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회복을 구하라
(1999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9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시온을 기억하라(시137:1) 1999.6.23 수요예배 1
2. 세속적인 낙관과 거룩한 비관(시137:2-4) 1999.7.7 수요예배 15
3. 아, 그리운 예루살렘이여!(시137:5-6) 1999.7.14 수요예배 29
4. 예루살렘을 위한 거룩한 분노(시137:7-8) 1999.7.21 수요예배 44
5. 대적자들을 향한 분노(시137:9) 1999.7.28 수요예배 55
1. 시온을 기억하라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江邊)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137:1)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37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 고향을 생각하며 지은 망향가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실향민들의 노래 일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조국을 잃어버리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후에 거기서 조국을 그리워했던 것이 아니라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었던 그 때를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이 짧은 137편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어야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의미가 있으며 주님이 그 백성들에게 주실 수 있는 교재의 축복이 어떤 것이며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슬퍼지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137편 전편은 우리와 더 넓게 우리 교회의 영적인 생활 전반에 대한 원리들을 많이 담고 있다.
오늘 우선 작자 미상의 이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가 바벨론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보며 울었도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시를 읽자마자 우린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남에 나라에 어려 강변에 앉아야 했을까 하는 것이다. 짧은 시속에서 구체적인 설명은 없지만 이 강변에 자주 나왔던 것 같다. 에스겔서 1장에 보면 에스겔이 소명 받은 것도 그발 강가였다. 어디서든지 하나님께서 소명을 주실 수 있지만 성경을 묵상할수록 우리는 그 그발강가가 시장 바닥과 같이 사람들로 가득 찬 가운데 선지자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소명이 주어졌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추측 건데 한 낮 동안에는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서 고달프게 종살이를 하고 일과가 끝난 저녁 시간에는 잠시 휴식을 가졌던 것 같다. 그리고 여러 강변에 삼삼오오 고향을 잃어버리고 남의 땅에 끌려와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 앉아서 아마 고향을 생각하느라 시름에 잠겼던 것 같다.
바로 오늘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가 보지도 않은 남의 나라 바벨론의 강변에 처량하게 앉아서 시온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상황이 되었겠는가? 무엇 때문에 그들은 이렇게 생각해 보지도 못한 먼 곳에 있는 남에 땅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짓는 실향민의 신세가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이 일을 행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로 하여금 고향을 잃어버리시게 만든 분이 하나님 이셨다. 그들로 하여금 조국을 등지고 얼굴도 알지 못하는 이방에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서 죽도록 종 사리를 하며 저녁 늦은 황혼의 시간에 강변에 나와서 슬피 울며 예루살렘을 기억하고 시온을 기억하도록 만든 분은 하나님 이셨다는 사실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애처러운 시 곧 137편을 열자마자 우리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베푸신 하나님의 일을 보면서 오랫동안 우리들이 묻어 두었던 하나님의 새로운 성품에 대해서 눈뜨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사랑하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때로 당신의 백성을 심판하시기도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여러 차례 당신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질투하는 하나님으로 소개했다. 그리고 이 질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사랑에 또 다른 표현이다. 하나님께는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면 그것은 사랑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랑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몹시 괴롭게 하는 것이었다. 왜냐 하면 그것은 순결한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하나님의 백성의 심판을 받고 있지만 그러나 이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에 또 다른 표현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은 참 끔찍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두 개의 신학이 신앙 속에 흐르고 있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으므로 아브라함에 베푸신 것과 같은 무조건적인 호의와 은총을 끊임없이 베푸실 수밖에 없으시라는 낙관적인 신앙 관이었고 또 하나는 예언자들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하시기 직전에 외쳤던 것처럼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도 너희를 버리시리라”라고 하는 멸망에 예고였다.
언제나 듣기 편한 이야기가 듣기에 좋다. 그리고 언제나 무거운 의무에 걸어가던 인생의 길을 돌이키는 결단을 동반하지 않게 만드는 메시지는 언제나 우리들을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편하고 쉬운 신앙을 택했다. 설마 했지만 그러나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예고한 바와 같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만드셨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에 태도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들의 편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잘못된 신앙들이 모두 무너져 버린 채 그들은 이방에 땅에서 예루살렘 시온을 생각하면서 슬피 우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처럼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엄위(嚴威)한 역사 속에서 우리는 단지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당신의 백성들을 통해서 분풀이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결해 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만을 사랑해야 할 의무로부터 멀어지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이키기 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종들을 보내셨다. 많은 종들이 와서 이스라엘의 유다의 멸망을 예고하였고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이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돌아오기를 사모하시는 지를 보여 주었고,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돌아오라는 메시지,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자에게 베푸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가 멸망의 순간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더욱 더 빛깔이 진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번져 갔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한결같이 예언자들을 통해 들여오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거절했다. 그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종들의 의해서 전파되고 있던 메시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치 단합하여 귀를 막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로 작정했다. 그의 뜻이 자신들을 향해 어떻게 들어 나는지를 보지 않기로 다짐했다.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이고 그리고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알지 아니하기로 다짐하였던 것이다. 충성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던 진실한 하나님의 종들은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외침이었지만 그들은 선조(先祖)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에게 전해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죽여서 하나님의 음성 없는 삶을 택하고자 하였다.
물론 그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들여주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하나님께로 온 계시를 가지고 말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무엇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싶어하시는가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이 아니라 백성들이 혹은 왕이 어떤 말을 듣고 싶어하는 지를 먼저 생각하고 지어낸 말로 그 시대의 백성들을 달래고 그 시대의 백성들에게 안정감을 주던 사람들이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은 이스라엘에 역사와 함께 비참한 심판을 받았을 것이다.
과연 우리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혹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행복을 위한 수단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에 관한 교리는 어떠한가? 우리가 지극히 균형 잡혔다고 생각하는 교리적인 감각이 혹은 성서적인 균형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고 있는가? 우리는 성경 전편을 흐르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본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향해 선하게 행하는 자들에게는 자비를 보이시고 하나님께 거치고 대항하는 자들에게는 주님이 진노를 보이신다는 것이다. 선을 행하고 의롭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평강을 주시지만 죄 가운데서 헤어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영혼에 곤고(困苦)함을 주신다고 하는 말씀이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주님께 순종하고 따르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복종해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들어내는 동안에는 그들과 함께 계시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주님이 율법을 따르지 않고 불순종한 길을 걸어가면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당신의 마음과 말씀을 생각나게하시기 위해서 더 간절한 목소리와 단호한 음성을 가진 선지자들을 보내신다.
말씀을 통해서 신앙의 양심을 통해서 우리를 일깨우시고 진리로 우리를 깨우쳐서 당신께 돌아오도록 만드신다. 때로는 어려운 환경과 그리고 곤란한 사태를 만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나게 하심으로 당신께로 돌아오시게 만들기도 하신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이 이제 더 이상 당신 자신의 거룩함을 이 땅에 들어내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심판하셔서 추려 내시기 시작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죄악을 개인적으로도 다루시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죄악을 집단적으로 다루시기도 한다. 한 교회와 한 가정과 한 교회와 그리고 한 국가와 한 시대에 죄악을 개별적으로 다루시기도 하지만 총체적으로 다루시기도 한다는 말씀이다. 나라에 죄악이 쌓이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극도의 패역함이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할뿐만 아니라 또한 집단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 민족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지나치게 하나님께 대적함으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께 노골적으로 대항하는 이러한 민족이 되지 않기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거슬리는 것도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에 정도가 여러 가지인 것처럼 다르다. 많이 순종하는 사람이 있고 적게 순종하는 사람이 있다. 많이 순종하는 사람은 더 많이 사랑을 받을 것이고 적게 순종하는 사람들은 적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대적도 강력할 수 있고 여릴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그 대적하는 것이 매우 심해서 악마적인 마음과 그리고 악마적인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을 대항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덜 대항할 수 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각기 다르다고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나라도 죄가 가득 쌓여서 더 이상 이 백성들을 그대로 평안하게 내 버려 두는 것이 당신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도움이 되지 않는 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신판 뒤에도 하나님께서는 긍휼(矜恤)을 잊지 않으시고 심판하셔도 하나님께서는 그루터기를 남겨 두시는 하나님이시다.
오늘 바벨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끌려왔다. 그러나 여러분 바벨론에 끌려왔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그친 것은 아니었다. 에스겔과 예레미아와 같은 선지자를 통해서 끊임없이 포로로 끌려온 이후에도 하늘 문은 열리고 하나님의 필요한 말씀은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전달 되도록 만들어 주셨다. 그야말로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잊지 않는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상황 올 때까지 침묵 가운데 갑자기 이 일을 당하게 하지 않으셨다.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경고하시고 그리고 경책(警策)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피할 길을 보이셨다. 그러나 마지막 경고하시는 그 말씀까지도 모두 거절했기 때문에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바벨론 강변에 앉아서 슬피 우는 처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죄와 불순종은 이처럼 하나님과의 모든 친밀한 관계를 파괴하고 하나님과 나누는 풍성한 교제로부터 격리되게끔 만들어 버린다. 오늘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도 이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없다고 믿어지지는 않는다. 분명히 우리들 가운데 이 전에는 시온에서 하나님과 거하는 것같은 지극한 영적인 복락(福樂)을 누렸지만 지금은 그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나와버린 그런 버린 받은 느낌을 받은 사람들이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있을 줄 안다.
그러나 불평하고 원망을 해 봐야 우리들에게 그런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오히려 더 길게 할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만드시고 지금은 고된 노예 살이 후에 바벨론 여러 강변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통곡하는 사람들로 만드셨지만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신 것은 아니었다.
예레미야 애가를 기억해 보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떠나고 이제 하나님의 성전조차 모두 부서지고 회파 된 가운데 낙관적인 신앙을 붙들었던 모든 사람들은 커다란 신앙적인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도대체 이제껏 까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도대체 우리에게 그 놀라운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자비를 나타내 보여 주셨던 그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계신가? 공교롭게도 하나님이 바로 이스라엘이 심판 받은 그 자리 한 가운데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며 죄 가운데 살면 필연적으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사랑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그때에 그 마음은 마치 낯선 땅에 끌려온 포로와 같이 정막한 신세가 될 수 있다. 전에 그렇게 즐겁고 기뻤던 교회의 생활이 건조하고 메마르게 느껴질 수 있다. 피붙이처럼 느껴졌던 사랑하는 지체들이 이제는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만나면은 오히려 외로움을 더해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나님을 섬기며 봉사하던 그 일, 나 같은 죄인을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에 한 모퉁이에서 수종을 들도록 만들어 주신 그 하나님께 한없이 감사하던 그 섬김들이 이제는 집어 던져 버리고 싶은 무거운 부담감으로 차갑게 다가올 수도 있다. 한때에는 교회에 한 모퉁이에서라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한없이 만족하고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의 복음 진리를 듣고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내가 무엇이기에 이런 변화의 은혜를 주셨을까하고 감격하던 사람들이 아무런 감동이나 감각 없이 설교를 듣는 시간이 지겨워 질 수도 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은 영혼이 포로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죄와 불순종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나면 모든 것들이 그렇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살도 석이지 않고 피도 석이지 않던 사람들이 그렇게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 때문이었고 그리고 한 사람이 전해 주는 인생에 대한 견해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증언이 그의 마음을 녹일 수 있었던 것도 말씀을 전하고 듣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계셨기 때문이다.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 없고 돌아오는 소득이 없어도 기쁘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던 것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일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나면 모든 것들이 지옥으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된 것은 누구 때문일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다. 왜냐하면 전쟁에 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을 갖지 않은 세속 정치가들이 하는 이야기이다. 이스라엘은 전쟁에 졌기 때문에 바벨론으로 끌려온 것이 아니다. 무능한 왕이 실정을 했기 때문에 바벨론에 끌려온 것이 아니었다. 물로 그 말은 틀리지 않다. 신앙이 좋고 유능한 왕이 있었거나 절대로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았더라면 바벨론으로 끌려올 이유가 없었다. 물론 말은 맞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역사를 보는 동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온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사람 때문일 수도 있다. 왜? 인간은 어차피 사람에게 너무 많이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면 하나님 아니면 이간이다. 또 남다른 환경이 그런 하나님과의 참다운 관계를 잃어버리고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의 백성과 같은 영혼의 상태가 되게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과 신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적으로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어도 신앙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상황을 인간적으로 깊이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것이 그 사람에게 무슨 유익을 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왜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하면 세상 모든 사람이 옳다고 말해도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판단 앞에서는 그 일에 익숙해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정직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회복될 때가 되거나 하나님의 큰 은혜 안에 살아있을 때에는 항상 이런 시선을 강하게 느낀다. 그래서 ‘예’ 와 ‘아니오’가 분명하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바라보시는 시각으로 자신과 자기의 허물,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볼 수 있는 시야(視野)를 들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가 충만하고 하나님 앞에서 은혜생활을 잘 할 때에는 언제나 핑계를 대지 않는다. 항상 핑계 대지 않는다. 하나님의 관계가 파괴되면 정직한 인식을 상실하게된다. 그리고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본성은 말도 되지 않는 말로 하나님께 핑계를 하는 것으로 잘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잘못 하셨는가? 사실 아담의 이야기가 잘못 되지는 않았다. 하나님이 주셔서 함께 게 하신 그 여자가 줌으로 내가 먹었나이다. 즉 “내가 먹었나이다” 라는 짧은 한 마디를 하기 위해서 서 너 마디의 긴 이야기를 붙이는 것이다. 이 말은 내 책임이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러나 더 책임져야할 존재가 있다면 그 사람은 나에게 선악과를 준 저 여자고 그리고 그런 여자를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나에게 배필로 주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기 시작하면 이런 정직한 인식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한 사람이 영적인 침체 속에서 혼란스럽던 것이 다 정리되고 하나님 앞에 단판을 지을 수 있을 만큼 이제 이 모든 것을 하나님과 나 사이에 문제로 그리고 나머지는 별로 문제가 아닌 것처럼 또렷한 시각이 생기기 시작하면 회복에 때가 가까워진 것이다.
가난한 마음을 가졌다고 하는 것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이렇게 불행한 처지에서 슬피 우는 그 마음이 당연한 마음인 것이다. 전혀 가난해지지 않고도 단지 고통 때문에 인간은 뼈저리게 통곡할 수도 있다. 혹은 사람을 향한 원망이나 자신의 상황에 대한 한없는 배신감이 한 사람을 처절하게 울부짖도록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적인 통곡일 뿐이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통곡은 아니다.
‘마음이 가난해 진다’ 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정말 가난해 질 때에 우리의 머리 속에 놀라운 변화가 온다. 즉 마음이 가난해지지 않을 때에는 복잡하다. 그런데 마음이 깊이 가난해 지고 나면 생각이 단순해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나 자신만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벧엘로 올라가는 마음이다. 그리고 정말 가난해 지고 나면 나를 이런 상황으로 몰아 넣었던 수많은 사람들을 용서 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 뵈러 가는 사람의 특징이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루살렘이 파괴되었을 때 무너진 성전 앞에서 한없이 통곡하는 장면이 나온다. “예루살렘을 지나는 사람들아 너희에게는 내 마음속에 일어나는 이런 슬픔이 왜 없느냐 ?”하면서 통곡을 한다. 예레미야의 통곡은 왜 우리가 평화로운 때에 군대를 많이 일으켜서 국방을 튼튼히 하지 못했던가? 하면서 유다 나라에 안보 정책의 실패를 가슴아파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헤어진 이산 가족을 보고 슬퍼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백성들은 장롱 안에 감추어 두었던 보물들을 가지고 나와서 전시에 금값인 양식을 사러 돌아 다녔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아무 것에게도 위로 받기를 거절하고 울고 있는 것이었다. 누구 때문에 나라가 망했는가? 누구 때문에 바벨론의 포로로 끄려가게 되었는가? 이런 것은 그에게 문제가 아니었다. 가난한 마음이 된 그는 하나님 앞에 너무 죄송스러웠던 것이다. 주님이 주신 은혜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의 크고 높음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패역한 죄, 좁힐 수 없는 그 간격 사이에서 선지자는 통곡하고 있었고 그렇게 통곡하며 울 때에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한 사람으로서 범죄한 자로서 울고 있는 것이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속하지 않은 제 삼의 사람으로 객관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면서 울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가난한 마음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 끔찍한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 하나를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들도 거룩하기를 원하신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 못지 않게 우리를 향해서 가지고 계신 강력한 기대는 하나님의 거룩이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끊임없이 거룩한 백성 되게 하시려고 때로는 불순종하고 불결하게 살아가는 우리를 흐느끼는 사랑의 음성으로 부르시기도 한다. 그리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오래도록 참으시면서 당신께로 돌아오도록 부르신다. 하나님께서 징벌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 버렸을 때에 그가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지를 보여 주시고 다른 사랑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를 뼈저리게 깨닫도록 만들어 주신다.
그래서 우리는 높은 산꼭대기를 뛰어 다니는 영적인 충만함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지만 깊은 골짜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거니는 것 같은 영적인 암흑기를 통해서도 주님의 성품을 새롭게 배우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많이 사랑하는 백성들이지만 그래서 그들의 행복은 당신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관심사이지만 당신의 거룩함을 지키는 것보다는 더 크지는 않았던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그 일이 의로움이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거룩을 지키는 방어적인 성품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은 자처럼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 왔어도 하나님을 향해 항변할 아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도전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스스로 당신의 거룩을 보존하시기 위해서 방어적으로 역사 하신 것뿐이다. 그 선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넘은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개인적인 신앙을 통한 하나의 소중한 원리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과 같은 상태에서 어떠한 마음을 보여야 하는 것인가를 보여 준다.
그것은 먼저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그 은혜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금에 처지에 놓여 있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행동의 결과라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은 우리의 위협에 굴복하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 모두 절벽으로 뛰어 내린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신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회복으로부터 우리는 거리가 멀리 떨어지게 된다.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이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온 것과 같은 영적인 깊은 어두움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라고 우리의 속 사람에게 말 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정당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 하였도다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떠밀려 살다가 불순종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환경에 떠밀리다 보니까 바벨론의 나라를 잃어버려야 할만큼 그렇게 하나님을 버리게 된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불 순종은 우리가 불순종하기를 원하기 때문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모든 죄들은 우리들 스스로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와서 시온을 생각하면서 울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깊은 영혼의 침체, 바벨론의 포로기와 같은 상황 속에서 영혼의 어두운 터널을 지내는 것과 같은 때를 보내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제일 먼저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으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버렸는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마지막 결론은 항상 문제는 내게 있었고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셨다는 결론으로 도달해야 한다.
