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밤을 지나는 빛의 자녀들
인생의 밤을 지나는 빛의 자녀들(1) 2013. 01. 07(월)저녁
궁핍한 땅에 내린 은총 p.1
I. 본문의 배경
- 엘리야의 활동: 아합의 시대
- 암흑기에 탁월한 두 선지자 보내심
- 엘리야와 엘리사: 바알교와 싸움
II. 이스라엘의 죄와 기근
A. 이스라엘의 번영과 죄
- 최고의 번영을 구하던 북이스라엘
- 세속적으로 강력한 오므리 왕가
- 아합의 불신앙과 이세벨의 배교
- 우상숭배+여리고성 재건(16:34)
- 재건자에 저주를 경고함(수6:26)
B. 하나님의 징벌, 기근
-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없음" 선포
- 전무후무한 징벌: 하나님의 마음
- 교회의 영적재앙: 은혜의 비 그침
- 말씀 미각: 개인적+공동체적 발생
III. 엘리야를 돌보신 하나님
A. 시냇물을 마시게 하심
- 가뭄 속에 마르지 않은 시내
- 당신을 섬기는 자를 돌보심
B. 까마귀로 떡과 고기를 먹이심
- 기적의 음식으로 기근을 이김
- 육체 뿐 아니라 영혼을 돌보심
- 영적 기근의 때에 말씀을 먹이심
IV. 적용과 결론
인생의 밤을 지나는 빛의 자녀들(2) 2013. 01. 08(화)저녁
궁핍한 자를 섬기게 하심 p.13
I. 본문의 배경
- 엘리야를 사르밧으로 보내심
- 궁핍한 가운데 섬김을 복 주심
II. 절망 중에 있는 여인
- 가루 한줌과 기름 조금
- 아이와 함께 먹고 죽고자함
- 체념은 죽음에 가까이 가게 함
- 끝없는 가뭄과 가난에 절망함
III. 순종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A. 엘리야를 먹이시는 하나님
- 시돈땅 사르밧 과부를 찾게 하심
- 가난한자 통해 선지자를 공궤하심
- 하나님 은혜로만 사는 것을 보여줌
- 과부를 절망에서 구하시려 하심
B. 순종을 요구하는 엘리야
- "나를 위해 작은 떡 한 개를 만들라"
- 까마귀로도 먹이실 수 있는 하나님
- 궁핍한 선지자 처지가 축복의 기회
- 가난한 과부에게 섬기도록 부르심
C. 순종하는 사르밧 과부
- 기꺼이 순종하는 사르밧 과부
- 한 줌 가루 나눌 욕심으로 보지 않음
- 궁핍한 중에 섬김이 복의 기회가 됨
- 섬길 수 없는 중에 섬기는 자가 귀함
- 과부 두렙돈 "생활비전부"(눅21:4)
- 자기를 돌보지 않으신 예수님 섬김
IV. 순종하는 자를 복 주심
- 기근 속에 가루와 기름을 채워주심
-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함"(마6:33)
- 나 자신 위해 섬김 포기할 때 유익×
- 없는 자를 섬기게 하심은 있게 하려
- 무능한자 섬기게 하심은 능력 있게
V. 적용과 결론
인생의 밤을 지나는 빛의 자녀들(3) 2013. 01. 09(수)저녁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p.24
I. 본문해설
- 가뭄이 3년 지났을 때 아합에 보임
- 오바댜와의 만남: 선지자들 구함
- 바알450+아세라 선지자400
- 갈멜산의 대결: 백성에 결단 촉구
- 대답 없는 백성들: 배교의 시대
II. 배교의 시대에 부흥을 주심
A. 하나님의 영광을 구함
- 하나님의 살아계심 인정+경배
1. 주가 이스라엘 중 하나님이심
2. 자신이 하나님의 종임
3. 자신이 행하는 일이 주의 뜻임
B.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
- 아합에게 보이게 하심(18:1)
- 갈멜의 대결에서 하나님을 믿음
- 당신의 삶과 연관된 약속 믿으라
- 삶이 엉킬수록 말씀에 집중할 것
C. 하나님의 능력을 구함
- 주 여호와가 하나님이심 알게끔
- 탈교자들의 마음을 돌이키도록
- 교회가 기도해야 할 중요한 제목
- 탈교자들을 위해 부흥을 간구함
D. 하나님께 헌물을 드림
- 12돌제단+송아지+12통물+나무
- 헌신으로 만족치 않고 부흥 구함
- 부흥만 구하고 헌신하지 않음×
III. 불로 내린 하나님의 응답
- 번제물, 나무, 돌, 흙을 태움
- 부흥은 언제나 하늘로부터 옴
- 하나님께로부터 위대한 일 기대
- 어찌할 수 없는 한계에서 간구함
- 부흥을 위해 목숨을 걸고 기도함
IV. 적용과 결론
인생의 밤을 지나는 빛의 자녀들(4) 2013. 01. 10(목)저녁
침체의 밤을 벗어나라 p.35
I. 본문해설
- 악한 선지자들과 겨뤄 승리를 한 후
- 아합의 이야기에 분노하는 이세벨
- 유다땅 브엘세바로 도망, 광야 피난
- 로뎀 나무 아래서 낙심해 죽음 구함
- 절망으로 잠든 선지자: 구운 떡+물
- 천사의 어루만짐과 격려: 호렙산
II. 침체 속에 잠든 선지자
- 신자에게 호황과 침체는 종이 차이
- 아합에 명령, 선지자 도륙, 달음질
A. 두려움
- "이 형편을 보고‥도망하여"(3)
- 담대함과 강함 없고 연약한 인간
- 신앙과 현실 양면성: 강함vs은혜
- 은혜 안에서 만강함, 자기 것 아님
B. 절망감
- "죽기 원하여‥생명거두소서"(4)
- 절망과 잊음, 어떤 은혜+어떤 능력
- 로뎀: 작은 덤불나무, 현실 감당×
- 그냥 사는 것도 주님 주신 은혜의 힘
- 두 절망: 하나님 앞+하나님 밖에서
- 하나님 의지함 vs 절망 중 체념함
- 절망의 끝: "하나님 욕하고 죽음"
- "고아 같이 버리지 않음"(요14:18)
- 엄마같은 아버지: 황수관 박사 회고
- "독수리 날개로...업어"(출19:4)
- 하나님의 현재적 경험: 믿음+경건
C. 무기력
- "누워 자니‥다시 누웠더니"(4~5)
- 힘의 상실: 현실과 관계 맺을 힘 소진
- 가고픈 곳, 먹고픈 것, 보고픈 이×
- 죽음 같은 잠을 택함: 요나, 제자들
- "잠자기 좋아하지 말라"(잠20:13)
- 영혼의 무기력 육체의 게으름 만남
- 천사를 보내어 격려하시는 하나님
D. 외로움
- "나만 남았거늘‥내 생명을"(14)
- 침체와 마음 극소화: 주위와 단절
- 경건한 외로움 vs 부패한 외로움
- 적용하는 인간의 마음의 작용 따라
- 자기 연민의 몰입은 마음을 굳게 함
- 외로움 승화의 경건 기술: 존 칼빈
- 외로울 때 기도하고 슬플 때 찬송
III. 적용과 결론
- 침체에서 벗어나라
- 두려움, 절망감, 무기력, 외로움×
- 예수의 구속: 이것들로부터의 해방
- 허깨비 같은 것들은 우리게 힘없다
인생의 밤을 지나는 빛의 자녀들(5) 2013. 01. 11(금)저녁
사명으로 돌아가라 p.48
I. 본문해설
- 침체에 빠진 엘리야 호렙산 세우심
-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체험함
- 강한바람(산, 바위)⇒지진⇒불
- 여호와의 임재는 거기 계시지 않음
II. 불후에 들린 세미한 음성
- 굴 속 숨었던 엘리야, 굴 밖에 나옴
- 폭풍+지진+불같은 능력과 기적×
- 세미한 소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
- 대결 때 부흥이 아니라 지성에 말씀
- 지속적 헌신과 시련 속에서 소진됨
- 외적 부흥 뿐 아니라 내적 말씀 필요
III. 사명으로 돌아가게 하심
A. 하나님을 만남
-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 거기는 사명자의 자리가 아님
- 선지자의 사명은 목숨의 보존이 아님
- 떡과 고기 먹이심은 사명을 위함임
- 문제? 다 해결 후 무엇 할 것인가?
- 다음 침체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 회복의 은혜 →옛사명으로 돌아감
- 은혜는 거저나 신적 계획 있기 때문
- 말씀으로 만나주시는 하나님
B. 사명으로 돌아감
- “하사엘, 예후, 엘리사”(14-16)
- 왕을 세워 역사를 움직일 사명자
- 사무엘: 사울과 다윗 폐하고 세움
- 엘리야: 예후 세워 왕가 쓸어버림
- 굴 속에 숨어 두려워 낙심할 자 아님
- 신자의 영광: 신분+목적 있는 활동
- “이라크 침공 막지 못해 미안해요”
- 우리 섬김 우습지 않다: 주뜻, 나라
- 회개/용서, 침체/회복, 시련/승리
- 그 후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
- 하나님께 순종함+사명 위해 헌신
–삶의 기쁨을 내 행복에 두지 않음
–구원하신 의도를 따라서 섬기며 삶
IV. 적용과 결론
- 하나님은 우리 모든 것을 돌보심
- 작은 신음에도 응답 하시는 주님
- 그러나 인생의 밤 지나는 게 목표×
- 모두 극복 후 돌아갈 사명의 자리?
- 거기로 돌아가게끔 간구하라
- 순종, 충성, 헌신을 약속하라
인생의 밤을 지나는 빛의 자녀들 1 (2013.01.07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궁핍한 땅에 내린 은총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 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왕상 17:2-7) |
I. 본문의 배경
오늘부터 5일 동안 엘리야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며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긴 구약의 선지자들 중 으뜸이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모든 선지자들의 입법자이니까 말할 것 없고 선지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할 때 사람들의 마음속에 엘리야가 제일 먼저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 성경은 엘리야가 다시 온다는 예언으로 끝납니다. 신약 시대에는 세례 요한이 등장해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능력 있는 선지자였고 하나님이 깊이 인정해 주셔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들려 올라간 몇 안 되는 신앙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이 그의 능력 때문에 편안하거나 늘 승리하기만 하는 생활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아합의 시대의 선지자로 보냈습니다. 남왕국과 북왕국이 분열된 이후, 북왕국에 가장 강력한 왕조가 있었는데 오므리 왕조였습니다. 오므리 왕조는 국가적인 큰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 시대는 신앙적으로는 아주 부패했고 부패한 시대의 임금 중 한 사람이 아합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우리들이 선입견을 갖고 있는 것만큼 그렇게 악하고 신앙이 전혀 없는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장가를 잘못 들었습니다. 이세벨이라는 악명 높은 여자와 결혼을 했는데 이 사람은 시돈 사람의 왕 옛 바알의 딸, 이세벨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바알 종교를 이스라엘에게 전파해야 한다는 선교사적 소명감을 가지고 이스라엘로 시집왔습니다. 반면 아합은 좋게 말하면 본성이 착한 사람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아내를 손에 꽉 잡을 수 있을 정도의 장악력, 그것을 사랑으로 하든지 아니면 왕의 권위로 하든지 간에 그런 능력이 없었습니다. 대담함과 용기, 결단 같은 왕이 갖춰야 할 덕목을 아내가 가지고 있었고 아내는 그것을 나쁜데 사용해서 남편을 불행으로 몰아넣고 이스라엘 전체를 파탄으로 데려갔습니다. 희망이 없는 캄캄한 암흑의 시기에 그 여자가 이스라엘의 왕비가 되어 여호와를 경외하는 선지자들을 대대적으로 핍박하고 살육하는 작전이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암흑기에 하나님께서는 구약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위대한 두 종을 보내십니다. 그게 바로 엘리야와 그의 제자 엘리사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들어 바알교와 정면적인 대결을 벌이게 합니다. 칼이나 창이나 무기가 아니라 신앙과 종교로서 이들과 전면적으로 승부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놀라운 은총과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 세상이 너무 불신앙적이고 믿음대로 살기 어렵다고 여기지만 안 그런 때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캄캄한 시대일수록 선지자와 같이 위대한 인물뿐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 한 구석에서 신실한 신앙으로 주님을 섬기는 숨겨놓은 종들을 붙들어 주셔서 질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영적인 싸움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무너지지 않고 생명력을 이어가도록 하십니다.
II. 이스라엘의 죄와 기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 떠나고 악을 행하였고 정치지도자조차 부패 하였고 선지자들은 핍박을 받아 모두 숨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하늘에 닿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를 기근으로 다스리십니다.
A. 이스라엘의 번영과 죄
이스라엘의 번영과 죄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최고의 번영을 누리던 북이스라엘 왕국이었습니다. 엄청난 무역으로 돈을 벌고 국방을 튼튼히 하고 산업이 번성하였습니다. 부유하고 평안함으로 인해 사람들은 뜨거워져서 열렬하게 정욕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비참한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 속에서 아합이라도 신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합에게는 신앙이 거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희미한 마음은 있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은 이세벨이 바알 종교에 가지고 있는 충성심의 십분의 일, 백분의 일도 되지 않는 초라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진노를 살만한 중요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여리고 성을 재건하는 사건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여호수아의 인도를 따라 가나안을 진격할 때 첫 번째로 맞붙어 싸워야 했던 큰 성이었습니다. 그 성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사람들은 그 성을 보면서 과연 이것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나와서 싸우는 대신 성문을 굳게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발달한 문명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이 기적으로 수많은 나라를 물리치시며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것, 요단강 물이 마르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른 땅을 건넜던 사건 등, 출애굽부터 시작된 어마어마한 기적의 역사들이 풍문을 타고 전해졌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렸고 엄중한 두려움이 성을 뒤덮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성을 에워싸며 돌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큰 함성과 함께 성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편에서 보면 하나님이 이 성을 무너뜨리지 않고는 가나안을 공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성을 이스라엘에게 붙이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예뻐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기보다는 그 땅의 백성들이 너무나 패괴하고 악하여 그 죄악이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상달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셔야 했습니다. 그 심판하시는 도구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용하셔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졌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십니다. 여호수아서에 나오는데 “누구든지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무너진 여리고를 다시 건축하면 터를 쌓을 때 큰 아들이 죽고, 모든 일들이 끝날 때 막내아들이 죽을 것이다.”라고 하나님이 선언을 하셨습니다. 무너진 성읍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교육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들이 하나님 앞에 지극히 우상을 섬기고 범죄하여 하나님이 큰 능력으로 징벌하셨다. 우리는 이렇게 하지 말자. 하나님이 우리를 어두운 세상의 빛으로 살라고 가나안에 들여보내신 것이다.’ 이것을 매일 생각하라고 하나님이 그 성을 그냥 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을 다시 건축하였습니다. 왜 건축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지도를 놓고 보면 여리고의 위치가 기가 막힌 사통팔달의 교통요충지입니다. 아마도 경제적인 이익 때문에 성을 다시 재건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때는 우상 숭배가 아주 극심한 때였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거의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마지막에 탐욕이 우상 숭배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한 탐욕을 갖게 되면 하나님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 욕망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성을 재건할 때 하나님이 예고하신 것과 똑같은 재앙이 일어났습니다.
B. 하나님의 징벌, 기근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중대한 결심을 하시고 엘리야에게 계시를 주십니다. “아합에게 가서 말하라.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아니하리라.” 그때나 지금이나 이스라엘은 비가 많이 오는 강수량이 풍부한 나라가 아닙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비가 내리면 땅속에다 항아리을 묻어놓고 빗물을 받아 쓸 정도로 물이 귀한 나라입니다. 수년 동안이라고 했는데 야고보서에는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가물어서 큰일이라고 하면서 양수기 보내기 운동을 하고 교회에서도 기도를 하는데 그저 4개월 정도 비가 내리지 않을 때 그러합니다. 4개월에서 6개월 정도 비가 안 오면 농사를 망친다고 온 나라가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3년 6개월이나 비가 오지 않았으니 종자 씨 하나 남지 않고 다 죽어갔습니다. 사람은 산다고 하더라도 작물이 없으니까 짐승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죽습니다. 짐승들이 죽으니까 사람들은 짐승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온 땅 자체가 비참한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린 시절, 펄벅 여사가 쓴 ‘대지’라는 소설을 읽은 기억이 날 것입니다. 중국에서 일어났던 비참한 가뭄에 대한 그림 같은 묘사가 나옵니다. 마지막에는 도저히 먹을 것이 없으니까 흙을 씻어서 그 물을 받아먹습니다. 실제로 아이티에 지진이 난 후, 너무 가난한데다가 재앙이 닥치니까 먹을 것이 없어서 길거리에서 쿠키를 팝니다. 아주 보드라운 흙으로 만든 쿠키입니다. 모래를 먹는데 이것은 건강에 매우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가뭄으로 말미암는 기근이 그렇게 비참한 것입니다.
북한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흉년이 들어서 죽어갔습니다. 지금은 여러 해가 지났으니까 말할 수 있는데 우리가 북한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북한의 실상을 듣는데 눈물이 나옵니다. 농사를 지어서 두 세주 후면 영글어 벼를 베어야 하는데 한파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한 2000명 정도 되는 주민이 전부 다 횃불을 들고 7-8m 간격으로 서서 밤을 새웠습니다. 그게 놀랍게도 도움이 된답니다. 위에서 찬 이슬이 떨어지면서 서리가 되는데 이렇게 불을 비추고 있으면 그 온기가 위에서부터 밑으로 퍼진다고 합니다. 6-7m정도만 떨어져서 횃불을 붙들고 있으면 온기가 이불처럼 덮어진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식량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가뭄과 기근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커다란 징벌이 내렸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징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는 양식이 없는 상태에서 깊은 고통에 빠졌습니다. 성경은 상세한 묘사를 하지 않았지만 가난한 사람부터 굶어 죽어갔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행하고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늘을 닫고 비를 그치시고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이 패괴하고 악하면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을 사랑하셔서 우리가 선한 마음을 갖고 나라가 나라를 돕고, 이웃이 이웃을 도우면서 평균적으로 가난한 나라와 사람들을 먹고 살게끔 배려를 하셨습니다. 물론 충분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양식은 충분한데 탐욕과 이기심이 그 균형을 맞추지 못하게 합니다. 과학의 발달과 산업의 발달은 어느 정도 오늘날의 기근과 재앙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예전에 우리가 정말 가난하고 비참할 때에는 미국이나 우방 국가에서 원조를 해 주지 않으면 먹지 못해서 굶어 죽고 병들어 가는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흉년이 들어서 쌀이 없으면 수입해 오면 됩니다.
이스라엘에게 나타난 사건이 주는 영적인 의미를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 말씀을 드립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늘의 문이 닫히고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커다란 문제요 고통이었다고 한다면 영적인 이스라엘인 교회에 임하는 가장 두려운 재앙은 무엇일까요?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못 받아도 내 아내가, 내 남편이, 혹은 우리 구역장이, 내 주위에 있는 지체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아서 나같이 못된 인간을 참아 줍니다.
