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엘로 올라가자
(2014년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설교기간|2014년 1월 13일 - 17일
편집내용|녹취원본
벧엘로 올라가자 1 (2014.1.1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출 력 일|2014년 1월 25일
목 차
벧엘로 올라가자 2 (2014.1.14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벧엘로 올라가자 3 (2014.1.1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벧엘로 올라가자 4 (2014.1.16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1. 다시 벧엘로 부르심(창 35:1) 2014.1.13 새해말씀사경회(저녁) 1
2.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리라(창 35:2-3) 2014.1.14 새해말씀사경회(저녁) 16
3. 벧엘로 올라가는 신앙(창 35:2-3) 2014.1.15 새해말씀사경회(저녁) 27
4. 영적 부흥을 위한 조짐(창 35:4-5) 2014.1.16 새해말씀사경회(저녁) 39
5.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창 35:6-13) 2014.1.17 새해말씀사경회(저녁) 52
벧엘로 올라가자 1
벧엘로 올라가자 1 (2014.1.1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벧엘로 올라가자 2 (2014.1.14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벧엘로 올라가자 3 (2014.1.1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벧엘로 올라가자 4 (2014.1.16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벧엘로 올라가자 5 (2014. 1.17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벧엘로 올라가자 2014. 1. 13 (월) 새해말씀사경회(첫째날 저녁)
< 다시 벧엘로 부르심 >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창 35:1)
I. 본문의 배경
- 출생을 다툰 쌍둥이(25:26-28)
- 팥죽과 장자의 명분(25:31)
- 아버지를 속인 축복(27:23)
- 밧단아람행과 벧엘의 경험(28)
II.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
A. 세 가지 조건과 헌신약속(29)
- "지키심, 양식, 입을 옷, 귀환"
- "내 하나님, 하나님의 전, 십일조"
- 라반의 집에서 하나님 경험: 20년
B. 귀한할 때 성숙해진 신앙
1. 주님 명령 기억함: 세겜에 머묾
2. 세겜에서 단을 쌓음
3. "엘엘로헤이스라엘"로 고백함
III. 다시 벧엘로 부르심
A. 디나의 강간사건
- 열한아들+외동딸(레아의 소생)
- 히위 족속 하몰의 아들 주장 세겜
- 세겜 백성을 살육해서 위기를 맞음
- 족장으로서의 권위를 잃은 야곱
- 사면 초가에서 헤쳐나갈 길이 없음
B. 다시 벧엘로 부르심
- "에서의 낯을 피해 도망하던 때"
-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 신적 갈망도, 믿음도 없던 때였음
- 불안과 초조, 두려움으로 가득참
- 일방적인 하나님의 찾아오신 은혜
- 다시 벧엘로 부르심
IV. 적용과 결론
- "제단을 쌓으라": 주님과 대면함
- 벧엘로 올라가라: 결단을 요구함
- "일어나": 침체로부터 회복 결단
- "거기 거주하며": 하나님과 동행
- "너는 너 앞에 서라"
벧엘로 올라가자 2014. 1. 14 (화) 새해말씀사경회(둘째날 저녁)
<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리라 >
“야곱이 이에 자기 집과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창 35:2-3)
I. 본문해설
- 벼랑 끝에서 들린 하나님의 음성
- 영적으로 각성한 야곱의 판단
- 하나님의 마음을 갖게 하심
II. 한 사람 야곱을 깨우심
A. 영적으로 각성시키심
- 감당할 수 없는 위기에 처함
- "벧엘로 올라가 제단을 쌓으라"
- 망가진 것에 익숙해지는 인간
- 각성: 하나님 심정을 전수받음
- 차가운 맘에 사랑없다(출32, 롬9)
- 하나님께 냉담, 세상에 뜨거움
B. 영적 귄위를 회복케 하심
1. 족장으로서의 권위를 잃음
2. 각성으로 영적 권위를 회복함
- "자기 집 사람들과 모든 자에게"
- 삶의 개혁과 종교적 헌신의 요구
- 권위를 우습게 앎+신뢰를 잃음
- 섬기게 주신 권위: 주장 아닌 모범
III. 우리를 깨우시는 하나님
- 하나님이 쓰시려고 택하신 사람
- 한 사람 만나주셔, 다수를 깨우심
- 당신 잠자는 동안 함께 잠든 영혼
IV. 적용과 결론
- 벧엘로 올라가자
- 하나님 앞에 서자
벧엘로 올라가자 2014. 1. 15 (수) 새해말씀사경회(셋째날 저녁)
< 벧엘로 올라가는 신앙 >
“야곱이 이에 자기 집과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창 35:2-3)
I. 본문해설
- 벧엘로 올라가기로 결단한 야곱
- 하나님 앞에 설 것을 명하셨으나
- 각성된 마음이 자신의 삶을 판단
- 영적 변화: 삶에 대한 진지함, 반성
II. 벧엘로 가는 자의 결단
- 야곱이 하나님과 대면하러 감
- 이미 각성시키신 하나님을 만났음
- 그것은 시작: 경외회복+ 살의개혁
A. 이방신상을 버림
- "세겜의 우상들의 집에서 취해 낸"
(Jornathan Targum): 평화, 번영
-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것을 버림
- HB: "그 이상의 신상들을 치워라"
- 오랜 문화 교류로 인해 종교 영향
- 침체와 타락: 사랑의 질서의 와해
-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감: 죄 끊음
B. 자신을 정결케 함
- "hittaharu" 불결로부터의 정결
a.이교(레11:32), b.도덕(행13:27),
c.의식(왕하5:10)⇒하나님께 나감
- 영적 잠듦 속에서 불결은 누룩처럼
- 정결케 되는 길: 회개, 사랑의 회귀
C. 의복을 바꿔입음
- 먼 길 여행에 적합한 의복 갈아입음
- 의복: 성도의 행실(계3:18,6:15)
- 그릇된 사랑: 불신행실, 열매맺음
- 삶의 개혁 결단하는 자와 함께하심
III. 적용과 결론
- 하나님과 함께함이 승리다
- 벧엘로 가는 자답게 용기를 보이라
벧엘로 올라가자 2014. 1. 16 (목) 새해말씀사경회(넷째날 저녁)
< 영적부흥을 위한 조짐 >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 나무 아래에 묻고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창 35:4-5)
I. 본문해설
- 영적각성: 삶을 객관적으로 직시
- 야곱의 상실한 영적권위가 회복됨
- "권위"와 "권위주의"의 차이점
- 각성된 한 사람으로 시작되는 부흥
- 완벽한 자 아닌, 돌이킨 자를 쓰심
II. 영적 부흥과 변화의 조짐
A. 이방신상들을 제거함
-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
- "자기 손에 있는": 처분 권한 있는
- 여호와 신앙에 대한 각성이 전달됨
- 확실한 증거: 하나님 인해 행복함
- 행복 이면을 보게 됨: 두려움+사랑
- 신앙의 화두는 사랑⇒말씀을 통해
B. 단장품들을 버림
-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 단장품을 제거함: 하나님만 앙망
- 아론의 우상 때에 모세에 말씀하심
- "너희 장신구를 떼내라"(출33:5)
- 장신구: 세상 향한 사랑의 제유법
- "머리 꾸미고 금차고 아름다운 옷 입는 외모로 말고“(벧전 3:3)
- "마음의 숨은 사랑 "가꿈": 온유와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
- 세상 관심에 잊힌 Imago dei를 봄
C. 상수리 나무 아래 묻음
- "묻음": '죽음과 잊음'을 의미함
- "상수리나무"아래:
a. 하나님의 나타나심(창18:1)
b. 유모 드보라를 장사함(35:8)
c. Js율법기록, 돌 세움(수24:26)
- 경배위한 최고의 예물: 세상사랑
- 유일한 기쁨의 원천, 하나님이심
III. 적용과 결론
- 두려운 것: 실패 아님, 거기 익숙함
- 영적자극에서 깊은 각성으로 나감
- 하나님 만나고자 하는 갈망 있는가
벧엘로 올라가자 2014. 1. 17(금) 새해말씀사경회(다섯째날 저녁)
<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창 35:6-13)
I. 본문해설
- 벧엘에 도착한 야곱의 식구들
- 그가 벧엘을 "엘벧엘"로 부름
-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의 죽음
- 그 가난한 마음을 더욱 낮추심
II. 다시 나타나신 하나님
-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9)
- 다시 나타나 복을 주신 하나님
A. 이름을 기억하게 하심
-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 얍복강에서 징계로 위골(33:25)
- 통곡 눈물 회개로 개명(호12:3-4)
- 최소한 10년 넘는 세월이 흐른 때임
- 의존, 회개로써 주님이 감동하심
- 당신의 이름은 성도, 언약의 백성
- 존귀한 하나님 자녀, 빛으로 살자
B. 전능하신 하나님
-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11)
- "el shadday": 파괴, 지존, 충족
- 야곱의 고난: 하나님 전능함 불신
- 장자 명분, 속임 축복, 세겜 생활
- 신앙의 핵심: 하나님 사랑+의존
- 이것이 삶에서 순종으로 나타남
- "하나님이 도와주셔도 안돼요?"
- 시험: 감당할 힘-피할 길(고전10)
- 인도: 일을 바꾸심+우리를 바꾸심
-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라
III. 다시 복 주시는 하나님
A. 큰 민족을 이루리라
-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나옴
- "땅의 티끌같이‥퍼져"(28:4)
- 세겜에서 변심⇒변하지 않은 언약
- 야곱과의 언약을 반복하신 하나님
- 잠시 멈추기도 하시나 포기 않으심
- "왕들 네 허리에서 나오리"(11하)
B. 약속의 땅을 주리라
- "땅을 너와 자손에 주리"(28:13)
- 세겜서 성공 번영했으나 나그네임
- 사면이 가나안 족속에 둘러싸인 삶
- 이 세상 지나는 나그네 같은 인생길
-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 땅에 임함
- 그 약속을 붙들고 삶: 최후의 승리
- 유업의 땅 정복하며 사는 성도가 됨
IV.적용과 결론
-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을 의지하라
-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 하나님(13)
- 남겨진 자의 의무: 헌신의 삶(14)
- 하나님 위한 삶 안에 자기 행복 있음
벧엘로 올라가자 1
벧엘로 올라가자 1 (2014.1.1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벧엘로 올라가자 2 (2014.1.14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벧엘로 올라가자 3 (2014.1.1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벧엘로 올라가자 4 (2014.1.16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벧엘로 올라가자 5 (2014. 1.17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벧엘로 올라가자 1
벧엘로 올라가자 1 (2014.1.1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벧엘로 올라가자 2 (2014.1.14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벧엘로 올라가자 3 (2014.1.1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벧엘로 올라가자 4 (2014.1.16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벧엘로 올라가자 5 (2014. 1.17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다시 벧엘로 부르심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창 35:1)
녹취자 : 조원정
Ⅰ. 본문 배경
아마 성경에 인물 중 야곱처럼 흥미로운 인물은 없을 것입니다. 야곱의 집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실질적인 이스라엘의 시조로 부름을 받고, 그 후에 이삭, 야곱, 요셉에 이르는 4대를 가리켜서 우리들은 족장시대라고 말합니다. 족장들은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특권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의 모든 권한을 함께 받아서 하나님의 권위로서 가족들을 다스리기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복을 빌거나 앞으로 이루어질 일들에 관해 예언하기도 하였습니다.
족장들 중에 야곱은 가장 독특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야곱을 가리켜서 복음을 보여준 족장이라고도 말합니다. 그 얘기는 야곱에게는 결코 좋은 얘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자격이 없는 사람을 깎고 다듬고 빚어서 구약의 족장의 위대한 반열로 세우신 하나님의 복음의 은혜를 보여준 사람이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이삭이 야곱을 낳은 것은 리브가라는 여자를 통해서입니다. 나이 40에 리브가와 결혼을 했고 야곱을 출생하게 됩니다. 놀랍게도 아내가 쌍둥이를 잉태했습니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이 아이들은 서로 다투기 시작했고 나올 때에도 형보다 먼저 나오겠다고 형의 발꿈치를 잡았다고 해서 야곱이라는 이름이 붙은 사람입니다. 일평생 이 야곱에게는 자신이 장자가 아니라는 콤플렉스가 따라 다녔습니다.
창세기 25장에서는 중요한 사건 하나가 나오는데 들에 나갔던 형 에서가 배가 고픈 가운데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야곱은 팥죽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붉은 것을 내게 주어서 먹게 해 달라고 했을 때 오늘 날 당신이 장자의 명분을 나에게 넘겨주면 이 팥죽을 주리라고 제안을 했습니다. 장자의 명분이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한 의식이 없던 어리석은 에서는 배가 고파 죽겠는데 그까짓 장자의 명분이 무엇을 하겠냐고 바꾸자며 팥죽을 얻어먹게 됩니다.
상징적인 이 사건은 두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습니다. 결국은 어머니 리브가의 편애로 말미암아 야곱은 어머니에게 사랑을 받고 아버지의 편애로 말미암아 에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형식적인 권한은 남자에게 있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여자에게 있었습니다. 엄마 리브가는 이아들에게 자기의 남편이 죽기 전에 축복을 해 주면 축복이 그대로 된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장자에게 내리는 족장으로서의 이 축복은 단 한번만 내릴 수 있는 것이었고 취소할 수 없는 강복이었습니다. 눈이 어두워진 아버지를 속이기 위해서 염소의 털로 만든 가죽으로 몸을 두르고 눈이 어두워진 아버지를 털이 많은 형인 것처럼 속여서 맘껏 축복을 받습니다. 후에 큰 아들이 돌아와 사냥한 고기로 음식을 차려 아버지에게 바치며 축복을 빌었을 때 비로소 동생이 자신의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 간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원한에 사무친 형 에서는 동생을 죽이고자 하였고 어머니는 형의 살해의 위협을 느끼는 이아들을 멀리 메소포타미아 밧단아람으로 보내기로 작정을 합니다. 거기는 바로 리브가의 오라비가 살고 있는 동네였습니다.
이때까지 야곱의 생애를 간단히 이야기 했습니다만 어디를 봐도 야곱이 뭔가 진지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이라고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놀랍게도 전혀 신앙이 없는 사기꾼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 이 사람을 족장의 반열 속에 세우기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열심이 이 사람을, 세속적인 이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긴 드라마를 시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을 속여서 축복을 많이 받았지만 그 축복과는 거의 상관이 없는 시련의 시절을 보내도록 하나님이 그의 인생에 간섭하십니다.
Ⅱ.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
잠시 전에 우리가 읽었던 28장은 바로 밧단아람으로 떠나는 길에 벧엘이라고 하는 곳에 그는 외롭게 노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그는 꿈을 꾸게 되었고 하늘로부터 사닥다리가 꼭대기까지 닿아있는 거기에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사닥다리’라고 했지만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 단 한번 나오는 ‘술람’(!L;s)이라는 단어입니다. 주변에 동족어들을 연구한 학자들의 결론에 의하면 이것은 사닥다리가 아니라 ‘하이웨이’, 하늘로 이르는 왕의 큰 대로와 같은 길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천사가 구차하게 날개도 있는데 사닥다리를 짚고 한발씩, 한발씩 조심스럽게 내려오고 또 올라가는 그림이, 그림보다는 하나님의 강림하시는 장대한 대도가 하늘을 향해 열려 있고 그리로 천사들이 오르내렸던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정말 그가 말로 듣기만 했지 실제로는 경험해 본적이 없는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늘로 이르는 그 긴 길 마지막 끝에 있었고 거기서 말씀하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희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며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제 야곱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간접적인 증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 네가 서쪽, 동쪽, 남쪽, 북쪽으로 퍼져 나갈 것이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고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줄 것이고 너를 이끌어 낸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너에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는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정말 누구에게도 흔히 주실 수 없는 최상의 축복을 야곱에게 주십니다. 야곱이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을 잘 섬겼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 어마어마한 헌신을 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 결단을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하나님 앞에 작정을 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왜입니까? 모르겠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믿음의 족장으로 선택하시고 야곱의 어떤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무한한 지혜와 사랑가운데서 이 사람에게 큰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가 모르겠다고 그럴 때 웃었습니다만 여러분은 왜 하나님이 여러분 같은 사람을 구원해 주셨는지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주위에는 여러분보다도 더 단정하고 좋은 생활하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불러서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을 흉악하게 대적하고 살아왔던 쓰레기 같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해주셨는지 여러분은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우리의 어떤 선행이나 공로, 우리의 가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셔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실에서부터 신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에게 있어서 본격적인 신앙의 최초의 경험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건이었습니다.
A. 세 가지 조건과 헌신약속
야곱은 여러분이 아는바와 같이 놀라울 정도로 계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과 타협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세 가지 조건과 헌신의 약속입니다. 이 사람은 가정적인 사람이었고 엄마 치마폭에 살던 사람이었는데 아버지 엄마 품을 떠나고 어쩌면 처음으로 이 먼 길을 떠납니다. 거친 여행과 모험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외로운 벌판에서 홀로 밤을 새운 그 시간이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제안을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여행길에서 지켜주시고 양식과 입을 옷을 주시고 무사히 이 집으로 돌아오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세 가지를 해 주시면 나도 세 가지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내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여기는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며 나의 모든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사실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이런 식으로 타협을 할 수가 없습니다. 벌써 그 앞에서 자기가 이런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너를 지킬 것이고 너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복을 받을 것이며 내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모래와 같이 많을 것이고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정도의 신앙만 되었어도 “아멘. 감사합니다. 그렇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이럴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신뢰가 안 간다는 듯이 구체적으로 “나를 지켜주실 것입니까? 먹을 양식과 입을 옷도 주실 것입니까? 무사히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까? 세 가지를 해 주시면 나도 세 가지를 하겠습니다.” 전형적인 장사꾼의 계산법입니다. 이 사람은 드디어 메소포타미아로 가서 외삼촌 라반의 집에 우여곡절 끝에 이르게 됩니다. 거기에서 그는 인생이 얼마나 쓰라린 고난의 바다인지를 20년 동안을 철저히 경험하면서 사기꾼 야곱의 껍질을 서서히 벗으면서 족장 비슷한 사람이 되어가기 시작합니다.
가나안에 있을 때에는 아버지, 형, 엄마, 모든 사람을 통틀어서 자기가 가장 놀라운 모사꾼이었고, 좋게 얘기하면 모사꾼이었고 나쁘게 얘기하면 집안에서는 나쁜 쪽으로 자기의 지능을 따라 갈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제 라반의 집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에서 강호의 고수를 만납니다. 그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핏줄인 외삼촌이었습니다. 라반의 집에 이르렀을 때 야곱이 한눈에 반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라헬이라고 하는 작은 딸이었습니다. 라반과 약속을 하고 그 집에서 일을 하게 됩니다. 내가 어찌 외삼촌의 집에서 공밥을 먹겠습니까? 저도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라반은 똑똑하고 열심히 일 잘하는 야곱이 집안일을 거들게 되었을 때 고급 노동력 하나가 집안에 추가 된 것이었습니다. 열심히 봉사를 했는데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항상 그 아리따운 라헬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라헬을 연모하는 것을 라반이 알고 야곱에게 제안을 합니다. 네가 우리 집에서 칠년을 봉사하면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라헬을 네게 주겠다. 이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을 할 일념으로 7년 동안 열심히 품삯 없이 봉사했고 얼마나 이 여자를 사랑했는지 성경에서 야곱은 7년을 수일같이 여기면서 전심으로 봉사했습니다.
7년이 꽉 찼고 혼례를 치루고 첫날밤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부푼 꿈을 안고 어둠속에서 자기의 아내 라헬을 맞아들였습니다. 꿈과 같이 행복한 첫날밤을 치루고 아침에 햇살이 창문을 두드릴 때 옆에 누워 있는 아내의 얼굴을 보니 그의 언니 레아였습니다. 7년 동안 고생하면서 그리워했던 그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심히 분노한 야곱은 라반에게 어찌 외삼촌이 나에게 이렇게 대우할 수 있느냐고 따졌더니 라반이 하는 말이 우리 동네에서는 동생이 언니보다 먼저 시집가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사실 그랬는지 자기가 만든 법인지 우린 알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러면 진작 얘기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분노에 가득 차 있던 야곱에게 야곱이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제안을 합니다. 마누라를 가불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일주일이 지난 후에 라헬도 가져가라. 대신 여태껏 7년 동안 사은품을 위한 봉사였고 이제 라헬을 데려가서 7년 동안 나를 위해 봉사하라.” 라헬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컸기 때문에 기뻐할 수만은 없는 제안이었지만 외삼촌의 사기성 어린 제안을 받아들이고 황금 같은 자신의 인생에 14년을 한 푼 받지 못하고 깨끗이 쓸모없는 여자 하나, 쓸모 있는 여자 하나, 둘을 위해서 온전히 바치게 됩니다.
야곱은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사람을 속이고 사기꾼처럼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 그리고 속인 사람보다 속임을 당한 사람이 어떤 마음인가 하는 것을 여기에서 절실하게 경험을 하였을 것입니다. 야곱이라고 하는 차돌같이 단단한 육신적인 인간이 그까짓 사건 몇 번 거쳤다고 해서 거룩한 족장으로 단숨에 변하가 된다면 아무도 그 사람을 야곱이라 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만만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하나님 하고 한번 겨뤄보려는 사람들 있습니까? 일찌감치 손을 떼십시오. 하나님은 자신의 집안에서 최고의 모사꾼이라고 생각하던 야곱을 메소포타미아에 보내어서 자신이 얼마나 어리버리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외삼촌의 집에서 철저하게 느끼게 하셨던 것입니다. 라반의 집에서 14년을 봉사를 합니다. 야곱은 떠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외삼촌이 또다시 야곱을 설득을 하면서 이번에는 아내 두 사람을 얻기 위해서 14년을 노동을 착취했으니 야곱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집안의 재산을 놓고 야곱을 설득하기 시작을 합니다. 야곱을 설득하기 시작을 했고 14년 동안을 허비한 야곱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깊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큰 섭리 속에서 하나님이 놀라운 지혜를 주셔서 외삼촌과 이런저런 약속을 하고 요즘으로 말하자면 양무리를 치는 데 있어서 스톡옵션을 받기로 하고 양을 치기 시작을 합니다. 그것도 복잡하게 신풍나무 껍데기를 물에 담궜다 꺼냈다 하면서 외삼촌의 집에 상당히 많은 재산을 자기의 소유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은 우생학적으로 거의 그렇게 될 수 없는 사건인데도 하나님의 큰 축복가운데 야곱은 많은 복을 받게 되고 엄청난 가축의 때를 거느린 거부가 됩니다. 라반과 라반의 자식들이 보니까 이렇게 해서는 절대로 야곱이 원하는 데로 게임이 진행이 되어서 야곱의 소유가 많아질 수 없는데 놀랍게 야곱의 양들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이때 라반과 라반의 자식들이 약속을 어기고 무엇인가 자기에게 위해를 가할 것 같은 위기를 느꼈을 때에 야반도주를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야곱은 추격해오는 라반과 자손들에 의해서 멸망을 당할 위기를 만나지만 놀랍게도 하나님이 라반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강력하게 책망하시고 야곱과 화해를 이루게 하시고 여갈사하두라 하는 증거의 무덤을 쌓아 놓고 경계를 넘어서 너를 추격하지 않겠노라는 맹세를 하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이 이 야곱에게 베푸시는 밧단아람에서 큰 축복을 이루게 됩니다.
