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3)
녹취자: 백지영
이처럼 여호와는 시인 다윗의 목자라고 고백이 되었습니다. 2절부터는 이 다윗이 어째서 사람들 눈에 보이지도 않으시는 하늘에 계신 그 여호와가 자기의 목자가 되실 수 있었는지 그 이유와 근거를 5절까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풍부한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목동이 양을 이끌고 푸른 풀밭으로 가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인도해 주셨기 때문에 이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목자이신 줄을 고백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고백 이전에 깊은 깨달음과 감동이 있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저에게 시간을 주시기 않았기 때문에 2절은 설명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3절에서는 2절과는 전혀 다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의 인생에 목자이심을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라고 하는 구절입니다. 그래서 2절의 푸른 초장은 사실 양들의 먹을 것을 가리킨다면 영혼을 소생시키는 것은 육체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인은 2절에서는 하나님이 목자의 사랑으로 자기의 육신의 먹을 것과 모든 생활들을 은혜롭게 인도해주시는 데서 하나님이 자기를 돌보시는 분임을 깨달았고, 3절에서는 영적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래서 자신이 한 마리의 어린양이 되어서 그 하나님만 따라가면 충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우리 인간은 그냥 육체로만 이루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이 세상의 많은 짐승들은 생명은 있지만 영혼은 없습니다. 영혼이 없어도 단순한 정신적인 기능이 육체에 붙어 있어서 살아 있는 동안 짐승들은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냄새를 맡기도 하고 감각을 느끼기도 하고 그에 따라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일정한 정신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새들이 날아다니다가 자기 집을 찾아가는 것이나 혹은 강아지라도 저를 낳아준 어미를 기억하는 것이나 이런 것들은 바로 이 속에 남아 있는 일정부분의 정신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혼이 가지고 있는 기능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과 혼과 육 이렇게 세 가지로 인간이 구성이 되어 있어서 육체는 육체이고 혼은 정신이고 영혼은 보다 높은 영혼의 기능을 가진 실체라고 보아서 짐승들도 혼을 가지고 있고 인간은 영과 혼과 육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짧은 시간에 그 긴 논쟁들을 말씀드릴 시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결론을 말씀드리면 그것은 성경적으로 잘못된 해석이고 그것은 저 멀리 서양철학에 영향을 미쳤던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설명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영이라는 말과 혼이라는 말을 서로 교차적으로 쓰고 있기 때문에 영혼이 떠나갔다는 말과 혼이 떠나갔다는 말 다 같은 말로 교호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이 영과 혼은 하나라고 봅니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볼 때 이것이 몇 가지 구성요소로 되어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물건 자체를 한없이 들여다보는 것도 한 방법일지 모르지만 그것을 맨 처음에 만드는 조립하는 과정을 보면 어떤 부품들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이 생산되었던 창세기 2장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인간의육체가 되었고 하나님이 그 코에 ‘후’하고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써 인간의 영혼이 창조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후’하고 불어넣는 이 과정 자체가 인간 폐에 있던 공기가 밖으로 나와서 장소를 이동하는 것처럼 ‘후’하고 하나님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실 때 하나님의 일부가 그의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한 조가리 한 조가리 영혼은 모두 하나님 자신의 일부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매우 위험한 해석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으면 영혼이 올라가서 하나님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으로 환원한다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후’하고 불어넣으신 이 행동은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을 창조하시는 과정입니다. 없는데서 있는 것으로 영혼을 만들어 육체와 결합시키심으로써 그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창세기 2장의 기록을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한 해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육체는 땅으로부터 물질을 빚어서 만들어졌고 영혼은 고향이 이 땅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직접 창조되어 인간의 몸속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잘 산다 풍족하게 산다고 하는 것은 영혼과 육체가 아울러서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을 누리면서 하나님이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실 때에 기대하셨던 그 목적을 따라 잘 사는 사람이 진정으로 잘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좋은 사람으로서 살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가장 큰 의무는 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도 더 큰 의무는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도 행복해 질 수 있는 것들 때문에만 행복해 진다면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꼭 믿어야만 행복해 질수 있다는 결론으로 도달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행복하고 잘 산다 그런데 그것이 꼭 물질적이고 이 세상에서의 사회적인 지위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은 아무리 돈을 많이 가져도 높은 지위에 올라도 결코 찾을 수 없는 그 무엇 때문에 행복하기도 하고 잘 살기도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저 사람들을 저렇게 행복하게 잘 살게 할까 하고 궁금해 하게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한 삼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미국에도 로또 복권 같은 것이 있습니다. 슈퍼볼이라고 하는 복권인데 미국의 어느 방송에서 지난 20년 동안 거기에서 어마어마한 상금을 탄 사람들을 추적하고 그 어마어마한 행운을 차지한 후에 그들의 인생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추적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똑같은 프로를 텔레비전에서 한번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모두 불행해 졌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예화) 어느 해에 슈퍼볼의 복권이 당첨자가 안 나오고 안 나오고 안 나오고 안 나오고 2천6백억까지 쌓였습니다. 누군가가 타면 2600억을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첨자가 나왔습니다. 광산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열 명이 계를 만들어서 매달 50달러씩 내서 500불어치의 복권을 사기로 하고 당청금은 모두 공동으로 배분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 열 명이 50불씩 거둬서 낸 500불로 산 복권에서 2천6백억짜리 잭팟이 터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2600억을 받아서 세금도 냈겠지만 어쨌든 260억씩을 나누어 가진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260억은 결코 작은 돈이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10명의 탄광 노동자가 260억을 배분받은 다음 첫 번째 한 일이 직장을 사표 내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힘들고 지저분한 일이니까. 두 번째 한 일이 예외 없이 고급 승용차를 샀습니다. 세 번째 한 일이 뭔지 아십니까? 예외 없이 좋은 집을 샀습니다. 네 번째 한일이 뭔지 아십니까? 마누라와 이혼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열 사람 모두 새로운 여자와 새 출발을 했고 물론 젊은 여자였습니다. 그 후 여러 해 후 그들은 예외 없이 여자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알코올 중독자가 되거나 폐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똑같은 조사를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금 다른 결과가 나왔습니다. 모두 불행해 졌는데 한 사람만 불행해 지지 않았습니다. 그 불행해진 사람들은 복권을 탄 사람들뿐만 아니라 부동산 개발붐을 입고 졸지에 부자가 된 사람들을 포함해서 추적을 했습니다.
(예화) 아침마다 거름통을 지고 똥을 퍼 다가 밭에다 뿌리고 험하게 서울 근교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이 어느 날 정부로부터 통보를 받았습니다. 너희 땅이 아파트 짓는 지역으로 고시가 되었으니까 수용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무슨 소리냐고 삼 대 사 대째 여기서 땅을 부쳐 먹고 사는데 내가 여기를 버리고 어디를 가느냐고. 그런데 그것은 본인이 안 간다고 해서 안 가지는 것이 아니고, 180억의 보상금이 나왔습니다. 아버지는 나는 평생 땅에서 일하는 게 좋으니까 이 돈으로 딴 데 가서 땅을 사고 다시 농사를 짓겠다고 했는데, 아들들이 아버지 그러시자고 그랬겠습니까? 거들떠보지도 않던 아들들이 서로 아버지를 자기 집에 모셔가겠다고 싸우고 큰 아파트에 자기들은 며느리하고 작은 방으로 건너가고 안방을 내드렸습니다. 정치적인 효도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재산을 분할해 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재산을 분할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땅을 사자고 하니까 우리 모두 몫을 떼어주고 엄마 아빠도 똑같은 몫을 가지고 땅을 사시든지 마시든지 해서 모두 나눴습니다. 그랬더니 형이 불만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평생 부모님을 여기서 모시고 살았고 내가 장남이고 돌아가시면 제사도 지내야 하는데 어떻게 막내하고 내 몫이 똑같으냐고 막내는 법에 그렇게 되어 있다고 대판거리 치고받고 싸우고 결국은 형제들끼리 서로를 법정에 고소를 해서 재판이 벌어졌습니다. 부인들끼리는 머리끄덩이를 끄들고 서로 동서 간들이 싸우고 그리고 어마어마한 재산을 수십억씩 나눠 갖게 된 한국 사람들도 똑같은 절차를 밟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아버지는 어느 날 대들보에 목을 매달아 자살해 버렸습니다.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불과 얼마 안 되어서 돌아가셨습니다. 한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어 버렸습니다.
딱 한 집이 안 불행해진 집이 있었습니다. 셋방살이를 하는 그저 가난한 샐러리맨이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아내에게 저녁때 다정하게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물었답니다. 여보, 갑자가 한 3000만원이 공돈이 생기면 당신 뭐 할래? 텔레비전도 바꾸고 싶고 냉장고도 새거 하나 들여 놓았으면 좋겠네. 나머지는? 글쎄, 뭘 할까? 나 같으면 3천만 원 공돈이 생기면 우리는 그래도 먹고 살만하니까 정말 몸에 장애가 있어서 생계가 위협을 받는 그런 사람들 도와주면 어떨까? 그것도 생각하니까 괜찮은 것 같다. 정말 당신 그럴 수 있어? 그랬더니 남편이 부스럭부스럭 하더니 3천만 원짜리 통장을 꺼냅니다. 여보, 한 달 전에 로또에 당첨이 됐어. 당신이 하자는 대로 장애인 복지시설에 보낼까? 부인이 잠깐 갈등이 생겼습니다. 없을 땐 어차피 내 돈이 아니니까. 여보, 그럽시다. 그리고 그 돈을 장애인 복지시설에 보냈습니다.
