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역을 고치는 길
(1999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9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회개하는 자를 고치심(호14:4上) 1999.6.6 주일오전 1
2. 회개하는 자를 사랑하심(호14:4下) 1999.6.12 주일오전 17
3. 이슬처럼 내리는 은혜(호14:5上) 1999.6.20 주일오전 28
4. 백합화처럼 아름답게 하심(호14:5中) 1999.6.7 주일오전 38
5. 백향목처럼 견고하게 하심(호14:5下) 1999.7.4 주일오전 49
6. 패역을 고친 자의 번영(호14:6上) 1999.7.11 주일오전 62
7. 패역을 고친 자의 존귀(호14:6中) 1999.7.18 주일오전 74
8. 패역을 고친 자의 그늘로 돌아옴(호14:6下-7上) 1999.7.25 주일오전 86
9. 제 2의 이스라엘(호14:7下) 1999.8.1 주일오전 96
10. 패역을 고친 자의 선언(호14:8) 1999.8.8 주일오전 101
1. 회개하는 자를 고치심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호14:4上)
가끔 꽃이나 화초를 파는 가게에 가 보면 나무 같은 것을 주인이 원하는 데로 똑바로 자라야 할 나무를 휘게 자라게 하거나 혹은 세 가지가 나란히 올라가야 될 나무를 새끼를 꼬듯이 꼬아서 그렇게 한 둥지처럼 올라가게 인간이 인공미를 가미한 나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방법이 아주 간단합니다. 이미 다 자란 나무들은 불가능하고 아직 나무가 어렸을 때에 똑바로 올라오는 나무를 활처럼 휘게 하고 거기에 무거운 추 같은 것을 매달아서 계속 거름을 주고 잘 돌보면 자라면 자랄수록 그 나무는 활처럼 휘게 되어서 똑바로 자라야 할 향나무가 아치모양으로 휘어져서 사람들이 한 그루의 나무사이를 지나다니게 되는 그런 모습에 나무가 됩니다. 이런 일들은 인간이 자연적으로 자라는 그 나무보다는 뭔가 인공을 가미해서 자기가 원하는 모습대로 자라게 하기 위한 한 방법입니다. 이런 일들이 나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조금만 사려 깊게 해본 사람들은 확실히 내 안에 나도 어찌할 수 없는 누가 들어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다 있으실 것입니다. 나는 그러기 싫고 나는 안 그래야 되겠다고 생각하는데 나도 어찌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내 안에 있어서 반듯이 아파하고 후회할 줄 알면서도 그런 삶을 살아가게끔 만드는 저항하기 힘든 어떤 힘이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무엇일까요?
그리고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러한 것들은 분명히 우리가 싫어하고 우리도 굉장히 힘겨워하고 미워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 자신이 힘들어하면서도 또 우리 자신이 우리 속에 있는 또 다른 우리 자신을 대적하고 싸우고 그것들을 없애버리려고 노력을 하느냐 하면 또 그것은 아니라 하는 느낌을 갖게됩니다.
마치 오랫동안 부부가 살고 나면 연애할 때처럼 불붙는 사랑은 없어도 인간대 인간으로 곰삭은 정이 미워하면서도 사랑하게 만들고 또 다투면서도 함께 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그러한 운명적인 관계를 만들 듯이 우리 속에 있는 패역이라는 것도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주님이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주실 때 북 왕국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태평성대를 구하고 있던 때 이였습니다. 여로보암 2세라고 불리는 이 왕은 백년에 한번 정도 나올까 말까한 영명한 지도력을 가진 능력 있는 군주였습니다. 나라는 부강하고 군사적으로는 대국이 되었으며 경제적으로는 많은 무역을 통해 엄청난 흑자를 보고 국민들의 생활은 점점 더 호사스러워 졌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있었으나 한 가지가 없었는데 이 왕은 불행히도 신앙이 없는 임금 이였습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뒤집지 않는 빈대떡과 같아서 한쪽은 새카맣게 타 들어갈 정도로 열정적이고 한쪽은 익지도 않은 설익은 모양에 전병이 되어버렸습니다. 세속적으로는 뜨겁고 세상 적인 열심에 있어서는 불길 같았지만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신앙적인 그 생활에 있어서는 매우 냉랭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태평하던 때에 호세아 라는 종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사무치는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 호세아 선지자에 마지막 장에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미래에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어떤 일을 상징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대항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다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는 관계로 변화되는 그런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저희를 즐거이 사랑하리니 이는 나의 진노가 저희에게서 떠나갔음이니라”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경제적으로는 부강하고 물질적으로는 모자람이 없고 군사적으로는 대국을 이룬 태평성대를 지내고 있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즉각 이런 질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그렇게 번영을 누릴 수 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가 인생이 잘 나가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한없이 승승가도를 달리는 것 같고 승승장구하면서 성공하는 것 같을 때에도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야말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다윗 왕 때의 가졌던 영토의 판도를 거의 회복하고 수많은 나라가 이 이스라엘에게 복 속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강국이 되었고 누구도 그 나라를 넘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여있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는 때때로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갖게 하시므로 우리의 영혼을 파리하게 하시는 때가 있다고 시인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일이 잘되고 경제적으로 복을 받고 출세의 가도를 달리는 상황에 놓여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그는 마치 하나님 없이 번영을 구가하던 진노아래 놓여있는 북 왕국 이스라엘과 같은 처지에 사람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복 주셔서 이 세상에서 번영을 누리게 하십니다. 당신이 싫어하시는 사람들을 벌 주셔서 이 세상에서 곤고하고 괴로운 일을 당하게 하십니다. 믿었던 세상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게 하시고 사랑했던 제물에 상처를 받게 만드시게 할 뿐 아니라 기대를 걸고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실망하게끔 만드셔서 자기를 바라보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떠나갔는데도 이 세상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오늘 기억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 속에서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있듯이 부귀와 영화를 누리면서도 그의 영혼에는 깊은 어두움이 깃 들어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실패와 좌절 속에서 쓴 물을 삼키면서 위로하시고 갈 길을 지도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는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가 원하는 데로 모든 것이 될지라도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는 흔적은 자신의 영혼 속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다른 눈을 가지고 인생에 불행을 보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호세아 선지자는 흐느끼고 통곡하면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를 미친 듯이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며 지나다녔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이 선지자의 눈에 피눈물을 흘려야 될 정도로 불후한 삶을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경제적인 도움이 필요로 하는 그러한 매우 불후한 상황을 지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면을 돌아보아도 평안한 것 뿐 이고 어느 나라 하나 이스라엘을 넘보지 못할 정도로 강국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지자는 흐느끼며 통곡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피 절인 음성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뻐하는 것만큼 기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며 이 사람은 통곡했고 형통하고 모든 것이 순조롭다고 말하던 그때에 이 선지자는 끔찍한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절규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해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지자가 그러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이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는 강국이 되었으나 선지자는 그들이 무엇을 먹고 얼마나 외화를 많이 벌어들이고 경제적으로 대국이 되었는가 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번영 속에서 침몰되어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신앙을 보았습니다. 날마다 성장해 가는 국력 뒤에 가리워 져서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조각난 하나님과의 관계를 목격했기 때문에 이 선지자는 통곡하듯이 외치며 이 시대를 지냈습니다. 먹고 마시던 시대에 주리고 목마르며 기도했던 깨어있었던 선지자들과 같이 이 호세아는 그렇게 역사의 한복판을 지났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지금 그렇게 사랑하고 또 자랑하고 있는 경제적인 부도 잠시 후 시간이 지나면 모두 주님이 거두어 가실 것들 이였고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버린 대가로 그들이 갖게된 이 세상의 모든 번영은 주님을 사랑하는 선지자의 눈에는 잠시 있다가 사라질 안개와 같은 것 이였고 병든 사람에게 놓아주는 진통제와 같은 것 이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오늘 선지자는 이런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떠나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불순종하고 우상숭배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세상의 번영을 더 많이 사랑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그 진노를 이제는 떠나보내야겠다고 약속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약속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과거형으로 쓰였습니다. 만 성경문학에서 이 과거는 예언자적 과거라고 불리는 시제입니다. 즉 미래에 일어날 것이라고 전망하는 일들을 일어난 것으로 보고 과거형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제는 과거지만 여전히 여기서 다루고 있는 사건들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왜 앞으로 하나님께서 어느 시점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진노를 거두시겠다고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한가지 태도를 담보로 한 것 이였습니다. 그 태도가 무엇입니까? 불의로 인해서 엎드려져 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그 진노에 이 마음을 끄시고 그들을 사랑해주실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거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 절기를 지키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까? 그들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형식이 사라진 것을 인해서 오늘 하나님이 진노하고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모든 형식이 살아있어도 이들이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인해서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머물러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로 얼룩진 사랑의 마음, 불붙는 긍휼의 심정을 가지신 하나님 아버지시지만 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끊임없이 불순종과 죄 가운데서 우상을 섬기고 있는 그 동안에는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셨지만 그들을 받아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 그 자체가 하나님을 버리고 불의한 사람들에게는 당신의 친밀함을 보이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삶의 자리에 놓여있는 것을 보셨기 때문에 오늘 선지자를 통해서 경고하고 또 격려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죄에 빠졌고 그리고 하나님보다는 세상의 권력을 의지하는 마음이 더 많았습니다. 나라를 부강하게 해놓고 스스로 그 나라를 믿었고 이웃 사이에는 진정한 사랑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아가페가 사라졌습니다. 사회 속에서는 신의와 공의가 깨트려지고 포악과 포악이 이어지며 피가 피를 뒤따르는 그런 황폐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죄악들이 선지자에 의해서 지적되었고 여러 각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와 불순종에 대해서 깊이 책망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 죄와 책망을 많이 받고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죄가 있고 불순종들이 있었지만 그 뿌리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법도대로 사는 순종하는 생활이 없었기 때문에 만들어 내어진 결과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남은 것은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입혔던 고의적인 불순종과 그리고 필설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반역과 주님을 향해 주님의 명예를 더럽힌 그 수많은 죄악들을 오늘 용서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향해 가지고 계셨던 하나님의 진노의 마음이 떠나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무조건 이 약속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이들이 회개할 것을 전망하시면서 이런 축복을 약속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후에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될 그때에 그들의 불순종이 무엇 이였고 죄가 무엇 이였든지 그들을 향해 가지고 계셨던 진노의 마음을 거두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거슬려서 무엇인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인생을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것은 마치 쏟아지는 폭포를 거슬려 올라가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복 주시는 것과는 상관없이 우리 자신의 힘으로도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씨를 뿌려야 할 농부가 밭에다 씨 대신 구슬을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가지고 계셨던 하나님의 진노가 떠나갈 것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을 듣고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기의 죄를 골고루(?)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오래도록 그들 위에 머물러 있었던 진노를 떠나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는 것은 죄이지만 그러나 죄가 만들어놓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간격을 다시 회복하지 못하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회개의 부재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사이를 내지만 우리사이에 깊이 난 죄로 말미암은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골 깊은 불화를 회복하게 해주어서 다시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친밀함이 흐르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회개입니다. 회개 없이는 하나님 앞에 진노의 대상 이였던 우리가 축복의 대상이 될 수가 없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돌이키고 뉘우치는 진실한 참회가 없이는 누구도 죄의 길을 벗어나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경험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진노가 떠나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실한 축복을 잃어버린 것은 언제였습니까? 왕국이 갈라진 그 이후로는 한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슴에 사무칠정도로 커다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민족적으로 누렸던 경험이 거의 없는 사람들 이였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은 강국이 되었지만 그들을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부귀와 권세와 재물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한 줌 모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관계가 될 때에 이 세상의 번영도 의미가 있는 것이고 우리의 성공도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가지고 있는 그 모든 번영과 성공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느 시점에서 그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주님은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성공, 그리고 이 땅에서의 부귀와 영화가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구나 하는 사실을 깊이 뼈저리게 깨닫고 이 세상살이에 골몰해서 살아가는 자신의 신앙에 처지가 정말 한심하고 비참하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달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세상에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 진노가 자신들에게서 떠나가기를 원하는 마음이 될 때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주님께서 전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기 전에 나라가 그렇게 부강해지고 그리고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을 때에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사람들이라고 선지자가 말해주었을 때 그들이 선지자의 예언을 믿을 수가 있었을까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의 눈을 여셔서 우리의 참 모습을 보게 하시는 그런 깊은 각성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아래 있는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지 정확하게 우리가 판단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축복 가운데 가장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커다란 축복은 주님의 눈으로 우리의 참 모습을 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눈으로 우리의 참 모습을 보게 하셨을 때 우리의 헛된 자만이 사라집니다. 뿐만 아니라 헛된 욕심도 사라지고 때로는 헛된 절망도 사라집니다.
성경은 가난하지만 부요 한 사람들이라는 칭찬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신적도 있고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와 같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사람의 눈과 하나님의 눈이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있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아래 놓여있습니까? 불순종의 길을 지속적으로 걷고 있습니까?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가지고 계셨던 진노를 모두 떠나보내시고 이들을 사랑 받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축복을 회복시켜주시기 전에 먼저 이들이 회개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돌아올 것을 예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진정한 유익이 무엇입니까? 오늘도 여러분들이 이처럼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참 유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이 예배를 통해서, 이 교회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인지 참 모습을 보게됩니다. 말씀을 통해서 그 말씀과 함께 역사 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감겼던 우리의 눈이 뜨여지고 우리들이 우리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 세상에서 형통한 길을 가면서도 우리의 마음이 가난해질 수도 있고 이 세상에서 짓밟히고 억눌리는 버림받은 자와 같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사람들로 변해가고 있는지를 보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집안이 망하고 사람들의 생명이 빼앗기고 사고가 나서 피투성이가 되어야만 진노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한없는 기쁨, 주님이 우리가 여기에 이렇게 살아있어서 하나님 앞에 움직이면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우리를 보고 한없이 기뻐하시는 주님의 그 마음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우리에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축복아래 있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축복아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진노아래 있는 사람이고 잠시 후 하나님의 진노 속으로 들어 갈만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음으로 인해서 짓게되는 수많은 불순종과 죄 때문에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뉘우치는 죄, 회개하고 뉘우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실한 참회가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떠나게 하고 다시 은총 속으로 들어오도록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의 죄가 하나님과 우리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처리하지 않고 버려 두는 회개 없는 생활이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더 깊은 골을 내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죄인도 회개하면, 자신의 죄를 뉘우치면 하나님의 진노가 떠나가고 하나님의 은총을 베푸시는 관계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며 아무리 의롭게 사는 사람이라도 회개하는 삶을 잃어버리면 잠시 후에는 그의 신앙 위에 독버섯 같은 죄와 불순종들이 가득 차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실종되는 것을 경험하고 말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오랜 동안에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진노를 드렸던 삶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주님의 진노가 우리에게서 떠나는 대신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이런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날 때에 하나님이 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 가지 일을 행할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 첫째는 패역을 고치는 것 이였고 두 번째는 즐겁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해주시는 것 이였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첫 번째 요소에 대해서만 말씀을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고친다’ 라고 하는 이 말은 동일하게 의사가 환자를 고칠 때 사용하는 그런 단어가 쓰여졌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치시겠다. 말씀하십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향해 가지고 계셨던 진노가 사라지셔서 그들을 사랑하시면 됐지 무엇 때문에 다시 또 어렵게 고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회개한 것이 곧 고친 것이 아닙니까? 뉘우치고 깊이 참회하고 하나님이 이제는 너희의 죄를 용서해주었노라 말씀하시면 그것이 곧 고친 것이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시야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패역이라고 되어있는 이 단어는 히브리말로“마슈브” 라는 단어입니다. “굽다” “돌아가다” 라는 의미에 슈브와 명사가 지칭하는 마가 합쳐져서 “마슈브” 라는 단어가 만들어졌습니다. 문자 그대로의 뜻은 굽은 것, 돌아간 것 그런 것을 의미합니다. 뭐가 굽었다는 것입니까? 뭐가 돌아갔다는 것입니까?
다시 말해서 똑바로 펴진 상태에서 어떤 일들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물체가 굽어버려서 아무리 이 물건을 사용해도 원래의 이 물건을 만들어 놓았을 때 의도했던 용도로 사용하기 힘들게 되어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적절한 예가 하나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는 어떤 물건의 길이를 잴 때 자를 가지고 잽니다. 물건을 보고는 얼마나 큰지 알기는 알지만 정확한 치수를 알 수 없습니다. 그때에 자를 갖다가 대면 정확하게 몇 센티라고 하는 길이가 나오고 다른 것들을 또 재보면 두 물체가 눈에 보기는 비슷해도 다시 키를 재보지 않아도 치수를 보면 어느 물체가 어느 물체보다 얼마큼 큰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가 그런 역할을 하는데 만약에 그 자를 플라스틱 자를 열을 가해서 확 휘어지게 만들었다고 칩시다. 기역자로 이렇게 비틀어서 휘어버렸다고 칩시다. 그 자로 물건을 잴 수가 있겠습니까? 열을 받아서 센티미터의 간격은 이 삼 센티로 늘어나고 그리고 눈금은 서로 겹치게 되었고 그리고 자는 직각으로 휘어버렸습니다. 이제는 그 자를 가지고는 물건을 잴 수가 없습니다. 눈금도 살아있고 치수까지도 모두 나와있지만 그러나 더 이상 그 자를 가지고는 자로 원래 만들 때에 자에게 기대했던 기능을 기대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패역은 우리를 하나님이 예수 믿게 만드시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생각과 인격이 심하게 굽어져있어서 무엇을 여기에다가 넣어주어도 굽은 상태밖에는 안됐기 때문에 원래 하나님을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하나님을 높이고 공경하며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만들어놓은 우리 자신이 그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살 수 없게끔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패역 이라는 것입니다. 패역입니다. 그러면 그 패역이 왜 생겨날까요? 패역이 생겨나는 이유는 지속적인 불순종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불순종을 통해서 마음속에 굽은 어떤 성질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죄를 더 좋아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보다는 자기의 고집대로 살고 싶어하는 그런 아집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아름답게 꽃피지를 않습니다. 물론 그는 교회에 다닐 수도 있고, 또 가끔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수도 있고 뭔가 신앙에 맛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는 이 패역이 고쳐지지 않은 상태로 있기 때문에 가금 은혜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부분적인 것뿐이지 그의 인생 전체가 새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망가진 볼펜도 입으로 빨거나 공중을 향해서 한없이 휘두르다보면 한 두절 글자가 나올 때가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여기서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패역을 고치겠다고 하는 이 말씀은 이제 신앙생활을 하다가 살아가다 이따금씩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우리를 고쳐야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백성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패역은 오랜 동안 하나님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아온,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다른 사상이나 인간관계의 영향을 받은 그 이유 때문에 생겨나게 되는 성행입니다. 그럼 이 성행은 계속해서 이 성행이 우리의 마음에 지배해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우리의 마음을 이끌어가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대신 패역한 경향이 원하는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겉모양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찬송하는데 끊임없이 산출되는 삶은 하나님을 거슬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삶이 죄로 얼룩지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막히고 더 막히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사라지고 은혜가 사라지니까 점점 더 자기 마음속에 있는 패역을 따라서 사는 일들이 증폭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쳐서 패역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참 사랑을 어느 순간에 알고, 복음의 맛을 보고 여러분들이 영혼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때 회개는 참 진실한 것 이였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살아온 그런 나날들이 하나님 앞에 원통할 수도 있고 그래서 마음을 다해서 참회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참회와 하나님 앞에 뉘우치는 격렬한 회개를 경험한 사람들이 모두 은혜의 세계 속에서 산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 같은 추측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상처의 치유, 뭐 그런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마음에 뭐 어떤 상처, 아니면 미움의 치유 뭐 그런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세상에서 완전한 치유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건 자기의 느낌일 뿐이지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완전한 고침, 완전한 치유 이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할 사람들이 서로를 미워하게 될 때 한 두 번 미움과 그리고 불순종은 이것이 경향을 만들어내어서 시간이 점점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아주 강력한 어떤 성향을 형성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용서할 수도 있었지만 반복적으로 상처를 받으면 미워하게 됩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처음에는 가책을 하면서 미워하지만 시간이 흐르게되면 적극적으로 미워하게 되어서 우리가 흔히 무어라고 말합니까? 저 사람은 주는 것이 없이 밉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공격을 하지 않아도 마음속에 미움이 싹트고 시간이 지나고 나면 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너와 함께 사는 세상은 너무 고통스러워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지 할 정도에 적극적인 살인에 의지 같은 것들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물론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예수님은 미워하는 그것이 곧 살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순간에 하나님을 만납니다. 깊이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가 그 동안 그 사람을 미워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면서 하나님 앞에 가슴을 치며 애통하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맹세했습니다. 다시는 이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리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 이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실 때 자기가 그 사랑을 받기에는 정말 자격이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같이 쓸모 없는 인간을 구원해주셔서 이렇게 당신의 사랑 받는 자녀로 삼으셨으니 내가 정말 그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앞에 아무 것도 아닌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나은 것이 있는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를 미워하고 원망한 것이 물론 그에게 허물이 있었다고 말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은 그 허물을 인해서 그 사람에게 그렇게 미움으로 복수를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 사람을 보고 회개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시고 자기와 같은 죄인을 용납해주신 하나님을 보면서 뼈저리게 회개하고 이제 용서한 것입니다. 그리고 찾아가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사랑하며 살기로 했습니다. 모든 것이 풀렸습니다. 그런 것을 우리는 치유라고 말합니다. 이제 더 이상 그 사람을 봐도 끓어오르는 마음이 내 마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 죽여버리고 싶다는 그런 강퍅한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나를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린 치유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조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아래 살아갈 때에만 그 감정이 유지가 되는 것이지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우리의 패역한 마음이 고개를 들고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거슬리면서 살아가려고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영향으로부터 멀어지고 나면 그런 식으로 모두 치료됐다고 믿어지는 수많은 것들이 전부 다 총 칼 들고 궐기 대회를 하듯이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해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무얼 깨닫게되느냐 하면 정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죄로부터 완전히 멀어진다는 것, 패역으로부터 완전히 결별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개의 조건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는 깊은 회개를 통해서 결정적으로 순종하는 길로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깊이 회개한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누리는 삶을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옛날에 남이 모르는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를 봤습니다. 지난 날 살아온 세월들이 바보와 같고 그리고 하나님을 거슬리며 산 날 들 이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옛 삶이 짐승과 같다고 그렇게 뼈아파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깊은 참회, 깊은 회개, 놀라운 각성이 있어서 신앙의 새로운 길을 찾게되었는데 그가 오늘 하나님의 은혜에 살지 않는다면 다시 죄악은 그를 삼키고, 그리고 그 영혼은 갈 길을 잃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물론 예전에 하나님을 어떻게 만났는가에 대한 지식이 있기 때문에 이러 이러한 신앙은 잘못된 것이고 저러저러한 신앙은 옳은 것이라고 하는 판단은 생기게 되었지만 그러나 옳은 신앙에 대한 판단이 아무리 생겼어도 올바른 신앙 속에서 살아가서 올바른 신앙이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생명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데 알고 어두움 속에 처하는 것이나 모르고 어두움 속에 처하는 것이나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어야 배부른지 모르는 상태에서 굶주림과 핍절 속에서 죽어 가는 것과 밥을 먹으면 배부를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굶주리는 그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확신을 가지고 이 일년 반전에 선포된 이 말씀이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다시 울려 퍼져야 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수많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경험, 수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기쁨과 감격의 경험들이 오늘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습니까? 남이 못 본 것을 봤고 남이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달았는데 여러분들은 왜 아무 것도 깨달은 적이 없는 사람들 보다 별로 낫지 않은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그 놀랍고 그 뜨거운 사랑에 감격을 했지만 지금은 왜 그 사랑의 감격이 사라졌습니까? 주님이 여러분들을 향해 태도를 바꾸셨습니까? 주님이 그 성품을 변화시키셨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감사하며 눈물로 신앙하던 때에는 지금보다 훨씬 좋은 환경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렇게 주님을 만났고 주님 좋아했고 주님 기뻐했습니까? 좋습니다. 그런 과거를 가지고 지금 여전히 하나님 앞에 여러분 살기 좋은 데로 살아간다고 칩시다. 주님을 만난 것이 여러분들에게 영광이 되겠습니까? 예전에 남이 알지 못하는 복음을 알게 되고 감격한 말씀에 감화가 여러분들에게 기쁨과 자랑이 되기는커녕 여러분들을 더 큰 심판과 책망으로 데려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알고 행한 자는 모르고 행한 자들보다 더 나쁘기 때문입니다.
이제껏 살아온 자기의 잘못된 삶, 올바른 것을 믿지 않고 살았던 자기의 기질대로 살고 자기의 인간적인 의지대로 사는 그 막 대먹은 신앙생활을 잘못됐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눈물로 회개하면서 다시는 이런 길을 걷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그 회개 없이는 하나님의 진노는 여러분들에게서 떠나가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그럴듯한 신앙생활을 하고 주일이면 점잖게 교회 나와 앉아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의 출석부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마음이 하나님이 아니라 패역에 의해서 점령되어있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하는 이런 식의 종교 생활은 모두 하나님을 향한 우롱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오늘 이 하나님의 말씀이 뼈아프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말이 뼈아프게 들리면 들릴수록 여러분의 마음의 병도 깊다는 사실을 인식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오늘 한 이야기가 전혀 가슴에 다가오지 않고 뼈아프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거의 완벽하게 망가져서 통증조차 느낄 수 없는 상황으로 가게 되었다고 그렇게 생각하시면 틀림없는 진실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나 넘치는 헌금이나 화려한 교회당이나 값비싼 고가의 외제 오르간이 교회의 영광이 아닙니다. 교회의 영광은 주님을 몰랐더라면 그 패역을 간직한 채 일평생 자기가 원하는 데로 인생을 살아서 하나님의 마음에 고통과 상처만 남기다가 진노아래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죄인들이 이곳에서 그러한 영혼에 관한 진실을 듣고 도저히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고칠 수 없고 자기의 결심으로도 고칠 수 없었던 인간들이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패역을 고쳐 주님의 즐거운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 변화되는 것이 교회의 영광입니다.
오늘 날 무지와 경박한 세상의 즐거움으로 가득 찬 그리스도인들에게서는 이런 진지함을 다시 회복시켜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난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의 얼마 되지 않은 신앙의 과거를 돌아보십시오. 슬픈 날도 있었지만 기쁜 날도 있었습니다. 비오는 날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햇볕 나는 날도 있었을 것입니다. 죽지 못해서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날들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교회에 나오는 것이 너무나 기쁘고 즐거운 때도 있었습니다. 의무감으로 예배를 견뎌야 하는 때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가슴을 녹이는 감화와 그 큰사랑 때문에 남이 못 본 것을 보고 이전에 내가 만져볼 수 없었던 은혜의 세계를 만져보는 말씀에 체험이 있었던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오늘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습니까? 여러분들은 분명하게 말해서 주님의 그런 사랑과 은혜에 체험을 경험하지 못했더라면 하나님과 누렸을 관계보다 훨씬 나은 관계를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에 최대의 적은 땅 아래나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선지자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패역을 고치신다.’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회개가 없으니까 자기의 불순종하던 길을 돌이킬 줄을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뼈저리게 뉘우친 참회가 없으니까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가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성경 찬송 팽개치고 걸어가던 길을 요즘은 성경 찬송 들고 걸어가고, 옛날에는 유행가 부르며 걸어가던 길을 요즘은 찬송가 부르면서 걸어간다는 차이입니다. 전에는 달려가던 길을 요즘은 양심에 가책 때문에 걸어간다는 차이이지 뭔가 전환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쳐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회개를 해도 고쳐지지 않는 이유는 회개는 했지만 마음속에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남겨두었던 패역이 고쳐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도 어찌할 수 없이 그런 삶을 계속 살아가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고쳐지겠지.
그러나 확신을 가지고 말하지만 고쳐지지 않습니다. 패역은 그렇게 번개에 맞듯이 어느 순간에 나도 모르게 고쳐져서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고 하나님 앞에 이 시간에도 생각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두길 밖에는 없습니다. 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너무 힘들어서 오늘 예배드리는 것을 끝으로 하고 술도 먹고, 담배도 피우고, 바람도 피우고 이제는 내가 세상 사람처럼 살아야지 되겠다. 라고 결심할 수 있으리만큼 용기 있는 사람이 이중에는 하나도 없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어차피 여러분들은 주님의 사랑에 붙잡힌 바 되었습니다.
그 사랑을 알았고 이제는 그분의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을 하지만 또 한편 우리마음에서는 주님의 사랑만으로 어떻게 인생을 살겠는가 하는 외침이 들려오지 않습니까? 이게 패역입니다. 이게 바로 오랜 동안 우리가 그렇게 살았던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순종하면서 살기를 나는 원한다. 그러나 내 성질 건드리는 사람은 용서할 수가 없다. 이것이 패역입니다.
찬양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 고쳐주소서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뤄지리라
가끔 경건하게 살고싶고 가끔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고 싶은 이 불안전하고 불결한 인간이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내면의 세계에 패역으로 인해서 힘겨워 하고 고통스러워한다면 완전한 거룩하시고 완전하고 순전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바라보실 때는 그 마음이 어떨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느 순간에 말씀을 체험하고 깊이 회개하는 이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굳게 믿지만 한 두 번의 그런 회개가 우리의 인생을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도록 고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치시기를 원하시고 한 사람의 죄인이 제 멋대로 살아오다가 어느 순간에 깊이 자기가 무지의 어두움 속에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자기가 살아온 인생에 길이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관없이 막 살아온 길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뉘우치는 그 순간은 바로 막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패역을 고치기 시작하는 그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해를 해도 심각하게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깊이 뉘우치는 회개를 통해서 모든 일이 이제 끝난 것같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승패는 판가름이 난 것처럼 생각합니다. 저는 패역에 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죄에 눌려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에 숙명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무수하게 많은 사람들을 오늘도 만납니다. 심지어 말씀을 그렇게 오랫동안 들었던 여러분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이 있음을 나는 압니다. 여러분 자신이 짐승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짐승처럼 사는 것과 짐승이라는 사실을 알고 짐승처럼 사는 그 사이에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무슨 차이를 발견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의 눈에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짐승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딱하고 한심하고 바보 같다는 생각을 할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 사람은 저 사람보다 더 비참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 사람은 알고도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도 내 성질 건드리면 가만 안 둔다는 사고방식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말씀이 관심이 있습니까? 말씀이 뭐라고 그랬든지 그 사람들이 무슨 관심이 있습니까? 오늘날 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어차피 그 뜻대로 안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주님께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한 조각의 깨달음이 한 점의 살점보다도 더 소중합니다.
오늘 도를 깨달으면 내일 죽어도 좋겠다고 하는 어떤 고백과 같이 동일하게 짐승처럼 십 년을 사느니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처럼 하루를 살다가 죽는 것이 성도의 꿈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헐떡임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 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옛날에 깨달았던 말씀 가지고는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옛날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을 오늘 바로 살고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돌아온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 선다는 것은 벌거벗은 채 살기 좋은 사람이 계속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벌거벗은 사람에게는 어두움이 좋고 자기의 성질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무지가 훨씬 더 그들에게는 평안한 인생의 환경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을 등진 사람들이 가득 찬 곳에서는 주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설교보다는 모든 것을 덮어주는 설교들이 훨씬 더 각광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의 마음을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한번 담아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신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깊이 깨닫고 이제는 예전에 살아왔던 그 길이 참된 인생의 길이 아니고 예수 믿는 바른 신앙의 도가 아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면 이제는 거기로부터 돌이켜서 이제는 올바른 길로 걸어가기를 하나님이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패역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거슬려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므로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주는 어떤 힘이 아닙니까? 이런 것들은 오랜 시간이 거쳐야만 이것들이 빠져나가면서 이 패역이 사라지고 그리고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빗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이 패역이 빠져나갈 때에는 놀라운 심신에 변화가 나타납니다. 저는 가끔, 여러분들도 아마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깊은 은혜 속에서 이 패역이 빠져나가는 시기에 놓여있는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보면 얼빠진 사람처럼 보이는 경우 없습니까? 은혜를 많이 받으면 폭탄 맞은 사람처럼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얼빠진 사람입니다. 얼 알지요? 얼이 빠졌습니다. 그러니까 정신이 빠진 사람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옛날에 그의 얼은 무엇 이였습니까? 불순종, 죄와, 죄악 자기 멋대로 사는 것, 고집, 자기 성질대로 사는 것, 이런 것들이 그의 얼 이였습니다.
