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소생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다”(시 23:3)
녹취자: 조원정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는 사실을 총론적으로 고백을 했고 2절에서 부터는 왜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신 근거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절은 못하고 시간이 없어 넘어갔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시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푸른 풀밭은 우리는 그저 운동하고 놀 수 있는 그라운드지만 양떼들에게는 밥을 먹는 곳입니다. 이 시인이 하나님이 자신의 육체적인 필요들을 충분히 채우시면서 인도하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3절에서는 신앙심이 훨씬 깊어진 시인의 고백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신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이런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보다 더 높은 이유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의 영혼을 소생시켰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그 소생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었다고 하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소생시키시며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히브리어 성경에는 ‘하야’라는 동사가 나옵니다. 이것은 원래 직역을 하면 “하나님이 내 영혼을 살아있게 하시며” 이렇게 번역이 됩니다. 그러면 시인이 내 영혼이 살아 있게 하시고 이렇게 고백을 했으니까 언젠가는 이 시인의 영혼이 죽은 것 같은 때가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져야지만 3절이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모습은 동물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는 크게 세 가지 층차의 사물들이 있는데 하차는 존재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위, 돌, 공기, 잘라놓은 나무 이런 것들은 그냥 있습니다. 그 위에 또 다른 사물들이 있는데 그것은 식물입니다. 이것들은 있을 뿐만 아니라 살아 있습니다. 그 속에서 양분을 빨아들이고 자라고 잎이 줄기와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위에 또 다른 사물이 있는데 있을 뿐만 아니라 살아있고,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감각할 수 있는 사물들입니다. 동물입니다. 동물과 식물의 차이는 위치 이동할 수 있습니다.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데로 위치를 이동할 수 있고 외부에 대해서 반응을 하는 면에 있어서는 식물이나 동물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동물들의 외부에 대한 반응은 식물의 그것보다 훨씬 더 적극적입니다. 강아지도 추우면 따뜻한 곳을 찾아가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안전한 곳으로 도피합니다. 그 위에 또 다른 층자의 사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을 가진 인간입니다. 있을 뿐만 아니라 살아있고,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감각하고, 감각할 뿐만 아니라 인식할 수 있는 지성을 가진 인간이 있습니다. 인식하고 자기 결정 능력을 가지고 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고도의 도덕 능력을 가진 인간은 동물과 구별되는데 그 이유는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간이 맨 처음에 창조되었던 창세기에 가보면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으사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더니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흙이라고 되어 있지만 원래 히브리어 성경에는 ‘아파르’라는 동사인데 티끌입니다. 먼지, 티끌을 하나님이 빚으셔서 사람의 모양을 만드셨고, 이 의미는 인간의 육체는 지상의 자원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이 지상으로부터 자원으로부터 인간의 육체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정한 시간이 지나가면 이 육체는 자기가 원래 나왔던 본래의 곳으로 돌아가려는 귀소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는 귀소성입니다.
그런데 이 ‘아파르’라는 티끌은 구약성경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이 아주 분명한 여지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미미한 것, 가치 없는 것의 대명사가 티끌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먼지를 돈 주고 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위대한 것은 비록 몸은 티끌로부터 창조되었지만 영혼은 하늘로부터 창조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후 하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의 일부를 인간에게 넣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5세기 때 프랑스에 댄생페레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자가 살았습니다. 댄생페레라고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석을 했는가 하면 하나님이 ‘후’ 하고 숨을 불어 넣어 주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일부를 이동시킨 것이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영혼과 영이신 하나님 사이에 존재론적인 일치가 이루어지면서 아주 복잡한 신학적인 문제가 나오게 됩니다. 이것을 어거스틴이 비판하면서 후 하고 하나님이 숨을 불어 넣으신 것은 당신의 일부를 나누어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영혼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보았습니다.
인간은 육체는 이 땅에 있는 자원으로부터 만들어지고 영혼은 하늘로부터 창조됩니다. 우리의 육체는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육체를 지탱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이 세상의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먹고, 입고, 마시고, 이런 의식주를 비롯한 많은 자원들을 끊임없이 소비하면서 인간의 육체의 생명은 유지되는 것입니다. 좋은 품질의 것을 사용할수록 잘 유지가 됩니다. 예를 들자면 편안하고 좋은 곳에서 하룻밤을 자고나면 아침에 피고하지 않고 힘이 남습니다. 노숙을 하거나 아니면 텐트에서 쪼그리고 자고 일어나면 아침에 힘이 듭니다.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영양이 생기면 육체에 힘이 생겨납니다. 너무 많이 먹으면 배가 나오지만, 인간의 영혼은 그런 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늘의 자원을 소비하면서 인간의 영혼이 인간의 영혼다운 건강을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하도록 있는 하나님의 말씀, 진리,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사랑, 이런 것들을 받음으로서 인간의 영혼은 영혼다운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아주 절묘한 조화와 결합을 이룰 때 정말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하게 문화주택을 지어 놨다 하더라도 그 속에 사는 사람이 식인종이라면 우리는 그 주택을 문화주택이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그 아름다운 저택에서 저녁마다 사람들의 팔, 다리를 끊어서 볶음을 하고 조림을 하고 요리를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그 집이 문화주택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둘 사이에 자원의 공급의 조화를 이루어야 된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고, 즐기고, 쾌락을 누리는 일에는 미친 듯이 열심히 살지만 그래서 인간의 삶이 행복한가 하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1850년대를 기준으로 미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생을 사는 데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했더니 열아홉 가지를 이야기를 했답니다. 열아홉 가지는 생존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다. 140년쯤 흐른 다음에 1990년대 물어봤더니 256가지로 말합니다. 그 안에 핸드폰도 들어가고 컴퓨터도 들어가고, 150년 전에는 열아홉 가지만 있으면 충분히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256가지가 필요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 돈 주고 사야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돈을 미친 듯이 벌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핸드폰도 없고 청바지도 없고 자동차도 없고 미장원도 못가고 화장품도 못 바르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인생의 행복의 본질적이지도 않은 것에 의해서 젊음을 바치면서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을 이기고 돈을 쟁취합니다. 자본주의는 극단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됩니다. 세상을 다시 유물론적인 사회로 바꾸어 놓습니다.