여러분 5, 6천만 원짜리 전세 살던 사람에게 3천만 원짜리 현금이 들어있는 통장은 현실적이 아닙니다. 그 돈 있으면 8천만 원짜리 전세를 살지 5천만 원짜리 전세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둘은 인생에 있어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그 사건을 통해서 부부가 더욱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왜 시편 23편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에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의 육체는 이 세상으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에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 데 있어서 지상의 자원이 필요합니다. 제가 오늘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점심을 안 먹었는데 장로님이 저녁을 대접을 해 주셔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여러분, 두 끼만 굶으면 아주 기분이 상쾌하고 살아갈 의욕이 생기지요? 아닙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미련한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배고픈 시간에 회의하는 사람들입니다. 항상 싸웁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회 할 때 식사시간이 되면 맛있는 햄버거라도, 저는 햄버거 일 년에 한 개 먹으면 많이 먹습니다, 하나씩 다 사드립니다. 아니면 생선초밥이라든지. 먹고 배가 부르고 나면 모든 일들이 잘 처리됩니다. 마음에 여유가 있으니까. 추운 겨울 날 옷 하나만 얇은 걸입어도 견딜 수 없이 으슬거리고 밤에는 감기에 걸립니다. 육체는 이렇습니다.
그래서 젊었을 때에는 사치스럽지 않던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사치스러워집니다. 아무 집에나 살던 사람이 좋은 집에서 살고 싶어 하고, 동대문 패션 좋다고 입고 다니던 사람들이 이젠 자꾸 그것이 싫고 합작메이커라도 하나 입고 싶고, 젊은 시절에는 아무 백이나 들고 다니더니 나이가 들고 나니까 8백만 원짜리 백 들어봐야 그 얼굴에 별로 돋보이지도 않는데 그런 것을 들고 싶고 입고 싶어 하는 사치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이지요. 그러나 거기에는 우리들이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그것을 이해해야 되는 측면도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면 힘이 듭니다. 저는 허리가 늘 아픕니다. 그래서 아무데서나 자지를 못합니다. 너무 아파서. 이럴 경우에는 사당동에 가면 2, 3십만 원 줘도 살 수 있는 침대 가지고는 허리를 배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침대를 쓰게 되는 경우도 있고. 고단하니까 차나 집이나 조금 씩 더 젊었을 때 아무렇게나 살던 것보다는 나은 것을 찾아가는 이유는 그렇게 해서 자기의 육체 속에서 빠져나가고 소진되어가는 어떤 자원들을 일정량 덜 빠져나가도록 보호해서, 좋게 말하면 오래 살고 싶고 또 다른 각도에서 말하면 사는 날 동안은 언제나 에너지를 비축했다가 필요한 일에 쓰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사회에서 예의라는 것이 생겨난 것입니다. 젊은이는 바닥에 앉아도 나이 드신 분이 오면 의자에 앉으시라고 권하고 방석이 한 개밖에 없으면 제일 연로하신 분에게 그것을 드리면서 앉으시라고 하는 인간의 예의가 생겨난 것은 저분들은 자원이 부족하신 분이니까 좀 소모가 덜 되도록 보호해 드려야 되겠다고 하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모든 것들이 너무 분수에 넘게 지나치면 물론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이처럼 이 땅에 있는 자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마셔야 하고 그것도 오염되지 않은 물, 영양분이 풍부한 음식, 그리고 우리 몸을 따뜻하게 보호해 줄 수 있는 편안한 옷이면 더 더욱 우리의 육체는 많이 보호를 받고 그런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어느 직원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우리가 나이가 들어보니까 참 이해가 된다고. 중학교 다닐 때 일학년 때부터 미스티를 가지고 다니는 애들이 있었답니다. 시간만 나면 착착착착. 그래서 학교 다닐 때 하도 그런 짓을 해서 다들 손가락질하고 유별나다고 했는데, 한 20년 지나서 만나니까 그런 애들은 다른 나라 사람이 되어 있더랍니다. 평생을 그렇게 관리하고 사니까. 그러니까 우리 인간의 육체는 그렇게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이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젊어서 열심히 일을 하고 돈을 모으고 우리나라처럼 사회 보장제도가 잘 안되어 있는 나라에서는 나이가 들었는데 돈이 없다고 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육체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체만을 사랑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가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오히려 육체를 이끌어나가는 주체입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주체가 되는 영혼과 그 주체에 이끌려지는 육체를 공정하게 사랑해야지만 진정으로 그 사람을 혹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라고 하는 4, 5세기를 살았던 기독교의 위대한 스승이 자기의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진리의 밝은 빛을 받지 않는 한 자신의 육체만을 편애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의 빛을 깨닫기 전까지는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다가오지 않습니다. 오늘 모여 있는 여러분 가운데 자신의 영혼이 이래서 될까 하고 많이 근심하면서 어젯밤을 보내신 분 있으면 한번 손들어 보십시오. 그렇게 우리는 육체에 대해서 염려하고 관심을 과도히 쏟고 영혼은 소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인간은 먹고 입고 마시는 쾌락에 빠져서 영혼으로 그런 자원들로 자기를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보호하고 돌보는 범위를 뛰어 넘어서 그 자체를 향락하고 쾌락하려고 하는 그런 즐거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면 인간의 모든 정신 작용들은 영혼과 진리를 싫어하게 되고 그 육체의 방탕함과 쾌락에 몰입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서 마약중독처럼 그렇게 세상과 육체만을 중심으로 하는 삶에 중독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실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없는 것입니다.
(찬양)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뤄 지이다.
이런 고민과 눈물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혼은 육체의 생명이고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은 무엇이냐? 영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리 안에 있는 위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옆으로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아래로는 자연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그것들을 알고 느끼고 사랑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실체입니다. 그 영혼이 우리의 마음 안에서 작용을 하게 되는데 그 마음은 실체가 아니라 영혼의 기능입니다. 그 기능에서 육체와 영혼이 만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을 느끼고 하는 것은 육체가 하는 오관의 작용인데 그것들을 마음에 전달해 줍니다. 그러면 마음은 이것이 딱딱하구나, 무르구나, 예쁘구나, 예쁘지 않구나, 좋은 냄새구나, 나쁜 냄새구나 그리고 맛있구나, 맛없구나 혹은 조화가 되는 울림이구나, 조화가 되지 않는 소리이구나 이런 파악을 마음이 합니다. 그러면 그 파악된 것이 마음에서 작용을 하면서 기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혐오하기도 하고, 그것을 본 것을 갖고 싶거나, 맛본 것을 먹고 싶거나, 감촉을 느낀 것을 끌어안고 싶거나 하는 욕망도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희로애락수오욕(喜怒哀樂羞惡慾)입니다. 작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충분히 작용이 무르익으면 그 다음에 그것이 행동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예쁘구나, 내가 꺾어 보아야지 하고 나뭇가지를 분지르거나 아니면 맛있겠네 그리고 먹는 작용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 그것 참 좋구나, 안아보자.
그래서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만들어 있지만 마음이라는 기능 안에서 연결을 이루면서 그러면서 인간의 자기만의 독특성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모두 똑같은 영혼이 아니라 사람마다 하나도 똑같지 않은 각기 다른 영혼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영혼과 마음은 얼마나 놀라운지 어마어마한 용량을 가지고 있어서 어거스틴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이라도 인간의 마음 안에 계시기에는 모자라는 공간이 아닙니다.”고 이야기합니다. 수많은 지식들 가까이는 상식적인 지식들부터 시작해서 멀리는 우리가 결코 볼 수 없는 우주와 하늘과 천국과 하나님과 천사의 존재들을 생각할 수 있기까지 그러한 정신의 영혼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피조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인간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천사들이 있지만 그러나 천사들은 하나님이 인간보다 더 높은 지위로 창조하신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잠시 인간이 타락했고 죄가 있어서 아는 것이 천사만 못하고 능력이 천사만 못할지라도 사실은 존귀함에 있어서는 인간의 존귀함을 따라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영혼을”할 때 그런 의미에서의 영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어떤 삶을 살든지 영혼으로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면 그 시련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모든 이 세상의 자원을 가지고 있어도 불행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했는데, 소생시키신다고 하는 이 말은 히브리말로 ‘하야’라는 동사인데 살아나게 하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내 영혼을 소생시키셨다는 이 이야기는 언젠가 자신의 영혼이 죽어 있는 같았던 때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은 영적인 사물이고 육체는 물질적인 사물이기 때문에 있다 없다 의미도 다르고 죽었다 살아 있다는 의미도 다른 것입니다.
