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엘로 올라가자 5
벧엘로 올라가자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창35:3)
그러면 이제 시작을 하겠습니다. 야곱이 그 34장 마지막에서 이전에 좋았던 신앙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하자면 그 34장 마지막에서 야곱은 그 모든 하나님께서 주신 그 아름다운 영적인 가장으로서의 그런 모든 지위를 다 잃어버렸어요.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해요. 오늘날의 모든 가정의 위기는 바로 아버지의 영적인 권위의 상실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요. 우선 가정이 다 믿고 그 다음에는 그 아버지가 말하자면 가장 돈독하고 깊은 신앙을 가지고 그 가정을 하나의 교회로서 인도하면 가정이 문제가 없어요. 그러나 이제 그 아버지가 그렇지를 못하고 이 세상에서 생각하는 그 아버지의 상은 너무나 쉽게 바뀌어요. 한 50년 전만 해도 근엄한 아버지상, 감히 자녀들하고 가까이 이야기도 하지 않는 아버지상이었는데 지금은 또 아버지가 완전히 무슨 일꾼처럼 되어가지고 그 가정에서 봉사를 하고 자녀들하고 친구처럼 놀아줘야 되는 그런 상황이죠. 그러나 그것이 시대에 따라서 아무리 변한다고 하더라도 분명한 것 하나는 그가 영적인 권위를 지닌 지도자여야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리고 그리고 이제 야곱은 정말 자기의 인생에서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어떻게 해야지만 이 길을 헤쳐 나갈 수 것인가? 무궁무진한 술수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 무궁무진한 모든 술수를 하나도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어요. 왜 그래요? 상황이 자기가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써먹었던 모든 술수가 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완전한 위기……. 이제는 인간에 있는 모든 방법과 그리고 야곱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의 술수들이 아무런 작동도 할 수 없는 그러한 상황 속에 놓이게 된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들은 이 배운 내용들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 들어가면서 우리가 하나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문제는 뭐냐 하면 창세기 34장 마지막에서 그 34장의 디나의 사건을 다 겪으면서 이 야곱은 그래도 마지막으로 이 34장 마지막까지 와서 철저하게 그 자식들로부터도 영적인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어떻게 그 자기가 스스로 여태까지 살아왔던 방식대로는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절망감,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마음이 워낙 화인을 맞아서 절망 속에 있으면서도 절망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다 벌거벗고 있는데도 우리는 ‘부요하다’ 다 가난하게 되었는데도 ‘우리는 부요하다. 우리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다.’면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결례를 받으러갔을 그 때에 선지자가 말하죠. 뭐라고 말해요? ‘이 아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폐하고 흥함을 위해서 세움을 입었다.’ 그러니까 먼저 인간이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고 각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자신이 얼마나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가하는 것을 깨달아야 해요. 그런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에요.
무엇 때문에 그래요? 자기의 인생 자체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영적인 시각이 아니라 육체적인 시각이에요. 그러니까 절망이라는 것들을 말이에요. 그 어떤 외부적인 것 사업이 쫄딱 망했다든지, 아니면 먹을 것이 없다든지, 물질적으로 비참한 환경에 들어갔다든지, 이런 것 속에서나 비로소 어떤 절망 같은 것을 느끼는데 그것이 아니라 야곱의 경우를 봐요. 뭐가 잃어버린 것이 있어요? 아무 것도 잃어버린 것은 없어요. 문제는 무엇이에요? 모든 것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으나 그러나 야곱의 마음속에는 중대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에요. 아직도 쳐들어오지 않았지만 그러나 브리스족속과 가나안 족속들의 그 다가올 침입을 바라보면서 이 야곱의 마음에 한없이 절망을 느끼는 것이에요. 그런 말하자면 절망, 그래서 그러한 절망 속에서 인간이 눈을 들어서 하나님을 앙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는 거죠.
성경이 우리에게 시인을 통해서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여호와는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를 찾는 자를 또한 찾으시느니라.’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구하는 그런 일들이 절망 속에서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사실 야곱이 그의 교만과 불신앙과 불순종과 그리고 깨어있지 못하는 것 때문에 34장까지 와서 디나가 강간을 당하는 이러한 불행한 사건까지 왔지만 그러나 이러한 불행한 일을 당하고서도 그것이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을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에요. 영적인 불감증에 걸린 사람들이죠. 그런 사람들은 성경이 말한바와 같이 이성 없는 짐승과 같아요. 그런 사람들은 참 어떤 해결의 길이 없어요. 그러면서 늘 우리들은 말이에요. 이러한 이야기를 하게 될 때에 우리는 또 하나의 한계를 만나게 되요. 그 한계가 무엇이냐 하면 말이에요. 그러면 육체적인 상황이나 이러한 물질적인 환경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서는 야곱이 당한 것과 같은 그러한 불행한 일을 당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에요.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창세기 34장에서 야곱을 깨우셔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는 그러한 방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깊이 각성되어야 되요.
그러나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원래는 야곱의 한 가정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 부흥을 얘기하고 싶었거든요. 그러면 말이에요. 우리가 디나의 강간사건과 같은 똑같은 사건은 우리가 만나지 않는다고 할지라고 우리가 영적으로 정말 창세기 34장과 같은 상황에 와있지 않은가? 그것을 우리들이 느끼면서 깊이 회개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죠. 무엇보다도 이런 문제를 고려할 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의 한계는 무엇이냐 하면 이런 것이죠. 내가 이렇게 살아가면서 영적인 불편함을 못 느끼는 것이에요. 이런 식의 신앙생활을 하고 이런 식의 영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불편을 못 느끼는 것이에요.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기 때문이에요. 모든 사람들이……. 모든 교회가 그렇게 살기 때문이에요. 모든 교회가…….
