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새롭게 하소서
(1998-1999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8-1999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라(시34:8) 1998.12.23 수요예배 1
2. 다시 부르시는 예수님(요21:19) 1998.12.30 수요예배 10
3. 다시 새롭게 하소서(애5:21下) 1999.1.6 수요예배 18
4. 다시 사명으로 돌아가라Ⅰ(눅22:32下) 1999.1.20 수요예배 29
5. 다시 순종으로 돌아가라(욘3:1-2) 1999.1.27 수요예배 36
6. 다시 사명으로 돌아가라Ⅱ(욘3:3上) 1999.2.3 수요예배 51
7.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길(시126:1-2,5-6) 1999.2.10 수요예배 63
8. 다시 새롭게 은혜주시는 하나님(삿15:18-19) 1999.2.17 수요예배 72
9.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창3:21) 1999.2.24 수요예배 85
1.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라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34:8)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을 지나면서 항상 기쁘고 즐거운 일만을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크다란 고통을 경험하면서 불같은 시간들을 지내기도 합니다. 왜 이 세상에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고통을 당할까?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고통받는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이 세상이 가지고 있는 고통스러운 속성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선인과 악인에게 골고루 미침과 같이 고통도 또한 그러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만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하는 슬픔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들에게도 사랑하는 사람과 죽음너머로 작별해야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뿐 아니라 하나님을 너무나 잘 알고 그를 경외하며 살고자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세상의 모순된 구조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통이 있게 마련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행한 죄악 때문에 그에 대한 대가로 이 세상에서 고통을 지불해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비록 죄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선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단련시키기 위해서 당하게 하시는 고난이 있습니다. 물론 두 번째와 세 번째 고통의 이유를 나누는 것은 다소 자의적인 데가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든지 하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통해서도 우리를 훈련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기록을 남기고 있는 시인 다윗이 당한 고난은 이 세 가지 중에서 아마 세 번째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다윗이 아직 왕이 되기 전에 기름 부으심을 받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살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이 버리신 사울, 그 사람으로부터 정치적인 대적으로 떠올라서 집요한 추격을 받아야했던 가슴아픈 시절에 쓰여진 고통스러운 한편의 시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진심으로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왕으로 생각하고 공경했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는 이미 하나님이 버리신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향한 다윗의 마음은 언제나 신실했지만 사울은 여러번 다윗을 죽이고자 창을 던졌습니다.
결국은 집요하게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이 사울 앞에서 불행하게도 이 다윗은 블레셋이 사는 원수들의 나라로 피하는 것이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는 일에 안전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블레셋 지방으로 넘어가서 여기에는 아비멜렉으로 되어있는 가드 왕의 처소로 피했습니다. 그가 다윗인 것을 그들이 즉시 알아보고 이 다윗을 가리켜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유행하고 있는 동요를 기억했습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전쟁에서 사람을 죽인 숫자를 가리킨 것입니다. 자기를 알아보는 것에 대한 깊은 두려움을 느낀 이 다윗은 그 자리에서 미친 척 했습니다. 몸을 못 가누는 병신 행세를 하고 일부러 더러운 침을 흘리면서 자기의 수염에다가 지저분하게 묻히며 정신병자 행세를 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을 내쫓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미친 체 하다가 결국은 사람들에 의해서 내쫓겨서 도망 나오면서 지은 시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시인 것입니다. 보십시오, 다윗이 오늘 너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기가 맛보지 못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사람들에게 맛보아 알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지금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신 분인지를 방금 맛보았기 때문에 내가 그 하나님을 맛보아 안 것처럼 너희들도 이렇게 하나님을 맛보아 알라고 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가장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때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추격을 당하고 자신의 생명이 원수들의 수중에 떨어질 것 같은 그러한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는 기회를 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자신이 어떤 분이신 지를 보여주시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어떤 분이신 지를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알려주고 싶어하십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모르는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올바르게 전해주고 그 전해주는 가르침을 받아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진실 되게 아는 곳에서는 언제나 얽매임으로부터의 자유가 있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찌하든지 우리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 지를 가르쳐주고 싶어하시고 또 그렇게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 여호와 당신이 어떤 분이신 지를 아는 일에 열심을 품는 백성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일에 얼마나 소홀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이나 혹은 일상적인 삶의 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만큼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알기 위해서 노력하고 애쓰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바로 이처럼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 분의 성품이 어떠한지를 얼마나 알리고 싶어하시는 분이신 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무엇인가를 느끼는 방법으로서 만지는 방법도 있고 보는 방법도 있고 냄새를 맛보는 방법도 있고 여러 가지 많이 있을 탠데 여기서는 하필이면 맛보아 알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개인적이고 직접적이고 그리고 뼛속깊이 사무치는 신앙의 체험적인 성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인격적으로 그 분을 깊이 만나고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된 때에는, 바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신 그 말씀이 내게 맛보아졌을 때 그래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그 가슴 저미는 사랑을 내가 개인적으로 경험하게 되었을 그 때에 비로소 그 말씀이 버림받은 것 같은 내 영혼, 버림받은 것 같은 내 인생에 놀라운 위로가 되고 그리고 내 인생을 새로운 방향으로 데려가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은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 것은 말을 잘하면 어느 정도 근접하게 묘사해줄 수 있고 그리고 들은 것도 힘을 다하여 세밀하게 묘사하면 직접 듣지는 못했어도 어느 정도 들리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맛본 것을 말로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정밀한 묘사를 동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오늘 시인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고 말합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그러한 진실한 체험 없이는 주님을 진심으로 깊이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윗은 말할 수 없는 슬픔을 간직한 채 일생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고 누구보다도 눈물을 쏟는 작별과 고통을 많이 지불해야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슬픔의 사람이 슬픔에 삼킨바 되지 않은 것은 이처럼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을 맛보아 아는 신앙의 깊은 감격과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그 은혜와 사랑이 다윗으로 하여금 이제껏 살게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언제 이렇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되었습니까? 도무지 맛보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인생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그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족에게 추격을 당하고 그리고 자기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왕으로부터 자기도 원하지 않게 대적자가 되어서 집요한 생명을 노리는 자들의 추격을 받아야하는 그러한 불행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을 때 오늘 시인은 오히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기회가 되었다고 고백을 하고있는 것입니다. 그가 언제 기름 부어달라고 그렇게 하나님께 호소한 적 있습니까? 그는 그저 아비 이새의 집에서 양떼들을 돌보는 사람이었지 정치적인 야망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렇게 살아갈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권적으로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그에게 기름 부으셔서 왕 되게 하시려고 그를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이 선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선택을 받은 후에 오직 하나님이 그에게 기름을 부어서 앞으로 왕이 되도록 만들어 주셨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시고 그와 함께 하심으로 이스라엘을 박해하는 원수들에게서 그 나라를 지키고 있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그는 집요하게 추적을 받으며 생명이 경각간에 달린 고통스러운 시기들을 보내야 했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후회할래야 후회할 수도 없는, 후회해 보아야 소용도 없는 기름 부으심의 그 사건을 통해서 그는 이제 가정도 버리고 이제 홀홀 단신으로 자기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왕의 추적을 받으면서 이리저리 도망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을 때 어디에서 그가 하나님의 선하시다는 사실을 입증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어느 것도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시인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고 마치 우리를 향해 뽐내는 것처럼 가장 고통스러운 인생의 한 시기에 서서 치욕스러운 방법으로 목숨을 연명한 후에 그는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신 분이신 지를 맛보아 아는 자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우회적으로 고백을 하고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보석과 같이 빛나는 값진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은 슬픔과 눈물이 있는 고난의 계곡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하구나 하는 것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슬픔과 고통이 있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곳에서 더 하나님의 선하심을 적나라하게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갖게됩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개인적으로 맛보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그 분과 나누는 교제의 감격 속에서 살았던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슬픔의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인생 길은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것 같은 고난의 연속을 지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고난보다도 더 많이, 고통스러운 시기보다도 더 오래도록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슬픈 일을 만났지만 슬픔에 의하여 압도당하지 아니하고 불행한 일을 만났지만 그 불행에 의해서 지배당하는 대신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을 아는 지식에 지배를 받는 삶을 살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고통받는 그 순간을 통해서 당신을 잘 알려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을 맛보아 알기로 작정된 사람들은 고난을 당할 때에 그 고난 때문에 마음이 산란하여져서 신앙과 그리고 영적인 관심이 흐트러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정돈되고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집중한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미 닭의 품을 떠나서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딛을 때마다 보이는 희한한 풀잎들과 벌레 같은 먹을 것들을 찾아서 어미 곁을 멀리 떠났던 병아리가 강아지가 짖거나 혹은 무슨 위험한 상황이 닥치는 것 같으면 쏜살같이 달려와서 어미의 날개 그늘아래 피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정말 고난을 당할 때 당신을 향하여 집중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당신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그 특권과 같은 기회를 주시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언제 주십니까? 당신의 자녀들이
고통을 받는 그 시간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통에 대해서 고통에 숨겨진 하나님의 깊은 섭리와 그리고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소중한 것들을 우리에게 많이 안겨주시는지를 깊이 생각하면서 우리가 원치 않는 고난을 당하거나 혹은 우겨 쌈을 당하는 것과 같은 고난 속에서 오히려 우리는 더 많이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은 그러한 인생의 깊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시인에게 인생의 크다란 위기, 생명조차도 경각간에 달린 것 같은 위기를 통해서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하셨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그런 일들을 베풀어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고통을 받으면서 원하지 않는 불행한 상황 속에서 마음 아파하는 일을 당하게 되었을 때, 사랑하던 많은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거나 혹은 믿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낯선 사람처럼 여겨지는 외로운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은 선명하게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의지하며 살아야할 분이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고백을 할 때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가끔 말씀드립니다만은 하나님께서 제일 슬퍼하시는 것은 우리가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 상한 마음이 되기에는 우리가 걸어가는 길이 너무나 확신에 차있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기에는 믿고 의지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은 그런 종류의 삶을 하나님이 가장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가장 자신만만해 할 때 사실은 하나님이 가장 슬퍼하시고 우리가 가장 확신에 차있을 때 어떤 의미에서는 그 확신에 차서 걸어가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우리를 보시며 역설적으로 하나님은 가장 불안해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가지고있는 깊은 지혜는 바로 이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온전한 삶을 살려고 애를 쓴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나는 확신하건대 그 정도의 온전한 삶을 살다간 사람이 이 세상에는 아주 많지는 않아도 분명히 여러 사람 있을 것입니다.
흠과 티를 찾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온전한 삶을 살며 순결한 사랑을 하나님께 바치다가 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죠지 위필드에 대해서 1,200여 페이지 정도되는 전기를 썼던 아놀드 델리모아라는 사람은 자기 글 속에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위필드의 생애를 연구하다가 그에게 뭔가 결점이 나오면 뛸 듯이 기뻐했다, 왜냐하면 내가 그 결점을 말함으로서 독자들이 내가 단순히 위필드에게 푹 빠진 펜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게 하나님 앞에 순전하고 온전하게 살다 간 사람들이 여럿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 비할데 없이 놀라운 다윗의 신앙의 특징은 항상 하나님 앞에 자기 깨어짐이 있는 그런 신앙 속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는 왕이 된 후에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제왕의 시라고 일컬어지는 왕의 시속에서도 이 시인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가난하고 곤핍한 자이며 얼마나 절박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인지를 호소하고있는 그 열렬하고 진지한 간구의 태도를 우리는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 앞에서 연약할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가장 강하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사람과 세상 앞에서 사자처럼 살았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꺼져 가는 심지와 그리고 상한 갈대와 같은 마음으로 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소망은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고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그 은혜밖에는 그들에게 소망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이렇게 겸비해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때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를 알게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강하심,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알기 전에 하나님은 먼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며 우리가 우리 자신을 믿으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어줍지 않은 것인가 함을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직면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강하심 속에서 하나님의 그 선하심을 맛보아 알며 살았던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이렇게 철저하리 만치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지를 깨닫는 그런 연약함 속에서 그것을 고백하며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더라면 국사에 나설 일도 없었을 것이고 정치적인 관심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에게 표적이 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기름 부으셨을 때 충만한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그랬는데 그 여호와의 신이 그로 하여금 덜 고난받는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셨습니까? 그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그 귀하고 놀라운 사랑이 그로 하여금 덜 고통받는 삶을 살게 만들어 주었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로부터 더 연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치 아편에 중독된 사람과 같이 헐떡거리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인자하심만을 의지하면서 살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는 없고 하나님 홀로 계신 것 같은 삶을 그는 배워나갔습니다. 여러분 인간이 열심히 일할 때 그는 단지 인간이 일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 인간이 하나님 손에 붙잡힐 때 그때 그 지점은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하는 지점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에 너무나 많은 세월동안 허세와 그리고 자기과시풍조가 교회 속에 많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끊임없이 제시되고있는 소위 얘기되는 비전 타령들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의 사업이 끝나면 또 하나의 사업이 제시되고 하나의 목표가 끝나면 또한 나의 목표가 제시되고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성취해 가는 곳에 참여하여 그것을 이루어나감으로써 자신들도 또한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되어가고 있다라는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호세아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한 것과 같이 우리에게 가장 급한 것은 여호와를 아는 것입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고 그 여호와의 어떠하심을 우리의 가슴속에 새기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부지런히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심을 맛보아 안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의 성품을 아는 지식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남다른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집어치워 버리거나 아니면 갑자기 이제껏 까지 신앙생활을 해오던 길이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고 내팽개치고 쉬운 지름길로 갈려고 하는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맛보아 아는 즐거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많은 쓸데없는 공상들을 신앙의 영역에다가 집어넣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가장 크다란 기쁨과 즐거움이 어디에 있습니까? 혹시 이미 신앙생활에 있어서의 즐거움을 모두 잃어버린바 되지 않았습니까? 물론 여러분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한때 교회 일을 하는 재미로 교회 다닌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목회자가 칭찬하고 띄워주는 재미로 허영에 가득 차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뭔지도 모르고 그저 사람들과 교제하고 어울리는 것이 신나서 부지런히 교회 다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건 모두 유아기적의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진심으로 알고 견고하게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가장 크다란 즐거움은 이 세상에서 은이나 금같이 곧 없어질 것들을 모으는 것이 그들의 큰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일부러 부요해지려고 탐욕에 사로잡히지도 않았지만 반대로 일부러 가난해지려고 탐욕에 사로잡히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의 즐거움은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이었습니다. 겉 사람은 후패해져 가도 날마다 날마다 새롭게 발견해 가는 하나님, 날마다 날마다 맛보아 아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체험하면서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면서 맛보아 알면 알수록 자기가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고있는 사랑이 보다 더 순수해지고 온전해져 가는 것을 배워나갔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이 멜랑꼴리해지는 것과 진정한 사랑의 느낌사이에 구분을 할 수가 없으리 만치 그렇게 무지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뜨거운 감정 중에 어느 부분이 감상이고 어느 부분이 참된 사랑인지 옥석을 가리는 지혜도 주님을 맛보아 아는 가운데 배워 나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타오르는 뜨거운 열정 가운데 어떤 것들이 육체에 속한 것이고 어떤 것들이 영혼의 호흡이 베여있는 것인지를 헤아리는 깊은 지식도 주님의 선하신 성품을 맛보아 알면서 하나씩 하나씩 쌓여 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너무 공상 같은 기대를 안 거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믿는 사람으로 만드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우리를 선한 사람되게 하시고 우리를 선한 일에 유익한 사람들 되게 하시려고 만드신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그 하나는 이렇게 날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맛보아 알고 그 맛보아 안 하나님 때문에 내 자신을 회개하고 뉘우치고 사랑하고 날마다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그러한 내밀한 기쁨과 완성되어 가는 즐거움이 있고, 그리고 또 하나는 그렇게 주님과의 사랑 주님과의 교제가 더 돈독해지면서 점점 더 뜨거운 열심으로 내가 이토록 사랑하는 그 분을 위해서 내가 몸바쳐서 살고 그래서 그 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직장에 다니고 그 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복음을 전하고 그 분에 대한 견딜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교회를 섬기고 영혼을 돌보는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원하시는 바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실제로 우리는 고통이라는 기회가 찾아와도 그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기회로 삼기보다는 오히려 그 고통 때문에 뒤로 물러가는 기회로 삼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저앉아버리고 이제껏 까지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인도와는 아랑곳없이 이제껏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막살아 버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보십시오, 오늘 시인 다윗에게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이 수모를 당하는 그 고통스러운 상황, 미친 체하고 목숨을 건져야하는 그 비참한 상황 속에서 아무도 그와 함께 해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철저하게 외롭게 철저하게 혼자가 되어서 당하는 그 인생의 쓰라린 고통의 때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때가 되었습니다. 실패했습니까? 어쩌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죄 때문에 실패한 상황에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때문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 세상이 가지고있는 고통스러운 속성 때문에 불가항력으로 실패를 경험하고 낙담한 처지에 있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 참석하신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에게 오늘 필요한 믿음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고통이라는 그 무대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여주고 싶어하시는 분이시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이 시인이 어떻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되었습니까? 오늘 시인은 고백하기를 여호와께로 피했기 때문에 그 선하심을 맛보아 알 수 있었다고 고
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품은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찬송가 449장) 저는 이 찬송가를 20여 년째 좋아하고 있는데 특별히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했을 때 믿었던 사람들이 마음을 많이 아프게 할 때 이 찬송을 부르고 나면 큰 위로가 됩니다. 그리고 오히려 격려가 됩니다. 아 그렇구나, 내 마음속에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과의 관계에만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마음이 때묻으니까 하나님이 당신과의 관계를 정결케 하시려고 하나님이 내 영혼의 묵은 때를 털어 버리는구나,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내 영혼의 묵은 때가 섭리가운데 그를 갈라놓게 만들었구나(잘림).
시인은 여호와께 피했습니다. 아마 다윗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시궁창을 지나는 것과 같은 비열하고 졸렬한 방법으로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고 연명하고 싶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신앙적인 자존심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 같은 이방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 기름 부은 하나님의 종이 미친놈 행세를 하면서 그 위기를 벗어났을 때 아마 그것은 목숨이 아까워서는 아닐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피하고 싶어했습니다. 눈을 감고 조용히 묵상해봅니다. 그러한 정말 비굴한 방법으로 목숨을 건지고 자기를 내어쫓는 사람들의 내어쫓음을 인해서 가드 왕의 면전에서 도망 나오면서 그는 틀림없이 울었을 것입니다. 인생사는 것이 얼마나 치사하고 비굴했겠습니까? 동족들에게 버림받고 이방의 땅에 와서 미친놈 취급을 당하는 자신의 삶, 누구하나 가까이 하는 사람이 없는 홀로 당해야하는 외로움으로 가득 찬 시련 속에서 그는 얼마나 괴로워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 시점에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실패와 고난의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방법입니다. 모든 것이 나를 버린 것 같다고 믿어질 때 그리고 내가 믿던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리고 내가 이제 외톨박이가 된 것 같다고 믿어질 때,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기 위해서 그 분의 품속으로 속히 피해야할 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윗을 아는 하나님의 넓으신 품이 없었더라면 다윗도 연약한 한 인간에 불과했을 텐데 어떻게 가장 고통스러운 인생의 때에 감격에 찬 목소리를 높여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들이 이러한 마음으로 아버지 앞에 살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홀로 있는 것 같고 그리고 남이 알 수 없는 크다란 고통과 실패에 직면해 있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말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그 동안은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저를 만나고 싶어하셨지만 이제 드디어 저를 아무도 없는 빈들로 저를 부르시는군 요, 하나님 저와 독대하고 싶으셔서 저에게 이런 고난과 실패를 주시는 것이죠라고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저는 당신의 품으로 피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다윗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이 땅에 창조하신 이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피했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도 자기를 피난처 삼고자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의 피난처가 되어주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며 당신의 품으로 달려오는 사람들을 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한해 어떻게 사셨습니까? 슬플 때도 있고 즐거울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보다 우리를 의지하며 산 때가 많았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들이 당하고있는 가슴아픈 때나 실패 같은 것들도 하나님이 이러한 쓸데없는 것들에 대한 의지하는 마음을 없애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패 속에서 순결해지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쓸데없는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찬 존재이며 그리고 내가 얼마나 내 자신을 건져내기에 무능한 존재인지를 터득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장 위기가 넘치고 고통이 가득 찬 것 같고 누구도 나를 돕는 자가 없는 것 같은 그 때에 우리는 오직 한 분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도 실패한 자들을 부르시고 상심한 자들을 불러모으시는 당신의 그 사랑의 방법들을 배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재미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가드 왕에게 피한 기사가 사무엘 상에 쭉 나오고 그렇게 도망쳐 나와서 아들람 굴에 숨었을 때에 그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하면 400여명의 상처받고 고난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다윗의 품으로 달려오는 일들이 생깁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의 그 날개 그늘아래 피해서 자기와 같이 상처받은 사람들을 싸매시는 하나님의 큰사랑을, 하나님의 그 크신 선하심을 맛보아 안 사람들만이 이 고난으로 가득 찬 인생 길을 지나면서 상심한 영혼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그러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 못했을 때 도덕적으로는 양심에 화인 맞은 자처럼 살고 감정적으로는 버림받은 자처럼 살아가는 그러한 수많은 사람들, 누군가의 손길을 필요로 하고 어디선가 그들을 고쳐주어야 할 그러한 손길이 필요한 그 수많은 사람들처럼 우리들 또한 그렇게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들이 너무나 우리자신만을 집중하니까 주위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그렇지 잠시 눈을 들어서 주변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환자들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른 사람은 모르는 매우 특별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상처받은, 그러면서 도 선하신 하나님에게 어떻게 피할 줄을 몰라서 버림받은 체 살아가고 그리고 내동댕이쳐진 채 고생하고 유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품 벌리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 같은 사람을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손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당신 혼자 하시지 않는 그런 일들을 하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바로 이렇게 주님의 사랑의 도구가 되어서 상심하고 상처받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이 무엇인지를 맛보아 알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들이 되도록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당신의 백성들이 자기에게 피하도록 얼마나 원하고 계시겠습니까? 사랑하는 백성들이 위기 가운데, 실패 가운데, 상실 가운데, 그리고 버림받은 것 같은 외로운 가운데에서 당신의 품으로 피해서 하나님 당신만이 우리의 완전한 피난처이며 그리고 그렇게 자기에게 피한 사람들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깊이 경험하게 하셔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상처받은 백성들을 끌어안는 그런 사람들 되게 하시려는 것 아닙니까?
오늘도 다윗의 그 기사를 보면서 그런 생각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상처받은 사람을 보내시는데 방금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래서 이방의 왕 앞에서 침을 흘리면서 치매 걸린 사람 흉내를 내고 도망 나온 정말 아무 것도 의지할 것과 갈곳이 없는 그런 사람에게 더 상처받은 사람을 보내셔서 그들로 하여금 다윗의 품에 기대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면서 얼마나 섬세한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아야할 뿐 아니라 또한 우리주위에 상처받고 고통받았지만 그러나 어디로 피해야할지 모르는 그 수많은 사람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계산을 하고 머리로 수많은 계산을 챙기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피할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어려움을 만나면 어머니의 치마폭 밑에 숨듯이 아버지의 품으로 뛰어들듯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은 팔을 벌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품으로 피해야 합니다. 그분 안에 안식이 있고 그 분 안에 참다운 위로가 있습니다. 실패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시작이 있고 씻을 수 없이 범죄한 사람들에게는 용서가 있습니다. 사죄함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처지로 무엇 때문에 다윗과 같은 위기를 만나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오늘 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너희는 나 여호와에게로 피하라, 그리고 내게서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 하는 것입니다.
2. 다시 부르시는 예수님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榮光)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21:19)
스포츠 중계방송을 하다보면 열심히 경기를 하다가 무슨 이유에서든지 경기가 중단되는 것을 봅니다. 야구를 하다가도 그렇고 혹은 레슬링을 하다가도 그렇습니다. 경기가 중단되었다가 다시 심판이 횟수를 불면 경기가 새로 시작됩니다. 플레이 어게인(play again)다시 한번 하는 것이죠.
정말 우리의 간절한 소망은 실패가 없는 신앙생활입니다. 성공만 하고 늘 승리만 하며 신앙생활을 해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나 짧습니다. 근데 실패하면 실패하러 가는 동안에 실패하지 않습니까? 뒤로 물러나 본적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은 저의 이 말을 깊이 이해하실 것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말씀의 빛을 비추어서 우리 자신의 실패한 모습을 깨닫게 하시기 그 훨씬 이전부터 우리는 서서히 뒤로 물러가고 그리고 침륜에 빠지고 점점 더 뒤로 물러가서 이제 신앙이라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물러가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기대와 표준에 미치지 못하는 많은 일들이 있고 나서야 어느 순간에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너무나 멀리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완전한 실패에 이르기까지는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서 많은 실패가 있습니다. 실패한 후에는 그것이 실패인 것을 깨닫기 위해 많은 시간을 실패하면서 보냅니다. 그것은 실패인 것을 깨닫고 나서는 회복하려고 몸부림치는 그 많은 몸부림이 또 많은 실패로 이어지면서 또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처럼 한번의 실패는 우리에게 많은 낭비를 가져옵니다.
우리의 소원은 어찌하든지 실패가 없는 삶. 실패가 없는 신앙생활 패배가 없는 생활, 이런 것들을 향한 강한 동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것들에 대한 동경을 안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있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사업을 하거나 직장 생활을 해도 비장하게 반드시 성공이다라고 하는 결심을 가지고 임하거늘,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기독교의 신앙생활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하는 생각을 하며 신앙생활을 해나간다면 그가 어떻게 진실한 신자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소망은 그렇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안 그렇다. 우리의 소망을 실패가 없이도 잘못이 없는 그런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하고, 또 주님께 무엇을 책임을 맡았으면 실패가 없는 그러한 사역을 하고 싶지만은 그러나 소원과는 상관없이 현실을 우리의 기대를 져버릴 때가 너무 많다. 계획에도 없었던 실패를 경험하거나, 좌절을 경험 할 때가 많다. 한해를 보내면서 감사한 일도 많지만 그만큼 후회되는 일도 참 많다. 그리고 어떻게 어떤 또 삶의 구간을 돌아볼 때 얼굴이 뜨거워서 감치 하나님 앞에 살았노라고 말 할 수 없는 그러한 인생의 구간도 우리에게는 있다. 그런 일들이 어떻게 이 한해를 보내며, 우리의 실패를 어떻게 하나님 앞에 감사한 조건으로 바꿀 수 있겠는가? 이런 것은 매우 현실적인 문제다.
이 요한복음 21장은 부록이다. 20장 마지막이 복음서가 끝나는 내용이다. 21장을 부록으로 본다면 넓게는 사도행전1장에 나오는 교회를 위한 것이지만 좁게는 베드로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예수님과 신의를 근본적으로 져버렸다.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그의 강한 예수 그리스도를 버린 불 신앙을 그러한 실패가 있기 직전에 그가 보여준 인간적인 뜨거운 그의 행동과는 완전히 배치된 것이다. ‘다른 사람이 다 버릴지라도 나는 주님을 절대 버리지 않겠습니다.’ 타인과 자신을 비교 할 때는 자신이 자신감이 없을 때 그렇다. 신앙이 자신이 없으니까 타인과 비교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그랬다. ‘사람들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아니 다른 사람들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저는 주를 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런 확신을 보여 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그런 인간적인 확신을 마음에 두시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어떤 고백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영혼 속에서 울려나온 진실한 고백인지 자신을 진지하지만 그러나 인간의 혈과 육에서 나온 고백인지를 분간해 내실 수 있는 분별력을 가지셨습니다.
저는 확실히 제자들이 예수님을 다 버리고 도망갔고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보는 면전에서 모른다고 부인했지만 이 부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상처받지 않으셨으리라 생각한다. 왜냐면 기대를 거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관심은 이제 베드로가 당신을 부인하고 부인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쨌든 그것이 잘 못된 것이었고 실패였기에 그 실패한 베드로를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 그런 흠이 많고 결함이 많은 연약한 인간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준비하게 하시고 그 이후로 이어지는 선교의 장을 펼쳐가는 주역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것이 예수님께는 더 현실적인 고민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 이미 그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성령의 증거가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실패하기 전에 이미 말씀하셨다. ‘사단이 밀 까부르듯이 밀 까부르려고 너를 청구하고 있는데 내가 너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다. 너는 돌이킨 이후에는 형제들을 굳게하라.’ 이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큰소리치고 있지만 그의 실패를 내다보시고 실패이후의 베드로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까지 말씀해주신 것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는 이 베드로의 배반을 통해서 마음 깊이 상처를 받으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오히려 예수님의 관심은 당신이 받은 상처나 슬픔이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부인한 것은 범죄한 것이고 그것은 분명히 씻을 수 없는 실패임에 틀림이 없는 실패를 한 베드로를 회복시켜서 하나님의 거룩한 그릇으로서 섬겨갈 수 있도록 만들어 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게 실패하고 왔을 때 예수님은 그런 실패를 통해서 상처를 받으시거나 배신감을 느끼지 않으셨다고 하더라도 베드로의 실패는 크게 3가지 방편으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첫째, 예수님을 베드로의 허물을 용서 하셨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베드로의 배신을 지켜보셨을 것이다. 둘째,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부인한 그 사실을 결국은 제자들도 모두 알게 될 것이고, 유대인들에게도 모두소문이 날 것이고, 그런 사람이 만약에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맞이하면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서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누가 그 사람을 신뢰하고 따르겠는가? 가짜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저게 어떻게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발생된다. 셋째, 예수님은 베드로가 실패한 것을 괜찮다고 말씀하셔도 베드로의 양심의 문제로 여전히 남아있다.
새벽 닭 울 때 난 괴로웠어 풍랑이 일면 난 무서웠어
하지만 이젠 두렵지 않아 이 세상 끝까지 주님과 함께 죽을 텐데
그런 찬송이 있습니다. 새벽 닭 울 때는 주님이 그렇게 실패할 것도 내다 보셨고, ‘내가 너를 회복시킬 텐데 돌이킨 후에는 형제들을 믿음에 굳건히 하라? 예수님의 귀에는 큰소리치는 것이 안 들어왔고 베드로의 귀에는 실패한다는 말이 귀에 안 들어 왔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그 이해를 다 해주셨다고 할 찌라도 양심의 문제로 남는다. 이것은 큰 문제였다.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은 용서하셨는데 자기가 자신을 용서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반대로 하나님은 절대 용서 안 하셨는데 자기가 자신을 용서하고 위로하고 싸매 주고 축복까지 다 해주는 얼마나 웃기는 사람이 있는지- 왜 항상 극단으로 나가는지 모르겠다.
하나님이 다 용서하셨는데 양심의 자유로움이 없는 것이다. 양심이 건강할 때는 그 송사가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었는데, 잘못 병들었을 때에는 양심의 송사가 복음의 빛을 비추지 못하게 한다. 반대로, 하나님이 용서하신 적이 없는데 자기가 다 용서해서, 스스로 위하고 싸매어 주고 장구 치고 북 치고 다하는 것은 복음 적인 모습들이 아니다.
하나님만 용서해 주시면 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다 문제가 없고 나 혼자서만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을 때에 그것도 건강한 마음으로 시달리고 있을 때에는 주님이 ‘내가 널 용서한다’ 하시면 ‘할렐루야’하고 문제가 끝날지 모르나 그렇지가 않은가? 이런 여러 가지 문제가 엮어져 있기 때문에 베드로는 단지 예수님께서 그의 실패를 인해서 상처를 안 받으시는 그것만 가지고는 해결이 되는 문제가 아니다. 실패는 항상 이렇게 복잡한 문제를 낳는다 성공은 항상 투명하고 좋은 효과를 다방면으로 미치지만 실패로 많은 그러한 것을 미친다. 어디로 갈는지 예상을 뒤엎는다. 한 3년 전에 예약을 하고 건강진단을 받으러 갔다. 종합진단을 처음 받았고, 하얀 약을 먹이고 돌려 거꾸로 사진을 찍히고 검사를 마치고 일주일 후에 무슨 죽을 병이 걸렸다고 하나 궁금해서 갔다. 별 이상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 오다가 옆구리를 만져보니 한 대추 만한 종양이 만져졌다. 예감에 이게 암이구나 싶어 어떻게 죽을 준비를 해야하는가 하는 심각한 생각을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부위를 사진 촬영하지 않았던 기억이 났다. 박사에게 보여주며 “종양이 분명하죠?” “그때는 못 봤는데 진짜 종양이네요? 내심 속으로 교회를 개척하여 작은데 하는 염려가 되었습니다. 사진을 찌는 과정에서 “혹이 암이 아닐까요” 하고 물었더니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암은 아닌 것 같군요.” 라고 확신 있게 말했습니다. 암세포는 대추처럼 동그랗게 예쁘게 뭉쳐지지 않으며, 멋대로 뻗쳐지기 때문에 예쁘게 만져지는 법이 거의 없이 뿌리를 내린다며 의사 생각에 암이 아닌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3일 후에 다시 오라하기에 결과를 보러 갔습니다. 결과는 종양아 아니라 의사의 추측대로 기름덩어리라고 하더군요.
