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33
목 차
찬송 받으실 하나님(시 33:1-3) 29
찬양할 이유(시 33:4-5) 34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함(시 33:6-11) 37
감찰하시는 하나님(시 33:12-15) 40
영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시 33:16-19) 46
여호와를 의지함(시 33:20-22) 50
시편56편 강해 1
시편33편 강해 1
시편33편 강해 1
시편33편 강해 1
시편33편 강해 1
시편33편 강해 1
시편33편 강해 1
찬송 받으실 하나님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지어다”(시 33:1-3)
본문해설
이 시는 다윗의 시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표제에는 안 나와 있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어우러져 들어있습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사람들에게 찬송하라고 초청하는 것입니다.
올곧은 자의 마땅히 찬양할 바
여기에서 ‘정직하다’라는 것은 거짓말을 안 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마음과 삶이 모두 올바른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말로 하면 ‘올곧은 자’라는 뜻입니다. “올곧은 자의 마땅히 행할 바로다” 왜 올곧은 사람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마땅한가?
첫째는 올곧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과 삶을 움직이는 마음이 굽고 쉽게 흔들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생활도 굽고 휘청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모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성품에 어울리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계속 보여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살아가려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이 참된 분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연약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자비를 보여주십니다. 가치 없고 아름다운 것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를 사랑하려고 애쓰면서 사랑하지 않으려는 자기 자신과 분투하며 싸울 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우리와 더불어 분투하고 싸우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이 의로운 분이시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올바른 사람은 모든 것을 움직이시되 당신은 움직이지 않으시는 올바른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어떤 사람이 휘청거리지 않고 올곧게 주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살아간다면 더 많이 찬양해야 됩니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임했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거듭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로부터 끊임없이 부어지는 은혜가 없이는 그렇게 살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맨 처음 창조되었던 아름다운 지위를 잃어버리고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비유를 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전등처럼 만들어졌습니다. 인간은 생명과 사랑이신 하나님께 연결될 때 생명과 사랑을 바라며 살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이지만 정직하고 올곧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올바른 마음과 올바른 삶으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삶을 영위하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더 많이 찬송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런 삶을 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찬양의 이유, 하나님을 앎
이어서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지어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악기가 어떤 것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수금과 비파를 비롯한 여러 가지 악기를 섬세하게 연주하라는 것인데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찬송의 기본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에 어울리는 가락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높이는 가운데 자신의 영혼과 마음 안에서 쇄신하는 작용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찬송의 유익입니다.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찬송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앎입니다. 알지 못하는 것을 찬송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에 알지 못하는 것을 찬송한다면 그것은 쓸모없는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인이 수금과 열줄 비파를 온 마음을 기울여서 정성껏 연주하는 것은 그렇게 연주해서 높이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어제 회심집회를 했습니다. 6학년부터 아주 어린 아이들까지 주일날에 850명 정도 모입니다. 그런데 어젯밤에는 950명이 왔습니다. 열린교회를 목회하고 나서 처음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배당에 들어갔는데 성령님이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아이들이 마음을 모아서 십자가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정말 놀라웠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회심하고, 회심한 아이들이 말씀을 듣고 기도하면서 은혜를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장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이들이 절실하게 회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 찬송하는 것보다 먼저입니다.
아름다운 찬양을 드리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나면 우리의 찬양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아름다움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그것을 똑같이 그리기 위해 마음을 기울이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해 수금으로 노래하고 열줄 비파로 노래하고 아주 숙련된 사람이 정교하게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찬송 받으실만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지식으로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전심으로 높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마음입니다. 연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환희, ‘야, 하나님은 이렇게 아름다우시구나.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시는구나. 하나님은 정말 사랑이시로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로구나.’ 이제껏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로부터 비취는 찬란한 아름다움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자연적인 질서의 아름다움입니다. 시편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 로소이다”,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말하니 전하는 자가 없고 들리는 소리가 없어도 알 수 있으니” 자연에 대한 모든 노래에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증거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자연적인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한 것입니다.
