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34
목 차
곤고한 자가 찬송을 들을 때(시 34:1-2) 55
회상의 능력(시 34:3-6) 59
선하심을 맛보라(시 34:7-8) 63
경외함과 만족(시 34:9-11) 67
복 받기를 사모한다면(시 34:12-15) 71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심(시 34:16-18) 74
악이 악인을 죽임(시 34:19-21) 77
영혼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시 34:22) 80
시편56편 강해 1
시편34편 강해 1
시편34편 강해 1
시편34편 강해 1
시편34편 강해 1
시편34편 강해 1
시편34편 강해 1
시편34편 강해 1
시편34편 강해 1
곤고한 자가 찬송을 들을 때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시 34:1-2)
본문해설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낯을 피해서 도망을 갔을 때 가드라는 곳으로 가는데, 그 나라의 왕이 아비멜렉이었습니다. 아비멜렉이 다윗을 중요한 인물로 알고 그를 찾아냈는데 다윗은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 지혜를 발휘하여 미친 척합니다. 수염에 침을 바르고 미친 척 하니까 아비멜렉이 “대단한 인물을 찾는 줄 알았는데 미친 녀석을 찾는구나.” 그리고 다윗을 풀어줍니다. 거기에서 도망 나왔을 때 지은 시가 바로 이 시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수치스러운 일을 당했는데도 그의 고백은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라고 합니다.
마음의 방향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을 찬송하지 못하는 이유를 인생의 어려움과 환란, 궁핍, 시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형통해도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제목을 찾아내지 못할 수도 있고, 커다란 어려움을 당하면서 인생을 살아도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제목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뜻을 어느 방향으로 세우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뜻을 어느 방향으로 세우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우리 밖에 있는 많은 사물에 대한 생각, 인상이 찍히는 곳입니다. 이 마음은 엄밀하게 말하면 육체와 영혼 사이에 있는 막과 같은 것입니다. 육체를 통해서 지각된 눈으로 본 영상, 코로 맡은 냄새, 입으로 알게 된 맛, 귀로 듣게 된 소리, 피부로 접촉하게 된 감각, 이런 것들이 우리의 마음에 전해집니다. 그때 마음은 그렇게 전해지는 것들을 통해서 ‘이게 무엇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전해질 때 좋아지고 싫어하는 경향들을 마음 안에 갖게 됩니다. 마음의 방향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해석된 것들이 한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마치 책상을 비스듬히 놓고 여러 가지 그릇을 올려놓으면 어느 그릇을 올려놓든지 간에 비스듬하게 되어 있는 쪽으로 그릇이 쏠리듯이 우리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기분이 나쁘면 평소에 괜찮아 보이는 남의 행동도 기분이 나빠 보입니다. 마음이 즐겁고 행복하면 옛날 같으면 못 참았을 행동인데 이상하게 그것도 다 고와보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경향입니다. 마음의 경향이 비뚤어진 사람은 인생을 살기가 참 힘이 듭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넉넉히 이해되는 것들이 이 사람에게는 비뚤게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성향이 있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우리가 마음을 먹는 것에 따라서 그것들이 일시적으로 정해지기도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계속 닥치는데 ‘그래도 감사한 게 너무나 많잖아. 감사해야지.’ 이렇게 마음을 먹으면 마음을 먹기 전까지 힘들어 보이던 것들이 괜찮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자의 의무입니다.
고난 속에서 감사함을 깨달음
다윗은 인생의 가장 어려운 때에 뜻을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노래하고 찬송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것이 다윗의 마음속에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었습니다. “인생의 가장 곤고하고 어려울 때 나는 하나님께 찬송할 것이며 내 입술은 찬송을 쉬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노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대적의 손에서 건져주셨다는 찬송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고통스럽고 어려운 상황이었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목숨까지도 적들의 수중에 떨어질 위기에 있었지만, 큰 위기와 어려움을 통해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송축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 같지만 이쪽에서 보면 하나님이 목숨을 건져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사실 모든 것을 건져주신 것입니다. 살아있지 않다면 소유가 무슨 의미가 있겠고 지위가 높아지는 영광이 무슨 뜻이 있겠습니까? 제일 안타까워 보이는 것이 죽은 사람의 계급을 올려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족들에게 위로가 되겠습니까? 다윗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희망 없이 빼앗긴 것 같지만 다시 한 번 돌아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찬송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인이 하나님 앞에 노래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우리도 항상 무엇인가 많은 고난을 당하는 것 같을 때 저쪽에서 보면 그렇지만 반대쪽에서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면서 찬송이 나옵니다. 먹이고 입히고 기르시고 은혜를 주시고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시고도 후회하지 않으시고 매 순간 붙들고 계시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곤고한 자가 소망을 가짐
2절에서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왜 곤고한 사람이 다윗의 찬송을 듣고 기뻐할까요? ‘나는 할 수 없다. 이제는 희망이 없다. 나는 버림받았다. 이제는 절망이다.’라고 생각하던 사람들도 다윗을 보면서 ‘내가 아무리 환란이 많고 고난이 많아도 이 사람 같을까? 하나님이 이 사람도 저 큰 시련과 어려움에서 구원해주셨다면 나에게도 희망이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의 여망입니다.