그러니까 그러한 시대에 흐르고 있는 정신, 그 시대 속에 흐르고 있는 신앙의 분위기, 그런 것들을 우리들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그 속에서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에요.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시는 일들이 필요한 것이에요.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각성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쉽게 얘기해서 탕자의 비유에 보면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서 허랑방탕하고 그 미리 빼앗은 유산을 다 탕진하고 그리고 돼지우리 간에 있게 되었잖아요. 거기서도 탕자는 별로 불편을 못 느끼고 살아가는 것이죠. 그런데 무엇을 생각하게 되면서 나는 여기서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되요? ‘내 아버지 집에는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그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면서 자기가 있는 이곳이 자기의 신분에 얼마나 맞지 않은가 하는 것을 느끼게 되요. 말하자면 그러한 각성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약간 빗나간 것 같습니다만 어떻게 해서 그런 각성이 오느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죠. 그러나 문제는 뭐냐 하면 해결의 길은 무엇이냐? 고정관념을 버려야 되요. 고정관념을……. 쉽게 얘기해서 말이에요.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람의 눈을 열어주셔서 각성시키시는 일들이 일어나야 되요. 제가 여기서 한번 말씀을 드렸나 모르겠는데 제가 88년도에 성경을 쭉 읽으면서 가을에 대신대학에 있을 때에 연구실에서 읽으면서 느낀 것이에요.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이 큰 은혜를 주셨는데 그 때에 한 석 달 동안 성경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배운 기독교도 참된 기독교가 아니었다. 내가 가리킨 것은 더욱 더 참된 기독교가 아니었다. 그런 깨달음이었어요. 그러고부터 영적인 순례가 시작되었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해서 그러면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자면 야곱으로 하여금 ‘아! 이게 잘못 되었구나.’ 라고 느끼는 것이죠. 그러면서 세겜의 모든 생활을 청산하고 벧엘로 가겠다는 것 아니에요. 그런 일들이 이 육체적인 관심에서 영적인 관심으로 옮아가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제껏 까지 조금도 불편 없이 살아왔던 것에 대해서 ‘아! 아무래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이 아닌 것 같다.’ 그러면서 도전장을 내놓는 일이 어떻게 일어났느냐 하면 하나님이 말하자면 이 시대가 준 그 눈의 비늘들을 벗기시는 일들이 일어나야 되요.
그런 면에서 참 우리는 불행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교회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지 않는 사람 가운데 하나에요. 아무리 자랑하고 국민소득이 얼마로 올라가고 난리를 친다고 해도 절대 이런 식으로 교회가 흘러가서는 정말 세상을 바꿀 수가 없어요. 보세요! 여러분 얼마나 잘살게 되었습니까? 강남에 다방수보다 교회수가 훨씬 더 많아요. 그런데 물질적으로 부요한 이 모든 강남이 우리나라의 타락을 앞서서 인도하고 있어요. 하루저녁에 쓰이는 술값이 30억이에요.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하면 모든 교회들이 무지하게 노력을 하고 애를 써요. 정말 눈물겨울 정도로 노력해요 그렇지만 대세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이에요. 대세를……. 흐름을 막을 수가 없어요. 여기에 살아가면서 여러분들도 저도 서서히 강남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면 말이에요. 이러한 이 시대가 우리에게 씌워준 말하자면 비늘 같은 것이 있어서 성경을 보든, 신앙생활을 하든, 그렇게 밖에는 안 되는 것이에요. 그 이상의 다른 신앙의 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못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약간 빗나간 이야기 같습니다만 그러면 어떻게 그런 각성이 일어나게 되는가? 쉽게 얘기해서 35장에서 야곱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가지고 말하자면 깊이 세겜의 땅이라고 하는 그 자체가 이제껏 까지는 거기서 세겜 사람들과 무역을 하면서 돈을 모으고 짭짤하게 재미를 보고 그리고 물질이 계속 늘어나고 그 다음에 우양이 번성했어요. 그리고 그 속에서 단단한 기반을 잡아가고 있었어요. 나름대로 거기에 그렇게 살면서 야곱은 야곱대로 꿈이 있었을 것이에요. 비전이 있었을 것이에요.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아니라 세겜 땅에서 살면서 스스로 꿈꾼 비전이에요. 그 모든 것들이 중요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서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 가나안땅에 와서 우거하게 된 것이죠.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한 40킬로에서 80킬로 밖에 안 된대요. 그렇게 가까운 거리만 가면 하나님과의 언약이 모두 이루어지는데 거기를 못가고 주저앉아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모든 일들이 일어났으나 하나님이 그 비늘을 벗기시니까 ‘아! 내가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자리이구나!’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전에 모두 귀하던 세겜에서 모은 재물과, 세겜에서의 안락한 생활과, 세겜에서의 자기의 입지와, 세겜에서의 자기의 모든 신앙이, 자기의 모든 입신의 모든 것들이 지푸라기와 같이 여겨지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왜 그렇게 되었어요? 그 사이에 무슨 일들이 일어났어요? 하나님과의 무엇이 이루어졌어요? 만남이……. 하나님이 만나주셨죠.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들이 그러한 영적인 각성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 동반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에요. 정말 안 돼요.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과의 만남이 주어질 때 그 눈의 비늘이 벗겨진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뭔가 우리들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잖아요. 누구든지 공통적으로 굳이 제 이야기를 안 들었어도 모두 생각하면서 지금 이 시대의 교회가 한없는 축복을 누리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에요. 만약에 있다면 그 사람은 신앙의 수준이 의심스러운 사람이에요. 무엇이 축복이에요? 교회가 이 땅에 세움을 받아서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선 문제는 무엇입니까? 참된 회심이 없잖아요. 참된 회심이……. 참된 회심이 없는 곳에는 구원도 없어요. 그게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이에요. 교회가 이 땅에 보냄을 받은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교회 속에 모여서 즐겁게 사교적인 관계를 갖기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니에요. 주님이 교회를 이 세상에 세우신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구원의 기관으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이 땅위에 세운 것이에요. 그러니까 교회의 가장 커다란 사명은 무엇이냐 하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에요. 어떻게? 사람이 참된 회심을 통해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는 정말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될 수 없어요. 어떻게 확장될 수 있겠어요? 그런데 문제는 참된 회심이 안 일어나잖아요. 포함해서 하는 이야기에요. 예배시간에 설교를 해도 참된 회심이 너무 드물어요. 그리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참된 회심이 일어나야 된다고 하는 절박함을 상실한 채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결국은 예배시간이 하나의 그저 즐기는 시간정도 밖에는 안 되는 것이죠. 왜 이렇게 되어가고 있는 교회의 형편 속에서 어떻게 우리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에요.