어떤 아이가 골목을 지나가는데 자기 집 창밖에서 소리가 들려오더랍니다. “여보, 똥 먹어.” 그러니까 아내가 “여보, 당신 죽어.” 이 아이가 깜짝 놀라서 무슨 일인가 가보니까 고스톱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병원에서 죽은 거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과 고스톱 판에서 너 죽었다고 하는 이것이 똑같습니까? 식당에서 갈비탕 먹으라는 것과 고스톱 판에서 똥 먹으라는 이것이 똑같으냐는 말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언어는 이렇게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육체가 살아있다고 할 때 그 말과 영혼이 살아있다 할 때 그 말은 다른 것입니다. 생물학적으로 육체가 살아있는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외부에 대해 반응할 수 있어야 하고 두 번째는 메타볼리즘(metabolism) 신진대사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신진대사가 멈추면 죽은 것입니다. 한 시간부터 썩기 시작해서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서도 똑같이 육체가 죽었다고 할 때는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은 신진대사라는 것이 없습니다. 영혼은 무엇을 먹고 똥을 싸고 이 속에서 피가 되고 살이 되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육체가 죽었다고 하는 것을 영혼에 적용해서 영혼이 죽었다고 하는 것은 숨이 끊어지고 없어져버렸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혼이 생명이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분께로부터 오는 좋은 영향을 받으며 영혼의 고유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고 있을 때는 살아있는 영혼이라 부르고 살아는 있지만 그런 것들이 다 끊어져서 영혼의 고유한 일들을 제대로 못하고 그냥 살아 있을 때는 그것을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 보면 죽은 행실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영혼이 죽은 상태에 있을 때에 영혼은 죽은 행실을 만들어 내는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올바르게 살아 있으면 잭팟(jackpot)이 터져서 260억을 벌었어도 아내보다 귀하겠습니까, 가족보다 소중하겠습니까? 우리 정상적으로 영혼이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었습니다. 눈이 먼 것입니다. 그래서 이 돈 가지면 나한테 시집오겠다는 쭉쭉빵빵 뻗은 여자들이 줄 섰는데, TGI 프라이데이 거기 의자에 앉아 한번 들어가면 몸을 거기서 못 빼는 미국 사람들 많습니다. 일어나면 의자가 달려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여자들은 태어나서 한 번도 자기 발을 본 적이 없는 여자들입니다, 왜 그런 마누라하고 사는냐는 것입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까? 영혼이 죽었으니까 아무런 육체를 향해서 제동을 못 거는 것입니다. 그것을 영혼이 죽은 상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은 왜 그런 죽은 상태에 도달하게 될까요? 시편에서는 영혼이 죽은 상태에 접어드는 것을 크게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무지(無知), 계속되는 인생의 어려움 인데 이 두 개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시인이 이 구약성경 속에서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고 다윗만큼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정말 눈송이처럼 순결한 인생을 일생동안 산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목동에서 왕이 되었는데 매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 나는 종입니다. 우리말로 말하자면 나는 노예입니다. 주님의 노예일 뿐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다윗이 성전을 짓기 위해 금을 모았습니다. 모아서 하나님께 그 금을 바쳤는데 아들이 지었습니다. 그 금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2.5톤 트럭으로 80대 분이었습니다. 그러면 가격이 얼마였느냐 하면 400조원 어치였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기도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 저는 가난하고 궁핍합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생애에서 씻을 수 없는 두 번의 큰 죄를 짓게 됩니다. 한번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한 인구조사를 한 사건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것을 하지 말라고 하셨느냐 하면 인구조사는 그 당시에 단순한 인구조사가 아니라 국가의 세력을 왕이 확인하고 뻐기고 싶어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싸움에 나갈 수 있는 남자의 수가 이렇게 많다, 말도 이렇게 많다, 백성은 이렇게 많아 큰 나라다 이것을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행정적으로는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신앙적으로 하나님은 이 일을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하시면서 하나님이 징계를 내리십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온역으로 죽어갔습니다. 두 번째의 큰 범죄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사건이었습니다. 신앙적으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이었지만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동정이 갈 수 있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는 상처의 사람이었고 그리고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왕국의 위기는 모두 지나가고 태평성대가 왔습니다. 한 여자를 보고 한 눈에 반했습니다.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륜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어마어마한 징벌을 내리셨습니다. 왕국을 박살내거나 포로로 끌려가거나 적에게 사로 잡혀서 죽음을 당하게 하는 방식의 형벌의아니라 그야말로 말려 죽이는 형벌이었습니다. 어떻게? 괴로워하면서. 처음에는 제사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받지를 않으시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없겠습니까, 돈이 없겠습니까, 아니면 짐승이 없겠습니까? 해결이 안 됩니다. 그래서 그가 뭐라고 말합니까?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그러면서 충격적으로 깨닫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아,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 상한 심령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레브 리스바르’라는 히브리어 표현인데, 도자기 그릇 같은 것들을 쾅 깨뜨려서 아작 하고 깨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제 속에서 영혼을 위한 양식들이 매일 매일 주어질 때 그때에 우리는 삶의 다양한 사태들을 직면하면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나를 인간으로 지으신 목적을 따라서 지혜롭고 힘차게 살아가게 되고 거기에서 이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복과 평안, 사랑, 자비 이런 것들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영적인 방식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너무 맛있고 너무 기뻐서 이 속에서 너무 기쁜 것입니다. 그것이 내려오면서 이 마음 안에서, 맞아 내가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지 그리고 그렇게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용기와 힘이 솟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자원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렇게 지상의 자원과 천상의 자원을 함께 가져야지만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외국에 보면 가끔 우리나라에서도 그렇지만 돈 많은 사람들도 자살을 합니다. 제가 전도사 때 다니던 교회 앞에 저택이 하나 있었습니다. 얼마나 집이 큰지 농구코트가 집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까만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세 명 많을 때는 다섯 명 늘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름만 대면 잘 아는 모 그룹 회장의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성처럼 집을 바깥하고 차단되게 지어서 집은 보이지만 사람이 오가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어느 날 신문에 났습니다. 그 모두 부러워하는 회장이 부엌에서 칼을 가지고 자기를 50번 이상 찌른 것입니다. 그때가 5공 청문회 있고 그러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안 죽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지상의 자원으로 말하자면 아무 수입 없이 아마도 하루에 1억씩 써도 죽을 때까지도 다 못 쓸 것입니다. 일 년 써봐야 365억이고 10년 써봐야 3650, 20년 써봐야 7200억인데, 그러면 그 사람 20년밖에 더 살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부엌에서 칼을 가지고 온 몸을 방에서 혼자 자기 몸을 50번 이상 찔렀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하늘의 자원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인도 그럴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영적인 활기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그런 때를 영혼의 침체라고 부릅니다. 혹은 영적 침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그런 것이 왜 오느냐 하면 가장 근본적으로는 죄 때문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다윗이야 간음죄를 지었으니까 영적 침체가 왔지 나야 그런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예화) 어느 군인들이 계곡에 모여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세 명의 부하 병사를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커다란 포대 하나씩 주면서 명령했습니다. “너희들은 각자 흩어져서 이 주머니에다 50kg씩 돌멩이를 주워온다. 실시.” 한 사람은 미련하게 50짜리가 어디 있는지 열심히 찾아서 한 개를 집어넣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20kg짜리 하나, 30kg짜리 하나. 세 번째 사람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이것을 짊어지고 어디까지 갈지 모르는데 저렇게 무식하게 큰 돌을 가지고 가면 어깨 아파서 어떻게 나르느냐고 그리고 공기 돌만한 것 천개를 모아가지고 50kg를 만들었습니다. 각자 가지고 온 것을 지휘관이 저울에 달아보니까 거의 정확히 다 50kg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 명령이 황당한 명령이었습니다. “지금부터 가지고 왔던 돌을 제자리에 두고 온다. 실시.”
한 개 가지고 온 사람은 확실합니다. 어디서 가지고 왔는지 알아서 딱 갖다 놓습니다. 그런데 천개를 가지고 온 사람은 그 자리에서 발을 못 떼는 것입니다. 어디서 가지고 왔는지 생각이 안 나는 것입니다. 하도 많이 가져와서.
(예화) 어느 대학 실험실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접시처럼 납작한 비커에다가 차가운 물을 붓고 개구리 한 마리를 올려놓았습니다. 물론 개구리는 맘만 먹으면 펄쩍 뛸 수 있습니다. 밑에다가 불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1초에 0.02도씩만 올라가도록 불꽃을 조절했습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개구리가 푹 삶아졌습니다.
미지근한 물에다가 개구리를 집어넣었으면 이 사람들이 미쳤나 그리고는 도망을 갔을 것입니다. 천천히 조금씩 지은 죄는 회개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대로 쌓이면서 가는 것입니다. 큰 죄나 작은 죄나 죄의 크기는 다르지만 본질은 똑같습니다. 그 본질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 저녁때 해서 죄송합니다만 건물이 6개월이나 1년에 한 번씩 똥을 풉니다. 그러면 항상 새벽에 차가 옵니다. 사람들에게 불편을 안 끼치려고. 큰 탱크로리가 와서 파이프를 정화조에다 담그고 빨아올립니다. 그리고는 한 두어 시간 후에 끝났습니다. 그리고 게이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면 유리가 이만큼 있습니다. 온갖 더러운 것들이 덩어리가 되어서 출렁출렁 거립니다. 계산서를 끊습니다. 그것이 본질이 무엇입니까? 똥차 속에 들어 있는 그것은 똥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거기서 한 국자를 펐습니다. 그리고는 믹서에다가 잘 갈았습니다. 그것을 커피 필터지에다 여러 번 걸렸습니다. 그랬더니 모든 물건들은 다 없어지고 노란 물만 한 컵 있습니다. 그것을 스프레이에다가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는 예쁜 안방에서 뿜었더니 노르스름한 작은 입자가 아름답게 허공을 떠도는 것입니다. 본질이 무엇입니까? 똑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엘리제를 위하여 똥차 근처는 절대 안 가지만 예쁜 안방에서 우아하게 아침 햇살을 받으며 허공중에 날아오르는 작은 노른 빛깔의 알갱이가 수증기처럼 아름다운 이유 때문에 가까이 가서 그것을 뒤집어쓰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이 오면 영혼에 깊이 병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어도 아무런 깨달음과 감동이 없고 기도를 하는 시간도 지겹기만 하고 진리와 관계되고 하나님과 관계되는 일에는 너무 힘들고 피곤하고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영혼은 영적인 것들에 둔감하게 되는 것만큼 마음은 세상적인 것에 대해서 아주 관심이 많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속적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매들이 은혜가 떨어지면 여자로 변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 오는 사람들이 폭탄 맞은 머리에 화장기도 없이 오라는 그런 이야기는 아닙니다. 원래 화장품을 늘 사용을 해야 됩니다. 다른 사람도 생각해야 하지 않습니까? 화장품이 영어로 코스메틱스(cosmetics)라고 하는데 희랍어 코스모스(cosmos)에서 온 것입니다. 희랍어 코스모스는 질서입니다. 화장품이 무엇이냐 하면 안 발랐더라면 절대 질서가 없었을 사람들을 화장품으로 발라서 그래서 질서를 잡아주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질서가 멀어집니다. 그래서 10대가 화장품을 바르면 하면 치장, 20대는 단장, 30대는 위장, 40대는 변장, 50대 이상은 (?1.05) 그렇게라도 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떨어지기 전에는 형제였는데 은혜가 떨어지고 영적인 침체에 들어가게 되면 남자로 변하는 것입니다. 세상 남자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데서 벗어나는 길이 무엇이냐? 성경에는 여러 개의 길이 있다고 가르치지 않고 딱 하나밖에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 회개가 영적인 침체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것입니다. 다윗은 맨 처음에 꼼수를 부리면서 해결해 보려고 했을 것입니다.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 그는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어제 말씀 드린 것처럼 이 온 우주를 말씀 한 마디로 창조하신 지금도 하나님이 콧김 하나면 자신의 생명을 걷어 가실 수 있는 위대하신 분 앞에 그분께 대적했다는 것 때문에 두려움 속에서 떨고, 목동시절부터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온갖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원수들의 멸망의 손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배반했다는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띠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한참 기도할 때 “하나님이 내 살이 뼈에 붙기까지 쇠약하여 졌나이다.”
