뜻이 무엇인지, 어떻게 그 계명을 지키기 위해 믿고 살아가야 할지를 확장해서 이야기한 것이 모세오경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쓰이는 가장 넓은 의미는 하나님과 세상과 인간에 대해 하나님이 올바르게 가르쳐주시는 계시의 총체를 율법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십계명 안에는 사람을 살리는 요소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십계명은 우리에게 죄를 생각나게 만듭니다. 그런데 마지막 하나님의 총체적인 계시로서의 율법은, 물론 그것은 모세의 오경 안에도 담겨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 영혼을 소생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혜에 대한 약속이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마지막 율법의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당신의 율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라면"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십계명뿐만이 아니라 시인의 마음에 은혜를 주고, 힘을 주고, 소망을 갖게 해주는 하나님의 모든 계시였습니다. 시인은 견딜 수 없는 고난을 당했지만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왜입니까? 그는 이 세상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깊은 웅덩이에 빠졌어도 흙덩어리를 바라보는 사람은 절망하지만, 고개를 들어서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혼란을 겪고 정신이 분산되는 대신 고난이 겹치면 겹칠수록 그는 자신의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했습니다. 더욱 깨닫고 싶어 했고, 고난 속에서도 그 말씀대로 살고 싶어 했고, 시련 속에서도 그 말씀을 사랑하기를 원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들 중 대부분은 이미 알고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간증할 때 보면 되게 웃깁니다. 어떤 사람이 나와서 아주 심각하게 간증을 합니다. 실화입니다. 제가 가르친 제자 중 한 사람이었는데, 아주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잘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열렬하게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했던 자매였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이 잘 살았고, 그날도 아주 좋은 승용차로 남편과 함께 고속도로를 달렸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졸았던 것입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가드레일을 들이박고 거의 360도 회전하면서 도랑 아래에 처박혔는데, 차는 완전히 완파되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거의 6개월 이상 병원에 입원해야 될 정도로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목숨은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는 그때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달았습니다. 맨날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걸 깨달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걸 깨달은 사람도 없습니다. 너무나 평범한 사실들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 "하나님은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진노하신다." "하나님은 보호하신다." 이런 너무나 평범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과외비를 많이 내고 얻은 지식은 굉장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의 목숨을 바치듯이 과외비를 지불하고 얻었기 때문에 이거를 간직하고 있을 수가 없어서 막 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시인도 똑같습니다. 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는데, 예전에 몰랐던 말씀을 새로 깨달았겠습니까? 환경이 달라지면 마음이 변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변합니까?) 신앙이 없으면 강퍅해지고, 신앙이 있으면 가난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애통하게 됩니다. 애통함으로 마음이 녹아내린 사람은 원한에 사무치지 않습니다. 사람에 대해 너그럽고 온유하게 됩니다. 그 온유한 사람이 의를 갈망합니다. 의를 향한 갈망이 마음에 불타고 있는 사람이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 뵙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고난과 역경을 통해서 예전에 알았던 한 말씀 한 말씀이 어떻게 자신의 삶과 연관되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든 말씀이 자기를 향해 주시는 것으로 느껴졌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은혜받는 분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일주일 내내 고민했는데, 마치 주일에 설교를 듣고 나니까 하나님이 자기 혼자 세워놓고 설교하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성경을 폈는데 하나님이 어제 궁금했던 것에 대한 대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말씀의 의미를 변화된 환경 속에서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인데, 환경이 깨닫게 해준 것이 아니라 가난한 마음이 깨닫게 해준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정말 수없이 지키는 이 주일 예배 속에서 그리고 수없이 드리는 예배 속에서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았던 적이 언제입니까? 이 시인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내 영혼이 멸망하였을 것입니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생명입니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가난한 심령으로 주님의 말씀을 찾은 적이 언제였습니까? 시인은 그랬기 때문에 예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말씀을 새롭게 깨달으면서 그 안에서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드러났습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짓밟혀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아름답던 성전은 다 뜯겨나가고, 그 안을 화려하게 채웠던 모든 금은보화는 바벨론에 의해 모두 강탈되어 버렸습니다. 겁탈당한 아녀자의 모습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흐느껴 울듯이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그런 비참한 처지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찬송을 하나님께 올렸습니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부르는 하나님을 향한 찬송의 노래였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환경은 절망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육적인 이스라엘은 이렇게 무너지고 있지만 하나님이 무너진 이스라엘의 육적인 잔해 속에서 영적인 이스라엘의 새싹을 틔우고 계시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고, 그분의 성품의 탁월함을 느끼게 되었으니 영혼의 즐거움이 넘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기쁨으로써 커다란 고난과 시련을 넉넉히 이길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 인생의 시련을 생각하는 방법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생각하는 방법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믿는 사람은 믿음으로 현실을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면서 살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깊은 내면의 세계 속에서 길어 올리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말씀의 즐거움입니다. 그 즐거움이 고난 속에서 연기에 그을린 가죽 부대와 같이 되었던 시인의 영혼을 살려주었습니다. 봄비에 파랗게 돋아나는 새싹처럼, 짙푸르게 번성해 가는 떡갈나무 잎새처럼, 그렇게 시인의 영혼에 새로운 생기와 생명을 불어넣었던 것입니다.
환경이 어려워서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어려운 시기를 지납니다. 인생은 고통의 바다고 인생은 그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니, 불행이라는 파도가 그치는 날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런 삶을 이제껏 살아냈고,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숙제는 시련의 깊이가 아니라, 그것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우리의 마음속에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은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신령한 기쁨으로 이 현실의 고난을 이겨내며 살아갈 힘을 은혜를 통해 받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의 은혜를 받고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말씀을 기억함
마지막으로 고난을 이기게 한 그의 즐거움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였습니다.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이 온실에서 자란 것처럼 그렇게 키워서 거목으로 쓰시는 사람은 없습니다. 꽃길만 걷던 사람은 꽃길이 지루해서 낙심하여 죽음의 길을 택하게 되지만, 시련과 고난의 파도를 헤치며 온갖 길을 걸어온 그 사람들은 하나님이 성숙시키셔서 당신을 위한 귀한 일꾼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시인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인만큼 고난의 길을 걸은 사람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시인의 기억에 남는 것은 그 고난의 아픔과 고통의 흔적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가난해진 마음으로 맛보았던 하나님 말씀의 달콤함과 그분 성품의 신비함과 매혹적인 아름다움에 이 시인의 마음은 취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나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93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 때문에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 (시 119:93) 거꾸로 놓고 본문을 한번 보십시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 때문에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 (시 119:93) 거꾸로 뒤집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주의 법도가 생각도 나지 아니하오니 이는 고난 때문에 내가 죽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시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고난과 시련을 통해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이기게 한 말씀은 마음에 커다란 감화를 주었습니다. 은혜의 감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 (시 119:93 上) 약속이 아닙니다. 이건 그의 마음 상태에 대한 자연스러운 진술이었습니다. 말씀들 중에는 대부분 이미 시인이 알고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 그 말씀의 진맛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더욱 가난해졌기 때문에 이미 알고 있는 말씀이었지만 그것을 새롭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이들이 군대를 갑니다. 가기 전에는 엄마가 맨날 얘기합니다. 요즘 군대는 저 놈도 안 데려가고 도대체 누굴 데려갔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하여튼 떠나보냅니다. 떠나보내고 이 아이는 군대에 들어갑니다. 지금이야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옛날에는 군대에 가면 구타가 많았습니다. 하여튼 뭔가를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을 하는 집단이었습니다. 24시간 마음을 놓을 날이 없습니다. 밤에도 언제 호출을 해서 연병장에 팬티 바람으로 엎드려 놓고 때릴지 모르는 그런 불안감을 안고 잠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응을 채 못하면서 일주일 그리고 이주일 흘러가면서 이제 조금씩 조금씩 군대 생활에 익숙해지는데 너무 외롭습니다. 그때 엄마한테 편지가 옵니다. 그리고 소포도 하나 옵니다. 그럼 그거를 내무반에서 뜯어서 혼자서 (꼬불꼬불한 것을) 읽습니다. 생전 군대 가기 전에 엄마한테 편지 받아볼 일이 있었던 아이가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생전 처음 받아보는 것입니다. 읽어 봅니다. 읽어보면 옛날에 다 엄마가 하던 잔소리의 연속입니다. 그 잔소리가 다시 반복되는데, 이게 잔소리로 안 다가오고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엄마 말이 달라진 게 아니라 자기 환경이 달라지고 마음이 달라지니까 이게 절절히 가슴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답장을 씁니다. 맨날 엄마한테 반말하다가 '어머니 전상서(前上書)' 그리고 '기체후일향만강(氣體候一向萬康) 하옵시며'. 이렇게 어투가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철이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그렇게 철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인이 많은 고난을 당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영원히 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했던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와서 그의 외로운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피 묻은 그리스도의 손으로 닦아주신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래서 39절 하반절에서 시인이 말합니다. "··· 주께서 이것들 때문에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 (시 119:39 下) "이것들"이라는 복수지시대명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복수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시련 속에서 깨달은 말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에게 닥친 시련이 혹독했지만, 그 속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런 말씀의 경험은 잠시 죽은 자와 흡사했던 시인의 침체되었던 영혼을 완전히 다시 살아나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였습니다.