‘키에르케고르’라는 철학자는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 절망이라고 했습니다. 절망은 모든 희망이 끊어진 상태이고 하나님이 부인된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한 거기에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절망의 감정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한 감정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버린 감정입니다.
신자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놓지 말아야할 두 가지 확신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사실과 하나님은 말씀으로 나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환란과 어려움이 올수록 세상 사람들은 상황과 씨름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진리를 알고 싶어 합니다. 큰 환란과 어려움 속에서 진리를 붙들면서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으로 주님을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회상의 능력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시 34:3-6)
하나님을 찬양하자
시편을 보면 사람들을 하나님을 향한 경배로 초청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함께 경배하자고 많은 사람들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기도하자고 초청하거나 찬송하자고 초청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기도에 초청하는 것이 어떤 사실들을 보여 주느냐 하면, 나 하나만 하나님을 잘 믿고 예배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뿐만 아니라 나의 이웃, 심지어는 나의 원수들까지도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 하나님을 향한 신앙 같은 것들이 진실로 올바르다면 자기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마음이 다른 사람 안에도 있기를 바라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참된 경배의 마음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좋은 물건 하나를 사서 만족해도 사람들에게 많이 권하는데 하물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해서 그것 때문에 행복해질 수 있었던 사람이면 누구든지 자신 안에 이루어진 일과 똑같은 일이 자신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루어지기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시인은 “함께 그 이름을 높이자.”라고 초청하는 것입니다. “아직 너희의 마음의 눈이 어두워서 못 보기 때문에 그렇지 마음의 눈에 떠진다면 주님의 이름을 높이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참으로 크고 높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세계 곳곳에 있고 우리의 삶 속에 있는데 모르는구나.” 그러면서 그들을 설득하고 경배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예수를 오래 믿은 사람이나 교역자, 권사님, 장로님이 도맡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신자도 아닙니다. 그러면 누가 하는가?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 마음속에 지금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이 살아있는 사람이 합니다. 오늘 예수 믿은 사람이든, 오래 전부터 예수 믿은 사람이든 상관없습니다. 몇 년 동안 한 번도 전도하지 않았던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자기 안에 감격이 있으니까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함께 하나님을 높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지금 그것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혹시 그들이 자신의 말을 신뢰하지 않을까봐 어려움 속에 있었던 사람들의 예를 듭니다.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광채’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얼굴빛이라고 묘사되기도 하는데 하나님은 사람의 형체를 갖고 계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얼굴과 손발이 있다는 것은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람의 영광은 얼굴에 있다는 것입니다. 권세 있는 사람이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똑바로 쳐다볼 때 두려움을 주게 되고, 권세 있는 사람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얼굴빛을 비춰줄 때 그것은 특별히 은혜를 베풀겠다는 호의의 표현입니다. 왕 앞에 나아와 엎드려 어쩔 줄 모르는 사람에게 “그대는 얼굴을 들고 나를 보라.”라고 한다면 그것은 은총을 베풀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얼굴빛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간증거리로 사용됩니다. “어려움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앙망했더니 하나님께서 은총의 얼굴빛을 비추어 주셨다. 그러므로 너희에게도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러니 하나님은 얼마나 좋으신 분이냐? 우리 함께 그분의 이름을 높이자.”
두 번째는 자신이 간증하기를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라고 합니다. 시인이 이것을 하나님 앞에 경험했던 것입니다. 주님을 만났고 어려움에서 구출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험한 일입니다. 이것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을 광대하시다고 부르고 많은 이웃들을 불러 “우리 함께 하나님을 높이자.”라고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구원으로 삼으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삶,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입니다.
회상의 힘
하나님께서는 매순간 당신이 우리의 도움이시며 환란의 날에 우리를 건져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시편에 보면 “환란의 날에 찬송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떻게 환란의 날에 찬송을 할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환란의 날에 회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보다 더 큰 시련에서 구해주셨던 옛날의 일들을 찬송합니다. 그러면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마음과 경배의 정신이 솟아납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자기 민족을 건져 주신 것, 홍해를 건너게 하신 것,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신 것 모두 그들에게 있어서 회상의 제목이 됩니다. 눈앞에 환란과 시련이 있어서 내 힘으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 느껴질 때 회상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보다 더 큰 환란 속에서 나를 구원하신 것을 생각하며 그분의 능력을 기억하면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큰 시련을 만나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수많은 원수들에게 에워싸일 때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다루셨는지 깊이 회상하는 것입니다.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
나 피곤치 아니하며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손으로 덮으시네
인생의 가장 곤고한 날에 나를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능력에 대한 회상이 믿음을 불러 일으켰다면 사람에 대한 회상은 하나님을 기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분의 손을 꼭 붙들게 됩니다. 이것이 회상의 능력입니다.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지만 바라는 것의 실상, 보이는 것들의 증거를 꼭 붙들고 걸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고의 불행은 기껏 해야 죽음인데 우리에게 있어 죽음은 생명으로 건너는 강입니다. 그러니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것 없이 주님을 꼭 붙들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늘 맑고 밝은 날만 있겠어요?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
빛으로 손잡고 나를 인도하소서
그렇게 살아서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과 동행하고, 기쁨 속에서도 주님과 동행하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선하심을 맛보라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7-8)
경외하는 자들을 건지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분의 뜻을 전달하고 그들을 보호하고 지키시기 위해서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당신의 도움을 천사들을 통해서 베풀어주십니다. 때로는 당신의 자녀들이 원수들에게 에워싸여서 죽음의 위협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보내어 그들을 보호하기도 하십니다.
