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 상처를 극복한 사람
(2000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하나님이 함께 하신 사람(창39:5) 2000.10.30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저녁) 1
2.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산 사람(창39:9下) 2000.10.31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저녁) 15
3. 신령한 사람 요셉(창41:38, 시105:19下) 2000.11.1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저녁) 28
4.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창45:5上) 2000.11.2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저녁) 43
5. 용서의 사람(창50:19-21下) 2000.11.3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저녁) 62
1.하나님이 함께 하신 사람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39:5)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신앙의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요셉은 언제나 우리에게 향기로운 사람입니다. 신앙이 무엇인지를 말이 아니라 삶으로서 그것도 단거리 경주 같은 삶이 아니라 마라톤과 같은 장거리의 삶으로서 우리에게 보여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전 한때 이 요셉이란 사람에게 아주 깊이 빠졌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전 더더욱 이 요셉에 대해서는 깨달은 바도 있거니와 또 요셉에 대해서는 배우는 바가 참 많습니다. 그럼 이 요셉을 가지고 이번 사경회 때 요셉을 우리가 강사로 모시고 한번 은혜를 받아볼까 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이 요셉은 야곱의 아들이었습니다. 특별히 요셉은 야곱의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그 이유는 레아와 라헬이라고 하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레아에게 먼저 장가를 들고 그 후에 라헬에게도 장가를 들었고 두 여자가 각기 데리고 온 여종이 있었는데 빌하와 실바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불행하게도 네 여자에게 에워쌓여서 결혼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나머지 셋은 전부다 껍데기였고 진짜 알맹이는 자기가 그토록 사랑했던 라헬이었습니다. 그 라헬을 얻기 위해서 나머지 셋은 모두 사은품으로 쫓아온 귀찮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래도 애를 낳는 재주들은 다 있어서 세 여자가 애를 쑥쑥 잘 낳습니다. 끝까지 아이를 낳지 못한 여자가 있었으니 라헬이었습니다. 그 라헬을 야곱이 정말 깊이 사랑한 사람이었고 성경에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에는 첫사랑이었습니다.
바로 이 요셉이 베냐민과 함께 그렇게 사랑하는 라헬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기 때문에 야곱이 이 요셉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또 사랑한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나머지 자식들은 비교적 결혼 초에 쑥쑥 낳은 애들인데 라헬에게서 낳은 요셉과 베냐민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전 아직 노년에 아이를 낳아보지 않아서 그게 얼마나 귀여운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노년에 아이를 낳은 사람들을 보면 병적으로 아이 사랑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도 예외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천성적으로 야곱은 잔재주도 많고 그리고 야비한 성격을 지닌 면도 있지만 또 정에 약한 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기다리는 자식이 낳았는데 그것도 아들이었고 또 노년에 아들이었는데 또 하나 더 사랑을 받을만한 것은 다른 아들들보다 요셉이 상당히 지혜있는 아들이었던 것처럼 여겨지고 후에 삶을 보면 그가 또한 다른 모든 아들들보다도 뛰어난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것으로 미루어볼 때 야곱이 요셉을 향한 사랑이 병적이었던 것은 이해할만 했습니다. 다른 자식에게는 입히지 않는 아름다운 채색옷을 입히고 늘 그와 가까히 하면서 지내서 형들에게 시기를 받을 정도로 편애를 한 사람이 바로 야곱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로부터 거의 독점적인 사랑을 받다가 그만 이 사람이 형들의 모함을 받아서 그래서 이제 애굽에까지 팔려오게 되어서 결국은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오게 됩니다.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오늘 성경이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 요셉의 영성의 특징은 무엇인가 하면 다른 모든 믿음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지만 아주 실제적인 삶 속에 녹아든 영성입니다. 신앙이 무엇인지를 추상적으로 관념적으로 보여준 사람이 아니고 생생한 삶의 현장에서 보여준 사람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면 이 요셉이 이적적인 해석의 꿈에 능력이라든지 신령한 신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라든지 이런 특징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요셉은 선지자도 아니고 제사장도 아닙니다. 그는 그저 족장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오히려 예레미야나 이사야나 이런 사람들의 삶이 성직자의 삶 속에 보여준 영성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 이 요셉은 여러분과 같은 평신도의 삶으로서 보여준 영성인의 아주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피부에 와닿는 현실적인 신앙의 교훈을 요셉의 경험을 통해서 많이 얻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요셉이 항상 저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직장인이었습니다. 요셉처럼만 직장 생활을 할 수만 있다면 참 좋겠다. 결국 뭐 그 직장에서 국무총리는 못해봤습니다만 그래도 하여튼 어째든 비슷하게 살아보려고 애를 많이 쓴 사람입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집에 팔려왔는데 애굽의 시위대장인이니까 대단한 것입니다. 당시에 애굽의 바로 그러면 그 권세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미국 대통령, 소련 대통령, 중국 주석 다 합쳐놓은 것 보다도 훨씬 더 권세가 강력한 거의 신의 존재에 가까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의 시위 대장이라고 했으니까 지금으로 말하자면 경호실장 쯤 됐을텐데 그 권세라고 하는 것은 가히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 집에 노예로 팔려가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서 맨 처음 노예로 팔려갔을 때 그가 사람 대접을 받았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일을 하고 있고 노예들도 얼마나 많을텐데 거기에서 방금 팔려온 젊기는 하지만 청년인 그 노예, 그것도 함족이 아니라 셈족인 히브리 사람의 노예, 분명히 맨 처음 갔을 때는 언어도 잘 통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는 그런 노예가 팔려왔을 때 사실 사람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옛날에 저 알던 분이 오래 전에 서울 시장의 집에 식모살이를 했는데 거기에 가니까 식모 일을 하는 사람이 5-9명이라고 그랬는데 대국인 애굽의 시위 대장의 집이니 거기에는 층층 시하에 얼마나 많은 위계질서가 있을 것이며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겠습니까? 거기에서 두각을 나타낸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고 그저 맞아죽지나 않고 마당이라도 쓸다가 제명에 죽으면 그것만 해도 복이라고 여겨야 할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면서 성경을 읽으면 오늘 읽은 이 본문이 얼마나 엄청난 사건에 대한 기록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팔려가서 그는 아마 가장 천한 일에 종사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런 사회일수록 더더욱 위계질서는 엄격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먼저 들어온 노예, 나중 들어온 노예 아마 사람 사는 곳이니까 어디든지 그렇게 괄시가 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그 많은 노예들 가운데서 요셉을 눈여겨보았습니다. 눈여겨본 것은 요셉이 무슨 노예로 팔려올 때 추천서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주인이 눈여겨 보았던 것이 아니라 눈여결 볼만한 무엇인가가 요셉에게 항상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그를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요셉의 삶을 보면서 처음에는 스쳐지나 갔겠지만 한번, 두 번 세 번 여러 가지의 사건들이 반복이 되면서 많은 노예 중에서 팔려온 그 청년 히브리 노예가 자꾸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고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여호와의 이름도 모르는 애굽 땅에 보디발의 눈에 요셉의 그 무엇인가가 보였습니다. 첫째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보디발에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인데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는가, 그것은 이런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을 안했습니다. 우연히라고 생각을 하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비로소 저 사람은 혼자서 살아가는 사람, 혼자서 타향에 팔려온 노예가 아니라 여호와라 이름하는 한 신이 저와 함께 하는 사람이다라는 인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잘 보십시오. 이게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제적인 원리입니다.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 크리스챤이라고 하는 것을 사람들이 아는데 한번 정도 의로운 일을 할 경우에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어! 저 친구 제법이네” 그래 버립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단번에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불의한 일을 보면서 그냥 지나치지를 않고 그것을 바르게 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보면서 “어! 사람 그래도 정신이 살아있네. 역시 젊어” 이렇게 넘어갑니다. 세 번 네 번 되풀이 되면 “어! 이 사람이 진실한 사람이구나. 그 사람은 참 정직한 사람이구나. 그 사람은 불의한 것을 못 보는 사람이야” 이 정도 밖에 안 됩니다. 장구한 세월이 흘러야지만 비로소 저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모든 방식,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데 그것을 쭉 실로 꿰어서 이어보니까 그게 우발적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나름대로 거기에는 분명한 원칙이 서 있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자기가 손해를 입었는데도 온유한가 하면, 어떤 때는 자기가 손해를 입지도 않았는데 사자와 같이 분노하면서 의로운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을 꿰어보니까 처음에는 그것이 무원칙한 줄 알았는데 오래 동안 두고 보니까 분명히 그의 분노, 그의 기쁨, 그의 삶의 목표, 그의 삶의 방식, 처세술에 일관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저렇게 일관성을 갖게 하는가. 거기에 대한 답이 마지막으로 얻어지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 저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구나” 그러면서 신앙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의 착한 행실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그러는데 그것은 우발적으로 탁 튀쳐 나오는 일관성이 없는 한 두 번의 종교적인 만용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선행을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광을 돌린다’라는 그 말은 제가 말씀드리지만 ‘인정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저들의 삶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는 한 두 번의 선행이나 반짝하는 어떤 욱 하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그런 우발적인 선행을 통해서 사람들이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지금 몇 년이나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이렇게 인정함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상당한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무엇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까? 요셉이 나중에 모함을 받아서 감옥 속에 들어가는데 감옥 속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바로 앞에 섰을 때 30세가 되었습니다. 17살 때 스토리부터 시작을 하는데, 그러니까 얼마나 장구한 세월이 고난 속에서 지나갔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모든 삶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보디발이 ‘요셉’ 그러면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무엇인가 하면 ‘아!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이 그와 항상 함께 하는 사람이다.’ 이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에 와서 박수 열심히 치는 신앙 생활이 아닙니다. 일이 생기면 기도원으로 뛰어가는 그 신앙이 아닙니다. 또 무슨 어려움만 있으면 기도해달라고 아무에게나 가서 머리를 뒤미는 그런 신앙도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공급받은 영적인 특성들이 현실적인 자신의 삶 속으로 녹아든 신앙 생활입니다. 그래서 장구한 삶을 통해서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우리라고 말할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사람들임을 느끼게 해주는 것입니다. 말이 조금 어렵지요?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살고 있으면서도 왠지 우리를 끌어안고 너와 나는 우리라고 말할 수 없게 만드는 그 무엇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똑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삶의 원리가 다릅니다. 실천하는 목표가 다릅니다. 삶에 있어서 이 삶을 보람있게 이어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자원을 공급받는 통로가 다릅니다. 기쁨의 이유가 다르고 보람의 이유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모두 일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선한 행실로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잘 생각해보십시오. 무엇을 하며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의 삶을 사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요셉은 사회적인 지위로 말하자면 보디발의 집에 노예에 불과했습니다. 노예 중에서도 가장 서열이 낮은 바닥 노예에 불과했습니다. 신참 노예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그 노예의 신분으로서 보디발을 비롯해서 그 집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던 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 성직자보다도 나은 삶입니다. 우리의 삶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을 하며 살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의 삶을 살았느냐입니다. 똥을 퍼도 어떤 방식의 삶을 살았는가. 자신의 삶에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그 사람의 삶, 그 사람의 삶이 성공한 삶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결코 예수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는 사람의 삶, 그런 것들은 어떤 지위를 이 세상에서 누리고 살든지 그것은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셉의 삶이 그런 삶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게 히브리 말로는 ‘히트 할레크’ 라는 단어인데 이게 구약에 나오는 동사 가운데 아주 심오한 의미를 가진 동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무에게나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 하나님이 함께 한 사람’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한다. 동행한다는 말이 ‘히트 할레크’인데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표현은 국부적인 표현이 아니라 총체적인 의미를 가진 표현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그 사람의 삶에 있어서 한 두가지 장점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인정머리는 없는데 그래도 뭐가 있는가 하면 세상에 부지런합니다.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하다못해 아궁이라도 쑤셔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그런 아주 부지런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또 부지런하지도 않고 정직하지도 않고 유능하지도 않은데 인정이 많습니다. 불쌍한 사람만 보면 그저 남의 것이라도 퍼주고 싶어하는 사람, 그런 사람 돈이 없으면 남의 집에서 꿔서 쌀을 사다가 주는 그런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도 훌륭합니다. 그런데 한 두가지 탁월한 특징을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사람을 하나님이 함께 한 사람, 하나님이 동행한 사람 이렇게 부르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전포괄적인 개념입니다. 어떻게 포괄적인 개념인가 하면 우리로 말하자면, 지금 우리로 표현하자면 그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한 두가지 교회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충성을 하는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그런데 직장에 가서는 탈세하고 아니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반대로 그렇게 기도할 때는 눈물을 펑펑 흘리는데 인정머리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이 사는 가련한 인생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도 한 두가지의 점에 있어서 다른 사람이 쫓아가기 어려운 탁월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라고 부르지를 않습니다. 그런 영광스런 호칭을 써주지를 않습니다. 총체적인 것입니다. 어떻게 총체적인가 하면 풍부한 영적인 삶, 그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신령한 은혜 속에서 주님과의 교제의 세계를 의지하며 사는 사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는 삶을 삶 구석구석에서 구현하는 사람, 물론 그가 완전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다윗은 왜 타락했습니까? 요셉에게는 실수가 없었나요.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완전하지 않는데 인격과 삶이 익어갈 때에 함께 익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양한 성품을 본받으면서 그 본받은데로 그 하나님의 성품이 그의 전 영적인 삶의 영역, 전체의 육신적인 삶의 모든 영역과 그의 인격 속에 모두 영향을 골고루 미친 사람, 그 속에서 하나님 앞에 성숙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굳이 이렇게 복잡하게 설명을 하지 않아도 만약에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고 그럴 때 누구냐고 물어볼 때에 여러분들이 더 정확하게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표현을 못해서 지금 제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떡일 뿐이지 다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누구냐? 당신은 누구를 향해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별명을 붙이겠느냐고 그럴 때 가난한 사람을 붙잡고 펑펑 울면서 쌀까지 퍼주고 남의 돈을 꾸고 카드로 뽑아주어도 기도 절대로 안 하는 사람, 그런 사람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그런 별명을 붙여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 눈물 펑펑 흘리고 눈물닦으면서 탈세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에 와서는 몸바쳐 충성하고 회사에서는 보따리 싸놓고 퇴근만 기다리는 사람,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더 정확하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든 직장에서든 어디에든 심지어는 감옥 속에 갖다 놓아도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정체성을 숨길 수 없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호칭을 이 요셉이 받은 것입니다. 어디에서? 노예의 처지에서.
사실 우리가 은혜를 왜 받습니까? 사실 이것이 결국은 우리들이 긍국적으로 살아가야 할 삶의 모습이 아닌가요? 만약에 우리의 영적인 삶이 이렇게 우리의 현실적인 삶 속으로 녹아들어가는 실제적인 영적인 삶이라고 할 것 같으면 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받는 것을 조롱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정말 우리가 마음에 그리고 있는 신앙 생활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욕먹지 않을 정도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입니까? 교회에 부담끼치지 않을 만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까? 무엇입니까? 우리의 신앙 생활이 진정한 목표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함을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여호와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람으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정한 목표고 우리의 모든 영적인 삶과 기독교 적인 아름다운 모든 교훈은 바로 이 삶의 목표의 실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산다라고 할 때 이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런 그림의 삶이 없이는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디발이 본 것입니다.
두 번째 보디발이 또 본 것은 하나님이 그를 형통케 하시는 것을 본 것입니다. 사실 이 점에서 보디발이 실제적인 매력을 느꼈을 것 같습니다. “형통케 하심을 보았다” 여기서 ‘형통케 한다’는 말은 히브리 말로 표현하자면 이런 뜻입니다. 장애물이 없이 쫙 뻗은 길을 깔아주는 것,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차를 몰고 갈 때 길에 바위가 있고 그러면 덜거덕 거려서 10킬로도 못 갑니다. 물론 갈 수는 있습니다. 차를 다시 안 타려고 마음먹으면 뭐 100킬로는 못 달리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반대로 쭉 뻗은 고속도로, 휘지도 않고 출렁거리지도 않고 쭉 바로 가는 길입니다. 길도 한 12차선 될 정도로 넓습니다. 운전대 놓고도 그냥 똑바로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런 길이 앞에 펼쳐지는 것, 그게 바로 형통케하다라는 히브리 말의 뜻입니다.
그런데 보디발이 고용주가 아닙니까? 노예를 10만원이라도 주고 사왔을 때의 계산은 무엇입니까? 이놈을 부려먹으면 10만원 가치는 있겠다고 생각이 들으니까 사오지, 돼지라면 누워서 밥먹고 나면 근수를 채워주면 잡아나 먹는다고 하지만 인간이 일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체중만 늘어나는데 그것을 뭐에다가 써먹겠습니까? 상인에게서 요셉을 딱 샀을 때에는 이 주인 보디발에게는 지불한 금액과 함께 그가 최소한 이정도의 유익을 우리의 집안에 주어야 한다라는 계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보다도 훨씬 넘치게 노예를 산 보람을 안겨준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형통케하셨기 때문에,
여러분, 이 세상은 냉혹한 것입니다. 이 교회나 냉혹하지 않지 세상은 냉혹한 것입니다. 교회도 냉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용서하고 부족하면 바로 저런 지체를 위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말도 안 되는 사람 만나서 자꾸 힘들게 만들면 ‘그런 지체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주셨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는 아니지만 비교적 있는데가 교회입니다. 세상은 어떻습니까? 냉혹합니다.
우리 뭐 I.M.F가 되니까 사람을 쫓겨내서 냉혹하다고 그러는데 외국에 가보면 이것은 너무나 인간적인 것입니다. 외국 사람들이 와서 기업을 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을 짜르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외국에는 주유소나 식당 같은 곳에서 일하다가 두 번 세 번 정도 지각하면 출근하는 사람에게 아예 문 앞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너 짤렸어. 언제 어제 밤에 짤렸어. 빨리 가. 내 물건은 어떻게 하냐고 그러면 물건은 신경쓰지 말라고 우편으로 부쳐줄테니까 들어오지 말고 너는 가라고 하면 끝입니다.
세상은 우리들에 대해서 우호적일 수가 없습니다. 냉혹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냉혹한데 우리들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말 이익을 남겨주는 사람인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가정에서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는 것이 가정 식구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습니까, 예수 믿기 전보다 더 많이 희생하십니까, 예수 믿기 전보다 더 많이 가족들을 섬기나요, 예수 믿기 전보다 가족들을 위해서 더 많이 수고합니까, 더 많이 사랑합니까? 직장에 다니면 직장이 여러분들이 신앙 생활을 한다는 이유 때문에 피해만 보는 상황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직장에서 오라고 그러면 비상 소집하면 잘 안 나가는 사람이 교회에 비상 소집하면다 팽개치고 뛰어오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믿음 좋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합니까? 직장에 가서 교회 주보나 만들고 있고 애들에게 편지나 쓰고 있고 그렇게 하면 되겠는냐는 것입니다. 내가 고용주라면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짤를 것입니다. 이익을 안 주는데, 그런 삶은 곤란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이 계시고 거기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 소명은 그 삶이 어디든지 간에 동일한 것입니다.
한 사람이 교회에서 뜨겁고 열렬한 열심히 있고 그리고 직장에서 정말 쓸모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참된 모습은 교회에서의 모습이 참 모습이 아니라 직장에서의 그 모습이 참 모습입니다. 이거 나머지 맨 마지막 것을 기초로 해서 여기에 일어나는 일은 거품입니다. 그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이 보디발이 요셉을 보면서 그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무엇인가 하면 자신에게 그 아주 유익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점점 더 소중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게 결국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교훈과도 일치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소금이라” 영혼에 참된 변화를 받은 사람이 결국은 캄캄한 세상에서 빛으로 나타나고 썩어가는 세상에서 소금으로 나타나고 결국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신령하고 거룩한 은혜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그대로 자신이 이제 그리스도를 만나고 변화된 존재라고 입증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보여줄 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이야기는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주님을 믿고 그 은혜가 정말 참된 은혜였다라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여러분들 때문에 가정에 있는 사람들은 가정에 있는 사람들대로 유익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단 하나 예외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믿는 신앙의 내용 그 자체 때문에, 복음의 내용 자체가 싫어서 여러분들에 대해서 박해하는 것에 여러분 자신은 책임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외 것들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희생하고 양보하고 해서 여러분 자신이 주님을 믿으면서 사는 것이 여러분의 가족들에게 유익이 될 수가 있어야 합니다. 하다못해 예수 믿고 나니까 술 안 먹고 절약한 돈이라도 더 집에다가 갖다주고 술 끊었을 것 아닙니까? 예수 믿었으니까 그리고 하다못해 가족들을 위해서 뭔가를 섬겨도 좀더 희생적인 정신으로 섬기는 실제적인 유익을 여러분들의 가족들이 받을 수 있도록 살아갈 때 거기에서 여러분들이 매우 유익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 모르는 여러분들의 가족들이 안다는 것입니다.
(예화: 직장에 다니실 때 직장에 신우회가 조직되어 있었는데 그 모임을 통해 변화를 받고 또 그 모임을 인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많이 은혜를 주셔서 교회에서 은혜받 지 못한 사람들도 은혜를 주셔서 변화되게 하셨는데 직장의 동료들에게 비가 오 면 돈을 걷어 우산을 사서 빌려주고 화장실에 수건을 사서 걸어놓고 사용하게 하 는데 그 중에서도 불평하는 사람들로 인해 하루에 두 번씩 수건을 갈아 놓고 하 면서 직장에 동료들을 섬기다가 직장을 나와서 이후에 그 직장에 최고의 책임자 로 있던 어느 사람이 회사를 그만 두면서 직원들에게 남긴 말이 자기가 이곳에 근무하면서 신우회 직원들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며 모든 직원들이 그들과 같았 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신우회에 피아노와 세탁기를 사주고 떠나며 넓고 깨끗한 회의실을 신우회가 사용하라는 특권까지 허락했다는 이야기)
세상 사람들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을 통해서 유익을 얻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요셉이 믿음을 지켰는지 기도에 영감을 받았는지 펑펑 우는 회개의 영을 가졌어도 매일 눈물이나 흘리고 다니면서 일하라고 그러면 구석에 앉아서 기도나 하고 있고 성경이나 본다고 그러고 교회에서 수련회 간다고 도망가고 그랬으면 능지처참을 했지, 내가 너를 얼마를 주고 사왔는데 밥값도 못한다고 그러지요. 그런데 이 사람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우리 좀 돌아보십시오. 우리 예수님 믿는 것, 이거 일상적인 우리의 삶을 잘라먹으면서 믿는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가정 주부들 예수 믿으려면 진짜 부지런해야 합니다. 낮잠 자던 사람들 낮잠을 포기하고 낮잠 시간에 기도하고 그리고 집안을 반짝반짝하게 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복음의 내용을 제외하고는 삶의 방식 때문에 불편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에 타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 그 점에 있어서 승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궁극적인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무엇 때문에 보디발의 집에 큰 유익을 줄 수가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그를 형통케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머리 좋은 사람들이 다 사업을 성공하나요? 요즘 머리 좋은 사람들이 신문에 많이 났습니다. 머리 좋다고 해서 사업에 성공하는 것이 아니고 성실하다고 해서 돈을 모으는 것도 아닙니다. 충성을 잘한다고 해서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뭐가 필요한가. 요셉이 그러한 신앙의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이 그를 형통케 해주신 것입니다.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형통케한다”라고 하는 것 여러분 이해가 가지 않습니까? 아니 제 경험을 통해서 한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예화: 전도사 시절 담임목사님이 너무 힘드셔서 새벽 기도를 부교역자들이 돌아가면서 인도하게 되었는데 5-6주에 한번씩 인도하는 새벽 기도에 집이 먼 교역자들은 교회에서 잠을 자기도 했는데 자신의 차례가 되었는데 그만 새벽에 시계 벨을 누 르고 잠을 자게 되어 엉겹결에 깨어 급하게 나오면서 하나님께 형통한 길을 달라 고 기도하는데 마침 택시가 와서 타고 가는데 신기하게도 신호등에 한번 걸리지 않고 제 시간에 들어가 새벽 기도를 인도할 수가 있었다는 이야기)
그런 것입니다. 그것을 보디발이 요셉의 생애를 보면서 본 것입니다. 자 이것도 한번입니까? 그럼 두 번. 아닙니다. 세 번도 아닙니다. 사사건건이 하나님이 형통케하시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때에 이 보디발의 마음에 이 사람이 비록 노예지만 보통사람이 아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이 인간이 복덩어리구나 그것 하나는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 놔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노예를 자기의 집안에 총무로까지 삼은 것입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성경에 보니까 오늘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보디발이 자신의 집에 모든 재물과 전토 이런 것들을 다 요셉에게 맡겨서 주관하게 한 그때부터 하나님이 요셉을 위하여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셨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사실 말이 거꾸로 되야지 말이 맞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보디발이 복을 받으니까 노예인 요셉이 해택을 받았다고 그러면 말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게 아니라 일개의 노예의 신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일개의 집안에 궂은 일을 하고 돌아 다니는 그 노예 한 사람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이 그 큰 애굽의 큰 관리인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복을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아주 중요한 힌트 하나를 얻는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주인공과 신앙의 눈으로 보이는 주인공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아마 신앙이 없는 애굽 사람들이 볼 때에는 그랬을 것입니다. 참 보디발이 똑똑하니까, 아니면 보디발이 힘이 좋으니까, 아니면 보디발이 후덕하니까 아마 그렇게 복을 많이 받는가 보다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아니야 그 집에 요셉이라고 하는 노예가 있는데 그 사람 때문에 하나님이 복을 주셨데 그러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이 사람들이 그래 허긴 보디발이 인격이 있지. 그렇게 밖에 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시선은 딱 고정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에 그 주인공은 보디발이라고 하는 것이 육신적인 시각으로 본 그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 성경을 가만히 보면 그 보디발의 집에 복을 주신 것은 사실 보디발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 팔려간 요셉을 하나님이 생각하셨기 때문에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고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들도 우리 때문에 복을 받을 수 있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 수가 있습니까? 그렇지요. 아멘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집이 정말 가난했습니다. 밥술이나 먹게 된 것은 내가 예수 믿기 시작하면서입니다. 그것은 진짜 집안 식구들이 다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생들이 하나씩 하나씩 예수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정이 윤택하고 평화로워졌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이제 내가 신앙 생활을 집안에서 처음으로 그래도 제대로 해보려고 하는데 집안이 계속해서 어려우면 그런 어려움들을 하나님 모르는 사람들이 당하는 건 하나님도 좀 참으실 수 있지만 당신을 이제 막 믿고 당신을 깊이 사랑하고 그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그 어린아들의 기도까지 무시하면서까지 가족들에게 고난을 주셔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그래도 내가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밥이라도 먹기 시작했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들어가면 이제 자기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되는 것을 보니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해하든지 안 하든지 상관이 없는데 성경은 오늘 아주 명백하게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는 보디발은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애굽의 왕에게 충성하다가 우상이나 섬기다가 죽는 인생, 하나님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중요합니까? 요셉이 중요했습니다.
