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게 하시는 하나님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 6:14-15)”
녹취자: 김혜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문맥상 주기도문이 먼저 나오고, 바로 뒤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주기도문 다음에 다시 한 번 용서에 관해 말씀을 하십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주기도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기를,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용서의 실천이 기도의 실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너희들이 정말 주기도문을 따라서 살고, 주기도문을 따라서 기도한다면 반드시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하는 삶을 살라고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이 공동체 안에서의 기도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오늘 이 말씀은 이제 공동체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삶에 있어서, 사람들과의 용서의 삶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들이 하나님의 용서와 인간의 경험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교리적인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즉 우리가 아는 바로는 하나님은 우리의 공로와는 상관없이, 우리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희생을 통해서 우리를 죄에서 용서해 주시고, 우리는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교리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마치 우리가 만약에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지 않는 것처럼 제시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우리가 용서 받는 것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과연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 우리의 공로에 달린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제일 먼저 용서의 충분성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정말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 단회적인 용서로 충분한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 중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용서는 단 일회적인 용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떠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를 짓고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서 치르신 희생의 공로의 토대위에서 주님이 직접적인 사역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또 우리가 바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고, 또 구원의 길이 오직 예수그리스도밖에 없다는 사실을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히 단번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만약에 이 구원에 이르는 용서가 과거에 지은 죄 만을 용서하는 것이라면, 구원받은 이후에 짓는 모든 죄들에 대해서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용서를 받아야하냐는 문제가 나옵니다. 또 만약에 우리가 고백한 죄만을 용서해 주신다면, 우리들이 지은 모든 죄를 기억하지 못할진대, 고백하지 않은 죄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가 나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들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용서해 주실 때에는, 시간을 초월해서 모든 것을 한 번에 보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과거의 죄뿐 아니라, 미래에 지을 모든 죄까지 시간을 초월해서 하나의 죄로 보고, 그 모든 것을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반복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구원받을 때에 우리들이 과거에 지은 죄뿐만 아니라, 미래에 지은 죄 그리고 지금 지은 모든 죄까지도 한 번에 영원히 단번에 용서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일회적 용서는 충분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에 있어서는, 어떠한 하나님의 후회나 돌이킴 같은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용서가 이처럼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삶의 태도와는 상관없이, 영원히 동일하게 계속 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교화시키실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지만, 우리는 즉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남아있는 죄의 본성들을 소멸하시고,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순결하게 하시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성화라고 합니다. 이러한 성화의 작용을 거쳐서 우리는 하나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왜냐하면 이 성화는 우리의 본성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고, 한 사람의 살아가는 삶의 계적은 그 사람의 성품이 그려온 발자취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어떤 상태가 된 것만큼 살아가고 살아가는 것만큼만 그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오늘 만약에 너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너희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시리라. 사실상 이것은 구원과 관련지어 설명한다면 예수님의 이 화법을 따르는 결론은 불가능합니다. 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이미 용서해 주셨고, 용서해 주신 사람은 하나님이 그 용서를 취소하실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슨 의미이냐 하면은, 우리를 도덕적으로 교화시켜서 하나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만 여러분도 자식들을 길러봤으니까 이런 말을 할 겁니다. “너 오늘 학교 갔다가 PC방이나 다른데 들르지 말고 바로 집에 와야 돼! 너 학교 갔다가 집에 바로 안 오면 엄마한테 죽을 줄 알아.” 영어로 말하면 “I will kill you, you shall die,!” 엄마한테 이 말을 들으면서 이 아이가 ‘아 내가 학교 가자마자 엄마는 숯돌에다 칼을 갈고 기다리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자식은 아무도 없습니다. “안돌아 오면 넌 죽을 줄 알아.” 이렇게 말하지만 강조점은 그게 아니라 “학교 갔다 바로 집에 와야 돼.” 이것을 이 아이에게 교화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용서해 주시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구원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받은 신자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사는데 있어서 얼마나 필수적인 것인가 하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해서, 최고의 예를 들어서 우리에게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정상적인 부모라면 ‘너 죽을 줄 알아!’ 