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엘로 올라가자 6
부흥을 기다리는 삶 Ⅰ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창35:1∼3)
35장의 중반부를 조금 못 왔는데 이제 처음에는 우리가 출발이 흔히 지극히 개인적인데서 출발을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떠나고 그래서 신앙이 깊이 침체된 가운데 34장에서 커다란 위기를 만나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이제 제가 이 본문을 한 3년, 4년 되었을까? 그 때에 만나면서 큰 감동을 받았던 것은 야곱 한사람이 개인적으로 이렇게 해서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서 다시 축복을 받는구나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여러분들에게도 필요로 하는 메시지는 사실은 그 이상의 것이 되어야 된다는 것이죠.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하면 35장의 이야기는 사실 그렇게 개인적인 면에서 본다고 하면 한번 설교를 하면 15절까지 할 수 있는 정도의 이야기에요. 그러나 이제 오늘 우리들이 생각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이제 34장을 풀어나가고 35장 1절을 풀어나갈 때 여러분들이 이해가 잘되었겠지만 이제부터 점점 풀어나가면서 ‘이것은 나하고는 점점 거리가 먼 얘기가 자꾸 나오는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할지 몰라요. 그래서 오늘 중간에 쐐기를 한번 박고 그 다음에 한 단계 올라가려고 하는 것이에요. 무슨 말씀이냐 하면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이 내용들이 가슴에 깊이 어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여러분들의 신앙생활 하는 사고의 폭이 너무 좁기 때문에 지금 제 얘기가 가슴에 어필이 안 되는 것이에요. 쉽게 얘기해서 주기도문에도 말씀하신 것과 같이 늘 의식 속에서라도 하나님의 나라, 주 뜻이 이루어지이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이런 것들이 중심적인 기도제목이 되고 이루어지지 못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고민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처음시간에 마치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이 34장을 우리들이 더듬어보았는데 그런 이야기는 흔한 이야기이고 지금부터는 정말 우리들의 고민과 실제적으로 맞닿을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강의하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어필이 안 되고 뭔가 강사가 열을 내면 낼수록 나하고는 좀 거리가 먼 것 같다는 일들이 종종 일어날 수 있어요. 그 이유는 여러분들의 사고의 폭이 너무 좁기 때문이에요.
무슨 말씀을 드리느냐하면 늘 우리의 신앙생활을 하는 역사의 무대가 기껏 해봐야 50년대 60년대 아닙니까? 그 옆집에 누가 죽어도 신경 쓸 수 없을 정도로 바쁘던, 고달프던 시기에 신앙을 받아들여서 자기 혼자 살면 되는, 신앙에 있어서도 그 시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경쟁주의 같이 다른 사람이 어떤지 신경 안 쓰고 오직 자기 길을 가야하는 그러한 말하자면 시대 속에서 우리들이 신앙을 받아들이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온 것이죠. 그러나 그것은 정말 우리들에게 다시 한 번 커다란 반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에요. 반성이 아니라 각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에요. 무슨 말씀을 드리는 것이냐 하면 계속해서 지금 그 나라와 의에 대해서 저녁때에 4시간에 걸쳐서 말씀을 드리고 있는데 오늘저녁에도 계속되겠습니다만…….
한 병사가 전쟁터에 갔습니다. 죽기 살기를 무릅쓰고 열심히 싸우는 것이에요. 그 병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야, 너 소속이 어디냐?’ 'I don't know.' ‘저는 몰라요.’ ‘누구를 위해 싸우느냐?’ ‘저는 몰라요.’ ‘그럼 왜 싸우나?’ ‘여기가 내가 서있는 자리이고, 옛날부터 여기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렇게 삽니다.’ 그런 것은 참으로 전쟁에 기여할 수 있는 군인이 아니에요. 또 그렇게 싸울 수 있는 병사는 이 세상에 없어요.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이냐 하면 우리의 신앙생활 자체가 커다란 하나님의 나라에 하나의 영적인 전쟁이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러면 그 나라에 대한 깊은 관심, 정말 그 나라가 나뿐만 아니라 내 주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 이루어지고 있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비참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가? 그런 것들에 대한 감각이 살아있지 않고는 하나님께 충성된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없어요. 기억하셔야 됩니다.
전부다 사람들이 말하자면 자기의 인생, 자기의 인생을 위한 방편으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쉽게 얘기해서 이렇게 겨우 이제 구도를(세계선교가 어필이 안 되는 이유가 그것이에요.) 그러니까 필름을 보고, 선교사들이 와서 감격적인 보고를 하면 ‘아 그런 세상도 있구나!’ 그러지만 말하자면 진심으로 미전도 족속들, 구원받지 못한 족속들을 향한 정말 깊은 각성과 부흥의 시대에 볼 수 있었던 그 수많은 사람들이 가보지도 못했던 곳을 지도를 펴놓고 가리키면서 눈물로 기도했다고요. 그리고 선교사가 갔어요. 그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면 가보지도 못했고, 형편도 모르지만 왜? 그 나라에 대한 그리움, 자기네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지도 못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고……. 어때요? 보지도 못한 땅, 가보지도 못한 땅에서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이루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들이 그들에게 커다란 아픔이 되었던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 소아적인 껍질을 깨고 크게 이 하나님의 나라의 구도를 바라보면서 진심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과 그리고 그 나라의 번영을 위해서 늘 깊은 사랑과 그 나라의 번영과 자신의 인생이 하나가 된 것 같은 이러한 의식 속에서 살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게 정말 어려운 것이에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을 보기가 너무 드물어요. 그리고 기계적으로 어느 교회에 딱 배치가 되어서 무슨 일을 맡겨주면 그것 하나에 매달리는 것이죠. 물론 그런 것들에 충성하지 않고 어떻게 교회가 제대로 될 수 있겠어요. 그것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뭐냐 하면 이 신앙의 차원이 개인적인 신앙의 차원을 뛰어넘어서 광대한 세상,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그러한 삶이 되어야 된다는 것이죠. 쉽게 얘기하면 그 모든 것들의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하면 커다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사랑의 부족 때문이에요. 사랑의 부족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교회의 조국에 대한 사랑의 부족, 그 다음에 조국에 있는 교회들에 대한 사랑의 부족, 이 시대에 임하여야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사랑의 부족, 이런 것들이 관심의 부족을 낳고 관심의 부족은 결국은 무지를 낳는 것이죠.
그래서 이런데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한번 사람들을 깨닫게 하셔서 자기가 이제껏 의식 없이 살아오던 그런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뜨거운 열망을 가지고 계시고 그 속에서 이루어지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을 인하여서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는가 하는 것들을 자기의 모든 삶으로 직접 느끼고 체험하는 것을 가리켜서 저는 각성이라고 부르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중심적으로 그 이야기를 드리려고 해요.
우선 본문으로 돌아가서 context를 이야기하자면 이렇게 해서 지난주에 권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지요? 그냥 헤매던 가장이 나타나서 우리가 벧엘로 올라가야겠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불러놓고 하는 말이었어요. 그러니까 뭔가 방향을 잃어버리고 아무것도 사람들에게 영적인 지도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 이 야곱이 졸지에 모든 식구들을 향한 지도력이 회복되어졌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수많은 방법이 아니라 사람을 필요로 해요. 사람……. 어떤 사람? 아주 특별한 사람! 이렇게 하나님 앞에 섰다가 나온 이런 지도자들이 필요한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만나고 야곱이 나오니까 주님이 만나서 하신 말씀이 겨우 ‘벧엘로 올라가서 단을 쌓으라.’고 그러는데 그 하나님과의 간단한 만남을 통해서 모든 식구들이 갈 방향을 찾는 것이죠. 그리고 누구도 이번에는 벧엘로 올라가자고 할 때에 ‘벧엘은 왜 갑니까?’ 하고 대드는 식구들이 없어요. 벌써 하나님을 만나고 온 이 야곱 속에 흐르고 있는 하나의 영적인 지도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이렇게 나타나고 있을 때 그는 구체적으로 이야기했어요. 세 가지를 이야기했는데 ‘이방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벧엘로 올라가야겠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벧엘로 올라가기 위해서 이방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꿔야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하나의 의문점이 있지요. 주님이 그런 명령을 하셨어요? 안하셨어요? 주님은 그런 명령을 내리신적이 없는데 야곱은 왜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우리가 벧엘로 올라가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방신상을 버리고, 자기를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꿔 입어야 된다. 는 단호한 결론을 내리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에요? 이것을 오늘 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좀 더 생각을 전진시켜 봅시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을 안 하신 말인데도 오늘 왜 이 이야기가 이방신상을 버리자. 자기를 정결케 하자, 의복을 바꾸자. 라는 하나님이 하신 이야기를 그대로 와서 전했으면 그 이야기가 권위 있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하나님이 해주시지도 않은 말이고 어떻게 보면 이것은 야곱의 개인의 의견인데 그 개인의 의견을 이야기하는데도 모든 식구들이 숙연해지는 까닭은 무엇이에요? 우리가 그런 의문을 한번쯤은 제기해볼 수 있지 않겠어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늘 의문을 가지고 읽어야 되요. 그런데 이제 그것에 대해서 우리들이 답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더듬어 봅시다. 야곱이 하나님이 벧엘로 올라가라고만 말씀을 하셨는데 야곱이 그 이야기를 듣고 가족들에게 와서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오히려 이방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고 그랬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닌데도 이 사람들에게 깊이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에요.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야곱 속에 있는 권위 때문만이 아니라 사실은 이 말씀이 하나님이 하시고 싶었던 말씀이에요. 그것을 주님이 말씀을 안 해주었는데도 야곱이 깨닫고 알게 된 것이에요. 그게 하나의 영적인 생활의 신비에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야곱과 만나서 벧엘로 올라가서 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셨는데 말씀하시기 위해서 야곱과 만나는 그것을 통해서 주님은 언어 이상의 것을 주신 것이에요. 아직 이해가 잘 안가죠? 좀 더 예를 들어봅시다. 이런 이야기에요.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우상이 있는 것, 그 다음에 자신들이 불결한 것, 그 다음에 의복의 문제, 이런 것들에 대해서 하등의 문제를 못 느낀 것이에요. 그런데 주님이 말씀을 안 해주셨는데도 주님을 만나고 나니까 이것이 문제라는 깨달음이 생기는 것이에요. 깨달음이……. 이런 비유가 적합할까 모르겠어요. 그냥 정신없이 이렇게 걸어가다가 갑자기 아주 어려운 분을 만나게 돼서 황망하게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경우가 있지요. ‘아! 이 차림으로 어떻게 그분을 뵐 수가 있을까?’ 그것이죠. 그런 생각이 그런 사건이 안 일어났으면 자기의 차림새에 대해서 조금도 생각을 안 하는데 그냥 살아가다가 그런 사건에 부딪히니까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죠.
