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을 당할 때 인정할 것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시 119:75)
녹취자: 김성희
살아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고통은 싫어하고 기쁨을 좋아합니다. 그것은 모든 살아있는 것의 공통된 특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식물이든지 동물이든지 자기를 괴롭히면 그것을 싫어하는 고통을 표현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은 허브 같은 것이고 로즈마리 향을 맡으려면 나무를 마구 흔들어 괴롭게 해야지 향기가 확하고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동물은 그보다 더 많이 반응하고 동물보다 인간은 더 많이 반응합니다. 그래서 옛 시인들의 글에 보면 인고의 세월 을 오욕칠정에 흔들림 없이 지내오는 나무나 바위에 대한 노래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인간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행복에 도움 되라고 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좋고 편안한 환경 그리고 마음의 안정된 평화만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의 마음 전체를 뒤 흔들어 놓고, 때로는 쓴물을 머금는 것 같은 견디기 힘든 고통스러운 시절을 지나게도 하십니다. 대부분 우리의 죄와 그리고 악함 때문에 그 결과로서 그런 일들이 생기지만 또 어떤 때에는 자신의 죄와는 상관이 없이 그런 쓴물을 머금으면서 고통을 받아야 하는 시기를 지나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나를 하나님이 그렇게 괴롭게 하시는데 그것은 주님의 성실하심 때문입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성실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구약에 등장하고 있는 언약관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실한 속성이 언약관계에 적용될 때에는 신실함으로 나타나는데 그 언약관계에 충실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인간에게 성실하심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더 사랑할 때도 있고 덜 사랑할 때도 있고 심지어는 대적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는 자신의 마음의 경향에나 행동 이런 것들이 일관성이 없이 움직일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실하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항상 시종이 여일하도록 그렇게 일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성실하심의 일하심이 오늘 시인에게는 괴롭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복이라든지 복수의 개념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예화) 악을 행하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선대하신다면 그의 육체는 편안할지 모르지만 영혼은 무섭게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약백성들이 불순종할 때에 괴로움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육체는 고달프나 그의 영혼의 파멸은 막아 주시려는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나타냄이며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괴로움의 시기를 지날 때에 주님께 더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그 괴로움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그렇게 섭리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괴롭게 하실 때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육체의 괴로움만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원망을 한다면 그러면 육체도 파괴되고 영혼도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말할 수 없는 친절한 자비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해석하기 나름인 것입니다. 사역에 있어서 끊임없는 고통과 시련이 올 때에 혹은 주님을 섬기다가 주위에 아무도 없고 혼자 있는 것 같은 외로움을 느끼게 될 때에 그 모든 고통들이 사실은 내가 하나님을 거스르고 있는 것들을 보여 주시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손짓이라고 생각하면 평탄할 때에 느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영혼을 괴롭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행복하고 평안할 때에 느낄 수 없었던 하나님을 고통과 시련 속에서 느끼게 된 것입니다.
역사를 보게 되면 전쟁이 날수록 찬송가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전쟁이 날수록 어마어마한 양의 찬송가가 쏟아져 나오고 어느 역사책을 보니 유럽에서 30년 전쟁동안에 쏟아져 나왔던 찬송가가 9000편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런 고통 속에서 믿음으로 산 사람들에게 평안할 때에는 도저히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그리고 나 같은 인간을 언약관계 안에 묶으시면서 선대해 주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발견하게 되어 노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은 부분적으로는 타락했기 때문에 또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살아야할 영원한 고향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계속되고 있는 한 하나님은 종종 죄 많은 이 세상이 우리의 고향이 아닌 것을 알게 해주시기 위해서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게도 하고 신뢰했던 사람들에게도 배신을 당하게도 하십니다. 존경하고 자기를 사랑해주던 사람들로부터 냉대를 당하거나 멸시를 당하게도 하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기의 자녀들이 아플 줄 아시지만 그러나 더 큰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던 자녀들을 때때로 괴롭히셔서 그래서 하나님 이외에 다른 곳에서 만족을 얻으려는 모든 마음과 의도를 차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괴로운 시절들을 지내면서 우리의 참된 인생의 가치가 세상에서의 소유와 성취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을 꼭 붙들고 동행하며 사는 거기에 인생의 참된 행복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께서 우리를 괴롭히시는 그것을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의 터치라고 생각하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나를 향하여 당신의 뜻을 저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라고 고백하고 나면 마음속에서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고자 하는 소원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제 2시 좀 넘은 시각에 자고 새벽에 새벽기도를 나왔다가 급한 원고가 있어서 원고를 쓰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주님의 의도는 그런 것 같습니다. 너의 희망은 나다. 너의 소망은 나다. 칠흙 같이 어두운 밤바다를 항해하는 사공들이 북두칠성 하나를 좌표로 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를 항해 하듯이 하나님도 우리가 그렇게 당신을 바라보면서 어디로 가든지 그 길을 가기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안식, 완전한 우정 같이 변함이 없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모든 것은 태어나고, 죽고, 흘러가고, 소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불편하신 속성이 아름다움의 요체가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거기 계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아무리 많은 삶을 떠돌아다니다가 돌아와도 언제나 하나님은 거기 계셔서 똑같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좌표로 삼아서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그곳에 우리의 참다운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조금 잘 못 살아서 하나님이 우리를 괴롭게 하시거나 혹은 바른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데 워낙 하나님을 거스르는 탁류와 같은 세상이 거칠어 우리가 괴롭힘을 당해도 그 모든 것을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사랑은 영원하지만 괴롭힘을 당하는 우리의 인생의 현실은 잠시 지나는 바람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봅니다. 괴롭힘을 당하는 마음 둘 곳 없는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우리의 감각에 기관으로는 아무것도 소망스러운 것이 없지만 감각에 걸러지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지성 속에 찾아오실 때에 우리는 그 안에서 깊은 행복 영원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진정한 행복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