옛날에는 여성들이 제일먼저 바느질하고 수예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아주 정교하게 바느질을 하고 예쁘게 수를 놓아서 옷감을 짠 것을 보면서 그 옷을 짠 사람의 내면을 알게 됩니다. ‘아, 마음이 참 한결같은 사람이구나.’ 그런데 사람이 성실하지 않고 약속한 한 가지에 착념하는 사람이 아니면 옷감이 한결같지 않습니다. 결국 어떤 물건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자연에 있는 찬란하고 눈부신 아름다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소산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또 하나의 질서를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도덕적인 질서입니다. 찬란한 도덕적인 질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질서한 것 같아도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자에게 복을 주시고, 거스르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벌을 내리시고, 그러면서도 오래 참으시고, 그러면서도 진노하십니다. 일이 바뀌는 것 같지만은 하나님은 바뀌지 아니하십니다. 이러한 놀라운 질서를 만들어 내십니다. 이것은 육신의 눈으로는 안보입니다. 마음의 눈을 더해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깊이 참회하고 은혜를 받을 때가 되면 ‘나의 삶을 하나하나 움직이신 것이 정교하신 하나님의 법칙이구나. 하나님이 나의 삶에 깊이 개입하셔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이 모든 것들을 이루셨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새 노래로 찬양하자
세 번째로 시인은 새 노래로 찬양하자고 합니다. 이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새 노래’라는 말은 시편에서 나온 말입니다. 새 노래의 반대말은 무엇입니까? 옛 노래입니다. 혹은 항상 부르던 노래일 것입니다. 왜 새 노래로 찬양하라고 합니까? 당신의 목적을 따라 하나님이 이 땅을 다스리시는 도덕적인 질서를 볼 수 있는 눈만 갖게 되면, 그것은 지루하게 반복되는 똑같은 일이 아니라 계속 새롭게 발견되는 것입니다. 사랑에 빠졌을 때도 그렇지 않습니까? ‘저 사람 저 모습이 다이겠지.’ 그러는데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콩깍지가 씌었으니까 나쁜 것은 안보이고 좋은 것만 계속 보입니다. 그럴수록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고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니까 마음속에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감각적인 사물에 달라붙어 있는 우리의 지성이 해방되기만 한다면 거기에서 끊임없이 드러나는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이런 고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신 주의 성실하심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을 높이고 싶은 간절한 사모함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이고 우리의 믿음생활입니다. 새로운 감격이 있을 때 옛날 노래로서는 그것을 다 표현하지 못합니다. 예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맞는 새로운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은 아무도 알 수 없는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이 세상에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서 살아가고 그 선하심을 맛보아 그분을 찬송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찬양할 이유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시도다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시 33:4-5)
정직하며 진실하신 하나님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에 대해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먼저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시도다”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정직’이라고 하는 말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어떤 말에 있어서 거짓을 행치 않는 것이지만, 이것이 하나님께 적용되면 ‘정직’은 계속해서 변함없이 한 방향으로 일관되게 흐르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대우나 행동, 성향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정직하다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이렇게 믿어라. 이렇게 기도해라. 이렇게 살아라.” 하고 가르쳐주시는 것들이 모순이나 변덕 없이 당신의 성품과 생각을 일관되게 가르쳐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의 은혜를 받고 지혜를 많이 얻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다 외우지 못해도 그분이 기뻐하시는 믿음과 기도와 생활에 대한 판단이 생겨나게 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 배운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 앞으로 어떻게 살고 믿어야 될지를 판단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종이 위에 똑바른 선을 그려 놨다면 그 다음에 선을 똑바로 그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미 그려진 똑바른 선에 자를 대고 연장해서 줄을 그으면 선이 됩니다. 만약에 선 자체가 삐뚤삐뚤 하게 되어 있다면 직선을 그으면서도 이미 그려진 선과 일치하는지 의심이 생겨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또 하나님의 말씀은 공평하다 했습니다. 인간들은 사물에 대해 느끼는 좋음이나 싫음, 인간에 대해 느끼는 애정이나 미움 때문에 판단이 자꾸 출렁거리면서 잘못 흐르게 됩니다. 예를 들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은 무엇인가 명백히 잘못해도 팔이 안으로 굽게 되어서 잘못한 것에 대해 공평한 판단을 안 내리고 잘 했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은 올바른 일을 했어도 동기를 곡해하거나 과소평가해서 기를 꺾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똑같은 사람이라도 똑같은 행동을 하는데 그날 나의 기분에 따라서 그 행동이 곱게 보이기도 하고 싫게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쁘게 미소를 지어도 나의 기분이 꼬여 있으면 ‘저 사람은 기분 나쁘게 왜 아침부터 실실거리고 웃나? 날 비웃는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 자신이 공평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흔들리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그렇게 대하신다고 한다면 우리는 굉장히 불행할 것입니다. 영화에 나오는 조폭의 두목 중에 이런 변덕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어느 날은 부하들에게 잘 해주다가도 어느 날은 야구 방망이를 들고 휘두르면서 개 패듯이 팹니다. 