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 물러간 자가 돌아오는 길
(1998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8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왜 깊은 데로 떨어졌습니까?(시130:1上) 1998.10.28 수요예배 1
2. 깊은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시130:1下) 1998.11.4 수요예배 17
3.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시130:2) 1998.11.11 수요예배 30
4. 하나님께서 왜 용서하십니까?(시130:3-4) 1998.11.18 수요예배 45
5. 회복을 기다리는 마음(시130:5-6) 1998.11.25 수요예배 59
6.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소망하라(시130:7上) 1998.12.2 수요예배 73
7. 죄에서 구속하시는 하나님(시130:7下) 1998.12.9 수요예배 83
1. 왜 깊은 데로 떨어졌습니까?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시 130:1)
이 시편 130편은 오래 전부터 제가 설교하고 싶었던 본문입니다. 그러나 혹시 잘못 손을 대면 영광스러운 본문에 돌이킬 수 없는 모욕을 드리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망설였고 지금도 여전히 망설여집니다. 설교를 하다가 저의 시리즈가 도저히 성경본문으로서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다 생각되면 다음주에라도 영광스러운 본문을 설교하는 것을 다음으로 미루고 멈추도록 하겠습니다. 이점을 여러분들이 깊이 이해하고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시리즈를 통해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특별히 영혼의 깊은 침체에 빠진 영혼들, 물러가서 침륜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놀랍게 그 깊은 웅덩이에서 헤어 나오는 밧줄과 같은 시리즈가 되기를 우리 모두 기도하면서 기대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130편의 저자가 누인지는 모르지만 많은 주석가들은 다윗의 것이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그런데 죽 읽어보면 분위기가 다윗 냄새가 물씬물씬 납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쓰여져 있는 표제도 성전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었던 다윗의 시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가능케 합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그것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 시는 다윗의 분위기를 많이 풍기는 시라고 제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1~8절까지로 되어 있는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두 토막으로 나뉘어 집니다. 1절이 한 토막이고 2~8절까지가 다른 한 토막입니다. 1절은 죄 가운데 있는 영혼의 상태, 물러간 영혼의 곤고하고 위태한 상태를 보여줍니다. 2~8절까지는 그 영혼이 그 속에서 어떻게 벗어나는 가의 몸부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시작해서 다음주, 길면은 네 주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1절을 먼저 자세하게 다룬 후에 2, 3절 차례대로 지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언제나 시리즈를 시작할 때 그러하듯이 몇 주에 끝나야겠다고 미리 계획하는 것은 언제나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언제까지라고 작정하지 않고 주님이 말씀을 풀어주시는 데까지 최대한 우리들이 깊이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아마도 오늘 모이신 분들 가운데는 저의 교회에 등록해서 새로운 시리즈가 시작하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시리즈를 듣는 방법을 새삼스럽게 말씀드리는 것은 조금 지나친 노파심일지는 모르지만 이 시리즈는 매주 수요일에 계속되는데, 이 시리즈가 얼마 나 계속될지 모르겠습니다. 짧으면 짐작으로 10주쯤 될 것이고 길면 30주쯤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되든지 그것은 저와 하나님이 할 일이고 여러분들은 이 시리즈가 설교되는 동안에는 이 시리즈가 지향하고 한가지 주제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말씀을 놓치지 마시기를 바라며 그리고 반복해서 이 말씀을 들으실 것을 강력하게 권합니다. 그리고 시리즈 2번째를 들으러 오실 때에는 일 번을 잘 정리하고 나오셔서 그 위에 벽돌을 놓듯이 2번 3번, 4번을 들어가시도록 권하며 불행하게도 부득이 한 주를 거를 경우에는 더더욱 테이프를 열심히 듣고 확실한 이해를 갖기를 부탁드립니다.
마지막 부탁은 이 시리즈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실제적으로 여러분들의 영혼의 상태와 얽매인 여러분들의 삶의 상태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기는(Enjoy)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이 시리즈를 통해서 여러분들의 영혼이 어둠에서 구출되고 깊은 웅덩이에서 헤어나올 수 있도록 기대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힘쓰면서 깨달음을 더해주시기를 성령의 도우심과 함께 간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1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130편 전편에 흐르는 분위기는 한 시인이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깊이 낙담한 가운데 이세상의 어떤 사람이나 환경적인 도움을 통해서도 구출될 수 없는 커다란 시련에 쌓여 있고 외적인 시련일 뿐만 아니라 내면적인 깊은 고통 속에 주저앉아 있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마치 함정에 깊이 빠져서 아무리 웅덩이 밖으로 기어 나오려고 몸부림쳐도 나올 수 없고 설상가상으로 밑에서는 물이 솟아나와 물이 차오르고 울부짖고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그 고함소리를 듣지 못하는 처절한 절대적인 절망의 상태에 놓여있는 광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는 한 시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한번 우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이고 그리고 시인과 같이 내면적으로 외면적인 삶에 있어서 깊은 갈등과 고통을 겪고 곤고해진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회복될 수 있는가를 시인의 경험을 통해서 도출되는 영적인 원리들을 통해서 더듬어보는 것이 우리에게 말할 수 업는 축복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영혼의 필요를 기억하시고 때를 따라서 우리의 영혼에 적절한 말씀을 주심으로써 당신이 우리를 버리지 않은 사실을 입증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각자 어떠한 위치에 처해있는지는 제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어떤 처지와 위치에 처해있는가와 관계없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있는 한 그래서 거기에서 무엇인가 희미하지만 하나님의 교훈을 발견하고 자신의 영혼의 위험한 상태에 대해서 지적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깨닫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가기를 원하시는 길들을 제시받고 있는 한 여러분들의 영혼은 지금은 병들어 있으나 곧 회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여러분들의 귀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어떠한 빛도 던져주지 못한다면 여러분들의 영혼은 매우 위험한 상태에 처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물러나 있으며 그 물러난 곳에서 조금 더 지나쳐 여러분들의 마음은 죄로 두터워져 있고 여러분들의 양심은 무디어지고 있으며 지금은 그 속에서 약간은 고통을 느끼지만 방치된 채로 시간이 흘러간다면 여러분들은 이윽고 그 마음에 가냘픈 고통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무지무각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하면 여러분들은 내가 왜 그 젊은 날에 그렇게 주님이 아니면 못살 것처럼 조바심을 내며 살았는지 여러분들이 지나온 경건했던 신앙의 삶이 낯설게 느껴지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어떠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참된 지식의 빛을 던져주는 은혜로운 깨달음이 그치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서 싸워야 합니다. 그것이 없이는 여러분들은 어떠한 회복도 경험하지 못할 것이며 또, 회복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느낌일 뿐 영혼의 회복으로 말미암는 참다운 회복은 아님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을 염두해 두면서 우리들은 1절을 대면하고자 합니다.
1절에서 시인은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부르짖었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벌써 시인의 외적인 삶과 내면적인 갈등이 어떠한 상태에 와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깊은 데서”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말로 “마 막그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시편 23편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가리킬 때 쓰여진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이 “깊은 데”라는 것은 깊은 계곡이나 음산한 골짜기나 웅덩이와 같은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내가 깊은 데서 여호와께 부르짖었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물에 빠진 것과 같은 고통의 상태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외적으로는 이 사람이 말씀드린바와 같이 자력으로 벗어날 수 없는 깊은 웅덩이와 같은 혹은, 깊은 계곡과 같은 협곡에 떨어져서 아무리 땅쪽을 더듬어도 아주 날카롭고 매끈한 바위밖에 보이지 않아서 도저히 스스로의 힘으로 올라갈 수 없는 단절된 계곡에 떨어진 것과 같은 외적인 상황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지속적인 죄에 빠질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외적인 삶에 있어서 이러한 절망의 상태에 떨어지도록 섭리 가운데 내버려두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오늘 이곳에서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 나가면서 그칠 줄 모르는 집요한 교훈은 이것입니다. ‘네가 진정으로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하고 순종하면 나 여호와는 네게 축복할 것이며, 나를 거스르고 나를 대항하고 불순종하며 살면 너는 심히 곤고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약에서만 통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신약 속에서도 그대로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마음을 다해 그를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축복을 주시며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그를 하나님의 구속받은 자녀로서 마땅한 의무를 다해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며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곤고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나니”라고 말합니다.
부요한 자들은 자신의 부요함 때문에 평강을 누리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외적인 환경에 관계없이 마음에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단지 마음의 평화만 주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대분분의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주십니다. 고난이 다가오는 것 같아도 주님께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은 잠시후 깨닫게 되는 것이 고난은 단지 하나님이 더 큰 축복으로 자신들을 인도하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깨닫게 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지 주님께 불순종하며 주님을 거스르며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며 걸어가는 사람들은 번영조차도 사실은 하나님이 그들을 더 높은 곳으로 올리셔서 그곳에서 떨어뜨림으로 그들의 인생을 더욱더 고통스럽게 하기 위한 패망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영광스런 시편 130편의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이 시인이 무엇 때문에 이 깊은 데 떨어지게 되었을까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과 죄 때문에 이 시인이 이 깊은 데에 떨어졌다고 하는 것은 시편 130편 전체의 문맥을 볼 때에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범죄했을 때도 그 마음이 그 절박하게 하나님을 찾는 경우가 있고, 범죄하지 않고 의로운 일을 위해 살다가 큰 위기를 만날 때에도 하나님 앞에 마치 범죄한 자가 마치 회개하기 위해 부르짖는 것처럼 부르짖는 상황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차이점 하나가 있습니다.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고난에서 울부짖는 것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하며 울부짖지만 의를 위해서 고난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하면서 울부짖는 것이 아니라 연합을 의식을 하며 울부짖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를 위해서 고난을 받는 사람들, 그리고 의를 위해서 받는 고난을 믿음으로 기꺼이 수납하는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 처참하게 울부짖으면서 하나님과의 보다 더 긴밀한 연합을 증진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죄 가운데 부르짖는 사람들은 동일한 절박함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오는 객관적인 고통을 의식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부르짖게 됩니다.
요약을 하면 이렇습니다. 시인이 오늘 이 깊은 데로 내려가게 된 것은 불순종과 죄로 말미암아 온 고통스러운 그의 삶의 상황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혹시 이러한 상황에 있지 않습니까? 곡식을 뿌려도 열매를 맺지 않고 열매를 맺고 나면 벌레들이 와서 먹는 그런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두 추수해서 수확을 이루어 거우어 들였는데 자고 일어나 보니 도둑이 모두 훔쳐 가버린 것과 유사한 상황을 경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을 끔찍이 사랑하는데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상처밖에 없고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하나님까지도 버렸는데도 형통함이 없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잘 살아보려고 애를 쓰고 노력을 했는데도 경제적으로 더 고통스러워지고 직장에서 잘 보이기 위해 신앙의 많은 부분을 양보하고 심지어는 주일까지 지키지 않는 것을 예사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자기가 사랑했던 그 직장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거나 믿고 신뢰했던 사람으로부터 심한 배신을 맛보게 되는 실패, 우연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떤 계획을 따라서 나를 파멸로 이끌기 위해서 점점 내 인생을 옥죄어 오는 것과 같은 깊은 고통을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시인이 바로 그런 상황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누구를 생각해야 할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인생의 그 깊은 사랑의 골짜기에서 여러분들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생각나게 하시기 위함임을 속히 깨달아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곳에서 깨닫고 돌이키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인생은 점점 더 곤고해질 것이고 하는 일마다 되는 노릇이 없는 비참한 삶을 영위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은 세상을 친해지기 위해서 하나님까지도 버렸는데 세상도 여러분들을 버리는 상황이 고난 가운데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의 진정한 행복이 여러분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도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아서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흔히 가질 수 잇는 세상적인 욕망을 성취하는 것이 신앙의 참된 보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것을 보람으로 알며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모든 삶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뒤로 물로선 사람,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버리고 불순종의 죄에 빠진 사람에게는 깊은 데서 홀로 버림받은 채 울부짖어야 하는 비참한 고통과 시련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람들이 여전히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길을 손쉽게 택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가 무엇 때문인지를 너무나 모르기 때문입니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맥췌인이라고 하는 거룩한 목사가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고 있습니까? 스물 두 살(?) 비참한 깊은 상태에서 울부짖으며 몸부림쳐야하는 상황에 떨어지게 되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의 공로에 의해서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벌레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보다도 더욱 움직일 수 없는 분명한 사실, 거울 앞에 설 때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에게 말해야 합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 피값으로 사신 바 된 하나님의 자녀다.”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 거룩한 고난, 그 끔찍한 희생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우리가 다 양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가는 불순종과 죄악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흠없는 그분이 바로 우리들이 즐기고 우리들이 빠지고 있는 불순종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나와서 주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우리를 위해 못박힌 어린양 예수의 거룩한 보혈을 찬송하는 것은 우리들이 이미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무나 부당하며 그 부당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거룩한 보혈에 빚진 사람들이 되었다는 믿음의 감격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그렇게 어린 양 예수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인생이 여러분의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전에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고 어떻게 눈물뿌리는 사연을 가지고 이곳에까지 걸어왔든지 저는 여러분의 종교적인 체험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가 이제는 하나님의 것이며 세상에 품에서 사는 것보다는 주님의 손위에서 버림받은 상태에서 사는 것이 훨씬 행복하다고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단지 어떻게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이며 어떻게 걸어가는 것이 천국을 가는 길인지에 대해 정확히 그린 약도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깨닫고, 무엇 때문에 주님이 나 같은 죄인들 위해 십자가에서 그 쓰라린 고난을 당하시고 나를 그 더러운 죄악 가운데서 건져내셨는가를 생각하는 십자가에 대한 펑펑 우는 거룩한 감격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어떤 훌륭한 신자라고 할지라도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못박히셔서 우리가 그의 피로 사신바 된 주님의 십자가에 빚진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에 대한 깊은 눈물어린 감격과 그 눈물을 닦은 후에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기대하셨던 삶을 살아서 삼위일체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를 깊이 탐구하는 정신, 이 두 가지가 없이는 짐승과 같은 삶을 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그렇게 살아서는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불순종과 하나님을 거스르고 우리 안에 성령을 근심시켜드린 모든 불순종과 죄에 대해 우리는 일체의 변명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말할 수 없는 도전이며 그 십자가의 보혈로 구속함을 입은 자녀로서는 살아서는 안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우리 안에 부패와 죄의 영향력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거룩한 새 본성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 때도 있지만, 우리 안에 솟아나는 정욕과 죄에 대한 욕망을 따라 하나님을 거스르는 삶을 위해 옛 성품을 따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이 시인도 바로 그런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전편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사람은 하나님을 대충 안 사람이 아닌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 안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절망의 계곡에 들어가기 전에 은혜의 계곡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는 사람입니다. 아닙니다. 절망의 계곡에 들어가기 전에 은혜의 산봉우리에 올라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불순종과 죄로 말미암아 외면적인 삶이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뒤엉켜 있어 버림받은 것처럼 울부짖어야 하는 상황에 떨어진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데 그렇게 될 때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분명히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인데 성도의 삶 속에서 일어날 때가 있고,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일인데 성도의 삶 속에서 도무지 일어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오늘 깊은 데서 부르짖는 이 시인의 상태는 우선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그가 처하게 된 고통스러운 시련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지금 여러분의 삶 속에 밀려오는 파도와 같이 요란한 인생의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인간의 방법과 지혜로 잠자게 할 수 있다고 아직도 생각하고 있으며 여러분 자신의 삶 속에서 그런 깊은 웅덩이에서 고통받는 여러분의 외면적인 삶이 아직까지 하나님의 관계를 접어둔 채 그 깊은 시련 속에서 여러분들이 헤쳐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이제껏 살아온 것보다 더 끔찍한 고통이 여러분들의 앞에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고 저도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악인의 형통함은 경건한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번민을 불러일으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평과 의를 따라서 주님께 불순종하며 거스르는 사람들에게는 끊임없는 곤고함과 고통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그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삶 속에 계속되는 외면적인 삶의 고통이 자신의 불순종의 대가였다는 사실을 깊이 깊이 깨닫는 것이 그의 육신은 고통스러울지라도 그의 영혼에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을 기도하거나 가족들, 혹은 교인들을 위해 기도할 때 무조건 것인 형통을 비는 것은 책임있는 기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고통을 당하더라도 그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살아나는 길이 무엇인가를 깊이 깨닫도록 하여야 합니다.
오늘 이 시인은 주님 앞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처절하게 그의 외면적인 삶이 고통당하고 있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거듭해서 경고합니다. 여러분들에게 마음을 다해서 말합니다. 내 마음과 제 마음속에 있는 갈망에 모두 실어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성경이 외치고 있는 평범한 진리를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축복이 있고, 거스르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깊은데 빠진 것과 같은 시련 속에서 몸부림 고 울어야 하는 울부짖음이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주고 계신 다양한 경고에 대해서 귀기울이지 않는 사람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은 파멸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만약 외면적인 삶의 깊은 고통 가운데 들어갔다면 여러분들은 이제껏 여러분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오도록 만들었던 오랜 불순종과 죄악들을 버려야 합니다. 버려야할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면 것에 대해 이모양 저모양으로 핑계를 대던, 더럽고 추한 행동들을 속히 끊어버려야 합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징책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계단 삼아 깊은 데서 올라오는 사람들의 자세는 주께서 여러분들을 판단하실 때 ‘의롭다 하시도다’하고 시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제일 먼저 이 깊은 데서는 이런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깊은 웅덩이에 빠진 것같은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시련을 당하는 여러분들은 반드시 여기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어떠한 불순종과 죄악이 나를 여기에 데려왔는지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이 깊은 데서 부르짖고 있는 시인의 상태는 양심이 각성되고 있는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양심이 깨어나고 있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깊은 데서 부르짖고 있습니다.
여러분, 시인이 깊은 데서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떨어진 이 육체와 영혼의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상태에서 무엇을 부르짖고 있겠습니까? 그가 그곳에서 부르짖는 것은 더 많은 돈을, 더 많은 쾌락을, 더 많은 욕망을, 더 많은 성공을 달라고 통곡하며 울부짖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든지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는 지금 이 깊은 데서 부르짖으며 찾고 있는 그것이 이전에 평탄한 길을 걸어가면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찾던 그것과는 다른 것을 이 깊은 데서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으로 깊은 침체에 빠져서 견딜 수 없는 고통속에 몸부림치는 사람의 변화입니다.
자,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시인이 깊은데 빠지기 전까지 불순종하며 죄 가운데 살았을 것입니다. 만약, 이 시가 다윗의 시라고 한다면 다윗이 일생을 살면서 이런 처절한 몸부림 속에서 침륜의 빠진 자신의 상태와 더불어 씨름했던 때를 우리들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과 연결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몇몇 주석가들을 그렇게 시도를 합니다.
자. 이런 깊은 상태에 빠져서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큰 고통과 시련을 당하게 되었을 때에 그 전까지 그가 무엇을 구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추측하는 바와 같이 만약, 이 사건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사건이었다면, 이 깊은데에 빠지기 전까지 그는 헐떡이듯이 그 여인을 찾아다니며 간음했을 것입니다. 그의 소원은 죄에 있었을 것이며, 그의 삶의 모든 기대는 오늘도 어떻게 주위의 눈을 피해서 이 여인과 동침하며 한날을 아름답게 쾌락에 빠질 것인가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이 시인은 처참한 죄와 불순종에 빠지게 되었고 그곳에서 이제는 무엇인가 영혼 속에 우러나오는 말할 수 없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르짖음은 전에 이 깊은 상태에 떨어지기 전에 헐떡이며 구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을 구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구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이 실패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혹은, “하나님 제 영혼이 찌르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나이다. 하나님, 평안을 모두 잃어버렸나이다. 하나님, 구원의 기쁨이 사려져가고 있나이다. 오 주님, 성령이 내게서 떠날 것만 같습니다”하며 그는 몸부림치며 울부짖고 있는 것입니다.
자,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찾아왔습니까? 그가 만약, 범죄하기 직전에 이런 기도를 드렸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이 기도를 기쁘게 받으시고 그를 죄를 지을 위험한 상황가운데서 돌이키셨겠습니까? 이제 그는 변했습니다. 전에는 인간의 욕심과 하나님 앞에 명백히 불순종인줄 알면서도 그것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헐떡였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잃어버린 영혼의 평안 때문에 울부짖고 ,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구원의 기쁨과 자신을 떠날 것만 같은 성령의 임재하심의 사라짐 때문에 울부짖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랍게 변했습니까?
물러가 깊은 영혼의 침체 가운데 빠진 영혼들이 이렇게 울부짖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자신의 힘으로 기도하는 것 같지 않고, 무엇인가 자신 속의 오래도록 마음의 땅속에 묻혔던 것같은 어떠한 힘이 불끈 솟아올라 자신의 기도의 힘을 더하고 처절한 울부짖음으로 하나님 앞에 울부짖도록 만들어주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회복을 위한 조짐도 아니며, 더하여 즉각적으로 하나님 앞에 응답되는 기도는 더더욱 아니며, 그렇게 기도를 드릴 수 있다고 해서 그의 영혼이 지난날의 죄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은 더더욱 아닙니다.
시인은 지금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뒤로 물러간 침륜의 상태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며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죄에 대한 각성입니다. 죄에 대해 깊이 각성하며 그는 처절하며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인가를 아십니까? 죄는 그냥 깨닫기만 하면 해결되는 각성의 대상이 아니라 치료받아야할 질병이라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비유가 제 마음속에 방금 떠올랐습니다.
(예화) 어린 아이 적에 아이들이 싸우다가 누가 이기고 진 것을 가리는가하면 누가 우는 가입 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아무리 얻어맞아도 독기가 오르면 서로 싸우면서 울지 않습니 다. 그런데, 누가 우는가하면 코피 터진 아이가 먼저 웁니다. 코피가 터지고 피가 흘러 내려오는데도 모르고 싸웁니다. 옛날에는 아이들이 코가 많이 나와서 피가 나와도 전 에 나온 뜨듯한 것이 코로 생각하고 싸웁니다. 그러다가 옆에 있는 아이들이 “피다”라 고 말합니다. 그러면 팔로 씻습니다. 그리고는 소리내어 웁니다. 그리고 그날의 싸움은 끝이 납니다.
자, 흐르는 피를 보고 그 사실을 인식하고 그렇게 피가 나오도록 얻어맞은 처지가 처참해서 통곡하며 우는데 그 우는 행동과 코피가 멎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이점에 있어 바른 성경적 견해를 갖기 못하기 때문에 사실은 전혀 회개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은 완벽하게 회개했다고 생각하면서 영적인 회복으로부터 멀어지는 지체들을 저는 지금도 수없이 보고 있습니다. 그들이 만약, 이 미묘하면서도 현격한 차이, 즉 죄라는 영혼이 치료되는 것과 죄에 대해 각성하는 것 사이의 현격하고도 분명한 차이에 대해 올바로 알았다면, 그들은 바보 같이 코피보고 소리내어 울면서 이 울음이 코피를 멎게 해줄 것이라는 말도 되지 않는 상상 속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했더라면 그들의 영혼은 훨씬 더 안전한 길을 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시인은 이 깊은 데서 울부짖고 있습니다. 이제 그의 마음은 변했습니다. 그는 지금 한번만 더 범죄하게 해달라고 울부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후회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이렇게 몰아넣은 그 삶의 상황에 대해서 비탄해하면서 몸부림치며 하나님 앞에 매어 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죄에 대해 여러분들이 심각하게 각성하는 것은 회개에 이르는 중요한 길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그친다면 그것은 정말로 참된 회개에 이르는 것도 아니며 더욱이 하나님으로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영육간의 시련과 곤고함을 만나서 버림받은 것과 같은 상태에서 회복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단지 하나님 앞에 이제는 주님이 더 이상 나를 벌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양심의 해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요약을 하면 이렇습니다.
영적으로 깊은 침체에 빠졌는데, 침체의 원인은 죄와 불순종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회개와 주님이 생각하는 그분의 자녀가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떨어진 침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참된 회개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분명히 회개했음에도 혼란이 옵니다. 무엇인가 하면, 회개는 깊이 했는데도 회개하는 자들 위해 주시는 하나님의 여러 가지 축복의 약속들이 이루어진 증거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이번에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의심합니다. 회개하고 벗어났는데, 이번에는 더 큰 덫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일단 신자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의심하고 나면 그는 결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를 부여하는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 급히 가다가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놓았더니 서울로, 강원도로 가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저는 말씀에 대한 이해를 제법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여러분조차도 이러한 경박한 이해 때문에 혼란에 빠져서 영적으로 손해를 보는 사람들을 종종 발견합니다. 여러분, 이번 기회에 여러분들의 이러한 어리석은 생각과 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잘못된 회개에 대한 생각들을 깨끗이 정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좀더 나아가보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버림받은 것과 같은 상태에서 처절하게 부르짖고 있는 이 영혼이 양심에 대해 깊은 각성을 느끼며 의식했습니다. 그러나 불순종과 죄로 말미암아 결국은 오랫동안 하나님이 인내하시다가 외면적인 삶과 내면적인 삶 자체가 마치 주님께 버림받은 것과 같은 처참한 깊은 계곡에 떨어진 것같은 상황이 되었을 때에 그것은 이미 간단한 죄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그 죄가 질병처럼 시인의 영혼 속에 파고 들어와 중대한 질환을 일으킨 것입니다. 치유가 없이는 불가능함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깊은 데서 몸부림치는 이 시인의 상태, 죄에 대해서 깊이 각성한 이 시인의 상태가 잘못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잘못된 상태가 아닙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불순종과 죄로 뒤로 물러나서 침륜에 빠진 사람들에게 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울부짖음입니다. 그가 특별히 도덕적이고 양심적이며 믿음이 좋기 때문에 울부짖는 것이 아니라 그는 자연적인 깊은 고통 때문에 영혼의 찾아온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다가온 버림받은 고통 때문에 처절하게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신자가 되어서 이렇게 죄 가운데 있으면서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린 고통과 시련과 아픔, 외면적인 삶 속에 밀려온 많은 시련의 고통 때문에 처절하게 울면서 그것이 대단한 믿음의 회개인 것처럼 생각하면 그는 회복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처절하기 회개하는데 왜 하나님이 내 영혼에 어떤 변화를 주시지 않을까를 생각합니다. 결국 그는 그 깊은 데서 올라오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불순종하고 죄 가운데 살면서도 도무지 이런 처절한 울부짖음이 없다고 한다면 그는 거듭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시기가 빠르거나 늦을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은총을 거두시면 그들은 처절한 고통을 맛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그것은 이렇게 불순종과 죄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간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깨닫고 처절하게 울부짖으면서 예전에 형통할 때에 헐떡이며 구했던 불순종한 삶과 죄악된 세상의 유익과 즐거움들을 한편으로는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 위에서 죄가 여러분들의 영혼에 미친 그 질병적인 영향들을 치유하는 일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 그는 결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비록, 과해서 매일매일 수많은 세월을 하나님과 단절되고 깊은데 빠진 것과 같은 처참한 버림받음에서 흐느껴 울고 통곡할지라도 그는 그 자체 때문에 그곳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우리들이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이 깊은 데 빠진 것과 같은 시련을 맛보기까지 죄를 짓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에 열심을 냈던 것처럼 회복을 위해서 열심을 내고 범죄하고자하는 욕망이 그토록 시종일관 우리를 주장했던 것처럼 회복에 대한 열망이 그렇게 우리를 지배한다면 어떤 흉악한 범죄를 짖고, 얼마나 길고 오랜 세월을 물러가 침륜에 빠져있었다 할지라도 그는 곳 그곳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자각, 그리고 양심에 대한 깊은 각성, 그 위에 더 필요한 것이 실제적으로 자신의 영혼 속에 들어온 죄라고 부를 수 있는 실제적인 질병을 하나님의 은혜로 고치는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호세아서에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패역을 고치는 과정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의 죄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 죄가 가져온 절망적인 상황 때문에 고통하며 울부짖으며, 그래서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평화 때문에 안타까워하며 염려하면서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는 그것 외에 실제적으로 냉정한 마음이 되어서 여러분들의 영혼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는, 지금도 끊임없이 불순종과 죄를 만들어내고 있는 여러분들의 영혼의 질병의 상태를 정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눈물이 적어도 좋습니다. 정확하게 자신의 질병의 상태를 인식하고 어떻게 그 죄의 질병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고쳐나갈 것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선 여러분들은 그러한 지속적인 죄가 여러분들 속에 어떻게 들어오게 된 통로를 기억하고 그 통로를 차단하는 일에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어떤 일정한 습관이 죄와 연결되어 있고 그 연결된 습관이 여러분들을 쉽게 범죄하게 만들므로 이런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오도록 만들었다면 여러분들은 먼저 그 습관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들어온 죄라는 질병들이 어떻게 무수하게 세균을 퍼뜨려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해갔는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면서 더 이상 죄가 여러분들 속에 자라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그 성장하는 길을 차단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여러분들 속에 있는 불순종의 질병과 같은 죄가 치료되는 과정이 없이는 바늘의 허리를 매어서 쓸 수 없는 것처럼 회복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영적인 깊은 침체에 빠진 사람들은 헤어날 길을 찾지 못하고 너무나 많은 세월들을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주님이 그 모습을 보시면서 얼마나 마음 아프실지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셨습니까? 우리는 살 수 있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눈에 보시기에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구원하신 그 백성들이 죽어있는 상태를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마음이 얼마나 처절했을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시인은 여기에서 깊은 데서 부르짖는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이미 무엇인가 전제하고 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즉각적으로 이 시를 써 내려가고 있는 고백하는 이 시인이 첫째로 이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맛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고, 두 번째로는 외적인 고통과 내적인 뿌리가 하나로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의 외면적인 삶의 끔찍한 고통한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우선 이 사람은 은혜를 깊이 경험한 영혼이었습니다. 그는 단절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하나님과의 단절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는 이야기는 주님과의 교통이 무엇인가를 알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평화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는 기쁨을 빼앗아 가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 사람은 주님으로 말미암는 참된 영혼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광경을 보면서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이 은혜를 받고 당신의 성품을 풍부하게 경험한 사람이 뒤로 물러가는 것을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뒤로 물러가는 것과 똑같이 다루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미 이런 사실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있었던 토마스 왓슨같은 후기 청교도 설교자는 “때로는 우리는 아주 사소해 보이는 한번의 범죄 때문에 가혹하리만큼 긴 세월을 영적으로 하나님과 단절된 가운데 영혼의 어두운 터널을 지내야하는 때가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의 성품을 많이 맛본 사람들이 뒤로 물러간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더 큰 분노를 일으킵니다. 그들은 그렇지 못한 성도들이 뒤로 물러갔을 때보다는 갑절, 아니 칠 배나 더 많은 쓰라린 고통을 맛보게 될 것이며 때로는 자신이 지은 죄에 비해서 버림받은 채로 지내야하는 이 영혼과 육체의 고통 - 깊은 데서 울부짖는 상태 - 이 너무 가혹하다고 불평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영적인 침체 속에서 얼마나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가를 보면 그가 이전에 하나님을 깊이 만났는가를 추측해서 알 수도 있다는 이상한 결론에 자연스럽게 도달하게 됩니다.
