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의 회복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녹취자: 이경순
여호와는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한시인은 2절부터 5절 사이에서 어떻게 그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실 수 있는지를 차례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는 자기의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시는 은혜 때문에,3절에서는 자신의 영혼을 회복시키시는 은혜 때문에, 4절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지켜주신 은혜 때문에, 5절에서는 자기의 심령을 감격에 넘치게 해주시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2절은 넘어갔습니다만 3절에 보면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시는 도다 라고 말입니다. 제일먼저 시인은 주께서 나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했습니다. 회복시키시고 라고도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동사는 히브리말로 ‘하야’입니다. ‘하야’는 살아있다 무엇무엇이다 무엇무엇이 되다 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살아나게 하시고 이런 뜻입니다. 시인이 자신의 영혼이 살아나게 해주시는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의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나의 영혼 이라고 할 때 이 영혼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영혼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가에 대해서는 성경이 그것을 설명하는데 그렇게 깊은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전체를 훑어보아도 영혼의 본질이 무엇이고 또 영혼이 본질적으로 어떤 것인가에 대한 설명이 아주 제한적으로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영혼이 어떤 기능을 하는가, 그리고 그 영혼이 우리 인간 존재에 있어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하는 가르침들은 성경에 아주 풍부하게 나옵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피조물들과 달라서 그냥 육체만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느냐 혹은 영과 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느냐 사람들이 여러 이야기들을 하지만 어떤 물건을 우리들이 보고 이 물건이 무엇으로 구성되었는지를 보려면 공장에 가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존재를 영과 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삼분적인 존재라고 보는 것은 성경에 입각한 사상이라기보다는 그리스철학에 따른 인간관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이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손으로 흙을 빚어서 사람의 몸을 만드십니다. 흙이라고 번영이 되었지만 히브리 성경은 ‘아파르’라고 번역되었지만 이것은 티끌입니다. 인간존재의 가치 없음 혹은 덧없음 하나님의 그 위대하신 존재 앞에서 하잘것없는 존재를 의미하는 단어로 비교되어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 티끌들을 가지고 하나님이 사람을 빚으십니다. 이것이 인간의 육체이고 하나님이 그 코에 ‘후’ 하고 생기를 불어넣어서 영혼을 주입하시므로 서 인간이 산사람으로서 인간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신 것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일부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불어넣는 동작 자체가 창조의 행동이고 그것을 통해서 예전에 없던 것들을 창조해서 인간 속에 집어넣은바 되었으니 인간의 영혼은 육체도 아니고 그렇다 고해서 하나님의 일부인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 독특한 영혼을 가진 존재로 인간이 창조되었고 그래서 인간은 육체와 함께 영혼이 만나 살아있는 사람 ‘네페쉬하야’라는 ‘살아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 여기에서 우리의 필요의 문제가 대두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육체도 자신의 생존을 위한 자원을 필요로 하고 영혼도 그런 자신의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육체에도 생명이 있고 영혼에도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함이라’고 할 때 그 영생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이 육체의 생명과 영혼의 생명은 원래 맨 처음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에는 불멸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과 끝이 없으신 하나님이시고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들은 처음은 있고 끝이 없는 존재로 인간이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시무종한 존재이고 인간은 유시무종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서 인간의 육체는 일정한 시간을 이 세상에서 살다가 결국 육체는 소멸하고 그리고 무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에 비해서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도록 창조되었고 그래서 인간의 영혼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불멸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영혼과 육체의 죽음의 문제를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육체의 죽음은 학자들에 따라서 육체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에 대한 견해도 통일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째든 분명한 사실은 육체가 생명의 기능을 멈추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죽음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영혼은 다릅니다. 영혼은 죽을 수가 없는 영혼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우리의 영혼이 허물과 죄로 죽었었는데 우리를 다시 살리셨다고 말했을 때 그 영혼의 죽음의 의미는 육체의 죽음의 의미와 다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혼이 죽었을 때 육체가 죽은 영혼의 행실을 만들어 낸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생명의 의미와 육체의 생명의 의미가 사뭇 다르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영혼에 대한 이야기는 이정도로 하고 좀 더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땅으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 땅으로부터 오는 지상의 자원들이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체는 오늘도 땅으로부터 나온 물을 마셔야 하고 땅으로부터 나온 양식을 먹어야 하고 땅으로부터 만들어진 의복을 입고 이 모든 재화를 끊임없이 소모하므로 서 우리의 육체는 건강을 유지하고 생명을 지탱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먹고 입고 쓰고 보고 누리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감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고 그리고 우리에게 늘 필요를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 필요를 늘 느끼며 살기 때문에 우리의 육체를 위한 필요에는 매우 민감합니다. 두 끼만 거르고 나면 이 속에서 밥을 달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리고 뭐라도 사먹어야지만 건강을 지탱할 수 있게 됩니다.