두목의 기분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자신의 운명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괴팍한 왕이나 황제들이 그랬습니다. 충신처럼 생각하고 상을 내렸던 사람을 특별한 이유도 없이 얼마 후에 죽이거나 유배를 보내는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이것은 공평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살려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안정감과 그분이 나에게 일관되게 대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미끄러졌다가 5년 후에 돌아와도 ‘하나님은 옛날에는 그러셨지만 요즘은 변하셨을 거야.’ 이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공평하시고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이 그분의 말씀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성품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정의와 공의입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정의’와 ‘공의’는 같은 말의 반복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정의는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고 공의는 이것들이 바깥으로 표출되어서 사람들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당신이 만드셨기 때문에 당신의 성품을 닮은 사람들의 삶이 세상 속에 구체화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성품이 세상에서 구체화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필요합니다.
인자를 베푸시는 하나님
그래서 시인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라고 노래를 합니다. 공평하고 정직하고 공의와 정의를 행해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법도대로 또렷하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도가 지나가면 그 법도에 맞는 것은 서있지만 맞지 않는 것들은 하나님이 쓸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당신께 돌아오려고 하는 사람들, 당신과 언약을 맺고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인자하심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 자비, 이런 것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성품을 배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행복하려고 스스로 애를 써도 그분 안에 있는 행복을 찾지 않는다면 그의 삶은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삶은 매순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생활을 하고, 그분의 성품이 어떠한가를 배워나가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바라고 원하시는 삶을 매일매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함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저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 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계의 모든 거민은 그룰 경외할지어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시 33:6-11)
위대하신 하나님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사람들 가운데 당신의 통치를 실현하시는 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안 보이지만, 창조하신 모든 만물 세계는 믿음이 없는 사람도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통해 모든 세계가 어떻게 운행되고 있는지를 보면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능력과 지혜를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하늘이 우리가 오늘날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신비로웠을 것입니다. 비행기도 없고 우주선도 없던 시대에 하늘은 더 할 나위 없이 신비한 세계였을 것입니다.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 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이것은 해일의 현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평범하던 바다가 어느 순간 바닷물을 무더기로 쌓은 것 같은 집채만 한 파도가 되어서 해안을 삼킬 듯이 밀려오는 광경을 보면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대하고 놀라운 능력을 보았을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만드신 위대한 세계를 보면서 우리가 도덕적으로 하나님 앞에 어떻게 통치를 받으며 사는지를 보게 되는데 이것은 신앙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끄시고 새롭게 하시는 세계 안에 나타난 크고 무한한 능력들을 보면서 위대하신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당신의 뜻과 창조의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는 삶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수동적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자연세계는 하나님의 통치에 항거하는 법이 없습니다. 대신에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창조의 목적을 이해하면서 봉사하는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혜와 능력으로 법칙을 정하시면 그 법칙에 순응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인간은 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봉사하고 섬길 수 있는 놀라운 힘을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님 닮은 지혜와 하나님 닮은 능력을 우리에게 주셔서 그분을 섬기면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이해하고, 자신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지, 자신에게 주신 소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산이나 강이나 바다 같은 피조물들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대로 거기에 순응하면서 살아갑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이 가능한 피조물로 창조되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려주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인간을 지으신 참 뜻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화의 삶은 날이 갈수록 하나님을 점점 더 알고 사랑하고 순종해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복종할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내신 목적을 이해하고 그분을 위하여 온 마음을 다해 섬기고 사랑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이고 믿음생활입니다. 