여러분들 여기 대개 젊은 분들이라서 얘기를 하는데 생각 없이 인생을 살면 안 됩니다. 모든 거대한 인생의 풍조가 우리를 떠밀고 가지만 항거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세상이 그러니까 그렇게 흘러간다고 말하지 말고 주체성을 가지고 여기에 항거하면서 사회가 규정한 자기 인생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안에서 규정한 내 인생을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삶이지 그냥 거대한 물에 떠밀려 가듯이 살아가는 삶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든지 경제든지 사회, 문화, 철학, 모든 것에 대해서 환경이라든지 언론이라든지 자기의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살아가서 자기가 살아있는 이 사회가 선한 영향을 받을 수 있도록 살아가는 삶이 진짜 인생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젊었을 때에 소비나 쾌락 같은 것에 눈을 뜨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따라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혼의 가치는 무엇인가 하면 인간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영혼이 건강한 상태에서 육체를 통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거스틴이 말하기를 인간의 육체의 생명은 영혼이며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이시라고 노래했습니다.
이 시인은 정말 구약성경에서 이 사람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고 하나님께 사랑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는데 영혼이 죽은 것처럼 되는 깊은 위기를 경험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좀 유식한 말로 영적침체라고 합니다. 영혼의 침체 상태에 있게 되면 영혼은 육체와는 달리 죽고 소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의 영혼도 소멸하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멸합니다. 육체의 죽음이라는 말과 영혼의 죽음이라는 말은 의미가 다릅니다.
예를 들자면 파리에서 발생한 화재가 꺼졌다는 말과 마음에서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불이 꺼졌다는 말이 의미가 다른 것처럼 인간의 육체가 죽었다는 말과 영혼이 죽었다는 말은 다른 것입니다. 육체가 죽은 것은 소멸되고 멸절된 것이어서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이지만 영혼이 죽었다고 하는 의미는 영혼이 영혼다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영혼은 오류와 부패가 깃들게 되어서 육체와 육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패션, 정들을 관할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수많은 죽은 행실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죄입니다.
영혼의 침체는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입니다. 오늘날은 죄에 대한 관념들이 매우 희박하고 죄 대신에 자신이 상처를 입었다고 표현을 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영혼의 침체는 상처나 환경의 어려움 때문이라고 말하는 대신 본질적으로 인간의 죄 때문에 찾아오는 침체라고 말합니다.
이 시인은 아주 탁월하게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 앞에 괄목할만한 두 개의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금지하신 인구조사를 시행한 사건이었습니다. 인구조사는 정치적으로는 아무문제가 없는 백성들의 숫자를 헤아리는 인구조사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매우 싫어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정치적으로는 문제가 없는데 신앙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당시의 인구조사는 오늘 날 인구조사와는 달라서 군대에 나갈 수 있는 젊은 남자들의 숫자를 헤아리고 마필의 수를 헤아리는 것이 포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라마다 인구조사를 통해서 우리나라에는 전쟁을 나갈 수 있는 남자의 숫자가 이만큼이고 물자를 동원할 수 있는 말들이 이만큼이라고 헤아린 다음 이것을 가지고 왕들이 교만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금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이것은 하나님이 금하신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왕국에 강성함을 확인하고 싶고 이 조사를 실시함으로 하나님의 큰 징계를 받아서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온역으로 죽게 됩니다.
