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을 용서하시고 고치시는 하나님
(2004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4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눅5:32) 2004.8.9 온가족 여름수련회(새벽) 1
2. 은혜 언약 안에 있는 용서(사1:18) 2004.8.10 온가족 여름수련회(새벽) 7
3. 용서하고 고치심(대하7:14) 2004.4.11 온가족 여름수련회(새벽) 17
4. 용서받은 자의 큰 의무(요 8:11) 2004.4.11 온가족 여름수련회(폐회예배) 26
1.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 비난하는 것에 대한 답변으로 이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병들고 가난하고 당시의 죄인으로 이름나 있던 창기와 세리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특별히 그들을 위해서 오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이 보기에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영적으로 병든 사람들이었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이처럼 당시에 따돌림을 받던 죄인과 세리, 병든 자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셨던 이유는 그들이 특별히 더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많이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사두개인들 이런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많이 배웠지만 그들 스스로 자기들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사회에서 낙인찍힌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생각하고 외부로부터 오는 구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러한 의문이 들 것입니다. 어떻게 죄인들이 스스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까? 몇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그들을 변화시키지 않으셔도 그들이 스스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본성의 빛을 통해서 자기가 죄인이며 자기는 자기가 이제껏 지은 죄로 말미암아 자기가 정죄되었고, 자기는 희망이 없는 인간이다 라는 생각을 인간의 본성의 빛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세상에는 교만해서 제 멋대로 살아가는 황당한 죄인들도 많이 있지만,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 중에는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접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성의 빛으로 자기가 아무 희망이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괴로워하고, 절망가운데 들어가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그 본성의 빛은 자기가 죄인이며 자기가 정죄되었다는 사실만 가르쳐 줄 뿐 그 이상의 빛을 던져주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두 번째로는 비록 구원받기 전이라고 할지라도 성령님의 중생 이전의 역사는 이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에 역사해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역사를 마음 가운데 일으키셨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마음속에서 자기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불러서 회개시키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인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요 라고 하는 이 말씀은 진짜 의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의롭다고 뻐기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스스로 자기 의에 가득 차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주님께로부터 오는 도움을 간절히 바라고 사모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오셔서 그들을 진실로 회개시켜서 그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고 회심하여 거듭나게 되는 우리들은 모두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부르기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가 아무 희망이 없는 죄인이며, 그리고 죄인 혼자 이 세상에 살아가는 것은 아무 희망이 없는 것이며, 그래서 주님이 내게 베풀어 주시는 그 구원의 은혜를 온전히 받아들이고자 하는 그러한 마음을 우리 모두 가진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이 다가오는 그 처음 회심의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얼마나 어린아이들처럼 주님의 용서의 은혜에 목말라 했으며, 우리가 얼마나 간절하게 우리의 구원을 위해 부르짖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또 우리들이 주님을 믿고 거듭난 이후에라도 우리들이 가던 불순종에서 돌이켜 다시 회심을 하던 때에도 한 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얼마나 진실하게 주님 앞에, 하나님을 떠난 것이 우리의 악이요, 우리의 고통인 것을 깨달으며 주님의 용서를 구하고 죄인이라는 사실을 얼마나 진실 되게 하나님 앞에 아뢰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진지한 몸부림,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주님 앞에 아뢰는 정직한 성찰과 구원의 은혜를 향한, 그분의 구원의 은총을 향한 갈망이 우리 안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를 일으켜 세우셔서 주님 앞에 발견되게 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받은 그 은혜를 간직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올곧게 인생을 살아왔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했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저는 최근 들어서 그런 묵상들이 많이 마음에 떠오릅니다. 주님을,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제껏 인생을 살았는데, 인생의 40% 이상을 주님을 모르는 채 이 세상에서 살았으니 그것도 역시 도둑맞은 날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고 회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지만 참된 성도가 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복음의 이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살았기 때문에 태어나기는 했지만 길가에 버려진 아이처럼, 그렇게 살았던 날들...긴 날들- 그것도 역시 반쯤은 도둑맞은 날들입니다. 그러다 주님을 크게 만나고 이제는 신앙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객관적인 어두움이 남아 있어서 허우적대며 몸부림쳤지만 성화의 조금밖에 진전을 이룰 수 없었고, 또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날들도 또한 그 속에 많은 인간의 야망이나 이기적인 욕심 같은 것들이 개입되어 있으니 역시 반쯤은 도둑맞은 날들입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신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현저한 많은 빛을 주시고 그래서 참 성도의 길을 걸어가도록 만들어 주셨는데 안에 남아있는 주관적인 어두움, 어두움 가운데 매여 있으려고 하고 부패한가운데 안주하려고 했던 많은 날들... 또 반 이상은 도둑맞은 날들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허무한 마음이 가슴에 확 밀려들어요. 이렇게 인생을 다 살면서 이만큼 주님을 믿으며 몸부림치면서 살아왔지만 배운 것은 이렇게 예수를 믿으면 된다 보다는 이렇게 예수를 믿으면 안 된다 라고 하는 것을 많이 배워왔어요. 그리고 이제 많이 깨닫게 되었는데도 아직까지도 어두움이 많이 남아있어요. 근데 이제 인생을 살 날 들은 점점 줄어들고....
내 평생에 힘쓸 그 큰 의무는 주 예수의 덕을 늘 기리다가
숨질 때에 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더 사랑합니다.
그러면서 그래도 그런 고통가운데 감사하게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엎드려지되 아주 엎드려지지 않게 하시고 죄악 중에 넘어진 자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다시 붙드셔서 우리가 선택하고 우리가 행하면서 살아온 죄인데도 수시로 우리로 하여금 그 죄를 미워하는 마음을 주시고, 오히려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고통가운데 더 간절하게 구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진실한 참회의 몸부림이 있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들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의 구속의 은혜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그 크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이렇게 밖에 살지 못하는 죄인을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님, 그리고 오셔서 우리가 좋아서 지은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짊어지시고 그리고 그 죄의 결과까지 주님이 스스로 짊어지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정죄당하시고 심판을 당하셔서 어린 양으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다시 한 번 부패한 욕망을 따라서 사는 내가 아무 희망이 없는 존재이고 주님의 뜻을 떠나서 내 마음대로 살았던 날들, 생각나는 대로 생각하고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자고 싶은 대로 자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살고 싶은 대로 살고 이렇게 짐승처럼 살았던 많은 날들이 우리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 가면 오지 않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허무한 것에 소비하였다는 뼈저린 후회가 우리의 마음에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실한 용서의 은혜 없이 회복의 은혜 없이 살았던 많은 날들 속에 떠나보낸 우리의 금쪽같은 인생의 날들을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창조하시고 더욱이 우리를 그 복음의 빛으로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은 이 땅에 있는 것들만을 위해서 살게 하신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이 세상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면서 이 세상에서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뜻을 이루면서 살기는 하지만 철저히 이 세상이 얼마나 소망이 없는 곳이고 이 세상이 얼마나 잠깐 지나가는 나그네와 같은 인생의 길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하늘의 것을 바라면서 살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를 그 십자가의 보혈로 구해주시고 건져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아무리 주님을 떠나고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하면서 산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진정으로 우리의 영혼의 만족이 있느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마치 뜨거운 여름날에 더운 설탕물을 마시는 것처럼 마시고 난 후에 목마름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며 살다보면 복음에 대해 반감이 생겨요. 그래서 그러면 나보고 어떻게 살라고 하는 말인가! 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적대감들이 노골적으로 고개를 들면서 우리의 마음 전체를 채우는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많이 회개해야 할 대목입니다.(*3)
하나님이 우리에게 잘못하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 주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래서 그 분의 이름은 사랑이었습니다. 죄 가운데서 아무 희망이 없이 진노아래 놓여있는 자들을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구원의 주님을 찾을 수 없는 인생들을 위해서 더러운 죄인은 자기의 자리에서 죄 짓고 살고, 고결한 주님이 그 희망이 없는 죄인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죄와 불순종으로 거칠어지고 완악해진 그 마음에 은혜의 손길을 내민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게 주밖에 없네