잘 생각을 해보십시오.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보석이 하나 있는데 아주 깨지기 쉽다. 그런데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하다고 생각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 신문지에 싸가지고 아무렇게나 들고 다니겠습니까? 이렇게 돌리면서, 그럴 리가 없습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예화: 처음에 노트북 컴퓨터를 구입해서 애지중지 아꼈다는 이야기)
요셉을 여기에 보내셨을 때 이 집에서 종살이나 하다가 종들 중에 우두머리나 하나 만들고 끝내시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는 이제 말하자면 작품으로 빚어져가는 중입니다. 이 사람을 애굽의 총리로 만들어서 기근 때문에 죽어가는 수많은 백성들을 포함해서 마지막에는 약속의 백성들까지 다 구원을 얻기 위한 유일한 도구로 택한 사람이 바로 이 요셉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는 보디발이야 바로가 짤렸어 그러면 끝날 사람이지만 이 요셉은 하나님이 잘 간직했다가 세상을 구원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모든 역사에 전개에 전 과정을 미리 알고 계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보디발은 그 요셉에 비하면 엄청난 권세를 누리고 있었지만 역사의 무대에서 보면 그는 요셉은 주연 배우고 보디발은 단역 배우도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바로 제가 아까 말씀드린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바라보는 육신적인 시각에서의 중심 인물과 영적인 시각에서의 중심 인물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 집안에서 제일 어린 청년으로서 예수를 믿기 시작했어도 여러분 집안의 전망이 그 어린 그대의 신앙에 달린 것입니다. 생명이 그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대가 정신차리고 신앙 생활을 잘하면 온 가족이 다 함께 예수를 다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날도 물론 주시겠지만, 그게 안 된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집안이 어느 정도 평강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일반적인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하면 아버지의 도울 수 있는 여력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바로 그런 원리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이야기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주민등록상의 호주하고 천국에 있는 호적등본의 호주하고 다릅니다. 여기는 아들이 아버지를 제껴놓고 호주가 되는 법이 없지만 거기에는 손주가 할아버지 제껴놓고 호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한번 영적인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네가 제일 먼저 예수를 믿어서 내가 너에게 많은 은혜를 주고 은혜를 준 것은 네게 사명도 있어서 내가 너에게 그런 은혜를 주었는데 네가 그렇게 집안을 움직이는 중심의 인물로 네가 택함을 받았는데 어떻게 살았느냐?’ 물으실 때 뭔가 할 말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결국은 그런 교훈을 여기에서 분명하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사람과 신앙이 없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향해 절대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항상 자기가 역사에 있어서, 혹은 자기 상황에 있어서 자신이 항상 다른 사람들의 덕을 입거나 끌려가는 엑스트라가 아니라 주인공이라는 인식을 갖는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의 지위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화: 대학에 계실 때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미국무부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 사람이 와서 특강을 하는데 그 시기에 쿠웨이트와 이라크의 전쟁이 있을 때인데 강의를 하기 전에 그가 하는 말이 최근 일어난 전쟁에 대해서 자신이 사과를 한다며 사 담 후세인과 오랜 시간을 독대를 하며 전쟁을 막으려고 했는데 제대로 이루지 못 했다며 그것은 자신이 인류 앞에 책임을 느낀다며 한 이야기)
진짜 역사의 마당에서 주인공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엑스트라로서 신문이나 들쳐보면서 남의 나라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확연하게 느껴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다른 사람이 좋은 간증하면 침이나 흘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까? “누가 은혜 받았데” “그래 신앙이 그럴 수도 있구나” 그러고 허물 삼키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까? 남의 간증집이나 읽으면서 소설을 읽는 것처럼 감탄이나 하는 대린 만족이나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런 삶은 너무 비굴한 삶입니다. 역사에 중심부에 들어가서 그것이 꼭 이렇게 요셉과 같이 세상 전체를 움직이는 역사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있어서 주님을 믿고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셨는데 여태까지 우리 집이 이모양 이꼴인 것은 우리 엄마 때문이고 우리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는 뭐 때문이라고 그런 소리나 하고 다니는 사람이 영원히 개꾼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구경꾼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민망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소서
그것을 다 짊어지고 나라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우리 아버지의 많은 죄, 우리 어머니의 수많은 상처, 우리 동기간들의 견딜 수 없는 아픔들을 다 끌고 나와서 내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를 기억하셔서 하나님 은혜를 베푸시고 이들에게 평안을 주시고 주님을 아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얼마나 내가 더 죽어야 되겠습니까, 얼마나 더 내가 섬겨야 되겠습니까, 얼마나 더 내가 주님 앞에 순전해야 되겠습니까, 얼마나 제가 주님의 마음에 들면 주님이 나를 기억하셔서 저들을 위해 역사하시겠습니까?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던 그 날에 아브라함을기억하사 롯을 생각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사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크게 두 번째, 그럼 왜 하나님이 이 요셉을 그렇게 특별하게 생각하셨을까? 왜 하나님이 요셉을 그렇게 특별하게 생각하셨을까? 정답은 요셉의 특별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에게 고난에 초기에 불과했습니다. 뒤편으로 쭉 넘어가면서 요셉의 스토리들을 쭉 읽어보면 거기에서 나타나는 요셉의 그 삶과 인격의 특징이 무엇인가라고 할 때 욥의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내가 나의 순전함을 지키리니” 그래서 고난 속에서도 이 요셉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내일 그것을 입증할텐데, 그것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요셉에게 있어서 최대의 관심사였습니다. 요셉은 이미 비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절하고 형님의 곡식단들이 절하는 꿈을 꿨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마 그는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여튼 그것이 바로 무엇인가 자신의 전 생애에 영향을 줄만한 비전이었고 그리고 아마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해가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그 비전이 식지 않고 계속 유지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구체화되었던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요셉도 거의 그런 맥락에서 자신의 비전의 시련에 대한 희망을 가졌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의 별명은 그의 형님에 의하면 꿈꾸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그 꿈은 자신 스스로 꾼 꿈이 아니라 하나님이 꾸게 해주신 그런 꿈이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비전입니다.
그러니까 17살에서 30세가 넘는 나이에 이르기까지 진짜 이 사람은 이력서 한칸 한칸이 연결을 댈 수가 없는 삶을 산 것입니다. 어떻게 연결이 되겠습니까? 첫 번 이력서에는 노년의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이력서에 나올 수가 있겠지요? 그러다가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형들은 지겹게 싫어했다. 팔려갔다. 노예로 보디발의 집에 구매되었다. 그런데 그 집에서 가정 총무가 되었다. 여기서부터 연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가정 총무가 되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노예를 총무로 삼을 수가 있습니까? 총무가 된 것까지는 그래도 된다고 치는데 그 다음에는 왕의 죄수인 대역 죄인들을 가두는 곳에 감금된 것입니다. 말이 됩니까?
아니 만약에 보디발의 아내의 고발이 사실이라면 파렴치범이나 가정 파괴범인데 잡범들의 수영소로 들어가야지 감히 어디 대역 죄인들을 가두는 그 정치범 수용소에 들어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만약에 정치범 수용소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바로에게서 술맡은 관원장과 떡맡은 관원장같은 레벨의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길거리에서 소매치기나 하고 온 그런 쓰레기같은 인간들과 만났을 것인데 뭐가 이야기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거기서, 왕에게 가서 내가 잘못을 안 한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해주십시오. 소매치기나 하고 온 애들하고 있어봐야 생전가야 왕 코빼기도 못 보는 애들하고 이야기를 해봐야 뭐가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게 연결이 됩니까? ‘가정 총무였는데 노예였는데 주인 여자를 희롱하다가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다’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러다가 거기에서 떡맡은 관원장과 술맡은 관원장을 만나다. 왕이 꿈을 꾸다. 해석을 하다. 총리가 되다.’ 이게 한 칸도 연결이 안 됩니다.
그런 삶을 다양하게 살았지만 그러나 그의 관심은 어떤 지위를 누리느냐에 있지 않앗습니다. 꿈을 해주고 나서도 어떻게 하랴 그랬더니 요셉이 저 정도 쓰시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을 세우셔서 이 난국을 헤쳐가도록 하십시오. 하며 마음을 비운, 말하자면 군자의 이 마음 가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의 관심은 그런 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무엇이 관심이었습니까? ‘하나님’ 하나님이 나를 지금 어떻게 생각하실까? 나는 지금 내게 놓여진 이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이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바르게 한다고 하는 것은 노예일 때 다르고, 제상일 때 다르고, 가정 총무일 때 다르고, 옥 속에 있을 때, 다르고 왕궁에 있을 때 다르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느 삶의 영역에 있든지 간에 동일한 것입니다. 노예로 있을 때는 또다른 신앙의 원리가 필요하고 제상이 되면 그것 보다 훨씬 더 다른 원리가 필요하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똑같은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놓인 삶의 현장이 어디든지 여러분들이 어떤 일로 어려움을 겪고 있든지 여러분들이 어떤 지위에 있든지 나는 여러분 모두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이 형통케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요셉이 그런 믿음으로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정체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면 너무 애매한 데 믿음의 정체가 무엇인가, 그 요셉의 믿음의 정체는 자신의 순전함을 잃지 않는 믿음이었습니다. 요셉이 마지막에 죽을때에도 거기서 그렇게 왕에 버금가는 대접을 받고 살았으면서도 그의 마지막 꿈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의 땅으로 가는 것, 이것 하나로서 그는 거기에서 왕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리면서 살았지만 그 애굽의 땅에서 그는 자기 스스로를 ‘나그네’라고 자처한 사실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게 신앙의 순전함입니다. 노예로 있을때든지 가정 총무가 된 때든지 교만해지거나 우쭐해지는 법이 없이 하나님 앞에서 처음에 순전함을 지키려고 애썼던 신앙입니다.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을 지키면서 살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유혹을 받을 때는 고난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있을 때는 신앙을 꺾으면 고난을 면할 수 있는 길이 있을 때는 더더욱 그 길이 매혹적으로 보입니다. 끝도 없는 고난이 펼쳐져 있을 때 그것을 그렇게 기쁨으로 감당하는 일은 쉽지가 않습니다. 남의 일은 쉽습니다. 그런데 자기 일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들에게 말할 수 있는 약속 하나는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믿음으로 자기의 신앙의 순전함을 지키는 사람들을 결코 고아와 같이 버려두시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대가 주님께서 탄식하신 바와 같이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신 것처럼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소수이기 때문에 신앙의 순전함을 지키기 위해서 믿음으로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 있기만 하면 그 사람들이 주님의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디에 숨어 있든지 하나님의 눈에 띕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람으로 취급됩니다. 아마 천사들은 그를 돕기 위해서 작전 회의를 짜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요셉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노예였지만 노예로서 사람들에게 무시당할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세상의 권위와 권세는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동안에만 사람들에게 대접을 받지만 신앙의 순전함을 지키는데서 오는 이 신앙의 권위는 그 사람이 죽어도 그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살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런 신앙을 가지고 한번 믿음의 경주를 달려볼 생각은 없습니까?
마지막으로 그럼 언제 어떤 상황에서 이 요셉이 자신의 순전함을 믿음으로 붙드는 그런 삶을 살았는가, 이게 고난 속에서입니다. 제상의 자리를 누리는 그때가 아니라 노예로서 살아가고 있을 때, 사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애들이 고등학교만 가도 애들이 징그럽습니다. 키도 크고 힘으로 하자면 아빠 몇 사람 엎어칠 정도로 그렇게 힘이 세집니다. 그래도 군대갈 때보면 입영열차 타고 의정부에서 출발할 때보면 수염도 시커멓게 난 놈들이 자기 반밖에 안 되는 엄마 가슴에다가 뭍히지도 않는 고개를 디밀고 꺼이꺼이 웁니다. 그게 인간이고 그게 자식입니다.
요셉이 17살에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형들에게 미움을 더 받았으니까 아버지의 품으로 파고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졸지에 도대체 생전 가보지도 못한, 고향을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 수가 없는 그 이국의 땅에 노예로 팔려서 당장 채찍을 맞으면서 천한 일에 종사하게 되었을 때에 아무리 낙천적인 사람이라고 그렇게 쉽게 거기에 정응할 수가 있겠습니까? 채색옷이나 입고 꽃밭에 물이나 주면서 그렇게 존귀한 대접을 받으면서 살던 아이가 채찍에 휘둘리면서 천한 일에 종사하면서 살 때 고향은 언제 돌아갈지 모르고 노예의 신세가 되어서 살아갈 때 한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삶을 살아갈 때 그게 쉬우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여기에서 다정다감한, 이 요셉도 상당히 정서가 풍부한 사람이었는데 이 요셉이 두고 온 고향의 아버지 그리고 자기는 잘못이 없는데도 자기를 팔아버린 형들에 대해서 미움의 칼을 갈면서 보디발의 집에서 근무시간이 끝나고 나면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고향 생각이나 하면서 눈물짖고 살았더라면 하나님의 그 위대한 역사를 이룰 수 있는 인물이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다른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점에 있어서 다른 것입니다.
그만한 나이의 청년으로서 두고 온 집을 그리워하고 아버지의 품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눈물흘리고 그런 정서에 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사는 일이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두고 온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기 보다는 당장 부디친 현실적인 문제, 어덯게 하면 내가 여호와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이 사람들, 말씀을 배울 때도 없는 이곳에서 내가 어떻게 이미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믿음의 순전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가, 가장 현실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면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난을 이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시인의 고백도 같은 맥락입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결국은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순전함을 붙들며 살아간 이 사람은 고난으로 점철된 환경 속에서 그 순수함을 잃지 않고 살아갔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함을 그리고 형통케하심을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삶을 살게끔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난을 핑계되면서 믿음의 순전함을 저버리는 행위, 고난을 핑계 삼아서 아무렇게나 살아버리는 행위, 고난을 핑계 삼아서 믿음대로 살 수는 없다고 하는 그런 하소연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신앙이 아닙니다.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가지만 신앙적으로는 이해가 갈 수가 없는 삶이고 그 마지막에 결과는 너무 황량한 결과밖에는 오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올 때마다 우리는 항상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요셉에게 있어서 그 혹독한 고난이 결국은 춤추는 물결이 되어서 요셉이라는 노예의 신분에 아이를 수많은 나라의 백성들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되기 위한 자리로 떠밀려가게 하였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고난 속에 살아도 우리의 신앙의 순전함을 잃지 않기만 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이 이 고난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더 가까히 다가가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꼭 필요한 재료로 이 고난을 사용하실 것이라고 하는 그 신앙을 갖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하나님의 임재 앞에 산 사람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39:9하)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형통케 하셔서 그의 이름도 알지 못하는 보디발과 그 집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요셉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드러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하나님이 형통케 하시는데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요셉과 함께 하시는 분은 권력이 있는 왕이나 주관자가 아니었습니다. 권력이나 정치적으로 힘이 있는 사람들은 정권이 갈리고 나면 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었던 것이 후일 부끄러움이 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전과 같이 그 사람을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셉을 돕고 계신 분은 불변하시는 하나님, 영존하시는 여호와이셨습니다. 더욱이 인간에게는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도 능력이 미치지 못해서 충분히 돕고자 하는 마음은 있으나 실제로는 그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 적이 있는데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마음을 먹으시면 무엇이든지 그를 도울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했다고 했으니 요셉의 인생은 활짝 피어난 인생이었습니다. 노예로 팔려갔으나 그러나 그는 이제 노예가 아닙니다.
오늘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에게 고백하기를 이 집에서 나보다 높은 사람이 없다. 당신 주인을 제외하고는 나보다도 높은 사람이 없다. 신분은 노예이지만 이미 그가 살아가고 있는 상태는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앞길에 얼마나 광명이 비치겠습니까? 노예에서 그렇게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보디발 다음으로 뛰어난 사람으로 세워주셨으니 이제 거기에서 하나님이 요셉을 그의 전능하심으로 그의 능력으로 축복해주시면 아마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요셉이 여기에서 애굽에서의 삶에 있어서 최고의 위기를 한번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이 요셉은 용모가 준수했더라 그랬습니다. 물론 히브리 말에 있어서 ‘준수하다’라는 개념은 우리 말로 ‘기생오라비처럼 생겼다’라는 말은 아닙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준수하다’라는 개념은 선이나 이런 것들이 아주 곱고 아름다워서 아주 미남으로 생겼다라고 하느 말보다는 남자다운 매력을 풍기는 용모를 가르켜서 준수하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자가 ‘아리땁다’ 그럴 때 아주 아리아리하고 이렇게 여러분처럼 아리아리하고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다움’ 그러니까 우리는 굳이 이 성경을 읽으면서 요셉을 기생오라비 같이, 탈렌트 지망생 같이 생긴 사람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째든 분명한 사실은 남자다운 풍모를 갖춘 수려한 사람이었을 것이고 아울러 그런 미모를 갖추고 있는 사람에게서 그런 외모를 갖추고 있는 사람에게서 이 여자가 성적인 매력을 느꼈을 것은 자연스런 이치입니다. 이 여자가 이 남자에게서 성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크게 두 가지의 이유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요셉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자신의 처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는 우선 용모가 준수한 사람이었고 그리고 아마 20대의 젊고 건장한 청년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의 생애 전체를 통해 보면 요셉의 성격이 드러나는 데 아주 터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터프한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터프한 것을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자매들 특히, 제가 아는 자매 하나는 터프한 사람을 되게 좋아하다가 요새 매일 맞고 삽니다.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약간 여성화 된 남성이 훨씬 낫습니다. 그런데 또 누가 남성화 된 여성은 어떠냐고 그러는데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이 사람은 생애 기록을 전체 통틀어보면 비겁하거나 그런 졸렬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담력도 있고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렇지만 이 사람은 남을 세심하게 배려할 줄 아는 그런 아주 세심하게 마음 씀씀이가 착하고 메너가 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보디발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성경이 침묵하고 있으니까 아무렇게나 그 사람을 말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실례가 될지 모르지만 어째든지 간에 지금도 그렇고 과거에도 그렇고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사생활이 많이 부실하기가 쉽습니다. 정사를 돌보고 밖에 여러 가지 많은 국사를 돌보기 위해서 아마 보디발은 수시로 집을 비우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이어서 아내가 남편의 얼굴을 보는것도 쉽지가 않았을지 모릅니다. 더군다나 그렇게 나라의 굵직한 직책을 맡고 있고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마 곰살굿게 이렇게 자기 아내에게 세심하게 배려하며 그렇게 여성스러운 그런 삶을 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달랐습니다. 요셉은 늘 눈만 뜨면 집안에서 마주치는 말하자면 집사장 쯤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총무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집안에 궁극적인 주인인 보디발은 수시로 외출을 하고 밖에 일에 골몰했으니까 가정사에 제반 중요한 일들을 아마 이 보디발의 아내의 지시를 받고 그리고 아내와 의논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속에서 그는 상전이었고 또 이 요셉은 노예였으니 아마 고분고분 하면서 이 부인의 말을 잘 들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지시를 하면 잘 따르고 자기가 해달라고 하는 데로 해주는 그러한 관계 속에서 심리적으로 이 보디발의 아내는 남편에게서 채워지지 못하는 어떤 보상심리를 요셉에게서 느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 속에서 이 여자가 요셉을 좋아한 것은 요부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어서만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여자였다면 한번쯤 요셉에 대한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텐데 이 여자는 그저 평범한 여자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이 여자의 구애는 목숨을 건 구애였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당시에 이렇게 지체높은 집안의 여자가 종과 통간을 하는 것은 아마 틀림없이 사형에 해당된 벌을 받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또 애굽은 역사적으로 보면 남자들이 여자에 대한 정조의 관념에 대해서 병적일 정도의 집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여자에게 외출할 때 정조대 같은 것들을 채운 역사들도 이집트 역사에 나옵니다. 생명을 건 구애였습니다.
우선 이 문제를 풀어가기 전에 우선 이쯤에서 잠시 쉬면서 우리 한번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이 함께한 사람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답은 일어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한다. 하나님께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이다.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이 그가 완전한 안전 지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도 유혹이 있고 그들에게도 시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에게도 유혹이 있고 주님을 위해서 뜨겁게 헌신하며 자신을 다 드린 사람들에게도 축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통하는 그 은혜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던 이 요셉에게도 이런 유혹과 시험이 닥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요셉이 책임져야 할 일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요셉은 그저 이 여인에 대한 생각은 없었고 자기의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서 일했을 뿐인데 그만 여자가 자기의 가는 믿음의 앞길에 덫을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주 현실적인 문제로 이 요셉에게 다가왔습니다. 아마 요셉은 이 여인의 집요한 유혹을 받으면서 두 가지면에서 압박을 받았을 것입니다. 첫째는 내면적인 압박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피끓는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틀림없이 애굽에서의 이 긴 세월동안 신앙으로 산 사람이었고 신분조차 노예였기 때문에 금욕한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그때 이 여인의 집요한 유혹을 뿌리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남편이 그렇게 높은 관직에 있고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는 삶을 살았을테니까 아마 이 여자는 나이보다도 훨씬 젊은 용모를 갖춘 그런 미모의 여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나이는 자신보다 많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또 정반대로 자기보다 어렸을 수도 있습니다.
어째든 그런 것 때문에 청년 요셉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요청 때문에 이 유혹을 거절하기가 힘들었을 것이고 또 하나는 이 여인이 이렇게 집요하게 자기를 유혹할 때 그 유혹을 거절하고 나면 어떤 정치적인 보복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외면적인 압박들이 이 요셉의 숨통을 조여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째든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이 함께한 사람에게도 이런 유혹과 이런 시험이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첫 번째 중요한 신앙의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결코 자신이 받은 은혜를 가지고 자만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깨어있다라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여기서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지금 받고 그 은혜의 빛 아래서 그 사랑의 빛 아래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놀라운 증거들을 보면서 날마다 하나님이 형통케 해주시는 그 축복 속에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은 언제든지 미끄러질 수 있는 존재들임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도 못 받고 세상과 신앙 사이를 오락가락 하면서 병든 채로 살아가고 있다라고 할 것 같으면 사단이 여러분들을 시험해야 할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가만두어도 사단이 볼 때 잘 살아가는데 왜 힘들게 찾아가서 유혹을 안 해도 잘 가는데 뭐 힘들게 자꾸 쫓아가겠습니까? 교회 열심히 다니는 사람을 찾아가서 전도하는 예수쟁이들을 봤습니까? 없습니다. 그 시간에 품팔 다리가 있으면 안 믿는데 찾아가서 예수 믿으라고 그래야지 되지 않겠습니까? 마귀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이미 전도한 사람에게 가서 또 전도하겠습니까? 자기 말을 잘듣고 살아가는데, 그러니까 마귀가 주목하는 사람은 그건 괜찮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상당히 중요하고 의미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이런 시험이 요셉에게 온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평소에 파렴치하고 아주 더럽고 난잡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부인이 유혹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껄떡거렸을 것입니다. 아니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은 성립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야! 그렇구나.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케 하시는 놀라운 증거들을 보면서 살아도 역시 우리는 하나님이 붙잡아주셔야 하는 사람들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유혹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신앙적인 삶을 돌아보면 큰 은혜 뒤에는 반드시 큰 시험이 있었습니다. 큰 성령의 은혜 뒤에는 반드시 큰 시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도 하나님의 큰 빛을 받은 뒤에 큰 시험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지식의 큰 빛을 받았던 베드로를 생각해보십시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주님이 극구 베드로를 칭찬하셨습니다. 그에게 지식의 빛이 있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나 잠시 후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면서 베드로에게 호통을 치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보십시오. 큰 지식의 빛이 있고 난 후에 그 다음에 사단의 시험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해보십시오. 광야로 가셔서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하셨을 때 마귀의 시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 하나님이 특별히 함께하시는 사람이란 증표를 남겨두실 만큼 특별한 은혜를 부어주시는 그 후에 이런 시험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다 살기 전까지는 우리가 이겼다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100터를 달리는 선수들을 보면 저는 경의에 찬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100터 그 긴 거리를 9초 8, 9초 얼마에 달릴 수가 있는지, 우리가 뛰면 15초는 걸려야지 뛰는 거리를 그 사람들은 막 쏜살같이 달립니다. 100터 달리기를 하면서 뒤돌아보는 선수들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모르겠습니다. 한 5000미터 달리는 사람들은 그럴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100미터 달리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최선의 스퍼트를 다해서 앞을 향해 달릴 뿐입니다. 테입을 끊고 전광판에 자신의 기록이 우승했음을 알리기 전까지는 그는 다 뛰었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번의 실패를 가지고도 좌절할 수 없지만 그러나 한 두 번의 성공, 한 두 번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한 두 번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의 깊은 빛을 받았다라고 하는 것 때문에 우리들이 충분하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교만한 것은 그것은 교만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정신질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권력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자신이 마치 큰 권력을 가진 것처럼 떠버리는 것처럼 교만해지는 것은 그것은 교만이 아니라 과대망상증입니다.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 분수에 넘게 그것을 믿고 신뢰하고 헛된 것을 자랑하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교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자신이 안전한 사람이며 자신은 넉넉히 이기는 사람이라고 만약에 전혀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이 확신하고 있다면 이것은 교만이 아니라 정신질환입니다. 이 모든 영적인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 말씀의 빛을 본 사람, 뭔가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감각을 갖었던 사람,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한번 들여다 보았던 사람 이런 사람들이 빠지는 죄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요셉의 이 경험은 우리에게 아주 선명한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그 교훈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함께 한 사람,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위험이 언제든지 앞에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교만할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모두 이기고 난 후에 비로소 우리는 이겼다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았으면 즉시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게 본인에게는 안 보여도 저에게는 보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입니다. 벌써 누가 은혜를 받는다 그러면 벌써 사단의 세계, 마귀의 세계에 쭉 소식이 전파됩니다. 아무개 교회 어떤 애가 은혜를 엄청받았는데 야 이러고 있다가는 큰일나겠다. 애들아 가자. 그래서 모두 합력해서 그래서 그 사람에게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아니 이것은 성경적입니다.
사도 행전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의 이름이 지옥에까지 알려진 것으로 나옵니다. 지옥에 있는 귀신들이 왜 사도 바울과 예수님의 이름을 유독히 기억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주 뛰어난 영적인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가서 유혹을 하라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이미 이런 것은 벌써 상당히 많이 넘어서 특히 예수님의 경우에 뭐 가망도 없는 것인데 그래도 예수님께 유혹을 했습니다. 떡을 만들어보라, 뛰어 내려보아라, 내게 절해보라. 유혹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지옥에 그렇게 알려졌던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만나면 죽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게 아니라 한번 겨루어볼 마음을 마귀들이 갖는 사람들입니다. 은혜를 받는 즉시 자신의 마음을 지키면서 견고하게 서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주님이 베풀어주신 그 은혜를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빚으로 기억을 하면서 그러면서 그런 은혜 속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 그렇게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지 않았던 사람보다 더 많이 자신을 지키고 더 많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매일 매순간마다,
보십시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신앙이 견고함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작년에 불같이 은혜를 받던 사람들을 올해 찾아보기가 힘들고 이년 전에 은혜 받았던 사람들치고 지금 다 털어먹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은 통계가 나오는 비관적인 상황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결함이 잇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은혜를 주신 사람들이 그 은혜를 잘 간직하면서 이런 유혹과 시련에 덫을 피해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일들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면 또 하나님께서 많은 은혜를 주신다면 그것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을 하면서 그 은혜,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잘 지키고 이런 시련과 유혹의 덫을 피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제 이 사람이 보여준 것은 두 가지 반응이었습니다. 우선 이 사람이 이런 유혹을 받을 때에 즉시 생각났던 것이 무엇인가 하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을 때 생각났던 것은 무엇인가 하면 신의였습니다. 누구에 대한 신의입니까? 신앙을 먼저 말하지 않은 이유는 신앙이 중요하지 않아서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 여자가 신앙이 없는 여자니까 이 여자에게 신앙이 어쩌구 저쩌구 이야기를 해봐야 쓸데없는 이야기처럼 들릴테니까 우선 이 여자와 대화가 될 수 있는 인간 사회에 보편적인 신의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였습니까? 당신의 남편 보디발이 집 주인이고 그리고 그분이 나에게 모든 것을 다 맡겼는데 아끼지 않은 것은 단 하나 당신밖에 없다. 당신은 자기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그 보디발이 당신을 제외해놓고 모든 것을 내게 맡긴 것은 나를 전적으로 신임했기 때문인데 내가 어떻게 그 신의를 저버릴 수가 있겠는가, 이것이 이 여인의 마음에 호소가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신앙이 어쩌구 저쩌구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여인의 도덕적인 마음에 호소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이 여자는 도덕적인 통제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도덕적으로 설득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요셉이 어디를 가든지, 아주 천한 종살이를 하든지, 아니면 죄수가 되어서 옥에 갖혔든지, 아니면 또 죄수가 되어서 남의 꿈을 해석해 주든지, 아니면 또 애굽의 국무총리로 발탁이 됐을 때든지, 정사를 돌볼 때든지 늘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형통케 해주신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인간적인 비결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성령 충만하고 기도 많이해도 본성 자체가 야비하고 치사한 사람들은 이렇게 형통하지 못합니다. 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형통함을 입으면서 살아간다라고 할 때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가는 사람보고 형통하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주고 받고 베풀고 받는 이런 모든 관계 속에서의 형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관계 속에서는 하나님이 홀로 일하신다기 보다는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사용하셔서 함께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단절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필요하면 물질을 공급해주신다는 이렇게 이따금씩 이렇게 신실하고 불신실하고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그렇게 해주실 수는 있습니다.
제가 어느 신학교에 설교를 하러 갔는데 그때 돈으로 꽤 큰 돈이었습니다. 감사 헌금 봉투가 채플시간에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글씨도 잘 못 썼습니다. 구불구불 영어라는 말이 아니라 한글을 그렇게 못 써서 구불구불 하게 노인네 글씨처럼 썼는데 감사 헌금이 들어왔다고 그래 놓고 사연을 썼는데 끝나고 나서 그 봉투의 내용을 보니까 쓰여진 글이 “목사님, 이 돈을 우리 학교에서 공부 제일 못하는 학생에게 주세요” 이거야 말로 진짜 은혜입니다.