제가 어떻게 하다가 강북에서 30년을 넘게 살다가 강남에 와가지고 제가 매일 저녁 욕하는 그 강남의 한 주민이 되었습니다만 어려운 세월을 참 많이 보냈어요. 그래서 저는 이제 나이는 얼마 안 먹었어도 참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어요. 그래도 지금 와서는 참 감사해요. 제가 대신대학에 있을 때에 같이 있던 교수들이 제 이력서를 보더니 ‘김 교수님은 파란만장한 세월을 사셨군요!’ 이력서를 보고 아는 모양이에요. 그런데 꽤 오래되었어요. 저희가 사당동에서 살았었는데 어떻게 해서 제가 퇴직금 탄 것을 가지고 오백만원을 주고 전세를 얻어서 가게 되었는데 벼룩의 간을 내먹지 집주인이 그것을 가지고 도망을 갔어요. 그래서 졸지에 길거리로 나앉게 되었는데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마침 그 해에 대신대학에 전임교수로 가면서 좀 생활이 나아졌죠. 그리고 최초로 사글세방으로 갔어요. 최초로 독채에 살았어요. 독채인데 9평짜리 독채에요. 18평의 연립주택인데 복층이에요. 9평이죠. 그렇게 살았는데 거기서 화장실이 집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되어서 그런지 저 화단에 지어놨어요. 그래서 가보는데 생전 처음 그 집에 가봤는데 양변기에요. 양변기인데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재래식 화장실이 좋은데 그 양변기에서 볼일을 보니까 불편해요. 그래도 이제 문화인이 되려니까 하면서 이런 고통을 분담하는구나 하면서 살았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에요. 볼일을 다 봤는데 물이 안 나와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코를 막고 양동이에 물을 퍼서 붓고 주인에게 하소연을 했지만 주인은 돈이 없는 사람이라서 고쳐줄 생각을 안 해요. 고치고 나서 이다음에 이사 갈 때 오는 사람한테 받아가라는 거예요. 남의 집에다가 그럴 필요가 무엇이 있어요? 그리고 그냥 살았죠. 4월에 이사를 갔는데 5월, 6월, 7월 석 달을 살았어요. 그 다음에 사는 동안에는 자동이 된 거에요. 그래서 볼일 보러 들어가면 자동으로 양동이 갖다놓고 수도를 틀면서 볼일을 보는 것이에요. 나중에는 이제 수도꼭지를 어느 정도 틀어놓으면 볼일이 끝나는 것과 함께 물이 찬다는 것까지 감이 오는 것이에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살았어요.
그러다가 그 해에 제가 처음으로 외부에 설교를 나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저로 말하면 집회를 나가는 하나의 데뷔였는데 지금도 별로지만 그 때는 그야말로 데뷔였어요. 그런데 하여튼 개막이 화려했어요. 제가 여태까지 수없이 설교를 하면서도 그런 때가 많지 않았어요. 하여튼 하나님께서 진짜 천정을 가르시고 내려오셨어요. 그래가지고 7시 반에 집회가 시작되었는데 두시가까이 되어서 끝났어요. 저는 물론 10시에 강사실로 들어갔지만……. 그런데 강사사택을 기도원에 지어놓았는데 잘 지어 놓았어요. 응접실도 있고, 침실도 있고, 화장실도 있고 그러니까 거기 가서 깨끗한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보고 자동으로 물을 퍼서 붓는 거예요. 그런데 왜 사당동에 있는 우리 집의 변기가 망가졌는데 왜 내가 여기서 물을 붓고 있을까? 생각하는데 3일이 걸렸어요. 3일……. 스위치를 누르니까 ‘쫙’하고 빠져나가요. 그러니 삼일동안 양동이에다가 물을 붓고 있었으니……. 소변보고 붓고, 또 큰일보고 붓고, 계속 그러고 있었어요. 또 세수할 때는 그 물을 아끼죠. 다음에 부으려고 구석에 놔두었다가…….
제가 이 말씀을 왜 드리느냐 하면 저는 그 때 깊이 깨달은 것이 하나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인간이 망가진 현실에 얼마나 익숙해질 수 있는 존재인가? 아주 탁월한 존재에요. 그렇기 때문에 지체장애자들보고 불편하시죠? 그러면 실례에요. 그들은 스스로 불편을 거의 안 느껴요. 왜? 너무나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이것이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이것은 잘못된 것이고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되는가?’ 하는 몸부림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고통스럽고 불편하지요. 그렇지 않겠어요? 매일 화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이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강남에서 화장실에다가 물을 붓다니……. 그러면 못사는 것이에요. 이사를 가든지, 고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해야지요. 그러니까 체념을 하고 사는 것이지요. 어쩌면 그것이 몸에 배가지고 자연스러워지잖아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강력하게 회개를 선포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라고 말하면 무슨 생각을 하느냐하면 이렇게 살면 되는 거지 어디를 자꾸 가라고 하느냐고 그래요. 그러니까 야곱이 이 속에서 그 동안에 우상이 집에 들어온 것이에요 그러면 벌써 그 33장 마지막과 34장 어간부터 10년에서 20년 사이에 야곱의 신앙이 어디까지 내려갔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 시대의 우상은 연필깍지만한 것부터 시작해서 2미터, 3미터까지 되는 것이 있었어요. 심지어는 호신용 우상도 있었어요.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이 우상이 나를 보호해주리라는 생각으로 넣어갖고 다니는 것도 있었고 아니면 손바닥위에 올려놓고 두드리면서 왜 나에게 복을 안주느냐며 회초리로 때리는 우상도 있었고 그런 우상들을 사람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었어요. 집에 하나를 놓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저마가 가지고 다니면서……. 이것이 어디서 배운 일들이에요? 어디서? 그렇죠! 세겜 사람들과 함께 교류하고 세겜 사람들과 함께 살고 무역을 하고 그런 친선관계를 유지하면서 살다가보니까 자연스럽게 유입되어 온 것이에요.
그래서 탈굼이라고하는 아랍어 번역에 의한 옛날 성경에 보면 ‘너희가 세겜 사람이 섬기던 우상의 집에서 가져온 그 우상을 버리고…….’ 이렇게 나와요. 그러니까 그 우상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죠. 가지고 살아간 것이에요.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어요?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이 그것을 얼마나 싫어하고 미워하시는가하는 것을 몰랐겠어요? 더군다나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하나님만을 섬겨야한다는 것을 야곱은 그 많은 세월을 지내오면서 28장에서부터 생생히 체험하고 마지막에는 여호와만이 나에게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하는 자기 서원까지 했었잖아요. 그런 많은 세월을 지내왔는데 결국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죠. 그렇게 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코앞에까지 닥칠 정도로 온 집안에 하나님을 믿은 신앙이 떠나고 우상이 가득 차게 되었는데도 야곱은 그것이 문제인 것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영적인 불감증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자신하면 안 돼요.
저는 늘 학교에서 강의할 때나 집회 나가서 느끼는 것이 뭐냐 하면 ‘정말 나는 지금 보통문제가 아니다. 내 심령은 병들었다. 나의 신앙생활은 비정상적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집회에 나오고 말씀을 듣는 자세부터 벌써 틀려요. 그 사람들은 사실은 말씀을 듣는 것은 하나의 말하자면 정확한 것을 찔러주는 것뿐이지 이미 이 속에서 터질듯하게 부풀어있기 때문에 꼭 누가 말을 안 하더라도 정확하게 말씀을 찔러주면 그 다음에는 그냥 터지면서 묵었던 더러운 것들을 쏟아놓는 것이에요.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하면 모두 자신들은 정상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제가 첫 시간에 얘기했듯이 그 시대에 태어나는 그 시대의 아들이 되는 것이에요. 저를 포함해서 여러분 전부가 다 뭐가 있느냐하면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이 눈과 마음과 귀에 이 세상이 가져다준 그릇된 찌꺼기들이 꽉 차있어 가지고 성경을 봐도 안 들어오는 것이에요. 참다운 진리를 들어도 그것이 마음에 고민이 안 되는 것이에요. 그 정도만 되면 그래도 낫지요. 그 다음에는 강한 반발이 있어가지고 말씀 앞에 도전하는 것이에요.