고린도서를 읽어보셨어요? 고린도교회가 문제가 많은 교회에요? 문제가 없는 교회에요? 어때요? 문제가 많은 교회였죠. 그러나 지금의 교회는 고린도교회보다 문제가 더 많아요. 고린도교회는 그래도 문제는 있었지만 성령이 놀랍게 역사했어요. 너무나 은사가 많아가지고 예배시간만 되면 저마다 은사 받은 사람들이 하도 설쳐가지고 중심을 못 잡겠으니까 다스려야 되었어요. 그 정도로 은사가 넘치고 있어요. 생명이 있으니까 문제가 있었던 것이에요. 지금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야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이렇게 질서를 못 잡고 난리를 쳤구나!’ 지금은 질서가 잡힌 것입니까? 없는 것이죠. 안 일어나는 것이죠. 지금 우리 가운데 있는 교회 가운데 어느 교회가 사람들이 너무나 방언을 많이 해서 예배시간에 문제가 될 정도로 생명이 넘치는 교회가 있습니까? 은사가 너무나 많아서 저마다 병을 고치고, 저마다 지혜의 말씀을 행하고, 저마다 말하자면 영들을 분별하고, 저마다 통역하고, 저마다 방언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가득차서 서로 자기의 은사가 더 높다고 다투는 사람들이 교회에 가득 차 있습니까? 저는 오히려 문제가 있어도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오히려 소망이 있겠어요. 그리고 그 모든 성령의 역사가 메마를 때로 메마른 속에 있으면서도 뭐냐 하면 고린도교회보다 우리 교회가 훨씬 질서가 잡힌 교회라고 이런 착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진실이 아니에요.
그러면 어떻게 우리들이 말하자면 우리의 현재의 상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느냐? 그것은 두 가지를 통해서예요. 하나는 성경을 읽으면서 깨닫는 것이에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교회가 사도행전 같은 것을 보면서, 또 복음서를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하시려고 했던 참된 구원의 복음이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참된 신자의 생활이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이 특별히 함께 해주실 때 교회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 그리고 역사를 보면서 우리들이 느끼는 것이죠. 늘 태연한 우리는 이 시대밖에는 볼 줄을 몰라요. 자기가 살아온 것밖에는 몰라요. 백 년 전에 교회가 어떠했는지 이백년 전에 세상이 어떠했는지 우리는 거의 모르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그리고는 저마다 다 마땅히 자기가 생각하는 교회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요.
가장 커다란 어려움은 무엇이냐 하면 뭔가 이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설교를 하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그렇게 관심을 기울여서 듣지를 않아요. 자기가 이미 다 생각을 하고 있어요. ‘교회는 어떠해야 된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것은 전부다 자기 개인의 생각이에요. 이런 교회였으면 좋겠다, 저런 교회였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것이죠.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잃어 버렸는가? 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부자였고 그리고 정말 서머나 교회하고는 반대되게 궁핍한 교회가 아니라 풍부한 교회였어요. 상업도시에 사는 큰 부자들이 모인 교회였어요. 저마다 다 부요한 교회라고 말하죠. 어느 날 하나님께서 사도에게 실상을 보여주신 것이죠. 사람들이 저마다 밍크코트에다가, 실크블라우스에다가, 기가 막힌 외제구두에다가, 몸을 휘감고 왔는데 사도가 하늘에서 쳐다보니까 전부다 벌거숭이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에요. 부자라고 그랬는데 얼굴이 유들유들하고 살이 찌고 배가 나오고 좋은 크림을 발라가지고 얼굴이 번쩍번쩍하고 한데 위에서 내려다보니까 완전히 바짝 말라가지고 해골들만 남은 거예요. 그래가지고 말하자면 덜덜 떨고 깡통하나 차고 있는 그 모습이 보인 것이에요. 누가 그것을 볼 수 있겠어요. 부족한 것이 없이 그냥 승용차가 즐비하게 늘어서있고 밍크코트와 실크로 몸을 휘감고 교회에 나오는 그 수많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을 보면서 어떻게 그런 모습을 읽을 수가 있겠느냐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바로 우리들은 늘 그 눈에 보이는 그것에 우리의 생각과 사상이 매이는 것이에요. 그러나 선지자들은 그렇지 않았어요. 선지자들을 그래서 선견자라고 그랬거든요. 꿰뚫어보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모든 부요함과 그 겉으로 드러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꿰뚫어보면서 그 속에 있는 참 모습을 직시해낼 수 있는 이런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
오늘날에도 문제는 뭐냐 하면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생겨나요. 그러면 교회는 기도하는 집으로 변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에요. 모든 사람들이 ‘태평하다, 태평하다.’ 하는 그 때에 선지자들은 위기를 외쳤어요. 모든 사람들이 ‘부요하다, 부요하다.’ 할 때에 선지자들은 눈물로 탄식하며 호각을 불었다고요. 모두 부요한 시대에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의 그림자가 그들의 눈에는 보였기 때문이에요. 벌거벗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비참한 삶이 선지자는 보였던 것이에요. 왜 그래요? 시각 자체가 영적인 시각을 가지고 통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에요. 눈에 보이는 것들에 매이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말하자면 시대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고 새롭게 해주시는 각성이 필요한 것이에요.