그러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비한 데도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공급해주신다든지, 야비한 데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동정심을 발동해서 도와주게 하신다든지 그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다라고 하는 것도 어제 말씀드렸지만 요셉의 생애에서 한 두 개의 사건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장구한 그의 삶에 모든 과정이 그렇게 하나님이 사람들과 만나는 그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통함을 느낍니다. 옥에 들어가면 옥에 있는 간수들과 형통함을 얻게 하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요셉이 무슨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정직하고 단순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신의들을 사용하셔서 그 관계 속에서 형통함을 입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요셉을 이야기할 때 그 인격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고난을 받으면서 요셉이 집중적으로 다시 빚어진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인격입니다. 그럼 처음에는 어땠는가 하면 처음에는 좀 순수할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좀 거칠고 약간은 야비하게도 느껴질 수 있는 그런 인격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왜 형들이 왜 그렇게 요셉을 미워했는지 아십니까? 고자질의 명수였습니다. 그게 진짜 어렸을 때는 제일 보기 싫은 것입니다. 동생들이 가서 엄마 아빠에게 이를 때 그때 진짜 동생 취소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형들의 입장에서 보면 애를 그렇게 미워한 것도 사실은 형들이 가해자라고 하기 보다는 사실 피해자였다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독점적으로 사랑해주었지요, 그리고 채색옷을 입혔지요, 그렇게 하면서 특별 대우를 해주고 늘 아버지의 품 속에서 놀았는데 그랬으면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니까 좀 형들에게는 더 너그럽고 널럴한 인품을 가진 사람으로서 살았더라면 형들의 마음을 오히려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아버지와 그렇게 가까히 있다는 것을 빌미로 해서 수시로 가서 형들에 대해 고자질하고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베냐민이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요셉과 베냐민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다 사은품에서 나은 자식들입니다. 레아는 본처이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사랑이 없이 억지로 끼어팔기로 들어간 장가였기 때문에 그 애들은 찬밥이었습니다. 빌하와 실바에게서 난 아이들은 첩의 소생이니 늘 그런 열등의식 같은 것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요셉이 그래도 항렬로 치면 동생인데 가서 아버지에게 늘 일러서 두들겨 맞고 야단을 맞고 그렇게 됐을 때에 형들이 얼마나 상처를 입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야비한 기질이 있는 사람이 이 고난에 과정을 통해서 이렇게 신의가 있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내가 한번 퀴즈 한번 낼게요. 보디발의 아내가 만약에 여기서 요셉의 이야기를 듣고 그 정도 상황에서 딱 끝냈다면 이 요셉의 성격에 보디발이 왔을 때 찾아가서 ‘제가 주인님의 신임을 한몸에 얻고 있는데 제가 어떻게 진실을 감출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설명드리겠습니다. 당신의 마누라가 나를 유혹하기로 내가 아니되느니라.’ 타일러서 돌려보냈습니다. 이렇게 일러서 그 여자를 이거 되게 만들었겠느냐는 것입니다. 딱 입을 다물고 침묵했을 것입니다. 영원히, 의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뢰가 17살 때 있었으면 형들이 그렇게 자기를 그렇게 고생시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서 이런 사람으로 하나님이 바꾸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들어보십시오. 이것은 진짜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를 입은 우리들을 형통케 하시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성품과 인격이 성화를 통해서 변화되는 것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인들 주에서도 과대망상증이 많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니 자기가 성질이 유별나서 사람들하고 부딪치면서 고난을 받으면서 항상 자기가 무슨 의를 위해 고난 받는 화신인 것처럼 그거 하늘의 천사가 배꼽잡을 일입니다.
자기 인격이 개떡같아서 여기 가서 부딪치고 저기 가서 부딪치는데 그럼 부딪칠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내가 허물이 많습니다. 나는 성격이 모났습니다. 내 마음 속에 이렇게 정리되지 못한 부분들이 있어서 사람들과 부딪칩니다. 이런 것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의지해야지만 이것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하여튼 자기와 부딪치는 모든 사람들은 시편을 읽으면서 악인의 뺨을 때리시고 이빨을 꺾으시고, 하여튼 참 그러니 그것을 누가 말리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진짜 무서운 사람입니다.
요셉이 만약에 그렇게 살아왔더라면 개꼬리 삼년 묻어서 황모가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 속에서 아주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는가 하면 하나님의 자녀의 공통된 경험이니까. 고난을 통해서 요셉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속적인 성화의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설명하지 않으면 그런 야비한 인격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어떻게 신의를 지키는 사람으로 바뀔 수 있는 지에 대한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앙 때문이었다라고 말하지 않으면 대답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경매에 나가서 손들 듯이 하루 저녁에 기도해서 일생에 축복을 한번에 받아보려고 하는 그런 사행심 어린 신앙은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요행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고요한 중에 기다리니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정말 축복을 받고 싶으면 하나님 앞에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새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저 구원받는다는 것만 의미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우리의 야비한 성품은 바뀌어서 신실한 성품으로, 포악한 성품은 변하여 주님의 성품을 닮은 자비한 성품으로, 권모술수에 능하던 우리의 삶의 방식은 바뀌어서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한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그런 사람으로 그렇게 우리 자신의 존재가 바뀌어져 나아갈 때 주님이 바뀐 우리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시는 것입니다.
잘 보십시오. 요셉이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형통했습니다. 그래서 보디발의 집에서 초급 하인으로 있을때부터 시작을 해서 총무가 될 때까지 그렇게 형통한 길을 걸었고 그리고 감옥에 가서도 형통한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그렇게 형통한 길을 걸었을 때에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형통하게 만든 것은 그를 형통하게 하시는 일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셨지만 그를 형통하게 해주는 도구들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요셉을 형통하게 해주었는데 요셉을 형통하게 해주는 도구가 되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요셉을 향해서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 보디발의 집에서 특별히 요셉에 대해서 호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요셉의 캄캄한 고난에 앞 길에 징검다리를 하나씩 놓아준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한순간에 충만한 믿음도 중요하지만 진실한 인격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요셉이 그것이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된 것입니다. 물론 신앙이었지만 그러나 신앙과 함께 그 신앙이 무엇을 명했는가 하면 ‘네 주인과의 신의를 저버리지 말아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제 많이 안 합니다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 나라에서 외국에 원서들을 불법으 로 막 찍었습니다. 사실 10년 전만 해도 우리가 불법인지 모르고 살았는데 한 5년 전서부터 이것이 불법이라는 사실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엄청나게 찍습니다. 그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이 되어서 지금은 별로 읽지도 않지만 잘 안 사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하여튼 그것이 불법으로 찍었습니다. 외국에 있는 원서들을 불법으로 찍어서 자기들만 쓰면 괜찮은데 그것을 미국으로 도로 수출을 하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돌 지경입니다. 어떤 분이 커다란 작품을 찍었습니다. 찍으면서 그 사람 하는 이야기가 참 재미있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것을 응답받고 찍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시기에 그 해저판을 찍으라고 응답하셨겠어요. 할 말이 없습니다. 응답받았다는 그런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인간 사이에 모든 규칙이나 신의를 막 뭉개면서 불도저처럼 앞으로 나가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요셉을 보면 알잖아요.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삶 속으로 녹아들지 않는 영성이 영성이 아닙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우리의 삶과 함께 용해되지 않는 교회용 영성은 영성이 아닙니다. 예배용 영성은 영성이 아닙니다. 모든 영성은 삶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치열하게 이런 유혹과 이런 시련, 조금만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면 호의호식할 수 있는 길이 있고 조금만 부인하면 얼마든지 고난을 받지 않고 갈 수 있는 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 때문에 그 길을 안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게 결국은 영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은혜의 경험들, 주님이 함께하시는 그 놀라운 영적인 은혜 이런 것들이 치열한 삶의 현장 속에 녹아들어서 신의를 지킬 수 없는 상황에서 신의를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이 주인과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 순간적으로 보면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루 사이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왜 요셉이 벗어놓고 간 그 옷을 이 여자가 딱 쥐고, 그러니까 이 여자는 사랑하는 마음이 확 돌아서면 무섭게 변하는 것입니다. 동서양 할 것 없이 진짜 무섭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옷을 확 잡아당기니까 벗고 도망갔더니 옷을 증거품으로 놓고 당신이 총애하는 그 히브리 노예가 나를 겁간하려고 했습니다. 증거품이 여기에 있습니다. 당장 그 자리에서 감옥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총무는 어떻게 됐습니까? 아 그거야 짤렸지요.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많은 사람들 속에 쌓아왔던 신의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조그만 노예부터 시작해서, ‘요셉, 그분은 정말 훌륭한 사람이야. 그분은 참 신실해. 그분은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지’ 동료인 사람들도 ‘그 사람은 우리 주인이 총애하는 사람이야’ 심지어는 보디발도 ‘아 진짜 개는 모든 것을 다 맡길 수 있어’ 이런 모든 신의를 쌓은 것, 신앙의 아름다운 신의를 포함해서 모든 신앙의 본까지 순간적으로 한번에 모두 잃어버린 것입니다.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왜 전에 이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형통하게 하시기 전에는 그래도 목숨이라도 부지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옥 속에 갖쳐서 언제 불려서 기호 3번 요셉, 그리고 짜를지 아무도 알 수가 없는 그런 상황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게 믿음이지만 어떻게 역사한 믿음인가 하면 신의를 지키는 믿음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믿음을 말하자면 신의를 지키기 위한 믿음이었습니다. 한 사람과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 모든 것을 깡그리 잃어버리는 상황이 되었는데도 요셉의 내면의 세계는 그런 삶을 살라고 지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삶 속에 녹아든 영성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꼭 기억을 해야 합니다. 정말 우리가 그것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타협을 하고 그러는 것은 쉽습니다. 정말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일단 그렇게 하는 것은 쉽지만 그러나 그것을 안 하려고 마음을 먹고 정도를 걸어가려고 하면 이렇게 일순간에 깡그리 잃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몇 년인지는 아직 안 나오지만 요셉이 히브리에서 팔려온 노예로서 그 집안에 총무, 말하자면 집사장의 자리에 오를 때까지 이것은 6개월이나 1년 사이에 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장구한 세월이 흘러간 것입니다. 그랬는데 그런 세월이 흘러간 후에 된 것인데 어떤 의미에서 요셉의 모든 생애가 용해된 공적이 아닙니까? 한순간에 깡그리 날라간 것입니다. 이게 바로 죄악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다고 하는 상황을 늘 예견하면서 살아갔습니다. 이런 상황을 만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경에는 이런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두랴 평온에 서 있는 느부가넷살의 신상에 절하라고 강요받았을 때 절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동안에 거기에서 쌓아온 모든 평판, 거기서 누리게 된 사회적인 지위, 앞날이 보장된 미래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깡그리 날라가 버리는 것입니다. 깡그리 날라가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풀무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삶은 다 요령으로 피해가고 그리고 영성을 이야기하고 은혜를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항상 기억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온 그 인생에 대한 우리의 충성에 정도를 평가하실 때 우리의 삶에 품질이 어떠했는지 하나님께서 저울에 달아보실 때 그것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자기 만족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취적인 은혜가 아니라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그 은혜가 녹아들어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게 하시는 그런 의미에서의 믿음, 그런 의미에서의 삶이 하나님에게 의미가 있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용 영성, 예배용 영성 그런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정말 삶 속으로 깊이 녹아든 영성, 이렇게 요셉과 같이 하나님이 동행하시다가도 다가오는 이 유혹과 시험, 시련 앞에서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싸워서 이기게 하는 그런 영성일 때 그런 것이 진정한 영성이라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우리가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보디발에 대한 인간적인 신의 때문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맨처음에 그 신의를 이야기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앙이 없는 보디발의 부인을 도덕적 차원에서 설득하기 위한 접촉점을 찾았기 때문에 그것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지 실제로 이 사람이 유혹에 빠져서 범죄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밀폐된 그 공간에서 가지고 있는 느낌과 생각이 이 여인과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 여자도 만약에 한번 요셉과 잠자리를 같이 하고 나서 그 다음날은 단칼에 목이 떨어진다고 하는 것이 분명하다라고 확신을 했다면 아마 한번의 정사를 위해서 생명을 내걸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여자의 생각은 ‘죽 떠먹은 자리에 표가 나겠는가’ 이런 생각이었습니다. ‘아무도 없다. 그리고 우리 둘인데 나는 말할 수 없고 넌 종이기 때문에 발설하면 죽을텐데 넌 말안 할 것이다. 우리 둘이 입을 다물면 이것은 영원히 비밀로 남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달랐습니다. 여기에 우리 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한분 계시다. 그게 누구였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는 이야기가 “하나님 앞에 어찌 득죄하리요” 요셉에게 있어서 더 큰 관심사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 신앙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산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무엇이 죄고 불순종인지를 익힙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어떤 더러운 찌끼들을 하나님께서 불쾌하게 생각하시는지를 말씀의 칼날로 드러내고 밝히고 또 밝혀서 찾아냅니다.
그 모든 것들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입니까? 어디에서 겨냥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라고 하는 그 지고의 복을 누리기 위한 준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았는데 하나님과의 만남과 그분과의 교통은 없다면 그것은 무슨 아름다운 도덕이 그런 도덕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내 자신을 비추어보면서 마지막 남은 하나의 찌꺼기 까지라도 내 마음 속에서 없애고 우리의 죄악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살피고 우리의 마음에 굽은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아래서 확인하고 그것이 작은 것일지라도 돌이키고 고치고 싶어하고 때로는 돌이키기 힘들어서 팔다리를 잘라버려야 할 것 같은 고통을 수반한다고 하더라도 그 길을 택하고 싶어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런 일들을 행하면서 마지막에 꿈꾸는 삶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사는 삶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성경에 보면 ‘임재’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히브리 말로 ‘세퀴나’입니다. 그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 말도 어렵고 그 말도 어려운데 풀어서 이야기 하자면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신 것을 감지할 수 있는 영혼의 예민함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 계신 곳 없이 어디든지 계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무슨 이야긴가 하면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사람은 그 말씀을 듣고 나서 하나님이 자기를 만지고 지나가셨다는 것입니다. 옆에 사람은 푹 잤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장소적인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지금 오셔서 나를 만지고 지나가셨다. 그래서 나의 영혼에 죄를 용서해주시고 나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시고 오랜 동안 가슴에 박힌 아픔과 상처의 못을 뽑아주시고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셨다. 그래서 내 영혼은 깊이 거룩하게 은혜로 고양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거기 오셨으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이 눈에 보이시지는 않는 영이신 분이지만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그분이 여기 오셨으니까 이 사람이 그것을 경험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은 경험하지 못하고 푹 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장소적으로 하나님이 누구를 이렇게 피해가셨다라는 것보다도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거기 와 계신데 한 사람은 영혼의 예민함을 회복하셔서 그 자리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경험했고 한 사람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오 하신 것입니다.
사실 이게 말이 됩니까? 하나님을 어떻게 봅니까? 영인데 하나님을 어떻게 봅니까? 볼 수 없습니다.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감지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람을 볼 수 없지만 광야에 서서 옷깃을 흔드는 바람을 맞으면서 ‘나는 바람 한 가운데 서있다. 바람을 끌어안고 있다.’ 이런 시적인 표현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옷 입은 것밖에 보이지 않는데 네 속이 다 보인다 그럴 때 무슨 치과 의사가 입을 들여다 보듯이 입을 벌리고 속을 들여다 보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영적인 눈으로 내면의 눈으로 그의 내면을 본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볼 것이요” 한 것도 역시 무엇인가 하면 그런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다른 사람들은 지각하지 못하는데 자신은 그것을 깊이 지각하면서 그 영광의 빛으로부터 골로새서에 의하면 그 힘을 받으면서 그래서 그 영광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요셉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서 형들의 모함을 받아서 이렇게 타관 땅에 팔려나와서 노예로 살아갈 때 후일에야 성공을 해서 총무가 되었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그는 노예에 불과했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하나님이 함께 해주셨다고 할지라도 그는 노예에 불과했습니다. 노예가 겪는 모든 설음과 아픔과 곤고함과 고난을 안 겪은 것이 없이 겪으면서 인생을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도 그렇게 학대받고 고난을 받으면서도 성격이 굽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는 항상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세계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 임재의 영광 앞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노예살이에서 오는 고단함과 고통스러움과 눈물과 서러움들을 보다도 그것을 능가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을 그 임재의 영광 앞에서 경험하고 그것이 자신의 눈물을 씻겨주는 것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후일 50장으로 넘어가도 알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이 요셉은 형들이 자기를 팔았지만 형들을 결코 원망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옵니다. 이것은 단지 요셉의 고매한 인격을 보여주는 것만은 아닙니다. 매순간 매순간 하나님의 임재의 그 빛, 그 임재의 영광 앞에서 사는 은혜의 세계가 만약에 요셉에게 없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는 아마 틀림없이 형들을 향해서 이를 가는 사람이었을 것이고 형들을 만났을 때 그들을 당장 보복을 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한맺힌 사람이 되는 대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정말 추구하고 바래야 할 신앙 생활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진정한 축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사는 것 이것이 우리의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며 갈망이 아닙니까? 주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신다고 우리에게 그 기뻐하시는 증거를 보여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때 내 종 이 사람이 전하는 나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이었다는 사실을 인쳐주시는 역사가 있고 그가 어떤 문제를 놓고 구체적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의 과정을 통해서 그 사람이 바로 그 상황과 역사를 움직이는 주인공으로 사용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입증해주실 때, 그때 그것이 진정한 신자의 행복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주님의 임재의 영광이 느끼게 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결국 여기서 우리들이 중요한 교훈 하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의 영광 아래서 사는 것과 신앙의 순수함을 지키는 것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사람의 신자가 하나님과 풍부히 교통하면서 그 하나님의 임재의 빛 앞에서 신령한 신앙 생활을 계속해 나간다라고 하는 것은 치열한 삶 속에서 자신의 믿음의 순전함을 지키는 분투하는 삶 없이는 획득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보다 깊은 교통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비천하고 더러운 인간이 죄의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은총의 빛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그리고 깊이 생각하다가 보면 결국 마지막에 부딪치는 것은 죄의 문제이고 죄의 문제는 결국은 밀폐된 공간에서 생겨나는 문제가 아니라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꿈속에서 일어나는, 환상 속에서 일어나는, 가공의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죄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일어납니다. 불순종도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일어납니다. 그 속에서 일어나는 죄와 불순종들이 하나님의 임재의 영과 앞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최고의 특권을 앗아가는 것입니다.
요셉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셉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은 세속적인 비전이 아니라 가치였습니다. 무슨 가치? 신앙의 가치였습니다. 그것이 이 요셉의 마음을 가장 불태웠던 가치입니다. 만약에 요셉이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꿈꾸는 비전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순간적으로 깡그리 잃어버리고 차가운 감옥 바닥에 내동댕이쳤을 때 그것이 비전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발걸음이라고 생각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절하는 자신의 비전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 되는 대신에 그 비전 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핵심가치였습니다. 그 핵심가치가 무엇인가 하면 순간순간 하나님 앞에 믿음의 순전함을 지키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요셉에게 있어 그 꿈들이 이루어지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팔면서까지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일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일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비전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비전에 매달린 사람이 아니라 핵심적인 가치에 매달린 사람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그런 순수함을 지키려고 하는 신앙이 하나님 임재 앞에서 사는 이 영혼의 축복을 계속 유지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상황, 신분은 엄청나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노예에서 또 옥에 들어가서 요즘으로 말하자면 옥속에서 자치회 회장이 되어서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또 왕궁에 가서 국무총리가 되고, 이렇게 많이 변했지만 그 모든 것들이 신분 상승을 하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도 하나님 앞에 양보하지 않았던 핵심가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순수한 신앙입니다. 그것을 목숨을 걸고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생동안 그가 하나님의 임재의 빛 앞에서 살도록 하나님이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만약에 이 사람이 믿음을 다 팔아먹고 핵심가치를 다 잃어버리고 애굽에 국무총리가 됐다고 합시다. 그럼 아마 애굽의 역사에는 기록이 남았을지 모르지만 성경에는 이 사람을 이야기할 필요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비전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비전보다 순결한 신앙이라고 하는 핵심가치에 더 많이 충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결국은 그 신앙도 지키고 그 비전도 이루고 그것 보다도 더 소중한 축복을 받았으니 일평생을 하나님의 임재의 빛 앞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가졌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오늘날은 꿈에 미친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미쳐야할 것은 꿈이 아니라 신앙이라고 하는 핵심적인 가치입니다. 여기에 미친 사람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꿈도 이루어 주시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임재의 영광 앞에서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신령한 사람 요셉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창41:38)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시105:19下)
우리가 읽은 이 성경을 보면 이제 요셉이 생애적인 전환점을 맞이하는 순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껏까지 애굽에 팔려와서 인간적으로 보면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노예로 팔려와서 그 주인의 집에 신의를 지키면서 죽도록 애를 썼는데 주인집 부인에게 모함을 당해서 왕들의 죄수들이 갖힌 감옥에서 고생을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견디기 힘든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고 그리고 또 거기서 술맡은 관원장과 떡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만, 그러나 그들은 한 사람은 죽었고 한 사람은 복직되었는데 그 은공을 잊어버렸고 영영 이 요셉은 감옥 속에서 인생을 마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요셉이 감옥 속에서 석방되어 바로 앞에 서는 장면을 오늘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어떻게 해서 애굽 큰 나라의 임금인 바로를 대면하게 되었는지는 우리가 읽은 성경 바로 앞부분에 상세하게 나옵니다. 모두 아는 이야기지만 한번 간략하게 요약을 해보자면 바로 이런 이야기입니다. 결국은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 때문에 왕들의 죄수가 갖히는 곳에 수감되었고 거기에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전옥들에게 은혜를 입게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를 맛보면서 거기서도 역시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얼마나 세월이 흘렀을까요?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여튼 요셉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그 처음 37장부터 17살로 나오는데 여기에서 바로 앞에 설 때의 나이가 30살이었으니까 13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것입니다. 17살에 바로 애굽으로 팔려갔더라면 13년 넘는 세월을 애굽에서 고난을 당하면서 지낸 셈이 되는 것입니다. 몇 살 쯤에 보디발의 집에서 총무가 되었고 총무가 된지 얼마나 있다가 투옥된지는 우리는 알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제 최소한 감옥에서 지낸 기간만 2년이 넘는다라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꿈을 해석을 해주고 그래서 술맡은 관원장이 복직을 하고난 후에 2년이 지난 뒤에 비로소 요셉을 생각하고 요셉을 바로의 꾼 꿈 때문에 바로 앞에 세워주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바로가 꾼 꿈은 이러했습니다. 7마리의 소가 올라오는데 아주 실하고 튼튼한 소였는데 뒤에 아주 파리하고 흉악한 소들이 7마리가 올라와서 그 소를 잡아먹은 것입니다. 아주 실한 이삭이 올라왔는데 동풍에 마른 아주 파리한 이삭이 올라와서 그 나머지 이삭을 삼켜버린 사건입니다. 애굽에 있는 박사와 점쟁이들을 불러다가 바로가 자기가 꾼 꿈을 이야기하고 해석을 하기를 원했지만 누구도 그 해석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때에 한때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어 복직한 술맡은 관원장이 생각이 났습니다. 옥속에 자신이 꾼 꿈을 기가막히게 해석을 해서 미래를 예견해주고 그래서 자신의 오늘에 있게 해준 그 요셉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 요셉을 바로에게 말했고 그 히브리 청년이 자기가 꾼 꿈을 기가막히게 해석을 해서 오늘날에 일어난 일들을 예고했습니다라고 말해서 이제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이 요셉이 이제 바로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로 앞에 서게 되었는데 바로가 자신이 꾼 꿈을 이야기하자 요셉은 뭐 기간을 주십시오. 기도해보고 응답을 받아서 오겠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바로가 꾼 꿈까지 이야기 하면서 쭉 진술을 하면서 그 꿈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아주 명쾌하게 해석을 했는데 7해 풍년이 온 후에 7해 흉년이 올 것인데 그 당시로 보면 전 세계적인 흉년이 올 것인데 그 흉년이 너무나 심하기 때문에 그 이전에 풍년이 와서 넉넉하게 곡물을 거둬들였을때의 그 풍요함을 잊어버리게 할 만큼 그렇게 아주 훙악한 흉년이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요셉은 거기에 대한 대책까지도 세워서 이 바로에게 말해주었습니다. 그 대책은 다름이 아니라 이제 지혜로운 사람을 세워서 그래서 7년 동안에 거둬들이는 그 풍년의 곡식들을 잘 저장을 하고 체계있게 관리를 해서 그래서 7해 흉년에 대비를 하면 천하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그런 진언이었습니다. 그렇게 요셉이 상세하게 진언을 해주자 바로와 바로의 신하들은 무릎을 치면서 이것이야 말로 자신들이 직면하고 있는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라고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판단했을 때에 이 애굽의 왕 바로는 좀 다른 표현으로 이 요셉을 깊이 칭찬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디서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을 만날 수 있겠느냐.’ 다시 말하면 요셉을 처음 만나서 그 요셉이 자기의 꾼 꿈을 해석하며 자신의 나라의 어려움을 면할 수 있는 대안까지 제시해 주었을 때에 그 바로는 단지 이 요셉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아니면 행정에 경험이 많은 사람이다. 그런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이 바로는 이 사건을 통해서 요셉이 아주 ‘신령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아주 신령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신에 깊이 감동된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즉시 애굽 그 큰 나라에 국무총리로 세워서 다가오는 풍년과 그리고 그 후에 이어지는 흉년을 대비하게 끔 했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여기서 성경에 본질적인 메시지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우리들이 하나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은, 궁금하게 여기는 사실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아무리 동화도 아니고 어떻게 해서 꿈 한번 잘 해석을 했다고 해서 노예인 히브리 청년을 단숨에 그 애굽의 국무총리로 삼을 수 있었을까? 민족적인 감정도 있고 여러 가지의 많은 변수도 있을텐데 상금을 후하게 내리고 자유를 주었다면 이해가 되지만 어떻게 국무총리를 단숨에 삼을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뭐 우리 나라가 I.M.F를 만나서 위기를 맞았다고 하지만 왠 새카만 흑인 하나가 와서 이렇게 하면 된다고 해서 훈수를 두어서 그래서 I.M.F를 이기게 되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당장 대통령을 만들 수는 없는 것과 비슷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도 이제 대답이 풀리는 게 무엇인가 하면 역사적으로 이 요셉이 여기에 가서 활동하던 시대는 이집트에 있어서 중왕국 시대입니다. 그 중앙국 시대는 이제 고왕국, 중앙국, 상왕국 이렇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그 중왕국 시대에 그때에 북쪽에서 힉쏘쓰 민족이 이집트를 침공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애굽 사람들은 혈통적으로 볼 때 함족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힉쏘쓰족은 말하자면 셈족 계통에 사람들인데 바로 요셉을 비롯한 히브리 사람들이 같은 셈족입니다. 그래서 소수의 힉쏘쓰 민족이 침입을 해서 애굽을 장악한 다음에 지배계층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랬을 때에 애굽 사람의 시각에서 볼 때는 히브리에서 끌려온 노예인 요셉이 자신의 나라에 국무총리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게 여겨졌을지 모르지만 지배계층인 힉쏘쓰 사람의 정서에서 보면 오히려 원주민인 함족 보다는 훨씬 더 통하는 것이 많았을 혈통적인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런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날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요셉은 이 땅에 국무총리가 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관심사는 무엇인가 하면 이 요셉이 신령한 사람이였다고 하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신령한 사람이였다는 것, 이것을 오늘 우리들이 한번 생각해보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좋은 그리스도인, 하나님 앞에 신실한 교인의 모범을 어디에서 발견합니까? 물론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한마디로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우리는 모범적인 교인, 하나님의 교회에서 정말 필요한 훌륭한 교인,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대부분 이런 것들을 말하지 않습니까? 한 교회에서 신앙심이 뛰어난 사람, 그리고 목회자의 목양을 잘 받는 사람, 잘 순종하는 사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충성스러운 삶의 방식,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물질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는데 아까워하지 않는 그런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과부와 고아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착한 사람 이런 것들을 우린 흔히 모범적인 교인의 조건으로 떠올리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맞습니다. 그것은 맞는데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 보다 더 본질적인 조건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사도들을 대신해서 교인들을 돌보고 공궤를 하게 할 집사를 뽑는데 있어서 조건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성령이 충만하고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충만한 것,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신으로 충만하여 신령한 신앙 생활을 이어가는 것이 과부들을 공궤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이 일을 맡길 집사의 조건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여기에서 참 이상하다는 느낌을 갖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도를 뽑는데 있어서 그렇게 성령의 충만한 사람을 뽑는다든지 아니면 한 교회의 목회자나 설교자를 뽑는데 있어서 그런 조건을 제시하면 참 당연하다고 말할텐데 사실 집사를 뽑는 이유는 사도들이 과부들을 공궤하고 그들을 구제하는 일에 신경을 쓰다가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에 전무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일을 대신 수종들게 하려는 것이 집사를 세운 동기였습니다. 그럼 오히려 요즘으로 말하자면 경영학과 나온 사람이나 사회 복지과에서 공부한 사람, 아니면 이 계산을 잘해서 주판을 잘 놓는 사람이라든지, 돈이 들어오고 나가고 곡식을 나눠주고 받고 하는 그런 장부 정리를 잘하는 것, 아니면 무거운 곡식을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나눠주어야지 되겠으니까 튼튼한 다리를 갖고 있는 쌀배달부 같은 사람이라든지 그런 조건을 이야기했으면 납득을 할만한데 “성령이 충만한 자였다” 이게 왜 그랬을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단지 기능만으로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 모든 일이 비록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고 구제하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 일을 훌륭하게 감당해 나가기 위해서는 경제적이고 계산에 능한 기능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신령함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처럼 신앙에 있어서 영적인 특징이 무시되는 시기에는 사실 이런 성경에 증거들이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많이 봉사하고 그리고 오랜 동안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잔뼈가 굵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일에 능숙해졌을 뿐이지 신령함과는 거리가 먼 교인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신령한 것은 오직 목회자나 사도들에게나 해당되는 자격요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성경은 전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요셉이 물론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특별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랬기 때문에 요셉이 우리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매우 특별한 신앙의 원리 속에서 산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히브리 사람이며 노예의 신분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앞에 면도를 하고 새옷을 입고 나타나기 직전까지는 감옥의 죄수로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언자도 아니었고 그는 제사장도 아니었고 더더욱 사도나 목회자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앞에 서기 직전까지 죄수의 몸이었습니다. 