실패는 예측할 수 없는 결과로 사방에다 미칩니다. 그러기 때문에 실패한 그리스도인들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데에는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못합니다. 흔히 부부가 살다가 이혼하는 경우에 한쪽이 자신의 잘못을 깊이 깨닫고 용서를 구해도 다시 화해가 안 되는 경우가 많은데, 문제가 심각해지기 전에는 자기만의 문제였지만 터지고 나면 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가 되어버리고 나 하나의 생각이 바뀐 것으로 안 됩니다. 실패는 이처럼 하나님, 이웃 자신과의 관계, 자신의 양심의 관계, 모든 문제의 우리가 예측 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베드로가 그런 상황이 되었다. 베드로를 선교의 상(?)시대를 여는 그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적인 주역으로 사용하시려고 언제부터 마음 먹으셨겠어요? 물론 신학적으로 보면 만세 전부터 주님이 마음 먹으셨습니다. 그러나 더 구체적으로 본다면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님과의 역사적인 만남이었다. 그 사랑을 보면서 고기나 낚으면서 평생 어부로 살아야 할 사람을 들어서 나의 복음을 전파하고 그리고 이 땅 끝까지 이르러 주의 찬란한 복음의 왕국이 오게 하는 첫 번째 주역으로 사용해야 되겠다고 주님 맘먹으시지 않았겠는가? 근데, 그런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으로 가 버린 것이 20장까지의 이야기다. 그런 사람을 사용할 수 없었다.
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께 범죄했다. 그리고 또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명망과 평판을 쌓아야 되는데 이제 철저하게 배신해 버렸다. 이것은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에게도 이 사람을 지도자로 인정할 수 없는 사건이었고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람들에게도 이 사람을 따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얼마나 베드로를 사랑하는 것을 봤는데 그 면전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부인했으니까, 자기들은 무서워서 그 자리에 못 오거나 자기들도 부인하고 도망갔다고 하더라도 자기들은 그래도 지도자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반대편으로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만약에 베드로가 이렇게 실패한 것을 다 아는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왜 너는 버렸나? 그럴 것 아닌가? 그러니까 도저히 사도행전에서 꿈꾸고 기다리고 있는 그러한 지도자로 설 수 없을 정도의 치명적인 실패를 해버린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사람을 회복시키시고 새롭게 하신다. 예를 들어 지금은 그만두었지만 어릴 적에 바둑에 빠졌었다. 동네에 형들도 있고 친구들도 있고 혹은 아저씨들도 있고 해서 여름 같은 때 가서 바둑을 두면 2종류의 사람이 있다. 한 종류의 사람은 어린이가 바둑을 배우려는데 두다가 잘못 두었을 때 ‘아저씨 한 수만 물러줄 수 있어요’ 하면 흔쾌히 ‘그래 너 놓고 싶은데 한번 놔봐라. 한번 봐주면 이기겠냐? 두 번 봐줄까?’ 하는 사람이 있고, 또 일수불퇴! 하면서 절대 안 물러 주는 사람이 있다. 후자의 사람으로부터는 배우는 것이 별로 없다. 물러주는 사람에게서는 아 그렇구나 하고 배운다. 내가 꼭 살 것 같았는데 이렇게 하면 결국은 죽네 두 번 두어 메 번 두어 빙그레 웃으면서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이 물러주는 사람에게는 배우는 것이 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 하나님께서는 성경전체를 통해서 실패한 사람들을 새롭게 하셔서 그래서 당신의 일들을 이루시는데 아주 기뻐하시는 하나님! 그렇게 하므로 그들이 성공해서도 그 성공이 자신 때문이 아닌 것을 인정하게 하신다. 실패해 봤기 때문이다. 여러 해 전에 21장을 묵상하는 중에 은혜를 받았다. 내가 만약 실패한 경험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은혜가 안되었을 텐데 하도 실패를 많이 한 사람이라 그렇구나!
하나님은 누구를 쓰셔서 당신의 일을 이루셨나요? 아무도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실패한 베드로가 사고가 논리적이지도 않고 충동인 성격의 사람이고 단순하다. 만약 그가 사도가 안되었으면 대모 선동자나, 하청업자를 하면 꼭 맞을 사람이었다. 근데 이런 허물 많은 사람이 오순절 성령 강림시에 선교의 주역으로 서서 바울이 출현할 때까지 선교 역사를 펼쳐 가는 중심인물이 되었다. 이해할 수 없지 않은가 우리는 오히려 주님이 역사를 시작하실 때, 날 때부터 울음소리도 틀렸고 완전히 다른 사람, 다른 사람은 다 때묻었어도 절대 때묻지 않은 사람, 모두 다 도망갔어도 눈물 펑펑 흘리며 ‘예수님 잡아갈 바엔 내 목을 따라 이놈들아’ 그러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날 사람, 그런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 같잖아요? 왜? 순결한 영의 역사가 선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때 그런 인물이 합당하지 않아요? 근데 이상하게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실패한 사람, 그리고 커다란 좌절을 경험한 사람, 양심이 자기를 용납할 수 없고 이웃이 자기를 용납 할 수 없고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할 것 같은 그런 사람을 들어서 사용하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가? 그것을 보면서 많이 울었다. 결국은 주님이 만약에 실패하지 않은 완전한 베드로를 들어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셨더라면 사람들은 베드로 붙잡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베드로 보면서 침흘리느라고 정신 못 차렸을 것이다. “아 역시 무엇인가 다르더니 큰 일을 하고야 마는 구나” 그렇게 바라만 보며 즐거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 없이 모두 실패하도록 버려 두시고, 그 중에서 가장 심하게 실패한 사람, 진작 도망이나 가지 거기까지 좋아가서 저주하면서 까지 부인한 실패의 사람을 들어서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도저히 쓰임 받을 수 없었을 것 같았는데 하나님이 용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던 제자들과 그 모든 사람들로부터 용납 받게 하시고 자신의 양심이 자신을 풀어주게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사람이 되어서 주님께 쓰임 받도록 만들어주셨다. 무엇 때문인가? 자기를 자랑하지 말고 자기를 새롭게 시작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께 영광 돌리게 하시려고 본문 성경에서 “이는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말씀 하심이러라? 보십시다. 어디에 시선이 갑니까? 죽음? 이런 것에 눈이 먼저 갑니까? 아닙니다 ”영광? 베드로와 같이 이렇게 완전히 실패한 사람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졌는데 영광 돌리는 기회가 주어졌다. ‘너무나 많이 실패했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을 것야 너무나 많이 실패했는데 나 같은 인생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 생각하는 분이라면 오늘 이 대목을 기억하십시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죽음이 아니다 어차피 죽게 되어 있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바닷가에 서너 발자국 떨어져 있는 것이나 대여섯 발자국, 또는 열 대여섯 발자국 떨어져 있는 것이나 무슨 차이가 있는가? 여기에서 중요한 관건은 죽고 사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와 같이 이렇게 도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구도에 쓰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실패하고 사람들로부터 도저히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인정받을 수 없는 자리에 이르고, 자기의 양심도 자기를 풀어 줄 수 없는 그런 엄청난 가책 속에 괴로워하고 있었던 베드로, 특별히 이 만남을 세 번째 만남이었다. 두 번 주님과 만났지만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그때 베드로의 마음을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그것으로는 안되었다.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손을 내미시면서 “괜찮다” 이 한 말씀을 해주셔야 했는데, 개인적 대화 없이 3번째 만났다. 그리고 그 첫 질문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였다. 베드로는 분명히 이 사건 때문에 자기를 의지한 것이 얼마나 무모한가를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기록한 베드로 후서에 보면 그의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핍박과 환난이 다가오는 그 위협의 시대에 어떻게 믿음을 지키며 마지막까지 승리할 것인가에 대한 열망으로 차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이 실패가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베드로가 베드로 되게 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실패였다. 그래서 이 단순한 베드로로 하여금 뼈저린 실패를 통해서 “아! 그렇구나. 내가 나를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하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만드신 후에 예수님께서 그를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로 삼으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자기의 아무 의지할 것 없고, 자기를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뼈저린 실패밖에는 남는 것이 없는가 하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았을 때, 그때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 외에는 없다. 베드로가 그랬다. 너무나 많이 실패한 것이 우리의 인생을 실패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실패자체가 우리를 실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가 가져다 준 두려움이상 아무 것도 경험하지 못한, 실패한 후에 또 실패할 것이라는 두려움, 이것이 우리를 실패로 데려가는 것이다. 실패를 통해서 무엇을 깨달았느냐가 중요하다. 내가 얼마나 나를 믿는 것이 무모한 것이고, 그리고 내 마음이 깊은 밑바닥에 이 더러운 찌끼와 불결한 것밖에는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다고 하는 처절한 고백, 처절한 몸부림, 이런 것이 있고 난 후에 비로소 그 사람은 실패 때문에 하나님 앞에 더 훌륭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서 설 수 있는 것이다. 실패하고, 인간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과 자신의 양심에 용납될 수 없는 이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기회를 다시 한번 부여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제 것 베드로가 쌓아왔던 실패를 한번 싹 털어 버리고 다시 시작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이다. 베드로에게 뿐만 아니라 당신을 위해 살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새롭게 하나님 아버지 위해서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주신다. 실패는 베드로에게 있어서 더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데로 나이가게 만들었고 이 실패는 인간적인 의지와 힘을 믿는 대신에 하나님의 은혜를 굳게 신뢰하는 믿음을 가져다 주었다. 만약에 실패했다고 한다면 그 실패 속에서 무엇을 보시렵니까? ‘이렇게 실패했어 나는 안 되는 사람이야. 역시 나는 소망이 없어’하고 주저 앉는 것은 실패한 사람들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니다. 그 실패를 통해서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더 철저하게 이전의 자기의 교만, 그리고 그리스도 없이도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어리석음 그리고 마음과 뜻을 다 바치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오만한마음을 모두 털어 버리는 기회로 삼고, 더 철저하게 그 실패를 통해서 나의 무능을 보고 그 대신 내 무능을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님 의뢰하며 사는데에 만이 참 희망이 있고, 내가 주님의 손에 붙들려 있을 그때에만 내가 정말 주님의 사람일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도록 만들어주신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실패가 놀라운 약이다.
오늘날 존경받으면서 목회하고 있는 몇 분의 과거를 알고 있다. 개척 교회 하다가 쫓겨나거나, 아니면 하다가 하다가 안되서 도망을 친 사람도 있다. 실패를 통해서 그들은 깨뜨릴 수 없는 자기의 아성을 무너뜨리는 방법들을 배운다. 실패는 마음 아팠지만 그러나 성공하는 사람들은 그 실패를 통해서 좌절과 슬픔을 배우는 대신 그 속에서 패배를 통해서 진정한 소망이 하나님께 있음을 다시 배운다. 베드로에게 필요한 것은 전과가 없는 순결함보다도 더 요구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를 신뢰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를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것, 그것이 예루살렘 교회의 후일 지도자로서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 왜냐하면 어차피 그 교회는 예수님께서 이끌러 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면전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마지막에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저주하면서까지 부인을 한 이 베드로에게 다시 한번 영광을 돌리면서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에게는 안 주시겠는가?
그 후로 지난날의 실패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연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지난날의 실패, 지난날의 뼈저린 후회는 묻어두고 그요(?) 속에서 우리는 정직하게 주님이 그 실패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려고 했던 그 교훈을 가슴 깊이 새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실패했느냐고 묻는다면 자존심이 상해서라고 아니라고 말 할 수 있겠지만, 물으시는 분이 모든 것을 알로 계시는 주님이시라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세울 자존심이 무엇이 있겠는가? “너 이렇게 실패했지?” “가슴 아프지만 주님 사실입니다.” “너 이때도 실패했구나” “사실입니다. 주님” “주님이 써 놓으신 장부가 틀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 정직한 말 그러나 그 실패를 통해서 배워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실패를 통해서 우리는 실패하게 만드는 것이 실패자체가 아니라 실패를 통해서 아무 것도 못 배우고 실패를 통해서 또 다시 실패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외에는 아무 것도 경험하는 것이 없을 때 실패는 능히 우리의 인생을 삼켜버리기에 충분하다. 이것은 지난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범했던 죄나 실패를 가볍게 생각하고 대충 덮어주고 빨리 넘어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 정직해 지는 것과 거기에 얽매어 있는 것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사기충천하던 베드로를 완전히 실패해서 이제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쓰임 받을 상황도 못되었고 주님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고 할 지라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베드로는 이제 더 이상 쓰임 받을 수 없다는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상황이 벌어졌는데도 예수님께서 유독 그 사람을 들어서 쓰시고 싶어하셨다. 무엇 때문이겠는가?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후일 마음속에 주님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며 살아가면서도 늘 실패를 벗삼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실패하고 좌절하는 가운데 자신으로는 자신 스스로 세울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에게 주님이 소망을 주시려고 베드로와 같은 실패한 사람을 들어서 당신의 새로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 주시지 않았는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의 직전과 직후에 교회를 어거해 나가고 그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에 불신 세계를 향한 장엄한 복음 선포의 첫 번째 나팔을 불었던 진리의 종으로 예루살렘 거리에 나타났을 때 우리는 더 이상 그 베드로가 새벽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담장 밑에 쭈그리고 앉아서 울고 있는 연약한 베드로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게된다.
우리는 그 능력 있는 복음 선포와 불붙는 확신과 주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던진 그 베드로 적인 열정 신앙 헌신, 그리고 그 결연한 사명자의 모습 속에서 이제 더 이상 실패의 어두운 그림자가 그의 인생에서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본다. 오히려 거리에서 해방된 것을 본다. 실패했기 때문에 미래에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며, 실패했기 때문에 후일 성공해도 그것은 더러운 성공이 될 것이다. 때묻은 성공이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여러 날 다양한 종류의 실패를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도 그렇고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그 직분에 충성하면서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도 그랬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은 팽개치고 도망쳤던 요나와 같은 1년을 살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패한 요나에게도 2장에서 2번째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니라 하신 것처럼. 그런 사람들을 불러서 새롭게 당신의 영광도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그러므로 이런 실패에 있는 사랑하는 지체들은 이 베드로를 거울 삼아서, 베드로의 실패를 거울 삼아서 이러한 예수님이 사랑을 다시 한번 의지하고 지난날, 실패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주를 위해 살고, 주를 위해서 살지 못하고 허비한 수많은 날들이 너무나 서러워서 이제는 남은 날들을 더 분투하며 남들이 한 번 주를 위해서 살 때 두 번 주를 위해서 살아서 지나온 많은 날들을 보다 더 아름다운 헌신과 훌륭한 신앙의 정절로 주님 앞에 갚아서 오히려 우리의 실패를 통해서 우리를 겸비하게 하시고 온전하게 하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더 많은 영광을 돌려드리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3. 다시 새롭게 하소서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애5:21下)
해가 바뀔 때마다 우리는 뭔가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그런 마음을 누구나 갖습니다. 지난해에 경험했던 실패는 되풀이되지 않고 그리고 지난해에 경험했던 선한 일들은 또 그치지 않고 우리 안에 반복되기를 원하는 그런 소원함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법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이 실패한 사람을 다시 부르시는 장면을 우리들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도 역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고자 하시는 그런 하나님의 열심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이 예레미야 애가서는 예레미야가 문자 그대로 눈물로 쓴 선지서 혹은 시가서이기도 합니다. 왜 예레미야가 그렇게 눈물로 이 글을 써야 했겠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멸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 특히 유다 백성들을 향한 심판을 끊임없이 경고하시고 그리고 그 경고를 구체적으로 일러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이키지를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의 예언과 같이 유다 나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한때 왕국의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 보여주던 그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의 말발굽아래 유린되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루살렘 성을 바라볼 때에 마치 순결했던 처녀가 겁탈 당한 것 같은 상황이 되었음을 인식하고 끓어오르는 하나님의 그 애달픈 마음으로 오늘 이 시를 써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는 단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다가 심판을 받아서 황폐하게 되어버린 조국을 향한 연민의 눈물로 쓰여진 시만은 아닙니다. 이 속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그 심판을 바라보시는 평가가 숨어있고 그리고 나아가서는 그 불붙는 진노로 말미암아 황폐하게 되어버린 이스라엘 나라의 그 잔해 속에서 회복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벌써 교훈을 받게됩니다. 언제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향한 소망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분깃이 하나님이시라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분깃 또한 당신이 택하신 성도들입니다. 그래서 그의 모든 즐거움이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살고 죽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그래서 그들의 영혼과 육체의 생과 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고 죽는가에 대해서 아주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여러분들의 삶을 여러분들의 죽어 가는 상황을 지켜보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 시라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황폐하게 되어버리고 결국은 예언이 성취가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멸망당한 상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회복의 약속을 보이시고 그 회복에 대한 전망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이 예레미야 애가를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았다 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생각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버림받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생각일 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예레미야 애가서와 같은 글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한 손으로 범죄한 백성들을 치셔서 그들을 징계하시면서 또 한편으로는 정당하게 징계를 받아서 찢어진 그 백성들의 살을 싸매시고 그 상처를 치료하시는 것을 우리는 보게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른 것들은 다 충분히 알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만큼은 우리들이 쉽게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내가 거의 알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모두 알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이미 파악했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 본문 속에는 오늘 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훼파되어 버린 예루살렘성과 그 성전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눈물로 호소하고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이 선지자는 말하기를 우리를 예전의 날과 같이 그렇게 회복시켜 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전의 날과 같이 회복시켜 주시는 그것은 또 돌이키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옛날과 같이 우리를 회복시켜 달라고 하는 이 기도, 다시 옛날로 돌아가게 해달라는 이 기도, 그것은 어떤 날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지 않고 든든히 서있던 그 때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훼파 되어 버리지 않은 아름다운 성전, 찬란한 영광과 그리고 위용을 드러내고 있던 그 화려한 성전의 때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레미야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러한 외면적인 번성함의 때가 아닙니다. 아직 예루살렘 성이 파괴되지도 않고 성전이 이방인들에게 짓밟히지 않았을 그 때에 이미 선지자 예레미야는 애굽에게 도움을 구하러 내려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눈물로 호소하였습니다. 이제라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돌이키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너희들이 애굽에 도움을 청해서 애굽의 도움으로 바벨론을 물리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고 눈물로 호소하면서 오히려 속히 바벨론으로 하여금 이 나라를 점령하게 하고 너희는 순순히 그 바벨론에게 포로로 끌려가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이 사실을 전심으로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 선지자가 당시로서 보면은 적과 내통한 아주 매국노에 가까운 그러한 예언자였습니다. 마땅히 선지자라면 우리가 단 한 명이 남더라도 우리 모두 힘을 합해서 이 민족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다가 죽자, 그렇게 했어야지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너희들이 순순히 포로로 끌려가는 그 길이 사는 길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만약에 진정으로 자기 백성을 사랑한 예언자였다고 말할 것 같으면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하나님께 떼를 써서라도 '하나님 그건 안됩니다 차라리 저를 죽여주십시오 내 백성들만은 포로로 끌려갈 수가 없습니다' 하고 호소했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레미야는 핍박과 환난이 오고 때로는 투옥도 되고 그래도 그의 마음속에서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 불길처럼 타올랐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외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다른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들으면서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는 그 끔찍한 재앙만을 생각했지만 예레미야는 먼 미래를 내다보았습니다. 그렇게 포로로 끌려가지만 그날이 70년이면 마칠 것이라는 것과, 그리고 그날이 마치고 나면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다시금 고토로 돌려보내셔서 나라는 망하고 민족은 포로로 끌려가도 하나님이 그 구약의 역사를 통해서 성취해 가고자 하시는 구원의 역사와 이스라엘 영적인 백성들의 나라가 속히 도래할 것이라는 전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는 그러한 끔찍한 심판을 하나님께로부터 경고 받았을 때 누구보다도 타는 것과 같은 마음아픔과 안타까움으로 주님의 그 심판의 음성을 들어야 했지만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아니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미 그 속에 약속되어있는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으시는 구원계획, 그리고 심판과 징계 속에서도 결국은 그 모든 관계를 청산하지 않으시고 결국에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루고 싶으셨던 그 원대한 구원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그 속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실을 보았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그렇게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예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예레미야가 그리워하고 있는 날은 환난을 안 당한 때, 왕국이 잘 서 있었던 때 그런 때를 옛날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옛날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던 그 날을 말하고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왜 하나님께로부터 징계를 받게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시던 그 민족이 왜 하나님으로부터 채찍을 맞게되었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어야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주님 자신의 이름의 영광을 땅에 떨어뜨리게 하면서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도록 하나님이 내버려두셨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당시 전쟁에서의 승리는 왕의 승리였고 나아가서 그들이 섬기고 있는 신의 승리였습니다.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이방 신들을 섬기던 신들의 천지이던 그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지도상에서 쓸어버리고 그들 위에 자기 나라의 깃발을 세웠을 때 하나님의 이름은 이방인들 가운데 모욕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실 때 온 인근에 있는 이방백성들이 여호와라는 성경스러운 신의 이름을 들으며 두려워 떨고 경외하고 혹은 믿음을 갖게 하던 그 놀랍고 위대한 역사는 사라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그들이 노예와 같이 부림을 당할 때 하나님의 이름도 모욕 받는 그들 가운데 함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 와서 저렇게 노예로서 천한 일에 종사하는 저 인간들이 어찌해서 우리 나라에 끌려왔대, 아마 그들은 저들이 섬기고 있는 신 여호와라는 분이 계셨는데 그 신이 능력이 없어서 저들을 지키지 못해서 우리의 신들이 그를 이겨 이렇게 그 나라를 우리의 속국으로 삼게 하였다네' 라고 말하였을 것입니다. 혹은 좀더 지각이 있는 사람들은 '여호와라 이름하는 신이 있었는데 저들이 악을 행함으로 그 신이 자기 백성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버리심으로 우리가 그 나라를 삼켜 우리의 속국으로 삼았다네' 라고 말하였을 것입니다.
어느 경우이든 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간 그 상황 속에서 주님의 이름은 땅에 떨어졌고 그렇게 모욕 받으시는 주님의 이름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은 심한 불명예를 받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이 일은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그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우리를 위해 주셨지만 우리보다도 더 사랑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명예 주님 자신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로 세우신 교회라고 할지라도 그 교회가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포기하면 하나님이 지구상에서 당신의 핏 값으로 세우신 교회를 쓸어버리시기도 하고 한 때 복음의 영광으로 충만한 땅들을 이방인들의 말발굽 아래로 내어 주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명예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십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었기 때문에 내 백성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에게 짓밟히고 속국이 된다면 당신의 이름이 어떻게 이방인들 가운데 이스라엘 가운데 모욕거리가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잘 아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스스로 자신의 이름에 먹칠을 할 일을 스스로 행하신 것입니다. 한번의 아픔을 즉각적인 상처로 되돌려 주시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된 우리들을 향하여 오래도록 참으십니다. 이스라엘을 향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러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주님은 오래 참으신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오래 참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최대한 참으시면서 더 이상 참는 것은 이제 차라리 이 교회나 이 백성들을 심판으로 쓸어서 그래서 이방인들 가운데 여호와가 그 백성을 버렸도다 혹은 여호와가 힘이 없어서 그 백성들을 못 지켰도다 이러한 모욕을 받는 것이 차라리 이러한 상태를 계속 내버려둠으로 말미암아 겪으시게되는 그 불명예와 고통보다도 훨씬 더 작다 생각하실 때 하나님
께서는 참으시는 것을 끝내고 결국은 사랑하는 그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인내는 한없는 것이 아니라 한도가 있고 그 인내가 끝나면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이러한 한계를 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면 당신의 이름이 이 땅에서 어떻게 모욕을 받을지 아시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끌려가게 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민족이 크다란 고난을 당하게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포악하고 성질부리는 분노와는 종류가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진노를 통해서도 그 진노 자체가 하나님과의 평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이키는 한 방법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는 반드시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 말 안 듣고 못된 짓하면 열이 확 뻗치지 않습니까? 그때 마구 때리지 않습니까? 그기에 무슨 메시지가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고 단지 복수할 뿐 아닙니까? 학교 교육을 체벌할 것인가 말 것인가 말들을 많이 하는데 획일적으로 말할 수가 없어요. 어떤 사람은 진짜 때리게 하면 안됩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선생님 한 분은 얘들을 마구 패면서 "야 이 자식들아 내가 사람되라고 때리는 줄 아느냐 내가 화가 나서 때리는 거다, 맞고 너희들이 사람되든지 말든지 나는 이미 관심도 없다" 라고 한 적이 있는데 어떻게 그런 소리를 선생님이 하고있는지 모르겠어요. 왜 그때 용기 있게 선생님 그런 말씀하면 안됩니다 라고 말못했는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선생님이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우리의 감정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 속에서도 하나님의 이성과 사랑은 그 진노 안에 그대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노 가운데서 바벨론으로 내어 주시면서도 물밑에서는 이 백성들을 심판대로 내어주시면서 이 백성들을 심판 속에서 연단해서 그래서 새로운 그루터기를 가지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 하나님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데, 그러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그 자체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선지자가 그것을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피눈물나게 고생을 해도 나는 너희에게 가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너희를 버리시되 아주 버리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포로로 끌려가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드러날 것이다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선지자가 옛날로 다시 돌아가게 해달라고 지금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이 장면은 무엇이냐 하면 왕국이 서고 안 서고 그런 심판을 당하고 안 당하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옛날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화목했던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있었던 때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사랑이 있었고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들이 보여주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쌍방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는 일방적인 하나님의 사랑 하나만 가지고서는 우리들이 살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아무리 눈물어린 사랑으로 여러분들을 향하여 뜨거운 사랑을 부어주셔도 여러분들이 그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에 대해서 사랑으로 반응하지 않는 한 그 사랑이 여러분들의 인생에 직접적으로 감동과 감화를 주어서 그 사랑을 따라서 살게 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어떤 이야기가 되느냐하면 모든 사람들을 주님이 뜨겁게 사랑하셔도 진짜 주님을 사랑하며 사랑하는 삶을 산 사람들은 주님이 자기를 향하여 베푸시는 그 뜨겁고 놀라운 사랑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것을 깨달은 사람들 마음속에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뜨거운 사랑의 소원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어느 순간에 깊이 하나님 없이 살았던 삶을 회개하고 주님의 그 뜨거운 사랑을 체험했을 때 즉각적으로 깨닫는 사실은 주님의 이 사랑이 오늘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주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셨는데 내가 너무나 많은 세월동안을 그 사랑을 모르고 살았다라고 하는 자책감이 밀려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있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다운 회개는 항상 자기의 의가 설자리가 없게끔 만듭니다. 자기 의에 빠져있는 사람들, 내가 무엇도 하고 무엇도 하고 나는 특별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신앙생활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참된 자기 부서짐의 회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자만에 빠지는 것입니다. 선 줄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넘어진 채로 발견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회개하는 그 순간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계속되어왔구나 하는 사실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확실히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부어주시는 그 사랑 하나만을 가지고는 인격적인 위탁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내가 체험하고 그리고 그 사랑에 어울리는 사랑의 반응을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하여야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한 성도가 뒤로 물러나지 않고 은혜 가운데 거한다라고 하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은혜 가운데 거한다라는 말은 그렇게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느껴지고 그래서 그 사랑이 느껴지는 즉시 또 하나님을 향한 자기의 사랑이 촉발되는 이러한 순환관계가 원활하게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데, 그래서 잠시 침체된 것 같으면서도 찬송을 부르거나 기도를 하면 주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가 새롭게 느껴지고 그 사랑을 느끼면 다시 한번 자신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살든지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그리고 이렇게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해주신 그 하나님께 나도 사랑을 드리면서 살아야 되겠다라고 하는 그러한 이 사랑의 교류가 끊임없이 촉발되는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은혜 가운데 거하는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은혜 가운데 거하는 신앙생활은 항상 풍부한 정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가 있고 주님의 이러한 특별한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만큼 밖에 살지 못하는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후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왜 이렇게 쓸모 없는 나 같은 인간을 분에 넘치도록 사랑하셔서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몸둘 바를 모르게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하는 자기 부족을 뼈저리게 깨닫는 자기 깨어짐의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가운데 거하는 삶입니다.