이에 비해서 우리의 영혼은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이 아닌 전혀 다른 또 다른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이 바로 천상의 자원입니다. 그런 천상의 자원을 가지고서야 우리의 영혼은 생명을 유지하고 그 자원을 이용해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육체와 영혼이 있지만 우리의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우리의 인생을 참으로 가치 있게 영위해 나가는 것은 육체의 건강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이 정신의 지도력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기를 인간육체의 생명은 영혼이며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렇게 공부하는 시절에 자신의 영혼을 순결하고 깨끗하게 하고 그리고 그 영혼을 올바로 지도할 수 있도록 신앙을 갖고 그 신앙의 토대위에 이 세상의 학문과 삶의 지혜를 축척해 나갈 때 그 때에 영혼이 여러분의 삶을 올바로 지도할 수 있고 이런 사람들이 사회의 지도자가 될 때 이 사회는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혼과 육체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얼마저 두건의 엽총사고가 났고 그리고 여러 사람이 죽었습니다. 총을 쏜 사람은 70대가 넘은 할아버지가 80대가 넘은 형이 유산을 좀 나누어주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엽총으로 형과 형수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 달려온 파출소장까지 사살하고 자신도 그 총에 맞아서 스스로 자결을 해 버렸습니다. 그저 평범하게 생각하면 ‘아 이사람 너무 열 받아서 사람도 죽이고 자기도 죽었구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보면 이것이 바로 영혼을 위한 자원의 결핍입니다. 3억 원을 달라고 했는데 3억 원을 안줘서 죽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미운 형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영혼과 정신의 힘이 고갈되었기 때문에 결국은 극단적인 행동을 하고 죽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요새는 자살을 하고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 제 1위의 국가라고 하는 오명을 벗지 못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결국은 영혼을 위한 자원의 완전한 결핍, 거기에서 오는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지탱할 수 없는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살에 대해서 말하기를 자살은 절대로 죽고 싶어서 죽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살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살고 싶은 그러나 너무나 다르게 살고 싶은 욕망의 표현입니다. 언제나 인간에게는 자기가 살고 싶은 삶과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의 격차가 존재합니다. 그 격차를 이기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만드는 것이 인간의 정신적인 에너지이고 우리의 용어로 말하자면 천상의 자원입니다. 이런 것들이 완전히 고갈 되었을 때 결국 인간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오늘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는 감격에 사로잡히게 된 이유는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살아나게 하시고 혹은 살리시고 혹은 회복시키시고 혹은 소생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히브리어 원문에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살게 하시고 라고 했으면 언젠가는 죽을 것 같았던 때가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다윗이 자신의 영혼이 죽을 것처럼 깊은 영적인 침체 속에 빠졌던 경험들을 자주자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특히 시편은 이런 침체에 빠지게 된 원인을 크게 세 가지를 제시하는데 하나님께 대한 무지, 인간의 죄, 그리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원인을 알 수 고통 이 세 가지가 시인으로 하여금 영적인 힘을 잃어버리고 깊은 침체에 빠지게 만들었던 원인입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이지만 그러나 뿌리는 하나에 내려가 맞닿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라고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죄는 영혼의 생명을 앗아가고 생기를 사라지게 해서 깊은 무감각과 침체에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혼의 힘이 고갈되어버리게 만드는 힘이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시인이 그런 영혼의 고갈상태에서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회복의 은혜는 언제나 이 죄의 문제에 대한 해결을 통해서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죄에 대한 긴 형이상학을 이야기할 시간은 없지만 죄가 어떻게 우리의 영혼의 활기를 앗아가고 영혼의 깊은 침체를 가져오는가 하는 것은 시편에 있어서 언제나 중요한 주제입니다. 자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묻고 싶을 겁니다. 도대체 무슨 죄입니까? 우리 교회의 바깥을 나가면 정말 죄지은 사람들이 많고 그런 사람들 중에도 활기차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가 무슨 그렇게 큰 죄를 지었다고 우리가 영혼의 깊은 침체 속에서 살겠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어느 대학 실험실에서 연구를 위해서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납작한 접시모양의 비커에 차가운 물을 넣고 그리고 거기에 개구리 한 마리를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매초마다 영점 영이도 씩만 온도가 상승하도록 불꽃을 조절해 놓았습니다. 