이보다도 심각한 사건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사건입니다. 말씀드린바와 같이 다윗은 아주 상처투성이의 사람이었고 그러다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보고 반하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불륜을 저지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커다란 심판이 임했는데 단번에 왕국을 박살내 버린 것이 아니라 다윗의 마음을 큰 고통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구원의 기쁨을 모두 가져가시고 주님의 성령을 거두실 것 같은 위기를 느꼈습니다. 바로 앞에 전임자 사울 왕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면서 하나님이 주신 성령을 거두어 가시자 어떻게 비참하게 죽는지를 목격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리시는 악신이 그에게 임하여 정신병자가 되었습니다. 이 시인이 그런 위기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깊은 영적인 모든 침체와 위기는 결국 죄에서 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해결은 회개하는 것 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무슨 그렇게 큰 죄를 지었나, 정말 나쁜 사람들은 다른데 많이 있는데 라고 합니다. 대학실험실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비커에다 차가운 물을 넣고 개구리 한 마리를 집어넣었습니다. 개구리는 원하면 폴짝 하고 뛰어 나올 수 있는 정도의 아주 얕은 접시였습니다. 밑에다가 불을 지폈습니다. 1초에 0.02도씩만 올라가도록 불꽃을 조절했습니다. 놀랍게 1시간 20분 만에 개구리가 푹 삶아졌습니다. 만약에 개구리를 미지근한 물에 집어넣었다면 개구리는 펄쩍 뛰어서 도망갔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죄는 큰 죄와 작은 죄가 있지만 그 본질로 볼 때는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크기는 다르지만 본질은 똑 같습니다. 별로 유쾌한 예는 아니지만 한국에서도 이제는 발달해서 화장실에서 나오는 분뇨나 이런 것들을 예전에 펐는데 지금은 바로 묻어서 화장실을 치우지 않고 바로 처리가 되게끔 그렇게 건설을 합니다. 예전에는 분뇨를 해서 꽉 차게 되면 똥 퍼는 차가옵니다. 차가 올 때 항상 음악을 틀고 새벽에 오는데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 음악을 틀고 옵니다. 베토벤이 그런 것 틀라고 만든 것이 아닌데 아침 일찍이 커다란 호수를 집어넣고 빨아들입니다. 유리로 게이지가 나오면 돈을 지불을 합니다. 출렁거리면서 다니는데 사람들이 아침에 그거 보면 굉장히 기분 나쁘고 더럽고 그렇습니다. 그런 더러운 똥을 물 한바가지 섞을 것을 여러 번 필터에다 걸렀습니다. 칼라가 오렌지 색깔에다 액체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예쁜 스프레이 속에 넣고 공중에다 뿌렸습니다. 노란 수증기 알갱이가 퍼졌습니다. 볼 때는 그렇게 더러워 보이지 않지만 품질에 있어서는 똑 같습니다. 출렁거리면서 달려가는 똥차의 똥이나 허공에 예쁘게 뿌려진 노란색 수증기나 똑같습니다.
(예화) 어느 군인들이 계곡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자루 세 개 갖다 주면서 여기에다 각각 돌멩이 50kg씩 담아 오거라, 한 군인은 가서 50kg씩 돌멩이 하나를 집어넣었습니다. 또 다른 군인은 30kg돌멩이 하나, 20kg짜리 돌멩이 하나를 집어넣어서 50kg를 만들었습니다. 세 번째 군인은 영리했습니다. 돌멩이를 지고 어디까지 갈지 모르는데 그렇다면 나는 작은 돌멩이를 주워야지 해서 작은 공기 돌 같은 돌멩이를 천개를 주워서 50kg를 만들었습니다. 무게를 달아보니 다 50kg였습니다. 그 다음 지휘관의 명령이 군인들을 황당하게 만들었습니다. 모두 이 돌멩이를 원래 있던 자리에 갖다 준다. 실시, 50kg 갖고 온 사람은 정확하게 제자리에 갖다 두었습니다. 30kg, 20kg갖고 온 사람도 갖다 뒀는데 천개를 주워온 사람은 단 한 개도 제자리에 못 갖다 두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죄지은 것이 없고 잘 살았다고 생각해도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비추어 보면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인간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이런 영적인 침체의 가장 커다란 주범은 죄입니다. 그리고 이런 침체로부터 벗어나는 가장 훌륭한 길은 자기의 죄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 회개는 전인격적이고 모든 영혼의 총체적인 활동입니다. 제일 먼저 자신이 죄가 없다고 하는 사람이 진리의 빛을 비추면서 진리의 빛을 통해서 자기가 죄를 지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깊이 슬프게 느끼고 고백을 하고 그것을 원래의 질서로 돌려놓는 의지적인 행동을 통해서 진정한 회개가 성립하게 되는 그러한 참회와 회개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우리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 인간은 그 죄의 짐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진정한 자유는 바로 이렇게 죄와 얽매이기 쉬운 것들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을 향해서 날아오르는 비상의 자유입니다. 그때에 한없는 영혼의 가벼움을 느끼게 되고 인간은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아주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알콜에 중독되어 본 적은 없습니다. 술을 썩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회심하기 전에 담배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십대 때부터 피우기 시작해서 스물한 살에 회심하고도 5년 정도 피웠습니다. 지금도 나는 담배를 피우는 것이 큰 죄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지 않습니다. 하루에 한갑 반 정도 피울 정도로 중독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가 하면 너무 담배가 피우고 싶은데 담배가 없으면 쓰레기통이라도 뒤져서 피워야 됩니다. 그런 중독성이 있는데 마약은 그것의 이백 배입니다. 사실 못 끊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3년 있다가 정말 어렵게 담배를 끊었습니다. 어느 날 버스를 탔는데 앞에 사람이 담배를 피우는데 후 하는데 나도 모르게 들어 마셨는데 담배가 너무 좋은 것입니다. 그때가 담배 끊은 지 3년 되었을 때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외면적으로 담배를 끊었지만 내 안에서는 그 담배를 좋아하는 습성이 남았던 것입니다. 지금은 토할 것처럼 싫습니다. 