시인이 특별한 사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괴로워하고, 연약하고, 때로는 죽고 싶고, 때로는 간음하고, 살인을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우리와 비슷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자식들 제대로 교육 못 시키고, 그 자식들이 서로 난투극을 해서 서로 죽이고, 그 아들이 또 자기 뱃속에서 난 딸을 강간하고, 하여튼 평범한 가정에서는 일어날 수도 없는 끔찍한 모든 일을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또 항상 성령 충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랬는데 그가 위대한 사람일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 깨닫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주셨습니다. 시련을 당할 때마다 시인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 같이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그의 죽어가는 영혼을 살려주셨습니다. 그는 약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인정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품으로 도망쳤고, 핍박을 받을 때나 범죄했을 때나 하나님 바깥에서 살아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영혼은 하나님의 생명 없이는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영혼은 결코 육체처럼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육체가 죽었다는 것은 호흡이 끊기고 맥박이 사라지고, 서서히 몸의 체온이 식고 부패하기 시작하면서 시간이 흐르면 시체의 국물이 줄줄 흐릅니다. 그리고 썩은 냄새가 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더 시간이 지나서 땅에 묻으면 그냥 뼈만 남겨놓고 사라지고, 더 많은 세월이 지나가면 뼈까지도 사라집니다. 그게 육체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영혼은 그런 식으로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혼이 죽었다'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사귐이 끊어져서 영혼에 공급되는 힘이 없기 때문에 영혼이 영혼다운 구실을 못할 때 우리는 그걸 '죽은 영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그렇게 나훈아 씨가 물었습니다. 그걸 우리들이 철학적으로 대답하면 '6·8혁명 때문이야'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파리 6·8혁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적으로 대답을 하면 '영혼이 죽었기 때문이야.'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혼다운 활기를 잃어버려서 육체를 제대로 지도할 수 없는 상태가 된 영혼을 '죽었다' 혹은 '침체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생명을 가진 증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말했습니다. "··· (말씀으로)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 (시 119:93 下) 이 고백은 고난 속에서 시인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영적으로 회복시켜 새로운 힘을 얻어서 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하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인의 믿음은 바로 이 소망을 붙들었던 것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나를 죽이려 하고 원수들은 나를 박해하지만 그러나 내 하나님은 나의 영혼을 살리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를 살리시는 분이시다.' 이 사실이 이 시인이 믿었던 진리였습니다. 인간이 어떤 위기 속에 있어도 두 가지만 믿으면 살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선하시다 .' '결코 나에게 나쁜 일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나를 살리신다.' 이 두 가지 사실만 잊지 않으면 우리는 멸망하지 않습니다.
시인이 고난을 통해 거짓된 것에 대한 사랑을 내려놓았습니다. 세상의 허무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시인은 자기에게는 오직 하나님밖에 없음을 다시 한번 알게 되었습니다. 만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이 자기에게 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비록 고통을 겪고 있었으나 말씀의 은혜는 고통을 능가하는 큰 즐거움을 시인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즐거움이었습니다. 침체에 빠졌던 시인의 영혼을 다시 살아나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살기를 원했습니다. 시인의 마음에 기쁨이 넘쳤습니다. 이러한 은혜의 힘으로 그는 시련과 역경을 넉넉히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시련을 통해 받은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마음속 심장 껍질에 아로새겨져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잊혀질 수 없도록 하나님이 기록해주셨습니다. 살아있는 한 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살아있는 한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나를 인도하여 여기까지 살게 하셨는지를 결코 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자기를 살렸기 때문입니다.
(찬양)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아로새겨 어떤 경우에도 잊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거기에서 힘을 얻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의 힘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능력이 어디에서 옵니까? 그치지 않는 시련과 고난을 넉넉히 이겨내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를 붙들며 살 수 있는 힘이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입니까? 우리 자신에게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시련 가운데 있을지라도 주님의 말씀을 깨닫는 자에게 하나님은 기쁨을 주십니다. 잊을 수 없는 말씀을 주셔서 그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고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셔서 넉넉히 세상을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껏 죽을 것 같은 때에 우리의 영혼을 어떻게 살리셨는지를 기억해 보십시오.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지 않으시고, 썩어질 세상의 것으로 우리의 죽었던 영혼을 살아나게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영원하도록 있는 하나님 말씀의 씨를 통해 우리의 영혼을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과 시련을 이기고 오늘 여기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 말씀이 여러분을 살려준 것을 잊지 마십시오. 다시 한번 그 은혜의 감격 속에 사십시오. 말씀을 통해 주시는 은혜로 돌아가십시오. 진동치 못할 나라를 우리가 받았습니다. 사단이 흔들어 놓을 수 없고, 이 세상의 시련과 역경이 뒤집어 놓을 수 없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읍시다. 그 은혜로 이기며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0. 내 눈물은 시냇물처럼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시 119:135-136)
녹취자: 조복령
Ⅰ. 본문해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주님이 주신 제일 큰 계명입니다. 인간은 그런 사랑 안에서만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 곧 사랑의 감화는 말씀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시인은 말씀을 통해 받은 은혜를 찬송하면서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로부터 구원해달라고 호소합니다. "사람의 박해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법도들을 지키리이다"(시 119:134) 그러면서 시인은 한편으로는 극심한 고난 속에서 당신의 친밀함을 보여주시기를 간구하고 또 한편으로는 멸시받는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Ⅱ. 내 눈물은 시냇물처럼
그래서 그는 오늘 본문에서 자신의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른다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박해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얼굴빛을 비추어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A. 얼굴을 비추심
오직 하나님께 대한 시인의 의존은 마음을 다해 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135절을 같이 큰 소리로 읽어봅시다.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시 119:135) ‘얼굴을 비추심’이라고 먼저 나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당신의 얼굴’로 되어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얼굴은 그 사람의 인격을 대표합니다. 이것은 영혼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처럼 형체를 가지신 분이 아니시니 손과 발이 혹은 얼굴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구약 성경에는 ‘얼굴을 비추시고’ 혹은 ‘얼굴빛을 비추시고’라는 표현이 자주 나타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보여주시는 것이 영광의 광채가 발산하는 것을 뜻하며 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의 표현 중 하나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자기 얼굴을 숨기시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범죄 하면 하나님이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이 당신의 얼굴을 외면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죄를 주목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얼굴을 그 사람에게서 가리우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범죄 했을 때 이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참회의 시라고 일컬어지는 51편 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시 51:9) 하나님의 백성의 가장 큰 행복은 당신의 얼굴빛 앞에서 행하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잃어버리게 된 시인에게는 아무런 기쁨이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팔복의 정점에 있는 복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으로 밝히 제시하셨습니다. 팔복의 최고의 정상에는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 최고의 복으로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복이 있도다. 그 마음에 있어서 청결한 자들이여. 왜냐하면 그들이 그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마 5:8, KNJ 私譯) 이렇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모든 행복이 그분의 얼굴빛으로 나오기 때문에 그분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기도 속에서, 말씀 속에서, 찬송 속에서, 예배 속에서 만나게 되는 그것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 세상을 이기며 믿음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인은 핍박으로 인한 고난 속에서 구원해 달라고 호소하며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시인은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종일뿐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종이 상전을 의지하고 여종이 주모의 손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렇게 시인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살아야 할 존재임을 시련을 통해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안에서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깨달음은 시인으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야 할 사명자임을 느끼게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불행은 자신의 위치를 떠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이신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고자 하는 데서 인간의 모든 불행이 오는 것입니다. 불행해지려고 해서 불행해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행복해지려고 하다가 결국은 불행해지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은 오직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창조되지 않은 사물과 창조된 사물입니다. 창조되지 않은 사물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있는 것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적인 사물이나 혹은 영혼과 같은 영적 사물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만드셔서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으면 하나님이 그 모든 것보다 더 높으신 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향유해야 할 대상이고 나머지 모든 사물은 이용해야 할 대상입니다. 향유한다는 것은 더 이상의 목표가 없이 중간 단계가 아니라 최종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모든 사물은 이용하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옷은 추위를 피하기 위해 있는 것이고, 안경은 사물을 똑바로 보기 위한 목적에서 쓰는 것입니다. 자동차는 자기가 어떤 일을 이룰 목적으로 먼 곳을 이동하는데 쓰는 물건이고, 집은 추위와 더위를 피하고 안식하기에 필요한 물건입니다. 모든 사물은 이용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용해야 할 분이 아니라 우리들이 향유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런데 향유해야 할 하나님을 이용하고 이용해야 할 사물을 향유하려고 할 때 사랑의 질서는 뒤집히고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인간은 고통을 겪게 되는데, 이 고통은 잘못된 지금의 질서에서 본래 있는 질서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어리석은 우리는 종종 핍박과 고통을 통해서 비로소 자신이 이런 잘못된 질서 속에 있음을 깨닫고 돌이키게 되는데, 이것을 우리가 회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얼굴빛을 간절히 구했던 것은 이용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자신의 행복이시고 자신의 진정한 기쁨이기에 그는 최고의 기쁨과 행복을 하나님 안에서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라고 번역된 이 구절은 히브리어에서 ‘당신의 종 안으로’ 혹은 ‘당신의 종 속으로 비춰주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결국 마음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가 내면세계를 새롭게 고쳐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하나님 얼굴빛에서 비치는 광채는, 하나님과의 만남은 인간 내면의 세계를 새롭게 합니다.
사람이 무엇 때문에 망가진 인생을 삽니까? 결국은 망가진 마음 때문입니다. 그들은 환경을 탓하고 모든 상황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망가진 인생을 사는 것은 자신의 고장 난 마음 때문에 망가진 인생을 사는 것이지 다른 것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만남을 통해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망가진 우리의 마음을 고침을 받아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시는데, 이것이 신앙을 갖는 유익인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박해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더욱 철저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 시인은 이 사실을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채찍과 몽둥이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붙잡혔기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서 밖에는 행복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왜 살아계십니까?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삽니까? 삶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목표는 과연 이 삶을 뛰어넘어 죽음을 향해서도 의미를 가진 것일 수 있습니까? 영원히 살아도 후회되지 않을 그런 인생이 여러분에게 목표가 되고 있습니까? 이 시인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얼굴빛을 간절히 구하며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자기는 인생의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함으로써만 진정한 주체적인 인생을 살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이 누구인지를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분을 섬기며 살도록 구원받은 사람임을 기억하고 무위도식(無爲徒食)하지 말고 주님을 섬기며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해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시인은 또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향합니다. 자신이 깨닫지 못해 불순종하며 사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고 있습니다. 135절 하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시 119:135 下) 여기 ‘율례’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훅카(חֻקָּה)’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율법이 하나의 커다란 법칙이라면 이 율례는 그 율법을 지키기 위해 제정된 법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주어진 구체적인 명령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고백은 하는데 실제로 모든 일은 자기중심적으로 결정합니다. 이렇게 살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총체적으로 개념적으로만 지킨다고 말하지 말고 삶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라도 하나님의 율례를 따라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얼렁뚱땅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그렇게만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님이시라고 고백을 하고 실제로 살아가는 것은 탈세를 합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상처를 주고, 정의롭지 못하게 살고, 뇌물을 받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살아간다면 그게 어떻게 주의 율례를 지키는 삶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면 디테일하게 행동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면 구체적으로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본보기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떻게 여기까지 인도하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어주시고, 구원받을 때부터 여기까지 어떻게 세밀한 사랑으로 여러분을 인도해 오셨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섬세한 인도였습니다. 하나님은 똑같이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렇게 구체적으로 섬세하게 율례를 지키며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나의 아주 작은 것이라도 주님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고 나는 그분의 종이며, 하나님은 내가 사랑하는 유일한 분이시고 결코 이용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여주는 삶을 살라고 주님이 우리에게 이 가르침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구체적인 하나님의 율례를 따라 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가 필요합니다.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은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사랑의 감동으로 행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이런 은혜를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빛을 비추심으로써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얼굴빛을 당신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심으로 말씀 안에서 당신을 만나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얼굴빛을 구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눈물을 흘릴 때
그러면서 시인은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토로합니다. 악인들에게 끊임없이 핍박을 받으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내적으로 자신이 당하는 고통보다 더 큰 아픔을 느꼈습니다.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시인이 세상을 보면서 느낀 것이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짓밟히는 하나님의 이름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시편 136절을 직접 히브리어 성경에서 옮겼습니다. 읽어보겠습니다. “물의 강들이 나의 두 눈에 흐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당신의 율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시 119:136, KNJ 私譯) 시냇물이 아닙니다. 강물입니다. 얼마나 눈물이 많이 흘렀는지 강물이라고 표현합니다. 복수로 표현한 것은 두 눈에 흐르는 눈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인의 두 눈에서 눈물이 많은 강물처럼 흘러내렸습니다. 박해받는 자신의 고난 때문에 흐르는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원수들에 대해 복받치는 미움 때문에 흐르는 눈물도 아니었습니다. 저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멸시받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을 어기며 살아가고 있는 불법한 자들의 무법한 행실 때문에 흐르는 눈물이었으니, 구약의 롯과 같은 사람이 흘리던 그런 눈물이었습니다.