그런데 그 각성이 어떻게 일어나느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집중할 때에 일어나는 것이에요. 성경을 읽을 때에 편견을 벗어버리고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 속에서 나와 다른 어떤 영적인 상황이 벌어지면 ‘왜 나는 이렇게 되지 못할까?’ 라는 것에 대한 깊은 자기 성찰이 필요해요. 오늘 저녁에 그 학생이 올지 모르겠는데 강남신학원의 아무개에요. 이 ‘벧엘로 올라가자.’를 읽으라고 내주었어요. 그런데 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건성건성 읽어요. 그러면서 자기네들끼리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1, 2장만 읽으면 돼 3장부터는 다 똑같아’ 그런대요. 그런데 몇 사람을 이렇게 보았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인데 이주동안에 여덟 번을 읽었대요. 그런데 완전히 말하자면 그 생애적인 변화를 자기가 경험했다는 것이죠. 쉽게 얘기해서 자기는 여태까지 깊은 로마서를 읽으면서도 한없이 울고 그리고 내가 이 젊은 나이에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밖에는 아무 소망이 없다는 변화를 받고 살아가는데 자기에게 다가오는 문제가 너무나 힘든 것이에요. 그리고 그런 문제들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의논할 때에 누구도 거기에 대해서 답을 해주지 않는 것이에요. 문제는 여덟 번을 왜 읽었느냐고 했더니 ‘세상에 나하고 이렇게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구나!’ 그러니까 여태까지 하나씩 하나씩 흩어져서 도무지 어떻게 꿰어야 될지 모르던 자기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일목요연하게 말하자면 정리된 것을 자기가 발견했다는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집중할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나요. 그리고 이번 11월 달에도 이제 부흥과 각성에 대해서도 듣고 싶다고 해서 이제 교회를 가게 되는데 여러 교회를 다녀보니까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사람들이 진심으로 각성되고, 진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려고 했던 참된 신앙과, 우리가 가지고 있던 신앙 사이에 차이가 있으면 그 차이를 내가 기꺼이 인정하고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소수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참다운 각성이 안 일어나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말씀에 깊은 집념을 가지고 그리고 진지하게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들어나갈 때에 그 때에 비로소 어느 한 순간이 될지는 몰라요. 정말 어느 한 순간이 될지는 몰라요. 이번 학기에 있었던 일이에요. 어떤 사람은 이 책을 읽으려고 폈는데 서문에 보니까 뭐라고 그랬느냐하면 35장 1절부터 15절까지에 사로잡혀서 내가 두 달 동안을 흥분과 감격으로 지냈다고 그랬더니 책을 도로 덮었어요. 책을 도로 덮고 ‘나는 어떤가?’ 하고 35장을 폈더니 아무것도 없더래요. 그래가지고 이 사람이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책을 읽기 전에 기도하면서 다시 읽고, 기도하면서 다시 읽고, 기도하면서 다시 읽고, 본문만 일곱 번인가 여덟 번인가 읽었대요. 그러는 가운데 얼마나한 깨달음인지 나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하여튼 그가 나에게 편지하기를 마지막 일곱 번째 읽을 때에 자기의 심령이 갈가리 찢기면서 그 말씀 앞에 거꾸러지는 일이 일어났었다는 이야기를 해요. 진지함이에요. 그리고 깊이 하나님이 나에게 뭔가 내가 가지고 있는 상식과 다른 것을 말씀하시면 내가 듣고 그 모든 것을 배와 그물처럼 버리고 따라가겠나이다. 라고 하는 것. 그러한 각오와 결단을 가지고 구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눈을 열어주셔요. 나는 그 눈이 열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어요.
그리고는 참 신앙부흥 이외에는 인생에 소망이 없다는 것이에요. 어떻게 그 다른 것들에 신앙을 걸 수 있겠느냐는 것이에요. 그러한 말하자면 전환으로 돌아서는 사람들을 보았어요. 아주 많지는 않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건질 자들은 건지시고 벗길 자들은 벗기신다고 하는 것을 보았어요. 왜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냐 하면 하나님과 만났다고 그러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을 만난 체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너무 많아요. 우리 중에 모두 가지고 있어요. 저마다 다 하나님에 대해서 할 얘기가 있고 하나님과의 만남의 체험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진리를 만난 자, 참된 하나님과의 만남은 말씀의 다리위에 선 하나님과의 만남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그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말씀의 세계의 광대하고 깊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으면 그 하나님과의 만남은 늘 허공에 뜬 것과 마찬가지에요. 누가 하나님과의 만남의 경험이 없는데 어떻게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그것이 정도의 차이는 있고 그리고 빛깔의 상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전부다 저마다 자기는 하나님을 만났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과의 만남, 단편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서 신앙의 전체적인 체계에 대한 말하자면 새로운 인식들이 생겨나야 된다는 것이죠. 새로운 인식들이 생겨나야 되요. 그렇게 말씀에 진지하게 집중할 때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굉장히 필요해요.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되는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는 싶어 하지만 말씀에 대한 집중이 없어요. 그러니까 늘 허공을 잡는 것과 같은 것이에요.
오래되었어요. 그런데 설교자들의 책임이 커요. 그런데 오래되었는데 제가 있던 교회에서 부흥회를 했어요. 부흥회를 했는데 그분이 오셔서 설교를 하시는 가운데 무엇을 얘기했느냐하면 성경은 얘기도 안하고 갑자기 어디로 뛰어넘어갔느냐 하면 자기가 부흥회가 끝나고 집에 갈 때는 산모퉁이를 돌아가는데 거기에서 밤송이 세 개를 주워가지고 갔다는 것이에요. 가을이면 늘 주워가지고 간다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얘기하는 게 자기 자녀들을 주기 위해서 가지고 갔다는 것이죠. 집에 딱 들어가니까 ‘아빠 올 때 뭐 사가지고 왔어?’ 그러니까 ‘그래 전해줄 선물이 있다.’ 그런데 애들이 아빠를 기다리지 못하고 가방을 열고 가방에 손을 넣다가 찔렸어요. 그러면서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그것 보십시오. 우리가 다 아버지가 허락하실 때까지 기다려야지만 되는 것이지 함부로 가방을 열면 고난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다가가서 그 밤송이를 꺼내놓고 이렇게 가져와서 ‘여러분 이 밤송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런데 무엇인지 알 턱이 있나. 그런데 ‘이 밤송이가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그것은 또 왜 밤송이가 신앙생활이 되는지 모르죠. ‘겉으로 볼 때는 예수 믿는 생활이 얼마나 고난이 많습니까?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이 밤송이와 같은 것입니다. 제가 드디어 발로 밟아서 밤을 딱 깠는데 그 밤이 세알이 나왔습니다. 이 세알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또 알 사람이 있나요. 눈을 껌벅껌벅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것은 바로 믿음, 소망, 사랑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확 물같이 녹아요. 물같이 녹아요. 한 삼년동안 부흥회를 했는데 그 부흥회가 가장 풍성했대요. 나만 빼놓고 다 은혜를 받은 것이에요. 그리고 헌금도 제일 많이 나왔어요.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보았어요. 그게 딱 깠을 때에 세 개가 나왔으니까 믿음, 소망, 사랑이지 두 개는 쭉정이고 하나만 나왔으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했더니 어느 학생이 ‘교수님 그럴 때는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믿음, 소망, 사랑, 이렇게 세 가지가 있을 것인데 하면서 하나를 딱 꺼내면서 이것은 사랑이고…….’
