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엘로 올라가자 12
떠나가는 부흥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야곱이 하나님의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창35:12∼14)
오늘은 11절의 지난 시간에 한 것을 다시 한 번 더듬어보면서 그러면서 가능하면 13절까지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이제 벧엘에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은 ‘생육하며 번성하여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그랬거든요. 거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뭐냐 하면 관심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를 하나님께서는 하시는 것이에요. 야곱의 관심은 34장을 보시면 아시지만 그런 것이 야곱의 관심이 아니었어요. 야곱의 관심은 무엇이었어요? 강간당하고 그리고 브리스족속과 가나안족속이 자기들을 보복하려고 먼 길을 떠났을 가능성이 있는 그러한 위험, 그런 위기, 이런 것들을 깊이 느끼고 있는 그런 상황에서 이런 것은 지금 전혀 야곱의 생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에요.
그러나 보세요. 인생 자체를 보는 관점이 야곱이 자기의 인생을 보는 관점과 하나님이 야곱의 인생을 보는 관점이 얼마나 틀린가하는 것을 보라는 것이죠. 기껏해야 야곱은 33장에서 하나님 앞에 감사기도를 드리고 단을 쌓았다고 하지만 그러나 기꺼해야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자기가 하나님을 잘 믿고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축복하시고 그렇게 하나님과 협동작전을 펴서 세상을 잘살아가는 것, 그 이상은 아니었어요. 28장에서도 그렇고 32장에서도 하나님을 만났다고 그랬지만 그랬고, 또 33장에서도 그랬고 그런 정도의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이죠. 하나님은 그의 인생을 그렇게 보신 것이 아니죠. 놀라운 것이에요. 그게 뭐에요? 너는 야곱이지만 야곱이 아니다. 모든 민족을 구원하는 구원의 거대한 역사의 드라마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한 주인공으로 너를 세웠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계속해서 야곱이 보는 그런 관점으로 우리의 인생을 보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고달픈 것이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서 우리를 왕의 자녀로 부르셔서 커다란 나라를 이어서 다스릴 그러한 유업을 우리에게 주었는데 우리는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가난한 집에서 이제 부자 집으로 양자로 왔으니까 먹을 것도 많고 입을 것도 많겠구나.’ 라는 정도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인생을 보는 시각자체가 하나님이 보시는 인생의 시각과 우리가 보는 인생의 시각이 차이가 나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과 딱딱 맞지가 않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살아가는 인생이 하나님은 또 반드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끌고 가시고야 말거든요. 그분은 그분대로 끌고 가시려고 하고 우리는 우리대로 못 끌려가니까 옛날의 저같이……. ‘예수를 몰랐다면…….’ 하는 그런 이상한 소리가 나오는 것이에요. ‘얼마나 좋았을까…….’ 엉뚱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에요.
(예화) 이 이야기를 좀 더 실감나게 하기위해서 제가 비유를 하나 들어볼게요. 아니 후사가 없었어요. 왕이 옛날이야기를 좋아하면 동화책처럼 옛날이야기를 제일 재미있게 해주어서 공주를 웃기는 사람에게 왕위를 주겠다면 좋겠는데 이 사람은 옛날이야기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공주는 원래 잘 웃는 사람이니까 문제가 안 돼요. 그래서 늘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에요. 그러다가 아직 공주가 어리니까 그러면서 생각을 하다가 이게 부마 감을 고를 것이 아니라 아들을 하나 골라야겠다고 평민 복을 입고 민정시찰을 나간 것이에요. 그래서 저 달동네서부터 시작을 해서 방배동의 호화주택까지 다 누빈 것이에요. 누비다가 보니까 부잣집 애들은 버릇이 없고 쓸 만한 애들이 없어요. 그래서 빈민촌에 와서 아 정말 눈에 총기가 나고 영특하고 정말 확실한 애가 하나 있어요. 그래서 그 아이를 양자로 삼기로 결심했어요. 그래가지고 양자로 삼아가지고 데리고 들어왔거든요. 데리고 들어왔는데 가난한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데리고 들어와서 전부 다……. 저는 왕궁에 들어가 본적이 없어서 모르겠습니다만 법도가 얼마나 복잡하겠어요? 말하나 마나죠. 그렇게 해서 다 씻고 그 다음에 좋은 옷을 입혀놨는데 입혀놨어도 아직 그 사람은 빈민가에서 놀던 애에요. 하는 것도 전혀 변하지 않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가 자기 앞에 있는 그 유업이 얼마나 큰 것인지 모르는 것이에요. 왕이 죽고 자기가 그 왕위를 물려받으면 천하의 모든 나라가 자기가 그 나라를 다스려서 백성들을 행복하게 살게 해야 한다는 커다란, 말하자면 사명이, 그리고 자기의 신분이 바로 그런 신분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전혀 몰라요. 단지 하나 감사해요. 왜 감사하느냐하면 예전에는 보리밥도 못 먹어서 늘 고생했는데 이제 왕궁에 와보니까 호화스러운 반찬과 그 화려함에 취해서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에요.
이렇게 야곱이 보는 인생의 시각과 하나님이 보는 인생의 시각이 그런 것이에요. 구비치는 구원의 역사의 큰 파노라마에 없어서는 안 될 주인공들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부르신 것이죠. 그러면서 이 세상에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이에요. 그런데 전혀 깨닫지를 못해요. 깨닫지를 못하니까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과 너무 커다란 차이가 나는 것이에요. 그러면 인생이 고달파지는 것이에요. 쉽게 얘기해서 하나님을 믿으면 주님이 복을 주시고 이 땅에서 살게 된다는 그런 사실을 공식화하기는 어렵지만 그러나 그런 것이 전혀 필요 없다든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에요. 보세요. 실제로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살면 잘살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 않아요? 무슨 복권에 당첨 되가지고 졸지에 갑부가 된다든지 그런 것이 아니라도 잘 살 수밖에 없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예수를 믿고 나니까 어때요? 술 먹고 담배피고 쓸데없는데 가서 돈 뿌리고 그리고 돌아다니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이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정신이 똑바로 박혀서 신앙생활을 해봐요. 그렇게 살수가 없잖아요. 자기가 지금 죽으려고 기를 쓰기 전에야 그럴 수가 없지요. 검소하게 살게 되잖아요. 사치하지 않게 되잖아요. 왜? 사치하면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것이 느껴져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게 살게 되지요. 검소하지요. 수입은 계속 그대로죠. 술 안 먹죠. 담배 안 피우죠. 가정이 화목하지요. 그리고 가서 무슨 투기 같은 것은 안 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착실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이 세상적인 삶에 있어서 먹고 사는 것에 있어서의 위기를 잘 안 만난다고요. 물론 사업을 하다가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뭔가 인생의 결단을 요해서 벽에 부딪히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가서 봉급이나 타고 생활하고 하는 사람들이 무슨 커다란 위기를 만나겠어요. 신실하게 신앙생활하고 미리 하나님 앞에 이 길인가요? 저 길인가요? 하고 물어보며 이 길을 가지 말라고 하면 ‘아멘’ 하고 가지 않으면 무슨 위기를 만나겠어요?