단지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가 있다면 ‘여호와 하나님을 공경하면서 사는 사람이었다’라는 차이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감옥 속에서 죄수의 몸으로 있을 때 그가 신령해야 할 무슨 필요가 있었습니까? 감옥 속에서 신령해져서 그 신령한 것을 가지고 어떻게 감옥 살이를 잘하는데 기여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직무와는 상관이 없이 이 요셉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특성을 가졌었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그 특성이 바로 신령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이 요셉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어떤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의 세계 속에 영적으로 보다 예민하거나 혹은 성숙한 사람이 있고 미숙한 사람이 있다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충분히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영적으로 미숙한 사람들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의 섬김과 도움을 일시적으로 받으면서 신앙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영적인 성숙과 미성숙을 토대로 주종관계를 이루면서 살라고 가르쳐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영원히 영적인 신령함에 있어서 영원한 선배도 없고 영원한 후배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내가 처음 주님을 믿고 신앙의 길에 들어서 보니까 오래 동안 신앙의 생활을 해온 믿음의 선배들이 나보다 더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고 신령한 사람처럼 여겨지지만, 세월이 흘러서 내가 그들을 넘어설 수도 있습니다. 한없이 신령해 보이고 높아만 보이던 그들이 어느 순간엔가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가득찬 신앙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을 수도 얼마든지 있고 하늘처럼 높아 보이고 커보이던 신앙의 선배들이 세월이 지나가고 내가 신령한 사람이 되어가면서 그들보다도 내가 훨씬 더 높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진리와 신앙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항상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을 믿으면서 신앙 생활을 해나가는 가운데 점점 더 신령해져 가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는 연조가 깊어지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연륜이 쌓여갈수록 하나님 앞에서 내가 점점 더 신령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에 대한 사모함이 있는가 그리고 정말 그런 신령한 사람이 되어가는 증거가 내 안에서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가 이 요셉을 만났을 때에 받은 첫 번째 강력한 인상이 무엇이었습니까? 보디발의 아내가 보았던 것처럼 ‘야 진짜 잘빠진 젊은이구나’ 그렇게 생각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정말 노예같이 생겼구나’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 안에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죄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권위있는 꿈의 해석과 지혜로운 정책에 대안을 제공받으면서 바로는 즉시 이것은 사람이 좀 똑똑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다. 여기서 ‘감동되었다’라고 하는 말은 ‘그의 사고와 그의 인격 사상 깊숙히 하나님의 신령한 영이 지배하고 있다’라고 하는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런 것이 필요합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보기 쉽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흔히 있는 일입니다. 같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신앙 생활을 하는 데도 은혜 많이 받은 사람과 그런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 사이에 이상한 주종관계가 성립이 됩니다. 그래서 늘 가서 머리를 디밀고 기도 해달라고 그럽니다. 성도들끼리 서로 중보기도 속에서 연합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그럽니다. 그리고 심지어 기도해주고 돈까지 받아서 챙기는 그런 무지한 사람들도 있으니, 아니 실제 있는 일입니다. 제가 있던 교회에서도 경험한 일입니다.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어째든 분명한 사실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는 신령해질 필요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의 세계에는 신령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사람들은 단지 육신의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볼 수 없는 비상한 신앙의 세계를 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육신적인 안목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쉽게 파악할 수 없는 믿음의 깊은 세계를 들여다보는 통찰이 있고 그 통찰을 가지고 삶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안목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신령함이 정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날마다 신앙 생활을 해나가면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이처럼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영적인 실상을 보여주어서 그들의 인생과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말해줄 수 있고 말씀을 통해서 그들이 가야할 일들을 제시해줄 수 있는 그런 선지자적인 안목과 해안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이 복잡한 시대에는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단지 착하고 마음씨 좋은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렇게 난국에 처한 애굽의 위기의 상황을 몇마디의 의견으로 타결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던 요셉과 같이 신령한 지혜와 눈을 가지고 역사도 보고, 교회도 보고, 이 세상도 보고, 자신의 삶과 성도들의 삶을 볼 수 있는 그런 신령한 눈을 가진 교인들이 정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령한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신령한 하나님과의 교통의 세계 속에서 탁월한 교제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남들에게는 없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오늘 이 바로 앞에서 요셉은 죄수의 몸으로서 바로가 꾼 꿈과 그리고 그 꾼 꿈의 의미와 그리고 그 꿈이 가져다 주는 해석에 대해서 어떻게 대안을 세워야 되겠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 두 사람, 한 사람 바로는 그 꿈에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고, 한 사람 요셉은 그 꿈을 이야기하는 사람인데 누가 이 두사람의 관계를 위대한 왕과 비천한 죄수의 관계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까? 드디어 이 요셉은 이 짧은 시간에 애굽의 죄수나 혹은 애굽의 노예가 아니라 애굽을 구원하기 위해서 보낸 하나님의 사자로 바로와 바로의 신하 앞에 나타났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애굽에서 살아온 자랑할 것이 없는 경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이 가지고 있는 풍모, 그가 가지고 있는 지력이나 인간적인 지혜, 이런 것들에 사람들이 굴복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이 죄수인 요셉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승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신앙 생활을 하면서 교회 생활에 익숙해지고 교회에서 이런저런 맡은 일들을 봉사하는 일에 전문가가 되는 것만으로 우리의 신앙이 자란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라고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깊어가는 그 마지막 결정체는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단지 좋은 사람,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신령한 사람으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모든 신앙 생활, 모든 영적인 생활에 궁극적인 모습이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목표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의 탁월한 교제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범접하기 힘든 신령함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탁월한 교제의 세계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감히 침범하기 어려운 권위와 위엄, 그리고 그들만의 독특한 세계가 있습니다. 바로 이 요셉이 그런 세계 속에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기사를 보면서 우리에게는 이런 의문이 하나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스토리 같으면 바로가 꾼 꿈과 그 꿈을 해석을 할 때 좀 기간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바로가 꿈을 해석을 하라고 그러는데 해석을 하면 총리오 못하면 사형인데 하나님, 도와주십시오.”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더니 주님이 응답해주셔서 ‘사실은 이 꿈은 이런 뜻이다. 그러니까 가서 바로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면 된다.’ 그 응답을 가지고 와서 이야기를 했다면 우리는 보다 더 이해하기 쉽고 공감을 느낄 수 있겠는데 그것이 아니라 그저 단숨에 몇분 안에 그냥 그대로 당신이 꾼 꿈은 이러이러한 꿈이고, 이러이러한 꿈을 꾼 것은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이고, 그리고 대안은 이거이거입니다. 한꺼번에 딱 제시를 하고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뭘 알 수가 있는가 하면 여기에서 나타난 이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었던 요셉의 신령함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시간에 필요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반짝하고 주신 한시적인 능력이 아니라 요셉 안에 원래의 있었던 능력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끔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대표적인 것이 바로 2년 전에 있었던 떡맡은 관원장과 술맡은 관원장의 꿈이 아닙니까? 그 꿈을 해석을 해줄 때에 안된 이야기지만 ‘당신은 사형이다.’ ‘당신은 복직한다.’ 그랬더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것도 보면 무슨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해준 것이 아니라 꿈을 꾼 후에 그대로 그들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그대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위기 상황을 넘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한시적으로 그런 능력을 요셉에게 준 것이 아니라 요셉 자신이 그런 많은 꿈들을 능히 해석하고 그런 꿈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여러 가지 계시들을 이해하고 해석해낼 수 있는 신령함을 이미 요셉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당하게 된 이 바로와의 관계 속에서의 꿈 사건은 요셉이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의 범위 안에 들어가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제가 왜 이 사실을 본문을 들어가기에 앞서서 여러분들에게 강조를 하는가 하면 이것을 먼저 기억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그래서 이것은 요셉에게 순간적으로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위기를 넘기게 하신 것이 아니라 요셉 자신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신령한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신령함으로서는 이런 문제들을 풀어갈 수 있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바로가 “우리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가 있겠느냐” 했을 때에 바로가 그를 보면서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식하게 된 것은 꿈을 해석해주고 명쾌하게 그 대안을 제시했기 때문에 그 사건을 통해서 요셉 자신을 사로잡고 계신 하나님의 그 감동을 본 것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가 바로가 그것을 발견을 그때 했다는 것이지 이미 요셉은 감옥에 있을 때부터 ‘신령한 사람이었다’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원래 신령한 사람입니다. 여기 바로 앞에 서기 전까지도 원래 신령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처음부터는 아니지만 하여튼 감옥에 있을 때도 신령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제 우리의 본격적인 관심을 끄는 것은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서 요셉이 이렇게 신령한 사람이 되어갈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 앞부분을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요셉이 무슨 특별히 하나님 앞에 기도 생활을 한 기록이라든지 또 무슨 하나님 앞에 어떤 자신의 영성을 고양시키기 위해서 어떤 특별한 자기 훈련에 헌신했다든지 이런 기록들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이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이 요셉은 경건한 사람이었고 하나님과의 교제에 힘쓰던 사람이었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들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어제도 보니까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을 때에 그는 그 여자와 자신 둘밖에 없는 그 공간에서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라는 사실을 의식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면전 의식, 하나님이 항상 내 앞에 계시다고 하는 이 면전 의식 속에서 사는 것은 어떤 충동적인 헌신을 통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장구하고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 앞에서 매일매일 하나님과의 교제에 자기를 바치고 드리는 경건의 힘쓰는 삶을 통해서 얻어지는 영적인 세계입니다. 물론 그런 신령한 세계를 단숨에 잃어버릴 수는 있지만 그런 신령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사는 세계가 단숨에 형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단숨에 형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우리들의 경험에 의하면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주셔서 반짝하고 그 한순간에 아주 죄에 대한 예민함이 생긴다든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 대한 큰 두려움이 생긴다든지 아니면 형언할 수 없는 놀라운 기쁨 속에 잠깐 들어간다든지 하는 그런 영적인 체험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요셉이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내면의 세계, 여호와의 임재 앞에서 사는 그의 영적이 생활의 진면목 이것은 모두 반짝하고 스포트라이트를 비치는 잠깐 동안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장구한 세월을 두고 살아온 최소한 13년 세월을 살아온 동안에 늘 경험하고 있는 그런 지속적인 삶의 경험에 선상에서 그런 하나님의 신에 의한 감동과 그리고 그런 영적인 예민함,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사는 내면의 세계 이런 것들이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어느 한순간에 반짝하고 비치는 빛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인 경건에 자신을 바치는 헌신 속에서 주님과의 관계를 가장 최상으로 여기면서 살아온 삶의 결과라고 우리는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아까 읽은 시편 105편에 아주 암시가 탁 나오는데 그것은 “그 애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요셉을 연단하였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요셉을 연단하였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특별히 시편에 잘 나오는 “연단”이라고 하는 단어는 금이나 은같은 귀금속을 제련할 때 쓰는 용어입니다. 불순물이 섞여져 있는 금붙이 같은 것을 용광로 속에 집어 넣어서 불을 때서 녹여서 거기에서 비중의 차이를 이용해서 금은 금대로 빼내고, 찌꺼기는 찌꺼기대로 빼내는 이런 일들을 반복을 해서 정금을 만드는 작업, 이런 것들을 연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요셉을 애굽에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자체는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이 침묵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완성된 요셉에 영성에 대해서만 결과론적으로 말해주고 있지만 그러나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실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공통된 경험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냥 모두 예수 믿고 아무렇게나 막 살았는데 어떤 사람들은 복권이 터진 것처럼 영적으로 신령한 사람이 되고 어떤 사람들은 꽝 해서 그런 꽝 같은 교인이 되는 것,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신령한 은혜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당신이 어떻게 그런 삶을 살게 되었소”라고 말할 때 “하나님의 은혜이지요”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재수가 좋아서”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시편 105편에서 아주 명쾌하게 암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요셉을 연단하였더라” 이게 얼마나 재미있는 힌트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요셉을 연단하였도다” 말씀이 어떻게 우리를 연단할까요? 누가 그랬습니다. 자기는 어려서 자라면서 자기 아버지에게 말씀으로 엄청나게 연단을 받으면서 자랐다고 했습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연단을 받았다고 해서 난 또 아주 고차원적인 신앙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온 줄 알았는데 아버지가 교회를 다니는 것을 엄청 싫어해서 매일 때릴 때는 성경을 들고 때린다고 했습니다. 말씀에 연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적어도 내가 진리의 말씀으로 매맞으면서 자랐다고 했습니다. 옛날에는 성경 겉이 딱딱한 껍데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것으로 때리면 진짜 연단이 됩니다. 수없이 맞으면서 자랐다고 합니다. 사실 그런 연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이 우리를 연단한다” 그럴 때 어떤 것입니까? 신앙 생활에 있어서 아주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이 연단한다 그럴 때 그림이 어떤 것이라고 여러분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코 말씀에 연단되지 않습니다. 교회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포기한 교인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를 포기한 사람들, 진리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일이 신앙에 중심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삶으로서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정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 아무리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그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어차피 안 듣기로 하고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니까 그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말씀으로 말미암은 연단, 그런 것 모릅니다. 환경으로 말미암은 연단은 있을지 모르지요. 살면서 실컷 두둘겨 맞고 얻어터지면서 경험을 통해서 비로소 ‘여러번 가봐도 계속 피터지니까 이 길이 아닌가 보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시편 119편에서 시인이 이야기했던 “하나님의 말씀은 너의 길에 빛이오 내 발에 등이니라” 등도 필요없고 빛도 필요없는 사람입니다. 왜 터져서 머리에 피나보면 거기가 길이 아닌 것을 아는데 뭐하러 힘들게 빛을 비치고 등불을 들고 그러고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뭐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운전자로 말하자면 헤트라이트가 필요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무 길로나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 길이 그 길이 아니면 어떻게 하나.
여러분, 영국이나 호주에 가면 우리 하고 차가 정반대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거기에 처음 이민가서 교통사고를 많이 낸다고 합니다. 여기처럼 우리는 우측통행을 하는데 가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휙 돌리는 것입니다. 저쪽에서 차가 나오다가 마주치는 것입니다. 그냥 달려보는 것입니다. 캄캄한데서 차가 오면 어떻게 하냐고 하니까 그것을 뭐 신경을 쓰냐고 하면서 박치기 하면 그게 길이 아니고 안 박치기 하면 거기가 길이지 뭘 그렇게 복잡하게 라이트를 비치고 표지판을 따라가고 그러냐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는 그렇게 사니까 괜찮지만 자기와 같은 차에 탄 사람들은 무슨 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 가족들은 무슨 죄가 있습니까?
‘말씀으로 연단받는다’ 하여튼 우리 중간 결론은 이런 것을 하나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요셉이 그런 신령함을 가지게 된 것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연단한 결과로서 그가 그렇게 신령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성경적인 그 결론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연단을 통해서 이 사람이 신령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에 연단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말하기 전에 우리는 신령해지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낭만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게 신령해졌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어느 날 기도원에 가서 소나무 뿌리를 뽑는데 뭐가 번쩍하고 어떻게 했다더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황당무계한 그런 이야기를 통해서 신령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 같은 그런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주위를 돌아보면 진짜 뭐 번쩍하는 것을 만나서 신령해진 사람이 있나 찾아보면 소문만 무성하지 장본인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번 손들어보십시오. 그런 경험으로 졸지에 신령한 세계 속으로 들어간 사람이 있으면 한번 손들어보십시오. 내가 가짜임을 오늘 입증할테니까 아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소문만 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했다더라. 뭐라 카더라. 그런 것만 있지, 진짜 장본인은 없습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한번 여러분 주위에 그래도 아는 사람이 많을 것이 아닙니까? 다 더듬어서 찾아보십시오. 뭐 어느 날 갑자기 번쩍하더니 완전히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그런 신령한 세계의 사람이 되었다더라. 그런 사람이 있는지 한번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있다면 대부분이 가짜입니다. 그게 오늘날 교회를 힘겹게 만드는 신비주의 운동들이 대부분 그런 부류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소문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가능성도 있을 것처럼 이야기들은 무성한데 실제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한사람이 신령해지는 것,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연단을 통해서 그 사람이 신령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아주 오랜 세월동안 되어가는 것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17살에는 요셉이 형들을 고자질하고 17살이면 그 당시에 성인인데, 그 당시로 보면 17살이면 장가갈 나이입니다. 장가도 몇번 갈 나이입니다. 그 나이에 형들에게 가서 잘못을 보고 와서 아버지에게 고자질하고 아버지 바지 자락에 숨고 이런 위인이었는데 그 사람이 오늘 여기에 바로 앞에서 꿈을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별세계에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이게 13년 이상이 흐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결정적인 계기가 있어서 번쩍하고 신령한 사람이 되었다면 성경이 반드시 그것을 기록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유치하던 젊은이가 이렇게 신령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뀌었을까? 거기에 대한 대답이 시편 105편에 나오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연단을 통해서 이렇게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신령한 사람으로 바뀌어간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의 말씀의 연단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느 순간에 우리에게 깨달아지면 그리고 그 깨달은 말씀이 정상적으로 성령을 통해서 역사하시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를 않습니다. 말씀이 살아서 일어나서 우리를 잡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차가운 성경 속에 갖쳐 있던 말씀인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에 그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그 깨닫는 과정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시니까 그 말씀이 강력하게 살아서 우리를 사로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하게 끔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늘 하던 일들을 못하게 끔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용서하게 만드는가 하면 꿀 수 없었던 위대한 일들을 꾸게 끔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이 놀랍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런 과정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신령한 사람이 되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씀의 연단을 받는 이 과정은 신령한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만이 아니라 신자다운 신자가 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문제는 이제 그 연단을 받고 그 연단을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가는 정도가 어느 정도냐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조는 시간보다는 말씀을 듣는 시간이 그래도 많은 편입니다.’ 이렇게 깨닫는 것도 깨닫는 것입니다. ‘예화는 생각납니다.’ 그것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설교는 못들었어도 마지막에 기도합시다. 이것은 늘 들었습니다.’ 이것도 사실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는 우리들이 연단을 받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연단을 받는다”라고 하는 것은 그 말씀에 수시로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강력하게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경이로운 눈빛으로 성경을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 이게 진짜 장난이 아니구나 여기에 기록된 것이 고문서가 아니구나 야 진짜 놀랍구나’
주 여호와는 능력의 주 내 영혼에 치료자
말씀으로 고치시네 주는 나의 치료자
오랜 세월동안 자기의 신체의 일부처럼 여기면서 살아온 아주 자연스럽게 몸에 밴 삶의 습관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그 순간에 강렬한 깨달음을 주면서 수 십 년 동안 내가 살아온 이 방식이 죄라고 하는 것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문제를 문제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깊이 묻어두고 살아왔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단숨에 그 오래 동안 자신의 삶 속에 습관처럼 녹아왔던 그 불순종이 자신의 삶에 어떤 고통을 주고 있는지를 탁 떠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자매 하나가 있었는데 굉장히 상처가 많은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어머니를 굉장히 미워했습니다. 원래 서로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야 될 사이에 미움은 원수보다도 더 증오심에 가득차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런 자매가 엄마로부터 견디기 힘든 상처를 받고 엄마를 미워하게 되는데 그 자매가 공산당을 더 미워하겠습니까, 엄마를 더 미워하겠습니까? 공산당은 이제 너무 추상적입니다. 그거 보십시오. 이 문제를 제가 마지막 날에 또 말씀을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어느 한순간에 미움이 확 들어오고 계기가 있어서 범죄하는 행위를 해서 미워하게 되었다면 그게 딱 남습니다. 아주 출발이 분명하니까. 그런데 이게 아주 유년시절부터 시작해서 아주 삶의 일부분으로서 쌓여오면서 그 어머니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머니를 미워하면서 사는 자체가 자연스러운 삶의 한 방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더군다나 신앙이 없을 때에도 그런 삶의 방식이 익숙해왔습니다. 그것을 누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끔 보면 이런데 혹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편하냐고 물어보면 그 사람들 불편하다는 소리를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자신의 신체의 일부로서 수 십년 동안 달려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딱 깨닫고 나니까 자신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가장 커다란 원인이 미움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생각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아 이건 내가 너무 예민해진 것이겠지’ 하고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한번 지우니까 더 크게 떠오르는 것입니다. ‘아 그런 게 아니지. 하나님이 다른 것을 말씀하실 것도 많을텐데 왜 그것을 자꾸 말씀하시는가 오래된 이야긴데’ 하고 밀어버리는 것입니다. 또 떠오르는 것입니다. 결국은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그 한문제 밖에는 자신의 인생에 존재가 안 하는 것처럼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게 말씀에 연단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자신의 어떤 부족을 뼈아프게 생각하면서 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지 않는 것도 알고 보면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연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늘 기독교인의 흉내는 내고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면해서 그 말씀이 자기에게 지적하는 바에 대해서 깊이 귀를 기울이는 이런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변화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번 마음을 열고 묵상의 날개를 펴보십시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인데 요셉이 그렇게 졸렬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었다가 이렇게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으로 나타났는데 그러한 놀라운 차이를 메워줄 수 있는 유일한 암시가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이 저를 연단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 요셉의 삶이 어떤 삶이었는지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없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분명히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을 해서 그 이전부터는 물론이거니와 아브라함 때부터 구체적으로 시작이 되어서 자신의 가문 속에 내려오는 구전을 통해서 혹은 기록을 통해서 전해 내려오는 아주 분명한 신앙의 교훈들이 존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교훈들을 오늘 우리들이 신앙의 경험을 통해서 오래전에 기록된 성경의 말씀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는 것처럼 아마 요셉도 그러한 경건의 발전 과정을 밟았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고난을 받으면서 길면 13년이 넘는 세월 동안 노예로서 죄수로서 고난을 받으면서 사는 세월 동안 그의 삶 전체는 하나님의 말씀에 혹독한 연단을 받는 삶이었습니다. 그런 삶이 지속적으로 계속 되었기 때문에 사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도 생각을 해보고가 아니라 단숨에 물리칠 수가 있었고 그것 보다도 상황이 더 나빠져서 노예에서 이번에는 죽을 날을 기다리는 죄수의 상태로 떨어졌을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의식하면서 사는 사람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요셉은 애굽에 있는 동안에 사실 꿈에 미친 사람이 아니라- 어제 굉장히 중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새로운 용어를 하나 썼습니다. -비전보다도 더 중요한 신앙이라는 핵심가치에 집중한 사람입니다. 요셉을 그렇게 봐야 합니다. 그런 핵심적인 가치에 집중하지 않고 꿈에 미치는 것은 그것은 몽상가입니다. 환상입니다.
우리의 경험도 이런 것을 아주 깊이 이해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정말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하다가 여러분 중 모두는 아니겠지만 여러분들 중에 상당수 대다수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연단한다”라는 말을 여러분들 대부분은 이해를 하리라 생각합니다. 소수분들은 이해를 못하지만, 그래도 수준이 있는 분들이니까 이해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연단할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이 세상에서 지위가 높아지고 낮아지고, 돈이 좀 있고 없고, 좋은 옷을 입고 나쁜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고 나쁜 음식을 먹고 이런 어떤 환경적인 변화에 대해서는 관심이 훨씬 덜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이렇게 계속 말씀하시는데 ‘아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지 내가 더 변화되어서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오래동안 내가 내 가족을 미워하며 살아온 것이 내 삶의 일부처럼 되어서 이제는 내가 이것을 통해서만 내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비참한 처지가 되었는데 어떻게 내가 이 오래된 미움과 결별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나를 너는 이것이 잘못됐다고 그러고 계속해서 나를 하나님 앞에 세운다고 할 때 죽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는 처지의 사람이 되었을 때에 그 연단 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여러분 알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단에서 이겼을 때에 그 놀라운 기쁨, 하나님께로 성큼 다가서는 것 같은 놀라운 친밀함에 증진, 이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오래동안 집착해왔던 자기 자아를 꺾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해서 내 자아를 허물고 내 안에 주님을 세우는 삶이 실현될 때 우리들은 비로소 우리의 신앙의 수준이 한차원 올라가는 것들을 경험합니다. 말씀에 연단이 우리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계속 연단할 때는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는 마음의 평안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평안도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승리에서 오는 평안이 있고 패배에서 오는 평안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셉은 외면적으로 볼 때에는 사랑받는 아버지의 한 아들로부터 시작을 해서 노예, 노예에서 총무, 총무에서 또 죄수, 죄수에서 반장 비슷한 것을 하면서 이렇게 하면서 국무총리까지 하면서 진짜 다이나믹하면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지만 그러나 요셉의 내면의 세계에서 말씀에 연단을 받으면서 그 파란만장에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가 아멘을 해야될 그 지점입니다. 신령해야지 아멘을 하지. 다시 하자면 그것입니다. 외면적인 요셉의 신분의 변화도 파란만장하고 다이나믹한 생애였지만 그것은 모든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의해서 연단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을 받으면서 자신이 변해가는 이 과정이 그보다 훨씬 변화무쌍하고 다이나믹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결국은 어떻게 변하는가 하면 50장으로 넘어가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7살에 형들이 잘못햇으면 뭘 그렇게 잘못했겠습니까? 잘못한 것을 ‘아빠, 형들이 소 물도 안 주고 매일 자기들끼리 놀러다닌데’ ‘이놈의 자식들’ 그랬을 것입니다. 그럼 형들이 도망가면서 ‘저 자식 언제 두고보자 매일 꿈만 꾸면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 옹졸함이 남아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자기 형제들이 다 애굽에 왔을 때 ‘능지처참 하여라’ 그랬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폐하, 저 자들은 한때 저의 육신의 동기간이었는데 인간도 아니옵나이다. 당장 단 칼에 목을 베소서’ 그 정도가 아니면 ‘멀리 멀리 귀향을 보내서 노예로 삼아서 너희들이 나를 팔아서 이 고생을 했으니 너희도 한번 맛좀 봐라’ 그랬을 것입니다. 아니 백퍼센트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그를 장구한 세월 동안 연단한 것입니다. 자, 우리에게 이런 세계가 있습니까? 우리는 왜 그렇게 부요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는 그 순간에 구원을 받았지만 그러나 알고 보면 우리는 진흙덩어리일 뿐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그 구원받은 그 이후에 말씀으로 우리를 연단하여 계속 빚어갈 때에 비로소 진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태어나서 단 한번도 말씀이 자기를 움직이고 연단하는 것을 경험해본 적이 없이 눈을 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짐승과 다름이 없는 삶을 살다가 인생을 마치는 것은 너무 당연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시시때때로 연단을 받고 때로는 그 말씀대로 사는 것 때문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때로는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 때문에 아파하고 때로는 그 말씀에 사로잡혀서 정말 고통하는 심령이 되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이런 자기의 반성과 자기 부인의 이 처절한 씨름이 있어도 인간이 이렇게 안 변하니까 사실 나같은 사람이 할 일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6개월 단기 속성으로 성자가 된다고 할 것 같으면 목회자들은 실업자 투성일 것입니다. 그런데 안 변하는 게 끊임없이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목사님에게 섬김의 기회를 풍부히 제공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하는 이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섬김의 기회는 여러분들이 안 주어도 줄 사람이 너무 이 세상에 많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에 의해서 연단을 받으면서 날마다 하나님 앞에 새사람이 되어갈 때 그때 우리들은 결국은 점차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단숨에 어디서 벼락맞듯이 그래서 다른 사람이 되는 그런 상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그 고통스러운 애굽에서의 종살이의 긴 기간이 있었습니다. 만약에 요셉에게 너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때가 언제였는가? 이렇게 물으면 보디발의 집에서 재수없는 여자에게 모함받아서 난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수가 되어서 감옥에서 고생할 때 생각하면 이가 갈립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저 같이 모자라는 사람에게도 누군가가 당신이 살아온 세월, 주님 만난 세월 돌아보면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때가 어느 때였습니까? 물으면 가난하던 때,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그때가 아니라 말씀이 나를 연단할 때, 고쳐지기 싫어하는 나를 연단해서 나를 새사람 만들려고 할 때 나의 사악하고 육에 속한 본성과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이 내 안에서 다투고 있을 때, 그때입니다.