정확하게 한 시간 이십 분 뒤에 개구리는 푹 삶아진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만약에 그 물이 아주 따뜻한 물이었다면 그 때 논에서 잡아온 개구리를 거기에 집어넣으면 개구리가 사우나 하듯이 ‘아 시원하다하고 더운 물속에 들어갔겠습니까. 아마 기겁을 하고 이인간이 미쳤나 하고 튀어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천히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의식을 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은 언제나 마음속에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자의식이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군인들이 계곡에서 뭔가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상관으로 보이는 군인이 세 명의 군인들에게 자루하나씩을 나누어주면서 명령했습니다. “너희들은 지금부터 가서 이 자루에다가 돌멩이를 50킬로씩 담아온다 실시” 했습니다. 병사들은 각각 흩어져서 한 병사는 무식하게 50키로 짜리 돌멩이를 찾아서 한 개를 부대에다 집어넣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30키로 짜리 하나 20키로 짜리 하나 두 개를 집어넣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생각했습니다. ‘야 이 돌멩이를 지고 어디를 가야될지도 모르는데 저렇게 큰 돌멩이를 넣어가지고 가면 지고 가다가 어깨가 빠지는 것 같아서 아마 힘들 거야 하고 자잘한 공기 돌을 천개를 주어서 50킬로를 만들었습니다. 각기 무게를 달아보니 정확하게 50키로 가까이 나갔습니다. 그 다음 명령이 이 병사들을 황당하게 만들었습니다. “지금부터 갖고 온 돌을 제자리에 같다 놓는다. 실시” 하나 가져온 사람은 딱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정확하게 제자리에 갔다 두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도 잠시 망설였지만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천개를 가져온 사람은 단 한 개도 제자리에 갔다 둘 수가 없었습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크기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입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대적입니다. 정서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반감을 느끼고 의지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해서 거역하고 대드는 반역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가 인간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할 때 맹렬함 담대함 끈질김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런 폭력적인 성격을 가지고 하나님이 세워놓은 이 질서에 도전하고 그것들을 거슬러서 자기를 주인 삼는 삶을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결국 온 우주의 중심이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을 밀어내고 자신이 중심이 되고자 하는 것이고 또 최고의 가치가 하나님이신데 자신의 행복을 그 자리에 밀어 넣는 것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크든지 작든지 죄를 추구하면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별로 유쾌한 비유는 아니지만 전국에 많이 좋아져서 요즘은 변소를 치고 이러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다 분리해서 하수처리하게 되어 있는데 얼마 전까지 우리교회도 항상 6개월에 한번 씩 변을 다 퍼내는 작업을 했습니다. 항상 그것을 구청에 전화를 하면 사람들이 아직 출근하기 전 새벽에 일찍 옵니다. 그때 파란 분뇨차가 올 때 항상 음악을 틀고 옵니다.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틀고 옵니다. 베토벤이 살아 있으면 참 썰렁했을 겁니다. 똥차에다 틀어주라고 자기가 작곡한 것이 아닌데 띠리리리리리 하고 옵니다. 그리고 나서 거기에다 커다란 호수를 담그고 열심히 빨아들이기 시작합니다. 한 30분내지 1시간 하면 꽉 찹니다. 그리고 출렁 출렁 거리면서 그 건더기와 함께 도로를 질주합니다. 그게 똥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너무 불쾌하고 돌아가고 코를 막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잘 따라서 몇 번을 걸러서 엷은 필터지에다 몇 번 걸러서 건더기가 하나도 없는 노란 맑은 물로 만들었다고 칩시다. 그것을 스프레이에 넣어서 공중으로 뿌리면 노란 가루가 되어서 흩어지겠지요. 그 두개사이에는 얼마나 느낌의 큰 차이가 있습니까. 저기는 건더기가 출렁거리는 똥이고 이것은 노란 분무입니다. 이것은 예뻐 보이고 저것은 정말 더러워 보이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똑같이 똥물입니다. 그러니까 죄는 크든지 작든지에 차이는 있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그런 죄 때문에 영혼에 깊은 침체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11장 까지는 이 세상에서 다윗과 같이 고결하고 순전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존 오웬 목사님은 다윗을 가리켜서 구약성경에서 그보다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없고 사람 중에 다윗보다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다고 말씀할 정도로 그렇게 순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람의 이제 사무엘하 11장 이하부터 결국 인간의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그가 크고 작은 많은 죄들을 지었지만 성경이 집중적으로 거론하는 두 가지의 심각한 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이 금지한 인구조사를 실시한 사건이었고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사건이었습니다. 인구조사는 정치적이나 행정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한 나라의 인구조사는 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을 매우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인구조사는 주목적이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의 수를 헤아리고 그것으로서 마병의 숫자를 헤아리고 해서 이렇게 전쟁에서 어느 정도 우리들이 군사력이 되는가를 측정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그 일을 하는 것을 매우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순전하게 칼이나 병거를 의지하는 나라가 아니라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을 의지하는 나라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사단의 충동을 받아서 다윗은 인구조사를 실시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온역이 일어나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가는 징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 그 죄는 그렇게 까지 심각하지 않았는데 더 심각한 죄가 발생하게 되었는데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사건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다윗에 대해서 충분히 동정이 가는 대목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정말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았던 사람이었고 정말 어떻게 보면 사람복은 지질이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오죽했으면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라고 말했을까요. 