잠시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아가는 일이 너무 힘들게 느껴져서 주님을 떠나 죄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이 너무 무거워서 정욕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성도로서의 의무를 다하며 살아가는 그 길이 너무 힘겨운 것인 것처럼 생각이 되어서 모든 의무를 벗어버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유가 주어졌나요? 그래서 우리의 멍에는 가벼워지고 우리는 정말 자유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행복한 사람들이 되었나요? 아니잖아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의 참된 안식은 그분의 품 이외에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자기의 참회록 속에서 젊은 날 성경을 읽었지만 그 성경에 나오는 모든 문체나 표현들, 사상이 자기가 깊이 심취했던 희랍의 철학에 비하면 너무 유치하고 조잡해 보였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래서 당대 최고의 지성인으로 그는 사상적인 방황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니교에 깊이 빠졌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참회록의 마지막에 뭐라고 기록했습니까? 제가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 전까지는 참다운 안식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두 하나님의 품 이외에 어떤 곳에서도 안식을 찾으려 하는, 안식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즐거움과 행복이 존재할 것이라고 하는 모든 것들이 죄의 속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처음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온 때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자들의 깊은 영혼의 침체와, 불순종으로 어두워진 길에서 그들을 다시 건져주시는 성화의 구원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죄로 말미암아 많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정직하게 자신이 주님을 멀리 떠나 죄에 빠진 것들을 고백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손길이 펼쳐지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살아온, 주님을 믿고 살아온 인생의 날들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용서로 점철된 길이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스스로 떠난 것은 우리였고, 우리를 찾아오셔서 설복하시고 우리를 무릎 꿇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사모하게 하고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로 돌아가게 해 주신 분은 언제나 하나님이셨습니다. 마치 호세아 선지자가 방탕했던 고멜을 끝없이 찾아 헤매고 자신의 아내로 여겼던 것처럼 주님을 믿고 살아온 많은 날들을 이렇게 주님을 떠나려고 하는 우리들을 찾아오셔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정직하게 이런 은혜의 빛을 가지고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면 우리가 주님을 섬겼다고 할 수 있는 날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시간들, 너무나 자주 주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방탕하게 주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제 멋대로 불순종하는 길을 걸어가서 또다시 상처받은 죄인의 모습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이지요. 그 때마다 다가오셔서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엎드러지되 아주 거꾸러지지 아니하고, 다시 살아서 성도의 길을 걸어가고, 다시 살아서 성도의 길을 걸어가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한 아이로서 복음 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엎드려지고 넘어지면서 우리의 신앙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우리는 모두 기억 못해도 우리를 낳으시고 우리를 일으켜 세우셔서 아직까지도 성화의 길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있음으로 좋은 신자 되기를 갈망하기를 지니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살아온 모든 길을 아십니다.
그래서 이 아침 시간에 우리는 이런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용서의 기억들, 그리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를 찾아오셨던 하나님에 대한 그 은총의 기억들로 거친 마음을 쓸어 내려야 합시다. 마음을 다스려야 합시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고 주님이 그 구속하신 사랑을 거스려서 살았던 우리의 모든 날들은 핑계할 수 없는 명백한 죄악이었으며, 그 불순종과 죄악 속에는 어떠한 기쁨의 날도 없었다는 것을 정직하게 고백하고, 우리의 모든 희망을 이 땅에 매어 두고 사는 우리의 모든 어리석음을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소망을 이 땅에 두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는 것은 마치 배가 부두에 정박한 채로, 닻을 내린 채로 발동을 걸고 출발하려고 하는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죽음의 빛으로 우리의 삶을 보아야 합시다. 그리고 주님이 바로 오늘도 우리에게 선명하게 말씀하신 것은 ‘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주님의 그 음성, 주님의 그 마음을 깊이 헤아리면서 거칠게 살았던 날들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회개하고 그리고 다시 안식이 있는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은혜 언약 안에 있는 용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찌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하고 계신 말씀은 죄의 용서와 정결케 함에 대한 약속입니다. 너희의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고 눈과 같이 희어지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1장 처음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심하게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 음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분명히 자기들의 주인이신데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품을 멀리 떠났다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껏 많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죄로 인해 얻어맞은 수많은 상처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용서로 부르고 계신 것이지요.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언약 안에는 우리들이 불순종하고 스스로 죄를 좋아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공급의 역사함이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정리하자면 이런 거지요. 은혜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모든 죄와 커다란 악과 더불어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은혜의 공급이 약속되어 있어요. 그리고 이 공급은 무한하고 절대적인 공급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은혜언약 안에 있는 사람에게 라고 할지라도 그 은혜가 힘 있게 역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절대적으로 무한히 약속하시지는 않으셨다는 거지요.
그러면 은혜를 공급을 해 주시기는 하는데 은혜가 역사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그러면 실제로 죄를 이길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도 죄에 대해서 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공급해 주시지 않는가? 공급에 대한 약속이 없는가? 있어요. 그래서 신자가 죄를 도저히 이길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죄를 도저히 이길 수 없다 그래서 결국은 나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자범죄에 빠질 수밖에 없다 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아직 객관적인 어두움과 주관적인 어두움 때문에 성경이 지시한 올바른 자리로 돌아가서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의 공급은 무한정으로 절대적으로 약속되어 있지만 모든 은혜언약 안에 있는 사람에게 약속되어 있지만, 그 은혜가 역사하는 것 힘 있게 역사하는 이것은 조건적입니다. 어떻게 조건적이냐?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죄와 분투하는 삶을 살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죄와 싸우려고 하고 그래서 진실한 성도가 되려고 하고 이렇게 애를 쓴다는 조건하에 은혜가 역사를 해서 모든 죄를 이기게 하는 데 너무나 너무나 큰 죄여서 도저히 일생동안 벗어날 수 없었던 죄에서도 벗어나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하나님께 온전히 회개하고 철저히 삶을 돌이키면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오로지 하면 수없이 긴 세월동안 죄에 깊이 빠져든 세월들이 만들어 낸 죄악 된 삶을 아주 짧은 기간 안에 극복하고 아주 진실하고 성결한 성도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말 할 나위 없이 공급된 은혜가 충분히 역사할 수 있도록 제시된 ‘순종’이라고 하는 조건에 부합할 때 그 때에 나타나는 은혜의 역사하는 힘이 죄의 힘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잖아요? 근데 왜 우리는 쉽게 죄를 이길 수 없습니까? 그게 바로 우리 안에 아직까지도 도처에 내재하고 있는 불순종들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를 크게 만나주시고 , 오셔서 놀랍게 죄에서 건져주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이 놀라운 역사, 우리를 고치시는 성령님의 크고 오묘한 역사는 그런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힘든 것이 아니라 그러한 역사를 받아들일 수 있을만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오로지’하는 것, 오로지 한 마음이 되는 것, 마음의 singleness를 갖는 것 --이것이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 그런 충만한 성령의 은혜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해도 그 많은 기회들을 우리들이 잃어버리고 은혜의 역사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우리 일생을 이렇게 돌아보면 우리는 늘 하나님 믿으며 하나님 사랑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며 늘 그렇게 살아왔잖아요. 그리고 믿음의 형식을 벗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꾸준히 교회에 다녔어요. 근데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마음을 오로지 하면서 정말 쏟아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사로잡혀서 그 은혜의 역사를 내 영혼 속에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주님의 뜻대로 날마다 살려고 했던 때가 얼마나 되는 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정말 몇 번 안 되거든요.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 그런 것들을 일평생 살면서 한 두 번 밖에 경험해 보지 못하고 인생을 끝내는 경우도 있다 이거지요. 흔히 여러분, 첫사랑 첫사랑 하는데 가장 커다란 문제 중의 하나는 처음 은혜를 받을 때처럼 열렬히 하나님을 사모하지 않는다 이것입니다. 갈망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은혜의 공급 공급된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하게 역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조건적으로, 하나님께서 공급된 은혜는 절대적이지만, 공급된 은혜가 우리에게 역사하는 것으로 적용됨에 있어서는 조건이 달려있어요. 그래서 성경이 많은 곳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을 가르치고, 우리에게 이렇게 순종하라고 촉구하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우리에게 분투하며 살라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삶이 본질적으로 영적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은혜의 언약이 또 하나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죄에 대한 용서예요.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은혜언약 안에 있는 모든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되 그들의 죄가 아무리 오랫동안 반복되어 온 죄라고 할지라도 또 크기에 있어서 그들의 죄가 아무리 큰 죄라고 할지라도 은혜 언약 안에는 이 죄에 대한 용서가 약속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거에 지은 모든 죄들, 그리고 현재의 죄를 , 미래에 짓게 될 모든 죄까지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용서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첫째, 용서는 하나님이 구원과 관련해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것-그게 고유한 용서예요.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보면 오늘 우리들이 신자로서 살아가면서 지은 죄 , 지금 짓고 있는 죄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것 자체가 교리적인 모순이지요. 이미 하나님이 믿는 그 순간에 모두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사실 오늘 우리들이 지은 죄를 가지고 나와서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그 기도 자체가 교리적으로 모순이라는 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 우리들이 어제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은혜의 용서가 필요한 죄인들입니다. ’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게 되지요. 그렇게 합시다.