음식점에 들어갔다가 담배 냄새가 나면 문 닫고 나와 버립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중독입니다. 그것을 누리고 있을 때는 자유로운 것 같지만 그런 자유로운 것이 자기가 습성화 되고 나면 그 자체가 자기를 억압하는 도구가 됩니다. 술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면서 무엇엔가 깊이 집착해서 그것 없이는 못 살 것 같은 사람이 되지는 말아야 합니다. 무엇에든지, 하나님 이외에는 어떤 것에도 그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취미도 마찬가지이고 모든 것에 있어서 그렇게 중독되는 삶을 사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욕망의 종이 되기 쉬운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을 자기가 다스리면서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 이외에는 어떤 것도 중독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중독된다는 것은 표현이 좀 잘못 되었지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에 심취하고 그 아름다움을 자신의 삶 속에서 구현하고 그런 삶 이외에는 ‘에딕’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영혼의 깊은 침체를 경험했다가 시인이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영혼의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영혼의 깊은 침체 속에서 죄 때문에 생명을 잃어버린 시인의 영혼을 다시 살아나게 해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고 나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했던가를 체험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은 이 세상에 있는 물질들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을 가장 풍성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많이 사랑한 사람이 나오는데 그 사람의 공통점은 죄로부터 하나님 앞에서 큰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은 영혼을 다시 살아나게 하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거저 주는 것입니다. 거저 주는 것이 아니면 은혜가 아닙니다. ‘크라시아’라는 이 말이 그레이스, 이것은 사은품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스토어에서 하나사면 하나 더 줄때 ‘크라시아’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호의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혼의 깊은 침체, 영혼의 깊은 죄의 상태에서 구원해 주시는 그런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데 놀라운 구원의 은혜가 거저 주어지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데 오늘 성경은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라고 말합니다. 의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말로 ‘베덱쩨덱’이라고 나오는데 ‘쩨덱’이라고 하는 말은 인간의 내면의 의로운 질을 가리킵니다. ‘쩨다카’라는 명사가 되면 이것은 의로운 마음의 퀄리티가 삶으로 표출되어 드러난 행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길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서 굉장히 많이 나오는 표현인데 비유적으로 은유적으로 내 인생의 행로를 가리킵니다. 의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불의한 길의 반대입니다. 그럼 불의와 의를 구별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시인이 살았던 시대에 의하면 율법이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기준으로 율법에 부합하는 삶은 의로운 삶, 그 율법에 부합하지 않고 배치되는 삶은 불의한 삶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시인의 영혼을 깊은 침체에서 건져주시는 것은 거저 해 주시지만 하나님이 시인을 용서하고 다시 은혜를 주셨을 때 계획은 의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의로운 인생은 불의한 인생의 정반대의 삶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는 마찬가지입니다. 탁월하게 발달한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하지만 인간의 본질까지 변한 것이 아닙니다. 해아래 새로운 죄악은 없습니다. 오늘 날 이 사회에서 짓는 많은 죄들이 나타날 때에는 옛날에 없었던 것과 관련되어 나타납니다. 컴퓨터 범죄, 지적 재산권의 침해, 환경의 파괴 등등으로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인간의 욕망을 따라 살려고 하는 인간의 마음의 퀄리티, 품질은 이미 초대교회 시대나 인류역사 이래 모두 가지고 있는 그 품질과 똑 같은 것입니다.
인간의 문제는 결국은 이러한 죄로부터 구원해 주신 신자의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는 계획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구원도 어느 쪽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현저하게 달라집니다. 애굽을 탈출해서 홍해 바다를 건너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바라보면 홍해를 건너던 것이 끝난 것이지만 가나안 땅에서 바라보면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삶은 구원을 받은 이후에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신 계획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거기에 우리의 인생의 좌표를 맞추면서 살아갈 때 그 안에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물어 보겠습니다.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 안 믿는 사람보다 행복한 삶을 삽니까? 대답해 보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안 믿는 사람보다 모두 행복한 삶을 삽니까? 아닙니다. 의문을 가져 보십시오. 왜 그럴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는데 왜 우리는 불행한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그런 고민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입니다.