얼마나 괴로우면 그런 연단을 받을 때 사람들은 죽음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복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며” “복되도다 우는 자들이여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결단코 혹독하게 몰아가서 우리를 죽이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 말씀에 강력한 도전을 받아서 죽었다는 사람을 보았습니까? 내가 이렇게 질문하니까 어떤 사람이 그랬습니다. 봤습니다. 그래서 누구냐고 그러니까 갸롯 유다라고 했습니다. 죽은 것 같잖아요. 그런데 그거는 아닙니다. 갸롯 유다를 죽음으로 몰고간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말씀이 몰고간 것이 아니라 양심의 가책이 몰고간 것입니다. 사실 필요한 것은 죄인의 양심의 가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된 가운데 신앙적인 양심에 가책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입니까? 베드로, 똑같습니다. 베드로가 유다 보다 난 것이 뭐가 있습니까? 갸롯 유다는 은 30 때문에 예수님을 팔았고 베드로는 목숨 때문에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는데 오십보 백보지 뭐 그렇게 차이가 있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회개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단순한 어떤 불신앙적인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양심에 가책이 그를 회개시켰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래서 보면 나가서 통곡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다고 했습니다. 그런 차이입니다. 결코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들이 연단받는 그 과정을 통해서 신령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아픕니다. 말씀이 우리를 향해서 이것저것을 말하고 우리에 대해서 이런저런 평가를 하면서 또 우리의 이런저런 것들을 우리에게 겨냥하면서 말씀이 우리에게 말할 때 우리는 고통스럽습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신령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보세요. 이 신앙의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자산이 뭔지 아십니까? 신앙의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자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연단될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연단한 말씀이 있고 그 다음에 말씀이 선포될 때 그 말씀이 자신을 연단하도록 자기를 내어주고 그리고 그 말씀이 연단할 때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려고 하는 마음을 가진 이것이 금이나 은보다도 훨씬 소중한 재산입니다.
요셉이 그 장구한 세월 동안 이런 연단을 받으면서 결국은 마지막에 신령한 사람이 되고야 만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죄수로 있을 때나 노예로 있을 때나 어떻게 보면 요셉이 옥속에 들어가게 된 것은 신령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총무는 원래 맡은 일이 많습니다. 그 큰 집안에 총무 일을 하면서 분주하게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짤렸습니다. 그리고 옥 속에 들어가서 뭐 할 일이 있었겠습니까? 거기서 반장 노릇을 했다고 하지만 그 큰 보디발의 집에서 총무로 일하는 것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업무량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 감옥 속에서 더 신령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고 말씀의 연단에 직면하면서 거룩의 사람이 되어갔을 것입니다.
저는 바울의 서신 가운데 소위 이야기하는 옥중 서신이라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이런 것들을 옥중 서신이라고 합니다. 그 옥중 서신을 보면서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그 복음에 대해서 아주 깊이 있고 해박한 세계를 보여주는 서신서를 보면서 때때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게 바울이 투옥된 것이 이게 아마 하나님의 은혜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투옥되었기 때문에 아주 분주한 일 속에서 다소 자신을 격리시키면서 보다 깊은 묵상 속에서 말씀에 연단을 받으면서 더 깊은 복음의 세계를 드러낼 수 있는 그 신령함을 갖게된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똑같은 상황을 우리는 요셉의 생애를 보면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지금은 신령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렇지요? 지금은 사람들이 볼 때에 그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말해주는 것도 감지덕지 할 정도에 어린 신앙 생활일지 모릅니다. 오래 교회에 다녔는 데도 왜 그런지 영적인 특성이 우리 속에 쌓여가지를 않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나를 보고 신령한 사람이라고 불러줄 가능성은 없고 신령함은 그만두고 착하다는 소리만 들어도 좋겠는데 불끈불끈 솟아나는 이 성질머리 때문에 쌓았다가는 허물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오기를 수 십년,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 모든 기회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괜찮습니다.
요셉의 생애를 생각하세요. 번쩍 하고 비치는 번개불 같은 것들이 이를 신령한 사람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장구한 연단, 주님의 말씀, 주님의 음성 앞에 자기를 걸고 씨름하는 그 연단을 통해서 신령한 사람으로 변해갔습니다. 바로가 볼 때 이런 사람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로가 볼 때 이렇게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수많은 종교인과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을 만났지만 이 죄수에게서는 그들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어떤 종교적인 서기를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 신령한 사람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요셉이 말씀에 의해서 연단받으면서 이런데로 나아갔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이 우리도 그 말씀에 지속적으로 연단을 받으면서 살아갈 때 언젠가는 지금은 초라하고 그리고 영적인 특성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언젠가 하나님이 성실한 하나님의 말씀에 연단받는 우리의 충성된 삶을 보시고 언젠가는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신령한 사람,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 그래서 변천하는 세상 속에서 불변의 복음의 진리를 통찰하고 많은 길 잃은 사람들에게 바로와 같이 난관에 처한 시대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줄 수 있는 신령한 사람들로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날을 기대하면서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에 연단 속에서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4.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45:5上)
소설도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은 없을 것입니다. 흥미진지합니다. 그래서 소망이 없는 죄수의 몸, 무기수가 아니면 사형이 확정되어서 기다리고 있었을 그 끔직한 죄수의 몸에서 졸지에 보디발 보다도 훨씬 뛰어난 국무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렇게 뛰어난 지혜로서 애굽을 다스려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큰 비전 이런 것을 말하기 전에 성실하게 자기 자신이 준비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준비가 안 된 사람이 잘못해서 커다란 일을 맡으면 자신만 불행지는 것이 아니라 그를 지도자로 따라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너무 불행해집니다.
그래서 제가 늘 이야기할 때 결혼은 나이가 찼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소명이 있어야지 하는 것이고, 애는 갖었다고 낳는 것이 아니라 애비가 될 소명이 있는지 확인하고 아이를 낳아야 합니다. 응답받고 애를 낳아야 합니다. 그 응답이 없으면 어떻게 하는가, 그러니까 그 이야기는 새겨서 들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준비가 되라는 것입니다. 누구 만나서 좋은 사람이 있어서 시집 장가 가는 것은 모두 세속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고 모든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그렇게 준비된 사람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감옥 속에서 나온 사람이니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혀 준비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준비된 사람이 있습니다. 탁월한 지혜로, 고대 애굽의 지도를 한번 보십시오. 어마어마한 영토입니다. 그것을 전체적으로 단숨에 장악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손에 넣고 바로를 대신해서 그 나라를 뛰어난 지혜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지도자로서의 놀라운 자질을 갖추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2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습니다. 요셉의 나이가 32살이 되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때에 이제 가나안도 흉년이 들었으니까 이제 곡식을 사려고 왔다는 이야기가 오늘 써있습니다. 반복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 나와있으니까, 그래서 이제 형들이 와서 곡식을 사려고 했는데 이러저러한 사연을 다 겪으면서 결국은 형제가 모두 만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이야기까지 들었고 그 형제를 모두 만나게 되는데 그게 고향을 떠난 지, 자기를 팔아버릴 때 형들은 아마 팔팔한 20대 혹은 30대 초반이었습니다. 자기도 이제 중년에 접어드는 데 형들은 오죽하겠습니까? 큰형은 노년에 접어들고 그 뒤에 줄줄히 이어서 이제 모진 풍파 속에 기근까지 들어서 먹지도 못하고 피골이 상접했으니 호강을 한 요셉 보다는 훨씬 늙어보였을 것입니다. 그 시골 촌사람들과 함께 마주앉아 있게 되었을 때에 요셉의 감회가 어떠하였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이제 그 요셉에게 형들이 모두 찾아와서 대면하게 되었을 때 몇 번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형들이 처음에 요셉임을 알게 되면서 큰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이 무엇인가 하면 무슨 두려움인지 뻔한 것이 아닙니까? 자기 손으로 팔았는데 그 사람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으니 상상도 안 가는 이야기입니다. 애굽의 국무총리 앞에 이제 자신들은 이방의 나그네요, 애굽 사람들이 상종도 안 해주는 천한 히브리 사람, 같이 밥을 먹으면 부정을 탄다고 믿을 정도로 재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서 그 앞에 앉아 있을 때에 그때에 그들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총리를 마주할 때에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자기들이 팔아먹은 요셉이었다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 그들의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범죄한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입니다. 하나님 앞에 바른 길을 걸어오지 않고 이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하고 그리고 순간에 끓어오르는 충동으로 사람을 향해서 모함하고 범죄하고 해롭게 한 사람들에게 이런 양심에 가책들이 있는 것입니다.
15년이 지나면서 그들은 아마 요셉의 존재에 대해서 새카맣게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요셉에게 행한 자신들의 끔찍한 범죄도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순간에 그 모든 것들이 다 살아났습니다. 모든 것을 다 생각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이제 자신들이 행한 끔찍한 일 앞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놀라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요셉이 형들을 모두 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형들이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고 그러지도 않았는데 무서워말라. 사실 용서를 비는 사람이 있어야지 용서를 해주는 것이지, 이게 말하자면 순서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은 입이 벌어져서 지금 얼어붙어서 조금 잘못했어야지만 미안하다고 그러고 변명을 하지, 워낙 만인이 잘못하면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어봐도 아무 대답도 못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바로 그런 처지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두려움 속에 가득차 있는 그들에게 팔을 벌리고 다가가서 심적으로 그들을 끌어안으면서 말하기를 당신들이 나를 애굽 사람에게 판 것을 인해서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 이야기는 봐주께 그 이야기 보다도 훨씬 더 깊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면 나는 나를 판 사건을 용서한 정도가 아니라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용서의 진정한 완성은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잊어버린 그 위에 아가페의 사랑을 더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단지 그냥 ‘용서할게, 이해해’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복수는 안할게’ 그 뜻입니다. ‘살려는 줄게’ 요셉이 그런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형들의 관심사는 요셉이 15년 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그냥 뭐 들었을 것이 아닙니까? 몇 번 오가는 사이에 그 입지전적인 생애에 대해서 전부다 들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요셉을 우리가 팔았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고생했을까? 우리가 행한 일은 정말 나쁜 일이었다, 어떻게 그 아이가 이렇게 높은 사람이 될 수가 있는가 하필이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아마 둘 중에 하나이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루우벤의 말대로 살려두든지 아니면 진짜 사자에게 찢기든지, 그랬으면 보복 받을 일은 없을 것인데 이 사람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우리 앞에 마주하고 있으니 이제 우리는 죽었다. 그리고 순간 사로잡힌 게 요셉에 대한 미안함, 이런 게 아니고 큰 공포, 죽음의 공포가 확 엄습하는 것입니다. 조금 잘못했을 때 아직도 서로 사랑이 남아 있을 때 미안하고 인격적으로 죄송하고 이런 생각이 들지 회복될 수 없는 큰 죄를 그에게 범했을 때는 미안한 생각이 안 드는 것입니다. 공포가 드는 것입니다. 왜 보복당할 것이라고 확신하니까. 그것을 요셉이 제가 델리케이트한 사람이라고 성경을 읽으면서 인상을 받는 것이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요셉은 사람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본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이제 관계의 회복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이게 아니라 공포로부터 그들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게 급선무였습니다. 만약에 그런 것을 풀어주지 않고 그냥 먹어먹어 그러고 이렇게 야릇한 회심의 미소를 짖고 있으면 그리고 마당 밖에서 칼가는 소리가 나면 그러면 넘어가겠어요?
학교 다닐 때 가끔 못된 녀석이 있으면 불러다 놓고 반쯤 죽입니다. 그러나 때리지는 않았습니다. 때린다고 또 누가 맞습니까? 말로 반쯤 묵살발을 만들어서 너무 애석하게 울면 데리고 나가서 밥이나 먹고 가자고 합니다. 그리고 데리고 나오면 못 먹습니다. 못 먹는 것을 알고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마. 먹어’ 넘어가겠어요? 형들이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요셉은 제일 먼저 풀어주어야 할 것이 공포로부터의 해방이었습니다. 그래서 공포를 풀어준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정곡을 찌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나를 여기에 보낸 것은 당신들의 범죄가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이게 무슨 신앙입니까?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요셉이 이 형들을 이렇게 깊이 품어 안고, 나중에 뒷편으로 넘어 가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자식까지도 내가 다 맡아서 길러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형들이, 하여튼 신앙이 없는 인간들은 생각하는 게 다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그냥 죽었습니다. 유언을 조작해서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아버지가 죽을 때 우리를 용서해주라고 그랬습니다. 요셉이 그 이야기를 듣고 보인 반응이 무엇입니까?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왜 울었습니까?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운 것이 아니라 ‘야! 너희들은 내가 아직까지도 그 기억에 매달리고 사는 사람인 줄 아느냐. 난 아니다’ 하도 기가막히니까 통곡을 하고 운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심리적으로 그 형들의 영혼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정이 포함된 것입니다. 그렇게 이제 통곡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형들이 지금 고민하고 끝까지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이 공포에 문제에 대해서 요셉은 벌써 자유를 얻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자유를 얻을 수가 있는 문제입니까?
늘 듣던 성경의 이야기니까 현실감이 안 날 수가 있습니다. 요셉이 그럴 수도 있지. 우리도 그를 본받아야 하지, 여러분의 남편이 있는데 보험금을 들어놓고 여러분들 큼지막한 것을 몇 개 들어놓고 그리고 여러분들을 데리고 한강으로 가서 싸이드 브레이크를 풀러놓고 여보, 잠깐 기다려 내가 뭐 사올게 그리고 뒤에서 밀어서 물 속으로 집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도망쳤는데 다행히 독수리 5형제가 와서 구해주었습니다. 돌아와서 집에서 보험금 계산을 하고 있는데 그날 밤에 입었던 옷을 다 벗어버리고 하얀 옷을 사입고 머리는 한강 물에 빨았으니까 그리고 머리를 풀고 부인이 딱 들어왔습니다. 내 남편이 뭐하고 있나 보니 전자 계산기를 두들기면서 A보험에서 5억, B보험에서 5000만원, C보험에서 2800만원 그것을 계산하고 있는 데 그때 여러분들이 가서 깊이 끌어안고 그럴 수도 있지, 기독교 기리에 의하면 전적으로 타락한 게 인간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나를 한강에 집어넣은 걸로 두려워마소서, 그리고 남편 끌어안고 잘 수 있습니까? 있어요. 몇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해보십시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 째 원인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형들이 살려달라고 뒤에 가면 애원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랬기 때문에 요셉이 그렇게 그 사람들을 품어 안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두 번째는 워낙 크게 성공을 해서 입신양명했기 때문에 그렇게 높은 지위에 오르고 큰 물질을 갖게된 권세 있는 사람이 된 사회적인 신분에 상승이 포용력을 갖게 만들었나요?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 일반적인 생각으로 보면 그렇게 되면 사람들을 더 많이 품고 이해하고 그럴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특별히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깊이 상처준 사람, 자기에게 일평생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준 사람일 경우에는 자신의 신분이 상승하거나 자신이 그 사람의 운명을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 높은 지위에 이르게 될 때 훨씬 더 잔인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문제에 대해서 아주 명쾌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는데 그것을 탕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그 액수의 돈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탕감을 받았으니까 이제는 자유한 사람이 되었으니까 이제 자기는 채무가 없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는데 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장 내놓으라고 하면서 안 내놓으면 죽이겠다고 합니다. 그게 사악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니까 요셉도 물론 그 애굽에서 그렇게 노예살이로 고생한 것 보다는 그렇게 높은 지위로 오르게 되고 형들이 자기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을 때 어느 정도는 그런 것들이 자기에게 위로가 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는 자신의 생명을 없어지게 만들어버리는 그렇게 구덩이에 집어 넣어서 짐승에게 먹히거나 혹은 묻어버릴 그렇게 자기를 죽음으로 몰아갈 그 살인마들입니다. 진짜 살인의 의도가 명백하게 있는 살인마들입니다. 그 살인자들을 용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요셉의 형제들의 간증에 의하면 그가 구덩이 속에서 살려달라고 애원을 한 것인데 그것은 당연하지 않겠어요. 더군다나 그들은 다 큰 형들입니다. 어린 요셉이 형들에게 ‘나좀 살려줘.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날 용서해줘. 날 제발 살려줘. 나 아버지 집에 가고 싶어’ 그렇게 울면서 애원을 하는데 결국은 죽게 만들고 결국은 그래도 차선책으로 그 아이를 애굽에 팔아버렸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용서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신분의 상승이나 그들이 와서 무릎을 꿇고 미안하다고 하는 그런 것을 가지고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게 공통된 경험입니다. 저 사람으로부터 받은 피해와 상처가 너무나 클 때 그 사람이 와서 ‘잘못했어. 미안해.’ 이렇게 말하면 대뜸 나오는 소리가 무엇입니까? ‘미안하면 다냐’ 저도 그럽니다. 입은 바 손해가 너무 크면 ‘미안하면 다냐. 뻔뻔스럽다. 어떻게 미안하다.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로 그것을 모두 해결하려고 그러는가. 그게 다냐. 사람 죽이고 잘못했다고 하면 다냐.’ 흔히 써먹은 말입니다. 그런 것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 요셉으로 하여금 이러한 참 뛰어난 아가페, 헷세드의 포용력을 갖게 되었는가. 그것은 인생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시각이 바로 섭리를 믿는 신앙입니다.
이 섭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방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의 뜻을 드러내 보여 주시는 대표적인 두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계시이고, 또 하나는 섭리입니다. 계시는 인간이 경험하기 이전에 이미 명백하게 하나님께서 자기가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를 아주 명확하게 인간들에게 교훈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 성품에 대해서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명시적인 것입니다. 이 계시적인 뜻은 그냥 순종해야지 자꾸 기도해보면 안 됩니다.
사경회 때도 여러분, 돈지갑 조심하세요. 가끔 도난 사고가 일어나는데 “하나님, 옆에 저 사람이 돈이 꽤 있어보이는데 하나님, 가져가도 되겠지요, 하나님, 만약에 돈지갑을 가져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강대상 위에 신기한 별빛을 비쳐주시옵소서” 그리고 나서 별빛이 안 나타나면 “하나님, 응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들고 가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명백하게 계시된 것은 그 일에 옳고 그름을 하나님께 여쭈어 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계시는 살아보지 않아도 압니다. 뜻이 명백하게 나와있으니까. 그러나 섭리는 다릅니다. 섭리는 단순히 선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살아가는 삶에 과정, 그리고 시간에 흐름 속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보여 주시는 것, 그것이 섭리입니다. 그런데 이제 계시와 섭리는 무엇이 다른가 하면 계시는 감추어진 것이 별로 없는데 섭리는 대부분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렇게 감추어져 있는데 그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내일이나 다음 시간에나 당장 드러날 수 있지만 때로는 죽을 때까지 내가 왜 그런 길을 가야 되는지 모르고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 여러분들이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알아야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다고 칭찬을 받는데 그러면 목사님 말대로라면 죽을 때까지도 하나님의 뜻이 안 드러났다고 그러는데 그러면 그 사람이 과연 하나님의 뜻을 이해도 못했는데 그 뜻대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주 굉장히 예리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대답은 더 예리합니다. 그것은 섭리라고 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과정 속에서 우리에게 그것들을 드러내셔서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무는 무엇인가 하면 비록 하나님의 뜻이 감추어져 있다라고 하더라도 매순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삶을 규칙들은 계시를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충분히 주어졌습니다. 그러니까 그 섭리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마지막 뜻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몰라도 그 모르고 죽은 것들 때문에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뭘 가지고 그 사람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산 인생이냐를 평가하시는가 하면 그렇게 일생을 살아봐야 아는 섭리는 내가 다 몰랐다고 하더라도 매순간 순간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받으면서 순종하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알 수 있게 해주는 그 계시를 쫒아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을 가지고 산 것에 의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잘 살았는가 못 살았는가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유의할 점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살고 그리고 그 섭리가 드러나기를 사모하면서 자신의 불순종이나 자신의 하나님을 거스르는 삶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흐려질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쫒아서 살면 하나님의 섭리가 더 잘 드러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쾌하게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섭리 속에는 반드시 가려진 요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점점 그것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 성경은 가끔 우리에게 어떤 시련을 당하거나 고난을 당할 때에 열심히 생각해서 왜 그런 고난을 당하게 됐는지 자기의 죄를 살피고 또 자신이 왜 그런 고통을 당하는지 이유를 캐보고 이러라고 하는 충고를 우리에게 많이 주지만 때로는 묻지 말고 하나님만 쳐다봐. 이것을 가르켜서 ‘묻지마’ 신앙입니다. “너희는 오늘 잠잠히 여호와를 바라고 그가 행하시는 위대한 일들을 기대하라” 그렇게 성경이 우리에게 명하는 때가 많습니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왜 현실을 바라보고 머리를 굴려봐야 아무리 굴려도 그 돌에서 정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 머리가 돌인 사람이 이렇게 턱을 괴고 있으면 뭔지 아십니까? ‘돌을 든 남자’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머리가 나빠서 안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섭리 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아직은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그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자, 그럼 요셉으로 돌아가서 한번 그 정황을 생각해봅시다. 요셉에게는 분명히 계시적인 비전이 있었습니다. 해와 달과 열한 별, 형들의 곡식단이 자기에게 절하는 비전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알 수 없었지만 요셉의 마음 속에 확실히 있었던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앙이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나는 형들과 같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이 특별히 나를 택한 사람이다.’ 그런 어떤 선택의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내가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여튼 형들은 내 앞에 무릎을 꿇는 날이 올 것이고 그리고 그들이 나를 상전과 같이 섬기는 그런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이 가난한 팔레스타인 땅, 여기저기를 유리하며 가축이나 먹이고 사는 삶과는 질적으로 다른 또 다른 종류의 삶의 영역으로 내가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그런 막연하나마 확실한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덜컥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고 이제 죽음의 위기를 만났습니다. 살려달라고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형들보고 애원하는데 못된 녀석들이 쳐다도 안 보고 도망갔습니다.
그때 여러분들이 구덩이 속에 들어가서 요셉을 보고 형들은 다 갔다. 이제 나올 가능성이 없는데 그러면서 조금 있다가 꺼내주었습니다. 그래서 팔려가는 것입니다. 죽는 것보다는 낫지만 팔려가서 그 애굽 땅에 가서 종살이 하는 그 상황에서는 얼마나 더 비참하겠습니까? 첫날 종으로 팔려가서 애굽 사람들에게 학대를 받으면서 가장 말단 졸병 생활을 하면서 거기서 종살이를 할 때에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는 요셉에게 와서 여러분들이 가서 ‘요셉아, 너 해와 달과 열한 별이 꿈을 꾸었다며’ ‘응 꾸었지’ ‘형들의 곡식단이 절한다며’ ‘그랬지’ ‘그럼 네가 모든 가족들 위에 뛰어난 어떤 사람이 되어서 이제껏 살아왔던 삶의 영역과는 다른 세계 속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그런 비전이 아니냐’ ‘맞지’ ‘네가 개발한 생각이니’ ‘아니, 하나님이 나에게 주셨어. 이것을 가르켜서 김남준 목사는 계시적 비전이라고 그래’ 요셉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이 이럴 것이 아닙니까? ‘아! 그래 그럼 너에게 질문을 하나 하자. 네가 그 꿈을 꾸었는데 그 비전이 이루어질까?’ ‘아마 이루어지겠지’ ‘그럼 네가 점점 위로 올라가야 되는데 네 아버지에게서도 떨쳐 나가고 형들도 너를 버려서 가장 무서운 보디발의 집에 이제 아무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너를 죽여도 죄도 되지 않는 노예의 그 신세가 되었는데 이제 앞으로 네가 그렇게 되는데 어떻게 기여할 수 있니?’ 그러면 요셉이 ‘어, 그거 내가 알지. 내가 여기 한참 있으면 내가 인정을 받을 건데, 총무가 되고 그러다가 그 여자가 나를 유혹할 것인데 그러면 내가 아니라고 그럴 것인데 그러면 내가 검옥에 들어갈거야. 거기서 두 사람을 만나거든 그 중에 한 사람이 날 배반하지만 한 사람은 2년 뒤에 날 꺼내줘’ 그렇게 말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물어보면 요셉은 눈물만 흘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연약한 믿음에 ‘그 때 내게 하나님이 꿈을 꾸게 하신 그 꿈, 그 비전이 계시적인 비전이 아니라 혹시 내 스스로 꾼 개꿈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도 순간적으로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분명한 응답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믿음과 의심은 항상 한 인격 속에 공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섭리는 가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승승장구해서 총무까지 되었을 때는 또 이야기가 됩니다. 그때 우리가 가서 다시 물어보면 요셉이 그랬을 것입니다. ‘거봐, 내가 뭐라고 그랬어, 너 내가 여기 팔려올 때에는 너 나에게 와서 놀리듯이 그 비전하고 노예로 팔린 것 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리고 너 열린 교회로 도로 갔지. 너 봐라. 갔다가 와보니까 내가 여기서 인정을 받아서 내가 총무가 되었는데 이 집에서 보디발 이외에 나보다 더 높은 사람이 없다. 애굽의 역사를 통틀어서 봐라. 이방인으로서 여기에 들어와서 시위대장의 집에 총무의 자격에 오른 사람이 있는가 한번 봐라’ 그렇게 이야기하면 이제 여러분 하나님이 어떻게 할지 모르지만 ‘이것 봐라. 하나님이 나를 형통케 하시고 함께 하시고 점점 높이고 계시지 않는가. 이만큼만 되어도 이제 형들이 와봤자 나한테 무릎을 꿇을 수밖에 더 있냐’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할 말이 없이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이제 감옥 속에 가서 다시 만나는 것입니다. ‘야! 작년에 그렇게 날 만나서 기고만장하더니 너 왜 여기에 있니?’ ‘말마, 재수없는 여자가 날 유혹해서 신앙을 지켰는데 날 여기에 오게 했어’ 그러면 ‘야! 그러면 너 그때 꾼 꿈, 비전은 어떻게 되는건가. 여기서 더 비참해졌는데 총무로 있을 때는 그래도 희망이 있다고 말이 되는데 너 이제 여기서 사형을 기다리거나 아니면 무기수였을 것인데 너 그정도의 죄를 짖고 여기서 살면 감옥에서 살아서 나가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너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인가’ ‘죽지, 아마 죽을거야’ ‘그러면 네 꿈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다시 요셉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면서 고뇌에 빠졌을지 모릅니다. 이번에 여러분들이 이긴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가니까 거기서 또 반장이 된 것입니다. ‘봐, 하나님이 나를 안 버리셨어. 이 발에 착고를 채우고 수갑을 채우고 먹지도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나를 버린 줄 알았는데..’ 거기에서 은혜를 입으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질문들을 하나하나 대입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답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마지막 순간까지 안 나옵니다. 어느 순간까지 가서 요셉을 불러와라. 명령이 떨어져서 그를 데리고 와서 면도를 시키고 새옷을 입어서 바로 앞에 세워서 바로가 꿈 이야기를 하고 그래서 이 사람처럼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이 나라에서 내가 높은 것은 보좌 뿐이니라. 이렇게 말하기 전까지 하나도 밝혀진 게 없는 것입니다. 너무 재미있으니까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떡맡은 관원장과 술맡은 관원장, 두 사람이 꿈을 꾸고 와서 요셉에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그랬는데 정확하게 해석을 해주었는데 그 꿈대로 하나는 사형을 당하고 하나는 복직을 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땅꾼도 의리가 있지, 그것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해서 소망을 두어서 결국은 자기를 살게 했는데 심리적으로 보면 요셉이 그렇게 이야기를 해준 것은 결국 왕이 명해서 살았지만 사실 꿈을 정확하게 해석해주었으니까 사실 요셉을 생명의 은인으로 알았을 것입니다.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게 해명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럼 정확하게 그러면 가서 목숨을 걸고 ‘너 복직해라’ ‘폐하, 나는 이전에도 왕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니까 이 직에서 물러나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나의 오늘이 있기 까지 이 모든 영광을 요셉에게 돌리나이다. 요셉아, 나 됐어’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한달이 아니고 두 달, 육개월, 일년, 이년의 세월이 이르도록 완전히 잊어버린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이 이제껏 함께 하신다면 그럴 수가 있습니까? 먼데 있는 사람이 와서도 그를 도와줄 수가 있는데 그 순간만 놓고 보면 요셉은 인복이 지지리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형들을 만났는데 그런 녀석들을 만났지, 그리고 보디발의 집에 갔는데 그 재수없게 그 여자를 만났지, 그래서 감옥 속에 철창 신세가 되었지, 사랑하는 여인 때문에 갔다면 또 이해를 합니다. 좋아하지도 않는 그 늙은 여자가 쫓아다니다가, 젊었을 수도 있지만, 어째든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감옥 속에 가서 그렇게 지성을 드려서 꿈을 해석해 주었더니 이 녀석이 배은망덕하게 배신하고 자기 잘나서 된 것처럼 그렇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마지막 순간까지 해명이 되었는가 하면 해명이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습니다. 들어보세요. 얼마나 놀라운지, 그리고 2년이 정확하게 지난 후에 이 사람이 왕이 꿈 이야기를 하니까 그제서야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잊어먹었을 수도 있고 혹은 자기의 정치적인 입지, 그런 죄수와 친분관계를 맺고 있다면 자신의 정치 생명에 도움이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묻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도와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그런데 딱 생각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의 마음에 감동을 받으면서 여차여차 해서 사실은 제 꿈을 이렇게 해석해준 그 요셉 때문에 제가 여기에 있게 되었습니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을 불러온 것입니다. 면도를 시키고 새옷을 입히고 딱 세웠는데 그 때 나이가 몇 살, 30세, 그런데 이게 기가막힙니다.