자기를 사랑하던 여자는 자신의 신앙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형들을 사랑했으나 형들은 자기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자식들 중에는 아버지와 함께 터놓고 깊고 경건한 신앙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신앙을 가진 자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 외로움 속에서 살다가 한 여자를 만나게 되고 한눈에 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남편이 있는 여자였고 왕 일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의 임금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간음하게 되었고 그를 통해서 이 시인은 예전에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영혼의 깊은 침체의 지옥 속을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동안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보다 더 크게 보면 하나님의 큰 섭리 속에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아름다운 계시를 남겨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큰 은혜의 계획 속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범죄를 주관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다윗이 육체의 욕심으로 범죄 하였으나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영혼의 깊은 침체의 경험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 오시기 일천년 전에 복음의 깊은 진수들을 이 다윗을 통해 경험하게 하심으로서 그 아름다운 계시들을 시편 속에 남겨놓으셨던 것입니다. 그 심각한 죄로 인해서 그는 구원의 기쁨이 모두 사라지는 경험을 하였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그런 기름부음 받을 때에 주셨던 성령을 거두실 것 같은 위기를 느꼈습니다. 전임자 사울이 하나님이 주셨던 성령을 거두어 가셨을 때 악신에 사로잡혀 미치광이가 되는 비참한 말로를 보았기 때문에 다윗의 두려움은 정말 큰 것이었을 겁니다. 이러한 죄로부터 영혼의 회복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칼빈주의 신학자 벤자민 워필드 박사는 자신의 책속에서 다윗의 이 범죄에 대한 경험은 정말 쓰라린 커다란 영혼의 고통을 동반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이 경험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의 비 할 대 없이 아름다운 은혜의 세계와 용서의 은총을 체험하게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 깊은 영혼의 침체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유일한 방법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진실한 깊고 심오한 회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밤마다 침상을 띄우며 밤마다 요를 적시며 하나님 앞에 기도 했고 그런 간절한 자신의 전 존재를 건 회개의 결단 앞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은총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했습니다. 사유하심이 오직 주께 있나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다윗은 이 복닥거리는 인간사를 초월하여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신 우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경험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큰 은총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그래서 어떻게 보면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그 위대한 하나님의 주권사상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 라고 하는 솔라그라티아의 사상 같은 것들의 뿌리가 사실은 다윗의 경험 속에서 풍부하게 계시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가 성경에서 발견한 두 명의 위대한 스승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구약에서는 철학자 다윗이었고 신약에서는 신학자 바울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지성을 기둥삼아서 아우구스티누스가 그 유장한 기독교의 위대한 신학을 펼쳤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특히 신학과 학생들은 아우구스티누스를 깊이 공부하고 그의 우주적인 신학에 눈뜨는 그런 사람들이 되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그런 처절한 기도 속에서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며 회개 했을 때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를 주셔서 그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정말 죽은 것과 같았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영혼이 다시 소생 하게 되는 영적인 회복을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알게 된 하나님은 범죄 하기 전에 알았던 그 하나님보다 더 커다란 진리의 인식에 대한 지평으로 그를 데려갔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막 솟구치는 은혜의 감격 그것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위대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깊이 아는 지식의 사람들이었고 그러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위대한 지식은 용서의 경험을 통해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사도바울이 주님의 그 위대하심과 자신의 아무것도 아닌 그 비천한 처지를 끊임없이 대조하면서 우리에게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절대적인 의존의 신앙을 가르쳐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용서의 경험을 통해서였습니다. 