(찬양)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자 주를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합니까.
그렇게 시편 42편에서 노래한 것처럼 간절히 우리 주님만을 찾는 회개의 기도를 올렸던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그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이 죄를 짓고 영혼이 어둠 속에 있어서 하나님의 참 생명을 거의 잃어버린 때조차도 언제나 그들이 당신에게로 돌아와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불순종하고 신앙생활을 등한히 할 때 어려운 일이 생기고 힘든 일이 생기고 때로는 비참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남이 사랑이시라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그렇게 때리는 것이 매우 고통스럽지만 그 부모가 이 자식이 올바로 되기를 바라는 너무 너무 간절하고 너무 너무 소중이 여기는 자식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라도 그를 돌이키고 싶은 것입니다.
엄마들이 그런 얘기 하지 않습니까? “너 오늘도 학교 갔다 곧바로 안 오면 큰일 난다. 학교 끝나자마자 반드시 와야 한다. 빨리 와서 시험공부 해야 한다. 안 그러면 죽을 줄 알아라.” 그때에 방점은 ‘죽어’가 아니라 ‘꼭 들어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못된 자식들은 엄마가 자기를 살인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방점이 ‘죽어, 죽인다.’ 이것이 아닙니다. 그 표현이 극렬할수록 앞에 나오는 명령형이 너무나 간절한 소원이라는 것을 이야기를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죄 지은 사람들에 대해서 엄하게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방점이 죽어가 아니라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라고 하는 2세기의 교부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회개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 그래서 아무리 반듯하고 교회생활 잘하고 교회의 일꾼이 되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는 점점 나쁜 교인이 되어 갑니다. 천천히, 천천히. 그러나 아주 나쁜 교인이라도 진실하게 매일 매일 회개하면 그는 마침내 좋은 신자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언제 회개해 보셨습니까?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언제 회개하셨습니까? 깊이. “하나님, 정말 하나님께 정말 잘못했습니다. 내 아내에게, 내 남편에게, 정말 아프게 했습니다. 이웃에게 정직하지 못해서 죄를 지었습니다. 자녀들에게 폭언을 퍼붓고 사랑하지 못해서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오.” 언제 하셨습니까? 드라마를 보면서는 눈물을 흘려도 기도하면서 눈물이 안 나오는 사람들 많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 시인은 그렇게 눈물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깊이 회개하면서 죽었던 자신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벤자민 워필드라고 하는 20세기의 너무나 위대한 신학자는 이 부분을 해설하면서, 죄를 지은 것은 다윗에게 뼈아픈 잘못이었지만 그 참회하는 과정을 통해서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온전히 회복된 상태에서 인생의 모든 고통과 어려움들을 헤아리면서 결국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고귀한 존재이고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마지막에는 그렇게 자신과 같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대우 속에서 그의 신실하심을 노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찬양)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온 세계위에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회개하고 영혼의 소생을 경험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들은 은혜입니다. 주는 사람의 선함 때문에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냥 주는 것을 우리들이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은혜는 우리에게 거저 주시지만 그런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는 데는 하나님이 그 은혜를 주신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초등학교 4학년짜리가 학교를 가면서 엄마를 찾았습니다. 엄마, 나 간 다음에 이 편지 보세요. 쪽지를 하나 남겨두고 갔습니다. 그래서 펴 보니까 황당한 내용이 쓰여 있습니다. “엄마에게 보내는 청구서, 엄마 없을 때 동생 보아준 것 4시간 2400원, 아빠 구두 세 번 닦은 것 900원, 엄마 심부름으로 슈퍼에 갔다 온 것 200원, 도합 3500원을 청구하니 속히 주시기 바랍니다.” 엄마가 보고 기가 막혀서 웃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도시락을 싸서 주었습니다. 도시락에 편지 넣었으니 가서 열어보라고 하시면서. 학교에 가서 도시락을 펼쳐서 열어보니까 편지봉투가 나오는데 “아들에게 보내는 엄마의 청구서, 네 몸 뱃속에 넣고 아홉 달 반 동안 고생한 것 공짜, 네놈 이제까지 먹이고 길러주고 애태운 것 공짜, 세 번이나 응급실에 실려 가서 밤새운 것 공짜, 아들아 엄마는 아들에게 청구할 것이 없단다. 사랑해.^^” 애들이 보다가 와, 너네 엄마 진짜 멋지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이 숙제 안했다고 엄마한테 뒈지게 맞고 잠들었습니다. 왜? 그렇게 모든 것을 공짜로 해 주었을 때 그 아이에게 엄마는 아무 것도 안 바랍니다. 이만큼 투자했으니까 이만큼 받겠지 그것이 아닙니다. 기대를 하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무엇이 되어줄 수 있는데, 무엇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공부를 안 하는 것입니다. 엄마는 네게 모든 것이 공짜란다 그래놓고 그날 밤에 뒈지게 때렸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들은 다 공짜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한번 머리끝부터 시작해서 만져보십시오. 원래 여러분 것이었던 것들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눈썹 그린 것도 발랐으니까 그렇지 엄마 뱃속에서부터 그렇게 눈썹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공장에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돈 벌어서 산 것인데 그 직장 일자리도 하나님이 주셔서 경제가 돌아가서 번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밝고 웃는 얼굴로 나오게 된 것도 어제 저녁에 은혜를 주셔서 첫날은 예의상 나와 봐야지 하고 나왔는데 들어보니까 드라마보다 재미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하니까 둘째 날 한번 나와 볼까 그리고 또 나온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온 것입니다. 벌써 여러분 친구들 중에도 죽은 사람이 많은데 아직 살아 있는 것도 하나님이 주셔서 살아있는 것입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다 자기가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공짜로 주신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회사 사장이 월급 주었지만 그것은 도구일 뿐이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경제가 돌아가게 하시고 나라를 살게 하시고 이렇게 해서 우리가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딱 하나 여러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도움 받지 않고 나 스스로 마련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도 아니고 내가 스스로 마련해서 내가 지금 가지고 있다고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 딱 하나 있습니다. 죄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유일하게 고유하게 인간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 있는데 그것은 죄다.” 죄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은혜는 공짜인데 그것을 그냥 줄 때에는 거기에 무엇이 있습니까?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그 계획이 무엇이냐? 오늘 성경이, 시간이 없어서 점프하는 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이것도 한 한 시간을 해야 합니다. 건너 뛴 것입니다. 소생시키시고 하면서 1시간 40분 흘렀습니다. 건너뛰었는데 그런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수없이 나오는 단어가 의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말로 ‘체덱’이라는 단어입니다. 혹은 ‘체다카’라는 여성 형으로 쓰기도 합니다.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어쨌든 ‘체덱’, ‘의’라는 단어입니다. 그럼 도대체 그 의가 무엇이냐?
구약성경에서 이 ‘의’는 크게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흔하게 쓰이는 첫 번째 의미가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부합한 사람이 되고 율법의 법에 맞게끔 살아가고 제사가 있었던 시절에는 제사의 예법대로 희생을 드려서 흠잡을 것이 없는 예배를 행하는 것 그것을 의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고 했을 때 요셉이 율법 특히 모세 5경의 법을 잘 지키면서 살아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의로운 나라라고 할 때 다른 나라에게는 없는 율법이 있어서 율법을 따라 믿고 제사 드리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이웃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다가 구약에서 계시가 진전되면서 또 하나의 의의 개념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율법을 잘 지켜서 스스로 의롭게 된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격이 별로 없는 사람인데 하나님이 은덕을 입혀 주셔서 그래서 좋은 사람으로 하나님이 여겨주시는 것 이것을 의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나오는 것이, 우리의 죄를 대속해서 짐승이나 누군가가 희생함으로 하나남이 우리를 우리가 마치 그 일을 행한 것처럼 죄의 대가를 치렀다고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시편 하박국 로마서 그 다음에 갈라디아서 이런 데서 이 두 번째와 세 번째 의를 발견하면서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성경에 나타난 의라고 하는 이것이 우리 스스로 율법의 요구를 다 만족시켜서 성취한 그 의가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 안에 있는 의를 우리에게 덧입혀 주셔서 의롭지 않은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천국이 열리는 커다란 복음을 체험을 하게 되고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라고 하는 중요한 진리를 발견해서 개신교에 일종에 혁명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시편 23편에서 나오는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라고 할 때 두 번째, 세 번째의 의의 개념도 일부 포함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첫 번째 개념입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이 세계를 만들고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시고자 하는 그 의도, 그 의도대로 부합하게끔 살아가는 그 길, 이것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의 길은 무엇의 반대일가요? 불의의 반대입니다. 불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던 그까지 것 하고 밟아버리면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불의한 삶입니다. 의로운 삶은 기준이 분명합니다. 불의한 삶은 기준이 없습니다. 그 의로운 것 이외에는 모두 다 불의한 것입니다. 미에는 표준이 있습니다. 저 여자 참 예쁘다고 할 때 왜 예쁘냐고 그러면, 얼굴이 작고 그리고 눈썹이 또렷하고 눈이 맑고 크기가 적당하고 코가 반듯하고 입술이 균형이 잡혔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저 사람 못생겼다고 그러면 못생긴 것은 무슨 조건을 충족시켜야지 못생긴 것이냐고 하면 없습니다. 그냥 그것이 아니면 됩니다. 그런데 아닌 것은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아서 뭐가 아니다 라고 그렇게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1센티만 높았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뭐가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지만 못생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서 멀어지면 다 못생겨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그렇게 예쁜 사람들이 사는 나라가 아닙니다. 조상 대대로 얼굴형이 약간 메주같이 생긴 사람들이 살던 나라입니다. 필리핀 원주민이나 이런 사람들처럼 생긴 사람들입니다. 우즈베키스탄 같은 데 사람들은 여자들이 정말 예쁩니다. 누가 농담으로 그런 말을 하는데, 우즈베키스탄을 갔다 왔는데 감자 밭에서 몸빼 같은 치마를 입고 감자를 캐는데 다 김태희, 전지현이더랍니다. 나는 그 말 믿습니다. 내가 본 사람들도 평범한 시골 아줌마들인데 정말 예뻤습니다.