나는 오늘 묻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눈물이 있습니까? 정말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까? 더욱이 그들은 이방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선택된 백성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열방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도록 살아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 사랑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부름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업신여김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강물처럼 흘러내립니다. 무엇으로 그 흐르는 눈물을 멈추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의복, 그리고 넓은 나라, 그리고 화려한 가마, 마차, 이런 것들로는 그의 눈물을 그치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온 땅과 하늘 위에서 높임을 받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셔야 할 이스라엘 속에서 모욕받고, 멸시받고,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그 현실을 미처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찬송)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 고쳐주소서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뤄지이다
스물한 살에 제가 회심을 하고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때 경험한 것이 눈물이었습니다. 예전에도 사람을 불쌍히 여긴 적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질 임세(臨歲)에 저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타인처럼 느껴졌고, 나 자신이 죽고 사는 문제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위해 흘릴 눈물이 저에겐 없었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울기에도 모자라는 눈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근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회심하고 한 30명 정도 되는 교회에 교인이 되었는데, 그렇게 기도할 때마다 눈물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이유도 모르게 예배당에 들어가면 눈물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때 밀려오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한없이 밀려오는데, 그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메마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핏기 잃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슴 아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없이 통곡하며 우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우리 교회 청년부 자매 하나가 간증을 하는데, 밤중에 자다가 엄마가 깜짝 놀라서 딸 방으로 달려온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이냐?" 왜냐하면 딸 방에서 깊은 밤인데, 엉엉 우는 통곡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마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래서 달려왔습니다. "딸아! 무슨 일이냐, 도대체?" "밤에 웬일이냐?" "기도하고 있는 중이에요." "근데 왜 그렇게 우니?" "기도하는데 엄마를 생각하니까 하나님 믿지 않는 엄마의 영혼이 너무 불쌍해서 가슴이 너무 아파서 내가 통곡을 하고 있는 거예요." 엄마가 말했습니다. "딸아! 네가 나 때문에 그렇게 가슴이 아프다니까 내가 이번 주일부터 교회 나가마."
저희 할머니는 저를 너무 사랑하셨습니다. 근데 절대로 안 들어주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 믿으라고 하는 말만 안 들으셨습니다. "너나 잘 믿어라." 어느 날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를 앉혀놓고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할머니! 이 세상에서 내 마음을 후벼파듯이 아프게 하는 사람이 있어요." 깜짝 놀라시면서 "그게 도대체 누구냐?" "할머니에요." "왜 내가 니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하냐?" "할머니가 하나님을 모르고 구원도 받지 못한 죽은 영혼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니 내가 기도할 때마다 할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갈가리 찢어지는 것 같아서 눈물이 나요." 할머니가 다가앉으시면서 내 손을 꼭 붙드셨습니다. "얘야! 너는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나는 너를 위해 목숨도 줄 수 있다." "돈을 달라면 내가 없어서 못 주겠지만 니가 그렇게 내가 예수 믿기를 바라는데 내가 못할 게 뭐가 있겠니." "내가 이번 주일부터 교회에 나오마." 그렇게 신앙을 갖게 되셨고, 돌아가시는 날까지 교회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말년에는 주님을 깊이 만나셨습니다.
결국 우리가 안 된다고 생각하는 많은 일들은 두 가지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초점이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리고 기도가 간절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너무 경건하기 때문에 아주 유별난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두 눈에서 눈물이 강물처럼 흘렀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모두 그런 눈물을 경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깊은 감화를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자기 스스로 하나님 앞에 눈물 흘릴 수 없는 사람은 누군가 대신 울어주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누군가를 위해 눈물 흘릴 수 없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이 땅에 짓밟힐 때 눈물이 흐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누군가가 대신 울어주어야 할 만큼 불쌍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찬양)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네 주를 보낸 하나님 사랑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네 갈보리에 구속의 사랑
시인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며 주님의 이름을 자주 불렀습니다.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시련 속에 괴로울 때,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매달렸습니다. 이러한 간절한 눈물의 기도가 우리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기도할 때 눈물의 기도를 드렸고, 예배의 감격을 누렸을 때 여러분의 두 눈에는 시인처럼 강물과 같은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세상을 이길 거룩한 힘을 공급받았고, 주홍보다도 더 붉은 죄를 용서받았으며, 죄인의 죄를 능가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자기가 세운 고통스러운 질서를 모두 포기하고 하나님 사랑의 질서로 돌아가기 위해 회개의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눈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들은 이런저런 환경 때문에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하나님 한 분이 그 마음에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가져도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시인은 박해로 고난을 받고 있었지만,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박해받는 시인을 염려하셨지만, 시인은 자기의 목전에서 짓밟히는 하나님의 이름을 보며 걱정했습니다. 그리고 가눌 수 없는 슬픔이 엄습하여 두 눈에서 눈물이 강물처럼 흘렀습니다. 어찌하든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려서라도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는 그때가 오기를 주 앞에 매달리며 간절히 구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이 시인의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웠겠습니까? 얼마나 소중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를 얼마나 사랑해 주셨겠습니까? 신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 안에 이루어진 것만큼만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갈망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너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기도를 해도 자기의 필요한 것을 위해서, 말씀을 들어도 자기 은혜 받기 위해서, 모든 것이 자기 개인의 평안함과 풍요로움을 누리는 것에 쏠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으로 살아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한없이 모든 것을 누린다고 할지라도 그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 마음 안에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쳐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어차피 이 세상은 고통의 바다입니다. 그리고 인생은 그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작은 물결 같은 때도 있고, 때로는 집채만 한 경우도 있지만, 언제나 불행이라는 파도는 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입니다. 그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며 살지 않으면 우리는 통증 때문에 견딜 수가 없습니다. 불행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인생길이라고는 하지만 고통을 느끼는 것은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 자녀들의 특권입니다. 세상이 나를 아무리 흔들어 놓고 나를 파멸하기 위해 온 세상이 무장을 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우리 주님의 품 안에 있으면 나의 관심사는 이 세상에서의 나의 안락한 삶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주님의 이름이 온 땅과 하늘 위에서 높임을 받고,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가득한 세상에서 사는 것이 꿈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불행은 피할 수 없지만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사셨던 것입니다.
행복은 불행이 삭제된 상태가 아닙니다. 그분도 세상에 계실 때 때로는 울기도 하셨습니다. 때로는 가슴 아파하기도 하셨고, 때로는 흐느끼기도 하셨고, 때로는 너무나 고통스러워 심한 통곡과 눈물을 흘리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분의 행복을 빼앗아 가지는 못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항상 그분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너무나 행복하셨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은 세상을 보시며 눈물 흘리셔야 했고, 그렇게 흐느껴 울면서도 그분은 자신의 행복을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겪는 많은 고통은 재수가 없어서 겪는 것도 아니고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징벌을 내리시는 것도 아닙니다. 대부분 우리들이 겪고 있는 많은 고통은 우리 스스로 잘못된 사랑의 질서를 따라 향유해야 할 하나님은 이용하려 들고, 이용해야 할 물건들은 하나님처럼 섬기고 향유하려고 들기 때문에 일어나는 고통과 비극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고는 결코 어디서도 인간의 마음은 안식처를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불행의 원인을 하나님을 멀리 떠난 데서 찾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물이 없는 것과 어떤 사람이 있는 것에서 불행의 원인을 찾고, 그것들이 사라지거나 생기면 행복할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행복이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 도박, 게임, 알코올, 성(性), 인터넷, 이런 것에 중독된 사람이 천만 명입니다. 그 중독된 가족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까지 합하면 이천만 명은 넘는 사람들이 중독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왜 그렇게 미친 듯이 우리는 돈 주고 하래도 못 할 텐데, 왜 그렇게 엄청난 돈을 쓰면서 잃을 걸 뻔히 알면서 도박으로, 게임으로, 알코올 중독으로, 모든 걸 망치는 삶을 사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디서도 행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영혼은 외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사로운 욕정으로 그렇게 중독의 욕망에 빠질 때 하나님은 쓰라린 고통에 굵은 소금을 벗겨진 살갗 같은 가슴에 뿌려버리십니다. 거기에 인간의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인생의 진실을 깨달은 사람이고, 비극의 현장을 겪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는 모든 사람에게는 저주가 있을지니라.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가르침입니다. 실제로 고린도전서 16장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지니라'고 사랑의 사도가 선언을 하는 이유는 사람을 깔보거나 저주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참 행복에 이르는 길이 오직 하나님과 예수 밖에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인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눈물을 배웁니다. 그런 면에서 이 시인의 강물처럼 흐르는 눈물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예표였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방황하고 유리하는 영혼들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오셨지만, 당신을 알지 못하는 자들 때문에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살아야 할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오히려 멸시받게 만드는 현실을 보면서 흐느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뒤를 이으며 살도록 주님이 불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렇게 주님의 이름이 모욕받는 곳에서 다시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주님의 이름이 업신여김을 받는 곳에서 다시 주님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니, 그의 영광을 위해 사는 그 삶에 당신의 행복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평생 소원은 이것입니다.