그런데 말씀의 폭탄을 맞으면서 변화를 받고 은혜의 깊은 물 속으로 들어가면서 서서히 이 독소들이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까 전에 그 사람의 얼이 그런 죄의 경향성 이였습니다. 그게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얼빠진 사람처럼 보이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사람들을 철저하도록 고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농부들이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농토가 모자라면 산을 개간해서 밭을 만듭니다. 어떻게 만드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큰 나무도 있고, 그리고 수많은 잡초와 풀도 있고, 이름 모를 여러 가지 그 풀꽃들이 잔뜩 피어있습니다. 그 위에다 채소와 씨앗을 뿌리거나 곡식의 씨앗을 뿌리는 법은 없습니다. 왜입니까? 안 자라기 때문입니다. 제일 먼저 어떻게 합니까? 큰 나무도 뽑아내고, 밑 둥까지 잘라서 캐내고, 호미로 혹은 쟁기로 삽으로 그 땅에 나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다 제거해버리는 것입니다.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제거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빨간 땅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곳을 갈아서 거기에 물을 뿌리고 비가 와서 축축한 땅이 되면 거기에다가 곡식을 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곡식이 아름답게 자랍니다. 그런데 신기한 게 적극적으로 거기에다가 누군가 와서 잡초를 뿌리려고 노력을 하지 않아도 바람에 날려옵니다. 그래서 떨어집니다. 씨앗이 떨어지고, 풀꽃이, 잡초가 피어나고 작은 나무의 씨앗들이 떨어집니다. 그러면 어떡합니까? 주인이 와서 매일 매일 소가 줍니다. 그러면서 기름진 밭이 되어서 이 결실에 이루도록 이 곡식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여러분, 그 패역을 뽑아내지 않으면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은 가능하고 기독교인으로서 기본적인 형식을 갖춘 체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교회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당연한데 그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십 년, 이 십 년 예수를 믿어도 하나님을 만났고, 은혜도 받았고 교회도 성실하게 다니지만 패역이 고쳐져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옛날 성질, 옛날에 하던 가닥, 그리고 옛날에 자기가 좋아하던 악한 취미 모든 것들이 변화되지 않은 체 그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제는 어느 정도 신앙의 틀이 잡혔기 때문에 극단으로 치달아서 뛰어나가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 패역이 고쳐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십 년 전에 인격적으로 너절하고 성질 급하던 사람들이 이 십 년이 지나고 예수를 믿고 눈물도 많이 흘리고 은혜도 많이 받았다고 그랬는데 그 모습 그대로 거짓말 잘하고 너절하고 돈 사랑하던 사람들은 여전히 신앙생활 오래 했는데 여전히 그 모습입니다. 교만하고 늘 그러던 사람들, 교회 와서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관심은 어떻게 좀 높은 사람이 되 볼까. 하는 그런 사고방식입니다. 그건 무엇 때문입니까? 마음속에 패역이 고쳐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더덕을 참 좋아합니다. 지금은 옛날에 먹었던 그 시골에서 나는 그런 더덕을 볼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맛있는지 앞집에서 구면 뒷집까지 그 더덕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그런데 그 더덕도 그냥 먹지 못합니다. 까서는 반듯이 물에 담가서 그 쓴맛을 빼냅니다. 도라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속에 오랜 동안 잠겨있는 이 패역은 삼 사 십 년 동안 잠겼다고 할지라도 은혜의 물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굉장히 빠른 속도로 정말 기적과 같이 빠른 속도로 성품이 변하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런 은혜 속에 깊이 잠기지를 않는 것입니다. 오래도록 잠겨야됩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고 다른 길로 돌아섰으면 이제 그 길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사랑을 받으면서 그 길에서 꾸준히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무엇으로 하나님께서 돌이키게 하신 그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이 아무리 극적으로 만나고 하나님을 체험한 것이 드라마틱하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 기도하지 않으면 여러분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고 다시 죽고 다시 패역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교회 밖에서 마음대로 패역했었는데 이번에는 차마 교회는 못 떠나고 교회 안에서 패역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난 여러분들이 어떠한 삶의 형편에 놓여있는지 나는 관심이 없습니다. 문제는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말씀의 감화를 받고 죄와 더불어 싸우는 사람들은 살 것이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아무리 회개가 격렬했어도 그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회개가 격렬하고 하나님 앞에 남이 못 보는 확실한 것을 깨닫고 옛날에 살았던 자신의 삶이 짐승과 같이 무지막지한 삶 이였다고 뼈저리게 아파했더라도 오늘 여러분들이 기도의 은혜, 말씀의 감화,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분투하는 노력 여기에 여러분들을 바치지 않으면 언제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그렇게 욕하는 짐승과 같은 사람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그들의 삶을 매우 사랑하고 있는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 안에는 거룩한 삶을 살게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고 주님 앞에 우리 삶이 향기가 되게 할만한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님이 매일 은혜를 공급해주시면 그 일용할 양식을 가지고 오늘도 우리들이 사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기본, 무슨 얼어죽을 기본이 타락한 죄인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패역이 아직도 우리를 주장하고 있으니 우리는 끊임없이 눈물로 하나님 앞에 호소하며 말씀으로 우리를 고쳐주셔서 우리의 옛 성품과 기질을 죽이시고 다시는 우리들이 불순종하며 어둡고 그렇게 하나님과 거역하며 살았던 불행한 과거로 돌아가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주님 없이 살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밖에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여러분들은 오늘날에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을 보면 완전히 승리한 개선 장군과 같이 부요 해져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씨름이 언제까지입니까? 우리가 우리의 죄 된 육체와 싸우고 우리의 영혼을 노략질하기 위해 달려오는 이 세상에 풍조와 더불어 싸워서 죄와 유혹 속에서 죽어 가는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패역을 고쳐서 주님의 마음에 우리가 기쁨이 되도록 노력하며 사는 일들은 몇 달 동안 계속해야 되는 일들입니까? 아닙니다. 살아있는 날 동안에 날마다 날마다 나는 죽고 우리 안에 주님이 사시기를, 나의 옛 사람은 멸하고 새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다시 살기를 그래서 하나님 앞에 믿음의 생활을 이어가는 것이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의의를 베푸시고 그리고 죄 가운데서 잠시 안일한 삶을 누리다가 당하는 쓰라린 고통과 아픔보다는 잠시 주를 위해서 절제하고 주를 위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잠시 고난을 당하다가 고난을 못 보는 한없이 영글어 가는 과일과 같은 변화된 우리의 인격, 우리를 사용하셔서 자기의 일들을 이 세상에 이루어 가시는 한없이 보람되고 기쁜 그 하나님의 역사의 현장에 한 복판에 우리가 서 있게 되는 이 말할 수 없는 축복, 이것들을 누리며 사는 것이 더 복되다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이 시간도 쉽게 갈 수 있는 넓은 길 대신 좁은 문을 열고 좁은 길로 걸어가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호세아 선지자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뉘우치는 회개를 통해서 주님의 진노가 떠나가고 나면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이제 우리의 패역을 고치실 차례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고쳐져야 할 존재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를 너무 믿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언제든지 고무신을 거꾸로 신을 수 있는 요부와 같은 인간이 우리라고 그렇게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나아가서 우리의 이 뼈저린 패역을 주님의 은혜의 물에 깊이 잠겨서 우리를 고쳐주시도록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가 우리 속에서 살아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패역의 경향성들이 생겨났으니 이제는 회개할 때 아버지 앞에 다짐했던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강력히 사로잡힌 바 되도록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의 은혜로운 기도의 생활 속에 우리를 깊이 잠기기를 힘쓰고 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숙명적으로 불행하게 만들었던 우리가 동행할 수 없는, 우리도 미워하는 삶을 살게 만들었던 우리 안에 있는 패역을 고치셔서 우리를 정말 주님의 사랑을 받는 그런 하나님의 백성들로 바꾸어 놓아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인생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 회개하는 자를 사랑하심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호14:4下)
지금은 소득 수준이 많이 높아져서 학생들이 앉는 책상과 걸상도 많이 현대화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해도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듣는 잔소리가 똑바로 앉아서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집에 다 부서진 상 놓고 엎드려서 공부하는 학생들, 번듯한 책상 걸상을 제대로 가져보지 못하고 산 사람들이 많던 시대였기 때문에 등뼈가 휘어지는 학생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렇게 앉아서 공부하는 자세를 어른들에게 흉내내라고 하면 힘들어서 못할 텐데 그 아이들이 엎딘 것도 기댄 것도 아닌 구부정한 자세로 공부를 하다보면 등뼈가 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똑바로 앉아서 공부하는 것 자체가 아이들의 어깨와 등줄기에 통증을 가져다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패역이라는 것도 불순종의 반복을 통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우리들이 불순종을 택하기 때문에 불순종하게 되었지만 그것이 오래도록 반복되고 나면 그 다음에는 패역이 시켜서 불순종하게끔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불순종하는 삶을 택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우리 속에 있는 패역이 불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택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진정한 행복이 없다는 사실을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패역은 질병과 같아서 우리의 모든 것을 오염시키고 더럽게 만듭니다. 그 패역을 하나님께서 고치시겠다는 것입니다. 언제? 말씀을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그때 주님이 먼저 그 패역을 고치신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이어서 하신 또 한가지의 약속이 있는데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하는 약속입니다. 사랑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다른 낱말은 몰라도 이 말만큼은 쉽게 정의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이 세상에 있는 언어를 가지고 그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이것이라고 한 마디로 간단하게 설명하고 결론을 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묘사하고 명확하게 정의를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느낀 체험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끼리 서로 통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회개하게 되면 하나님이 패역을 고치시고 패역을 고쳐감에 따라서 하나님이 즐거이 우리를 사랑해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도 우리에게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지 않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선지자는 “내가 저희를 즐거이 사랑하리니” 다시 말하면 그들이 미래에 말씀을 가지고 돌아와서 패역을 고칠 때 하나님이 이렇게 사랑해주실 것이라는 것을 말하면서 상대적으로 지금은 그렇지 못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즐거이’라는 짧은 단어를 주목하고 싶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이 한 가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즐거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랑도 있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경험 그 자체가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디블라임의 딸 음란한 여인 고멜에게 장가를 들었습니다. 그 여자는 경향만 음란했던 것이 아니라 음란한 그것이 행동을 통해 모두 드러나서 행실이 매우 부정하고 그런 부정한 행실로서 동네의 모든 사람들에게 소문이 난 창녀와 같이 헤픈 여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향해 명령하시기를 “그 여자를 취해서 장가를 들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처음 하나님이 그 명령을 호세아에게 주셨을 때 호세아도 순종하기 대단히 어려운 고통스러운 분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처음 순종한 그것은 정말 그 여자를 향한 사랑 때문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사랑하기도 싫고 사랑할 의지도 없는 그 여자를 향해서 장가들러 갔을 것입니다. 그렇게 장가를 들고나서 가정을 이루게 되었으나 그 여인은 결혼하기 전의 그 패역한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이 남자 저 남자 외간 남자와 성적인 타락을 하며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자식들을 낳아놓았습니다.
그런데 호세아 선지자는 그 여인을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자기의 재물을 주고 그 여자를 구속해 옵니다. 이것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만일 이 대목을 보고 ‘호세아 선지자가 신앙심이 뛰어나서 순종을 잘했기 때문이다’고 생각한다면 성경을 너무나 잘못 본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그 끔찍하게 더러운 걸레 같은 여자를 찾아 나선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에서 찾아 나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마음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동기만으로 이 여자를 찾아 나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 아니었느냐 하면 만일 하나님을 향한 순종심이 그 여자를 찾아 나서게 만들었다면 호세아가 고멜을 향해 가지고 있는 애정은 도덕적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명령에 의해서 강요된 행동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이유가 하나님이 이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당신이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호세아에게 보여주고 호세아를 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니까 호세아의 그런 행동 자체가 이미 복음이었다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만일 고멜을 찾아 나설 때 여자는 정말 싫지만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그 여자를 찾아 나섰다고 할 것 같으면 그 관계를 통해서 어떻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설명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무나 가기 싫으신데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이기 때문에 억지로 떠밀리듯이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까?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입술을 깨물고 이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세상을 견디시다가 마지막에 억지로 하나님께 자기의 생명을 빼앗기셨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요 자발적으로 섬기시면서 마지막에는 자기의 목숨을 대속물로 우리에게 주시기 위함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예수님에게 그것을 강요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 목숨을 버림으로 우리를 구속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호세아가 고멜을 찾아 나섰던 이 사건은 진짜 이 호세아의 마음속에 고멜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던 것입니다. 호세아의 마음속에 있었던 감정이 아내로서의 고멜을 사랑하는 감정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남녀간에 느낄 수 있는 그 에로스적인 사랑이 호세아의 마음에 충만했더라면 자기를 배반하고 외간 남자와 함께 놀아난 그 여자를 향해서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뜨거운 사랑은 순식간에 불같은 질투로 변해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보다 더 깊은 증오, 그리고 애정보다 더 깊은 복수의 마음이 불탔을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의 마음속에 있었던 고멜을 향한 사랑은 -그런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더 크게 호세아를 사로잡았던 것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이 호세아가 고멜을 너무 뜨겁게 사랑합니다. 자기를 향해서 배신하고 외간 남자와 걸레와 같이 놀아나는 그런 패역한 삶을 조금도 포기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이 여인을 향해서 사랑의 병에 걸린 것입니다.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사랑이 불붙으면서 고멜을 사랑하는데 그 호세아 마음속에 있는 사랑은 그 여자가 그런 사랑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느냐는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입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쓰레기 같고 아무 쓸모 없는 여자인데, 형벌을 받아 죽는 것이 이 세상을 정화하는 길인데, 하나님이 그에게 뼛속 깊이 타 들어가는 그런 불붙는 사랑을 넣어주신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에게는 ‘그 여자가 이런 순결한 사랑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가’하는 질문이 떠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자밖에는 없는 것처럼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면서 그 여인에게 다가갑니다. 다가가서 구속해 오면 다시 바람이 나서 나가서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자식들을 낳아놓고 또 가서 돈을 주고 그 여자를 사오면 다시 가출해서 외간 남자들과 함께 놀아나는 이 더러운 여자를 향해 사랑이 마음속에 불붙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인데 즐거운 사랑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순결합니다. 순수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줍니다. 그러니까 호세아 선지자의 마음속에 뼛속 깊이 타 들어가는 이 고멜을 향한 열렬하고 숙명적인 사랑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즐거이 사랑하는 이 사랑과 질적으로 다를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비교될 수 있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런데 호세아 개인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즐거운 사랑일 수 없습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이 호세아는 처절하리만치 외로워졌고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호세아의 마음은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오히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병이 깊어지는 것과 같은 통증을 느끼는 종류의 사랑이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고멜에게도 호세아가 이처럼 자기를 사랑한 것이 그의 패역한 인생을 계속 살아가는데 변화를 주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호세아 선지자와 같이 자기를 그렇게 뜨겁고 열렬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리라는 것을 고멜도 알았을 것입니다. 수많은 남자들이 자기에게 다가와서 엎드리고 지나갔지만 모두 자신에게 몸만 주었을 뿐이지 마음을 주거나 인격을 바쳐서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가 걸레와 같이 살아가는 그 더러운 여자에게 자기의 이름 한자라도 알리고 싶어했겠습니까? 분명히 그 여자는 호세아와 같은 식으로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없이 가출했지만 호세아의 손에 이끌려서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십시오. 고멜도 호세아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불행히도 호세아만으로는 살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있습니까? 어떤 패역한 사람도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 더 나아가서 “하나님만으로 사실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 할 때 “아멘”이라고 마음 깊이 솟아 나오는 감격으로 고백할 수 있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고멜과 같은 사람입니다. 주님 없이 살 수 없지만 동시에 주님만으로도 살 수 없는 사람.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는데도 우리는 왜 하나님만으로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왜 하나님 없이 살 수 없지만 동시에 세상없이도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을까요?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그 옛날 하나님을 떠난 가운데 살아가던 우리의 옛생활이 그런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멜과 흡사한 삶이었습니다. 아무하고나 -자기의 마음이 끌리고 육신의 안목에 좋은 대로- 아무나 붙잡고 관계를 맺으며 오늘은 이 남자의 품에서 내일은 저 남자의 품에서 오늘은 이 남자의 딸을 낳고 다음에는 저 남자의 아들을 낳고 이렇게 살아가던 고멜과 같은 그러한 패역한 습성을 우리들이 가지고있기 때문에, 그것이 고쳐지지 않기 때문에 순수한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면서 사는 것이 힘겹다는 이야깁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대목에서 넘어집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숙명일 수밖에 없다’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더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패역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사랑을 모두 버리고 살아가는 것을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고 또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것들을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고 하는 두려움 때문에 옛길에서 작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삶을 계속 살아가는 동안에 패역은 점점 깊어져 가고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져 가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고멜을 향해 가지고 있었던 이 순진무구한 사랑, 열렬한 사랑, 그리고 이 세상 끝까지라도 따라 가겠다고 하는 이 집요한 사랑의 추적, 이것은 진실로 문자 그대로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의 순도와 이 사랑의 열정과 이 사랑의 진실함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호세아가 그렇게 열렬하게 자기의 아내 고멜을 통곡하는 눈물과 피 어린 감정으로 찾아다닐 때, 어느 한 순간 고멜이 완전히 자기의 패역한 경향을 버리고 그 호세아의 품에 한없이 안겨서 통곡하며 옛날 더럽고 때묻은 과거를 그 눈물 속에 떠나보내고 호세아만을 열렬히 사랑하는 순결한 여자로 변화되었을 경우에, 호세아의 그 사랑이 돌아오지 않는 고멜을 향해 눈물로 찾아 나서는 호세아의 그 사랑과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호세아가 패역에서 돌아오지 않는 고멜을 향해서 쏟아 붇고 있는 뜨거운 사랑이 고멜이 순결한 여인이었을 경우 쏟아 부었을 사랑과 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말하면 성경이 다 뒤틀립니다. 어차피 호세아 속에 부어진 그 사랑은 호세아의 개인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라기 보다는 주님의 사랑이 부은 바 된 것입니다. 그 두 사랑이 차이가 있다고 말해버리면 심각한 교리적 문제에 부딪힙니다. 동일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호세아 개인에게로 볼 것 같으면, 두 사랑이 질적으로는 똑같은 사랑이었지만 돌아오지 않는 고멜을 향해 찾아 나서는 이 눈물겨운 사랑은 즐거운 사랑일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외로워지는 사랑이었습니다. 뜨겁게 눈물로 이 여인을 찾아 나서면 찾아 나설수록 병이 짙어지는 그런 종류의 사랑입니다.
몰골이 비참하게 된 그 여인을 찾아서 가슴에 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는 동안에 이 여인은 다시 한 번 가출해서 안길 남자의 품을 그리워하고 있었다고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이런 사랑을 하고 싶습니까? 전 자신 없습니다. 즐거운 사랑이 아닙니다. 고귀하지만 뼈아픈 사랑입니다. 아름답지만 자기가 직접 경험하기에는 너무나 가슴 저미는 사랑입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 모두를 향해서 계속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충만할 때나 고갈되어 있을 때나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 때나 어그러진 길을 걸어갈 때나 주님은 여러분을 항상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내가 어둠 속에서 방황할 때도 주님은 함께 계셔
내가 아무도 모르게 선한 일 할 때도 주님은 함께 계셔
정말 주님은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사랑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버리면 확실하게 하나님을 버립니다. 떠나면 아주 분명하게 떠납니다. 돌아올 때 돌아오더라도 차갑게 돌아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오늘 회개하고 돌아와서 패역을 고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새로운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이 호세아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 뼈아픈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하나님도 너무 좋으시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도 너무 행복한 그런 종류의 사랑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아름다운 동산이 있습니다. 거기에 실개천이 휘돌아 흘러가고 아름다운 꽃들과 나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물은 오직 한 통로로 흘러와서 한 통로로 나갑니다. 그런데 흘러나가기는 하는데 들어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흐르고 물이 완전히 막혔기 때문에 동산이 모두 가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개울 바닥이 드러나니까 주위에 풀들이 죽기 시작했습니다. 꽃들이 죽고 아주 억센 풀들만 살아남는데 대개 잡초 같은 것들이 억세니까 잡초만 가득한 정원이 되었습니다. 수문이 막혀서 동산 밖에 물이 잔뜩 모여 강물을 이루고 있습니다. 수문이 막혀서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런 사랑입니다. 호세아를 통해서 부어 준 것같이 패역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불길 같고 핏속 깊이 타들어 가는 듯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패역이 수문이 되어서 그 사랑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이 이스라엘에 인격적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수문이 쾅 하고 깨트려지고 나니까 그 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물이 순식간에 그 아름다운 동산을 휘돌아 지나고 있는 실개천을 내리달리게 됩니다. 마른 동산에 물 되어 흐르니까 넉넉히 물이 가득한 동산이 되어서 다시 아름다운 풀들이 돋아나고 꽃들이 피어납니다. 새들이 깃들이고 나비와 꿀벌들이 날아다니고 벌레들이 노래하는 아름다운 동산으로 바뀝니다.
그러니까 호세아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 같은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그 사랑과 순종하며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사랑이 질적으로 차이가 있을 수는 없지만, 하나님 혼자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짝사랑하시는 것만을 가지고는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항상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의 사랑을 좀 알아달라고 그렇게 애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서 사랑하시는 것을 당신의 백성들이 몰라준다고 해서 하나님에게 무슨 손해가 나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 우리의 동의에 의해서 입증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또 사랑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사랑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큰사랑을 알게 되면 그 패역의 수문이 터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 가운데 달음질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들이 그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 사랑에 어울리는 동일한 사랑으로 반응할 때 그 사랑의 힘이 우리의 인생 자체를 어마어마하게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진리를 알아도 체험하지 못한 진리는 우리의 인생을 붙들어 줄 수 없습니다. 지식은 우리에게 체험의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체험될 때에 그 진리는 우리의 인생을 붙들고 우리가 진리를 택했지만 이번에는 그 진리가 우리를 택해서 우리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의 힘입니다. 진리의 힘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역사 하는 자동적인 힘이 아니라 그 진리의 체험을 통해서 진리이신 하나님의 인격을 알게된 힘에 의해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 가슴 저미는 깊은 사랑이라고 할 지라도 그 사랑을 체험하고 그 사랑이 우리의 삶 속에 물 되어 흐르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삶을 살수밖에 없고 단지 다른 것은 입술의 고백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사랑은 처절할 정도로 열렬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상처받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이제는 하나님의 마음에 상처받은 사랑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삶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사랑이 사로잡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고 그 사랑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드릴 수 있는 그런 관계로 하나님에 바꿔 놓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백성과 구분되는 가장 뚜렷한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없는 사랑이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우리의 인생관과 가치관과 사고를 모두 재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죄악된 세상이 더러운지를 언제 압니까? 세상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세상이 더러운 줄을 안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정확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네
하나님의 사랑 하나를 깊이 체험하고 바로 그 하나님이 오늘 호세아가 느끼고 있는 이러한 불같이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내 인생의 바로 문밖에서 두드리고 계셨지만 내 패역과 죄를 회개치 않는 나의 완악함이 그 하나님의 사랑이 내 삶 속에 흘러들어 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깊이 참회할 때 그 사랑이 우리 속에 들어옵니다. 예전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했었는데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했지만 우리는 그 사랑을 알 수 없었고, 안다고 하더라도 주님이 그렇게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희망을 준 것이 아니라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고쳐진 패역을 타고 하나님의 사랑이 강물같이 밀려들어 올 때 그 사랑에 의해서 우리의 인생에 대한 생각, 무엇이 행복한 것이고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가에 대한 모든 생각이 완전히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부유할 수도 있고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많이 교육받았을 수도 있고 별로 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꿈이 있을 수도 있고 평범한 소시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여러분들이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위대하신 분인 것처럼 여러분들도 그 주님의 뒤를 따라 대단한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지금 주님의 그런 뜨거운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 속에서 살고 그 사랑 때문에 주님을 위해 살고 싶어하는 그 마음 자체가 이미 여러분들이 하늘 나라의 VIP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너무나 쓸모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찬 것을 똑바로 기억해야 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열렬한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메마르고 건조한 삶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눈에는 성경도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며 살았기 때문에 그분의 가슴 저미는 사랑에도 불구하고 애비 없는 자식처럼 에미 없는 후레자식처럼 살아갑니다. 분명히 하늘나라의 집안에서 태어난 신령한 가문의 거룩한 자손임에도 불구하고 불량배처럼 짐승처럼 막돼먹은 인간처럼 쓰레기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쓸모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이따금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는 없을까요? 있습니다. 그리고 진실한 교인이 되고 싶다고 하는 그런 신앙의 고백이 없을까요? 있을 수 있습니다. 은혜 받을 수는 없나요? 받을 수 있습니다. 선한 것을 결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패역을 고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느끼지만 이것은 간헐적일 뿐이고 주님의 은혜의 세계 속에 들어가지만 항상 장마철에 가끔 햇볕이 드는 것같은 그런 체험일 뿐입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말대로 하면 “너희의 의가 아침 구름과 같도다”한 그 고백과 어울리는 그러한 종류의 체험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패역은 완전히 고쳐지지 않고 죄악된 본성을 따라 살아가면서 이따금씩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선한 것을 결심해보고 그 패역한 경향성이 가끔 억제되기는 하지만, 쉽게 끊어지는 줄에 묶인 커다란 망아지처럼 언제든지 원하면 그 은혜의 줄을 끊어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길로 능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그 패역을 제갈 먹일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한 도덕적인 결심으로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봐야 되겠다고 백날 결심해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이 부흥회 때마다 혹은 예배 시간에 가끔씩 열렬히 하나님을 체험한다고 해도 패역이 지속적으로 고쳐지는 은혜생활 없이는 진실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늘 나의 것으로 체험하면서 그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거룩한 성도의 발자취는 따라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고 묻고 싶으시겠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그 놀라운 이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광야로 뛰어나왔을 때 그들의 마음속에는 어떤 가식이나 거짓도 없었습니다. 갈라진 홍해를 바라보며 환호성을 지르면서 하나님을 향해 장엄한 찬양을 불러 영광을 돌렸을 때 이스라엘의 마음속에는 어떤 거짓이나 사악함도 없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그 신기한 맛나를 먹을 때의 그 첫 감격도 순수한 감격이었습니다. 마른땅에서 반석이 터져 물이 쏟아져 나오며 그 물을 마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감격에 어떤 거짓이 깃들여 있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순수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체험했지만 그 사랑은 언제나 이따금 맛보는 예외적인 경험에 그쳤고 끊임없이 그 사랑이 그들의 삶을 움직이고 역사하지 못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두고 온 애굽에 대한 그리움, 패역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그 뜨거운 사랑의 감격의 눈물이 채 마르기 전에 그들은 즉각적으로 또 다른 충동이 마음속에서 솟아났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음란에 빠지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각대로 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기적을 체험하고 누가 그 사람들보다 더 하나님의 큰 영광을 보았겠습니까? 그들은 빽빽한 구름 사이에서 엄위로운 음성으로 친히 말씀하시는 만군의 주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도 살아 남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위대한 지도자 모세에 의해서 영도되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도대체 그들이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못 본 사람들과 무슨 차이점이 있으며 애굽에서 엎드러져 죽은 사람들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그들은 약속의 땅을 얻지 못했고 광야에서 눈을 부릅뜬 채 죽어갔고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행복했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실패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말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왜 쏟아지는 하나님의 그 아름다운 사랑, 그리고 시시때때로 찾아오셔서 이 세상에 우리밖에는 없는 것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아름답고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면서도 그 사랑 때문에 지속적으로 행복해질 수 없었을까요?
체험이 모자라서가 아니었습니다. 지식이 부족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질기디 질긴 그 옛사람의 패역이 그들 속에 살아 남아서 순간 순간 경험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격 속에서 억제되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그것을 뿌리뽑을 수가 없었습니다. 은혜 안에 있을 때는 이 패역이 기를 쓰지 못하고 은혜가 계속되면 이 패역이 점점 약화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없는 것같이 됩니다. 그러나 은혜가 떨어지고 나면 그 패역은 다시 궐기대회를 하듯이 솟구쳐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의 통제력을 벗어납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로잡아서 죄 가운데 데려가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살아가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 식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행복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저희를 즐겁게 사랑할 것이다’라는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편에서 보면 “내가 이스라엘을 그렇게 가슴 저미는 아픔으로 사랑할 뿐 아니라 나의 이 사랑을 이스라엘이 알아주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가슴 아픈 짝사랑이 아니라 우리 함께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그런 관계가 될 것이다”고 선지자가 예언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오늘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많은 이유들을 댑니다. 우리의 신앙이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오르는 것처럼 생명력 있는 신앙이 되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거리들을 환경과 여러 가지 주변의 여건에서 부지런히 찾습니다만 결국은 패역이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이 우리의 신앙 전선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진정 아름다운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단지 어떤 일을 안하면 하나님께 벌받을까봐서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이 너무나 깊고 진실한 나머지 그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면 도무지 인생 같지 않고 사는 것 같지 않은 그런 관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없이 하나님으로 인해서 즐거워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인해서 즐거워하는 그런 관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도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그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뜨겁게 사랑해 주시겠다는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신앙의 현실에 대해서 분통터져할 줄 모르는 것이 오늘날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문제인 것입니다.
(예화) 조난 당해 죽은 사랑하는 이가 언젠가는 떠내려 올 것을 기다리며 수십 년간 알 프스 산자락에서 살던 어느 여인 이야기.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그런 사람들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를 이야기하기 전에 그런 사람들이 매우 희귀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주인공 중의 한사람이 될 가능성은 있지만 바로 그 사람일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 왜냐면 수십 만 명 가운데 한 사람 있을까 말까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잃어버리고도 그렇게 긴 세월을 서러움과 고독 속에서 시체라도 만져보기 위해서 기다리는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도 너무나 씩씩하게 잘 살아갑니다. 주님의 사랑 없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유가 의미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명성과 우리 육체의 자랑이 주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없는데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까? 나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그 지존하시고 아름다운 사랑, 우리 행복의 유일한( ? ) 그분이시며 우리의 목장이시고 우리의 생명의 원천이 되시는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마음에 느껴지지 않는데 우리의 소유가 있음이 무슨 소용이 있고 높은 지위에 있음이 무슨 소용이 있고 ( ? ) 수많은 사람이 우리를 향해 존경과 찬사의 격려의 말을 우리에게 보내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까?
구주의 사랑으로 흘리신 보혈이
내 마음의 위로와 내 마음의 기쁨 내 마음의 즐거움 내 영혼의 욕망이 되지 않는데 사람들로부터 받는 그 많은 사랑, 그 많은 우정 그 많은 즐거움들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주님의 손에 의해 빚은 바 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우리 생명의 월계관이고 우리 전 인생의 면류관과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그 뜨거운 사랑, 범죄하고 걸레와 같이 더러운 우리 같은 인간을 찾아 나서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느낄 수 있고 그 사랑에 감격하고 그 사랑이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움직이는 근원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아무 것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적어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렇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을 누리면서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소수일까요? 하나님 때문에 행복해보지도 못하고 하나님이 자기 때문에 행복해지신 적이 있다고도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정말 얼마나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이 세상의 헛된 욕망을 취하는 것처럼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간직하려고 했다면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처럼 하나님 자신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목마른 사람들이 되어서 마약처럼 이따금 찾아와서 우리 영혼의 고통을 진정시켜주는 세상의 즐거움과 연락들을 포기하는 대신 고통 가운데서 그 완전한 사랑을 얻기 위해서 몸부림친다면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그 큰사랑을 더 풍성하게 맛볼 수 있을까요? 패역을 고치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주님의 그 완전한 사랑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주님의 사랑의 그 오묘함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압니다. 주님의 그 사랑을 경험한 사람, 내가 주안에 있고 주님이 내 안에 있어서 언제나 주님의 음성이 들리고 주님의 숨결이 느껴지는 완전한 교제 속에서 산 영적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이세상의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과 바꿀 것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 없이 이렇게 파리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열렬하게 그 사랑을 되돌려 달라고 하나님 앞에 애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가 행복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한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그 뜨거운 사랑 없이 살아가는 이 건조하고 목마르고 때로는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이 삶을 계속해서 이어갑니까? 실패를 숙명처럼 생각하고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이 자기의 분깃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이 잘못된 신앙생활, 거짓된 만족으로 가득 찬 우리의 신앙생활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누가 우리를 그 사랑에서 멀어지게 만들었고 누가 우리를 그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은 우리에게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되게끔 만들었습니까?
높음이나 깊음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피조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가 없다고 사도가 감격했는데 우리에게는 왜 이런 감격이 없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패역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완전한 복종을 지향하든지 패역을 지향하든지 둘 중의 하나 뿐이지 중간지대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와 같이 더럽고 죄로 물든 이 패역한 인간들이-하나님의 사랑이 싫어서 세상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을 거스르며 마음대로 살던 짐승과 같은 우리들이-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증언을 들으면서 순간순간, 순간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자주 ‘우리가 그 사랑 안에서 살고 싶습니다’라는 고백이 있다면 완전하고 순결하신 그분, 한 번도 우리를 버리신 적이 없고 우리를 포기하거나 떠나신 적이 없는 그 하나님은 그런 종류의 사랑을 우리와 얼마나 나누고 싶어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굳게 마음을 닫아걸고 우리의 패역을 좇아서 사느라고 주님의 그런 사랑을 헛되게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 예수 대문밖에 기다려 섰으나 단단히 잠가두니 못 들어오시네
나 주를 믿노라고 그 이름 부르나 문밖에 세워두니 한없는 내 죄라
그침이 없고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패역이 막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그 사랑이 우리의 삶 속으로 흘러 들어오지 못하고 있고 우리를 향한 불붙는 주님의 사랑이 짝사랑으로 끝납니다.
