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할례를 행하라
(2000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옛적 길로 돌아가라Ⅰ(렘6:16) 2000.8.13 주일오후 1
2. 옛적 길로 돌아가라Ⅱ(렘6:16下-17) 2000.8.13 주일저녁 14
3. 듣고 행하라(렘7:22-23) 2000.8.14 온가족 여름수련회(저녁) 25
4. 참된 영적 쇄신의 길(렘4:3-4上) 2000.8.15 온가족 여름수련회(저녁) 43
5.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램4:4上) 2000.8.16 온가족 여름수련회(저녁) 54
6. 마음의 가죽을 베고 여호와께 속하라(렘4:4上) 2000.8.20 주일오전 64
7. 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끄는 길(렘4:4下) 2000.9.3 주일오전 75
8. 경외의 마음을 회복하라(렘6:18-20) 2000.9.24 주일오전 85
1.옛적 길로 돌아가라Ⅰ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6:16)
때는 주전 약 615년경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을 비롯한 세 친구가 첫 번째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기 약 10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예레미아는 선지자 중 가장 고통스러운 사역을 감당해야 했던 선지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멸망을 예언해야 했고, 멸망을 예언하면서도 구원하실 하나님 대신에 순순히 끌려가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을 예언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예레미아서 6장은 이스라엘 유다 백성들이 멸망하기 직전에 바벨론의 침공을 앞두고 그 시대의 타락상들을 바라보면서 예레미아 선지자가 찢어지는 마음으로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의 빛 아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외치는 내용들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오늘 “너희는 길에 서서 돌아 보라 그리고 옛적 길 곧 선한 길로 걸어가라. 그러면 너희들이 평강을 얻을 것이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옛적 길 그것이 무슨 길입니까? 선지자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인도해 내시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던 그 때에, 그리고 가나안 땅을 정복해 가는 과정에서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비교적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갔던 은혜가 충만했던 때를 회상하면서 그 때 걸어갔던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발자취를 ‘옛적 길’, 혹은 ‘선한 길’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선지자는 이 ‘옛적 길’이라는 말에 ‘선한 길’이라고 하는 설명을 하나 더 붙이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토브’라고 하는 이 ‘선한’의 뜻은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한 조화와 균정을 이룬, 하나님 뜻에 합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그런 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그렇게 하나님을 순수하게 생각하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아 보이는 그런 길로 행하던 때가 있었는가?”라고 질문할 때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런 때를 쉽게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교적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길을 걸어갔던 적을 한 시기정도 찾을 수 있습니다.
애굽을 떠나올 때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적을 보고 하나님 앞에 감격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순간의 감격으로 끝났고 그들은 즉시 광야에서 원망하고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하나님을 순수하게 따르던 때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대체적으로 광야에서의 삶은 불순종과 하나님을 향한 반역들이 점철된 사십여 년의 역사였습니다.
그래도 상당한 기간동안 순수하게 하나님을 따랐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적인 때가 언제였느냐 하면 모세가 그 지도권을 여호수아에게 넘겨주고 가나안 정벌을 하기 직전부터 시작해서 가나안 정복을 해나가는 그 몇 년 동안, 그 때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교적 하나님을 향해서 열심히 순수한 신앙을 가졌던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카리스마에 있어서는 모세와 비교가 되지 않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항상 모세에게 가리워진 모세의 참모였습니다. 전설적인 영웅,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고 주님과 직접 대면하였고 그 큰 능력과 기적으로 자신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낸 위대한 출애굽의 영웅 모세가 사라지고 난 뒤에 아마 그들의 눈에는 여호수아가 차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면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히려 모세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오히려 모세와는 비교가 안 되는 약해 보이는 지도자였기 때문에, 그들은 낙심하는 대신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실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두고두고 추억할만한 순수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가진 신앙의 때를 지나게 됩니다. 말하자면 처음 사랑의 때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녀로서 신랑이신 하나님을 깊이 연모하고 따르던 때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약속으로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주셨지만 들어가 보고 나니 그 땅은 빈땅이 아니라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당시로서는 선진국의 민족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사십여 년 동안 광야에서 살아온 자신들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눈부신 문명을 자랑하고 오래도록 가나안에서 뿌리내린 백성들이 그 땅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그 싸움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하는 그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단강을 발을 들여놓으면서 물이 마르는 기적 속에서 건너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칼 하나 휘두르지 않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아이성의 전투에서 아간의 죄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패배를 보면서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죄지은 자들을 심판한 후에 정결함을 회복했습니다. 매 순간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전쟁을 해나갔습니다. 왜냐하면 이 순간 싸움에서 이기는 그것이 자신들의 힘과 무력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고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마음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주신 제비뽑은 땅을 하나하나 정복해 나아갔습니다. 동족애가 충만하였고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깊이 깊이 메아리치고 있었습니다. 유일신 신앙의 투철한 지도자 여호수아의 지도하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는 것을 배웠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를 부탁한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유언을 따라서 말씀 신앙을 이어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는 깊은 감동을 드렸습니다. 그 길이 옛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는 곳마다 가나안 원주민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형편없는, 유랑하는, 강을 건너온 민족이지만 -원래 ‘히브리’라는 말이 ‘강을 거너온 백성’이라는 뜻입니다-저들 가운데는 여호와라는 신이 함께 한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해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 통해서 -예레미아 뿐만 아니라 호세아를 통해서도 그렇고 여러 선지자를 통해서- 그 옛날의 때를 회상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 백성이 그 처음 사랑의 때처럼 그 옛길로 그 선한 길로 행하였으면 얼마나 좋을꼬’하는 마음을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번 표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궁금한 것은 그 옛길,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갔을 때의 특징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처음 사랑의 때에 유일신 신앙으로 굳게 뭉쳐있었습니다. 가나안 정복을 해나가면서 혁혁한 승리를 이루면서도 매 순간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때에, 그들은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당시 그들이 즐겨 고백했던 것은 “하나님이외에는 우리에게 신이 없나이다”하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앙을 버렸습니다. 선지자는 가득한 우상 숭배를 보면서 그 옛길을 행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회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바벨론으로부터 침공을 받는 심판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온 가장 끔찍한 죄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우상을 섬기는 것이 어떻게 다르냐면 하나님을 섬기는 동기는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러나 우상을 섬기는 것은 우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자기를 위해서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광야를 유리했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기적적으로 내리는 만나를 먹으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왔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오고 나니 농경사회였습니다. 농경사회는 좋은 점도 많은데 불안한 것은 농사가 흉년이 드느냐 풍년이 드느냐에 따라서 1년 동안의 행복과 불행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라고 하는 신은 자신들이 농경 생활을 하면서 섬겨본 적이 없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했는데 거기서 하나님 앞에 애굽나라의 번영을 위해서 기도했을 리는 없고, 그 이전에는 그들이 유리하면서 무역도 하고 목축도 하는 이동하는 유랑민족들이었습니다. 조상들의 경험과 자신들의 경험에 비춰볼 때에 완전히 다른 문화 속에 들어온 것입니다. 들어와 보니 엄청나게 잘 사는데 그 기반이 농사였습니다. 그들은 농사가 잘되려면 땅을 주관하는 신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순간적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벌써 유일신 신앙을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기게 되는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섬기는 것인데 우상을 섬기는 것은 자신의 번영과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섬기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겼지만, 하나님을 선택할 것이냐 우상을 선택할 것이냐의 기로에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보면 그것은 우상이냐 하나님이냐가 아니라 하나님 사랑이냐 자기 사랑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순수한 사랑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임박하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예전에 우리가 하나님을 처음 인격적으로 만나고 주님의 큰 사랑을 받고 하나님 말씀의 은혜에 깊이 감격하던 그 옛적 길이 우리에게도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그렇게 산 날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렇게 산 날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러한 옛적 길을 걸어가던, 선한 길로 행하던 그 때가 있습니다.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 때로 돌아가 보십시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하나님의 큰 은총이 나같이 쓸모 없는 인간에게 임할 때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반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주님이 은총을 쏟아 부으실 때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반드시 반응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이 있고 주님의 크신 사랑을 모르면서 살았던 것이 너무 기적처럼 생각되는 감격이 우리에게 밀려올 때 우리의 신앙 생활의 결정적인 특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고 나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 그리고 예배드릴 때마다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 ‘주님의 크신 사랑을 무엇 때문에 이 쓸데없는 인간에게 베풀어주셨을까?’하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한마디의 설교를 듣거나 찬송 한마디를 부를 때 우리의 마음에 걷잡을 수 없는 감격의 눈물이 있어서 아무도 알 수 없는 이 비밀, ‘하나님이 나만을 사랑하신다’라고 하는 큰 확신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우리가 사랑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시라고 하는 마음이 우리 전체를 사로잡아서 무엇을 하든지 그 사랑이 동기가 되는 것이 우리가 처음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깊이 인격적으로 대면하던 때의 모습입니다.
아침에 눈뜨면 보고 싶은 사람이 생각나거나 해야할 일이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간밤에도 지켜주셨군요. 오늘도 하루를 맞았습니다’ 아프거나 병들었을 때에 병상에 눞거나 침상에 누워서 고통으로 잠 못 이루는 밤에도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그런데 오늘밤은 너무나 아픕니다’ 하루가 끝나는 때면 하루의 문을 닫으면서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눈뜨는 순간부터 눈을 감는 순간까지 우리의 마음에 가득했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입니다. 알면 알수록 비밀이 되는 그 아름다운 이름, 그 사랑 속에서 살았습니다.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 때 우리는 풍부한 정서 속에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황량하게 메마른 대지가 아닙니다. 꽃피고 새가 울고 시냇물이 흐르고 꽃향기가 가득한 정원같은 곳입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다가도 어느 한순간 주님의 그 큰사랑의 자극을 받기만 하면 우리의 마음이 깊이 녹아지고 그 사랑에 대한 감격이 솟아납니다.
(예화) 몇 해 전 설날 전에 교회에서 가르치던 학생들이 찾아와 두세 시간을 보낸 후 돌아가는 그들을 보며 가슴이 뚫린 것 같기에 예배를 드렸다-‘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찬송을 부르며 말씀을 전하 고 기도하는데 폭탄이 터지는 듯이 기도가 쏟아져 나왔다.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자극을 받기만 하면 그 장소가 어디이든지 -걸어 다니는 길이든지 전철 속이든지 화장실이든지 직장에서든지- 나같이 쓸데없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느껴질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듣기만 하면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우리같이 쓸모 없는 인간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감격이 있었고 그 사랑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아야 되겠다는 감격이 있습니다.
사랑은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큰 강이 흐르고 그 강에 잇대인 실개천에 물이 흐르고 실개천에 이어진 작은 개울들, 논길에 물이 흐르면 온 땅에 풍요로움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물이 끊어지고 나면 아름다운 곡식을 내던 밭에는 가시와 엉겅퀴가 뒤범벅이 되고 예쁜 고기들이 놀던 개울에는 흉칙하게 강바닥을 드러낸 곳에 억센 잡초들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에는 유일신 사랑이 흘러 넘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한없이 흘러 넘치고 우리가 그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순수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항상 차고 넘쳐야 합니다.
기도하고 일어난 자리에는 언제나 우리의 땀과 눈물이 배어있어야 하고 우리의 마음속에는 항상 ‘나같이 쓸데없는 인간을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깊이 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랑의 감격 속에서 아침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사랑과 성실하신 자비하심을 맛보면서 매순간 그 주님을 온 삶에 느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처음 사랑의 때를 지나면서 설교도 많이 듣고 성경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신앙이 많이 성장했겠지요. 이제 옛날처럼 흔들리지 않고 많이 견고해졌겠지요. 그러나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견고함이 무슨 견고함입니까? 나무가 심겨진 것입니까, 막대기를 꽂아놓은 것입니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입니까? 사랑의 감격이 없는 성실함, 사랑의 감격이 없는 진지함, 사랑의 감격이 없는 지식의 축적,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는 너무나 많이 옛적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 같은 죄인들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던 그 옛길, 하나님 보실 때 선하게 보였던 그 길을 우리는 너무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우리 눈에 눈물이 말랐기 때문에 우리의 가슴에 사랑이 마르고 우리의 삶 속에 주님 사랑의 샘물이 그쳤기 때문에 신앙의 모양은 가지고 있으나 생명을 많이 잃어버린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곤고한 얼굴로 예배를 드리다가 돌아가는 지체들의 영혼 속에서 그것을 봅니다. 새벽기도에 나왔지만 돌처럼 굳은 얼굴로 앉았다가 한마디의 기도도 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형제들의 모습 속에서 그런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을 봅니다. 왜 잃어버렸을까요? 왜 우리는 그분을 처음 사랑하던 때처럼 사랑에 생명을 걸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같이 쓸데없는 죄인을 구속하신 십자가의 사랑을 처음 알았을 때 우리를 압도했던 감정은 무엇입니까? 쓸모 없는 인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사랑, 우리에게 자신을 모두 찢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산 교재로서 인생을 사셨던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처음 걸었던 그 옛길이 이런 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보십시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옛적 길, 선한 길로 행할 그 때에는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던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다른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리고 희생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면서 일생을 사는 것이 가장 단순한 신앙이면서도 신앙의 전부입니다. 그런 사랑을 버리고 우리가 무엇을 얻었습니까? 견고해졌다고는 하지만 주님을 향한 사랑의 감격이 없는 뿌리박음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집착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견고함은 나무를 심어놓은 것이 아니라 막대기를 꽂아놓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꿈꾸고 그리워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로 가득찬 교회, 아무리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를 반복해서 들려주어도 들려줄 때마다 펑펑 우는 사랑의 감격이 있는 교회, 어린아이로부터 안력이 흐려지는 노인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교회, 그 사랑 때문에 웃고 그 사랑 때문에 울고 그 사랑 때문에 삶의 이유를 발견하는 그런 성도들이 모인 교회,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루에 한번쯤은, 하루에 세 번쯤은 홀로 있을 때나 성경을 읽을 때나 설교를 들을 때나 지체들과 주님의 사랑과 성품에 관해서 나눌 때, 우리의 마음에 우리의 눈에 우리 같은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의 눈물이 흘러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큰사랑의 빚을 지고서도 이렇게 밖에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악함을 인하여 참회의 눈물도 흘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옛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길이었습니다. 조금 미숙해도, 성경을 조금 부족하게 알아도, 교회 생활의 에티켓을 약간 몰라도, 살아있는 신앙 속에서 살아있는 사랑을 가지고 그렇게 주님 이름을 부르던 그 때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선한 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왜 이렇게 무디어지는 것일까요?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백 번 양보해서 우리가 성실하게 십 년 이십 년을 교회생활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을 바꿔 놓았나요? 여전히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태어나서 형벌 받을 수밖에 없는 흉악한 인간들이었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성실한 교회 생활과는 상관없이 영원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그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무엇으로도 우리는 그 빚을 갚을 수 없었고 우리들이 아무리 많이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위해서 일하고 우리의 소유를 주님 위해서 드렸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 사랑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그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그 옛적 길로 돌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두 번째는 순종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순수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불타고 있을 때 우리의 눈에는 큰 불순종과 작은 불순종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었고 우리가 순종한 것은 심판 받을까봐 두려워서 순종한 것이 아니라 불순종함으로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에 고통과 아픔을 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순종의 길을 걸어간 것이었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못살고 가난할 때에도 많이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말씀을 아는 지식이 많지 않았던 때에도 더 진실하게 순종했습니다. 복 받으려고 순종한 것도 아니었고 심판 받아서 이나마 사는 것 쪽박 찰까봐 순종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그렇게 사랑하셨는데, 자기를 모두 버려서 우리 같은 죄인들을 건지시고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하시고,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죄악과 무지와 어두움 속에 싸여서 길을 모르고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살았던 우리를 주님께서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길 잃어버린 자에게 진리의 밝은 빛을 비추어서 참 신앙을 찾게 하시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지루하던 모든 어두움 속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어느 길로 걸어가야할 지 모르던 우리에게 참 신앙의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고 순종하며 살 수 없었던 우리들에게 순종의 은혜를 부어주셔서 순종하며 살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주께로부터 진 이 많은 사랑의 빚 때문에 우리가 영원히 그 사랑을 갚을 수는 없지만 그 사랑에 빚진 자답게 사는 오직 유일한 길은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우리 인생의 최고의 가치는 순수한 신앙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불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당하고 있는 가장 커다란 죄는 끊임없이 하나님이 당신의 종들을 보내셔서 역사의 진실,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고 목 메이는 사랑으로 그들을 돌아오도록 말씀을 보내셨지만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옛날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사랑하고 옛길을 걸어가고 옛적 길로 행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게 살았던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순종은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은 수양의 기름보다 낫고 완고한 것은 사신의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옛적 길로 행하던 때,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사랑의 길로 우리들이 행할 때에 우리들은 하나님께 잘 순종했습니다. 말씀이 전해지면 그 말씀을 받으면서 그 말씀을 몰랐기 때문에 불순종하며 살아왔던 수많은 날들을 서럽도록 아파하고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했습니다.
성도가 은혜를 받고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면 그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서 살려고 하는 그 의지와 자연스러움이 얼굴에 흘러납니다. 그들의 얼굴에 비치는 은혜의 빛은 ‘하나님, 무엇이든지 제게 말씀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순종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았었지 않습니까? 지금은 어떠십니까?
순종하면서 사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은혜의 감격을 지속적으로 누리게 하는 가장 결정적인 조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 안에 지속적으로 누리게끔 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말씀을 많이 듣고 말씀을 아는 지식이 쌓이고 기독교 사상이 심겨지게 되면 이런 것이 전혀 없는 사람보다 말씀에 대한 이해의 속도가 빠를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씀을 이해하는 속도, 말씀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고 정확해진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모두 예전보다 더 뜨거운 신앙의 감격 속으로 들어갑니까? 절대 아닙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해당되는 사람들이 꽤 있으실 것입니다. 말씀을 많이 들으면 체계가 잡힙니다. 말씀에 대한 탁월한 이해력이 생기고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말씀이 전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고 이 내용들은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가 분석이 되어서 가슴속에 들어옵니다. 그 정도면 말씀에 대한 지식이 상당히 많이 쌓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씀을 들을 때 잘 정리되어서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것으로 만족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격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마치 이렇게 고도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지식을 소유하면 수준이 너무나 높아지고 너무나 냉정해 지기 때문에 그런 감정과 은혜의 경험들을 초월해서 말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속는 것입니다.
조지 윗필드의 일기를 읽어보니까 그 사람이 1740년대에 영국에서 미국으로 설교하러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부흥사인 윗필드의 설교를 수십 년만에 한 사람 나올까 말까한 천재적인 신학자요 목회자였던 조나단 에드워드가 듣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을 지적으로 비교한다면 비교가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죠지 윗필드가 자신의 글 속에서 “착한 에드워드 목사는 나의 설교를 들으며 한없이 울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탁월한 신학자였지만 그 신학과 사고를 가지고 윗필드의 설교를 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은혜가 필요한 한 어린아이로서 그 설교 앞에서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이 너무나 성숙하고 진리를 아는 지식이 너무나 뛰어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경험이 줄어드는 예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의 말년이 다 되었는데도 십자가의 사랑에 어린아이처럼 감격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꽤 깊은 지식을 소유한 사람들이 눈에 눈물이 흐르지 않는 것을 보면 무섭습니다. ‘그 사람들이 무엇이 될까’ 합니다. 왜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실천하는 순종의 삶이 결핍되어 있을 때 결정적으로 그런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 병적인 현상은 순종하지 않는 삶이 거의 대부분의 원인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오류를 범하면서도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나 예배시간에 저는 봅니다. 왜 교만합니까? 정말 그런 은혜의 세계가 있을 것 같습니까? 입증해 보십시오.
만약에 우리에게 계속 들어오는 하나님의 진리와 말씀에 대한 지식이 우리의 삶과 우리의 인격을 날마다 거룩하게 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을 통해서 주님의 큰사랑을 아는 감격, 그리고 새롭게 열리는 하나님의 찬란한 은혜의 세계 속에서 흘러 들어오는 참된 빛에 대한 감격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의 삶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순종합니까?
‘제는 아직 정리가 안됐어. 또 제는 아직 말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또 제는 아직 말씀을 깨달은 양이 절대적으로 모자라. 또 제는 옛날의 사고가 너무 지배적이어서 말씀이 안 심겨’ 하나하나 남들은 기가 막히게 갈라냅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무엇으로서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신앙이 죽어있는 신앙이 아니라 날마다 살아있는 신앙임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 속에 살아 역사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삶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전방위적인 삶에 있어서 순종의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렇게 순종하면서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의지를 처음 사랑의 때에, 옛적 길을 걸었던 때에, 하나님이 보실 때 선한 길을 걸었던 때에는 항상 살아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경험을 보더라도 특이하게 느껴지는 사실은 가장 순종하며 살던 그 시기가 가장 불순종하게 사는 것에 대해서 회개를 많이 하던 때입니다. 자기 신앙의 경험을 돌이켜 보십시오. 그러니까 항상 남을 위한 기도 제목만 있지 자기를 위한 기도 제목은 없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한 기도 제목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불순종과 자신의 악함, 그리고 그렇게 순종이 결핍된 삶을 살아가면서도 그것을 마음 아파할 줄 모르는 자신의 마음의 무뎌짐들에 대한 깊은 참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순종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냐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자신의 불순종을 인해서 얼마나 마음 아파한 경험이 있느냐와 비례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하나님 앞에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는 내가 나도 미워서 깊이 몸부림쳤던 때가 언제입니까?
자기 깨어짐이 없는 수많은 중보기도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마치 까지 않은 과일과 같고 껍질을 벗기지 않은 계란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 자기 깨어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중보기도가 흘러나오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향한 모든 섬김의 기도가 흘러나와야지, 무미건조하게 공식을 따라서 날마다 뜻도 없이 되풀이되는 기도 속에서 주섬주섬 주어 올리는 형식적인 틀로 짜여진 중보기도가 진짜 중보기도냐는 것입니다.
순종이 결핍되고 있습니다. 삶의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면서 살던 그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깊어질수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높은 차원의 순종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옛적 길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매 순간마다 순종의 길을 걸었던 그런 발자취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던 삶의 발자취입니다. 그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의 사랑의 놀라운 감격도 회복될 것입니다. 이번 수련회에서 이렇게 순종을 회복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옛길로 행하던 때에는 우리 신앙에 순수함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도 성전을 지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성전은 요즘 모양으로 보면 하찮은 것이었을 것입니다. 귀한 금으로 만든 기구들이 그 안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가장자리는 하얀 천으로 둘러싸인 담장이었습니다. 물돼지 가죽으로 덮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같이 화려한 건물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 성막이 쳐지면 그곳이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으로 여기고 순종하면서 거기에 머물며 하나님을 섬기고 제사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다. 심판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는 형식에 빠져있는 신앙이었습니다. 늘 제사를 드렸는데 문제는 순수하지 않은 것입니다. 동기 자체가 이렇게 함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어떠한 진노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바보 같은 생각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율법적인 제사행위를 하게 하는 동기가 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우상에게나 하는 일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종교계까지 다 썩었습니다. 자신의 영혼의 질병을 가지고 찾아오면 선지자로부터 제사장에 이르기까지 심상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우습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님, 제 심령이 너무 곤고하고 고통스럽고 괴롭습니다” “제사장님, 제가 너무나 많은 죄를 범했고 제 영혼이 파리해져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요?”하면 “괜찮아,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시는데, 그것보다 막사는 인간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너만큼만 살아도 괜찮아. 평안할거야” 했습니다. 용기를 얻고 돌아갔지만 그것은 속임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식의 도움들을 구하면서 사람들은 돌아다녔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심이 없는, 하나님을 향한 순수함이 없는 신앙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처음 하나님을 만나고 그 큰사랑을 알 때 우리는 세련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유창한 목소리로 대중기도 못해도, 차마 기도를 잇지 못하고 울먹이는 그런 순수함이 있었습니다. 뛰어나게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해도 작은 직분이나마 하나님이 주셨다는 생각을 가지고 교만하지 않고 주님을 섬기고 싶어하는 그런 순수함이 있었습니다. 어린 영혼을 몇 가르치면서도 토요일이면 밤잠을 설치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익숙해지고 능숙해집니다. 노련해집니다. 그것이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우리 속에 있는 순수함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책을 읽다가 가슴을 쾅 치고 지나가는 명언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설교자는 설교의 유능함 때문에 하나님 앞에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신실함 때문에 보상을 받습니다” 이해되십니까? 하나님을 섬기는데 유능하게 섬긴 것 때문에 하나님께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신실하게 섬겼느냐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 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진실하게 목회 한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모이지 않는 목회자는 세상에서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마음에 아무리 집을 팔고 세상을 바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헌금하지 않는 교인을 아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왜냐하면 “나 여호와는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고 중심을 보는 여호와니라” 여전히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순수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목사님 우리가 이 추세로 나가면 내년에는 몇 명쯤 모일 것이고 교회는 어떻게 될 것입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추세라는 것은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물붓듯 부어주시면 더 폭발적인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고 하나님이 놓으시면 각기 흩어져서 다시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해지고 정직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순수해져야 합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뚜껑을 열어보시더라도 예전에 처음 시작할 때와 똑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합니다. 인생의 마지막 벼랑 끝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지팡이 내미시고 손 내미셔서 건져주셨을 때 우리는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이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살려 주실 때 그 주님 앞에 순수했던 마음을 간직하면서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유능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많은 재물이 있어서 그것으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드릴 수 있는 것은 변함없는 순수한 마음, 잘 했을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순수한 마음, 잘못되고 일을 그르쳤을 때에는 ‘나 때문입니다’라고 가슴을 치며 아파할 수 있는 그 순수한 마음,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 주셔도 ‘이것이 모두 주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입니다’라고 생각하고 낮아질 수 있는 마음, 심지어 주님이 우리를 ‘진실되다’고 ‘착하다’고 칭찬해주셔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전혀 쓸모 없는 종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그런 순수한 마음, 그 마음이 예전에 있었습니다. 그 마음을 우리들이 너무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주고 바꿀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을 주고 대신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
그런 순수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옛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그런 옛길을 원하십니다. 기회에 넘치는 신앙생활, 숙달된 신앙생활 말고 순수한, 아무도 손대보지 않은 샘에서 솟아난 샘물과 같은 그런 순수함, 그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하나만 더 추가한다면 옛길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섬김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걸어갔던 그 옛길 속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그 섬김의 정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큰사랑을 우리가 알고 그 순수함에 사로잡히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간에 섬기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타락했습니까? 이기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동족들 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동체로 묶어주었던 순수한 연합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너는 너, 나는 나’하며 살아간 것입니다. ‘율법이 무엇이관데 내 땅을 돌려주랴’ 하며 전토에 전토를 늘리고 동족들을 노예로 삼는 일들이 누룩처럼 번져갔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너희들이 모은 모든 재산의 주인을 내가 단번에 바꿔버리겠다” 그래서 바벨론 사람들이 다 빼앗아 갑니다.
우리들이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그 사랑, 그 순종함, 그 순수함, 그 속에서 우리들이 옛길을 걸어갈 때 우리에게는 섬김이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교회가 어려울 때쯤이면 이름도 밝히지 않는 사람들이 거액의 연보를 합니다. 지금도 누군지 모르고 찾아낼 의향도 없습니다. 여러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섬깁니다. 본인들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어디에서 비롯된 힘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깊은 사랑,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순종함, 그 순수함이 있었던 옛길에서 볼 수 있었던 현상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통해서 자신이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부족한 우리를 사용하셔서, 보잘 것 없는 인간들을 택하셔서 귀한 일을 맡겨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그분을 위해서 헌신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렇게 주님 섬기면서 살았습니다. 이것이 옛적 길로 행하던 때,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길로 행하던 때의 우리 신앙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자기를 버린 사람의 땀과 눈물, 피를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은혜로 서 가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그렇게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보이는 교회는 부자 한 두 사람이 거액을 기부해서 지을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교회는 그렇게 지어지지 않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피와 눈물과 땀의 섬김, 고난이 있는 섬김, 그리고 그 섬김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그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교회가 서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큰사랑을 누가 받았느냐고 물을 때 많은 사람들은 “아멘”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진리를 깊이 깨달아서 영적인 어두움 속에서 빛으로 나오게 해주셨는지 그 은혜를 간증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을 때 많은 사람들은 “아멘”하고 말합니다.