고고학자들이 애굽의 문헌을 연구해보니까 이 중앙조 시대 때에 남자 나이 30세가 공무를 담임할 수 있는 최장의 연령입니다. 법정 연령입니다. 그러니까 자로 잰 것입니다. 이게 만약에 요셉이 한 19살 때쯤 이 꿈을 해석해서 여기에 나왔다고 할 것 같으면 대접받는 노예에서 해방시켜서 양민정도로 해서 그래서 대접받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정도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나이가 30세였다고 하니까 그 성경 기자가 30세라고 기록한 것은 그 요셉을 부른 바로나 그 애굽 사람들도 그 나이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닙니까?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증거가 아닙니까? 굳이 거기서 나이를 언급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게 공무 담임권을 가질 수 있는, 공직에 취임할 수 있는 최저한의 연령이었다는 것입니다. 아, 그러니 하나님의 섭리가,
그러고 보니까 이것 하나가 딱 밝혀지고 나니까 그 다음에 그 이전에 왜 그 사람이 2년 동안이나 요셉을 배은망덕하게 새카맣게 잊고 있었는지 그렇게 하게 하신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셨는지 모든 게 다 해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앞에서 보면 하나도 안 보이는데 앞에 가서 뒤를 거꾸로 돌아보면 기가막히게 정답들이 풀려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길을 걸어왔는지,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멘을 해야지 됩니다. 여기에 종을 하나 매달아 놓고 딱 쳐야 합니다. 댕! 하면 아멘을 할 수 있게.
요셉도 애굽에서 오래 살았으니까 30세에 공무을 담임할 수 있다라고 하는 국민상식 정도야 알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자기하고 상관이 있으리라고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죽음이나 면하고 옥속에서 나오면 다행이지, 언감생신 공직은 무슨 공직이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애굽의 총리로 쓰시려고 30이라는 나이에 딱 맞추시면서 그 세월동안 연단을 받으면서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주셨습니다. 야!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데 이제 오늘 우리들이 진짜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감격하게 되는가. 사실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감격하는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요셉은 지금 이렇게 요셉이 감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까 성경 읽으면서 눈물이 쏟아져서 혼났는데, 요셉이 아니고 제 삼자인 우리가 봐도 그렇게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야! 진짜(?)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아! 참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를 이렇게 돌아보면 삶의 어느 전환점에 서서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높이 들고 터질듯한 가슴으로 자기가 살아온 인생의 여정들을 돌아보면서, 그것이 꼭 인생 말년이 아니더라도 순간적으로 그 삶의 전환점에서 여정들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주 여호와 하나님이 신실하시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그 터질듯한 감격으로 그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 오시는 그 하나님의 그 은혜로우심을 찬송하는 사람들을 보면 실제로 너무나 소수이고 섭리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계시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지도 못하고 살다가 그저 꺼떡 거리고 조는 것처럼 인생을 살다가 마지막에 죽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게 왜 그러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보면 마지막으로 도대체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면서 신앙으로 사는 것이 정답이라는 것을 우리들이 이제 알 수 있겠는데, 순전한 신앙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겠는데 그러면 그런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 섭리가 실현될 때까지 믿음으로 살으라고 그러는데 그 믿음이 도대체 무엇을 믿는 믿음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섭리가 이루어지기까지 믿음으로 살으라고 그러는데 그러면 반듯이 영광스러운 섭리의 성취를 볼 것이라고 그랬는데 그러면 도대체 그러한 섭리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믿음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믿음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두 가지로 간략하게 요약해서 말하자면 첫째는 하나님의 계획을 믿는 믿음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전 그림을 잘 못 그립니다. 아주 못 그리는 사람보다는 좀 그리지만, 그러나 잘 못 그립니다. 그림을 기가막히게 그리는 사람을 보면 참 부럽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는데, 우리는 그저 사람을 스케치할 때 그저 일반적인 방법은 이렇게 큰 구도를 잡고 그리고 몸집을 잡고 머리통을 잡고 그리고 사지를 가르고 그 다음에 이제 선을 점점 분명하게 하면서 이렇게 디자인을 해가는 것이 우리가 받은 미술 교육의 기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림을 그리는데 그 통념을 완전히 깨고 손부터 그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손부터 이렇게 그려나갈 때 지금 그려야 할 사람은 큰 체구를 가진 이런 동작을 가진 사람인데 손부터 그리는데 뭘 그리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여기서부터 완성이 되어서 거꾸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아! 저기에 있는 저 사람의 모습을 그릴려고 했구나. 아주 숙달된 화가가 그림을 디자인을 해도 눈썰미가 없는 사람이 초반부에는 무엇을 그리려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데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그리는 완전하신 화가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좀 이해가 안 간다고 하더라도 참아야 합니다. 아니, 자기가 어떻게 이해를 하겠습니까? 그렇게 잘 이해할 것 같으면 인간이 아니지, 요셉과 같이 신령한 사람도 다 이해를 못한 게 있는데 그렇게 요셉처럼 신령하지도 않으면서 그것을 어떻게 그런 점에 있어서는 자기를 그렇게 뛰어나게 생각을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무지한 것이 자랑은 아니지만, 자랑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요. 하나님, 나 아닌 것 없어요. 그래.’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그래 나 못 배웠어요. 성경도 못 배웠고, 새 가족도 계속 댕댕이로 일관했습니다. 어째요’ 그렇게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면 안 됩니다. ‘하나님, 무식해서 죄송합니다. 무지해서 죄송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많이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시려고 하지만 제가 부실해서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닫지 못해서 오늘날에 이렇게 무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그래도 하나님이 은혜는 베풀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좀 눈물 섞인 음성으로 하소연을 해야지, 그나마 긍휼을 얻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인간이 그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커다란 디자인들을 다 이해할 때보다는 이해 못할 때가 훨씬 더 많은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부귀 영화를 누리고 승승장구하는 것은 ‘섭리 모르면 어때. 그냥 좋게 잘 살면 되지’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잖아요.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띄우시나. 나를 이렇게 띄우시나. 나를 왜 이렇게 유명하게 하시고 나 이렇게 돈 잘벌게 하시고 내 사업을 승승장구 하게 하시나’ 생각은 해야 되지만 그거 생각을 안 해도 사는데는 별로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고난이 왔을 때는 다릅니다. 그것은 계속 고통을 받고 고난을 받아 사람들에게 신의를 지켰는데 돌아오는 것은 감옥살이입니다. 감옥에서도 신의를 지켰는데 사람들이 배반을 해서 자기를 따돌리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는 신앙이 없으면 사람이 돌아버리는 것입니다. 상처를 받고 돌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그런 상황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간 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에 그 고난에 길을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고난을 받고 때로는 믿음을 지키면서 사는 데도 견딜 수 없는 대접을 받거나 순결한 신앙을 지켰다는 이유로 사람에게 박해를 받고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을 때에 그때에 왜 그러한지 이렇게 되는 것이 어떻게 계단이 되어서 나중에 하나님이 나를 높이실지에 대해서 대답을 다 알기 때문에 그런 순전한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그렇습니다. 순교를 눈 앞에 둔 안이숙 여사가 부른 찬송입니다.
주 예수 팔 내미사 내 손 잡아주소서
그렇게 사는 게 신앙입니다. 거기에서 신앙에 자유가 있고, 하나님을 바라는 마음이 있고, 사람들을 용서하는 마음이 있고, 하나님의 큰 섭리 속에서 순간의 성공으로 교만하여 지거나 순간의 실패로 절망하지 않는 비결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다 살고 나면 백전 백승의 기록을 남기며 산 성도도 없고 백전 백패로 산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결국은 우리의 인생 마지막 석양의 노을이 지고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가 되면 우리의 인생은 순수와 불순한 것이 섞여 있고 성공과 실패가 함께 있습니다. 주를 위해 산 날이 있는가 하면 날 위해 산 날이 있습니다. 범죄한 날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며 주 앞에 순결하게 산 날도 있었습니다. 진리를 위해 피흘린 날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기 위해서 헐떡이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게 모두 섞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삶의 어느 구간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그것이 최종적인 승리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승리가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승리들이 쌓여서 결국은 승리를 가져오니까. 그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한순간에 승리가 최종적인 승리를 좌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순간에 실패도 최종적인 패배를 담보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궁극적으로 우리는 승리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승리하고 주께서 우리를 부르는 그 마지막 순간에 우리가 주님의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목표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뭘 생각해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모든 절망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면 자신의 존재에 가치를 부인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부인하는 것은 결국은 무엇 때문에 오는가 하면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단념하는 것에서 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 것만이 내가 하나님 앞에 살아 있다는 유일한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해 볼까요? 어떤 때는 제법 뭐좀 하는 것처럼 생각이 들어서 교만해지다가, 그런 날보다는 절망하는 적이 훨씬 많지만, 어떤 날 설교를 죽을 쓰고 내려가거나 목회가 꼬이기 시작하고 성도들이 병들기 시작하면 너무 사는 것이 괴롭습니다. 그리고 나같은 쓰레기 같은 인간이 하나님의 길에 서서 그 영혼들에게 흘러들어갈 수 있는 수많은 은혜의 물을 가로막는 것 같고- 가식이 아니고 진심의 고백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나라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빨리 죽고 다른 사람이 내 자리에 설 수 있도록 내 의자를 비워주는 것이 나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비결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실제로 일년이면 몇번씩 가슴에 파고듭니다. 그때에 부분적으로는 자신을 정확하게 통찰하게 되고 도가 지나치게 되면 부분적으로는 낙망하게 됩니다. 목회자에게도 그런 침체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성경을 펴면 도대체 이렇게 설교할 게 많은데 사람들은 일주일에 세 번밖에 교회를 안 오나. 아니, 뭐 그렇게 복잡한 일이 많은가. 이게 사경회는 일년에 네 번밖에 없는거야. 월요일만 집에 가는 날이고 나머지는 모두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들으면 이것을 다 쏟아놓고 죽어야지,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하나. 주일날 설교 하고 내려오면 일주일을 언제 기다리나. 그런 날이 있는가 하면 어느 날은 말씀준비를 하러 올라가서 아침서부터 밤까지 성경을 넘기는데 아무 것도 없습니다. 때로는 그냥 덮고 내려오는 때도 있습니다. 솔직한 심정으로, 그때 기도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내가 충분합니다. 볼 것, 못 볼 것 다 보고 살았습니다. 이제는 족합니다.’ 그런 한숨이 저절로 터져나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죽을 맛이 될 때가 있습니다. 매주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런 때면 꼭 우리 집사람이나 누가 와서 ‘말씀 준비를 잘했습니까?’ 그렇게 물으면 ‘그럼 뭐 했지 뭐’ 그리고 속으로 ‘묻지마. 내일은 묻지마 설교야’ 그렇게 해서 토요일 밤까지 고민을 합니다. 그리고 올라갑니다. 강대에 엎드리면 많은 눈물이 쏟아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눈물을 흘리는 모든 날이 설교 준비가 안 되어서 올라온 날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비리를 다 털어놓는 것 같아서,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이 확신이 없는 본문을 가지고 또 여기서 (?)해야 되나. 아! 나는 정말 설교자의 길을 갈 수 없는 사람이야. 갈갈히 찢어진 가슴으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준비를 안 한 모든 날들이 부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준비한 날이 더 부어주시지요. 그런데 하여튼 예외적으로 부어주시는 데 설교시간 내내 여러분들이 한 사람이 없어도 괜찮은데 왜냐하면 내 설교가 돌아서 내 마음 속으로 파고들어가니까. 그리고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흠뻑 젖습니다. 그리고 앞에 서서 눈물을 닦으면서 인사를 할 때에는 하나님의 선명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너 어디 가든지 충성하라 너 어디 있든지 충성하라
주 너의 하나님 왕되신 주 너 어디 있든지 충성하라
그리고 강한 확신이 비록 가늘기는 하지만 아주 지울 수 없는 선명한 레이저 공상과 같은 확신이 절망 속에 있는 설교자의 영혼 속에 파고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넌 내 계획 속에 있다. 지금은 그 모든 계획을 알 수 없으나 언젠가는 그 계획이 드러나는 일이 있으리라’ 그러면 또 몇 달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나밖에 행복한 사람이 없어. 아! 정말 하나님이 나를 이제 사용하실거야. 그리고 이제 또 소급해서 옛날에 설교자로 부르심을 받은 때까지 막 거슬러 올라가면서 하나님의 행하실 위대한 일들에 대한 소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제가 그러고 삽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희미하게 들어오는 것, 그 희미하지만 지울 수 없게 실낙같은 줄기로 레이저 광선처럼 들어오는 그것을 붙들고 그 주위에 있는 그것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수많은 어두움과 의문투성이를 붙들고 회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 실낙같이 들어오는 빛줄기 하나를 붙들고 사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경건하게 하나님 앞에 정말 내일생 소원은 주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계획을 앞고 싶고 고난과 시련 속에서 내가 인내해야 하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라고 하는 이 믿음을 가지고 그 하나님의 계획을 붙들며 살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절대로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대부분 우리들에게 고난이 많이 닥치고, 아무리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지만 드러나지를 않고 애매히 고통을 당하고 상처를 받고, 혹은 또 애매히가 아니더라도 자기가 실제 잘못해서 그 결과를 업으로 받아서 고통의 대가를 지불하면서 살아도 뭔가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의 해결이 없고 축복의 조짐이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지날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기서 절망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지 아십니까? 그것은 결국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고난 속에 갖고 계신 계획을 붙들지 못하고 절망의 어두움을 붙드는 것입니다. 절망의 어두움을 붙들면 다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저 자식들 이제 와서 양식을 얻으려고 왔구나. 나를 죽여버리려고 하던 인간들이 자기의 목숨들은 부지하겠다고 서로 살려달라고 저러고 있구나’ 그런 적개심 같은 것들이 막 솟아나지 않겠어요? 요셉은 그 하나님의 계획을 믿으면서 살아온 것입니다.
제가 종종 쓰는 비유입니다만,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아름다운 동굴이 있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탐사를 갖는데 갑자기 우르르 하는 소리가 나더니 부지직 하더니 굴 속에 들어오는 전기가 다 끊어졌습니다. 후레쉬도 가져간 사람도 없고, 그리고 우르릉 하는 소리가 나더니 굴이 무너져 내려서 졸지에 그 긴 굴 속에 갖힌 사람이 된 것입니다. 가보니까 굴이 동서사방으로 수없이 나 있는 것입니다. 캄캄해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데 그런데 몇 시간을 해매다가 보니까 저쪽 끝에서 바늘 구멍만한 아주 작은 명주실 같은 빛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게 너무나 가늘어서 땅에 까지 비치지도 못하고 중간에서 오다가 소멸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서 ‘살았다!’ 그럴 것입니다. 왜 살았다고 그럽니까? 절대 양을 가지고 비교하면 그 빛이 자신들이 놓여 있는 그 어두움을 해결하는데 무슨 도움이 됩니까? 땅에까지 다다르지 못하기 때문에 돌맹이 하나도 보여줄 수 없고 발을 어디 딛어야 할지 한뼘 뺨도 밝힐 수 없게 공중에서 다 분산되어서 흩어지는 그 빛인데 왜 그 빛을 보면서 ‘살았구나’ 그런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빛이 작은 한줄기의 빛이지만 그것은 결국 빛이 비친다는 것은 출구가 있다는 것이고 그리고 그 출구는 두텁게 막힌 출구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하나님의 섭리를 다 이해하는 그런 믿음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그런 믿음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아십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하나님만 위해서 우리의 지나온 생과 앞으로 살 생을 한꺼번에 보실 수 있지, 우리 인간은 그렇게 볼 수가 없습니다. 허락이 안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갱도에 대낮과 같이 밝은 빛이 다 들어오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소리를 지르는 너희들의 그 고함 소리를 나는 믿을 수 없다고 하고 어두운 갱도 구석에 앉아서 엄마 아빠 부르면서 우는 사람들은 정신질환자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조금도 과격한 비난이 아닙니다. 당연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입체적이고 전체적인 것을 섭리를 아는 그 신앙이 없어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라고 하는 그 신앙, 그것을 붙들고 그것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고 하는 그 신앙이 있으면 산다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산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산다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참 많습니다. 왜 나는 이런 가정에 태어났을까, 우리 엄마 아빠는 이런 사람일까, 왜 우리 자식은 이런 애일까? 그런 것부터 시작해서 이제 그래도 내가 학교에서 배울만큼 배웠는데 왜 사업은 이렇게 꼬이고 남들은 다 나보다 잘되고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비참한 삶을 살까? 또 뭐 영적인 면에 들어가서 이러이러한 문제들을 안고 있는데 하나님은 날 안 만나주시는 것일까부터 시작을 해서 나는 왜 이렇게 신앙의 견고함이 없어서 방황할까? 수없는 의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십시오. 요셉이 배를 탔습니다. 굴 속에 집어 넣는 그 순간 이미 돛대도 부러지고 삿대도 부러진 것입니다. 요셉이 지금 어디론가 그래 내가 그래도 총리가 되어야지. 해와 달과 열한별이 자라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지. 그리고 입지를 세우고 지금 어디로 노를 저어서 가는 것입니까? 이미 그에게는 그런 주권이 박탈당한 것 같은 생애 밖에는 기다리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냥 어떻게? 떠내려 가는 것입니다. 그 물결이 무엇입니까? 고난이라는 물결입니다. 출렁출렁 거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 물결이 치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총무가 되었을 때는 살랑살랑 치는 것입니다. 그 여자 만나고 나서는 막 일어나는 것입니다. 막 쪼개질 듯이 막 뒤집어지는 것이어서 바다물을 먹다가 죽기살기 올라와서 바다물을 퍼내면서 그렇게 가는데 이게 또 출렁거리는 것입니다. 막 그러다가 또 잠잠한 것입니다. 또 출렁거리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나와 보니까 애굽의 왕궁으로 떠내려 가는 것입니다. 매순간마다 신앙으로 살았기 때문이지만 하여튼 그렇게 떠내려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고난이라고 하는 것, 시련이라고 하는 것, 견디기 힘든 아픔이라고 하는 것, 그것이 결국은 이 요셉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고 하나님이 그를 향해서 가지고 계신 위대한 계획을 성취하는 그 항구로 요셉을 인도하기 위한 물결이었습니다. 야!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런 계획을 붙들고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게 바로 섭리를 믿는 믿음입니다.
마지막으로 두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항상 성경의 인물들을 대할 때, 연엽법적으로 대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요셉’ 그러면 훌륭한 사람입니다. 좋은 나라 사람이잖아요. 애들 말로, 그러니까 요셉이 한 것은 모두 잘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어땠을까? 그는 진짜 인내의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이었고, 온유한 사람이었고, 용서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형들이 그를 팔았을 때 어땠을까요? 아마 그는 하늘이 낸 사람이었기 때문에 형들이 자기를 팔아버리려고 구덩이에 그를 밧줄로 달아 내릴 때에도 ‘형, 손 아프지, 내가 내려갈게’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그리고 팔려갈 때에도 ‘형, 나 팔아서 그 돈을 사이좋게 나누어 가져’ 그랬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애굽으로 팔려 내려가면서도 자기를 팔고 그렇게 내려가는 형들이 결국은 편하지 않을텐데, 그 양심의 가책이 얼마나 아플까? 그러며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이런 식의 과장을 하면 그런 식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누구인지를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나는 요셉을 압니다. 그 마음에 들어왔다 나왔다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구덩이에 놓고 등을 돌리고 돌아가는 그 인간들을 보면서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지만 결국은 어땠을까요? 형들은 나빠, 나쁜 놈들이야, 나쁜 자식들이야, 야 이놈들, 그리고 보디발의 집에 팔려가서 천신만고 끝에 고생을 하면서 그렇게 살아갈 때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경험, 그리고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야곱이 보여주었던 신앙 인격의 수준으로 판단하건데 그는 십중팔구는 애굽에서 처음에는 복수의 칼을 갈았던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 가만히 있는 형들을 아버지한테 가서 고자질을 할 정도에 인격을 가진 사람인데 그런 인격을 가진 인간을 돈을 받고 팔아버려서 그 돈을 나누어 갖는 그 모습을 뒤를 돌아보면서 지금 팔려서 울면서 가면서 그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간 날, 첫 날 거기에서 서러운 타관 땅에서 천한 일에 종사하면서 살아가는 그 첫 날 밤에 복수의 칼을 안 갈았다면 이 사람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었다면 하나님이 13년씩이나 연단하셔야 할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복수의 칼을 갈았습니다.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여러분들에게 자꾸 저게 맞을까? 하는 눈빛인데, 아주 기분 나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러면 내가 순간에 입증해버릴테니까 눈빛을 좀 바꾸어주십시오. 순간에 입증할께요. 여러분이 사랑하는 부모나 여러분들의 동기간이 여러분들에게 견딜 수 없는 상처를 준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상처를 주자마자 용서한 사람이 있으면 한번 손들어 보십시오. 하나님 만나기 전에, 또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역시 상처를 많이 받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상처를 받는 그 순간, 즉시 (?)안 죽으셨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이외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여기에서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요셉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는가. 어떻게 그러면 그런 평범한 인간, 형들을 고자질하고 그리고 형들로부터 받은 그 상처로 인해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받았던 그 사람이 어떻게 지금 형들이 공포 속에서 벌벌 떨고 있는데 ‘당신들은 나를 애굽에 판 것을 인해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판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보내셨습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게 하기 위한 구원자가 되게 하시려고 나를 여기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 요셉이 보여준 소명은 우주적이고 세계적인 소명입니다. 그 우주적이고 세계적인 소명에 천하에 모든 사람들의 목숨을 보존하게 하시려고 자기를 당신들 손을 빌어서 여기를 팔리게 하신 것입니다. 요셉의 마음에서는 당신들이 미워서 나를 팔았지만 그러나 당신들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주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나는 당신들에게는 감사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당신들을 사용하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정말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데 이 신앙의 정체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절대로 선하신 분이시다’는 사실을 믿는 신앙입니다. 돌아가신 분의 이야기를 자꾸 해서 진짜 마음이 안 좋은데 내가 전도사 때 나를 고생시키신 그 할아버지 목사님을 요즘도 내가 종종 생각합니다. 전 그 할아버지 밑에서 내가 왜 8-10년 가까운 신앙 생활동안 거기에서 그렇게 인격적으로 고통을 받으면서, 그 할아버지가 나쁜 할아버지였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인격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모서리가 많으신 분이었기 때문에 굴러갈 때마다 나를 많이 쳤습니다. 그것이지 나쁜 분은 아닙니다. 진실하시고 정직하신 분이셨습니다. 칼 같은 분이셨습니다. 말씀의 깊이나 방향같은 것들은 없으셨지만 신의는 있으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정말 끝까지 복음을 위해서 살아야지 되겠다는 그런 뭉툭한 사명감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52세에 신학공부를 시작하셨다고 하니까 지적으로는 해박하실 수는 없으셨지만 하여튼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그렇게 참 내 마음에 심장병이 생길 정도로 인격적인 고통을 많이 주셨는데 지금도 그쪽으로 지나가면 지나가기가 싫습니다. 너무 힘들었던 세월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참 하나님이 저를 다듬으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에피소드를 말하면 수없이 많지만 그런 것을 거기서 많이 느꼈는데 요즘에 와서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일까? 이때쯤이면 드러날 때도 되었는데, 그 할아버지도 돌아가신지 10년 가까히 되었고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제는 좀 드러낼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할아버지 밑에서 말씀을 들으면서도 한편도 기억에 남는 것이 없었습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린 적도 없었고 기도를 받고 뜨거운 것을 경험한 적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 분처럼 목회해야지 보다는 나는 절대 저러지 말아야지 그때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 제가 그 할아버지 위치에 서서 한 교회를 어거하면서 이렇게 갈 때 하나님이 내가 왜 그 할아버지 밑에서 그렇게 그 교회를 떠나게 해달라고 울며 애원을 해도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너는 거기 더 있어라. 동료들과 저를 사랑하는 교수님들은 그런 교회에 있으면서 인생을 낭비하느냐, 훌륭한 목회자 밑에서 배워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나도 동의를 하는데 하나님이 허락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와서 이렇게 생각하면 왜 그랬을까? 그랬는데 아직까지도 다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아마 나쁜 것들도 또 배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쁜 것들 속에는 하나님의 섭리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나의 부정직한 반응에서 온 것이고, 좋은 것들 속에 찾아야지 되는데 그것이 무엇일까라고 생각해 보면 ‘리더쉽’입니다. 그 할아버지는 그것 때문에 좀 힘들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한 교회를 자신의 손에 꽉 잡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단정된 가운데 신앙생활 하려는 사람들은 리더쉽 때문에 좌지우지 하면서 이렇게 우왕자왕 하는 교회적인 상황은 허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약간 불안해보이는 때도 있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분의 판단력과 또 영적인 깊이의 문제이었고 확실한 것 하나는 한 교회를 어거하며 가는 지도자의 리더쉽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원리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나하나 적용하는 강론에 있어서는 제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는데 그 원론적인 부분에서는 아주 많이 배웠습니다. 수많은 집사들이 있고 장로들이 있어도 사람들이 다 이야기를 하면 들어주기는 하는데 누구에 의해서도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누구의 편을 드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외롭게 목회를 하셨지만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나는 원래 하나님, 유리 그릇처럼 잘 깨어지는 사람이었고 누구에게 무슨 말만 들으면 쉽게 흔들리고 그리고 눈물도 많고 웃음도 많은 사람이었는데 거기서 지도자로서 한 교회를 어거해가는 그 정체성이 무엇인가 하는 원론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순간순간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내린 장엄한 결단, 그리고 사람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그리고 모든 것ㄹ에 사람들의 의사를 묻기 보다는 이것이 성경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설득했던 리더쉽, 그런 것들에 대해서 아주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때 누가 와서 나에게 뭐 여기서 이렇게 연단받는 동안에 이런 것을 배워간다고 하면 너나 배우라 그랬을 것입니다. 틀림이 없이 그때에 저의 인격으로 그랬을 것입니다. 그때도 풀리지 않았고 세월이 많이 흘러도 풀리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저는 이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은 소리가 전화벨 소리입니다. 전화벨 소리만 울리면 심장이 덜덜 떨립니다. 그런데 많이 치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제가 우리 교회 전도사님들에게 나한테 전화가 왔을 때 이렇게 떨리지 않느냐고 물으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가 하는 표정입니다. 긴장이 안되냐고 하니까 하나도 긴장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삽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이기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선하시다. 우리는 좋은 것과 그릇된 것들을 판단하는 것들이 능력이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 판단이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고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원을 들어달라고 한 두가지만 정해서 아뢴다면 말할 수도 없겠거니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만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고 실현이 되면 행복해질 사람들보다 불행해질 사람이 많습니다.
(예화: 어느 동화의 이야기-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시는데 어느 날 천사가 와서 세 가지 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는데 무심결에 할머니가 소세지가 있었으면 했는데 소 시지가 생겼고, 그것을 할아버지에게 가서 말하니 소중하게 얻은 소원을 그렇게 낭비했다며 화를 내고 할머니 코에나 붙어버리라고 하니까 소시지가 코에 붙어버 렸는데, 할머니가 코에서 떼어지기를 바래니 코에서 떨어지면서 세 가지의 소원 이 다 이루어졌다는 이야기)
우스운 소리지만 아주 심오한 철학이 담긴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인생에 가지고 있는 소원이라고 하는 것이 이런 입체적인 시야를 가지고 있는 그런 섭리를 믿는 신앙에서 나온 소원이 아닌 경우에는 그 소원이 성취되었을 때 우리들이 반드시 행복해진다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지 자신의 욕망의 방향을 믿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를 굳게 붙들면 진짜 절망적인 상황에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제가 설교니까 말할 수 없지만 제가 요새 설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편지를 많이 씁니다. 이메일에도 편지가 오는데 괜히 뭐 무슨 어쨌다고 오는 편지들은 내가 답장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절망의 선상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의 편지는 저녁 내내 편지쓸 때가 많습니다. 그 사람이 밝히기를 원하지 않았기에 비밀리에 이메일로 자기의 이름조차 밝히지 못하고 들어옵니다. 다 이해합니다. 그리고 답장을 써줍니다. 그들에게 있지 않은 충고가 있습니다. 두 가지만 잊지 않으면 당신이 지금 보다도 백배나 절망적인 상황에 있다고 할지라도 당신은 희망이 있다. 그것은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사실과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은 절대로 당신에게 악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주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신실하신 분이시다. 요셉이 그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것을 믿으니까, 성경을 대충 읽으면 안 됩니다.
