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엘로 올라가자 13
헌신과 부흥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창35:15)
이제 우리들이 마지막 결론을 내리기 전에 한번 전체적인 이때까지의 흐름을 잡아봐야 할 것 같아요. 우선 그 야곱의 신앙이 28장부터(물론 그전에도 있었지만…….)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져왔다는 사실, 그 다음에 29, 30, 31장에서 그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많이 경험하면서 자라왔다가, 32장에서 결정적으로 다시 한 번 하나님을 만나고, 33장에서 형과의 화해가 이루어지고, 34장에서 다시 영적인 깊은 침체에 들어가는 것들을 배경으로 해서 35장이 나왔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여태까지 이야기했던 것들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무엇입니까? 이 35장을 강의하는 것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평소에 알았던 신앙의 상식가운데 어떤 것들이 타파되었다고 할까? 어떤 것들이 평소에 알고 있었던 신앙의 상식과 합치하지 않는다는 것들을 발견했습니까? 쉽게 얘기해서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커다란 문제는 뭐냐 하면 사실은 무지에요. 무지……. 알지 못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뭐냐 하면 무엇이든지 너무 확신이 강해요. 확신이 강하다는 이야기는 믿음이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오히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제가 말하는 면에 있어서 오히려 확신이 없을 수 있어요. 무슨 뜻이냐 하면 성경에서 얘기하는 주님이 믿음을 지키면서 산다는 말씀을 할 때 늘 근신하라는 것이에요. 근신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늘 자신을 살피면서 조심하는 것이에요. 어떤 식의 조심이에요. 내가 믿고 내가 신앙하는 바를 확신하지만 또 동시에 자신이 그 하나님을 믿는 참된 도에서 잘못행하고 있거나 그릇되게 믿고 있는 것들을,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늘 생각하면서 언제든지 진리가 우리에게 말해줄 때 자신을 교정할 수 있는 그런 것이죠. 쉽게 얘기해서 말씀으로 말미암는 교정능력이 상실되었다는 것, 그것은 어떤 깊은 확신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굳어져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것이 고쳐지지를 않아요. 고쳐지지를 않는 것이죠.
그러니까 제가 처음시간에도 말씀을 드렸고 주기도문할 때도 수없이 말씀을 드렸지만 두 가지 사실만을 굳게 붙들면 그래도 절망적이지는 않아요. 그게 뭐예요? 오늘 이 부흥의 마지막 장면을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러니까 이 35장의 부흥을 경험하면서 그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는 것이에요. 그 인식이 새로워진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선 아까 두 가지가 무엇이냐?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선하시다는 사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 또 하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일하신다는 사실이에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기울이고 하나님이 말씀을 하시면 자신을 언제든지 바꿀 수 있어야 되겠다고 하는 마음의 그러한 성향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에요. 저는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런데 여러분! 그러면 우리들 가운데 일어나는 현상들을 보세요. 무엇을 하든지 간에 상식으로 생각을 해요. 상식을 따라서 행동해요. 그리고 상식을 따라 이야기해요. 그리고 ‘성경에 이르기를’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고리타분하고 구태의연한 주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어요. 그렇지 않아요? 이런 태도는 가망이 없다는 것이죠. 그러면 결국 마지막에 무엇이 남느냐하면 인간의 이성의 판단과 그리고 자기 자신의 성향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의지하는 것이에요. 이게 저의 결론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굳게 붙드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니에요. 왜 그러느냐하면 선하시게 보일 때 선하시다고 믿는 것은 쉽지만 전혀 선하시게 보이지 않을 때 선하시다고 믿는 것이 쉽겠어요? 인간이 그렇게 강철 같은 존재가 못돼요. 그것을 아셔야 되요. 쉽게 얘기해서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이 잠시잠깐 동안 선하시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실 때는 참을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오래되고 길어지면 누구도 장사가 없는 것이죠. 그러면서 믿음이 식어지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혼돈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그것이 그러면서 결국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혼돈은 어떤 결과를 가져와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하여 의심을 품도록 만드는 것이죠.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 때에 시험하는 자가 와서 말하기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그것은 만약이거든요. ‘만약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만약이 무슨 필요가 있어요? 하나님의 아들인데……. 그런 관계들을 자꾸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에요. 성품에 대한 의심은 관계에 대한 의심으로 나와요. 관계에 대한 의심은 실질적으로 우리의 삶속에서 믿음을 따라 살 수 있는 그런 힘과 능력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보세요.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붙드는 것도 굉장히 힘든 일이겠지만 그러나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과 틀린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듣고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에요. 이 세상에 어떠한 도덕적인 민족도 그렇게 절대적인 하나님의 명령을 소유하고 있지 못해요. 우리는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에요. 말씀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지키며 살 수 있는 도리가 있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가 궁금하게 여기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셔요. 부흥에 대해서도 보세요. 부흥에 대해서 강의를 쭉 하고 그러면서 개인적으로 느끼는 인상이 무엇이냐 하면 상당히 많은 사람이 제 개인적인 견해를 설파하고 다니는 것으로 생각을 해요. 그런 판단이 어디서 나왔어요? 성경에서 나왔어요? 아니에요. 그러니까 평소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앙적인 상식에 일치하지 않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이 나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이 그대로 즉각적으로 판단이 되는 것이에요. 어디에 의해서? 성경에 의해서? 아니에요. 그런 태도들이 다 잘못되었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가 나오고, 무슨 설교가 나오고, 아니면 무슨 이야기가 나오면 성도들에게는 그것을 검증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요. 이렇게 얘기하니까 여러분들 충격적이죠? 충격적일 것 하나도 없어요. 검증해야할 권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의무가 있어요.
여러분! 만약에 강단에서 잘못된 사람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되게 전하고 밑에 있는 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아멘으로 순수하게 받아들여서 그릇된 길로 갔다면 말씀을 전한 사람만 책임을 질 것 같죠?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아요. 책임을 지는 것이 그 모든 사람이 함께 하는 것이에요. 에베소교회가 그것을 보여주잖아요. ‘자칭 사도라 하되 거짓된 자들을 시험하여 그 사도가 아닌 것을 드러낸 것과’ 이것을 인하여 칭찬을 받는 것이에요. 시험해 봐야 되요. 판단해야 되요. 그런데 문제는 뭐에요? 그러나 그 판단하는 것이 만약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 판단하는 것이면 하나님 앞에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에요. 왜냐하면 그 말씀이 참다운 하나님의 말씀일 경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상식으로 판단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늘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할 때에 그 말씀이 정말 성경인가? 하는 것에 끊임없이 거기에 관심이 가있어야 해요. 그렇기 때문에 그게 가장 큰 문제에요.
