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위기와 부흥의 기회
설교기간|1997년 03월 09일-05월 14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8년 05월 25일
목 차
1. 기도할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출 32:1) 1997.03.09 주일오전 1
2. 앙망하는 자는 기도하라(출 3:37) 1997.03.09 주일오후 12
3. 이스라엘 백성들의 변화(출 33:8-9) 1997.03.23 주일오후 26
4. 회막기도의 축복(출 33:10-11) 1997.04.02 수요예배 32
5. 은총 입은 자의 기도(출 33:12) 1997.04.09 수요예배 44
6.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중보기도1(출 33:13上) 1997.04.23 수요예배 56
7.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중보기도2(출 33:13下) 1997.04.30 수요예배 66
8. 긍휼로 돌이키신 하나님(출 33:15-16) 1997.05.14 수요예배 78
9. 하나님 백성의 표(출 33:16) 1997.05.21. 수요예배 88
10. 주의 영광을 보이소서(출 33:17-18) 1997.06.01 주일오전 97
11. 자신을 보이신 하나님(출 33:19上) 1997.06.04 수요예배 105
12. 은혜 줄 자에게 은혜 주시는 하나님(출 33:19下) 1997.06.15 주일오후 114
13. 은혜받은 자의 거룩한 의무(출 33:20-34:1) 1997.06.18. 수요예배 121
교회의 위기와 부흥의 기회 (1997.03.09. 주일오전1)
기도할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출 32:1)
녹취자 : 오희열
이 본문은 오래전 한 2년 전에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주에 이 본문을 다시 살피면서 영광스러운 본문을 너무 쉽게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앞부분은 반복하지 않고 오늘 읽은 7절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꽤 길게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이 사건이 놓여있는 문맥을 여러분이 이해하시라고 길게 읽었습니다. 읽으신 바와 같이 지금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고 광야에 들어섰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십계명을 받기 위해서 산으로 올라갔고 백성들은 그 앞에서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그렇게 범죄를 보시고 하나님이 진노하시게 되자 모세가 살려달라고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장 진멸하실 것처럼 말씀하시다가, 모세의 간구를 듣고 그러면 다시 올라가라고 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멸하시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어떻게 되시는 것인지, 주님이 이 백성을 인도하셔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때부터 이미 주어진 약속인데 이렇게 하시면 어떻게 하느냐고, 만약에 하나님이 이 백성을 용서하지 않으시려면 차라리 생명책에서 자기의 이름을 지워달라고 하면서 영생을 걸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일단 진노를 주춤하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오늘 읽은 33장 첫 부분입니다. “너는 내 백성을 데리고 올라가라.” 32장과 33장에서 반복되는 말씀은, “네가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을 데리고 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모세가 어떻게 백성을 인도해냈습니까? 늘 말씀하시는 것이, “내가 내 백성을 애굽에서 독수리가 그 새끼를 업어 나른 것처럼 내가 건져 내었다.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구속해냈다.”라고 늘 강조하시는데, 오늘은 “네가 건져낸 네 백성을 데리고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시는 말씀이,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나안 땅을 다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거기에 있는 가나안 원주민들을 약속대로 다 쫓아내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들이 편안히 살게 해 줄 테니 가라고 합니다. 그 대신 내가 직접 너희를 데리고 가지 않고 내 사자를 시켜서 너희를 데리고 가겠다고 하십니다. 외면상으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기에 손해 볼 것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가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사자가 인도하는 것을 좇아간다고 해도 이 사자는 신적인 존재입니다. 사람이 여호와의 사자를 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여호와의 사자가 인도해서 이 백성들을 데리고 가면 가나안 땅에 있는 족속들을 모두 무찌르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탈취하고 정복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자마자 이스라엘 온 백성들이 커다란 슬픔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영적인 각성”입니다. 그들이 깨달은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만약에 그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그까짓 영화가 무슨 소망이 있겠느냐는 신앙적인 생각이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속에 회복된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각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께서는 가지 않으시고 사자를 통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여보내시겠다고 하시는 것은, “가서 너희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아라. 내가 약속한 것이라고 너희들이 말하니까 나는 그 약속을 들어준다. 그러나 이것으로 너희와 나는 끝이다.”라는 뜻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큰 슬픔에 잠기게 된 것입니다. 그 슬픔의 의미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시면 어떻게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일 수 있겠느냐는 커다란 영적인 각성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황송한 말씀”이라고 했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하다바르 하라”, () “그 재앙의 말씀”을 듣고 라는 뜻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모두 자신들에게 주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없이 그것을 소유한다는 것은 재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깊은 슬픔에 잠기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단장품을 제해버렸습니다. 세속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이 깊은 슬픔에 잠겨있을 때, 모세가 한 일을 7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장막을 취했습니다. 그때는 아직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장막, 쉽게 말해서 성막이 지어지기 전이었습니다. 여기에 문이 있었다고 한 것을 보면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이동식으로 커다란 울타리를 쳐 놓고 그 안에 텐트를 치고 지파별로 우거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었고 후에 성막이 지어진 후부터는 성막이 이스라엘 백성이 이동하는 진 한 가운데 들어오고 사방으로 지파별로 진을 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성막이 아직 만들어지기 전입니다. 그래서 이 위기 상황에서 모세가 한 일은 회막을 하나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가능하면 진 바깥에, 백성들이 모여 있는 진의 문을 빠져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바깥인데도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회막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로 하여금 거기로 나아가서 기도하도록 만들어 준 것입니다.
얼마나 이상합니까?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당장 멸망시키실 것처럼 분노하신 그 분노의 불을 진정시킨 것도 모세 혼자의 기도를 통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것에 있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위해서 한 일이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건져내실 때에도 하나님이 제일 먼저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의논하시고 모세에게 지시하셨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실 때에 하나님은 모세와 대면하시고 일을 다 해오셨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도 이런 중차대한 일을 만났을 때도 모세 한 사람이 해결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슈퍼맨 아닙니까? 무릎을 꿇고,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 생명책에 적힌 이름까지 걸었다고 했으면 육신의 생명은 백 개라도 다 걸었을 것입니다. 영생의 생명책에 기록된 구원받은 영혼의 이름까지 걸었으니까 이제는 이 백성들을 건져주시지 않으면 자신은 지옥에 가도 상관이 없다고 하는데, 이 모세가 혼자 기도해서 해결하면 되는 것이지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모세는 여기서 주춤합니다. 그리고는 회막을 만듭니다. 여태까지는 모세가 앞서서 인도했습니다. 여러분이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면 모세의 뒤만 졸졸 따라왔으면 되었을 것입니다. 여태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바다는 누가 가릅니까? 모세가 가릅니다. 물론 하나님이 가르시지만 모세를 통해서 가릅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나니까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이튿날 물이 갈라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 뒤만 좇아가면 됩니다. 다시 손을 내밀면 물이 원래대로 합쳐집니다. 애굽의 병사들은 물에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목이 마르면 어떻게 합니까? 모세가 치면 나옵니다. 고기 먹고 싶을 때는 지팡이를 흔들면 메추라기가 날아옵니다. 이런 모세의 뒤만 잘 좇아가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늘 앞서서 가는 상황이었습니다. “나를 따르라!” 하면 따라갑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앞서서 가지를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뒤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등을 밀기 시작했습니다. 어디를 향해서 밀었습니까? 회막으로 나아가도록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 같은 사람이 여러분의 뒤를 밀어서 기도하려 내보냈다면, “목사님이 요새 기도발이 밀리시나보다.”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기도의 거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로는 구약시대에서 모세와 같이 위대한 영역을 소유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 위대한 사람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 가서 담판을 짓고 해결을 보지 않고, 여태까지 앞서가던 지도자가 뒤로 가서 백성을 밀면서 회막으로 내어 보내는 장면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합니까? 왜 모세는 이 위기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작별을 고하며 응답받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보따리 싸서 기도원으로 올라가지 않고 회막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거기에 가서 기도하도록 등을 미는 역할을 자처했습니까? 모세가 하나님을 덜 바라보아서 이런 일을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깊이 각성하고 나면 사람들은 반드시 기도할 욕망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충격을 받았느니, 말씀을 통해서 마음이 떨렸느니, 울었느니, 깨어졌느니 해도, 그것이 기도로 이어지지 않으면 영적인 각성이 아닙니다. 영적인 각성은 반드시 심오한 기도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지 않을 수 없는 영혼으로 만들어 줍니다. 어떤 의미에서 각성이 일어나지 않고는, 진정한 의미에서 열렬한 기도의 영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통해서 영혼이 각성하게 되면 그는 하나님 앞에 정말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기도하지 않고 머릿속에 오가는 잡다한 신앙적인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모세에 의해서 떠밀려 진 밖을 나가는 장면을 보십시오. 재미있는 것은, “진”이라고 했으니까 이것이 얼마나 컸을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300만 명 정도 되는 사람이 텐트를 치고 우거한 것입니다. 한 가족에 텐트 하나를 쳤을 것입니다. 좀 양보해서 몇 가정이 뭉쳐서 하나씩 쳤다고 해도 이것은 정말 장관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회막을 취했다고 했는데,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몇 개나 취했을 것 같습니까? 히브리어 성경에는 단수로 나타납니다. 하나의 회막을 취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회막에 몇 명이나 들어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 당시 짐승의 가죽이나 천을 가지고 회막을 만들어 쳤을 텐데 설마 여러분이 초등학생이라고 생각해도 수십만 명이 들어가서 집회할 수 있는 회막을 쳤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평범한, 우리가 아무리 양보해도 수만 명이 동시에 들어가서 집회할 수 있는 그런 크기의 회막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컸을지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300만 명이 모두 들어가서 집회할 수 있는 그런 회막은 아니었습니다. 거기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는 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 중에서 지극히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재미있는 사건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정말 모세에게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의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나서 이 백성들을 모두 진멸해버리실 수 있습니다. 아침이슬 하나로도 300만 명을 모두 죽은 자로 만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자신들의 생명이 경각에 달리고 민족의 운명이 초급을 다투는 상황인데도, 그리고 그 사실을 모든 백성들이 알았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염려하고 전전긍긍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염려하는 것만큼 그 민족과 자신의 공동체의 영적인 위기 상황을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위해서 회막을 나아가는 사람들은 수백만 명 중에서 아주 적은 소수의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언제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든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가 어렵거나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도록 부름을 받은 그 소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는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렇게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서 살아가고 민족적으로 커다란 위기를 당했을 때, 그냥 진중에서 살아가면서 마음으로만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며 근심이나 하며 살아가고 있던 다수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여러분의 마음을 각성시켜서 여러분을 기도하는 사람으로 불러주셨다면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남다른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 안에는 많은 진리가 내포되어 있지만, 우선 하나를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할 사람들을 불러내서 그들로 기도하게 하는 그 회막이 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한 번 고요히 묵상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진을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버려두고, 요즘으로 말하자면 TV에서 재미있는 연속극이 계속되고 있는데, 맛있는 저녁상이 차려지고 있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눈물을 머금은 마음으로 그 진으로부터 걸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 쳐있는 회막을 향해 걸어갑니다. 걸어가는 동안에 진이 멀어지고 불빛도 점점 멀어지고 웅성거리는 소리도 점점 멀어집니다. 그렇게 회막으로 나아갑니다. 거기서 하나님과 대면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는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여기에서 보여주는 바는 진으로부터 떨어진 회막이 보여주는 첫 번째 이미지는 고독입니다. 외로움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말 형식적인 기도 속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번잡함”입니다. 오늘 아침에 눈을 뜨면서 제일 먼저 여러분의 마음에 떠올랐던 생각이 무엇입니까? 일에 대한 생각으로, 계획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무엇인가 일상적이고 번잡하고 바쁜 생활 속에서 살아가면서 고독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뛰어난 영적인 사람들의 교회사를 읽어보면 유난히 자연을 사랑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숲 속에서 기도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숲 속에서 진리의 말씀을 묵상하거나 호숫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감화를 받고 말을 타거나 산보를 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이상을 보고 숲속에서 마음을 쏟아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인간은 인간이 기도하고 외로운 마음이 되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러나 똑같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도 자연은 인간의 그런 마음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휴가철에 바닷가에 가서 잠을 잔 적이 있으십니까? 창문을 열어놓고 가만히 들어보십시오. 엄청나게 시끄럽습니다. “쏴아~ 쏴아~” 이 소리가 계속 됩니다. 만약에 도심지에서 사람들이 자려고 하는데 창가에 이삼십 명이 모여서 “쏴아~ 쏴아~”하면 아마 노이로제에 걸릴 것입니다. 아무리 똑같은 소리를 흉내 낸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바닷가에서는 오히려 그 소리 때문에 잠이 더 잘 옵니다. 제가 얼마나 잘 자는지 바닷가에 한 번 보내줘 보십시오. 그 소리 때문에 정말 잠이 잘 옵니다. 그게 자연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사람들이 자연에 가까이 다가 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보면 그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언제나 숲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고독이 보장된 상태 속에서 하나님 앞에 깊은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녁 시간에 목사님들 몇 분이 모여서 함께 대화를 하는데 역시 뛰어난 사람들은 모두 자연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 숲 속에서 하나님과 깊이 교제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숲을 사랑해야 한다고 해서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자연 속에 갖다 놓는다고 해서 모두 그렇게 하나님을 찾겠느냐?” 고 말입니다. 평소에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을 자연 속에 갖다 놓으면 고기 구워먹을 생각밖에는 안 납니다. 부루 스타에 삼겹살 생각밖에 더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그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이 기울어진 사람들은 이 고독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장소, 그것이 여러분에게 없다면 여러분은 회막을 만들어 놓았는데도 회막에 나아가지 않고 그 진속에서 기도하겠다고 우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새벽기도에 나오라고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새벽기도에 나오지 못할 것 같으면 직장 갔다가 오는 길에 들러서 기도하십이오. 그것이 회막입니다. “저는 평소에 늘 기도합니다.”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고독이 회복되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깊은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세상에 대한 소망을 끊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는 깊고 능력 있는 기도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모세는 이 기도해야할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니, 기도해야할 인간의 모든 처지와 약점을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 위기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 바깥으로 불러내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일상적인 분주함이 없고 일상적인 번잡함이 없는 가운데 홀로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는 장소가 있었습니다. 거기로 불러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어디서든지 기도하셨습니다. 무덤 앞에서도 기도하셨고 거리에서도 기도하셨고 병든 자 앞에서도 기도하셨고 밤늦게 자신의 집 앞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심방 가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아무데서나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무데서나 그분이 기도하셨지만 기도할 때마다 그 기도는 강력하고 권위 있는 기도였습니다. 병든 자를 낫게 하고 권능으로 귀신을 내어 쫓아낼 수 있는 기도였습니다. 어디서든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고 하나님과의 교통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기도였습니다. 심지어는 십자가에 매달려서도 기도하셨습니다. 도저히 기도할 수 없는 그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간구하시고 기도하시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살 소망이 끊어지고 지옥을 넘나드는 것과 같은 고통, 그 속에서 모든 것이 단절된 것 같은 어려움을 느낄 때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면서도 하나님과 하나 된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어디서든지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디서든지 기도하실 때, 그렇게 영력이 있고 능력이 있는 위대한 기도가 되기 위해서 주님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기도생활을 이어오셨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정된 기도의 시간이 있으셨습니다. 새벽미명과 깊은 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필이면 새벽 아직 어두운 때, 그것도 아무데서나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서 기도하셨습니다. 강가이든 혹은 산 속이든, 혹은 빈들이든, 어떤 곳이든지 주님은 고독이 보장된 곳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긴 시간동안 하나님 앞에 그 고독 속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이러한 구별된 기도의 회막이 있고, 그 회막 속에서 아버지와 만나는 놀라운 영적인 기도의 세계가 있었기 때문에 어디서든지 기도할 때 위대한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조차도 이러한 엄격한 기도의 공식이 적용되었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처럼 무죄하지도 않고 그분처럼 뛰어나지도 않고 그분처럼 순결하지도 않은 우리들은 얼마나 더 많은 기도 속에서 살아야 되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다른 면에 있어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좇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에 있어서만큼은 예수님을 능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예수님보다 더 많이 기도하려고 더 많이 애를 쓰지 않으면 우리는 본성 자체가 예수님보다 훨씬 더럽고 부패한 인간이기 때문에 주님이 사신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삶을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마음을 통해서 옵니다. 하나님 앞에 겉모습으로는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할지라도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의 좋은 분깃을 맛 볼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올바른 사람들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기도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통로라고 한다면 마음은 그 기도를 솟아나게 하는 샘입니다. 그 마음속에서 맑고 깨끗한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면 기도의 통로는 넓고 청결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기도의 통로가 마련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솟아나는 그 마음 자체가 더럽고 부패하고 불결한 물이 솟아오른다면 그 기도의 통로는 금방 막히거나 더러워질 것이고 오물로 가득 찬 하수처럼 되어버릴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다른 일에는 모두 그렇게 뛰어난 사람들이 기도하는 일에 있어서 약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마음이 순결하고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만 바쳐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은 즉석에서 할 수 있습니다. 설교를 하는 일도 즉석에서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봉사하는 일도 즉석에서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헌금을 하는 일도 즉석에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그 사람이 기도하기 직전까지 살아온 삶, 기도하기 직전까지 하나님 앞에 간직했던 그 마음이 기도시간을 통해서 그대로 가감 없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어느 후배가 찾아와서 “목사님, 설교와 기도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묻자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설교는 항상 쉽고 기도는 항상 어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쳐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살아간 삶, 그리고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한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드려진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결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싶고 주님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귀한 것을 바치고 주님의 이름만 높이고 하나님만 찬송하며 살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아니었던 사람이, 기도시간에 무릎을 꿇고 그 마음을 가진 사람처럼 기도하려니까 기도회가 썰렁해지는 것입니다. 찬양 부를 때까지는 열렬했는데 기도하는 그 순간에서 썰렁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못하면, 쉽게 얘기해서 기도시간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수 없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의 어느 한 부분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 전체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유능한 사람이 와서 기도회를 인도하거나 혹은 바뀐 순서를 따라서 기도회를 인도한다고 해서 그런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를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은 신앙의 중심자리라고 할 수 있는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쳐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열렬한 기도의 영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신앙의 요소는 쪼가리 쪼가리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려고 애를 써도 기도가 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때 참 처참함을 느낍니다. 왜?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인데 그동안 한참 살아온 삶이 그 마음을 하나님이 아니라 이미 다른 것들에게 주면서 살아온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는 하나님 앞에 그 마음을 바쳐야만 기도가 쏟아져 나옵니다. 마음은 안 바치고 기도가 쏟아져 나오면 그것이 바로 외식하는 기도입니다. 자기는 느끼지도 못하는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고백과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정서 사이에 커다란 갭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외식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있는 사람들을, 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정확하게 보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비결은 그를 고독 속에 두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외로움 속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이렇게 섞여 있을 때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혼자 두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혼자 고독하게 두었을 때 하나님을 더 깊이 붙드는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서 비슷하게 살아가도 마음으로 언제나 하나님을 찾으면서 살아가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으면서 살아가지 않던 사람들은 홀로 있을 때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그 고독을 견지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회막으로 나아오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정말 그 복잡한 진을 떠나고 일상의 번잡한 생활을 떠나서 홀로 조용히 걸어서 멀리 떨어져있는 그 회막으로 걸어가면서 그들은 진속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로부터 멀어지는 것만큼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고독해지는 것만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진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연합된 상태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도록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을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아주 현실적인 문제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려고 하는데 마음이 그렇게 되지 않으면 마음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계속 기다린다고 해서 언제 그런 마음이 될 리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자연 속에 데려다 놓으면 고기 구워먹을 생각을 하는 사람을 어느 환경에 갖다 둔다고 해서 마음이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 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을 정복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가 막히는 것 같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열리지 않는 것 같고 기도해도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이르지 않는 것 같은 그런 깊은 위기와 때로는 차가운 거절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 계속 기도로 씨름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정복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계속 자신을 외로운 상태에 두고 그 고독 속에서 고통스러워도 거기를 떠나지 않고 하나님과 대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씨름하듯이 기도하려고 애를 쓰면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스스로 정복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정복 될 때 그때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을 찾으면서 살지 않았지만 드디어 하나님과의 교제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기도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정복하는 것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사람들이 중간에 포기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정복하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가 아니면 그 기도는 하늘에 올라가는 기도가 아닙니다. 거의 허공을 맴돌다가 다시 추락하는 비행기처럼 그렇게 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독을 회복하지 않고는 마음을 정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왜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이 그렇게 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하나님 앞에 자기를 바치는 기도 가운데 비로소 기도의 사람들이 탄생하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한순간에 부어질 수 있습니다. 영적인 은사는 오늘 이 한 순간에, 잠간 사이에 우리에게 부어져서 우리가 기도하고 방언하고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위대한 세계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오랜 세월동안 기도로 바치며 자신의 마음을 정복했던 사람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기도할 때만이 아니라 날마다의 삶 속에서 정복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능력 있는 영적인 생활의 지름길인 것을 알았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위대한 기도의 능력을 소유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소수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도하는 모양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마음이 기도 속에서 완전히 정복되어져서 영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호소하는 그러한 기도의 세계를 얻기까지 투쟁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회막까지 나아가지 아니하고 진을 잠시 떠나서 진 밖에서 서성거리다가 그 정다운 가족들의 목소리, 그리고 왠지 사람들 곁을 떠나면 무서울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서 진 밖에서 서성거리다가 들어오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의 진수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로 지금 우리의 교회에 대해서, 그리고 여러분 개인의 상황에 대해서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많은 말씀을 듣고 깨닫고 많은 은혜를 받으면서 남다른 신앙생활을 해 나간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이 기도에 약하다는 것은, 들은 바 하나님의 진리가 여러분의 머리에만 있고 마음을 점령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그 마음이 지배되고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그 생각이 사로잡힌 사람, 그 사람들이 순결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와 사랑과 놀라운 은총에 그 마음이 사로잡혀 있는 사람, 이 사람들이 정결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능력 있는 기도로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마음을 하나님 앞에 바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모습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모든 생각들이 머리에 맴돌고 있을지라도 그들의 마음은 세상에 있는 것들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세상에 빼앗겼고 몸은 진을 떠나서 회막으로 걸어가지만 마음과 생각은 여전히 진중에 있는 즐거움과 진속에서 맛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안락한 삶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바람 부는 빈들에 나가서 무릎을 꿇고 주님의 음성을 듣기보다는 편안하고 안락한 곳에서 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쳐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쳐졌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빈들로 나가는 외로움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홀로 대면하고 싶어 했습니다. 빈들이든지 그 장막이든지 하나님과 홀로 대면할 수 있는 그곳,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하나님과 홀로 대면할 수 있는 그 고독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해서 사람들로부터 외톨이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주님과 합일된 기도생활로 들어가기 위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외톨이가 되는 희생을 감수할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부터 맛볼 수 없는 위대한 환희와 기쁨을 기도하는 그 영혼들 속에 물 붓듯이 부어주셨습니다.
지난 주간에 하나님께서 제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셔서 남이 알지 못하는 신앙의 진리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입술로 우리의 인생이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서 죽고 싶다는 고백이 우리들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죽는 것처럼 기도하지 않고 사는 것처럼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신앙의 심각한 위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귀로 들어가서 머리까지 가득 차 있지만 마음을 막고 있는 이 죄악의 통로들이 그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속으로 내려가서 우리로 하여금 불꽃같은 삶을 살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좋은 말을 들은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산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열렬한 기도의 영을 유지하며 하나님 앞에 언제나 복받치며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한 부분이 약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그렇게 기도하지 못하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지식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뛰어난 이해는 시동을 걸지 않은 엔진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지금 온 세상은 가물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엔진에 불이 붙고 샘 속에 있는 그 샘물을 퍼내어서 온 땅에 퍼 부어주어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은 남이 듣지 못한 좋은 진리의 말씀을 듣고 남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여러분 자신 스스로 대견해하는 “나는 뭔가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라고 하는 특별한 신앙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은, 온 산하가 메말라가고 온 작물들이 타 들어가는데 이 발동기의 엔진이 수입 산이라고 자랑하면서 사람들에게 뻐기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엔진에 불이 붙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불붙어서 그 하나님의 마음으로 우리가 기도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불변하는 인생의 목표와 신앙의 목표를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외로워지는 것이 싫어서, 고독하게 되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 여전히 세상의 진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모든 기도의 능력을 메마르게 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여러분이 아무리 좋은 진리를 듣고 여러분이 아무리 많은 기독교에 관한 진리를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의 마음이 불붙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위대한 신학자가 된다고 할지라도, 바울과 같이 위해한 통찰을 소유한 사람이 된다고 할지라도 방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몹쓸 것들이니까 말입니다. 자기네 나라가 파괴되는데 이바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휫필드가 말했습니다. “단지 우리가 성경을 읽고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한다면, 나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칼빈주의가 되든 알미니안주의자가 되든 무엇이 되던, 사단은 상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많이 애쓰고 수고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반영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감옥에 가 있는 대통령도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매일 밤 지구본을 만지면 밤을 새운 날이 있었습니다.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가슴이 설레는 것입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이 어떻게 되면 좋을까?” 누구든지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기도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이 올바르지 않고 우리의 말과 생각은 올바르다고 해도 우리의 마음이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기도에 있어서 한없이 약한 것입니다. 저는 종종 기도회를 인도할 때 무너지는 것 같은 좌절감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삶의 현주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지배되지 않는 마음, 자신의 소욕과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면서 적당히 신앙생활하고 있는 이런 마음으로는 하나님 앞에 폭포수와 같이 쏟아져 나오는 순결한 마음의 지원을 받으면서 더 넓은 통로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설교는 한 시간의 준비로 가능하고 섬기는 일은 일주일의 준비로 가능할지모르지만 기도는 살아가는 삶의 준비가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른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정복하기 위해서 얼마나 기도 속에서 씨름하고 있습니까? 저는 저녁때마다 이 교회가 기도하는 사람들로, 구석구석에서 마음이 열린 사람들은 그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마음을 정복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마음을 정복하기 위해서 씨름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수요일이나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열렬한 기도의 영을 소유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입니다.
요즘 하나님이 저에게 주시는 더 강한 부흥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역사 속에서 일어난 것들과 내 자신의 목회 경험과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이 짧은 한국 교회의 역사를 가만히 돌아보면 그 내면의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서 정복된 사람들이 아니면 그 불타는 정서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이 하나님 앞에 다 바쳐진 사람이 아니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데 기여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 30년 전에 사람들이 교회로 물밀듯이 밀려왔을 때, 그 열렬하고 뜨거운 열심을 가지고 있는 그 나라가 20년이나 30년 뒤에 이렇게 차가운 나라가 될 줄은 아마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떤 운동이나 어떤 인간의 계획에 의해서 주도된 신앙 부흥운동들에 의해서, 이 세상에서 겉모습을 보면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 같지만 실제 역사가 지나간 후에 계산을 해보면,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마음이 바쳐진 삶을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포클레인으로 일하기를 버리고 호미로 일하기를 택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셔서 한 번에 흙을 퍼서 한 번에 한 트럭을 가득 채울 수 있는 그런 포클레인을 버려두고 호미로 일하기를 택하는 사람들이 바로 마음을 바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입니다. 바쁘고 고달프게 애쓰지만 열매는 너무나 초라하고 그 초라한 열매 속에서 우리는 뭔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는 것입니다. 초라한 열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초라하게 바쳐진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정말 열렬하고 뜨거운 영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쏟아 붓는 기도를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마음을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앙적인 문제에 있어서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받은 은혜를 따라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무엇보다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쳐지지 않고는 기도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열렬하게, 그리고 뜨거운 마음으로 우리를 쏟아 붓고 기도하지 못할 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으로 지금 하나님을 버리고 있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정복할 수 있는 사람은 여러분 자신밖에 없습니다. 누가 와서 여러분의 마음을 되돌려 주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홀로 씨름해야 합니다. 주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오늘날 내가 처하고 있는 이 영적인 어려움과 교회적인 상황과 민족적인 상황을 보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 재앙의 말씀 앞에서 슬픔에 잠기고 그 속에서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때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보면서 어찌하든지 하나님 앞에 사죄와 용서의 은혜를 구하며 자기 마음을 정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속에 순결함과 정결함을 회복하여 주시도록, 주님이 내 마음을 정복할 수 있도록 나에게 복주시지 아니하시면 내가 주 앞을 떠날 수 없다고 하는 그런 열렬한 소원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으면 여러분은 결코 세월이 흘러갔다는 이유 때문에 저절로 뜨거운 기도의 영을 가진 불붙는 기도의 사람들로 회복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저기 기도회 모임을 보면서 저는 그런 좌절을 느낍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다 쏟아 부으며 그렇게 기도해도 예사롭지 않은 상황을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전폭적인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일들을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음이 바쳐진 기도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잠시 일상적이고 번잡한 일을 떠나십시오.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매일 진 밖에 있는 외로운 회막에 나아가 그 하나님과 홀로 대면하려고 하는, 그래서 그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까지 그 회막에서 떠날 수 없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교회의 위기와 부흥의 기회 (1997.03.09. 주일오후2)
앙망하는 자는 기도하라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출 33:7)
녹취자: 조경훈
오늘 아침에는 상반절을 중심으로 구별 되어야 하는 환경과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될 필요성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 시간에는 그렇게 쳐진 회막으로 나아 온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주목하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본문에 앞서서 먼저 우리 자신의 태도를 결정해야 합니다. 어느 때에든지 이 세상에는 잠자는 다수가 있었고 깨어있는 소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예레미야 23장에 나온 바와 같이 행음한 시대 속에서 부패와 타락의 물결을 먹고 마시면서 살아가던 다수의 사람들이 있었고 그 물결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시대를 거스르고 타락한 그 시대의 풍조에 항거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에 모든 백성들을 초청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백성들이 불의와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죄의 길을 버리고 의롭고 정결한 믿음의 도를 따라서 살아가는 천국 백성의 삶으로 초청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역사적인 현실은 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언제나 불순종했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순종했습니다.
이 모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우리의 것으로 삼기 위해서 우리는 어느 자리에 설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떠내려가는 엄청난 세상에 죄악의 물결을 쫓아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소수로서 이 시대를 거스르며 하나님 앞에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영혼들을 돌보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목사이지만 신앙생활 답답하게 하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습니까? 안 계시다고 믿습니까? 만약에 하나님을 부인할 수 있으면 교회를 떠나십시오. 적당히 신앙생활 하는 것은 안하는 것만 못합니다. 안하면 자기가 언제든지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이라도 있습니다. 진짜 구원받은 사람이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것이라는 양심의 가책이 작동합니다.
전혀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 적당히 기도하는 것보다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 아십니까? 전혀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언제든지 자기가 거의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을 하고 기도에 대해서 설교하면 자신을 가리켜 하는 말이라고 가책을 받습니다. 적당히 기도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편리한 쪽에 자기를 세웁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의식도 없이 떠밀려가는 다수 속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 나라에 보탬이 되지 않고, 두고두고 성경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나 불순종하며 살다가 광야에서 멸망한 다수 중의 하나이기를 원한다면 지금 신앙생활 하는 것도 너무 과도한 열심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하실 필요 없습니다. 뭐 하러 주일 오후 예배까지 나와서 여기 앉아계십니까? 주일 낮에 나오시고 그때도 바쁘면 쉬면됩니다. 어차피 신앙생활의 동기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주님을 공경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데 아무렇게나 살면 돼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런 다수가 되고 싶으면 덥든지 차든지 하라는 주님의 음성 앞에서 새롭게 자신의 태도를 결정해야 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사람을 찾아다니는 교회는 조금 부흥하지만 하나님이 강력한 부흥을 주시는 교회는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어오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야 강제로 되겠지만 신앙의 진수는 강제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여호수아서 24장에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오던 이스라엘 역사에 배교의 비탈길에서 피를 토하며 외쳤던 그 음성을 다시 들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그 시대의 모든 백성들을 향해서 너희는 모두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와야 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는 그것이 싫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시대를 보니까 그렇게 될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너희는 오늘 섬길 자를 택하라.” 내용은 “이방종교에 가득 차 있고 껍데기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포장되어 있는 삶을 살아가면서 너희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면 차라리 껍데기까지 바뀌라. 그것이 하나님 앞에 정직한 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우리의 조상이 섬겨오던 그 여호와 하나님, 우리를 가나안 땅까지 인도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 땅을 누리게 하신 거룩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든지 아니면 강 건너 편에서 섬기던 이방신을 섬기든지 이 땅의 이방족속의 신들을 섬기든지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너희는 오늘 섬길 자를 택하라.” 고 덧붙입니다. 그러나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본문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음성을 들었지만 여전히 진중에 남아서 웃고 떠들고 일상적인 일을 해 나갈 수 있고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다수의 삶을 살고 싶어 한다면 여러분들은 이 어려운 설교를 들을 필요도 없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인생을 살아가면 됩니다. 믿으려면 분명히 믿고 안 믿으려면 그만 두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은 말씀의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고 자기 소견대로 살다가 모든 인생을 판단하시는 하나님 앞에 심판받으면 끝입니다. 그것도 인생을 살아가는 한 방법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이런 다수가 되고 싶어 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려운 인생을 살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소수가 회막 앞에 나아 왔습니다. 회막에 모여서 잡담을 했겠습니까? 성경이 명백하게 기록하지 않아도 그 사람들이 그 회막에 모여서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그 회막으로 나아왔다고 오늘 말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히브리 본문에 “메브카시”()라는 단어는 “앙모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 많이 나오는 말로써 “바카쉬”()라는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찾았다’, ‘추구했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것도 강조형입니다. 본문에서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들이라는 의미는 여호와를 열심으로 추구하는 자들 혹은 반복의 의미가 있어서 한번이 아니라 계속 반복해서 여호와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회막으로 나아 왔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를 그렇게 전심으로 찾고 추구하는 사람들만이 회막으로 모두 나아갔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진중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은 실로 우리에게 기도의 진수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기도는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교인들이 모여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간절하고 뜨겁게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프로그램에 달린 문제가 아닙니다. 기도회를 만들어 놓으면 기도회가 냉랭하고 시간이 짧아서 그런가 하고 철야기도 만들어 놓으면 상갓집에 와서 밤새는 사람들처럼 먹다 마시다 노래 한 곡조 부르고 중얼거리고 기도하다가 쉬다가 이러면서 새벽 3시 되기만을 기다립니다. 이런 것들은 기도의 영이 메말랐기 때문이며 전심으로 그들의 삶속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 것은 기도하려고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혹은 개인적으로 기도하려고 하나님께 나아왔을 때 기도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 자신이 메브카시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찾는 것인데 그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을 찾는 마음에 작용이 동반되어야 하는 기도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들어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기도하기 보다는 기도에 대해서 책을 읽거나 세미나를 참여함으로써 보상의식은 어느 정도 갖게 되지만 이런 것들은 다 바보 같은 짓들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전도 자체를 위해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도에 관한 것에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자체를 위해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는 방법에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자체를 위해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놀라운 영적인 위기를 맞이하게 하셨습니다. 커다란 안목에서 보면 하나님은 이 커다란 영적인 위기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번 용서하실지라도 그 용서하시는 과정, 당신의 심판의 진노를 돌이키시는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한번 세탁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진중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회막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가 들어가는 것을 보면 벌떡 일어나서 인사를 하고 다시 앉고 그리고 진으로 들어가고 그런 것 이상의 무슨 신비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회막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뵈었던 그 진실한 소수들은 하나님을 만났고 그 회막 속에서는 아마 진 밖에서는 도저히 들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의 약속들이 주어졌을 것입니다. 소수만이 그런 특권을 누렸던 것입니다.
세계 역사를 보면 커다란 전쟁이나 역사적인 사건, 정치의 변화 이런 것들을 통해서 역사가 움직이는 것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 사람 때문에 움직입니다. 한 사람의 우연적인 인격적인 특성에 의해서 역사의 수레바퀴가 움직입니다. 지금은 죽었지만 북쪽에 김일성이 성질이 그렇지만 않았어도 6.25 안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호전적이고 뭔가 밀어붙여서 이 민족을 정복해 보겠다고 하는 개인의 야망이 6.25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더 큰 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났지만 그런 우연한 개인적인 특성이 그런 것들을 만듭니다. 한사람의 지도자가 우유부단하면 그 역사가 비비 꼬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을 보면 신앙의 세계에서도 그런 공식들이 성립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불타고 깨어있는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시고 거기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러나 세상 끝 날까지 그렇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문제는 소수마저도 잠들어 있고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명백하게 은혜를 주셔서 자신의 인생이 무엇을 찾아서 살아야 될 것인가를 보여주셔서 진리를 소유하게 하신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을 찾고 추구하며 살아가지 않으면 그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의 재앙이 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소수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했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러 회막으로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부르짖기 전에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그들의 죄가 얼마나 엄청난 죄인지를 보여주시고 그들을 심판하겠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조용히 앉아서 기다릴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우리가 주님의 처분을 어찌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믿음을 가장한 운명론에 빠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각성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부흥이 일어나던 때를 보면 그 직전에는 항상 그 시대에 비극을 느끼는 비관적인 상황을 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는 부흥이 너무나 놀라우니까 바로 직전의 시대는 너무나 타락하고 비참해서 마치 세상 끝나간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란 언제나 그랬습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기도하던 사람들은 세상을 보면서 이 세상이 그 전의 세상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생각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의 빛이 그들의 영혼이 비춰서 각성시키고 변화시키시니까 자신들이 이렇게 계속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잃어버리고 있는 축복들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지금만 불신앙의 시기가 아니라,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5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크게 만나고 자기의 민족과 이스라엘을 위해서 부르짖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 시대의 역사를 보면서 분노하거나 눈물 흘렸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비교치는 작년이나 재작년의 자기나라 형편과 비교 할 때 어떠했느냐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 상태가 어떠해야 하는가, 주님이 오셔서 다스리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나라가 어떻게 의롭고 자비가 넘치고 공법이 물같이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거룩한 각성이 하나님께로부터 어느 한순간 들어오는 것입니다. 자신 속에 그런 나라가 이루어지며 그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추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추구하며 살아가는 그 사람의 눈으로 적당히 살아가는 그 시대를 바라볼 때 그는 깊이 고통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하나님을 앙모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열렬히 찾은 사람들은 단지 기도하기 위해서 열렬해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그 놀라운 능력으로 우리를 건져주셨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그 은총이 자신들을 떠나려고 한다는 깊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조용히 앉아서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았습니다. 이 사람들도 그 죄악에 동참했던 사람들이지만 어느 순간에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기도할 수 있도록 부르시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성결하고 깨끗한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참한 죄인들을 불러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로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죄인 중에 가장 부패하고 쓸모없는 사람을 불러서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위대한 구속의 대업에 동참할 수 있도록 특권을 주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영광스러운 기도의 섬김으로 부름 받은 사실 자체를 하나님의 은혜로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 소수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진중에 있는 수많은 백성들을 보시면서, “야. 너희들 몇 명 나와서 기도해도 소용없다. 비교해 봐라. 저기는 수 백 만 명이 모여서 아직까지도 정신 못 차리고 기도도 안하고 저러고 있는데 너희들 몇 명이 와서 기도한다고 내가 봐줄 것 같으냐? 혹시 90프로 이상 나온다면 몰라도.”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하러 나오는 사람들의 순도입니다. 그 마음의 순도는 얼마나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사람들인가 하는 것에 달려있었고 그것은 기도의 열렬함을 가져오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에 실패하고 있으면 여러분들은 삶에서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그런 기도의 능력은 회복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기도에 몰두하는 일을 좋아합니까 아니면 기도에 관해서 듣는 것을 더 좋아합니까? 지금도 제가 기도의 거장들의 생애를 얘기하면서 영광스러운 기도의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은 황홀경에 빠질 것입니다. 이런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에 관한 생애를 들으면서 감동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내가 놀라운 사람인가 생각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은 위대하지만 그 사람들을 바라보고 입을 벌리고 있는 우리는 위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정직해져야 합니다. 내게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장해도 없는 것은 없는 것이고 있는 것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열렬한 기도의 영을 여러분은 유지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들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회막 앞으로 나아 왔습니다. 열렬히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 밖에 주님을 생각 하지 않는 사람은 일주일에 한 번도 기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지배받는 사람, 자신의 마음의 시선이 하나님을 응시하는 그 곳에서 벗어나지 않고자 몸부림치며 자신의 마음을 지키며 싸우는 사람, 순간순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아버지 하나님을 찾는 정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느 한순간에 기도하러 나아 올 때 다시 말해 그들에게 회막이 허락될 때, 고요한 장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을 때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정복된 마음속에서 기도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가 그렇지는 않지만 저는 교회의 중직자들이 모인 기도회 치고 신통한 기도회를 못 봤습니다. 굉장히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으면 청년들이 모인 기도모임 보다는 집사님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것이 더 뜨겁고 기도의 영이 살아 있어야지만 소망이 있는 교회입니다. 더 꼭대기로 올라가면 사령탑인 당회가 나옵니다. 도대체 우리나라 당회가 기도하러 몇 번이나 모이는지 묻고 싶습니다. 모여 앉아서 회무를 처리한다고 하지만 기도의 영이 살아있는 당회 얘기 들어보셨습니까? 당회원들이 모인 기도가 불 붙었다고 하는 얘기 들어보셨습니까? 이상하게 위로 올라가서 사령탑으로 올라 갈수록 은혜의 물에서 공중으로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뭐가 신령한 결정들이 나오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실패는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 삶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면서 살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기 때문에 두려움과 떨림으로 말을 더듬는 것과 도무지 하나님과는 관계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헤매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더듬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추구하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기도를 열렬히 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러 회막으로 떠날 때에 그들을 떠나게 만들었던 것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마음,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진으로부터 떠나서 외롭고 고요한 회막으로 나아가고 싶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바로 오는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그분이 자신들을 심판하시도록 조용히 앉아서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은혜를 간구했습니다. 뻔뻔스럽다고 자신들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어차피 자신들의 상태를 기초로 하고 자신들의 상태를 하나님 앞에 발판 삼아서 우리가 이렇게 잘났사오니 용서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가 아니라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용서하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자비로운 성품에 호소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호소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들만이 진정한 낙관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힘이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좌절하고 낙심하지만 기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교리적으로 성취하실 수 있는 일은 자신들에게 일어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관건은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고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은 오직 마음입니다. 외모로 우리를 취하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열수 있는 열쇠를 오직 우리 마음에 두셨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우리의 교회적인 상황과 선교적인 상황과 나의 영적인 상황과 장래일과 미래의 모든 일도 오직 하나님 그 손안에 달려있기 때문에 그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고 하는 절박한 고백을 가지고 있는 그 마음만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예화) 요즘에 집회 부탁이 엄청나게 들어오는데 사양하다가 하다가 지쳐서 이제는 바통을 우리 집사람에게 넘겼습니다. 이제 전화가 이 방으로 오면 저 방으로 가고 저 방으로 오면 이 방으로 갑니다. 그렇게 사양하는데도 꼭 가게 되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는 집요하게도 전화를 하다가 도저히 안 된다 그러니까 아예 찾아옵니다. 내년이고 후년이고 좋으니까 말씀하시고, 목사님 오실 때 까지는 부흥회 안하고 순전하게 기다리겠다고 하면 저의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우리교회 재직들이 목사님 모시고 집회하려고 6개월 동안 기도를 했다라고 하고 나오면 영력에 있어서 밀립니다. 응답 받았다는데 누가 항거하겠습니까? 정말 대단합니다. 가끔 농담처럼 해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거기 열린교회 맞습니까? 설교테이프 있습니까?” “무슨 테이프를 찾습니까?” “목사님이세요?” “예.” “아. 참 잘 됐네요. 다 다음 주에 한번 오실 수 있어요?” “갈 시간도 없거니와 가고 싶은 마음도 없지요.” 정말 끈질기게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할 수 없이 항복합니다. 지난번에 정근도목사님 교회에 갔을 때도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한번은 어떻게 정중하게 거절하겠는데 같은 사람이 다음에 전화를 걸어서 그 때 거절하셨는데 하면서 이야기하면 도저히 거절을 못 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도 그러한데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 아들이 컴퓨터 하나만 사달라고 노래를 합니다. 일체 얘기를 안했는데 가만히 보니 요새 교육용 프로그램이 많이 나오는데 용산에 가서 한번 보니까 충격 받을 정도로 좋은 프로그램들이 많았습니다. 싼 거 하나라도 사 줘야겠는데. (생략) 그래서 아빠의 마음을 엄청나게 감동시켜라 그러면 사줄지도 모른다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오늘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받으신 것이 아니라 솟아나고 있는 마음을 보고 감동을 받으신 것입니다. 마음은 환경에 따라서 막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맑은 물이 담겼는데 불을 끈다고 새카매지지 않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그 마음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삶의 자리에 갖다 놓으면 풍풍풍풍 솟아 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추구가 담겨있는 맑은 마음으로 섬길 자리에 갖다 놓으면 그 솟아나는 마음으로 순결하고 충성되게 하나님을 섬깁니다. 복음을 전파할 자리에 갖다 놓으면 불타는 그 순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러던 사람을 기도의 자리에 갖다 놓으면 열렬하게 기도합니다. 우리는 이런 건 다 거두절미하고 막 살다가 기도자리만 들어가면 폭포수같이 기도를 쏟아 부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북도 치고 주여 삼창도 합니다. 그러나 외치는 소리는 교회당을 메워도 하나님의 보좌에는 적막이 감돕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은 쉰 목소리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마음입니다.