B. 귀환할 때 성숙해진 신앙
그가 다시 고향집으로 돌아오는 귀환할 때쯤 되어서 이 사람의 신앙은 훨씬 성숙해지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야곱이 집으로 돌아올 때 마음에 가장 걸렸던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원한에 사무친 형 에서가 복수의 칼날을 갈면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장자로서의 모든 축복을 한 번에 빼앗기고 그렇게 살아온 이 사람의 마음속에 동생에 대한 원한에 사무치는 복수심은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브니엘이라는 그 곳에서 절체절명의 인생의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형이 무사로 여겨지는 약 400여명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동생을 맞으러 온다고 하는데 동생을 맞으러 오면 혼자 올 것이지 400여명의 칼 찬 병사들을 데리고 온다고 하는 것은 단번에 비무장인 야곱의 집안을 살육하겠다고 하는 메시지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머리 좋고 재산도 많은 야곱이지만 어떻게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혜로는 벗어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였습니다. 이때에도 그는 또다시 머리를 쓰기 시작을 합니다. 이제 그는 얍복 강가에서 가나안 땅을 향해 식구들을 내 보냅니다. 먼저 가축 떼들과 종들을 내 보냅니다. 뒤에 자기가 별로 원하지 않았던 사은품으로 따라 온 여자들을 하나씩 보냅니다. 그리고 진짜 자기가 사랑했던 라헬과 그 아들들을 맨 뒤에 보내고 자신은 그 얍복 강가에 남아서 천사와 씨름하는 유명한 사건을 거기서 경험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가리켜서 야곱의 믿음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의 혈기로 이겨보려고 했던 아직도 남아있는 야곱의 사기꾼 같은 옛 본성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그를 크게 징계하셨고 그의 환도 뼈가 상함으로 절뚝거리며 걷는 신세가 되었고 자신의 힘으로는 그 천사를 이기지 못할 때에 울며 회개하였다고 호세아서에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가 바로 야곱이 제대로 하나님 앞에서의 깊은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울며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했고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수단과 방법, 혈기를 버리고 울며 회개하는 야곱을 보시고 야곱아 내가 나를 이기었다는 뜻으로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이라고 하는 이름을 붙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커다란 축복을 천사를 통해서 내리십니다. 기적이 정말 일어났습니다. 저 멀리서 형이 자신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장정들을 거느리고 얍복강으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이쪽에는 밤새도록 씨름한 야곱이 형을 만나기 위해 가고 있었습니다. 형을 만나자 그는 땅에 엎드려 종처럼 절하며 왕에게 절을 하듯이 예를 갖추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순간 에서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자기를 속이고 아버지의 축복을 한 번에 뺏어간 이 사람이 어마어마한 거부가 되고 존귀한 사람이 되어 늠름한 사람이 되어 돌아올 줄 알았더니 20년의 노동 끝에 쇠잔해진 몸을 이끌고 새벽에 천사에게 얻어맞아서 다리는 질질 끌고 장애인처럼 절뚝거리며 오는 모습을 보면서 깊은 동정심이 들었습니다. 달려가 동생을 끌어안고 어긋 맡기며 피차간에 울었습니다. 순진한 에서는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동생과의 진한 형제의 정을 느꼈지만 함께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야곱의 머리는 팽팽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사람 에서는 “정말 잘 왔다. 자, 함께 우리 사는 동네로 같이 가자. 그리고 같이 살자.” 그러자 야곱은 완곡하게 거절하며 “형님 말씀대로 하겠지만 지금은 이 양떼와 모든 소떼들이 너무 지쳤기 때문에 조금만 더 걸어가면 길거리에서 이것들이 다 쓰러질 것입니다.” 물론 거짓말이었습니다. “형님이 먼저 가시면 제가 잠시 후 뒤 따라 가겠습니다.”
그는 세일로 나가는 대신에 가나안을 향해서 세겜으로 오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주님이 가나안으로 돌아오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는 이 세겜에서 잠시 쉬었다 가려고 마음을 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겜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한번 야곱을 보십시오. 세겜에 돌아왔을 때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하나님 앞에 단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그 하나님께 아마도 감사의 제사를 드리며 거기를 ‘엘엘로헤 이스라엘’, 하나님 이스라엘, 곧 자신입니다. ‘하나님 곧,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신앙의 큰 진전을 이루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자기의 아버지인 이삭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신앙에까지 성숙해져 있는 야곱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때 야곱은 하나님을 만난 생생한 기쁨과 첫 사랑의 감격을 누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자녀들에게도 아버지로서의 경건한 신앙의 본을 어느 정도 끼쳤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야곱은 본래 직업이 목축을 하는 사람일뿐만 아니라 무역업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세겜에 있을 때에 세겜에 있는 가나안 원주민과 거래를 하면서 상당히 짭짤한 수입을 올렸던 것 같습니다. 거기에서 잠시 머물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야곱의 계획은 자꾸만 지체하게 됩니다. 세겜에서 일이 잘 풀리고 돈도 벌리는 세상적인 번영 때문에 잠시 머물고 가고자 했던 세겜이 오랜 기간 거주하는 곳이 되었고 여기에서 그는 생생하게 주님을 만난 인생의 벼랑 끝에서 자기를 건져 주신 그 은혜를 서서히 망각하고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누군가가 신앙에서 미끄러졌다. 누군가가 타락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어찌 그런 일이 하며 혈기 어린 분노를 표할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자기도 그런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은 지금 미끄러졌지만 자기는 옛날에 미끄러진 적이 있었고 옛날에 미끄러지지 않았다면 조금 있다 미끄러질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의 불순종이나 악한 본보기를 볼 때 항상 자신에 대해 겸손하고 경계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어찌 저놈들이 저런 나쁜 죄에 빠졌을까 쓸어버릴 놈들,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저런 죄의 뿌리가 나에게도 있지 않을까? 내가 이렇게 살면 나도 저 사람처럼 죄에 미끄러지지 않을까 하는 깊은 두려움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그들의 죄가 자신의 죄인 것처럼 애통하라고 하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태도인 것입니다.
야곱은 세속적으로는 거기에서 잘 나가는 세월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이미 밧단아람으로 돌아올 때 그는 어마어마한 거부가 되었고 세겜에 그 떼를 거느리고 와서 목축을 하고 그 위에 무역까지 하면서 세겜 사람들로부터 돈을 벌고 살아갈 때 그의 세력은 세겜의 추장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가진 집안이 되었고 그 가축들도 여기에서 계속 목축을 통해서 늘어나갔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순풍에 돛단 것처럼 야곱의 인생이 활짝 펼쳐졌으니 그때에 인생의 화려함이 어찌 밧단아람에서의 외삼촌의 눈칫밥을 먹고 강호의 고수 같은 잔머리에 속아서 진품 하나를 사기 위해 사은품 하나를 데려오고 7년 동안 종살이 하던 그때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시간을 더 뒤로 돌리면 아버지의 집에서 장자로 태어나지 못한 콤플렉스를 느끼며 형과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살던 외로운 날에 어떻게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정말 부족한 것 없이 번영을 누리며 마치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그의 인생은 잘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동물이자 짐승, 혹은 기계처럼 우리를 다스리지 아니하시고 인격적으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오래 참음 속에서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시면서 우리 스스로 우리의 지성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마음을 바꾸어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 우리를 여러 번 당신께 돌아오도록 기도 속에서,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부르십니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은혜가 사라지면 이런 은혜의 수단에 접촉할 시간을 거의 가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주인 삼으면서 살아가려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복종할 기회를 갖는 것이고 자기의 뜻을 꺾어야 하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수단으로부터도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충만할 때는 예배드리러 나오는 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 오면 가기가 싫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떨어지면 성경도 읽기 싫고 기도는 물론 하기 싫고 예배에도 나오기가 싫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집에서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교회 나오기 힘든 상황을 하나님이 만드실 것입니다. 그것이 말이 됩니까? 인터넷은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것을 대신하라고 주는 수단이 아니라 보완하라고 준 수단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매일 예배는 왜 드립니까? 케이블 TV에 보면 드라마 1회부터 20회까지 한꺼번에 방송한다고 나옵니다. 6개월 동안 교회 안 나가고 있다가 어느 날 휴일 하루 날 잡아서 1번서부터 18번 까지 듣지 왜 그렇게 합니까? 그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떻게 인터넷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여기에 와서 생생하게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주님께 마음을 바치는 그것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파자마 바람으로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서 사과 찍으면서 핸드폰 가지고 말씀을 듣는 것과 추운 어두운 밤길 바람을 가르고 여기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어떻게 똑 같을 수 있습니까? 그 사람들을 하나님이 똑같이 대우해 주시면 공평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 것은 버려야 합니다. 인터넷은 아파서 못 일어나는 사람 들으라고 나오는 것이고 예배 와서 들었는데 좀 보충하라고 자료를 남겨둔 것이고 외국에 있어서 도저히 여기에 올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주신 수단입니다.
야곱은 잘 나가고 있었지만 영혼은 병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야곱의 마음속에서 얍복 강가에서 울며 형과 화해하게 하셨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사기꾼 같은 라반의 집에서 건져주시고 그의 악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복을 주신 이 모든 감격적인 사건들은 거의 잊혀져 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야곱의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이 사라졌지만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한번 선택하고 사랑한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사라졌을 리가 없습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어서 돌아오오 어서
하나님이 야곱을 세겜에서 자기의 세상적인 번영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고 세겜에 머물러 있는 이 사람을 가나안으로 보내기 위해서 그를 다시 부르십니다. 혹시 오늘 사경회 나온 여러분 가운데 야곱처럼 세겜에 주저앉아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분명한 지시를 받고 하나님과의 약속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반쯤 순종한 상태에서 주저앉아 세월을 보내며 이 세상에서 잘 나가는 번영을 누리지만 마음 한 구석으로는 불안한 기억을 떨쳐 버릴 수 없는 이런 처지에 있는 분들은 없습니까? 오늘 여러분 있는 곳이 세겜인 줄 알고 다시 하나님을 만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Ⅲ. 다시 벧엘로 부르심
다시 벧엘로 야곱을 부르신 사건이었습니다. 당시를 기준으로 야곱에게는 네 명의 부인과 열 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부인이 네 명이지만 진짜 사랑한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나머지는 다 사은품이었고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아내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소생이 열 한 아들이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디를 들어가든지 걔네들이 하는 일이 대부분 목축하는 놈들인데 시커먼 놈들이 열한명이 발 냄새를 푹푹 풍기면서 집안을 드나들 때 집안의 분위기가 어땠을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혹시 여러분 중에 열한명의 아들을 거느리고 있는 집안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남의 애들까지 불러서 며칠 데리고 있어 보십시오.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나는 딸이 없고 아들만 있는 사람들에게 삼가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는 재미가 없습니다.
외동딸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디나라고 하는 이름도 얼마나 예쁩니까? 요즘 불러도 예쁩니다. 물론 이 딸은 자기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라헬의 소생은 아니었습니다. 사은품으로 억지로 딸려온 레아의 소생이었습니다. 부모의 마음이란 것이 그렇지 않겠습니까? 비록 아내는 더 사랑하는 아내, 덜 사랑하는 아내가 있겠지만 그 밑에서 태어난 애들은, 그것도 물론 우선순위가 야곱에게 분명히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자식들에게 대한 사랑은 야곱에게 있어서 남달랐고 자세한 기록은 안 나오지만 우리의 일반적인 경험을 미루어 볼 때 디나는 야곱에게 있어서 고추밭에 장미꽃이었을 것입니다. 열 한 개의 고추들이 있고 거기에 예뿐 장미꽃이 하나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귀여웠겠습니까? 아마 이 아이 때문에 집에 들어오는 기쁨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A. 디나의 강간사건
그런데 충격적인 사건, 일어나서는 안 되고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하는 사건이 34장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아마도 그 당시에도 집안 단속을 하면서 이 아이를 조신하게 키우기 위해서 집안에만 있게 했던 것 같습니다. 이 아이가 세겜 땅에 있는 여자들은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어서 나갔다가 히위 족속 하몰의 아들이자 세겜 족속의 추장인 이름도 세겜이라고 하는 이 남자에게 강간을 당합니다. 아버지인 야곱에게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과 같은 사건이었고 아마도 정상적인 아버지라면 이때에 겪는 마음의 지독한 고통은 아버지의 집을 떠날 때에 괴로움과 두려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사기를 당할 때 배신감, 자기를 죽이러 올지도 모르는 형을 맞이하기 위해서 얍복 강가에서 절망 속에 몸부림쳤던 이때의 괴로움을 능가하는 고통이고 괴로움이었을 것입니다. 죽어버리고 싶은 심경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가 수없이 당신의 음성을 들어도 마음을 돌이키지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을 흔들어 놓아서 우리의 마음이 변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끔찍한 불행을 통해서 당신이 한번 선택한 이 야곱, 그의 집안을 버리시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뼈를 깎는 큰 고통을 느끼고 있을 그때에 야곱이 세겜의 아버지 하몰과 세겜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의 아버지 하몰은 많은 예물을 주고라도 지참금을 주고라도 디나를 자기 아들의 아내로 부쳐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야곱이 그 딸 디나가 더렵혀진 소식을 들었지만 그는 조용했습니다. 이것도 야곱의 전형적인 계산입니다. 여기에서 자신이 분노를 발하면 자신이 이 사람들에 의해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을 하다가 모두 돌아오기까지 잠잠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목축을 할 때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지만 먼 곳으로 나갔다가 풀을 먹이고 며칠 있다가 돌아오기도 하는 이런 때였기 때문에 자식들이 다 돌아올 때까지 그는 조용히 지냈습니다.
자식들이 돌아왔을 때 자식들은 펄펄 뛰며 자기의 누이를 강간했다고 분노에 사무친 마음이 되었습니다. 하몰이 그들에게 이르되 자기 아들 세겜이 마음으로 디나를 사랑하니 제발 그 여자를 세겜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자. 서로 혼인을 해서 우리 딸을 너희에게 주고 너희 딸을 우리에게 주면서 이 땅을 너희들이 차지하고 같이 살자는 제안을 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제치고 나서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할례 받지 않은 사람에게 누이를 줄 수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우리의 법을 따라서 남자가 다 할례 받고 우리처럼 할례 받은 사람이 되면 우리의 동생 혹은 누이를 당신에게 줄 수 있고 한 민족이 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그렇게 할 의사가 없는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족장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엄위로운 권위를 가진 사람이었으나 아들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리 떠나고 은혜가 사라지고 경건이 사라지자 아버지는 안중에 없는 자식들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재산이 가진 것이 없고 지위가 낮아도 사람들에게 존귀히 여김을 받으며 사는 길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그분이 주신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고 그것을 모두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분명한 사건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어떤 영적인 권위, 신앙에 있어서 견고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신앙이 주는 유익입니다. 이 모든 권위를 다 잃어버렸고 자식들은 아버지에게 버릇없이 말대답을 하면서 족장으로서의 권위를 깔아 뭉개버렸습니다.
세겜 사람들이 하몰과 추장의 말을 듣고 순종하여 모두 성기의 표피를 베고 할례를 받아서 누워 있는데 그 당시에 무슨 마취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통증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일주일 동안 고통스러운 시간이 되는데 가장 고통스럽고 몸을 움직이기 힘든 3일이 되었을 때 야곱의 자식들은 칼을 들고 세겜 땅으로 쳐들어가서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누워 있는 사내들을 모두 찔러죽이고 재산을 다 약탈하고 종들과 그의 아내들까지 빼앗아 왔습니다. 평화롭던 그 마을이 피바다가 된 것입니다. 두려움 속에서 가족회의를 하는 광경이 35장 바로 앞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야곱이 말합니다. “너희가 나에게 화를 끼쳐 이 땅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가 나게 하였구나.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서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할 것이다.”
세겜은 가나안 땅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바로 이들과 동족 관계에 있는 원주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들의 땅이었습니다. 오래전부터 그들은 거기에서 씨를 퍼트리며 살았고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야곱의 집안은 이방에 있는 사람들이 들어온 것입니다. 자신의 동족이 그렇게 부당한 방법으로 비겁하게 살육을 당하고 아내들과 노비들이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그들이 누구의 편을 들겠습니까? 그들은 수가 아주 많고 그들이 단합을 해서 야곱에게 쳐들어오면 야곱 같은 집안 하나쯤 씨를 말려 죽여 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고 잔꾀로 일생을 살아온 야곱이었지만 사면초가의 길에서 어디를 돌아보아도 헤쳐 나갈 길이 없었습니다. 앞을 보면 막혀 있고 뒤를 보니 막혀 있고 좌우를 보니 막혀 있고 하늘을 보니 하늘은 덥혀 있었습니다. 어디도 탈출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고 여기에서 그는 틀림없이 마음의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며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였음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어찌해야할 바를 알지 못하던 야곱에게 하나님이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야곱이 하나님 찾은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인생의 위기 속에서 그가 한적한 곳에 나아가 눈물로 회개하며 내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버리고 세겜 땅에서 번영을 이루는데 바빠서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하고 이렇게 타락하고 미끄러졌습니다. 그리고 지금 자기에게 이르는 불행하고 끔찍한 사태, 앞으로 전개될 무서운 일들은 바로 자신의 죄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하며 눈물로 고백했더니 하나님이 찾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는 고통을 받고 있었고 두려움 속에서 큰 아픔을 느끼며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절체절명의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던 것이었습니다. 멸망의 문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야곱의 인생에 새 길이 열리는데 언제나 그것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심으로서 그 일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도 고단한 인생길을 살면서 시련과 역경을 만나고 사면을 돌아보아도 도저히 헤어나갈 길이 없고 위를 올려다보니 하나님과의 관계는 막혀 있습니다. 움치고 뛸 수도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여태까지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왔던 잔꾀가 통하지 않는 시련의 기회를 여러분이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지혜와 여러분의 생각으로 도저히 헤쳐 나갈 수 있는 길이 없게 된 이 상황이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시는 상황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분주해진 마음을 걷어내고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미 여러 번 목이 아프도록 여러분을 부르셨고 지금 이 시간도 당신의 집을 멀리 떠난 여러분을 동구 밖에서 눈이 짓무르도록 기다리던 탕자의 아버지처럼 여러분이 당신께 돌아오게 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뜻밖의 시련을 만나고 인생의 위기는 복병과 같이 찾아왔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끊임없이 여러분에게 경고하셨고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가르쳐 주셔서 하나님께 매달리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서 인생에 시련의 길에서 신앙을 다시 찾도록 여러분에게 수없이 타이르셨습니다. 때로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를 통해 성경을 통해 혹은 사람들과의 교제를 통해 때로는 양심의 작용을 통해 수없이 여러분을 간절히 찾으셨고 마치 집을 떠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어미의 마음으로 여러분을 찾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세겜과 같은 세상에서 성공을 거두고 먹고 사는 일에 바쁘고 세상의 번영을 이루는데 바쁜 나머지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없었습니다. 잘 나가는 사람은 이 세상의 성공과 번영이 재미있어서 뜻대로 안 되는 사람은 뜻대로 안 되는 시련과 괴로움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여러분 마음대로 살아보니까 형통합니까? 과연 신앙을 버린 보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트리고 불순종하고 자기의 아집과 고집을 따라 살고 나니까 과연 성과가 있었도다. 과연 여기에 길이 있었구나 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여기에 누가 있습니까?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을 뜻을 멀리 떠났더니 여러분이 얻은 것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위대한 증거가 있는데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얻어 보려는 여러분에게 형통함을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형통함이 있더라도 그것은 폭풍이 오기 전 고요한 전날 밤입니다.
B. 다시 벧엘로 부르심
인생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져 보려고 하는 인간의 모든 기대와 시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야곱을 다시 벧엘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주 선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세겜에서 돈 버는 재미에 빠져서 내 사랑을 잃어버렸지? 네가 세겜에서 이런 죄를 지었지? 네가 세겜에서 이렇게 나에게 불순종했지?” 하나님은 그렇게 쩨쩨하게 따지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관심사는 과거에 야곱이 저지른 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앞으로 펼쳐질 야곱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벧엘로 올라가거라. 거기에 거주하면서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에게 제단을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꽤 깁니다.