거기서 이 선지자가 한없이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그러한 통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에 예루살렘 성전이 예루살렘을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뭘하고 뛰어다닌 줄 아십니까? 난리 통에 집에 장롱 속 깊이 감추어 두었던 금 은 패물들을 들고 나와서 어디 양식 좀 사먹을 데가 없나하여 찾아다녔습니다. 왜냐하면 난리 통에 생필품이 바닥이 났기 때문입니다. 전쟁 나면 돈도 필요 없고 금도 필요 없습니다. 쌀 많이 가진 사람들이 왕입니다. 공습경보 한번 났더니 5분만에 슈퍼마켓의 먹을 것들이 다 동이 난 것을 여러 해 전에 보셨죠? 그런 사람들은 뭔가 아는 사람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예루살렘을 지켜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들이라면 그것이 진정한 신앙이라고 할 것 같으면 지금 예루살렘이 그렇게 비참하게 훼파되었으면 그러면 막 몸부림치며 마음 아파해야 되지 않습니까? 아니면 최소한 혼란을 일으켜야 되지 않습니까? '아 이상하다 우리가 믿었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래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관심도 없습니다. 그들이 생각했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종교적인 요행수였습니다. 종교적으로 요행수를 바란다고 하는 것과 신앙한다라고 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하나님과의 화해를 그리워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주실거야 하는 것은 종교적인 요행수를 바라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이루어져도 감사하지 않고 안 이루어져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어차피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이 세상사람들이 재수나 운수라고 말하는 그 단어에다가 하나님이라고 바꾸어 놓은 것뿐이며 문화의 문제이지 신앙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상태에 있을 때 그때를 지금 그리워하고 있는데 그때의 특징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시는 것을 느끼고 그 하나님께 마땅한 사랑을 돌려드리는 그러한 상태입니다. 그때를 이 예레미야가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것은 부정확하고 그것은 우리가 더 잘 압니다. 남들이 여러분들의 신앙을 아주 칭찬할 때, '아 당신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리스도인이시군요, 아 자매님은 순결한 영혼을 가지신 것 같습니다, 당신은 정말 거룩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당신은 신령한 하나님의 종인 것 같습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 마음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적이 없으십니까? 사람들이 아무리 나를 향해 찬사를 던지고 당신과 같은 믿음만 가졌다면 좋겠다고 말하고 당신은 신령하고 등등 얘기해도 그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지 아닌지는 자기가 가장 잘 압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속아도 하나님은 알고 그리고 나는 압니다. 내가 은혜 가운데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 남들이 나에게 뭐라고 평가하든지 하나님이 나와 화목한 관계에 있는지 아니면 내 인생에 있어서 주님이 거침돌이 되고있는지 그것은 내가 가장 잘 압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한해 어떻게 사셨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는 교회에 미친 사람, 예수에 빠진 사람, 교회밖에 모르는 사람, 하나님의 일 외에는 아무 것도 못할 것 같은 사람 그런 별명을 수없이 많이 받았지만 그러나 하나님과의 평화를 얼마나 누리면서 사셨습니까? 주님과의 평화를 누리던 그 특별한 옛날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분들에게는 그런 날이 없을지 모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런 날이 있을 것입니다. 깊고 넓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알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부으시는 그 자비와 사랑의 놀라운 표현력(?), 깊고 은밀한 곳에 혼자 있을 때에 외롭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었던 그러한 때, 그래서 주님의 그러한 사랑을 몰랐을 때 그 수많은 한숨들이 전날의 그 수많은 두려움들이 변하여 기도가 되고 그리고 그 많은 한숨들이 변해서 노래가 되었던, 내가 그 분 안에 있고 그 분이 내 안에 있는 그런 사랑의 교류가 있었던 그때 그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던 때 그 옛날 거기로 돌아가지 않고는 어떤 것으로도 우리의 인생은 행복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 속에 이미 주님을 만난 이후로부터 세상에 있는 어떤 것들로도 채워질 수 없는 영혼의 빈 잔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그 사랑이 가득 부으셔서 사랑으로 말미암는 만족이 아니면 살수 없도록 그렇게 새롭게 지은바된 인간들이며 피조물들입니다. 물론 이 세상의 즐거움이나 쾌락, 잠시 누리는 소유의 기쁨들은 이러한 주님과의 평화가 없는 것을 잠시 잊게 만들어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생을 포기한 사람들이 한 잔의 술에 취해서 잠시 식음을 잊는 것과 꼭 같습니다
술이 깨고 나면 다시 차가운 현실이 이전보다 더 선명하게 더 크다란 무게로 자신의 삶을 엄습하는 것처럼 우리도 이 하나님과의 평화 거기에서 맛보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통 그것을 향하여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든지 옛날로 돌아가야 될 사람들이다 하는 것입니다. 오늘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한해동안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는 일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진전을 보게 되었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닫고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다가 모든 의미에 있어서는 진보를 거듭했지만 이러한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 안에서 사랑의 정진을 이루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에 결국은 옛날이 옛날로 끝나버리고 물러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게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마음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다시 그 옛날을 그리워하여 아버지 앞에 호소하고 있는 이 기도 속에서 여러분들은 이전에 여러분과 나누었던 그 친밀한 사랑의 관계, 주님이 여러분 안에 계시고 여러분이 주님 안에 있는 그러한 관계로 돌아오기까지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그런 관계를 그리워하고 계신 하나님과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있는 착한 신앙의 목마름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지난 한해에는 정신없이 살아오면서 우리의 인생과 신앙의 본질을 놓쳤지만 그러나 이제 새로운 하늘을 맞으면서 우리는 분명한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내 살을 베어내고 내 뼈를 깎아서라도 내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해주시옵소서, 그래서 옛날의 그런 사랑의 관계로 돌려달라고 기도하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는 이러한 하나님과의 평화를 선지자가 그리워하고 있는데 그가 그리워하는 때는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살던 때입니다. 순종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비례한다라고 하는 것이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아주 재미있는 것이 뭐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이 하나님이 그들을 향하여 부어주시는 사랑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바치는 그 사랑에 비례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많이 사랑해 주시는데도 거의 순종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사랑을 깨닫고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생겨난 사람들은 그 사랑의 분량만큼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고 그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을 입증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뜻을 헤아리고자하는 관심을 갖게됩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사랑한다고 사탕발림을 많이 해도 그가 가지고있는 심중의 뜻에 대해서 그것을 알고자하는 관심이 없는 사람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이러한 사실이 더 잘 진실로 입증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고백 속에서도 거품을 좀 빼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사하고 이야기하면서 '목사님 제가 주님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그런 얘기를 그렇게 일생에 몇 번 하는 얘기를 만날 때마다 자꾸 하면 제 눈에는 사람이 자꾸 코미디언처럼 보입니다. 정말 그런 결심을 갖고있는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농담하듯이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일제 시대 때 순교의 위기가 왔을 때 신사참배 않으면 교회 문을 닫아버리고 감옥소에 다 집어넣고 죽여버린다고 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예화) 일제시대 때 신사참배 요구와 협박에 호언장담하던 목사가 제일 먼저 신사참배 하고 뒤에서 앉아 눈물만 흘리고 흐느끼던 무명의 성도 한사람만 투옥 당한 이야기 하나님을 진정 가득 찬 가짜 고백, 뻥 튀기성 신앙의 과시 이런 것들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하고 그기에 순종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가득 있었을 때에는 정말 하나님께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순종하는 일에 있어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그 백성들의 집합 전체가 그렇게 자기들을 다 드려서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정신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선지자는 지금 그런 날들을 아주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의 신앙에 대한 어떤 향수에 빠지는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어떤 사람들은 과거에 진짜 신앙생활을 워낙 잘했기 때문에 향수에 빠지는 사람도 있지만 또 옆에서 보면 별것 아니었는데 마치 옛날에 먹던 된장국은 낭만이 있고 지금 먹는 된장국은 시시한 것 같듯이 그렇게 흘러간 옛날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흘러간 것은 쓰레기통도 예쁘게 보이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그런 기억들 때문에 과거에 대한 향수에 빠진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과거를 추억하는 것은 좋은데 대부분 관심사가 어디에 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해주신 것 그 때는 기도응답도 잘되고 그 때는 뭘 달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달라는 대로 다 주셨고 그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서 영향을 받았고 등등 그러한 영웅주의적인 추억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시니까 진실일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과 진정으로 평화할 때에는 우리들이 하나님께 잘 순종하며 산 때라는 것을 기억하고 깊이 그리워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서 하나님께 잘 순종하며 사는 그런 삶이 있으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더 충만하게 부어지고, 또 그런 삶이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사랑을 베풀어주실 때에 느끼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그런 하나님을 향한 순종이 있었던 때 그때를 지금 이 선지자가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볼 때에 정말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눈물이 흐르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눈물이 흐릅니다. 왜냐하면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가 알고있는 자기에게 평화를 주신 그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 속에 함께 있다고 하는 그 마음이 두 사람을 하나가 되게 만들어 주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논리적으로는 은혜 받은 사람들이 은혜 못 받은 사람들과 좀더 깊이 사귀면서 그들에게 은혜를 나누어주어야 하는데 사실 은혜 받고 나면 은혜 받은 사람들하고만 만나서 은혜 받은 이야기하고싶고 은혜가 없는 사람이라도 자기 은혜 받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하고 만나고싶지 동문서답하는 사람하고 만나고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런 참된 사랑이 있고 하나님과의 평화가 있을 때 그 때에는 사람들은 순종하는 사람들을 보고도 감격하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을 보고도 눈물 흘리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계명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그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그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그러한 순종하는 삶을 통하여 입증할 때 그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했던 그 선지자의 마음에는 얼마나 큰 그리움이었겠습니까?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는 이 쌍방적인 언약의 관계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속에서 찬란하게 꽃필 때,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있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열방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며 여호와는 그 나라의 왕이시로다 라고 하는 그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삶을 보여주었던 그때 그 옛날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그러한 놀라운 민족적인 순종을 회복하는 그런 일들을 못보고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는 죽어도 자기가 외치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 씨가 되어서 이스라엘 역사를 움직이고 그 역사를 통해서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열심이 미래에 꽃피울 영적인 이스라엘 왕국 이것을 미리 바라보면서 위로를 받으며 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예레미야는 이미 패역한 시대에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일치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따르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그러한 민족적인 순종의 모습을 보기 어려운 때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도 역사를 읽었을 것이요, 분명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 시대 속에서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또 자신의 경험이나 경건한 동료들을 보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선지자의 마음은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 그래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순종해서 너희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계명이 한없이 달고 그 계명에 순종하며 살아가던 때가 한없이 그리워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 다른 종류의 그리움을 가져야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예전에 누렸던 많은 축복들 중에서 특별히 순종의 축복,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 요즘은 이렇게 힘들고 한가지 계명에 복종하는 것이 큰 몸부림치는 것 같은 싸움을 동반하여도 불가능하게 느껴지는데, 예전에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살아가던 때 얼마나 내가 하나님과 가까웠는가 하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정말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을 때에는 주님이 우리에게 '너 이렇게 살아야된다, 이전에는 네가 몰랐지만 지금부터는 이렇게 살아야된다' 이렇게 가르쳐주실 때 얼마나 기뻤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지키면서 살아야하는 계명을 깨달을 때에는 그것이 인생의 무게가 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마음대로 살던 길인데 이제는 그 길로 가면 안되고 이 길로 가야된다고 가르쳐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주님이 지어주시는 짐이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뛸 듯이 기쁜 겁니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면 이렇게 넓은 길로 걸어가지 않고 좁은 길로 걸어가도록 하나님이 나를 인도해 주실까? 아 정말 감사하다.' 그런 생각을 하게되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이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리워하고 있는 그 옛날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던 그 옛날에는 하나님의 계명을 그렇게 순종하며 살고자하는 그런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깨닫는 그 일에 매우 뜨거운 열심을 갖게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역사를 보면 항상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부흥이 일어날 때에는 모두 성경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18세기경에 스코틀랜드에 있는 성직자들이 교회 역사상 가장 기다란 고백으로서 하나님 앞에 성직자들로서 잘못 살았던 죄를 모두 통회한 기록이 나옵니다. 그 기록을 보면 별별 것들이 다 나오는데 그 중에 하나가 뭐냐하면 이 책 저 책 뒤적거리고 인생을 낭비하며 살았던 죄를 회개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정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뜨겁게 회복되는 그 속에서는 그 뜨거운 관심은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주님을 향하여 가지고있는 이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하는 방법이 여기에 다 나와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출판계에서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100가지,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100가지에 대한 서적이 연애하는 쪽에 별로 달란트가 없는 사람들에게 불티나게 책이 팔린 적이 있습니다. 누구 마음을 사로잡고 싶은 겁니까? 대상도 없는데도 책이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누군가에게 사랑 받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고 하니까 그런 책들이 불티나게 수십 만 부가 팔리면서 사람들이 밤 세워서 읽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랑해야할 분이 누구 신지 아직까지도 번지수를 못 찾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분이 자기가 어떤 분이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고 계십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자 하는 깊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서 도외시되거나 형식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아무리 많은 성도들이 있어도 목회자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더듬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번 쭉 훑어보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거의 만나지 않아도 주일 한번만 보아도 여러분의 영혼의 상태를 거의 파악할 수 있습니다. 정말 마음속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의 화해를 누리고있는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서 더 잘살아 드리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괴로움입니다. 어떻게 하면 나를 사랑하사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신 주님의 뜻에 더 합당하게 살아드릴 수가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 모든 답을 설교가 주고 성경이 줍니다. 그러니까 탐구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있는 사람들은 주님을 믿었는데 나중에 타락했고 구원을 받았는지 아닌지 등등 그런 질문은 하지도 않습니다. 그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이 다음에 천당 가느냐 못 가느냐 그것보다도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서 자기를 다 버리신 이 좋으신 하나님, 때로는 그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바로 살지 못하지만 포기하려고 해도 포기할 수 없고 또 포기하고 싶지도 않은 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어떻게 이어가고 그 관계 속에서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고있는 사랑을 어떻게 순종하는 삶으로 표현할까라는 열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집착과 뜨거운 집념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또 교회적으로 그러한 소망을 간절히 갖고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너 댓 살 밖에 안되었지만, 그런데 한 교회가 스무 살 서른 살이 되었어도 누가 이 교회를 가장 오래 다닌 교인일까 또 그 긴 세월동안을 같은 교회에서 같은 설교자에게 설교를 들으면서 그렇게 이 교회에 가장 오래 다닌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기보다는 예배시간에 누가 가장 잘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부서지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며, 그래서 아침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성실한 사랑과 자비하심에 대한 감격이 새롭기 때문에 그 새로운 감격을 느낄 때마다 어떻게 하면 내 인생을 좀더 공들여 살아서 나를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시고 지금도 아낌없이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삶을 살까 이런 고민을 하고있는 성도들이 있는 교회, 이러한 것이 저에게는 그리움으로 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한 해에는 감사한 일도 많았지만 뼈저리게 후회되는 일들도 많지 않습니까? 1-2년밖에 안되는 그 짧은 기간 동안에 이미 저는 한없는 행복을 맛보던 사람이 한없는 좌절을 동시에 맛보는 것을 그 짧은 기간 동안에 저에게 보여주었던 지체들도 있었습니다. 제가 보았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더 잘 보았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감사한 일도 많았지만 후회한 일도 많은 것입니다. 그렇게 후회할 일도 많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런 후회 속에서 후회로 끝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옛날로 돌이키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거기로 데려가실 수 있을까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런 하나님과 화해를 누리며 살아왔던 충만한 사랑과 교제, 충만한 순종과 헌신이 있었던 그러한 때에 대한 그리움이 우리에게 한처럼 맺혀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처럼 나는 가진 것은 없지만 그러나 지금 가지고있는 것을 다 잃어버린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러한 옛날을 다시 찾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주님이 내가 거기에 있는 것을 기뻐하시고 그리고 내 인생을 주님으로 가득 채운 주님과 합일된 그러한 삶을 살수가 있다면 미련이 없습니다 라는 고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배 시간이 되기 전에 잠깐 창세기를 읽었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에녹이 65세에 무드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더라가 나오고 뒤에 아들 무드셀라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버지는 365년을 살았지만 무드셀라는 995년을 살았습니다. 살다가 죽은 이야기만 나오는데 아버지는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함이 없는 천년 가까운 삶과 주님의 임재가 있고 동행함이 있는 300년의 삶,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여러분은 어느 인생을 택하겠습니까? 잠시 머무는 이 세상은 모두가 지나가는 것들뿐이고 현란한 몸짓으로 우리를 향해 손 흔들지만 그러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모두 변하는 것들뿐입니다. (찬송가 449장)
이런 옛날로 돌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다시 사명으로 돌아가라Ⅰ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
오늘 이 부분은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의문을 많이 갖게 하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를 비롯한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좇아가겠고 또 죽는데 까지 내가 가겠습니다. 그런 고백이 나오는 장인데 아직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는 치욕적인 고백을 경험하지 않았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베드로에게 다가오고 있는 시험을 미리 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시몬아 시몬아” 이렇게 부르실 시몬 베드로의 연약한 면, 즉 베드로야 “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너는 시몬 이었음을 기억하라.”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부르실 때에도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셨습니다. “나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가 베드로여”라고 부르지 않으시고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사단의 아들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이 하려고 청구하였다.” 사단이 키를 흔들면 밀이 까부러지는 것처럼 너희를 자기 맘대로 하기 위해서 너희를 넘겨달라고 간청했지만 예수님이 기도한 것은 너희를 위해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해서 기도한 사실이 주목됩니다.
그러면서 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부분에서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만을 위해서 기도하셨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제 시몬을 향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를 위해서 기도하였다. 그리고 돌이킨 후에는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이것은 회개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형제는 단수로 번역되었지만 실상은 군집을 의미합니다. 이 부분을 보면서 우리는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돌이킨다라는 것은 결국 범죄 한 것을 전제로 합니다. 우선 베드로가 실패하지도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실패할 것을 내다보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베드로의 실패를 미리 보실 수 있다는 것이 이해는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상하게도 예수님이 아직 베드로가 실패하지도 않았는데 실패할 것을 아시고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더욱 나아가서 ‘돌이킨 후에는’ 이라는 말에서 기정 사실로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가 돌이킬 것을 확정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를 믿으셨다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성령을 통해서 회개케 하실 것임을 미리 확정하셨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이런 식으로 가룟 유다를 다루시지 않았을까 의문도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가룟 유다를 대하셨다면 유다가 목을 메어 떨어져서 배가 터져서 죽는 비참한 말로를 경험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세세 무궁토록 저주를 받는 그러한 불행한 일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만 그렇게 대하시고 가룟 유다에게는 그렇게 대하지 않으셨는지 그 명쾌한 대답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 졌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기도 전에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아시고 간절히 기도하셨으며 그리고 그 기도를 통해서 이 실패한 베드로를 돌이키시고 돌이킨 그를 원래 그에게 주셨던 사명에로 돌아가세 하실 것을 예수님이 작정하신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은혜가 베드로 한 사람에게 국한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에 분명히 베드로와만 대화를 나누시는 장면이 나오지만 그러나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 그 모든 제자들이 이렇게 돌이켰고 그래서 죽기까지 주님을 위해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신명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베드로 한 사람에게 주신 약속이라기 보다는 베드로를 통해서 베드로를 다루시는 모습을 보면서 다른 모든 사람들을 그와 같이 다루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그것도 역시 베드로 개인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만약에 베드로 개인의 문제라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단 둘이 만나서 결판을 지었을 것입니다. 모든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베드로와 대화를 나누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통해서 실패한 베드로를 회복시켜 주신 것은 예수님께서 그 본보기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실패한 가운데 낙담해 있는 이들에게 “너희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너희가 내 양을 먹이라”는 예수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고백과 그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구령의 소명을 함께 연결 시켜서 확증하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깊이 보면서 우리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음을 직감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이 짧은 32절 하반절에서 “돌이킨 후에는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우선 첫째는 예수님께서는 한번의 실패로 인간을 완전히 매장하시는 그런 예수님이 아니시다 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세상 사회에서는 한번 실패하면 매장되기 쉽습니다. 교역자의 세계에서도 ‘그 사람은 진실성이 없다’ 라고 소문이 나면 매장되기 일수입니다. 신의를 한번 져버린 사람은 다시 그 신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한번 그 신의를 져버린 것에 대해서 열 개를 보상해도 그 신의를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세상은 사람을 아주 쉽게 매장해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렇게 다루시지 않습니다. 사실 예수님도 인간이셨으니까 인간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베드로의 실패는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뼈저린 상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칼날이 오가는 순교의 자리에서 우물쭈물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지 않다가 그런 일을 당했던 것도 아니고 아주 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주님이 계시는 바로 그 면전에서 저주하면서 부인한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제자에게 그런 뼈아픈 배신을 당했을 때 얼마나 깊은 상처가 되었을지 생각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깊이 믿었던 사람들이 자기를 배신했을 때, 그리고 신의를 저버렸을 때, 자기가 진심으로 축복하고 싶었던 그 사람이 뒤에서 자신을 저주할 때 차라리 자신의 손마디 하나가 잘라지는 고통이 훨씬 참기 쉬울지도 모릅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그런 경우를 몇 번 겪었습니다. 마치 가슴을 칼로 도려낸 뒤 그곳에 소금을 뿌리는 것같이 아픕니다. 그러면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인간과 하나님의 다른 점이 인간은 그러한 배신을 느낄 때 인해 계속 그 마음이 오그라들고 그 아픔이 복수심과 미움, 적개심으로 바뀌어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자비와 긍휼로 인해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를 배신할 때 그 배신으로 말미암아 내가 당한 아픔과 고통 상처 그것만을 깊이 끌어안는 대신 하나님은 그렇게 배신하고 주님을 멀리 떠난 인생들이 자신을 배신 한 것에 대한 복수심보다는 그렇게 자기를 스스로 배신하고 떠나갔기 때문에 영혼에 어두움이 드리워져서 그래서 범죄하고 하나님과 불화하고 그늘에서 살아가야 하는 그 파리한 영혼의 비참함에 대해 불쌍한 마음을 가지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의 그 사랑과 긍휼에 넘치는 자비를 묘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얘기가 성립됩니다. “돌이킨 후에는 형제를 굳게 하라”이렇게 말씀하신 데서 이미 우리는 베드로가 실패할 것만을 미리 바라보신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 마음속에서는 여러 가지 작용이 다 지나갔습니다. 베드로가 실패할 것을 먼저 보시고 실패한 것을 보시고 마음 아파하신 것도 지나갔고 감정 정리가 다 끝난 후에 이 베드로를 끝까지 사랑하고 붙잡아 주실 것을 결심하시고 그리고 돌이킬 힘도 주시고 돌이킨 후에는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이런 은혜가 베드로에게만 주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억지입니다. 우리 모두 사람들이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습니다. 이런 모든 사람들이 또한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겠는가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첫 번 교회를 여시면서 낙인찍힌 한 때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 적이 있던 실패한 베드로를 들으셔서 예루살렘 교회의 첫 번째 지도자로 삼으셨습니다. 교회들 가운데 목회자를 바꾸면서 은혜롭지 못한 일들이 있음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웬만한 교회에서는 목회자를 청빙할 때 10년 전에 있었던 일까지 다 캐내어 봅니다. 그래서 실패한 흔적이 있으면 자기들은 매일 실패하면서도 자신들의 목자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베드로가 실패할 것을 보셨는데도 그의 실패로 말미암아 주님이 마음 아파하실 것까지 모두 감정정리 하시고 돌이킬 것을 확정적으로 말씀 하셨습니다. 주님이 실패한 사람들을 고치셔서 새로운 일꾼으로 부르시는 것은 주님의 주특기입니다. 주님이 쓰셨던 위대한 인물들 가운데 뼈아픈 실패를 경험하지 않았던 사람이 어디 있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물론 실패를 경험한 모든 사람들이 모두 귀하게 쓰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실패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진실로 그 실패가운데서 다시 새롭게 시작하게 하심으로 자기를 의뢰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부르시고 다시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만을 의뢰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그랬고 초대교회의 위대한 역사를 열었던 열 한 명의 제자들이 모두 그랬습니다. 바울이 그러했고 사도시대 이후 최대의 교부로 일컬어지는 어거스틴 같은 사람은 이러한 일의 대명사였습니다. 그가 쓴 저작 가운데 최대의 걸작이 은총론 입니다. 은총론하면 일단 신학에서는 어거스틴에게 귀를 기울일 정도로 훌륭합니다. 그가 그렇게 이교도 사상에 빠지고 음탕한 죄에 빠져서 완전한 패인까지 갔다가 자기를 건져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놀라운 돌이킴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역사를 보면서 그는 평생 깊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이 두 단어가 뼈저리게 새겨졌습니다. 사도 바울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은총입니다. 어거스틴이 완벽한 신학자는 아니지만 사도시대 이후로 하나님의 이 은총에 대해서 가장 해박한 글을 남겼습니다. 그의 타락과 실패가 그것에 눈뜨게 만든 것은 아닙니다. 그와 함께 타락했던 많은 사람들은 죄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이 새롭게 시작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는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자신 속에 묻혀있는 더러운 죄성 속에서 인간이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 타락한 죄인일 뿐이라고 하는 종교개혁 시대의 교리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나 요한 칼빈 같은 분들이 그 어거스틴에게 신학적인 자양분을 빨았다고 봐야 합니다. 특별히 이 은총론에 있어서 더더욱 루터의 은총론은 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깊은 섭리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사실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지난날의 실패를 거울 삼아서 무엇인가 새롭게 해보자고 하는 대신에 지난날의 실패에 대한 너무 많은 기억들이 우리들로 하여금 그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새로운 기대조차 갖지 못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짓밟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다루시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실패가 너무 크고 실패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돌이킬 수 없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주님께 대한 심각한 오류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실패를 아직 하지도 않았고 할 것이고 또 자신이 할 것도 모르고 또 회개를 받기도 전에 이미 주님께서는 감정을 정리하시고 이 사람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을 회복시키셔서 그래서 주님의 나라에 수종을 드는 첫 번째 지도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크게 쓰임 받은 인물이었는데 크게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가장 슬퍼하시는 것은 지난날의 뼈저린 실패를 오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보다 더 크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 곧 주께서 새롭게 하실 위대한 일들에 대한 기대보다는 끊임없이 과거를 추억하면서 거기서 실패한 자신의 처지를 곱씹으며 절망을 깊이 간직하는 이러한 모습들을 주님이 너무나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실패한 베드로를 건지실 수 있었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실패도 주님이 그 실패한 가운데서 우리들을 새롭게 일으켜 세우셔서 그래서 그 실패 때문에 오히려 온전하게 된 사람으로 만드실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은 언제나 망가진 사람들을 고치시는 일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의원이 필요하다. 인자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실패했다고 해도 우리는 그렇게 실패했기 때문에 더더욱 주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 실패하고 주님이 원하시지 않는 길로 갔었다고 한다면 그랬기 때문에 더더욱 주님을 뼈저리게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자기는 전혀 고쳐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멍청한 사람들이고 두 번째는 망가졌는데도 그대로 살겠다고 우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사람은 자신이 망가진 것을 인정하고 자신의 실패를 뼈저리게 인식하면서도 실패보다도 더 큰 다시 새롭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바라보고 나오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예수뿐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나를 버리지 않네
오늘도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에게 용서와 사죄의 확신을 주시고 그 실패 때문에 오히려 더욱 찬란한 삶을 주 앞에서 살아서 그렇게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일들에 있어서 대표적인 본보기가 됩니다. 역설적인 이야기겠지만 스데반을 죽이는데 가 편 투표를 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혹독하게 박해를 하면서 사도 바울이 살았기 때문에 그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손으로 그 놀라운 기적을 이루고 자기가 선포한 복음이 파죽지세로 불신세계를 유린하면서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는 놀라운 부흥을 보았을 때 그는 교만해 질만한 이유가 너무나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도대체 천지가 창조된 이래 하나님께서 누구를 사용하셔서 할래 받지도 않은 이방인들에게 천국의 놀라운 맛을 보게 만드시고 그 은총의 세계아래 들어오게 만들었습니까? 창조이래 최초의 사건이었고 그 포문을 여는 그 놀라운 일에 하나님이 바울을 사용하셨습니다. 베드로로 그 빗장을 여셨지만 그러나 노도와 같이 복음의 능력을 몰아가서 이방의 세계를, 불신의 세계를 복음으로 초토화시키고 십자가의 깃발을 꽂은 장본인은 바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까지만 베드로의 이야기가 나오고 그 다음부터는 바울의 이야기가 끝까지 나옵니다. 이 사도행전을 바울 행전이라고 불러도 좋은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가 무엇을 자기의 것이라고 숨겼습니까? 오로지 자기를 위해 자기의 생명을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 잡혀서 가문도 버렸고 친척도 가족도 문벌도 버렸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해로 여길 뿐만 아니라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분처럼 세상에서 수고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자기가 무엇인가 의미 있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위대한 역사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뼈 속 깊이 파고드는 옛 생각이 있었는데 바로 핍박 자요, 포행 자요 그리고 교회를 박해하던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그가 뼈저리게 실패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드러나 그래서 결국 그 놀라운 위대한 성취를 보면서도 그는 정말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라고 그리고 그 놀라운 성취들은 이전에 주님을 대적하며 살았던 자신의 옛 삶을 생각할 때 자기 같은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성취였기 때문에 만약 이 성취 속에서 무엇인가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하는 사상 속에서 일생을 살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만약에 지금 여러분들이 뼈아픈 실패를 하고 있다면 기뻐하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돌이키기만 하면 그 뼈아픈 실패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능력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마르지 않는 은총의 영광이 드러나서 그런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보다도 더 훌륭하게 주님의 섭리 가운데서 새롭게 하시고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위대한 영광을 돌려드리게 될 것을 기대하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돌이킨 후에는 네 형제를 굳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굳게 하다’는 것은 믿음을 ‘돈독하게 하다’ ‘강화시키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게 하시면서 그에게 상기시켜주시는 것이 있는데 ‘네가 한번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너에게 주었던 고유한 그 사명의 자리를 잃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범죄 했을 때는 용서를 빕니다, 어그러진 길로 갔기 때문에 마음에 원하지 않는 깊은 시련을 당할 때는 그 험한 시험 물 속에서 자기를 건져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리고 자기는 자기 눈에 좋은 대로 선택했기 때문에 위기를 만나게 되었을 때 자기의 힘이 부족하니까 이 위기 속에서 자리에게 도움이 되어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도움을 받는 사람들은 그렇게 원하는 사람보다는 훨씬 적은 숫자입니다.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문제는 자기 급한 것만 생각하지 주님이 자신을 그렇게 건져주심으로써 주님이 무엇을 하시려고 하는지 관심이 없거나 매우 적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그렇게 돌이키게 하신 후 간절히 원하시는 것은 주님이 쓰려고 했던 그 자리에 우리를 갖다 놓기를 원하십니다. 주께서 불러주셨는데 충성스럽게 하나님 앞에 살지 않고 그 직분을 버렸기 때문에 고난과 위기를 당하게 되었다면 돌이키게 해달라고 아버지 앞에 기도하는 동시에 “한번만 돌이켜주시면 내게 주신 그 자리로 돌아가서 내게 주신 그 사명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깊은 고백이 동반된 간구이어야 합니다. 사라들은 사명을 너무나 가볍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명은 존재의 이유입니다. 그래서 사명이 다하면 하나님이 버리십니다. (집회 갈 때 마이크가 망가져서 버렸던 예)
하나님 앞에서 주님이 우리를 물론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사명과 동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각자 에게 주신 고유한 자리가 있는데 우리가 실패할 때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자리를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 앞에 깊이 회복을 위해서 기도하고 돌이켜주시도록 다시 새롭게 시작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우리는 동시에 ‘하나님이 나를 돌이켜주시면 하나님이 나를 원래 두셨던 그 자리로 돌아가서 내가 충성스럽게 하나님 앞에서 살겠다’라는 마음의 각오를 하나님 앞에 새롭게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 돌이킨 후에는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볼 때 주님의 관심은 베드로의 실패보다는 그의 사명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안 그러면 좋았겠지만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겨 쌈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실패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그렇게 실패하면서도 여전히 주님이 그에게 세워주신 고유한 그 자리에 서 있으려고 했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관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회복을 위해 기도할 때도 순종하는 자리에 돌아와서 기도하는 것과 불순종하는 자리에서 기도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세워주신 그 자리가 어디였습니까?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은총 주셨을 때 세워주신 그 자리가 어디였습니까? 지금 그 자리에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이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새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 할 때에 여러분들이 서 있는 그 자리는 바로 주님이 처음 불러주신 그 자리에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최소한 그렇게 ‘주님께서 다시 새롭게 시작하게 하시기만 하면 나는 목숨을 걸고 기꺼이 주님이 나를 세워주셨던 그 자리 대접받는 일이 없고 고난이 있고 그리고 시험보다도 더 큰 시련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 자리로 돌아가겠다’라고 하는 거룩한 결의가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이 처음에 세워주셨던 그 소명의 자리로 돌아갈 때에만 회복이 의미가 있는 것이고 그 자리에서 다 충성할 때에만 주님이 새롭게 시작하게 하시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 우겨 쌈을 당하고 그리고 잠시 넘어졌어도 결국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우리의 허물로 말미암아 그치지 않고 다시 우리를 새롭게 일으키고 우리를 새롭게 건져주시고 우리를 새롭게 시작하게 하실 때에 그쳤던 주님의 역사도 다시 계속 되어 가는 것이 드러날 때 그 때 하나님이 진정으로 우리의 회복을 인해서 받으실 그 영광을 몸소 받으시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지난날의 많은 실패를 인해서 얽매인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과거의 실패를 계산하면서 앞으로도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안됩니다. 오늘 이 베드로를 보십시오. 아직 회개하지 않은 사람을 용서하시고 용서하지도 않은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그의 잊혀졌던 그 사명의 자리로 돌려보내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불순종이 무엇이고 하나님 앞에 우리를 다시 새롭게 시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상황은 어떤 상황입니까?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원래 세워 주셨던 자리는 어디입니까? 거기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주님이 우리를 새롭게 하시면 우리는 그 자리로 돌아가서 나의 이 모든 용서와 그리고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모든 하나님의 회복을 다시 시작하게 하신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알고 실패하기 전 보다 더 진실하게 더 주님밖에 없는 것처럼 그런 충성스런 생애를 살아서 오히려 우리의 실패를 통해 주님의 성공이 드러나고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그런 본보기가 되는 삶을 살아서 주께 영광을 돌리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5. 다시 순종으로 돌아가라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욘3:1-2)
성경 속에서 요나 만큼 우리에게 이야깃거리가 되는 사람도 아마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요나는 다윗이나 삼손, 혹은 골리앗보다도 우리에게 훨씬 더 자주 이야깃거리가 되곤 하는 사람입니다. 또 성경 속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 가운데 가장 크게 비꼬임을 당하는 인물중의 한사람이 바로 이 요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요나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며 살았다는 데에만 시각을 맞춰서 보면, 우리는 계속 요나를 보면서 조롱하고 싶은 마음만 들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해인가 저는 이 성경말씀을, 불순종하는 요나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 그를 다루시는 거룩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주권에 초점이 맞춰진 상태에서 읽어 갔을 때, 전자의 관점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많은 진리들을 이 작은 성경 책 속에서 찾아 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런 관점에서 이 요나를 생각해 보면서 그를 통해서 나타나신 하나님과, 우리가 다시 새롭게 시작 할 수 있도록 길을 여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요나는 니느웨로 가도록 하나님께 명령을 받은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그 명령을 매우 못 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감히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니느웨가 아니라 다시스로 가는 불순종의 장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선지자로서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면, 그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당대에나 그 앞선 시대에 혹은 후의 시대에 기라성 같은 수많은 선지자의 반열에 들 수 있을 정도의 영적인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영적인 인물이 되기 위해서 그는 모든 선지자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그 엄청난 소명의 사건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인생을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결단하는 전환점이 되는 하나님과의 장엄한 만남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지자로서의 본분을 버리고 감히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자기가 그곳으로 가고 싶으니까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파헤쳐 보면 감히 요나가 이런 불순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그 명령이 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이 이스라엘의 매우 중요한 적군이었고 이스라엘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강대한 국가였으며, 그들의 남하정책의 희생의 제물로 이스라엘이 수시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압박과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민족을 하나님이 멸망시키시기로 했다고 하는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외치라는 사명은 전혀 기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처럼 멸망시키실 자들을 예고 없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뭔가 선지자를 보내서 예고하실 때에는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바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선지자들의 역사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경고를 통해서 그 백성들이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자비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는 국수주의적인 선입견, 그 앗수르라는 이방민족에 대해서 한이 맺힌 마음 등으로 말미암아 도저히 이 명령에 순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일본과 북한의 경기에 일본을 열심히 응원할 사람이 없을 것이며 저 역시 심정적으로 북한을 응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이 당연한 것이기는 하지마는 그러한 사실은, 그런 마음을 타고 들어온 바르지 못한 불순종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여기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당시에 흐르던 지역신사상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 모든 나라 사람들은 신들이 각기 다스리는 구역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선지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하찮은지는 시편의 기자가 잘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의로운 손이 나를 붙드시나이다" 하나님이 어디든지 계시다라는 이 사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매우 독특하고 고유한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선지자는 도망가면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이 자기를 간섭하고 통제하실 수 있는 범위는, 자신이 배를 타면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 동기에서 그는 선지자로 할 수 없는 가장 담대한 불순종을 감행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 매우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 인간이 살면서 모두 적절히 불순종을 합니다. 지난 삼일 동안도 여러분들이 불순종하지 않고 살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 자체가 불순종입니다. 누구든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모두 불순종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런 불순종하는 삶을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런 것들을 정리( ? )해야합니다. 불순종한 삶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어차피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온전한 순종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불순종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저 완전히 순종하며 살려고 노력을 해봐야 쓸데없는 것이고 그런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자체는 터 놓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살려고 애를 쓰다가 잘못하는 것과 터놓고 막 살아버리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나가 바로 그런 행동을 했습니다. 이것은 불순종의 질에 있어서 하나님 보시기에 아주 악질적인 불순종이었습니다.