그런데 괜찮아요. 많이 그런 기도를 드려야 합시다. 그럼 아까 이야기 한 교리적인 모순은 어떻게 극복될까요? 용서의 의미가 아까 그것과 다르다 이것입니다. 그건 용서받지 못하면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용서예요. 그것은 한 번 밖에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용서는 뭐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용서예요. 즉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그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뜨려지고 그러면 은혜의 역사가 사라져요.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심각한 단절이 생기게 되면 은혜의 역사가 멈춘다 이거지요. 그렇게 되면 실제적으로 은혜의 공급이 끊어진 것과 같은 상태가 되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은혜를 공급해 주시지 않으면 죄를 이길 수 없는데 은혜의 역사가 끊어지면, 원리적으로 은혜가 공급되었고 역사가 안 되었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 은혜가 역사하지 않으면 우리를 죄로 더불어 싸워서 이기게 할 수 없는데 그러니까 사실상 은혜가 공급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거지요. 그렇게 되면 무엇을 가지고 죄와 더불어 싸우냐 이거지요. 그게 벌써 마음 자체가 죄에 기울어 있고 죄와 하나 되어 있으니까 이길 수 없다 이거지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용서를 빌면, 하나님께서 오늘 ‘용서해주시옵소서’라는 기도의 자판기 버튼을 누르면 ‘그래 용서했다’라는 물건이 툭 튀어나오는 그런 경험은 우리에게 거의 없다 이거지요.
여러분 잘 들으세요. 사죄의 확신--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고 하는 확신 conviction of forgiveness 은 죄가 우리 안에서 우세하게 지배하고 있는 그런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 안에 그런 확신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왜? 그것도 성화의 한 작용이기 때문에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하나님 앞에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빌면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속에 확실하게 인쳐 주시기를 ‘네 죄를 사했다. 내가 너를 용서했다’는 사실을 깊이 인쳐 주셔요. 이 용서라는 개념이 아까 이야기 한 구원에 이르는 용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 하나님과의 평화가 다시 복구되고 이렇게 되었다라고 하는 개념에서의 용서예요. 그 확신이 우리에게 밀려오는 때가 있어요. 근데 그건 언제냐면 용서해달라고 마음을 바쳐서 많이 기도한 후에 옵니다. 그렇지 않고 오는 경우가 있다 백 번 양보해서 혹시 있다 하더라도 그런 용서의 확신은 우리에게 용서받은 바대로 살도록 우리에게 해 주는 힘이 없다 이거지요.
그래서 여러분 경험했을 것입니다. 어떤 죄를 하나님 앞에 막 ~~회개 했을 때 마음속에 확신이 들었다기보다는 해석이 떠올랐어요. 하나님이 우리 죄를 다 용서하셨다. 그리고 우리들이 기도할 때 순간적으로 기도가 너무나 간절하면 그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을 하셨다고 하는 해석을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용서하셨다는 마음의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눈물이 마르기 전에 다시 또 똑같은 범죄를 하는 경우를 발견하게 되지요? 그래서 강력한 양심의 송사를 받게 되죠? 그러니까 실지로 그런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우리의 신앙을 회복하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뭐냐하면 그 죄에서 용서받도록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죄의 세력이 약해지도록, 자기가 어떤 한 가지 죄를 지었지만 그 죄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죄’라고 하는 큰 뿌리가 자기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통적으로 모두 말라서 죄 죽임의 상태가 되어야 한다 이거지요. 이 죄의 세력이 약해지기를 기도하면 용서의 확신은 나중에 저절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언약 안에 있는 백성들에게 무한한 용서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양적으로도 그렇고 질적으로도 그렇고 무한한 용서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용서를 묻는 제자들에게 뭐라고 대답하셨어요? 일흔 번에 일곱 번 씩이라도 용서하라. 만약 하나님이 무한히 용서하시는 성품을 가지 분이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타락한 인간들에게 그렇게 용서의 삶을 살라고 당부하시지도 않았을거다 이거지요.
그러나 여기에도 아주 중요한 조건이 있어요. 그 조건이 뭐냐하면 죄를 용서해주시기는 용서해 주시는 데 자신이 미워하고 혐오하는 죄에 대해서 용서해 주시는 것이지 자기가 사랑하고 여전히 붙들고 있는 죄에 대해서는 용서가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이 용서의 교리를 계속해서 죄 가운데 거하는 데에 사용을 한다 이거지요. 이게 바로 어제 말씀드린 죄가 복음을 교리를 이용해서 사람들의 생각을 속이는 계교예요. 절대로 그렇게 되는 것 아니거든요. 성경도 그렇게 말하지 않고, 우리의 경험들도 그렇게 말하지 않은데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그 죄를 사랑하고 붙들면서도 자신도 마치 이 죄의 피해자 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 말하는 거지요.
똑같이 그렇게 얘기했던 사람이 하와에요. 뭐라고 했어요? 네가 어찌하여 먹었느냐? 여자가 먹어서 나도 먹었습니다. 하와에게 핑계를 대서 하와에게 물었더니 하와가 나도 피해자입니다. 저 뱀이 가만히 있었어도 절대로 안 먹었을 텐데 뱀이 꾀었기 때문에 내가 먹었습니다. 그래서 하와의 책임이 면죄되었나요? 그렇지 않죠. 그러니까 너무나 사단의 세력이 강하고 나는 너무 약하고 죄는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어쩔 수없이 나는 피해자가 되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이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 이거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안된다 이거지요.
그래서 성경에 뭐라고 말하냐면 누구든지 죄에 순종함으로 죄의 종이 된다. 그러니까 죄도 은혜도 순종함으로써 지배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절대로 우리들이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것처럼 순종하지 않으면 절대로 그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시다. 그걸 먼저 알아야지만 자기 죄에 대한 정직한 인식이 주어질 것 아니에요? 그리고 자신이 정말 잘못했다 라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것 아니에요? 근데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눈물을 흘려요. 흘리긴 흘리는데 그 마음 속에 있는 게 뭐냐면 “나도 피해자입니다. 나는 너무나 약하고 죄는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죄를 지으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얘기는 뭐냐하면 곧 하나님을 향한 중대한 도전이며 원망입니다. 왜 나를 이렇게 내버려 두십니까 당신이 보호해 주시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데 왜 이렇게 내버려 두십니까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너무나 복음교리에 대해서 무지한 것이 드러납니다.