(찬양)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나이다 아멘.
시인이 고난 속에서도 멸시받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가슴 아파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무위도식(無爲徒食)하지 마십시오. 어디선가 이 땅 한 구석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모든 사람이 주님의 이름을 높이도록 그렇게 이바지하며 산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강물처럼 눈물을 흘리는 여러분의 뺨에서 그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며, 재 대신 화관을 여러분에게 씌워 주실 것입니다.
Ⅲ.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도덕적으로 훌륭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이름의 영광에 관심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 없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한때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흘릴 눈물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의 이름을 간절히 찾으며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이바지하며 행복하게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1. 말씀을 깨닫게 한 것
“여호와여 내가 전심으로 부르짖었사오니 내게 응답하소서 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키리이다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지키리이다”(시 119:145-146)
녹취자: 조복령
Ⅰ. 본문해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에 안타까워하며 강물 같은 눈물을 흘리던 시인의 마음은 다시 말씀으로 향합니다. 본문은 시인이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방식으로 깨닫게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가 거의 없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Ⅱ. 말씀을 깨닫게 한 것
시인은 본문에서 자기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자 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무슨 동기에서 시인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를 간절히 원했습니까? 그것은 단지 지적인 호기심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한 것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를 원했던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자 갈망하는 것만큼 두 가지를 간절히 추구하였습니다. 그것은 부르짖는 기도와 온전한 순종이었습니다.
A. 부르짖음
그는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그것은 평범하게 드린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마음을 다해 간절한 부르짖음으로 올린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자 하는 시인의 갈망은 부르짖는 기도와 함께 시작되었으니, 그만큼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진심을 보신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삶의 상황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셨던 것입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전심으로 부르짖었사오니 내게 응답하소서 ···" (시 119:145)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 (시 119:146) 먼저 시인은 하나님을 친근히 부릅니다. '여호와여'라고 되어 있는 이 하나님의 성함은 성경 전체에 나오는 세 가지 하나님의 성함 중 하나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세 하나님의 성함이 첫째는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이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엘로힘'(אֱלֹהִים)입니다. 이것은 '힘이 세다'라는 말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이름은 모든 신과 모든 만물들 위에 월등히 뛰어나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이 하나님의 성함은 이스라엘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이방 민족에게도 계시된 이름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주' 혹은 '주님'이라고 번역되는 '아도나이'(אֲדֹנָי)라는 단어는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종이나 하인이 자신의 상전이나 주인을 부를 때 바로 이 '아도나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기 때문에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며 그분의 통치와 지배 아래에 있다는 표현으로서 하나님을 '주' 혹은 '주님'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여호와'(יהוה)는 그 근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있다' 혹은 '살아있다'라는 단어에서 유래하였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기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나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하심과 같습니다. 모든 만물이 누군가를 의존하여 살아있지만, 하나님은 누구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계신 분이시라는 의미입니다. 이 하나님의 성함은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계시된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언약 백성임을 보여주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하나님의 성함들 중 '여호와' 즉 '야훼'라는 하나님의 성함은 하나님의 본명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히 부르기를 두려워했던 성함이었습니다.
시인이 위기 속에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르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과의 언약 관계를 생각나게 해줍니다. 따라서 시인이 여호와를 부름으로 시작하는 이 기도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자기를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며, 모든 대적으로부터 반드시 자기를 지켜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시인의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전심을 다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가 말씀을 깨닫고자 할 때 마음을 모두 바쳐 매달렸던 것처럼 그는 기도할 때 부르짖으며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전심으로'라고 번역된 이 부분은 히브리어로 '베콜 레브'(בְכָל־לֵ֭ב)입니다. 이는 '모든 마음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시인의 마음 중 어느 한 구석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고 있는 부분이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를 정확하게 보여주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교회 생활은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향해 전심을 다하는 적은 거의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공부하고, 예배를 드리고, 또 예배 속에서 찬양하지만,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지는 않습니다. 이런저런 일로 섬기고 기도도 하지만, 어느 것도 안 하는 것은 없지만, 또 전심으로 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렇게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을 때 만나는 하나님이시건만 우리들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마음이 나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한 사랑과 염려로 찢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 한 분을 향해 모든 마음을 기울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배우고자 할지라도 자신의 마음을 바쳐서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호기심에 불과한 것입니다.
마음을 바치는 간절한 기도는 자신의 중심이 하나님을 찾는다는 가장 훌륭한 표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마음은 기도로 나타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의 최고의 표현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그분께 부르짖는 기도 생활이 없다면 그는 결코 신실한 신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한 16편의 설교』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기도 없이 사는 사람을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호흡이 생명의 자연스러운 증거인 것처럼 기도는 믿음의 마땅한 증거입니다.”(J. Edwards, Fifteen Sermons On Various Subjects, 75.) 그 당시에도 신실하다고 인정을 받고 있지만, 거의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도전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간절한 기도 생활이 없는데, 어떻게 그 사람을 믿음으로 산다고 말할 수 있겠으며, 부르짖는 기도 생활이 없는데, 어떻게 신실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살아있지만 숨은 쉬지 않는다는 말이나 혹은 호흡은 없지만 활기는 넘치는 사람이라고 뜻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간절함은 그가 말씀을 깨닫고자 하는 동기가 바로 자기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시인이 기도한 방식은 간절히 부르짖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마음을 다해 부르짖었고 세상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시인이 보여준 경건의 특징은 하나님을 향해 수시로 마음을 쏟아 놓는 것이었습니다. 기도에 있어서 이런 간절함은 그가 일찍이 경험했던 바였습니다. 목동이던 시절에는 가슴이 에일 듯이 심령이 가난해지는 일이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기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려고 작정하시면서부터 그의 인생길은 고난의 가시밭길이었습니다. 그는 전혀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했건만 사울은 끊임없이 자객을 풀었고, 시인은 지은 죄도 없이 이 광야 저 동굴로 도망을 다니며 그렇게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는 마음을 털어놓을 친구조차 없는 도망자의 신세였기 때문에 유일한 위로는 자기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쏟아 놓는 것이었습니다. 단단한 양초에 불이 밝혀지고 나면 그 불이 커지면서 초는 물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합니다. 시인의 마음도 그랬습니다. 고난의 불꽃이 크면 클수록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그때에 밀랍처럼 굳었던 그의 마음은 촛농처럼 녹아내렸습니다. 마음이 물같이 녹으며 주님 앞에 자신의 진심을 쏟아 놓았고, 그렇게 시인은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기도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주님이 그를 크게 쓰고자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가 많은 슬픔을 겪게 하시고, 그 고난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지를 배우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밤이나 낮이나 시인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고, 자신의 마음을 쏟아놓으며 주님께서 자신의 심정을 헤아려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시리
오 주여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주께 바라리이다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다윗만큼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받은 인물이 없었습니다. 그는 시련과 고난이 가득 찬 때에 세상을 원망하고 사람을 미워하는 대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헤아리며 그 뜻에 자기를 맞추고 싶었습니다. 시련의 가시밭길을 걸을 때면 고통 속에서 주님의 품을 파고들고, 외로울 때도 사람을 의지하는 대신 우리 주님의 품을 파고들며 주님의 사랑을 갈구하였던 것입니다. 어린 갓난아이가 엄마의 품을 파고들며 젖꼭지를 찾아 볼을 부비는 것처럼 시인은 하나님의 가슴에서 그분의 품을 사모하였고, 그분의 신령한 젖을 먹기 원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무도 받지 못한 사랑을 그에게 주셨고, 누구도 보지 못한 것을 그에게 보게 해주셨습니다.
(찬양)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온 땅과 하늘에 가득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궁창에까지 이르는 하나님의 진리를 보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하나님의 품을 파고들 때 부르짖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때 시인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억제할 수 없는 갈망의 정이 강물처럼 넘쳐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마디로 그의 마음은 물처럼 녹은 마음이었고, 그것을 주님 앞에 모두 쏟아붓는 기도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한 적이 언제입니까? 가슴을 치며 심령을 찢으며 주 앞에 울부짖으며 나를 도와달라고 그분께 기도한 적이 언제입니까?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린 적이 언제입니까? 많은 성도들은 하루에 거의 십 분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세상일을 위해서는 백 분도 아낌없이 사용하고, 자기 즐거움을 위해서는 일주일에 천 분도 부족하건만, 단 십 분을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기도한다고 해도 잠시밖에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스치듯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말씀에 대한 사모함만큼 가볍고 일시적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생각은 가볍고 신앙은 얄팍하며, 그만큼 인생은 더욱 무거운 중압감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말씀을 배운다고는 하지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수없이 말씀을 들어도 지나가는 바람처럼 의미를 알 수 없고, 수없이 성경을 읽어도 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의 마음에서 한없이 멀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시인이 주님의 얼굴빛을 사모했던 것처럼 그 은혜를 부어주시도록, 처음 그 사랑을 다시 내 마음속에 되살려 주시도록 주님 앞에 매달리십시오. 주님 앞에 부르짖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자리를 눈물의 기도로 적시십시오.