저는 생생하게 그런 것들을 많이 경험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역사하는 집회를 갔다 오면 늘 저에게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생겨요. 전폭적으로 아멘이다. 그러면서 결단하는 사람들이 있고 아니면 영동에 있는 첨단을 간다는 어느 유명한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고 왔더니 일곱 교회에 대한 테이프들이 돌아다녀요. 제가 인도한 집회가 교회 당회에서 문제가 되었어요. 왜 문제가 되었느냐고 하니까 교인들이 가서 하는 얘기가 이단 같은 사람이 왔다가 갔다고 그랬대요. 그래서 당회원들하고 교역자들이 테이프를 다 복사해서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설교를 하고 갔기에 사람들이 저렇게 난리냐고 다 들었어요. 들어봐야 뭐 어쨌다는 거예요? 그렇게 살면 안 되니까 돌이켜서 회개하라는 것이죠. 또 문제는 뭐냐 하면 그런 강한 하나님을 향한 도전과 반발이 생겨나는 것이에요. 말씀이 참된 말씀일 경우에 그 말씀을 향한 도전은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에요. 왜 순종하지 않는 것이에요? 그것들이 다 무엇이 시키는 것이에요? 이 시대가 가려준 상식적으로 깨달은 신앙과 아니면 기독교에 대한 자기들의 선입견이 있는 것이에요. 그것을 가지고 말하자면 판단을 하는 것이죠. 불편함을 못 느끼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러한 것들이 우리들에게 해결되어지는 것들을 가리켜서 말하자면 각성이라고 부르는 것이에요.
야곱을 보세요. 바로 그 전날까지도 이제 완전히 브리스 족속과 가나안 족속에게 이제 추격을 당해가지고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그러한 비참한 절망 속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절망을 당했다고 하는 생각을 하고 아파하는데 자기 집에 그런 재앙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그리고 이런 일들을 당할 만한 일들이 우리가운데 있게 될 때 눈앞에 무엇이 보여요? 집안속의 우상이 보이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계시를 맡아서 후대에 그 핏줄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가 나실 텐데 그러한 구원을 위해서 보냄을 받은 그 하나님의 계시의 공동체가 이런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는 것이에요. 그러면서도 그것을 조금도 문제로 못 느끼는 것이에요. 이것이 영적인 불감증이에요.
여러분 모든 성경을 보세요. 교회가 싸워야할 가장 커다란 적은 그것이에요. 그게 가장 커다란 적이에요. 무슨 적? 그 무지, 깨닫지 못하는 것이에요. 선지자들이 말씀을 외쳤을 때에 ‘옳소이다! 당신의 말이 맞나이다.’ 그런 사람이 누가 있었어요? 보세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시대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너희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 계속되는 논쟁이 뭐에요? ‘너희는 여호와를 버렸다.’ ‘우리가 언제 여호와를 버렸나이까? 우리가 언제 제사를 그쳤고,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향한 노래를 그만 둔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과 계속 다투는 것이죠. 그러나 ‘없다.’ 그러한 것들이에요. 선지자들의 시대에 와도 똑같은 것이에요. 끊임없이 사람들이 많은 우양을 갖고 나아가서 제사를 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경배를 드려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시지 않고 가증스럽게 여기신다는 것이에요. 무엇이 빠져있다는 것이에요. 그렇죠? 그러한 것들을 야곱이 똑같은 함정에 빠져들게 된 것이에요
문제는 뭐냐 하면 죄와 악이 한꺼번에 덜컥 들어오면 누구든지 알 수 있어요. 그래서 제가 지난번에 돌짐을 지고 가는 예화도 들었잖아요. 50킬로를 모아 오라고 그랬는데 한 개를 들고 온 사람은 금방 안다고요. 그러나 수없는 작은 돌멩이를 주워가지고 온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에요. 말하자면 그렇다고 하는 것이죠.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무엇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느냐는 것이죠. 야곱은 하나님과의 생생한 만남이 있었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었어요.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어요? 이 야곱을 보고 알 수 있다는 얘기에요. 야곱을 보고……. 감히 우리들이 34장을 넘어서 35장에 와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교만일수 있어요. 그렇지 않아요? 여전히 34장에 있으면서도 자신은 그 34장에 있는 인생이 아니라는 생각을 얼마든지 하면서 스스로 자긍하고 위로를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무엇을 발견하려고 하느냐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 표증이 얼마나 많은가! 이것을 생각하는 것이에요. 야곱이 34장에서 그런 것을 발견하려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어요. ‘보아라! 얼마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 요즘은 세상이 험악해서 강간하고는 죽여 버린다고 그러는데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았느냐? 보아라! 아들이 돌아오지 않았는가? 보아라! 이들이 시므온과 레위가 가서 다 쳐 죽이고 왔는데도 아직 브리스 족속과 가나안 족속의 말발굽소리가 들리지 않고 우리에게 도망갈 기회가 있지 않겠느냐?’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 자위를 하면서 살아가는 그러한 인생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사실이에요.
야곱은 마땅히 34장에서 깊이 깨달았어요. 그것은 뭐에요? 주님은 분명히 나에게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며 네가 어디로 행하던지 내가 너희를 인도하리라.’ 하셨는데 지금은 내가 여기 있는데 주님이 내 옆에 계시는가? 왜 하나님의 인도는 사라지고 나는 캄캄한 인생의 어두운 밤길에서 갈 길을 몰라서 어린자식들에게 대거리를 받아야 되는가? 마땅히 이런 것으로 고민을 하면 즉시 그 눈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에요. 깨닫지 못해요. 인생이 깨닫지 못하면 그 사는 삶이 짐승의 차원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 나와서 우리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봉사가 아니에요. 교회에 나와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가만히 앉아서 듣는 것이에요. 그것이 신앙생활의 첫 번째 단계에요. 그리고 듣고 깨닫는 것이에요. 그것이 없으면 우매한 인생들이 모인 집단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교회는 굴러가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일들은 하찮게 여기고, 하나님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막 지나칠 정도로 관심을 가지고 몰두하고 시간과 주님이 주시는 귀한 물질과 정열들을 낭비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지체하게 되는 것이죠. 듣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늘 반복되는 말씀을 다시 드려요. 그게 뭐냐 하면 두 가지만 믿으면 그가 어디에 있든지 그 인생은 소망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참으로 선하시다는 사실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이 말씀을 하실 때에 깨닫기를 원하는 사람들, 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를 원하는 사람들, 그 두 가지만 있으면 지금은 어떻게 있든지 문제가 되지 않아요. 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스쳐지나가게 하시는 훈련의 과정일 뿐이에요.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없으면 그 신앙은 이미 파산하고 있는 것이에요. 조금 더 진전을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야곱이 이렇게 우상을 그렇게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라오디게아 교회 아니에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했는데 그들은 무엇을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에요. 육신적인 부요가 영적인 부요를 의미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죠. 눈앞에 잘되어가고 있는 모든 일들이 곧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지 않아요. 정말 그렇지 않아요. 우리의 손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는 그 일들을 통해서 그것이 곧 우리 자신의 영적인 생활에 대한 주님의 평가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엊그제 우리 집사람한테 들었는데 조용기 목사님이 그런 간증을 했다고 그러대요. 얼마나 능력 있는 역사가 많이 일어납니까? 그런데 설교를 다하고 사람들은 은혜를 받았다고 외국에서 그 난린데 자기는 갈 곳이 없는 것이에요. 집에도 가기 싫고 심령이 곤고한 것이죠. 집회가 끝나고 집에 안돌아오고 유럽을 빙빙 돌아다녔어요. 그런 적이 있었다는 것을, 소위 능력이 있는 목사님도 고백을 하는 것이죠. 그래요. 저는 메시지가 막 전해질 때 어떤 때는 그 메시지에 내 마음이 물같이 녹아서 성도들과 함께 녹는 경우가 있어요. 어떤 때는 정말 허공에다 쏘아대는 것처럼 그렇게 설교를 했는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내 앞에서 열광하는 것을 본 적이 있어요. 그 비밀은 하나님만이 아셔요. 모든 사람들은 한없이 은혜를 받았는데 내 마음에는 큰 공허감속에서 눈물을 흘려도 그들이 흘리는 눈물과 내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가 틀려요.