제가 말씀 드린 것은 동물로 태어나지 않고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공부하라고 태어난 것입니다. 공부안하는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스튜데오 에르고 숨’, ‘나는 공부한다. 고로 존재한다.’ 태어난 즉시부터 공부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내가 이렇게 산다면 행복할 수 있는가? 이웃은 왜 불행한가? 이 세계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이 세계는 어떤 세계가 되어야지만 진정으로 아름다운 세계인가? 이런 것을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인간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동물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그런 것들을 고민하면서 행복한 돼지가 되기보다는 고민하는 인간으로서 살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참된 가치입니다. 그런데 고민을 안 하는 것입니다. 책을 안 읽습니다. 고민도 안 합니다. 행복하냐 하면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괴로워합니다. 고민한다는 것과 괴로워 한다는 것은 다릅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비 그리스도인들 보다 더 심합니다. 깊이가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의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이루어진 사회가 의로운 사회, 그 뜻이 짓밟힌 사회가 불의한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셔서 그들에게 하나님이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고 그 영혼을 위한 남이 모르는 양식을 주셔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불의한 세상을 의로운 세상으로 고쳐 놓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혜입니다. 그 계획을 따라서 살아 나가는 것입니다. 뜻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예화) 초창기에 교회를 시작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신학교에 교수로 있으면서 교회를 개척했는데 굉장히 많이 설교하러 다녔습니다. 하루는 충청도 대학에서 저를 불렀습니다. 일찌감치 출발을 해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떠났는데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났습니다. 차가 잔뜩 밀렸는데 간신히 빠져 나와서 지방도로로 달려갔는데 시간이 촉박합니다. 아무도 없으니까 과속을 했습니다. 저쪽에서 경찰이 차르 탁 세우는 것입니다. 운전면허증 좀 보여 주십시오. 왜요? 속도위반하셨습니다. 천천히 왔는데 무슨 속도위반입니까? 내가 보는 앞에서는 속도위반을 안 하셨는데 산보면서 과속했습니다. 산보면서 당신이 과속한 것을 어떻게 압니까? 거기 우리 친구가 있는데 속도계로 당신 차를 쏘니까 20키로.. 그렇게 까지 이야기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알았다고 내가 지금 빨리 가야 하니까 벌을 받을 테니까 스티커를 끊어 주십시오. 하시는 일이 뭡니까? 대학교수인데 학교에서 나를 불러서 강의하러 가는 길입니다. 아 교수님이시군요? 걱정하시 마세요, 제가 벌점만 드리겠습니다. 전 무슨 소리인지 모르고 어쨌든 빨리빨리 하라고 했더니 끝났습니다. 그리고 차를 몰고 갔더니 간신히 차를 몰고 밤중에 올라왔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스티커가 생각이 났습니다. 빨리 제때 내야지 하며 교회 직원을 시키려다가 그런 것 가지고 심부름 시키나 싶어 가지고 은행을 갔습니다. 다른 일을 보고 처음으로 열어 봤는데 범칙금이 너무 싼 것입니다. 속도위반 하면 이만 원쯤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육천 원밖에 안 나왔습니다. 육천 원짜리를 낸 것이 없는데 육만 원이면 너무 비싸고 그런 벌금은 없었습니다. 이십년 전입니다. 육천 원이 틀림이 없습니다. 제때 내지 않으면 칠천 이백 원을 내야 한다고 써져 있습니다. 비고란에 범칙 사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역에서 담배 피다 걸렸으니, 그때 얼핏 생각이 났습니다. 교수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싼 것으로 끊어 드리겠습니다. 제가 그 다음부터 그것을 놓고 조용히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만약에 우리 직원이 그것을 가지고 은행에 갔다고 하면 우리 목사님 어디 가서 담배 피다가 걸려가지고 이것을 끊어왔을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칙을 딱 세웠습니다. 교통법규를 가능하면 지키자. 어쩔 수 없이 위반했을 때에는 법이 정하는 처벌을 받자. 다음부터는 한 번도 봐달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딱지 끊은 적도 별로 없지만 거의 없습니다. 그냥 그대로 벌을 받았지, 한 번도 깎아 주십시오. 그렇게 이야기해본 적은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그런 것 많이 합니다.