이렇게 시인이 위기와 고난 속에서 우리 하나님을 생각하며 간절히 부르짖었던 이 기도 생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실 기도 생애의 한 그림자였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은 부족한 것이 없으셨지만, 스스로 신성을 인성 아래 감추시고 죄는 없으시지만, 우리와 똑같은 연약한 육체를 기꺼이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신 당신이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매달리며 기도의 응답을 받는 방식으로 우리처럼 사셨던 것입니다. 그분의 생애는 액체의 생애였습니다. 땀의 생애였고 눈물의 인생이었으며, 피 흘림의 연대기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에는 그분의 땀과 피와 눈물이 배어 있습니다. 시인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앞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어떤 마음으로 주님 앞에 매달리며 우리를 위해 기도하실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공생에 접어드신 처음 시작은 사십일을 금식하며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으로 시작했고, 그의 생애는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해 비는 기도로 마감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눈물이 쏟아지는 기도의 생애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마음에는 진리가 가득했습니다. 비록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셨지만, 그분은 행복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육체로는 고난을 겪으셨으나, 그의 마음에는 오로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했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분은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 무엇이 부족한지를 헤아려 보십시오. 그리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그분께 매달려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시간을 정하십시오. 공간을 마련하십시오. 그리고 거기서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성을 쌓으십시오. 거기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고 마음 깊은 곳에 두레박을 던지듯이 기도의 언어를 길어 올리십시오. 진심이 아니면 한마디도 하지 마십시오. 말하는 모든 것에 마음이 액체처럼 배어 있게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십시오. 마침내 주님이 여러분을 만나주실 것이며, 이 현실을 능히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하늘로부터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부르짖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말씀을 지킴
마지막으로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그는 말씀을 사랑한 것만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내기를 원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 그는 부르짖어 기도했고, 부르짖어 기도하기 위해서 그는 기도할 수 있는 삶을 살아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를 원했으니, 이는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내게 응답하소서 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키리이다" (시 119:145下) "···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지키리이다" (시 119:146下) 시인은 악인들에게 에워싸여 난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그 모든 시련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궁극적인 소원은 편안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자기를 통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넘쳐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신자들이 영적으로 메마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너무나 현실이 고통스럽고 힘들 때면 곤충이 꿈틀거리듯이 하나님을 찾는 척합니다. 자신이 너무 힘들고 괴롭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금 흘러 상황이 나아지거나 혹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응답이 되지 않을라치면 그나마 하던 기도마저 그만두고 맙니다. 이러한 자기중심성 때문에 거룩한 삶에는 진전이 없고 영적으로 메마른 상태에서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는 오직 성도로서 자신의 거룩한 삶을 살아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순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시는 것을 받았습니다. 누구에게도 주지 않은 부(富)를 주었으나, 그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자신이 가난하고 궁핍한 심령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모든 왕들 위해 뛰어난 영광을 주었지만, 그는 항상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자기는 가난하고 비참하오니 불쌍히 여겨달라고 매달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이상의 삶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이 특별히 은혜를 주시고, 자신의 과오를 용서해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감화시켜주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의 교훈을 지키기를 원했고, 주의 증거들을 준수하기를 바랐습니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오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총체적인 의미에서 그리고 개념적으로만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구원받은 자녀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렇게 선언만 하고 실제로는 자기 마음대로, 모든 삶을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자기의 삶에 아주 작은 부분까지라도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하며 사는 생활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진리를 사랑하는 데 있고, 진리에 대한 사랑은 자신의 마음과 생활을 그것에 맞추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살아갈 때만 자신이 가장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하나님이 그 때에 가장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곳에 자신의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이 『삼위일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의 서문에서 말합니다. "하나님 제가 젊어서 이 책을 쓰기 시작했는데, 늙어서야 책이 출판되었나이다." 실로 삼십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그는 『삼위일체』라는 책을 쓰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원고를 너무 보고 싶어 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하나님이 삼위일체일 수 있을까?' '세 인격을 가지셨으나 세 분은 결코 아니고 한 분이시다' '한 분이신데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세 인격을 가지고 계시다' 이 말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 최고의 스승인 어거스틴은 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너무 궁금했습니다. 당시 어거스틴이 글을 쓰는 방식은 방을 하나 마련하고 그 방에 원고를 놓고 거기서 글을 쓰고, 작업이 끝나면 문을 잠그고 나왔다가 시간이 나면 다시 들어가서 쓰는 방식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아마도 삼위일체 하나만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동시에 여러 작품들을 썼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시로 사람들이 그 방을 열고 들어가서 삼위일체의 원고를 훔쳐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좋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아는 길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전혀 새로운 설명을 내놓습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길은 하나님에 대해 탐구하는 것만으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거스틴은 『삼위일체』 15권 20장 39절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기억하고 바라보고 사랑하려면 ··· 자기의 전존재를 연관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A. Augustinus,『삼위일체』15. 20. 39 삼위일체 하나님을 기억하고, 마음의 눈으로 그분을 바라보고, 더욱이 그분을 사랑하려면 탐구하는 것으로는 안 되고, 자기의 전 존재를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시라는 지식에 연관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하나님에 관한 기억에 있어서 여러분에게 상처가 되는 것이 있습니까? 종종 내가 사랑하던 사람은 가끔 상상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내게 남겨주고 떠나 그를 기억하는 것이 쓰디쓴 맛을 내 마음에 쓸개와 같이 뿌려 놓을 때도 있습니다마는 하나님에 대해서 상처받은 기억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입니다. 생텍쥐페리가 말했던 바와 같이 마음의 눈으로 보지 아니하고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고 한 것처럼 하나님은 그렇게 마음의 눈으로 보여질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눈이 감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에 관해 우레와 같은 설교 소리를 들어도 그들의 마음은 굳게 눈이 감겨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싫다고 말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비록 자신의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 것이 싫다거나, 하나님을 미워하는 편이 오히려 즐겁다고 말하는 정신 나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말씀에 대해 많이 알고 있어도 자신의 모든 삶의 상황을 하나님과 연결 짓는 구체적인 사색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살 수도, 보면서 살 수도,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 수도 없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 일에 있어서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보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와 살아가는 자기의 모든 삶을 하나님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형통할 때면 그 형통한 삶의 의미를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결 짓기를 원했습니다. 고난이 닥칠 때면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자기 인생의 의미를 연결 지으며 해답을 찾고 싶어 했습니다.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삶의 모든 순간순간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싶어 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을 때마다 자신의 삶이 어떠한가를 보며 그 지식을 삶과 연관시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삶을 지식의 기반 위에 두고 싶어 했고, 모든 지식을 삶으로 꽃피게 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할 수 없이 외로운 순간에 고독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결코 홀로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역설적으로 그 안에서 하나님과의 풍성한 교제를 누렸던 것입니다. 시련과 고난을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 그리고 자녀들이 죽는 것을 보면서 그 비극의 순간에 오히려 이 세상이 잠시 지나가는 안개와 같은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소망을 이 세상에 둘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며 자기 인생의 고난의 위기 속에서 자신의 삶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 사이에 매듭이 생기는 것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삶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의 지식과 연결하며 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로 묶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누구도 가져본 적이 없는 부(富)를 누렸지만, 그것에 마음을 뺏기는 적이 없었고, 탁월한 권세를 주셨으나 교만해질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마음의 처지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허무함을 생각하면 영원하신 하나님의 품 이외에 파고들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그에게는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대신에 사랑할 것도 역시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은 사람 중에서 다윗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남이 받지 못한 사랑을 받게 하셨고, 남이 갖지 못한 것을 갖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참으로 추구하는 것이며, 지금도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만나주십니다.
또한 하나님과 자신의 삶을 연결해서 생각할 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새로 깨닫게 되고 그분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으니, 그의 일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를 온전히 바침으로 우리를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해주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로서 우리에게 보여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본체였으나 그와 동등 됨을 취할 것을 거절하시고 오히려 사람의 몸을 입고 종의 모양으로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멸시와 욕을 다 당하며 이 세상을 나그네처럼 종처럼 사셨습니다. 왕이셨지만 종처럼 취급을 받으셨고, 하나님이셨지만 인간 중 가장 미천한 자 취급을 받으며 모욕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그래서 그분의 생애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한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관심은 사람에게 영광을 받는 것이나 혹은 당신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자신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순종하기에 이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살아가는 목자 잃은 양 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분 말씀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순종하며 사는 인간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당신의 온몸으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당신은 죄가 없으셨으나 죄인들이 만든 세상이었기에 세상에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 허공에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생애는 우리들이 겪은 모든 고통을 다 겪으신 생애였습니다. 죄는 없지만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일생은 고난의 연대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복하셨습니다. 비록 육신으로는 고난과 시련을 겪어 눈물이 마를 날이 없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피까지 쏟으셨지만, 그분의 마음은 온전히 하나님의 것이었고 팔복(八福)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으로 충만했을 때 하나님 자신이 행복이었기에 예수 또한 행복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 가시면서도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죄인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의 기도를 올리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을 뿐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은혜를 간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Ⅲ. 적용과 결론
우리는 살기 위해서 말씀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진리를 깨닫기 위해 기도해야 하고 또 기도하기 위해 순종해야 합니다. 삶으로 순종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간절한 기도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부르짖는 기도 생활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순종하기를 선택하십시오. 자기의 능력을 의존하지 마십시오. 순종할 수 있게 하는 사랑의 힘이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십시오. 내가 살아낼 수 없는 바로 그 시점이 하나님의 도움이 시작되는 시점이며, 내가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그 지점이 하나님이 시작하는 시점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으십시오. 기도 생활을 회복하십시오. 그리고 삶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우리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십시오. 주님께서 반드시 말씀을 깨닫게 하실 것이고, 그렇게 살아갈 은혜와 힘을 주실 것입니다. 이 능력으로 현실을 넉넉히 이기며 행복한 삶을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2. 부르짖고 묵상하라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시 119:147-148)
녹취자: 조복령
Ⅰ. 본문해설
고난받을 때 시인의 태도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고난받을 때 부르짖는 기도와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으니, 그렇게 하기로 뜻을 세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어서 시인이 그렇게 자기가 세운 그런 뜻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했는지에 대해 기도의 형식을 빌어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Ⅱ. 부르짖고 묵상하라
그것은 부르짖고 묵상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평화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 평화 안에서 언제든지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시인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런 마음을 계속해서 유지하면서 살 수 있었겠습니까?
A. 부르짖고
제일 먼저 그는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시편 119편 147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시 119:147) 그의 갈망은 밝아오는 새벽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아니 그전에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온전한 사랑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마음의 갈망이었습니다.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찼던 시인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모든 죄를 용서받고 더 큰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갈망이었습니다. 이것이 시인으로 하여금 깊이 잠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심정에는 자신과 이웃의 죄에 대한 경건한 염려와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사랑이 함께 있었습니다.