이어서 성경은 “바벨론 여러 강변에 앉아서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도다” 라고 되어있다. 우선 그들은 울었다. 이 눈물은 아마 한 두 가지의 의미를 담은 눈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바벨론에게 끌려가서 노예와 다름없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후에는 돈을 많이 모은 사람도 있다고 전해지지만 어째든 처음에는 엄청나게 많이 고생을 하고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살았을 것이다. 우리의 선조(先朝)들이 당한 일제시대의 삶 보다 더 혹독한 삶을 그들이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거기서 그들은 강대국의 지배를 받는 설움 많은 민족으로서 그리고 나라를 잃어버린 갈 곳 없는 백성으로서 천한 노역에 종사하면서 뼈아픈 설움을 되씹어야 했을 것이다. 우리들이 고향을 떠나 와도 설움이 많다고 하는데 나라를 잃어버리고 종 사리로 더부살이를 살며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는데 얼마나 많은 설움이 있었겠는가? 거기서 한없이 울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들이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다고 되어있다. 시온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산지의 명칭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 크고 넓은 지역이 아니다. 여기에 끌려온 사람은 모두 예루살렘에서 끌려온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전역에서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이 사람들 가운데는 시온을 고향으로 갖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단지 육적인 고향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이었는가?
‘시온’이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메마른 땅이라는 말이다. 왜 이 사람들은 바벨론의 기름진 땅에 와서 메마른 산지에 지나지 않는 시온을 생각하며 기기가 고향이 아니 사람들 모두 그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겠는가? 이것은 육적인 고향이 아니라 엄밀하게 말하면 시온이 이처럼 이들에게 그리움이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이 시온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이들이 꿈꾸고 그리워하는 것은 영적인 고향인 교회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인 것이다. 그들이 시온을 그리워하였을 때 그리고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때 그때 그들이 생각했던 것은 무엇이었겠는가? 율법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을 섬기는 법도가 시온으로부터 흘러나와서 모든 백성들에게 번져 갔다.
우리들이 만약에 이전에 불순종하고 거칠게 하나님께 반항했던 삶을 포기하고 짐승과 같은 삶에서 돌이켜 성도와 같이 살아가는 비결을 알았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지식과 그렇게 살아가게 하는 힘이 어디로부터 말미암아 나온 것이었겠는가 우리의 가정과 직장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교회서부터 흘러나온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를 받았기 때문에 인생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되었고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인생의 시련들을 극복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얻게 되었다. 혼자 버려진 것 같은 정막감 속에 있었지만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고난과 위기 가운데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래서 시온을 생각하며 울고 있는 것이다. 두고 온 가족이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자신들이 이렇게 바벨론의 강변에서 이 억 말리 떨어진 남에 나라 땅에서 노예 살이 하며 슬피 우는 신세가 된 이유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그들이 꿈꾸고 그리워하며 울지 않을 수 없었던 시온은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며 살던 은총의 시온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같은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는 이 시대 속에서 우리들이 참된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길은 가랑잎에서 작은 조각돌 하나를 찾는 만큼 힘든 시대가 되었다. 이제는 서 있는 어는 교회든지 발을 들려 놓으면 정직한 복음에 진리와 참다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단언하기는 힘든 때가 되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무지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어떻게 거듭나며 거듭난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공급해 주시는 능력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움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
심지어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내적인 생명을 가지고 우리들을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새 삶을 창조해 나아가시는 지에 대한 아무런 영적인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성경을 가르쳐 주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
과연 그들이 하나님의 교회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넘쳐 나고 그 진리의 생수를 먹고 온 교인들이 말할 수 없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감격에 흐느껴 우는 그런 기쁨과 사랑과 거룩으로 충만한 교회의 부흥의 때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부흥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 조국의 교회에 위대한 부흥의 때를 기억하면서 그때가 우리들에게 다시 회복하기를 목말라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묻고 싶다.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에서 호의 호식 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조국의 교회의 영적인 형편은 바벨론의 포로의 시대와 같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것 같이 느껴지는 교회들이 늘어가고 있다. 우는 사자와 같이 으르렁대며 교회를 삼킬 것 같은 악마의 울부짖음 소리는 가깝고 한 교회에서의 영적인 승리를 축하하는 천군 천사들의 나팔 소리는 너무나 아득히 들린다. 메뚜기가 와서 모든 것을 먹어버린 것 같은 그런 시대를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다. 부흥이 필요하지만 부흥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없고 그리고 부흥을 누리던 그 시대에 교회의 영광에 가슴 뛰는 사람들이 없고 단지 오늘 하루도 별 커다란 일없이 평안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며 변화를 꿈꾸지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고 바라지 않는 이러한 형편이 바로 바벨론 시대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황폐한 상황과 다를 바가 무엇이냐는 라고 하는 것이다.
오히려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은 시온을 기억하며 울고 있다. 거기서 아름다운 성일이 되면 백성들을 인도해서 하나님의 전으로 예배 드리러 가던 때를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성일을 지키려는 무리와 손잡고 하나님을 찬송하러 가던 때를 그리워하는 사람들, 흉악한 죄인이 제사를 드릴 때 죄 사함에 은총을 베풀어주시던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 그리고 안식년이나 희년이 오면 꿈꾸지 못했던 놀라운 은혜가 주어지고 포로들이 돌아오고 잃어버렸던 땅들이 되 찾아지는 놀라운 축복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이 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구나 하는 그 영광으로 가득 차던 때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요지는 이들이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다고 했을 때 그것은 단지 물리적인 장소에서의 시온이 아니라 시온에 함께 계시던 은총의 하나님을 그리워하며 통곡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땅도 소용이 없고 유혹도 의미가 없고 금과 은이나 국력과 왕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참된 영광은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리라는 사실을 지금 뼈저리게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매일 하루하루의 일을 붙들고 씨름을 하다가 보면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하셨고 그리스도께서 왜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우리가 인생 전체를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커다란 구도 자체를 잃어버리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온 절망적인 상황에서 시온을 생각하며 울고 있다. 그 시온은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며 율법이 예루살렘의 시온에서부터 흘러나와서 온 나라를 두루 적시며 강물같이 흘러 그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 받는 백성답게 살아가던 그 때를 그리워하며 지금 울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에게도 이런 눈물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는 하나님과 이전에 맛보았던 그 충만한 사랑,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나 같은 인생을 이 죄 많은 땅에 살게 하신 것을 기회로 주신 하나님으로 알고 찬송하며 살던 그 때의 감격을 잃어버린 것을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슬피 우는 사람들이 되어야겠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좋은 것을 남김없이 잃어버리고도 모든 것을 잃어버린 서러움을 느낄 수 없는 사람들은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순간순간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에 우리에게 주셔서 누리게 하시던 수많은 것들을 외 잃어버리게 되었으며 그리고 주님 이 외에는 이 세상에 모든 것들을 찾고 추구하는 것이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이 허무한 것임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은 하나님과 화목하던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다. 이것은 단지 망향의 설움에 울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속으로 돌아가고 싶었고 하나님과 화해를 누리던 그 아름다운 신앙의 때로 다시 회귀(回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되어서 지금 설움에 복받쳐 울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널리 교회적으로도 적용할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처럼 가난하고 매우 답답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러나 이 땅에 영광스럽고 아름다웠던 교회의 시대가 있었다. 지금 보다 훨씬 더 적은 노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변화를 받고 세 사람이 되고 흉악한 죄인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던 영광스러운 때, 마치 희어져 추수하게된 밭을 낫으로 거둬 드리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복음이 혁혁한 성공을 거두던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르는 것이다. 그런 영광스러웠던 때 역사하시던 하나님이 오늘 왜 우리에게 역사하지 않으실까? 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 사람들은 이제 막 바벨론에 끌려가서 시온을 기억하며 슬피 우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음을 같이 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사실 오늘 우리를 절망(切望)스럽게 하는 일들은 너무 많다. 그 가장 커다란 이유 중에 하나는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얼마나 변화되지 않는 지는 우리 자신들이 증인일 것이다. 얼마나 변화되지 않는지 모른다. 그리고 변화된 사람들은 왜 그런지 견고(堅固)해지지 않는다. 어렵게 변화된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마음을 빼앗기고 그리고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변화된 사람들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결한 마음을 잃어버리고 거짓된 욕망에 사로잡혀서 세속에 대한 사랑으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무엇인가를 세우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허물어뜨리는 것은 너무나 순간이다. 마치 하나님 없이 씨름하는 것 같은 절망감을 느낄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운명일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가득 찬 동산에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더 강력한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주셔서 도저히 변화 받을 수 없었던 사람들을 변화 받게 하시고 도저히 하나님께 고침을 받을 수 없던 사람들을 고쳐 놓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음을 향해 대적하였던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교회에 사람들을 보내시고 그래서 교회를 하나님의 사람들로 가득하게 하시고 거기에 모인 사람들을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시온에 함께 하시던 때에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온에 들어가는 그 순간 이곳이 구별된 곳이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구별된 장소라는 사실을 뚜렷이 느낄 수가 있었다.
부흥의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교회에 발을 들려 놓았을 때 이 교회가 매우 특별한 곳이며 그리고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다라는 선명한 인식들을 모두 할 수가 있었다. 형식적으로 들이던 예배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해지고 그리고 숱하게 오랜 세월동안 아무 생각이 없이 교회를 다니던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게되기 시작한다. 반대로 아무 일없이 교회에서 잘 지내던 사람들이 어느 날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들어내기 시작하고 노골적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향해서 반기를 들기 시작한다. 그들이 단지 잘 길들여진 짐승인지 그리고 참 복음을 받아드려 진실한 변화를 경험한 참 신자들인지 하는 것을 부흥에 때에 잘 들어내 보여 주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보다 필요한 것은 인간의 많은 노력과 방법으로 모래성을 쌓는 것처럼 애쓰고 수고하면서 교회를 세워 가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폭풍과 같이 우리에게 임하셔서 인간이 힘으로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자아와 결별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서 듣기만 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뼈까지 녹아지게 만들며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교만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그 진노와 엄위하심 앞에서 두렵고 떨며 그 하나님 앞에 부복하게 되는 영광의 주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시온의 때를 생각하면 우리는 작은 성취를 가지고 교만해 하거나 작은 성공을 가지고 크게 부풀어서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교회를 여기에 세우시고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셔서 당신의 일들을 행해 오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린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갖게 되었고 어찌하든지 쓸모 없는 이 몸이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거미줄과 같은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는 너무나 크고 교회를 향해 베풀러 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은 만 입이 있어도 다 찬양할 수 없지만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실 수 있는 최선에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에 비하면 단지 서곡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님 자신의 찬란한 영광에 비하면 이것은 단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님의 위대한 부흥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당신을 통해 드러날 찬란한 영광이 오케스트라의 합주와 같다면 우리들이 이제껏 경험했던 정말 크고 놀라워 보이는 놀라운 은혜는 단지 악기들이 각기 자기의 악기를 조율하기 위해서 연습할 때 울려 나오는 한 두 마디에 가락과 같은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커다란 부흥을 맞이하기 전에는 항상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남들이 보지 못한 교회의 부흥의 때, 남들이 만나지 못한 하나님과의 위대한 만남이 있는 때를 처절하게 그리워하며 그러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교회 속에 부어 주시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그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울부짖는 사람들의 그 기도가 다가오는 부흥을 알리는 효시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었다. 그리고 우리는 엄청나게 흐르는 세상에 물결 앞에 힘없이 서 있는 교회의 모습들을 본다. 그러나 어차피 우리는 교회가 이 세상에 파도를 헤치고 이 세상에 거친 파도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길은 교회안에 그런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와 함께 하실 때 그런 일들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마음을 모아서 이런 부흥에 대한 소망을 새롭게 가져야 한다.
저는 요즘 개인적으로 교회가 성장하면서 이런 염려를 하게 된다. 교회라고 하는 비행기가 땅에서 이륙을 할 때에 정말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를 받은 성도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 교회라는 비행기가 창공을 날아오르는데 도움을 주겠지만 만약에 변화를 받지 않으면은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람들의 존재라고 하는 것은 비행기에 실린 돌멩이와 같아서 비행기를 더 뜨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변화 받은 성도들은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데 보탬이 되지만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데 견딜 수 없는 큰 부담을 주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 우리들은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교제가 있던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는 우리 시대에 교회를 만족하지 말고,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위해 꿈을 꾸어야한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이제껏 까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기적과 같은 일일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이 교회도 하나님을 위해서는 충분하지 않다. 더 정결해 지고 더 충성스러워 지고 더 열렬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희어져 추수하게될 밭을 보며 더 불붙는 소명감에 이글거리는 교회로 바꾸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너무나 크지만 이것으로 우리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한없이 크지만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그 일은 행하실 수 있는 일에 비하면 아주 적은 것에 불과 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당신에 교회들을 통해 세상을 정복하고 싶어하신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사면을 두루 살피시며 전심으로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능력을 주고 싶어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를 찾고 계신다. 모두들 평안하다고 하던 때에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영광스러워 질 수 있는지를 기억하며 그 영광을 잃어버린 것을 인해 가슴아파 하면서 시온을 기억하며 통곡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그런 영광을 보여 주시기를 소망하고 또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굳게 믿으면서 실패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부흥을 구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교회를 지금 이 시간에도 지켜보고 찾고 계시는 것이다. 어느 교회든지 찾으시면 하나님께서 그 교회에 당신의 자비하심을 보이시고 당신의 축복을 보이고 싶어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더 깊이 가난해져서 한번 마지막 시대에 우리 교회에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부어 주셔서 당신이 매일 기뻐하시던 교회에 부어 주셨던 그 시온의 놀라운 축복이 우리에게 재현되어서 하나님을 위해 훌륭한 도구가 되어서 주의 위대한 역사를 예비하고 그 길을 만드는 그런 역사를 이루도록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그렇게 하나님 앞에 소망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2. 세속적인 낙관과 거룩한 비관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荒廢)케 한 자가 기쁨을 창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시137:2-4)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음악을 가까이 한 민족이 흔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처럼 다양한 악기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노래하는 민족이었다. 그리고 그 노래들을 모아 놓은 시편을 보면 상황마다 그들은 노래로 그 상황을 이기고 피해가곤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비바람일 부는 것과 같은 시련에 때에 부르는 노래가 있었고 그리고 감사하고 기쁜 일이 있을 때에 부르는 곡조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인은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버드나무 가지에 걸었나니”라고 말하고 있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 바벨론 여러 강변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던 이 백성들이 버드나무 가지에 수금을 걸어 놓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수금이라고 하는 악기는 기다랗게 끈을 매달아서 사용하게끔 되어 있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나무에 걸어 놓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시인이 뭔가 2절을 이야기 할 때 비장한 마음을 가지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버드나무 가지에 걸었나니” 이것은 그저 일상적인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수금을 더 이상 연주하지 않고 더 이상 노래 부르지 않기로 결단한 어떤 내면에 움직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과연 그들은 노래하지 않기로 결심했고 그래서 더 이상 노래하기 위해 수금을 연주하지 않기로 수금을 버드나무 가지에 걸었던 것이다. 이것은 신앙적인 결단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일종에 하나님 앞에서 내린, 신앙적인 의지가 있는 어떤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일상화 되어있는 노래 부르는 일을 그만 두었으며 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노래하던 아름다운 곡조를 내어 보내던 그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었을까 하는 것이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일상적인 연주에 사용되던 수금을 버드나무 가지에 걸고 더 이상 노래하지 않기로 다짐했는가 하는 것을 오늘 우리들이 찾아보면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어떤 영적인 원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이 노래하는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버드나무 가지에 수금을 걸기로 결단을 하고 더 이상 노래하지 않기로 결심했던 이유는 바벨론 사람들을 기쁘게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오늘 성경을 보면 바벨론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서 너희가 잘 부르는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한번 불러 보라고 요청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여기 저기 흩어져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바벨론 사람들은 주문(朱門)이었을 것이다.
원래 문화가 다른 사람들끼리 만나면 그들이 하나 하나가 신비롭기 짝이 없고 때로는 혹이심을 불러일으킨다. 이 억 말리 먼 곳 바벨론에 끌려와서 노예와 같이 비참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와 습관은 바벨론과 통하는 것도 많이 있었겠지만 다른 것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고대의 세계가 항상 그렇듯이 그들의 다양한 문화적인 삶의 핵심을 캐들어 가면 거기에는 종교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매우 독특한 삶과 문화를 바벨론 사람들이 보니까 그 한 가운데 그들의 야웨의 종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시온에서 부르던 노래를 한번 불러 보라고 주문했던 것이다. 어쩌면 바벨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민족과 그리고 가사를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노래를 귀담아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기들이 가락과는 비교되는 그 독특한 가락을 다시 한번 들어보고 싶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청을 한 것이다.
종교적인 멸시 그리고 종교적인 학대의 감정이 포함되어 있는지에 대한 여부(與否)는 알 수 없지만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시온의 노래 중 하나님을 불러 달라고 한 것은 반드시 조롱에 뜻으로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금을 버드나무 가지에 걸고 더 이상 노래 부리는 않기로 다짐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을 기쁘게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금을 버드나무 가지에 걸면서 자신들이 부르는 긴 세월 동안에 노래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이 이방에 땅에서 절실하게 깨달았을 것이다. 신앙에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신앙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지를 알게 된다. 몸이 너무 쇠약해서 기도할 마음은 있으나 기도할 수 없도록 강요된 환경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마음껏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찬송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잘 부르는 노래는 아니지만 목청껏 주의에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특권인지 모른다. 누구의 강요와 지시를 받지 않고서도 자신의 신앙의 양심을 따라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행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쁜 것인지를 잃어버리기 전에는 사람들이 잘 모른다고 하는 말씀인 것이다.