모든 대부분의 위기와 시험은 정욕 때문에 비롯되는 것이에요. 쓸데없는 탐심 같은 것 때문에……. 그러면서 매일 걸어가는 거지요. 그러면 수입은 계속 늘어날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죠. 또 그 돈 가지고 십일조하고 감사헌금하고……. 옛날에 말이에요. 예수를 제대로 믿기 전을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예수 믿기 전에 쓸데없이 쓰던 돈, 술 먹고, 다방에 들어가고, 담배나 피고, 괜히 객기 부리던 그런 돈이 어디로 가느냐하면 교회로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얼마나 좋게 보시겠어요? 좋게 보시는 것이에요. 사실이에요. 그렇잖아요. 그러면서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분이심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차츰차츰 살아가는 것이죠.
저희는 엄청나게 부자였다가 제가 돈을 쓸데쯤 되니까 쫄딱 망해가지고 아버지가 제주도로 강원도로 전라도로 막 도망 다니고 빚쟁이들이 와서 소주병으로 양복장을 다 때려 부수고 그런 암울한 시기를 겪었어요. 그리고 밥 먹고 살게 된 게 언제였느냐 하면 내가 예수를 믿게 되면서부터였어요. 아니에요. 확실해요. 창세기 39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나는 확실히 믿어요. 요셉을 인하여 보디발의 온 집에 하나님이 복을 내리셨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어요. 왜냐하면 자기 혼자 잘사는 것은 잘사는 것이 아니에요. 자기 혼자 안정된 것은 안정된 게 아니라고요. 내가 밥술이나 먹고 편안하게 사는데 부모가 만날 굶는다, 먹는다 하고 형제들이 만날 빚에 몰려서 쫓겨 다닌다면 그게 잘사는 것입니까? 그럴 수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신통한 게 하나도 없지만 이 사람들이 곤란을 당하면 이 하나님의 자녀인 내가 어려움을 당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할 수 없이 사은품으로 손을 봐주는 것이죠. 보너스로……. 그것을 알아요? 몰라요. 뭘 모른다고요. 그래서 나라의 위기도 마찬가지에요. 어떤 때에 위기가 와요?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 제대로 못 살 때 위기가 오는 것이에요. 나는 그런 것을 많이 경험했어요. 우리 아버님이 종가집의 종손이에요. 그러니 제사 섬기는 것을 위해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내가 늘 그랬어요. 그렇게 조상을 섬기듯이 하나님을 섬기면 순교도 할 것이라고 했어요. 돈은 하나도 없는데 일수 돈을 얻어서 묘지를 넓히고, 비석을 세우고……. 세상에……. 그래서 조상들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그렇게 섬기지…….
그런데 변해요. 많은 역사가 일어나요. 지금은 우리 집사람 들어오고 나서도 열심히 전도를 해서 이제는 온 가족이 복음이 다 전해져서 다 믿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제 어느 날 ‘나는 이제 제사를 안 지낸다.’ 다 팽개쳤어요. 그러니 삼촌들이 ‘아니 장조카가 제사를 안 지낸다니 무슨 소리냐?’ 그 자리에서 아버지가 정색을 하고 ‘내가 삼촌들 아버지 제사를 지낼 때 온 적이 있느냐?’ 할 말이 없는 것이죠. ‘가져가라.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겠다.’ 하여튼 뭐 바늘로 찔러도 피도 안 나오시는 분인데 돌아섰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누룩과 같은 것이에요. 한 사람이 신실하게 믿으면 하나님께서 주위를 다 정리해주셔요. 끼니걱정을 하고 고달픈 인생을 살다가 우리가 먹고 살게 된 것은 솔직히 말해서 그 때부터였어요. 이제 다들 평안해요.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아요. 복을 주셔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것을 추구하면 그 때부터 복잡해지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주님이 원하시는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쪽 방향으로 예수를 믿고 나서 방향이 그쪽 방향으로 전해지고 그쪽 방향으로 데시를 하게 되면 굉장히 어려운 문제로 비비꼬이게 되는 것이에요. 왜 그러느냐하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으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십일조와 감사헌금과 건축헌금을 왕창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하는 그 계산이 깔려있는 상태에서 하나님께로 접근하는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금을 하는 것도 물론 귀하지만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관계는 뭐냐 하면 거래관계가 아니에요.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신다고요. 인격적인 관계와 함께 어디에 눈을 떠요? 야곱이 겨우 생각해서 어떻게 하면 디나, 강간당한 이 녀석을 어떻게 처리해야하나? 별의별 생각을 다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야곱의 인생을 바라보시면 생각하는 것은 뭐냐 하면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신약으로 내려가는 그 장엄한 구원의 역사의 물줄기에 없어서는 안 될 한 주인공이 되게 하셨던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때요? 그러한 물줄기속에 자기가 서 있고 그 거대한 역사 속에 자기가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주님이 주셔도 더 이상 그런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아, 그 까짓게 무슨 문제에요. 지금 구비치는 구원의 물결을 통해서 자기의 허리에서 수많은 민족이 나오고 열 왕이 나오고 마지막에는 그 핏줄을 통해서 구속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메시야가 일어나서 무너지지 않는 영원한 다윗의 왕국이 세워지는 이러한 놀라운 구원의 역사의 파노라마 위에 주인공으로 서있는데 지금 그 까짓게 뭐가 문제에요? 그러니까 저는 교회에 많이 다녀봤잖아요. 헌금은요? 교인들로부터 헌금을 많이 받아내는 비결은 간단해요. 간단한데 그것은 뭐냐 하면 부흥이 일어나게 해야 돼요. 그러면 다 내놔요. 싹 내놔요. 정말 다 내놔요. 마지막에 내놓고도 통곡을 하게 만들어요. 왜? 드릴게 없어서…….
그것은 치사한 것이에요. 나는 실제로 봤거든요. 세워놓고 ‘직분이 뭐요?’ (꼭 반말을 해요.) ‘집사입니다.’ ‘얼마 낼 거요?’ 옆에서 다 적어요. 그러고 나서 나중에 시험에 들고. 어떤 때는 막 기도하다가 ‘일억’ 하면 ‘아멘’하고 손들었다가 나중에 집에 와서 후회하는 거예요. 내가 정신이 돌았지……. 왜 거기서 손을 들어가지고…….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어요. 부흥이 일어나면 다 바치지 못해서 안타까워해요. 육체를 쪼개서 하나님 앞에 드리고 싶은데 그 까짓게 뭐가 문제가 되겠어요. 하나님 앞에 다 드리고 싶은데……. 그런데 헌금을 너무 안 해요. 이정도 가지고 안 돼요. 쉽게 얘기해서 너무 짜요.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어느 교회, 어느 시대이든지간에 부흥이 안 일어나고는 헌신이 안 나오는 것이에요. 물론 개중에는 교회를 지으면서 구역별로 할당을 해가지고 보험을 모집하러 다니는 사람처럼 교역자들이 돌아다니면서 걷어가지고 막대그래프를 그려놓는 교회도 보았어요. 그런 것은 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에요. 그런 인생 자체를 보는 시각을 좀 바꿔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부흥을 보게 되면 부흥을 깊이 경험하게 되니까 야곱의 눈에 이런 것이 보이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그것이 뭐냐 하면 수준이 훨씬 높아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시점에서 맨 처음에 강좌를 열 때 33장 34장을 이야기하니까 여기뿐만이 아니라 대부분 그래요. 33장, 34장 강의를 할 때는 막 부흥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야기해도 다 가슴에 다가오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야곱의 고민이 내 고민이니까 생각할 필요 없이 가슴에 찹쌀떡처럼 딱 달라붙는 것이에요. ‘아, 저 이야기가 내이야기다.’ 하면서……. 그런데 이제 35장을 넘어가면서 강의를 하는 제 입장에서는……. 이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에요. 구비치는 구원의 역사에서 내려다보고 얘기해라. 그런데 이제 바닥에서 노는 사람들은, 아래에서 노는 사람들은 그 입장에서 인생을 바라보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쪽으로 껑충 뛰어올라오면 이해가 안가는 거예요. 왜? 자기는 이런 것들 때문에 고민해본 적이 별로 없거든요. 이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현실적인 일, 현실적인 고민, 이런 것들 때문에는 막 마음아파해도 이 구비치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물줄기에서 내가 시점에 서있는가? 그리고 이 구원의 역사는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하는 이러한 장엄한 역사의……. 하나님께서는 없어서는 안 될 역사의 주역들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높은 곳에서 이렇게 내려다보면 아래에서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우스운 것이죠.