이제는 우리들이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울려 퍼지는 그 피 어린 애원의 음성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의 사랑 없이 넉넉히 살 수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핍절하고 고통하는 영혼은 주님 사랑의 빛을 받게 해달라고 아우성하고 있습니다. 영혼의 이런 울부짖음을 외면하고 우리가 무엇으로 이 세상에서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우리의...(?)하는 행복이며 주님의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 시간에도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던 그 불타는 마음으로 오늘 주님의 택함을 받았지만 그 사랑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여러분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열렬하게 사랑하고 싶으니 너희의 패역을 버리고 이제는 나의 사랑으로 너의 인생의 동산에 흐르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3. 이슬처럼 내리는 은혜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이 피리니 저가 백합과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호14:5上)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슬은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와 같이 강수량이 풍부한 지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땅은 비가 충분하지 않아서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염려의 제목은 파종할 때 적절히 비를 내려주시고, 또 추수하기 전에 마지막 곡식이 익어야 할 그때에 비를 내려주시는 것, 이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서 진노하시면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시는 광경들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슬도 그와 같이 중요성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이 이슬이 한마디로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패역을 고치고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들이 이슬과 같이 풍부히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살아가게 될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가끔은 기적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평상적인 우리의 생각과 노력으로 뛰어넘을 수 없었던 난관이 있을 경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적인 역사가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숙명처럼 생각하고 살아오던 실패의 벽을 뛰어넘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메마르고 밋밋한 신앙생활보다는 때로는 기적과 이적의 역사가 일어나는 광경을 보면서 마른땅에서 물을 내시고, 마른하늘에서 번개를 내리셔서 대적들을 불태우시고, 건조한 땅에서 하나님의 생수의 강을 흐르게 하시는 이적들을 보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아니었다면 숙명처럼 생각하고 살았을 많을 실패들을 주님을 믿는 신앙 때문에 극복하고 승리하는 이적적인 체험들을 우리는 갖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생이 이적으로만 마주 닿은 인생을 살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 언제든지 하나님이 일으키실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그 위대한 이적을 보는 것보다도 더 소중한 것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아래 살아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경험되는 하나님의 은총,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런 화려한 것도 없고, 괄목할 만한 어떤 일들이 내 인생에 일어나는 것 같이 않을지는 모르지만 내게 아침마다 새로운 하나님을 향한 간격이 있을 때, 날마다 하늘을 열고 은밀하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킬 때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진정한 행복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 사라집니다.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은 끝이 있고, 시작이 있었던 것처럼 사라지는 날들이 있습니다. 신앙의 진정한 행복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아래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이적과 기적적인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스토리를 듣노라면 마치 소설을 읽는 것 같은 감동을 받게 하는 이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이적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이 오늘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이적, 쉽게 반복될 수 없는 위대한 기적을 보았으면서도 가슴에는 아무 것도 없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이름을 거명하고 계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독점적인 사랑을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민 위에 뛰어난 백성으로 택하시고, 아무 공로와 위로가 없었지만 그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을 알리는 나팔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 자체가 기적의 역사였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실 때에 그 아브라함이 거대한 민족을 이루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아이가 없어서 나이가 백세 가까이 되도록 외로운 노년을 보내고 있는 희망이 없는 늙은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일들을 이루시지 않았습니까? 애굽으로 끌려갔을 때에도 이미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야곱의 가문은 ‘그렇게 끝이 났구나!’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억압을 박해를 받는 포로생활을 통해서 민족을 잉태하셔서 역사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출애굽으로부터 시작해서 오늘 예언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이 가나안에 정착하게 될 때까지 그들의 역사는 기적으로 점철된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선지자로부터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이스라엘은 어떤 처지에 놓여 있습니까? 그런 놀라운 기적을 보았고, 하나님이 그들만 사랑하시는 것 같은 이적의 놀라운 경험을 했는데 지금은 어떤 처지에 있게 되었습니까? 지금은 이 예언자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들은 놀라운 이적을 과거에 체험을 했지만 지금은 잔잔하게 느껴오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부터는 거리가 먼 척박한 심령을 가진 메마른 마음 밭의 사람들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통해서는 이슬이라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오늘 하나님이 부르고 계시는 이스라엘은 얼마나 그리움으로 가득 찬 이름입니까? 하나님의 자녀, 주의 사랑하는 성도, 주님의 기쁨,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이 이름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매우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이들의 외면적인 삶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들의 마음속에 있는 내면의 세계에서는 이미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맛볼 수 있는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에서 오는 즐거움들, 그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참된 기쁨이 모두 잊어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따금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기적을 보여주시고, 우리들이 상상할 수 없는 위대한 일들을 행하시는 것은 이처럼 이슬과 같이 내리는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적을 베푸시고,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시련의 강들을 건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이따금 찾아오는 하나님의 커다란 이적을 경험하고, 뒤집어 질 듯이 감격하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없는 생활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마치 대낮에 떨어지는 번갯불을 보고 놀라는 강아지와 다름이 없는 반응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성도의 커다란 행복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때에 그것은 이적이나 기적의 역사를 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슬이 어느 때에 내리는지 알 수도 없고 어떻게 내리는지 눈으로 이슬이 내리는 것을 본 사람도 없지만 그러나 분명하게 이슬이 이 풀들을 맺혀서 식물들을 살게 하는 것처럼 우리들이 ‘왜 나 같은 죄인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시는 지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우리에게 임하게 되는지를 우리들이 모두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아침마다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택한 백성으로 여겨주시고, 나를 버리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므로 은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다’라고 하는 관계에 대한 체험이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이슬이 오늘 맺힌 그 이슬이 어제의 이슬이 아닙니다. 오늘 맺힌 이슬이 어제의 맺혀있던 그 이슬이 아닌 것처럼 ‘주님이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은 것이다’ 라고 하는 이 말씀은 그들이 패역을 고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베푸시는 매일 매일의 은혜가 진부하고 구태의연한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새롭게, 새롭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 신지를 알려주시는 그러한 은혜의 감격 속에서 살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난주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회개를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대로 살기로 다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늘 다짐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다짐하는 그대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아픔은 있지만 그러나 날마다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앞에서 새롭게 자신을 돌아보고, 비록 이 결심이 아름답게 열매맺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주님이 도와주시면 꼭 그렇게 될 것처럼 믿으면서 선한 결심으로 우리의 신앙의 씨를 뿌리면서 사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마지막에 그렇게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살아가고, 짐승처럼 먹고 마시며, 짐승처럼 웃고 울고 살아가는 평한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는 끊임없이 불꽃과 같은 하나님의 눈동자 앞에서 우리의 마음의 세계를 두루 감찰 받고, 어둠 속에서 적당히 숨어서 살수 있는 인생의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둠 속에서 위안을 받기보다는 빛 가운데서 하나님의 진리 앞에 드러나기를 힘쓰는 우리의 삶, 그것을 통해서 마지막에 얻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마지막에 도달하고 싶어하는 그 장면은 어떤 장면입니까? 무엇을 원하길래 우리들이 그렇게 자기를 부인해야 하고 또 십자가를 져야하고, 평탄한 길을 걸어가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의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바램인데, 진리를 위해서 살아야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마지막에 우리들이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답할 수 있는 그것을 성경이 오늘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의 패역을 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마음 깊이 젖어오는 은혜의 세계가 있습니다. 마음 깊이 하나님의 은혜에 젖어서 사는 사람들은 은혜로운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영적인 사고 방식 속에서 인생을 판단하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완전한 사람일 수 없습니다. 누구도 하나님 앞에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와 졌다고 단언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고 패역하게 살아가고, 자기 고집대로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짓밟은 완악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병든 내면의 세계가 고쳐지는 아픔이 없는 대신 하나님의 은혜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여기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도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지 없는지는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의 증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 속에 살아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부어져 있어서 이슬을 머금은 풀잎처럼 싱싱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모두 사라져서 가뭄의 시들어 가는 풀잎과 같은 신세가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은혜로 새로워지려고 하는 회복의 시점에 있는 사람도 있지만, 이미 받은 은혜가 모두 고갈되려고 하는 시점에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우리에게 그런 상황에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남은 것들을 굳게 하라고 하신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남은 은혜를 굳게 붙들고 다시 우리를 이슬과 같이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소생시켜주시기를 기도해야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경험을 돌아보면 우리의 눈이 이슬에 젖는 것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에 젖는 것은 아주 비례합니다. 우리들이 패역한 삶을 계속 살아가고 나면 우리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 눈물입니다. 물론 눈물을 흘리면서 여전히 패역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그래도 그 사람들에게는 최소한 패역을 참아 버리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향한 안타까움이라도 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우리의 눈에서 우리의 죄를 참회하고 하나님이 큰 은혜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오랫동안 살아 온 패역의 사슬에 매여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원하지만 차마 돌아가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안타깝게 호소하는 눈물이 있는 동안에 그에게는 희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은혜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 보면 우리들이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만큼 자신의 모습을 인해서 슬퍼하게 되요. 왜냐하면 주님의 사랑을 몰랐을 때에는 내가 막 살아도 그게 하나님을 가슴아프게 하는 것인지를 몰랐고, 또 그게 하나님을 가슴 아프게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주님이 가슴아파 하시는 것이 낫지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들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은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고 중심이 자아입니다. 은혜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 자아 중심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나만 만족하면 되고, 내 마음대로 살면 되고, 내가 흡족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난 거예요. 최고의 가치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이웃의 행복도 짓밟고 신실함도 버리고, 언제든지 자기 중심적인 삶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음대로 포기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에 은혜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마음은 거칠어지고 황폐합니다. 형식은 그럴듯하게 예배를 드리는 교인의 모습일지 모르지만 사고방식은 세속적이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으로 딱딱하게 굳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완전한 삶을 살지 못해도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아 알아서 주님의 크신 사랑, 오늘 호세아의 마음을 가슴 저미게 만든 고멜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피눈물이 흐르게 했던 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그렇게 배역하고, 음란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살아가는 걸레와 같은 우리를 향해서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될 때, 그런 하나님의 큰사랑을 받고도 이런 존재밖에 되어있지 못하고 있다라고 하는 깊은 후회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때문에 신앙은 절대로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하기 싫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런 것들을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깨닫게 될 때에 그 순간에 완전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자기가 동의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전에는 백퍼센트 동의했습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자아 중심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체험하고 나면 사고가 사람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입니다. 주님 중심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 주셨는데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자기에게 용납이 안돼는 것입니다. 사고가 하나님 중심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자기의 허물과 부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고 하나님을 거슬리며 살려고 하는 우리의 불순종과 반항은 그에 비례해서 크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참회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질 때 내면의 세계는 하나님의 은혜에 젖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촉촉이 젖어있는 상태는 의로운 사람들만 그런 상태에 젖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결하게 살았어도 하나님 앞에 죄가 많은 사람이라고 주님의 은혜에 젖은 심령일 수 있고, 정말 도덕적으로 의롭게 살았어도 잘 길들여진 짐승과 같이 하나님 앞에 돌과 같이 무거운 가슴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단히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은혜 아래서 살아가는 자신의 비참함을 대비시키면서 늘 깨뜨려진 마음을 가질 때 그 사람은 신속하게 패역들이 빠져나가면서 고쳐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아주 신속하게 패역들이 빠져나가고 고쳐지면서 우리들은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이슬과 같이 그렇게 은혜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영원히 완전한 사람은 될 수 없어요. 그러나 우리의 패역과 죄악들이 많이 빠져나가고 그렇게 된 다음에 우리의 가슴속에 남은 것은 하나님을 향한 놀라운 감사와 그 은혜 아래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말할 수 없는 감격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라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러한 약속을 이스라엘에게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우리의 패역을 고치기 전에는 하나님 자신을 한없이 감격하며 살아가는 진실하고 행복한 삶이 지속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약속을 타락하고 범죄 한 이스라엘에게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이 주신 크신 은혜를 잃어버리고 배역하는 가운데 있는 못된 백성들이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그러한 백성들이었고, 나라는 위기 가운데 치닫고 있는 그때였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 더럽고 범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이슬과 같이 내리는 은혜 아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한없는 은혜를 날마다 내리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슬처럼 내리는 생명적인 은혜 아래서 즐거워하는 관계를 하나님이 여전히 꿈꾸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숨질 때 되도록 사라지지 않는 하나님의 소망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비록 고멜과 같이 하나님을 여러 번 떠나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하나님 없는 것들을 너무나 사랑해서 주님의 가슴에 아픔을 드리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주님은 여러분들 혼자 떠나보낸 그 자리에 기다리시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사는 당신의 백성들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 하나님의 사랑은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워낙 탁월한 너머지 여러분들의 눈에는 그 하나님이 무능해 보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사랑은 어떤 의미에서 방법을 많이 앗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힘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과 인내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이방의 우상들을 섬기고, 정조를 잃어버렸지만 누가 그들이 섬겼던 우상 중에 이스라엘을 보호할 수 있었습니까? 고멜이 자기를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는 남편 호세아를 버리고 뭇 남자들의 품을 전전하였지만 누가 그 호세아의 아내 고멜을 불쌍히 여겨준 사람이 있습니까? 모두에게 버림 받게된 기회 있을 때마다 그를 구속하여 건져 온 것은 자기의 남편 호세아 밖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든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지 여러분들의 진정한 구원자는 오로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여러분들이 누구를 믿고, 누구를 의지한다고 할지라도 그 관계들은 모두 잠시 있다 사라지는 관계들뿐입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베풀어 주셨던 사랑보다 더 빛깔이 짙은 사랑이 여러분을 부른다고 생각해도 사실은 그 어떠한 사랑도 여러분들을 향한 사랑을 능가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사랑을 경험한 모든 사람은 결국 모든 것으로부터 다 버림받았다고 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보다 우리를 더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더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고 믿으면서 신앙을 버리고, 그것들에 대한 사랑을 찾으면서 가지만은 마지막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에는 자기가 그 모든 것들로부터 버림받았다고 하는 확신을 갖게 되고, 그렇게 모든 것들로부터 버림받았을 때 찾아오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 그때가 하나님의 사랑을 눈뜨는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범죄하고 당신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에게 소원을 가지고 계셨는데 그것은 이렇게 매일 이슬과 같이 쉼 없이 은혜를 내려 주셔서 그 은혜 아래서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한없이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사막의 선인장들의 가시가 원래는 잎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후에 적응하면서 점점 줄어들면서 햇빛을 받아서 습기를 날려보내지 않아도 되는 가시로 변했다 라고 보고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살아가지 아니하면 우리가 그 가지 같은 존재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속하셔서 우리에게 사랑을 많이 경험하게 만드신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아름다운 존재가 되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거예요. 그런데 지속적으로 은혜아래서 살아가니까 가시 돋친 존재로 변하는 거예요.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때문에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패역을 고치지 않으니까 약속은 있는데 현실은 너무나 비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패역을 고치고 지속적으로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슬이 의미하는 바는 소생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른 아침에 이슬에 흠뻑 젖은 풀밭을 걸어본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바지 끝이 이슬에 흠뻑 젖습니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는데도 풀 속을 헤쳐 지나가면은 옷깃이 물로 흠뻑 젖어서 비를 맞은 사람처럼 변합니다.
이스라엘 지방은 비가 충분하지 않은 지방이라서 예전에는 지붕을 경사되게 만들어서 비가 오면 그 빗물이 채앙을 타고 흘러가서 지하의 물 항아리 속에 떨어지도록 만들어서 물을 사용을 했습니다. 그럴 정도로 물이 귀한 곳입니다. 거기에서 자연의 현상을 통해서 흠뻑 맺힌 아침 이슬은 수많은 풀벌레들과 날짐승들과 식물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비가 오고 안 오고는 상관이 없이 아침이 되면 이슬이 흠뻑 머금어집니다. 이슬이 많이 내릴 때에는 이슬이 풀잎을 타고 굴러 떨어집니다. 그것을 머금으면서 아침을 맞이할 때 숲은 모두 싱싱하게 살아납니다. 어제 오후에 모두 시들었던 숲이 아침마다 새롭게 이슬을 머금도 피어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이슬이 필연적으로 만물을 소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예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도 분명히 믿고, 하나님 없이는 살수 없다는 고백도 있고, 주일이면 교회를 변함없이 찾아오는데 죽은 자와 같이 살아가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뭐예요? 소생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은 패역을 고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슬을 흠뻑 머금으면서 싱싱하게 푸른빛을 내뿜은 초록의 세계와 같이 패역을 고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생명력이 있는 것입니다. 소생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고난도 당하고 시련도 당합니다.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도 종종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은 잠시이고, 소망은 영원합니다. 잠시 인생의 어두운 밤에 낙심도 깃들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다시 그에게 충만하게 부어져서 소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들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러한 생명력 있는 신앙생활을 우리들이 해 나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대충 예수 믿으면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우리를 보면서 ‘저 신앙이 도저히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으로서 여러분들은 아주 중요한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보는 사람들마다 오히려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끼고 주님의 편지를 보는 사람들이 되어야 된단 말입니다. 우리들이 얼마나 침체되어 있고, 죽음과 방불한 인생을 살아가면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신앙이 인생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자기도 이렇게 사는 것이 싫은데 이렇게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패역을 고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몸은 하나님께로 돌아왔으나 마음까지는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몸은 하나님께 드리고 싶지만 마음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부는 하나님께 바치고 싶지만 전부는 하나님께 바치고 싶지 않은 자기 중심적인 사고 방식 때문에 그러한 불순종이 지속적으로 있게되고, 거기서 생명을 잃어버린 자와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생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늘의 신령한 이슬이 흠뻑 내린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한 낮의 잎사귀가 비틀어지면서 메말라가던, 그래서 살 희망이 없어 보이던 풀들이 아침의 구슬과 같이 영롱한 이슬들을 잔뜩 매단 채 싱싱한 초록의 빛을 뿜어내고 있는 광경을 우리는 생명을 연상하지 않고는 바라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올리고, 찬양을 하나님께 부르면서 하늘로부터 신령한 이슬이 쫙 쏟아져 내려서 아까 말씀드린 풀들처럼 싱싱한 이슬을 잔뜩 머금고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는 예배의 시간이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자신 안에는 이 세상을 이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결심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결심이 우리의 실패에 대한 대안이 될 수는 없습니다.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하늘로부터 임하는 소생이 여러분들에게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속히 하나님 앞에 이 오랫동안 굳어졌던, 아무리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은혜를 받아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옛 삶의 방식들을 버려야됩니다. 살갗을 뚫고, 핏줄을 뚫고 마지막에는 뼈까지 깊숙이 박혀있는 자기 중심적인 신앙생활,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든지 나는 나대로 산다 하는 신앙생활, 또 듣기는 잘 들어도 그 들은 대로 행하지 못하면서 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인하여서는 곤고하지 않으려는 지식과 실천이 분리된 신앙생활,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소생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그가 아무리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를지라도 그의 기도가 그에게 소생을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가 패역을 버리도록 요구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그 패역을 버리고 마음을 정말 고침을 받고 나와 사랑을 나누는 관계 속으로 들어오게 되면 내가 너희를 즐거이 사랑할 뿐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소생을 주어서 주님을 등지고 살아갔을 때에 너희들이 경험할 수 없었던 그러한 놀라운 결실과 변화들을 주겠노라’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리비아의 대수로 공사가 20세기에는 불가사의한 인간의 대 역사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방송을 통하여 여러 해 전에 본적이 있습니다. 5600KM의 수로를 까는 것입니다. 그 거리는 서울과 부산을 편도로 11번을 왔다갔다하는 거리입니다. 수로가 직경이 3m정도 됩니다. 수로를 만드는데 접는 널빤지 철판이 32평입니다. 이 세계에는 그것을 접는 기계가 생산이 안되서 독자적으로 만들었습니다. 32평 짜리 철판을 접어서 하나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을 매일매일 270개씩 놓아서 수로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나라 전체의 운명을 걸고 그 일에 온 국민이 매달리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오직 하나입니다. 그 물을 가지고 사막을 옥토로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식물학자들 얘기는 아무리 비참하게 버려진 모래밭이라도 물만 있으면 몇 년 내에 곡식을 심을 수 있는 땅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질학자들의 보고가 매일 사막이 넓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사막이 된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비가 안 오고 물이 없으니까 좋은 땅들이 몇 미터씩 사막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으로 물을 가지고 사막이 변하여서 옥토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지구의 식량난에 대해서 아주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막을 바꾸면 된다는 것입니다. 물만 있으면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뭐가 있습니까? 주님의 은혜가 끊어졌는데 우리가 무엇을 하면 사람들이 되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우리는 패역을 고쳤습니다. 또 요즘에는 사람들이 즐겨 말하는 치유도 얘기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해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마치 어느 한 순간에 치료를 받으면 모든 과거의 상처들이 완전히 치료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은 한번 받은 상처는 영원히 치유될 수 없습니다. 물론 계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치유되고, 또 옛날의 패역을 어느 한 순간에 깊이 결단하고 고칠 수 있습니다. 버릴 수 있고, 도저히 걸어가기 싫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상태가 유지되려면 이슬같이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아래서 계속 살아야 합니다. 술 끊었던 사람이 몇 년 후에 다시 마시는 사람들 많습니다. 얼마든지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사막과 같이 메마른 우리의 삶에 물과 같고, 건조한 들판 생명을 잃어버린 풀밭과 같은 우리의 심령 속에 이슬과 같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살수가 없고 사는 자처럼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죽은 자처럼 죽어있을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비록 여러분과 함께 이 작은 교회를 목양하고 있지만 저가 꿈꾸는 교회, 나아가서 꿈꾸는 나 자신도 그러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괄목한 만한 업적을 남기거나 수많은 사람들에게 경배와 찬양을 받는 대신에 감탄과 찬사를 받을만한 교회가 아니라, 날마다 소생함이 있는 교회,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알고, 그 사랑 안에서 감격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는 교회, 그리고 거기가면 언제나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킬 물이 있는 교회, 그래서 거칠어졌고 황폐해졌던 우리의 마음이 거기서 이슬처럼 소리 없이 쏟아져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잠겨서 소생함을 경험하게 되는 교회, 우리 자신이 되기를 소망하고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메마른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들이 부지런히 경건 생활을 유지해도 우리는 이 세상을 담쌓고 살수는 없어요. 우리는 오히려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속된 세상으로 내려가야 하고, 주님의 아름다운 사랑을 많이 맛보면 맛볼수록 복수와 미움으로 가득 찬 칼부림으로 살벌한 피 냄새 나는 도시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거기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우리의 마음이 메말라질 때마다 순간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다시 채워지는 이 충만한 은총을 끊임없이 경험하는 이 복된 은혜, 이 복된 사랑은 패역을 버린 사람들의 것입니다.
요즘은 건전지가 충전해서 쓰는 제품들이 많이 나옵니다. 값싼 옛날 제품과 최신의 제품의 차이는 옛날 제품은 단시간 쓰고 나면 장시간 충전해야 됩니다. 그런데 요즘의 제품은 고속충전입니다. 그리고 장시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패역을 버리지 않으면 충전이 잘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오랫동안 남아서 매달리고 열심히 쫓아다니는데 효과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패역을 버리고 오랫동안 하나님을 거슬리면서 살아왔던 삶을 청산하고 악한 길을 떠나고 견고하게 하나님께 매달리면 항상 영적인 순발력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갈급하고 건조할 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전심으로 매달리면 순식간에 하나님께서 고속으로 충전시켜 주십니다. 그런데 패역을 고치지 않은 사람은 망가진 밧데리와 같습니다. 아무리 꽂아놔도 전기가 안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급선무는 패역을 고치는 일입니다. 패역을 버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순교할 마음이 되어 있는 사람의 마음의 한시간의 쏟아 붓는 기도는 패역을 버리지 않은 채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 좀 받아볼까 하고 매달리는 사람의 몇 일 금식기도보다도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들이 더 하나님을 알아갑시다. 그리고 어차피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혹시 고기가 물이 없이 잠시 살아있을지 몰라도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충만하고 완전한 사랑을 알기까지는 행복해 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매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 앞에 옳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고, 우리의 삶을 움직이고 있는 패역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렇게 소생시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매일매일 주님을 뵙는 삶을 살아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백합화처럼 아름답게 하심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호14:5中)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와서 은혜 가운데 살면 하나님께서 서서히 우리 속에 있는 패역을 고치십니다. 패역이 고쳐지는 것만큼 주님의 사랑의 친밀함이 우리 마음에 밀려옵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 가지를 행하시겠다고 5절에서 말씀하시는데 첫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이슬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백합화와 같이 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백합화 하면 우리에게는 매우 귀하지만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매우 흔히 피는 들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백합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아름다움의 대표적인 예로서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들에 핀 백합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그 옷이 이 꽃 하나의 아름다움만 못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 백합화는 자태도 고상하고 아름답지만 향기가 매우 뛰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고치셔서 변화시키시는데 두 번째로 백합화와 같이 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인생이 정말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패역을 고쳐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해볼만한 것 다해보았습니다. 왕년에 불 받으러 안 다니고 안수 기도 받으러 안 다니고 성경공부 교재 몇 권씩 끼어 들고 성경공부 배우러 안 다녀 본 사람 있습니까? 이런 훈련이다 저런 훈련이다 이런 집회다 저런 집회다 안 쫓아다녀 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저는 그런 것이 쓸데없다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가 없으면 이러한 모든 노력이 다 쓸모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한 가지가 바로 패역을 고치는 것입니다. 패역을 고쳐야지만 아름다운 사람으로 바뀝니다. 여러분도 이 말씀에 깊이 동의하실 것입니다. 불 받았는데 아름답지 않은 사람을 많이 만나셨을 것입니다. 성경지식이 뛰어난데도 아름답지 않은 사람을 많이 만납니다. 이런 훈련 저런 훈련 많이 받아서 집에 가면 수료증이 앨범에 그득한데도 향기롭지 않은 사람을 많이 만납니다. 그런데 그런 수료증 없고 그런 뛰어난 지식이 없고도 향기로운 사람을 우리는 또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께서 패역을 고친 사람들입니다.
다 필요하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한 사람이 외부로 얼마나 많은 불을 받아서 시뻘겋게 되었느냐 얼마나 많이 연필로 공부해서 새까맣게 되었느냐 이전에 본질이 어느 날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불이 겉만 새까맣게 태우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 속 골수까지 파고 들어가서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인간성의 본질을 얼마나 바꿔놓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식이 머리에서만 도는 지식이 아니라 그 지식이 얼마나 가슴 깊이 들어가서 다른 것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이 철저하게 망가진 인간의 마음의 본성을 얼마나 철저하게 고쳐 놓았느냐가 관건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이 사람 보라고 하는 신앙생활이 아니지 않습니까? 남들이 아무리 그럴듯하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배고픈 얘기 아닙니까? 배가 고파서 먹다 남은 라면 국물에 찬밥이라도 말아서 한 그릇 먹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데 배가 불룩 나와서 남들이 ‘사장 같다 점심을 잘 먹었나보다’한다고 우리의 배고픔이 위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남을 위한 예증이 아닙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아름다워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말 고매한 희생정신으로 예수님처럼 살아간 사람들을 다 바라보면서 즐거워합니다. 자기는 그렇게 못살아도 그런 사람들이 좋은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패역을 고쳐야 합니다. 그가 어떤 훈련을 받고 무엇을 하던지 간에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속에 있는 이 패역을 고치지 않으면 그는 향기로운 사람으로 변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아름다움은 하나님이 패역을 고칠 때에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선 마음속에 있는 패역을 고치기 시작하면 마음에 아름다움이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모든 신앙생활의 중심부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영혼과 아주 가까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작용에 따라서 영혼이 움직이고 다른 쪽에는 육신이 붙어 있어서 육신이 움직입니다. 마음 그 자체가 실체는 아니지만 -영혼과 육체로 되어있지만- 마음이 그런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육에 기울어지게 하기도 하고 영에 기울어지게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혼을 돌이키라고 하지 않고 마음을 돌이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음의 아름다움을 회복하지 아니하고는 우리들이 백합화와 같이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저마다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며 살아가는데 왜 이렇게 눈살 찌푸려지는 일들이 많을까요? 왜 이렇게 향기가 없고 아름답지 않을까요? 여러분들이 만일 정말 아름다운 나무와 같이 그렇게 오랫동안 신앙생활하고 아름다운 나무와 같이 장성하였다면 여러분 사이를 지나는 동안에 하늘의 향취를 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썩고 썩은 곳이 교회가 되어버렸을까요? 한 사람 한 사람 있을 때는 제법 도덕적인 사람 같은데 교회에 나가서 일단 어울리기 시작하면 모두 부도덕한 사람들이 되어버리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 모두 마음에서부터 문제의 핵심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시면서도 제일 먼저 심령의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고 해서 금방 우리의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으로 고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래도록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속 변화되어 갈 때 우리의 패역들이 고쳐지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아주 아름다운 마음으로 변합니다. 보드라운 찰흙과 같은 마음으로 변합니다.
아름다운 마음이라는 것은 주님의 손으로 빚으시고 싶으신 대로 빚어지는 마음입니다. 그게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아무리 해도 완벽하고 완전한 마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삶도 완전하지 않고 마음도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패역이 빠져나가기 시작하고 우리들이 고쳐지기 시작하면 놀라운 변화가 오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이 매우 여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생활의 굉장히 많은 관심이 먹고 입고 마시고 세상을 살아가고 교회에서 직분을 받고 투표를 하고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관심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주님이 패역을 고치시게 되면 하나님이 즐거이 사랑해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참 사랑을 가로막게 하는 것도 마음의 문제이고 마음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성도의 행복은 그런 하나님의 사랑, 즐거이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많이 먹고 잘 입고 좋은데서 자는 것이 그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보고 친밀한 관계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죄를 많이 짓고 부패하게 살았다고 할 지라도 마음이 정말 가난해져서 성전에 올라갔던 세리와 같이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습니다’하는 진실하고 간절한 고백을 갖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만나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정결한 마음이라는 것은 ‘이만큼 살았으면 됐지’하고 배 두드리는 마음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마음, 주님이 자기의 마음속에 친밀함을 보여주시지 않으면 세상의 부귀와 영예, 심지어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이 사역의 성공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마음, 그것이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참된 사랑은 존재 그 자체를 필요로 하지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말 사랑하면 그 상대방만 필요합니다. 그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좋은 것, 그것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가로막는 그 가장 커다란 원인은 마음의 더러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마음의 더러움이 신앙생활의 적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알기 때문에 철저히 그 자신의 마음과 더불어서 싸웁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되기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더러운 패역을 많이 고치시고 나면 그 다음에는 관심사가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인해서 깊이 고민하고 그 마음을 인해서 깊이 애통합니다. 그러면서 그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고치고 새롭게 합니다. 그러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으로 화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아름답게 바뀌지 아니하면 그 인격과 삶이 변화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패역을 고치면 하나님이 이들을 백합화같이 피어나게 만들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마음에서부터 먼저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완고하게 가지고 있던 자기중심적인 패역의 뿌리들을 뽑는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녹아지게 될 때에 마음은 놀랍게 변화됩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패역을 그대로 가지고 믿는 것은 믿기는 믿지만 내 좋은 대로 하나님을 믿도록 내버려 둬 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알아서 하나님께 해드릴 테니까 자꾸 나에게 뭔가를 요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버려두십니다. 그러나 자기가 자기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대신 하나님도 하나님 원하는 대로 살아가십니다. 그런 사람들은 패역을 그대로 두고 하나님을 믿으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이 형식적입니다. 동일하게 형식에 대해서는 많이 듣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어떠한지에 대해서 많이 듣지만, 인공위성이 지구 주위를 뱅글뱅글 돌면서 한 번도 지구와 만나는 일이 없는 것처럼 듣기는 수없이 듣고 보기는 수없이 보는데 한 번도 그것을 만져서 경험하는 감격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을 고치지 않는 사람들의 대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패역을 뉘우치고 깊이 회개하고 나면 하나님께서 마음의 아름다움을 다시 회복시키십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서 깊이 자기의 마음의 더러웠던 죄들을 회개하면서 아름다움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렇게 변하게 될 때 인격도 변하고 삶도 변하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성이 뛰어나면, 평범한 사람이 도저히 볼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뛰어난 사람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마음속에 일어나는 변화들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면서 그 마음이 어떠한 행동을 유발하고 그 행동들이 어떻게 또 다른 패역들을 만들어 내어서 우리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 것인가를 경험하기 전에 미리 파악하고 볼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영적이 사람들입니다.
(예화) 신학생들은 모여 앉아서 주로 담임 목사와 장로님 얘기를 화제로 삼는다-목사보 다 자신이 모든 면에서 뛰어나지만 될 수 있으면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자신을 스스로 겸손하다고 말한다는 한 장로님 이야기.
