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엘로 올라가자 4
회복된 신앙, 회복된 지도력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창35:2)
이번 부흥회에 다 초보자들이니까 너무 깊게 하면 여러분들이 지루해 할까봐 홅으면서 지나갑니다. 여러분들이 이제 신앙부흥에 입문을 하셔서 이제 무엇인가 신앙부흥의 감을 잡으시면 기회를 가지고 제가 35장을 다시 하겠습니다. 그때는 좀 더 깊게 우리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 나라와 세계와 그리고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로 확장을 해서 이야기를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야곱이 34장에서 그런 비참한 절망을 경험하고 있을 때에 소망이 어디에 있었다고요? 하나님이 야곱에게 어떻게 하시되? ‘이르시되’ ‘이르시되’에다가 야곱이 아마 동그라미를 쳤을 것이에요. 그런데 오늘의 이 시대는 말이에요. 너무 마음이 부요해요. 그래서 도무지 부족한 것이 없어요. 모자라는 것이 없어요. 그래서 말씀을 듣는 태도도 나는, 저는 안 믿어요. 성도들이 말이에요. 특히 강남에 사는 사람들이 ‘아무개 목사님 설교 좋다. 아 누구 설교는 참 멋있어.’ 그런 소리를 하나도 안 해요.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좋다는 그 느낌이 무엇이냐 하면 들었을 때 마음이 편한 것, 그것을 좋아해요. 그것은 안 돼요. 참된 설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할 수 없어요. 그것은 불가능한 거예요. 사람들에게 평안하고 잔잔한 호수에 막 돌멩이를 집어던져서 파문을 일으켜야 해요. 그러지 않고 어떻게 사람이 바뀌겠느냐 말이에요. 그런데 대부분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아 무슨 설교가 좋아.’ ‘왜 그렇게 좋으냐?’ 얘기를 듣고 있으면 편안하대요. 편안한 게 좋은 것인 줄 아세요? 호수에 돌멩이를 막 집어던져서 파문을 쳐야 되요. 그래도 사람이 변하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좋다, 좋다’ 그러는 사람들이 모인 강남에서 하루 30억씩 술값이 지불되고 있지요. 서울이 모든 죄악의 온상 같아요. 저도 강남 사람이라서 자신 있게 얘기하는데 책임을 깊이 느껴야 되요.
그런데 뭐냐 하면 그렇게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리고 나서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야곱이 얼마나 하나님을 떠나서 살았어요? 그런데도 하나님이 찾아오시잖아요. 이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에요. 이게 하나님의 언약이에요. 그런데 그런 가운데서 야곱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바가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너는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왜 벧엘로 올라가야 되는지 말씀드렸지요. 그 다음에 쭉 내려가다가 ‘벧엘로 올라가서 단을 쌓으라.’는 것의 의미를 다 말씀드렸지요. 그럼 오늘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 하면 성경을 잘 들여다보세요. 성경을 보시면 무슨 이야기가 나오느냐하면 ‘너는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누구에게? 그 이상한 말 아니에요. 이게 누구의 말씀이에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자신을 지칭하면서 얘기하는 게 이상하잖아요. 예를 들면 ‘강사님께 물 한 컵을 갖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게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겠어요. 그렇지요? 그런데 우리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늘 기억해야 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성경에 나오는 한 단어, 한 글자도 하나님이 꼭 필요해서 그 단어가 최상이기 때문에 그것을 택해서 거기에 놓으셨다는 사실이에요.
그러면 이제부터 ‘하나님께’라는 말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겠어요. 우선 야곱이 하나님께로부터 명령을 받았을 때에 벧엘로 올라가서 단을 쌓으라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야곱이 바보입니까? 하나님이 단을 쌓으라고 그랬는데 갖다가 그 단을 우상에게 쌓아놓고 ‘너 왜 단을 나에게 안 쌓고 우상에게 쌓았느냐?’ ‘하나님이 그냥 단을 쌓으라고만 그랬지, 언제 하나님께 쌓으라고 그랬습니까?’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아이큐가 모자라는 사람입니까? 그럴 리가 없거든요.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단을 쌓아야 된다. 하나님께…….’ 이 단어는 34장을 살아오는 동안에 33장 이후부터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야곱에게는 새카맣게 잊힌 단어중의 하나였어요. 그의 인생은 하나님께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자기 멋대로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판단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판단과 생각을 따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생애가 아니라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생애, 하나님의 집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집안을 염려하면서 살아왔던 이십년 가까운 세월이었단 말이에요. 이것이 바로 이 하나님께서 이 야곱에게 너는 단을 쌓으라고 그러면서 ‘하나님께’라고 하는 설명을 붙이셔야했던 이유에요.
야곱에게 성경책을 들이대면서 야곱선생! 여기다가 동그라미 하나만 쳐보시오. 그러면 ‘이르시되’를 치겠지만 최고로 충격을 받았던 것이 어느 때입니까? 그러면 디나의 강간사건은 이미 충격이 아니에요. 왜? 35장 1절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시면서 이미 말씀을 하시는 가운데 이미 자신은 그 34장에서 일어났던 디나의 강간사건 자체가 이미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35장 1절에서 아는 것이에요. 왜 그렇게 금방 알아차릴 수가 있어요? 이전에 하나님을 만난 적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깊이 한번 만나면…….
제가 말씀드렸죠. 집회 가서도 말씀을 전할 때에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리고 정말 통곡하면서 진심으로 가슴을 찢으며 참회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하나님을 그렇게 만났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그리고 생짜 베기는 그것은 정말 기적이에요. 그런 것은 인생에 있어서 한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이지요. 완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안개 낀 호수 같았는데 꽝하면서 뭔가 부딪히면서 완전히 인생이 무너졌다. 그것은 보통일이 아니에요. 그것을 가르쳐서 우리들이 참된 회심이라고 그래요. 지금 우리에게 가장 커다란 문제는 무엇이에요. 참된 회심을 보기가 어려워요. 저도 설교를 하러 다니고 설교를 하는 사람이지만 참된 회심이 어려워요. 참된 회심을 보기가 너무 어려워요. 이게 보통 문제에요? 참된 회심이 없이는 영생도 없고, 천국도 없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아가는 삶도 없어요. 마른 뼈들이 어떻게 얼마나 하나님을 위해서 잘 살겠어요? 마른 뼈들이……. 다 죽은 자와 방불한 시체들이…….