그러니까 그런 신앙의 원리가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호소하는 것이 안 되어 있으니까 성경을 사랑하라는 이야기는 헛구호에요. 사랑할 수 없어요.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에요. 여러분 그것은 가능하지 않아요. 그렇게 만약에 사랑하라고 그렇게 강요를 받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하면 성경을 머리로 공부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인다고요. 그러니까 계속해서 머리만 키우는 것이에요. 그런데 성경이 얼마나 신비한 책인지 알아요? 여러분 아무리 공부를 해도 성경은 알 수가 없어요.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 하면 성경을 배우면서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서 실천하게 되고 행하게 될 때에 깨달아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은 성경에 있는 내용이 무엇일까? 생각해서 호기심으로 성경에 접근하거나 이기적인 태도로 성경에 접근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성경은 장막을 친다고요. 보이지 않아요. 시편을 읽어보고…….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하잖아요. 구약성경이 나온 다음에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 나오면서 구약에 희미하게 비쳤던 그 구원의 빛줄기가 신약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장엄하게 빛나게 되잖아요? 그것을 모든 사람이 봤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보고 성경을 써내려가기 시작한 사람들은 석사나 박사나 전문가가 아니었어요. 그저 평범한 어부들, 세관의 세리들, 아니면 유대교에 푹 빠져 있던 바울과 같은 사람, 베드로와 같은 뱃사람, 이런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되요. 그들이 전부다 다 성경을 썼는데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기독교의 참된 모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렇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세계를 꿰뚫어서 우리에게 참된 기독교와 신앙이 무엇인가를 보여줄 수 있었던 그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에요? 호기심으로 구약을 탐구했던 사람들이에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또 아무리 열심히 있었어도 유대종교를 위하고 그리고 히브리 종파를 위하는 열심에 빠져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신약이 철저히 가리어져 있었어요. 사도바울과 같은 경우죠.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났어요? 그가 참답게 예수를 만나고 그리고 예수를 위해서 살아가고자하는 그 말하자면 놀라운 과정 속에서 비로소 무엇을 보게 되요? 참다운 하나님의 기독교 신앙의 진리와 진수가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보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그것들을 이제 우리에게 전해주게 된 것이죠. 우리는 그것을 의지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제가 주일학교 성경시험을 보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이유가 그것이에요. 그런 식으로 성경을 가르쳐서는 안돼요. 그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에요. 그렇게 해놓고 더군다나 상품까지 얹어서 준다면 그것은 문제가 많아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보세요. 뭐 하나가 기본적인 원리를 벗어나면 그 다음에는 다음원리를 그대로 적용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적용이 되지를 않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35장 마지막에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서 세 번 연속해서 나오면서 결국은 끝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야곱이 이제껏 까지 하나님을 믿어왔던 그 신앙이라고 하는 것들이 여기에 와서 하나의 커다란 변혁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것이 뭐냐 하면 이전에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에 집중되어 있어요. 그래서 뭐라고 말하느냐하면 35장 1절에서 약간의 각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껏 해서 자기 집안사람들에게 얘기하는 것이 무엇이에요? 35장 1절을 보세요. 잘 보세요. 이제 35장 1절이 새롭게 보일 것이에요. 보세요.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내가 네 형 에서에게 나타났던…….’ 2절을 보세요. ‘야곱이 이에 자기 집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이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이방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3절-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란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3절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이 없어요? 잘 보세요.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란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재미있지요? ‘나의 환란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그 다음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 …….’ 고정도가 야곱이 생각하던 하나님이었어요. 그러니까 잘 보세요. 이렇게 되는 것이죠. 이 35장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을 거예요. ‘환란 날에 내게 나타나셔서 내게 말씀하시던 하나님’ 그 수준에까지 못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때요? 하나님은 자기가 고난 중에 있을 때에 부르짖으면 달려오시는 분 정도로 생각하고 그렇게 자기의 도움이 되시는 분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야곱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에 관한 견해였어요.
이렇게 말을 하면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그게 그거지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해요. 그러나 이것은 엄청난 차이에요. 야곱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신앙의 단계마다 어떻게 변해갔는지를 조사해보면 아주 놀라운 결론에 도달하게 되요. 그 결론이 무엇이에요? 처음에는 환란 가운데 자기를 도와주실 수도 있고 안도와 주실 수도 있는 분이라고 28장에서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뭐라고 그래요? ‘이렇게, 이렇게 하시면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하지요. 그러나 나중에 여기 35장에 와서 깨닫게 되는 것은 ‘환란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응답했다는 것은 어때요? 환란 날에 자기가 부르짖었더니 자기에게 응답해주셨다는 것이죠. ‘나의 가는 길에 나와 함께하시던…….’ 그 정도에 그치는 것이에요. 신앙이 좋고 믿음이 충만하다는 사람들이 대개 생각하는 하나님의 정도가 이런 것들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뭐에요? ‘믿음이 적은 너희들은 부르짖어도 응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기도가 있고 살아있는 신앙이 있으므로 내가 부르짖을 때는 하나님이 나에게 생생하게 오셔서 나에게 응답하시고 나를 위해 역사하신다.’ 라고 생각하죠.
그러나 이제 이 35장을 야곱이 경험하면서 야곱에게 일어났던 가장 놀라운 변화는 무엇이냐 하면 그 하나님이 자기를 환란 가운데서 건져주시는 그런 것들보다도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새로운 성품을 발견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기에서 세 번씩이나 써내려가는 거예요. 말씀하시던 곳에서, 말씀하시던 곳에서,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람이 그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귀를 기울이면서, 그러면서 그 말씀에 깊이 집중하고, 그리고 거기에서 자기의 마음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여 녹아들 수 있다면 그는 분명히 무엇인가를 경험한 사람이에요.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럴 수 없어요.