라고 말을 할 때에는 그 앞에 나오는 조건은 매우 중요한 것 이여야지, 너무 사소한 것을 놓고 죽을 줄 알아 라고 하면 아이가 교육이 안 됩니다. “너 아침에 일어나면 이빨 닦아야 돼, 안 닦으면 죽을 줄 알아. 밥을 다 먹었으면 조용히 일어나야 돼, 떠들며 일어나 죽을 줄 알아!,”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조건론에 죽을 줄 알아 라고 걸면 아이가 교화가 안 됩니다. 가끔 그런 말을 별로 엄마가 안하는데 “너 학교 갔다 바로 안 들어오면 죽을 줄 알아!” 학교에서 친구들이 유혹을 하면 야! 우리 학교 일찍 끝났는데 우리 PC방에 가서 게임하면서 놀다가 가자! 그러면 얘가 반복하는 거예요, “안돼! 나 오늘 집에 빨리 안 들어가면 엄마한테 죽어,” 그럴 때 얘 마음속에 있는 것도 엄마가 나를 죽이기 위해 숯돌에다 칼을 갈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빨리 들어가야 돼 그것이 나의 매우 중요한 의무야 하고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신약성경에서 인간의 많은 죄들을 거론하시지만, 이론적으로 돌변하시는 하나님의 용서가 가변적인 것처럼 제시하면서, 그렇게 하지 말도록 제재하고 있는 죄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이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십일조를 안 하는 것, 그리고 누구를 폭행하거나 간음을 하거나,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분명한 죄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는 것에 대한 죄의식을 깊이 간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본인이 그것을 의식하던 의식하지 않던 그것과는 상관없이 영혼에는 매우 깊은 영향을 끼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속에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앙심을 품은 사람이 충만한 영적인 생명을 누리면서 은혜의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죄와 사람의 분리를 보게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신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미워하시고,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신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해야 된다. 사람들의 죄는 미워해도 죄를 지은 그 사람들은 사랑해야 된다. 실제로 우리들이 이러한 삶이 가능한 가 실험을 해 보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저 사람이 특별히 나에게 매우 나쁜 일을 해서 나에게 고통을 주었는데, 저 사람이 나에게 행한 나쁜 일은 매우 밉고 저 사람은 너무 사랑스럽다. 그런 것은 통상적으로 우리가 지니기에는 매우 어려운 감정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내게 죄를 지은 사람과 그 사람의 죄를 분리하는 일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매일매일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을 때에 지은 그 죄는 미워하지만,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변명하고, 하나님 앞에 죄와 함께 나를 죽여 달라고 말하는 대신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빌고, 나를 폐기하지 마시고 고쳐서 사용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와 사람이 분리되지 않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너 자신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명령을 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지 않아도 원래 잘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만약에 나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내가 잘못된 나라면 사랑하는 것이 의미가 없고, 만약에 내가 정말 바람직한 나라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이미 그 사랑 안에서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라고 하는 기독교의 중요한 신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요,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에, 죄를 지은 자기를 매우 미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양심 없는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고발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게 됩니다. 이때에 그것이 짧게 보면 나를 미워하는 것이지만 나를 가장 사랑하는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을 때에 우리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구원은 얻었다 잃었다 취소되었다 복구되었다 할 것입니다. 복구되었을 때에 죽으면 다행인데, 잠시 놓쳤는데 죽으면 삼십년 신앙생활 도로아미타불이 됩니다. 믿은 사람이나 안 믿은 사람이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그렇게 이해할 것이 아니라, 교화적인 말씀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우선 여기에 나오는 너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이것은 물론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신자의 의무는 자신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되, 끝없이 무제한으로 계속해서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근거 없이 하나님이 그렇게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자 자신이 이미 하나님께 그렇게 죄 용서함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용서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용서라고 하는 것은 사랑의 또 다른 국면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면, 끊임없이 자신을 다른 사람과 교통하게 하는 성향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자기와 교통하려는 사람으로부터 교통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에게 교통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강하게 되면 자기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람과도 오래 참으면서 끝없이 교통하려는 열망을 갖게 되고, 사랑의 크기가 작으면 교통하려고 했는데 저 사람이 무엇인가 옳게 반응을 하지 않으면 즉시 의욕이 꺾이고 포기하게 되는데, 이것은 사랑의 크기의 크고 작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랑을 위해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신 다음 마지막으로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습니다.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는 또 다른 흙으로 빚지를 않으시고, 그 한 사람을 잠들게 하여 한 갈비뼈를 취하여 두 번째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 사람을 만들 때에 한 사람의 살과 뼈를 취했고, 놀랍게도 그 뼈는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팔 가까운 곳에서,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심장 가까운 곳에서 취하여, 두 번째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우리들이 이 창세기 2장의 사건을 기억하면서 주목하여야 할 바는,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두 번째 사람을 만들었는데, 그 두 번째 사람은 하와입니다. 하와는 여자이기 전에 사람입니다. 