그러면서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이 좋아하시는 신앙생활입니다. 이것이 일생동안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살아가야할 삶인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시인은 많은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도에 복종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오도록 초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고 안타까워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그분의 계획대로 살도록 초청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매순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분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생활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곧 그 거하신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을 하감하시도다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로다”(시33:12-15)
기업이신 하나님
찬송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복됨에 대해서 노래합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라는 말도 나오고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시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시다.”라는 말은 우리를 중심으로 놓고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근거요 희망이라는 것을 피력하는 것입니다. ‘기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제비 뽑아서 얻은 땅입니다. 기본적으로 기업은 땅입니다. 땅을 제비뽑아서 얻은 것입니다. 그렇게 얻은 것이 바로 기업입니다. 그 땅에서 살고 그 땅을 붙여먹으면서 거기에서 곡식을 얻고 그것으로 재물을 삼아 다른 사람들이 생산한 물건과 바꾸고, 그 땅에서 샘을 길어 그 물을 먹고 거기에 포도를 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땅은 곧 그들의 삶의 기반이고 생명입니다. 땅을 떠난 인간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시다.”라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의 근거가 되신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기업으로 삼아서 거기에서 자기의 필요한 자원을 공급받으면서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자신을 기업으로 삼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아서 그분께 공급받는 영적인 자원과 육적인 자원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육신을 위해 필요한 많은 물질들은 우리가 애쓰고 직업 활동을 통해 얻지만, 그것도 하나님이 허락해주시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업이신 하나님에게서 생산되는 것입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의 영혼에 필요한 자원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는 것 아닙니까?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공급해주시는 힘으로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기업인 백성들
또 하나의 표현은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입니다. 세상에는 나라와 민족들이 많이 있는데 하나님이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셔서 그들과 관계를 맺으십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기업이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5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포도원이요, 하나님이 그 백성을 선택하셔서 이 땅에 심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업으로 여기신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업으로 여기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업으로 여기면서 거기에서 필요한 모든 생명적인 자원들을 얻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기업으로 삼으실 때는 우리를 통해 생명적으로 필요한 무엇을 얻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기업이라고 하시는가? 첫째로, 기업의 원래의 의미는 소유라는 뜻입니다. “내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나의 기업을 다른 사람한테 빼앗길 수 없습니다. 힘이 없으면 빼앗기게 되지만 힘이 있는 한, 기업을 잃어버리는 것은 중대한 파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잃어버리는 것 자체가 죄악입니다. 하나님이 잃어버리시지 않는 당신의 소유로 삼으신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은 스스로 충족하셔서 무엇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지만 또한 당신이 선택하신 백성들을 통해 필요한 일을 하십니다. 곡식이 자라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잘 자라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들 속에 실현되는 자연적인 통치와 도덕적인 통치를 보고, 백성들이 그분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당신이 그들 속에 살아계시고, 이 땅을 당신이 만드신 것임을 드러냄으로써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수고해서 꽃밭을 가꾼다고 할 때, 먼저 꽃을 어떻게 심을 것인지 꽃의 종류를 선택하고 나무의 수종을 선정하고 색깔별, 키별로 잘 맞춰서 꽃밭을 조성했습니다. 물을 주어서 아주 잘 자랍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왜 행복합니까? 여러분 자신도 아닌데 말입니다. 이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들이지만 여러분이 작품을 만들듯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들을 모아서 무엇인가를 구현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잘 자랍니다. 그러면 너무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누가 와서 그 꽃밭을 밟고 지나갔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마음이 상하겠습니까?