저는 최진실과 조성민 일가를 생각하면서 오늘 하루 종일 마음이 슬펐습니다. 인간의 삶에 대해 하루 종일 생각했습니다. 저녁때도 애들하고 밥을 먹으면서 그 얘기를 한참 했습니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모든 것들을 갖추고 있을 때는 세상의 자원을 가지고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직장에 다닐 때에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한 연예인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우리 직장에 간증을 하러 한번 왔습니다. 요즘도 여전히 나이 많이 드셨는데 가끔 라디오에 나타납니다. 그 분이 이야기 하는데 너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연예인이니까 어디를 가든지 특별대우를 받습니다. 어마어마한 인기를 한 몸에 받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하늘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인기가 추락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아무 희망이 없고 매일 눈을 뜨면 죽고 싶은 심정이었답니다. 언제 인기가 다시 올라갈지는 모릅니다. 연예인 같은 경우에는 그때 받는 고통들을 이루 헤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가 매일매일 괴로워하는 이유들이 있습니다. ‘나는 돈이 없어. 사람들이 나에게 관심을 안 가져줘. 나는 못 생겼어. 그렇다고 마음이 고운 것도 아니야. 이것들이 나에게 없어서 인생을 사는 게 너무 비참해.’ 나에게 없는 것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요즘 제가 공부를 하면서 ‘세상에는 천재적인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어쩌면 그리도 많을까? 이 사람들은 이것을 발견했는데, 나는 이것을 이해하기도 힘드니 나와 이 사람들의 차이는 얼마나 큰가?’ 그러면서 소외감을 느낍니다. 그 무엇이 나에게 없어서 인생이 구겨지는 것 같고 짓밟히고 같아 결국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생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인생의 본질을 직시하지 않으면 그것을 느끼지 못 합니다. 그런데 어떤 계기가 있어서 인생의 본질에 직면하게 되어서 그것이 자기에게 없다고 생각되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운 것입니다. 이것은 화장품이 없다, 얼굴이 못 생겼다, 이런 것은 사치스러운 고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인기 있는 예쁜 배우들이 죽는다고 한다면 아마 수많은 남자들이 줄을 서서 나하고 한번만 결혼해 보고 죽으라고 내가 당신을 반드시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돈을 가지고 줄을 설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다 필요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의 무거운 짐을 그 사람들이 대신 져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무게입니다.
인생의 무게 자체를 못 느낀 채, 짐승처럼 하루를 먹고 만족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죽어가는 사람보다 나아서 살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적당히 우리의 눈을 가리고 무지하게 해 주시는 덕분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순간, 눈을 떠서 인생의 진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끝까지 직면하지 않고 자기 욕망대로 살다가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욕망을 극대화해서 다른 사람에게 고통과 불행을 주면서도 남을 짓밟고 빼앗아서 자기를 위해 살다가 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짐승처럼 살다가 아끼는 자 없이 죽는 삶입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자기가 어디로부터 오고 누구를 향해 살고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고 자기가 이 땅에 살아있음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을 끼쳐서 그 사람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아름답고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인생을 살 때에 우리가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도달하는 문제는 인생을 움직이는 커다란 자원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살한 조성민 씨도 수많은 남자들이 얼마나 부러워했겠습니까? 최고의 스타와 결혼을 했고 결혼식은 45분 동안 전국에 생방송으로 중계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그것만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것만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왜 그렇게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마음으로 눈물이 났고, 남겨진 그들의 아이들을 위한 기도가 나왔냐면, 저의 옛날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중학교 2, 3학년, 고등학교 1, 2학년, 그때 저는 혼자서 가슴앓이를 했습니다. 아침에 눈만 뜨면 너무 무서웠습니다. 하루를 사람으로 살아야 된다는 게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하면 다 저를 욕합니다. 누구 한 사람도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쓸데없는 생각한다고 미친놈이라고 합니다. 그 문제가 풀릴 때까지는 저는 죽음이 저의 친구였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한계선 상에서 죽음을 자꾸 생각하면 삶은 남 같고 죽음이 친구 같습니다. 삶은 곧 헤어져야 할 친구이고 죽음은 오래도록 같이 있어온 친구처럼 느껴집니다. 세상에 있는 자원이 우리를 살게 하는 유일한 자원이 아닙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하나님이 비를 안 내리십니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들이 죽는데 비 때문에 아니라 무엇 때문입니까? 비가 안와도 다른 먹을 것이 있으면 살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그런 먹을거리들은 비가 내리지 않으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비가 내리면 흐르는 빗물을 받아먹고 살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내리는 비는 지금 현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나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식품이기 때문입니다. 밥, 고기, 치즈덩어리 그리고 밀가루가 필요합니다. 비가 내린다고 해서 내 배가 부른 것은 아닙니다. 당장 필요한 것은 빵과 떡과 고기인데 이것들은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금방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비가 내리면 이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해 줍니다. 비가 오면 풀들이 돋아나고 그것을 짐승들이 먹고 짐승들이 새끼를 낳게 됩니다. 비가 오면 종자를 심고 거두며 먹고 살 수 있는 땅의 생산의 능력이 다시 회복이 됩니다.
그와 같습니다. 영적인 이스라엘인 교회에 가장 커다란 재앙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하늘 문을 닫고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비가 내릴 때에 ‘생명이 내리는구나. 저것 때문에 내가 일 년을 사는구나.’ 그렇게 생각한 적 없을 것입니다. ‘놀러가야 되는데 하필이면 오늘 비가 오는 거야.’ 심지어는 투덜대기까지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리는 그 비 때문에 여러분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는 그런 사실을 잊고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이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열렬히 일주일 내내 은혜 받게 해 달라고 구슬땀을 흘리면서 기도하다가 온 사람이야 몇 명 되겠습니까? 그냥 옵니다. 그래도 와서 조용히 앉아서 찬송을 부르면 마음에 은혜가 됩니다. ‘아, 내가 정말 주님을 멀리 떠났다 이제 왔구나.’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아, 정말 그렇구나.’ 물론 여기저기서 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은혜를 받고 ‘주님 감사합니다.’ 생애 전체를 뒤흔들어 놓을 만한 것은 아니지만 깊이 은혜를 받으면서 ‘그래, 나는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돼. 하나님은 안 계신 곳 없이 어디든지 계시는 하나님이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문제지 내가 미국으로 이민을 간들, 일본으로 도망을 간들, 내가 독도와 울릉도로 간들 내가 하나님을 피할 수 있겠는가? 주님을 만나서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지.’ 이런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놀랍게 여러분의 마음과 삶속에 스며들어서 때로는 곤고하고 힘들지만 아주 주저앉아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데까지 여러분을 데려가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에너지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그런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칭찬하는 거죠?” 아닙니다. 이것은 생존 수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여 년 전에 남해에 배를 타고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갔는데 사공이 설명을 합니다. “저 산 바위에 있는 저 나무” 그러는데 한 3m 정도 되어 보입니다. 가느다란 나무입니다. 천년이 되었답니다. 그 나무가 바위에 바짝 달라붙어 있습니다. 비가 내리면 습기를 먹고 이슬이 내리면 그것을 먹으면서 죽지 않을 만큼 생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월이 흘러갑니다. 나무가 굵어지지를 않습니다.
여러분이 과수원을 가꾼다고 합시다. 들판 끝까지 전 재산을 들여서 나무를 가득 심었습니다. 3500그루를 쫙 심고 저 쪽에는 묘목도 1500그루 심었습니다. 그리고 과수원 이름을 열린과수원이라고 지었습니다. 이 나무들이 죽지는 않았습니다. 생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아, 올해 농사가 기가 막히다. 80년째 우리 나무가 안 죽고 살아있습니다.”라고 한다면 그는 농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과수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분재를 키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대단합니다. 거미줄 같은 믿음이라도 붙들고 살 수 있는 에너지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느 날 완전히 고갈이 되는 순간이 도래하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사야서에 보면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을 때 “이스라엘은 나의 포도원이다. 그리고 나는 그 포도원에서 극상품의 포도를 얻기를 원한다.”라고 하십니다. 모든 게 그렇지만 극상품의 과일과 떨이로 파는 과일의 차이는 극상품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만큼 심합니다. 저는 황색 복숭아를 좋아합니다. 포도가 많이 나는 고장에서 근무하는 집사님이 와서 저에게 말합니다. “목사님이 좋아하시는 황금색 황도 복숭아를 사려고 무지하게 다녔어요. 그런데 못 구했어요. 그래서 그냥 왔어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아니 있으면 그걸 사오지만 없으면 하얀 거라도 사오지.’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우리를 한 그루의 포도나무로 심으셨을 때 우리 같은 사람이 극상품의 포도나무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거셨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얼마나 커다란 영광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진리를, 은혜를, 필요한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약속이 그 안에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늘을 열고 은혜의 비를 계속 내려주시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생애적인 은혜를 받지 못했더라도 그 말씀을 통해서 죽지 않고 살아있다고만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은혜는 놀라운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리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것, 모든 은혜가 하늘의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점에 있어서 은혜와 진리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시는 것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다음, 내가 발견했다고 하는 사람이 없고, 누구도 은혜를 자기가 생산했다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미천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하늘에서 은혜를 베푸셨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은혜는 원천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우리에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진리의 말씀과 은혜는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그것을 받느냐에 따라서 없는 것처럼 되기도 하고, 아주 작은 것 같았는데 우리의 마음과 삶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듣는 것이 사랑과 아주 비슷합니다. 결혼하기 전에 신상 털기를 한 후에 ‘이 여자, 이 남자가 틀림없구나. 사기는 안 당하겠구나.’ 하고 결혼을 하는 게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어느 한 순간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저 사람이 나의 운명이구나.’라고 여기게 됩니다. 자매 하나가 저에게 신앙 상담을 하는데 눈물이 글썽글썽 해서 “전도사님 저는 더 좋은 사람을 하나님이 주신다고 해도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런 게 사랑입니다. 거기서 사랑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시대를 움직였던 위대한 말씀의 종들은 대게 10대 초중반, 늦어도 10대 후반에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어마어마한 내용의 설교를 듣고 엄청난 지식을 체계적으로 깨닫고 나서 인생에 변화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존 오웬 목사가 옥스퍼드의 학생으로 있을 때 설교를 잘한다는 유명한 목사님이 그곳에서 큰 목회를 하고 계셨습니다. “거기에 가서 은혜를 받으리라” 결심하고 갔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갔는데 실망스럽게도 그날 그 목사님은 다른 곳으로 출장을 갔습니다. 대신 무명의 설교자가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오웬은 굉장히 실망을 합니다. 그때 이름도 모르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풍랑 이는 바다의 배 위에서 두려워 떨던 제자들에게 “너희의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말씀하시던 예수님이 이야기였습니다. 설교 전체가 신학적으로 어마어마하게 체계적인 말씀으로 다가온 게 아니라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는 한마디에 꽂혀서 생애적인 회심을 하고 청교도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스펄전도 똑같습니다. 스펄전도 16살에 시골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믿어지지 않지만 그는 거기서 계속 졸았습니다. 설교도 그렇게 은혜가 안 되었나봅니다. 시골 교회에서 설교하시는 목사님이 교인도 몇 안 되는데 멀쩡한 젊은이가 거기서 졸고 있으니까 “이보게 젊은이, 눈을 들어서 예수를 바라보게.”라고 말했습니다. 설교자가 앞에 무슨 얘기를 했는지도 모릅니다. “눈을 들어 예수를 보게.” 그 한마디 말씀에 꽂혀서 거기서 불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일평생 말씀의 종이 되고 그 다음부터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진리의 만남이라는 것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만남이라는 것이.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에는 방배동에 예배당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200명 정도 되는 교인이었는데 한 3년 반 만에 천 명 가량 되었습니다. 성도들에게 제일 미안한 게 식사 시간입니다. 11시 예배에 온 사람들이 밥을 먹어야 되는데 지하에는 의자가 한 8-90개 밖에 없었습니다. 가장 자리에 우동집처럼 자리를 만들었는데도 백여 명 정도 밖에 못 들어가는 식당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줄줄이 서 있었습니다. 식당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보러 갔는데 사람이 꽉 막혀서 내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자매 두 명이 내가 뒤에 있는지도 모르고 대화를 합니다. “언니 오늘 예배 잘 드렸어?” 동생이 언니를 데리고 온 모양입니다. “어, 예배 잘 드렸어. 그런데 설교가 너무 길어. 길어도 너무 길어.” 저는 거기서 내려가지고도 할 수 없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참 졸았어.” “그래? 그런데 어떻게 은혜를 받아?” “한참 자고 깼는데 설교를 계속 하고 있었어. 그때 정말 은혜가 됐어.” 그 자매는 앞에 제가 무슨 설교를 했는지 생각도 안 납니다. 하나의 말씀이 마음에 꽂히면 우리의 마음을 변하게 합니다. 그러한 경험을 한 사람이 ‘정말 놀랍다. 언제 다시 그런 체험을 해 보나. 다음 주일까? 다다음주? 요번 주? 다음 사경회?’ 그런 사람이 대게 두 번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특별히 주시는 것입니다. 워낙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을 안 하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과는 다른 어마어마한 전리품을 획득한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은혜의 비가 계속 내립니다. 험악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계속 주어집니다. 은혜와 진리는 하나님께만 고유하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면 받고 안 주시면 못 받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셔도 우리 마음이 그것을 붙들지 않으면 우리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씨 뿌리는 비유가 나옵니다. 제일 먼저 길 가에 뿌렸습니다. 그 다음에 가시나무 떨기에, 돌짝 밭에, 옥토에 뿌렸습니다. 네 밭에 떨어진 씨는 다른 씨가 아니라 동일한 씨입니다. 씨는 거룩한 하나님의 복음, 말씀입니다. 길가에 떨어졌는데 밟히고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습니다. 없는 것 같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안 나타나는 것입니다. 말씀에 하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마음 밭 자체가 길가같이 거칠고 완강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생각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서 땅에 떨어지면 트랜스포머에 나오는 것처럼 변신을 해서 드릴처럼 파고 땅속으로 들어가서 거기에서 무엇이 펼쳐지듯 열매 맺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안하십니다. 그게 인간의 위대함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다루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지성과 마음에 말씀을 들려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우리의 마음을 후벼 파서 그 속에 말씀을 집어넣고 뚜껑을 닫아 내년 쯤 열매를 맺도록 그렇게 안하십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자기가 하기 싫으면 못하는 것입니다. 책임을 자기 자신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속한 진리의 말씀과 은혜가 나의 마음속에 떨어져서 열매를 맺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말씀의 은혜를 받을 만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더 예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소비자 단체에서 통계를 내었습니다. 화장을 예쁘게 하고 예쁜 옷을 입고 물건을 사러 갔을 때와 폭탄 맞은 머리에 몸빼를 입고 갔을 때 누가 물건을 대우 받으면서 싸게 사가지고 오느냐 할 때, 전자의 사람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떨어뜨리십니다. 어떤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진리의 말씀은 언제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언제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은혜를 못 받아도 옆에 있는 사람은 은혜를 받고 변화되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한번 조사를 해 보십시오. 대화를 한번 해 보십시오. 문제는 내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입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며 세상을 살아가는 자원이 이 땅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 성경에 보면 고난을 당하면서도 기뻐했던 수많은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더라도 지금보다 경제적으로 더 어렵고 병들고 고통스럽고 사면에 우겨쌈을 당할 때도 내 마음에 평화가 있었습니다.
(찬양)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렇게 이기고 나아갈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보다 고난이 더 많을 때에도 매일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기도를 마치고 나면 어디에서 오는지 모르는 평화가 마음속에 밀려옵니다. ‘그래. 잠시 머무는 이 세상은 헛된 것들이니 내가 주님 의지하며 살리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때는 잘 되었는데 지금은 안 되는 것일까요?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게 과연 세상에 있는 자원만의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를 간절히 구할 때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도 여러분을 보호해 주시는 분이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III. 엘리야를 돌보신 하나님
A. 시냇물을 마시게 하심
엘리야를 하나님이 돌보셨습니다. 엘리야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사람이 자기 혼자뿐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훌륭하고 탁월한 사람의 강함과 인간적인 나약함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그래서 용기 있게 이세벨과 아합과 대면을 하다가도 약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 이제 내가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B. 까마귀로 떡과 고기를 먹이심
엘리야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자신도 배가 고팠을 것입니다. 모든 양식이 다 떨어졌고 그때나 지금이나 선지자들은 부자가 아닙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숨어라. 거기서 내가 너를 먹이게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가뭄 속에서 특별히 이 사람을 위해 시냇물이 마르지 않도록 보호해 주십니다. 한동안 시냇물을 마시며 생명을 연장하여 하나님 앞에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큰 기근의 고난 속에서 엘리야를 보호하고 돌보기를 마치 어미가 자식을 돌보는 것처럼 돌보셨습니다. 까마귀로 떡과 고기를 먹이셨습니다. 기적의 음식으로 기근을 이기게 하시고 육체뿐 아니라 영혼을 돌보셨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저는 최근에 사회복지 공동 모금회의 15초짜리 광고를 보면서 마음에 감동이 왔습니다. 애들과 너무 가난하게 사니까 결국은 칼을 품에 품고 강도질을 하려고 하는데 마침 그때 문자가 옵니다. “복지회에서 20만원을 입금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바꾸었다는 광고였습니다.
이런 깊은 고난 속에서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시냇물을 마시게 하시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떡과 고기를 실어다가 먹이실 때 그것을 먹고 육체의 원기를 얻었을 뿐 아니라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언제나 주님 안에 내가 있음을 아노라.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주가 너를 지켜주신다”라는 찬송처럼 떡과 고기를 먹고 시냇물을 마시면서 치열한 기근 속에서 커다란 감동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이렇게 돌보고 싶어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없고 세속적으로 변해간다고 투덜거리는 사람은 바보입니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교회에 부흥을 달라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남 얘기를 하듯, 욕을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간절히 원하면서 자신도 그것을 붙들고 열렬히 살아야 안타까운 마음의 진실성이 입증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신도 즐거워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복을 가져다주리라고 믿는 것 자체가 모순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재앙을 내리십니다. 이스라엘 망가진 나라가 된 것에 대해 엘리야에게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의 언약 공동체로 다루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능력을 주셨으나 자기 혼자 남았다고 두려움 속에 떨고 있는 엘리야에게 떡과 고기, 물을 먹이시며 육체에 힘을 주시고 영적인 기근에 빠지지 않도록 사랑과 은혜를 주셨습니다. 원기를 얻고 악한 정권과 맞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살아야 할 고유한 소명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IV. 적용과 결론
저는 다 말씀을 드렸고, 이제는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인간답게 살게 하는 자원이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오고 그것이 끊어졌을 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해도 인생이 불완전하고 비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작년 한 해 동안 저는 여러분이 게을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최소한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는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일하기 싫어서 집에서 뒹굴 거리며 리모컨을 돌리는 것도 결국은 자기가 행복하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은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행복하기 위한 삶에 있어서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만족스러운 분도 있겠지만 만족스럽지 않은 분이 더 많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결국은 그것 하나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작년과 똑같은 삶을 수없이 살아보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해봤더니 안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금년도 기대할게 없는 것입니다.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세상으로 도망치지는 않으면 생존은 할 것입니다. 목회자와 구역장들이 열심히 기도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목표가 겨우 생존이라면 너무 비참합니다. 포도원 농부가 도끼를 가지고 와서 ‘이것을 잘라? 말아?’ 고민하는 교인이 될 것입니까? 아니면 “해봐야 뻔한 일들을 지금껏 수년 동안 반복해 왔는데 더 이상은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것이든 몸부림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죽을 것 같습니다.”입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주님은 고난 받는 엘리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엘리야 자신은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으로 음식을 날라 먹이시며 그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실 뿐만 아니라 어머니 같은 사랑으로 돌보십니다.