하나님이 벧엘을 상기시키시면서 야곱이 결코 잊을 수 없었던 사실을 상기시키셨습니다. 너는 한 때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인간이었고 그때에 나는 네게 나타났다. 나는 너에게 너와 동행할 것을 많은 축복을 약속했고 그때 너는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시고 양식과 입을 옷을 주시고 집으로 돌아오게 해 주시면, 그렇게 조건을 제시했는데 하나님은 다 해주셨습니다. 지켜주셨을 뿐만 아니라 먹을 양식과 입을 옷으로 생존만 유지하게 하신 것이 아니고 돌아오게 하신 것만이 아니고 거부가 되어서 사랑하는 아내 라헬, 사은품까지 자식들까지 종들까지 거느리고 돌아오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하겠다고 한 세 가지 약속,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히브리서 성경에는 하나님이 나에게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무슨 뜻입니까? 이제 내가 하나님을 내 조상의 하나님이 아니라 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모실 것이며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고 나의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나님은 야곱이 요구하는 모든 것, 그 이상을 은혜로 베풀어 주셨지만 야곱에게는 하나님이 야곱의 하나님도 아니었고 벧엘이 하나님의 집이 된 것도 아니었고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린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배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 인생의 굽이굽이 위기 가운데서 이 사람을 건져주신 하나님의 그 고귀하신 은혜를 배신으로 갚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모습입니까? 여러분의 모습은 아닙니까? 여러분이 이제껏 하나님께 구원을 받고 인생길을 걸어오는 동안에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안 해 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베풂을 받아 누리고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 여러분이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지식의 은사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여러분에게 따뜻한 가정과 나의 피곤한 영혼을 위탁할 교회를 주시고 피붙이처럼 사랑을 나누며 함께 기대며 살 수 있는 사랑할 수 있는 지체들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것이지 여러분이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좋은 모든 것들은 단 하나도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없고 여러분에게 일어났던 모든 고통스러운 것들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스스로 좌초한 것들입니다. 모든 고통과 모든 시련과 모든 고난과 괴로움이 여러분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초래된 일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어떤 못된 일들을 하나님이 하셔서 여러분 가슴에 대못을 박으셨습니까? 주님이 하신 일은 여러분을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못 박으신 것 이외에는 하나님이 잘못하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만 받았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건강한 육신을 가지고 행복한 삶을 이어갈 수 있었든 것도 사업과 직장, 일할 수 있는 기회, 건강한 정신과 육체를 주셔서 빌어먹지 않고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신 놀라운 모든 행복들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은혜가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신실하셔서 여러분에게 약속한 모든 것을 갚아 주셨는데 여러분은 인생이 곤고하고 어두운 벼랑 끝에 선 날에 하나님께 약속한 것, 서원한 것을 얼마나 지키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니까? 하나님 나를 이 인생의 위기에서 건져주시면 일평생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모시겠습니다. 하나님 정말 나를 인생의 벼랑 끝에서 날개를 달아 주신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거기가 하나님이 동행하는 집이 되게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착하게 헌신하며 살겠습니다. 하나님 나를 이 궁핍과 시련 속에서 건져주시기만 한다면 내가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주님이 나를 이 곤고한 물질생활에서 복을 주시면 이 물질을 하나님이 나에게 대리자로 맡기신 것으로 알고 청지기의 사명을 따라서 주님을 섬기며 일생동안 이 물질로 인간의 죄와 탐욕으로 구겨진 세상을 펼치는데 사용하며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찬양)
눈물 흘리며 참회 하였었네 나의 마음이 뜨거웠었네
그러나 죄악이 나를 삼키고 내 영혼 갈 길을 잃었네
한때는 그랬습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새로운 삶을 살겠노라고 주님이 내게 베풀어 주신 모든 축복에 청지기로 살겠노라고 하나님 앞에 고백을 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 아래 놓겠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당신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간구하는 우리의 기도를 보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시련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고 환란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핍박과 역경으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은 내 하나님이 되지 않았고 내가 있는 그곳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집이 되지도 않았고 하나님 앞에 헌신하며 살지도 않았습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 그렇게 뜨거운 마음으로 진지하게 신앙을 고백했던 벧엘은 세겜에서 성공적이고 번영하는 삶을 사는 야곱에 있어서는 잊혀진 곳이었습니다. 아마 거기는 무성하게 잡초만 우거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사람 야곱을 벧엘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상기시키셨습니다. 나는 네가 인생의 벼랑 끝에 있을 때에 나타났던 은혜의 하나님이란다. 나는 거기서 약속한 모든 것을 지켰다. 나는 신실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만사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여러분 오늘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꼬일까? 왜 이렇게 시련이 가득차고 되는 것이 없을까? 이렇게 원망하고 한탄이 나오는 사람은 오늘 집에 가서 자기 전에 가슴에 손을 얹고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초점을 여러분이 원하지 않는 가운데 초점을 놓고 보면 아무 것도 된 일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거기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한번 하나님이 여러분을 바라보시는 그 시각으로 여러분이 인생의 초점을 맞추어 보십시오. 살아온 생애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고 매일매일 베푸신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에게 사라진 적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오늘 이 추운 겨울날에 여러분 마음을 움직여서 “그래도 네가 여기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라.” 하나님이 왜 그렇게 여러분 마음을 움직이시고 설득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신실하신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지 않고는 여러분이 결코 인생의 방황이 끝날 수 없기 때문에 세겜에서 잘 나가서 성공하던 야곱의 성공은 결국은 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없는 번영은 언제든지 끝이 있게 마련이고 그 번영이 훌륭하고 크면 클수록 그 끝은 더 비참하고 절망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야곱의 마음이 얼마나 돌덩이같이 굳어져 있었는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외동딸이 강간을 당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만나기 전까지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게 인간의 마음입니다. 한번 하나님을 향해 놓고 나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받아들이는 찰흙과 같은 마음이지만 일단 은혜에서 멀어지면 어떤 조각가도 무슨 도구로도 글씨를 새길 수 없는 강철 같은 굳은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흘릴 눈물도 없고 녹을 마음도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생애가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을 벧엘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Ⅳ. 적용과 결론
여러분의 벧엘은 어디입니까? 주님은 바로 그 벧엘, 여러분이 인생의 곤고한 날에 주님을 감격적으로 만났던 때의 그 마음, 그 맹세, 그 헌신, 그 사랑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렇게 야곱에게 경험한 것과 같은 가슴 아픈 사연이 이미 일어났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향해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경고의 나팔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벧엘에 올라가서 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너는 내 앞에 서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살도록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 시켜주셨지만 우리의 죄와 욕심, 하나님 없이 살려는 거짓된 독립심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일이 희망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겜에 살면서도 번영을 이루면서도 마음 편한 적이 없었고 그나마도 항상 번영을 이루며 성공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망설이고 지체하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나 짧습니다. 우린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주님이 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을 낭비할 권리가 우리에겐 없습니다. 우린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아들을 그렇게 우리를 위해 내어 놓아 주신 하나님이 우리가 무엇이 필요하다면 어떤 것이 아까워서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시지를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을 벧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없는 번영보다는 하나님 함께하는 위기가 훨씬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이제 누구도 이 결단을 대신해 줄 수는 없습니다. 운명에 떠밀려 살고 이제 이 세상의 모든 흐름 속에 자신을 내어 맡기던 그런 무책임한 인생은 그만 두십시오. 이제 다시 한 번 하나님이 요구하신 신앙에 결단을 내리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벧엘이 어디인지 생각하십시오. 거기에서 나의 여태껏 살아왔던 모든 삶을 그분 앞에 쏟아 놓고 내가 하나님 앞에 서리라. 설령 그분이 거기서 나와 대면하시고 나를 책망하신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책망은 번영하는 세상에서의 칭찬보다 희망이 있으니 전자는 생명으로 우리를 인도하지만 후자는 우리를 사망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이 벧엘에서 주님을 다시 만나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리라
“야곱이 이에 자기 집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창 35:2-3)
녹취지: 김경애
Ⅰ. 본문해설
야곱은 인생의 벼랑 끝에서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위기의 상황을 맞이하였습니다. 이제 사랑하는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을 때에는 개인적인 고통이었지 최소한 온 집안이 파멸될 두려움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앙이 거의 없는 자식들이 세겜 사람들을 도륙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악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이제 잠시 후면 가나안 주민들이 그 소식을 듣고 야곱의 집안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달려올 것이었습니다. 천하에 얕은꾀로 일생을 살아온 야곱이었지만 이 지점에서는 머리가 하얗게 되기까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Ⅱ. 한 사람 야곱을 깨우심
A. 영적으로 각성시키심
바로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부르셨습니다. “벧엘로 올라가라”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는 음성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오랫동안 마음속에 잠들어있던 야곱의 신앙은 깨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상당한 세월이 흘렀을 세겜에서의 세월은 번영과 성공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그는 거의 죽은 것과 같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한 사람 야곱을 깨우셨습니다. 제일 먼저 그를 영적으로 각성시키셨습니다. 각성이라는 것은 이제껏 까지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만들어 이제껏 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느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있는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적인 각성을 주시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의 위기를 만나기도 합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깨어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두 가지 의미를 갖는데 영적으로 깨어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살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요즘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이것은 하나님 앞에 잘못하는 것인데. 요즘 내가 왜 이렇게 기도도 하지 않고 예배생활도 마음을 쏟지 않지?’ 이런 반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누가 우리를 향해서 뭔가 잘못을 지적하면 이런 말을 잘합니다. ‘뭐 어때? 그게 어때서? 그게 뭐가 안 돼?’ 우리가 잘 쓰는 말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려도 끝까지 내편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은 끝까지 자기편입니다. 일단 하나님의 은혜가 살아있으면 그래서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들리면 그것이 객관적인 기준이 되어서 거기에 자꾸 나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의 마음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에 은혜를 많이 받고 성령 충만해서 기도를 많이 할 때에는 아침부터 밤까지 반성의 연속입니다. ‘내가 이런 마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데.’ 아이들을 데리고 막 성질을 내고도 ‘아 이러면 안 되는데.’ 금방 그런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깨어있다는 말의 또 다른 의미는 무엇이냐 하면 이런 것입니다. 나의 삶에 어떤 사태가 일어납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언제나 늘 어떤 사태를 만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런 어떤 사태들이 끊임없이 일어날 때 그때에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늘 들리고 기도를 많이 하고 성령 충만하면 내 삶속에 일어난 사태들을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연관 지어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깨어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좋은 일이면 ‘하나님이 왜 이렇게 좋은 일을 내게 허락하셨을까? 왜 이렇게 훌륭한 일들이 내게 일어났을까? 생각하면서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가지고 내가 무엇을 섬기고 어떻게 살아야지만 이런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의도에 부합하는 것일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쁜 일이 일어나면 ‘이 나쁜 일은 왜 일어난 것일까 이 일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어떤 것을 깨우치려고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럼 반대로 말씀이 들리지 않고 은혜가 떨어지고 기도도 안하고 신앙이 없으면 왜 일어나는지 그런 의미는 단절되고 ‘어느 놈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보니까 남편입니다. 저 못된 인간 때문에 우리 집안은 만날 이 꼴이 된다고 생각하며 미움과 원망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쓴물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일단 그것이 쏟아지면 마음이 더렵혀져서 안 되던 기도가 더 안 되는 것입니다. 안 들리던 말씀이 더 안 들려지게 되고 예배를 드려도 감동이 없던 마음이 더 돌같이 굳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도 소용이 없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게 되면 그 다음에 내적인 갈등과 고통이 밀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태가 일어나면 하나님의 자녀의 독특성이 무엇이냐 하면 땅에서 일어나는 사태들이 하늘과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하늘과 땅 사이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하는 것인가를 생각하고 판단해야하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이고 어떻게 보면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딱 잘라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일이 일어나면 헤헤거리면서 ‘아 좋다. 신난다.’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이라고 하고 아니 심지어는 재수가 좋아서 그런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런 소리를 합니다. 그 다음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나면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재수 없어서.’ ‘어느 인간 때문에.’ 결국은 지난 주일날 이야기했던 남한산성에 있는 강아지입니다. 뼈다귀라도 하나 주면 꼬리를 흔들며 신나서 온 세상을 자기가 다 갖은것처럼 하다가 주인의 발길에 채여서 귀퉁이에 쓰러지면 온갖 불행은 자기가 짊어진 것처럼 우울해지는 짐승과 같은 삶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잠들어있다는 것은 그냥 푹 잔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깨어있지 못한 삶입니다. 그게 영적으로 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떻게 예수를 믿는 사람이 예수를 안 믿는 사람보다 더 나쁘냐고 그러는데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각을 해보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그냥 늘 세속적으로 생각하고 세상 속에서 삽니다. 그러니까 어떤 죄나 불순종을 보아도 대부분의 경우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한답시고 어느 정도 절제를 하면서 삽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고삐가 풀리고 욕망을 스스로 억제할 수 있는 신앙적인 통제 장치가 풀리게 되면 욕망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바로 대학을 들어가지 못하고 1년씩, 2년씩 재수를 합니다. 그러면 이 아이들이 절간에 들어가서 고시공부를 하듯이 그냥 공부만 파다가 대학에 성공적으로 들어가는 특별한 종자들은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성인이 다 되었으니까 세상맛을 다 보면서 1년이나 2년을 세상에서 구르다가 대학에 들어갑니다. 요즘은 고등학교 애들이 옛날 대학처럼 보내기 때문에 내 이야기가 잘 안 맞을지도 모르지만 옛날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고등학교에 그냥 앉아서 범생이처럼 공부만 하다가 대학을 들어가면 이런 애들은 대학이 별천지입니다. 술을 먹어도 되고, 담배를 피워도 되고, 여학생을 만나도 되고, 미팅도 하고 날마다 날마다 새로운 것입니다. 마치 예수를 믿는 사람이 처음 은혜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완전히 별세계에 들어온 것입니다. 애들이 미팅이며 모임이며 신나게 뛸 때 강의실에 엎드려 자는 애들이 있습니다. 그 애들은 재수, 삼수하고 들어온 애들입니다. 이미 다 해보았기 때문에 새로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을 잡고 대학생활을 하는 데는 미리 맛을 본 것이 면역이 되어서 좋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면역이 별로 되지 않은 모양입니다. 하나의 공식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꽉 붙들고 계실 그때에만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 손에서 놓이면 누구도 그렇게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누군가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면 그 사람을 찬송하지 말고 저 사람을 저렇게 살도록 저런 인격을 가고 오랜 세월을 사는 사람으로 붙들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이 배우는 것입니다. 실망하고 말 것도 없습니다. 인간이 본래 그런 것인데 무슨 어마어마한 기대를 겁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야곱의 경우에는 맨 처음 세겜에 도착했을 때는 방금 전에 죽을 것 같은 인생의 벼랑 끝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왜? 형으로부터 복수를 당하여 온 가족이 파멸될 지경이었는데 하나님이 이 야곱과의 약속인 멀리는 이삭, 더 멀리는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기억하시면서 신실하신 하나님이 야곱을 인도해주셔서 그래서 그 인생의 벼랑 끝에서 위기를 모면하게 해주셨습니다. 세겜에 도착했을 때는 그 은혜의 감격이 어느 정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단을 쌓고 ‘엘엘로헤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신앙의 감격까지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국은 잠시 머물려고 했었던 세겜에서 그는 이 세상의 성공과 번영에 취해서 그래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한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한마디로 세상에 깊이 젖은 생활을 하였습니다. 만약에 오늘 아침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펑펑 눈물을 흘리고 기도할 때 마음을 온전히 쏟아 부어서 기도하던 사람이 점심때에 무엇인가 잘못된 불순종을 하고 오후부터 기도가 안 되기 시작했다면 회개를 하지 않을 인간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의 신앙, 하나님과의 관계, 경건 이런 것들은 마치 떨어지는 낙수에 땅이 패듯이 혹은 눈이 하얗게 쌓였지만 내리는 이른 봄비에 그 눈이 녹듯이 그렇게 서서히 서서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신앙과 좋은 것들이 상실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타락하는 사람이 어느 시점을 정해놓고 이날 내가 타락해야겠다고 계획을 세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서서히 서서히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로 주셨던 모든 좋은 것들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잃어버리는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영혼이 온전히 구비되어서 하나님을 향해서 은혜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있던 올곧은 상태가 망가집니다. 그런데 놀랍게 망가진 것에 대해서 아주 신속하게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졸업하기 전에 직장을 다니다가 받은 퇴직금을 가지고 전세를 얻었습니다. 살았는데 사기를 당했습니다. 주인이 다 떼어먹고 도망을 갔습니다. 어느 날 그 집은 경매에 넘어가고 경락을 받은 사람이 우리를 길거리로 내쫓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만 했더니 자기네들을 못살게 굴지않았다고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주어서 내보냈습니다. 그래서 언덕에 조그만 집인 사글세를 얻었습니다. 그런 중에 다행히도 제가 교수로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빌라인데 복층인데 한 층에 방이 딱 1개인 조그만 빌라입니다. 화장실도 저 밖에 있어서 드나들어야합니다. 그런데 이사 가던 날부터 변기는 망가졌습니다. 그래서 볼일을 보면서 항상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붉은 바게쓰에다가 수돗물을 트는 것입니다. 그것도 여러 번 해보니까 속도를 조절하면 볼일이 끝나는 것과 함께 한 바게쓰가 꽉 차는 것입니다. 상태에 따라서 속도를 조절해보면 말입니다. 딱 차면 그것을 붓는 것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반복을 하면서 그 집에서 여러 달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무슨 일인지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강의에 감동을 받은 학생에 의해서 어느 교회에서 저를 여름 수련회로 불렀습니다. 강사로 간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강사는 잘해주었습니다. 묵는 숙소도 깨끗하고 욕실도 있고 그랬습니다. 거기서 4일인가를 집회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 자신의 행동을 보니까 똑같이 바게쓰에다 물을 받으면서 볼일을 보고나면 그 바께쓰 무거운 것을 들고 붓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니 우리 집 변기가 망가졌는데 왜 여기에 물을 붓고 있지 이런 생각을 한 것이 이틀이 지나서였습니다. 그때 제가 충격적으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망가진 것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무엇이 망가졌을 때 그게 얼마나 불편할까 생각되지만 거기에 익숙해져 살아온 사람들은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성령 충만하고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 신앙을 다 털어버리고 이리저리 방황하는데 그것도 신앙을 버렸는데 야곱처럼 그렇게 세겜에서 번영과 성공이라도 거둔다면 조금 낫습니다. 번영과 성공도 없고 신앙을 버렸는데 결국은 실패와 좌절이 연속됩니다. 그래서 만날 괴로워하고 만날 죽고 싶다는 이야기나 하고 그러고 삽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진짜 어떻게 저렇게 살까? 나라면 진짜 못살 것 같다.’ 그런데 그 사람은 살만합니다. 아직 견딜 만합니다. 진짜 죽을 것 같으면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살만하니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은혜에서 멀어져 무감각한 교인들의 특성이 무엇이냐 하면 정말 끈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견딜 수 있는 데까지는 견딥니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있을 때까지는 한번 살아보는 것입니다. 그게 어디서 나오는 오기인지 우리는 그 근원을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죄의 영향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죄는 우리에게 그런 무모함, 담대함, 그리고 어떤 혈기를 우리에게 줍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께 못 돌아가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만나면 건강을 묻는 것이 늘 주제가 됩니다. “허리가 아프다더니 운동 좀 해?” 어느 목사님한테 물어보았습니다. “늘 해야 한다는데 몸이 안 따라줍니다.” 몇 년째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김 목사님, 나는 정말 운동에 관해서 생각할 때마다 회심하지 않는 교인들이 이해가 갑니다.” 은혜로운 설교를 듣고 죄를 지적받으면 ‘내가 이렇게 살면 진짜 안 되는데. 이렇게 살아보아야 마지막에 실패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서 ‘기도도 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야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집에 가면 마음이 또 바뀌고 또 살만한 것입니다. 기도를 하지 않아도 주님의 은혜가 없어도 그냥 살만한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그 사람도 영혼을 가진 야곱인데 그리고 하나님을 그렇게 감격적으로 만나서 생의 벼랑 끝에서 생생하게 하나님이 건져주신 은혜를 경험한 사람인데 그래서 제단까지 쌓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까지 고백했던 사람인데 그런데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그리고 영혼이 곤고해졌을 때 괴롭지 않았겠습니까?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눈을 뜨면 벌어지는 삶의 새로운 사태들은 항상 그에게 “걱정하지 마라. 모든 것이 잘되어가고 있다.”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상황 속에서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상황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양심의 작용을 통해서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하나님께서 한두 번 말씀하셨겠습니까? 어떤 우리의 삶의 사태에 커다란 변혁이 일어나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위기가 온 것은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경고 후에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갑자기 덮치듯이 그렇게 멍하게 있는 인간의 뒤통수를 야구방망이로 후려치듯이 그렇게 환난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슨 조폭입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수없는 인격적인 경고와 타이름, 안타까운 호소가 있고난 후에 하나님이 이 사람이 도저히 돌아올 수 없으니까 하나님이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야곱을 하나님이 이렇게 정말 의지할 곳이 아무것도 없는 절망의 상황에서 하나님이 이 야곱을 깨우셨습니다. 아마 자식들이 돌아와서 “아버지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 그것가지고 뭘 그렇게 괴로워하세요? 저희가 가서 하몰과 세겜을 만나서 담판을 잘 짓고 우리 동생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약조를 받고 적당히 패물도 받고 혼례를 올리도록 하지요.” 그렇게 해서 원만히 일이 처리되었으면 아마 야곱이 이렇게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삶의 어떤 사태가 일어나는데 그것이 여러분 보기에 너무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이라면 여러분이 하나님 없이 그 일이 우연히 일어났다고 생각하면 아무 은혜도 되지 않습니다. 재수 없다는 이야기밖에 안 나옵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자신의 잠자고 있는 신앙을 일깨워서 내게 오늘날 일어난 이 삶의 사태들이 이제껏 내가 하나님 앞에 살아온 인생길과 어떤 관계를 갖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 내 앞에 펼쳐진 절망적이고 위태로운 상황을 통해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는가? 라는 것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어떤 경우에는 거의 미쳐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고백했던 많은 사람이 극단적인 경우에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자살의 동기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너무나 너무나 죽고 싶은 것이 자살의 동기가 아니라 너무나 다르게 살고 싶은데 내 힘으로는 도저히 그것을 할 수 없는 것이 자살의 동기입니다.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너무나 너무나 살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만난 삶의 사태와는 다른 상황 속에서 살고 싶은데 무엇으로도 그것을 바꾸어놓을 수 있는 가능성이나 힘이나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그때 선택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다행히 야곱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씀하실 때 마음속으로 이미 지푸라기라고 붙들 수밖에 없는 가난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돌아가는 가장 커다란 방해가 무엇이냐 하면 죄가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엄밀한 의미로 말하면 부요한 마음이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왜? 죄가 있으면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냅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죄가 너희와 나 사이를 내고나면 아무런 대책이 없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수단이 주어졌습니다. 무엇입니까? 회개입니다. 회개는 어떤 마음에서 나옵니까? ‘나 오늘 회개 좀 해야지.’ 그렇게 해서 회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집사님이 아이가 회심집회를 다녀왔다 하니까 “너 회개했냐?” “회개했습니다.” 너무 기특해서 “너는 무슨 죄를 회개했니?” “원죄와 자범죄를 회개했어요.” 그냥 교리시간에 배운 것이지 무슨 죄를 회개한 사람이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정말 가난하고 그리고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서 내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고 그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고 싶다는 그 마음이 가슴에 꽉 차게 될 때 그 마음에는 눈물이 출렁거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회개하면 하나님이 다시 그를 용서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난하고 목마른 마음 없이는 절대로 회개할 수 없습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현실적으로 말하면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지만 회개를 하면 그것은 치워질 수 있는 것인데 그 회개에 이르는 마음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른 마음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부르심입니다.