이방에 땅에 끌려와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부르던 노래 중 하나를 한번 불러 보라 내가 너희들의 노래를 듣고 내가 즐거워하고 싶다라고 하는 바벨론 사람들의 청탁을 들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정한 찬양에 의미가 무엇이고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부를 수 있었던 그 고국에서의 생활을 몹시 그리워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오늘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바와는 정반대로 행동하며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비유를 하지면 오늘 노래 부르지 않기로 수금을 버드나무 가지에 걸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정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지 않기로 다짐한 노래를 부르며 이방 사람들의 박수 소리를 들을 때 우쭐해지는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시온의 노래를 부르는 바벨론 사람들의 청탁을 거절했지만 우리들은 이 세상이 우리들을 향해서 무엇인가 노래하라고 말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절한 그 노래를 부르고 세상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는 그 환성에 놀아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순결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백성들이다. 한 사람의 신자의 신앙이 진실하고 순결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 사람의 신앙과 삶의 모든 규칙이 하나님 한 분에게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제외해 놓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 하나님 손에 붙잡힌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의 기쁨이 그의 기쁨이고 하나님의 슬픔이 그의 슬픔인 것이다.
오늘 우리는 세상에 재미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세상에서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들을 교회에서 얻기 위해 그것을 얻는 재미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들은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에 땅에 끌려와서 바벨론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더 이상 노래 부르지 않기로 다짐하고 수금을 버드나무 가지에 걸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본 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나라가 멸망의 위기를 향해서 치달아 가고 있을 때는 아마 깨닫지 못했던 영적인 진리들을 고난을 당하면서 그들은 깨닫게 되었을지 모른다. 찬양을 뜻 없이 불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면전(面前) 의식이 없는 예배로 자신의 양심을 달랬던 사람들이다. 오늘 이방에 땅에 포로로 끌려와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찬양하고자 할 때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찬양이 이방 백성들의 오락 거리가 되고 자기들의 찬송하는 이 연주가 이방 백성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노리개가 되기를 거절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는 것이다. 순결한 신앙의 특징은 하나님 한 분만 기뻐하시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것이다. 사람이 내게 무엇이라고 말하고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기뻐하는 한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인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지혜롭게 처신하고 그들을 사랑하기를 힘쓰지만 그러나 그것은 모두 사람을 향한 염려와 근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끌려와서 광야와 같은 곳에서 의지할 것 없이 노예와 다름없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고 자신들이 부르는 노래를 통해서 짐승 같은 이방에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고통인지를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마음의 작용을 통해서 고난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경건을 회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경건한 사람, 하나님 앞에 신령한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가? 누가 한 사람을 경건한 사람이요 신령한 사람이라고 평할 때 그 사람은 신령하지 않고 경건하지 않은 사람과 어떻게 구별이 되는 가?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자신의 삶의 초점이 맞추어진 사람이다. 그리고 누구도 하나님을 향한 찬송을 가로채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이방에게 주지 아니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돌려드릴 경배와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자신도 찬양을 통해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는 백성들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커다란 고난을 통해서 비로소 그들이 진정으로 추구해야될 나라가 세상에 나라가 아니고 자신들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들이 이 세상에 있는 즐거움이 아니요 하나님 한 분의 영광이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 것처럼 우리들도 또한 이러한 깨달음 속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교회 생활과 조국 교회의 현실들을 한번 영적인 안목(眼目)을 가지고 돌아보기를 원한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포로로 끌려가서 피 눈물을 흘리는 서글픈 역사에 무대에 서 있지 않는다. 이산(離山) 가족이 있기는 하지만 가족을 잃어버린 남한의 백성들은 비교적 여유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슬픔과 가족과 생이별한 사람들의 마음의 아픔을 우리가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비참하지는 않다. 우리는 나라가 강하지는 않지만 지금 누구에 노예도 아니고 누구의 압제(壓制)를 받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나라는 우리 나라이고 우리는 우리의 사랑과 양심을 가지고 이 나라를 사랑하고 이 나라 속에서 겨레로서의 본분을 다해가고 있다.
그러나 눈을 들어 이 시대와 이 시대의 영적인 형편을 살펴보기 바란다. 오늘날 교회 시대의 영적인 형편은 바벨론의 포로의 때와 같은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지만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태반이다.
그리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어도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겠다고 다짐하지 않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하나님의 대한 다양한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 자신이 이 시대를 향해 가지고 계시는 그 계획과 마음을 자신의 삶의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역사를 움직이고 계시고 하나님께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마지막 때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닫고 소명을 자각하고 있는 그리스도인 수는 매우 희박하기 짝이 없다.
대부분의 교회는 세상과 전투하기를 포기했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도움은 고사하고 하나님께 벌을 받지 않으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은 소극적인 모습들을 보이고 있다. 그들의 꿈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이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목표와 다르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생관도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의 인생관과 별로 다르지 않다.
지금은 마치 주권을 잃어버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백성들은 남아있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도 남아 있지만 영토를 잃어버리고 남의 나라 땅에서 남의 나라 백성들의 종살이를 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형편과 유사하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한 자존심과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와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교회의 영광스러운 기풍은 사라져가고 “금과 은이 없으니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하던 처음 교회의 장엄한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이제는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하지 않기 위해서 세상에 있는 것들이 자신들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과시함으로 세상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교회의 몸부림이 애처로워 보이는 시대에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노래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할 만한 아무 이유가 교회에 없는 때이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한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간다고 하는 것과 거짓된 낙관에 빠진다고 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의 진리를 예고하던 선지자들을 기억해 보시기 바란다. 그들의 말씀은 갈급해 있었고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좋은 것만을 예고하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때로는 왕의 죽음을 예고하기도 했고 때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멸망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커다란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갑자기 하나님의 모든 은총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 앞에 저주받은 물건과 같이 되어버린 위기를 예언하기도 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역사에 캄캄하고 어두운 심판의 그림자가 다가올 때 춤추고 노래하던 선지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아 민족을 향해 기쁜 소식을 전해주지 못하는 것들을 슬퍼하던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는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를 사자와 같이 외치고 돌아서서는 찢어지는 마음의 고통을 부여안고 흐르는 피 눈물을 닦아야했던 사람들이 이스라엘 선지자들이었고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던 예언자들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편견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지고 있던 하나님의 심판의 특별한 예고 속에서도 선지자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총을 향한 기대가 전혀 없거나 심판 중에 긍휼을 잃지 않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찬송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 향한 심판의 예고를 거의 읽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눈물겨운 사랑과 성실하심과 자비하심이 가장 불붙는 심판의 메시지 속에서는 전해 내려 왔고 이것이 하나님의 선지자들 속에서는 감사의 제목들이 되어 왔던 것이다. 우리가 하루 하루의 삶을 감사함으로 산다는 것과 거짓된 낙관에 빠진다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또한 반대로 하나님의 비관을 받아드리며 경건한 슬픔에 잠기는 것과 감사에 마음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다. 심지어 이런 식으로 교회에서 가르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즉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면 긍정적이고 행복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가르치는 시대에 우리들이 살고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느낌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감정이나 우리들의 느낌이 아니라 ‘사실’이다. 진짜 사실이 무엇이냐고 하는 것이다. 거짓된 낙관을 가르쳐 주던 선지자의 목소리를 신령한 비관주의를 가르쳐 주던 참된 예언자의 목소리 보다 더 좋아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 선지자들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뜻밖에 멸망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오늘 버드나무 가지에 수금을 건 이스라엘의 백성들에게는 노래를 부를 만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바벨론 강변에 앉아서 아마 어떤 노래를 부르면서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노래가 가져다주는 위안이 아니었다.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낙관이 가져다주는 위안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이 말씀을 개인적으로 적용한다면 우리의 개인적인 영적인 회복에 있어서도 늘 값싼 동정이나 사람들로부터 받는 위로나 노래를 통해서 받는 위로를 통해서 위안을 삼는 것과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영혼을 회복 시켜주시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고향이 없는 사람도 망향가를 많이 부르면 있지도 않는 고향이 그리워지는 법이고 헤어진 경험이 없는 사람도 이별의 노래를 많이 부르면 마치 자신이 비련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마련이다. 노래에는 이런 힘이 있다. 우리가 만약 위로가 피로할 때 우리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노래를 들으면 위로가 될 수 있다. 문제는 무엇인가? 문제는 느낌이 아니라 사실이다. 우리들이 영적인 깊은 침체에 빠져서 하나님의 관계가 도탄에 빠졌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들이 노래를 부름으로서 우리 자신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만이 급선무가 아니라 사실상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깊은 웅덩이에서 건져내셔서 이제는 사슴과 같이 높은 바위 위를 뛰어다니게 만드시는 그 사실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오늘 성경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슬퍼할 만한 이유가 있을 때에는 깊이 슬퍼하고 기뻐할 만한 이유가 있을 때는 지체없이 기뻐하라고 하신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태도,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 주시는 그 모습을 읽을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은 노래에 미친 시대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노래를 부른다. 심지어는 복음성가에도 순위가 매겨지고 그것이 청소년들의 주요 화제가 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세상에 대중가요에 순위를 매기에 젊은이들이 거기에 빠지는 것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뜻 없이 노래를 부르는 것은 몽유병 환자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 역사를 볼 때 정말 살아있는 찬양이 교회에 울려 퍼지던 때에는 복음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던 때였다. 복음에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이해와 자신들의 시대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를 알던 때에는 그들이 정말 의미 있는 찬양을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노래는 단지 우리를 노래 부르게 할뿐이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영적인 각성은 주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속에 베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에 땅에 끌려 와서 나라가 망한 다음에야 그리고 전혀 희망이 없는 신앙을 받아드릴 마음에 준비조차도 없는 그럴 의지조차도 없는 이방에 백성들이 자신들의 오락을 위해서 거룩한 노래를 불러달라고 주문하는 그런 현실에 놓이게 되었을 때 그들은 찬양에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진정한 찬양에 의미를 알게 되자 자신들의 상태는 지금 전혀 노래 부를 만한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노래를 부르는 대신 바벨론의 여러 강변에 앉아서 많이 울었다. 그들은 바벨론 강변에 앉아서 가벼운 노래로 마음을 달래고 설움을 이기는 대신에 하나님 앞에 많이 울었다. 하나님과 함께 하던 주님의 은총을 받던 지난날들을 기억하며 울었고 불순종과 죄 가운데 나라가 멸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돌이킬 줄 모르며 하나님께서 주신 그 구원의 기회들을 잃어버렸던 민족에 죄를 생각하며 많이 울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이러한 뼈아픈 포로 생활 가운데서도 긍휼과 은총을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목메어 울었을 것이다.
바벨론의 여러 강변에 앉아서 지는 석양을 한 몸에 받으며 목놓아 우는 이 백성들의 이 모습을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마치 아버지에 품을 떠난 탕자들의 울부짖음과 같고 그리고 돌아갈 기약이 없는 실향민들이 통곡소리와 같은 이 울음 소리가 바벨로 강변에 메아리쳐 갈 때 그들의 마음 속에는 과연 어떤 생각이 있었겠는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서 나라를 잃어버리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유를 박탈당한 채 또 다시 나그네 설움을 겪게되기 전 까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줄을 모르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만 섬기고 매일 같은 율법을 배우고 매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상태와 거룩한 삶이 있는지를 성찰하고 그 앞에 징책과 격려를 받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던 삶을 지루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우상을 섬겼고 하나님 한 분을 섬기지 않기로 다짐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상도 섬기기를 원했고 그리고 이 세상 나라도 소유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도 사랑하고 싶어했고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세상에 축복도 놓치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비참한 실패와 처절한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행복이 얼마나 특별한 것인지를 이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고 하는 말씀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자기가 원하는 때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고 찬송할 수 있음을 인해서 얼마나 감사하고 있습니까? 의지만 있으면 어느 때든지 나와서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찾아야 할 지를 탐구할 수 있게 해 주신 이 신앙의 자유와 여러분들 곁에 진리를 두신 것을 인해서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의 삶은 꽃처럼 향기 나는 삶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화려한 장미꽃과 같이 아름다운 삶일 수 없고 울긋불긋 꽃잎으로 치장해서 아름다운 향기로 수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시선을 모으는 그런 화려한 삶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공경하며 살아가는 그 삶은 그렇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꽃처럼 향기 나는 삶이지만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우습기 짝이 없는 삶의 모습이다. 마치 무더운 여름날에 털 코트를 걸치고 지나가는 정신병자처럼 보이는 삶일 수도 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속된 이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게 마련이고 더 진실된 신자가 되고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자 하면 할수록 이 세상에서는 쓸모 없이 튀는 존재로 보이기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지를 안 사람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에 백성들과 똑같이 이 세상에 살아있지만 그들이 먹고 마시는 이유와 세상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이유는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양식이 있다.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없는 또 다른 세계가 있고 그 세계에서 만족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를 잃어버리고 뼈아픈 하나님의 진노를 당한 후에 껍데기 밖에 남아있지 않은 비참한 교회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이 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가 거울이 된다. 우리에게는 그 역사가 거울이 되고 그래서 우리는 육적인 이스라엘 나라가 아니라 영적인 왕국인 이스라엘의 소명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바벨론의 포로 때와 유사한 영적인 상황을 지나고 있을 때 어떻게 역사의 밤을 지났는지 지혜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에 땅에 끌려와서야 비로소 이 노래가 여호와 앞에 부르는 노래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호와 앞에 부르는 이 노래,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찬송하게끔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기서 경험하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와 친밀한 사랑을 나누었던 사람들은 주님이 그런 사랑을 부어 주시기까지 그 영혼에 만족이 없다. 배불리 먹는다고 행복이 아니고 좋은 옷을 입는다고 해서 호사스러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손에 넣어도 하나님의 백성의 진정한 기쁨인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시지 않으면 그들은 전혀 노래부를 만한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과 함께 하던 사람들,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고 기쁨 되시는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삶을 살았던 믿음에 사람들은 사망에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비결을 배웠고 마라와 같이 쓴 물을 머금어야 하는 인생에 피눈물나는 인생에 골짜기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방법을 배웠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 자신들이 부르는 찬송을 들으시는 하나님이 자기들 가운데 계신 그 관계가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것인지를 배우게 되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우리는 오늘 하나님 앞에서 이런 깨달음을 얻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한 조국에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 한 분만을 섬겨야 할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행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게 되었듯이 오늘 우리는 이제 이 만큼 잃어 버렸으면 이 지점에서는 우리들에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에 복음에 영광이 사라지고 하나님을 찾는 수많은 백성들이 있어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는 백성들이 없고 그리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교회에 신앙생활에 거의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이 시대에 교회는 마땅히 오늘 이제는 더 이상에 경험을 하지 않아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 바벨론 강변에서 통곡하며 슬피 울면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은총과 영광을 그리워했던 것처럼 오늘도 우리는 그러한 기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배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이방에 땅에 포로로 끌려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실 때 나타났던 놀라운 권세와 영광은 사라졌고 하나님이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은총을 잊어버리시지는 않으셨지만 그러나 믿음에 눈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면 그 은총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심판이 확실한 시기였다.
지혜로운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서 목숨을 잃어버렸던 수많은 동족들과는 생명을 부지하고 오늘도 이렇게 살아 바벨론 강변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남아 있는 것을 먼저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을 생각했다. 그들에게 희망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들의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너무나 많은 하나님의 백성을 영광을 잃어 버렸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영광, 떠나가 버린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잃어버린 것을 인해서 오늘 바벨론의 여러 강변에서 슬피 울면서 더 이상 노래 부르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이 시간에도 우리 자신들의 영적인 상황과 교회의 영적인 상황, 조국의 교회의 영적인 상황을 깊이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신앙생활을 해온 것을 대견스럽게 생각하는 사람 치고 오늘 건강한 영적인 생활을 이어 가는 사람이 없고 그리고 자신의 목회적인 업적을 자랑하는 목회자가 건강한 교회를 가지고 있는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오늘 이 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강변에 앉아서 생각하던 그 시야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랑할 만한 것도 많고 감사할 만한 것들은 더더욱 많다. 많은 성도들을 보내어 주신 것도 감사하고 우리들이 가끔 넘어지기는 했지만 완전히 뒤로 물러서서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도 감사할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께서 많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보내어 주시고 그리고 또 하나님 앞에 보냄을 받은 영혼들이 완전히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는 모습도 우리에게는 감사에 이유가 될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우리에게 채워 주셔서 넉넉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지 않고 살게 해주신 것도 감사의 제목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서 주님의 얼굴을 구했더라면 얻을 수 있는 것들을 그렇게 살지 않았기 때문에 잊어버린 것들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만약에 우리가 주님 밖에 사랑하는 분이 없고 생사간에 주의 제단 앞에 우리의 건강, 우리의 마음, 우리의 생명,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바쳤더라면 얻을 수 있었을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한번 더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우리의 쓸데없는 만족, 그리고 거짓된 낙관주의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구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하며 살 수 있는 사람들은 더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우리의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면 주님이 주실지도 모르는 커다란 역사를 소망하는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감사하게 살 수 있다. 주님 앞에 마음에서 울어 나오는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이 정도면 괜찮지 하는 거짓된 낙관주의의 빠지는 태만한 심령과는 같은 것이 아니다.
주님의 거룩한 사랑을 알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내하면서 자족하는 비결을 배우는 것과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체념하고 환경에 순응하는 것과 어떠한 환경에든지 어떤 모습으로든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우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인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뒤로 물러선 사람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소나마 영적인 진보를 보였다. 그리고 어쩌면 그 진보가 대단히 커서 우리들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지난해의 우리들보다는 지금에 우리들이 대견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들이 태만하게 지내지 않고 더 열렬하게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그리고 더 간절히 마음을 지키고 처음 우리들에게 주신 그 은혜를 굳게 하며 매 순간 죄와 더불어 싸우고 우리들을 유혹하는 이 세상에 거짓된 유혹을 단호하게 뿌리치며 주님께서 처음 우리들에게 주셨던 처음 부르심을 따라서 최선을 다하며 살았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훌륭하게 되었을 것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을 것이며 지금 보다는 훨씬 더 그리스도 예수를 많이 닮아서 거룩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변했을 것이다.