여러분은 엘리야 선지자가 도단성에서 경험한 일을 기억할 것입니다. 수많은 적군들이 도단성을 에워쌌습니다. 게하시라는 종이 일어나 절망적인 목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아, 주인이여, 우리는 이제 망하게 되었습니다. 어마어마한 군대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때 선지자는 기도하여 그의 눈을 뜨게 해주었습니다. 영의 눈이 뜨이자 그는 성을 에워싸고 있는 적군보다 훨씬 더 많은 하늘의 군대가 그들 뒤에서 에워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시는 방법입니다.
본문에는 원수들을 둘러 진을 치고 있는 하나님의 사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도움을 늘 경험한다면 패배할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의 삶에서 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본문은 그것에 대한 답을 줍니다. 하나님은 어찌하든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모든 것들을 이기도록 이끄시고 도우십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어 세상에서 늘 승리하는 삶을 살고 싶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라기서에는 영적으로 육적으로 병들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지자가 외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치료하는 하나님의 광선이 떠올라 하나님의 의로운 태양이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빛입니다. 거기에는 그렇게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모든 치료하는 힘, 고치는 놀라운 능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여기에서도 원수들에게 에워싸고 있을 때 그들을 둘러 진 치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경외하는 자에게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할 때에만 위기에서 보호하시고 악한 자들의 위협에서 지키시는 것일까?” 이런 질문이 제기됩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있고,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모든 세계를 움직이는 것이 최고의 선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바꾸시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한 방향으로 계속 흐르는 급한 물과 같습니다. 그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은 그 물결을 타게 되지만 그것을 거슬러서 살면 물결의 저항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한 원리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본인이 가는대로 가면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불쌍하게 여겨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돌이켜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살지 않으면 인간은 고통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본인의 입으로 아무리 하나님을 찬송하며 아부해도 하나님을 등진 인간은 고통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등진 사람이 고통을 당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부모가 반듯하고 인간은 왜 사는지에 대한 뚜렷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수록 자녀들이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려고 할 때 부모는 불편한 존재가 됩니다. 부모가 줏대가 없어서 자식이 투정을 부리면 아부를 하거나 이리저리 흔들리면 자식들이 마음대로 하기가 편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버지가 아니십니다.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 분명하고 인간을 어느 방향으로 데려가야 되겠다는 의지도 너무나 분명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을 거스르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어미를 보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거스르는 인간이 고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면서 살아야할 이유입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하나님을 향하여 삶을 돌이키고 마음의 방향을 바꾸기 전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풍부히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선하심을 맛보라
그래서 본문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날마다 주님을 경험하고 그 사랑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뜻을 보이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각을 알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요 생각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은 당신의 놀라운 능력을 이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보여주셔서 믿고 따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삶의 방향을 갖고 있지 않으면서 복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소원이 얼마나 헛된지를 보여줍니다. 삶의 방향이 하나님을 거스르고 있는데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시면 그 자원을 가지고 하나님을 더욱 거스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자원을 빼앗으십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을 해서 밥을 먹고 사느냐가 아닙니다. 얼마나 높은 지식을 쌓아서 인생을 사느냐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방향이 어디로 가는 것인가 입니다. 가려고 하는 방향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끊임없이 경험합니다. 강물을 따라 같은 방향으로 배를 저어 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빨리 흐르는 강물은 고마운 것입니다. 그러나 강을 거슬러 건너고자 하는 사람에게 빨리 흐르는 강물은 괴로운 것입니다. 강을 직선으로 건너려고 하면 물살이 빠르기 때문에 결국은 저 아래지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서 밥을 먹고 살고,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봉사하며 사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경험이 있습니다.