불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준이 무엇이냐가 하나님의 율법인데, 거기서 멀어지는 것은 다 불법이고 불의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신약으로 넘어오게 되면 그 불법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것이 불법이고 불의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이냐? 그런 불법하고 하나님의 법도에서 어긋나는 이 세상에서 핍박과 고난을 받으면서도 올바른 길을 걸어가도록 하시려고 남에게 안 주시는 이 지상의 자원과 특별히 다른 사람들은 전혀 알 수 없는 하늘의 자원을 주셔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기 힘든 사랑을 사랑하고 그리고 견디기 힘들었을 핍박들을 이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이면서 어떠한 핍박이나 신앙 때문에 어려움이 당하는 적이 없이 산다면 결국은 정말 신자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느 교회 집회를 갔습니다. 장로님 한분이 점심을 열심히 대접을 하셨습니다. 차를 타고 오는데 자기 자랑을 많이 합니다. 자기가 인권변호사여서 정권에 핍박당하는 사람들을 옹호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누구를 면전에서 면박하는 그런 성격이 아닌데 너무나 자기 자랑을 많이 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장로님 그 법무부분에서 세금은 정확히 내십니까?” 그랬더니 갑자기 운전하다 말고 고개를 푹 떨어뜨리더니, “목사님 그것은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러면 지금 장로님이 하시는 인권변호사일도 빛을 바랩니다. 하루살이는 삼키고 낙대는 걸러 보내면 안 되지요”. 까칠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어렵습니다. 매우, 매우 어렵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 기독교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산다는 것, 더군다나 복음이 우리에게 원하는 대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산다는 것은 핍박받을 용기가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디트리 본 회퍼(Dietrich Bonhoeffer)라는 독일의 신학자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복음서를 정직하게 읽어보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얘들아, 이리 오너라. 우리 모두 나와 함께 가서 죽자.” 이것이 예수님의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아직 교회를 개척을 하고 얼마 안 된 상태에서도 제가 2년 동안 전임교수로 있었습니다. 요즘은 사실 부흥회 오라고 해도 시간이 없어서 못갑니다만 그때는 오라는 데도 정말 많았습니다. 충청도에 있는 어느 대학에서 강사로 불렀습니다. 몇 백 명 청년들이 모였으니까 기독교적인 설교를 해 달라고 해서 갔습니다. 일찍 출발했는데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나서 차가 많이 지연되었습니다. 지방도로를 들어서니까 빨리 달려야 했습니다. 르망을 타고 다닐 때였는데 시골길 넓으니까 한 100킬로쯤으로 달렸는데 저기 경찰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도를 줄였습니다. 경례를 붙이면서 속도위반 하셨다고 그래서 내가 언제 속도위반을 했느냐고 했더니 자기가 보는 데서는 위반을 안 하셨는데 산 뒤에서 위반을 했다고 합니다. 산 뒤에서 내가 위반한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했더니 거기 자기 친구가 있는데 스피드건으로 찍어서 자기한테 보냈다는 것입니다. 딱지를 끊으셔야 겠다고 하면서 뭐하시는 분이시냐고 묻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학교 선생인데 요 앞에 있는 대학에서 불러서 가는데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나서 지체가 되는 바람에 조금 과속을 했다고 끊으시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경찰관이, “교수님이시군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싼 걸로 얼른 끊어 드릴게요.” 난 그때도 그게 무슨 소리인지 잘 몰랐습니다. 고지서를 얼른 받아서 햇빛가리개에 꽂고는 아슬아슬하게 딱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은혜롭게 강의를 하고 올라와서 그 다음 아침이 되었습니다. 그 생각이 났습니다. 햇빛가리개에 그 고지서, 잊어버리면 과태료 나오니까 빨리 내야지. 그래서 교회 여직원이 은행에 매일 가니까 직원에게 시킬까 하다가 뭐 좋은 거라고 내가 갔다 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은행에 갔습니다. 그때 고속도로나 일반도로에서 위반을 하면 한 2만 원 정도 벌금이 나오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내려고 보니까 벌금이 6천원입니다. 6만원이겠지 생각하다가 그것은 너무 비싸고, 그래서 다시 보아도 정확히 6천원입니다. 그리고 납기일까지 내지 않으면 7천2백 원을 내야 된다고까지 밑에 쓰여 있습니다. 무슨 벌금이 이렇게 적은가 하고 생각하다가 “아, 교수님 걱정 마세요. 제가 싼 것으로 얼른 끊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던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보니까 범칙사실에 공란이 나오는데, “금연 장소에서 담배 피다 걸렸음.”
그것을 만약에 교회 직원이 갔다 냈으면 얼마나 큰 시험들겠습니까? 담임목사가 어디 가서 담배를 피다가 걸려가지고. 그래서 그것을 내면서 그때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이것은 아니다. 물론 내가 그렇게 해 달라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까지도 이렇게 산다면 이것은 아니다. 그리고 솔직히 그 전에도 걸렸을 때 한번만 봐 주십사고, 제가 좀 바쁜데 잘 모르고 그랬다고 이런 얘기 솔직히 한 적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여전도사님이 있었는데 운전을 못하는 전도사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모시고 다니는 것입니다. 자기는 뒤에 앉아서 계속 자고 그러다가 걸렸습니다. 유턴을 하는데 유턴 차선이 서있었는데 하얀 점선에 다른 차들이 막았기 때문에 끝에까지 못가고 서 있다가 아무도 오는 차가 없어서 돌았습니다. 경찰이 어디선가 나오는데 지하도에서 숨었다가 막 뛰어오면서 교통 위반하셨다고 면허증 좀 보자고 해서 제가 그랬습니다. “뭐가 교통위반이냐. 도로교통법 1조를 봐라. 이 법은 도로교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법이라고 그랬다. 저 차가 저렇게 가로막고 있어서 돌았고 누구의 방해도 안 끼쳤다.” 그랬더니 법은 그렇게 안 되어 있다고 중앙선을 밟고 유턴 하시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불쌍해 보였는지 또 똑같은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벌점 없는 싼 걸로 끊어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고 그것은 법원에서 판단할 일이라고 그대로 끊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너무 황당해 하면서 알았다고 하면서 앞으로 가서 넘버를 적더니 벌점 15점 6만원, 확 뜯어버리는 것입니다.
평생 가난하게 살다가 34세에 교수가 됐고 그 학교에서도 물론 잘해주었지만 다음 학교에 37살쯤인가에 옮겼는데 저를 보고 주거환경은 어떠시냐고 물어서 2천만 원짜리 세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학교에서 5천만 원을 드리겠으니 좀 좋은 집으로 옮기셔서 편안한 환경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시라고, 5천만 원은 10년 안에만 상환하는 조건이었으니 사실 거저 주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40평형, 어느 연예인이 살던 집에 전세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애들은 뛸 듯이 기뻐하면서 우리 집에 화장실이 두 개고 여기서부터 저기 창가까지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고 자랑을 합니다. 그리고 살다가 한참 지났는데 뜬금없이 건너편 빌라에 사는 사람이 하루는 찾아와서 우리 집사람한테 사모님이 저희 집을 좀 사시라고 합니다. 아니라고 우리는 집 살 계획 없다고 해도 계속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사모님한테 저희 집을 팔란다고 그래서 하나님도 정말 이상하시다고 왜 살 사람한테 오셔서 말씀을 하셔야지 살 사람한테는 안 나타나시고 팔 사람한테 나타나셔서 그러시느냐고 사기는 뭘 사느냐고 그랬더니 그래도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았다고 우리도 기도해 보자고 그래서 결국 사게 되었습니다. 정말 아주 싸게 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하기에 방배동이라고 하니까 어마어마한 빌라인가 하겠지만 산 아래 있는 다세대주택보다는 좀 나은 빌라였습니다. 사고 나니까 뭘 내야 되느냐 하면 세금을 내야 하는데 그 세금이 그렇게 비싼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법무사 사무실에 가서 세금 얼마냐고 하니까 얼마라고 합니다. 이 조그만 집이 무슨 세금이 비싸냐고 하니까 법무사 여직원이 말합니다. “너무 많지요? 반만 내세요.” 또 무슨 세금이 여직원이 반만 내라고 하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방법을 알려 주는데, “가셔서 집 판 사람하고 계약서 말고 다운 계약서를 쓰셔서 집값을 한 3분의 2 정도로 낮추셔서 사고 판 것으로 하면 반 정도로 세금이 줄어 듭니다”. 그것을 들고 와서 우리 집사람이 물어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세금이 반쯤 줄어든다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그래서 목사 사모가 말이라고 물어보느냐고 그게 거짓말인데 로마서 13장에 국세를 바칠 자에게 국세를 공세를 바칠 자에게 공세를 그랬는데 집 파는 사람은 집사고 사는 사람은 목사인데 둘이 앉아서 뭐하는 것이냐고 다 내라고, 그런데 정말 거짓말 안 보태서 우리 아들 벙어리저금통까지 뜯었습니다. 그리고 간신히 세금을 맞춰서 법무사 사무실에 갔습니다. 그 여직원이 다운 계약서 써오셨느냐고 그래서 아니라고,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느냐고 그냥 세금 다 내겠다고, 그때 여직원이 어떤 눈빛이었을까요? 아, 정말 저렇게 훌륭하신 분들이 우리나라에 있구나. 저렇게 정직하고 양심적인 분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이만큼 이라도 사는 것이라고 그랬을까요? 내가 왜 저런 분들에게 말도 안 되는 유혹을 했을까, 그랬을까요? 아니면 말은 안 하지만, “아이, 병신 꼴값하고 있네. 아이고, 잘났어요. 잘났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가난하게 살지.”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대부분은 후자입니다. 그 당시에는 90% 이상이 다 그렇게 다운계약서로 거래를 했습니다. 그래서 장관 나올 때 20년 전에 다운계약서를 쓴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하는데 그런데 물론 잘못한 것이지만 장관될 줄 알았겠습니까, 그 젊은 시절에? 그렇게 해서 다 몇 백만 원씩 세금 절감 해 먹고 산 것입니다.