이 사실은 즉각적으로 우리를 잃어 버렸던 의무에로 돌아가도록 만들어 줍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누구보다도 많이 하나님의 참사랑을 깨달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많이 맛보아 알게되었다면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배나 더 뒤로 물러나 침륜에 빠질 때에 얼마나 끔찍한 파멸적인 결과가 오는가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잠시 죄에 빠졌다가 즐거움을 맛본 후에는 속히 주님의 품으로 도망치리라는 사행심 어린 기대를 가질지 모르지만 그러나 진정으로 주님이 사랑하셔서 당신을 만나게 하신 사람들에게 있어 그런 시도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편 속에서 다윗이 지은 시들을 묶어 놓고 그가 죄의 상태에서 얼마나 처절하게 몸부림쳤는지를 보면 그의 영혼의 몸부림이 얼마나 처절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의 간음의 죄에 빠진 사람들은 다윗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단언코 여러분들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과 유사한 죄에 빠졌던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다윗만큼 괴로운 사람은 다윗 한사람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은혜 받은 것을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자랑하는 일에는 열심일지 모르고 그 은혜와 지식의 산에서 지체들을 판단하는 일에는 탁월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을 맛보았고, 주님이 만지고 지나가셨고, 하나님의 진리와 말씀에 대해서 탁월한 인식을 가졌기 때문에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여러분들은 근신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여러분들은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계시를 위탁받고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을 먼저 깨닫게 해준 사람으로서 중차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까? 내 영혼을 하나님이 만지고 지나가시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시지 않는 놀라운 복음의 비밀들과 이 세대에 가려져 있어서 참된 하나님의 복음이 들려도 배척하고 깨닫지 못하며 피묻은 복음대신 물묻은 인간의 사상에 젖어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바른 길을 가고자 하나 그들은 알 수 없고, 그 바른 길을 따라 살고자 하나 그렇게 살 힘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열심히 있다면 반드시 빗나갈 것입니다. 주를 위해서 헌신하면 헌신할수록 역설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날에게 들어오지 못하도록하는 거치는 돌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해주신 주님의 성품을 바로 깨닫게 해주시고 변천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세상 속에서 불변하는 복음의 진리를 붙들고 살아가게 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책임감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이런 놀라운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를 맛보고 진리가 우리의 영혼을 자유케하는 놀라운 독점적인 은혜를 경험한 우리가 만약에 뒤로 물러가면 죽음밖에 없다라는 비장한 각오로 배수진을 친 채 신앙생활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신만큼 은혜를 죽이기 위해 밀려오는 여러분들의 죄와 얼마나 처절하게 싸우고 계십니까? 일같지 않은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도 되지 않는 일로 핑계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주님이 주신 지식 안에 거하기를 기뻐하지 않는 삶을 반복하고 있습니까? 그 길로 가십시오. 그러면 사도바울의 예언을 따라서 여러분들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한 예증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왜 그렇게 혹독하게 다루셨습니까?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에 비하면 그래도 도덕적인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죄 가운데 형통한 이방 나라는 내버려두시고 그래도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하는 이스라엘을 처절할 정도로 혹독하게 다루신 이유는 무엇때문입니까? 이방에서는 우상을 섬기는 것이 삶의 일부가 되었는데도 버려두시고, 이스라엘 가운데는 잠깐 동안 잘못해서 우상을 섬겼는데도 몇십만, 몇 만 명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한번에 목숨을 앗아가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당신이 세운 나라를 죄 때문에 이방민족에게 팔아버리고 멸망함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이름이 함께 모욕을 받으시면서도 그 백성들을 징벌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그렇게 이스라엘이 자비하신 하나님의 손길아래 혹독하게 취급되어야했던 이유는 무엇때문입니까? 오직 하나입니다. 그들에게는 남에게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알지 못하는 것 알았고
남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남에게는 위탁하지 않은 보석과 같은 하나님의 계시를 위탁받고 하나님을 경험한 민족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혹독하게 다루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무엇인가 가혹하게 다루신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들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오! 하나님. 저는 이제껏 제가 하나님을 깨달은 것이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습니다. 주님을 만난 것이 그렇게 큰 것인 줄을 몰랐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기뻐하며 그 말씀 속에서 제 신앙의 뿌리를 내린 것이 좋은 것이라는 것은 깨달았고, 그렇게 살지 못한 사람들이 불행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사실 제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놀라운 은총을 입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 자리에서 시인합니다. 저는 제가 물러간 가운데 당하는 처절한 고통, 양심의 가책을 받고 울부짖어도 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음성, 고통 가운데 건져달라고 하소연해도 응답이 없는 하나님의 그 응답을, 하나님의 구원을 생각하면서 저는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제가 다시 한번 참회하오니 일평생 사는 동안 제가 물러감으로 말미암아 받은 이 끔찍해 보이는 대접을 인해서 저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기로 다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비와 긍휼을 베푸셔서 저의 그 죄악을 씻기시고 이 깊은 웅덩이에서 벗어나 다시 한번 회복을 주시옵소서. 그때에 그 깨뜨려진 심령, 그때에 하나님을 알고 말할 수 없이 기뻐하던 그 마음,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천사와 같이 기뻐하던 그 옛날의 삶이 이렇게 대단한 것인줄 미처 몰랐습니다. 한번만 제 인생에 기회를 주시옵소서. 결코, 뒤로 물러가지 않을 것이며, 나태와 안일함과 죄에 대한 일순간의 사랑 때문에 이렇게 처참한 고통 속에서 주님께 버림바된 양심을 가지고 몸부림치지 않기로 다짐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 놀라운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그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을 모두 잃어버리고 그것을 잃어버린 자에게 주시는 끝도 없는 처절한 터널과 같은 그 깊은 골짜기에서 울부짖으면서 그는 뼈저리게 후회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두가지로 말하고 싶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시인과 같이 받고 그를 아는 지식에 많은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여러분들이 뒤로 물러가 있다면 여러분들은 자신들이 서 있는 그 자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무서운 자리인가를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몸부림치는 데도 주님의 구원의 손길이 보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그러한 상황 속에 있을 때에 내일이나 다음주면 그 영혼의 어두운 터널이 끝난다고 여러분들에게 사탕발림을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을 지지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메시지가 여러분들에게는 우울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희망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비록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터널 속에서 도움이 끊어진 자처럼 처절하게 울부짖을 지라도 여러분들이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새롭게 배우고 뒤로 물러가게 된 죄에 사로잡혔던 삶을 깊이 성찰하며 올바른 말씀의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르게 찾아가면 그 회복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어디서도 치료받을 수 없었던 급속하게 번져하고 있는 여러분들의 영혼의 죄의 질병을 하나님이 온전히 고치실 것입니다. 그래서 밝은 터널로 나오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때까지 하나님의 노여움은 잠깐이요, 은총은 영원하다는 말씀을 붙들어야 하며, 밤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깃들리라고 한 거룩한 약속을 붙들어야 합니다. ‘주께서 나를 버리실지라도 나는 이 터널을 지나기를 소망하며 주께서 나를 내치실 지라도 나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다가 죽겠나이다’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상황에 떨어져 있을 때 하나님 이외에 다른 곳에 소망이 있다면 주저 않지 말고 속히 그곳으로 가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얼마를 지나지 않아서 더 처참한 마음으로 결국은 두려움에 떨며 하나님 앞에 나오고야 말 것입니다. 저는 영혼의 침체를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치고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아직 본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영혼의 침체를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죄를 무시하는 것만큼 그는 하나님을 무시할 것이며, 죄를 두려워하는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인간은 자기가 죄 가운데 빠져들도록 만들었던 환경은 크게 생각하고 그 죄에 굴복해서 뒤로 물러갔던 자신의 결함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비겁하고 야비한 합리주의 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그러한 경향과 손잡고 거기서 변명만 늘어놓는다면 여러분들의 영혼은 계속해서 죽은 상태를 모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 어둠 속에서 여러분들은 더 깊은 침체로 들어가게 될 것이며, 그 깊은 침체 속에서 여러분이 무엇을 움직이고 행동하면 그것이 곳 하나님 앞에 범죄가 되어서 여러분들은 그 죄의 사슬에 완전히 얽혀 이제는 외부의 도움이 없이는 그 죄악의 사슬에서 풀려나올 수 없는 노예 상태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시인은 지금 이것을 논리적이 아닌 경험적으로 우리들에게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영적인 침체를 하찮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그 영혼을 한없이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영적인 침체는 빠져봐야 하나님의 은혜로 그 침체 가운데서 속히 탈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지금 이 설교를 들으면서도 “목사님, 맞습니다. 침체에 빠질 때는 곳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들어오고 보니 밖에서 볼 때 그렇게 잘 보이던 출구가 왜 그렇게 보이지 않는 줄 모르겠습니다. 지체들이 저와 같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저는 훈수도 잘 두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빠지고 보니 몸부림칠수록 더 깊이 빠져들어가는 이 비참한 상황에서 저는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것과 같은 상황을 면할 수 없습니다. 기도를 매일 하지만 기도 속에서 느끼는 것은 거절감 뿐이요, 이전에 기도 속에서 맛보던 그 친밀한 사랑이 제 마음에서 떠났습니다.”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하십시오. 오늘밤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공갈을 하는 것과 같이 느껴지십니까? 아닙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입증하려고 굳게 마음을 먹고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권고하는 시인이 이미 경험적으로 보여준 이 회복의 길에 마음을 다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저는 여러분들을 버려두겠습니다. 파멸된 여러분들의 삶은 남아 있는 수많은 지체들에게 영원히 귀감이 될 것입니다. “아! 주님의 그 큰 은혜를 받는 다고 할지라도 저렇게 될 수 있구나!”라고 말입니다.
절대로 지금 물러가 있는 여러분들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낙관하지 마십시오. 저는 알고 있습니다. 지금 영적인 깊은 침체에 빠진 어떤 지체들 중에는 십 이삼년 넘어 똑같은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지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계속될 날은 지금 경험한 날보다 훨씬 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절로라는 말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신데 나를 버려두실까? ” 예, 그렇습니다. 버려두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범죄하여 당신을 거스르고 돌아선 자들을 향해 사랑을 보이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돌아서서 주님을 붙드는 자들에게 사랑을 보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넘어지는 자에게는 엄위를 보이시고 참회하는 자에게는 자비를 보이신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또 하나의 작은 결론은 이것입니다. 주님의 깊이 경험하고 주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 위에 서 있다면 여러분들은 뒤로 물러가면 파멸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에 지금 그렇게 된 상황에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심호흡을 하고 여러분들의 이러한 영적인 침체로부터의 회복이 오늘 울고불고 기도하면 내일쯤 끝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제는 냉철해지고 장기전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속에 뿌리 박힌 죄악된 습관과 습관적인 패배의 공식적인 통로들을 차단해야 합니다. 마음을 지키고 겸비하게 낮아지며 자신의 죄와 물러난 상태들을 적당히 합리와 시키려는 마음의 경향과 단호하게 결별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여러분들은 살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외적인 고통, 그리고 내면적인 영혼의 깊은 몸부림이 내부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즉각 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핍절한 외면적인 삶의 상태, 시련과 고통으로 얼룩진 자신의 이 외면적인 삶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이 단지 돈을 못 번다든가, 나쁜 놈이나, IMF, 변하지 않는 남편, 버릇없는 자식들과 같은 변명으로 일관하며 누구 때문에 시험에 들었고, 누구 때문에 은혜를 잃어버렸다는 식의 돌팔매나 들고 눈을 부릅뜨고 나타난다면 그에게는 회복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죄로 말미암아 그 고통스러운 외면거인 삶에 떨어지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깊이 생각하고 여러 사람들이나 상황이 도구가 되어서 여러분들을 불행에 몰아넣었다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그 사람들과 상황들을 주목하고 있는 한, 여러분들은 이미 참회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미워하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람 때문에 여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바보같은 발상들을 집어치워야 합니다. 그리고는 철저하게 어떻게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쳤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영혼이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것과 같은 상태가 되어서 처절하게 몸부림치고 있는 상황은 더더욱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결국 시험과 뒤로 물러나는 침륜 속에서 마지막 내리게되는 결론은 이런 것이 되어야 합니다. “아! 이런 외면적인 삶의 처절한 고통과 나의 삶을 이런 고통속에 몰아 놓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실수와 범죄 그리고 또 이렇게 하나님께 버림받은 상태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면서도 하나님께 버림받은 절망속에서 울부짖어야 하는 이 모든 상황이 결국은 내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심지어 분명히 “나는 이 일, 이 상황, 저 사람 때문에 이렇게 신앙을 잃어버리고 견고한 상황에서 이탈해서 물러가게 되었다”고 생각되는 그 사람이 찾아와서 “내가 당신을 실족하게 했소”라고 말해도 “아닙니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깨닫고 보니 당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나를 넘어뜨리기 전에 나는 이미 넘어질 준비를 내 마음속에서 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당신이 아니라 나였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서 그는 이제 이 깊은 데서 울부짖으면서 하나님만에 자신을 이 깊은 곳에서 건져주실 수 있고 인간에게서 오는 어떤 도움도 소망이 되지 않는다는 그 마음의 자세를 하나님 앞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깊은 데서 울부짖으며 버림받은 상황 가운데 있지만 소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 하나님과 단독으로 대면할 준비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2.깊은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깊이 주께 부르짖었나이다(시130:1)
지난주에서부터 저는 이 영광스러운 시편 130편 본문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데 지난 시간에는 왜 그렇게 깊은 데로 떨어지게 되었는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죄 때문에 떨어진 것이며 이를 적고 있는 시인은 은혜를 많이 받은 영혼이었습니다. 외적생활의 고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그 내적인 뿌리가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시인은 지금 여기에서 양심의 커다란 찔림을 받아서 고통 속에서 울부짖고 있지만 그러나 문제는 양심의 가책을 받고 각성을 하는 것으로서는 무너져 내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는 양심은 각성하고 있지만 일종의 질병과 같아서 치료를 필요로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그렇다면 이 시인은 이 깊은 데서 하나님께 부르짖기까지 그 깊은데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시인은 이 깊은 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주님의 자녀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향한 사랑을 두셨습니다. 주님은 해 아래 있는 모든 당신이 지은 피조물들을 사랑하시고 특별히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속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한없이 사랑하십니다. 그 사실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인 사랑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사랑을 주어서 그 특별하고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게 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한없는 경배와 사랑을 바치도록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말할 수 없는 기쁨, 억누르고 억제할 수 없는 거룩한 환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맛본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종종 주십니다.
시인은 지금 억누를 수 없는 그러한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오는 거룩한 환희를 송두리째 잃어버렸기 때문에 오늘 여기에서 이렇게 울부짖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구원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깊이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제가 말할 수 없는 신앙의 기쁨, 견딜 수 없는 거룩한 환희가 무엇인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인 수준의 문제입니다.
시인은 이러한 놀라운 거룩한 영적인 기쁨, 주님의 사랑 안에서 맛보는 견딜 수 없는 놀라운 환희를 경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시인은 죄 가운데서 깊은 데로 떨어져서 일시에 하나님과의 사랑과 친밀함을 송두리째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삶이 얼마나 즐겁고, 교제하며 누리는 영적인 기쁨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랑을 잃어버린 자의 비참한 고통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이런 깊은데서 하나님을 향하여 울부짖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사랑과 은혜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떠나가는 것은 바로 죄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뒤로 물러나 침륜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대부분의 경험을 면밀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받고, 구원의 놀라운 기쁨에 가슴 벅차하던 사람들이 그러한 신앙의 기쁨을 너무나 쉽게 잃어버리는 경우를 발견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진리로 말미암아 비췸을 받고 깨닫는 즐거움 속에서 매일 매일 신령한 기쁨으로 주님을 만나는 즐거움 속세서 살던 성도들이 너무나 쉽게 그러한 사랑을 잃어버리고 속히 건조하고 답답한 신앙생활로 돌아가는 것은 바로 죄 때문에 깊은데 떨어지는 현상이라는 말씀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그 고통 때문에 울부짖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나면 성도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것 한가지가 없어집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 마음속에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깨뜨려지게 되면 즉각적으로 신자의 마음속에서는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서 사라져 버립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가 은혜를 받고 성령의 은혜 안에 충만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며 살아갈 때에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강권하셔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어떤 잘못된 일을 하려고 할 때에 우리 생각에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되는데도 자꾸만 성령이 그것을 슬퍼하시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분명히 내가 하려고 의도했고 하고 싶어하는 일인데도 어느 순간에 내 안에 성령이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시므로 내가 나의 육신은 원하지만 나의 영혼이 그것을 싫어하게 되어서 그만두는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그 길을 걸어가다가도 어느 순간에 성령이 강권하시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우리들에게 기도 가운데 보여주셔서 가던 길이 잘못된 길이라는 것을 즉각적으로 깨닫고 순종하며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엇인가 우리가 잘못해서 범죄를 하거나, 혹은 지체나 다른 사람들에게 말로 불명예를 주거나 험담을 했을 때, 당시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도 돌아서서 기도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즉각적으로 누군가 지적해주는 사람이 있지 않아도 우리가 방금 전에 행한 그 일이 매우 잘못된 일이었음을 즉시 후회하게 되고 하나님 의 성령의 책망하시는 음성, 권고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자신의 마음이 흡수되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를 누리며 그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갖는 특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 안에 살고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사랑가운데 거하면 거할수록 그는 점점 더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마음속에 오셔서 자신의 인생을 조정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그의 안에 주님의 강권하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깊은 데 떨어지고 나면 이러한 통제력을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한번 범죄하고는 도무지 회개할 줄 모르고, 그릇된 길을 걸어가면서도 그 길이 하나님을 얼마나 슬프게 하는 길인가를 알지 못합니다. 무지는 용기를 더하고 알지 못한 소경됨 속에서 더더욱 담대함을 얻어서 육신의 길로 행합니다. 전에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고 그 은혜 안에 있었더라면 벌써 돌이켰을 사람이 깊은 데 떨어져서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마음속에 하나님이 강권하셔도 그것을 느낄 수 없고, 또한 강권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는 막된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지금 이러한 상태에 떨어져서 하나님 앞에 애통하며 울부짖고 있는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체험하였을 이 시인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가지고 있는 커다란 재산이 있었다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있고 온 세상이 그를 버려도 하나님이 그를 찾으시면 그에게 하나님의 마음에 강권하시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릇된 길을 걸어가다가도 속히 돌이키고 무지한 가운데서 행하다가도 즉각적으로 돌이키고 주님의 마음이 빛을 비추어 주시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돌아오곤 하는 삶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 가운데 떨어지자 그 모든 하나님의 사랑을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불행한 상황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내세우고 의지할만한 것이 무엇이 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신뢰하지 않고 우리는 우리를 믿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유일한 재산이 있고 믿는 바가 있다면 환경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알고 내 안에 주님의 강권하시는 사랑의 마음이 있어서 내 마음이 그릇된 길로 가고자할 때에도 늘 이기시는 하나님의 마음 때문에 우리들이 좀더 순종하며 살고 거룩한 은혜 안에 사는 그러한 놀라운 축복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 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세울 만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를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만약 그것을 잃어버리면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시 그 옛날 소경된 삶으로 돌아갈 것이고, 이전에 주님을 모를 때 행했던 육체의 옛 습관을 따라 살아가는 짐승과 같은 무리들로 돌아갈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겉모양으로 교회를 떠나지는 못하고 신앙생활의 형식은 벗어버리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과 버린 것이 하나님 앞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시는 분이 아니시요, 중심을 보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몸이 하나님 앞에 바쳐지기 전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쳐지기를 원하고, 목숨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기 전에 마음과 뜻과 성품이 하나님 앞에 바쳐지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주님 자신 때문에 우리들이 주님을 사랑하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며 우리가 그분과의 관계를 한없이 즐거워하고 그 은혜와 사랑 안에 거하는 그것을 말할 수 없는 크고 영광스러운 분깃으로 여기는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것들을 바치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고, 값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심으로 창조의 본래의 의도대로 존재하지 않고, 주님을 거스려서 좋으신 하나님과 대적하며 살아서 창조의 질서를 파괴하고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못하도록 하는데 기여하고 있는 그 인생의 마지막 운명이 너무나 불쌍해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셔서 십자가에 못박아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주님의 백성을 삼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그러한 주님이 놀라운 사랑 때문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향해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또한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들을 주님께 받음으로 말미암아 주를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거기에 계시고 주님이 자신의 존재가 우리에게 기쁨이 되므로 그분을 사랑하고, 좋아하며 그분 안에서 즐거워하는 관계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의 연합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흘러 들어가고,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마음이 우리의 마음속에 흘러 들어와서 우리가 살아가고 싶어하는 삶을 주님이 살아주시고, 주님이 살고 싶어하시는 삶을 우리가 살아드리는 그러한 관계가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고 계십니다.
이럴 수 있는 영적인 상태,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과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관계보다 귀한 것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런 하나님과의 평화와 진정한 사랑 없이 일평생을 살아가는 것보다는 이러한 놀라운 사랑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마음의 강권하심을 늘 받으며 주님 때문에 즐거워하며 오히려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에서 더욱 복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수많은 믿음의 성도들이 남들은 짐승처럼 대충 살아가는 삶을 왜 버리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로 결심하며 자신을 부인하며 그 십자가에 자기를 복종시킨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믿음의 선조들은 안일하고 평탄한 길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협을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주님의 명령에만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고난과 형극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구름과 같은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은 한결같이 이 세상에서 나르네로라 일컬음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까? 그 이유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주님께로부터 오는 그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님의 강권하시는 사랑의 마음이 자신 속에 떠나는 것보다는 이 세상에서 모든 소유를 잃어버리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것보다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것을 오히려 더 즐거워했기 때문입니다. 한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사랑을 잃어버기 보다는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받는 사랑을 상실하는 것을 오히려 더 다행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과의 평화, 그분과의 사랑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그들은 인생의 가는 길에서 끝없이 입을 벌리며 자기가 빠지기를 원하는 수많은 웅덩이를 피해갈 수 있었습니다.
시인과 같이 이런 깊은 수렁에 떨어졌을 때에는 그들은 예외 없이 이전에 이러한 깊은 데 떨어지기 전에 하나님과 누렸던 그 말할 수 없는 감격,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부어지는 그 신비롭고 거룩한 사랑의 기억 때문에 그들은 시인처럼 통곡하며 울부짖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지금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내가 주님의 사랑을 받고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고, 그분의 마음이 내 마음에 부어지고, 내가 마음을 열어 기도할 때 그 마음이 그분의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이 하나님과의 화목한 사랑의 관계하나면, 다른 모든 것은 아무래도 관계없다”는 고백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이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이 말할 수 없는 이 거룩한 환희, 그것만 내게 있다면 세상에 있는 모든 소유를 잃어버리고 나를 사랑하던 사람들이 모두 나를 떠나도 나는 즐거울 수 있으며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라는 고백이 여러분들에게 없으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분의 자녀는 그분을 즐거워하는 사람이고, 그분의 사랑을 받는 자녀는 그분의 사랑에 한없이 인생의 가치를 두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찾아오셨는가를 보면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죄 가운데 빠져서 소망없게 된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이 나쁜 일을 행하셔서 우리를 죄 가운데 빠뜨리시고 시험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도록 만드셨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죄의 길을 택하고,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사는 것보다 죄 가운데 사는 것이 더 즐거울 것이라는 거짓된 확신과 유혹에 빠져서 주님의 그 사랑을 버리고 그릇된 길로 걸어갔고, 그래서 우리는 죄 가운데 살면서 주님의 이름을 모욕했고 깊은 데 떨어진 영혼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영혼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으로 오늘도 찾아오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 신기하게도 여러분들이 어쩌면 이 시리즈는 나를 위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다라고 굳게 믿는 지체들이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지체들은 사실은 그렇지만 그러한 고백을 하기를 주저하는 지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 나같이 쓸데없는 죄인을 구원하신 아버지의 참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안에서 주님과 함께 즐거워하면서 살던 추억 속의 그 사랑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수십 년전의 일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과 몇 달 전의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랑 안에 살 때에 여러분들은 천사와 같았습니다. 세상에 살았지만 이 땅에 있지 아니한 성자와 같은 삶을 살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부어질 때에 몸은 이 세상에 있지만 마음은 하늘나라를 비행하고 있는 천사들과 같았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거룩한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찼고, 주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신령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여러분들의 온 마음을 정결하게 만들었습니다. 주님을 위해 조금밖에 자신을 드리지 못하는 것 때문에 괴로워했고, 여러분들의 진실한 소망은 자신을 불꽃처럼 태워서 자신을 모두 가루처럼 갈아서 주님의 나라를 위한 하늘 아래 밀알과 같이 바치고 싶은 것이 여러분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주를 위해서 당하는 모함이나 혹은 고생이나 고난은 여러분들에게 언제나 눈물 흘리는 기도를 가져왔지만 그것은 언제나 고통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뛰어넘는 하나님이 위로와 주님이 여러분들과 함께 하신다는 놀라운 사랑을 여러분들에게 일깨워주었습니다. 마귀는 여러분들을 쓰러뜨리려고 고통 가운데로 몰아놓고는 했지만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 오히려 주님의 손을 든든히 잡고 헤어 나와 여러분들의 영혼은 더 큰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른 새벽 교회로 옮기는 발걸음은 얼마나 가벼웠습니까? 오늘도 이 새벽의 기도 속에서 주님을 만날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를 찬송하면서 이 교회당에 나오지 않았습니까? 환경이 열악하고 때로는 숨쉬기 힘든 상황 가운데 예배하면서도 주님을 만나는 감격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교회당을 찾았습니다. 주일을 기다렸고, 수요일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기대하며 돌아가는 길에는 하늘의 이슬로 흠뻑 젖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혹은 기도를 드리고 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고 주님의 말씀을 일고 나면, 거룩한 서원을 따라 살기로 한 주를 위한 결심들이 새로워지곤 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심취하고 나면 하늘의 신령한 것들이 세속적인 욕망을 몰아내고 오직 거룩한 성도로서 이 어두운 세상을 빛과 소금으로 살아서 주님을 드러내는 일에 자신을 바치는 것 이외에는 이 세상의 영광이 없는 줄로 알았습니다. 어찌하면 나를 다 드려 좋으신 주님을 섬기고, 나를 깨뜨려 우리를 위해 자기를 찢어 피 흘리신 그리스도를 위해 내 자신을 제물로 드릴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중에 어떤 사람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몰랐습니다. 주님의 이런 놀라운 사랑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이런 사랑이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금보다 귀한 주님을 버렸고, 물러갔으며 깊은데 떨어졌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깊은 데서 느끼고 있는 처절한 영혼의 고통은 주님의 진노를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우리 홀로 느꼈던 것이 아니라 가만히 계신 하나님을 우리 홀로 사랑하다가 우리 홀로 그 사랑의 마음을 접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도 함께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우리의 인생의 모든 것이 되는 것처럼 사랑하고 주님의 마음에 부어지는 것을 한없는 기쁨으로 느꼈던 것처럼 주님도 우리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사랑하셨고, 우리가 깊고 은밀한 기도 속에서 달콤한 대화로 우리의 마음을 주님의 마음에 부을 때 주님도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던 우리가 차갑게 등을 돌리고 주님의 면전에 죄악으로 침뱉고 깊은 데로 떨어져 죄악에 빠졌을 때에 주님의 그 모욕과 고통은 진노를 가져왔고 우리는 그런 놀라운 사랑을 떠난 대가로 시인과 같이 울부짖는 처지에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오늘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한 놀라운 사랑,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의 강권하시는 사랑을 언제나 느낄 수 있는 이 지고의 축복된 상태 속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여러분 주의에 얼마나 되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놀라운 은혜를 여러분들에게 주신 것은 바로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살게 하시려고 여러분들에게 그런 것들을 주셨습니다.