저는 미국에 안 가봤으니까……. 집사님은 미국에 자주 왔다 갔다 하시죠? 24시간 텔레비전이 방송을 합니까? 그렇죠? 수십 개 채널로 24시간 방송을 하는데 미국이 다 잘살아서 그렇겠지요. 그런데 미국에 불면증 환자가 그렇게 많대요. 대충 천오백만 명 정도랍니다. 그러니까 2억 5천만이나 2억 8천만 중에서 천오백만 명이니까 굉장한 숫자가 불면증 환자라는데 이 사람들이 즐겨 시청하는 것이 심야프로인데 심야프로에는 설교가들이 등장해요. Televangelist라고해요. Television + Evangelist = Televangelist라는 말을 만들어냈어요. 그 사람들 중에서 한 여류설교가가 있었대요. 하여튼 그렇게 한때는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대요. 어느 정도인지 짐 백크나 조지 스왓 같은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이에요. 얼마나 설교를 잘하는지 텔레비전을 쳐다보다가 막 설교가 끝나고 나면 엉엉 울면서 옷장을 더듬는 거예요. 왜? 돈을 꺼내려고요. 그 자리에서 헌금을 긁어야지 속이 풀리지 안 풀리는 것이에요. 그런 정도로 수많은 감화를 일으켰어요. 그 여류설교가의 설교를 듣고는 잠이 오는 것이에요. 평안히 자는 것이에요. 그런데 어느 날 그 여류설교가가 자기 집에서 변사체로 발견이 되었어요. 그래서 경찰이 수사해보니까 수면제 과다복용이에요. 자기는 설교를 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불안을 쫒아내고 성령 안에서 평안을 느끼며 잠들게 한 다음에 자기는 돌아와서 수면제를 먹지 않고는 잘 수 없는 그런 십 수 년의 세월을 보냈어요.
보세요. 영적인 생활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에요. 정말 우리는 기억해야 해요. 그러니까 신앙의 수준이 높아지고 영적인 세계에 대한 인식이 넓어질수록 우리는 한없이 겸비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에요. 휫필드 목사님이 처음으로 야외설교를 했거든요. 은혜를 많이 받았지요.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교를 하니까 불경하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어떻게 이 난장판에서 드릴수가 있느냐는 것이죠. 그런데 웨슬레도 처음에 뭐라고 그랬느냐하면 자기도 처음에 해보니까 정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거든요. 왜? 안 믿는 사람들은 교회에 들어오기 싫어해요. 우르르 모였을 때 말씀을 전하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결신하는 것이에요. 미국으로 잠시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존 웨슬레의 동생이던 찰스 웨슬레에게 집회를 부탁했어요. 찰스 웨슬레가 편지를 했어요. ‘목사님 저를 너무나 괴롭히는 게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님이 나를 통하여 역사하지 않으시고 나를 사용하여 역사하신다는 것이에요.’ 나는 다만 좋은 의미에서의 도구가 아니라 청중들에게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와 부흥의 역사가 자기를 통해서 이렇게 나가야지 되는데 자기를 통해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손끝에서 거쳐서 가버리더라는 것이에요. 이것을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목회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부흥을 보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에 대한 평가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는 모든 생활, 겉으로 드러나는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그럴싸한 삶, 그리고 겉으로 별 탈 없이 진행되어가고 있는 자기의 사역, 자기의 봉사, 이런 것들을 보면서 스스로 하나님 앞에 돌아갈 기회를 잃어버리는지 몰라요. 사단은 그런 식으로도 우리를 광명의 천사같이 위장하여 우리를 속이는 것이에요.
야곱이 말하자면 그런 케이스였습니다. 깊이 깨달아야 해요. 늘 우리는 말하자면 기도할 때나 무엇을 생각할 때나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하고 있는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해요. 정말 넘치고 있습니까? 생명이 있나요?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참된 희락과 놀라운 샬롬의 강물이 넘쳐나고 있습니까? 정말 놀라운 능력 속에 잡혀있습니까? 주님의 나라가 여러분의 마음속에 온전히 이루어지고 있고 여러분들은 그 주님의 나라로 말미암아서 말할 수 없이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내면을 깊이 돌아보면서 주님 앞에 내가 얼마나 가난한가하는 것을 고백할 수 있어야 되는 것이죠. 이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랬지요. 부요한 거예요. 겉으로 보면 전혀 문제가 없었어요. 라오디게아 교회가 주일예배를 안 드렸겠어요? 아니면 요즘으로 따지면 성가대가 파업을 했겠어요? 아니면 헌금을 안했겠어요? 십일조를 안냈겠어요? 선교헌금을 안했겠어요? 다 했지요. 주일날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했지요. 그런데 주님이 뭐라고 그러세요? ‘너는 벌거벗었고 네 눈 먼 것과 가난한 것과 가련한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주님이 보시기에는 다 벌거벗은 사람들이에요. 마지막에는 어때요? 문밖에서 내가 두드리노니……. 그러니까 어때요? 매일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먹고 그러는데 주님은 어디 계세요? 교회 밖으로 추방된 것이에요. 그래서 들어가게 해달라고 막 두드리는 그림이 그것이에요. 불신자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교회에게 하는 이야기에요. 놀라운 충격이에요. 저는 몇 년 전에 그것을 읽으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교회에서 그리스도가 이렇게 철저히 추방될 수 있구나! 그리고 문밖에서 두드리게 그분을 세워두는 사건이 있을 수 있는가! 뭐가 부요해요? 아무도 그것을 못 보는 것이에요. 누가 봤어요? 누가? 요한이 보았어요. 요한의 편지를 받은 감독이 깨달았겠지요. 그런 일들이에요.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어느 지점에서 연약한가하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하는 것이에요. 부요함을 벗어버리셔야 해요. 이제껏 까지 여러분들이, 사람들이 아무개는 집사요, 아무개는 누구요, 아무개는 누구요, 그 사람은 우리 교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고 여러분들이 자타의 인정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인정이 아니지요. 오한이 밀려드는 것과 같은 이런 이상한 일들은 사람들이 모여서 북적거릴 때는 뭐가 되는 것 같았는데 혼자 고요히 드러누우면 가슴에 깊이 밀려오는 뭔가 무너지는 것과 같은 이러한 깊은 좌절감……. 무엇 때문에? 바로 문제는 자신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그러나 눈을 뜨고 나면 다시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에요. 이게 인생이에요. 야곱이 그런 식으로 10년, 20년을 살았어요. ‘아 그 소중한 나날들이여!’ 황금 같은 세월들을 야곱은 그렇게 쓸데없이 세겜에서 흘려보냈어요. 결국은 그렇게 살아온 인생의 마지막에 뭐라고 고백을 해요. ‘내가 심히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 그 험악한 것이 누구를 위해서 보냈나요? 하나님을 위해서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요? 아니죠. 깨닫게 되기까지 그런 험악한 세월을 보내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인생이 바로 야곱의 모습이고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이죠. 우선 이방의 신상이 가르치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하기에 앞서서 그 이야기를 합시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야곱은 가만히 있는 가운데 하나님이 만나주셨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어떤 면에 있어서는 아주 럭키한 사람이에요. 진짜 행복한 사람이죠.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이런 고통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눈이 뜨일 수 있다면 나는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교회가 이런 고통을 받기를 원해요. 문제는 고통을 받아도 깨닫지 못하니까 그게 문제지요. 그런데 그렇게 깨닫게 일이 있었는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러면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만 기다리자, 나는 아직 창세기 34장이라는 것까지만 내가 저 강사의 이야기를 듣고 인정을 하겠는데 35장 1절을 내가 불러왔느냐? 하나님이 거기다가 써놨지? 그러니까 할 수 없다. 35장 1절이 올 때까지는 34장이 안 끝나는 거니까 나는 그냥 이대로 살게 내버려둬.’ 실제로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오시느냐고요. 그래요. 하나님은 우리와는 상관없이 정해진 때에 오셔요. 그리고 일을 행하실 것이에요. 그리고 깨닫게 하실 것이에요. 그러나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이런 분들에게는 하나님이 거의 안 오실 거예요. 예를 들자면 ‘그래 나는 34장에 있다는 것은 동의할 수 있어 그렇지만 35장은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야 주님이 오시고 나서야 야곱도 깨달았으니까 내가 깨닫지 못하고 옛날처럼 살아가는 것을 자꾸 뭐라고 그러지마 내버려둬 이대로 살다가 죽을래.’ 이러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안 오셔요. 또 나타나셔서 말씀을 하셔도 그게 주님의 음성이라고 듣지를 못하지요. 전적으로 주님이 하시는 일이지요. 그러나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막 나타나시는 것은 하나님이시지만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어요? 주께서 오실 길을 만들어 드릴 수는 있잖아요.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전심으로 정말 내가 이렇게 만나고 싶은데 그렇게 만나기를 원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을 준비하였는가? 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면 전심으로 자기가 깨닫지 못하는 것들을 진심으로 깨닫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그 신앙의 자세는 틀려요. 전심전력해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에요.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는 것이에요. 누가복음 18장에서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가 그것을 증명하여 주잖아요? 주님만이 불쌍히 여겨주셔야 된다고 하는 사실을 세리는 성전 앞에서만 알았겠어요? 집에서도 훤히 알았지. 뭐 성전까지 올라와요? 왜 올라와요? 왜 올라오는지는 모르지만 올라가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렇게 해놓고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가슴을 치면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어떻게 해주랴?’ ‘나도 잘 모릅니다. 어쨌든 주님이 어떻게 해주십시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사람들의 마음이 야곱은 그러면 저절로 ‘내버려둬 이대로 살다가 죽을 테야!’ 그러다가 주님을 만났을 것 같아요? 그 행간을 읽는 것이에요 34장의 마지막에서 이 비참한 절망을 경험하면서 야곱의 마음이 34장 전체에서 흐르고 있는 마음에서 놀랍게 심경의 변화가 오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말하자면 주님이 야곱의 마음이 그렇게 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인생들이 마음을 높이고 더군다나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문을 닫고 그러면서 산다는 것은 이미 자기가 막살기로 작정한 것이에요. 그것은 하나님도 어떻게 할 수 없어요. 그것은 하나님이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안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심판가운데 제일 무서운 심판이 무엇인지 아세요? ‘내버려두사’ 로마서 1장에 보면 ‘내버려두사’ 가 나오지요. 그들의 악한 정욕대로 행하게 ‘내버려두사’ 저희의 마음에 원하는 것들을 하도록 ‘내버려두사…….’ 그대로 버려두신 인생들의 삶은 평탄해요. 버려두신 인생들의 삶은 안일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최고의 재앙입니다. 그것을 말씀드리는 것이에요.