프랑스 역사를 보면서 감동을 많이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유럽 전체를 여행하면서 유럽 최고의 선진국이 어디냐고 하면 나는 3초도 망설이지 않고 돈은 독일이 더 많을지 모르지만 무기는 미국이 더 많을지 모르지만 문화적으로는 이태리도 아니고 독일도 아니고 영국도 아니고 미적 감각이 탁월한 나라가 별로 없습니다. 독일은 모든 나라의 사회 시스템이 정직하기입니다. 우리나라도 많이 정직해 지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 만할 때의 한국 사회에 비하면 비약적 발전을 한 것입니다. 언젠가 영국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는 한국 사람들이 자기 나라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은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나라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생각을 해야 합니까? 두 가지를 이야기 하는데 20세기에 경제발전과 정치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개발도상국의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했습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에디오피아, 캄보디아, 필리핀, 베트남, 이런 나라들은 한국이 너무 부러워하는 선진국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를 것입니다. 50년 전의 한국은 전 세계에 그런 나라가 없을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그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여러분들은 태어나기도 전입니다. 어떻게 자랑스러워하지 않습니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예화) 한번은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 교수가 되었는데 학교를 옮겼습니다. 학교에서 면접을 합니다. 교수님 주거 환경이 어떻습니까? 방 두 개짜리에서 아들하나 하고 아내하고도 여건에서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치겠습니까? 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십시오. 굉장히 많은 돈을 무이자로 저에게 빌려주었습니다. 그냥 준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방이 세 개나 되고 화장실이 두 개나 있는 강남의 좋은 빌라로 이사를 갔습니다. 산 것은 아니고 세를 들어 살았는데 몇 년을 살았는데 앞에 있는 집에 어느 집사님들이, 남편이 이화여대 교수였는데 우리 집사람한테 그러더랍니다. 사모님 기도를 하는데 우리 집을 우리 목사님한테 팔라고 합니다. 팔려면 하나님이 우리한테 먼저 얘기하시지 그 사람한테 먼저 얘기하셨겠습니까? 어떻게 어떻게 해서 그 집을 사게 되었습니다. 제대로 된 집은 처음 샀는데 세금이 그렇게 비싼 줄은 몰랐습니다. 집사람이 법무사 사무실에 가서, 20년 전의 일입니다. 집을 조그만 것 하나 샀는데 무슨 세금이 이렇게 비쌉니까? 법무사 사무실에서 아줌마 비쌉니까? 라고 합니다. 비싸지요, 조그만 집에 세금이 이렇게 많은데 라고 했습니다. 너무 비싸면 반만 내십시오. 무슨 세금이 반으로 깎아집니까? 그것이 요즘에 장관들 청문회 나와서 문제가 되는 다운계약서입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보편적이었습니다. 집사는 사람하고 파는 사람하고 예를 들면 30만 유로면 20만 유로로 가짜계약서를 따로 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금이 절반 정도 주는 것입니다. 집사람이 집에 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세금이 너무 많이 나오는데 이렇게 하면 세금을 덜 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파는 사람은 집사이고 사는 사람은 목사인데 둘이서 그것 쓰고 앉아 있으면 성령님이 정말 기뻐하실까? 다 내라, 로마서 13장에도 세금을 다 내라고 나와 있는데 하며 냈는데 정말 세금이 많이 나왔습니다. 집에 있는 돈 다 털고 우리 아들 벙어리저금통도 털었습니다. 법무사에서 아줌마 가짜 계약서 써 오셨습니까? 아니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나 세금 다 내려합니다. 그랬을 때 그 아가씨의 눈빛이 어떤 눈빛이었겠습니까? 가짜 계약서를, 세금을 적게 내라고 충고했던 나는 얼마나 ... 인간인가? 그렇게 존경스러운 애국자가 아직 살아있다니 하며 우리를 쳐다보았겠습니까? 아니면 에이 병신, 정말 잘났어. 그런 눈빛이었겠습니까? 후자입니다. 그 당시 대부분 다 그렇게 했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가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사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답게 이곳 어두운 세상에 살면서 불의에 항거하고 몸부림치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것입니다. 하고 사는 것은 굉장히 많은 희생을 요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어쩌면 큰 손해를 보거나 핍박을 받을 수도 있는 삶입니다. 그것이 민주화가 덜 된 나라일수록 심각한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꽃핀 나라라고 하는 그런 나라도 속에 들어가서 보면 있는 사람들의 민주화고 가진 사람들의 자유지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화) 2012년 12월호에 이코노미스트지에 특집기사가 하나 실렸습니다. 미국에서 어떻게 가난한 사람은 계속 가난할 수밖에 없고 부자는 자자손손 물려받으면서 부자로 사는지에 대한 왜 그렇게 사회가 된 것에 대한 분석기사가 실렸습니다. 몇 가지 요인이 있는데 첫 번째가 뭔가 하면 부자들이 입법부, 국회에 로비를 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을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를 증식시키고 가진 부를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입법로비를 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손들을 교육에 있어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따라올 수 없는 차별교육을 받게 함으로서 계속해서 승자가 되게끔 만듭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아이들은 부자 환경의 아이들이 받는 탁월한 교육환경을 제공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학교 수준도 다르고 겉으로 보기에는 다 평등한 것 같지만 그들이 받는 교육의 수준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너무 비용이 비쌉니다. 교육 자체가 현저하게 지적인 차이가 있는 교육을 받습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더 심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체제를 구축입니다.