그것이 겸손입니까? 마음의 변화 없이 삶을 어느 틀에 맞추려고 하니까 결국 마음의 변화도 없고 삶의 변화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무에 예쁜 구슬을 매달아 놓고 열매라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만일 그 사람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겸손의 인격이라면 자기가 훌륭한가 목사님이 훌륭한가를 비교하는 데서 오는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어느 날 자기 마음대로 막 살아왔던 삶을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이 정말 놀랍고 뜨거우며 자기는 쓸데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패역을 고치기 전까지는, 자기만큼만 되면 세상이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은혜를 받고 보니 -밝은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들어오고 죽었던 신앙의 양심들이 살아나게 되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마음의 더러움들입니다. 그 더러움들을 깊이 보면서 하나님 앞에 한없이 자기의 불결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불결한 자기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자기를 구해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잘난 사람 못난 사람을 만나 키 재기 할 때는 할 말이 많았는데 은혜를 받고 패역을 고치고 십자가 앞에 서 보니 거기서 만큼은 할 말이 없게 된 것입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는 갚을 수 없는 죄인이고 사람들이 아무리 자기를 보고 몰라보게 좋아졌다고 말해도 자기는 쓰레기와 같은 죄인일 뿐이고 수많은 죄인들을 줄로 서라고 하면 첫 번째 서야 될 그런 끔찍한 죄인이라는 사실밖에는 깨달아지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는 자기보다 나은 사람, 못한 사람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의 진정한 행복은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됐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의 참다운 행복은 자기를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이 아니라 빈들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잠근 동산에서 그분에 의해서 개봉된 샘이 되는 것, 그분에 의해서 열려진 우물이 되는 것, 그분의 손에 들려진 바가지에 의해서 떠 먹히는 것, 그것이 그의 진정한 소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물을 볼 때 렌즈가 쓰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험하고 발견한 내 참모습이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이 렌즈가 된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보는 것입니다. 전에는 ‘저 흉악한 놈, 저 쓰레기 같은 놈, 종량제 봉투에 넣어서 다 쓰레기통에 버려야 해’라고 생각했었는데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참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쓸모 없는 죄인이고 그 죄인을 하나님이 버리시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니까-그 렌즈를 통해서 보니까- 더러운 죄인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도 만일 하나님께서 구원의 긍휼을 베풀지 않으셨다면 진리의 말씀을 보내서 나를 깨닫게 하시지 않으셨다면 나는 아마 저 사람보다 백 배는 더 더럽고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비참한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와 내 차이는 나는 하나님 앞에 용서받았고 너는 용서를 못 받았다’ ‘나는 은혜를 받았고 너는 은혜를 받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그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보니까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그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존재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보듬어줘야 할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어두움 속에서 빛 가운데로 데리고 오면서도 전혀 자랑할 것이 없는 이유는 자기의 자기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패역을 고치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에는 이런 생각이 잘 들지 않습니다. 들어도 아주 경미하게 밖에 들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이 패역이라고 하는 것은 계속해서 불순종을 해서 쌓이는 습관적인 죄의 경향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아주 나쁜 인간성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편적인 죄성 말고 거기에 추가해서 말입니다. 아버지가 도박에 미쳐서 식구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고 가정을 파탄으로 몰고 가면 그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가 다 그렇지는 않지만 도박에 미친 자식이 태어날 확률이 많은 것입니다.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그것을 보고 자라며 그 죄에 대한 면역력이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예화) 비디오 집 하는 어떤 사람의 한탄-늘 야한 비디오를 켜 놓아야 하니까 아이들이 성적인 죄에 대해서 둔감해질 수 있다.
저주를 받아서 만이 아니라 계속 쌓여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자기가 의지적으로 결단하는 죄와 결탁하게 되면 상승작용을 일으켜서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쳐지지 않으면 인간은 영원히 망가진 채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망가진 채로 태어난 것이 더 망가져 가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일그러진 이 세상과 그토록 평화를 원하지만 평화가 없는 세상의 원인입니다. 행복해지기를 원하지만 행복해지기를 원하면 원할수록 더 많이 불행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렇게 내버려두면 망가진 채로 태어나서 결국은 더 망가져서 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드러내고 고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망가진 채로 태어나서 더 망가진 채로 인생을 살다가 수많은 사람들은 불행하게 하고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패역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하나님 믿는 사람들입니다. 가끔 나와서 양심의 가책도 받습니다. 어떤 때는 은혜 많이 받아서 펑펑 울고 회개하기도 합니다. 죽어도 안 나오던 새벽기도를 살아도 나오기로 결심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시시때때로 가책을 받고 ‘그러지 말아야지’하는 반성과 회개의 세계를 가지고 살아가는데도 차마 그 패역을 끊고 버리지 못하는데 한 번도 인생에 대한 진실을 듣지도 못하고 자기 중심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를 고친다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인간이 불행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지만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들은 살아가는 것이 기적입니다. 단지 생존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아직까지 모르니까 그러는데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미 빛 가운데 들어와서 그 비밀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왜 그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고 싶은데도 마음대로 안되는지 그 이유를 오늘 성경을 통해서 배우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패역을 고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패역을 고치고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는 마음을 회복할 때 마음의 아름다움이 인격의 아름다움으로 화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할 때에는 돈이 최고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행복해지고 불행해지는 것은 돈 때문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죽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지만 돈 무더기에 깔려서 죽고 싶다는 소원을 가진 사람을 몇 사람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런 속된 사람이 주님을 만나고 변화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속에 ‘돈이면 무엇이든지 하리라’ 마음먹었던 패역들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면서 ‘인생은 이런 것이 아니다’는 것을 깨닫고 고쳐지기 시작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 생의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내 생의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주님을 간절히 닮기를 원하네
내 생의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의 관점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믿고 열심히 기도했더니 하늘이 열리고 대박이 터졌더라’는 간증만 하지 말고, ‘저 사람은 예수 믿고 잘 풀리는데 나는 왜 되는 일이 없을까?’하는 고민 말고, ‘저 사람은 어떻게 예수 믿은 지 3년밖에 안되었는데 저렇게 인격이 아름다울까? 얼마나 진실한가? 사랑도 충만하고 온유하지 않은가? 그런데 나는 왜 예수 10년 믿었는데 그 성질머리 그대로 그 너절한 인격 그대로인가? 저 사람은 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찬송을 부르며 그 큰 은혜를 받고도 그 정도밖에 살지 못하였다고 눈물 흘리며 찬송 부르는데 나는 배째 식으로 부르는가?’를 비교하면서 깊이 충격을 받고 자기의 신앙생활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을 저는 거의 못 만났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인격이라고 하는 그 자체가 신앙생활에 과연 복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로버트 멕체인이라고 하는 청교도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으로서 최고의 복은 주님을 많이 닮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오래 믿은 사람들일수록 위선이 심합니다. 그리고 오래 믿은 사람들일수록 하나님 앞에 죄짓고 하나님 속이면서 살아가는 삶들이 더 교묘하고 졸렬합니다. 오히려 처음 믿기 시작한 사람들은 모르면 모른다고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야곱과 같은 속임수 같은 것들이 적습니다. 순수하다는 이야깁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패역을 고치지 않으니까 마음의 변화가 어느 시점에서 그치고 더 이상은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니까 인격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인격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인격이 안되니까 더러운 삶이 나옵니다. 더러운 삶으로 영혼이 더럽혀집니다. 더럽혀진 영혼에 어두움이 옵니다. 마음에 어두움이 오니까 인격이 좋아질 수 없습니다. 악순환을 계속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숙명적으로 그렇게 살다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받고 나면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제물입니다. ‘뭐 한 껀 올려야 하지 않을까?’하는데 한 껀 안해도 주님의 사람다운 사람이 됩시다. 그래서 주님의 향기가 풍겨 나와서, 주님의 친절하심과 자비와 온유와 그 아름다운 사랑의 향기가 우리의 인격 속에서 풍겨 나와서 우리와 접촉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도대체 주님이 누구시기에 저 사람의 마음을 만지고 지나가시더니 저 사람이 저렇게 온유한 사람으로 변했을까?’ ‘옛날에는 인간 같지 않았던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놀랍게 변하게 되었을까?’ 그런 존재로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이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뜻입니다. 그러니까 패역을 고치지 않고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빛 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돈이나 몇 푼 가지고 이웃돕기 한다고 해서 빛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패역을 고치면 마음의 아름다움이 회복되고 인격도 아름다워 지는데 사람들은 왜 그렇게 못 고칠까요? 고치는 것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예화) 할머니 목에 생긴 긴 혹을 떼 드리려고 하면 그것도 살이라 아프다고 하셨던 이 야기.
우리의 패역도 그렇습니다. 신자의 주님을 향한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살을 뒤지면 뼈 속에 숨고 뼈를 뒤지면 심장 속에 숨어버릴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용해되어서 모든 영혼의 세계 속에 완전히 스며들어 있는 것처럼 패역도 그렇게 스며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혹처럼 한 번에 뚝 떼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패역 속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은 오랫동안 신고 다니던 신을 계속 신는 것과 같습니다. 고쳐야 되는데 너무 아픈 것입니다.
지체들이 교회에 처음 오면 은혜를 받습니다. 보기 좋지만 흥분하지 않고 더 두고 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래도록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서 변화를 받고 자신과 씨름하면서 몰라보게 다른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울고불고 뒤집어지고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면서 간증을 하는데 어느 한 순간에 차갑게 마음이 닫힙니다. 왜냐면 주님의 충만한 은혜 속에 거할 때는 우리의 패역에 칼을 데시는 주님의 마음이 사람의 마음으로 전해옵니다. 그래서 그 칼을 데는 마음이 한없이 고마운 것입니다. 그래서 ‘망가진 대로 죽어가기 보다는 고치셔서 살아있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고침을 받습니다.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고 나면 그 칼이 너무 싫은 것입니다. 이대로 사는 것이 너무 편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왜 신앙이 이렇게 복잡하냐 다른 사람들은 칼질 안해도 잘만 사는데’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옛 생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가는 것입니다. 그 나중 상태가 처음 상태보다 더 악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편한 것을 생각하고 아픔이 없는 것을 원하면 십자가를 만나지 말았어야 합니다. 어차피 이 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입니다. 진실한 신앙을 가지려고 해보십시오. 친구가 많이 없습니다. 외로워집니다. 고난이 있습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들이 자기를 싸움의 대상으로 알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미워해야 합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을 쫓아서 살아가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오히려 하늘의 것을 사랑하기 위해서 땅에 있는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패역을 안 고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 교회는 자기에게 잘 안맞는다고 합니다. 어디가면 맞겠습니까? 저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맞는 교회 생겨나면 절대 가지 말아라. 거기는 절대 안 맞는 교회이다’ 수술해야지 고칠 수 있는 병을 빨간 약으로 고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기입니다. 배를 가르고 아이를 꺼내야 하는데 피 한 방울 안 나고 꺼내는 방법이 있다고 하면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모든 신앙생활의 실패는 희생과 고통이 없는 편안한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전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20세기의 유명한 전도실천가이면서 학자인 로버트 콜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2천년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한 시대에도 전도의 지름길이 없는가 하고 고민 안 해본 시대는 없지만 역사는 모든 선교의 지름길은 실패했다고 입증한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안타깝고 그 패역을 고치는 것이 고통스러웠으면 우리 최대의 실수는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믿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랬으면 훨씬 덜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예화) 예배에 몇 번 참석한 어떤 분이 오라고 해도 교인들이 안 모이는 세상인데 그렇 게 신앙생활 하려면 가버리라고 하면 되겠느냐고 하였다.
그런데 가라고 해도 안 갑니다. 오라고 할 때는 가도 안 믿으려면 세상으로 나가라고 할 때 누가 감히 ‘그 말 나오기를 기다렸다’며 가버리겠습니까?
그러니까 패역이라고 하는 것은 이쪽도 저쪽도 아니고 엉거주춤하게 걸쳐있는 이상한 마음의 작용이 토대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치지 않고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수없이 많은 말을 듣습니다. 먹어봐야 맛을 알 듯이 주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펑펑 우는 것도 수없이 보고 새 사람되는 것도 봅니다. 패역을 고치고 변화 되어야지만 그런 하나님의 은혜의 경험과 그런 지속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견고케 하시는 하나님의 견고한 은혜들이 우리를 세우는데, 그럴 새가 없이 하나님 앞에서 요동치는 겁니다.
이 교회에 가서 찬양 실컷 부르고 저 교회 가서 훈련받는다고 하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심방 가서 훈련받은 수료증으로 도배를 해놓았음에도 목회자의 양심으로 그리스도인으로 부를 수 없는 사람들을 여럿 만났습니다. 그들이 잘못 배워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 필요한 공부였고 필요한 훈련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본질을 고치는 것이 빠진 것입니다. 겉모습은 많이 고쳐졌는데 본질이 고쳐지지 않은 것입니다. 폐차 직전의 자동차에 아무리 페인트를 바르고 예쁘게 치장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패역을 고치지 않으면 인격의 아름다움이 회복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욕해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자기의 양심에서는 ‘너나 잘해라’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동하고 질책한다고 해서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급해도 바늘 허리에 매어서 쓸 수 없습니다. 기본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돌아가면 결국 마음의 문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 왜 하나님을 등졌는가? 어떻게 그 마음을 돌이키는가? 어떻게 고치는가? 고쳐진 마음이 어떻게 생명의 은혜를 회복하고 거룩한 인격을 그리고 거룩한 인격에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복잡합니까? 복잡하기는 뭐가 복잡합니까? 복잡하면 차라리 죽는 게 낫습니다.
(예화) 핸드폰을 사서 작동 법을 파악하려고 해도 몇 시간을 읽어야 한다. 하물며 누구 도 모방할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인간이 지존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뜻하신 바대로 작동할 수 있을까를 가르쳐 놓은 설명서가 한 줄이 나 두 줄로 되겠습니까? 여러분 앞에 커다란 인간을 닮은 고성능 로봇 하나를 가 져다 놓고 조작하라고 한다면 조작할 수 있겠습니까? 고장났을 때 고치는 설명서 를 주고 고치라고 한다면 저와 여러분은 눈뜬 장님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고도로 복잡한 인간입니다. 그에 비하면 이 성경책은 무한히 얇은 설명서입 니다. 핸드폰 설명서 열 권 모아놓은 것밖에 안됩니다. 그런데 복잡하다고 합니 다. 마음의 패역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가 죄인인 것을 정말 알고 거기로부터 고침을 받아서 진실한 성도의 삶을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려고 애를 써보기만 하면 그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더 많은 설명과 이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감동 없이도 사람들은 넉넉히 신앙생활 하면서 삽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무슨 신앙생활입니까? 그냥 교회생활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것도 예의 바른 교회생활이 아니라 버릇없는 교회생활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자신의 패역을 고치고 주님이 원하시는 진실하고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살기 싫으니까 그 설명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화) 민방위 훈련 갔다가 보약 판매하는 사람이 세 낸 버스를 타게 되어 관심에도 없 는 보약 선전을 듣느라 곤욕을 치르고 후회했다는 이야기-보약을 살 마음이 없 기 때문에 망가진 자신의 인격, 그리고 그런 인격이 망가진 채로 계속 있게 하는 망가진 자신의 마음의 패역한 요소들을 고치려고 하는 의지가 없기 때문에 하나 님의 말씀을 집중하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애매모호한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고쳐지면 고쳐지는 것이고 안 고치면 안 고쳐 지는 것입니다. 내버려두면 그대로 있습니다. 자동차를 고치다가 내버려두고 삼사 일 후에 와보면 그대로 있지 어느 날 바람이 불어서 바퀴를 제대로 맞춰줍니까?
인간의 패역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역사 하시지 않느냐?’고 묻고 싶겠지만 인간이 역사 하는 곳에서만 하나님도 역사 하십니다. 성령의 문제이므로 하나님이 홀로 하시지 않습니다. 거룩해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주님이 적극적으로 도우셔서 거룩하게 해주시는데 거룩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사람들은 자기가 거룩해졌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이 자기를 도와주십니다. 그렇게 인격이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망가진 사람들이 아름다운 인격으로 변화될 때 향기로운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의 향기를 풍겨서 그 사람의 향기를 보면서 그의 모습을 보면서 주님을 생각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불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태어난 저 사람이 저렇게 행복한데 나는 저보다 훨씬 나은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데 나는 왜 이렇게 불행할까?’를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 사람을 바꾸어 놓은 그 무엇이 어떤 것이냐?’하며 패역을 고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백합화같이 피리니”하는 이 아름다움은 삶의 아름다움입니다. 그 인격에서 삶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정직한 사람이 제일 하기 힘든 것이 거짓말하는 삶입니다. 거짓된 인격을 가진 사람이 제일 하기 어려운 것은 정직해지는 것입니다. 유혹을 너무 많이 받기 때문입니다. 삶이 인격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인격으로 인격에서 삶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물이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수원지에서 시작해서 상류를 지나 중 하류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내를 맑게 하려면 물 근원을 맑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거두절미하고 -인간이 그렇게 마음이 변하고 패역을 고치고 인격에 변화가 일어나고 하는 삶이 너무 지루하다는 것입니다- 내 놓으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라 안 살면 인간도 아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요구하는 사람이 요구하는 그 삶에 있어서는 자기가 뛰어날 지 모르지만 그가 비난하는 사람이 다른 방면에서는 그보다 뛰어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대적인 것입니다. 거룩한 삶은 거룩한 인격에서 흘러나오고 거룩한 인격은 거룩한 마음이 유지되는데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주님을 닮은 인격이 될 것이고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닮은 인격이 있는 사람이 주님 닮은 삶을 살아가려고 할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인간이 패역을 고치고 본질적으로 바뀌어져서 새사람이 되어서 새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한 덩어리이지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지 못했다. 나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 노력을 조금 덜 했기 때문이고 다음 주에는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까? 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안 나오면 우리 인격의 어느 부분들이 고장이 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인격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우리의 마음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를 찾아가 보면 반드시 거기에서 패역의 문제가 나옵니다. 그것을 떼어놓고 삶의 문제를 들추면 삶의 문제가 해결이 안됩니다. 항상 다시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항상 이렇게 순환하면서, 그 문제들을 고민하면서 마음을 통해서 미리 삶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마음속으로 아무리 사람들을 미워해도 미워하는 죄 가지고는 법이 벌주지 않습니다. 사람을 죽일 생각을 몇 번이고 해서 부엌칼을 들었다 놨다 했어도 그것 가지고는 벌주지 않습니다. 행동을 했을 때, 칼을 들고 가서 팔이라도 찔렀을 때 즉시 처벌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는 그때는 이미 늦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죄를 지은 사람이 고쳐질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거기까지 가지 말도록 마음부터 고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관점과 법의 관점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패역을 고치고 변화되어서 아름다운 새 마음으로 변화되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하나님 앞에 패역하게 살아갈 가능성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물 근원을 맑게 해서 하류의 물을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감찰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해하고 말씀에 마음을 비춰보지도 않고 마음을 고쳐서 거룩한 주님 닮은 인격으로 변해가려고 애를 쓰지도 않으면서 삶을 살아가는 것만 잘못한다고 하는 것은 -마치 장끼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변명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살아가고 있는 만큼이 당신의 인격입니다. 그리고 그 인격만큼 여러분들의 마음( ? ) 우리의 인격이 너무나 미천하고 더러워서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우리의 마음의 패역이 그만큼 고쳐지지 않은 것입니다. 살아도 살고 싶은 삶을 살지 못하고 거짓된 삶을 살아가는 것은 그만큼 우리 마음의 패역이 고쳐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도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말씀의 손길에 자신을 맡기고 오랫동안 쌓았던 마음의 패역을 고치도록 허락하는 사람들, 그래서 아픔 속에서도 자신의 패역을 고치고 주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주님께서 놀랍게 변화시키셔서 거룩한 인격을 가진 새 마음의 사람, 새 인격의 사람, 새 삶의 사람을 만들어서 정말 주님의 아름다운 향기를 드러내는 그런 그리스도의 편지로, 그리스도의 냄새로 쓰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패역을 고치면 주님이 우리를 이렇게 고귀한 존재로 만들어서 천국의 향취를 널리 날려 보내는 도구가 되게 하십니다. 그러한 삶을 사는 성도들은 얼마나 복되겠습니까?
5. 백양목처럼 견고하게 하심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호14:5下)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있는 신앙생활에 어려운 일 중에 한가지는 견고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큰 은혜도 받고 그리고 때로는 격렬한 영적인 체험도 하곤 합니다. 거짓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제는 세상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아야되겠다 라고 하는 그 각오를 새롭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결심과 결단은 있지만 그 결심과 결단을 따라서 삶이 움직여주는 그런 복된 생활이 흔하지 않습니다.
한 이년 전쯤에 이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옛 삶을 버리고 새롭게 주님의 뜻대로 살고싶다고 결심하던 사람들 가운데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사실이 바로 우리들이 견고함이 얼마나 없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견고함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생활은 늘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흔들리는 갈대와 같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믿음으로 살기보다는 믿음으로 살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방황으로 살아온 이력이 우리의 신앙의 경력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견고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하는 말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시기를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이 백향목이라는 말이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굳이 백향목이라는 말을 첨가할 필요가 없이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레바논 산이 땅에 뿌리를 박은 것처럼 그렇게 견고하게 만들어줄 것을 주님이 약속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만 사실 나무 중에서 이 향나무만큼 뿌리가 땅에 깊이 박혀서 좀처럼 빠지지 않는 나무도 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위대한 권능을 말할 때 큰 백향목 나무 뿌리가 뽑혀 나가는 홍수의 광경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위대한 권능을 자연 속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이 백향목은 뿌리가 견고하기로 유명한 식물입니다. 둥치가 잘라질지언정 쉽게 뿌리가 뽑히지 않는 나무에 대명사인데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견고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신앙의 견고함이 너무나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견고함이 없이는 우리의 신앙생활은 한낮 종교적인 감정체험에 지나 지 않습니다. 거룩한 삶, 하나님의 왕국을 위한 헌신, 그리고 주님의 모습을 닮아 가는 거룩한 인격의 본받음, 이 모든 것들이 견고함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흔들리는 마음에 정함이 없는 신앙생활을 통해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통해서 견고함이 없는 백성들의 신앙생활의 허무함이 어떤 것인지를 낱낱이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굳이 실험해보지 않아도 성경의 역사를 통해서 거울로 삼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보실 때 여러분들은 얼마나 견고한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흔히 우리가 견고하지 못한 것을 그저 우리가 약하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약한 것과 악한 것은 다른 것입니다. 우선 우리들이 그 논의를 하기 전에 먼저 도대체 이 견고함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레바논의 백향목이 뿌리를 내린 것 같은 견고함이라 하는 것은 은근과 끈기와 인내로 버티면서 살아가는 것을 우리는 견고함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교회가 오래되고 연세 드신 교인들이 많이 있는 교회는 출석에 변동이 없고 꾸준하기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견고함이란 그런 것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그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정이 들어서 그리고 내가 이 나이에 또 교회를 옮겨서 무슨 유익을 얻으랴 마음에는 안 들지만 이제 내 사는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 그저 끈기로 버티면서 교회생활 하는 것 말고 무슨 낙이 내게 있으랴. 이런 마음에서 비롯되는 꿋꿋함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견고함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천성이 그저 성실하기 때문에 요령을 피울 줄을 모르고 융통성이 없기 때문에 한번 세워주면 그저 그 자리밖에는 갈 때가 없는 줄 알고 눌러 붙어 앉아있는 것을 가리 켜서 성경은 견고함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천년 만년 살고 지고’ 하는 적당 주의 정신 때문에 그저 어느 한곳에서 꾸준히 눌러있는 것도 성경이 이야기하는 견고함은 아닙니다.
실패를 숙명처럼 생각하면서 그저 마음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것을 가리켜서 견고함이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오늘 말하고 있는 진정한 의미의 견고함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견고함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그 속에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신앙생활은 겉보기에는 전혀 변동이 없는 것 같지만 이 내면의 세계 속에서는 날마다 새로운 경험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이“아! 뭐 좀 신나는 것이 없을까? 사는 것이 왜 이렇게 시시하나” 이런 말하는 것을 가끔 들어봅니다. 똑같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아! 예수 믿는 것이 뭐 이렇게 시시하냐 좀 신나는 것이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 주님과 인격적인 바른 관계를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날마다 새롭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렇게 새롭게 된 피조물이 매일 아침마다 맞이하는 새로운 여명이 날마다 새롭게 다가오고 저녁마다 지켜보는 저녁 노을이 어제와 같지 않은 것이 진실로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신앙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에 인자는 끝이 없고 그에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에 성실함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예레미야가 이 노래를 지였을 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침략을 받아서 모두 망해버린 폐허가 되어버린 때였습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하나님의 자비를 발견할 수 있는 증거는 없었습니다. 무너진 성전과 파괴된 예루살렘을 보면서 선지자가 어디서 하나님의 자비를 읽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 없이 못산다고 말하던 백성들은 겁탈 당한 부녀자처럼 처량하게 서있는 예루살렘 성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각기 장롱 속에 묻어두었던 자기의 보물들을 가지고 나와서 양식을 사기에 바쁜 그때에 선지자가 도대체 어디서 아침마다 새로운 주의 성실하심과 인자하심을 읽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선지자는 그렇게 노래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견고한 사람들입니다. 그냥 타고난 성실과 인내, 은근과 끈기 같은 것으로 버티면서 살아가는 것이 견고함이 아니라 진정한 견고함은 충만한 사귐과 교제가 인격 속에서 이루어지는 가운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동기가 되어서 주님 사랑하는 그 인격으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의 자리에 서있는 사람,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감정의 동요와는 상관없이 주님을 섬기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에 거기 서서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견고한 사람들입니다. 배짱에 맞을 때 주님을 섬기고 배짱에 안 맞으면 집어치우는 사람들에게는 인간적인 견고함 이외에 하나님의 신령한 의미에서 견고함은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육 적인 그리스도인들도 얼마든지 감당해 나가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폐허 가 된 예루살렘 성전을 보면서도 감격하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큰 것을 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견고함입니다. 마음속에서 내 주되신 깊이 사랑하고 그분과 아름다운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리고 그렇게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삶 속에서는 지루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우리가 영원히 이 땅에 거하며 주님의 말씀을 배워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천국에 가서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던 것들이 그때는 마주 대하며 볼 수 있게 되는 그때가 이른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 하늘에서조차도 우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완전하게 아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은 한이 없고 끝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환경에 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진정한 견고함은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래서 날마다 주님을 알아 가는 새로운 기쁨, 주님의 성품과 그에 하신 일을 새롭게 알아 가는 말할 수 없는 감격이 있고, 그 사랑에 감격, 그 인격 속에 흐르는 하나님의 진실하신 사랑에 붙잡힌바 되어서 주님이 세워주신 자리에서 주님을 위해서 마음을 다해서 섬기는 그런 의미의 생활에 진정한 의미에 견고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주님 앞에 견고한 사람들은 자기가 서있는 자리,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차가운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견고한 사람들은 어제나 그제나 세월이 많이 흘러도 늘 그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지만 그의 내면에 세계 속에는 다른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는 수많은 아름다운 비밀들이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만들라고 명령하셨던 그 이동식 성전인 성 막이 멀리서 볼 때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그런 가죽으로 덮인 지붕으로 불과했지만 막상 그 성소와 지성소 속에 들어가면 헤아릴 수 없는 아름답고 화려한 것들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주님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에 이 모습이 정말 시시하고 재미없고 고리 타분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견고한 생활이 무엇인지를 아는 성도들은 끊임없이 그 지루해 보이고 답답해 보이는 신앙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경험되는 하나님의 사랑, 그 분과의 인격적인 경험에서 오는 지식, 날마다 하나님의 성품을 체험을 통해 알아 가는 참된 기쁨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결코 지루할 수가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아침마다 새롭고 그리고 늘 새로웠습니다. 눈을 뜨고 나면 어제의 세상이 오늘의 세상과 같지 않고 오늘의 세상이 어제의 그것과 같지 않은 것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경험하는 변화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견고함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선지자는 이런 견고함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고하는데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앞에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견고함이 없는 것이 대해서 심한 탄핵을 받았던 사람들 이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아침 구름과 같았다고 선지자는 묘사했습니다. 해가 뜨고 나면 사라져버리는 구름도 아니고 안개도 아닌 그런 아침 구름, 잠깐 있다 가 사라지는 들풀에 맺힌 이슬과 같이 하나님을 향해 무엇인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구체적인 삶으로 이어지기에는 너무나 하잘 것 없는 감정에 지나 지 않는 그런 무엇,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신앙 이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선지자가 말하기를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놀랍게 하나님 앞에 견고한 백성들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의 큰 은혜를 입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언제까지 환경에 의해서 쉽게 요동하고 상황에 의해서 뒤집히는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생활을 계속 하려고 합니까? 우리들이 그런 식의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동안에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될 수 없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런 식으로 일평생을 예수님을 믿다가 하나님 앞에 간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인생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는 다름이 없는 그런 결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돌아보고 그리고 내가 왜 하나님을 향한 순간 순간 솟아오르는 진실한 감정에도 불구하고 견고함이 없는가 하는 것을 밑바닥까지 탐구해가려고 하는 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믿느냐 그렇지 못하냐는 문제는 우리의 인생의 일부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 인생 전부의 문제입니다. 태어난 대로 인생을 살다가 주님을 믿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면 우리의 인생이 더 빛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누리고 또 어떤 것들을 소유하며 산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만약에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살다 죽은 것이나 한 마리의 짐승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은 것이나 다를 것이 무엇이 있느냐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견고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자동적으로 견고해 진다는 말씀보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서 이렇게 그들을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이 레바논 산에 깊이 뿌리를 박아서 여호와가 아니면 그들을 뽑을 자가 없으리 만치 흔들리지 않는 믿음에 사람들로 세워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자신의 의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견고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견고케 만들어주시고 순종하려고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순종하며 살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에 결핍됐던 견고함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그들조차도 자른다해도 뿌리를 뽑아본 적이 거의 없는 레바논의 백향목을 예로 들고 계신 것입니다. 요즘과 같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쉽게 흔들리는 신앙생활이 일반화되어 있는 때는 이런 견고한 신앙을 가 진 사람들이 더더욱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빛과 소금으로 부름을 받아서 정말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되고 썩 는 세상에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 세상과는 다른 이 세상을 능히 이길 수 있는 단호함과 견고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강력하게 흐르는 세상에 부도덕하고 더러운 물결을 막아서기 위해서는 세상의 흐름보다는 훨씬 강한 힘으로 그 물결을 거슬릴 수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잘 들여다보면 우리들에게는 비록 우리 자신이 시시때때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적이 많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어떡하면 하나님만 사랑하고 그리고 하나님과 진실한 인격적인 관계를 누리며 지고의 행복을 누리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을까 하는 고민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다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마다하는 사람이 없고 참 신자가 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그런 신자로 남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우리는 그 이유들을 찾아낼 수 있어야됩니다. 그리고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아주 중요하고 결정적인 한 대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떡하면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 그러면서도 안으로 한 맺히는 인내 속에서 보여주는 견고함이 아니라 시시때때로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인격적인 관계에서 오는 감격에 의해서 우리 자신이 충만해지고 그런 주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흔들리지 않고 주님이 세워주신 자리에서 주님이 걸어가라고 명하신 그 길을 흔들림이 없이 걸어가는 사람들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오늘 우리들이 생각해보아야 할 관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동함이 없는 신앙생활의 대명사였던 이스라엘의 신앙을 보시면서 그들이 좀처럼 경험할 수 없었던 지극한 견고함을 그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엄밀하게 말해서 이 견고함은 어떤 일들이 그들 속에 이루어진 자연스런 한 결과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런 견고함을 주시는가 말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패역을 고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삶을 계속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시고 단지 견디고 이를 악물고 인내하는 그런 신앙이 아니라 아침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성품, 그 자비하심을 인해서 기쁨 속에서 주님을 위해서 견고해지는 그런 신앙생활을 해나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님이 세워주신 자리에서는 방법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자원이 없이 우리의 힘으로 버티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인간에게 의외로 그런 힘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꼭 하나님께서 신자의 마음에 커다란 감화와 사랑을 주셔야 지만 그 신자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두려움 때문에 순종하지 않을 수 없는 때도 있고 때로는 외부적인 환경에 의해서 강요당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조금도 두렵지 않지만 세상의 법이 너무나 무섭기 때문에 의외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자원이 없이 오직 인간의 인내와 환경의 강요에 의해서 그 자리에서 견디고 있는 것은 그 자리를 떠나보내고 하나님께 반역하면서 사는 것보다는 훨씬 나 은 것이지만 오늘 선지자나 혹은 예레미야가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내적인 하나님과의 사랑에 교제 속에서 견고해지는 것에 비하면 그것은 너무나 비참한 인내에 지나 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어 오는 내면적인 진정한 기쁨과 인격적인 사귐에서 오는 참된 사랑의 경험 없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결심과 오기로 자기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인내하고 버티는 것은 항상 마음속에 많은 사람을 향한 원망과 환경을 향한 원망과 사람을 향한 미움을 가져다주게 만들고 이런 작용들이 오래되게 되면 사람의 마음속에는 한이 맺히고 그 한은 그 인내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또 다른 패역을 갖다가 심어다줍니다. 상처 나고 망가진 가정에서 이를 악물고 참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의 마음속에는 예외 없이 잘못된 인성이 깃들여있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고 견디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극도의 가난 속에서 한을 삼키면서 가난한 시절을 보내온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굽어진 성품이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반대로 무엇하나 아쉬운 것 없이 자기 마음먹은 대로 모든 일들을 제약받지 않고 기분 내키는 데로 먹고, 입고 쓰면서 자기하고 싶은 데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방종이라는 또 다른 패역이 그들의 인격 속에 저항 없이 깃들여있습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인간은 하나님께서 완전한 존재로 계속 있을 수 있도록 안전하게 창조하신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더군다나 죄가 들어온 다음서부터는 인간은 스스로 내버려두어도 불행할 수 있는 수많은 요인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애 아래서 그 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자라나는 날들은 외면적으로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처럼 살든지 거슬리면서 살든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속에 항상 하나님을 거슬리는 어떤 부정적인 패역을 가슴속에 남겨두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변함없이 자기가 맡겨주신 자리에 서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서 수고하는 그런 종들로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단신이 공급해주시는 힘없이 인간들이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므로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 원리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건 무엇입니까? 어떡하면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힘으로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자리에서 잘 인내하며 견고한 사람으로 주님 섬기다가 아버지 앞에 갈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것을 오늘 성경은 패역을 고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런 견고함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에 깊이 뿌리 박고 하나님을 거슬리며 살려고 하는 패역의 뿌리와 그리고 주님과의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열매를 맺는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에 뿌리는 서로 서로를 내쫓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좇아서 살려고 하는 인간의 패역한 뿌리는 뿌리는 그 뿌리를 우리의 마음과 인격 속에 두루두루 뻗게 만들어서 도무지 주님을 향한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에 뿌리가 우리의 마음속에 내리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이따금씩 말씀에 씨앗이 내려와서 뿌리를 뻗는 경우가 있지만 그 뿌리는 아주 작은 뿌리에 불과하고 일생 우리들이 의지하며 살아 갈 수 있을 만한 나무를 붙들어주는 그런 뿌리가 아닙니다. 느끼는 것은 있고 무엇인가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있지만 우리의 삶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하는 것 이것은 모두 우리의 뿌리가 이런 종류의 뿌리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하나님의 진리의 빛으로 하나님 앞에서 망가진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자신에 궁극적인 삶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헤아리는 사람들, 그리고 그렇게 망가진 자신의 삶에 뿌리를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이 패역의 나무에서 찾고 그 패역을 고치고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생명 적인 관계를 누리며 번성하는 나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살고 싶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들, 그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아무리 오래 신앙생활을 해도 도무지 자라지 아니하는 우리의 믿음생활의 원인이 어디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2~30십 년 혹은 5~60십 년 전 선조 들에 비하면 비교도 안될 정도로 풍부한 문화를 누리면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지금 많은 책들을 가지고 있고 어디서든지 성경에 관한 공부를 하기를 원하면 원하는 자료들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좋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5~60십 년 전 성도들에게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성경에 관한 많은 지식들을 언제든지 접근할 수 있을 정도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성도들의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 보다 많은 양질의 섬김을 제공하고자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전에는 산천을 두루 다니며 풀뿌리를 캐먹던 신앙생활 이였다고 한다면 이제는 모든 것이 갖추어진 뷔페 식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을 받는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60십 년 전 우리의 환난과 시련을 많이 겪던 우리의 신앙의 선조에 비해서 우리들이 훨씬 더 복음 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하나님을 위한 헌신에 있어서 견고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고 확신 할 수 없게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견고함은 우리 속에 있는, 우리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우리 속에 있는 이 더러운 패역과 얼마나 교묘하고 철저하고 집요하게 주님을 거슬리면서 살려고 하는가 하는 자신의 그 본성을 깨닫지 않는 한 자신과 싸울 수 없을 것이며 자기를 부인하고 싸우지 않는 신앙생활이 우리를 견고하게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따금 우리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의 눈물을 흘리는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언제나 우리들이 살기 싫었던 삶을 살았던 과거에 대한 후회의 눈물이 담겨 있습니다. 많이 눈물 흘려도 거룩한 삶에 있어서 도무지 진전이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조금 눈물을 흘려도 거룩한 삶에 있어서 눈물의 양보다 훨씬 뛰어난 진전을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오직 주님만을 위해서 살겠다고 하는 풍부한 신앙의 고백이 있어도 거의 하나님을 위해서 안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입술에 고백을 극도로 아낌에도 불구하고 고백보다는 훨씬 크게 하나님만 섬기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견고함에 차이가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회개를 하고 혹은 하나님 앞에 참회를 경험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 눈물이 하나님이 내 마음을 알아주실 것이라는 변명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여러분, 악한 것과 약한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악한 것은 악한 것이고 약한 것은 약한 것입니다. 저마다의 차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잘 헤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약한 것을 악하다고 정 죄 하거나 혹은 악한 것을 약하다고 쓸어안는 두리 뭉실한 신앙생활로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결코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견고해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에 대해서 다양한 경험은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구체적인 삶이 결핍되어 있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서 종교적인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이 구체적으로 그들의 삶을 통해 드러나고 삶을 통해서 그들의 고백을 감격스럽게 만들어주는 그런 순환작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뿌리에 대한 답을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성경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약한 것과 악한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이것들을 혼동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교회 안에는 묘목과 같은 신자들과 그리고 분재와 같은 지도자들만 가득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상당한 시간이 갔는데도 여전히 묘목으로 존재할 뿐 스스로 뿌리를 내리지를 못합니다. 오래 예수님을 믿고 장구한 세월이 흘러갔지만 거목이 되었다기보다는 분재가 되어버린, 오래 예수를 믿은 사람들도 결국은 견고함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 앞에 패역을 고치는 적극적인 신앙생활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묘목과 같은 교인, 그리고 분재와 같이 늙어버린 이상한 지도자들이 있고 난쟁이와 같은 교인들은 민주화 선언을 해서 하나님의 신령한 신앙생활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이런 식에 신앙생활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하나님 앞에서의 악순환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오랜 동안 우리의 신앙생활을 실현해왔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패역을 고치지 않으면 어떠한 견고함도 우리에게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흘리는 그 눈물은 자신의 약함을 인해서 처량해서 흘리는 눈물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그 눈물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고침을 받아야 할 패역한 인간임을 알고 말씀을 통해서 자기를 수술해주셔서 이제껏 까지 반복된 실패를 이제는 종식시켜주실 근본적인 해결을 하나님 앞에 구하는 마음으로 흘리는 그 눈물이 하나님 앞에 감동을 들입니다.