그런데 ‘하나님께’ 라는 이 말이 야곱에게서 전광석화와 같이 쾅하고 와 닿은 것이에요. 맞다. 나는 이제 내 마음대로 나를 위해서 살았고 엘엘로에 이스라엘 (왕년의 이야기하는 사람치고 지금 신통한 사람이 없어요. 왕년이 무슨 문제에요. 왕년이……. 아 왕년에 한 가닥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어요. 왕년은 소용없어요. 왕년을 얘기할 것 없어요.) 엘엘로에 이스라엘이라고 쓰인 그 단이 거기 있으면 그게 뭐에요. 지금 그게 이름값을 하고 있어요? 집안은 완전히 쑥밭이 되고 그리고 지금 자기는 그 쑥밭이 된 상황가운데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는 이런 상황인데 그 왕년이 무슨 소용이 있냐고요. 목회자들도 똑같아요. 왕년에 뭐 한 것 얘기하는 사람치고 현재 신통한 사람 아무도 없어요. 학생들도 똑같아요. 문제는 뭐냐 하면 지금이에요. 지금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단을 쌓으라. 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야곱은 큰 충격을 받는 것이에요. ‘아! 하나님께…….’ 이게 도대체 몇 년 만에 들어보는 이야기인가? 하나님께 라고 하는 모든 관심이 사라진 속에서 오직 세겜에서 그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그래서 물품을 팔고, 그래서 돈을 모으고, 그래서 재산을 축적하는 이런 것들 이외에는 여념이 없이 살아왔던 삶이었다는 것이에요. ‘하나님께…….’
그러니까 사람이 놀라운 변화를 한번쯤 받아야 해요. 받아야 되는데 한번이 아니라 많이 받아야겠지만 제대로 받으면 한번만 받으면 족해요. 제대로 받지 못하니까 만날 돼지가 그 씻었던 곳으로 자꾸 돌아가고 개가 토했던 것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그렇지. 바울을 봐요. 한번 딱 확실하게 만났잖아요. 인생 자체가 완전히 돌아서잖아요. 뭐라고 그래요? ‘내가 귀하게 여기던 모든 것들을 나는 배설물로 여기노라.’ 그러니까 그 배설물들이 자꾸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면 그 변화가 확실치 않아서 그래요. 그러면서도 매일매일 끊임없이 죄와 더불어 싸웠지요. 그러니까 제가 부흥, 부흥 그러는데 여러분은 아직 부흥에 대해서 제가 본격적인 뚜껑을 안 열었어요. 다 도망 갈까봐…….
부흥이 뭐냐 하면 여러분들이 감당하기에 너무 어려운 메시지에요. 그러나 살짝 이야기를 하자면 부흥이 뭐냐 하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동시에 생생하게 그런 놀라운 변화가 찾아와 가지고 정말 ‘이전에 내게 귀하던 모든 것들을 해로 여길뿐더러 배설물과 같이 여기노라.’ 그러면서 말하자면 질그릇과 같은 연약한 인생들이 이 험악한 세상 속에서 사자와 같이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것이 부흥이에요. 한번 부흥을 경험하면 우리들의 모든 가치 체계가 뒤집혀져요.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여러분들은 정말 교회를 위해서 가장 먼저 통곡하는 사람들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한 영혼의 커다란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에게 어떤 조짐이 보이기 시작해요. 부흥은 박수를 치고, 북을 치고, 열심을 내면 부흥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것은 정말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한 생각이에요. 부흥은 밖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깊은 내부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교회에서 뭔가 목표를 세워놓고 사람들을 막 몰아가면 그것은 어떤 힘이 있느냐 하면 왠지 모르게 나도 거기에 막 빨려드는 마력이 있는 것이에요. 더구나 지도자가 사람들을 움직이는데 있어서 천부적인 소질을 가진 사람 같으면 그런 것이에요.
그러나 그것을 우리는 참된 부흥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하나님을 향한 말할 수 없는 사랑과 감격이 가슴속에서 터지면서 그러면서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 앞에 자연스럽게 드려지는 것, 그것이에요. 그런데 이제 그러한 사람의 마음속에 이런 부흥 비슷한 사건들을 경험하게 해주시는 것을 저는 여러 사람에게서 보았어요. 그런데 제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이 ‘하나님께’ 라는 말씀 속에서 우리들은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사람들에게 어떤 조건이 있는 것은 아니냐? 물론 시편에서 말씀하신대로 ‘여호와는 온 땅을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를 찾는 자들을 또한 찾으시느니라.’ 이러한 말하자면 사람들 속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해야 되요. 그러기 위해서는 한 가지밖에 없어요. 마음을 다 기울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세요. 정말 그래요. 그리고 읽으세요. 그리고 깊이 생각하세요. 그런데 부흥이 크게 일어날 때는 말이에요. 어떤 변화가 오냐 하면, 사람들이 사람들의 부흥이 일어나는 그런 조짐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사람들의 관심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해요. 어떻게 변하기 시작하느냐 하면 자기의 인생을 주목했던 시선이 자꾸 이제는 자기 자신의 인생이 하찮아 보이면서 하나님을 주목하게 되는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 변화가 마음에 일어나기 시작하면 부흥을 향해서 이제 첫발을 내딛고 다가가기 시작합니다. 마음의 변화가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해요.
교회의 목표는 무슨 큰일을 하는데 있지 않아요. 그리고 웅장한 건물을 짓는데 있는 것도 아니에요. 심지어는 이 세상에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도 교회의 일차적인 목표는 아니에요. 교회의 일차적인 목표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면 영광을 받으실까? 오늘 저녁때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그것에 완전히 관심이 모아지는 것이에요. 이것이 교회가 해야 될 일이에요. 교회가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고, 사회를 섬기고,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그 모든 일들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금방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거예요. 아니 그것이 그 소리가 아니냐? 전혀 그 소리가 아니에요. 왜 그 소리가 아니냐하면 처음에는 무슨 일을 하고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간절한 출발에서 시작을 해요. 우리나라에 새벽기도가 왜 생겼는지 아시죠? 민족적으로 너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이 새벽에 기도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에요. 철야기도가 왜 생겨났는지 아세요? 밤을 새워 기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철야기도가 생겨난 것이에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는 9시 반쯤 모여가지고 커피 마시고 율동하고 노래 부르고 한참을 그래요. 진짜 기도하는 시간은 한 시간도 될까 말까에요. 말하자면 내용이 없으니까 그 형식을 감당하기가 어려운 것이에요.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겠다는 뜨거운 마음이 없이도 교회에서 봉사할 수 있고 다 할 수 있어요. 왜? 커다란 조직체 속에 부속품으로 딱 들어가면 자동으로 작동하거든요.