저는 마음을 다해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이제 더 이상 지루한 일에 시험받으며 고통을 더하는 인생을 살지 않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에게 모든 것이 있고, 그것을 얻기 위해 몸부림치며 때로는 신앙까지 버렸었지만 그것으로 나의 영적인 기근을 해결할 수 없었구나. 주님이 나와 함께하셔서 기근을 이기게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이기는 삶을 살 수 있으랴.” 이렇게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밤을 지나는 빛의 자녀들 2 (2013.01.08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궁핍한 자를 섬기게 하심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왕상 17:8-16) |
I. 본문의 배경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서 기적적으로 남아있는 시냇물을 마시고 아침, 저녁으로 기적적으로 공급해주시는 떡과 고기를 통해 목숨을 부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냇물을 마르게 하신 후 엘리야에게 새로운 명령을 주셨습니다.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살고 있는 어떤 과부에게로 찾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과부로부터 엘리야에게 음식을 주도록 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시작부터 무엇인가 개운하지 않지요? 까마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물어다 엘리야를 먹이실 수 있고 시냇물을 보존하여 기갈을 면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면 새로운 방법으로 먹이시겠다고 할 때, 봉황이나 천사를 통해서라면 얼마나 보기가 좋겠습니까? 아니면 “사르밧에 유력한 자가 있는데 내가 그에게 너를 돌보도록 지시하였느니라.”라고 한다면 고난 중에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라고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II. 절망 중에 있는 여인
옛날에 과부라고 할 때는 모든 사람이 만만히 보고 짓밟히는 약자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 시대에는 누가 과부가 되면 주의 사랑으로 그와 결혼해 주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과부가 너무 무시당하고 심지어는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니까 자기가 기둥이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남편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때 종교 개혁자들이 도망친 수녀, 자기보다 나이가 10년 가까이 많은 과부, 이런 사람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과부는 사회적 약자인데 가뭄에 그를 찾아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셨느니라.”고 말하는 게 쉽겠습니까? 이 선지자는 조용히 일어나서 사르밧으로 갔습니다.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계시로서 이 여자가 그 여자라는 것을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에게 “물을 좀 주십시오.” 했습니다. 가뭄인데 물도 많이 있겠습니까? 그 후에 “떡 한 조각만 주십시오.” 엘리야가 요청하자 이 여자가 약간 화가 났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할 게 그렇게 없습니까? “난 떡이 없고 통에 가루가 딱 한 움큼, 병에 기름이 조금 남았는데 나뭇가지를 두 개를 주워다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어먹고 그 후에는 죽으려고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나뭇가지 두 개로 조리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밀가루와 기름이니까 얼마나 조금 남았는지 볼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절망 중에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과부로 아이 하나를 데리고 살면서, 어쩌면 여러 아이가 있었는데 기근 속에 모두 죽고 하나만 남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아이와 함께 마지막 남은 한줌의 밀가루와 약간의 기름을 가지고 음식을 지어먹고 죽고자 하였습니다.
절망의 가장 친절한 친구는 죽음입니다. 절망과 죽음은 매우 가까이 있고 체념은 절망을, 절망은 죽음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이 한줌의 가루로 음식을 만들어 먹고 나와 이 아이는 죽으려고 합니다.” 이 아이가 불쌍하니까 마지막으로 음식을 만들어서 잠시나마 아이를 기쁘게 해 주고 함께 죽으려고 한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끝없이 계속되는 가뭄으로 곡식이 핍절한 상태에서 이 여자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있는 마음과 정신의 자원을 상실한 채, 깊이 절망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직은 목표를 가지고 들판에 나아가 나뭇가지를 줍고 있습니다. 아무거나 줍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 나뭇가지가 잘 말랐을까? 불이 잘 붙을까? 물을 잘 끓여서 음식을 만들 수 있게 잘 탈 수 있을까?’ 아마 여자는 나뭇가지를 부지런히 찾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불을 지펴서 가루와 기름을 섞어 반죽을 해서 음식을 만들려고 여러 가지 계획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절망에 다다른 사람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안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매일 닥치는 일을 어떻게 안하겠습니까? 여러 해 전에 우리나라의 유수한 그룹의 회장이 자기 사무실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했습니다. 자살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가족과 함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돌아와서 자살을 하고 아침에 발견된 것입니다. 누가 오늘 저한테 간곡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장문의 편지를 보냈는데 ‘자살 시리즈’를 설교해 달라는 것입니다. 현대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고 자기 주위의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자살하는 광경을 보게 되는데, 어디에서도 기독교적, 성경의 관점에서 ‘자살은 이것이다. 우리가 이 죽음을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극복하자.’라는 선명한 복음과 삶의 지침을 제시해 주는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간곡히 당부하는 글을 보내왔습니다. 절망에 도달했다고 해서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 아무것도 안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계속 하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 여자에게도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아마 누군가가 자기가 준비한 나뭇가지 두 개 중 하나를 가져가려고 한다면 뭐라고 했을 것입니다. “여보시오. 그것은 내가 지금 찾아놓은 거란 말입니다. 저기 딴 데 가서 주우세요.” 그리고 ‘어느 그릇에다가 물을 끓일까? 밀가루 반죽에 기름을 섞어서 무슨 음식을 만들까?’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에게 삶을 이어갈 수 있게 하는 힘은 이미 완전히 고갈되고 사라졌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을 보아서는 신앙이 있는 여자였고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이후에는 죽을 것입니다.”라는 말이 자살을 하겠다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없어서 결국은 굶어죽고 말 것입니다.”라는 이야기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이렇게 깊이 절망하면서 자신과 아이의 죽음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삶의 소망이 끊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소망이 모드 끊어져 도달하게 된 상태를 가리켜 우리는 뭐라고 말합니까? 그것을 절망이라고 합니다. 희망이 끊어져 버린 것이 절망입니다. 절망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의 삶을 영위해 나가게 만드는 힘이 완전히 고갈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두 가지 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처음 만드실 때 흙으로 사람을 빚어서 육체를 만드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영혼과 결합시키셨습니다. 우리가 단일체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이 두 가지 힘을 적절하게 공급받음으로써 살아갈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육체의 힘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가 정신과 영혼의 힘입니다. 힘은 무엇입니까? 힘은 어떤 물건으로 하여금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하도록 만들어 주는 능력입니다.
예를 들면, 위에서 물이 흘러내려옵니다. 헤엄을 칩니다. 떠내려가지고 않고 위로 올라가지도 못하고 제자리에 서있는 상태에 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물에 떠밀려 가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쳐서 팔 다리에 힘이 빠지고 나면 갑자기 물살에 떠밀려 내려가게 됩니다. 이것이 힘입니다.
‘나는 이제 인류를 위해 내 자신을 불사르며 살 거야. 남북통일을 위해 내가 한 알의 밀알이 될 거야. 이 세상의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위해서 내가 재물이 될 거야.’ 이런 높은 가치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많은 정신과 영혼의 힘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평범한 사람들처럼 먹고 자고 직장 다니고 결혼하고 애를 낳으며 사람들과 살아가기 위해서도 엄청나게 많은 정신과 영혼의 힘이 필요합니다. 기본적으로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도 엄청난 양의 힘이 요구됩니다. 그 힘이 공급이 떨어지고 나면 그 다음에는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을 지탱할 길이 없는 한계가 찾아오게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시련과 환란이 올 때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들어갑니다. 평상시의 상황이 잔잔한 물위에 떠 있는 거라고 한다면 시련이나 고난, 인생의 위기가 닥쳐오면 급물살이 내려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냥 떠 있는 것은 쉽지만 물이 움직여서 나를 밀어내려고 할 때는 살아남기 위해 어마어마한 힘이 들어갑니다. 그런 힘이 없을 때는 어느 순간, 한계가 오면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떡과 기름이 떨어진 문제를 넘어 이미 모든 희망을 잃어버렸고, 결핍과 기근 속에서 자신의 삶을 지탱해 갈 수 있는 능력을 현저히 잃어버렸습니다. 그 속에서 여자는 “우리는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 죽을 것입니다.”라며 모든 희망이 사라진 현실을 담담히 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완전한 절망 속에 있는 여인이라면 하나님께서 오셔서 이 여자에게 무엇을 내놓으라고 하실 것이 아니라 도와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III. 순종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A. 엘리야를 먹이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인생의 절망 중에 있는 여자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제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엘리야를 먹이시는 하나님입니다.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떡과 고기를 먹으면서 생명을 연명했는데, 하나님은 시돈 땅의 사르밧 과부를 찾아가게 하셨고 한줌의 가루밖에 남지 않은 여자를 통해 선지자에게 음식을 제공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헤세드의 사랑의 측면에서 보면 여자에게 보태줘야 옳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가루 한줌이 남았는데 그것으로 떡을 만들어서 먼저 나에게 가져와보라 그러면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벼룩의 간을 빼 먹지.’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엘리야를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신 것이 엘리야를 위한 것이냐는 것입니다. 떡 몇 개를 먹어야 한 끼가 될 텐데 한 개만 만들어 오라고 요청합니다. “가루 한 줌을 가지고 떡 세 개를 만들어서 내게 먼저 가지고 와라. 그리고 나머지는 너희가 먹어라.” 이런 말입니다. 이것으로 보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위해 사르밧 과부를 사용하신 것 같지 않습니다. 더 기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갑자기 과부에게 빌붙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실 리가 없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선지자 엘리야에게, 그리고 과부에게, 오늘 성경을 읽으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자 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엘리야도 여자에게 가서 한줌 남은 가루로 자신이 먹을 떡을 만들어오라는 명령에 순종하고 싶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르밧 과부에게 큰 복을 내려 주시기 위하여 궁핍한 선지자의 처지가 여자에게 섬김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극도로 가난한 과부의 섬김으로 하나님이 큰 복을 부어주시는 것을 봄으로써, 이러한 기근과 재앙의 때에도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으셨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라도 그들을 먹이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선지자에게 일깨워 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B. 순종을 요구하는 엘리야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 있었던 엘리야는 여자에게 순종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위해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라.” 하나님이 이것을 분부하셨던 것 같습니다. 자기의 백성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선지자였는데 그까짓 떡이 자신에게 있었으면 이 여자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여자에게 작은 떡 한 개를 자기를 위하여 만들라고 합니다. 그것은 “한 인간으로서의 엘리야가 아니라 너를 공궤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라.”는 의미였습니다. 까마귀를 통해 기적의 떡과 고기를 먹이실 수 있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이토록 가난한 여자에게 누를 끼치지 않고도 선지자를 능히 먹이실 수 있는 위대하신 하나님이 선지자보다 더 궁핍한 여자에게 섬김을 요구하셨던 것은 섬김의 기회를 통해 여자를 진정으로 축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관심의 전환입니다. 엘리야를 만나기 전까지 여자는 나뭇가지를 주우면서 한 줌의 가루와 조금 남은 기름으로 한 끼를 만들어서 아이에게 먹이고 그 후에는 희망 없이 조용히 누워서 죽기를 기다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여자가 생각하는 절망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여자에게 요구합니다. “나를 위해 두려워하지 마라. 양식이 떨어져 죽을 것이라는 염려로 인해 두려워하지 말고 내 말대로 해라. 가서 날 위해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 가져오라.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해 만들어라.”
엘리야가 여자에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조용히 일러줍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는 신앙심이 있는 사람이었고, 그 말을 듣고 그에게 관심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떡을 아들과 자기를 위하여 만들려고 할 때는 이 떡이 마지막 희망이었고 이 떡을 씹고 삼키는 순간, 희망도 함께 넘어가고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는 비참한 처지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희망이 생겼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언젠가 다시 하늘이 열리고 비가 내릴 것인데” 언제가 될지는 모릅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3년 6개월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긴 세월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텐데 기근은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통에 가루가 없어지지 않고 병에 기름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희망을 여자에게 준 것입니다. 여자가 말씀을 받을 때, “아멘,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라는 확신에 불탔는지 아니면 한번 믿어보는 심정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뒤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 여자의 믿음이 수준 높은 인격적인 믿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이 생겼다고 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사회복지 모금회에서 하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아이와 함께 살면서 생활이 너무 어려워서 강도질을 하려고 품에 칼을 감췄는데 문자가 하나 온 것입니다. “20만원을 계좌에 입금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바꿨다는 광고 카피입니다. 그 광고를 보는 순간 ‘아, 그렇겠구나. 정말 그렇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인생을 모두 접고 완벽한 절망 속에 추락하는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었던 희망의 끈 하나가 끊어짐으로 말미암아서 절망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희망도 마찬가지입니다. 희망도 어느 한 순간,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 같은 희망이 생기기도 하겠지만 ‘내가 저렇게 하면 살 수 있을 것이다.’라는 실낱같은 희망 하나가 삶을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전쟁을 합니다. 그는 전쟁 통에도 책을 싸들고 다니며 읽었던 사람입니다. 전쟁에서 계속 패배를 하고 있던 어느 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데 거미 한 마리가 내려오더랍니다. 허공에 매달린 거미가 저쪽으로 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몸을 흔들며 가려고 하는데 안 됩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여덟 번, 아홉 번을 시도해서 간신히 거기에 달라붙어서 거미줄을 치는 것을 보았답니다. 그것이 특별한 계시입니까? 그런데 그 사람의 마음에는 이것이 계시처럼 “안 되는 것이 영원히 안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확인으로 밀려오는 것입니다.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은 아주 작은 것 하나에서부터 놀라운 희망이 생겨납니다.
엘리야에 떡 한 개만 만들어 오라는 황당한 요구가 여자의 마음속에 실낱같은 희망을 주었습니다. 비록 이 여자는 수준 높은 찬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선지자가 이 같은 순종을 요구했을 때 “선지자가 빌붙을 데가 없어서 가난한 과부의 한줌 남은 가루를 넘보느냐?”고 원망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C. 순종하는 사르밧 과부
엘리야의 요구를 받은 사르밧 과부의 태도가 다음에 나옵니다.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라” 기꺼이 엘리야의 황당한 요구에 순종하였습니다. 아마도 이 여자의 눈에는 엘리야가 요구하는 순종이 인간적인 욕심으로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한줌의 가루로 떡을 만들어 선지자의 명령대로 그에게 바쳤습니다. 궁핍한 중에 섬긴 것이 하나님께 커다란 복을 받는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각기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큰일을 하고 어떤 사람은 작은 일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큰 물질을 하나님께 바치고 어떤 사람은 지극히 적은 물질을 바칩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달란트가 아주 많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각각 다르기 때문에 외형적인 섬김 하나로 “저 사람은 참 많이 섬기는구나. 이 사람은 조금 섬기는구나.” 우리는 그렇게 평가하기 쉽지만 그것은 사람의 평가이고 하나님의 평가는 다릅니다. 누가복음 21장 4절에 보면 많은 사람이 와서 헌금을 하였습니다. 그때 초라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겨우 동전 두 렙돈을 집어넣었습니다. 많은 헌금을 바쳤던 사람들에게도 칭찬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이 이 과부를 드러내어 칭찬하셨습니다. “이는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유를 전부 바쳤느니라.”고 하시며 이 과부의 헌신을 지극히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돈 많은 사람들이 내는 큰 헌금보다 이 여자가 바친 두 렙돈이 크게 느껴졌기 때문에 이 여자를 그렇게 칭찬하시며 축복하셨는데 그도 역시 과부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는 방법입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 여자는 선지자 엘리야를 만나기 전까지 모든 관심이 자신의 궁핍에 있었습니다. ‘나는 이제 먹을 것이 다 떨어졌고 물 한 방울 길어올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의지할 곳이 없구나. 아들아, 우리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마지막 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뿐이란다.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구나. 이것으로 떡을 만들어 먹고 이후에는 아무 희망이 없으니 미끄러지듯 조용히 죽음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이 여자의 마음이었습니다. 결국은 그 여자에게 있는 마지막 남은 것이라고는 한줌의 가루와 약간의 기름이고 이것은 그의 남아있는 희망의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복 주시기 전에 “네가 가지고 있는 가루 한줌과 조금 있는 기름, 그것의 일부를 나에게 바쳐라. 내 종 엘리야를 너에게 보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마음속에 그리지 않습니다. 선지자가 와서 “먹을 것이 조금 있습니까?” “가루 한줌과 기름 조금이 있습니다.” “그것가지고 떡 하나만 만들어서 주십시오.”라고 하면 주님이 내려오셔서 “이 못된 놈아. 벼룩의 간을 빼어먹지. 네가 선지자가 되가지고 보태줘도 시원찮은데 그것을 달라고 하느냐? 내가 아까 까마귀를 통해 줬던 떡과 고기도 다 먹지 말고 남겨서 이 여자를 줘야할 처지인데, 어떻게 그것을 빌어먹겠다고 손을 내미느냐?” 하시며 선지자에게 호통을 치시고 밀가루 몇 포대, 기름 몇 통을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그림이야말로 하나님다운 하나님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본문은 이런 상식을 완전히 깹니다. 어디에서 이런 관점의 차이가 오는 것일까요?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모든 관심의 초점이 나 자신의 행복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먹고 나면 그 다음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입니다. 생명이 아니라 사망입니다.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언제 비가 다시 내릴지는 모르지만 우선 밀가루 10포대, 기름 5통, 물 20병, 이 정도면 일단은 안전하다는 느낌이 다가옵니다. 그 후에는 넉넉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참 감사하다. 주님이 이렇게 보내주시니까 살만하네.’ 잠시 동안은 ‘주님 정말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감사합니다. 제가 평소에 주님을 잘 섬기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궁핍한 때에 나 같은 사람에게 밀가루 10포대와 기름 5통, 물 20통을 보내주십니까?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입니다. 우리가 소위 이야기하는 인생의 문제, 문제의 해결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사고방식이 대게 이런 것입니다.