프랑스 사람인데 피게티가 21세기 자본론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피게티 교수가 하는 이야기는 자본이 돈을 버는 수익률이 고용을 통해서 벌어들이는 수입을 능가하는 비율을 가질 때 사회의 부의 불균형은 촉진되는데 지금 이 현대가 1차 대전 이후 가장 심각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돈을 벌어서 돈을 굴리면 노동을 안 하고 휴양지에서 지내도 거기에서 나오는 수익이 노동을 해서 버는 수익보다 훨씬 더 많은 부를 가져다주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그 숟가락을 입에 물고 태어나는 애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됩니까? 한국에서 오랫동안 안 살아서 무슨 소리인지 모릅니까? 그러면서 심각한 문제를 지적하는데 엄청난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계속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속에서 무엇인가 그 사회를 개혁하고 그런 사회의 구조에 도전하면서 살려면 편안한 인생길을 접고 고달픈 인생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잘못된 이 세상의 구조에 항거하면서 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런 영혼의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난을 받는다고 하는 생각 자체를 거의 없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최고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최고의 관심사 국가? 이제 아닙니다. 이제 아시아에서조차도 국가가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대인들에게 최고의 관심사가 무언가 하면 개인의 행복과 평안입니다. 개인적으로 행복하고 평화로우면, 프랑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세금을 하도 많이 내니까, 러시아 000갑부 있었습니다. 옛날 같았으면 아무 말도 안했을 것입니다. 속으로는 싫어하겠지, 세금내기 싫으니까 도망가니, 무슨 문제 해결이 됩니까? 개인의 행복과 평안이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관심사이고 욕망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해석할 때에도 내 마음에 평화를 주고 나에게 번영을 가져다주고 그러면 좋고 그런 것에 있어서 기독교가 도움이 된다면 나는 기독교인이 될 의사가 있다는 식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진정한 신앙이 아닙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신앙은 기도를 하고 예배를 하고 이런 것도 기독교인의 표지이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시대에는 없었던 세계관과 인생관, 가치관을 가지고 살기로 결단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가치관, 세계관, 인생관은 옛날과 똑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짝퉁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루이뷔통, 헤르메스, 중국가면 시장바닥에 즐비하게 있습니다. 중국에 갔더니 버스를 탔더니 어떤 사람이 롤렉스시계가 있답니다. 롤렉스시계가 엄청 비싼데 얼마냐고 하니까 만원이랍니다. 롤렉스시계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짝퉁이라는 것을 금방 알겠습니다. 안산다고 하면서 운전수가 시동을 거니까 만원에 두 개 주겠답니다. 몽블랑도 여기 것입니까? 한 번도 산적이 없는데 선물 받았습니다. 몇 개 가지고 있는데 몽블랑 중에서 제일 싼 것입니다. 한국에서 삼십만 원정도 합니다. 중국 가니까 이만 원입니다. 수없이 많습니다. 짝퉁입니다. 내가 알기로는 몽블랑은 중국에 제조 공장을 차린 적이 없습니다. 갖다 써보면 그 만년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짝퉁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느 사회에 이렇게 있어도 그 사람이 있기 때문에 주변의 사람이 영향을 안 받습니다.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그리스도인의 현존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미국의 유명한 속담이 있습니다. 현존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외침이다. 말 안하고 가만히 있어도 그 사람을 보면서 아 우리는 잘 못 살고 있구나, 우리가 가는 길은 옳은 길이 아니구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가치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하고 비슷해짐으로서 사람들을 교회에 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학적으로도 잘못된 것이고 심리학적으로도 잘못된 것입니다. 저는 비독교인이었다가 스물 한 살 때 기독교인이 되었는데 그때에 기독교인이 됨으로 결심했던 것은 나하고 똑같은 사람이 교회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교회 간 것이 아니라 나와는 전혀 종류가 다른 사람들이 거기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지 나하고 똑 같은 사람이 거기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면 거기에 안 갔습니다.
제가 늘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한국 젊은이들이 비판의식이 너무 없습니다. 잘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비판의식이 있으면 또 뭘 잘 모릅니다. 무식하면서도 비판적입니다. 호락호락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젊은이들에게 미디어와의 관계를 이야기 합니다. 눈만 뜨면 신문 보고 스마트폰 켭니다. 인터넷, 텔레비전, 수없이 막봅니다. 모든 것들에 의해서 내가 호락호락하게 빚어지는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밀가루 반죽 같이 놓여 있어서 주무르면 주무르는 데로 움직입니다. 자기를 활짝 열어서 인터넷도 와서 나를 주물러라, 텔레비전도 와서 나를 주물러라, 신문도 와서 나를 주물러라,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거대한 음모들이 언론과 이런 속에서 움직이면서 사회가 굴러다닙니다. 신문을 볼 때는 항상 비판적으로 봐야 합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23일 현재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습니다. 그러나 유병언이 죽었습니다. 진짜일까? 황급하게 시체를 정리해서 깨끗이 치워버렸을까? 그 사람의 죽음이 밝혀지면 손해 보는 사람이 누굴까? 비판적인 생각을 하면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올바르지 않은 세상을 보면서 부정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 그렇게 사는 것이 때로는 손해를 보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해야 될지도 모른다고 하더라도 감수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찬양)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모든 문제, 대표적인 하나가 환경문제입니다. 이렇게 불을 다 켜놓고 예배드려야 할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몇 개만 켜면 됩니다. 성경 읽을 것도 아니고 설교자 얼굴만 보면 되지 않습니까? 이것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처리해야 될지도 모르는 핵폐기물들을 끊임없이 생산해내서 미래의 우리 후손들이 환경의 재앙 속에서 살도록 희생하면서 오늘 우리가 탐욕을 누리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자원의 낭비, 지금 태평양 한 가운데 가면 북미 대륙의 절반 정도 되는 크기의 쓰레기더미, 대부분이 플라스틱 쓰레기가 어마어마한 것이 거기에 있어서 분해가 되어서 전 세계의 바다로 유통이 됩니다. 해류가 남북극을 오가면서 전체를 한번 돌때에 표면으로만 도는 것이 아니라 삼천 미터 밑에까지 해류가 뒤집히면서 돕니다. 천년이 걸립니다. 천년 후에 바다는 저 북극까지 플라스틱으로 바다가 오염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어마어마한 양들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1회 용품을 쓰는 것은 죄악입니다.