사람인데 여자입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 바로 둘을 하나 되게 하시려고, 갈비뼈를 취하여 둘이지만 사실을 한 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하나님이 두 번째 사람인 하와를 한 사람의 갈비뼈를 취하여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결혼식에 많이 인용을 하고, 이것이 바로 남녀관계의 결합 부부의 결합을 나타내는 것으로 활용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창세기 2장이 보여주는 이 위대한 계시에 절반입니다. 그러면 그 절반은 무엇이냐? 그것은 절반은 아내이고 절반은 사람으로서의 표본을 그 안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요약을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여자를 이끌어 오실 때에 아담이 그 여자를 무엇이라고 말을 합니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히브리 문학에서 이 무엇 중의 무엇이라는 이 표현은 최고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몸 중에는 있어도 되는 뼈도 있고 없어도 되는 뼈도 있습니다. 없어도 되는 것은 좀 이상하지만 실용적이지 않은 뼈가 있습니다. 살은 엉덩이 살이나 굳은살은 티스푼 하나쯤 떼어내도 안 죽습니다. 그러나 심장 가까이 있는 살은 손톱깎기로 한번만 찰깍 눌러도 절명합니다. 그런 종류의 살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요 라는 이 고백은 아내와 남편사이의 고백인 동시에, 첫 인간과 두 번째 인간과의 사이의 고백입니다. 결론을 내리면 하나님은 이렇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이 고백을 이 세상의 모든 인류가 서로에 대하여 하면서 사는, 사람으로 엮어진 인간 세계를 만드셔서, 그들이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이 모습이, 마치 천상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 사랑으로 교통하시며 사는 그 모양을 본 딴 세계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죄는 제일 먼저 그 사랑의 관계를 깨뜨려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라고 고백이 나옵니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고백이 변하여,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는 그 자식들이 태어나서 형제와 형제가 살해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의 비극인 것입니다. 만약에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대했을 것인가 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모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보여주신 그 놀라운 사랑, 특별히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그 탁월한 사랑은, 첫 번째 사람 아담이 두 번째 사람 하와에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던 그 고백을 재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인류를 인류가 죄가 들어오면서 제일 먼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사랑의 관계가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고립되었고,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인간끼리 서로 사랑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우리 인간에게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 1서에서 사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한 화목재물로 주셨음이라’고 말입니다. 그 사랑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동안에는, 나 이외에 다른 사람을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처럼 사랑할 수 있었는데, 죄가 들어와서 이것이 끊어지고 나니까, 마치 전원이 끊어진 가전제품처럼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희미한 사랑이 본성 속에 그래도 남아있어서 하나님은 인류를 보존하시고, 또 이 세계를 지속시키셨던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인간은 결코 행복해 질 수 없고, 인간은 결국 하나님과 단절되고 사람들과 단절되고 자연의 세계와도 단절되므로 말미암아 사랑을 잃어버린 완전히 고립된 불행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인간이 타락하자마자 펼치신 구원의 계획은, 바로 이 사랑의 관계를 복원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이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자의 후손을 즉시 약속하시고, 메시야의 약속을 그들에게 주시고, 죽음을 연기시킴으로써 인류 구원의 여망이 계속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속의 대 드라마가 펼쳐지는 가운데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을 주시고, 은혜를 주신 그곳에는 언제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볼 수 없었던 탁월한 사랑이 솟아났던 것입니다. 이 솟아난 사랑을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간직하며 살게 하신 것이 아니라, 같은 언약 공동체의 사람끼리 자비와 사랑을 베풀면서 사랑의 교통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시므로 신약의 교회를 형성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에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보좌 우편에 앉아 주가 되시고,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이 성령이 하시는 일이 두 가지인데, 진리 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언약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이 강하게 있고나서 수많은 표적과 기사가 잇달았지만, 정말 사람들이 주목해서 보아야 했던 것은 이 땅에 없던 놀라운 신앙의 가족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과 떡을 함께 떼며, 함께 생활하며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놀라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의 교회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는 바로 구속사적으로 맨 처음 있었던 첫 사람과 두 번째 사람의 이는 살 중의 살이요 나의 뼈 중의 뼈라고 하는 이 고백이, 마지막 타락한 인류를 구속하셔서 완성이 될 때에, 이루어질 인류사회 이 사이에 과도기 적으로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한편으로는 이미 그렇게 될 위대한 완성된 왕국의 특권들이 교회에 들어와 있고, 한편으로는 타락해서 여전히 분열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죄들이 함께 떠나지 않고 있는 이미 하늘나라의 놀라운 사랑이 들어왔고, 이 세상나라의 아직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모순들이 남아있는 교회, 그것은 교회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각자 속에 남아있는 새로운 새 사람의 본성과, 옛 사람의 옛 본성이 공존하는 것들의 합계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만약에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을 잘 믿고 많이 회개하고, 진리의 빛 앞에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살게 되면, 여러분들 속에는 아주 뜨거운 사랑이 흘러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볼 때에 아주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고, 내가 저런 사람들의 무리 속에 함께 들어가, 나도 저들과 함께 사랑받고 사랑받으며 살게 된다면, 그 인생은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할까 하는 것을 그 이웃들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의도 하셨던 선교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기독교적 영성의 최고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속으로 사랑하는 예수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지만,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이 보이는 공동체의 지평 속에서 입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동체에서 이루어지는 나타나는 사랑이 교회의 담을 넘어, 이 세상의 이방인과 그리고 이 세상에 우리와는 다른 종교를 믿는 이교도들에게까지, 이 사랑이 전파되고 이 사랑이 성취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무엇인가 이렇게 내 마음 안에 있는 이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사랑이 흘러들어가고자 할 때에, 저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서 이 사람에게 흘러갈 수 없을 때에, 그 때에 이것이 계속 흐르도록 만들어 주는 맺힌 것을 푸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그러니까 용서의 크기는 사랑의 크기입니다. 