주님은 무엇을 원하셨을까요? 주님은 이 여자가 도와주지 않았을 때도 까마귀에게 명령하여 여인의 떡보다 더 맛있는 떡과 고기를 엘리야에게 주셨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공급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자에게 가서 마지막 남은 것을 바치라고 요구하실 때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은, 여자가 떡을 지어서 명령대로 선지자를 공궤하면서 가득한 궁핍과 고통 속에 마음이 눌어붙어서 가루와 기름 이외에는 보이지 않는 시야를 돌리게 하고 싶으셨습니다. 죽고 사는 것 외에는 보이지 않던 여자의 마음을 현실에서 뜯어내어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런 비밀이 그 속에 들어있었습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저의 21살 때가 생각이 났습니다. 제가 그 때 회심을 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이 세상이 천국같이 느껴졌습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때 저는 병약하고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아주 가난한 희망 없는 젊은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는 하나님과 연애에 빠졌습니다. 주일마다 가슴이 아팠던 것은 바칠게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씩 헌금은 하지만 무엇인가를 바치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 돈이 생겼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금은방에 갔습니다. 은으로 십자가 모양의 배지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포장을 해서 목사님께 선물했습니다. 그것이 제가 회심한 후, 헌금이 아닌 물질로서 섬긴 첫 번째 섬김이었습니다. 할아버지 목사님은 좋아하면서 오랫동안 그것을 옷에 꼽고 다니셨습니다. 그리고 자랑을 하십니다. “김남준 청년이 날 위해 해 가지고 왔다고.” 하면서 좋아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친척집에 갔는데 “할머니 잘 지내시냐?”고 묻습니다. 헤어질 때가 되었는데 봉지에다가 뭘 하나 담아 가지고 오시면서 “할머니 삶아 드려라.” 하십니다. 보니까 살이 퉁퉁하게 오른 생닭 한 마리가 그 속에 들어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러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은혜롭게 예배를 드리고 집에 가려고 하는데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 조안숙 집사가 있는데 지금 몸살이 심하게 나서 며칠째 못 먹고 앓고 있습니다. 조안숙 집사를 위해서 기도 합시다.” 하시는데 그 자매가 너무 불쌍한 마음이 듭니다. 예배가 끝나고 “목사님, 조안숙 집사에게 이것을 주세요.” 목사님이 그것을 받고 난감해 하셨습니다. 목사님은 그날 그 닭 한 마리 때문에 심방을 하러 가셨습니다. “하나님이 몸이 약하다고 큰 생닭을 한 마리를 주셨다.”고 하시며 솥에 넣어서 삶아서 준 이야기를 10년 동안 두고두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들판 길을 걸어서 교회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에 마음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그 후로 세월이 흘러서 직장인이 되고 교수가 되고 목회자가 되면서 그 닭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헌금과 구제를 했지만 그때만큼 가슴 벅찼던 때는 없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은 우리가 궁핍하고 아무것도 없는 처지를 알면서도 “너는 나를 섬겨라.”고 하십니다. 물질이 아니라도 시간이 없을 때 “봉사해라.” 물질이 없을 때 “헌금해라.” 재능이 없는데 “이 일로 하나님 앞에 충성하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있는 것들을 빼앗아 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낙심 혹은 궁핍 속에서 세상에 달라붙어 있는 염려와 근심의 마음을 뜯어 하나님께로 향하기 위해 우리에게 때로는 부당해 보이는 명령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나니까 티끌만큼도 내가 하나님을 섬겼다고 하는 자기 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나 같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하신 것 자체가 한없는 영광으로 여겨집니다. 하나님께서 궁핍한 중에 한줌의 가루로 음식을 지어먹고 죽어버리려고 했던 사르밧 과부에게 그것을 선지자에게 조금 나누어 주라는 명령을 하셨을 때 그것은 가혹한 뜻이 아니라 그 여자를 특별히 선택하고 지명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IV. 순종하는 자를 복 주심
바쁜 가운데 주님을 섬기는 것은 백수로 놀면서 섬기는 것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물질이 없는데 어떻게 십일조를 하나?’ 어떤 때는 야속해 보이기도 하고 ‘경제가 어렵고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 이렇게 섬겨야 하는 의무가 많은 현실이 너무 부담스럽다.’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르밧 과부를 통해 받으시고자 했던 것은 하나님이 기적적인 방법으로 얼마든지 선지자에게 공급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기근과 가뭄으로 도처에서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분께 순종하는 사람은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남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르밧 과부를 선택하여 당신을 섬기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부족한 것이 없는 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큰 희생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어떤 교회는 주일날 찬양과 함께 악기를 연주하지 않습니까? 관악기를 부는 한 사람이 기관지 확장증에 걸렸습니다. 의사가 “절대로 악기를 불지 마십시오. 안 그러면 당신은 죽습니다. 일체 호흡을 아끼고 기관지를 보호하지 않으면 기관지가 계속 확장되어서 나중에 성대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목을 아끼고 아꼈다가 주일날 변함없이 악기를 불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주치의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연주를 못할 텐데. 괜찮습니까?” “당신은 모릅니다. 예전에는 그냥 피리를 불뿐이었지만 지금은 나의 생명을 태우면서 붑니다. 그때마다 나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희열을 느낍니다.”
(찬양)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울뿐인 육신 속에 참 빛을 심게 하시고
가식뿐인 세상에서 밀알로 남게 하소서
V. 적용과 결론
사람은 그것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두 아십니다. 사람은 여러분의 섬김의 크기를 보며 하찮게 여길 수 있고, 여러분이 헌신하는 물질의 크기를 보며 우습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이 여러분에게 있어서 얼 만큼의 크기인지를 모두 아십니다. 우리는 사람 앞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그토록 여러분에게 무위도식하지 말라고 눈물로 외쳤습니다. 당신 한 사람이 안 움직인다고 해서 교회가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이 여자와 반대의 상태에 있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이 여자는 한줌의 가루밖에 없는 상태에서 그것으로 섬기라는 순종을 요구받고 그로 말미암아 커다란 복을 누렸습니다. 기적을 통해 기근의 시대에도 하나님의 은총은 남아있다는 신앙적인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무위도식함으로 그 확신을 잃어버립니다. 가지고 있던 신념도 상실합니다. 물길에 떠밀 듯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른 아침부터 깊은 밤까지 자신을 위한 염려와 근심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고 한 번도 마음이 시련과 고난, 위기와 근심에서 떨어져 나와 거룩하신 하나님을 우러러 보지 못합니다.
안 계신 곳이 없는 하나님이시니까 우리는 그 분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붙드시고 주관하십니다. 피할 수 없고 떠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해야 됩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지키고 싶어 하시고 우리를 복주고 싶어 하시고 평강 주시기를 원하시고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하는 삶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없는 것을 우리에게 받으려고 하시겠습니까? 교회가 너무 어렵고 가난하고 경제적으로 시달릴 때는 가난하고 돈 없는 게 그렇게 서러울 수 없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유산이라도 몇 십억 받았다면 무엇을 할까? 쓰레기 같은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 바치지 그것으로 무엇을 할까?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를 위해 기도하게 하셨지, “네가 100억 바쳐라.”는 명령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제게는 그것이 없는 걸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지 않은 것을 가지고 요구하는 분이 아닙니다. “목사님 저는 교회의 구제대상자가 되어야 할 판입니다. 재능으로 말하면 집에서 밥하는 것 외에는 아무 재능이 없습니다. 건강이라고는 매일 약봉지를 달고 수시로 병원에 입원하는 처지입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래도 우리에게 있는 것이 있습니다. 있는 것, 그중에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섬기도록 부르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주머니에 있는 것들을 빼앗아가려고 요구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세상 끈끈이로부터 뜯어서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내가 비록 가난하고 능력이 없고 영적으로 미약하고 육신까지 병들었어도 나에게 아직 하나님을 섬길 기회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우사 우리를 복주시기 위해 부르시는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들려오는 이야기는 어두컴컴한 이야기들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금년에 많은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헌금을 더 거두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교회는 어려우면 어려운 데로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 앞에 복 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그 길을 지극한 사랑의 마음으로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며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는 당신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고 수많은 까마귀들이 필요한 대상일 뿐입니다.”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을 듣고 보니 내 통에 한줌의 가루는 남았네요. 이것을 모두 털어서 주님께 바친들 주님께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마는 주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무위도식하지 않고 내게 있는 것, 남아있는 것,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 없는 사람들과 비교하면 그래도 나는 부유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한 줌의 가루밖에 되지 않지만 이것을 큰 것으로 받으시고, 드리는 나의 마음은 이것처럼 작지는 않사오니 주님, 내 마음을 받아주시옵소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은혜를 구한다면 주님은 반드시 여러분에게 복 주실 것입니다.
많은 이들의 복의 근원이 되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수많은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시고 불쌍한 자들을 구원하셨지만 많은 것을 가지고 그 일을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병이어로 뱃세다 광야에서 굶주린 무리들을 먹이실 때 주님은 가난한 아이의 도시락에 축복하셨습니다. 부자의 헌신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아이의 작은 도시락 위에 축복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린 아이가 먹어도 성에 차지 않을 정도의 작은 도시락에 축복하셔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복 주시는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고통에서 헤어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무위도식하지 말고 주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섬김 위에 하나님이 큰 복을 내리셔서 없는 자에게 섬기게 하시는 것은 있게 하려 함이고, 무능한 자에게 섬기게 하시는 것은 능력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따라서 올 한해 주님의 은혜와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밤을 지나는 빛의 자녀들 3 (2013.01.09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왕상 18:36-39) |
I. 본문해설
가뭄이 시작된 지 3년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때가 가까이 왔는지 엘리야에게 아합과 대면하도록 분부하셨습니다. 엘리야는 아합을 대면하기 위해 가고 있었고 그때 오바댜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캄캄한 배교의 시대에 신앙의 순수성을 잃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선지자는 아니었으나 철저한 배교의 시대에, 아합과 이스라엘을 반역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던 시대에 그는 누구도 할 수 없는 대담한 섬김으로 하나님께 봉사했습니다. 이세벨의 잔인무도한 핍박으로 수많은 선지자들이 도륙당할 때, 그는 100명의 선지자들을 모아 각각 50명씩 토굴에 숨기고 그들의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공급해주며 말씀의 종들을 보존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커다란 교훈을 줍니다. 이것이 설교의 본론은 아니지만 중요하기에 잠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오늘날은 말씀이 사라진 시대이고 교회다운 교회가 없는 시대라고 비난하고 돌을 던집니다. 그래서 나아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시대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다음세대에는 말씀의 빛이 온누리를 밝히려면 서로 비난하는 일에 몰두할 시간에 자라나는 자녀들을 잘 교육시키고 주의 종들이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추구하며 학문에 헌신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것은 결코 공허한 투자가 아니라 미래에 우리의 자손들을 위한 투자이고, 더 넓게 보면 미래의 보편교회를 주님 앞에 세우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교회 건물을 세우는 것과 같은 가시적인 사업을 하는 것들은 시간이 흘러가면 사라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는 것, 그들이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추구할 수 있도록 교회에서 어린 세대들을 신앙으로 단련하고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탐구하고 헌신하는 일에 몰두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결국 오바댜의 집안은 그 후에 하나님께 큰 축복을 받습니다.
엘리야는 담대하게 아합을 대면했습니다. 그리고 아합에게 제안을 합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모두 모으십시오. 그들이 섬기는 신이 참 신인지 아니면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인지 왕이 한번 판단하십시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세벨 같으면 단칼에 죽여 버렸을 텐데 아합은 그렇게 모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세벨같이 배교적인 사람은 아닌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온 지파에 지령을 내려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모두 모았습니다. 그랬더니 850명의 선지자들이 모였습니다.
엘리야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갈멜산에서 백성들에게 외쳤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역사의 비탈길에서 “오늘날 너희는 섬길 자를 택하라. 강 건너 저편에서 너희 조상들이 섬기던 신이던지 여호와 하나님이던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던 것처럼 그도 “누가 참 하나님인지 너희는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결단하라.”고 강력하게 촉구했습니다. 백성들은 그의 열렬한 연설에 대해 일체의 대답이 없었으니 그들 가운데 퍼진 배교가 얼마나 보편적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가뭄이 3년이나 지속되었고 선지자들은 대부분 모두 도륙을 당했습니다. 오죽하면 엘리야가 나 혼자 남았다고 말할 정도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색출되어 죽임을 당하는 핍박과 배교의 시대였습니다. 도대체 엘리야는 어디에서 그런 확신이 나왔는지 불타는 마음으로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아합과 이세벨의 정치적 지원을 받는 사람들과 대결하게 되었습니다.
II. 배교의 시대에 부흥을 주심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배교의 시대에 부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강력한 부흥은 언제나 신앙이 형식화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진정성이 사라지던 시대에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공동체적으로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은혜를 받을 때뿐 아니라 부흥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을 정도로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초월적인 사랑의 역사가 있습니다. 큰 회개와 영적인 각성을 동반하고 하나님의 거룩하고 초월적인 은혜가 강력하게 임하는 역사가 있습니다. 이때 여러분은 모두 죄 가운에 있거나 곤고하고 방황하며 하나님 앞에 불결했습니다. 어느 한 순간, 캄캄한 지성을 찢고 하나님의 진리에 선명한 빛이 나타났고, 그 거룩한 빛 앞에서 여러분은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발견하고는 눈물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돈이 없는 것, 얼굴이 못 생긴 것, 사업이 안 되는 것, 위기를 만난 것, 인간관계가 어려운 것, 등으로 괴로움을 당하며 내 인생이 불행하다고 생각했지만 찬란한 빛이 들어오는 순간, 가장 슬픈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내가 너무 불결하고 더러운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완전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지고 불순종하고 미끄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넘어지고 미끄러진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각성의 빛이 말씀과 함께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올 때 예전에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초월적인 은혜와 늘 경험한다고 말할 수 없는 주님과의 깊은 개인적인 만남의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관점의 차이입니다. 절망적인 관점에서 보면 교회의 역사가 계속 내리막길로 가고 하나님의 교회가 명맥을 이어갈 수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보면 부흥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메시지이고 부흥의 때가 가까이 다가왔다고 하는 하나님의 사인일 수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신앙이 다 내려가고 더 이상 붙들 것도 없고 ‘과연 이게 나의 믿음이었는가?’ 자신에게 묻고 싶을 정도로 인생의 비탈길로 내려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실 때가 가까이 왔다는 의미이고,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 외에 의지하던 다른 것들이 죽어버리는 시점이 우리에게 다가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망의 관점으로만 보지 맙시다. 모든 희망이 끝난 절망의 지점이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의 시작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영적인 부흥은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셨습니다. 그들은 매우 비참한 지경에 있었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이스라엘에서 완전히 맥이 끊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은 죽임을 당하고 850대 1의 결투가 갈멜산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한 사람이 어떻게 850명을 꺾고 이기리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큰 부흥을 주셨고 거기에서 850명의 이방 선지자들이 엘리야의 손에 모두 도륙 당했습니다. 850대 1의 싸움에서 승리함으로 수많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인생의 위기와 절망의 순간도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이제껏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위대함, 크신 은혜와 능력의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적어도 우리는 이러한 희망의 선상에서 인생의 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엘리야에게 큰 부흥을 주시고 배교의 세력을 단숨에 무찌르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면 엘리야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무엇을 했기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응답하셨는지를 보면서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찾고자 합니다.
A. 하나님의 영광을 구함
첫째는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했습니다. 3년 6개월 가까이 비가오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온 땅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비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을 열고 큰 비를 부어주셔서 모든 생명을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비를 먼저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36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하나님이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 내가 주의 종인 것,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라고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선지자가 가슴을 찢으며 하나님 앞에 구했던 것은 이스라엘의 육체를 살리는 비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언약백성으로서 하나님이 여전히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 경배 드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는 세 가지를 구했는데 첫째는 주님이 이스라엘 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도록 구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라가 컸습니까? 조상들이 위대했습니까? 그들이 자랑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 발달한 문명을 가진 가나안을 무찌르고 그 땅을 기업으로 얻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자신의 소유로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에 계셨고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말하기를 “너희가 생각해 보아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민족들 중 하나님이 이스라엘처럼 가까이 한 민족이 어디에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최고의 축복이었고 세상 어느 민족에게도 주시지 않은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배교와 가뭄 속에서 신앙을 거의 잃어버렸습니다. 빈들에 마른 풀과 거친 들판은 그들의 심령을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엘리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이심을 알려주시기를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인생의 캄캄한 밤중을 지나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관점을 자신의 고통과 괴로움 하나에 고정시키지 마십시오. 오히려 눈을 들어 거룩하신 하나님을 주목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부르시고 하나님이 영적인 이스라엘인 교회 가운데 계신 것이 얼마나 커다란 복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무한한 복을 누린 백성들이 세상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관점의 이동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의 전환을 가져옵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하나님의 종인 것을 알게 해 달라고 간절히 빌었습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죽임을 당했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참 신의 종인 것처럼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 당신의 성도들을 통해 알려지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분이니 당신의 종들과 사람들을 통하여 알려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선지자는 자신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종이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 달라고 간절히 빌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들에게 영적인 부흥이 있을 때, 백성들은 주의 종들을 크게 보았습니다. 신앙을 잃어버리고 패역할 때, 하나님의 종들을 하찮게 취급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 자기가 하나님의 종인 것을 보여 달라고 간절히 빌었습니다. 돈과 학식, 아합과 친한 정치적 권력, 이세벨과 맺은 인척 관계 같은 것으로 자기가 주의 종임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적인 부흥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종인 것을 드러내 보여 달라고 간절히 매달렸던 것입니다. 자신이 행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보여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찢어진 마음속에 하나님이 다시 살아계시기를 간절히 빌었습니다. 이미 배교는 전국적으로 전 이스라엘 중에 있었고 이것은 선지자가 한 사람씩 불러서 설득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영적인 위기가 닥치고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곳곳에 역사하는 힘이 느껴질 때, 목회자의 마음은 가난해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마음은 찢어집니다. 모두들 춤추고 노래할 때 주님을 아는 사람들은 교회 한 구석에서 눈물로 기도합니다. 그들은 그렇지 못한 성도들에 비해 완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도 넘어지고 쓰러지는 사람들이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영광을 앙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멀리 떠나 배교에 가까운 길을 가며 하나님과의 언약을 등지고 살아가는 족속들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대신 은혜를 구하지 않을 수 없는 갈망을 가졌던 것입니다. 교회의 위대한 힘은 바로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종인 것과 우리가 행한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지식이 주님의 교회에 가득하기를 갈망하는 성도들의 흐느끼는 기도 소리가 교회에 가득 찰 때 부흥은 가까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부흥은 수많은 사람들이 투표를 하고 결의를 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계획표대로 오는 부흥은 거의 없습니다. 부흥은 언제나 흐느끼는 몇 명의 하나님의 종들, 하나님의 자녀들의 신음소리와 같은 기도로 시작됩니다. 그들의 눈물, 가슴을 찢는 대리적인 회개, 회심하지 못한 영혼들을 위한 눈물과 교회를 향해 찢어지는 사랑은 하늘에서 부흥의 단비를 내리기 위한 증거의 구름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간절히 구하였고 하나님은 간절한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인생의 관점을 하나님께로 바꾸고 인생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
두 번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자신이 얼굴도 보지 못한 새카만 조상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자신이 보지 못한 오래된 조상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그들에게 언약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26장 12절에 보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최고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 때문에 예수님이 임마누엘로 오셨고, 예수님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 성령이 강림하셔서 우리 가운데 계시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습니다. “아합에게 가서 보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도 아합은 엘리야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합이 손끝 하나 까딱하면 그는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까지 자기를 홀로 버려두시지 않을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아합 앞에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 믿음이 갈멜산에서의 대담한 대결을 펼치게 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었고 갈멜산에서 850명의 선지자들과 겨룰 때에도 하나님이 결코 자신을 고아와 같이 홀로 버려두시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우리가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굳센 믿음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상황과는 상관없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자기를 간절히 찾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 이 두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떠한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그 분은 선하시다는 두 가지 사실을 놓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헤어 나올 수 있습니다. 아무리 웅덩이가 깊지 않아도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 죽을 때까지 거기에서 홀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수십 길 웅덩이에 빠졌다 할지라도 잡고 올라갈 수 있는 줄만 드리워져 있다면 우리는 몸을 묶어서라도 깊은 웅덩이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절망이 깊어서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의 줄이 없어서 절망합니다. 아무리 상처가 깊고 고난이 극심해도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보이면 그 희망의 줄을 붙들고 거기에서 벗어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웅덩이가 매우 얕아도 희망의 줄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거기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깊은 위기를 만날 때도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책 속에서 구체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을 때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와 유사한 상황에 놓인 예를 찾아라.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떻게 했을 때 실패했고, 어떻게 했을 때에 승리했는지를 교훈으로 찾으라. 그리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라.”고 말입니다.
깊은 시험에 들어 은혜의 단비가 그치고 흉년이 든 것처럼 삶이 황폐해질 때 우리의 삶은 모질게 엉킵니다. 그때 우리의 정신에는 혼란이 일어나고 깊은 영적인 침체가 고난 속에서 함께 찾아오게 됩니다. 상황이 어려워도 성령충만 하고 기도할 수 있으면 우리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오히려 자극이 되어 우리를 간절하게 기도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은혜가 많이 남아있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정직하게 앙망할 때, 안 좋고 실망스러운 일들이 생겨나고 고통이 찾아오면 이것을 피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이 상황들을 가지고 당신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드러내실까 한편으로 기대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힘이 없기 때문에 힘든 일이 일어나면 일차적으로는 화가 나고 괴로움을 준 사람을 찾아내고 그 사람에게 모든 탓을 돌리면서 원망하고 미워하게 됩니다. 사람을 미워하면 마음이 굳어지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강퍅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런 강퍅한 마음으로는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원망의 말이 쏟아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되돌아 자신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그 말에 합당한 마음이 됩니다. 그 사람의 정신과 모든 것들이 악과 더불어 부대끼고 고통을 받으면서 자신도 악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악하고 더러운 사람이 되어가면서 자신을 망치게 됩니다.