일곱 명이 모여서 교회의 첫 깃발을 올리던 때가 엊그제 같다. 그리고 우리가 이 만큼 모여서 주님을 찬송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은 한 순간도 이 교회를 홀로 버려 두신 적이 없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린 적은 가끔 있었지만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를 버리신 적이 없었다. 우리의 불의한 행위를 따라 갚지 않으시고 이 교회를 위해서 자기의 살을 찢어 피 흘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을 생각하시면서 그리스도께서 패역한 영혼들을 징벌하시는 대신 그들의 마음을 인격적으로 돌이키시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말씀하셨고 교회가 여러 번 어려움을 겪을 때에 그 때마다 큰손을 바다 위에 펴시어 그 파도를 잔잔케 하심으로 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때로는 목회자도 포기한 교인들을 하나님께서 돌아오게 하시고 목회자에게조차 낙망을 주었던 사람들을 하나님이 홀로 그 영혼을 변화시키셔서 주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표본이 되게 하셨다. 필설(筆舌)로 다할 수 없는 것이다. 열린 교회의 5년이 어떠한 역사였냐고 묻는다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개척 교회를 3년 하면 수기를 쓰고 대하 소설을 쓸 수 있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그런 아무 재료가 없다. 하나님 앞에 쓸모 없는 사람으로 이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그 사실 하나와 그 쓸모 없는 인간을 향해서 베푼 하나님의 은총이 크시다 라는 것밖에 말할 수 없고 주님이 우리가 교회를 세울 때에는 과연 누가 이 교회에 나올까? 하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가 세워지기를 기다리는 수많은 영혼들을 도처(到處)에 예비해 놓으셨다는 사실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울어도 눈물로는 다 값을 수가 없고 그리고 우리 교회의 역사와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모든 축복들 중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쓰레기 같은 사람들을 모으셔서 거룩한 사역을 꽃 피우시고 그리고 아무 것도 아닌 인간들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교회의 모습이 되게 하셨다.
그러나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저의 지난 5년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일생이 뼈저린 후회로 가슴에 다가올 때가 많다. 5년 동안 우리는 하느라고 애를 많이 썼지만 우리가 좀 더 지혜로웠다면 그리고 우리가 좀 더 순수했더라면 그리고 좀 더 주님만을 사랑했더라면 우리가 좀 더 생명까지 아끼지 않고 주님을 위해 헌신했더라면 아마 그 결과는 지금 이 교회의 건강함보다는 훨씬 더 영광스러운 모습이 되어있었을 것이며 그리고 이렇게 빈자리가 남아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遊離)하며 고생하는 영혼들을 건지라고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를 교회에 한 모퉁이를 수종들 라고 세워 주셨는데 우리는 너무나 많은 시간동안 하나님의 아픔을 잊으면서 살아왔다. 자신의 아픔과 갈등은 어마어마하게 크게 생각하고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교회를 섬기게 하신 동기가 되는 시대를 향한 아픔과 목자 잃은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에 고통은 우리들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살아올 때가 너무나 많았다.
우리는 감사해야할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이유들을 발견함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우리는 눈을 들어서 희어진 이 세상을 바라보고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대책 없이 악한 이리 때들에게 뜨기고 있는 양떼들을 보면서 확실히 지금은 춤추고 노래할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능력이 없는 사랑은 애처로운 사랑일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그토록 찬송하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능력이 있으신 분으로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더 큰 찬송에 제목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잃어버린 것들이 너무나 많다.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찾았더라면 받을 수 있었던 그 큰 영적인 능력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우리들이 만약에 마음을 모으고 시선을 보좌에 고정시킨 채 하늘을 가르고 이 세상에 강림하실 하나님의 부흥의 영광을 전심으로 구했더라면 아마 그 불이 우리 중에 떨어졌을지도 모르고 그리고 조국에 강산에 한 모퉁이가 활활 타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빈 공간이 많이 남아있는 교회당을 보는 것이다.
유리하는 영혼들이 너무나 많고 영혼 깊은 곳에서 목자에 품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안타까운 외침을 간직한 영혼들이 많건마는 그러나 때로는 우리의 능력 없음에 때로는 우리의 사랑 적음에 때로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하나로 모아지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 하심의 부재(不在) 때문에 우리는 단지 영혼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은 보고 있을 따름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불충성하고 우리들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야박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흘리는 가책의 눈물이 있는 동안에는 회복의 기회가 있다.
그러나 조국에 교회를 보면 노래할 이유가 없는 교회당에서 춤추는 방법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살아온 날들이 너무나 감사하고 우리의 코에 호흡이 끊어지지 않고 우리의 심장에 박동이 계속 되는 한 우리의 영원한 찬송 제목은 ‘예수 인도 하셨네’ 하는 감사에 노래 밖에는 없다.
우리에게 무슨 공로가 있고 우리에게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우리의 본분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을 대적하던 죄인들이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슬리던 짐승과 같은 인간들이었다. 우리들에게 무슨 자랑거리가 있는가? 우리는 숨질 때까지 하나님 앞에 우리를 주님이 만드시고 살려 두셔서 긍휼과 사랑으로 우리의 오류와 거짓으로 가득 찬 인생의 길을 선하게 인도하신 하나님을 노래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날에 이 시대와 그리고 힘을 잃어버린 교회에 모습을 보면서 피 저린 목소리로 이 시대를 향해 외치고 외쳐도 돌아오지 않는 백성들을 보면서 하나님께 가슴을 찢으며 호소하던 믿음에 사람들의 그 외침을 본 받아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처절한 중보 기도인 것이다. 우리는 아무 힘이 없고 우리는 능력이 없다고 고백하면서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 것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우리가 힘이 없고 우리가 기우러진 선교의 상황을 다시 뒤엎거나 우리에게 맡겨진 영혼들이지만 아무리 권면해도 바뀌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영혼들을 대할 때 “우리는 아무 능력이 없어”라고 말해서는 안되고 우리는 아무 도움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한계의 선상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우리는 처절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의 섬김 위에 함께 했더라면 얻을 수 있었던 수많은 영혼들, 그리고 진척(進陟)을 볼 수 있었던 하나님의 위대한 선교의 상황들을 염두해 두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벨론의 강변에서 슬피 울며 지난날의 신앙의 자유와 영광을 노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신앙의 선조들은 자신들을 가리켜서 ‘나그네’요 ‘객’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싸우는 신앙이 싸움이 홈 그라운드에서 싸우는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먼 본향을 찾아가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지금 믿음에 싸움을 싸우는 이 경기를 홈구장에서 펼치는 것이 아니라 와 본적이 없는 낯선 땅에서 펼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했다.
주님께서 왜 우리들을 주님을 믿게 만들었는가? 이렇게 예수를 믿어도 도무지 행복한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고, 믿는 것도 없고, 안 믿는 것도 없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인생살이를 적응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시고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드셨는가? 그렇지 않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은 당신의 아들의 죽으심을 통해서 이루고 싶으셨던 하나님의 나라에 일에 우리를 동참하게 하시려고 세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가장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자기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강변에서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던 것처럼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 속에서 정복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아집과 교만과 독선과 하나님 이외에 쓸데없는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만 바쳐지지 않은 것을 인해서 슬퍼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마치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지 않은 것이 우리의 영토를 이방에 적군들에게 빼앗긴 것처럼 그렇게 슬퍼하며 주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하며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하는 말씀이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강변에서 통곡하며 울었던 이 역사를 본다. 이들은 나라가 망하고 나서야 눈물을 배우게 되었지만 그러나 아직도 우리에게 작은 은혜들이 남아 있을 때 이 남아 있는 것들이 모두 사라지고 그리고 진짜로 우리들이 죽은 자와 방불한 사람들이 되기 이전에 바벨론 강변에서 통회하며 눈물을 흘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물의 지혜를 배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진정으로 회복하기 위해서 사람들로부터 오는 위로를 거절하고 그리고 사람들이 가져다주는 교제의 기쁨보다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에게 지고의 행복을 보이실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주님을 만나서 애통하지 자의 눈물을 씻기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위로가 있기까지 가난해 지기를 마다하지 않는 성도들, 주님과 대면하기까지 더 이상 인생의 언저리에서 선택에 기로(岐路)서 머뭇거리지 않기로 다짐한 사람들, 수많은 사람들의 말을 귀 기울이며 바보와 같은 삶을 끝내고 내 인생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망루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홀로 대면하고자 하는 하박국 선지자의 마음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말씀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당신의 교회를 통해서 이루실 위대한 영광에 꿈을 꾸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은 초라한 모습으로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결코 이 세상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아무 상관이 없는 존재로 살다가 가는 소시민의 생활을 꿈꾸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에 손에 붙들린 횃불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바짝 마른 산에 어디든지 주님에 손에 던져서 타오르는 불길들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한다.
이 교회가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었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바벨론 강변에서 수금을 나뭇가지에 걸고 하나님께 시선을 모으고 통곡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참회하는 마음과 하나님 자신만을 집중하는 이 마음을 본 받았더라면 얼마나 놀랍게 교회가 변해있었을까 생각하며 그것들을 마치 잃어버린 우리의 보화인 것처럼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애통하는 마음으로 교회와 목회자와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교회의 소명을 위해 우리들은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교회가 지혜로운 인간의 방법과 성실한 인생들의 노력을 통해서 탑을 쌓아올린 성공 사례를 남기는 교회가 아니라 한 교회가 하나님 앞에 모두들 춤추고 먹고 마시며 노래할 때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온 것과 방불한 상태를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버드나무 가지에 수금을 걸며 하나님 한 분을 추구하고 그분께 이 시대와 교회의 회복을 위해서 중보하기로 다짐하였을 때에 하나님이 친히 강림하셔서 나타내시는 영광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교회가 되도록 우리가 모두가 거기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쓸모 없는 즐거움으로부터 자신들을 격리(隔離)시켜야 한다. 값싼 낙관이 거룩한 슬픔 그리고 경건한 고민을 빼앗아 가지 않도록 유의하며 우리는 더욱 더 마음을 모으고 더 마음을 모아서 펴진 우리의 무릎을 다시 꿇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주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하나님의 교회와 이 민족에 역사에 아무 소망이 없는 것처럼 주께서 은혜를 내려 주시기를 마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세와 같은 심령이 되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기우러져 가는 이스라엘 역사의 비탈길에서 피로 외치던 예레미야의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이 우리를 처음 불러 주셨을 때에 세우셨던 그 자기에 우리가 서 있게 하시고 그래서 우리들이 부르짖는 이 기도를 통해서 꿈꾸며 그리워했던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교회에 나타나고 그 교회를 통해서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세상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날들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중도에 이 일을 포기 할 것이고 주님보다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일을 위해 고난받기를 거절할 것이며 주님의 응답이 너무 더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걸어 두었던 수금을 꺼내어서 다시 춤추며 먹고 마실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살게 내 버려 두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서말에 가루를 통해서가 아니라 한 줌에 누룩을 통해서 역사 하시고 다수에 잠자는 사람들의 숫자를 사용하셔서 위대한 일들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시기 때문인 것이다.
3. 아, 그리운 예루살렘이여!
에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 천장에 붙을지로다(시137:5-6)
지난 시간에는 인간의 낙관과 하나님의 낙관이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았다. 확실히 우리는 오늘날의 교회의 형편을 낙관하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약속 받은 것들이 얼마나 위대하고 하나님께서 교회에 함께 하실 때에 어떤 번영이 교회에 일어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희미하게 잊어버리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춤추고 노래하는 인간의 낙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과 시각으로 교회를 바라보고 그리고 그 교회가 지금 역사에 어는 지점을 지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통찰할 수 있는 지각이 필요하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풍성한 기업이 무엇이고 오늘날에 교회가 왜 그런 것들을 잃어버리고 있는지를 깊이 깨닫는다면 사람들은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인간이 스스로 불러일으키는 잘 될 것이라는 낙관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비관이 훨씬 더 희망적이다 라는 말씀을 드렸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어서 5-6절에서 이 시인이 예루살렘을 잊을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제목을 붙인다면 ‘아 잊지 못할 예루살렘이여’라고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앞에서 시온을 이야기 하다가 이번에는 예루살렘을 이야기하고 있다. 시온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산지이고 예루살렘은 그 산지에 둘러싸인 고유한 예루살렘 도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라를 잃어버리고 적국에 땅에 끌려온 사람들이 고국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고국을 그리워하게 될 때 저마다 자기가 살다가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편 137편의 시인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상태에서 예루살렘을 잊지 못하고 있는 장면은 전혀 이상한 장면이 아니다.
(예화) 어렸을 때 2년여 자란 곳(강원도 인제)을 지나갈 때에 향수에 젖은 이야기. 통일전망 대에서 관광객과 실향민의 차이를 낀 이야기.
오늘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는 것은 실향민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과는 달랐다. 이 정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되지 않고는 모르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이 시온에서나 예루살렘에서 끌려온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데서 끌려온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두고 온 갈릴리나 가버나움이나 나사렛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적으로 예루살렘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 속에 흐리고 있는 ‘예루살렘 신앙’을 파악해야 한다. 예루살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 있는 신앙이 한 장소로 구체화되는 것이다. 이미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서 광야를 지나고 있을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직 정복하지고 않은 그 땅에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한 장소를 예배할 것이고 거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만나고 그리고 언약이 그 장소를 통해서 시행되고 그리고 왕권이 구현될 것임을 미리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약속이 바라 본 역사적으로 최종적인 지점이 예루살렘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학자들 사이에는 예루살렘이 무슨 뜻이냐에 대해서 학설이 분분하다.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대체로 ‘여루아’ 와 ‘샬라임’이 합쳐진 것으로 본다. ‘여루’는 성이라는 뜻이고 ‘샬라임’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뜻하는 말이다. 즉 평강에 도성이 되는 것이다. 구약에서 ‘평강’이라고 할 때에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peace'가 아니다. 이것은 단지 전쟁이 없고 다툼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짐으로써 거기에서 밀려온 평안을 누리며 거기서 전쟁이 없는 다툼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예루살렘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과 구체적으로 만나주시고 거기에서 언약을 실행시키시고 그리고 당신의 왕권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펼치시는 특별한 장소였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에 변천 과정이 있기는 하지만 마지막에 성전도 예루살렘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이 시온과 예루살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거룩한 땅이다. 그리고 그 땅에 심장부에는 여호와께서 친히 강림하시는 성전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지금 잊을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도 알고 보면은 잘못된 신앙이 이런 뼈아픈 망향에 노래를 부르게 만든 것이다. 그 이스라엘 속에는 크게 두 가지 신앙을 흐르고 있었다. 특별히 이 위기에 시대에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심판을 예고하고 회개하고 돌이킬 것을 선포하는 이때에 두 개의 큰 신앙의 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하나는 낙관적인 신앙이다. 그 낙관적인 신앙이라는 것은 비관을 결코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낙관이 아니라 낙관적인 면만을 본 나머지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고자 했던 ‘야웨 신앙’에 한 쪽을 보지 못한 것을 말한다. 그래서 구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것을 아브라함에게 뿌리를 둔 신앙이라고 본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다. 아브라함에게는 그럴만한 공로가 있지 않았다. 그러면 왜 갈대아 우르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 우상을 만들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가계의 아브라함을 택하셨을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을 기뻐하셨다는 사실 말고는 설명이 어려운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과 관계를 맺으시는데 그 관계라고 하는 것이 항상 일방적인 은총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호의 베푸시고 아브라함은 그것을 받아드린 것뿐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영원히 그렇게 다루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는 계속해서 은총을 약속하시고 우리에게 호의를 베푸실 수 있는 분이시지 뭔가 우리에게 다른 여지를 남겨 두실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나라가 멸망에 위기까지 갔는데도 낙관을 갖게 만들어 준 잘못된 신앙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믿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교회 다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믿으면서 다니느냐가 문제이다.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살고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달랐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의 언약을 기억하도록 촉구하였다. 선지자들에게 있어서는 아브라함보다는 모세가 가르쳐 준 율법이 훨씬 더 중요한 제목이 되었다. 그래서 선지자들의 메시지 자체가 만약에 모세가 이 시대에 살아 태어난다면 모세의 시대와는 다른 이 시대에 어떻게 살아가라고 가르쳤을까? 하는 것이 선지자들의 선포의 주제였다.
오늘날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천년 전에 쓰여진 신약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이시라면 오늘날 어떻게 살아가라고 그리하셨을까 생각하듯이 선지자의 메시지도 그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호의만 베푸시던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모세 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는 확연하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다루시는 방법이 달라진다. 왜냐하면 언약을 맺으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은총을 약속하시는데 굉장히 커다란 책임과 의무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언약으로 부르셔서 언약을 맺으신 후에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순종하면 하나님의 큰 축복이 불순종하면 하나님의 징벌이 있다는 가능성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함께 가르쳐 준 것이다.
그런 시야를 가지고 있는 선지자들에게는 하나님은 한없는 호의와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지만 그러나 하나님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일정한 시점이 지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대항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리실 징벌을 예고하신 것이며 따라서 너희 나라를 망하게 하신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을 너희들이 어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서 하나님과의 관계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가게 하는 것이 예언자들의 임무였다.
대부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피묻은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거절되었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듣고 돌이키는 것이 사는 길이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사는 길을 택하는 대신에 지속적인 불순종의 길을 걸어갔다는 것이다.
(예화) 약 20년 전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휴거’ 라고 하는 소설 이야기.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을 한다. 우리를 바르게 가르쳐 주면 바르게 믿을 것인데 교회가 바르게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에 잘못 믿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말은 완전히 틀리지 않는데 결코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니다. 정말 참된 신앙을 갈망하는 사람들 참된 신앙을 갈망하면서도 철저하게 주위에 의해서 참된 복음이 은폐되었고 잘못된 것만을 가르쳐 주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것을 믿는 사람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참되지 않은 거짓 진리를 붙들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마음속에 그렇게 적당히 믿으면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런 교훈을 붙잡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단에 흐르고 형식적인 신앙에 흐르면 교회도 책임을 면할 수 없지만 그런 교회를 다니고 그런 신앙을 붙들고 살았던 우리들 자신들로 그 책임을 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좁은 길을 적게 가르쳐주고 넓은 길을 많이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넓은 길로 걸어 갔다고 해서 그 좁은 길을 버리고 넓은 길로 걸어가서 사망에 이르게 된 그 선택의 책임이 전혀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교훈을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간절한 소원은 이 땅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운 어는 교회든지 교회에 들어가면 정직한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대치할 수 없는 축복이다. 그리고 어느 교회든지 기독교가 무엇이고 인생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는 교회, 그리고 그렇게 정확하게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가르쳐 주는 것을 교회가 성장하거나 교회가 커지거나 교회가 사람들로 붐비거나 아니면 교회가 많은 인기를 끌거나 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라고 믿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 교회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모두 예수를 믿는 교회가 아니라 사람들이 이곳에서 인생이 무엇이고 복음이 무엇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듣고 믿든지 말든지 둘 중에 하나를 결단하는 것이 바로 교회이다.
