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35
목 차
여호와는 내 영혼의 구원(시 35:1-3) 1
대적자를 바람 앞에 겨와 같게 하심(시 35:4-5) 5
악한 자의 멸망을 구함(시 35:6-8) 10
가난한 자를 건지시는 하나님(시 35:9-10) 14
사람에게 배신을 당할 때(시 35:11-13) 17
사랑할 때와 배신할 때(시 35:14-17) 23
나를 판단하소서서(시 35:18-24) 27
원수에 대해 비는 기도(시 35:25-26) 30
찬송하게 하시는 하나님(시 35:27-28) 36
시편56편 강해 1
시편35편 강해 1
시편35편 강해 1
시편35편 강해 1
시편35편 강해 1
시편35편 강해 1
시편35편 강해 1
시편35편 강해 1
시편35편 강해 1
시편35편 강해 1
여호와는 내 영혼의 구원
“(다윗의 시)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방패와 손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우소서
창을 빼사 나를 쫓는 자의 길을 막으시고 또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시 35:1-3)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는 생활
하나님이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도록 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하나님 편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이 위기 가운데 있고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나를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도 특별한 응답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신 분이기 때문에 당신을 거스르는 자들을 대적하십니다. 그것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이 악한 자들을 거스르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불변하시는 선이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선하시기 때문에 악하게 행동하는 자들에게는 거스르는 자가 되시고, 정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불의한 자들에게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자비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악랄하게 행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당신의 엄위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대로 하나님께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바꾸시오. 저렇게 바꾸시오.”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 기도는 백날 해도 응답이 안 됩니다. “당신은 의로운 분이시지만 불의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 이번만큼은 그러지 마십시오.” 그런 기도는 응답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기도라는 것을 활용해서 밀어붙이면 하얀 하나님을 까맣게 만들 수도 있고, 타오르는 사랑의 마음을 끌 수도 있고, 하나님의 진노를 막을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아주 불경한 상상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진노하시는 중에도 나에게 긍휼을 베풀어달라거나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징계를 보이시는 중에도 그러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기도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렇게 반문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돌이키는 자의 기도입니다. 예전엔 악인이었는데 지금은 그 길을 버리고 선하게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잠시 전까지의 악을 기억하셔서 악을 갚아도 나는 할 말이 없지만 제발 그렇게 하지 말아달라고 비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의 대적이 얼마나 많고 강한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편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대통령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도를 많이 했고 신학적인 지식도 뛰어났습니다. 그의 이야기가 핵심을 찌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적이 얼마나 강하냐, 상황이 얼마나 나쁘냐, 이것은 문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해결할 문제라고 한다면, 우리 볼 때 큰 문제, 작은 문제가 나눠진다고 해도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셔서 해결해주시려고 하면 큰 문제와 작은 문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있지 않은데 “도와주시옵소서. 우리의 대적을 물리쳐 주시옵소서.”라고 빌면, 자기가 하나님의 대적인데 누구를 물리쳐 주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기도가 누구나 드릴 수 있는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깊이 의지하며 하나님 편에 서있을 때 이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그렇게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내 편이 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그분께 붙어 있는 사람만이 그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기도에 있어서 제일 불경스러운 것은 자기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의도와 목적, 이런 것을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에 목을 맨 것처럼 생각하고 세게 기도해서 잡아당기면 하나님도 끌려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겸손과 경외의 정신 가운데서 행사될 때 그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뜨거운 열정이 일어나도 그 열정이 진리와 이성의 지배를 받을 때 참된 의지가 되는 것이지, 그런 것이 없이 열정이 일어난다고 하면 그것은 아주 동물적인 것입니다. 칼빈 선생은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 이야기 했습니다. 마음속에서 뜨거운 열정이 솟아나도 이것이 진리와 이성에 의해 통제를 받을 때는 하나님 앞에서 건전한 의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통제를 받지 않은 채 격렬한 감정이 확 하고 솟아날 때 이것은 이성이 없는 격정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안 좋은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파도스’라고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믿음이라는 것도 하나님을 향한 지극한 겸손과 경외 가운데 행사되어질 때 그 믿음이 건전하고 경건한 믿음이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 관계, 태도들은 돌아보지도 않고 자기의 기도가 하나님 목에 줄을 맨 것처럼 하나님도 딸려 오실 것이라는 불경스러운 생각들은 신앙적인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처음부터 생각이나 관점이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돌아와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께 돌아갈 때 하나님이 나를 향해 돌아오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구원, 하나님
그러면서 시인은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라고 말합니다. 내 영혼에 대해 “나는 너의 구원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종종 다른 사람에 의해서도 구원을 받습니다. 모든 것을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사람들을 통해 그 일을 하십니다. 우리들이 돈이 없거나 몸이 아프거나 직장생활이 힘들다고 기도를 하면, 어느 날 자고 일어났을 때 하늘에서 돈다발이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선한 마음을 품고 우리를 도울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면 좋은 의사를 만나서 하나님께서 고쳐 주십니다. 직장생활이 어려울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상사를 발령 내서 좀 더 좋은 사람이 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모두 일반적인 섭리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영혼의 깊은 침체를 느낀다든지, 어떤 죄 때문에 깊이 괴로워한다든지, 밑도 끝도 없는 깊은 심연에서 괴로워하고 방황할 때 사람이 건져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충고하고 말해줄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우리를 건져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성령에 의한 직접적인 개입이 있어야 합니다. 일으켜 세우시는 강한 변화가 그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안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영혼의 구원은 하나님이시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의 영혼이 얼마나 하나님을 경험했는가에 의해 영혼의 깊이가 좌우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좌우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무릎에 앉아서 살아가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의 기도가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내 편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려는 사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서 하나님 안에서 이해되고 발견되려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렇게 매순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대적자를 바람 앞에 겨와 같게 하심