경외함과 만족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시 34:9-11)
경외하는 자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본문은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찾는다’라는 말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추구한다는 뜻입니다. 지성으로는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고,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 하고, 삶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어 하는 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삶을 살고 그러한 생활을 이어가는 사람들은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 자체가 창조의 목적을 따라 모든 세계와 백성과 세상을 다스리고 이끄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것과 일치하게 되면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십니다. 큰 힘으로 내려가는 물을 잘 타기만 하면 빠른 속도로 내려갈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큰 자비와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만들어주십니다.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크신 계획을 거슬러 사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도록 주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한다고 해도 하나님 안에 있지 않으면 그 욕망은 무저갱과 같아서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면 원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구하고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뤄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목적으로 삼으시고 이 땅을 인도하십니다. 경외하는 사람의 기도와 삶의 목표가 하나님이 이 땅을 창조하신 목표와 계획에 들어맞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삶을 기쁘게 인도하시고, 그런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힘을 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참된 만족
시인은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합니다. 사자는 모든 짐승의 으뜸입니다. 사자는 얼마나 클까요? 그 무게가 거의 소 한 마리에 해당합니다. 생김새가 날씬해서 그렇지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게다가 젊은 사자입니다. 젊은 사자라는 말 자체가 힘의 상징입니다. 민첩하고 빠르고 목표한 사냥감을 공격해서 그것들을 잡아먹는데 탁월한 수완과 재능을 가졌습니다. 그런 능력이 있는 존재라 하더라도 실제적로 사냥감을 만나지 못한다면 주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사자와 같지 않고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당신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고 공급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다른 말로 표현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고마워서 주시는 거래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하고 의지하는 것들이 거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내 힘으로 나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의지해서 행복하게 잘 살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 자신의 행복이라는 삶의 방향을 바꾸라.”라고 하십니다. 결국 인간은 행복을 찾아서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마음에 그런 필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깊이 변화를 받으면 그 행복을 하나님 안에서 찾게 되는데 문제는 교회를 다녀도 변화되지 않으면 그 행복을 하나님 바깥에서 찾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바깥에서 행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하니까 자신의 행복을 하나님 바깥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나를 하나님께 바치고, 그분을 의지하고, 복 주시는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주변 것들이고,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싶은 마음의 방향을 바꾸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거래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엄청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삶의 방향을 당신을 향해 바꾸지 않는 사람들의 손에 들린 예물은 하나님께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그렇게 기뻐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들이 남겨서 온 재산 때문이었습니까? ‘아, 이제 아들 하나가 왔구나. 품꾼하나 덜 써도 되겠다.’ 이런 것 때문에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한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한 것은 그가 자신의 아들이고 바르지 못한 삶의 방향을 바꾸어 올바른 삶의 방향으로 전환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목적이나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자
젊은 사자는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키시기 때문에 그분이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를 경험하고 나서 사람들을 부릅니다.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하고 불러내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만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며 사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함께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 갈망이 내 안에서 끊임없이 생겨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매순간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중심점을 가지고 있으면 인생을 사는 것이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셨고, 나 같은 인간을 만드셨으며, 나 같은 타락한 인간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해주셨다. 그래서 내 인생은 이제 주님의 것이고 내 모든 행복은 하나님 안에 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끊임없이 의지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늘 하나님 붙들고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행복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중심점을 놓치고 나면 삶이 복잡해집니다.
결론과 적용
사람들은 자기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애를 쓰는데 하나님 바깥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사실 하나님 바깥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 바깥’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을 거스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묘하게도 자기의 행복을 위해 애쓰면 애쓸수록 더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고 그분의 뜻대로 순종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매순간 주님을 의지하며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찾으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영혼으로나 육체로나 결코 주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힘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복 받기를 사모한다면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 지어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시 34:12-15)
본문해설
구약시대에는 아직 천국에 대한 충분한 계시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죽고 나면 그 다음에 이르게 되는 천국에 대해 충분한 계시가 주어지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 이후의 삶은 현세의 삶보다 행복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다분히 현세적인 신앙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욥이나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에 대한 탁월한 인식을 가졌던 사람들은 성도들이 죽은 후에도 하나님을 보는 행복을 누릴 것이고 육체의 껍질을 깨고 다시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놀라운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내세에 대한 깊은 소망이 사라지게 되면 삶 자체가 굉장히 현세적이 됩니다. 그 때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 두 가지는 이 땅에서 무병장수 하는 것과 사는 날 동안에 부족한 것이 없이 넉넉하게 복되게 사는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을 따를 때