기도하는 그 시간에 나와서 거의 기도를 못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에 갖다 놓아도 섬기는 모양은 있지만 그 모든 섬김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솟아나는 마음에서 비롯된 섬김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지만 정말 주님을 찾는 마음의 작용에서 쏟아져 나오는 충성됨이 섬김의 기반에 되어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시로 수가 틀리고 마음에 안 맞는 것입니다. 장애에 약합니다. 어느 자리에 갖다 놓아도 마찬가집니다. 이것은 기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도가 뭔지를 모르고 기도의 분위기가 잘못 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 자체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백년을 놓아 둬도 그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비춰서 자신의 삶 전체가 심각하게 병들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수술하고 자신을 개혁하지 않으면 백년을 지나도 결코 열렬하게 기도할 수 없고 변화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은 세상 속에서 막히는 게 있으면 넘어가고 거치는 게 있으면 돌아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오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지난주에도 묵상을 했는데 특히 계곡이나 도랑 같은 것을 볼 때 홍수가 한번 나면 도랑의 모양이 변합니다. 이 쪽 흙이 푹 파여져서 저쪽으로 가기도 하고 흙과 오물이 가득 싸여있는데 어디로 갔는지 싹 날아가 버렸습니다. 큰 바위 덩어리가 있었는데 어디로 가버렸는지 치워져 버렸습니다. 심지어 물이 돌아갔었는데 부딪치며 계곡을 들이 받아서 산을 허물어버리고 물이 똑바로 지나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래야지만 오는 것입니다. 장애물이 생기면 밀어버리고 거치는 것이 생기면 부셔버리면서 물줄기가 나가야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않겠습니까? 장애물이 생기면 넘어가고 어려움이 생기면 돌아가고 핍박받을 것 같으면 타협하고 신앙생활에 어려움이 생길 것 같으면 슬쩍 안 믿는 사람 행세를 하고 죄와 타협해야 될 상황에 가면 적당히 신앙적으로 양보하고 돌아가니까 수많은 물이 지나가도 세상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작년에 철원에서 생생하게 보지 않았습니까? 교회 무너진 것 보셨을 것입니다. 교회 옆에 산이 있고 강대상만한 큰 돌들 수십 트럭이 무너진 산 아래 하얗게 쌓여있는 것 보셨지요? 물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힘이 있어야 되는데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힘이 없습니다. 은혜 못 받은 사람을 통해서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자신의 마음을 드리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리 예수를 많이 믿어도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수많은 물이 지나갔지만 여전히 오물이 남아 있고 더러운 것은 달라 붙어있습니다. 어느 순간 강력한 물이 밀고 나가니까 다 부서지고 파괴되면서 새로운 물길을 만들어 버리는 것처럼 하나님 자신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만 이러한 능력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교회에 전도나 상담이나 심방이나 이런 많은 교회가 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거의 개인의 삶속에서 거의 기도하고 있지 못하면 거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에 있어서 강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세상 앞에서 연약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타협하고 적당히 세상과 어울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겠습니까?
오늘 성경에서 이들은 하나님 앞에 그러한 기도의 능력으로 나아가서 아버지 하나님의 은총을 구했습니다. 죄악이 넘쳤기 때문에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죄가 넘쳤기 때문에 더 넘치는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우리가 죽은 자와 같기 때문에 더 커다란 생명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캄캄하기 때문에 더 놀라운 빛이 우리에게 필요하고 어두운 시대이기 때문에 더 찬란한 진리의 빛이 필요하고 패역한 시대이기 때문에 더 강한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고 비진리가 난무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칼 같은 진리의 말씀이 우리에게 필요하고 또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냉담한 시대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부어져서 잃어버린 순결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붙잡힌바 된 주의 거룩한 백성들로 다시 태어나기를 그 회막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삶속에서 기도 한 부분이 특별히 발달한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삶의 인격과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찾고 추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회막으로 나아가게 되었고 그 회막에서 아버지 앞에 기도할 수 있도록 부름을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도 듣지 않는 기도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움직이는 기도가 아니면 진정한 의미에서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한 기도의 능력을 사모한다면 그것을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릴 각오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세상의 안일도 손에 넣고 기도의 능력도 손에 넣고 데릴라의 무릎도 베고 잠들고 싶고 하늘의 영권도 소유하고 싶은 것입니다. 도둑놈의 베짱입니다. 그렇게 안 되게끔 돼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삼손이 신전을 무너뜨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한 심령으로 데릴라를 떠나서 비록 머리카락은 다 잘려졌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마지막에 자기의 눈을 빼고 하나님의 이름을 능욕한 이 원수들과 함께 죽을 수 있는 영광스러운 특권을 달라고 기도할 때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머리털도 없는데 그런 놀라운 능력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열납되고 받쳐지니까 하나님이 진노 가운데서도 마지막에 응답하셨습니다. 여태까지 삼손의 힘의 근원은 머리털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머리털이 다 잘리고 이치적으로는 힘이 없어야지 맞습니다. 삼손의 머리카락이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지만 예전에 길게 늘어트릴 때만큼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초월해서 하나님이 삼손에게 능력을 부어주시니 위대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소수와 같이 살아가야 됩니다. 부패한 세상에서 밀가루처럼 살아가는 것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심판받아 마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더하면서 세상에 있는 것들을 조금 더 얻고 부를 누리면서 이 세상에서 안락하게 사는 것이 정말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세상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러나 호세아서 2장에서 말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그 길은 돌아갈 수 없는 길입니다. 광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애굽을 그리워하고 추억했지만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돌아갈 수 없는 길이지만 어리석게도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배교의 마음을 품고 광야를 지나는 동안 그들은 그 광야의 길이 고통과 눈물의 길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자신들이 분명하게 얻어야 할 기업에 대한 소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광야의 고생은 고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복된 낙원과 영광스러운 기업으로 가는 축복된 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는 회막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외로움이 있는 광야의 밖 길로 걸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뛰어나고 무엇보다 진실한 기도의 영을 소유하면서 기도로 하나님을 훌륭하게 섬기다 죽은 사람들은 남들이 걷지 않은 평범하지 않은 길을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과 대면하고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정신적인 광야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만족은 세상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진토와 같이 아무것도 아닌 인생이 무릎을 꿇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사실이 그들을 감동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을 제쳐놓고 그런 깊은 기도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셔서 역사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셨고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셨습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신비하고 기이한 세계의 일들을 미리 보여주셨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기도하게 해주셨습니다.
승리하는 기도생활이 아니면 그 기도생활은 무슨 기도생활입니까? 무승부의 기도생활은 없습니다. 승리하는 기도생활을 이어가지 아니하면 패배하는 기도생활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기도생활을 승리하는 기도생활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나는 약하지만 약한 것만큼 무릎으로 살기 때문에 강하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형식적으로 살아갑니다. 조금만 은혜 받고 진실한 신자 비슷하게만 되어도 교회 안에서도 탁 튀어 보입니다. 대단하다. 뭐가 대단해요. 이제 겨우 예수 믿는 사람 됐는데. 설교를 조금만 해도 ‘와 대단하다.’ 뭐가 대단해요 성경에 나와 있는 것을 말했는데. 복음 근처에 간 것만 말을 해도 사람들은 충격을 받고 감탄을 합니다. 통탄할 일입니다. 조금만 기대해도 사람은 미안하게도 우리를 어마어마한 기도의 사람으로 착각을 합니다. 이런 사실 자체가 교회가 얼마나 잠들어 있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훈련으로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훈련으로 되지 않습니다. 마음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고 내 인생의 모든 복잡한 일들을 붙들고 매달리는 대신에 광야에서 나 홀로 하나님을 대면하리라고 하는 고독하게 하나님 앞에 서는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결단 없이는 기도의 변화가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울리고 웃고 떠드는 것이나 즐거워하고 도무지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에 관해 말하는 것에는 입에 침이 마르지 않을 정도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이야기하는 것에 게으른 사람들은 껍질뿐인 사람들입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사람, 마음에 정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 앞에 있는 현실들을 보십시오. 세상은 점점 더 치열한 열심히 살아갑니다. 자신들을 자랑하고 신앙을 대적하고 자기 육신의 소욕을 따라서 자기의 소견대로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불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복음화 하고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세상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보다도 더 뜨거운 불덩어리와 같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세상에 몰두하는 것만큼 우리는 하나님 자신에 몰두하는 사람이 되어서 그 몰두하는 일에 대해서도 세상을 이기는 사람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시장 바닥에서 물건 하나 팔기 위해서 정말 치사할 정도로 지나가는 행인의 옷소매를 붙잡고 애원하듯이 매달리는 장면을 보셨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모습과는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중얼 중얼거리다가 기도 안 되면 오늘은 재수 없는 날이네 하고 툭툭 털고 돌아갈 때 여러분의 마음속에 자신의 모습을 향한 슬픈 마음이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왜 이 복된 교제의 시간에 하나님과 사귀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도록 부름을 받은 이 시간을 고통스러운 의무와 같이 이렇게 때우다가 돌아가야 되나. 나의 기도생활은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때우는 기도생활인가 정말 나의 기도의 골방에 하나님과의 진실한 사귐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의 임재의 음성이 들려오고 있는가라고 반성을 해봐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인데 하나님은 왜 기도할 때 얼굴을 돌리시는 것일까? 한 시간을 엎드려 매달려도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무거운 셔터이상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새벽기도 다닌다고 인정해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금요기도회에 빠짐없이 나오는 사람이라고 사람들이 칭찬해 주는 게 여러분들에게 그렇게 대단한 것입니까? 훈장을 달만큼 그렇게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까? 중요한 것은 얼마나 기도하는 모습을 갖춘 사람인가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 마음과 영혼 속에서 하나님과의 교통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그 교통이 우리의 모든 삶에 자원이 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요구에 얼마나 민감한지 보십시오. 요즘 새벽기도 끝나고 가면 일부러 눈 뜰 때까지 늦잠은 잡니다. 너무 컨디션이 안 좋아서 의무감을 가지고서 잡니다. 육신적 요구에 대해서는 이렇게 민감합니다. 조금 피곤하면 얼른 드러눕고 싶고 배고프면 서서라도 좋으니까 얼른 먹고 싶습니다. 배가 부르면 깨끗하고 환하고 맛있고 편안하게 앉아서 먹지만 너무 배고프면 근처에서 파는 붕어빵이라도 사먹어야 합니다. 우리 육신의 요구에 대해서 이렇게 민감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적인 요구에 대해서는 얼마나 민감합니까? 우리의 속사람은 하나님의 얼굴빛을 보게 해 달라고 소리 지르고 이제 내 영혼이 기도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거의 죽게 되었사오니 내 속사람의 주인이시여 제발 기도 하소서 외치고 부르짖어도 우리는 오늘 왜 이렇게 배가 고프지? 이런 뚱딴지같은 소리나 하면서 자신의 육신의 소욕에 반응하는 일에만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 비춰보면서 이런 모든 우리의 현실의 삶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우리의 신앙생활에 어려움이 생기면 슬쩍 넘어가던 사람들이었습니까? 아니면 밀치려고 몸부림치면서 능력이 없는 것을 ‘도와주시옵소서.’라고 하며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 삶속에 부어져야 할 필요를 느끼며 절박하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기도하는 기회로 삼았습니까? 얼마나 우리들의 신앙이 편의주의적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어려움이 생기면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기고 모든 장애물들을 파괴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길을 내게끔 만들어 주시는 자신의 환경에 변혁과 마음의 변화를 위해 기도하는 대신에 어려움이 생기면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머리로 생각하며 타협할 궁리를 찾고 돌아갈 길을 찾지 않습니까? 오랜 기간 신앙생활 생활해도 우리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살아온 족적이 없습니다. 살아온 모든 길은 곧이곧대로 올바른 믿음을 따라서 걸어온 길이 아니라 세상에 바람이 불면 하나님 쪽으로 움직이고 하나님 앞에서 어려움을 느끼면 세상으로 가는 갈지자로 흔들리면서 수 십 년을 신앙생활 했어도 제자리에서 술 취한 사람이 흔들린 족적과 같이 흔들리다가 제자리에 머물러있는 삶의 자리를 우리가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 모든 문제는 무엇입니까? 능력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도하지 아니하면 도무지 능력 있는 삶을 우리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단에게 굴복하고 환경에 무릎을 꿇고 자기가 처한 상황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굴종적인 순종의 태도로 환경과 사탄이 미워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제한적으로 신앙생활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땅을 정복하도록 거룩한 복음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놀라운 복음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까지 역사해서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고 어둠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 빛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신 위대한 덕을 만천하에 선전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고 그 부름을 소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기도 외에 우리에게 무슨 대안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런 용사들이 필요합니다. 교회를 에워싸고 있는 많은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넘어설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수없이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거저 왔다가 돌아가지 아니하고 그날이 하나님을 만나는 날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모임 위에 성령이 함께 하시는 거룩한 표징들이 나타나야 됩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손길이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모일 때 마다 만지고 지나가서 사악한 죄인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회개케 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치유와 은혜를 경험하고 어둠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진리의 빛으로 나와서 자유하게 되는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까지는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허락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달이나 많으면 한 육 개월 쯤 매일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기로 결심하는 일은 가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길면 한주일이나 사순절 기간 동안 아버지 앞에 나와서 매일 아무도 없는 그 시간에 그 회막으로 나아가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 하는 결심은 기도를 통해서 약속하신 축복에 비해서 희생이 너무나 큰 것입니까? 수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대해 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연약하고 하나님 앞에 어리지만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지 삶의 좌표가 아직도 정해지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영광과 그 거룩한 나라를 위해서 살도록 부름을 받았을 때 우리가 너무나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광스러운 꿈들이 좌절되고 있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 때는 없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늘로 부터 부어주는 커다란 능력과 은혜입니다. 이러한 것을 가져오게 하는 가장 첫 번째 발걸음은 그것을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우리들 가운데 생겨나야 됩니다. 그것들을 하나님께서 부어주실 거라는 굳센 믿음과 기도로 나타난 믿음의 실천,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기도하고 간절히 부르짖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기를 그치고 기도하는 일들에 우리의 마음을 바치는 것을 삶의 우선순위로 삶기를 포기하는 그 즉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테니까 뒤나 좀 봐 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도 당신 안에 위대한 놀라운 능력을 소유하시고 누군가에게 위대한 능력의 보고를 열어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나 사면을 두루 살펴보아도 하나님의 마음을 마음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흔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간절히 부르짖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그들을 만나면 우리가 보기에는 그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 너무나 많은데도 그 사람 한사람을 모든 사람들 위에 시기 나게 하시는 것처럼 한없는 은혜를 그들에게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나라에 유용한 도구들이 되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기도의 사람들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능력 있는 기도의 영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우리의 생각들이 바뀌어야 되겠습니다. 주일날은 말씀의 자극을 받고 열심히 기도하다가 월요일부터 감도가 떨어지기 시작해서 바닥까지 내려간 상태에서 금요일에 교회를 찾지는 않으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뜨겁게 산 사람들만이 하나님 앞에 열렬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수요일에 한 신학생이 말하길 물었습니다. 목사님. 여기가 막혔을 때 뜨겁게 기도하려면 어떻게 기도해야 됩니까? 그래서 제가 뜨겁게 사냐? 열렬히 살아야지 뜨거운 기도가 나오는 것이지 열렬히 살지 않는데 어떻게 뜨거운 기도가 나오겠습니까? 가슴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불타는 목표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불타는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것이 가족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든지, 질병이 낫는 것이든지, 맡고 있는 섬기는 부서가 부흥하는 것이든지, 전도 대상으로 놓고 기도하는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든지, 여러분 자신이 더 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입니까? 유능한 전도사가 되는 것입니까? 그것 밖에 내 인생의 목표가 없는 것처럼 타오르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 열렬히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 사람들은 목표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간절히 찾고 찾으니까 뜨겁게 열렬한 기도의 영으로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점잖케 신앙 생활하는 사람치고 열렬한 기도의 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셨습니까? 가슴 속에서 뭔가 불타오르고 있을 때 그것이 어떻게 행동으로 삶으로 표현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런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간절하고 절박하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도록 간구하는 기도의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매일 매일 체험하는 생생한 삶이 있고 하나님을 향한 섬김이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삶과 우리의 기도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기도가 안 될 때 나는 기도가 너무 약해 나는 달란트가 기도가 아닌가봐 생각하는 건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서 이미 여러분의 삶에 중심이 하나님을 떠나가고 있음을 하나님께서 명백하게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삶이 하나님을 초점으로 해서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으니까 기도의 영이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특별히 기도해야 합니다. 먼저 나의 연약한 기도 생활과 박약한 기도 생활이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의 삶 전체를 다시 돌아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고 있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시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열렬한 기도의 영을 회복하고 싶어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기도의 영을 회복하기 위해서 기꺼이 외로워지기까지 빈들에 나아갈 수 있는 용기, 거기서 고요히 하나님과만 대면할 수 있는 용기, 그런 하나님을 향한 추구와 사모함 이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는 교회적으로나 개인의 삶에 있어서 엄청나게 많은 기도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기도의 기회들을 소비하고 낭비해 버리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영혼들을 위해서 뿐 아니라 교회의 영적인 상황과 새롭게 하나님을 믿기 위한 지체들의 변화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가르치고 있는 영혼들이 도무지 거듭나지 않고 변화되지 않는 것을 인해서 고통하고 진토에 구르는 것과 같은 마음이 돼야 합니다. 그 환경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씨름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런 과정 없이는 결코 영력 있는 기도를 우리는 소유할 수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응답과 천국의 하늘 아래서 내리는 능력의 이슬을 맞았던 기도의 사람들은 기도의 환희를 맛보는 짧은 순간을 얻기 위해서 진토에 구르는 것과 같은 고통과 아픔의 시간들을 처절하게 보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고통 하는 아픈 시간들을 너무나 많이 보내었습니다. 천국의 위대한 능력은 쓰디쓴 고통과 연단 끝에 주어지는 놀라운 기쁨이요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함께 하고 성도들의 기도가 교회를 움직이기 시작 할 때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상상할 수 없는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미 죽기로 정해져 있고 날이 새면 사형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있는 교회의 지도자가 살아서 교회로 돌아온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던 이방인의 총독이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아서 죽는 일도 그러한 기도의 영성을 소유할 때 일어납니다. 우리가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그 실패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부어지면 한 순간에 전세가 역전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됐던 복음전파의 환경들이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열리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이 땅에 살아 존재한다는 증거를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방법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를 실감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 한가운데 살아 역사하시며 동행하시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커다란 축복이고 은혜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도된 우리들의 의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당부합니다. 특별한 기도의 시간들을 가지십시오. 에어로빅 체조를 하겠다고 새벽에 일어나고 심지어 등산을 가겠다고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박차고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셔야 됩니다. 새벽에 나오는 것이 어려우면 밤중은 어떻습니까? 직장에서 끝나면 쉬고 싶을 것입니다.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나오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고난 주간 한 주간쯤은 교회에서 기도하면서 무시로 기도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며칠 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금식하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은 또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런 식으로 광야를 나아가야 합니다.
(예화) 어느 교회에 갔는데 우리가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갈릴리 바다로 가야 됩니다. 거기가 어디냐고 묻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새벽기도 나옵니까? 아니요. 내일 새벽에 새벽기도를 나오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만나 주시겠지 기도하면서 평소에 안하던 기도의 태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보십시오. 거기가 갈릴리입니다. 밤이든지 새벽이든지 어느 때든지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위한 특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늘도 듣고 그냥 돌아가지 말고 뭔가 구체적인 결심을 여러분들 속에서 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떻게 전심으로 주님을 찾고 어디를 나의 회막으로 삼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인가 정말 진중에 남아 있던 다수의 사람들이 아니라 정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 분류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로 나타나야 되겠다고 하나님 앞에 간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지금까지 많은 은혜를 받고 믿음 생활 하면서 간증도 쌓고 해서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걸어왔습니까?
(찬양)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지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얼마나 수많은 사연을 앉고 여기까지 왔는지 저도 아는데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여러분 본인들이 알고 있는 것 중에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 아닙니까? 예수님을 놓을 수 없어서 여기까지 걸어왔는데 주님이 우리를 분류하실 때 너는 나를 전심으로 찾는 자고 너는 아니야 그러면 여태까지 걸어온 길은 그러면 무엇이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도 괜찮습니까? 그럴 순 없습니다. 매순간 순간 마다 우리마음을 지켜야 됩니다. 저는 언제부턴가 마음이 산란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각이 들 때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리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찬양)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질 않네.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세상에 실망스러운 일들이 일어나서 우리의 마음을 산란하게 할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쓸어내리면서 하나님 제 마음에 한 번도 저를 배반하지 않으신 분은 하나님 한분 뿐입니다. 저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 이미 바쳐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면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순간순간 원하지 않는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눈을 들어서 그 고통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의 손길을 바라보아야 됩니다. 좌절할 수밖에 없을 것 같고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이런 상황을 벗어나 볼 기력조차 없다고 느껴질 때에도 마지막으로 하나 확인하게 되는 것은 그래도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 밖에는 희망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 기도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 한번 우리의 과거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떤 속에서 나 같은 죄인을 건져 주셨는가 내가 처음 주를 만났을 때 내 모습이 어떠했는가? 지치고 모두 병들어 있는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하나님은 실로 오랜만에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을 찾고 싶은 마음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세상에는 아무런 위로가 없었지만 이상하게 그 순간에 하나님만 만나면 여태까지 세상에서 위로가 없었지만 하나님 안에 모든 위로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만은 나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거 하나도 없었다면 우리는 여기까지 신앙생활하며 걸어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죄악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거나 하나님 앞에 차가운 거절감을 느끼거나 내 능력보다는 훨씬 커다란 환경에 매여서 도저히 거기서부터 어떻게 하나님 앞에 자신을 지키는 조차도 힘들게 느껴질 그 때에도 여태까지 낙망하지 않고 살아오게 만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죽음에서 살리시고 이것보다도 더 커다란 고난과 고통 가운데서도 우리를 건져내셨다고 하는 그 확신 하나가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저는 더 어려웠을 때를 생각합니다. 더 어렵고 고통스러운 때에도 나를 건져주신 그 하나님이신데 오늘은 얼마나 하나님이 나를 건져주시려는지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위로가 됩니다. 옛날에 시련의 비바람과 환란의 고통이 그렇게 넘쳤을 때에도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는데,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요 앞으로도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면서 살 건데, 나는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하나님 이외 어디에서 도움을 호소하고 하나님 이외 누구에게 가서 나의 이 딱한 처지와 상황을 호소할까 생각하면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 앞에 무릎을 세우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스스로를 달래야 합니다.
시편 42편에 보면 시인이 자신의 속사람을 타이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 영혼아 내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불안해 하는고. 너는 너의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된다. 마치 자신이 남인 것처럼 속사람을 타이르는 것입니다. 그 마음 그 영혼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됩니다. 매일 매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매일 매일 붙들어 주시는 사랑과 은혜를 의지하며 사는 백성이기 때문에 비록 내가 하나님 앞에 주님 보시기에 선하지 못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충성스럽지 못해도 오늘도 오셔서 내 마음을 지배하시고 점령하셔서 내 마음을 스스로 정복케 주시고 나로 하나님 앞에 기도의 사람으로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됩니다.
옛 생활로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그 죽음의 자리로 그 죄악의 구렁텅이로 우리가 다시 돌아가서 세상의 만족을 얻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는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심판에 대해서 눈을 떠야 됩니다. 이 시간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기도할 회막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셨고 거기 나올 사람들을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택하시렵니까? 진중에 앉아서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리시겠습니까? 아니면 그 하나님의 은혜를 호소하고 그 얼굴빛을 나의 어두운 영혼과 가정과 교회 위에 역사위에 비춰 주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이 드러나는 일에 나의 인생이 이바지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둘 중에 어떤 삶을 선택하며 사시겠습니까? 오늘도 여러분 그냥 돌아가지 마십시오. 뭔가 구체적인 계획을 하나님 앞에 말하십시오. 어떻게 새롭게 무너진 기도의 세계를 세우고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온 영혼이 주의 것이오니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을 찾고 추구하면서 우리의 기도가 회복되어지는 것과 함께 하나님과의 관계가 모두 우리 앞에 회복되어 지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19970323주일오후
2016
이스라엘 백성들의 변화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 까지 바라보며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기둥이 내려 회막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더니”(출33:8-9)
교회의 위기와 부흥의 기회 (1997.03.23 주일오후3)
녹취자: 이경순
지난주에는 하나님을 앙망하며 찾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회막으로 나아가서 기도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찾는 기도의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성경 8-9절이 기록하고 있는 그런 기도로 말미암아 첫 번째로 나타난 그런 변화의 조짐들과 변화의 역사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일어난 놀라운 변화중 하나가 우리가 읽은 성경에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모세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는 백성들과 함께 회막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 그 때에 백성들이 모두 자기가 서있는 장막 문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기도하러 들어가는 그 광경을 주목하고 지켜보고 그렇게 있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어주신 이 지도자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가게 되었을 때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 회막으로 들어가는 모세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는 지도자인 모세가 하나님과 교통하며 살아가는 일에 커다란 비중을 둔 것에 대해서 눈뜨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회막에 무엇을 하러 갔겠습니까? 모세가 회막에 나아간 것은 회막에 나아가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그 백성들과 함께 기도하기 위해서 나아갔던 것입니다. 모세가 회막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었을 때 기도하러 들어가는 모세를 바라보면서 모든 백성들은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일어선 백성들은 자기하던 일을 멈추고 기도하러 들어가는 그 모세를 지켜보았습니다. 즉,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이제는 기도의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전에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커다란 위기를 당하게 되자 그들은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 하나님과 교제하고 만나기 위해서 들어가는 그 모세를 바라보면서 자기들 마음속에 있는 그 모세를 향한 신뢰와 존경의 마음을 일어서서 그를 지켜보는 것으로서 표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회막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 일이 자신들의 삶과 자신들의 민족의 앞길에 그토록 심각하고 중요한 관건이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눈뜨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냉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도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서 새롭게 눈뜨게 되는 놀라운 변화와 역사가 일어나기 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아뢰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전에 먼저 소수의 백성들이 그 자신들이 처한 민족적인 상황과 그리고 위기 앞에서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그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하고 매달리게 되자 그 소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주님의 얼굴을 구하며 부르짖는 기도는 다수의 수많은 백성들에게 기도의 중요성에 대한 커다란 각성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앞에 놓인 당장의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서 허둥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회막을 향하여 갈 때 그는 지도자로서 뭔가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 면전으로 다가가고 있다고 하는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에게 있는 필요와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향해서 동물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살아오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는 대단히 영적인 감각을 가진 백성들로 변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나아갈 때 그들은 그 순간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섰고 일상적인 일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모세를 경외스러운 표정으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서서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그 시간이 바로 구별되고 매우 특별한 시간이라고 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과 모습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 이 소수에 의해서 깨어난 각성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도달하게 되는 또 하나 결론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모두 한결같이 깨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정말 크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교회, 어느 때이든 이렇게 커다란 각성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소수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을 기껏해야 기도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존경심을 표하는 정도의 사람들만 되도 대단히 각성되는 공동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 만나게 되는 교훈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특별히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그 교회와 민족은 잠시 위기를 만나는 것 같지만 그 위기 속에서 당장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힘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껏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오시고 이끌어 오신 모든 과정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누구 잘난 사람을 세워서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간섭하시고 당신을 온전히 의뢰하고 복종하는 자들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유능함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붙잡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해서 눈뜨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시고 섭리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소수의 사람들이 마음을 바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러한 모습을 그리워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깨어있는 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에는 잠시 어려움이 오는 것 같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강한 능력과 힘을 다시 한 번 그 공동체를 통해서 보게 됩니다.
오늘 하나님은 그 소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해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간구하고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그 소수의 백성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놀라운 은혜와 변화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큰 은혜를 이 기도를 통해서 기도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얼마나 매우 특별한 관계에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깨어있는 사람들이 남아있는 공동체에는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진리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변혁시키시는 이 일이 하찮은 일이 되지 않고 언제나 중요한 일이 됩니다. 그리고 매우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며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꼭 필요할 때에 농축된 기도는 그렇지 못한 때의 평상적인 기도의 수백 배의 위대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한 교회와 한 민족이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찾는가를 보면 그 공동체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우상을 섬기고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오늘 이 위기를 하나님 앞에서 이 지도자의 도움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로 이 어려움들을 극복하는 장면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보다도 소수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기 시작하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마음에 백을 다 마음을 드리지 아니하고 90을 드린 사람이 일만 명이 모여서 기도하는 것 보다는 마음을 모두 드리는 한 사람이 기도하는 것이 더 크고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 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가슴에 새겨야 됩니다. 이 소수의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가 다수의 잠자는 백성들의 마음에 어느 정도의 자극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다음입니다. 왜 그렇게 기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그들 모두 회막으로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기도하지 않고 왜 단지 모세가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일어서기만 하고 또 회막으로 나아가는 지도자의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으로 그쳤을까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지 않습니까? 이것이 보여주는 바는 결국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뭔가 우리 가운데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기 위해서 우리로 기도하게 하실 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지켜보는 구경꾼과 같은 모습을 취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기도의 중요성도 알고 기도를 해야겠다는 자극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극이 정말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으면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기도에 이르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지극히 작은 소수 그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얼마큼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깨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고, 이 백성들 가운데 있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관건입니다. 오늘 성경은 마음을 바쳐서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깨어있는 한 어려움과 위기를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기도로 부르시는 때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징표와 표징으로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때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하며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심각한 때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실 때 그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됩니다.
그런데 결국 하나님이 그 교회의 백성들에게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하나님을 찾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가 뜻을 모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 우리들이 교회생활하면서 심지어는 이 열린교회 안에서도 모든 교인들이 한마음이 되어서 지금 우리 모두가 한마음으로 사도행전 1장에서 이야기하는 전혀 기도에 힘쓰고 있다고 하는 자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순간들이 얼마나 되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언제든지 소수의 사람들은 기도하고 다수의 사람들은 그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은 부르짖어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침묵으로 그 기도의 시간이 경과되기를 견디고 지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결국 마음의 문제입니다. 개인적으로든지 혹은 교회적으로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열심히 잘 기도하는 것도 어렵지만 뜻을 모아서 함께 기도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어렵기 때문에 그만큼 함께 기도하는 그 기도가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함께 기도하기가 어려운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한 교회에 기도의 영을 부어주셔서 기도하게 하실 때 그것들을 가로막고 훼방하기 위한 사단의 가장 커다랗고 강력한 무기는 어떤 이유로든지 사람들의 마음을 나누어 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사람들의 마음을 갈라지게 하고 나누어놓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갈라지게 하고 나누어 놓으면 사단은 그들이 한 마음으로 전혀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일단 마음이 하나로 합하여지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모임을 가지고 그들이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별로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을 오늘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마음을 지키는 사람이 기도의 세계를 지키는 사람이고 교회에 있어서도 그 하나 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신앙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사단은 이러한 도전들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한 교회가 기도의 영을 모두 차갑게 메말라 버리게 될 때까지 도전과 시도를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사단은 그 교회를 기도의 영을 모두 잃어버린 싸늘한 교회가 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들의 지배권을 그 교회 속에 심어서 교회가 십자가를 세웠지만 실상은 사단의 회가 되게 하는 것이 바로 마귀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보다 중요한 것, 보다 높은 가치를 위해서 작고 사소한 것들을 기꺼이 없이하고, 기꺼이 작고 사소한 것들을 파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고 원하시는 그러한 모습으로 우리들의 기도의 세계를 쌓아가기 위해서 기꺼이 비용을 지출해야 됩니다. 그러면서 오늘 성경은 그렇게 그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이제 모세에게 다시 말씀하기 시작한 사실을 오늘 성경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신 백성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인도받도록 부름을 받은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보며 이기고 견뎌야 되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들의 간절한 기도가 자신에게 들려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다시 말씀하시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여기에 분명하게 나와 있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한 기도 회막으로 나아와서 하나님 앞에 절박하게 부르짖고 하나님을 찾는 그런 간절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구하고 울부짖는 그 기도소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의 말씀을 반복하셨을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뭔가 지금 놓여있는 이 사태를 해결하고, 하나님께서 보다 더 좋은 길로 이 백성들을 인도하기 위한 그런 새로운 대화들이 모세와 하나님 사이에 오갔던 사실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 모세가 이렇게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마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들 앞에 놓여있는 이 모든 어려움과 그리고 위기를 극복하고 넘어설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기회라고 하는 사실을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어느 교회에 가도 높은 자리에서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낮은 자리에서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대면해야하는 그런 고통스러운 순간을 뛰어넘어서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기도에 자신을 바치는 사람은 언제나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사람들이 사실은 교회와 그리고 역사를 움직이는 주인공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사람의 눈에 보이게 움직이고 이일 저 일을 하고 있지만 기도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자신의 기도를 통해서 교회를 이끌어 나가고 움직여나가는 놀라운 일들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들을 이루어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됩니다. 매우 특별한 때를 우리들이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진정한 소원이 무엇이고 그리고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도 결국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백성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의 기도로 하나님 앞에 입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절박할 때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이 바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리고 우리가 그나마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힘쓰고 애쓰면서 우리들이 믿음생활을 해왔다면 그것은 또 누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까? 저는 지금도 이 본문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그리고 개인이건 그 사람이 누구이건 하나님이 그를 붙잡고 계실 때 그 때에만 하나님의 백성일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람일 수 있습니다. 순간순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으로 우리를 매순간마다 사로잡아주셔서 우리를 당신의 손에 의해서 주장되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시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금방 쓰러질 수밖에 없는 인생들이요 그리고 죄인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순간 마다 하나님을 찾아야 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내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고 그리고 우리의 교회와 우리의 가정과 그리고 나의 이 모든 섬기는 일들을 하나님이 강한 손으로 붙잡아주시지 아니하시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그런 고백을 가지고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회막에서 만나주시던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3년이 넘는 동안 하나님의 교회가 이끌어져오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시련과 어려움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도 하나님께서 우리 알게 우리 모르게 극복하며 이기며 나아오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 교회가 저는 3년 동안 결코 풀밭에 그늘에서 누워서 자란 교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진 비바람을 겪으며 혹은 쪼개질 것 같은 그런 커다란 풍랑 앞에 마주하면서 헤치고 나왔습니다. 이번에 충무에 가니까 조선소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굉장히 잘 사는 도시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요즘은 가난한데 옛날에는 어업을 해서 정말 잘 살았답니다. 그 조선소 옆을 지나면서 그 교회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배가 작은 배는 흔들리는데 이게 아예 몇 만톤되어 버리면 흔들림이 거의 없답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만들어지는 배는 그저 몇 톤이나 될지 크기는 잘 모르는데 조그만 한 3~4층짜리 빌딩만한 배들을 만듭니다. 그것도 조그만 배에 비하면 엄청 나게 큽니다. 그런 배들을 만드는 장면들을 쭉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교회도 워낙 크면 크다는 것은 단지 사람이 많이 모여서 크다는 것이 아니라 파도와 시련의 비바람을 맞으면서 헤치고 나와서 내적으로 강인한 그런 성장을 이루어온 그 교회는 감각이 있습니다. 그 교회는 어려움 속에서 파도를 헤치고 시련 속에서 자기들이 지금 하나님을 찾아야 될 때라는 것을 아는 감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붙들어서 더 큰 어려움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 앞에 강하게 연단되어지고 새로워지는 그런 기회로 하나님께서 새롭게 해주시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되고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회막으로 나아가서 기도함으로써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변화된 태도로 이 모세에게 찾아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래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말씀하게 해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 그런 깨어있는 소수가 되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지금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제 이 말씀이 우리를 향해서 주신 말씀으로 여러분들이 받아들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그리고 이제 저희들이 이 고난주간을 통해서 오늘을 기점으로 고난주간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여러분 이 고난주간에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여 이 어려움과 그리고 이 시련들을 하나님 앞에 개인적으로도 이기고 그리고 또 우리 하나님의 교회가 이 고난주간을 통해서 더 크고 놀라운 그런 복음의 능력을 소유한 교회로 새로 태어나서 온 성도들의 마음속에 이 고난주간을 통해서 하나님을 새롭게 아는 지식과 은혜의 깊이가 다시 이루어지는 그런 영광스러운 그런 고난주간이 되었으면 부활이 우리에게 얼마나 커다란 소망이 되겠는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번 고난주간 동안에 여러분들은 할 수 있으면 더 많이 새벽이 너무 어려우면 낮이든 혹은 저녁이든 하루에 한 번씩 꼭 들려서 아버지 앞에 기도하고 또 혹은 기도로 밤을 새우고 하면서 이 교회당에 늘 드나드는 사람이 있고, 이처럼 저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게 되었으면 정말 하나님 앞에 귀한 고난주간이 되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아버지께서 오늘도 우리들이 그렇게 깨어있는 소수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므로 이 모든 어려움들을,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이 그리스도 고난의 의미를 헤치고 나아가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십니다. 이번 주간에 개인적으로 이렇게 깊은 기도 속에서 사실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특별히 이러한 고난이 목요일에 모이는 이 고난주간 특별집회 고난일 집회와 성찬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부어주셔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그런 영광스러운 그런 날들이 되게 해달라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위기와 부흥의 기회 (1997.04.02. 수요예배4)
회막 기도의 축복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출 33:10-11)
녹취자 : 김세나
지난 시간에는 수요일이 아닌 주일 저녁에 이 설교를 해오다가 부활절 이후 잠시 그쳤습니다. 이제 수요일로 옮겨서 계속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앞에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고 커다랗게 타락한 위기를 만개하게 되었을 때 회막을 만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찾는 자들은 그 회막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오늘 본문에서는 회막의 기도가 한창 진행되고 백성들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마음을 모아서 간절히 기도하고 난 후에 일어난 일들을 순차적으로 설명해가고 있는 첫 부분이 오늘 본문 10절, 11절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과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회막에서 기도하는 특별한 기도가 있고나서 무엇인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조짐을 10절, 11절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10절, 11절 말씀은 크게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보도해 줍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하나님이 사람끼리 서로 얼굴을 대면하며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모세를 대면하여 대화해 주셨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회막에 남아서 있었던 장면을 보도해 줍니다. 이 두 가지를 중심축으로 하여 이 속에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생생한 교훈들을 더듬어 가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시 말씀하시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전에도 있었던 일이지만 오늘 성경은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며”(성경-“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얼굴을 마주보는 것처럼 친밀하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대면하여 말씀하기 시작한 사실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회막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이 간절히 기도하고 난 후에 회막에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서 드디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다시 말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전에도 모세는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하였습니다. 이전에도 모세는 하나님과 얼굴을 대면하여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백성들의 간절한 기도가 있고난 후에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씀합니다. 설마 모세가 이렇게 백성들과 기도하고 난 후에 친밀하게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하며 나눈 대화의 내용이 주님이 친밀하게 모세에게 찾아오셔서 친구처럼 말씀하시면서, “모세야, 네 백성 너희가 아무리 회막에서 기도하여도 다 소용없어. 이제 끝난 거야.” 그렇게 다정하게 말씀하시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한 추측이 우리가 읽은 11절 이후에 전개되는 상황 속에서 암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은총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겠노라고 하는 약속을 베풀어 주시고 그 표징들을 보이시는, 부흥의 놀라운 표징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기 시작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쓸어버리겠다고 하신 상황의 모종의 변화를 암시하는 하나님과 모세의 친밀한 대화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위기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왕좌왕 하지 아니하고 모세의 인도를 따라서 주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고 찾는 사람들이 회막에 나아가서 아버지 앞에 간절히 매달려 기도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나아가서 진의 편안한 생활을 버리고 회막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고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기 시작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변화된 메시지를 가지고 지도자를 찾아오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지도자는 하나님과 더불어 대면하는 교통을 다시 찾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에는 어줍지 않은 민주주의 사고방식들이 오늘날 교회가 영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이 시기를 틈 타 교회를 마치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반상회 하면서 끌고 가는 곳과 같은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언제든지 상황과 성경이 충돌할 때는 일단 성경을 믿고 성경이 상황을 설명해 주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성경과 상황 사이에 있는 갈등의 폭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무엇인가 더 깊이 성경에 대해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겸비한 마음을 하나님 앞에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수많은 사람들이 손들고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토론을 하면서 운영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교회 제도를 세우실 때 거룩한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서 장로들을 뽑게 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민주적인 방식으로 교회를 운영하도록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지도자가 하나님의 거룩한 감화와 성경에 입각한 신앙의 정신으로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며 교회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최고의 자산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하나님의 사람이 그 교회를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시록 2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미래에 이루어질 위대한 일들을 말씀하시기 전에 각 교회를 판단하시는 것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판단하시면서 제일 먼저 에베소 교회에 나타나셨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른손에 있는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계 2:1)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2장 마지막에서 예수님은 일곱별은 바로 그 교회의 지도자들과 교회에 있는 종들이고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설명하십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처럼 깊은 혼란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써 모세의 영적인 지도력을 새롭게 회복시켜 주신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변화된 마음과 변화된 메시지를 가지고 변화된 환경을 약속하시면서 모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전과 같은 놀라운 친밀함을 가지고 사랑하는 종 모세와 더불어 교통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은 이 세상과 하나님의 교회에서 살아가는 동안 주님을 진실로 올바르게 섬기다가 죽은 이후에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아, 나의 신앙생활은 잘못되었구나.” 때늦은 후회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두 눈에 흙이 들어가고 두꺼운 무덤이 우리의 이불처럼 우리의 몸을 덮기 전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감당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목자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날 교회는 좋은 목자를 원하는 것만큼 좋은 목자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하여 간절히 중보기도 하는 사람들이 흔치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자리에서 모든 역사적인 이스라엘 백성의 연결이 끊어지고 모두 파멸되어 되어 버릴 것인지, 아니면 홀로 하나님도 없이 가나안 땅에 올라갈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셔서 다시 한 번 회복시켜 주실 것인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우왕좌왕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시켜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응답은 하나님께서 세운 모세를 직접 찾아오셔서 대면하여 말씀하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응답이 시작되었습니다.