어느 시대이든지 매우 특별한 시대를 제외하고는 매우 특별한 시대라고 할지라도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마찬가지로 교회가 정직하고 참된 복음을 전할 때 예외 없이 교회당에 발을 들어놓은 모든 사람들이 그 복음에 매료된 적은 없었다. 만약에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참된 복음이 이미 아니다.
그래서 복음의 힘, 진리의 참된 힘은 그 진리를 통해서 듣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판가름해 준다. 비록 오랜 동안 무지 가운데 살았다고 할지라도 정직하고 참된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선명한 십자가의 도리를 들을 때 그 사람이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참된 신앙을 사모했더라면 아무도 붙들지 않아도 그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선포될 때 그것을 붙들게 된다.
아무리 교회와 친근하게 살았어도 그 사람이 만약에 마음속으로 전혀 하나님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거슬려 살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정직하게 복음이 선포 될 때에 그 복음을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곳, 바로 그 곳이 교회인 것이다.
그리므로 교회가 참된 진리를 얻을 수 잇는 것은 이 세상에도 존재하지 않고 저 하늘 나라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믿고 안 믿는 것은 우리들의 자유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입맛대로 예수를 믿을 수 있는 권한은 없다. 이 사람들이 지금 자기의 입맛대로 여호와를 믿었기 때문에 이 끔직한 심판에 직면하고 돌이키고 회복할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주셨지만은 그 기회를 모두 떠나 보내고 지금은 이처럼 비참하게 남의 나라에 포로로 끌려와서 설움을 머금어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와 설교자들은 아무리 엄격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해서 여호와하나님을 성경대로 믿고 따르는 것이 하늘의 별을 따는 것처럼 힘들어 보인다고 할지라도 정직하게 진리를 선포하면 아무도 그 진리를 기뻐하고 환영해 줄 것 같지 않고 교회에서 전파하는 이 메시지가 대중적인 호응을 얻지 못할 것 같아도 캄캄한 어둠 속을 향해서 복음을 선포하노라면 오랜 세월 동안 그 복음에 목말라서 어둠 속에서 복음을 붙잡기 위해서 손을 내 밀었던 눈먼 수많은 사람들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주님이 우리들에게 맡겨 주신 양떼들이다. 그 사람들을 향해서 무엇이 들려지든지 상관이 없는 다수가 아니라 참된 복음이 들려지면 참되게 반응하기를 원하는 그 소수의 사람을 향해서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어 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때가 될수록 참되고 정직한 복음을 듣기가 힘들어 지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바로 그런 신앙을 받아드리지 않은 것이다. 멸망할 수도 있다는 개연성(蓋然性)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왜 그것을 인정하면 자신의 삶과 사고 방식과 이제껏 살아왔던 모든 삶들을 뜯어 고치고 부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힘겨운 것이다.
(예화) “피묻은 복음에 빠져라”를 읽고 자기 느낌을 말한 어느 지체의 이야기. 십자가의 복음 을 알면 알수록 불안해지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자체가 부담스럽다.
이 지체는 자기 방식대로 믿고 싶은 신앙이 있었던 것이다. 성경은 우리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뭐라고 생각하든지 관심이 없다. 성경은 잠자코 성경이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것을 들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자기주의 주장이 유별나게 강한 사람들이 이 신앙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신 그런 사람들이 한번 무너지고 깨뜨려지고 나면 자기의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할 수 없으니까 매우 부지런히 성경을 배우려고 애를 쓴다. 흐리멍덩하지 않다.
오늘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는 것은 이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새롭게 깨달은 것이다. 즉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이 멸망했을 때에 그들이 받은 신앙적인 충격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다른 곳은 다 망해도 이 시온과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지키실 것이다 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결국은 이방인들이 와서 말발굽으로 다 밟아 버리고 성전을 허물고 성전에 있는 거룩한 기명(器皿)들을 다 걷어 가지고 가버린 것이다. 결국 겁탈 당한 부녀자와 같이 다 뜯겨버린 그 예루살렘 성전과 성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 무신론자가 되기에 적합했던 것이다. 왜? 하나님이 분명히 예루살렘과 이 시온을 지키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 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미 예레미야로 부터 유다 나라의 멸망을 예고 받은 백성들에게는 이와 같은 태도가 웃기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 심판 받은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이 선지자와 같은 사람은 “봐라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 계시지 않느냐?”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즉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비참하게 파괴될 일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선지자들의 역사관이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루실 때에 무조건적인 호의로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대하느냐에 따라서 그들을 다루시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혼란에 빠질 수 있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에 있느냐 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심판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가도 하나님의 사랑이 다한 것은 아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사랑이 다했더라면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모든 것을 쓸어 버리셨을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나라를 끝내셨을 것이다. 세상을 재창조하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을 받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셔서 그들을 통해서 자기의 뜻을 계속 계승해 나가도록 만들어 주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신앙을 생각할 때 우선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신앙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전체로서의 신앙을 같이 생각해야 한다.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기서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예루살렘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쌓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이들이 그리워하는 예루살렘은 무엇인가? 이미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여 주셔서 당신의 임재를 나타내 보이시기를 기뻐하시는 특별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때에 이 예루살렘이 특별한 도성이 된 것이지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이 되어버린 다음에 심지어 패역한 백성들이 된 다음에는 이 예루살렘은 진정한 의미에서 예루살렘이 이미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그리워하고 있는 예루살렘은 하나님과의 평강을 누리는 신앙적인 하나님과의 화해가 있고 그 화해를 기초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권세와 능력 안에서 예루살렘이 보호를 받던 때의 평화, 그때의 평화, 예를 들면 다윗과 같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임금이 다스리던 그런 시대의 하나님과의 평화로 말미암아 강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였던 그러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런 번영이 있는 그런 예루살렘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호세아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나님 없는 번영과 영화와 국력이 가져다주는 평화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피 비린내 나는 아픔을 통해서 그 신앙이 성숙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정확하게 한 시대를 향한 교회에 연결이 됨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나라 그 자체가 교회였다. 예루살렘에 대한 이 처절한 그리움은 오늘날로 비교하자면 이 망가진 교회들을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눈물겨운 그리움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제대로 깨어나게 되면 그는 이 교회의 힘을 빌어서 단지 잠깐 예수를 믿다가 천당 가는 하나의 대합실 정도로 생각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신앙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참으로 알게 되면 우리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속에서 아주 눈을 뜨게 된다. 각성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각성이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이 배우는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천박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구약의 하나님의 율법이나 신약 시대의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자체가 어느 한 개인에게 위탁된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게 위탁된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을 수여 받은 한 사람이 모세였지만 하나님이 이 율법을 모세 개인에게 주신 것이 아니었다. 모세 개인에게 주셔서 모세가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만 나누어 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개인 모세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택한 할례 받은 백성의 언약 공동체의 대표로서 그 율법을 수여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 율법을 수여 받았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율법을 수여 받는 자리에 함께 참여한 것이다. 그래서 율법을 다 읽어주고 그 다음에 피를 뿌리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멘, 아멘, 하면서 회답하고 언약의식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이렇게 피를 뿌리는 것과 같은 죽음이 있을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아멘, 아멘, 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 율법을 받음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다른 민족과는 비교되지 않는 떼어 놓을 수 없는 영적인 연합을 이루는 언약 공동체가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올바르게 살고 있는데 그들을 핍박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 된다. 이 얼마나 엄청난 사실인가?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 무거운 의무를 주는 대신에 놀라운 축복을 주신 것이다. 즉 우리를 축복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올바르게 사는데 우리들을 대적하고 박해를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벌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런 특권을 받은 사람이 과연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멸망당하고 나서 예루살렘의 가치를 새롭게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주목해야할 바이다. 우리들이 신앙에 대해서 정직하게 배우고 눈을 뜨게 되면 하나님께서 즉시 나의 아버지이기 전에 우리 아버지인 것을 알게 된다. 율법도 공동체에게 위탁된 것이고 복음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라고 하는 연계의식이 없이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접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교회에 관심이 없다. 그리고 관심이 있어도 그 관심이 매우 육적이다. 그리고 열심을 내는 것도 지극히 인간적이다. 소위 말해서 빗나간 열심인 것이다. 그러나 신앙생활대해 올바른 눈을 뜨게 되면 교회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성경적인 교회 사랑은 개 교회적이지 않다. 세상에 취미가 같은 사람도 통하는 것이 있다. 하물며 예수를 믿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를 잘못 사랑하니까 자기 교회 밖에 모르는 개교회주의 자들이 되어버렸다. 다른 교회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소위 교회 공동체성에 눈을 뜬다고 하는 것은 좀더 거시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시대에 만들어진 모든 교회들은 우리의 지체이다. 우리들은 늘 이 교회를 위해서 기도한다. 그러나 교회에 대해서 가슴 아파해 본적이 과연 얼마나 있는가? 즉 오늘날 이 조국의 교회가 참된 복음을 잃어버리고 있다라고 하는 대해서 마음 아파해 본적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름을 알 수 없고 얼굴도 잘 기억할 수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참된 진리의 길을 모르는 채 세속적인 생각과 성경적인 생각들이 뒤엉킨 가운데 생명이 있는 신앙 생활을 하는 것에 대해서 가슴 아파해 본 적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공동체성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순간이다. 참으로 각성을 하게 되면 반드시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어느 순간에 주님의 복음을 진리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고 영적으로 각성하게 될 때에 이제껏 자기 나름대로 자기가 얽기 섥기 짜 놓았던 신앙에 얼개를 가지고 믿어 왔다는 사실이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는 항상 영적인 각성이 일어나게 되는데 영적인 각성은 항상 정서적인 각성과 지성적인 각성을 동반한다. 그래서 무엇이 잘못 되었다고 하는 일들을 깨닫는 것과 함께 잘못 되었기 때문에 마음에 많이 아픈 정서적인 각성이 함께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깨닫게 해 준 것이 교회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자기만이 아니라 자기 주위에 많은 사람과 많은 교회들이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각성하게 되는 것이다. 회심을 하고 나면 회심을 하지 않을 때 가질 수 없었던 강력한 소원이 하나 생긴다. 그래서 참된 회개의 특징은 사랑하는 대상에 변화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변화가 일어나니까 전에는 나를 위해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싶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교회에 그렇지 않는 것이다. 그러고 예전에 자기가 잘못 생각하고 믿고 살았던 잘못된 방식을 가르치고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으면서 성도들이 살아가는 것이다. 그 때에 깊은 고통이 주어진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 그에게 부음 바 된 것이다.
그런 시야에서 한번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으로 돌아가 보기를 바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끄려와서 예루살렘을 그리워하고 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그 평화로 말미암아서 나라가 강력한 국권을 가지고 그리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평강을 그 백성들이 누리며 살아가고 있었던 그 시대를 그리워하고 이제는 예루살렘이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포로로 끌려와서 잔혹하리만큼 노역에 종사하고 있는 그 실향민들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을 받고 있지만 예루살렘은 이제 자기 자체가 이미 약탈이 되어서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거기 계셨지만 축복으로 함께 계신 것이 아니라 심판하기 위해서 거기 계셨기 때문에 그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거룩한 성품을 들어내셔야 했던 그런 비극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이 사람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때 비로소 그 영광스러운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이었는가를 깨닫게 된 것이다. 여기에 끌려와서 그들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았는데 그 진정한 행복이 예루살렘의 영광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큰 축복으로 넘치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서 그 교회에 발을 딛어 놓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곳이 거룩한 곳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의 영의 임재의 영광이 있었던 그것이 예루살렘의 영광이었고 그 영광을 보면서 살아가는 것이 자신들의 행복이었다는 사실을 모두 잃어버린 후에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요즘 이런 것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한 마디로 개판이다. 즉 이 교회 다니다 마음이 들지 않으며 저 교회로 간다. 저 교회 가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집어치우고 저쪽 교회로 간다. 언제든지 교회가 자기에게 어느 정도 행복을 줄 수 있고 즐거움과 유익을 줄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거기에 머물어 있지만 교회에 다니는 비용보다는 교회로부터 받는 혜택이 적다고 생각할 때에는 언제든지 헌 신짝처럼 버리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우리의 영혼에 당하는 고통과 괴로움을 기억하셔서 섭리 가운데 교회를 옮기게 하실 수 있다. 그래서 거기서 주님을 더 잘 만나고 진실 되게 섬길 수 있게끔 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목사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교회를 옮기는데 평신도가 교회를 옮기는 것은 당연한 것일 수 있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기도하는 기도제목이 있다. “제 생애에 두 번째 목회지가 없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그 이유는 나도 내 자신에 대해확신 할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우리가 기도하는 것과는 다르게 우리를 얼마든지 움직이게 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 사람들이 편의 주의적으로 쉽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눈물은 이 교회에서 흘리고 헌금은 다른 교회에 하고, 등록은 다른 교회에 하고 그리고 이 교회에서는 은혜만 받고, 자기 말로도 그 교회에 다닐 이유가 없다고 하면서 다니는 것이다. 왜 부모님 적부터 다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옮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너무 편의 주의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화) 교회 개척 초기에 배우겠다고 찾아온 신학생들 이야기.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 예루살렘의 영광을 향한 그리움을 본다는 것은 꿈같은 일인 것이다. 장난하는 이야기이다. 교회는 영적인 가정이다. 그리스도인에 삶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십자가를 지는 삶이 없을 때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불가능하다고 하셨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그토록 자신들이 온 관심을 예루살렘을 향해 쏟았다. 그 얼마 안되는 도시인 예루살렘에 온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에 따라서 우주적인 운명이 좌우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이유는 그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축복아래 있으면 그 예루살렘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호와의 통치와 왕권을 맛볼 것이고 하나님의 통치와 왕권아래 그 백성들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백성들이 반드시 여호와의 성품을 따라서 살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살면 그들의 삶은 반드시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예루살렘을 세우는 하나님의 목적인 것이다.
교회가 무엇으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세상 사람들은 높은 교회의 예배당을 보고 감동 받지 않는다. 문제는 무엇에 감동을 받는가 하면 거기 예수의 사람들이 있을 때 감동을 받는다. 기기에 예수의 사람들이 있기 위해서는 그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찬 교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것을 적용하면 우리는 이 시대의 교회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혼 탄식소리 들려온다” 누가 들어야할 탄식 소리인가? 목사가 홀로 들어야할 탄식 소리라고 생각하는가?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아니다. 목사 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명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 시대를 위해서 거룩한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예화) 10년 전 수련회 때에 은혜를 받고 놀라운 변화를 받은 두 자매의 이야기.
상한 영에 탄식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우리에게 만약에 영안이 있어서 그 영안이 뜨여진 가운데 이 세상을 바라보고, 우리들이 진실된 그리스도인이라고 가정할 때 이 세상을 위해 기도하지 아니 하고 베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믿지 않는 우리들의 가족이 얼마나 처참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지금 살아가고 있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세상을 고치기 위해서 교회가 부름을 받았는데 특정한 교파로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이 상한 영혼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종식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의 일원으로서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이 일을 행하고 이 사람들을 건져내어서 이들 가운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구원의 길이 어디 있는지를 알려 주어야 하는데 교회가 캄캄해진 것이다. 마치 어두운 골목길에서 아녀자는 겁탈을 당하는데 방범 초소에 불이 꺼진 것처럼 교회가 그런 상황이 된 것이다.
그때에 생각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능히 그런 세상에 비극을 종식시켜 줄 수 있는 권세를 가졌던 그 예루살렘의 영광이 있었던 때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세상을 위해 부름을 받았고 보냄을 받아서 무엇인가 이 세상에 이 슬픔과 비극과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어두운 세상에 슬픔을 끝내야 되는데 교회가 이것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 그가 할 수 있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교회를 살려 주시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 이외에 무엇이 있는지 생각을 해 보라는 것이다. 바로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교회를 보면, 정말 사람들이 어느 교단에 발을 들여놓든지 정직한 복음을 들을 수 있고, 몇 주라도 다니면 정말 참된 기독교 신앙이 이것이고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결단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정확한 의지를 갖게끔 만들어 주고 있는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다. 십자가가 없다는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생명을 누리고 살아가는 영적인 생활에 진정한 풍요함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핍절한 삶, 실패를 숙명처럼 알고 살아온 삶, 거짓된 복음을 진리처럼 붙들고 그 위에 안일한 삶의 이부자리를 펴고 살아온 거짓된 신앙 생활이 누울 자리를 제공받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 자신을 생각해 보자. 변화 받은 사람들이 여기에 많이 있겠지만 여전히 돌멩이같이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들이 예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단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도록 허락을 해주어 드리고 교회에 등록한 것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이 정말 성경이 가르쳐 주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이냐 하는 것이다.
각종 스포츠 클럽에 가입하는 것처럼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등록하고 아무 것도 배우려고 하지 아니하고 무지한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문화 현상으로서의 신앙생활, 기업처럼 움직이는 교회, 이런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정말 그리스도인이냐 하는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서 정말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으냐는 것이다. 정말 그 사람들이 죽어 가는 영혼들에 대해서 피끓는 애정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참 생명이 무엇인지를 보여 달라고 원하는 무리들에게 제시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자기가 경험을 해 보지 못한 것을 어떻게 제시할 수 있겠느냐 라는 것이다. 살아보지 못한 용서를 그들에게 말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다.