몇 가지 점에서 악질적인데 첫째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이 불순종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불순종을 해도, 하나님은 그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다루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던 사람들의 적은 불순종은 크게 다루어지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매우 미천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매우 조금밖에 맛보지 못했던 사람들은 큰 불순종도 적게 다루어집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맛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지자로서의 가장 기본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라는 그 명령 자체를 거절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의 불순종은 악질적이었습니다.
두 번째 그의 불순종이 악질적이라 할 수 있는 이유는, 불순종의 방법이 면밀 주도했다는 것입니다. 우발적인 불순종이 아니라 불순종을 하기로 아주 철두철미하게 계획을 세웠습니다. 베드로의 불순종은 어떻게 보면 우발적이었습니다. "새벽 달 울 때 난 괴로웠어 풍랑이일 때 난 무서웠어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아 이 세상 끝까지 주님을 위하여 죽을텐데" 사람들이 에워싸고 한패임을 추궁했을 때 그는 무서웠습니다. 그 때 아니라고 답한 것은 우발적이었습니다.
반면, 가룟유다의 불순종은 어땠습니까? 면밀 주도하고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미리 떠보았습니다. '만약에 내가 예수를 여기서 판다면' 이것은 이루어지지 않은 가정법 아닙니까? 얼마 줄 것인지 거래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어떤 신호를 짜서 예수를 넘겨 줄테니 그 신호가 이뤄지면 누가 와서 잡고, 잡으러 갈 때에는 검과 망치를 가지고 가자고 하는 철저한 준비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그런 식의 범죄는 용서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 성경에서 보면 의도 속에서 범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는 사함을 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나의 불순종이 바로 그러한 종류의 불순종이었습니다. 배를 탔으니까 불순종하러 가기 위해서 주님이 사명을 저버리고 배 삯까지 다 준비를 하고, 요즘으로 말하면 갑판 위에서 쓸 밀짚모자와 썬그라스 까지 준비하고 배에 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의 불순종은 아주 악질적이었습니다.
그의 불순종이 악질적이었던 세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아주 준엄한 사명을 너무 손쉽게 저버린 것입니다. 이 사람이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사실 이게 뱃속이라 하지만 구약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의견과 모든 정황을 다 종합해보면 배가 아니라 후두부입니다. 여러분들이 밥 먹다가 밥풀 걸리는 부분입니다. 코도 아니고 입도 아닌, 밥풀 딱 걸려서 재치기 하면 탁 튀어나오는 데 말입니다. 뱃속에 들어갔으면 위액에 다 용해되어버립니다. 후두부입니다. 그런데 고래나 상어처럼 큰 고기에 들어가면 경우에 따라서는 그 크기가 조그마한 골방 정도의 크기라는 것입니다. 그 곳은 공기가 소통되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거기서 살아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얘기는 제가 요나서 강해를 하면서 많이 했습니다. 요나서 강해를 들어보시면 거기에 큰 물고기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아주 재미있습니다. 꼭 한번 들어보십시오
물고기 속에 들어가기 전까지 자기가 사명 버린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장면이 한번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풍랑이 일어난 다음에야 비로소 자신이 불순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그의 불순종은 악질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장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요나에게 임하는 장면을 보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에게 임하는 이것은 단순한 의사소통이 아닙니다.
요즈음은 자기 과시적인 표현들을 많이 해서 제가 청년들이나 교인들에게 절제를 시킵니다만, 성경 읽다 깨달았으면 정직하게 "오늘 성경을 읽는데 이런 말씀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해도 귀 있는 사람은 그것이 상당히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다 압니다. "오늘 아침에 성경 읽는데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치 직통파처럼 너무 그렇게 폼 잡지 말라는 말입니다.
어떤 때는 상담과 심방을 할 때 커다란 착각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를 봅니다. 자기는 계시에 빠졌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공상에 빠져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스스로 그러한 권위를 가지고 자신을 얽어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셨다고 말입니다. 좀 그렇게 너무 폼 잡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다할 때 어떤 때에는 "내가 성경을 읽다가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라고 말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을 정도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이례적인 무게를 가지고 자기 가슴에 깊이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체험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올 때 그 체험의 강도가 획일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라'는 선지자들의 기록에 나오는 이 표현은, 단순히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다가 깨닫는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을 깊이 파고 들어와서 그 말씀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여러 가지 잘못된 생각이나 사상들이 그 말씀의 놀라운 체험에 의해서 부서지고 깨뜨려지는 내면 세계의 변화를 동반하는 것입니다.
저는 방위출신이기 때문에 총을 사격장에서밖에 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일선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은 가끔 총으로 짐승 잡은 얘기들을 합니다. 날아가는 새의 경우, 총으로 갈기면 총알이 똑바로 가서 꽂히는 것이 아니라 총구를 보면 나선형으로 되어 있고 총알이 발사되면서 회전을 하고, 가다가 목표물에 맞으면 살을 뚫고 가면서 회전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중에서는 똑바로 회전하는데 이것이 살이나 뼈 등에 부딪치면 그 다음에는 저항을 받아서 속을 파 뒤집으면서 회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한 대 탁 맞으면 바늘로 찔린 것처럼 상처가 나는 것이 아니라 내장 등에 들어가면 다 뒤집으면서 관통하는 것입니다. 좀 섬뜻한 비유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강력한 말씀의 체험은 그런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탁 임하면서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파헤치고 들어가서 그렇게 스핀을 먹고 회전하는 커다란 총알처럼 우리내면의 세계를 파헤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적인 혁명이 일어나도록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선지자들은 다 미친 사람들입니다. 미치지 않고는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미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보면 정상적이던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 완전히 뒤집어버려서, 세상에는 살고 있지만 천상의 사람처럼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동의해줄 수 없는 일에 대해서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세상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생명을 걸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서도 보면 많지는 않지만 정말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강력하게 하나님을 만나고 속이 뒤집혀버린 사람들은 정신나간 사람들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일제 시대에 순교하고 공산치하의 그 총칼 앞에서 신앙의 지조를 굽히지 않고 초로와 같이 사라져 간 것입니다. 이슬과 같이 사라져 간 것입니다.
그런 체험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것은 그냥 그렇게 단순하게 성경을 읽다가 무엇을 깨달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실지로 하나님이 지금 우리의 예배 가운데 친히 임하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기절 안하고 살아남을 수 잇는 사람이 몇 명쯤이나 될지 궁금합니다. 그런 하나님과의 아주 범상한 영적인 체험 속에서 주님의 말씀이 이 선지자에게 강력한 권세를 가지고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첫 번째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 경험했던 그런 경험과 유사한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체험이 이 선지자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렇게 악질적이고 의도적이고 계획되어 있는 불순종을 한 사람에게 어떻게 하나님이 복된 만남을 또 주시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말 해봐야 무슨 소용 있습니까? 성경은 그렇게 하나님이 하셨다고 보여줍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했습니다. 이 요나는 하나님 앞에 악질적인 불순종을 했고 그것은 의도적, 계획적이었으며 면밀 주도하게 준비된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불순종에 대해서 아주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시스로 가면서 머뭇거리는 것을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걸어가면서도 양심조차 마비된 것처럼 배 밑창에 내려가서 실컷 잠을 자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영혼을 깨워야할 사람이 오히려 죄인들에 의해서 육체적인 잠이 깨워지는 신세가 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선교의 주도권을 연약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붙잡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사용하고자 하시는 계획이 요나의 불순종으로 좌절되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그 뜻대로 이루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요나의 섬김을 통해서 선교를 이루어야하겠다는 계획은 좌절된 것처럼 보였지만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계속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받은 은혜에 비해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불순종, 그가 체험한 하나님의 사랑에 비교할 때에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배역, 사명을 저버린 것 등을 하나님께서 말끔히 치워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이 사람을 만나주셔서 두 번째로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로서 사역할 수 있는 관계들을 새롭게 회복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잘 한다 하더라도 못하는 사람과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을 잘하고 스스로 대견해하며 머리를 쓰다듬는다 할지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과 차이가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 하나, 남이 듣지 못하는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과 남이 의지할 바가 없어서 어찌할 줄 모를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의뢰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는 그런 것들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그 사람을 놀랍게 다시 만나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실패한 과거에 대해서 너무 지나치게 연연해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잘못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은, 밑도 끝도 없는 영적인 침체에 빠지는 중요한 이유가 됩니다. 그래서 마귀는 우리를 끊임없이, 스스로 어떻게 돌려놓을 수 없는 그러한 과거의 일들로 그 실패 앞에 직면하게 함으로써 기를 펴지 못하게 만드는 전략을 집중적으로 사용합니다.. 사단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결코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워주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면 자신은 설 수 있는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이나 마귀의 송사로 말미암아 양심의 가책을 받는 모습과 하나님 앞에 참회하는 모습은 매우 흡사합니다. 우울하다는 것과 거기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이 얼마나 갈피갈피 무지와 편견으로 가득 찬 존재인지 모릅니다. 그렇게 괴로워하면서도, 과거의 잘못에 대해서 이처럼 반응할 수 있는 자신을 대단히 대견스럽게 생각합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옛 실패를 딛고 신앙 안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뻔뻔스럽다고 정죄하려는 욕구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사람들의 차이를 면밀하게 분별해 낼 수 있습니까?
이따금 저는 글 속에서나 대화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부패한 존재이고 연약한 존재인지를 아주 진실하게 토로하는 데도 역겨운 느낌을 받을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 고백을 하면서까지 그렇게 죄에 대한 과거의 실패에 대해 집착하는 자기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하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런 실패에 대한 집착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아주 안이한 그리스도인, 죄에 대해서 얼렁뚱땅 넘어가는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정죄하는 사람들을 자주 봅니다. 그런데 그것은 고도의 외식입니다. 정말 자신의 죄의 문제나 불순종,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잘못으로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깊이 괴로워해 본 사람은 속히 결론에 도달합니다. 왜?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실패에 대한 유일한 탈출구는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용서하셨다고 하는....
문제는 그렇게 간절하게 옛날의 실패와 과거의 불순종 그리고 현재 자신의 죄에 대해서 고백을 하는데, 그 고백 곧 과시를 위해서 기울이는 노력가운데 삼분의 일만 사죄의 은총을 구하는 데 기울였어도 벌써 용서받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죄인의 마음이 컴퓨터보다 복잡하고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해서 끊임없이 집착하는 것은 사죄의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여기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나는 계획적인 불순종을 했고 악질적이고 면밀 주도하게 하나님의 사명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백방으로 노력한 사람입니다. 선지자는 그 부름의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온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함으로 순종하는 백성들 되게 만드는 것이 선지자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백방으로 노력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을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다시 그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죄인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사죄의 은총을 베푸시면서 "너희는 빛으로 나아와 이제 나의 사죄함을 받고 나와의 관계를 회복하자"고 부르실 때에, 그 음성을 듣고 빛 가운데로 나아오지 않고 어둠 속으로 더 깊이 숨으려고 한다면, 그가 어둠 속에서 흘렸던 뜨거운 눈물은 하나님을 찾던 눈물이 아닙니다. 그것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과거의 어떤 실패가 있습니까? 지난 한해 동안 뼈아픈 어떤 실패가 있습니까? 그것이 지금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지금 저는 과거의 실패가 오늘의 신앙생활에 영향을 주는지 안 주는지에 대한 문제를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과거의 그런 실패에 집착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집착하고 회복될 수 없는 실패에 사로잡혀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결국은 실패 때문에 뼈아프게 눈물을 흘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 하나님 앞에서 살고 싶지는 않은 사람입니다. 세상을 비관하는 모든 사람이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며 눈물 흘리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무너진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실패했지만 자신의 실패를 그대로 인정하고 하나님께 사죄의 은혜를 구하고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보다는, 돌이킬 수 없는 옛 실패에 매달려서 그 실패에 마음 아파하는 자신을 대견스럽게 여기는 그런 사람들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오랫동안 영적인 회복의 빛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이 요나가 다른 사람과는 비교될 수 없는 중대한 선교의 소명을 받은 선지자였지만, 이 사람도 역시,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한 한 마리의 어린 양일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의도적이고 면밀 주도하게 불순종했어도 결국 이 사람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두 번째의 말씀이 임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그런 영혼의 세계를 회복시켜주신 것입니다.
만약에 이렇게 불순종했고 실패한 요나에게 하나님이 두 번째 찬스를 주셨다면, 또한 동일한 성품을 가지신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이렇게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믿어야합니다. 그런데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있습니다. 1장에서 3장으로 바로 넘어온 것이 아니라 1장과 3장 사이에는 2장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가 회개하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새롭게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 위해서는 결국은 불순종하던 자리에서 회개하는 일이 있어야합니다.
덜 순종하는 것과 불순종하는 것이 비슷하지만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덜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길로 가기는 가는데, 마음을 다 바쳐서 중심으로 애정을 가지고 그쪽 길로 가지 않는 것이 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하면 충분하지 않고 어떤 순종이라고 해야합니까? 온전한 순종입니다. 순종은 자꾸 배우면서 계속 온전해지는 그런 개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지상생애를 가리켜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웠다" 라고...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생애가 순종의 생애였지만 고난을 통해서 그분의 순종하는 삶은 더 완전한 순종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물론 그 분에게 있어서 더 완전한 순종, 덜 완전한 순종이라는 개념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런 개념과는 비교가 안될 것입니다. 이미 지닌 순종의 수준이 워낙 높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에는 연약한 육신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그 역시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워야될 필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순종은 그것이 확실히 순종인지 불순종인지 구별하기 쉽지 않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온전한 순종이 존재하기 때문에...
(예화) 옛날 하인들 중에는, 이를 갈며 억지로 종살이하던 사람도 있었지만 주인을 정말 사랑하며 종살이하던 사람도 있었음.
남북전쟁시 노예해방으로 풀어주지만 주인 곁을 떠나지 않으려는 노예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주인의 차가운 가죽신을 숨기려 했다는 오해를 받으면서도 추운 겨울에 품에 녹이던 종의 이야기.
종으로 섬길 때에 마음으로 섬기는 것과 의무로 섬기는 것이 차이가 나듯이, 순종도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온전해지기를 배워야합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숨질 때 하는 말 이것일세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그렇게 말하는데 이것과 비례해서 더욱 순종 더욱 순종이 됩니다.
마음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전 방위적이고 총체적으로 순종하는 삶이 이루어져야합니다. 그래서 온전한 순종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불순종은 다릅니다. 그 길로 가긴 가는데 덜 간다든지 달려가지 않는 개념이 아니라 딴 길로 가는 것입니다. 딴 길로 가기 때문에 불순종에서 돌이켜 서는 데는 반드시 터닝포인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결단이 필요하며 그 곳으로부터 돌이켜 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고민과 괴로움, 그리고 회개의 눈물, 기도와 찬송 또한 봉사도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유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하나님은, 그가 정말 고의적이고 계획적이며 악질적으로 불순종했는데도, 실패한 요나에게 그의 영혼 속에 다시금 말씀하시는 기회를 열어주셨던 것처럼, 실패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를 상대하지 않고 외면하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여러분들은 천국에서 만날 수 없는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실패해본 적이 없는 성도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도 성도들의 찬송제목은 우리 주 예수 어린양의 구원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는 실패했다는 이유, 불순종했다는 이유, 심지어는 그 불순종이 우발적이 아니고 악질적이었다는 것 때문에 그 사람을 완전히 버리시는 일은 그의 성품에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요나처럼 아주 면밀하게, 아마 그는 하룻밤 정도 책상 앞에 앉아서 불순종 계획서를 짰을지도 모릅니다. 시간 별로 말입니다. 돈은 어디서 꾸고, 배표는 어디서 사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도망칠 지에 대한 계획을 면밀 주도하게 짰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찾아오셔서 다시 말씀하시는 두 번째 만남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 전에 있어야 되었던 것은 자기를 돌이키는 회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요나의 입장에서 보면 회개가 너무 추상적인 얘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장을 통해서 요나의 회개가 지닌 특징 두 가지를 찾아 봤습니다. 첫째는, 조금 전 읽은 성경 구절입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요나가 불순종을 통해서 물고기 속에, 후두부에 들어갔으니까 아마 볼만했을 것입니다. 물이 들어 올 때 미역줄기 같은 것도 들어왔을 것이고, 성경에도 이렇게 써있습니다. "물이 나를 둘렀으며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이것은 미역을 뒤집어 쓴 것입니다. 내 영혼까지는 바로 목구멍입니다. 그래서 거기가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회개한 것도 물론 하나의 동기는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번 1장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요나는 이미 불순종할 때 생명 잃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1장 12절을 보면, "바다가 점점 흉흉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잔잔해지랴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이 사람은 나쁜 의미에서 이미 생사를 초월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순종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하나님 앞에 "배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물고기 속에 들어가서 당했던 죽음에 대한 공포가 회개를 불러왔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이 실감나는 한 원인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 사람은 1장에서 회개했을 것입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물고기 가시라도 붙들고 숨을 쉬는 환경이 더 좋은 환경인지, 배가 금방 파선될 것처럼 파도가 넘실대는 데 사람들이 들고 던지려고 흔드는 상황이 더 무서운 상황인지 생각을 해보기 바랍니다. 여기서 회개했을 사람이 저기서 회개 안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1장에서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신앙이 아니고 완전히 개베짱입니다. 그러니까 불순종을 생명 걸고 목숨 다 바쳐서 한 것입니다. 앗수르 놈들이 내 선포를 듣고 하나님의 자비를 얻어 구원을 얻는 꼴을 보기보다는, 내가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우리교회에서는 아무리 연구대상이라고 이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회개한 것은 죽음의 공포 때문이 아닙니다. 4절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주의 성전을 바라겠나이다." 이 구절의 의미는, 이 사건을 통해서 물고기 속에 있으면서 뼈저리게 체험한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보다도 더 무서운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버림받는 것의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절 전체는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고민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불순종이 왜 무섭습니까? 하나님이 불순종과 순종에 대해 일당 주듯이 즉시 즉시 갚으십니까? 하나님께서 물론 한번 순종할 때에 즉각적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때도 있습니다.
( ? )할 불순종을 두려워하는 불순종할까봐 두려워하는 이유는 축복을 못 받는다든지 이 다음에 주님한테 혼난다든지 그런 생각 때문에 불순종을 두려워한다면 그 사람 아직까지 그리스도의 순종에 학교에 입학 안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수준이 그렇습니까? 그렇게 불순종 했다가 반쯤 죽으면 어떡하지, 그런 것입니까? 이렇게 불순종 하다가 하나님이 한번 박살 내실 걸 그런 생각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불순종하면 지난달에 산 내 집 날라 가지, 그런 생각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도 다루시지만 그러나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앞에 산전 수전 겪으면서 신앙생활을 쭉 해온 거룩한 성도가 불순종 할까봐 깊이 괴로워하고 어찌하든지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애를 쓰는 이유는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반 죽으면 어떡하지, 그 다음에 뭐 하나님이 주신 축복 빼앗아 가면 어떡하지 이 자리에서 날 쫓아내시면 어떡하지, 실직 당하면 어떡하지, 그런 것 때문에 불순종 할까봐 고민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하나님 앞에서 순종의 축복과 불순종에 책망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그런 것들은 사실은 부차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불순종 하게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깊은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선지자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걸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혼자 있는 것도 상황에 따라서 낭만적일 수도 있고, 가슴을 찢는 것처럼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같이 혼자 있는 거지만 파아란 해변, 뭐 가끔 보면 무슨 하와이로 날라 오십시오 뭐 싱가폴로 날라 오십시오 그런 여행 광고 많이 나옵니다. 아주 광고를 아주 사람을 홀리는 광고를, 어느 해변을 쫙 그려놓고 Visit easy forget hard 찾아오기는 쉽고 잃어버리기는 어려운 곳입니다. 오십시오 그런 것들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같이 혼자 있는데 파아란 바다, 은빛 모래, 그리고 그 야자나무 같은 것들이 쭉 뻗어 있습니다. 거기에 이렇게 그물로 된 침대를 하나 탁 매달고 바람이 솔솔 부는데, 그래서 수영복에다가 까운이나 하나 걸친 차림으로 거기에 벌렁 누워 있습니다. 손에는 쥬스를 하나 폼 나게 들고 그것도 혼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혼자 있는 것은 덜 무섭습니다. 덜 무서운 것이 아니라 혼자 안 내버려둬서 고민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 두 사람도 탈 수 없는 작은 조각배에 혼자 있습니다. 그런데 돛대도 부러지고 삿대도 없습니다. 돛대도 없고 삿대도 없습니다. 큰 풍랑이 불었습니다. 배는 뚫어졌습니다. 바가지로 물을 퍼내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이따금씩 넘치는 파도가 배를 완전히 뒤집어 놓을 것처럼 난리를 기승을 부립니다. 그런데 혼자 있습니다. 아까 혼자는 되보고 싶은 혼자인데 지금 혼자는 절대 되보고 싶지 않은 혼자입니다. 그렇다고 그럽니다. 그렇지요 그게 무엇 때문입니까? 상황이 다릅니다. 환경이 다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선지자 요나는 평탄하게 배를 타고 가고 있는 동안에는 혼자라는 사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사실이 엄청난 무게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물고기 속으로 들어가고 나니까 그 경각간에 죽음을 오가는 그 상황, 물론 그는 죽음정도는 두려워하지 않는 오기를 가지고 하나님께 불순종했지만 그러나 그는 당장 죽어버리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을 거기서 경험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다라고 하는 영혼에 깊은 단절입니다. 그것을 여기서 물고기 속에서 경험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스올” 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구약 사람에게 있어서 이 스올은 지옥입니다. 지옥 거기에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불가능한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차단된 지대를 가리키는 죽음의 장소를 뜻하는 말입니다. 거기에서 회개하는데 무엇을 깨달았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절대적인가 하는가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라고 했냐하면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주의 목전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시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쫓아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나님이 은총을 안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더 이상 기도해도 안 들어주시고, 은혜를 구해도 은혜를 안 주시고, 용서를 빌어도 용서를 안 해주시고, 도와달라고 그래도 하나님의 대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 되어 있어도 자기는 어떡합니까? 주의 성전을 바라겠나이다. 그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은 나에 대한 당신의 관계를 포기 하셨을지라도 나는 당신과의 관계를 포기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여기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순종에서 하나님 앞에 다시 그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회개하여야하는데 그 회개가 어떤 종류의 회개이냐 하면 내 마음대로 불순종하는 그것에서 얻는 즐거움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는 그것이 얼마나 뼈저린 아픔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실패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회개 없이 다시 새로 시작할 기회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실패한 사람이 한번 더 다시 새로 시작하지 못하고 실패한 채로 자신의 구원조차 의심하며 죽어 가는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만납니다.
하나님은 죄가 많거나 불순종이 너무나 노골적이고 악랄했기 때문에 기회를 안 주시는 법은 없습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회개가 없는 것입니다. 그 회개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하면 그 불순종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 된 것을 경험하면서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린 것이 얼마나 뼈저린 실패인가 하는 것을 처절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요나가 경험 한 것입니다. 지금 요나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 모습이 여기에 안나옵니다. 그는 이미 생사를 초월한 오기로 말하자면 배 째라는 오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 이였고 신앙으로 말하자면 그런 것을 초월한 사람 이였습니다. 그런데 뼈저리게 경험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불순종해서 자기가 원하는 길을 가는 동안 철저히 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그래서 지금 이제 선지자로서 소명을 받은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생사를 오가야 하는 경각간에 자신의 목숨이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처지에 자기가 놓여있게 되어있다는 이 현실이 이 요나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시작하기를 원합니다. 실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실패했습니다. 이미 과거에 일어나 버렸습니다. 불순종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런데 불순종했습니다. 일어나지 말았어야했고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인데 이미 그렇게 일어나 버렸습니다. 그럼 어떡합니까? 하나님 앞에 죄송한 이야기지만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염려하고 고민한들 과거를 돌려놓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도 우리가 실패한 과거를 앞으로 내밀면서 원상복구 해놔 원상복구하기 전 까지 난 너 같은 인간하고 상대도 하지 않을거야.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믿으셨다면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당신의 고귀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게 하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셨겠습니까?
주님이 이 방면에 있어서 우리가 처절할 정도로 무능하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은혜의 구원에 길을 주님이 열어주신 것입니다. 실패했죠? 불순종 하셨죠? 거기에서 무엇을 깨달으셨습니까? 지금도 여전히 불순종에 길을 가고 계시는 길이죠? 여전히 돌이키지 않는 분들이 있죠? 저는 여러분들이 무엇에 불순종하고 어떤 형편에서 그 불순종의 길을 돌이키지 않는지 다 알 수는 없지만 한가지 확실하게 아는 것은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던 그 예민하고 친밀한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던 그 교제의 때가 사무치도록 그리워지는 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날 동안은 편하지만 기도를 하거나 말씀을 대하면서 자신을 성찰하면서 내가 지금 여전히 불순종 가운데 있으며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중요한 단절이 있다는 자각이 밀려들어 올적마다 여러분들은 아무 것도 스스로 행할 수 없는 무기력에 빠지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인정해주는 것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압니다. 어떡해야 됩니까? 거기서 정직하게 요나처럼 오늘 고백을 해야합니다.
하나님이 내가 이러한 저런 욕심과 이러한 저런 사랑, 그리고 이러한 저러한 편견 때문에 또 어찌할 수 없는 이런 저런 연약한 이유로 주님 앞에 불순종했고 불순종했을 때에는 내 나름 데로 이 불순종을 통해서 내가 만족을 얻으리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불순종하고 나니까 내게 오는 만족은 없거나 매우 적은 것 이였고 그리고 내게 더 크게 잃어버린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당신과의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뼈아픈 이 불순종과 거슬림을 통해서 그 주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저는 이제 주님이 혹시 저와의 관계를 포기하신다 할지라도 저는 주님과의 관계를 포기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내게 끝까지 은총을 베푸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저는 은총을 베푸실 주님의 손만을 바라보다 죽을 것이며 주님이 저를 안아주시고 용납해주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저는 주님이 계신 보좌로 달려가다가 엎드러져 죽을 것입니다.
그런 고백이 하나님 앞에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요나가 이 사실을 여기에서 뼈저리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순종하는 길에서 순종의 길로 돌이킨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가장 넘치는 위로는 무엇이하면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것들이 아니라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닫쳤던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열리고, 다시 기도의 은혜가 부어지기 시작하고, 다시 하나님이 나의 영혼 속에서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지난날의 여러분들의 실패가 무엇이든지 실패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지금 가혹할 정도로 긴 시간동안 하나님 앞에 단절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불순종을 통해서 잃어버린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정직하게 고백하고 그리고 무엇을 희생해서라도 그 관계로 돌아가야 되겠다 라고 하는 처절한 하나님을 향한 고백과 그리고 간절한 애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두 번째로는 그는 약속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그것이 무엇 이였는지 우리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몇 절에 나오는가 하면 9 절입니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서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바치기 위해서 무언가를 하나님 앞에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 받지 않은 사람은 이 서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서원을 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인지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서원을 했습니다. 아마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살겠다 라고 하는, 아골 골짝 빈들이든지 어디든지 주께서 보내시는 곳이면 가겠습니다 라는 헌신의 고백이든지 뭐 그런 종류의 것 이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여튼 서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불순종을 통해서 이 사람이 이 서원이 생각난 것입니다. 서원이 생각났다고 하는 것은 은혜가 은혜 받은 것이 생각났다는 것입니다.
참 놀라운 것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공짜로 주어지는데 일단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 표시를 안 하는 법 이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헌금을 이야기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물론 헌금도 중요한 은혜 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한 교회가 얼마나 헌신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지는 그런 헌금 생활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것 보다 더 포괄적입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여러분들이 한번 경험하고 그래서 이례적으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큰 은혜를 베푸셔서 말할 수 없는 감사한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밀려와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산산이 녹였을 때 그래서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일 그때에 그런 은혜를 모두 받았을 때에 공통적인 반응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앞에 모든지 드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네
사랑하고 의지하여 주만 따라 가겠네
다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모두, 서원은 강요에 의한 서원이 아닙니다. 시편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후에 나오는 시인들에 고백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주께 한 서원을 갚겠나이다. 이런 고백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새롭게 깨닫고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갔다 라고 하는 표입니다.
그러니까 이 선지자는 이렇게 아주 면밀 주도하게 노골적으로 그리고 배짱으로 불순종한 악질적인 불순종한 사람 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다시 그에게 찾아 오셔서 말씀해 주실 수 있도록 하나님이 새로운 기회를 주시기 전에 그는 회개는 회개였는데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렸던 평화를 기억하는 회개였고 또 하나는 자신이 받았던 하나님의 은혜를 추억하는 회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 앞에 자기가 약속했던 것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들의 실패가 정말 아무리 뼈저리고 노골적이고 그리고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실패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제 보면 그 실패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시 새롭게 시작 할 수 있는 기회를 안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그 실패 속에서 불순종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속에서 여러분들에 불순종과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베풀어 주셨던 그 은혜를 대조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불순종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와 어울리는 것입니까? 불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이러한 삶이 주님이 이전에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던 신실한 사랑과 변함없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던 값없이 베풀어 주셨던 그 놀라운 은혜에 어울리는 반응이냐는 것입니다. 그걸 깊이 회개해야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어떠한 사랑을 주셔서 우리같이 쓰레기 같은 사람들을 천에 하나 만에 하나 불러서 그 아들의 피로 우리를 씻기시고 할 일 없어서 이 세상에 뜨내기처럼 왔다가 사라질 벌레만도 못한 사람들을 고귀한 자리에 세워주셨습니다. 각자 주님을 섬기며 은혜 받은 데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이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 각자 각자를 주님이 보시기에 가장 좋은 자리에다 세워 놔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자기를 여기 세우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고백이 있습니다. 불순종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거기에서 세우신 것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잃어버리거나 그 사실을 기억한다고 하더라도 심히 재수 없는 자리에 자기가 놓여졌다 라고 하는 불만적으로 가득 찬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에 아무리 뼈저린 실패를 하고 작년에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마음을 지키기는커녕 아예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면밀 주도하게 계획서까지 짜 가지고 하나님 앞에 대적하고 불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못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깊은 참회,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앞에 약속 한 것을 다시 이루어드려야 되겠다 라고 하는 간절한 참회하는 그 소원에 회복, 그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되찾으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보니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그런데 이게 1장 2절에 나오는 이야기와 똑같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똑 같습니다. 결국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그 지점이 어디입니까? 잃어버렸던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우리는 베드로의 실패를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게 급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불순종했으니까 과거에 대한 가책이 있습니다. 그래서 용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그 다음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우리를 사랑 해주셨으면 좋겠지요 그렇죠? 그리고 불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삶을 살았으니까 이제는 과거는 모두 무효로 돌려주시고 새 출발하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바램은 이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각도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그 시각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불순종은 사명을 전제로 할 때에 불순종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명이 없는데 무슨 불순종이 있습니까.
여러분, 수 백 마리 의 돼지를 갖다가 우리에다 넣고 그냥 꿀꿀이 죽 먹이면서 키우는데 불순종, 그것들이 무슨 불순종합니까 왜! 돼지에 대해서는 기대하는바가 없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그냥 빨리 먹고 많이 커서 빨리 죽는 것밖에 없습니다. 인물이 잘 생긴 것도 그들에 사명이 아닙니다. 그냥 살만 많이 쪄서 빨리 식탁에 올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렇게 모여 있을 때는 다릅니다. 불순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각자각자 그들에게 정해주신 미션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명 데로 주님이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하지 않았으면 다시스 가는 배를 탄 것이 무슨 문제가 됐겠습니까 사명이 있으니까 불순종이라는 말이 성립을 하는 겁니다.