모세가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 아래에서 아론과 함께 송아지를 만들고 경배하고 뛰놀기 시작하였습니다. 모세는 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갔고 이미 그 백성들을 통제할 수 있는 영적인 지도자를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난 후에 모세가 회막으로 갈 때 그들은 문 앞에 일어섰습니다. 본문에서 “경배하고”라고 되어 있는데, “히스타후후”()라는 동사입니다. 이것은 “인사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인사한 것인지 모세에게 인사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그러나 히브리어 어법상 마지막에 나온 것이 목적격 인칭 접미가 붙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앞의 문장 속에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제가 보기에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경배가 아니라 모세를 향한 인사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위기 속에서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나니까 모세의 지도력이 회복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일들을 위해서 얼마나 기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위기를 만나서 모세가 하나님께 회막으로 나아갈 때, 모두 문 앞에서 일어나 그에게 인사함으로써 회복된 모세의 지도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간절히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의 응답이 자신을 통해서 다가오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영적으로 잠들어 있고 표류하는 교회의 특징은 교회 안에 아무도 지도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명목상 주보의 큰 글씨로 나오는 지도자는 있지만 실제로 그 백성들을 이끌고 지도해 나가고 그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지도력 안에서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으며 하나님께서 그 지도자를 사용하셔서 이끌어 가시리라고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는 백성들이 없습니다. 사사 시대가 바로 그러한 시대였습니다. 왜 그들은 지도자를 싫어하였습니까?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살고 싶어 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판단과 자신의 주관대로 살고 싶어 하는 강한 욕구가 그들로 하여금 영적인 모든 지도력, 모든 지도자, 모든 리더십을 거부하는 삶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두운 시대에 그리고 교회가 어디로 가야할지 표류하고 세상이 교회로부터 역사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야할지 들을 수 없는 그 시대에는 더욱더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강력한 영적인 지도력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과의 관계 속에서 회복시키는 중요한 신앙적인 원리 하나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모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무엇인가 친밀한 대화로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여호와를 진심으로 경외하는 사람들이 진 안의 편안한 생활을 버리고 그 외로운 외딴 진 밖에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사라져가고 그리고 주께서 거두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다시 한 번 자신들의 공동체 가운데 회복시켜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호소하는 이 사람들의 기도가 있고 나서야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목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천국에 가면 죽고 난 후에는 반드시 여러분들의 목자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은 죄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죽은 후에, 혹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라도 반드시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국문하실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은 가벼운 짐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해도 되고 해도 되지 않는 가벼운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교회가 잠들어 있는 때에 언제나 그러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영적인 전쟁이 치열하지 않습니다. 마귀의 역사와 영적인 전쟁이 가장 치열하게 일어나는 곳은 바로 교회입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망원경이 있어서 영계를 꿰뚫어 보려고 한다면 여러분, 오히려 술집이 많고 유흥가가 많고 사람들이 음란하고 타락한 곳에는 마귀가 별로 없습니다. 어차피 그곳은 자기네들의 구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망원경이 있어서 볼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교회를 에워싸고 있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심지어는 교회위에 하늘에까지 포진하여 있는 악한 영들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소스라치게 놀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교회를 에워싸고 있는 악한 영들의 세력이 노리고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매우 특별하게 주목하고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총구는 우선적으로 그를 향하여 겨누어 졌고 활의 시위도 그를 과녁으로 삼고 있습니다. 누구이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람 좋은 사람이 목회에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복음적인 진술에 대해서 얼마나 깊은 이해를 가지고 계십니까? 혹시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사람이 좋고 착하고 그리고 인격이 훌륭하면 좋은 우리의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철부지 같은 사람들이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을 움직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한 교회가 넘어지기 전에 반드시 넘어진 목회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교회의 목회자가 넘어지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수없이 그 교회 성도들에게 목회자를 위해서, 지도자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수없는 기회를 주셨으나 그것을 거절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교회의 성도들의 신앙생활은 기가 막히게 목회자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영합니다. 또 하나 목회자의 영적인 상태는 그 교회 교인들의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기도의 상태를 반영합니다.
(예화) 얼마 전에도 어느 지방의 집회에 내려갔었습니다. 감각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첫날 집회를 하려고 교회당에 들어가 교회 중직들과 목사님과 인사를 나누는데 느낌이 아주 이상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싸늘한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많이 모였습니다. 나중에 집회가 다 끝나고 나서 그 교회 교역자와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그 자리에서 이야기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시험에든 것이 아니라 융단 폭격을 맞아 초토화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교회가 거기 서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할 정도로 완전히 초토화 되어 버렸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마귀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한번이 아니라 세 명의 목회자가 갈리면서 똑같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 중 한 목회자는 축도가 끝나고 형사들에게 체포당하지 않기 위해 뒷문으로 도망갔다고 하니까 교회가 어느 정도였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 제가 그랬습니다. 그 목회자를 성도들이 신뢰하지 않고 비난 하는 이야기를 쭉 하였습니다. 마음속으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뭔가 우리에게 커다란 위기와 어려움이 일어날 때는 개인에 있어서나 교회에 있어서나 나라에 있어서나 수많은 하나님의 경고가 있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가 일어났을 때 즉각 무엇을 말하는지를 압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주님이 경고하심에도 듣지 못합니다. 일어나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러한 무지와 어려움을 타고 사단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그러면 결국 초토화 됩니다. 그런 교회 처음 봤습니다. 설교가 끝났는데 사람들이 나와서 내 손을 잡고 놓지 않습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고 유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찾아오셔서 그렇게 지도자를 회복시켜 주셨는데, 그런 일이 있기 전에 주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세가 어떻게 하겠지, 여태까지 다 했는데, 우리는 가만히 앉아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을 하나님을 찾는 마음에 실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그 마음을 기도 하나에 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이제 임할 것 같은 이 재앙의 말씀을 들으면서 분주하게 회의하고, 참모회의를 소집하고, 반상회를 열고 통반장들을 불러서 무엇인가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진심으로 이 위기가 위기로 다가오는 사람들, 진심으로 주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이와 같은 영적인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밖에 없는 내적인 요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회막으로 나아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훌륭하게 영적인 통찰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히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아가서 하나님의 결정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찾아오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친밀하게 대면하여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당신이 원하는 대로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키시고 하나님의 교회와 이 민족을 새롭게 이끄십니다.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한 사람들은 자기 한 사람의 기도를 통해서 역사가 움직이리라고 하는 역사변혁의 핵폭발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기도의 능력을 신뢰하는 사람들입니다. 나 하나가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가정에 놀라운 변화가 오리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나 하나가 간절히 기도하면 이 민족의 역사 속에서 무엇인가 변화가 오리라는 신념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결코 능력 있는 기도의 세계를 맛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그것은 기도하는 자신이 일하리라고 하는 생각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역사하리라고 하는 믿음을 갖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모세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대면하여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뜻들을 이루어가시기 시작 하셨습니다.
여러분, 저는 하나님 앞에서 생각을 늘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가 말씀하시는 한 하나님의 이 교회는 수많은 원수들에게 에워싸여도 건제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시작할 것이고, 제가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할 때 여러분들 모두는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진심으로 이 시대와 교회와 여러분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향한 사랑과 염려로 손 내미는 진실한 하나님의 음성의 손을 어디엔가 잡아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해 나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현재 혹은 미래에 대해서 너무 낙관하면서 좋아할 필요도 없고 비관하면서 시름하면서 시간을 보낼 필요도 없습니다. 어차피 정답은 하나입니다. 교회도 우리 개인도 역사도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을 행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놓으시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부분이 바로 “아멘”을 진심으로 해야 하는 클라이맥스입니다.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시는 것, 그것이 교회와 개인과 역사의 정답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이 순간에 가장 간절한 소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한 가지만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겠다고 말씀하시면 여러분은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제가 물어봤더니 어떤 사람이 그랬습니다. 자기는 한 가지 소원을 말할 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른 것도 더 말할 테니까 더 들어달라고 말할 것이랍니다. 하여튼 타락한 인간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이 그런 것 밖에 없습니까. 무엇을 위해 기도하겠느냐 하니까 이것입니다. 한 가지만 기도하라고 하면 이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다 들어 주십시오. 한 가지 말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Well born!” 그랬습니다. 잘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무엇입니까? 저는 궁금합니다.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습니까? 한 가지만 원하는 대로 들어주신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들어 주셨으면 좋겠습니까? 죽여 달라고 하는데 그것이 소원입니까? 저렇게 대답해서 강사의 의도를 빗나갑니다. 여러분, 나는 아무리 기도제목을 찾아도 하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사실 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부흥을 주십시오.”도 아닙니다. 부흥이 와도 내가 부흥에서 멀어지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목은 오직 하나입니다. 어떻게 살든지,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 그것을 누가 가장 잘 알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결국 최고의 기도 제목은 뭐냐 하면 저는 그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나님의 장중에 사로잡히게 하옵소서.” 그러면 됩니다. 그렇게 완전히 사로잡힌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용 안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쓰시지 않겠습니까? 살고 죽는 것은 기도할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중요한 것은, 이제 상훈 형제가 죽여 달라고 말하였지만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게 해 달라는 그런 뜻 아니겠습니까? 꿈보다 해석이 신령합니다. 맞습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제가 저 형제를 잘 압니다. 죽여 달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여주십시오. 사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사실은 그 기도제목도 하나님이 순교하게 해 달라고 해서 모두 그 사람들을 순교시켜 주십니까? 아닙니다. 순교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채로 살아간 한 인생의 마지막 신앙적인 열매입니다.
언젠가 제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에게 순교자 열전이 있었습니다. 그 책에는 사진이 쭉 나와 있는 것을 팔아서 유족들을 돕는데 매주 한 사람씩 잘 아시는 분들을 설명하시는데 그 중 순교자라고 딱 나와 있는 그 분을 딱 보면서 “지난주에 여기까지 했는데 이 사람인데 글쎄요. 이 사람이 죽긴 죽었는데, 순교를 했는지 그냥 총살을 당하였는지 확신이 안 섭니다.” 왜 입니까? 평소에 그 사람이 순교할 것 같은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엉겁결에 죽은 사람도 순교자 명단에 많이 올라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손에 강력하게 붙잡힌 사람, 그 사람들만이 마지막에 결국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살다가 죽습니다. 죽음 다음에는 또 다른 소원이 있을지 모르지만 죽기 전에는 제가 여태까지 머리털 나고 발견한 기도제목에는 그 기도제목이 최고의 기도제목입니다. 그리고 그것이면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절히 기도하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그 지도자를 찾아오셨습니다. 대면하면서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백척 간 뒤에 놓인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의 시기를 넘기고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과 함께 새로운 부흥을 보여주시는 역사로 접어들게 되는 놀라운 축복을 얻어내게 되었습니다. 이 회막의 기도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축복받은 사람들은 인생을 흔들거리며 사는 것 같다가도 결정적으로 기도해야 하는 시간이 딱 오면 영적인 감각이 살아납니다. “아, 이때는 하나님 앞에 매달릴 때다.” 그래서 매달립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치며 매달릴 때에 정답을 찾아냅니다. 그러나 복 받지 못할 사람들은 평소에는 기도도 하고 불도 때는 것 같고 뭐 좀 하는 것 같습니다. 보면 씩씩거리기도 하고 가끔 눈물도 씻고 뭔가 하는 것 같습니다. 말도 그럴 듯 하고 뭔가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그 시점에서는 완전히 다 퍼드러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삶과 신앙의 모든 초점을 잃어버립니다.
여러분, 대나무가 종으로 자르는 것은 너무나도 쉽지만 횡으로 꺾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 언젠가 한번 어느 커다란 대나무 숲에 있었는데 폭풍이 막 불었습니다. 다른 나무들은 다 가지가 꺾어졌는데 그 폭풍이 대나무를 못 꺾입니다. 꺾다가 꺾다 못 꺾으니까 어떻게 되는가 하면 뿌리 채 뽑혀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대나무를 횡으로 자르려면 어디에 칼을 대야 합니까? 빨리 대답해 보십시오. 어디에 칼을 대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마디에 대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결정적으로 기도해야 할 시기에 기도하는 것은 덜 결정적인 시기에 많이 기도하는 것보다 결정적인 시기에 응집된 짧은 기도가 상황을 더 크고 놀랍게 바꿉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느 시기가 마디와 같은 시점이고, 어느 시기가 하나님 앞에 쏟아 붓고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라고 하는 감각을 여러분들은 가지고 계십니까? 그것이 없다면 여러분들의 인생은 매우 곤고하고 고달픈 인생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그 마디와 같은 시점에서 기도했습니다. 사실 이 사람들이 기도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입니까? 32장에서 그들은 우상을 만들어 놓고 뛰어 놀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뛰어 놀았다는 부분은 어느 성경학자가 해석하기를 이 부분은 고대 근동에서 있었던 제사방식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하면서 이것은 이방의 신상들을 섬기는 제의 가운데 있었던 성적인 간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틀림없이 타락한 제사형태를 통해서 그러한 부패한 일들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그 위기를 선고받고 단장품을 제하고 그 재앙의 말씀 앞에서 겸비해지기 시작하고 견딜 수 없는 내적인 요구를 가진 사람들이 회막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은총을 호소하며 매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간구를 응답하셔서 그들에게 놀라운 변화를 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부모의 마음. 분명히 교육적으로 보면 더 때려야 하는데 말입니다. 한 대 맞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자식을 보면서, 이러면 안 되는데 마음이 강퍅해져서 더 때려하는데 불쌍한 마음이 번져 갑니다. 그러면 징계가 힘들어집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이와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막에 나아가서 간절히 하나님의 은총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회복시켜 주시도록 매달릴 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눈물 흘리며 매달리는 그들을 보시며, 조금 전에 벌거벗고 우상숭배하며 간음하며 타락하던 모습이 떠올랐더라면 하나님께서 회복을 위해서 모세를 다시 찾아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전의 타락과 하나님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였던 것은 사라지고, 문제는 지금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가 그렇게 간절히 회막에서 모여서 사라져가는 하나님의 은총을 공동체 가운데 회복시켜 주시도록 간절히 매달릴 때 하나님의 헤세드, 하나님의 자비가 움직입니다. 그리고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여러분, 사람을 감동시키려고 노력하기보다 하나님께 감동을 주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를 섬기거나 학교에서 일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다가 진실로 충성되게 옆에서 함께 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늘 보면 말입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있어도 그렇게 사랑스럽습니다. 사랑을 다 표현하지는 않지만,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습니다. 그 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인간이 인간을 감동시켜도 무엇인가를 막 주고 싶은데 좋으신 하나님을 감동시키면 어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들 모두 위기 속에서 그렇게 하나님께 감동을 드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1절에서 눈길을 끄는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한 콘텍스트(본문)의 부록처럼 실려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수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진으로 돌아가나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미래의 지도자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합니다. 물론 이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거론되고 있는 것이 이 구절이 처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러한 사건을 겪으면서 청년 여호수아는 영적인 판단이 성숙해 가기 시작하였고, 민족의 위기, 교회의 위기를 다룰 수 있는 영적인 관리 능력이 탁월하게 상승되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백성들이 허둥지둥 대고 방황하는 것은 잠시 정돈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될 수 있는데 그러나 지도자가 우왕좌왕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는 것은 그 공동체의 끝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모세가 사역을 끝내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땅에 남겨두고 떠나야 할 때를 대비해서 한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수종자인 눈의 아들 여호수아, 그 청년을 준비시키셨습니다.
그 준비시키는 장면 속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 우리들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이처럼 회막에서 하나님과 깊이 사귀면서 미래의 지도자로 준비된 것도 역시 위기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가 함께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위대한 영적인 지도자를 만들고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을 탁월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가실 때 하나님이 즐겨 사용하시는 것은 위기입니다. 그리고 그 위기를 사용해서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를 만들어 가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막에 나아가서 간절히 기도하고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떠나가려는 그 은혜를 회복시켜 주시도록 간절히 하나님 앞에 매달릴 때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사후를 준비하시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실 때 이전에 말씀하셨던 심판의 말씀을 되풀이 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저의 판단의 또한 근거입니다. 쓸어버리실 것 같으면 이러한 지도자를 또 다시 준비하실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어차피 그도 함께 멸망될 사람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셔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시작했습니다. 보십시오. 모세 혼자 매달려서 기도하다가 안 된 일이 백성들과 함께 매달려 회막에서 기도할 때, 신기하게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과 상황을 풀어 가시는 하나님의 간섭하시는 손길이 다가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모든 의무를 목사에게 위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뜻은 고맙지만 일부만 받아들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중 상당 부분이 여러분 자신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의 신앙에 굉장히 많은 부분을 아버지에게 의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육신의 부모를 의지하거나 여러분들의 육신의 아버지에게 의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옳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몫도 상당부분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이 모세가 혼자서 받아낼 수 없는 놀라운 응답에, 변화의 약속들이 회중과 함께 회막에서 간구하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움직이기 시작했고 변화의 역사가, 변화의 조짐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보십시오. 제가 하나 예고하는데 특별한 일이 일어나면 30년 후에 여러분들이 이 땅 위에 살아있는 동안에 이 땅에서 새벽기도가 없어지는 것을 여러분들은 보게 될 것입니다. 교인들이 이렇게 기도 안 해서 한국 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기도하지 않습니다. 마치 제가 보기에는 기도 하지 않으려고 결심한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저는 소위 각 교회에서 교회를 인도하기 위해서 이끌어가는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기도하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거의 기도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집사 직분 이상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TV보는 시간보다 기도시간이 긴 사람들이 몇 퍼센트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에 정말 미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정말 우리에게는 회막이 있습니까? 언제든지 하나님이 내려다보시면 주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앙망하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있는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구별된 시간과 구별된 자리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보실 수 있으신가 말입니다.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이유를 간단하게 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예화) 직장에 다닐 때 자매가 하나 있었는데 얼굴이 아주 아름답게 생긴 자매였습니다. 그 자매가 연애하던 시절을 이야기 했는데, 군인 아저씨 하나가 자기를 죽어라 좋아하며 쫓아 다녔습니다. 그런데 안 만나줄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휴가만 나오면 자기를 쫓아와 전화통에 불이 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만나 주는데 그때가 너무너무 지겨운 순간들이라고 합니다. 어차피 한 번은 만나 줘야 하는데 그래서 만나자마자 극장을 가자고 합니다. 거기에 가면 쳐다 볼 일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왜 그러는지 물어보니까 그 사람 쳐다보는 것 자체가 자기에게는 고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 관람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몇 번을 그러니까 그 형제가 그랬습니다. 왜 자꾸 자기만 만나면 영화관에만 가는지 말입니다.
사랑하면 대화하고 싶어집니다. 간단합니다. 내가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서도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이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려 간절히 기도하는 그 모습과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과 하나라 봐도 거의 잘못이 없습니다. 오늘날 하나님 앞에 사람들이, 그리고 교회가 이렇게 간절한 기도의 영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은 사랑의 영이 매 말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부흥을 통해서든지 말씀을 통해서든지 하나님의 사랑이 강물같이 강력하게 한 사람, 혹은 한 교회에 뒤덮기 시작하면, 즉시 다시 소생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의 영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기도하게 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깊은 위기에 쳐한 교회를 살려 내시는 방법을 보십시오. 그들은 회막에서 기도하였고, 그 회막의 기도는 또한 새로운 지도자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여호수아는 그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는데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모세는 회막 한 가운데로부터 떠나가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회막을 떠나가지 않은 것은 문 앞에서 보초섰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 또 오십시오.” 중국집 종업원처럼 웨이터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무엇입니까? 회막 그 한 가운데서 무엇을 하고 있었겠습니까?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돌아갔는데, 여호수아는 홀로 하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대부분 말입니다. 커다란 영력을 얻게 된다든지, 아니면 여러분들이 흔히 쓰기 좋아하는 하나님을 만난다든지, 개인적인 부흥을 경험한다든지, 모두 비슷비슷한 말입니다. 그러한 일들은 대개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하면,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 그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몸부림 칠 때 거기에서 일어납니다. 인간적으로 성품이 좋고 성실하고 하나님을 올바르게 믿어보려고 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황당하게 다른 길로 떠나가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싹이 잘못된 사람들이고 대부분 꾸준히 나아갑니다. 쭉 갑니다. 약간 평범하기만 하면 쭉 하나님을 찾아갑니다. 섬김을 통해서나 기도에 있어서나 모든 일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쭉 가다가 이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성품이나 개인적인 노력이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도의 힘이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지식이나 모든 것을 통해서 다 역량을 동원하였는데도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어떤 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섬김에 있어서나 기도에 있어서나 무엇에 있어서든지 벽에 부딪힙니다. 딱 부딪히게 될 때 여기에서 뒤로 물러나면 편해집니다. 쉬워지는데 물러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커다란 짐이 되고 한없는 고통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교회를 섬기면서 그러한 것을 느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변화되지 않는 공동체를 섬기면서 아무리 인간적으로 노력을 하고 애를 쓰고 방법을 다해도 영혼들이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것, 그러한 것들을 여러분들이 발견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에서도 썼습니다만, 신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강의할 때는 교만해지고 늘 교회 상황을 이야기 하니까 비판도 많이 합니다. 교만해지고 글을 쓸 때는 분수를 모르는데 교회만 돌아오면 겸비해집니다. 안 변하는 70-80명의 영혼들이 나에게 피를 말리게 합니다. 그 상황이 너무 너무 힘듭니다. 힘드니까 자꾸 그만 두고 싶어 합니다. 뭐든지 말입니다. 비록 그 일 뿐만 아니라 기도의 자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다하다 안 되면 그만두려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거기까지의 환경을 통해서 만드실 수 있는 사람은 이미 모두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만들 수 있는 것은 모두 만들었습니다. 이제 그 사람을 그 한계를 뛰어 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거기에서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적인 한계나 영적인 한계를 하나님의 한계라고 까지 생각하면서 포기할 때에 모든 것은 다시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 시점에서 이것이 나의 영혼의 한계, 나의 하나님과의 관계의 한계이지 하나님의 한계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그것을 자신의 한계로 인정하지 않고 거기에서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것 모든 밑천이 드러났습니다. 그때 그 한계 상황에서 눈을 들어서 하나님 한분이 나를 도와주시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하는 절대적인 몸부림으로 하나님 앞에 주님의 도우심 앞에 매달릴 때, 하나님께서는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한분을 응시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순결하게 만드시고 순결하게 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절박한 도우심을 바라면서 그 한계를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서 견디면서 몸부림칠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만나주시고 역사해 주십니다. 그리고 바꿔 가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을 훈련시켜서 훌륭한 그리스도인, 영적인 뛰어난 자질이 있는 그리스도인,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 하는데 유용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고 싶어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애쓰시고 노력하지만 결국 하나님조차도 그렇게 계획하셨던 일들이 실패로 돌아가는 일을 보셔야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 자신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호수아는 그렇게 회막을 지키면서 모세조차 사라져 간 그 시간에도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회막을 지키고 그 회막에서 부르짖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한 놀라운 은혜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갈망하고 기대했습니다. 그때 그것은 분명 영적으로는 아직 어리고 나이도 연소한 이 청년 여호수아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압박이었고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한계를 인정해 버리면 쉽지만, 그 한계를 인정 해버리는 것 결국은 “나 없이 너희들끼리 가나안으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재앙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인내하면서 깊이 강력해 지는 기도의 세계를 배우고 영적으로 강건한 사람으로 만들어 져 갔던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이유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위기를 자신의 위기로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그 모든 문제의 끝장을 봐야 하겠다고 하는 고뇌와 몸부림과 섬김과 투쟁에 초점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말씀을 듣고 무엇인가 감화를 받으면 기도할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쪽지라도 돌리고 새벽기도 나오자고 설득하면 동그라미 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싶은데 왜 그런지 초점이 흩어져 버리는 것을 발견하지 않습니까? 간절히 마음을 모으고 기도하고 싶어도 왠지 그것이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 날아가다가는 허공중에 막 분산되어 퍼져 버리는 물줄기 같이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의 기도가 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오늘 가르쳐 드릴 테니 가슴에 지우지 말고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들의 삶의 초점이 없기 때문입니다. 초점이 있습니까?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꼭 이루어져야 하는 초점이 있습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나의 안락한 삶과 내가 소유하고 있는 많은 것들을 양보하더라도 반드시 성취하고 말아야 할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삶의 초점. 그 하나가 성취되기 위해서라면 많은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고 버릴 수 있고 던져 버릴 수 있게 하는 어떤 내 마음에 열망을 가져다주는 하나님 안에서 허락받은 하나의 초점이 있는가? 그것은 반드시 이 조국교회의 위대한 부흥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여러분들이 섬기고 있는 누군가 이름 모를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한 것이어도 좋고,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맡고 있는 지극히 작은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기 원하는 간절한 갈망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거룩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매일 매일의 실패를 깊이 자책하고 그 거룩한 삶을 찾고 싶어 하는 갈망일 수도 있고, 구원받지 못한 여러분들의 가족을 위한 위기를 느끼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초점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초점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뒤로 물러서게 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자신의 영적인 변화나 개인적인 부흥, 교회적인 부흥을 위해서 기도만 하면서 열렬한 기도의 영을 유지한다고 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기도의 세계 자체가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예화) 신학교 같이 다녔던 형제 하나가 있습니다. 지금은 목사가 되었습니다. 직장을 다니면서 공부를 하니까 여러분, 해 본 사람이나 알지 안 해 본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학교 올라가면서 돌계단을 올라가면서 거의 매일 울면서 올라갔습니다. 그러니까 이 형제가 이것도 안 되고 저 것도 안 되겠으니까 용단을 내려야겠다는 것입니다. 꽤 높은 지위에 있었는데 사표를 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까짓 돈보다 중요한 것은 사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석 달 지난 뒤에 다시 직장을 잡았습니다. 왜 그랬는지 물어보니까 자기는 직장을 그만 두고 교회 섬기는 것까지 그만 두고 나니까 기도의 초점이 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김 전도사, 석 달 동안 내 머릿속에 TV 프로그램만 꽉 찼어.” 삶으로 하나님께서 부딪히게 하신 그 한계를 절대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넘어보려고 하는 그 몸부림이 없이는 결코 불타는 기도의 영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저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이후로 세월이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아주 이 생각이 뼈 속 깊이 파고 들어옵니다.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 앞에 감화를 받고 감동을 받아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이 나와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유지하면서 살지 못할 것이 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그 감동의 은혜만을 간직하면서 살고 싶어 하지 주님이 이러한 은혜를 주셨을 때 나에게 어떠한 삶을 위해서 분투하게 만들었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은혜는 받았는데 초점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흘려버립니다. 초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불타는 소원이 여러분들 속에 있습니까? 그것만 생각하면 마음에 저며 오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소원,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서 이 일을 이루어드리고 싶어 하는 불타는 소원하는 마음, 하나님이 이 일이 이루어지면 반드시 기뻐하시리라고 하는 소망,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이 일을 위해서 어떠한 희생과 노고를 치러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믿는 그러한 간절함과 절박함, 소원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는 사람들은 살았으나 죽은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불타는 하나님을 향한 소원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며 기도할 수 있겠으며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향하여 불타는 마음이 없는 그 사람들이 세상을 향하고 자기의 육체의 정욕을 향해서는 불타오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냉담한 마음이 세상을 향하여 타오르고 하나님을 향하여 식어진 심령이 자신의 욕망과 소욕대로 살아가는 일에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습니다. 은혜의 세계에서는 찬바람이 불어도 적성에 맞는 세속의 세계에서는 열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이 하나님 앞에 기도의 영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무슨 소원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소원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세상을 위한 소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왜 건져 내셨습니까? 왜 남이 알지 못하는 은혜를 알게 하시고, 맛보게 하셨겠습니까?
저는 참 복된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요즘 그럽니다.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고 해.” 할만큼 정말 행복합니다. 그 행복 중 하나가 뭐냐 하면 저는 설교하러 다니면서 그것을 누가 시켰습니까? 와서 누가 제 손에 편지 하나 지어주고 팩스를 보내고 아니면 붙들고 이야기 하면서 “목사님, 내가 목사님의 아벨 크라리가 되겠습니다. 일평생 목사님을 위해서 매일 기도할 것을 약속합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 그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극소수라 생각하지만,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놀라운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놀라보게 빠른 시간 안에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삶이 없는 순 기도로 기도의 영을 유지하려고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정말 삶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한계에 왔을 때, 그때가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뛰어난 사람 만드실 절호의 기회입니다. 오늘 여호수아를 보십시오. 그 민족이 하나님 앞에 경고를 받고 위기에 놓인 상황을 자신의 운명처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견디기 힘든 긴장이었고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긴장과 고통 앞에서, 그 긴장과 고통이 큰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주시는 은혜를 갈망하면서 회막 한 가운데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무엇인가 추구하는바가 있을 때, 그가 영적으로 강력한 힘과 그리고 놀라운 하나님의 도우심을 보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선 추구하는 바를 가지십시오. 왜,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지 그리고 나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은 내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도록 만들었는지 그것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그 일들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그것을 자신의 소명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추구하십시오. 한계에 부딪혔을 때 그때가 하나님을 만날 기회라고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여호수아를 준비시키셨던 것처럼 우리를 준비시켜 나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세계에 대한 한 통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교회의 위기와 부흥의 기회 (1997.04.09. 수요예배5)
은총 입은 자의 기도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출 33:12)
녹취자 : 김세나
민족으로 신앙생활을 하거나 교회적으로나 살아가다 보면 위기가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위기는 또한 다른 측면에서 보면 기회이기도 합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러한 위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가지 않겠다.”라고 선언을 하신 후에 이제 회막을 만들고 기도하고, 그래서 지난 시간에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회막을 지키는 장면을 통해서, 그리고 모세와 함께 대면하여 말씀하시는 장면을 통해서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가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드디어 하나님께서 모세와 대면하실 때에 모세가 하나님을 향하여 탄원하였던 중보기도의 내용을 12절 이하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오늘 12절을 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다루어보고 그리고 몇 주에 걸쳐서 13절을 우리가 더듬어 보겠습니다.
우선 12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모세는 여호와께 “보시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이것도 사실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언제나 보고 계신 분이신데, 명령형으로 “레에” 하면서 “보소서.” “보옵소서.” 라고 하나님께서 주목하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주목하도록 요청하고 있습니까? 그는 자신과 자신의 교회가 처한 상황을 향하여 하나님께 주목해 주시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으신 분이시고, 어느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든지 하나님의 시야를 벗어날 수 없고 그 분의 시선으로부터 감추인바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깊은 굴속에서 일어나는 일도 알고 계시고,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어도 어떤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서 사람의 마음속에서 계획하고 있는 바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모세는 마치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못 보시는 것처럼, 그리고 무엇인가를 모르시는 것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호소하면서 “하나님, 보시옵소서.”하며 하나님을 자신과 자기가 처한 교회의 상황에 주목시키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보면 외람된 말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태도를 매우 좋아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의 처지를 주목해 주시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까? 우리가 처한 교회의 상황을 진심으로 하나님께서 주목해 주시기를 요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매우 좋아하십니다. 결코 불쾌해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자신의 시선을 자신의 처한 상황에 고정시키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상황을 주목해 주시도록 요구하는 것은 그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실 말씀을 듣고 또한 자신이 그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아뢸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싶어 하는 마음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분들이 원하지 않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고 거기에서 홀로 있는 것 같은 깊은 위기를 느끼게 될 때, 여러분은 이렇게 하나님의 시선이 이 온 땅 천하 만물을 감찰하지만 특별히 그 시선의 초점이 여러분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에 집중되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자신 있게 요구하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죄나 혹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잘못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상황을 향하여 이렇게 “보소서”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허물이 있고 죄가 있다면 더더욱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주목하시고 그 죄로 말미암아 빚어진 우리들의 상황에 하나님께서 시선을 보내셔야지만 궁극적인 해결에 관심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이든지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간에 하나님께서 그 상황을 향하여 주목하시는 것이 우리에게는 소망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보십시오. 오늘 모세가 하나님을 향하여 “보소서.”라고 하는데 무슨 선한 일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습니까? 무엇을 보라는 것입니까?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우상숭배에 대해서 진노하셨고,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기로 작정하신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이제는 같이 안 올라가겠다고 결단하셨습니다. 사자를 보낼 테니까 그와 같이 가든지 말든지 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계속 이스라엘 백성들을 주목하면 하나님의 더 큰 진노와 심판이 일어날 수밖에 없을 지도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보시옵소서.”라고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이 백성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심판을 받고 멸망을 받든지, 또 하나님의 사죄의 놀라운 은총을 입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용서와 화해를 경험하든지, 그 일의 선택은 하나님께 달렸거니와 어쨌든 하나님의 시선을 피해서 무엇인가 잘 되는 것도 의미가 없고, 또 하나님의 시선을 피해서 무엇인가 잘 해 보려고 하는 인간의 모든 시도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오늘 성경이 이 모세의 요청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행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뻐하시는 대로 당신의 선하신 뜻을 따라서 우리의 인생도 인도하실 것이고, 우리가 당한 인생의 위기도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하나님의 계획대로 짚어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그 거룩한 뜻을 알고 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일을 진행해 나아가시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한 가지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찌하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눈앞에 주목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선악 간에 무엇을 판단하시든지 그 하나님의 정직한 판단을 우리들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그 판단 앞에서 우리는 힘을 다해서 긍휼과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 밖에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오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처한 상황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처한 인생의 위기나 혹은 교회가 처한 위기에 있을 때 여러분들은 그 위기를 통해서 하나님과 대면할 기회를 가져야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든지 하나님께서 여전히 말씀하시고 있는 한 그 상황은 결코 기회이지 위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커다란 위기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환란을 만나고 정말 두려움에 떨어지는 그것이 우리에게 위기가 아닙니다. 정말 커다란 위기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그야말로 심각한 위기를 만났습니다. 사자 굴에 쳐 넣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오히려 위기가 아니라 후일 다니엘이 모든 사람 위에 더 높아져서 그 이방의 땅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영광스러운 기회가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다니엘을 보고 계셨습니다. 위기는 왔으나 그리고 원수들은 그를 넘어뜨리고자 몸부림쳤지만 하나님과 자신을 향하여 열려 있는 하늘의 문은 닫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려다보고 계셨습니다. 분명히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도움을 보내주셨습니다. 여러분, 죄 가운데 있을 때에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얻을 수 있는 최선의 것은 하나님도 안 계신 가운데 사자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잘 먹고 잘 살다가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지고 이 세상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던 수많은 민족 중 하나가 되어서 지푸라기 같이 이 땅에서 한 민족의 이름이 잊혀져가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운명이었습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오늘 모세가 소망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긍휼은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판단하시든지 간에 시편 51편에 기록된 대로 “주께서 판단하실 때에 나는 의롭다 하리라.”고 고백하였던 것처럼 그 하나님의 판단을 오히려 옳다고 받아들이고 하나님 앞에 자비와 긍휼을 호소해서 그 위기를 신앙적인 기회로 바꾸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의 태도요,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허락된 특권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이 모세는 도대체 의미를 알 수 없는 말 한 마디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향한 기도였습니다.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무슨 이야기 입니까? 하나님이 같이 갈 자를 지시하셨습니까, 안 하셨습니까? 하셨습니까? 안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같이 갈 자를 지시하셨습니까? 안 하셨습니까? 뭐라고 하셨습니까? 출애굽기 33장 앞부분을 보겠습니다. 1-3절을 읽어 봅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여기까지 읽겠습니다. 그러니까 함께 할 자를 안 보여주셨습니다, 라고 하는데 사실은 보여 주셨습니다. 누구와 같이 가라고 하셨습니까? 앞서 가는 것과 같이 가는 것이 결국 같이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자와 같이 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나와 함께 보내실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실 자, 관계대명사로 나옵니다. 나와 함께 보내실 자를, 혹은 보내실 바를 당신에게 나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라고 나옵니다. 이것을 “보내실 바”로 해석을 하든지, “보내실 사람”으로 해석을 하든지, 아니면 어떤 신적 존재를 포함하여 “보내실 자”로 해석을 하든지, 그것은 어떻게 선택하든지 간에 그것은 성경은 보는 자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이 “보내실 자”를 의심할 여지없이 “마르아크”, 사자라고 지명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모세는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나와 함께 할 자를 하나님께서는 알게 하지 않으셨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33장 1절에 보면 그 이야기를 누구에게 하셨습니까? 모세에게 직접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하면서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모세는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라고 딱 잡아뗍니다. 의미가 무엇입니까? 쉽게 이야기 하면 모세가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 주겠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는 나와 동행할 자가 아님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모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보낼 바를 나에게 알게 하시지 아니하셨나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자가 함께 가리라고 말씀하셨지만, “하나님, 이 세상의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서 안 가시고 사자가 동행하는 백성이 그게 하나님 백성입니까?”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든지 당신의 백성으로 여기시든지 둘 중 하나로 하시지, 하나님이 우리를 버려두시고 하나님은 동행을 안 하시고 그리고 죄를 용서해 주신 것도 아니고, 용서해 주시지 않은 것도 그리고 하나님은 사라져 버리시고 사자를 보내셔서 우리로 가라고 하시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를 끊어내 버리시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것은 우리에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양단간의 결단을 하나님 앞에 구하면서 매달리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심판,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하자면 은혜로 자신들을 용서해 주셔서 하나님께서 다시 친히 동행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13절에 넘어가면 이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 하였지만, 진노하셔서 이들을 심판해서 멸절하시면 안 되시는지에 대해서 모세는 간절한 애정으로 설득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중요한 것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 자신의 명예를 위한 관심, 또 하나는 하나님의 명예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그 자체를 사랑하는 모세의 관심, 그리고 그 두 관계를 통해 영향을 받게 되는 세상에 관한 관심, 이 세 가지가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멸절되는 일들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세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사자와 같이 가라고요? 그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와 함께 가는 것은 함께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실 자가 아닙니다. 주님이 진정으로 나와 함께 가라고 보내실 바가 아닙니다. 주님이 진정으로 나와 함께 이 백성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라고 명령하신다면, 유일한 대안은 하나님 자신이 저와 동행해 주시는 것인데, 어떻게 하나님, 사자와 더불어 갈 수 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 없이 사자와 동행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라고 거절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종종 교회에 대해서 염려하고 근심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사업을 하다가 돈이 안 벌리고 어려움에 빠지면 고민을 하고 근심을 하듯이 교회도 숫자가 줄면 근심하고 걱정합니다. 헌금이 덜 걷히면 머리를 골똘히 싸매고 근심하고 “어떻게 하지?” 걱정합니다.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만나거나 지체들이 사고를 당해도 “왜 그런 일이 일어났지?”하며 염려하고 근심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러한 것들을 근심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자기의 사업을 하면서 다 하는 수준의 근심이고 염려입니다. 중요한 것은 잘 되어가고 있을 때 조차도 정말 이 잘 되어 가고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있는 것인가, 진지하게 물어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오늘 이 백성들을 이끌고 있는 모세는 이러한 것들에 대한 예리한 눈을 가졌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이것을 교회의 수준으로 낮춰 생각해 보면 어떠한 이야기입니까? “나는 너희와 함께 안 하지만 인원은 계속 불어날 것이고, 땅도 사게 될 것이고, 교회도 짓게 될 것이고, 건물도 높아질 것이고, 재정도 많아질 것이고, 교역자 수도 늘어나고, 선교사도 많이 파송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것 아니겠습니까? 모세는 그러한 것과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올라가라고 하시면서 “하나님, 저를 누구와 함께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분명히 사자와 함께 올라가라고 말씀하셨는데도 하나님, 알려 주신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 주실 수 있는 분, 그리고 나와 함께 이 백성들을 이끌고 올라가라고 말씀하실 때, 나와 함께 동행 하겠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 내가 직접 가마라고 말씀하시는 것 밖에 다른 대답이 없을 수 없는데 저는 그러한 대답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커다란 자산이 무엇입니까? 성경을 아는 지식입니까? 신앙의 경력입니까? 남이 좇아 올 수 없는 탁월한 열심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최고의 자산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존스가, 사실 그것을 읽었을 때 같이 목회사역을 하는 많은 목회자들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마틴 로이드존스가 『설교자와 설교』라는 책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설교자가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회중들을 하나님과 놀랍게 만나게 해 주고 있다면 그는 모든 것을 교인들을 용납해야 한다.” 그것이 사실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동일하게 여러분들에게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하나님과 매우 특별하게 동행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일단 여러분들의 신앙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옳은 사람에게만 함께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남이 누릴 수 없는 탁월한 동행하심을 누리면서 그 하나님과 함께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매순간 순간 하나님의 도우시는 그 도우심으로 이기는 분명한 증표들을 보여주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 매우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매우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 교회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자산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늘어나는 땅 덩어리나 높아져가는 통장의 잔고일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 교회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알았습니다. 모세에게는 가나안 땅도 필요 없고 그리고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과 가나안의 모든 강력한 족속들을 초토화시키는 위대한 군사력을 지니게 되는 것도 의미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는 한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들이 비록 불을 통과하고 물을 통과하고 그 모든 어두움 가운데를 지난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가장 중요한 자산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이러한 영적인 시각으로 우리 개인의 삶과 교회의 삶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위해서라면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을 버릴 수 있고 우리가 맛보고 있는 모든 안일한 것을 포기할 수 있는 결단이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모든 것들을 내어버리기 위해서 기꺼이 자기를 부인하고 우리의 모든 잘못된 삶들을 찌꺼기들을 몰아내고 우리의 인격 속에 단단히 들어앉아있는 모든 더러운 습성들과 방탕한 생각들을 살점을 떼어내는 것같이 잘라 버릴 수 있는 각오가 되어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중요한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세대입니다. 가치 있는 것들은 하찮은 것들처럼 취급을 받고 하찮은 것들은 보물처럼 떠받들림을 받고 있는 이러한 시대에서 우리들이 신앙생활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한 사람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살아있는 삶의 이유가 그 하나님의 명예에 고정될 때 진리를 알고 그 진리를 알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감격하고 그분을 바라보는 믿음 안에서 살아갈 때, 그가 누리는 최고의 분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우리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할 때에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과 동행하십니까? 누구와 동행하십니까?
여러분, 오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행해 주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당연한 일들이 깨뜨려지려고 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임마누엘의 백성으로 불려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과 왜 같이 안 가시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래도 함께 가달라고 애원하는 모세가 이러한 갈등을 빚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사람과 함께 하십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마음에 슬픔과 고통을 안겨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들과 함께 하시는 놀라운 관계들이 손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오늘 하루 우리의 마음속에서 우리가 행하는 행동 속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슬퍼하시는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까? 우리의 목표는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에 고정되어 있습니까? 정말 우리는 주님만 기뻐하시면 우리는 우리를 보고 기뻐하시는 주님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고 있습니까? 교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기만 하면 어떤 목표에서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는 사람은 하나님을 매우 특별히 기쁘게 하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에 대해서 명백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이 일을 행함으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탁월한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언제나 동행하셨던 이유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하나님께 커다란 기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왜 사십니까? 왜 여러분, 오늘도 끼니를 거르지 않고 먹고 우리의 건강을 추스르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예화) 작년의 일입니다. 양재동에도 열린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에 가서 성경공부를 가르쳤습니다. 식사 시간에 제가 식사 기도를 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밥이 식어서 식사기도를 길게 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데, 정성껏 짧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이 식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밥을 먹고 살아있는 우리들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그 중 한 권사님이 숟가락을 못 들었습니다. 어떻게 기도를 그렇게 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뭐가 잘 못되었는지 물었습니다. 밥 사주는 사람 위해서 왜 축복을 한 해 줬느냐 하는 줄 알고 “뭐 잘못 되었습니까?” 물었습니다. “목사님, 너무 충격입니다. 정말 이 밥 먹고 살아있는 우리가 주님께 기쁨이 될까요?” 묻는 것입니다. 그 분 아나 밥 한 그릇 다 먹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최고 아닙니까?
