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9.6 미국 트리니티 신학교
용서받은 사람으로 살라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눅 7:36-50)
녹취자: 김미영
우리 모두 하나님에 관해서 공부하기 위해서 먼 조국을 떠나서 여기에 와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가 이 신학을 통해서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지 이 새벽에 잠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성전을 만들게 하셨고 이것은 이동식 성전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모세에게 아론에게 명하여 이 성전에, 성막에 등불을 어떻게 켜고 관리해야 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알다시피 성막은 이동식 성전이었고, 그 성막은 물돼지 가죽으로 덮개를 하였습니다. 어떠한 빛도 들어올 수 없게끔 설계되었고 또 어느 면에도 창문을 두지 않아서 완전히 바깥으로부터의 모든 빛이 차단된 가운데 제사장과 대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성막에서 섬겼습니다. 직사각형의 방은 두 개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성소라고 불리우는 큰 방과 그리고 하나는 지성소라고 불리우는 작은 방이었고 둘 사이에는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고, 이 커튼은 양쪽에서 황소가 잡아당겨도 찢어지지 않는 아주 탄탄한 그런 휘장이었습니다. 자 무엇인가 이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막을 싸게 하실 때에 바깥으로 이 빛을 완전히 차단하고 그리고 오직 규례를 따라 만든 등잔불로만 빛을 삼아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진리의 빛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며칠 전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칼빈 신학교 존 볼트 교수의 논문 하나를 읽었습니다. 솔라스크립투라라는 말에 대한 재조명이었습니다. 그 분의 긴 논문의 핵심을 요약하면 이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솔라스크립투라라는 말을 잘 못 이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솔라스크립투라라는 ‘오직 성경으로써’ 그런 뜻이지 단지 ‘성경만 가지고’ 그런 뜻은 아니라는 것이 논문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성경만을 가지고 학문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과 연관된 많은 학문을 같이 공부하지 않으면 성경만 가지고 하는 학문이 건전해질 가능성이 매우 약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학문에 대한 지식과 또 심지어 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공부해야 하는 모든 신학에 대해서 이 성경은 유일한 규범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은 노르마 노르만스 규범하는 규범이고, 우리의 신학은 노르마 노르마타 규범 규정된 그러한 규범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신학에 있어서 성경의 진리의 빛이 최종적인 권위가 되게끔 학문 활동을 하는 것, 그 진리를 밝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이 세상에 그를 만드셨을 때에 의도하신대로 살아가게 하는 것, 이것이 진리를 주신 목적입니다.
캄캄한 성막 안에서 제일 먼저 불을 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비로소 햇빛은 캄캄하게 차단되었지만 그 등잔불의 불빛을 받으면 성전 내부의 아주 아름다운 모습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각종 주님을 섬기는 도구들과 청색 홍색실로 짠 아름다운 인테리어가 찬란하게 드러나게 되겠죠? 이동식 성막은 바깥에서 보면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천막은 햇볕에 그을리고 비와 혹은 바람을 맞으며 칙칙한 모습으로 변해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내부는 찬란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을 터인데 어둠속에서 그 아름다움을 보여준 것이 성경진리의 그 등불이었던 것처럼 성경진리의 참된 빛을 이 모든 세계의 지식에 비추게 될 때에 그 속에 있는 찬란한 아름다움이 아주 아름답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저는 60을 바라보지만 아직도 스스로 자신의 정체를 학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30대 후반에는 신학의 모든 분과들이 어떻게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에 대해 증거 하는지를 체험했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40대 후반에는 신학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학문들, 심지어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들이 어떻게 아름다운 상호연관을 이루면서 창조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지를 영적으로 경험하였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항상 생각하는 것이 주님의 아름다움입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베르스 필로스 푸스 에스트 아마도르띠 ‘참된 철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럼 우리들이 지식과 관련해서 생각해보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일방적으로 피지컬하게, 우리말로 하자면 심적으로 사랑하게 하는 방법인데 그것은 중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하실 그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는 힘을 우리에게 넣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이후에는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성향을 따라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계속 발견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학을 공부하면서 지식은 알지만 지식이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직관하고 그 속에서 어펙션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신학 하는 방식이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작년에 여기에 와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관해서 학생들에게 한 시간 특강을 하고 질문도 받았습니다. 