자! 여러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만약에 하나님이 지난날의 여러분들이 노골적이고 계획적인 불순종을 모두 용서해준다면 어느 자리로 돌아가시겠습니까? 그게 없다면 여러분은 아무리 기도해도 회복도 없습니다. 아니 자기의 사명의 자리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어디 가서 설 것입니까. 돌아가겠나이다. 돌아가겠나이다. 그래 네가 어디로 돌아가겠느냐 모르겠나이다. 모르겠나이다. 그것이 말이 되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순종 하다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풍랑을 만나서 어려움을 당하면 건져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내가 어디로 갈까요? 내가 잃어버린 사명의 자리가 어디입니까? 그곳으로 돌아가겠나이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잠시 끊어졌던 것과 같은 그 사명에 계획이 다시 이어져서 완수 되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놀랍게 빠르게 치료됩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그래서 불순종한 사람은 자기가 떠나왔던 그 자리로 돌아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 )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 물론 돌아갈 수 없는 자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새롭게 자기에게 부여해주시는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사람이 되야 됩니다.
보십시오. 요나는 불순종하고 사명을 팽개쳤지만 그 사명은 풀지 않는 문제집처럼 그대로 기다리고 있다가 온갖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을 찾으면서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온 요나를 그 사명 앞에 세워주셨습니다.
대전에 내려갔더니 나이 한 오십이 넘은 머리가 허연 할아버지 목사님이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27 살인가 그랬습니다. 그냥 뭐 자기 아들 보듯이 그냥 사랑에 찬 시선으로 봤습니다. 그러면서 얼마나 좋네 뭐가 좋으냐고 그러니까 이렇게 젊었을 때 자기 갈 길을 알고 이렇게 열심히 주의 일 하려고 하니 얼마나 좋으냐고 자기는 30대에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셨는데 ( ? ) 그리고 자기는 사업하고 그랬답니다.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오십이 넘었는데 그래도 신학을 하라고 그러시더랍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마지막에 그거라도 들어드려야 되겠다. 그리고 왔답니다. 그래서 그저 신학은 마쳤으니까. 자기는 그렇게 생각했답니다. 이제 30, 40대 다 지나 30대로 돌아가서 했어야 할 모든 일을 하나도 깎아 주시지 않고 죽을 고생을 시키시는데 자기는 너무나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도 속죄하는 마음으로 자기는 산다고 합니다. 이나마도 주님이 안 써주셨으면 나는 정말 영원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죽었을 텐데, 하나님이 이렇게 생고생시키는 것이 나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맡겨주신 사명은 다른 사람이 대치 할 수 있는 사명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서 있는 그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서 있으라, 그러는 그 자리에 여러분들이 안 서있으면 그 자리는 누가 다른 사람이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는 것입니다. 불순종의 자리에 서 있으면 순종해야할 그 자리는 비어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지난해에 내가 불순종하고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하나님 앞에 바르게 못 살았습니다. 다 인정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여기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주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크신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주님 뜻 데로 살고싶어했는지 깨닫게 하셔서 우리를 다시 우리의 잃어버린 사명의 자리로 세워주십시오. 한번만 더 세워주시면 그때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실패했던 지난날들을 뼈저린 거울로 삼아서 그래서 우리의 최선의 것을 주님을 위해서 바치면서 실패하지 않았을 때보다 더 훌륭하게 당신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겠나이다. 이렇게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6. 다시 사명으로 돌아가라Ⅱ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욘3:3上)
새롭게 다시 시작하려면 먼저 우리에게 전환점이 필요하고 이제껏 까지 살아온 삶에 대한 청산 그리고 방황 전환이 필요하다. 비록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해서 사명지를 버려 두고 다시스로 가는 중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내버려두시지 아니하시고 요나에게 오셔서 그에게 강한 역사를 일으키심으로 두 번째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불순종하고 있는 이 요나를 통해서 불순종하고 있는 요나의 완고함보다도 더 강력한 일관된 의지를 가지고 이 사람을 써서 자기의 뜻을 이루고 싶어하시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한 두 번 실패했다고 해서 우리들을 포기하거나 버리시지 않으신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우리의 실수이든지 실패이든지 뼈아픈 범죄이든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 되었을 때에는 하나님이 언제나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물론 이제 하나님 앞에 그렇게 불순종하거나 잘못된 인생들을 사용하셔서 새롭게 자기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너무나 필요해서라기보다는 더 정확한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집요하게 우리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일들, 그 자체가 우리를 향한 한없는 긍휼이요 사랑이라는 것이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심부름하는 것이 싫었다. 심부름을 시키면 동생은 안 시키고 나만 시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심부름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핑계를 대면은 할머니께서 관두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상하게 관둬라 그러면 아 신난다 그래지질 않고 마음이 심부름 할 때 보다 더 상했다. 그리고 염려도 됐다. 여러분도 아마 그럴 것이다. 아마 견디기가 힘들 것이다. 그냥 애야 너 이렇게 살아야지 이거 해야 된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때 힘들어요 하나님 제가 어떻게 그렇게 하겠어요 어 너무 힘들어요 끌려가면서 뒤로 버팅 기는 것이 힘들겠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래 그럼 관둬 말씀하시는 것이 더 힘들겠는가? 후자가 더 절망적일 것이다. 더군다나 하나님이 해라 해라 하시면서 그리고 왜 안 하냐고 소리를 지르는 욕을 할 때에는 자식이 된 도리에서 나만 시켜먹는다는 불만이 나올 수 있지만 그래도 그래 그럼 그만둬 그러면 가슴이 철령 내려않게 된다. 그러니 그 자체가 하나님이 뭔가 우리를 통해 하고자 하는 일을 끝까지 그렇게 하시려고 하는 자체가 무엇을 보여 주느냐 하면 우리가 얼마나 잘난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여러분들 하나님이 집요하게 너 좀 깨달아라 말씀하시면 그게 하나님이 너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향한 긍휼이다. 너 계속해서 거기 있을래 너 정말 내가 원하는 자리로 안 올래 너 계속해서 그렇게 불순종할래 그렇게 강력하게 말씀하시면서 때로는 책망하시고 환난을 만나게 하시는 것 그 자체가 긍휼이다. 하나님의 긍휼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인자하신 성품 때문에 한 번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뜻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두 번 세 번 네 번 계속 반복해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이 놀라운 역사는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지만 하나님 혼자 하시지 않는다. 우리들이 죄 죽임의 교리를 배우면서 죄를 죽이는 것이 성령 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하시기는 하시지만 순종하는 우리의 의지와 함께 역사 해 나가신다 는 중요한 교리를 우리는 배웠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이다. 잘못 살아온 길을 깊이 뉘우치고 돌이키며 올바른 길로 돌아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걸어 나가는 이 삶 자체가 이미 성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거룩해 지는 것과 그리고 이 삶이 거룩해지는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하나님 홀로 하는 역사가 아니라 순종하는 인간과 더불어 역사 하신다. 그러면 하나님과 인간하고 몇 대 몇으로 투자를 해야되느냐는 말이 나올 수 있다. 완전히 온전히 성화 되어가고 거룩해지는 것이 100이라고 할 것 같으면 인간이 순종하는 것이 100이고 성령이 도와주시는 것이 100이다. 그러니까 어떡하면 온전히 더 거룩해 질 수 있을까?
나의 입술에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 되기를 원하네
어떡하면 내 행동뿐만 아니라 내 말 내 생각 내 안에 있는 욕망까지고 어떻게 하면 주님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드러나지 않는 마음까지고 하나님께 찬송이 됐으면 얼마나 좋을까? 부지런히 죄와 더불어 싸우고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대적들과 투쟁하면서 피 흘리기까지 싸우면서 점 점 점 주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사람 온전한 마음 온전한 묵상 이런 것을 가진 온전한 사람으로 되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한 삼 년이나 사 년 전 자기를 생각해 보면 얼굴이 후끈 후끈 달아오르는 세상에 어떻게 교회 와서 그렇게 살았을까 세상에 저만 잘났다고 폼잡고 돌아다니면서 다른 교회 같았으면 벌써 왕따 당했을 텐데 야 정말 내가 왜 이렇게 살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된다. 그런데 사람들이 묻는다. 그래 당신이 내가 보기에도 그렇게 변화되었는데 어쩜 당신은 그렇게 늘 기도하고 매달리더니 그렇게 훌륭한 믿음으로 살았습니까? 예 그 비결이 뭡니까? 그러면 뭐라고 대답합니까? 예, 비결로 말하자면 뭐도 해야되고 뭐도 해야되고 뭐도 해야되고 한 자락 깔고 앉아서 이제 특강을 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온전히 된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자기의 말의 절제, 생각의 정결함, 행동의 절제, 악을 미워하는 마음, 하나님의 기쁘시게 하지 않는 것들을 버리려고 하는 마음, 그 투쟁하는 마음, 철저하게 삶이 바쳐진 그러한 인생을 살아왔는데도 당신이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신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성화 되어서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대답한다.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이 다 온전한 사람 온전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몸부림 칠 때 아 하나님이 해주실 거야 다 하나님이 해주실 거야 그렇게 하면서 살았느냐 아니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혼자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혼자 일을 하는 것처럼 몸부림을 쳤다. 그러면서도 차이점이 무엇이냐 하면 몸부림치는 자기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다.
그렇게 성화의 삶, 하나님 앞에 불순종에서 돌이켜 순종하는 삶을 살고 새롭게 시작하는 이 모든 것들이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 주심이 백대 백으로 이루어져서 결국 마지막으로 합계가 백이 되는 아마 이상한 공식이 나오는데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온전히 순종하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대로 새롭게 살아서 승리하고 난 다음에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열심히 산 것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만이 기억에 남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 라는 고백이 나온다.
(예화) 고 정암 박윤선 박사님은 학문과 기도를 겸한 분이셨다.(평양시학교시 모란봉 기 도생활 , 총신 학장역임) 주석을 쓰실 때에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자녀들의 증언. 그분의 신약 신구약 주석 출간 감사 예배 때에 고백- 잘된 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고 잘못된 것은 이놈이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잘못이 없으십니다.
이 고백 자체가 거룩한 성화가 무엇인지를 잘 드러낸다. 이렇게 실패한 사람이 새롭게 기회를 부여받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도 결국은 그 성화에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고 새롭게 시작하게 하신다 할지라도 자기편에서의 적당한 반응이 어우러져야지만 다시 시작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현실로서 적용이 되어서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 물고기 속에서 그냥 회개하면서 기도했다. 2장 주제 자체가 회개이다. 그래서 지난주에 말씀드리기를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생각했고 하나님이 은혜 주신 때의 서원을 다시 생각했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물고기가 요나를 토해 놓은 것도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분명히 고래만한 물고기가 막 돌아다니다가 하나님이 토해 라고 그러실 때에 물고기가 바위가 많은 곳으로 토해놨다면 뇌진탕으로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틀림없이 맑은 물이 있고 모래가 포근하게 깔려있는 그런 곳에 토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새롭게 기회를 주셨다. 바다 물 속에 던져진 요나가 죽어서 마땅한 그 사람이 지금 모래가 살포지 깔려진 그 평화로운 해변에 해안에 물고기에 의해서 토해 내친바 되어서 안전하게 엎드려지게 되는 과정에 있어서 요나가 기여한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그에게 기회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물고기에게 명령을 내리셔서 요나를 토해 내게 하셨다. 그러면 이번에는 무엇이 있어야 되느냐 하면은 요나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한 반응이 나타나야 된다. 그리고 물고기가 그렇게 토해냈을 지라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면 배타고 가면서 불순종하는 것이나 물고기 타고 가면서 불순종하는 것이나 해변에서 불순종하는 것이나 바다 한가운데서 불순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본문에 보면은 요나가 하나님 앞에 주님이 새롭게 기회를 주셨을 때에 반응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반응이 무엇이냐 하면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니느웨로 가니라" 저는 여기서 크게 새가지 요소를 찾아 보고싶다.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가 실패 속에서 새롭게 시작하려고 하면은 첫째로 "말씀대로"의 신앙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두 번째는 '말씀대로 일어나' 즉 결단을 따라서 결단대로 말씀대로 결단대로 그 다음에는 요나가 니느웨로 갔다. 즉 '사명대로' 다시 말해서 말씀대로 결단대로 사명대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응답해야 된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면 우리는 그 기회를 붙들고 하나님 앞에 바른 관계로 돌아가야 한다. 기도가 참 능력 있는 기도가 되려면 두 가지가 중요하다. 누가 기도 하느냐와 그 다음에 어디서 기도하느냐 이다. 누구는 어떤 사람이 어떤 동기를 가지고 매달리느냐 이다 그리고 어디서라고 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이 새워 주신 자리에서 기도하는데 아니면 다른데서 기도하느냐 이다.
가끔 하나님께서 명백하게 세워 주셨는데 여러 가지 불순종으로 그 자리를 떠나는 지체들이 많이 있다. 떠나면서 그래도 기도는 제가 계속 하겠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그 기도가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 생각한다. 하나님은 사명을 주신 그 자리에서 기도하는 것 즉 어디서 기도하느냐를 하나님은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신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교사이면 교사에 자리에 서서 기도해야 한다. 자리를 이미 떠나서 기도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영혼을 잘 돌보라고 목양의 소명을 주셨는데 그만두고 다른 데로 가 버리고 매일 밤마다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능력을 주시라고 기도해봤자 소용이 없다. 그 사람이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자신의 일들을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이나 걱정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기도는 쉽지 않다. 결국 기도를 해결하려고 끌어오다 보면 거기에 우리의 인생 전체가 따라 오게 된다. 그래서 기도가 어려운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기도가 잘 될 때도 있고 잘 되지 않을 때도 있다. 우리 몸이 너무 힘들어 정신을 집중하지 못할 때에 기도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리고 마음을 혼란하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면 기도가 연약한 사람들은 기도하는 데 방해를 받는다. 그런데 그것이 일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일어난다면 그것은 기도 자체가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삶 전체의 재점검이 필요한 문제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는 어려운 것이며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그렇게 불순종하던 길을 걸어가던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새롭게 되려면은 반응을 해야한다. 그 반응을 한다는 것은 '말씀대로' 순종해야 하겠다는 반응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기도하든지 간에 기 기도의 출발선상에 먼저 서야 한다. 달리기 경주에서 일등을 하는 사람은 꼴인 지점에 제일 먼저 당도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또한 함께 중요한 것은 지정한 장소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먼저 가는 것이 일등이라고 해서 중간에서부터 달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보 취급을 받게 된다. 그러면 그 출발 선상이 무엇인가? 실패한 사람을 새롭게 시작하게 하시는데 혹은 하나님 앞에 주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하는 데 그 출발선상이 무엇인가? 기도하기 전에 주님의 뜻이면 나는 순종한다 라는 마음의 자세이다. 하나님의 응답은 호기심으로 일단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자에게는 응답을 주시지 않는다. 응답이 올 리가 없다. 이러한 응답이 없는 사람들이 결단은 잘한다. 이러한 사람의 신앙생활의 태도는 깡패와 갔다. 즉 눈감고 도끼를 휘두르는 것과 흡사하다. 인생을 살려면 결단이 있어야 하는데 하면서 매일 그 도끼로 자신의 다리 찧고 발등을 찧는다.
본문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새롭게 기회를 주신다. 그런데 요나가 그 기회를 가지고 새롭게 될 때가되니까 요나에게 말씀대로의 마음이 생기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1장 2절을 보면 재미있는 내용이 나온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에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대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이 악독이 내게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런데 3절은 '그러나'로 시작한다. 즉 앞에 1절 2절의 말씀은 주님의 생각이시라는 것이다. 1장 3절은 '그러나'로 시작된다. 그러나 3장 3절은 말씀 대로임을 보여준다. 1,2장에 있는 엄청난 풍랑과 폭풍은 결국 '그러나' 거기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시고 그것을 허락 받았을 때 진짜 새로운 시작이 되기 위해서는 말씀대로 순종해야되겠다고 하는 결심이 새로워지고 실제로 그러한 각오가 서야 한다. 그래서 제 이번 사경회 때 말씀 드리면서 총체적인 순종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의 기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는 늘 기도 응답을 받고 결단을 하는 사람들을 부러워 할 것이며 그는 늘 안개가 자욱히 낀 인생을 걸어가는 것 같은 오리무중의 한계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는 결코 기도해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으며 그는 아무리 하나님 앞에 간구 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매우 흔하게 받는 그 분명한 응답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흔하게 체험하는 분명한 하나님의 인도하심 즉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 어디로 가야 합니까 라고 손을 내밀 때 하나님이 붙잡아 주셔서 따뜻한 감촉으로 우리를 폭풍과 흑암 속을 헤쳐서 당신이 원하시는 길로 인도해 내시는 이러한 감격을 일평생 동안 거의 맛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너무나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가장 자기에게 싫은 것을 주님이 말씀하실 지라도 순종할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에 알려지기 때문이다.
보십시오. 1장에서 요나에게 주신 소명이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친다는 것은 그들에게 대항해서 그런 삶을 살지 말라고 뭔가 외치라는 뜻이다. 가서 다 부서뜨리라는 말이 아니다. 영어의 '어겐스트'이다. 그렇게 불순종해서 우여곡절과 난리를 겪고 난 후에 하나님이 요나와 함께 흥정을 하신 것이 아니라 1장에서 나오는 똑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여 너는 일어나 저큰 성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너에게 명한 것을 쳐서 외치라 말씀 하셨다.
하나님은 항복을 하지 않으신다. 여러분들이 고집과 오기로 주님의 팔을 꺾으려고 하는 시도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요나가 2장의 풍랑과 바람을 겪으면서도 결국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선지자를 배 사람들이 오히려 타이를 정도였다. 즉 어떻게 해서 네가 너의 신께 불순종하고 범죄 하였느냐 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그 선지자를 가르칠 정도였다. 그때 선지자는 살고싶은 마음은 없었을 것이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목사에게 다가와서 설교에 대해서 기도에 대해서 가르친다고 한다면 인생 살맛이 나지 않을 것이다. 죽어 버리고 싶을 것이다. 요나는 이것보다 더 심하였다. 하나님의 음성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셨다. 그런데 그러한 기회를 주셨을 때 그 기회를 확 붙잡는 모습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말씀대로의 신앙이다. 요나는 여기서 크게 깨달은 것이다. 거역하면 흐지부지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요나가 폭풍 속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후에 두 번째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첫 번째와 똑같은 말씀이 들여왔다. 결국 불순종하며 나아갈 때는 이득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고생은 고생대로 실컷 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세월이 약이 될 수 없다. 풀다만 산수 시험지와 같다. 어제 3번 문제를 풀었으면 자고 나도 거기까지밖에 풀어져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작하려면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된다는 것이다. 제가 이 말씀을 가지고 간증을 하려면 간증거리가 되는 것이 많이 있다. 10년이 지나서 시험지가 노랗게 바랬는데 결국은 거기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 세월이 결코 약이 될 수 없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러한 잘못된 신앙의 태도를 가지고 살면 여러분들의 인생이 보인다. 즉 죽을 고생만 실컷 하게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맛본다는 말은 웃기는 말이고 남이 하니까 하번 해보는 것이 된다. 자기도 한번 그렇게 말해보는 것에 지나니 않는 것이다. 벌써 그 얼굴에 하나님 없습니다 하고 곤고함이 드리워져 있다.
요나는 여기서 깨달았다. 내 뜻대로 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는데 두 번째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니까 주 뜻대로 라고 생각이 바뀌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가장 생생한 응답의 세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예민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착실한 사람들이 아니라 순종하는 사람들이다.
저는 여러분들의 의문점 가운데 하나를 시원하게 풀어들이기를 원한다. 일평생 가슴에 새기면 도움이 될 것이다. 저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큰 궁금증 중에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이상하게 굉장히 착실한 사람인데 하나님의 뜻을 잘 발견도 못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잘 따라서 살지를 못하는 반면에 겉으로 보기에 날티가 나고 건들건들 거리고 어떤 때에는 교회도 나오지 않고 너무 편의주의적인 사람들이 이상하게 하나님의 인도를 잘 받는다는 것이었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왕이면 하나님께서 착실한 사람들을 잘 해주시고 밀어 주셔야지만 교회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결혼한지 삼 사 년 지나면서 그 의문이 확 풀렸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하면 착실하면서도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내적인 복종이 않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른다. 그리고 잘 인도해 주셔도 그 인도가 그것이구나 하고 잘 붙들지 못한다. 그런데 날나리 같이 살면서도 어떤 상황이 터지면 내 주여 뜻대로 나오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까 다른 때에는 잘못 살았지만 어떤 기로에서 하나님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결단을 해야 됩니까 내가 하나님 어디로 가야 합니까? 라고 할 때 전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이 그 당시에 생기게 된다. 즉 그 문제에 대해서 자기를 내려놓게 된다. 이럴 때 바로 하나님께서 아주 쉽게 자신의 인도를 보여주시게 된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면 그저 하나님께서 어떤 문제에 부딪쳤을 때에도 염려를 하지 않는다. 왜냐고 물으면 옛날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해 주신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머리를 써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이 이렇게 내가 좀 흔들거리고 살았지만 그러나 내가 일단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매달리면 하나님께서 내게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다. 자부할 수는 없지만은 저희 집사람하고 저하고 그런 일에 대하여 수 없이 많은 간증을 가지고 있다. 나는 착실한 신앙생활을 해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느 한 순간에 우리 부부가 일치를 본 것이 있다. 그것은 주의 뜻이면 되고야 말기 때문에 되고야 말도록 내버려두기보다는 되게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군대에서 이야기하듯이 이거 할래 안 할래 그냥 할래 맞고 할래 이것은 선택도 아니다. 그냥 할래 만고 할래 요나가 바로 이와 같은 경우였다.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불순종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1절2절에 걸쳐 길게 말씀하셨는데 요나는 그러나 라고 한마디로 끝냈다.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그러나 나는 그렇지만 내 생각엔 하고 나아간다. 달그락 달그락 하면서 큰돌 속에 작은 돌이 굴러간다. 돌 굴리는 소리가 나게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두 번째 세 번째 주셔도 그 기회가 찬란하게 역사가 일어나서 첫 번째 두 번째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자꾸 잃어버리게 된다. 요나가 바로 이러한 사람이었다. 그러더니 하나님께서 두 번째 기회를 주셨을 때에는 그것을 붙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발판으로 삼으려고 하니까 어떤 신앙이 일어났느냐 하면은 말씀대로 신앙이었다. 진작 1장에서 가졌어야 하는데 갖지 안았다. 2장의 뼈저린 실패를 통해서 말씀대로 신앙을 갖게되었다. 그러면 말씀대로는 무슨 의미인가? 이 말씀 전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금 불순종해서 이러한 일을 당하고 있는데 원래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셨던 그 뜻을 가리킨다. 그것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시는 것이다.
여러분 요나에게 왜 두 번째 기회가 필요하게 되었습니까? 왜 여러분들이 다시 새롭게 라고 하는 시리즈를 감명 깊게 들어야 할 상황이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처음에 한 것이 잘 나가고 있었으면 다시라는 말도 필요업소 새롭게 하는 말도 필요 없고 두 번에 기회 이러한 것들이 필요 없다. 뭔가 잘못했고 아닌 것 같은 삶을 살아왔고 주님께서 분명히 여러분들에게 주신 소명이 있는데 그렇게 못 살아왔기 때문에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게 된다.
저도 요즈음에 이러한 기도를 한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십시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거기에 올바로 반응하며 살지 못했던 실패가 있었기 때문에 다시 우리가 두 번째 기회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실패하게된 궁극적인 원인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말씀대로의 신앙을 초지일관 가졌으면 실패하지 안았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두 번째 기회를 주시려고 하신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되는가? 그러면 그 두 번째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첫 번째 하나님이 주신 자리에서 실패한 것을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붙들어야할 신앙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말씀대로의 신앙이다. 말씀 대로라는 말을 정확하게 이 문맥에 맞게 번역한다면 주 뜻대로의 신앙이다. 말씀대로 일어나 걸어라 이것이 아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무슨 말씀을 하셨어요? 너는 저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을 저들에게 쳐서 외치라고 말씀 하셨다. 그러니까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두 번째 기회를 주셨을 때 그 기회를 그대로 다 활용하여서 역사 하게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냐 하면 주 뜻대로의 신앙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수없이 기회를 주셔도 그 두 번째 주신 새 기회가 새로운 시작을 하게 하지 못한다. 불가능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두 번째 기회를 이 요나에게 주신 것처럼 또 우리에게도 주시고싶어 하신다.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그 기회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이제 그렇게 두 번째 찾아오셔서 기회를 주실 수밖에 없도록 내 뜻대로 생각하고 살아왔던 그 삶을 깊이 청산하고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느냐 하면은 하나님에 뜻대로 주 뜻대로 다시 모든 일과 생각이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야 한다. 그래서 요나가 하나님께로부터 두 번의 기회를 제공받았을 때에 하나님 앞에 자기의 뜻을 버리고 이제는 주 뜻대로 하겠나이다 그 신앙을 가졌을 때 즉각적으로 하나님께서 가야할 길도 보이시고 일어날 힘도 주시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할 지도 모두 알게 하신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는 것은 하나님 자신도 늘 그렇게 하시고 싶어하시기 때문에 그것은 어려운 것이 아닌데 이제 내 뜻 대로를 버리고 주 뜻대로의 신앙을 회복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몫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말씀대로 일어나 했습니다. 이것은 결단대로 이다. 그러니까 어느 한쪽을 향해서 지속적으로 가던 그 행동이나 삶을 바꾸는 것은 엄청난 힘이 든다.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엄청난 힘이 든다. 저는 어려서부터 비행기 로케트를 매우 좋아했다. 호주에 갔을 때 제자가 한 명이 있었다. 공군 중령 출신이었다. 그 사람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 새로운 것을 많이 느꼈다. 자기가 300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탔다고 했다. 베테랑이었다. 비행기를 몰 때 제일 힘든 것이 무엇인지 물어 보았다. 우리가 보기와는 달리 매우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비행하면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했다. 퇴역하고 난 후 예편되고도 비행기 소리만 들으면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는 것이다. 지긋지긋 하다고 했다. 조종사 하체부위에 자동 공기 주머니가 있어 비행기가 하늘로 솟아 거꾸로 내려오면 꽉 조여서 하체의 피가 상체로 흐르게 하지 못하게 한다고 했다. 만약에 피가 상체로 흐른 다면 코피가 나고 뇌출혈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복잡한 장치가 비행기 한에 있다.
우리들이 평상시 활동할 때를 1g라고 한다. 그런데 급하게 회전을 한고 반경을 돌 때에는 15g까지 올라간다는 것이다. 즉 손이 조정관을 붙들어야 하는데 비행기 내부에 기체와 붙어서 뗄 수가 없을 정도까지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손이 스스로 손을 뗄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고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관성에 법칙인 것이다.
똑같다. 우리들이 신앙생활 하면서도 가던 길을 돌이킨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계속 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비행기는 그만두고 자동차가 30킬로미터로만 달려가도 기억자로 꺽어지는 지점에서 브레이크를 밝지 않고 핸들을 돌리면 차가 거의 미끄러질 것이고 60킬로미터로 달리다가 그랬더라면 차가 벌렁 뒤집힐 것이다.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이것이 나온다.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실 때에도 '일어나' 라고 말씀 하셨다. 일어나 내 발로 서라. 탕자가 집으로 돌아갈 때도 일어나 '일어나' 라는 말이 성경에 굉장히 많이 나온다. 달리다굼 할 때 그 굼이 바로 일어나다 라는 뜻이다. 조금 이상하다. 위대한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 불순종하였지만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 즉 요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손 내밀어서 일으켜 새워 주실 수도 있다.
(예화) 이제 간신히 일어나서 걸어다닐 정도의 어린아이가 길에서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지 않고 끝까지 자기 힘으로 일어나기를 달래는 엄마의 모습을 목격한 이야 기
하나님이 요나를 사랑하시는데 뭐 하러 일어나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인가? 일으켜 세우면 되는데 아니 손잡을 필요도 없으시고 일어나게 되어라 말씀만 하셔도 될 터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절대로 하지 않으신다. 우리들이 가만히 보면 왜 하나님께서 그러시는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결단은 하나님이 대신 해 주시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결단은 오직 자기 자신만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결단을 하고 일어나는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 자신의 옛 삶을 옛 불순종하던 발자취를 버리는 효과를 가져온다.
어느 신문에 실린 도벽이 심한 아이를 고친 부모의 수기의 마지막 장면 이야기- 어린이로 하여금 자기가 지금껏 까지 훔친 물건을 스스로 파묻게 하는 내용-
이것은 굉장히 좋은 교육이다. 여러분 가운데는 없겠지만 신자들 중에 화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손목은 끊지 못하더라도 화투를 한번 묻어보아야 한다. 저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앞에 헌신된 삶을 살기 위해서 취미나 세상 속의 옛 습관들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낚싯대 같은 것을 다 분질러서 땅에 묻어버리는 것이다. 이제는 물고기를 낚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여리고 전도에 나와서 사람을 낚아야 하겠다. 얼마나 좋습니까? 이러한 굉장한 교육적인 효과가 있다. 하나님께서 일어나게 되어라 뿅 하지 않으시고 일어나라 네 발로 서라 말씀하신다. 요나에게 말씀하신다. 불순종 할 때는 자기발로 갔다. 이와 같이 순종할 때도 자기발로 와야 된다. 자기발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관계의 회복을 간절히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어나라 라고 하는 이 명령 자체가 하나의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두 번째 기회가 필요했다는 이야기는 실패했다는 이야기다. 실패에 배경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삶의 괴적들이 있다. 삶의 발자취들이 있다. 걸어온 길이 있고 걸어온 그 길을 보면 어디로 갈지를 안다는 것이다. 어디로 갈지를 아는데 거기서 한번 하나님께서 순종으로 돌이키시는데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아주 흔한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두 번째 기회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실패했다는 이야기다. 실패했다는 이야기는 실패의 배경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살아왔던 삶이 있었다.
요나가 이렇게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첫째는 편견이다.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받으면 어떻게 하나 하나님께서 핵 폭탄 같은 것을 내리셔서 아주 박살을 내 버리셔야 할텐데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마 이스라엘 땅덩어리에서나 효과를 발하시는 분이시다 라는 지역 신 개념이다. 이러한 편견은 성령을 엄청나게 슬프시게 한다. 이러한 것들과 결별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해야된다.
(예화) 조용기 목사님이 자기의 설교에서 일본집회를 하고 온 이야기- 일본에 대해 적 대시하는 전통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자신이 일본 집회에서 입이 붙어서 도 저히 설교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솔직히 자신의 마음을 털어 논 후에 모든 회중 과 함께 그 마음을 푼 이후의 성령의 역사가 재개됨-
당연한 이야기이다. 다시 두 번째 기회가 필요하리 만치 실패했던 과거와 결별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행동적인 결단이 필요하다. 에스라서에 보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본국으로 돌아가서 이제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면서 거기서 성전을 재건한다. 그렇게 하는 와중에 이방사람들과 결혼이 이루어진다. 자식들까지 낳게 된다. 그러나 깊이 회개하고 나서 하나님의 율법이 그러한 일들을 금하고 있고 주님께서 은혜로 돌아오게 하신 이 땅을 더럽히고 있다라고 하는 깊은 확인을 받게 되니까 깊이 그 사실을 깨닫게 되니까 그 다음에 결단을 내리게 된다. 그 아내들을 돌려보낸다. 자식들도 함께 돌려보낸다. 이와 같은 일이 쉬운 일이겠는가? 결혼이 잘못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아내고 사랑하는 자식들인데 보따리 싸서 내 보내낸 것이다.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이 자고 있는데 내일 아침 보따리 싸서 내 보낸다고 생각할 때 어떻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되는 결단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진정으로 실패한 옛 삶을 청산하고 두 번째 기회를 청산하고 그 기회를 주셨을 때 기회를 붙드는 사람의 모습이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영혼의 피를 말리는 그 지속적인 불순종이 무엇입니까? 다시 두 번째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셨는데도 또 그것을 붙들지 못하고 늘 뭔가 깊은 불만 속에서 살아가게 만드는 궁극적인 요인이 무엇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그러한 옛 삶과 결별하는 결단이 없이는 안 된다. 일어났다 했는데 이때에 요나의 마음이 얼마나 참담했는지를 생각해 보자. 여러분 여러분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을 주거나 지긋지긋한 사람을 향해서 이러면 안되지 내가 가서 먼저 화해하고 그를 안아 줘야지 그리고 한번 일어난 본적이 있는가? 이것은 힘든 일이다. 이것보다도 더 끔직한 일이다. 그런데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무엇인가? 요나의 생각이 갑자기 니느웨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뀐 것이 아니다. 편견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요나에게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라는 신앙이 회복된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도 이것을 청산해야 된다는 결단이 생긴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기억해야 된다. 이 사람이 지금 결단하고 일어난 것은 니느웨 백성들을 끔찍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꾸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셨을 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요구하시는 삶은 여러분에게 전혀 달콤하지 않는 삶이 될 수 있다. 두 번째 기회를 주시면서 여러분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어떤 선택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거기서 또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옛날서부터 여태까지 살아와서 실패했기 때문에 새로운 기회를 받을 수 받게 없게 만든 옛날 입맛만을 고집하고 옛날의 여러분들의 생각만을 고집하고 이것은 안돼 라고 하면 두 번의 기회로 되는 않는다. 세 번째 기회가 필요하게 된다. 세 번째 기회가 주어지기 위해서는 다시 요나서 2장이 써져야 한다. 이것은 삶이 아니다. 동물과 같은 삶이다.