B. 영적 권위를 회복케 하심
1. 족장으로서의 권위를 잃음
야곱이 깊이 회개했다고까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어쨌든 커다란 충격을 받았고 아마 그 짧은 시간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 그 하나님과의 약속을 배반하고 살았던 자신의 불신앙적인 삶, 하나님을 향한 사랑 대신 세상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하게 살았던 세검에서의 그 많은 날들을 후회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깨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야곱의 태도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집안사람들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를 모았습니다. 여기에서 집안사람이라는 것은 아마도 가족들인 것 같고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들이라는 것은 아마 거기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일꾼들 같습니다. 어쨌든 그 사람들을 모두 모으고 무엇인가 비장한 태도로 자신의 결심을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자, 이 모습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좀 전에 있었던 야곱의 모습과 얼마나 다릅니까? 자 디나는 강간을 당하고 이제 야곱의 마음은 칼로 찢어지는 것처럼 괴롭고 아팠습니다. 사건을 당한 당사자 디나는 아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울고 정말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식들이 밀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한테 허락도 받지 않고 가서 담대하고 거짓 흥정을 하고 그들이 할례를 받고 모두 신열이 나서 누워있는 동안에 그들 모두를 도륙하고 재산까지 모두 빼앗았습니다. 이제는 가나인 족속들이 이 소식을 듣고 자기의 집안을 파멸시키기 위해서 달려올 위기에 놓여있었습니다. 야곱은 자식들을 꾸짖었습니다. 너희가 왜 이런 일을 해서 그래서 저 사람들에게 악취가 나게 하고 우리는 수가 적은데 그들이 모여서 나를 치고 나를 죽일 것인데 우리 집이 멸망할 것인데 왜 이런 일을 했냐고 했을 때 무릎을 꿇고 “아버지 저희의 생각이 짧았습니다.”라며 용서를 구했습니까? 아닙니다. 뭐라고 그랬습니까?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같이 대우함이 옳습니까?” 그 놀라운 권위와 특권을 받은 족장인 야곱에게 대들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없이 이런 끔찍한 일을 꾸몄다는 것은 이미 이 집안에서 야곱이 사실상 영적이 지도력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젊은 자식들은 홧김에 끔찍한 일을 저질렀고 대책을 세울 수 있는 능력은 자식들에게도 없었습니다.
2. 각성으로 영적 권위를 회복함
비로소 잠시 정신이 들고 보니 자신들이 한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시작했고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멸망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침묵 속에서 야곱이 식구들을 모두 모으고 자신의 결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영적인 권위를 회복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족장으로서의 모든 권위를 잃어버리고 짓밟히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은혜에서 멀어지면 마귀도 압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하찮게 생각합니다. 성령만 슬퍼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귀도 그것을 압니다. 이렇게 영적인 권위를 잃어 버리고나니까 이제 세상과 싸울 힘도 없고 마귀와 대적할 능력도 없고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면서 자신 속에 일어나는 수많은 죄와 대적할 수 있는 능력도 상실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영적인 권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여러분이 몇 푼의 용돈으로 자녀들에게 권위를 몇 십 분 동안 살 수 있습니다. 유산을 물려주면 아마 몇 달 동안은 권위가 설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있다가 사라지는 권위입니다. 부모로서의 권위, 먼저 믿은 가족으로서의 권위, 영혼을 섬기는 교사로서, 구역장으로 순장으로서의 권위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확신 있는 인생을 살아가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이 야곱이 하나님 앞에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깨닫고 각성하고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했는데 하나님은 즉시 이 사람의 갈 길을 보여주셨고 영적인 권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만나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가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어머니이기도 하고, 아버지이기도 하고, 자식이기도 하고, 혹은 며느리이기도 합니다. 또 교회에서도 여러분에게 맡겨준 자리가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회적인 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여러분을 거기에 세우셨는지 생각해보셨습니까? 하나님을 향해 살아있는 신앙이 있을 때에는 언제나 충만한 은혜의 기쁨과 함께 여기가 내자리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세우신 것은 여기에서 내게 주신 은혜를 따라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에 내가 비록 미약하고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나 같은 사람을 통해서 여기에서 무엇인가 하시려고 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나를 여기에 부르셨다.’ 이 생각이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항상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은혜 받은 사람들이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여기가 왜 있어야하는지 모르는 사람,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실제로 떠날 수 있는 사람이 충성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교회를 개척하고 제일 어려웠던 점 중의 하나가 그런 것이었습니다. 교회에 와서 은혜는 받는데 교회에 마음을 쏟는 사람들이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 나는 역사가 오래된 교회를 많이 무시했습니다. 교회에 가면 예배도 살아있지 않고 그저 소 잡아먹은 죽은 귀신처럼 그냥 한 교회에 엎드려서 다니는가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교인이 700명이 모일 때까지 그저 저의 영적인 감각으로 보기에는 사람들이 전부 전깃줄에 앉은 참새 같았습니다. 조금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후루룩 날아갈 사람들입니다. 그런 느낌이 교인이 700명이 모였는데도 들었습니다. 오죽했으면 교회에 온지 일 년 반밖에 안된 사람들이 안수집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은 지 그것밖에 안되었는데 교회에 온지 그것 밖에 안 되었는데 안수집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세워주신 교회고 그리고 여기서 나는 오늘도 여러 자매를 심방했지만 교회에 뼈를 묻겠다는 자매들이 가끔 나오는데 뼈는 안 묻어도 되니까 살아있을 때 충성하시면 됩니다. 뼈는 납골당으로 가져가시고 살아있을 때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그게 정말 하나의 목회의 외로움이었습니다. 이제는 좀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 교회의 역사가 깊어진다는 것 그것이 그렇게 허무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확실히 남기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어디다가 우리를 세워주시든지 거기에서 소명을 느끼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하면 그렇게 소명을 느끼면서 사니까 자신이 있는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과 어울리지 않는 상황들을 개혁하려고 하고 경건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이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 이 집안에 나를 시집오게 하신 것 하나님이 교회, 이 교구, 이 구역 여기에 하나님이 나를 두신 것을 생각하면서 그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자꾸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생각이 잘 나지 않을 때 교회에 오면 그냥 이를 악물고 무위도식하지 말라고 밥도 별로 안주면서 그렇게 무위도식하지 말라고 소리치는 목사의 설교를 들으니까 또 뜨끔하고 찔립니다. 그러면서 은혜를 받으면서 자기가 여기에 서있는 이유, 여기에서 살아갈 때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소명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내가 여기에 왜 있는가? 그리고 여기에 있어야할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여기서 부족하지만 당신을 섬기는 나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창조의 세계를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끔 변화시켜가는 일에 무엇인가 이바지하고 있다는 이 기쁨과 소명의식이 없이 사는 것은 사실은 동물적인 삶입니다. 그냥 살아간다기보다는 그냥 살아있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어떤 목표를 두고 그 길을 향해 달려가고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괴로워하고 이루어졌을 때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것이 아니면 동물적이 삶입니다. 그냥 별일이 일어나지 않고 배불리 먹고 따뜻한 옷 입고 그저 편안히 누우면 오늘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일 수는 없습니다.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무엇인가 바라보는 목표가 있을 때 그것을 향해 가려고 몸부림칠 때 거기에서 울고 웃고 죽도록 괴로워하고 기뻐하면서 살아가는 그 삶이 하나님의 자녀의 삶입니다. 신앙이 없는 세상 사람들도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그저 배불리 먹고 마치 죽을 날을 기다리며 사육되고 있는 짐승과 같은 그런 삶을 행복한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야곱은 정말 그런 동물적인 삶을 세겜에서 이어간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각성하게 되니까 다시금 영적인 권위를 회복하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Ⅲ. 우리를 깨우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이렇게 야곱 한 사람을 만나주셨는데 이 야곱이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결단을 하자 이 야곱의 자신뿐만 아니라 이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인생에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야곱만 깨우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또한 우리도 깨우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이 당신의 품을 멀리 떠나 불순종하고 죄 가운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수하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멀리 떠나 살아가는 우리의 삶, 우리는 느끼지 못하지만 하나님 없이 세겜에서 이 세상의 번영과 성공에 취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채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을 때 우리에게는 들리지 않지만 우리의 영혼 속에는 커다란 울부짖음이 있는 것입니다. 제발 나를 살려달라는 영혼의 외침이 있는 것입니다. “내 영혼은 네가 주는 기름진 음식과 그리고 좋은 의복 그리고 편안한 물리적인 환경에 의해서는 만족을 얻을 수 없으니 내게 내 하나님을 다오.” 하고 소리치는 울부짖음이 있습니다. 그것을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 무뎌진 심령으로 그것을 누르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이 야곱을 깨우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깨우십니다. 자, 하나님이 야곱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벧엘로 올라가라.” 그리고 야곱도 “맞습니다. 하나님, 제가 제 인생에 가장 심각한 벼랑 끝에서 나를 건져주셨던 우리 하나님께 올라가겠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모든 사태들이 해결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가나안족이 쳐들어올 위험은 여전히 있었고 그리고 자식들이 저지른 일은 취소될 수 없는 일이었고 더렵혀진 사랑하는 딸 디나도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과 같이 상처가 없는 상황으로 돌아올 수는 없었습니다. 모든 문제들은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마음속에 솟아오르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 그렇다 하나님을 만나면 해결될 수 있겠다.’ 그래서 뭐라고 그럽니까? “내 환난의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 이라고 고백합니다. 내 환난의 날에 그렇게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사랑하는 엄마 아빠를 떠나 가정을 떠나 가보지도 않은 먼 밧단아람으로 가는 먼 여행길을 떠났을 때 나는 살아서 집으로 돌아올지가 의심스러웠던 절망과 슬픔밖에는 없을 그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날이 바로 환난의 날이었습니다. 그때 나타나셔서 내게 응답해주시고 과연 그 20여년이 넘는 그 긴 나그네 길에 하나님이 함께해주셔서 무사히 하나님의 약속대로 여기까지 오게 해주신다는 감격이 이 야곱의 마음속에 밀려왔습니다. 만약에 그때 그렇게 형에게 진멸될 위기, 사기꾼 같은 라반에 의해서 아무것도 없이 빈털터리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메소포타미아에서의 생활, 그리고 밧단아람으로 가는 길에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에 그 절망적인 상황, 거기서 하나님이 나를 건져주셨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건져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온 가족에게 한 번에 이 신앙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한사람 하나님이 야곱을 먼저 깨우셨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쓰시려는 한 사람을 택하시고 그 사람을 만나주셔서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바꾸어놓습니다.
오늘 남자 성도들이 많이 오셨는데 내가 하나 이야기하겠습니다. 당신들의 아내가 열심히 기도생활하고 은혜를 많이 받고 집에서 열심히 살림을 합니다. 이러면 불만이 좀 있습니다. 나가서 돈 좀 벌지! 그런데 그게 남는 것입니다. 직장을 다닌다고 밑진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깨어있는 아내가 있으면 백번이나 감사하고 섬겨야합니다. 여러분의 인생길이 평안한 것이 어쩌면 아내의 기도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또 여기에 온 자매님들 계십니다. 가정생활이 넉넉하지 않고 남편이 성격이 까다롭습니까? 여기에 같이 손잡고 나와서 은혜를 받겠다고 그러는 것이 기특하지 않습니까? 아니 어느 교회에서는 제발 남편들을 전도하라고 그랬더니 자매님이 새벽시간에 남편구두를 가지고 왔답니다. 매일 새벽마다 구두를 가지고 다닌답니다. 목사님이 그게 뭐냐고 하니까 자기가 기도할 때 구두를 옆에 놓고 “하나님, 우리 남편 구두가 먼저 왔습니다. 사람도 오게 해주시옵소서.” 우리는 웃지만 얼마나 눈물 나는 기도입니까? 얼마나 안타깝고 괴로우면 그러겠습니까? 요즘도 핍박하고 그런 사람들도 많고 여러분이 신앙이 없으면 핍박을 하고 행패를 부리면 감옥에 집어넣는다고 하지만 여러분이 은혜를 많이 받고 원수도 사랑해야겠다고 새벽마다 눈물을 흘리는데 남편이 박대를 하면 참아야지 별수 있겠습니까?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참게끔 되는 것이 원리입니다. 그런데 손잡고 나와서 옆에 앉아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 뜻대로 살아보겠다는 남편이면 나 같으면 업고 다니겠습니다. 나머지는 무엇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살아가는데 말입니다. 내가 각성하고 주님을 만났다고 해서 한순간에 기적이 일어날 것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기적은 그런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잠자고 있는 교회를, 잠자고 있는 가정을, 잠자고 있는 구역을 한사람을 깊이 은혜주시고 깨우셔서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 일입니다. 십년 가까이 전의 일이니까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남자들이 모여서 구역예배를 드리는데 그 구역에는 별난 사람들이 모였답니다. 스머프 영화를 보면 투덜이 스머프가 나옵니다. 어디가든지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구역예배에서 만나면 만날 투덜대는 것입니다. 그렇게 투덜이 대장이 있었는데 바로 그 사람이 구역장이었습니다. 구역장이 투덜거리니까 옆에 있는 사람들은 계속 투덜이가 모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잘 투덜거리던 사람 하나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사경회에 와서 정말 제대로 하나님을 만나고 회심을 한 것입니다. 결국은 그 투덜이들의 모임이 해체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잘 들어보십시오. 목사님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말할 때는 믿어지지 않았는데 같이 투덜거리던 저 인간이 변하니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고백이 무섭더라고 합니다. ‘아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시구나.’ 두렵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이 공포를 가져다주는 그런 종류의 두려움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은 살아 계시구나.’ 설교보다도 더 강력한 외침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최고의 증거는 설교이기도 하지만 그 설교의 영향을 받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가는 여러분 자신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죽했으면 자기의 교인들에게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의 편지라고 했습니까? 여러분이 주님을 제대로 만나고 고난과 시련 속에 잘 참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면 여러분이 아무 말을 안 하고 기쁨 속에서 살면 ‘정말 하나님은 살아 계시구나. 그리고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도 당신의 백성을 붙드시는 사랑의 하나님이구나.’ 이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선교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도입니다. 말의 전도와 존재의 전도가 함께 갈 때 정말 살아있는 것입니다. 가끔 교인들을 만나보면 자기 구역식구들, 자기 구역장이나 순장들을 아주 정말 존경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회자보다 더 존경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를 매일 매일 성경을 통해서 확인할 뿐만 아니라 함께 모이는 사랑과 은혜로 충만한 지체들을 통해서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을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꼬장꼬장하게 공부만 해서 칼을 들고 사람들을 해부나 하려고하는 것이 그것이 사상이 아니라 모든 지식과 사랑을 가지고
(찬양)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Ⅳ. 적용과 결론
벧엘로 올라가라는 주님의 분부를 받들어 벧엘로 올라가면서 그는 제일 먼저 환난 날에 자신을 도우셨던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인생의 환난 날이 있었을 것이고 벼랑 끝에 서있는 것 같은 위기의 시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거기서 바로 정말 인간의 상식과 그리고 인간의 이성의 논리를 초월해서 여러분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를 경험하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거기가 여러분의 벧엘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둠속에서 빛으로 깊은 사망의 웅덩이에서 생명의 샘으로 인도해주셨을 때 여러분은 거기서 야곱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과 언약했습니다.
(찬양)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눈물도 있었고 헌신도 있었고 소명도 있었고 이 생명을 다 드려서라도 이 벌레 같은 인간을 구원해주시고 사랑해주신 하나님을 위해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잠자는 동안 여러분의 벧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님과 나의 환난 날에 주님과의 만남의 감격이 있던 그 아름다운 벧엘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되지 않았나요? 가슴 벅찬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주님 앞에 드리기로 결심했던 여러분의 그 유서 깊은 벧엘이 지금은 모두 무너진 폐허가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행복하셨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결단해야합니다.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벧엘로 올라가는 신앙
“야곱이 이에 자기 집과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창 35:2-3)
녹취자: 박지성
I. 본문해설
이제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기로 결단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거기 가서 자기의 환난 날에 응답하시고 내가 가는 길 그 20여년의 길동안 함께 하신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고 한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자기 집안사람들을 모두 모아 놓고 이렇게 벧엘로 올라가기에 앞서서 그들이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을 지시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사실 집안사람들에게만 지시하는 행위 만이었다기보다는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이렇게 하자는 제안이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너희 중에 있는 이방신상을 버리고 정결하게 하고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이런 일을 하라고 지시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명료하고 간단하였습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여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그저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은 제단을 쌓으라고 한 말씀이었고 다만 그 벧엘이라는 곳이 어떤 하나님과 야곱 사이에 어떤 추억이 있었던 곳인지를 야곱에게 상기시켜주셨습니다. 이 말씀이 오랜 동안 세겜에서의 번영과 성공에 취해 잊어버렸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나게 만들었고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움치고 뛸 수 없는 이 디나의 강간사건으로 말미암아 멸망의 위기를 맞게 되었을 때 비로소 안 들리던 주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은 제단을 쌓으라고 명령하셨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너는 내 앞에 경배자로 서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니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과연 야곱이 처음 세겜에 도착해서 제단까지 쌓았는데 딱 한번 제사를 드리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까지 일체의 종교행위 없이 그 긴 세월을 보냈을까요? 물론 성경은 기록을 안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식으로 판단해도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하나님 모르고 방황하고 사람 원망하며 살던 그 허허로웠던 여러분의 날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여러분은 예배드리다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혹은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기도하다가 성령님 체험했습니다. 그러면 요새는 여러분이 예배 안 드립니까? 성경 전혀 안 읽나요? 물론 기도는 게으르기는 하지만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때에는 왜 옛날에 일어났던 그런 일들이 안 일어나는 것입니까?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변화시키시지만 그 하나님의 말씀은 받아들일 만한 마음 밭에 떨어질 때에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 돌쩌귀와 같은 마음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에서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야곱은 각성된 영적으로 깊이 각성을 하게 되었고 그러자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판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에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인생의 많은 날들이 생각났고 지금현재 자신의 집안에 놓여있는 이 상황이 하나님이 보실 때에 어떤 상황인가 하는 것이 절절히 가슴에 다가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영적으로 변화 받고 싶어 한다고 말은 합니다. 그렇지만 그 마음이 진짜 마음일까요? 정말 삶에 대한 진지함이 정말 그들에게 있을까요? 영적인 변화와 삶의 변화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을 계속하면 하나님의 도움이 별로 필요 없습니다. 무위도식하면서 살지 말라고 제가 금년에도 많이 말씀드렸습니다. 왜 무위도식하면 나쁘냐하면 무위도식을 하면 기도의 제목이 함께 사라집니다. 왜? 기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도와주실 만한 어떤 사태에 직면하거나 그 사태에 직면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것을 극복하려는 사람일 때에 자기의 삶의 사태를 두고 기도하는 것이지 기도가 안 나옵니다. 또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에게는 거룩한 목표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서원한 일에 도전을 해야지만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도저히 이 일을 할 수 없다는 절박함을 느끼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무위도식하는 삶을 살면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제목이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인정하는 바가 아닙니까?
기도는 하면 할수록 할 것이 너무 많고 못한 기도제목 투성이입니다. 그런데 안하기 시작하면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별로 할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기도의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께 간절히 변화의 은혜를 구하면 구하는 사람은 삶이 그 기도에 합당하게 접붙여져 있을 때에 삶이 합당하게 거기에 부합하여 있을 때에 기도가 간절히 나오고 그런 기도를 간절히 한 사람이 힘차게 그 방향으로 삶을 삽니다. 결코 전도하지 않는 사람이 영혼을 붙여달라고 눈물 흘리며 기도를 하겠습니까? 그것이 가능합니까? 성경을 깨달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나는 깨닫지 못하기가 짐승 같사오니 하나님 나를 깨닫게 해주셔서 깨닫지 못하고 왕궁에서 평생을 살기보다는 깨달으면서 주님의 집에 문지기로 살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하겠습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무위도식하는 삶을 살면 살아있으나 사실은 죽은 사람입니다. 영혼 그 자체가 다 침체되어서 하나님을 향해서 마귀도 그런 사람들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언제든지 호출하면 달려오기 때문에 별로 신경 안 씁니다. 그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 년을 새로 시작하면서 하나님 이것 해주세요. 이것 해주세요. 이렇게 하나님 앞에 요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 아니면 어디 가서 그런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 다면 그것은 좀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보고 한 해를 어떻게 살지 목표를 세우라고 했더니 하나님께만 목표를 드립니다. 하나님 목표는 금년에 이런 것 하시는 거라고 모르셨냐고 작년까지 모른 것은 제가 용서해 드릴 테니까 올해는 좀 신경 좀 쓰시라고. 그것이 뭡니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도와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목표를 정하라는 것입니다. 뜻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달력 한 장 넘어갔다고 새 희망이 솟는 것처럼 사람들이 난리치지만 작년에는 그렇게 살았습니까? 이것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되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금년에는 내가 최소한 이렇게 살아야 되겠다는 실천이 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그리고 조금 높이 세워도 괜찮습니다.
(예화) 수능 시험 성적이 나왔는데 제가 아는 분 이야기입니다. 도저히 그 학교 그 학과를 갈 실력이 안 됩니다. 모자랍니다. 그런데 옆에서 3년 동안 과외를 가르쳐준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그냥 집어넣으십시오.”, “20점이나 차이가 나는데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집어넣으십시오.” 이 친구가 공부를 잘하는 친구입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 친구가 하는 이야기가 자기 점수로 안전하게 입학원서를 집어넣으면 곧 수능 끝나고 입시할 때까지 공부를 잘 안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커트라인의 칼날이 발바닥이 간지러울 정도로 오가기 시작하면 아주 표현이 절묘합니다. 커트라인의 칼날이 발바닥이 간지러울 정도로 오가기 시작하면 목숨을 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퍼트가 오른다고 합니다. 막판 뒤집기가 된답니다. 그래서 붙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안 도와주셔도 그저 될 만한 그런 목표는 목표가 아니고 약간 커트라인에 발바닥이 간지러울 정도로 목표를 세우는 것입니다. 허리나 목이 잘릴 정도로 기준을 잡으면 안 되겠지요. 되지도 않는 사람. 아무리해도 안 되는 사람이 올해는 제가 다이어트하고 화장품도 발라서 김태희가 되게 해달라고하면 되겠습니까? 안되지. 그러니까 발바닥이 간지러울 정도의 목표를 세우고 그리고 도달하지 못하면 발목이 끊어지는 구나하고 하는 이 마음으로 살 때 기도가 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강조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뭔가 자신의 삶에서 족적을 이룬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결단을 할 줄 아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보고 우리는 “야, 저 사람은 결심이 정말 강하다!” 그런데 그 결단이 성취된 것만 나타난 것이지 그 결단을 했지만 못한 것들은 다 묻히는 것입니다. 안 그런 것 같습니까? 오늘 결단을 했는데 3일하고 나서 못했다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결단하고 제가 했더니 결국은 1년 만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저보고 얘기합니다. 목사님 참 의지와 결단이 강하실 것 같다는데 나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10타석 1·2안타밖에 안됩니다. 나머지는 제가 말을 안 하지만. 아무튼 의사가 저보고 3㎏만 빼라고 했는데 1㎏밖에 못 뺐습니다. 이게 안 됩니다. 그렇지만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때 거기에서 하나님을 향해 살 수 있는 힘들이 나옵니다. 목표를 세우기 바랍니다. 서론이었는데 벌써 시간이 갔습니다.