한때 이제 커다랗게 포드시스템이라고 해서 자동차 하나가 3분 만에 나온다고 그래요. 그게 컨베여시스템이에요. 여기서는 모든 사람이 한 가지 일만을 하는 것이에요. 되게 빠르죠. 한 사람은 나사 하나만을 조이고 이 사람은 두 번째 나사를 조이고 세 번째 사람은 걸이를 탁 걸고 네 번째 사람은 뚜껑을 씌우고 하면서 착착 진행이 되는 것이에요. 나중에 한참 있다 들어온 사람은 매일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이것 나사만 끼우니까 자기가 이것을 왜 끼우는지도 모르는 것이에요. ‘왜 끼웁니까?’ ‘나도 몰라 그냥 끼우는 거야.’ ‘이게 끼우면 어떻게 되느냐?’ ‘나도 몰라.’ 나중에는 ‘이것은 무엇을 만드는 거야?’ ‘그거 나도 몰라.’ 그렇게 되는 거예요. 주어진 일이니까. 조직 속에는 이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에요. 왜 하는지도 몰라요. 그러나 하는 것이죠. 처음부터 그랬겠어요? 구원 받고나서 하나님의 나라의 선교라는 커다란 자동차를 만드는데 내가 두 번째 나사를 끼우는 것만 해도 너무 감격해서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나라의 선교자동차에 나사를 끼울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것이 얼마나 할렐루야인가! 아! 주님, 감사합니다.’ 만날 눈물로 범벅 지었지요. 그러나 만날 하니까 그 다음에는 자동이에요. 그 다음에 들어온 사람들은 더 자동이에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하는 것이에요. 이런 위험이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부흥이 일어날 때에는 말하자면 인생자신을 향하여 주목하던 그 마음이 변하여서 하나님을 주목하게 되는 것이에요.
‘내가 이렇게 디나가 강간당하고 이 고통을 당하는데 내 인생은 왜 이럴까? 자식새끼들은 왜 애비의 속을 이렇게 썩이는 것일까?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러면서 라헬을 비롯해서 사은품으로 쫒아온 레아까지 무더기로 욕을 하면서 투덜대봤지만 자기 혼자 너무 비참하고 가련하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렸을지라도 그것은 신앙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에요. 주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눈물은 그런 눈물이 아니에요. 성경에 보면 히스기야를 보고 뭐라고 그러셔요? ‘내가 네 눈물을 보았고 네 간구를 들었느니라.’ 시련 앞에서 흘리는 눈물을 보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여호와를 바라보면서 구하는 그 눈물을 보기를 원하시는 것이에요. 그런데 부흥이 일어날 때가 되면 사람들에게 이런 마음이 생기는 거예요. 여태까지는 야곱이 전부 다 자기의 디나가 강간당하는 것부터 어떻게 브리스 족속과 가나안 족속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무엇으로 막을 것인가? 이 난리를 치며 사람들을 원망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 라고 할 때 야곱은 비로소 이제 눈이 자신을 쳐다보던 34장의 눈에서 눈을 들어서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무엇을 보게 되느냐하면 내가 이렇게 이런 삶을 살면서 34장에서 한없는 고통을 받는 이 고통에 대한 생각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하나님 없이 살아오는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그의 이름이 모욕을 받았는가? 주님의 영광을 내가 얼마나 가렸던가? 그러면서 생각이 하늘을 향해요. 이것을 가리켜서 ‘철이 든다.’ 라고 해요. 부흥이 일어날 때는 이런 일들이 있게 되요.
그러니까 부흥이 일어날 때 공통적인 모든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의 죄에 대해서 애통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에요.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겠어요? 생각을 해보세요.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요. 환란이?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런 것일 수 없어요. 정사와 권세와 하늘에 있는 천사라도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그 놀라운 은혜와 주님께 마땅히 돌려드리게 되는 그 영광을 가릴 것이 없는 것이에요. 문제는 어디에 있어요? 인간의 마음 깊은 속에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고 하는 그 죄악, 35장에 이르기 전까지 야곱이 얼마나 씩씩하게 살아갔어요? 제가 다시 말씀드려요.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범죄는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이에요. 또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에요.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최악의 반항이에요. 오히려 범죄를 해서는 안 되겠지만 범죄를 하면서 늘 쓰러져서 울면서 우리의 마음이 연약하여 죄적으로 떳떳하게 살아가를 범하기 쉬우니 하나님이 받으시고 천국 인을 치소서.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도덕면서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소망이 있다는 것이에요.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씩씩하게 살아갔어요? 율법을 다 지킨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먼저 드렸어요.
그런데 부흥의 때는 이런 각성이 일어나는 것이에요. 눈에 비늘이 벗어지면서 자신이 얼마나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것이에요. 깊이……. 그러한 일들이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있게 되는데 그 때의 마음속에서 놀라운 사모함이 이 야곱의 마음에 싹텄어요. 무슨 사모함이? 그 옛날에 하나님과 동행하던 때……. 33장 마지막에 ‘엘 엘로에 이스라엘’이라고 주님을 불렀을 때에 그 가슴에 밀려오던 놀라운 신앙의 감격, 그리고 브니엘에서 자기 형으로부터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천사와 더불어 싸움을 하는 교만을 보이다가 하나님께서 환도를 치시니까 울며 부르짖으며 매어달리며 하나님 앞에 참회하였을 때에 주께서 베풀어주셨던 그 놀라운 대면의 약속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자기는 얼마나 이 하나님을 만나기에 부적합한 인간으로 변해버렸는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죠. 깊이 깨닫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잖아요? 성령을 받아도 소용없어요. 깨닫지 못하면 위험해요. 그 자기의 체험을 절대화시키는 것이에요. 깨달음이 있어야 해요.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에요. 그런데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이러한 하나님이 야곱의 마음을 움직이시니까 야곱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기울어지는 것이에요. 이것은 야곱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기울어질 뿐만 아니라 또 야곱도 이 34장 마지막을 말씀드렸지요. 왜 35장 1절에서야 짠하고 하나님이 나타나셨느냐하면 너무나 완악하니까 그 절박한 위기 속에서 비로소 그 위기 속에서 도무지 이제는 자기의 힘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끔 주께서 세우시는 것이에요. 그 비싼 수강료를 내고나서야 깨닫는 것이에요. 무엇을 깨달아요?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될 백성이다…….’ 깨닫는 것이에요. 고액의 과외를 한 거예요. 고액과외. 보통과외에요? 딸을 버리고, 그 다음에 집안 살림이 거덜 나고, 그리고 이제 막말로 얘기하면 벧엘로 도망을 가고 나서야 비로소, 그 고액의 과외비를 지불하고 나서야 ‘나는 세겜의 사람들과는 다르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되는 인생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에요. 우리보고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살아야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금방 ‘아멘’ 하잖아요. 그 간단한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그 엄청난 과외비를 지불하는 것이에요. 그러니 어찌 성경이 ‘깨닫는 자가 복이 있도다.’ 라고 안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지금도 말씀을 들으면서 깨닫는 것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지금 고액의 과외를 말하자면 번 것이에요. 제가 말씀드렸지요? 인간이 얼마나 우둔한지 실감나게 두드려 맞기 전에는 깨닫지를 못해요. 그런데 그 깨닫지 못하는 마음이 결국은 계속 하나님을 향하여 죄의 껍질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늘 하나님이 말씀하시죠. 그런데 그것이 다가오지 않아요. 남의 얘기 같아요.