그럴 수 없다. 그래서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깊은 결단이 필요하다. 그래서 두 번째 기회가 필요하도록 첫 번째 기회를 실패로 몰아갔던 그 습관적인 자신의 신앙의 노선, 자세, 삶, 태도, 이러한 것들로부터 깊이 결별해야 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해 주시지 않는다. 너 이제로부터 성실하게 되어라 이렇게 성실한 사람을 만들지 않으신다. 너 오늘부터 성경이 한 눈에 확 들어와라 이렇게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역사는 장난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충성스럽게 처절한 가슴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는 동료 목회자나 혹은 교회의 직분 자들을 굉장히 부러워한다.
(예화) 신의주에서 한경직 목사님께서 목회 하시던 교회의 충성스러운 장로님 이야기. 자신이 교회를 지키겠다고 하면서 월남한 성도들을 위해서 한경직 목사님을 남쪽 으로 내려보낸 이야기. 영락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의 생애를 보면서 모든 사람들은 모두 부러워한다. 그런데 그런 삶을 자신도 본 받아서 살기 위해서는 그 삶만 본 받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삶을 살지 못하게 했던 그런 사람들과는 다른 옛 삶의 방식들과 사고 방식들과 결별하는 결단이 있어야 된다. 그래서 일어나는 일들이 있어야 된다.
이런 비유를 한번 해 보자 열기구를 크게 만들어 놓고 높이 띄우는 방법은 프로판 가스를 가지고 강하게 불을 지피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뜨거운 공기가 되어서 그 기구를 가득 채우면서 기구가 위로 솟는다. 그러나 그렇게 다는 열기구처럼 뜨거운 공기를 그렇게 집어넣고 불을 지핀다 할지라도 다른 기구에는 없는 커다란 돌멩이 하나를 열기구 밑에다 매달아 놓았다고 한다면 그 열기구는 좀처럼 뜨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그 줄을 먼저 잘라내야 된다. 이것이 바로 결단이다. 미적미적하고 계속 그렇게 살면 그 꼴로 살다가 죽는다. 다시스로 가자니 하나님이 막으셔서 못 가고 니느웨로 가자니 자신이 갈 맘이 없고, 소명대로 살자니 결단이 너무 뼈저리고 내 뜻대로 살자니 인생을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고 그래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리다가 후줄근하게 인생을 마치게 된다. 뭐가 필요합니까? 결단이 필요하다. 하나님 나는 왜 이렇게 캄캄합니까? 하나님 나는 왜 기도의 능력이 없습니까? 하나님 나는 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감화가 없습니까? 하나님 나는 왜 나의 사역에 대한 불같은 열정이 없습니까? 어떤 것들로부터 결별하고 있지 못하는지 가슴에 깊이 새기면서 용단을 내려야 한다.
마지막 세 번째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말씀이 니느웨로 가니라 누구 발로 걸어갔어요 요나 자기의 발로 걸어서 니느웨로 갔다. 웃기는 상상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흔히 아 정말 그 분이 혼자 하셨다. 그런 감탄을 할 때가 많다. 그러면 이런 방법은 어떤가? 하나님이 요나가 배를 타고 불순종의 길을 막 달려가고 있을 때 하나님이 물고기를 직접 니느웨로 대려 가셔서 니느웨 성 앞에 토하게 하시면 더 이상 갈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물론 니느웨성 까지 물길이 나있지 않다. 이러한 일은 일어날 수 없다. 그러나 물길이 니느웨 성까지 나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직접 가게 하신다. 결국은 불순종의 문제를 자기 발로 순종의 길로 걸어가게 하심으로 옛 삶을 청산하고 새롭게 주어진 기회를 받아들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은 사명 대로이다. 주 뜻대로 결단대로 마지막에는 사명대로 이다.
왜 두 번째 기회가 필요하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첫 번째 사명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은혜에서 떨어졌다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은혜가 떨어진 것이 아니라 사명이 떨어진 것이다. 은혜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의 메시지가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왜 구원하셨는가? 왜 예수님을 알게 하셨는가? 믿어지지 않던 주님이 믿어지고 오늘날 구원받은 자녀가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다 싫어하는 그 일을 내가 정말 주님을 위해 살아야지 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자리에 세워 주셔서 주님을 섬기게 하신 그 은혜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명이 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왜 그렇게 많은 은혜를 주셨는지 모르는 사람 결국은 그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고 싶어하시는지 희미한 사람 그런 사람들이 은혜를 오래 유지한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요나에게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첫 번째 놀라운 은혜 불순종했을 때 그를 섬세하게 다루시면서 두 번째 기회를 주신 그 놀라운 은혜는 무엇 때문이었는가? 니느웨라고 하는 사명에 자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사명에 자리가 어디인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돌아가라고 명령하신 그 사명의 자리, 바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내가 아니면 비어있을 수밖에 없는 자리, 그 자리가 어디인가? 그리고 거기로 돌아가야 한다. 실패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두 번째 기회를 주실 때 가슴 저미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 생각이 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을 때에는 그냥 시야 가득히 들어오는 것이라곤 내가 이렇게 생고생을 하는구나 이렇게 고생하는 나는 얼마나 슬프고 곤고하겠는가? 라고 자기 머리를 쓰다듬게 된다. 스스로 위로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회복이 이루어지고 두 번째 새롭게 시작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초청이 주어질 때에는 생각이 놀랍게 변화된다. 그러면서 내가 고생하고 힘들고 그러한 것들이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신 사명이 내가 불순종하는 동안에 버려졌다는 생각과 그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얼마나 아파하셨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나는 그 사명과 함께 죽더라도 그 자리로 돌아가야겠다 라는 사명대로의 결단이 생겨난다. 그때 그 사람에게 주님이 두 번째 주신 기회가 훌륭하게 받아들여져서 첫 번째 실패를 아주 놀랍게 만회할 수 있는 것이다.
(예화) 미국 야구 역사 가운데 신화적인 인물 베이비 루드의 이야기- 신화적인 홈런 수 보다 삼진으로 아웃된 수가 더 많다는 사실-
실패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좌절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주님께서 세워주신 자리에서 한두 번씩 넘어지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실패한 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엄청난 차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실패한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두 번째 기회를 계속 주시는 데 어떤 사람은 그 기회를 붙잡고 거기서 말씀대로 결단대로 사명대로 이 신앙을 회복해서 새 출발을 했기 때문에 과거의 실패를 모두 만회하고 남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지는 것이고 어떤 사람은 두 번째 세 번째 끊임없이 기호가 주어졌는데도 결국은 이 세 가지 주 뜻대로 결단대로 사명대로 이러한 생각과 삶을 회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그 실패가 지겹도록 길게 영향을 주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 앞에 자신의 보습을 비쳐 볼 때 여러분 자신도 자신이 마땅하지 못할 때가 있다. 누가 뭐라고 말해도 확실히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내가 실패한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실패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새로운 기회를 주고 싶어하신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혼자 하시는 일이 아니다.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 기회를 여러분들이 활용하기만 하면 지금 여러분들이 뼈저리게 마음 아파하는 첫 번째 실패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수 있게 된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혼자 그 일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두 번째 기회를 주신 이 자리에서 이제는 주 뜻대로 이제는 결단대로 이제는 사명대로의 신앙을 회복할 때에 두 번째 새로운 기회가 놀랍게 꽃피워서 첫 번째 실패를 능히 하나님 앞에 보상해 드림으로 여러분 자신이 첫 번째 기회를 잃어버렸을 때에는 하나님을 등진 삶을 살았지만 두 번째 기회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성도의 삶이 여러분 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그렇게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7.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길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捕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는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시126:1-2)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126:5-6)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늘 함께 해 주셨지만 그러나 그들이 무엇인가 과거를 회고하실 때에는 뚜렷하게 반복되는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님이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 정도의 어려움 쯤은 문제도 없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격려하고 싶을 때 그 때에 선지자나 혹은 성경의 저자들이 흔히 돌아보았던 사건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산과 바다와 이 세계를 지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혹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 되었던 것에서 건져내신 그 위대하신 여호와의 권능을 또한 자랑했지요. 그리고 가나안을 정복한 놀라운 사건, 요단에 물을 말리고 그리고 가나안을 파죽지세로 점령한 놀라운 일들을 상기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설명할 때에 앞서 말씀드린 사건과 더불어서 자주 인용되는 사건들이 있었는데 그 사건이 무엇인고 하니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 포로로부터 돌아오게 하신 이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기적적인 것은 전쟁을 통해서 적국을 꺾고 무력으로 해방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이 민족의 지배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 자원하는 사람들이 고국으로 돌아가서 성을 짓고 또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그렇게 놀라운 은혜를 입었다는 것이에요. 그것은 굉장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충격적인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 손에 넘겨버리셔서 결국은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하게 하실 때에 그것은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징벌이었지만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보고 있는 수많은 이방민족들에게 이스라엘이 조롱거리가 되는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예와 하나님의 백성들의 상태는 항상 같이 갑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이방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그 큰 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시고 홍해의 물을 가르시고 요단의 물을 말리실 그 때에는 이방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이 매우 크게 보였고 그리고 이스라엘을 보면서 그들은 이 백성은 매우 두려운 민족이며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하시는 동안에는 누구도 이 민족을 해칠 수가 없다라고 하는 강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정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다 나라까지도 결국은 모두 망해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게 됐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를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제껏 까지 붙들고 계시던 하나님의 이름은 이방인들 가운데는 먹칠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개인이나 교회나 그리고 한 민족을 심판하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볼 때에는 그 심판이 매우 오래도록 연기되는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께서는 진노하기를 잊으신 것 같이 우리에게 느껴지는 이유도 사실 하나님이 그렇기 때문에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지막에 유다 나라가 망할 때에 살아남기 위해서 얼마나 처절하게 몸부림쳤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신흥국가인 바벨론의 위협을 구세력인 애굽을 통해서 막아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옳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순순히 끌려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이 이방민족에게서 노예가 되어서 끌려가는 그 비참한 멸망을 지켜보는 것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기꺼이 그 일을 하게 하신 것은 오래 참으신 연후에 당신이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다 백성들이 멸망을 당해서 포로로 끌려가는 커다란 불행을 당하면서라도 그러면서 자신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이 오히려 돌이킬 줄 모르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순종하며 그릇된 길로 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내 버려 두어서 하나님이 잘못 알려지게 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낫다고 하나님이 그렇게 판단하실 때 그렇게 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것은 여러 가지 말로 설명을 해도 피할 수 없는 결론은 하나님의 진노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유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70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이번에는 다시 한번 온 이방이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다시 두고 온 고토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가서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군주의 도움을 받아서 성을 다시 쌓기도 하고 혹은 성전을 건축하게도 되는 그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로는 꿈꿀 수 없는 그러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은 말하기를 주께서 시온의 포로들 다시 말하면 유다의 그 포로들을 다시금 돌아가게 해 주실 때에 그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고레스의 칙령을 통해 이들이 돌아오게 되었지만 그러나 이 시인은 그 포로들을 돌아오게 한 것이 고레스나 또 어떤 그 시대의 왕이 한 일이 아니라 주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라고 말함으로서 그 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명백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이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국가적으로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전에 하나님의 진노가 변하여 은총으로 바뀌고 이전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벌하시고 그들을 버리심으로 이방인들 가운데 소문났던 그 이스라엘이 이번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독점적으로 사랑하시고 독점적으로 그들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신다는 놀라운 역사 그 놀라운 것들을 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70년만에 다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포로의 귀환을 보면서 우리는 한가지 잊을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성품 하나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에요. 주님이 신실하신 분이신데 그 신실하신 성품이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언약관계 속에서 구체화될 때에는 신실하심으로 나타나요. 신실하신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그 언약을 성실하게 지켜나가시는 언약의 당사자인 이스라엘은 그 언약에 불 충성하고 그 언약을 향하여 마음이 늘 한결같지 않아도 하나님은 늘 한결같아서 당신이 그 백성과 맺으신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약속을 따라서 신실하게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이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을 묵상하면 우리의 기도가 큰 힘을 얻을 수 있고 우리의 우리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것임을 자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그 포로로부터 돌아오게 하셔서 그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꿈꾸는 것과 같은 시대를 새로 시작하도록 만들어 주셨고 그 입에 웃음이 가득하게 하심으로 기쁨과 환희에 벅찬 새날을 맞이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연히 시작된 것이 아니라 당신의 백성과 맺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신실한 언약에 대해서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와 그 많은 하나님을 거슬리는 불순종의 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서 이방인들에게 비참하게 끌려갔던 그 역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디서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바벨론 군대의 말발굽 아래 비참하게 유린된 그 예루살렘과 그리고 처참하게 뜯기어 나간 그 황폐한 모습 속에서 어디서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패역하고 완악한 사람들만 그 전쟁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들도 함께 죽어갔습니다. 피가 피를 부르는 도력의 때이고 나라를 잃은 슬픔을 뒤로 한 채 포로로 끌려가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행렬을 생각해 보십시오.
파괴된 가족들의 관계 그리고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 그 비참한 이스라엘의 고난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디서 하나님의 은총을 읽을 수 있습니까? 역사 속에서 진노하셔서 당신의 백성을 멸하시기 위해서 열심을 내시는 폭발할 것 같은 하나님의 진노 이외에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볼 때에 어느 날 고레스 왕의 조서가 내리고 때가 되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될 때에 그들은 깜짝 놀라며 뜻밖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고 경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미 예레미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멸망을 예고하면서 또한 그들이 다시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하고 돌아올 것까지 함께 예언을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난이 넘치는 그 인생 속에서도 믿음의 눈으로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마르지 않는 은총이 흐르고 있습니다. 설레이는 것 같은 그런 처절한 징벌을 받으면서 정말 아침마다 눈뜨는 것 자체가 한없이 괴롭게 느껴지는 마라와 같은 쓴 물을 먹어봐야 하는 인생의 시련의 벌판을 지날 때에도 고요히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땅 밑에서는 은총의 물줄기가 함께 흐르고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의 백성들의 그 패역과 불순종을 차마 보지 못하셔서 그들을 끓어오르는 진노로 심판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심판의 채찍 뒤에 찢어진 그들에게 바르실 고약과 그리고 피 흘린 그들의 상처를 싸맬 붕대를 준비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처참하게 멸망을 예고 받고 그 멸망이 이루어졌지만 그래서 이제는 이방의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이제는 드디어 한 나라가 역사 속에서 사라졌구나 한 민족이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그들이 섬겼던 하나님도 함께 사라졌구나 라고 생각을 했지만 그러나 생각지도 않은 때에 하나님은 역사 하셨습니다. 그들을 다시 그 옛날 주님을 섬기고 함께 찬양했던 그 고토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우리 중에는 아마 이 감격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실향민이 여기 계십니까? 북에 두고 온 고향, 금강산 관광 길에 올라서 안내양을 따라서 지나가다가 바로 그 관광하는 노선 바로 옆에 손을 뻗으면 바로 잡힐 것 같은 동리가 고향인 사람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통곡을 하고 울면서 그 이북 사람들에게 사정했다고 합니다. 내 고향이 저긴데 강아지 지나가는 것도 보이고 사람 지나가는 것도 보이는데 우리 아버님, 어머님이 살아 계신지 생사를 내가 알아보기 전에는 내가 여기서 일어날 수 없다고 어린아이같이 길바닥에 앉아서 대성통곡하며 우니까 12시간 후에 부모님이 거기서 운명하신지 몇 해가 되었다고 통보가 왔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고향은 우리에게 있어서처럼 정든 고향의 정도가 아니었어요. 그들이 예루살렘을 등지고 바벨론을 떠날 때 그것은 고향만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도 함께 일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시온으로 돌아가라고 명령이 내렸을 때에 그들은 단지 두고 온 고향을 찾는 것이 아니라 고향으로 돌아가는 발걸음 자체가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이었고 나아가서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의 은총에서 소외되었던 그들이 하나님의 그 은총의 품으로 돌아가는 영적인 부흥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패역한 이스라엘을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그것도 교회냐 저것도 교회냐 그렇지요. 물론 그 중에는 정말 희망이 없어 보이는 교회도 있습니다. 우리 자식들이 다녀도 적극적으로라도 못 다니게 하고 싶은 그런 교회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버렸어도 하나님이 그 교회를 버리시지 않는 한 그 교회는 약속을 가진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주님이 그 교회를 붙들고 계시는 한 우리는 그 교회조차도 정말 사랑할 수밖에 없고 그리고 우리는 희망이 있다고 바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오죽했으면 징계의 채찍을 받고 역사 속에서 나라를 잃어버린 채 완전히 사라졌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실 때에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이스라엘 백성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그들을 이방의 등불로 삼아서 이방의 수많은 백성들이 이스라엘 백성 보기를 하나님 보듯 하게 하시려고 수많은 민족과 나라 가운데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주님이 아직까지도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을 식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이 이스라엘 백성들만 통해서 계속 되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오늘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그 흠 없는 보혈로 죄 씻음을 받아 자기의 사랑하는 양떼가 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진노를 잠깐이지만 은총은 평생이며 저녁에는 울음이 잠시 기습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라고 말합니다. 그가 곤고할 때나 괴로울 때나 기쁠 때나 심지어는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을 때에나 주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주님의 신실하심을 보이십니다. 완전히 실패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맛을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잃어버린 그래서 하나님 앞에 진노의 콧김에 날라가 버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그 고토로 돌아가게 하셨다고 할 것 같으면 오늘 그런 하나님의 마음은 오늘 말씀을 듣고 있는 여러분과 그리고 저를 향해서도 계속 되고 있는 것입니다.
돌아보면 우리에게는 후회되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지만 그 은혜에 부응하며 산 날들이 얼마나 되었는가 수없이 긴 날 동안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았지만 처음 정말 주님을 우리 주인처럼 대접해 드린 우리의 인생의 날 수가 주 앞에 갔을 때에 주님이 바라보시기에 우리의 인생이 정말 주님을 섬기면서 살았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우리의 년 수가 얼마나 될 것인가 살아온 삶을 후회하고 이제는 정말 옛날의 그런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썼지만 우리의 결심은 왜 그리 약한지 몰라요.
나는 여러분들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자기가 미워 본 적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한번도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아 본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도 내가 밉고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데 그 은혜를 받고도 하나님을 거슬리고 주님의 참사랑의 품에서 떠났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주께서 우리에게 베푸셨던 그 수많은 은혜를 못 박혀 죽으신 주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 구원을 주를 위해서 사는 대신 우리 육신의 방종의 기회로 삼고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자유, 이 아름다운 해방의 자유를 다시금 그 사랑에 붙들린 주님의 노예로서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분의 이름을 찬송하는 일에 우리 자신을 다 드리기보다는 주님이 그렇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배신으로 갚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보십시오. 오늘 하나님께서는 한 때 끌어 오르는 진노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기 때문에 이제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과 함께 이제 완전히 잊혀진 존재인 것 같이 생각되던 그 때에 주님께서 다시 자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진노하셨던 은총의 약속을 따라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화해의 길을 여시면서 다시 오셔서 그들에게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러한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범죄와 실패 속에서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극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의 용서의 사건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한번씩 새로 시작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은 딱 한번만 새롭게 시작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살다보니까 다시 시작해야 될 필요가 있는 그런 상황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의 고토로 돌아가게 하심으로 새로운 시작을 주셔서 거기서 다시 한번 이방인들의 주목을 받으며 그들 가운데 구원의 등불로 나타나도록 의도하신 것처럼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실패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찾으셔서 새롭게 하나님 앞에 시작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더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힘든 일 할 때 흔히 인용하는 ‘눈물을 뿌리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하는 이 5절과 6절의 말씀이죠. 애를 쓰면 열매를 거두게 된다라는 그런 이야깁니다. 그런데 이것이 126편의 문맥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포로 귀환과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이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일체의 오래 참으심과 신실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찾아오셔서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은 사실인데 그 기회는 거져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70년이나 되는 긴 포로생활 동안에 많은 사람들은 이방인에게 노예로 끌려가거나 혹은 그곳에서 더부살이를 하면서 잠시 머물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편하게 살다가 갈 것인가를 가지고 관심을 가지고 인생을 살았겠죠. 군대는 그만두고 예비군 훈련만 가 봐도 사람이 깔판 하나라도 반반한 것은 서로 자기가 깔고 앉으려고 애를 쓰잖아요. 여자 분들이 고개를 끄덕이면 알겠어요? 예비군 훈련 안 가 봤는데... 그래 가지고 사실입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그랬단 말입니다. 그런데 소수의 사람들이긴 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캄캄한 포로시기에 눈물로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니엘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예레미야의 서책을 보면서 이제 한 3년 정도밖에 남지 않은 포로 귀환의 위대한 역사를 보면서 약속을 보면서 그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당신의 백성의 부흥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에스겔과 같은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그발 강가에서 포로시대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이 열리고 권능이 임하고 여호와의 특별한 말씀이 임하시는 놀라운 체험을 통해서 그 시대 하나님의 말씀을 그 포로시대의 사람들에게 대언 해 주던 그런 비전의 종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름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분명히 오늘 성경은 ‘울며 씨를 뿌리러 나아가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그 기쁨의 단을 거두게 되는 이 놀라운 일이 이렇게 다시 고토로 돌아가서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님이 여전히 살아 계시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 여호와 하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는 민족이라는 것을 드러내시는 그 사건이 바로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사건이었습니다. 캄캄한 때에 하나님의 은총이 계속되고 있는지를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운 상황이 계속 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의 그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를 간절히 간구하 며 민족의 죄를 대신 통회하던 그런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강가에 모여서 저녁때면 두고 온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경험을 가지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두고 온 고향이 그리워질 때마다 그들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고향을 원수들에게 넘겨주시고 우리는 우리의 조상들의 죄로 말미암아 우리를 이곳으로 포로로 끌려오게 만드셨다 라고 하는 그 인식이 언제든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벨론 강가에서 흘리는 그 눈물은 단순히 타향살이의 괴로움, 고향을 그리워하는 감상적인 눈물이 아니라 신앙적인 눈물이고 종교적인 눈물이에요. 반드시 거기에는 죄에 대한 인식과 참회가 동반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눈물이 모두 울며 씨를 뿌린 사람들의 수고요 눈물이었습니다.
자, 여러분도 다시 시작하고 싶으시죠? 지난날 후회스러웠던 일, 하나님 바로 믿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크게 징계를 당하거나 혹은 하나님의 그런 참사랑을 모두 잃어버리고 이제는 빈 털털이가 되어서 허전한 가슴을 안고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위해 신음하는 사람들이 여기 있을 것입니다. 그런 모든 사람들은 다시 한번 하나님이 새로 시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시겠지요. 그러나 여러분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처절할 정도로 하나님께 불순종과 배역의 길을 걸었는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눈물로 씨를 뿌리며 새로운 하나님의 시작을 구했습니다. 신앙의 문제는 멍하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세월이 해결해 주는 신앙의 문제는 없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답답하다 뭐 도대체 신앙이 뭔지, 뭐가 뭔지도 잘 모르겠고 또 알아도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고 대놓고 안 살겠다고 뛰쳐나가자니 용기는 없고 그런 분들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믿자니 고생이 심하고 버려야 할 것들이 너무 많고 주일 낮마다 그렇게 믿으려면 가버리라고 메일 소리를 들으면서도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아멘하고 밖으로 걸어나가면 뒤통수 얻어맞을 것 같은 불안감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거 가만히 내버려두면 10년 흘러도 10년 후에도 여러분은 똑같은 고민합니다. 물론 9년 동안은 그런 고민을 잊어버릴 수는 있어요. 그러나 다시 돌아와 앉으면 접어두었던 그 고민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월이 약이겠지... 신앙에 있어서 세월은 그냥 물이에요. 물. 약이 아닙니다.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세월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세월의 흐름에 씻겨서 거룩하고 예민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강팍하고 무식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돌덩어리 같은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저는 축구경기 볼 때 제일 신나는 것이 막 우리편이 시달리다가 한 꼴 빡 먹었는데 심판이 호로라기 삑 불면서 무효라고 그럴 때 그 때 너무 기분이 좋지 않아요. 너무너무 좋아요. 무효 그리고 어디로 공이 굴러갔던지 가져와 가지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쁨니까? 실패한 사람들을, 만족스럽지 못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에게 다시, 새로 라고 하는 이 말은 한없는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수학문제를 막 풀다가 안 풀리면 새 시험지를 갖다 놓으면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지 않아요? 아니 뭐 그것도 조금 하는 사람이어야 되겠죠. 워낙 모르는 사람이라면 새 거 갖다 놓는다 해도 일 없지요. 그렇잖습니까?
지금도 저는 생각을 해요. 처음 교회를 막 세우게 하셨을 그 때에 정말 잘 해야지, 정말 제 인생을 살면서 잘 해야지라고 결심을 그 때처럼 심각하게 결심한 것입니다. 잘 해야지...주님이 어떻게 우리를 여기 세워 주셨는데 이것이 한번 밖에 없는 기회인 줄 알고 언제부터인지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이사오기 전에 한 1년쯤 된 것 같습니다. 제 입에서 자연스럽게 새벽마다 기도가 흘러 나왔어요. 결심한 건 아닙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 교회가 제 인생의 최초의 목회지요 그리고 마지막 목회지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잘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얼마나 무능한지를 절실히 자각하게 될 때 그리고 내 안에 있는 내가 얼마나 사악하고 그리고 주님의 뜻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 자각하게 될 때 저는 거울을 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 말해 봅니다. 주님 잘 할께요. 다시 한번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속으시는 것 같으면서도 당신 앞에 와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요청하는 우리에게 언제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수없이 새로운 기회를 제공받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그 실패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우리들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마음으로 이전의 실패의 종지부를 찍고 이전의 실패를 딛고 일어나려는 그 몸부림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옛사람을 답습하는 것은 너무나 쉽고 좋습니다. 마치 오랫동안 신고 다닌 신발을 계속 신고 있는 것처럼 편합니다. 새로운 모험과 인생의 방향의 전환 그리고 신앙생활의 새로운 각성 그리고 삶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개혁 이러한 것들은 언제나 고통과 아픔을 동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눈물이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고치는 사람, 자신이 이제껏 걸어온 패역한 길을 안 갈려고 돌아서는 사람 그리고 이전에 많이 사랑하던 것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치 않은 줄을 알았기 때문에 내려놓는 사람들의 눈에서는 언제나 눈물이 흐르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아픔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그렇게 해야지만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은 원하지만 그 회복을 위해서 아무 것도 희생할 생각은 안 하는 사람은 그 사람들은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원하고 또 하나님의 축복을 원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내 인생 길을 열어 주시기를 원하고 그리고 말씀의 놀라운 지식도 주시기를 원하고 소원함은 많은데 하나님 앞에 어떻게 눈물의 씨를 뿌려야 할지 특별한 고난을 받으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다는 것도 인정하면서도 그냥 특별히 견디기만 하지 특별히 기도는 안 해요. 그러니까 죽으라고 맞는 거야. 그냥 소 잡아먹은 귀신 모양 가만히... 그게 뭡니까? 그건 인내도 아니고 신앙도 아닙니다. 무지막지합니다.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지고 정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께 받고자 원한다면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릴 각오를 해야 합니다.
알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나는 신앙적으로 볼 때 이런 한계가 있다, 나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러이러한 실패를 반복하고 있다, 내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이러이러한 것들을 버려야 한다, 알면 뭐합니까? 실제로 그렇게 하나님이 새롭게 시작하신 그 은총의 그늘 아래로 불러주기를 고대하면서 그 캄캄한 포로시대에 눈물을 흘리던 깨어있었던 소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기 부인과 극복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다 똑 같습니다. 새벽이면 퍼질러 자고 싶지, 새벽에 바지 끼고, 양말 신고 휴~ 찬바람 부는 거리를 서너 정거장, 너덧 정거장 심지어는 차를 두 번 갈아타고 나와서 추운 예배당에 쭈그리고 앉아서 그것도 하루지 매일 기도하면서 새벽을 시작하기를 원하는 육체는 연구대상 빼고는 없다 이겁니다.
다 똑 같습니다. 다 나 즐거운 거 좋고 나 기쁘게 하는 거 좋고 그리고 나 편한 거 좋지 내 유익을 희생해서 다른 사람을 섬기고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서 주님께 기쁨을 드리고 자기가 피땀 흘려 벌어서 남 주고 싶은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는 삶 하나도 변하지 않고 새로 시작할 기회를 주면 뭐해요? 어차피 문제를 풀 의지가 없는 사람들에게 새 시험지 내 나눠줘 봐야 개발 새발 낙서하다가 도로 갖다버리고 또 새 종이 새 종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회개가 이런 것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 얼마나 받습니까? 그것이 진짜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눈물을 펑펑 흘리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그러면 이제 하나님이 새로 기회를 주시기를 정말 원한다면 그런 눈물이 삶 속으로 녹아들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언젠가는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은총으로 바꾸시고 지금은 비록 하나님의 은총의 햇살에서 벗어난 것 같은 어두운 처지에 있지만 그러나 끊임없이 나의 패역을 고치고 내 안에 뿌리깊은 죄를 매일매일 미워하며 눈에는 아무 증거 아니 보여도 패역을 고치며 당신께 다가오는 사람들을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이 겸비하게 하시고 백합화와 같이 향기롭게 하시겠다고 하신 그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으며 눈물로 씨를 뿌리는 마음으로 돌아가는 사람, 돌아가도, 돌아가도 뭔가 강한 하나님의 축복이 당장 나타나지 않을 때 오히려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왔는지를 생각할 수 있는 겸비함을 가진 사람, 그래서 요나 선지자가 고백했던 것처럼 주께서 나를 쫓아 내실지라도 나는 주의 성전을 바랄 수밖에 없나이다 라고 말했던 것처럼 주께서 우리를 때리시거나 우리의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잠시 어두움 가운데 두신다고 할지라도 주님만이 우리의 인생을 다시 새롭게 시작케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굳게 믿으면서 그 은총의 약속을 마치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농부와 같은 마음으로 쉬지 않고 계속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꿈꾸는 것과 같은 회복의 날들을 주시고 그리고 그렇게 회복을 주실 때에 그들의 입에는 웃음이 가득한 그 날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실패한 사람들은 다시 새롭게 시작하게 하시고 싶어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에게도 여러분들의 실패가 아무리 깊고 심지어는 여러분의 죄가 주홍과 같이 불고 지나온 삶들이 너무나 후회와 슬픔으로 가득 찬 그런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여러분들에게도 꿈꾸는 것과 같은 날들이 오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숨을 쉬는 동안 영원히 이 교회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그 사건이 내 인생에 대사를 행하신 사건이라고 기억에 남는 그래서 주님이 은총의 주님이시며 소망이 끊어진 자들에게 위로가 되시며 세상에서 낙인찍히고 양심의 정죄를 받아서 이제는 내 삶의 모든 기회가 사라졌고 아무런 소망이 없다 그렇게 이르던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은 살아 계시며 자기를 찾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들에게 대사를 행하셔서 그들의 회복을 꿈꾸는 것과 같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이렇게 간증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때까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으십시오. 우리를 위해서 못 박히시고 실패하고 하나님 앞에 소망 없는 자들을 부르셔서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 세우시는 다시 새롭게 시작케 하시는 그 하나님의 손길을 마음껏 맛보고 여기서 여러분이 이 실패를 딛고 일어서서 지난날의 부끄러움이 변하여 후일 여호와 앞에 영광이 되게 하시고 여러분들의 연약한 것을 통해서 오히려 아버지의 강함이 드러나는 그런 복된 역사들을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경험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8. 다시 새롭게 은혜주시는 하나님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주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精神)이 회복(回復)되어 소생(蘇生)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이 샘이 레히에 오늘까지 있더라”(삿15:18-19)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삼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는 드릴라와의 깊은 사랑에 빠져서 결국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잃어버린 실패한 사사였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부분에서는 사실 삼손의 실패를 이야기하고는 있지 않다. 그렇지만 비록 여기서 삼손이 큰 실패를 경험한 것은 아니였지만 그러나 여기서 삼손은 깊은 고갈을 경험하게 된다.