이 모습 이대로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주님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셔서 우리에게 주신 이 구원에 놀라운 은총을 이런 식의 인생을 살다가 마무리할 수 없다고 믿는 견고한 확신,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 싶지만 자기 안에는 도무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어떤 것도 없다고 믿는 처절한 자신에 죄인 됨에 대한 확신,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운명을 거슬려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안에 아무리 이 패역한 요소들이 많이 있고 그리고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성격적인 결함이나 환경 적인 상황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인생이 그것들에 의해서 조작되어서 기성품처럼 불행을 향해서 생산된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을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 앞에서 고쳐지는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그 고백이 얼마나 진실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패역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운명에 순종하는 인생에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패역에 익숙해지고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죄를 버리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모험을 걸 용기가 없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인생에 바다에 믿음의 닷 줄 하나를 들고 그 바다를 헤엄쳐가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어떤 뜻을 성취하리라고 하는 단호한 각오와 결심 같은 것들은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배짱은 돈이 있고, 배경이 있고, 넉넉하면 배짱이 나옵니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이 배짱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여러분 알고 계십니다. 더군다나 저같이 이렇게 목회를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배짱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모릅니다.
(예화) 목사님이 예전에 직장 다니실 때의 이야기- 직장에서 새마을 교육을 보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가기를 싫어했는데 힘든 교육원 생활에 특히 여성이나 나 이든 사람은 더욱 가기 싫어했는데 어느 나이든 직원 한 분이 교육받으라고 명 령을 받았는데 결국은 가지 않으면서 사표를 낸다고 하니 그 사람의 상황을 고 려해서 교육을 안 갔는데 도대체 사표까지 써야 할 정도의 용기가 무엇인가 했 더니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
이렇게 이 세상에서는 돈이 많으면 자신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뒤에 있는 배경이 있어도 사람들은 배짱이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을 살아갈 때 경우에 따라서는 상당히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이 치사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 갖은것이 있고 밀린 배경이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자신감이 있고 무엇인가 흔들리는 사람을 붙들어줄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이 세상에 물질과 그리고 이 세상에 권세 속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누구를 그렇게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까? 우린 무엇을 배짱으로 믿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인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세상의 세계에서는 돈도 도움이 되고 세상의 지위에도 도움이 됩니다만 하나님 앞에서 신앙의 눈을 뜨고 우리가 아무 쓸모 없는 찌꺼기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서 아무 희망이 없는 망가진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깨닫게 될 때에 우리 인생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정말 돈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까? 이 세상의 권력을 갖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권력자도 방백들도 힘있고 권세 있는 부자들도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이 처절한 우리의 영혼에 절망적인 상태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이렇게 희망이 없는 자기 자신을 직면하고 주님 없이 살았던 날을 신기하게 여기고 그리고 이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속의 사랑과 시시때때로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은혜, 성령의 능력주심 이외에 우리의 인생에 희망이 없다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는 것, 그래서 영원에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고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름같이, 여종이 주모의 손을 바램과 같이 그렇게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신앙의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시련이나 어려움, 그리고 고통들이 우리를 에워쌀 때 하나님은 내 편이시다 라고 말하게 해주는 담대함이 어디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거슬리는 패역과 그리고 늘 신고 다니는 신처럼 익숙해진 자기 중심적인 아집에 사로잡힌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에는 여호와는 내편이시라 이렇게 담대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유를 느끼는 사람들,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부모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은 친밀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거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에 하나님 이외에는 사랑하는 것이 없는 사람들, 시시때때로 솟아나는 인간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는 고통 속에서 주님을 다시 찾는 기쁨을 맛본 사람들, 나는 죽고 내 안에 주님은 다시 사시는 것 없이 우리의 인생이 정말 하나님께 도움이 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 그들만이 부족하게 살면서도 여호와는 내편이시라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향한 간절한 소원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서 구속한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이 얻고싶었던 것이 무엇일까요? 천하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분의 소유이고 그분의 능력은 이 아름다운 창조세계를 만들어 놓으실 수 있을 정도로 위대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홀로 살아 계셔서 당신이 하시고 싶은 일들을 이 세상에서 행하시고 당신이 살게 하시고 싶은 사람들을 이 세상에 내보내십니다. 당신이 다시 부르고 싶은 사람들을 오늘도 거두어들이시고 그리고 하늘에 달과 별들의 운행을 홀로 주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셨을 때에 정말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은 우리와의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단지 죄를 범한 쓰레기들로 생각했더라면 당신의 고귀한 아들을 십자가에서 희생시키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뜻을 세우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패역을 고치라는 거듭되는 하나님의 촉구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사랑을 받기보다는 자기의 연민에 빠지는 것을 훨씬 기쁘게 생각하는 사람들, 자기를 부인하고 자아 중심적인 인생관을 청산해서 어떡하면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기간동안 하나님의 마음에 내가 살아있는 것이 기쁨이 되도록 만들어 들일까 고민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적당히 얼버무려서 세상의 즐거움도 취하고 신앙의 세계에서도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을 수 있는 제 삼의 경제적인 신앙생활의 길이 있을까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얄팍한 신앙의 모습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오늘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서 선지자는 못박고 있는 것입니다. 패역을 버리고 불순종하는 지속적인 하나님을 향한 저항의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는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지 견고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젊은 날에 방황은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황을 통해서 나이 먹은 날에 인생에 종착역을 찾은 사람들에게만 젊은 시절에 방황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젊어서의 방황은 목표를 찾아가는 방황이기 때문에 아름답지만 살아봐도 목표를 찾지 못한 나이든 사람들의 방황은 더럽고 추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시시때때로 이 세상에 유혹과 우리의 육체에 욕심, 포기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의 아집 속에서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죽이는 이 패역의 길을 청산해야한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견고하고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그루의 나무를 생각해보십시오. 나무가 어렸을 때는 산에 신세를 집니다 만 그러나 나무가 거목으로 자라고 나면 산이 나무의 신세를 집니다. 어렸을 때는 그 동산에서 잘라낸 나무 가지로 부목을 하고 그리고 그 산의 흙에 신세를 집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뿌리를 내립니다 만 나무가 거목으로 자라고 나면 이 나무는 많은 낙엽을 떨어트려 온 산을 덮어 부엽토를 만들고 거기에 맺힌 꽃과 그리고 씨앗들을 먼 산에 바람을 타고 날려보내서 자기와 같은 작은 나무들을 온 산에 두루 심는 역할을 합니다. 넓은 그늘은 습기진 땅을 만들어서 부엽토가 쉽게 건조해지지 못하게 만들고 눅눅한 그 부엽토 속에서 풍부한 곤충들이 자라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그 벌레들은 많은 새들을 불러오고 그리고 나무는 새들이 깃들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만들어줍니다. 이렇게 해서 그 나무가 산에 큰 도움을 주면서 생명이 없던 벌거벗은 민둥산을 아름다운 결실이 가득하고 동산 어디를 가든지 생명의 기운이 깃들여 있는 푸른 산으로 만들어주고 산들이 모여 아름다운 숲이 되게끔 만들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이 어렸을 때는 교회의 신세를 집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양육을 받고, 넘어지면 교회에서 달려가서 고쳐주고, 가난하고 궁핍하면 교회에서 도움을 주고 하면서 눈물을 씻기고 까진 무릎에 피를 닦으면서 유모가 어린아이를 돌보듯이 여러분들을 키웁니다. 그러나 유아기는 항상 지나가고 성년기가 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머리가 하얗고 얼굴이 주글주글하고 등이 굽어있는 상태에서도 언제까지 여러분은 유모의 보살핌을 받는 것과 같은 어린 신앙을 계속하겠습니까? 견고함이 없기 때문에 신앙이 자라지 않아서 자기도 원하지 않는 침해 걸린 모습이 되어가고 있다고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저에게 여러분들의 영혼에 상태를 찍는 사진기가 있어서 찍어 보여준다면 여러분들은 소스라치게 놀랍게 될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우리는 이런 슬픈 이야기들을 호세아 14장을 강해하면서 자주 언급해야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에게 견고함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월이 많이 흐르고 교회로부터 한없는 은혜와 섬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세월이 많이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더 많이 교회에 손해를 끼치고 부담을 주고 그리고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어갈 때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이나 두 사람에게 국한된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패역을 고치고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성숙해 가는 견고함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도 어느 때에는 모두 이런 사람들이 되어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내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오늘 선지자를 보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 번영 속에서 하나님을 잊어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눈물로 권고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와의 관계 속으로 돌아오기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멀리서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던져지는 어떤 물질적인 축복이나 환경 적인 형통함을 주고받는 것을 통해서 겨우 하나님과의 관계가 확인되는 그런 피상적인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안에 계시고 이스라엘이 하나님 안에 있는 이런 연합된 관계, 그런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감격적인 사귐을 누리고 매일 매일 발견하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지식 때문에 매일 아침이 새롭게 보이고 그 지식을 따라 살아간 거룩한 삶 때문에 매일 지는 저녁 노을이 매일 같지 아니한 것같이 느껴지는 감격 속에서 살도록 하나님이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부르심은 오늘 우리를 향해서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편으로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얼마나 희박하고 우리들이 매일 주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정말 우리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가 하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번에 열린 하늘에 실린,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라” 의 독후감을 쓴 어느 지체의 글처럼 자신이 이제껏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사실은 얼마든지 어느 잡지에서나 어느 드라마에서나 그리고 시장 바닥에서도 얼마든지 나뒹굴고 있는 싸구려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각성이 없이는 우리는 보다 깊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사모할 리가 없고 그런 사모함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뿌리 깊게 내려서 하나님을 거슬리며 살도록 만들어주는 이 패역을 청산하려고 마음먹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기를 거절하고 그리고 패역을 사랑하기를 하나님처럼 사랑하며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는 대신 스스로를 위로하는 자기의 연민에 빠져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굶주리고 가난한 삶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돌이키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그러하듯이 넘치는 자비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돌이켜서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시고 그리고 하나님보다 깊은 사랑에 관계 속에서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나 진실하기 때문에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이 패역에 끈질긴 고리를 끊어버리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사람들에 그 몸부림을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오랜 동안 신앙생활 하면서도 도저히 경험할 수 없었던 견고함 들을 경험하게 만들어주셔서 행복하고 형통할 때뿐만 아니라 곤고 하고 고통스러울 때에도 고통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인생에 굽이치는 수많은 파도와 뱃길을 지나 서 자신에게는 도저히 그 풍랑을 이기면서 항해할 수 없었던 인생의 길에서 자기를 붙들어주셨던 하나님 때문에 견고한 인생을 살 수 있었다고 고백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에게는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이 아름다운 동산을 만드셨을 때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한 톨 한 톨의 말씀의 씨앗을 뿌리면서 저는 여러분들을 심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저의 소원은 이 동산 안에서 나의 지성과, 나의 판단과, 그리고 나의 경험과 말씀을 아는 나의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거짓된 것들을 뽑아내고 참된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우리 모두 손잡고 그렇게 새롭게 심겨지는 어린 묘목들에게 바람이 오면 덮어주고, 해가 나면 가리우고, 그리고 건조하면 물을 뿌려주는 섬김을 다하기를 원하는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지금은 비록 묘목으로 가득 찬 동산이지만 언젠가 우리가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우리모두 함께 손잡고 어린 성도들을 섬기면서 사노라면 언젠가는 아무 가치 없어 보이는 묘목들로 가득 찬 이 동산이 하늘을 찌르는 거목들로 가득 찬 울창한 숲이 되리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라난 여러분들을 통해서 수많은 이 거룩한 삶에 씨앗들이 온 지면에, 온 산에 두루 흩날리고 떨어져서 한때는 이러한 거목을 세우는 운동이 우리 자신에 작은 몸부림에 지나 지 않았지만 세월이 지나가고 난 다음에는 여기에서 자란 거목과 같은 성도들의 그늘 아래서 또 다른 수많은 분재와 같은 교인들과 그리고 묘목과 같은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새로운 국면이 있음을 눈뜨게되는 각성들이 일어나기를 소망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입니다. 시인이 고백했던 대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우리에게 복이고 하늘에서는 하나님이외에 사모할 자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성도의 진정한 본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시때때로 우리 자신을 깊이 성찰하면서 우리 속에 있는 이 뿌리깊은 이 패역과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주님 앞에 거칠 게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뼈 속 깊이 간직하게 된 우리의 슬픈 패역들을 눈물만 흘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서 우리를 고쳐주시고 치료해주셔서 우리 안에 있는 패역을 모두 뽑아내고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관계를 든든하게 구축하사 우리로 하나님을 즐거워하기를 처음 하나님을 뵙던 때와 같이 그렇게 즐거워하며 주님 섬기며 주님 모습을 닮아 살아가는 것을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본분으로 알고 그런 하나님 즐거워하면서 사는 인간들이 되도록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6. 패역을 고친 자의 번영
그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호14:6上)
패역을 고치고 하나님 앞에 새롭게 은혜 생활하는 성도들에게 주님께서는 이슬과 같은 은총을 내리시고 백합화와 같이 아름답게 하시고 레바논 백향목과 같이 견고한 신앙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패역을 고치면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축복은 여기에서 멈추질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다시 한번 추가적으로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가지가 퍼짐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퍼져나갈 것이고 그 아름다움이 감람나무와 같게 될 것이고 그 그늘 아래로 많은 사람들이 돌아올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가지가 퍼지며”라고 했는데, ‘그 가지’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그 가지가 무엇일까요? 앞에서 레바논의 백향목이 뿌리 박히게 될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얼핏 그 가지는 곧 레바논의 백향목의 가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에는 백향목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백향목은 덩굴과 가지를 널리 뻗는 식물이 아니라 곧게 자라는 나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가지는 백향목의 가지가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레바논의 백향목이라는 말이 히브리 성경에 없기 때문에 백향목이 뿌리를 박는다기 보다는 레바논 산 자체가 견고하게 뿌리를 땅에 박고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회개하고 패역을 고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산과 같은 견고함을 주실 것이라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가지’라고 할 때 ‘그’는 레바논이 될 것이고 ‘레바논의 가지’가 될 것입니다. 도대체 한없이 뻗어나가는 가지가 레바논 산에서 성장하고 있는 수목 가운데 어떤 것이 될까요? 레바논 산지에 널리 알려진 특산물 가운데 하나는 포도나무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이 가지는 포도나무 가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을 입증하는 증거 가운데 하나가 뒤편으로 넘어가면 포도에서 만들어진 포도주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포도나무는 덩치가 크고 우람한 소나무나 향나무와 같은 나무가 아닙니다. 가지를 꺾어 땅에 꽂으면 뻗어나가는 식물입니다. 거기서 뻗어 나온 나뭇가지는 멀리 뻗어갑니다. 그래서 포도나무를 기를 때는 버팀목을 세워주고 위에는 망을 쳐서 그 포도나무가 끊임없이 뻗어가도록 만들어 줍니다. 몇 그루 심고 버팀목과 함께 위에 망을 쳐 놓으면 등나무와 같이 그늘도 만들어 주는 나무가 포도나무입니다. 실로 뿌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까지 양분이 운반되어서 가지가 뻗어나가면서 그 가지 사이사이에 아름답고 탐스러운 포도가 영글어서 그 아래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 포도나무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포도는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강수량이 많은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먹을 물이 부족했고 물이 있어도 그냥 마시면 다리가 퉁퉁 붓는 좋지 않은 물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들은 물 대신 포도를 가지고 음료를 만들어서 사용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이 포도는 우리로 말하자면 물과 다름이 없는, 그야말로 샘을 발견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생존을 위한 중요한 조건이었습니다. 그래서 포도 농사가 잘 지어졌다는 의미는 음료 걱정을 안해도 좋은, 양식과 관련된, 생존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나무였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포도 넝쿨들이 뻗어나가서 탐스럽게 포도가 잔뜩 열려있는 것을 그들이 늘 보면서 살았던 것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이러한 번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가지가 퍼져나가는 이것은 분명히 의심할 여지없이 번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번영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단지 주님을 믿고 교회에 출석하는 삶 만으로서는 번영을 누릴 수 없습니다. 제대로 된 신자가 되어야 하고 마음속에 오래도록 간직했던 패역들을 돌이키는 고쳐진 신자들이 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번영을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번영이 꼭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인정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압니다. 의롭게 살면서도 고난을 받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불의와 타협하며 살면서도 이 세상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실하고 정직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성도들이 있는가 하면 거짓과 사기 그리고 남들을 괴롭히는 악한 일들을 하면서도 번영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별한 계획 속에서 하나님은 경건한 성도들을 가난과 고통 가운데 두시기도 하고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인간들을 부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게 만드시기도 합니다.
그런 일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말씀 가운데 거하며 순종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을 번영하게 하신다고 하는 사실은 불변하는 것입니다. 예외적인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은 보다 더 많은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을 경외하면서 사는 사람들에게 번영을 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물론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번영과 이 세상에서의 부귀를 담보로 하나님을 믿어주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번영의 축복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라기 보다는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진실 되게 주님을 찾아갔던 신앙생활의 아름다운 결과일 뿐인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하나님의 정미한 말씀 앞에서 자신들 속에 있는 깊은 죄의 뿌리를 발견하고 대충 살아가는 대신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하는 자신 속에 있는 악과 더러운 것들을 정성껏 고치는 삶을 살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번영하게 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이 말씀을 교회적으로 적용해 보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번영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교회가 커지는 것이 반드시 번영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돈 많고 호의호식하며 잘 사는 그 사람이 꼭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아니듯이 교인들로 붐비는 교회가 모두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있다는 증거는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보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사람들도 사람을 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과 하나님의 진리에 이끌려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있지만 무디어진 신앙의 양심을 간직한 채 죄의식을 달래기 위해서 편안한 교회를 찾는 성도들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진정한 번영이 무엇입니까? 금과 은과 옥으로 꾸민 아름다운 교회 빌딩을 소유하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의 번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변화 받지도 못하고 변화 받고자 하는 마음도 없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도 없는 형식적인 신자들로 교회가 가득 차는 것도 하나님의 교회의 번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난한 교회가 되고 초라한 건물에서 모이지 않는 성도들로 구성된 교회가 하나님이 번영하게 해주시는 교회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외적으로 나타나는 번영의 모습은 내적인 번영의 결과이어야 하고 하나님을 진실하게 의지하는 성도들의 마음이 그 모든 번영의 한복판에 있는 번영이 진정한 의미에서 번영이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저는 어떤 식으로든지 여러분들이 땟거리가 없어서 고생을 하고 이 세상의 물질을 향한 염려로 주님이 주신 인생 전체를 채우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물질과 이 세상에 대한 사랑에 빠져서 성도들의 본분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삶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들이 잘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영혼도 하나님 앞에 잘 살게 되고 이 세상에서도 번영을 누리면서 살아서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볼 때 여러분들의 영혼과 여러분들의 온 삶에 넘치는 하나님의 축복을 보고 그 축복을 통해서 과연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고자 하는 것이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 두신 하나님의 마음이며 목적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진정한 번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은 건물이나 재산이 아닙니다. 모이는 사람들의 수나 매 달마다 집계되는 헌금의 통계도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일 수 없습니다. 물론 교회는 건물도 필요하고 사람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를 이루어 가는 한 구성 요소일 뿐이지, 수단일 뿐이지, 그 자체가 교회의 영광은 아니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하나님이 번영을 주실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하나님의 교회에 주님께서 번영을 주실 때 먼저 교회는 사람들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다른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은 인간적인 방법 때문이고 우리 교회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것은 워낙 순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는 하나님이 홀로 판단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주시는 진정한 번영은 하나님의 교회에 사람들이 가득 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리워하는 성도들, 죄 가운데 살았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아무 희망이 없이 버려진 인생들,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고 고침을 받을만한 어떠한 곳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손들고 아버지 앞에 나온 죄인들, 이런 사람들로 교회는 가득하게 됩니다.
다가오는 사람들은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었지만 거기에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사람들을 고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망가진 그들의 영혼이 고쳐지고 주님을 멀리 떠났던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돌아오는 신앙의 감격이 있습니다. 돌아온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눈물을 씻고는 매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고 가르쳐주시는 진리의 그 아름다운 세계를 경험하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 안에서 짐승처럼 살아갔던 옛 삶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어울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의 즐거움들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멀리 떠나서 살아가며 이 세상의 즐거움에 심취했던 옛 삶을 버리고 거룩한 하나님의 눈빛 앞에서 살아가는 즐거움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즐거움을 성도들에게 주신 것처럼 성도들이 변화를 받으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들의 모든 즐거움을 두는 아름다운 관계가 만들어집니다. 교회는 사람들로 가득 차고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교회,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죄인들이 교회로 들어오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교회, 이미 하나님을 만난 하나님의 성도들이 매일매일 참회와 기도의 눈물로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 아래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거룩한 결단이 있는 교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의 번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만 입이 내게 있어도 그 입 다 가지고
주 예수 크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우리의 필설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를 제가 세웠지만 순간순간 저와는 상관이 없이, 저는 마치 이 교회의 부목사나 전도사가 된 것 같고 하나님이 이 교회를 책임지고 이끌어 가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교회를 개척해서 1-2년이 지나면 수기를 한 권 쓴다고 하는데, 저는 아무 것도 쓸 말이 없습니다. 쓰레기와 같은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주님이 베푸시는 사랑과 교회가 하나님 앞에 감사할 뿐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실로 감사할 제목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교회가 개척해서 성장해온 이 4-5년의 기간을 보며 기적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목회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는 큽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을 주님이 만지고 계십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어두움 속에 살던 영혼에 밝은 빛을 보내시고 제멋대로 살던 짐승과 같던 사람들을 고쳐서 성도로 만드시는 일들은 여러분들이 잠자고 있는 시간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디서든지 언제나 이런 저런 사람에게서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는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어두움 속에서 한줄기의 빛으로 다가오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발견하고 주님의 그 비춰주시는 은혜의 빛 없이 살아왔던 옛날을 깊이 후회하고 오늘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간직하며 살고자 결심하는 성도들의 아름다운 결심의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우리는 발이 부르트도록 전도한 적도 별로 없지만, 여기가 하나님의 집인 것을 알고 여기에 모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을 깊이 존경하며 여러분과 같은 성도 중의 한 사람이 되는 것을 지극히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오늘도 하나님께서 보내주고 계십니다. 우리들이 이곳으로 올 때에 물질적으로 많은 염려를 하였지만 주님께서 우리들이 상상할 수 없었던 방법으로 채워주셔서 빚지지 않고 물질로 인해서 고통을 받느라고 기도할 마음을 잃어버리는 일없이 주님이 살아오게 해 주셨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던 많은 지체들이 다시 해산의 기쁜 소식이 들려오도록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고 실직을 하고 고통받던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주시고 파산의 직전까지 갔던 망가진 가정들을 이 교회 속에서 고쳐주시는 하나님의 축복들을 많이 봅니다.
아직까지도 깨닫지 못해서 옛 삶으로 돌아가는 무지막지한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람들의 숫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아가지 못한 일주일을 참회하고 이 모습 이대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으며 새로운 삶을 결심하고자 하는 성도들이 있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지금 이 순간, 이 말씀이 증거 되고 있는 이 자리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저는 압니다.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의 자격 유무와는 상관없이 말씀을 듣는 성도들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주님이 세워주신 이 교회에서 하나님은 함께 하시고 지금도 하나님이 이 교회 속에서 함께 하시는 놀라운 표징들을 이 사람 저 사람 하나님이 준비하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역사 하십니다. 우리가 충성스럽지 못해서 넘어지고 쓰러진 성도들을 하나하나 보듬지 못할 때에도 주 친히 찾아가셔서 어둠 속에서 울고 있는 성도들을 권면하시고 그들의 영혼에 일깨움을 주시어서 다시 엎어진 자리에서 일어나서 주를 바라보고 살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오늘 이렇게 성도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크고 우리에게 주신 이 은혜를 만 입이 있어도 다 찬송할 수 없고 우리의 흐르는 눈물로 먹물을 삼아서 주님의 그 사랑의 족적들을 기록한다고 할 지라도 다 기록할 수 없고 하늘을 두루말이 삼아서 사연을 적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 놀랍고 크신 사랑과 은혜의 자취를 다 기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는 이만한 교회도 과분하고 여러분들에게도 이만한 하나님의 은혜는 과분합니다.
이 교회에 들어설 때마다 항상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을 때마다 우리와 같은 인간이 옳다함 받아서 주님 앞에서 한 성도라고 불려지고 있는 이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감격하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다 인정하고 동의하고 뼈 속 깊이 감사한 마음과 필설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죄인들을 향한 끊임없는 오래 참으심과 아침마다 성실하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인정합니다.
이 정도 살았는데도 이 큰 축복을 주셨는데 만약 우리가 더 많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뜨거운 사랑과 눈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보여주신 주님의 그 피 사랑을 기억하고 주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피 흘리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죄와 우리의 패역을 고치기 위해서 피 흘리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고 싸웠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들이 이제껏 받은 은혜와는 비교되지 않는 번영을 하나님이 우리들의 교회에 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교회당을 주시고, 여기에 왔을 때 우리들은 한 줄이나 채울까 말까 한 성도들이 모여서 아마 한참동안은 썰렁한 예배를 드리겠다고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아래 칸을 가득 채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많은 성도들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고 늘 울어도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크고 신실한 사랑을 보답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형식적으로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 했던 수많은 날들 대신에 더 주님 앞에 진실해졌더라면, 생각 없이 흘려버렸던 하나님의 말씀의 깨달음을 붙들고 그것이 시작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집요하게 어찌하든지 이 모습을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바꿔달라고 매달렸더라면, 그래서 주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발견할 수 없었던, 발견했더라도 우리가 직면하기는 싫었던 우리의 뿌리 깊은 죄와 많은 악들을 하나님 앞에서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고쳐나가고 어찌하든지 내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으로 새롭게 빚어져 가는 축복이 우리에게 있었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아마 지금과는 비교되지 않는 교회의 번영을 보았을 것입니다.