그 때 제가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을 설명하면서 마지막에 내린 결론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을 우리들이 사랑하게 된 이유는 ‘그의 신학이 참 예쁘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받은 우리에게 주신,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없는 놀라운 감각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인식론의 놀라운 변화를 통해서, 인식론적인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스피리츄얼 센스입니다. 그 스피리츄얼 센스는 하나님의 뷰티를 향합니다. 그래서 회심하기 전에는 전혀 그럴 수 없었는데 회심하고 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 하나님의 예쁘심에 관하여 감각할 수 있는 탁월한 영적 지각력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 지각력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에 이 속에서 정동이 일어나면서 하나님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인간이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났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지성이 끊임없이 설복됨으로써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향한 정동을 느끼게 될 때에 그 때에 우리가 하나님을 날마다 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만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는 것만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가장 정수처럼 모아놓은 자료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중에서도 특별히 하나님의 구속의 드라마가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증언의 진수입니다. 그리고 이 아름다움의 진수는 이제 이 성경으로부터 시작해서 마치 헐몬산의 이슬이 흘러 넘쳐서 그것이 온 땅을 두루 적시는 것처럼 성경에서 흘러나와 신학을 적시고, 이 세상의 모든 학문을 적시고, 이 세상의 자연의 모든 세계 안에 흔적을 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증언으로 가득 차 있고 이 아름다움을 보는 것은 아는 것만큼만 보이기 때문에 이 지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은사 다음으로 주신 최고의 은사입니다.
오늘 성경은 바로 하나님이 그렇게 성막에서 등불을 켜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목회자는 구약시대의 제사장들과는 컨티뉴이티와 디스컨티뉴이티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제사라는 희생의 행위를 통해 중보적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는 우리는 더 이상 제사장이 아니지만, 우리를 통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게 하고 그래서 각각 그들을 그리스도의 신부로 맺어주게 해서 그를 하나님과 관련을 맺게 하는 언약의 사람들이 되게 한다는 면에서는 우리는 여전히 그런 지위를 어느 정도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마틴 루터가 만인 제사장의 교리를 말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 사도는 우리를 향해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신 그리스도의 빛을 선전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택하셨다’ 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이 진리의 빛을 찬란하게 밝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지혜로운 삶을 살고 그리고 자신이 또한 그 빛으로 모든 사람들을 이롭게 하여 그들도 하나님의 빛 안에서 살게 하는 것이 가장 하나님이 신학 공부하는 사람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중에 가장 신비한 것이 빛입니다. 이 빛은 그래서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이 말하기를 이 빛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철학적인 사물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이 빛은 그 본질을 우리들이 볼 수 없고, 오직 그것이 작용하는 효과를 통해서만 우리들이 그 빛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빛은 놀랍게도 파장인 동시에 파장만이 아니라 광자라고 하는 입자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은 동시에 또한 파장입니다. 1초에 30만 킬로미터를 달려가는 이 빛은 정말 신기한 사물이고 그래서 성경은 이 진리를 우리에게 예로 설명할 때 이것에 대한 하나의 비유로써 이 빛을 사용하였는데 신약에 나오는 포스, 구약에 나오는 이 오르는 성경 전체에서 광범위한 적응성을 가지고 진리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이 되어야 하고,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나는 빛으로 너희에게 왔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은 예수님 자신의 인덴션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 뿌리박고 있는 그 탄탄하고 풍부한, 이 소위 얘기하는 오르 신학에 의해서 그 연장선상에서 예수님이 포스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시편 119편에서 시인으로부터 이런 고백을 읽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길에 빛이요 내 발의 등이니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동시에 ‘너희는 빛이라’ 를 말씀하시면서 등불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하신 소위 얘기하는 등불이라는 것이 리크머스라고 하는 이 단어가 바로 이 리키미나라는 단어, 이것이 네르이고 거기서 말씀하시는 포스가 이 오르로 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빛은 단순한 객관적 존재가 아니라 객관적 존재와 인식하는 인간의 주체사이에 걸쳐있는 인식과 존재 사이에 걸쳐있는 독특한 사물입니다. 이 진리는 물론 객관적으로 진리가 존재하지만 객관적으로 진리가 존재하는 것만 가지고는 우리를 그 진리를 향하거나 혹은 그 진리가 있는 유익을 누리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진리는 객관적으로 있을 뿐만 아니라 주관적으로 인식되어서 나와 관련을 맺을 때에 진리가 가지고 있는 참된 힘과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3장에서 천국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그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이 길가에 떨어져 있다면 날아가 버리고 땅에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신학을 공부하면서 끊임없이 이 진리를 탐구하도록 참된 성경의 빛으로 비추어야 합니다. 신학은 신학 하나만을 공부해서는 절대로 그 신학의 본래의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가 없습니다. 