제가 다른데 가서 제가 여태까지 섬겨오던 교회에서도 늘 그러지를 못해서 안타까웠습니다만, 뭐 조그만 변화만 있었습니다만 예배를 드리는 광경을 보면 저는 매주 절망해요. 아! 소망이 있겠는가? 우선 뭐냐 하면 말씀을 향하여 그 채워지지 않는 갈증, 쉽게 얘기해서 그 양쪽에 다 문제죠. 저를 포함해서 설교자도 문제고 그 다음에는 듣는 사람들의 태도도 문제죠. 정말 생명이 없어요. 왜 그렇게 안 믿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생명이 있는 예배의 광경을 경험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에요. 생명이 있는 예배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한번 깊이 경험해야 해요. 그럼 경험하지 못하면 영원히 알 수 없는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말씀드리잖아요. 책을 읽어야 해요. 과거의 역사를 읽어야 해요. 성경을 깊이 읽어야 해요. 그러면 우리들의 그것과는 뭔가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되요. 아! 정말 말하자면 한이 없어요. 그런데 나 자신도 그 속에서 그렇게 닮아가는 것을 느껴요. 그것은 개인의 신앙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를 흐르고 있는 어떤 영적인 그런 기류에요. 예배가 그렇게 힘이 없으니까 어떻게 되요? 요즘에 많이 하고 있어요. 홍해작전? 홍해작전은 뭐에요? 그런데 제가 있던 교회에서도 홍해작정인지 무슨 지중해작전인지를 하는데 아! 놀라워요. 정말 한국교회 교인들은 너무 착해요. 하여튼 그 본당이 가득 차더래요. 서울시내 각양 각처에서 또 안내 맡은 사람은 그 새벽시간에 4시밖에 안되었는데 한복을 입고 나와 가지고 길에서부터 쭉 늘어서서 인도하고, 또 거기서 기도하고 직장 갈 때 아침 먹고 가라고 한 팀은 가서 밥을 하고, 그리고 5시에 새벽기도가 시작 되요. 성가대도 울려 퍼지고 그런데 같이 있던 전도사님이 참석을 하고 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5시 25분에 설교와 모든 것이 마치는데 40분이 되니까 기도소리가 들리지를 않더래요. 그러니까 사람은 가득 메웠으나 기도의 영은 죽어있다. 그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어요. 그리고 6시가 되니까 아무도 없고 사찰의 청소하는 소리가 들리더래요. 기도회가 끝난 지 40분도 안지나갔어요. 안 되는 것이에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부흥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사람들에게 그렇게까지는 하게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새벽시간을 달려와서 거기에 앉아서 그 수많은 사람이 한복을 입고 교회당을 메워도 기도의 영은 그런다고 살아나는 것이 아니에요. 왜 모르세요. 전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필요해요. 왜? 사람은 워낙 부패하고 게으르기 때문에 그렇게 억지로라도 해서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필요해요. 나는 그것까지는 인정할 수 있어요. 그러나 문제는 무엇이에요? 그렇게 모이면 되는 것입니까? 그런다고 저절로 일어나요? 그렇지 않아요. 보세요. 사람의 깊은 내면에서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 고요한 예배당이 부르짖는 기도소리와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탄식으로 가득 찰 수가 없는 것이에요. 무슨 프로그램으로 그것을 일으킬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대안을 얘기해보세요. 나는 거기에 대해서 성경적이고 합당한 대안을 찾는다면 내가 무릎을 꿇고 그분을 내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겠어요. 정말이에요. 결코 되지 않는 것이에요. 나갈 수 있어요. 그러면 보세요. 참다운 영혼의 변화와 함께 그런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떤 결과들이 생겨나요? 자기의 의가 되는 것이에요. 어떤 자기의 의? 새벽기도를 40일을 했다든지, 우리교회에서 이만큼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야 된다던지, 이런 게 나오는 것이에요.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옳지 않은 것인지 아세요? 그러니까 그럴 수는 있다는 것이죠. 그럴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런 방법 자체에 영혼의 변화를 기대한다고 하는 것은 무리인 것이죠. 정말 되지 않는 거예요. 놀라운 영혼의 변화 없이도 그런 일들은 행할 수 있어요. 교회는 하나의 조직이기 때문에 그래요. 제가 여기의 당회장이라고 칩시다. 그러면 집사님들이 어느 날 안색이 변해서 깊이 고민하면서 우리가 이래서야 되겠느냐면서 40일 동안 새벽기도에 나오라고……. 그러면 나오려고 애를 쓰지 않겠어요? 그게 당회장이 얼굴이 사색이 되어서 이야기를 하는데 새벽에 잠자고 있으면 그게 편하겠어요? 나오겠지요. 수요일에 무슨 명목으로 만날까?........ 더군다나 거기에 출석 표까지 도장을 찍어서 마지막에 시상품까지 준다면 그게 상업주의죠. 안 되는 것이에요.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사람의 마음속에 참다운 변화가 일어나려면 어떻게 해서 일어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에요. 그것을 가지고 고민하는 것이 부흥의 문제에요. 대안이 있으면 보자고요. 아니! 없어요. 그 영혼 속에 참다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거든요. 이러한 일들이 부흥의 이야기에 나오는 커다란 대단원의 결론이에요.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 말씀을 전하면서 여러분들은 아직까지도 제가 부족하게 설명을 해서 그런지 부흥이라는 말 정도가 깊이 어필되지 않는 것 같아요. 쉽게 얘기해서 충만하고 은혜가 많은 상태, 그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서 수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말하자면 깊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에요.