호주에 한 주간 가 있는 동안, 돌아와서 며칠을 지내는 동안, 저는 아직까지도 교회당에 빈곳이 있다는 이 사실이 전적으로 저의 허물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통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왜 교회가 부흥되지 않느냐고 물을 때 “우리 목사님이 그러는데 목사님 때문이래”라고 말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두워진 세상 중에
외치는 자 많건마는 생명수는 말랐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지만 진리를 찾기를 원해도 그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해서 헤매는 수많은 영혼들을 건지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먼저 그 복음의 진리를 알게 하셨습니다. 시대가 가르쳐준 무지와 편견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스러운 하나님과의 만남과 은혜 속에서 저를 세우시고 교회를 세우시고 여러분들을 이 성전에 묘목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교회와 함께 여기에 세우심은 열매를 얻기 위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교회 바깥에는 마치 폭풍우 속에서 수많은 영혼들이 파도에 떠내려가는 것처럼 울부짖고 있고 이 교회의 방주 속에는 아직까지도 빈자리가 많이 있는데 왜 교회의 번영이 그치고 있는 것일까요?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더 많아져 가고 있는데 구원받은 사람들의 숫자는 실제로 줄어들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이 세상은 하나님을 가르쳐 줄 수 없고 오로지 교회만이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과 은혜를 생각나게 해 줄 수 있는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아버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하셔서 이 교회에 주님의 크신 사랑을 기억하며 섬기는 하나님의 종들로 세워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가 말할 수 없이 감사하고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한편 기억합니다. 우리들이 받은 축복도 크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하고 뉘우치는 마음으로 자기를 고치고 패역을 버리며 하나님 앞에 존귀하게 충성하는 백성들로 살아갈 때, 그랬더라면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셨을 그 크신 은혜에 비하면 우리가 받은 은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았더라면 우리는 지금쯤 이 교회당이 너무 좁아서 교회를 옮길 계획을 의논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하늘을 여셔서 당신의 사랑을 물 붓듯 쏟아 부어주시기를 원하고 병들어 있는 죽은 자와 같은 교회에 생명을, 어두움 속에 있는 교회에 진리의 밝은 빛을, 상처를 받고 고난을 받는 교회에 승리를 주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교회가 더럽혀지는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흘리신 보혈의 피 값을 기억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를 고쳐서 새롭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수많은 여인들이 주님이 그 태를 여심으로 아이를 출산하고 그래서 생산의 기쁨을 온 가족과 친지들에게 전해주었던 것처럼 그런 교회들을 하나님이 고치셔서 영혼들을 태어나게 하시는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패역을 돌이키지 아니하고,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건조하고 뜻 없는 결단이 없는 신앙생활을 계속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에 더 크고 위대한 일들이 그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복음 전파의 가지가 더 많이 뻗어나가고 그리고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구령의 놀라운 역사의 가지가 더 많이 뻗어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처럼 평안하게 예배를 드리는 이 순간에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어느 교회 한 구석에서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는 예배를 드리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사랑 없이 살아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세력들에게 사로잡혀서 속박 받는 가운데 구원의 자유와 구속의 은총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 고쳐져서 진실 되고 철저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것이 여러분들이 교회에 바칠 수 있는 최고의 헌신임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교회를 운영하기 위해서 세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를 경영하기 위해서 성도들이 이 교회에 모이기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곳에서 하나님의 부흥을 보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패역을 고치며 하나님 앞에 시시때때로 진실하게 살기를 소원하는 성도들을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이라면 불 가운데라도 지나가기를 원하고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어도 섬기며 살기를 원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이면 살점이라도 떼어내고 우리의 한 주발의 피라도 쏟아낼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진 성도들로 가득 찬 교회, 그래서 하늘을 가르고 이 세상에 강림 하셔서 힘없는 교회들을 영화롭게 하시고 세상을 향해 권세를 잃어버린 교회들을 새롭게 하셔서 주님의 복음의 능력으로 이 땅을 정복하시는 위대한 광경들을 보여주게 하시려고 이 교회를 세워놓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위대한 하나님의 번영을 꿈꾸면서 오늘인가 내일인가 그날을 기다리며 하나님 앞에서 이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숨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보고 우리의 삶의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주저 없이 우리가 이 생명 다하도록 보기를 원하는 것은 이 교회의 번영이고 조국의 교회의 번영이며 하나님의 왕국의 번영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섬기는 사람 되게 하시려고 천의 하나 만의 하나 가운데 구원해 주셔서 남이 알지 못하는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고 주님의 크신 은혜를 시시 때때로 입으며 말할 수 없이 오래 참으시는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살아오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시시때때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아마 이 광야와 같은 세상의 길에서 일찌감치 쓰러졌거나 우리의 신앙을 배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경험하면서도 거기에서 돌이키지 않으려고 하는 우리를 고치셔서 주 앞에 살게 하시는 그 크신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 앞에서 이 교회의 번영을 오게 하는 주님의 도구가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이제까지 붙들고 계시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오늘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더 이상 지체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제껏 우리가 끌어왔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집착과 오래도록 우리의 살이나 우리의 뼈 중의 한 부분처럼 익숙해져 왔던 옛 패역한 습관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고통스럽고 아파도 우리가 그것을 고치지 않으면 그것이 우리를 망하게 할 것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고치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로 들어가면 우리는 그 고침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교회에 번영을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호주에 있는 동안 그 기도원의 숲을 거닐면서 그런 생각을 하며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이 얼마 되지 않은 공간에 성도들이 가득 차서 주님을 만난 감격 때문에 흐느껴 울고 자기와 같이 더러운 인간들을 향한 주님의 구원의 그 사랑에 감격하며 울고 그래서 이곳에서 정말 하나님을 찬양하는 함성이 메아리 친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을 받으실까? 그리고 하나님이 얼마나 열렬히 우리의 교회들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를 사모하고 계실까?’ 하나님의 그 불타는 마음이 마음속에 전해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 고쳐주소서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뤄지이다
우리의 완악함과, 주님의 크신 사랑을 보답할 줄 모르는 우리의 완고함과, 오래도록 익숙해져 온 우리의 불순종,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여호와의 얼굴을 직면하지 않으려고 하는 하나님의 등뒤에서 살려고 하는 가증한 신앙생활 때문에 여기를 가득 채워야 할 수많은 영혼들이 우리의 패역 때문에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고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시간에도 기도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패역을 고치고 우리의 살처럼 사랑하던 우리의 옛 불순종하던 삶과 지속적으로 지적 받음에도 하나님 앞에 고쳐지지 않는 우리의 아집과 우리 중심의 삶을 버리고, 진흙과 같은 우리를 부수셔서 당신의 교회를 위한 도구로 삼아달라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매달릴 때, 하나님께서는 급히 하늘 문을 여시고 우리에게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우리가 이미 받았던 것보다도 더 많이 부으실 것이며 이 교회에 발길을 들여놓는 성도들마다 이곳이 하나님이 살아 계신 곳이며, “화로다 나여 오늘 나는 죄 가운데 있으면서 거룩한 하나님을 이 교회당에서 뵈었도다”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패역을 고치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깨달은, 주님의 사랑을 뼛속 깊이 사무친 바 되었던 사람들은 아마 외치지 아니하고는 일주일을 살아갈 수 없을 것이고, 자기가 얼마나 흉악한 죄인이었는지를 잠시 잃어버리고 물동이조차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들어가서 자기가 만난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었던 사마리아의 여인과 같은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교회당은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수에 비하면 너무나 왜소하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성전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노력으로 주워 모은 형식적인 성도들로 가득 차고 그들의 호주머니를 털어서 모은 헌금으로 교회가 운영되는 기업과 같은 교회를 꿈꾼 적이 없습니다. 하늘을 여시고 그 열린 하늘을 통해서 사랑하는 빌라델비아 교회에 부어 주셨던 주님이 열어놓으신 구원과 은혜의 문을 여신 그 한 분 외에는 닫을 사람이 없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꿈꾸면서, 오늘도 우리는 우리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 목자로 부름을 받기 전에 하나님 앞에 이 교회를 목양하도록 부름을 받은 저는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서 깊이 참회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내가 더 많이 고쳐지고 내가 내 마음에 있는 뿌리 깊은 불순종과 내 마음의 악들과 구태의연하게 살려고 하는 안일한 삶을 포기하고 버렸더라면 여러분들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이 교회당을 가득 채우셨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 어떤 사람들은 분명히 주님이 여러분들을 이 교회로 보내셔서 어떻게 섬기며 살아야 할 지를 소명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남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에게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이올시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무엇 때문에 내가 이교회의 거룩한 부흥과 그런 가지가 퍼지는 것 같은 깊은 번영을, 선교의 번영을 너희에게 주지 않겠느냐?”고 물으시는 주님 앞에서 “그것이 바로 나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고, 나를 위해서는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을 주님이 피로 값 주고 사신 이 교회를 위해서는 포기하고, 나를 위해서는 버리고 싶지 않았던 죄악들을 이 교회와 그리고 사랑하는 성도들과 빛 가운데로 나오기를 원하지만 아직도 어둠 가운데서 고통하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위해서 포기했더라면 주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 여기에 번영을 주셨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바라보면서, 주님이 문제가 많은 이 세상에서 고통하고 방황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고, 주님을 보여줄 수 있는 교회가 되지 못한다면 차라리 교회당의 문을 닫으시기를 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있을 때 이 말씀을 주신 것도 아니고, 위대한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북왕국 이스라엘이 영적인 각성으로 충만해진 가운데 이 말씀을 주신 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이 말씀을 주신 것은 강철과 같은 심장으로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끊임없이 어그러진 길로 걸어가고 있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무 소망이 없는 시대에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여러분들은 비록 아직까지도 패역을 간직하고 있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마음들이 있지만, 호세아가 눈물로 애원하던 이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보다는 훨씬 나은 성도들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제가 살아있는 보람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양심과 내게 허락된 신앙의 지식을 따라서 저는 옳은 것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며 살려고 애썼고, 여러분들은 그것들을 받아들이며 살려고 애를 썼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완전히 등지고 그렇게 패역하게 살아가던, 고칠 생각조차 하지 않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번영을 약속하셨다면 우리의 교회를 향해서는 하나님이 이런 번영을 얼마나 더 많이 약속하셨겠는지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한 번 위대한 꿈을 꾸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전에 우리가 어두움 속에 있을 때 우리가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를 생각나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바깥에 있을 때, 이 교회를 찾기 전에 희망이 있었습니까?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알고 하나님 아버지의 불붙는 긍휼과 죄인들을 돌이켜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에 눈뜨고 그 사랑에 감격하기 전까지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었습니까? 우리는 동물과 다름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죽을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흐느적거리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악한 것이었고 우리의 삶은 죄된 것이었으며 우리가 걸어가는 발자취는 모두 주님의 마음에 못을 박는 삶의 발자취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삶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주님도 아팠고 우리도 아팠고 우리 때문에 이웃과 우리의 가족도 쓰라린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런 시절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멀리 떠나고 이 교회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 얼마나 절망적인 존재인지를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때보다는 사람답게 살고 있고 그때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바른 길을 걸어가고자 해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고, 길을 알아서 그 길을 걸어가려고 해도 그렇게 걸어갈 기운이 없는 처지에 놓여있는 사람들이, 예전에 우리처럼 그렇게 절망적인 삶의 벼랑에 서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깨어있는 성도들이 매일 새벽마다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이것 때문입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영혼들, 그들도 우리처럼 아플 것이고 예전에 우리들이 절망적이었던 것처럼 절망을 친구로 삼고 실패를 숙명처럼 여기면서 그렇게 버려진 채로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필요로 했던 것처럼 그들도 교회를 필요로 하고 있고, 그들이 교회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울부짖는 아우성 소리가 이 도시에 가득한데 우리는 아직까지도 비어있는 공간을 둔 채 매주 똑같은 모습으로 뻔뻔스럽게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하나님의 교회에 보내주시는 번영 때문에 흘릴 눈물이 없다면 그런 번영을 주시지 않는 하나님의 축복 없음을 인해서 흘릴 눈물이라도 남아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 리차드 백스터 목사가 말했던 것처럼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서 눈물 흘릴 줄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더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번영을 위해서 눈물 흘릴 줄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이 초라해진 사람이고 가난해진 사람들임을 기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마음을 다하고 상상력을 동원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존재처럼 지내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교회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에 우리들이 살았던 그 처절하고 아픈 날들이 반복되는 것을 원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날은 계속될 수 없는 날들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반복되어서는 안되는 날들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죄 가운데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을 거스르는 절망적인 이 몸부림, 이 죄인들의 희망 없는 현실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이 교회에 번영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이날을 꿈꿉시다. 그리고 “이날을 위해서 다시 한 번 주님이 우리에게 그런 부흥의 날을 주시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랑하고 있던 모든 것들을 가져가셔도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약탈당할 수 있습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하나님 앞에 오랫동안 지적 받았던 우리의 패역을 고치고, 이제껏 까지 살 깊이 간직했던 우리들의 죄를 버리고 온전히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교회의 번영을 위해서 기도할 때 주님은 반드시 번영을 주실 것입니다. 수 십 년 동안 우리들이 이룰 수 없는 일들을 단숨에 이뤄내시고 이 공간에 주님을 만난 성도들과 만나기를 원하는 죄인들로 가득 차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한 사람의 죄인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 주님의 기쁨이 얼마나 클지는 여러분 자신이 너무나 잘 알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에 주님의 놀라운 번영이 가득하게 되는 날이 되도록 우리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이 말씀을 우리 개인의 번영에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기 짝이 없어서 우리에게는 정말 있어서는 안되는 것 같은 고통을 주셔서 그 고통이 후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축복된 삶에 없어서는 안될 재료가 되게 하십니다. 주님을 위해서 아무 것도 아깝지 않고 모든 것을 바칠 마음이 있는 성도들이 바칠 것이 없어서 눈물을 흘리는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때가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인정을 해야 합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스물 한 두 살 때 회심을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는데 매일 주님의 그 큰사랑이 느껴졌습니다. 눈물로 매일 감격하며 사는데 더 가슴 아픈 것은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건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남다른 지식이 있거나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찬송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랑하며 의지하고 따라가는 것 이외에는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 사실도 우리는 인정합니다.
그 사실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우리는 또 하나 기억해야 합니다. 오해하지 말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먹고 살만해지려면 주님을 잘 믿어야 합니다. 다 망가진 가정이 회복되기를 원한다면 제대로 패역을 고치고 주님의 은혜의 세계로 들어와야 합니다. 기웃거리다가 지나가는 성도들이 되어서는 주님의 축복의 끝을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은 철저하게 신앙생활 하려고 몸부림치는 성도들에게 고난의 끝에서 축복의 시작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적으로 볼 때 아무 희망이 없는 상황을 뒤집어 엎으셔서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여러분들이 만일 말씀을 깨닫고 패역을 고치며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은혜의 세계 속에서 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붙들고 신앙생활 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경제적인 고통에서도 -때가 어느 때인지는 모르지만- 벗어나게 해주실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막혔던 인간관계에 다시금 형통함을 주실 것이고 절망적인 집안 식구들을 여러분들을 도구로 해서 구원해가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상황이 너무나 어렵고 우리를 에워싼 환경이 아무리 심각하고 크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능력보다야 크겠습니까? 그 능력이 우리의 것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패역을 고치기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셉의 생애를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늘 깨어짐이 있는 생애를 살았습니다. 주님밖에는 없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는 곳마다 그를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그를 고용하면 그 집안에 복이 임했습니다.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그와 함께 옥살이를 하면 함께 옥살이를 하고 있는 죄수들이 은혜를 입었습니다.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그를 공직자로 등용을 하니까 그 나라 전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패역을 고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들어온 성도들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패역을 고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기웃거릴 뿐 그 은혜의 세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살려고 하지 않을 때, 여러분과 동업하는 사람들은 망할 것이고 여러분의 가정은 여러분 때문에 불행해 질 것이며 여러분들의 친구와 이웃은 여러분들이 죽는 것이 행복이 될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우리가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불행과 고통의 원천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까? 그럴 이유가 어디에 있냐고 하는 말씀입니다.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여러분들의 지극한 행복을 위해서라도 여러분과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진정한 축복을 위해서라도 여러분들은, 그리고 저는 패역을 고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번영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교회도 번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기까지 끊임없이 철저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 우리를 세우고 잠시 잘못한 것들은 회개하고 고쳐지지 않는 것들은 입술을 깨물고 하나님 앞에 선한 뜻을 세우며 고쳐 가는 그런 성도들로 살아가십시다.
7. 패역을 고친 자의 존귀
그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호14:6中)
말씀을 가지고 회개한 후에 하나님께 돌아와서 패역을 고치면 하나님께서 가지가 포도나무 가지가 뻗어나는 것처럼 그러한 번영을 주시겠다고 지난주에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어서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패역을 고치는 사람들을 주님께서 감람나무와 같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감람나무는 성경에 나오는 식물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식물입니다. 왜냐하면 이 감람나무는 존귀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감람나무는 메시아를 상징하는 나무로도 성경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시편 52편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충만하게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신에 축복된 모습을 가르쳐서 “나는 여호와의 집의 푸른 감람나무와 같을 것이며” 라고 말합니다. 시편 128편에서는 여호와의 도에 순종하고 그 도에 행하는 가정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크신 복을 말하면서 네 집의 어린아이는 어린 감람나무와 같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감람나무는 성경에서 존귀의 상징입니다. 이 나무는 여러분들이 아는바와 같이 올리브나무입니다. 잎은 상처를 싸매는데 사용되고 열매는 먹기도 하고 그 씨앗은 기름을 내어서 값진 올리브기름을 만들기도 합니다. 이처럼 이파리부터 시작을 해서 나무 가지, 어디하나 버릴 것이 없이 우리에게 매우 귀하게 사용되는 감람나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존귀하게 하시는 상징으로 드실만한 나무라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십자가의 피로 구속하셨을 때 그때 우리는 확실히 존귀하게됩니다. 전에는 어그러진 길로 걸어가면서 짐승과 같이 살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불현듯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에 눈을 뜨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그래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그 순간 우리는 예전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시 태어난 거듭난 신자의 삶을 가르쳐서 사도 바울은“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합니다. 확실히 그리스도인이 되는 그 순간 우리는 완전히 변화된 신분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노아래 살던 저주의 자식이 변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우리들이 신분적으로 새사람이 되었지만 그러나 패역을 고쳐서 하나님 앞에 쓸모 있는 인간이 된다는 점에서 보면 이제 막 고쳐지기 시작한 시점이다. 이런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데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이 나를 고치도록 내가 나를 허락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피묻은 십자가 아래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그리고 자기가 바로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 비로소 그는 이제 하나님 앞에 자기가 고쳐지도록 하나님 앞에 자신을 허락한 것입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더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것이 모두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존귀하게 사용하시고 귀하게 사용하시느냐 에 의해서 우리의 인생은 엄청나게 다른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서 세상 앞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정말 이 패역을 고치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결하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바뀌어져 가기만 하면 우리가 바뀌는 것만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하게 여기던 감람나무와 같이 존귀하게 사용해 가시는 것입니다. 사용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깊이 뉘우쳐서 우리가 새사람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이 그후에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 앞에 쓸모 없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있고 아주 존귀하고 쓸모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전혀 몰랐던 우리 조상들도 아이를 낳아 놓고 인간이 살아가야 될 도리를 잘 가르치는 것이 부모에 가장 중요한 책임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도리를 바로 터득하고 그 위치를 따라서 살지 않는 사람은 금수와 같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똑같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우리가 단지 예수님의 피를 발라 구원하기만 하면 우리가 쓸모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하나님은 이제 우리의 패역을 고치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패역을 고치는 학교에 입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학생들은 입학을 해서 열심히 노력을 잘해서 고쳐지는데 어느 학생들은 태만하기가 그지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을 고쳐서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여러분들이 깊이 느끼지 못한다면 여러분들은 신앙적으로 볼 때 모두 후레자식들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합니다. 부모가 있다고 해서 모두 자식이자식인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뭐라고 생각하던지 나는 나대로 산다라고 하는 자식들은 막대 먹은 자식이고 부모를 함부로 보는 자식들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 갇혀 계신 하나님이 아니시고 예배시간에 여러분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자녀 닮은 사람이 되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들 속에 구원받았고 주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고백하지만 옛날에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진노의 자식 이였습니다. 사단의 아들 이였습니다. 세상의 아들 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단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뿐 아니라 이전에 진노의 자식으로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분들의 마음과 삶 속에서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패역한 죄악들을 뜯어고치고 정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그 고치시는 손길에 순종하고 실제로 하나님의 그 손에 의해서 고쳐져야 된다. 이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존귀하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저한테 이렇게 질문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패역을 고치지 않아도 이 세상에 떵떵거리고 잘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늘 울어도 눈물로는 갚을 것이 없어서 그렇게 자기의 죄를 들여다보는 사람도 이 세상에서 곤 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나는 두 가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우선 첫째는 인생은 다 살고 봐야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악인의 찬성함에는 끝이 있고 의인의 번성에는 끝이 없습니다. 고난을 잠시 당하는 의인이 있는가 하면 심판으로 가기 위해서 죽기 위해 태어난 이성 없는 짐승과 같은 인간들을 번영 속에 내버려두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 살고 보자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대답할 수 있는 말은- 그래요 그런 예가 있다고 칩시다. 좋은 직장에 다니고 좋은 사업해서 돈 많이 벌고 휘하에 많은 부하 직원을 거느리고 권력을 쥐고 흔들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번영하는 삶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번영에 한 요소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번영’ 하면 가장 떠오르는 것이 그러한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것일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진정한 번영 속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번영은 번영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자! 좋은 직장에 다녀서 모두들 퇴출을 당하고 해고를 당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운 좋게 위기를 넘기고 승승장구해서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많은 돈을 거머쥐게 되었다고 칩시다. 어디 가든지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사고, 그리고 돈과 권력이 있어서 자기 하고싶은 데로 육체의 원하는 데로 무엇이든지 손에 넣고 움직이면서 살 수 있게되었다고 칩시다.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것입니까?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할지 모르고 주를 섬기는 진정한 도리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은 것이 좋은 사료를 먹고 살이 찐 다음에 도살당한 한 마리의 짐승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에 가치를 그런데서 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나는 목자로서 여러분들 모두에게 간절히 바라는 마음 이였습니다. 집이 없어서 이리 저리 주인의 뜻에 따라서 옮겨다니고 셋방살이를 하는 사람들이 좀 집간이라도 가지고 살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제 집 산 것 마냥 기쁩니다. 직장이 없어서 이리 저리 실직하던 사람들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서 돈을 벌거나 아니면 좋은 직장에 취직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제 일 과 같이 기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또 다른 목적을 위해서 쓰임 받는 사람이 될 때에 영광스럽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감람나무와 같이 아주 존귀하고 귀하게 우리를 만들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아무렇게나 대는 데로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을 좀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비취어 보면서 어떤 부분들이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주님의 그 은혜에 합당하지 않은가. 그리고 오늘 이렇게 살아가고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내 모습, 내 삶에 이 현주소에 대해서 우리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겠는가. 그것을 깊이 반성하고 돌아보면서 무엇이 잘못되었고 내가 무엇이 부족한지를 깨닫고 그것을 마음 아파하면서 고치고 새로워지는 자기 변혁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고 그래서 쓸모 없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아주 쓸모 있고 고귀하게 감람나무와 같이 존귀하게 사용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생활의 모습을 한번 돌아보자는 이야기입니다. 지난한 주간을 보내면서 얼마나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았습니까? 여러분, 일주일의 삶이 없는 경건한 모양으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 앞에 구역질 나는 것만큼 토할 것 같이 불쾌한 것입니다. 이 예배는 일 주일 동안 예배의 정신으로 살다가 온 사람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렇지 못하게 살았다고 할 것 같으면 이 자리에 나와서 우리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참회의 눈물이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 주일동안 하나님 앞에 받은 말씀을 가지고 오늘 하루도 행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 두려워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고 하루를 산후에는 나의 하루의 삶 가운데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던 부분들이 어떤 것들이 있었느냐 하는 것을 돌아보면서 그것이 확인 될 때에 주님이 우리의 삶을 보면서 아파하셨던 것처럼 자신도 아파하는 자각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려고 애를 쓰지만 그렇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무릎을 끓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서 나는 것처럼 진리를 이해하는데 우리의 마음과 신앙에 모든 희망을 걸고 하나님 앞에 깨닫게 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기도 안 해도 살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간절히 살기를 원하고 고치기를 원하는 우리 자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서 우리에게는 그렇게 할 힘이 없기 때문에 주님의 도우심을 열렬히 구하며 주님의 그 도우심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 역사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로 우리도 고칠 수 없는 우리의 패역을 고치고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고자 하지만 우리의 죄와 그리고 우리의 정결하지 못한 생각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늘 막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오랜 시간동안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우리 앞에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장애물이 없도록 우리의 삶에 정성을 기울이는 이런 삶을 살아가야 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성도들은 하나님이 신속히 매우 빠른 속도로 우리를 고치시기 시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속도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치시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자기를 고쳐서 쓸모 없는 사람이 되려고 하는 노력이 없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계속해서 쓸모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가지고 있는 믿음도 믿음이니까 구원이야 받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이 성취되는 날까지 살아가는 동안 행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큰 은혜를 베푸셔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놀라운 은혜를 넘치게 주실 때 그는 항상 소외될 것이며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서 매우 값지고 보람된 일에 사용될 때에 그는 항상 주님의 사용되는 손길에서 소외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서 자신이 존귀하게 취급되고 있다. 라고 하는 느낌을 받지 못한 채 살아갈 것입니다. 그는 세상 속에서 돈과 권력을 다툴 때에는 자신이 쓸모 있는 사람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영원을 향해 살아가는 이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인생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자기를 사용하시는 기쁨 같은 것들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썩을 물질, 사라질 권력과 함께 종말을 고하고야말 것입니다.
요즘이야 플라스틱 바가지도 많고 많은데 옛날에는 바가지를 팔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멍을 뚫은 데다 철사 줄 같은 것을 잔뜩 꿰어서 한 보따리이고 다니면서“바가지 사려 바가지 사려”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가지를 제일 먼저 사면 제일 먼저 이제 밥을 할 때 쌀을 씻는데 사용합니다. 깨끗하니까. 그러다가 이제 우물로 나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사용합니다. 한참 쓰다가보면 이끼도 끼고 지저분해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 다음에 뜻 물을 풉니다. 뜻 물을 퍼서 이제 돼지 밥줄 때 사용하거나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귀퉁이도 깨지고, 시커멓고 볼품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거기에다가 기다란 막대기를 꽂아서 똥 푸는 바가지로 사용합니다. 이것이 바가지의 일대기입니다. 같은 바가지인데 사람이 먹는 쌀을 씻는 맑은 물이 담겨진 바가지, 그때는 용도가 구별됩니다. 누가 거기다가 걸레를 빨거나 행주를 빨면 엄마한테 혼이 납니다. 쌀바가지에다가 더럽게 그렇게 했다고. 그런데 그렇게 존귀하던 바가지가 막판에 가서는 똥바가지가 됩니다. 왜? 정결하고 깨끗해지면 그렇게 존귀하게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 앞에 그냥 대충 예수님 믿고 하나님 막보면서 사는 이런 신앙생활이 아니라 정말 주님과 같이 온전해지기를 원하고 내 인간에 이 의식 이 자체에 내 인생전체가 하나님 앞에 기쁨 덩어리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나 주님에 기쁨 되기 원하네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들이 그 기쁨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내 마음 새롭게 하소서
우리들이 새로워지지 아니하고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쁨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식을 길러보면 알게됩니다. 자! 기쁨 덩어리 자식 있는 사람 손들어보십시오. 없습니다. 손들어봐야 그것은 아마 예솔이 정도 될 때까지는 그럴지 모릅니다. 어느 자매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이 자식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오 열매인데 부담스러운 애물단지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왜 그렇습니까? 그 존재가 자꾸 부모 속을 썩이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식들을 돌아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 뱃속에 자식들을 가졌을 때 사실 그럴 줄을 몰랐습니다. 낳아 놓고 일평생 자식과 작별하면서 눈감을 때까지 그냥 이 자식이 기쁨 덩어리가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온전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더 원하십니다. 우리는 불안전한 부모이기 때문에 자식이 그런 자식이 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어도 우리들이 그렇게 자식을 기쁨 덩어리가 되도록 만들 수 있는 힘이 없지만 하나님은 완전하신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쁨 덩어리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만 가지고 있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쁨이 되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데로 자신을 고치려고 하는 의지만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에게는 능력도 있고 지혜도 있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이렇게 돌아보세요.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시는 원리는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나 오웬이나 이런 사람들처럼 정말 천재에 가까운 사람, 공부 많이 한 사람, 존 오웬 같은 사람은 십대에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공부를 했답니다. 우리 젊은이들 새롭게 각성해야합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공부를 했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19세에 예일대학교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들만 사용하나 보다 그런가 하면 또 무디 같은 사람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40분 설교하면 24번 맞춤법이 틀리는 그런 사람을 사용하셔서 수 백만 명의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들고 지금도 100년 전에 살다간 사람이지만 지금도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또 이 건강한 사람들도 잘 사용하십니다. 아주 건강한 사람, 그래서 웨슬레 같은 사람은 60년 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났는데 90세까지 새벽 4시에 일어났습니다. 굉장합니다. 그 하루에 10시간 이상씩 설교를 하면서 그렇게 엄청나게 체력이 소모되는 그런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만 사용하셨나 그랬더니 브레이너드와 같이 한편 설교하고는 강대 아래 주저앉아서 한 사발씩 피를 쏟는 그런 피골이 상접한 사람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존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필립 브록스 라고 하는 사람은 하버드 대학에 설교자였는데 얼마나 얼굴이 잘 생겼는지 동리 사람이 설교 들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얼굴 좀 보려고 여자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사용하시는가 하면 또 저 같은 사람도 사용하십니다. 아! 그런데 그 대목에서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시는 원리는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사용하시는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많이 무너진 사람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은혜의 깊은 세계 속에서 자기가 허물어지고 자기가 정결하게 된 사람들, 패역을 고치고 부드러운 진흙과 같이 주님이 어떻게 빚으시든지 간에 아름답게 빚어져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놓일 수 있는 그런 순종하는 사람이 된 정결한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하시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패역을 고치고 오랜 동안의 불순종, 인간의 고집 이런 것들을 고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즐겨 사용하셔서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함께 손잡고 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애를 가리켜서 우리는 존귀한 생애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배불리 먹고 잘 산다고 해서 모두 행복한 것이 아니고 좋은 옷 입고 산다고 해서 모두 호사스러운 삶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이 진짜 의미 있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영원을 향해서 사는 인생이 되어야합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존귀하게 여기셔서 사용하시는 그런 인물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인생이라는 무대에 부름 받은 연극 배우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각본을 쓰시고 연출을 하시고 감독까지 하십니다. 한 역할씩 우리가 만약에 영화를 찍는다고 그러면 무얼 하고 싶습니까? 주인공 형제하고 싶습니까? 엑스트라 자매하고 싶습니까? 전편을 한없는 감동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그렇게 심금을 울리고, 용기를 주고, 삶에 깨달음을 주는 그런 주연배우로 사용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나기만 해도 모두 쓰러져 죽는 그 엑스트라가 되고 싶습니까? 길거리 지나가는 행인이 되고 싶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정말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존귀하게 쓰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두 되고싶어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패역을 고치는 사람들을 주님께서 고친 것만큼 귀하게 사용하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에 이제 인생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여러분들이 교회에 나오고 있는 그 자체가 그야말로 어메이징 그레이스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기에 있을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디 가서 무슨 사고를 치든지, 난리를 치든지 그럴 사람들인데 그 어떡하다가 변화를 받아서 그래도 꾸역꾸역 나와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해달라고, 수시로 그렇게 믿으려면 가라고 그래도 안 가고 있으면서 은혜생활을 합니다. 귀합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 고치고 그 정도로 순종했는데 하나님이 그만큼 사용하신다고 할 것 같으면 정말 하나님 앞에 더 많이 순종하고 더 많이 패역을 고치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더 존귀하게 사용하시겠는지 는 가슴 뛰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 다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패역을 고치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길로 들어섰으니 이제는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밖에는 내 인생에 참된 영광이 있을 수 없다. 그걸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패역을 고치는 이것을 선택 과목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누가 늘 반복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체험 속에서 살아갑니까? 누가 어제 맛본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에 만족하지 않고 오늘 다시 우리의 마음속에 생생하게 임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교통과 은혜의 감격을 누리며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속에서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자기의 잘못된 부분들을 발견하고 고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받아들여서 새로워지는 변화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그 사람들 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교제도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가 아침마다 새롭고 예수님을 믿으면 믿을수록 왜 예수님께서 나같이 쓸모 없는 인간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버리셨는지 실감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에 수많은 진리들이 구태의연해지고 진력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날마다 새롭게 다가와서 평생에 듣던 말씀인데도 또 듣고싶고 평생에 알던 하나님이심에도 오늘 뵙는 하나님이 어제의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느냐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그리고 말씀의 찬란한 빛 아래서 우리의 삶과 그리고 우리의 삶을 이어가게 만드는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면밀하게 관찰해서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시는 부분을 찾아내고 그리고 이런 패역을 간직하고 살기보다는 고침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 정말 온전해지기를 소원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미래형으로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해당 상황이 없다는 것입니다. 존귀하게 될 것이며, 지금 존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듣고있는 북 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세상 적으로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부강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는 이 패역이 가득 차고 주님을 믿는 형식은 남아있었지만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 앞에 깨트려진 그 은혜의 세계가 실종된 것입니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호세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누누이 상기시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젊은 시절에 어떻게 하나님과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광야의 길을 지나왔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이끌어냄을 당하여서 아무 것도 의지할 것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들어섰을 때 그들의 마음에는 오직 하나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를 호세아 선지자는 연애하던 때라고 묘사를 했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길 잃은 나그네와 같지 않았습니까? 버림받은 사람 같지 않았습니까? 물론 세상은 우리를 버리기도 했지만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못된 사람들 이였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우리가 다른 사람에 행복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습니까? 또 있었다고 하더라도 자기의 행복과 관련된 사람이나 관심이 있었지 나에게 원수를 갚는 사람들을 향해서라도 행복을 염려하는 그런 아가페 적인 마음이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를 누가 고칠 수 있었습니까? 그 못된 성격, 그리고 비뚤어진 성질 머리, 그리고 자기 중심적인 이 아집 이런 것들 덩어리 이였습니다. 여기 가서 치이고, 저기 가서 치이는 그런 종류의 삶을 저희들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날 복음의 빛이 우리에게 찬란하게 비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지 않을 수 없게 되기 그 직전에 우리의 마음속에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이 세상에 내가 붙들고 살아왔던 모든 것들이 나와는 관계가 없는, 그리고 나를 따돌린 그래서 나는 나그네와 같이 되어버린 사람이라고 하는 외로움에 대한 자각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 없이는 우리의 인생에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십자가를 붙드는 것입니다.