이 신학은 모든 학문들의 통합으로써의 정점에 있기 때문에 이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신학과 관련된 인접 학문에 대한 풍부한 지식이 필요하고 그렇게 될 때에 이 신학 자체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과 이 세계와의 연관성이 찬란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틈나는 대로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모든 지식은 염원 그 자체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하나인 특성 인테그리따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함께 공부하면서 모든 학문 속에서 신학을, 신학 속에서 모든 학문을 읽어내는 그런 지혜를 우리들이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가서 그런 자기가 배운 신학 하나를 학원 강사처럼 가르치는 것으로써 일생의 과업을 삼는다면 저의 충고가 별로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역이 정말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신학이 될 지에 대해서는 나는 많은 회의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이 신학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신학을 주신 본래의 목적을 완수해가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오늘 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설하는 나의 설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여러분 신학을 많이 공부해서 궁극적으로 무얼 하려고 합니까? 그것도 어떻게 보면 이 세상과 함께 지나가는 많은 지식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신학을 공부하는 궁극적인 유용성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신학공부를 하는 유연성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을 계승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신학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은 이중적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고,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람 됨됨이 자체가 온전하고 그가 하나님을 위해서 행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온전하게 행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성서를 우리에게 주신 목적이고 이것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즉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방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신학은 어떤 의미에서는 학문이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학문이 아닙니다. 이 두 가지 성격을 적절하게 이해하면서 신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우리는 어리석게도 신학에 합당한 방법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하는 학문 활동과 동일한 원리를 가지고 신학을 공부하므로 거기에서 목표 하는 바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올바른 성과를 얻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학문들은 각각 자기 나름대로의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그 어느 학문도 신학만큼 본질적이고 통합적이지를 않습니다. 철학은 진리에 대해서 말하지만 신학은 그 진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신학은 단지 인간의 이성의 추론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한 하나님을 향한 직접적인 지식을, 신앙을 수단으로 해서 전수받음으로써 이 신학의 가장 중요한 대로들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이 신학을 하면서 진리의 빛을 가진다 하는 것은 단지 학문을 부지런히 탐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대면하여 매일매일 거기에서 인간의 모든 인간의 영혼에 직접적으로 계시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진리의 전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아버지 같고 때로는 어머니 같은 하나님의 속성을 경험하면서 그 진리가 가진 함의하는 위대한 뜻들을 자신에게 적용시키면서 살아가게 될 때에 이성의 활동을 통해 배우는 많은 신학적인 지식은 바로 그러한 명제에 걸림으로 말미암아서 무슨 지식을 공부하든지 간에 그것이 이성에 맴도는 지식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그런 삶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은 이 진리의 빛을 간직한 크기가 신학적 지식의 양의 축적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의 질은 지식의 양의 크기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붙들고 있는 진리의 빛의 크기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에 신학 활동을 정말로 하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려고 한다면 철저하게 이 신학이 최종적으로 진리를 습득하는 수단이 되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배우기에 가장 적합한 마음은 그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격적인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 분을 본받으려고 하는 우리의 실제적인 삶의 자세가 이 진리를 터득하고 이 빛을 우리의 마음속에 함양하는 가장 훌륭한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더 많지만 두 번째로 넘어가면 하나님이 이 찬란한 등불의 빛을 하나님이 기름을 사용하셨습니다. 두말 할 필요 없이 이 기름은 성령을 예표 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우리 목회자의 사역이 더 확장해서 보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성도들의 삶이 이 진리와 함께 성령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실 때에 당신의 지혜와 그리고 사랑으로 창조하셨고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은 지성으로써 바로 이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여 세계를 창조하신 영원한 지혜를 파악하고, 한편으로는 성령을 통하여 자신의 의지를 변화시켜 거룩하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삶입니다.