우리는 행하는 일도 다 다릅니다. 직장 다니는 사람, 문서 선교부에서 일하는 사람, 유치원 자동차 모는 사람, 전도사 하는 사람, 대학원 다니는 사람, 세일즈 하는 사람, 학교 다니는 사람, 집에서 노는 사람, 아주 다양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다 다릅니다. 무엇을 가지고 우리들이 구체적으로 기도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또 무엇을 하든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지 주님이 우리를 보실 때 한 없이 기뻐하시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성공한 인생입니다. 믿습니까? 젊은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어떤 직업을 가질까에 대해서 너무 고민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맡겨진 직업을 어떻게 감당할까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일을 할 것인가 고민하는 사람은 많은데 그 맡겨진 일을 어떤 방식으로 감당해 나가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니까 하나님이 그들과 매우 특별하게 동행해 주십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먹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죄악으로 말미암아 슬프시게 하고 기쁘시게 하지 못하였을 때 하나님이 이제껏 임마누엘하고 동행하며 왔던 그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위기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의 글이나 혹은 이야기나 간증을 들으면서 “아, 참 하나님께서 쟤만 사랑하시나봐.”라고 생각하며 살다 죽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이러한 소망을 주셔서 우리를 예수 믿게 살게 하셨으니 우리들도 하나님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을 기뻐하셔서 언제든지 우리들과 함께 동행 해 주시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사자가 동행하는 것은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이 세상에서 환경도 우리들을 때로는 도와줄 수가 있습니다. 불경기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고전하지만 불경기에 한 구석에는 떼돈 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환경이나 상황이 우리들을 축복하는 것처럼 인도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인 질문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가?” “하나님 내가 놓여 있는 이 상황을 보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의 특별한 함께하심과 보호가 필요합니다.”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놀라운 징표들을 맛볼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이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임을, 하나님 앞에 이러한 임마누엘의 관계를 유지하고 사는 길임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서 두 번째로 넘어갑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고 하셨는데 그러면서 13절이 나오고 있습니다. 13절의 그 유명한 중보기도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이 모세는 자기가 하나님의 매우 특별한 은총을 입은 사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매우 특별한 은총을 입은 사람이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도 하나님이 매우 좋아하시는 기도 방법 중 하나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어려운 사정이 있을 때 막 바로 들고 와서 “하나님 이걸 주십시오, 저걸 주십시오,” 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관계를 상기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누구 때문에 이 길을 걸어왔습니까? 하나님, 제가 누구 때문에 오늘 이 교회에서 이렇게 설교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 제가 무엇 때문에 오늘 이 교회 와서 오늘 이렇게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까? 하나님, 제가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구원을 받아서 누구의 사랑을 놀라운 사랑을 받고 제가 누구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제 인생의 참된 소망이 주님 보시기에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러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주님께 상기시켜 드리면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방법은 구약에 있는 하나님의 믿음의 백성들이 특별히 잘 사용하던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우리와의 긴 인연을 주님께 특별히 생각나게 해 드리고 우리가 깨우쳐야지만 깨닫는 분은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내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부름을 받아서 여기에 서 있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지금도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관계를 붙들리도록 만들어 줍니다. 여러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그 놀라운 은총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여기까지 데리고 오셨습니까? 그리고 여러분, 이나마 신앙을 가지고 여기에 오기까지 우리는 수많은 사연과 남이 알지 못하는 인생의 고비들을 넘겼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이 선택을 위해서 때로는 우리는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루면서 결단을 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이유 때문에 여기에 매달려 여기까지 오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 관계를 주님께 생각나게 해 드리고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끊을 수 없는 하나님과의 질긴 관계,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 맺어진 이 사랑의 놀라운 관계에 대해서 여러분 스스로 확신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러했습니다. 위대한 중보기도를 하기 앞서서 모세는 먼저 자기가 하나님 앞에 매우 특별한 사랑과 은혜와 놀라운 주님의 자비를 입은 적이 있는 하나님의 사람임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들은 무엇을 발견하게 됩니까? 이 이야기를 먼저 하기 전에 모세는 틀림없이 하나님 앞에 받았던 그 은총을 기억하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히브리 사람 중 하나로 태어나 그리고 팔자도 기구하게 어머니의 품을 떠나서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고 거기에서 어머니를 오히려 유모라 부르면서 그렇게 젖을 먹고 자라고 히브리 민족의 교육을 받으면서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난을 받는 것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여겨서 모든 영광을 버리고 단숨에 졸지에 좇기는 신세가 되어서 도망자처럼 지명수배를 받고 도주하는 신세가 된 것과 그리고 미디안에서의 외롭고 쓸쓸한 세월과 하나님을 만났을 때의 놀라움과 하나님을 향한 원망, 강퍅한 자신의 마음을 녹이셔서 자기에게 소명을 주시고 가시나무 떨기 사이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두려워하던 자신의 모습, 그리고 소명을 주셔서 어려움 속에서 바로와 대적하여 넘을 수 없는 한계와 위기를 극복하고 결국 꿈에도 그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탈출하는 일들을 이루고 애굽의 병거의 추격을 받으며 홍해 앞에 놓였던 일과 기적적으로 갈라지는 전대미문의 위대한 사건과 이후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사건들을 꼬리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자신의 인생의 역사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특별한 은총 속에서 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어디 모세의 고백뿐이겠습니까?
저는 오늘 아침 새벽 기도회에 나와서 기도하다가 문득 이 찬송이 떠올랐습니다.
(찬양)
밤 깊도록 동산 아래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을 알사람 없도다
우리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이 남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사랑을 입었기 때문에 오늘 여러분들이 인생의 수많은 위기와 시련의 파도를 해치고, 어떤 때는 응답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떠 밀려서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대로 선택할 수 있는 힘조차 잃어버리고 파도에 떠밀리는 것처럼 떠밀려 왔는데 오늘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하나님 앞에 감사하시고 생각하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배우는 중요한 교훈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놀라운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그 관심이 하나님 자신과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를 향하여 기울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다음 주에 보면 알겠지만, 13절서부터 그는 크게 하나님 자신의 이름의 명예와 그 백성들을 향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이렇게 그 관심이 하나님 자신의 이름과 하나님의 교회를 향하여, 그의 백성들을 향하여 기울여집니다. 여러분, 우리 가운데 은혜를 많이 받았다 생각하면서도 늘 골돌한 마음으로 자신의 영적인 상태와 그리고 자신의 마음과 자기 일, 자기 문제, 자기 관심, 자기 고민, 자기 안타까움, 이 늪에서 도저히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든 힘들을 소진해 버리는 것이 마치 자기가 진실하고 정직하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려지는 그러한 순결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징표라고 생각하는 그것은 그야말로 성경에 대한 대단한 오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났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참된 은총을 입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자기들이 깨닫게 되었을 때 그들의 관심은 즉시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의 명예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전에 관심이 없었던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그 심정을 읽기 시작하였고,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하여 나타나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후에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하고 너는 이제 이러한 것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헤아릴 수 없는 놀라운 은혜를 받고 보니까 그들의 관심은 이제 자신에게서 교회로 옮겨져 갔습니다. 나 중심에서 이제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명예를 얻으셔야 할지에 대해서 관심이 기울여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참된 놀라운 은총을 입고 보니까 하나님이 자신들의 유일한 사랑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영적인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하나님 앞에 귀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상당히 은혜를 많이 받고 말씀으로 말미암아 깨달은 바가 많은데도 언제든지 자신의 문제, 자신의 처지, 자신의 마음의 갈등, 자신의 고민, 자신의 일, 자신의 목표, 자신의 성취하여야 할 바, 자기가 애착하는 것들로부터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마귀의 꼬임에 빠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그 모세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받고 나니까 자신이 하나님 앞에 무엇에 관심을 갖고 있는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지난주에 들었던 그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회막에 나아가서 기도하던 장면들에 대해서 우리는 세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놀라운 그 징벌의 말씀을 듣고 나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 깊이 깨닫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자신의 영혼의 상태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어려움들을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어려움들에 처하게 되자, 그 어려움 속에서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자, 그들은 즉시 하나님 앞에 간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와 하나님 자신의 명예를 향하여 그들 자신의 관심이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진을 떠났습니다. 외딴 곳에 있는 회막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은혜와 사랑을 구하며 자비와 용서를 간구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전히 여러분 자신의 문제만을 물고 늘어지는 그 소아적인 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여러분 자신에게로부터 도저히 관심이 떠나지 않고 그것 이외에는 기도하고 하나님을 섬길 여유가 없다면 여러분들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만나주셨던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고 체험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었던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무엇이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인생은 없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오늘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의 이야기를 읽어보면서 모세의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가 잘 나오지 않는 것, 여러분, 기이하게 생각되지 않습니까? 모세는 쉽게 이야기해서 가족들을 깊이 돌아보며 살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하나님의 명예 하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인도하도록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소명 하나에 완전히 바쳐진 사람으로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의 모든 관심은 공적인 것, 하나님의 거룩한 일들을 위해서 주목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영예와 직접적으로 관계되고, 하나님의 이름에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것은 이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소명이었고 자신의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들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매일 아침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할 때 여러분들의 기도를 매우고 있는 중요한 기도의 제목들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아직까지도 여러분들의 문제 밖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까? 여러분들의 문제에 매달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의 명예나, 교회의 상태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 받는 상태에 대한 그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것을 위해 기도할 정도로 여유가 없는 그러한 기도생활과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까? 여러분, 이것은 모두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은혜 받은 자의 삶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로서 언제나 자신의 내면 세계나 들여다보고 어떤 때는 슬퍼하고 어떤 때는 기뻐하고 그 이상 아무것도 하는 것 없이 살아간다면 여러분들에게 주신 은혜가 하나님께 어떻게 기쁨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남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보여 주심으로써 여러분들에게 원하시는 분명한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넘치는 기쁨과 보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마음을 이 세상에 알리는 사람들로서 여러분들을 부르시고, 그리고 그렇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베풀어 주신 놀라운 은혜와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깨닫게 해 주신 진리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과 그리고 놀라운 기쁨들이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만족시키는 안락의 도구화 되는 것으로만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혹시 예배를 즐기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을 단지 즐기는 것으로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에 대해서 날마다 알아가는 일, 그 자체가 즐거움이 되고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되어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리가 여러분들에 의해서 농락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에 의해서 마취제처럼 취급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예를 위해서 고민하고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고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이 세상에서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그런 남다른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 가운데 삶을 위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가 청교도들의 주석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정말 그 사람들은 삶을 위해서 성경을 주석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성경 주석 앞에는 언제나 이러한 말이 붙었습니다. “A practical commentary on” 하고 성경구절이 나옵니다. 시편 몇 편 몇 절에 대한 실천적인 주식, 삶을 위한 주석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학자끼리 주고받고 서로 읽으면서 “아하, 아하”하고 무릎을 치고 감탄하는 엔조이하는 성경 주석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우리의 은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셨던 그 넘치는 사랑과 우리에게 알려 주셨던 남이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랑의 미로들도 하나님이 은혜 속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바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에 비취며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사람들, 오늘 여러분들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마음도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 받는 것을 보면 안타깝습니까?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주님의 명예와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훼방하는 일들을 공공연히 자행하는 일들을 볼 때 여러분들의 마음이 이 모세처럼 불타오르고 있습니까? 선지자들처럼 마음이 뜨거워지고 있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의 마음과 간구하는 기도가 주님이 중심이 되고 있습니까? 어찌하든지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한 은총을 회복시키시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당신 자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드러내 보여 주셔서 이 백성들로 하여금 변화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이러한 은혜가 나타나는 일들이 여러분들에게 정말 절박하고 절실한 기도의 제목들이 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대부분의 기도를 그렇게 메우고 있습니까? 그래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의 영예를 위한 삶을 사는 길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여러분들의 관심은 보다 더 소아적인 상태에서 대국적인 견지로 멀어져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상처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까? 그것만큼 교회의 아픔과 상처에 대해서 여러분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이 처한 어려움과 위기를 위해서 너무나 고민한 나머지 교회가 처한 위기와 어려움들에 대해서 기도할 마음의 여유조차 갖지 못한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자신이 오해를 받고 사람들 앞에 명예가 실추되는 것을 회복시켜 달라고 안간힘을 치며 기도한 나머지 하나님의 실추되는 명예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일 여유조차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아닙니다.
이 영적인 사람들은, 사고가 영적인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영적인 사람들은 어떤 위엄이 있는가 하면 안으로 안으로 오그라드는 위엄이 있습니다. 결국 그것이 얼핏 보게 되면 어떤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모두 공감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건성으로 살아갈 때는 자신을 성찰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은혜 받지 못한 사람들은 묵상을 하라고 해도 하지 못합니다. 숲속에서 묵상하라고 공기 좋은 곳 숲속에 방석을 깔고 돌맹이 위에 앉혀놓고 조용히 눈을 감고 묵상하라고 하면 삼겹살 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은혜 받은 사람들 이외에는 무엇인가 영적인 것에 대해서 생각한다든지 골똘히 사모한다든지, 그것을 하지 못합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침묵하는 시간을 하나님 앞에 갖는 것 자체가 말할 수 없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 됩니다. 그런데 은혜 받은 사람들은 그러한 영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늘 생각합니다.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자기에게 일어난 세상적인 일들도 영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제가 막 차를 몰고 가다가 쾅 하고 부딪혀 차가 박살이 났습니다. 그러면 “재수 없네. 신호등 망가져 박치기 했네.” 그렇게 끝나겠지만, 그러나 영적인 사람들은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까?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 이렇게 영적으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보면 무슨 함정이 있는가 하면 계속해서 생각이 안으로 오그라 듭니다. 그래서 눈이 뚫어져라 수사관 같은 눈초리로 자신의 삶을 계속 쳐다보면서 그 속에서 정확하게 지적을 해 내고 정확하게 자신의 상태를 간파해 내면서 이것은 잘못되었고, 이것은 맞고 이것은 고쳐야 하고 이것은 버려야 한다, 이렇게 결단 있고 용기 있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삶으로 나타나야 되는데 그러지 않습니다. 계속 자신의 마음의 상태나 자신의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여러 가지 문제들을 내다보면서 한숨을 쉬고 내리쉬면서 혼자 시시덕거렸다가 눈물 흘렸다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삶은 간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변명하기를 “내 자신을 성찰하는 것을 보면 대단히 양심적이고 영적인 그리스도인이다.”는 사고방식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마귀의 꼬임입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 자신이 이러한 진리를 몰랐기 때문에 스스로 그러한 오류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러면서 본인 스스로 생각하기를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생각이 모자랐기 때문에 허겁지겁 사는 사람들이고 자기는 무엇인가 깊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수사관처럼 조사하면서 혼자 눈물 짓고 한숨 짓고 또는 기뻐하기도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 기쁨이 있는가 할 때 기쁨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면서 눈물 짓고 괴로워하고 한숨 쉬고 혼자 시시덕거리는 동안에 그는 은혜 안 받은 사람과 조금도 다름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계속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문제는 결국 자신을 철저히 조사하지 못하였기 때문임이라고 생각하면서 계속 자신의 속을 들여다봅니다. 들여다보면 뭐가 그렇게 많이 나오겠습니까? 성찰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의 조명을 받으면서 올바르게 자신을 성찰할 때 어둠속에서 빛으로 나올 수 있고 자신의 인생의 오류를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올바른 방법으로 성찰하지 않을 때는 영적인 작업이 우리를 파멸로 몰고 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문제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정말 은혜를 주셨는데 여러분 하나님 앞에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정말 주님이 동행해 주시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고정되어 있습니까? 주님의 이름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무엇도 아끼지 않을 수 있는 그러한 각오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 두 가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지 않는 모든 번영은 그것을 대가로 주고 하나님의 동행하시는 것을 포기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어느 시인이 이야기 했던 것처럼 “하나님 없이 천국의 길을 홀로 걸어가기 보다는 지옥의 불 가운데를 하나님과 동행하며 지나는 편이 훨씬 쉽다.”고 우리도 고백해야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기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특별한 은총을 입은 사람이면 우리의 관심이 하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대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을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눈물을 흘리고 감화를 받고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깨달았는데 삶은 어떻습니까? 삶으로 하나님 앞에 그렇게 하나님의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분투하는 노력들이 있습니까? 그러한 것들이 있을 때에만 하나님의 은혜가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은 사람들의 시선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거룩한 일들을 향해서 관심이 옮겨져 가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모세로 하여금 그 위대한 13절 이하의 중보기도를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교회의 위기와 부흥의 기회 (1997.04.23. 수요예배6)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중보기도(1)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출 33:13上)
녹취자 : 김세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위기는 닥쳤고 하나님께서 같이 동행하시지 않겠노라는 분명한 의사 표시도 떨어졌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회막을 만들고 아버지 앞에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앙모하는 자들은 그 회막에 모여서 아버지 앞에 간절히 기도하였고 그 기도는 결국 하나님께서 그 지도자와 대면할 수 있는 응답을 받아내게 되었습니다.
결국 지난번에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의 기도생활이 간절하고 열렬해지지 않는 것은 초점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살고 죽을 수 있는 목표가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그 목표를 따라서 살 수도 있고 죽을 수 있는 목표가 있습니까?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목표가 있는가 물으면 모두 한 마디씩은 합니다.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 위하여.”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말장난은 이제 지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말 잘하는 사람이나 말 유희 하는 사람들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왜 많은 사람에게 성경이 보이지 않는지 아십니까? 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성경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이 공부했어도 성경이 여전히 닫혀 있을 수 있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화) 며칠 전에 시카고에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총신대학 나온 젊은 목사였습니다. “목사님, 미국에 와 보니까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지만 말씀의 종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 공부가 말씀을 깨닫게 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은 살고 죽을 수 있는 거룩한 목표에 불타는 마음으로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서 기록되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러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그렇게 불타는 마음을 간직했었고, 그렇게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이 쓴 성경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바라보는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나라는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침노하고 있습니까? 쟁탈하고 빼앗듯이 그렇게 호시탐탐 주님을 위해 살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까? 거룩한 목표를 위해서라면 그 거룩한 목표가 나의 인생을 통해 성취되어 가는데 내 인생이 그저 그 거룩한 목표가 성취되기 위해서 한번 밟고 지나가는 징검다리와 같은 소모품이 되어도 기꺼이 그럴 수 있는 용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지난 시간에 회막에서 모두들 떠나간 후에도 홀로 회막을 지키며 한 가운데서 기도하던 모세를 통해서 그렇게 불변하는 한 목표를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불타고 있는 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미끄러지지 아니하고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지 않고 자신을 불태우면서 살아가야 할 그 목표 하나에 메여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간구하고 기도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그것이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이와 같이 말합니다.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 여러분, “향락” 하면 여러분은 그저 무슨 타락한 생활을 생각할 것인데, 아닙니다. 편안한 삶입니다. 편안한 삶을 좋아하는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것이라 하였습니다. 편안한 삶을 좋아하는 사람이 치열한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뚜렷하고 간절한 목표 없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두 손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는다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기도는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삶의 목표를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지, 자신의 삶은 돌아보지 않고 기도의 능력만을 되찾으려 하니까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 혹시 하나님을 바라보실 때 주 앞에 비취고 있겠습니까? 많은 은혜를 우리는 받았습니다.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해 주셨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일주일이면 수백 명씩 수십 명씩 짐승과 방불한 신앙생활을 하는 무지한 그리스도인들을 수없이 만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리의 빛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러한 때가 있었지만 깨닫게 하셔서 무엇이 빛이고 어두움인지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이 아버지께서 정말 원하시는 것인지 깨닫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참다운 은혜의 계시의 정신을 따라서 얼마나 우리의 삶이 치열하게 주님의 깨달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온 목표를 향해 우리의 마음이 불타오르고 있습니까? 여러분 오늘 모세를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어떤 의미에서 식언을 하시고자 하실 때에 그 진노는 정당한 것이었지만 그로 말미암아 이방 백성들에게 잘못 전파되게 될 하나님의 이름의 영예를 생각하면서 오늘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 모두에게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많은 은혜와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얼마든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향락을 좋아하는 자로서 단지 한 때 은혜를 받았던 사람, 그러나 지금은 실상 죽어있는 사람으로 비췰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그 위대한 선교사역의 위협을 이루면서도 늘 긴장을 잃지 않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고 오히려 자기는 그 구원으로부터 멀어질지도 모른다고 하는 신적인 긴장감을 가지면서 아버지 앞에 살아갔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늘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감격과 매 순간 순간 나의 육체와 마음과 온 정신이 하나님 앞에 바쳐졌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그 하나님을 위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타오르는 불타는 긍휼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러한 절박하고, 처절한 삶을 아버지 앞에 살아가는 신앙을 우리들이 가지고 있어야겠습니다. 여러분,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것만이 잠든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 잠들지 않았습니까? 오늘 하루도 거리를 다니며 생업에 종사하며 우리는 도처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는 현장을 보았을 것입니다. 분노하는 마음이 있었습니까? 영혼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새롭게 아버지 앞으로 돌아오는 기쁨을 보며 우리의 마음에 감격의 눈물이 있었습니까? 향락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삶의 반응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13절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가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도하기 시작해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모세와 다시 대면해 주는 놀라운 축복을 주셨습니다. 회막에서 성도들이 간절히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다시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여러분, 무엇인가 마음에 느끼는 것 없습니까? 신령한 목자를 하나님이 만드시지만, 신령한 목자가 신령한 은혜의 세계를 유지하면서 목양할 수 있게 하는 비결이 성도들의 애타는 중보기도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얼마나 가슴 깊이 느끼고 있습니까? 저는 확신합니다. 여러분들은 우리가 만약에 이 세상을 하직하고 하나님 앞에 가면 반드시 우리에게 두 가지는 물어보실 것입니다. 하나는 “내가 너에게 붙여준 영혼들을 위하여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였는가?” 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너희 영혼의 목자인 너희를 목양하는 이들을 위하여 얼마나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는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매우 특별한 사람들 빼 놓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목자를 위해서 기도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바쁘고 박약한 기도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기도하는 시간이 한 시간은 되어야 가족들을 위해서 10분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서 10분 기도하고, 자신을 위해서 10분 기도하고, 직장과 일터를 위해서 10분, 그리고 10분이라도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할 것 아니겠습니까? 다 합해봐야 10분도 안 되는데 그러니까 거의 기도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삶이 얼마나 비극적인 삶인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보게 됩니다. 13절에 나오는 모세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음성이 새롭게 들려오게 됩니다. 그 음성은 완전히 바뀐 음성입니다. 이전에는 “내가 너희와 함께 가지 아니하리라.” 그것으로 끝나는 진노의 음성이었는데 “내가 너와 함께 가리라.”는 응답의 음성이 들려오고 끊어졌던 임마누엘의 약속이 다시 들려오는 놀라운 변화가 여기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절히 기도하니까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었고 모세가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기도하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이게 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한번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중보기도”라는 제목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중보기도”가 어떤 기도였을까요? 본문 13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우선 모세는 첫번째로 하나님 앞에 주의 길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여러분, 모세가 하나님 앞에 무조건 떼를 쓴 것이 아니라 주의 길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였던 것을 우리가 한번 마음 둘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주의 길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단지 하나님 앞에 자기의 민족을 살려 달라고 무대포로 아버지 앞에 기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만약 하나님이 이 백성을 용서하시고 고쳐주셔도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드러날 것인지에 대해서 관심을 두며 아버지 앞에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열심히 기도하면서 기도가 마치 주님의 팔을 꺾어 항복시키는 것 같이 기도 속에서 자기의 요구만 이루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하는 마음으로 매달리면서 팔 꺾이 식으로 아버지 앞에 앞뒤 가리지 않고 매달리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믿음의 기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민족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위기 앞에서 자신의 생각으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시면 안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좀 더 깊은 주의 길을 보고 싶어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주의 길”은 “주의 뜻”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뜻을 알고 싶어 하였습니다. 이제껏 자신들을 인도해 오신 주님을 새롭게 알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가실 일, 주님의 뜻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영 버리시면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으셨던 수많은 약속들에 대한 아버지의 뜻은 어떻게 되는지 이 모든 것들을 아버지 앞에 묻고 싶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어려움에 빠졌을 때 여러분들은 제일 먼저 무엇을 구합니까?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주 앞에 몸부림을 치고 기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기에 앞서서 먼저 여러분의 마음속에 주님의 뜻, 이 위기 상황 속에서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싶어 하시는지, 아버지께서 나에게 보이고 싶어 하시는 그 길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하나님 중심의 소원이 여러분 속에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십중팔구 그 시험 속에서 하나님께 범죄 하기 십상입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시련 속에서 혹은 깊은 시험 속에서 고난을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그 길을 알 수 있다면 우리는 비교적 그 시험과 어려움을 이길 때가 있습니다. 욥이 왜 그렇게 시험을 받으면서 한없이 괴로워하고 몸부림치고 한 때는 순전함을 져버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의 말을 담았던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왜 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고 나를 왜 하나님께서 깊은 시련 가운데로 몰아넣으시고 내가 부르짖어도 응답하시지 않으시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큰 시험을 만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마귀가 나를 시험할 때에 그 수작하는 것이 뻔히 눈에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덤벼들어서 나를 넘어뜨리려 하는구나, 하면서 전략이 눈에 훤하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십중팔구는 그 시험에 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깁니다. 왜냐하면 주의 길이 무엇이고 그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이루시려고 하시는지 그 뜻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심지어 영적인 침체에서 벗어나는 길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혹시 자신이 깊은 영적인 침체나 신앙적인 어두움에 있는 것을 하나님을 향하여 핑계를 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가소로운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그러한 사람들이 자신이 당하고 있는 영적인 침체나 신앙의 감격이 사라진 것을 하나님과 환경에 핑계 대기보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로부터 떠나시나이까. 저를 이런 메마른 상태에서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의 길이 무엇입니까.” 묻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영적인 침체로부터 훨씬 빨리 벗어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책망, 하나님의 침묵, 마음속에서 사라진 은혜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때로는 당연하게 생각하는 태도도 필요합니다. “그렇지. 내가 그렇게 막 살고서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각이 내게 남아있겠는가.” 생각하면서 짐승처럼 신앙생활 해 온 것을 반성해야 합니다. 오늘 모세는 그것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내가 너희와 올라가는 것이 나의 뜻이 아니라고 해도, 그 뜻을 복종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하나님의 이름이 가장 영예롭게 온 세상 위에 드러날 수 있는 그러한 길을 아버지 앞에 호소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모세는 분명하게 그것을 알고 싶어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 이전에는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약속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서 오늘 돌아서신 뜻이 무엇이고 만약에 하나님의 심판이 궁극적으로 시행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떠한 신비한 방법으로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것들과 자신의 행동이 어긋나는 식언하시는 하나님이 되시지 않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아버지의 뜻과 길이 무엇인가 그것을 묻고자 하였습니다. 여러분, 그러한 점에서 우리는 모세의 기도에 불타오르는 열정을 배워서 그것으로 하나님께 승리를 거둔 모습을 먼저 배우기 전에 우리는 커다란 민족적인 시련, 교회적인 재앙 앞에서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구하였던 주님 중심의 사람, 모세를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향한 아버지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왜 여러분들을 여기에 두셨고 지금 그 상태에 있게 하셨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전에 잃어버린 많은 것들을 회복했고, 어떤 사람들은 주님이 주신 것을 잃어버리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간신히 이름값이나 하면서 살아가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불꽃처럼 살고 어떤 사람들은 꺼져가는 심지와 같이 연기 나는 삶을 살아갑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처지에 놓여있는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묻는 지혜를 배우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는 여기에서 우리는 이상한 기도제목을 보게 됩니다. “내게 주를 알리시고.”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모세가 첫 번째 기도가 하나님 앞에 주의 길을 묻는 기도라면,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더 알고 싶은 기도였습니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 급한 것이 무엇입니까? 가장 필요한 기도의 현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래, 내가 아까 했던 말은 취소한다. 그리고 다시 올라가마.” 그것이 바로 최고의 기도제목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현안이었습니다. 그 문제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막을 쳤고,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매달리며 기도하였고 이 모세도 하나님 앞에서 간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가하게 주님의 성품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 이 기도가 바로 상황을 바꾸는 핵심적인 기도였다고 하는 사실에 우리는 눈을 떠야 합니다. 여러분, 모세의 이 기도를 보면서 우리는 모세의 겸손을 배웁니다. 어째서 이 기도 제목 속에서 모세의 겸손을 배우게 됩니까?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친구가 친구를 얼굴로 마주 대하고 대화하는 것처럼 그렇게 친히 대화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민수기에서 말하기를 모세가 다른 모든 선지자와 동일한 선지자로 취급받을 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다른 선지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꿈과 이상으로 말씀하셨지만 모세에게는 당신의 뜻을 전달하는 방법이 매우 특이하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면하여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같은 선지자가 일어남이 세상에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커다란 위기 앞에서 자기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이 얼마나 작고 초라한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 문제 속에서 뭔가 하나님 앞에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이 있다면 그것을 알고 싶어 하였습니다. “내게 주를 보여 달라고” 모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여러분, 어려움 속에서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고 혹은 기도할 바를 알아서 기도하여도 기도의 문이 열리지 않거나 여러분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되는 방식대로 문제가 풀려가지 않을 때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때로는 여러분들이 열심히 간절히 부르짖지 않았기 때문에 간절한 기도가 부족해서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하나님이 어려움과 위기를 통해서 당신 자신의 성품을 우리에게 알리고 싶어 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하고 있습니까? 시련을 올바른 방법으로 통과하고 위기를 신앙적인 방법으로 극복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겨두고 가시는 커다란 유산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35장에서 벧엘로 올라갔던 야곱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났지만 하나님은 곧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사라지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무엇인가 커다란 유산을 야곱에게 남겨주고 떠나가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금이나 은 같은 것이었습니까? 아니면 잠시 있다 사라질 이 땅의 것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위기 속에서 당신을 찾는 자들에게 응답하시면서 남겨 주고 가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성품에 대한 놀라운 이해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해가 그들의 삶을 붙잡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힌다고 하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지식과 함께 역사하는 성령에 붙잡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이 없는 자가 하나님께 붙잡힌다고 하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고 별로 가치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 중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 손에 붙잡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참다운 지식에 의하여 붙잡힌 사람을 하나님이 붙잡으실 때 그를 통하여 진리의 역사가 일어나는 법입니다. 야곱은 깊은 시련과 위기 속에서 벧엘로 올라갔고 생명을 걸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주님의 놀라운 성품 하나를 야곱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어떠한 성품입니까? “벧엘로 올라가자” 시리즈 다시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개척하고 한 번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 그 이후로부터 야곱이 놀랍게 변합니다. 뭐냐 하면 실수도 하고 실패도 또 합니다. 가슴속에 새겨지지 않는 인식이 그의 삶을 주장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여호와는 전능하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전에 사기꾼과 같은 방법으로 살았던 인생을 과감히 삶의 방식을 바꾸는 역사가 벧엘에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여러분들 생각하기에 무엇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고 신앙이 무엇인가 아는 풍성한 진리로, 여러분들을 진리의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고 생각합니까? 무엇입니까?
(예화) 오늘도 출판사에 잠깐 들려 책임자들과 제 책 출판 문제로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분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관심이 있는 문제 하나를 가지고 수없이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자신이 보기에 이상하다는 것이 다 좋은 이야기들인데 핵심을 다 빗겨 가는 책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누가 오늘날 가장 갈급하고 궁금해 하는 오늘날의 이 세상의 제반 문제에 대해서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본질을 꿰뚫고 그것을 확 쪼개어 들어가 줄 수 있는 속 시원한 통찰들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필요하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것 없이 우리의 신앙이 바뀌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여러분, 그러한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통찰은 오직 한 곳에서 옵니다. 인생을 사는 경험이 거기에서 옵니까? 아닙니다. 나이 먹어서 목회하는 사람들 다 성공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디에서 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성품의 빛에서 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기뻐하시는데, 그러한 성품을 풍성하게 알았던 사람들이 그 성품이 주는 진리의 빛으로 삶의 제반 문제들을 비출 때, 거기에서 우리들은 번뜩이는 성경의 통찰들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러한 놀라운 성품에 관한 지식을 무엇을 통해서 주십니까? 어떠한 것을 통해서 주십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이 누구이신지 아는 그러한 성품에 관한 놀라운 지식들을 언제 주십니까? 어떤 사람에게 주십니까? 여러분들이 기독교의 역사를 움직였던 영적인 뛰어난 사람들의 생애를 읽어보면 공통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우연히 걸어가다가 불 받아서 신령한 사람이 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들은 개인적인 놀라운 부흥을 통해서 남들이 보지 못한 광대하고 위엄 있는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고 그 성품을 아는 지식의 빛으로 삶과 성경의 제반 문제들을 조명하면서 진리를 깨달아서 그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여 거룩한 삶을 추구하게 되어가는 결정적인 변화가 있기 전에 그들은 오랫동안 고민하고 갈등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민과 갈등이 때로는 깊어서 죽음을 결심할 정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갈등하고 무엇인가 찾으려 하는 그러한 몸부림 속에서 그들은 환경이나 이러한 것들과 함께 작용하며 올 때도 있었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러한 내면적인 위기 혹은 외면적인 위기 속에서 그들은 결국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는 간절함을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어주셨던 개인적인 부흥은 결국 주님을 그들에게 보이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말로만 듣던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고, 말로만 듣던 하나님의 정의가 무엇인지 알았고,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을 향하여 슬퍼하시는 마음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깊이 깨달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모세를 보십시오. 민족적인 깊은 위기 속에서 하나님 앞에 주님을 보여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려움에 빠졌을 때 단지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어떤 의미에서는 약간은 동물적인 반응 이상을 위기 속에서 보이지 못하는 우리의 영적인 회복의 방법과는 얼마나 스케일이 다른 것인가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십시오.
(예화) 이번에 집회 갔었던 교회에서 어느 집사님인가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기도원에 올라갔는데 기도가 너무 안 되더랍니다. 옆에 있는 누가 가르쳐 주었습니다. 기도 안 되면 가만히 앉아서 “주님, 주님.” 그러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앉아서 “예수님, 주님.” 기도하는데 30분, 40분 하는데 마음이 막 녹기 시작하더랍니다. 자신이 주님의 이름만을 부르다가 내려 왔는데 놀라운 기도의 은혜를 받았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성품을 묵상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여러분, 왜 사람들이 하나님께 구원받았으면서도 여전히 짐승과 같은 삶을 사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왜 주님의 사랑의 줄에 포로 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그 끔찍한 쇠사슬에 메여서 죄의 노예가 되는 것을 더 즐거워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주님이 누구이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위기 속에서 이렇게 주님의 성품을 깊이 알고 그 성품을 아는 지식이 영원히 여러분들의 인생을 붙들어 주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주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위기가 기회로 바뀌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모세가 이상한 기도를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모순입니다. 12절 마지막에서도 “주께서 나를 은총을 입은 자라고 하셨으니”라고 해놓고 13절에서 보면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이라고 가정법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13절 하반부에 보면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라고 지금은 은총을 입지 않은 것처럼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약간은 횡설수설하게 들리는 세 개의 문장이 12절 마지막과 13절 사이에 3번이나 나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겠습니까? 우선 모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이 내용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습니다만, 핵심 하나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한 가지 핵심은 이전에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것은 분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나님이 그에게 실제로 말씀하셨던 것 같습니다.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지금 그것을 회상하면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앞에서 은총을 입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면서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정법이라기보다는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전제해 놓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야기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은총을 입은 자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말이 사실이시죠? 맞죠, 주님? 그렇다면 제 기도를 들어 주셔야 합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얼마나 건방집니까? “주님, 이렇게 말씀하셨죠. 이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렇게 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이렇듯 따지듯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건방져 보이고 교만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또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할 때 기분이 확 상하기 시작합니다. “저 녀석은 설교 안 듣고 틀린 것 찾아내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매우 좋아하십니다. “주님, 우리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죠. 그렇죠? 주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죠? 주님, 죄 지은 사람도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죠? 하나님의 자녀가 고통에 빠질 때 하나님은 불붙는 긍휼 때문에 차마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보실 수 없는 하나님이시죠? 그러니 제 잘못을 용서해 주세요.” 매달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믿음으로 보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바로 선지자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을 향하여 건방지게도 숱한 의문문을 던졌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여, 당신의 백성들을 이렇게 버려두시려나이까.” 그 뜻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 그러실 수 없는 분이시죠? 그렇죠? 그런데 지금 우리들의 상태를 보면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과 같죠. 그렇죠, 하나님?” 하나님께서 끄떡 거리시면, “왜 그렇게 안 하세요? 제 기도 들어주셔야 해요. 안 들어 주시면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어긋나는 거예요. 그렇죠, 하나님?” 이렇게 하나님 앞에 따지듯이 하나님께 매달리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나무라듯이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대표기도를 하면서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사야서 몇 장에 보니까 이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도대체 어떻게 되신 것입니까? 주무십니까, 졸고 계십니까?” 이런 기도 말고 기도제목이 이루어지고 당신의 백성이 위기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도록 사모하는 뜨거운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논리를 가지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논리를 가지고 하나님을 몰아 세운다기 보다는 약속의 보증을 가지고 붙들며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이러한 기도가 놀랍습니다. 하나님을 자기의 논리로 다그치는 기도와 약속을 붙들고 하는 기도는 다릅니다. “주님, 이것을 약속해 주셨죠?” 약속을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하나님께 상기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믿음으로 보십니다. “주님, 우리는 주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모르십니까? 다 아십니다. “주여 오늘 우리가 주일 예배로 모였습니다.” 다 아십니다. “아, 나는 몰랐다.” 그러실 분이 아니십니다. “다 왔구나. 나는 너 안 왔는 줄 알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상기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주일 예배로 모였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 말썽꾸러기 상훈이도 여기에 왔습니다. 주여,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우리의 처지를 상기시켜 드리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켜 드리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성품을 상기시켜 드리는 것도 하나님께서 좋아하십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온 천지와 만물 중에 가장 사랑이 많으신 여호와이십니다.”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믿음으로 보십니다. 그러니까 약속을 붙들고 기도해야 하는데 무엇을 알아야 붙들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마음속을 헤집고 찾아보아도 무엇이 약속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무대포의 기도입니다. 그러한 기도는 육체의 힘이 넘쳐도 영적인 능력에 있어서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께 끈질기게 매달리며 기도하는 것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늘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큰 기도의 발판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이것이 적합한 비유가 될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제 무엇인가 굴러 내려오는 짐을 밀 때에 이렇게 하고 미는 것과 뒤에 벽이 있어서 뒤에다가 발 하나를 받치고 발과 손으로 온 몸으로 미는 것 사이에는 아마 물리학적으로 계산해 보지는 않았지만 엄청난 힘의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늘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들은 말하자면 후자의 사람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약속을 붙들고 기도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 나에게 여기에 있게 하신 분이 하나님 아니십니까?”라고 상기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하나님께 상황을 상기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백성의 고난을 당하는 것을 차마 보시지 못하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마음을 상기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부르짖으면 돕는다고 약속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약속을 상기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에는 엄청나게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기도의 놀라운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은 공통점이 뭐냐 하면 말씀에 대한 투철한 애정을 가졌던 사람들만이 그러한 능력을 소유하였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잠시 능력을 받는 것 같지만 곧 잃어버리거나 미끄러져서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모세가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께 상기시켜 드리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여, 부흥을 이 땅에 부어 주신다고 약속하셨죠? 주여 보소서. 주님의 이름이 능욕 받고 있습니다.” 계속 상기시켜 드리면서 우리의 마음이 상기시켜드리는 그 기도를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상기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사람이 거룩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하지만 거룩한 기도제목에 집착하는 그 기도가 그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어 갑니다.
(예화) 어느 교회 장로님이 올라와 기도하시는데 야채 장사 하시는 장로님이었습니다. 늘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열무 사려” 하시는데, 단 위에 올라와 사회를 보시는데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계속 “오늘 주일인데 오늘 받아놓은 야채를 팔아야 하는데…” 마음속에 계속 쌓여 있었습니다. 올라오더니 “오늘 목사님께서 전해주실 말씀은 요한복음 3원 16전입니다.” 마음에 뭐가 있는가, 마음에 무엇이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상기시켜 드리는 동안에 우리의 마음이 상기됩니다. “아, 그렇다. 이 세상은 지금 부패한 사람이다. 여기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부흥이 필요하다.” 이것이 계속 상기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정말 기쁘게 여기십니다. 한번 심리적으로라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 앞에 올려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는 진심으로 드리는 기도 아니겠습니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하나님께 무엇인가 상기시켜 드리고 있다면 그 상기시켜 드리는 내용은 이미 자기에게 상기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쉽게 이야기 하면, 하나님이 당신이 다 아는 내용을 상기시키는 것을 기뻐하시는 이유는 당신에게 상기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기도하는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께 알려드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상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한 기도가 되어 갑니다.
그러면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라고 하였는데 이 세 번째 이야기가 문제입니다. “주의 은총을 입게 하소서.”라고 한 것입니다. “입었다”고 하였는데 그 후에 “입었사오면”이라는 것은 “지금 입었습니다.”라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런데 또 “주의 목전에서 은총을 입게 하시며.”라고 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지금 모세는 이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던 것, 지금 그 은혜가 지속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목전에서 다시 새롭게 부어지는 현재적인 은혜를 하나님 앞에 구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다같이 따라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현재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과거에 여러분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많이 만나고 얼마나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에게는 오늘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현재적인 은총이 필요합니다. 어제 것도 아니고 오늘의 은혜입니다. 예레미야가 맛보았던,
(찬양)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매일 매일 새롭게 부어지는 은혜, 그것입니다.
(예화) 저는 지금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지금은 결혼해서 잘 살 것입니다. 신앙이 좋은 자매였는데 어느 날 주일에 교회에 갔습니다. 그런 질문을 태어나 처음 받아 보았습니다. 신대원 다닐 때였습니다. 전도사 때입니다. 탁 만났는데 “안녕하셨습니까.” 서로 인사를 하는데, 그러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혹시 지난 한 주간 동안 생활하시면서 새롭게 깨달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십니까? 제가 곤고한데 저에게 좀 나눠 주십시오.” 그런데 사실 그 주간에 뚜렷이 기억날 만큼 깨달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굉장히 신선한 자극이 되었습니다. “아, 그렇다. 옛날의 은혜가 문제가 아니라 아침마다 새롭게 깨닫는 현재적인 은총, 날마다 날마다 기가 막힌 감격으로 다가오는 새로운 성품에 대한 새로운 이해, 그 이해의 숲에 묻혀서 주님의 성품을 맛보고 그것을 힘입어서 주님의 은혜를 따라서 살아가는 삶, 이것이 우리에게 위기에 있을 때나 평탄할 길을 걸을 때나 우리에게 요구되는 삶입니다.
교회 안에는 눈 뜨고 못 봐주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 못 봐주는 게 뭐냐 하면 케케묵은 신자들이 처음 은혜 받는 지체들을 동물 보듯이 쳐다보는 것, 그것이 눈뜨고 못 봐줄 꼴불견입니다. 은혜를 받고 열심히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기도하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자기가 그런 기도를 못 하면, “어떻게 하나, 나는 왜 저러한 기도를 잃어버렸을까?”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데 “다 한 때는 저러는 거야.” 현재적인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궁색한 자기변명 아닙니까?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날마다 죽노라.”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과 날마다 계속되는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감격 없이 날마다 죽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 됩니까? 죽습니까? 죽이기는 쉬어도 죽지는 않습니다. 말과 미움으로 사람들을 죽이기는 쉬워도 자기는 죽지 않습니다. 날마다 하나님 앞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부어주셔서 날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그 은혜를 아는 지식에서 현재적으로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 이것을 하나님 앞에 자랑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모세는 남이 부러워할 만큼 매우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위기 앞에서 민족을 위해서 기도를 하는 것 앞서서 먼저 내게 은총을 주시도록, 주 앞에서 은총을 입게 하시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였습니다. 아버지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비록 모든 선지자와는 비교되지 않는 탁월한 관계를 하나님과 누리면서 영적인 관계를 누렸지만,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는 데는 오늘 현재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그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레미야 선지자와 사도바울은 시기적으로 얼마나 많이 떨어져 있는 사람입니까? 최소한 8세기 가량 떨어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롭다고 고백을 하였고, 그 수백 년 후에 사도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하고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매일 새롭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순간순간 매일매일 부어주시는 현재적인 은혜로 살아간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가정에 위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사업에 위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진정으로 현재적으로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문제가 문제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 그 은혜를 현재적으로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세상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그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은총의 보호 아래 있는데 말입니다.