두 번째로는 말이에요. 이 ‘하나님께’ 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 부흥이 일어나게 되거나 부흥으로 들어가는 심령이 되면 사람이 놀랍게 정화되어서 우리의 모든 인생 자체뿐만 아니라 삶의 동기,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동기, 주님을 섬기는 동기, 심지어는 예배를 드리는 동기, 심지어는 헌금을 하는 동기, 이 모든 것까지가 너무 불순물이 많이 끼어있어요. 정말 하나님 한분을 위한 영광, 이런 것 정말 보기 어려워요. 교회에서 섬기면서 사람들을 이렇게 봐도 말이에요. 사람과는 상관이 없이 변함없이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섬기는 사람들은 너무 극소수에요. 그러니까 목회자는 늘 어떻게 해야하느냐하면, 뭘 잘해야 되냐면 사람을 잘 얼러줘야 해요. ‘아! 김 집사, 최고야!’ 이 집사하고 있을 때는 ‘김 집사보다 이 집사가 나아!’ 박 장로하고 있을 때는 ‘역시 박 장로 밖에는 없어’ 김 장로하고 있을 때는 ‘박 장로는 못써 김 장로가 최고야.’ 이러면서 사람들을 얼러야지만 그리고 사람들에게 얼굴을 드러내주고 이래야지만 신이 나서 일을 하는 것이에요. 미안하지만 그것들 중에 얼마나 하나님이 받으실까? 왜냐하면 주님은 헌신 자체만을 중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동기를 모두 중요시 생각하셔요. 그러니까 뭐에요? 바리새인들이 정말 이레에 두 번씩 금식했어요. 우리 가운데 일주일에 이틀 금식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것도 일, 이년이 아니고 평생을……. 식물과 박하와 회향의 십일조는 안 드려도 되는데 그것도 십일조를 드렸어요. 율법을 지나쳐서 행하는 것이죠. 하나도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으셨어요. 주님이 받으신 것은 오히려 가슴을 친 세리의 눈물이었어요. 그것을 주님이 받으시는 것이에요.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가 섬기고 일하는 모든 것들이 봉사나 하나님을 섬기는 것들이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직업적으로 흐르게 된다는 것이에요. 그게 무서운 것이에요. 그런데 부흥은 말하자면 이런 것들을 통해서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교회에서 많은 훈련들을 하잖아요? 그 훈련들이 참 중요하고 좋아요. 중요하고 좋지만 그러나 그 훈련 속에서 끊임없이 말하자면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를 소원하는 그 뜨거운 마음들이 계속 불타오르지 않으면 그것은 나중에는 결국은 하나의 습관적인 봉사로 흐르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때요? 저는 그것을 많이 경험했어요. 일주일을 보내고 얼마나 바쁘게 삽니까? 주일날 가가지고 열심히 일을 하고 일을 할 때는 모르겠는데 왠지 돌아와서 가만히 있으면 가슴이 뻥 뚫린 것 같고 허망한 느낌이 듭니다. 같이 모였을 때는 뭔가 되는 것 같은데 혼자 있으면 다 무너지는 것 같고 그런 것들은 무엇 때문이에요? 왜 그래요? 그렇게 찾아드는 공허함은 무엇 때문이에요? 문제는 뭐냐 하면 자꾸 우리의 신앙을- 말하자면 행동하는 것들, 행동주의에 빠져 버렸어요. 영혼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그분과 함께 동행 하면 동행할수록 우리의 가슴속에는 뭔가 깊이 차올라서 우리 자신이 뭔가 새로운 존재로 변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목적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뭐라고 그러셨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불러 건지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목표에요.
오히려 주님의 일을 하면서 우리의 모든 삶이 황폐해져가고 그리고 우리의 인격이 초토화되어져가고 그래서는 우리는 참다운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주님을 닮아가는 이러한 일들이 같이 일어나야 되는 것이죠. 그래서 헌신은 훈련이 참 중요해요. 그러나 훈련이 우리에게 참된 부흥을 가져다줄 수 없어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기술적으로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바로 훈련에 달려있어요. 그래서 여러분 교회에서 주일학교를 위해서 일하다가 보면 아주 놀라운 특징을 발견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안 그런 사람들도 많지만 일반적인 경우에 주일학교 교사가 된지 대개 일 년 내지 이년 정도 된 사람이 가장 열매가 많아요. 그리고 삼년이 넘어가면서부터는 둘 중의 하나에요. 놀랍게 열매가 많던지, 아니면 이름만 걸어놓던지 둘 중의 하나에요. 처음에는 영혼을 위해서 그렇게 울고 말이에요. 눈물을 흘리고 요새 신통치 않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지만 그러나 괜찮은 사람들은 어린아이의 영혼들을 사랑하고 그리고 자기가 어떻게 그 교사의 직분을 감당해나갈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아주 떨리는 마음으로 그렇게 살아요. 그런데 이 실력이 없어요. 알아듣지를 못해요. 그러다가 쭉 하면서 일 년 정도 하게 되면 실력이 붙게 되면서 그 헌신과 어우러져서 상당히 많은 열매를 맺게 되요. 그런데 삼년 차 되면서 몸에 익어서 훈련이 되었다는 것이죠. 공과 책도 하나도 안 들여다보고(다 아는 것이라는 거죠.) 교회에 갈 때 획 빼서 가지고 나가면서 버스에서 찍찍 읽고 가서 가르친다고요. 그러면서 말하자면 봉사의 직업화현상으로 떨어지는 것이에요.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세요. 인간의 습성이 그렇게 되먹은 것이에요. 인간의 습성이 그렇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그렇게 하다가 나중에는 사람이 자꾸 변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신실하신데 인생은 이렇게 자꾸 변하는 것이에요.