한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고, 한 인간 존재의 가치는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선한 의지의 크기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종종 회개하라는 말을 듣습니다. 메타노에오라고 하는 이 단어는 원래 회개라는 뜻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이 말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노에오’가 바뀐다는 뜻입니다. 회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지성적인 특징입니다. 그 지성의 특징이 뭐냐하면 회개의 가장 두드러지는 표징이 뭐냐 하면 지성의 변화입니다. 예전에 생각하던 것과는 하나님을 믿고 난 다음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인간의 이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메타노에오 된다’ 라고 할 때 그렇게 메타노에오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이냐 이것이 ‘스피리츄얼 굳’ 영적인 선에 대한 바뀐 생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선이 많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영적인 선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공리적으로 유익하거나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이차적인 도덕 감정에 합치하기 때문에 그것을 선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함구적일 수가 없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관점에 따라서 많은 이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합치를 이룰 수가 없는 견해 입니다. 그러나 소위 ‘스피리츄얼 굳’ 이라고 하는 영적 선은 하나님을 기준으로 한 선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선에 가장 중요한 최고의 목표가 되고 다른 모든 것들이 하부적인 선으로써 거기에 굴복하는 전체적으로 일체를 이루는 그런 종류의 선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영적 선이라고 하는데 이 영적 선은 단순한 도덕 감정으로만 추론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그 분이 당신의 속성으로써 이 세계와 관계를 맺으신 그 모든 것을 성경을 통해 믿음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분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의 의의와 가치를 그 분이 나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그 우리와 전적인 타자이신 그 분의 의도에 나를 합치시킴으로써 도달하는 것이 영적인 선입니다. 그러니까 회개야말로 우리를 이 영적인 선으로 돌아가게 하는 놀라운 것입니다.
(예화) 돌아가신 하용조 목사님이 저한테 제 개인적인 사석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기는 ‘전 세계를 두루 돌아다녔지만 예수 때문에 공부하는 사람은 거의 못 봤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학위 때문에 공부하고 자기의 장래 때문에 공부하지 예수 때문에 공부하는 사람은 못 봤습니다.
물론 그 분의 그 평가는 무엇인가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으셨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 우리들이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그 분이 강조하고 싶으셨던 것은 그것입니다. 뭐냐 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모든 동기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 분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선순위가 바뀌지 않게 만드는 놀라운 우리의 영혼과 정신의 움직임이 ‘메타노에오’ 회개입니다 회개. 그렇기 때문에 매일 새벽 이렇게 나와서, 혹은 깊은 밤에 혹은 낮에 자기를 반성하고 깊이에 있어서는 매일매일 다르지만 우리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고 간절히 기도하는, 그러면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성찰하고 주님 앞에 올리는 눈물이 있는 이 회개는 이러한 자기 자신의 삶을 영적인 선에 끊임없이 어드저스트하는 행동입니다. 이것을 끊임없이 하면 조금씩 빗나가도 하나님 앞에 올바른 길을 가지만 사람 앞에 옳은 것 같아도 이러한 조종의 과정이 없으면 세월이 지나가면 천천히 이루어지긴 하지만 굉장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문을 두드릴 때에는 순수했던 젊은이들이 공부를 하고 난 다음에 마지막에 남은 것이라고는 병든 영혼과 망가진 지식의 체계, 거기에다가 올바른 신학을 하지 않으면 쓰레기 같은 자유주의 신학 이외에는 남은 것이 없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성령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크게 적셔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요한 칼빈의 글을 읽으면서 늘 지워지지 않는 인상 중에 하나는 그 사람이 비록 신사도 주의자나 오순절 주의자라고는 볼 수 없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성령의 은혜에 깊이 잠겨있고 그렇게 되기를 정말 열망하는 신학자, 그리고 그의 모든 경건한 삶과 아름다움이 바로 거기에서부터 흘러나온 그 열매로써 그의 인격과 삶에 흘러 넘쳤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들이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칼빈의 저작을 통해서 우리들이 받는 성령에 대한 인상은 무엇인가 성령을 자기 손아귀에 쥐고 뒤흔들면서 자기 마음먹은 대로 하는 그런 종류의 성령 운동가가 아니라 오히려 그 거룩하신 성령 앞에 자기를 완전히 복종시키고 그래서 자신이 성령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자신의 모든 언행과 심사, 인격 그리고 자신의 학문까지도 모두 주장해서 그 물이 자기를 흠뻑 적신, 그러면서도 자기를 그렇게 사로잡은 성령 때문에 교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성령 때문에 한없이 하나님 앞에 겸비해지는 사람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칼빈이 일차 제네바에서, 개혁운동에서 어떻게 보면 도중 하차해서 슬라스프로로 간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마틴부처 밑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제 소위 샤돌레토에서가 아니라는 것을 통해서 개신교들을 이론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에 그들은 칼빈 이외에는 이러한 신학적인 문제에 대해서 정당한 답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제 칼빈이 제네바로 다시 초청을 받습니다. 