인생 말년의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감옥에서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뭐라고 말했습니까? 한때는 핍박자요 폭행자였던 자신을 하나님이 일꾼으로 삼으신 것을 찬송하면서 그는 고백 했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예수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하려 이 세상에 임하셨다 함이로다. 내가 죄인중의 괴수로다 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 괴수라고 하는 단어가 프로토스라는 단어인데 첫 번째 라는 뜻입니다. 죄의 크기를 가지고 일렬로 세우면 자기가 일번에 해당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평생을 그 인식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는 자기 자신을 예수그리스도의 둘로스 곧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최근에 아주 흥미 있는 논문하나가 나왔는데 성경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는 번역이 잘못된 번역이라는 논문이 나왔습니다. 그것이 ‘둘로스 크리스투스’인데 예수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노예인데 그것을 영국 사람들이 제임스 버전에서 번역을 하면서 ‘슬레이브’가 아니라 ‘서번트’로 번역을 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노예들을 무역하고 이러던 때니까 그때에 노예들에 대한 노예를 이야기 할 때 나름대로 느끼는 자책감이 있었기 때문에 ‘노예’란 단어가 명백한데 그것을 버리고 ‘서번트’ 라고 하는 단어를 채택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에 나오는 이야기들이고 전 오래전부터 그 사실에 대해서 깊이 동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자기가 그리스도의 노예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모든 시련과 환란 고난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었는데 그 모든 것 중앙에 있는 사도바울의 그 위대한 소명에 모든 외연 중심을 파고 들어가면 마지막에 다메섹에 소명의 문제가 나오고 그 소명의 핵심을 들어가면 그렇게 죄인 중에 괴수였던 자기를 용서하고 이 세상에 인간을 용서해 주셨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셨다 라고 하는 그 사실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경험한 모든 사람의 공통점은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그 사랑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영혼의 침체 속에서 살아간다면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죄의 용서를 경험하게 되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어째든 이 시인에게 있어서 푸른 풀밭에서 먹을 것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도 신앙의 처음시절에는 주님을 자신의 목자로 인정하게 하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지만 자신의 영혼이 삶과 죽음사이를 오가고 있을 때 거기서 주님의 자비로 자기를 용서해주신 경험을 통해서 정말 자신의 일생을 다 드려 섬겨도 아깝지 않는 그런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이 시인이 터질듯 한 신앙의 감격으로 하나님 앞에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죄 가운데서 죽은 자와 같던 나의 영혼을 소생시켜주셨사옵나이다. 그러면서 가슴벅차하고 있는 이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이제 그 이후가 우리의 관심을 끕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혹은 우리말에는 표현이 없지만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나이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여기에서 ‘의’ 라고 하는 단어는 ‘체데크’, ‘체다카’, ‘체데크’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의’는 그야말로 ‘불의’의 반대입니다. 그러면 ‘의’, ‘불의’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 당시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삶의 기준과 표준이 율법이었습니다. 특히 모세가 가르쳐준 율법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이 나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지만 그것은 모세가 살았더라면 어떻게 했을까 라고 하는 설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사실은 선지서는 모세오경에 나타난 율법을 가지고 그 시대에 백성들을 향해서 해설을 하고 그 시대에 삶을 모세오경에 적용하는 외침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의식이 분명해야 되었는데 하나는 율법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그 시대에 정신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는 시대에 대한통찰 그리고 이 두 가지 지식을 하나님을 아는 ‘다트 엘로힘’,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에서 이것들을 녹여 내므로 서 당 시대에 유능한 선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주의 종이 되려면 우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오후에도 제가 공부 열심히 하라고 이야기 한 것처럼 공부안하면 그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 시대가 무엇인지 또 이 시대가 무슨 시대인지 어떤 정신을 가지고 있는 시대인지를 이해하고 이 두 가지 지식을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앎으로써 통합시키면서 비로소 무엇을 외쳐도 한 시대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설교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단상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가르치고 그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아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고 가슴을 치게 만드는 것은 하루 이틀에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됩니다. 난 공부하지 않는 신학생을 보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한 10년 있다가 진짜 쓸모없는 사람이 됩니다. 정말 사라졌으면 좋은 사람들이 됩니다. 그래도 목사 되기 전에 아예 깨끗이 정리하고 그만 두면 도움이 될 텐데 꾸역꾸역 그 길을 가고 그 나이에 안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게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비굴 합니까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이 시인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신 것은 시인의 뭘 보고 해주신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 계획은 의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이었습니다. 