신앙과 교회 생활에 대한 냉소주의가 가득 찬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교회에 한 두 달 다니면 인간이 변하는 것이 정상이다. 변하지 않는 것이 기이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기이한 일이 일반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교회에 모습이 건강한 교회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이 교회에 충만하고 언제든지 세상과 더불어 타협하기를 거절한 생사를 건 복음이 오늘 이 설교단에서 이루어지고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면 그것이 자신을 칼로 찌르는 것 같아도 진리이면 아멘하고 받아들이는 성도들이 있는 교회, 그리고 그 진리대로 살다가 죽는 것을 진리를 버리고 사는 것보다 영광스럽게 여기는 신자들이 있는 그 교회, 그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이 깃든 교회인 것이다. 천막을 치고 모여도 그 교회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오늘 이 예루살렘을 그리워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으로 그리워해야 할 교회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에 패역을 고친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 자신의 번영이 가득 찬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정신없이 까불고 살았던 인간들이 이 교회당에 인도되어 들어오는 순간부터 여기는 내가 늘 다니던 민방위 교육장이나 포장마차 촌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거들먹거리는 교인들이나 복잡하고 어려운 예배 순서 때문에 그것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고상하고 높은 건물이나 화려한 악에 연주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그 곳에서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인생에 대한 견해와 하나님의 살아 계심에 대해서 증거를 받는 교인들의 그 엄숙한 예배의 태도, 그리고 거기에 깊이 경외하고 그리고 언제나 이 세상에서 고난과 시련을 당해도 진리대로 사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성도들이 여기에 실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 그들의 신앙에 대한 생각이 달아지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우리의 교회가 건강하지 않음에 대해서 가책을 많이 느꼈다. 건강하지 않다. 그리고 여기 저기서 병든 모습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이 교회가 잘못되면 제 인생은 없는 것이다. 한번 태어나서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의 길이 3만 4천 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 한 길을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택했는데 일생을 살고 나니까 재고품처럼 망가진 교회 하나하고 다 지친 영혼 하나밖에 없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 헐떡거리는 육체 하나밖에 남은 것이 없다면 그 인생은 잘못 태어난 것이다. 실수한 것이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하나님과 여러분들과 자신을 위해 행복한 것이다.
이것이 생활비를 받는 목사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인가? 아니다. 이 교회가 없으면 우리의 인생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기 있으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갈 곳을 정해주지 않으시는 한 여기가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영원히 살 것처럼 여기서 목회하고 여기서 신앙 생활하다가 죽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래도 될까 말까 라는 이야기이다. 생명을 걸고 하는 목회가 그것이 기관이든지 담임 목회이든지 간에 성공하는 예를 본적이 없다. 그리고 사람들이 성공했다고 하는 것은 사실 성공이 아닌 것이다.
교회에 발을 드려 놓으면서 내가 갈 곳이 어디 있겠는가?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실 리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진리의 말씀으로 깨우쳐서 바른 사람을 만드시고 그것이 좋은 동안에는 있고 하나님이 새 사람 만드시려는 것이 기분 나쁜 동안에는 교회를 떠난다고 하면 그 사람이 정말 신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막 보면서 사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교회가 건강한가? 정말 병든 모습이다.
세상에서 가장 마음이 아픈 것은 어느 교회를 가든지 간에 정직하게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배울 수 있는 진리가 선포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정도에 차이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를 정한다고 하는 것은 생사를 거는 문제이다.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이 교회는 단지 우리의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수단이 아니다. 여기가 없으면 우리도 없는 것이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받고 일평생 주를 위해서 헌신하며 살았다고 하는 삶을 무엇으로 입증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교회를 어떻게 섬겼느냐로 입증될 것이다. 교회를 섬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일평생 주님을 섬기면서 살았다는 말은 매우 특별한 사람 이외에는 성립이 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들의 교회에 대한 태도를 보면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태도가 거의 결정이 난다. 판단이 된다는 것이다. 오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여러 강변에서 시온을 기억하며 흘리며 눈물을 흘리는 이스라엘 백성들, 단지 고향에 두고 떠나와야 했던 실향민으로서의 눈물이 아니라 “왜? 어찌하여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주님이 예루살렘에 허락하신 장엄한 소명을 등진 채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고향을 잃어버리는 신세가 되었는가?”, “아! 그 옛날에 아름다웠던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던 예루살렘의 영광이여 하나님 교회를 다시 돌려주옵소서!” 하며 눈물을 흘리는 이런 눈물이 우리들에게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정말 우리들의 소망은 교회와 결탁되어 있는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던 한 사람이 이곳에 와서 예수를 믿기로 결심을 하고 여러분을 향해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그 순간에 우리들 속에는 어둠 속에 있던 한 영혼을 건져서 우리의 동기간으로 주셨다고 하는 감격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어떤 교인이 믿음으로 이기고 승리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 우리 자신들의 승리처럼 그렇게 그것이 기쁘냐 하는 것이다. 팔장을 끼고 뒤쪽에 앉아서 마치 경기장에 들어가지 못한 후보생들이 경기장 밖에서 팔장을 끼고 잔디밭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에는 예루살렘이 영광을 받을 때에도 우리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넘칠 때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정말 우리들의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감격 속에서 주님과 만나는 감동 속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들이 이 교회를 뜨겁게 사랑해야 한다. 단지 헌금을 하고 봉사하는 문제가 아니라 내 인생이 이 교회가 잘 되지 않으면 내 인생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내 생애에 모든 꿈과 젊음과 그리고 내 모든 영광과 내 생의 모든 자랑을 교회에 걸었습니다.” 이것은 한 교회를 웅장한 교회로 키우기 위한 꿈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교회를 잘 섬기는 그것이 이 세상에서 이 어두운 세상을 위해서 우리를 빛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소명을 가장 잘 완수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의 교회가 정말 건강한가? 하고 돌아보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좋고 좋은 것이 통용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된다. 아닌 것은 잘라내야 한다. 기쁜 것은 함께 나누지만 상처 난 것들은 고치고 곪은 것들은 찢어내야 한다. 그래서 교회당에서 항상 사람에 마음에 맞는 메시지가 선포되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이 항상 같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나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이 교회당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진리를 배우면서 사람의 마음은 살아지고 주님의 마음이 부음 바 되는 것이다. 이전에 육신의 안목으로 살아 갈 때에는 관심도 없었던 거들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면서 살 때에는 맛볼 수 없었던 신령한 즐거움들을 교회의 섬김 속에서 맛볼 수 있게 되는 진정한 축복들을 누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는 우리들 모두가 마치 비유를 하자면 몸 속에 있는 백혈구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병균이 침입을 하면 온 백혈구가 달려들어서 그것을 죽여버리고 면역력을 가진 건강한 몸을 만들 듯이 그래야 하는 것이다. 정말 하나님의 교회가 주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게 하는 어떤 병적인 부분들이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될 때에 정말 그 아픔을 자기의 것처럼 느끼며 그 상처 위에 눈물을 뿌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피를 뿌릴 수 있는 사람이 되야 한다. 그렇게 섬겨서 하나님의 교회가 건강을 회복하고 주님의 참된 영광을 온 땅에 들어내는 그런 하나님의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오늘 이 시인은 이러한 목메 이는 그리움들을 맛보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평온할 때에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에 이것을 맛보지를 못하고 좋은 기회와 돌이킬 수 있는 수많은 순간들을 흘려 보내고 하나님의 심판이 역사 속에서 성취되어서 이제는 포로된 상황에서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예루살렘의 영광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까지 이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정말 그리워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상황까지는 내려가지 않았다. 아직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다. 우리가 잘못한 것이 많고 하나님의 교회를 병들게 만드는데 우리 모두 기여한 바가 많지만 그러나 아직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기회를 주셨다. 추수 때가 가까웠지만 아직은 밤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 더 일할 수 있고 또 돌이킬 수 있다. 그래서 예전에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교회에 상처를 내게 했던 우리의 모든 죄과를 십자가 앞에 토하고 전에는 내가 건강한 주님의 교회에 거치는 돌이었고 하나님의 교회의 찬란한 영광에 어두움이었지만 이제는 내가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깨닫고 예전 보다 더 갑절이나 열심히 주님의 교회가 찬란한 주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공동체로 새워지는 일에 한 점 보탬이 되는 그런 도구가 되어서 사는 것만이 우리의 남은 인생의 보람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된다.
한 부모가 태어나서 아이들을 신앙과 사랑으로 잘 가르치면 그 아이는 너무 행복한 아이이다. 아까 부른 찬송가 어머니 읽으시던 손떼 묻은 성경책 읽어 주시던 주님의 말씀 새롭게 다가옵니다. 저는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은 때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저의 어머니는 그런 어머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여러분들이 대충 신앙생활을 하고 아무렇게나 예수를 믿다가 돼지우리 같은 교회 속에 짐승 같은 후손들을 잔뜩 나놓고 죽으면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징벌이다.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또 우리 자손들 다 주를 기리며 저 성전 돌 같이 긴하게 하소서 주 구원하신 능력을 주 구원하신 능력을 늘 끝 날까지 주소서”그러면 여러분들의 후손은 인생의 반은 저절로 성공한 것이다. 아니 80% 는 저절로 성공한 것이다. 항상 이 교회 속에서 진실되게 추구하던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 노구의 몸을 이끌고 이 교회당에 나와서 예배 시간마다 감격에 잠기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의 그 은혜에 감격하던 모습, 언제나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육신의 안일함을 포기하며 살던 우리의 부모님들, 진리를 지키는 일을 위해서라면 생명을 주는 것을 아깝지 않게 생각했던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 그리고 이 교회에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수 있다면 아무 것도 아까워하지 않으며 자기의 살던 집과 전토와 자신들의 모든 제물을 아낌없이 이 교회를 위해서 쏟아 부었던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 그렇게 회상하면서 우리의 후손들이 이곳에서 교회 생활을 할 수 있다면 그 후손들 가운데 누가 나오셔서 이 세상에 여호와 공의의 빛을 들어낼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못한 그 일들이 그 후손들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소명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교회로 부르신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이 교회를 다니는 이 소명은 실로 엄숙하고 영혼에 깃들인 결단이다. 우리의 삶 하나 하나는 하나님의 생명책에 모두 기록되고 있다.
오늘 이 시편에 시인처럼 바벨론 유수의 시대에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시대에 찬란한 예루살렘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하나님 앞에 통곡하는 이 모습, 수금을 버드나무 가지에 걸고 내가 예루살렘을 가장 많이 사랑하지 않으면 차라리 내 혀가 내 입에 달라붙어서 아무 노래도 부를 수 없게 되기를 소망하고 있는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단의 모습을 보시기 바란다.
우리들이 이런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이 우리와 같이 쓸모 없는 인간들을 그리스도 예수의 값진 속죄의 피로 건져 주셔서 우리에게 한없는 사랑과 은혜를 베푸셨다.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은 주님이 주신 것이고 앞으로 누릴 것도 주님이 약속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한편에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들처럼 믿고 즉시 취하지 아니하시고 이 땅에 우리들을 남겨둔 것은 주님을 섬기게 하시기 위함이다. 주님을 섬김으로 우리들이 이 교회를 통해 복음의 빛을 발견하고 생명의 길에 들어셨던 것처럼 우리들의 피와 눈물과 땀을 흘려서 남들이 모두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는 태평한 때에 인간에 낙관 때문에 상식적인 생활에 만족할 때 좁은 길이 무엇인지를 알고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무릎을 꿇고 이 교회에 임하실 하나님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아버지 앞에 목놓아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들을 부르신 것이다. 그런 삶을 살아 갈 때에 비로소 우리들의 삶은 충성된 삶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흘린 이 눈물의 씨를 통해서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토로 돌아가고 예루살렘성이 다시 지어지는 영광을 누렸던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의 한 모퉁이를 우리들이 그렇게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리고 어떻게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살아가야 할지 생각하시기 바란다.
4. 예루살렘을 위한 거룩한 분노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해 받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저희 말이 훼파하라 훼파하라 그 기초까지 훼파하라 하였나이다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유복하리로다(시137:7-8)
시름에 잠겨있는 것 같았던 시인은 갑자기 하나님에게 예루살렘이 해 받던 날을 상기시키고 있다. 히브리 성경에는 ‘해 받던 날’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예루살렘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쳐 주시옵소서 저희가 훼파하라 훼파하라 기초까지 훼파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예루살렘의 날을 주님께 기억하도록 호소하고 있는 이 시인의 호소는 우리들이 조금 전까지 읽었던 시름에 잠긴 것 같은 잔잔한 분위기를 깨뜨리는 격렬함을 보이고 있다. 시인이 오늘 하나님 앞에 이처럼 이상한 탄원을 열렬하게 드리고 있는 배경이 여러분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오늘 시인이 이처럼 열렬하게 하나님께 에돔 자손을 공격하고 바벨론의 딸들에 대한 저주를 퍼부으면서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이 장면은 바로 우리들이 지난주에 살핀 앞부분 즉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루살렘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그 타오르는 듯한 열심히 반영된 것이다.
예루살렘이 비록 자신들의 죄 때문에 망했지만 그러나 죄 때문에 저절로 망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자신들이 죄를 지었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허락하셨지만 최종적으로 그 예루살렘을 무너뜨리는 도구로 쓰여졌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그 사람들은 바벨론 사람들이었다.
넓게 커다란 구도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잘못한 것이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주님을 사랑하고 거룩하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면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만 했더라면 그들은 그렇게 멸망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버려 두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외적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쳐들어 왔다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물러가거나 돌이여 멸망했던 수많은 역사의 기록들을 가지고 있다. 만약에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고서라도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려고 했고 하나님께서 만약에 그들을 지켜 주시려고 마음만 먹으셨다면 이전에 그들에 역사 가운데서 일어났던 놀라운 기적들이 되풀이 되서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셔서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예루살렘을 지켜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범죄했고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때문에 그들은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묘미가 여기에 있다. 그렇게 바벨론에 끌려와서 시온을 기억하며 눈물을 흘리고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진정한 가치,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한 축복됨, 이런 것들을 깊이 느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역사적인 고난을 해석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것으로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거기에서 충분히 자신들이 죄로 말미암아서 이스라엘이 멸망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들을 멸망시키는 도구로 사용되었던 바벨론을 향한 강한 반감과 미움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 바벨론 강변에서 시온을 기억하며 슬피 울고 있는 이 사람들은 고향을 잃어버린 슬픔 속에서 설움을 달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이 짓밟히고 그리고 이스라엘이 멸망당하고 난 후에 비로소 자신들의 영예와 하나님의 영예가 결탁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들의 행복과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이 결탁되어 있고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축복 받는 존재들이 될 때에 자기들을 통해 하나님이 올바르게 알려질 수 있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크게 교훈을 받고 있었던 거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오늘 바벨론을 향해 가지고 있는 강한 미움에 감정은 단지 국수주의(國粹主義)자나 민족주의자나 애국주의자가 자기 나라를 침공한 다른 민족을 향한 미움이나 원망, 불타는 적개심, 그 이상의 무엇을 보여주고 있은 것이다. 만약에 그 앞 절이 예루살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열심이라고 말한다면 오늘 우리들이 읽은 이 성경 본문은 그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원수들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한 분노를 보여주고 있는 장면인 것이다.
우리들이 흔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을 한다. 그리고 흔히 우리는 우리가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도구가 되기를 고백한다. 여러분들은 어떠한가? 마태복음 6장 33절은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리스도인이 왜 살아있는지를 그 성경 구절처럼 잘 보여주는 구절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께서 이 악한 세상에 여전히 살게 하시는 이유는 그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여기 두신 것이다. 만약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열심히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을 살고 전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고 그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헌신적인 삶을 산다면 우리들의 헌신을 통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런데 이것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신앙의 고백이 있으면 그 고백이 참되고 진실한가 하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참되지 않다면 그것은 올바른 고백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신앙의 영력에 있어서 상당히 많은 것들은 우리들이 너무나 습관적으로 당연하게 고백해 왔고 또 고백을 강요받는 분위기 때문에 사실 그런 고백을 반복하다가 보면 우리도 우리가 고백하는 내용에 깊이 동의를 하는지 하지 않는지를 모르면서 단지 이런 고백을 해야한다라고 하는 공식 때문에 자동으로 우리 속에서 흘려 나올 때가 많다는 것이다.
(예화) 서울 어느 교회의 대학부에서 특강한 이야기. 116㎏에서 54㎏로 살을 뺀 어느 자매의 이야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기를 원한다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기를 원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원하는 것이 모든 원하는 것이 아니 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목표에 대해서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있을 때 그 소망이 진실한지의 여부는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그 소망이 절대적인 사람들은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살아가는 것이 고통스럽게 짝이 없는데 소망이 상대적인 사람들은 그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살아가도 거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를 우리 모두는 원하는데, 그냥 단지 그랬으면 좋을텐데 라고 한다. 그러나 정말 진실로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를 원하는 마음이 절대적으로 간절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매우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망이 상대적인 사람들은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욕망이 절대적인 사람은 자신의 의식구조가 아직 소유하지 않은 미래에 맞추어져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견딜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보아야지만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나라를 간절히 갈망하는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만약에 별 불편이 없이 이 세상을 상당히 좋게 생각하면서 자신의 상황을 받아드리면서 매일 매일 살아가고 만족해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오기를 원한다라고 대답은 했지만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오기를 갈망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에 그가 진정을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오기를 갈망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하루를 살아가면서도 수시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고 힘겹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증거가 우리 예수님의 생애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은 예배를 마칠 때 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기도해야할 지를 즉 기도의 방식을 보여주시는 것이었다. 골격을 보여 주셨고 그 골격에 살을 많이 붙여서 풍부하게 기도를 하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어가게 하시고 싶으셨던 기도 생활이었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분 주위에서나 여러분 자신이 기도하다가 보니까 어느덧 주기도문에 따라 가고 있었다는 고백 할 수 있는 사람을 얼마나 보았는가?
오늘도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는 것이 우리들의 뼈저린 기도의 제목이 되고 있는가? 나라에 임하옵시며,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곳에 임하게 해 달라고 부르짖는 그 기도가 굉장히 살 깊은 기도가 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이 기도가 너무나 오랫동안 간절히 기도 드리면서 살아온 나머지 여러분의 마음에 타오르는 갈망에 일부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 주기도문의 순서는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올렸던 이 기도의 중요성에 순서라고 말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에 앞서서 예수님께는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나리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기도했다. 예수님이 이른 새벽마다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나아 가셔서 빈들이나 혹은 산이나 혹은 강가에서나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계실 때 주님의 그 기도하는 모습을 어떻게 상상하고 있는가? 주님의 그 기도의 모습은 열렬함이 없는 기도라는 상상할 수 없는 기도였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시되 열렬함 속에서 간절함으로 하나님께 드리셨고 그 맑은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었던 기도의 제목 가운데 가장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의 제목은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고 하는 간구요 탄원이었다.