“내 생명을 찾는 자로 부끄러워 수치를 당케 하시며 나를 상해하려 하는 자로 물러가 낭패케 하소서
저희로 바람 앞에 겨와 같게 하시고 여호와의 사자로 몰아내소서“(시 35:4-5)
하나님이 높이실 때
다윗에게는 왕이 되려는 계획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기름을 부으셔서 왕 삼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사람이 높임을 받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계획에 있어 줄달음질을 쳐서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높여주심으로 정말 높아지는 것이 신앙적인 높임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왜 하나님이 높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의 외모 때문이었습니까? 아니면 그의 지위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이 낮출 수 있는 사람을 무한대로 낮출 수 있고 당신이 높이 실수 있는 사람을 무한대로 높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높은 지위나 많은 재산, 세상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점들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높이시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사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한나라의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버리시자 그는 미친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주실 때 짐승을 치는 목자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어떤 외적인 장점에 의해 이 사람을 높이신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오히려 외적인 장점 때문에 자신을 스스로 높이려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매우 악한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은 사울은 버려서 낮추시고 지극히 낮은 다윗은 높여 영광 받고 싶어 하셨습니다. 높은 지위에 있다든지 명성을 얻게 되면 하나님 앞에 책임이 더 커집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이 더 많은 영광을 나타내실 수도 있고,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높이기 시작하니까 수많은 대적들이 그를 끌어내려고 공격을 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만약에 다윗이 이새의 집안에서 이름 없는 목동의 삶을 살았다면 누가 그를 원수처럼 여겼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높이시니까 근거 없는 모함과 시기, 까닭 없는 미움들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없이 공격을 당하며 괴롭힘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심
하나님이 높여 주셨지만 그에게 칼을 주셨습니까? 창을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그를 높여 주셨지만 그것들이 그에게는 무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에 그런 어려움이 없었더라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신앙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새의 집안에서 짐승이나 치던 다윗을 당신이 일꾼으로 세우셨던 목적에 명백히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점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면 맨 처음 짐승을 치던 목자였던 그를 이스라엘 왕으로 택하게 만들었던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결과가 됐을 거라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끊임없는 시련과 고통, 신하들의 수많은 배신, 이런 것들이 하나님이 다윗을 처음 불러주셨던 그 마음에 머물도록 도와주는 도구였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기름집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고통이 없는 순풍의 돛을 1년에서 2년만 달아 보십시오. 미끄러지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결단 하고 매달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신앙의 끈을 다시 동여매는 일들을 많이 봅니다. 안타까운 기도제목들이 이루어지고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인생이 나아갈 때 신앙에서 미끄러지는 사람을 많이 만납니다. 그래서 대적자들이 다윗의 생명을 끊임없이 노리고 그를 죽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하나님이 왕으로 세우신 것 외에 아무런 잘못을 한 것이 없는데 원수들은 그의 생명을 노립니다. 때로는 당신을 의지하고 사랑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버림받은 자처럼 그를 내동댕이쳐지는 것 같게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루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몇 세기에 한명 나올까 말까한 탁월한 천재였습니다. 저는 누구의 책을 읽으면서도 이 사람이 천재라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책을 두세 권 읽는 사이에 벼락을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 이 사람은 천재다.’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학문을 많이 알고 사물의 이치와 철학에 대해 통달한 사람이었는데 나중에 회심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 이 시편입니다. 자기가 일평생 찾았던 지혜는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는 만들어 줬지만 어떻게 진리를 찾아 가야하는지는 안 가르쳐 줬는데, 시편 속에서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과 참회의 눈물입니다. 자신이 막연하게 생각했던 진리는 움직이지 않고 흔들리지도 않고 감정도 없이 공중에 떠있는 천체와 같아서 그것을 찾아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시편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깨뜨려졌던 것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것, 진리의 사랑을 받는 것, 자신의 삶이 진리에서 이탈했을 때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진리로 돌아가는 것, 그러면 진리는 그를 용서해주고 진리의 사랑과 긍휼을 받는 것, 여기에서 그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 이것이 진리를 찾아가는 삶이로구나.’ 그 사람에게 신앙과 철학함에 있어서 최고의 스승은 다윗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찾아가는 구도자의 눈에도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추면서 그분께로 나아가려고 하는 인간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였다면,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이 보실 때 당신에게 합치기 위해 사랑으로 그 길을 걷고, 그 길에서 멀어졌을 때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다시 찾아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인간은 자기를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을 모두 기뻐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애처롭게 매달릴 때 그 사람이 항상 감동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이 남아 있을 동안에는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미 사랑이 떠나고 마음이 식어지고 나면 귀찮고 추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무리 쓰레기 같은 죄인이라 할지라도 언제든지 하나님을 찾으면 당신 앞에 나오는 인간들에게 감동을 받으십니다.
진리를 찾아 가는 구도의 길은 사랑을 찾아 가는 구도의 길과 일치합니다. 자신의 삶을 창조의 목적에 부합시키며 살아가는 겸손의 길과 하나입니다. 다르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내가 가지고 있는 인생의 목표, 내가 가야할 인생의 길, 나의 야망, 나의 행복, 이런 것에 초점을 맞추시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선한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알고 계셔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과 계획을 향하여 끊임없이 나를 맞추면서 인생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자를 낭패케 해달라고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은 악인의 영광
그러면서 그는 또 하나의 기도를 드립니다. “저희로 바람 앞에 겨와 같게 하시고” 저도 인생을 얼마 살지 않았지만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왕성한 것 같고 어마어마한 권세를 가진 것 같고 힘이 있는 것 같지만 결국 악인은 바람에 날리는 겨입니다. 겨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지금은 집에서 쌀을 조리질 하는 사람이 없지만 예전에는 조리질을 했습니다. 쌀을 놓고 조리질을 하면 돌멩이는 쌀보다 무거우니까 쌀을 흔들면 쌀이 물위로 떠오를 때 슬쩍슬쩍 건져내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안 건져내고 남은 것은 돌멩이입니다. 싸리나무 엮은 것으로 조리질을 하니까 반 토막 난 쌀, 겨, 이런 것들이 들어가니까 그것들을 키질합니다. 쌀을 높이 던지면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서서 휘 던지면 바람이 불면서 가벼운 것들은 날려 보내고 쌀만 떨어집니다. 그것을 몇 번 까부르고 나면 쌀이 깨끗해집니다. 조리질은 무거운 돌멩이를 걸러 내고, 키질은 가벼운 것들을 털어내는 것입니다. 바람에 날리는 겨가 그렇게 키질을 할 때 날리는 것입니다. 키질을 하면서 훅 던지고 내릴 때 바람이 일면서 그것들이 날아갑니다. 키질을 하고 나면 그 앞에는 겨들이 잔뜩 쌓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람에 날리는 겨입니다.