칼빈은 안 오려고 했습니다. 마틴 부처가 타일렀고 심지어는 아주 꾸짖어서 칼빈으로 하여금 돌아오게 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칼빈이 돌아온 후에 카톨릭 사람들이 칼빈을 만나러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문을 두드리니까 어떤 시종이 하나 내려오더랍니다. ‘얘야 칼빈 선생에게 우리가 왔다고 전하거라’ 그랬답니다. 그들의 눈에 보기에는 바짝 마르고 그리 큰 키도 아니고 구부정해보이고 남루한 옷차림의 사람이 ‘제가 칼빈인데요’. 그 때에 카톨릭의 사람들이 ‘제네바의 놀라운 힘이 저기에서 나오는구나.’ 라고 생각을 했답니다. 생각을 한 것을 누가 가서 들여다 봤겠습니까마는 누군가가 해석을 한 거죠.
성령은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가장 놀라운 일은 그리스도에 관해 증거 하는 일이고 모든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는 일이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일입니다. 누구도 이 성령과 가까이 하지 않고는 거룩해질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성령은 망가진 사람도 고칩니다. 죄지은 사람도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불러들이시고 불결한 사람은 당신이 씻어 정결케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신학을 하여야 하냐하면 매일 매일 성령의 물에 깊이 잠겨서 이 지적인 활동을 통해 교만해지거나 혹은 잘못 습득된 지식이 여러분의 영혼에 미칠 바람직하지 않은 영향들을 그 은혜의 물에서 탈색시켜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빼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령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저는 박사논문도 믿음으로 쓴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박사 논문을 쓰지는 않았지만 논문 쓴 후배들하고 많이 얘기해 보면 논문 속에 흐르는 수정같이 맑고 투명한 논리, 무엇에도 끊어지지 않는 캄캄한 명제는 어느 날 하나님이 직관적으로 주신 그리고 나머지 지적인 능력을 가지고 그것을 풀어가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박사논문도 잘 씁니다. 거짓말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저는 박사논문까지는 아니지만 책을 쓰면서 그런 것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하나님이 놀라운 지적 직관력들을 주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학문의 세계도 무슨 학문이든지 맨 꼭대기에 올라가면 최고의 권위자는 종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뭐 참고서적도 없지만 눈을 감고 읊으면 학문의 세계에 대한 정수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 것들은 이 신앙은 그런 특성들을 가장 고유하게 간직하고 있는 학문이기 때문에 성령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성령의 은혜로 자신이 녹고 변화되고 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하면 여기에 쓰여진 기름이 올리브 오일입니다. 그래서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이라고 했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세멘자이트자끄까띠뜨라고 나옵니다. 세멘은 기름이고 자이트는 올리브입니다. 자끄는 퓨어라는 뜻이고 까띠뜨라는 말이 문제인데 까따뜨라는 동사의 분사 수동태 남성형입니다. 그러면 까따뜨가 무슨 뜻이냐 하면 NIV 성경에서는 프레스라고 번역이 되었는데 잘못된 번역입니다. 킹 제임스 버전이 정확히 번역을 했는데 비튼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래서 까따뜨는 비트, 브레이크, 스트라이크 그런 뜻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올리브를 가지고 기름을 짤 때에는 절구에 넣어서 찧거나 아니면 다량으로 돌멩이 위에 놓고 연자 맷돌을 매 달아서 소나 말이 돌았습니다. 그럼 이게 밟고 지나가면서 깨뜨려지죠. 그럼 그것들이 한 곳으로 기름이 흘러 나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그대로 담습니다. 이게 세멘자이트자끄 입니다. 까띠뜨 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것들을 모아서 프레스에 놓고 누르면 더 많은 양의 기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기름은 성막에서 불을 지피는 데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양은 많아지지만 거기에 이물질이 들어가고 그러면 그을음이 나오고 그 밝기의 강도도 떨어지기 때문에 이런 기름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 주냐 하면 신학 활동에 있어서 드윙자라지에 있어서 자기 깨어짐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신학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마음은 어떤 마음이냐 하면 마음과 삶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그 사랑하는 마음으로 신학을 통해 탐구하고자 하는 진리에 합치된 상태, 이것을 라틴어로 베룸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이건 진실한 상태입니다. 베로서티라고도 말 할 수 있습니다.그런 진실한 상태가 되는 것이 신학을 하기에 가장 좋은 마음입니다.