주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해드리는 것은 자기 혼자 잘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이에요. 그리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이죠. 주님 없이 씩씩하고 용감하게 힘차게 살아가는 것은 주님을 향한 최고의 반역이에요. 차라리 못살면서 가슴을 치는 것이 훨씬 소망이 있는 것이에요. 잘살면서 씩씩하게 사는 것보다……. 누가 그러대요. 나는요. 정말 주님 앞에 기도했어요. 나는 주님의 도움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하여튼 내가 사는 대로 간섭만 하지 말고 내버려두시면 잘살 수 있습니다. 인생들이 얼마나 패역해요. 뭘 잘살아요? 뭘 잘살 수 있겠어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에요. 다 무엇 때문에 그래요?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잘못된 것들에 때가 끼어서 생활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말하자면 성경으로 돌아감으로써 이런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그게 어떻게 보면 유일한 길이에요. 물론 하나님은 말씀 아닌 곳에서도 그런 일을 하실 수 있어요. 그러나 말씀 아닌 곳에서도 반드시 거기에서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머릿속에 평소에 든 게 없으면 생각날게 있어야지요! 생각나는 게 온통 시장의 물가하고 텔레비전프로하고 유명탤런트 이름밖에 없는데 뭐가 생각이 나느냐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평소에 성경을 많이 읽어두는 게 도움이 되요.
영국의 스코틀랜드에서 신앙 부흥이 일어날 때의 일이었는데 교회에서 목사님이 설교를 하셨거든요. 회개하라는 설교를 쭉 하셨는데 그런데 이 농부가 계속 졸았어요. 성수주일도 어기고 말이에요. 예배를 간단하게 드리고 나서 집에 가서 바로 밭을 가는데 큰 나무둥치가 하나 나오는 것이에요. 작년에도 속을 썩이더니 이게 또 나왔다고 하면서 없애기로 하고 집에 가서 날이 바짝 선 도끼를 가지고와서 ‘휙’하고 때리는데 뿌리에 가서 찍히면서 뿌리가 뚝 부러지는 순간에 몸이 후들후들 떨리는 거예요. 그리고 뭐가 생각이 나느냐하면 ‘열매를 맺지 아니하면 내가 이렇게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메시지가 막 떠오르면서 그 도끼가 뿌리에 꽉 꽂혔는데 그 잘려져 나가는 뿌리를 보면서 그리고 그 뿌리를 향해서 거추장스럽다던 느낌이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느낌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에요. 결국은 박힌 그 도끼를 뽑지도 못한 채 거기에서 일대 각성이 일어난 것이에요. 그게 스코틀랜드의 한 마을에서의 신앙부흥의 시작이었어요.
여러분 깨닫게 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뭐든지 희생시킬 수 있는 그런 각오를 가져야해요. 놀랍게 깊이 깨닫게 되어야 해요.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의 깊은 각성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나는 망가졌다고 전제를 내려야해요. 누가 온전한 사람이 있겠어요? 인생들이 그렇게 생각할 뿐이에요. 주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더군다나 이렇게 잠들어 있는 이상하게 왜곡된 교회의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일단 그렇게 생각을 하고 시작을 해야 해요. ‘아 나는 잘못되었다. 나는 지금 이렇게 멀쩡하게 걷고 있지만 내 영적인 사람은 어디가 부러져서 불구가 되어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일까?’ 그러면서 온전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보세요. 정말 틀리잖아요. 온전하게 살아서 온전히 하나님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보세요. 이런 삶을 살지 못하잖아요. 그런데 자신들은 다 잘 산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어요. 그러니까 늘 십자가 설교를 하면 우는 사람만 울어요. 그 사랑 받은 자만이 그 사랑 알도다. 사실 십자가 설교를 듣고 깊이 애통하는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는 문제가 비교적 적은 사람들이에요. 다 남의 말을 하는 것같이 생각이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정상으로 생각하느냐는 것이에요. 참된 사랑이 메말라가는 것을 우리가 보잖아요.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메말라가고 있어요. 교회가 식어가는 것들을 보잖아요. 그렇지요? 정말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영혼을 구원하는 이 일들에 대해서 교회가 깊이 애통하는 것들이 그쳐가고 있지요? 여러분 이것은 우리가 직접 관계된 것이에요. 우리가 어디에서 우리자신이 지금 근거 없이 하나님의 큰 축복을 누리겠어요?
저는 일리는 있겠지만 그러나 저는 근본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지금 한없는 축복을 받고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이 성령이 주신 생각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근거 없는 낙관이야말로 사단이 우리 앞에 뿌려놓은 가라지에요. 왜 그래요? 우리의 마음을 자꾸 부요하게 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것같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죠. 우리는 이런 오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성경을 깊이 묵상하면서 내가 경험한 이 신앙의 세계 말고 또 다른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며 마음을 기울여야 되요. 그리고 지속적으로 견고해야 되요. 한 번에 안 되면 두 번, 세 번, 네 번, 일 년, 이 년, 끊임없이 탐구하면서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세겜에 있으면서도 세겜에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이 시대에 물들어버린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회복시켜 주셔서 우리 속에 있는, 참 하나님을 갈망하는 영혼들을 새롭게 해주시기를 바라는 간구와 소원을 하나님 앞에 들릴 수가 있어야 되는 것이죠.
그래서 ‘위대한 영적부흥’의 하권에 보면 스코틀랜드의 1741년에 켐버스래인이라는 곳에 대대적인 부흥이 일어나요. 거기에서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회개하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신학교 교수에요. 신학교 교수인데 그것도 아주 권위 있는 노교수에요. 그리고 거기에다가 무엇을 가르쳤느냐하면 고집 세기로 유명한 교리를 가르치는 교수에요. 고집이 세거든요. 고집이 세지 않으면 그것을 못 가르치거든요. 죽고 사는 신념이니까. 그러면서 하는데 부흥이 막 일어났어요. 그 때에 막 이 노교수가 어린아이처럼 십자가 앞에서 회개를 해요. 신학교 교수처럼 설교듣기가 어려운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생각해보세요. 어린아이처럼 듣지를 못해요. 여기에 쫙 깔려있어서 다 들어오면 조직신학적으로 문제가 많아! 성경 신학에서는 이렇게 얘기하는데……. 그런데 성령이 역사하니까 파고들어가는 거예요. 다 회개하는 것이죠. ‘나는 이제껏 속죄의 교리를 가르쳐왔습니다.’ 자기는 속죄의 교리를 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나는 지금 이제 그 속죄가 무엇인지를 이제야 내가 느끼고 있습니다.’
수많은 기독교의 진리들이 가슴속에서 파노라마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결국 무엇인가 하면 깊이 자신이 하나님을 느끼는데 있어서 병들어있는 것입니다. 감격이 있습니까? 오늘 저녁에 기도할 때 눈물이 있습니까? 주님이 아파하시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저미도록 슬퍼합니까? 주님의 깃발이 높이 달릴 때 우리의 마음이 어린아이와 같이 뛰놀고 있습니까? 이것은 시야의 문제가 아니라 심령의 문제입니다. 시야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무슨 전도사도 아니고 목사도 아닌데 나는 내 구역이나 하면 됐지, 그것은 생각이 그래서가 아니라 심령의 변화가 없기 때문에 열리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시기 전날 밤 장엄한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을 때 누구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까? 이 땅에 있는 모든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기도제목이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데 전부 추상적입니다. 아버지여 저들로 하나 되게 해주십시오. 저들이 누구인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 우리는 흔히 말하기는 그런 기도는 불명확하기 때문에 응답이 없다고 그러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깊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각성들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합니다. 마음을 모아서 깊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그래서 주께서 우리를 변화시켜주셔서 어두운 눈을 열어주시옵소서. 어느 한순간에 주님이 쾅 하고 치고 지나가십니다.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다 무엇이 있는가 하면 무너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게 가장 큰 강적입니다. 설교자가 그것보다 더 큰 강한 고집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물론 성령이 역사하시는 고집은 무너지면 어떻게 하나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다 무너지면 어떻게 하나. 그 다음에 어떻게 다시 시작할까? 거기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들에 확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린아이처럼 내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꾸 진리를 판단하면서 재면서 가려서 자기의 세계를 그대로 소지할 수 있게 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런 생애적인 변화가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절망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얼마나 무너졌습니까. 오죽했으면 그랬겠어요. 사람들이 들으면 오해할만한 게 신약성경을 읽다가 아, 내가 배운 기독교는 참된 기독교가 아니었다. 내가 가리킨 기독교도 참된 기독교가 아니었다. 그럼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다시 처음서부터, 걱정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주님이 책임지십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각성을 경험한 다음에 일어나는 사건 중에 하나가 오늘 이거 하나만 가지고 계속되는데 이것을 경험한 다음에 일어나는 놀라운 사건이 무엇인가 하면 말씀에 대한 신비한 집중력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성령을 수없이 받았다고 말하고 자기가 신앙이 도가 텄다고 이야기를 해도 저는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을 향하여 온 마음을 기울이며 나아오지 않는 사람들은 그 고백이 참이 아닙니다. 정말 참이 아닙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6시간 째 되면서 여러분들이 잘 기억하시면 여기에 서있는 사람이 한 번 더 우리에게 무엇을 하지 말라고 얘기한 적도 없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다고 얘기한 적도 없음을 인해서 여러분들이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번도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지금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본질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나무 자체가 바뀌면 열매가 바뀝니다. 그러나 열매를 아무리 바뀌려고 노력해도 참되게 바꾸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푸른 감에다 붉은 칠을 하면 정말 잘 익은 감이 됩니까? 그런 식으로 변화를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 자체가 바꾸어져야 하는데 그 바꾸어지는 것이 이 시대에 심겨진 피상적이 복음에서 벗어나서 참된 말씀의 뿌리를 내릴 때, 쉽게 얘기해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가 하면 지금 제가 그런 변화를 겪고 나서 이제 지금 눈을 뜨고 나오면 하루에 열권 이상의 책이 쏟아져 나옵니다. 기독교 서점만, 엄청난 책이 쏟아져 나오는데 늘 내 마음속에 어떤 갈등이 있었는가 하면 이 책을 다 읽지 못한다고 하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왜 가리키기 바쁘고 막 바쁘니까.