오늘 성경에 보니까 뭐라고 했느냐하면 14절을 한번 보세요. ‘야곱이 하나님의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랬지요? 우선 그 신앙의 참다운 부흥에 있어서 말씀의 요소에 대해서 우리들이 지금 생각을 해봤어요. 그러니까 겨울에 이제 여러분들이 강좌가 없는 동안에 혼자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생활을 하실 때에도 이제 그런 문제들을 깊이 생각하셔야 되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딱 잘라서 오늘날 현대 교회의 모든 문제는 무엇이냐? 딱 하나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들을 만족시켜줄 수 없는 설교자, 그 다음에 그 말씀으로 만족할 수 없는 성도, 거기서부터 그 문제가 출발인데 그 문제가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을 안 하고 접어두고 나서 문제를 풀려고 하니까 문제가 풀리지를 않는 것이에요. 아! 풀리지 않아요. 정말 안 돼요. 그러니까 그렇게 풀리지 않으니까 전부 다 잘못 되요. 심지어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니까 산타클로스는 좀 나아요. 어느 교회에 가니까 크리스마스 때 뒤에다 추리를 해놨는데 마녀가 빗자루를 타고 가는 것을 달아놓고 발표회를 해요. 이제 뭐가 잘못 되도 한참 잘못된 것이에요. 어림없는 것이에요. 모든 것이 다 뒤틀리는 것이에요. 오즈의 마법사를 타고 다니는 것이에요. 물인지, 술인지, 뜨물인지, 막걸리인지 구분을 못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와야 해요. 그러니까 문제가 되는 것은 뭐냐 하면 신앙부흥에 동의를 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동의를 하지 않는 것은 자기의 자유에요. 그러나 문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정말 그런 진지한 탐구를 가지고 있느냐? 그래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말하기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훌륭한 철학자라고 그랬어요. 다 자기의 주견을 가지고 있어요. 어느 정도로 강하느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물리칠 정도로 완고하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그 완고함은 정말 불행한 완고함이에요. 여러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분들이 조금만 지각이 있으시다면 인간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그리고 얼마나 간사하고, 더럽고, 추잡한 것인가 하는 것을 알거에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완전하고 순결한 말씀이 인도해 주는 대로 신앙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못 믿을 육신 속에 깃들여져 있는 생각과 상식이 판단하는 대로 신앙생활을 한다? 더군다나 교회를 그런 상식을 가지고 이끌어간다? 그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에요. 정말……. 그래서 제가 청년들에게 설교하면서 늘 이야기하는 것인 그것이에요. 제가 마지막 떠날 때 까지도 못 알아들어요. 무엇을 말하든지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요.’ 이렇게 말하지 말고 성경을 가지고 다가오라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 함께 풀어서 이야기해보자 그러니까 어느 목사님이 그런 표현을 썼어요. ‘오늘날 도대체 교회에 있어서 하나님이 누구시냐?’ 고 했더니 ‘입헌군주제 국가의 왕이다.’ 뭐에요? 영국여왕이나 일본 천황 같은 존재라는 것이죠. 일본 천황이 정치에 실권이 있어요? 영국의 국왕은? 아무것도 없어요. 상징적인 존재에요. 모든 일들은 밑에서 다 알아서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은 그런 존재라는 것이에요. 먼저 회의하기 전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만 그것은 국회가 의회를 하기에 앞서서 국왕께 알현하는 정도로 끝난다는 것이에요. 인사를 받으시고 높은 자리에 앉으셔서 저 곁방에 가서 편안히 대접을 받고 계십시오. 모든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합니다. 그러면서 이야기하기를 제직회 때 성경을 펴놓고 제직회를 하는 교회가 있느냐고 묻고 있어요. 당회를 할 때에 성경을 펴놓고 당회를 하는 교회가 있느냐고 물었어요.
그러나 예전에는 그렇게 했다는 것이에요. 1960년대에 박윤선 박사님이 총신대 학장을 하실 때에 교수회의를 하면 성경을 가지고 들어가도록 해서 같이 학교의 진로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그러면 이 문제에 대해서 성경이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우리한번 서로 살펴봅시다.’ 그러면서 성경을 펼치면서 그 속에서 진리를 찾았어요. 그렇지 않아요? 이런 신앙적인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첫 번째 걸음은 그것이에요. 그러니까 말씀을 듣고 이제 이번 학기가 끝납니다만 여러분들은 동의해도 좋고 동의하지 않아도 좋아요.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에요. 늘 성경으로 돌아가세요. 그리고 확인하세요. 그 반론을 제기하기 위해서는 성경 속에서 이야기를 하세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할 것이에요. ‘아 그런 사람들은 전문가고 우리들은 비전문가인데…….’ 그러니까 동일하게 같이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진지하게 성경을 탐구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판단을 할 수 있는 기준을 성경은 우리에게 명백하게 해주어요. 그러면서 그 성경 속에서 삶으로 돌아가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에요.
제가 마지막으로 이것을 강조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사랑이 되지를 않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거기에 그 성경에 자기의 신앙의 미래와 자기의 지금의 생활의 미래와 삶의 장래와 모든 것들이 달려있다고 할 때 그리고 그것을 매일 따라서 살아갈 때에 성경을 사랑하게 되는 것 아니에요. 안 되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공부로 모여도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가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고 싶어가지고 안달들이에요. 그러면서 젊은 애들이 모여가지고 성경공부 교재 하나를 가지고 3시간씩 보내고 있어요. 입만 아프지 뭐가 남는 것이 있어요? 물론 자기 느낌을 이야기하는 것도 필요하지요. 그러나 깊이 성경 속으로 함께 들어가야지 되잖아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집에서 자녀들을 교육시킬 때에도 철저하게 무엇부터 교육을 시켜야 되느냐하면 ‘쉐마’부터 교육을 시켜야 해요. 히브리말로써 ‘들어라’ 고요히 앉아서 부모가 가르쳐주는 성경말씀을 듣는 연습을 시켜야 해요.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오늘 뭐라고 그랬느냐하면 돌기둥을 세우고 그 다음에 전제물을 붓고 또 기름을 부었다고 했지요. 돌기둥을 세우는 이야기부터 먼저하고 전제물을 붓는 이야기를 하겠어요. 기둥을 세우는 이야기는 무엇이죠? 돌은 언제 세웠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슨 사건이 일어날 때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웠어요. 요단강을 기적적으로 건넜을 때 돌기둥을 세웠지요. 라반이 야곱을 쫒아오다가 ‘다시는 너를 이 국경을 넘어서 너를 추격하지 않겠다.’고 약속 할 때 ‘여갈사하두다’ 라는 돌무더기를 세워요. 증거에요. 증거의 돌무더기라는 돌무더기를 세웠지요. 바로 그것이에요. 왜? 돌아가면서 그것을 보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에요. 국경일이 왜 있는지 아세요? 한번 놀라고요? 아니에요. 가장 좋은 것은 그 날을 평상시의 날과는 다르게 만드는 것이에요. 그것은 잊지 않아요. 왜 그래요? 그날은 매일매일 출근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회사에 오지 말라는 것이에요.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이 땅에서 국군들이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죽어간 날을 기념하는 날이래요. 생생하게 머리에 새겨지는 것이에요.