지난날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놀랍게 깨달았던 추억들을 생각하며 교만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미끄러져서 깊은 데 떨어진 여러분에게는 그것이 부끄러움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심령을 찢으며 애통하던 지난날의 진실한 모습 때문에 여러분들은 이제 교만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그랬었지만 지금은 그런 가난하고 처절한 마음으로 물같이 녹는 심령을 가지고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지금 이런 상태에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 그 사랑 안에서 살고 시시때때로 권고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으며 살 수 있다는 이 축복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닫고 한번 여러분들에게 이런 것들을 주셨을 때에 쉼 없이 그것을 빼앗아 가고자 노리는 마귀의 그 악랄한 장난에 놀아나지 말고 그것들을 마음 깊이 간직하며 보화와 같이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을 잃어버리면 마치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하나님 중심으로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인은 시편 72편 3절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그는 이 깊은 데서 지금 하나님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왜 하나님 때문에 괴로워해야 합니까?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누리고, 그분을 사랑하며 살아갈 때는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한없는 위로와 용기가 되지 않습니까?
어느 날 책상에 앉아서 신학대학에 다니던 시절의 책들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있었습니다. 책을 읽어가다 보면은 책 위에 제가 그 옛날에 써놓은 글씨가 보였습니다. 히브리어로 작문을 해서 써놓은 그 글은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였습니다. 넘겨도 넘겨도 몇 장을 넘기면서 계속해서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 그것을 읽는 순간 그때 제 마음이 그대로 전해 옵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의 소원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성실하게 살아서 영혼들에게는 열매가 맺히고 학문적인 진보가 있고, 그 위에 날마다 내 영혼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는 행복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힘을 다해 살아도 하루를 살고 나면 산 삶보다는 살지 못했던 삶이 너무나 많아서 새벽이면 학교에 일찍 도착했는데 그렇게 하나님이 마음을 녹이셨습니다. 그때의 유일한 위로는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를 안단다”. “주님이 나를 알아주신다”. 그것이 유일한 위로요, 희망이었습니다. 영혼을 건지고 구원하는 도구로도 적합하지 않고, 하나님에 관한 많은 학문을 공부해서 사람들을 가르치기에도 적합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서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에도 당치않아 보이지만 그러나 주님이 나를 알고 계신 다는 이 사실, 그것이 유일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맘속에 시험을 당할 때와 괴로운 맘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하사 시시때때로 날 도우시네
시시때때로 날 사랑하사 시시 때때로 새 생명주네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시시 때때로 주만 봅니다.
정말로 이러할 때 주님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유일한 위로입니다. 주님이 나를 아시고, 주님이 나를 기억하시며, 이렇게 부족하고 후회밖에 없는 삶을 살아도 주님이 나를 아신다는 사실, 그 하나님이 지금도 이런 애통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눈물을 씻고 나면 새롭게 주님을 위해 살고자하는 거룩한 결심이 솟아나곤 했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은 힘의 원천이며 능력의 원천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힘입어 믿음의 사람들이 원수를 이기기도 했고 불과 칼의 세력을 멸하기도 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그들을 보호하기도 했고, 여호와의 이름 때문에 그들은 죽음의 고비에서 살아났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과 같은 고통스러운 시련 속에서도 여호와의 이름을 기억하며 그 고난 속에서 승리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시편에서 무엇이라 말하고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뒤로 물러나 깊은 데에 빠진 사람들, 주님의 깊은 사랑과 그 마음이 우리 속에 부어지는 그 찬란하고 거룩한 환희의 교통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던 수많은 사람들은 바로 그 깊은 데서 하나님을 생각할 적마다 힘을 얻은 사람들이 아닌, 오히려 불안하고 하나님을 생각하면 근심이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죄가 없었을 때에는 그렇게 그리움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게 만들고,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여호와를 대면하기를 사모했지만 뒤로 물러나 침륜에 빠지고, 죄 가운데 깊은 웅덩이에 떨어지고 나니 이제는 하나님의 이름이 그에게 두려움이 되었고, 하나님의 이름을 생각하면 그는 오히려 근심이 휩싸인 처지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눈 앞에서 사는 것이 이제는 두렵기 짝이 없고, 오히려 주님의 등뒤에서 사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큰 행복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자서전적인 기록에 보면, 젊었을 때의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그가 하나님의 참사랑을 알고 변화받은 다음부터는 자신에게 자연에 대한 놀라운 변화가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하늘이 갈라질 것처럼 진노하고,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면 어린 시절에 어쩔 줄을 몰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깊은 사랑 속에 살아가게 된 후에 자신이 좋아하게 된 날 중의 하루가 바로 이런 날이 이런 날입니다. 멀리 들판에서 우르릉 쾅! 하면서 천둥이 일어나 캄캄한 구름사이로 장엄한 빛이 마치 땅을 찢어 버릴 것처럼 떨어지고, 먼 들판에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때에 그는 마음속에서 한없는 찬송이 솟아납니다.
주 여호와는 광대하시도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한 번 상상력을 발휘해 보십시오. 컴컴한 먹구름이 가득차 있는 대지 위에 선명한 번갯불이 하늘을 가르며 땅을 찢을 것처럼 공중에 번쩍이며 먼 들판에 우뢰와 같은 소리를 내며, 벼락이 떨어지는 그 광경을 보며 이 젊은이는 소리치며 환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사람을 그렇게 바꾸어 놓았습니까? 그분의 사랑 안에 살게 되니 그분이 진노하시는 것처럼 번개와 천둥을 일으키는 광경도 그 진노와 자신은 상관이 없고, 주님이 진노하시는 것과 같은 위대한 엄위로우심을 통해서 당신에게 대항하였던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주님의 위엄을 보이셔서 영광을 얻으실 것을 생각하니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생각할 때에 한없는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이 땅을 향하여 심판하시고자하는 불을 보내시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면전에서 사는 사람들은 담대함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 그분과의 진실한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가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의 이름은 여러분들에게 무엇입니까? 여러분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마음이 불안하고 근심하고 있습니까? “내 삶이 모두 주님 앞에 드러난 다면 어떻게 할까?”하는 두려움 속에 오늘도 여러분들의 인생의 죄악을 한풀 접고 하나님 앞에 나오지는 않았습니까? 그런 마음들이 여러분들을 깨어지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으며, 그런 마음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깨어진 심령이 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아집과 교만과 위선의 벽을 허물지 못하고 하나님보다는 하나님께 돌아가므로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이 세상에 대한 것들에 사로 잡혀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시인과 같이 이런 깊은데서 하나님 때문에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참사랑을 알고, 그 주님의 은혜 아래 살 때에는 그 사람의 인생은 기쁨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가 철저히 파괴되고 시인과 같이 깊은 곳에 빠지고 나면, 하나님의 이름을 생각하는 그 자체가 그에게는 매우 우울한 일입니다. 신앙에 대해 무엇인가 생각해보려고 하고 진지한 설교를 들으려 하면 그에게 더더욱 고통스러운 아픔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생각하면 평정을 찾는 것이 아니라 평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악이 준 평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렇기에 점점 더 하나님 앞에 나타나서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할 기회를 스스로 버리려고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시인은 지금 이 깊은 데서 하나님 때문에 이렇게 괴로워하며 몸부림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그뿐만 아니라 이 깊은 데에 떨어져서 울부짖고 있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처절한 죄책감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커다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맛본 후에 뒤로 물러가서 이렇게 깊은 침륜에 빠지고 웅덩이와 같이 깊은 죄악의 나락에 떨어지게 되었을 때에 즉각 적으로 찾아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셨다는 처절한 버림받은 느낌입니다. 이런 것들은 살아 갈 때에 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 받으려고 노력할 때에 더 많이 느껴집니다. 그냥 살아갈 때에는 덜 느껴지는데 기도하려고 하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는 사실을 철저히 확인하게 됩니다. 말씀 앞에 나아가려고 하면 예전에는 그렇게 말씀을 열면 쏟아지던 거룩한 하나님의 음성이 그치고 그 거룩한 하나님의 음성이 그치는 대신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는 패배와 절망의 죄책감이 그를 완전히 사로잡아 버립니다.
하나님 앞에 주님의 얼굴을 등지고 살아가는 것이 때로는 고통스러워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보고자 애를 쓰지만 이상하게도 그때마다 좌절에 부딪히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때로는 기도에 한번 힘써보고자 특별한 결심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분명히 된다고 말씀했는데 기도하면 확인하고 돌아가는 것은 역시 안된다는 것입니다. 역시 하나님은 내 기도를 안들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처절한 좌절을 맛보고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것에서 무엇인가 얻어보려고 하지만 그러나 어린아이와 같이 순전하고 주님을 따르고자하는 마음으로 들었던 그때 그 말씀의 맛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철저히 범죄해서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신 하나님을 모욕했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을 찾는데도 하나님이 버리셨다고 생각하며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향하여 토라진 마음을 갖게 됩니다. 때로는 무엇인가 교회 일에 뛰어들어서 미친 듯이 자신을 한번 헌신해보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일에 자신을 던져보기도 하지만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 맛보는 평안은 하나님이 주신 평안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고민을 잠시 잊고 있는 데서 오는 마취제와 같은 효과일 뿐입니다.
그러면서 그의 마음속에서는 한편으로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달아가지만 또 한편으로는 내가 죄를 좀 지었다고 해서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혔는데 이렇게 나를 외면하시고 거절하실 수 있을까하는 하나님을 향한 섭섭한 마음이 한구석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결국 후자의 마음의 지배가 점점 커지게 되면 이제는 자신이 하던 기도도 치우고 말씀을 통해 해결을 받으려고 했던 기대도 집어치우고 무엇인가 헌신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보려고 했던 모든 기존의 시도들을 뒤집어 버리면서 하나님을 향해 더욱 강팍해진 마음이 되어서 교회를 떠나거나 신앙의 형식조차 집어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빠짐없이 새벽기도회에 나와 주 앞에 매어 달리던 사람들이 기도가 게을러지고 주일도 빠지고 심지어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의무조차도 망각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 절망 속에서 두 가지 사실을 터득하게 됩니다. 하나는 내가 이렇게 몸부림치고도 안되는데 내버려두어 본다고 해서 - 하나님을 거스려 살아본다고 해서 - 더 나빠질 것이 있겠는가하는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자신이 흘러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고 그 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아예 스스로 포기했을 때에는 잠시는 편안한 느낌을 받지만, 잠시 후에는 더 고통스러운 하나님의 진노가 자신의 영혼을 누르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시인은 88편 7절에서 “주의 노가 심히 나를 누르오니 내가 눈을 들어 볼 수가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의 진노가 그를 심히 누르고 있는 사실,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관계를 회복해야 겠다는 몸부림을 칠 때는 거절감만 느껴지는데 포기하고 제갈길로 가고 나면, 이번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를 누르는 중압감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정신 이상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잠을 자다가 가위에 눌려서 몸부림치다 깨어난다든지, 아니면 선명하게 자신의 영혼을 위협하고 있는 귀신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든지, 아니면 정신분열증적인 증세를 보여서 헛것이 보이거나 혹은 평소에 자신이 행할 수 없는 비명소리를 지르는 일을 행하면서 자신의 영혼이 무엇인가 정상적인 상태에서 이탈했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는 정도에까지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할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도 여러분들을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만약에 이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고 이전에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 주셨던 그 놀라운 사랑을 잃어버리고 깊은 데에 떨어져서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처량하게 울고 잇는 신세가 되었다면 최소한 더 나빠질 것이 무엇일까하고 막살아 보겠다는 지경으로 가지는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거절하시면 언제까지 여러분들을 거절하시겠습니까? 주님이 여러분들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면 언제까지 듣지 아니하시겠습니까?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위해 피흘린 그분이 이 시간에도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거룩한 성부 하나님께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간구하고 계시는 데 하나님이 이 시간에 여러분들을 버린 것 같으면, 얼마나 오랫동안 버려두시겠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주님의 성품을 새롭게 알아야 합니다. 자식을 길러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데 도움이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잘못했기 때문에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 종아리에 피가 나도록 때려서 추운 밖에 종아리를 겉은 채 내쳐서 손을 높이 들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 있는 자녀들을 봅니다. 자녀들을 그렇게 내보내 놓고 엄동설한에 자신은 전기 장판을 깔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아침까지 잔다면 그가 아비요, 어미이겠습니까? 그 사람은 짐승입니다. 주님이 찢으실 때가 있지만, 싸매실 때가 있습니다. 버리실 때가 있지만, 다시 부르실 때가 있고, 그분이 치셨으면, 위로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오랜 날을 주님의 사랑을 등지고 정죄하며 그렇게 철저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능욕하고, 그토록 오랜 세월을 죄 가운데 살았으면서도 주님은 참으셨는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주 앞에 나아가 부르짖을 때에 몇 번이나 절망감을 느꼈습니까? 그 거절감 속에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정결케 하시고자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주께서 나를 버리실 지라도 나를 바랄 수밖에 없으며, 주께서 나를 모르신다고 하여도 나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주님의 자녀입니다.” 그런 고백 없이 여러분들이 그런 깊은 곳에서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헤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런 기적과 같은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깊은 데서 울부짖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처절하게 버림받았다는 거절감을 느끼게 될 때에 이것이 오랫동안 하나님을 떠나 살던 우리의 패역한 죄에서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애들을 많이 때리고 야단친 다음에는 반드시 혼자 있게 두어야 합니다.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때에 역설적으로 이런 생각을 갖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몸부림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애를 쓰는 데도 이렇게 침묵하시고 나를 거절하시는 이 주님의 마음을 보면 내가 지은 죄가 얼마나 큰가? 내가 지금 지난 죄를 마음 아파하는 것보다도 더 큰마음 아파함을 우리 주님이 겪으시지 않으셨던가? 하나님, 제가 이렇게 찾아도 주님이 저를 모르는 척, 버리신 것처럼 대하시는 것이 부당한 것이 아니라, 마땅합니다. 그러나 주님, 주께서 저를 향해 긍휼을 베푸시고, 진노의 마음을 누르실 때까지 내가 주를 바라겠으며, 주를 떠나지 않겠으며, 주께만 매달리겠사오니, 오! 주여, 저의 날들을 길게 마옵소서!”하고 하나님 앞에 매어 달려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지금은 잃어버렸지만 주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셔서 지금 이렇게 깊은 데 떨어진 자리에서 주님과의 관계를 포기할 수 없도록 만드셨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고 깊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껏 주님의 살아 계심을 경험하며 살아왔던 그 주님과의 작별할 수 없는 관계를 추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주께 버림받은 것 같고 절망적인 거절감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지만, 그 옛날 주님과 사랑을 나눌 때 주께서 여러분들에게 오셔서 주님의 자녀 삼으시고 넘어지고 쓰러지는 과정들을 일으켜 세우셔서 이곳에 서서 주님을 찬송하고 주님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고백하게 만드셨는지를 생각하고 회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회상 속에서 즉각적으로 지금 우리가 주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되는 이 느낌이 정말로 느낌에 지나지 않으며, 내가 이렇게 주님을 떠나지 아니하고 이 깊은 데서라도 주님을 향해 부르짖으면 주님이 반드시 나를 돌아보실 것이며, 또 나를 권고하고 오늘의 이 진노를 긍휼과 사랑으로 바꾸실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믿게 됩니다. 그러면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불순종해서 한차례 얻어맞고, 추운 겨울에 종아리를 걷고 두 손을 높이 들고 모진 바람이 부는 처마 끝에 서있는 일은 정말로 고통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고통스러워서 스스로 종아리에 바지를 내리고, 신발을 신고 어두운 밤길을 걸어 가출을 한다면 거기에는 더 깊은 고통과 버림받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의 그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미 그 사랑에 붙들린 바 되었고, 주님의 그 사랑의 추적이 여러분들의 인생을 따라오고 있습니다. 변화되고 하나님의 그 사랑의 관계로 돌아오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영혼에도 안식이 없고, 하나님의 마음에도 안식이 없습니다. 그들을 돌이키고자 하고, 여러분들을 다시 부르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열심히 여러분들을 때로는 징계하기도 하며, 버림받은 것처럼 만드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버림받은 느낌은 참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이 침묵하심을 통해서 정결하게 하시며, 결국은 당신께로 부르실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주께서 나를 버리셔도 나는 주를 바랄 수밖에 없나이다”라는 고백과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매달려 기도하십시오. 안되도 하십시오. 또 안되도 하십시오. 매일 매일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돌아가십시오. 그러나 언젠가는 주께서 내게 긍휼을 베푸시고, 주의 맘에서 나를 향한 진노가 떠나 마침내 내가 한때 주님을 향해 마음이 녹았던 것처럼, 주님도 나를 향해 그 마음을 푸시고 내게 긍휼을 베푸심으로 나를 모든 진리와 은혜 가운데 다시 불러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보십시오. 그런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어 달릴 때, 일년이 갈까요, 이년이 갈까요. 정결해지기를 사모하며,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서서 버림받은 것같은 기분을 느끼는 것이 세상 속에서 환영을 받는 것보다는 훨씬 희망이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결국, 이렇게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절망 가운데 이 깊은데서 부르짖고 있는 시인은 결국은 이 깊은 데서 모든 영적인 힘을 다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주님을 찬양하던 그 혀와 입술을 굳어 버렸고, 하나님을 향하여 연주하던 아름다운 악기의 줄은 끊어져 버렸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너무나 좋아서 온몸으로 찬양하던 그의 육신은 정욕을 따라 흐느적거리는 고깃덩이로 변했고, 말씀을 펼 때마다 들려오던 주님의 기이하고 달콤한 음성은 사라졌습니다.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고, 고난과 어려움이 올 때에 담대함을 가지고 내가 주의 이름으로 이것들을 이기고, 내가 주의 이름으로 이것들을 꺾으리라는 담대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위기 속에서 “주께서 나를 아시오니, 주의 종이 주의 이름을 의지하여 승리를 얻겠나이다”라고 하는 담대함과 용기를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의 영혼은 매우 심약해졌고, 어떤 힘도 없는 가련한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죄와 더불어 싸울 능력도 없고, 악인줄 알면서도 그 악에 항거할 수 있는 힘조차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에 힘을 주던 여호와의 이름은 이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고, 그의 희망은 이제 여호와 앞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등뒤에서 사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셔서,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기 위해서 주님이 어떠한 희생의 대가를 지불하시고 우리의 길이 열릴 때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얼마나 기뻐하셨는데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삶이 고작 그 정도의 삶이란 말입니까?
몸은 이 땅에 살고 있으나 하늘의 왕자로서 이상에 주의 거룩한 통치에 참여하고, 악한 세력들을 제압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갈 거룩한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은 우리들이 그렇게 살 수 있는 모든 삶의 자원을 송두리째 죄악을 향하여 반납하고, 이 깊은 데서 자신이 한때 그렇게 사랑하고 헌신하며 목메어 하던 그 하나님께 버림받은 마음이 되어서 죄 가운데를 헤매고 있는 그 영혼의 처지는 얼마나 있을 수 없는 일인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빛 가운데 살도록 부름 받았고, 절망과 어두움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 안에 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가난하고 핍절한 삶, 버림받은 것같은 절망적인 삶 속에서 살도록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풍성한 은혜와 진리 가운데서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의 영혼의 상태를 헤아릴 수 있는 신령하고 지혜로운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하고 우리가 어떤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으며 여기까지 걸어왔는가를 돌아보고, 주님 앞에 우리의 마음과 시련, 우리의 영혼이 어떠한 상태로 비칠 가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시인과 같이 이렇게 뒤로 물러가서 영혼의 모든 힘과, 기쁨과 영적인 생명을 잃어버리고 죽은 자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에게는 없기를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이렇게 뒤로 물러가서 깊은 침체에 떨어져 있다면, 여러분들은 이 설교가 모두 끝나기 전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 깊은 곳에서 벗어 나와야 합니다. 감각을 따라서 살지 말고, 말씀을 따라서 그 깊은 데서 시인처럼 주 앞에 부르짖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결국은 우리에게 확증시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떠나 뒤로 물러나 깊은 죄악에 빠지게 되었을 때조차도 “주의 진노는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영원하며,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 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라”는 시인의 고백이 진리임을 깨닫게 되는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3.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주가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내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시130:2)
오늘 이 시간에는 2절의 말씀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여기서는 깊은 데에 떨어진 영혼이 하나님에게 간절히 부르짖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귀를 기울이시고 내 음성을 들어달라고 하는 간절한 탄원으로 아버지 앞에 기도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범죄와 하나님을 거스르는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영혼의 깊은 어두움과 웅덩이와 같은 침체 속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에 결국은 그 곳에서 마지막 희망의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희망이시고 그 하나님을 바라는 것만이 신자의 참된 행복이라는 것을 그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그 은혜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린 다음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신자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악으로 들어서게 되는 것은 환상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이런 삶보다도 훨씬 더 달콤하고 아름다운 행복이 주님을 떠남으로 가능할 것이라는 환상입니다.
그 환상은 시인도 그랬고 우리도 그렇고 주님을 멀리 떠나서 멀리 떠나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는 깊은 웅덩이와 같은 침체에 빠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녀가 되었다할지라도 구원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저절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도록 내버려두시지를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가 된 것과 그리고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삶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을 때에 죄인인 우리들을 하나님이 의롭다고 칭해주셔서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불화가 무너지고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서 정죄함이 없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구원받은 자녀들에게 또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불순종하면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화목의 길을 열어놓으셨는데 삶 속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일하셨을까? 한 번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셨으면 제대로 확실히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열어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실제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하나님과의 화해를 누리며 살도록 만들어 주셔야 되지 않았는가? 그것은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지만 핵심적으로 보면 이런 설명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한 번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불신자나 다름없이 비참한 존재들입니다. 여러분들은 결코 행복을 느끼지 못할 것이고 만약에 구원을 받고도 주님 중심으로 살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아니라 우리의 삶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지막 때에 구원받은 영혼을 추수하는 것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날까지 이 세상에 어떻게 주님을 경외하며 사는가 하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관심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을 불만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이러한 환상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하더라도 가치관이 거듭나고 삶 전체의 방향이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은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울하고 불안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마땅히 살아가야 할 삶과 그가 실제로 살아가는 삶이 너무나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주안에서 행복한 사람들은 이것이 환상이라는 사실을 빨리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이미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택받은 사람이고 그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 내 인생의 유일한 대안은 하나님 사랑하고 그분을 섬기며 그 생명 안에서 사는 것이다 라고 입장을 정리하고 다른 모든 삶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능성이 없는 삶이라고 접어버리는 체념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맛보던 즐거움과 그리고 이전에 주님을 모를 때에 느끼던 이 세상에서의 만족들을 계속해서 찾으려하니 신앙 생활에 갈등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만 순종하고 주님만 의지하며 살아가는 그것보다는 더 행복한 삶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환상과 착각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기의 인생을 향해서 훨씬 더 좋은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결단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자기 인생을 보다 더 잘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절대 하나님께 승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승복하고 주님께 항복한 사람은 주님을 자기를 향해서 가지고 계신 계획이 자기가 가진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주님이 자기를 보호하고 지키시는 것이 자신이 지키는 것보다 훨씬 더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고 믿고 하나님이 내게 주시고자하는 것이 사실은 내가 갖고 싶어하는 것보다도 내 인생에 있어서 더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삶입니다. 그런 사람들만이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는 자리에서 떠나지 않아 이같은 수렁에 빠지는 것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는 선택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주님을 경외하고 주 뜻대로 살 것이냐 아니면 주님께 불순종하고 주님과 대적하며 내 뜻대로 살 것이냐 십자가를 자랑할 것이냐 육체를 자랑할 것이냐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 것이냐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 것이냐 옛 사람의 길을 걸어갈 것이냐 새 사람의 본분을 다할 것이냐 그래서 우리의 신앙 생활에는 이런 중간지대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동안에는 잘 깨닫지 못합니다. 그분과 평화를 누리고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는 이 하나님과의 평화가 얼마나 값진 것이고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과의 이 평화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신앙이 떨어지고 은혜가 식어지면서 환상은 점점 커지고 주님 안에 살아야겠다는 신앙적인 각오는 점점 약화되기 시작합니다. 유혹에 쉽게 굴복하고 죄가 들어 와서 자신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서슴없이 불순종의 길을 택하고 자기의 욕심,소욕에 옳은 대로 잠시 세상 즐거움을 위해 사는 대가로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참 생명과 거룩한 은혜를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그 깊은 데서 오늘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울부짖으며 하나님 앞에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미 뒤로 물러가서 침륜에 빠지는 사람들 하나님을 향해서 거룩한 삶을 살기를 포기한 대가로 깊은 웅덩이와 같은 침체에 빠진 사람이 마지막 도달하는 결론이 그 속에서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가 쫓아갔던 그 환상이 얼마나 헛된 것이었는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미 답은 명백히 나와 있는데도 사람들은 서슴없이 그 일을 계속 행합니다. 그래서 그 곤고함과 그 고통을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 거기서 몸부림치고 울고 벗어나서는 평안을 누리게 되면 다시 육체대로 살아가던 옛 삶을 그리워하게 되고 깊은 곳에서 통곡하고 울부짖었던 고통은 속히 잊어버리고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며 살던 그 삶 속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이 세상의 맛과 육체의 유혹을 만족시켰던 옛 삶의 즐거움들을 다시 생각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이런 식으로 옛 삶을 돌아보는데 있어서 공정성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옛날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깊은 데에 빠져서 고통할 때 물론 거기에서도 즐거움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데서 오는 깊은 영혼의 고통 그리고 거기에서 그렇게 부르짖고 울부짖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회복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누군지 그렇게 깊은 죄에 빠져서, 웅덩이와 같은 침체에 빠졌을 때 그것을 통회하고 아파하는 고통스런 몸부림 없이는 저절로 회복되는 경우라고는 거의 없습니다.
어떻게 죄값을 치르지 않고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겠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본분을 버리고 육체를 쫓아서 살아서 거기에서 깊은 것에 떨어졌는데 어떻게 탄식과 눈물이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몸부림치며 마음 아파했기 때문에 그 속에서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 남아 있는데 그것을 버리고 주님을 붙들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올바를 하나님과의 관계에 냉기가 돌기 시작하면서 옛날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즐거움이 있었고 그 즐거움과는 비교될 수 없는 영혼의 고통이 있었는데 그 고통에 대한 기억은 잊어버리고 거기에서 맛보았던 즐거움 거기에서 맛보았던 육체의 만족 등을 자꾸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한 번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빠지는 것입니다.