지금은 거의 들어갔습니다만 한 20년 전에 리처드 바흐라고 하는 비행기 조종사 출신의 작가가 갈매기의 꿈이라는 책을 쓴 적이 있어요. 삼일 만에 그것을 썼다고 하는데 거기에 보면 그런 얘기가 나오죠. 만날 갈매기가 배에서 쓰레기를 버리면 갈매기가 새카맣게 덤벼들어서 그 쓰레기 더미를 주워 먹는 거예요. 그러면서 거기서 서로 주워 먹기 위해서 갈매기가 싸움을 엄청나게 잘해요. 막 쪼이면 머리통이 터져서 피가 철철 흐른다고요. 그 쓰레기를 서로 주워 먹으려고……. 그러다가 이제 조나단 리빙스턴 시갈 이라고 하는 갈매기가 가만히 생각하니까 갈매기의 삶이 이런 것이 아닌 것 같아. 그래서 나중에 생각을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창공을 나는 것을 배우는 것이죠. 높이 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없잖아요. 쓰레기는 다 밑에 있으니까. 그런데 높이 솟아오르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그 속에서 그는 비행을 하는 자유로움을 느끼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가 마지막에 덧붙이는 말이 뭐냐 하면 ‘그렇게 내가 비행에 몰두할 때 내가 더 좋은 먹이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런 높은 구원의 역사의 물줄기에서 하나님은 야곱의 인생을 바라보고 계시는데 야곱은 계속해서 그 바닷가에서 쓰레기더미나 주우면서 살아가고, 생선 한 토막을 주우면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고, 또 못 주우면 원망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추라기를 먹고 싶다고 하나님 앞에 투덜대고, 삿대질하고, 그러면서 또 홍해가 갈라지면 막 박수를 치고 신나하고, 그러는 것이죠. 그럼 하나님께서 그 높은 곳에서 야곱의 인생을 바라보시는 것이죠. 깨닫고 그와 같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해하고 그런 수준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이죠. 그런 목표를 그것이 ‘뜻이 하늘에서 이룸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 다음에 ‘나라에 임하옵시며…….’ 그것이 다 거기에 연결되는 것이에요. 그렇게 주님이 기도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인생과 연결이 되는 것이에요. 보세요. 상관이 없는 구약과 신약인데 그렇게 만나잖아요. 그러니까 어때요? 그런 것에 눈을 뜨지 못하면 인생을 살아가는 것과 예수 믿는 것 자체가 너무 고달픈 것이에요. 그러니까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정말 도움이 되는가? 이런 극단적인 질문까지 나오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부르신 것은 여러분들이 아플 때에 가서 좀 위로해주시고 그리고 다시 사라졌다가 여러분들이 슈퍼맨을 부르듯이 여러분들이 위기에 처해있을 때에 ‘슈퍼맨’ 하면 휙 날아오듯이 하나님이 날아와서 여러분들을 도와주시고 다시 원위치 하시고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신 것이 아니에요. 그냥 생각하는 것이 계속 그 차원에 머물러 있으니까 ‘슈퍼맨’ 하고 불렀는데 하나님이 안 나타나시면 그때부터 원망이 쌓이는 것이에요. 불러도 안 나타나니까……. 아니에요. 하나님은 그 정도 높은 수준에서 야곱의 인생을 바라보시며 돌아오라, 돌아오라 그러면서 이런 정도의 수준의 삶을 살아가야한다며 보여주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때요? 부흥에 대해서 서서히 눈을 뜨고 나면 무슨 생각이 드느냐하면 전에는 안 그랬는데 사람들이 왜 그렇게 쓸데없는 일에 저렇게 골몰하고 열을 내면서 다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에요. 그리고 또 어떤 때에는 아니 저 사람들이 저렇게 중요한 일을 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팽개치고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무엇 때문에 그래요? 결국은 뭐냐 하면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부흥을 깊이 경험하는 정도까지는 안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이렇게 각성되면서 바라보면서 여기가 정리되면서 질서가 잡히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뭐가 중요하고 안중요한지가 완전히 뒤범벅이 되어서 판단이 흐려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쓸데없는 일에 얼마나 몰두하고 살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잖아요. 주님이 부르시는 커다란 목적들을 차차차 이해하게 되면서 세상과 교회와 이런 보는 모든 눈들이 달라져요.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면 이런 이야기에요. 자신 속에 있는 그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을 깊이 이해하는 일이 일어나게 되면 그러면 하나하나 가르쳐주지 않아도 인생과 역사와 교회와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말하자면 다른 기준이 생긴다고요. 그게 중요한 것이에요.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교역자가 하나하나 다 가르쳐주겠어요?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보는 하나의 관점이 생기는 것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신앙부흥을 통해서 그런 관점이 생기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바라보는 것이 다 틀리는 것이에요. 여기에도 그런 것을 경험하신분이 아마 있을 거예요. 우선 큰 부흥이 일어나지 않아도 계속 말씀을 듣고 공감을 하고, 자기가 깨닫고, 깨닫고 그러다 보면 신앙부흥에 대해서 눈을 뜨면서 35장을 깊이 깨닫기 전에 보지 못했던 세상과 좀 다르게 보이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갑자기 공허한 느낌 같은 것들이 올수 있어요. 예를 들어서 말씀을 듣는다든가 아니면 교회에서 훈련을 받는다든가 등등 하면서도 ‘이것이 본질적인 것이 아닌데…….’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요. 이게 뭐에요. 관점의 변화가 생긴 것이에요.