마치 예술작품처럼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로 하여금 망가진 세상을 고쳐서 사람답게 살아가고 그분의 창조의 목적에 따라 살게 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입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백성들은 참 복이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감찰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을 뚫어지도록 쳐다보시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한 가지는 복주시기 위해서,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이 당신의 공의를 따라 심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감찰하심은 그들에게 복주시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고 은혜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복입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의 시선을 받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악인은 이런 시선 받음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 자체가 말할 수 없는 고통이고 두려움이고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뜻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시선을 받는 것 자체가 커다란 행복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다고 할 때 그 사람의 시선을 받는 것 자체가 행복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행복해 하고 기뻐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의 시선은 곧 사랑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그분의 시선 앞에서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면전 앞에서 사는 인간의 행복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주는 쾌락, 자기 마음대로 자행자죄하며 사는 빗나간 자유가 주는 행복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행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그의 기업이 되고 그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그분의 눈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행복을 하나님 바깥에서 얻으려고 할 때 거기에서 인간의 모든 불행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점령된 마음
그러면서 하나님이 인간 일반의 마음을 지으셨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빼신바 된 백성들의 마음도 그분께서 지으셨습니다. 그 마음의 원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마음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말과 같습니다. 사탄이 올라타면 미친 듯이 날뛰지만 하나님은 그 말을 잘 몰 수 있는 익숙한 기수이십니다. 하나님이 마음의 말을 타시면 말은 기수의 말에 순응하며 말과 기수가 하나 되어 달려갑니다.” 말과 기수를 보십시오. 기수는 몸무게가 45kg이하여야 합니다. 그 기수가 말을 타고 달릴 때 보면 편안하게 앉아서 달리는 것이 아니라 말에 탁 붙습니다. 말이 뛰는 것에 따라서 기수도 함께 따라 뛰고 몸을 움직이면서 말이 몸의 일부가 되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려갑니다. 그것이 말을 잘 알고 있는 기수입니다. 말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기수의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멈추게 할 수도 있고 달려가게 할 수도 있고 좌우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이 기수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마음은 하나님에 의해 점령된 마음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마음이 점령되지 않으려고 하는 독립적인 정신 때문입니다. 독립적인 정신은 아주 패역한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 때 우리는 자신을 비워 하나님을 향해 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충만히 계시고 은혜를 내리시도록 하나님을 향해 우리 자신을 개방하고 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독립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 때 그 마음에는 평강과 기쁨, 평화, 사랑, 이런 것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혼란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내가 하나님께 돌아갈 때까지는 내 마음에 평안이 없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디에도 그런 평화와 행복은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 자체가 영혼의 작용입니다. 영혼 자체의 고향이 하나님의 품입니다. 그 품으로 돌아갔을 때 인간은 가장 행복을 느끼게 되고 그것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 인간의 마음은 모순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품을 파고들기를 원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집요하게 하나님을 떠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두마음이 인간 안에서 함께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품안에서만 가능한 행복을 하나님 품 밖에서 찾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모든 모순과 갈등, 시련, 범죄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의 모든 것을 그에게 주셔서 왕과 황제보다 뛰어난 지위를 누리게 하신다고 할지라도 인간이 하나님을 저절로 찬양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는 그 마음이 하나님에 의해 지배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부요한 모든 것을 주시지 않고 고난과 핍박을 받아도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시련과 역경을 만나도 주님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원리이고 인생의 이치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복을 그 마음이 하나님에 의해 점령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감찰하시는 데에 인생의 행복을 두면서 살아갈 때 역경과 시련, 고난과 어려움 속에 있어도 하나님을 늘 찬송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는 하나님이 세상을 통째로 주셔도 그분을 찬송할 수가 없습니다. 시인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영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 도다
구원함에 말은 헛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 도다
영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시에 살게 하시는도다”(시 33:16-19)
본문해설
한 나라의 힘은 그 나라의 백성의 수와 군대의 크기에 달려있습니다. 고대 국가에서는 이것이 더욱 정확한 사실이었습니다. 잠언에 보면 백성이 많은 것은 왕의 영광이요 백성이 적은 것은 주권자의 수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셨는데 세상에 있는 나라가 끊임없이 다른 나라를 정복하고 다른 나라를 자기 나라에 복속시키는 시도들은 백성들의 수를 늘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정복을 위한 전쟁을 하거나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을 때 침략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는 최고의 방법은 자기들을 지켜줄 수 있는 군인들을 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강력하고 큰 군대를 가진 나라의 왕은 다른 나라를 향해서 큰소리를 칠 수 있었고, 다른 나라의 공격이나 전쟁에도 자신을 충분히 지킬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동북아의 질서를 보면 각 나라마다 자신의 군대를 강하게 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돈을 부어가며 군대의 무기 체계를 현대적으로 개선합니다. 북한은 그런 것을 따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어마어마한 돈이 들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비행기 한 대에 천오백억 달러, 부속품까지 사려면 삼천 억을 달라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북한에선 이런 것들을 다 할 수가 없으니까 핵이라도 만들어서 협박을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절박한 것이 국가의 안보라는 것입니다.