그 의의 길이 무엇입니까? 불의한 길의 반대입니다. 그러면 불의한 길은 무엇입니까 의에 길의 반대입니다. 그럼 도대체 무슨 이야기이냐 결국 불의한 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거슬려서 사는 삶이고 의로운 삶은 그 율법을 지키면서 그 율법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이유는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그런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가리켜서 존재의 울림이라고 표현합니다. 성공했기 때문에 ‘아 정말 저 사람은 좋겠다, 나도 저사람 믿는 하나님을 믿어볼까 ’ 하는 이런 것들은 존재의 울림이 아닙니다. 예수 믿지 않고도 엄청난 성공을 이룬 사람들이 더 많아요. 높은 지위에 올랐기 때문에 선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존재의 울림은 이 사람이 나보다 더 성공했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무릎을 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의 사회적인 지위가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인간으로서 그 사람 앞에 서면 왠지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드는 그런 울림이 바로 존재의 울림입니다. 그런 존재의 울림이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이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형성하셔서 우리들을 이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맛을 잃은 세상에 소금으로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길이 바로 의의 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항상 의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좋아하거나 기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본질적으로 악한세상이기 때문에 가끔씩 의로운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칭찬해 주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세상은 자기를 주인 삼은 사람의 나라이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주인삼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질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나라이고 이 세상 나라는 사람을 임금삼고 사람이 주인이 되고 사람이 그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는 세상이기 때문에 결국 마지막에 어느 한 순간에는 이 두 가지의 가치관이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것을 순순히 굴복하고 타협하면서 살아가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두운 세상에서 빛을 나타내고 맛 잃은 세상에서 맛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섬김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디트리히 본훼퍼라는 독일의 신학자는 자기의 글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정직한 마음으로 복음서를 읽어보자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얘들아 모두 내게로 오너라. 우리 모두 같이 가서 죽자. 이것이 복음서의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그 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요즘에 순교의 위협을 받을 만한 때가 있나요? 누가 예수 믿는다고 잡아 죽이는 나라가 있습니까? 나는 전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기독교신앙의 자유를 보장받고 있는 나라가 우리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교회 짓는데 동네사람 청문회도 안하고 교회 막 짓고 2층에다 간판 걸어서 교회이름붙이고 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 미국과 우리나라 중 어느 나라가 기독교의 자유가 풍부하냐고 묻는다면 5초도 망설이지 않고 미국은 따라올 수도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미국은 땅 사서 교회지어도 교회 자기 맘대로 짓지 못합니다. 온 동네사람 청문회 해야 됩니다. 우린 그런 것 없습니다. 내일이라도 가서 이층에다 십자가 붙이고 예수찬송 부르면 교회가 시작됩니다. 이런 나라가 없습니다. 누가 순교하게 합니까? 그렇지만 성경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은 이미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천국의 복락을 누리는 그 순간부터 자신의 생명과 삶을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덤으로 사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장열하게 죽을 준비를 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 기회가 올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는데 그러나 항상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의에 항거하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의 단오하고 용기 있는 삶을 보면서 정말 진리가 아직까지도 시퍼렇게 살아있구나 라는 것을 사람들이 인식하게끔 만들어주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여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 25년 전 일이었습니다. 1999년도 일입니다. 한 26년 정도 되었습니다. 이미 교회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요즘은 제가 저 공부하기도 너무 바쁘고 책 쓰기도 바빠서 집회를 안갑니다. 신학교에서 오라고하면 일순위로 가지만 웬만하면 안갑니다. 그때는 하여튼 열심히 다녔습니다. 한번은 충청도 있는 어느 대학에서 나를 불렀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차를 타고 일찍 출발했는데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났습니다. 차가 잔뜩 밀렸습니다. 지방도로로 빠져나오니까 시간이 촉박해서 막 좀 밟았습니다. 그랬더니 저기서 교통경찰관이 언덕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도를 줄였습니다. 그랬더니 차를 세우고 경례를 합니다. ‘면허증 좀 보여주세요, 왜요? 속도위반 하셨습니다. 아 내가 무슨 속도위반 했습니까 이렇게 천천히 왔는데 무슨 속도위반을 했다는 것입니까? 했더니 ‘예 여기서는 속도위반을 안 하시고 산 너머에서 속도를 과속했습니다. 산 너머에서 내가 과속한지 당신이 어떻게 압니까? 하니까 자기 동료가 거기 있어서 스피드건으로 쏘고 그 속도를 자기한테 무전으로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할 말이 없습니다. ‘아 미안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딱지를 끊어 주세요’ ‘뭐하시는 분이세요? 