여러분 저는 생일에 대해서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사람 중의 하나에요. 어떻게 태어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까짓게 뭐 중요해요. 저는 어렸을 때 종암동 개천 옆에 있는 집에서 태어났어요. 지금은 다 복개공사를 했지만요. 그 까짓게 뭐 그리 대단해요. 핏덩어리 하나 태어난 것하고 안 태어난 것하고 세상에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에요? 내가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내가 마지막에 주를 위해 살다가 주를 위해 죽을 것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니에요? 그래서 저는 그런 생각을 해요. 출생한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한번 대대적인 발상의 전환을 해볼 계획이 없어요? 저는 그런 계획을 가지고 있어요. 일단 조금만 더 주변이 정리가 되어 지고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가게 하실 때에 저는 대대적인 정리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그런 날보다 어떤 날? 우리의 가족이 커다란 시험으로부터 응답을 받고 구출을 받았던 날을 대대로 오래도록 기념을 하는 것이죠. 자녀를 모아놓고 ‘얘야, 엄마와 아빠가 이제 망해가지고 아니면 큰 시험에 들어서 집안이 다 풍비박산 되었다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가운데 주님이 응답해주셔서 새롭게 회복을 받았던 그런 날이란다. 그 날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바로 이것이란다.’ 하고 성경을 펴면서 ‘너희는 전심으로 여호와를 의뢰하라.’ 그러면서 나름대로의 돌기둥을 세우는 것이죠. 나는 그것이 필요하다고 봐요.
그리고 교회가 세워진 날! 얼마나 뜻 깊은 날이에요. 그날은 직장을 안가면서 우리교회 창립기념일이라서 직장을 안 간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저녁때에 모두 모여서 성찬을 하고 ‘지금으로부터 25년전 이 고을에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몇 사람들이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하고자 이곳에서 교회를 세웠다. 오늘 저녁이 바로 그날이다.’ 하면서 주의 잔과 떡을 나누면서 깊이 교회를 세우시게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과 그리고 그 구속의 사역에 합당한 삶을 교회가 이어가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것이죠. 그렇지 않아요? 이런 것들이 돌기둥을 세우는 중요한 이유에요. 교회적으로도 마찬가지죠. 기념일을 만드는 것이에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우리들이 그 역사를 돌아보는 것이죠. 그래서 후손들로 하여금 ‘엄마 왜 주일도 아닌데 우리가 손을 잡고 새 옷을 갈아입고 교회에 가야 되요?’ 그때에 가르쳐주는 것이죠. ‘얘야, 25년 전에 이 섬김의 교회가 이 서초구에 세워졌는데 그 때에 우리 전도사님과 장로님과 몇 분들이 정말 이 세상에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가정에 모여서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면서 성경 몇 장 몇 절을 읽으면서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 교회의 시작이란다.’ 그러면서 옛날을 일깨워주는 것이죠. 그러면서 끊임없이……. 인간은 그러한 줄을 의지해야지만 그래도 순수성을 놓치게 되는 것이에요.
우리는 너무나 빨리 옛날을 단절해버려요. 탁탁 끊어버려요. 당회장이 오면 부교역자들은 일괄사표를 내야해요. 이게 뭐하는 세상이에요? 왔으면 왔지. 다 각자 하나님이 보내서 섬기는 것인데……. 당회장이 오면 부교역자들은 다 사표를 내야해요. 그게 어디에서 온 것이에요? 성경에서 온 것이에요? 세상의 상식에서 온 것이에요? 이런 식의 일들이 벌어져요. 그리고 옛날과는 빨리 단절을 하는 것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면서 과거에 집착해서도 안 되죠. 그러나 끊임없이 그런 역사를 돌아보며 돌기둥을 세우면서 나중에 그 돌기둥을 보면서 후손들이 혹은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지나면서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때에 요단강을 건넜을 때에 여호수아에게 주님이 가르쳐주셨잖아요. 이것이 무엇이냐고 후손이 물으면 하나님이 여기를 건널 때에 우리를 기적적으로 인도하셔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그 표증이라고 대답하라는 것이죠. 여러분 돌기둥이 있습니까? 돌기둥을 세워놓을 만한 그런 기념비적인 사건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좋은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나쁜 의미에서도…….
저는 그런 기념비적인 돌기둥이 세워질 수 있는 일들을 여러분들이 찾아내야 된다고 생각해요. 더군다나 교회적으로 정말 그래요. 저는 교회를 15년 가까이 섬겨오면서 늘 하는 생각입니다만 교회는 뭔가를 많이 하는 데가 아니에요. 그냥 백성들이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이 깨닫고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 그 자체면 교회는 일을 다 하는 것이에요. 왜 그래요? ‘구제해야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을 받고 그 마음에 녹아져서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구제를 안 하면서 살수가 있겠어요? ‘전도해야 된다.’ 아니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리고 죽어가는 영혼들이 얼마나 비참한 운명이고 구원받은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느끼며 흐느껴 울고 어깨를 들먹이며 돌아간 사람이 복음을 전하지 않겠어요? ‘의롭게 살아야 된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지난 죄를 깊이 통회하고 매일매일 주시는 죄 사함의 은혜를 힘입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고 믿은 그 사람이 돌아가서 의로운 삶을 안 살겠느냐는 것이에요. 왜 교회가 자꾸 행사를 좋아하는지 아세요? 무엇 때문인지 아세요? 생명이 없는 것들에 마음이 허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라도 단합을 과시하는 것이에요. 전혀 전도를 안 하니까 할 수 없이 교회가 조직적으로라도 뭉쳐서라도 해야 되는 것이에요. 물론 그런 일도 필요해요. 그러나 아까 말씀 드린 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 되고 영혼들이 놀랍게 변화를 받고 그러면서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에요. 그것이 주된 것이고 교회에서 계획하는 행사는 부수적인 것이에요. 그런 노력들을 어떻게 결집시킬 수 있을까하는 것이죠. 앞뒤가 뒤바뀐 감이 있지 않아요?
이런 것들이 어떻게 하면 원위치를 찾을 수 있겠어요? 쉽게 얘기해서 사람의 개개인의 영혼 속에서 어떤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는 것들을 교회 속에서 경험해야지만 된다는 것이죠. 여기에서 보면 돌기둥을 세우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 다음에 전제물을 붓는 이야기가 나와요. 전제물은 뭐냐 하면 제물을 태워드린 다음에 그 위에다가 추가로 제물을 붓는 것이에요. 그것은 대개 액체로 되어있어요. 시편에 보면 피의 전제도 나오고 그 다음에 또 포도주도 나오고 기름도 나오고 그래요. 여기에는 전제물도 붓고 또 기름도 부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니까 액체를 하나님께 헌신의 상징으로 부은 것이죠.