당시 경건한 백성들에게 아침은 신비로운 시간이었습니다. 하루의 시작이었을 뿐만 아니라 어제와는 다른 새로운 날에 태어남을 알리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윗은 후일에 있을 성전의 낙성식 곧 자기 아들에 의해서 성전이 건축되면 완공 시에 부를 노래를 미리 작성하였고, 그 시 속에서 자기의 심정을 고백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기를 건져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춥고 긴 밤 동안 외롭게 밤새도록 성을 지킨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 같이 시인은 하나님을 갈망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의 무엇을 갈망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어떤 것들을 그렇게 간절히 갈망했다는 뜻입니까? 그것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수도사로 있던 시절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금식하고 고행을 하며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눈물로 기도하는 아퀴나스에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 아퀴나스야!" "네가 왜 그렇게 울고 있느냐?"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랴?" 아퀴나스는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무엇을 갖고 싶어서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금식하며 나에게 부르짖느냐?” 아퀴나스가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만약에 무엇을 주실 수 있거든 저에게 당신 자신을 주시옵소서.” 시인의 기도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떤 세상에 있는 것들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시인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사람이 되고 온전히 그분의 사랑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밤은 자연적인 밤뿐만 아니라 환경적인 밤중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절망과 고독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밤은 세상에 있는 것들로부터 방해받지 않는 시간입니다. 영혼의 평화로운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좋은 때입니다. 본문은 환경적으로 깊은 밤중과 같은 상황을 지나던 때에 시인이 어떻게 요동치지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자가 고난과 시련 속에서 그 마음이 언제나 하나님 자신을 향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인의 갈망은 기도의 부르짖음으로 나타났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기에 억제할 수 없는 정이 하나님께 대한 의존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 부르짖는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절실한 의존의 감정을 동반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만을 온전히 의지하는 우리의 마음 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가졌어도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그분을 의지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면서도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그분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시인의 부르짖음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은 없습니다. 여기서 부르짖음은 단지 육체의 외침이 아닙니다. 입으로는 조용하나 마음으로 소리치는 것도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소리를 내지 않아도 신음을 동반한 침묵의 기도도 부르짖는 기도인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언제든지 필요할 때, 마치 둑이 터지면 물이 쏟아지듯이 그렇게 기도할 수 있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오랜 시간을 들여서 규칙적으로 기도하지 않고는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우 연약하고 환경에 늘 흔들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규범을 세워 놓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 규범은 자신과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나는 저녁 밤 9시부터 10시까지는 기도하는 시간이다.' 또 '아침 7시부터 7시 30분까지는 성경을 읽는 시간이다.' 그렇게 탄탄한 지속적인 경건 생활이 있을 때, 그때 우리의 마음이 언제든지 부르짖을 수 있도록 준비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 생활을 하고 또 말씀 생활을 하는데도 그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밤 시간에 간절히 기도할 때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것이 느껴졌고, 아침에 성경을 읽을 때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새로워졌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낮이 됩니다. 그러면 어젯밤에 간절히 기도하고 아침에 성경을 읽으면서 받았던 마음이 엷어집니다. 이때 필요한 경건의 기술 하나를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짧은 기도를 마음 깊은 곳에서 길어 올려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굳이 무엇인가를 구하며 기도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여!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 저를 꼭 잡고 놓지 마시옵소서.'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주님 앞에 간절히 마음을 쏟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15초도 안 걸립니다. 그 짧은 기도 속에서,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감정이 올라옵니다. 그리고 내 마음을 적십니다. 그래서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특히 유혹을 받거나 혹은 누군가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혹은 근심이 있을 때 자기의 마음을 추스르고 하나님을 향해서 살 수 있는 경건의 기술이 바로 짧고 간절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거는 누구나 다 되는 게 아닙니다.
우울증의 첫 번째 증상이 뭔지 아십니까? 우울증의 첫 번째 증상은 평소에 그렇게 좋아하던 사람들을 만나기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합니다. 그렇게 만나서 즐겁고 행복하고 너무 보고 싶어 했는데, 우울증에 걸리면 그렇게 자기가 좋아하던 사람들인데도 만났을 때 자기의 기(氣)가 빨려가는 것 같이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아무도 안 만나려 하고 고립의 벽을 쌓는 것입니다. 그게 우울증의 초기 증상입니다. 우울증을 영어로 디프레션(depression)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앙에서 영적인 침체를 스피리츄어 디프레션(spiritual depression)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침체는 영혼의 우울증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았을 때는 그렇게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이 즐거웠고 행복했는데, 이제는 기도만 하려고 하면 기가 빨려 나가는 것처럼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드리기가, 설교를 듣기가, 성경을 읽기가, 너무 힘든 것입니다. 그게 영적인 우울증에 걸린 첫 번째 증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증상들을 잘 관리해 나가야 됩니다. 그리고 노력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고, 명랑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를 놓치면 점점 우울증이 깊어져서 나중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단계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자살하는 사람의 80%~90%는 이미 우울증의 전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자살을 하지 전혀 그런 게 없는 사람들이 자살하는 예는 극히 드뭅니다. 이미 마음에 병이 깊어진 (것입니다.) 우울증에 걸린 모든 사람이 그렇게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극단적인 생각하는 모든 사람은 다 우울증의 전력을 거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울증은 그 자체가 심각한 게 아니라 그것이 가져올 또 다른 일들 때문에 우울증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기도를 언제 드렸습니까? 마음을 쏟으며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던 이 시인의 부르짖는 기도는 이 시인을 시련과 고난 속에서 지켰습니다. 갑옷이 되어서 원수의 칼을 막아주었습니다. 갑옷이 되어서 모든 해(害)로부터 자기를 보호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안에, 그분의 장중에 붙들려 있는 비결이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그렇게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까?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만 하고 시름에 잠겨 근심과 걱정에 주저앉았더라면 그는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는 어떻게 하나님을 찾아야 할지 알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의 은혜를 받고 주님께 간절히 부르짖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수시로 기도를 쉬지 않음으로 영혼의 침체에서 벗어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묵상하라
두 번째는 묵상을 하는 것입니다. 부르짖음과 묵상, 시인에게 이 두 가지는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항상 같이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부르짖는 기도와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았기에 이것 없이 저것이 있을 수 없고, 저것 없이 이것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시편 119편 148절은 어려운 구절입니다. 그래서 번역이 조금 잘못되었습니다. 그래서 역을 더 쉽게 했습니다.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나의 두 눈은 야간 경비를 설 순서를 기다리는 것처럼 떠져 있었으니, 이는 당신의 말씀을 묵상하기 위함이었습니다.”(시 119:148, KNJ 私譯) 시인은 마치 깊은 밤 파수꾼이 경비를 설 순서를 기다리기 위해 대기하는 것처럼 밤에도 눈을 붙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시인이 눈을 뜨자마자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이 이러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사정을 낱낱이 아뢰며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오직 시인이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겠다는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시인에게 묵상은 하나님을 향한 사색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사색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는 자신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려면 우리의 생각이 우주 공간을 헤매어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자신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자기를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다시 솟아 나와서 자기 바깥으로 나와 이번에는 하늘의 하나님께 도달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그 하나님을 발견하고 다시 자신 속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보여준 사색이었습니다.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믿음 없는 사색은 공허하며, 사색 없는 믿음은 자기 것이 아니다.” 믿음이 없는 사색은 공허하고, 사색이 없는 믿음은 남의 것이지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색은 마치 항구에 닻을 내리지 못한 채 떠도는 배와 같습니다. 정착할 의도는 가지고 있으나 자기를 붙잡은 말씀이 없기에 방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색하는 것도, 사색 없이 하나님을 믿는 것도, 온전한 경건이 아닙니다. 참된 사색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을 묵상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경건한 묵상과 철학적 사색은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공통점은 발견한 사실을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것과 연결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경건한 묵상은 자기가 인식한 사실을 하나님과 연결 지으면서 자신과 자신의 삶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철학적 사색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어떤 사실을 보고 그걸 하나님과 위로 연결시키고 또 아래로 자기와 연결시킴으로써 무엇을 행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스스로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색과 판단, 결정, 결정한 것의 실행, 이 네 가지가 끊임없이 반복되어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일생인 것입니다. 따라서 묵상이 없는 말씀 생활은 단지 신앙을 이성에 머무르게 하며, 이는 신앙의 피상성을 벗어날 수 없게 합니다. 참을 수 없으리만치 가벼운 생각들을 미워하는 사람이 아니면 참으로 진리를 찾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진리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물과 음식을 찾지 않을 수 없듯이,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 진리를 찾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진리만이 영혼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1650년에 태어나서 1678년에 세상을 떠난, 스물여덟 살에 일생을 마쳤던 훌륭한 청교도 가운데 헨리 스쿠걸(Henry Scougal)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이십팔 년밖에 살지 않았지만, 정말 커다란 업적들을 남겨 놓았고 주옥같은 저서들을 물려주었습니다. 그가 쓴 가장 유명한 책 중 한 권이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책입니다. 전설적인 설교사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가 이 책을 읽으며 회심을 경험했다는 책입니다. 그 책의 제34페이지에서 그는 말합니다. “참된 신앙이란 하나님과 영혼의 연합이며, 하나님의 성품, 곧 인간의 영혼에 요구되는 그분의 형상에 실제로 참여하는 것이다.” 참된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 영혼의 연합입니다. 이 연합이라는 것은 영(靈)이신 하나님과 인간의 영혼이 연합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큰 밀가루 반죽과 작은 밀가루 반죽 덩어리를 뭉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남녀가 서로 모르고 지낼 때는 완벽한 타인입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부부가 됩니다. 몸은 각자 따로 가지고 있지만 결혼을 통해서 두 사람은 사랑으로 한 사람처럼 연합되는 것입니다. 바로 참된 신앙이란 이렇게 영(靈)이신 하나님과 인간의 영혼이 사랑으로 연합되는 것입니다. 그 연합을 가지고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에 참여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영적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신앙은 그것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내적이며 자유롭고 스스로 움직이는 원리로 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은 살과 피와 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생명을 가지고 있을 때는 살, 뼈, 핏덩어리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이것을 '몸'이라고 부르고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도 영적 생명을 가지고 있을 때 '살아있는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마른 뼈와 같은 영혼으로 살아갑니까? 왜 예수를 믿으면서도 기쁨이 없이 살아갑니까?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통해 영적인 생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말라깽이처럼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영혼 안에 충만한 생명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 충만한 생명은 은혜를 통해서 부어지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렇게 풍성한 생명을 기도의 부르짖음과 말씀의 묵상 속에서 누렸습니다. 묵상은 머리에 있는 지식이 가슴으로 내려오게끔 해주는 깔때기입니다. 묵상이 없는 말씀의 습득은 마치 많이 먹었지만 소화되지 않고 돌아다니고 있는 음식과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이 음식을 먹어도 그것이 자신의 체력을 길러주지 못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성적으로 많이 깨달아도 묵상이 없는 사람들의 삶은 결국 말씀은 말씀대로 자신 안에서 돌아다니지만, 그것이 자기 영혼의 핏줄을 통해서 양분이 공급되지는 않기 때문에 사뭇 다른 마음을 가지고 인생을 힘겹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경건한 시인들에게 가장 기뻐 받으시던 제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소의 목을 꺾고 살코기를 발라서 드리는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번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사는 시인들의 애통하는 기도와 하나님을 생각하는 묵상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시인은 19편 14절에서 말합니다. “···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下) 말과 묵상이 열납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이 '열납된다'라는 동사는 제사에서 많이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묵상은 하나님께 바쳐지는 훌륭한 제물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우며, 그 하나님을 묵상하며, 그 마음의 진심을 주께 드리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도 드리는 사람입니다.