우리는 이미 생애적으로 이 안에 거짓과 가식, 위선과 그리고 오류를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끊임없는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깨뜨려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소위 이 브로큰 에스, 자기 깨어짐이라고 하는 이 깨어짐은 깨어진다는 행위 자체가 파괴, 혹은 작용이나 기능, 힘, 이런 것들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것을 앤드류 머레이 같은 사람들은 자기 죽음이라고까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도바울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핵심이 무엇에 대한 죽음이냐하면 아무로스이, 자기 사랑에 대한 깨뜨려짐이고, 또 하나는 자기 의에 대한 깨뜨려짐입니다. 자기 사랑이 깨뜨려 짐으로써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타적인 삶을 살게 되어서 신학을 탐구하는 동기 자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이 되게끔 만들어주는 놀라운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을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순수한 사랑이 생겨나야지만 이것이 올바른 신학함입니다. 그래서 신학을 공부하고 나면 무릎을 꿇고 싶고, 좋은 책을 읽고 나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싶은 그런 방식으로 성경의 진리와 여러분의 배우는 신앙의 내용들을 연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기 의인데 내가 무엇을 이루었다고 하는 ‘이 정도면 하나님 앞에 나를 내세울만하다’ 라고 하는 자기 의에 대해서 계속 깨뜨려 질 때에 그 때에 우리의 신학 활동은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대로 가장 가까이 근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이 두 가지, 자기 사랑과 자기 의에 대해서 끊임없이 깨어짐으로써 우리의 신학 활동이 본래 신학을 연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에 부합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한 번 보십시오. 정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주님을 뵈오면 뵈올 수록 사랑의 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까?
제가 최근에 신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700페이지 짜리 책을 쓰고 있는데 지금 한 570페이지 썼습니다. 100여 페이지만 더 쓰면 마무리가 될 텐데요 그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많이 반성하게 되는 것이 뭐냐 하면 복음주의, 특히 개혁주의를 공부한다고 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정말 부끄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들이 처해있는 이 현실에 대한 고민이 너무 없습니다. 그리고 이 죄악 된 사상과 우리 사이에 담장을 높이 쌓고 차별성만을 강조하지 자신도 그렇게 타락한 세상의 한 구성원이고 ‘어떻게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 일어나는 이 비극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진지하게 고민해야 될 것인가’ 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흔적을 읽을 수 없는 것이 소위 복음주의 신학과 개혁신학에 대한 자괴감중의 하나로 저에게 작용을 합니다. 오히려 레비나스 같은 사람을 통해서 있는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훨씬 가슴에 와 닿습니다. 레비나스는 제가 보기에는 하나님을 배제해버린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입니다. 사실은 엉터리 신학입니다. 그런 게 어디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 없는 타자라고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내키는 것은 존경하게 되는 것은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살면서 그의 시대보다 오늘날은 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데 그는 인류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에서 이렇게 찢어지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왜 저 사람보다 훌륭한 신학을 공부한다는 나에게는 그런 마음이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투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저렇게 진실하게 역사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모투만이 나치의 문제를 가지고 저렇게 고민했던 것처럼 나는 일본의 문제를 가지고 공부했을까? 