예전에는 짐승처럼 어두움 속에서 무지하게 살았지만 이제는 빛 가운데 있고 이제는 다시 돌아가기 싫은 옛 신앙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신앙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 크고 놀라운 은혜를 받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으로 섬기면서 살았을까요? 진리를 많이 안 사람들은 그 진리대로 살도록 빛 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달은 사람들은 그 지식의 등불을 비춰서 아직도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들을 밝혀주도록 하나님이 특별히 부른 사람들입니다. 계획이 없이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는 법이 없고 사명이 없이 하나님이 불러주시는 법이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에 비하면 우리의 섬김은 너무나 인색하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사실상 가나안 땅은 싸워서 얻은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땅이었습니다. 이세상 전쟁의 역사 가운데 성을 두루 돌았더니 저절로 무너졌다는 전쟁의 역사가 있습니까? 그들은 단지 싸웠지만 싸움이 그 땅을 쟁취하게 해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랬으면 이제는 하나님 섬기면서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대신 자신의 행복을 섬겼습니다.
얼마나 바쁘십니까? 기도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쁘십니까?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바쁘게 사십니까? 수년동안 말씀을 먹고 은혜를 받고 교회 생활했지만 너무 바빠서 아무 것도 섬긴 것이 없다면 그렇게 바쁜 것이 누구를 위한 삶인가요? 마지막에 지푸라기처럼 불 타 없어질 것들 아닐까요?
(예화) 어릴 때 살던 마을을 가 본 이야기
살같이 빠른 광음을 주 위해 아끼세
이 진리 믿는 사람들 다 복을 받겠네
어머니와 함께 손잡고 걸어가던 학교 길도 그대로 있는데 35년이 지나갔습니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했습니까? 하나님의 그 사랑에 얼마나 많이 빚졌는데 주님을 위해 갚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한 나머지 하나님을 위해서 희생하고 주님을 아름답게 섬기던 옛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예화: 서로 할머니의 심부름을 안 하려고 하면 “죽으면 썩어질 살 왜 그렇게 아끼냐”하셨다)
내 주 예수 주신 은혜 한없건만
나 주 위해 갚은 것은 참 적으니
주 예수여 너그럽게 보옵소서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많이 입었습니다. 이제 하나님 섬기면서 살아야 합니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나온 날들은 우리의 욕망과 더러운 욕심, 방탕한 옛 기질 때문에 이기심으로 가득 차서 하나님 섬길 기회를 모두 떠나 버렸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우리의 일생의 짧은 기간만이라도 주님 섬기면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돌아가야 할 길입니다.
2.옛적 길로 돌아가라Ⅱ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수꾼을 세웠으니 나팔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렘6:16下-17)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 예레미아에게 시종일관 비난과 탄핵을 받고 있지만 그들이 항상 하나님 앞에 그렇게 불순종하면서만 인생을 살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씨를 삼으시고, 그들을 한 가족으로 만드시고, 애굽에서 민족으로 만드시고, 탈출하게 하시고, 시내 산에서 법을 주셔서 국가로 만드시고, 그래서 오늘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게 하시기까지 대부분의 시간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항과 불순종, 패역과 죄악 속에서 하나님을 거스러 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비록 그렇게 살아온 날이 훨씬 많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에서 그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사랑하고 순결하고 섬기고 살아왔던 그 연애 기간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위대한 기적을 보며 믿음으로 홍해를 건너던 때에도 그러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더 뼈저리게 남는 연애의 기간들을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굳이 꼽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가나안을 정복하던 때의 일이었습니다. 모세가 죽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면하던 사람이었고 하늘의 능력을 이 땅으로 불러 내리던 권능의 사람이었고 카리스마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하늘같이 믿었던 모세는 죽고 자신들이 보기에는 아직도 연약하기 그지없는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철통같은 요새들을 쌓아놓고 기다리는, 선진국민이라고 할 수 있는 가나안을 정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순전하게 하나님을 의뢰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밟는 땅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부를 수 없는 찬송을 부르게 하셨습니다.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던 위대한 일들을 그들로 하여금 보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에 이스라엘밖에는 없는 것처럼 사랑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의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밖에는 없는 것처럼 가나안을 정복해나갔습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우상을 훼파하고 주님을 거스르던 패역한 족속들의 씨를 말리면서 그들은 혁혁한 승리로 진군해 갔습니다. 주위에 있는 수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보며 두려워 떨었던 것은 이스라엘의 웅장한 군대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는 여호와라고 하는 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살아갔던 때에 그들이 행했던 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옛적 길이었습니다. 그 때에는 요즘 길이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걸어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지금은 그들에게 있어서 옛적 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늘 걸어다니며 행하였지만 지금은 사람들의 인적이 끊어졌기 때문에 밟고 지나간 자리는 있지만 곳곳에 수풀이 무성하게 솟아나서 얼핏 보면 길인지 숲인지를 분간할 수 없게 된 그런 옛적 길 말입니다.
멸망을 눈앞에 둔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선지자는 옛적 길로 돌이키라고 간곡하게 권하고 있습니다. 주님과의 사랑이 있고 주님을 향한 순결함이 있고 헌신이 있고 교제가 있고 그 분과의 완전한 친교가 있었던 그 아름다운 길로 돌아서라고 선지자는 간곡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답은 너무 간단했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우리는 그 길로 행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다시 그 옛길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 그들 앞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쟁의 위협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습니다. 열방의 틈바구니에 끼여서 그들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의지할 곳 없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당신 자신이 지키지 않으면 지킬 사람이 없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지키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시고 하나님은 그 일을 자기의 고유한 일로 여기시기 때문에 누구도 하나님의 백성을 지키는 그 일을 당신을 대신해서 하게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버리시면 그 백성들을 구원해낼 백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옛적 길로 가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아주 쉽게, 그러나 아주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왜 그 길로 행치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일까요? 옛적 길로 행할 때 그들에게 없었던 것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친교가 있었고 번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인정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위엄과 영광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한 권세와 권능이 있었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의 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로 행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옛적 길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걸어가게 되었는데 그 길은 하나님 없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있는 그곳에 모든 것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있는 곳에 없는 것들이 하나님 없는 곳에는 많은 것입니다. 그것의 맛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본 것입니다.
개인이나 이스라엘의 역사나 마찬가지인데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해서 별다른 존재들이 아닙니다. 원래는 세상에서 취한 바 된 백성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내면의 세계 속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을 유지하게 하는 경건과 거룩이 있을 때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일이 자연스럽지, 그렇지 않고 참된 하나님의 실재가 느껴지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 그들에게 전혀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옛적 길을 버리고 하나님이 없는 새 길을 걸어가면서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면 누릴 수 없었던 많은 즐거움들을 맛보았습니다. 옛적 길로 돌아가면 바로 그런 것들을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고 하는, 새로운 길에서 갖게된 잘못된 사랑 때문에 옛길로 못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벌써 깊이 굳어진 패역이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과 삶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인간 스스로가 죄를 택합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기가 원해서 불순종합니다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죄와 불순종이 인간을 택할 뿐 아니라 지배해 버립니다. 그래서 그들이 계속해서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새 길로 걸어가고 옛길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시 옛길로 돌아가면 새 길에서 맛보게 된 이 세상적인 즐거움과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들에 대한 사랑을 버려야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또 하나 이 사람들이 단호하게 “우리는 그 옛적 길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늘 주님 때문에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은 주님이 “너는 내 앞에 서라”고 말씀하실 때 혹은 “내가 네 앞에 있노라” 혹은 “내가 불꽃같은 눈동자로 너를 지켜보노라” “내가 네 가장 가까이 있노라”하는 말씀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되지만, 하나님을 거스르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것만큼 힘겨운 것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자기가 당하게 될 지도 모르는 어떤 일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이제껏 까지 자기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심판 받을 지도 모른다는 율법적인 두려움에 기인할 수도 있고, 도 한편으로는 자기가 이제껏 까지 애착하고 하나님 없는 어두움 속에서 누리던 것들을 버리라고 말씀하실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사실 저도 그랬습니다. 주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깊이 빠지지는 않으리라’했습니다. 제가 모든 것에 외골수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가지면 외골수가 될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목회자가 되라고 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맞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 무엇에 대한 두려움이냐면 목사가 되어서 가난해 지고, 교인들에게 시달리며 살게 되기 때문이 아니라 목사가 되면 도저히 갈 수 없는 길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버리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그럴만한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고, 돌이켜 서기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습관을 한번 고치려고 해보십시오.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뭘 빼앗아 가시겠다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옛적 길로 돌아와라 너희 조상들이 그렇게 나를 즐거워하고 나는 그들을 사랑하고 친교를 나누면서 이 가나안을 정복해 갔던 위대한 새 역사를 창조하자"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는데 그 사실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다 알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로 돌아가지 안겠다는 것입니다. 이 고집과 완고함은 정말 굉장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볼 때에 사실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싸움은 하나님이냐 세상이냐, 우상이냐 여호와냐, 유일신 신앙이냐 무신앙이냐, 그것이 아닙니다. 옛적 길이라고 하는 것이 암시하는 것은, 그 시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일신 신앙을 삶으로서 구현하던 때입니다. 하나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사랑했고 그렇게 순종했고 그렇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겠다거나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겠다거나 하나님을 버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도 사랑하며 절충하면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옛적 길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옛길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들이 이 선지자의 경고의 음성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인간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모습이 오늘도 재현되고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나와 주겠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버리겠느냐, 하나님을 택하겠느냐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겠느냐 말겠느냐가 아닙니다. 교회도 나오고 십일조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헌금도 하고 건축헌금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라고는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을 위해서, 생명과 마음과 뜻과 성품, 모든 것을 드려서 그 한 분밖에는 없는 것처럼 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 성숙한 인간이니 우리가 알아서 하나님을 공경해드리면 되지, 밑둥까지 완전히 하나님 것으로 만들려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싸움이 선지자와 이스라엘 백성의 싸움이었고, 또 오늘 우리와 하나님과의 싸움이 바로 이런 싸움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일 "싫다. 우리는 이 길로 행하지 않겠노라"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그 속에서 읽을 수 없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외식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옛적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 속에서 한 번 귀 기울여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제사의 제도를 상세하게 일러주시고 율법을 주신 이후로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여전히 그들의 정신의 중심 자리에 와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죄나 불순종에 대한 기계적인 처리를 하기 위해서 율법을 이용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복음이 우리가 짓는 불순종과 죄를 기계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이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값없이 주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 하신 것은 단지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 용서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한 분밖에는 의지할 분이 없고 그분 밖에는 우리의 참 구주가 없으며 그분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나님과 우리를 위해서 그분의 명령을 따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그 십자가의 복음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대한 반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여기에서 옛적 길이라고 하는 것은 너희들이 가지고 있던 어떤 어떤 의무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너희들이 그 옛적 길로 돌아가라. 그 옛적 길로 너희의 조상들이 행했을 때 그들은 나만을 사랑했으며 나에게만 순종했으며 나에게 순결했으며 나만을 위해서 섬기며 내가 전부인 것처럼 살았느니라. 내가 그들을 그렇게 사랑했던 것처럼.” 거기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인간은, 특히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의 행복 속에서 살기 전까지는 결코 이 세상에서 행복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과의 참된 친교의 빛을 잃어버리고도 그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저는 그 사람의 구원을 믿을 수 없습니다. 어둠 속에서 햇빛이 들지 않는 음지에 있는 식물들은 아침이면 잠깐 들었다가 사라지는 그 햇빛이라도 받기 위해서 줄기를 그 쪽으로 뻗습니다. 굴광성이라고 합니다. 빛을 향해서 굽습니다. 하물며 주님이 주신 생명이 있는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완전한 친교와 교제의 행복 없이 어떻게 복되게 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을 버리고 얻은 얼마 안 되는 행복, 그리고 주님의 성품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느끼는 잘못된 정죄 의식이나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싫어하고 그래서 숙명적으로 옛적 길로 돌아가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 사는 불순종과 방탕한 죄악의 길을 계속 걷겠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죽기를 작정한 짐승과 같은 행동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가던 삶의 방향을 선회하는 것입니다. (예화:부산을 가야하는데 목포 가는 기차를 탔다면, 부산행이라고 다시 써 붙이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중간에 내려서 다른 기차를 타야된다) 그것 이외에 다른 것으로는 가득 차오르는 하나님의 분노, 하나님의 배신감을 잠재울 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한데 그것은 심판입니다.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심판하셔서 분노를 푸신다고 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다시 당신의 백성들로 말미암는 행복이 회복될 수 있겠습니까?
적용을 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의 모습이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계속해서 "우리는 그 길로 행하지 않겠노라. 하나님도 버리고 내 마음대로 살아온 그 길을 그대로 걸어가겠노라"고 고집하며 말하는 것은 쓸데없는 것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고 근거 없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이 시간에 그 사랑의 실체와 두려움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것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백 번 양보해서 하나님 버리고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길에 얻은 사랑하는 것들이 있다고 칩시다. 사실 신앙을 버리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참 많습니다. 신앙을 버리면 편해지는 때도 참 많고, 어렵게 걸어갈 필요 없이 쉽게 걸어갈 수 있는 길도 많이 있습니다. 신앙을 버린 대가로 누리는 즐거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즐거움을 줄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가 불에 데어보기 전까지는 불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 애쓰다가 결국은 그 불에 데는 것처럼,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만 사랑하도록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을 사랑하게 될 때 그것이 어떻게 커다란 상처를 그들의 마음에 주는 지를 끊임없이 경고 받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린아이들처럼 여전히 주님 안에서 얻을 수 없는 것들을 탐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우리에게 커다란 상처와 아픔을 가져다주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꿀처럼 달았으나 나중에는 쑥처럼 쓰고, 처음에는 보기에 좋은 것 같았으나 시간이 지나면 우리를 찌르는 가시가 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인간들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모두 소유하면 행복해질까요, 불행해질까요? 아마 틀림없이 불행해 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너무나 원하는 데도 적절하게 주시지 않고, 가지고 있고 싶은데도 가져가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적절하게 하나님 앞에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쓸모 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과 사랑이 옛적 길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그런 집착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버리기 전에는 결코 그 옛적 길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하나 두 번째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죄 받은 양심이 주는 송사이지 정당한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알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아담이 범죄 하였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기도 전에 아담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커다란 두려움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피하려고 시도하면서 어디엔가 숨었습니다.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를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신 것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보면 전혀 책망의 음성이 아니라 친근한 아버지가 아들을 찾는 음성입니다. “우리 아들 어디 갔나?”하는 의미입니다. 이미 죄가 들어온 그 양심이 그를 찔렀고 송사했습니다. 하나님이 정죄하시기도 전에 그는 정죄감을 느끼며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살기를 원하는 강력한 소원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다시 부르셔서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물론 죽음이 선고되었고 하나님의 징벌이 선언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 오든지 안 오든지 하나님을 만나든지 안 만나든지 어차피 받게 될 징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자기의 고집을 따라서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선명하게 울려 퍼지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대면하는 것을 무서워합니다. 피합니다. 하나님을 정직하게 대면할 용기를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실제로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면하기 싫어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를 징벌하실 수 없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잘못했을 때 당신께로 돌아오게 하는 방법의 일환으로서 그들을 징벌하시고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려움은 모두 쓸모 없는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그런 두려움 속에서 더 많이 어두움을 찾고 더 많이 범죄하고 더 많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죄를 지을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겉모습을 다듬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방향의 선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오늘 선지자는 옛적 길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돌아 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절에서는 그들이 그렇게 돌아갈 수 없었던 궁극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의 태도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위에 파수꾼을 세웠으니” 파수꾼이라는 말이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복수로 나와있습니다. 그러니까 한두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나팔 소리를 들으라”에서 그 나팔은 복수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나팔을 든 파수꾼들은 많이 있었지만 소리는 한결 같았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것은 전쟁의 문맥입니다. 성을 짓고 그 높은 망루 위에 파수꾼을 세우는데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파수꾼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들은 먼 곳을 관찰하면서 적군들이 침입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군들의 침입이 확인되면 나팔을 부는데, 이 사람은 이런 소리, 저 사람은 저런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본 사람은 여럿이지만 나팔 소리는 정확하게 하나로 들려온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변화될 때가 되면 이상하게 하나님이 일관성 있게 말씀하신다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 성경을 읽어도 그것, 지나가다 책을 한 권 샀는데도 그것, 주일에 설교를 들었는데도 그것, 금요일에 구역 예배에 갔는데도 그것, 새벽기도를 오래간만에 나왔는데도 바로 그것,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종종 졸지에 심판을 당하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결코 졸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충분히 동일한 목소리로 경고하시고 말씀하시고 가르쳐주신 후 어느 순간에 이제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다고 생각되실 때에 당신의 행동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잘 순종할 때에만 선지자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스르고 반항할 때 더 진실하고 능력 있는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예레미아가 그런 경우이고 이스라엘의 역사가 비탈길로 접어들면서 혁혁한 선지자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에스겔, 예레미아, 엘리사, 엘리아, 이사야 같은 걸출한 선지자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음성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결국 여기서 알게되는 중요한 진리는 우리의 삶은 철로 위를 달려가는 기차와 같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일탈될 때가 있고, 다른 길로 접어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분명하게 인정해야 될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신앙의 세계를 가진 사람들은 여전히 희망이 있지만, 그런 세계가 없는 사람들은 정말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 결정적인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진실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어도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인식할 수도 없었고, 인식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들은 애써서 부인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철저히 자신의 귀에 듣기 좋고 자신의 입에 먹기 좋은 하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시대에 거짓 선지자들이 열렬히 환영받았고 대중들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대한 관심사는 단지 여러분들이 많이 모이거나 커다란 계획들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 여러분들이 진정한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옛적 길로 돌아가는 회개와 자기의 삶의 진정한 변혁 없이 어떻게 질적으로 다른 백성들이 될 수 있겠습니까?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만으로는 결코 이러한 하나님과의 친교가 있는 옛적 길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가지고 모든 것을 누리고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우리에게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좋은 아버지의 곁을 떠나 방탕한 길로 떠났던 탕자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자기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곁에 있으면서 자기를 사랑하는 그 아버지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누리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관계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 때문에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누리기 위해서 먼길을 떠났습니다. 허랑방탕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아버지 때문에 누리지 못했던, 아버지와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한 결코 접촉할 수 없던 세상의 수많은 즐거움들을 경험했습니다.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exciting했습니다.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집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일평생 아버지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자녀였습니다. 아버지의 자녀는 언제라도 그 아버지와의 관계를 생각하도록 만드십니다. 돈도 떨어졌습니다. 굶주렸습니다. 그 때 생각이 났습니다. 동기는 주염 열매였지만 그것은 하나의 계기에 불과했고 그것을 캐고 들어가니까 마지막에 잡힌 큰 뿌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아버지와의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의 아들이고 그 아버지의 집은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돼지를 치는 목부의 신세가 되어서 주려서 이방의 땅에서 굶어 죽는구나’하며 돼지우리에 엎드린 뿌리는 쌀이 없거나 돈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를 버렸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생각난 것입니다. 궁핍을 통해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인생을 보는 눈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열렸습니까?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의 기초가 아버지와의 관계였구나’하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또 하나 깨달은 사실은, 아버지 없이 누린 것들이 준 그 exciting한 즐거움이 무엇을 남겼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정말 신나는 때도 있습니다. (예화:록키 산맥의 그림 같은 호수를 구경하면서 통곡하고픈 심정이었다-천혜의 아름다운 호수를 보고 자신을 돌아보니 너무 비참해서 통곡하고 싶었다) 그것이 예술이든지 문학이든지 정치든지 사회든지 무엇이든지 간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분을 따르는 것 이외에는 모두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찬송: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 더 귀하다)(예화: 캐나다 여행하다보면 머리가 하얀 노인들이 연금을 타서 여행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나이아가라 폭포에서는 정말 눈물이 나왔다) 노년이 되어 죽음의 때가 가까왔는데 저렇게 경치 좋은 곳이나 보며 인생의 허무를 달래면서 사는 것이 너무 비참해 보였습니다. 좋은 음식, 편안한 잠자리, 경치 좋은 곳을 두루 다니면서 영혼의 허함을 달래는 것이 무엇을 남겨주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다 헛된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심이었습니다. 주님이 그들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하시는 그 불붙는 아가페, 헤세드의 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주님이 자신을 사랑하신 것처럼 그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동행하면서 사는 백성들과의 관계 속으로 돌아가는 옛적 길이 하나님 마음에 그리움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우리의 삶을 돌이키기 위해서는 마음에 참된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는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참된 변화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가를 한번 점검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가던 길을 돌이켜서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그 때는 항상 죽음에 대한 공포라든지, 상 줄지도 모른다는 보상 의식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우리를 하나님께 회개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서 철저하게 하나님을 배역하며 사는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강퍅해져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주는 그리운 마음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집을 나간 그 탕자가 주염 열매조차 주는 사람이 없어서 굶주렸을 때, 집을 생각나게 한 동기는 주염 열매였지만 상상하며 계속 따라가니까 마지막 끝은 집이었고 결국 아버지였습니다. 한 사람이 깨어있는 영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복잡한 말이 아니고 단순히 말해서 늘 그 관계를 느끼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경험이 필요합니다. 예배시간마다, 기도할 때마다, 성경을 펼 때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경험이 꼭 필요합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불순종하는 많은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보면 그들의 불순종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들도 어쩔 수 없어서 그런 삶을 사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시각에서 죄인들을 볼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때로는 자신이 불순종을 택했고 죄를 택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 떠났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의 감각을 잃어버리고 죄와 불순종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죄와 불순종은 영혼에 어두움을 더하고 그 어두움은 그로 하여금 계속 불순종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듭니다. 그러는 사이에 마음은 강퍅해지고 몇 번 씩 걸어갔던 그 불순종의 길은 그를 움직이는 강력한 길이 되어서 패역의 통로가 되어 그로 하여금 그 길을 걷게 합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죄를 택했지만 다음에는 죄가 자기를 택해서 지배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속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영혼은 탄식하며 목말라하며 통곡합니다. 한 손으로는 피를 묻히며 죄를 짓고 한발로는 불순종의 진흙을 걸어가면서도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가슴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목말라 합니다. 이것이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인간들의 모습은 혼돈일 수밖에 없고 궤변으로 자신의 삶을 입증하려고 해도 그들의 삶은 모순 투성일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돌아오기 전까지는 결코 질서와 정도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생각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비결을 터득하지 못하고 시련과 아픔 속에서도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달래려고 애를 씁니다. 병적인 쾌락과 죄에 대한 탐닉은 바로 이런 허무감 속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사실 우리들이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친교를 회복하게 될 때 그 때 우리를 그렇게 뼈저리게 가슴 아프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버렸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가책으로 다가옵니다. 다만 우리의 죄와 불순종이 우리의 눈을 멀게 해서 두려움 속에 떨고 가시에 찔리면서도 거기서는 가시밭길이기 때문에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주님이 거기 계실 리가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다릅니다. (찬송: 어둡고 캄캄한 그곳 가시밭길에 길 잃은 양 한 마리 떨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때 그는 닫혀진 대문을 두드리며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광경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거기에 나와 있었습니다. 짓무른 눈으로 먼 곳을 살피며 실의와 비탄에 차서 돌아오는 아들을 먼저 발견하셨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떠났지만 아버지는 항상 거기에 계셨습니다. 돌아올 때나 돌아오지 않을 때나 언제나 거기에 계셨습니다.
오늘 새벽 3시에 잠을 깨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신실하신가 만약에 내가 사람들에게서 그 신실함과 불신실함을 따라서 받는 대접 그대로를 하나님이 하셨다면 나는 아마 벌써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하나님 사랑한다고 펑펑 울고 십자가에서 흐르는 그 피를 예수님의 발끝에서 닦아 드리고 그 얼굴을 끌어안고 울다가는 침 뱉고 도망가고 다시 돌아와서는 용서해달라고 빌며 물수건으로 예수님의 그 흐르는 피를 닦아주다가 뺨 때리고 도망가고 그래도 언제나 거기 계십니다. 돌아가서 무릎을 꿇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언제나 거기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돌아올 수만 있다면 이전에 주님 자신이 능멸을 받으신 것 같은 것은 생각도 않으시는 것처럼 자존심도 없이.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시켰나 봅니다.
우리가 이런 좋은 하나님을 버리고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찬송:예수 내 친구 날 버리잖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시는 것은 이런 관계를 생각하고, 그것을 잃어버리고 걸어가는 이 새 길이 얼마나 허무한 지를 알고, 그 옛길, 그 관계가 있었던 그 길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오기 위해서 그들은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백성이 천하를 주고도 사야할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영혼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언제 말씀하시든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전수 받을 수 있어서 주님이 가지고 계신 생각과 계획에 우리가 반응할 수 있다면, 그는 부족해도 반드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말 것입니다. 모자라도 나중에는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이고 지금은 모난 돌 같아도 언젠가 하나님이 다듬으셔서 고귀한 가치를 지닌 성도들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이제 돌이키라 그리고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옛적 길을 버린 이후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참 사랑의 교제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주님의 숨결이 느껴지는 완전한 교제의 행복 속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그 길로 돌아가는 삶 전체의 전환 없이는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종종 그런 삶과는 상관없이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비 성격적인 신비적인 사상입니다. 삶이 옛길로 돌아가지 아니하고는 하나님과의 옛 친교 옛 관계를 다시 복원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총체적인 삶이 돌이켜 서서 예전에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는 것처럼 사랑하고, 그 하나님께만 순종하고, 그 하나님 때문에 순결을 지키고 하나님만 섬기면서 살았던 온전한 옛길로 돌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바라시는 회개와 돌이킴이라는 것이 이처럼 전 삶을 포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흔드시는 것이 아니라 삶을 흔드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을 흔들고 여러분들의 마음에 감화를 주어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시는 것은, 그 마음으로 여러분들의 삶을 움직여서 그 옛적 길로 돌아가게 하시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감화요 감동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는 우리가 그렇게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을 기뻐하고 주님을 사랑하며,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주셨을 때 하나님과 우리를 그렇게 관계 맺고 싶어했던 그 완전한 사랑과 친교가 있는 그 관계 속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날마다 실패하고 예배를 드리는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 자신이 너무나 미운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들은 사랑 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 이외에는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거기에 서서 기다리시고 언제나 거기에 서서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께로 속히 돌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3.듣고 행하라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렘7:22-23)
옛적 길로 행하라고,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길로 돌아오라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외쳤던 선지자는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이 7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근본적인 요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들은 바대로 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들으라 그리고 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시는 가장 중요한 요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치 없는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자기의 백성들이 당신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그런 자비와 긍휼을 보이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 따로 존재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래로 경건한 사람들의 계보가 흘러온 것은 사실이었고, 노아의 홍수를 통해서 셋의 자손들이 보존되고 분명히 이 세상에 섞이지 않는 일부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지만, 실질적인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아브리함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우상을 만드는 아비와 함께 메소보타미아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과분한 약속들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그 때에 “내가 너를 약속의 백성들의 조상을 삼겠다. 그리고 너로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모래와 같이 많은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조건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라”였습니다.