그때 느꼈습니다. 아, 그렇구나. 우리는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면 하나님이 큰 복을 주시고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 같지만 돈 잔뜩 쓰고 병신이라고 욕을 들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살라고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죽었던 우리 영혼이 회개할 때 살아나게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교회를 살 때였습니다. 이제 지하실에 나와서 3년 만에 교인이 한 천명이 되었는데 요정도 크기 될까요? 이것보다는 좀 작겠습니다. 예배당 건물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 건물을 팔고 다른 곳으로 예배당은 이사 가고 건축대금으로 그것을 회사에다 주니까 회사는 그것을 팔아서 오피스텔을 지으려고 했는데 이사 가자마자 IMF가 터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개발을 할 엄두를 못 내는 것입니다. 할 수없이 월세를 놓겠다고 해서 우리가 월세로 들어갔습니다. 거기 200명이 갔는데 3년 반 만에 천명이 좀 더 모였습니다. 꽉 차서 더 이상 앉을 데가 없고 수시로 차는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이 IMF도 거의 끝나가고 자기네는 빨리 허물고 집을 지어야 하니까 방을 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로 기도를 했는데 서울에는 도저히 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만한 인원을 데리고. 그래서 정말 가기 싫은 안양이라는 곳에를 갔습니다. 안양 가면 있을 줄 알았더니 없습니다. 교회가 갈만한 땅의 크기는 위치가 전혀 아니고 위치가 좋은 데는 크기가 너무 작고 크기도 맞고 위치도 좋은 데는 돈이 상상도 못할 정도입니다. 그러던 차에 기가 막힌 땅이 하나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부동산에서 하는 이야기가 그 사람 3년 전에 그것 잠깐 내놓았다가 안 판다고 집어넣기 때문에 가나마나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한번 소개해 달라고 사정을 해서 찾아 갔습니다. 그랬더니 연세 많이 드신 할아버지가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땅 좀 파시라고 했더니 안 팔겠다고 한 지가 언제인데 그러느냐고 그 땅 안 판다고 문 닫고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러지 마시고 얘기 좀 해보시자고 그러시라고, 해서 땅을 자꾸 파시라고 하니까 안 판다는 데 왜 자꾸 팔라고 그러느냐고, 뭘 하는 사람들이냐고 내가 땅을 팔면 거기다 뭘 하려고 그러느냐고 그러십니다. 교회를 지으려고 한다고 하면서 담임목사 책을 두어 권을 드렸더니, 갑자기 할아버지가 “교회요? 일주일만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알고 보니까 이분이 26살 때 한경직 목사님한테 안수를 받고 장로가 된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자리에서 가발공장과 여러 가지 공장을 하셨는데, 거기 한경직 목사님이 1년 6개월 동안 오셔서 매주일 성경공부를 인도하시던 곳이었답니다. 그래서 1주일 후에 만났는데 이 할아버지가 땅을 파시겠다는 것입니다. 회사를 그만 두면서 자기는 평생 돈 벌며 살았으니까 이 땅에는 공장 말고 교회가 들어와서 많은 영혼을 구원하면 참 좋겠다고 그러고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당신들이 교회를 지으려고 한다고 그랬을 때 정말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시면서 이 땅을 사라고 그러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고를 듣고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36억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교회 통장에 정확하게 1500만원 있었습니다. 참 대단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부자도 별로 없습니다. 지금도 500만 원 이상 십일조 하시는 분이 몇 분 계시긴 하지만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36억, 계약을 하자고 했습니다. 당장 계약금이 3억 6천만 원이 필요합니다. 울고불고 기도를 했더니 어느 교인이 계약금은 제가 교회에 빌려드리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좋다고 계약을 하러 갔는데 계약을 못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야기하기를, 36억으로 계약을 하려고 했더니 이 할아버지가 30억으로 다운계약서를 쓰고 30억은 정식으로 거래를 하고 6억은 비자금으로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래야 되시느냐고 하니까 그 땅을 워낙 싸게 사서 이것을 팔면 세금을 내야 되는데 세금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이 땅을 이미 저당을 잡혀서 은행에서 돈을 빌려 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계산을 해 보니까, 36억에 계약을 하고 교회에 넘겨주면 부채 갚고 금융권 상환하고 세금 다 내고 그러면 1억 정도가 모자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할아버지 말씀이 이 땅은 지금 계속 값이 올라가고 있는데, 사실이었습니다. 지금은 한 1200만 원 정도 갑니다, 땅값은 계속 올라가서 가지고 있으면 돈이 되는데 이것을 내가 팔기 위해서는 회사를 청산해야 되고 모든 것을 해야 되는데 내가 교회에 그냥 줄 수는 있다고 치더라도 내 돈을 마련해서 얹어서 이 땅을 넘겨줄 수는 없지 않느냐고, 건축위원들이 듣고 와서 생각해 보니까 그분 입장도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와서 내게 묻는 것입니다. 목사님 상황이 이러한데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건축위원들을 모아놓고 의논을 시켜보니까 95%가 아무 문제 안 된다는 것입니다. 4대그룹에서도 다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일부 빼놓고는 95%가 다 그렇게 거래하고 있으니까 하시자는 대로 하고 36억에 끝내라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항상 전문가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그래서 회계사를 불렀습니다. 내 생각으로 이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해도 된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데 당신 의견은 어떠냐고, 그러니까 관례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하셔도 되기는 된다고 하면서 말합니다. “그런데 목사님 이중장부 쓰셔야 됩니다.” 그 대목에서 “아, 이것은 아니다. 안 되는 것이구나.” 결정했습니다. 어떻게 교회가 두 개의 장부를 써서 하나는 세무사 감사 받을 것으로 하고 그것이 결국은 거짓말인데 그래서 그 다음에 건축위원회 소집해서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교회 땅을 못 사면 그냥 역사에 남기자. 이러이러한 일이 있어서 교회를 옮길 뻔 했는데 그것 때문에 교회를 못 옮겼다. 그리고 어디 다른 전세라도 찾아다니면서 2층, 3층, 4층 빌려서라도 하자. 그것은 아니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또 안 살 수는 없는 것이 빨리 두 달 안에 이사를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가서 할아버지한테 세금이 얼마인지 여쭈어 보라고 그랬더니 3억이랍니다. 36억이면 팔겠다는 땅을 39억을 주겠다고 하고 샀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듣기에는 우스운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 모든 돈을 다 빚을 얻어서 했습니다. 1500만원밖에 없었던 교회이었으니까. 교회에서 성도들이 큰 충격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대한 커다란 자부심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말로만 개혁신학을, 청교도를 하는 교회가 아니라 사람들이 주저주저할 때 이렇게 우리 교회 목사님과 중직들은 정도를 따라 걸어왔다.”
한때 미국이 전쟁을 하려고 했습니다. 전쟁을 해서 영토를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전쟁하면 미국이 영토를 얻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을 좌절시킨 것이 교회였습니다. 그때 나온 찬송가가 뭔지 아십니까?
(찬양)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매여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그 뜻이 이뤄 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볼 대 우파, 보수, 골통, 독재자들의 하수인 생각 없는 친미주의자, 이것이 보편적인 불신자들의 눈에 찍힌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기독교 선교에 매우 나쁜 영향을 주고 있고 더욱이 어느 정권이든지 정권을 잡으면 이용하고 싶은 일 순위가 교계의 지도자들과 기독교의 맹목적인 말하자면 순종하는 힘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역사를 알고 어느 정도로 눈이 띄어져 공정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차를 타고 오면서 뉴스를 들으면서 마음속에 여러 번 분노를 억누르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대주그룹 회장이 249억 원의 벌금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판사라고 하는 작자가 50일, 하루에 5억씩만 감옥소에 있으면 250억을 탕감해 주어도 된다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지금 노조대에서는 무임금 무노동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공휴일까지도 그냥 5억씩 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 거기서 무슨 노역을 하느냐, 봉투 부친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일당 5억을 주고 부친 봉투를 한 장에 얼마를 받고 팔아야 될까요? 우리 같은 사람이 죄를 짓고 감옥소에 들어가면 일당 5만원 쳐줍니다. 5억이 얼마나 큰돈인가 하면 고등학교 다니는 청년이 매일 하루도 쉬지 않고 10시간씩 시급 5천원 받고 일해서 70세 되어서 만질 수 있는 돈입니다. 원래 벌금형이라고 하는 것은 벌금 내지 말고 노동을 하게 하기 위해서 판결을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희 씨는 벌금으로 돈을 대신해서 옥살이를 할 수 있는 최장 기간이 3년입니다. 그래서 이건희 씨가 1100억을 벌금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건희 씨는 옥에서 안 나오고 1100일을 봉투 부치면서 개기면 1100억을 안내도 됩니다. 그래서 거기서 그분이 봉투 부치면서 하루에 1억씩 까나갔습니까? 아닙니다. 자기 돈 개인 돈 1100억 빼다가 나라에 납부하고 석방되었습니다. 재벌이 망했는데 그 돈 아니면 절반이라도 먹고 살려고 남겨 놓았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 사람을 2300만원씩 판결을 내렸어야 합니다. 그러면 삼년 꽉 채우면 239억이 종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회장으로 살던 사람이 감옥을 살겠습니까, 아니면 친구한테 빌려서라도 감추었던 비자금 땅에서 파서라도 미술작품을 팔아서라도 벌금을 내겠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입니다. 그런데 그 나쁜 사람들이 재판장 검사 변호사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서 5억에 까준 것입니다. 더 나쁜 사람은 검사입니다. 그것을 상고를 안했습니다.