나는 길 잃은 나그네였네 죄 중에 헤매 이는데
사랑에 왕 내 목자 예수 나를 집으로 인도하네
그러니까 예수님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의 피할 바위요. 산성이요. 요새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 이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초기에 그랬던 것처럼 주님과의 깊은 연애에 빠져들지 않았습니까? 그 두려움은 변하여 기도가 되었고 전날의 한숨은 변하여 우리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아무도 우리를 사랑해주지를 않아도 주님 한 분이면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 것이라는 고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순간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것, 그래서 그 주님이 시시때때로 찾아오셔서 우리를 향한 자기의 사랑을 보이시는( ? ) 하나의 체험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 진정한 행복 이였습니다. 우리는 주님밖에 없는 것처럼 살았고 주님은 우리밖에 없는 것처럼 독점적인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스라엘도 한때 그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사랑을 모두 잃어 버렸고 그들은 다시 옛 패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보다는 자기의 고집대로 사는 것을 즐거워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었고 그리고 하나님보다는 자기의 힘을 의지하며 살았기 때문에 여호와보다는 눈에 보이는 왕을 의지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진리를 가르쳐 주는 선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에게 평안하다 평안하다고 말하는 거짓 선지자들에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살아가는 썩어빠진 종교생활로서 신앙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동안에 세상의 시야에서 볼 때는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이미 존귀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존귀함은 그들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을 때에 그들이 존귀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장면이 우리에게 감동이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정결한 자에게 주신다면 우리 중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약속하고 별로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정결하지 못하니까.
패역을 모두 고친 사람들에게 이 약속을 주신다면 우리는 그 약속 때문에 감동 받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는 패역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가운데 가장 타락한 시대, 그리고 피 절인 음성으로 외치는 온 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이 호세아 선지자의 고난으로 가득 찬 예언 선포조차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이 캄캄한 어두움과 불순종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당신의 백성들을 감람나무와 같이 존귀하게 해주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요즘 아이들은 안 그렇습니다. 만 저희 어렸을 때는 애들이 전쟁놀이를 그렇게 많이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할머니 살아 계셨을 때 늘 염려하셨습니다. ‘6.25 나기 직전에도 애들이 저렇게 나무로 칼 만들어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돌멩이 던지고 싸우더니 전쟁이 났는데 저거 또 저러니 저거 아무래도 전쟁이 날 징조가 아니고 뭐냐고’ 저녁 때 밥만 먹으면 애들이 새까맣게 나옵니다. 특히 여름이면 말할 것도 없이 나와 가지고 골목골목 몰려다니면서 넌 대대장 난 소대장 그리고 돌아다니면서 패거리가 되어서 싸우고 돌 던지고 그랬습니다. (예화) 어느 겨울에 어린애들이 모여서 쥐불놀이를 하면서 놀다가 한 아이가 똥 구덩이 에 빠진 이야기- 애들의 도움으로 건졌는데 악취에 모두 도망갔으나 그 애의 엄 마가 데리고 가서 씻기므로 어머니의 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
그게 부모입니다. 그 부모가 공부도 못하던 자식인데 똥 묻었으니까 버리자. 그렇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그 아이를 낳은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부모들도 그런데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어떻게 구해내셨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지만 여러분들을 구속하기 위해서는 아들을 찢어서 그 피를 발라서 여러분들을 구속해주셨습니다. 부모님의 은혜가 백골 난망이요 부모님의 은혜가 하해와 같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가슴을 파고드는 헤집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버려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를 주고 얻은 자녀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순종하고 패역하게 살아가는데도 하나님이 즉시 패기처분하지 않으시고 너무 아까워서 그래도 어떻게 두고 보면 쓸데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기대를 거시고 하다가 하다가 안 되니까 이 교회까지 한번 보내본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다른데 하도 안 고쳐지니까 여기서라도 좀 한번 고쳐보라고 그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는 말하자면 재생공장과 같은 곳입니다. 다 망가진 사람이 이곳으로 들어왔다가 여기서 잘 고쳐져 완전히 신제품이 되어 가지고 저 앞으로 내려가는, 그렇다고 해서 또 여기로 안 나가고 저기로 다 나가면 안 됩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교회 다니는 의무도 만약에 하나님 앞에 그렇게 망가진 자신을 고치는 노력이 없이 교회를 다니는 것은 이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쓸모 없는 사람으로 인생을 살다가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행복해진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난 예수님을 믿으면서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기 때문에 행복해진 사람들을 얼마나 봤는지 묻고싶습니다. 왜 우리가 이런 슬픈 질문들을 주고받아야 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누가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감격, 날마다 가까이 다가오셔서 우리를 복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런 것들에 늘 가슴 벅찬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게 매일 매일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죽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다시 살고 하나님의 진리를 통해서 자기의 패역과 더러움들을 고치고 새 삶을 살아가는 이 치료와 변화의 역사를 날마다 경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될 때에 이런 신앙의 감동과 은혜의 감격이 새로워지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진정한 희망이 어디에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목회를 하는 것이 힘들다거나 인생을 사는 것이 힘겹다. 이렇게 생각이 될 때에 주님이 이나마 예수님을 믿고 이나마 패역을 고쳤기 때문에 얼마나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존귀하게 해주셨는지를 생각할 때에 다시 새로운 힘이 납니다. 젊은 시절에 주님을 만나고 제가 변화되지 않았더라면 뭐 하고 있었겠습니까? 뭐 한껏 자기 원하는 데로 다 이루어졌다면 그래봐야 후진 지방 대학에서 영어나 가르치고 있는 그런 교수가 되었을 것입니다. 한 걸 음 더 나가서 소원대로 됐다고 그러면 글줄이나 몇 줄 써서 젊은이들 혼동시키는 그 이상한 글쓰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게 무슨 재미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냥 교만과 아집 덩어리로 예수 믿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좋은 대로 살다가 어느 날 비명횡사했을 것입니다. 그게 무슨 인생이냐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 앞에 고달프고 인생이 힘들어도 그래도 힘을 써서라도 뭔가 내가 소용이 된다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기쁩니까? 생각을 해보세요. 그렇지 않습니까?
어느 해인가 한번 견딜 수가 없는 것 이였습니다. 오라는 데는 많고, 무얼 해달라는 것은 많고, 요즘도 교회에 있으면 정신이 없습니다. 가만히 있는 것 같아도 전화통에 불이 납니다. 어떤 때는 막 짜증이 나고 특히 뭔가 어떻고, 부탁을 하고 그러면 아주 힘겹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언젠가 한번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은퇴한 목사님이 자기 친구를 찾아가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랬답니다.“여보게 나 설교 한번만 하게 해줘 응 제발 부탁이야 사례비는 안 줘도 좋아” 얼마나 쓰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노년이 외로웠으면 친구한테 찾아가서 사례금 안 줘도 좋으니까 나 설교 좀 한번 하게 해달라고 그렇게 눈물까지 흘리면서 애원을 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쓸모 있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매우 값지고 귀하게 생각하신다. 그것은 정말 행복한 것입니다.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지 모르는데 저는 가끔 그렇습니다. 이러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 도움이 되나. 지난주에도 그런 생각을 참 많이 하면서 낙담을 했는데 그러다가 어떤 사람이 와서 “아! 당신의 책이나를 어둠 속에서 구원해 주었다.” 라고 하든지 뭐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삶에 희망이 생깁니다. “어 그래도 아직 살아도 괜찮겠구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고 계시고 주님이 우리를 존귀하게 사용하시는 동안에는 우리는 소외감 같은 것 느끼지를 않습니다.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까짓 것 고난이 좀 있으면 어떻습니까? 좀 빈궁하게 살거나 남 보다 좀 짧게 인생을 살거나 다른 사람보다 예수님을 위해서 좀더 고생을 하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매우 귀하게 사용하셔서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아무 희망이 없고 이 세상에서 썩어질 것들을 구하다가 그것과 함께 인생에 막을 내릴 그런 비참한 인생들 이였는데 주님을 만 나서 우리의 패역을 고치고 우리 같은 사람을 위해서 생명 버려 구원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가슴에 새기며 우리가 주님모습 닮기 위해서 애쓰면서 살았더니 주님이 우리를 매우 귀하게 사용하셔서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어서 안 되는 꼭 필요한 사람, 그리고 하나님에게 있어서도 없어서는 안 될 매우 귀하고 소중한 사람으로 우리들이 다시 태어났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값지고 보람있는 인생이 되겠습니까?
더욱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인생은 단지 이 땅에 것들만을 위해서 사는 인생이 아니라 세상을 살면서도 영원을 잇대어서 사는 인생입니다. 힘들게 고생을 모두 하다가 죽음과 함께 모두 허망하게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땀과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섬겼던 우리의 삶이 영원한 상급으로 이어지고 그리고 영원한 세계에서 주님을 뵈올 때 우리에게 힘주시고 능력 주셔서 주님 위해서 살게 하신 하나님 찬송되는 제목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그런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패역을 고칠 가치가 있지 않느냐 이런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말 우리 자신이 고쳐지고 새사람이 되어서 일생 사는 동안 정말 보람있게 그리고 너무 존귀하고 귀하게 하나님의 집에 푸른 감람나무와 같이 언제나 우리를 소중한 눈빛으로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그윽하고 사랑으로 가득 찬 눈빛아래 살 것인가. 늘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과 원수 맺은 감정을 유지하면서 그렇게 쓸모 없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다가 인생을 끝마칠 것인가. 이것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패역을 고치지 않고 막 사는 것은 당장은 매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상기시키시는 것은 무엇을 뿌리던지 뿌린 대로 우리는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육체를 위해서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들을 거두고 그리고 성령을 위해서 심는 사람들은 거기로부터 영생에 열매를 거두게 된다는 이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은 무엇인가. 이렇게 휘몰리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리의 빛을 받고 그 진리의 말씀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소망 있는 사람들인지를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오. 우리도 아직 알지 못했던 우리의 마음의 죄악을 보이시고 우리의 살이나 뼈처럼 자연스럽게 우리의 인격과 내면의 세계 속에 녹아들어 와서 우리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그 패역을 주님의 말씀의 빛으로 보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쓸모 있는 존귀한 생애를 단 1년을 살다가 가더라도 쓸모 없는 생애를 살지 아니하고 존귀하고 쓸모 있는 생애를 살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등지고 편안하게 살기보다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들의 상처와 죄들이 드러나고 고침 바 되어서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이 좋아하시는 날 동안 여기에 살면서 우리 전부 주님의 손에 쓰임을 받고 말할 수 없이 귀한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는 존귀한 도구들로 우리의 인생을 살아서 우리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번영이 교회와 우리의 심령에 가득한 그런 사람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8. 패역을 고친 자의 그늘로 돌아옴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찌라(호14:6下-7上)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패역을 고침 받은 사람들에게 주실 축복을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앞에서는 주님께서 번영의 축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는 감람나무와 같이 존귀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 후에 오늘은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향기가 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잘 살펴보면 레바논이라는 말 밑에 백향목이라는 표시가 작은 글자로 되어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 부분이 안 나와있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레바논 같이 향기로울 것이며”라고 나옵니다. 5절에는 다시 ‘레바논’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레바논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며”하니까 성경을 번역하는 사람들이 레바논이 뿌리가 박힐 리가 있는가 하며 백향목이라는 말을 보충해서 집어넣었습니다. 그것은 일리가 있다고 봐줄 수 있는데 이 뒤편에 나오는 레바논 뒤에 백향목을 집어넣은 것은 우리가 쉽게 받아들이기가 힘들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레바논은 산지였는데 그 산지에는 특별히 백향목도 많이 나지만 향기로운 많은 향료들이 자생하고 있는 산지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의 사람들이 ‘레바논’하면 각종 향기가 나는 화초와 약초들이 많이 자라고 있는 아주 존귀한 산으로 사람들에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백향목이라는 말을 빼버리고 히브리어 성경에 나와있는 그대로 “레바논 같이 향기롭게 할 것이며”라고 표현을 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향기라고 하는 말씀이 백향목이라는 말 하나에 묶이는 것보다는 레바논의 광활한 산지 전체가 향기로운 산지라는 것과 연결을 시키면 의미가 훨씬 풍성해 지는 것을 발견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바로 이처럼 패역을 고치는 자기의 백성들을 향기로운 백성들이 되게 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향기를 말할 때 사도 바울이 고린도서에서 향기에 대해서 말한 것이 떠오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너희들은 믿는 자들에게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나 그리스도의 향기니 그 향기를 통해서 어떤 사람들은 심판에 이르고 어떤 사람들은 생명에 이른다”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의 문맥을 가지고 있는데 로마 시대에 개선 광경입니다. 로마의 군인들이 먼 나라에 가서 전쟁을 해서 이방 나라를 정복하고 승전가를 부르면서 로마로 돌아올 때 로마에는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자기 나라의 자랑스러운 군대들을 환영하기 위한 장엄한 환영식이 콜로세움에서 열리게 됩니다. 그 엄청난 경기장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서 열렬하게 환영하는 가운데 로마의 군인들이 전쟁을 지휘했던 장군부터 시작해서 그 장군의 지휘를 받으며 충성스럽게 싸웠던 군인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원형경기장 안으로 입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들어오는 뒤에는 그들이 사로잡아온 적국의 왕과 장군들, 끝까지 저항했던 군사들, 쓸모 있는 백성들이 줄줄이 끌려서 경기장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때 장엄한 팡파르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황제가 입장을 하고 큰 성화와 같은 곳에 향료가 부어지고 그것이 큰 연기를 구름처럼 내면서 경기장 전체에 타오릅니다. 거기에서 아주 향기로운 냄새가 온 경기장을 진동하는 것입니다. 그 향기는 곧 거기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에게 잠시 후 일어날 일을 알려주는데 한편으로는 싸움에서 이긴 로마의 군사들을 향한 시상식이요 또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운 로마 군대에 끝까지 대항하기 위해서 싸웠던 전범자들에 대한 처형식입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에 있었던 개선 행사의 배경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을 그 행사장에서 쓰여지는 향기에 비유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이 모인 곳을 지나가거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살아있을 때, 사람들이 그를 통해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믿게 되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알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대적하는 본성을 드러내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는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하나님 두기 싫어하는 본성을 드러냄으로 심판에 이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정체가 분명하고 향기로운 존재가 될 때에 그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주고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구원받게 하며 또 한편으로는 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마음에 있는 악을 드러내게 하심으로 하나님 앞에 징벌 받게 만드는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진정으로 패역을 고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면 주님께서 그들을 감화력이 있는 향기로운 백성들로 만들어 주실 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일이 너무나 놀랍고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는 일임을 압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복음은 단지 다른 방법보다는 우리가 명백하게 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를 위해 다시 사셔야 되셨는지를 말로 가르쳐 주는 것보다 훌륭한 방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말로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이것이 매우 귀한 방법이고 이 방법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굳게 신뢰하지만, 만약에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이것이 영화로 말하자면 외국 영화의 화면 같다고 한다면 우리의 아름답고 감화력이 있는 신앙적인 인격과 삶은 곧 그 아름다운 화면 밑에 쓰여진 자막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전하는 그 복음을 듣고 사람들이 깨달았을 때 과연 우리들이 그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살아가는 감화력이 있는 인격과 삶의 향기를 그들에게 보여주면 그들은 자신에게 전해준 이 복음이 확실히 믿을만한 복음이라는 사실을 굳게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의 인격과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전하고 있는 복음의 진리를 옳다고 인치는 매우 중요한 방법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신자는 있으나 성도는 없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단지 “아멘”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거룩해지는 사람들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기 전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저는 정말 밥맛없는 존재들로 생각했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누구라고 말하는지를 보고 얻은 인상이 아니라 -예수 안 믿을 때는 시간이 없어서 성경 읽을 새가 없으니까- 눈에 드러난 모습을 보면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를 비로소 터득하게 되는데, 제 눈에 비친 그리스도인은 오래 예수 믿은 사람일수록 문제가 많은 사람으로 비추어졌습니다.
싸움 잘하고 야비하고 쉽게 얘기하면 호탕하지 않았습니다. 앞에서는 악수하고 뒤에는 송곳 하나 감추고 돌아가며, 앞에서는 이 말하고 뒤에서는 저 말하는 표리부동 하는 -안 믿는 사람들은 대판거리 싸우다가도 가서 한잔 먹고 형님 아우 하면 끝나는데- 쩨쩨하고 따지기 좋아하는 것이 제가 가지고 있는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인상이었습니다. 요즘도 안 믿는 사람 붙들고 물어보면 제가 가지고 있는 것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조국의 교회가 많이 망가져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일단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받는 인격적이고 삶에 의한 감화가 없으면 그들이 뭘 믿든지 그 사람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가끔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너처럼 될까봐 교회에 안 간다” 어느덧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도 우리의 인격과 삶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명제를 만들어서 쉽게 받아들이고 쉽게 안 변한다는 사실을 깊이 간직합니다. 다른 것은 가르쳐줘도 잘 잊어버리는데 그것은 안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자기를 거기에 맞추면서 변하지 않는 자신을 위로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국 오늘 성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패역한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화) 친척 중 어떤 이가 시집가서 배추를 절이지 않고 김치를 담은 이야기.
교회에 와서 은혜를 받고 패역을 고칠 줄 모르는 사람들은 꼭 절이지 않은 배추 같습니다. 늘 잘 부러지고 양념을 해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가끔 와서 눈물로 양념을 하고 콧물로 양념을 하고 가끔 말씀에도 은혜를 받는 것 같고 이것저것 섬기면서 거드는 것 같기는 한데 존재 그 자체는 제대로 된 김치가 안된 것입니다.
그러나 배추를 밭에서 뽑아서 반씩 잘라서 소금물에 집어넣었다가 다음날 꺼내보십시오 그러면 보들보들해집니다. 무슨 보쌈을 싸든지 착착 감깁니다. 우리의 인격도 마찬가지입니다. 패역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패역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가 매우 힘들고 거역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사람들입니다. 살아가는 삶의 발자취 자체가 불순종입니다. 패역을 만드는 것 자체가 불순종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정말 오래 예수를 믿지 않으면 쉽게 인간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맞는 이야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크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큰 은혜를 주셔도 그 은혜를 거스르며 살려고 하는 우리의 본성이 얼마나 악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사실이고 우리의 선입견이 일리는 있지만 성경을 똑바로 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 제대로 알게 되면 그것이 꼭 맞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는 종종 20년을 예수 믿은 사람보다도 2년을 예수 믿었는데 훨씬 그 인격에 감화력 있는 향기로운 사람으로 변하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세월이 얼마나 많이 흘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패역을 많이 고치고 은혜의 비를 많이 맞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는데 한참 맞아야만 옷이 젖습니다. 그러나 장대처럼 퍼 붇는 소낙비는 잠깐만 나갔다 들어와도 온몸이 물에 흠뻑 젖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다운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할 때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보니까 수많은 패역들이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신앙을 고백하고 신자는 되었는지 모르지만 마음속에 여전히 뿌리 깊고 강한 칡뿌리 같은 패역들이 있어서 좀처럼 잘라지지 않는 겁니다. 질기디 질긴 생명력으로 뻗어나갑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신앙생활 하면서도 그 패역을 고치지 못해서 그 패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순종하며 삽니다. 불순종하면서 살면 그나마 있던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고 친밀함이 사라지면서 그 불순종은 기존의 마음에 있던 패역을 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패역이 더 질기고 뿌리 깊어집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더 순종할 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자신이 불순종을 택했는데 세월이 흐르고 나면 그 불순종이 쌓여서 패역이 되고 처음에는 자기가 불순종하게 되지만 이번에는 패역이 자기를 선택해서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도록 만드는 놀라운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치지를 않으면 이런 상태로 계속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나마 은혜의 불이 완전히 꺼지지 않아서 패역이 남아있지만 그래도 와서 다시 패역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눈물로 회개하고 내일은 실패할 지라도 오늘이라도 그 패역을 거슬려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몸부림을 치고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죄의 강력한 세력과 싸우고 싶다라고 하는 감동을 그래도 한 번씩이라도 받고 회개하고 주님을 붙들면 더 자라지는 않고 자란다고 하더라도 천천히 자라거나 아니면 조금씩 깎여져 나가는데 아예 그것도 사라진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는 급속하게 우리의 패역이 강하게 자라납니다.
우리 속에서 그렇게 패역이 강하게 자라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점점 굳은 땅이 됩니다. 매우 굳은 땅이 되고 그 굳은 땅 속에서 이 패역의 뿌리는 훌륭하게 자라갑니다. 못된 식물들이 조악한 땅에서 잘 자랍니다. 그러나 값지고 귀한 식물들은 부드러운 밭에서 잘 자라는 것입니다. 독버섯이나 칡뿌리가 자라는 것을 보십시오. 칡뿌리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 질긴 생명력을 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말씀을 듣고 패역을 고치고 우리의 죄를 드러내면서 하나님 앞에 근본적으로 치료되어야 할 어떤 것들을 지적 받을 때 그 마음이 더 강퍅해 지고 더 하나님의 복음을 향해서 대적합니다. 그러면서 심판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패역을 고치시면 고치실수록 우리의 마음 밭이 매우 부드러워져서 무슨 하나님의 말씀을 심든지 잘 심겨집니다. 그래서 자기가 부서진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이 잘 자랍니다. 자기 아집이 깨어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 안에서 훌륭하게 성장해 갑니다. 자기 깨어짐이 없는 사람들은 성장이라는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냥 죽은 시체에 화장품을 바르거나 아니면 죽은 나무에 가짜 열매를 달아 놓는 것 같은 그런 신앙생활이지 근본적으로 자기가 죽지 않으니까 다시 태어나는 것도 없고 성장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그렇게 자기가 죽고 다시 은혜 안에서 태어나는 변화가 반복될 때에 마음의 밭은 매우 부드러워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잘 심겨집니다. 그러나 반대로 세상에 있는 것들은 안 심겨집니다. 그래서 세상에 있는 유혹이나 세상에 있는 사랑에 대해서는 딱딱한 밭이 되어서 사단이 와서 아무리 세상의 사랑 같은 것들을 심어도 가끔 유혹은 받지만 금방 날아가 버립니다. 강퍅한 사람들의 마음에 말씀이 안 심겨지는 것같이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패역을 고친 사람들에게는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잘 심겨집니다. 무슨 말씀을 뿌리든지 그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뻗어나가면서 결실하기 시작하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패역을 고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변화시켜 나가시는 방법입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말합니다. 패역을 고치는 사람들을 레바논, 그 진귀한 향품들이 자라고 백향목이 자라서 향기 진동하는 산과 같이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말씀의 깊은 은혜를 받으면서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이렇게 어린아이와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우리 속에 있는 패역을 고치고자 하는 말씀의 손길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우리를 고치게 허락할 때 우리는 놀라운 속도로 새 사람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저는 많이 만나지는 못했지만 ‘정말 저 사람은 예수를 믿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구나’ 또 똑같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인생을 살아왔는데 어느 기간동안에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인격과 삶의 놀라운 변화를 보게 만들어주는 그런 지체들을 종종 만납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를 패역 가운데서 고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더 몹쓸 정도로 망가진 사람으로서 일생을 불행하게 살수도 있고, 오랜 세월 거쳐서 거의 고쳐지지 않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짧은 시간 내에 빨리 패역을 고쳐서 정말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이러한 번영의 축복, 존귀의 은혜, 그리고 이런 감화의 특별한 은총을 입을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한 패역에서 고침을 받지 못하도록 만들어주는 가장 커다란 문제는 자기 아집과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강력한 집착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 자기의 자랑거리를 누구에게도 주지 않으려고 하는 자기 집착, 그리고 교만 이런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 패역을 고침 받지 못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손길을 대적하는 요소들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 우리의 정욕이나 우리의 아집에 대한 강한 집착, 이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치시고자 하는 손길을 거절합니다만은 그러나 우리들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하나님 앞에 패역한 삶을 살아오면서 우리의 패역이 이미 우리 자신의 일부분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우리의 살이나 뼈나 우리의 장기처럼 일부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말씀으로 우리의 그 패역을 고치기 위해서 하나님이 칼을 대실 때 우리는 고통과 통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파멸로 몰아가고 싶으면 항상 여러분들을 칭찬해주고 듣기 좋은 소리만 골라하는 교회를 다니면 틀림없이 파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떠한 감격으로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았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이후에 여러분들이 그런 식으로 목양을 받으면서 신앙생활 하면 여러분들은 구원받았지만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땔감과 같은 존재들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끊임없이 거룩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패역을 고치는 그 손길을 저항하고 있는 여러분 안에 있는 숨은 요소들을 말씀을 통해서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집착, 그리고 자기 교만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치고자 하시는 은혜의 손길을 거절하고 있지만 여러분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과 함께 화목하게 살아가는 그 생활 이외에 다른 곳에서는 행복할 수 없도록 그렇게 이미 만들어진 존재들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예화) 윈도우 98에다 글쓰는 작업을 한 다음에 486컴퓨터 한글 2.0 버전에다 띄우려고 하면 뜨지 않습니다. 디스켓은 똑같고 사람이 글을 쓴 내용도 똑같은데 이미 그 컴퓨터에서 작정될 때 프로그램 자체가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바뀌어서 인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당신 나라의 백성으로 삼는 그 순간에 우리가 무엇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지 새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예전에는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 갈채를 받으며 자기 멋대로 사는 것에서 행복을 느꼈습니다. 돈 많고 여유롭게 살아가고 그 물질로 사람들을 지배하며 살아가는 재미를 느끼면 세상이 낙원과 같고 더 필요한 것이 없을 정도로 행복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는 우리의 행복을 그런 것들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고 그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시고 주님이 우리와 가까이 계셔서 우리를 향기로운 존재로 만드시는 주님의 손길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 아니면 우리는 행복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있어도 주님이 거기 계시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요, 아무 것도 없어도 주님이 우리를 인정해 주셔서 우리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면 우리는 모든 것들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이런 사람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아무리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패역을 고치고 순종하며 살지 못하게 하는 그런 악한 요소들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생각일 뿐이지 실제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먼저 너희는 하나님 앞에 말씀을 가지고 돌아오고 돌아온 너희들은 진심으로 너희 마음속에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하나님을 향한 패역한 죄의 경향성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아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번성하게 하겠고, 너희를 존귀하게 하겠으며, 나아가서 내가 너희들을 감화력이 있는 존재들로 만들겠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살려고 하는 패역을 보물처럼 귀하게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고치는 아픔은 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패역을 안고 살아가는 마지막은 멸망과 파멸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잠시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으로 우리를 고치는 패역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칼에 수술 당하는 것 같은 고통을 맛본 사람은 고통은 잠시이지만 이어서 고통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게 될 것이며 고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번영과 존귀의 축복을 누려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이 세상에 두신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시간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시면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를 고쳐주시기를 원한다고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병에 걸려서 누워있는 원자력병원에 여러 번 간 적이 있습니다. 암 말기에 들어간 사람들을 모아놓은 병실에 가 보신 적이 있습니까? 복부에 물이 차서 배가 남산만큼 올라오고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기기 시작하는 병실에 들어설 때 그 환자들의 절망적인 눈빛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들의 소원이 무엇일까요? 그 중의 한사람이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건넸습니다. “목사님, 저는 낫고 싶습니다. 이 재산도 내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지위도 병을 고치기 위해서 쓰여질 수 있다면 다 반납할 용의가 있습니다. 시장에서 리어카를 끌고 지게를 져도 건강하게 1년만 살다가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그런 치명적인 패역들을 가지고 이 교회에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이 앉아있는 그 자리는 바로 그 환자들이 누워있는 병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회복되고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시간만 보내면서 그 패역의 암덩어리를 키워서 죽음으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습니다. 목회자는 눈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창과 칼은 없지만 그 진리의 말씀으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그들을 고치는 인정 많은 의사와 같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패역을 고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빗줄기 아래로 들어오는 성도들을 만나는 것은 얼마나 커다란 행복입니까?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혜로 우리를 고쳐서 새 사람을 만드심으로 우리를 지극히 복되게 하시고 우리의 존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와는 상관이 없이, 어두움 속에서 고통 하면서도 패역을 고치지 않으므로 죽음의 자리로 가고있는 성도들을 바라보는 것은 목회자의 마음에 한없는 고통이요 눈물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목회자의 마음에 피가 흐르게 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목회자는 여러분들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위해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존재하고 있는 성도들 가운데 이웃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아들의 생명을 준 사람들이 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여러분도 줄 수 없는 아들의 생명을 주셔서 여러분들을 죄 가운데서 구원해내시고 그 일을 위해서 자기 아들로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 앞에 형벌 받게 만드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건져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오랫동안 우리의 마음속에 숙명적으로 간직하며 살아왔던 우리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이 어두운 패역의 암덩어리들을 의로운 주님의 손길로 고쳐서 새사람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을 믿은 자의 진정한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미쳐 여러분들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고 여러분들이 벌린 그 은혜로운 신앙의 팔을 통해서 그 영혼들이 이끌려 그리스도 예수의 품에 안기는 축복들을 주는 도구가 되게 하시려고 여러분들을 그렇게 고치시고 싶어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이런 생각을 입증하듯이 오늘 성경은 “내가 그들을 이끌어 그 그늘 아래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그 그늘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6절에서 나왔던 바로 그 가지가 뻗어나가서 그늘을 이룬 포도나무 번성한 가지의 그늘인 것입니다. 주렁주렁 탐스러운 포도 열매가 가득 열려서 음료와 식량의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고 내리쪼이는 태양의 볕을 차단해주어서 시원하고 쉴만한 그늘을 만들어준 그 포도나무 번영의 그늘 아래로 그 사람들을 데려오게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정복해 나가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몇 평 안되는 땅문서를 쥐고 있던 사람들은 육체의 죽음과 함께 그 땅문서가 휴지로 변할지 모르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이러한 인격과 삶의 감화를 통해서 세상을 정복해간 사람들의 땅은 영원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여러분들을 정복하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이 시간에도 어떻게 그분이 선교지를 정복해 나가시는지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흔히 사람들이 가지고 다니는 단검 하나 차지 않고 전대 하나 옆구리에 끼지 않은 채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단벌 옷에 언제나 궁핍한 모습으로 이 세상을 가난한 자로 사셨으나 수많은 왕들이 그 가난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정복당했고 이 세상의 화려한 권세를 가진 수많은 선생들이 시골 청년처럼 보이는 나사렛 예수 앞에 정복당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분에게 정복되어서 오늘 어찌하든지 주를 위해 살고 싶어서 여기 있는 것입니다. 칼 한 자루 창 한 개 없으셨고 돈 한푼 없으셨지만 우리는 그분이 가지신 칼이나 창에 굴복한 것도 아니고 그분이 가지고 계신 돈이나 명예에 굴복한 것도 아닙니다. 그분의 몸은 허름한 옷에 둘러싸였으나 그것은 마치 질그릇에 담긴 보화와 같았으며 그분의 외모는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와 같아서 우리가 흠모할만한 아무런 아름다운 것이 없는 것 같았으나 우리가 믿음의 눈을 갖는 그 순간 아무 것도 없이 연한 순과 같은 그분이 만유의 주, 만왕의 왕, 우리의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그분의 인격과 삶으로부터 풍겨 나오는 향기 때문에 창칼 하나에 위협받지 않고서도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의 노예로 그분을 위해서 살아가기로 다짐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매순간 주님의 이러한 인격과 아무리 향기를 맡아도 다함이 없는 그분의 삶 속에서 우러나오는 향기 때문에 날마다 우리가 예수 죽인 것을 기억하고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 그 좋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것밖에 다른 것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2천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이 땅에 사셨던 그분의 삶의 향기는 성경을 펼치고 성경에 관한 증언을 듣는 우리의 마음속에 실제로 우리의 두 눈으로 보는 것 못지 않게 감화가 전해져 옵니다. 성경을 펼 때마다 묻어 나오는 그리스도 예수의 고매한 인격과 그분의 삶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향기는 바로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가 패역을 고치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감으로 갖게 하시고 싶어하시는 그 향기입니다.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주님은 우리를 끊임없이 이 망가진 세상을 고치는 도구, 그리고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해서 부요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가난해졌는데도 끊임없이 주님을 등지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어두움의 자식들을 치료하고 싶어서 우리를 도구로 쓰시고 싶어하십니다. 그러나 패역이 고쳐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손에 붙잡힌 이런 아름다운 도구가 되지 못하고 아무 가치도 없는 쓸모 없는 것들에 연연해하며 거기에 매달리며 우리의 인생을 허비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정복하신 방식을 기억해 보십시오. 총칼 없어도 우리는 그분의 삶과 인격에서 흘러나오는 그 향기 때문에 그분이 그분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분을 알게 되었고 그분이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의 패역을 고쳐서 당신이 우리 속에 계심으로 이제는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향기를 드러내고 싶어하시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기억하며 매 순간 십자가 앞으로 나오기를 원하고 우리가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우리는 죽어도 우리 안에 예수께서 사시기를 원하는 소망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를 지체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고쳐질 수 있는 수많은 기회들을 얼마나 잃어버렸습니까? 아까운 세월들은 흘러가고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을 날들은 얼마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직까지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있는 우리의 가족들, 스치며 만날 때마다 복음의 부담을 떨쳐버릴 수 없는 그 수많은 영혼들의 파리한 얼굴들이 사실은 우리들이 더 패역을 고치고 주님을 닮았더라면 그래서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가 흘러나와서 그들에게 주님이 누구 시고 하나님의 진실한 백성들의 마지막 행복이 무엇인지를 웅변할 수 있었더라면 그들이 혹시 오늘 우리와 함께 눈물을 흘리며 살아 계신 하나님이 자신들을 구원하신 은혜를 찬송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 파리한 영혼들을 거두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 속에서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도구로 우리와 함께 손잡고 살아갈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기 때문에 고쳐지지 않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 앞에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우리 개인의 삶 속에서 먼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패역을 고치고 우리를 번영케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보면서 곤고한 영혼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축복들이 있기를 원합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이런 일들이 교회적으로도 적용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생명보다 더 사랑하던 이전의 패역을 버리고 십자가 그 아래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 흘리신 보혈의 피를 맞으며 주께서 우리를 위해 버리신 것을 기억하며 우리가 주를 위해서 무엇을 아낄 것이 있는지를 다시 생각하고 주님을 위해서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패역을 고치시려는 주님의 그 손길을 받아들여야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여러분들을 압니다. 여러분들 중 어떤 사람들은 지금 하는 이야기와 전혀 상관이 없지만 여러분들 중의 대부분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많은 것들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저도 많이 버렸습니다.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좋은 평판을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버렸고, 성공이 보장된 장래를 버리고 가시밭길과 같은 헌신의 길로 들어서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진리 가운데 살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는 것을 진리를 버리고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스타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종종 저는 여러분들이 살아온 인생의 과거를 들으면서 마음속에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저가 이제껏 걸어온 신앙의 길은 수없이 버린 버림의 길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버린 것이 보람있게 하시옵소서”라고 말입니다. 더 귀한 것도 버렸습니다. 그리고 더 사랑하던 것도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주님이 우리가 이미 버린 생명이나 재물도 아니고 우리가 가지고 있어도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는 패역의 덩어리들을 버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패역을 그렇게 고쳐서 우리의 존재 그 자체가 향기로운 화초가 되고 그리고 아름다운 냄새를 발하는 약초가 되어서, 교회 이 자체가 진귀한 약초와 향료들이, 백향목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고귀한 바벨론 산지와 같이 되어서 그 산지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향기를 맡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그 포도나무의 그늘 아래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저 햇빛 심히 쪼이고 심령이 심히 곤하여 갈 곳 없이 쓰러진 무리들이 가득한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우리들이 만들어주는 그 아름다운 포도나무 그늘은 그들을 건지기에 유일한 피난처가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그런 삶을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셔서 오늘도 지치지 않는 열심으로 고쳐지지 않는 우리를 고치시고자 여러분들을 여기에 세워두신 것입니다.