주님 손을 붙들고 깊은 웅덩이와 같은 침체에서 올라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또 다른 웅덩이에 빠지기 위한 준비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은혜 받은 우리들이 볼 때에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데 완전한 하나님이 그 성도의 삶을 볼 때에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오죽했으면 이스라엘을 향해서 주님이 소나 나귀에 비유하면서 그런 짐승들도 주님을 알아보는데 너희는 어떻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상한 곳이 없도록 그렇게 고난을 당하면서도 누가 너희들은 주인인지를 모르냐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널리 퍼지고 있는 아주 위험한 사상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뒤로 물러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에게 거룩한 삶을 기대하는 것은 마치 도랑물에서 생수가 나오기를 기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뒤로 물러가는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매일 상기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비유를 하나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벼랑 위에 박힌 말뚝에 묶여 있다고 합시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바로 이런 이러한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서서 나무에 묶이고 누도 뜨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벼랑은 흙덩이로 된 벼랑입니다.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면서 한 덩어리씩 흙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점점 무너지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하고 천둥소리에 자꾸 흙더미들이 부어져 나가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깎아지른 새까만 절벽이 여러분의 눈앞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점점 벼랑이 깎여져 내려서 드디어 여러분의 발끝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아마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는 치거나 나무에 묶여 있는 밧줄을 풀려고 몸부림칠 것입니다. 아니면 나무 채 안고 뒤로 넘어지기라도 할 것입니다. 그러면 조금 더 살 수 있으니까요
신앙 생활이 뒤로 물러가는 것을 그렇게 두려워하고 무서워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물과 명예에 대해서는 한없는 집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신앙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 것을 보면 참 기묘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직 작은 소유 하나를 놓고도 분노하는 사람들이 신앙을 다 잃어버리고 자기가 뒤로 물러갔는데도 전혀 대책을 세우지 않고 무방비 상태로 그렇게 자기 자신을 헤프게 세상을 향해 개방하는 사람들은 일평생 신앙 생활을 해도 계속해서 올라가고 내려가는 일을 반복할 뿐입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우리는 거룩한 삶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짐승과 같은 실패의 반복일 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뒤로 물러가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는 고통을 느낄 것이며 그리고 깊이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어 가는 과정에서는 세상의 즐거움을 잃어버리는 늘 자신이 무엇인가 손해 본다는 생각에 빠져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아무 것도 기대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인의 실패를 통해서 많이 배우는 것입니다. 깊은 데서 그렇게 처절하게 울부짖게 되었는데 결국은 마지막으로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것은 귀를 기울이시고 내 호소를 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성경에는 성실함을 가지고 내게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그런 의미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깊은 웅덩이에 빠져서 그 빠지는 동안에는 잠시 세상의 즐거움과 만족이 있었지만은 그러나 결국은 거기에서 모든 즐거움은 끝나고 자신의 영혼을 얽매는 죄의 끔찍한 고통이 현실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할 때에 그때 그는 거기에서 처절하게 울부짖는 광경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잊었던 한 이름으로 자신의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 우리 주님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서 결국은 그 모든 환상들이 깨지고 나서 자신의 소망이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두 가지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그 죄에 대한 사랑 때문이고 또 하나는 그 죄악된 자리에서 벗어날 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지 모르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죄는 마치 우리 발에 잘 맞는 신발과 같아서 신으면 신을수록 편하고 벗어버리고 다른 신을 신으면 다시 그 신을 신고 싶은 그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는 죄 가운데에서 결국 마지막 겨냥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두 잃어버리고 그 분과의 친밀함을 모두 잃어버리고 그리고 고통을 더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실 뿐 아니라 결국은 거기에서 하나님의 곁을 떠나서 자신의 소욕대로 사는 것에 만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기대가 헛된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마지막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동물이나 혹은 곤충 같은 것들이 멀리 떠났다가도 본능에 의해서 자기의 거처로 돌아오는 것, 연어가 북태평양까지 갔다가 다시 자기가 알을 깨었던 그 하천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오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귀소 본능이라고 부릅니다.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결국은 이런 본능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그런 환상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삶이 내게 더 큰 만족을 줄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서 마지막에 얻게 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나누어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나서 오랫동안 방탕한 삶을 경험한 후에 눈물 흘리고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 왔을 때에 그가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먼 나라 그가 그토록 꿈꾸고 그리워하던 자유와 희망이 있는 나라 그 세상이 집을 나간 탕자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성경은 거듭해서 우리에게 가리키는 것이 그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떠나면 어떤 일들이 있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거기에는 죽음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고 주님을 진실하게 믿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품을 떠났을 때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어두움과 죽음과 죄와 절망만 남는 것입니다. 이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렸을 때에 깊은 타락으로 흐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오늘 내가 하나님을 찾는 삶을 게을리 할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고정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풀어져 버릴 때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순간의 어두움과 영혼의 그 깊은 어두움을 보면서 우리가 만약에 오랫동안 하나님을 버리고 위로부터 멀어지면 어떤 철저한 어두움과 커다란 죄악이 우리를 덮고 에워쌀 것인가 하는 것들에 대한 맛을 보지 않습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는 천국을 맛보는 동시에 주님 없는 지옥을 맛봅니다. 은혜 안에 살고 주님을 기뻐할 때 우리는 비록 우리의 몸이 죄 많은 이 세상에 살지만 우리가 정말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깊이 경험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 안에 살지 못하고 우리의 마음이 욕망과 육체의 욕심으로 더럽혀질 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지옥과 같은 상태를 경험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경험도 하나님을 떠난 마지막 결과가 얼마나 깊은 어두움이고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인지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신앙생활을 터득하지 못하고 욕망에 시달리면서 인생에 대해 쓸데없는 기대를 걸거나 혹은 쓸데없는 이유 때문에 절망하는 일들을 얼마나 자주 겪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결국은 어떤 식으로 하나님을 떠나고 어떤 식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든 간에 마지막으로 돌아올 곳은 한 분 하나님밖에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탕자가 재산을 가지고 아버지의 곁을 떠날 때에 그는 다시는 돌아올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아마 자기는 어디든지 갈 수 있고 그리고 어디든지 가서 생활할 수 있고 행복과 만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갈 수 있는 것은 많이 있습니다. 떠날 수 있는 곳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올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돌아올 수 있는 곳은 하나님의 품밖에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시인은 이 깊은 곳에서 이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정말 복이 있는 사람들은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상에 대한 모든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 똑같이 세상에 있으나 l제는 옛날에 가졌던 꿈을 버린 삶입니다. 똑같이 세상에 살아서 직업에 종사하고 여러 가지 일들을 위해서 힘쓰고 애쓰며 살아가지만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어디로 가겠습니까? 어디로 가서 하나님의 품에서 맛볼 수 있었던 선한 것들을 누릴 수 있겠는지 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가끔 가정의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로 가출한 청소년들에게 저는 그런 권면을 합니다. 너의 입장을 들으니 정말 견디기 힘든 상황이구나 내가 너라도 가출을 했을 수 있게다. 그러나 너의 그 가정이 견디기 어렵다면 너는 세상에 나가는 즉시 그래도 너의 가정이 가장 견디기 쉽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주님 안에 거하고 순종하며 사는 길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희생을 요구하고 있든 우리는 매일 하나님 안에 살기 위해서 자신이 미끄러질까 가슴 조이는 경건한 두려움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매일 매일 우리의 행동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살피지 않으면 언제 악한 자가 와서 우리의 마음에 가로등을 끌지 모릅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을 매일 매일 성찰하고 살피는 엄격한 감시에 우리자신을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너무나 무겁고 어떤 때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운명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떠난 시인처럼 깊은 곳에 떨어져서 죄와 사망의 법에 뒤엉켜서 몸부림치는 이 고통에 비하면 그 경건한 의무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 그대로 내 멍에는 쉽고 가벼우니라고 하신 그 멍에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너희는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다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거저 그런 은혜를 주겠다고 말씀하지 않고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며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볍고 쉽기는 하지만 역시 멍에는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지어주시는 그 온유하고 가벼운 신앙 생활의 멍에를 매기를 싫어하고 그것이 너무나 부담스럽고 내 인생을 하나님 안에 속박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것보다 천 배나 더 무거운 죄의 짐을 삼는 것밖에는 대안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밑에서 배우며 그 가벼운 멍에를 매고 날마다 천성을 향하여 올라가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보다 천 배나 무거운 죄의 멍에를 매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불붙는 하나님의 심판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잠시 환상이고 그 기쁨과 쾌락의 때가 지나고 나면 결국은 깊은 나락에 떨어지는 것 같은 고독과 허무에 몸부림쳐야하는 인간의 참된 모습을 우리들이 직시한다면 우리가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이것이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과 화해를 유지하기 위해서 치르는 인내가 결코 고통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 인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될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도 종종 쾌락 속에 자신을 집어 던져 버려서 완전히 망가진 사람들을 가끔 만납니다. 사람들은 흔히 그렇게 쾌락 속에 자기를 던져서 망가진 사람들을 보면서 가끔 동정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은 본인들로 어찌할 수 없는 일종의 질병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렇게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거룩한 삶의 참 맛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점 점 더 그 거룩한 삶을 사모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교제의 기쁨과 달콤함이 무엇인지를 일단 맛을 보고 나면 마치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듯이 아편에 걸린 삶처럼 더 깊은 하나님과의 고통 그리고 보다 더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갈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이 거룩한 갈망은 거룩한 갈망을 또다시 창조하는 것처럼 쾌락을 쫓아가는 삶은 또 다른 갈증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죄를 자꾸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뒤로 물러가는 삶을 살고 범죄하게 되면 그 때 범죄에서 오는 즐거움이 잠시 하나님과의 관계의 불편에서 오는 영혼의 고통을 잠시 잊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므로 죄가 더 쌓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갈등은 깊어지고 그래서 그것을 잊어버리기 위해서는 좀 더 적극적인 죄가 필요하고 더 커다란 쾌락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점점 노에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끔찍한 죄에 빠져서 완전히 파산해 버리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보호가 없으면 정말 순식간에 그렇게 망가진 사람으로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죽임의 교리를 여러분에게 설교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온 순간의 유혹은 항상 가장 끔찍하고 가장 커다란 죄를 겨냥하고 있다는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죄는 마지막에 그 사람을 죽여 버리는 죄로 여러분들을 몰고 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적절히 보호하시고 또 여러 가지 제도적인 사회적인 여건들이 여러분의 욕망을 억제하고 있으니까 거기까지 안 가는 것이지 할 수만 있고 죄에서 모두 풀려 버리면 그러면 결국은 죄는 거기까지 가게 됩니다. 누군가를 보면서 느끼는 순간의 음욕은 궁극적으로는 간음이라는 죄를 향해서 치달아 가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여건이 막고 있으니까 못 가는 것이지 길만 터주면 갑니다. 그래서 신자의 참된 믿음은 하나님 안에서 사는 참된 기쁨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온천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유혹의 탈을 쓰고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많은 우리를 범죄하고 뒤로 물러가게 하는 그런 요소들을 직시하면서 그 뒤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그런 파멸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참된 소망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 때든지 아니면 뒤로 물러가서 깊은 침체에 떨어졌을 때든지 신자의 최종적인 소망은 결국은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이것을 체험적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깊은 침체에 떨어져서 그 깊은 곳에서 울부짖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잃어버린 그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마지막에 내린 결론은 하나님만이 내 인생에 돌아가야 할 유일한 귀로라고 하는 결론을 내리기 전에 아마 그는 그 하나님과 떨어져 버린 고통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 보았을 것입니다. 제사도 지냈을 것이고 아니면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생각나게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기를 벗어나게 해 보려고 몸부림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어디로 가겠습니까?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에서 여호와의 신이 나를 붙들리라고 한 시인의 고백과 같이 바다 끝에 가도 땅끝에까지 가도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외면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길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저는 오늘 두 가지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아직까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들은 그 평화를 굳게 붙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는 일이 평화하고 그 화목을 누리고 있으면 여러분들은 다른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여러분 자신의 내면에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어도 사실은 하나님과 화목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하나님과의 그런 평화를 잃어버린 가운데 있다면 여러분들은 굳이 애써서 그 깊은 데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가운데서 오는 고통을 잊고 또 그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한 어떤 대안을 마련하려고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데서 오는 그 깊은 고통과 영혼의 불안과 절망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서 이 시인과 같이 여러분들이 돌아가야 할 곳이 바로 여기밖에 없다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버리고 니느웨로 가는 대신 다시스로 가다가 커다란 물고기 속에서 그 깊은 밤을 지내야 했던 요나가 울부짖었던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버리실지라도 내가 주의 성전을 사모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그 고백이 바로 오늘 시인이 말하고 있는 이 고백과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지막으로 돌아가야 할 곳은 바로 하나님뿐입니다. 여러분들이 잠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외면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묻어둘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결국은 여러분들은 인생의 어느 길을 지나든지 환난과 시련 속에서 들려 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회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소유하고 어떤 일들을 하고 또 어떤 지위에서 살아가는 가 하는 것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들이 이렇게 단순한 소망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 나아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잃어버리고 멀리 떠났던 사람들 주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리고 처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상실한 채 자기의 죄와 불순종으로 어두움에 빠진 그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여러분들의 인생에 유일한 희망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내게 있어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그러한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는 여러분들의 인생은 결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인생은 될 수 없으며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는 인생의 불안과 고통과 깊은 데서 맛보는 절망감은 극복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깊은 영혼의 침체에서 벗어나서 거룩한 빛이 깃드는 영적인 행복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그는 먼저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화해를 등지고 살았던 그 깊은 곳에 빠졌던 나날들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깊이 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망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깊이 가책을 느끼며 자기의 잘못을 고하지 않으면 안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도 이렇게 깊은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하나님 당신 품으로 부르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들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아무리 부르셔도 우리들이 응답하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어두움 속에서 우리를 건져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여기에 있노라고 어두움 속에서 손드는 사람의 손을 붙잡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인이 경험하고 있는 이 사실을 깊은 ( ?)를 가지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은 시인의 독특한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저버리고 하나님과의 화해를 잃어버린 모든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공통된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깊은 곳에 떨어지기 전에 우리는 이 깊은 곳에 떨어질 수 있는 위험을 늘 방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유일한 대안이 소망이 오로지 하나님께만 있다고 하는 소망을 두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좋아하고 기뻐하시는 일이 나에게도 말할 수 없이 기쁨이 되고 하나님이 가슴 아파하고 안타까워하시는 일이 나에게도 슬픈 일이 되는 삶에 대한 관점이 일치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그렇게 쉽게 뒤로 물러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일 우리의 삶 전체가 마치 하나님을 위해서 화살을 쏘는 것과 같은 그러한 마음으로 매일 매일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과녁을 앞에 놓고 활을 겨누는 궁사들이 날아가는 새 곁에서 펄럭이는 깃발 그런 것을 보지 않습니다. 그들이 응시하는 것은 과녁 그 중에서도 가장 가운데 있는 그 점 하나에 마음이 꽂힙니다. 그리고 이따금 화살이 다른 곳에 꽂히긴 하지만 그러나 원래 화살을 날려보냈던 그 궁사들의 마음속에는 그 화살이 그 가운데 있는 지점에 꽂히기를 소망하면서 쏜 곳입니다.
우리는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살려고 몸부림을 쳤는데 결국은 다른 곳에 꽂힌 적이 있습니다. 정말 주님을 위해서 잘 해보고 싶었는데 잘 안될 적이 있습니다. 그 때는 우리도 우리가 밉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끔 하는 기도가 “ 하나님 잘할께요 하나님 저도 잘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의 삶을 시위를 겨누는 마음으로 그래 오늘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루를 주셨지 내 인생의 최대의 가치는 거룩한 그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의 나의 삶이여 제발 저 붉은 과녁에 주님이 나를 향해 맞추기를 원하는 그 지점에 날아가라 그리고 하루를 당길 수 있어야 합니다. 저녁에 돌아보면서 붉은 과녁의 그 지점에 드디어 맞았을 때에는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의 나의 하루를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며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나 같은 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시니 좋으신 주님 찬송합니다. 하면서 감사로 하루의 문을 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활을 쏘았는데 빗나갔습니다.10점까지에 마지 못하고 8점짜리 하얀 과녁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고백합니다. 주님은 내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셨지만 오늘 하루도 하나님 이렇게 밖에 못살았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못산 그 2점을 하나님 앞에 참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나에게 모든 것을 주셨는데 내가 이 일을 위한 의무를 바로 이행하지 못하고 혹은 지식이 없고 혹은 결단이 부족하고 혹은 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왔구나 그리고 하루를 깊은 뉘우침 속에서 문을 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새로운 화살을 하나 더 주십시오. 이 번에는 다시 한 번 정확하게 겨누면서 주님의 마음에 맞는 그런 하루가 되도록 한 번 해보겠습니다.
신자의 삶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매일 매일 자기를 부인하고 실패했을 때에 참회해서 용서받고 그리고 주께서 가르쳐 주셨을 때에 고치면서 매일 살아가다가 임종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아예 과녁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공중을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며 날개가 한 번 맞고 추락하는 꿈을 꾸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늘 높이 올라갔다 자기 머리로 떨어졌습니다. 다릅니다. 과녁을 향해 쏘는 활과 자기가 쏘고 싶은 대로 정신변자가 덩크슛 하듯이 날뛰면서 아무 데나 대고 쏘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내 삶이 그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사는지 오늘 하루의 삶이 내가 뒤로 물러간 삶인지 거룩한 삶의 진보가 있었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은 바로 정신병자가 하늘을 향해 정신없이 화살을 쏘아 날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매주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이 말씀을 듣는 것말고 이처럼 여러분들의 마음을 잘 단속하며 매일 매일 하루가 주어질 때마다 자신의 온 하루를 주님의 뜻이라는 그 과녁을 향해 날리는 두렵고 경건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여러분들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정도도 놀라운 진보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물러난 깊은 침체 속에서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마지막 도달해야할 지점이 우리 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깊은 것에 떨어지지 않고도 이 사실을 가슴 깊이 인식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빨리 날아갈지라도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을 향해 날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며 힘쓰고 애쓰며 땀흘려 수고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의 목표가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면 우리의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라고 하는 고백 속에서 우리의 매일의 삶이 이어져 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들이 여기에도 많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런 사람에게 오늘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떠나 사람이 기대하는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수많은 신기루들이 여러분들을 하나님 곁에서 떠나가게 하지만 여러분들이 하나님 곁을 완전히 떠난 사실을 깨닫는 그 순간 여러분들을 그렇게 유혹하던 세상도 여러분들을 버린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 같은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 이미 그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가 명백해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옛 삶을 못박는 사람들이 되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이전에 추구하던 것들을 그 십자가 아래 장사지낸 사람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일평생 우리는 오로지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님이 우리의 인생에 유일한 초점이고 곤고할 때에나 형통할 때에나 하나님을 찾고 그 분과 함께 동행하는 삶만이 우리에게 있어서 대치할 수 없는 목표라는 사실을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에게 인쳐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멀리 떠나서 이 시인과 같이 깊은 곳에 떨어진 사람들에게 나는 오늘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오직 소망을 굳건히 해야 합니다. 이제 그만큼 세상의 즐거움과 그리고 세상의 유혹에 속았으면 이제는 그 속에는 또 다른 어떤 진실이 있을지도 모른 다고 하는 기대를 철저히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아니하고는 내 영혼에 진전한 평안이 없다는 사실을 앞에 깨달아야 됩니다.
시인이 깊은 것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몸부림쳤던 것처럼 주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신음하고 있는 영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왜 ( ?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깊은 어두움 속에 있는 영혼이 소리쳐 부르짖고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한 번 귀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은 이미 세상에 있는 것들이 주는 즐거움에 질렸고 그리고 그 허구의 (?)에서 철저히 분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눈은 이제 아무리 부어도 만족이 없는 세상에 대한 욕망에 갈증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잃어 버렸던 평안을 회복하고 옛날 이 세상에서 좋은 것들은 없어도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서 살아가던 그 때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영혼의 진실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제 여러분들이 그 영혼의 주체로서 여러분들의 그 허기진 영혼 주님과의 화해를 갈망하고 있는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할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먼저 이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 시인은 이 하나님을 버린 깊은 웅덩이와 같은 영적인 침체에서 만나게 된 커다란 고통이 이 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끔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 웅덩이 속에서 그는 스스로 선한 결심을 했다기 보다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처절하게 주님을 향해 부르짖도록 그렇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깊은 데는 누가 이 시인을 등을 밀어 집어넣은 것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 걸어간 길입니다. 불신앙도 인격적인 불신앙이고 신앙도 인격적인 신앙입니다. 여러분들의 의사에 반해서 신앙을 갖게되는 일이라고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의사에 반해서 여러분들은 그럴 맘이 없는데 죄를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물론 마음에 원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 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원하지 않는데 그렇게 되는 적은 없습니다. 신앙이 그렇다면 불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단이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여러분들의 의사에 반해서 여러분들을 불신앙으로 몰아 넣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준비된 마음속에 들어오고 사단의 역사도 준비된 마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 곳으로 들어가게 되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보다도 훨씬 기쁘고 즐거운 그 무엇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아서 들어갔는데 누구도 그에게 말한 사람이 없는데 스스로 그것이 좋아서 들어갔다가 마지막에는 거기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 때문에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즉각적으로 안목을 가지고 우리의 인생을 보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이 모두 좋은 것이 아니고 우리 눈에 보기에 고통스러운 것이 모두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시인은 안목의 정욕이 가르쳐 주는 대로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고 그 대가로 얻을 수 있는 즐거움과 죄를 통해서 맛보는 쾌락이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서 불신앙에 들어섰습니다. 불순종과 범죄에 빠지게 되었고 그래서 그의 영혼은 깊은 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깊은 것에 첫발을 들여놓는 순간 자기가 꿈꾸던 죄악을 성취하고 자기가 그리워하던 불순종의 길에 첫발을 들여놓는 순간 아마 이 시인은 마음은 쾌락과 기쁨으로 심장이 떨리는 것 같이 즐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맛본 즐거움은 잠깐이었고 그리고 잠시 후에는 하나님께 뿌리 박으며 살아야할 영적인 본성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가 그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잘리어졌을 때에 맛보는 처연한 외로움과 고통에 몸부림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어떤 안목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에게 누누이 말씀을 드리지만 짐승과 같이 살아가는 일들을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죄 가운데 하나님 앞에 진노의 대상이 되는 일들을 위해서는 특별히 노력해야할 일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자기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대로 선택하며 살아가노라면 그는 저절로 동물과 다름없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방종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성도의 삶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방탕한 삶에는 투쟁이 필요 없지만 거룩한 삶을 위해서는 거룩한 투쟁과 거룩한 움직임이 필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아주 명백한 안목의 판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눈으로 신기루와 같은 그 안목이 말하는 것들을 부정하고 신앙의 판단을 따라야할 때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살면서 그래서 뭔가 거룩한 성도의 흉내를 내면서 산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은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물과 같은 삶을 산 사람의 특징은 항상 자기의 생각을 두둔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의 안목의 판단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대해서 판단해 주시는 것들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동물적인 감각 속에서 살아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삶들이 생명을 누리면서 사는 길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 때는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그렇게 좋았고 그 깊은 것에 들어가는 것이 말할 수 없는 마음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을 버린 영혼에게 찾아오는 살을 저미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오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성실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예민하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그는 하나님께로 돌아갈까말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죄를 향해서 주었던 깊은 것에 물러가 침체에 빠졌던 그러한 마음의 사랑을 버렸고 하나님 품을 그리워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마음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으나 이전에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리던 때의 즐거움과 그 친밀함이 아직 자기의 것으로 주어지지 않은 상태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는 가나한 마음으로 여기에서 이렇게 몸부림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갑자기 성실해진 시인의 모습을 읽게된 것입니다. 여러분 신자가 왜 오랫동안 영적인 침체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가장 커다란 이유는 자신이 그런 영적인 침체에 살아가는 심각성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이 정상적인 신앙 생활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기쁨이나 그리고 신령한 하나님과의 교제 주님의 진실한 사랑이 무엇이고 그 은혜의 빛과 주님이 빛 아래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도무지 모르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침체 속에 있는 것들에 대해 가책을 별로 받지 않고 그것이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안다고 할지라도 그는 시인이 진 것 같은 유일한 성실함 없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들 가운데도 예배 시간만 하나님을 추구하고 싶은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계속해서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될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모두 잊어버리고 살다가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성도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들으면서 자기도 그렇게 되고 싶은 소망을 품고 예배가 끝나고 밖으로 나가면 다시 그 마음의 소원을 잃어버리고 분주한 한 주간의 삶에 매몰되어 버리는 사람들은 그 삶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열망하는 성실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설교를 마치고 나오는데 한 삶이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내일 하자는 제의에 그는 자기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은데 내일이면 이 마음을 잃어 버리 것 같다고 말함 다고 말했습니다. 목사님 당신의 마음에 무엇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내일이면 잃어버릴 것같은 그 마은은 나에게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감성입니다. 그런 감성은 누가라도 다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못생겼어도 공주와 말탄 신랑을 보면 나도 혹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아무리 방위도 못간 사람이라도 람보와 같은 무용담을 보면 자기도 뭔가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외;국에 나가서 고달픈 이민 생활에 시달리다보면 다 애국자가 된다고 합니다. 애국가만들어도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똑같은 감정입니다. 자기 속에서 영혼의 무엇인가 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아주 대견하게 생각합니다. 일 주일에 한 번씩 내가 무엇인가를 느낀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감상입니다. 지금 시인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 시인은 2절에서 완전히 눈이 멀어 버렸습니다. 하나님밖에는 안 보이는 사람으로 돌변한 것입니다. 깊은 데 빠져서 처절한 고통을 맛보았습니다. 평생에 나누었던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밀어와 경건한 사랑의 관계도 송두리째 잃어 버렸습니다. 그의 영혼은 근심과 거짓된 평화로 휩싸이게 되었고 처절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주님과 평화를 회복하고 싶습니다. 한 번 주님의 사랑을 회복하면 거기에서 주님의 품에 안기어서 숨을 거두어도 좋습니다.’ 이것을 2절이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주일날 한 번씩 스쳐 가는 종교적인 감상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과 맞는 설교 한 편 들었을 때에 잠깐 실감나다가 너무나 바쁘고 고달프기 때문에 잊혀져 버리는 그런 종교적인 감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를 잃어버리기 전까지 주님의 사랑의 빛 아래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얼마나 소중한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소중한지 몰랐다고 할지라도 한 번 잃어버리고 난 후에는 우리는 배우게 됩니다. ‘아, 그렇구나! 꽃처럼 향기 나는 생활이 아니라도 좋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열렬하게 숭배를 받는 삶이 아니라도 좋고, 그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 품안에서 안식을 누리고 사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이 거룩한 교제의 삶이 우리에게 있어서 진정한 행복이구나’ 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배우는 교훈을 가슴 깊이 하나님의 은혜의 칼로 아로새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만난 하나님인데 내가 잠시 누릴 즐거움을 위해서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버릴 수 있겠는가? 주님과의 관계를 접어둘 정도로 내 인생이 소중한 것이 정말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까지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머뭇거리고 있습니까?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영의 눈을 열어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여러분의 모습이 얼마나 비참하고 가난한 모습인지를 보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 화목한 관계로 돌아오지 못한 여러분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인지를 여러분 스스로 뼈저리게 느끼게 될 날이 오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시인의 열렬한 성실함을 배우도록 노력하십시오.
깊은 데 빠져 있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가장 커다란 안타까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이 깊은 곳에서 이 시인처럼 목메어 부르고 안타깝게 부르짖어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대답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찾고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하는 하나님 자녀들의 마음을 힘들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그러면 나는 그 때에 이런 마음을 가지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그것을 회피하고 죄 가운데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침묵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죽는 것이 소망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노염은 잠깐이고 은총은 평생입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습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을 주십니다. 주님이 만일 여러분들이 이 시인과 같은 몸부림으로 열렬한 성실함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면 아마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정죄시키기 위해서 잠시 침묵하실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침묵하는 과정이 고통스럽게 느껴지거든, 여러분들이 끊임없이 여러분들을 당신의 사랑으로 부르시던 그 음성을 침묵으로 거절하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감으로 주님의 마음에 드렸던 그 깊은 고통을 여러분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주께서 침묵하실 때 여러분은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 하나님 내가 열렬하게 부르짖지만 그러나 내가 너무나 먼 곳으로 주님을 떠났고 너무 깊은 것으로 빠졌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짖을 때 주께서 침묵하시는 것이 오히려 당연합니다. 그러나 주님 내게는 들리지 않으나 이 침묵 속에서 나를 향한 당신의 마음이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을 나는 압니다. 주님 나를 향해 귀를 기울이시고 내 음성에 내 부르짖는 간구에 당신의 귀를 기울이시고 내 음성을 들어주소서.’ 라고 시인처럼 열렬하게 부르짖으며 주께서 나를 향해서 그 마음을 돌이키시기까지 나는 주 앞에서 떠나지 않겠다고 하는 거룩한 결의와 결단을 가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4. 하나님께서 왜 용서하십니까?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시130:3~4)
지난 시간에는 2절을 중심으로 깊은 곳에 떨어진 자의 소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시인은 그 깊은 곳에서 결국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밖에는 참된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비록 죄로 말미암아 떨어진 깊은 곳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상실되고 우리의 영혼이 곤궁한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는 그 때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고 그분께 돌아가는 것 말고는 소망이 없다는 사실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가난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그 핵심을 알고 보면 여러 가지 희망이 모두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리고 하나님을 찾고 그분을 뵈옵고자하는 마음만이 강렬한 소원이 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3절과 4절에서는 크게 세 가지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죄로 말미암아 깊은 데 떨어진 곤고한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중요한 세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데, 첫째는 겸비함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사유하심이며, 세 번째는 하나님을 경외케 하심입니다. 이 세 가지는 이렇게 연결이 됩니다.
죄로 말미암아 깊은 데 떨어져서 처절한 고독과 하나님과의 교제와 사랑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신음하던 영혼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 전에는 먼저 마음을 낮추고 겸비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을 오늘 성경에서는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죄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죄를 지었다고 너무 그렇지 마십시오”하면서 대드는 것 같은 태도가 아닙니다.
시인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깊은 침체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과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주님과 나누었던 아름다운 교제를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영혼이 햇빛을 잃고 살아가는 식물보다도 얼마나 더 견디기 힘든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곡식이 햇빛 없이 살 수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로부터 비춰오는 은총의 햇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물고기는 혹시 물을 떠나서 살 수 있다고 할지 몰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살 수 없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그들의 영혼 안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강한 갈망을 주신 것입니다.
시인이 깊은 데서 이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그는 죄의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라고 묻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드는 태도가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처절한 위기의 상황 속에서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게 하는 질병과 같은 죄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어떤 신앙상태에서 신앙생활하는지, 개중에는 우리 교회에 있지 않은 분들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아는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은 아주 지독한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누구든지 죄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성화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거룩한 삶도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일 수 없습니다. 거룩한 삶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거룩함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살지 아니하고는 거룩한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적인 교통과 사랑 없이 산다는 것은 마치 햇빛 없이 식물을 키워보려고 애쓰는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어느 과학자들은 지하에 도시를 만들어 놓고, 지금까지 인간이 이루어놓은 과학적인 업적을 기초로 해서 태양이 없이도 완벽하게 전기장치를 하고, 그것을 통해서 동·식물들을 자라게 해서 그 자체 내에서 생산이 가능한 지하도시를 만들고자 계획했습니다. 그런데 실패했습니다. 그것은 되지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저런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남들이 갖지 못한 중요한 섬김을 할 수도 있고, 때로는 남들이 소원하게 생각하는 분야에서 투철한 열심을 보여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 하나는 그런 중요한 모든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거룩한 고통, 그분께로부터 부어지는 신령한 사랑, 그 사랑 속에서 영혼이 생명을 얻고, 활기를 얻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화해 없이는 그는 그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그는 건강한 신앙생활이 불가능합니다. 삶 자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그분과 온전한 교제와 사랑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점점 거룩해져야할 욕망들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거룩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고자 원할 때마다 그들은 그 거룩을 위해서 마땅히 제거되어야할 죄악들을 보게됩니다.