질병 중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면역력이 사라졌을 때 찾아오는 바이러스성 질환입니다. 최근에 황수관 박사가 돌아가셨습니다. 꾸준히 운동도 하고 건강관리를 잘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그렇게 일찍 돌아가시리라고는 생각도 안했습니다. 건강 전도사 역할을 하시며 아주 즐겁게 사셨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물질욕심도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굉장히 많은 돈을 사회에 환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패혈증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패혈증은 균이 혈액 속에 침투하는 것입니다. 혈액은 온 몸을 도는 물질입니다. 어디 한 군데에 머물러 있으면 괜찮은데 이것이 온 몸을 돕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바이러스가 들어와도 혈액 안에서 백혈구 같은 것들이 작용을 해서 잡아먹어 버립니다.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동원령을 내려서 백혈구가 새카맣게 몰려들어 잡아먹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피곤하고 힘이 듭니다. 그런데 그럴 수 있는 면역력이 현저하게 고갈이 되었습니다. 면역력이 고갈되면 겉으로 표가 나지는 않습니다. 바이러스가 침투하면 대상 포진 같은 증상이 몸에 나타납니다. 대상포진은 굉장히 위험한 병입니다. 이것은 당신 몸에 면역력이 고갈되었다는 사인입니다. 그때 바이러스가 침투해서 혈액 속으로 들어옵니다. 그 균이 돌아다닙니다. 그러다 균이 맛있게 먹는 부위에 집중적으로 달라붙습니다. 몸살 나면 뼈 마디마디가 쑤시지 않습니까? 아무데나 쑤시는 것이 아니라 뼈 마디마디가 쑤십니다. 혈액 속에 있는 바이러스들이 우리의 몸의 연약한 부위에 달라붙어서 뜯어먹는 것입니다. 한번 손상되면 어떤 경우는 회복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게 삽시간에 퍼져서 불과 24시간에서 36시간 안에 절명하는 무서운 병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난관과 시련을 만나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고 인정해 주는 사람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싫다는 사람도 만나고 내가 마주하기 싫은 상황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것은 죄가 세상에 들어온 다음,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숙제입니다. 인생에서 수많은 것들을 만날 때 이것을 이겨낼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저항력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평소에 신앙생활을 잘해야 합니다. 위기가 닥쳤을 때 금식하고 기도원으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평안할 때 마음의 중심을 흩트리지 않고 주님께 모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불순종한 것을 회개하고 은혜를 구하며 새롭게 신앙의 길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엘리야는 주님이 이스라엘을 고아와 같이 버리지 않으시고 당신의 종을 내치지 않으실 것이라는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그 약속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인생의 밤을 지나는 여러분에게는 어떤 약속이 있습니까? 그 약속을 발견하고 굳게 붙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환란이 올수록 예배 잘 드리십시오. 거기서 주님 만나면 해결의 길이 보입니다.
C. 하나님의 능력을 구함
세 번째는 하나님의 능력을 구했습니다. 37절에서 선지자는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 내게 응답하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불을 구한 게 아니었습니다. 불을 내리는 신이 여호와인줄을 알라고 하고는 하나님 앞에 불을 내려 달라고 기도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구했습니다.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내시도록, 굳어질 대로 굳어져 세상에 달라붙어있는 이스라엘의 마음을 뜯어서 하나님을 향해 새롭게 하도록 간절히 빌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선지자라고는 나만 홀로 남았거늘 바알의 선지자는 450명이로다” 이것이 그에게 낙심할 이유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들과 맞설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것이 선지자에게 강력한 힘을 주었습니다. “육신의 힘, 정치적인 힘으로는 450명을 꺾을 수 없으니 하나님이 나에게 능력을 주셔야 합니다.”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선지자가 간절히 구했던 것은 바알 선지자 450명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주님을 아는 참된 지식에서 벗어나 배교의 길을 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향하여 찢어지는 마음으로 이들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돌이켜 주시도록 간절히 빌었고, 그것이 선지자로 하여금 하늘로부터 오는 큰 능력을 구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선지자를 보십시오. 초라하지 않습니까?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이세벨과 아합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어떤 면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원, 혹은 묵인 속에서 갈멜산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들의 후원자들이 지면에 가득하였습니다. 아마 이들 중 누구도 밥을 굶주리다 온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떡 한 조각 얻어먹고 목숨을 연명하다가 온 사람이었습니다. 어디에도 엘리야의 동료는 없었습니다. 이세벨과 아합은 그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사면을 돌아봐도 엘리야의 편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절망할만한 상황이지 않습니까? 낙심할만한 상황이지 않습니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상황 뒤에 숨어버리고 싶은 지금 사태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디서 이런 놀라운 힘이 나왔을까요? 그는 오히려 자신 홀로 남았기 때문에 하나님 한분 이외에는 자기를 지켜주실 분이 없고 이 난관을 헤쳐 나가도록 붙들어 주실 분이 없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며 하나님의 능력을 구했습니다. 하늘을 찢고 땅을 가르는 능력을 구하기보다 먼저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때리고 녹여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기를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희망 없는 배교자들을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시는 위대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이 간절한 기도 속에서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믿음을 가졌더니 850대 1이라는 이유는 그를 좌절하고 주저앉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간절히 붙들게 하고 의지하도록 했습니다. 주님이 자기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신뢰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기 까기 보호하고 지켜주셨던 그 사랑을 거두지 않을 것이라는 깊은 확신을 가지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아무 희망이 없을 것 같은 절망적인 때를 얼마나 많이 경험합니까? 아무리 돌봐도 변화되지 않는 영혼들,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상황을 개선해 보려고 용을 써 봐도 굳센 밧줄에 묶인 것처럼 잠시 움직이다가는 다시 뒤로 자빠지고 마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발견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 없이 몇 번을 그렇게 시도해 보다가 어느 순간에 ‘이렇게 사는 것이 나의 팔자구나.’ 하고 주저 앉아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이 선지자에게는 850대 1의 현장과 모든 백성이 탈교의 길을 가고 있는 배교적인 상황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안 된다고 간절히 매달리도록 만든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을 향해 간절히 매달리는 한 사람의 마음속에 타오르는 불꽃과 같은 열망을 사용하셔서 3년 6개월 동안 닫혔던 하늘의 문을 열고 단비를 내리기 전, 불을 먼저 내리시고 모든 것을 태워 탈교의 역사 가운데서도 여전히 살아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입증해 보여주셨습니다.
D. 하나님께 헌물을 드림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능력을 달라고 매달렸는데 단지 기도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헌물을 드렸습니다. 주님께 바쳐질 제사를 올렸던 것입니다.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개의 돌로 제단을 쌓고 그 위에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각을 떠서 올려놓았습니다. 밑에는 땅을 파서 곡식이 약 15L 정도 들어갈 수 있는 홈을 팠습니다. 아마도 물이 흘러내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12지파를 상징하듯, 4통씩 3번에 걸쳐 12통의 물을 그 위에 흠뻑 부었습니다. 여기에 불이 붙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열고 부흥을 주셔서 당신의 불을 이 제단 위에 내리셨습니다. 그 불은 돌과 흙과 나무와 물과 송아지를 모두 태워버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만 할 뿐, 헌신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헌신할 뿐, 부흥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를 쓰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매달려 기도하라는 것은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도움을 구할 데를 찾고 여러분이 벌어서 먹을 수 있는 생업에 종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그러한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말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심으로써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분께 간절히 매달려야 합니다. 그렇게 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과 실제로 살아가는 것이 융합이 되면서 우리를 시련에서 건지고 교회를 영적인 침체에서 하나님이 회복시키십니다.
III. 불로 내린 하나님의 응답
선지자 엘리야는 혈혈단신으로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과 맞섰습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헌신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며 하늘로부터 오는 불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은 3년 6개월 동안 비를 내리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재앙을 그치고 비를 내리시기 전, 엘리야라는 사람을 통해 당신의 큰 권능을 보여주심으로 불로 내리시며 하나님의 응답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위대한 부흥을 간절히 구하였던 엘리야 한 사람의 간구는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여호와의 신앙이 모두 꺼져가고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절망이 밀어닥칠 때 하나님께서는 갈멜산의 불기둥을 통하여 당신이 만천하에 살아계신 것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자신의 약속과 관계를 끊어버리지 않은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엘리야는 살기 위해 아합에게 나아간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 나아갔고 비를 내리기 위해서 나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기를 바라며 나아갔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두 가지 모두를 엘리야에게 주셨습니다.
IV.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펼쳐진 현실 앞에서 두 가지를 적용함으로써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먼저 여러분은 인생살이에만 매여 있는 마음을 뜯어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교회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가지셔야 합니다. 지금 이 세상의 어두운 밤이 어디쯤 왔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어느 곳에도 소망이 없다고 말하는 무신론과 불신앙의 시대에 하나님이 교회를 남겨두신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물어야 합니다. 내가 한 개인이 아니라 머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져 있는 하나의 몸으로서 하나님을 멸시함이 가득 찬 이때에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소명에 불타는 마음을 가지고 교회와 조국 교회, 나아가서는 우리 시대의 보편교회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의 운명은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운명과 나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교회들이 주님의 몸과 살이기 때문에 교회가 잘못 될 때 주님은 교회 때문에 아파하시고, 교회가 영적으로 번영하고 올바를 때 주님은 교회를 통해 기쁨을 얻으십니다. 여러분은 교회와 목회자들, 조국교회, 이 땅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시비하고 욕하는 대신 주님이 죄인들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셨던 것처럼 조국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품어야 합니다. 작은 교회라도 무시하거나 얕잡아보지 말고 모두 끌어안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사라지고 하나님을 진실하게 경외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는 이 때, 돈과 인간의 지식과 변론으로는 이 상황을 개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하늘을 열고 강림하사 우리 모든 사람들 가운데 찾아오시고, 대적하는 자들을 불의 섶과 같이 사르시며, 독사의 자식과 같은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녹이시고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들이 어두운 세상의 빛이 되기를 하나님 앞에 빌어야 합니다.
이것을 개인의 삶에 적용해 봅시다. 엘리야는 좌절할 이유가 여러분보다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가족도 없습니다. 동료도 없습니다. 친구도 없고 자기를 위해 기도해 줄 선지자도 하나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목숨은 간사한 이세벨과 아합에 손끝 하나에 달려 있었습니다. 이 정도면 주저앉아서 눈물을 흘리다가 절망할만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선지자는 이러한 시대를 살면서 터득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찬양)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구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입니다. 성경에서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고난을 받지 않는다거나 항상 달콤한 일만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고난을 받지만 승리한다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신앙의 길을 걷는 사람도 때론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하늘의 위로가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죄인으로 방황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 홀로 세상에 버려진 줄 알았는데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 같은 죄인을 죄악의 깊은 계곡에서 건져내기 위해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셨다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진노의 자식들이었으나 주님이 당신의 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고, 하나님의 무한히 크신 사랑과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속죄의 피를 우리의 가슴에 발라 구원해 주셨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너무 감사해 이제는 주님의 뜻대로 살겠노라고 다짐했을 때, 세상에 기대를 걸고 삶을 살기로 다짐했습니까? “이제 예수를 믿었으니 복만 받게 될 거야. 부자가 되겠지?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도 만날 거야. 예쁜 아내도 만나겠지? 신나는 쾌락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이런 기대를 품었습니까?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곤고했던 인생의 날에서 돌이켜 깊은 웅덩이에서 헤어 나와 주님의 품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의 간절한 소원은 이 땅에서 얼마를 살게 하시든지 살아있는 날 동안 주님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이제껏 우리가 살아온 인생의 날들은 좋으신 주님 대적하고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배반하면서 살았던 인생이었습니다. 그때는 어둠 속에서 무지하고 어리석었기 때문에 그렇게 밖에 살지 못했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으니, 그것이 1년이든, 2년이든 잠시 머무는 세상에서 주님을 섬기며 살 기회를 달라고 구했습니다. “예전에 나는 악한 자요 하나님 앞에 배신한 자요 주님의 은혜를 거절한 포악한 죄인이었으나 이제 거기에서 돌이켜 모든 것을 알게 되었으니 나에게 하나님 당신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주시든지 어두운 세상에 불꽃처럼 타올라 주님께 보여드리는 삶을 살도록 도와달라고, 그것 때문에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으니 이제 나는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위해 사는 것이라고” 우리를 타이르며 인생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정오까지 울부짖으며 자신의 몸을 상처를 내어 피를 보였으나 응답이 없었습니다. 저녁때까지 응답이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소제 시간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절히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두움이 내리기 시작하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찬란한 불꽃이 제물을 향해 내리 꽂혔습니다. 그리고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들이 타오를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는 불신앙도 함께 태워지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인생의 어두운 밤은 반드시 태양이 와야지만 빛을 비추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제 3의 불이 있습니다. 그 불은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놓고 교회의 역사를 바꾸어 놓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똑같은 인생의 길을 걸어왔던 신앙의 동료로서, 여러분을 목양하도록 불러주신 하나님의 종으로서 모든 사랑으로 여러분에게 간절히 호소합니다. 절망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절망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편입니다. 우리가 잠시 지고 있고 침체에 빠져있고 재앙과 어려움을 만나서 생명을 부지하기 힘든 메마른 땅에 있을 때, 주님이 우리에게 진노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을 짓밟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고는 여러분이 주님께 돌아올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굳어진 마음을 때리고 계시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 돌아갑시다. “나를 위해 자기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랴.” 이런 깊은 확신을 가지십시오. 돕는 사람 없이 홀로 갈멜산에서 주님을 찾았던 엘리야보다는 여러분이 낫지 않습니까? 여러분 위해 기도하는 가족들이 있고,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 눈물 흘리는 목회자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많은 허물과 약점들을 받아주는 교회가 있고 예수님이 계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우리를 떠나도 우리는 주님을 떠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놓아 주시지 않습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주님께 돌아와 큰 부흥을 경험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절망 속에 이 집회에 참석했을 때 좋으신 하나님을 만났다고 기쁨으로 간증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습니다.
인생의 밤을 지나는 빛의 자녀들 4 (2013.1.10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침체의 밤을 벗어나라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왕상 19:1-10) |
I. 본문해설
엘리야는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더불어 갈멜산에서 대결했습니다. 그는 거기서 하나님의 큰 부흥으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이방 선지자들을 모두 도륙하였습니다. 아합은 이세벨에게 달려가서 모든 일을 이야기하였고 이세벨은 분노가 하늘 끝까지 다다랐습니다. 이세벨은 치열한 분노 속에서 엘리야에게 사신을 보내 “내가 반드시 너를 죽여 버리겠다.”고 통보했습니다. 단 하루 만에 그렇게 하겠다고 작정하였습니다. 이것을 기점으로 선지자는 깊은 두려움에 쌓였고 유대 땅 브엘세바로 도망을 갔습니다. 거기에 자신을 따라다니는 종자를 두고 자신은 하룻길쯤 광야로 피난하여 로뎀나무 그늘 아래서 죽음을 구했습니다.
로뎀나무는 말이 나무지 빗자루 엎어놓은 것 같은 작은 나무입니다. 볼품이 없고 키가 작고 빗자루를 거꾸로 세워놓았는데 빗자루가 약간 우거졌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몸 하나를 피할 수 있는 충분한 그늘이 지는 것이 아니라 머리만 간신히 햇빛을 피할 수 있을 정도의 아주 볼품없는 나무입니다. 광야에서 자라나는 나무이니 잎이 무성한 나무가 아니었습니다. 온몸을 피할 처지도 못되는 나무 아래 주저앉아 낙심하며 이제 충분하오니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죽음을 구했습니다.
절망 속에서 선지자는 깊이 잠이 들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기사 천사를 보냈고 천사는 마치 그가 불쌍하다는 듯이 어루만지며 일어나서 먹으라고 권했습니다. 일어나서보니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천사의 분부를 받고 일어나 호렙산으로 향하게 됩니다. 40일을 걸어가서 그는 거기서 하나님을 대면합니다.
II. 침체 속에 잠든 선지자
우리는 어제의 엘리야와 이 사람이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고 믿어질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차이를 경험합니다. 갈멜산에서 이방 선지자와 850대 1로 대결했던 선지자에게는 어떠한 두려움이나 절망, 무기력, 외로움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담대했고 손끝 하나면 자기를 죽일 수도 있는 아합이 눈앞에 있는데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아합에게 명령하듯 이방 선지자들을 모두 모으라고 지시했고 아합은 그 선지자 850명이 엘리야의 손에 도륙을 당하는 광경을 그냥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담대하고 위대한 선지자가 지금은 비교할 수 없이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침체 속에 잠든 선지자 엘리야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 두 그림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자에게 있어서 영적인 호황의 때와 침체의 때가 종이 한 장 차이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때는 그렇게 강했던 사람이 다른 때는 그토록 약할 수 있으니 이런 강함과 능력이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연약하고 침체에 빠져 하나님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는 모습이 예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죄 된 인간의 본래의 모습입니다. 능력 있게 살아가고 하나님 앞에 기품 있게 행동하고 담대한 용기를 가진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에 굳게 붙들려있는 때입니다. 이 침체 속에 잠들어 있는 선지자 엘리야는 크게 4가지 상황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A. 두려움
첫째는 두려움입니다. 3절에서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도망하였다”고 그랬습니다. 그는 이세벨로부터 너를 반드시 죽이고 말리라는 통첩을 받았습니다. 엘리야가 이방 선지자들을 죽인 것 같이 단 하루 만에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어제까지도 두려움 없이 담대했던 엘리야에게 영혼의 침체가 찾아오자, 두려움이 물밀 듯 밀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도망치게 되었습니다.
담대함과 신앙의 강함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느냐의 차이입니다. 인간은 연약하기 그지없는 사람일 뿐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현실사이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신앙에서 떠나고 은혜에서 멀어지면 우리는 세상을 향해 너무 약합니다. 바로 전까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고 침체에 빠지고 나니 세상에 대해서 약해진 것입니다.