그러니까 34장에서 야곱이 디나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괴로워하면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각성된 때에 그게 35장 1절로 넘어오잖아요? 각성되면서 각성된 가운데 35장으로 들어가서 각성된 가운데 다시 하나님이 한 단계 높이셔서 신앙의 참된 부흥, 그 시각에서 바라보는 인생을 말하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떤 일이 생겨나요? 이미 돌아가신 아브라함과 자기아버지 이삭과 그 다음에 자기와 자기 후손과 이렇게 하나의 끈으로 꿰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요. 그것은 결코 생육하고 죽는 출생의 연대로서만 꿰어진 줄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인생 하나, 하나를 사용하셔서 장엄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한 방편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보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인생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바라보시는 그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가 내 인생을 바라보는 것이에요. 그리고 주님이 그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과 기대와 내가 내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과 기대가 일치하는 것이에요.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참답게 하나님을 위해 살아갈 기력이 생긴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뭐에요? 쉽게 얘기해서 참다운 마음의 영혼 속에서 참다운 부흥에 대한 추구, 그리고 참다운 부흥으로 말미암는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는 사실 이 이야기가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이에요. 나는 여러분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주기도문도 보면 굉장히 많은 방법으로 주기도문을 강해했어요. 안한 사람이 몇 사람이 되겠어요? 책도 시중에 대여섯 권 이상 나와 있어요. 그러나 문제는 무엇이에요? 어떤 식으로 설명한다고 해도 좋아요. 다 말씀에 대한 해설이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셨던 그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의 인생을 바라보는 것, 그것으로 먼저 포인트가 돌아가지 않으면 참다운 해석이 나오지 않는 것이에요. 생각해보세요. 그러니까 인생 그 자체에 충실하게 살고 열심히 사는 그 모든 것들이 출발이 여기서부터 이런 커다란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가는 주역으로 나를 부르셨다고 하는 의식 속에서 이루어져야지만 주기도문의 기도가 진실로 간절히 나온다고요. 그렇지 않겠어요? 이 세상에서 창세기 34장처럼 그런 식으로 각성되지 않은 채 그저 6일 동안 자기 멋대로 살아가다가 주일에 한번 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또 홀가분한 기분으로 나가고,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기도문이 정말 간절하게 다가올 것인가? 나는 확신해요. 다가오지 않아요. 그러니까 신앙부흥은 별개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뭐냐 하면 무슨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교회로 하여금 신약성경에 기록된 그 시대의 참된 교회로 돌아가게 하는 그 원동력이에요. 그리고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생을 바라보셨던 그런 시각으로 돌아가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제 주님이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시는 것이죠.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데 이 땅에서 지난시간에 말씀 드린 대로 이스라엘이 서게 되는 것이죠.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가 서게 되면서부터 이제는 한 사람에 의하고 가족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이제는 한나라에 의해서 모든 열국에게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그러한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이에요. 그 나라는 어떤 나라에요? 구원의 역사의 대드라마에 주역을 맡은 한 나라에요. 지금은 그 이스라엘이 사라졌지만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로서 보이지 않는 하나의 영적인 왕국을 이루면서 그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의 그 영적인 연합으로 이루어진 한 나라가 이 모든 세상의 역사에 드라마를 펼쳐나가는 한 드라마가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의 미국이나 소련이나 세상의 큰 나라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고 떠올랐다 사라지며 난리를 쳐도 전부다 역사의 엑스트라에요. 하나님의 역사는 철저하게 하나님과 당신을 믿는 백성들과의 약속이에요. 그래서 당신을 믿는 백성들, 이스라엘이 그랬잖아요. 당신을 믿는 백성들이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어때요? 이방민족이 일어나서 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전쟁의 역사가 나오는 것이에요. 이방이 흥하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에요. 쇠하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에요. 땅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방면으로 구원의 역사가 스케일을 더 크게 넓혀서 나아갈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이것이 말하자면 참된 신앙의 부흥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이제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하면 이제 그러한 신앙의 부흥의 시각에서 자기의 인생과 교회를 보게 보면 사람들하고 얘기를 할 때 얘기가 잘 안 통하는 것이 느껴져요. 그렇죠? 얘기를 해봐야 사람들은 참 이해가 안 간다고 해요. 뭐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느냐고 해요. 사실 이게 간단하게 생각한 것인데……. 얘기를 해도 얘기가 잘 안 통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제 점점 단절 비슷한 것을 느끼게 될 수도 있어요. 그 속에서 저는 맨 처음에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을 하면 이해가 다 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붙잡아놓고 설득도 많이 하고 얘기도 많이 했는데 거의 이해가 안 돼요.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혀있는 그 고정관념이라는 것이 굉장해요.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거의 강좌가 다음 주면 끝나갑니다만 한 학기 동안 공부하면서 뭔가 이제 생각이 정리되고 이게 확실하지는 않지만 뭔가 이렇게 오솔길이 보이고 ‘아! 이게 결국은 신앙부흥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것은 결코 여러분이 저에게 설득당한 것만은 아닐 것이에요. 말씀을 듣고 기도하면서 가슴에 다가오는 것이 있고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진정한 기도제목을 깨닫고, 찾고, 발견하게 되고 이렇게 되기 때문에 인생과 성경을 보는 시각들이 바뀌는 것이지 설득당해서 바뀔 수는 없어요.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이 이해가 안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사람들 속에서 이제 단절 같은 것들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런 것들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돼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가슴에 깊이 묻고 하나님 앞에 주님이 주시는 기도제목들을 따라서 계속 기도하면서 우리들이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야하는 것이죠.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부부가 같이 신앙 부흥이 해야 돼요. 나는 그것을 경험했거든요. 나는 신앙부흥에 쑥 들어갔는데 우리 집사람은 안 들어가니까 얘기가 안통해요. 그러니까 같이 울면서 기도해도 그 울음의 의미는 틀려요. 똑같이 옆에 앉아서 같이 울면서 기도해도 그 울음의 의미는 틀려요. 그러니까 어때요? 참다운 하나 됨이 사실은 힘든 거죠. 그래서 계속해서 그것이 고민이었고 기도제목이었어요. 그러니까 결국은 참답게 신앙부흥이 일어나면 그것이 일어날 때 그 신앙부흥을 경험하는 사람들 사이에 기가 막힌 일치가 이루어져요. 그래서 교회에 참된 하나 됨은 공동적으로 신앙부흥을 같이 경험하면 완전히 하나가 되요. 확실해요. 그렇기 때문에 옛날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힘에 넘치는 헌신과 섬김으로써 지체들을 섬기고 봉사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될 수 있으면 이번 학기는 끝나가니까 방학 때라도 말이에요 수시로 전도를 해요. 집에 가서 자기 부인에게, 혹은 남편에게, 혹은 형제들에게 수시로 전도해요. 전도를 하는데 물론 불신자들에게 전도하는 게 아니라 이미 예수 믿은 사람들에게 다시 신앙부흥을 전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렇게 해서 참으로 우리들이 고통하고 고민하는 바를 함께 경험하고 함께 느낄 수 있을 때 우리들 사이에 참된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그리니까 보세요. 하나님은 야곱의 인생을 야곱 하나를 본 것이 아니라 이렇게 커다랗게 흘러가는 구원의 역사에 한 주역으로 하나님께서 생각을 하시면서 야곱의 인생을 바라보시고 야곱의 소망은 무엇이에요? 누구 말대로 ‘내 평생소원은 이것 뿐 돈을 많이 벌어서…….’ 하나님을 안 섬기겠다는 것이 아니에요. 섬기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업이고 세겜에서 돈을 많이 벌어서 점점 부를 쌓아가지고 그렇게 넉넉하게 살겠다고 하는 어떻게 생각하면 소박하고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나 세상적이고 현실적인 그런 꿈만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그런 장엄한 구원의 역사의 주역으로 하나님이 부르셨는데……. 인생에 대해서 이렇게 엇갈리는 견해를 가지고 하나님과 야곱사이에 의사소통이 안 되었잖아요. 사람들 사이에 한 사람은 지금 34장에 나오는 야곱의 생각을 하고 있고 한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게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겠느냐는 것이에요. 딴이야기는 다 일치해도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일치가 안 되고 딱딱 안 맞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것이 자꾸 강하게 나오면 ‘저 사람이 한물갔나? 맛이 갔어!’ 그러면서 딴소리만 자꾸 하고……. 뭐든지 자기가 XXX 한쪽에서 생명을 내걸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한쪽에서는 아무가치도 없다고 해요. 아무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우리는 생명을 걸어야한다고 생각하죠. 그러니까 안 맞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저 같은 경우에는 그런 신앙부흥에 눈을 뜨게 되면서부터 그런 말을 많이 들었어요. ‘너무 비판적이다.’ 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저는 원래 그렇게 날카롭게 비판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아닌데 그게 눈에 이렇게 들어와요. 아 너무 쓸데없는 일에 사람들이 골몰하고 있구나! 그러니까 참된 하나 됨을 위해서라도 이것이 되어야 해요. 어느 교회라도 똑같아요. 나는 이것을 경험한 사람 아니에요? 만약에 이렇게 기존에 있는 교회에 저 같은 사람이 가서 신앙부흥을 외치면 교회는 어떻게 되겠어요? 막 이거라고 매달리는 사람은 바짝 매달려서 죽을 둥 살 등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나머지는 어떻게 되요? 괴로운 것이에요. 내가 떠나온 교회에서도 나를 괴로워하는 몇 사람이 있어요. 괴로워해요. 그게 왜 그러느냐하면 개인적으로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당신이 아는 하나님과 내가 아는 하나님이 틀린데요. 틀릴 수밖에 없지요. 하나님은 신앙부흥에 하나님은 신앙부흥이 아닌 사람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마찬가지지만 생각하는 구도가 너무나 틀린 것이에요. 그러니까 계속해서 그 말씀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에요.