가치가 없고 환경이 변하면 사라져 버리는 존재가 바로 악인의 존재입니다. 악인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아서 훌훌 털면 날아갑니다. 그러나 의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그분의 자녀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악하게 살고 하나님을 떠난다면 그는 더욱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가장 큰 힘, 가치, 우리의 인생의 가장 큰 능력과 도움,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매순간 의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마음을 끊임없이 잡아당깁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와 생명을 가지고 진리를 올바로 세워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두셨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모든 것을 버린 것이라는 것입니다.
악한 자의 멸망을 구함
“저희 길을 어둡고 미끄럽게 하시고 여호와의 사자로 저희를 따르게 하소서
저희가 무고히 나를 잡으려고 그 그물을 웅덩이에 숨기며 무고히 내 생명을 해하려고 함정을 팠사오니
멸망으로 졸지에 저에게 임하게 하시며
그 숨긴 그물에 스스로 잡히게 하시며 멸망 중에 떨어지게 하소서”(시 35:6-8)
하나님을 의존하는 삶
악한 자들에게 고통을 받을 때 시인의 호소는 둘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로 피하며 자신을 보호해달라는 기도와 악한 자들이니 저들을 멸해달라고 부르짖는 탄원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간에 하나님께로 향하는 영혼이 아니면 어떠한 기도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붙들며 살아가거나,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사람이라도 최소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진실한 참회 없이는 하나님께로 피한다는 기도나 나를 대적하는 자들을 주께서 원수로 삼으시고 멸하여 달라는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지 삶에서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주님을 붙들면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무엇보다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신앙의 기본은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존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불순종하고 멀리 떠났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 참회하는 마음이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곁에 머무는 마음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영혼은 번영하거나 원수들이 없을 때 가장 해롭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곁에 원수들이 없을 때, 모든 일들이 잘 될 때,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마음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스스로 마음을 겸비하여 당신 앞에 나아올 수 없을 때 시련과 어려움을 주셔서라도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당신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깊은 의존,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고 바라는 신앙, 그것으로 아버지 앞에서 살아가는 삶,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소중하고 그분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구함
하나님께서는 시편 속에서 우리에게 이런 가르침을 주십니다. 여기에 보면 시인이 원수들을 향하여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의 길을 어둡고 미끄럽게 해 주시옵소서” 즉, 어두워서 보지 못하면 자신을 목표로 삼고 달려올 수 없을 것이고 거기다가 길을 미끄럽게 하신다면 결코 자신을 추격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여호와의 사자로 저희를 따르게 하소서”라고 빕니다. 여기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심판하기 위해 하나님께 보냄을 받는 천사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나타났던 원수들을 향한 커다란 재앙들, 앗수르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그들을 일시에 시체로 만들어 버리신 하나님의 큰 위엄과 능력, 전쟁에서의 승리,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여호와의 사자의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이기게 하시는 아주 놀라운 증거와 힘, 능력을 보게 하셨습니다. 시인은 여호와의 사자의 심판하시는 권능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당하는 고통과 괴로움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줍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악인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구하기 전에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생각해야합니다. 오히려 원수들도 변화되어서 하나님을 좇고 그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되도록 기도하는 것이 사랑을 완성하는 기도입니다. 다윗은 아직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시기 이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늘에까지 미치는 진리를 보고 우주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고 하지만,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아름다움을 세상이 목격한 이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까지 들었습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모든 악을 향한 기도이고, 악을 행하는 죄인들을 향한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더 깊이 승화해야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악인들은 웅덩이를 파고 그 속에 그늘까지 감추어서 거기에 시인이 빠지고, 빠진 곳에서 올무에 사로 잡혀서 결국은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곤경에 떨어뜨리고자합니다. 시인은 그런 곤경에서 자신을 구해주시고 악한 사람들을 멸하여 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합니다.
결론과 적용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탄탄대로를 달리는 삶은 아닙니다. 육체의 욕심과 더러운 욕망, 죄된 습관, 사악한 세상 사람들의 태도, 이런 것에 늘 얽매이기 쉽고 사로잡히기 쉬운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삶 속에서 분초마다 지키고 보호하지 않으시면 우리도 그런 올무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 매순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힘입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세상은 믿는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적합한 땅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은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대적하는 원수들이 가득한 곳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고 미워하는 악한 경향성을 가진 사람들이 가득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따르려는 끊임없는 의지의 결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성령의 은혜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하신 사랑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참된 성도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마음입니다. 전심으로 주님을 향하고 의지하면서 사는 마음, 그것이 바로 신앙이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생활, 이것이 바로 신앙의 마음이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가장 훌륭한 표현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구속의 제사이고 끊임없는 자기 헌신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정말 승리할 수 없습니다. 매순간 하나님을 의지하고 은혜를 구하며 아버지 앞에서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가난한 자를 건지시는 하나님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요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시 35:9-10)
영혼이 드리는 찬송
하나님께 대한 찬송은 그냥 부르는 노래라기보다는 우리 영혼 안에 일어난 활기찬 움직임을 하나님 앞에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찬송은 영혼과 마음의 움직임을 통해 부르는 노래입니다. 만약에 마음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면, 그것은 아주 놀라운 찬양을 불러일으키는 도구가 될 것이고, 만약에 그렇지 않은데 찬송을 하려고 한다면 어려움이 생길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일까요? 영혼과 마음의 움직임은 없는데 노래를 불러야하는 어려움이 생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다가 보면 그 마음 안에 하나님을 향한 영혼과 마음의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을까요?”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 안에 움직임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찬송을 통해서 마음 안에서 어떤 움직임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것입니다. 찬송을 부르다 보면 찬송할 이유가 생겨날 수도 있지만, 마음 안에 찬송할 수 있는 이유가 생겨나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이 찬송의 참다운 정신입니다.