놀랍게도 모든 사랑은 용서를 통해서 그 존재가 가장 잘 입증이 되고, 그리고 또 용서를 통해서 그 사람이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라고 하는 것을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보와 순수한 공경을 쉽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더군다나 이익이 관련되어 있을 때에는, 저 사람이 나를 진심으로 공경하기 때문에 저렇게 행동 하는지, 아니면 나에게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저렇게 하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두 사람사이에 어떤 갈등이나 죄가 생겼을 때에, 이것은 입증이 됩니다. 사랑이 있으면 그의 과실을 용서해 줄 것이고, 사랑이 없으면 그 과실을 용서하기 못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크게 체험했던 위대한 인물들이 나옵니다. 그 모든 인물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게 된 것은, 모두 죄로부터의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경험한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키가 작고 배가 나오고 머리가 벗어지고 광대뼈가 튀어 나오고 독선적이고 그리고 날카롭던 사도 바울이, 그 유장한 복음의 진리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노래할 수 있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 말년에,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하려 이 세상에 임하셨다 함이로다. 내가 죄인중의 괴수로다.’ 이 괴수라고 하는 말은 희랍어로 ‘프로토스’인데 ‘first’ 라는 뜻입니다. 죄지은 순서대로 줄을 세우면, 자기가 가장 죄질이 나쁜 더러운 인간이다. 라는 뜻입니다. 아마 구약성경에서 다윗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또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는 그런 위대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었을까요? 그 자신이 죄에서 용서받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으시는 법은 없고, 언제나 우리가 가해자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는 죄를 지었지만 우리를 어떤 방식으로든지 용서해 주셔서, 다시 사랑하시므로 말미암아 범죄 했던 우리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감격적으로 깨닫게 되는데, 그래서 어떤 때는 우리는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은 겁니다. 내가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이 놀라운 사랑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죄가 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도 더한다고 이야기 했고, 그렇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기에,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짓겠느냐고 반문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무엇을 보여 줍니까? 누군가가 우리에게 잘못했을 때, 서로 맺힌 관계를 풀지 못하고 악감정을 품고 용서하지 않는 것은, 결국 그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작은가 혹은 없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만드셨을 때에, 마지막 날에 이루실 이 모든 인류가 사랑의 공동체가 된 모습의 샘플을 보여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하나님 앞에 힘써야 할 가장 훌륭한 일은, 사랑하고 그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그리고 요한 1서에서 새 계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스스로 사랑이십니다. 인간이 존재하기 전에도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를 사랑하심으로 완전한 사랑을 이루셨고, 이 사랑은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은 인간들을 위해서 이 사랑을 인간들에게 부어 주셨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랑은 아담에게, 아담에게 온 사랑은 하와에게, 하와에게서 태어날 많은 사람들에게 이 사랑이 계속 흘러 이 사랑은 결국은 마지막에 모두를 사랑하고, 마지막에는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우주적인 하나님의 자기 사랑의 말하자면 확장입니다. 그래서 온 인류 안에 삼위일체 안에 있는 것 같은 이 놀라운 사랑의 모형이 존재함으로서, 그들이 여럿이지만 그들 모두를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심으로써 작은 신들이 이 세상에 살아, 당신의 사랑의 모형을 이루는 아름다운 이 지상의 세계를 만드시고자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이루어질 이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모르는 이 모든 세상은 전적으로 그 운명을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교회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선교하지 않으면 이 날은 더디 될 것이고, 교회가 부지런히 선교를 하면 이 사랑을 전파하면 마지막 날은 훨씬 앞당겨 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교회가 만약 그 사랑을 잃어버릴 때, 그들이 행했던 모든 것들을 분연히 없는 것처럼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이 쓸모없는 것으로서 판단을 내리시고 그들을 징계하시는 것까지 보게 됩니다.
이러한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계시록에서 발견하게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에베소 교회를 향해 주시는 말씀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기셨습니다. ‘나는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하는 것과,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드러낸 것, 참고 내 이름을 위해 견디고 게으르지 않은 것을 아노라.’ 이 정도의 교회는 이 세상에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놀라운 장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하면 그러나 이 말은 앞에 있는 것들을 모두 다 엎어 버리는 것입니다.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 그리고 만약에 회개하여 그 사랑을 되찾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리라.’ 