오늘 세 번째로 이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하나는 너무 중요해서 다음 시간에 계속 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교회의 위기와 부흥의 기회 (1997.04.30. 수요예배7)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중보기도(2)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출 33:13下)
녹취자 : 김세나
지난 시간에는 모세가 대책 없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어져 버리고 심판을 이미 선고받은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모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한 내용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가 주의 뜻, 길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고, 그리고 또 하나는 주님의 성품을 보여 달라는 기도였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현재적인 은총, 다시 말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은총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하나님께 상기시켜 드림으로써 자신이 지금 현재 하나님 앞에 현재적인 은총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호소했다는 내용들을 살펴보면서 기도에 관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기에서 이제 매우 중요한 꼭지점에 와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오늘 읽어드린 13절, 지난 14절에서는 지루할 정도로 길게 팽팽한 긴장 속에서 계속되어 왔던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모든 일들의 결말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지 않으시겠다고 했던 말씀, 그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켜 보려고 모세가 회막을 만들어서 기도하고 매달린 것, 마지막에는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면서 부르짖지 않을 수 없게끔 하였던 일들. 그 결말은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은총을 회복시켜 주시고 “내가 사자만을 보내어서 너희를 가게 하지 아니하고 너희와 동행하겠다.”고 하는 거룩한 약속을 다시 허락해 주시는 극적 반전이 14절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13절은 여태껏 계속되어 왔던 33장의 모든 상황을 뒤엎는 결정적인 기도라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마지막 기도의 특징 가운데 네 번째가 바로 하나님 앞에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하는 기도제목입니다. 오늘은 이 기도의 제목에 우리가 한번 유의해 보고 여기에 담겨져 있는 무한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비밀들을 우리들이 더듬어 보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린 것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시지만,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들이 당신이 이미 알고 계신 일, 알고 계신 사건들을 반복해서 상기시켜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믿음으로 보신다는 말씀을 지난 시간에 드렸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라고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레헤 키 아멕카 하꼬이 하제”()라고 나오는데 직역을 하면,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이 족속이 당신의 백성이옵나이다.”는 의미입니다. 이것 또한 똑같이 하나님께 상기시켜 드리는 내용입니다. “보시옵소서.”라는 명령형을 취합니다. “보시옵소서 이 백성이 당신의 백성입니다.” 이 나라가 당신의 백성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 또한 지난주에 말씀드린 바와 똑같이 하나님께 특정한 사실을 상기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그 사실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하나님에게 하나님이 잘 알고 계신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상기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옵소서. 이 나라는 당신의 백성이옵니다. 이 족속은 당신의 백성이옵나이다.”라고 상기시켜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서 우선 첫 번째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성품을 깊이 깨달아 안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그 관심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로 향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기도의 세계에 있어서 이 점은 실로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한 사람이 아무리 많이 기도한다 하더라도 기도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경험하고 나면 우리의 필연적인 관심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 보지 못한 사람은 그 사람은 정녕 깊은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본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은 기도에 있어서 취향이나 방향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도는 단지 열심 하나로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기도가 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깊이는 하나님을 얼마나 풍부하게 경험하고 그분이 누구이신지 어떻게 잘 알고 있느냐, 하나님 자신을 아는 지식에 필연적으로 매인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진정 깊은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먼저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누구이신지 보다 더 깊이 알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보다 더 깊은 이해를 경험해야 합니다. 또한 그 성품에 대한 보다 넓은 식견을 갖는 것이 우리가 보다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가려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가 왜 열심이 없고 힘이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사랑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겠다고 하는 간절한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삶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는 사무적이고 우리의 기도는 뜨겁지 않고 우리의 기도는 열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간혹 우리 주위에는 꽤 많이 기도하고 열렬히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폭좁은 기도세계를 갖은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를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는데 한 경향을 택했기 때문에 그러한 기도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기도의 깊이의 문제와 관계됩니다. 물론 광대한 제목의 기도만 깊이 기도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어떤 문제에 부딪힐 때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통해서 무엇인가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고 알리시고자 하시는 제목이 있으실 경우에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 개인의 기도임에도 불구하고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을 우리는 자주 경험합니다. 그러한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일들이 언제나 일어날 수 있지만,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고 하나님의 체험을 깊이 맛보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도의 제목이 오히려 하찮은 것들이 되어버리고 공동체와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과 그의 나라를 위한 기도로 가득차게 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 왜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경험한다고 하였는데, 이 이야기를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경험한다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는 다양한 성품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다양한 성품들을 경험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요, 인격적인 체험입니다. 여러분, 기도는 일방적으로 내가 무엇을 원하는 것을 욕구 불만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 퍼붓는 것을 가리켜 기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그러한 것들을 가리켜서 기도라 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기도의 제목을 욕구 불만에 가득차서 단지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 그것이 기도의 전부가 아닙니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장로교 교인들의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는 기도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기도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찾아내고 그것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그 분의 성품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갖게 될 때 그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더욱 간절한 기도의 제목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여러분들이 잘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를 간략하게 들어보겠습니다. 사람이 말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자신이 얼마나 불결한 죄인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심지어 사람이 명백하게 그 사람이 지은 죄를 나열하면서 “당신은 나쁜 사람이야”라고 말해도 그것이 곧 그 사람에게 회개를 불러일으키거나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부끄러워하거나 뉘우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 반대로 그러한 죄에 대한 지적을 받고 죄가 확 드러나 버릴 때, 부패한 죄인의 심리 가운데 하나는 다 드러나 버린바 아주 뻔뻔해 지는 심리가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이것입니다. “너 이것도 잘못했지? 저것도 잘못했지?” 감출 수 있을 때에는 “아니야, 그렇지 않아. 사실은 이런 거였어.”라고 변명하지만, 모두 다 드러날 때에는 마지막으로 대상 파괴적인 반응으로 나갑니다. “그래, 나 그런 놈이다. 어쩔래?” 하며 나갑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복스러운 때가 되면,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단지 자신이 지은 죄를 하나님 앞에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이 하나님 앞에 한없이 두렵고 떨림으로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살가죽을 벗겨서라도 자신에게 묻어있는 죄의 죄책들을 씻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언제 그러한 일들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할 때에만 그러한 죄에 대한 본질적인 반응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면 이렇습니다. 어느 순간에 성령은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십니다. 어느 순간에 진리를 알고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시고 순결한 분이신가 우리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순결하고 정결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고, 그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내가 서 있다고 느껴질 때, 그때 나는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 있기에 얼마나 불결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누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키는 대로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배가 만선이 될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을 때 베드로는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두려운 생각이 들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무엇 때문에 베드로는 갑자기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생각이 들게 되었고, 그래서 무릎을 꿇고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그 분과 함께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서 있는 것 자체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경험 때문입니다. 그 기적의 놀라운 사건을 통해서 물고기가 잡혔지만, 물고기 잡히는 사건은 매개체였습니다. 그 사건을 매개로 하여서 베드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거룩하고 순결한 성품 앞에서 이제껏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자신의 부패함과 죄악, 그리고 자신이 철저하게 죄로 지배당하고 있는 존재라고 하는 인식이 하나님 앞에 떠올랐습니다. 그러한 두려움에 베드로에게 임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그 기도가 거기에서 끝났으니까 그렇지, 만약에 베드로가 계속해서 혼자 기도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면 무엇을 기도 하였을지에 대해서는 명백해지지 않습니까? 무엇을 기도하였겠습니까? 베드로가 기적의 사건을 보면서 두려움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순결한 성품을 봤기 때문에 그분과 함께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이 너무나 두렵고 떨려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오로소이다.”라고 고백을 하였는데, 그가 계속해서 기도했더라면 무엇을 기도하였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연스럽게 죄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이 아닙니다. 다양하게 나올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성품의 빛 앞에서 무엇이 드러나겠습니까? 그 성품과 반대로 살아가는 자신의 사랑 없고 포악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이것은 무슨 허공중에 있는 이야기가 아니고 여러분 가운데 매일 매일 경험되는 일들을 정리해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하나 더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지금 사랑과 거룩에 대해서 이야기 했는데,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또 하나 의로우신 성품이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불의하게 살아왔는가 하는 인식이 생겨납니다. 내가 살아온 길은 순간순간 열심히 살았고 성실히 살았지만 내 길은 전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없는 불의한 길이었단 말입니다. 그러한 뼈아픈 확신을 얻게 되는 것이 어떤 일들을 통해 일어나겠습니까? 하나님의 엄위롭고 의로우신 성품을 체험하게 될 때 일어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쭉 나오는 이야기들을 인간 세상 속에서 어떤 사람이 너무나 사랑하니까 오래 참아 복을 받고, 그리고 어떤 사람이 너무나 사람을 사랑했더니 그 사람 속에서 온유함이 있었고, 친절함 있었고, 등등 이러한 식으로 성경을 풀어가는 것은 고린도전서 13장에 흙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어떻게 해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의 다양한 속성들을 발견하게 되었겠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 속에서 사랑의 성품을 만났고, 그 사랑의 성품에 내재하고 있는 다양한 속성들을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속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13장을 들어가는 문입니다. 철저히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과 관련되어서 오로지 그 빛 속에서 해석이 되어져야지만, 바울이 경험하였던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어 했던 사랑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왜 지금 이러한 이야기가 지금 필요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게 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체험하도록 만들어 주시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관심이 하나님의 백성들, 공동체, 교회, 하나님의 나라로 옮아간다는 것을 지금 첫 번째 대지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자, 그렇게 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체험하면 그 성품을 체험하는 것을 통해서, 성품은 결국 마음이 드러나는 통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성품이 온유하면 온유한 마음이 성품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경험하게 되면, 그 성품을 경험하게 될 때 하나님 안에 있는 이 세상에 있는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게 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 자신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와 공동체를 위해서 그렇게 간절히 자신의 일처럼 기도하고 간구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바로 이러한 특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보게 되었고, 그 성품을 보게 되니까 오늘 이 모세가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체험하고 나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마음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경험하고 나면 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 관심이 옮겨져 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는데 가장 중요한 변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경험하고 만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명예에 대해서 매우 깊은 관심을 갖습니다. 모세가 지금 하나님 앞에 “이 백성을 보소서. 이 나라가 당신의 백성입니다.”라고 하는 이러한 내용들을 하나님께 상기시켜 드리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모세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나니까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한 가장 중요한 변수이자 도구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모세가 이 백성을 당신의 백성으로 여겨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이 장면은 단지 민족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그것은 2차적인 것입니다. 그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깊이 체험한 사람들에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명예에 대한 깊은 관심이 불러 일으켜지는데 그 명예에 가장 중요한 변수는 이 세상에 살아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의 상태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기도를 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러한 어떠한 의미에서 조금은 당돌한 질문을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많은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는데 여러분, 그 기도제목이 다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나라가 오겠습니까? 어려운 질문일 것입니다. 다시 반복해 보겠습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을 비롯해서 이 땅에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의 제목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에도 없고 괜히 해 보는 기도는 치워버리고 마음에 늘 담아두고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기도의 제목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의 제목들이 모두 다 성취된다고 할 때, 그러한 기도의 제목이 모두 다 성취된 세상이 과연 하나님의 나라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허점이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주기도문에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기도문의 패턴을 따라서 기도할 수 있었던 때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패턴과 자기가 하고 있는 기도의 패턴이 어쩌면 그렇게 똑같을 수 있을까 무릎을 치는 그리스도인들은 극히 드뭅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 생각합니까? 왜 주님이 우리에게 돌려서 말하거나 애매모호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기도제목까지 아주 분명히 가르쳐 주셨는데도 우리의 기도의 패턴이 그 기도의 패턴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 생각하십니까? 한번 마음을 열고 솔직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 때문이라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대답하기 전에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그것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중요하지 않으면 왜 이렇게 힘들게 질문하겠습니까? 중요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결론은 이것입니다. 왜 주님이 그렇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는데도 그 기도를 따라서 우리의 기도의 패턴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패턴을 반영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삶이 주기도문적인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기도적인 삶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최상의 가치의 삶이 무엇이라고 이야기 합니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 세 가지가 어떤 의미에서는 동일한 계열의 기도입니다. 동일한 계열의 기도입니다. 왜 입니까?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은 그 나라가 이루어질 때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가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아름답게 이루어져 갑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갈망하는 집단들이 생겨납니다.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에 있어서 가장 첫 번째 중요한 일부입니다. 일부. 첫 번째 파트란 말입니다. 그런데 늘 그러한 기도제목들이 우리에게 있어서 우선적인 기도제목이 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 주기도문적인 삶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다시 출애굽기로 돌아오면 이제 이러한 논의들을 통해서 우리들이 하나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 우리가 이 세상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고 있는 모든 기도의 제목들이 이루어지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개인적으로 조금 더 행복하고 교회적으로 보다 조화로운 세상이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인정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주 고통스러운 문제들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그것이 응답되면 분명히 어떤 면에서는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이 나아질 수도 있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 계기를 통해서 더욱 온전해 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전체적으로 그러한 기도의 제목들이 이루어졌을 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안고 있는 가장 커다란 문제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있어서 이 기도의 제목이 가장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의 제목으로 다가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심지어 자기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개인적인 은총까지도 이제는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는데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철저히 공동체를 위하고 자신의 민족과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을 돌이키는 수단으로서 자신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자기에게 베풀어 주셨던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 앞에 상기시켜 드리면서 이 모든 것들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회복시키는 일에 철저히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하나의 목표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백성들을 버리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애족적인 사랑이나 국민의식에서 비롯된 애국정신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부어주시는 마음이었고,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된 것에서 비롯된 마음이었고 더욱 구체적으로는 그가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그의 처절한 관심이 무엇인가 그의 기도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우리의 가슴에 분명히 못 박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누구이든지 어떠한 사연을 가지고 여기까지 신앙생활을 해왔고 앞으로 어떠한 계획을 가지고 있든지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 사는 인생이 아니면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이 아니면 그것은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설교를 할 때마다 앉아있는 수많은 사람들 마음에 항의가 빗발치는 것이 느껴집니다. 도대체 그렇게 사는 사람이 우리 중에 몇이나 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춤추고 노래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애통하고 눈물로 도고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은 오늘날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시대는 어느 때나 보실 수 있었습니다. 사면을 두루 살펴도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도 없고 그 이름의 명예가 땅에 짓밟혀도 그 명예를 끌어안고 슬퍼하는 사람도 없는 건조하고 타락한 땅을 바라보시면서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 믿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복음 가운데 사람들의 입맛을 당길 수 있는 어떤 특정한 내용들만을 뽑아내어서 말의 잔치를 벌여서 기독교라는 종교를 사람들에게 혹하게 하려는 사악한 소상인적인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정직하게 복음이 무엇인가 보여주고 인생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 보여주고 담대히 그러므로 그렇게 살아가는 당신은 죽은 인생이라 말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마지막 날이 되면 수많은 영혼들은 하나님 앞에 울부짖고 그리스도인들에게 항의할 것입니다. “나는 복음은 들었고 기쁜 소식이라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인생이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진정으로 사는 것인지에 대해서 한 번도 정직한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항의한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기억을 해야 합니다.
오늘 이 모세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입었습니다. 자기가 개인적으로 받은 은총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모세였기 때문에 한 사람 모세로서 하나님께 받은 은총이었습니다. 이름으로도 내가 너를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심지어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너를 통하여 한 민족을 다시 세우겠다.” 다시 말해서 모세를 제2의 아브라함으로 만드시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오늘 오직 한 가지의 기도제목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자신이 받은 은총의 증거와 모든 하나님의 사랑을 모두 걸고 한 가지 기도제목으로 매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백성을 버리셔서는 안 된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면 “보시옵소서. 이 나라가 주님의 백성입니다. 이 족속들이 주님의 백성이옵나이다.” 당연한 내용을 상기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이렇게 상기시켜 드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무엇을 하려고 모세가 당연한 이야기를 상기시켜드리는 것입니까? 범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이 이들을 향하여 돌아서려고 할 때 하나님의 마음에 주된 관심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성품을 가지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고 하나님 앞에 더럽혀 졌을 때 차마 그들을 바라보실 수 없는 분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은 그 거룩한 공의의 성품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심판받게 해야 한다고 하는 공의의 성품이 이스라엘의 심판을 재촉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께 “이 족속이 바로 당신의 백성이옵나이다.” 고백을 함으로 이제 이 모세는 이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경험하고 진정으로 그 백성들을 향하여 중보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의 성품에 호소하고 그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성품이 간구하는 자신의 기도의 소망이 되어 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 백성들이 범죄하여 주님을 진노하게 하심으로 당신의 의로운 성품이 격동하고 있는 것을 보지 마옵시고 이 백성이 주님의 은혜로 구속받은 백성이고 하나님과 추억을 간직하고 이제껏 범죄하고 잘못하였지만 순간순간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하였던 백성들이었고, 주님이 당신 자신의 명예를 걸고 구속해 내어 뽑아내신 백성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달라고 하면서 말하자면,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의 마지막 장면 한 컷이 아니라 긴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사연과 인연을 하나님 앞에 생각나게 하심으로 긍휼의 뛰어난 하나님의 성품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것을 믿음으로 여기십니다.
주일에 하나님께 나왔습니다. “주님, 막 살다왔습니다. 죽이든지 살든지 맘대로 하십시오. 저도 이제 막 가는 인생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주님, 내가 범죄 하였고 하나님 앞에 거스르는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 사실 진심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한 때는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자녀였습니다. 아버지,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옵니다.” 이렇게 관계를 하나님께 상기시켜 드리는 것이 하나님 앞에 뻔뻔스러운 무책임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보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킨 모세의 기도는 그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성품에 호소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잘못했고 저렇게 잘못했다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가 변명한적 있었습니까? 무엇을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우상을 섬겼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그리고 범죄 하였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보탠 것도 없고 뺀 것도 없이 정확히 사실 그대로를 모세에게 말씀하셨고 그 사실에 기초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분노의 감정을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모세에게 말하였습니다. 정직하고 공의롭고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가감이 있으시겠습니까? 우리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요만큼 화나는 게 있을 때 평소에 그 사람이 유감이 생기면 요만한 미움이 확 커져서 그것이 기회다 여기며 이참에 관계를 짓밟아 버리는 파괴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러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확하게 무게를 달아보시고 죄의 값만큼 분노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 사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잘못 생각하신 것입니다. 우상은 사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라고 변명하거나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모두 말씀하실 때 인정하였습니다. 시편 51편에서 죄인이 하나님 앞에 책망을 받을 때 의롭다 하시도다, 고백하였던 것처럼 그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말씀으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만나려면 판단하시는 하나님을 의로우시다고 여기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어떨 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어떤 설교는 목사 이야기로 듣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그것입니다. 모세가 한 번도 그것에 대해 토를 달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반박하거나 뒤집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 인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전혀 다른 방면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이미 정직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동을 범죄로 판단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착오도 있을 수 없습니다. 판단하였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은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분노하시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이미 그렇게 공의롭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정면으로 대면하여 그 성품을 바꿔보고 그 성품에서 우러나오는 여러 가지 하나님의 행동을 움직여보려고 시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반역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하나님의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옳습니다. 내 백성은 범죄하였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 맞습니다. 이놈들 죽일 놈들입니다.”라고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호소하는 것은 “하나님, 이 백성이 그래도 주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면서 우회하여서 하나님의 감추어진 긍휼의 성품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한 성품이 아니라 다양한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어느 한 성품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이 성품을 통해서 자신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질 수도 있는 주권적인 은혜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을 하나님의 심판을 회피하는 비겁한 태도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음으로 보십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기의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에게 호소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줌이 마땅치 아니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여인이 뭐라고 하였습니까? “예수님,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사람 깔보지 마세요.” 이와 같이 대들었습니까? “예수님 사람만 고치면 다 입니까?” 덤볐습니까? 그랬다면 끝났을 것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줌이 옳지 않다.”고 하니까, “예수님, 그런 식으로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상처 받았어요.”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않다.” 즉각적으로 여인은 “옳소이다.” 맞습니다. 정확하신 지적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판단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이 여인으로 하여금 그러한 태도를 보이도록 만들어준 원인은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무엇이 이 여인으로 하여금 그 예수님이 그렇게 치욕적인 말씀을 하셨는데도 맞다고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가지고 있는 기도의 제목이 절박하였기 때문이고, 어차피 예수님 앞에 나와서 이방 여인으로서 자기의 딸을 고쳐 주시는 신적인 은혜를 받기를 원하였을 때에는 정당하고 공의롭고 정의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에 호소하려고 하였던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무슨 성품에 소망을 두고 나온 것입니까? 긍휼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출애굽기에 묻어있는 복음의 맛을 보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매우 이점에 있어서 약하십니다. “내가 쓸어버리리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 부르짖으십니다. 그때 “맞습니다. 하나님 이 백성들은 나쁜 놈들입니다. 갈아버려도 시원찮은 인간들입니다. 저도 신물이 납니다. 그러나 주님 우리는 주의 백성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마음에 떨리는 감동이 일어납니다. 이 여인이 그것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맞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로 배를 불리지 않습니까?”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히 여기시는 성품에 호소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는 말씀을 해 주십니다. 결국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모세의 이 “보시옵소서. 이 백성이 주의 백성이옵나이다.”라고 호소한 이 기도는 그야말로 믿음의 기도였습니다. 어떤 믿음의 기도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향해 긍휼을 거두실 수 없는 분이시라고 하는 그 믿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긍휼의 성품에 호소하면 다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아주 기가 막힌 통로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긍휼에 호소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는 사람들이 너무 적습니다. 궁금한 것은, 그러면 왜 이것을 못 하는가 문제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아 그렇구나. 잘못했어도 그렇구나. 잘못하면 죽도 밥도 안 되는 줄 알았더니 아, 오늘 참 수요예배 차 두 번 갈아타고 온 보람이 있구나. 야, 잘못했어도 들어주신다는 이야기네? 야, 좋다. 그러면 무엇인가? 긍휼히 여겨달라고 호소하면 되는구나.” 오늘서부터 “하나님, 긍휼히 여겨 주세요. 네? 나를 긍휼히 여겨 주세요.” 될 것 같습니까, 안 될 것 같습니까. 벌써 문맥을 보면 안 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면 왜 그렇게 어떤 의미에서 기도의 핵심이라고 할까, 급소와 같은 진리가 있어서 그렇게 하나님의 긍휼에 호소하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결의가 얼마나 대단하였습니까. 32장, 33장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결의는 웬만한 사람들이었다면 이미 포기하였을 것입니다. 주의 뜻은 이미 확정되었도다. 주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매달렸습니다. 아주 굳건하게 확정된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이 돌이키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긍휼에 호소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하나님의 긍휼에 호소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긍휼에 호소하면 됩니다. 그렇게 긍휼에 호소해야 하는데 그러면 긍휼에 호소하기만 하면 잘못하였어도 주님이 돌이키시고 긍휼히 여겨주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역사를 이루시는데 왜 그렇게 다 알면서도 못하는가, 그 이유를 오늘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에 깊이 호소하기 위해서는 단지 입술의 고백으로 “우리들은 주님이 긍휼히 여겨 주셔야 삽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신 성품에 호소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보시고 어떠한 하나님의 성품이 감동을 받으시는 적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감동을 받으시는 것은 외모를 보시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감동되기 위해서는 긍휼이라고 하는 것은 불쌍히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성품에 기대를 걸고 나아오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연민과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측은하고 불쌍한 모습이 될 때, 하나님의 마음에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감동을 받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말로는 긍휼히 여겨주는 것 밖에는 소망이 없다고 나오는데 그렇게 불쌍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로는 긍휼히 여겨달라고 매달리는데 보면 전혀 불쌍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러면 어떤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겠습니까. 오늘 모세를 주목해 보십시오. 모세는 지금 이런 생각을 가지고 기도하였겠습니까? “아 참 80에 겨우 직업을 가졌는데 몇 년도 안 해 봤는데 벌써 명퇴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얘네들 쓸어버리시면 나는 뭐 하나? 퇴직금이나 챙겨서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 어학 강사나 할까나, 아니면 어디 가서 이드로의 집에서 쳤던 것처럼 양떼나 치며 밥을 먹으며 살아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좌우지간 문제가 빨리 해결이 나야 나도 좀 거취를 정할 텐데.” 이렇게 하였겠습니까? 확실히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해력이 우둔하여도 그것은 아닙니다. 모세는 심지어 하나님이 명백하게 말씀하시는 것조차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너를 제2의 아브라함 삼아서, 얘네들은 종자가 원래 다른 애들 같은데 얘네들을 쓸어버리고 너를 통해서 제2의 아브라함으로 새로운 민족을 창조하겠다.” 그렇게 말씀하셔서 그러면 내가 후손들에게 아브라함처럼 추앙을 받을 것이고, 장밋빛 꿈을 꾸면서 이 일이 빨리 해결이 나기를 마음속으로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가지면서도 겉으로만 “주 뜻대로 하옵소서.” 이러면서 입바른 소리를 하였겠습니까. 아닙니다. 모세에게는 이 백성들을 하나님이 버리시면 자신의 인생도 없고 미래도 없었습니다. 그의 생명은 그 백성들과 결탁되어 있었고 그의 삶의 모든 꿈은 교회와 붙들려 매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고, 그렇게 된 목적도 하나님의 이름의 명예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기도자의 마음과 기도하는 태도와 기도자 속에 존재하고 있는 심령의 상태가 하나님의 긍휼을 불러내기가 충분하였습니다. 짧은 본문 속에서도 우리는 기록되지 않는 숱한 언어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모세는 뛰어난 영적인 경험을 토대로 요령을 부려가면서 기도응답의 핵심을 찌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고 사자 뒤나 쫓아가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한 맛을 잃어버리고 이방 백성들처럼 살아가고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 버린 백성이 되어 버리는 것은 모세에게 있어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굳이 거기까지 가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버림을 받으면 자신의 인생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은혜받은 사람의 삶입니다. 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이 그렇게 철저하게 하나님의 교회와 매여 있고 꿈과 모든 소망과 삶의 모든 기대를 하나님의 교회와 공동체, 이 땅에 세우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 그들의 상태에 따라서 웃고 그들의 상태에 따라서 울고 그들의 상태에 따라서 고통하고 아파하는, 그렇게 교회 하나를 위해서 부름을 받은 것처럼, 아버지의 나라 하나만을 위해서 소명된 것처럼,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렇게 붙잡혀 매인 생애를 살았던 비밀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러한 마음이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이 교회의 영적인 상태가 여러분들에게 고민거리가 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교회에 어떤 변화를 위하여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매어 달리려고 할 때 그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고 기도하는 바에 대해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고 동행하기를 거절하시는 그 자체가 곧 여러분들의 생명이 끝나는 것 같은 깊은 좌절과 절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때로 이루시지 않을 것 같은 놀라운 일들을 획기적으로 이루어주심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 놀라운 증거들을 우리 가운데 자주 보이십니다. 그러나 위대한 일 이면에는 하나님이 반드시 위대한 사람들을 세우십니다. 오늘 이 모세가 하나님 앞에 “보소서, 이 족속이 주의 백성이옵나이다.”라고 주님 앞에 상기시킬 때 모세가 그 마음이 어떠했을지 여러분, 이렇게 상기시켜 드리는 모세의 마음이 여러분들에게 느껴지십니까? 모세는 남의 말 하듯이 “저 나라가 미국이옵나이다.” “이 나라가 북한이옵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여, 이 족속을 백성으로 여기시옵소서.” 만약에 하나님이 이 백성을 당신의 백성으로 여기지 아니하시면 이스라엘에게도 미래가 없었지만, 모세 개인에게도 아무런 미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이러한 사람들의 기도로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합니다. 나는 없고, 내 삶도 없고, 영광을 받으실 수 있는 하나님의 교회가 주님의 교회임이 드러나고 여호와의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 때문에 부족한 것이 많고 죄와 허물이 많은 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과 아침마다 새로운 사랑의 성실함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그 백성들의 실존을 보면서 자신의 인생은 아무래도 관계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의 기도가 하나님 마음을 움직이고 역사의 한 획을 그어가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 하는 거룩한 여명이 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늘 이 설교를 들을 때 공허한 느낌을 받고 있겠습니까? 이런 설교를 들을 때 이 설교가 가슴에 와 닿는 사람이 얼마나 소수이겠습니까? 아마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설교를 들으면서 방언을 듣는 것처럼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주님의 나라가 완성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고 간구하셨지만, 자신의 이름의 명예를 위하여서는 생명을 거는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의 명예를 위하여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그 나라를 목말라 하면서 살도록 말씀하셨지만 자신을 배부르게 하고 평안하게 하는 세상 나라의 부함을 더욱 구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 시점에서 주의 나라가 이 세상에 충만하게 도래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기대이겠습니까? 믿음이 아니라 허황된 꿈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그 뜻이 이루어지길 구하며 살도록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오늘도 고민하는 모든 고민의 핵심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자신의 욕망과 인간의 뜻을 인하여 고통을 받고 하나님과 신앙 까지도 자신의 뜻을 성취하는 도구로 사용해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노는 진노대로 남고 하나님의 고통은 하나님의 고통대로 남고, 무엇인가 하나님의 분노가 은총으로 바뀌고 하나님의 심판하시고자 하시는 불같은 열망이 뜨겁게 눈물 흐르는 긍휼로 바뀌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우리는 다시 한 번 평범한 사실을 확인해야 합니다. 세상은 세상대로 살게 버려두고 우리는 우리에게 명하시는 하나님의 방식대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드셔서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33장에서 만난 위기와 같은 때에, 우리를 이 세상에서 데려가지 않으시고 살아있게 하셨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한 사람의, 두 번째 모세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거룩한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고도 하나님의 긍휼에 호소하지 않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희망을 두며 아버지 앞에 매달리지 않는 이 무책임하고 잠들어있는 이 세상에서 누군가 두 번째 모세가 되어서 주께서 이 백성들을 살리시고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시키지 아니하시면 나도 없고 내 생명도 없고 나의 사는 것이 고통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 그 꿈과 모든 소망이 오로지 하나님의 백성들, 그 백성들을 통해서 높이시고자 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이름에 매여 있는 두 번째 모세와 같은 사람의 출현을 하나님께서는 기대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이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의미로 “이 족속이 주의 백성인 것을 보시옵소서.”라고 하나님께 호소할 때 하나님의 마음은 움직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였지만 그 기도가 모세를 하나님과 대면하게 만들어 주었고 모세의 하나님의 긍휼의 성품을 자극하는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누가 하나님 보시기에 불쌍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이 시대의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이 교회를 위해서, 한 공동체를 위해서, 하나님이 내려다보실 때 “불쌍하도다!”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를 바라볼 때마다 가슴 저미는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이 동하여 불붙는 사랑을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상기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줄 사람,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좁은 길로 걸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참된 신앙의 도, 그리고 일생을 살고 믿고도 후회하지 않을 수 없는 신앙의 길은 대중적인 길이 아닙니다.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긍휼의 성품에 호소하고 하나님 앞에 불쌍히 여기는 감정을 불러 일으켰던 사람들은 세상에서 소외되거나 세상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서 마음 쓰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꿈과 모든 소망과 온 영혼의 기대 자체가 당신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마음에 감동을 받으시고 당신의 놀라운 계획을 새로운 계획을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설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오늘도 교회는 이런 사람들을 목마르게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해전술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민중운동으로 오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자신이 건설해가십니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시는 당신의 성품을 자극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긍휼히 여길만한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이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여러분,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바꿔 놓으실 수 있겠습니까? 이 시대의 교회들을 바라보시면서 복음을 떠나고 인간이 만들어놓은 천박한 진리들을 붙들고 참된 진리의 빛을 버린 죄악들을 인하여 마음 아파하시고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긍휼로 바꿔놓을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목자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간 그 백성들의 죄악이 아니라 목자를 버렸고 목자를 떠났기 때문에 고생하며 유리하고 있는 그들의 처참한 상태를 향하여 하나님을 주목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랑과 긍휼의 성품을 자극하고 움직여서 하나님의 마음에 눈물이 흘리게 할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그 거룩한 긍휼을 상기시켜 드리고 이 백성들이 하나님이 버리실 수 없는 백성들이고, 그리스도의 피로 세우신 이 조국의 교회가 순교의 피를 머금고 자라난 하나님의 사연을 많이 안고 살아온 주의 백성들이고, 주님이 긍휼히 여기시면 다시 한 번 이 민족의 교회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는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의 마음에 상기시켜 드리고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긍휼의 마음으로 바꿔 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또 다른 중보자로 하나님 앞에 나와 탄원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모세가 하나님 앞에 그 일을 자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삶과 모든 꿈과 기대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었고 그것은 바로 자기가 하나님께 매였기 때문에, 하나님께 매였던 그것 때문에 그 백성들에게 매인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또 하나의 작은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힌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생명이 붙어있는 동안에 우리의 힘으로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고 뚫어진 성벽을 메꿀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고치시고 무너진 성벽의 터를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주의 긍휼을 호소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긍휼을 호소할 때 하나님이 감동하실 수 있는,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삶을 우리들이 살아갈 때 불가능해 보이는 시대의 상황이 뒤바뀌어서 14절과 같이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이 이 세상에 내려지는 축복들을 우리들이 경험하게 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교회의 위기와 부흥의 기회 (1997.05.14. 수요예배8)
긍휼로 돌이키신 하나님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출33:15-16)
녹취자 : 허혜숙
이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은혜를 입은 자, 하나님의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경험한 사람, 또 하나님을 영적으로 만난 사람들은 반드시 그의 관심이 하나님의 관심과 일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나름대로 신앙의 체험을 많이 하고, 많은 은혜를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 이럴 수 있지 않습니까? 한 아버지 밑에 자식들이 있다고 칩시다. 그 자식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몰라도 비교적 아버지를 위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즉, 성격이 반듯하고 인생의 살아가는 이치를 잘 깨닫고 엉터리없는 행동이나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정상적인 정서와 인격을 가지고 있는 자식이 있습니다. 그가 비록 아버지의 마음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그가 만약에 아버지를 사랑하기를 원하고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기를 위해서라면 그는 비교적 아버지를 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아버지를 위해서 아버지의 분신처럼 살아가는 것, (아버지가 하고 싶어 하는 일, 아버지가 행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아버지를 대신해서 행할 수 있는,) 다시 말해서 아버지의 분신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인격적으로 모나지 않고 아버지께 잘 순종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행하려고 하는 마음도 가져야 하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아버지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깊이 아버지의 마음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이 아버지를 기쁘게 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 아니냐는 말입니다. 저의 이 말이 여러분들에게 어느 정도나 납득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자, 그럼 이해를 돕기 위해서 더 한 번 치밀한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 주위에는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들이 신세를 지거나 혹은 어려울 때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가족이나 이웃들이나 친지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주위에는 그 사람이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여러분들 마음속에서 깊은 어려움과 고통이 있을 때 말을 털어놓으면 이 고통과 어려움을 모두 이해하고 내 마음을 함께 공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만약에 있다면 그 얼마나 훌륭한 재산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능력이 많은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붙잡으시면 부수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그 사람을 통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인격이라는 것도 하나님이 그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받은 영향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아무리 신령하고 능력이 많아도 하나님의 마음이 그에게 없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주님이 바라보시고 슬퍼하시는 그 역사를 바라보고 웃고 낄낄거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이처럼 모세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의 성품을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는 위대한 능력도 주어졌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얼굴을 대면하여 말할 수 있는 친밀함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이 모세는 가족도, 두고 온 고향도 자신의 일신상의 안일도 모두 우선적인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백성이 지금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거절하느냐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시고 애굽에서 건져내신 그 계획을 이루시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이 백성을 버리시느냐 하는 문제가 최대의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 나라와 의에 대한 관심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마음의 세계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삶의 모습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에게도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거나 하나님의 교회가 힘을 잃어버릴 때 그 때 그것이 여러분들에게도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있습니까? 하나님의 교회가 고통을 받고 어려움을 당할 때 여러분들에게도 동일한 고통이 느껴집니까? 하나님의 교회가 흥왕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 주님의 이름이 드러나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때 말할 수 없는 감격과 기쁨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이것이 없으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많은 은혜를 체험했어도 아직은 영적으로는 먼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느냐 하는 삶의 방식은 머리로 생각을 하는 것이나 자기가 세워 놓은 목표를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자기의 가슴을 지배하고 있는 열정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열정이 세상에 있는 것이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면 그는 세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지배하고 있는 열정과 정서가 하나님의 마음이고 또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영적인 상태에 대한 것이고 그 나라의 건설에 관한 것이라면 그 때 비로소 그가 그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지체되고 있는가? 그것은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몸과 형식은 하나님의 백성처럼 살아가지만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모세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랬더니 이제 그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이 모세는 이제 자신의 인생, 자기가 살고 죽는 것, 심지어는 생명책에 자기의 이름이 기록되고 기록되지 않는 것, 이런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최대의 관심사는 이 백성들, 이 백성들을 통해서 이루기로 한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이 만약에 이 백성들을 버리신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로 말미암아 이방인들 가운데 모욕거리가 될 아버지의 이름의 영예는 어떻게 할 것인가? 또 그토록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나도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던 이 백성이 영토도 없고 왕도 없었지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민족과는 다른 민족이 될 수 있었던 이 유일한 기초를 하나님이 버리시면 내 사랑하는 백성은 어떻게 될 것이며 이것이 커다란 해일과 같이 이 모세의 마음속에 밀려왔던 것입니다. 생사를 건 고민거리였고 이 고민 앞에서 모세는 생사를 건 기도로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열린 교회에서 가장 많이 쓰는 동사 가운데 설교 중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만나다”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제가 여러분들이라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목사님, 나는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못 만났습니까? 3년 전에 제가 교회에 왔을 때에도 저보고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했는데 3년을 다녔는데 요새도 목사님은 하나님을 만났느냐고 설교 중에 묻고 있습니다. 목사님, 정말 주님이 만나주시기는 만나주시는 것입니까? 저는 주님을 만난 사람입니까? 못 만난 사람입니까?” 그 대답을 저한테 기대할 필요가 없이 여러분 스스로를 진단할 수 있는 한 가지 아주 정확한 시금석을 오늘 여러분들한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시금석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금속이 있습니다. 누른 빛이 납니다. 그러나 시금석이라는 돌멩이에 갈면 그 돌멩이에 쇠가 갈리면서 가루 상태가 되어서 돌에 붙습니다. 그러면 때로는 푸른빛을 띠는 금속이 가루 상태에서는 노란 빛을 띨 수가 있고 누런빛을 띄고 있는 것이 가루상태에서는 검음 빛을 띨 수가 있습니다. 분말로 된 그 상태에 있을 때가 본질적인 모습입니다. 그것이 시금석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만났다는 시금석이 무엇이냐? 여러분들이 오늘 내가 정말 주를 만났는가? 하는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주일을 잘 지키고 공 예배에 잘 빠지지 않고 나오고 있는가? 이것은 시금석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얼마나 높은 직분을 받았는가? 이것도 시금석이 되지 않습니다. 얼마나 교회를 오래 다녔는가는 더군다나 시금석이 되지 않습니다. 얼마나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했는가도 시금석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을 정말 만났고 그 영광을 뵈었고 진리 안에서 그 분의 성품을 경험했는가 안 했는가를 알 수 있는 정확한 시금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러분들의 관심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관심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는가? 아주 더 쉽게 말하면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에 대한 고민이 있습니까? 나만이 아니라 나의 이웃과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만나지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뭔가 높은 신앙의 경지에 도달한 것처럼 그렇게 형식적으로 허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거두실 것 같은 그런 위기 앞에서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안타까움과 슬픔과 번민이 있는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다시 만나야 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변화되어 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믿습니까? 신문지상에서, 혹은 동네 어귀를 지나면서 하나님을 모욕하고 주의 교훈을 비웃는 세상의 풍조를 발견할 때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는 아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교회의 영적인 상태, 죽어있는 것처럼 잠들어있는 교회의 모습들을 보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라는 마음이 듭니까? 어느 교회가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소문이 들려올 때 여러분의 마음에도 그 교회를 통해서 모욕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아파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주님의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거나 깊은 위기에 빠져들 때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아픔과 고민이 있습니까? 지체들이 실족하고 영혼들이 하나님의 곁을 떠날 때 깊은 염려와 고통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새로운 영혼들이 구원을 받고 회심하는 소식이 들려올 때 여러분들의 마음도 뛸 듯이 기쁘고 교회를 통해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 때문에 찬송을 할 마음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범죄 할 수도 있습니다. 충만한 성령의 상태를 유지하지 못할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에 있든지 이 관심사는 바뀌지 않습니다. 잠시 죄 가운데 빠지는 것 같아도 다시 기회가 있어서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 그 백성들을 통해서 그 이름이 존귀케 여김을 받으시는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이 그 백성들 가운데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고 하는 약속을 들을 때 그 사람의 마음은 다시 뛰기 시작할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여호와여 하늘을 가르고 이 땅에 강림하시옵소서. 교회 위에 임하셔서 세상 가운데 내려오셔서 당신의 이름을 빛내시고 당신을 대적하는 원수들을 불이 섶을 사르고 불이 물을 끓임과 같이 그렇게 끓게 하시고 불살라 버리시고 하나님 자신의 명예를 드러내시옵소서. 만약에 당신이 이 세상에 내려오시기 위해서 정말 길이 필요하다면 나의 육체라도 가르셔서 그 사이 길을 어느 통로라도 삼으소서 라는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눈을 들어 산을 살펴도 주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됩니까? 삶의 모습을 보면 주님의 일에 종사하는 거 같은 사람들은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이든지 아버지와 같은 마음이 된 사람-자기가 발견한 하나님의 성품, 자기가 체험한 하나님과의 만남, 그리고 자신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 자신의 그 놀라운 영광을 인식하고 그 영광에 합당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정하는 것이 이 세상에 가득하여야 된다는 신념 때문에-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선지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신분도 다르고 시대도 달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신뢰를 경험하고 소명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고 권능도 받았습니다. 그들의 관심거리는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이 부강 하는 것이 그들의 꿈이 아니었습니다.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 선지자들의 꿈이 아니었습니다. 앗수르나 바벨론의 국제정세가 어떻게 되는 것이 선지자들의 꿈이 아니었습니다. 선지자들은 한 도시를 향하여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중요한 관심은 오직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한 도시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도시가 얼마나 살기 좋은 도시가 되느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불타오르고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예루살렘에서 불붙고 있느냐? 여호와의 한 의와 여호와의 거룩한 자비가 그 도성 안에서 불붙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도시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도시 하나를 보면서 슬퍼하고 웃었습니다. 시련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마지막에는 그 도시 하나 때문에 죽어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모세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관심거리는 오직 이 백성을 주님의 족속으로 생각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이 백성들이 이 족속들이 주님의 백성이옵나이다. 그것을 상기시켜드리면서 이 모세는 자신의 전존재적인 관심을 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성령의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주님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그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주님의 마음을 본받고 모세와 같은 사람이 주님께 본받은 마음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에 대한 깊은 관심사였음을 되새기면서 여러분도 그렇게 돌아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여러분들의 신앙은 초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간혹 우리 주위에는 신앙적으로 대단히 헌신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초점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명히 인생은 주님을 위해 살기로 결심을 했는데 무엇 하나에도 쏟아 붓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헌신도 있고 지식도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이 그에게 부은바 되지 못한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초점이 없는 것이고 정함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기 적합하지 않는 삶입니다.