시인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깊은 타락과 침체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하나님의 위로를 많이 받았던 영혼이었습니다. 물론 죄 가운데로 들어갈 때는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자신으로 하여금 범죄하게 하는 그것에 대한 욕망이 컸기 때문에 하나님보다는 죄를 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깊은 곳에 들어가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상태 속에서 그의 영혼은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흐느낌은 거친 오열로 변했고,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을 떠나서 이런 죄 가운데 빠지도록 만들었던, 하나님과의 교제를 무너뜨려 버리고 손에 넣을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자신에게 주는 기쁨보다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느끼는 영혼의 고통과 갈등이 훨씬 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주님을 버릴 수 있도록 만들었던 이러한 세상을 향한 욕망과 굴복했던 유혹의 제목들을 버렸습니다. 그래도 그의 영혼은 쉽게 하나님을 향해 회복되지 않습니다. 처절한 고통과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영적인 침체에서 건지시거나, 혹은 우리를 영적인 침체로 떨어지도록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심에 있어서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함께 여러분들이 선명하게 기억하도록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여러분들을 권면합니다. 쉽게 요약해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은 사람일 수록 때로는 아주 사소한 죄 때문에 가혹할 정도로 깊은 웅덩이에서 고통스럽게 긴 세월 동안을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린 채 침체 속에서 헤매야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이 어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깊지 않은 사람들은 잘못해도 하나님께서 쉽게 회복시키시지만, 많은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성품을 깨달았던 사람들은 그들이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매우 중대한 범죄로 생각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한없는 사랑의 표시이기도하지만 그런 사랑을 받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더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자신을 지키며 살아야할 것인가의 표증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실 때, 여러분들은 한편으로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로 그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야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받은 것에 대해 자신이 어떻게 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과 은혜에 어울리도록 하나님 앞에 변함없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깊이 마음에 새기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한번 깨뜨려지는 것은 쉽습니다. 높은 곳을 다니는 것 같은 신앙이 졸지에 웅덩이에 빠지는 신세가 되어서 그 웅덩이에 빠져서 발목이 부러진 채 신음하는 노루나 사슴같은 신세가 되는 것에는 많은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회복은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침체에 빠지는 것만큼 빠르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상태에서 깊은 고통을 느꼈습니다. 아마도 처음에도 열심히 기도하면은 훌쩍 뛰어올라서 그 열렬했던 하나님과의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정성껏 드리는 한두 번의 제사가 막혔던 하나님과의 단절을 일시에 무너뜨리고 폭포수와 같은 예전의 감격으로 자신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시인이 옛날의 그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하나님이 옛날 방식으로 다루셨으나, 주님을 아는 놀라운 지식과 은혜를 받은 후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과의 평화와 사랑을 잃어버린 시인의 잘못을 깊이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시인으로서는 너무 가혹해 보일 정도로 깊은 웅덩이 속에서 부르짖어도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긴 시간들을 지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 깊은 웅덩이 속에서 이 시인이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이제는 주님을 버리기 위해서 사랑했던 것들을 다 버려두고, 이제는 견딜 수 없는 울부짖음으로 그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게 해달라고 울부짖는 그 시인이 들리지 않는 울부짖음을 계속하면서 그 깊은 데서 무엇을 배웠겠습니까?
시인이 고백한 것이 바로,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주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가운데 발견한 진리였습니다.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이것은 물귀신 작전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만 잘못했습니까? 저 사람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래도 신사적으로 죄를 짖지 않았습니까?”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을 물고 들어가는 물귀신 작전이 아닙니다. 시인은 처음에는 자신의 잘못이 단순하게 우연히 생겨난 사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많이 기도해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쉽게 회복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뻔뻔스러움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담과 혹은 하와와 같이 변명의 천재입니다. 또 그들과 같이 교제를 회복하기 위해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회피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 뜨거운 사랑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한 갈망을 가지고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 그분의 얼굴과 대변하기를 한없이 두렵게 생각하는, 그래서 도망가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은 그런 속에서 처절하도록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뿌리 깊은 그 죄의 본성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뿌리 깊은 본성이 바로 모든 사람들 속에 존재하는 그 죄의 뿌리라는 것, 모태로부터 죄 가운데 잉태하였다는 사실을 보도록 만든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하나하나 더듬어가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치유하고자 처절한 몸부림으로 부르짖을 때에 그는 자신의 죄를 만지면 만질 수록, 점점 더 그 근원이 깊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간단히 뽑힐 것 같았던 이 자신의 죄의 뿌리가 사실은 더듬고, 더듬어 들어갈 때에 이제까지는 발견할 수 없었었던 경악할 만큼, 놀랄 정도로 깊이 깊이 자신의 본성 속에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여기에서 자기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그런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면서 살아가는 그 인생들이 이러한 죄의 뿌리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훨씬 전에 이 시인은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인간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그 끔찍한 죄의 뿌리를 보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파괴하고 그 깊은 곳의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도록 만들었던 그 죄의 장본인이 바로 자신 속에 있는 이 끔찍한 죄의 본성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바로 거기서 처절하게 깨달으면서 자신이 비록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무리 회복하기를 원한다고 할지라도 자신 속에 뿌리깊이 내려 있는 죄악된 본성을 자신의 힘으로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로 돌아가기를 끔찍이 돌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깊은 데에 떨어지도록 만들었던 그 죄가 사실은 자신의 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 안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시인이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라고 말하면서 “주여, 주 앞에 누가 서리이까”라고 고백하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을 함께 물귀신처럼 물고 들어가면서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려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자신의 죄 앞에 절망하고 있는 그 경건한 몸부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 은혜 안에 살기를 소원하였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시인은 자신에 대해서 자신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신뢰할 수 있는 모든 근거를 잃어버렸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똑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죄악된 본성을 깊이 깊이 보면서, 은혜가 깊어지면 깊어질 수록 그는 사도중의 가장 작은 자라고 자신을 표현했다가, 또 한편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성도들 중의 가장 작은 자로 묘사했다가 마지막에는 정말로 자신의 본성이 처절하게 죄에 오염되어 있음을 로마서에서 토해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도달한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도 바울이 그래서 도달한 결론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아, 그렇습니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정결하게 살고자 하는 희망은 있지만 자신의 몸이 그렇게 정결한 삶을 살아가도록 허락하지 않는 처절한 자신의 절망적인 상태를 보면서,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그곳에서 해답을 발견했다면, 오늘 이 시인은 하나님의 사유하심에서 그 정답을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처절하도록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가 하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깊은 곳에 떨어졌을 때 우리의 잘못과 우리의 마음을 지키지 못함으로 성령을 근심하게 해드리고,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충만한 교제의 축복을 잃어버렸을 때 여러분들은 어디에서 회복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하십니까?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나님과의 평화와 주님께로부터 받았던 진실하고 사랑에 넘치는 교제의 세계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계속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불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이유나 핑계거리를 찾고 있는 동안에 여러분들의 영혼은 회복될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어느 지점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에 우리의 마음을 지키지 못했고, 그래서 불순종이 우리 속에 들어오도록 허락했고, 하나님 홀로 긷드셔야 할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의 욕망이 우세하도록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내어준 어디에 있는 가를 우리의 마음은 성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대답은 우리의 죄입니다.
물론 온도와 습도가 낮으면, 균이 더 빨리 번식하고 질병이 촉진되는 것처럼 똑같이 우리의 죄도 죄가 자라고 성장하기에 적합한 환경을 조성해주면, 아주 훌륭하게 빨리 죄가 절망적인 상태를 몰고 갈 수 있습니다.
(예화) 얘들이 길에 놀다가 넘어지면 무릎이 벗겨집니다. 그런데 겨울에 까지면 덧나지 않습 니다. 그런데 여름에 나면, 땀이 나고 오물이 들어가면서 계속 약을 발라도 표면이 곪 기 시작합니다.
똑같습니다. 잘못하고 환경적인 이유로 말미암아 상처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환경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안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강요를 받고 있다면, 덜 덧나거나 치료가 빠릅니다. 그런데, 핑계없는 무덤이 없다고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고, 깊은 침체 속으로 떨어지게 되고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과의 사랑을 잃어버리게 될 때에, 환경의 자극이나 도움, 혹은 환경의 방조없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인간은 그 자체가 환경속에 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런 관계를 모두 가지고 있고, 심지어 그런 관계가 없는 무인도 아래 거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그의 마음의 상태는 환경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습니다.
(예화) 여러분이 무인도에 홀로 있다고 생각합시다. 만약 적당한 햇볕이 나고 비가 와서 여러 분들에게 물이 있고, 어쩌다가 놀란 물고기가 바닷가로 뛰어 올라와서 몇 마리 잡아서 물에 씻어서 꿰미에 껴서 그늘에다 말려서 내일 먹을 양식을 예비했다면, 마음이 훨씬 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폭풍이 몰아치고 천둥번개와 함께 커다란 파도가 섬 전체를 삼킬 것처럼 밀려들어온다면, 여러분들은 혼자 있어도 불안하기 짝이 없고, 희 망이 없는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보십시오. 아무하고의 관계없이 혼자 있다고 할지라도, 사람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태어나서 이 세상에 던져질 때에, 그는 어떤 식으로든지 환경 속에서 살아가도록 운명지어진 사람입니다. 더 더욱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마음을 지키면서 하는 것인데, 그 마음을 지키는 일에 실패하면, 범죄하고 불순종하게 되는 것인데, 그렇게 마음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그 일에 아무런 이유가 아무런 상황과 관계도 없이 스스로 걸어서 그 깊은 웅덩이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것은 환상 속에서나 일어나는 것이지, 현실 속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공 속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이때에 이용되는 것이 사람들과의 관계, 상처,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같은 것들로 말미암아 많은 잘못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경건 생활을 이어가기에는 바쁠 정도로 너무나 분주한 신앙생활, 그러면서 바닷물에 모래성이 깎여 나가듯이 야금야금 경건한 삶의 태도가 깎여 나가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허물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하는 사이에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고자하는 욕망은 커지고, 은혜 가운에 주님께 순종하면서 살고자하는 마음은 사라집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을 구원해주신 구원의 기쁨과 감격은 서서히 고갈되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이 세상의 훨씬 중요하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기쁨보다는 자신의 기쁨을 찾게되고 주님을 영광을 위해서 살았던 많은 날보다는 주를 위해서 자신이 지불해야 했던 끔찍한 고통 같은 것들이 그의 마음을 깊이 점유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주님의 은혜 안에 살 때에는 행할 수 없었던 범죄와 감히 생각할 수 없었던 불순종을 서슴지 않게 실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직해지지 않으면, 침체로부터의 어떤 회복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의 눈을 똑바로 떠서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주위의 여러분들의 지체 가운데는 생명이 없는 신앙생활을 여러 해 동안 계속해온 지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 중에서 처음부터 하나님의 참된 생명인지를 모르고 있던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개중에는 한때 하나님과의 놀라운 평화를 누리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평안을 잃어버렸고,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은 아득히 먼 옛날의 추억처럼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거기서 헤어나는 첫 번째 길은 이제껏 까지 여러모로 핑계대던 그 모든 핑계들을 접어두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니 앞에서 자신을 이런 상태로 몰고 갔던 자신의 깊은 죄의 뿌리에 대해서 인식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도, 오전동안에 그런 생각을 많이 하면서 지냈습니다. 정말로 만물의 찌끼와 같은 아무 것도 아닌 저 같은 인간에 보기에도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누가 무엇이라고 말해도 인간은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 큰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던 사람들, 어둠과 죄악 속에서 곧 죽어버릴 것과 같았던 사람들, 주께서 건져내셔서 그의 피로 정결케 하신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그 놀라운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육 개월만 그 은혜 받은 마음을 지켜도 기적에 가깝다는 것이 저의 목회의 경험입니다. 아직도 그만한 성도들을 많이 만나지 못했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더 깊이 범죄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송두리째 날려버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마치 헤밍웨이의 작품 ‘노인과 바다’에서 큰 물고기를 낚아서 배 양쪽에 걸치고 오는 동안에 상어 떼를 만나 다 뜯기고, 항구에 도달해서는 뼈다귀만 남은 생선을 끌어올려야 했던 그 노인과 같이 그렇게 주님께로부터 받았던 놀라운 은혜를 거의 다 잃어버리고 몇 장 붙은 껍데기에 가까운 신앙을 끌어안고 힘겹게 신앙생활하고 있는 지체들도 많이 보여집니다. 그래서 오늘도 그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나님! 막 살기에는 너무나 짧은 인생이고, 잘 살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나 깁니다”.
여러분들은 정말로 침체 속에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려면, 여기에 지름길이 있다고 가르치는 말들을 믿지 마십시오. 모두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어느날 불덩이가 떨어지면, 단번에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리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린 여러분들 중에서 불덩이를 받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한 사람이 있다면 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아주 소수에 불과 합니다. 하나님은 처절하도록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사랑을 잃어버린 처절한 몸부림 속에서 주님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 얼마나 소중한 분이신 가를 깨닫게 됩니다.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주님을 간절히 사랑키 원하네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슨 희망을 가지고 하늘 영광을 버리셨을까요? 보좌의 영광을 버리고 마리아의 거친 강보여 싸여서 구유에 누이시기까지 비참한 종으로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무엇을 희망하면서 그렇게 낮아지셨을까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었기에 머리둘 것 없는 생애를 사시고, 가진 소유없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주셨을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들 자신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보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될 것을 배우도록 우리를 가르쳐 주신 분이십니다. 주님이 무엇이 탐나셨을까요? 미모를 탐내실 만큼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우리들 가운데 있었을까요? 교회가 어려우면 종종 교인들이 갖고 있는 재산에 관심이 가실지는 모르지만 주님은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에 관심을 가지시고 여러분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관심은 여러분 자신이었습니다.
탕자를 집을 떠나보내는 그 아버지의 마음은 그이 손에 들여주었던 반쪽의 유산도 아니었고, 그가 얼마나 그 돈을 남겨 가지고 돌아오는 가도 아니었습니다. 제발 쓰지 말고 돌아와야 한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 아들 하나가 돌아오면 아버지는 그것으로 만족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우리 자신을 그렇게 사랑하셔서 우리 자신을 원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런 삶을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불순종과 죄에 대해 시인이 깊이 인식하면서 한없이 겸비해지는 은혜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무엇 때문에 하나님과의 평화를 헌신짝처럼 벗어버리고 달려들어 죄 가운데로 빠져들고 그 죄의 사슬에 묶여 이 깊은 죄의 웅덩이에서 울부짖게 된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도의 진정한 분깃,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진정한 유산이 무엇인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진정한 유산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진정한 기업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살펴보아도 주님의 자녀들에게는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에게도 있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을 믿는 자녀들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없는 그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주일에 놀러 다니고, 양심의 거리낌없이 육신의 쾌락을 위해서 자유롭게 범죄하고 양심을 더럽히는 것을 보면서 살 때, 여러분들은 때로는 경건한 심령이 상해서 분노할 때도 있지만 속으로 부러워 할 때도 있다는 사실을 저는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들이 그렇게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만을 부러워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사람들이 인생의 절망 속에 부딪혔을 때 어떻게 됩니까? 월급 몇 푼 받아오고, 잘 나갈 때에는 서로 끌어안고 내 색시, 내 신랑하며 잘 살던 사람이 실직이라는 위기 앞에서 가정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들을 한번 보십시오. 절망 속에 부딪혔을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짐승과 같이 행동합니다. 술을 퍼마시거나, 알코올중독에 빠지거나, 순간의 괴로움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쾌락에 몸을 던지거나,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미움과 원망으로 바꾸어 놓고 등돌리고 살아가는 일과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막판에 골목에 몰린 강아지가 사람을 무는 것과 다를 바 없이 행동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의 최고의 재산은 무엇입니까? 고난과 위기 속에 처했을 때에 삶의 절망의 구덩이 속에 떨어졌을 때에 우리들에게는 부르짖을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고, 곤고하고 괴로울 때에는 우리의 신음을 토할 때면, 우리를 위로해주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십니다. 사랑했던 사람들이 떠날 때에나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올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고,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이라는 그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는 얼마나 놀라운 자산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더욱이 고난과 위기 속에서 그 관계를 붙들고 그 젖줄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양식을 통해서 고난을 이기고, 슬픔의 위기를 환희의 기회로 바꾸어본 사람들은 모두 그 하나님과의 교제가 성도에게 있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알게 됩니다. 정말로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성도의 본분은 그것에 만족해서 사는 것입니다. 모든 죄는 성도가 자신이 만족해야할 바에 만족하지 못하는 욕심에서 잉태하고, 그 죄가 영혼의 사망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바로 이렇게 하나님과의 놀라운 교제가 얼만 축복된 것인가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비참한 웅덩이에 떨어진 후에야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실 때에야 자신의 영혼의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서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을 만족하게 여기면서 살지 못하도록 자신을 만들었던 그 죄의 깊은 뿌리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리고 사랑을 잃어버린 맨 처음에는 마지막으로 지은 그 범죄만이 생각났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부르짖어도 들리지 않는 깊은 웅덩이 속에서 하나님 한 분밖에는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자신의 내면 속에 있는 뿌리깊은 죄의 본성을 깊이 보게 되었을 때에, 그 때 그는 자신이 얼마나 절망적인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자신 때문에 절망하는 바로 그것이 모든 깨어짐은 첫발자국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가장 커다란 실수는 자신을 과신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실패를 여러분들은 기억하십니까?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는 장담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주를 배반할 지라도 저는 결코 배반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호언 장담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든 제자들 가운데 가장 악질적인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면전에서 부인한 할말없는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에게 기대를 갖는 사람, 자신을 스스로 대단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가야하는 마지막 발자국이 이런 곳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시인은 바로 이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나는 전에는 이 깊은 웅덩이에 떨어지면서는 내가 결정적으로 어떤 죄 때문에 여기에 떨어졌고, 그것만 없었다면 내 인생은 정말로 티하나 없는 옥과 같은 인생이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그 죄를 통해서 깊은 웅덩이 속에서 자신의 본성을 보게 되었고, 그곳에서 자신 전체가 죄에 오염되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피할 수 없는 이 숙명적인 자신의 처지 앞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밖에는 자신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처절하도록 하나님 앞에 겸비해진 이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렇게 자신을 향해서 절망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죄가 많아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제물을 준비한 사람입니다. 같은 시인으로 믿어지는 51편에서 저자 다윗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제물이 소도 아니고 염소, 양도 아니며 향기로운 어떤 제물도 아닌 주님이 받으실 만한 제물이 상한 심령이요, 깨어진 마음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날마다 우리 자신을 믿으려고 하는 우리 자신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 매일 자신 때문에 절망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합니다. 은혜 생활을 조금 잘 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약간의 희망을 가져도 되는 사람들은 더 절망하고, 이제는 완전히 맛을 잃어버려서 자신에 대해서 처절하도록 실망해야 될 사람들은 자신이 상당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과거를 돌아보면 아주 이상한 공식하나가 성립합니다. 무슨 공식인가 하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고 실제로 상당히 온전한 삶으로 가까이 다가갔을 때일수록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형편없는 죄인이고, 자신이 얼마나 절망적인 존재인가를 깨달으며 많이 울었던 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온전함과는 거리가 먼, 막돼먹은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던 때에는 하나님 앞에 자신이 상당히 괜찮다고 생각하던 때입니다.
누군가가 “당신은 참으로 온전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면, 진정으로 온전한 삶을 추구할 때에는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렇게 사는 때에는 그런 이야기를 접하면서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의에 빠진 생활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거짓되고 깨끗한 사람들 보다는 추하고 정직한 사람들을 가까이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처절하도록 이 시인을 겸비하도록 만든 것이 바로,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죄인가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일평생 우리를 부인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절망적인 존재이고, 매일매일 우리의 온 몸과 장악해주시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삶이 아니면,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손이 붙들고 계실 때에 가장 불결하고 더러운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할 수 있지만, 주님의 손이 그들을 놓으실 때, 그들은 아무리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들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날마다 날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날마다 날마다 주님의 그 충만한 진리의 빛으로 더 가까이, 날마다 날마다 더 뜨겁고 진실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부어져서 어제 볼 수 없었던 우리의 허물을 보게 하시고, 어제는 깨달을 수 없었던 우리의 죄악을 발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계속되도록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뢰해야 합니다. 그런 죄에 대한 인식과 겸비함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첫 발자국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시인은 그런 속에서 처절하도록 자신을 절망하면서도 완전히 거꾸러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희망이 무엇입니까? 살다보면 좋은 날이 오겠지. 살다보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회복될 거야. 이 바쁘고 어려운 일이 좀 지나면 그래도 기쁘고 좋은 소식도 있을 것이라는 요행을 바라는 것에 희망을 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향해서 처절하게 절망하는 만큼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망이 하나님의 사유하심에 있다는 고백을 아버지 앞에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깊은 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마음을 낮추고 기도해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나왔으나 차가운 기도가 계속될 때, 말씀을 들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빗겨가고, 나에게 빗겨간 그 말씀들이 주위의 지체에게 떨어져서 그 영혼들을 변화시킬 때 여러분들은 다양한 생각으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진 것에 대해 핑계를 만들고 있을 것입니다. “내가 오늘 아침에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피곤하기 때문이야. 오늘 말씀이 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설교자가 헤매고 있기 때문이야. 말씀이 내 마음에 뜨겁게 와 닿지 않는 것은 설교자가 성령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교회의 예배분위기가 어수선하기 때문이야. 저 말씀은 내가 듣기에는 너무나 수준이 높고, 이 말씀은 사실 나를 겨냥한 말씀이라고는 할 수 없어”. 다양한 핑계를 여러분들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맞을 확률이 많은 것은 그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뵙지 못하는 차가운 기도 생활과 수없이 예배에 참여해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그 냉담한 이해가 바로 여러분들의 영혼이 병든 영혼임을 증거해 주고 않습니까? 단언하건대 여러분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진실로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방금 전에 말한 것과 같은 핑계들을 대면서 곤고한 자신의 영혼을 달래려고 하는 한 그는 결코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말하는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 “사유”는 단지 하나님이 “너를 용서해 준다. 네가 나에게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지만 내가 더 이상 너를 징벌하지 않겠다”는 사유가 아닙니다. 이 사유는 단지 벌을 안주겠다는 의미를 뛰어 넘어서 이 용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화해를 의미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리의 죄와 불순종을 고백하는 단지 징벌 받지 않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가 정말로 지각이 있는 그리스도인라면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육체와 삶을 향해 내리는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징벌보다도 더 무서운 것인가를 알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안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모든 육체적인 도구들을 동원해서 자신의 몸을 으스러지도록 징벌하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영혼의 진정한 평화와 화목을 회복시켜주시기만 한다면 그런 것들은 기꺼이 감당할 수 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실레아 쉬링크라는 작가는 말했습니다. “회개란 단지 이렇게 빌면 하나님이 예전에 잘못했던 것을 모두 용서해주시고 일체의 책임을 묻지 않으실 것이며, 나를 마땅히 받아야할 징벌을 면제해주실 것이라는 기대로 하나님 앞에 비는 것이 회개가 아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차라리 하나님이 내가 지은 이전의 죄에 대해서 징벌을 내리시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시켜주시는 것을 징벌을 면제해 주시고 어둠 속에서 사는 것보다 더 원한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오늘 시인은 “사유하심이 주께 있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죄인의 참된 소망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깊은 웅덩이와 같은 곳에서 우리를 오랫동안 버려 두기를 원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 깊은 웅덩이와 같은 곳에서 우리를 그 깊은 웅덩이에 빠뜨렸던 우리 속에 죄와 불순종들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과의 평화가 얼마나 그립고, 그 평화 없이 우리의 육신의 모든 번영과 우리의 마음의 원하는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깊은 웅덩이에서 신음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용서하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불러들이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고백하는 것은 우리가 하지만 그러나 그 고백을 들어서 우리를 당신의 사랑으로 다시 부르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깊은 곳에 떨어진 모든 사람들이 결국은 하나님을 바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여러분 가운데는 이런 깊은 웅덩이에서 가혹할 정도로 긴 세월동안 생명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깊이는 다르지만 분명히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무엇인가의 걸림이 있고, 웅덩이와 같은 곳으로 자신의 영혼이 이끌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처럼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소망을 두는 사람, 그가 희망 있는 사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어린아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서 가지고 계시는 소원은 뜨거운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막힘이 없는 교제 속에서 살아가기를 하나님이 너무나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이라도 그렇게 막힌 담을 허물고 그 은혜와 사랑을 부어주셔서 그 말씀과 은혜의 빛 아래 살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시지만 하나님은 두루 살피시면서 누가 간절하게 죄의 용서를 구하며 참회하는 마음으로 사유하심을 구하고 있는지 살피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값진 것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쉽게 얻어지는 것 치고 값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복, 주님과의 화해는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정말로 “나는 하나님의 화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내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다면 나의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그 하나님의 사랑없이 내가 어떻게 이 어두운 세상에서 이기며 살 수 있겠는가? 하나님! 내게 있는 모든 것을 가져가셔도 주님과의 그 화해를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내가 그 풍부한 사랑 속에 서기를 원합니다”라는 고백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그런 하나님과의 화해를 통해서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기대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죄의 용서를 받은 사람, 깊은 영혼의 어두움에서 건져냄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그 삶을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깊은 어두움 속에서 여러분들 건져내시고 여러분들을 죄로 말미암아 스스로 걸어 들어간 깊은 웅덩이와 같은 곳에서 주 친히 들어가셔서 여러분들의 손을 이끌어 밝은 빛 가운데로 나오게 하시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아주 분명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둘로 구분했습니다. 하나는 율법적인 회개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적인 회개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깊은 어두움 속으로 들어갈 때에 고통스럽기 때문에 울부짖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울부짖는 이유가 단지 고통 때문이라면 그런 회개만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깊은 영혼의 침체에 버려두시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지 그 침체에서 건져내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을 경외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은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삶은 마치 비유하자면 계란과 같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외면적인 삶이 있고, 그 내면에는 그런 삶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입니다. 그래서 그런 깊은 침체의 웅덩이에서 우리를 건져내고 나면, 금방 회복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막혔던 사업, 무너졌던 가족과의 관계, 깨뜨려졌던 사람들과의 관계와 같은 것들이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었던 자신에게 변화가 와서 비로소 기도하면 주님이 들으신다는 확신이 오고,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때 우리의 영혼을 적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단비가 우리의 영혼 속에 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핵심 속에서 끊임없이 주님을 알아가면서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진실한 삶이 흘러나옵니다. 이 두 가지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가는 그 경외하는 삶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면,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영적 생활과 그 사랑에서 비롯되는 거룩한 공의로운 삶,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경외하는 삶의 핵심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을 만약 하나님이 실로 오랫동안 어두움 속에 있던 여러분들의 영혼을 주께서 구원해주시고 빛 가운데로,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 가운데로 들어오게 하셨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아할지가 분명하지 않습니까?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다시 열어주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리지 말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 날마다 많은 기도에 시간을 바쳐 열렬하게 기도하고,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그분과의 교제에서 오는 즐거움으로 여러분들의 영혼을 충만하게 적시도록 여러분들이 일체의 게으름을 뿌리치고 힘쓰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흠뻑 받은 그 마음을 가지고 삶의 구석구석에서 주님을 섬기는 정직하고 진실하고 복음을 위해서 사는 헌신된 삶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의 모든 고민과 갈등은 바로 이렇게 열어주신 하나님의 영적인 교제와 그 교제의 힘에서 비롯되는 실천적인 삶을 어떻게 하면 감당해 나갈 것인가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펑펑 울며 감격하고, 옛날에는 짐승과 같이 살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금방 미끄러져 버리고 이전에 돌아갔던 것보다 흉악한 상태로 떨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진리가 모자라거나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주님이 그렇게 그들을 어둠가운데서 불러내셔서 진실한 신자로 만드실 때에 주님이 원하셨던 기대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무리 회복해보려고 몸부림쳐보아도 삶이 그 죄와 그 웅덩이 속에서 돌이켜지지 않는 한 습관적인 죄와 실패에서 해방되지 않는 한, 여러분들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한 영혼이 정말로 그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벗어나서, 햇빛처럼 쏟아지는 하나님과의 은혜, 활짝 열려진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진리를 먹으며 사는 것이 기적과 같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마음만 먹으면 그런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잇는 흔한 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쉽게 웅덩이 속에 쳐 넣는 삶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개가 그 토했던 곳으로 돌아가고, 돼지가 그 씻었던 곳으로 돌아가 다시 눕는 것과 같은 불행한 반복들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하나님과의 평화가 여러분들에게 절실하고 귀합니까? 주님없이 살았던 그 어두운 날들의 칙칙함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목적도 없이 방황하며 주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떠날 수도 없었던 그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여러분들은 기억하고 있습니까? 순간의 자신의 욕망에 굴복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잠깐 내어준 결과가 얼마나 혹독하고 아프게 여러분들의 영혼을 후벼파고 여러분들을 병든 사람으로 만들었는지를 여러분들은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습니까?