고까지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가장 커다란 의무는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인본주의적인 사랑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하고 사랑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내가 나에게 죄지은 사람들을 용서하기에는 너무 큰 죄는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가 가져야하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번 현실의 교회를 보기 바랍니다. 특히 이민 교회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어느 교회이든지 싸움이 있는데 들리는 바에 의하면, 이민 교회는 훨씬 더 질기대요. 어느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세요. 이제 싸우던 사람들이 젊은 시절에 싸우던 사람들이 이제 다 늙어간대요. 그럼 조금만 기다리면 끝나겠네요. 그랬더니 그 목사님 하는 말이 후손들이 있잖아! 후손들이,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후손들이 있잖아. 그러시더군요.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에 자신의 영혼은 아주 더러워지는 겁니다. 더욱이 이 개신교 안에는 분리의 정신들이 너무 충만해서, 그래서 찢어지고 찢어지고 찢어지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왜 교회는 계속 찢어지고 사람들은 사랑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교만한 이기심 때문입니다. 자기만을 이롭게 하고 유익하게 하고자 하는 이기적인 성품이, 각자에게서 뿌리 뽑혀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 미움과 투쟁이 계속되고, 한 번 맺힌 것을 풀지 못하는 그러한 패역함이 교회에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영원에 대한 무관심 때문입니다. 자, 우리들에게 어떤 갈등이나 미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이 유한하고, 이 삶 너머에는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신자든 신자가 아니든 누구든지 그 심판대 앞에 서야 된다는 것을 안다면, 다시 말해서 영원의 관점을 가지고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본다면 그렇게 치열하게 미워하고 용서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끊임없는 영혼의 올무가 됩니다. 이런 것들이 교회적으로 분쟁이 되면, 개같이 물고 뜯고 싸우고 그리고 세상의 법정까지 달려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면서, 교회는 찢어지고 고통을 받든 말든 자기 하나 살고자 그렇게 치열하게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교회는 끊임없이 끊임없는 미움이 꼬리를 물게 되고, 함께 사랑하며 살아야 할 교회 공동체가 미워하고 원망하고 복수하는 공동체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가 훨씬 더 평화롭고 화해가 있는 세상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비교하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이처럼 자기에게 죄지은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이야 말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실천하는 능력이야말로, 그게 바로 신앙의 수준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 죄는 매우 커서, 우리의 영혼에 뚜렷한 질병을 남깁니다.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미워하고 맺힌 것을 풀지 못하는 사람이, 마음을 쏟으며 매우 열렬하게 기도한다는 것은, 마치 새의 다리를 기둥에 묶어놓고 날개 짓을 시키며, 하늘높이 날아오르라고 명령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자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새는 다리를 묶인 채 몇 번 날아오르려고 시도하다가, 날개 죽지가 아플 정도로 날개 짓을 하다가 어려워지고 고통이 따르게 되면 결국 묶인 자신의 처지에 순응하며 살면서 날기를 포기하고 다리가 굵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풀어놔도 나를 수 없는 새가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한을 풀지 못하는 사람들은, 기도하려고 몸부림도 치고 하나님께 은혜를 받으려고 애도 써보지만, 되지 않는 것을 매일 매일 확인합니다. 그러나 용서하기는 싫습니다. 왜? 그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자기에게 큰 고통을 준 사람을 마음속으로 진심으로 용서하느니 자기 살점을 한 점 떼어내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왜! 마음과 정신의 성향을 떼어내는 것은 육신의 살을 한 점을 떼어내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미움은 사람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며 강력한 경향을 형성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부어주시는 사랑을 교회 속에서 먼저 사람들을 통하여 흐르게 하신 이 경륜을, 전면적으로 대항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살아가면서 결국은 하나님과 모든 교회와,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닮아 창조하신, 모든 인간을 대적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젠가 회개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때에 모두 예외 없이 깊이 밀려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심자가 앞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진실한 신자가 된 사람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공통적인 고백이 있습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러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은 자기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경험과 함께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자기의 죄를 회개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경험할 수 없고, 용서의 은혜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무한히 깊은 사랑과 넓으신 자비를 체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진실로 회개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했고, 이 용서를 통하여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정수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누군가의 죄를 용서하지 않을라치면, 하나님은 우리가 마치 예전에는 하나님 앞에 용서 받았으나, 지금은 용서 받지 못한 자처럼 느껴지도록 동일한 영적인 효과를 주시는 겁니다. 두 가지 방식으로 주시는데, 하나는 내면적인 방식으로 주시고, 또 한 가지는 외면적인 방식으로 주십니다. 내면적인 방식으로 주신다함은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가 누군가의 죄를 용서하지 않을 때에, 하나님은 예전에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친근히 대해주시던 하나님이신데,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지고, 멀리 있는 분으로 느껴지도록 만들어 주심으로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마치 용서받지 못한 관계인 것처럼 만들어 주십니다. 이것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인제 교리를 잘 모르는 성도들은, 자기가 구원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고백을 할 정도로 매우 괴로운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을 때가 훨씬 행복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영혼의 질병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낯설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낯설다! 애들이 엄마 품에서 잘 놀다가 아빠한테 한 번 가봐! 