그 때에 눈물이 막 흐르는 데 그 눈물의 정체가 뭐냐하면 자기 연민의 눈물입니다. 하나님이 회개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눈물이 뭐냐하면 죄에 대한 분노와 죄의 비참한 결과에 대한 슬픔,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고 나의 죄로 인해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다는 그런 아픔에서 오는 눈물이 우리에게 진정한 용서를 가져다주는 데 그게 아니라 나는 너무 약하고 죄는 너무 강해서 내가 결국은 이렇게 죄를 지으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처량하게 흘리는 그 눈물은 자기 연민의 눈물입니다. 그런 눈물은 감정적으로는 그런 기도가 끝나고 나면 정서적인 배설 -카타르시스적인 - 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절대로 하나님의 신령한 용서를 가져다주는 눈물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시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 이게 무슨 뜻이지요? 하나님이 너희의 죄를 용서하시나 안 하시나 한 번 너희들이 하나님인 나와 더불어 변론을 해 보자. 네가 나 하나님이 너희의 죄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이유를 얘기해보라. 나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를 이해시켜서 그것을 너희들에게 보여주겠다. 그래서 하나님인 내가 어떻게 너희들을 쉽게 용서하고 너희들을 새롭게 살게 하는지 내가 너희들에게 설명해 보이겠다. 이게 변론입니다.
실제로 성경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 앞에 한 번 주님께 선택을 받고 일평생동안 미끄러지지 않고 마음을 오로지하면서 곧을 길을 걸어가다가 산 사람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 없을 정도로 그렇게 완전한 삶을 살다가 가신 분은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에 성경을 읽다가 요한복음 21장을 읽으면서 정말 한 없이 울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그 실패한 베드로를 요한복음 20장까지에서 완전히 실패하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사람을 사도행전 첫 장에서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로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했는데 한 사람이 끝까지 피투성이가 되면서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 그 사람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더라면 얼마나 아름다웠겠어요? 근데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신 특별한 이유를 거기서 발견했습니다. 순간적으로는 감탄할 수 있어요. 아! 그렇구나! 하나님께서는 정결한 사람, 그리고 믿음을 배반하지 않은 사람을 사용하시는 구나 그럴 수 있어요. 그 사람을 볼 때 우리한테 적용이 되겠느냐고요. 적용이.
가수가 노래를 웬만큼 잘해야지 따라도 불러보고 그러지 너무 탁월하게 잘하면 따라 부르지도 못하고 그냥 *^^* 이렇게 쳐다보다가 끝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조수미씨가 잡지에서 그런 인터뷰를 하더라고요. 자기는 매번 노래를 부르기 위해 무대에 오를 때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쓰러트려버릴 결심으로 노래를 한 대요. 나는 여러 번 들었는데도 한 번도 안 쓰러졌는데^^ 근데 어쨌든 그렇게 탁월하게 노래 부르면 따라 부를 수도 없습니다. 감탄하면서 볼 수밖에.
만약 베드로의 삶이 그렇게 결코 넘어지지 않은 사람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 아마 사도행전을 보면서 베드로를 볼 때 동물원의 원숭이 보듯 할 것입니다. 존경은 하지만 우리에게 도저히 적용점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것입니다. 그 사람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좌절했겠어요. 우선 제일 많이 좌절했을 사람들이 사도들이잖아요? 누구는 끝까지 피투성이가 되도록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끌려가시는 십자가 따라가더니 저렇게 대 사도가 되고, 우리는 주방에서 설거지나 하는 구나! 이렇게 생각할 거 아니에요? 제일 큰 소리쳤지만 제일 뚜렷하게 실패한 사람, 다른 제자들은 도망가서 어디 가서 조용히 숨었는데 이 사람은 또 열심히 예수님을 옆에까지 쫓아가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면서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너무나 많이 울었습니다. 너무나 많이 눈물을 흘리고 난 다음에 벅찬 은혜가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나 같은 사람도 희망이 있구나 (*2) 죄인을 한 번에 낙인찍어 버리시는 대신에 죄인을 끝없이 고쳐서 새롭게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낀 거지요. 우리의 인생을 이렇게 돌아봐도 똑같은 사실이 회고되지 않아요? 우리의 인생의 발자취는 수시로 우리 자신이 죄를 택해서 망가지는 길을 걸어왔지만 주님이 수시로 우리를 고쳐서 사용하시며 여기까지 데려온 역사예요. 정말입니다. (*2)
성경을 한 번 보십시오. 베드로뿐만 아니지요. 하나님이 그렇게 믿음을 자랑하시던 욥도 결국은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범하지요. 모든 태어난 이후의 모든 사람의 믿음의 조상이 되게 했던 아브라함도 실패하고 여러 번 범죄 하게 되지 않습니까? 이삭은 그 아버지의 믿음이 없는 실패를 보면서 또 똑같은 실패를 경험하게 되지 않습니까? 야곱은 어떻고 요셉은 어땠습니까? 모든 뛰어난 믿음의 사람들의 발자취를 생각해 보십시오. 구약에서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도 없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도 없지 않습니까? 그도 역시 범죄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성령을 주셔서 세워주신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범죄 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하나님이 이제껏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사용하신 하나님의 사람들이 얼마나 연약한 사람들이었는지 깨닫는다면 아마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풍부한 증거를 하나님이 많이 보여주셨기 때문에 인간과 용서에 대해 변론할 때 하나님은 자신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될 것이며 너희의 죄가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될 것이다’ 그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말 이 죄의 악함, 이 죄의 비참한 결과, 이 죄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고 죽으시면서 까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해 주신 예수님께 대한 말할 수 없는 비열한 배신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이 충분히 아픔으로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는 우리 자신의 완고함에 문제가 있다 이거지요. 그리고 거기에는 죄를 완전히 벗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그 죄에 대한 두려움과 죄에서 떠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그리고 그 죄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는 것이 우리에게 커다란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불러서 이런 용서의 은혜를 베풀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양심의송사와 정죄, 율법의 송사를 벗어나서 주님이 하나님의 은혜언약 안에 있는 백성들에게 놀라운 용서의 약속을 충분히 받아서 누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지난 날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것은 너무 가슴 아픈 일이고 불순종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잃어 버렸던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되어버렸어요.
그럼 우리는 오히려 그렇게 과거에 대한 후회로 세월을 보낼 것이 아니라 정직해져야 합시다. 그래서 주님 앞에 나아가서 우리의죄와 악함을 정직하게 고백하고 용서해 주시도록 그래서 은혜언약 안에 약속된 그 무한한 용서, 그 무한한 놀라운 용서 그것을 하나님 앞에 믿으면서 주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합시다. 그 때 우리에게 큰 중보자가 있으니 그분은 바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 죄에 대해서 모든 형벌의 대가를 치르시고 우리에게 보좌에 이르는 새롭고 산 길을 열어 주시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하나님을 속이는 자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죄를 정직하게 고백하며 그 때에 끊임없는 양심의 송사와 율법의 송사, 양심의 정죄를 받을 때 그 때에 우리들이 굳센 믿음을 가져야 합시다. 그 믿음이 뭐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나의 모든 죄를 그 피로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내가 잠시 죄에 빠지고 불순종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렸지만 이제 다시 은혜언약을 따라서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가 주어질 것임을, 그 용서를 통해서 역사하는 은혜의 힘이 오늘 나를 지배하고 있는 모든 죄와 불의를 이길 것이라고 하는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언제든지 당신 앞에 진심으로 뉘우치며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의 간구를 물리치신 적이 없습니다. 더욱이 여러분들은 은혜언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도 범죄하고 은혜의 길에 미끄러져서 시험의 벼랑에 서 있는 한 사람 한 사람들을 스스로 돌이켜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당신의 품속으로 돌아오게 되길 하나님께서는 손꼽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치고 우리를 때리셨지만 그러나 우리를 싸매고 고쳐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로 인해 많은 고난을 당한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서로 권면하며 돌아올 회개의 날을 꿈꾼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 아닙니까? 우리가 만약 이 큰 용서의 약속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용서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해서 여전히 죄의 지배를 받으며 여전히 죄의 종으로 산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 인생의 남은 날들에 무슨 기쁜 날들이 있겠습니까? 죄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줄까요?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등진 채 살아가면서 느끼는 삶의 평안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인간이 처음 창조된 이후 타락한 그 다음부터 언제나 우리 하나님의 별명은 기다리시는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밤마다 문 열어 놓고 마음 졸이시며
나간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신다오.