모세가 기도했더니 주님이 “친히 가겠다”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생사를 건 기도, 그리고 온 백성들의 거룩한 각성, 그 백성들 가운데 특별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회막에서 부르짖는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단지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이 속에서 여호와의 긍휼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기대를 걸고 소망을 걸고 있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낮아져서 하나님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부르짖고 간구하면 불가능해 보이고 하나님이 마치 우리를 내어 비린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십니다. 70년 동안 유대 민족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갔다가 돌아왔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문전 옥탑은 풀이 길같이 자라고 여우와 늑대들이 뛰어다니는 그런 세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돌아오리라고 믿어지지 않은 그런 일을 여호와께서는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가 ‘주께서 남방 포로들을 돌리실 때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을 수가 있는 일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뭡니까?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부흥이 일어날 때에는 사람들이 보기에 황당해 보이는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1900년대 초에 무디 신학교에서 있었던 기도회는 아주 유명했습니다. 황당한 기도회가 벌어졌습니다.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다섯 명의 교수들이 모여서 “하나님, 이 나라에 부흥을 주시도록”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기도했습니다. 점차 기도모임이 늘어나면서 300명 이상 모였습니다. 신기하게 하나님의 부흥의 불길이 그들이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그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으로서 편하게 되실 수 있는지를 압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의 쇄신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가 원래의 모습을 회복을 바랍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백성들이 신앙적, 도덕적으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기여하는 백성들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기도할 때 그 기도제목은 황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잠들어 있는 큰 교회의 이 백성들을 너무나 슬퍼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때에 그것을 깨닫고 가슴아파하며 몸부림 친 사람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겨우 한다는 말이 “하나님, 저 사람들이 다음 주에는 웬만하면 주일예배를 지킬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런 식으로 기도를 하겠습니까? 그것 가지고 만족이 되겠습니까? “주님,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 이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바뀌어져서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로 새롭게 소생시켜 주시옵소서, 한 명이나 두 명 말고 하나님, 싹 쓸어서 그런 일들을 행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게 됩니다. 이런 기도는 그 사람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 그런 기도를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흥은 그런 사람들에 대한 기도의 응답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편케 하리라”입니다. 이것을 보면 무슨 말씀 같습니까? 지금 하나님이 마치 당신이 내 사자를 올려 보내고 나는 안 가겠다고 해 놓고 당신이 말씀하신 것을 변경 하시면서 까지 친히 동행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누구 때문이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모세 한 사람 때문인 것처럼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세야 마음 편히 먹어라 내가 가겠다, 그래서 너를 편하게 해 주겠다” 이런 의식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놀라운 부흥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야 목사님이 시키시는 것밖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 어떤 의미에서는 맞습니다. 그러나 반만 맞습니다. 이 교회에 진정한 부흥을 위해서 저만을 사용하셔야 된다는 오류는 없습니다. 부흥을 경험하지 못한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서 모인 교회의 부흥이 일어난 역사적인 예가 있었을 것 같습니까? 당연히 있습니다. 스펄전이 정말 위대한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스펼전이 분명한 회심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시골 교회에 갔는데 세 사람이 나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젊은 청년 하나가 설교는 안 듣고 열심히 잠을 잤습니다. 찰스 스펄전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설교자가 하도 답답해서 “이보게 젊은이 눈을 들어 주 예수를 보게”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강력한 변화를 스펄전에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찾으려고 스펼전이 애를 많이 썼는데 못 찾았다고 합니다. 이름도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존 오웬도 마찬가지 경험을 했습니다. 10대 초반에서부터 그는 이미 지독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회심은 없었습니다. 공부를 한 목적은 세상에서 명예를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다가 고민이 극도로 당하던 청년 시절에 친구와 함께 유명한 설교자가 설교하는 교회에 찾아갑니다. 설교자는 출타 중이었고 별로 유명하지 않은 설교자가 올라갔습니다. 자기 친구가 “그 사람도 없는데 우리 다른 곳에 가자” 했는데 “아냐, 나 그냥 여기에서 예배드릴래”하고 예배를 드리는데 복음서를 설교하기 시작하는데 그 말씀이 오웬을 사로잡고 완전한 새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을 통해서 위대한 영적인 지도자, 위대한 영적인 사람으로서의 순례의 길을 떠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도 역시 후일 그 설교자를 찾으려고 했지만 이름도 알 길이 없었고 그 사람을 찾을 수도 없었다고 합니다. 보십시오. 스펼전보다 훨씬 못한 사람이 설교를 했는데 스펄전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를 사용하실까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를 변혁하고 교회를 바꾸는데 있어서 자신의 기도와 자신의 간구 그리고 자신의 섬김과 자신의 이 외침이, 몸부림이, 한 역사를 하나님의 권능으로 폭발시키는 뇌관이 될 수 있다는 의식이 필요합니다. 커다란 폭탄을 장작불을 붙여서 나가는 것입니까? 커다란 폭탄도 자그마한 뇌관을 건드리면 그 충격 때문에 팡 하고 터지면서 수 십 개의 건물을 초토화 시키면서 날아 갑니다. 교회와 역사를 움직이고 부흥을 이 세상에 하나님이 보내시는 도구로 사용했던 사람들, 특별히 부흥의 여명을 오게 하는 기도의 도구로 부름 받았던 사람들은 내가 기도해서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많은 사람들의 기도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부흥의 불을 붙여 주시는 뇌관과 같은 존재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따라서 모세만 기도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모세한테 친히 나타나서 “가라,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편케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모세 입장에서 보면 “주의 종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내가 이렇게 이 백성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갑니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이렇게 똑같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할 수 있습니다. 모세에게 뿐만 아니라 여호와를 앙망하기 때문에 회막에 나아가서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사람, 모두에게 동일하게 하실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한 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한다고 칩시다. 그 때 “내가 기도를 열심히 하지만 그저 조금 보탤 뿐이지” 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기도할 수 없습니다.
어느 전도사님께서 물어봤습니다. “목사님, 어떤 사람은 전도사 일을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가 되는데 어떤 사람들은 전도사 일을 하면서 신앙이 더 떨어지고 형편없는 사람이 되는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그 사역을 통해서 사람들만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당신도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교회가 부흥할 때 담임목사보다도 더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한 명의 새 신자가 오면 담임목사님이 좋아하는 것보다도 전도사님 당신이 너무너무 기뻐서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를 것 같이 신나는 마음을 갖는 목회를 해라 그러면 틀림없이 그것이 양면적인 것이니까 한 지체가 실족하고 고통을 받으면 담임목사는 멀뚱멀뚱하고 있어도 당신은 깊이 아파하면서 그를 위해 기도할 것이다, 그렇게 섬기는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마음과 뜻과 성품을 바치는 사역이라고 부르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이 당신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새로운 신자들이 와서 등록을 합니다. 또 등록을 하지는 않지만 어떤 사람들은 예배에 와서 감화를 받으면서 눈물을 닦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눈에는 여기에 와서 등록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기로 한 사람들을 향해서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떤 마음을 갖고 계십니까? “아, 또 하나 늘었네”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아픔과 사연을 안고, 대하소설을 쓸 만큼의 사연을 안고 이 교회에 온 것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여기에 서서 인사를 받고 “성도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크도다” 함께 찬송 부르던 그 순간을 여러분들은 잊어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사연과 사정을 안고 왔고, 다른 사람들은 놀다가 온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보다 혹은 여러분만큼 기막힌 사연을 안고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영적인 방황과 번민 속에서 길이 무엇인지를 찾으려고 혹은 찾았기 때문에 온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볼 때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아, 당신도 나와 같이 진리의 빛 가운데로 나아오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정하라, 뜻을 정하라, 그리고 우리 모두 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하고 당신을 이 세상에 손으로 빚으셔서 창조하신 아버지의 거룩하신 창조를 통해 이 교회 속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라고 하는 감격과 영혼을 향한 목 매이는 영혼을 향한 축복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있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지체가 실족했을 때 “아, 나 때문이야” 이런 생각을 합니까? 목사님이 매일 돌아다니더니 그것 봐 교회가 꼴이 안 되잖아 이런 생각합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역시 교회는 목사님이 지켜야 돼 그것 봐 수요일 날 안 빠지니까 비가와도 우리가 나오잖아? 그런 생각 합니까 안 합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의 생각이 그 정도 밖에 안 된다면 여러분들이 들은 설교를 하나님 앞에 반납해야 됩니다. 저는 내년이 되면 다시 돌아다닐 것입니다. 그래도 마음 든든한 교회, 어디에 살든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사는 날 동안에 겉 사람은 후패해져도 우리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지고 육신은 늙어져가고 피폐해져가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아는 지식이 날마다 새롭고 세상 적으로는 소망이 없어도 우리의 섬김으로 주 형상 닮아가는 지체들을 보며 즐거워하고 우리의 육신을 깎아서 섬기는 이 교회가 부흥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주는 교회로 변화되는 것 때문에 즐겁고 기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인생을 닳도록 사용해 달라고 오히려 호소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요즘 충격의 연속입니다. 지난주에는 아시아나 스튜어디스가 어버이 날 나한테 와서 선물을 주어 내 마음을 상하게 했습니다. 또 엊그제는 한국 교회 유명한 큰 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는 목사님이 하시는 곳인데 목회자들이 150명가량 모였는데 산골 교회에 아침을 어떻게 그렇게 잘 차려놨는지 모릅니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시편 23편에 아라크의 정찬이었습니다. 쫙 차려놓고 목사님들이 제가 오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아침에 가서 식사를 했습니다. 밥도 잘 먹고, 차도 잘 마시고, 디저트도 잘 먹었는데 목사님께서 내 마음을 상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김목사님” “네” “50은 넘으셨죠?” 제가 귀를 의심했습니다. “20은 넘으셨죠?” 그러신 건가? “네?” 하고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50은 훨씬 넘었죠?” 아, 아침 맛있게 먹었던 것이 싹 가시었습니다. 제가 “목사님, 50 조금 안 됐습니다. 40 중반쯤 됐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 말이 더 재미있습니다. “오우, 보기보다 젊으시네?” 요즘 제가 세상에 소망이 없습니다. 가난케 하십니다. 걸어 내려오면서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져야 되는데, 여러분, 우리는 이런 역사 변혁, 교회의 변혁에 뇌관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영혼들이 죽 나와서 새롭게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결심할 때 “오, 주님 저의 기도를 응답하여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합니까? 아니면 “어휴, 어쩐지 이번 주에는 김 목사가 엎드려서 오랫동안 기도하더니 몇 명 나왔네” 하나도 없는 날에는 “그것 봐,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또 나가니까 또 안 나오잖아”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것은 교만도 아니고 분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내 기도를 들어 주셔서, 하나님이 내 간구를 들어주셔서 하나님의 교회에 평안을 주시고 그렇게 간구하고 기도하는 나를 편하게 해 주시려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내주셨군요. 자,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가 고통 가운데 있고 곧 쓰러질 것 같은 어려움에 당했을 때 그리고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고 “이제는 편하게 지내라”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편안히 해 주겠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위기를 만나게 되었을 때 모세의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의 상태는 죽음을 넘나드는 것 같이 불편했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마음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징이 교회에서 사라지는 것 같고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는 표징이 조국 교회에서 잊혀 져 가는 것 같을 때 우리의 마음이 고통스럽습니까? 정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야 될 정도로 조급하고 안타깝고 어찌할 수 없이 괴로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까?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교회 변혁의 뇌관으로 사용하십니다. 모세는 그런 날을 보내왔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넘치는 위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평안과 위로는 어떤 사람들에게 경험됩니까? 주님을 위해서 불안해 본 사람, 주님을 위해서 전전긍긍해 본 사람,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노심초사 해 본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평안도 경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만나셔서 그 사람의 영혼의 지극한 평강과 말할 수 없는 위로를 주신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시인이 말한 바와 같이 고뇌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다 하였는가?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는가? 이것을 생각하고 밤새도록 괴로워한다고 시인이 그랬습니다. 마음이 상하고 중심이 고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위로를 주시고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년에 접어 든 사람들이 요즘 얼마나 불안한 직장생활을 하고 계시는 줄 아십니까? 명퇴당하면 어떡하나, 조퇴 당하면 어떡하나, 명퇴를 당하면 퇴직금은 충분히 받을 것인가? 이 젊은 나이에 뭘 하나? 남산에 가면 아침 일찍 양복을 입고 구두를 닦아 신고 할 일 없이 벤치에서 앉아 있거나 왔다 갔다 한다고 합니다. 왜? 집에서는 출근하는 것처럼 나와서 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불안해하면서 하나님을 향해서는 그렇게 불안한 마음을 가져 본 적이 있습니까? 나의 영혼은 안전한가? 나는 지금 뭔가 미혹된 길로 걸어들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뭔가 하나님의 뜻을 기다린다고 말하지만 이것이 하나님께 불순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은가? 자신의 영혼의 상태나 하나님의 교회의 상태로 인해서 고뇌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어쩔 줄 몰라 하는 심령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편하게 해 주십니다.
여러분, 믿으십시오. 여러분들도 모세와 같은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교회에 거룩한 부흥과 주님의 백성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교회의 상태를 불안해하고 아버지 앞에 매달리고 노심초사 하면서 기도하고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당신을 편하게 해 주시려고 하나님의 교회에 변화를 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못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불신앙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됩니다. 그 말을 뒤집으면 하나님의 교회에 부흥이 오지 않는 것은 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겨우 생각해 봐야 세상에서는 그렇게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역사에 있어서는 엑스트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이 자기를 위한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것 때문입니까? 주님은 지금도 역사변혁에 뇌관의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위대한 일에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네 그렇습니다. 설교자나 바라보고 있는 것이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 15절에 다시 계속해서 나옵니다. 15절에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이것은 또 무슨 소리입니까? 한 번 말했으면 됐지 올라가신다는데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친히 가리라” 어제도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합니까? “주께서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하나님께는 매우 화가 나는 반문이 아닙니까?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편케 하리라” 할렐루야 아멘, 아멘 그래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만약에 같이 안 가시려거든 우리를 올려 보재지 마옵소서.” 하나님께서 친히 가시겠다는 말씀으로 인해서 모세가 조금도 감격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같이 올라가지 않으시려면 우리를 보내지 마옵소서” 마치 하나님이 친히 가겠다고 말씀을 해 놓고도 다시 안 가실 수 있는 분인 것처럼 다시 말대답하고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렇죠?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너무 선입견에 사로잡히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매우 기분이 나쁜 믿음이 작은 자의 소치처럼 보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으십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모세는 하나님의 성품을 이미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하시는 이 약속의 말씀에 확증을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하나님이 “서약서, 모세 앞, 내가 다시 말하노니 친히 올라가리라 내가 너를 편하게 해 주리라” 하나님의 친필로 그러면서 줬는데 보더니 “주님 도장이 빠졌습니다” 하면서 들고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상하게 그것을 믿음으로 보셨습니다.
이 비슷한 이야기를 몇 주 전에 예를 들어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 일을 상기시키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자비로운 분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아십니다. 우리가 가서 “주님 자비로우십니다”. 하면 그래 내가 자비로운 여호와지? 하시는 분이 아닌데도 우리가 주님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라고 상기시켜 드리고 하나님, 우리를 위해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시옵나이다, 눈물로 기도하는 자의 간구를 차마 거절하지 못하시는 주님이시옵나이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사실 “우리는 주의 백성들 이옵나이다” “예배드리러 모였습니다” 하나님이 벌써 보시면 모르십니까? 그런데도 상기시켜 드리면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보는 것처럼 “내가 같이 가리라” 하면서 던져주니까 죽 보더니 “주님, 도장이 빠졌습니다” 하면서 다시 들고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이 뭡니까? “주여, 찍어주소서, 찍어주셔야만 되겠사옵나이다” “주여, 이것까지 찍어주시옵소서, 확증하여 주소서, 우리로 의심하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매달리면서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믿음으로 보셨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아까도 하나님이 말을 바꾸시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이번에도 아, 내가 잘못 했다 취소하겠다, 이러실까봐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모세가 이 기도 제목, 이 하나님의 응답에 대해서 얼마나 간절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지 그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내가 친히 함께 가리라” 하는 말씀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같이 가시겠다고 말씀하셨사오니 주여 이제 이 일이 주님의 일이오니 주님 자신을 여기에 묶어 주시옵소서.” 그것입니다. 도장을 찍으므로 묶이는 것 아닙니까? 제가 아무리 여러분에게 백억을 주마, 그것은 법적인 계약인데 또 그것이 법에는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 구두로 한 계약은 언제든지 취소할 수 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 그것은 그 때 헛소리였어.” 하면 끝입니다. 그래서 서명을 하고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것을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이 일은 당신의 일이옵나이다, 당신 자신의 명예와 이 백성들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 자신을 여기에 묶어주시옵소서” 다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이 일을 친히 행해 주시옵소서” 소원이 불타고 있는 것이 모세에게는 이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가서 “주여, 만일 당신이 올라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여기에서 올려 보내지 마시옵소서,” 그럼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가라고 하면 가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안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죽음을 달라는 것입니다. "올려 보내지 마시옵소서” 그 이야기는 “만약 주님이 함께 가시지 아니하시려거든 차라리 우리를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옵소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만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엇을 통해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지를 이 모세는 알았고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기 때문에 모세는 응답하시는 그 하나님의 응답 위에 하나님이 친히 지장을 찍으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증표를 보여 주시옵소서, 그 언약에 하나님 자신을 묶어 주시옵소서, 우리가 당신의 그 언약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오니 이 일을 이루어 주겠다라고 하는 또 다른 언약의 징표를 나에게 보여 주시옵소서” 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세는 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도 정말 우리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 쓰여 질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 하나님의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교회가 거룩한 공의의 불붙는 교회가 되도록 아버지 앞에 여러분들이 그렇게 기도하고 그것이 여러분들의 최대의 관심사가 되지 아니하면 우리의 인생은 허전하고 허망한 인생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함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과 더불어 우리도 살아있고 그들과 함께 죽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아버지 앞에 매달리는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응답하시고 나아가서는 그들을 편케 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 이십니다. 여러분, 여러분들도 바로 그런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으로 아버지 앞에 인정받을 수 있는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교회의 위기와 부흥의 위기(1997.5.21 수요예배 9)
하나님의 백성의 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출 33:16)
녹취자: 백지영
지난 시간에는 이 16절을 앞부분의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라는 이 모세의 질문을 가지고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미 은혜를 베푸셨는데, 함께 올라가겠다고 친히 올라가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뭔가 은총의 표징을 구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올라가겠다고 하시는데도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듯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에 대해서 분명한 보증으로 인 쳐주시기를 탄원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있는 이 모세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자의 열렬한 믿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우리가 특별한 은혜와 사랑을 입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때로는 더 특별한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어려움 속에 처했을 때는 평범한 도움이 아니라 매우 특별한 도움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또한 곤경에 처했을 때는 곤경을 능가하는 강력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야’라고 하는 막연한 마음으로 살아가지 않고 주님이 도와주시겠다고 하는 확실한 표증이 있기까지 불안해서 살 수 없다는 듯이 하나님 앞에 매어달리는 것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믿음이라고 판단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 표증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후의 스토리를 보면 표증에 대해서 이중적인 이야기를 하는데,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은총의 표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한 번 더 나아가서 ‘무엇으로 알리이까’ 할 때 하나님께서 그 앞을 지나가시는 광경을 여기 출애굽기 33장 마지막 부분에서 보여줍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부흥이라고 묘사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모세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들이어야 된다는 사실을 끈질기게 하나님께 간절히 탄원합니다. 이렇게 간절하게 하나님의 은총 입은 자들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간절히 탄원하면서 그 은총을 어디에서 구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함께하심, 거기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도 나라입니다. 나라가 이 세상에 있는 다른 나라와 구별되기 위해서는 구별된 국력이 필요합니다. 저는 직접 제가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미국에 유학을 간 어느 교수님의 이야기가 우연히 초등학교 사회교과서를 탁 펼쳤는데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책임을 느껴야 한다.” 처음서부터 단일민족, 단일국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우리와는 스케일이 처음서부터 틀린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그런 얘기를 했는데, 그런 나라가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강한 국력 때문입니다. 강한 국력, 강한 군대, 넓은 영토, 그리고 강력한 경제력, 이런 것들이 이 세상에서는 나라의 자존심이고 국민들의 자랑거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오늘 모세는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와는 다르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이 자랑하는 것으로서 자랑거리를 삼는 것이 아니고 또 그것으로서 하나님의 은총의 표증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에 꼭 필요한 것을 소유할 때 그 나라가 세상나라와 구별된다는 사실을 오늘 이 모세가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여기서 생각해야 될 것은 모세가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 이처럼 하나님이 같이 안 가겠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가 안 가고 사자를 보내겠다고 이렇게 말씀하셔서 지금 이렇게 커다란 위기가 찾아오게 된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어떤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하시면서 진노하시면서 책망하시고 또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격노를 발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주셨던 많은 은혜를 거두어 가시는 때가 언제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상 백성과 구별되기를 거절한 때 그때 바로 하나님께서 은총을 거두시고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때였습니다. 33장에서 당하고 있는 이 커다란 이스라엘 백성들의 위기도 역시 우상숭배를 통해서 이 세상에 있는 백성들과 구별되어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똑같이 이 세상 백성들과 섞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분노하시고 마음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하여튼 세상 백성들과 함께 살지만 구별된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나 가치관이나 그 다음에 생각하는 것이나 사랑하는 것이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생존의 이유가 이 세상의 백성들과는 구별된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 자신의 요구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만나서 교제하고 이야기하면서 아무런 답답함이나 갈증을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미 구별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조금도 이 세상에 사는 것이 불편하지 않거나 하나님만을 섬기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에 정말 아무런 고통이나 갈등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미 구별된 백성들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그 자체를 이 세상에 있는 많은 백성들 사이에서 떼어놓으셨습니다. 함께 있지만 구별된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따로 떼어놓은 백성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위해서 따로 세운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영광스럽고 거룩한 일들을 위해서 따로 나누어놓은 하나님의 백성들, 그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이었고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니까 마치 이 모세는 구별이 목표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그러니까 일단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 세상 백성들의 세계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별되는 일들이 일어나야 됩니다. 구별되지 아니하면 결코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세상 속에 들어가는 것도, 세상을 깊이 파고 들어가는 것도, 그렇게 구별된 백성들이 세상을 깊이 파고 들어갈 때 정말 세상이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구별되지도 못한 백성들이 세상에 깊이 파고 들어가면 함께 모여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보다 신속하고 쉽게 세상 속에서 녹아서 없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늘 사귀면서 주님의 은혜 안에 살 때는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버겁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서 떠나면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주일날까지 놀고 어떻게 사업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이 없을 때는 이런 것들이 고통이 되고 갈등이 됩니다. 직장생활하면서 술 먹고 그런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지 않는 것이 직장생활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주는가 하는 것은 굉장히 많은 사람들의 간증입니다. 그런데 구별된 삶을 살려고 하지 않으면 그런 것들이 갈등과 고통을 주지 않습니다. 그냥 섞여서 살면 되는 것입니다. 누가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 구별된 삶을 피할 수가 없다, 그것을 피하라는 것은 신앙을 버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코 그 일이 박해나 핍박이라고 생각 안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구별되는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세상에서 박해를 받거나 진리로 말미암아 오해를 받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뜻을 좇아서 걸어갈 때에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 그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모세가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구별된 백성들로 모세는 그것을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한 맛을 유지하며 살아갈 때 그때에만 행복할 수 있고 그리고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별하실 때,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백성들과는 다르게 구별된 삶을 살아가게 하시는 것, 이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구별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이 세상 사람들과 다릅니까? 죄 많은 세상에서 죄인의 몸을 빌려 죄인의 피를 받고 죄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거기에 지배를 받으며 종노릇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죄는 우리에게 오랫동안 신고 다닌 신발처럼 편안한 느낌을 줍니다. 죄 가운데 있으면서 거룩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갈등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지 않고 죄 가운데 있던 사람에게 하나님의 거룩과 구별에 대한 사상이 들어오게 되고 그것이 인생에 어두움들을 비추기 시작할 때 갈등이 시작됩니다. 반대로는 구별된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세상과 하나 되려고 하는 죄들이 들어오게 될 때 그때 갈등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완전한 죄와의 화해도 때로는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멸망하기로 작정된 사람들에게는 영적인 갈등이 거의 없습니다. 그냥 죄 가운데 즐거운 것입니다. 죄악 된 생활이 편안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결코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런 완전한 화해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별된 삶을 살아야지만 진정한 평화와 그리고 행복을 마음 깊이 느끼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모든 문제들이 오늘 모세에 의해서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은총은 하나님 앞에 구별된 백성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섞여서 살아가지만 나는 이 세상 사람들과 우리가 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 세상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살아도 나는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자각, 이런 것이 가슴에 분명하게 박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구별하시고 또 그 구별하심을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제 밤늦게 집회를 마치고 소망수양원 쪽에서 죽 오는데 굉장히 졸렸습니다. 지나가는데 교통순경이 붙잡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선생님, 신호를 위반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니, 신호등이 어디 있냐?” 그랬더니 저기 있지 않느냐고 그래서 뒤보니까 진짜 신호등이 있는 것입니다. 신호등을 못보고 그냥 지나쳐 온 것입니다. 진짜 억울했습니다. 봤으면 내가 섰을 텐데, 못 봤는데. 못 봤다고 목구멍까지 한번 봐 달라는 얘기가 여기까지 나오는데 그러면 안 된다고 내가 설교를 했지 않습니까? 정리가 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주면서 다른 얘기 안 하고 “내가 잘못했습니다.” 그랬더니 “못 보셨어도 위반은 위반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맞습니다.” 그래가지고 아주 근사한 딱지를 하나 탁 끊어가지고 왔습니다.
그런 일들을 당하면서 확실히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별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지 모릅니다. 구별된 백성들은 안목의 정욕이나 육신의 소욕대로 살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살아가는 방식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를 구별하시는 것이 우리를 세우신 하나님의 목표인 것을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과 구별되면 구별될수록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또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백성과 구별되지 않으면 구별되지 않을수록 점점 더 하나님께로부터 더 멀어져 가고 세상과 섞여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별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입니다. 종교적으로 보면 우선 그들이 행하는 종교의식을 통해서 세상 백성들과 구별될 것입니다. 동남아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람과 그리고 기독교 국가인 유럽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그들이 비록 뜻과 성품을 다해서 자기네 신들을 섬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종교가 가운데 있어서 엄청나게 다른 문화를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그런 종교적인 것도 다르겠지만 그뿐만 아니라 도덕에 있어서든지 여러 가지 삶에 있어서 매우 다른 삶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렇게 달라진 삶들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찾아서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눈에 보이는 구별된 것 그리고 정말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세상 백성들과 구별되었을 때는 그 구별된 관계가 삶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런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진정한 원동력이 어디에서 나느냐, 그것은 바로 오늘 모세가 이야기하고 있는바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서 그런 변화가 가능해 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그들을 다스려 주실 때 그때에만 그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백성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이 사람들이 우상을 만들어서 그래서 우상에게 절했습니다. 이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구약의 여호와 신앙과 구약의 이방종교의 형식과의 만남입니다. 이 우상숭배의 사건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학자들은 이것을 이교적인 개념의 우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우상의 형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호와 하나님을 이방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섬기는 방식으로 예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구별을 포기하는 행동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종교라는 형식이 있어도 이처럼 매우 쉽게 구별을 포기하고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일들이 언제든지 얼마든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러한 모든 형식 속에 근본적으로 그 형식을 움직이고 지배할 수 있는 내용을 깃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이야기는 단지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고 그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셔서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신 효과를 뚜렷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양들이 함께 모여 있다고 할지라도 목자 없이 초장에 돌아다닐 때는 자칫하면 먹이를 구하기 위해서 내려온 맹수들의 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자가 비록 모든 양을 자기의 팔 닿는 반경에 두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목자가 서서 양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양떼들의 실제적인 안전에는 현실적인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영향이 미친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에 대한 그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금이나 은같이 썩어질 것들로 하나님 백성 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 자신으로서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매우 특별히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그리고 매우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특별한 임마누엘의 은총을 보여주십니다. 특별한 함께 하심을 하나님이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간절히 알리고 싶어 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계시하시고, 또 그들이 하나님이 친히 함께 하시는 삶을 이 세상에서 살아감으로써, 이 세상에 있는 많은 민족과는 다른 어떤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그래서 그들 속에는 세상의 나라에서는 흔히 통용되지 않는 매우 독특하고 특별한 윤리가 그들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당신을 이 세상에 알리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정도만큼만 정확하게 하나님을 이 세상에 알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정도만큼만 효과적으로 여호와의 구원을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무엇을 향해서 목마른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무슨 은혜를 베풀어줄꼬?”라고 말씀하시면 여러분은 무엇을 하나님께 제일 먼저 구하겠습니까? 무엇이 하나님께서 가장 다급하게 들어주셔야 할 소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교회 나오기 전에 우연히 책을 넘기다가 오래 전에 써놓은 글귀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정말 이때는 이 마음으로 썼는데 난 정말 이렇게 살아가고 있나 그런 반성을 하게 됐습니다. 뭐라고 쓰여 있었느냐 하면,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따옴표를 열고 “하나님 저를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게 하시려고 너무 많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야 이 세상에서 아무렇게나 살면 어떻습니까? 주님, 주님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마음을 쓰시옵소서. 주님이 우리를 구별하셔서 우리를 통해 마음껏 당신을 알리시고 그리고 주님의 명예를 드높이소서.”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의 자랑은 금이나 은같이 썩어질 것들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자랑거리는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들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 우리의 자랑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자랑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셔서 누구든지 우리를 보는 자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와 그 백성들의 가장 최상의 축복입니다.
(찬양)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온다.
왜 탄식소리가 들려옵니까? 세상은 언제나 죄와 슬픔이 많은 곳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결별하고 살 수 없습니다. 지난 3일 동안도 죄 짓고 왔습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찌하든지 자신의 인생이 주님을 드러내는 인생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금보다도 귀하고 은보다도 보배로운 것, 세상의 모든 성공을 주고 바꿀 수 없는 것,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 교회 앞에 설 때마다, 그 교회에 성도들이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이 그 회중 가운데 계신 것을 예배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느낄 수 있게 되는 거룩한 예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러한 주님이 생각하시는 최상의 가치를 그 백성들도 붙들고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올바로 살아가려고 애쓰고 그리고 비교적 세상 사람들보다는 도덕적인 삶을 살면서도 왜 끊임없이 우리 자신 속에 있는 불결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고 후회하고 그리고 정결케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간절히 하나님 앞에 매어달리고 기도하고 간구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특별히 함께 해 주시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나시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다시 그들과 함께 해 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을 주시고 정말 그들 가운데 오셔서 함께 하실 표증을 보여주시고 그 후에 다시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얼마나 긴 고통과 인내를 요구하는 과정들이 있었는지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하고 두려움과 고통 속에 떨면서 자신의 죄들을 회개하고 그래도 하나님의 응답이 없자 그들은 다시 회막을 세우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은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며 마음을 낮추고 잃어버린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되찾기 위해서 그렇게 장시간 동안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자기를 투자하고 아버지 앞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넓은 구도에서 보면 이러겠다고 말씀하셨다가 이러고, 저러고 일관성이 없는 태도를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커다란 구도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이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심으로 이 33장의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화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의 재앙 중에 제일 큰 재앙은 하나님이 특별히 함께 하셔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저 일반적으로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고 종교생활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나쁜 형태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심리적으로도 본다면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뒤로 물러나거나 혹은 많이 잃어버리고 회복하고 싶어서 애를 쓰지만 돌아오는 길이 쉽지 않습니다. 그때 때로는 포기하면서 이전의 하나님의 놀라운 그 충만한 은혜로 새로워지지 못하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안하신다는 말인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나는 너희를 벌하겠다, 나는 떠나간다, 사자를 너희에게 남겨 두겠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그들 앞에 계시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음성이 들리는데, 하나님이 어디 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거기 오셔서 말씀하시잖습니까? 나는 안 간다, 그들과 함께 계시니까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사자를 보내줄게, 거기 계시니까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함께 하심이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매우 기뻐하시고 그리고 자신이 베풀 수 있는 모든 호의를 즐거운 마음으로 베푸시려고 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것을 기쁨으로 받으려고 하는 그러한 함께 함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는 반드시 커다란 능력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에 축복이 있습니다. 회복된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강력한 힘이 그 안에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주님이 창고에서 나눠주시는 부와 명예를 얻는 것은 조금 얻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며 우리와 함께 친근히 계셔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해 주실 때 그때에 겪었던 고난은 우리에게 한이 되거나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 없이 생고생을 하니까 그게 한이 되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해 보겠습니다. 죽어라 고생을 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서 고생을 하는 것은 화병으로 남는다든지 아니면 견디기 힘든 상처로 남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고생 고생한 것들이 마음에 한이 되고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상처라는 것은 있습니다. 확실히.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있으니까 그 상처가 사람들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적합한 예인지는 모르지만 예를 들자면, 애들이 둘이 있는데 어떤 애들은 개만 보면 좋아서 어쩔 줄 모릅니다. 그런데 어떤 애는 개만 보면 막 웁니다.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 앞의 그 아이는 개와 더불어 늘 뒹굴면서 놀던 추억이 있는 아이입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아이는 그런 추억은 없고 뒷집 똥개한테(내용끊김 44.44) 상처받은 사람들, 상처와 마음고생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많이 고생한 것이 관계가 있는데 그런데 성령 충만할 때 고생하면서 그게 상처로 남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신다는 위로와 은혜의 표증들이 풍성하게 나타나는 시기에 시련을 당하고 고생을 하는 것은 우리를 연단하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다 주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뭐가 중요하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 기도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해 주시옵소서.” 예배가 성공했느냐고 물을 때 그 성공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예배에 함께 하셨나요? 우리는 이제 새로운 언어로 물어봅니다. “주일날 교회 갔었어?” 그것보다는 좀 더 신앙적인 질문, “주일날 하나님께 예배드렸니?” 그것보다 좀 더 핵심을 찌르는 질문, “주일날 주님을 만나고 오셨습니까?” 그러면 단계가 높아질수록 사람들은 껍데기가 벗겨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한번 그런 질문으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어 보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먼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먼저 가지고 가야합니다. 그것도 부정적인 답을 가지고 가면 안 됩니다.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너는?” “난 못 만났다.” 확신있게. 그러면 질문을 하지를 말지, 긍정적인 대답을 가지고, “주님 만나셨습니까?” “그게 뭔데?” “월요일 날 나같이 되는 것.”
그러니까 교회는 이 한 가지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 하나님이 설교자와 함께 하시면 말씀이 풍성해 질 것이고. 하나님이 봉사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면 헌신이 넘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음을 들고 길거리를 나서는 전도자들과 함께 하시면 수많은 영혼을 부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돈 많은 사람과 함께 하시면 지갑과 통장이 회개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물질이 없고 곤고하고 고통 해 하는 성도들과 함께 하실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물질의 축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바로 그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 제가 아는 형제가 하나 있는데 “아버지 제가 뭘 좀 사야 되는데 돈 좀 주십시오.” 그러면 아버지가 돈을 주겠지요. 얼마나 지혜로운지 그렇게 이야기를 안 하고, “아버지 제가 책을 좀 살게 있는데 카드를 빌려주십시오.” 책을 산다든지 돈을 달라고 할 때에는 오십만 원을 달라겠습니까? 60만원을 달래겠습니까? “아버지 카드 좀 빌려주십시오.” “뭐하려고?” “책 좀 사려고요.” 그리고 아버지 카드 가지고 가서 70만원, 80만원 사가지고, “아버지 좀 썼습니다.” 그리고 갖다 드립니다. 카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버지 통장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교회는 영원히 어떤 의미에서 이 기도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부흥을 위한 기도라는 것도 사실은 보다 완전한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이 교회와 복음 전도와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위해 꿈꾸고 그리워하는 백성들의 삶에 함께 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 바로 그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예민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섬김 여기 하나님이 정말 함께 하고 계신가 물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정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증이 드러나고 있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더 큰 함께 하심을 그 표증들을 보여주시지 않으실까? 인생은 속히 흘러가고 이제 주님을 섬길 날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왜 우리에게는 이렇게 열매가 적은 것일까? 세월이 흘러갈수록 정말 우리는 작은 것에 만족하면서 그것으로서 스스로 위안을 삼으면서 살아가는 삶을 택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더 분명해 집니다. 보다 큰 함께 하심 그래서 질풍과 같이 노도와 같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교회에 부어주셔서 우리의 힘으로 몸부림쳐도 눈물을 흘려도 넘어뜨릴 수 없었던 이 골리앗과 같은 세상들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을 배반하던 도시마다 여호와를 알리는 깃발을 꽂는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 말고 무엇이 우리에게 필요하겠습니까? 날마다, 날마다 비록 우리가 때로는 좌절하고 넘어지지만 그러나 쇠하지 않는 이 꿈을 가슴속에 붙들고 누가 모세처럼 기도할 것입니까? 누가 여호와를 앙모하던 그 신실한 사람들이 되어서 시대를 향해 돌아앉으신 하나님의 면전으로 다가가서 하나님의 마음을 돌리고 그리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으로 얼마든지 만족해하는 이 백성들의 마음을 돌려서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줄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금이나 은은 그것과 함께 썩고 망할 세상이 취하게 버려두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임마누엘이 있는 놀라운 징표들을 우리 세대에 보아야 합니다. 이런 꿈과 소원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을 사단이 가만히 버려둘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사단에게도 주목을 받지만 이런 꿈을 안고 사람들은 하나님에게도 주목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이 시간도 지켜보시고 어두운 죄악의 수렁에서 건져내시고 그리고 더러운 세상에 발을 딛고 살면서도 식어지지 않는 불을 안고 사는 사람들을 오늘도 찾아 나서시는 것입니다.
사면을 돌아보아도 불을 가진 사람들이 없습니다. 저는 요새 저 자신을 보면서 너무 너무 마음 아파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셨고 정말 온전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어떤 일들을 하나님이 행하시는지를 보여주셨는데 나는 왜 이 모든 일들을 자꾸 과거형으로 말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가? 왜 설교할 때도 나는 자꾸 이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설교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는가? 부흥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지금 당신이 그 가운데 있지 않느냐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냐?
하나님이 오늘 이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 한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엇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고 여호와의 자녀들이 무엇으로서 여호와의 자녀 될 수 있는지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시키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만이 베드로와 요한과 같이 성전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와 같은 세상을 향하여 솔직하게 은과 금은 내게 없다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용기 있게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러나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줄 터이니 하며 그리스도를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뒤로 물러서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연약한 인생들입니다. 어떤 때는 설교자도 살려고 애를 쓸 뿐이지 아직은 도달하지 못한 삶을 설교해야 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눈앞에는 가다가 엎드려지면서 쓰러질 때 그 방향을 향하여 쓰러지는 것과 뒤로 돌아서서 달려 내려가는 것과는 하나님의 눈앞에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가슴에 불을 안고 산다는 의미는 바로 그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그리움을 간절히 사모함을 안고 그것을 찾는 사람으로서의 합당한 삶을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가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마귀는 열린교회를 주목하고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당신을 더 많이 주목하고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아니시면 주님이 함께 해 주시는 것이 아니시면 아니 우리에게 있는 것도 없지만 있는 모든 것을 가져가시고라도 주님의 함께 하심만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면 우리가 정말 그것을 원하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위기와 부흥의 기회 (1997.6.1 주일오전 10)
주의 영광을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출 33:17-18)
녹취자: 백지영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이 모세가 하나님께 표증을 보여 달라는 것 그것을 간구하는 그 기도에 대해서 우리들이 설교를 들었습니다. 요약을 하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가겠다고 다시 말씀하셨지만 모세는 표증을 구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확실한 표증은 바로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세상에 있는 백성들과는 어떻게 구별되는 백성이어야 하는지를 하나님 아버지께 상기시켜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실 때 열방의 많은 백성과 이스라엘이 구별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교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 백성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만 교회는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표증을 구하는 모세를 향해서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내용이 17절에 나오고 18절에는 다시 구체적으로 모세가 하나님께 표증을 구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간구가 실려 있습니다.