그리고 갔는데 아빠가 출장 갔다가 몇 달 만에 온 거야, 애가 막 우는 거예요. 낯선 사람이니까! 그게 낯선 거예요. 거리감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꼈는데 사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거든요. 그러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은 하나님을 친근히 하고, 하나님이 매우 가까이 있는 것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 신자의 특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삶을 살고 더 많이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면 참여할수록, 이러한 친밀함과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의 이 가까움은 친근함은 우리에게 계속 증진이 되는 겁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이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놀라운 힘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하루의 삶이 너무 괴로워! 이민 생활에 가난해서 이른 새벽부터 죽도록 투 잡을 뛰면서 일을 하고 그래야 돼! 그런대도 그렇게 힘들 때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시는 겁니다.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고단하게 하루일과를 끝내고 교회당에 와서 엎드려 이 고단한 이민생활을 도와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막 부어주시는 거예요.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막 들려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친밀함 친근함입니다. 이것을 가져가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환경적인 방법으로 즉 외부적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어떻게 하냐 하면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고 계속 미워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인 관계가 하나님 앞에 묶이게 되니까, 우리의 외적인 삶도 계속 묶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데, 우리의 마음이 워낙 무디어지고 강퍅해 져서 하나님의 그런 마음을 우리가 전수받지 못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좋아하지 않거나 애착하지 않는 것들에는 아무리 흔들어도 우리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애착하는 것들을 흔들어 놓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컴퓨터를 거의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일 년이면 10시간도 잘 안할 정도로 제 이메일이 없습니다. 그럴 정도로 안하고 삽니다. 그래서 우리 비서한테 보내면 비서가 알아서 줍니다. 나는 그렇게 비밀스럽게 편지 주고받을 사람도 없고, 그러니까 어느 날 갑자기 ‘너 똑바로 해, 너 똑바로 안하면 게임 못하게 할 거야’ 나 같은 사람의 마음은 추호도 안 흔들립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아이들 같은 경우는 ‘너 주일날 똑바로 안 나오면 인터넷 다 끊어 버리고 게임 못하게 할 거야!’ 그러면 얘네들 마음이 흔들리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 사랑하는 것들을 흔들어 버립니다. 돈을 좋아하면 돈을 확 흔들어서 위기가 오게 하고, 그리고 또 특별히 누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막 흔들어가지고 관계가 깨지게 막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 말로 해서 안 들으면 발로 차야 되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리고 그러면 되겠니? 그러면 되겠니? 하고 하나님이 수시로 말씀하시는데 안 들려, 인격적으로는 안 통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저 친구 제일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 찾아보시는 거예요. 그것을 막 흔들어 버리는 거예요. 그 다음에는 정신을 못 차리는 거예요. 마음을 흔들어버리리까, 사랑을 흔들어 버리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외부적인 것을 가지고 흔들어 버리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도 사업을 하든 공부를 하든 무엇을 하든 누군가를 독하게 미워하면서 성공하는 사람을 없습니다. 끝이 항상 안 좋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도 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모두 궁극적으로 하나의 몸으로 교회로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가 누군가에게 악을 행하면 그것은 자신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그래서 결국은 영혼에 깊은 손해를 입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야 비로소 이제 마음이 흔들리니까 기도하게 되는 겁니다. 오늘 여기 나오신 분들 가운데 그런 분들이 많죠? 그렇죠! 하나님이 막 잘한다잘한다 하면서 복을 주실 때에 잘 나갈 때는 하나님 안 찾아요. 그러다가 뭐 좋은 차도 사고 좋은 집도 사고 겁적겁적 하다가 그러다가 도저히 안되겠으니까 하나님이 발로 한번 퉁 치시니까 우르르 무너지고 여기저기서 막 뒹굴다가 그때 다시 돌아와서 울면서 하나님이 용서해 달라고 한 번만 봐주시면 정말 잘하겠다고 그러고,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는 경우가 여러분 모두 있을 겁니다. 그렇죠? 왜 그게 가능한 겁니까? 마음을 하나님이 흔들어 놓으니까 이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든지 여러분들을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자녀 된 아름다운 삶을 살게끔 내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오늘 너희가 만약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시리라.’ 즉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용서 못 받은 사람처럼 살아가게 될 것이다 결국 너희들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아니한 것이 얼마나 커다란 죄인가 하는 것을 알게 할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경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러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계속 용서하지 못하고 그를 미워하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데, 그것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영적인 손해가 너무 막대한 것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해도 설마 여러분들이 가서 살인 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미움의 감정은 뭐냐 하면 그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감정입니다. 그래서 미워하는 마음을 예수님이 살인이라고 부른 이유가 그것입니다. 