하는 겁니다. 그래서 대학에 선생으로 있고 여기 있는 대학에서 저에게 특강을 해달라고 불러서 가는 길인데 시간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아 교수님이시군요. 걱정 마세요. 제가 싼 걸로 벌점 없는 걸로 끊어드릴게요.’ 하면서 끊어주었습니다. 난 별로 생각도 않고 아예 하고 제가 벌금 내겠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없으니까 햇빛 가리개에다가 꽂아놓고 간신히 도착해서 잘 집회를 하고 그 날 밤에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그 고지서 생각이 나서 벌금내야지 하고 직원을 시킬까하다가 은행가는 길에 내가 가서 가지고 가서 내가 내야지 그리고 문제는 창구 앞에 서서 도대체 얼마인가 하고 펴보니까 과태료가 너무 싼 겁니다. 6천 원인 것입니다. 속도위반 했으면 최소한 이 만원은 내야 되는데 그리고 다시 보았더니 틀림없이 6천원입니다. 그 때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서 이게 뭔가 하고 다시 보니까 비고란에다가 범칙사유가 써있었습니다. 금연 장소에서 담배피우다 걸렸음, 그랬습니다. 그러니 그거 만약에 교회직원 들려 보냈으면 우리 목사님이 어디 가서 담배 피다가 걸려가지고 교회가 큰 시험에 들 뻔 했습니다. 그때 그것을 내고 걸어 나오면서 굉장히 생애적인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건 정말 아니다 이건 아니다 그 다음부터 원칙을 세웠습니다. 교통법규를 지키자 그 대신 부득이하게 위반했을 때는 법이 정하는 처벌을 모두 받자 그랬습니다.
그 다음에 차를 타고 가는데 유턴하게 되었는데 차들이 유턴차선을 가로 막아서 그 뒤로 돌았더니 경찰이 지하도에서 숨어 있다가 뛰어 올라오는 겁니다. 우리나라 경찰은 왜 그렇게 치사합니다. 면허중 주세요,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왜 그럽니까? 했더니 도로교통법 위반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야 도로교통법 나도 아는데 1조를 봐라 이 법은 교통을 원활하게 하기위한 법이다 그랬다 내 차선을 가로막고 있는데 어떻게 하냐 그 차들도 다 딱지를 떼어야 한다, 그랬더니 어째든 선생님은 잘못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똑같은 이야기 하는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벌점 없는 싼 걸로 끊어드리겠습니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그거 안 된다 너에게 그런 권한이 어디 있느냐? 너는 잘못한 것을 지적할 수 있는 권한이 있지 네 마음대로 법규에 어긋나게 점수를 깎아주고 벌금을 적게 내게 하고 그러는 것은 그것은 판사나 하는 거지 네가 하면 되냐 했더니 알았어요. 법대로 해드리면 될 것 아닙니까 하면서 벌점 15점에 벌금 6만원하고 확 끊어주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일은 학교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 학교에서 교수면접을 하면서 주거환경이 어떻습니까? 그래서 이천만원 전세에 세 식구가 살고 있습니다. 방두 개입니다. 그랬더니 교수님이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우리학교가 오천만원을 드리겠습니다. 좀 좋은 집을 빌려서 편안하게 사십시오. 그래서 싫다 그럴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받아서 빌려주는 것이지만 살았습니다. 그리고 한 일이년 살았는데 저 건너편에 빌라였는데 건너편에 있는 사람이 목사님 할 말이 있다고 왔습니다. 하고 우리 집사람한테 하나님이 기도하는 데 이 집을 목사님한테 팔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니 하나님도 이상하시지 그걸 팔려면 우리한테 이야기 하시지 왜 당신한테 이야기 하시냐 우리는 살 마음이 없는데 하고 어쨌든지 간에 사게 되었습니다. 정말 놀란 것은 사가지고 세금을 내러 가서 세금이 얼마입니까? 하니까 얼마라고 이야기하는데 깜짝 놀랄 정도로 큰 금액입니다. 무슨 세금이 그 쪼그만 집에 이렇게 많냐고 하니까 법무사 사무실에 아가씨가 말하는 겁니다. 많으세요? 많죠. 쪼그만 집에 무슨 세금이 이렇게 많아요? 그랬더니 그럼 반만 내세요. 그래서 무슨 세금이 그런 세금이 있냐? 그랬더니 둘이서 계약서를 다른 것으로 써서 집값을 3분의 2정도 줄여서 계약서를, 그게 요즘 이야기 하는 이중계약서입니다. 그 당시에는 다 그렇게 했답니다. 여보, 이렇게 면 세금을 좀 깎아 준다는데요.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보 집을 사는 사람은 목사이고 파는 사람은 집사인데 둘이 앉아서 가짜 계약서를 쓰고 있으면 하나님이 성령님이 정말 감동하시겠다.’ 로마서 13장에 봐라. 국세를 바칠 자에겐 국세를 공세를 바칠 자에게는 공세를 바치라고 했잖아. 다 내야 된다. 그러고 나서 세금을 내야 되는데 돈이 없는 겁니다. 돈이 없습니다. 우리아들 벙어리 저금통까지 뜯어서 돈을 챙겨서 갔습니다. 계약서 새로 써오셨어요? 그냥 다 내려고요. 했더니 그때 여직원의 눈빛이 어땠겠습니까? ‘아 존경스러워 정말 나는 너무 애국심이 없어 이 분 좀 봐. 이렇게 세금을 다 내시잖아. 아유 존경스러워.’ 이랬겠습니까? 아니면 ‘아이구 병신’ 그랬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그러다 더 큰일이 내 생애에 터졌습니다. 방배동의 지하실에서 7명 데리고 교회를 하다가 교인이 한 250명 정도 되는데 큰 예배당으로 갔는데 사글세로 갔습니다. 때가 되니까 건물 주인이 나가랍니다. 교인이 벌써 한 1300명이 되었습니다. 갈 때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고민을 하는데 가기도 싫은데 안양 평촌이라는데 땅이 있답니다. 그래서 갔더니 땅을 사고 팔게 되었습니다. 안 판답니다. 그래도 좀 팔으라고 하니까 뭘 하려고 하냐고 해서 교회를 짓는다고 그러니까 그 할아버지가 생각을 해보자 하더니 일주일 있다가 땅을 팔겠답니다. 그러더니 36억에 땅을 팔겠다고 해서 좋다 그러고 계약을 했는데 교회에 돈은 1500만원 밖에 없었습니다. 36억짜리 집을 사는데 전부다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은 정말 담대했습니다. 고민도 안했습니다. 충만하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돈 나올 때는 안보였습니다. 오늘 찬송했잖아요. 책임지신다며 하나님이 그랬더니 교인한사람이 너무 불쌍하니까 3억을 빌려주었습니다. 그 다음이 문제가 벌어졌습니다. 36억에 해주는데 30억은 계약서를 쓰고 6억은 비자금으로 달라는 것입니다. 그게 왜 그러냐 그랬더니 세금이 너무 많이 나와서 자기가 교회에 그냥 땅을 계속 값이 올라가는 땅을 그냥 넘겨주는 것인데 대출 받은 게 많아서 교회에 36억을 받고 팔면 자기돈 2억을 보태야만 청산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버려두면 계속 오르는 땅인데 교회에 그냥 줄 수 있지만 내 돈을 보탤 수는 없지 않느냐 그러는 것입니다.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제직들을 불러서 이것을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고민도 하지 마시래 세상 땅 거래 다 그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하면 된다고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회계사를 불러 물어 보았더니 목사님 해도 되는데 장부를 두 개를 쓰셔야 됩니다. 가짜 장부 , 진짜장부 그래서 내가 이건 아니지 그거 교회에서 진짜장부 가짜장부 이중장부를 쓴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래서 세금이 얼마냐 그랬더니 3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36억을 달라는 땅을 39억을 주고 샀습니다. 39억을 줄 테니까 우리보고 이중계약서 쓰라고 하지 마라 난 그 때 체험을 했습니다.