이미 우리가 마음을 실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수 있는 사람 같으면 그 기도의 제목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충분히 고통을 받았다. 충분히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 기도가 뼈 속 깊이 사무치는 간절하고 애절한 제목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토해내어 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어떤 기도의 제목을 마음에 실어서 간절하고 열렬하게 기도할 때에는 이미 그 기도가 아직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에 충분한 고통을 우리들이 맛 볼 때에 그런 기도가 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가족이 예수를 믿지 않는데도 그 가족에 대한 안타까움이 없는 사람이 외부에 강요에 못 이겨서 가족을 위해 기도한다면 그 기도가 가슴에 절실하게 다가오는 기도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신앙생활을 올바로 하려고 하는데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가 박해를 하며 그것 때문에 수시로 부딪히는 문제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내 맘대로 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상황에 하나님께 기도하며 너무 나고 억울하고 안타까워서 기도를 하다가 보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핍박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주셔서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당연히 가족이 함께 교회에 나와야할 사실과 현재 그렇게 되고 있지 못하고 있는 현실 사이에서 마음이 찢어지는 갈등과 고통을 많이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좋은 직장도 필요 없고 돈 많은 것도 필요 없고 큰집도 필요 없고 그냥 다 벗고 지게하나 짊어지고 시장 바닥에서 난전 장사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부부가 한번 손잡고 신앙생활을 하면 20년만 살다가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라고 하는 마음이 뼈저리게 스며드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다른 기도 제목은 다 상대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이제 남편이나 아내를 위해서 영혼을 건져달라고 하나님 앞에 애절하게 부르짖게 된 것이다. 세상에서 그 사람만큼 자기의 남편이나 아내를 위해서 절절하게 기도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니다. 계획을 세워 놓고 수첩에 적어 놓고 기도하면 내일 아침 새벽기도 시간에 그 기도제목이 절절하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사람이 무엇을 기도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사실을 알 수 있고 평소에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깊이 사랑하고 어떤 것에 애착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우리 아버지께 간구의 소원을 올리시는 가운데 첫 번째로 터진 기도의 제목이 하나님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예수님이 온 몸을 던져서라도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그 하나님의 존재에 합당하게 사람들에게 인정되는 그러한 세상이 되기를 예수님께서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기도 속에서 이런 기도가 가슴에 깊이 파고드는 기도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사실 때 가장 고통스럽고 아팠던 것은 가난한 집에 태어나신 것이나 척박한 음식을 먹거나 안락하지 않은 잠자리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을 자주 만나지 못하는 것이 예수님에게 있어 첫 번째 고통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첫 번째 고통은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도처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의해서 모욕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보는 것이었다. 그 자체가 예수님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요 아픔이었던 것이다. 가슴을 저미는 슬픔과 고통이었다. 그것을 하루 종일 간직했다가 새벽 미명이면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기의 상하고 찢어지는 심령을 하나님 앞에 토해놓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데,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가 얼마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이신데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이 그의 손으로 지은바 된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더군다나 그런 하나님을 알리도록 부름을 받은 선택된 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을 인해서 이방 가운데 모욕을 받도록 허락을 하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주님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던 것이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예수님의 마음이 그런 마음이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이다. 이것이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위해서 필요한 예루살렘의 열광을 위한 열심인 것이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볼 수 없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데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 혼자 사랑하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자기가 하나님을 더 열렬하고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은 더 깊은 외로움을 느끼면서 처절하리만치 큰 고통이 밀려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좋으신 하나님을 나처럼 사랑하지 않는가 라는 것이다. 똑 같은 정서가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는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 홀로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 높아지기를 정말 열렬하게 바라는 마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자신 혼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사는 것으로서는 만족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깊은 은혜의 속에 들어가면 자신은 지체들과 가깝게 있고 교회는 버림받은 이 세상과 나뉘어질 수 없게끔 결탁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래서 한 사람에 마음속에 진정으로 주님을 향한 사랑이 물 붙듯 부어지는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면 그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을 마음껏 사랑하면서도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고 그 모든 세상 열방이 자기와 같이 하나님을 저심으로 사랑하는 그 세상을 보기까지는 만족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 죽을 때까지 만족을 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 죽을 때까지 만족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도 없고 흠도 없으신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일생을 피와 눈물과 땀으로 범벅된 삶을 사셨던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죄가 있으셔서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한 분도 아니셨는데 무엇 때문에 심히 통곡하고 몸부림을 치셨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되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분이신지를 분명하게 고백하지 않고 대충 살아가는 삶 자체가 예수님에게는 말할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고 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심은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덕목들과 어깨를 겨두고 비교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다양한 덕목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처절한 열심과 열망 위에 세워지지 않은 것이면 별로 의미가 없거나 거의 의미가 없는 것들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인간의 간절한 열망, 주님만이 홀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라고 하는 인간의 그 절박하고 간절한 울부짖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그의 욕망,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다른 덕성과 겨루어서 서로 평가되고 우위를 겨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중요한 정서라는 것이다.
여기서 에돔에 자손을 치소서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에돔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은 에서의 후손들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것을 바벨론에다 비유를 한 것이다. 에돔에 자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언제나 적대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그렇기 때문에 바벨론에 대한 적대감을 에돔에 대한 적대감과 동일선상에 놓으면서 서로를 상징하게 만드는 이 기법은 아주 정확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던 이 에돔과 자기네들의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고 자신들을 포로로 끌고 와서 바벨론 여러 강변에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게 만들었던 이 원수 바벨론을 동일선상에 놓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쳐달라고 호소하는데 이 치는 것은 아주 박살을 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건드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파멸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벨론을 향해서 그것을 구한 것이다.
그럼 우리들은 나라 잃은 설움이 복받쳐서 적개심에 불타고 있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갑자기 육이오 노래가 떠오른 이야기) 어떤 무력주의적인 사고 방식에서 오는 전쟁에 패배에서 오는 적대감이 아니다. 이것은 바벨론 자체를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민족에 원수로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원수로 본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비록 죄로 말미암아 멸망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큰 틀이고 그리고 그렇게 멸망하게된 직접적인 원인을 바벨론의 침공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비록 하나님 앞에 잘못 살아서 섭리 가운데 하나님께 징벌을 받은 사실을 충분히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멸망시키는 도구로서 나타났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저주와 도전을 면할 길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생각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다. 어떤 사람은 가룟 유다의 무죄론을 이야기한다. 즉 어차피 예수님은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해야 죽으실 수 있었고 그래야지만 인류 구속이 이루어짐으로 가룟 유다는 단지 도구가 되었을 뿐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선택되었으니 오히려 다른 사람이 불행한 자리에 처하게 될 것을 막아준 사람이라는 것이다. 또한 성경에 사단이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을 팔 생각을 넣어 주었다고 말하면서 그래도 가룟 유다에게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그런 생각을 넣어준 사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억지이다. 더 엄밀하게 보면 이런 이야기가 성립한다. 하나님도 준비된 사람들에게 찾아가시고 사단도 준비된 사람들에게 찾아간다는 것이다. 결국 그렇게 준비된 책임을 면할 길이 없는 것이다. 섭리 가운데서 그 사람에게로 돌아갔지만 그러나 결국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사단에게 자신을 내어준 책임은 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벨론이 그런 도구로 쓰임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바벨론이 그 책임을 면할 길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분노는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한 분노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서 말하는 것이 “예루살렘의 날을 기억하소서” 즉 예루살렘이 회파된 날에 바벨론 사람들이 한 짓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멸하시되 모두 산산조각을 내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도록 만들어 달라고 하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한 탄원이다.
오늘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궁극적(窮極的)으로 하나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열심은 참되고 진지한 것이었다. 수금을 버드나무 가지에 걸고 시온을 생각하며 우는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진실한 것이었고 궁극적으로 결국은 예루살렘이 망하고 시온이 회파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존귀하게 선포되고 선교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절박한 절망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만들어서 자기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내지 못하게 만들었던 원수를 향한 하나의 큰 미움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읽은 이 성경구절을 보면서 우리는 비로소 시온을 흘리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나 버드나무 가지에 수금을 건 것이나 그리고 만약에 예루살렘을 잃어버리면은 혀가 입천장에 붙어 버릴 것이라고 하는 자기 저주를 건 맹세 같은 것들이 진실한 소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면 맨 처음으로 돌아가서 우리에게 이런 것이 과연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정말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오기를 원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주님의 나라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살아가는 깊은 고통이 있느냐는 것이다. 만약에 그런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병들어 있는 신자들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지 그것은 상관이 없다. 성경이 오늘 그것을 말하고 있다. 모두 잠이 들었든지 일부가 잠이 들었든지 그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이라고 해서 수많은 사람 때문에 그 넓은 길이 좁은 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즉 지옥으로 달려가는 사람이 대다수라고 해서 그 지옥으로 가는 길에 고통이나 아픔이나 형벌이 경감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좁은 길을 걸어가고 참된 신앙을 찾아가는 길에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이변이 일어나서 그런 좁고 협착한 길임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받으면서 찾아가는 사람들이 다수가 되고 그것이 대중적인 것이 된다고 하더라도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특별한 하나님의 상급의 약속들이 경감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어느 편에 서 있는 신자인가 하는 것이다.
예레미야 1장 13절 이하에서 예례미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바벨론의 의해서 파멸을 당하고 성이 모두 부서진 상황에서 눈물로 애가를 써 내려가고 있을 때 그 애가 속에서 그는 “예루살렘을 지나는 너희들이여 너희들에게는 내게 있는 괴로움이 있는가? 생각해 보라” 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리라고 굳게 믿고 저 원수를 찔려야 된다고 구호처럼 부르짖었는데 신기하게 예루살렘성이 마치 겁탈 당한 부녀자처럼 비참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무 근심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더라는 것이다. 전쟁에 나서 기근에 휩싸이다 보니까 장롱 속에 감추어 두었던 보화들을 가지고 나와서 여기저기 양식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이더라는 것이다.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성전이 회파된 것과는 관계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의 모습 그들의 고백, 그들의 관심사들을 보면 너무나도 다른 반응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 때문인가?
조금 전에 이야기한 예루살렘을 향한 열렬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즉 거기서 울어 나왔다고 생각했던 많은 고백들이 사실이 거짓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단지 예루살렘이 자신들의 고향이고 그리고 나라를 잃어버리면 어디로 가야 하나 하는 일반적인 한 국가의 국민, 한 성의 한 주인으로서의 그런 평범한 생각이었지 그리고 약간 종교적인 분위기가 있는 고백이었을 뿐이지 이 시온의 예루살렘이 영광을 들어내어야 하며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우리들이 부름을 받았고 이 예루살렘과 시온이 회파되고 이방인들에 짓밟히고 있는 상황 속에서는 우리의 인생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라는 고백이 그들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편 137편에 이 시인의 심정은 그것이 아니었다. 예루살렘을 향한 간절한 열망, 비록 이방인들에게 짓밟혔고 회파되었지만 “예루살렘아 나는 너를 잊을 수 없단다 내 말이 거짓말이라면 차라리 내 혀가 입 천장에 달라붙어서 다시는 죽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위한 노래, 예루살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더라도 기꺼이 그리 하겠노라”는 고백이다. 이 고백의 진실성은 예루살렘을 그렇게 만든 원수들에 대한 이을 가는 분노로 표출된 것이다.
우리들이 과연 하나님을 만나는 삶을 살고 싶어하는가? 그러면 우리들의 삶 속에서 어떤 것들이 하나님을 못 만나게 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런 것들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는 분노하는 태도인가? 이전에 몰랐을 때에는 모르고 살았는데 어느 한 순간 말씀의 비추임을 받고 깨닫게 되니까 그 동안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것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않으려고 하는 무지한 태도였음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할 때 그 무지에 대한 미움이 생겨나느냐 하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호광을 하며 천년 만년 살기보다는 단 하루라도 진리의 빛 가운데서 인간답게 살고 싶다 라고 하는 처절한 고백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보니까 돈에 대한 사랑이 너무 컸음을 발견하였다. 자기는 안 그러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셨다.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깨닫고 난 다음에는 물질을 사랑하는 이것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데 과연 이 재물이 이렇게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며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예수를 좇을 각오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을 교회적으로 적용해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의 한없는 축복아래 있기를 원한다. 마치 예루살렘이 하나님과 화목한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와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 횃불과 같이 타오르는 것이었던 것처럼 우리는 교회가 그렇게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들어내는 횃불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부흥으로 나타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많은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그러면 우리가 교회가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분노가 우리들에게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들의 게으르고 나태한 삶이 우리의 목장을 병들게 했다면 나태와 게으름에 대한 혐오가 우리들에게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들이 바르게 찾아오는 성도들을 바르게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성도들의 신앙이 자라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데 기여하지 않는 백성으로서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사람들이 양산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올바른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만약에 부르짖는 함성으로 교회를 채우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오래도록 무릎을 꿇으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지를 않고 우리는 그 역사가일어 나기를 너무나 원하는데 하나님의 그런 놀라운 약속들이 있는데 그 약속들이 성취되지 않고 지연된다면 기도하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의 태만한 삶에 대한 분노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하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하나님 앞에 깨어있는 성도요 교회와 자신의 인생을 통해서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고 하는 사람인가 그냥 세월에 흐름 속에 묻혀 자기의 편의를 따라서 살려고 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가늠할 수 있는 유일한 갈림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분노도 있는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울분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방해하는 것들을 모두 상세히 부셔버리는 위엄을 나타내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그 격렬한 울부짖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다가 결국 하나님께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대적하는 것들을 마른풀을 불을 지펴서 태우시는 것처럼 단숨에 태워 버리고 그리고 물을 끓이는 것처럼 그들을 끓여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탄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처절한 정서는 매우 특이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어쩌다 한번 경험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남겨 두신 당신의 모든 백성들이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살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예화)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국회의원임을 자랑하던 친구가 어느 날 신민당 당사 앞에서 짚으로 만든 아버지가 변절자로서 화형을 당하는 것을 본 이야기.
하나님을 영광을 향한 간절한 갈망도 이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가슴 저미도록 감동을 받으시는 기도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구하기 위해서 마음 아파서 눈물 흘리며 몸부림치며 드리는 기도이다. 주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고 아버지의 나라가 온 땅에 이루어지고 주님을 등지고 살았던 악한 죄인들 하나님과 원수 맺었던 사악한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돌아와서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날이 오기만 한다면 우리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기도이다.
한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는 부흥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탁월한 분노가 필요하다. 정말 하나님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쓰임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것 같으면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붙드셔서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그 무엇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분노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오늘 여러분들이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변화를 갈망하는 참된 소원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변화가 점점 멀어지게 만드는 원인도 여러분들은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여러분 영혼의 진정한 변화는 공상과 상상에 세계 속에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씨름하는 영적인 전투 속에서 얻어지는 결실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진정으로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어떤 것들이 나의 그런 변화를 가로막고 있는지를 보면서 거기에 대해서 깊이 분노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드리고 있는 우리의 입술의 고백들을 진실한 것으로 받으시고 그 고백에 찾아 오셔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예화) 몇 일 전 교회 구석 구석을 살피면서 청소할 것을 지시한 이야기.
우리가 정말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면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드리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눈에 확 띠이지 않는다. 그것은 감추어져 있고 뿌리를 내리고 우리의 일부가 되어 가려고 한다. 그러한 것들을 말씀에 빛으로 정확하게 진리의 탐조등으로 비추면서 하나하나 찾아내어 그리고 그것들을 아깝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 붙은 헛된 욕심을 버리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올바르게 살아가지 못하도록 은밀히 들어와서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의 관계에 방해거리가 되고 있는 것들에 대해 단호하게 혐오하며 미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나와서 물이 흘러가듯이 그냥 예배 드리고 돌아가고 하면 교회에 부흥은 오지 않는다. 성도들이 낸 헌금을 가지고 교역자들을 밥 먹여 살리고 현상 유지하다가 문을 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이 없어 그 일 하려고 여기에 모여있는 것인가? 저는 그렇게 해서 인생을 마친다면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세상에 즐거움도 버리고 걸어갈 수 있는 수많은 길을 버리고 여기에 왔는데 겨우 헌금이나 모아서 건물이나 유지하고 교회의 직원들 월급이나 주는 교회에 되게 하려고 우리가 여기 모였다는 말인가? 만약에 우리가 이렇게 살다가 죽는 다면 그것은 저주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정말 이곳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고 강림 하셔서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며 그리고 그 하나님만이 이 병든 교회와 그리고 이 희망이 없는 어두운 세상을 향한 유일한 희망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 역사적인 일을 이루시려고 하나님께서 여기에 세워 두신 것이다.
그리고 현재 우리 교회의 모습이 피할 수 없는 모습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을 여기서 보여 주고 있다. 그래서 그런 처지에 있는 수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의한 교회의 변혁에 새로운 가능성들을 보고 그리고 우리처럼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고 우리처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임재하심 속에서 그의 교회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목격하도록 만들어 주어서 그들에게 성전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희망을 가지게 하시는 것이다. 그런 일들을 행하시려고 우리들을 여기 세워 놓으셨고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인생을 걸고 소명에 응답을 해서 이 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곳에서 이렇게 하나님은 정말 우리가 꿈꾸는 것과 같은 역사를 이루지 아니하시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그러한 진심을 항상 새롭게 다지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그런 일들을 원하시고 그리고 이 땅에 죽어 가는 수많은 교회와 세상을 고치기에는 어림도 없는 교회의 이 척박하고 영적인 힘을 잃어버린 이 현실들을 고치시기를 열렬하게 원하시는데 불구하고 이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무엇인가 그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어떤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우리의 마음에 있는 죄악일 수도 있고 교회적인 구조의 문제일 수도 있고 그리고 이 속에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고용되고 있고 통용되고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매우 근심시켜 드려서 그런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일이 있을 수도 있다. 발견하지 못했을 때는 모르지만 우리는 발견하도록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해야 하고 발견한 다음에는 숨김없이 그것들을 들어내고 그것들에 대한 격렬한 분노를 가져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향해서 치소서 멸하소서 에돔에 자손들을 멸하시듯이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그러한 위대한 교회가 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그런 백성으로 살아가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고 있는 것들을 멸하여 주소서 그렇게 우리의 온 마음을 실어서 탄원하고 몸부림칠 때 우리는 그 과정에서 이미 하나님이 부흥을 주시는 도구로 사용하시기 좋은 사람들로 변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청결해지고 당신 자신의 영광을 향한 처절한 애정을 품으면서 당신 앞으로 나아오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응답하지 않으려는 자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의무이지만 그 영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에게는 특권인 것이다.