II. 벧엘로 가는 자의 결단
어쨌든 그래서 이제 벧엘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벧엘로 올라가는 자로서의 결단이 여기에 등장합니다. 이제 가족들을 다 모았습니다. 그리고 종들과 일꾼들까지 모두 모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야곱이 그들에게 선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이제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로 결심을 했을 뿐이지 아직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하나님이 이 야곱의 말에 권위를 주셨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아무도 토를 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까는 야곱이 한마디 했더니 온 자식들이 덤벼들면서 분을 냈습니다. “그들이 이르되”라고 되어있습니다. 한명이 대표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그 못난 자식들이 전부다 덤벼들면서 아버지에게 말하자면 대꾸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 하나님을 만나고 왔더니 자식들이 모두 굴복하며 이 야곱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우러르며 당신 앞에서 살고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수치스럽게 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그를 붙들어 주셔서 그래서 그를 어떤 방식으로든지 높여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높여주십니다. 그러면서 세 가지를 말하는데 이것은 사실 나는 그 문제에 상관이 없고 너희들만 해라 그런 것이 아니라 야곱 자신이 가족들 속에 있는 이 모든 일들에 대한 개선 사항을 요구할 때 자기 자신도 그렇게 깊은 고통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A. 이방신상을 버림
첫째는 뭐냐면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을 버려라.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이 원래 히브리어로 되어있는데 이 구약 성경이 그대로 전해 내려오지를 않고 곁가지로 퍼져나가면서 사람들이 거기에 해석을 덧붙여서 주석 같은 성경을 만들어 놓은 것이 있습니다.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는데 그것은 히브리어가 아니라 아람어로 쓰였습니다. 탈굼이라고 하는데 온켈로스 탈굼, 요나단 탈굼 이런 탈굼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요나단 탈굼(Jornathan Targum)이라고 하는 성경에 보면 이 부분을 어떻게 다르게 기록했느냐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너희가 세겜의 우상들의 집에서 가지고 온 그 이방 신상을 버려라” 이렇게 해석이 들어가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정확하게 맞는 해석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오랜 시대부터 이 유대인들 중의 상당수가 이 35당 2절을 읽으면서 거기에 나오는 이방 신상이 이러한 유래에서 야곱의 집안에 들어온 신상이라고 하는 것에 해석을 가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주석학적으로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요나단 탈굼이 만약에 진실이라면 그러면 어떻게 되냐면 상당히 저는 거의 맞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밧담아람에서 바로 내려옵니다. 그때는 야곱의 신앙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라헬이 드라빔을 훔쳐서 나오는 장면이 기억나시지요? 그래서 여기 딱 감춰두고 달라고 해도 안 주고 왜 여자가 생리얘기까지 구차하게 하면서 말에서 안 내려오면서 왜 그것을 드라빔 우상을 그렇게 안주려고 했는지에 대해서 학자들이 대개 의문을 많이 가졌습니다. 나중에 그 쪽의 문헌이 발견되면서 그것이 단순한 우상이 아니라 딸인데 아버지가 죽으면 그 집안에 대대로 모셔둔 우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유산청구권과 관련이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라헬이 밑에 감추었지만 물론 신앙적으로 옳은 행동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100%우상에 대한 애착이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가 죽은 후에 재산분할을 할 때 법적으로 요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생각할 때 그때 무슨 법이 거기 있나? 아닙니다. 어마어마하게 법문화가 발달되었고 특히 메소포타미아는 인류 문명의 발상지입니다. 제가 신대원 다닐 때 그쪽 지방 언어를 취미를 느껴서 한동안 공부를 하다가 이제 주님 만나고 다 접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 고등학교 다닐 때 배웠던 쐐기문자가 있지 않습니까? 설형문자들. 그 기록들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져 나오는데 보니까 문서의 천국이었습니다. 물건을 사면 그것으로 영수증까지 주고받았습니다. 연애편지, 집행관의 강제집행구류장 뭐 이런 경찰서류 같은 것이 수없이 나옵니다. 그러니 당연히 법원이 있고 재판을 합니다. 그것이 나중에 고고학의 발굴로 밝혀진 것입니다.
어쨌든지 간에 그렇게 세겜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세겜에 들어와서 야곱이 처음에 그렇게 얍복강가에서 주님을 만나고 감격하고 한 그런 상태에서 그들이 그런 우상을 많이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가장 개연성 있는 해석은 세겜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면 같은 문화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입장에서 대적해야 할 경계선을 긋고 대치해 있는 적국이 아니라 다 고객들입니다. 여러분이 요새 전화 잘 받으시죠? 고객님. 그러잖아요? 그렇게 다 고객입니다. 그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삽니다.
어울리며 산다는 것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저사람 속으로 흘러들어가고 저 사람 속에 있는 것이 내속에 흘러들어오는 것이 교류입니다. 놀라운 교류가 이루어집니다. 교류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제 마지막으로 이제 그 사람들이 틀림없이 우상의 집들을 야곱이 방문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가족들이 상업적인 이유로든지 종교적인 이유로든지 드나든 것입니다. 거기서 아마 우상도 팔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우상을 보면 집채만큼 어마어마하게 큰 것도 있지만 연필깍지같이 작은 것도 있습니다. 종류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집 앞에 놓는 것은 좀 크고 방에 놓는 것은 좀 작고 어디가든지 나와 함께하는 우상은 연필깍지 만하게 만들어서 호주머니에 달고 다니고 목걸이에 달고 다니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 우상이 자기를 지켜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조나단 탈굼이 너희가 세겜의 우상들의 집에서 가지고 온 사가지고 왔을 것입니다. 가지고 온 그것을 버려라 이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도 보면 그 이방의 신상들을 치워라 그러니 이것이 한 개가 아니라 아주 여러 개 그래서 각자 자기의 방, 자기 집에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호신용으로 가지고 다녔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것을 다 치워버려라. 성경에서 이 이방신상을 어쨌든 하나님은 당신을 빚어서 어떤 형태의 우상이든지 만들지 않도록 강력하게 요구하셨고 그 이방의 신상을 버리도록 그렇게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지을 수 있는 가장 종교적인 죄가 바로 이 이방신상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그럼 그것을 미워했는가? 그것이 뭐냐면 이것은 사랑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여기에 이의를 달 수 있습니다. 뭐냐면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사이에 끊임없는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학술적인 용어로 ‘리브패턴’이라고 합니다. 리브는 히브리말로 ‘다투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끊임없는 다툼의 패턴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우상문제입니다. “너희는 나를 버렸도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선지자가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답합니다. “우리가 언제 주님을 버렸습니까? 우리가 언제 주님께 절기를 지키지 않고 제사를 드리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그러면 이제 선지자가 “너희가 하나님과 함께 이방신을 섬기려고 하지 않느냐 그것은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이해하기 굉장히 어렵습니다. 왜냐면 이방신의 개념에는 그런 개념이 별로 없습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와 여기 가나안의 종교 자체가 다신교였습니다. 다신교는 남의 종교에 대해서 관대합니다. 그 신을 인정하느냐 안하느냐에 대해서 굉장히 관대합니다. 다신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종교는 유일신 종교입니다. 그러니까 다신교에서는 그 자기의 특정한 신만 가장 높이 섬기면 됩니다. 그러나 유일신 종교에서는 그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은 신이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죄입니다. 더욱이 거기에 의지하는 것은 더더욱 큰 죄입니다. 왜냐하면 의존의 반복은 반드시 사랑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해됩니까? 많이 의지하면 결국은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야곱이 이 이방신상을 버려야 되겠다고 한 이 결단은 결국 야곱이 세겜에서의 번영과 성공에 취해서 그의 중심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정말 하나님도 말씀하셨죠?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내가 나타났던 하나님” 이렇게 길게 당신을 소개하셨습니다. 자 에서를 피해서 도망갔을 때 이제 굶어죽을지도 모르고 가보지도 못한 밧단아람에 도착할 지도 모르는 위기상황 속에서 나타나서 도우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거기 가서 라헬을 사랑했지만 사기꾼 같은 꼬임에 빠져서 14년이라는 세월을 품삯 하나 받지 못하고 가난뱅이가 될 수밖에 없을 때에 그를 지켜주신 분이 누구셨습니까?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거부가 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었고 어쩌면 자기를 죽일지도 모를 복수심에 불타는 형의 마음을 녹여서 얍복강가에서 뜨겁게 끓어 안고 말하자면 재회의 눈물을 흘리게 한 분도 하나님 이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생생하게 도움을 입으며 살았으면 그 하나님을 의지해야합니다. 그런데 세겜에서의 번영과 성공에 취하면서 세겜 사람들이 우상을 의지하며 잘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도 남의 땅에 와서 이류백성으로 취급되지 않고 그들과 함께 한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상이 들어오기 시작했는지 아마 종교적인 목적이 아니라 처음에는 문화적인 목적으로 들어왔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의 유일신 신앙이 허물어지기 시작해서 디나의 사건이 일어날 때에는 바닥까지 내려가 버린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고 주님과 함께 한 해를 시작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여러분 속에 있는 하나님 아닌 것들에 대한 사랑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때로는 너무 아픈 일일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살과 같아서 그것이 무엇이든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떼어낼 때에는 그 사랑이 끊어지는 고통과 아픔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사람에 대한 사랑이든 세상과 물질에 대한 사랑이든 명예에 대한 집착이든 인간에 대한 집착이든 무엇이든지 그 무엇이든지 간에 이 일은 우리가 하나님 만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버려야합니다. 영적인 침체와 타락은 결국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님 사랑하며 하나님 의지하며 살아야 할 우리들이 그 사랑과 의지의 질서가 와해되면서부터 그런 깊은 침체가 우리의 영혼 속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우리의 삶을 주관했던 그 이방신상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돈에 취해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더라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이 세상에서의 번영과 성공에 취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무위도식하는 삶을 살았다면 그것이 여러분이 어떤 죄를 좋아해서 거기에 탐닉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 만나지 못하게 하는 이방의 신상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이 야곱에게 너 이방의 신상을 버려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만나고 보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보니까 하나님이 이방신상에 대해서 한 말씀도 안했는데 하나님이 이 사람을 각성시키시니까 정신 차리게 된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내가 내 마음에 품은 우상이 무엇인가? 그것을 하나님 앞에 버려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들이 당신을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받고 싶으셔서가 아니라 우리가 당신을 사랑할 바로 그때에 우리가 가장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외에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은 사랑스러운 것들에 대한 사랑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사랑에 대한 사랑입니다. 누구도 사랑 자체를 사랑하지 않고는 진정한 사랑의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깨뜨려진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서 깨뜨려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B. 자신을 정결케 함
두 번째는 자신을 정결케 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을 정결하게하고”라고 말합니다. 히브리말로 ‘타헤르’라는 동사입니다. 이 타헤르라는 동사는 불결로부터 깨끗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레위기 11장 32절에 보면 이교적인 불결로부터 정결케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고 사도행전 13장 27절에 보면 도덕적 불결로부터 정결해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고, 열왕기하 5장 10절에 보면 의식,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의식의 불결로부터 다시 깨끗해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이교적인 불결이든지 도덕적인 불결이든지 의식적인 불결이든지 간에 결국 그 불결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이에 대한 답은 불결이 무엇을 방해하는 지를 보면 됩니다. 자, 이교적인 불결이 있다고 해서 야곱의 집안이 세겜에서 성공과 번영을 못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제없습니다. 도덕적으로 불결하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모두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예화) 최근에 중국의 사정에 칼바람이 붑니다. 한 해 동안에 공무원으로서 감옥에 들어간 사람이 18만 명이라고 하니까 어마어마합니다. 그중에서 잔챙이들은 자디잘게 형벌을 받고 풀려나는데 굵은 대어들이 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몇 십억 몇 백억씩 심지어는 몇 천억씩 해먹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문에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유형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게 무엇이냐면 그것을 다 이야기할 수는 없고 대표적인 것이 뭐냐면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잘못했으니 한번만 봐달라는 형이랍니다. 그런데 그중에 어떤 사람이 마지막 재판에서 돈을 너무 많이 몇 십억을 해먹은 것입니다. 자기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하면서 어렸을 때 얼마나 가난했는지 그 형제들이 다 가난해서 끼니가 간 데가 없고 병들고 그러면서 그 돈 없이 가난하게 사는 것이 너무 한이 맺혀서 그 다음에는 철이 들면서 돈에 대한 욕심을 자기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고 하면서 자기가 돈 없이 고생스럽게 자수성가해온 모든 길을 눈물을 쏟으면서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읍소형입니다. 그런데 재판장이 파격적으로 형을 깎아주었다고 합니다. 거의 사형당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13년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판에서도 판사들이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런데 같이 우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나도 그 이야기를 듣는데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러한 것도 있고 뭐 여러 가지 형태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도덕적으로 불결했다고 해서 뭐 성공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적으로 불결했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 아닙니다.
그러면 그 불결이 무엇을 가로막습니까? 단 하나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 자신을 정결하게 하라는 것은 사우나를 다녀오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불결, 이교적인 불결, 도덕적인 불결, 의식적인 불결 대표적인 세 가지의 불결들이 이미 야곱과 그 집안사람들에게 깊이 침투해있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구린내 나는 상태였습니다. 서울에는 별로 없지만 시골에서 헛간 같은데서 놀다가 보면 헛간에 깔아놓은 가마니 데기를 들어보면 그 속에서 지렁이부터 시작해서 온갖 벌레들이 막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이 야곱의 집안의 상태가 그랬습니다. 그런 속에서 살아가는 이 불결한 상태를 해결하라. 깨끗케 너희 자신을 정결하게 하라 사실은 궁금한 것이 어떻게 정결하게 할까? 궁금했습니다. 그들이 고작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이방신상을 다 내어버리고 이제 하나님이 보시기에 불결했던 것 그런 행동을 하지 않고 몸도 깨끗하게 씻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살지 않기로 하는 것. 그런 정도가 아니었을까요? 그런 것이었겠지요.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 앞에 다시 정결해져야 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이 불결해져야 되겠다고 오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이들이 밖에 나가서 놀고 오면 개판이 되어서 옵니다. 애들이 나갈 때 면밀 주도하게 계획을 합니까? 엄마가 오늘 새 옷 입혀줬으니까 바지에는 진흙을 묻히고 왼쪽 팔꿈치에는 흙을 발라야지. 그리고 그네 타다가 친구들과 싸워서 왼쪽은 좀 찢어가지고 가야지 그러지 않습니다. 그냥 애들하고 어울려서 새 옷 입은 줄도 모르고 하루 정신없이 놀다가 들어오면 찢어지고 진흙이 묻고 개판이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만 그렇습니까?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결해졌다고 해서 교회당 딱 나서면서 불결해지기 위한 일주일이 남았구나. 이번에는 골고루 불결해져야지. 월요일에는 한번 어떤 쪽으로 불결해 볼까? 그러고 오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냥 딴에는 그래도 하나님 기억하며 산다고 그랬는데 굴러먹다가 보니까 그냥 진창에 묻고 더러워지고 막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리스 본문이 ‘마카리호이 호이 카탈로이’라는 희랍어 단어인데 그 ‘카탈로이’가 여기에 나오는 ‘타헬’이라는 단어와 같은 뜻입니다. ‘카탈로이’라는 단어에서 영어 카타르시스가 나옵니다. 물 같은 것으로 깨끗하게 씻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결국 뭐냐면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물을 부어서 깨끗이 자신이 씻김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 사람들이 사용했던 물로도 씻길 수 없었던 더 더러운 불결도 씻을 수 있는 은혜의 샘이 주어졌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입니다. 그래서 그 피에 깨끗이 씻으면 사람들은 손가락질 할지 모르지만 주님은 그를 정결한 자로 여기시고 하나님 앞에서 다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보다 자기를 우상 삼으며 살았던 사람들 결국 불결해지는 것은 그렇게 사랑에 있어서 우선순위를 하나님 우선수위에서 하나님을 제외했기 때문에 생겨난 불결입니다. 그런 불결 속에 있었던 사람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깨끗하게 하시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당신의 십자가 앞으로 이끄십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앞에서 이미 내가 믿는 하나님이 내가 의지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봇 박혀 죽으실 때 나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할 때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짓고 우리의 과오가 있으면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 기억이 남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평생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았던 사람인데 두 가지 끔찍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살인과 간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셨지만 사람들은 기억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그 모든 것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사태들과 직면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했더니 그것이 오히려 십자가가 되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더 순결하게 하고 그리고 의지하면서 살게끔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눈물 흘리며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도 여러분이 잘못한 어떤 결과들이 남아서 여러분에게 십자가가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실 하나는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여러분을 덜 사랑하시거나 마음에 앙심을 품고 여러분에게 복수할 제2, 제3의 기회를 노리시는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때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 모든 불결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걸음씩 나가네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정말 불결한 죄인이고 불결해지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했지만 경결해지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정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면서 그러면서 주께서 우리를 위해 뿌리신 핏길을 걸어 찢으신 그 휘장을 지나 거룩한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보좌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 하나님께 진실하게 고백하고 어린 아이처럼 용서를 빌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자비와 은총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예화) 어떤 집안에 아이가 있었는데 아이가 자라면서 돈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에 가도 친구들이 자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돈으로 무엇을 사주면 자기를 좋아하는 것에 재미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이제 엄마 지갑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엄마도 정신없이 사니까 천 원씩 한 장 가져갈 때 별로 표가 안 나지 않습니까? 저도 지갑이 있지만 얼마가 들었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커지니까 단위가 점점 큰돈을 꺼내야 했습니다. 어느 날은 아이가 돈을 탁 꺼내는데 무슨 생각이 들었냐면 지갑이 홀쭉해서 엄마가 금방 눈치 채면 어쩌나 그러고 종이를 돈과 똑 같은 크기고 오려서 넣었습니다. 그랬더니 엄마가 드디어 어느 날 불렀습니다. “애야 나 좀 보자.” “네, 엄마.” ‘나는 이제 반 죽었구나.’ 그랬는데 엄마가 그러더랍니다. “우리 아들은 어쩜 그렇게 창의적일까? 돈 대신 돈과 똑같이 생긴 종이를 집어넣었구나.” 아이가 갑자기 당황해서 “엄마 지갑에서 돈 안 훔쳤어요.”, “나는 지금 종이이야기를 했지. 돈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꼭 안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날부터 용돈을 올려줬습니다. 그리고서 이 아들이 그 손버릇을 고쳤다는 어느 간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결국 이방신상을 섬기는 것 같은 삶을 살면서 불결해진 우리를 고치고 새롭게 하셔서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이런 저런 자격조건을 갖추면 내가 만나주마 라고 한다면 모든 사람이 주님 만나고 나서 주님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얼마나 주님 만나려고 준비를 했는지 아마 자랑을 할 것입니다. 그 때 우리 같은 사람들은 대부분 소외감을 느낄 것입니다.
(찬양)
이 모습 이 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정결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있으니 그 임마누엘의 샘으로 돌아와 회개하는 모든 사람들 하나님이 다시 깨끗해 하셔서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실 뿐 아니라 다시 당신의 사랑 속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니 주님 의지하고 정결해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C. 의복을 바꿔입음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의복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말합니다.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고 말입니다. 크나벨이라는 신학자는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아마도 의복을 바꾸어 입으로가 말하는 것은 여기 세겜에서 벧엘까지의 길이 거리가 있는 먼 길이니 여행에 적합하도록 일상적인 복에서 여행을 위한 복장으로 간편하고 활동하기에 좋은 옷으로 갈아입으라는 뜻일 것이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물론 그 해석이 틀리지 않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제 성경을 보면 이 의복이 성도의 행실을 가리키는 단어로 나옵니다. 그래서 계시록 3장 18절, 6장 15절 같은 데에 보면 결국은 이 의복이 성도의 마땅한 행실입니다. 여러분 혹시 그런 꿈 못 꾸어보셨습니까? 저는 어렸을 때 많이 꾸었습니다. 어렸을 때 내가 하나님 앞에 잘 못살면 항상 꿈에 옷을 입었는데 막 뭐가 묻은 꿈이 꿔지거나 아니면 아주 중요한 모임에 내복 바람으로 나타나는 꿈을 꿉니다. 한동안 제 콤플렉스였습니다. 그 꿈이 꾸어지면 ‘지금 뭔가 삶의 행실이 잘못되어 있구나.’ 그래서 내가 옛날에 읽던 성경을 보면 그런 것이 쓰여 있습니다. ‘오늘도 그런 꿈을 꿨다 도대체 성도의 행실이 무엇이어야 하는가?’ 낙서 비슷하게 메모를 해 놓고 다시 성경을 읽기로 결심한 그렇게 써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의복을 아주 분명하게 성도의 행실이라고 말합니다.
여행가기에 적합한 옷으로 물론 갈아입으라는 뜻이었겠지만 여기에서 옷을 갈아입으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옷을 벗으면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을 벗어버리면서 그러면서 이제 너희들은 이제까지 살았던 삶이 아닌 새로운 삶을 하나님 앞에 우리 모두 살자. 그런 다짐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새롭게 말하자면 사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하나님 의지하지 않을 때에는 그렇게 하나님 의지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한 합당한 행실들이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게 눈에 띄게 드러나느냐 눈에 잘 뛰지 않느냐라는 차이는 있지만 누구든지 하나님 경외하지 않는 것만큼 하나님을 불신앙하는 행실을 낳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래서 의복을 바꾸어 입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중요한 결단입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 드렸듯이 삶에 대한 개혁이 없이는 영혼의 진정한 변화가 어렵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같이 갑니다. 그런 것 아닙니까? ‘아! 이제 내가 정말 그동안에 기도생활을 안 했구나. 이제 기도해야지.’ 그러면 반드시 시간도 필요하고 장소도 필요합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야지 퇴근하다가 집에 가기 전에 교회에 들러야지 아니면 점심 때 기도해야지 등등의 실제적인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쳐야지 기도만 한다고만 하면 뭐입니까?