본문은 말합니다.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사실은 “누구냐?”라고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원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장수하고 복을 받기 위해 스스로 자기를 사랑하고 보호하고 공급합니다. 그것이 모자라면 다른 사람의 자원을 빼앗아서라도 공급받으면서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그 생명을 이 땅에서 얼마나 연장할지도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생명을 연장하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날들 안에서 모든 것을 누리며 복 받고 사는 것도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누리며 살고, 더 나아가 공급해주시는 자원을 가지고 복 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세계를 지으시고 당신이 지으신 목적에 맞게끔 이 세계를 사용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계를 당신의 마음에 맞게끔 목적을 따라 움직이십니다. 악을 행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과 어긋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과 어긋나는 삶을 살게 되면 그것은 복된 삶일 수가 없습니다. 창조의 목적을 거스르면서 살면 두 의지가 충돌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포함한 모든 세계를 창조의 목적대로 가게 하시려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반대의 삶을 살고자 합니다. 두 개의 힘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작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힘이 더 강하겠습니까? 일시적으로 보면 사람의 힘이 강한 것처럼 보이나 하나님의 힘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방향으로 세계와 인간을 데려가려고 하십니다. 그러면 결국 그 힘에 의해 인간이 떠밀려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게 되는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거스르는 자들은 악을 행하는 자들로 여기시고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을 반역하고 악을 행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 멸망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그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당신의 놀라운 뜻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역으로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방향으로 가고자 하시는 그분의 의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얼굴빛을 비추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감찰하신다고 말합니다. 악인은 심판하기 위해 감찰하시고 의인은 복 주시기 위해 감찰하십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얼굴빛’,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비취는 찬란한 영광의 빛이 백성들에게 비칩니다. 악인은 그 빛을 보고 두려워 떨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그분의 백성들은 그 얼굴빛에서 힘을 얻게 됩니다. 골로새서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의 힘으로 강건하여진다”라고 합니다.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분이신지를 발견하게 될 때 우리에게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애쓸 때 하나님께서는 크고 놀라운 능력과 힘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심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6-18)
하나님이 얼굴을 대면하실 때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여 얼굴을 대면하실 때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사랑스러울 때 그의 얼굴을 주목하여 그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큰 자비와 능력의 영광입니다. 또 하나는 악을 행했을 때에 악한 자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얼굴을 대면하십니다. 이것은 그를 향한 최고의 진노의 표현입니다. 악을 행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선하신 증거라고 한다면, 악한 사람을 향해 진노하시고 징벌하시는 것을 경험함으로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영광스러운 분이라는 것을 입증하게 됩니다.
우리가 실제로 강을 건너보기 전에는 흐르는 물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모릅니다. 강을 거슬러 보려고 할 때 그 강의 힘이 대단히 크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모든 인간을 통치하고 다스리시면서 당신의 뜻대로 강력하게 세계와 역사, 개개인의 영혼을 움직이고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거슬러 사는 사람들에게 고난을 당하게 하시고 심판하심으로써 창조의 목적을 향해 이 모든 세상과 개인의 삶을 이끌어 가려고 하시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선하신 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악인, 혹은 의인의 얼굴을 대면하여 주목하시는 것도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롭게 살면 하나님이 우리를 돌아보시지 않는다고 염려할 필요도 없고, 우리가 악하게 하나님을 거슬러 살면 우리가 안전하다고 스스로 자긍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심
시인은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한 마디 말을 보탭니다. 여호와는 아주 멀리 계셔서 우리를 직접 도우시기에는 너무 높이 계시는 분으로 여겨지지만, 하나님은 언제든지 가까이 계셔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확신을 피력합니다. 그것은 마음의 상태의 어떠함에 따라 하나님이 그들을 대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말하기를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사람에게 가까이 하십니다. 여기에서 ‘마음이 상했다.’라는 말의 의미는 ‘마음이 쪼개졌다.’라는 의미입니다. 질그릇 같은 것이 깨뜨려져서 부서졌다는 히브리어의 의미입니다. 성경에 보면 ‘부서진 마음’, ‘조각난 마음’ 이렇게 되어있는데 그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십니다. 하나님보시기에 쪼개진 마음이 좋다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원래는 좋은 마음이었는데 그것이 찢어졌으면 하나님 보시기에 나쁘게 된 것일 것입니다. 여기에서 ‘쪼개졌다’, ‘깨뜨려졌다’라는 것은 전에 가지고 있었던 마음이 좋은 마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는데 방해가 되는 마음들이 부서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을 때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다가 그런 것들이 부서져버리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십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으신 분이시지만 우리의 마음의 상태의 어떠함에 따라 하나님이 매우 가까이 계시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멀리 계시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상한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이 훨씬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통회하는 자를 가까이 하심
두 번째는 이 마음에서 훨씬 발전된 마음입니다. “중심에 통회하는 자에게”, ‘중심’은 마음인데, ‘중심에 통회한다.’라는 것은 히브리어로 밟아 짓이겨진 마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상처를 심하게 입으면 살갗이 터지고 세포가 파괴되어 고통스럽습니다. 원래 있던 것들이 모두 짓이겨져 버렸으니까 바람만 불어도 아프게 됩니다. 마음이 그렇게 된 사람들을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마음이 그렇게 될 때까지 내버려두시는 것입니까? 이렇게 되면 가던 삶의 방향과 길에서 철저하게 돌이키고 하나님을 향해서 돌아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해 내십니다. 우리가 예전에 그릇된 길을 걸어가고 마음에 악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마음이 깊이 상하고 중심이 통회하게 되면 다시 하나님과 가까워 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에게 돌아오는 죄인들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악이 악인을 죽임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시34:19-21)
본문해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산다고 해서 고난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자연의 세계가 서로서로 놀랍게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인간들의 도덕의 세계도 정교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가을이면 낙엽이 다 떨어져서 열매까지 모두 맺고 나면 나무들이 옷을 벗습니다. 우리들이 보기에는 흡사 죽은 것 같습니다. 늦가을의 나무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초봄에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날 때 느끼는 감정과는 정반대의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초봄에 물이 올라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날 때 그것이 생명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가을의 그것은 죽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봄보다는 가을의 떨어지는 낙엽과 시드는 풀을 보면서 삶의 허무함을 느낍니다. 낙엽들은 온 산에 두루 떨어져서 산을 비옥하게 하고, 거기에서 많은 다른 식물들이 자라나게 하고 벌레들이 살게 하고 벌레들은 곤충과 짐승들이 깃들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의인은 고난을 받지만