선지자에게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물밀 듯 밀려왔습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리신 분이 하나님이었고 이방 선지자 850명을 도륙하게 하셨다면 엘리야 한 사람을 지키시는 것이 하나님에게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은혜에서 멀어지고 침체에 빠지게 되니까 세상을 향해서 약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강퍅한 마음이 생겨납니다. 자기를 이런 상황에 두신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고 죽음을 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게 되면 정반대가 됩니다. 세상을 향해 아주 담대해집니다. “세상이 내게 어찌하랴?”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유명한 에스더의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면 또한 주와 함께 살리로다”라고 바울은 고백한 것처럼 세상을 향한 담대함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아주 약한 마음이 됩니다. 한 순간도 주님의 손에서 놓일 수 없고 주님이 나를 놓으시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세상은 나를 욕하고 비난하며 심지어는 순교의 상황이 온다 할지라도 무섭지 않습니다. 삶과 죽음이 주님의 손에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두려운 것은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면 어떻게 하나? 나의 마음의 묵상과 입술의 모든 말 중 주님의 마음에 근심이 되는 것이 있으면 어떻게 하나? 내가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주님의 이름에 누가 된다면 어떻게 하나?’ 이런 것이 자신의 애를 태우고 두렵고 떨리도록 만듭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해 약한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약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해 강하고, 하나님을 향해 약한 사람들은 세상을 향해 강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은혜에 멀어져 침체에 빠지고 나니까 두려움이 밀려와서 그를 장악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약한 것은 본래의 모습이고, 주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실 때만 세상을 향해 담대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니 세상이 나를 어떻게 하랴?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무엇도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끊을 수가 없느니라.’는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떠나면 마음에 평강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밀려오기 시작합니다. 수시로 이런 두려움을 느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 강하게 붙들려 있던 영적인 충만함에서 멀어졌다는 것을 영혼이 알고 하나님의 보호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땅의 자원에 호소합니다. 권력을 찾고 물질로써 자신의 근심과 염려를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로 해결할 수 있는 염려와 근심은 우리의 인생을 뒤흔들어 놓는 결정적인 근심이나 염려가 아닙니다. 진짜 우리의 인생을 송두리째 뿌리 뽑고 파괴하고 흔드는 두려움은 돈이나 권력과 같은 것들로 땜질해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깊은 밑바닥에 있는 어떤 인간도 회피할 수 없는 삶의 무게와 현실성, 이런 것들은 물질이나 돈 몇 푼 가지고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합니다. 그러나 먹고 살 것이 없어서 자살하는 사람들은 소수입니다. 그것은 자살을 하도록 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되지 않으며 하나의 동기를 제공했을 뿐입니다. 끝없이 입사 원서를 집어넣어도 계속 낙방을 했고 빚이 많고 가난하고 어렵다는 것은 그를 낙심시키고 절망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삶의 현실성이라는 버거운 삶의 무게가 어느 한 순간 하나도 감축되지 않고 현실적으로 강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자원이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부흥을 일으키는 도구가 되었던 선지자도 이세벨의 한 마디에 낙심하여 먼 길을 도망가 로뎀나무 그늘 아래서 “이제 충분이 살았으니 나를 죽여주십시오.”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며 잠에 빠질 정도였다면 그 두려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영적인 침체의 특성입니다. 영혼의 침체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항상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악인의 마음속에는 평안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을 이기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비결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바로하고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면서 내가 어디에 있든지 나의 일생이 주님의 손에 붙잡혀 있다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세상을 향한 두려움을 이기고 그분의 처분에 자기 자신을 기꺼이 맡길 수 있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영혼의 침체에 빠져있다면 그것은 매우 나쁜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염려가 우리의 키를 한자나 더 자라게 할 수 있습니까?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깊이 파고들어 골수와 관절을 녹입니다.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분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 수 있는 마음의 모든 동기를 송충이처럼 다 파먹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마귀로부터 오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진 양심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굳게 붙들고 두려움을 이기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아주 중요한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면 나는 충분하다고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렇게 되어야합니다. 저것은 저렇게 되어야합니다.”라는 자기의 정욕적인 아집을 다 버리고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며 그분의 주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선하신 분이시고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으로 나를 건지신다는 두 가지 사실을 굳게 붙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대로 되면 나는 충분하다.’는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고치고 바꾸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B. 절망감
두 번째는 절망감입니다. 4절에서는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않습니다.” 절망은 미래에 대한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것인데 과거에 대한 망각을 통해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은혜를 주사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는가? 하나님이 어떤 능력을 내게 베풀어주셔서 이보다도 더 어려운 치열한 고난 속에서 나를 지키고 보호해 주셨는가를 망각함으로써 절망의 끝자락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잊지 말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망각하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 우리의 생각이 아주 진취적으로 변합니다. 하나님의 위해서 무엇을 할까?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까?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복을 하나님을 위해 어떻게 쓸까?
(예화) 이번에 한경직 목사님과 늘 같이 영락교회를 섬기던 장로님이 돌아가셨답니다. 그분이 한경직 목사님을 만나서 헌금한 돈이 3000억이라고 합니다.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면 언제나 이 사업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도록 자신을 부르셨다는 소명에 불타는 삶을 일평생사신 것입니다. 훌륭한 목사님이 있기까지 그런 훌륭한 장로님들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게 되면 삶의 목적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진취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한 진취적인 힘은 회고에서 나옵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항상 회상합니다. ‘나는 한때 세상에서 유리하던 쓰레기와 같은 인간이었는데 주님이 나같이 더러운 찌끼와 같은 인간도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를 삼아주셨습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2000년 전에 돌아가셨는데도 지금 내 앞에서 죽으신 것처럼, 30년 전에 회심했는데도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지금 회심하고 있는 것처럼, ‘이 더러운 죄인을 위해 주님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을 주셔서 여기까지 나를 인도하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지금보다도 더 거친 광야의 길, 사망의 음침한 계곡이 있었지만 거기서도 해를 당하지 않도록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지켜주셨습니다.’라는 감사의 회상이 계속됩니다.
침체에 빠지면 이것을 잊어버립니다. 침체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미래의 희망이 없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이 이보다 더 심각한 난관에서 어떻게 나를 건지고 도우셨는지를 잊습니다. 역경을 당한 자녀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어떻게 건지고 보호하셨는지 성경이 말하는 바에 귀를 막고 눈을 감습니다. 그리고 자기 한 사람에게 깊이 몰입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물과 같습니다. 평평한 곳에 물을 쏟으면 물이 이리저리로 흐르는 것처럼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속에 부어지면 나의 지성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생각들이 자신 안으로 몰입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흘러갑니다. ‘저 사람은 괜찮을까? 나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도 어려움을 당하지만 저 사람은 더 많은 고통을 당하는데 위로가 필요하지 않을까? 저 가난한 사람은 물질이 필요하지 않을까? 저 외로운 사람은 친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저 무지한 사람은 내가 가르쳐주어야하는데.’ 사랑은 생각의 방향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은혜를 받으면 원리적으로 절망할 수가 없습니다. 절망이라는 것은 의식의 극소화입니다. 의식이 넓은 원을 그리면 고려하고 생각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 친구, 할아버지, 병상에 계신 어머니, 동생, 교회, 우리 구역원, 우리 동기, 동창, 교리반 동창, 이런 것까지 다 생각이 납니다. 그러면서 서로 사랑하고 도와주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침체에 빠지게 되면 원이 쪼그라들면서 마지막에는 자기 아내가 가까이 오는 것도 싫고 자기가 그렇게 친하던 친구한테 전화가 와도 안 받습니다. 자기 자신한테 극소화시켜 동전보다도 더 작은 영역으로 몰입을 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에 대해서도 골고루 관심을 갖느냐? 아닙니다. 머리에 폭탄 맞은 것에 관심을 안 씁니다. 지저분해도 관심을 안 씁니다. 어느 것 하나에 깊이 몰입하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어떻게 은혜를 주셔서 인도하셨는지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엘리야같이 하늘이 낸 선지자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위대한 선지자가 구약의 역사에 몇 명이나 있었습니까? 그러한 그는 “하나님 이제 생명을 거두어주옵소서.”라고 기도를 했지만 만약 그에게 신앙이 없었다면 자살할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까지 될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강함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그는 로뎀나무 그늘 아래로 갔습니다. 로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듬성듬성 있고 정말 빗자루를 거꾸로 엎어놓은 것 같은 모양이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느티나무 같이 시원한 그늘을 만드는 큰 나무일 것 같은데 어린애 양산만한 나무입니다. 하체는 뜨거운 태양에 노출되고 면상만 그늘에 가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것은 현실을 감당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완전하게 잃어버린 상황을 보여줍니다. 이것을 통해 결국 우리들이 완전히 절망하지 않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엄청난 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에게 두 가지 절망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 앞에서 하나님을 향해 절망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빛에 비추어 자기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이고 얼마나 하찮은 인간인지를 절실하게 깨닫게 됨으로 말미암아 절망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도 교인을 심방하게 되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심방을 하다가 지식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한 번도 제가 지식을 습득하기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공부를 하든 무엇을 하든 ‘내가 아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가. 말씀의 세계를 비롯해 모든 지식의 세계는 얼마나 끝이 없는가.’를 생각하면 성경을 연구하다가도 눈물이 나고 세상의 학문을 보다가도 눈물이 납니다. ‘나는 몸부림을 치고 애를 써도 겨우 이해할까 말까하는 것들을 저들은 찾아내서 어떻게 크도록 거대한 학설을 만들었을까? 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끝없는 지성의 크기와 저들의 지성의 발자취가 이어져 온 끝없는 길이 앞에서 도대체 내가 안다는 것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그러고 나면 눈물이 핑 돕니다. 주위에서 나에 대해 조금이라도 좋은 이야기를 하거나 높이는 이야기가 들리면 토할 것 같습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책을 읽고 은혜를 받은 이야기를 장문의 편지로 써서 보내왔습니다. “저는 당신이 알고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답장을 썼습니다. 저는 한 번도 목회가 적성에 맞는다든지 설교에 관록이 붙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목회는 언제나 내가 원하지 않는 가슴앓이이고, 설교는 내 마음에서 언제나 이국의 언어와 같습니다. 한 번도 제 자신이 이 일에 적합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절망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편으로 참 좋은 것입니다. 이렇게 절망하고 나면 ‘나 같은 인간을 왜 여기에 두셨습니까?’하는 원망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마음속으로 눈물만 계속 흐릅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세상이 나를 칭찬하고 내가 한 일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하는 이야기가 역겹습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며 여기 서있다는 사실 자체가 구토가 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자신에 대해 깊이 절망하고 나면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찬양)
주 없이 살 수 없네 죄인의 구주여
그리고 나면 마음속에 기도가 꽉 찹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게 절망할 때, 기도의 언어가 꽉 차올라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나 반대의 절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에게 대해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 대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 감정을 끝까지 가지고 가면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하나님께 욕을 하고 갈기갈기 허공에 찢겨져 죽어버리고자 합니다. 이것이 절망이 우리를 데려가려고 하는 끝입니다. 욥의 아내가 욥에게 그러했습니다.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려라.” 이것이 절망의 끝입니다. 이것은 정말 잘못 된 것입니다.
동전처럼 집약되어서 나 하나만을 쳐다볼 때는 인생의 의미를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내 옆에 있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내가 돌보아야 할 사람들, 내가 관계를 가져야 할 사람들, 하나님이 나에게 돌보고 의지하며 살도록, 사랑하도록, 허락하신 사람들을 바라볼 때 인생의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지랖 넓은 사람들은 자살을 잘 안합니다. 신앙을 떠나서 일반적으로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깊이 집중하는 사람들에게 우울증이 많이 옵니다. 인간은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8절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간다고 할 때, 불안하고 염려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우리는 제대로 된 아버지를 본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를 닮게끔 창조되었는데 죄가 들어온 이후에는 아버지 상이 하나님 아버지의 상으로부터 많이 멀어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아버지 상과 우리가 말하는 아버지 상은 많이 다릅니다. 성경에서 그리는 아버지는 자녀에게 엄격할 뿐만 아니라 감추어진 엄마 같은 사랑을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 공의와 사랑의 놀라운 조화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호세아서에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녀 된 백성들을 치고 싸매시고 때리고 고치시십니다. 우리말로 하면 자식을 회초리로 때리고 돌아서서는 회초리 맞은 자식보다 더 아파하며 마음을 찢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또 탕자의 비유에서 잘 표현됩니다. 자식이 집을 멀리 떠났습니다. 그러면 눈이 짓무르도록 밖에 나가서 기다리는 것은 누구입니까? 엄마입니다. 그런데 거기서는 엄마를 등장시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어머니, 아버지를 모두 합친 것 같은 아버지의 엄격함과 어머니의 사랑을 함께 가지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예화) 얼마 전, 황수관 박사가 돌아가셨습니다. 안타깝게 생각을 합니다. 그분을 회고하면서 평소에 하셨던 강의 중 감명 깊었던 것 몇 토막을 들었습니다. 그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180개국의 젊은이들에게 앙케트를 했습니다.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단어를 쓰라고 했는데 1등을 한 단어가 무엇일 것 같습니까? ‘사랑’일 것 같지만 아니었습니다. ‘마더’, 엄마가 1등입니다. 2등이 ‘열정’, 3등이 ‘스마일’, 4등이 비로소 ‘사랑’입니다. 그러면 5등쯤에는 아빠가 나올 것 같습니까? 70번을 내려가도 아빠가 안 나온답니다. 남성들이 회개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혼자 짝사랑하다 상처를 받은 50대 아버지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 사람들을 볼 때 굉장히 불쌍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 시간을 빌어서 말합니다. “아들, 딸들이여, 아빠가 젊었을 때 좀 못했다고 해서 노년에 복수하지 말거라. 마음만은 아들, 딸을 사랑한다.”
제가 아는 분이 계신데, 일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히로시마 원자폭탄이 떨어진 근처에 살았는데 엄청남 굉음이 울리면서 폭탄이 떨어졌습니다. 도망을 가는데 ‘쾅’ 하고 저 멀리서 폭탄이 터집니다. 폭탄이 터지는 순간에 어머니는 아이들을 모두 끌어안고 쪼그려 앉았습니다. 아버지는 멀리 도망가서 숨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어떻게 내가 애비가 되어서 이럴 수가 있냐고 폭탄이 터질 때 당신은 아이들을 끌어안고 있는데 나는 나 혼자 살겠다고 도망을 갔으니 내가 다시는 당신과 애들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하고 한국으로 왔답니다. 5살 될 때 6.25가 일어났답니다. 밤길에 걸어서 피난을 가는데 도망을 가는데 수류탄이 어디선가 날아와서 ‘쾅’ 하고 터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재빠르게 도랑으로 내려가서 몸을 붙이고 숨었습니다. 이번에도 엄마가 길 위에서 애 셋을 끌어안고 쪼그려 앉았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하는 말이 “전쟁 통에 자기 새끼 버리는 애비는 있어도 애미는 없겠구나.” 했다고 합니다.
성경이 그리는 아버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아버지가 아니라 엄마 같은 사랑을 가지신 아버지입니다.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업어서 나른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셨다고 표현합니다. 일설에 의하면 독수리는 자기 새끼를 어깨 위에 올려놓고 날아간다고 합니다. 밑에서 사냥꾼들이 총을 쏘아도 어미를 맞히지 않고는 새끼를 떨어뜨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업어 나르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모두 끊어지고 주변 사람들에 대한 고려와 생각도 끊어진 상태에서 자기 자신에게 깊이 몰입하고 이것을 계속 반복할 때 우울증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럴 때, 의식적으로 생각을 끊어버리고 오히려 다른 사람을 향해 베풀려고 하고, 의무를 감당하려고 하면서 극소화되는 자의식을 분산시켜야합니다. 억지로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엘리야는 깊은 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순간에 절망감이 밀려오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되니까 물같이 주변으로 흘러가는 관계성들이 사라지고 자신에게 몰입이 됩니다. 욕탕의 배수구 뚜껑을 열면 물이 한 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모든 생각들이 ‘나만 비참해. 나만 불쌍해. 나만 소외되었어. 나만 고통스러워.’하고 몰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한 사람이라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식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자식을 남겨놓고 떠나는 사람들은 사랑을 안 하는 것이냐? 그것이 아니라 절망의 힘이 사랑의 힘을 넘어서 이겨버린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 죽음을 선택하는 절망에 빠지면 아주 이기적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다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결국은 선지자는 절망 속에서 깊이 주저앉아 잠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영적으로 충만할 때에는 이렇게 했지만 은혜가 떨어지고 나니까 더 이상 못하겠어.’ 그러나 은혜가 떨어졌을 때 더욱 공동체에 참여하고, 은혜가 떨어졌을 때 더욱 기도하려하고, 은혜가 떨어졌을 때 더 말씀을 깨달으려고 하는 반대의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관심을 흩어 눈을 들어서 주변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신은 현재 낙심하고 절망하고 있지만 자기보다 더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내 코가 석자”라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이 말은 코가 석자가 나왔다는 것이 아니라 콧물이 석자나 늘어진 것입니다. 들이마실 수도 없고 떨어뜨릴 수도 없는 상황이 “내 코가 석자”라는 뜻입니다. 그런 난감한 처지에 있는데 누가 와서 자기를 도와달라고 합니다. 자기 코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냐?” 하고 물었더니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너 그러면 안 된다. 그렇게 낙심하면 안 된다.”라고 조언을 해주면서 가만히 듣고 보니까 자기가 들어야 할 이야기를 자기가 하면서 되돌아 자신의 귀에 들려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코가 석자인 상태에서 상담을 하면서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겨우 해줬는데 상대방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고맙다며 기도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 그가 낙심치 말게 하시고” 그러면 자신의 양심은 말합니다. “너나 잘해”, “하나님, 힘을 주시고”, “너나 받아.”, “하나님, 은혜에서 미끄러지지 말게 하옵소서.”, “너나 잘해라. 너나 잘해.”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십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그래서 은혜가 떨어져도 그럴수록 섬겨야합니다. 그 자리에 꼭 붙어 있어서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것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생존하는 길입니다. 이게 은혜의 비밀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이렇게 절망하고 있다면 한번 눈을 들어보십시오. 우리에게는 희망을 가질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화) 제가 아는 전도사님이 한분이 병원에 있습니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병원으로 데리고 와서 말기암환자 돌보게 합니다. 곧 죽으려는 사람들을 하루만 돌보고 나면 불평하던 아이들의 생각이 바뀐답니다. 살아있고 죽을병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서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지켜주십니다. 함께 섬길 수 있는 지체와 교회를 주시고 위급하면 달려갈 수 있는 목자를 주시고 의지하며 살 수 있는 지체들을 붙여주셨습니다. 내가 나타나면 기뻐하는 아이들이 있고 내가 섬기면 고마워하는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한없는 감동과 감화를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절망하지 않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절망은 아무것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마귀의 속삭임입니다. 죄가 있어서 침체에 빠졌다면 하나님께 간절히 비십시오. 그러면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너무 환경이 어려워 좌절했다면 주님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저는 본문 속에 나오는 천사가 선지자를 어루만졌다는 기록을 읽으면서 눈물이 나왔습니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을 대적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던 선지자가 로뎀나무 아래에 누워서 자고 있을 때, 천사가 와서 발길로 걷어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네가 선지자인데 네 꼴이 이게 뭐냐고, 하나님께 불 받은 사람이 이게 뭐냐고 책망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천사가 조용히 와서 깊은 절망과 두려움 속에 잠들어 있는 엘리야를 어루만졌습니다. 일어나라고 흔들어 깨우지 않고 어머니처럼 어루만졌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시키셨을 것입니다. “무엇을 좀 먹어라.” 어머니처럼 깨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모든 것이 우리 뜻대로 안되고 낙심할만한 이유가 있다고 합시다. 모두 다 사라졌다고 칩시다. 그래도 주님은 우리 옆에 계시지 않습니까? 주님은 우리 옆에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버려도 그분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C. 무기력
세 번째는 무기력입니다. 4절과 5절에서 선지자는 “나무그늘에 앉아서 죽기를 청하고 하나님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라고 말합니다.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는데 천사가 와서 불쌍히 여기며 어루만집니다. “일어나서 좀 먹어라.” 40주야를 걸어왔으니 얼마나 배가 고팠겠습니까? 구운 떡과 물 한 병이 옆에 놓여 있습니다. 배가 고프니까 맛있게 먹고 또 잡니다. 천사가 옆에 와 있는데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런데도 다시 잠이 듭니다.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라 천사가 또 와서 어루만지면서 이르되 먹어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 할까하노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에게 천사의 음성이 어머니의 음성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이것은 힘을 모두 상실한 상태, 현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소진한 상태를 보여줍니다.