구역장을 처음 맡겨주면 감지덕지에요. 막 이 사람은 본업이 구역장 같고 구역식구들도 쫒아 다니고 김장을 해주고 빨래도해주고 심지어는 금식기도까지 해주고 말이에요. XXXX 그것 가지고는 만족이 안 돼요. 그런 식으로 어르는 것이 교회의 본질일수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군들은 그리고 정말로 영적인 재생산을 원한다면 정말 교회가 일군을 써야할 원리가 있는 것이에요.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생생하게 만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아니면 영혼을 위해서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확실하게 진리를 붙잡은 사람들, 이 사람들이 섬기지 않는 한 교회는 소망이 없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인 성도도 그런 습관으로 흐르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교회에서 참다운 신앙부흥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런 일군들을 찾을 수가 있어야지요. 할 수 없이 대충 세우는 것이죠. 대충 세우니까 교회가 자꾸 뒤틀린 모습으로 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교회가 참다운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말하자면 진정한 부흥이 있어야 해요. 어떻게 바울에게 디모데와 같이 훌륭한 믿음의 아들이 있을 수 있었겠어요? 어떻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사람들, 어떻게 마태 같은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들……. 베드로에게 마가 그리고 바울에게는 누가와 같은 이러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에요? 하나님 한분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는 것 그것이에요. 그러니까 자기의 위치와 자기의 체면 그런 것은 관계가 안 돼요. 여러분 바나바와 바울이 어떤 관계인지 아세요? 바울이 회심했을 때 사람들이 아무도 안 믿었어요. 그 나쁜 놈의 회심을 어떻게 믿느냐? 그럴 때 보증서에 도장을 찍어준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나바에요. 바나바는 벌써 4장에 나와요. 초대교회에 저명인사였어요. 그런데 어떻게 되요? 하나님께서 바울을 쓰시기로 한 것을 보자 바나바는 새카만 후배인데 그분의 비서가 되기를 자청했어요. 그리고는 사도행전이 바나바와 바울, 바나바와 바울 이렇게 나가다가 어느 때인가 확 뒤집어지면서 바울과 바나바로 나오면서 영원히 바울 밑에 숨는 것이에요. 무엇 때문이었어요?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어요? 주님을 섬기는 자기의 인생의 목표가 자기를 드러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고 바울을 드러내는데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된다는 그것 하나에 꽂혀있는 것이에요. 시인이 얼마나 잘 표현하고 있어요? ‘왕궁에서의 천 날보다 주님의 집의 하루가 더 낫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내게는 좋사오니…….’ 하나님이 나를 통해 영광을 받으셔야 된다고 하는 이 한 가지 사실에 매여 있으므로 나머지 모든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이런 사람 야곱이 하나님과 만나는 일이 있을 때 이런 변화가 마음속에서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부흥이 올 때에도 이렇게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어떻게 하겠어요? 어떻게 하면 습관에 젖어서 아무 기쁨도 없이 봉사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직업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다니는 이 꾼들, 그리고 아무런 기쁨도 없고 그리고 아무런 헌신의 마음도 없이 습관적으로 봉사하고 자기가 치켜세워질 때에 비로소 잠시 기쁨을 느끼면서 교회에 주인의식을 갖는 이 철새들과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변해서 세상이 어떠하든지 아무 관심을 안 갖고 오직 하나님 한분의 이름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로 바꿀 수 있는 대안이 있으면 말해보라는 것이에요. 어떻게 바꿔지겠어요. 타이르면 변하겠어요? 변하지 않아요. 노래를 많이 부르면 변하겠어요? 변하지 않아요. 부흥을 경험함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확연하게 경험하게 될 때에 그리고 진심으로 하나님의 일군 되기에 합당한 크신 하나님을 만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요?
(찬양)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 만 보이도다.
그렇게 되는 것이에요.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걸어갈 수 있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도 노래 부를 수 있어요. 마라와 같이 쓴물을 마셔야 되는 고난의 때에도 시온의 노래를 부르며 주님의 이름을 찬송할 수 있어요.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걸어갈 때에도 외롭지 아니하게 하나님 한분을 보러 걸어갈 수 있는 사자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런 것이 바로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변화란 말이에요.