왜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느냐하면 그러한 감격이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에요. 그것은 신앙생활에 아무 도움을 못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해요. 눈물을 흘릴 수 있어요. 그래서 제가 늘 이야기하잖아요. 정말 나도 십분 이면 삼, 사백 명을 울릴 수 있다. 십 분이나 이십분의 여유만 주면……. 그러나 무엇이 필요해요? 여러분! 그 눈물은 흐르고 닦이면 함께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에요. 들떴던 마음이 가라앉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에요. 일리는 있지만 그러나 굳건하게 성경의 진리 속에서 뭔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그 깨달음 속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질 때 그 때에 우리의 일생이 그 진리에 붙잡히게 되는 것이에요. 무엇에 붙잡혀있어요? 그 많은 눈물과 그렇게 살아온 많은 것들이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죠.
어떤 한 형제가 있는데 기도원을 같이 가면서 그래요.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저는요 전도사님을 만나기전에는 하나님을 만났다고 생각했고 방언도 받았고 그 다음에 성령의 은혜도 받았고 자기는 다 만났다고 생각을 했는데 설교를 들으면 들을수록 내가 만난 하나님과 당신이 만난 하나님이 똑같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고 그러면서 나는 하나님을 못 만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그래요. ‘그런 생각을 계속하면 소망이 있다.’고 그랬어요. 그러한 체험들을 하나님을 만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 것이 아니에요. 정말 그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은 주님이 손으로 주는 물건을 주고받은 정도를 가리켜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각성되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에요. 진심으로 그분의 인격과 만나는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야 된다는 것이에요.
그러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지금 35장 1절에서 이루어진 것이에요. 정말 놀라운 만남이 이루어지고 거기서도 보면 하나님이 야곱에게 다가오시면서 무엇으로 다가오셔요? 그렇죠. ‘야곱아 네가 얼마나 가슴이 아프냐? 내가 네 눈의 눈물을 닦아주고 디나를 강간한 자들을 더 혼내 주리라.’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상황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어떻게?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그것이었죠. 그것이 주님의 말씀이었어요. 그렇게 주님이 말씀하시면서 만나주신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야곱이 3절에서 많은 집안 식구들을 불러놓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에요. 생각해보세요. 야곱이 지금 댓돌 같은 데에 올라가서 그 다음에 많은 식구들이 쭉 모여 있어요.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어떤 자신감이 야곱에게 있는 것 아니에요. 상황이 뭐가 변한 것이 있어요? 여전히 디나는 한쪽 구석에서 몸을 버렸다고 꿀꺽꿀꺽 거리고 울고 있고 모든 식구들은 브리스족속과 가나안 족속이 쳐들어올지도 모른다고 하는 불안에 떨고 있어요. 상황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어요. 그런데 야곱에게만 변화가 일어났어요. 어떤 변화가? 이제 이 실타래같이 엉킨 가정의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말하자면 자신이 생긴 것이에요. 어떻게 생겼어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만나주셨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34장 마지막에서 영적인 권위와 지도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그러한 한 야곱의 모습을 발견한다면 이 35장 3절에서는 그러한 영적인 권위를 온전히 회복하고 그리고 이 자기의 가족들을 인도할 수 있는 영적인 권위를 소유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이죠. 바로 그런 것이에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참다운 만남이 있는 그 사람에 의해서 권위가 있어지는 것이에요. 저는 아주 강한 신념이에요. 그래서 교회에서도 그런 것 때문에 부딪히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뭐 제가 아주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옳다는 신념만 가지고 있지 실제로 교회를 그렇게 해 나가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요. 제가 지금 단독목회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뭐냐 하면 어설픈 민주주의가 교회에서 사라지는 것이에요. 그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지도자들의 참다운 영적인 권위의 부재 때문이에요. 성경을 읽으면서 편견 없이 성경을 읽으세요. 하나님께서는 늘 수많은 백성들에게 동시에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특별히 세운 하나님의 지도자들에게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그들은 한결같이 뛰어난 영적인 사람들이었어요.
여러분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가고야 말 일들을 그 태평한 시대에 오직 누구에게 보이셨어요? 예레미아에게 보이셨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그리고 교회가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를 때에 제일 먼저 열두 사도 중의 한사람 가롯 유다 그 자리를 대신 채워야한다고 하는 결정을 하게끔 인도하실 때에 누구를 통해서 인도하셨어요? 사도를 통해서 인도하셨어요. 계시록에 와서도 역시 똑같이 그렇게 하나님께서 교회의 모든 형편을 그 교회를 섬기는 감독들에게 편지를 보내셨던 것이죠. 왜 아시아가 아니라 유럽 쪽으로 복음이 전파되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그것을 먼저 알리셨어요? 바울 한사람에게 알리셨어요. 교회에 깔린 이 모든 어설픈 민주주의는 그렇다고 독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온 참된 영적인 권위를 가진 지도자들이 바로 교회에는 필요하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끌어줄 수 있는 그런 권능의 지팡이를 가진 목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 백성의 수많은 이야기를 듣고 민주적인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수많은 천개의 귀를 가진 지도자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물론 듣지요. 그러나 오늘날의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이 지도자의 요건으로 평가되고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에요. 보십시오.