누구든지 어떤 필터를 가지고? 34장 정도에서 야곱이 생각하던,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던 그런 필터를 가지고 설교를 듣고 말씀을 듣고 성경을 읽는 것이에요. 안 들어오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 필터에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더니 이 35장 13, 14절에 나오는 하나님을 들이대니 이 필터에 안 맞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거부반응을 일으키면서 입력이 안 되는 것이에요. 들어오지 않는 것이에요. 더군다나 생각을 평소에 많이 하고 책을 많이 읽고 뭔가 교회와 기독교 신앙에 대한 많은 정보들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자기가 사람들에게 많이 가르쳐준다는 사람들이 더 어려운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잘못되고 그릇된 지식들이 계속해서 들어가서 그것들이 완전히 포진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단순하게 들어오지 않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여기에서 어떤 교훈을 받느냐하면 가장 중요한 비결은 무엇이냐 하면 그 마음을 비우는 것이에요. 그리고 일단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면 저 말씀이 진실일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접근을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받아들여져요. 그리고 성경을 보기 시작해야 해요. 결국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해요. 추구하고 정확하게 자기 자신을 진단할 수 있어야 되잖아요.
그러면서 이제 하나님이 그런 장엄한 약속을 주시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 이런 이야기를 35장 1절에서 안하고 왜 여기에 와서 하시느냐 이거에요. 그러니까 35장 1절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셨지만 이 사람의 머릿속에 꽉차있는 것은 지금 하나님이 내 인생에 대한 계획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하면 이 불행과 위기에서 탈출할 것인가 하는 생각만 가득한 것이에요. 그러다가 2, 3, 4, 5, 6, 7, 8 드보라도 죽고 다 죽고 난리를 치니까 말하자면 마음이 완전히 가난해진 가운데 그러면서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서 주님이 다시 나타나셔서 너의 신분이 누구라는 것과 그리고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떤 것들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세상에 살아도 이 세상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세상이 아닌 것들을 위해서 부름을 받고 사는 것이에요.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죠. 더 큰 소원, 우리의 인생이 끝나도 이어질 더 큰 구속의 역사를 위해서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에요. 그것이 말하자면 부흥이에요. 이 참된 부흥을 통해서 야곱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게 되었고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확인하게 되었어요. 어떤 하나님이에요? 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자기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장엄한가 하는 것들을 깨닫게 된 것이죠. 그러니까 부흥을 발견하기 전에는 정말 기복신앙을 면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정말 세상을 위한 신앙,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신앙, 그런 정도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데 눈을 뜨면서부터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하고 14절을 같이 읽읍시다.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이게 결국은 부흥의 끝이에요. 끝. 그러니까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도로 올라가시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어떤 사실을 한번 생각해보게 되요? 하나님이 35장에서 야곱과 만나주시기 위해서 준비하시는 과정은 철저하고도 길고 복잡해요. 그렇죠? 우선 뭐에요? 32장에서 만나고, 33장에서 그렇게 되고, 34장의 기간을 쭉 지나오는 동안에 영적인 깊은 침체로 들어가고, 하나님이 침체를 주신 것은 아니지만 깊은 침제로 들어가고 그러면서 10년 내지 20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타나시고 말씀을 하시고 야곱으로 깨닫게 하시고 그래서 벧엘로 올라가게 하시고 거기서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드보라를 죽게 하시고 그리고 이제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긴 길이 나타나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기간은 잠깐이었어요. 그렇지요? 잠깐 동안……. 부흥도 이와 같은 것이에요. 한없이 계속되는 부흥은 없어요. 부흥은 자기가 말씀을 따라서 살고 늘 경건을 연습하면 충만한 생활은 계속할 수 있어요. 평생 계속하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그러나 대체로 충만한 삶을 계속 이어가는 것은 가능할 것이에요.
그러나 사실은 이 부흥은 성령 충만이 아니에요. 성령 충만한 것은 하나의 신앙의 상태라고해요. 신앙부흥은 상태와도 연결이 되어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신앙의 수준을 높여주는 것이에요. 신앙의 수준이 뭐에요? 신앙의 수준은 얼마나 열심히 봉사하느냐? 그것이 신앙의 수준이 아니에요. 그것은 열심의 정도이지요. 그리고 교회에서도 그건 것을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겠지만 그러나 썩 좋은 것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직분을 주면 사람들이 열심을 내잖아요. 그러기 위해서 직분을 주면 소망이 있을까하고 자꾸 생각해보기도 하는데 아무튼 엄격하게 말해서는 이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하고 열심히 하는 것 자체가 신앙의 수준은 아니에요. 또 기독교 교회생활에 익숙해지는 것도 신앙의 수준이 아니에요.
우리 전도사님은 34살에 장로가 되어서 도가 텄다고 그러는데 그게 곧 신앙의 수준은 아니에요. 34살에 장로가 되었다고 하니까 대단한 것이죠. 그러니까 34살이면 애들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요? 애들 아니에요? 지금 보니까 애들이에요. 그때는 애들 안 같았는데……. 뭐 우리 청년부에도 31살씩 되는 애들이 있는데 애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도가 튼 거예요. 그건 뭐냐 하면 교회에서 하도 오래 살아가지고 그래서 몸에 밴 것이에요. 그래서 담임교역자를 대하는 에티켓이라든지 부흥강사를 접대하는 방법이라든지 도를 텄다는 게 대게 그런 것이겠지요? 교회에 사건이 나면 그것 해결사로 등장하는 것이라든지 어떻게 하면 목사님 대신해서 욕을 먹는 것이라든지 어떻게 하면 교인들을 독려해서 헌금을 하게해서 기필코 이 일을 달성하고야마는 것이라든지 아니면 동네에서 교회가 시끄럽다고 데모하면 어떻게 가서 진압을 할 것인지……. 대부분 그런 것이 아닙니까? 그런 것을 도다 텄다고 하는 것이죠. 자기의 마음에 없어도 교회에 가면 이렇게 해야지만 좋아하고 이렇게 하면 싫어한다고 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몸에 배이게 되는 것이에요. 세련되어지는 것이죠. 세련된 사람들 많아요. 특히 강남은 그래요. 자기 할 일을 딱딱 하는 것이에요. 그 대신 간섭하지도 말고 떠들지도 않아요. 내 삶은 내 삶이라는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강해요.