살인은 너라는 존재와 이 세상에 같이 있기 싫다, 그럴 때에 그것을 실행에 옮겨서 제거해 버리는 것이 살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 하고 싶은데 도저히 할 능력이 안 될 때, 그와 함께 있는 자기를 제거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살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국에 마지막에 가장 하나님 앞에서 커다란 범죄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랍게도 그냥 용서해 주시면 되는데 하나님이 네가 저 사람을 용서해라 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것은 남에게 지은 죄를 남을 대신해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죄를 지은 것에 한해서 얘기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는 과정을 통해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체험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람을 용서하게 하는 사랑이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려고 강한 마음을 품었다면,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시킨 것인데, 그 은혜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어도, 남에 대한 용서를 실행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때 비로써 자기가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이고, 하나님의 용서 받은 자녀이지만, 여전히 자기 안에 있는 죄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런 절망감을 깊이 느꼈을 때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길이 무엇인가 하면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나에게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라고 하셨고, 그것은 전적으로 옳은 일인데 자기 안에 그것을 실행하고자 하는 소원은 있지만,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코 외면하지 않는 기도가 있는데, 순종할 수 있게끔 해달라는 기도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그 기도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이어야 합니다.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순종할 수 있도록 정말 도와달라는 기도는, 하나님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렇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게 될 때에, 우리는 그 동기를 어디에서 발견하나 하면은, 하나님이 나같이 더러운 인간을 어떻게 구속하셨는가 하는 것을 아주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남편들이 이제 30대 갓 넘어서 이제 직장생활 한지 몇 년 안 되고 다 어렵게 신혼생활 해 나갈 때, 평범한 집안에서는 부인들이 그렇게 남편들이 품위를 유지하도록 막 넉넉한 용돈을 주고 그러지 안찮아요. 그렇죠? 왜 대답을 안 하시나? 그런데 우리 교회에 있었던 자매 이야기 인데, 벌써 한 15년 전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아주 얌전한 사람인데, 어느 날 남편이 ‘여보! 왜, 나 30만원만 줘!’ 그러더래요. 그때 30만원은 굉장히 큰돈이었어요. 큰돈이었죠! 그 당시에 그 때 내가 개척교회에서 사례금 100만원 밖에 못 받을 때였으니까 30만원은 굉장히 큰돈 이었지요. 더군다나 그 부부는 맞벌이 하는 부부도 아니고 혼자 버는 학교 선생님 이었는데, 그 큰돈을 당신 뭐하게? 그러니까 남편이 하는 말이 너무 황당한 겁니다. 자기 친구하나가 이혼을 하게 됐다는 겁니다. 위자료를 줘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친구들이 30만원씩 모아서 주기로 했다는 거예요. 이 부인이 좋겠어요? 안 좋겠어요? 누구 놀리냐고 말이야! 아니 자기가 잘 못하고 찢어지고 이혼 하면서 당신 친구가 이혼하는데 이혼하는 것도 그리스도인으로써 동의 할 수도 없고 친구를 말려야 할 판인데, 당신이 무엇 때문에 그 사람 이혼하는 위자료를 월급에서 보태 주냐고 정신 나갔냐 ,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 그러고 남편 출근 시켜 놓고 아침에 기도를 하는데, 새로운 사실을 자매가 깨달았어요. 그게 뭐냐 하면 간절히 기도하는데 마음속에 주님이 그러시는 것 같더래요. 야, 네 남편친구 이혼하는데 위자료 할려고 30만원 보태달라고 그러니까 네가 황당해 했지! 내 아들 예수가 너 죄지어서 멸망당하게 됐다고 자기 피를 바쳐서 너를 구하겠다고 했을 때 내가 얼마나 황당했겠냐! 그 때 그 자매가 그 시간에 깊이 은혜를 받고 깊이 회개를 했어요. 그리고 줬대요. 하여튼 그 돈을, 이것이 대속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용서를 명령하실 때, 그 용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실 때 그것이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의 표현인 것처럼,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누군가를 용서해 줄 때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사랑의 고백입니다. 여러분 이제껏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서 여러분들에게 쉽지 않은 상처를 남겼는데,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고 용서해 준 것이 몇 번이나 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여러분 대부분이 단 한 번도 없는 분이 많을 겁니다. 그것은 무엇을 보여 주는가 하면,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간절히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용서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용서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셔서 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내게 용서받은 사람이 설령 내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목사님, 나의 많은 죄를 용서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라고 말할 때 머리를 쓰담듬으면서 ‘그럼 사람이 그 정도는 감사할 줄 알아야지! 넌 내가 많이 봐 준거야!’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를 일으켜 세우면서 ‘아니야, 아니야, 내가 너를 용서해 준 것이 아니야, 하나님이 너를 용서해 주시는 도구로 나를 사용하신 거야, 내 힘으로는 너를 이렇게 용서해 줄 수 없어, 주님의 은혜가, 주님의 사랑이 너를 용서해 주게 한 거야!’
누군가 우리에게 악을 행했을 때에, 우리가 힘이 없어서 혹은 힘은 있는데 신앙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막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복수할 수 없을 때에, 우리의 유일한 위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생각날 때마다 그에게 당한 고통을 곱씹으면서, 그를 향한 악한 감정을 불태우는 것이 원수를 갚을 수 없는 사람의 유일한 위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을 포기 한다고 하는 것은 마치 가장 자기가 사랑하는 것 중 어느 하나를 포기하는 것처럼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언제나 죽음과 짝을 이룹니다. 그래서 자신이 한 알의 밀알처럼 죽고자 하는 사람 이 외에는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고, 자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도 죽을 수 없기 때문에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면서 교회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 있는 지체들에게 악을 행하고 미워하는 것은, 이것은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칼로 찌르는 미련하기 짝이 없는 행동입니다.