강대에서 올바로 살아라 말씀대로 살아라 이것은 되게 쉬워요 그런데 실제로 자기가 이익에 문제에 부딪쳐서 씨름을 할 때에는 3억이 지금도 큰돈이지만 그 당시에 우리로서는 아직도 어쩌면 그 돈을 아직도 못 갚았는지도 모릅니다.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은 입술에 침만 바르면 진리를 말할 수 있지만 그 진리를 따라서 살아가려면 피가 나야 됩니다.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영혼을 끊임없이 소생시켜주고 회복시켜주시면 그렇게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정의로운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정의롭지 않은 삶을 살 때는 외톨이도 되고 핍박도 받고 그러는데 그거 다 당하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주님을 위한 고난입니다. 그래서 외톨이가 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진리가 아닌 편에 다수에 서서 외롭지 않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필요하다면 진리 때문에 외톨이가 되고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정신병자 취급도 받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 사셨습니다.
총신 다닐 때 일이었습니다. 학생들이 컨닝을 자꾸 하는 겁니다. 내가 아주 토할 것처럼 싫어하는 게 컨닝입니다. 너무 분개하니까 학생들이 시험시간에 컨닝을 합니다. 학생들이 왜 그럽니까 그리고 나서 그 수요일이 시험 보는 날이었는데 그렇게 컨닝하고 시험보고 수요일 날 가서 설교할거 아닙니까 그게 말이 됩니까? 너무 답답합니다. 교수님은 또 너무 신사적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믿습니다. 그리고 갑니다. 아니 믿을 것을 믿어야지 신학생을 믿으면 됩니까, 신학생을 믿으면 안 됩니다. 막 보고 쓰는 것입니다. 뒤에 학생이 컨닝 하지 맙시다. 보고 쓰지 맙시다. 그러니까 앞에 있는 학생이 그런 말 하지 맙시다. 너무 화가 나니까 몇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서 정화운동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런 컨닝을 하고 레포트를 베껴 쓰는 것은 거짓말이다. 사기다. 이것은 십계명에 위반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학교에다 강력하게 감독을 해달라고 요청을 하고 그리고 만약에 부정행위하다 걸리면 교계신문에 내고 당회에다가 통보해서 일생을 아예 합동측 교단에서 매장시켜버리자 웃으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로 교회신문이 아니라 돈을 모아서 사대 일간지에다가 내자고 했습니다. 아무 아무개 사람은 컨닝 하다 걸린 사람이다. 그래서 아예 이 땅에서 발을 못 붙이게 하자 그랬습니다. 수많은 학생들이 서명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주동했던 학생들이 뒷산에 끌려가서 죽도록 누군가에게 뚜들겨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 학생들 중에 대부분이 너무 상처를 받아서 자퇴해버리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컨닝 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게 뭡니까.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제가 육군사관학교에 근무했었는데 완벽하게 무감독 고사입니다. 학생이 컨닝 하면 옆에 학생이 고발합니다. 너 같은 치사한 놈 하고 같은 육군사관학교에 다니는 것이 수치스럽다 그러고 고발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런 젊음의 시절에 칼날 같은 양심을 가지고 괴로워하면서 살아도 윤동주 시인처럼 잎새에 이는 바람 하나에도 괴로워하며 살아도 나이가 들면 그렇게 그렇게 되는데 하물며 지금부터 이리저리 흔들리고 정의에 대한 관념도 없이 어떤 의에 대한 도전도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앞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분투하는 삶이 되겠습니까? 가장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가장 정치인들하고 결탁하고 온갖 혜택을 다 누리고 그렇게 하면서 사회의 불의에 대해서 항거할 줄 모르고 그까짓 것 봉은사 역하나가지고 목숨을 걸고 싸우고 그게 무슨 기독교 신앙입니까? 같은 예수 믿는 사람입장에서 볼 때도 너무나 졸렬하게 보이는데 안 믿는 사람들이 볼 때에는 어떻게 보일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한다면 총신대역도 없애야지 그게 뭡니까. 보다 더 커다란 대의를 위해서는 작은 것을 위해서는 양보하고 더 큰 대의를 위해서는 정말 목숨을 걸어야 되는데 큰 거는 대충 넘어가고 작은 것을 위해서는 순교의 각오를 불사합니다. 이유는 절대로 죽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순교의 각오를 냅니다. 올바른 삶의 질서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모든 불의에 항거하는 그런 의로운 마음을 간직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그런 것들이 어떤 분노나 억압 속에서 표출되는 그런 것이 아니고 폭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그래서 어거스틴이 말했습니다. 사랑이야 말로 정의를 완성하고 그리고 정의 안에서 사랑이 완성됩니다. 둘이 서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분이 정말 올바르고 투철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합니다. 정말 그래야 합니다.
외국에 가보면 너무 마음 상하는데 어떤 학생들은 유학생이 돈이 없어서 밥을 쫄쫄 굶을 정도입니다. 한 학생은 장학금을 여기저기서 세 개씩 네 개씩 받습니다. 돈 벌러 유학 온 것도 아닌데 그런 공정하지 못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그 뿌리가 결국 마지막에 자기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은혜를 주시고 회복시켜주시는 것은 그 하나님의 은혜 안에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이 있습니다. 그 소명을 따라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고난도 주시고 시련도 이기고 이 세상에 불의와 항거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삶을 살면서 불의에 대해서 강직하게 말하고 사랑하고 끝까지 이 현실에 하나님의 말씀과 조화시키려고 노력하지만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면 단호하게 그 고리를 끊고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를 외치고 그리고 핍박을 받으면서 마지막에 안 되면 장열하게 죽어가는 것이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회복된 영혼으로 정말 이 사회를 이 교회를 바라보면서 무엇이 하나님 앞에 옳은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이 세상의 가치와 다른 삶을 살아야 될 것인지를 깊이 생각하고 그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자원들을 이 의로운 삶을 구현하는데 사용해서 여러분을 보는 사람마다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있는 것을 보여주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