오늘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전해주고 있는데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 내가 너희에게 언제 제사를 명했느냐, 제물을 명했느냐? 아니다. 너희가 나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키실 때 실제로 제사에 대해서 아무 말씀도 안 하셨느냐면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히브리 사람들의 하나의 어법인 것입니다. 어떤 한 가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다른 한 가지를 없는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 사람들의 고유한 어법입니다. “나 여호와가 너희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그날에 제사에 대해서번제에 대해서 너희에게 말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중요성에 있어서는 나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에 비교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멸망을 앞둔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는 삶을 제사 드리는 삶, 형식적인 종교생활로 대치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살아있을 때에는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 행위가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고 우리의 부족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좋은 방법이 됩니다. 그런데 그 중심에서 신앙의 대의라고 할 수 있는 순종하는 삶을 버리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점점 더 순종을 잃어버리게 하고,
살아가는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아예 그 기반 자체를 흔들어 버리십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제사를 지내고 여러 가지 형식을 갖추어서 절기를 지키고 나를 경배한다마는 그 종교행위는 나 여호와가 너희에게 준 가장 중요한 신앙의 대의, 즉 나 여호와께 순종하는 것이 있을 때에 비로소 의미가 있는 종교행위이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하나님께 형식적으로 제사하고 예배하는 것으로서 마음을 다 드려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불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자신의 양심의 가책들을 점점 더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하고 제사를 드리면 드릴수록 심령이 더 강퍅해지면서 하나님 앞에 뉘우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예배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배 생활은 예배를 통해서 자신이 깨트려지고 깊이 하나님을 만나는 살아있는 경험들을 갖지 못하면 그 예배를 통해서 그 사람의 마음이 걍퍅해져가는 것입니다. 가끔 회개에 대해서 설교할 때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하며 울고 회개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님을 떠났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하나님을 떠났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예배시간에 와서 하나님을 만나면,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이미 알면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면, 자기가 하나님을 떠났던 흉악한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남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 사람의 양심 속에 확 느껴지도록 만드십니다. 그것이 예배의 힘입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과의 만남도 없고 말씀 앞에 자신이 깨트려지고 변화되는 감격도 없는 사람들이 자신이 하나님을 떠났던 죄인이라고 고백하게 되는 일은 굉장히 드믈게 일어납니다. 그것이 심판 직전에 예레미아의 설교를 듣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동생이 아버지의 재산을 나눠가지고 허랑방탕하게 다니면서 다 썼습니다. 그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사랑으로 맞아주었습니다. 너무 감격했습니다. 왜냐하면 품꾼중의 하나로 여김을 받고 밥만 먹여줘도 행복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옷을 입히고 신을 신기고 송아지를 잡고 반지를 끼워주고 다시 권세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너무나 놀랍고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그런 신앙의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쓸모없는 죄인을 하나님의 사랑하심으로 우리들이 잊지 못했던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풀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님의 큰사랑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옛적 길을 걸어갔던 때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순수한 사랑이 있고,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순종이 있고,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순결함이 있고, 무엇을 하든지 좋으신 하나님을 섬기며 살고자 하는 자기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런 놀라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큰아들처럼 되갑니다. 이제 더 이상 탕자가 되어서 멀쩡하게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유산 내놓으라고 해서 보따리 싸서 떠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집에 있는 즐거움은 없습니다. 큰아들이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뭐가 다릅니까? 만일 둘째 아들이 돌아와서 자기같이 쓸모 없고 아버지를 떠났던 죄인을 아버지가 용서하고 다시 사는 삶을 주셨다고 하는 감격을 잃어버렸다면 큰아들이 낫습니까 작은아들이 낫습니까? 큰아들은 원래부터 그 집에 가만히 있었고 재산도 축 내지 않았습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 재산을 다 축내고 한 때는 눈물을 흘리고 돌아왔지만 지금은 역시 아버지가 자기 같은 사람을 용납하고 긍휼히 여겨주신 옛 사랑의 기억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가 그런 상태였습니다. 형식적인 신앙생활 속에서 점점 하나님을 만나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주님 앞에 펑펑 우는 감격으로 돌아온 극적인 회개의 경험이 있으면 뭐합니까? 옛날에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없는 것처럼 뜨겁게 사랑하는 신앙의 열렬한 과거가 있으면 뭐합니까? 지금은 큰아들처럼 되어버렸는데. 지금은 ‘아버지가 나를 용납해 주시고 나같이 쓸모 없는 죄인을 다시 받아주시다니’ 하는 감격이 지금 없는데 옛날에 그런 감격이 있었던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신앙의 감격은 모두 사라지고 신앙에 있어서 대의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은 이것이 있고서야 비로소 예배와 제사와 모든 것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순종은 모두 다 없어져 버리고 매일 매일 되풀이되는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하나님을 향한 참된 순종을 대치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언제 너희에게 그런 식으로 제사를 지내라고 한 적이 있느냐? 나는 그런 제사를 너희에게 드려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다”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지를 않았으니까 그렇지 만약에 정신을 차리고 선지자의 이 음성을 들었다면 폭탄적인 선언인 것입니다. 자신들에게는 아무 것도 없고 제사드리고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섬기는 것 하나밖에 남지 않았는데 선지자가 와서 하나님이 그런 것을 명령하신 적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행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앞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 행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이런 식의 수사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의 이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강퍅해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토마스 왓슨이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기만 할뿐 마음에 참된 변화도 없고 영혼의 진정한 감격도 없으면서 일정한 틀 속에서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도덕적인 사람들을 가리켜서 길들여진 짐승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목표는 상자 속에 반듯반듯한 쿠키가 들어가듯이 규격제품화 된 교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 좋으라고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들은 교회의 부속품이 아닙니다. 교회 위해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목회자가 가지고 있는 목회의 꿈을 위한 부속품들이 아닙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화) 어느 목사님이 자기 교회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를 자랑삼아 하셨는데 교 인들이 문제를 일으킬 만큼 의욕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린아이들이 사 고를 치는 것은 건강하다는 증거이다
그런 것도 신앙의 목표일 수 없습니다. 문제없는 것이 무슨 자랑입니까?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신앙의 목표가 아닙니다. 가끔 어떤 사람이 교회에 와서 “목사님 말씀 잘 듣겠습니다”하는데 제 말 잘 안 들어도 하나님 말씀 잘 들으면 됩니다.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규격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감격이 있습니까? 누구를 위한 신앙생활입니까? 그렇게 신앙생활해서 누구 좋은 일 시켜주려고 합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신앙의 대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모두 신앙적인 내용물을 싸고 있는 부차적인 포장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식에 익숙해지는 것은 굉장히 경계해야 합니다. 생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예화) 한 주일 학교 교사가 교회를 안나왔기에 물었더니 은혜를 못 받는데 교회가면 뭐하느냐고 했다
은혜를 못 받아도 교회에 와서 왜 은혜를 안 주시느냐고 하나님 앞에 따지든지 자기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든지 해야지 교회에 안나오면 어떻게 합니까? 이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주 미묘한 것입니다. 형식에 익숙해져도 문제인데 형식 자체를 버려도 문제입니다. 형식에 늘 만족하면서 예배 생활 하는 사람, 그 이상은 더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형식적으로 예배드리고 나면 내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런 사람도 문제이지만 오고 싶으면 오고 말고 싶으면 마는 사람은 하나님을 막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배교에 가까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돌이키지 않으면 작대기로 두들겨 맞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데 연약함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막보는 것입니다. 예배에 가고 싶으면 가고 말고 싶으면 말고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맙니다. 자기가 하나님입니까? 그런 사람에게 무슨 신앙의 미래를 볼 수 있겠습니까? 아직까지도 그런 유치한 단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소수이기는 하지만 여러분 가운데에도 있습니다. 빨리 그 생활을 걷어치우십시오. 무슨 좋은 날을 보기를 기다리면서 생각날 때 가금씩 교회에 나오는 우발적인 교회생활을 합니까? 그렇게 해서 뭐하시렵니까? 무슨 희망이 있을 것 같습니까?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막보면서 형식도 파괴하고 그렇게 살면서 하나님 앞에 무슨 도움을 받으려고 하십니까? 그런 식의 신앙생활은 안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식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의 대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순종입니다.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이 여기로 모아집니다. 제가 몇 가지만 질문 할테니 불순종이라고 답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에 왜 죄가 들어왔습니까? 불순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구원해 주실 때에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리의 무엇을 회개합니까? 불순종을 회개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그런데 내가 너무나 많은 세월 동안을 하나님 없는 것처럼 살았구나’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는데 옛날에 주님 모르고 살았을 때 자신이 저질렀던 불순종이 마음 아파서 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마른 뼈와 같은 인간들에게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그러고 나니까 내가 내가 아닙니다. 너무 행복합니다. 전에는 주일이 빨리 돌아왔는데 은혜를 받고 나면 일주일에 교회에 한번 더 나가는데도 전보다 주일이 더 늦게 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바뀌는 것입니다. 교회당에 와서 앉기만 하면 기도가 쏟아져 나오고 그렇게 기쁩니다. 변화를 받고 나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깊어지고 어쩌면 그렇게 하나님 말씀이 잘 이해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말씀이 은혜가 됩니다.
그러다가 언제인지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데 어느 날 내 자신을 돌아보니까 그런 기쁨과 은혜가 사라졌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불순종 때문입니다. 그 불순종이 패역이 되어서, 우리에게 단단한 껍질이 되고 우리를 결박하는 사슬이 되어서 이제는 좀처럼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것도 무엇이 반복되기 때문입니까? 불순종이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죄를 택하는데 다음에는 그 죄가 나를 선택합니다. 나를 사로잡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의지적으로 불순종을 하는데 이 불순종이 계속 반복되다 보면 그 다음에는 그 불순종이 나를 사로잡아서 다시 순종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 죄에 대해서 인 박이게끔 만들어버립니다.
(예화) 술에 인 박인 이야기-일단 먹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몸 속에서 술과 서서히 결별하게 되는 것이다. 술에 인 박인 사람을 수용소에 가뒀는데 나오는 날 다시 먹었다는 이야기.
술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예화) 도벽이 있는 사람이 그 도벽을 어떻게 끊을 수 있겠습니까? 처음에는 자기가 물 건이 탐이 나서 훔쳤지만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자기가 훔치는 것이 아니라 도벽 의 기질이 자기를 주장해서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에는 하면 재미있었고 안 하면 안 하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안 하면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패역 입니다. 악한 습성입니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안 고쳐집니다. 하지 말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안 하면 안 할 수 있었는데 몸에 배여서 도벽이 되어버리고 난 다음에는 안 하는 것 자체가 견디기 힘든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술을 왜 먹을까요? 처음에는 선택해서 먹는 것인데 나중에는 안 들어가면 몸이 견디기 힘든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슬에 매여있는 상태입니다. 노예가 된 상태입니다. 무엇에도 그렇게 노예가 되면 안됩니다.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그렇게 되어도 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모두 예수님께 매여서 중독 된 환자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그분 말고는 절대 다른 것에 매여서는 안됩니다. 취미에도 그렇게 매이면 안됩니다. 취미를 갖는 것은 괜찮지만 취미에 미친 듯이 매이면 안됩니다.
불순종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좋은 것을 다 앗아가는 것입니다. 언젠가 하나님의 큰사랑을 알고 주님의 놀라운 사랑의 감화를 받았던 은혜의 경험들이 있는 지체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가까운 때에 그런 것을 받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하는 감격 속에서 ‘이렇게 좋은 신앙의 길이 있는데 왜 사람들은 나에게 안 가르쳐 줬을까. 이제서야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겠구나’ 하며 펑펑 울며 감격합니다. 그 때마다 저는 속으로 ‘얼마나 가나 한번 보자’합니다. ‘그대가 그대 자신을 너무 모르는구나’ 합니다.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지금 하나님의 깊은 말씀을 깨닫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감격적인 사랑 속으로 들어가니까,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자신에게 넘치니까 옛날에 그렇게 살지 못했던 때가 생각나는 것입니다. ‘옛날에 그렇게 살지 못했던 것은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좋은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그런 삶을 살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합니다. 그것은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립니다. 그것은 자기 안에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죄악 된 씨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지라고 하는 어두움에서 버섯이 자라듯이 같이 자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감격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잃어버리고 이제는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에 접어들었습니다. 무엇이 변했습니까? 하나님을 막보는 신앙생활도 안 합니다. 교회에 나가기 싫어도 자동으로 나갑니다. 역사와 전통에 빛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것이 중대한 발전입니다. 적어도 노골적인 행위로서 하나님을 막보지는 안습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은혜를 받고 신앙이 깊어질수록 신앙이 돈독해지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목회자가 신경을 별로 안 써도 될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전에는 막보는 단계에 있었으니까 교회에 잘 나오고 있는 한 문제가 적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깊어지고 나면 하나님 앞에 진실로 중요한 신앙의 내용은 다 빼버리고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습니다. 처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던 그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교회 출석해서 거기에 앉습니다. 바뀐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큰사랑 눈물에 겨워
울며 울며 내가 옵니다
가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그런 감격, 그런 은혜가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진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불순종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불순종이라고 할 때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허랑방탕한 아들 생각을 하시면 안됩니다. 그런 사람은 우리 가운데 거의 없습니다. 아버지 유산 나눠 가지고 가서 다 털어먹고 온 사람이 여기에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출석생활만 있고 그 속에 감격과 하나님과의 만남과 진실한 자기 깨어짐과 사랑과 은혜의 감격이 없는 생활, 그것이 불순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이 깊어질수록 이 불순종이 아주 지능적이 됩니다. 그리고 점점 더 야비해 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뭉툭한 말씀의 칼로는 그런 것이 잘 도려내 지지가 않습니다. 허랑방탕 하면 안 된다고 말씀의 큰칼로 내려치면 주일이면 교회에서 사는데 누가 허랑방탕 합니까? 어디 가서 술 한잔을 마음대로 먹어보았습니까, 바람을 피웠습니까? 그런 것이 없으니까 그런 칼을 아무리 휘둘러도 교회에서는 그것 맞고 회개할 사람 없습니다. 어느 정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면 막가파 그리스도인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생활은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진짜 그 속에 담겨야 할 모든 내용은 다 빼버리는 것입니다. 전부 가짜입니다. 그런 식의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불순종이 모든 좋은 것들을 앗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종교적인 생활을 외관상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불순종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가 두 가지 입니다. 첫째는 늘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진짜 하나님께 은혜 받은 사람들이라면 여러분들을 술자리에 데려다 놓으면 어떻게 될까요? 대부분 아주 우울해 질 것입니다.
(예화) 직장 다닐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술자리에 같이 가면 다시는 오지 말라고 했 다.
어울리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영혼 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은혜의 세계와 그 환경이 안 맞는 것입니다.
(예화) 택시 타고 니나노 노래가 나오면 끄라고 한다
저에게 그것은 노래가 아니라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속에 울려 퍼지고 있는 정서의 세계와 외부적으로 강요되는 정서의 세계가 다르니까 그 속에서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신앙이 깊어질수록 순종하지 않으면서도 자기가 순종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심각하게 자각하지 못하느냐 하면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디서나 찬송가 테이프가 나오고 설교 테이프가 나오는 분위기 속에서 살기 때문에 그런 분위기 속에 익숙해져서 살면서 자신이 잘못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명쾌하게 깨닫기는 힘든 것입니다. 주위의 분위기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주위의 분위기가 우리로 하여금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살게 하기 때문에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줍니다.
두 번째 이유는 신앙이 깊어질수록, 말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지식에 대한 교만함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정확하게 보지 못하게 합니다. 교만은 항상 자기편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자기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예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고 신앙의 세계에 대한 다양한 체험이 없었을 때에는 설교를 하거나 누군가가 ‘너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렸지?’하면, 자기를 변호할 수 있으리 만치 영악하지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저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내 신앙생활에서 눈물이 사라졌고 감격과 기쁨이 사라졌습니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를 많이 경험하고 말씀의 지식도 어느 정도 늘어나면 신앙에 있어서의 다양성들을 맛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감격을 잃어버렸지?’하면 ‘너무 원숙해졌기 때문에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는 식으로 자기 변호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사고를 움직이는 것은 궁극적으로 교만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잘못되기에는 너무나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이라는 멍청한 사고 방식을 갖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회개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면 순종은 무엇일까요? 오늘 예레미아 선지자는 순종이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쾌하게 지적합니다. 그 두 가지는 ‘들으라’ ‘행하라’입니다. 옛적 길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에게 강력한 책망을 받는 결정적인 이유는 듣지 않은 것입니다. 파수꾼들을 세워서 파수꾼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망을 보게 하십니다. 망루에 서서 ‘망루에서 보니 이방나라의 군대들이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서 달려오고 있다’합니다. 성 아래에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성벽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데 망루는 외적의 침입을 감시하기 위해서 높은 곳에 세워 놓은 곳이고 거기를 지키는 사람이 파수꾼입니다. 파수꾼이 정확하게 상황을 보고 의심할 여지가 없이 명쾌한 언어로 전달해 줍니다. 그러나 안 듣는 것입니다. 안 들으면 얼마 후에 적군은 당도할 것이고 당도해서 그 성을 공격하면 그들에게는 죽음이 엄습할 텐데 안 듣는 것입니다. 그것을 6장 7장에서 하나님께서 계속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자기의 종들을 보내시지 않은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이 더 많이 타락하고 철저히 하나님을 떠나있는 때일수록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사람들을 보내십니다. 누군가가 정확하게 가르쳐 주면 되지 수십 명이 와서 보고를 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망하기 전 아합의 시대가 얼마나 패역한 시대였습니까? 왕궁 전체가 우상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구약의 역사에서 가장 걸출한 두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입니다. 이제 유다 나라는 너무 불순종해서 바벨론에게 공격을 받아 다 부서지는 것밖에는 남은 것이 없고 하나님의 심판은 확정되었는데, 구약 역사에서 길이 빛나는 뜨거운 가슴을 가진, 말씀과 눈물을 아울러 가진 예레미아라고 하는 걸출한 선지자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에스겔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아무렇게나 살아가면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책망밖에는 없습니다. 그 때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많이 사랑하시는 놀라운 증거를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용서는 회개를 해야만 되는 것이고, 깨닫지 못하는데 어떻게 회개가 되겠습니까? 깨닫게 하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회개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사랑은, 여러분들에게 여러분들의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 정확하고 명쾌한 하나님 자신의 뜻과 의지를 표명하시는 것입니다.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큰사랑입니다.
(예화) 자녀가 학교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면 밥을 먼저 주는 것이 사랑이겠는 가? 자지러질 듯이 아파하더라도 소독해 주는 것이 사랑이다.
잘못 살 때 그가 잘못 살고 싶어서 잘 못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지적을 받는다면 그것이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며 살 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신을 정확하게 지적하시고 자신의 불순종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아직 버리지 않으신 증거입니다. 자신은 중대한 문제에 처해있고 인생의 벼랑 끝에 서있습니다. 계속 불순종하는 삶을 살았고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에 와있습니다. 그런데 ‘불순종하고 돌아다니느라고 얼마나 발바닥이 부르텄니? 하나님이 사랑해 주시니 괜찮아’하였는데 벼랑으로 떨어져 버리는 선택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것입니다.
예레미아가 괴로웠던 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말씀해 주셨고 그것을 전달해 주었는데, ‘하나님이 내게도 말씀하셨다’며 나오는 그들의 말은 완전히 다른 얘기였습니다. “너희는 너무나 잘못되었다. 회개하라. 그리고 이미 나라가 망하는 것은 정해졌다. 바벨론에게 순순히 끌려가서 복종해라. 그러나 그후에 내가 은혜를 베풀어서 너희를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였는데 그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다. 평강을 주신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신다더라’하니 사람들이 그리로 가는 것입니다. 그 선지자들은 아이의 머리가 터져서 피가 흐르는데 배고프니까 밥부터 먹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오락이라도 하라고 하는 어머니와 같은 자들입니다. 그것이 거짓 선지자였습니다. 예레미아의 마음은 죄악으로 상처 입은 그 백성들의 질고를 끌어안고 자신의 몸에는 피가 다 묻어도 상처를 고치기 위하여 아프지만 그들을 닦아주고 싶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듣기 좋은 이야기나 들으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미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비교적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순종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생각도 건전합니다. 막가는 인생도 아니고 분별력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다 잘합니까? 하나님 앞에 다 옳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범죄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거역한 여러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리신 것은 여러분들을 대체로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흠도 없고 점도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 주님을 본받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것입니다.
주는 토기장이 나는 진흙 날 빚으소서 기도하오니
항상 진실케 내 맘 바꾸사 하나님 닮게 하여주소서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의 강력한 은혜를 받지 않았어도 우리 자신의 마음이 연하고 부드러워지면서 ‘정말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내가 입었는데 내가 주님 앞에 해드린 것이 뭐가 있나?’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또 사람들이 나를 칭찬할 때 사람들이 나를 칭찬해주는 많은 말들이 나와는 상관이 없는 공허한 말처럼 들리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가? 그리고 주님의 자비, 주님의 긍휼에 빚지면서 살아가는 인생인가?’하는 것들이 가슴에 밀려오는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말씀을 보면 우리의 마음이 떨릴 정도로 말씀이 살아서 우리의 잘못된 삶을 지적해 줍니다. “너희에게 순결이 있느냐? 너희가 옛적 길로 행하던 때의 그 순수한 사랑이 있느냐? 너희들이 정말 죄와 더불어서 피흘리기 까지 싸웠느냐? 네가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고 하는데 너 자신의 성취욕에 의해서 그렇게 일한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네 일의 중심 속에 있느냐?” 하는 것들이 살아서 우리 마음을 깨웁니다. 그러니 우리가 만일 우리 자신의 그러한 마음의 변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찬란한 빛과 성령의 강력한 감화 속에서 주님의 시각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보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가 얼마나 깊이 깨트려지겠습니까?
이러한 놀라운 은혜로운 작용이 순종하는 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순종의 핵심부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들으라 행하라’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내가 언제 너희에게 번제나 제사를 명한 적이 있느냐”하십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셨습니다. 하셨는데 이런 식의 수사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어라. 그러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약’은 약속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 중에서 원조는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약속입니다. 신약과 구약은 이 약속 하나를 상세하게 역사 속에서 풀어 설명한 것입니다. 처음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온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 때에는 불순종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모든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이 새삼스럽게 처음 조상을 향해서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 여호와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관계 이외에 다른 관계는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약속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런 이 약속은 죄가 들어오고 난 후 백성들이 타락하고 수많은 인류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이 그 중에서 특별히 이 인류의 역사에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릴 자기의 특별한 백성들을 택하셔서 그들에게 독점적인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은 매우 특별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복을 받는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신해서 싸워서 이기게 해주신다’ ‘기적을 행하신다’는 것들은 이 약속이 역사 속에서 이렇게 저렇게 실현된 단편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도 이 약속을 실현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럴 정도로 이 약속이 가장 커다란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최고의 기업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과의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는 특별한 관계입니다.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구약에서는 “너희는 내 소유가 되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과 맺고 있는 이 특별한 관계를 여러 방식으로 표현하십니다. ‘양과 목자’로도 표현하고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리니’ ‘독수리가 자기의 새끼를 업어 나름과 같이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업어 날랐다’ ‘이렇게 우리와 가까이 한 신이 있느냐?’ ‘어느 백성들이 자기의 신을 부를 때 이렇게 자기의 백성들과 가까이 해 주신 신이 있느냐?’ 그런 친밀함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면서 그런 관계 속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조건은 “내 말을 들으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 듣는 자세가 그 사람이 순종할 의사가 있는 사람이냐 없는 사람이냐를 입증합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면, 잘 들어도 그대로 안 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잘 듣지 않고도 순종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은 비단 추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잘 들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그 앞에 항상 히브리어 전치사가 하나 나옵니다. 그것은 ‘베’라는 전치사인데 ‘in’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실 때 그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데, 그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을 듣는다는 개념이 아니라 그 목소리 안에서 듣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저쪽에서 ‘아’하는 소리를 지르니까 단선적으로 그 소리가 달려와서 우리의 귀에 다다르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케스트라와 같이 자기가 존재하는 이 공간 자체에 전체적으로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소리 속에서 듣는 것입니다. 그런 그림을 가지고 있는 말인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을 대나 특별히 설교를 들을 때나 성경에 입각한 신앙적인 충고를 들을 때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 벌써 부주의하게 들으면서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사람은 그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순종할 의지가 없다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잘 새겨서 들으십시오. ‘들으라’는 명령이 구약 성경에 5천번 이상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의 목소리를 듣기를 원하신다고 할 때에 듣는다는 그림은, 그 자리에 앉아서 들리는 것은 물론 듣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는 귀를 기울이고 듣는 것도 듣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천성적으로 주의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잘 기울이고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귀를 기울이고 듣는다고 해서 듣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듣는 것은 ‘내적인 순복이 있는 들음’입니다. 내적인 순복의 자세가 되어있는 들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들이 기꺼이 순복 하는 자세 속에서 듣는 것입니다.
(예화) 사극 영화에서 왕이 ‘이제부터 명하겠다’고 하면 신하들이 땅바닥에 엎드리는데, 그것은 ‘다만 말씀만 하시옵소서’의 표시입니다
그것이 왕권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그런 들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영혼의 강력한 변화를 경험하고 성령의 은혜를 받게 되면 오래 동안 자신을 에워싸고 있던 죄악의 껍질들이 벗겨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의 심령에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오랜 불순종과 죄악들을 버립니다. 그러면 영혼이 깃털처럼 가벼워집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스럽고 좋을 수가 없어집니다. 소원이 있다면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알았으니 주님께 더 많이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 때 얼굴이 천사와 같이 환하게 핍니다.
그런 사람이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듣는 자세를 보면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 확인되기만 하면 그대로 복종하겠다고 하는 내면적인 순복의 자세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하는 어느 과정에서 자신도 놀라울 정도로 깃털처럼 보드러워져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살고 싶은 강한 애착을 갖게 되었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면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나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것 같고 그것이 실제로 나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적용이 되는 예민해 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듣는 것은 들리는 것도 아니고 졸음이 오는데 살을 꼬집으면서 억지로 귀를 기울이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순종을 원하시지만 그 순종은 복잡한 것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주께서 말씀하실 때 내적인 순복의 자세를 가지고 그 말씀을 깊이 귀기울여서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하고 그 사랑과 은혜가 우리에게 가득 찰 때 하나님의 음성이 얼마나 감미로운 음성이었습니까? 진리의 빛 가운데서 사는 행복이 얼마나 컸습니까? 그런 내적인 순복이 있는 자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강력함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적절하게 훈련을 받으면 어느 정도는 가능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질 때, “너희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렇게 하면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주리라” “네가 인생에서 그런 위기 속에 놓여 있는데 거기서 벗어나는 길은 이것이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실 때, -성경을 읽을 때 딴 생각하고, 예배 시간에 정신이 완전히 딴 데 팔려있어서 무엇을 설교했는지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제외해 놓고- 잘 귀를 기울이고 들으려고 애를 쓰고 말씀을 잘 받아들이지만, 그 말씀이 그의 삶을 움직이는 것으로서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말씀을 잘 듣고 들은 말씀을 마음 속에서 다 죽여버리기 때문입니다. 내적인 순복의 자세가 결핍되어있기 때문에 이해는 되어도 자신 속에서 다 죽여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변화가 됩니까? 설교자를 직시하고 구멍이 뚫릴 것처럼 설교를 들으면 뭐합니까? 내적인 순복의 자세가 결핍되어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다 받아 들여서 마음에서 죽여버리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나 마음에 받아들이고 마음에서 다 짓이겨서 죽여버린 사람이나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순종의 결정적인 한 요소가 되는 ‘내 목소리를 들어라’할 때의 듣는다고 하는 의미는 그런 식의 들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에 대한 한 전문가의 견해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다양하게 제시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안 중의 상대적인 한 방안 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확정된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굉장히 중요한 말씀을 지금 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집중을 해서 말씀을 듣고 변화가 일어나던가요? 내적인 순복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버렸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을 한 것입니다. 말씀이 항상 비껴간 것입니다. 말씀에 관해서는 많이 듣는데 그 중에 한 말씀도 자기를 움직인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어떤 생각을 한 두 가지씩 더 가르쳐준 말씀이지 자기를 찔러 쪼개고 들어와서 자기를 변화시켜준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스치고 지나간 말씀을 한 두 가지 붙들고 엄청나게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허풍떨고 과장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전부 가증한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럴 수 없습니다.