하나님의 품을 멀리 떠났다가 어느 날 인생의 깊은 시련을 만나고 제 발로 걸어서 교회에 갔습니다. 수요일이었는데 저녁이었습니다. 풍금소리가 들리는 교회당에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데 잘 몰라서 기도는 안 나왔지만 부인할 수 없이 확 밀려오는 게 뭐냐하면 고향집에 돌아 온 것 같은 편안함.
사랑하는 여러분 밤이 깊지 않습니까? 죄악의 밤이 깊고 외롭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하나님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도 우리가 여전히 의지하며 살 수 있는 그 무엇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주님은 이제껏 주님을 믿으며 살아 온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주신 모든 것들이 주님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물질의 축복을 주시지요. 감사하지요. 그러나 그 물질이 주님을 대신할 수 있을까요? 주님이 우리의 지위를 높여 주시지요. 고맙지요. 그러나 그 지위가 주님을 대신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간절한 소원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세상부귀 안일함과 명성 원치 않으며 즐겨 권하는 길을 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그것이 정말 참된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생각이 죄에 의해서 속임을 당하지 않는 신자의 고백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제일 소중한, 죄를 사랑하고 용서받지 못한 채 죄의 그늘 아래 있는 동안에는 이런 위로와 평안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주님의 발 앞에서 우리의 더러운 모든 죄를 고백하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총밖에 의지할 것이 없다고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비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죄를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용서하고 고치심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대하7:14)
솔로몬의 성전은 이미 아버지 때부터 지으려고 잘 준비된 가운데 건축된 성전이었습니다. 금만 약 120조 원 어치가 들어갔다고 하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성전이었겠습니까? 그렇게 아름다운 성전을 지어서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이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우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죄가 있으면 용서해 주시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더니 주님이 응답을 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여기 나오는 장면입니다.
이 성전을 짓고 하나님께로 받은 큰 축복의 말씀이 바로 용서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성전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많은 기도의 제목들을 토해 놓아요. 성전이 지어지기 전이 이미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여행할 때도 성전이 있었습니다. 성막이라고 부르잖아요? 그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곤고하고 서럽고 아픈 일이 있으면 늘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죄가 있으면 거기에 가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죄의 용서를 받았던 것이지요.
하나님이 솔로몬의 성전을 받으시면서 주신 제일 큰 축복은 바로 거기서 내 백성이 기도하면 내가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 땅을 고칠 것이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되면 마치 하늘이 닫힐 때에 농사짓는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과 비유될 수 있는 고통이 신자들에게 뒤따르게 됩니다. 여기서 죄라고 하는 것은 살아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부지불식간에 짓는 작은 죄들도 포함되지만 그것과 함께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죄 인지도 알면서 짓는 고의적인 죄를 더 많이 의미한다 이거지요. 그렇게 되면 하늘의 문이 닫혀요. 하늘이 문을 닫고 더 이상 비를 내리지 아니하면 잘 자라던 곡식들이 시들기 시작합시다. 그래서 농부가 부지런한 것도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그래서 농부가 계곡아래 가서 물을 퍼서 천수답으로 만들면서 그렇게 물지게를 지고 농사를 지으려고 해도 그게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농사는 하늘이 열려서 적기에 비를 내려주지 않으면 농사는 불가능한 것이지요.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믿고 나서 그래도 이 세상을 능력 있게 살 수 있었던 이유가 뭐냐하면 주님이 사업 잘 되게 해 주셔서 돈도 주시고 자녀들 공부 잘하게 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 모를 때 누릴 수 없었던 하늘 자원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늘의 문을 열고 하늘의 은혜를 공급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받았기 때문에 그 하늘 자원을 공급 받아서 하나님 앞에 정말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지요. 죄를 지으면 딱 닫혀요. 그래서 기도를 해도 하나님이 차갑게 거절을 하시는 것이 느껴져요. 그러니까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실제로 기도할 수가 없지요.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 새 힘을 얻는다는 것을 알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가슴 깊이 들어와서 나를 사로잡아서 불붙듯이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 강물처럼 뜨거운 흘러내리는 그 큰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놀라운 평강 이런 것들을 누릴 수 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하늘자원을 힘입어서 하나님 앞에서 힘 있고 능력 있게 살아가던 성도의 삶이 망가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직접 밭에 지은 농사를 파괴하지 않아도 문이 딱 닫히면 곡식들이 막 타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걸 좀 해결해보려고 애를 쓰지요. 양수기를 동원하고 물도 퍼 오고... 다 해보지만 해결이 안돼요. 그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지 그걸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첫째는 뭐냐하면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보다 더 급한 일이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이제껏 하나님 앞에서 떠나 불순종하고 죄를 짓던 그 길에서 떠나야 되는 것입니다. 떠난다는 의미는 거기 계속 관여하고, 그 죄에 빠졌던 것에서 이유가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더 이상 범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지요. 그걸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기도보다 더 급한 것입니다. 거기에 발을 담그고 주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상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삼손은 하나님이 특별히 택하신 용사였죠. 그러나 후에 마음을 지키지 못해서 들릴라라고 하는 이방 여인을 사랑하게 되지요. 그를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대로 사는 일과 이 여인을 기쁘게 하는 일 사이에 갈등을 하지요. 근데 보십시오. 삼손이 만약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악한 길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첫 번째 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에 이치가 있듯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죄 가운데 빠져 영적인 단절을 경험하고 하나님 앞에서 깊이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침체 속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도 이치가 있어요. 아무렇게나 해서는 안 되고 원리를 따라야 합시다. 제일 먼저 거기를 떠나야 합시다.
여러분들이 어제 말씀을 들으면서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은 것들을 회개했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왜 ? 무엇이 ? 어떤 나의 습관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게 하지 못했나 하고 거기서 돌이켜야 합니다. 떠나지 않으면 예전의 삶이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영적 생활에 있어서 진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간구하고 부르짖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는 단절된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는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 은혜를 가슴에 품고 구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혁하는 것, 이것은 더욱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제일 먼저 이제껏 주님을 마음 아프게 해 드렸던 옳지 않았던 길-- 거기서 떠나야 되요. 일단은 거기에서 떠나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 이야기를 해야 합시다. 우리가 그렇게 떠나지 못할 때 왜 우리에게는 죄에 대한 사랑도 있고, 또 이 죄를 버리고 떠나면 내가 과연 살 수 있을까 라는 두려움도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떠날 때 이제껏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죄에서 떠날 때 죄에 대한 사랑을 이길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마음속에서 깨뜨려 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길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서 주신단 말이지요.
한 번 하나님의 성품을 잘 생각해 보세요. 만약에 하나님이 이제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삶을 후회하고 ‘이제 하나님께 돌아가야 되겠다’ 라고 생각을 하고 그 악한 길에서 결단하고 떠나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힘을 주시지 않는다면 한 번 죄에 빠진 죄인들은 영원히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힘을 주셔요. 반드시 하나님이 힘을 주셔요. 그래서 반복하면 안돼요. 결단을 하고 지금의 삶을 고쳐야 합시다. 구체적으로.
두 번째는 뭐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겸비해 져야 합시다. 떠나는 것이 외적인 행동의 결단이라고 할 것 같으면 겸비해 지는 것은 내적인 마음의 변화예요. 여기서 겸비해 진다는 것은 비천해 진다는 것입니다. 비천해 진다는 것은 마음이 한 없이 낮아져서 자기 자신에 대한 중요성을 잃어버리고, 예전에는 하나님 앞에 내가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그것을 신앙적인 의미에서 주님이 나를 그 피로 구하셔서 이 땅에 살게 하시고 나로 사명을 맡기셨으니까 하나님 앞에 얼마나 중요한가! 내가 주님의 형상을 닮았으니 주님께 내가 얼마나 중요한가! 그런 신앙적인 중요성이 아니고 완고하게 자기중심적이고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자기 사랑은 문제가 안돼요.