본문에서 시인은 커다란 인생의 위기를 만났고 거기에서 하나님이 건져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제일 먼저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라고 찬송합니다. 영혼의 기쁨이 있으니까 거기에서 찬양이 솟아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승리, 놀라운 능력, 은혜, 이런 것을 경험하고 나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찬양, 감격, 감사가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찬송하는 이유
감격의 원인이 구원이라고 한다면 그것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 말로 요약될 수 있는데 능력과 자비입니다.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이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외침을 가르칩니다. ‘뼈’는 인간의 마음과 심령 깊은 자리를 가리키는 하나의 은유로 사용됩니다. “뼈가 아프도록, 뼈저리게 사랑한다. 뼈가 아픈 고통이다. 뼈를 깎는 노력이다. 뼛살에 의해 우러나오는 고백이다.” 이런 표현들을 사용합니다. “그 뼈들이 말한다. 증거한다.”라는 것이 말하는 바는, 첫째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자신에게는 힘이나 권세가 없어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만한 완력도 없는데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주셨고 건져주신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찬양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큰 능력을 아무에게나 행사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특별히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자비가 됩니다. 그 능력으로 나를 건지시고 보호하시고 나를 미워하여 내 생명을 찾는 원수들을 징벌하셨으니 놀라운 능력이 나에게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됩니다. 아무리 긍휼히 여기고 사랑해도 능력이 없다면 그 사랑과 자비는 열매를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능력이고,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비이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자비, 놀라운 능력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능력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푸실 수 있고 자비를 베푸실 수 있는 것입니다. 악한 자를 징벌하는 일 없이는 선한 자를 보호할 수 없고, 선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는 일 없이는 악한 자를 징벌할 수 없습니다. 이 자비와 능력은 함께 쌍을 이룹니다. 시인이 바로 이 두 가지를 하나님 앞에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를 입으려면
우리도 인생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를 힘입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런 능력과 자비를 힘입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고 자비를 베푸시는 것과 같은 방향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합니다. 그래야 자비와 능력, 선, 은총을 입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복 받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야합니다. 자신이 걸어가는 길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 아니라면 그가 비는 복은 응답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가는 길이 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 아니라면 복을 비는 그의 기도는 의미가 없을 것이고, 자신이 가는 길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라면 하나님께서 그의 길에 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삶의 방향과 비는 기도의 방향이 일치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 큰 복을 자기 백성들에게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을 보면 자신의 가는 길을 고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복만 받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에 어려움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하나님을 ‘나의 구원, 나의 빛’이라고 부를 수 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맞추었습니다. 하나님이 시인에게 기쁨이 되시기까지 시인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일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를 기뻐하는 자들에게 하나님도 당신의 기쁨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높은 덕을 하나님께 대한 초월적인 사랑에 있다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이 아니고서는 이 둘을 완전하게 합치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배신을 당할 때
“불의한 증인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힐문하며 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
나는 저희가 병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시 35:11-13)
사람에게 배신을 당할 때
하나님 안에서 구원을 경험하면서 시인이 자신의 지난날들을 회상합니다. 회상이라는 것은 이미 이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다시 기억을 불러내서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에 대한 회상은 과거에 대한 회상이지만 오늘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 안에 은혜가 풍성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속에는 항상 과거에 하나님이 나를 위해 하셨던 은혜로운 일들에 대한 넘치는 기억, 감사함, 이런 것들이 넘치게 됩니다.
시인이 회상을 하는데 첫째로 모함입니다. 모함은 자신은 그런 적이 없는데 누군가 자기를 해할 목적을 가지고 모함을 하는 것입니다. 그릇된 증언을 서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악을 행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이러한 잘못을 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라고 하면서 모함을 하는 것입니다. 특히 구약에서는 거짓증거 하는 일을 매우 커다란 죄로 규정합니다. 시인을 향해 거짓증거하면서 모함하는 일은 결국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을 모함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고 언약백성들을 향한 자비가 없는 악한 사람들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알고 늘 교제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고개를 들고 대적하면서 시인도 알지 못하는 일로 모함하고 해롭게 하기 위해 기승을 부립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될 때 시인은 곤고하고 고통스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호소하였더니 하나님이 건져주셨고, 그러한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는 배신입니다. 자신은 그에게 선을 베풀었는데 어느 날 선을 베푼 은덕을 악으로 갚아서 자신에게 원수처럼 행하는 자들을 만난 것입니다. 시인은 인생을 살면서 이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자식들로 인한 배신, 왕국을 세울 때 선대해 주었던 무리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대적했던 일들이 생각났습니다. 배신 속에서 시인은 견디기 힘든 고통스러운 상황을 만납니다. 본문을 보면 자기가 선을 베풀 때 악으로 갚고 사람들이 자기를 모함하는 일들이 일어날 때 그가 외로웠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도움이 끝난 것 같고, 인간으로부터 오는 모든 혜택이 다 끊어진 것 같은 시기에 시인은 하나님 앞에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피함
그때 그 사람들을 함께 대적하며 이를 갈고 미워했더라면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모함에 걸려들었을 때 그 모함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누군가를 망가뜨려야 합니다. 그것이 아무리 진실이라도 어떤 의미에서는 또 다른 악을 공동체에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서에서 “너희가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게 낫지 아니 하냐”라고 외쳤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두 아십니다. 설령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그런 누명을 안 벗겨주신다고 할지라도 그가 정말 하나님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자신을 아신다는 사실 하나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저쪽에서 칼을 빼든다고 나도 총을 들고 나타나면 그것이 신앙이겠습니까? 마음 깊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만이 나의 인생에 피난처이십니다.”라는 마음으로부터의 고백이 없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미워할 때 미움을 받고 있지 않고 그것보다 더 많이 그를 미워하는 사람은 마음의 병이 없습니다. 한대 맞으면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아 갈 정도의 보복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마음에 어떠한 상처도 남지 않습니다. 그것이 타락한 인간의 악함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가인의 후손의 고백이 나옵니다. “창상을 인하여 내가 저를 죽였도다” 상대방이 그를 살짝 긁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보복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그 사람에 대한 증오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품고 있으면 거기에 하나님이 계실 수가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모함을 당하거나 배신을 당해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를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또 하나의 살인이고 또 하나의 고통입니다. 그 사람은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나를 죽이는 일들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 속에서 하나님께 피했습니다. 그는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라고 말합니다. 저희를 위해 내가 금식하여 기도하고 저희가 어려울 때 도왔다는 말입니다. 그랬더니 그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어떤 사람을 위해서 진심으로 축복을 비는데 그 사람이 그 복을 받을 만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니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 기도는 다시 기도한 사람의 품으로 돌아와서 자기가 원수와 같은 사람을 향해 빌었던 복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나를 배신한 자들을 위해 내 가슴에서 떠난 기도가 그들이 그 축복을 받을 만하지 못하니까 결국은 나에게로 다시 돌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바라는 신앙입니다.