나라의 승리는 하나님께 있음
오늘 성경은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라고 말합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는 나라의 흥망성쇠가 군대의 크기에 달린 것 같지만, 하나님이 지도상에서 나라를 지워 버리려고 마음을 먹으면, 그 모든 것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많은 군대를 가지고 있어도 패배한 나라가 많이 있습니다. 중국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한번 동원하면 몇 십만 백만 명의 군대를 동원 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나라였지만 그런 나라가 군대를 동원해서 아주 작은 나라인 우리나라를 공격해서 망했던 경우는 많이 있습니다. 수나라도 백만 대군으로 우리나라를 공격하다가 결국은 망하지 않습니까? 뿐만이 아닙니다. 미국이 독립전쟁을 할 때 프랑스는 군대를 파병하고 나서 왕정이 무너지게 됩니다. 역사를 보면 이런 실례들이 아주 많이 일어납니다. 군대가 많다고 하더라도 그 군대가 왕을 구원하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자신이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힘을 의지하거나 믿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군대와 능력, 이런 것들을 믿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은 그분을 깊이 의지하고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내게 많은 군대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은 군대가 아니라 자신에게 승리를 주시고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것이 옳게 여깁니다.
영혼을 건지시는 하나님
본문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은 군대의 수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말하면서 우리의 영혼에 관한 이야기로 이끕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자의 영혼을 구원하시고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환란과 어려움, 커다란 전쟁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면서 시인은 그런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을 고통에서도 건지실수 있을 것이라는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영혼의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이 건져주신 놀라운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것이 육체가 환란을 당했을 때 거기에서 헤어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배가 고파서 예수를 믿었습니까? 아니면 죽을병에 걸려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육체적인 환란과 어려움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은 영혼의 고통입니다. 육체적인 어려움은 우리가 비록 하나님이 아니지만 이 세상의 자원을 가지고 있으면 어느 정도는 우리의 육체를 구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혼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육체의 주인은 영혼이고 영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에게 무엇인가를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잇대어 살아가는 삶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매 순간 우리의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러한 진리를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라
영혼이 곤고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입니까? 영혼이 곤고하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전에는 영혼의 행복과 즐거움을 누릴 수 없습니다. 육체가 좋아하는 이 세상의 즐거움과 쾌락들은 우리의 영혼의 무게가 되어서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날아오르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그래서 매순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특별한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로 오는 진리의 말씀을 먹어야만 영혼이 건강 할 수 있고 영혼다울 수 있는 것입니다.
육체를 위해 우리가 배려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늘 먹여주고 씻겨줍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일생전체가 우리의 육체를 섬기는 일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땀 흘리고 애쓰면서 일하는 것이 무엇을 위하는 것입니까? 가족의 영혼을 위한 것입니까? 자신의 영혼을 위한 것입니까? 인류의 영혼을 위한 것입니까? 자신의 육신을 돌보기 위한 제화들을 얻고 미래의 궁핍에 대비하기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좋은 것들을 공급해 줌으로써 육체가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합니까? 우리는 영혼을 돌보는 일에 대해서는 아주 게으릅니다. 영혼이 하나님을 좇아가는 기도의 생활을 게을리 하고, 영혼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말씀생활을 게을리 하고, 자신의 육체만을 열심히 섬깁니다. 그 때 자신의 영혼이 깊은 고통과 곤고함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의 힘으로는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의 구원과 도우심을 갈망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된 사람입니다.