우리 인생도 보면, 의인도 고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한 사람을 놓고 볼 때는 모순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악을 행하는 죄인을 향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그것이 또한 질서입니다. 우리도 악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의롭고 올바른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우리들에게는 끊임없는 고통인 것입니다. 모순되어 보이는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서 질서를 연출해 내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런 사실들을 깨닫고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의인에게 고난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뼈가 꺾인다.’라는 것은 사람을 처형할 때 확인사살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완전히 죽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인은 고난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아주 파멸에 이르기까지는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악이 악인을 죽임
본문에 보면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사람이 누군가에게 악을 행하면 힘없는 의로운 사람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의로운 사람이 피해자이고 그가 악을 당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모든 관점을 우리의 외면적인 삶에 한정했을 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이 누군가를 향해서 악을 행하면 겉으로 보기에는 이 사람이 가해자고 저 사람이 피해자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전체를 보게 되면 힘이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의 영혼과 마음에 그가 밖으로 행한 것보다 더 사악한 것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큰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돈을 훔쳤습니다. 가해자는 도둑질한 사람이고 피해자는 도둑맞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 번의 도둑질을 통해서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도둑질을 하고자 하는 강한 성향이 심겨지게 됩니다. 한 번 성공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남의 돈을 부당하게 빼앗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누군가가 그에게 도둑질을 강요하지 않아도 이 사람에게는 그런 것을 하고자 하는 내적인 필연성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악이 악인을 죽이는 모습입니다. 결국 악인은 누가 그를 파괴한 사람이 없어도 자신 안에 있는 악 때문에 영혼과 마음의 생명과 사랑을 상실하고 스스로 소멸하여 죽어가는 것입니다.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마치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같이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악인입니다. 의인은 돕는 자가 없는 것 같아도 번성하나 악인은 스스로 힘이 있는 것 같아도 자기 자신 안에 생명과 사랑이 소멸됨으로 말라가는 것이고, 그것은 파멸로 이르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그러므로 우리는 매순간 죄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나에게 어떤 악을 행할 수 있는 힘과 자원이 있을 때도 그 악이 결국은 나 자신을 파괴시킬 것이라는 두려운 결과를 직시하면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악인으로 말미암아 그런 어려움을 당할 때도 항상 마음 깊은 곳에서 악을 행하는 사람의 비참한 말로를 믿고 그를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지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잠시는 모순인 것 같고 부조리인 것 같고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는 것 같지만, 믿음으로 살면 결국에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와 사랑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면서 사는 사람들을 건져주십니다.
영혼을 구속하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 저에게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시 34:22)
영혼과 육체를 소유한 인간
영혼과 육체가 만나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됩니다. 영혼만 있어도 인간이 아니고 육체만 있으면 더더욱 인간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죽어있는 시체를 향하여 인간의 의무를 다하라고 명령하지 않고, 육체가 사라지고 영혼만 남은 존재를 향하여 인생의 기쁨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습니다. 영혼과 육체가 함께 만나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된다는 점에서 영혼도 육체도 모두 소중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하나님이셨고 마지막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도 하나님이셨습니다. 부활하고 하늘에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의 몸은 지상에 계셨을 때의 몸과는 다른 몸으로서 공간을 넘나드실 수 있는 몸이었습니다. 그 몸은 후일 부활의 때에 우리도 입게 될 것입니다. 영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셔서 33년 정도 사시다가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만 오늘날 우리가 겪을 것과 조금 다르고 나머지는 똑같은 양상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그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게 되지만 사람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그분은 영광스러운 하나님, 자신이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귀하신 나의 주님”이라고 노래할 때 그것은 이 세 토막의 시간의 구분 중 어느 부분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볼 수 있게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생애는 한정된 생애였습니다. 33년이라는 한정된 생애이고 그 한정된 생애 중에서도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지극히 적은 부분이었습니다. 그 적은 부분 중에서도 우리의 찬송의 제목이 된 것은 그 시점으로 보면 더 적은 부분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영혼 이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 걸쳐있는 성자 예수의 인성과 신성의 아름다움을 보게 만드는 하나의 작은 바늘구멍에 지나지 않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생애의 지극히 작은 일부분이지만 바늘구멍과 같은 일부분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 이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 걸쳐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신성과 무한한 인성의 깊이와 넓이, 높이, 크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찬란한 빛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를 찬송하고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 관점을 인간 존재에게로 이동하면, 우리의 육체는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 나온 시점이 있고 사라지는 시점이 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보다는 좀 더 있을지는 모르지만 시간의 연장이라는 것은 아주 하찮은 것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이 십대, 이십대, 삼십대, 사십대, 오십대에 맞이하는 시간이 다릅니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똑똑똑’ 하고 날 때마다 인생이 깎여나가는 것을 느낍니다.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 흘러갑니다. 세상에서 70세나 80세, 90세, 100세 이만큼 오래 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배회하면서 산 100년보다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꽂혀서 10년을 산 것이 훨씬 나은 것입니다. 목표는 정해졌으나 에너지가 없는 10년보다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서 1년을 산 시간이 하나님 앞에 훨씬 가치 있는 삶일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육체는 시간 안에 태어나서 시간 안에 사라져가는 것이지만, 영혼은 이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 걸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작이 없지만 우리에게는 왼쪽 끝은 시작이 있지만 오른쪽 끝은 시작 없이 계속되는 유시무종(有始無終)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뻗어가는 것이 우리의 존재입니다.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영혼이 육체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너희의 육신을 멸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을 지옥 불에 던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몇 십 년 동안 세상에서 영혼과 함께 있다가 사라지는 한시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을 소중하게 보십니다.