이야기를 말씀드리자면 당시에는 블레셋 사람들의 힘이 강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들의 관할아래 두고 있었다. 그런데 삼손이라는 이 사사가 나타나서 아주 괴력적인 힘을 가지고 여러 가지 사건을 일으키면서 불레셋 사람들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러자 이 불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내 놓지 않으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커다란 위해를 가할 것처럼 위협을 가하게 괴었고 그러자 이스라엘 사람들도 삼손을 내어주기가 싫었지만은 그러나 이제 묶어서 이 불레셋 사람들에게 삼손을 바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삼손은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를 단단히 묶어서 불레셋 사람들에게 내어주었지만 여호와의 신이 임하자 자신을 묶은 밧줄을 모두 풀어버리고 당나귀 턱뼈 한 개를 가지고 불레셋의 수많은 군사와 대적을 했다. 그래서 결국은 일 천명이나 되는 불레셋의 무장한 군사들을 한 자리에서 해치게 되었다. 그러니까 춤을 추듯이 당나귀의 턱뼈로 불레셋의 병사들의 급소를 쳐서 하나씩 둘씩 쓰러뜨리는 그런 놀라운 일들을 연출해 내게 되었다. 그것은 삼손 한 사람의 무술이나 체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를 도와 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일 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모두 다 때려눕힌 그후에 일어났다. 삼손은 싸움이 끝나게 되자 엄습해 오는 목마름과 그 다음에 탈진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주저앉는 심령으로 목말라서 이제 결국 전쟁에서는 이겼지만은 자기가 죽인 그 시체들 위해 엎드려져서 죽어버릴 것 같은 탈진을 느끼게 되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이제 그에게 '레히'의 한곳을 터트리시고 셈을 내게 하셔서 그 물을 마시니까 정신이 회복되고 소생하게 되었고 그 샘의 이름을 '엔학고레' 라 부르게되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이 이야기의 주요내용이다. 우선 여기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레히의 우묵한 곳을 터뜨리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들어가기 전에 무슨 불순종을 해서 커다란 범죄로 요나와 같이 실패한 사람은 아니였지만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 범죄를 해서 크게 실패한 사람은 아니였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리에 서서 불레셋과 싸우는 동안에 그는 탈진을 경험하게 되었다.
실제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주님이 주신 길을 걸어가다가 신발을 거꾸로 신고 주님이 원하시지 않는 다른 길로 가는 불순종이 시작되기 전데 막 순종을 향해 달려가다가 갑자기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서 뛰어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비스듬한 언덕위로 공 같은 것을 굴려서 올려보내면 힘이 있는 동안에는 언덕을 타고 계속 올라간다. 그러나 올라갈 때까지 다 올라간 후에는 공이 완전히 그 언덕을 넘지 못하면 아래로 굴러 내려오기 마련이다. 아래로 굴러 내리기 전에 먼저 공이 힘차게 올라 가다가 속도가 점점 떨어지면서 그 언덕에서 멈추는 지점이 있다. 그리고 나서 그 공은 이제 탄력을 받으면서 아래로 내려오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 생활과 영적인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다른 길로 가기 전에 대부분의 경우에 먼저 탈진의 과정이 먼저 있다. 그러므로 실패한 사람들만 새로 시작할 것이 아니라 아직은 불순종하지 않았지만 점점 탈진되어 가고 있는 사람들은 그 탈진을 통해서 불안해 지기 시작하고 결국은 그 탈진을 통해서 불순종을 준비하고 실패를 예비하고 있는 셈이 된다. 그래서 실패하고 완전히 그릇된 길로 간 사람들만 다시 새롭게 시작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 탈진된 사람들도 새롭게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탈진되기 시작할 때 우리의 육체는 힘을 얻기 시작한다. 우리의 영성이 탈진되기 시작할 때 우리의 죄 성은 힘을 얻기 시작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은 사라지고 내 맘대로 살고자 하는 강퍅하고 굳은 마음이 고개를 들게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충만한 은혜와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도움을 바라는 깨뜨려진 마음 이것이 우리의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또 우리의 마음으로 하여금 강퍅해져서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게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 주는 훌륭한 장치가 되는 것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 그리고 그것은 매일 매일 은혜 생활을 하면서 매일 매일 자기와 싸워 이기고 죄를 죽이고 한편으로는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이 주신 따듯한 마음과 은혜를 계속 살리는 삶을 살아가야 되는 것이다. 다른 지름길은 없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 이렇게 탈진 상태에 있는 이 삼손을 놀랍게 다시금 강한 용역을 가진 군사로 다시 회복시키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오늘 성경에서는 네 가지 정도로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레히의 한 우묵한 치셨다는 내용이 나온다. 바로 그 앞 절에는 이 '레히'가 '라마드 레히'의 그 '레히'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레히'는 히브리말로 '빰'을 가리킨다. "원수의 빰을 치시며" 할 때 이 뺨을 '레히'라고 부른다. 더 정확히 말하면 뺨의 턱 부분을 가리키는 말이다. 조금은 안 될 말이지만 우리말로 토속적인 언어로 말하면 '아구창'을 나타내는 말이 된다. 즉 삼손이 가지고 싸웠던 턱벼가 바로 당나귀의 레히의 해당하는 부분이 되는 것이다.
'라마트' 라는 말은 '룸'이라는 동형용사에서 온 말이다. 그런데 '높다' 라는 말에서 온 단어이다. 라마트는 높은 곳, 고원지대, 언덕, 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조금 이상한 말이다. 하나님께서 샘을 터치신 것은 사실인데 '레히'를 터치셨다는 사실이다. '라마트 레히'라는 지역을 터치셨다는 것이다. '레히'는 나귀 턱뼈로 불레셋 사람들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는 것이고 '라마트'는 그런 일들을 하나님께서 행하신 지형이 언덕이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언덕에서 물이 나오는 법이 없다. 물은 언덕 아래로 내려와야 나온다. 더욱이 깊은 펌푸를 박아서 암반을 뚫어서 물을 푸는 것도 아닌데 구릉이진 언덕에서 어디를 파도 물이 나오지 않는 이스라엘 지방에서 언덕에서 물이 나온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마 삼손 자신도 너무나 목이 마른 나머지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면서 목말라 죽겠다고 호소한 것은 사실이지만 설마 거기에서 물이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그래서 은혜 받기 전하고 은혜 받고 난 후에 사람의 차이는 은혜 받기 전의 사고는 복잡하였다. 이러한 사고는 좋은 사고가 아니다. 그러나 은혜 받고 난 후에는 머리가 단순해진다. 그런데 단순해져 보이는데 이상한 것은 세상에 이치는 생각이 많고 사고가 입체적이어야만 판단을 제대로 하는데 신앙의 세계와 은혜의 세계에서는 사고가 너무 입체적이고 복잡하면은 판단을 하지 판단을 하지 못한다. 단순해져야 한다. 단순해진다는 이야기는 멍청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유치하다는 말과 순진하다라는 말이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단순해져야 한다. 사고와 정신이 단순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고 이런 저런 이유로 우리의 영적인 힘이 고갈되고 은혜가 떨어지고 여러 가지 실패에 직면할 때가 있다. 그때 우리의 머리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하면서 나름대로 혼란스러워지는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은 항상 그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를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늘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 인간에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다만 방향이 엉뚱한 대로 가니까 그렇지 다 생각은 한다. 그리고 고민도 한다. 방향은 맞지 않지만 고민을 한다. 그러니까 "당신이 왜 그렇게 고갈되어 가고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이유가 총천연색 씨네마스코프 이다. 너무 많다. 어떤 사람은 집을 팔려고 내 놓았는데 팔리지 않아서 신앙생활을 못한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집을 사로 다니느라 은혜생활을 못한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직장의 문제 어떤 사람은 돈 문제 어떤 사람은 인간관계 어떤 사람은 건강에 문제 여러 가지 이유가 자신의 고갈의 원인으로 실패의 원인으로 말한다.
그러면 해결의 방법이 무엇인가? 내 고민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결핍의 문제를 풀어주시고 이 문제 저 문제 저 문제 이 문제 이렇게 저렇게 해결을 해 주시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도를 하나도 안 해도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알고 정답도 잘 알고 있고 "어떻게 하면 될텐데" 하고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보다도 머리가 나쁘신 것 같아 보인다.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부지런히 자기의 고갈로 말미암아 목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서 부지런히 '라마트 레히' 아래로 내려간다. 어디 축축한 곳을 터뜨려서 어떻게 해서라도 물 한 모금 "얻어먹어 볼까" 하고 다니는 것이다. 그런데 아니다.
하나님이 언덕 위에서 물을 내신 것이다. '레히'에서 물을 내셨다. 이와 비슷한 예가 또 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다가 기적적으로 하나님께서 물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을 마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동의할 수 있다. 그런데 물이 나오라고 명하시려면 옛날에 물을 퍼 마셨던 우물에 하시든지 평평한 땅에 말씀을 하시든지 아니면 언덕아래 축축한 대로 가서 물이 나와라 할 것이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반석에서 그것도 보통 반석이 아니라 삼백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물을 마시기에 충분한 크기에 반석,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그리스도로 비유한 반석, 아마 모세가 올라가서 장엄하게 반석을 내리치는 위용이 어울릴 정도의 반석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그러한 반석이 터지면서 물이 쏟아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영혼의 깊은 고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새롭게 문제를 해결하고 충만한 경험을 한 뒤에는 너나 할 것이 없이 감탄하게 된다. 그것은 내가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리라고 생각한 모범 답안하고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내 영혼의 고갈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방법이 너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자기는 상식으로 축축한 계곡 아래로 내려가서 뭘 후벼파야 될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바로 그 '레히'에서 고 치수(?) 샘을 내신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그렇다 여태까지 돈이 없어서 자식이 속을 썩여서 자신의 인생이 막장으로 가는 줄 알았을 것이다. 또 직장을 잃어버렸거나 사업에 실패했기 때문에 인생이 이처럼 슬픈 것인 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결국은 자신이 실패했다는 그곳에서 다시 성공을 보고 내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시 얻고 내가 절망했던 그 곳에서 희망을 갖는 것이 결국은 자신이 소생하는 길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명예는 잃어버린 사람들이 더 갈증을 갖고 돈은 벌지 못하는 사람이 돈에 대한 욕망이 더 많다. 높은 지위에 오를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은 초월한데 오를 자격도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높은 지위에 대한 갈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신앙만 반대이다. 신앙은 있는 사람들이 욕심을 더 낸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신앙에 대해서 욕심을 내지 않는다. 은혜 받은 사람들이 은혜 받겠다고 몸부림친다. 은혜 없는 사람들은 은혜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리고는 오로지 자신이 생각하는 시나리오대로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셔야지만 거기에 문제에 해결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사고 방식이나 행동하는 방식을 보면 그 사람의 머리가 하나님 보다 훨씬 더 좋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깊이 이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를 받으면서 그 고갈된 영혼이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 지는 소생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때 그 때 그 사람은 자기가 생각한 문제가 문제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해결의 방법은 자기가 생각한 시나리오와 너무나 틀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즉 자기는 언덕아래 내려와서 돈 찾아다니고 잃어버린 명예 찾아다니고 이것 저것 찾아 다녔는데 사실 정답은 바로 '레히'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정답이 있을 것 같지 않는 그 곳에 터쳐서 물이 나올 것 같지 않은 그 곳에 바로 정답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참 기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가지고 몸부림치며 데굴데굴 구르면서 고통하고 이 문제로부터 벗어 날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사실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가 있다. 그리고 해답이 그가 돈이나 명예나 사업이나 사람을 찾아다녀서는 해결이 안되고 하나님이 찾아가 해결이 되는데 그런데 그렇게 하질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 상식을 믿기 때문이다. '레히'에서는 물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을 만나려면 내려 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물이 있을만한 곳 물을 찾을 만한 곳으로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라마트 레히'에서 샘을 터치시는 역사를 보여주신다. 여러분은 실패 가운데 있을 수 있다. 불순종 가운데 있을 수도 있다. 깊은 고갈 가운데에 있을 수도 있다. 수요일마다 다시 새롭게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씀을 들으면서 다시 새로 시작하고 싶다라는 마음을 여러분들이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정답을 하나님께 강요하지는 말아야 한다. 여러분들 가지고 있는 정답이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다. 만약에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이러한 방법을 우리들이 바르게 알지 못한다면 여러분들이 순종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모범 답안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모범 답안에 순종하는 것이 된다.
자기 자신의 생각에는 꼭 맞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우리가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예비고사' 라는 시험을 봐야 했다. '예비고사' 라는 시험에 합격하면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시험을 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초창기에는 이러한 방법을 반영하는 학교가 거의 없었다. 이것은 자격 시험을 따는 것에 불과 했다. 그런데 학교가 얼마나 좋으냐 하는 것은 두 가지로 판명이 되는데 하나는 서울대를 몇 명이나 합격 시켰느냐 이고 두 번째는 학교 전체가 예비 고사 합격률이 얼마나 되느냐에 있었다.
그래서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에도 저희 학교의 합격률이 93.5%가 나올 정도로 거의 모든 학생들이 예배고사 시험에 붙었었다. 한 반에서 서너 명 떨어지고 다 붙었었다. 유난히 성적이 잘나왔다. 그런데 떨어진 아이들 중에 공부를 그래도 제법 하는 어떤 아이는 이 사실을 도무지 받아드리려고 하지 않았다. 채점이 잘못됐었다는 것이었다. 이 아이뿐만 아니라 이러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이이 신청을 내었는데 결과는 동일하였다. 자신이 틀렸던 것이었다. 즉 문제를 풀어서 답안지에 잘못 옮기는 등 자신의 실수로 떨어진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의 신청을 하였지만 채점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된 경우는 한 건도 없었다.
꼭 맞는 것 같다. "내 상식대로 역사 해 주시면 될 텐데" 라고 생각한 다 그러나 아니다. 하나님께서 '레히' 에서 셈을 터치신 것이다. 삼손도 예측하기 어려운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실패 가운데 고통하게 만드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는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그것보다는 실패를 통해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다루시는 방법을 배우게 하시려는 것이다. 배우고 있습니까? 배우고 있습니까? 비스마르크는 "미련한 자는 경험을 통해서 배우고 지혜로운 자는 역사를 통하여 배운다"고 말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신앙의 세계에서 경험을 통해서도 배우지 못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정말 미련한 사람일 경우가 너무도 많다. 아직까지도 우리의 사고 세계가 가지고 있는 공식과 규칙을 따라서만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마음을 먹고 그 정답을 하나님께 강요하고 정답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새롭게 살리실 수 있다고 하는 명백한 성경의 증언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의 증언으로 무시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실패로부터 회복되기가 힘들고 고갈로부터 다시 회복을 얻기도 매우 힘들다.
오늘 이 시간에 한번 여러분들의 사고에 일대 전환을 일으키기를 바란다. 여러분들이 여태껏 여러분 자신들의 신앙에 대해서 우쭐하게 평가했던 그것이 다 잘못될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해 보자. 그리고 내 자신이 내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느끼고 있는 안전한 느낌 이것이 사실은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 다고 한번 생각해 보자. 그리고는 초점을 하나님의 생각에 맞춰 보자. 이렇게 내가 모든 일에 실패하고 허탈과 좌절을 느끼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것을 통해서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인가? 정말 내 문제는 돈만 있으면 해결되는 문제인가? 정말 내 문제는 내자 지겨워하는 그 인간 한 사람만 변하면 문제가 해결되고 나의 영혼은 하나님 앞에 자유를 얻는 것인가? 정말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것 이 외에는 정말 문제가 없는가?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는 것 이 외에는 내 인생에 정말 자유케 될 수 있는 길이 없는가? 그것만 해결되면 내 영혼은 저절로 자유가 오는가?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성경에 빛을 받기만 하면 성경 다음으로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자료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 경험이다. 성경에 빛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성경의 빛을 받고 우리의 경험이 제대로 판단되기만 한다면 즉 검증되기만 한다면 옳고 그른 것을 잘 판단할 수만 있다면 신앙의 경험만큼 우리의 인생과 신앙에 도움을 주는 것은 없다.
예를 들어 우리의 회개의 경험을 생각해 보자. 회개의 경험은 항상 우리에게 충격과 함께 다가온다. "얘야 내가 너를 볼 때 마음이 너무 아프다" 라고 할 때 "내 그럴 줄 알았어요 하나님" 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 내가 정말 하나님을 멀리 떠났었습니까?" 라고 고백하며 깊이 애통한다. "하나님 제가 겉으로는 그럴듯한 신앙생활이었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그렇게 비참한 모습이었습니까?" 하면서 회개한다. 그리고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후회하게 된다. "하나님 그렇습니다." "주님의 생각이 맞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에 계속 나오고 있었지만 아버지를 멀리 떠난 탕자와 같은 인간입니다." 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된다.
그러므로 회개는 항상 충격으로 다가온다.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몰랐는데 회개하는 그 순간에 충격적으로 깨닫게 된다. 하나님 저 같은 인간에게도 관심이 있으셨겠어요? 라고 하면서 관심을 가져달라는 자기의 속을 드러내게 된다. 그런데 회개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하나님 인자한 귀로서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 주시고 너의 작은 시름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나를 사랑하셨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우리들이 인식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어 있지 않을 때에는 심지어 "자신이 상당히 바르다" 라고 생각할 때조차도 그렇게 진실과는 엄청나게 거리가 먼 상황이 있을 때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결국 자신의 인생을 보는 시야 자체가 매우 정확하지 않으니까 자기가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정확할 리가 없는 것이다.
예비군 훈련을 가면 실탄 사격을 한다. 나는 눈이 참 나쁘다. 얼마나 눈이 얼마나 나쁘냐 하면은 안경을 벗으면 남녀가 구분이 안될 정도이다. 안경을 보면 내 얼굴이 안보일 정도이다. 그 정도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비가 쏟아지는 날에 안경을 잃어버려서 안경을 쓰지 않고 사격을 하게 되었다. 맞을 리가 없었다. 다 사격한 후 표적을 확인했을 때는 한 방도 맞지 않았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여섯 발을 발사했었다. 내가 발사한 총알이 옆에 사람 표적에 다 맞았던 것이다. 옆 사람은 분명히 여섯 발을 쏘았는데 표적에 아홉 발이 맞아 있었다. 그런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심각하게 폼은 있는 대로 다 잡고 보이지 않는 눈 그것도 한쪽 눈 마저 감았으니 보일 리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진지하고 폼잡아도 그것은 다 똥 폼이다.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레히'에서 터뜨리신다. 반석에서 샘을 내신다. 어쩌면 여러분의 실패를 다루시는 방법도 여러분들이 예상하고 있지 않는 전혀 다른 곳에 하나님께서 지금 두드리시면서 "만나자." "내가 네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겠다." 하고 하나님께서 부르고 계실지 모는 것이다.
두 번째 하나님께서 '레히'의 우묵한 곳을 터뜨리셔서 물을 내셨다. 물을 확 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참 놀라운 분이시다. 삼손이 "목말라 죽겠나이다" 하고 부르짖었다. 그러면 포도주를 먹어도 목마름이 어느 정도 해갈 될 것이다. 그리고 양이나 젖소의 젖을 주실 수도 있었다. 그런데 '물'을 주셨다. 결국 여기서 보여주는 것은 지금 이 삼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적당히 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이차적이고 삼차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일차적이면서도 궁극적인 해결책이다. 이 순간 삼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물인 것이다. 산해진미나 영양제 같은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물' 이 필요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터치시며 내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을 살아 가다가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 그 문제를 인간이 아무리 버둥거리며 애를 쓰면 어느 정도는 스스로를 도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미봉책에 불과 하다. 마치 튿어진 바지에 스카치 테이프 붙이고 다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항상 문제가 해결되었나 싶으면 다시 문제가 불거지고 풀렸나 싶으면 다시 불거지고 불거지고는 한다.
여러분 삼손에게 있어서 일 천 여명을 때려죽이고 목이 말라죽을 것과 주저앉은 이 삼손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오직 물밖에 없었다. 오직 물이 궁극적인 해결이었다.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삼손처럼 영혼의 깊은 고갈을 경험하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궁극적인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안 되던 사업이 조금 잘 되는 것입니까? 가계의 매상이 오늘 하루 만 예상외로 올라가는 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습니까? 실패하고 하나님께 돌아가기에는 너무나 멀게 느껴지는 그 길로 떨어져 나와있는 여러분들에게 궁극적인 해결은 무엇입니까? 과연 무엇입니까? '라마트 레히'에 지쳐서 넘어져 있는 이 삼손에게 유일한 해결은 땅속에서 쏟구쳐 오르는 시원한 생수가 그의 궁극적인 대안이었던 것처럼 고갈이나 깊은 실패 속에 있는 여러분들에게 궁극적인 대안은 역시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이것만이 궁극적인 대안이다.
그런데 우리는 궁극적인 대안이 이렇게 우리의 인생의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해 줄 것이다 라는 믿음이 너무나 없다. 어차피 이 '레히'에서는 물이 나오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다시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그런 대안들을 자기가 손쉽게 가질 수 있는 대안들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깊이 고갈된 사람들에게 유일한 대안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전에 가난하던 시절에는 펌푸 물도 잘 마셨다. 석유 냄새가 심하게 나는 물도 보기에 맑은 물이면 잘먹었다. 게다가 수도가 나왔다. 고동 수도에 물통 들고 죽 서서 한 들통 받아다가 여자들이 목욕이라도 한 날은 온 골목을 다니면서 수돗물로 목욕했다고 자랑하던 때가 있었다. 서울 올라가서 얼굴이 하얗게 되면은 "역시 수도 물이 좋구나"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먹지 않는다. 정수기의 물이 더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생수를 받아다가 먹는 사람들은 정수기 사용도 하질 않는다. "그물이 무슨 물이냐 증류수지" 라고 말한다. 그리고 생수를 먹는다.
궁극적인 목마름을 해결하는 궁극적인 대안을 이미 맛본 사람들은 항상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그 궁극적인 대안을 향해서 목마름을 가지고 있다. 여러분들이 처하고 있는 인생의 문제나 영혼의 고갈이 어떤 이유로 시작되었는지는 다 알 수 없지만 알 수 있는 것 하나는 있다. 하나님을 만나만 해결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하다. 그것이 실패든지 깊은 절망이든지 아니면은 영혼의 깊은 고갈이든지 심지어는 뭐가 뭔지도 모르는 혼돈이든지 간에 하여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그 문제의 해결이라고 하는 만큼은 분명하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삼손이 오늘 이 '라마트 레히'에서 주저앉아서 하나님 앞에 목말라 죽게된 처지를 호소하면서 물을 기다렸던 그러한 마음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 인생의 그 모든 문제에 '라마트 레히'의 우묵한 곳을 터뜨리셔서 물을 내신 것과 같은 그러한 놀라운 해결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 앞에 세우시기 위한 수단일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인생의 깊은 문제는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상적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영혼의 감각이 무디어진 사람들 향해 당신 앞으로 나아오도록 부르시는 또 다른 종류의 하나님의 음성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문제는 그 문제가 그런 깊은 고갈이나 실패 속에서 깊은 좌절하고 절망하는 그 문제가 결국은 시금석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올 사람과 하나님께로 영원히 멀어질 사람들을 구별해 낸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올 사람들은 문제가 없을 때 교만하게 살다가도 문제가 '꽝' 하고 터지거나 아니면은 살만 할 때에는 교만하게 살던 사람들이 영혼의 깊은 고갈을 경험할 그 때에는 이 사람들이 겸비해 진다. 그리고 교만해 하던 자들이 겸손해 지고 하나님을 향해 초점을 갖지 못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게 된다.
그러면 반대로 하나님 앞에 멸망할 사람들과 하나님께로부터 영원히 멀어질 사람들의 특징은 문제가 생겨나면 하나님 앞에 마음이 더 강퍅해 지고 그 다음에는 '막가파' 기질이 발동을 하게 된다. 그래서 아이들이 마치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놀이 같을 것을 하다가 확 때려 업으면서 판을 뒤집어 버리듯이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못된 오기를 부린다. 그리고 "확 죽어버릴 가보다."라고 한다. 자기 죽는다고 겁내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이러한 어리석은 생각을 하게 된다.
문제는 항상 우리가 누구인가를 분별하게 해 준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부르고 계시고 그 문제를 통해서 "너는 너 자신의 깊은 한계와 나로부터 멀어진 것과 그리고 내가 고갈 된 것을 보고 나를 만나서 해결해야겠다는 갈망을 갖으라!"고 하시는 표시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들은 문제를 통해서 즉시 하나님을 찾게 되고 작은 문제를 통해서 크게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미련한 사람들은 문제를 통해서 더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이른바 '막가파'로 가게된다. "뭐 가는데 까지 가보자"라고 말한다. 이것은 끝이 없는 일이다. 죄 죽임의 교리를 하면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죄가 마지막까지 우리를 데리고 갈려고 하는 곳은 구원받았으면서도 사실은 배교자의 모습으로 사는 데까지 우리를 데리고 갈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끝이다. 거기까지 가겠습니까?
그래서 마지막 날에 우리의 영혼이 구원을 얻고 우리의 육신은 사단에게 내어준바 되어서 심판을 당하는 거기로 가기를 원하는가? 끝이 없다. 생각해서 금방 끝이 보이는 것이 아니다. 끝이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은 죄의 세계와 은혜의 세계가 비슷하다. 은혜의 세계에는 끝이 없다. 다시 말해서 "요즘 지루해서 교회 못 다니겠어!" "나는 너무 충만하거든 나는 이제 갈 때까지 갔어!" "나는 너무 거룩해 졌거든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서울대 법대가 단과 대학에서 시험을 볼 때 제일 어려웠다. 그래서 같은 학급에 친구들 중에 조금 교만한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공부를 잘했다. 그런데 시험에 떨어졌다. 그리고 난 후 재수를 열심히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에게 내 친구가 편지를 받았었다. "너 어떻게 시험준비 잘하고 있니?" 하고 편지가 왔는데 편지에 "아무게야! 내가 이번에도 서울대 법대를 시험 보는데 면접만 남았다." 라는 내용이었는데 그 해 시험에 또 떨어진 것이다.
은혜의 세계는 참 기가 막히다. 즉 은혜의 세계로 가까이 들어가면 갈수록 자기가 더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라고 하는 사실을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한번은 학교에서 교수생활을 할 때였다. 그 때는 열심히 하늘을 찌를 듯 하던 시기였다. 겨울이나 여름이 되면 누가 시키는 사람도 없는데 내가 자청해서 아이들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치기 위해 학생들과 함께 산 속으로 들어갔다. 강사료도 받지 않고 관광버스 빌려서 주일 오후 예배를 마친 후에 먹을 것과 이브자리를 챙겨서 밤 11까지 서울역에 집합하여 지방의 기도원으로 학생들을 끌고 갔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새벽 3시쯤 된다. 그리고 짐을 풀어놓고 곧바로 알파벳부터 배우기 시작한다. 알파벳을 가르쳐 주고 학생들에게 익힐 수 있는 시간을 주고 7시 30분에 시험을 보기로 하고 나는 숙소에 들어가 잠을 잔다. 그 동안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를 하게된다. 시간이 되어 시험을 본다. 그 다음에는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세수하고 아침 먹고 그 다음 계속해서 한 시간 공부하고 문제를 풀고 문제 푸는 시간에 또 들어가서 자고 시간이 되어서 학생들이 푼 문제에 답을 가르쳐 주고 그렇게 해서 하루에 15시간씩 공부를 했다. 그러니까 알파벳부터 시작해서 6박 7일 동안을 해서 돌아오는 토요일에는 창세기 1장을 보고 올 정도였다. 학생들 중에 한 아이는 고 3때도 이렇게 공부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이와 같이 은혜의 세계도 끝이 없다. 마찬가지로 바닥으로 내려가는 실패에 세계에도 끝이 없다. 그런 곳에서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태도는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문제는 다양해고 해결책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명하신 것이다. 가만히 보면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에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끝이 없는 것처럼 죄와 실패의 세계에도 끝이 없다. 충만함에도 끝이 없는 거처럼 고갈도 끝이 없다.
그런데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문제가 있을 때 그리고 고갈을 느끼거나 자신이 실패했다고 느낄 때 "될 대로 되라지" "갈대로 가보라지"할 수 없는 것이다. 머리 허옇고 영어를 모두다 잊어버린 그런 사람들도 6박 7일의 지옥 훈련을 마치고 오면 창세기를 읽기 시작한다. 내버려두면 아무 것도 못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은 무한한 신축성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서 끝이 없는 이유는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면은 충만함을 느낌과 동시에 거룩의 빛을 더 많이 느끼게 된다. 거룩에 빛을 더 많이 느끼게 되면은 우리가 얼마나 더러운 인간인가 하는 것을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면서 더 정확하게 보게 된다.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게 되니까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게 된다.
반대로 죄의 세계에도 마찬가지이다. 끝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의 영혼의 상태나 여러분의 실패를 방치해 두면 거기가 끝이 아니라 더 멀리 가서 마지막에는 예수를 믿지만 사실은 배교자처럼 살아가는데 까지 나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삼손이 '라마트 레히'에서 터져 나오는 물로 자신의 인생의 문제와 목마름을 해결 받은 것처럼 여러분들도 역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여러분 자신의 고갈의 문제이든 실패의 문제이든 이 문제와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말씀하고 싶어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궁극적인 해결을 하나님 앞에 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 '라마트 레히'에서 샘을 터치셔서 물을 내어주시므로 회복과 소생의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목마름에는 물이 최고인 것처럼 우리의 영혼이 갈급 할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제일이다. 그리고 이것 말고는 우리의 메마른 영혼을 궁극적으로 회복시켜주고 실패로부터 우리를 소생시켜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탈진하게 하는 갈급 함으로부터 벗어나야 하고 우리가 실패한 길에 서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실패로부터도 새롭게 회복되는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과의 만남만이 실패한 우리들에게는 회복을 주고 목마른 우리의 영혼에는 새로운 만족을 가져다준다. 그것 없이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이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때때로 우리는 선하게 먹은 결심으로 "그래 잘 될 거야" 라고 생각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문제를 통해서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 것은 우리의 결심의 촉발을 위해 부르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찾도록 부르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님 만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주신 어려움은 주님께로 가야 해결이 되지 다른 것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실패한 속에서 회복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아무리 스스로 자신에게 암시해서 희망적인 사고를 갖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회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한번 눈을 감고 이 본문이 장면을 생각해 보자. 우리가 가 보지는 못했지만은 천 여명의 사람과 더불어서 싸울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쾌 넓은 벌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언덕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언덕에서 천 여명의 시체를 즐비하게 느려놓고 하나님께서 뜻밖에 '레히'에서 터쳐 주신 물을 마시고 그의 영혼이 원기를 얻게되었다.
삼손이 거기서 물을 얼마나 많이 먹었겠는가? 거구였기 때문에 많이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하고 얼마나 차이가 나겠는가? 기껏해야 1리터 짜리 팻트 병으로 세 네 병정도 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물 한 모금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를 살려준 것이 되었다.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인생의 막다른 길목에 와있는 것과 같고 완전히 실패한 것 같고 너무나 고갈되어서 죽어 버릴 것과 같은 그런 때에 한번 하나님을 만나 뵈옵고 가슴의 무거운 죄의 짐이 탁 풀어지면서 은혜의 생수가 우리에게 쏟아질 때 원기를 회복하게 되고 순종하며 살지 못하던 사람이 순종할 용기를 갖게 된다. 그 길이 여태껏 갈 수 없었던 길이였는데 그 은혜의 생수를 먹고 나면 눈이 밝아져서 그 길을 갈 마음이 생기게 된다. 배고프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게된다. 이것도 인체 생리 구조상 가능한 현상이다. 배가 고프면 집중도가 떨어지게 된다. 즉 혈당이 떨어지면서 암기력이 떨어진다. 어떤 것을 봐도 그것이 뇌에 찍혀서 뇌신경을 움직여서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운전 사고가 날 때에도 항상 피곤하고 배고플 때에 사고가 잘 난다.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혜의 생수의 물을 쭉 마시고 나면 안보였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른 판단이 서기 시작한다. 한번의 은혜가 죽을 사람을 살리게 된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교회에서도 한번에 은혜로 깊은 수렁에 들어갈 사람들이 그 한번에 말씀에 은혜로 전환점을 마련한 사람이 많다. 언제든지 얼마든지 많을 수 있다. 한번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영혼을 녹이시고 오랫동안 두텁게 싸여있던 죄의 찌꺼기들을 터뜨리시면서 하나님과의 생수를 터뜨리실 때 그 한번이 죽을 영혼을 살리게 된다. 인생을 완전히 포기하고 이제 막판으로 갈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한 번에 하나님과의 만남은 너무나 너무나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마지막으로 네 번째 어떻게 주어졌느냐 하면은 그러한 회복과 소생을 놀랍게 경험하면서 결국은 자신이 경험한 그 놀라운 사건을 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곳의 이름이 '엔학고레'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엔' 이라는 말은 샘이라는 말이고 '하'라는 말은 '그' 라는 뜻이고 '코래'는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 이라는 뜻이다. 결국 '그 부르짖는 자의 샘이다' 라는 뜻이 된다. 우리는 여기서 이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 삼손 앞에서 이 샘을 터뜨리셔서 놀라운 생수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연히 삼손에게 그런 것들을 주신 것이 아니라 '라마트 레히'에서 일 천명이나 되는 군사를 때려눕힌 다음에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는 삼손의 부르짖음을 듣고 하나님께서 응답으로서 터뜨릴 수 없는 그 자리에서 샘을 터뜨리셔서 죽어 가는 삼손을 살리신 일을 볼 수가 있게된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꼭 기도회 하자고 그러면 기도해야 될 사람만 빠진다. 부흥회 하자고 그러면 꼭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이 빠지게 된다. 그러니까 되지 않는 것이다. 두드려 보면 주먹으로 부서질 벽인지 몸으로 부딪혀야 할 벽인지 중장비를 불러와야 부서질 벽인지를 알 수 있다. 주먹뼈가 다 으스러지도록 두드리고 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이 되겠는가? 눈치가 빨라야 한다.