그런데 그 후에 내가 깊이 깨달은 사실 하나는 수없는 책이 나오는데 또 한 번 놀라는 사실은 읽어야 할 책들은 너무 적다는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들어야 할 이야기도 너무 소수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참된 하나님을 만났던 그런 소수의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빨려 들어가게 만듭니다. 막 탐닉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다른 이야기는 흥미가 없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순식간에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서 이렇게 각성되고 날 때 진리를 깨닫게 되고 그러므로 말미암아 하나 깨닫게 되는 게 아니라 전체적인 체계가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씩, 하나씩 다시 쌓여져 가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면 말씀에 대한 깊은 집중력으로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설교 시간에 웃기고 예화를 드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얘기해달라는 것입니다. 집중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것들을 통해서 깊은 갈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말씀을 향한 너무나 부요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각성을 하나님께서 주시도록 마음을 기울여서 사모해야 합니다. 진심으로 사모하면서 우리의 경험한 신앙의 모든 삶, 이 이상의 삶이 우리에게 있음을 보여주십시오. 교회가 이것 잘못되었다고 얘기하지만 그 비판한 사람의 교회에 가보면 저게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왜 선교를 안 하는가, 왜 구제를 안 하는가. 그것은 몰라서 못하는 것입니까? 왜 사람들이복음을 들고 아골골짝 이라도 간다고 그러면서 왜 저렇게 시골에는 교회도 없는가, 등등 수많은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속에 참다운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니까 그런 일들로 인해서 주님께서 가지신 그 열망을 인생이 못 쫒아갑니다. 쫒아가지 못합니다. 말씀을 비장한 각오로 읽으면서 깊이 그 말씀의 뜻을 사모하는 이런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면서 여러분 자신이 마음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바로 이 34장의 야곱일 수 있고 35장은 아직 한 번도 도달해보지 못한 곳일 수도 있습니다. 깊이 하나님 앞에 이런 각성을 구하는 삶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부흥은 무엇인가 하면 이런 각성을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변화가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변화가 안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라고 하는 것이 점진적인 변화가 아니라 아주 급속한 변화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자기들이 새카맣게 멀어져있는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눈뜨게 될 때 그것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죄와 무지, 그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집요한 타도와 고민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정결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을까?
주 예수의 완전한 주의 사랑
그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깊은 갈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대충 살아버릴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런 완전한 사랑에 대한 경험을 체험한 사람들은 늘 그런 것들에 대한 사모함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완전한 나라 속에서 살아가지 못하는 사실은 인해서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오늘 이야기하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전부 다 납득되어진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깨닫는 사람들은 소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 나는 지금 어쩌면 벌거벗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결코 나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 많은 일들이 곧 나에 대한 증거는 아니다. 깨닫습니다.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할 수도 있고 이 돌들로도 소리쳐 하나님을 찬양하실 수 있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분수에 지나친 생각을 우리가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어리석다고 찍히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각성을 깊이 경험한 야곱은 자기의 집안에 우상이 들어온 것이 커다란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어떻게? 천천히 교육을 받아서 우상의 뜻이 무엇인데, 들어왔는데, 교육을 받고 깨달은 게 아니라 어느 한순간에 눈을 떠보니까 우상이 들어와 있었고 그 우상은 바로 하나님 앞에 커다란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것이 바로 34장을 경험하게 된 요인이었다는 사실도 놀랍게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야곱이 체험한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그 순간이 언제가 올지 누구도 모릅니다. 정말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조전도사님이 보름달이 언제 뜰지 모릅니다. 보름달이야 뜨는 게 언제 뜰지 왜 몰라. 정확하게 보름날 뜨지. 그러나 하나님의 이 복스러운 (?)는 언제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것 보십시오. 바울이 고백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 오백여 형제들이 승천하실 때 보았다고 했으니 분명 오백 명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한 것들을 주시기까지 기다려라.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기다리자. 그러면서 갔을 것입니다. 열흘이 지난 사이에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120명입니다. 380명이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120명이 놀라운 성령강림 사건의 목격자가 된 것입니다. 십자가를 따라왔던 수많은 여인들이 있었는데 십자가 바로 밑에 서있던 여인은 3사람입니다. 모친 마리아, 세베대의 아내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전심으로 사모하면서 구하는 것 밖에는 우리에게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무디 이야기를 하면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구하면서 산다는 것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구하면서 그 구하는 것이 진심인 것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난번에 기도원에 가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도와 금식 이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가 없느니라. 나도 그것이 필요합니다. 다 그렇게 얘기하지, 나는 그런 것 필요 없어, 아무도 없습니다. 귀신을 내어쫒고 병든 자를 고칠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필요로 합니까? 모두 목이 터지라 아멘 합니다. 그렇게 아멘처럼 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벧엘로 올라가자 이 부분을 다루면서 제목이 부흥을 경험하는 길, 그러지 않고 부흥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 그것이 무엇입니까? 끊임없이 우상을 버리는 것입니다. 야곱이 지금 아직 부흥을 경험했습니까, 못했습니까? 아직 몰라요? 뒤에 나오지 않습니까? 뒤에 드디어 주님이 장엄하게 나타나십니다. 이제는 올라가라. 그렇게 해놓고 가있어. 내가 갈 테니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인 방문을 하십니다. 나는 야훼의 엘샤다이, 나는 전능한 하나님 여호와다. 그 부분이 부흥입니다. 그러면서 장엄함에 놀라며 압도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전제물을 붓고 이스라엘을 이름으로 다시 불러주시는 이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직 안 일어났습니다.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 야곱의 마음속에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실 때 다시 벧엘로 올라가는 그 태도를 세겜에서 사는 것과 같은 태도로 벧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히 이전의 생활을 결단하고 벧엘로 올라가라고 그럴 때 이미 이 야곱의 영혼 속에는 자기가 부끄럽게 살아왔던 세겜에서의 10-20년의 모든 삶을 이제는 다시 지속하지 아니하고 이제 완전히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하나님만 구하는 삶을 살기로 원했던 것입니다. 마음에 그런 결심이 있었기 때문에 이방신상을 버려야겠다는 이런 각성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각성이 참으로 진심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우상이 세겜 사람들과 함께 친교하기 위한 것이었는가. 그렇다면 나는 세겜 사람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이 우상을 치워버리고 내가 하나님만을 섬기겠노라고,
이 우상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사랑과 희망입니다. 왜 그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까? 주님이 나 외에 다른 신을 네 앞에 있게 하지 말라. 무엇 때문입니까?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앙은 결국 무엇인가 하면 이것, 저것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입니까? 가슴 속에 있는 사랑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들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이 없는 것을 알았노라.” 그것이 가장 커다란 책망이었습니다. 율법에 강령이 무엇입니까? 그 ‘강령’이라는 말이 헬라어 성경에서 ‘크레마타이’입니다. ‘못’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라고 하는 못을 다 걸어놓는 못입니다. 못이 빠지면 다 떨어집니다. 그러니까 그 걸리는 못이 무엇입니까?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것입니다. 그것을 늘 무엇이 가로채려고 했습니까? 우상이 가로채려고 했습니다. 지금은 무엇이 가로채려고 합니까? 지금도 우상이 가로채려고 합니다. 무슨 우상? 부처에게 절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뭐라고 하는가 하면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라” 그래서 십계명이 1. 2. 3. 4. 5..... 나갑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1계명이 제일 중요하고 내려갈수록 점점 덜 중요하다고 하는데 똑같은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 1계명입니다. 마지막에 가서 네 이웃의 아내나 탐내지 말라고 쭉 나오는데 신약성경은 곧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라 하고 십계명이 다시 1계명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중에 수많은 우상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이 지금 부르시면 기꺼이 모든 것을 이별하고 주님께로 갈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게 만드는 모든 것은 다 우상입니다.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지만 그 모든 사람은 주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렇게 따진다면 우리 속에도 우리가 지금 눈을 뜨고 보지 못하니까 그렇지 얼마나 많은 우상들이 들어와 있는지 모릅니다. 