시인은 이러한 사실을 깊이 우리보다 앞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심은 그러한 평화를 잃어버렸다면, 그러한 하나님과의 평화없이 처절하게 울부짖었던 이 시인과 같이 고통하며 부르짖고,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여러분들의 영혼의 울부짖음을 듣게 하시기 위함이며, 그래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위해서 모든 사랑하던 것들을 내어 던지고 자존심과 자신을 신뢰하는 그 오만함과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서지 않는 모든 자기 의로 가득찬 신앙생활을 버리게 하기 위함이며,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런 하나님과의 여러분들을 유지하고 있다면, 이 세상이 여러분들에게 그것과 바꿀 수 있는 더 소중한 것을 아무리 주겠다고 말할지라도 여러분들은 그것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는 여러분들에게 그것을 빼앗기 위해서 여러분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시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붙든 그 손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폭풍우 속의 파도에 뒤엉켜서 구조선으로부터 흘러나온 밧줄을 동여매고 파도와 싸우면서 그 밧줄을 놓지 않는, 살기를 원하는 조난자처럼 여러분들은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붙든 손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주님을 붙든 그 사람들을 주님이 또한 붙드셔서 헤어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헤어나게 하시며, 올라올 수 없는 절망적인 웅덩이에서 건져내시는 주님이심을 기억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시종일관 주님이 사랑이시라는 사실과 당신을 찾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음성을 잠시는 혼자 울부짖게 버려두시기도 하지만, 결국은 귀를 기울이셔서 당신의 자녀들을 그 웅덩이에서 건져내어 당신의 사랑의 품에 뜨겁게 포옹하기를 원하시는 그것이 우리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이심을 우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마음에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만족은 하나님이시며, 주님 곁에서, 주님 앞에서, 주님의 눈빛 앞에서 그 사랑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커다란 만족이고, 주께서 우리를 당신 앞에 두시는 동안 우리는 주님 이외에는 필요한 것이 없는 사람임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가난할 때나 부할 때나,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받을 때나 멸시를 받을 때나, 주를 위해서 섬기다가 고난을 받을 때나 칭찬을 받을 때나, 언제나 우리의 모든 삶의 환경을 통해서 날마다 주께로 더 다가가는 그러한 성도의 행복을 누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5. 회복을 기다리는 마음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 도다.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130:5-6)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약에 죄를 본다고 할 것 같으면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시인은 그 깊은 데서 사유하심이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용서해주시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용서, 이곳에서 말하는 사유하심은 단순히 죄를 용서해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를 뛰어 넘어서 하나님과의 진정한 화해와 사랑을 이루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한 사유하심이 하나님께 있다고 시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유하심이 주께 있사오니 이를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사람, 주님과의 화해를 이룬 사람, 깊은 데서 하나님이 건져주셔서 새 삶을 찾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할 것을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명백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깊은 데 떨어져서 영적인 침체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영혼의 어둠 속에 있는 분들에게는 저는 오늘 기도 하나를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처해 있는 상태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또, 자신이 변화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많이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 위에 한가지 잊지 말고 첨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만약에 이번에 이 깊은 웅덩이와 같은 영혼의 어두운 터널, 영적인 깊은 침체에서 건져주시면 제가 일평생 주님만을 경외하며 살겠나이다”라는 고백을 첨가하시기를 바랍니다. 시인이 이곳에서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사학에서 최선의 공격은 최상의 방어라는 격언이 있듯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침체에 빠지지 않는 최고의 비결은 부지런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침체에 빠지지 않는 중요한 방어장치입니다. 그렇기에 쓸데없는 꿈을 너무 많이 가지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루하루 마음껏 하나님을 사랑하고, 힘닿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주님을 섬기며 그날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옷깃을 여미면서 또 하루를 맞이하는 삶, 그런 삶을 살다가 죽는 것이 성도의 행복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 주님을 경외하는 삶, 그것이 이어질 때 우리는 시인과 같이 불행한 깊은 침체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난주의 요약입니다.
오늘은 시인이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니”. 기다리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린다고 말하면서 어떻게 기다리는가를 말하기를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자신이 더 그렇게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고백을 우리가 읽은 본문 5, 6절에서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은 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낙담하고 고통하고 있는 시인의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를 다시 한번 읽을 수 있습니다. 시인은 내가 하나님을 바라본다. 내가 하나님을 기다린다고 말하지 않고, 조금 복잡한 표현을 씁니다.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린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말은 우리로 하여금, 사도바울이 쓴 로마서 1장을 생각나도록 만들어 줍니다. 로마서 1장에서 사도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하기를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을 어떻게 묘사했는가를 아십니까? “내가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묘사했습니다.
그는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라고도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에게는 그렇게 말하는 것 말고는 자신 속에 가득 차있는 하나님을 향한 섬김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이 시인은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그저 갈망하고, 하나님이 오셨으면 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과 자신의 영혼이 하나되어 있는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자신 속에 있는 영혼이 기다리고 있는 바와 나라고 하는 외적인 실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외면적인 내가 완전히 하나의 목적을 향해서 연합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러분, 마음에 없는 일을 행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 마음에는 있어도 행하지 못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이 시인은 마음에는 있으나, 행동은 행하지 못하거나, 혹은 마음에는 없는데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밖으로 드러난 삶, 그의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육체와 육체 안에 담겨져 있는 마음이 완전히 연합되어서 한가지 목표를 향해서 자신을 온전히 집중시키고 있는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을 향해 집중하고 있습니까? 여호와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적인 침체,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영혼의 어두움 속에서 벗어나는 그 일은 그런 어둠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런 어두움 속으로 들어갈 때에 마음이 하나님을 떠남으로써 깊은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음으로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새롭게 모아지는 마음의 변화없이 그는 결코 삶을 추스를 수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음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 시인은 오늘 이전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깊이 받았고, 그러한 사랑의 교제 속에서 더 없는 행복을 누리던 깊이 있는 영성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고 영혼의 깊은 어두움과 무기력이 깃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인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사랑과 상실해버린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는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의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그의 육체도 수행하고 있었으며, 그의 마음의 원하는 바를 향해서 그의 모든 삶이 집중되고 있었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찾으면서 몸으로는 쓸데없는 오락에 봉사하거나, 몸은 하나님을 찾는 것처럼 눈물을 글썽거리며 여호와의 성소를 향해 손을 들고, 마음은 이 세상의 쓸데없는 즐거움에 빼앗긴 외식하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마음과 그의 육체, 그의 온 정신과 모든 인격은 오로지 하나를 향해서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렌즈를 통하여 모아진 빛이 종이에 불을 붙게 하여 태워버리듯이 그의 마음과 생각과 인격과 모든 의식세계는 오직 하나로 모아져 있었습니다. 이전에 내가 받았던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주님과 누렸던 말할 수 없는 교제와 기쁨, 마치 아가서의 기자와 술람미 여인이 누렸던 그 아름답고 애절한 사랑이 깃든, 독점적인 하나님과의 교제를 지금 그는 온 영혼과 마음을 다해서 목말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정말로 정결하게 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청결하지 아니하면 누구도 하나님을 뵈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결함만 그 속에서 신령한 빛이 비취는 법입니다. 마음이 정결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기도해도 어느 수준을 넘어서는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정결한 사람들은 기도 속에서 항상 하나님을 뵈옵습니다. 마음이 정결한 사람들은 말씀 속에서 “이 말씀은 누가 와서 들으면 좋겠다. 이 말씀을 잘 적어다가 누구에게 들려줘야지. 이 테잎은 꼭 사서 아무개 지체에게 선물해야지”하는 생각을 벗어나서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다른 사람이 자신을 찌르고 녹이는 놀라운 세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정결, 순결한 마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순결 그 체가 소중한 것이 아니고, 성화 그 자체가 소중한 것이 아니라 그 순결한 삶, 거룩해져 가는 성화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으로 들어 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정결해지기를 더욱 사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사귐의 맛을 알면 알수록 점점 정결해지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더 정결해지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신령한 사랑과 큰 은혜를 더 깊이 알지 못하도록 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정결해집니까? 정결해지려고 싸워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 때마다 여러분들은 용기와는 어울리는 실패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일 하루도 한번 결심해보십시오. “내가 순결하게 살아야지. 정결하게 살아야지”라고 한번 결심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낙심하게 될 것입니다. 실패의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신이 스스로 자기와 싸웠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는 언제나 실패밖에 없습니다.
정결하게 하시는 분은 물론 성령이십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정결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왜 어떤 사람들에게는 역사하셔서 정결하게 하시고, 또 어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역사하지 않으시고 자기와의 싸움을 싸우도록 내버려두셔서 싸우려고 애쓰면 애쓸 수록 비참한 실수를 경험하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를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시인은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나니”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한 분, 그분이 자신을 향한 태도를 바꾸어 주시기를 목메어 기다리며 그의 온 마음과 인격과 모든 의식이 오로지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태도가 변하는 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의식과 모든 감각이 거기에 모두 매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결론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우리를 정결케 하시지만 하나니은 하나님을 향해 집중되어 가는 그 과정을 통해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정결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신비주의자였던 마이스터의 카르터 라는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 앞에 가졌던 그 마음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하루를 살아야 한다”. 신비주의자이기는 하지만 그의 그 말은 상당히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어떠한 원리를 우리에게 생각나가 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가졌던 그 처절하게 부서졌던 그 마음, 주님 없이 살 수 없다라고 하는 그 가슴 어린 고백,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만 하면 이 세상 모두에게 버림을 받아도 좋을 것 같은 그 하나님을 향해 집중된 마음, 그 마음을 기도 속에서도 유지하기 어렵지만, 기도하고 난 후에 삶 속에서 그 정신을 유지하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들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정신이 기도와 삶 속에서 함께 유지될 때,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니은 우리의 마음, 우리의 영혼, 우리의 삶을 정결하게 하셔서 당신이 만나 주실만한 그러한 깨끗한 마음으로 우리를 바꾸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삶의 초점과 기도의 초점이 하나되지 않는 삶, 하나되지 않는 기도는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기도의 초점과 일치하지 않는 초점, 그것은 하나님의 도움을 입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초점을 잃은 삶입니다.
시인은 먼저 그러한 상태로, 그런 마음의 상태로 여호와를 기다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소원을 아뢰고 영혼의 회복을 위해서 아버지 앞에 기도하거나, 절박한 여러분들의 문제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에 만약, 여러분이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면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오! 주님. 나 곧 내 영혼이 이것을 갈망하고, 이것을 위하여 기도하오니, 하나님 내 마음과 영혼의 중심을 살피시고 제 기도에 응답하소서”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기에 합당한 정결한 사람으로 놀랍도록 빨리 변해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 다음으로 시인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우리를 궁금하도록 만듭니다. “여호와를 기다리나니”. 여호와께서 어디로 가셨습니까? 하나님은 돌아다니시는 분이 아니라, 하늘 높이 계셔서 어디에나 임재하시며, 당신의 백성을 다스리고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수요일 밤에 모여서 예배하고 있는 동안에만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이런 예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심지어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안 계시기를 바라면서 어두운 죄악의 길로 한 걸음 성큼 옮겨 놓는 그 불행한 발걸음, 바로 그곳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누구도 그분의 면전을 떠나서 살 수 없고, 누구도 그분과 대면하는 삶 없이 그들은 결코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은 무엇을 기다린다는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들은 신자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가를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지 하나님은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삶을 모두 지켜보시고, 여러분들을 붙들고 계십니다. 이 사실이 여러분들에게 확실히 믿어지십니까? 여러분들이 주님을 버렸을 때에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붙들고 계십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고 있는 여러분들 중에 한 번쯤 이렇게 깊은 곳에 떨어져서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가 돌아온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거기서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붙드셨기 때문에 오늘 이곳에 나와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증언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주시는 것만으로는 완전한 자녀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붙드셔야 할 뿐 만 아니라, 우리가 주님이 우리를 붙들고 있음을 확실하게 확신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옛날부터 부모가 없는 아이들은 일단 색안경을 쓰고 보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엄마 없는 자식, 아빠 없는 자식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온전히 부모가 다 있는 집의 아이들도 잘못되는 아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청소년 범죄를 조사한 어느 보고서는 우리를 깜짝 놀라도록 만듭니다. 비행청소년의 33%정도는 아주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입니다. 우리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문제 가정에서 부모가 없거나 이혼한 문제의 가정에서 문제가 생겨나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간단합니다. 어디로 가든지 그 청소년이 그 아이가 아버지와도 관계가 되어 있고, 어머니와도 관계가 되어 있지만, 문제는 자신이 그 아버지의 아들, 그 어머니의 딸이라는 것에 대한 소속감을 느끼고 그 사랑을 부모도 사랑하고 자신도 그 부모의 사랑을 함께 붙잡을 수 없는 진정한 교제가 없기 때문에, 부모가 있어도 아무런 소용없이 빗나가는 삶을 살게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불변하시기 때문에 우리처럼 변덕스럽게 우리를 버렸다가 다시 건졌다, 죽였다가 다시 살리는 일은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신실할 때 주님을 신실하다고 진정으로 찬송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할 때에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감격으로 밀려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고 확신하면서 담대해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을 때에 그 사실이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그렇기에 항상 주님의 성품에 대한 지식은 우리에게 그 하나님의 성품에 어울리는 반응을 해야만 그 성품이 우리의 삶에 능력을 주고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시인이 기다리고 있는 여호와는 어떤 여호와입니까? 일방적으로 사랑하시는 그 여호와, 자신은 느끼지도 못하는 그런 사랑을 부으시는 여호와 하나님, 자신은 전혀 감지할 수 없는데도 맹목적으로 주님이 자신을 지켜주실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 시인은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계셨지만, 그러나 시인에게는 안계신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바로 곁에 계신 여호와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인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여호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자신을 향해서 태도를 바꾸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깊은 침체에 떨어졌습니다. 이유를 대고 핑계댈 것 없이 자신의 허물이었으며, 죄악이었고, 자신의 불순종이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참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교제의 달콤함을 잃어버렸고,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흘러 들어오던 모든 영광스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들은 산산이 부서져 버렸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면 새 힘이 솟고, 주님의 이름을 기억하면 거룩한 용기가 저절로 솟아오르던 때는 지나가고, 주님의 이름을 생각하면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두려움이 앞서고 숨어버리고 싶은 하나님의 이름을 생각하면 웃다가도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하나님의 이름이 심히 낯설게 된 그런 상황까지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다시 한번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 어떤 여호와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이전에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은혜의 동산, 말씀의 숲 속을 거닐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던 그 깊고 은밀한 때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의 폭풍이 몰려오는 때에도 시련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모두들 거꾸러질지라도 시인은 그 사랑의 교제로 말미암아 새로운 힘과 능력과 은혜를 공급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그 은혜를 통해서 그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알고 자신도 자기를 소중히 여기는 비결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모르기 때문에 인생을 장난하는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참사랑을 깨닫고 나면 우리는 아무렇게나 운명에 자신의 인생을 내동댕이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쾌락과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육체의 즐거움에 우리의 육체를 중독되도록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참사랑, 아버지께로부터 부어지는 그 거룩한 교제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인생에 대한 진지한 견해를 갖도록 만들어주고, 어떻게 하면 한정된 내 인생이 하나님 앞에 가장 보람있게 쓰여져서 주님의 마음에 내 생에 기쁨이 되고, 주님의 이름이 내 마음의 그림이 되었던 것처럼, 또한 내 이름이 하나님의 마음에 그리움을 아로새겨질 수 있는 하나님만을 위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끔 보면, 형편없는 사람을 내동댕이쳐지듯이 살다가 하나님 만난 사람들이 물불 가리지 않고 오로지 주님만을 위해서 사는 삶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그것이 무엇 때문인 줄 아십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충분히 삶이 얼마나 무모한 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삶이 얼마나 방향 없고 인생이 얼마나 목적이 없는 것이며, 목적 없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가를 고통을 통해서 깨달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참 목표를 발견하게 되자 미친 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기다리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그러한 하나님이었습니다. 주님과의 교제가 있고 주님의 마음이 시인 속에 힘이 되고 용기가 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에 그 하나님과의 교제는 언제나 시인에게 왜 살아야 하는 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기도하다가 은혜에 흠뻑 젖고 내가 정말로 비참한 죄인인데,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했나
왜 날 사랑하나
그러한 주님의 사랑이 이 쓸모없는 이 죄인을 사랑하셨는가를 깊이 느끼게될 때, 그때 여러분, 돌아가면서 “또,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나?” 이렇게 말합니까? 아닙니다. 오로지 무엇을 향해서 살 것인가가 너무나 명백합니다. 왜 나같이 쓸데없는 죄인을 수많은 실패와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께 했던 것처럼 했더라도 벌써 자존심이 상해서 내팽개쳐졌을 죄인을 긍휼과 사랑과 신실함으로 버리지 않고 사랑하실 그 사랑 때문에 내가 이곳에 이렇게 일체의 긍휼과 사유하심을 입어 오늘도 이 더러운 입술로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이 더러운 마음에 하나님의 참사랑의 빛이 느껴지도록 만들어주셨다고 생각할 때 그가 주를 위해서 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때 우리는 삶의 목표가 너무나 분명해 집니다. 다른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고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은 그 사람을 주님을 위해서 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또 억압받는 것은 그야말로 커다란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더라도 주를 위해서 살아야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결별하더라도, 사랑하는 남편과 이별하더라도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님을 시인이 잃어버린 것입니다. 단지 자신을 하늘에서 돌보아 주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 시인은 위로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그 이상의 무엇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지식, 그 전능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지켜주신다는 사실, 결국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진토와 같이 긍휼히 여기셔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다는 이런 모든 남아 있는 이야기, 옛날에 느끼고 들었던 이야기로는 이 시인을 만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시인에게는 지금 그 하나님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화해가 필요했습니다. 자신을 찾아와서 예전의 그런 태도로 자신을 긍휼히 여겨주시던 그 하나님을 지금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고대하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주님의 손으로 우리를 만지시는 그 하나님의 거룩한 터치,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대면하시는 그 하나님의 대면해주심 없이는 우리는 어떤 것으로도 만족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의 모든 기업을 우리에게 주어서 천사보다 뛰어나게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왕 노릇 하게 해주신다고 하실 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약속의 유업을 가진 자 답게 매우 특별한 하나님과의 교통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그것을 우리의 영혼이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런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다렸습니까?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여러분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를 잘 이해하시기 힘들 것입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하는 군대에서 보초를 서 본 사람입니다.
(예화) 저녁에 보초를 설 때에 근무표가 날라 옵니다. 몇 시에 자신이 보초를 서게 되는가에 대해서 먼저 관심이 집중됩니다. 제일 좋은 시간은 첫 번째 나가는 것입니다. 첫 번째 나가면 저녁에 출근해서 보초를 서기 위해 나갑니다. 빨리 서고 들어오면 아홉 시쯤 됩니다. 그러면 자면 됩니다.
보초는 돌아다니며 서는 것과 가만히 서서 서는 것이 있는데, 돌아다니며 서는 동초라 고 말하는 것은 그래도 조금 낫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서서 지키는 보초, 아무 움막도 없는 허허 벌판에서 수백 미터 간격으로 떨어져서 두세 시간을 보내야하는 그 보초는 제가 서보았지만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제일 좋아하는 것이 이른 저녁이고, 그 다음 좋아하는 것이 아침되기 직전입니다. 제 일 싫어하는 것이 두 시부터 네 시입니다. 그때를 왜 싫어하는가 하면, 이유가 두 가 지인데 두 시부터 보초를 서야 하니까 저 같은 경우에는 열두 시 40분이면 일어나야 했습니다. 그러니 일곱 시쯤 근무를 시작해서 아홉 시 정도까지 지내다가 열 시쯤 되 어 잠이 듭니다. 그런데 잠이 들려고 하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달프겠 습니다.
그런데다가 또 하나는 두 시부터 네 시까지가 가장 춥습니다. 추운 겨울에 벌판에 서 있으면 양말을 세 켤레나 신어도 밑에서부터 한기가 치솟습니다. 할 수 없이 제자리에 서 계속 걷습니다. 그러면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질퍽거리는 진창으로 변합니다. 오직 기다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고 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다음 보초가 빨리 와 서 나를 교대해주기를 기다립니다.
시인이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아침이 오면 이제 자신 혼자 성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성을 지키고, 자신은 그 의무에서 해방되는 때입니다. 그러나 그 의무에서 해방되지 않는 그때에는 얼마나 가슴을 조이는 긴장이 있는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온 성의 눈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적국이 쳐들어오면 아마도 파수를 서고 있는 자신을 제일 먼저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성의 모든 곳을 쉽게 점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린다”는 이 묘사는 시인이 그렇게 교제가 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상태 두 가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인내와 간절한 소원입니다. 저는 이 세상의 누구도 자신의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깊은 웅덩이와 같은 곳에 빠진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없이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은혜로 우리를 돌이키시지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끊임없는 인내와 간절한 사모함입니다.
그러나 이 인내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인내는 언제나 달콤한 인내라는 것은 없습니다. 언제나 이 인내는 씁니다. 더욱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어지지 않은 하나님과의 관계 앞에서 오로지 그분이 손을 내미실 때만을 기다리면서 눈물 흘리며, 묵묵히 하나님의 자비를 호소하며 기다리는 것은 실로 죄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인내입니다.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침체에 들어가는 것은 순식간인데 나오는 것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수시로 “기도해야지, 하나님의 말씀을 똑바로 들어야지, 예배에 나가야지, 죄를 버려야지”하고 말합니다. 정답은 다 결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아침 구름과 같은 인내입니다. 오늘은 있지만 그러나 내일은 없고, 하루 이틀은 되지만 삼일이 지나고 나면, 찾기 어려운 작심 삼일의 결심입니다.
자신은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을 거절하고 주님을 모욕하는 삶을 살았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아직까지 손에는 불순종한 범죄의 피가 남아 있음에도 하나님께 용서해달라는 한마디의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 아무런 대답이 없으시다는 이유 때문에 안 된다고 집어치우고 돌아가는 것이 죄인인 우리의 태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에게 인내를 가르쳐 줄 때 어떻게 가르쳐 주었습니까? 인내할 때에 누구를 생각하라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그렇게 오래 참으셨던, 그리스도 예수의 오래 참으심을 기억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서 얼마나 오래 참으셨습니까?” 그렇게 오래 참으시는 인내하시는 사랑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아마도 오래 전에 천국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정리해고 되었을 것입니다.
오로지 무엇 때문에 가치가 있었습니까? 용서받고 나서 일생을 주님만을 위해서 살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를 목회 하면서도 많이 느꼈습니다. 어떤 때는 배신감이 느껴집니다. “야. 참. 대단하다. 그 캄캄한 금방 죽어버릴 것만 같던 인생의 위기에서 하나님이 건져주셔서 저만큼 살게 해주셨더니 그 동안 참으로 많이 컸구나! 아, 이제는 저렇게 교만해지고 주님없이 잘 살 수 있을 것처럼 행하는 구나! 옛날에 어려웠을 때는 오히려 정말로 자신이 주관적인 신앙에 빠져있고, 이제는 그런 어려움에서 벗어나고 보니 객관적인 시각에서 자신의 신앙을 볼 수 있다고 말합니까?”
저는 그런 사람들이 일초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면, 자신들이 얼마나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금방 알 것 같습니다. 제가 그런 지체들을 위해 한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말씀을 전했는데 그 사람만을 위해서 말씀을 전했습니까? 어차피 그런 사람들이 없었어도 전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지 않았습니까? 무엇을 해준 것이 있습니까? 그저 남들 들으라고 전해준 그 시간에 구석에 앉아 한 숟가락 떠먹고 간 것밖에 더 있습니까? 무엇을 해준 것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저는 여러분들을 위해서 해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제 마음이 이렇게 아프고 배신감이 느껴질 때에 우리에게 아들을 주시고 모든 좋은 것을 아낌없이 선물로 주셨던 그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 까요? 그런데 참으셨습니다. 왜 입니까? 주님의 인내가 끝나면 무서운 심판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그렇게 버리실 수는 없으셔서 인내하고, 참으시면서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불순종과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이제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갔지만 그곳에는 진정한 행복과 만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때, 마음은 하나님께로 돌아왔지만 아직 사람도 영혼의 더러운 부분도 완전히 정결해질 정도로 하나님을 향해 집중되지 않는 그 사람인 우리를 향해서 주님이 잠시 침묵하시고, 부르짖는 기도에 잠시 응답하지 아니하시기로 우리가 그 하나님을 원망하고 탓할 수 있겠습니까?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저는 가끔 이럴 때가 있었습니다. 잘못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도 아무런 기도의 응답이 들리지 않고, 남들이 볼 때는 대여섯 시간 엎드려 있는 것 같아도 아무 기도도 없이 하나니 앞에 그냥 침묵하면서 엎드려 있어야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에 저는 스스로를 많이 타일렀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제게 침묵하시는 것이 옳습니다. 주님, 제가 부르짖어도 응답하지 아니하시는 그 하나님이 옳습니다”.
바로 시인이 그것을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다른 시편에서 무엇이라 말하고 있습니까? “주께서 판단하실 때에 나는 주를 의롭다 하리이다”. 주님은 의로우십니다. 주님이 나를 향해서 행하시는 것은 잘못된 것이 없고, 부당한 것이 없으며 우리가 원망을 해야 될 정도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잘못하시는 법은 없습니다. 죄인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살아가는 파리하게 되어버린, 병든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놀라운 인내로 나타났는가를 배우고, 침체에 빠진 하나님의 백성들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인내를 배우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방법을 깨닫고, 그것을 알게된 다면 얼마나 커다란 위로를 받겠습니까?
우리를 이렇게 간절히 사랑하시지만 주님은 우리가 더 정결해지기를 원하시면서 우리 몸과 마음이 더 완전히 일치가 되어서, 오로지 깨뜨려진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고, 어두움 속에서 벗어 나오기를 원하는 그 한가지 소망이 온 영혼의 시선이 고정되기를, 그런 고정되는 기간들을 통해서 우리를 더 정결해지기를 주님은 목적을 가지시고 기다리시면서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사랑은 인내를 낳습니다. 사랑 없이는 참는 것이 불가능하고,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이 깊으면 그 사랑의 깊이만큼 참는 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또 한가지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은 사모함입니다. 시인은 간절한 목마름으로 그 하나님, 그 여호와를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자신을 향한 태도를 바꾸시고, 이전에 자신이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누렸던 그 진정한 행복과 사랑으로 자신을 데려가 주시기를 갈망하고 목말라하며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시인은 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렸던 그러한 사랑 없이 일평생을 호화로운 왕궁에서 권세를 누리면서 사는 것보다는 한순간이지만, 움막과 같은 곳에서 주님이 자신을 사랑하시는 뜨거운 가슴에 안겨서 임종하는 것을 더 원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속에 있는 진정한 소원입니다. 그러한 사모함을 이 시인은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라고 묘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희망한다는 것과 갈망한다는 것은 비슷하기는 하지만 같은 것은 아닙니다. 희망한다는 말과 갈망한다는 말은 같은 계열에 속한 말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같은 말은 아닙니다. 희망하는 것은 많은 희망이 있는데, 그 희망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이루어지면 좋고, 이루어지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별 지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갈망한다는 것은 그것이 이루어지면, 다른 아무런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괜찮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른 모든 것들이 아무리 아름답게 이루어져도 그에게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하는 것, 그것이 바로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불순종과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야 그런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만 커다란 행복인가를 깨달았고, 그것 없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처참한 죽음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헐떡이는 사슴과 같이 그는 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갈망하며, 그 여호와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갈망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있습니까? 뜨뜻미지근한 신앙을 오래도록 가지고 있으면서 문제라고 느낄 뿐,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평생 그런 식으로 신앙 생활하다가 세상에서도 마음먹고 타락해보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마음먹고 정결한 삶을 살아보지도 못한 채, 세상에서도 낙인찍히고 하나님 날에서도 낯선 자 취급을 받는 이방인과 같은 삶을 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분명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꿈은 세상에 있습니까, 하나님께 있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까, 이 세상과의 관계입니까? 여러 달이 흘러가도 도무지 가슴을 찢는 것 같은 간절한 한마디의 기도 없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도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기도 속에서 자신에게 은혜를 주시는 징표 없이, 그러한 위험한 상태 속에 놓여있는데도 전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낳고 꾸준히 교회나 출석하는 그러한 생동은 사실상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만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시간이 되면 정류장 앞에 정시에 도착하는 버스를 기다리는 것 같은 마음으로 여러분은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는 결코 정결해지지 않을 것이며, 그는 결코 하나님을 뵈올 수 없을 것입니다.
시인을 보십시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간절한 인내와 사모함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기다림, 이런 사모함, 이런 인내를 가지고 마치 불의한 재판장 앞에 나아가서 자기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목메던 억울한 과부와 같이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더 이상 하나님과 불화한 관계 속에서는 인생을 계속할 힘이 없습니다. 저의 웃음은 거짓되고, 잠시 스쳐가는 저의 인생의 기쁨은 경박한 것뿐입니다. 하나님, 교회당에 오면 그것도 은혜가 넘치는 날이면, 피할 수 없이 마주하게되는 이 하나님과의 관계, 그 앞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는 대신 좌절을 경험해야 하는 이 신앙생활을 저는 계속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 주십시오. 저를 만나주시든지 제 인생이 이제 족하오니 데려가십시오. 그런 마음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같이 하나님을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이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에게 넘쳐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쓸데없는 돌이킬 수 없는 옛일에 대한 후회에 수없이 사로잡히는 것보다 훨씬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인이 이러한 목마름과 간절함으로, 이런 인내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오래도록 참고, 그렇게 간절한 사모함으로 부르짖어도 대답이 없는 그 하나님을 향해서 탄원할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따라서 믿음입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가 고통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신다는 그 마음입니다.