깊은 목마름과 갈증에 상태로 들어가고 실패가 점점 골이 깊어져서 이제 좀처럼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한번 가늠 질을 해보아야 한다. 즉 이것이 내 힘으로 비벼서 헤어나올 수 있는 수렁인가? 아니면 정말 깊은 웅덩이에서 나를 건져 주시는 하나님의 팔 내미시는 그 은혜의 손을 붙잡는 그 놀라운 구원 없이는 불가능 한 것인가? 빨리 생각해야 되는 것이다. 그리고 후자라고 판명이 되고 나면 그 다음에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 밖에 남아있지 않게 된다. 기도하는 것이다. 고갈이 매우 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되어질 때 그 길로 가지 말아야 하는데 그 길로 가게되었을 때 후회를 해도 이미 일은 이루어 졌다. 눈물을 흘려도 해결이 안됐다. 충만한 상태를 늘 유지했어야 했는데 못했다. 늘 기도했어야 하는 데 기도하지 못했다. 이때에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미 일은 벌어 졌다. 그러면 상황은 달라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이다. 하나님 앞에 호소 할 수밖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한 어려움에 있을 때에는 특별히 기도해야 된다. 어느 분이 목회자를 대상으로 특강을 한 글을 실었다. 자기는 사람들이 왜 철야를 하는지 이해 할 수 가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자게 되어있는데 밤에 와서 철야 기도를 하게 되면 창조 질서는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인체는 밤에 쉬게 되어 있는데 밤을 세워 기도를 하면 인체는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왜 사람들은 그렇게 금식 기도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백성이 모두 멸망당할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 겨우 삼일 금식 기도했는데 뻑하면 일주일, 뻑하면 열흘씩 금식하는 사람들을 정상적인 사람들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분의 신앙이 정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분에 이론도 일리는 있지만은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모두 같은 처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이다. 우리 모두 기도해야 되지만 어떤 사람은 밤에는 자고 낮에는 직장 다니면서 기도해도 좋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창조 질서는 밤에 자게 되어있는데 자지 말아야 하고 우리의 육체는 하루 세끼 먹도록 되어있는데 열흘씩 이십 일씩 밥 먹지 말고 하나님 앞에 생사간에 결단을 하고 매달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될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가정과 교회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이것은 질문이 되지 않는다. 직장과 교회 중 어느 것이 중요한가? 이것도 질문이 되지 않는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교회에 일한다고 직장에서 일하지 말라고 늘 이야기한다. 제가 직장 생활을 할 때도 보면 직장에 와서 열심히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어 근무 시간에 주보를 만들고 직장에 있는 복사기에 아이들 주보를 인쇄해 가지고 간다. 이런 일을 왜 하는지 답답했었다. 그리고 교회서 무슨 일이 있다고 그러면 다 때려치우고 교회로 총 집합하는 것이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직장은 무슨 꼴이 되겠는가? 근무 시간에는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틈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대적이 여러분들의 직장 생활을 드려다 봐도 흠잡을 곳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성실하고 모범적으로 주께 하듯이 해야 된다. 그리고 밤에는 자야 된다. 그리고 식사시간이 되면 꼬박 꼬박 챙겨 먹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평범할 때에 일이고 매우 특별한 상황이 벌어지면 평범한 상식의 틀을 깨야 될 때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죽으면 죽으리라'는 말이다. 문제는 너무 심각한데 세월아 네월아 먹고 싶은 것 먹고, 자고 싶은 것 다 자고, 다니고 싶은데 다 다니고, 이것은 사실 믿음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무관심이다.
이 사람이 지금 일 천명의 사람을 때려눕힌 후 주저앉아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부르짖었다. 이 사람의 기도제목은 "하나님! "나는 지금 목말라 죽게 되었나이다." "나를 살려 주시 옵소서! "물을 주시옵소서! 라는 기도 제목 하나이었다. 그러면 이 삼손과 같이 영혼의 깊은 고갈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의 기도 제목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다시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 살았다 할지라도 용서해 주시고 은혜에 세계를 다시 한번 회복 시켜주셔서 나에게 은혜에 생수와 같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터뜨려 주시도록 간구 해야 한다. 그리고 실패해서 불순종으로 너무나 먼길까지 걸어온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나를 만나 주셔서 두 번째 기회를 주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그런 사람들이 무엇을 믿는지 기도를 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던 삼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회복시켜 주시는 과정은 간절한 부르짖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러한 생명을 살리시고 다시 그를 회복시키시고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놀라운 변화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처지가 특별히 어려운 상황에 있다고 생각될 때에는 특별히 기도해야 된다. 특별히 응답 받아야할 기도의 제목이 있다고 할 때는 특별히 기도해야 된다.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시지 않으시면 내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 될 때에는 특별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몸부림이 필요하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그 샘은 그 부르짖는 자의 샘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 주시겠는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겠는가?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정말 그 목마름과 그 부르짖음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해결 받는 사람들이 되겠는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 그러한 간절한 갈망과 부르짖음이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조금은 우수운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어렸을 때에 집에서 강아지를 오래 길렀다. 새끼를 낳는데 많이 날 때는 열 마리 정도를 낳는다. 그 어미가 새끼들에게 젖을 먹일 때가 되면 길게 뻗고 드러눕는다. 젖꼭지를 다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열게 보다는 훨씬 더 많았다. 그런데 위에 있는 젖꼭지는 유선이 아주 발달되어있고 근실했다. 그러나 아래로 내려갈수록 볼품이 없었다. 처음 새끼를 낳았을 때에는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 배속에서 동시에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눈을 뜨자마자 젖꼭지 탈취 경쟁이 벌어진다. 그런데 한 번 딱 정해지면 바꿔 놓는 일은 거이 어렵다. 왜냐하면 하루 이틀 지나면 유선이 발달된 곳에서 젖을 먹는 새끼는 하루하루가 다르게 발육이 좋아진다. 다시 말해서 아래에서 젖을 먹다가 하루는 좀 좋은 데로 가보려고 하면 발에 체여서 그 축에 끼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까 계속 그 새끼는 계속 쳐지게 되는 것이다. 똑같이 태어났는데 한 달이 지나면 엄청난 차이가 나게 된다. 만약에 사람이 신경을 써서 그것을 띠어내서 바꿔서 먹이는 일들을 하지 않으면 결국은 처져서 병들어 죽거나 쓸모 없는 강아지가 되고 말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는 간구하는 자의 것이다.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내가 어떻게 만나서 이제껏 까지 살아왔는데 지금도 내 인생의 문제는 크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보다는 훨씬 더 크기 때문에 내가 그 분을 만나면 그분께서 나의 이 문제를 반드시 풀어 주시고 내가 지금은 비록 주저앉아 죽을 것 같은 고갈을 느끼고 있지만 주님 앞에 부르짖으면 그분이 예기치 못했던 곳에서 샘을 터뜨리셔서 갈한 내 영혼을 만족하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마치 어린아이가 눈을 감은 채 어미의 젖을 더듬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과의 신령한 만남과 신령한 은혜를 향해서 간절하게 목마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실패와 고갈을 딛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9.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3:21)
오늘 제가 읽어 드린 이 본문은 아주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창세기를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논란을 벌이고 있는 구절 중에 한 구절이 바로 이 짧은 구절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이 성경은 여러분도 오늘 성경 전체를 봉독할 때 들으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담과 하와가 주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고 난 다음에 뱀과 여자와 그 다음에 아담 모두에 대해서 주님이 징벌과 저주를 내리신 그 후에 이제 이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기 직전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그들에게 여호와께서 가죽옷을 지어서 입히셨다는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한 10주 째 매주 수요일마다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들이 공부해 나가고 있습니다.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삶에 대해서 우리들이 살펴보고 있다 그 말씀입니다.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것과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이 무슨 의미가 관계가 있을지 우리 오늘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이들을 위해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은 여기에 나오는 이 가죽옷이 동물을 죽여서 만든 옷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 옷을 만들기 위해서 어느 동물인가는 죽었어야 했고 죽었어야 했기 때문에 그것은 어떻게 보면 아담과 하와의 죄를 짐승을 죽여서 속죄하는 제사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짧은 구절을 보고 그러한 상상을 하는 것은 너무나 성경의 계시의 순서를 지나치게 무시한 그러한 처사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후에 밝혀진 풍부한 계시의 결론을 아직 시작하려고 하는 그 계시의 시대에 갖고 들어와서 후에 일어난 일을 가지고 먼저 일어난 일들을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모피만 남기고 어디로 사라져 버린 짐승의 죽은 시체가 아니라 아담과 하와 몸 위에 걸쳐진 가죽옷 그 자체를 주목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제사의 시작이라고 보기 어려운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첫째는 주님이 지금 방금 이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 징벌한 기사가 나와 있지마는 어떻게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귈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제사의 기록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것도 하나의 근거가 되고 또 하나는 제사를 드리면 사람이 짐승을 죽여서 드려야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짐승을 죽여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스스로 제사를 지내신다 이것은 조금 어불성설 같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에 깊은 속뜻을 너무 생각하지 말고 주목해야 할 것은 가죽을 남기고 죽은 그 시체가 아니라 아담과 하와 그 몸 위에 걸쳐진 튼튼한 가죽옷 두벌 그걸 오늘 우리들이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선 우리들이 이 가죽옷을 생각해 보면 말이죠 커다란 하나의 변화가 이 아담과 하와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 있을 때에 완전한 그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 그리고 그 손길에 의해서 완전하게 창조된 피조세계 속에서 하나의 피조물로서 또 나아가서는 주님이 창조하신 자연세계에 관리자로서 에덴동산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 사이에는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완전한 화해와 그리고 완전한 화목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한 것처럼 피조물 사이에도 화목이 있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해를 받아서 자기의 의사와는 반해서 몸을 상하거나 고통을 받거나 심지어는 자연의 재앙으로 말미암아 죽거나 생명을 잃어버리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랬는데 주님이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그 동산에 거하던 이 사람들에게 그러니까 그것은 쉽게 낡거나 떨어지지 않고 비바람이나 외부의 어떤 습격이나 충격에도 그 옷을 입은 사람의 몸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매우 질기고 튼튼한 옷이 필요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이 자연과 인간 사이에 조화와 화목의 관계가 파괴된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왜 아담과 하와, 에덴동산을 떠나는 아담과 하와에게 짐승을 잡아서 만든 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는가 하는 그것은 자연으로부터 받는 그 고통, 자연으로부터 받을지도 모르는 위험으로부터 아담과 하와의 신체를 보호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그들에게 옷을 지어서 입히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과의 관계가 파괴된 사실을 보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함께 지내던 피조물들,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창조된 동기 동창들로서 화목한 관계를 누리면서 자연은 인간을 즐거워하고 인간은 자연을 즐거워하고 인간은 자연을 다스리고 관리하며 또 자연은 인간을 보호하고 인간에게 순종하는 그러한 가장 아름답고 이상적인 생태적인 관계가 파괴되어 버린 거예요. 이제 그는 아침이면 해가 뜨고 저녁이면 해가 지고 때에 따라서 내리는 비와 이런 모든 바람 이런 자연현상조차도 이제는 그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었습니다. 정말 독사 굴에 손을 넣고 그리고 사자와 호랑이와 뒹굴며 놀아도 문제가 없었던 그런 화해는 이미 깨뜨려졌고 그리고 아주 끔찍한 적대관계가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들은 지금 자연과 화해를 누리며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해 보지 못한 상태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자연으로부터 받은 많은 고통과 그리고 자연현상으로 말미암아 당하는 질병, 그리고 자연과의 화목이 깨졌기 때문에 인간이 당하게 되는 여러 가지 위험, 이런 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자연과의 완전한 화목, 하나님과의 완전한 화해 이런 것들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던 죄가 없었으니까 사실을 화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그런 완전한 화해라기보다는 평화의 관계 이런 것들을 누리면서 살았던 그 사람들이 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그리고 이제는 함께 누리면서 살던 그 자연 속에서 이제 그들로부터 해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느끼며 그 동산에서 추방될 때 그 때에 아담과 하와의 처지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큰 불행이었고 고통이셨습니다.
피조세계를 모두 창조하시고 그리고 인간을 마지막에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이 그 인간들에게 무엇을 명하셨습니까? 아담에게 너는 이것을 다스리라고 명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과 충만 하라 그래서 ‘다스리다’는 말이 히브리말로 ‘라다’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임금이 왕으로서 자신의 왕국을 통치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피조물인 이 창조세계와 동기동창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지위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지위는 같지 않습니다. 같이 태어났지만 그러나 지위는 같지 않았습니다. 똑같이 왕의 몸에서 태어나도 왕위를 이어서 왕관을 쓰게 될 왕세자가 다른 왕자들과 같지 않은 것처럼 인간과 피조물은 똑같이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동창생들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피조물과 같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을 선한 왕으로서 삼으셨고 그래서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당신의 마음을 가지고 당신을 대신해서 다스리고 정복해 나아가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영광은 굉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자연과 피조물들이 자기들을 향한 인간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가 인간이 깨진 것을 보면서 자연 속에 하나님의 저주가 깃들고 인간에게 저주가 내리면서 인간은 그 고상한 세상을 향한 거룩한 왕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왕권은 지금도 회복이 안되었습니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창조의 면류관으로서 인간을 만드시고 그 인간 속에 자기의 형상과 모양을 주셔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만드시고 그 손에 당신이 지으신 창조세계를 당신이 대신해서 다스릴 수 있는 홀을 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서 자연계를 다스리고 관리해 나아갈 수 있는 그 창조세계에 하나님의 대리자였었는데 그걸 모두 잃어버리고 이제는 비바람과 추위 그리고 심지어는 맹수의 습격 이런 것들을 두려워하면서 가죽옷을 입고 그렇게 사이좋게 지내던 피조세계를 이제는 두려움으로 지나야 하는 그런 신세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가져온 비참한 파국은 인간의 언어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 지고의 축복을 누리면서 살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망가진 세상에서 죽은 영혼을 가지고 죽은 사람들 속에서 망가진 인간들 속에서 태어나서 관계가 깨어진 자연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그 둘의 격차를 몰라요.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달랐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그 완전한 평화, 그리고 죄가 없는 무죄상태에서 그 하나님과 그의 임재 안에서 살아가는 그 영원하고 지고한 복락을 누리던 사람이 최초로 하나님과의 단절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고 그리고 자기의 수하에 왕국의 백성들처럼 순종하던 이 자연의 세계가 반기를 들고 일어나서 이제는 자기의 왕권을 인정하게 되지 않았을 때에 그 비참함은 마치 자기가 지극히 사랑하던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왕으로서 다스리던 나라에서 수많은 사람의 돌팔매와 침 뱉음을 당하고 모래를 끼얹음을 당하고 황망하게 왕국을 도망쳐야 했던 다윗의 심정보다도 더 처참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죄와 불순종이 가져다 준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일 먼저 창세기 3장을 대할 적에 하나님 앞에 주께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뭐 그렇게 큰 죄인가 그 선악과를 따먹어서 하나님이 손해보신 게 뭐가 있나 우리는 그런 식으로 막가는 질문을 해서는 안돼요. 우리가 죄가-얼마나 최초의 인류의 죄가-얼마나 끔찍했는지는 그들이 당하게 된 그 비참한 죄의 고통 그리고 그 불순종과 죄에 빠지고 나서 그가 잃어버린 것이 얼마나 크고 많았는지를 생각하게 되면 비로소 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범한 그 범죄가 얼마나 심각하고 엄청난 것이었는가 하는 사실을 깊이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우리는 비록 정도와 수준은 좀 다르지만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면서도 그런 것을 동일하게 경험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자면 누군가를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 말입니다. 그 이 세상에서 보면 그 사람이 피해를 본 사람입니다. 그리고 길가는 사람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미워하는 자기가 옳지 자기에게 미움을 당하는 그 사람이 옳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실은 피해자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에는 자기가 심각한 죄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리게 되고 그리고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깊이 죄에 대해서 각성하고 눈을 뜨게 될 때 자기가 사소하게 생각했던 그 죄가 얼마나 많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앗아가고 자신의 영혼을 황폐하게 만들었는가를 면밀하게 관찰하면서 비로소 무엇을 깨닫느냐 하면 자기가 지은 그 죄가 얼마나 끔찍하게 커다란 것이었는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린 여기서도 그런 교훈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담과 하와가 이런 커다란 죄를 지은 것입니다.
왜 제가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이 설명하느냐 하면 사실 우리가 읽은 이 마지막 이 구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니라.’ 제가 이 성경을 며칠 전에 읽으면서 제 마음이 눈물로 가득 차는 걸 느꼈습니다.
우리는 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성경 구절 속에서 뭘 발견하게 되냐 하면 아담이 하나님 앞에 한 것과 하나님이 이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하시는 이 일이 얼마나 커다란 차이가 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 사건은 그들이 당하게 된 이 끔찍한 진노를 보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였는가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방금 창조하신 그 세상에 아담과 하와가 살고 당신이 창조하신 그 완전하고 선한 세상을 송두리째 망가뜨려 놔 버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왜? 아담과 하와가 따먹은 것은 선악과에 불과했는데 그 선악과를 통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해 드린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는 그 이 행동을 통해서 죄가 제방이 무너지는 것처럼 물밀듯이 커다란 세력으로서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 속에 들어온 것입니다.
저희는 밭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몰랐습니까? 그러나 옛날에는 시골에 방학 때 돼서 가보고 그러면 왜 동네 아이들이 밤이면 서리해 먹으러 가자 (왜 서리가 그러는지 난 모르겠는데) 그래서 가서 수박밭에 가서 수박도 하나 몰래 가서 밤에 먹고 또 참외밭에 가서도 참외도 몰래 따먹고 주인이 그 원두막에서 지키는 거 뒤로 돌아가서 몰래 따먹고 스릴을 느끼고 그러던 애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안 그랬습니다. 착했습니다. 모범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세월이 점점 각박해지고 나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느냐하면 사람들이 공기총 들고 지켜 가지고 문제가 가끔 납니다. 수박밭에 수박 서리 해 먹으러 들어 온 것을 공기총으로 갈겨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농부들 쪽에 이야기를 들어보면 또 이해가 가는 면이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요즘 밭에 와서 서리를 해 먹는 놈들은 옛날 놈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그냥 살금살금 들어와서 커든 적든 수박이나 한 두개 따서 가지고 가서 그것도 수박 밭 바로 옆에서 터뜨려서 먹고 껍질 남겨 놓고 그냥 갔지만 그런데 요즘 어떻게 되면은 와 가지고 다 깨뜨려 놓는다는 것입니다. 밭을 완전히 유린하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한 두개 먹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옛날에 제가 모시고 있던 목사님은 기도원 갔다오는데 참 그 목사님도 연구대상이시지. 기도원 갔다오는데 밭에 가을철이니까 무우가 아주 잘 탐스럽게 익었습니다. 그 잘 익었다고 하시면서, 나도 잘 익었다고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는데 ‘김집사 우리 저거 하나 빼 먹자’ 그러니까 이제 ‘그래도 될까요’ 그러니까 ‘야, 저... 저 한 두 개 빼 먹는 거는 죄가 아니네’ 어느 신학에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주의 종이 죄가 아니라니까 집사님이 그냥 충성스러운 집사님이 가서 쑥 뽑았습니다. 두개를... 뭐가 그렇게 잡숫고 싶으시면 집에 와서 달라 그러시지 그걸 그 할아버지 목사님은 옛날 생각을 하시는 것입니다. 옛날 생각. 정말 옛날에는 진짜 그걸 죄로 생각 안하고 웃어 넘겼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달라진 것입니다. 공기총으로 막 사살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은 특별한 나무의 열매 하나를 없애 버리고 하나님 말을 안 들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는 그 사건을 통해서 죄가 막 그 커다란 땜이 무너지면서 확 밀려서 온 도시를 뒤덮는 것처럼 그렇게 죄가 밀려들어 온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그 선악과 사건을 통해서 밀려들어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가 지금껏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는 여전히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엄청납니다.
그러니까 이걸 비유로 생각하자면 하나님이 아주 임금이 하나님이 아니라 임금이 아주 정성껏 정원을 하나 가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취미가 정원을 잘 가꾸는 거라서 외국으로 출장 갔다가도 그 나라의 특별한 꽃나무가 있으면 하나 싣고 와서 심어놓고, 전쟁을 하러 갔다가도 희한한 열매가 있으면 그 나무를 갖다가 심어놓고 해 가지고 그 세계에서 귀이하고 아름답다라고 하는 화초는 다 갖다가 거기를 가득 채운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너무 아름답게 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안 들여보내고 당신 자신이 거기를 이렇게 드나드는 기쁨을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관리인 두 사람을 맡겼습니다. 남자사찰하고 여자사찰하고 둘을 맡겼습니다. 그랬는데 어느 날 가보니까 얘네 둘이 정신병이 들렸는지 당신이 그렇게 아끼는 그것을 그렇게 오랫동안 잘 정성껏 관리를 해오던 것을 얘네 둘이 막 작대기를 가지고 다 뽑고 부러뜨리고 불지르고 막 다 난리를 쳐서 그 아름다운 정원을 쑥밭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렇게 비유를 해도 비유가 안됩니다. 그 때 왕의 마음에 얼마나 진노가 꽉 솟아올랐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진노가 막 왕의 마음에...
저는 할 수만 있으면 내 물건 막 잃은 것에 대한 집착을 될 수 있으면 안 가지려고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물욕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그 집착이 무섭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장 집착하는 물건이 하나 있는데 이 성경입니다. 이 성경. 나는 다른 사람이 내 성경을 막 이렇게 들고 막 이러는 걸 보면 가슴이 덜덜 떨립니다. 아니 성경을 굳이 누가 잠깐 들어주겠다 그래서 줬더니 성경을 이러고 주는 것입니다. 이러고... 그렇게 들면 되겠어요? 성경이 망가지지. 성경이 잠깐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회심하던 그 해에 사서 여태까지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 만원을 진짜 줘도 안 팝니다. 사갈 사람도 없지만. 그렇게 아낍니다. 이 성경을. 그런데 이 성경을 어느 날 우리 이슬이가 발기발기 찢어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손해가 났다 안 났다는 건 나중 문제고 마음이 막 찢어지는 것 같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만약에 그럴 리도 없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 훌륭한 360억씩 가는 그림 한 폭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와 보니까 유치원 다니는 여러분의 꼬마가 ‘야 이거 다빈치가 잘못 그린 거 같애.’ 그리고 거기다가 다시 검은 크레용으로 그려놨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정신이 돌아버리지 않겠습니까? 인간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하나를 따먹은 사건은 선악과 하나를 따먹은 그 사건이 아니라 창조세계를 쑥밭으로 만들어 놓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죄가 들어오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거는 보통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죽 했으면 그 끔찍한 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지만 그 죄의 문제가 하나님의 진노가 풀릴 수 있게 되었겠는가를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끔찍한 고난을 보면 인간의 그 첫 조상의 타락과 불순종의 죄가 얼마나 어마어마한가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어마어마한 일을 하나님이 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 만들어 입혀주고 계신 것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지금 쑥밭이 되어버렸는데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을 떠나 길을 가다가 나무에라도 찔리고 돌부리에라도 몸을 상하면 어떻게 할까 염려하시면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여러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사랑을 구약에는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신약에는 축복하시고 그런 정도의 획일적인 구분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모든 성령을 이해하는 그 이해를 커버할 수는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국 사람이 여러분은 그러지 말아야 됩니다. 외국인이 한국인을 보면서 귀가 막히게 생각하는 것이 뭐냐하면 뒤에서 막 달려와서 쾅하고 받았으면 그러면 잘못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차에서 내려 가지고 자기 차 범퍼 기수가 났나 그것부터 본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미국을 갔습니다. 가서 운전이 서툴렀습니다. 도로에서 막 밟았는데 앞차가 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서 있는 차였더랍니다. 그냥 쾅하고 박았는데 자기 차 범퍼가 반 이상 날라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주여... 그러는데 그 앞차도 왕창 찌그러졌는데 문이 덜컹 열리더니 흑인이 이런 덩치가 둘이 내리더랍니다. 둘이 타고 있다가 한 사람이 내렸습니다. 그러더니 진짜 레슬링 선수같이 우락부락한 놈이 하나 내리더니 (놈이라 그래서 미안해) 그런 시커먼 분이 내렸습니다. 그리고 걸어왔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떨려 가지고 문을 열고 나오지도 못하는데 더벅더벅 걸어오더니 문을 확 열더니 어디 다치신 데 없으세요? 했더랍니다.
자!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겠어요? 이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이 그 아름다운 창조의 세계를 죄로 쑥밭을 만들어 놓은 그 인간에게 얘들아... 길 가다가 너희들 몸 상하면 어떻게 하나 그리고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서 입히시는 것입니다. 이미 벌써 무스탕이 그 때부터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도 못 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하늘을 두루말이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자, 이게 말이 됩니까? 그냥 한번에 단칼에 날려버려도 시원치 않은 그 창조의 세계를 짓밟아 놓은 그 끔찍한 죄인들을 길 가다가 가시에 찔리고 혹시라도 넘어져서 상할까봐 추위에 떨거나 뜨거운 태양 빛에 피부가 상할까봐 가죽옷을 지어서 입히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손수 입혀주셨다 그랬으니까 만들어서 정말 주님이 그들에게 입을 수 있도록 걸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대표적인 성품이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 성품이 있으신 데 그 중의 하나가 사랑입니다. 그런데도 그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그 불의와 자기의 창조세계를 짓밟아 놓은 그 인간들을 향해서 공의가 불같이 타오르시는 분이신 데도 또 한편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이 공의의 성품에 의해서 추방을 당하는 이 인간들을 향한 눈물겨운 하나님의 배려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 이 아담과 하와는 반드시 좋은 의미는 아니지만 재출발을 하여야 했습니다. 그들은 범죄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그 찬란한 교제, 그 아름답고 신비로운 그 하나님과의 완전한 사귐, 창조해 주신 그 자연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지배권, 그런 것들을 모두 상실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새로 시작해야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벌써 하나님이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어마어마한 죄를 짓고 그 축복된 동산으로부터 쫓겨나는 그 아담과 하와, 그들은 동산과는 마지막으로 작별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그 아름다운 임재의 세계에서의 누리던 삶은 종식되었지만 그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은 앞으로도 형벌을 받는 고난의 인생 길을 걸어가면서도 계속 될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것입니다. 이 때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당신의 의롭고 공의로운 성품이 크게 자극을 받아서 이들을 향해서 진노를 부으시던 그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들의 죄를 아직 속해 주시지 않은 그런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실패와 범죄 가운데서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 나가는 그 순간에도 아담과 하와의 육체를 향한 그 끔찍한 배려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지은 창조의 세계는 쑥밭이 되었는데 그렇게 죄를 저지르고 물밀듯이 죄가 들어오게 만들었던 이 장본인들은 하나님 앞에 가죽옷을 지어 입힘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은총과 보호를 입는 장면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새로 시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뒤에 이제 4장으로 넘어가 보면 아벨이 하나님 앞에 제사지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면 그가 어디서 제사를 배웠겠습니까? 그래서 칼빈 선생 같은 분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아담은 비록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유린했지만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추방당했지만 그를 향해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은 계속 됐다는 것입니다. 죄의 형벌을 받으면서도 죄의 형벌을 받고 또 죄와 더불어 싸우고 죄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비참한 상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충분히 계속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린 이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스스로 어떻게 당신과 그 죄가 들어온 이 세상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알려 주시는데 그것이 제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칼빈은 이 아담이 우리들이 천국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아주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범죄한 원형이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즉각적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구원의 계시를 주시고 그리고 그 뼈저린 자신의 실패를 가지고 주님과 교제하면서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랬고 그런 아버지로부터 경건한 아벨은 어떻게 죄가 가득한 이 세상에서 죄인인 내가 거룩한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을 배워 온 거라는 것입니다. 참 그거 읽으면서 제가 어린 시절에 참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도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그 자기의 창조 세계가 지금 방금 처절하게 유린당했는데도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서 이제 그에게 마르지 않는 은총을 보이시면서 이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 앞에 우리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진 그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서 우리의 죄를 모두 사함을 받았고 그의 피로 화해를 이룬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 당시 아담에게 미쳤던 이 은총과 비교도 안 되는 더 커다란 은총과 사죄의 약속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온전히 유린한 그러고도 하나님 앞에 죄사함을 입지 못했던 이 아담이 추방당하면서라도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이런 긍휼을 입었다고 할 것 같으면 오늘 우리가 비록 그의 후손이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속죄함을 입은 주님의 거룩한 백성들로서 아버지 앞에 나아가서 왕 같은 제사장들로서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우리에게 새로운 인생을 주시기를 새로운 출발을 주시기를 기도하고 그리고 다시 한번 우리들이 새롭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입은 그 구속의 은혜를 어떻게 하면 새로 시작하고 새로 출발해서 그 주님께 보답하며 살까라는 이러한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며 아버지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의 이런 은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권면하고 싶습니다. 너무나 뼈저린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 그리고 너무나 새로 시작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에는 지나온 나의 실패가 너무나 길었고 혹은 이미 경험한 나의 잘못이 너무나 큰 것이었고 그리고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분들에게 경험에 의지해서 그런 실패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도록 나는 권하고 싶습니다.
문제는 실패가 여러분들을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어둠 속에 있도록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 새롭게 하나님께 사죄의 은총과 은혜를 입어서 새롭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주님이 새로운 시작을 주실 것이다 라는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것이다 라고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들이 지난날 잘못한 것 때문에 때로는 마땅히 그 자기가 잘못한 실패의 멍에를 아직 쥐고 있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겠지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것과 함께 고통스러운 상황을 종식하실 수도 있지만 그러나 집을 떠난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했을 때에도 여전히 남루한 옷을 걸치고 굶주리고 피골이 상접한 얼굴로 주린 배를 움켜줘야 했던 것처럼 새롭게 시작하는 그 시점에도 이전에 자기가 잘못한 것을 하나의 업보로서 짊어질 수 있습니다. 열매로서 짊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덜 됩니다. 왜냐하면 일단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다시 새롭게 시작하리라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이전에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린 것처럼 이제 앞으로의 나의 삶이 더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실패를 거울 삼아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자 애를 쓰면 하나님이 그 멍에들을 하나씩 둘씩 하나님께서 벗겨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패역을 고치고 새롭게 되어 가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다시 새롭게 시작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제껏 자신의 인생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과거의 실패나 과거의 문제나 과거에 자신을 얽어 맺던 숙명적인 패배를 주목해서는 안됩니다.
눈을 들어서 이제는 정말 자기가 이제는 하나님을 얻으면 내가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괜찮다는 믿음, 그리고 주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주님을 사랑하며 사는 이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잃어버리는 것이 두렵지 않다는 그런 믿음, 그런 것들을 굳게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이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가 받았던 이러한 긍휼의 은총보다 더 뛰어난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한 몸에 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실패하고 하나님 앞에 어두운 인생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다시 새롭게 시작해서 주님만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갈 때 그 때에 과거에 그의 실패는 이제 그에게 부끄러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의 광선을 찬란하게 빛나게 만드는 보석과 같은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러한 실패를 딛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보다는 예전의 그 실패에 매여서 여전히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 않고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지 못한 채 실패에 길들여진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낙심에 길들여진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삶을 살아가는 삶 밑에 사람이 되어서는 하나님이 그들을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아무 공로 없는 죄인들을 위해서 못 박혀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고 놀라우신 사랑,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그것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하루하루 매순간 순간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그러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다시 새롭게 시작해서 이전에 실패보다도 더 뛰어난 그러한 아름다운 삶을 주님 앞에서 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다시 새롭게 하소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