내적인 순복이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느 날 졸지에 바벨론 군대들이 쳐들어와서 쑥밭이 되고 왕은 포로로 잡혀가는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수없이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번도 하나님이 보실 때에 내적인 순복이 있는 자세로 들어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수많은 경고는 강물과 함께 떠내려간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에 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이 자녀를 길러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자녀를 때릴 때에는 수없이 경고합니다. 갑자기 영문도 모르는 아이를 때리면서 그것이 잘못이라고 처음 가르쳐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사랑의 하나님이 자기가 피로 값 주고 산 그 백성들이 전쟁을 만나서 다 죽고 이산 가족이 되고 왕이 비참하게 포로로 끌려가는 상황을 하나님이 갑자기 당하게 하시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그러지 않으십니다. 무수히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에게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 와 있다구요? 나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와 있다구요? 하나님이 그리로 가면 안 된다고 지루할 정도로 반복해서 말씀하셨는데 한번도 여러분들의 귀에 들리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적인 순복이 없었기 때문에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 깊은 곳까지 내려가지 않은 것입니다. 들렸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마음을 당신이 점령하지 않으면 자기의 백성들을 자기의 백성답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너무나 잘 아십니다.
구약에서 보면 구약 종교의 영적인 특성들이 굉장히 많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동일한 자기의 백성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에게 자기의 친밀함을 보여주십니까?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친밀함을 보여주십니다. 여러분들은 바늘 한 개가 떨어져도 소리가 날 정도로 완전한 침묵이 흐르는 경건한 예배로 설교자를 감동시킵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렇게 여러분들이 설교를 들어도 내적인 순복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enjoy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알고 옛적 길로 행하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같이 쓸모 없는 죄인을 십자가의 피로 구속해주신 예수의 참 사랑을 알고 하나님 없이 살아온 수많은 과거가 모두 하나님 앞에 견디기 힘든 불명예를 안겨드린 과거였다는 사실을 깊이 참회하고 쓸모 없는 인간을 향한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어찌할 길이 없어서 이제는 어떻게 할까를 생각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이전에는 무지해서 못살았지만 하나님 알려주십시오.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주님 밖에 없으니까 하루의 삶의 보람은 주님께 순종하며 산 것이고, 우리의 희망은 ‘어떻게 하면 살아있는 날 동안 나를 구속하신 주님만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까?’ 하는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자 하는 적극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으니까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내적인 순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아야겠다고 하는 적극적인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결핍되었을 때에는 ‘어디까지 나가면 하나님이 화 내실까? 여기까지는 괜찮겠지’하는 생각을 합니다. 또“목사님, 이런 것을 하면 죄일까요?”라고 질문합니다. 왜 사고가 그런 식으로 밖에 안 돌아갑니까? “목사님,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라고 질문하면 안됩니까? 죄가 아니면 뭐든지 다 하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다르니까 내적인 순복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은 잠재되어있지만 자라서 마음속에 들어오는 말씀의 씨를 전부 말려버리고 그나마 하나님의 은혜가 떨어지면 깨고 바깥으로 뛰쳐나와서 불순종이 되고 그 불순종이 쌓여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무섭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근본적으로 내적인 순복의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순종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회복하여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멸망에 관한 하나님의 음성을 예레미아를 통해서 들려 준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으려면 예레미아의 예언의 내용에 귀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아서를 읽어보면 인간의 사악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예레미아가 예언하는데 그 자세, 그의 소명감, 진리에 대한 진지함, 담대함, 고난에 끄떡하지 않는 결단력 있는 태도, 이런 것들을 보면 직감적으로 사람들은 ‘저 사람이 두려운 사람이다’ 그리고 ‘저 사람이 중요한 뭔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정말 하나님을 대적하고 막가는 사람들이었어도 실제로 예레미아를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미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참된 선지자들은 항상 뭔가 입을 열고 말을 하면 사람들에게 무시할 수 없는 어떤 두려움을 주는 것입니다. 이 예레미아 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레미아 선지자가 예언을 하는데 그의 진지함, 불붙는 소명감들이 사람들에게 전해졌을 것입니다. 다수의 거짓 선지자들이 평안하다고 이야기해도 그 예레미아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진지한 소명감, 말씀 속에서 두려운 확신을 주는 어떤 신적인 힘, 이런 것들은 가짜 선지자들에게서는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아의 예언대로 이루어진다면 자신들은 아무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싫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될 수 있으면 그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레미아의 예언에 대해서도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교묘하게 어떤 시도를 하느냐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을 예레미아가 잘못 전달했을 것이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해주고자 하는 말과 일관되지 않았다는 것을 주입시키고 거기에서 평안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정말 바보 같은 짓입니다. 예를 들어 적군이 쳐들어오면 빨간 깃발을 올리고 평상시에는 하얀 깃발을 올린다고 칩시다. 적군이 온다고 빨간 깃발을 올렸을 때 빨간 깃발을 보면서 하얀 깃발로 바꾸라고 한다고 상황이 달라집니까? 병실에 ‘중환자 절대 안정을 요함’이라고 써있는 표시를 환자가 보고, 하얀 종이에 ‘안정 안 해도 됨’이라고 바꿔 넣는다고 환자의 몸에 무슨 변화가 옵니까?
그러니까 정직해져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정직해지지 않고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떠한 진전도 없을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씀에 빗겨 가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깊어지는 대신에 거들먹거리는 사람들 말씀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결핍되어있는 것은 정직한 자세입니다. 왜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총체적으로 어우러지면서 결국은 선지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귀를 기울여도 내적인 순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종이 안 되는 것입니다. 회복해야 합니다. 회복하십시오.
여러분들은 대단합니다. 다른 곳에 가면 ‘어떻게 이렇게 설교를 듣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그쳐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을 자기의 백성들에게 울려 퍼지게 하실 때 하나님이 거시는 기대는 예의나 침묵의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울려 퍼질 때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내적인 순복이 있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일 때에 하나님이 그 백성을 자기 백성 되게 하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향한 진지한 내적인 순복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수많은 인생에 대한 경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 방황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은데 그 뜻을 알 수 없는 것은 주님이 말씀을 하지 않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에 내적인 순복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백한 뜻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만 할 뿐, 받아들여서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 말씀의 씨를 죽이는, 단수 높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생활을 청산해야합니다.
두 번째는 ‘행하라’입니다. 하나님이 명백하게 자기의 뜻을 보이시면 실천으로서 하나님이 명하신 것에 대해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순종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지막 목표는 완벽한 순종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순종 이전에 즉각적인 순종을 더 원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완벽한 순종이지만 완벽한 순종보다 더 시급한 것은 즉각적인 순종입니다. 그런데 완벽한 순종은 한번 순종해서 완벽으로 갈 수 있지만 많은 경우에 완벽한 순종은 즉각적인 순종이 반복되는 가운데 완벽한 순종으로 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드믈기는 하지만 교회를 떠난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래서 다른 곳에 가서도 신앙 생활을 하지 않고 미끄러져 버린 사람을 만났을 때, 저는 범죄 했어도 괜찮고, 잘못된 상태에서 계속 머물고 싶으면 머물러도 괜찮으니 그 상태 그대로 교회는 나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범죄 했고 잘못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교회만 나오는 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 오늘 설교의 내용이지만 왜 그렇게 이야기할까요? 그것은 완벽한 순종은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에 나아가 있는 그 인간이 죄 가운데 빠져서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고 있고 자신의 힘으로 그 불순종의 사슬을 풀어버릴 수 없는 인간을 내버려두면 언제쯤 모든 것을 결단하고 마음속에 주님 사랑이 충만해져서 ‘이제는 죽어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하며 교회로 돌아오겠습니까?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에 있어도 그런 일이 잘 안 일어나는데 세상에서 돌아다니며 불순종의 자리에 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 있어서 시급한 것은 완벽한 순종이 아니라 즉각적적인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즉각적으로 순종하고 나면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의 참된 뜻을 제시받으면서 자신이 놓여있는 삶의 자리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또 순종하고 또 순종하면서 완벽한 순종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해서 죄를 짓고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심각한 문제가 되었을 때 딱 하나의 불순종이 문제가 되는 예는 거의 없습니다. 몇 가지가 다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의 커다란 불순종의 줄기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미워할 때 괜히 미워하면 정신병자입니다. 뭔가 이해 관계가 있어서 그럴 것입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 하나만 불순종이 아니라 그런 이해관계에 집착하게 된 물질이나 명예에 대한 잘못된 집착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불순종입니다. 그리고 보복을 하면 그것은 또 다른 종류의 불순종인 것입니다. 복수만 그쳐도 그것으로 안되고 미워하는 마음도 풀어야 하고 그렇게 사랑하는 사이가 미워할 수밖에 없게 되었던 쓸데없는 집착이나 잘못된 것들이 모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 개의 불순종이 결합이 되어서 하나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완벽한 순종보다 더 시급한 것은 즉각적인 순종임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말씀을 읽는 가운데 한 문제를 잘못했다고 지적하시면 버렸다가 연약함으로 인해서 다시 범죄 한다고 할지라도 즉각적으로 거기에서 떠나야 합니다. 즉각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행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은혜를 주시면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고 나서 늘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의 역사를 경험한 다음에는 하나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향한 충성의 맹세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충성의 맹세였는데 ‘우리가 이제 이 말씀대로 살리라’고 하는 즉각적인 순종의 맹세입니다. 이런 자세가 없으니까 불순종이 서서히 들어오고 한번 들어온 불순종은 나가지를 않는 것입니다. 자리를 차지하고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식적인 신앙생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이 문제가 아니라 이런 내적인 순복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청취, 그리고 주님의 뜻인 것이 확인이 되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내가 내 있는 모든 힘을 다해서 즉각적으로 순종하리라는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오직 두 가지 길 밖에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는 불순종 속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불우한 인생을 살든지 순종하면서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삶을 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지신 그 십자가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인한 십자가였고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우리의 불순종이 불러온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불순종이라고 하는 우리의 죄를 대할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그 불순종을 위해서 지불해야 했던 대가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신자들의 마음속에 순종하면서 살려고 하는 순수한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아주 결정적인 수단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이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충만하냐는 것을 잴 수 있는 바로미터도 됩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나 항상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참된 진리의 말씀을 선포했지만 아무도 그 전하는 말씀을 듣지 않고, 그랬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박해를 받으면서 슬피 울며 예언해야 했던 예레미아의 모습은,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자기의 백성들을 사랑하고 어찌하든지 그 백성들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고 여호와의 진노의 불을 피하기 위해서 진리를 가르치셨지만 세상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고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훌륭한 예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남들이 받지 못한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가진 것은 많지 않고 세상에 있는 것들로는 자랑할 것이 별로 없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음의 빛 가운데 살게 해주셨지 않습니까? 그 큰 은혜를 베푸신 주님, 우리의 많은 허물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이 신실한 사랑을 베풀어주신 우리 하나님께 우리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입니다.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유명한 사람되지 않아도 많은 소유, 그리고 커다란 재산 없어도 생명이 있는 날 동안에 예수 사랑 우리의 마음에 부여안고 매 순간 우리 하나님 때문에 행복해 하고 하나님 말씀 지키면서 순종하며 살아서 주님께 기쁨을 드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사소한 삶이 아닙니다. “그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 같으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요”
오늘 우리의 시대에는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합니다. 무공해 그리스도인, 청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순수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 한 분께 순종하며 사는 것을 인생의 가장 큰 보람으로 알고, 마지막 소망은 그렇게 사랑하고 그렇게 순종하면서 살게 하셨던 주님을 뵈옵는 것을 소망으로 삼고 살아가는 성도로 말입니다. 헛된 욕망을 버리십시오. 야망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제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 중의 하나인 다윗, 유명한 사람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도 자식이라고 별로 생각 안 해주던 시골 무지랭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이세의 아들 다윗의 마음이 내 마음에 합하다. 내가 저에게 모든 것을 이르리라”하셨습니다.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우리 인생의 보람은 무엇일까요? 많은 재산, 큰 명예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나 같은 인간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면, 패괘하고 하나님을 배역하고 도처에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는 이 땅을 바라보시며 마음 상해하시던 하나님이 도처에 샛별같이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히 순종하며 살고 싶어하는 성도들을 발견하실 때 그 기쁨이 얼마나 크시겠습니까? 주님이 그 사람들에게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그들의 마음에 주님이 전부이면 주님의 마음에도 그들이 전부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당시 예레미아 선지자의 예언을 듣던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던 사람입니다. 주님이 남이 못 본 것을 보게 하시고 남이 받지 못한 은혜를 우리에게 받게 하신 것은 우리를 이제는 특별히 순종하는 사람되게 하시려고, 이제는 더 이상 우리가 패역에 매여서 생명이 없이 파리한 옛 삶을 되풀이하는 것이 너무나 싫으셔서 우리에게 주님 만나게 해주셨고 어떻게 살아야지만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셨고 성령을 보내셔서 순종하며 살 수 있는 능력도 아울러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매 순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두들겨 패서 우리를 복종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노예적인 복종이 아니라 인격적인 순종을 원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답지 않게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답지 않으시게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시면서 기다리십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예적인 복종이 아니라 인격적인 순종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 산 날들이 행복하던가요? 주님의 뜻을 어기고 내 고집대로 막 살았던 날들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행복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 불순종을 통해서 얻은 그 즐거움은 하나님을 막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즐거움이었습니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계속 가던 길을 오늘 막아서십니다. 그 길을 막으시려고 여기 오게 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순종하기 전에 그 순종을 못하는 이유는 순종이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리고 순종하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순종하고 나면 순종하기 위해서 잃어버린 것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불순종할 때 우리들이 경험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과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주님 안 믿고 여러분 좋은 대로 살다가 예수님께로 돌아왔을 때 주님 만나기 위해서 버려 두고 온 것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가고 나면 순종하기 위해서 우리가 버린 것들은 순종하지 못할 때까지는 굉장한 것이었는데 그것을 버린 사람들에게 갚아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죄인을 향해 물 붓듯 쏟아 부어지는 은혜와 긍휼, 그 기쁨, 그 사랑, 오랫동안 우리들이 맛보지 못했던 특별한 사랑, 탁월한 긍휼, 다시 우리의 가슴속에 우리의 삶 속에, 우리의 신앙 속에 물 흐르듯 만들어 주십니다.
보고 싶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가도 분재처럼 굳어진 신자들이 아니라 고목처럼 계속 자라 가는 거룩한 영적인 성장을 보고 싶습니다. 날마다 주님을 만나서 주님을 닮아가고 주님을 위해 살아가고 그런 삶의 과정을 통해서 주님의 거룩을 본 받아 가는 그런 성도들을 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순종입니다.
4.참된 영적 쇄신의 길
“나 여호와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지금은 세상이 좋아져서 다들 잘 삽니다만 우리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해도 온 국토의 산이 벌거벗은 산이었습니다. 그렇게 벌거벗은 산이 된 두 가지 중요한 이유는 사람들이 그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땔감으로 썼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땅이 없는 화전민들이 그 산을 개간해서 농작물을 심어먹으면서 산이 그렇게 황폐하게 된 것입니다. 이북을 화면으로 보면 그렇더군요. 굉장히 많은 국토가 산이 아니라 구릉지대로 변했습니다. 갈아엎을 수 있는 데는 다 갈아엎어서 밭을 만들었는데 비가 오면 모두 무서운 산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나무가 없으니까 물을 품지 못하고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전민들이 어떻게 개간을 해서 감자라도 심어먹고 옥수수라도 심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커다란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그런 산을 개간하지 않습니다. 장정이 몇 사람 달라붙어도 뿌리가 엄청나기 때문에 나무 하나를 캐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화전민들이 좋아하는 땅은 기름지면서도 가시덤불이 잔뜩 있는 산입니다. 그런 땅에 자기가 가꾸고 싶은 만큼 풀섶을 거둬내어 편편하게 만들고 불길이 더 이상 번지지 못하게 한 다음에 불을 지릅니다. 그러면 불이 일어나면서 가시나무와 덤불들이 다 타게 됩니다. 한참 타고나면 타지 않은 작은 나무가 몇 그루씩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곡괭이와 삽으로 파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돌멩이들을 거둬내고 나무 뿌리들을 캐내고 쟁기로 갈아 가시덤불이 무성한 숲을 보드라운 흙이 가득한 땅으로 보기 좋게 만들어 놓고 거기에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숲에 불을 질러 다 태우고 나무를 거둬내고 뿌리는 커다란 구덩이를 파다시피 해서 뽑아내고 크고 작은 돌멩이를 거둬내고 쟁기질을 해서 보드라운 밭으로 만드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래도 그들은 가시나무가 가득한 풀섶에 감자를 심거나 옥수수를 심지 않습니다. 심어도 자라기는 합니다. 그러나 먹을 수 있는 식물이 되지 않습니다. 자라다가 맙니다. 양분을 다른 가시나무 떨기나 풀들에게 다 빼앗겨서 감자나 옥수수가 빨아먹을 땅의 양분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자가 제대로 자라지를 않고 조그맣게 자랍니다. 옥수수도 자라 올라가기는 하지만 알이 튼튼히 달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골에서 옥수수를 심어도 먹으려고 심는지 사료하려고 심는 지 알 수 있습니다. 먹으려고 심으면 좋은 종자를 드믄드믄 심습니다. 사료하려고 심는 것은 빽빽하게 심어서 사람 키쯤 자라면 알맹이가 있건 없건 상관하지 않고 다 베어서 말려서 싹둑싹둑 썰어서 땅 속에 묻어 두었다가 겨우내 소죽 끓여 먹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레미아는 이 문제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겠다. 그러려면 묵은 땅을 기경하라” 묵은 땅은 처녀토가 아닙니다. 한번도 작물을 심어본 적이 없고 사람이 개간해보지 않은 땅이 처녀토입니다. 공사할 때 산을 깍으면 빨갛게 쏟아지는 흙, 사람이 산 적도 없는 흙, 이것이 처녀토입니다. 묵은 땅은 한 때 곡식을 잘 내던 땅입니다. 뿌리기만 하면 곡식이 자라서 농부가 가을에 소출을 보면서 가슴이 뿌듯해지는 그런 땅이었습니다. 농부가 아무리 수고하고 종자가 좋은 씨를 아무리 정성껏 뿌려도 땅이 좋지 않으면 풍성한 소출을 낼 수 없습니다. 묵은 땅은 한 때는 그렇게 많은 소출을 내어서 땅 주인에게 큰 기쁨을 주었던 땅입니다. 그런데 그대로 있으면 그것이 옥토였을 텐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농사가 거의 중단되었습니다. 농사를 거의 포기하니까 그 기름진 땅에서 잡초가 자라고 가시나무 떨기와 엉겅퀴 같은 것들이 잔뜩 자라서 풀섶이 된 땅입니다. 가끔 차를 타고 시골을 지나다 보면 다 쓰러져 가는 집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다가 버리고 간 집입니다. 그런 집 뒤뜰 쪽으로 이름 모를 풀들이 다른 땅과는 비교가 안되게 잘 자라 있는 것을 봅니다. 그것이 바로 한 때는 기름진 땅이어서 곡식을 잘 내던 땅이었는데 농사를 그치고 나니까 곡식이 빨아들이면서 성장할 수 있는 좋은 영양분을 가시와 엉겅퀴, 잡초들이 먹으면서 길같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땅을 가리켜서 묵은 땅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묵은 땅입니다.
이스라엘이 옥토였던 때가 있습니다. 옛적 길로 행하던 때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충만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너무나 기쁘고,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이 있고, 자기를 버려서 하나님을 섬기는 섬김이 충만했던 옛적 길로 행하던 때, 그 때에는 하나님이 너무 기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백성을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데려다가 정착시키신 것을 나무를 심는 것에 비교하셨습니다. 참 포도나무를 심은 것입니다. 그런데 잘 자라면서 흐드러지게 아름다운 포도를 맺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너무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아 선지자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당할 것이라는 예언을 받고 있는 이 때에는 묵은 땅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한 때는 그런 기름진 땅으로서 지력을 다하여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와 공평, 정직, 사랑, 자비의 열매를 많이 맺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던 땅이었는데 지금은 묵은 땅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참 이상한 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한번 하나님 사랑을 잃어버리고 세상 사랑의 맛을 배우면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새는 줄 모른다고 세상맛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빠져서 삽니다. 더군다나 한 때 옥토였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한가지 목표에 매진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옛날에 한가지 목표는 예수였습니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주 사랑하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한 번 예수님 믿고 그 사랑에 빠지고 나니까 인사불성이 되는 것입니다. ‘가난하면 어떤가. 가진 재물 없으면 어떤가. 좋으신 주님을 내가 알았는데 아무 것도 없지만 내 모든 것을 드려서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다면, 주님을 더 많이 알 수 있다면, 주님을 더 아름답게 섬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하나의 목표에만 매진하던 성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목표가 바뀌고 나면 미친 듯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래간만에 옛날 음식을 먹으면 ‘맞아 이 맛이야’하듯이 은혜가 떨어지고 삶에 있어서 우리 주님이 목표가 되는 신앙생활을 버리고 나면, 이상하게 언제 돌아가도 세상은 역시 세상입니다. 그러면서 무성하게 자라납니다. 죄와 불순종, 악함, 정욕, 헛된 욕망들이 막 자랍니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옵니다. 그러나 그렇게 세상 사랑하면서 하나님 불순종하며 사는 것이 편할 리는 없습니다. 제일 마음이 불편한 날은 은혜 받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정직하게 자기의 문제의 정곡을 찌르는 그날이 가장 힘든 날입니다. 그러면서도 은혜 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씨가 떨어져서 다시 옛날처럼 아름다운 소출을 내어서 하나님께 사랑 받는 삶을 살고 싶은데, 문제는 그 가시덤불을 불태우거나 갈아엎는 아픔 없이 이 모습 이대로 받아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됩니다. 그 모습 그대로 어떻게 받아주겠습니까? 억지를 쓸 때 가서 써야지, 이 모습 이대로 받아달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다 불태우고 철저히 낮아지고 회개하는 가운데 ‘하나님, 이제 나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은혜도 없는 것 같지만 죄도 다 버렸고 옛길을 버렸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나를 기경해 주셔야 합니다’
다 불탄 땅과 같은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이 모습 이대로’를 찬송하며 기도해야지 불순종으로 살아서 그 옛날 아름다운 소출을 내던 땅에 가시덤불이 많이 있는데 그냥 와서 ‘이 모습 이대로 받아주시옵소서’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은혜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배 째라는 식입니다. ‘나는 바뀔 수 없으니 이 모습 이대로’하는 것은 ‘건드리지 말고 그대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농부보다는 지혜로우시지 않겠습니까? 농부들도 가시덤불 속에다 감자를 심지를 않는데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 속에 심으시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반문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깡그리 회개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은혜를 안 주십니까?’ 아닙니다. 주십니다. 주님의 은혜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뽑는 것과 심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뽑히는 것만큼만 심겨집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안됩니다. 밭에 엉겅퀴가 잔뜩 우거졌는데 일주일만에 예배드리며 잡초 한줌 뽑아 가지고 나간다고 그 땅이 옥토가 되겠습니까? 뽑으나마나 입니다. 뽑은 것만큼 심겨지고 깨트려지는 것만큼 하나님이 치료하시고 아픈 것만큼 성숙시키십니다. 그러니까 잡초를 한 주먹 뽑아 가지고 나왔으니 감자를 한 두 알 심은 것입니다. 찾아보면 감자가 있기는 있겠지만 그것 먹고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개판 치며 살고 불순종과 죄악으로 인해서 가시덤불처럼 살아도 교회에 나와야겠지요. 나오면 한줌이라도 뽑히니까. 그리고 아무리 은혜가 떨어진 사람이라도 뒤져보면, 주님이 은혜주신 것을 이야기하라고 할 때 감사의 제목들이 한 두 가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은 영혼을 소생시키기에는 어림도 없는 양입니다. 그런데 억지로 ‘이 모습 이대로 받아주시옵소서’하면 어떻게 이 모습 이대로 받아줍니까?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 가시와 엉겅퀴는 더 무성하게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은 점점 더 영양분이 다 뺏겨버리고 황폐한 땅이 되는 것입니다. 감자 하나 옥수수 한 톨 심을 공간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아가 당시에 농사짓는 것을 본 그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문전 옥답 기름진 밭이 있었는데 오래 동안 집을 비우는 동안에 가시와 엉겅퀴가 우거지고 가시가 꽉 찼다고 치자. 거기에 그냥 씨를 뿌리고 곡식을 심는 농부를 보았느냐? 그러니까 먼저 곡식을 심기 전에 불을 질러버려라. 그리고 다 갈아 엎어버려라. 쓸데없는 식물의 잔뿌리들을 다 걷어내고 깊이 심겨진 것은 도끼로 찍고 곡괭이고 퍼내서라도 그 뿌리들을 다 캐내라. 그 잡초와 엉겅퀴가 무성한 땅을 우선 밭으로 만들어라. 그리고 씨를 뿌려라” 예화) 옥상에 상추 쑥갓의 모종을 심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상추 쑥갓으로 뒤덮인다- 빨리 뿌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먼저 걷어내야 한다.
호세아 선지자도 이 예레미아와 똑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호세아 10장에서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했습니다. 시기는 달랐으나 선지자는 정확하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여러분들이 정말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고 사랑이 되고 옛적 길로 돌아가는 아름다운 성도-사랑과 순종과 순수함과 섬김으로 가득찬-로 회복하기를 원하면 부분적으로 여러분의 신앙을 보충하려는 자세를 버리고 자신의 신앙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놓고 삶 전체를 말씀의 빛으로 조명하면서, 근본적이고 대대적인 수술, 삶에 있어서 전면적인 개혁을 시도해야지 만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정하게 돈을 버는 직업행위, 불성실하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직장생활, 엉망진창이 되어버리고 다 박살나 버린 콩가루 집안 같은 가정생활, 그것을 내버려두고 교회 생활 중 한 두 가지나 고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풀섶을 내버려두고 거기에 옥수수를 심으면서 밭 전체가 옥수수로 충만하게 될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입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닌데 안 떠났다고 하기에는 삶이 너무 부실하고 거룩한 생활의 열매도 없고, 기쁨도 없고 은혜도 없는 것입니다. 백 번 해봐야 안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왜 자꾸 전면적으로 자신의 삶을 수술하고 고치려고 하지 않고, 묵은 땅을 내버려 둔 채 거기에 감자라도 심고 옥수수라도 심어서 그것으로 풀죽이라도 끓여 먹으려고 하느냐면, 아픔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돼. 내가 이어가고 있는 내 인생의 모든 삶이 잘못되었어’라고 생각이 굳어지고 나면 삶의 모든 방면에서 다 자기를 부인합니다. 교회에 와보면 자기처럼 하나님께 은혜 받고도 섬기지 않는 뺀질이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큰 은혜를 주셔서 이 교회에 다니게 하셨는데 내가 언제 목사님 말씀에 순종해 본 일이 있는가? 남모르게 눈물을 흘리면서 충성해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고 재물을 바쳐본 적이 있는가? 영혼을 위해서 섬겨본 적이 있는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내 인생 최고의 불행은 저 인간 만난 것이다. 두 번 째 불행은 못 헤어지고 아직 사는 것이다. 세 번째 불행은 아직 같이 살 날이 오래 남은 것이다’고 생각했었는데 자기가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삶이 속속들이 썩었고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굳혔을 때는 교회에만 와도, ‘남편이 저렇게 마음을 못 잡고 유리방황하고 사업에 어려움을 만나는 것도 모두 나 때문이다. 아이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다 나 때문이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옛날에는 ‘동업하는 그 못된 인간 때문에 내가 거덜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이것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물질에 집착하면서 성공 하나를 위해서 살고 있는지 하나님이 본 때를 보여주시는구나’합니다. 그러니까 어디를 가도 자기 양심이 자기를 향해 손가락질합니다.