9. 제2의 이스라엘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저희는 곡식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같이 되리라(호14:7下)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오래된 패역을 고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번성케 하시고 존귀하게 하시고 감화력이 있는 백성들로 만드셔서 또 그들 이외에 아직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않은 백성들, 나가서는 더 많은 이방의 백성들까지 그 이스라엘의 그늘 아래로 돌아오게 될 것을 오늘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이 읽은 이 7절은 전체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라 처음 하나님께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다시 돌아오게 된 다른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제2의 축복과 번영을 말하고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가 곡식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같이 꽃이 필 것이며 또 레바논의 포도주와 같이 되리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곡식같이 소성할 것이며” 성경을 잘 보면 작은 글씨로 써 있는데 이것은 원래의 성경에는 없는 말인데 아마 이렇게 보충을 해서 번역을 해야지 뜻이 통할 것이다. 이렇게 번역자의 견해를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이 부분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곡식을 소성” ‘리바이블’ 죽었던 곡식을 살아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죽었던 곡식들을 살아나게 할 것이며 포도나무같이 꽃이 필 것이며 또 레바논의 포도주와 같이 되리라”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저희는 누구일까요? 저희는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패역을 고친 이스라엘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 또 다른 백성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곡식을 소성케 한다. 라는 말씀입니다.
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이 고대사회에서는 전쟁에 대부분의 원인은 먹고사는 문제였습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2차대전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먹는 문제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열방들이 자기네들이 만든 공업이 발달해서 만든 상품을 시장에다 갖다 팔아먹고 거기서 돈을 벌어서 잘살고 싶은데 사줄 사람이 없으니까 식민지를 만들어서 거기에다가 자기네 물건들을 갖다가 팔아먹는 것입니다. 나중에 자기도 그런 시장을 얻고싶어하던 일본이나 독일 이태리 같은 나라들은 눈을 들어서 사면을 두루 보니 이미 열방들이 모두 먹어버린 뒤였습니다. 자기네도 갖고싶으니까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고대에서는 이것보다도 더 전쟁이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교로운 일인지도 모르지만 히브리어 말로 떡이라는 것을 ‘레헴’이라는 단어인데 전쟁이라는 단어는 ‘밀하마’ 라는 단어입니다. 레헴과 밀하마 라는 이 두 단어는 어근이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미 옛날서부터 먹는 것과 전쟁은 매우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 여러분들은 블레셋이 매우 자주 이스라엘을 침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통가운데 몰아넣는 사건들을 여러 번 보셨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그렇게 자주 침공한 이유는 바로 먹는 것 때문에 추수하는 곡식을 탈취하려고 침공한 것입니다. 모든 전쟁이 그렇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곡식이라고 하는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뿐만 아니라 고대사회에 이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아주 굉장히 뼈에 사무치는 그런 단어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그 곡식을 소성시킬 것이며, 소성하게 할 것이며’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한번 조용히 묵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비롯해서 한 나라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진노를 사게 될 때에 주님이 자주 베푸시는 그 심판이 무엇 이였습니까? 대표적인 심판이 세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전쟁이고, 또 하나는 질병이고, 또 하나는 기근 이였습니다. 땅에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복되게 살아가면 그 땅이 축복을 받고 땅에 사는 사람이 파괴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면 주님이 그 징벌로서 이 땅에 기근을 내리십니다.
여러 해 전에 언제 이상 기후가 찾아왔습니다. 우리 나라에 큰 흉년이 든 때가 있었습니다. 추수할 때가 됐는데 이상 기온이 찾아와서 날이 춥고 햇볕이 나지 않아서 곡식이 여물지를 않았습니다. 추수할 때가 됐는데 눌러보니까 곡식의 알맹이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얀 물이 죽죽 나오는 것 이였습니다. 모두 쭉정이인 그 밭을 보면서 농부가 그 논둑에 앉아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장면을 카메라가 담았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끝없이 펼쳐진 넓은 논밭에 기근과 한발이 들어서 모두 땅이 갈라지고 그나마 살아남은 곡식들이 모두 알곡이 없는 쭉정이가 되어버리고 그나마 그래도 조금이라도 알곡이 맺혀있는 것들은 깜부기의 재앙이 와서 모두 다 벌레가 먹고 새까맣게 깜부기가 쓸었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몇 년을 무엇을 먹고 살 것입니까? 이것은 오늘같이 돈만 들고 아무 곳이나 가면 먹을 것이 있는 현대사회에서는 가슴에 와 닿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하는 이 말씀은 이 호세아 시대 때 살고있었던 모두 이스라엘을 비롯한 다른 모든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뼈 속 깊이 와 닿는 말씀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그러면 처참하게 황량하게 버려진 논과 밭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누런 곡식이 황금물결을 치듯이 하늘을 맞다 듯이 넓은 평야에 가득하고 그리고 농부들이 즐겁게 땀을 흘리면서 노래를 부르며 그 풍년든 논과 밭에서 곡식들을 거두어들이는 광경을 아까 말씀드린 그 광경과 대조해서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비교될 수 있는 두 장면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라고 할 것 같으면 그 가지 아래로 들어온 남은 이스라엘 백성과 열방의 모든 백성들이 그렇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이 땅에 가득했던 재앙들이 이번에는 아무리 쟁기와 호미를 가지고 몸부림치며 논과 밭을 일구어도 곡식을 내지 않던 그 땅이 변하여 기름진 땅이 되고 아름다운 수확을 풍성히 거둘 수 있는 그러한 들판이 될 것을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그렇게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 때문에 이 땅에 있는 곡식들이 다시 소성할 것임을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 걸 음 더 나가서 포도나무와 같이 꽃이 핍니다. 식물의 모든 이치가 그러하듯이 꽃이 활짝 피어야만 아름다운 열매가 맺게 되어 있습니다. 꽃이 활짝 피어서 그 과수원에 혹은 포도 원에 향기 진동하면 그러면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풍성한 수확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한 걸 음 더 나가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꽃이 가득 피어서 아름다운 동산으로 만드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아름다운 동산에서 꽃을 통해서 결실 하게 하셔서 큰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달린 아름다운 수확의 계절이 오게 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황무지와 같은 곳에 포도원이 들어서고 거기에 꽃이 활짝 피어서 향기가 진동하는 아름다운 동산으로 변하게되는 광경을 생각해보십시오. 비록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짐승과 같은 인간들 이였지만 주님을 알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런 놀라운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로 하여금 이렇게 아름답게 꽃피는 동산과 같이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아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올 때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셨던 것과 똑같은 은혜를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돌아온 이스라엘의 남은 백성과 열방의 백성과 똑같이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7절은 선교 적인 구도에서도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걸 음 더 나가서 꽃이 피면서 뻗어 나가는 이 포도나무가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또 다른 그늘을 만들 것이고 거기에 맺힌 값진 포도송이들은 그 포도 원을 더욱 귀하게 만들 것이며 그 그늘 아래로 또 다른 제3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오게 만들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황무지와 같던 땅이 결실과 풍요로움으로 가득 찬 새 땅으로 변화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서 선교가 되어 가는 광경이고 이 땅에 황폐한 인간의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어 가는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이런 놀라운 일들이 어떻게 일어날 것이라고 호세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있습니까? 처음 이 호세아에 메시지를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말씀을 가지고 회개하며 돌아오고 자기의 패역을 고치고 주님의 사랑을 받는 주님 앞에 즐거움을 드리는 백성이 될 때에 그때에 하나님께서 그 작은 백성들을 통해서 또 다른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그늘로 부르고 그들을 통해서 또 다시 열방에 주님을 모르는 백성들을 불러들여서 그 하나님의 은혜의 그늘 아래서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전에는 짐승과 같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던 그런 인간들을 주님의 그 은혜로 변화시키시고 다시 그들을 십자가에 은혜로 치료하고 마음깊이 심겨져있던 그 하나님을 향한 배신과 반역의 패역한 뿌리들을 은혜 속에서 살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속적으로 그들을 고쳐서 그래서 또 다시 제3, 제4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되어서 아직까지도 주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황폐한 이 땅, 주님을 대적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기근과 고통이 가득한 황폐한 땅, 다시금 하나님의 축복과 생명이 깃들게 만들어주는 도구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한 백성으로 말미암아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이 처음 이스라엘 백성 되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실 뿐만 아니라 부르신 그 후에는 우리의 패역을 고치기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피눈물 나는 노력과 목숨을 걸고 거기에 반응하면서 주님을 믿기는 하지만 더 이상 자기의 패역을 고치지 않으려고 하는 우리의 처절한 불순종이 싸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에 확실하게 주님을 잘 믿으면 우리의 인생을 사는데 없어서는 안될 아니 없어서는 안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 없이는 우리의 인생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지만 우리가 똑바로 제대로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을 사는데 신앙이 도움이 별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부인이 알콜 중독의 남편과의 삶의 이야기. 집안도 좋고 허우대도 멀쩡한 남자를 만나 결혼 생활을 하는데 남편이 술만 먹으면 구타를 심하게 하는데 애들 까지 때리며 바람까지 피면서 고통을 주는데 부인의 마음에 한이 맺혀 자는 남편 을 죽여버리려고 생각한 가운데 주님을 만나서 변화가 되어 남편의 영혼을 불쌍 히 여기며 기도하면서 다른 여자와 바람을 펴서 상대방 여자들이 남편으로부터 상처를 받으면 그들을 보듬어 안고 눈물을 흘리며 위로를 하면서 남자 고멜과 같 은 남편을 여자 호세아가 되어서 사랑을 베푸는 그런 일이 되니까 시부모님과 형 제들 주위에 모든 사람들이 이 부인의 모습을 보고 모두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 게 되었다는 이야기.
똑같은 공식입니다. 지금도 이런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목회를 하면서 지금 말씀드린 가정과 유사한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많이 찾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처럼 간증을 만들어낸 훌륭한 승리를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결국은 자신이 고쳐지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고 깨트려질 수밖에 없는 가정이 결국은 깨트려지고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주위에 사람들을 결국 불행으로 몰아 가는 사람들을 봅니다. 은혜를 많이 찾지만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하면 자기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고쳐지기를 견디지를 못하고 뛰쳐나가는 것입니다.
이 광야 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에
주 십자가에 그늘에 내 쉴 곳 찾았네
주님의 사랑을 몰랐을 때는 몰랐는데 주님의 사랑이 정말 좋은 것을 알고 그분의 사랑의 품안에서 즐거이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그분과 교제를 누리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깨닫고 난 후에는 주님 없이 살았던 날이 진저리 쳐지도록 끔찍하지 않습니까?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다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지금 우리의 패역 때문에 아직 우리의 그늘 아래로 돌아와서 주님의 번영과 준비케 하시는 복락을 누리지 못하는 광야와 같은 세상에 유리 하는 수많은 우리의 가족들과 그리고 우리의 이웃들이 바로 우리와 똑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고쳐진 사람이 되느냐. 그것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과장해서 표현하면 전 세계의 문제입니다. 왜 그렇게 고쳐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이고 그 교회에 하나님께서 패역을 고친 자에게 주시는 복을 주시면 그 복이 넘칠 때 둑이 터지듯이 죄가 밀려와서 불행하게 되고 황폐하게 된 이 세상이 이제는 교회의 둑이 터지면서 그 은혜의 물이 이 세상을 향해 막을 수 없는 물결이 되어서 흘러가서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모두 덮어 황폐한 땅에 곡식이 맺게 하고 가시나무 덤불 가득해서 까마귀 밖에 날아와서 우지직고 가지 않는 그 처참한 땅에 풀 돋고, 꽃피고, 가지열매 뻗어서 아름다운 결실로 가득 찬 그런 낙원이 되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패역을 고치고 진실하고 뼈 속 깊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얼굴만이 아니라 담배피지 않는 입이나, 술 마시지 않는 혀만이 아니라 그 예수의 정신이 우리의 살갗을 뚫고, 우리의 마음을 뚫고, 깊이 우리의 뼈 속에까지 배여서 신자이되 진실 된 신자, 우리 입술에만 예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뼈 속 깊이 사무치는 예수님이 계셔서 그렇게 참으로 변화된 하나님의 백성이 될 때에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질 그 아름다운 복락원에 세상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주로 말미암아 낙원을 잃어버린 사람들, 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주의 참 사랑에서 멀리 떠났기 때문에 한없이 불행해지고 불행해졌으면서도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의 의로움을 고칠 수 없는 그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 우리를 통해서 흘러 들어가는 주님의 은혜의 물에 고쳐진 사람들이 되어서 온 땅 가득히 주님을 향한 찬송이 메아리치는 세상이 우리 앞에 펼쳐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정도의 축복이 약속되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즐겁게 주님의 말씀에 칼 앞에 나와서 말씀으로 우리를 고치시고 주의 진리를 따라 순종하며 사는 백성들로 새롭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릴 만 하지 않습니까? 오늘도 주님은 여러분들을 통해서 그런 일들을 이루는 첫 번째 이스라엘 백성들 되게 하시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10. 패역을 고친 자의 선언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찌라 내가 저를 돌아 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호14:8)
여기서 호세아 선지자는 패역을 고치는 하나님의 마지막에 대해서 장엄하게 설명함으로써 이 메시지를 사실상 끝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가지고 당신에게 돌아와 참회하는 이스라엘에게 저희를 용서하시고 즐겁게 사랑하시면서 이제 저희의 패역을 고쳐나가기 시작하십니다. 그들의 패역을 고치실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번영을 주시고, 그들이 번영을 경험할 때 또 다른 제2의 이스라엘들이 돌아와서 하나님 앞에 깊이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고 번영을 누리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무엇일까요?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에브라임이여 너희는 다시 내가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에브라임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엄밀하게 말하면 지금 말하고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너희의 패역을 모두 고치고 나면 너희들이 언젠가는 말하기를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라고 말할 것이다”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 선지자가 제일 처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예언하기 위해서 길을 나섰을 때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주님을 멀리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키는 고멜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 속에 있었던 고백이 어떤 고백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를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살과 내 기름과 내 술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을 열심히 따르고 섬겼는데, 그것은 자신들이 먹고 마시고 누리는 모든 것이 그 우상을 통해서 온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문화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그리고 광야에서 생활을 하다가 가나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을 때 거기에 들어간 사람들은 애굽에서 출발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광야에서 태어난 신세대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애굽 도시의 영광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을 때에 그들은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광야 생활에서는 볼 수 없었던 번영하는 나라를 보았던 것입니다. 농경문화에 뿌리를 박은 찬란한 문화, 그리고 그들의 놀라운 건축들, 발달한 문명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풍성한 농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농사를 그렇게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그들의 신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좋았을 때는 ‘여호와 한 분이면 우리는 족하다’라고 생각했지만 가나안에 들어가서 신앙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이들은 그 가나안을 복 주고 있는 이방 신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길이 물질적이 풍성함을 누리면서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별한 특징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 번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가지고 영원히 이 세상의 백성과 구별되게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호세아가 다 기울어져 가는 이스라엘 왕국에 나타나서 불붙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 시대를 향해서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과 자기를 떠나서 돌이킬 줄 모르는 백성들을 향한 피 쏟는 사랑을 그들에게 증거 할 때쯤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완전히 타락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이방신을 가끔 섬기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이방신에게 부종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심으로 이방의 신들을 따랐습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물과 포도주와 술과 살과 다시 말하면 먹고 입고 마시는 모든 것들을 바알이 자신들에게 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전심으로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그리고 앞으로 이 축복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전심으로 바알을 섬기고 따라야 한다고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먹고 마시는 모든 포도주와 그들이 입었던 모든 아름다운 옷과 심지어는 그들이 그렇게 우상을 섬길 수 있었던 건강과 생명까지도 사실은 주님이 주신 것들이었습니다. 당신이 누구인지를 몰라보고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이미 하나님 앞에 거룩한 백성이기를 포기한 인간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먹이시고 입히시면서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까?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할 때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고 아무렇게나 살아가고 있을 때에도 주님은 우리를 먹이고 입히시고 시련과 고통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서 은혜를 베푸신 것과 똑같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들을 우상이 주었다고 말하며 그래서 더더욱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대신 우상에게 매어서 살려고 몸부림치는 이 인생들을 그래도 은혜 베푸신 것은 그들이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애 타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의 마음은 한 번도 쇄한 적이 없었고 마른 적이 없었습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먹고 입고 마실 것을 주실 때에도 그들이 돌아오기를 원하는 마음이었고 때리시고 찢으실 때에도 그들이 그 징계와 아픔을 통해서 주님의 그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고백을 한 번쯤은 하고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이 고백한 것처럼 “내가 이제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고백을 했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크신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이제는 내가 죄와 무슨 관계가 있으리요’ 아니면 ‘내가 세상에 대한 사랑과 무슨 관계가 있으리요 내게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으니 사나 죽으나 우리가 그분의 것이로다’라는 고백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의 패역을 고치시기를 원하셨는데도 우리들이 고쳐지지 못한 채 이렇게 살아갔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우리들이 주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 중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랑에 깊이 감격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보며 가슴 뛰지 않아 봤던 사람들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도 저는 여러분들의 마음을 압니다. 여러분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주님의 뜻을 좇아서 살기를 원하는 착한 외침이 있습니다. 주님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영혼의 몸부림이 있습니다. 어찌 하던지 진리의 빛 가운데서 살고 어찌하던지 은혜의 불길 속에서 살고 싶어하는 그런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독특한 심성이 여러분들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패역 속에서 살았고 그래서 실패가 우리의 운명이 되는 것처럼 그리고 실패하면서 죄에 짓눌려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소외된 채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자랑이기라도 한량 그렇게 우리 멋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풀려나고 광야로 뛰어나오면서 주님의 아름다우심과 위대하심을 찬송하고 전심으로 주를 따르려고 했던 것처럼 착한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었습니다.
여러분들 중 대부분은 인생을 살면서 한 두 번 주님을 크게 만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만남이 없다면 여러분들은 지금이 바로 그런 만남을 구하여야 할 때인 것입니다. 쓸모 없는 죄인으로 이 세상에서 아무렇게나 뒹굴던 인생들을 주님이 찾아오셔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해 주셨고, 주님의 그 사랑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의 눈을 뜨게 하셨을 때 우리에게는 이 세상이나 사람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을 거절하며 살아왔던 날들을 뼈아프게 후회했고 그런 사랑을 등지고도 살 수 있었던 옛 시절이 우리에게는 신기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물이 있는 신앙생활을 했고 항상 가슴에 북받치는 감격을 가지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고민하던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에 우리들의 마음이 바로 이러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다시 세상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이전에 내게 유익하던 모든 것들을 해로 여길 뿐만 아니라 배설물과 같이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는 고백 말씀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가 삼키고 그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우상 숭배가 결탁된 패역이 이스라엘 속에 깊이 뿌리 박히게 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또한 하나님의 참 사랑 안에서 살아가기를 거부하고 불순종하는 매일매일의 삶이 누적되어서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패역을 우리 안에 만들었고, 그 패역 때문에 좋으신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이제껏 살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그냥 두실 리가 없습니다. 세상사랑 때문에 육신을 위한 정욕 때문에 수시로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이방 신들의 품에 안겼던 이스라엘처럼 그렇게 이 세상을 쫓고 육체의 정욕을 좇아서 옛 생활로 돌아가는 우리들을 버려 두시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셔서 말씀으로 우리를 당신께로 돌이키시고 인격적이신 그분이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이 세상을 따라가다가 잃어버린 것들이 무엇인지를 생각나게 만들었습니다. 잠시 죄악의 낙을 즐기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잃어버렸고 잠시 이 세상의 즐거움을 맛보는 짜릿함 대신에 우리는 하나님의 참 사랑을 반납하여야 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뼈아픈 범죄를 저질러야 했습니다. 이러한 실패가 누적되면서 그것은 우리의 뼛속 깊이 사무치는 부패한 경향성을 낳았고 그리고 그 패역은 끊임없는 실패와 불순종으로 우리를 몰아갔고 우리는 그 죄의 노예가 된 채로 살아왔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것이 성도가 살아가야 하는 삶입니까? 우리에게 겨우 이런 삶을 주시려고 좋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서 고난과 멸시를 받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세상에 있는 죄와 패역으로 고통받으면서도 스스로의 힘으로 도무지 고침을 받을 수 없는 인간들을 바라보시면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을 때, 아버지의 마음은 아들의 마음이었고 아들의 마음은 아버지의 심령이셨습니다. 좋으신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멸시와 치욕을 당하시고 가난한 자로 고통 속에서 일평생 사신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고 자기의 육체를 찢고 흘러나오는 거룩한 보혈의 샘에 우리를 씻어서 우리를 정결한 백성 만들어서 하나님의 눈빛 앞에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주님의 그런 사랑을 알면서도 순종하며 살기를 싫어했고 패역을 고치는 아픔을 지불하기보다는 죄의 낙을 좇는 즐거움을 택했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은혜 되지 못했고 끊임없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수많은 회복의 기회들을 놓쳐버려서 결국은 단 한 번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내가 자랑할 것이 없으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로라”하는 하나님이 지극히 기뻐하신 사도의 고백에 동참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치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가 이제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하고 단언하며 이제는 패역을 고치고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 안에 사는 진정한 즐거움 속에 감격하는 기쁨을 누리지 못했던 것처럼 말씀입니다.
아직도 폐병은 무서운 병입니다. 저는 최근에 두어 사람 폐병으로 죽어 가는 것을 보면서, 과학이 발달했기 때문에 그런 정도의 위협에서는 벗어 났는 줄 알았는데 아직도 무섭습니다. 치명적입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는 그런 결핵균으로부터 자유로우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 씩은 결핵균들을 마시며 삽니다. 그러나 곧 이깁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어보면 아픈 것도 저절로 아팠는데 날 때도 저절로 나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늘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라고 감격적인 선언을 하면서 이제 이전의 패역을 모두 버리고 전능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만 높이고 사랑하려고 그렇게 감격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완전한 인생을 살 수 있겠습니까? 땅에는 그러한 영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패역을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범죄와 패역이 고쳐진 상태에서 인간의 연약함으로 시시때때로 범죄 하는 것과는 그 차이가 전자를 폐병에 깊이 걸려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후자는 수시로 결핵균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사람과 같습니다.
우리는 완전할 수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사람과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 성경 어느 곳에서도 똑같이 취급받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완전해질 수는 없지만 패역을 모두 고치고 나면 여러분들 속에서는 어느 때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들리든지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려는 착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되고, 죄의 강력한 영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없습니다. 시시때때로 짓는 작은 범죄나 또는 허물들을 하나님 앞에 나와서 깨트려진 마음으로 용서를 구하고 매일 새 삶을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힘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말씀으로 돌아와서 회개하고 우리로 하여금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은혜 안에 살게 하심으로 우리의 깊이 뿌리박은 패역을 고쳐나가시는 그 치료의 마지막은 우리의 마음과 온몸과 모든 뜻과 성품을 다해서 하나님 한 분을 경배하고 찬송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패역에서 온전히 고치신 다음에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하나님만 높이고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전에 우리에게 패역을 가져왔던 장본인이 우리의 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한 번 두 번 아무렇게나 죄를 짓고 마는 그 불순종에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깊이 생각나게 만들어주셔서, 패역을 고친 다음에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같이 땅에서도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목마름으로 자기부터 먼저 순종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 되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고치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고백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세상은 점점 흉용하고, 죄의 세력은 막강해지고, 성도들은 점점 찾아보기가 힘들고, 대충 살아가는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사도가 우리에게 간곡히 당부했던 바와 같이 이 세대를 본받지 아니하려는 결단 없이는 우리는 이 세대에서 찍어낸 주물과 같은 존재들이 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 세대를 거스르지 아니하면 여러분들은 이 시대의 물결을 따라 흘러가는 소망 없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헤아리고 그분을 전심으로 사랑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의 마음의 깊은 밑바닥 속에 잠겨있는 패역이 무엇인지를 보고 우리의 입술이나 우리의 손과 발뿐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그 자체가 전부 살아 계신 우리 아버지의 것,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이 단지 우리의 입술이나 우리의 머리에 피 바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온 마음, 우리의 온 육체를 모두 발라 우리를 완전히 새로운 사람 만들어서 전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불순종의 자녀였고 전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마음 아파하실 수밖에 없는 존재였지만 그렇게 고쳐져서는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지 아니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당신의 백성들을 온전히 고치시기까지 결코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열심으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호세아서의 1장, 2장, 3장, 4장을 읽어나가면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비참하게 부패했고 얼마나 소망이 없었으면 남편의 손길을 뿌리치고 외간 남자의 품에서 아비도 모르는 자식들을 낳는 걸레와 같은 여인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비교하시는지 생각하게 되며 새삼 놀라게 됩니다. 우리의 가족들이 그랬더라면 우리의 아내나 우리의 남편이 그랬더라면 우리는 벌써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을 고치시는 하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면을 두루 살펴도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가 없고 한결같이 치우쳐서 우상으로 빠지지 않는 자가 없고 당신이 주는 호세아의 외로운 외침은 피묻은 진리의 외침이었으나 아무도 그 외침을 듣고 흐느껴 회개하는 자가 없는 그 때에도 당신의 백성을 고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은 그치지 아니하시는 것이 여기에 보이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도 환난과 시련 속에서 고통 하는 지체들은 오늘 그 속에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패역을 고치기 위해서 다루시는 손길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환난과 시련이 없어도 곤고한 영혼으로 하나님 앞에 회복이 없이 살아가는 여러분들은 오늘 하나님 앞에 지속적으로 살아왔던 여러분들의 불순종과 거기에서 비롯된 패역이 여러분들을 곤고하게 만들었고 곤고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는 여러분들의 태만함이 오늘 여러분들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 죽은 자와 같이 만들었다는 것을 상기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망가진 신앙, 망가진 인생, 깨트려진 인간성들이 세월이 흐르면 저절로 고쳐질 것이라는 어리석은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제껏 여러분들이 저절로 고쳐져 본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다가오셔서 그들을 홀로 두지 아니하시고 고치십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뼈저린 아픔을 느끼시면서도 자기의 자녀들의 가슴에 칼을 대십니다.
(예화) 외과 의사가 자기의 식구들은 도저히 칼을 못 댄다.
그것이 사랑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곤고하게 사는 것이 아버지의 뜻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죽도록 고생하면서 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 구원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계획일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렇게 때리고 그렇게 찢어서 그렇게 갈라서라도 그 아픔을 모두 느끼게 하시면서라도 고치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여러분 헤아려 본적이 있습니까?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우리 주는 날마다 기다리신 다오
밤마다 문 열어 놓고 마음 졸이시며 나간 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신 다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 동안에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의식할 수 없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고치신 것처럼 우리를 고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생애의 단 한번만이라도 ‘하나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나를 사셨고 주님의 사랑 때문에 걸레와 같은 인생이 이렇게 존귀하게 되었으니 살든지 죽든지 제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 제 인생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게 하소서’ 그런 고백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패역을 고쳐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라고 말입니다. 잣나무는 시편 55편에 의하면 가시나무와 반대입니다. 이사야 60장에서는 이 나무가 레바논의 영광이라고 불립니다. 백향목과 같이 값비싼 나무였기 때문에 솔로몬 성전을 짓는 중요한 재료로 쓰여졌다고 열왕기상 5장에서 말합니다. 이것으로서 다윗은 악기를 만들었다고 사무엘하 6장에서 말하고 나흠 2장에서는 창을 만드는 재료에 이 잣나무가 쓰여졌다고 말합니다. 이 잣나무는 땔감이 아닙니다. 고귀한 재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푸른 잣나무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는 포도나무요”라고 말씀하신 것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히브리어 성경에서 하나님은 “나(아니)”라고 하는 1인칭 대명사를 두 번이나 사용하시면서 하나님 자신이 잣나무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귀한 목재를 내는 나무, 바람이 불어도 쉽게 꺾이거나 휘거나 뿌리뽑히지 않는 강인한 나무, 그 나무와 같은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패역을 고치고 주님의 은총의 그늘 아래 돌아오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에게 있는 모든 것이 다 그들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존귀하고 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그늘 아래 들어와서 그 은총의 날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존귀하신 당신과 관계를 맺은 사람들로서 존귀하게 만드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스라엘을 향한 강렬한 하나님의 바램을 오늘도 가지고 계십니다. 때리고 어루만지시고 찢으신 후에 다시 싸매시는 고통스러운 치료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는 우리가 오랫동안 우리의 가슴속에 숙명처럼 묻어두었던 패역을 모두 녹여버리고 이제는 어린아이와 같이, 주님이 우리로 인해 기뻐하시는 것처럼 여러분들 또한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에 주님을 인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을 즐거워하고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죄와 어두움이 가득한 세상에서 불꽃처럼 당신을 위해서 살고 싶어하는 우리를 보시면서 기뻐하시는 관계, 주님은 우리가 여기 있어서 좋고 우리는 주님이 거기 있어서 좋은 그러한 관계 되게 하시려고 오늘도 당신의 성실함을 따라서 한 영혼, 한 영혼을 찾아 나가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말씀을 주셔서 당신이 그들이 돌아오기를 원하는 애절한 마음이 얼마나 뼛속 깊이 사무치고 계신 지를 보여주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 달 동안 계속 되어오던 4절부터 8절까지의 강해를 마칩니다. 이 강해를 들으면서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깨닫고 지나가야 할 분명한 사실이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대충 살아서는 안되는 존재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고 오늘 여기에까지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실 때 그분은 전심으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셨고 그래서 오늘도 돌멩이와 같은 죄인들, 흉악한 죄인들이 그 십자가의 복음 아래서 주님의 사랑을 읽고 좋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몰랐던 죄인들의 마음에 이 복음, 이 하나님의 사랑의 감격이 다가온다면 이미 주님의 사랑을 알았고 주님의 위대하심이 어떠하며 우리를 얼마나 당신의 품으로 부르시는지를 깨달은 우리들은 얼마나 더 많이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해야 되는 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날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자포자기한 가운데 자기를 고치기를 포기했지만 어떤 때는 몸부림치면서 주님 닮기를 원했고 우리 속에 있어서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죄와 더불어 싸우기 위해서 곤비해지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거룩한 신앙의 길에서 영광은 싸우는 자체가 아니라 승리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한 두 번 선행을 하거나 우발적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베푸신 사랑을 기억하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의 마음속으로 가장 아끼시는 아들까지 내어주셨는데, 버리고 나면 하나님이 더 큰사랑과 축복과 번영을 주실 계획이 있는데,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당하신 고난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죄에 대한 사랑, 패역에 대한 사랑, 아픔에 대한 두려움쯤은 버릴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고치시고자 하시는 것은 이제는 죄와 어둠으로 가득한 광야와 같은 길에서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삶을 청산하고 십자가 그늘 아래서 당신의 말씀만을 순종하고 당신만을 사랑하며 당신 때문에 행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패역을 고치는 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