5. 대적 자들을 향한 분노
네 어린 것들을 반석(磐石)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시137:9)
바벨론의 파멸을 말하면서 그렇게 하는 자가 복 있다고 말한 이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바벨론의 어린아이들에 대한 저주를 말한다. 즉 그 어린아이들을 반석에 내어 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우선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왜 구약에서는 이런 식의 표현이 많이 나오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지난 시간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 때문에 이런 표현들이 많이 나왔다고 말씀 드렸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해야 할 것은 당시 이스라엘은 교회와 나라가 하나였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은 곧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를 향한 어떤 공격은 곧 교회를 향한 공격이었고 이스라엘 나라를 향한 모욕은 곧 교회를 향한 모욕이었으며 그들을 대한 모욕은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모욕이었다. 국에 대한 충성과 교회에 열심히 일치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구약에서 교회를 위한 탁월한 열심은 대체로 전쟁이란 옷을 입고 나타난다. 왜 나라가 존재하려고 하니까 전쟁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즉 전쟁을 옷을 입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국심이 곧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똑같이 연정선상에서 받아드려 지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이런 형태가 많이 나온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보더라도 그랬다. 당시는 요즘과는 달라서 나라 뒤에는 항상 종교가 있게 마련이었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 그런데 대체로 종교는 강요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다니엘의 세 친구의 모습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에서 진다라고 하는 것은 자신들의 신앙의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전혀 동의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금하신 그러한 신들을 강제적으로 섬겨야 하는 운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니까 그들이 나라를 지키는 이일이 생명을 거는 일이었고 그것이 곧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하나님을 위한 열심과 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내 어린것들을 반석 위에 내어 친다”는 표현이 나오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대항하고 하나님께서 진멸하시기로 작정한 민족들을 이스라엘을 도구로 사용하실 때 철저하게 그런 식으로 진멸하도록 명령하시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성경에서 많이 나타난다. 가나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명령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성경에서 가장 잘 나오는 표현 중에 하나가 무릇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이라는 명령이었다. 심지어는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까지 포함해서 땅에 숨을 쉬는 모든 것들을 진멸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쓰여지면서 그 들을 모두 진멸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두 가지 국면이 함께 있는 것이다. 하나는 하나님의 진노를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풀어 나가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심판을 자초한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이었으니까 심판의 진노의 그 불을 끌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심판의 불을 끌만한 아무 것이 없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람들도 아니었고 주님의 은총이 보장된 사람들도 아니었다. 완전히 심판하시되 싹 쓸어서 살아있는 모든 인간들을 모조리 멸절 시키시는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그렇게 철저한 심판을 철저한 멸망을 강력하게 재촉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것이다. 첫째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둘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는데 그 이유는 오늘 이 어린것들을 바위에 치라는 말씀이 암시하고 있다. 이 어린것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긍휼을 베푸실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아이들이 지금은 당장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자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자라면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의 영향을 받을 수 없고 반드시 바벨론이 될 것이며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대적의 감정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뿌리를 모두 없애 버리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와 같은 사실이 너무 잔인하다고 말하는데 사실은 그렇게만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보호하시는 방법이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한 역사를 통해서도 이런 것들을 배운다.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명령을 잘 준행하였더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을 훨씬 더 오래도록 훌륭하게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철저하게 그 일을 행하지 못했다. 산지로 도망쳤던 백성들이 번성해서 다시 내려오고 그들과 교통하고 영향을 받고 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싹 쓸어버리시는 심판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오늘 시인이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시인이 단지 누군가에게 우리를 대신해서 바벨론을 멸망시켜 달라고 하는 인간을 향한 탄원이라기 보다는 역사 속에서 행해 오신 하나님의 이런 놀라운 계획을 따라서 이렇게 바 벨론을 멸망시키는 그 도구로 쓰임 받을 사람들에 대한 축복을 예고하는 것이다.
히브리 성경에서 보면 “유복하리로다” 라고 되어있는 이 표현은 시편 1편에 나오는 복있는 사람은 이라고 할 때에 복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받는 일반적인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도로서 받는 축복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즉 여기에서 어린아이를 돌에 내어 치는 자가 복이 있도다 할 때에 이 사람들이 외세의 힘을 빌어서 이 아이들을 돌에다 내어 치면서 자신의 복수심만 풀리면 된다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다시 일어남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성도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렇게 심판하게 되도록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 그렇게 움직여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에 시대에는 이런 열망이 없으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실 때 바베론과 같은 이방 민족들만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도 심판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심판은 싹 쓸어버리는 이런 식의 심판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기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불같아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향해 돌격하시면서 자신들을 모두 쓸어버리시는 것 같은 위협을 느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다른 것은 하나는 긍휼이 있는 심판이었고 하나는 긍휼히 없는 심판이었다. 이것이 바로 택하신 백성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강변에 앉아서 시온을 향해서 눈물을 흘리게 만드신 것은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을 하지 않으시면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없다는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역사적인 바벨론 유수의 사건을 통해서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죽어가고 나라를 잃어버리고 이민족들의 사민 정책을 통해서 그 땅으로 이사를 오고 개 끌려가듯이 이방에 나라로 끌려가는 완전히 초토화된 상황을 맞이했을 때 사람들은 역사 속에서 다른 나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멸망해 간 것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 바벨론에 의해서 처참하리 만치 멸망당하는 이것 사이에 아무런 차이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하나님은 항상 그들을 향한 심판과 같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지 않으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기에는 끔찍한 재난이었고 그리고 국가적인 큰 고통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끔찍한 고난이었지만 심판이었지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하나님께서 열방을 다루시는 방법과 같이 그렇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들과 이방의 민족이 심판을 받는 차이가 어떤 것인지를 몰랐지만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행해지고 있는 그 시대 속에서도 여호와의 긍휼, 그리고 자신들을 때리시면서 흐느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 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니엘과 같은 사람 혹은 에스겔이나 예레미야와 같은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처참한 멸망을 예언하거나 경험하면서도 항상 그 속에는 그 동안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렸던 위로가 있었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몰랐는데 믿음의 눈을 가지고 역사를 보니까 하나님께서 엄청 진노하시면서 나라를 망가뜨리고 쓸어버리시는 그 장면이 열방들을 심판하시는 것과 똑 같은데 그러나 사실 깊이 들어가 보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의 흐느낌과 하나님의 눈물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백성들을 때리시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싸매시고 고쳐서 자기에게 돌아오게 하시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시인은 그런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서 소망을 걸고 있는 것이다.
이 시편의 전편을 읽어 볼 때에 바벨론을 향한 큰 진노와 분노들은 표현되어 있지만 “우리가 무엇을 잘못 했습니까?” 라고 하는 자기 정당화는 없다. 그러면서도 심판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미래를 꿈 꿀 수가 있는가? 그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히 자신들의 의로움이 아니다. 자기들을 택하셨고 자기들을 심판하셔도 이방을 심판하시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자기들을 다루지 안이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그들이 보고 거기에 희망을 건 것이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이 되어야 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혹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과하게 다루신다 라고 하는 상황 속에 들어가 있는가? 물론 그럴 수 있다.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우리들의 버릇을 고치고자 하시면 정신없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욥과 같이 자기의 태어난 날을 원망하는 정도까지 그 혹한 고통을 경험할 때도 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을 보면 내가 이렇게 환난과 시련을 당하고 하나님 앞에서 강력한 채찍으로 얻어맞고 있지만 그러나 나를 다루시는 이것이 완전히 나를 진멸 시키기 위한 다루심이 아니고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루셨던 것처럼 나를 그 고통 가운데서 연단 시키고 훈련시켜 깨닫게 하여 하나님을 향한 나의 신앙의 태도를 바꾸게 하심이라는 사실이 보인다는 것이다.
잘못 살 때가 있다. 존재 자체가 여기에 살아 있어서 우리 하나님께 무한한 기쁨을 드리는 때가 있는가 하면 살아있는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에 고통이 될 때도 있다. 우리는 그런 삶을 살기를 원치 않지만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때때로 그런 물건이 될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망하신다. 그리고 얻어맞는 그 순간에는 주님의 우리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혹독한 시련이 다가오고 감당할 수 없는 심적인 고통과 그리고 상황의 어려움 들이 겹겹이 쌓이게되며 견딜 수 없는 시련과 고통이 계속되고 사람들과의 관계의 깨뜨려짐이 계속되고 부서지는 고통스러운 상황들이 많이 일어날 때 시인이 그러했던 거처럼 이제는 하나님의 은총이 다하였는가? 그런 고민을 하게된다. 과연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는가? 그런데 그런 속에서도 믿음의 눈으로 드려다 보면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 손에 붙이셔서 싹 쓸어버리시는 것과 같은 상황을 통해서 오히려 새 민족을 그 안에서 만들고 계셨다. 그리고 꿈꾸는 것과 같은 놀라운 일들을 역사 속에서 이루셔서 그들을 선지자의 약속대로 예언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의 포로에서 자기의 고국으로 돌아가게 만드셔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셨던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기의 택한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 당신이 사랑하기로 자기의 것으로 지명한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성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축복 받을 때만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불같은 시련과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시련 속에서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들을 기억해야 한다.
역사에 캄캄한 밤중이었지만 믿음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진리들을 굳게 붙들었다. 다니엘과 같은 사람이 바로 가장 비참한 그 캄캄한 암흑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고 감격하며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예수의 왕국을 예고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하나님의 이러한 손길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오늘 이 시인이 이방 민족에게 철저히 짓 밟혀서 노예와 다음 없는 삶을 살면서 잃어버린 고향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 상황 속에서조차 하나님께서 그 역사를 뒤집으셔서 자기들의 손으로 자신들에게 도전함으로 하나님을 거슬렸던 바벨론 백성들을 진멸하고 그 어린것들을 돌에 내어 치는 때가 올 것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징계와 시련 속에서 이런 시야를 가지고 참고 견디면서 우리들을 새롭게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붙들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오늘 신약 교회에도 적용될 수 있겠는가? 결론은 그렇게 적용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나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나라는 교회에 일치하는 나라가 아니다. 이것은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는 다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나라를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와 국가가 구별되고 신앙과 교회의 일원으로서의 삶과 세상 정부의 일원으로서의 삶이 나뉘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이 이것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영적인 시야에서 적용하면 아주 훌륭한 적용이 된다. 즉 우리의 보이는 나라와 우리의 교회는 일치하지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나라와 참된 교회는 항상 일치한다. 하나님의 나라의 국민은 보이지 않는 참된 교회의 신자의 수와 일치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살지만 하나님의 나라, 하늘 나라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들이 육적인 시야를 가지고 보면 우리 나라를 이렇게 포로로 끌고 가서 우리를 압제하고 노예 생활을 시키는 사람이 없고 우리들이 퇴근하고 강변에 모여 앉아서 무슨 도시를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거나 기타를 버드나무 가지에 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눈을 떠서 하나님의 나라의 한 백성의 일원으로서 이 전선을 한번 살펴보면 지금 이 순간에도 격렬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한 치의 땅이라도 더 빼앗으려고 하는 영적인 싸움이 이 불신앙의 세계와 신앙의 세계 사이에서 처절하도록 벌어지고 있다. 한 영혼을 두고 그 영혼을 결코 양보하지 않으려고 하는 악한 사단의 세력들과 그리고 그들을 쳐부수고 한 영혼이라도 끌어내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품에 안겨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고자 하는 처절한 투쟁들이 벌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미 믿은 사람들조차도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간절한 염원과 그리고 교회의 갈망과 그리고 비록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변절자들이 되거나 혹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오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로 만들려고 하는 죄와 사단에 강력한 도전들이 있다.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치밀한 전쟁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쟁은 우리들이 기도를 쉬는 동안에도 잠을 자는 동안에도 밥을 먹는 동안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이 신앙이 깊다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독특한 신앙의 시각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세계를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유추해낼 수 있는 시야를 가지고 있을 때 그 사람이 신앙이 깊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신령한 사람, 영혼이 열려서 육적인 것에 즉 눈에 보이는 것에 매이지 아니하고 그 현상에 배후를 꿰뚫어 살펴서 영적인 진실을 읽어낼 수 있는 그런 시야를 가진 사람, 그런 사람이 신앙이 깊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 깊은 신앙의 눈으로 한번 보자. 그러면 얼마나 처절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들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예화) 어떤 사람이 자기 식구들을 전도하려고 애쓰다가 어느 날 꿈을 꾸고 이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력에 결박 되어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도 가 정말 치열한 영적인 싸움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야기.
그런 세력들이 믿음에 눈을 가지고 바라보면 보이지 않는 나라를 향한 이러한 대적들이 수없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바벨론 포로의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다.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신앙이 충만하여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선교에 열심을 내던 교회들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성도들의 마음이 모두 돌멩이 같아지고 짐승과 다름없는 사람들로 변할 때 그들은 몸은 교회에 나오지만, 보이는 교회에는 변동이 없지만 보이지 않는 교회는 이미 바벨론 포로시대에 들어간 것이다. 아무 힘도 쓸 수 없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일들을 해서 하나님의 교회에 고통을 주고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로 하여금 기여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사단에 도전하는 세력들에 대해서는 오늘 이 시인이 품었던 것과 똑같은 아니 이것보다도 훨씬 더 열정적인 적개심을 가지고 교회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이런 세력들에 대해서 강력히 도전할 수 있는 그런 심정을 가져야 한다. 그것 없이는 신앙의 깊이와 열정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 역사를 읽어보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후에 돈을 많이 벌어서 살기가 괜찮아진 사람들의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거부가 된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이 시인처럼 이렇게 가슴이 찢어지는 것과 같은 아픔을 가지고 너희의 어린아이를 들어서 반석에 내어 쳐서 죽여 버리는 그러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이 복되도다 라고 할 정도로 탁월한 열심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훼방하였던 원수들을 향한 적개심에 모두 불탔던 것은 아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바벨론의 포로시대와 유사한 어려운 영적인 시기를 맞아하고 있지만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교회를 무너뜨리고 자신들의 영적인 삶을 파탄으로 몰아가는 악한 세력들에 대해서 우호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왜? 그것들이 주는 잠시의 평안이나 만족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본분이 아닌 것이다.
눈을 들어 보이지 않는 교회를 꼼꼼히 살펴보아야 한다. 보이는 교회는 변함이 없지만 보이지 않는 교회는 다이내믹하다. 오늘 나온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다. 변함없이 나오고는 있지만 그 사람의 영혼은 수시로 변한다. 교회에 전선에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우리가 게으르고 싸우지 않으면 원수들이 국경 가까이에 몰려들어서 압박을 하며 쳐들어오게 된다. 가끔 와 가지고 탈취해서 도망가고 죽이고 도망가고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충성스런 삶을 살고 몸부림치면서 교회를 지키고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분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이 사실이 증명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고 “내가 저 땅을 너희에게 주었다.” 이미 과거에 일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것이 획득되는 것은 주신 것은 과거에 주셨는데 그것이 획득되는 것은 현재에 싸움을 통해서 획득되는 것이다. 다 주셨다. 즉 분투에서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이기면 그 땅을 너희들이 차지한다는 것이다. 과거에 주신 것인데 오늘 분투하는 삶을 통해서 내일 그것을 쟁취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의 전선도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원수의 세력들이 교회를 에워싸고 성도 들를 위협하기 위해서 수없이 매달려서 난리를 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교회를 삼킬 수는 없는 것이다. 성도들을 빼앗아 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원수들은 덤벼든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 거의 쓸모 없는 그리스도인을 만들려고 한다. 마치 예루살렘이 훼파되던 그 날에 집에서 고물을 가지고 와서 양식을 바꾸러 돌아다니던 사람들처럼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수 없는 원수들이 겹겹이 교회를 에워싸고 우리들을 향해 창칼을 내밀고 우는 사자와 같이 울부짖어도 아무 것도 아니다. 이미 그들은 우리들에게 준바 되었다. 우리들의 땅인 것이다. 정복하고 성취할 수 있는 땅이다. 단지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 나라를 위해서 이 시인이 가졌던 하나님의 나라를 도전하는 세력을 향해 화친하거나 화해하려는 태도를 가지면 인된다. 적개심을 가지고 그들을 파멸로 몰아가고 그들을 격파해서 모두 부셔버리고 거기에 하나님의 통치가 아름답게 임하는 그때를 꿈꾸면서 헌신적으로 사는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역사해 주시는 것이다.
우리들이 그런 시야를 가지고 이 교회에서도 열심히 충성하면 이 교회는 계속 부흥한다. 변화가 계속 일어난다. 도저히 변화될 것 같지 않던 사람들이 기도하면 변한다. 도저히 전도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전도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도저히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어느 날 마음속에 주님이 믿어지고 신앙을 고백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들어오는 역사가 일어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시인이 보았던 그런 시야를 가지고 그 시야를 우리의 영적인 교회에 적용 시켜서 교회의 거룩함과 그리고 교회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부름을 받았는데 그것들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이러한 적대감을 가지고 탄원을 하듯이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어린아이를 들어서 반석에 내려치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모두 없애 버리려는 마음을 가질 때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진실하다고 보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사무치는 열심히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인정하고 그들의 그런 충성스런 삶을 통해서 반드시 당신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편 137편의 마지막은 단지 적개심에 불타는 한 이스라엘 백성의 애달픈 소원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장엄한 하나님의 나라에 전진과 성취를 바라는 거룩한 소원이다. 우리는 오늘 이것을 보면서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이들은 이렇게 원수들을 향해 적개심이 불탔는데 우리는 어떠한가? 바벨론 에서 주는 아침 죽, 저녁에 빵이나 얻어먹으면서 그저 숙명처럼 노예살이를 하는 것을 감사하며 살고있지는 않았는가? 우리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 이 시인이 자신들을 멸망시킨 바벨론을 향해 이러한 처절한 마음을 가졌던 것처럼 우리는 또 그런 마음을 가지고 정말 사무치는 열심을 가지고 우리의 영적인 교회, 영적인 나라를 대적하는 원수들을 이런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일평생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교회와 나라를 섬겨 가는 그런 백성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회복을 구하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