조나단 에드워드도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지정해 주신 위치에 있는 자기를 사랑하고 힘쓰고 애쓰는 자신을 사랑할 때 그것은 정당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똑바른 자기 사랑이 아니라 비뚤어진 자기 사랑입니다. 그래서 비뚤어지게 자기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보다 내가 먼저예요. ‘애야 내가 너를 구원해준 여호와 하나님이다 이렇게 살거라.’ ‘싫습니다.’ ‘왜?’ ‘힘드니까요’ ‘이게 내가 너한테 원하는 바이다 나를 이렇게 섬기거라.’ ‘못해요’ ‘왜?’ ‘힘드니까요’ 이런 것들이 모두 비뚤어진 자기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 진실한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모든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합시다.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바라시는 의무가 무엇일까 그리고 내가 그것을 어떻게 행해야 될까 생각하는 것이거든요. 근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구속해 주신 것을 생각합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 생각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유리하던 아람 족속으로서 우리 조상이 이 애굽 땅에 들어와서 작은 가족이 큰 민족을 이루어졌지만 바로의 노예가 되어서 비참한 삶을 살았었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적인 은혜로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우리를 그 애굽에 종살이하는 것에서 건져내시고 이 크고 아름다운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저희를 들여보내셨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나는 중요하지 않고 우리 주님이 훨씬 중요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겸비한 마음은 자기 자신이 정말 하찮은 인간이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복종하고 순종하며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느끼는 것입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해 흘러요.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높은 주의 보좌로부터 겸비한 마음을 가지고 깊이 낮아진 사람들 그 사람들의 심령 속으로 흘러들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정말 겸비해져서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정말 하찮은 인간일 뿐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마음일 때 하나님이 거기에 은혜를 흘려보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한 은혜를 받았을 때에는 특별히 마음이 가난해졌을 때예요.
오늘 아침부터 내가 하라는 대로 해 보세요. 이렇게 수시로 마음에 손을 얹고 하나님 저는 아무 쓸모없는 죄인입니다. 근데 주님이 그 크고 놀라운 십자가에 사랑으로 저를 구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이제는 제가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 주시옵소서 제게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저를 버리지 마시옵소서 간절히 20초 밖에 안 걸렸어요. 간절히.... 이 겸비한 마음을 이따금씩 사경회때 갖는 것이 아니라 늘 그렇게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렇게 기도하기 전에 마음이 아주 겸비해져야 되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이런 원리는 똑같아요.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실 때 우린 은혜를 받잖아요. 근데 하나님이 잘 산사람에게도 은혜를 주시지 않는데 죄 가운데 허우적대며 산 사람에게 은혜를 주셔요. 차이가 뭐냐하면 잘 살고 마음이 깊이 겸비해지면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스러우시겠어요? 근데 사느라고는 살았는데 마음이 교만합시다. 겸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목마름이 없습니다. 겸비한 사람들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에 목말라요. 그러면 그 겸비한 사람이 누구이든지간에 남자이든 여자이든 초등학교학생이든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요. 은혜를 주셔요. 정말 놀라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을 때 성령님이 오시잖아요? 성령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놀랍게 맞이하실 때 그런 일들이 굉장히 드물게 일어나잖아요? 성령님이 오셔서 강하게 역사하실 때 그 때, 지루할 정도로 우리의 발목을 사로잡았던 이 죄악의 쇠사슬들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근데 그런 강력한 은혜를 가지고 성령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주님이 우리에게 오시도록 목마르게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오로지하는 것입니다. 그게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역사가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총각 집사 때 주일학교 아이들도 가르치고 설교도 하고 그랬거든요. 보면 정말 놀라와요. 어느 날 하루는 --제가 다니던 교회가 그렇게 은혜로운 교회가 아니었어요-- 시험이 많고 문제가 있는 교회였는데 아이들이 여름에 지하실에서 눅눅하고 작은 지하실인데 교회당에서 기도를 하면 동네 사람들이 하도 욕을 하니까 할 수 없이 아이들을 세 번에 나누어 지하 기도실에 데리고 가서 간절히 기도를 합시다. 근데 초등1학년 2학년 심지어는 7살 이런 아이들이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를 받고 회심합시다. 성경학교 한 번하면 회심 못하는 아이들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그렇게 회심을 했습니다. 왜 그러냐면 콩알만 한 애들이 게다가 신학도 안한 집사가 얼마나 설교를 잘하겠어요? 주님이 너희를 사랑하시고 너희를 위해 죽으셨으니까 이제 너희도 예수님 말 잘 듣는 사람들이 되어야 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얼마나 아프셨겠니? 그렇게 신파조로 설교를 하는데 눈물을 펑펑 흘려요 그리고 그 고사리 같은 손을 가슴에 모으고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쬐끄만 아이들이 예수님이 날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 날 용서해달라고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은혜가 뭔지 이 콩알만한 애들이 뭘 알아요? 근데도 은혜를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러니까 성령님이 오셔서--성령님이 하시지 않으면 그럴 수 없어요-- 하나도 예외 없이 애들이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지하에서 와글와글 소리가 나니까 완고한 집사님 한 분이 문을 탁 여는 데 성령님이 확 여니까 성령님이 오신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냥 눈물을 쏟아요. 그러면서 가슴을 치면서 골목을 가면서 ‘우리는 애들만도 못해, 우리는 애들만도 못해 우리가 애들을 가르칠 게 아니라 얘네들한테 배워야 돼.’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왜 집으로 가? 기도를 하지^^ 얼굴에 곰보가 있는 집사님이셨는데…
보세요. 오래 교회 다니고 섬기고 그런 나이 많은 어른들이 못 받은 은혜를... 어른들은 냉랭합시다. 한 6년 다녔는데 교회가 한 번도 그렇게 기도하는 것을 못 보았어요. 정말 얼음장 같아요.아이들은 은혜를 받아요. 아이들이 은혜를 받으니까 성경을 읽어요. 하루에 100장씩 읽어요. 욕을 입에 달고 살던 애가 욕을 버려요.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요.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시지 않고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찾아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겸비해서 ‘하나님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인간입니다. 불순종하고 게을렀던 나를 용서해주시고 다시 한 번 내게 은혜를 주셔서 나를 고쳐서 나를 사용해 주시옵소서’ 수시로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합시다.
세 번째는 뭐냐하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야말로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는 삶을 살면서 우리 안에 생겨난 마음의 거짓된 틀들, 그리고 경향성 이런 것들을 구체적으로 파괴하는 행위가 바로 기도예요. 그러니까 아무리 눈물을 흘려도 실제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부르면서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고 이제는 내가 다시는 어둠 속에서 살지 않도록 하나님이 나를 붙들 것이다. 이 확신은 하나님 앞에 실제로 매달려서 기도할 때 그 때에 이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악한 길에서 떠나며 마음이 정말 겸비해져서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 없이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이 저를 버리실지라도 내가 주님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결사적인 마음이 될 때 하나님이 기도의 문을 열어주셔요.
조금 기도의 문이 열릴 때 찬스예요. 엘리베이터 문이 조금 열릴 때 발을 먼저 집어넣잖아요. 어쨌든지 밀면 들어간다 이것입니다. 기도의 문이 열릴 때 기도의 발을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를 도와 주십시오’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소서
하나님 앞에 기도합시다. 기도하는 과정이 쉽지 않죠. 오랫동안 불순종하고 심지어는 커다란 죄로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으니까 기도가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저도 평양 대 부흥을 연구한 적이 있었는데 교수님 말씀을 들으면서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어요. 1500명이 모였는데 900명이 돌아갔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시험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그 때에 집회에 내려오는 것은 장난이 아니거든요. 기록에 보면 짚세기를 두 세 개씩 말아서 지고, 자기 먹을 양식을 가지고 먼 데서부터 걸어오는 사람들입니다. 그 당시 예수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1500명이 모였겠어요? 굉장한 거지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대체적으로 사모하는 사람들을 찾지 아니하시고, 전심으로 사모하는 사람을 찾으셔요. 그러니까 마지막 날이 되어서 털어내시는 것입니다. 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기록에는 안 나와 있지만 왜 600명이 안 돌아갔는지 너무 분명합시다. 우리가 어떻게 은혜 없이 돌아갈 수 있는가!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어떤 수련회가 있었는데 다 끝나서 차타고 가고, 남아 있었던 사람들이 기도하는 데 성령이 임하시는 이야기...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사람들을 다 가려내시고, 그렇게 기도하기 힘든 과정을 통해서 뭘 생각해야 하냐면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고 쳐다보지 않는 그런 느낌을 받을 때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자기 아들까지 주셔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하나님이 우리가 주님의 품을 멀리 떠나서 제 멋대로 살 때 주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면 그 아픈 게 아픈 것이 아니지요.