그런데 부흥은 그게 아니에요. 그런 것을 다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그리고 교회에서 능숙하게 봉사한다고 해서 그것으로써 신앙의 수준을 잴 수는 없어요. 그렇다면 그 신앙의 수준을 올리기 위한 학원도 가능하다는 이야기에요. 교회를 세련되게 섬기기 위해서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학원, 얼마든지 가능해요. 참된 신앙부흥의 차이는 이런 것이에요. 그 외에 뭐가 더 필요하냐 하면 그렇게 세련되게 봉사를 하다가도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서는 아무런 감동도 없고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고 그리고 항상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교회의 문제를 깊이 통찰하고 이끌어나가고 그리고 누구도 돌보지 않는 교회의 근본적인 부분에 대해서 아파하는 대신에 늘 행동주의적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늘 교회에만 오면 습관적으로 예배시간에도 가만히 앉아있지를 못하고 계속해서 서성대고 돌아다녀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지요. 교회에 가면 그런 사람들이 꼭 있어요. 예배시간에 밥도 잘되는데 괜히 솥뚜껑을 열어보고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는 사람들이 있다고요. 가만히 앉아서 예배를 못 드리는 사람이 있어요. 괜히 주보가지고 일어서서 왔다 갔다 하고 말이죠. 특히 설교시간에 잘 그래요. 이것은 전부 다 잘못 배워서 그런 것이에요.
그러니까 참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져다주는 영혼의 참된 위로와 안식, 이런 것들을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자기의 몸을 자꾸 일에 내어던지는 것이에요. 그것이 영적인 침체 속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영혼들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에요. 그러면서 뭔가 막 해보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가 뭔가 침체에 있는 것 같다고 하면 생각하는 것이 왜 이런 침체가 오게 되었는가? 어디가 잘못되었는가? 어떤 것들로 우리가 주님을 슬프게 하였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침체에 빠졌으니까 우리가 한번 전교인이 신나게 야유회를 한번 갑시다.’ 아니면 ‘우리교회가 이런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커다란 사업을 하나 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나와요. 그러니까 겉으로 보면 그런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돈도 없으면서 무조건 믿음으로 가서 돈이 일억밖에 없으면서 십억 짜리 땅을 사놓는 것이에요. 그리고 계약을 했다고 하면서 몰아붙이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그러면서 그런 것들이 각성이라는 미명하에 말하자면 벌어지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어떻게 되요? 물론 하나의 목표를 놓으면 그것은 교회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단체에서도 마찬가지에요. 하나의 목표를 세워놓고 이렇게 막 밀면 사람들이 소속감을 느끼고 막 된다고요. 그게 신앙의 부흥이냐는 것이에요. 그게 정말 신앙의 부흥이냐는 것이죠. 그것은 아니에요. 만약에 나중에 교회를 다 짓고, 교육관도 짓고, 주차장도 사고, 그 다음에 기도원도 짓고, 양로원도 짓고, 마지막에 묘지까지 사서 우리교회 교인들은 우리교회끼리 묻혔다가 부활 때에 손잡고 하나님을 만나자고 누가 그렇게 기도를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까지 다해놓고 마지막으로 다해놓은 다음에 뭐할 거예요? 다음에는 또 일을 벌여요. 넓히기 운동을 벌리는 것이에요. 쉬지 않는 것이에요. 그 일이 필요 없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우리의 신앙이 자라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에요.
그러면서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부흥을 주시는 것은 한 순간에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아주 크고 놀라운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35장에 넘어와서 35장 15절이 끝난 다음에 마지막에 돌기둥을 세우고 전제물을 붓고 기름을 붓고 그곳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잖아요. 예배하고 나서 야곱이 34장과 35장 초반부에서 자기의 살아왔던 인생의 파노라마를 비디오로 보여준다면 그 스스로 어떤 생각이 들겠어요? ‘나는 참 어렸다.’ 그런 생각이 들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묻는 것은 그것이에요. 여러분이 1년, 2년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부흥강좌를 듣고서, 듣기 전에 ‘아! 참 그 때는 내 생각이 어렸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에요. 왕년에 내가 충만했었다. 그런 것 말고 아 그때는 정말 어렸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수준이 높아져야 해요. 수준이 높아지면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주기도문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이것이 다가오지 않는 이유가 수준의 문제에요. 수준의 문제. 그게 말하자면 최고 수준의 비전이거든요. 수준의 문제에요. 그러면 어때요? 딱 내려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먹고, 살고, 입는 그 문제들을 이야기할 때는 눈에 총기가 드는 것이에요. 지금 당장 살아가는 문제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부르시는 부흥을 통해서 야곱에게 보여주시는 삶은 정말 차원 높은 삶이에요. 그러한 원대한 계획을 위해서 어때요? 먹고, 입고, 쓰고 사는 것은 우리가 죽으면 함께 없어지는 것들이에요. 신문에서 보셨지요? 한사람이 일생동안 얼마큼 먹고 쓸 수 있는가? 우스워요. 뭐 배추 2트럭, 소 두 마리 반, 평생 먹어봐야 그것밖에 못 먹는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우유 몇 드럼, 쭉 나왔는데……. 아! 정말 우스워요. 쌀 몇 십 가마 그것만 딱 먹고 죽는 것이에요. 그런데 보세요! 하나님이 이 야곱에게 보여준 구속의 역사의 드라마 속에 우리가 서있다고 할 때에 야곱은 죽어도 그 역사의 물줄기는 흘러가는 거예요. 도도히…….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의 역사의 계시를 받아서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것이에요. 그리고 자기는 죽는 것이에요. 자기는 죽어도 그 계시의 드라마는 계속 펼쳐져 나가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그 물줄기 속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이 많은 후손들을 통해서 사람들이 이방의 빛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해서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자꾸 들어오는 것 아니에요. 그렇죠? 마지막에는 그 사람들이 하던 일들이 우리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아니면 세상은 소망이 없어요. 우리보고 뭐라고 욕을 하던지 우리가 아니면 소망이 없어요. 예수 믿는 우리 모든 사람들이 입을 딱 다물고 이제는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지 말자 결의를 하면 세상은 구원이 없는 것이에요. 세상이 교회가 여기에 서있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사람들이 몰라요. 그것을 깨우기 위한 사람들이 누구에요? 바로 여러분들이에요. 어느 정도에까지 이르게 되었어요? 자기 자신도 자기의 인생을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이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말하자면 여기 도곡동의 죽어가는 영혼들이 그래서 어때요? 내가 복음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이 사람들의 인생이 바뀔 뿐만 아니라 영혼을 향한 운명이 바뀌는 것이에요. 그 권세를 하나님이 주신 것이에요. 적어도 아파트 문 앞에 가서 벨을 누르면서 ‘여보세요.’ 할 때에 그 사람은 우리를 장사꾼 취급을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거기 서있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그 영혼을 구원으로 초청하는 것이에요.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겠어요?