영혼이 곤고할수록 영혼을 돌보고 영혼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호소하야 하지만 은혜가 떨어지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살려달라고 외치는 것은 영혼인데 육체를 먹이고 입히기만 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영혼의 곤고함을 육체를 개선함으로써 해결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곤고함과 어려움이 계속해서 밀려오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의지함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저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우리 마음이 저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 성호를 의지한 연고로다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시 33:20-22)
참된 즐거움
이 시의 결론입니다. 시인에게는 많은 역경과 어려움, 시련과 고통이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내 영혼은 즐겁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즐거움은 세상에 있는 물질이나 권력을 통해 받는 종류의 즐거움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마음이 저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 성호를 의지한 연고로다” 시인이 노래하는 즐거움은 하나님 자신에게로부터 오는 영혼의 즐거움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맞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 안에 참된 즐거움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어떤 태도와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다른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같은 자리에 있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악하게 살아가고 한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은 영혼의 기쁨을 경험하지만, 악한 사람은 엄격하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시간도 같고 장소도 거의 같은데 하나님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경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즐거움
시인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인해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속에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신다는 고백을 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들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아름다움을 나타내게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들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창조된 후에도 하나님이 그것들을 붙들고 계심으로써 그 만물이 창조의 계획을 따라 세상에 존재하고 작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는 그런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창조하셨습니다. 당신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만물들을 창조하고 세상을 다스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인간에게도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아름다움이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만큼 인간은 추하게 보이는 법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바라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더 깊이 있게 알려주십니다. 거기에 모든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는 때는 자신을 의지하지 않을 때입니다. 자기 의라는 것은 자신이 행한 일을 하나님 앞에 아주 가치 있는 것으로 내세우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존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순간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보이시는데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고, 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참된 신앙생활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 의해 이 세상에 창조된 피조물들의 본분입니다.
세상 모든 만물의 존재의 의미는 하나님을 의지함에 있고 인간도 그렇게 창조된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 흙과 돌과 풀과 물과 바람과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위에 살아가는 짐승과 육축,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더 의지할 수도 없고 덜 의지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덧입히시는 대로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자기 육체를 잘 돌보면 수명도 길어지고 내구연한이 오래가기는 하지만 그것도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이 있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덧입히시는 한도 내에서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다릅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을 더 의지할 수도 있고 덜 의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자유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육체는 이 땅에 있지만 영혼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어서 하나님과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의 중간쯤에 위치해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자기가 다만 바람이요 흙일뿐임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에 즐거움을 주십니다.
인간의 모든 비극은 하나님께로부터 독립하려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의 모상이 인간 안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우리가 자식을 낳으면 자식이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를 의지하게 됩니다. 부모에게서 인생을 배우고 사랑과 믿음을 따라 사는 인간의 도리를 배우게 됩니다. 만약에 어린 아이가 태어났지만 의지할 부모가 없다든지, 부모의 행실과 모든 것이 의지할 만하지 못해서 어려서부터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며 자기를 돌보아야 되면 심성이 굽게 됩니다. 생활력이 강할지는 모르지만 심성이 굽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데 굉장히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 특히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살게 되면, 하나님 아버지를 의뢰하는 것은 굉장히 쉬워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버지에 대한 인상이 없습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이 자신에게는 상처와 고통이 되고, 육신의 아버지를 의지하던 경험이 없을 때 하나님을 신뢰하기는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가정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가정의 참다운 회복 없이는 교회가 참 교회로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부모를 의지하는 것을 배우면서 참 사람으로 자라가듯이 하나님의 자녀들도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영혼의 기쁨과 즐거움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인자를 베푸소서˛
그러면서 시인은 마지막으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인자’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가치 없는 인간들을 향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슬픔이 담긴 넘치는 사랑입니다. 슬픔이라는 것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사랑을 베풀어 달라고 하나님 앞에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전 존재를 하나님께 의탁하고 그분을 의지하는 존재임을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 앞에서 살아가는 삶,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삶입니다. 자기를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복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들을 사랑하시고 특별히 자기를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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