요새는 어떤지 모르지만 이제 구정명절이니까 여기저기서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까? 전에는 광고가 막 나왔습니다. 콘도로 막 놀러가니까 콘도로 배달을 해줍니다. 교자상과 다 펴놓고 갑니다. 그러면 와서 절만하면 됩니다. 그것을 먹고. 깨끗이 처리도 다 해줍니다. 그러니까 이제 몇 년 전에는 무엇이 나왔냐면 그것도 돈이니까 가족 넷이서 놀러갔는데 차례 상 하나 차려 놓으려면 그 당시 돈으로 20만원, 좋은 것은 30만원 넘으니까 누가 뭘 만들었냐면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제사를 인터넷에 차려서 드래그하면 여기에 굴비, 탕국, 고기 다 드래그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조상님 이름을 탁탁 쳐 놓고 자기 아버지 신의 그렇게 써놓으면 됩니다. 그 다음에 차려 놓은 그림에 여기 사람이 있어서 클릭을 하면 그 사람이 절을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첫날 인터넷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고, 우리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나와도 되는 사람이 인터넷을 보고 있는지 인터넷을 볼 수밖에 없는 사람이 그렇게 하고 있는지 둘 다 안보면 더 나쁜 사람이지만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만약에 좀 과장했지만 하나님 앞에 드릴 예배를 그렇게 인터넷으로 여기다가 제사상을 차리듯이 여기에 사랑과 순종을 다 드래그해서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만약에 하나님이 인터넷으로 복을 주시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기에 복이 있다. 많이 가져라. 그리고 요새 잘 나가는 경기 활성화된 지역의 땅을 탁 찍어서 보이면서 자 이게 네 것이다 작은 글씨도 그림만. 그래도 괜찮습니까? 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인터넷을 시청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볼 수밖에 없는 분은 보시고 다른 분들은 나오라는 것입니다. 외국에서 보고 계시는 분에게 왜 여기에 안 오냐고 하는 것 이 아니고 대구에 계시는 분에게 안 오시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이 아파서 입원실에 있는 분에게 왜 안 오시냐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옳은 길로 가고자 할 때는 반드시 우리의 삶을 흔들어야 합니다. 흔들지 않고는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몸을 움직이고 시간을 내고 무엇인가 투자를 해야지만 하나님께 순종 안하던 사람이 순종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귀를 기울일 수 있고 말씀에 은혜를 받을 수 있지 어떻게 하느냐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무지와 어둠속에서 지내던 사람들이 오늘이라도 제발 도서관에 들러서 수천 권의 책들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데 동네 가서 보고 그것을 읽고 듣고 무엇인가를 깨달아야지 “하나님 제가 하나님 말씀 멀리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면 성경이라도 읽어야지 그것이 다시 자신의 삶의 개혁이 되는 것이지 “그렇게 살아서 죄송했습니다.” 그러고는 그 다음날 와서 “죄송했는데 오늘도 또 죄송합니다.” 하루 이틀이지 애들 장난입니까? 그리고 첫날은 그것이 진지한 마음으로 고백이 되어 나와도 자신의 삶을 고치지 않으면 둘째 날은 재현이 안 됩니다. 재현이 되면 이상합니다. 셋째 날, 넷째 날 매일 매일 주님 만나서 연기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삶을 개혁하고 결단과 용기와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의 승리는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써 주어지는 승리입니다. 한 해의 여러분에게 빌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는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입니다. 아까 부른 찬송 너무 은혜가 되지 않습니까?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믿노라. 그 믿음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주신다. 한번 불러볼까요?
(찬양)
여기에 모인 우리 주의 은총 받은 자여라 주께서 이 자리에 함께 계심을 아노라
언제나 주님만을 찬양하며 따라가리니 시험을 당할 때도 함께 계심을 믿노라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주신다 어둔 밤에도 주의 밝은 빛 인도하여주신다
주님의 뜻하신바 헤아리기 어렵더라도 언제나 주 뜻 안에 내가 있음을 아노라
사랑의 말씀들이 나를 더욱 새롭게 하니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승리를 믿노라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주신다 어둔 밤에도 주의 밝은 빛 인도하여 주신다
여기에 모인 우리 사랑받는 주의 자녀라 주께선 뜻하신 일 우릴 통해 펼치신다
고통과 슬픔 중에 더욱 주님 의지하오니 어려움 이겨내고 주님 더욱 찬양하라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주신다 어둔 밤에도 주의 밝은 빛 인도하여 주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기까지 사랑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이 성령 충만하고 충성스럽게 살 때에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야곱과 같이 자신도 어찌할 수 있는 인생의 벼랑 끝에서 마지막 의지할 분이 주님뿐임을 알고 주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해를 우리 주님과 함께 평화를 누리며 시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영적부흥을 위한 조짐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 나무 아래에 묻고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창 35:4-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야곱이 온 가족들을 모아놓고 종들과 더불어 벧엘로 올라가기 위해서 어떻게 준비해야 될지를 가르쳤습니다. 이방 신상을 버리고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고 지시를 하였습니다. 영적으로 각성을 하고 나면 그때 비로소 삶을 객관적으로 직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침에 일어나서 겨울에 추우니까 온 방안 문을 꽉 닫아놓고 잡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이불을 펄럭거리면서 개기 시작합니다. 커튼이 쳐져있는 동안에는 얼마나 더러운 그 먼지가 온 방안을 가득 채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커튼 한쪽을 걷고 아침에 눈부신 햇살이 투명하게 들어오기 시작하면 ‘웁’ 하고 입을 틀어막게 됩니다. 어마어마한 먼지들이 날아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각성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보지 못하던 그것을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게 만들어 주어서 그래서 객관적으로 볼 수 없었던 자신의 삶을 직시하고 그리고 내가 어디에서 떨어졌는가, 어디에서 은혜로부터 미끄러졌는가, 그리고 지금 나의 삶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삶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을 보게끔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야곱이 이 세겜에서 성공과 번영에 취하여 잃어버렸던 영적인 권위를 회복하게 된 것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점이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하늘을 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성령 충만을 주시지 않아도 일단 우리의 인생이 어디로 가야할지, 지금 내가 어디에 와 있고, 어떻게 하면 이 시험에서 벗어나서 다시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할 수 있을지 분명하게 길을 알 수만 있어도 사실은 절반은 승리한 것입니다. 이제는 그렇게 안길을 놓고 나면 기도가 명료해지는 것입니다. 대부분 영혼의 침체에 빠진 사람의 기도는 맥이 없습니다. 무엇을 하나님 앞에 해 달라는 뚜렷한 요구사항이 없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직원들 데리고 일해 보면 1년이 지나도 무언가 건의하는 것이 없는 직원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유능해서 조금도 윗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스스로 처리하면서 훌륭하게 해 나가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되는 것은 하고 안 되는 것은 내버려두는 사람입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발전이 없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일을 해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항상 건의사항이 있습니다. ‘무엇을 이렇게 해 주십시오, 저렇게 해 주십시오.’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느 길로 가야되는지만 확실히 알고 그 길을 꼭 가야되겠다고 하면 그쪽 방향으로 기도가 간절해지는 것입니다.
지하실 교회에 있을 때인데 그때 지금도 그렇지만 돈도 없고, 그러니까 전도지를 어디서 찍을 돈도 없고 그냥 타자로, 컴퓨터로 쳐서 그냥 프린트하면 복사 가게에서 필요한 것만큼 복사해서 잘라서 나눠주고 그랬습니다. 한번은 전도지를 누가 가지고 왔는데 “와 보라. 열린 교회로.” 유치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야, 이걸 보고 요즘 세상에 누가 오겠냐?” 그런데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 퍼뜩하고 기가 막힌 문구가 하나 떠올랐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올바로 살고자 하나 그 길이 어디인지를 모르고 올바른 길을 찾았으나 그렇게 살 힘이 없는 사람들은 열린 교회로 오십시오.”라고 썼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들고 감동을 받아서 왔습니다. 그것을 조잡하게 이렇게 컴퓨터로 필기체로 썼는데 보는 순간에 눈물이 확 쏟아지더랍니다. 자기는 알고 보니까 올바른 길로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 길이 어디인지를 몰라, 그런데 또 막상 알고 나면 그렇게 갈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우리의 지성이라면 갈 수 있는 그 힘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우리의 의지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가 항상 결합이 되어야지만 우리가 승리하는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야곱은 하나님을 만나 각성하게 되었고, 이제 도저히 자신의 꾀로도 피할 수 없는 디나의 강간사건, 가나안 족속에 의한 끔찍한 보복의 위협을 느끼는 인생의 벼랑 끝에서 하나님 앞에 벧엘로 올라가서 그 하나님을 뵈옵고자 결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영적으로 각성한 한 사람으로부터 부흥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 같은 놀라운 일들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 한 사람으로부터 위대한 시작을 이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은 여러분 자신의 것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가정에서 먼저 예수를 믿었거나 혹은 모든 가족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이 주님을 깊이 만나고 우리 가족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된다면 그 신실한 믿음으로 목표를 정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 하나님이 야곱처럼 잃어버렸던 영적인 권위를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시려고 먼저 찾아가셔서 은혜를 주십니다. 온 가족을 함께 깨우시기도 하지만 아내를 먼저 깨우셔서 혹은 남편의 마음에 각성을 주셔서 혹은 어린 아이의 마음에 큰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이 가족을 주님께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한 10년도 더 되었습니다. 싱가포르에 집회를 갔는데 거기에서 집회 끝나고 쉬는 시간에 그 교회에 있는 어느 집사님이 목사님하고 저를 데리고 케이블카를 태워 주었습니다. 그 센토사 섬으로 건너가는 케이블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안수집사랍니다. 그러면서 “집사님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셨습니까?” 자기는 예수하고 아무 상관없이 사업 잘하던 사람이랍니다. 싱가포르에 와서 열심히 일해서 장사해서 돈을 꽤 벌었는데 자기가 정말 사랑하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초등학교 5학년이랍니다. 이제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거기 와서 이제 케이블카를 타고 기억이 안 나는데 바다인가 강인가를 건너서 그래서 섬으로 들어가는 케이블카를 타려고 하는데 왜냐하면 그게 관광 코스이니까. 초등학교 5학년 된 아이가 “아빠 이거 타지마. 난 무서워 안 탈래.” “왜?” “나 꿈에 이 똑같은 케이블카를 봤는데 줄이 끊어지면서 케이블카가 떨어졌어.” 싱가포르가 그런 점에 있어서는 철저한 나라입니다. 아빠가 웃으면서 “야, 말도 안 되는 개 꿈 생각도 하지 마라. 야, 빨리 타자.” 나중에는 얘가 울면서 안탄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빠가 기분이 팍 상한 것입니다. 오래간만에 온 가족들 즐겁게 해 주려고 왔는데 꼬맹이 녀석 하나가 그렇게 심술을 부리고 나중에 울면서 안타겠다고 하니까 가족들이 마음이 상해서 안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표를 못 끊고 내려가는데 진짜로 케이블카가 거기에서 이제 사고가 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는 것이 두 케이블카가 서로 부딪힐 수는 없는데 케이블카가 가서 고장이 나서 꼭대기에서 매달려 가지고 뭐가 끊어졌대나 사람이 죽지는 않았는데 굉장히 큰 사고가 난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 단순한 마음에 ‘콱’ 하고,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 순간에 두려운 느낌이 확 밀려오더랍니다. ‘아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시는구나.’ 그것을 보면서 몇 사람이 부상을 입었고 그것을 보면서 이 사람 마음이 확 돌아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이가 자기 꿈 얘기를 상세하게 해주면서 자기가 기도했다고 그 아버지가 그 주일부터 교회 나가기 시작해서 안수집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각각 수준대로 다루십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대로. 하나님이 항상 사용하시려고 하는 그 사람을 제일 먼저 찾아가셔서 그 아이가 아주 어린 아이일지라도 하나님이 그 아이를 사용하셔서 그 가족을 구원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아이를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면 거꾸로 놓고 생각해보면 여러분 한 사람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안하면 여러분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여러분에게 수없이 달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함께 비참한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세겜의 번영에 취해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가나안에 돌아가지도 않고, 그 이삭이 이때까지 살아있었습니다. 나이 계산으로 보면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뒤에 가보면 이삭이 180세에 죽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살아있습니다. 아버지가 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세상 번영에 취해서 코앞에 집을 놓고도 안 간 것입니다. 나쁜 사람입니다. 인간적으로도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돌이켜서 그래서 그들을 다시 하나님 사랑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위대한 사람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아브라함을 읽을 때에는 그렇게 감동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워낙 처음부터 훌륭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워낙 순결합니다. 이삭은 워낙 온유합니다. 여러분 닮은 사람은 세 사람 중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 사람이 여러분의 조상입니다. 야곱의 후손입니다. 우리 모습을 꼭 보는 것 같습니다. 도망갈 수 있는 데까지 도망가보고, 피하는 데까지 피해보고, 얻어맞아서 견딜 수 있는 데까지 참아보고 그렇지만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 이런 사람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당신의 일들을 이루어 가시기 때문에 사실은 야곱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그 은혜가 현실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가장 와 닿는 것입니다.
II. 영적 부흥과 변화의 조짐
A. 이방 신상들을 제거함
어쨌든 이제 야곱이 너희 중에 이방신상을 버리고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어 입어라 그랬더니 이번에는 거기의 자식들과 종들이 모두 이제 자기 손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제거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손에 있다는 것은 손에 들고 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자기가 처분할 권한이 있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손에 들고 있을 정도로 호신용 우상 같은 것은 손에 들고 있었겠지만 더 큰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뭐든지 자기가 세겜의 우상의 집에서 가지고 온 그 우상들에 대한 처분권이 있는 그 모든 우상들을 다 가지고 와서 그것을 내려 야곱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이것은 야곱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야곱이 확신에 차게끔 이 가족들의 갈 길을 보여주자 이제 같이 있던 모든 가족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놀라운 권위를 보면서 거기에 복종하고 그리고 오랫동안 간직했던 정들었던 이방 신상들을 모두 내려놓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 이것이 쉬운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정들었던 사고방식이 이 이방신상을 의지하며 사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벧엘로 올라가기에 앞서서 그리고 가까이 닥쳐오고 있는 가나안 족속들에 의한 보복의 위협을 생각하면서 이 이방 신상들을 모두 제거해 버리는 것은 결국 하나님 의지하며 살겠다는 결단에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만났으니까 갈 길이 정해졌다고 하지만 가족들이야 두려움에 가득찬 것 이외에 무슨 느낌이 있었겠습니까? 결국은 야곱의 결단을 보면서 어떤 저항할 수 없는 어떤 권위가 느껴졌던 것입니다.
권위와 권위주의의 차이가 있습니다. 권위는 자기가 그것을 내세우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이 권위이고, 그래서 기꺼이 거기에 복종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게 권위고 권위주의는 근거가 불확실한 토대위에서 사람들을 억압하기 위해서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위는 분명한 근거가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초하지만 권위주의는 그 기반이 없이 사람들을 지배할 목적으로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권위주의입니다. 그러니까 정당한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커다란 범죄입니다. 그리고 그 권위의 근거가 없는데 맹종하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순종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올바른 하나님에 대한 앎, 그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와 질서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가지면서 사는 것,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 권위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권위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속의 전부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 세워놓은 권위도 함께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번 어디를 갔는데 목사님들하고 평신도들하고 같이 이렇게 모였는데 물론 이제 각자 자기 정치적인 생각이 있으니까 이런 사람은 내 맘에 들고, 저런 사람은 내 맘에 안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명색이 한 나라의 대통령인데 “근혜”가 뭡니까? “명백이” 너무 마음이 상했습니다. 설령 내가 그 사람을 안 찍었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이 됐으면 대통령이라고 그래야지, “명백이”라고 뒷집의 머슴 부르는 것도 아니고, “근혜가 온다는데.” 어떻게 저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 사람이 교회의 장로고 안수집사인데 그 교인들이 자기들을 그렇게 모여 앉아서 부르면 자기는 어떤 태도가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옳지 않은 태도입니다. 저는 이런 신학이 성경적이라고 봅니다. 나라가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정의를 배신하고 회복될 가능성이 없으면 국민에게는 혁명권이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그래서 그런 정부는 도태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그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누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국 권위와 권위주의는 그 근거가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 강요된 것이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냐의 차이입니다. 야곱은 지금 족장의 권위로서 강제적으로 이 사람들 비인격적으로 누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께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분명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셔서 놀라운 권위를 주신 것입니다. 야곱이 자기의 자녀들과 집안 식구들에게 혈기를 부리거나 폭력을 행사하거나 위협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이제 벧엘로 올라가고자 한다. 그러니 너희 주위에 있는 이방 신상을 버려라.” 그랬더니 그 신상들을 모두 내려놓았습니다.
종종 우리는 건강이 확신이 없을 때 진찰을 받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로 진찰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대부분 이제 건강을 심각하게 잃어버리고 걱정스러운 징조가 나타나야지만 겨우 병원을 찾아가는 어리석은 때가 있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을 향해서도 그렇습니다. 영혼은 미끄러져서 망가지기 전에 벌써 자신이 건강한 상태가 아니라고 하는 신호를 우리에게 수없이 보냅니다. 그게 신호를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신호가 자기의 영혼에 무슨 의미를 주는지를 파악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죄와 세상에 대한 사랑은 일단 맨 처음 신자에게 침투하기가 어렵지 일단 침투하고 나면 양심과 건전한 정신의 기능을 와해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속에서 죄가 친화적인 작용을 하게 됩니다. 이게 죄의 주관화입니다. 객관적으로 그것을 그렇게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지를 않게 됩니다.
저는 회심하기 전에 회심하고도 한 4년 동안 담배를 많이 피었다고 했습니다. 하루에 한 갑반씩 피었습니다. 담배를 끊는 사람은 그래서 살인도 한다고 그럽니다. 그렇게 정말 중독성이 강합니다. 그런데 금연운동 본부 같은데서 담배를 많이 피고 죽은 사람의 폐 같은 것을 자른 것을 사진도 가지고 다니고 어떤 때는 포르말린 병에다가 폐를 잘라서 보여줍니다. 담배를 피우면 폐가 어떻게 되냐 하면 짜장에 절인 것처럼 됩니다. 그런데 진짜 담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외면하고 가지 그 안에서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실을 직면하기가 싫은 것입니다. 어차피 못 끊는 담배인데 그냥 모르고 피면되지 그것을 가서 들여다보고 이 사람들이 뭐라고 하냐면 그런 것 쳐다보면 담배 맛 떨어진다고 합니다. 사람은 살고 싶은 대로 살다가 죽는 거지 그까짓 것 몇 년 더 살면 뭐하냐 그럽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폐암에 걸려서 그렇게 해서 니코틴에 중독 되서 죽는 사람들은 너무너무 비참합니다. 그래서 금연학교에 가면 맨 처음에 일주일 합숙훈련을 하면서 제일 먼저 보여주는 것이 그 끔찍한 광경들입니다. 사회 저명한 사람들이 어떻게 비참하게 마지막에 죽었는지 보여주고 죽었을 때 그들의 폐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끈적끈적한 짜장에 절인 폐입니다. 선지를 짜장에 절였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 폐가 됩니다. 못 봅니다. 그런데 안 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런 신호를 우리 영혼은 계속 소리칩니다. 제발 우리를 좀 건져달라고 소리를 칩니다. 그런데 그것을 말씀의 빛이 없기 때문에 그게 그 음성인줄 모르고 설령 양심에까지 호소해서 그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파헤쳐서 왜 그렇게 소리치며 우는지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벌써 그렇게 소리치고 파헤쳐서 들어보려고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벌써 하나님을 거의 만난 사람입니다. 이 마음을 하나님이 움직여 주십니다. 이게 증거가 뭐냐 하면 하나님으로 인해 행복하지 않으면 영혼에 붉은 신호등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행복한 것이 없으면 벌써 그 행복이 없는 것만큼 그 행복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모든 불행의 근원입니다. 하나님 바깥에서 하나님 없이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 하나님 이외에 다른 곳에서 기쁨을 느끼고 하나님에게서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영혼이 벌써 심각한 질병상태에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들이 결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뜻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러한 인생의 벼랑 끝에서 시련을 만나게 하셔서라도 자신의 참된 모습을 보게 만들어 주시고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모든 고통이 결국은 사랑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우상을 의지하고 그 우상이 주는 번영, 우상이 주는 성공, 우상이 주는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의 참 사랑으로 돌아오도록 부르시는 것입니다. 오늘 야곱의 음성을 들은 이 집안의 식구들은 야곱의 이 영적인 각성의 결과에 동참했고 그래서 이방신상을 모두 제거하고 이제 야곱의 영적인 인도를 따라서 그가 환란 가운데 있을 때에 만나 주셨던 그 하나님께로 자신들도 올라가기로 다짐하였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영적인 각성, 신앙의 바로 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큰 깨달음은 이처럼 그 사람뿐만 아니라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을 움직여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이 바로 그렇게 하나님이 흔들어 깨워서 여러분 주위에 올바로 살고자 하나 길을 알지 못하고 길은 알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붙들어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여러분을 야곱처럼 부르고 계신지도 모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주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단장품들을 버림
두 번째는 단장품들을 버렸습니다. 사실 야곱이 이 귀걸이나 단장품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처럼 놀라운 적용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면 놀라울 정도로 지혜가 생겨서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해야 되겠다고 하는 그 길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놀랍게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할 놀라운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가끔 어떤 사람을 보면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고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는데 아주 한 마디로 간단하게 말하면 은혜를 덜 받은 것입니다. 은혜를 깊이 받으면 그러면 아주 확실하게 ‘아, 이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살라고 명령하신 음성이구나.’ 하는 것을 또렷이 깨닫게 되는데 이게 각성한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놀라운 적용력입니다. 이런 놀라운 적용력을 가지고 이 사람들이 이방 신상들만이 아니라 자기의 있는 귀걸이들을 모두 빼앗아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이 귀걸이의 풍습이 원래 있었던 건지 아니면 밧단 아람에서부터 배워온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거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셨습니다. 더군다나 귀를 뚫거나 남녀 성을 바꿔서 옷을 입는 것이나 이런 것들을 아주 불결하게, 의식적으로 불결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금하십니다. 그런데 그 율법은 훨씬 나중에 나오는 거니까 조심스럽긴 하지만 이것은 아마 메소포타미아에서 배워서 가져왔던지 아니면 세겜 지방의 독특한 풍습을 따라서 무엇인가 이 귀걸이 자체 안에 우상의 성격이 들어있는 것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함께 내려놨을 가능성도 있고 아니면 여성으로서의 장식구나 이런 것을 겸해서 가지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이 단장품들을 모두 제거함으로써 이제 하나님만 앙망하는 신앙으로 돌아갈 각오를 했던 것으로 해석이 됩니다.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으로 하나님 만나러 올라가고 아무리 기다려도 내려오지 않자 이제 이 완악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을 앞세워 자신들을 애굽으로 인도할 우상을 만들자고 하였고, 그래서 그들은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경배하였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매우 진노하셨고 그리고 이 민족을 다 쓸어버리고 너로 말미암아 새 민족을 만들리라 하셨을 때 모세가 목숨을 걸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생명책에서 제 이름을 차라리 지워버려 주십시오. 하나님이 이 백성을 버리시려면 차라리 저를 지워주십시오.” 목숨을 걸고 사랑으로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마음을 누그러뜨리시고 “이제 이 백성들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올라가라. 약속대로 가나안을 주마. 나는 안 간다. 내 사자를 보낼 테니까 사자하고 같이 가라.” 그 이야기를 모세가 전했을 때 창세기 35장에서 일어난 것 같은 영적인 각성이 공동체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그 우상을 섬기던 백성들이 회개하기 시작했고, 모세에게 당부하여 우리 대신 하나님께 빌어달라고 간청하면서 대대적인 회개와 각성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할 기도의 은혜에 사무친 사람들을 위하여 진 떨어진 외딴 곳에 회막을 만들고 거기에 가서 하나님 앞에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간절히 기도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합니다.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깊이 각성하며 한 것이 뭐냐 하면 자기의 장신구들을 모두 떼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3장에 나오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 장신구라고 하는 것은 결국 세상을 향한 사랑의 제유법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3장에 보면 “너희 여자들아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마음에 숨은 사랑을 가꿔라” 그래서 어떻게 하냐면 온유와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너무 극단적으로 해석을 해서 머리를 꾸미는 것이 이게 안 좋구나 그래서 폭탄 맞은 것처럼 하고, 그리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이 좋지 않구나. 그리고 그렇게 하고 다니는데 이게 검소해 보이는 게 아니라 게을러터져 보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은 마음은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아름다운 것이 있느냐?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 야곱의 집안의 사람들의 각성한 야곱의 선언을 들으며 단장품을 제외해 버린 것은 이제 자신들도 주인 야곱을 따라서 하나님만 앙망할 것이며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을 잠시 접고 이 커다란 멸망의 위기로부터 자신들을 건져 주시고 지켜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릴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이것 아닙니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드렸다, 한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셨다 이런 기억만을 안고 살아가는 것으로는 충분한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오늘 매일매일 새로운 감격으로 가득찬 간증을 써 내려가야 하고, 오늘 내가 만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매일매일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고 내 안에 넘치는 사랑과 생명 때문에 곤고하고 아프게 사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흘려보내는 베푸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 자리에 두신 이유인 것입니다. 모두 위로를 받으려는 사람뿐이지 위로를 하고자 하는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사랑을 받기 위해서 태어났다고만 스스로 노래하지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것은 우리들에게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 영적인 은혜 생활에 있어서 무엇인가 모자람이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하나님을 앙망하고 그 주님의 은혜로 그 마음을 가득 채우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흘러가는 강물처럼 사는 삶을 위해서라도 그의 영혼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상하리만치 큰 은혜를 주시고 이전에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우리의 불순종과 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다시 신앙의 감격 속에서 살게 하실 때에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모두 쏟아 붓는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참된 기쁨은 하나님이고, 내가 직장을 다니고, 사업을 하고, 자녀들을 키우고 그리고 봉사를 하고 일을 해도 그것이 세상에서의 번영과 성공,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자랑이 목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고 그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 일을 할 때에 그때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참된 기쁨과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기쁨을 누리고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 이것이야말로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장 아름다운 증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때문에 정말 기쁘십니까? 그 대답을 정답을 알기 때문에 말해야 하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오늘 하루도 이 벌레 같은 나를 위해서 그 큰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습니까? 하나님 모르고 인생의 뒷골목에서 살았더라면 지금쯤 더러운 죄에 빠져서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목적과는 상관없이 짐승처럼 살다가 가버릴 이 비참한 인간을 하나님이 이렇게 구해주셔서 주님의 교회의 그늘 아래서 주님께 목양을 받으며 살게 해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 감격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받지 못한 것들 때문에 하나님께 토라지고, 그리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소외시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이 당신 앞에 나아올 때에 마지막 단장품 하나까지 모두 버리고 그래서 하나님만을 앙망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여러분의 관심이 이 세상에서의 번영이나 성공, 거기에서 누리는 기쁨과 그리고 행복한 상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같이 모자라는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기쁨 때문에 살 수 있을 때에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더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입니다.