얼마 전에 아덴만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소말리아에 납치된 선원들을 구출해 내는 특공작전이 있었습니다. 그 때 세계가 깜짝 놀랄 정도로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하고, 그리고 포로로 잡혔던 사람들을 모두 구출하였습니다. 한국에서는 굉장했습니다. 그 때 소령 한 사람이 해적들에게 총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인터뷰를 했습니다. 제가 그 기사를 읽고 눈물이 나왔습니다. ‘너무 두렵고 그리고 총상까지 입었는데 고통스럽지 않았습니까?’ 그랬더니 그 군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군인이 되기로 결심한 그 날부터 제 생명은 조국과 민족의 것이 되었습니다.’ 아침에 그 신문을 읽으면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와 똑같은 고백을 반복할 수 있을까? ‘너 그 사람이 너에게 그렇게 많은 악을 행했으므로 네가 그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서 많은 상처를 입었는데 힘들지 않았니?’ 라고 주님이 물으실 때 ‘하나님 제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로 구원을 받은 그 날부터 저의 모든 것은 예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성경은 우리에게 은혜를 많이 받은 우리가 십자가를 지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은 네가 용서하라고 가르칩니다. 주님의 자비를 더 많이 체험했으니, 네가 한 알의 밀알이 되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그렇게 내가 무조건 양보하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면 나는 무엇입니까 라고 물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주님이 그들을 위하여 생명까지 주셨기 때문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낮고 천한 세상에 내려 오셨습니다. 우리 같이 더러운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하여, 죄인의 형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인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속에 깊이 들어오셔서 우리의 죄와 악함을 모두 당신의 십자가의 피로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를 용서해 주심으로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흐르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신자의 삶은 그 십자가죽음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나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와 꼭 같이 죽어,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나에게 남겨주신 사랑이 나의 죽음을 통해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고, 그들도 죽어 또 다른 살아있는 사람에게 전달되어, 그도 죽어 그 사랑이 계속해서 흐르게 하는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들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밤하늘을 보면 아름다운 별들이 하늘에 가득합니다. 그 별들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아십니까? 먼저 그 별은 거대한 별 구름에서 태어납니다. 작은 물질들이 우주 공간에 모여 있고, 아무것도 없는 우주 공간에 모여 있는 작은 별들은, 별 하나가 수명을 다하고 죽으면서 거대한 폭발을 일으킵니다. 태양도 수명이 다해서 폭발을 하고 죽게 되면, 그러면 그 때에 폭발한 것이 수 금 지 화 이 모든 별들을 전부 다 태양 안에 가둘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태양으로 변했다가 폭발하면서 사라집니다. 그렇게 사라지는 별들로 말미암아 작은 별 구름들이 뭉치게 되고, 작은 그 구름들이 핵융합을 일으키면서, 새로운 별들을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별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별들이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 전체는 약60조개의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세포는 뇌세포만을 빼고는, 6개월만 지나면 우리의 몸에 6개월 전에 있었던 동일한 세포는 없을 정도로 죽었다 살았다 하는 과정을 계속 되풀이 하게 되는 것인데, 그래서 우리의 몸을 비유하자면 60조개로 된 꼬마전구들이 한 덩어리를 이루며 깜빡이는 겁니다. 끊임없이, 이것이 바로 세포의 죽음과 생성입니다. 이 60조개의 세포 중 과학도 풀지 못하는 세포가 있는데, 세포의 죽음입니다. 세포의 죽음은 생물학에서 네크로시스의 죽음과 아프로토시스의 죽음이 있는데, 네크로시스의 죽음은 세포가 외부로부터 타격을 받거나 수명을 다해서 괴사하는 겁니다. 이것은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데, 아프로토시스의 죽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과학이 풀지 못하는 것인데, 원인이 무엇인지는 모르는데 아직도 멀쩡한 세포들이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자살할 때 화학 에너지가 나오고 이 에너지는 옆에 있는 세포의 공장을 돌리는 전원이 됩니다. 그래서 세포가 생성하고 그 세포가 다시 분열하여 죽은 세포를 대치합니다. 우리의 몸에 이상이 와서 이상하게 어느 한 부분의 세포들이 아무도 안 죽겠다고 몸부림을 치면서 서로 살기위해서 바깥에 있는 영양분들을 마구 빨아들이면서, 그 영양분들을 빠른 속도로 세포가 죽지 않으면서 번식하는데 이것이 바로 암입니다. 암!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안에 사는 이가 그리스도이니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자기 안에서 하나님 앞에 죽으려는 자기가 있기 때문에, 자기는 죽고 자기 안에 있는 예수는 또 다른 자기와 함께 충만하게 살아, 그래서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만이 존귀하게 되려고 하는 소명을 품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언제든지 악한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그런데 누군가가 스스로 자살해야 되는 겁니다. 그 때 이 교회는 그 사람이 자기를 죽임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고 끌어 앉는 아픔 이 모든 교회의 생명들이 유지되어가는 것입니다. 죽어보셨습니까? 주님이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남이 받지 못하는 사랑을 주시고, 남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알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그렇게 남들이 깨닫지 못하는 찬란한 빛을 깨닫게 하시고, 남들이 알지 못하는 사랑을 충만하게 받게 하셔서, 마지막에 우리를 어떻게 살게 하시려는 것일까요?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성형수술 잘해서 예쁜 자매가 되어서 부자 집에 시집가고,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전부일까요? 아니죠! 주님이 우리에게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큰 사랑과 자비를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도구로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찬양)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그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잘 죽으라고 우리를 살리셨고, 모두 베풀라고 우리에게 주셨고, 그리고 오래 참으라고 주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일생동안 우리의 삶에 성공과 보람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하면은 예수님 때문에 성공하고 번영하는 것에 두지 말고, 어떻게 하면 아무것도 아닌 더러운 내가 주님께 진리의 말씀과 은혜를 많이 받아서, 예수님이 지금 나의 삶의 현장에 계셨더라면 되셨을 그 됨됨이를 따라서, 하셨을 그 일의 본을 따라서, 내가 주님을 섬기며 살리라. 그것을 생각하면서 사는 겁니다. 그래서 감히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괜찮습니다. 저는 이미 주님께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나를 행복하게 하지 마시고, 나를 고통 가운데 견디게 하시면서라도 나를 사용하면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시고, 용서받지 못한 사람들을 용서하게 해 주옵소서! 그것이 하나님의 평화의 도구로 삼는 것이고, 그런 사람이 세상에서는 눈여겨 볼만한 장점을 가진 사람이 아닐 수도 있지만, 사람이 그 사람을 보는 크기가 하나님이 그 사람을 보는 크기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람 앞에는 작아도 주님의 눈앞에는 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어디서든지 잘 죽어 여러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사는 그런 도구가 되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