이어서 지금 이야기한 것들을 종합하자면 우리들이 부흥이 일어날 때가 되면 사람의 마음이 놀랍게 변해서 이 ‘하나님께’ 라는 말에 충격을 받게 되는 것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들은 항상 어떤 교만을 가지고 있느냐하면 내 비전, 내 계획, 내 인생의 이 장엄한 청사진, 그게 뭐에요? 그것과 하나님과 무슨 관계가 있어요? 자기 인생의 청사진과 하나님과 무슨 관계가 있겠어요? 주님이 그 청사진을 그리셨어요? 잘 들어두세요. 인생의 목표를 갖는 비전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자기 암시적인 비전이에요. 늘 자기가 생각하는 거예요. ‘아! 나는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지! 나는 이런 것도 하고 싶어!’ 그러면서 마구 그리는 것이죠. 그것은 자기 암시적인 비전이에요. 그런데 참다운 비전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비전이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너로 민족을 구하게 하리라. 내가 너를 들어서 사용하겠다.’ 야곱에게 나타나서……. 아브라함에게 ‘갈대아우르를 떠나라. 내가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하고 너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겠다.’ 이런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이지 자기 마음대로 다 청사진을 그려놓고 그 뭐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이 출발부터가 그렇게 되니까 계속해서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미명하에 자기의 욕망을 따라 계속 사는 것이에요. 그런 비전이 있습니까? 허물어버려요. 그 비전들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이 말하자면 여러분 마음속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에요. 그게 마지막 싸움이 그것 아니에요. 마지막 싸움……. 제가 소명을 받을 때도 마지막 싸움이 그것이에요. 나는 내 인생의 비전을 그려놓고 있어요. 아 이렇게 해서 뭐가 되고 뭐가 되고 그런 것이죠. 하나님께서 나에게 비전을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없었지만 또 주시는 것도 원하지 않아요. 왜? 분명히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은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인생의 계획과 똑같을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싹 지워버리고 다시 그리실 것이라는 것이 싫은 것이에요. 하나님이 축복을 해주시는 것은 그만두고 내가 내 비전을 따라 살도록 내버려만 두시면 할렐루야겠어요. 그게 인생들이 가지고 생각이에요. 그게 무슨 의미겠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야곱이 이렇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실 때까지 야곱이 33장의 세겜에 거하면서 엘엘로에 이스라엘의 단을 쌓고 수입이 짭짭했던 모양이에요. 인생의 계획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렇죠? 아 예금통장을 들여다보면서 가명계좌, 차명계좌 잔뜩 만들어놓고 야! 이것이 쌓여가는구나 세금 한 푼 걷어가는 사람도 없고 이제 잠시 후면 우리가 저 세겜성의 반은 살 수 있겠다. 그러면 넓은 땅에다가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별 꿈을 다 꾸었겠지요. 그것은 자기의 비전이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비전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비전은 야곱을 어떤 사람으로 세우느냐? 지금 이렇게 설교제목으로 삼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비전이었어요. 그래서 그를 통해서 이 모든 인류의 구속을 위한 계시가 전파되어지고 그 후손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이 세상의 영혼을 구할 메시야가 나게 하시는 이 거대한 구원사의 한 흐름의 한 고리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에요. 그것이 야곱을 향한 비전이었어요. 그래서 야곱이 나중에 깊이 깨닫는 것이에요. 나이가 많이 들어서 이 부흥을 통해서 깨닫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절대 절명의 신앙고백이 야곱을 붙어 다녀요. 그게 뭐냐 하면 ‘전능하신하나님, 전능하신 나의 하나님’ 야곱이 이 부흥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은 엘샤다이, 전능하신 나의 하나님을 깨닫게 된 것이에요. 그러면서 마지막에 뭐라고 하냐하면 죽을 때에도 나의 유골을 꺼내서 마지막으로 애급에서 가나안으로 옮겨달라고 그렇게 유언을 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무엇 때문이에요? 소망이 이 세상의 나라가 아니라고 하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야곱이 소유하기를 원하셨던 그 비전을 나중에 깨달은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 첫 번째 인생의 단추가 잘못 끼어지니까 그 다음에 계속해서……. 그러면 우리끼리니까 남이 안 듣게 작은 소리로 얘기합시다. 여러분 스스로 생각할 때 예수 믿는 것이 내가 가고자하는 인생에 놀랍게 도움이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신 적이 있으세요? 정말 그런 생각이 들어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거추장스러울 때가 없었어요? 예수 안 믿었으면 여러분은 지금보다 훨씬 더 잘되었을지도 몰라요.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것이에요. 왜? 거듭나는 순간에 여러분들을 향한 인생의 목표, 이 세상에 살아있게 하시는 이유도 같이 거듭났거든요. 그런데 여러분의 생각은 거듭나지 않은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때요? 주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인생의 목표와 살아있는 이유도 다 거듭나게 하셔서 이제 이 거듭난 인생이 거듭난 목표를 찾아가기 위해서 이 각본이 맞아떨어지는데 이게 야곱처럼 그렇게 안가는 거예요. 이렇게 거듭나서 거듭난 목표를 향해 가야되는데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안 거듭난 목표가 여전히 마음속에 살아있는 것이죠. 가보는 거예요. 그러나 이상하게 옛날과 같은 만족이 없는 것이에요. 옛날에는 돈 하나만 있었으면 땡이었는데 거듭나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그것을 쫒아가도 막상 그것이 주어지면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갈등하는 거예요.
무슨 얘기냐 하면 애급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해가지고 전부다 이끌려서 나왔잖아요? 그런데 나온 백성 가운데 애급으로 돌아기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죠. 그렇죠? 그런데 그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들이에요. 우리의 신앙의 인생을 거듭난 것을 가정한다면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 가운데 예수를 몰랐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그렇게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예수를 버리고 나는 지옥가도 좋으니까 여기서 신나게 살다가 죽겠다. 나는 예수를 믿은 것을 정말 철전지 원수처럼 후회한다는 사람은 심지어 교회에 안 나오는 사람도 그런 사람은 없어요. 만약에 그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되요 자기 소원대로 될 테니까. 문제는 뭐냐 하면 사람들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있느냐하면 애급에 다시 돌아가서 한 열흘쯤 신나게 놀다가 다시 광야로 나오고 싶은 것이에요. 이 사악함……. 그러니까 계속 있고 싶지는 않고 가서 한 열흘쯤 신나게 보트도 타고 말이에요. 이 세상에서 보지도 못했던,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날 불평했던, 우리는 여기서 정력이 없어서 죽는다. 우리는 정력에 좋은 마늘도 없고, 그 다음에 오이도 없고, 참외도 없고, 또 뭐에요? 부추도 없고, 만날 이 타령을 하잖아요. 그러니까 가서 만나 집어치우고 거기 가서 한번 부추와 마늘을 실컷 먹고 놀다가 사우나를 즐기다가 다시 궁극적으로는 광야로 오겠다는 거예요. 무엇 때문에 그래요?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서 애급을 떠난 것은 사실인데 꿈이 거듭나지 않은 것이에요. 여전히 하나님이 약속하신 주님이 임마누엘 하시는 그 거룩한 마라, 그것이 아니라 끊는 고기 가마, 정력에 좋은 마늘, 부추, 오이 이런 것을 생각하니까 만나가 눈에 들어올 리가 있나? 처음에는 그렇게 감격하더니 그 다음에는 만나를 시큰둥해 해요. 그렇지 않아요?
교회에 와서 만나가 하늘로부터 내리는 설교시간에 생각을 합니다. 어휴 참외 생각이 간절해요. ‘보이는 이 만날 만나야! 지겨워 이 험악한 세상을 나는 부추도 못 먹어서 정력이 없나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이게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비전이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들의 사악함이에요.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부흥의 불길이 와서 쓸어 가야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심령 속에서 찾아와요. 자기를 하나님이 애급의 속박에서 건지시기 위해서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는지를 기억할 수 있어야 해요.