사랑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제일 먼저 사고(思考)기능에 관여하기 때문입니다. 충만한 사랑의 증거는 많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달콤한 묵상이야말로 지금 그가 하나님과 연애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속삭이는 애인의 목소리가 귀를 만져주고 마음을 달콤하게 해주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이해할 때 그 어떤 것보다도 마음에 큰 기쁨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 묵상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고요한 시간이 있습니까?
(찬송)
나의 말의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을 묵상하지 않는 사람은 드릴 수 없습니다. 자신을 들여다보고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는 사람이기에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애하는 지성(知性)이야말로 탁월한 믿음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사랑하기 위해서 알고, 참으로 알기 위해서 사랑하는 마음은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고 묵상하는 마음입니다. 비록 그는 손에 아무 가진 것이 없어 주께 바칠 것이 있지 않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매일매일 제사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의 온전한 묵상이 하나님께 바쳐질 최고의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묵상하고 이때의 마음이 달콤한 사랑의 정서에 푹 잠기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이미 하나님께 바친 사람입니다. 자기 삶의 동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피에 푹 담가 세례를 준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삶의 나머지 모든 부분도 기꺼이 드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시간이 언제입니까? 조용히 묵상해 보십시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조용히 눈을 감고 묵상해 보십시오. 이것이 나의 의무이기 때문에 읽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내 마음속에 오셔서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과 연결시키고 자신의 삶과 연결시켜 보십시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주저앉은 사람이 일어날 것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포기한 사람에게 다시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날 것입니다. 이게 묵상이 주는 힘입니다. 한 편의 설교를 듣고 조용히 그 말씀에 정신을 집중하고 그 말씀이 나에게 무엇을 기도하라고 하는지 찾아내십시오. 그래서 기도를 따라서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서 기도를 드려보십시오. 예전에 없었던 놀라운 힘이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인생의 난관과 역경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지혜가 주어지고, 하나님을 묵상하기 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도우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마음 깊은 곳에서 선한 의지의 샘이 솟아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찬양)
주님의 뜻대로 나 항상 살리라
그렇게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며 살아갈 힘을 묵상을 통해서 얻었기에 시인은 이 부르짖는 기도와 말씀에 대한 묵상의 두 날개로 고난의 계곡을 지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Ⅲ. 적용과 결론
여러분도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간절한 부르짖음을 통해서, 이기고 승리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3. 간구하고 깨닫게 하소서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나의 간구가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시 119:169-170)
녹취자: 조복령
Ⅰ. 본문해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간절한 기도가 함께 간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시편 119편은 알파벳 히브리어 순서 22개로 되어 있는 것을 8절씩 똑같이 묶어서 총 176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시편의 마지막 연(聯)의 시작이 바로 본문입니다. 여기서도 경건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가 함께 간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II. 간구하고 깨닫게 하소서
A. 주 앞에 이르는 간구
그는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그는 주 앞에 이르는 간구를 드리고 있습니다. 169절에서 170절 사이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 (시 119:169) "나의 간구가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 (시 119:170) '여호와의 율법'이라는 표현으로 시작된 첫 연(聯)으로부터 '여호와여'라는 부르짖음으로 마지막 연(聯)의 첫 머리를 장식하며 끝을 맺습니다. '여호와', 이것은 하나님의 본명입니다. 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를 시작합니다. 이것은 시인의 마음에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선택하고 선택받은 언약 관계가 존재하며, 그분의 인자하심 안에 자기가 있다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의 간절한 기도의 제목은 자기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이르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소위 기도를 위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 드립니다. 그러나 모든 기도가 항상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이르는 기도는 평범한 기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그분께 바쳐지는 기도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자는 기도합니다. 그러나 모든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라는 행위는 하나인 듯하지만, 그 기도 드리는 마음의 깊이의 층차(層差)는 다양합니다. 단지 남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외식하는 기도로부터 시작을 해서 단지 입술로 기도할 뿐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기도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가장 높은 경지의 기도가 있으니 그것은 자기의 마음의 중심을 모두 쏟아서 하나님 앞에 이르기까지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영으로는 기도하나 마음으로는 깨달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방언 기도도 있다고 고린도전서 14장 14절이 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서 그분 앞에 이르기까지 드리는 기도인데, 이 기도야말로 신령함에 있어서 기도의 가장 높은 단계인 것입니다.
시인은 단지 겉모양으로 기도하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샘솟듯 솟구쳐 터져 나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이르도록 기도하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시인은 그런 기도 속에서만 사랑하는 하나님과 완전한 연합을 누리며 친밀한 사랑 속에서 자신의 소원을 아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는 기도는 오직 마음이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사랑하는 상태이며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에서만 이런 기도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는 간절한 기도로 주님만을 찾는 마음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에 가장 좋은 마음입니다. 깨닫기에 가장 좋은 마음이며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사실 주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모두 순종할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마음과 정신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간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주께로부터 받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사랑하실 때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시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조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돈과 명예를 주시지만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요한복음 14장 2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 14:21) 시인은 자신의 기도와 간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이르기를 원하였습니다. 간절히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며 시련과 고난 속에서 시선을 하나님의 보좌에 고정하고 그분께 마음을 쏟으며 그만을 의지하기를 어린아이가 어미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시인이 생각하는 기도 곧 보좌 앞 하나님의 면전에 이르기까지 드리는 기도가 어떤 기도였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에서 터져 나온 간절한 기도는 새들이 날아다니는 첫 번째 하늘을 지나고, 악령들이 지배하는 두 번째 하늘을 꿰뚫고, 거룩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세 번째 하늘에까지 이르는 기도였습니다. 시인이 드리고 싶었던 기도는 단지 혼자 중얼거리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헛되이 허공을 향하여 맴돌다가 다시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공허한 기도를 드리기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움직이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그런 형식적인 기도를 드리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어떤 낯섦이나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완전한 사랑의 연합 속에서 자신의 심령을 쏟아부어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런 기도는 즐겁다 못해 달콤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런 기도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하나님을 만납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영원(永遠)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사랑의 기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각각 깊이와 시기는 다르지만 언젠가 하나님과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물처럼 쏟아부으며 하나님의 품을 향하여 파고들고, 주님은 당신 자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쏟아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소원이 내 마음을 바꾸어 내가 하고 싶은 소원이 되게 해주시고, 원하였으나 도저히 할 힘이 없다고 주저앉았던 우리들을 일으켜 세우셔서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신 것도 바로 이러한 기도 속에서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자신의 영혼의 깊은 침체와 곤고한 삶의 원인을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과의 관계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향하여 너무 과다한 욕망을 품거나 혹은 지나친 기대를 가짐으로써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사람을 의지하며 살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곤고한 삶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자주 간과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은 태어나고 흘러가고 변전(變轉)하며 마지막에 사라져가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도 역시 이 모든 사물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게 태어나고, 젊음을 향하여 절정에 도달하고, 그 끝에 도달한 후에는 나뭇잎이 물들어 떨어지듯이 그렇게 우리의 육신은 사위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혀 슬프지 않은 이유는 우리에게 속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육체의 모든 짐을 벗고 자유롭게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우리 장막의 집을 떠날 준비를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태어나고 병들고 늙고 죽는 모든 것들이 결국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깊이 있는 기도를 하는 가장 큰 비결은 온갖 사방 세상에 있는 것들로 뻗어있는 우리의 정신을 거둬들이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을 거둬들여 우리의 영혼 깊은 곳을 더듬어 세밀하게 살피며 우리 자신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사라고 부릅니다. 꼼꼼하게 자신을 살피기 위하여 세상으로 뻗쳤던 자신의 정신을 거두어 자기의 마음 깊은 곳을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거기서 주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질 때 우리의 영혼은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보좌로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영광의 하나님을 뵈옵고 다시 평화롭게 자기 자신으로 내려오는 것, 이것이 이런 깊은 기도를 나누는 비결인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영적인 사랑의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그런 기도를 통해 우리는 거룩해집니다. 그렇게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대면하는 기도를 드려보십시오. 신령한 것들에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헛된 욕심과 집착들을 내려놓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태로 들어가는 것은 시인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그의 마음을 변화시켜주시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은혜의 도움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욕심을 버리고 진리의 도움을 받으면 올바른 것을 선택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 선택한 것을 실제로 실천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선한 것을 바라면서도 실제 삶으로는 악한 것을 좇기에 그 속에 인간의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이미 그리스도 예수를 닮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고, 이미 붙잡았다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것을 향해 달려가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시고 찾는 자에게 발견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매달리는 자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은혜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이런 기도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우린 시간 가는 줄을 몰랐고, 고통스러운 마음을 안고 하나님의 집을 찾았고 주님께 매달렸으나 하나님은 고통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시며 오히려 하나님의 달콤한 사랑을 우리에게 알게 해주셨으니 우리는 고난을 주신 것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주님을 알게 하신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우리 안에 기도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일이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이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나를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주 앞에 이르는 진실한 간구를 드려야 될 때가 아니겠습니까? 마음에 없는 일만 마디의 번지르르한 말보다는 한마디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한 기도가 우리 주님의 보좌에까지 이릅니다. 수많은 뜯어볼 필요도 없는 우편물 같은 형식적인 기도를 집어치우십시오. 그리고 단 한마디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기도를 드려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가 깨뜨려지고 주 앞에 눈물을 쏟으며 자신의 마음을 깨뜨리며 하나님 앞에 최고의 예물을 드릴 때 삶의 상황은 바뀌게 되고 절망 속에서 희망으로 자신을 설득할 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 앞에 드리는 간구로 살 길을 찾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B. 구원하는 말씀