잘 보십시오. 요셉이 37장에서 형들에게 결국 그렇게 미움을 받은 것이 고자질한 그 성질머리였습니다. 그런데 옥에 들어갔는데 기가막힐 노릇이 아닙니까? 자기는 잘못도 없는데 그 여자 때문에 옥에 들어갔는데 두 사람이 와서 꿈을 풀어달라고 해서 풀어주었는데 사형될 사람이야 뭐 그 사람 자기도 사형될 처지인데 뭐 봐주겠어요. 그런데 그 술맡은 관원장은 복직이 되어서 왕을 가까히 섬긴 사람이었습니다. 나같으면 백퍼센트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내 결백을 입증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 여자, 사건의 전모는 이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술서로 남기든지, 이번에 자살하면서도 전모를 남긴 것처럼 전모를 남기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랬다. 그 여자가 어떤 사람이었는데 모년, 모월, 모시에 어떻게 해서 내 외투를 빼앗아서 그래서 고자질을 해서 내가 여기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아주 나쁜 인간이다. 인간도 아니다. 그러니 날 살려달라. 그랬을 것이 아닙니까? 백퍼센트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뭐라고 그랬습니까?
야! 요셉의 이 아름다운 신앙의 인격이 벌써 여기서 농익어가는 것입니다. 뭐라고 그랬는지 아십니까? “나는 히브리에서 잡혀온 노예이지만 여기에 와서도 옥에 갖힐 일은 한 적이 없나이다” 그게 변명이 됩니까? 우리 같은 사람을 누가 아! 나는 여기 들어온게 당연합니다라고 말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제가 서대문 교도소에 설교하러 갔는데 거기 있는 사람들이 다 이야기를 하는데 거기 갖힌 사람들 중에 60%이상은 자기들은 여기에 갖힐 사람들이 아니다며 모두 억울하다고 합니다. 더 나쁜 사람들이 밖에 돌아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를 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 보디발의 아내를 감싸서 마지막에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시 그 집에 신세를 질 리가 있습니까? 설마 그 집으로 복직하려고 그러는 것은 아닐 것이 아닙니까? 나 같으면 복직하지 않겠습니다. 이제는 거기 복직하려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 여자를 보기 힘들어서도 복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고자질하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 말을 해서 풀어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라면 내가 이 사람을 덮어주어도 하나님이 나를 풀어주시리라는 신앙이었는데 그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믿는 신앙입니다. 벌써 17장 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향기로운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러니 감탄이 안 나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 속에 있지요? 여지껏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아픈 길을 걸어야 할까? 그리고 나의 믿음의 시련은 어디에서 끝나는 것일까? 어둠 속에 혼자 울 때 정말 우리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상황을 붙들고 절망하는 동안에 누구도 여러분들을 미워할 수 없습니다. 눈을 들어서,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쳐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바라고 주만 바라볼지라
입증해볼까요? 여러분들이 여지껏 살아오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있나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악하게 대해주신 적이 있나요? 주님이 여러분들과 원수처럼 여기시면서 보복하신 적이 있나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여지껏 까지 신실하신 사랑으로 아침마다 새로운 성실하심과 인자로 대해오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죄가운데 살았으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고 은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입고 수시로 하나님의 품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여기 살아서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자비가 아닌가요? 혹시 여러분들이 왜 하나님이 나에게는 폭포수와 같이 은혜를 부어주시지 않으실까? 왜 하나님께서는 나를 지고의 행복, 처음 사랑의 그 영광스러운 때로 나를 데려가지 않으실까?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고난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 바라보기보다는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살아온 날들이 주님의 은혜로부터 더 멀어지게 했고 그리고 우리 안에서 죄와 불순종들이 자라나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았기 때문에 좋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큰 사랑을 보여주실 수 없었던 것이지 그것은 순수하게 그분의 거룩하신 성품에서 비롯된 결과이지 우리 자신을 향한 악한 감정이나 미움, 보복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분은 여러분들을 향해서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집을 나간 탕자를 동구밖에서 눈이 짖무르도록 기다렸던 그 아버지처럼 여러분들이 인격적으로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고 그 좋으신 주님의 품 안에서 그분의 지배를 받으며 살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 나올 때를 기다리시면서 여러분들에게 쏟아부으실 그 사랑을 축척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선하심, 요셉은 절대적으로 믿으면서 폭풍우가 몰아치는 절망의 밤들, 시련과 원수들의 칼날과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는 애굽의 고통스러운 파란만장한 세월을 믿음으로 살아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한번 우리들이 어두움 속에서 절망하며 고통하던 우리의 마음을 들어서 어두운 구름위로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을 바라보듯이 우리가 느끼는 절망과 좌절이 사실은 먹구름일 따름이지 변함이 없으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불변의 하나님의 선하심, 우리의 모든 상황을 초월한 것이며 우리가 바로 그 선하심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정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번 눈을 들어서 우리 좋으신 하나님을 찬송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참 좋으신 분이시고 그리고 자기에게 돌아오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면서 이 고난과 시련, 곤고한 광야와 같은 어려움의 때를 지나 요셉과 같이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용서의 사람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50:19-21下)
이제 우리가 요셉의 생애를 볼 때에 정말 파란만장한 생애를 지났고 그리고 모나고 인격적으로 굽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람답게 만드셔서 혹독한 연단의 과정을 겪게 하셨습니다. 역사를 움직이는그 변곡점에는 반드시 사람이 있는데 아무 사람이나 거기서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커다란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역사나 중요한 상황에 전환점에서 아주 요긴한 인물로 쓰여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누구든지 그렇게 쓰시게 합당하게 준비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뼈를 깎는 고통이니까,
그러면 그렇게 자기를 다듬으시는 하나님의 그 연단의 과정을 피할 수가 없는가, 얼마든지 피할 수가 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여러분 자신이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만약에 피하지를 않고 주님의 그 말씀으로 말미암은 진실한 연단을 다 받았더라면 지금쯤 얼마나 훌륭한 성도가 되어 있겠습니까? 그런데 뺀질뺀질하면서 그렇게 은혜 받기를 원한다면서 연단받기는 원치아니하오니 이모습 이대로 중요한 인물로 써주시옵소서. 완전히 배짱입니다. 이모습 이대로 크게 써주시옵소서. 주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주님이 몰라서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세상을 움직이시는 원리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마지막 시간으로, 어제는 섭리를 믿은 사람, 요셉에 대해 생각했는데 오늘은 용서의 사람 요셉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용서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는 요셉의 진정한 승리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요셉이 결국 팔려서 애굽으로 오게된 것도 그 궁극적인 요인을 보면 형들의 미움이었습니다. 시기와 미움이었고, 팔려온 이후에 요셉이 아마 싸워야 했던 가장 처절한 싸움 두 가지가 있었다고 할 것 같으면 애굽에서의 그 고난의 과정이었고 또 하나는 내면의 세계 속에서 형들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었을 것이다고 우리는 그렇게 추측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결론부터 내리고 그 사람을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도 어떻게 보면 참 좋습니다. 목회자에게도 이런저런 소문들이 따라 다니게 됩니다. 그런데 그 현재 보이는 목회자의 모습이 워낙 거룩하고 훌륭하면 좀 부정적인 소문이 따라 다녀도 많은 사람들은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그것은 목사님을 시기하는 인간들이 날조해낸 것일꺼야. 그분은 그럴 리가 없어.’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본래 인격이 신통치가 않고 하는 짓이 영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면 그 사람에 대해서 좋은 소문이 따라다녀도 ‘그것은 누가 뻥튀긴 것일꺼야. 그 사람 그럴 리가 없어.’ 그렇게 편애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우리는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이라는 사람을 볼 때에 결국은 요셉의 그 마지막이 너무나 훌륭하고 아름다우니까 사실 성경에서 요셉처럼 순결한 신앙으로 대가가 없이 조금씩의 잘못이 있지만 대과 없이 믿음의 족장으로서 한 시대를 열었던 이런 필적할만한 인물을 구약에서 만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저는 다윗보다도 훨씬 순결한 생애를 살았던 사람이 아닌가 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워낙 그랬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그가 당한 모든 고난은 진짜 우리는 언제나 요셉 편입니다. 그래서 그가 당하는 고난은 모두 그 몹쓸 놈의 형 자식들이 좋은 나라 사람을 그렇게 고난을 당하게 해서 이 시련의 골짜기 까지 오게 만들었다고 해서 요셉이 당한 모든 고난은 애매히 당하는 고난이오 의를 위한 고난이오 결국은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한 그런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주어진 고난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편 이야기만 듣지 말고 남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남의 이야기는 누구입니까? 형들 이야기입니다. 형들이 비록 요셉과 같이 훌륭한 믿음의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들도 인간인데 그들에게 내려가서 너 어떻게 그렇게 요셉을 팔고 그렇게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짓을 했는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그 형들도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하는 이야기가 그것은 우리가 진짜 잘못한 것이지만 그러나 내 말좀 들어보십시오. 그 일이 있기 전에 요셉이 우리에게 행한 일들이 너무나 악하고 고통스러운 일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자락을 깔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레아와 라헬, 빌하와 실바, 네 여자가 있었는데 둘은 종이었고 그리고 둘은 부인이었는데 라헬을 좋아했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딸이고 외사촌입니다. 참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가 좋아서 장가를 들겠다고 하니까 외삼촌이 하는 말이 7년 동안 봉사를 하라 그러면 내가 주마. 그래서 7년 동안 노동을 하고 목축의 일을 하면서 괴로운 시간들을 수일처럼 여겼습니다. 왜 너무 사랑스러우니까. 방긋방긋 웃는 것만 봐도 정말 어떻게 견딜 수가 없으니까 7년을 다하고 이제 골인했다. 저 예쁜 여자, 저렇게 귀여운 라헬을 내가 이제 아내로 맞이하는구나. 그리고 왠 놈의 결혼식을 불끄고 했는지 첫 날 밤을 치렀습니다. 실컷 만리장성을 쌓고 아침에 일어나서 동이 터서 얼굴을 보니까 그 물건이 아닙니다. 너 누구냐고 하니까 언니인 레아였습니다. 막 그 순간에 행복감이 모멸감으로 바뀌면서 길길히 뛴 것입니다. 어떻게 외삼촌 나에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7년 동안을 일했는데 내가 언제 이 물건을 달라고 그랬는가 라헬을 달라고 그랬지, 그랬더니 외삼촌의 하는 이야기가 우리 고장에서는 동생이 형보다 먼저 시집가는 경우가 없다. 동생이 언니보다 먼저 시집가는 경우가 없다. 그러면 그 이야기를 진작 하지. 왜 7년 동안 죽도록 고생한 다음에 하는지. 그랬더니 이 약아빠진 라반이 잔꾀를 부리기를 일주일 있다가 네가 진짜 갖고 싶었던 그 라헬을 줄게 그러니까 7년 더 머슴살이를 해라, 월부로 이제 라헬을 샀습니다. 그러니까 결혼하기 위해서 14년을 거기서 죽어라고 봉사를 했는데 첫번째 7년은 속은 것입니다. 그 사은품은 전혀 원하는 바가 아니었는데 그 사은품을 얻기 위해서 7년을 일해야 했고 진짜 라헬을 얻기 위해서 월부로 다시 7년을 갚아야 했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시기, 황금같은 시기에 14년이라고 하는 세월이 장가 한번 들기 위해서 송두리 채 날라갔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나니까 늙어가는 여자 둘 하고 올망졸망 딸려서 밥 달라고 입벌리는 새끼들밖에는 남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첩들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살아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요셉이라는 사람을 여기서 낳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마음 속에는 그런 적합하지 못한 결혼관계 속에서 상처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것이 야곱은 깊은 신앙을 가져서 내면의 세계가 이렇게 요셉처럼 아주 기가막히게 정돈되면서 치유되어가는 그런 과정들이 좀 부족했다라고 봐야 됩니다. 그 나름대로 하나님을 만났는데 그게 좀 부족했다고 봐야 합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런 일그러진 결혼과정에서 온 좌절과 심리적인 갈등들이 자식을 향해서 투영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과 베냐민에 대한 병적인 집착, 편견 이런 것들이 결국은 심리적으로 그런 피해의식과 그런 문제들이 있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그것을 본인은 의식을 못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압니다.
그러니까 그 레아나, 실바, 빌하 여기에서 태어난 소생들을 보면서 야곱이 진짜 자식으로서 사랑하고 애정을 갖는 그런 마음이 덜 들고 라헬을 통해서, 그것도 또 라헬이 마지막까지 애기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애기를 낳았는데 노년에 얻은 자식들이니까 더 깊이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러니까 형식적으로 보면 두 번째 부인이었지만 정신적으로 보면 사실은 라헬이 본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자식들에 대한 일그러진 편애 이런 것들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슬러 올라가면 사실은 요셉이 형들을 고자질하고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하는 이 처절한 갈등, 그래서 결국은 요셉을 죽음까지 몰고가는이것이 결국은 그 뿌리를 캐들어가면 어디까지 올라가는가 하면 아버지 야곱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를 경외하는자들에게는 그 복이 천대까지 이르게 하고 그리고 그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값되 삼 사대에 이르기까지 하느니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비의 죄를 위해서 자식에게 적극적으로 개입을 해서 복수를 하지 않으셔도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산 불신앙에 사람들이 남긴 상처들이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의 치료가 개입되지 않으면 그것이 흘러 내려가면서 이대, 삼대 내려가면서 계속해서 부모의 인생에 어떤 결과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손들의 삶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주 훌륭하게 봅니다. 기가막히게 봅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는 염두에 두고 가족사를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야곱이 그런 일그러진 결혼생활 속에서 상처가 자녀들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이 자녀들이 신앙의 사람들이 별로 아니었습니다. 나중에는 모르겠는데 그 당시에는 그랬습니다. 요셉이 조금 낫습니다. 뭔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이 있는 사람이었던 징조들이 보이기는 하였지만 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속에서 자식들은 아버지로부터 받는 대우가 굉장히 부당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처에서 여러 소생들이 태어났으니까 당연히 엄마를 정점으로 해서 자식들이 패를 지게 되는데 자기의 어머니가 죄도 없이 아버지에게 구박을 받거나 홀대를 당하는 것을 볼 때에 그 때에 사랑받는 라헬과 끔찍히 여김을 받는 요셉을 보면서 무슨 감정이 자랐겠는가 하는 것은 명확한 것이 아닙니까?
만약에 요셉이 형들의 입장에서 서 있었어도 아마 요셉도 역시 그 형들처럼 그 사람을 팔려고 했을 것입니다. 죽이려고 했을 것입니다.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하루에 쌓인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그런 가족사에 있어서 치료되지 않은 그 콤플렉스들이 갈등을 일으키면서 막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번져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갈등이 결국은 급기야 여자들 사이로 이어진 것입니다. 여자들이 다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 밑에 여자들을 통해서 낳은 아이들 사이에 다툼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속에서 사랑받는 라헬, 그리고 라헬에게서 태어낳기 때문에 편애를 받는 요셉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요셉의 위치는 굉장히 중요한 위치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고, 어머니는 또 아버지가 가장 사랑했던 첫사랑의 여인이었고, 그리고 형식상으로는 두 번째의 부인으로 들어왔지만 사실은 정신적으로 보면 본처였습니다. 그런 속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한없이 받으니까 사실은 그의 역할이 그 가정에의 화목을 이루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변수를 쥐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오히려 자신이 그렇게 아버지의 그 충만한 사랑을 받고 있고 형들은 아버지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고 그리고 자기의 작은 어머니 큰 어머니들도, 다른 처들도 아버지의 아내들도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깊이 성찰하면서 무엇인가 자신이 족장인 아버지와 그 가족들 사이에서 뭔가 이렇게 화해의 역할을 하는 징검다리가 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을 가지고 형들을 더 많이 품어 안고 사랑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아내들의 마음에 보상을 주는 그런 화목자로 살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그런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아버지가 자기를 편애하고 자기가 아버지의 사랑하는 여인의 소생이라는 사실 때문에 아주 교만해지고 그래서 형들의 잘못들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하고 그래서 형과 아버지 사이를 점점 멀어지게 만들고 그래서 더더욱 아버지에게는 자기밖에 없다는 것을 아버지의 마음 속에 각인시켜 놓으려고 한 사랑의 이기적인 소유역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쯤되고 보면 그 형들이 그동안에 받은 마음의 상처라고 하는 것은 진짜 쉽게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더욱 형들에게는 요셉과 같이 신앙의 세계가 별로 없었던 같습니다. 신앙의 세계가 별로 없는 사람들에게는 상처가 남으면 그대로 독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혈기로 변하고 그것이 결국은 이 속에서 마음에 칼을 가는 복수심에 불타는 것입니다. 그것을 장구한 세월동안 요셉이 그런 일들을 하므로서 그렇지 않아도 가슴에 남아 있을 그 수많은 상처들에 계속해서 소금을 뿌리는 역할을 요셉이 해온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한 사람이 어떤 사람들의 관계가 미움으로 말미암아 서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고통받는 관계는 전적으로 어느 한편에만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항상 누가 먼저냐라는 문제는 나올 수 있지만, 그러나 반드시 한 사람의 인격 속에 누구를 향한 깊은 미움이 생기기까지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상호작용이 있고 두 사람이 함께 책임을 적절하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양이 어느 쪽이 훨씬 더 많은가 는 정도의 문제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전적으로 한쪽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한없이 사랑할 뿐이고 오죽 모든 것을 불사르게 내어주었을 뿐인데 이유없이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 그런 경우는 신앙의 세계에서 박해를 받는 것 같은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박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격이 순전하고 흠이 없으면 없는 사람들도 사람들이 박해를 하지만 오늘날과 같이 이렇게 인격이 너절한 우리들이 모여서 사는 이런 시대에는 박해를 받아도 대부분 순수한 신앙만이 이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상당히 인격적인 문제가 용해가 되어서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예화: 미국에 가셨는데 어느 분이 간증을 하는데 미국 땅에서 박해가 심하다고 하면서 동네에서 살지도 못하게 한다고 해서 정말 순수한 믿음을 지키려고 하니까 박해 가 심한가 보다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잠자는 미국 땅을 회복시킨다고 동네 한복판에서 통성기도를 하면서 피해를 주니까 싫어한 것인데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예배드리니까 그 사람들이 질투하며 박해하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는 이야기)
사실은 그런 껍질들을 우리들이 깨야 합니다. 요셉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은 어떤 의미에서 이런 끔찍할 만한 일을 당할 만큼 형들의 가슴 속에 많은 고통과 아픔을 안겨준 사람이었습니다. 오히려 초창기를 보면 요셉을 가해자이었고 형들은 끝없는 피해자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우리들은 고난과 섭리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 이것은 결국 미움인데, 그러니까 첫째는 요셉의 과실이었습니다. 인격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사실 17살 먹은 소년에게 그런 고차원적인 성화의 인격을 기대한다라고 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째든 정답은 그랬습니다. 정답처럼 못 살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실패였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형들이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미워하게 되니까 그 미움이 계속 쌓이게 된 것입니다. 사랑이 계속 쌓이면 결국은 표현으로 흘러나오고 미움이 계속 쌓여도 결국은 표현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실패와 그 다음에 미움, 미움이 복수가 되는데 그래서 결국은 요셉이 복수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웅덩이에 빠져 있다가 결국 애굽으로 팔려가는데 그런 모든 과정들이 지극히 고통스럽고 그리고 견디기 힘든 아픈 과정이었는 데도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용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요셉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고난들을 믿음으로 이기면서 경건하게 반응을 하면서 신앙 안에서 견뎠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고난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들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섭리론적으로, 그렇다면 그 요셉이 고자질하기를 잘했네, 요셉이 고자질을 하지 않았으면 형들이 미워하지 않았을 것이고 미워하지 않았으면 팔지를 않았을텐데 팔지 않았으면 보디발의 집에 갔을 리가 없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 여자도 안 만났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옥에도 못갔을 것인데 그랬으면 거기서 술맡은 관원장도 못 만났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요셉이 바로 앞에 설 수도 없었을텐데 결국은 요셉이 형들을 고자질하고 인격적으로 미성숙해서 실수한 것이 형들에게 미움과 복수를 당한 것이 축복으로 건너간 징검다리였구나 그러니까 우리도 역시 굳이 뭐 잘못된 것을 고칠 필요가 있겠는가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두고 보면 우리에게도 볕뜰날이 있지 않은가, 이런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것을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화: 신학교 졸업반 때 학생들과 기도원에 가셔서 어느 학생을 통해 들은 간증은 자 신이 대학교를 제대로 나오지 못한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성경을 빨리 배워서 주의 종의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뒤늦은 나이에 공부를 하는데 오랜 시간이 흐른 상태라 어려웠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공부를 하는데 수학에는 자신이 없었서 대학교 시험을 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는데 뜻밖에 감독관이 나눠주는 시험지에 모범답안지가 자기에게 오게 되어 그대로 배 껴서 내어 장학생으로 합격을 해서 신학생이 되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는 그때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를 들으셔서 인도해주셔서 신학교를 졸업하게 되 었다고 말하는데 너무 황당해서 그때의 잘못을 말하며 다른 뜻으로 하나님이 인 도해주셨을지도 모른다며 이야기를 해줘도 이해를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
요셉이 만약에 그렇게 화목자로 형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많은 사랑과 은혜를 베풀고 형들을 감싸안았다고 할 것 같으면 애굽에 팔려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측할 수는 없지만 정말 우리들이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그 요셉에게 개입하셔서 반드시 이루고자 하신 그 일을 이루고야 말았을 것입니다. 요셉이 실패하지 않고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향해서 가지고 계신 계획에 성취될 수 없었다라고 한다면 도대체 교리적으로 무슨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요셉의 이 삶은 최선의 삶을 산 드라마라기 보다는 어떤 삶? 차선의 삶을 산 드라마입니다. 그래서 그 드라마가 감동을 주는 것은 그 차선의 삶을 살기 위해서 믿음을 지키면서 산 긴 삶의 여정이 너무나 치열하고 불꽃 같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셉은 어땠는가, 한편 그렇게 해서 그 형들에게 그렇게 큰 고통을 주었는데 형들만 일방적으로 피해를 받았는가 아닙니다. 그 요셉을 애굽에 팔았습니다. 팔고 요셉이 어디에서도 불평하는 기사가 안 나옵니다. 그저 보디발의 집에서 천한 종으로서 치열하게 봉사하면서 거기에 총무의 자리에 오르고 감옥에 투옥되어서 거기서 또 반장 비슷하게 일하고 이러면서 살다가 결국은 애굽에 총리가 되었는데 그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처절한 고통 속에서 살아왔는지는 첫 아들을 낳았을 때 입증이 됩니다. 첫 아들을 낳아서 ‘므낫세’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그 이름이 무슨 뜻인가 하면 ‘잊고 싶다’는 뜻입니다. 아들을 낳았는데 네가 태어나서 내 기쁨을 주므로 애굽에서 내게 일어난 견딜 수 없었던 이 내면의 고통을 잊었으면 좋겠다. 그 하나가 요셉이 그저 우리들이 생각하는 바보같은 낙천주의자로서만 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도 인간인데 형제들로부터 고통을 받고 살아온 그 모든 과정에서 얼마나 마음의 고통과 아픔을 겪었겠습니까? 그것을 한 몸에 다 겪고 고통하면서 이 요셉이 살아온 것입니다. 아들을 낳으니까 므낫세라고 아름을 지었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의 일, 그리고 형들로부터 그렇게 미움을 받아서 팔린 그 일, 그 형들의 야비한 행동, 여기에 팔려와서 죽도록 고생한 그 과거, 그 지옥같은 감옥살이 이 모든 것들을 잊고 싶은 것입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내 인생에 있어서 그냥 퍼내버리고 싶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런 때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사랑해야 할 관계에서 오는 미움을 통해서 어느 한쪽이 이익을 받았습니다.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형들에게 고자질했는데 결국은 모든 것을 잊고 싶을 정도로 견딜 수 없는 고통스러운 세월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요셉을 미움 속에서 팔았던 형들도 그 후에 보면 견디기 힘든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보냈고 이제는 인생의 노년에 가까히 다가왔는 데도 그 마음 속에 고통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주님의 자녀로 불러주신 것은 바로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대신에 미워할 때에 생겨나는 그 고통이 가져다 주는 그 일이 완전히 인생을 황폐하게 만들어버리는 이 폐허로 만드는 미움의 문제를 치유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사랑을 알려서 이 세상에 그런 화목자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이 주님을 만나고 거룩한 성화의 삶을 살면서 사랑의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섬기고 살아가는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미움은 어느 한편에게만 절대적인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요셉에게도 문제가 있었고 형들에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초창기에는 요셉이 가해자였지만 그러나 뒤에 와서는 형들이 가해자가 되는데 방법이 너무 악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의 입장에서 보면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악랄했습니다. 최소한 요셉은 형들을 아버지에게 고자질을 했지만 그러나 죽이게 하기 위해서까지 고자질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미움이 그렇게 증폭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싸우다가 ‘이자식’ 하고 욕을 하면 그러면 여기에서 더 세게 더 적나라하게 욕을 하지, ‘이자식’ 하고 욕을 하는데 ‘선생님 저보고 이자식이라고 그러셔도 돼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 대 툭 때리면 ‘그러지마’ 그러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 대 툭 때리면 ‘이게’ 그러고 주먹이 날라옵니다. 주먹이 오면 발길질이 되고 몽둥이가 오가고 벽돌이 오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은 당연합니다. 다툼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게 되어가는 것입니다. 둘다 다 문제가 있었는데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요셉의 형들과 요셉 사이의 인생이 완전히 갈라지게 되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그게 무엇인가 하면 요셉에게는 형들에게 없는 한 세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신앙의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두 가지 작용이 함께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 작용이 무엇인가 하면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볼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 신앙의 세계가 요셉으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보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형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신앙으로 재해석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작용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신앙의 세계가, 그러니까 신앙의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놀라운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계는 우리의 신앙이 깊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돈독해질수록 점점 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영적으로 깊다. 그리고 한 사람이 참 영성이 깊다라고 말할 때 그 의미의 핵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자신의 죄와 자신의 말씀에 어긋나는 잘못된 그 불순종들을 얼마나 예리하게 찾아내는가 그게 한 사람의 영성이 깊다는 것에 결정적인 표입니다. 기도를 얼마나 많이 하는가, 병자를 얼마나 많이 고치는가 그런 것들이 진정한 의미에 영성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영성은 남이 볼 수 없는 죄,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불순종을 얼마나 예리하게 들여다보고 그것을 예민하게 느낄 수 있는가 이것이 영성의 깊이입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신앙이 깊고 은혜의 세계가 클수록 그는 하나님 앞에 늘 어떻게 보면 절망하는 사람으로 삽니다. 왜 수시로 자기가 깊은 영성과 말씀에 대한 깊고 해박한 지식들이 자기의 존재와 삶에 대해서 빛을 비추어 주는데 그 빛 앞에 서기만 하면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기 때문에, 그렇게 뼈저리게 깨달으면서 결국은 무엇을 알아가는가 하면 나 자신이 이렇게 부족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요셉이 17세 때는 그런 세계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세계가 그렇게 훌륭하게 존재했던 것은 아닙니다.
형들이 자기를 그렇게 팔았는 데도 ‘이자식들 다 때려 죽여야지’ 하는 복수심으로 맨 처음에 가득찼을지 모르지만 그 복수심이 서서히 사라지게 된 아주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고난을 받으면서 영적으로 깊어지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형편이 없는 인간인가 하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시편 105편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연단하였도다” 하나님의 말씀에 연단을 받는다고 그럴 때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말씀의 깨달음을 통해서 가책을 주어서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아파하면서 그것을 고치게 하는 것, 그것이 연단입니다.