그거에요. 무엇이에요? 하나님을 참답게 만난 사람을 아낌없이 붓는 것이에요. 그래서 글쎄 장담은 못하겠습니다만 헌금이 안 나오는 것은 절대적으로 교역자 책임이에요. 나는 그렇게 믿어요. 그리고 헌금을 걷어내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뭐냐 하면 강력하고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내가 언제 여기에서 얘기를 했나 모르겠네요. 휫필드가 그 점에 있어서 탁월했잖아요? 얼마나 설교를 잘했는지……. 여러분 피뢰침을 발견한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벤저민 프랭클린이라는 과학자에요. 그런데 그 사람이 과학자이기도 했지만 그 사람의 직업이 인쇄업자였어요. 인쇄소를 해서 돈을 꽤 번 사람이었는데 휫필드가 바보들을 돌보는 사업에 굉장히 많이 헌신적으로 투자를 했어요. 그런데 벤저민 프랭클린이 미국에 앉아있으니까 휫필드가 온다는 소문이 들린 것이에요. 지난번에도 다 털렸는데 또 온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번에 와봐라 내가 주나봐라.’ 그리고 집회에 참석했는데 돈주머니를 차고 갔지요. (그 때는 돈주머니가 있었나 봐요.) ‘안 돼! 요번에는 내가 절대로 안 넘어갈 거야!’ 딱 앉아서 설교를 듣는데 설교가 쫙 뻗어가는 거예요.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돈주머니를 쥔 손이 좀 느슨해지는 것이에요. 안준다고 돈주머니 모가지를 딱 움켜쥐고 갔는데 느슨해져요. 설교가 쫙 올라가면서 꽃이 피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 내가 어떻게 안 낼 수 있겠는가! 금화는 내버려두고 은화만 털어놓고 가자.’고 했는데 마지막에 가서는 설교가 막 꽃이 피면서 그러면서 폭탄이 떨어지는 것 같은 은혜가 임하니까 달달 떨면서 이것을 들고 나가서 다 주머니째 다 털어 넣고 주머니를 풀었다가 처음에는 은화만 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설교가 절정에 이르고 이윽고 기도시간이 되자 나도 모르게 떨리는 손으로 모두 털어 넣고야 말았다고 해요. 그런 것이에요.
우리가 은혜를 받을 때 저도 생각이 나거든요. 그 때는 저는 일정한 직업도 없었을 때에요. 공무원발령이 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뭔가 바치고 싶어 죽겠는데 뭐가 있어야지요. 그래가지고 집에서 닭 한 마리를 사주시면서 이것을 가지고 가서 할머니하고 끊여 먹으라고 그랬어요. 그 닭을 가지고 교회로 가서 닭을 바쳤어요. 생닭을……. 지금은 우습지만 그 때는 꽤 큰 거였어요. 그래서 ‘목사님 제가 닭을 한 마리 가져왔는데요. 결핵에 걸려서 누워있는 조 집사에게 보내줄 수 있으세요?’ 난감하거든요. 그 때는 냉장고도 흔치 않은 시대니까 어디다가 둘 수도 없는데 이 새로 믿은 청년이 생닭을 가져와서 지금 당장 그 집에 전해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니 목사님은 계획이 없는 심방을 또 가야되는 것이 아니에요? 하여튼 그렇게 뭐든 바치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바치지를 못해서……. 그런 일화가 있었는데 7, 8년이 지나서 그 목사님을 만났는데 그 목사님 사모님이 제일먼저 그 얘기를 해요. 하여튼 뭐든지 바치고 싶은 것이에요.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쏟아놓고 싶은 것이에요. 어떻게 안 바치겠어요. 연애할 때 사랑해보셨지요? 좋은데 어떻게……. 주면 줄수록 자기가 만족이 되는 것이에요. 주고 주어서 자기가 가난해질수록 자기는 만족과 희열을 느끼는 것이에요. 왜? 나 때문에 저가 부요해지니까…….
영혼의 변화가 없는데 헌신을 좀 짜내서 쓰자니 공갈을 쳐도 안 듣고 그것은 한, 두 번은 되는데 구슬러도 안 듣고 얼러도 안 들어요. 나중에는 상패까지 주고 그래서 조금씩 짜내서 쓰자니……. 그것을 헌신 좀 달라고 손 벌리는 그 교역자는 얼마나 비참하겠어요? 그러니까 늘 헌신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가 넘치는 게 아니에요. 그런 사람 많잖아요? 건축 헌금할 때 왕창해놓고 가만히 생각하니까 좀 섭섭하다가 나중에 속이 아린 것이죠. 내가 아는 교회의 목사님께 그런 전화가 왔대요. ‘목사님 그것 좀 면제시켜줄 수 없습니까?’
여러분! 참다운 헌신은 부흥이 일어날 때 참답게 하시는 것이에요. 한 20, 30명 모였지요? 괜찮아요. 이 사람들이면 한 동네를 뒤집을 수 있어요. 정말……. 헌신되지 않은 십만 명이 모이는 것보다 헌신된 사람 열 명이 모이면 더 크고 위대한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이에요. 왜 그래요? 하나님의 나라는 수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뭐에요? 다수결주의를 되게 좋아하는데 교회에서는 다수결이 필요 없어요. 그런 게 아니에요.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보다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 그 사람이 다수에요. 그렇지 않아요?
야곱이 하나님을 참답게 만나고 돌기둥을 세우고 올라가자! 아낌없이 자기의 전제물을 풀었어요. 무엇인지는 알 수 없어요. 그러나 분명히 귀중한 것을 아낌없이 하나님 앞에 부었을 거예요. 이제는 이 붓는 것이 제물에 있어서 제물을 드리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자신의 일부를 드리는 것이 아니에요. 자기 자신을 드리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해요? ‘내가 이미 관제와 같이 부음이 되고…….’ 자기 자신이 제물위에 드려지는 관제와 같이 액체가 되어서 순교를 위해 그렇게 부어졌다는 것이에요. 그게 제사의 참된 의미에요. 하나님 앞에 이런 헌신은 참답게 하나님을 만나는 가운데서 이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에요. 우리 모두가 당연히 이렇게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아낌없이 부을 수 있는 상태가 언제든지 되어있어야 된다는 것이죠. 그것이 참답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통하지 않고 무엇으로 가능하겠느냐는 것이죠. 재미있어요. 회개도 참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시면 회개하는 순간에도 머리를 굴려요. 하여튼 인간은 정말 이 야곱의 후손이에요. 정말…….