거기에서 진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어떤 믿음이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결코 버리실 수가 없고 나는 공로 없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을 보고 하나님이 나를 용납해주실 것이다 내 기도를 들어 줄 것이다 라는 믿음을 가져야 되요. 그래서 마음을 지켜야 되요. 하나님 나는 믿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이 뭐냐하면 기도할 때 기도의 제목입니다. 우리들이 죄 가운데 들어가서 깊이 고통을 받을 때에는 우리들의 최우선 관심사가 무엇이냐 하면 이 고통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충분히 변화되지도 않은 그 인간이 마음의 고통이 물러가면 어떻게 하겠어요? 다시 죄로 날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그러지 말아야지 그러면 안 돼’ 이런 결심이 얼마나 힘이 없는지 경험하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것만 가지고는 안 돼요. 신자가 죄로 물든 어두움을 이기고 빛 가운데 살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두려움 공포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뭐가 필요하냐면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합시다. 그 때 그 사랑이 내게 만족이 되어서 세상사람 날 부러워하지 않아도 나도 세상 사람이 부럽지 않은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진실한 성화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시다.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양심의 괴로움을 이기게 해달라고 이 마음의 고통을 이기게 해 달라고 그렇게 기도하지 말고 오히려 이렇게 기도합시다. ‘하나님 제가 지금 제가 지은 죄로 인해 마음이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데 제가 이 고통을 더 많이 느낌으로서 제가 지은 이 죄로 인해 주님이 아파하셨던 주님의 아픈 마음을 느낄 수 있다면, 오히려 저를 더 고통스럽게 해 주십시오.’ 역설적인 기도지요. 오히려 그 기도 속에서 하나님 앞에 정말 구해야 할 것은 고통이 물러가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되요.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처럼 내가 주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다시 그 음성을 들려주시고 다시 내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래서 내가 이 곤고한 시련 가운데 고난 중에서라도 제가 주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 때까지 내가 물러설 수 없습니다. 도와주시옵소서. 수시로 하나님 앞에 주님의 은혜를 구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용서해 주시겠다고 주님이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구원해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실 때부터 우리가 불순종하고 시시때때로 죄에 빠질 것을 모르셨겠어요? 오죽했으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을 주실 때 지금은 나를 사랑하고 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 같지만 가나안에 들어가고 평안할 때가 되면 저들이 타락한다. 그 때에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돌아와야 되는지도 이미 벌써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충분히 자기의 백성들을 죄 가운데 있는 백성들을 용서해 주시고 새 삶을 살게 해 주시는 은혜 언약 안에서 충분히 준비하셨습니다.
근데 뭐냐하면 죄를 짓고 괴로워서 신음하면서 고통하긴 하지만 그 악한 길에서 떠나는 사람들이 너무 소수예요. 그리고 그 악한 길에서 떠나서 하나님 앞에서 정말 어린 아이와 같이 비천하게 겸비해 지는 마음을 갖는 그런 겸손의 사람들이 너무나 소수예요. 더욱이 끈질기게 주님의 약속을 의지하며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도록 간절히 회개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소수예요. 고통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소수예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죄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해서 모든 용서를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용서를 경험하는 사람은 그렇게 소수인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음 깊은 곳에서 이렇게 주님의 얼굴을 구하며 다시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그래서 이전에는 하나님을 등지고 죄 가운데 살았지만 이제는 죄를 떠나서 빛 가운데 살면서 주님을 의지하겠노라고 간절히 매달릴 때 그 때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우리에게 용서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어둠가운데 있었지만 이제는 빛 가운데 살면서 어둠 가운데 있으면서 잃어버렸던 하나님을 섬길 기회를 다시 한 번 찾고, 이제는 정말 주님과 동행하면서 살게 될 때에 우리가 죄 가운데서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고통하고 방황했던 날들은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죄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정말 우리의 머리가 하얗게 희도록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는 그 놀라운 구원의 은총을 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4. 용서받은 자의 큰 의무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요8:11)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저희들을 이 수련회로 부르시고 저희들을 만나 주시려고 저희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마지막 시간입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도 말씀을 통해 저희를 찾아오시고 영상을 통해 이 말씀을 듣는 유아부와 사랑부 자모들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셔서 이 마지막 시간에 저희가 큰 은혜를 받도록 우리 모두에게 복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이 은혜 언약 안에서 우리에게 그 어떤 큰 죄라도 용서받을 수 있도록 준비해 놓으셨지요. 그렇게 하나님이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놓으셨기 때문에 성경에 나와 있는 많은 인물들과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이르기까지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용서의 은총을 입으면서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해 오고 있는 것이에요. 실제로 이 세상에는 위대하다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로서 하나님이 한 순간이라도 붙들어주지 않으시면 아무 희망이 없는 존재들이에요.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하나님은 당신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기를 원하셨어요. 죄가 들어오고 나서 사람들의 마음은 많이 강퍅해지고 그래서 하나님을 도무지 의지하지 않죠. 우리 안에 있는 죄는 우리로 하나님을 도무지 의지하지 않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신자의 마음이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신자의 마음이 굳어지고 굳어지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그 심령이 상하고 깨뜨려져서 죄와 자기 의에 대한 사랑에서 깨뜨려지게 되면 하나님을 올곧게 의지하게 됩니다. 그 때의 마음은 자기가 얼마나 부족하고 아무것도 아닌 인간인가 하는 것임을 깨달아요. 그래서 정말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살 수 없는 사실을 아주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할 수 없이 신비한 방법으로 신자들이 지은 죄를 사용하셔서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가운데로 부르시는 거예요. 이게 복음의 깊은 비밀이에요.
신자가 그 죄를 계속 붙들고 그 죄 가운데서 떠나지 않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그 죄가 계속 그 사람의 영혼을 파괴해요. 그래서 계속 거칠게 반항하고 불순종하며 살게 만들어요. 죄 안에는 맹렬함과 광기가 있어요. 미친 것처럼 사는 거예요. 계속해서. 그러니까 그 죄는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든지간에 긍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없잖아요?
근데 일단 오늘 아침 말씀에서 들은 것처럼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죄인이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범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않은 길을 택했다 라는 사실을 깨닫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면서 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견~~~디기 힘든 고통도 있잖아요. 그 때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그 악에서 떠나요.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비천하리만치 낮아져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용서의 은혜를 구하며 주님의 얼굴을 찾아요. 그렇게 되면 한 번에 우리안의 모든 죄가 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잘못했던 죄 때문에 가슴이 아프도록 깊이 회개하고, 눈물을 흘렸는데도 눈물을 씻고 걸어 나가면 다시 죄에 대한 사랑이 생겨나요. 그리고 우리가 게으르게 살고 나태하게 살아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회개했는데 눈물을 씻고 나서 다시 쉽게 게으르고 나태한 삶으로 돌아가려고 해요.
그 때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요. 결국은 우리가 그 모든 악과 더러움에서 떠나요. 그리고 하나님은 어둠의 깊은 터널에서 결국 우리를 이끌어내셔요. 그래서 우리를 찬란하게 밝은 주님과의 사귐이 있는 빛 가운데로 우리를 불러내셔요. 그러면 감사하게 되지요. 그런데도 내가 이렇게 놀라운 용서를 받았으니 이제는 이 죄가 문제가 안 돼. 용서를 받았으니까. 그렇지만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지은 것은 잊어버릴 수가 없어요. 한 참 기억나요. 몇 십년이 흘러도 기억이 안 날수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되냐면 그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겸손해 지는 거예요.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 때에는 그 죄가 나쁜 거였는데 용서를 받고 다시 빛 가운데 살게 되면 옛날에 지은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이 많이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셔도 내가 얼마나 원래 더러운 죄인인가 하는 것인지 깨닫게 되고 나 스스로는 아무 희망이 없는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달아요. 그래서 큰 죄에서 용서받은 사람들이 더 신앙이 뜨겁고 열렬해요. 왜?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이고 자기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가 하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에요. 너무나 뜨거운 확신이 있기 때문에 신앙이 ??적이죠.