이 세상도 사람의 인생을 행복하게 해놓고 인생의 어떤 변화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많아요. 마치 애굽의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나타났을 때 제일 먼저 징조를 보이잖아요. 지팡이를 던지니까 뱀이 되잖아요. 그런 일들을 할 때에 애굽의 술사들도 따라했어요. 피가 될 때도 따라했어요. 개구리가 될 때도 따라했어요. 파리 떼도 따라했어요. 그러나 나중에는 하지 못하는 것이에요. 세상도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어요.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고, 그 다음에 사람의 운명을 개척하게 만들고, 또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보다 나은 삶을 살게 할 수 있는 힘이 세상에도 있는 것이에요. 그러나 세상에도 그런 것이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세상에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전혀 새로운 그래서 인생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인생 자체가 바뀌어서 마지막으로는 하나님께 하나님과 영원을 향하여 살 수 있는 말하자면 이런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도구들로 우리들을 세우신 것이에요. 이게 얼마나 놀라운 것이에요?
여러분 제대로 우리들이 깊이 묵상을 해보면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일이 더 중요한 일이었어요? 예수를 믿은 일이 더 중요한 일이었어요?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예수를 믿게 된 것이 더 중요한 사건이었어요? 태어난 사건이 중요한 사건이었어요? 예수를 믿는 것이죠. 왜? 땅에서 태어난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안 믿고 태어나기만 했다면 그냥 몇 십 년 쓰레기를 더 만들고 살다가 오염 좀 더 시키다가 죽는 것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인생이 무슨 커다란 변화가 있겠어요. 예수를 알게 됨으로 말미암아서 우리의 인생이 영원을 향한 인생이 되었던 것 아니에요? 마찬가지에요. 똑같은 것이에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에요. 여러분 스스로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을 받고 변화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전혀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말하잖아요. 세상에 사람들을 향한 그러한 변화를 가져다주고 사람들을 그렇게 변화시킬 수 있는 그 권세와 권한은 누가 쥐고 있는 것이에요? 우리에게 있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어져가는 것이에요. 우리는 죽어도 그 나라는 영원하리로다. 그러면서 쭉 흘러가는 것이에요. 그리고 우리가 마지막에 숨을 거두고 가는 그 나라도 그 나라의 연장이에요. 신앙의 부흥은 바로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새롭게 눈을 뜨게 만드는 것이에요.
성경을 좀 더 봅시다. ‘야곱이 하나님의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기둥을 세우고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하늘로 올라가시는지라.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13절, 14절, 15절에 보면 똑같은 동사가 한 번씩 계속 나와요. 그게 뭐에요? 13절에서는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14절은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15절에서는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이렇게 나와요. 그것이 부흥의 특징의 하나에요. 그러니까 참된 신앙의 부흥은 아주 분명한 메시지가 있어요. 그러니까 언제 한번 말씀드렸습니다만 소위 얘기하는 성령운동, 은사운동, 그런 것과 신앙부흥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이에요. 신앙의 부흥에 가장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기적의 역사가 아니라 진리를 깨닫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번학기도 끝나가지만 영원히 가슴에 새겨야 될 일은 그것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마음을 기울여서 읽지 않는 사람의 신앙은 언제나 그 수준을 벗어날 수 없어요. 불가능한 일이에요. 신앙이 상승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래서 그렇게 살아가면서 점점 세련되어져갈 뿐이죠.
여기에서 보세요.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오셔서 만나주시는 신앙부흥에 있어서 야곱에게 있어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해주셨다는 것이에요. 말씀해주심으로 말미암아서 야곱이 하나님이 이전에 누구신가 하는 것을 알았었는데 이제는 그 하나님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된 것이에요. 그리고 자기의 인생이 이제는 이 세겜에서의 땅에서 살다가 돈을 잔뜩 벌어서 그것을 부둥켜안고 죽는 인생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조금도……. 그러니까 어때요. 바울이 그렇게 얘기했잖아요.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새롭도다.’ 그러니까 거울을 쳐다보면서 슬픈 기색을 짓는 그것은 신앙부흥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거예요. 괜찮아요. 겉 사람은 날로 후패할지라도 전혀 문제가 안 돼요. 얼굴이 쭈글쭈글 해지고……. 괜찮아요. 흰머리가 가끔 보이기 시작하지요. 그러면서 슬픈 생각이 들지요. 그런 생각할 필요 없어요. 인생은 그렇게 사라져가는 것이에요. 그러나
(찬양)
그 나라 영원하리라
우리는 그렇게 사라져가도 우리를 통해서 세우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견고하고 영원하리라 하는 것이죠. 가는 홍안은 누가 잡을 것이며 오는 백발은 누가 막을 것인가 하는 시조가 있잖아요. 누가 막겠어요. 가서 돈 좀 줘서 얼굴 좀 핀다고 해서 그 영혼이 잡아둘 것 같아요? 다 쓸데없는 것이에요. 다 속이 허해서 그런 것이에요. 어차피 인생은 그렇게 가는 것이에요. 문제는 어때요. 그런 허무감, 내 인생을 향한 보다 높고 훌륭한 하나님의 계획을 붙들고 살아가면 그 사람이 후패하는 것을 인해서 조금도 후회하지 않아요. 조금도 후회하거나 슬퍼하지 않아요. 그러면서 우리는 날마다 거울을 보면서…….
(찬양)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 날로 다가와
매일 매일 나가는 것이죠. 그러면서 우리의 인생이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흔들리지 않는다는 높은 가치를 지니는 것이죠.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전진해 나아가는 것이죠. 우리의 인생을 통해서 뭔가 구원하고 영원한 것들을 추구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의 이 후패 감을 인해서 슬퍼하고 서글퍼하는 것이에요. 그럴 필요 하나도 없어요. 어차피 인생은 그렇게 가는 것이에요. 속히 지나가는 것이에요. 그 대신 그 속히 지나가는 동안에 나는 더 속히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그 장엄한 뜻들을 남김없이 이루어드리는 도구가 되기를 원한다는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 잠깐이에요. 잠깐……. 오십년 후면 여기에서 만날 사람 거의 없어요. 오십년 후에 다 천국에서 만나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그 인생의 시각과 우리가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일치되기 위해서 신앙부흥이 필요하다는 것이에요. 보세요. 디나가 강간사건을 당했을 때에 그 때 야곱의 가장 큰 고민이 무엇인지 우리는 이미 알 수 있잖아요. 그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해주시고 가나안족속과 브리스 족속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아주시고 그 모든 것들을 다 보호해주셨다고 하더라도 깨달을 수 있었겠어요? 아 이렇게는 나갔을 거예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이 큰 불행가운데서 건져 주시오니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또 엘엘로에 이스라엘이라는 단을 쌓았겠지요. 그리고 다시 어때요? 10년, 20년 지나면 또다시 한 번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서 그 35장이 또 나오는 것이에요. 수준의 향상이 없는 것이에요. 그러나 여기를 통해서 전에는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그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인생 전체에 대한 계획과 그리고 인생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바뀌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무엇보다도 그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확연한 견해가 그의 인생을 사로잡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의 인생이 이제는 야곱의 인생이 아니라 정말 이스라엘의 인생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이스라엘이라고 하나님이 자기를 불러주신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서 자기의 인생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장엄한 구원의 역사의 대드라마 거기에 한 주역으로서 그리고 다음세대에 바통을 이어주어서 자기는 사라져가도 구원의 역사는 계속 흘러가서 그 물줄기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하는 그러한 하나님의 도구로 자기를 부르셨다는 이 사실에 눈을 뜨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 사실에 눈을 뜨게 되었을 때 어떻게 되었어요? 세겜에서 모은 재산이 눈에 들어왔겠어요? 우스운 것이죠. 그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서 바라볼 때 세상에 있는 것들은 정말 하찮게 보이는 것이에요.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그것들에 매이지 않는 것이에요. 부흥을 만났던 모든 사람들은 그랬기 때문에 살아갔던 것이에요.