마지막 구원하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마음을 다 드리는 부르짖는 기도로서 시련과 위기 속에서 벗어나게끔 해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고 빌고 있습니다. 시편 119편 169절에서 17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 ···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시 119:169 下) "···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 (시 119:170 下) '깨닫는 것'과 '건지는 것'이 나란히 가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를 시련 속에서 구원해 주시는지를 알았습니다. 능력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시련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련 속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고, 고통 속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있어서 자기를 철들게 하시기 위해, 깨닫게 하시기 위해, 자기를 바꾸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게 하기 위해, 그 시련을 소중하게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수에게서 자기를 건져주시기를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제일 먼저 구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말씀은 모든 율법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약속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현실적으로 시련과 고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피하게 해달라는 것이 시인의 첫 번째 기도제목은 아니었습니다. 현실적인 비관을 낙관으로 바꿀 수 있는 어떠한 희망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에게는 119편 150절 상반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악을 따르는 자들이 가까이에 있었고 또한 157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핍박하는 자들과 대적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눈은 하나님을 향하였습니다. 모든 시련과 고난 속에서 현실은 안개와 같이 앞을 가로막고 보이지 않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 시인의 마지막 희망은 오직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주님의 약속을 현실로 소환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자! 한번 상상해 봅시다. 어떤 사람이 깊은 웅덩이에 빠졌습니다. 두 길이 넘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웅덩이에 빠졌습니다. 거기서 사방을 둘러보아도 모두 흙더미뿐이고 내려다보니까 물이 발목까지 차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에 그 물은 무릎까지 올라왔고, 잠시 후에 그 물은 허리까지 차올라왔습니다. 이제 웅덩이에 빠진 것도 서러운데, 웅덩이에서 솟아나는 그 물속에 익사해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눈이 닿는 어디에도 희망의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서 위를 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늘이 보입니다. 이때 비록 하늘의 크기는 손바닥만 할지라도 거기서 새로운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자신이 갇힌 구덩이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반드시 저 밖에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현실로 소환하는 능력입니다. 신앙은 이렇게 소환되는 약속을 따라서 현실보다 더 그 약속을 현실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에 대해서 성경은 칭찬하며 이들의 믿음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로마서 4장 20절에서 22절에서 말합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롬 4:20).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 4:21).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2). 시인이 간절히 바라는 바는 고난과 위기에서 건져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 먼저 자신을 고치셔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어 하도록 변화시켜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변화되기를 원하는 자신의 처지를 돌보아 주셔서 궁극적으로 원수의 손에서 자기를 구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에서 '건져주소서'라는 탄원은 난관과 위기로부터의 구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시인은 원수들에게서 핍박을 받고 고통받는 상황에서 자기를 건져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 모든 질문에 만족스러운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마음이 병들었을 때 우리에게 시련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혼의 질병에 대해서는 무감각할지라도 육체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때로는 그 아픔과 고통 속에서 고난의 의미를 생각하며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자기의 병든 영혼을 돌아보게 하기 위해서 그런 시련의 과정을 겪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셔서 하나님이 영혼을 고치십니다. 우리의 구원이 늦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력(知力)이 미치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고통을 통해서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뜻에 우리가 믿음으로 응답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옛날 1960년대와 70년대에 우리나라를 먹여 살린 수출산업 가운데 하나가 잠사업(蠶絲業)이었습니다. 누에를 길러서 누에고치에서 나오는 실을 뽑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실크(silk)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에도 보면 그렇게 누에를 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기억이 안 나지만 선배 목사님들에 의하면 그런 뽕나무 밭과 잠사(蠶事)를 하는 농장들이 가득 모여 있던 곳이 잠실이었다고 합니다. 거기서 얼마나 많은 누에들이 뽕잎을 먹는지 하여튼 그 뽕잎을 갉아 먹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실을 뽑아냈는데, 그걸 놔두면 그게 번데기에서 나방이 됩니다. 나방이 될 때 번데기에서 나방이 나옵니다. 머리부터 나옵니다. 애 낳는 것처럼 똑같이 나옵니다. 그러다 어깨가 밖으로 나오고 날개까지 나옵니다. 그러면 어쨌든 그 번데기에서 벗어나서 한번 날아보려고 부지런히 날갯짓을 합니다. 애를 씁니다. 그리고 결국은 몸이 다 밖으로 나오고 마지막에 하체가 번데기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날갯짓을 합니다. 그게 불쌍하다고 도와주면 그 나방은 결국 하체가 여물지 못해서 질질 땅바닥에 끌리다가 죽어버립니다. 그렇게 빠져나오지 않는 하체를 곧 번데기 속에 들어 있는 그 하체를 끄집어내기 위해 자기가 부지런히 날갯짓을 하면서 몸에 근육이 생기고 날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마지막에 번데기 속에 들어있던 자기의 하체가 여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물면서 비로소 스스로 빠져나올 때, 그때 날갯짓을 하면 이제 완전히 공중을 날아다니는 나방이 되는 것입니다.
고통에는 뜻이 있습니다. 시련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들을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어떤 하나님의 뜻들은 죽을 때까지도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을 경우도 있습니다. 나에게 왜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 그리고 내게 왜 이런 시련이 계속되는지, 나에게 왜 이런 힘든 질병을 허락하셔서 고통을 겪게 하시는지,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 모든 것에 대한 완벽한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이 풀리지 않는 의문과 함께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인정해야 합니다. 거기서 우리의 믿음에 대한 판단이 갈리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나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합니다. 그분이 살아계시다는 사실과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좋으신 분이라는 사실 그리고 자기를 위해서 산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상급을 잊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찬양)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라
그렇게 하나님은 고통과 고난을 통해서 덜 여문 우리의 영혼을 여물게 하시고, 마침내 이 땅을 박차고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수 있는 우리의 정신에 날개를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풀리지 않는 의문들로 가득 차 있으나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 그분이 선하시고 나를 기억하신다는 사실만큼은 너무나 분명해서 우리의 마음에서 결코 빼어낼 수 없을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그 의미를 모르는 고통을 당하거나 우리의 이성으로 모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둠 속을 향하여 바라보는 것 같은 희미한 그 속에서도 오히려 우리 하나님을 의지할 간절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니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어린아이처럼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두움이 없이는 빛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고, 악(惡)이 없이는 선(善)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무질서의 경험이 없이는 질서가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알 수 없으며, 오류에 빠진 사람만이 비로소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확실한 많은 것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언제 이 세상에서 육체의 장막을 벗고 주님의 품으로 가게 될지 모른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 앞에 이르는 기도 속에서, 살고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우리들은 우리가 어떤 일을 만나든지 그분의 손안에 있고, 우리 인생의 모든 결말이 그분의 계획안에 있음을 우리는 굳게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헤아려야 합니다. 갚을 원한도 없고, 누군가를 미워할 이유도 없고, 누군가에게 자랑할 만한 아름다운 미덕도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며, 단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이 세상에 태어났고, 주님의 뜻을 따라서 선택되었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우리 인생의 지난날들이 주님의 계획에 펼침이었던 것처럼 또한 우리의 앞날도 주님의 계획안에 접혀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들이며 생사 간에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그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영혼으로 주님을 향하여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만나는 은혜의 감격이 있었던 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고,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에이는 깨달음이 있을 때 우리의 기도는 자연스럽게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마디 한마디가 눈물에 젖은 언어가 되어서 주님의 보좌에 이르게 되었으니 달빛처럼 비치는 진리의 희미한 빛줄기들을 실 삼아 그것으로 우리의 마음으로 뜨개질하여 우리의 삶이라는 천을 짰던 것입니다.
(찬송)
인생의 황혼의 깃들어서 이 땅을 떠날 때가 되어도
우리는 주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그분은 우리 안에 우리는 그분 안에 있는 사랑의 연합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슬픔과 시련을 겪을 때마다 이 세상이 내가 영원히 머무를 본향이 아님을 깨닫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 순풍에 돛단 것처럼 평화롭게 이루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나로 말미암아 그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 때문에 된 일이며, 하나님이 그렇게 당신의 뜻을 따라 나의 인생을 순적하게 인도하시는 거기에는 이 세상에서 나를 살아가게 하시는 소명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말씀을 통해 여러분을 구원하시는 것을 깨닫고 그 말씀으로 살아있는 영혼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는 하나님을 이용해서 상황을 바꾸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바꾸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근심할 환경을 주십니다. 우리를 너무 소중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을 정결하게 하시려고 낙심하는 대신 믿음으로 기도하게 하십니다. 간절한 기도로 더욱 당신께 매달리게 하시기 위하여 자기가 사랑했던 세상으로부터 배반을 당하게 하시고 하나님 품 이외에는 자기가 돌아갈 곳이 없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고치고 영혼을 새롭게 변화시켜주시는 하나님이시니 그렇게 새 마음으로 새롭게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인생과 세계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나를 사랑하사 자기를 버리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임을 깨닫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13주 동안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나를 살리는 말씀』이라는 시리즈를 설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부끄러운 것이 있어도 여러분에게는 부끄러움이 없이 최선을 다해 설교를 준비하고 내 마음에 없는 말을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제 공은 여러분에게로 넘어갔습니다. 그 13편의 말씀을 들은 여러분은 언젠가 주님 앞에 대답해야 될 것입니다. 왜 그 말씀을 들었고, 왜 그렇게 살았는지를 주님 앞에 해명해야 될 때가 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마음으로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내려놓기를 바라셨습니다. 대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다시 살아나는 영혼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주님을 섬기며 그렇게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향해 너무 많은 사랑을 쏟지 마십시오. 사람에게 너무나 많이 기대지 마십시오. 생사 간에 우리가 의지할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니 주님의 말씀으로 살아난 영혼은 모든 현실을 감당할 수 있고 거기서 좋으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여러분이 이 믿음을 가지고 이기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