그러나 전면적으로 부인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나면 다르게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는 아픔이 싫고 묵은 땅으로 살아가는 것이 편하고 묵은 땅으로 살아가는 데에도 나름대로 맛이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는 집착 때문이고 또 하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저는 요즘 전혀 완전히 새롭게 목회를 배우고 있습니다. 한동안 저의 목회적인 성과에 대해서 상당히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나쁘게 이야기하면 위안을 갖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옥토였던 밭이 묵은 땅이 되어 가는 것은,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까 아름다운 곡식이 가득하던 땅이 갑자기 요술에 걸린 것처럼 황폐한 땅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화) 옥상 마당에 쑥갓, 상추, 파 같은 것만 심었는데 잡초가 어디서 날아왔는지 뽑아 도 한이 없이 많다. 그러나 그나마도 뽑아주지 않으면 잡초가 자라 상추가 묻혀 버린다.
옥토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많이 맺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잡초 씨가 날아와 떨어지고 나니 땅이 너무 기름져서 뿌리를 내리면서 뻗어나갑니다. 그런데 어쩌면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던 마음 밭에 잡초도 떨어지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시간이 더 흐르면 열매는 없습니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앙상한 교회생활만 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는 없게되는 것입니다. 묵은 땅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왕년에는 많이 맺었었지요. 그러나 그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요즘 우리 교회 청년들을 보면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예배 시간에는 얼굴에 눈물이 고여있습니다. 그들을 볼 때마다 저는 ‘내가 저 나이 때는 세상 모르고 까불었는데 너희들은 다 내 선생이다’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지체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결혼해도 계속 그럴 수 있습니까? 결혼해도 그렇게 예배시간마다 촉촉이 눈에 눈물이 고이고 하나님 만나는 감격이 있고 주님의 말씀 앞에서 그렇게 가슴을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면서 애통해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에게 한 단계 더 높여서 묻겠습니다. 아이를 둘 낳아도 그럴 수 있겠습니까? 유아실에 앉아서 그럴 수 있습니까? 저는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형제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직장 다녀도 그럴 수 있습니까? 7시에 출근해서 9시에 퇴근하는 직장에 들어가도 계속 그럴 수 있습니까? 집사 되어서 계속 그럴 수 있습니까? 오래 다녀서, 말씀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져서, 김목사가 설교하러 올라가 성경 본문을 읽으면 설교가 어디로 흘러갈 지 거의 알 정도까지 말씀을 많이 깨달은 후에라도 계속 그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하얀 머리를 가진 사람들의 눈에 이슬이 맺히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오랜 세월 교회를 다녀도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할 수 있습니까? 왜 이 찬송은 처녀 총각 때만 부르고 우는 것입니까? 나이 들어서 주름살이 가고 흰머리가 나서 왼쪽 다리 오른 쪽에 얹고 입술을 굳게 닫고 눈을 꼭 감고 깊은 명상에 잠긴 것처럼 예배를 견디는 것이 우리 나라 교회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노년입니다.
이렇게 묵은 땅이 되어 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을까요? 깨트려지는 집사를 보고 싶습니다. 자기 깨어짐이 있어서 어린아이처럼 늘 자기 부서짐의 감격이 있는 장로를 보고 싶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연로한 사람들이 모여서 당회를 하다가도 지난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교회를 향한 그 세미한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그 할아버지들이 우는 당회를 보고 싶습니다. 그런 것이 없으면 주식회사 대 주주 회의밖에 더 되겠습니까? 이것이 모두 묵은 땅으로 화할 때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했어도 묵은 땅이 되어 가는 것에 있어서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한 것들은 그런 땅이 더 좋습니다. 기름지니까 그런 땅에 뿌리고 싶어합니다. 정말 한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참 많이 주셨습니다. 개척 후 1년 2년 3년이 지나갈 때 매 시간마다 예배시간이 눈물 바다였습니다. 그렇지 않고 예배드린 날이 기억에 남을 정도였습니다. 한 시리즈가 계속될 때 하나님이 겨냥한 사람들은 말씀이 그의 강퍅한 심령을 거의 초토화시켰습니다. 수요일이면 예배가 끝나도 집에 돌아갈 줄 모르고 불꺼진 성전 구석에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애통하는 성도들이 꽤 여럿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되어 왔는데도 그런 사람들도 묵은 땅이 되어 가는 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목회에 대한 생각을 달리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이제는 새로운 말씀의 칼이 필요합니다. 많이 다듬어 졌습니다. 불성실하던 교회 생활은 견고해 졌습니다. 수요 예배 빼먹는 것은 생각도 못합니다. 그리고 새벽기도도 꾸준히 나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틀이 생겼을 뿐이고, 옛날 하나님의 은혜의 감격 속에 들어갈 때 새워진 틀을 습관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뿐이고, 옛날과 같은 감격이 없는 것입니다. 왜 이제는 그 눈에 다시 눈물이 흐르지 않는 것입니까? 왜 요새는 예배가 끝난 후 어두운 성전 불꺼진 본당 구석에서 (찬송: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민망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소서)하며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까? 새벽기도를 늦게까지 하고 일어나서 가려고 가방을 들고 나가는데 그 때까지도 구석에서 그렇게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너무 마음이 아파 문을 나가다가 다시 들어와서 기도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지금은 왜 그런 일들이 드믈어졌을까요? 여러분 개개인에게 묻는 것입니다. 특히 이 교회에 와서 은혜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지금 누군가를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묻는 것입니다. 이제는 너무나 온전해졌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 적용할 하나님의 말씀이 거의 없나요? 주님이 이제 더 이상 말씀하실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거룩해졌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요? 아닙니다. 여러분들 마음의 악함입니다. 그것이 정답입니다. 다른 사람이 여러분들의 신앙, 여러분들의 성실한 교회 생활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 안 하십니다. 그리고 ‘저 사람은 변화되었어. 이 사람은 아직 정리가 안되었어. 이 사람은 아직 멀었어. 열심은 있는데 빗나갔어’라고 하는데, 남의 말하지 말고 그대 영혼을 챙기십시오.
묵은 땅이 되기 전에 주님을 만나고 여러분들의 가시덤불과 같은 황폐한 마음의 밭이 완전히 살라지고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심겨져서 꽃피고 열매를 맺어서 인격적으로 삶에 있어서 그 열매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던 때를 기억해보십시오.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하는 여러분들의 문제는 단지 아름다운 땅은 그냥 있는데 기후 조건이 나쁘든지 해서 열매가 조금 덜 맺는 문제가 아닙니다. 다시 옛날의 가시와 엉겅퀴와 잡초가 무성하던 땅으로 돌아갈 조짐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묵은 땅으로 돌아가면 다시 옥토로 돌아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저는 왜 그런지를 ‘신앙과 은혜체험Ⅱ’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호세아서 5장 마지막절부터 6장 2절까지를 가지고 3주에 걸쳐서 상세하게 설교했습니다. 백 번 양보해서 옛날에 은혜를 받았다고 칩시다. 옛날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되어서 여러분들이 혁명적인 변화를 경험했다고 칩시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매를 많이 맺어서 정말 뜨거운 사랑에 접어들게 되었고 여러분들의 삶이 잠근 동산과 같아서 주님 한 분만을 사랑하던 때가 있었다고 칩시다 그것이 여러분과 무슨 상관입니까? 찬송 받으실 이가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에게 그런 은혜를 주신 하나님이시지 여러분 자신이 자랑거리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한 때는 그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움 열매를 맺던 잠근 동산과 같은 아름다운 땅이 황폐한 묵은 땅이 될 때 그 부끄러움은 오히려 예전에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더 클 것입니다. 생각 없이 교회 다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생각을 안 합니까? 그래서 현실적으로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자신이 완전히 부서졌던 사람인지 안 부서졌던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간다고 할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시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왜 잡초 한 포기 두 포기 자라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까? 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들이 자라는 그 땅에 가시와 엉겅퀴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양분을 빨아먹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렇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양해를 하는 것입니까? 옛날에 묵은 땅이었던 때도 처음부터 지면 전체를 덮는 가시나무 떨기가 하늘로부터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한 싹에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잘라주는 사람이 없었고 뽑아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세월이 지나고 나니까 도저히 식물을 심을 수 없는 망가진 땅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너그럽습니까? 죄에 대해서 불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그렇게 너그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내버려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신의 부패, 불순종을 통해서 심겨지는 잡초의 성장에 대해서 너그러운 마음을 갖는 것만큼 정반대로 하나님에 대해서는 너무 인색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살아라”하시면 “좀 깎읍시다. 어떻게 에누리도 없이 단번에 순종하라고 그러십니까? 조금씩 조금씩 합시다. 천천히 천천히 합시다. 누가 순종을 안 한답니까? 즉각적인 순종은 너무 아프니까 서서히 하겠습니다” 그래서 세월이 흘러갔기 때문에 불순종하던 삶이 세월의 흐름 속에서 순종으로 돌아선 것이 있습니까? 즉각적인 순종이 아니면 시간이 흘러갈수록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인색하고 자기의 마음 밭에 와서 뿌려지는 가시와 엉겅퀴들에 대해서는 아주 너그럽습니다. 그런 조짐들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5년이고 10년 뒤에 어떤 교회가 될 지 선명하게 마음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머리털이 섭니다. ‘내가 겨우 그런 교회 만들려고 걸어갈 수 있는 인생의 수많은 길을 포기하고 목회를 하겠다고 이 길로 들어서서 사역을 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불안전한 인간인 나에게도 그런 생각이 들 때 나보다도 훨씬 완전하고 순결하신 하나님이 바라보실 때에는 제 평가는 너무 낙관적이고 여러분들에 대해서 너무 호의적인 평가입니다. 일생을 살다가 아주 망가진 인생들이 모인 잘못된 교회 하나 세워놓고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보입니다.
언제부터 그렇게 가난한 마음을 잃어버리고 애통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이 깨트려지는 것은 초보신자의 몫이 되었나요? 어느 날 제가 강단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목회를 그만두려고 작정한 것처럼 완전히 바뀐 사람처럼 돌변해도 놀라지 마십시오. 너무 아픕니다.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심으셨는데 좋으신 그분이 우리같이 황폐한 마음 밭에 오셔서 어떻게 건설해 주신 하나님의 나라인데 이름도 모르는 원수들에게 다시 다 내어주고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고 은혜의 감격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던 그 좋은 신앙의 때를 아스라한 옛 추억의 한 페이지로 돌리고 다시 그 옛날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을 알면 알수록 주님의 사랑에 더 감격하고 하나님을 많이 섬기면 섬길수록 더 겸손해지고 주님을 위해서 이마에 땀이 흐르며 분투하면 분투할수록 하나님을 더 많이 닮아 가는 그런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는 없을까요? 세월이 많이 흘러서 하나님이 우리의 교회에 복을 많이 주셔도 늘 자신의 부족 때문에 변화되지 않는 영혼들을 생각하면서 가슴 아파하는 목회자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풍성히 받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순종하면서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인해서 애통해하는 그런 교인들이 언제나 있는 그런 교회, 그런 신앙생활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옥토와 같은 신앙생활입니다.
옛적 길로 행하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싶고, 더 순종하고 싶고, 그럴 때에는 목사를 찾아와도 “목사님, 기도가 안됩니다. 숨겨진 죄악이 있습니다” 하며 자신의 영혼의 문제를 가지고 오는 적이 많은데, 이제는 일 때문에 다가옵니다. 요즘은 제가 목양을 하는 것인지 회사를 하는 것인지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굉장히 위험한 조짐입니다.
충분히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고 성도들을 믿어주는 목회자, 목양 받기에는 너무 성숙했다고 생각하는 교인, 그들에 의해서 만들어져 가는 교회가 어떤 꼴이 될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시점에서 여러분의 삶 전체의 그림을 하나님 앞에 놓고 총체적으로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어느 정도 묵은 땅이 되어가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다 부인하고 갈아 엎으십시오. 예전에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에는 밤중에 혼자 나와 철야도 잘하더니 그렇게 하기에는 영혼에 지방질이 많이 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뭐가 있습니까? 날마다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날마다 쓰러진 자를 일으켜 세우시는 주님의 긍휼과 자비, 그리고 하나님의 분에 넘치는 도우심 때문에 겨우 여기가지 왔습니다. 잘한 것이 있으면 모두 주님 때문이었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모두 우리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이것은 아닙니다. 이대로 두어서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선지자가 분명히 말합니다. “길은 없다” 그 묵은 땅을 내버려두고 거기에 씨를 뿌리고 자기의 부족을 보충하는 식의 신앙의 갱신은 없다는 것입니다. 다 태워버려서, 갈아 엎어버려서 새롭게 기경하고, ‘내 밭에 잡초 하나 깃들 수 없다’는 마음으로 다시 ‘농부 되시는 우리 주님, 우리 마음에 오셔서 다시 한번 두루 파시고 거름을 주시고 햇빛과 단비를 내리셔서 무성한 열매가 가득한 아름다움 신앙생활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하든지 아니면 묵은 땅에 그대로 살면서 그냥 길같이 우거진 죄의 가시가 자신을 찌르는 고통 속에서 번민 속에서 인생을 마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중에는 어떤 특정한 문제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불순종하고 있는 부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일 수도 있고, 악한 습관들에 대한 반복일 수도 있고 혹은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데도 끝가지 마음속에서 용납하지 못하고 복수의 칼을 하는 그런 불순종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더 심각합니다. 왜 심각하냐면 그것은 잡초가 뿌려진 것이 아니라 큰 악한 나무를 옥토에다 심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땅을 빨아먹으며 자라는 것입니다.
예화) 백 미터 높이의 나무는 백 미터 길이의 뿌리가 사방으로 뻗었다.
그러므로 큰 나무 하나는 작은 동산 하나를 움켜쥐고 있는 것입니다. 내버려두면 그 뿌리가 여러분들의 그 좋은 옥토 구석구석을 파고 들어가서 땅의 기름기를 다 빨아먹을 것입니다. 잡초는 없어도 이렇게 망하나 저렇게 망하나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베어버리기에는 도끼질을 해야하니 아프다구요? 그러나 지금이 희생이 가장 적게 따르는 때입니다. 해가 거듭할수록 지금보다 훨씬 커다란 아픔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내버려두고 하나님 앞에 새로운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양심이 안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은혜를 주시옵소서”말할 때, 여러분의 양심이 “돈을 더 좋아하니, 하나님을 더 좋아하니?”합니다. “하나님,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 일을 해결해주시옵소서” 하면 “너 아직도 그 사람 미워하고 복수의 칼을 갈고 있지? 피 묻은 칼을 계속 가지고 살래, 내려놓을래” 합니다. 그렇게 양심에 재갈을 물린 상태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동산이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이유가 있고 사연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은 하나님이 다 아시는 이야깁니다. 하나님 앞에 구차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도 버리라는 것입니다.
계속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해결이 안되니까 여기에 부르셔서 이렇게 구별된 장소에 와서 세속적인 일정을 다 끊고 말씀에 집중하면 한 번 결단 할까하여 환경을 여셔서 하나님께서 여기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필이면 여기에서 그 문제를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결단하십시오. 어차피 신앙은 살고 죽는 것입니다. 살기로 결심하면 살 수 있지만 내 안에 주님은 죽으십니다.
그것을 내버려두고 계속 은혜는 달라고 해왔는데 그 은혜로 우리들이 살 수 있었습니까? 안됩니다. 우선 우리의 죄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죄 죽임에 있어서 중요한 교리는 총체적인 순종의 의지가 없이는 죄는 절대로 안 죽는다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방향에서 다 순종하리라고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만 빼놓고’는 안됩니다. 그 통로를 타고 죄가 들어와서 거기에 뿌리를 박고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우리의 삶 속에 치외법권 지대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땅에 못 다스리는 곳이 있다면 거기에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서겠습니까? 아무리 아파도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주님보다는 덜 아픕니다. (찬송: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물론 견디기 힘듭니다. 오래 동안 계속되어온 패역을 버리고 깊이 뿌리 박힌 묵은 땅이 되어 가는 것들을 어느 날 허물어 버리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예화) 한 청년이 정신 이상이 되어 보건소에서 약을 타다가 먹다가 은혜를 많이 받아 약을 안 먹고 참는데 은혜를 받았어도 아픈 것은 똑같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 가 고통을 생각하며 참으면 예수님이 불쌍해서 울게되었다.
늘 몸에 가지고 있던 물건 하나만 잃어버려도 며칠씩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데 하물며 자기 몸의 일부처럼 묻어온 불순종, 그렇게 미워하고 세상 사랑하고 살던 것을 버릴 때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래서 어느 지체가 사랑과 용서라는 시리즈 설교를 듣고 미워하던 가족을 찾아가 용서한다고 말하며 울면서 하나님께 말하기를 “하나님, 어째서 내게 이런 형벌을 주십니까”했답니다. 맺힌 것을 풀고 용서하는 것이 내가 사는 길이라는 결론에는 도달했는데 오랜 세월동안 가슴에 품고 살아왔던 것을 용서하는 것이 너무 가슴아픈 것입니다. 아픕니다. 그런데 예수님 보다는 덜 아프지 않습니까?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되 못 박혀서 완전히 죽으셨습니다.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주님이 더 아프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기를 “너희가 죄와 더불어서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는 아니하였느니라”했습니다.
또 예전에 했던 대로 미적미적하다가 그냥 내려가 버리겠습니까? 그런 것은 많이 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다시 옛 생활, 옛날과 똑같은 망가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여기 올라왔던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여기서 유서를 쓰는 심정으로 여러분 자신의 전체적인 삶을 한번 부인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은혜만 남겨놓고 “하나님 내가 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습니다. 내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내가 하나님의 뜰에 심겨진 아름다운 한 그루의 나무가 되기 위해서라면, 내 인생이 내 신앙이 하나님 앞에 많은 소출을 내어서 그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만 있다면, 제가 무슨 짓이든지 하겠습니다. 사랑하지 말라면 버리겠고 죽으라면 죽겠으며 용서하라면 용서하겠으며 십자가를 지라면 지겠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결단하는 그 순간에 그렇게 오래도록 뿌리를 내리고 기승을 부리며 자라던 식물들이 신비한 힘에 감전된 것처럼 순식간에 힘을 잃어버리고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너진 위로 다시 하나님의 강물 같은 은혜가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합니다. 새로운 방향으로 추측해볼 필요도 없이 명료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우리 살던 대로 살고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추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 삶을 쓸어버려야 합니다. ‘무슨 일이라도 하겠습니다’해야 합니다. ‘우리의 결단을 기다리고 있는 일이 아무리 힘겹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고, 나에게 어마어마한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오래 동안 정리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그 일이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 이 메마른 벌판 같은 인생을 지나가서, 한 때는 주님의 사랑을 받았지만 지금은 그런 사랑을 잃어버리고 묵은 땅으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쉽습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5.마음의 할례를 행하라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렘4:4上)
선지자는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지 말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비유적인 것으로서 아직까지도 마음에 가득한 세속적인 욕망과 불순종을 남겨둔 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봐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와 공평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이러한 예언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메시지는 받아들일 수 없었을 지 모르지만 당시는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선지자가 말하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귀한 종자를 가시덤불이 가득한 속에 뿌릴 사람은 없습니다. 가시와 엉겅퀴가 뒤얽힌 가시밭 속에 감자를 심을 사람이 없고 잡초들이 우거진 곳에 귀한 볍씨를 뿌릴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바는 “너희들이 정말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마음에 있는 묵은 땅과 같은 잘못된 것들을 모두 쓸어내고 새롭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지 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의와 공평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우리의 묵은 땅과 같은 마음의 밭을 기경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마음의 묵은 땅을 기경해서 곡식이 심겨질 때에 아름다운 결실을 할 수 있는 땅으로 바꿀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겨우내 묵혀두었던 논에 모내기 할 때가 되면 쟁기를 소에 매어 땅에 꽂아 놓고 힘차게 잡아당깁니다. 둑에 앉아서 논 가는 모습을 바라보면 꼭 파도가 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단단해 보이는 땅들에 쟁기가 지나가면 땅이 깊이 파이면서 뒤집어집니다. 땅을 부드러운 흙으로 만들고 모내기를 합니다. 그렇게 가시덤불에 뒤덮인 것들을 정리해서 발그스름한 흙으로 뒤덮이게 만들어 놓고 거기에 씨를 뿌리기만 하면 놀랍게 작물들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마음을 기경하여 그렇게 씨앗이 떨어질 때 잘 결실 할 수 있는 기름진 밭과 같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에 대해서 오늘 성경이 말하는데 “스스로 할례를 행하고 마음의 가죽을 베라”는 것입니다. 같은 말의 반복입니다. 우선 “스스로 할례를 행하라”는 말에서 우리는 두 가지 의문점을 갖게 됩니다. 첫째는 선지자가 부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예루살렘의 거민들은 예외 없이 할례를 이미 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할례를 이미 행한 사람들에게 왜 다시 할례를 행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또 하나는 이 할례의 방법은 대개 다른 사람이 할례를 해주는 것인데 왜 오늘 여기에서는 통상적인 할례의 방법과는 달리 스스로 할례를 행하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할례가 처음 들어온 것은 창세기 17장입니다. 12장에서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고 15장, 17장, 22장에 계속되는 하나님과의 극적인 만남을 통해서 그의 신앙이 자라납니다. 16장에서 이미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실 것이고, 네 몸에서 난 그 씨라야 너의 후사가 될 것이고, 그 자손들이 퍼져서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지고, 너는 그 열국의 아비가 되라라”는 약속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약속을 굳건히 믿지 못하고 아내의 충동에 의해서 여종 하갈에게 들어가서 이스마엘이라고 하는 서자를 낳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는 굉장히 커다란 불순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 아브라함은 16년 동안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가운데 살았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래서 창세기 16장에서 이스마엘을 낳고 17장 1절에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까지 16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는 가운데 흐르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살지 말고 온전하게 살라고 격려하신 후에 만나주시고 그에게 할례를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자녀와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받아야 하는 이 할례는 오늘날로 말하자면 어린아이에게 행하는 포경수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굳이 사내의 생식기에 표를 새기고자 하셨을까요? 그것은 굉장히 심오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부끄러워 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고 심오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 위생학적으로 보면 이런 것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부인병들을 예방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차적인 것이고 더 중요한 의미는 위생학적인 의미가 아니라 종교적인 의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식기에 표를 행하셔서 후대에 그 문제를 설교하는 사람마다 곤혹스러워지도록 복잡하게 하셨을까요? 왜 몸의 다른 부분이 아니라 그곳에 하게 하셨을까요? 참고로 구약은 몸에 문신이나 무슨 흔적을 내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율법에서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 할례의 표를 다른 몸에 내었다면 그것은 굉장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외적으로 허락하신 장소가 있었는데 바로 남성의 생식기 부분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창세기 2장과 관련이 됩니다. 1장과 2장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특히 2장에서는 사람을 창조하시는 부분을 새롭게 확대해서 보여주시면서, 그렇게 창조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이 있었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금하신 실과를 먹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생육하고 번성하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조하신 세계를 아담 혼자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생육하고 번성해서 태어난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창조세계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타락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본래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성적인 충동에 의해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라는 것과 자신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지은바 된 피조물이며 자신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세상에 빚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는 인간들이 온 땅을 뒤덮게 된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하나님께서 할례를 명하십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을 비롯한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들은 할례를 받음으로써 자신들이 성적인 욕망을 따라서 성행위를 하고 거기에서 자손들이 생산되는데 그것은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이 똑같은 것인데, “너희를 통해서 생산된 그 후손들은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이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확신 시켜 주신 것이 할례를 행한 표입니다.
남자들의 경우에는 손등을 유심히 들여다보거나 거울이 없었을 때니까 자기 얼굴을 더더욱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등은 평생 태어나서 한번도 못보고 죽습니다. 발바닥을 매일 유심히 들여다보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자들이 매일매일 눈여겨보는 자신의 신체가 바로 생식기입니다. 생리현상을 해소하면서 늘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에게는 다른 사람이며 자신에 의해서 생육하고 번성해서 태어나는 모든 족속들도 하나님을 향해 구분된 백성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심어주시기 위한 최상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몸에 문신을 하고 새겨서 표시하는 풍속들은 많이 있었지만 이 방법은 그 당시로서는 매우 특이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방 백성들이 자신의 몸에 표를 해도 그것과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구별하시는 표에 차별성을 보여주기에도 아주 훌륭한 방법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남성의 그 부분에 할례를 행하셨는가하는 것은 성경에서 깊이 연구할 가치가 있는 대목입니다.
그 할례가 들어오게 된 문맥은, 하나님이 17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실 때에는 12장이나 15장에서 나타날 때와는 다른 정서를 가지고 나타나십니다. 12장에서는 믿음의 조상으로 처음 부르신 소명이니까 하나님께서 기분 나쁘실 필요가 없었고, 15장에서는 아브라함이 적군들에게 끌려간 롯을 기적적으로 구출했고 자신이 소수이기 때문에 그 왕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지도 모르는 깊은 두려움 속에서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진심으로 의지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롯을 구해온 것도 믿음이 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만나주실 때 하나님의 마음에는 굉장히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17장에서는 다릅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의심하면서 하나님보다는 아내의 말을 더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영적인 암흑기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스마엘 하나를 얻은 대가로 말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이 아브라함에게 상기시켜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면서 몸에 표를 행해야 하는데 그것이 할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는 “너는 다른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나 여호와의 말과는 상관없이, 나 여호와와의 언약과는 상관없이 아무렇게나 살아가도, 너는 내 말에 순종해야 하느니라”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심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똑같이 “그 할례를 통해서 네 몸에서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 생육하고 번식해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이제는 내게 속한 자들이다. 그들은 내가 직접 통치하고 다스리리라. 내가 직접 복 주고 내가 직접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리라. 그들에게 기대하는 바는 다른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바와는 다르다. 너희들은 다른 백성이다”를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문맥을 고려해 보면 여러분들이 아무리 머리를 써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 된 표를 다른 곳에다가 할 수 없고 거기에 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생육하고 번성하는, 성생활을 통해서 번식하는 이 의미도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육과 번식의 의미와 하나님의 백성의 생육하고 번성하는 의미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면서 자기 자식들을 소유물처럼 취급하는 것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한 예로 롯이 자기를 찾아온 천사들을 숨겼는데, 사람들이 와서 그 천사들과 상관하겠으니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상관’은 성행위입니다. 당시에 얼마나 동성연애가 성행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미남인 천사들을 보고 문을 부술 것처럼 내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롯이 한 말이 “내게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두 딸이 있는데 대신 줄 테니 마음대로 해라”하였습니다. 딸이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창세기에 보면 요셉을 만나고 온 야곱의 자손들이 베냐민을 다시 데려오지 못하면 자신의 자식들을 아버지 마음대로 하라고 하며 자식을 마치 자기의 소유처럼 생각하는 개념들이 나옵니다. 족장들은 자기 자식들에 대한 생사 여탈권을 가지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신앙에서 나온 행위가 아니고 잘못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자식을 자기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 당시의 풍조였고 거기에 감염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성도들의 고백은 여호와의 기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것으로서 자신에게 위탁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의 할례 받은 표를 보면서 자신의 몸에서 태어난 자식이 이교도들이 당시에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사상을 확고하게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 할례를 보면 할례가 갖는 의미가 명백해 집니다.