그런데 어때요? 참답게 하나님을 만나면 일일이 예를 들지 않아도 많이 봐요. 한번은 집회를 하는데 말씀이 끝나고 기도하는 시간인데 저쪽 뒤에서 어떤 한 사람이 저벅저벅 걸어오는데 얼굴이 완전히 갔어요. 얼굴이 노랗게 되어버렸어요. 걸어와서 주저앉더니 자기의 죄를 고백해야겠대요. 그래서 나에게 고백할 필요가 있나? 하나님 앞에 고백하면 되지……. 그런 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때로는 그러한 것도 필요해요.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고는 마음의 자유를 누릴 수 없는 그런 영혼이 있어요. 그럴 때는 들어줘야 해요. 그러나 비밀에 부쳐야지요. 그리고 얘기를 쭉 하는데 황당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기도하기 시작하는데 이제 완전히 기도의 영에 사로잡혀서 기도하는데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것 같다.’ 그 하나, 하나의 죄를 지적할 적마다 자지러지는 것처럼 아파해요. 그러면서 울부짖으며 ‘아멘, 아멘, 그렇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지금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자신이 완전히 깨어져요. 그러니까 회개도, 헌신도 이렇게 자신을 아낌없이 하나님 앞에 붓는 것과 같은 그러한 일들이 부흥을 경험한 다음에 일어나는 것이죠. 정말 참다운 부흥을 경험하기 전에는 정말 참다운 헌신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이죠.
물질생활도 역시 마찬가지에요. 물질생활도 하나님을 향한 그 생명이 넘치던 때에는 우리가 물질을 하나님 앞에 많이 바쳐요. 정말 많이 바쳐요. 이래요. 참다운 부흥을 만나지 않고도 물질적인 헌신은 어느 정도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참다운 부흥을 만나면 반드시 이런 물질적인 헌신이 있다는 것이죠. 그것은 그렇게 안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죽도록 사랑하면서도 한 번도 선물해본 적이 없다는 사람과 똑같은 것이에요. 그것은 안 바칠 수가 없어요. 예를 들어서 봅시다. 이런 교회가 이렇게 있는데 어느 날 교회를 짓는다고 합시다. 여러분 오백 원, 천원을 모아서 교회를 지을 수 있겠어요? 교회뿐만이 아니라 선교사를 파송한다고 합시다. 그래서 선교사 몇 가정이 여기서 단독으로 파송을 받아서 나간다고 하면 그 때에 정말 오백 원, 천 원씩 코 묻은 돈을 헌금해서 그 일을 할 수 있겠어요? 물론 티끌모아 태산이니까 할 수 있어요. 그러면 교인이 태산처럼 많아요? 그게 아니잖아요. 태산처럼 많으면 더 큰일을 해야지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교회를 짓는 정도가 되면 자기의 재산을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에요. 정리해서 반이면 반, 광명시에 있는 어느 교회인데 한 800명, 900명이 모이는 그 교회에 제가 집회를 갔는데 아주 큰 감화를 받았어요. 거기의 목사님이 내가 가르치던 학생의 아버지였는데 교인이 250명이 있을 때에 한 200평되는 교회를 아주 훌륭하게 지었어요. 그래서 아니 200명 정도밖에 안되는데 어떻게 이렇게 큰 교회를 지을 수 있습니까? 그랬더니 하는 이야기가 장로님부터 전부 다 집을 팔고 사글세로 갔대요. 그게 말이 쉽지 쉬운 이야기입니까? 십억이 있는데서 오억을 내는 것도 힘든데 집을 팔아서 삼억씩 내고 사글세로 간 거예요. 어떤 생각으로? 믿음으로……. 그런데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200명에서 건축을 시작했는데 건축하는 과정에 성도가 150명이 늘었대요. 교회가 그렇게 되어야 해요. 그러면서 그 사람들이 지금은 다 잘산다는 것이죠. 저는 지금 물질적인 축복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하나님을 만난 깊은 신앙의 경험이 있으면 아낌없이 하나님을 위해서 쏟아 붓는 것이에요. 어느 정도로? 모든 것을 버리고 마지막 자기의 생명까지도……. 주님이 자기의 생명을 받으시지 않으면 주님께 대한 소속감을 잃어버릴 정도로 그렇게 말하자면 헌신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선교도 마찬가지에요. 나는 선교사 지망생은 아니지만 우리 교회의 선교 지망생들이 저를 좀 굉장히 부담스러워했지요. 아주 심하게 얘기했어요. 선교사로 소명을 받았으면 고국의 땅에서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는 증거를 보이라는 것이에요. 성도들의 돈을 축내지 말고……. 기도도 제대로 안하고 교회에서 섬기면서 열심도 없는데 아니 똑같은 피부가 모인 이 속에서, 똑같은 풍습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전도하지 않고 뜨겁게 영혼을 섬기지 않는데 피부 색깔이 틀리고 문화와 종교와 풍습이 다른 그곳에 가서 죽기까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디에서 나온 이야기에요? 교회의 참다운 부흥이 일어나지 않고는 선교의 역사는 지체되는 것이에요. 정말 지체 되요. 선교사들이 기도제목을 보내는 것을 보면 만날 똑같아요. 그런 기도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일번순위는 만난 돈을 보내달라는 것이죠. 무슨 교회를 짓는데 몇 만 불이 필요한데 기도해주십시오. 그런데 제가 아는 파송된 선교사들 가운데 정말 훌륭한 사람들이 종종 있어요. 우리 선배중의 하나가 태국의 선교사로 갔는데 기도편지가 왔는데 가족들의 사진이 예쁜 아들, 딸, 둘과 사모님하고 자기하고 기도제목을 보냈는데 이분의 기도제목은 딱 하나에요. ‘우리 온가족이 이 불교의 나라 태국의 땅에서 순교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부르고 있는 것이에요. 정말 이 구원의 역사와, 이 신앙의 놀라운 역사, 그렇게 나이브하고 순진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의해서 변화되어지지 않는 것이에요. 나는 수많은 선교사들 중에서 그 사람만이 지금 선명하게 생각이 나요. ‘우리 온 가족이 주님을 위해서 이 불교의 나라에서 순교할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이런 사람들이 선교의 빗장을 열어가는 것이에요.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올라가셨고, 돌기둥을 세웠고, 마지막에는 무슨 이야기가 나오죠? 15절에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루스란 이름은 28장에 벌써 나오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또 벧엘이라고 불려요. 무엇 때문이에요? 이스라엘하고 똑같은 것이죠. 벧엘은 새까맣게 잊어버린 것이에요. 새까맣게……. 새까맣게……. 벧엘이 무엇인지 새카맣게 잊어버린 것이죠. 자기가 부르고도 자기가 새까맣게 잊어버린 것이에요. 