깊은 무기력에 빠지고 나면 욕망이 없어집니다. 가고 싶은 곳도 없고 먹고 싶은 음식도 없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고 갖고 싶은 물건도 없습니다. 어디 가는 것도 관계를 맺어야합니다. 먹고 싶은 것도 누구와 같이 가야할 것 아닙니까? 보고 싶은 이, 갖고 싶은 물건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가 마음이 아주 청결한 상태이기 때문에 욕망이 모두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기력이 없는 것입니다. 좋은 욕망이든 나쁜 욕망이든 욕망도 기력이 있어야 생기는 것입니다. 절망에 이른 사람들의 특징은 잠을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노동하고 주님을 섬기다가 잠이 드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제가 제일 부러운 사람은 베개만 베면 곯아떨어지는 사람입니다. 깊은 숙면을 하는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예전에 허리가 많이 아플 때는 밤에 4번까지 깬적도 있습니다. 항상 자고 일어나면 ‘잘 잤다.’는 느낌을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말하는 잠은 그런 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영혼의 깊은 무기력에서 오는 잠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계속 활동을 하고 욕구가 생겨야 머리도 만지고 옷도 새로 입고 ‘오늘을 뭘 먹을까?’도 생각하게 됩니다. 삶의 생기가 있는 것입니다. ‘머리를 이렇게 해볼까?’ 이 속에 기운이 있는 것입니다. 내버려 둬서 머리는 폭탄 맞은 머리가 되고 몸빼 같은 옷 하나 걸치고 아줌마인지 처녀인지 할머니인지 뒤에서는 알아 볼수 없도록 하고 다니는 것들은 무기력에서 오는 것입니다. 잠언 20장 23절에서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아라”고 합니다.
선지자에게 이러한 모습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움직이도록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이렇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통해 하실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바알 선지자 850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백성들은 “야, 여호와하나님 살아계셔. 정말이야. 우리가 봤어.” 이 때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말씀만 전하면 사람들이 은혜를 받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선지자는 손바닥만 한 로뎀나무 그늘 아래 쭈그리고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를 발길로 차면서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하셨을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어 그를 어루만져주라고 하십니다.
자식은 엄마의 눈에는 항상 아이입니다. 70세 된 어머니가 50세 된 아들을 데리고 전철을 타면서 “어른 하나에 애 하나요.” 했답니다. 이것이 엄마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으로 선지자를 아기처럼 어루만지셨습니다. 이 장면에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이런 하나님이 어디에 계실까?’ 선지자라는 사람이 말씀을 외치지 않고 도망쳐서 자기 한 목숨 살겠다고 광야에 와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그렇게 많이 베풀어 주셨는데 죽으면 어떻습니까? 원래 선지는 죽기위해서 태어난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름값도 못하고 도망쳐서는 쭈그리고 앉아 죽은 자처럼 졸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네가 어찌 여기에 이렇게 자빠졌느냐?” 그러셔야 마땅하지만 천사를 보내어 그를 어루만지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성령 충만하고 교회에 봉사를 많이 하고 가난한 자들을 도울 때만 여러분을 예쁘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침체에 빠져있고 주님의 은혜에서 멀어져 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주저앉아 있는 때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때마다 오셔서 군화발로 힘차게 후려치시면서 “악하고 게으른 여종아, 내가 너에게 베푼 은혜가 얼마나 많은데 너는 이렇게 자빠져 있느냐?”고 하지 않으십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심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우리를 이렇게까지 대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긴병에 효자 없다는 얘기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가족들도 우리가 너무 힘들게 하거나 진을 빼면,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선지자 홀로 버림받은 것 같은 그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임무에서 이탈하여 광야에서 잠들어 있는 불쌍한 선지자를 어루만지시며 먹이고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기력한 좌절에서 일어나 새 길을 가게 하셨습니다. 무기력에서 일어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D. 외로움
마지막으로 외로움입니다. 14절에서는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나의 생명도 찾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영혼의 침체는 마음을 극소화하고 주위와 단절되도록 합니다. 고독이 좋으냐 나쁘냐에 대해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자신에게 적용하느냐에 따라 칼처럼 음식을 썰어서 유익하게 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살을 베어서 우리에게 손해를 오게 하기도 합니다. 외로움이 자기연민의 깊음 속으로 빠져 들어가면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이런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런 외로움을 느낄 때 외로움을 승화시키는 경건의 기술이 있습니다. 그것은 존 칼빈이 한 이야기인데 “이 세상이 덧없음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모두 지나가는 것이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 한 분 뿐이라고 생각하면 우리가 아무리 외로움을 느껴도 외로움을 느끼는 그 자리에 하나님은 계십니다.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는 무엇이라고 고백했습니까? “주님 한분만으로 충분합니다. 주님만 계시면 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를 주십시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화) 양 목사님이 상을 당했습니다. 저는 알다시피 멀리까지 문상을 못 가는데 전라도였습니다. 직원들이 가려고 하는데 “지금 다녀오면 내일 일을 못하지 않느냐? 모레 주일인데, 너는 몸도 안 좋으니까 건강한 너는 가고 너는 가지 마.”, “그래도 목사님 저희가 죄송해서.”, “아니야 내가 다 얘기해 줄게.”한 후 문상을 갔습니다. “누구누구는 온다고 그랬는데 일이 너무 많고 몸이 안 좋아서 내가 오지 말라고 했다.” 했더니 양목사가 하는 말이 “목사님,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목사님 한분 오시면 다 온 것입니다. 그러면 충분합니다.”였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다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외로움을 느끼지 마십시오. 우리는 어차피 다 외로운 사람들이었고 버림받아 조각조각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었는데,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주셔서 예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 당신의 교회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 된 지체들로 살아가게 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왜 혼자입니까? 나의 영혼을 위해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있고, 내가 아플 때 같이 아파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될 그리스도의 교제가 있으니 외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하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 안에 있는 지체들을 다시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깊이 의지하며 숨질 때까지 하나님을 붙드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외로울 때 기도하고 슬플 때 찬송하면서 이기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침체에서 벗어나야합니다. 두려움, 절망, 무기력, 외로움,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구속하실 때 이것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이제 이것들은 우리에게 허깨비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고 고백할 때 주님이 여기 계십니다.
“주님이 저를 당신의 손으로 붙드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나를 버리고 떠나도 주님은 항상 내 곁에 계십니다. 그리고 나도 주님을 버릴 수 없습니다.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놓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내 인생에 이전에 더 큰 환란과 고난이 있어도 주님을 붙들며 승리하고 이기며 살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침체에 빠진 나의 영혼에 천사를 보내어 어루만져 주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의 떡과 은혜의 물로 나를 다시 살리사 주님 앞에 살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합니다.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 살게 하여 주십시오. 나를 살아가게 해 주옵소서.” 절망의 종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게 맡겨주신 사람들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 고백으로 주님 다시 붙들고 이기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밤을 지나는 빛의 자녀들 5 (2013.01.11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사명으로 돌아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0-18) |
I. 본문해설
침체 속에 있던 선지자 엘리야는 두려움과 절망감, 무기력과 외로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특별한 능력을 주신 선지자가 그렇게 침체에 빠져 잠들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어 발길로 걷어차고 밟으시는 대신 그를 어루만지시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깊은 침체에서 벗어나도록 하나하나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호렙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호렙산이 어떤 산입니까? 모세가 소명을 받을 때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 불길로 임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대면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소명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자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엘리야를 호렙산에 새워 모세의 소명을 생각나게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처음 소명을 받을 때 모세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40세가 되었을 때 민족을 위해 일하고자 불끈 일어섰고 결국은 애굽의 병사들을 때려죽이고 도망갔습니다. 40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 그는 이제 노인이 되었고, 애굽에서 배운 자랑스러운 학문과 지식들이 희미하게 잊혀져가는 늙은이가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너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해방자로 너를 불렀느니라.” 할 때 모세는 마음이 상했습니다. 자기는 이 일에 적합하지 않다고 핑계를 대다가 결국은 하나님께 혼이 납니다. 결국 놀라운 소명을 그곳에서 받게 됩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호렙산에서 있었던 일을 잘 알고 있을 엘리야에게 모세를 불러내어 위대한 일을 행하게 하신 것을 생각나게 하셔서 이 선지자를 격려하고자 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침체에 빠진 엘리야를 호렙산에 세우셨습니다. 아마도 선지자는 호렙산에 가자마자 간절히 기도 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떡과 물을 먹고 기운을 조금 차렸지만 그것은 육체의 회복이었지 영혼의 회복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굴속에 숨었습니다. 이세벨이 복수심에 불타올라 자기를 찾고자 여기까지 자객들을 보냈을지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나라에는 굴이 많습니다. 깊은 굴도 있고 계곡을 바라보면 구멍이 수없이 뚫려 있는데 그게 전부 굴입니다. 굴이 숨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강한 바람이 일어나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쉈다고 나옵니다. 바람이 바위를 어떻게 부쉈을까?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어서 돌들이 바람에 날아 내렸고 그것들이 다른 바위에 부딪히면서 바위가 부셔져 내렸던 것 같습니다. 그곳에 엄청난 폭풍이 몰아 닥쳤습니다. 그 후에는 땅이 울리면서 엄청난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지진이 지나간 자리에는 불길이 타올랐습니다. 선지자는 밖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보면서도 굴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증거일 텐데 그는 나가지 않았습니다.
II. 불후에 들린 세미한 음성
놀랍게도 큰 기적이 나타나는 현장에는 여호와의 임재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불까지 소멸된 후, 세미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때 엘리야는 들고 있는 겉옷으로 얼굴을 가렸다고 했습니다. 밖에서 비춰오는 햇빛이 눈부셔서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나갔던 것 같습니다. 굴 어귀에 서서 도대체 이 소리가 어디에서 들리는 소리인가 귀를 기울이기 시작할 때 소리가 그에게 임하였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 하여 여기에 있느냐?” 불후에 들린 세미한 음성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폭풍과 지진이 일고 불길이 타오르는 기적의 능력은 한 가지를 위한 예고편에 불과했습니다. 주님이 도입하고 싶었던 결정적인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세미한 소리 가운데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하늘의 불을 내리고 기적을 일으킬 때, 850명의 선지자들을 죽여 피가 낭자할 때도 말씀은 없었습니다. 불길까지 모두 지나간 다음, 하나님은 선지자의 지성에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침체에 빠진 엘리야를 다시 용사로 만드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폭풍, 지축을 뒤 흔드는 무시무시한 지진, 그 이후에 화염처럼 솟아오르는 불길이 얼마나 장대하고 두려운 광경입니까? 이러한 놀라운 기적을 본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 놀라운 기적의 역사를 선지자는 홀로 관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침체에 빠진 선지자를 회복시켜 준 것이 아닙니다. 네가 믿고 의지하는 능력의 하나님 여호와의 큰 권능을 예고편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런 능력을 가진 여호와 하나님이 너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겠느냐?” 이것을 알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후, 침체에 빠진 선지자를 일으켜 세울 하나님의 방법을 도입하셨습니다. 그것은 세미한 음성으로 그에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화)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사람들은 자신이 영혼의 침체에 빠져 있을 때, 무언가에 열광을 하면 거기에서 벗어 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처음 예수님을 믿고 얼마 되지 않아 신앙의 지식이 미천하였을 때 부흥회를 따라 다닌 기억이 납니다. 곤고한데 내가 왜 이렇게 곤고한지를 모르겠습니다. 돌아보면 잘 한 것도 없지만 특별히 악독한 짓을 한 것도 없습니다. “나보다 형편없이 사는 사람들보다는 내가 훨씬 나은데 왜 이렇게 예수 믿는 것이 행복하지 않을까?”라는 이야기를 하면 교회 어른들이 부흥회를 가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보면 보통 분위기가 아닙니다. 전부 방석을 깔고 앉아서 열심히 박수를 치고 앞에서는 북을 치고 부흥사가 찬송을 부르는데 열기가 ‘훅’ 하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때 생각을 합니다. “아, 나도 여기에서 미쳐야 은혜를 받는다.” 그리고 지성의 스위치를 끄고 어떻게든 앞자리로 갑니다. 그리고 박수를 칩니다. 언젠가 집회에서 돌아와 손바닥이 이상해서 보니까 피가 새빨갛게 맺혀 있었습니다. 완전히 지성을 빼 버리고 설교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것이 설교일까? 웃기고 울리고 여러 가지 잡다한 이야기를 섞어서 설교합니다. 어떤 날은 다 일어나라고 하고 얼마씩 헌금 할 것인가 얘기하라고 합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떤 날은 유산시킨 사람들은 다 일어나라고하고 한 명당 얼마씩 낼 것인가 묻고 그러면 용서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면제부도 아니고 그게 뭡니까? 사람을 죽였으니까 돈을 내고 전도하면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광경을 보면서 저것은 아닌데 하면서도 그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안 주실 것 같아 다 떨쳐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손에 피가 맺히도록 찬송을 부르고 집에 돌아와서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때의 무력감이란 말로 할 수 없습니다. 그때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기도하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러 산에 갑니다. 그것도 낮은 산에 가면 안 되고 높은 산에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각산에 자주 올라갔습니다. 정상까지 1시간 20분이 걸립니다. 목사님이 올라가신다고 하면 따라 올라가고 목사님이 없을 때는 혼자 올라가고 청년들 하고 올라갔습니다.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인천이 보였습니다. 얼마나 높은지 인천에서부터 불암 산까지 한눈에 보입니다. 장관입니다. 거기에서 기도합니다. 또 낭떠러지에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응답 바위라고 있는데 그곳에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곳에 올라가면 정말 무섭습니다. 낭떠러지입니다. 손을 들고 기도를 합니다. 추운 겨울는 입술이 얼어붙습니다. 그런 곳에서 털모자를 쓰고 기도하다 내려오면 눈썹부터 코털까지 하얗게 얼음이 맺힙니다. 어떤 때는 은혜를 주시지만 어떤 때는 목이 터져라 부르짖어도 내려오는 발걸음이 한 없이 무겁습니다. 봉사를 많이 하면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봉사를 하고 땔나무도 주우러 다녔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확장되면서 그때 나의 신앙생활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없었습니다. 은혜를 받아도 왜 받았는지도 몰랐고, 어떻게 받는지도 몰랐습니다. 은혜가 빠져 나가도 그것이 왜 빠져 나갔는지도 모르고 왜 그것이 나에게 시험이 되는지도 몰랐습니다.
본문은 여기에 대한 답을 보여 줍니다. 산을 가르는 바람, 바위를 부수는 폭풍, 지축을 뒤흔드는 지진 후에 춤추는 화산처럼 타 오르는 불길도 놀라운 기적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끝난 후에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결국 영적인 회복은 지성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면서 우리의 영혼에 회복이 시작됩니다. 외형적인 열렬한 기도, 외형적인 기적, 열렬함, 뜨거운 섬김, 이런 것들만이 아니라 내적인 말씀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는 “엘리야야, 어찌하여 네가 여기 있느냐?”는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인생의 전환은 기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화) 제가 가르친 제자 가운데 여성 사역자가 한명 있는데 성남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기도도 많이 하고 열렬한 사람입니다. 한번만 자기네 교회에 와서 설교해 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사양을 하다가 내가 뭐라고 하고 교회에 갔습니다. 조그마한 교회였습니다. 교인이 30명 정도 모인다는 합니다. 철야기도 많이 하고 금식도 많이 하는데 마음에 원망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정말 인간들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없어요.” 어느 날 누가 배가 불러온 남자 하나를 메고 왔더라는 것입니다. 병원에서 나가라고 해서 나왔는데 오늘 내일 죽어갈 사람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교회에 와서 기도나 한번 받아 보고 싶다고 해서 왔다고 합니다.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그 사람이 살아나면 가족들이 예수를 믿을 텐데. 그래서 매일 기도해주고 심방을 다녔답니다. 병원에서도 포기하고 내놓은 사람이 완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 사람이 멀쩡하게 걸어 다니고 직장까지 다니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그런데 살만하니까 그 사람이 교회를 안 나오더랍니다. 그래서 자기가 요즘 다시 아프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한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배은망덕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너무 실망을 느낀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살려 달라고 할 때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매달렸지만 낫고 나니까 하나님이 고쳐 주셨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쳐주셨다고 생각하면 부채의식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 앞에 자신이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살다보면 가끔 그런 기적이 일어난다 하고 빠져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고 해서 병자들이 모두 낫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살기를 원했는데 하나님이 데려가십니다. 그런데 마지막 죽을 때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찬양하며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적을 보아도 인간은 변화하지 않지만 지성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을 때 사람이 하나님 앞에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놀라운 은혜의 역사입니다.
III. 사명으로 돌아가게 하심
하나님은 선지자를 회복시키십니다. 그를 회복시킨 것은 폭풍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고 지진도 충천하는 화염도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 후에 조용히 들려오는 세미한 음성이었습니다. “엘리야야, 어찌하여 네가 여기에 있느냐?” 하나님은 하실 말씀이 많으실 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숨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우리말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이 무섭게 말씀하시는 것 같이 느껴지지만 히브리 성경을 보면 아주 부드러운 표현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할 말씀이 많을 때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를 사명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A. 하나님을 만남
엘리야를 사명으로 돌아가게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사건을 보여 주십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사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엘리야야, 어찌하여 네가 여기에 있느냐?” 이 물음에는 하나님의 수많은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따지듯이 “왜 여기에 자빠져 있느냐?”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추궁하지 않고 조용히 물으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던 것처럼 “엘리야야, 어찌하여 네가 여기에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의 사랑하는 자녀가 어디에서 울고 있다면 “너 여기서 왜 이러고 있니?” 라고 물을 때,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염려와 근 심속에서 갖는 관심의 표현입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여기에 왔다는 대답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여기는 네 자리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네 자리는 여기가 아니다. 소명을 받은 네가 살아가야 할 삶의 자리는 여기가 아니다.”
엘리야는 왜 굴속에 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질문에 답변합니다. “하나님 내가 원래 열심이 있습니다. 주의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을 버리고 제단을 다 허물어 버리고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저만 남았습니다.” 그는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 선지자의 사명은 자기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선지자도 핍박이 오면 도망가야 할 때도 있고 피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남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일시적인 피난이지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는 것이 선지자의 사명은 아닙니다. 무슨 그런 사명이 있습니까?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사명입니까? 사명이 목숨을 위해 있는 것이지 목숨이 사명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하나님이 엘리야에게만 유독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먹이시고 물을 먹이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천사를 보내 어루만지고 위로해 주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선지자의 생명을 부지시켜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아주 인격적인 방법으로 회복시키시고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가지고 옛 사명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대가를 바라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공짜입니다. 우리의 공로가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품으신 사랑과 성품 때문에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라는 말 자체가 자신의 공로에 의하지 않고 값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은혜는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은혜는 아무 쓸모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주실 때에는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신적인 계획이 있습니다.
(예화) 강남에 가면 정보사 부지라고 노른자 땅이 있습니다. 그곳에 아파트 건립 계획이 세워졌습니다. 짓기만 하면 대박이 나는 자리입니다. 그 땅이 군인들 땅이니까 거기에 강남 수준으로 아파트를 지어서 군인들을 위해서 분양을 하겠다고 했더니 “무슨 군인들이 그런 좋은 곳에서 사는가?” 하고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군인에게 그 땅이 쓸모가 없으면 내놓고, 그 땅을 개발해서 모든 민간인에게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해도 군대에서 땅을 안 쓰겠다고 하면 당연히 민간에게 땅을 돌려주어야지 군인들만을 위한 아파트를 짓는 것은 이상한 것 같았습니다. 며칠 후, 어느 장교 부인이 신문에 글을 썼습니다. 그 글을 읽고 나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글에는 “대한민국 국민은 우리더러 나라를 위해 충성하라고 하고 전쟁이 나면 죽으라고 말합니다.” 남편이 장교이기 때문에 전방을 돌아다니는 것을 시작해서 집다운 집에서 살아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강남에서 살면 안 되냐는 것입니다. 항상 군인은 민간인만 못하게 살아야 된다는 법이 어디 있냐는 것입니다. 기억을 다 해낼 수는 없지만 눈물이 날 정도로 절실했습니다. 그 글을 읽고 굉장히 숙연해 졌습니다. 나라는 군인에게 잘 해줍니다. 옛날에는 군대에 가면 월급이 어디 있었습니까? 월급 없이 집에서 받아 가지고 갔습니다. 요즘은 나라에서 군인들에게 계속 월급을 주고 여러모로 잘 해 준다고 합니다. 심지어 군인들만 가는 골프장이 있고 콘도도 있고 면세점에 가면 눈이 휘둥그레 질 정도로 물건 값이 싸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이 나라를 지켜주니까 그들의 마음이 구겨지지 않도록 국민들은 세금을 내서 그들이 일정한 품위를 유지하며 다른 민간인과 어깨를 견주며 살 수 있도록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게 전부가 아니라 전쟁이 나면 우리를 지켜 달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은 공짜입니다. 은혜를 조금 주시고 우리에게 당장 무엇을 내놓으라고 하는 분이 아닙니다. 은혜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주어지지만 그 은혜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 계획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명입니다.