여러분 인생이 얼마나 간사한지 아세요? 오늘 집에 가셔서 뭐든지 좋으니까 평소에 좋아하고 사랑하던 것 하나만 포기해보려고 해보세요. 쉬운가요? 아니에요. 어때요. 자기 속에 있는 욕심 하나 요만큼을 버리는 것이 손가락 요만큼을 잘라내는 것만큼 힘들어요. 그게 인생이라고요. 그게 왜 그래요? 인생을 바라보는 견해가 아직 안 바뀌어서 그런 것이에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말했잖아요. ‘내 자신을 허비하고 또 허비해도 좋다. 내 자신을 허비하고 또 허비하리라.’ 참된 신앙의 부흥을 통해서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바뀌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 야곱이 이러한 일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 앞에 돌기둥을 세우고 전제물을 붓고(전제라는 것은 부어서 드리는 제사에요.) 그 다음에 기름을 붓고 드디어 하나님께 약속한대로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 되었던 것이에요. 거기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죠. 그게 뭐에요? 부흥이 일어나면 이런 참된 헌신이 주어지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초라해 보이는 일은 무엇이냐 하면 교인들이 헌신을 안 한다고 예배시간에 화내는 교역자에요. 그것은 아무리 그래도 안 돼요.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사람들 속에 부흥이 일어나면 헌신하고 싶어서 안달을 하는 것이에요. 왜 야곱이 어때요? 벧엘은 가보지 않았지만 ‘이곳이 하나님의 집이 되겠사오며…….’ 청산유수로 약속하잖아요? 그러고 나서 새카만 오랜 세월동안에 그대로 방치되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만나니까 거기에서 참된 헌신이 이루어지게 되잖아요. 전제물을 붓고, 기름을 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잖아요. 그 때에 야곱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이제 비로소 33장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것과 35장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차원이 틀린 것이에요. 자기가 알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이미 35장에서는 달라진 것이에요.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생애 가장 감격적인 예배를 여기서 지금 드리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뭐에요? 하나님이 찾아오시지 않는 예배, 주님이 말씀해주시지 않는 예배, 주님이 누군지도 잘 모르면서 드리는 예배, 이 모든 것이 예배의 초라함에 원인이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드디어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주님이 참답게 말씀하시니까 그 다음에 여기에서 참된 헌신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에요. 부흥이 일어나면 헌신 자들이 벌떼와 같이 일어나는 것이에요.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바뀌니까 모든 것을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위해서 쏟아내는 것이에요. 그러한 참된 헌신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에요.
보세요. 많은 설명이 필요 없어요. 우리 주위에서도 역사를 읽어보시면 서도 참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힘에 넘치도록 수고하는 사람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시간에 인생의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기로 결단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원동력이 어디서 주어져요? 그 사람들이 뭔가를 바치고 나면 하나님께서 되돌려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사람들을 헌신하게 할 수 있어요? 그럴 수 없어요. 거래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거래인일 뿐이에요. 전폭적으로 ‘나의 인생을 주께 맡기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에요? 진심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 그래서 그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웅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 그리고 그 하나님의 계획에 자기의 인생이 쓰임 받는 것이 얼마나 존귀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것이에요. 그게 무슨 문제가 있어요. 그러면 그럴수록 이 사람은 어때요? 하나님을 더 깊이 느끼고 체험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신앙부흥에서 만나는 하나님, 그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제는 어때요?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점점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다가가는 것이죠. 이것이 참된 신앙부흥이 가져다주는 것이에요.
신앙의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는 정말 사람들이 선교하지 않고 헌신하지 않아요. 몇 년 전에 미국인 선교사가 한국에 와서 설교를 하면서 얘기하는데 자기가 있던 교회가 천막을 치고 시작을 했대요. 세가정이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 첫 번째 선교사를 파송했대요. 그리고 방금 156번째 선교사를 파송했는데 교인이 160명이 모인대요. 160명이 모이는데 156번째 선교사를 방금 파송했대요. 그런 교회에 있어서는 선교사를 돕는다는 개념이 1불, 10불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세가정이 이렇게 모여서 너희 한가정이 가면 우리 두가정이 너희를 후원하겠다는 식으로 하는 것이죠. 90만원씩 버는 사람들이 셋이서 270만원씩 벌던 사람들이 180만원을 가지고 60만원씩 나누어서 쓰는 것이죠. 그것이 그들에 있어서의 선교의 개념이에요. 그러니까 되는 것이죠. 지금 그런 것들도 결국은 선교의 계획을 세우고 호소를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참다운 신앙부흥이 일어나면 영적 군사이니까 복음의 신발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영혼이 막 가슴에 저려오면 나서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리고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에요. 왜? 이 구원의 놀라운 역사의 물줄기가 이 나라에만 머물러 있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것이에요. 이게 바다를 건너서 일본으로, 대륙을 넘어서 중국으로 확산되기를 원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자기의 인생을 그렇게 드리기를 원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참다운 신앙부흥이 일어나면 참다운 헌신이 일어나요. 그리고 그런 참다운 헌신이 이루어질 때 교회는 폭발적인 능력을 가진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주님을 위해서 살기로 결심하는 사람 백만 명이 모인 것보다도 주님을 위해서 죽기로 결심한 사람 열 명이 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더군다나 주님을 위해서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복을 받아야겠다는 사람 천만 명은 주님을 위해서 죽어야겠다고 결심하는 사람 한사람을 못 당하는 것이에요. 세상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계속 설명했지요? 만만하지 않아요. 지금 당장 나가보세요. 오늘 나가면서 성경, 찬송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 딱 붙들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여야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얘기 해봐요. 미친놈, 그러면서 지나가요. 만만치 않은 세상이에요. 그 만만치 않은 세상에 복을 받으려고 예수님의 뒤를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겠느냐는 것이에요. 무슨 일을 하겠어요? 떡을 먹을 때는 한참 먹다가 딱 펼쳐서 복음의 말씀을 증거 하니까 기껏 한다는 말이 ‘이 말씀은 심히 어렵도다!’ 그러면서 가는 것이죠. 그렇잖아요. ‘이 말씀은 심히 어렵도다!’ 쉽게 들리는 말씀은 뭐에요? ‘하나님이여 이 떡과 물고기에 축복하소서! 너희들은 다 와서 이것을 먹어라.’ ‘아 그 말씀은 쉽도다.’ 그러는 것이에요. 참된 복음이 제시될 때에는 ‘그 말씀은 어렵도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위해 거의 일할 수 없어요.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는 다시 복음화 되어야 해요. 그러면 그 교회는 비록 외제 대리석이 아니고 외제 파이프 오르간이 아니더라도 예배를 드리고 나와서 놀라운 역사를 일으킬 수 있어요.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어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요. 그리고 사람들 속에 예수를 안 믿고 사는 것과 믿고 살아가는 것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실제의 삶으로 보여줄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고, 성도들이 될 수 있는 것이란 말이에요. 이런 놀라운 헌신들이 어떻게 일어나겠어요? 바로 참된 신앙의 부흥을 통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힘이 다하는 날까지 하나님을 위해서 살 수 있는 이런 일을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