나는 항상 선대했는데 마지막에 돌아오는 것이 가슴 아픈 배신이고, 나는 많이 아끼고 사랑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뼈저린 배신뿐일 때 우리는 더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이러한 배신은 사랑을 단 번에 끊어버리려고 달려드는 칼을 든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더 많은 고통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고통스럽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일들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달라붙어 있던 사람을 의지하는 마음을 떼어서 하나님을 향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하나의 축복입니다. 한편으로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경험이지만 그 경험을 통해 시인과 같이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실망하거나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면 늘 부르는 찬송이 이것입니다.
이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
날 사랑하는 이는 오직 예수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질 않네
온 천지는 버려도 날 버리지 않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사람에게 뼈아프게 실망하게 하셔서 변하지 않는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참된 소망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게 하고, 주님을 붙들면서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만약에 나를 뼈아프게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를 저주하고 깊이 미워하면서 악한 마음을 품을 때 그가 만약에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사람이라면 그 악함은 어떻게 될까요? 그 역시 돌아서 자신을 찌르게 되는 것입니다. 의인을 이유 없이 미워하거나 하나님 편에 서있는 사람을 이유 없이 대적하고 배신하는 일은 자신의 영혼과 육체에 대한 중대한 도전입니다. 칼로 스스로 자신의 몸과 영혼을 찌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상상보다 더 큰 해를 자신의 영혼과 마음 안에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몇 푼의 돈이나 제물에는 마음을 쓰면서도 자신의 영혼과 마음에 오래도록 남는 무수한 상처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불쑥불쑥 정욕처럼 솟아 나오는 욕망을 따라서 사람들을 배신하고 미워하고 하나님 편에 서있는 사람을 모함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살수가 없습니다. 끊임없는 고통과 시련을 만나게 됩니다.
억울한 가운데 잠잠함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많다고 할 때 모함이나 배신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언가를 해명을 할 것입니다. 해명을 하는 동안, 그것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무언가를 말해서 나를 배신하거나 모함했던 사람들을 미워하게 만들게 됩니다. 그렇게 해야 자신이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 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편 여러 곳에서 “나는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나이다. 나는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라.”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의지함으로 말미암은 일의 좋고 나쁨보다는 고통, 배신, 모함, 음모, 이러한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과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시고 싶어 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나는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었나이다”라고 합니다. 다윗시대에 요단강 건너편으로 망명의 길을 오를 때, 사람들이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우리에게 훌륭한 왕이 있고 그 왕에게 나쁜 자식이 있었는데, 그 자식이 반란을 일으키고 그의 잔꾀에 놀아난 수많은 간신배들이 칼을 들고 일어나서 우리 주군을 내어 쫓고 우리가 여기로 도망을 왔습니다.” 이렇게 떠들겠습니까? “주야로 눈물이 내 음식이 되었나이다”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할 때 “내가 밤낮으로 눈물 흘리니 주여 어찌 합니까?”라고 합니다. 할 말이 많이 있었지만 그것을 가슴에 묻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결론과 적용
그분은 우리를 모함하지도 아니하시고 배신하지도 아니하시고 언제나 진실하셔서 당신께 돌아오는 자들에게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께 가슴에 많은 언어의 사연을 눈물로써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원한을 신원해주시는 하나님, 우리를 모든 고통과 억압에서 풀어주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과 자비를 경험함으로써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변하는 사랑과 변하지 않는 하나님 사랑의 차이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것을 우리는 쉬운 말로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사람 앞에서 흘리는 눈물을 구차한 것입니다. 자신을 모함하는 사람에게 쏟아놓는 수많은 변명들은 우리를 추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피합니다. 주님을 깊이 의지하지 못했던 날들을 쓰라린 고통 속에서 참회하면서 마음에 붙어 있던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지했던 마음, 사람을 의지함으로 하나님 앞에 홀로서지 못했던 태만, 세상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뒤엉켜서 하나님을 온전하게 따르지 못했던 게으름, 불순종, 이런 것들을 씻어내는 것입니다. 한 맺히고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으로 가슴이 물드는 것이 아니라 순결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물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피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 속에서 “나의 구원 나의 방패 내 머리를 드시는 주시니이다”라고 고백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주님과 연합될 때 우리는 자신 있게 이런 고백을 외칠 수 있게 됩니다. “여호와는 내편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오히려 모함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리고, 배신을 통해 내가 선을 행했던 사람들을 떠나보내지만, 오히려 그것을 통해 더욱 하나님편이 되어서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약한 자 같으나 강한 사람, 외로운 자 같으나 주님이 함께하는 사람, 곧 짓밟힐 자 같으나 다시 일어서는 사람, 쓰러진 자 같으나 다시 달려갈 수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사랑할 때와 배신할 때
“내가 나의 친구와 형제에게 행함 같이 저희에게 행하였으며
내가 굽히고 슬퍼하기를 모친을 곡함 같이 하였도다
오직 내가 환난을 당하매 저희가 기뻐하여 서로 모임이여
비류가 나의 알지 못하는 중에 모여 나를 치며 찢기를 마지아니하도다
저희는 연회에서 망령되이 조롱하는 자 같이 나를 향하여 그 이를 갈도다
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시리이까 내 영혼을 저 멸망자에게서 구원하시며
내 유일한 것을 사자들에게서 건지소서”(시 35:14-17)
배반을 경험함
본문은 시인이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향한 자신의 태도와 자신을 향한 그들의 태도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뛰어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었고 영적인 인물이었지만 그전에 그는 다정다감하고 심성이 고운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지은 시를 통해서 드러나고, 그가 살아온 인생의 발자취를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전쟁 중에 목이 마를 때 군인이 왕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면서 물을 떠옵니다. 다윗은 그들의 그런 마음이 너무 안쓰러워서 그 물을 마시지 못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또 자신의 아들인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옛날에는 자기 아들이 아버지와 갈등을 일으켜서 죽임을 당하는 일은 다반사였습니다. 그 못된 아들이 죽었는데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그러면서 통곡을 하지 않습니까? 그 대목들이 그가 얼마나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지금은 원수이지만 전에는 그들을 친구처럼 대하면서 그들이 아프다면 치료해주고 배고프다면 먹여주면서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대해주었는데 결국은 그들이 시인을 배신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것은 배신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이것을 매우 악하게 여기십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우리 인생사에서는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시인이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자식이 반란을 일으켜서 도망을 갈 때는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픕니다. 그 뒤에 줄서있는 많은 악한 무리들을 보면서 시인은 몸보다도 마음이 아픈 경험을 하게 됩니다.