크고 작은 수많은 우상들, 그 속에서 우리는 그 우상을 치울 생각도 하지 아니한 채 곤고함을 당했을 때 부르짖으면서 주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주셔야 될 텐데 왜 주님의 목소리가 하늘에서 들리지 않는 것일까? 주님이 나를 버리셨는가.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곤고함을 당하는 것이 마치 의로 말미암아 핍박을 당하는 것 같이 이런 망상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간격은 점점 더 멀어집니다. 이런 슬픔과 이런 깊은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 이외에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구한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기도는 하나님 앞에 올라가기도 전에 다 떨어집니다. 그 이유는 그 기도가 진심이 아닌 것임을 삶이 보여줍니다. 말씀하셨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니까 많은 사람이 변론을 하니까 “내가 너희들 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것을 아노라.” 어떻게 아실 수 있습니까? 모든 삶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디엘 무디의 교훈이 우리에게 얼마나 커다란 감화를 줍니까? 얼마나 놀라운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까? 정녕 세례를 주십시오. 그러다가 나중에 크게 자신이 깨닫고 나서 하는 말이 주님 성령이 오실만한 사람으로 나를 바꾸어주십시오. 그러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변화되기를 사모하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하나님 이외의 것들에 대한 사랑으로 주님을 슬프게 하는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단은 우리에게 너만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 세상 사람들이 너 만큼이면 하나님이 매일 웃으실 것이다. 이렇게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애야, 집사 가운데 너 같은 집사가 어디에 있는가. 아무개 집사, 아무개 집사를 봐라. 그게 집사냐, 그래도 너는 봐라, 야 이정도 아니냐. 하나님이 너 외에 인정한 사람이 없느니라. 다들 너만큼만 하라고 해라. 이런 속삭임으로 더 이상의 하나님과의 모든 교제, 신령한 이런 것들에 대한 사모함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신령한 사람이 될 수 있겠으며 신령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늘을 가르고 이 세상에 영적인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신령한 능력이 부어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늘 이런 사람들은 패배를 숙명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적군에게 수없는 군사들이 노략당하고 자기 혼자 남았는데도 자기가 발목에 총알 한방밖에 안 맞았다고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은 진정한 겸손이나 감사가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의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거룩한 열망이 불타는 탁월한 열심을 가진 사람, 십자가의 전사들입니다. 그래서 용사와 같은 사람, 도무지 이 세상에서는 상처받을 줄 모르고 하나님 앞에서만 상처받을 줄 아는 사람들. 세상을 향해서는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든지 울 수 있는 사람, 주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도 눈물을 씻고 세상에 나아가서는 강철과 같이 되어 질 수 있는 사람, 이런 용사들이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의 교회에 설수 없습니다. 수많은 부상병과 패잔병이 모인 그런 교회의 모습이 되어서는 세상에 희망이 없습니다. 군인들이 모여서 점호가 끝났으면 총을 들고 나가야지, 오늘은 왠지 전투할 기분이 아니야, 내가 오늘 오면서 김소월의 시를 읽었는데 아, 마음이 그렇게 슬플 수 없고 오늘은 전투를 쉬어야 되겠어, 좀 더 자자, 좀 더 눕자 할 때 군사들이 밀려와서 사로 잡아갑니다.
더 하고 싶지만 그 다음, “자신을 정결케 하고” 그랬습니다. 자신을 정켤케 한다는 말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히브리 성경에 ‘히타하루’ 그러고 나옵니다. 그런데 ‘타헤르’라고 하는 동사에서 나오는데 ‘정결케 하다.’ 그런데 이 정결케 하다는 문자적인 정결의 의미도 물론 있지만 더 깊은 뜻은 씻은바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나 마음의 불결, 또 여자가 아이를 낳게 되면 33일 66일 불결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 신체적으로 불결해지는 것보다도 마음의 불결함, 이런 것들을 씻어내는 것, 그런 것들이 타헤르라는 동사입니다. 히브리어입니다. 그게 헬라어로 옮겨졌을 때 카탈로이가 되어서 “심령이 정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럴 때 그 정결하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심령이 정결하다는 말이 물리적인 정결은 아닙니다. 하얗게 모욕을 했다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심령이 정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의 모든 불결과 심령의 더러운 죄악의 찌끼가 무엇인가로 씻겨 져서 온전히 깨끗하게 된 그런 사람, 그러니까 이정도 되면 우리가 비로소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각성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의 그 영혼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다니다보면 제일 기분 좋은 때가 세차할 때입니다. 더군다나 비포장도로를 달려서 흠뻑 뒤집어써서 승용차가 개판이 되었는데 친구 목사님과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세차를 맡겼는데 밥을 먹고 나오면서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아, 이 차를 세수시켜놓으니까 차가 아주 새것이네. 그렇습니다. 새것이지.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이렇게 차가 새 차가 되었을 때 타는 사람이 기분이 좋은데 교회를 운전하시는 주님께서 세차한 것처럼 회개하고 이렇게 정결한 교회가 되어졌을 때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 차가 더러우면 운전할 때도 아끼지 않게 됩니다. 깨끗이 세차한 다음에는 조심스럽게 차를 몰게 됩니다. 어디 때가 묻을까 이러면서 그런데 때가 많이 묻으면 포기하고 막 달립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정결함이 그런 도덕적인 정결함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이방 사람들과의 종교적인 접촉으로 말미암아 그 불결이 삶으로 들어와서 심령에까지 더러워진 것들을 털어내는 일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가르쳐주셨습니까? 하나님이 가르쳐주셨습니까, 자기가 깨달았습니까? 깨달은 것입니다.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나고 나니까 자기의 집안이 얼마나 더러운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을 야곱이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한번 가지고 부족하겠지만 우선 부흥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번쯤은 온 심령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그런 생애적인 회개가 안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한번 이런 일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서서히 생각이 돌아와서 참된 것과 거짓된 것들을 구별해낼 수 있는 사람들도 있어야 하는데 공통적인 것은 깊은 회개를 통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이런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책을 몇 권 썼는데 책을 쓰라고 했더니 책을 읽은 다음에 그 다음에 글을 써서 냈는데 뭐라고 써서 냈는가 하면 여태까지 내가 들어본 말 중에서 최고의 악평이었습니다. 그 책이 어떤 책이었는가 하면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책이었는데 뭐라고 썼는가 하면 교수님, 왜 이런 책을 읽으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대로 외웠습니다. 이름은 안 외웠습니다. 이름을 외우면 미워하게 되니까 이름은 안 외웁니다. 잘 쓴 것이나. 못 쓴 것이나. 그런데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면 이런 것을 뭐하러 펴내십니까? 그렇게 한가하십니까? 우리나라의 종이가 남아나고 있습니까? 누구든지 두 세 시간이면 쓸 수 있는 이런 것들을 펴내서 우리에게 사서 읽으라는 저의가 무엇입니까? 만나서 얘기하자면 제가 만나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깨끗하게 타이프를 쳐서 보냈는데 제가 그런 사람도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벧엘로 올라가자. 내가 똑같이 썼습니다. 도대체 왜 한 이야기를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페이지를 늘리는 것입니까? 그래서 대게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가 보다. 그런데 이름은 안 외웠는데 똑같은 타이프로 쳤습니다. 똑같은 양식으로. 세 번째 읽은 책이 십자가의 도전이었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썼는가 하면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첫 번째 책을 읽을 때 저는 심하게 분노를 느꼈습니다. 두 번째 책을 읽을 때는 세상에 왜 이럴까? 이해가 안 갔습니다. 그러나 교수님 이 세 번째 십자가의 도전을 읽으면서 나는 한없이 내 자신이 허물어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합니까? 나는 그 리포트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누군지도 모릅니다. 졸업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는데, 졸업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두 장, 정도 써내려갔는데 한없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쪼가리로 된 책들이 한참 나오다가 지금은 한권씩 나오는데 굉장히 생각하면 수없는 간증을 일으켰습니다. 그 중에 여기 대표자가 우리 신집사님, 아주 대표자이신데,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비추어봄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불결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얼마나 불결한지를 깊이 깨닫게 되는 것, 그런데 그 불결이 여러분, 우리의 겉이 얼마나 멀쩡합니까? 지금 지명수배를 받고 쫒기고 있습니까, 국법을 어겼습니까, 아니면 누구에게 이를 갈 정도의 원한을 사신 적이 있습니까, 누구 돈을 사기 치셨습니까? 겉보기에는 얼마나 우리가 멀쩡합니까. 이상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멀쩡하고 도덕적입니다. 우리가 일주일 동안 살면서 무슨 그렇게 뼈를 깎을 듯한 나쁜 죄를 짓겠습니까.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사람의 생각이고 사람의 시간일 뿐입니다. 주님은 지난 한주일 동안도 우리의 삶을 보면서 끊임없이 마음 아파하십니다. 주님이 이곳으로 가기를 원하는데 가지 않고 주님이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주께서 애곡해도 울 줄 모르는 주님이 중요하고 이 일을 위하여 누가 갈꼬, 말할 때 아무도 가지 않습니다. 이런 끊임없는 불순종과 불신앙이 주님을 얼마나 슬프게 해드리고 있고 그 모든 근거는 우리의 심령에 깊은 부패, 그것이 씻겨 지지 않고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인생의 본질이 바꾸어지지 않으면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첫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사람을 바꾸려고 노력하지 마라. 그 인생이 여러분의 인생하고 똑같습니까? 여러분이 안 바뀌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바꾸기 어려운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기는 쥐뿔도 바꾸지 않으면서 사람들은 막 꺾다가 안 되면 부러트려서라도 꺾어지게 만들어놓고서야 직성이 풀리고 뭐가 될 것 같은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결코 그렇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그 본질이 얼마나 포악하고, 그리고 얼마나 교만하고, 얼마나 더럽고, 그리고 얼마나 깨닫기를 싫어하고, 얼마나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심령의 부패가 놀랍게 새로워지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와의 만남을 인해서 정말 정결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집안을 청소해보면 압니다. 