인간의 육체는 동물들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동물의 유전자와 인간의 유전자 사이에는 수에 있어서 어마어마한 차이가 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유전공학이 발달하고 파헤쳐지고 나니까 인간의 유전자와과 동물의 유전자가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히 실망스러운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의 몸은 동물의 그것과 거의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영혼을 담아야 하니까 영혼이 움직이는 기능을 인간의 마음을 통해 이해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마음과 육체를 통해 감각되는 상상의 경험들을 영혼 안에서 역량을 미치도록 하려다보니 다른 동물에 비해 다른 육체적인 요소가 조금 더 필요했던 것입니다. 뇌라든지 정신작용에 관계되는 것들입니다. 나머지는 거의 일치합니다.
여러분이 매일 소화가 안 되면 먹는 대부분의 약들이 돼지의 췌장으로부터 만든 약입니다. 돼지 췌장에서 나온 분비액이 우리의 소화를 돕기 때문입니다. 만약 동물과 인간의 육체가 같지 않았다면 인간은 세상에 살면서 의약품을 개발하는데 어마어마한 한계에 부딪쳤을 것입니다. 자연적인 질서에 속해서 하나님이 똑같이 만드신 것입니다. 식물은 물론이거니와 동물에 있어서도 많은 의약품을 얻어 낼 수 있습니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 인간으로 살아있다는 점에서 육체와 영혼의 통합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육체는 영혼 못지않게 중요해서 육체가 반란을 일으키고 영혼만 남게 되면 인간 존재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영혼과 육체의 통합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구속의 의미
영혼의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에게 정말 소중한 것은 인간의 육체가 아니라 영혼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를 품에 안으시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영혼 이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의 영혼을 포섭하십니다. 베드로 사도가 “믿음의 결국은 곧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며 결론을 내립니다. 그 영혼이 오늘 구속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의 영혼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구속’이라는 것은 남에게 팔린 것을 물러온다는 뜻입니다. 물러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 값을 물러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거기에는 비용이 들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구속 하신다’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결국 죄에게 팔린 것을 구속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범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영혼을 파는 것과 같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구속하여주신 것이 구속의 원래의 뜻입니다.