저는 진보주의자나 이런 좌파 쪽의 논리 같은 것들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닙니다. 박 목사가 증인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런 것을 보면서 너무 너무 억울한 것입니다. 왜 법 앞에 태어난 민주국가라는 곳에서 태어나서 우리 사회는 이렇게 말도 되지 않는, 초등학교 학생들 갖다 놓아도 이것은 말도 안 된다고 발로 깡통을 차버릴 이런 판결을 그 거지같은 인간들이 거기 서서 그 법을 좌지우지해 가지고 사회를 이런 꼴로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뭐 법을 따라 판결을 했다고 그러는데 법이 그렇게 돼 있어도 법이 무엇입니까? 최소한의 상식입니다. 사람들이 조금 의견의 차이는 있어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게 사람 사는 경우지 그래야 법입니다. 그런데 기껏 하는 이야기는 이제 이 사건을 계기로 앞으로 고치겠답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이미 벌서 혜택을 본 사람이 있는데? 억누를 수 없는 분노를 느낍니다. 이것이 불의입니다. 이런 일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어느 교인이 저보고 목사님 두 영화는 꼭 보시라고 그랬습니다. ‘신이 보낸 사람’하고 ‘또 하나의 약속’ 그것을 꼭 보랍니다. 그래서 둘 다 일부러 가서 보고 왔습니다. 혼자서. 원래 영화는 조용히 혼자서 봐야 합니다. 또 하나의 약속을 보면서 속으로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게 뭔지 아시지요? 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 걸려 죽은 아이 이야기. 어떻게 이렇게 한 사람을 수많은 사람들이 합력하여서 손에 손을 잡고 짓밟을 수가 있을까요? 그게 무엇입니까? 불의한 세상입니다. 그 불의한 세상에 화염병 들고 죽창 들고 나가서 전경들을 찔러 죽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아닙니다. 그러나 침묵하는 것은 영혼을 소생시켜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에 정면 적으로 배치되는 행동입니다. 말도 안 되는 행동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러한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아주 깊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지도자로서, 교회의 지도자로서 얼마나 이 교회의 목사와 장로를 비롯한 지도자들이 올바른 가치관과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중요한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가난했을 때에는 도저히 생활할 수 있을 만큼 월급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많이 모이고 살만해 지면, 제 주장은 그것입니다, 뭐냐 하면 직원과 교역자가 월급을 받아서 헌금을 더 도로 내는 한이 있더라도 생활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것은 교회의 의무다 이것입니다. 세상의 어느 교회에서 애들까지 포함하기는 하지만 7천명이 모이는 교회에서 교육전도사 월급을 80만원을 주는 것입니다. 결혼한 사람을.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지들보고 한번 살아보라고 해라 그것 가지고. 야고보서에 보면 품삯이 소리를 친다고 했습니다. 물론 예수 믿는 성직자들이 일하는 이것이 품삯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죄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우리는 물건 무지하게 싸게 샀다고 그러는데 그것도 안 됩니다. 누군가가 이익을 보았다고 신나하는 사람 이면에는 피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배추장사도 해 보고 이 동네에서 떡 장사도 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압니다. 어떤 교인은 그럽니다. “목사님, 하나님이 올 초에 우리에게 대박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집을 팔기로 하고 어떤 사람이 계약을 했습니다. 나는 아직 집을 막 알아보려고 하는 중이었는데 거기서 계약을 해지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계약금 1억 원 공돈이 생겼습니다. 할렐루야.”
진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불러서 왜 그렇게 뜻대로 안되었느냐, 내가 똑같은 계약을 해서 1억 원의 계약을 했더라면 나도 저 사람에게 물어주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이 돈을 다 받아야하지만 내가 다행히 아직 집을 계약을 안 했다. 그러니까 얼마나 어렵겠느냐. 도로 가져가시라. 그게 너무 속이 쓰리면 나도 이것 때문에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가족들이 신경도 많이 쓰고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있었다. 2천만 원은 내놓고 8000만원은 가져가십시오. 그런 사람 세상에 있습니까? 불의한 세상이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럴 수 있는 용기와 아량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목사님들 생활비를 넉넉하게라고는 말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삶이 구겨질 정도로까지는 우리는 안 드립니다.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 드립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얘도 어린이집 공짜고 쟤도 공짜입니다.” 왜 그러냐고 하니까 아빠가 수입이 없다고 우리를 영세민 취급해서 얘들을 공짜로 받아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대들이 어떻게 영세민이냐고, 연봉을 몇 천만 원을 받는데. 너 그거 좋아하지 마라. 네가 그렇기 때문에 진짜 가난한 애들 둘이 못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이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일 수 없다. 그래서 세무서에다가 우리 교역자들, 직원들은 이미 세금을 내고 있으니까, 모두 세금을 내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당회에서 통과시키고서 세금 내라고 가서 신고하라고 그랬습니다. 세무사 시켜서 계산을 해 보니까 우리 교역자들이 면세점 이하인 사람들도 있지만 면세점 이상인 사람들 특히 여성교역자로서 혼자 사는 사람들이 돈을 많이 받을 때는 세금이 엄청 많이 나옵니다. 계산해 보니까 첫 해에 세무서에 월급에서 떼어서 바쳐야 하는 돈이 6천 8백만 원입니다. 저는 세무서에서 요즘 교회들이 정직하지 않은데 이 교회는 어쩌면 이러시냐고 빈말이라도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랬는데 아니 그걸 왜 내느냐고 안 내도 된다고 법에 내라는 조항이 없는데 내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직원이 서류를 들고 갔는데 내지마시라는 것입니다. 그걸 복잡하게 왜 내시느냐고. 그래도 내고 싶다고 하니까 참 이상한 분들이시네. 안 내도 된다니까 제가 여기 담당자인데 제가 봐 드릴게요. 그러니까 우리 담임목사님의 의지입니다. 냅니다. 알았어요. 고맙다는 소리 안합니다. 그리고 아까와 똑같은, 어이 병신 꼴값하고 있네.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유치원에서 다 안 받아줍니다. 아빠 연봉이 몇 천이고 차도 있는데 여기를 거저 들어오느냐고 돈 다 내라 이겁니다. 그래서 자기네는 지금 굉장히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아골골짝 빈들에도 간다며,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게 해 달라며, 의의 길로 간다며? 하나님 우리가 정말 공법이 물같이 정의가 하수같이 그러고 싶다며? 내라. 그 대신 올해 올라간 세금만큼 생활비를 인상한다. 그 다음서부터는 똑같이 원래대로 돌아간다. 세금이 얼마나 나온다? 그것은 너희 개인적인 사정이고 수입이 있기 때문에 우리 애들이 유치원에 이제 돈 안 내고 못 갑니다, 보건소에 무엇을 안 해줍니다, 보조금이 안 나옵니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다. 그것이 싫으면 교회를 떠나라. 그래서 다 불이익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것 하나 하고나니까 교회의 모든 문제들이 떠오르게 된 것입니다. 저 오르간은 얼마짜리인지 모르는데 진짜 좋은 오르간은 한 3억씩 갑니다. 전화를 해서 우리 교회 오르간 사고 싶은데 카탈로그의 b형 얼마냐고 하면 1억 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계약서 쓰시고 한 대 갖다 달라고 그러면 영업사원이 와서 계약서를 씁니다. 그리고 갖다 줍니다. 그리고 1억 원 입금하면 거래 끝이잖습니까? 그런데 그게 무자료 거래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교회는 부가세 10프로를 탈세하는 것이고 저쪽은 소득세 4프로 정도를 탈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서부터 교회에서 3만원까지는 문방구에서 쓰는 영수증을 받아주지만, 왜냐하면 권사님들이 구멍가게에서 야채 사 가지고 온 것 그것을 신용카드로 사가지고 올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3만원 넘는 것은 어떤 평신도나 교역자가 가지고 와서 청구서를 내도 교회에서 돈을 안 줍니다. 그 다음서부터는 전부 다 현금영수증입니다. 1억 원이라고 거래명세표를 들고 왔습니다. “여기 1억 원 쓰여 있습니다. 입금해 주십시오.” “아저씨, 이거 안 됩니다. 세금영수증 세무서에서 나오는 그 영수증 주셔야 합니다.” “아, 그러면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1500만원 더 주셔야 합니다.”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팔았다는 자료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분한테 걷어서 그 1천만 원을 세무서에 내야 되고 그리고 소득이 올랐기 때문에 3프로 내지 4프로 소득세가 나중에 나오기 때문에 그것도 결국은 당신들이 원한 것이기 때문에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이 소득은 저희가 한 것인데 그것을 왜 우리가 내야 하느냐 말입니다. 실질적으로 1억 천만 원 달라고 하는 데는 양심적인 기업이고 1500만원, 좀 싼 데는 1억 3천만 원 달라고 합니다. 이 종이 한 장을 합법적인 것을 얻기 위해서 1500만원을 주고 이 영수증을 사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맞는다는 것은 알겠는데 과연 이렇게 해야 되나 라는 것이 궁금해서 이름만 대면 아는 우리나라에서 존경받는 큰 교회에다 사람을 보내서 다 알아 보았습니다. 대답이 뭔지 아십니까? 노력은 합니다마는 다는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와서 그랬습니다. 2년을 고민을 하다가, 우리도 그 교회들의 모본을 따라서 노력은 하되 다는 못하는구나 하다가 2년 후에 그 사건을 겪고 나서 이제는 안 된다 모두 다 해라. 그렇게 해서 지금 이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이번에도 우리 교회가 60억짜리 공사하는데 에누리 없습니다. 부가세 6억 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남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독특하고 신선하구나 하지만 자기가 여기서 돈을 내 놓을 때는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개인적으로는 어떻습니까? 나 개인적으로 물건을 사도 개인이 사는데 영수증 받든지 말든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 돈 주는데. 나는 10% 더 내고 정당하게 영수증을 요구한다 이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법적으로 내가 탈세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정직이라는 것입니다.