강단에 올라오기 전에 잠시 어떤 작가의 책을 읽으면서 깊은 은혜에 잠겼었습니다.
(예화) 볼리비아에 선교사로 갔던 목사님이었습니다. 전직이 외과의사였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미개한 곳이어서 아들이 넘어졌는데 턱이 찢어져서 너덜너덜하게 되어버렸습니다. 내버 려두면 그냥 병신이 되게 생겼습니다. 병원도 없습니다. 약도 없거니와 약을 가지고도 해결이 안됩니다. 찢어져서 너덜너덜한데 내버려두면 완전히 병신이 됩니다. 아주 어린 아이인데 어떻게 합니까? 재봉실과 바늘을 가지고 부인과 함께 붙들고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갓난아이의 살을 마취도 없이 꿰맸습니다. 애는 죽는다고 난리를 쳤습니다. 그 런데 그렇게 해서 꿰맸습니다. 외과의사의 직업이 무엇입니까? 배를 가르고, 꿰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자신의 아이를 꿰매는데 손이 후들거리더랍니다. 생살에 바늘을 찌르 는 것도 고통스러운데, 찌른 다음 긴 실을 잡아 당겨야 합니다. 애가 어떻게 됩니까? 그런데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분이 말하는 이야기는 잠깐의 치료를 눈물겹게 한 다음 에 자신이 확신이 깨달을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고통받는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실까요?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제물되실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주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우리들이 당하는 대부분의 고난은 우리들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 고난의 의미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지만 주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의 현장을 지켜보시면서 아파하셨던 그 마음이,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고통받는 상황에서도 계속된다고 확신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복을 부르짖을 때에 주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이 없어서 좌절하고 아파하는 이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파하실까? 결국은 하나님이 무엇인가 이 침묵 속에서 내게 이루시고자하는 일이 있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나를 기다리게 하시고 인내하게 하시고, 사모함이 극에 달하게 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시기는 정할 수 없지만 이렇게 주님을 향해서 인내하며 사모하는 사람들을 결코 하나님이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말보다도 애매모호한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호와를 기다린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한 태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오늘 시인은 우리의 이런 질문에 대해서 아주 명쾌하게 답하고 있습니다.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 도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지금 비록 스스로의 죄와 불순종, 혹은 아직까지 부서지지 아니한 자아와 무지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진 삶을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그 사랑을 회복하기를 간절히 갈망하고 있다는 그 모습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습니까? 물론, 열렬하고도 간절히 기도하는 것으로서 여러분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절박하게 찾고있는가를 잘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시인은 그것도 오히려 두 번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간절히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는 그 갈망입니다. 주님의 그 목소리 그것을 듣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포기할 수 없고, 체념할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중의 어떤 한 사람이 상대방을 향해서 잘못해서 그 사람의 마음을 심히 아프게 하고 양심의 가책을 끊임없이 느낄 때에 그 사람에게 있어서 최고의 위로는 무엇입니까? 끊임없이 양심의 가책과 죄의식을 느끼게 해주는 그 사람이 어느 날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린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무엇을 회상하고 있는 것입니까? 다른 것이 아니라 이전에 하나님과의 한없는 평화를 누렸을 때에 이 시인이 가장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때에는 주님의 말씀이 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시편 130편이 만약에 다윗의 시가 틀림이 없다고 확정한다면 다윗의 생애서 하나님이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습니까? 범죄하고 하나님을 등지는 순간 그런 신령한 음성이 들리는 그 세계가 사라졌습니다. 그에게 가장 그리운 것은 바로 그것이었을 것입니다.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와 같은 기름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주님의 이름을 기리며 살아갈 때, 때로는 주님 앞에 나아가 물을 때에 들여오던 감미로운 하나님의 음성, 어둠 속에서 그 말씀을 빛이 되었고, 캄캄한 밤길에 그 말씀이 발에는 등이 되고 발에는 빛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어떤 식으로 인생을 살아왔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가족들의 사랑도 별로 받지 못한 버림받은 자와 같이 잡초처럼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의 결혼도 실패했습니다. 수많은 원수들과 대적들에게 에워 쌓인 삶을 살고, 정치가가 되고자 하는 꿈을 꾸지도 않았는데 정치의 길로 들어서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때에 마음둘 곳 없었던 다윗의 유일한 위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취미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고, 특기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주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세계를 통해 들려오던 하나님의 말씀, 선명하게 들려오던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던 그 때를 목마르게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리고 신음하고있는 이 영혼의 상태도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를 용서하나니, 너는 이제 이렇게 행할 지니라”하고 말씀하시는 하나의 말씀의 재개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화해가 새롭게 시작되고, 과거에 하나님 잃어버린 어두움의 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태도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되기를 간절히 갈망하고 있습니까?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도 간절하게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다가오셔서 여러분들에게 무엇인가를 들려주시고, 여러분들의 삶을 확정지어주시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주님이 내게 말씀하시고, 그 말씀이 내 영혼이 양약이 될 수 있고, 주님이 내게 아무리 어려운 명령이라도 다시 달콤하게 내 영혼 속에 속삭여 주시고, 다시 한번 부르심을 주실 수 있다면 내가 주님을 위해서 할텐데”하는 사모함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여러분, 어떠한 인생의 어려움과 시험 속에 있어도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한 우리는 희망이 있고, 주님이 말씀하시고 있는 한 주님은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여러분, 하나님께 무릎을 꿇으십시오. “하나님, 저를 버리셨습니까? 저를 완전히 잃어버리셨습니까?” 기도해보십시오. 다른 기도는 응답하지 않으셔도, 그 기도는 주님이 응답하실 것입니다. “아니다. 내가 택하고, 너를 지명하여 불러서 내 것이 되었는데 내가 어떻게 너를 버리겠느냐? 다만 나는 네가 지난날의 불순종과 죄로 말미암은 더러워진 죄를 씻어버리고 정결한 사람으로 내 앞에 나오기를 원하노라”. 주님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런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그분이 어떤 말씀으로 우리를 새롭게 깨우실 지를 소망하며 목말라하는 것, 그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며 주님이 반드시 나를 돌아보실 것이라는 신념 속에서 매일매일 주님을 찾는 것 이외에 깊은 데에 빠진 사람에게 진정한 대안은 없는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이 건져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6.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소망하라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 저가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리로다(시130:7上)
시인은 깊은 데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고,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한 기다림과 목마름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부르면서 이 시인은 하나님을 바라라고, “여호와를 바랄지어다”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만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만났느냐고 물을 수 있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았던 사람들만이 사람들에게 당신이 진실로 하나님을 찾고 있느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인은 비록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불순종 때문에 잠시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를 잃어버리고, 깊은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기는 했지만, 이 시인은 그 어둠 속에서도 오로지 하나님만이 자신의 진정한 희망이며, 자신의 참된 소망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일한 희망이며 소망이 되어주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체험이 필요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보는 사람들에게 열어주시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축복, 그 교제의 통로를 타고 내려오는 하늘의 신령한 은총을 맛보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바랄만한 가치가 있는 분으로 이스라엘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 이야기가 신앙의 고백이고, 시이기는 하기만, 그러나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라고 말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인의 그러한 권고를 들었더라면 얼마나 마음이 상했겠습니까? 시인이 보기에는 참된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단지 하나님을 믿는 습관에 익숙해져서, 그냥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며 살아가는 그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라, 전심으로 하나님을 바라고 바래서 그 사람의 초점이 하나님께 있는 그러한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라는 유명한 책을 남긴 「토마스 아 켐피스」를 가까이 에서 지켜본 그 동시대의 사람들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온 몸과 마음이 하늘로 빨려 올려간 채 간신히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몸은 이 땅에 살지만 마음은 거룩한 하나님과의 교제에 목마르고, 그 하나님의 참사랑 속에서 사는 그리스도인,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이 백성들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바란다”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관심을 갖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분명히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삶의 초점이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으며, 살아가는 모든 삶의 하나 하나의 삶이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으로 이어지는 삶을 여기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읽은 책에는 어느 시대 사람인가는 분명하지 않은데, 「로렌스」라는 수도사를 예를 들면서 저자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 놀랍게 변화된 다음에 주님을 순결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성도로 변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가 제일 하기 싫은 일이 설거지였는데, 수도원에서 설거지 담당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래서 일평생 해보지 않은 가장 혐오하던 일을 하면서 중대한 변화를 경험합니다. 그것은 그의 고백에 따르면 이제껏 그가 인생을 살아온 것은 모두 나를 위해서 살아온 인생이었는데, 주님을 만나고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가를 깨닫고, 그분을 너무나 뜨겁게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자신의 마음속에 이일이 주님이 맡기신 일이라고 생각되니 그릇 하나 접시 하나 닦는 일이 그렇게 감격적일 수가 없습니다. 수도원을 지나다니면서 지푸라기 하나 줍는 일이 그렇게 감격스럽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이 바라시는 삶입니다. 이런 것이 주님을 향하여 사는 삶입니다.
저는 지금 신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신비는 신비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교회에 나왔습니다. 편안하십니까? 직장에서는 고달프셨습니까? 잠시 편안한 시간이 끝나면 또다시 한숨을 쉬면서 고달픈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까?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하는데, 교회당에 와서만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 참, 하나님이 계셨었지”. 그것도 교회당에 와서 은혜를 받는 사람만 하나님을 바라보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이 예배 중에도 많습니다.
이곳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라는 것은 삶의 모든 초점이 변화되어서, 세상에 초점을 맞추어 나의 편안함과 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었던 삶이 모두 하나님 안에서 부서져 그는 거룩하신 그 하나님, 그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진 삶. 여러분, 교회에서 영혼을 섬길 때에는 단 마음으로 섬기고, 그 영혼을 섬긴 이력서가 적어도 피로 쓰여진 이력서가 되어야 합니다. 눈물로 쓰여진 이력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직장에서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한 달의 월급을 이천만원씩 받고 최고급 승용차를 따고 다니는 대우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단지 그 보수를 위해서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회사의 노예이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이 시인이 지금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진 인생을 살도록 이스라엘을 부르고 잇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그 초점이 잠시 흐려졌습니다. 그래서 깊은 곳에 떨어지게 되었고, 그 심히 깊은 곳에서 탄식하며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교제를 그리워하며 울부짖는 가련한 처지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타락이 무엇이겠습니까? 정말로 술마시고, 장고치고, 노래하며, 성적인 방종에 흐르는 것만이 타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들 가운데는 서슴지 않고 그런 죄악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많지 않습니다. 참된 타락, 하나님의 자녀들의 타락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던, 그 놀라운 교제의 특권을 상실하고 살아가는 것이며, 그것보다 더 나쁜 것은 그러한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를 잃어버리고도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화) 제방에 두 주전에 예쁜 양란 하나가 들어왔는데 잘 보살피고 많이 사랑을 해 주 어도 결국 이 주 후에 죽어버렸는데 문제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 졌었어도 했빛 이 없었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을 깨달은 이야기.
제가 그것을 보면서 또 한번 깨달았습니다. “아 그렇구나! 사람으로부터 아무리 사랑을 받고, 정성을 기울기고, 매일 오면 한번씩 들여다보고, 대화를 해주고, 기온은 맞춰주어도 햇볕이 없으면 안되는구나?” 그것을 보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이 만드신 미물도 햇빛을 못 보면, 다른 모든 조건을 갖추어 주었고, 영양제까지 놓아주어도 저렇게 힘을 잃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아야 사는 신자들의 경우에는 어떠하겠는가?”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난 때문에 스러져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결핍 때문에 죽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랑하는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고독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고, 그의 친절한 교제로부터 멀어질 때, 그는 슬픈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모두 잃어버리고, 마지막에는 빈 털털이가 되어서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과 같은 느낌을 받고, 세상도 자신의 본향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서, 두려움이 동반된 커다란 고독에 직면하게 될 때까지 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가하는 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시인은 오늘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한때는 높은 곳을 뛰어 다니는 사슴과 같이, 그렇게 웅덩이가 아닌 아름다운 곳에서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반석이신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으며 주님과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던 적이 있는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사랑과 그 교제를 잃어버리고, 깊은 곳에서 탄식하며 울부짖고 있는 이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땅히 바라보아야 할 하나님을 바라보는 대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는 바라보지 말아야할 것들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는 불순종하게 되었으며, 범죄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택하는 대신 하나님 아닌 것들에 대한 사랑을 택해서 주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리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 시인은 자신의 뼈아픈 실패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아직도 회복되지 못한 채, 자신처럼 하나님이 아닌 것들, 여호와가 아닌 것들에 대해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서 “너희는 여호와를 바라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없이 살 수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품을 떠나서 살 수 있습니까? 우리의 영혼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간절히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영혼은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의 인생의 최고의 가치로 두고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영광과 잠시 있다가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욕망을 갖도록 만들어주는 대상들의 아름다움은 마치 얼음과 같습니다.
물이 얼면 어떤 얼음은 얼고 녹아, 이즈러진 얼음이 있고, 낮고 평평한 얼음이 있지만 결국 그 본질은 따듯한 태양볕 아래 모두 녹고, 평평한 물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것은 잠시 있는 것이요,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가장 소중한 분임을, 그리고 우리의 가장 커다란 행복은 그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언제나 우리가 부르면 하나님의 대답하시는 음성이 들리고, 언제나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을 향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고 반응할 수 있는 우리가 있는 그러한 관계, 그래서 그 하나님과의 평화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삶,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영원히 행복할 수만도 없고, 영원히 불행한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자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사는 그 기쁨입니다. 주님의 눈앞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에 만족하고, 주님의 등뒤로 돌아가야만 겨우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을 우리의 분깃이 아닌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변함없이 하나님을 의뢰하고, 바라보며 살 수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만나고 깊이 변화받고 나서 제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것들 중 가장 첫 번째로 달라진 감각이 돈입니다. 돈을 한 움큼 쥐었다고 합시다. 특별히 쓸데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별로 그런 일이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에게는 갑자기 필요하지 않는 돈이 이렇게 생겨도 쓸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분에 넘치는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돈을 가지고 향락을 즐기는 것은 더더욱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이 돈을 가지고 분에 넘치는 영화를 누리고, 향락을 즐길 수 있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그 물질 자체가 하나님만을 바라는 우리의 삶의 균형을 모두 파괴해 버립니다.
그렇기에 초연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차피 제가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은 이런 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평화와 참된 기쁨을 소유하는 그 순간, 이제는 우리의 것이 아닌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질을 어떻게 쓰는 가를 보면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삶의 초점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만 고정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인이 그런 삶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 누릴 수 있는 허락된 수많은 즐거움, 그것을 바라보는 대신 하나님의 등뒤로 돌아가서 숨어야만 겨우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을 택한 대가로 그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사는 삶을 잃어버렸습니다.
에덴 동산에 수많은 실과가 있었는데 왜 아담과 하와의 시선은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금하신 그 실과에 꽂혔을 까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즐거움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바라며 살지 않는 신앙인 것입니다.
백 날을 고민해봐야 쓸데가 없습니다. 이것이냐 아닌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삶의 모든 초점이 이렇게 변화되고, 자신이 이렇게 살려고 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 안에 있는 진정한 행복과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왜 사람들이 아무리 예수를 오래 믿어도 성화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거룩해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간단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면서 살면 거룩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동안 그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유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거룩과 하나님과의 평화는 매우 밀접합니다.
시인이 이스라엘을 향해서 여호와를 바라라고 말하는 것도 결국은 그렇게 하나님과 대면하며 살 수 있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렸으면서도 자신이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또 죄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하나님과 평화하다고 말하는 것도 모두 거짓말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고 그 평화를 통해서 맛보는 하나님의 참사람이 우리의 마음속에 부어질 때 우리는 더 뜨거운 갈망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싶은 절박하고 간절한 소원을 갖게 됩니다. 그것을 오늘 시인이 여기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사람으로 분류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에 “그래 네가 열린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 이 어렵고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그 모습이 내가 보기에는 나를 바라보며 사는 것 같구나!” 하나님이 그렇게 인정해 줄 수 있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우리는 시인이 그런 삶을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는가를 되새기면서 우리가 그런 삶을 되찾고 혹은 그런 삶을 잃지 않도록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굳건히 해야겠습니다.
이어서 시인은 구체적으로 왜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할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인자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인자하시다 라고 할 때에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훨씬 더 다가오는 감격이 달랐을 것입니다.
저는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고 추측합니다. 우선은 이스라엘의 상황입니다. 우리는 오랜만에 만났을 때에 인사가 무엇입니까? “안녕하십니까”가 아닙니까? 저는 그 말을 좀 바꿨으면 참 좋겠습니다. “안녕하세요?”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안녕 못했을 텐데. 그 말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거기에서 안녕이 “샬롬”입니다. 정확한 번역입니다. 평화와는 또 다른 개념입니다.
얼마나 정확한가는 모르지만 어떤 작가가 쓴 글에 보니,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 생긴 인사법이라고 합니다. 밤사이에 너무나 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나기에 “안녕하세요?”, “밤새 별 일없었습니까?”라고 인사하는 것입니다. 인사할 때 저도 무의식중에 “요즈음 별일 없습니까?”라고 인사합니다. 그것은 별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는 말입니까?
이스라엘은 오랜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에 그런 인사를 해야 할만큼 매일매일 불안한 삶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애굽에서도 그랬습니다. 애굽에서의 행복과 불행은 오늘 바로의 기분이 좋은가, 나쁜가에 달려있습니다. 바로 뿐만이 아니라 그 밑에서 채찍을 휘두르면서 자신들을 부리는 사람들의 기분 여하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정확한가는 모르겠지만 가벼운 죄를 지었어도 판사가 부인하고 싸우고 온 날은 에누리도 없다고 합니다. 아무리 애절하게 호소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열린 교회에 와서 수요일에 은혜받고 “인간이란 참으로 불쌍한 존재이구나”라는 생각이 가득 차있을 때 마음이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입니다.
지도를 놓고 보십시오. 이스라엘이 지역이 위에서 애굽으로 진출하는 통로이고, 남쪽에서는 애굽 세력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진출하는 통로입니다. 바로 그 골목길에 이스라엘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나라와 비슷합니다. 일본 사람이 중국으로 가는 길목이고 위에서는 해안으로 나가는 교두보입니다. 역사 이래로 오천 몇 번의 전쟁을 치렀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헤아릴 수 없는 전쟁을 치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러했습니다.
그런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인자하시다”라고 할 때에 그 필요를 어느 민족보다 많이 느꼈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의 실제 삶의 정황과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또 하나는 그 당시의 신들입니다. 이스라엘도 수시로 우상을 섬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우상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끝까지 지켜주었습니까? 하나님을 배반하면서 우상을 섬겼지만 돌아오는 대가는 하나님의 진노와 자기가 사랑했던 우상도 자신을 버리는 배반이었습니다. 신앙의 순결을 잃어버리고 까지 우상을 섬겨보려고 했지만 다가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끊어지고 우상으로부터도 버림받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에 쓰리요. 밖에 버리워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니라”. 집안에서도 필요없어 던져버리고, 밖에 던져지니 밖에서도 필요없어 밟혀 버립니다. 그것이 소금입니다.
소금을 많이 먹으라고 하지 않습니까? 많이 먹으면 안된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자살 할 때에 소금을 먹습니다. 그렇게 짠것을 먹으면 나쁜데도 역시 소금의 가치는 짠데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신앙의 정절을 잃어버릴 때에 그렇게 유린당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 속에서 냉담하기 짝이 없고, 잔인하기 짝이 없고, 그리고 겉으로는 당장 자신들을 복줄 것처럼 현혹하지만, 일관성없고 자비심도 없는 그런 이방의 신들에 대한 수많은 경험들이 생각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소망을 갖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절박합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에게 이것을 기대하라고 이 성품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들은 중요한 영적인 진리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멀어져서, 깊은 웅덩이에 빠진 것 같은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 어떻게 무엇을 사다리로 삼아서 그곳을 벗어나야 하는가를 보여 줍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믿음입니다. 이유를 댈 수 있는 것은 대체로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매우 가치가 적은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이유를 대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이 참된 사랑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데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까?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는 부모를 찾아가서 “당신, 당신 딸을 사랑합니까?” “예, 사랑합니다”. “왜 그렇게 사랑합니까?” “귀엽잖아요”. 그만큼 세상에 귀엽지 않은 아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공부를 잘 하잖아요?” 일등도 못하는데 그런 것을 가지고 말합니까? 그렇게 발견한 여러 가지 이유는 사람의 눈으로 보고 발견한 것이지, 그런 것들을 발견했기 때문에 사랑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자식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입니다.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이 붙들고 그 웅덩이에서 걸어나올 수 있는 유일한 사다리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영적인 깊은 침체에 빠졌을 때에 사단은 우리는 그곳으로부터 우리를 헤어 나오지 못하도록 집요하게 방해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수시로 와서 꽂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정죄되었다는 의식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을 찾아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양심의 송사, 이런 것들을 우렁차게 들려주어서 좌절하도록 만듭니다.
정말로 이런 깊은 침체에 빠져서 믿음을 가지고, “그래 나는 부족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인자한 분이시니, 하나님이 그 사랑으로 나를 받아주실 거야”라고 붙잡으려는 순간, 또 양심 한쪽에서는 송사가 들어옵니다. “이런 뻔뻔스러운 것, 네가 무슨 짓을 해서 이렇게 떨어졌는가를 생각해보아라. 그러고도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줄 아느냐?”. 이런 송사가 화살같이 날아옵니다. 그래도 “나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어”하는 순간 화살이 쏜살같이 날아와 꽂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꽂히는 그 순간 믿음은 와르르 무너져 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사다리가 우지직하며 부러지면서 저 깊은 웅덩이 속으로 곤두박질 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올바르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영적인 침체에 빠진 사람들은 누구나 마찬가지이지만 진리의 빛의 도움 없이는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왜입니까? 마귀의 계략은 매우 치밀하고 정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우리를 어떻게 공격할 때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대한 사실까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포자기하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 중에도 분명하게 깊은 웅덩이와 같은 영적인 침체에 빠져서 하나님과 누렸던 그 따뜻한 사랑을 잃어버리고, 이 설교를 들으면서 마음속으로 절규하고 있는 지체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압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런 노력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피나게 노력했습니다. 어떤 때에는 정말로 거의 다 올라옵니다. 그러나 사다리가 두 조각, 세 조각이 나면서 곤두박질 칩니다. 그리고는 더 큰 마음의 상처를 깊이 받습니다. 회복하려는 몸부림이 크면 클수록,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 우리는 더 큰 침체 속에 떨어지게 됩니다. 거기에서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되는 데 하나는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과, 다른 하나는 더 이상 무엇이 나빠지겠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점점 더 강팍해지는 것입니다.
몇 번 경험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완전히 자포자기하고 맙니다. 그러나 완전히 자포자기 할 수는 없습니다. 잠깐은 아무런 희망이 없는 자포자기가 되고 말지만, 이 하나님을 만난 의식이 살아 있습니다. 옛날에 하나님과 누렸던 완전한 사랑, 빛 가운데로 이끌어들이시던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주님의 그 체취. 그것을 늘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입으신 그 옷을
나 만져봤도다
그 향기 내 맘에 사무쳐
나 눈물 흘리네
그 어떤 것으로도 그 이전에 누렸던 하나님과의 그 따듯하고 기이하며, 순결한 교제를 누리지 못하는데서 오는 공허함을 메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완전히 절망했다가 이 속에서 그 욕망을 고개를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음속에서 점점 가득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하나가 없으면 절대로 그 깊은 수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인자하시다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신세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기대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참사랑이 인자하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그 인자하신 성품이, 그 인자함이라는 사다리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용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타고, 그 믿을 타고 영적인 깊은 침체에서 벗어나기를 하나님께서 너무나 간절히 소망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양심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음성이 있습니다. “벼룩도 낮이 있지. 며칠 전에 그렇게 콧물 흘리며 하나님 사랑받게 해달라고 돌아가 놓고 그 올라간 사다리에 발자국도 지워지지 않았는데, 지금 또, 하나님의 인자하심 밖에는 소망이 없나이다 라는 식으로 네가 너의 범죄와 불순종을 정당화해도 되느냐?” 이런 양심의 송사가 들려옵니다. 이것이 성령의 음성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죄지은 자를 얼마나 용서해주어야 되겠느냐고 묻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일흔 번의 일곱 번씩이라는 표현을 빌어서 한없이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 자사신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안 인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비하심을 소망으로 삼고, 내가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주님이 나를 용납해주시리라는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을 이용하는 횟수가 너무나 잦다고 해서 멸시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언제나 당신 앞에 나아가 화해의 길을 열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의지해서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화해를 새롭게 회복하고 사는 그 일을 위해서 당신의 인자하신 성품이 우리들에게 이용되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시인은 이것밖에는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그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영혼의 어둠 속에서 깨달았습니다. “이전에 하나님을 잘 믿었던 과거도 없고, 이전에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행한 업적에 대한 추억도 없고, 오로지 아는 것은 나는 하나님 앞에 범죄한 죄인이며 더러운 죄인이며, 주님이 나를 버리셔도 마땅하지만 단 하나 희망을 거는 것은 하나님이 인자하신 분이시라는데 내 소망이 있다. 만약에 하나님이 나를 거들떠보시면 그것은 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면, 하나님만이 찬송받으실 유일한 분이시다”. 이런 고백을 시인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아가페는 영원히 하나님을 바라며 사는 사람들의 양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새벽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라는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육신을 떡가루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오늘도 잊지 않고 계시며, 사랑하고 계시다는 자비의 표증이었습니다. 아침마다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하나님이 이 민족, 이 백성을 한없이 아끼신다는 사실을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이 있었던 조상들은 아마도 눈을 뜨고 아침 이른 새벽에 나아가 사면을 두루 볼 때, 이스라엘 진의 사방에 하얗게 내린 그 만나를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직 하나님을 찾기도 전에 하나님이 오셔서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내리신 것입니다. 다른 시간이 아니라 새벽이었다는 이 사실 자체도 커다란 구속자적인 의미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인간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제대로 되려면 상황이 이래야 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보다는 먼저 일어나야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진 사면에 모두 둘러앉아서 “주여, 오늘도 우리에게 만나를 주시옵소서”. 그 소리를 듣고 하나님께서 보좌에서 잃어나셔서 “너희들이 오늘도 찾는구나! 내가 주지. 자 만나야 내려라”. 그것이 정상이 아닙니까?
(예화) 육군사관학교에서 방위병으로 근무할 때 하루는 늦어서 열심히 뛰어가는데 헌병이 세워 배를 작대기로 쿡 찌르면서 하는 말이 “너, 별 넷이야?” “아닙니다" “야, 임마, 별 셋도 한시간 전에 출근했는데 방위 주제에 이제와. 네가 별 넷이야?”
하나님이 먼저 오셔야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저 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안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여! 내일도 만나를 주시옵소서”. 그렇게 했겠습니까? 몇 번은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깊은 잠을 자는 그 시간에 하나님 홀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여러분들이 “하나님 이제는 인자해지십시오, 이제는 제발 인자좀 해주십시오. 주여! 믿습니다. 제 기도가 당신을 변화시킬 줄 믿습니다”라고 기도해서 인자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입니까? 그것은 단순한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에게는 사악한 죄와 그 우리를 향한 불붙는 뜨거운 사랑을 배신한 허물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없이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어져서 이제 당신께 갑니다. 하나님! 저를 받아 주시옵소서. 저는 하나님이 자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저 같은 죄인을 용납해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이런 단순한 믿음만이 필요한 것이지 다시 하나님을 자비롭게 만든다거나 인자한 마음을 가져 주시기를 하나님 앞에 호소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여러분 가운데 오늘 이 자리에서도 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영혼에 들려지는 순간 탄식하고 있는 여러분의 영혼의 한숨소리와 눈물소리를 듣습니다. 무엇을 망설이고 계십니까? 시인도 여러분처럼 한때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렸습니다. 아직도 그 웅덩이에서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살았던 그 어둡고 추운 수렁에서의 수많은 날들을 통해서 오직 한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의 인자하심밖에는 우리에게 진정한 소망이 없구나! 그리고 오늘도 내가 하나님께로 다가가면 주님은 자비하심으로 나를 받아주실 것이다”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한 믿음, 그 하나를 가지고 그는 밑도 끝도 없던 그 깊은 영혼의 골짜기를 헤쳐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7. 죄에서 구속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 저가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리로다(시130:7下~8)
우리는 지난 시간에 범죄한 자들, 그래서 자신의 죄와 허물로 인해서 깊은 죄에 빠진 모든 사람들에게는 오로지 하나님의 인자하심 밖에는 소망이 없다는 말씀을 가지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에 지난주의 설교를 듣지 못하신 분들은 이번 주의 설교를 이해하실 수 있도록 꼭 들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어서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은 그 인자하심과 함께 자신의 백성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찬송하고 있습니다. 허물과 불순종으로 말미암아서 한때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깨달았고, 말할 수 없이 행복한 교제를 누렸던 신앙의 사람이었던 이 시인이 불순종과 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멀어지고 깊은 웅덩이에 빠진 것과 같은 비참한 처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벌판에서 외치는 소리는 듣는 이도 많지만 웅덩이에서 부르짖는 소리는 아무리 외쳐도 자신의 고막만 아프게 할 뿐 누구도 돕는 자를 부를 수 없습니다. 이 시인이 그런 처지에 처해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산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처절하게 절감하게 되었고, 잠시 자신의 마음대로 산 불순종과 자신의 눈에 좋은 대로 아무렇게나 행해버리는 그 생각 없는 선택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교제에 단절을 가져와 웅덩이와 같은 깊은 곳에서 몸부림치고 울부짖어도 들리는 대답이 없는 처지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그것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깊은 영혼의 고통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그 하나님과의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깨달았던 이 시인은 역시 하나님의 사람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하나님의 사람이면 끝까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할 때만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범죄해도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비록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답게 못살았지만 그 깊은 웅덩이와 같은 침체 속에서 하나님께 돌아가게 해달라고 몸부림치는 그의 영혼이 원래 하나님의 사람이었음을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그런 죄 가운에 빠졌을 때에 시인은 유일한 소망이 죄에 하나님께 용서받은 것 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그 사유하심을 기다리면서 그 웅덩이와 같은 곳에서 하나님 한 분께 소망을 걸고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치열한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해서 몸부림하며 이 쓴 이 시인의 모습을 우리들이 보게 됩니다. 그 속에서 시인은 범죄에서 깊은 웅덩이에 빠진 자신과 같은 사람이 무엇을 소망해야 하는 가를 배운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말씀드리려는 구속하심과 이 자비하심이 연결됩니다. 시인이 소망하고 있는 바는 그 깊은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떨어진 웅덩이와 같은 영혼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두 가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하나님의 죄를 구속하심에 소망이 있었습니다.