이스라엘 안에는 노예제도가 있었는데, 하나님은 ‘종’이라는 신분제도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에서 종들이 생겨납니다.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기업을 상실할 때 종이 됩니다. 기업은 땅입니다. 땅이 있으면 거기에서 일구어 먹으면서 생존해 나가는데 땅이 없기 때문에 먹고살기 위해 누군가의 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팔거나 전쟁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이 잡혀오게 된 경우가 그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스스로 거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벗어나는 방법은 하나님이 신년에 해방을 주시거나 아니면 안식년에 그 값을 지불하고 자기 자신을 구속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누군가에게 돈이 많다면 돈을 주고 그 사람을 빼낼 수 있는데 그것이 구속입니다. 범죄한 자가 죄로 말미암아 자신의 영혼을 죄에 팔게 되었을 때 용서와 자비로 건져내주시는 것도 구속이라는 것입니다. 구속의 개념이 시간이 흐르면서 확장되는 것입니다. 구속은 인간이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위기와 고통에서 하나님이 구원행동을 보이셔서 전격적으로 우리를 거기서 건져내 주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마지막에 하나님이 거기서 구출해주신 위대한 구속사건으로 자주 노래했습니다. 원래 구속의 뜻보다 훨씬 더 확장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갇혔을 때 하나님이 어떤 희생을 하셔서 그들을 건지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크고 놀라운 능력을 보이신 것 외에 하나님이 희생을 하신 것은 없습니다. 그것을 구속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의로운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는 것입니다. 구속은 영혼의 가치,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 그것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행동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행동은 언제나 그 백성들에게 감읍하는 찬송의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이런 노래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의 소중함
성도의 영혼은 하나님께 있어서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영혼을 위해 일하고 섬긴다는 것은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입니다. 다른 모든 섬김은 육체에 대한 섬김이지만 영혼을 향한 섬김이야말로 아름다운 섬김이 없고, 그 의미도 영원한 것입니다. 자신이 끊임없이 아름다운 영혼이 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육체는 섬길 수 있겠지만 영혼은 섬길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신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만이 구도의 길을 가는 사람의 영혼을 도울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그 길을 가지 않는 사람은 구도의 길을 가는 사람의 영혼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만약에 해줄 수 있다면 그것은 위선이고, 해주지 않는다면 자기의 의무를 기피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처럼 영혼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십니다.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직접 내리시는 특별한 축복이 있습니다. 그 놀라운 축복, 놀라운 은혜와 사랑, 이런 것들이 지상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것입니다. 영혼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내리는 축복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벗고 하늘나라에 갔을 때 하나님께 받게 될 사랑을 오늘날 우리의 영혼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미리 맛보게 됩니다. 이 세상에 있을 때는 지존하신 하나님이 영혼에 베푸시는 구속의 은혜를 경험하는데 있어서 육체가 도움보다는 방해가 될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시인은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저에게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 시인은 원수들에게 쫓기고 고통을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인간은 상황에 몰리면 죄를 짓게 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앙망하면서 그분 앞에서 매일매일 살아가는 복된 삶 가운데 있을 때 참 영혼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지성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아름다우심을 느끼면서 그분께 집중하지 않을 때 우리의 영혼은 영혼다울 수 없고, 인간됨에 이바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눈을 들어 주를 보라 영광의 주를 보라 ♬
그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마음으로 보는 지성의 눈도, 내면의 세계를 보는 지성의 눈도, 보는 것들을 마음에 가져다 놓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지성을 통해서 본 것도 우리의 마음에 실어주고, 육신의 눈으로 본 영상도 마음에 실어줍니다. 만약에 한 화면에 영화 두 개를 동시에 쏜다면 두 개의 영화를 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어렵습니다. 문제는 육신을 통해 들어오는 것이 훨씬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혼의 맑음과 상관없이 언제나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는 맹인의 삶을 보면서 의사 한 사람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개안수술을 해주어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일주일쯤 지나서 그 환자가 고백하기를 “육신의 눈이 볼 수 없었을 때 하나님을 더 잘 볼 수 있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때, 보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에 속한 것들은 그렇게 끊임없이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씻어서 지성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전달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보이는 물질들은 마음의 여유와 상관없이 우리의 마음에 부지런히 영상들을 실어 날라줍니다. 그러나 정신세계와 영혼의 세계에 속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우리의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지성과 마음에 여유를 갖고 하나님을 끊임없이 바라보는 것 없이는 누구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영혼의 소중함을 잃어버릴 때 육체에 탐닉하게 되고 거기에 몰두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만 잠잠히 바라보는 신앙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불쑥불쑥 솟아나는 육체의 충동에 의해 자기의 육신에 도움이 되는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결국 지혜를 잃은 육체를 이끌면서 영혼은 피곤한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거기에서 보복, 미움, 음행, 살인, 폭행, 각종 추한 것들이 나옵니다.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서는 그런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영혼은 그런 것들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시기하고 미워함으로써 영혼은 상처를 받게 됩니다. 원수를 갚고 사람들을 살인하고 미워하는 것을 통해 영혼이 무슨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오히려 스스로 영혼에게 심한 매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누군가를 미워할 때 가슴 속에서 큰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오히려 영혼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나라를 소망하고, 다시 만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내세적인 것을 향한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정신적인 힘에 의해 보호를 받고 사랑을 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이 영혼을 구속하실 때 인간은 죄를 입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내버려두시면 인간은 육체만을 편애하고 끔찍한 일들이 가슴속에서 끊임없이 생겨납니다. 그 속에서 고통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인이 깊은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인간의 영혼과 육체, 어두운 세상을 사는 자신의 존재와 인간의 존재, 그리고 그 존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놀라운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생각 없이 살아갑니다. 구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이 길을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환경과 여건의 변화, 공급되는 좋은 것들을 통해 영혼이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의 본향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대한 끊임없는 애착과 그분께로 돌아가려는 영혼의 순수한 몸부림이 육체까지 배어서 나타나는 것이 구도의 삶입니다. 연약한 인간이 왜 쓰러지지 않겠으며 넘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인생의 참다운 즐거움이 이 세상에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향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도의 삶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이나 삶의 양상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참된 양식인 진리에서 찾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꺾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진리에 합치시킬 때 거기에서 나오는 희열을 경험하면서 그분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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