누가 그러는데 나도 어렸을 때 연단을 많이 받았다고 그러면서 제 아버지에게 성경책으로 두둘겨 맞은 이야기를 했다고 내가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연단이 아니라 말씀의 깨달음을 받으면서 그것 때문에 아파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막 아픈 적이 있을 것입니다. ‘아! 하나님, 너무 아픕니다. 너무 괴롭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이 참 맞습니다. 내가 왜 그렇게 살아왔을까요?’ 이런 것을 통해서 자기를 보면서 고쳐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쳐나가면 고쳐나갈수록 다시 말하면 자기가 그렇게 성화되면 성화될수록 ‘이것이 전적으로 형들의 잘못만은 아니었구나’ 그것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세계가 없는 사람들은 이런 자기 성찰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생각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내 인생을 이지경에 몰아넣은 인간들, 내가 싹 쓸어버릴 수 있다면 지금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아무런 잘못이 없고 절대적인 피해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수심에 불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게 걸러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모르는 사람들이 슬쩍 스쳐가는 미움이나 뼈속에 사무친 그 미움을 해결하고 죽는 사람들을 봤습니까? 그러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자식이 부모를 상대로 법정에 나가고 법정에서 동기간들이 만나서 삿대질을 하고 다시 의절하고 사는 그 부모, 자식들, 형제간이 많습니다.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이제 다른 사람들이 내게 박해를 가하거나 요셉처럼 고통을 주어서 자기에게 아픔을 주었다고 할지라도 그런 은혜의 세계가 있고 신앙의 세계가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다시 해석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여기서 해석하잖아요. “당신들이 나에게 악을 행하려고 나를 팔았으나 하나님은 그 악을 선으로 바꾸사 내게 많은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재해석할 수 있는 섭리의 시각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 형들과의 관계를 들여다보므로서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 지식들이 큰데 그 지식과 사랑의 빛에 의해서 그 형제들과의 관계를 돌아보니까 형들이 잘못한 것은 사실인데 이 모든 것들은 결국은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기 위해서 쓰신 것이구나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두부를 만들 때 들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간수’입니다. 바닷물 소금에서 만든 것입니다. 전 먹어보지 않았습니다만, 그것이 옛날에 시골에서는 자살 할 때 간수를 먹고 잘 죽었습니다. 그래서 간수는 간수를 잘해야 합니다. 후딱하면 먹고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게 두부로 유명한 동네는 다 바닷가 동네입니다. 강릉에 가면 학사평(?) 두부가 유명합니다. 그게 왜 그런지 아십니까? 바다물이 가깝기 때문에 거기에서 간수를 직접 만들어서 간수를 넣는 것입니다. 간수를 많이 먹으면 죽는데 약간을 집어넣으니까 아주 맞있는 두부가 되는 것입니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형들이 자신에게 악을 행했으나 이것은 자신의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것밖에는 아무 유익이 없었으나 그러나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가니까 이것을 재해석할 수 있는 눈이 생겨나게 되고 하나님이 이것을 사용해서 합력해서 자신의 인생에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가 요셉에게는 있었는데 형들에게는 거의 없었습니다. 이것 하나가 요셉과 형들의 생애를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게끔 만들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들의 세계는 그렇게 요셉에게 고난을 받은 것이 요셉을 팔고 자기 아버지 가슴에 칼박은 것 이외에는 아무 결과를 남겨준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니까 누가 그랬습니다. ‘아이구 그래도 그렇게 해서 나중에 애굽에 가서 얻어먹고 살았잖아요.’ 그렇지, 그건 맞습니다. 맞는데 안 그렇게 쓰여져서 뭐합니까? 그래도 하나님 나라에 쓰임을 받으려면 뭔가 주인공이 되어서 쓰임을 받아야지, 결국은 그렇게 팔았더니 요셉을 사용하셔서 자기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어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으니까 그 섭리도 참 놀랍다. 내가 그런 사람과 무슨 대화를 하겠습니까? 그 모두 다 삼류신앙, 찌꺼기 신앙입니다. 그렇잖아요. 아무 것도 남겨준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더부살이를 해서 좀 얻어먹고 살게 되었는데 여러 해가 흘러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더 큰 공포가 엄습한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이제 우리는 끝이다. 우리 자식도 다 끝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에게 그렇게 잘못하고 요셉에게 고통을 받고 또 요셉에게 잘못 행한 그 모든 것들이 이 사람들게 가져다 준 것은 죄의 열매, 보복의 열매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요셉과 같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고 그 고난 하나 하나가 징검다리가 되어서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창출해내는 다이나믹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디자인이 이루어지는 이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똑같이 당해도 그 고난에 대해서 어떠한 반응을 가지고 사는가, 상처를 받았어도 그 상처에 대해서 어떠한 반응을 가지고 사는가에 의해서 이후에 인생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상처를받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를 깨닫는 것도 아니고 고통을 받으며 살아온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닫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꾸 옛날에 받은 상처 타령만 하고 있어봐야 도움이 안 되고 마지막이 되면 그 요셉의 형들과 같은 그런 인생밖에는 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요셉의 경우를 보면 다릅니다. 요셉은 그렇게 자신이 잘못해서 형들을 고자질하고 이간질을 해서 아버지에게 미움을 받게 하고 그래서 보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요셉이 아마 깊이 성찰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인격적인 결함으로 형들에게 보복을 당하면서 비참하게 팔려왔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신앙에 특징은 결코 과거에만 매이는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그 형들의 대한 미움이나 곱씹으면서 장구한 세월을 보내면서 복수의 칼날을 갈면서 ‘내가 여기에서 무슨 하나님의 뜻을 이루나. 다 필요없다. 내가 칼들고 고향에 돌아가서 다 찔러죽이고 나도 장열하게 전사하리라’ 아니 그런 생각할 수 있잖아요. 자기 인생을 그렇게 불행하게 몰아넣었는데 그런 생각을 우리라도 얼마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그런 계획이 진짜 실행에 옮겨졌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인생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족은 죽고 그리고 자신은 도망친 노예로서 추격을 받아서 결국은 비참한 말로를 맞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끝없는 미움이 마지막에 가져다 주는 그 종착역이 어디인가 하면 죽음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요셉을 그렇게 미워하니까 결국은 형들이 요셉을 팔아버립니다. 팔기 전에 죽이려고 합니다. 그리고 죽였다고 그러고 염소를 잡아서 그 피를 요셉의 옷에 묻혀서 아버지에게 가져갑니다. 그런데 그게 참 재미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야곱이 아버지 이삭에게서 대신 뺏을 때에 이삭의 눈이 멀어서 큰 아들을 축복해야 하는데 리브가가 듣고 작은 아들을 사랑하니까 네가 가서 대신 받으라고 해서 갔는데, 형은 털이 많은 사람이고 야곱은 털이 없어서 맨질맨질 합니다. 손을 만져보면 야곱인 것을 알 것 같으니까 여기에 토시를 해서 끼운 것입니다. 그 토시가 무슨 토시인가 하면 염소 토시였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진짜 우연치고는 참 기가막힌 일치입니다. 행한 데로 갚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토시를 끼고 가서 축복을 받고 형을 아프게 만들었더니 자기는 그 염소의 피를 바른 요셉의 옷을 만지면서 일생동안 지워지기 힘든 고통스러운 상처를 받으면서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것입니다. 참 그 우연치고는 놀랍습니다.
그런데 어째든지 간에 그 미움의 종착역은 죽음입니다. 죽기 전에는 끝나지 않습니다. 결국은 야곱이 죽고 그리고 모든 가족들이 이제 거기서 상당히 정착하게 되었는 데도 아버지가 죽자마자 형들의 가슴 속에 밀물처럼 밀려오는 생각은, ‘이제는 죽었다. 아버지 덕분에 우리가 살았는데 이제는 죽었다.’ 이게 무엇인가 하면 미움을 받은 사람이 요셉이었고 그 요셉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그것이 치유되었기 때문에 형들과의 관계에서 자유가 있었는데 형들은 겉으로는 요셉과 화목하게 지냈지만 그렇게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 속에서 살지 못했기 때문에 요셉과 좋게 거기서 정착을 해서 함께 화목하게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마음에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사람들은 개줄에 묶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유언을 날조해냅니다. “아버지께서 그러셨는데” 아니, 아버지가 그러신다면 요셉을 불러서 요셉에게 “애 너희 형들을 용서해주어라.” 그렇게 이야기를 하시지, 아니 왜 자기들에게 요셉에게 가서 이런 이야기를 하라고 그랬겠어요. “내가 죽는데 유언을 하거니와 네 형들을 용서해라. 그러셨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막 웁니다. 그런데 우는 그 눈물에 의미가 무엇인가 하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도 있고, 그리고 자신의 살아온 날들의 서러움도 있지만 그 눈물에 더 큰 요인은 무엇이었는가 하면 그 형들이 너무 불쌍하게 느껴진 것입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은혜 위에서 옛날에 그 상처와 미움의 고리를 풀고 이제 자유를 얻게 되었는데 형들은 아직까지도 그 미움이라는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렇게 고통받고 아파하고 있고 공포 속에서 사는 모습을 보면서 그것을 어떻게 인간적으로 해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 요셉이 경건한 고통을 마음 깊은 곳에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놀라운 것들을 이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제 우리들이 하나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결국은 이러한 미움과 고통의 문제는 요셉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 오면서 이렇게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는 물줄기에 있어서 아주 개인적인 성화의 차원에서 보면 그런 위대한 일들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섭리 속에서 사용하셔서 그 고통을 통해서 우리를 훌륭한 자리로 우리를 데려가시고 우리를 통해 이루고 싶어하셨던 그 궁극적인 계획에 사용하시려고 할 때에는 외면적으로만 어떤 사람의 지위나 환경을 부하게, 능력있게, 그리고 권세있게 이런 환경에서 저런 환경으로 이렇게 움직이시는 과정은 그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내면이 치료되어지는 과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냥 하나로만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요셉이 고난을 받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어디로 인도하시던지 아멘하고 따라갈 마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요셉의 내면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허물과 부족을 발견하고 형들이 자신을 미워하게 된 것들을 깊이 이해하고 용서하게 되는 내면의 변화가 전혀 없었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이 섭리를 이루는데 이렇게 훌륭한 도구로서 진전이 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요셉은 고난 받는 과정을 통해서 아주 놀라운 성화의 삶을 살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제 아주 명쾌하게 대비를 해드렸습니다. 누구 잘못된 것을 보면 고자질하지 못해서 안달을 하던 17세 소년이 30이 채 되기 전에 그러니까 28살 때쯤 그 바로 앞에 서기 직전에 꿈을 해석해주면서 결정적으로 자기가 왜 여기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이야기를 할 때 보디발의 아내를 보호합니다. 사실 그 인간이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인간입니까? 자기의 삶을 그렇게 승승장구 하면서 나아가던 그 삶을 완전히 그 시궁창에 집어 넣었는데 아니 형들이 조금 곱같게 하는 것에 대해서 아버지에게 고자질을 하던 사람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 이번에는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송두리채 모든 것을 날아가버리게 하고 그래서 완전히 죽음을 문턱에 둔 사람으로 자기를 전락시켰는데 형들이 더 악하겠어요, 아니면 보디발의 그 부인, 자기를 유혹하던 그 여자가 더 원망스럽겠어요? 비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용서를 못했는데 이것은 용서를 한 것입니다. 여기서 느끼는 것이 없습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작용 속에서 요셉의 내면의 세계, 거룩의 놀라운 변화가 치열하게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화: 아는 목사님이 들려준 이야기- 어느 목사님이 상처를 하셔서 혼자 사시며 목회 를 하시는데 시중을 드는 한 자매가 임신을 한 사실이 드러나 그 상대자가 목사 님이라고 말해 교회가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되었는데 목사님은 아니라고 말씀을 하셔도 사람들이 믿어주지를 않고 결국 쫓겨나서 광부의 생활을 하시며 애를 키 우시게 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흘러 그 교회에 부흥회가 있었는데 사람에게 상처 를 준 죄에 대한 설교로 인해 교회가 회개의 은혜가 임해서 그 자매에게도 놀라 운 회개의 은혜로 인해 모든 성도들 앞에서 예전에 자기로 인해 쫓겨난 그 목사 님은 결백하시다며 모든 사실을 다 고백하고 나니 성도들이 다시 그 목사님을 만 나 잘못을 구하며 다시 목사님을 담임목사로 모셔왔다는 이야기)
(예화: 예전에 섬기던 교회의 전도사님이 형제 자매들과 여름 수련회를 갔는데 그곳에 서 찍은 사진이 자매들과 수영복을 입고 끌어안고 찍은 사진들로 인해 교회에 문 제가 되어 제직회에서 행실이 좋지 않다며 그 문제로 토론을 하는데 갑자기 그 전도사가 뛰어들어와 명예회손 죄로 다 넣을 것이라며 난동을 부리는데 그때 생 각하시기를 전도사가 교회에서 죽어서만 지내는 자로만 생각했는데 저럴 수도 있 구나 생각했다는 이야기) 얼마나 두 사람이 대조적입니까?
그러니까 요셉에게는 그런 고난을 받으면서도 자신을 하나님이 그 고난이 자기에게 왔는데 그것에 대해서 두 가지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세계가 없는 사람은 오직 무엇만 보는가 하면 그것이 왜 그 사람들이 나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었는지 그 배경은 하나도 관심이 없고 ‘저놈이 나를 때렸다.’ 그것만 가슴 깊이 새겨두는 것입니다. 그 애가 왜 때릴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서는 일단 이야기를 안 하는 것입니다. ‘나를 때렸다. 그리고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보복하는 것이다.’ 그것만 남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세계를 가진 사람들은 두 가지를 함께 보게 되는데 그것은 저 사람이 저렇게 때릴 수밖에 없었던 그 배경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허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관계 속에서 일어난 것이니까. 그리고 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둘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결국은 이 커다란 물줄기가 하나님의 움직이시는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하나를 가지고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만들어가시는 것입니다.
두부를 만드는데 해골이 그려져 있는 간수를 불 때 그때 옆에서 두부를 만드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기겁을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이것을 부어야지만 두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그 계획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깊이 알고 있는 신앙의 세계가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았을 때 그 속에서 자신의 부족을 성화의 과정에서 발견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 그 잘못들을 사용하셔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나에게 꼭 필요한 징검다리로 이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게 이것입니다. 들어보십시오. 얼마나 재미있는지를, 아까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만약에 요셉이 여기에 형들과 갈등이 없어서 여기 팔려오지 않았더라도 훌륭하게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비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허물이 있었습니다.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형들에게 고통을 주었고 미움을 받아서 고난으로 점철된 길을 걸으면서 결국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거룩한 사람으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허물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된 것보다도 더 훌륭한 방법으로 되었으리라는 그 상상이 우리는 안 떠오르는 것입니다. 이게 차선인 데도 그 차선을 경건한 신앙으로 잘 끝까지 섭리를 믿으면서 순전하게 살아가니까 그 차선이 최선과 차이가 나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나온 과거를 가지고 깊은 시름에 잠기면서 오늘의 신앙이 영향을 받는 것처럼 바보가 없습니다. 그 사람의 문제는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그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면서 순수한 신앙으로 그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오늘의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과거를 들여다보면 우리 모두에게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요셉이 자기의 형들을 용서하는데 용서할 수 있었던 비결을 이야기하기 전에 이렇게 결국은 형들이 요셉을 팔고 그리고 와서 요셉의 용서를 받고 함께 어울려서 살아가는 데도 형들에게는 아직까지도 그 공포와 두려움들이 가시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요셉이 완전히 형들을 정복해서 진짜 하나님이 보여주셨던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절하는 그 비전이 궁극적으로 성취되는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사랑으로 마무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제 이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그리고 우리는 주의 종입니다. 한때는 요셉, 이자식, 저자식 그러던 그 애 한테 주인이라고 부르면서 우리는 이제 주인님의 종일 뿐입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으면서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하나 발견하게 되는가 하면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점령해나아가는 방식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팔복에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며” 이것은 물리적인 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오늘날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온유한 사람들입니까? 이봐요. 다 웃습니다. 오늘날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온유한 사람들이 아니라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아주 사악하고 재리에 밝고 그리고 어디서 정보통과 내통해서 치사하게 사는 사람들 손에 대부분 땅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며” 할 때 이 땅은 찰스 스펄젼의 해석이 정당합니다. 찰스 스펄젼 목사는 이것을 영적인 감화와 영향력이라고 본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들, 그 온유가 어떻게 온 온유인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그분의 참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그 온유한 사랑으로서 사람을 감화시킨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들을 정복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결국은 그리스도께서 복음으로 이 세상을 정복해 나아가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잘 보십시오. 저도 목회를 하거나 아니면 개인적인 삶에서 지금 아주 뼈 속 깊이 사랑하는 지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체들 중에 어떤 지체들은 제 마음에 상처를 많이 주고 거의 완전히 갈라질 뻔하던 그런 지체들도 있습니다. 한때는 마음에 아주 분노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래서 인간이 어떻게 저렇게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가 있을까?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도 그런 경험을 여러 번 했습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비결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깊이 용서하고 다시 화해해서 나를 통해서 연약한 자들을 받으시는 그 하나님 아버지의 용납하시는 사랑을 보여주면 정말 그렇게 훌륭하게 옆에서 섬겨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맛보는 영적인 유대감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좋게 좋게 살아온 사람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그렇게 끈끈한 유대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렇게 하면서 땅을 정복해가는 것입니다.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지듯이 한번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으로 관계가 그냥 끝장나지 않고 오히려 그 치유와 회복, 화해와 용서를 통해서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끊어지질 수 없는 지체들임을 뜨겁게 확인하고 나면 정말 놀라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다리에 총을 맞아서 뼈가 뚝 부러져서 내버려두면 젊은 사람들은 뼈에서 아교질이 나와서 뼈가 굳어지게 되는데 뼈가 기형이 됩니다. 총을 맞아서 부러진 데는 용접한 것처럼 굵어집니다. 그래서 부러지면 다음에는 거기가 부러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데가 부러집니다. 똑같습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서로 미워하고 그리고 갈등하고 고통하는데 그것을 그냥 내버려두면 정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그런데 그것을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고난을 순전한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경건하게 반응을 해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큰 사랑을 가지고 그 사람들을 용서하고 다시 사랑으로 품어서 다시 결합을 이룰 때 일이 삼겹줄처럼 끊어지지 않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꼭 신앙의 세계 말고도 역사의 고사를 넘어가더라도 굉장히 그런 것이 많습니다.
(예화: 주왕 때의 이야기- 주왕이 장수들을 모아놓고 연회를 베푸는데 왕에게는 아주 총애하는 후궁이 있었는데 연회 중에 바람이 불어 촛불이 꺼지는 사이에 누군가 가 후궁을 끌어 안았는데 지혜로운 후궁이 그 사람의 옷 솔기를 끊어 나중에 왕 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니 왕이 그냥 넘어갔는데 그 후에 싸움이 있어 왕이 친 히 싸움을 하는데 적군들이 왕을 공격하는데 왕의 앞에서 필사적으로 왕을 보호 하며 왕이 피할 수 있도록 어느 장수가 보호를 하면서 그 사람이 적군의 화살을 맞으며 죽어가면서 예전의 그 사실을 이야기하며 자기인 줄 알면서도 자기를 살 려준 왕에게 목숨을 바쳐야겠다고 다짐했다며 그 다짐을 지킬 수 있게된 것을 영 광으로 생각한다며 죽은 이야기)
신앙의 세계 밖에서도 용서는 이런 놀라운 힘을 갖는데 신앙의 세계 안에서 일어난 용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을 주는 정도의 용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심하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진정한 신자로서의 권위를 갖는 요소가 둘이 있는데 그것은 진리요, 또 하나는 사랑입니다. 우선은 자기가 참되게 살아야 합니다. 참되게 살지 않으면 그가 어떠한 능력을 발휘하고 어떠한 영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 영향력을 신앙의 영향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참되게 살아야 합니다.
제가 어그제도 교회에 집사님들을 몇 분 모아놓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잘 보필하라. 내가 무조건 좋게 좋게만 하면 하면 안 된다. 참된 길을 걸어가도록 그렇게 보필을 해야지만 세월이 흘러갔을 때 당신들이 열린 교회의 일꾼으로서 잘 살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참되게, 진리가 먼저 권위에 가장 중요한 기초입니다. 진리로 행하고 진리로 살고 진리에 터위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만 있고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그것입니다. ‘너 이런 것 알아’ 그러면 ‘난 모른다’ ‘너는 아나’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너 이렇게 이렇게 사는 것이 참된 것이 아니야. 그렇게 살고도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어’ ‘니나 잘 살아라. 난 이렇게 밖에 못산다’ 아니면 워낙 자기보다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고 탁월하게 사는 데 자신이 그 사람 앞에 설 때마다 자신은 형편이 없는 인간이 되어서 나타날 때에 그때에 배째라는 식밖에 없습니다. ‘그래 너는 잘났다. 난 이것밖에 못산다. 나 못났다. 그래서 어쩔래’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사랑이 있으면 다릅니다. 훌륭하고 진실한 삶을 살면서도 그런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가서 무릎을 꿇고 사랑으로 그들을 설득하고 아파하고 이런 것입니다. 제가 구역장들에게 이야기하면서 구역장들이 교육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안 나온 사람에게 ‘또 왜 안 나왔어요?’ 그리고 전화를 하면 뭐라고 대답을 하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안 나올 수밖에 없는 일이 있었겠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그 사람을 이해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나가야지, ‘또 안 나왔다며’ 그렇게 전화를 하면 저쪽에서 뭐라고 대답을 하겠습니까? 그러면 저쪽에서 나오는 대답은 ‘요즘 왠지 교회에 가기가 싫어요, 전화하지 마세요.’ 그리고 툭 끊어버립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으셨다죠, 그래도 어떻게 수요 예배는 나오셨네요’ 이렇게 물어보면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아, 사실은 수요 예배도 못 갈 뻔 했는데 주일 날 무슨 일이 있었다’고 ‘아 그러셨겠지요. 얼마나 경황이 없으시겠어요. 제가 기도해드릴게요. 그래도 주일 날 나오도록 애쓰셔야지요, 하나님 은혜를 받아야지요.’ 이렇게 해야지 인격적으로 해야지 되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만 있고 사랑이 없으면 결코 그 사람이 아무리 참되게 살아도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싸늘합니다. 그리고 사랑이 없는 그 사람의 훌륭한 삶은 모든 사람들을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재 자체로서, 그러니까 예수님의 생애를 보십시오. 예수님의 생애는 그런 생애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완벽한 삶을 사신 생애였습니다. 충성에 있어서나, 정절에 있어서나,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성경적인 삶에 있어서나 예수님의 삶은 완전무결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완전무결함 때문에 예수님 앞에 섰을 때 정죄받고 있다라고 하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분은 완전하고 참되시나 참되신 그 분이 부족하고 못된 우리들을 용납하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서 그들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발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서 애굽에 와서 고통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 아닙니까? 그 고통 속에서 쓰라린 눈물을 머금으며 복수의 칼이나 갈면서 지냈다면 불성실하고 성질이 못된 노예로서 아마 그의 인생은 끝났을 것입니다. 아니면 도망나와서 추격을 받아서 잡힌 그런 탈출한 노예 정도로 비참한 인생을 끝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인격적인 허물을 그 성화의 과정 속에서 깊이 성찰하고 자기를 미워하여서 이 비참한 생활을 해나가도록 판 그 형들의 보복을 보는 대신에 그것을 사용하셔서 자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게 하시는 아버지의 큰 뜻을 발견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형들의 미움과 그 보복에 대해서 이 요셉은 훌륭하게 복수를 하였는데 그 복수의 이름은 사랑의 복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주님의 은혜를 입고 여기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랬으면 이제 여러분들이 정말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셉이 그렇게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요셉이 만약에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고갈된 영혼으로 살았더라면 요셉도 인간인지라 자신의 형들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과 함께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통케하심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분의 사랑의 임재 속에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신령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요셉과 정도가 다를지는 모르지만 우리도 어느 정도는 요셉이 누리고 산 것들을 누리고 산 사람이 아닙니까? 요셉이 맛보았던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맛보지 못했습니까? 요셉이 맛보았던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사는 은혜를 우리도 말씀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짐승과 같이 무지하던 우리들의 마음을 일깨워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고 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더러운 죄인들을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해주시던 아버지의 그 감격적인 용서의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한때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이 이 크고 놀라운 하나님 아버지의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도 되는가. 감격했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문제는 이런 신앙에 감격을 오늘도 계속 유지하면서 살아서 우리에게 이처럼 놀라운 사랑을 그리스도께서 베풀어주신 것은 우리처럼 하나님 앞에 소망이 없었던, 또한 우리 앞에 소망이 없는 우리에게 상처준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심과 같이 용서하고 주님을 거스려 대앙하고 불순종하며 산 죄밖에 지은 것이 없는데도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값으셔서 우리를 주님의 사람으로 만드신 것처럼 또한 우리도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준 사람들을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이 아니라, 우리를 감화시키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우리의 용서와 사랑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주인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해주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수많은 사람 가운데 택하셔서 이 십자가의 사랑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모릅니다. 바람처럼 지나가는 세월입니다. 우리에게는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료하며 끌어안으면서 용서하고 살아도 우리의 시간이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원수맺고 마음에 상처를 준 사람들은 많아도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들을 찾아가서 서로를 화목하게 하고 맺힌 것을 풀어주는 피스메이커들은 너무나 소수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의 감화를 입고 미움의 심각성이 무엇이고 용서의 축복이 무엇이며 맺힌 것을 풀고 살아가는 이 화목의 삶이 무엇인지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개입하지 않으면 이 세상은 끝없는 전쟁과 미움, 서로를 찌르고 죽이는 피묻은 칼의 복수의 잔치가 끝나지가 않을 것입니다. 한 원망은 미움을 부르고, 미움은 복수를 부르고, 복수는 다시 칼을 부르고, 칼은 죽음을 부르는 피가 피에 잇대이는 이 처절한 파괴가 바로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와서 이루고 싶었던 그 궁극적인 그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불러서 우리 엄마가 모르는 십자가의 사랑을 내게 알게 하시고, 우리 아버지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나의 동기간들이 알지 못하는 그 큰 사랑을 우리에게 알게 하신 것은 먼저 우리가 그 사랑의 빛을 충분히 지고 주님의 사랑에 빛진 그 부채의식으로 우리가 우리에게 상처를 준 많은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들에게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참된 용서의 자유와 사랑의 기쁨을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수많은 사람 가운데 우리르 택하셔서 독점적인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미움과 고통이 난무하는 우리의 삶의 현장, 특별히 우리가 사랑하며 살도록 관계를 맺고 부름을 받은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 우리의 동기간, 그 속에서 이러한 용서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요셉과 같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이루는 지렛대와 같은 사람들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자신 속에 그런 미움과 복수의 감정과 칼을 품고 곧이곧대로 자기 살고 싶은 데로 살아가면 그는 결국은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를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역사 속에 사라져간 수많은 거품처럼 흘러갔던 그 엑스트라들, 요셉의 형들과 같이 주변 인물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이 살아온 고난으로 가득찬 삶, 거기에서 받았던 수많은 정신적인 고통과 신앙적인 연단을 생각하더라도 우리의 고난과 연단이 그렇게 끝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던지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모른 사람들은 어쩔 수 없지만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 상처보다 큰 하나님의 위로, 고난보다 큰 하나님의 사랑, 아픔보다 더 큰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맛 본 우리들은 그렇게 인생을 마무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이 운명인 것처럼 알고 미움의 개줄에 묶여서 결국은 파멸로 가지만 우리는 그것을 끊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래서 용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집에 가서 용서하세요. 맺혔던 부모들을 깊이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있는 하나님의 위로, 주님의 사랑 이런 것, 그런 것 있어도 아직까지도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들을 용서를 못하는데 여러분들이 용서를 하지 못하고 있는 그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큰 가시와 같은 미움과 고통, 그것만 있지 어쩌다가 한번이라도 불태워주는 은혜의 불길이 없습니다. 여러분들 보다도 더 포악한 사람들이 되어서 여러분들에게 상처를 주는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용서하게 하시려고 주님이 먼저 우리에게 용서를 맛보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끊임없이 그런 관계에 직면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수렁이 되어서 우리의 영적인 삶은 진전이 없습니다. 그 미움 때문에 더 이상에 진전이 없고 그 미움 때문에 어떻게 살아볼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요셉이 경험했던 고통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우리에게 고통이 있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고통만 주신 것이 아니라 고통을 능가하는 기쁨을 주셨습니다. 진주 조개에게 아픔만 준 것이 아니라 그 바다가 소중한 보석을 준 것처럼 그 고통과 시련이 아팠지만 그것 때문에 지금 우리가 거미줄 같은 믿음이나마 붙들고 주님이 살아계신 간증을 유지하며 살았다는 생각을 할 때 여러분들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람되고 주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인간이 되게 하려고 천사와 같은 존재들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경회 마지막 날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진정한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용 영성이 아닙니다. 진정한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헌신용 영성이 아닙니다. 진정한 영성은 헌금용 영성이 아닙니다. 진정한 영성은 삶에 녹아드는 영성입니다. 주님의 사랑, 주님의 은혜, 주님께로부터 맛 본 거룩의 은혜 때문에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의 아픔까지도 끌어안고 흐느끼며 사랑해서 결국은 나를 미워한 그 사람의 이름 석자가 내 가슴에 서럽도록 아름다운 그리운 이름이 되기까지 사랑하며 사는 것, 이런 삶을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불러서 오늘도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요셉, 상처를 극복한 사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