시인은 인간을 의뢰하는 것과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 인간에게로 피하는 것과 하나님에게로 피하는 것들 사이의 아주 놀라운 차이점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다윗의 시를 보면 인간은 믿지 못할 가변적인 존재이고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에 변함없이 계신 분으로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 경험 속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사용하시기 위해 아주 험난한 길을 걷게 하신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받기 전까지는 그의 인생이 평탄했을지 모르지만 기름부음을 받고 난 후부터 수많은 대적 자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아무것도 안 섬기고 예배만 드리고 축도하기 전에 슬쩍 일어나서 도망가는 사람이라면 여러분을 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물질을 드리고 자기 힘을 쓰면서 섬기려고 하면, 시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을 세우면 열심히 하겠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도드라지게 보이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그를 모함하고 말 한마디도 거칠게 하고 시기하는 일들이 언제든지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를 하면서 좋아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입니다.
시인도 그런 것을 많이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가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더라면 사울이 다윗을 그렇게 미워할 이유가 있었겠습니까? 백성들을 그를 미워할 이유가 있었겠습니까? 백성들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하지 않고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십십이라.”고 노래를 했으면 사울이 다윗을 그렇게 미워했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쓰시기로 작정한 다음부터 다윗의 인생은 아주 비참하게 꼬였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시기와 도전을 받았으며 사랑했던 사람이 자기를 배신하는 일도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불변하시는 하나님
이런 일들을 경험하면서 시인은 인간이 얼마나 가변적인 존재인지를 배웠습니다. 사람의 사랑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인간이 잠시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이 세상을 향해 달려가고 나면 그 다음에는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불변하는 사랑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맨 처음에 회심하고 감격했던 내용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아, 세상에 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 이웃, 친구간의 사랑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부모와 자식의 사랑까지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로구나.’ 이것을 깊이 깨닫게 될수록 불변하는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다는 사실이 말할 수 없는 감격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에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렸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린 것이 아니며,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지 하나님이 우리를 떠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옛 자리에서 찾으실 때 우리는 지금 그 자리에 없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에 계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매순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은혜 속에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시인이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서 상처를 입었을 때 더 이상 위로받을 길이 없다면 그 상처는 마음에 큰 병이 됩니다.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대개 자라면서 유치원이나 학교에 가서 친구를 사귀든 무엇을 하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 합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이지만 어렸을 때 그러한 기억이 있는 아이들은 어디를 가든지 사랑을 받고 싶어 합니다. 사랑을 받고 싶어 하면서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쉽게 믿지 못하는 이중적인 성격을 보입니다. 그런 태도가 결국 하나님을 믿을 때도 작용하게 됩니다. 하나님 닳은 부모를 만나면 하나님을 믿기가 쉬울 텐데 말입니다. 이 말도 어패가 있지만 일반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을 닳지 않은 부모를 만나게 되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기가 아주 어렵고 이해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하나님을 잘 믿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것입니다.
하나님께 피함
시인은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피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시인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한 나라의 제왕이고, 후에 놀라운 계시와 은혜의 세계도 경험했고, 놀라운 재능도 있는데 어린아이와 같이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이었겠습니까? 자신의 잘못 때문에 녹아내리는 마음,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하나님께로 돌아가겠다는 마음, 그런 마음이 이 사람 안에 가득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에게 배신을 당할 때 얻는 유익이었습니다.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는 것이 뼈저리기는 하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품으로 파고드는 것입니다.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이런 고백을 하나님 앞에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판단하소서
“내가 대회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많은 백성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부당하게 나의 원수된 자가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서로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
무릇 그들은 화평을 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평안히 땅에 사는 자들을 거짓말로 모략하며
또 그들이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하하 우리가 목격하였다 하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이를 보셨사오니 잠잠하지 마옵소서 주여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떨치고 깨셔서 나를 공판하시며 나의 송사를 다스리소서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그들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시 35:18-24)
하나님 주권 신앙
여기에서 시인은 자신이 처한 위기의 상황에 대해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내용을 보면 강력하고, 한편으로는 무시무시한 기도입니다. 실제로 시인이 기도의 내용과 같은 행동으로 악인들을 대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말한 대로라면 자기를 대적하는 악인에 대해 칼이라도 휘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연약한 자중의 연약한자가 되어서 도망 다니고 압제당하고 핍박당하고 고통을 받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원수 갚는 것이 여호와께 있사오니” 시인의 뚜렷한 사상 하나가 하나님 주권사상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맡아서 주관하여 주실 것이라는 확고한 신앙, 그것이 시인이 가지고 있었던 주권사상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믿음, 확고한 신앙, 그것이 시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분명하고 확고한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벽한 사람은 있을 수 없겠지만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을 사랑하지 않으면 이렇게 전폭적인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주권사상이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는 진리를 우리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서 최고의 선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이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목표가 되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이 어려움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권사상을 말해도 그 주권이 그 사람에게 유익이 되고 기쁨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목적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에 대한 복종이 있어야 그 사람에게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렵습니다. 하나님께 깊이 참회하고 그분을 깊이 사랑하고 전적으로 의지하면 결국은 하나님 주권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 진리라는 것은 자기 속에서 어떤 체험이 일어나느냐에 따라 그 진리가 아주 분명하게 보일 수 있고 이해가 안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깨뜨려져서 자신이 흔적도 남지 않을 만큼 깊이 깨트려진 경험이 있으면 하나님 주권사상에 대해 굉장히 신뢰하게 됩니다.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자신을 장악하고 움직이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렇게 역사하시고 당신의 뜻대로 놀랍게 이루어 가십니다.