다음, 이게 지금 하나님이 야곱에게 명령하시는 것입니까? 야곱의 모든 식구들에게 명령하시는 것입니까? 대답을 해보세요. 야곱, 개인에게 명령하시는 것이에요. 여기에 해석이 빠져있지만 당연히 그 명령형은 ‘너는’이에요. 히브리어성경에도 2인칭 남성단수로 나와 있어요. 그러니까 ‘너는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단을 쌓아라.’ 이렇게 나오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여기서 이상하지 않아요? 지금 하나님을 떠나서 범죄하고 완전히 하나님과 막힌 속에서 살아가는 게 야곱 혼자만이에요? 아니면 야곱의 모든 집안 식구들도 마찬가지에요? 집안 식구들도 마찬가지고 비교적 그 중에서도 야곱이 좀 아무래도 나았겠지요. 그러나 모든 집안 식구들이 지금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물건들이에요. 그리고 모든 사람, 모든 집안에 있는 식구들이 조금 있으면 나오지만 우상단지를 가지고 들어와서 섬기면서 살아가는 이러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에요.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인 야곱의 이 집안 모든 식구들이 문제가 된 거예요. 그랬는데 하나님이 모든 집안 식구들을 부르지 않고 누구를 불러요? 야곱을 불러요. 개인을 부르시는 거예요. 뭐 느끼는 것이 없어요? 하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셔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과 만나는 놀라운 부흥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무슨 사건을 내세우고……. 우리는 그렇잖아요. 쩍하면 조찬기도회, 우르르 모이고, 아니면 무슨 큰일이 생기면 제일먼저 무슨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되느냐 그런 생각들이에요. 조찬기도회를 할까, 토론회를 할까, 세미나를 할까, 심포지엄을 할까, 맨 그런 것이에요. 그러나 그런데는 하나님은 나타나시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그러면 어디에 나타나시느냐? 혼자, 이 야곱이 그런 커다란 위기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를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 개인에게 나타나셔요. 그러니까 놀라운 각성과 부흥은 이렇게 작은 한사람으로부터 시작이 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교회와 그리고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원리에요. 이런 일들이 일어났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곱을 만나셔서 야곱에게 네가 이렇게 벧엘로 올라가야 된다는 명령을 주실 때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세우는 대신에 야곱 이 한 사람을 세우신 것이에요. 이 야곱에게 직접 말씀해주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문제는 뭐냐 하면 그 한 사람이 여러분일수도 있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늘 우리들은 커다란 위기, 영적인 난국, 이러한 것에 부딪혔을 때에 늘 사람들을 원망하고 다투어요. 그리고 모든 것들을 생각하고 궁리들을 해요. 그러나 참으로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진심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에요. 야곱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니까 온 가족이 살잖아요. 야곱 한 사람이에요. 그 야곱이 XXXXXXX라는 거예요. 그런 생각들을 해야지 그러니까 뭐예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는 거예요.
저도 뭐 목회라는 것을 신통치 않게 제대로 해보지도 않았지만 교회를 섬기다 보면 별의별 소리를 다 듣지 않겠어요? 막 말해요. 이럴 수가 있느냐면서 와글와글……. 그 때에 내가 뭘 어쨌느냐? 그러면 집어치워야 해요. 막 와글와글 할 때에 그 때에 다 떠드는 소리가 지나간 다음에 ‘모든 문제는 내게 있습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사람들이 얘기할게 없어요. ‘모든 문제는 진심으로 내게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서 정말 하나님 손에 붙들려서 내가 너희를 섬겼더라면 이런 일이 있겠느냐?’
야곱이 34장에서는 막 실타래처럼 엉켜가지고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될지를 모르는 상황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야곱 개인에게 ‘너는…….’ 이렇게 말씀하셔요. 부흥이 일어날 때에는 말이에요. 정말 놀라워요. 부흥이 일어날 때에는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집단적으로 무엇을 해서 부흥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런 커다란 부흥 뒤에는 하나님께서 놀랍게 변화시키는 한 사람, 혹은 두 사람, 세 사람 이런 소수의 사람들이 있는 것이에요.
1851년 뉴욕에서 일어났던 엄청난 기도응답, 그러니까 집회를 하고나면 술집이 문을 닫았어요. 그러면서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술집에 술꾼들이 술을 먹으러 갔더니 술집에 문이 닫혔는데 뭐라고 쓰여 졌느냐하면 ‘폐업, 어젯밤에 주인이 회개하였음’ 또 어떤 도시에서는 하나님이 술집주인은 회개를 안 시키셨는데 술꾼들을 회개시켰어요. 우리로 말하자면 강남 1번지 로데오거리 같은데서 오렌지족들이 판을 치면서 들어와서 (라면 한 그릇에 뭐 8,000원이라나요. 12,000이라나……. ) 그런 거리에 와서 술을 퍼지게 먹고 몇 백만 원씩 뿌리고 갔는데 아 오렌지족들이 하나도 안 나타나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그 오렌지족들이 집회에 참석해서 놀랍게 회개를 한 거예요. 그리고 술을 끊어버렸어요. 이러한 변화의 사건들이 1851년에 일어났어요. 일어났을 때에도 그 놀라운 일들이 기도한 사람의 숫자가 손의 손을 맞잡으면 이천 킬로미터가 되었대요. 서울 부산을 두 번 왕복할 수 있는 거리에요. 사십 몇 킬로를 만들었는데 십만 명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대충 그 인원을 셀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에 앞서서 선교사 한사람이 그 뉴욕시를 위해서 깊은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통해서 이 뉴욕시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면서 하나님 앞에 깊게 회개하는 가운데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에요.
문제는 뭐냐 하면 나 한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서있는가? 그것이 그 서있는 사람이 만약에 그 서있는 사람이 여러분이면 여러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가정을 이끄시는 것이에요. 교회를 이끄시는 것이에요. 정말이에요. 왜 오늘날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부모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는지 아세요? 이렇게 생생하게 주님을 만나는 영적인 삶을 부모들이 살지 못하니까 지식들에게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에요. 교회에서 왜 사람들이 설교를 우습게 생각하고 예배를 아주 하찮게 생각하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노는 교제를 즐겨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 때문이에요? 그것은 마음이 강퍅하게 된 것도 있지만 그것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하나님 앞에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저는 이거 핑계 안 해요. 그렇게 생각해요.