야곱은 34장 마지막에서 이렇게 완전히 깊은 절망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 35장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게 되었는데 드디어 그는 모든 사람과 상의하지 않고 집안 식구들을 불러 모았어요. 그리고 그 집안 식구들에게 이야기했던 것이죠. 벧엘로 올라가려고 한다. 너희들은 준비를 해야 된다는 것이었어요. 오늘 우리들은 무슨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회의를 한다, 무슨 심포지엄을 한다, 현수막을 내걸고 학자들을 초정해서 견해를 듣는다, 무슨 공부를 한다, 무슨 스터디를 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지도자들이, 가정을 섬기고 가정을 이끌어가고 있는 지도자들이, 구역을 돌보고 있는 지도자들이, 교회를 섬기는 일군들이, 그리고 여러분들이, 각기 하나님이 그 상황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해주시는지를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에요. 그럴 때에 막힌 길이 열리고 그 때에 헤어날 길이 없었던 것처럼 여겼던 인생의 미로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갈 길을 찾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 한분에게만 해결의 길이 있는 것이에요. 정말 그렇습니다. 왜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모음으로 말미암아 더 좋은 의견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면서 하나님 한분이 가장 확실한 해답을 가지고 계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이러한 일 때문이라는 것이에요.
부흥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결국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것 같은 이러한 각성과 부흥을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부흥이에요. 35장 1절에서 야곱을 하나님이 만나주셨더니 야곱은 갑자기 식구들 앞에 서서 우리가 가야할 길을 제시해줄 수 있는 지도자가 되었던 것이죠. 전에는 그가 왜 이렇게 하였느냐고 야단을 하고 나무랄 때에 그 때에 자식들이 대어들면서 아버지에게 대거리를 했어요. 그러나 여기에서는 계속해서 35장 마지막까지 식구들의 이야기는 하나도 나오지 않아요. 말을 붙일 수 없을 정도의 분명하고 확실한 확신과 권위가 이 야곱에게 있었던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말하자면 하나님을 만나고 온 야곱의 변화에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제일 문제가 뭐냐 하면 모른다는 이야기를 밥 먹듯 많이 하는 것이에요. 이렇게 생각하는데 이렇게,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한참 생각하다가 ‘모르겠는데요.’ 그렇게 이렇게 하는 것이 성경을 바로 믿는 것입니까? ‘글쎄 모르겠는데요.’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밥 먹듯이 많이 해요. 오죽했으면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모르는 이야기는 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끝까지 생각해야지요. 어느 것이 바른 것인가를……. 모를 것이 없었어요. 34장에서는 모르는 것투성이였는데 35장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모를 것이 없었어요.
그러면서 여기에서 두 번째로 발견하게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관심의 전폭적인 변화에요. 그것은 무엇이에요? 새로운 시작이었어요. 일을 벌이는 것이었어요. 무슨 일? 그 디나가 강간당한 그 사건, 자기의 생활의 주위에 널브러지듯이 이렇게 땅을 뒤집어놓듯 파헤쳐놓은 것 같은 혼란스러운 상황, 그리고 금방 다가올지도 모르는 가나안족속과 브리스족속의 침입, 자식들에게 이렇게 설움을 당하는 이런 영적인 권위를 잃어버린 아버지의 이 비참함, 이런 모든 것들이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에요. 그러면서 뭐냐 하면 야곱이 비로소 이 모든 문제가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에 있다고 하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이에요. 이것이 바로 야곱이 하나님과 만난 후에 야곱에게 일어났던 가장 큰 변화였어요. 여러분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우리들은 환경을 원망하고, 사람을 향하여 불평하고, 자기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그리고 씻기지 않는 마음의 상처를 고이고이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는지 몰라요. 해결은 결코 거기에 있지 않아요. 누가 해결해주겠어요. 야곱은 온통 마음속이 불만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디나, 그 녀석은 왜 하필이면 그 시간에 그런 야한 옷을 입고 그 못된 놈들이 살고 있는 세겜 거리를 오빠들하고도 같이 안가고 혼자 나섰단 말이냐……. 이놈들은 어찌하여 가서 사기를 치고 그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서 나로 하여금 이런 위협을 느끼게 하느냔 말이다……. 내가 말을 좀 잘못했어도 그렇지 어떻게 너희들이 나한테 이렇게 대들 수 있겠느냐……. 마누라들은 도대체 집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이야? 별생각이 다 떠오르는 것이죠. 사은품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이냐? 정품은 또 무엇을 하고 있었고……. 그러면서 온갖 원망을 품고 있었죠. 그런 먹구름 속에서 하나님이 보이겠어요. 그 먹구름 속에서 하나님이 보이겠느냐고요. 그 중에 누가 변해주겠어요? 누가……. 라헬이 변해주겠어요? 레아가 변해주겠어요? 아니면 자식들이 변해주겠어요? 세겜의 자식들이 변해주겠어요. 디나가 변해주겠어요. 브리스족속과 가나안족속이 말을 타고 쳐들어오다가 마음이 바뀌어서 돌아가겠어요. 아무것도 변화되지 않는 것이에요. 무엇을 생각하시면 되느냐하면 내가 안 변하는 것을 보면 다른 사람도 얼마나 안 변할지를 알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런 생각은 안하고 나는 언제든지 무슨 장기판 하나 뒤집듯이 나는 쉽게 뒤집혀질 수 있는데 사람들이 왜 나를 위해서 변해주지 않을까를 생각하는 것이죠. 환경을 바라보면서 사람을 바라보면서 변화를 기대하지만 변화되지 않아요. 변화되지 않을 때 우리는 변화시켜 주시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요. 그 원망 속에서 살다가 그 원망 때문에 죄를 짓게 되고 그 원망의 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과 더 큰 간격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원망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죽는 장면이 나오죠. 그러므로 우리가 이같이 하나님 앞에 원망하지 말자고요. 그럼 불신앙이 증폭되어가요. 그래서 점점, 점점 34장에서는 35장이 시작될 수 없을 정도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것이 가슴속에 한이 되고 상처가 되고 그러는 것이에요. 그런 모든 것들은 결국은 그런 안개와 같이 피어오르는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벧엘로 올라가서 단을 쌓아라.’ 야곱의 머리를 전광석화와 같이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것이 뭐에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아니하였다는 것, 내가 지금 불순종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이 모든 불행한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그 인식이 생겨난 것이에요. 그것이 신앙인이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에요. 눈에 보이는 것 그 자체로 판단하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 밑에 깔려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문제를 풀어보려고 하는 이러한 마음과 이러한 노력 이러한 시야 이것으로 야곱이 돌아왔어요. 그러면서 얘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모든 자기 집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를 불러놓고 말하기를 ‘내가 내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나타났던 그 하나님께 나아가서 곤고한 날에 내게 응답하시던 고난의 날에 내게 응답하시던 그 하나님께 나는 단을 쌓아야 되겠다.’ 야곱의 마음이 이제 비로소 이 땅에서 씨름을 하던 일을 들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백하게 된 것이에요. 그러면서 쑥밭이 된 자기의 집안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무너져버린 하나님과의 약속, 그리고 깨져버린 하나님과의 관계를 발견하게 된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이 야곱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게 된 그 모든 출발의 시작이었다는 것이에요.