우선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해 주시고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또 우리와 함께 해 주시겠다고 하는 표증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는 이 모세의 기도에 대해서 그 일도 내가 하리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서 신앙에 대해서 철저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문제를 인하여서 하나님 앞에 매어달릴 때 근원까지 파고 들어가서 마지막에 그 모든 문제의 뿌리까지 뽑아버리려고 드는 다부지고 그리고 집착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정신과 믿음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과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면서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누리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매우 적습니다. 문제는 무엇 때문입니까? 바라는 바 소원은 있지만 그러나 끝까지 그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 앞에 떼쓰고 매달리고 결국은 하나님께 응답을 받아내고자 하는 거룩한 결단과 집념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잠시 진지하고 잠시 하나님 앞에 울부짖고 잠시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고 새로 이 모세를 중심으로 제 2의 이스라엘을 만들겠다고 하실 때 단호하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를 풀어드리고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냈습니다. 그리고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이제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둔 것만으로 만족한 것이 아니라 진노를 거두시고 그 위에 이전보다 더욱 뜨겁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고 함께 하시는 표증을 보여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남은 순간까지 이전에 하나님 앞에 지었던 이스라엘의 범죄가 모두 치유되고 치유될 뿐만 아니라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의 기름이 더 넘치게 부어져서 오히려 그 죄와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 충만하게 드러나고 아버지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은총이 더 불꽃같이 일어나도록 모세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매달렸습니다. 불굴의 투지와 불굴의 집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물론 그것은 개인의 의지와 인간적인 능력에 호소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의지한 것이 아니라 집념에 호소한 것이 아니라,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당신의 택한 자를 차마 버리시지 못하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을 알았기 때문에 그 성품을 붙들고 그는 매달렸습니다. 사태가 조금도 나아지지 아니한 것 같은 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불퇴전의 용기와 집념으로 주님의 선하신 성품을 붙들었습니다. 그분의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전심으로 매달렸습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전의 분노를 푸시고 사랑과 은총을 돌이키시겠다고 하는 이 사실을 확인함에 있어서 더 이상 보여주실 징표가 없을 때까지 그는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주님은 “그것도 내가 하리니” 응답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집념이 동반된 믿음, 그러면서도 그 집념의 기원이 사람의 집착에서 솟아나온 집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불변하며 한번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하나님의 성품이 반드시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의 행동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하는 그 확신을 붙든 것입니다. 그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집념을 가지고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모세의 마음은 인간의 결단이나 인간의 목표의식으로 불타올랐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품과 약속을 붙들며 당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거절하시지 아니하시는 여호와의 긍휼을 바라는 마음으로 불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것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제까지나 “내 힘과 결심 약하여 늘 깨어지기 쉬우니” 그 찬송이나 부르면서 우리의 의지 없음과 단호하지도 않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결단력도 없는 우유부단한 우리의 신앙생활을 합리화시키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서 선한 결심을 한번 했으면 그 결심을 붙들고 싸우는 마음으로 걸어갈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늘 한숨과 낙심을 친구로 삼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진지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모세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연약한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위대하게 만든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뒤에는 모세가 있었고 모세 뒤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뭔가 신앙생활 하면서 한번 선한 결심을 한번 하면 그러면 마음에 칼을 품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뭐라고 한번 하겠다고 그러면 가슴 속에 선한 뜻을 품고 이 선한 뜻이 하나님께로 온 것이고 그리고 내가 선한 뜻으로 붙잡고 있는 이것이 주님의 약속이고 그리고 내가 걸어가는 이 길, 내가 가야할 이 결심의 길이 정말 주님이 피할 수 없이 내게 주신 길이라면 그러면 우리는 싸우는 마음으로 불퇴전의 용기와 집념을 부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진지하고 눈물을 흘릴지라도 마음에 정함이 없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끈질긴 간구의 집념이 없는 사람들은 승리를 거두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죄도 이기지 못합니다. 잠시 휴전과 소강상태에 들어가지만 그러나 다시 약해지면 죄는 기승을 부리고 다시 종노릇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이러한 태도를 교만하다거나 혹은 불량에 넘친다거나 하나님 앞에 건방지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믿음으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의 이와 같은 태도를 아주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네가 내게 말한 그것을 그것도 내가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는 은총의 표증을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 속에서 첫 번째 교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진실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를 원하고 그리고 주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용기와 집념을 가진 사람으로 아버지 앞에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인간적인 교만과 거짓과 허위와 위선을 모두 깨트려버리고 하나님 앞에 낮아진 가운데 주님께로부터 부어진 분명한 약속과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진실한 소원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지를 깨닫게 해 주신 그 하나님의 목표와 약속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매일 매일을 승리하며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주님의 도움을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만큼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분발하고 나태와 태만에 빠지기 쉬운 우리를 쳐서 복종시키며 정결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어달리고 그리고 주의 도우심을 힘입도록 아버지 앞에 거룩한 집념을 가진 사람들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새벽기도도 한번 나와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면 한번 결심을 했으면 뭔가 하나님 앞에 이 선한 뜻을 이행하기 위해서 다른 것은 희생을 해도 좋다고 하는 결단이 지녀야 되지 않습니까?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이 치면 물결이 치는 대로 흔들리며 사는 사람들은 결코 신앙에 있어서 좋은 날을 볼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찬양)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아갑니다
다시금 기도하오니 내주여 인도하소서
“내주여 내발 붙드사 그곳에 서게 하소서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이렇게 분투하면서 살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위로에 대한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넘치는 위로에 대한 소망이 없습니다. 위로에 대한 소망이 없으니까 그 위로를 경험하고 남이 알지 못하는 진실한 기쁨으로 우리의 심령이 가득해 지는 하늘의 특별한 은혜를 우리들이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투하는 자, 믿음으로 약속을 붙들고 바람이 부는 대로 날리지 아니하고 물결이 흔드는 대로 흔들리지 아니하려고 몸부림치며 나아가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 안에서 교회를 변혁하고 역사를 움직이고 가정을 움직이는 그런 핵심적인 인물로 하나님 앞에 쓰임 받고자 한다면 그런 거룩한 집념과 약속을 붙들고 매달리는 담대한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이런 용기 있고 담대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한번 마음속에 날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동일한 기도를 반복해 볼 의향은 없습니까? “주여 나를 강하게 하시고 그리고 나로 쉽사리 환경과 상황에 굴복하지 않는 불굴의 거룩한 집념과 약속을 붙든 모세의 믿음을 주시옵소서.”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 사람을 중심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모세야 지도자니까 그렇지.”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도자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중심으로만 역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모세는 단지 지도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도자로서 뿐만 아니라 지도자이기 전에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주님이 그 사람을 중심으로 역사하실 수밖에 없는 그 주인공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의 모든 운명이 목사 한 사람에게 달려있다고 하고 목매면서 실망하고 희망을 갖고 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했습니까? 비성경적이라고 했습니까? R. A. 토레이 목사님의 글에 보면, 목사님이 부임하셨는데 교인들이 대부분이 다 별로 말씀에 특별한 저기가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몇 사람 그래도 뛰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미 만난 사람들인데 말씀을 들어보니까 한마디로 '아니올시다'입니다. 물 건너갔습니다. 설교가. 저 설교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구구단 외우다가 천국 보는 것만큼 힘들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자매들이 다섯이서 우리 교회 목사님 잘못 왔다고 떠들고 다녔더라면 교회는 시험이나 들었을 텐데 매일 지하실에 내려가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목사님을 변화시키셔서 복음의 생수를 주시옵소서." 기도하는데 서서히 목사님이 변하는 게 아니라 어느 날 강단에 올라왔는데 지난주의 그 목사님이 아닙니다. 터지면서 진리가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 다섯 자매가 예배 시간에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한없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바로 그 날이 그 교회가 새롭게 하나님 앞에 돌아오던 날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누가 신자들이 내가 기도하면 목사님이 바뀌어서 신령해 질 것이라고 믿고 그것이 자기의 분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목사가 매달려 기도해도 교인도 안변하는데 그것을 분깃이라고 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고방식이 팽배하니까 그런 일은 매우 파격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매달려 기도하던 특별한 교회에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의 약속을 붙들고 거룩한 집념을 가지고 매달리는 그런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좀 집념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불타는 집념을 가진 사람, 그러한 강한 믿음의 약속을 붙드는 그런 집념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정말 요구되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시선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사람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말씀하십니다. 이것보다도 더 파격적인 인정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래, 너는 참 똑똑하다." 이런 말씀 해 주신다고 해서 우리에게 인정이 되겠습니까? "너는 네게 은총을 많이 입은 자야." 그래서 가끔 천사들이 나타날 때 "은총을 입은 자여",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은총을 입은 자여.", 요한이라는 이름도 바로 그런 소망 속에서 만들어진 이름입니다.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자, 그러니까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이 이렇게 놀라운 것입니다. 그 은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은 자라는 것은. 더군다나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앞에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었다는 것은 그 하나님 앞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름으로도 너를 안다는 말씀은 친밀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후에 태어난 모든 선지자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특권을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누구와도 대면하여 말씀하신 적이 없었는데 모세와는 대면하여 말씀하셨습니다. 33장 20절에 보면 “나를 보고 살 자가 없다”고 했으니까 대면했다고 하지만 이 대면이라고 하는 표현 그 자체는 다른 선지자들과는 구별되는 매우 특별한 친밀함으로 하나님과 마주하도록 특권을 부여받은 영성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많이 입은 사람, 당신의 한없는 은혜를 입은 사람,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과 친밀하게 지내오고 언제나 하나님과 은밀하고 긴밀한 교제를 나누는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온 사람, 그러한 하나님과의 교통의 세계를 지닌 사람 그 사람과 더불어 일하시고 그를 역사를 움직이는 중심인물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신 것은 지도자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모든 사람들 위에 뛰어난 영적인 성품을 가지고 하나님의 예민한 인도에 민감하며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주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적인 세계를 소유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통해서 비밀스러운 당신의 일을 알리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기서 우리는 불굴의 집념과 더불어 또 한 가지 배우게 되는데 그것은 신앙생활에서 성공이라고 하는 것은 많은 일들을 이루어 놓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사랑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구원하셨지만 그 구원에 대해서 감격하는 정도는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의 특권을 주셨지만 주님을 믿게 하신 이 사실 때문에 감사하는 정도는 모든 사람들이 같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린교회에 나오지만 그러나 그 중에는 마지못해서 나오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할 수 없이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나오는 사람도 있고 감사하다 말다 하다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동일한 은혜에 대해서 느끼는 바가 다 다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실제로 모세에게 많은 사랑 이스라엘에게 실제로 많은 은혜를 주셨지만 그러나 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용하시고 모세를 사용하신 것은 주님이 주신 은혜를 깨닫는 점에 있어서도 다른 사람에 비해서 뛰어났습니다. 지극히 작은 하나님의 그런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사실은 그것이 작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감격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사건을 통해서 모세가 은총을 입은 자요 또 이름으로도 그를 아는 사람이었듯이 그렇게 오늘날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일을 위해서 쓰시려는 사람들도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한없이 깨달으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사로잡힌 존재인 것을 아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도 조금 낫습니다. 많이 낫지는 않고 조금 난데, 집회하러 가서 내려다보면 사람들이 골난 사람들 같습니다. 왜 잠자는 사람 일찍 깨어놓으면 입이 쑥 나와 가지고 눈이 게슴츠레하고 있는 것같이 그렇습니다. 골난 사람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단에 올라갔다가도 사람들 얼굴을 보면 내가 심각해집니다. 왜 그럴까? 왜 사람들은 그렇게 골난 것같이 교회생활하고 방금 누가 살짝만 건드려도 대판거리 한판 할 것 같은 표정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을까?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이 내게 주신 그 은혜, 주님이 내게 주신 사랑, 그것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알고 또 그것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하나님 앞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고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고 싶은 소원이 그를 지배하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18절에 가서는 모세가 충격적인 발을 하나님께 합니다. 그게 바로 모세가 끝까지 매달렸던 그 마지막 이유였습니다. 무얼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까?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자,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그랬는데 이것을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표징을 주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주님 자신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주님이 이제까지 나에게 약속하시고 하시겠다고 하신 그 일에 주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심으로서 보증을 하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영광, 우리는 이 주의 영광이 무엇인지 우리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웨슬리 같은 사람은 아주 재미있게 정의를 내렸습니다. 주의 영광이 무엇이냐? “주의 영광은 그것이 비치게 되면 다른 것은 모든 것은 빛을 잃고 캄캄해 져서 그것밖에 안 보이는 그것이 주의 영광이다.” 너무 어렵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주님의 영광은 주님 자신과 나누어질 수 없는 주님 자신의 임재가 가져다주는 효과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계신 그곳에는 반드시 표가 납니다.
요즘은 간단한 약이나 수술도 많이 보급이 돼서 문제가 없는데 저희 고등학교 다닐 때 같이 공부할 때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이 누구냐 하면 암냄새 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누구든지 몸에서 냄새가 납니다. 그런데 그것도 젊었을 때는 아주 향기로운 냄새가 나고 나이가 먹으면 고통스러운 냄새가 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어린애들이 노인네 냄새 싫어합니다. 그런데 그 몸에서 암냄새 같은 것 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본인은 전혀 지각을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 앉으면 완전히 폭탄 떨어진 것입니다. 주위에. 하나씩 하나씩 사람들이 이동을 합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피할까?’ 하고 들어가면 사람들이 폭탄 맞은 것처럼 또 이동을 합니다.
사람도 어디엔가 나타날 때 반드시 그 사람이 거기에 있는 어떤 효과를 발휘합니다. 이럴 때 있습니다. 저도 그런 재주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 매우 적습니다. 그러니까 학교에서 강의할 때 모든 학생들이 지쳐있는데 교수님 한 분이 들어오시면 존재 자체가 수면제입니다. 그분은 기도할 때서부터 졸립니다. 기도할 때서부터 맥이 하나도 없고 봄날이면 봄날대로 가을이면 가을대로 어쩌면 그렇게 졸린 지 말입니다. 그런데 또 어떤 분은 들어오시면 효과가 나타납니다. 벌써 얼굴에 기쁨이 흐릅니다. 그리고 모두 지쳐있을 때 한 번씩 웃음을 터트려서 사람들에게 엔도르핀이 흐르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집중하게 만들어줍니다.
거룩한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그 방에 빙긋이 웃고만 앉아만 있어도 속된 것이 그 모인 곳에 가까이 갈 수 없는 어떤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왠지 그분 앞에서는 경박하고 속된 이야기를 꺼낼 수 없는 그런 자제력을 느끼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게 바로 인간, 속속들이 썩고 부패한 인간이 조금 하나님의 성품을 닮을 때도 이런 일들이 나타나는데 하물며 지존하신 하나님이 연약한 인간들 가운데 오실 때 그때 그 하나님의 임재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분이 어떻게 하나님이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분이 사람들 가운데 계실 때 그 사람들에게 모두 지각할 수 있도록 드러내 보여주는 어떤 신적인 존재의 표증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광입니다. 찬란한 영광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자신의 형체는 그 영광에 둘러싸여서 도저히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을 뵈온 분이 없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형상이 어떠한 지를 본 사람이 없습니다. 주님을 에우고 있는 그 찬란한 영광이 우리는 그 빛이 비칠 때 우리는 단지 주님이 우리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이 모세는 그것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주님이 자기에게 지금 이렇게 이스라엘의 미래를 놓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기도하고 매어달리고 있는 자기 자신 앞에 나타나 주시는, 함께 하시는 임재의 거룩한 표증인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하나님 앞에 떼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고 진노를 은혜로 바꾸어서 다시 이전보다 더 큰 사랑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동행해 주시겠다고 하는 그 표증을 위해서 주님 자신이 내게 나타나 주시기를 아버지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부흥은 하나님 자신이 잠시 하나님 백성들 사이에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 영광이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영광이 나타나고 그 영광의 빛이 모든 것에 비출 때 그때에 그것은실로 영광스러운 것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노래 부르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기쁨도 맛보고 때로는 찬송 속에서 감동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자리에 임재해 계실 때 찬란한 영광의 빛을 찬양이 받게 될 때에 그때에 그 찬양은 마치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가락과 같습니다. 찬양이 사람의 목이 아니라 사람의 심령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고 그 찬양은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달은 사랑을 찬양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경배하게 만들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때 우리는 때때로 감화를 받고 감동을 받고 동의를 하고 혹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고 예배 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당신의 찬란한 영광을 설교 속에 비쳐주실 때 우리는 그 설교가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 태도가 얼마나 엄위로우시며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그 말씀 속에서 보여주시는 그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긍휼과 사랑에 불붙는 사랑인지를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에 의해서 압도되는 것은 수단 자체에 깃들어있는 어떤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 수단 가까이 와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아 비춰지는 영광의 빛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압도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사람들의 죄는 모두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고 사람들은 그 죄를 인해서 고통하고 아파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주님의 임재와 영광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자신이 얼마나 누추하고 더러운 존재이고 미약하고 아무것도 아닌 티끌과 같은 존재들인지를 깨닫는 거룩한 각성과 변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고 회개하는 영적인 각성이 있습니다.
오늘 이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자기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느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까? 율법을 받을 때 빽빽한 구름 가운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고 당신의 거룩한 임재를 보여주심으로 자신들에게 거룩한 법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이 얼마나 전능하고 영광스러운 분이신지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뵈올 때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님이 이미 주신 거룩한 말씀과 약속을 따라서 결심하는 신앙의 갱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충성을 새롭게 맹세하는 일들이 있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이 모세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를 구했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내게 보여 주옵소서.”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제게 약속하신 이 놀라운 은총에 회복에 대한 약속들이 진실하고 또 하나님이 친히 이 일을 이루실 것이며 이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모든 성취의 동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사랑의 회복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보여 주시옵소서 그러면서 그는 빙빙 돌거나 헛된 것들을 구하며 시간을 보내는 대신에 핵심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 아버지의 영광을 보는 것을 구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모세의 이 기도는 바로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아버지 앞에 기도해야 할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 앞에 힘을 잃어버리고 우리들이 선한 결심을 늘 갖지만 그러나 자주 실패할 때에 우리에게는 거룩한 집념과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놀라운 사랑과 인정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매일 매일 겨우 그리스도의 이름, 교회의 이름을 그 이름값을 유지하면서 살게 하는 그런 현실만족으로부터 벗어나서 오히려 하나님의 장엄한 영광을 구해서 우리를 선택하고 부르신 아버지의 뜻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불변하는 사랑과 은총 때문에 성취되고야 말리라는 표증들을 우리들은 발견하도록 아버지 앞에 힘써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 영광을 하나님 앞에 뵙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리고 이 영광을 달라고 탄원하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함으로 하나님께서는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여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고 자신도 또한 기업으로 주실 것이라고 하는 은총의 표증을 보여주심으로 잠시 죄로 말미암아 막혔던 하나님과의 관계,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표류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래에 관하여 종지부를 찍고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무엇을 위해 왜 그 길을 걸어가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는 이런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성취될 것 같지 않은 목표를 놓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그들의 영혼을 매만져주셔서 그들의 기도와 간구가 단지 허황된 기도가 아니라 내가 이렇게 민족과 교회를 위해서 중보자의 탄원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에 부흥을 부어주시고 당신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셔서 세상에 있는 헛된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보여주시고 당신의 이름이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서 어떻게 영광스럽게 드높여줄지를 보여주실 수 있는 이런 표증들을 간절히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 자신의 손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희망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모세 한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다시 거룩한 은혜를 회복시키시는 영광의 부흥을 위해 매달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을 오히려 은혜의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을 오히려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시는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난날이 문제가 아니라 오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어떠한 정신으로 어떠한 마음으로 매달리며 사느냐에 의해서 전날의 수치와 죄악이 은혜와 영광의 기회가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하면서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기를 그래서 모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산 것처럼 여러분들을 통해서 교회와 이 민족이 사는 축복들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의 위기와 부흥의 기회 (1997.6.4 수요예배11)
자신을 보이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출 33:19上)
녹취자: 조원정
우리는 장엄한 33장에 마지막 클라이맥스 부분에 와 있습니다. 모세가 간구하였습니다. 표증을 보여주시기를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그 표증도 내가 행하겠다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들이 읽은 본문의 말씀을 모세에게 하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모세가 간절히 구했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셔서 그 백성을 천하의 모든 다른 백성과 어떻게 구별하실 것인지에 대해서 확증을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당신이 모세가 말하는 표증을 보임으로써 모세에게 하나님이 밝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과 함께 동행해주셔서 가나안에 이르게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게 하실 것인지에 대해서 주님은 밝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얼핏 보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본문이 하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 본문이 우리가 읽은 본문인데 오늘 이 시간 반절을 설교를 하고 다음 이 시간에 반절을 설교 하겠습니다. 반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선한 형상을 내 앞으로 지나게 하고 또 네 앞에서 나의 이름을 반포하리니” 이 부분이 히브리어 성경 본문에 정확하게 옮긴 본문인가? 여러분 주의해서 들으십시오. 제가 성경을 설교하다가 가끔 우리말 성경 번역이 정확하지 않다고 이야기 합니다. 매번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혹시 이게 정말 페이지마다 줄마다 문제가 많아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해주시려고 하는 완전히 다른 것을 우리에게 전해주면 어떠하냐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아주 작은 차이입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하나님이 성경을 영감하셨다. 에서 영감은 번역본도 아니고 베껴 쓴 사본도 아니고 처음 저자가 쓴 원본입니다. 여러분과 같은 평신도야 그럴 수 없겠지만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반드시 원어를 해야 합니다. 어떤 때는 본문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매우 중요하고 예민하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였느냐에 따라서 히브리 성경에 본뜻을 오류는 아닐지라도 본뜻을 충분하게 전하지 못하거나 혹은 잘못 오해할 가능성이 있게끔 번역될 수 있는 가능성이 인간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바로 잡습니다.
그러나 번역된 이 성경으로도 하나님을 만나기에 충분하고 구원받기에 충분하고 하나님 앞에 가서 ‘너는 왜 내 뜻대로 못 살았니?’ 할 때 ‘하나님 저는 한글 성경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됩니까? 안 됩니다. 분명히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신약 성경 네 번째 책이 무엇이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네 번째 책이 무엇인지도 대답 못할 것입니다. ‘목사님은 한글 성경을 완전히 불신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상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선한 형상을, 한글로 옮길 때도 조그만 글씨로 썼습니다. 보역이라고 그럽니다. 보역은 히브리 성경에는 없는데 ‘아마 그럴 것이다.’ 라고 상상을 하고 넣었는데 이해를 해 달라는 뜻입니다. 평상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내가 네 앞에서 내 이름을 반포하리니”, 두 분분이 문제인데 우선 복잡한 증명과정 까지 제가 여러분들에게 해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론을 내리자면 히브리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나의 선을 너의 면전에서 지나게 할 것이며, 선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명사로 쓰였습니다. 선, 혹은 선한 것, 그 뒤에 1인칭 소유격이 붙어서 나의 선 혹은 나의 선한 것으로 번역이 됩니다. 정확하게 번역을 하자면 제 판단에는 오히려 내가 너의 면전에서 나의 선을 지나게 할 것이면 이렇게 번역을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할 것이며, 반포하다는 말에 쓰인 동사가 카라라는 동사인데 가장 많이 쓰인 단어, 오천 번 이상 쓰인 단어입니다. 용례를 보면 카라라는 말이 가장 많이 우리 성경에서 뭐라고 번역이 되었는가 하면 부르짖다. 라고 번역이 되었습니다. 부르짖다. 외치다. 혹은 격렬한 음성으로 기도할 때도 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삼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삼손이 목말라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으니까 샘을 내십니다. 그 샘이 어떻게 해서 나오는가 하면 ‘엔학고레’라고 했습니다. ‘학고레’는 똑같은 말입니다. ‘부르짖는 자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삼손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것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샘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 용례로 많이 쓰였습니다. ‘반포하다.’ 라는 용례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히브리어 성경에는 ‘in’이라는 전치사가 붙어서 “여호와의 이름 안에서 내가 부르짖으며 혹은 내가 외치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상당히 권위 있는 번역본 중 하나, 헬라어 번역본 중 하나는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관하여 외치리니” 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보았을 때에는 가장 본문에 적합한 번역이라고 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히브리 성경에서 읽으면 이렇게 됩니다. “내가 너의 면전에서 나의 선을 지나가게 할 것이며 또한 너의 면전에서 여호와의 이름에 관하여 내가 외치리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뜻은 드러났습니다. 오늘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여호와께서 선을 지나가게 하시고 이름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외치시겠다고 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반씩 나눠서 생각해 봅시다. 여호와께서 지금 뒤에 장면을 보면 모세를 바위틈에 놓고 덮으신 다음에 하나님이 지나갈 것을 말씀하시면서 네가 나의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하시면서 내 뒤를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지나가는 것은 하나님이 무엇을 지나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모세의 앞을 지나가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주시옵소서” 하고 탄원한 것은 정확하게 표현하면 하나님 자신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껏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 데리고 인도해 오면서 한량없는 영적 축복을 받던 때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도움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도움 보다 더 놀라운 것을 모세에게 보여 줄 때가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현현, 하나님의 현존,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눈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없는 영적인 존재이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모임 가운데 나타날 때는 반드시 거기에는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좌정하고 계신 놀랍고 귀한 표증들이 드러났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영광이라고 불렀습니다.
모세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주소서” 탄원했던 것은 바로 무엇인가 하니 하나님의 현존하신 놀라운 임재를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이 이스라엘 회중가운데 충만했습니다.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는 하나님 앞에서 찬양과 경배를 하였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송축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범죄 하자 무엇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났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표징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떠나셨습니까? 이스라엘이 범죄 하자 정말 떠나셨습니까? 떠나셨으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수시로 오셔서 말씀하십니까? 난 안 올라간다. 계시니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 사자를 보내겠다. 계시니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속에 간섭하시고 간혹 우리에게 말씀하셔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거두시는 사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놀라운 은총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종종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올 수도 있습니다. 하늘이 완전히 막히고 하나님이 완전히 버린 제사장 엘리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심으로써 심판을 예고하시거나 책망하시는 음성이 들리는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곁을 어떤 의미에서 떠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어떻게 우리를 버리십니까? 우리의 신앙 고백과 어긋납니다. 조금 잘못 했는데 하나님이 저리가 휙, 버립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교리와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아버지를 떠나며 주님을 향해서 물러서면 하나님이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영광을 거두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끝났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상황을 맞이한 것입니다. 이 모세가 하나님 앞에 핵심을 구한 것입니다. 주님이 내가 다시 올라가겠다. 여기서 하나님이 명백하게 말씀 안 하셨지만 내가 너희를 용서하겠다. 이런 것으로 궁극적인 해결이 안 됩니다. 완벽한 해결은 ‘내가 잘못했으나 내가 심판하지 아니할 것이며 아까는 내가 너희들보고 안 가겠다고 말했으나 이제는 내가 마음을 바꿔서 너희들과 동행하리라.’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의 백성들에게 주의 영광을 다시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의 영광은 하나님이 그 자리에 친히 임하심으로써만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교회는 잘 운영될 수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지 않고도 잘 먹고 잘살고 오래 살다가 싫증나도록 길게 살다가 평안하게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삶속에 영광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놀라운 영광, 표증, 그것이 없습니다. 모세가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한 이 기도는 정말 핵심을 찌르는 기도였습니다. 그 이상 더 하나님이 주실 것도 없고 모세가 더 이상 원할 것도 없는 기도였습니다. ‘영광을 보여주소서.’ 하는 기도 앞에 하나님께서 뭐라고 응답하시는가 하면 “나의 선을 네 앞에 내가 지나가게 할 것이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나가신 분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이런 의미를 던져줍니다. 내가 네 앞을 지나간다는 의미는 너를 향한 나의 선이 지나간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마음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다 쓸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장가 보내주신 분, 하나님은 나에게 일터를 주신 분, 하나님은 오늘 넘어졌으나 다리를 삐지 않게 보호해 주신 분, 이런 식으로 써내려간다면 정말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써도 다 못쓰다 죽을 것입니다. 한 줄로 쓰면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입니까? 구약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공경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들고 마음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공통된 찬양의 제목이 있습니다.
“주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그의 선하심은 영원 하시도다. 그 선하심과 함께 짝을 이루고 나오는 단어가 인자하심이 영원하심이로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심이로다.” 시편에 나오고 있는 흐르고 있는 대주제입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것을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누리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찬양)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누구에게 선하신 분이십니까? 모든 피조물을 향해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의 선하심을 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진실히 사랑하며 아버지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시며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하나님이 선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고 불순종하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대적하는 사라들에게 조차 거스른 사람들에게도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다만 그 선하심이 어떤 사람들은 돌이키기 위하여 고통을 맛보게 하시고 그 선하심이 어떤 사람에게는 희락과 은혜를 충만하게 부어주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에 처해 살아가든지 한 가지만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둠 속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입니다. 존 오웬은 범죄 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구체적인 과정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한다면 당신이 그렇게 잔악하게 하나님 앞에 범죄 했던 시간들이 하나님을 위해서는 마치 그 시간들이 없었으면 당신의 인생들이 빛날 수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선한 것으로 바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 선하신 하나님이 오늘 당신이 모세의 앞을 지날 것을 말씀하시면서 당신이 지나가시는 것은 곧 당신의 선이 모세 앞을 지나가는 것임을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향하여 누구이신지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감사와 감격으로 넘치는 때보다는 불평과 고통에 가득 찰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선하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제거되지 않은 죄악과 무지와 하나님께 대드는 신앙 속에서 맛봐야 하는 불만족이요 고통인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맛보는 어떠한 고통과 어려움, 쓰라림도 그것을 만들어 내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욱이 고통과 아픔을 맛보면서 그러한 고통을 안겨주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이 더욱 굳어지고 나아가서는 하나님께 대들고 싶은 심령을 마음에 간직하는 것은 더욱더 인생의 쓴 뿌리가 되고 그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파멸로 몰아가도록 그러면서 고통을 경험하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영혼을 건지시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불순종과 거스르는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이 마냥 그들로 하여금 동물적인 행복에 빠지게 내버려 둔다면 그들은 육신과 함께 영혼도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선하신 분이십니다. 바로 그 선을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대로 모세 앞을 지나가셨습니다. 모세는 다시금 이전에 보여주셨던 것에 더욱 뛰어난 찬란한 임재의 영광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는 그 영광의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도 바뀌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바뀌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의 선을 그 앞으로 지나가게 하시는 놀라운 영광을 보도록 만들어 주셨습니까? 33장에는 얼마만한 기간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분명한 사실은 하루나 이틀 만에 일어난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셨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거두셨습니다. 물론 여전히 구름기둥이 불기둥이 그들을 지키고 계셨지만 그러나 더 중요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그 찬란한 영광이 사라졌습니다.
불기둥으로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여자들과 함께 간음할 때도 불기둥은 여전히 있었습니다. 구름기둥도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이적이 있다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서 거두시지 아니하셨다는 증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두렵습니까? 이 표현대로면 신앙생활하면서 여전히 이적을 행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이 오셔서 말씀하시기도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은 여러 가지 표증들이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영광이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날 사자처럼 사파리를 누비면서 백수를 호령해야 할 그 맹수가 굴렁쇠를 넘는 이유입니다.
여러분 혹시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이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아직까지 꺼지지 않고 있는 불기둥이나 구름기둥이나 간혹 들리는 하나님의 책망의 음성이나 오늘도 변함없이 내리는 만나 같은 것을 보면서 스스로 위안하고 나는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모세와 같은 열심으로 주님이 사해주셨다고 말씀하시고 다시 그들과 함께 가겠다고 말씀하시고 다시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어도 이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표증을 내게 보여주시기 전에는 내가 물러설 수 없습니다. 하고 아버지 앞에 매달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것이 영광이 사라진 신앙생활로 만족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선이 드러나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놀라운 백성들입니까? 나는 이것을 보면서 오늘도 감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뭘 잃어버린 것이 있습니까? 범죄 했지만 하나님이 너희와 안 가겠다고 말씀하셨지만 뭘 잃어버린 게 있습니까? 누가 징계를 받고 수십 만 명이 죽었습니까? 여전합니다. 밤이면 불기둥이 타올랐습니다. 낮이면 구름기둥이 해를 가렸습니다. 떠날 때가 되면 기둥들이 움직였습니다. ‘여전히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하나님이 안 가신다고 하셨으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히 버리셨을 거야.’ 하며 새벽에 나가니까 만나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만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도 이렇게 수요 예배 와서 은혜 받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그대로 두셨습니다. 가나안 땅도 안 건드리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떠나시면 자신들은 떠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그 음성 속에서 그들은 모든 것이 그냥 남아 있지만 자기들 가운데 사라진 영광을 발견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이 회막에서 그렇게 몸부림치고 아버지 앞에 기도했던 것입니다. 마른 뼈와 같이 살아가는 일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은 오늘 이 설교가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아버지의 권능이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현존하심이 우리들 가운데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영광을 거두시면 우리에게 수많은 하나님의 은총의 표징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를 앙모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쉬지 않고 회막으로 나아가서 아버지 앞에 매달렸던 이유이고 하나님의 모든 응답을 받아 내고도 영광을 보여주시기 전에는 물러 설 수 없는 태도로 아버지 앞에 떼를 쓰듯이 매달려 모세의 간구의 이유였던 것입니다.
어떻게 사시렵니까? 하나님을 한번 만나고 우리의 본성이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받고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얼마나 바꾸어 놓는지도 경험했습니다.
(찬양)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 소리 들려 온다
주님의 영광이 떠난 형통한 이 세상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우리와 함께 할 때 우리가 어떻게 이 어두운 세상을 불타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거스른 세상 사람들을 초개와 같이 사르며 살 수 있을 것인지를 보았습니다. 그렇게 만난 후에 바뀌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신앙생활과 믿음생활 모든 것이 환경 수능형의 사람이었습니다. 가능하면 자신의 환경에 변화를 주지 않고 신앙생활 하고자 했습니다. 주일 예배 나올 상황이면 나오고 못 나올 상황이면 말고, 수요예배 나오는 것이 손해가 나면 말고 괜찮으면 나오고 마귀에게 적어도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지 않지만 그의 비위를 건드리는 것이 선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신앙생활 해왔습니다. 하나님도 기쁘게 해야 하고 마귀의 비위도 맞춰야 되니까 비굴한 속사정이야 말할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한마디로 환경에 길들여지고 마귀에게 길들여진 수능형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지고 지나가시고 주의 영광을 우리 가운데 두셨더니 그는 단숨에 야성을 회복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갇혀서 수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던져주는 비스킷이나 주워 먹고 살아가는 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외롭고 보장된 식사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유가 있었습니다. 그의 본성에 어울리는 생활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들판을 마구 달리면서 부르짖었습니다. 수많은 백수들이 그 사파리에서 자기를 피해갔습니다. 그는 기뻤습니다. 그러나 영광이 떠나자 그는 이 광야를 홀로 걸어 다니는 것이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길들여지기 시작했습니다. 힘써서 불타는 굴렁쇠를 몇 번 넘는 대가로 던져지는 한두 근의 고기를 먹으면서 배에 육질이 끼기 시작했습니다. 이빨도 그대로고 위험 있는 갈기도 그대로입니다. 울부짖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그렇게 굴렁쇠나 넘으면서 사람들에게 길들여지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으면서도 만족하며 살아가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는 아마 틀림없이 비유를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굴렁쇠를 넘으면서 자기의 털이 타지 않고 불속을 한번 넘고 나서는 두발을 모으고 기도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 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너무 감사합니다. 불 가운데를 지났으면서도 꼬리에 털 하나 타지 않게 하신 하나님 오늘도 주의 놀라운 은혜를 너무 감사합니다. 성경을 읽으니까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오 하나님 주님이 함께 하셨더니 오늘도 저에게 귀퉁이가 좀 상하긴 했지만 돼지고기 한 근이 던져졌습니다. 주 아니면 누가 나를 이렇게 대우해 줄 수 있겠습니까?’
(찬양)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사파리에서 자유를 누리며 백수의 임금으로서 영광을 한 몸에 지니면서 자유 속에 살아가고 있는 사자들은 그런 사자들을 보고 정신병자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혹시 이런 식의 자아도취적인 신앙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찬양)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보배로 속죄함 얻은 것 아니오
확실히 믿기는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금이나 은같이 썩어질 인간의 사상들과 그런 사상들로 들여다 본 성경에 대한 오해들이 우리를 삶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사자에게서 울음을 빼앗아가고 이빨은 꺾고 날카로운 이빨은 모두 갈아버렸습니다. 음악에 맞춰서 굴렁쇠나 넘어 다니는 그런 삶을 살면서 행복을 느낀다면 그는 처음부터 사자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거두시자 그것은 재앙이었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졌습니다.
오늘 이 모세가 끝까지 차마 미루어 왔던 기도 제목을 당돌하게 하나님 앞에서 내놓으면서 이 기도제목을 내 놓아서 주님이 나를 죽이시면 죽으리라.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 주시옵소서. 떠나 가버린 영광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다시 부어주시도록 아버지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영광이 우리와 함께 할 때에만 껍질뿐인 교회 생활에 거룩한 생명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마른 뼈와 같이 체면을 이기지 못해서 마지못해서 섬기던 사람의 섬김 속에 불이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말씀을 전해도 언제나 머리로 주고받던 사람의 마음속에 주의 영광이 들어가자 한마다 한마디 말은 뼈 속에서 우러나오고 살을 찢고 피를 바릅니다. 눈물을 머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세의 이 기도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필요 없는 매우 특별한 무엇을 기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의 영광을 나에게 보여주시고 주의 거룩한 임재를 이 백성들에게 다시 보여주시옵소서.’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서만 이 백성이 여호와의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영광을 거두시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처럼 살아가고 있다고 본인은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에게는 유리하고 있는 하나님 백성처럼 살기를 거부하는 불순종하는 한 마리의 양에 불과한 것입니다.
무엇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지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오늘 이 모세에게 당신 자신이 지나가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굳이 그것을 나의 선을 내가 네 앞에 보내리니 주님이 지나가시는 그 사건 자체가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알리고 싶으셨던 것은 하나의 본성이었습니다. ‘모세야 네가 내 앞에 범죄 하였고 이스라엘이 내 마음을 찢어놓았지만 내 앞에서 패역했으나 모세야 나는 너희들에게 유일한 선이다. 내가 너희를 향하여 유일한 선이라.’ 하나님은 이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여기까지 나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기까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간구해야 되지 않습니까? 환호성 치며 영광을 보고 애굽을 떠난 사람들은 수없이 많았지만 오직 믿음으로 순종한 사람들 주의 영광에 대한 그리움들을 품고 살았던 사람들만이 약속한 그 땅에 다 다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 속에서 필연적으로 추구하면서 살아야 할 그 무엇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망에 약해져 있는 여러분들을 봅니다. 어떡하든지 그러한 하나님이 주신 소망을 따라서 주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사모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회막 앞으로 광야에서 하나님과 만남을 위해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고 추구하는 간절한 몸부림으로 사는 대신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될 수 있는 어떤 이유를 찾고자 하는 정신적인 침륜을 저는 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의 그런 사악한 생각에 대해서 가슴 저며 하십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길을 걸어가다가 잠시 쓰러지는 것과 돌아서서 반대편으로 걸어가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넘어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울기도 합니다. 두려워서 주저 않기도 합니다. 주의 영광 없이 주의 백성 됨도 없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향하여 돌아갈 수 없었던 것처럼 구하고 찾던 바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압니다.
제가 언젠가 책 서문에 하나님 부흥은 우리의 몸에 흐르는 피가 식고 우리의 입안에 혀가 굳어질 때까지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애원입니다. 하고 고백했던 것도 그런 맥락이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은 이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말씀드려야 할 차례입니다.
교회의 위기와 부흥의 기회(1997.6.15 주일오후12)
은혜 줄 자에게 은혜 주시는 하나님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출 33:19下)
녹취자: 장미연
33장은 절정을 향해서 치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33장 가운데 가장 영광스러운 본문이라고 할 수 있는 주님 자신이 모세 앞을 지나가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통해서 그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며 그것이 바로 부흥을 위한 약속이었다는 사실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교회에 무엇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지를 아는 사람들은 정말 하나님 자신 이외에는 구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타난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했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았기 때문에 인간의 인간됨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분수를 알았습니다. 자신의 본분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지만 삶의 진실한 목적이 성취될 수 있는지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주님 자신을 구하는 사람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 같이 그런 목마름으로 하나님 자신을 찾고 또 찾는 사람들을 오늘도 기다리십니다. 부흥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부흥을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 자신을 찾는 사람입니다.