고난의 때에 하나님께 기도함
여기에서 생각할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시인이 원수들에게 박해를 받으면서 고통 중에 부르짖고 있는 모든 것들이 기도입니다. 실제로 이 사람이 고통을 받을 때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은혜의 수단이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며 고난의 때를 하나님 앞에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보여주는 고난을 이기고 지나는 삶의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과 어려움이 지날 때 당신을 찾기를 원하십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고난과 어려움 속에 우리의 마음은 굳어지고 심령은 죄 앞에 깊이 잠기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멀리 떠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으로 매순간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은 깊은 시험에 들고 고통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매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이 시련이 닥쳤을 때 주님을 붙드는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환난이 일어날 때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면 되겠지만 평소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던 사람은 환난이 일어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떤 중대한 영혼의 변화가 그에게 일어나야 가능한 것입니다. 평상시에 주님을 붙들던 사람이 특별한 때도 주님을 붙들게 되고, 특별한 때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평상시에도 그렇게 살게 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은 고난과 어려움이 와도 그분이 우리를 붙들어 주신다는 고백이 있습니다.
원수에 대해 비는 기도
“저희로 그 마음에 이르기를 아하 소원 성취하였다 하지 못하게 하시며
우리가 저를 삼켰다 하지 못하게 하소서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들로 부끄러워 낭패하게 하시며
나를 향하여 자긍하는 자로 수치와 욕을 당케 하소서”(시 35:25-26)
원수에게 보복하지 않는 의인
시인은 원수들이 자신에게 악을 행했던 것처럼 악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원수를 너무 사랑하고 긍휼히 여겼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원수를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신앙입니다. 언젠가 한번 사람들에게 부당하게 비난을 받게 되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오해가 생긴 것이었고 그 사람에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변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변명의 과정을 통해 나는 사실을 말한다고 했지만 나를 비난하는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내가 결백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순간 비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제 마음에 주시는 생각이 ‘이것은 정말 아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을 하고 평판을 깎아 내리고 명예를 훼손하고 심지어 근거도 없으면서도 아무렇게나 말하고 나중에 “아니면 말고.”라는 식의 말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막상 본인이 그런 입장이 되어 보면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알게 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의존하는 신앙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존하는 신앙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해야 합니다. 결국 사람들에게 원수를 갚는 것, 혹은 보복을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본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모든 악을 판단하고 심판하시지 않습니까? 결국에는 악인을 벌하심으로 당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선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호의를 베푸심으로 말미암아 당신이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따라 판단하고 그분께 복종하며 살아야할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뜹니다. 하나님이 악인을 판단하시고 벌을 주시는 것처럼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 사람을 판단하고 복수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신앙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판결을 내리셔서 모든 문제를 정상으로 돌려놓으실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 속에서 하나님은 너무 멀리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영원히 안 해주실 것 같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깊이 의존하는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은 항상 내 안에 살아계십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아닐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반드시 나의 한을 풀어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결백을 아시기 때문에 결국은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혈기를 부리는 사람의 문제는 그 순간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인생사를 살면서 모든 것이 선후 원인, 결과가 딱 부러지게 이어지고 선과 악이 명확하게 구분되어서 벌 받고 상 받는 것들이 우리 눈앞에 나타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그렇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는데도 남들이 보기에 복 받은 자처럼 살고, 어떤 때는 선을 행하는데도 고난을 받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나는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다루신다고 생각하는 것도 독단입니다. 하나님은 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그도 눈물 나는 사연을 안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두를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는 왜 그런지 모르지만 세월이 지나고 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꼭 그렇게 하셔야 했다는 고백이 나오듯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게 만드는 힘, 믿음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이 있으면 절대로 보복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결백해지기 위해 나를 대적하는 자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짓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시인은 “나는 주 앞에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살 때, 그릇 행했다 하더라도 뉘우치고 하나님의 선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이 내편이 되어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사람을 만나보면 웃어도 나를 좌불안석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고 무표정해도 이상하게 그 사람 옆에 있으면 포근하고 기대고 싶은 인격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 차이는 여기에서 옵니다. 지금 내게 일어나는 가슴 아픈 이야기, 원수들로 말미암아 당하는 비난, 원수는 아니지만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해서 오해 가운데 평판을 깎아내리는 사람들의 원한과 비난, 이런 것들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은 내 편이시기 때문에 나를 지키실 것이며, 지금 내게 일어나는 모든 가슴 아픈 일이 결국에는 선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거기에서 원수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에게 좋은 것을 위해 열심을 내지 않습니다. 자신은 원수를 갚고 싶고 욕을 하고 싶고 나를 때린 자를 칼로 찌르고 싶지만, 나의 감정보다 나의 원한이나 상처보다도 더 높으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것을 참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히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보다 더 높은 사랑의 본질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랑을 이야기 할 때 사랑은 하나님을 위해 많이 봉사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오래 하다 보면 숙달이 됩니다. 교회 봉사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무례하고 교양 없던 사람들이 교회에 오래 다니면 교양 있는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어쩌면 그렇게 예의가 바르고 교양 있는지 모릅니다. 겸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인색했던 사람도 주님을 위해 열심히 섬기면서 바칩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 익숙하게 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익숙해지지 않는 것은 사랑입니다. 내가 주님을 꽤 많이 닮은 것 같다고 여겨지는데 어느 한 순간 쓰레기 같은 나의 본성, 원수 맺기를 좋아하고 한번 원수 맺으면 화해하기를 싫어하는 마음, 하나님 같이 남을 판단하려고 하고 관계를 단칼에 베어버리려고 하는 잔인함이 은혜가 식으면 어느 한 순간에 쓴물처럼 확 올라옵니다.