선지자는 그런 할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두 가지 의문점들을 불러일으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할례를 이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거민들은 이미 다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할례를 받으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상하지 않은 이유는 이 할례가 육신의 할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할례를 받으라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사실을 깨닫습니다. 몸에 새긴 할례는 한번의 할례로 충분하지만 마음에 새긴 할례는 수시로 할례의 갱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지적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번 할례자는 영원히 할례자이다’는 표면적인 할례에 관해서만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면적인 할례는 수시로 갱신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만일 적절하게 시기시기 마다 우리 자신이 할례자로 다시 마음의 할례를 받고 다시 태어나는 변화가 없다면 표면적으로는 할례자요 이면적으로 무할례자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상태가 된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할례 받은 사람들이고 이면적으로는 무할례자였습니다. 후일에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표리부동한 신앙이 사도 바울에게 철저히 공박을 받는데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진정한 유대인이 아니오 이면적 유대인이라야 할지니라” 하였습니다. 내면의 세계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면 그 표면에 받은 할례가 무슨 표가 있겠습니까? 이방인들이 자기 몸에 칼집을 내어서 문신을 새기는 것과 다를 바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 할례에 무슨 신비한 힘이 있는냐는 것입니다. 할례는 무슨 신비한 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영적인 진리를 하나 터득합니다. 한번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영원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다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내적인 갱신, 영혼의 새로운 각성과 하나님이 우리의 심령을 완전히 새롭게 하시는 갱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여기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불행했던 이유는 표면적인 할례를 너무 믿은 것입니다. 표면적인 할례를 너무 믿고 이면적으로 자신들이 마음의 할례를 통해서 내면과 외면이 동질화되어야 만 참다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쉽게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커다란 불행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그런 불행한 일들을 똑같이 저지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만남의 경험,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은혜의 경험은 여러분들에게 자리잡힌 종교생활을 가져다줍니다. 처음에는 뭔가 교회에 나갈 만한 이유가 없는 한 교회에 안나오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나갈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교회에 나갑니다. 그것이 표면적인 할례자의 삶입니다. 영혼을 뒤흔드는 감동이 없어도 예배에 참석합니다. 뼈빠지게 자신의 진액을 쏟아 부어서 펑펑 울며 하나님을 섬기지 않아도 세워주면 인간적인 성실함으로 자기 할 일들을 감당해 나갑니다. 처음에는 십일조 떼어먹으면 사업이 거덜날까봐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그 십일조를 해서 큰복을 받겠다거나 안 하면 거덜날 것이다는 두려움이나 축복에 대한 기대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표면적으로 할례 받은 삶의 모습입니다. 문제는 마음속에서 옛날과 같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친구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교회에 나가는 그 순진한 마음, 경제적인 어려움 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물질을 바치는 헌신의 감격, 그런 것들이 없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표면적으로는 할례를 받았으나 마음은 다시 옛날을 버리고 무할례의 상태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마음이 새롭게 되지 않고 할례되지 않은 삶이 실패하면 배교에 가까운 삶이 되고, 최선의 성공을 거두면 성공적인 외식이 됩니다.
두 번째 의문은 왜 스스로 하라고 하셨을까 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구약을 연구하는 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잘 안 된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3장 4장에서 소명을 주셔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부르셨는데 길거리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만날 때 죽여버리시려고 한 것입니다. 여러 가지 추측을 하는데 보편적으로 지지를 받는 견해는 할례 때문이었습니다. 광야 생활 중 얻은 십보라 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이 여호와께서 모세를 죽이시려는 것을 보면서 재빨리 차돌을 취해서 자녀의 양피를 벱니다. 어느 의사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성경에 나온 그 여자가 굉장히 지혜로운 여자라고 했습니다. 만일 칼로 길거리에서 할례를 행했다면 파상풍에 감염될 확률이 크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차돌로 양피를 베었습니다. 그래서 그 가죽을 던져버리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사실은 할례에 대해서 뭔가 분명한 하나님의 계시를 모세도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아이의 할례를 스스로 행한 것이 아니라 해준 것입니다.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게 되어있었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할례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할례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입니까? 사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장본인은 하나님-특별히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죄 많은 세상에서 구원받을 때는 물론 전폭적으로 성령님의 믿어지게 하시는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날마다 거룩해지는 성화의 삶, 우리의 인격이 예수님을 점점 더 닮고 우리의 행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들이 되는 이 성화의 삶을 행하시는 주체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구원과 성화의 다른 점은 구원은 인간을 전혀 의지하지 않고 성령님 홀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데 그리고 그것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데 반해서 성화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하나님 홀로 행하시지 않고 인간과 함께 행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화의 주체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구원은 100% 하나님의 은혜와 0%의 인간의 노력이라는 공식이 나오지만, 성화는 100% 하나님의 은혜와 100% 인간의 노력이 합쳐져서 100%라는 이상한 공식이 나온다고 말합니다. 적절한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는데 그 하나님은 거룩해지고자 욕망을 갖지 않고 거룩해지고자 하는 성화의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는 전혀 역사 하시지 않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인격적으로 주님을 닮고 삶에 있어서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절대적인 마음의 요청이 없이 교회에 다니면 여러분들이 성령의 불을 받아도 결코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그런 불을 받을 리도 없지만 기적이 일어나 받는다고 할지라도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여러분들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오늘 예레미아 선지자가 ‘너희 스스로 할례를 행하라’고 했는데, 난지 팔일밖에 안된 아이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할례를 받을 리도 없는데 할례를 받는 것처럼, 할례는 자기가 직접 자기에게 행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대신 그 할례를 행해줍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구분시키시는 것도 하나님이 직접 행하십니다.
그러나 성화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홀로 행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오래 전 ‘죄 죽임의 교리’를 설교하면서 회개는 하나님께서 하게 하시는 것이냐 우리가 하는 것이냐를 설명하면서, 우리가 회개를 했다 라고 한다면 인간이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교리에 위배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하게 하셨다고 하면 회개 안 한 채 뻣뻣하게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의 책임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시키시지 않은 하나님께 있다는 극단적인 결론에 도달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설명하면서 제가 장작을 패는 비유를 들었습니다. 나무를 적당한 크기로 톱으로 자른 후 결 따라 도끼로 가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회개할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회개시키십니다. 새롭게 되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정직한 마음을 주십니다. 성화의 삶을 살고 싶어도 온전히 성화 되지 못하며 사는 사람도 있지만 성화 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사람을 거룩한 사람으로 만드시지는 않으십니다.
여기에서 예레미아가 “너희 스스로 할례를 행하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신뢰하기 때문에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예레미아 선지자는 인간을 너무 과대평가 하는 자유주의자입니다. 선지자는 전혀 그런 생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도를 도끼를 가지고 장작을 패는 나무꾼의 입장에서 본 것이 아니라 나무의 입장에서 본 것입니다. 생선도 아무렇게나 썰어 먹으면 어떻습니까?
(예화: 일식 집에서 3년 동안 설거지를 해야만 칼을 들고 생선회를 뜰 수 있다)
그러나 결을 보고 생선을 자릅니다.
예레미아 선지자의 시각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안 주셔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베푸신 끊임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돌이킬 수 있는 수많은 기회들을 하나님이 제공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서지 않는데 모든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가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인간을 과대평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돌아가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앞에서 드린 질문, ‘우리를 거룩 하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데 도대체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까, 우리가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까?’는 질문은 처음부터 필요가 없는 질문입니다. 그것은 거룩해지려고 하는 사람들을 성령님께서 거룩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우리들이 노력이 해봐야지 만 절감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지자가 마음의 가죽을 베고 할례를 행하는 것이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 혼자 행하는 것처럼 말해도 화법 상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관점의 차이이지 실제로 선지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이러한 사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회개시키면 그들은 회개 할 것이니라”하지 않고 “회개하라. 너희 악함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믿음을 가지라.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관점에서 이야기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거룩해지는 것이 우리 입장에서는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 우리가 거룩해지는 것처럼 하나님께로부터 순종을 촉구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말을 보면서 예레미아가 인간의 전적 타락의 교리에 대해서 몰랐다거나 인간을 과대평가 한다거나 개혁신학의 맥에 안 맞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으로 돌아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즉각적인 순종과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안 주신 것이 아닙니다. 수없이 선지자를 보내어 말씀하시고 돌이킬 길을 주시고 이제 포로로 끌려가게 된 상황에서도 회복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부족하게 해주신 것이 없는데 선지자가 하나님을 책망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인간들을 향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할례를 행하라” 결국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죄 죽임의 교리에서도 이미 나온 말했듯이, 성령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주체이지만,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순종하는 만큼 성령이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주도적으로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체해서 손끝을 딸 때도 자기 스스로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자신은 바늘 하나도 찌르기가 싫은데 어떻게 칼을 들고 살가죽을 벗겨내겠습니까? 이것은 굉장히 커다란 고통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할례 되어서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었지만 이제는 표면적으로는 그 할례가 유지되고 있지만 이면적으로는 그 할례는 간 곳이 없고 다시 무할례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무할례자인 사람이 이면적으로 무할례의 삶을 사는 것이 편하겠습니까, 표면적으로는 할례자인데 이면적으로는 무할례자의 삶을 사는 것이 편하겠습니까? 전자가 훨씬 편합니다. 그래서 두 번째 질문인 “스스로 할례를 행하라”는 의미는 성화에 있어서, 마음을 새롭게 함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과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하랴’는 말이 열심히 주를 위해서 거룩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며 사는 사람의 입에서 나와야지만 ‘내가 거룩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고백이 뒤따르게 되니까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고백이지, 태만하게 살면서 ‘인간이 무엇을 하랴’하면 내친 김에 놀자는 것입니다. ‘로마가 하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속담은 무엇을 기억하라는 것입니까? 꾸준히 노력해야지 만 결과를 보게 되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하기 싫은 사람이 ‘로마가 하루에 이루어졌냐?’하면 ‘따라서 오늘 놀자’의 의미밖에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마음의 밭을 기경하고 다시 의와 공평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풍성한 소출을 낼 수 있는 아름다운 포도원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의 책임과 노력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은혜가 그런 갱신을 주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의 참된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는 것은 다만 딱딱한 의자에 한참동안 참고 있으라는 정도의 희생만을 우리에게 요구하지만, 스스로 말씀의 칼을 들고 자신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는 일은 자기를 죽이고자 하는 살인할 마음을 품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가시덤불에 씨를 뿌려봐야 소용이 없는 줄을 알면서도 그것을 태우지 못하고 내버려둔 채로 곡식을 일궈먹을 수 있는 길은 없을까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혀 자신을 고치고 개혁하려는 의지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겠다고 나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별로 성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많이 뿌려져도 그들은 여전히 공허할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들이 그들에게 늘 느껴져도 그들은 늘 궁핍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할례자로서의 삶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도 자신은 그 감동과는 관계가 없는 특별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선지자가 너희 스스로 할례를 행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반응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성경은 “마음 가죽을 베고 여호와께 속하라”합니다. 할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요즘은 아이들이 너무 풍족하게 삽니다. (예화: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 말이 물건을 쓰다가 잃어버려도 찾으러 오지 않는다고 한다. 하루 오천 원 짜리 두 장 정도를 줍는데 찾으러 오는 아이가 없다고 한다.-또 사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전에는 물건이 귀하니까 연필 하나에도 이름을 써 놓았습니다. 어디에 가도 존재 자체가 소유자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할례가 그 표입니다. 품질보증이 아니라 그 인간의 몸에서 태어나는 후손이 누구의 것인가 하는 것을 표시해 주는 것입니다.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금반지를 주웠는데 반지 표면에 깊이 그 주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면 그 반지를 차고 다닐 수 있겠습니까? 팔든지 녹여서 다시 만들든지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의 이름이 새겨진 존재들입니다. 열심히 세상으로 나가면 세상의 유실물 센터에 보관됩니다. 세상으로 가서 ‘주님 버리고 세상으로 왔습니다’하면 세상이 ‘welcome’하며 과거는 묻지 않겠으니 앞으로 잘해보자 하며 악수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은 받아주는데 나중에 보면 유실물 센터에 다 보관되어있습니다. 기도원이 유실물 센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버리고 세상으로 간 사람들이 마지막에 다 기도원에서 만납니다. 거기에서 주인 찾아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길거리에 버려져서 아무 가치도 없이 흙만도 못하게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수 불퇴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새겨 놓으셨습니다. 할례의 표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표시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건드릴 수 없습니다. (예화: 닭의 머리에 표를 해서 어느 집 닭인지 구분했었다) 하나님의 할례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여호와께 속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속한다는 것은 소유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나서 자기를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다” “그리스도의 노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거기에서 ‘의’는 소유의 의미입니다. 가축에 화인을 찍어 어느 가문의 것인지 표시해 놓듯이 화인 맞은 노예의 의미입니다. 그 주인이 바뀔 가능성은 없습니다. 한번 노예는 영원한 노예입니다. 그래서 완전히 그리스도에게 소속된 노예입니다. 그러한 신적인 강제력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아가게 했고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가게 한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의 심장부에 있는 경험입니다. 신적인 강제력의 경험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할례를 받고 여호와께 속하라”고 합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주인은 하나님이든지 우리 자신이든지 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세계, 우리의 내면의 세계, 우리의 외면적인 삶, 이 모든 것들을 지배하기 위한 치열한 투쟁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성령과 우리 안에 있는 불순종과 죄에 대한 욕망이 구체적으로 투쟁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소멸되든지 우리의 자아가 죽든지 양단간에 결단이 나야지 만 우리가 누군가에 의해서 온전히 지배받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양단간의 결단이 안 납니다. 그리고 대개 자기가 열심히 이기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할례를 통해서 ‘내가 내 것이 아니구나. 그리고 내가 주님의 것이구나’를 깨닫습니다. (찬송: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선지자가 그렇게 “마음의 할례를 받고 여호와께 속하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만 온전히 소유된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의 지배만을 받는 백성이 되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래된 불순종과 주님을 거스르는 삶이 우리의 영적인 삶을 묵은 땅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아직도 우리가 우리를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전형적인 인식이 필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모든 삶이 우리가 살 수 있는 삶이 아닙니다. 세상을 살아가기에 적합한 삶의 방식은 하나님의 사람보다는 세상 사람들이 훨씬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사업하면서 적당히 종이 몇 장을 거짓말로 쓰면 탈세할 수 있는데 왜 몇억씩 정직하게 세금을 내고 경영에 압박을 받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나의 행복을 저해하고 나를 괴롭히면 보복하면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는 자들이 존재하지 않는데 왜 그것을 참으면서 왼뺨 오른 뺨을 돌려대며 마음으로 삭히고 용서하며 삽니까? 그것이 세상 살기에 적합한 방법입니까? 하고 싶으면 하면 되지 왜 그런 욕망을 억제하며 삽니까?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일들을 우리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우리의 영혼은 죽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대로의 삶의 방식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니까 압박이 와도 탈세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미워해도 용서해야 합니다. 원수는 사랑으로 복수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어떻게 살수 있겠습니까?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고 하나님이 마땅히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시는 것과 그렇게 살 수 없는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면서 끊임없이 주의 도움을 구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갑니다. 그래서 완전한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연합,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호와께 속한 삶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가슴에 꼭 품으시고 그 백성들을 뜨겁게 사랑하시면서 그들에게 은혜를 주실 때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면서 그 말씀에 충성하면서 사는 삶이 힘들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아서 주의 은혜로 충만했을 때에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무거운 것이 아니었고 그리스도 예수의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그 일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안식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즐거움이었습니다. 거기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 주님의 다스림과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연합을 누리면서 그분의 생명을 먹고사는 연합된 삶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은혜를 받겠다고 나오지만 그렇게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적인 연합 속으로 들어가는 기쁨은 없는 것입니다. 불순종과 죄를 내버려두고 이따금 다가오는 은혜로 만족하는 그런 사람들 속에 충만한 기쁨, 신령하고 완전한 행복, 하나님과의 연합에서 오는 온전한 승리, 이런 것들은 모두 꿈꾸고 바라보는 개념일 뿐이지 실제의 삶 속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6.마음의 가죽을 베고 여호와께 속하라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렘4:4上)
이어서 선지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례를 행하여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할례를 이미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할례를 촉구한 만큼 그 할례가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은 선지자도 알고 있었고 그 선지자의 설교를 듣는 하나님의 백성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선지자는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이 할례를 연상시키면서 그것이 어떻게 마음의 할례에 구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여호와께 속하라고 말입니다.
어색하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고 말씀을 드릴 테니 들어보십시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산부인과 의사들은 써컴을 시켜주라고 권합니다. 그 써컴이 할례와 똑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린아이의 생식기를 덮고 있는 껍질을 벗겨주는 것입니다. 아이가 자란 후에는 그것을 잘라내야 하는데 어렸을 때에는 벗겨내기만 해도 그대로 굳어져서 써컴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할례는 정말로 양피를 베어내는 것이었습니다. 보다 더 완전한 써컴이 되는 것이지요. 안 하면 어떻게 되느냐면 어렸을 때에는 문제가 비교적 적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자라서 청소년기에 들어가게 되면 육체가 성숙해지고 성숙해져감에 따라 몸에서 각종 체내 분비물이 나옵니다. 그런 분비물들이 체내에서 나올 때 써컴을 하지 않은 상태로 머물러 있으면 그 속에 아주 고약한 물질들이 끼기 시작합니다. 하얗거나 혹은 노란 색의 물질들이 끼기 시작하는데 그 물질들은 아주 강력한 독성을 가지고 있는 물질들입니다. 그래서 써컴 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을 제거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가죽을 벗겨내서 수시로 소독을 않고 내버려두면, 발진 비슷한 피부병을 일으켜서 생식기가 퉁퉁 붓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적인 관계를 갖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산부인과 의사들에 의하면 여자를 진찰해보면 남편의 직업을 거의 알 수 있답니다. 그만큼 여자의 몸 속으로 남자의 더러운 것들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의학이 발달되었기 때문에 치명적이지 않은 부인병은 고쳐냅니다. 자궁을 드러내고도 문제없이 살아갈 정도로 의술이 발달되었으니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의 문맥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치명적입니다. 그리고 의학전문가는 아니지만 부인병의 특징은 고통을 느낄 정도가 되면 이미 병은 절망적이랍니다. 내장들은 살갗에 비해서 감각이 둔하기 때문에 견디기 힘들 정도의 통증을 느낄 정도가 되면 절망적인 병세로 기울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문제들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불결한 속에서 당신의 선택된 백성들이 태어나기를 원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할례라는 방법을 통해서 남성들의 표피를 벗겨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더러운 이물질들이 몸에 낄 수가 없습니다. 늘 건강한 상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들이 수술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할례의 위생학적인 중요성이 종교적인 중요성보다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종교적인 의미이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할례를 받음으로 그 하나님의 백성 된 표를 몸에 새겨서 수시로 그것을 확인하고, 그렇게 할례 받은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을 인치고, 태어난 아이에게 자기의 손으로 할례 시키면서 그 아이가 자신의 몸에서 태어났지만 또한 하나님께 소속된 백성이라고 하는 것들을 계속 새기는 것입니다. 그 종교적인 의미가 위생학적인 의미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항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살다가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섭리 가운데 우리들을 보호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학자들에 의하면 구약에서 먹지 말라고 하는 음식을 종교적으로는 지금 먹어도 되지만, 안 먹으면 좋은 음식들이 거기에 훨씬 많다고 합니다. 섭생학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미 당시의 여러 가지 질병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고려를 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 가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살가죽입니다. 살가죽이 덮고 있으면서 그 살가죽이 단단하게 붙어있지만 그 살가죽 속에서 온갖 더러운 분비물들이 잔뜩 끼여있고 거기에서 독소의 성분을 가진 질이 나쁘고 질병의 원인이 되는, 그리고 육체적인 관계를 통해서 얼마든지 자기의 부인이나 다른 사람에게 전파할 수 있는 악한 물질들이 그 속에 끼여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지자가 이 이야기를 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 여러분들에게 이야기 하는 것을 그림처럼 생생하게 느끼면서 마음 가죽을 베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할례를 받고 가죽을 벗겨내지 않고는 남성이 그 불결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습기가 많은 피부에 껍질이 덮여있고 노출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온도와 체온이 맞으면서 왕성한 활동을 통해서 체내에서 분출되는 분비물들이 거기 모이면서 독소의 성분을 가진 악한 물질들이 깃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적절하게 자신을 관리하지 않으면 엄청나게 냄새가 납니다. 그런 것들을 그림처럼 생생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화: 중학교 때 한 친구의 생식기가 부어 걸어다닐 수 없게 되었다)
그런 것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생하게 염두에 두고 선지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이니까 어색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잘 묵상해보면 선지자가 이 묘사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현재 상태와, 마음의 할례가 없는 속에서 그들 속에서 자라고 있는 치명적인 독소를 가진 질병화 된 죄악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해결은 아파도 그 가죽을 벗겨내는 것입니다. 벗겨내면 온 몸에 열이 오르면서 열흘동안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일평생동안 육체적으로는 깨끗하고 건강한 남자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대안은 없는 것입니다. 그 가죽을 남겨둔 상태에서는 잠시 청결하게 해도 또 계속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규례에 보면 몸을 씻어서 정결케 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아무리 몸을 씻어서 정결케 한다고 하더라도 남자의 그 신체 부위가 가죽으로 덮여있기 때문에 속에서는 치명적인 독소를 가진 더러운 이물질들이 질병을 일으킬 요소를 안고 살에 염증이 생기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위를 아무리 물을 뿌리고 비누로 닦고 깨끗하게 한다고 해도 그 속에 있는 치명적인 질병은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수없이 목욕을 해도 그런 질병을 옮길 수 있는 잠재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그림 같은 생생한 묘사입니까? 이렇게 노골적이고 생생한 설명을 들어보셨습니까?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생생하게 듣지 않으면 성경의 이 메시지가 묻힙니다. 남성들이 여성의 질병을 듣기만 하고 경험해 보지 못하여 이해할 수 없듯이 여성들도 남성의 이런 질병에 대해서 모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계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한계가 있습니다. 이 내용을 깊이 묵상해보면 그림같이 생생한 이 묘사는 모든 이스라엘 남성 백성들이 깊이 이해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여성들도 자신들의 자녀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는 문제들을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이 그림 같은 묘사를 가지고 우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무리 비누로 닦아내고 깨끗한 옷을 입고 화장을 해도 결정적으로 가죽에 가리워서 아직까지도 은폐되어있는, 심하면 염증을 일으키고 그 염증을 전파할 수 있는 불결함들은 가죽을 잘라버리기 전에는 제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그는 결코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건강한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아무 것도 깨닫는 것도 없고 감화도 없고 영적인 자극도 없는 상태에서 오래 계속된다면 그 자체가 이미 신앙도 아니고 종교도 아닙니다. 그렇게 자신에게 신앙의 영향을 하나도 주지 않는 상태에서 견실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기적입니다. 무엇인가 조금씩은 자극을 받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라는 맛도 보고 감화도 다소 있고 책임도 있고, 또 다는 아니지만 들은 말씀 가운데 한 두 가지를 순종하면서 살아가다 보면 거기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도 있으니까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출석 생활이라도 지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 은혜, 순종의 경험에서 오는 축복의 체험, 그런 것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본질이 변화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동질성을 상실했습니다. 그런 속에서 이 백성들이 하나님께 진정으로 돌아오는 길은 표피적인 변화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그 신체를 덮고 있는 가죽을 제거하기 전에는, 그 껍질 속에 내재되어 있는 남성의 몸에서 나오는 체액이 형성한 독소의 성분을 가진 독특한 이물질들이 제거되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인생에 대해서 말하기를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하였습니다. 희랍어에서 ‘이두’라고 하는 ‘보라’는 장엄한 사건이 일어날 때에는 감탄사입니다. ‘새롭게 되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평신도가 집사가 되었다는 것입니까? 교회에서 커다란 직분을 맡게 되었다는 것,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이 말을 할 때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서 인간의 내면 세계가 본질적으로 영향을 받아서 변화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겉 사람의 모습은 예전과 똑같은데 내면의 세계에서는 예전과는 다른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서 새로운 질의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예화: 포도를 설탕에 재서 땅속에 묻어두면 시간이 지난 후 포도도 아니고 설탕도 아닌 독특한 다른 물질이 나온다) 사도가 말하는 새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육에 속한 더러운 인간이 교회에 나와서 복음을 듣고 진정으로 변화되었는데 그 변화된 사람은 복음도 아니고, 그렇다고 옛날의 육체의 인간도 아니고, 둘을 합친 어떤 사람이 된 것도 아닙니다.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그 안의 죽은 영혼을 살리시고 새 생명을 심으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과 은혜로 성도다운 거룩한 삶으로 자라갈 수 있는 거룩한 존재로 바꿔 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본질적인 변화입니다.
수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이 그 사람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꿰뚫고 들어가서 폭발을 일으켜서 그 사람을 본질적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고치는 역사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는 진정으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새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새것을 접한 옛 사람일 뿐입니다. 선지자가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생각하고 있는 문제는 그렇게 자기를 근본적으로 고치고 내면의 세계에 하나님의 참다운 진리가 영향을 미쳐서 자기를 새롭게 갱신하는 위대한 역사는 일생에 한번만 일어나면 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할례는 한 번 가죽을 잘라내면 영원히 잘라진 상태입니다. 머리를 깍듯이 두 번 세 번 할례를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가죽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랑스러운 처녀처럼 당신을 따르고 깊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정결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가나안을 정복해가던 그 때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아름다운 연합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때 그들은 정말 정결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음이 할례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대체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순종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신으로 그들의 삶 전체가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에게 다시 할례를 받으라고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가죽은 육체의 가죽과는 달라서 한 번 잘라내면 영원히 안전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가죽들은 계속 다시 자라서 다시 덮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덮여진 가죽 속에서 여러 가지 치명적인 독소들을 가진 인간의 죄악 된 욕망과 사악함들이 계속해서 자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해결하는 영구하고도 완전한 방법은 없습니다. 수시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할례 받고 정결해지는 것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의 신앙의 경험들을 돌아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받고 주님을 진실하게 따를 때,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들에 대한 사랑이 별로 없었던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하던 때가 있습니다. 주님밖에는 소중한 분이 없었던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마음의 할례를 받은 때입니다. 정결하게 할례를 받고 나니까 깨끗함이 있고 하나님과의 깊은 연합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히 유지되었습니까? 다시 마음에 살가죽들이 덮이면서 그 속에서 여러 가지 더러운 것들이 자랍니다. 가죽이 덮이는 것은 하나이지만 그 가죽 속에서 여러 가지 독소의 성분을 가진 악한 물질들이 끼면서 신체에 악한 영향을 미치듯이,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간단한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이냐 아니면 자기 사랑이냐 입니다. 자기 사랑은 세상사랑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보다 우리 자신을 사랑하던 사람들이었고 우리의 본성은 우리를 사랑하도록 말하지만, 타락하기 이전의 본성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만족을 누리려는 본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변화를 주셔서 그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깊은 사랑이 인간의 참다운 행복이라는 사실을 복음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변화된 자신의 내면의 세계로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게 되었는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계속되고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있을 때에는, 그런 풍부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있을 때에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자기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불순종을 유발하는 자기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깊이 회개해서 마음의 살가죽을 베고 하나님께 속하게 되니까 영혼의 다양한 욕망들이 한꺼번에 사라집니다.