최근에 예일대학의 교수로 있는 미러스라보볼프라고 하는 사람이 쓴 ‘포용과 배제’ 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 책이 결코 쉬운 내용의 책은 아니고 잘 읽히는 책은 아니지만 그 사람이 내리는 하나의 결론이 우리의 마음에 깊이 와 닿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결코 이렇게 악이 횡횡하는 세상을 끊임없는 친절과 자비로만 대해 주시지는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만이 아니라 악을 행하고 죄를 짓고 이웃에게 고통을 주고 행복을 짓밟으면 하나님이 어느 날 강력한, 소위 여호와의 날을 임하게 하셔서 심판하고 신원하시는데, 마치 포도즙틀을 밟아 그 포도즙들이 튀기듯이 그렇게 악인들을 짓밟아 그 피를 낭자하게 하면서 하나님이 심판의 역사를 수행하시는 때가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요한계시록에 쓴 백마탄자로서 심판하는자로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이야기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이것이 명백한 계시적인 사실이고 역사적인 사실이지만,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의 입장에서는 이 세상의 원수들과 악이 횡횡하는 많은 세계를 보면서 우리들이 취할 수 있는 것은 그렇다고 해서 모든 악인들을 짓밟아 피를 낭자하게 하는 칼을 든 백마탄 기사의 깃발아래 모여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깃발아래 모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혜와 사랑은 바로 이렇게 고통하는 인류를 포용하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게 하기 위함인데 이런 신학의 이상들을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결국은 자기 자신이 끊임없이 깨뜨려져 자기만을 사랑하고 자기만을 위하는 이웃 속에서 살아가려고 하는, 자기 자신을 이 신학 활동속에서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 박는 자기 죽음이 동반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틴루터가 자기의 책속에서 그런 말을 남겼습니다. ‘한 사람이 신학자가 되는 것은 독서하고 기도하고 명상함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함께 죽고 다시 태어나고 저주받는 것을 통하여 한사람의 신학자가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공부하느라고 바쁘지만 그 속에 매몰되어서 그 이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면서 신학을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끊임없이 거기서 튕겨 나와서 그래서 여러분이 공부하고 있는 학문 자체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리고 심지어는 그 공부를 수행하고 있는 여러분 자신이 자기가 아닌 것처럼 객관화해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가능합니다. 시간 속에서 신학활동을 하지만 성령은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해 주고 변하는 인간의 논리를 따라 공부하지만,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불변하는 진리와 관계를 맺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자기 성찰의 객관화가 이루어질 때 그 때 여러분이 무슨 신학을 공부하든지 그것이 내 마음속에 모두 쌓여서 많은 사람들에게 그 진리에 대해서 말해주고 그 진리를 가르쳐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신학을 하는 유익이고 아름다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기가 깨뜨려지는 진정한 참회의 삶, 기도의 생활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학교에 오면 가장 마음에 깊이 다가오는 게 뭐냐 하면 현저한 기도의 부족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칼빈 신학교를 갔더니 60명 가까이 새벽기도를 나왔더라고요. 내가 온다 그러니까 더 많이 나왔겠죠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저도 시간을 아껴 쓰면서 공부하는데 기도를 많이 하잖아요? 하면 하나님이 다른데서 시간을 보충해주십니다. 해보세요. 절대 여러분이 새벽에, 혹은 깊은 밤에 한 시간 정도 떼어놓고 기도했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시간이 모자라서 할 일을 못하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필요하면 하나님이 놀랍게 은혜를 주셔서 그 시작을 축복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축복을 받았을 때 받지 않았을 때에는 보리떡 2개와 물고기 2마리와, 오병이어가 다섯 개의 보리떡과 물고기 두 마리 그것뿐이었습니다. 주님이 축복해주시니까 수많은 사람이 먹었던 것입니다. 기도는 여러분의 시간에 오병이어의 축복을 만들어줍니다. 그러니까 한 시간 정도를 떼어내어서 두 시간하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떼어내어서 자신과 약속하고 마음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온전히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그 성품을 배워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신학을 공부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절대 합리화시키지 말고 자기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됩니다.
제가 오늘날 이렇게 부끄럽게나마 목회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수 있게끔 해 주시고 목회에서도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극복하면서 살게 해 주신 것은 신학 공부하는 그 7년 동안에 제가 드렸던 그 기도들이 쌓여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눈물이 있는 신학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유학생활에서 겪는 많은 고통과 어려움들을 십자가 삼으셔서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삶으로 변화되게 만들어 주시고, 우리를 바꾸어 가시는 것입니다. 더하고 싶은데 기운이 없어서 못하겠습니다. 그만하겠습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