그 길이 너무 힘이 듭니다. 그렇게 해서 1년에 세무서로 나가는 돈이 내가 생각하기에는 교회 예산이 80억이니까 얼마나 많은 돈이 세무서로 가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아깝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십일조 안 내는 사람들이 십일조 내는 사람들을 보면 미친 사람입니다. 지금 10퍼센트를 더 벌어도 살까 말까인데 어떻게 봉급봉투 받아서 그것도 또 봉급봉투 맨 아래가 아니라 위에서 10%니까 받는 돈의 10프로니까, 당연하잖습니까? 제대로 하려면 퇴직금 타서도 퇴직금의 10분의 1을 하나님 앞에 내놓아야 합니다. 제가 어느 교인들 보고 그랬습니다. 당신들 아파트에서 24에서 32, 32에서 45, 45에서 60으로 막 올라가고 그때마다 경사 났다고 교역자들 불러서 심방 받는데, 십일조 언제 할 거냐고. 10일조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다 하지 말아야 하고 그게 맞는 것이라고 하면 다 해야지, 24평 6천만 원 주고 들어와 가지고 한 7, 8년 있다가 2억 4천만 원이 되고 2억 4천만 원짜리가 다시 42평으로 샀더니 5억 주고 산 게 10억이 됐는데, 십일조 언제 낼 거냐고 제가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중의 어떤 교인이 십일조를 교회 온라인으로 7천만 원을 부쳐 왔습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우리 아파트 중간 십일조 정산한다고 입금을 하였습니다.
안 믿는 사람이 보고 신앙이 없는 사람이 보기에는 미친 짓입니다. 그런데 그런 미친 짓이 오늘 성경은 의의 길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거의 불가능한데 그리스도인조차도 그렇게 살지 않으면 이 세상은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나 한 사람이 그렇게 올바르게 산다고 해서 어느 날 신문에 대서특필이 되고 그런 것은 교회의 본질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서 이제껏 까지 나는 그리스도인에 비하면 개 같이 산 인간이라고 회개하면서 절대 밀린 세금을 내지 않습니다. 대주그룹 회장 같은 이런 판결을 내는 그 못된 판사와 나쁜 놈 검사 이런 사람들이 그래도 수없이 나옵니다. 그래서 세상을 시커멓게 먹칠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두운 밤하늘이 될수록 샛별처럼 빛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딘 가는 한 두 사람이 남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두 달 동안 덕적도라는 섬에 가서 혼자 공부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인천을 나오기 위해서 배를 탔는데 바다의 풍랑이 심상치 않은데 주의보가 발령이 안 났습니다. 주의보가 발령이 안 나면 그냥 갑니다. 그래서 두 시간 반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세 시간 가까이 갔는데 중간밖에 못 갔습니다. 그런데 중간에서 무전이 떨어진 것입니다. 큰 폭풍이 오니까, 오긴 뭐가 와 벌써 왔는데, 빨리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냥 가는 것이 빠를 것 같은데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장은 명령을 따라서 도는 것입니다. 전 거기서 이렇게 해서 죽는 것이구나 바다에서 그것을 느꼈습니다. 이쪽에서 친 파도가 포물선을 그리면서 이리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모두 구명조끼를 입고 바닥을 뒹굴면서 토하는데 한 번에 물속에 쳐 박힐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폭풍이 오니까 하늘이 어두워서 아무 불빛도 없이 캄캄한 밤바다입니다. 그런데 저 섬에 전기가 안 들어오는 마을이었는데 천주교에서 발동기를 돌린 것입니다. 기름을 때면서. 미국 천주교회에서 선교사가 나와서 미국 사람들 헌금을 걷어서 그것을 지어서 기름을 때서 동네에 7시부터 10시까지 세 시간 전기를 넣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텔레비전도 보고 라디오 듣고 등불 하나 키고 이 정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도 지났습니다. 10시가 지나서. 깜깜합니다. 그런데 저기서 등대 하나가 반짝 반짝 비치는 것입니다. 그 어두운 밤바다에 그 등대 하나가 저것이 생명이구나 하는 것을 그때 내가 예수 안 믿었을 때인데 아주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 불빛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배를 몰고 가다가 방파제에 박살낼 수도 있고 바다에 걸릴 수도 있고, 왜냐하면 땅이나 바다나 어두우면 다 시커멓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불빛 하나 때문에 우리 배만이 아니라 많은 배들이 안전하게 대피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삶이 그렇게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대접을 받고 칭찬을 받는 그런 삶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관심 없습니다. 세상사람 바라보라고 우리 존경하라고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문 보면서 제일 역겨운 것이 선거철에 정치인들이 시장가서 애꿎은 고등어 손으로 집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애를 안고, 웃기는 것입니다. 순 쇼 아닙니까? 백성을 불쌍히 여겨? 뭘 불쌍히 여깁니까? 그리스도인이 배가 항구에 올 때 그렇게 큰 어두움 속에서 이런 방법도 있습니다. 해군에서 조명탄을 한 일만 발 정도를 하늘에 쏘아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기합니다. 수십 발 쏘아 올리면 낮에 하고 똑 같습니다. 다 보입니다. 낙하산을 타고 천천히 내려오는데 어마어마한 밝기입니다. 그런데 한 일만 발 정도를 쏘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다가 환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래도 됩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 없습니다. 등대 하나만 있어도 등대에 방파제가 있다는 것도 알고 그 등대를 따라서 들어가면 안전한 포구가 있다는 것도 아는 것입니다.
진리가 대중적이었던 시대는 없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너무 많아서 불의한 사람이 숨어서 사는 시대는 없었습니다. 도덕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어서 그렇게 진리가 보편적인 그런 시대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남이 알지 못하는 진리의 말씀을 주신 이유는 그 진리의 빛이 되라고 주신 것입니다. 자기들끼리 모여서 “장로님 성경지식 풍부하시네요, 권사님은 신학 책도 읽으셨다면서요, 집사님은 신학교도 다니셨다면서요, 아무개 권찰은 청교도 서적을 하루에 10권씩 읽는다면서요? 그래서 어쨌다는 것입니까.
주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지 조명기구상의 스탠드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소금끼리 통 속에 모여서 아이고 짜시네, 아이고 권사님 어쩌면 그렇게 짜셔. 밥도 한번 안사고. 그러라고 소금 만들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그 속에 나가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피아노 하나 사고 천만 원을 더 내도 아무것도 아깝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러더랍니다. 어느 교회의 중직이 교회 돈을 그렇게 함부로 쓰면 되느냐고. 그것이 아닙니다. 교회 돈은 함부로 쓰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도둑질한 돈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세금을 내는 게 왜 함부로 쓰는 것입니까? 안 내고 포탈한 더러운 돈인 것입니다. 콩나물 살 때 50원을 깎으면서 살다가 이것을 탁 보면서 당연하지 1억 원짜리 샀으니까 천만 원은 세금을 내야지. 그것이 싫으면 항의를 하고 국회의원들을 움직여서 10퍼센트 부가세를 5퍼센트 낮추자고 운동을 해서 법을 만들고 법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마음에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는데 원래 그리스도인의 삶은 불의한 세상에서 의로운 삶을 살라고 주님이 주신 것이다. 우리 예수님이 무엇을 잘못하셨습니까? 누구 것을 빼앗으셨습니까? 때리셨습니까? 로마 의료보험제도가 없는 로마의 환자들을 예수님이 고쳐주셨습니다. 복지부가 해결을 못하는 가난의 문제를 해결해 주셔서 먹이고 입혔습니다. 그러면 로마의 복지부 장관이나 의료부 장관이 와 가지고 상장을 드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짓밟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만들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냥 싫은 것입니다. 무엇을 잘못하였느냐고 물어보니까 말을 못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할까 그러니까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 버리라는 것입니다. 뭘 잘못했느냐고, 말을 못합니다. 왜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까? 싫은 것입니다. 사람이 싫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로운 분이셨기 때문에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싫은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아데네의 유명한 현자였습니다. 그의 친구 가운데 하나가 알키비아데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머리가 아주 명석한데 아주 방탕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하루는 소크라테스에게 말했답니다. “난 네가 정말 싫다.” “왜 싫은데? 내가 뭐 너한테 나쁜 짓 했냐? 그런데 왜 싫은데?” “네가 옆에 있기만 하면 나는 자꾸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나는 네가 싫다.” 이해하셨습니까? 소크라테스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사는 삶이 인간이 아니구나. 개돼지처럼 사는 것이구나 생각을 자꾸 하게 하니까 그 사람이 거기 있는 존재 자체가 싫은 것입니다. 왜 싫으냐고 이유를 댈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디에 가든지 그렇게 살면서 올바르게, 정직하게 그리고 올곧게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난도 받을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 도와 달라고 기도하고, 그래서 돈이 모자라면 돈을 보내달라고 기도하고 그래서 우리 능력이 모자라면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고, 그러면서 박해를 받으면서도 양심에는 구김이 없는 길을 걸어가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은 우리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속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엇이 있는 것같다. 그래서 저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구나. 저것이 정말 인간이 사는 삶의 이치가 아닐까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선교입니다. 그 선교가 사실은 전도지 돌리는 이러한 선교의 삶과 같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정말 아름답구나. 그리고 나는 저 사람들을 싫어하지만 무시는 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가진 집단이라는 이런 일들이 온 교회에 가득하게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이라고 이야기하고, 이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교회 바깥까지 확장되어 나가는 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교인 것입니다.
(찬양)
은혜와 긍휼을 열방 중에
비추소서 빛 되신 주의 말씀
여러분, 예수 믿다가 박해받아 본 적 있습니까? 전도하다가 그 아파트 경비원들에게 상소리를 듣고 심지어는 손찌검을 당해 본 적 있습니까? 그리고 교회에 와서 엎드려 본 적 있습니까? 주님이 바로 그렇게 박해를 받으시며 사셨군요. 하나님이신 그분이.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우리에게 영혼을 소생시키는 은혜를 주신 이유는 예수님이 이 땅에 아직 살아계셨더라면 사셨을 그런 삶을 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죄 지었을 때는 용서를, 능력이 부족할 때는 능력을, 지혜가 모자랄 때는 지혜를, 사랑이 모자랄 때는 사랑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셔서 그래서 우리를 이 어두운 밤하늘과 같은 세상에 샛별처럼 빛나는 사람들로 살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