이 문제를 십자가의 경험과 결부시킬 때에 의미가 확실해 질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죄인으로서 무지하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마구 살다가 어느 한 순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의 빛에 압도당하게 됩니다. 십자가 사랑의 놀라운 빛을 보면서 나 같은 쓸모 없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오래 지속된 은혜와 사랑, 오래 참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는 전혀 부당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감격하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나를 믿으려면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하지 말라”고 각서를 받아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소중한 분이시고,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버려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 까지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깊이 감격하여 마음의 할례를 받고 나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 가죽에 덮여서 자라났던 수많은 악한 것들을 버리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면 나를 위해서 죽어라고 사람들을 미워하던 악도 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나니까 물질에 대한 집착도 버릴 수 있습니다. 가난해지는 것이 두렵지 않고 무가치한 삶을 사는 것이 더 두렵게 되었습니다. 그 가죽을 하나 벗겨내니까 수많은 독소들이 한꺼번에 제거되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그것을 그림처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마음 가죽을 베어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구별된 마음입니다. 두 가지를 선지자가 이야기했는데 마음의 가죽을 베는 것은 구별이고, 하나님께 속하는 것은 친교입니다. 이것을 설명 드리려고 합니다. 마음의 살가죽은 누가 벗겨냅니까? 역시 성령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그렇게 베어지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할례 시키는 성령의 역사를 허락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화: 걷지도 못하던 중학교 때 그 친구가 아프지 않았다면 그렇게 힘든 포경수술을 안 받았을 지도 모른다) 치명적인 질병들이 생겨나기 때문에 아픈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할례 받지 못한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끊임없는 죄의 영향력,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초월해서 자신의 영혼을 압도해 오면서 자신의 인생을 죄 가운데 살도록 비참하게 만드는 죄의 세력에 대해서 눈뜨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참다운 영혼의 자유의 기억을 생각하면 그런 상태에서는 살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이해는 합니다. 깨닫습니다. 가끔 감동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번 가죽 위에 비누칠하는 것 같은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지체들 속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의 본질을 새롭게 해서 사람 자체가 새사람이 되어서 그 사람의 존재 자체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그런 친밀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깨달을 수 없는 곳에 있을 때에는 진리가 무엇이고 하나님의 참된 복음이 무엇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변화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들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이 참다운 변화를 경험할 수 없다면 주님이 굉장히 애통하십니다. 그 이상 우리 영혼에 어떠한 희망들을 발견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가 그런 상태라고 말합니다. 그는 고난받는 선지자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의 살가죽을 벗겨내기 위해서 칼을 들고 찾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베여지고 나면 그 속에서 자라고 있는 온갖 독소의 성분을 가진 이물질이 깨끗이 제거되고 하나님 앞에 구별된 백성으로서의 표를 가지고 살 수 있을 텐데’하는 생각 때문에 선지자가 집요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아프게 살가죽을 베어내지 않아도 길이 있다고 가르쳐주는 많은 사람들이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생각해 보라,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희들을 불행하게 하실 수 없다. 결코 바벨론에 의해서 이 나라가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것이다. 예레미아와 같은 비관적인 미래에 대한 예언을 너희들이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다”라고 이야기 해주는 것입니다. 감동의 눈물을 흘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느낌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키기로 작정되었고 하나님의 계획을 누구도 돌려놓을 수 없었습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지름길이 있다고 가르치는 교훈을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쉽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은 대부분 나쁜 신앙생활입니다. 효과적인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랬더라면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고 하나님의 사랑을 누구보다도 많이 맛보았던 사람들조차도 왜 신앙의 길을 그렇게 노래합니까? (찬송: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자신에게 한 두 가지를 보태거나 한 두 가지를 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계속 거스르며 살도록 만드는 우리의 마음을 덮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가 되는 살가죽들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나의 잘못된 집착의 껍질 속에 여러 악과 불순종들이 동시에 깃들이지 못하도록 근원적인 처방을 하나님 앞에 받는 것입니다. 한때는 우리 마음의 살가죽이 온전히 베어져서 나를 죄악 가운데에서 구원하신 주님을 사랑하고, 일평생 하나님 한 분만을 따르고 그 사랑에 살면서 떠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그 하나님이 주신 은혜도 우리가 여전히 알고 있고, 무슨 말씀을 통해서 고치셨는지도 분명히 알고 있고,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새로워졌는지에 대한 체험도 우리에게 분명히 있고, 그렇게 생각되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이해도 분명히 있지만, 마음에 껍질들이 계속 자라서 다시 우리의 마음을 뒤덮고 우리들이 이전에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면서 생생하게 경험되던 모든 신앙의 진리들은 이제는 차가운 지식으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습니다. 허무합니다. 그러나 정말 잘 살기에는 인생 칠십, 팔십이 너무 깁니다. 7개월이면 백지장처럼 순전하게 살다가 끝나고 죽을 수 있을 텐데. 그렇다고 해서 성령 충만 할 때 자살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웃으면서 듣지만 저는 25년이 넘는 영적인 순례의 길에서 뼛속 깊이 배인 언어입니다. 나도 이런 삶이 싫은데, 나도 이 마음속에서 사는 것이 싫은데 이렇게 살아갑니다. 정말 구별된 마음으로 나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드리며 내 자신의 존재 그 자체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리는 선명한 편지가 되기를 원하고 아름다운 향기가 되기를 원하는 데, 이 마음의 살가죽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라서 주님의 향기를 발해야 할 그 자리에서 더러운 육체의 악취가 나고 주님께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할 그 때에 다시 할례 없는 백성과 같이 되어버려서 우리 자신의 동질성을 잃어버립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칼 들고 수술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상한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 없이는 어찌할 수 없는 내 마음의 살가죽을 주님이 벗기셔서 오늘 내 마음이 순전하게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을 향해서만 구별된, 주님께 내가 전부인 것처럼 또 주님이 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살고 싶지만 나도 어찌 할 수 없이 마음의 살가죽이 자라나서 우리의 마음을 덮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순결한 마음에는 독소의 성분을 가진 더러운 이물질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영적인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문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 결정적이 메시지를 듣는 순간 여러분들에게 살가죽이 베어지는 소리가 들립니까?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표피적인 변화만으로 만족하는 신앙 생활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가시덤불로 가득 찬 그곳에 다시 씨앗을 뿌리면서 거의 생겨나지도 않는 소출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쓸어내 버리고 새로운 신앙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정말 감사합니다. 주일날 사랑하는 여러분들을 만나는 것이 제게 있어서는 가장 행복합니다. 만 입이 있어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내 마음의 가죽을 베이고 하나님 앞에 순전한 사람이 된다면 그때 하나님이 하늘을 열고 쏟아 부어주실 은총의 빛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서너 사람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가 (찬송: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우리 마음의 가죽이 베어져서 표피 위를 씻어내는 것 같은 이 지리하고 멸렬한 신앙생활을 청산하고 언제까지나 쥐어짜듯이 옛날에 하나님을 만났던 그 감격을 되뇌어서 느끼지도 못하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자랑하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증거 하는 대신에, 오늘 마음의 살가죽이 베어진 내 속에 주님이 찾아오셔서 나의 내면의 세계를 새롭게 고치시고 갱신시키셔서 새사람을 만드시는 이 역동적인 변화의 생생한 현장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절망적인 죄인들조차도 고치실 수 있음을 보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에게는 더 많은 프로그램들이 줄어들 것이고 쓸데없는 수많은 말들이 필요 없는 말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이 있다면 주님이 주신 것이요, 우리의 후패하고 더러운 본성과 더불어서 싸우고 죄악 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고자 하는 신령한 욕망이 있다면 그것도 모두 주님께로부터 온 것이지 우리 자신에게서 온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주께서 충분히 우리에게 오셔서 마음껏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하나님 소신껏 우리를 빚으실 수 있도록 주님의 손에 달라붙은 부드러운 진흙이 되어서 어떻게 빚으시든지 간에 주님의 손에 빚어진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근본적으로 마음의 살가죽을 베고 여호와께 속하는 것은 일생에 한번 일어나야 할 일이 아닙니다. 수시로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위험할 정도로 우리의 마음을 덮고 있는, 그래서 다시 예전의 무할례의 상태로 돌아가는 우리의 마음의 가죽들, 겉보기에는 그럴듯한 모습이지만 우리의 내면 속에서는 주님께 점령되어야 할 마음이 사악한 욕심과 육체의 욕망, 쓸데없는 헛된 영광에 대한 사모함들로 대신 점령되고 있는 것들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주님과의 친밀함에서 멀어지고 그분과의 교제로부터 소외됨을 느낍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정말 우리의 본질적인 내면의 세계를 가르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진리의 칼날, 그것을 통해서 내가 그토록 사모하고 고대하는, 내마음을 뒤덮어 무할례 상태로 가고있는 나의 이 껍질들을 하나님이 벗겨내 주시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하루하루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기록하고 있고 인간을 모두 창조하고 창조를 끝내신 후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구절은 성경에 거의 안나옵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한 번 불신의 상태에서 그리스도께 돌아와서 본질적으로 새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바라보실 때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더더욱 우리의 죄와 불순종, 그리고 거룩이 결핍된 방만한 삶 속에서 다시 무할례의 상태로 돌아가고 있을 때, 형식은 남아있지만 내면의 세계는 모두 무할례의 상태로 돌아가게 되었을 그 때에, 주님을 만나고 근본적으로 변화된 가운데 우리들이 마음의 가죽을 베고 진짜 하나님 앞에 새로운 피조물이 다시 한번 할례 상태로 돌아갔을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것은 하나의 창조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있는 그 위에 한 가지나 두 가지 더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무할례 상태로 돌아가고 있는 여러분의 마음의 껍질을 피가 흘러도 잘 드는 칼로 과감하게 베어내 버리고 며칠동안 신열을 앓는 일이 있더라도 다시 하나님 앞에 할례 된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별된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이 우리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우리가 누려도 좋은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사람들입니다. 돌아갈 수 없는 강을 지나온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참된 행복은 구별을 포기하고는 획득될 수 없습니다. 그리니까 주님의 자녀로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것, 구별된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을 양보하고도 얻을 수 있는 행복은 모두 악마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찬송: 나의 영원하신 기업)-영어 찬송가에는......(?) ‘당신은 나의 영원한 분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행복의 근원으로 삼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그런 구별된 삶을 버리게 만드는 것이 마음의 살가죽입니다. 베어야 합니다. 진실로 돌아가야 합니다. 분위기에 휩쓸려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통으로 수술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것은 현대 의학의 세계에서는 존재할 지 모르지만 마음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실 된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내 마음의 상태가 어떠하고 주님 앞에 내 마음이 왜 구별되지 못했고, 그래서 내 마음속에 어떤 죄악들이 그 무할례 상태 속에서 어떤 독소의 성분을 가진 더러운 물질들이 -악들이-내 속에서 자라고 있는데, 이것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고침 받기를 원하는 사모함들을 갖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내게 속하라” 했습니다. 마음의 가죽을 베는 것이 구별을 의미한다고 할 것 같으면 속하는 것은 친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순종하는 삶, 거룩한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때 제일 먼저 마음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할 때 비참하게 살아가는 노예의 이미지가 우리에게 들어옵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소유라는 뜻이니까 ‘하나님이 마음대로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들을 때 줏대로 없고 주권도 없고 자기 것은 아무 것도 없고 하나님 앞에 완전히 옭아 매인 사람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누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생각납니다. ‘그리스도의 종’하면 우리와는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참하게 살아간다는 면에서 나와 다르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이 그리스도와 매우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인격적인 영성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교 없는 영성은 다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이교도들의 영성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친교가 결핍된 강한 영적인 영향력을 소유한 것으로서의 영성은 이교도적인 영성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영성이 아닙니다. 존재한다면 이교도적인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다면 흉내를 내는 것 뿐 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 친교입니다.
하나님이 “너는 내게 속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너는 내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애굽에서 빼어내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셨기 때문에 우리가 인정하든지 인정하지 않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 충만해서 하나님을 잘 믿을 때만 우리가 하나님의 것인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멀리 떠나서 어둡고 캄캄한 길을 방황하면서 아무도 모르는 눈물을 흘리면서 비참하게 신음할 때에도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찬송: 어둡고 캄캄한 그곳 가시밭길에 길 잃은 양 한 마리 떨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만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도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쌍방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음난하게 우상을 섬겼습니다. 유대 말기로 가면 정말 패역한 마음들이 계속 생겨납니다. 그랬는데도 진실한 선지자 예레미아를 그 몹쓸 고난을 당하게 하시면서도 하나님이 보내신 것을 생각하면 죄 가운데에 있는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여기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바는 그런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그렇게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들도 깊이 알고 하나님께 소속되어서 살아가는 관계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받는 것을 기뻐하고 그분의 눈앞에서 사는 것을 즐거워하고 그분과의 친교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행복해 하는 그런 관계가 되기를 하나님께서 너무나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죄 가운데에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살가죽을 베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면 하나님께 소속된 삶을 살아가게 만들어 주십니다. 신자의 모든 거룩한 삶의 실패는 하나님 이외의 것들에게서 인생의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우리의 참된 행복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고 그 사랑 안에 감격하면서 사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참된 행복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소 닭 보듯이 하면서 교회 다니는 신앙생활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헤어지기로 작심했지만 자식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는 형식적인 부부처럼 그렇게 신앙생활 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께 속한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과의 특별한 친교가 있습니다. 그의 인격에는 그가 주님의 소유라고 하는 도장이 찍혀있습니다. 어디를 가도 그의 인격은 그리스도를 반영하고 그의 삶은 자기를 구원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어두운 세상에서 그런 표가 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아 그 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 소속되어 있습니까? 주님이 낯설지 않습니까? 주님의 사랑은 늘 듣고 주님의 은혜는 늘 증거 받지만 그 사랑을 느낄 수 없고 그 은혜를 경험할 수 없고 그분으로 말미암는 참다운 행복을 모른다면 우리는 사실상 무할례자와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의 할례는 받았으나 마음의 상태는 다시 무할례로 돌아갔기 때문에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계속할 수 있지만 마음으로 하나님과의 친교는 누릴 수 없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은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불행의 경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밖에 살아가지 않아도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는데 눈을 들어 사면을 돌아봐도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주님의 은총이 아닌 것이 없고 우리같이 하나님 앞에 부족한 인생들이 섬기는 삶의 현장을 돌아보아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셨더라면 나보다 훨씬 훌륭한 여러분과 같은 성도들을 열매를 주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제 자신의 유능이 아니라 하나님의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은혜에 대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에게만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에게 경험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마음의 살가죽을 베고 주님과 더할나위 없는 친교 속에서 주님을 찬송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된다면 하늘을 열고 우리에게 부어주실 그 축복들은 얼마나 큰 것일까요? 무엇으로도 고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은혜의 치료하시는 광선 아래로 들어올 것이고 핍절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로 말미암아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점에서 저와 함께 여러분 모두 좀 진실한 신앙으로 돌아가서 위선과 거짓, 핵심을 하나님이 지적하셔도 어물적거리면서 피하던 비겁함을 버리고 주님의 은혜를 많이 입었지만 내 자신의 마음이 나 자신도 어찌할 수 없이 무할례의 상태로 돌아가고 있는 것과, 그 껍질을 베어서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어 예전에 누렸던 그 친밀한 친교 안에서 하나님과 행복한 관계를 가지고 주의 백성답게 살고자 하는 소원을 주님 앞에 정직하게 고백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시간에도 자기의 백성들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 중 누구도 잃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여러분들이 피할 수 없는 죄 가운데, 혹은 자신도 어찌할 수 없이 반복되는 패역 가운데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주님의 그런 사랑을 받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철저하게 버렸습니다. 그 백성들에게 다가오셔서 마음의 가죽을 베이고 하나님께 속하라는 눈물의 권면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참사랑, 그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면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돌아가고 하나님이 우리 속에 찾아오시도록, 주님의 진리가 우리의 사악한 본성을 관통하고 우리의 부패한 이 내면의 세계를 찌르도록 본질적인 변화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할 때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여러분들을 구별된 사람들로 받으시고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충만한 친교 속으로 들어가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찾아야할 기업입니다.
7.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끄는 길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렘4:4下)
만약에 마음 가죽을 베고 하나님께 속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마음을 요동치 않고 진실과 공평과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서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고 이 일을 위해서는 너희들이 마음 가죽을 베고 할례를 받아서 나 하나님과 친교를 누리는 삶을 회복하라”고 강력하게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서 요청하시는데 만약에 그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원하고 의도하시는 일들을 결정하시고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보증을 확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마음 가죽을 벨 수가 없다. 나는 하나님께 돌아갈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여호와께 속하지 아니하련다’는 반응을 보일 때 하나님이 하실 행동에 대해서 오늘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자가 없으리로다”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에서 불은 하나님의 분노가 타오르는 불같다고 하여 즉흥적으로 하나님의 분노를 불에 비유한 것이 아닙니다. 이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나오는 불에 대한 사상, 불에 대한 신앙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일 먼저 불이 등장하는 것은 창세기 3장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다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시고 생명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두루 도는 화염검을 준비하셨습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검의 화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검이라는 의미에 포함되어있는 죽음, 화염이라는 의미에 포함되어있는 불길, 이것은 분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불은 예외 없이 죄악이 관영한 곳에 나타났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죄악이 가득 차고 하나님의 진노가 내릴 때에 소돔과 고모라는 쏟아지는 불 비, 폭발하는 지진의 불길 속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그 소돔과 고모라 성은 사해 밑바닥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지 않는 애굽의 완고함은 죄악이었습니다. 여덟 번째 재앙에서 우레와 커다란 우박과 함께 애굽 전역을 불태우는 강렬한 불의 심판이 내렸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불의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 사람들에게만 내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레위기 10장에 보면 나답과 아비후라는 사람이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는 다른 불을 담아서 드릴 때에 제단에서 쏟아져 오르는 불로 그들 모두를 삼켜버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범한, 하나님의 거룩함을 능멸한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민수기 11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은 후 처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원망에 대해서 징계의 의미로 진 이쪽부터 진 저쪽까지 불붙게 하셔서 졸지에 그들의 진을 태우시는 놀라운 다베라의 심판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불이 반드시 이러한 죄에 대한 강렬한 심판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 15장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려고 제물을 쪼개놓은 그 사이에 하나님의 불이 지나가는데 이것은 심판의 불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의 표징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나왔을 때 하나님의 큰 영광이 그들 위에 충만하였고 위에서 내려온 불이 제단 위의 제물들을 다 태워버렸습니다. 열왕기상 18장에는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백5십명과 대항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엘리야가 사람들을 시켜서 송아지의 각을 뜨고 물을 붓고 장작을 올려놓았을 때 하나님의 불이 위로부터 내려서 엘리야의 제물을 모두 태워버렸는데 이것은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부르짖는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셔서 여기에 살아 계시다라고 하는 의미였습니다.
이처럼 불은 한편으로는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강렬한 심판,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찬란하고 위엄 있는 영광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과 진노는 단지 하나님의 화, 하나님의 복수, 하나님의 분풀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이런 불들이 구약의 역사 후기에 와서는 급격하게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신약으로 넘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서 성령이 임하실 때에 다른 모습이 아니라 불의 모습으로 임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복음이 가지고 있는 심판의 능력과 복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능력을 동시에 우리에게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이 구체적으로 전파될 때에 그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를 본질적으로 변화시켜서 새 사람을 만드시는 새 창조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지만, 이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체적인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나타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깊은 의미를 가지고 오늘 이 불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히브리 성경에 보면 “나의 분노가 한 불처럼 안에서 밖으로 나오리니”라고 되어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분노가 감추어져 있다가 튀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불이건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불이건 이 모든 불의 공통적인 특징은 작은 불씨로 시작을 해서 모두가 알아볼 수 있게 서서히 불붙어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한번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물리적으로는 폭발이라고 합니다. 폭발은 불이 갑자기 붙는 것입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의 불이 붙는 것이 강력한 폭발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 영광의 불, 이 모든 것은 항상 인간이 예측하지 못하던 때에 불시에 확 임해서 마치 폭발하는 화염과 같이 인간들에게 임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의 할례를 받고 본질적으로 변화되어서 새사람이 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시 이 예언을 듣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곧 유다 나라의 백성들은 선지자 예레미아를 통해서 거듭되는 멸망의 경고를 받고 있었습니다. 바벨론에 의해서 나라가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가고 나라가 파멸될 것이며 그들의 형식적인 신앙생활의 본거지였던 그 성전이 바로 하나님의 이 진노의 불을 맞아서 박살이 나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가운데 충만하게 나타날 것임을 예레미아 선지자는 끊임없이 경고했고 그 백성들은 듣지 않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은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때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아가페의 하나님 상과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상이 조화를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표현은 미성숙한 인간의 신경질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두 가지 점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는 오류인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의 진노를 인간의 분노를 가지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식의 결론을 얻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분노와는 다릅니다.
인간의 분노는 다분히 자기 중심적이고 욕정적입니다. 그래서 한 인간의 인격 속에서 치솟아 오르는 분노의 불길과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정욕은 아주 유사합니다. 양자가 혀끝가지 타들어 가는 강렬한 불길의 면에서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노를 폭발하기까지는 자신 속에 있는 정욕을 해소하지 못할 때에 여전히 혼돈이 남아있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래서 분풀이 할 때가 없으면 깡통이라도 발로 차고 주먹으로 베개라도 두들겨 패야지 만 분이 풀리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분노는 이렇게 욕정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거룩합니다. 분노 자체의 동기가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해서 복수를 하여야 하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복수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거듭되는 인간의 죄악과 불순종, 그 반역으로부터 당신 자신의 영광을 보존하시기 위한 방어 행위로서의 분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분노는 항상 욕정적이 아니라 오히려 의롭습니다.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자체가 죄 많은 백성들의 도전으로부터 자신의 거룩함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를 방어하시는 행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죄를 짓고 도전하지 않는 곳에는 결코 하나님의 진노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아무런 해를 받지 않는데도 ‘저 인간 주는 것 없이 밉다’ 하며 인간을 미워할 경우가 있는데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향해서 도전하고 죄와 불순종을 통해서 자신에게 반역하지 않는 곳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없습니다.
두 번째 간과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는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소개하실 때 “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하십니다. 질투는 하나밖에 없을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질투이지 아무에게나 질투를 느끼면 정신병자입니다. 남의 부부가 손을 잡고 간다고 질투를 느끼면 정신 질환자 입니다. 결코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질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실 때 주님이 정말 말하시고 싶으셨던 것은 질투를 통해서 쏟아지는 진노를 말하고 싶으셨던 것이 아니라 질투할 정도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독점적인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런 성경의 언급을 보면서 마치 하나님이 진노하신다 라고 하는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과 조화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랑 자체를 잘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개 하나님의 사랑을 못 받아본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질투는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나오는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두렵다' '우리가 이렇게 살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면 어떻게 하나'하는 두려움도 느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하나님께 돌이키는 진정한 회개가 복음적인 회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진노 때문에 내 삶을 돌이켜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율법적인 회개입니다. 율법적인 회개만으로는 진정으로 마음의 가죽을 베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그 돌아옴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를 말씀하시면서,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서 쏟아 부으시는 진노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속에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두렵다. 이런 심판이 나에게 임하지 않기를 바라노라'하는 두려움을 갖는 것과 동시에 그러한 하나님의 질투하시는 진노 이면에 가리워져 있는 우리를 향한 불붙는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진노를 말씀하시면서 불같이 너희를 태워버리리라고 하시는 심판의 말씀 속에서 사실은 심판의 칼이 아니라 당신의 곁을 떠나간 우리 인간들을 향한 피눈물 나는 사랑을 충분히 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찬송: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이 예레미아 선지자는 눈물의 선지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을 예고하면서 예레미아 선지자가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그 백성들을 향해 진노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불타는 진노를-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하는 예언자로서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백성 중의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런 진노를 거두시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했던 중보자로서- 이 두 가지를 한 인격 속에 담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형벌이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도 똑같이 두 가지를 받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경고를 받습니다. 신약시대라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시대는 하나님의 은혜의 시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자비와 사랑이 더 혁혁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실 때에 오래 참으십니다. 그 자체가 사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래 참으시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능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인격적으로 우리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시지만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인내를 끝내십니다. 그때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심판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정도에 따라서 다릅니다. 하나님을 많이 알고 주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한 사람들은 작은 불순종과 작은 죄악으로도 가혹할 정도로 긴 세월동안 어둠의 터널을 지나는 것 같은 고통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커다란 죄와 불순종인데도 하나님의 은혜를 별로 알지 못했던 어린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주 쉽게 용서해주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죄로부터의 영적인 회복은 죄의 크기와도 관계가 있지만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알았느냐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면 알수록 여러분들은 그렇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 가는 것에 대해서 깊은 두려움과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여러분들이 주님의 사랑대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이 슬퍼하시고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알면 많이 알수록 더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야 하고, 주님의 거룩한 성품을 맛보았으면 맛본 것만큼 더욱 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따라서 성결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많이 맡은 자들에게는 많이 구할 것이요”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은 우리를 끊임없이 돌아오도록 부르십니다. 말씀으로 부르시고 성령의 음성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환경을 통해서 우리를 끊임없이 부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계속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며 하나님께 도전할 때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으로부터 영광을 받는 대신 모욕을 받으시는 것이고 그 모욕으로부터 당신 자신의 위엄과 그 이름의 영광을 지키시기 위해서 의로운 심판을 발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모든 것, 주님께 온전히 붙어있고 그 하나님을 부정하면서 살아가던 옛적 길을 버리고 옛 삶을 떠나는 모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오늘 예레미아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떠난 죄에 대한 강력한 책망을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 중심 속에는 우상 숭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동기에서였지만 우상을 섬기는 것은 우상에게 영광을 돌린다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행복과 물질적인 안녕을 위해서 우상과 짝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우상은 오늘날 여러분 가운데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을 지 모릅니다. 여러분 중에 제사 상에 절하거나 법당에 가서 향불을 피우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탐심은 곧 우상 숭배니라”고 말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각종 탐심, 그리고 자기에 대한 지나친 사랑,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욕구에 쉽게 굴복하는 자신을 숭배하는 삶,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를 우상 숭배자로 만들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더럽히고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바쳐야 할 진실한 경배의 정신들을 오염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대해서 오래도록 참으시면서 끊임없이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기다리시는 사랑입니다. 우리 스스로 주님 없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인격적인 회개, 인격적인 귀순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것만 기다리실 뿐 다른 아무 것도 하시지 않는다면 그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창살에 갇혀 있는 그런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순간에 당신의 인내를 끝내시고 심판하십니다. 물질을 너무나 사랑해서 하나님을 버렸던 사람들은 그 물질을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랑하고 집착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알게 하십니다. 돈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돈에 배신을 당하게 만들고 하나님보다 사람을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게 하시거나 큰 실망을 맛보게 하시거나 심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가심으로 하나님 한 분밖에는 내가 의지할 분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나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섬기며 사랑하는 대상의 첫 번째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깊은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훼손하면서 쌓아올린 수많은 업적들, 지금은 하나님이 눈물로 여러분들을 돌아오도록 성령을 통해서 간구하고 계시고 말씀으로 여러분들에게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돌아오도록 요구하고 계시지만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인내가 끝나고 나면 하나님이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포기하고 쌓아 올인 그 모든 업적들을 한번에 불살라 버리십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보다 사랑하는 것들, 신앙을 버리고 대가로 얻은 것들, 그것이 결국은 여러분들을 버리도록 만들어주어서 주님 안에서 주님이 주셔서 얻은 것 이외에는 우리에게 참다운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구나를 깨닫게 만드십니다. 악하게 번 재물은 우리의 인생 자체를 찌르는 가시가 되어서 우리에게로 돌아옵니다. 악하게 유지한 관계들도 우리를 지르는 가시가 되어서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를 보면서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심으로 본질적으로 변화되고 하나님 앞으로 회개하지 않고 예전의 삶을 반복해서 살면 하나님을 버리고 살아가는 내 삶에 대해서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다’는 두려움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진노를 한꺼풀 뒤집어서 거기에서 여러분들을 향해서 타오르고 있는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을 발견할 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 어느 백성들에게 이렇게 집요하게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어느 백성들에게 당신을 떠난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 마음속에 불타고 있는 아픔을 보여주셨습니까? 이것은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베풀어주시는 독점적인 사랑이요 독점적인 은혜입니다.