이것이 바로 각성이고 이것이 바로 변화에요.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말하자면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이러한 변화라는 것이죠. 3절에 보니까 말이에요. 3절을 한번 보세요.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란 날에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여기에 보면 우선 처음에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가 나오고 그 다음에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 많이 나와요. ‘나의 환란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단을 쌓겠다.’ 그러니까 이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자.’ 라고 말할 때 그 야곱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느냐 하면 환란 날에 자기에게 응답해주시던 하나님 그것이 생각이 난거에요. 환란 날에 자기에게 응답해주시던 하나님……. 그리고 또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함께 하시던 하나님, 이렇게 하나님과 이런 관계 속에서 야곱이 살아온 것이에요. 벧엘 이후로 이렇게 쭉 살아온 것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환란 날에 라반의 집에서 환란을 당할 그 때에 도망을 쳐서 추격을 받았을 그 때에 그 환란 그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셨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늘 동행해주셨다는 것이죠.
이 모든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어요. 이 보이지 않는 것들을 잃어버린 대가로 그는 세겜에 거하면서 많은 물질을 얻었고 그리고 그곳에서 자기가 원하는 많은 것들을 손에 넣었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 대가는 너무나 큰 것이었어요. 이제는 환란을 당했는데도 주님을 부를 기력도 없고 그리고 고난가운데 처했는데도 그 어두움 속에서 영적인 어두움도 계속 더해가서 주님의 대답이 들리지가 않는 그러한 때를 당하게 되었어요.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며 (임마누엘인데)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잃어버리고 살았던 것이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은 어떻게 그 큰 환란을 만났을 그 때에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궁리하고 염려하다가 자식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하는 그런 자리까지 갈 수 있었겠어요. 이미 이전에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들어 줄 수 있었던 그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함께하심, 그가 모든 식구들 가운데 뛰어나게 그 언약의 하나님과 만남을 경험했던 그 훌륭한 신앙의 체험과 살아있는 신앙의 생생한 하나님과의 교제, 이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리는 대가를 치르게 되었던 것이죠. 불순종 때문에 말이에요.
그러한 상황에서 야곱은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의 모든 가족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떠나 있는지를 깨닫는 것이죠. ‘일어나자’ 무슨 이야기에요? 지금신앙이 앉아있고, 주저앉아있는 신앙, 그것을 본 것이에요. 그러면서 한사람의 각성은 또 다른 사람들을 이렇게 깨우는 것이에요. 그래서 정말 그래요. 저는 그것을 많이 경험했어요. 하나님께서 한번 우리를 변화시켜 주셔서 이렇게 시대에 흘러가고 있는 이러한 기독교, 이러한 신앙생활이 참된 신앙생활이 아니라고 하는 것들을 한 두 사람에게 일깨워주셨을 때 그 사람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깨어나요. 하나님이 야곱을 깨우시니까 야곱은 즉시 자기와 함께 잠들어있는 그 모든 자기의 가정을 볼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러면서 너희는 나와 함께 벧엘로 올라가야한다. 그 벧엘이 바로 하나님과 나와 언약하신 곳이고 그것은 나와 개인적인 언약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민족과의 언약이고 그리고 하나님께로 언약을 받은 그 백성들과의 약속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킬 수 있었던 것이죠.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필요해요 그리고 사람들을 깨워야 해요. 사람들을 깨우기 전에 우리가 먼저 이렇게 하나님 앞에 깨어나는 일들이 있어야 되는 것이에요.
교회를 비판적인 눈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에요.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기 전에, 교회를 비판하기 전에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참된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시려고 했던 그러한 참된 신앙이 어떤 것이었는가? 그런 것들을 우리들이 돌아보면서 무엇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깊은 사랑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 스스로 판단해 보아 야해요.
그런데 이 야곱이 우리에게 벧엘로 올라가자고하는 곳에서 또 하나 보여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가족들을 다 모아놓고 벧엘로 올라가자 이렇게 말을 할 때에 야곱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은 무엇이냐 하면 벧엘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무엇이었어요? 하나님과의 언약이지요. 그 언약을 통해서 야곱이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에 있는 자신이라고 하는 사실이 확인되어지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그 벧엘로 올라가야 되겠다고 하는 의미는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와 언약을 맺으심으로 말미암아서 그러니까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 이스라엘 백성 그러는데 이스라엘 백성의 시작은 어디에요? 아브라함이에요. 아브라함이 누구냐?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사실 이스라엘 백성이고 뭐고 할 게 없어요. 아브라함은 그냥 갈대아 우르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우상을 섬기고 만드는 집안에 한 아들로 태어난 것이죠. 그가 이스라엘의 머리가 되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셨기 때문이에요. 관계를 맺으셨기 때문이에요. 그 관계를 맺으셨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된 것이에요. 그것이 뭐가 틀려요.