종종 심방을 하다 보면 오랫동안 경제적으로 혹은 또 다른 이유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끔 그들은 토로합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같은 제목으로 많이 기도했건만 하나님은 나 같은 사람의 기도는 잘 안 들어 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때마다 항상 꼭 같은 충고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같은 제목으로 많이 하는 것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간구의 수단이기는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구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니까요. 그렇지만 만약에 같은 기도 제목을 오래 했는데도 진전이 없고 마음에 그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도 서지 않으면 그러면 여러분이 그 기도를 하기에 합당한 사람인지 여러분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입술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듣고 싶으셔서 기도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가 기도하기 전부터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언제 도와주어야지만 될지를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기도하라고 하시는 이유는 그런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마음을 쏟고 그렇게 마음을 쏟으면 이 세상을 사랑하던 그의 심정이 변하여 이 세상 사랑을 십자가에 내려놓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랑하게 되도록 그 마음이 바뀔 것을 기대하시면서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기도의 제목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바뀌지 않고 입으로만 계속 기도가 나오니까 결국은 삶이 마음을 따라가지 생각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생각 속에서는 이 길을 가야지 하는데 마음으로 저 길을 가고 싶으면 사실은 생각과 마음속에 찢어짐이 일어나지만 결국은 마음의 욕망을 따르지 생각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바입니다.
그러면 이런 단장품을 사람들이 귀걸이를 끼고 있고 무엇을 좀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님에게 무슨 손해가 나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이 야곱의 각성된 연설을 듣자마자 즉각적으로 온 가족들이 회의를 한 것도 아닌데 가슴속에 와 닿은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 이외의 이런 것들로 즐거워하는 것이 우리에게 이 벼랑 끝에서는 합당하지 않다고 모두 스스로 야곱이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다 내려놓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 한분만을 앙망하며 하나님께 올라가겠다고 하는 야곱의 결단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여러분을 이렇게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의 지혜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 자신의 재능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원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이 위기의 상황에 직면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디나의 강간 사건과 같은 어찌할 수 없는 뼈아픈 인생의 갈림길에서 하나님을 의지할 것인가, 자신을 의지할 것인가를 결단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이 세겜에서 성공을 거두고 당신께 예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이 사람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커다란 뜻, 이 사람에게서 낳은 아들, 이제 요셉을 통하여 잠시 후에 다가올 그 무서운 대흉년에 인류를 보존하여야 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집안사람들을 애굽으로 들여보내어 거기에서 거대한 민족을 이루고자 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연결 고리의 역할을 이 야곱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 사람을 그렇게 훌륭한 인류 구원을 위한 연결 고리로 사용하고자 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세겜에서의 성공과 번영에 취했지만 그 정도 가지고는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소명이 이 야곱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야곱을 만나 주셨고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그리고 자기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세겜에서의 번영과 성공에 취해서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 사랑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았을 때 그 아버지의, 혹은 족장의 주인인 그 마음이 전해졌고 이 온 가족들이 저항할 수 없는 권위를 느끼며 자신의 모든 단장품들을 제거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로 결심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무슨 보람에 요즘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여러분도 혹시 세겜과 같은 곳에서 성공과 번영에 취해서 주님을 잊고 살지는 않습니까? 혹은 성공과 번영을 얻기는커녕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셔서 점점 성공과 번영이 멀어지는데도 여전히 그것을 붙들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불순종하며 살고 있습니까? 이 단장품들은 이 사람들에게는 귀에 달린 귀걸이였지만 여러분의 마음에는 이런 수많은 단장품들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진정한 기쁨을 대신하게 해 주는 어떤 즐거움들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가 걸림이 되고 거치는 것들이 된다면 오늘 그것들을 모두 내려놓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관심사에서 잊혀져 버린 여러분의 영혼의 상태를 보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매일 십자가를 생각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받은 그 구원이 일상적인 것처럼 여겨질 때 그때 신자의 마음은 부패하게 됩니다. 신자의 마음에는 십자가의 피가 흘러야 하고 기도의 눈물이 흘러야 하고 주님을 위해서 섬기는 땀이 흘러야 합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생활을 이 세상 사람들은 꽃처럼 향기 나는 생활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 안에 있는 무한한 기쁨과 은혜, 주 하나님이 나와 함께 동행하시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단장품을 버리고 이렇게 하나님 한분만을 앙망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상수리나무 아래 묻음
야곱은 이제 이 모든 단장품과 그리고 우상들을 이제 묻었습니다. 성경에 나옵니다.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아마 떠나면서 동리에서 좀 떨어져서 이것을 묻은 것 같습니다. 묻었다는 것은 죽음과 잊어버림을 뜻하는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 우상을 여기에다가 묻었다. 오래 전부터 세겜 우상의 집에서 가지고 나온 이 우상 이방 신상들을 모두 땅에 묻었다. 이제 우리는 이 이방신들이 복 줌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사는 사람들이다. 자, 우리가 우리의 몸에 있는 모든 단장품들을 제외해 버립니다. 이제 우리의 기쁨은 우리 스스로 이 세상에서 번영하고 성공하고 우리 스스로의 만족을 찾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의 기쁨은,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 당신이십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었습니다.
그런데 이 상수리나무 아래라고 하는 것이 구약에서 많이 나오는데 그래서 학자들은 이 자체에 무엇인가 제의적인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엘로힘’이 바로 이 상수리나무에서 왔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로 ‘울’(lWa)이라는 것이 상수리나무인데 이것이 비바람이 치고 막 폭풍이 일어도 끝까지 안 쓰러지고 버텨있는 나무가 팔레스타인에서는 상수리나무입니다. 그래서 그 상수리나무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나무, 강하고 힘센 나무,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엘로힘’의 의미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아무튼 창세기 18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실 때에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오늘 이제, 내일 보면 알지만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습니다. 그때에 그 시신을 아무데나 묻은 것이 아니라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의 비탈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쳤던 가나안 정복의 영웅, 여호수아가 율법을 기록한 돌을 세운 곳도 상수리나무 아래였습니다. 그런 유서 깊은 상수리나무입니다. 그런 유서 깊은 상수리라고 하는 나무에 거기에 그 모든 것을 묻는 이것은 단순히 묻는 의미가 아니라 이제 세상 사람과 하나님 없이 추구하던 행복들을 모두 장사지내고, 잊어버리고,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묻는다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최고의 경배의 제물이 무엇이겠습니까?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자식의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최고의 제물은 바로 내가 사랑하던 세상을 죽여서 하나님 앞에 묻는 것입니다. 이것을 먼 훗날 다윗이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받으면서 용서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시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결국 그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을 사랑하던 마음이 세상과 끊어지고 하나님 이외의 것에서 만족을 구하던 그 마음이 그것을 끊어버리고 상한 상태, 그래서 그것을 죽여서 하나님 앞에 드린 것이니 사실은 세상을 죽여 제물로 드린다고 했는데 그 세상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보면 수도원, 절이 세상으로부터 아무리 멀리 떠나도 떠난 그 속에서 세상이 다시 시작합니다. 세상 속에 세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세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세상을 죽여 하나님 앞에 묻는다고 하는 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나 자신을 죽여 주님 앞에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가장 기뻐하실 때게 두 번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찰 때, 두 번째는 죄에 대한 미움으로 가득 찰 때, 전자는 하나님 사랑의 최고조의 때이고, 후자는 통회하는 마음이 가득 찼을 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사람의 마음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격렬하게 회개하고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랑하던 죄를 뉘우치고 그것 때문에 주님이 얼마나 마음 아파 하셨는지를 절실하게 느끼며 가슴을 찢을 때만큼 하나님이 가까이 계실 때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찬양)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 만 바라볼지라.
우리가 정말 두려운 것은 실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하는 데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체념하고 그냥 이것이 인생의 전부인가 보구나 하면서 살아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 무서운 것입니다. 요즘은 그래도 좀 덜한 것 같은데 한때 왜 80년대 말 90년대 초에 인신매매에 대한 사건들이 굉장히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제가 관심이 있어서 상세히 봤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 인신매매된 상태로 저렇게 살 수 있을까? 그런데 그게 방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 인신매매 범들이 사람을 잡아오면 중국이나 한국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잡아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삶의 모든 희망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자비한 폭력과 학대 그리고 성적인 착취 이런 것들을 통해서 저항할 수 없는 상태에서 유린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 기억을. 그래서 모든 희망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희망이 없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통 6개월이면 완전히 그들이 원하는 절망의 상태에 들어간답니다. 자아가 워낙 강한 사람은 1년 내지 1년 6개월 정도, 그것보다 더 강한 사람은 자결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 완전 자아상실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그 생활에 그냥 익숙해져 버립니다. 포기해 버립니다. 그게 더 무서운 것입니다.
실패가 두려운 게 아니라 거기에서 익숙해지는 것, 그래서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 들여서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는 모든 희망을 잃어버릴 때 사실 그 사람은 살았으나 사실은 죽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너무 깊은 절망과 좌절 속으로 들어가면 아프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상황 속에서 그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각을 다 짓밟힌 것입니다. 그런데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이것이 완전히 사라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는 영적인 자극의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모두 포기하고 좌절했는데 예수 안에서 정말 아름답게 살아가고 평안하게 살아가는 사랑의 사람들을 보면 옛날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향수가 다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막 위협하는 설교, 계속 그렇게 가면 죽는다는 식으로 강박하는 설교로는 돌이키지 못합니다. 인간이 막다른 지경에 가서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나면 상상할 수 없이 강한 악의 힘이 나옵니다. 그래서 심지어 하나님이 나를 죽이셔도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까지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 은혜의 자극입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을 한없이 불쌍히 여기면서 대신 울어주고, 사랑해주고,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역장이나 순장이나 아니면 그렇지 않더라도 사연이 딱해서 얘기 좀 하자고 불러놓고 진을 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진 빠지십시오. 그게 주님 섬기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붙들고 그러겠습니까?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 떠나고 하나님으로부터 생명과 사랑이 끊어지고 나면 상상할 수 없이 피폐해지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정말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야곱이 하나님 만나고 와서 가족들 앞에 섰을 때에 하나님이 놀라운 권위를 주셨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이 사람들이 자기의 신상들을 모두 내어놓고 단장품들을 제거하였습니다. 결국은 한 사람이 하나님 만나니까 이들의 마음이 모두 움직였고 이것이 영적인 부흥을 위한 하나의 조짐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드디어 이제 떠났습니다. 그랬더니 오늘 성경에서 이렇게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야곱이 염려하던 일이 이미 일어난 것입니다. 주변에 있는 많은 고을들에 이미 이 세겜 사람들이 도륙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무엇을 두려워했냐하면 이 사람들이 연합을 해서 보복을 하겠다고 덤벼들면 우리는 숫자가 적기 때문에 결국은 멸망하고 말리라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 하나님이 야곱과 이 집안사람들을 이 세겜 족속 주변에 사는 사면 고을들의 사람들로 하여금 매우 크게 보이게 하였습니다. 큰 두려움이 하늘로부터 뚝 떨어진 것입니다.
그 똑같은 묘사가 어디에 나오냐 하면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에베소라고 하는 로마의 번영한 도시에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큰 두려움을 뚝 떨어뜨리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위로 올려 졌다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입니다. 놀라운 위엄과 권능을 주셔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야곱의 집안의 사람들이 매우 두렵게 느껴져서 감히 보복을 하고자 도모할 수 없게끔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의연한 삶입니다. 그래? 나 돈이 좀 없고 지위 없고 다른 사람보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 살지만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래서 사람들이 내가 비록 가난하고 어렵고, 높은 지위는 없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영적인 자존감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고 하나님이 진리 이외에는 무엇에도 쉽게 무릎을 꿇지 않으면서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견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과 같이 나아올 것이라’ 환란과 시련을 당하면 하나님 앞에서 그 의미를 물어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하려고 해야지 하나님은 당신 만나게 하시려고 시련을 주시는데 그 사이에서 잔머리를 굴리면서 하나님 바깥에서 그 위기를 모면해 보려고 할 때에 어떤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겠습니까? 영적인 권위는 권위대로 다 잃어버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우스운 꼴은 다 보이고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돌아오는 실리도 하나도 없는 실패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셨냐 하면 ‘만일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에다가 쓰겠느냐 바깥에 버리고자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니라’ 그 소금이 암염이라고 말씀드렸죠? 바위 속에 소금이 다른 물질들과 함께 섞여 있습니다. 그것들이 소금기가 다 빠져 나가면 마지막에 그 부산물들만 남는 것입니다. 그것은 찌꺼기입니다. 아무 가치가 없는 것들입니다. 바깥에다가 버리니까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원리를 따라 인생을 살면 하나님 앞에 복 받고 영광스러워질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의 행복이 아니라 바깥에서의 행복을 원하고 인생의 문제와 그리고 위기를 하나님과 함께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의 세속적인 방법으로 해결해 보려고 할 때에 영적인 권위와 위엄, 존귀함, 자존감, 모두 잃어버리고 세상에서도 복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 안에서도 복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정말 여러분은 오늘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이스라엘 야곱의 집안의 사람들처럼 이렇게 하나님만 온전히 의지하고 그리고 여러분의 세상 사랑을 상수리나무 아래 묻어 하나님 앞에 세상을 살고자하는 각오가 있습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이렇게 결단을 하고 주님께 올라가려고 한다면 하나님이 이미 여러분의 마음 안에 영적인 부흥을 시작하신 것이고, 하나님이 그런 여러분을 만나 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성품에 어울리는 분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마음을 모으고 그리고 정말 하나님 앞에 우리가 사랑하던 것을 제거하고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을 못 박고 그리고 우리 주님 앞에, 주님 안에서만 우리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며 걸어가겠습니다. 하나님 저를 버리지 말고 동행해 달라고 간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창 35:6-13)
녹취자: 김인철
I. 본문해설
하나님의 분부를 따라 각성한 야곱은 가족과 함께 벧엘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그 벧엘을 ‘엘 벧엘’ 이라고 불렀으니 이것은 ‘벧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 일어납니다. 드보라 라는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이 사람을 리브가의 유모 드로라 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굉장히 연세가 많은 분이었을 것이고 그런데 어떻게 해서 리브가의 유모가 이 벧엘에서 야곱과 함께 있게 되었을까? 그리고 오래전부터 이 드보라가 야곱과 함께 했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될까에 대해서 주석가들은 크게 두 가지 의견을 제시합니다. 우선 첫째는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떠날 때에 리브가가 자기 유모를 딸려 보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드보라는 밧단아람에서의 야곱의 생활과 마지막 밧단아람을 떠나 세겜에서 오는 모든 길에 동행했을 것이라고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추측이지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는 없습니다. 칼빈 같은 사람이 그런 의견을 제시합니다. 또 어떤 주석가는 이런 의견을 제시합니다. 동행했다고는 말할 수 없고 아마도 야곱이 세겜에 왔을 때 리브가가 그 유모를 보내어서 야곱을 맞으려고 했는데 뜻밖에 세겜에서의 체류기간이 길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저는 그 둘 중 어느 해석도 이 성경 본문의 내용을 뒤 흔들어 놓을 정도로 결정적인 것이 아니고 성경이 침묵하고 있으니 저는 판단을 유보합니다. 다만 하나 확실한 것은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세겜에서부터 야곱의 집안사람들과 함께 있었고 야곱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유모인 이 드보라는 정신적으로 깊이 의지하는 그런 어른이었을 것이라는 것과 아마 자라나면서부터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리브가를 사랑했을 터이니 리브가가 총애하던 야곱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어서 어머니나 할머니 같은 사이였을 것이라고 여겨진다는 것은 의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머니의 유모 드보라가 죽었을 때 야곱의 심경은 가난한 마음이 더욱 낮아져서 아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허무를 느꼈을 것이고 너무나 사랑하고 의지하는 어머니의 유모 드보라가 죽었을 때 야곱의 마음은 마음 둘 곳이 없는 더 가난한 심령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들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야곱은 이제까지 살아 온 자신의 인생을 반추해 볼 때 정말 뼈저리도록 가슴 저리는 위기를 넘기고 벧엘로 왔지만 여전히 가나안 원주민에게 보복을 받지 않으리라는 어떤 보증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의지 하였던 드보라가 죽었을 때 야곱의 그 마음은 정말 처절하도록 가난하고 마음 둘 곳이 없는 심령이 되었을 것입니다.