어제도 로이드존스의 책을 읽다가 그 목사님이 테이프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도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송두리째 보여줍니다. 기도의 한계는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신앙의 한계이고 곧 존재의 한계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여러분 이렇게 유창하게 설교하는 것이 언제나 기도하는 것 보다 쉽습니다.” 하나님이 제 영혼을 깨우신 다음에 많은 사람들을 제 설교를 통해서 깨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거의 한 번쯤은 ‘내가 일평생 부흥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겠다.’ 그런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 기도를 지속하고 있는 사람들은 정말 극소수에 불과 합니다. 왜 그렇게 기도를 지속하기 힘듭니까? 그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마음이 하나님 자신을 구하는 마음을 유지하고 다른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그 자신대문에 만족하는 마음이 유지되지 않는 한 부흥을 구하면서 사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영성과 영육에 대해서 여러모로 이야기 하지만 그러나 단 한 가지 그가 매일 열렬한 영으로 타는 것 같은 마음으로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를 그렇게 간절히 기도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개인적인 부흥의 불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주기도문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는 것 같아도 그는 결코 이 세상에서 빛이 되기 위해서 별도로 노력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는 이미 존재 자체가 빛입니다. 그는 결코 어둠과 합할 수 없습니다. 어둠속에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아주 특이한 말씀을 하심으로써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하는 이 모세의 끈질긴 간구에 마지막으로 응답하시는 말씀을 정리하십니다.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이 말씀이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께서 이 전체적인 맥락에 대해서 마지막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뒤에 구체적으로 당신이 어떻게 그 영광을 보여주실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만 실질적으로는 이 말씀이 표징을 구하는 모세를 향한 마지막 말씀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갑자기 당연한 말씀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하는 말씀을 반복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단지 하나님의 일반적인 성품을 상기시키는 것만은 아닙니다. 물론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분명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즐겨 행하시는 일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모세에게 하시는 이 말씀은 지금 모세와 하나님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주소서” 할 때 주님께서는 “내가 이 일도 행하리니” 하시면서 “이제 내가 나의 선함을 네 앞에 지나가게 하고 네 앞에서 내 이름을 외치리라” 말씀 하셨습니다. 이 일은 분명히 모세에게 있어서는 표징을 구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하나님 자신을 모세 앞에 지나가게 하셔서 모세로 하여금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었던 임재의 놀라운 영광을 맛보도록 만들어주신 이 응답은 모세에게 있어서 정말 특이하고 놀라운 응답이었음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는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영광을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을 지나가게 하심으로써 마치 하나님이 모세 앞에 자신을 지나가게 하심으로써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의 언약을 인 치시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장면에서 쪼갠 고기 사이를 불길로 지나시던 하나님의 임재를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걸어서 맹세하신 방법이었습니다. 마치 그와 같이 표징을 구하는 모세, 주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하나님 자신을 구하는 모세에게 “내가 그 앞을 지나가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제 당신의 찬란한 영광을 모세에게 보여주시고 또 앞서서 하나님께서 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회복의 약속을 인 쳐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러한 하나님의 응답은 모세에게 있어서 놀라운 감격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 보다 더 커다란 것을 하나님은 주실 수가 없습니다. “내가 너로 내가 하는 말을 믿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돌이킨 내 마음이 진실하다는 사실을 너에게 확인시키기 위하여 내 자신이 네 앞에 지나가리라고 한 이 말씀을 주셨으니 모세가 이것보다 더 커다란 응답의 표징, 영광의 표징을 어디서 구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모세는 틀림없이 엄청난 감격 그리고 잠시 후에 뵙게 될 하나님 아버지의 그 찬란한 영광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 속에 떨었을 것입니다. 감격해 있는 모세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품을 상기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히 여겨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상기시키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평범하게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은혜주시기를 기뻐하시고 곤란에 처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성품, 그 이상의 것을 만나게 됩니다. 이 말씀은 일반적인 하나님의 성품을 상기시킨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놓인 이 상황을 향해 일차적으로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은혜주시고 싶은 자에게 은혜 주시는 것을 누구도 막을 수 없음을 압니다. 그 분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려고 마음을 먹으면 누구도 그 긍휼을 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서 나타나는 은혜와 긍휼은 부흥과 관련한 하나님의 은혜요, 부흥과 관련한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바로 모세를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가운데 지나가시는 찬란한 표징을 보여주실 것이었지만 그러나 이것은 모세 앞에서 지나가도록 작정된 표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은혜, 긍휼 이 대상은 당연히 모세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그 앞에 지나가게 하시고 당신 자신의 이름을 모세 앞에서 외치시는 이 놀라운 사건, 약속을 바라보면서 두려움과 기대로 떨고 있는 모세를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으로 그에게 성품을 상기시켜주는 것입니다. “모세야, 나는 은혜를 줄 사람에게 은혜를 주노라. ‘내가 내 영광을 네게 보여주겠다.’라고 한 이 약속에 대해서 네가 이것이 참으로 크고 놀라운 은혜인줄 감격하고 있지? 그러나 너는 자격 있다. 나는 은혜를 줄 사람에게 은혜를 준다. 그리고 모세야, 나는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러면서 마치 인간과의 논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뒤로 밀리시는 것처럼 자신의 뜻을 돌이키는 이 모든 전 과정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성경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은혜와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고자 하실 때 그 사이를 막아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도 한편으로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염려하면서 백성들을 사해주시도록 아버지 앞에 자기의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을 걸고 하나님 앞에 모세가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지켜보셨습니다. 회막을 만들어 놓고 어찌하든지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영적인 상황에 심각함을 깨닫게 하여서 어찌하든지 세상에 진으로부터 떠나 나와서 진밖에 마련된 회막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매달리도록 만들어주려고 애쓰는 하나님께 반역한 위기 상황에서 몸부림치는 모세의 마음과 모든 섬김을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세의 모습을 불쌍히 보셨습니다. 모세의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이 되었던 것입니다. 금이나 은같이 썩어질 것들이 아니라 잠시 있다가 사라질 가문의 명예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 빼낸바 된 그 백성들을 통해 더럽혀질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명예 때문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바로 알지 못해서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도 돌이킬 줄 모르는 많은 백성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아파하는 백성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죄송해하는 모세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 받으시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불쌍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남다른 은혜가 필요함을 아셨습니다. 남다른 긍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실 때 우리는 무슨 이유 때문에 하나님 앞에 불쌍하다고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온전하고 똑똑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만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향락의 노예가 되거나 물질의 노예가 되고 세상살이에 노예가 되어서 돌이킬 줄 모르고 살아가는 불쌍한 인생들, 더욱이 그들이 하나님 앞에 참회하고 고통 하는 마음으로 나아올 때 하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예화) 어제 책을 읽다 보니까 웨스턴 웨스트 예배당에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설교하시기 전에 늘 목회 기도를 하시는데 딱 한 사람이 옛날에 교회를 다니다가 그만 둔 사람입니다. 너무 사는 게 괴로워서 “이제는 죽어야 되겠다.” 그러고 ‘템스 강 보다 더 죽기 더 좋은 곳이 없겠다.’ 그러면서 뛰어내리려고 하는데 ‘쾅!’ 하고 어떤 음성이 들리는 거 같더랍니다. 뭐냐면 “오늘 주일 밤이 아니냐? 그러니까 가서 저녁 예배라도 드리고 죽자.”그리고 맘이 변해서 저녁 예배를 드리러 교회당을 올라오는데 마이크에 대고 기도하시는 음성이 그 계단 아래까지 들린 것입니다. 교회당을 들어서서 올라가는데 “주님께서는 미끄러지는 자를 붙드시오며” 기도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교회당에 올라오기도 전에 완전히 기도 속에 깃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뒤집어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인생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반역하던 인생을 죽음으로 청산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긍휼히 여기시고 붙드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밖에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온전하게 살지 못해도 하나님 밖에는 소망이 없고 주님 앞에 나오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문제와 관련해서 보면 모세는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불행해져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불쌍히 여김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그리고 하나님 사이에서 중보자로 죽은 자와 같이 범죄하고 하나님 앞에 진노아래 놓여있는 이 백성을 향해서 한편으로는 죄에 대해서 끌어 오르는 하나님의 거룩한 마음 또 한쪽으로는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용서를 구할 수밖에 없는 죄인들의 마음이 모세의 한 인격 속에 함께 깃들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갈등하고 고통하며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모세 이야기를 듣고 단장품을 제했다고 했는데 마음이 가난해졌겠지요. 모세의 이야기를 듣고 그 백성들이 그 정도 되었을 때에야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건지시려고 갈대 상자에 나일 강가로 떠내려가는 자기를 살리시고 그 유모 밑에서 자라게 하셔서 이렇게 하나님이 긴 세월 40여년이 넘고 이제 광야에서 앞으로 40여년을 지낼 텐데 이 긴 세월동안을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소명을 맡겨주신 이유는 이스라엘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없었으면 그에게는 소명도 없었을 것이고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을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백성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다고 생각했을 때 모세의 괴로움은 말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 괴로움과 슬픔, 하나님께서 보셨을 때 불쌍히 여기실 수밖에 없는 그 형편은 자기의 명예나 자기의 소유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보실 때 불쌍히 여겨 주실만한 사람들이 되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흘리는 눈물과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 기도하고 죽어가는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서 아버지 앞에 그들의 심령을 대신해서 통회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긍휼히 여기실만한 그러한 모습이 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화) 언젠가 전도사로 교회 봉사를 하고 있을 때입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선생 한 사람이 골목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그러고 있느냐?” 어린 아이가 교회를 안 나오는데 심방을 와도 만날 수가 없어서 문에서 밤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겁니다. 가슴이 뭉클하면서 눈물이 나옵니다. 사람도 그러한데 우리는 우리가 지체들을 향한 사랑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사시기 위해서 당신의 몸을 찢으시고 피 흘리셨습니다. 그 피로 사신 그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피로 사시고 그 보혈로 구속하신 백성을 위하여 자신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범죄, 자기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진정한 샬롬, 자신의 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음 안에서 부요해지는 것 때문에 안타까워하고 눈물을 흘리고 그들의 영혼의 핍절한 것이 자기의 핍절한 것으로 느껴지며 안타까워하고 눈물 흘리는 모세와 같은 중보의 사람들을 만날 때 하나님의 마음은 슬픕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주님이 긍휼히 여겨주시는 그 은혜가 누구에게보다도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역사를 보거나 우리의 경험을 보면 하나님 앞에 우리는 능력을 많이 구하고 은혜를 구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와 능력을 주시면 우리는 편안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혜와 능력을 부어주신 사람들은 하나님이 가만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바울처럼 쓰시고 베드로처럼 거꾸로 달아 죽게 만드십니다. 남김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소진하면서 살도록 만드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체험적으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부흥의 한 가운데 서서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기를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몸부림치고 자기의 죄도 아닌 남의 죄를 짊어지고 안타까워하고 남들은 춤추고 노래하고 먹고 마시는 시간에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비탄하고 괴로운 시간들을 보내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하나님의 백성들 위해서 그 백성들의 생명을 위해서 몸부림치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용하게도 그 긴장과 고통스러운 과정들을 이기면서 견딜 수 있었던 진정한 힘은 단지 성령의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순간, 순간 이렇게 하나님 앞에 바쳐진 사람들에게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을 경험하는 위로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중보자적인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모세는 하나님 앞에 넘치는 고난을 받으며 오직 이 백성들 하나를 하나님 앞에 살게 하려고 모세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백성들의 범죄 한 그 앞에서 그것이 자기의 죄인 것처럼 몸부림치며 하나님 앞에 주님 자신의 얼굴을 구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가나안땅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도 백성들과 함께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착하면서 “하나님 자신의 은혜가 아니면 소용이 없다.” 라고 하는 확고한 믿음을 보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문제의 실체를 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들과 동행해주시고 자신들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백성과 구별시켜 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 됨을 드러내 보여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 됨을 드러내 보여주시라는 것이 라는 사실을 그들은 깊이 깨닫고 믿고 또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지 가나안 땅에 주인이 바뀌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내신 것은 모든 백성들이 모여 사는 문명된 세계 한 가운데 이스라엘을 보내셔서 그들로 이방의 찬란한 빛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리로 보내시고자 하신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들과 동행하지 아니하신다면 그들은 이방인 가운데 있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모세는 이러한 사실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백성들도 모세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전심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을 구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는 중보자가 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우리들이 길러야 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는데 있어서 유능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받는데 있어서 유능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사람의 기도만이 하나님의 의중을 꽤 뚫는 기도로 아버지를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예화) 1907년에 평양에 대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벌써 1903년에 조그만 집회들을 했더니 거기에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거기서 큰 은혜를 3년, 4년에 받고 사람들은 거의 미친 사람처럼 되어버렸습니다. 평양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원산의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통곡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을 하나님 어찌 합니까?’ 모여서 기도회를 하면 동네사람들이 초상이 난 줄 알고 와서 기웃거릴 정도로 심한 곡소리가 들렸습니다. 이게 바로 그 당시에 거의 죽어있는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부어지니까 하나님의 마음으로 몸부림하며 기도하게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서 받는 것과는 똑같이 않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고난을 많이 받는 것 같으나 하나님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 섬기려고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저 먹고 살려고 사는 것이라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있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주님의 명예를 위해서 일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판단하실 때는 다 저 좋다고 하는 일로 하나님이 그렇게 인정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아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하는 모든 의도가 투명해서 나의 기도가 성취되면 반드시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나의 사랑하는 하나님의 그 백성들이 영광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분명한 검증들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도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세상, 자신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혼의 상태 그것을 바라보면서 아파하고 슬퍼하는 그러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주의 은혜의 소망을 걸고 매달리는 사람들, 그 사람들 편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당신의 마음을 더욱 부어주셔서 당신을 대신해서 기도하게 하시고 또 당신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매어 달리도록 만들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모세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자 하셨는데 모세가 바로 그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실 때 긍휼히 여겨야 되겠다고 결심 하시리 만치 모세는 하나님 앞에 가련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당신의 백성들은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스스로 불쌍히 여길 수도 없는 그때 모세는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과 결탁되었고 자신의 부르심이 하나님의 은혜와 결탁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꿈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 백성에게 묻었습니다. 그 백성들이 곤고할 때 모세는 함께 곤고했었습니다. 그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진노의 불길 아래 놓였을 때 모세는 자기가 그 불 앞에 놓인 것 같이 두려워 떨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했습니다. 그렇게 살아오는 동안에 모세는 휴식이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표정을 보면서 매일 긴장하고 언제 어떻게 범죄하고 하나님을 원망할지 모르는 이 철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안타까워했습니다. 그것은 모세에게 있어서 너무나 버거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한때 “하나님 내가 이들에게 젖을 먹이는 유모이옵나이까. 어찌하여 이 백성들을 종에게 다 맡기시나이까. 이제 내가 내 생명이 족하였으니 나를 취하시옵소서.”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모세는 힘의 진한 부담을 지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새롭게 살리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소생의 은혜를 기대하면서 아버지 앞에 기도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위에 뛰어난 영광을 모세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꿈과 묵시로 말하였습니다.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였으니 나는 그와 대면하여 말하였노라”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왜 모든 선지자들 위에 뛰어난 특권을 주셔서 하나님과 대면하게 하시고 친구가 친구의 얼굴을 보고 이야기함 같이 그렇게 모세가 하나님을 향하여 대면하여 말할 수 있는 놀라운 교통의 특권을 주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오직 하나님 주님의 집에 온전히 충성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모세로서는 하나님 앞에 최고의 충성을 바치는 길이 바로 이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시키시고 죽어가는 이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의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어 주셔서 살려주시는 것만이 그 일을 위해서 자신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화해의 제물로 바치며 아버지 앞에 매달리는 것만이 모세가 그토록 사랑하고 일평생 충성하며 섬기고 싶었던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최고의 헌신이었습니다. 꿈도 희망도 모든 생각도 미래도 오직 하나님 앞에 묻었습니다. 생명이 붙어있는 날 동안 소망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이 백성들이 하나님이 함께 해주실 수 있는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이 백성과 함께 하셔서 그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백성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어서 이 세상에 있는 열방의 모든 민족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줄 수 있는 백성들이 될 수만 있다면 그는 모든 것을 양보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인생을 마감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입니다. 어떠한 사람은 사고로도 죽고 자연의 수명을 다하다가 병이 들려 죽기도 합니다. 불의의 사고로 절명하기도 합니다. 죽는 방법이 여러 가지인 것처럼 사는 방법도 여러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은 여러분들은 이 출애굽기 설교를 들으면서 누구처럼 살고 싶으십니까? 어떤 사람처럼 살다가 죽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의 진노의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여전히 회막으로 나아가지도 않고 진중에 뒹구는 그러한 짐승에 가까운 삶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사라진 은혜와 영광을 구하며 모세의 뒤를 따라 회막으로 들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 중 하나님을 진심으로 앙모하던 그 백성들처럼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오늘 이 모세와 같이 이렇게 하나님의 많은 백성들을 한 품에 감아 안고 자신의 생명과 자신의 모든 꿈을 거기에 묻고 이 백성들을 고쳐주시고 아버지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서 매달리다가 주의 영광을 본 모세와 같은 삶을 사시렵니까? 우리는 어찌하든지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고 어떤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서 얼마나 많은 만족을 누렸든지 간에 우리의 인생이 모두 끝날 때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하나님의 평가는 오직 하나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이제는 내가 너에게 많은 것으로 맡기리라. 나와 함께 즐거움에 참여하자.” 이런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야지만 그 인생이 하나님 앞에 의미 있는 인생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주님이 보실 때 은혜를 베푸실 자, 주님이 보실 때 하나님의 위한 슬픔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 그 슬픔이 세상으로 비롯된 것이니 세상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있다가 사라질 것들 때문에 생겨난 슬픔은 있다가 사라질 것들을 소유하면 그 슬픔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비롯된 슬픔은 하나님 자신 이외에는 참된 위로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마음이 상함은 하나님 자신이 치료해주실 수뿐이 없습니다. 모세의 슬픔, 모세의 마음, 은혜가 필요한 모세의 상태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모세의 마음의 상태가 그러하였습니다. 그의 슬픔은 하늘로부터 왔습니다. 그 백성들을 향해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는 그 안타까움은 땅의 있는 어떤 것들을 대가로 얻기 위해서 간직한 슬픔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 사랑의 매인바 되었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는 내 백성을 향한 눈물이었습니다. 그를 울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로 몸부림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울게 하셨는데 누가 그를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제외해놓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백성들을 위해 몸부림치는 중보자, 한 사람 모세를 통해서 진멸 받아야할 그 백성들을 향해 진노를 푸시고 다시 그 백성들을 일으켜 세우셔서 결국은 가나안을 유업으로 차지하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이게 바로 성경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잊지 못하고 모세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 없는 이유였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모세와 같이 지금 당장은 이런 수준 높은 중보의 삶을 살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곳에서 분명히 깨닫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을 향해서 충성스러운 사람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을 은혜를 주시고 또 이런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들의 위로가 하나님께 있음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시간도 범사에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삶을 살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희망을 걸고 아버지께 호소하는 이 기도를 그치지지 않는 중보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 받은 자의 거룩한 의무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출 33:20-34:1)
녹취자: 김정규
33장을 시작한 지가 오늘로써 아마 14주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이제 저는 이 시리즈를 맺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기억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듣고는 그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단지 듣기만 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가는 자들이 되도록 우리는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모세의 기도를 들어주시겠다고 확답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당신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시면서 덧붙인 말씀이 “나는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기를 모세가 주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지만, 그 엄청난 기도의 제목들을 하나님이 들어 응답해 주신 것은 단지 모세의 믿음이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한 성품이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 하나님이 스스로 움직이신 당신 자신의 성품은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모든 우는 사람의 고통이 꼭 같은 무게와 깊이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매 맞고 고통 받는 사람들도 하나님은 아파하면서 고통하고 눈물 흘리고 회개하면 주님은 그들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신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들 그리고,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앙망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충성이 가져다준 중보자적인 슬픔, 이런 것들로 하나님 앞에 주님 자신의 이름과 그의 택한바 된 백성들의 신앙의 상태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호소하기 위해서 슬퍼진 사람들,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매우 긍휼히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자신의 죄악이나 혹은 자신의 허물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아파하는 단계를 뛰어 넘어서 성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서 이제는 신령한 슬픔으로 하나님의 연민을 살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지만 그 사람들이 바로 교회를 움직이고 역사를 움직이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도 긍휼히 여기신다는 말에 한 반복이 됩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그 백성들과 함께 이제는 위기에 놓인 자신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한탄하며 아버지 하나님 앞에 매달렸을 때, 주님은 그 불같이 솟아오르던 진노를 불을 끄시고 그 진노가 은혜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이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실 뿐만 아니라 자비하시고 인자하신 분이십니다. 할 수만 있으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하고 당신의 선하신 성품을 따라서 기쁨 속에서 하나님의 날개 아래서 살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분노하시고 때로는 진노하시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노라면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 지라도 아침에는 다시 기쁨이 오는 것이 신앙생활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이런 위로를 주시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와 아버지의 영예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고, 어려움이 많이 닥쳐도 그 나름대로 그렇게 하나님 앞에 헌신되지 않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넘치는 위로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그런 사람들답게 살아갈 수가 있었다는 말씀을 지난주에 드렸습니다.
오늘 이제 드디어 장면이 하나님이 진짜로 지나가시는 장면을 하나님이 생생하게 약속으로 보여주십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실제로 지나가셨다는 이야기는 없지만, 이 약속이 주어지고 오래지 않아서 하나님이 그 약속을 이루셨을 것입니다. 표징을 보여주시고 정말 하나님의 임재가 그 어느 때보다도 경험하지 못했던 그 찬란한 임재의 영광이 모세의 앞을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모세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새롭게 알게 되었고, 과연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진노의 불을 끄시고 이제는 완전히 그 백성들을 사하셔서 원래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가지고 계시던 그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기대를 따라서 그 백성들과 동행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증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20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나오는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지나가시겠다고 하는 사실에서 구체적인 메시지를 찾아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하나하나 설명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중요한 것은 그 모세가 구했던 표징,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시겠다고 약속한 표징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모세에게 임재 하셨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렸던 기도가 재현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렸던 기도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이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이방 백성들과 구별된 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심으로 이 백성들을 천하만민족속과 구별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백성의 백성 됨이 하나님이 친히 그 백성들에게 함께 해주시는 것임을 하나님 앞에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시켜달라는 탄원이었습니다. 민족을 향해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시키시는 가장 뚜렷한 증거가 하나님 자신이 그들과 함께 해주시는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세는 개인적으로도 자기와 특별히 함께 해주시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자기와 동행하신 그러한 표징이 바로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와 특별한 선택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하는 원리를 개인적으로 그대로 가져갔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이 모세는 표징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의 영광을 내게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과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보여주시옵소서라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 자신이 이전에도 나와 함께 하셨지만 이전에 나와 함께 하셨던 임재와는 비교되지도 않는 그러한 더 크고 더 놀라운 영광으로 나와 함께하시고 또 내 곁에 계신다는 사실을 확증해 보여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이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부흥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마치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오셔서 많은 장소 가운데 특별히 그 장소를 찾으신 것 같은 영광을 보여주시는 것이 부흥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어디에든지 계십니다. 지금 다들 수요예배를 드리고 있을 텐데 하나님이 어느 교회에 계시겠습니까? 어느 교회에 계시겠습니까? 어려운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누구도 하나님이 지켜보시는 그 시야를 벗어날 수 없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그 통치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느 수요일 모든 교회가 예배드리고 있어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와 주시는 정도는 다 같지 않습니다. 어느 곳에는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하나님께 사랑하는 성도들이 예배드릴 때 그 예배가 평상시에 드렸던 예배와는 뛰어나게 다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난주 수요일 예배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드렸는데 오늘은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다고 하는 그런 놀라운 확증을 보여주시는 때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성령의 역사와 함께 나타납니다. 진리를 통해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와 함께 나타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임재하실 때 평상시에는 발견할 수 없는 하나님이 거기 계시는 놀라운 징표들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임재해 계실 때 나타나는 독특한 표징들이 성령으로 역사하여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그들 앞에 지나가실 때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깨닫고 그 성품 앞에서 그 거룩하심을 느낍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악들을 보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자기의 비참하고 더러운 모습을 보며 참회하고 하나님 앞에 뉘우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모임 가운데 오실 때 이전에 종교적이고 단조롭던 모든 일이 갑자기 커다란 의미를 가진 사건들로 엄청나게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전에 장난처럼 드리던 그 예배가 그렇게 심각하고 의미 있는 일인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당신의 사랑과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땅에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늘의 신령의 기쁨들을 맛보게 하십니다. 교만하던 많은 사람들은 그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자기가 얼마나 지푸라기와 같은 존재인지를 깨달으면서 그들은 두려움과 함께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살아야겠다는 거룩한 공경심이 사람들 속에 솟아나는 것입니다. 갑자기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이 예배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어마어마한 사건으로 다가오기 시작하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찬양 속에서 자신의 온 영혼이 하나님께로 빨려 올라가는 것 같은 감격과 영적인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예배에는 눈물이 있고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그리고 헌신을 맹신하는 거룩한 결단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거기에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에 어울리지 않게 살아가고 주님이 창조하신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거룩한 뜻을 따라서 이어가지 않는 이 세상의 현실들을 보면서 아파하는 아픔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개발했거나 누구에게 배웠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완전하고 순전한지를 보았기 때문에 그러한 마음속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삶으로써 외연적으로 뻗쳐나가서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이 자기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세상이 되기를 그리워하는데서 비롯되는 그러한 갈망인 것입니다.
부흥에 대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면서 지나가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많이 설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수백 번을 들었다 보는 것보다 한번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 앞을 지나는 그런 놀라운 영광을 경험하는 것이 훨씬 나은 것입니다. 인간이 쌓아올린 지혜와 사람이 공부한 신학과 자기가 알고 있는 성경에 대한 지식과 자기가 이제껏 배운 그 모든 기독교 사상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찬란한 빛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도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 앞을 지나갈 때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은 부흥을 경험하고서야 비로소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그 창조주 되신 그 위대한 광대함과 그 앞에서 얼마나 초라한 미물이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섬기고 주님만을 높이면서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처지에 있는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감격스러운 위치에 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으로 봄으로써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진실로 이 땅에 속한 이 주먹만 한 인간들이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을 뵙기 전에는 자기가 누구인지 분수를 알 수 없습니다. 자기를 낮추려고 애를 쓰고 애를 쓰지만 그것은 애쓸 뿐이지 진정으로 자기가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되어서 그 영광의 빛 앞에서 자기가 한갓 지푸라기와 같은 피조물이고 티끌과 같은 피조물이라는 사실들을 깨달아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뵘으로써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의지하고 나를 위해서 내 이름의 높아짐을 위해서만 사는 것이 힘쓰고 애쓰는 절제 때문 억제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습니다. 성경 속에서 부흥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겠다고 하는 그 거룩한 소명이 가슴에 새겨졌습니다. 그래서 숙명과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사도바울을 보면 그런 것이 잘 나오지 않습니까?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지난주일 오후에 무슨 설교를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도다’ 왜 다른 사람은 못 느끼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뜨겁게 강권하셔서 정신이 온전하여도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고 미쳤어도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고, 그 사랑하는 성도들을 위한 것이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게 했던 남들에게는 없는 그런 어떤 강한 숙명과 같은 어떤 붙들림, 그것은 어디서 비롯된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의 모습입니다. 가슴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저도 그것이 어디 출처인지 원전을 확인을 못했는데, 어느 책에선가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톨릭의 신학 체계를 완성한 분이었다고 할 수 있는 『신학대전』을 쓴 토마스 아퀴나스 얘기입니다. 그가 그 대전을 다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 완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는 그 신학대전을 완성하지 못한 이유가 어느 날 하나님의 큰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개인적으로 부흥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고백하기를 내가 하나님을 영광을 본 이후로는 더 글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껏 내가 하나님에 관해서 써놓은 모든 것이 지푸라기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주님의 영광을 본 사람들의 지성입니다.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겸비해집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누구인지를 깨닫고 주님이 자기를 구속하고 불러주신 그 본분으로 돌아가게 되는 일들도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들 속에서 나타나는 특징인 것입니다.
모세는 일평생 이때 이 사건을 잊어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 번 하나님의 임재와 마주했지만 33장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경험하게 된 이 아버지의 임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찬란하고 영광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여기서 다시 한 번 그 영광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해주신 거룩한 소명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영광스러운 힘을 얻게 되었다고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시면서 유난히 강조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부흥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잠시 그 백성들에게 비추고 곧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부흥의 특징입니다. 부흥을 영원히 간직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부흥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하나님이 보내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하나님이 걷어 가십니다. 때로는 하나님 앞에 범죄한 바가 없어도 하나님은 걷어 가십니다. 그러나 또 어떤 때는 성령을 슬프게 하고 사람들이 반역하고 그 부흥을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을 슬프게 할 때 부흥의 영광은 떠나갑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부흥을 상징하는 이 하나님의 영광은 잠시 모세에게 보였다가 사라졌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그는 반석에 감추고 하나님의 임재가 그 앞을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임재가 지나갈 때 거기에는 초자연적인 표적들이 뒤따랐을 것입니다. 모세는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이었으니까 그 하나님의 영의 지나가심에 놀라운 임재의 효과를 깊이 경험하고 모두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한 교훈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흥은 지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지나가는 것인데 어차피 지나갈 것인데 왜 그렇게 우리들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부흥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은 부흥은 왔다가 떠나가지만 우리들만 남겨두고 떠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부흥은 잠시 왔다가 떠나가지만 그 잠시 동안에 알게 되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놀라운 지식, 신앙에 대한 놀라운 지식, 우리가 이제껏 귀로만 들었던 그런 진리들을 그 영광스러운 진리를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되는 놀라운 일들을 하나님이 그 부흥의 사건들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흥이라고 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여러분에게 이렇게 예를 들어서 설명해드리면 이해가 잘 될 것입니다.
분명히 여러분들은 처음 예수를 믿기 전에 누군가로부터 예수님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못 듣다가 처음 듣는 순간에 회개하신 분도 있겠지만 평소에 어디서든지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최소한 기독교에는 그런 교리가 있다고 백과사전에서도 보았을 것입니다. 늘 듣던 것입니다. 문자로써는 이해 못 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계셨는데 사람들이 죄를 많이 지으니까 못 박혀서 돌아가셨다더라 그리고 그분이 죽으니까 사람들이 용서를 받았다더라’라는 그런 얘기 많이 들었어도 전혀 느끼지도 못할 때에-그것도 아는 것은 아는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에 그 주님을 개인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죄 가운데서 구속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캄캄한 어두운 길에서 갈 바를 모르고 죄악의 사슬에 묶여서 죽어버릴 것 같은 고통 속에 있는 그 사람이 어느 한 순간에 주님이 그 죄짐을 벗기시고 십자가의 피로 자기를 정결케 하시는 놀라운 구원의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사람들은 그 고난으로 용서를 받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그 모든 진술들을 다시 읽거나 다시 듣기 시작할 때, 그 사람은 무엇인가 깊이 느끼면서 그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다가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는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반응을 평범한 이야기 속에서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한마디 한마디가 이 사람의 말을 찌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참회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지은 죄를 모두 토설하고 자기가 어떠한 형벌의 대가를 받든지 하나님과 화목 하는 것이 자기의 인생의 급선무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변화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경험하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 용서받는 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영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흥은 이러한 것들을 훨씬 더 극대화하면 이해하기가 가능해집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지만 부흥의 때는 사람들은 자기의 죄에 대해서 더 깊이 고뇌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그 어떤 때보다 더 분명하게 느끼고 평소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이 혹시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는 이 기쁨이 거짓된 것이면 어떨까하는 고민들을 하게 됩니다. 정말 나는 충분히 회개하였을까? 정말 나는 이제 하나님 앞에 정결한가?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모두 씻어주시고 용서해주셨는가? 주님의 마음은 아직 풀어지지 않았는데 내가 짐짓 하나님 앞에 잘못된 화해의 교리를 생각하며 스스로 내 자신이 풀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태도를 보고 하나님이 슬퍼하시면 어떡하나 하는 이러한 자신의 죄악된 상태와 거룩한 하나님을 닮고 싶어 하는 갈망들이 굉장히 뚜렷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흥의 때에 예수를 믿게 되는 사람들이 특징은 아주 분명하고 뚜렷한 회심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는지 말았는지 예수를 믿었는지 말았는지 그런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깊은 용서와 사랑을 경험하고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분명한 그 은혜의 표징을 가지고 하나님과 화목한 속에서 주님을 사랑하며 살 수 있게 되는 분명하고 뚜렷한 회심이 부흥에 일어나는 확실한 특징입니다.
그래서 1차대각성이 있었을 때 조나단 에드워즈는 부흥의 때에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와서 회심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웨일스라는 곳을 가보지 않았지만-산간지대-지금부터 100년 전에 인구가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근데 그 부흥이 일어난 불과 6개월 동안 5만 명의 사람들이 교회 속으로 회심하고 들어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어마어마한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엄청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돌아와서 뚜렷하게 회심하고 하나님 앞에 복받치는 신앙생활을 하는데 조나단 에드워즈는 1년 동안 세례를 안줬습니다. 당신들의 회심이 참된 것인지를 두고 보자 그리고 1년 동안 세례를 안줬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났는데도 그 사람들이 거의 회심한 상태로 교회에 남아있었습니다. 세례를 줬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가장 커다란 문제는 눈물도 흘리고 마음이 녹지만 견고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그렇게 받았으면 견고하게 살아야 될 것이 아닙니까?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은 은혜를 조금 받은 사람이 뒤돌아서 도망질치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더 큰 범죄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해야 합니다. 이 말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실감이 안 나면 ‘신앙과 은혜체험2’를 다시 들어야 합니다. 뒤로 물러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엄중하게-죽음입니다. 죽음-경고하시는지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도 말씀을 전해보면 알지만-평신도 리더들-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칩니다. 맨날 조용히 시키고, 도망가는 사람 잡아다 놓고, 공부를 가르치느라 정신없는데 어느 날 펼쳐놓고 예수께서 쭉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뭐 그렇게 특별히 준비해놓은 것도 없는데 초등학교 3, 4학년이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교사로서 흥분이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딱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을 때, 이 사건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겠습니까? 굉장한 은혜라고 생각을 하겠습니까?
말씀을 전하는데 사람들이 애통하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모습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정말 예배가 끝나도 일어날 줄 모르고 매달리고 사람들은 그 사람에 대해서 기대를 합니다. ‘십몇 년 동안 교회를 다녀도 10년 전에 부흥회 다닐 때 눈물 흘려보고 처음인데 대단하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견고하지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부흥을 통해서 만지고 지나가시는 것은 하나님이 그 회심이 모두 같은 회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똑같이 눈물 흘리고 회개해도 가슴을 굴착기로 깊이 파고 지나가서 완전히 파헤쳐서 회개하는 사람이 있고, 살짝 비침을 받고도 요만큼 감화를 받고 이만큼 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봐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흥의 때에는 하나님이 깊이 파헤치고 지나가십니다. 그런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깊이 하나님이 말씀으로 파헤치고 지나가시니까 그만큼 하나님 앞에 자신에 대해 결단하는 것이 아주 뚜렷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흥운동과 부흥의 차이가 그것입니다. 에드워즈 시절에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심하고 변화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놀라운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세례도 안 받은 상태에서, 교회의 정식 회원이 안 된 상태에서 일 년 동안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온 사람들 경품 잔치하는 것처럼 사람들 불러다 모아놓으면 그 다음 주일 어떻게 되는지 여러분은 알지요? 2, 3천 명씩 총동원전도주일에 몰려왔던 사람들이 다음 주에는 어떻게 됩니까? 내가 전에 있던 교회에서 그거 한번하고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일 년 지났더니 딱 20명 남았다. 1,300만원 드려서 잔치했는데 20명 남는다. 죽어라 속상하게 하는 교인이 누군가 했더니 그 20명이다.’ 다시는 당신은 그런 거 안 하겠다고 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깊이 파헤치고 지나가시는 그런 회심의 부흥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 그런 영광스러운 간증은 못 가졌지만, 그때 제가 가르치던 학생들이 고3이었는데 꽤 많았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34명이 고3으로 올라왔는데 목사님이 하루는 교역자 회의를 하면서 그 학생들이 장년부로 올라오겠는가에 대해 아주 회의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거기는 실업계 다니는 애들이 많기도 했고, 공부를 잘 못해서 2명 붙고 나머지는 대학1차 시험에 다 떨어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대학부에 올라가면 대학생들이 수두룩 있는데 올라가겠는가?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고등부에서 장년부에 얼마나 남는가하는 최대의 결정변수는 그때 대학 합격률입니다. 그러니까 고등부에서는 학생들이 장년부에 남게 하기 위해서라도 대학입시에 신경을 많이 써줘야 합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근데 결과는 아주 안 좋게 나왔습니다. 근데 놀라운 것은 그 아이들이 다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6개월 뒤에 34명 올라간 아이들이 32명이 대학을 떨어진 상태에서 여전히 예배에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일이 유사 이래로 처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그 전해에 비록 대학은 떨어졌지만 하나님이 그들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대학을 떨어진 애들이 대학을 붙고 교회에 나오지 않는 아이들에게 공중전화에 매달려 교회나 나오라고 애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깊이 파헤치고 지나갈 때 하나님은 지나가시지만 하나님께서 파헤치고 지나가신 그 진리의 영향과 하나님에 대한 광대한 지식은 여전히 남아서 그의 인생을 움직이고 삶을 움직여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깊이 있는 삶을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깊이 아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공경하고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끊임없이 일관된 삶을 살아가는 요인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하나는 하나님이 얼마나 그를 깊이 만나주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책임도 많이 따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맛보고 뒤로 물러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매우 슬퍼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많이 구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남들보다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고, 하나님보다 하나님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정교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삶으로 이것들을 보여야 합니다. 잠시 지나가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아는 놀라운 지식을 남겨주십니다. 그리고 그 지식은 결코 뒤로 후퇴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이러한 내용으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떠나가신 것입니다. 이야기는 여기에 끝나야 하겠지만 오늘 우리에게 눈길을 끄는 것은 그 사건이 있고 나서 바로 굉장히 의미 있는 한 사건이 34장에서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계명의 사건입니다. 돌판에 하나님께서 그의 계명을 새겨주셨지만 우상을 숭배하는 백성들을 보면서 분노했던 이 모세는 그만 돌판을 깨뜨리고 맙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 모세에게 찾아오셔서 돌멩이를 깎아서 판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거기에다가 스스로 당신이 계명을 새기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하필이면 십계명 돌비를 만드는 사건이, 또 돌비를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이 말씀이, 왜 주의 영광을 방금 보고난 모세를 향해서 주어지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왜 하필이면 딴 시점이 아니라 바로 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이 모세의 그렇게 목메는 기도의 서원대로 그의 앞을 찬란하게 지나가고 나자마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하나님이 영광가운데서 모세에게 그 돌을 깎으면 내가 거기에다 친히 글을 쓰리라고 하는 계명을 다시 새겨주겠노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은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왜 하나님은 이 크고 놀라운 부흥 끝에 그에게 돌비를 만들라고 하셨고 거기에다가 계명을 새기시려고 마음먹으셨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사건 속에서 깊은 의미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의미가 있지만 우선 우리들이 생각해보아야 할 중요한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께서 진노하여 버리시려고 하다가 다시 그들을 향하여 은혜를 회복시키셨습니다. 그 은총을 회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진심으로 용서하시고 그들을 새롭게 불러주시고 그들을 향한 당신의 진노의 불을 끄시고 그들과 함께 친히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동행해 주실 것을 보증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중보 하던 이 모세를 향한 은총도 또한 하나님이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이 모세를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가 간구하고 기도하는대로 당신이 모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해주시겠다고 하는 찬란한 징표와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바로 곧 이어서 돌 계명을 만드는 사건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줍니까?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받는 도전은 무엇입니까? 요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당신의 은총을 회복시켜주신 그 모세와 모세의 백성들, 부흥을 본 사람들에게는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축소해서 이야기 하면 남다르게 하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오랫동안 당신의 임재에 취해있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임재를 보여주신 그 놀라운 신비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즉시 그 놀라운 영광을 보고 그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이 즉각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계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세상에 있는 백성들과 구별되는 이유의 핵심에는 이 계명이 있었습니다. 이방의 사람들은 자기의 왕의 명령을 쫓아 살아갑니다. 자기의 육신의 소욕을 쫓아 살아갑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들에게는 국법이 있습니다. 왕을 기쁘게 하기 위한 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규칙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이것이 가장 핵심적인 요약, 이것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이것을 지키면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방의 백성들과 구별되게 되었습니다. 이방의 백성들은 자기를 축복할 수만 있다면 누구에게든지 다가가서 음란하게 절하며 경배하고 오늘을 이 신을 섬기다 내일은 저 신을 앞에다 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온갖 형상을 깎아 만들고 공경하고 경배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 신들의 이름을 부르고 그리고 자신의 신들이 정한 날들을 음란하게 섬기고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하나님에게만 정절을 맹세해야만 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혹은 죽음에 이른 경우가 있어도 우상을 그들 앞에 둘 수 없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축복을 신들이 약속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심하게 말해서 오히려 하나님께 재앙을 받을지라도 오히려 자기들을 축복하겠다는 신들 앞에 절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을 수 없었고 그분이 정하신 날들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계명을 따라서 부모를 공경해야 했습니다. 살인을 할 수 없었습니다. 간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모든 이방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매우 독특한 맛을 드러내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오늘날 여러분들이 계명을 지키면서 살 때에 느껴야 했던 그런 모든 고통과 어려움들이 그것보다 훨씬 더 심한 고난과 어려움이 그 계명을 지키면서 그 이방백성들이 가득 찬 곳에서 정해진 땅도 없이 이리저리 유리하면서 독특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표를 드러내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엄청난 수고와 고난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지만 그 은혜가 진리를 따라 살려고 하는 고난을 감소시켜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은혜는 은혜고 고난은 고난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게 받은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남들은 혀가 빠지도록 일해야 될 일들을 손 하나로 해결합니까? 하나님의 은사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남들이 피 흘리며 일해야 될 일들을 말 한마디로 이룰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게 받았던 사람들은 넘치도록 고난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쳤던 사람들은 하나님 때문에 넘치는 고난을 받아야했고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보았던 사람들은 자기가 보았던 그 영광 때문에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던 사람들, 진리가 무엇인지를 체험하고 그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권세를 경험했던 사람들은 진리와 함께 죽고 진리와 함께 살아야 됐습니다. 고난을 당해야 했습니다. 피해갈 수 있는 수많은 길을 하나님이 만지고 지나가신 그 사랑과 자기에게 알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로 말미암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저는 기억할 수 없지만 한국의 초대교회에 어느 목사님이 그 설교 속에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예수 함께 권능을 받기를 원합니까? 권능 받으면 좋은 일이 일어날 줄 압니까? 권능 받은 우리믿음의 선조들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이 한량없이 많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죽었습니다. 바울도 권세를 한없이 받았습니다마는 고난을 받고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도 넘치도록 고난을 받다가 못 박혀 죽었습니다. 우리도 능력 받고 권능 받아서 죽을 때까지 주의일 합시다. 이런 설교였습니다. 어쩜 그렇게 그 시대에 성경진리를 그렇게 꿰뚫을 수 있습니까? 우린 지금 퇴보하고 있습니다. 그걸 기억해야 합니다.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처음 하나님이 마음 먹었던 대로 내 사자하고 가라 난 이제 너희랑 안 간다고 말씀하셨다면 십계명 얘기를 하셨을까요? 안하셨을까요? 하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 아니면 이것을 지키면서 살아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잘라버리시면 백성들이 이 율법에 매달릴 이유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이 율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화해 표시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진노하게 하였고 나에게 불순종하였지만 이제는 내가 이 모든 너희를 향한 진노의 마음을 씻는다. 그리고 내가 그 표로 너희에게 율법을 준다. 이제 내가 너희를 내 백성으로 다시 생각한다. 그러면서 지키면서 살 율법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이스라엘의 사명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님을 남다르게 만나셨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남이 못 본 것을 보여주셨습니까? 그랬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매우 특별한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남이 못 본 것을 보셨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안 주신 것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소망할 수 없는 것들을 주어서 누리게 하셨습니다. 오류가 진리처럼 득세하는 시대에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두움 속에서 짐승처럼 살아가고 그러면서도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교만한 우리들을 주님이 어느 한 순간에 깨워주실 때 우리는 그 앞에서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허위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철저하게 편견과 무지에 가득 찼는지를 하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 무지를 혐오하게 되었습니다. 남이 못 본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남에게 있는 권능을 받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남이 못 본 것을 보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감격할 줄 모르며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우리에게 알게 하셔서 주님이 건드려주시지 않으셨으면 돌멩이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반항하면서 살다가 인생을 마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어둠속에서 벗어날 때에 그 무지를 향한 분노와 진리를 향한 사랑의 마음을 기억해보십시오. 우리는 올무에서 벗어난 새같이 자유로웠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는 그 어두움으로 돌아가지 않겠노라고 맹세했습니다. 매일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 즐거웠고, 그 진리를 깨달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의 사랑을 볼모삼아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고 무지의 어둠속에 갇혀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우리는 슬퍼했습니다. 그리고 많이 울었습니다. 마치 병들어서 모두 문드러져버린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던 우리들은-악취 나고 더럽고-수많은 의원들을 찾아다녔지만 우리의 영혼의 문제를 고칠 수가 없었고 자신도 자기가 너무 싫던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주님이 찾아와 주셔서 우리를 그 지옥의 사슬에서 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빛으로 빛으로 우리를 불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여기에 서있습니다. 우리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을 수 있겠습니까? 왜 하나님이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우리에게만 그 빛을 보여주셨습니까? 우리에게 어떤 의로운 공로와 하나님의 환심을 살만한 그 무슨 장점이 있길래 아직도 수많은 사람이 어둠 속에 살아가고 있는데 부르짖고 외쳐도 받아들이지 않는 수많은 사람이 있는데 하필이면 우리 자신도 하나님의 은혜에게 우리에게 미치리라고 생각지 못하던 그때 주님은 수많은 사람을 남처럼 헤치고 지나서 설마 했는데 우리 앞에서 서셔서 우리를 불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우리를 옮기셨습니다.
(찬양)
웬 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 웬 말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도다. 우리가 이런 사람입니다. 모세와 같은 영광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아무리 이해해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 영광의 작은 빛이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를 받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이런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그리고 당신 자신이 우리를 깨우시는 그런 놀라운 영광과 은혜를 경험한 우리들이 지금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그 은혜와 빛과 계시와 하나님의 광채를 본 우리들이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과연 우리가 어두움의 나라를 그리워하고 눌려 살던 그 사단의 권세 아래로 다시 들어가는 날들을 그리워하면서 살라고 우리를 빛으로 불러냈습니까? 그 죽음의 자리에서 썩어서 문드러져가는 시체와 같은 인생들은 살려주신 것이 그때 그리워하면서 불평과 원망으로 감사도 잊어버린 채 빛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이끄신 하나님을 부담스러워하며 살라고 여러분들은 그 어두움 가운데에서 건져내셨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원수로 갚겠습니까? 주가 보여주신 영광을 욕으로 갚겠습니까? 하나님께는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나의 영광을 보고 나의 빛을 본 너희들이 진리로 돌아가고 나의 계명과 나의 기뻐하는 뜻을 따라 사는 것이 나의 영광을 본 자의 마땅히 행할 바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런 놀라운 은혜와 빛을 얻었습니다. 이제는 어두움으로 돌아갈 순 없고 빛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부담스러울 만큼 우리의 마음이 무디어지고 뒤로 물러가게 되었습니다. 더 이제는 빛이 감격으로 다가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물러감 들을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아파 하시는지 오늘 하나님의 마음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우리의 형편과 우리의 처지를 향한 마음으로 우리가 가득 찼지만, 우리가 언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우리로서 어떠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 것인가에 대해서 가슴 아프게 고민해본 적이 있습니까? 주님이 나에게 보여주신 빛이 얼마나 크고 놀랍고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입을 때 주님이 우리의 기도의 제목을 거절한 것이 있었습니까?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특별대우를 받으면서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런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계명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의 마음에 가득차 있는 것은 혹시 여러분 자신을 향한 연민이나 여러분의 처지에 대한 원망이나 힘겨움이나 여러분 자신을 긍휼히 여기는 자기 연민이 아닙니까?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그 영혼이 다시 살아날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아무리 진지하게 매달리며 기도하고 눈물로 세수를 하며 기도해도,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대로 어두움 가운데 살게 버려두십니다. 때때로 자신의 처지 속에서 너무나 안타까워서 진실로 눈물 흘리며 크게 뉘우칠 수 있습니다. 가슴이 녹는 것처럼 아버지 앞에 매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도가 그를 어두움에서 건져내지 못합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서 근본적으로 영광을 본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삶의 목표로 돌아와야 합니다. 돌아오지 아니하면 거기에는 어떠한 희망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항상 하나님의 계획을 동반합니다. 왜 하나님이 그 많은 사람을 헤치고 지나서, 지나서 이 사람도 아니고 이 사람도 아니고 나에게 다가오셔서 이 놀라운 은혜를 주셨는가? 끊임없이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그 계명을 모세에 손에 들려주셨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영광의 힘으로 이 거룩한 계명을 좇아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향해 베풀어주신 그 놀라운 사랑과 아름다운 은혜를 가슴에 새기고 간직하고 기억하며 고난을 받으면서도 계명을 지켜야 했습니다. 입술을 깨물고 타협을 거절하면서 이 진리를 따라서 살아야 했습니다. 부흥을 맛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맛본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모든 사람을 향한 거의 유일한 하나님의 요구는 계명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왜 이 계명을 잃어버리게 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향한 사랑이 식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삶을 목표로 하지 않는 부흥에 대한 추구는 모두 종교적인 노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삶과 동떨어진 고매한 영적인 생활, 역사와 단절된 교회의 거룩한 영성, 모두 거짓말입니다. 사단은 여러분들이 무엇을 맛보고 무엇을 지향하든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여러분들이 그 지식과 은혜 때문에 어떻게 살아가는 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깨진 그 돌판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 스스로 거기에 계명들을 새기실 때 그리고 다시 그 두 돌판을 들고 이스라엘 가운데로 나아왔을 때 모세와 그 오랜 회막의 기도를 통하여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를 쟁취하고야 말았던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속에서는 그 돌판을 보면서 어떤 심령이 되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비록 글씨를 새기신 분은 하나님이셨지만 이 놀라운 은혜를 맛보면서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는 그 계명을 지키고 살도록 하나님 앞에 맹세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 새롭게 맹세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제는 의문에 매인 돌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거룩한 말씀이 여러분들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앞에 성경을 펼 때마다, 예배드릴 때마다 매 순간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살라고 간절히 원하십니다. 어떻게 살아달라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외치고 계십니다. 이제 그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지키는 삶으로 돌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33장의 부흥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부흥은 결국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 살아가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타락하고 힘을 잃어버린 백성들 가운데 오셔서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