오직 그에게는 세겜 만이 정겨운 이름이었죠. 벧엘이 이제는 자기에게 정결한 새로운 삶의 중심, 신앙의 중심지가 되는 것이죠. 똑같아요. 여러분!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고 놀랍게 변화를 받으면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게 되요. 그리고 삶의 중심이 교회로 바뀌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스운 이야기인 것 같지만 이사를 가신다면 깊이 기도하고 교회를 정하세요. 교회를 주시라고……. 그리고 그 교회에서 정착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나? 확인을 하고 아멘하고 응답이 되어 지면 모든 것을 옮겨야 해요. 교회에 가장 이상적인 것은 할 수 있으면 지역에 기반을 둔 교회가 되어야 해요. 그래야지만 정말 좋아요. 그러면 어때요? 예를 들면 오늘 저녁 교회에서 엄청 중요한일이 생겼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오늘 낮에라도 두루두루 전화해서 오는 저녁에 전 교인이 모여라. 그리고 우리가 기도하자. 그런데 이것은 뭐 한없이 먼데서 오니까 사실 구역예배도 불가능해요. 이제는 구역의 의미가 없어요. 그러면서 그 동네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심방 갈 때 차타고 갈 필요도 없고 가방하나 들고 터덜터덜 할아버지처럼 걸어 다니면 얼마나 좋고 아름다운 풍경이에요? 너무 꿈같은 얘기겠죠. 그러나 나는 그런 결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제 이런 벧엘이 새로워지게 된 것이에요. 그러니까 신앙의 커다란 변화가 있게 되면 교회가 다시 보이게 되는 것이에요. 지하실에 이까짓 것 30, 40평짜리 건물이 있고 만날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그런 거구나!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간단한 곳이 아니구나! 간단한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에요. 왜? 여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주어지는 곳이니까. 그래서 사람이 신앙의 경험이 사람이 틀려도 그렇게 똑같이 일치 하는 게 많아요.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은 몇 사람으로부터 내가 공통으로 같은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만날 교회에서 쫓겨나는 꿈을 꾼대요. 그러면서 꿈에 나를 교회에서 쫒아내지 말라고 주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매달린대요. 그러면서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매일 저녁 자기는 불안하대요. 왜 그러느냐 하면 어느 날 갑자기 교회에서 너는 나오지 마! 그럴 것 같대요. 다 무엇 때문에 그래요? 루스가 변해서 벧엘이 되었어요. 견해가 바뀌는 것이에요. 삶의 중심과 사랑의 자리가 바뀌는 것이죠. 이제 이 루스에 올라와서 이곳을 벧엘이라고 부르면서 이곳의 이름을 벧엘이라고 부를 때 야곱의 마음에 이제 세겜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에요.
(찬양)
나와 세상은 간곳없고 구속한 주 만 보이도다.
야곱에게 있어서 이렇게 여기를 새롭게 벧엘이라고 불렀을 때 깊이 깨닫는 바가 있는 것이에요. 무엇을 깨달아요?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깨닫는 것이에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새로워지고 벧엘이라는 이름이 새로워지면서 깨닫는 것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과 자기가 어떤 관계의 사람인지,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에요.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관계에 있다는 것, 벧엘을 깨달으면서 자기의 인생이 하나님의 이 언약에 구비치는 역사의 큰 물줄기에 그 속에 구원의 역사에 징검다리를 놓아가는 인생이요, 풀꽃과 같이 사라지는 인생이지만 영원을 향하여 살아가야하는 인생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야곱의 생애에 깊은 신앙부흥을 여기서 경험하게 되면서 지난시간에 말씀 드린 대로 계속 일평생동안 이 35장의 영향이 그를 주장하는 것이에요. 주님은 잠시 만나고 떠나가셨지만 야곱의 인생은 영원히 변화되었어요. 놀랍게 변화되었어요. 그러면서 그가 믿음으로 그 험난한 세상을 헤치면서 살아가다가 결국은 어때요? 그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기꾼 같고 그 권모술수를 의지하면서 살았던 그 하찮은 인간 야곱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어지는 구원의 역사에 한 징검다리가 되는 것이에요. 그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의 역사로 넘어올 수 없어요. 정말이에요. 그를 통하지 않고는 계시의 역사가 이어질 수 없는 그런 자리에 서게 된 것이에요. 매일같이 짐승에 둘러싸이고 짐승의 먹이를 해주고 그리고 세겜 사람들과 함께 물건이나 몇 푼 나누어서 팔았던 야곱, 그 사람도 죽었고 야곱이 주고받던 그 우상도 다 없어졌고 그리고 물건을 팔아서 얻어 들였던 수입도 다 사라졌어요. 그를 그토록 기쁘게 했던 가축도 이젠 다 죽고 세상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요. 마지막에 남은 것은 하나님이 그의 인생을 사용하셨던 그 놀라운 역사와 그리고 그의 인생을 통해 주셨던 하나님의 놀라운 계시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구원의 징검다리가 되어서 우리에게 건너오지 않습니까?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이것이 바로 창세기 35장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라는 것이죠. 우리가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를 깊이 깨닫고 그리고 이와 같이 충만하고 크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사모해야 해요. 그 빛에서 이 시대와 교회와 자기의 신앙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해요. 저는 여러분들이 오늘 이 강좌가 끝나더라도 정말 한없이 말씀을 깊이 의지하고 그 말씀가운데서 살아서 여러분의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이 커다란 영광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