불편하게 살고 탐욕을 줄이고 소박하게 살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인간의 욕망이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소의 평균 수명이 몇 년 쯤 될 거 같습니까? 15년에서 20년입니다. 젖소는 젖을 짜야 되니까 4년입니다. 젖을 짜야 되니까 계속 임신을 시키는 것입니다. 젖을 막 빨아내니까 결국 제명에 못 죽고 죽기 직전에 도살장으로 보내서 고기로 정리하고 죽는 것이 소의 일생입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 낸 것이 여러분이 즐기고 있는 수많은 유가공품 비싼 제품들입니다. 사실 알고 나면 그중에 먹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모든 음식 대부분이 비인간적인 자연에 대한 폭행과 파괴로 인하여 생산해낸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되는 것입니다. 닭 가슴살 좋아합니까? 닭 가슴살 좋아하니까 조작을 해 가지고 가슴만 커지게 조작을 한 것입니다. 가슴이 너무 커져서 계속 앞으로 쓰러집니다. 75일이 되어야 닭 가슴살이 나오는데 45일 만에 만들어서 닭 가슴살만 싹 도려내고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완벽하게 여러분 식탁에 오르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에 의해서 모르면 마음 편하게 살아가는데 그 대신 마음 편하게 살면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아서 이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돌아가게 하는데 기여하는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떠밀려서 사람들처럼 똑같이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날카로운 음식을 가지고 현실을 비판하면서 내가 살아있는 것이 어쨌든 암 덩어리같이 퍼지는 이 세상의 어떤 일부분을 치료하는 항암제와 같은 역할을 하면서 살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셔서 우리를 자녀 삼으신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항상 고뇌가 있고 고난이 있습니다. 그런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고난 받는 사람들에게는 고난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는 새로운 은혜를 하나님이 부어주십니다.
프랑스 역사를 읽으면서 가장 감명 깊은 것이 나치정권이 들어선 이후에 과거사를 처리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정말 감동을 받았고 우리나라는 어떻게 이런 나라가 되었을까하며 눈물이 났던 대목이었습니다. 7년인가 8년 동안 그때 세워진 꼭두각시 정권이 00정권입니다. 국권을 다시 되찾고 과거사를 정리를 했습니다. 7년 동안 00정권, 거기에서 싸웠던 사람에게는 00가 확고하게 과거사 청산을 한 것입니다. 전 굉장히 감동적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럴 수 없는 여건이 있었지만 그것을 통해서 프랑스 국민은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조국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조국이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 역사적 교훈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입을 시켜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의 자녀답게 살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런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 중에 예전에는 예수 믿을래? 안 믿을래? 하면 신앙적인 박해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철저한 인간 중심적인 인간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는, 물질을 최고로 숭배하는 극단주의 자본주의 성향, 자연에 대한 폭행, 만행, 이런 것들이 이 사회를 가득 채우고 있는 문제들입니다. 이 속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는 분명하게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은 회색분자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이 모든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항거하는 반 하나님 적이고 반 인류애적인 모든 삶의 총제적인 항거의 삶이어야 합니다.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이 시대에 또 다른 의미의 레지스탕스가 되어야 합니다.
미국이 멕시코와 전쟁을 하려고 했습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속셈은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야심이 있었습니다. 전쟁만하면 이길 수 있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때 미국의 온 교회가 들고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영토의 확장을 위한 전쟁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때에 그들이 데모하면서 불렀던 찬송가가 있었습니다.
(찬양)
빛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메여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에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그 뜻이 이뤄지다 외치며 사나니
우리의 신앙은 초월성과 역사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초월성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하늘나라의 놀라운 신비 그것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와서 오늘 죄를 용서받았다, 은혜를 받았다, 진리의 말씀을 깨달았다, 이런 것들은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초월적인 것입니다.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있다. 신앙이 그것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하늘을 날아오르는 새가 두 개의 날개를 가지고 날듯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여기 발을 디디고 살고 있는, 여러분들은 여기에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이 역사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행동하며 하나님 앞에서 헌신하며 살아야 될 것인가? 그것을 가지고 고민을 해서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더라면 되었을 그 세상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좀 더 나은 세상이 되었는데 이바지하며 살아야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자신의 인생을 자기의 행복과 평안이라는 관점에서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목적이란 관점에서 자신의 인생을 생각해야 됩니다. 꿈을 품고 살아갈 때에 현실이 너무 어려우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는 용기와 힘을 얻으면서 그런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모든 조건들과 항거하면서 투쟁하면서 그런 삶을 살아내는 가운데 그 사람이 한 인간으로서 존재의 가치가 이 세상에서 지금도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삶이 될 때, 청년들이 공부 안하는 것 보면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어떤 삶일까 하는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돈 많이 벌어서 남들보다 좋은 차타고 좋은 집에서 좀 더 예쁜 아내를, 그것이 뭐 인간의 결정적인 행복이 있겠습니까? 그 이상의 무엇이 있어야 될 거 아닙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자원들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답을, 삶의 실존적인 응답을 여러분들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도 하고 은혜도 받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