애들이 와서 흙을 확 뿌리고 지나가면 금방 닦입니다. 그러나 저 가스렌지 구석, 천장 구석, 한 10년 동안 묵은 때, 어쩜 그렇게 안 닦이는지. 우리 맨 처음에 이사 와서 들어올 때 지저분했는데 가스렌지 후완 통에 기름이 잔뜩 끼었는데 사력을 다해서 닦아도 안 닦여집니다. 무슨 세제를 써도 안 되어 포기했습니다. 그것을 쿠킹호일로 씌어버렸습니다. 안 닦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살아갑니다. 얼마나 우리의 인생이 비루하고 천박하고 비참한지 모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합니다.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그 모든 좋은 것을 가로 막았느니라. 각양 좋은 은사가 아버지께로부터 말미암아 하늘로서 내게 내려오나니 그것이 우리의 죄 때문에 바꾸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그 넘치는 감격, 그 넘치는 사랑, 그 넘치는 은혜, 넘치는 능력, 넘치는 희락, 이런 것들이 다 사라져도 우리는 뭔가 기대를 걸면서 이만하면 제법 쓸만 하다고 스스로 자기를 평가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기도회를 해도 늘 그러니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기도회가 그렇게 쏟아지는 통곡이 나오겠습니까. 그러면서 자기의 심령이 차가운 가운데 화석화 되어갑니다. 그러면서 세월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누가 이 어두운 눈을 열어 보게 하겠으며 누가 그 가는 길이 그 길이 아님을 외쳐서 그 길로부터 돌이키게 만들겠습니까? 누가 그 사람의 귀를 열어서 참다운 말씀을 듣게 만들겠습니까? 누가 그 사람의 귀를 열어서 참다운 음성을 들어 자기가 가고 있는 길에서 돌이키게 할 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늘 그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를 바꾸시옵소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보화보다도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떠나 있는지 내가 실감나게 보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과 가까이 있던 완전한 교제를 누릴 때 내가 맛볼 수 있던 그 놀라운 하늘나라의 축복을 가끔이라도 맛보게 하옵소서. 그때 우리에게 변화를 향한 절박한 기도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삶이 새로운 단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 같이 기독교의 참된 신앙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서 열매를 많이 맺으라고 그러는데 어떻게 열매를 맺습니까? “너희가 내 안에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이루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포도나무가 가지에 붙어있으면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저절로 열매가 맺습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열매를 맺겠다고 몸부림을 칩니까? 가지는 가만히 있으면 열매가 자유롭게, 그리스도 예수께 가지가 붙어있자 그 뿌리로부터 뽑아져 올라오는 수액이 포도나무 줄기에서 가지로 잎으로 잎에서 줄기로 줄기에서 꽃으로 꽃에서 또 열매로 넘어가면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가을에 포도나무가 요즘처럼 풍성하게 수확이 맺혀질 때 나무에게 가서 물어보십시오. 가지야, 네가 열매를 맺게 위해서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가. 가지가 분명히 말할 것입니다. 아닙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단지 포도나무에 붙어있었을 뿐입니다. 이것은 내 열매가 아니라 포도나무의 열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무엇도 하고 무엇도 해야지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복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그리스도 예수와 접붙여진바 되어서 그 속에서 생명의 능력이 한없이 샘솟아 올라오는 그 영혼의 비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너무나 무지한 채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생각하기를 기독교는 뭔가 옛날에 헤롯당이나 열심당원들이 열심히 자기의 주인을 위해 충성했듯이 애를 써서 무엇을 만들거나 아니면 옛날에 수도종교처럼 뭔가를 체념하고 고요히 득도하는 것이 마치 기독교의 본질인 것처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생명의 능력이 그리스도 예수께 박힌 그 줄기로 뿌리를 타고 한없이 솟아납니다. 열매 맺은 것을 보고 포도나무 가지도 놀라는 것입니다. 아니, 이런 열매가 내 손에 달리다니. 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누구에게 영광을 돌립니까? 포도나무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비루한 인생들인지 자기가 이루어놓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비하면 마치 지푸라기만도 못하고 초가집 밑에 있는 그 구더기만도 못한 작은 자기의 행동으로 감히 나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살아왔노라. 하면서 얼마나 비루한 인생들인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주 안에 있는 생명의 그 놀라운 신비, 주 안에 있는 그 놀라운 생명의 능력, 우리를 살게 하는 그 위대한 하늘의 힘,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그 놀라운 참 빛,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오히려 우리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깊이 느끼고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커다란 경험들, 자신을 정결케 한 사람들 속에서 경험되어지는 것입니다.
저도 늘 요즘은 뭔가 그래도 금년이 가기 전에 나만 뭔가 하나님 앞에 깊이 정말 나야말로 회개하고 돌이켜야지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늘 그런 한 번에 깊은 부흥 비슷한 것을 맛보면서 한 번도 그 이후로는 나 자신의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나는 충만하고 만족하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늘 내가 가난하다는 사실을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내가 이렇게 깊이 기도하면 누구 표현대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립니다. 십자가에 떨어진 그 핏방울 소리가 비오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생명의 놀라운 교제, 능력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심령의 깊은 정결함을 갈망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왜 불결함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은 연합할 수가 없습니다. 그 불결을 비집고 우리에게 들어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수많은 더러움과 불결에 장벽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수많은 좋은 것들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너무 비싸서 사먹을 기회도 없지만 가끔 빕스에 가면 연어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얼마인지 모르는데, 그런데 그 연어가 북태평양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돌아오는데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하는데 나는 확인은 못했는데 어느 목사님이 설교한 가운데 그런다고 하는데, 누구는 또 신문에서 봤다고 하는데 모천을 올라가는데 모천이 폭포수 위라면 폭포를 타고 올라가다가 바위에 몸을 부딪치면서 반동으로 튕기면서 올라간다고 합니다. 온 몸이 찢어지면서 올라갑니다. 모천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런데 모천이 폐놀이 나오고 석유가 쏟아지고 난리입니다. 그러면 못 들어갑니다.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그 태평양이 어디입니까. 상상할 수도 없는 수 만 거리를 오직 모천으로 돌아가고자 왔는데 폐놀이 쏟아지고 아황산가스가 쏟아지고 도저히 그 물 속에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올라오다가 그냥 돌아가다가 죽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불결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온전한 사랑,
주 예수여 완전한 주의 사랑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느끼면서 살 수 있도록 우리를 구속해주셨는데 그것을 못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인간들이 만족합니다. 괜찮다. 살만하다. 그러나 호세아 선지자가 말한 대로 네 얼굴이 증거하노라. 심령 속에 참된 기쁨이 없고 생명이 없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생명으로 우리를 구속하셨고 생명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우리는 그 생명 없이 살아가면서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마음의 불결함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되자 이 사람이 이것에 대해서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 이 불결함, 이것이야말로 정말 치워버려야 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우상과 함께, 우상이 들어와서 우상이 그렇게 역사하고 우상을 사랑하게 만들었던 자신들 속에 있던 깊은 심령의 불결함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심령의 불결을 털어버려야 될 절박한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로 만들어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각성을 경험하고 나서 깨닫게 된 사건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얼마나 무궁무진합니까? 마치 야곱이 아니라 오늘 우리 한사람을 두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야곱이 넘어졌던 그 지점에서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주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거울로 주셨으니 우리도 그를 보면서 우리가 경계로 삼아야 할찌니라.” 주님이 보여주셨는데도 지금도 깨닫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넘어져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이런 야곱에게 주셨던 교훈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깊이 기도하시면서 내가 정말 주님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면 주님은 당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그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도 섬기고 여호와도 섬겼으니까 우리가 언제 여호와를 안 섬긴 적이 있습니까? 하는데 그렇게 섬기는 것은 안 섬기는 것입니다. “오직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만을 사랑하라.” 그것이 주님의 교훈입니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우리의 하나님께로만 돌려져야 할 사랑을 가로채는지 돌아봐야 됩니다. 그리고 얼마나 이런 일들을 행하면서 하나님 앞에 조금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그리고 부족한 것이 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이 생각들도 사실은 심령이 얼마나 부패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 앞에 우리의 의로움을 다 버리고 주 앞에 정직해질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주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주저하지 마십시오. 무너져서 내가 절망에 떨어져도 좋으니까 하나님이 세우지 않은 것은 다 무너트려주십시오. 거짓된 것에서 희희낙락하기보다는 참된 페허 위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하나님 앞에 소망이 있을 줄 믿습니다. 그럴 수 있는 용기 있는 기도를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