어제 박영규 목사님이 김익두 목사님 얘기 하는 데 깡패였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깊은 용서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니까 인간이 누구인지 원래 잘 깨닫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것은, 내가 죄를 짓고 미끄러진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게으르고 나태하게산 것은 정말 잘못된 것이지만 용서받고 다시 은혜의 빛 가운데 살기만 하면 오히려 과거에 여러분들이 지었던 죄 때문에 하나님께 더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거예요. 어떻게?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셔요. 교만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가 없어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자기를 신뢰하지 않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제 끝이 없던 죄에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을 확실하게 믿고, 다시 이 영혼의 잔인하리만치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서 하나님의 찬란한 빛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다시 살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보는 거지요. 그게 오늘 여기에 답이 나오고 있어요. 간음한 여자가 현장에서 잡혔으니까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서 죽이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율법대로 그렇게 하라고 하셨으면 로마의 현행법에 의해 살인범이 되요. 그리고 만약 내버려둬라 그러면 모세의 율법을 어긴 것이 되요. 예수님께서는 그사이를 교묘하게 피해가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두 가지를 깨닫게 해 주고 싶으셨어요.
먼저 지금은 다른 사람의 죄를 보고 분노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에게 자신 안에 있는 큰 죄를 보게 해 주고 싶으셨어요. 두 번째는 하나님은 아무리 큰 죄를 진 죄인이라도 용서해주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지 파멸되기를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에요. 사람들이 다 돌아가고 여자만 남았어요. 사람들이 자기에게 돌을 던질 줄 알았는데 아무도 못 던지고 모두 돌아가고, 예수님 한 분만 남았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너에게 돌을 못 던진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들도 죄인이니까. 그러나 나는 너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다. 왜?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도 너를 용서한다 그러면서 다른 얘기 아~~무것도 안 하셨어요. 오직 하나만 말씀하셨어요. 나도 너를 용서하는 데 돌아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용서해 주었으니 이제 너는 나만 따라 다녀라. 내가 너 용서했으니 이제 너는 전도하러 다녀라. 내가 용서해 주었으니 다 팔아서 바쳐라 그러시지 않으셨어요.
용서 받은 사람의 가장 큰 의무는 무엇이냐 하면 용서받은 죄를 반복하지 않는 거예요. 그것이 용서 받은 사람의 가장 중요한 의무예요. 우리가 누구예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에요. 이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게 하셨어요. 그래서 그 분이 십자가를 지고 그 나무 위에서 당하시는 그 고통의 깊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인간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피 흘리며 기도하시던 그 분의 고뇌를 보면, 우리 인간의 죄가 얼마나 크고 얼마나 무거운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하나님과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는 그 분이 왜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해야 했어요?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흠 없는 그 분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셨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그 모든 죄를 짊어진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아들이아니라 죄인으로 보고 공의로운 심판으로 하나님이 정죄하셨어요. 큰 심판을 내리셨어요. 이게 십자가의 고난이에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앞에 이제는 이 세상의 길과 가치를 다 버리고 이제는 내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그렇게 고백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시는 모든 죄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신 거예요. 그들이 의롭고 훌륭하기 때문에 용서해 주신 것이 아니라 자기의 흠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죄인 사이에서 흘려주신 보혈 때문에 그 보혈을 보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거지요. 그렇게 용서해 주셨을 때 하나님의 제일 큰 바람은 뭐냐면 다시는 가서 죄를 짓지 않는 거예요. 예전의 삶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주님을 극단적으로 대적하며 산 인생이었기 때문에 이제는 깊이 회개해서 세상의 길과 가치를 버렸으니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순종하며, 주님을 온전히 어린아이처럼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지금도 그 동안 하나님이 많은 은혜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하나님보다 죄를 더 사랑하고, 그 죄도 한 번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계속 그 죄에 빠지고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할 수 없이 탁월한 은사들, 그리고 주님이 주신 은혜와 사명들 그 계획에 따라 살지 않고 게으름과 나태함 속에서 막 살아요. 그리고 그것이 습관적으로 계속 반복이 되요. 하나님이 너무 슬퍼하시는 거지요. 은혜를 보내 주셔도 그 은혜가 우리 안에 거할 수가 없어요. 벌거벗은 민둥산에 메아리가 살 수 없듯이 그렇게 불순종하며 지속적으로 태만하게 특정한 죄에 빠져서 사는 우리 안에 오셔서 성령님이 편안하게 계실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령님이 은혜를 보내 주셔도 자꾸 소멸돼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그렇게 살아 왔는데 그 죄를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고백을 해야 해요. 그랬더니 요한 사도가 말했듯이 우리가 범죄 하였을 때는 우리에게 한 대제사장이 있으니 그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고, 용서의 은혜를 경험했어요. 그러면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되겠어요? 해야 할 일이 많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이 마음아파 하셨다고 믿어지게 된 그 죄를 다시 범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어요. 다시 어둠을 뿌리치고 빛 가운데서 살 수 있어요. 잔인하리만치 길게 느껴졌던 영혼의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지날 수 있어요. 그래야 하나님 앞에 다시 사랑을 받고 그래야 살 수 있어요.
우리 인생의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어요?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아침 안개와 같은 거예요. 부와 지위 학식과 재능 모든 것들은 이 세상에서만 빛이 나는 것들이에요. 그러나 사랑은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 인생에서 제일 큰 가치는 주님을 사랑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그 주님께 많은 사랑을 받는 거예요. 그러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요. 우리 각자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다르고 재능의 크기가 틀려요. 그리고 관심 있는 분야도 틀려요. 세워주신 자리도 틀리고 사회적인 위치도 같지 않아요.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주님이 우리를 어디에 세워 두시든지 우리의 인생의 가치는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누리고 이 세상에서 이름을 내는 것이 인생의 가치가 아니에요. 주님을 많이 사랑하고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에 세워 주시든지 거기서 주님을 섬길 수 있다면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 인생이에요? 그러면서 우리는 점점 늙어가겠지요.
인생의 황혼이 깃들어서 이 땅의 수고가 끝날 때에
주님을 섬기다 평안히 가리라 사랑의 주 내 주님께
비록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많은 재물 없고 유명하지 않고 높은 지위 없어도 주께서 너는 이제 이 세상의 수고를 모두 끝내고 이제는 나와 함께 영원히 살자 그렇게 부르실 때에 아무 두려움이 없이, 주님을 만날 아무 두려움이 없이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면 성공한 인생이에요. 물론 울기도 했지요. 그리고 사랑도 했고 범죄도 했고 미끄러지기도 했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린 때도 있고 주님이 은혜를 주셔서 우리를 세우신 사명의 자리에서 미끄러진 때도 있었지요. 그 때 만약에 그때까지 여전히 우리가 죄 가운데 있고 용서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주님을 기쁨가운데 뵈올 수 있겠어요? 그렇죠?
그래서 육체를 찢으시고 피를 흘려주신 그 예수님의 구속의 공로로 우리들이 쓰러지고 넘어졌지만 하나님의 큰 용서의 은총을 경험하고 남은 인생의 날들을 주님을 섬기다가 왔습니다. 이렇게 불러주실 때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어요? 얼마나!! 그래서 착해야 돼요. 주님이 나를 위해 흘려주신 놀라운 눈물과 피를 기억하고 이제 다시는 동일한 일로 주님의 가슴에 못을 박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돼요. 그러면 나쁜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이 시간에 우리 기도할 때는 하나님 이제는 내가 어두움을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다시 동일한 실패와 죄악, 미끄러짐으로 주님의 마음에 못 박지 않도록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 저희들을 도와 주시옵소서 새롭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살기를 원하오니 주님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 같이 오늘 말씀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겠습니다.
죄인을 고치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