II. 다시 나타나신 하나님
그런 깊은 상실감과 견딜 수 없는 그런 고통 속에서 드디어 하나님은 다시 나타났을 것입니다. 어떤 비평가들은 9절의 내용이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복을 주시고”라고 했기 때문에 이것이 기록이 진정성이 없고 창세기 28장의 기록에 전승적인 반복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지 않은데 우선 첫째는 히브리사람들의 문학방식입니다. 히브리사람들은 글을 쓸 때 한 이야기를 쭉 서술하고 그 이야기를 겹쳐서 반복하기를 좋아합니다. 예룰 들면, 누가복음을 누가가 기록을 했고 사도행전도 누가가 기록을 했는데 누가복음의 마지막 장면과 사도행전의 시작하는 장면이 겹칩니다. 이것이 히브리사람들의 중첩되는 방식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 온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돌아 온 것입니까? 세겜으로부터 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언약적인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은 가나안에서 야곱을 밧단아람으로 보내셨고 가는 길에 벧엘에서 언약을 했고 밧단아람으로 보냈고 그리고 하나님은 내가 너를 지켜 함께 하여 네 아비의 집으로 평안히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세겜에 머물고 다시 벧엘로 갔지만 그러나 그것은 언약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모두 하나님과 약속한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는 과정이었고 그 출발지는 밧단아람이었기 때문에 내용은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언약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도 밧단아람을 출발해서 아직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안에 도착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세겜에서의 성공과 이 세상의 번영에 취해서 그는 중도에 머물러 버리며 그렇게 신앙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먹구름이 끼게 되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 이 야곱에게 벧엘에서 다시 만나서 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다시' 라는 부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벧엘에서 다시 야곱을 만나 주셨을 때에 그 야곱의 마음에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 긴 세월동안, 세겜에서 사는 동안 그렇게 자기를 인생의 벼랑 끝에서 구해 주시고 은혜를 주셨는데도 그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언약을 따르기 보다는 조금만 더 가면 아버지가 계신 가나안에 이를 수 있는데도 세상의 성공과 번영에 취해서 하나님 없는 날을 세겜에서 보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악하게 살고 온 집안에는 유일신 신앙은 사라지고 우상이 득실거리는 이러한 타락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데도 하나님이 다시 이 야곱을 부르시고 벧엘에서 이 야곱을 다시 만나 대면해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때 야곱의 감격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처럼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쉽게 포기하고 폐기하기까지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한번 맺은 언약을 신실하신 당신의 성품을 따라서 끝까지 그 일을 이루십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은혜로 그 일을 이루셔서 우리의 마음을 사랑으로 자극하시고 감화하셔서 우리 의지를 불러 일으켜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심으로서 당신과의 언약을 성취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에 빠지고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것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고 그분께 순종하며 살 수 있었다면 그것은 모두 앞서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벧엘에서 야곱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이렇게 여러분도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A. 이름을 기억하게 하심
다시 나타나신 하나님이 야곱에게 하신 일은 두 가지였습니다. 말씀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이름이 야곱이지만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발뒤꿈치를 잡았다.’라는 뜻입니다. 형이 먼저 태어나니까 그것을 자신의 혈기로 붙잡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형적인 욕망으로 말미암은 사기꾼의 대명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이것도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미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이미 얍복강가에서 세겜에 도착하기 전에 창세기 33장에서 주어진 이름입니다.
그런데 마치 하나님이 새로 이름을 붙여 주시는 것처럼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이 그 사기꾼 같은 이름을 없애고 새로운 이름을 지어 주셨는데 야곱은 그 거룩한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했고 그 이스라엘이라는 그 이름 자체가 이미 야곱의 마음속에는 잊혀져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야곱의 마음속에 네가 누구인지를 알라 라는 뜻으로 다시 한 번 그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불러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스라엘’이라는 뜻은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겼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해석할 때 하나님이 당신의 천사를 보내어 야곱과 대면하게 하셨고 야곱은 떠나려는 천사들을 붙들며 자기를 복 주기 전에는 절대로 놓을 수 없다고 몸부림치면서 씨름을 했더니 야곱의 완력이 천사를 이겼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천사가 “네가 이겼다.” 그리고 축복해 주었기 때문에 그 이름이 이스라엘이라고 해석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어려서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천사가 무슨 천사였는지는 모르지만 이때 야곱의 나이가 상당히 들었을 때인데 나이가 벌써 청년 시절이 다 지나고 우리 나이로 따지면 노년에 접어드는 이 야곱과 씨름을 해서 그것도 이기지 못할 정도의 천사 뭐 그런 천사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천사가 어떻게 성도들을 수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이 결정적인 해석에 도움을 주는 성경이 호세아 12장 3절에서 4절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호세아 선지자는 얍복강에서 일어났던 야곱의 씨름 사건에 대한 결정적인 해석을 제시합니다. 통곡하며 눈물로 회개를 해서 하나님께 은총을 입은 사건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이기기는 이겼는데 육체로 씨름을 해서 천사를 꺾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이긴 것이 아니라 그런 특별한 은총, 어떤 은총입니까? 형이 자기를 죽이러 오는데 그 인생의 위기에서 벗어난 그런 은총, 아버지 이삭에게 하나님이 하신 모든 언약을 계승하여 그 복을 누리고 땅을 유업으로 차지할 만한 좋은 장점이 전혀 없었는데 이 사람이 일생동안 하나님 의지하지 않고 자기 수단과 꾀를 의지하던 그 모든 삶을 회개하고 자기가 깨뜨려 졌을 때 그렇게 통곡하며 눈물로 회개하는 이 야곱을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이 사람을 복 주고 복 주셨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이 야곱이 하나님을 이겼다고 격려하는 의미에서 표현을 한 것입니다.
(예화)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아이들이 무엇을 해 달라고 했는데 이이가 물건을 집어 던지고 길거리에 들어 누워 난리를 치면, 그때 부모가 지면 안 되는데 때려서라도 그런 것에 불복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엄마의 비위를 맞추면서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 교회에 다니던 형제 자매가 있었는데 아들이 한명 있었습니다. 그 녀석이 네 다섯 살쯤 되었는데 아빠는 학교 선생님이었습니다. 그 아이가 아침이면 어디로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나?’ 하고 보았더니 항상 아침이면 건너방에 가서 방석을 깔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엄마가 얼마나 기특하겠습니까? 이렇게 들여다보니까 “하나님 우리 아빠가 나 닌자 거북이 인형 사주게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마에게 사 달라고 했는데 엄마가 안 사준 것입니다. 그 기도하는 것을 본 것입니다. 남편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여보, 우리 아이가 아침마다 건너방에 가서 무릎을 꿇고 우리 아빠 닌자 거북이 하나 사 달라고 기도하는데 저것을 어떻게 할까?” 하는데 아빠가 웃으면서 하나 사 주라고 합니다. 사 주었더니 그것을 가지고 건너방에 가서 무릎을 꿇고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이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야곱이 하나님과 싸워서 이겼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의 승리입니다. 하나님 은혜의 승리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름이 영원히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이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이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애칭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요셉도 보여 주지만 진짜 여러분이 감동하여할 은혜는 야곱입니다. 바로 이 야곱이 하나님의 은총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승리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통곡과 눈물로 회개를 하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이면서 네가 이겼다 진짜로 이긴 것이 아니라 아까 그 아이가 이긴 것이 아니라 엄마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이 야곱을 측은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확 드는 것입니다. 세겜에서 야곱이 얼마나 살았을까요? 성경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희미한 증거가 나옵니다. 왜냐하면 어린 아이들이 자라서 이제는 장성한 청년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못 살아도 10년의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아니면 길게 잡으면 15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으로 잡아도 1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세상의 번영에 취해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심지어 우상까지 끌어 들이고 인생의 벼랑 끝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셨는데 그 위태로울 때 하나님 앞에 수 없이 세 가지나 약속하고 아무것도 안 지켰습니다. 그 속에서 야곱의 어머니는 병들어 가고 마지막에는 인생의 벼랑 끝에까지 내 몰렸습니다. 그렇게 모든 고통과 좌절 속에서 하나님 앞에 나왔을 때 하나님의 마음속에서는 다시 이 야곱을 측은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움직였던 것입니다. “야곱아, 네 이름을 기억하거라. 나의 은총이 너희 결점을 이겨 승리 했단다. 그것이 너의 이름이란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이름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이름은 무엇이었습니까? 성도입니다. 여러분의 이름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요 성도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입니다. 그 언약을 따라서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면서 까지 여러분을 그 피의 값으로 사셨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이며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하나님의 은총이 승리한 위대한 증거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주님 앞에 나온 여러분 가운데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떠나 왔다는 후회에 붙잡힌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하나님 앞에 많은 불순종과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제 나 같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다시 용납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속에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묵상으로 마음을 떼어 놓으면 양심은 소리를 치고 율법은 칼날을 휘두르며 여러분의 죄를 고발하고 여러분은 아무래도 하나님께 돌아 갈 자격이 없다고 송사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음성에 귀 기울이지 말고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불러 주시는 하나님의 이 말씀, 너의 완력이 천사를 꺾었기 때문에 축복한 것이 아니라 네가 너의 혈기로 살아 온 날들을 회개하고 통곡과 눈물로 용서를 빌었을 때에 나의 은총이 너의 결점을 이겼노라 라는 의미에서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찬송)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신실하신 하나님이 부르시면 후회가 없고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은 것을 후회한 날이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향해 당신의 은총으로 여러분의 죄와 결점을 이긴 것을 한 번도 후회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일 굳게 붙들고 다시 일어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슴에 새기십시오. ‘나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이다.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이다.’
B. 전능하신 하나님
두 번째로 하나님이 자신에 대하여 계시해 주셨습니다. 1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은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기까지 하나님이 그 사람을 향해 품었던 하나님의 마음을 은연중에 보여주는 아주 훌륭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 나타나셨습니다. 이것이 13년 만에 나타나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서 자손이 번성할 것이라는 것을 약속해 주셨는데 하갈에게 들어가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이때 나이가 86세였습니다. 그리고 13년이라는 영적인 침체의 시기가 흐르고 99세에 정말 오랜만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면서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이것이 무슨 메시지 같습니까? 왜 아브라함이 불신앙으로 하갈에게로 들어가 이스마엘을 낳았을까? 그것은 결국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하신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에 금이 갔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말씀을 오늘 하나님이 야곱에게 하고 계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그러면 야곱이 아버지의 집으로 곧바로 돌아가지 않고 세겜에서 그렇게 긴 세월동안 머물며 세상의 성공을 추구하고 번영을 이루며 살았던 그리고 결국은 우상까지 받아들이며 살았던 하나님과의 약속도 지키지 않았던 그 불순종이 무엇 때문이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전능하셔서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책임지실 것이라는 믿음에 균열이 생겼기 때문에 결국 그는 세겜 땅에 주저앉아서 그 많은 세월을 보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전능한 하나님이다”라는 것이 히브리어로 ‘엘 샤다이’라는 단어입니다. 좀 어려운 단어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이 ‘엘 샤다이’가 무슨 뜻일까 하는 연구를 많이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번역을 했지만 자세히 이 뜻을 살펴보면 ‘샷다이’라고 해서 ‘부수다, 파괴하다’라는 동사에서 이 단어가 왔을 것이다. 그래서 힘이 많아서 무엇이든지 잘못 건축되거나 세워진 것을 파괴하여 보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심판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을 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샤도르’라는 단어에서 와서 ‘높은 머리’라는 뜻이어서 ‘샤다이’라는 말이 ‘지존자 하나님’을 뜻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충족하신 하나님이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즐겨 사용합니다. 이 그림들을 모두 합쳐 보면 결국 하나님은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충족하신 하나님으로 당신이 원하시는 잘못된 것들을 심판하실 수도 있고 모든 것들을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아주 높은 지위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복합적인 뜻을 ‘엘 샤다이’가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최고이시고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고 그리고 충분히 이 세상에서 잘못된 것들을 심판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시라는 이 그림을 한꺼번에 다 뭉뚱그려서 전능한 하나님이다 그렇게 여기에서 번역한 것입니다. 차라리 번역하지 않고 엘 샤다이라고 내 버려두어도 되는 단어입니다. 어쨌든 그런 뜻입니다. 결국이 야곱이 오늘 겪게 되는 이 끔찍한 불행,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보복의 두려움을 느껴서 10년이나 넘게 살던 삶의 기반들을 정리하고 도망 나오듯이 세겜에서 빠져 나온 이 가슴 아픈 사연들은 모두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불신, 하나님이 나를 위기 가운데서 만나 주셨고 나에게 약속하신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위대하고 전능하신 분이시라는 것 때문에 모두 잃을 것이며 나는 그 하나님을 의존하고 순종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라고 하는 그 신앙이 식으니까 모든 불행이 찾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많은 물질과 지위, 지식 우리의 삶을 넉넉하게 하는 이 세상의 자원들을 가지고 있으면 자신의 삶이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커다란 불행은 이 세상에 있는 자원으로 막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야곱이 이렇게 가나안 족속으로부터 보복의 위협에 두려움을 느끼며 도망치듯이 세겜을 빠져 나올 때 그에게 돈이 없었겠습니까? 짐승이 없었겠습니까? 무엇이든지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 심지어는 그 집안 식구들이 섬기던 이방신상도 자기를 불행한 처지에서 구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 있는 자원들의 한계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순종은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해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가 아니면 나는 살 수 없습니다.”라는 이것이 삶으로 나타날 때 순종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은 말합니다. 우리에게 감당할 시험밖에는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험을 당할 때 감당할 힘을 주시든지 혹은 피할 길을 내 주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때 나타나는 기적적인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야곱에게만 보여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도 하나님 믿고 살아 온 이제까지의 인생의 날들이 바로 이런 간증의 연속이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하나님이 힘을 주셔서 이기게 해 주셨고 어떻게도 피할 길이 없어서 아침마다 잠드는 밤마다 아침이면 하늘나라에서 눈을 뜨고 싶은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지혜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로서 우리에게 피할 길을 보여 주셨고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셨고 우리를 헤치려던 원수들은 자기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결국 우리의 불순종과 잘못은 언제나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원수가 열이냐 백이냐 일만이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우리를 기뻐하시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그 원수를 우리의 손이 붙이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뻐하실 때 무엇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여리고성을 소리만 쳤는데 그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그 성이 모두 무너져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자 아주 작은 성을 정복하는데도 결국 이기지를 못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 같은 것들도 하나님은 이루어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린아이처럼 믿으며 살아가는 그것이 하나님 자녀들이 본분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 항상 우리의 마음에 맞게끔 우리의 계산대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바라지만 그런 하나님은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게끔 붙들고 계십니다. 그래서 만약에 여러분에게 삶의 어떤 풍파가 일어나고 어려움이 온다면 인간답게 도대체 그 어려운 것 그 시련의 의미가 무엇인지 물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되고 신앙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는 일을 바꿔서 우리에게 형통함을 주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종종 일을 바꾸는 대신 우리를 바꿔서 그래서 우리를 변화시켜서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사람이 되도록 시련과 위기를 통해서 때로는 우리를 인생의 벼랑 끝까지 몰려가도록 내버려 두면서까지 하나님은 바로 거기에서 우리를 바꾸어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이렇게 전능하신 엘 샤다이의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엘 샤다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충만해 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구김이 없이 우리가 모두 죄가 하나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죄가 있다면 회개를 하고 그리고 몰랐던 것이 있다면 깨닫고 깨달은 것이 있다면 고치고 그래서 마음이 다시 하나님께 드려지고 나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은 당신의 전능한 능력을 그렇게 구김 없이 당신 앞에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화) 다섯 살 채 안된 어린아이가 온 가족이 모여 가족회의를 하는데 가족예배를 드리면서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 엄마 아빠 그리고 심지어는 가족들 모두 근심하면 한숨을 쉬고 어떻게 하면 좋니 하니까 그 어린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빠에게 물어 보더랍니다. “아빠, 하나님이 도와 주셔도 안돼요?”그 말이 그 가족들에게 계시의 말씀처럼 들렸습니다. 어린아이는 지금 방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될 텐데 그런데 “하나님이 도와 주셔도 안돼요?” 생생한 믿음은 어린아이 같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의심하지 않고 아버지를 굳게 붙들고 길을 걷는 아이처럼 그렇게 주님을 신뢰하며 그 전능하심을 의지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도전하여야 합니다. 이제까지 여러분이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넘을 수 없었던 한계가 있었다면 이번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하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빌어서 인생을 살겠노라는 신앙적인 결심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라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모든 것들을 이루실 수 있는 하나님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무너지지 않고 서 있는 과제가 무엇입니까? 벧엘에서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해결 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는 너의 이름은 이스라엘이요 하나님의 은총이 이긴 사람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엘 샤다이다. 그러니 너는 내 앞을 향하여 온전한 사람이 되어라. 그러면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너도 이룰 수 있으리라.” 하는 메시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눈물 속에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면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 속에서 진취적인 삶을 사는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입니다.
III. 다시 복 주시는 하나님
A. 큰 민족을 이루리라
이렇게 하나님이 두 가지를 보여 주신 다음에 야곱에게 다시 복을 주셨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생육하여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애가 너에게서 나오고 왕들의 너의 허리에서 나오리라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다시 한 번 벧엘에서 주셨던 모든 복을 반복해서 주시는데 그것은 사실은 이삭에게도 주셨던 복이고 아브라함에게도 주셨던 복입니다. 그 복을 계승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 들지 않습니까? 무엇을 한 것이 있는데... 무엇을 그렇게 잘 했는데... 얍복강가에서 살려 달라고 몸부림치고 그것도 한번 꺾어 보려고 혈기로 하다가 그러다 한대 얻어맞고 허리가 부러지고 나서야 어떻게 힘을 쓸 수 없으니까 울며 매달리면서 자기 깨어짐을 경험했고 그리고 벧엘에서의 약속도 지키지 않고 세겜에서의 세상의 성공과 번영에 취해서 10년이 넘는 세월을 불신앙과 우상숭배 속에서 보냈는데 이 약속의 계승자가 될 수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말없이 세겜에서 이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 전혀 따지지 않으시고 이미 하나님이 야곱의 양심을 통해 모두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시기로 한 복을 다시 한 번 언급하시면서 큰 민족을 이루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8장 4절에서 네 씨가 땅의 띠끌 같이 퍼지리라 라고 하신 그 말씀을 그대로 하십니다. 야곱은 세겜에서 변심했으나 하나님의 언약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방탕하게 주님을 떠났는데도 그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자 하나님은 야곱과의 언약을 반복하시면서 잠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야곱의 불순종 때문에 멈추시는 것 같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이 야곱을 돌이켜 이 약속을 계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이것은 가깝게는 이스라엘이라는 위대한 민족과 나라가 이루어져 그들의 실질적인 조상이 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씨에서 결국은 그리스도가 나와 이스라엘의 육적인 껍질을 깨뜨리고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이라고 하는 전망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계시에 대해서는 우리와는 비교될 수 없는 희미한 지식을 가졌을 테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고 밖에는 불러 줄 수 없는 사람 즉 하나님의 은총이 승리한 사람이라고 불러 줄 수밖에 없는 이 결함이 많은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하나님의 나라에 위대한 일을 이루셨습니다. 믿음이 충만했던 아브라함이나 온유했던 이삭이나 그리고 순결한 삶을 살았던 요셉이 아니라 이렇게 사기꾼 같고 하나님의 은혜를 자주 잃어버리고 자기 방법대로 살아 보려고 몸부림치던 지렁이 같은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셔서 그 이름을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 나라에 영원한 기호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놀라운 복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그런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고 당신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이 하나님을 떠나서 어디에서 행복한 삶을 찾으시려고 합니까? 이렇게 주님과 함께 여러분이 복음의 언약을 계승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약속의 땅을 주리라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약속의 땅을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약속은 28장 13절에서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겜에서 번영했습니다. 돈도 벌었습니다. 세겜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되었습니까? 나그네라고 하는 그 신분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습니다. 돈이 조금 있는 나그네. 장사 좀 잘 해서 먹고 살만한 나그네이지 그 땅의 주인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몰이 찾아와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선심을 베풀듯이 “같이 살게 해주마. 딸을 주고 살게 해주마.”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쫒아 낼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땅 주인과 세 들어 살고 있는 나그네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느낄 수 없는 깊은 설움을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서의 번영과 세겜에서의 성공 정도 가지고는 그것을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만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고 번영할 수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평촌에 여러 필채를 가지고 있어도 그런 식으로 땅을 소유해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땅을 얻는 것은 온유한 자는 땅을 유업으로 받나니 할 때 그 땅이 아닙니다. 왜 야곱이 가나안 족속에게 공격을 받을지도 모르는 두려움에 쌓여서 벧엘로 도망치듯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 땅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등바등하면서 이 세상의 것들을 붙들기 위해서 아귀다툼을 하고 물어뜯고 몸부림치지만 결국 우리는 모두 나그네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 식으로는 이 땅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정말 진정으로 이 땅을 소유하는 것은 그렇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그 하나님의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을 이 세상에 감화로 미치며 그 사람들을 지배하며 사는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여러분이 교회를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에 와서 여러분 하나님 많이 만나고 깊이 변화됩니다. 은혜를 주시면 하나님이 항상 사랑으로 여러분을 충만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교사를 맡겨 주었더니 어린 영혼 하나하나를 돌보아, 전도를 했더니 자기 같이 이런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이 생겨납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 나 좀 도와 달라고 눈물로 도움을 호소하는 사람이 생겨납니다. 몇 마디만 위로해 주면 자결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새 힘을 찾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 날 수 있겠습니까? 구역장 한 사람이 하나님 잘 믿고 헌신하면 그 그늘아래 불쌍한 영혼들이 모두 깃들여서 거기에서 쉼을 얻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생각해 보면 정말 이 세상에서 마음 둘 곳이 없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조차도 마음속에서 희미해질 때 그 은혜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우리 마음의 심지를 돋우워 준 곳이 교회였습니다.
(찬송)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렇게 땅을 정복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정말 제가 그리워하고 꿈꾸는 교회의 모습하고 현재의 교회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지만 그래도 간절히 꿈꾸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큰 교회 이 세상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런 교회가 아니라 정말 이 세상에 아무데도 마음 둘 곳이 없고 어디에 가도 자신이 버림 받은 나그네라는 느낌을 받았던 사람들이 이 교회라고 하는 큰 나무 그늘 아래 와서 그곳에서 쉼을 얻고 그리고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이스라엘로 불러 주시는구나, 이 세상에 나그네와 같이 살 때는 내가 정말 희망이 없는 인간인줄 알았는데 오늘 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받고 보니까 ‘내가 바로 하나님의 은총이 승리한 사람이구나.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총으로 나의 모든 죄와 결함을 이기고 결국은 하나님의 은총이 승리한 사람이구나. 사기꾼 같은 인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시고 자기의 수단과 방법으로 살아 온 불신앙 하던 인간을 이스라엘로 은총이 이긴 자로 바꾸어 주시는 곳이구나.’라고 느끼면서 거기에서 새 힘을 얻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그리워하고 꿈꾸는 교회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 세상을 지나는 나그네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이라면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운이 좋아 얻은 땅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야곱에게는 약속의 땅을 주셨고 결국 이 약속의 땅은 신학적으로 그리스도로 이어지고 결국 땅에 관한 약속은 예수 안에서 안식을 얻음으로서 성취되고 그 약속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안식으로 성취되고 귀결됩니다.
IV. 적용과 결론
그러면 오늘 우리는 바로 그렇게 “내가 약속의 땅을 주리라. 예수 안에 진정한 안식을 너에게 주리라. 네가 나를 의지하고 나의 전능함을 기억하며 은총이 이긴 자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산다면, 나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산다면 네가 이 세상에 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영향을 끼치리라.” 이렇게 유업의 땅을 정복하며 사는 성도들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까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불신하고 여러분의 수단과 방법으로 살아 보려고 하십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한 것이 없을 정도로 고통을 당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여러분도 고통스럽지 않으십니까? 비록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넘어지고 깨어져도 여러분의 이름은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이긴 사람들입니다. 다시 그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벧엘로 올라가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