요새 교회에서도 얘기했지만 나가면 우리가 제복을 입고 다닙니까? 딴 길로 모여서 다닙니까? 다 같이 모든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같은 사람들일 수 없어요. 결코 그런 사람들일 수 없어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에요? 우리에게 무엇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특별한 약속이 있기 때문에 그 약속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가 된 것이에요.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백성된 의무에요. 그러한 하나님과의 관계로 말미암아 백성된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의 의무인데 이렇게 믿음이 충만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때는 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녀의 명분, 이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하는 것을 느껴요. 그러나 신앙이 없으면 이 모든 것들을 귀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이죠. 야곱이 깨닫게 된 것이죠. 벧엘로 올라가야 되겠다는 결심 속에서 야곱이 깨닫게 된 것이 바로 이것이에요. 자기는 이 세겜에 살고 가나안에 살고 이 사람들과 함께 살지만 그러나 이들과 같이 같은 방식으로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야곱이 받은 하나의 커다란 다짐이에요. 이러한 맥락을 통해서 저는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 야곱이 말하자면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영적인 권위를 회복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 가져오는 놀라운 변화가 아니겠는가하는 것이에요. 왜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들 향해서 그런 영향을 끼칠 수 없는 그런 관계가 되어버렸겠는가?
그래서 교회사에서 보면 요한 타울러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스승이 에카르트였는데 독일 사람이에요. 그런데 아주 신비주의자였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신비주의자라기보다는 그 신비주의의 틀을 많이 벗었어요. 그래서 아주 박식한 사람이었는데 설교를 아주 잘했어요. 그런데 그 니콜라스라고 하는 가젤에서 온 친구가(어떤 책에서는 친구라고 나오고 어떤 책에서는 친구가 아니라고 나오는데) 뛰어난 영적인 사람이었든 모양이에요. 그 타울러의 설교를 쭉 듣고 있다가 설교가 딱 끝나자마자 그에게 가서 얘기를 하는데 ‘당신의 설교는 전적으로 잘못되었다. 당신의 설교는 죽은 자의 설교다. 의문에 매인 설교요 생명이 없는 설교다.’ 그러면서 가버렸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이제 고민에 싸이게 되는 것이에요. 처음에는 그 말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들었다가 6개월인가 어느 정도 흐른 후에 그 말이 사실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요. 그러고 나서 2년 동안 설교를 안 해요. 2년 동안 설교를 안 하고 말하자면 자기의 설교 속에 하나님과의 분명한 만남이 묻어나오지 않는다고 하는 한계를 느낀 것이에요. 그러면서 기도를 해요. 그리고 2년 있다가 다시 설교단에 바람과 같이 등단을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에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한절 ‘보라 신랑이로다.’ 그것을 가지고 설교를 해요. 설교를 듣다가 50명이 졸도를 했대요. 그런 일들이 설교시간에 일어나요. 지금 여러분이 웃으셨는데 예배시간에 하나님이 정말 함께 하시면 이 회중 전체를 뭔가 이불처럼 깊은 기운이 덮고 있는 것이 느껴져요. 그리고 거기에 범접할 수 없는 권세 있는 분위기가 감돌아요. 그러니까 말씀을 전할 때에 사람들이 졸도를 하거나 귀신이 나가고하는 일들이 일어나요. 때린다고 해서 나가는 것이 아니에요. 왜 패요? 그 사람이 무슨 죄가 있어요. 손가락으로 쑤시고 그러는데 왜 그래요? 권세 있는 분위기가 뒤덮으면서 외칠 때에 50명이 졸도했어요. 교회사에 나와요. XX4권에 나와요. 그렇게 졸도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에요. 그것이 무엇 때문이에요. 그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에서 오는 말하자면 영적인 능력이에요.
이제는 우리들에게 참다운 진리의 말씀을 증거 할 때에 이러한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동반하는 이러한 설교, 이러한 하나님 말씀의 증거, 그것은 이런 직업적인 성직자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에게도 마찬가지에요. 복음을 전할 때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권세 있는 복음전도가 되는 것이에요. ‘당신은 예수 믿어야 돼. 예수 안 믿으면 불붙는 지옥밖에 기다리는 것이 없어.’ 그런데 전에는 늘 농담처럼 들었는데 그 말이 계속해서 찔리는 것이에요. 그리고 나중에는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실제로 자기 발끝에 타오르는 지옥의 불길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에요. 무엇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강력한 권세 하나님과 만나고온 사람이 가져다줄 수 있는 그러한 놀라운 영적인 영향력이에요. 저는 그리워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것들이에요.
그러니까 끊임없이 교회는 추구해야 되요. 그래서 그러한 설교자들을 세우시고 또 그러한 설교자들을 위해서, 그러한 일군들이 세워지기 위해서, 교회는 허리가 끊어지도록 기도해야 해요. 정말 교회의 역사를 보면 아무 힘이 없고 은혜도 없는 설교자들이 성도들의 기도로 말미암아서 이런 벧엘의 사건을 경험하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그러한 놀라운 역사들을 역사는 많이 기록을 하고 있어요. 어느 쪽이든지 한 쪽의 수준이 뭔가 좀 틀려야지만 그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지 않겠어요. 참답게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도 시대가 점점 흐르면서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신앙의 확신들을 점차 잃어버리고 체험이나 하나님과의 만남, 이런 것들은 허공에 뜬것과 같은 것이고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사상들로 기독교에 대한 생각들이 채색되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선명하고 원색적인 복음이 점점, 점점 우리에게 잊혀가고 있는 것이죠.
십자가에 대한 책을 준비하면서도 제가 느끼는 하나의 깊은 감회는 그것이에요. 왜 우리에게는 정말 모든 사람들이 서슴없이 있는 그대로의 복음, 그 원색적인 복음을 내놓으면서 사람들에게 믿든지 말든지 양자택일하라고 도전하는 그런 담대함을 우리는 왜 자꾸 잃어버려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에요. 이 모든 상황들은 교회로 하여금 참답게 하나님을 만날 것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죠. 야곱이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에 34장의 모든 혼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렸던 것이죠.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볼 때에 야곱이 그 모든 좌절의 늪에서 해결의 길을 찾은 것이에요. 어두움 속에서 빛을 발견하게 된 것이죠. 무엇 때문에? 진정한 하나님과의 만남 이것 때문에 야곱은 그 모든 어려움과 혼란 속에서 참된 희망의 길을 찾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만남들을 사모하는 그런 관계로 들어가야 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