트림을 하면 신물이 올라오지 않습니까? 그것이 위액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지독한지 모르실 것입니다. 쇠를 녹일 정도입니다. 어렸을 때 제 동생이 500환짜리 동전을 먹었습니다. 집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모두들 큰일 났다고 하고 병원은 엄두도 못 내고 있는데 다음날 24시간이 지난 후 변으로 나왔습니다. 하루 만에 한쪽 면이 완전히 지워졌습니다. 이것은 의학적으로도 입증이 된 것입니다. 위에서 나오는 액이 쇠를 녹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강한 산입니다. 위벽이 잘 코팅이 되어 있어서 그것이 위를 손상시키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위벽이 상했다고 하면 심각한 것입니다. 지독한 산이 코팅이 벗겨진 살을 파고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술을 많이 먹으면 천공(穿孔)이라고 해서 위에 구멍이 뚫어집니다. 그게 그렇게 무섭습니다. 악한 본성이 쓴 물이 올라오는 것처럼 한순간에 확하고 올라오는 것입니다. 사랑은 익숙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없지만 사랑은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매순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지탱이 됩니다.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면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악을 행하거나 원수를 갚겠다는 마음을 가지면 원수를 갚지도 못하면서 자기의 마음과 영혼 안에 이미 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가서 한번 때려주던지 아니면 권력 있는 황제 같이 한 번에 불러다가 능지처참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마음으로 미워하기만 합니다. 복수도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은 썩기 시작합니다. 상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제까지 기도가 잘됐는데 남편이랑 크게 싸우거나 시어머니나 시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거나 자신에게 이런 처지를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이 들면 한순간 기도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사랑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가장 풍부한 언어가 흘러나옵니다. 그러니까 한순간에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결국은 누군가를 미워하기 위해 채찍을 휘둘렀지만 그 채찍은 상대방을 때리지도 못하고 결국은 자신의 영혼을 휘감아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상처를 받기 마련인데 상처를 많이 받고 살아가면 우리는 남들에게 피해를 받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 올무에 묶여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이 미워하는 원수가 아니라 그 사람을 미워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공의를 행하시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가진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자기를 꺾고 포기하며 버리는 사람은 상처를 받으면서도 자유하게 하시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보복하지도 못하면서 자신이 미움의 사슬에 매여서 스스로가 자신을 묶어서 부자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치입니다. 그런 모든 올무에서 벗어나는 비결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아무 것도 보지 않아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일의 시작과 진행, 종말까지도 이해하시는 분이시라는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일 매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순간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은혜가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한번 용서한 사람은 영원히 용서가 됩니까? 아니면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미워질 수도 있습니까? 한번 용서한 사람을 계속 용서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깊이 용서했는데 은혜가 식어지면 용서가 잊혀지고 옛날의 상처가 다시 생각나는 것입니다. 인간은 마음과 육체와 환경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자칫하면 예수를 믿고 구원받고 나면 아주 놀라운 해방만이 있다고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잘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지혜로우십니까? 제멋대로 살던 사람이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지 깨달을 때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그에게 능력을 주시면 자만해지기 쉽지 않습니까? 그때 원수들을 만나거나 고난을 당하면서 자신 속에 있는 끊임없는 악함을 발견하고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찬송하게 하시는 하나님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그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는 말을 저희로 항상 하게 하소서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시 35:27-28)
사랑의 세 가지 동기
모든 사람이 시인을 대적했던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인을 대적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시인의 형통을 기뻐하고 시인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자는 인간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데는 세 가지 동기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첫째는 쾌락입니다. 저 사람을 사귀는 것이 나에게 쾌락을 주기 때문에 관계를 맺고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두 번째가 ‘유용애’(有用愛)라는 것입니다. 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나에게 득이 되고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동덕애’(同德愛)라고 해서 둘이 생각이 같고 같은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도 세상에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받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도 합니다. 그때 그 사랑이 온전한 사랑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동덕’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데 상대방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원인이 두 사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아닌 바깥의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사람이 함께 사랑하면서 걸어가는데 한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배반하지 않는 한 그 사랑이 계속되는 것을 가리켜서 참된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들 간의 사랑과 교제
시인은 고난을 많이 겪고 자신을 모함하는 사람들만 있었던 것 같아도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변에는 시인을 깊이 사랑하고 시인에게 형통함을 주시는 하나님, 원수들의 압제와 많은 고난으로부터 하나님이 건져내 구원해주시고 도와주시는 것을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시인을 붙들어주시는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많은 사람들을 통해 계속되게 해주시고 형통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즐겁게 노래하게 해달라는 대목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믿으면서 살아갈 때 고난도 있고 시련도 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와도 함께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안에서 위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자신에게 쾌락을 주거나 자신에게 유용해야 사랑해주는데, 여기에서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쾌락을 주지 않아도, 우리를 사귀는 것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유용함을 주지 않아도, 우리를 사랑해주는 유일한 원인이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본뜬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들 때문에 쾌락을 얻거나 덕을 보시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성향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랑으로 만물과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는 그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랑의 덕을 힘입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생활입니다.
사랑에 있어서 우선적인 것은 믿음의 식구들을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되 특별히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생활이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생활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면서 살아가는 생활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생활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실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즉, 원수들에게 시련과 압제를 당하는 과정을 통해 쓰라린 고통을 겪었는데, 결국은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해주시고 그를 대적하는 무리들뿐만 아니라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경험하게 해주셨습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의 교제를 통해 받는 사랑과 유익이 없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의 절반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도 안에서 느끼는 아름다움과 온유함, 사랑, 위로, 교제의 힘, 교제 안에서 만나게 되는 하나님, 나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을 소중하게 다루시며, 그들 하나하나를 돌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크고 놀라운 사랑, 이런 것들을 경험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믿음 생활을 절반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결론과 적용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시인이 마지막으로 결심하는 일은 “하나님을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겠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주의 도를 만방에 전하겠나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원수들에게 압제를 당하고 고통을 받는 과정을 통해 깨닫게 되는 많은 것들을 통해 결국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 잘 알고 찬송하게 되고, 놀라운 은혜와 믿음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성품과 사랑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게 하는 그 일을 위해 인생의 과정과 역경, 고난, 이것들이 사용되는 것입니다. 시인의 인생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고난과 시련, 원수들로 인한 압제와 박해, 이 모든 것들이 사용되어서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을 갖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해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하나님 앞에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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