우리는 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되어서도 한편에서는 하나님의 부모로서의 성품을 물려받은 흔적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흔적도 많습니다. 자녀들을 길러보면 하나님의 성품을 잘 알게 됩니다. 어떤 때는 우리들이 죄악 되기 때문에 화가 정욕처럼 확 솟구쳐 오릅니다. 이 때는 아이들을 때리면 안됩니다. 옛 어른들은 살이 낀다고 했습니다. 그 때는 아이가 바르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없고 신경질이 나서 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가 풀렸을 때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부모로서의 징계가 아니라 감정적인 배설작용입니다. 자신 속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런 징계로는 아이들이 결코 바르게 되지 않습니다. 그런 징계는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런 징계가 아니라 때리면서 마음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이 인간이 나를 닮아서 이렇게 되었는데 나를 닮은 것은 나로 족하다. 나는 이렇게 밖에 될 수 없었지만 너는 나를 닮아 그렇게 살면 안 된다’할 때 적게나마 하나님의 성품을 느낍니다. 그것이 사랑의 징계입니다. 피가 섞이지 않고 살이 섞이지 않았으면 왜 때리겠습니까? 사랑하는 내 자녀에게 아픔을 주어서라도 아 자식이 진정으로 바르게 돌아오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기다리며 징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때리시고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채찍에는 결코 인간이 분노할 때에 필수적으로 깃든 욕정적인 복수의 감정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강렬한 사랑입니다. 파멸로 복수하기 위함이 아니요 이렇게 징계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들을 살리셔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그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찬송: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사납기도 하니 집을 나간 자여 돌아와 돌아와)
하나님께서는 어느 한 순간 불시에 진노의 심판을 베푸시지만 이런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있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하는 분명한 증거를 우리에게 인식할 수 있도록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영적인 깊은 침체입니다. 하나님과의 친교의 단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고 우리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내 안에 계신 완전한 주님께 속한 이 친교, 이런 것들이 깨트려지고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배하면 그냥 예배에 참석할 뿐 하나님이 없습니다. 기도하면 내 기도는 허공을 맴돌아 올 뿐 이 기도에 대해서 반응하시는 하나님의 소리가 없습니다. 내가 이름을 부르면 그냥 이름을 부를 뿐이지 하나님의 대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감각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늘 공급되던 터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망가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의 친교를 버립니다. 처음에는 기도하기 싫어서 기도를 안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계속되면 나중에는 기도가 우리를 버립니다. 기도하고 싶어도 그 다음에는 기도가 안됩니다. 처음에 우리들이 말씀을 버립니다. 게을러서, 바빠서,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가 말씀을 가까이 안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말씀 앞으로 다가가도 말씀이 우리를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전에 그런 조짐들이 우리의 영혼 안에 이미 나타나는 것입니다.
진노가 불같이 솟아올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파멸시키고 그 백성들에게 형식적인 신앙생활의 은신처를 제공했던 예루살렘의 성전을 향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 부어질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면서 끌려가고 유서 깊은 왕궁은 다 불타고 궁전은 박살이 나는 구체적인 심판이 있기 전에 선지자의 음성을 빼고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속에 들리지 않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 신령한 증거들이 사라져 간 것입니다.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이런 기운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분노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의 영혼의 상태를 생각해보십시오. 왜 하나님의 친교를 잃어버린 삶을 살아가고 있나요? 분명히 내 가슴팍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흔적이 새겨져 있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친 하나님의 백성들인데 그 인침에 합당한 하나님과의 친교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내 안에 있는 사랑의 친교가 없고 그래서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속한 삶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여러분들을 하나님과의 친교로부터 소원한 사람들로 만드셨습니까? 마음 가죽을 베고 할례를 받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인 변화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라는 말이 나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너희의 행동들의 한 악 때문에”라고 나오는데 의미가 좀 다릅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은 그들의 행동 때문이라기 보다는 행동 하나 하나에 공통적으로 배어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악이 배어있는 것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sin(악)과 crime(죄)은 다릅니다. sin은 마음에 있는 죄입니다. 본질적인 죄입니다. 이것은 실체적인 것이 아닙니다 만져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crime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난 형법상의 죄들입니다. 그런데 이 둘 사이의 관계는 crime의 궁극적인 원인은 sin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죄가 악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두 개를 합쳐서 표현 한 말이 죄악입니다. 우리 나라 말에만 있는 기가 막힌 단어입니다. 그래서 죄의 본질적인 성격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악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이 진노의 불을 끄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충분히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충분히 심판하셔서 모두를 쓸어버리기를 원하시는 그것의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대상이 아들의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징계를 하고 징벌을 하시면서라도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거스르고 악하게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이례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구원을 취소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충분히 진노하심으로 불을 끄신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죽여버리시면 하나님의 마음속에 불붙고 있는 안타까운 사랑의 마음이 성취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말썽을 부리고 속을 썩일 때 아이가 죽으면 기뻐하겠습니까?
“나 여호와의 뜻은 너희들이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돌이켜서 살기를 원한다”고 에스겔 선지자가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도 사실은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끄는 것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민수기 11장에서 ‘다베라’라는 말을 했는데 ‘다 탔다’는 뜻입니다. 불이 진 이쪽부터 저쪽까지 타들어 가는 것입니다. 천막이니 얼마나 잘 탔겠습니까? 그러면 불을 끄기 위해 물을 뜨러 가야하는데 하나님을 경험한 백성들은 놀랍습니다. 자기의 진을 태우고 있는 불의 성격이 물로 꺼질 불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온 백성들이 열렬하게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무엇을 기도했겠습니까? (찬송: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소서)하며 부르짖으니 불이 꺼진 것입니다. 물이 그 불을 끈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존하신 하나님,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한 우리의 죄가 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진을 불태우시는 도다’하면서 흘린 그 회개의 눈물이 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끈 것입니다. 그런데 동일하게 이 선지자가 이 백성들에게 그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살가죽을 베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본질적인 변화와 회개를 원하는 것입니다.
“너희 많은 행동들의 한 악을 인함이라”가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하나님 앞에 공평을 버리고 불의하고 무자비하고 사악하고 교만하게 살아간 악한 실제적인 행동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행동들을 가능하게 했던 궁극적인 뿌리가 마음속에 있는 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죄악 된 경향성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지금 공격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고쳐야 될 것이 많습니다. 왜 예배시간에 늦게 옵니까? 사람이니까 한 두 번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 주 늦으면 그것은 영혼의 질병입니다. 지존하신 하나님을 경배하는데 그런 태도로 되겠습니까? 반복된다는 것은 여러분 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신이 없거나 심하게 결핍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과 만나는 그 시간을 거룩하고 심각한 시간으로 생각하지 않는 오만함이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고치십시오. 기도 안 하는 사람은 기도 안 하는 행동을 고치고 기도하는 행동으로 바꿔야 합니다.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는 사람들은 고쳐야 합니다. 말씀을 제대로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한 두 가지를 했다고 해서 여호와께 속하는 친교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냐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했던 근본적인 내면의 본질적인 문제에 하나님의 은혜의 불이 붙지 않으면 안됩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할례를 이야기 하다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할례를 안 받아서 껍질이 잔뜩 쌓여 있습니다. 거기에서 온갖 더러운 오물들이 부패하며 화학적인 작용을 일으켜서 질병을 일으킵니다. 고름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자기의 아내와 육체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예화: 성병 가진 자들의 아이들이 상상할 수 없는 결함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 할례를 받으면 해결이 될 텐데. 자신도 정결해지고 그런 질병으로부터 떠나게 되고 아내도 보호할 수 있고 그 자녀들과 자녀를 통해서 생산될 또 다른 자녀들 모두를 보호할 수 있는데, 근본적인 할례를 받지 않으니까 많은 문제들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욕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가죽을 벗겨내는 본질적인 수술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고 기분 전환이 되어 마음이 개운해지고 정돈된 것 같은 식의 청량제 역할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와 모든 은혜의 방편들이 진리의 말씀이 여러분들의 마음 껍질을 깨고 그 깊은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등지고 살수밖에 없는 부패한 수많은 행동들을 가져올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그 악에 대해서 파고 들어가서 거기에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사람, 새 마음을 가진 사람, 이제는 무엇을 행하든지 그 속에 악이 깃드는 것이 아니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행하든지 우리의 죄와 강퍅함을 용서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큰사랑, 주님의 깊은 은혜와 자비, 이런 것들이 그 행동 속에 배어있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 삶의 예배화 작업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라’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그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배어있고 주님을 향한 경배의 정신이 깃들여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 가죽을 베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늘을 열고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큰사랑, 나의 마음에 차고 넘쳐서 교회와 내 가슴속에 넘쳐흐르는 인내와 긍휼, 쏟아지는 하나님의 큰 은혜와 사랑의 부으심, 이러한 친교, 이것은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생활로는 도달할 수 없는 목표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본질적인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지성을 스치고 지나가거나 순간적으로 우리의 의지를 충동하거나 천박한 감성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깊은 곳을 찌르고 들어와서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은 채 살아가는 우리의 사악한 삶을 총체적으로 회개하고 우리의 마음의 더러움들을 뉘우치며 이제껏 까지 자랑처럼 붙들고 살아왔던 마음의 가죽을 벗겨내고 그 가죽 속에 깃들여 있던 모든 더러운 것들을 씻어내고 정결한 사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정으로 자기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진정으로 당신의 독점적인 사랑의 친교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로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날들을 경험하게 되면 바로 그날에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자녀 된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이며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거룩한 고난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가져오고 싶어했던 목표가 무엇인지를 여러분들이 알게 될 것입니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생활이 아니라 은혜와 긍휼을 우리 안에 쏟아 부으시고 우리를 통해 그 사랑을 열방 중에 펼치시는 하나님의 그 큰사랑, 어디서든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경험하게 하시고 우리가 주님께 속한 백성임을 입증하시는 하나님의 임마누엘의 임재를 날마다 경험하면서 살아가게끔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런 축복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8.경외의 마음을 회복하라
“그러므로 너희 열방들아 들으라 회중아 그들의 당할 일을 알라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니라 시바에서 유향과 원방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찜이뇨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렘6:18-20)
이스라엘 백성들은 옛적 길을 버리고 자신의 소견에 옳은 길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완전히 하나님을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제사하고 있었고 보다 더 좋은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하였습니다. 시바의 유향과 원방에서 가져오는 향품들을 하나님께서 매우 싫어하시는 것을 선지자는 오늘 말하고 있습니다. 시바는 아라비아 반도 쪽에 있는 사비안 족속들이 살고 있는 땅인데 예로부터 유향이 나기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거리 상으로 약 1500마일 된다고 하니 아마 2500㎞정도 되는 엄청나게 먼 거리입니다. 그 유향은 향기가 나는 기름인데 성전에서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예식을 할 때 사용되는 기름이었다고 합니다. 향품은 원방에서 실어왔는데 당시 향품의 명산지 하면 인도였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말하는 원방이라고 하는 곳이 인도였을 것이라고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추정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시바보다는 훨씬 더 먼 무역로를 통해서 실려온 향품이었을 것입니다. 이 향품은 성전에서 향을 태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재료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유향과 향품을 매우 고통스러워하시면서 “그런 것들이 내게 무슨 쓸모가 있으며 너희들이 드리는 번제와 모든 제사가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느냐?”고 반문하시면서 그것을 향한 강한 혐오감을 표하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극상품의 유향이나 향품이 제사에 쓰여지는 것을 비난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참다운 교회의 영광이 무엇일까요? 참다운 예배의 영광이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화려한 궁전과 같은 건축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회집하는 규모나 아름다운 오르간이나 유명한 성가대나 혹은 유명한 쏠리스트 때문에 그 예배가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천막을 치고 마른땅에 가마니를 깔고 드리는 예배라고 할지라도 그곳에서 정말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고 우리를 위해 자기의 생명을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인격적인 경험이 있다면 그래서 죄 가운데 살면서 용서받지 못해 곤고해 하던 영혼들이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만나고 사죄의 은총을 누릴 수 있다면, 인생의 갈 길을 알지 못해서 방황하던 무지한 사람들이 그곳에서 선명하게 어둠을 뚫고 비치는 진리를 깨닫고 자신이 살아가야 할 인생의 참 길을 터득할 수 있다면, 길은 알지만 그 길을 따라서 순종하며 살아갈 힘이 없는 사람들이 예배의 시간을 통해서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 길을 따라서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는 거룩한 능력을 받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아름다운 예배가 아니겠습니까? 비록 다 낡은 천막으로 둘러싸인 교회당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아마 그 교회당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그 장소가 거룩하고 구별된 장소라고 하는 사실을 뼈에 사무치도록 인식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 초라한 천막이 쳐진 그곳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인격을 경험하고 주님의 큰사랑을 알게 되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들은 아마 그 천막에서 예배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만난 거룩한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시는 그 존귀하신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교회당을 짓기를 원할 것이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께 드리는 존귀한 예배에 알맞는 물건들을 가지고 예배에 사용하려고 할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고 범죄한 자들을 용서하시는 사죄의 은혜, 그래서 다시 하나님과의 큰사랑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친교의 회복의 경험이 있는 그 제사에서 어떻게 조잡한 합성유나 태워도 냄새가 나지 않는 저질의 향품을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점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바에서 유향을 싣고 오고 인도에서 향품을 싣고 와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사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찬송: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모신 것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다윗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많이 사랑했습니다. 다윗이 제위 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 민족을 매우 기뻐하신 기간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장막이 있었고 그 장막에서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과 은혜의 축복이 있었던 때였습니다. 하나님을 모신 그 성소가 천막으로 되어있고 광야에서 쓰던 이동식 성전이었기 때문에 다윗이 하나님을 만나는 데 방해가 되었다든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데 문제점이 있었다든지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깊이 만나고 그 영광을 본 사람 다윗, 주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는 다윗은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백향목으로 지은 이 아름다운 왕궁에 거하는데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궤는 아직 천막 중에 있도다”며 괴로워했습니다. 주님이 주신 괴로움이 아니었습니다. 그 괴로움 때문에 하나님께 성전을 짓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는 괜찮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고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나면 어떻게 하든지 좋은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섬김으로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유향과 향품을 고급으로 가져와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 내지는 예배의 행위가 -섬김의 행위가- 섬기는 그 사람과 일치를 이룰 때에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 앞에 예배는 최상의 것으로 드리려는 마음이 남아있을 지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그 마음은 그들의 존재와 삶 자체를 파고 들어가는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드리는 향품과 유향, 그들의 번제와 그것을 드리는 사람 사이에서 일치를 발견하실 수 없었습니다. 제물은 최고급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지만 그 제물을 손에 들고 온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름다운 예배가 하나님께는 커다란 고통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오늘날 교회를 솔로몬과 같은 생각으로 짓는다면 모든 사람들이 욕을 할 것입니다. 만일 교회를 짓는 데 강단을 금으로 만들고 기둥을 은으로 만들고 각종 불 들어오는 기구들을 순금으로 만들고 바닥은 외국에서 수입해온 돌을 깔고 의자에는 중국에서 수입해온 최고급 비단을 깔고 통로에는 페르시안 카페트를 깔았다면, 그래서 성전을 짓는 데 90조원정도 들었다면 여러분들이 좋아하시겠습니까? 솔로몬 성전에 금만 90조원 어치가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큰 성전도 아니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가 18평밖에 안되었습니다. 그렇게 화려하게 지어진 성전에서 준공을 하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에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에 나타났다면 오늘날의 신앙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받아들이기 힘들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구약의 야훼 종교가 신약 시대로 넘어오면서 훨씬 영적인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보여준 찬란한 금과 은의 아름다운 영광은 바로 오늘날 복음의 영광으로 바뀌어야 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 하나는 만약에 하나님의 백성들 마음 가운데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경배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최상의 것으로 섬기려고 할 때 하나님이 그것을 문제로 삼지는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향과 향품을 최고급으로 실어온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께 향기롭고 좋은 것이 되기 위해서는 해결되어야 할 것이 먼저 있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앞부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슬퍼하며 책망하신 것은 파수꾼, 즉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끊임없이 경고하고 권고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 말씀을 버린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배를 드릴 때 마음에 유혹을 받거나 죄가 있으면 영적으로 흐려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잘 오지 않습니다. 자난 주에는 가슴이 저미도록 하나님의 말씀이 파고 들어와도 지금 불순종하고 죄를 짓거나 유혹을 받으면 구름이 끼면서 그런 것들이 모두 사라집니다. 또 그런 죄는 없어도 육신적으로 매우 연약하면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놓칩니다.
그러나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삶은 그런 심정적인 유혹이나 육신의 연약함이나 마음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말씀을 놓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려는 의지를 가진 것입니다. '나는 내 뜻대로 살겠노라' '나는 우리에게 거듭 들려주는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을 싫어하노라. 나는 거기에 순종하지 않겠노라' 하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그 말씀에 불순종 한 것입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불순종한 것이 아니라 의지를 가지고 강력하게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의 자세를 고수하면서 최고급 유향과 외국산 향품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모습은 그것이 고급이면 고급일수록 그 종교 심리 자체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대적하는 것에 대한 보상을 하고 싶다라고 하는 빗나간 보상 심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믈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매우 잘못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매우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그 일을 빼앗으면 그들은 인생에 있어서 설자리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일하지만 결코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일을 짊어지고 일에 치이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넘쳐나는 비밀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드리는 최상의 제사, 최고의 유향과 향품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이 모든 예식이 하나님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선지자들이 공통되게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제사는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좇아서 살아가는 삶이 없는 사람의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예배의 행위는 하나님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 예배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하시는 거룩한 은혜가 깊이 예배자의 마음을 파고 들어가서 질적인 변화를 일으킬 때에 그것이 가장 하나님 앞에는 훌륭한 제물이고 훌륭한 예물입니다.
(예화:6-7년 전 교회를 개척하고 나니 일꾼이 아쉬웠는데 도와주기 위해 왔다는 사람들이 있었다-그러나 나를 가장 도와주는 것은 은혜를 받고 새사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러분 각자가 하나님을 만나고 진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될 때, 그래서 내면에서 참다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완전히 변화되어 새사람이 될 때는 그런 교인들이 많은 것이 목회에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적은 것이 목회에 부담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늘 어린아이처럼 녹고 주님을 닮아가려고 애를 쓰고 어찌하든지 자기를 버려 주님을 섬기려고 애쓰는 교인들이 수천명, 수만명이 모일수록 더 쉽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기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사랑 받는 백성도 되고 이 세상에서도 환영받는 백성이 되는 것, 교회 안에서는 소금이고 교회 밖에서는 설탕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것, 그리고 적극적으로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들에게 경고하시면서 돌아오라고 간절히 부르시는 이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한 것은 결국은 그들이 옛적 마음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옛적 길로 행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옛적 길은 멀리로는 에녹과 같은 노아와 같은 족장들이 걸어갔던 그 아름다운 하나님과의 교제의 길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들, 요셉과 같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분을 늘 경험하며 그분의 임재 속에서 살았던, 그분께 기쁨이 되었던 그 옛적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가깝게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너고 이방의 땅들을 점령해 나갈 때, 그들은 무기도 없고 연약한 백성들이었고 그 땅의 주인들은 강력한 민족이었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그 땅을 차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뢰하였습니다. 싸우기는 자신들이 싸우지만 그 땅을 자신들에게 주시는 것은 자신들의 싸움이 아니라 자신들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했고 주님을 깊이 따랐습니다. 마치 젊은 처녀가 결혼을 해서 신랑을 따름과 같이 그들은 전심으로 하나님 밖에 없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들의 최고의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들은 늘어나는 땅보다는 그 땅을 주시는 동안에 역사하셔서 자신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더 흥분되는 시기를 보내었습니다. 옛적 길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 옛적 길 안에는 옛적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마음을 버렸기 때문에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의 명백한 음성을 거절했고 말씀을 통해서 그들에게 갈 길을 보이는 하나님의 음성을 그들이 철저하게 배반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확정된 하나님의 심판과 고난받고 죽어갈 자기의 백성 사이에서 녹는 것 같은 마음으로 이 예레미아는 선지자로, 그리고 제사장의 마음을 가진 말씀 증거자로 오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그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죄악 가운데에 있는 그 백성들을 용서해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간구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그리고 우리 시대의 교회가 하나님과 하나님을 버린 이 백성 사이에서 서야 할 삶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주의 법을 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한 삶의 이면에는 옛적 마음을 버린 실패가 있었습니다. 옛적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옛적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삶의 길을 확정해주는 사령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과 악한 원수들은 어찌하든지 모든 힘을 동원해서 우리의 그 마음을 공략하고 무너뜨리려고 애를 쓰고 옛적에 가졌던 그 마음을 멸하여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기에 합당한 마음을 갖도록 우리에게 강력하게 도전합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의 주인은 사실 우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이 마음을 돌이키도록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떤 상황에서 애굽에서 건져내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울부짖음이 하늘에 달했을 때 하나님이 내려오셨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그렇게 고통스러운 인생을 보내었다는 뜻입니다. 하도 고통스러워서 부르짖는 그 탄식과 고통의 울부짖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자기의 사자들을 내려보내시고 결국은 모세를 보내어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옛적 길로 행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옛적 길에는 옛적 마음이 있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모두 인생의 벼랑 끝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벼랑 끝에서 주님을 만났다는 사실을 그 당시에는 인정할 수 없었던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주님의 은혜가 자신의 마음속에 밀려오고 어둡던 눈을 밝히 뜨게 될 때에 비로소 자신은 정말 생애의 벼랑 끝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20대 초반에 좋으신 우리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나면서 ‘어떻게 하면 이 육 척 단신의 몸을 의탁할 수 있을까’하고 유리방황 하던 사상적인 방황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가난과 질병, 견디기 힘든 환경의 고통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그래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자신의 인생을 지탱할 수 없는 사상적인 문제, 자신이 자신을 지탱할 자신이 없는 정신적인 연약함은 육체적인 곤고함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 주님을 만나고 사상적인 방황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따라다니며 이런 사상 저런 생각의 동냥질을 하며 하루 하루 살아가던 인생의 길은 주님을 만나고 나서 광산을 발견한 것과 같았습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있고 안식이 있었습니다. 인생의 어떤 의문에 대해서도 답해주는 지혜가 그 속에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단지 인생의 길이 이런 것이라고 가르쳐주는 대신 언제나 찾아가서 그 진리에 귀를 기울이면 우리 주님이 만나주시고 그 주님은 나에게 험한 인생을 헤치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주셨습니다. 벼랑 끝에서 만난 주님입니다.
여러분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지 않고 살아도 될 사람들이 우리 주님을 만나고 구원의 감격을 경험하는 예는 거의 없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의 큰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때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시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어찌하든지 자신들 속에 있는 사랑을 하나님께 보이고 싶어하고 그 사랑과 은혜를 알게 하고 싶어합니다. 문제는 마음의 참다운 변화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좋은 날에 무엇을 얻기 위해서 이 예배당에 오셨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기대하면서 이 예배에 참석하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의 인생에 많은 문제들은 여러분의 마음의 변화를 기다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시험의 도구들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들이 좋은 유향과 향품을 드리는 것도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겠지만 자신의 변화가 없는 그러한 헌신은 하나님께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법도대로 살고 주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인데 우리와 같이 죄성이 가득하고 옛길을 버리고 새 길로 멀리 돌아선 우리들이 돌이켜 그 옛길로 행하기 위해서는 옛 마음의 회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살아 계신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의뢰하고 그 사랑 때문에 감격하던 마음, 나같이 쓸모 없는 인생을 위해서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에 녹던 마음, 그래서 쓸모 없는 이 인생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버려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이제는 내 인생의 남은 보람이 나를 위해서 자기를 버리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 분처럼 사는 것이라고 하는 착한 옛 마음의 회복이 없이는 우리는 결코 옛길로 걸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찬송: 내 주 되신 주를 참사랑하고 곧 그에게 죄를 다 고하리라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옛 마음의 회복입니다. 그래야만 옛길을 걸을 수 있고 그래야만 우리들이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우리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해보십시오. 하나님은 당신께서 우리를 위해서 아낌없이 당신 자신을 주셨던 것처럼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의 계명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순간순간 죄와 유혹에 에워싸이고 우리의 마음이 옛적 길로 행할 때는 너무나 잠깐동안이고 우리들이 고난과 어려움에서 벗어나거나 하나님의 참된 사랑의 경험에서 이탈되기만 하면 우리의 마음은 신속히 강퍅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마음을 지키며 순종함을 잃지 않으려는 성도들은 악한 원수들에게 아주 좋은 표적이 됩니다. 그들의 삶의 길에는 끊임없는 유혹이 도사리고 시련이 진을 칩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애를 쓰지만 마음을 지키려는 그들의 노력과 의지는 너무나 연약하고 그들을 삼킬 듯이 밀려드는 시련과 세상의 유혹, 죄의 세력들, 옛적 길을 걸어가려고 애쓰는 우리들을 쓸어내어 새 길로 몰아가려고 하는 어둠의 세력들은 훨씬 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지키며 옛 마음을 유지하면서 살려고 하는 성도들은 늘 웁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그 마음을 뺏고자 하는 그 악한 대적들이 안팎에 가득한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그 마음을 풀고 점령당할 때가 있습니다. 잠시 후 생명과 같은 교제의 빛이 마음속에서 사라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참 사랑, 그분의 거룩한 교제의 빛, 친교의 빛 안에서 살아가는 것보다 행복한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되고 옛적 길로 걸어가는 그곳에서 가장 커다란 평강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할 마음을 갖게 되고 불순종을 뉘우칠 마음을 갖게 됩니다.
(찬송: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민망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어떻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쓸모 없는 쓰레기와 같은 인간들을 위해서 자기를 어떻게 버리셨는지를 아는 순간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갈 의무 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빚진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자기를 모두 버리실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주님의 마음에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찬송: 사랑이 구주를 죽게 했네 왜 날 사랑하나 죄 용서 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우리에게는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주님 앞에 벗어드릴 제왕의 면류관도 없고 커다란 영토도 없습니다. 황금도 없고 유향도 없고 몰약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압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를 구속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큰사랑 속에서 살게 하신 가장 큰 비밀은 우리에게서 제왕이나 황금의 면류관, 우리에게는 있지도 않은 왕국, 가져 보지도 못하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 같은 것들을 얻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주인이 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큰사랑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주님의 길로 행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고, 그래서 주님의 마음에 시리도록 사랑스러웠던,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족장들과, 가나안 정복 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기를 부정하던 그 마음을 우리에게서 보시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아직까지도 이런 기대를 갖고 계셨던 것처럼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돌아가기에는 너무나 멀다고 생각하는 길에 나와 있을 지라도 사실은 거기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거기로부터 돌이켜서 다시 옛적 길로 행하는 백성, 옛 마음을 다시 갖게 하셔서 사랑하는 신부처럼 신랑 되신 하나님을 좇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삶의 기쁨과 보람으로 아는 백성들이 되기를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간절히 사모하고 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습니다. 옛 마음을 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옛적 길도 아울러 버렸고 세상의 번영과 영광 하나에 마음을 뺏겼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셨던 것과 똑같은 마음으로 여러분들을 부르셔서 옛적 길로 돌아가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어떤 인생의 때에 구해주셨는지 그리고 소망이 없었던 우리들에게 찾아오셔서 어떤 사랑을 보여주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입술로 주 없이 살 수 없다고 고백하던 그 옛적 마음을 상기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마음으로 걸어갔던 옛적 길을 회상해 보십시오. 거기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었고 무릎을 꿇을 적마다 쏟아지는 하나님과의 친교가 있었습니다. 죄와 무지 속에서 건져내시고 화해와 광명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골방에서 무릎을 꿇고 우리는 가정과 교회와 세상을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위엄,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오늘도 동일합니다. 이런 사랑 이런 은혜로 여러분들을 부르셔서 자기 백성 삼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실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거짓, 허위, 위선의 옷을 벗어버리고 쏟아지듯이 내려오는 하나님의 사랑의 빗줄기 앞에서 정직하고 진실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직한 하나님의 눈앞에서 정죄를 받는 것이 거짓된 가식 속에서 스스로를 의롭게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소망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마음으로 자기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마음으로 말하는 사람의 말은 마음에까지 다다르지만 입술로 말하는 사람의 말은 귀에까지만 다다르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마음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은 움직이십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한번 진실해 보십시오. 사랑은 우리를 솔직하게 만듭니다. 사랑은 우리를 정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진실하게 자기를 한번 추스러 보십시오. 매 순간마다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큰사랑,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면서 순간순간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보람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우리 인생을 걷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마음의 참다운 변화를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진실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솔직해지고 주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인정하며 제물보다도 향품보다도 유향보다도 번제보다도 소중한 것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다가오는 마음임을 기억하고 그 마음을 제물로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갈 때 우리로서는 도저히 돌아갈 수 없는 그 옛적 길로 돌아갈 옛 마음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여러분들을 향한 간절한 마음입니다.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