야곱이 이러한 모든 깊은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을 때 개인적으로 부름을 받았어요. 너는 내 앞에 서야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야곱이 비로소 처음 갖았던 신앙으로 되돌아가는 거예요. 그게 뭐예요. 여러분 야곱이 창세기 28장에서 괴나리봇짐하나 지고 어딘지도 모르는 밧단아람으로 정처 없는 길을 떠날 때 누구를 의지할 수 있었어요? 아무도 없었지요. 누가 자기의 길에 임마누엘의 보증이 되어주셨어요? 하나님이에요. 누구 사이에 이루어진 약속이에요?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이루어진 약속이에요. 아무도 할 수 없는 약속이에요. 라반의 집에서도 그렇게 어려움을 당할 때 결국은 누가 해결해주셨어요? 하나님이에요. 32장의 브니엘 사건에서 그 절망적인 위기 가운데 천사와 붙들고 씨름할 때에 결국은 그 천사가 해결해준 것이 아니라 결국은 누가 해결해 준거에요? 하나님 자신이 나타나셔서 놀라운 역사가운데 야곱의 길을 열어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죠. 세겜 땅에 도착하게 하신 것은 물론 하나님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너는…….’ 하면서 하나님께서 왜 자기를 독대하시기를 원하는가? 독대하시를 원하시는 거예요. 둘이……. ‘왜 너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야곱을 불러주실 때에 그 때에 비로소 이제껏 까지 살아왔던 모든 인생경험, 신앙의 경험이 하나님 한분 앞에서 자기가 그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말하자면 야곱의 33장 이후로 세겜 사람들과 함께 세파를 거치면서 막 묻었던 더러운 죄악의 찌꺼기들이 벗어지면서 그 처음 신앙의 모습이 생각나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서야 된다는 사실의 깊은 인식을 이 야곱이 소유하게 되는 것이에요.
문제의 해결은 환경에 있지 않아요. 정말이에요. 아무리 환경을 이야기해도 환경이 그렇게 쉽게 변해줍니까? 변해주지 않아요. 사람을 원망합니까? 사람이 내가 원하는 대로 그렇게 변해주어야지요. 우선 내가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변해줍니까? 못 변해주잖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을 붙들고 그 사람이 변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러나 그 사람이 변해주리라는 생각만 해서는 안 돼요. 자기가 변해야 되요.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34장과 같은 위기에 나를 두셨는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일이 아니라 여러분들 자신을 원하고 계셔요. 돌이키세요. 놀랍게 변화 되요. 이런 모습으로 나아가야 되는 것이죠. 조금만 더할게요.
그러고 나서 그 다음절을 읽어보세요. 2절 시작.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거기에 보면 이제 야곱이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뭘 하라고 그러시지 않았어요. 딱 하나 말씀하셨어요. 그게 뭐에요. ‘벧엘로 올라가서 내 앞에 단을 쌓아라.’ 그 얘기 한마디 하셨거든요. 그리고 뭐 일체 다른 이야기를 안 하셨어요. 중요한 것은 이것이에요.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야곱아! 너 왜 이것을 잘못했니? 너 왜 이랬니? 너 왜 저랬니?’ 그러면서 아무리 이야기를 하셔봐야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죄들을 얼마나 많이 지었겠어요? 하나님 없이 살았는데…….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이 한걸음 옮기면 남는 것은 죄에요. 하나님을 떠나 사는 인생이 입 한번 뻥긋하면 나오는 것은 모든 것이 죄에요.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는 것이에요. 생각해보세요. 그 사람이 활동적이고 씩씩하면 씩씩할수록 죄는 더 많이 맺히는 것이에요. 그러면서도 자기는 제법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죠. 그랬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너는 내 앞에 서라는 말씀을 주시는 것이죠.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이 말씀을 하느냐하면 부흥이 일어날 때에는……. 부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모든 사람이 평소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다가 부흥이 일어나면 함께 계시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과 같은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에요. 깊이 하나님을 체험하고…….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예배를 이렇게 드릴 때에 어떤 하늘로부터 오는 커다란 권세가 모인 우리들을 장악하고 있는 것 같이 느낄 때가 있어요. 그 때에는 어떤 일들도 일어나느냐하면 고요히 말씀을 듣는 가운데 영적으로 사단에게 눌렸던 사람들이 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거나, 뛰쳐나가거나, 기절하거나 하는 일들이 일어나요. 말하자면 부흥이 일어나는 때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권세가 땅 아래 충만해져서 그 충만함 속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이에요. 매일 그런 일들이 일어나야 될 텐데 힘들죠. 그러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말하자면…….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그런 권세 속의 사람들이 꽉 눌려있으니까 그 다음에는 그 속에서 그 예배가 그 때에 비로소 예배가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것이에요.
부흥은 따라 해보세요. ‘부흥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서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사람들의 생활이 놀랍게 변화되지요. 왜 변화 되요? 지금은 끽해봐야 지난 일주일을 살면서 무슨 잘못을 했어요? 무슨 자질구레한 것을 쭉 대지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러한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되겠다는 결심 때문에 도덕적인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깊이 체험하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면서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이것보세요.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단을 쌓으라고 그랬는데 즉시 야곱이 집안 식구들을 다 소집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지금으로 치면 이런 댓돌 같은 데에 올라가고 그 다음에 식구들이 이렇게 쭉 모여 있고 그러면서 이야기를 딱 하는데 그 모습이 이전의 그 모습이 아니에요. ‘내가 지금부터 이야기를 할 테니 잘 들어라.’ 하며 이야기하는 그 모습이 34장 마지막에서 자식들에게 ‘아버지…….’ 그러면서 도전을 받을 때에 아무소리도 못하고 있던 그 야곱의 모습이 아니란 말이에요. 일어나면서 ‘우리는 이제 벧엘로 올라가야한다. 그러므로 의복을 바꾸고 그 다음에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라.’ 이렇게 명령할 때에 모든 사람들에게 왠지 거기에 나타나는 야곱의 모습이 이제는 뭔가 이렇게 막 눌려있는 이런 모습이 아니라 뭔가 자유함 속에서 사람들에게 말하자면 권위를 가지고 얘기를 하는 것이에요. 참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는 이런 당당함이 있어요. 권위가 있어요. 이런 권위를 갖게 된 야곱이 무슨 일들을 하게 되었는가? 다음 시간에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