이 구약에서 구속이라는 말은 원래 잘못한 사람이 따로 있는데 그 사람들을 위해서 대가를 지불하고 그 사람을 어려움에서 구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우리들은 구속주가 되신다고 표현합니다.
시대를 조금 거슬러 내려와 보면은 신약으로 와서도 이 구속이라는 말이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 이것은 당시에 있었던 노예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 노예제도의 예를 들면 구속이 무엇인가를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화) 노예시장에서 노예를 죽 세워놓고 상품처럼 팔았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저 사 람, 키만 크고 말라서 힘도 없어 보이네”하고 말하면 노예 주인이 채찍으로 피 가 터지도록 때리면 노예는 펄쩍펄쩍 뛰면서 이 정도 맞아도 아직은 일할 수 있 다는 힘을 과시한다. 그렇지 않으면 매매자가 지나간 다음에 주인에게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광경을 보던 어떤 돈 많은 사람이 너무나 비참하기에 그 노예를 사서 자기의 집에 데리고 왔다. 그 주인은 이 노예에게 해방증서를 써주 면서 이제 자유인이라고 했다. 그의 아내와 어린아이들까지 사서 해방시켜 주었 다. 그리고 이제 가서 자유로운 삶을 살고, 누가 다시 노예라고 밀어붙이면 이 노예방면증서를 보이라고 했다.
그 행위가 바로 구속입니다. 그 사람은 아무런 책임질 이유가 없는 사람인데 거액의 돈을 지불하고 남 좋은 일을 시킨 것입니다. 그것이 구속입니다.
죄와 관련해서 여러분들에게 자주 말씀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인간은 결국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만 있지 자신이 지은 죄를 갚거나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한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갔습니다. 그리고 한 삼십 년쯤 살고 풀려났습니다. 그는 죄 값을 치렀다고 그를 보고, 세상은 흔히 말합니다. 그러나 그가 죄 값을 치렀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납니까? 또 죽은 경우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에게 커다란 상해를 입히거나, 남의 마음을 크게 상하게 만들거나, 이웃의 명예를 심하게 손상시켰을 때에 그가 벌금을 내거나 처벌을 받는다고 해서 그가 남에게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피 흘려 자신을 못박아 여러분들을 사셨습니다. 그렇게 사신 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만을 찬송하며 살게 하시기 위해 그 피로 구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아니하고 불순종과 죄악으로 하나님을 거스르고 강퍅한 죄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범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 땅에서 먹칠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들 때문에 하나님 알기를 우습게 알게 되었고, 여러분들 때문에 신앙에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실족했습니다. 무엇으로 갚으시겠습니까? 갚으실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그 자리에서 백 번을 죽고 다시 태어나도 이미 여러분들이 지은 그 죄와 잘못은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고, 보상할 수도 없습니다. 흔히 죽음으로 자신의 죄를 갚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피를 받아서 무엇하시겠습니까? 아들의 피나 귀하게 여기시지 범죄자의 피를 받아서 하나님이 무엇하시겠습니까? 기억해야 합니다. 죄를 지을 능력만 있지, 그 죄를 해결할 능력은 없습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부인 것을 뛰어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했습니까? 돈이 좋아서 예수님을 팔았는데, 양심의 심한 가책을 느껴서 그 돈을 써보지도 못한 채 던져버리고, 목매어 떨어져 창자가 터져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가 주님을 판 대가를 갚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그렇게 죽든지 죽지 않든지에 관계없이 죄는 죄대로 남아 있고, 그는 죽었을 뿐입니다.
그처럼 죄에 대해서만큼 인간은 불가항력적인 존재이고 불가항력적인 존재라기보다는 죄의 결과에 대해서 속수무책인 존재이고, 그 죄의 결과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지거나 그것들을 보상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면서도 그 죄에 대해서 스스로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는 무능력한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결국은 절망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여기서 시인이 이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이 사실은 우리들이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한번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이 시인처럼 하나님과 보다 깊은 교제를 누리는 그러한 사랑과 은혜의 세계 속으로 나아가려고 할 그 때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하나님의 그런 사랑을 막을 수 없는데 오직 하나, 죄가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어떻게 하든지 그것을 극복하고 그 놀라운 사랑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자신은 그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 때 우리들이 다시 돌아보게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이 바로 우리들이 고통하고 있는 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서 우리들을 그 피로 사셨다는 사실을 회상하고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이 시인이 오늘 그렇게 꿈꾸고 바라던 구속의 진정한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도 잘 몰랐던, 그러면서도 하나님과의 사랑을 누렸던 이 시인이 이렇게 하나님과의 교제와 사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몸부림쳤다고 할 것 같으면, 예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안 우리들이 만약에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그 사랑과 은혜가 있는 그 교제를 다시 누리는 삶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이 시인보다 배나 깊은 곳에서 갑절이 넘는 고통을 당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현실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의 죄를 회개하고, 불순종했던 지난날들을 깊이 뉘우치면서 이 시인과 같이 자비하신 하나님께 자신을 그런 사랑의 교제로 회복시켜달라고 간절히 호소하면서 나아가면 주님께서 우리를 놀랍도록 그런 사랑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만약, 회개하지 않고 죄 가운데 사는 우리들을 방치하고 내버려두며, 그래서 불순종과 죄악이 자라고 쌓인 범죄한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삶과 신앙생활과 마음의 행복한 상태를 모두 다 관찰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이 얼마나 자신을 향해 놀라운 사랑을 가지고 계신가하는 것을 실감나게 체험할 뿐입니다.
불순종하고 죄 가운데 들어가서 이렇게 깊은 데에 빠졌을 때에, 이 시인처럼 그 사랑을 그리워하면서 뉘우치는 심령이 되면은 모르지만 그렇지 않고 자신을 방치한 채 내키는 대로 살다보면은 뭐가 되어도 될 것이라는 뚝심으로 밀어붙이는 그런 삶을 산다고 쳐보십시오. 그런 삶에 마음속에 행복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데 근심과 공포의 그림자가 없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가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두려운 마음을 물리치기 위한 의식적인 행동일 뿐,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르짖을 때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감사할 때 그 감사를 받아주시고, 고난 중에 호소할 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고 계시다는 사실이 우리의 마음속에 느껴지는 그런 하나님과의 영교 없이는 우리는 살았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제멋에 겨워서 춤추는 종교 놀음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는 신자가 있고, 그들을 통해서 당신이 원하시는 삶을 살게 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곳에서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의 “구속”은 무엇입니까? 쉽게 말하면 앞에서 말했던 용서입니다. 바로 사유하심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범죄해서 하나님께 많은 손해를 입혔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저 좋아서 나쁜 짓을 했고 하나님께 범죄해서 하나님의 그런 사랑을 모두 거절하고 웅덩이와 같은 깊은 곳에 빠져서 한숨쉬고 고통하다가 견디지 못하자 이제 하나님께 돌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용서해달라고 합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과거의 죄를 불문에 붙이고, 없었던 것으로 하고 다시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간단합니다. 하나님 혼자 손해 보십니다.
그렇기에 이 시인이 하나님의 그런 용서를 말하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인자와 하나님의 용서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하면 회개가 있습니다. 이 시인과 같이 오늘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를 하나님이 시키십니까, 우리가 회개합니까? 결을 따라 역사하십니다. 지난주에 듣지 않으신 분은 무슨 말인가를 모르실 것입니다. 결을 따라서 장작을 패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회개할 수 있는 마음이 될 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우리를 쪼개십니다.
그렇다면 인자하심과 이 회개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인자하심과 용서하심 사이에 인간의 회개라는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어떻게 보면 인간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 따라 역사하십니다. 쉽게 말하면, 회개하겠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회개를 못하는 경우는 있어도, 회개하여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회개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깊은 웅덩이와 같은 곳에 두셔서 거기서 하나님과의 모든 교제가 단절되게 하시고, 그래서 인생에 아무런 희망이 없도록 만드실 그 때에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용서받는 것 외에는 참다운 자유와 평안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용서받기 위해서는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돌아가고자 하는 소망을 마음속에 품어야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잘못되었고, 그렇게 자기를 위해서 선대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던 하나님이 자신과의 관계에서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사랑을 느낄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심각한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가 오래도록 계속되면 나는 멸망할지도 모른다라는 두려운 마음을 동시에 가져야 합니다.
그때에 인간은 많은 죄의식에서 몸부림치게 됩니다. 그것은 두 가지 요소로 되어있는데, 하나는 두려움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에 대해 더럽게 생각하는 감정입니다. 두려움이란 내가 이런 일을 했으니, 이런 불순종과 죄를 지었으니 내가 이렇게 깊은 곳에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닐까하는 두려움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영영 회복할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왜 그랬을까? 정말로 자신이 생각할 때도 자신이 더럽고 추하고 밉다고 생각하는 마음. 내가 나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나를 쓸어버리고 싶은 마음. 바로 자기 혐오의 감정. 이 두 가지가 죄의식의 중심적인 요소입니다.
그렇기에 무슨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죄의식 자체를 느끼는 것만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아무런 해결이 없습니다. 죄의식 자체는 오히려 잘못하면 그 죄의식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더 절망하게 만들고, 자신에 대해서 더 포기하는 감정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 죄의식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데 유용하게 쓰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그 죄의식을 느끼면서 하나님께 소망을 갖는 방향으로 바뀌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느끼는 죄의식이 아니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거의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죄의식이라는 것도 자세히 살펴보면 상대적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 등쳐먹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성경적으로 죄가 아닌데도 괴로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양심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죄의식을 느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는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죄의식이 그를 망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깨닫게 되는 사실 한가지는 회개에는 죄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느껴서 절망하면서 하나님밖에 소망이 없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는 그런 방식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관적으로 느끼는 죄의식이 아니라, 이런 깊은 상태에 시인이 들어가게 되었을 때에 이렇게 자신이 깊은 상태 속에 들어가게 되고 웅덩이와 같은 곳에서 그렇게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던 자신이 비참한, 절망적인 단절의 상태를 느끼게 되었던 이유를 이 깊은 곳에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깨닫게 되니 이 사람이 결국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자신을 깊은 영적인 고통스러운 상황을 해결하는 길로 걸어들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인자하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은 죄의식 속에 몸부림치지만 자신이 죄인이며 하나님 앞에 범죄와 불순종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이 깊은 웅덩이와 같은 상태에 빠지게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이 택하신 백성에 대해서, 즉 이스라엘을 향해서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이 시인이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이 시인에게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앞에 버림받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그를 버리지 말도록 매달리게 되었고, 자신이 너무나 더럽고 추잡하다는 느낌은 그런 죄에 참여했던 자신의 죄에 대한 철저한 혐오감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삶에 대한 거룩한 신자의 상태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그렇기에 이 시인이 참된 회개를 이 깊은 웅덩이 가운데서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깊은 지적만을 가지고는 사람을 완전한 회개에 이르게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죄에 대한 지적과 함께 하나님을 끝까지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그 엄위하신 진노와 함께 당신께 피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사죄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일 때에 사람들은 더 빨리 하나님의 빨리 피하고자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예화) 장발장이라는 소설에 장발장이 여동생의 자식들이 굶주리는 것을 보다못해 빵을 하나 훔치고는 십 구 년을 옥살이한다.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한 분노와 더러움에 부들부들 떨면서 세월을 보내다 쓴 마음을 품고 옥에서 나오지만 어디로 가든지 취직할 수 없다. 마침 마음씨 좋은 신부 한사람이 먹을 것을 주고 하루 밤을 재 워주었다. 그때 장발장은 그 거실에서 이 신부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아 주 고귀한 은쟁반 여섯 개와 은으로 만든 국자하나를 훔쳐서 도망나온다. 그러 다가 경찰에게 잡히자 신부님이 준 것이라고 우긴다. 결국은 신부 앞에 끌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신부는 깜짝 놀라며 “그것은 내가 진짜로 준 것입니다.” 그러더니 벽난로 쪽으로 걸어가서는 그 위에 있는 은촛대 두 개를 더 집으면서 “이것도 주었는데 왜 것은 두고 갔습니까?”라고 한다. 십 구 년 동안 쓴 마음을 품고 살아왔던 그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거실에서 무릎꿇은 채 생전 처음으로 어린 아이처럼 격렬하게 통곡하며 운다. 그렇게 자신이 모두 허물어진 상태에서 통곡하며 그 영혼이 새로운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세상의 어떤 고난이나 악조건, 심지어는 하나님의 징계조차도 좀처럼 죄로 굳어진 인간을 회개시킬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녹이고 그 영혼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인간은 은혜가 떠나고 나면 하나님의 사랑에만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도 익숙해집니다. 은혜가 늘 살아있을 때에는 날마다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이 새롭습니다. 어제의 간증이 있고, 오늘 오면은 어제 것을 가지고 간증하기에는 오늘 간증할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한해를 살고 나면 옛날을 말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그때와 같이 역사하시는 하나님, 지금도 그때와 같이 다가오셔서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빚으시는 주님의 손길에 대한 체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식어지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하나님이 날마다 은혜를 주시고, 자신에게 주님을 위해 살 기회를 주시고, 주님을 섬기며 살 기회를 주셨는데도 그것에 대해서 감사하거나 기뻐할 줄 모릅니다. 그렇기에 당연히 하나님은 성실하게 그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셨는데, 그는 도무지 성실하게 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에 성실하게 반응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성실한 자비하심에 대해서 점점 잊어버립니다.
똑같이 죄 가운데 빠지게 되면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책망하십니다. 오늘 하루를 사시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기 때문에 괴로움 속에서 아침에 기도하나 거의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도 못하고, 교회당에 들어서 예배를 기다리며 기도하는 동안 자신의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하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자체가 이미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리고 사는 정당한 대가가 아닙니까? 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집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부름받은 우리들인데 왜 우리가 정신적으로 유리 방황해야 되고, 왜 우리가 마치 돌아갈 집이 없는 것처럼 허전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까? 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가 살아계시다는 사실, 그리고 잠시 후에 내가 하나님께로 갈 것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현실적인 위로가 되지 못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우리를 피흘려 죽으셨으며, 다시 사셔서 이 시간에도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는 사실, 환란과 고생은 많지만 이 거친 세상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날개 아래 보호하신 다는 사실이 오늘 현재적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왜 힘이 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 것을 못 느끼고, 못 경험하고, 하나님이 버리시지도 않았는데 버린 자처럼 살아가는 그 자체가 결국 하나님을 얼마나 멀리 떠난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 자체가 이미 범죄한 대가를 하나님 앞에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고통스럽게 느껴져야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점점 흘러갈 수록 적응을 합니다.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분명히 어느 한 시점에서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매우 잘못되었고, 하나님 앞에 범죄나 혹은, 허물 때문에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깨졌는데도 불구하고 단지 여러 차례 그 일을 위해 기도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제는 더 이상 할 것이 없고, 시간에 되면은 떠밀리듯이 교회에 왔다가 가는 것 이상으로는 나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고 하는 무기력에 시달리는 분들이 분명히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런 정도의 반응을 가지고는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간단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을 너무나 쉽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는 돌아갈 수 없는 길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랍고, 그리고 그 사랑으로 돌아가 하나님과의 교제가 다시 회복되기 전까지는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할 수 없고, 내 인생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는 처절한 열망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이 너무나 쉽습니다. 그리고 돌아간 후에 모두 하는 말이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근거없는 사랑을 베푸셔서 나같이 쓸모없는 죄인을 이렇게 용서하시는가”하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버리지 않는 사람, 자기 부서짐이 없이 하나님께로 걸어서 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들것에 실려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영원히 죄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과의 사랑을 회복했으면 하고 바라는 것과 정말로 하나님 앞에 돌아가고 싶어서 갈망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우리 모든 사람들이 알기를 원하십니다.
(예화) 옛날 텔레비전도 없고 라디오도 없을 때 무엇을 알리기 위해 삐라를 잘 뿌렸다. 거기에 가끔 간접은 자수하라는 내용이 실리는데 자수하면 정착금도 주고, 죄를 묻지 않고, 직장도 주고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해주겠다고 쓰여있다. 그리고 예외 없이 나오는데, 자수해서 광명 찾고 장가가서 잘 사는 사람의 사진과 그 사람들 이 호소하는 내용도 나온다.
무엇을 먼저 말하고 싶어서 입니까? 자비를 먼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단을 촉구하며 더 이상 숨어살지 말고 빛으로 나오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지금 그렇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만약 시인과 같은 처지에 있어서 정말로 이런 하나님의 사랑,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교제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여러분들은 오늘 모든 상상력과 모든 마음의 작용을 동원해서 여러분들의 추억 속에 묻혔던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어떻게 사랑하신 기억들을 추억해내도록 힘써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그런 사랑을 느끼고 있다면 말할 필요없이 여러분들은 이미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이 단지 명제 이상으로 생각이 나지 않는 다면 여러분들은 하는 수 없이 옛날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어떻게 사랑했는지를 회상할 때, 그것은 오늘 여러분들이 잊고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닫게 해주고, 오늘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이 얼마나 커다란 것이며, 그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생각나게 해주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등지고 그분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진 대가로 잠시 누릴 수 있었던 이 세상의 쾌락과 자기 멋대로 사는 즐거움들을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가를 깨닫게 해 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주님의 사랑과 그 품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어 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인은 범죄와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부르짖어도 하나님의 응답이 들리지 않고, 고난이 찾아올 때에 위로가 되었던 하나님의 이름이 이제는 그에게 두려움과 떨림이 되었습니다. 그런 속에서도 이 시인은 결국 자신이 웅덩이와 같은 비참한 처지에서 헤어 나오는 유일한 길을 그럼에도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이 사람은 이 웅덩이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느끼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르짖어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이 자신의 귀에 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이전과 같이 하나님의 체취가 느껴지지 않을 때에 그 하나님을 인자한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그가 잠시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참된 사랑에 대한 감각을 상실했지만 그는 언제나 마음속에 그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감쌀 때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선대하시고,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며, 이제껏 긴 인생의 길을 걸어오게 하셨는지를 그는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은 비록 느끼지 못하지만 그 옛날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셨던 그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호소해서 그 자비하심이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는 사죄의 은총으로 이어지도록 그는 지금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토로하며,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그 하나님과의 참된 사랑의 교제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지금 애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가장 커다란 오해가 우리들에게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내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내가 무엇을 구하실 때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선명하게 내 손을 잡으시며, 나의 매일 매일의 갈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서 사는 그 삶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그것은 신앙생활 하는 동안 일생에 한번 어쩌다가 연애감정처럼 찾아오는 것이고, 평상시에는 이렇게 신앙생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생래적으로 하나님을 만나 깊이 감격하고, 눈물을 흘리고, 말할 수 없이 기뻐하고,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에 대해서 간증하는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저것은 틀림없이 허풍떠는 것일 거야. 저것은 아마 교만해서 그럴 거야. 그렇지 않으면 저것은 부풀리고 뻥튀기 하는 거야”. 아니면. “왕년에 누가 안 그래본 사람이 있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실패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실패에 익숙해지고 나면 그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입니다. 일단 받아들이고 나면 그 다음에는 길들여집니다. 길들여지면 그곳에서 벗어나려는 어떠한 몸부림도 그에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비참한지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 이 세상에서 오는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나아가서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풍성한 삶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지 예수님을 믿고 이 세상에서 많은 부를 누리고 산다고 하는 물질적인 풍성함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이 말씀하신 참된 의도는 우리가 예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도록 더 풍성하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과 주님과 베풀어주시는 은혜와 그 풍성한 진리 가운데서 거하는 삶을 살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으로 집약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시인과 같이 자기가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와 영교가 있는 삶을 잊어버렸다면 그것이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고 당신이 구속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주셔서 죄 가운데서 구속하셔서 그 죄를 용서하시고 십자의 피로 여러분들을 씻어서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어주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여러분들이 다시는 그런 죄 가운데로 돌아가지 말고, 그 죄를 씻은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하나님과의 자유로운 교제를 누리며 그 사랑 속에서 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부르신 것이 아닙니까?
신자의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에서 대접을 받는 데에 신자의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큰 교회의 교패를 대문에 붙인 것이 신자의 영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목회자의 사랑을 받는 것이 신자의 영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것이 신자의 영광이 아닙니다. 신자의 영광은 건강한 영광을 가지고 하나님을 몰랐더라면 느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한없이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버림받았기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도록 굽어진 사람들이 그 사랑 때문에 바르게 되어지고, 이전에 받았던 많은 상처들이 그를 파멸로 데려갈 수 밖에 없지만 상처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인해 온전해진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누리는 것이 신자의 행복이 아닙니까?
인간의 심령 속에는 각자각자 담겨야할 용기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부모를 잘못 만났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매일 두들겨 패고 싸우는 것밖에 보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어제 텔레비전에 보니 어떤 여자아이가 눈을 가리고 인터뷰를 하는 데 자신을 나아준 아버지가 자신을 상습적으로 겁탈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코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 아이에게 죄가 있고 없는가에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했어도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렇게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은 사람이 아무리 시집가서 좋은 남편을 만나도 해결이 안됩니다. 부분적으로는 해결이 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해결이 안됩니다. 물론 부모도 거지같은 부모를 만났는데, 남편도 거지같은 남편을 만나면 사람이 미쳐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남편을 만나면 좀 낳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남편으로부터 아내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이 효성스러운 자식을 두었다고 해서 그 상처가 아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부분은 그대로 남습니다. 그것은 그 관계만이 채워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자신에게 부모는 상처를 주고 죽었는데 어떻게 합니까? 자식은 다시 만들면 되지만 부모를 어떻게 다시 만듭니까? 그렇기에 결국은 이 세상에서 태어난 인간들이 자신의 죄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많은 죄 때문에도 서로 상호관계에 얽히고 설히면서 비참하고 불행하게 살 수 밖에 없는, 구조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 것이 인간의 상태요, 숙명입니다.
그런데 해결의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그의 마음속에 부은바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겁탈 당하고 정신이 완전히 만신창이가 된 아이들도 다른 사람을 만나서는 해결이 안됩니다. 오직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만나면 해결이 됩니다.
저는 지난번에 앨라배마에 갔을 때에 집회 장소 바로 옆에 헬렌 켈러의 생가가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자라던 그때 바로 그대로였습니다. 제가 가서 보니 진정으로 헬렌 켈러의 글을 읽으면서 알았던 것들, 가정교사가 어떻게 자신에게 언어를 가르쳐 주었던 그 예증의 펌프, 하녀들이 묶는 주방, 모두가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자라난 방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저택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귀먹고 장님인 그 아이가 진정으로 보이지도 않는 상태에서 글을 쓴 것입니다. 글씨가 어쩐지 이상합니다. 그래서 보니 다른 사람의 글씨가 아니라 본인이 수 십년 전에 써 놓은 글씨입니다. 뭐라고 써 있었는지 아십니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처럼 자신의 힘, 자신의 죄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라도 처절하게 찢긴 바 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단 하나의 해결의 실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충만한 사랑과 은혜 속에서 살 때에 그들 스스로 자신이 저지른 자신의 죄와 사랑의 결핍들을 해결해 줄 수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그것을 해결해 줍니다. 그래서 소망 없이 불행하게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다시 하나님이 사랑을 힘입어서 그런 상처럼 입지 않은 사람보다도 더 강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많은 잃어버린 것 때문에 자신을 원망하고 비참하게 울어야할 사람들을 변화시키셔서 오히려 넘치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간증하며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렇기에 시인과 같이 만약 하나님의 참 사랑을 잃어버리고 우리가 깊은 웅덩이에 떨어진 것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정말로 죽은 자와 다름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그런 참된 사랑과 교제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이 시인이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총에 기대하며, 그 은총이 사죄로 이어지기 위해 하나님 앞에 간절히 자신의 죄악을 보며 회개하고, 그리고 그 회개함이 마치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사모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동일한 소망을 품고 하나님 앞에 가야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들 중에서 하나님 없으면 별 볼일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살다가 성경이 기록된 대로 아무도 아끼는 자 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예수 홀로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으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하실 지도 잘 몰랐던, 알았다고 할지라도 아주 희미하게 밖에 몰랐던 이 시인이 이렇게 처절하게 자신의 죄를 자비하심으로 용서해주시고 구원해주시는 주님의 인자하심을 회상하며 하나님께 돌아갈 소망을 얻었다고 한다면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버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화해의 십자가가 우리 앞에 분명한데 우리는 얼마나 더 하나님 앞에 돌아가야 할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변치 않고 하시는 일들이 있으십니다. 그것은 당신을 떠난 자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떠나보내신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을 버리고 떠난 사람들, 하나님께서 그들을 강요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어 불순종하고 범죄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던 사람들, 하나님은 오늘도 찾아 나서십니다. 스스로 떠난 자녀들이 스스로 돌아올 수 없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어디엔가 벌판에서, 또는 깊은 숲 속에서, 깊은 벼랑에서, 가파른 낭떠러지 아래서 슬피 울며 유리 방황하는 양떼들을 찾아서 오늘도 나서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당신의 참사랑으로 돌아오시게 하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그런 죄인들을 부르고 당신의 사랑에로 찾으시는 그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사실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에게 참된 기쁨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에게 여러분들을 향한 진정한 기쁨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혹시, 이 시인과 같이 한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으나 이제는 그 모든 하나님의 사랑을 죄와 불순종으로 잃어버리고 사실상 탕자와 같은 처지가 되어서 견딜 수 없는 결핍과 고통가운데 신음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떠난 대가가 어떠했는지 우리는 지금까지 배운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주님을 떠난 자에게 깃들었던 것은 죽음과 슬픔, 공허와 자책감, 끝없는 죄의식, 절망밖에는 아무런 친구가 없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처음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고 떠날 때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는 희망이 있는 것 같았고, 좋은 친구들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기대와 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그것들이 모두 헛된 것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는데
이 나그네 된 나는
외로운 세월 가는 것
금할 길 아주 없네
속히 흘러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지고 그 사랑을 잃어버린 지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어제는 아닐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날을 망설였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뒤척이며 잠못 이룬 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벽을 마주하며 주일 밤이면 주일 낮보다 더 공허한 몸부림 속에 시달린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잠시 웃음과 바쁜 일 속에서 잊혀지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어김없이 와 닿는 하나님의 음성, “아들아 너는 어디 있느냐?”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깊은 웅덩이에 있습니까? 얼마나 더 망설이려고 하십니까? 오늘 이 시리즈가 끝이 납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결단해하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더 우리의 인생을 허비해야 되겠습니까? 얼마나 더 우리들이 비참한 가운데 시달리고 우리의 인생이 쭉정이와 같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닫고, 얼마나 더 우리들이 절망해야만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죄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용서하심밖에 참소망이 없다고 말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이 바로 그 밤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처지에 처해 있든지 오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어찌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그 깊은 웅덩이에 버려두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김칫독 같은 깊은 곳에 묻어두고 여러분은 이곳 교회에 올 수 있었습니까?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이 더 이상 망설여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당신의 말씀이 다 맞았습니다. 제 생각은 모두 틀렸습니다. 저는 범죄했고, 제가 이 깊은 웅덩이에 빠져서 한 때 주님의 사랑을 받았고, 아니 지금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느껴질 수 없을 만큼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철저히 멀어진 비참함이 저의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 더 이상 이 어두움 속에서 살지 않기를 원하오니 오늘 이 밤에 부르짖는 부르짖음이 웅덩이 속에서의 마지막 부르짖음이 되게 하옵소서. 새 날을 주시옵소서”. 기도하고 믿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뒤로 물러간 자가 돌아오는 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