B. 사명으로 돌아감
하나님이 철없는 선지자의 불평을 다 듣고 난 후,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선지자들을 다 죽이고 나만 남았습니다. 나도 곧 그들이 찾아와서 죽이려고 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해 다메섹으로 가라. 그리고 하사엘이라는 사람에게 가서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이스라엘로 가서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아합에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해서 선지자가 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얼마나 충격적인 것입니까? 그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후는 깊은 신앙이 있는 인물은 아니었고, 분별없는 의협심이 넘치는 감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예후는 바알 선지자와 아합 일가에 대한 뼈 속까지 타 들어 가는 원한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예후가 등장하니까 바알 선지자들이 다 숨었습니다. 그래서 예후는 바알 선지자들을 다 초청합니다. 아합보다 내가 바알을 더 잘 섬기겠다고 합니다. 아합과 이사벨이 죽고 이제 희망이 없는 줄 알았는데 바알에 헌신된 군주가 나타났다는 소식에 숨어 있던 바알 선지자들이 다 모입니다. 예후는 그들을 다 잡아 죽입니다. 그 사람이 예후입니다. 선지자가 가서 기름을 부으면 그 사람이 왕이 되어서 역사를 바꾸고 이사벨과 아합을 비롯해 엄청난 수의 바알 선지자들을 전부 다 몰아내게 됩니다. 결국 예후에게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이세벨과 아합 정권과 바알 선지자들을 전멸 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너 엘리야는 역사를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소명을 받은 사람이다. 내 뜻을 따라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붓고, 이스라엘의 종 예후에게 기름을 붓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으면 지금 세워진 왕들은 무너지고 새로운 왕과 새로운 선지자들에 의해 세상이 바뀔 것이다. 질서가 천지개벽하게 만드는 권한을 내가 너에게 주었다. 역사를 바꾸는 것이 너의 사명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너는 지금 어린이처럼 징징 거리면서 저들이 나의 생명을 자꾸 뺏으려 하고 나에게는 힘이 없고 죽고 싶다고 징징거리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지자의 자세냐는 것입니다. 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주제파악을 하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선지자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네가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선지자 사무엘을 기억해 보십시오.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쫒아서 사울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임했고 권능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처음에는 지극히 겸손하게 나라를 다스렸지만 신앙이 사라지면서 교만이 싹트기 시작했고 결국은 제사장의 권한까지 범하려고 하는 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을 칼로 찔러 죽였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가서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새의 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대신,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영이 나가고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령이 그에게 임하여 미치광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무엘에게는 칼 한 자루, 창 한 자루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과 기름병 딱 두개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어디에 붓느냐에 따라 역사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목숨을 노린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물론 죽임을 당할 수 있고 그것은 주님께 가까이 가는 길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예후를 세워서 아합의 왕가를 쓸어버립니다. 예후는 잔혹하리만치 바알 선지자들을 박멸해 버렸습니다. 아합의 정권에서 충성했던 유능한 관리들까지 다 죽여 버립니다. 그래서 나중에 나라를 세울 때 등용할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 왕권은 결국 오래가지 못하고 무너집니다.
엘리야는 굴속에 숨어 두려움에 떨면서 낙심하고 있을 자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신자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죄와 사망에서 건져 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이요 마귀의 자식이었으나 이제는 진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의롭다 칭함을 얻은 거룩한 나라의 백성이요 세상의 빛이 되었습니다. 놀라운 신분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신분의 영광만이 아니라 활동의 영광도 있습니다.
(예화) 오고 가는 여행길에서 한 사람을 만났는데 허름한 점퍼에 얼굴은 거무칙칙해서 어디서 지게지다가 온 사람 같았습니다. 대화를 하는데 굉장히 유식합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이 사람이 가만히 보니까 한 나라의 장관을 지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자리에 똑바로 앉아서 다시 보게 됩니다. ‘이 사람 진짜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제가 교수로 처음 발령을 받아 2년쯤 지났을 때입니다. 1991년도의 일이었습니다. 교수들이 모두 모여서 한 학기에 한번 퇴소회를 하는데 한 강사가 왔습니다. 키가 조그맣고 얼굴이 까무잡잡한데 한국 사람이었습니다. 키가 160cm 정도 될까 말까한 분이 몸은 다부지게 생겼습니다. 옛날에 백악관에서 근무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가 보다.’ 하는데 강사가 “여러분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하는데 진심으로 죄송한 눈빛을 띄고 있었습니다. “이라크 전쟁을 막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저 사람은 누군데 이라크 전쟁을 막지 못한 것을 우리에게 왜 죄송하다고 이야기하는가?’ 생각했습니다. 1990년 8월 2일에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해서 하루 만에 나라를 점령해 버립니다. 쿠웨이트는 원래 조그맣고 힘이 없는 나라였습니다. 이 전쟁의 명목은 이라크로 오는 석유를 쿠웨이트가 훔쳤다는 것입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훔쳐 간 석유가 약 2조 4천억 원 되었으니 당장 배상을 하라는 것입니다. 쿠웨이트가 못 하겠다고 하니까 전쟁을 일으켜서 하루 만에 파죽지세로 몰고 가서 점령하고 쿠웨이트를 이라크의 19번째 주로 편입시켜 버립니다. UN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8월 2일에 그런 일이 있고나서 25일 경쯤에 이것은 야만적인 침략이라고 규정하고 많은 나라들이 UN군을 파견해서 이라크를 쳐야 한다는 결의를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석유가 많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미국이 그 전쟁에 개입한 것이 석유 때문이 아니냐고 할 정도였습니다. “몇 월 몇 일까지 너희들은 철수해라. 그러면 공격을 안 하겠지만 철수 하지 않으면 전쟁이다.”라고 최후통첩을 합니다. 철수 안하고 버티니까 미국에서는 그 강사를 이라크에 특사로 보냈습니다. 자기가 사담 후세인과 3시간을 독대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강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전쟁을 막으려고 했는데 3시간을 사담 후세인과 독대를 했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라고 하는데 성공하고 실패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올 때 자기가 타고 다닐 차를 싣고 오는데 방탄차라고 합니다. 수류탄을 던져도 안 터진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일을 알고 나니 그의 키가 조그만 것도 안 보이고, 얼굴 새까만 것도 안 보이고 굉장한 사람이라고 인식을 하게 되고 그를 다시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은 신분의 영광만이 아니라 그의 일 자체도 큰 영광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섬김을 우습게보지 마라.” 예수 안 믿는 남편이 아내를 보면 얼마나 한심하겠습니까? 다른 아내들은 동창회를 돌아다닌다면서 돈을 쓰고 허영스럽게 명품계를 든다고 하고 남편과 아이들을 버려두고 친구들과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간다고 하면서 설치는데, 한 때는 그래도 잘 나가던 여자가 교회에서 은혜를 받았는지 교회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교회만 왔다 갔다 하고, 잘 모르겠지만 월급을 가져다주면 상당한 금액을 교회에 갖다 주는 것 같고, 집에 전화하면 “엄마 교회에 갔어요.” 하는 것입니다. 월요일에 전화 하면 “교회에 청소하러 갔어요.” 화요일은 “전도하러 갔어요.” 수요일은 “기도하러 갔어요.” 목요일은 “선교하러 갔어요.” 금요일은 “간구하러 갔어요.” 토요일은 “통성 기도하러 갔어요.” 매일 봉사하러 갔다는 것입니다. 남편 눈에는 얼마나 우습게 보이겠습니까? ‘저 사람은 즐거움도 모르게 허무하게 저러고 사는가?’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부인의 섬김은 세상나라를 위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이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본인은 모르지만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유익을 주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데 사용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두려움과 절망감, 무기력, 외로움에 깊이 사로잡혀 우울증에 갈 지경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먹이고 마시고 입히고 어루만지셔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회복시켜 주시는 것은 공짜입니다. 그러나 회복시켜 주시는 데는 하나님의 큰 뜻이 있습니다. 깊은 침체에 있고 좌절 속에 살아 가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죄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회개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용서 해주십니다. 다시 침체에 빠졌습니다.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시련을 당하면 승리하게 해주십니다.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이 이길 힘을 주시든지 피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십니다. 여러분도 지금 가지고 있는 각자의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이런 문제들이 저의 인생의 발목을 잡아서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견딜 수가 없습니다. 자식이 속을 썩여 견딜 수 없습니다. 남편이 가슴 아프게 해서 견딜 수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힘들어서 가족들이 해체 될 위기에 있습니다. 건강이 나쁩니다. 마음의 괴로움이 너무 많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제들이 있을 것입니다. 인생의 어두운 밤중을 지나는 중입니다. 내가 어둠의 자식이면 아무렇게나 살 텐데, 나는 빛의 자녀입니다. 어두움을 지나가도 빛의 자녀들은 그렇게 살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깊이 고민하는 가운데 여러분은 여기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고민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여기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괴로워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해결이 되면 무엇을 할 것입니까? 죄가 많습니다. 회개해서 용서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입니까? 침체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셔서 살려 주셨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할 것입니까? 시련이 있어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셔서 이겼습니다. 질병이 있었는데 나았습니다. 돈이 없었는데 돈이 생겼습니다. 아이들이 속을 썩였는데 아이들이 회심해서 말을 잘 듣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할 것입니까? 다음 침체에 빠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다른 기도제목이 생길 때까지.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여러분에게 정말 심각하게 물어 보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하나님이 그것을 해결해 주셨다고 합시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입니까? 그냥 좋습니까? 그것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럴 것 같았으면 하나님이 엘리야를 데리고 왜 호렙까지 오십니까? 로뎀나무 그늘아래에서 무릎에 엘리야를 눕혀 놓으면 힘들고 서럽다고 자꾸 눈물을 흘릴 것 아닙니까? 그러면 계속 눈물을 닦아주고 어루만지다가 거기서 조용히 죽게 하시지 그를 왜 일으켜 세워서 먼 길을 걸어 호렙까지 오게 하시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동물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4가지 사이클이 반복이 됩니다. 특히 사사시대에 그러합니다. 제일 먼저 시련이 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고 복을 주십니다. 복을 주시면 타락합니다. 타락하면 고통이 옵니다. 그러면 살려 달라고 합니다. 이것이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경제적으로 어렵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도와 주셔서 해결되면 무엇을 할 것입니까? “절반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주님이 여러분 동업자입니까? 동업을 하려면 큰 사업자들과 하시겠지 여러분 같은 사람들과 하시겠습니까? “우울증에 걸려 저는 정신적으로 침체에 있습니다. 회복받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러면 회복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오면 무엇을 할 것입니까? “지혜가 없습니다.” 지혜를 주시면 무엇을 할 것입니까? “가족들이 너무 힘들게 합니다.” 그러면 가족들이 다 변화되어서 행복한 가정이 되면 무엇을 할 것입니까? “거기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스스로에게 물어 보지 않은 것입니다.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입니다.
엘리야에게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는 역사를 바꾸는 사람입니다. 아사헬에게 기름을 붓고 예후에게 기름을 붓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서 역사를 바꾸는 사람입니다. 기름 붓는 곳에서 역사가 바뀌게 됩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사명입니다. “이사벨과 아합이 나를 죽이려하는가? 너희들이 안 죽여도 내 생명이 끝나면 주님이 데려가시고,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고 수천 명의 자객을 풀어도 사명이 남아 있는 한 너희들은 나를 못 죽인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죽은들 뭐가 두려우랴?”는 용기를 가지고 아합 앞에 나타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찾을 수도 없는 곳에 멀리 와서 숨어 있으면서도 떠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현실의 두려움과 침체에 몰두한 나머지 사명조차 아예 잊어버렸습니다.
맨 처음에 여러분을 여기에 보내 주셨을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이 분명히 있습니다. 믿지 않는 가정에서 여러분을 예수 믿게 만드시고 은혜를 주셨을 때는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이 분명히 있습니다. 교회에서 여러분에게 직분을 맡겨줍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세워지지 은혜 받지 않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 왜 세워지겠습니까? 시간을 내고 일을 하고 물질도 바치고 봉사도 하고 마지막에는 욕도 먹어야 하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욕먹는 사람들은 결국은 죽으라고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10시 5분전에 왔다가 축도 끝나기 무섭게 사라지는 사람을 누가 욕하겠습니까? 누군지 알아야 욕을 할 것 아닙니까? 은혜를 받았을 때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세워주신 자리가 틀림없이 있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이 그것을 못 느끼면 그 은혜는 가짜입니다. 진정한 은혜는 항상 하나님의 사명에 눈을 뜨게 만들어 줍니다. 은혜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용서하도록 만드십니다. 그러나 침체에 빠지면 이것이 다 희미해져버립니다. “내가 힘들면 그만이지 사명이 도대체 무엇인가? 내게 맡겨진 직분, 가족이 내 인생을 대신 살아 주는가? 그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한다면 어제 말씀드린 내면의 몰입으로 가게 됩니다. 침체에 빠진 사람들은 기도제목이 없습니다. 대신 고민이 많습니다. 기도제목은 은혜가 넘쳐서 사랑이 확장 되어 갈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 자매 구원해 주세요.” 처음부터 저 자매가 구원을 받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저 사람은 성격이 이상한데 저 사람을 변화시켜서 아름다운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하는 기도제목들이 나오게 됩니다. “저 사람이 하는 일이 뜻 깊은 일인데 잘 되게 도와주세요.” 하는 기도제목들이 퍼져 나가야 하는데 안 되는 것입니다. 안으로만 오그라들면서 고민 속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나를 사로잡고 있는 고통스러운 시련, 가난, 경제적인 어려움,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너무 커서 나에게 여력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그것을 사명을 떠나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반드시 체포되고 욕을 당한다는 증언을 듣고도 그곳으로 떠났습니다. 그가 마지막 전도여행을 떠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오직 성경이 증거하여 각 성에서 고난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지만 내가 하나님께 받은바 은혜의 사명 곧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는 만류를 뿌리치고 성도들의 눈물의 전송을 받으면서 예루살렘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명자입니다. 세상의 고통과 괴로움이 누군들 없겠습니까?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의 자리가 가정이든 교회든 어디든지 간에 그 자리에 서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저는 늘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서 하는 한마디의 간절한 기도는 원하시지 않는 곳에서 목숨을 걸고 하는 기도보다 더 큰 능력이 있다고 말입니다. 어느 자리에 서서 기도를 하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요즘 견디다 못해 이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가정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의 기도와 일단 끝내놓고 그 다음에 하는 기도의 차이는 현저합니다. 무엇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느냐의 차이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곳에서 기도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분명한 그림을 그리고 사경회를 마쳐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의 신앙이 없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셨음에도 낙심해있는 어린아이 같은 선지자도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겨주십니다. 여러분도 긍휼히 여겨 주셔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하고 매달리면 하나님이 반드시 해결해 주십니다. 오늘이냐 내일이냐 몇 개월 후냐의 차이지,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면 해결된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여러분의 마음에 그림을 그려 보십시오.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해방되게 해주셨다면 그 다음에는 어떤 그림을 그리면서 살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두 가지인데 첫째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두 번째는 사명으로 돌아가서 사명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삶의 기쁨을 자기의 행복에 두고 살아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상에서 수많은 상처를 받고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를 구원하신 이의 의도를 따라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시며 내게 주신 사명과 섬김의 자리에서 주님을 섬기며 살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적인 은혜를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V.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린 아이의 작은 울음소리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 엄마는 알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작은 신음에도 어디가 아파서 그렇게 신음소리를 내는지 아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기도를 충분히 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이 우리의 신음소리만 듣고도 찾아오셔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인생의 밤을 간신히 지나가는 것이 우리의 목표일 수는 없습니다. 어둑어둑해오는 갈멜산에 하늘로부터 불이 내릴 때 타 오르던 충천하는 화염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날 때에 불신자의 모습과 다를 바 없고 지나는 길이 괴로워도 거기에서 하나님이 동행하시면 찬란한 불빛을 어두움 가운데비추며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 인생의 목표는 겨우겨우 인생의 밤을 지나며 운명을 기다리는 것일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극복한 후, 돌아갈 사명의 자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은 자기 괴로움, 자기 고민, 어려움, 경제적인 궁핍, 질병, 인간관계에 집중한 나머지 마음이 너무나 분주해서 사명은 아득해져버렸습니다. 그것이 바뀌어야합니다. 주님은 교훈해 주셨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놀라운 것은 주님을 열심히 섬기며 사명을 따라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우리가 미처 헤아리지 못할 때에도 공급해 주십니다. 그것이 꼭 필요한데 너무 바빠서 기도도 못했지만 하나님이 공급해 주십니다. 참 좋은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여러분이 깊은 침체에서 벗어나려면 내팽개친 사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무의도식 하지 말라고 제가 2년째 외쳤습니다. 그것은 2012년으로 충분합니다. 나가서 교회 복도를 걸어가면서 보십시오. 교회에는 일꾼이 필요합니다. 몇 사람만 와서 걸레를 들고 깨끗이 닦아놓으면 얼마나 정갈할까요? 보십시오. 곳곳에서 하나님을 섬길 일꾼들을 필요로 하고 여러분은 자기 문제에 골몰해서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동안, 여러분의 사명의 자리에서 여러분의 마음은 많은 부분 떠났습니다. 명목상 거기에 서 있으나 마음을 쏟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을 쏟아서 농사를 짓는 농부와 그렇지 않은 농부의 밭과 논은 다릅니다. 이 시간에 관점을 깊이 돌이켜서 여러분의 침체와 괴로움만 보지 말고 하나님이 처음 여기에 세워 주셨을 때 나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 믿지 않는 가족을 위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연약한 가족을 위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내게 맡겨진 영혼들과 교회에서 나에게 주신 소명들을 생각하고 그 곳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헤아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너는 여기에 이렇게 있어 할 사람이 아니란다. 너는 사명으로 돌아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침체에 빠져있는 동안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난다는 핑계로 팽개쳐진 의무, 마음을 다하지 않은 섬김, 은혜 받았을 때 주님을 섬기며 일평생 살겠노라고 다짐했던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그 자리에서 주님께 순종하고 온 마음을 다해 헌신할 수 있기 위해 나를 사로잡고 있는 올무와 고통, 내적인 어려움으로부터 나를 건져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충성하고 싶습니다. 헌신하고 싶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아서 착하다, 잘했다, 충성되다, 인생을 헛살지 않고 주님이 주신 가르침과 사명을 따라 살았다고 인정받고 싶습니다.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지지만 주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나를 얽매고 있는 모든 시련과 가난, 고통에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건져 주시면 나를 즐겁게 하는데 쓰지 않고 사명을 따라 살아가는데 쓰겠습니다. 아멘.” 이렇게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