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
(2014년 주일오전설교)
설교기간|2014년 7월 6일-9월 21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4년 10월 23일
목 차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 1 (2014.7.6 주일오전)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 2 (2014.7.13 주일오전)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 3 (2014.7.20 주일오전)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 4 (2014.8.17 주일오전)
1. 하나님과의 평화를 생각함(욥 22:21) 2014.7.6 주일오전 1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 5 (2014.8.31 주일오전)
2. 하나님과 화목함(욥 22:22) 2014.7.13 주일오전 8
3. 전능자에게 돌아가라(욥 22:23) 2014.7.20 주일오전 15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 6 (2014.9.7 주일오전)
4. 전능자를 보화 삼으라(욥 22:24-26) 2014.8.17 주일오전 26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 7 (2014.9.14 주일오전)
5. 네 기도를 들으실 때(욥 22:27) 2014.8.31 주일오전 33
6. 화목을 이룬 자의 행복(욥 22:28) 2014.9.7 주일오전 39
7. 하나님이 낮추실 때(욥 22:29) 2014.9.14 주일오전 46
8. 죄인을 건지심(욥 22:30) 2014.9.21 주일오전 54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 39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 1 (2014.7.6 주일오전)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 2 (2014.7.13 주일오전)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 3 (2014.7.20 주일오전)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 4 (2014.8.17 주일오전)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 5 (2014.8.31 주일오전)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 6 (2014.9.7 주일오전)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 7 (2014.9.14 주일오전)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 8 (2014.9.21 주일오전)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1) 2014. 07. 06 주일오전
< 하나님과의 평화를 생각함 >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골 3:21)
I. 본문해설
- "욥"의 유래: Hb.ayeb<"미움받는자", Arab.aba<"회개하는자"
- 북아라비아, 아브라함
- 야곱 때 쯤
- 개인 제사, 200세 장수, "께쉬따"
- 동방의 의인, 그 내면을 정화하심
II. 복을 주시는 하나님
- "복이 네게 임하리라"(21)
A. “하나님과 화목하라”
- sakan: 유용, 익숙, 친근하다: ~와 잘 지내다
- "제발, 너 자신을 하나님과 친하라"
- 하나님 자신이 복: 가까이함이 복임(시73:28)
- 하나님과의 불화: 불순종←침체
- 주님과 불화할 때: 거리감+낯섦
- 친근히 하는 길: 회개+순종+사귐
B. “평안하라”
- shelam "평화하라"
- 샬롬: 하나님과 평화+이웃과 평화
- 복의 근원은 하나님, 사람 통해 옴
- 하나님과 관계 깨짐⇒이웃관계도
- 삶의 총체적 회복이 필요: 속사람
- 신자는 다른 방법으로 복을 구함
III. “복이 네게 임하리라”
- tobah: 선, 좋은 것, 이익, 복락
- "그것들로써 복락은 네게 들어간다"
- 무엇이 좋은 것인지 모르는 인간들
- 진정한 복: 좋음이 무엇인지 알아감
-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샬롬 속에서
- 당신이 집착하던 것을 내려놓으라
- 받아들이지 못하던 상황 인정하라
- 고요히 하나님의 선하심 생각하라
IV. 적용과 결론
- 선하시며, 선 자체이신 하나님
- 우리 맘대로 안 되는 상황의 뜻 물음
- 마음을 돌려 신실하심을 생각하라
- 하나님과 친밀히, 평화를 이루자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2) 2014. 07. 13 주일오전
< 하나님과의 화목함 >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욥 22:22)
I. 본문해설
- 행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공통 욕망
- 복의 근원인 하나님 없는 행복 추구
- 행복보다 더 큰 불행의 쓰라림 맛봄
- 먼저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권고함
II. 하나님과 화목하는 길
A. 교훈을 받음
- "제발 ,그의 입으로부터 토라를 취하라"(22)
- "교훈"(torah): 율법의 두 범주
a. 하나님의 흠 없는 계시의 총체
b. 도덕적 삶의 가르침
- 하나님이 누구며 어찌 살아야하나
- 입의 말씀으로 교훈하시는 하나님
-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이유들
- 말씀 ⇒ 기적 / 신적 능력이 나타남
- 마음을 흔들어 말씀을 경청케 하심
- 삶의 사태 바꾸려함 vs 마음 바꾸심
B. 말씀을 마음에 둠
- "그의 말씀들을 네 마음속에 두라"
1. "그의 말씀들"
- amarayu ⇒ emer: 발화된 말+생각
- 명시된 말씀 뿐 아니라 그의 생각까지 마음에 품음
- 참 신앙: 계명지킴+기뻐하심 행함
- "구하는 바를 받나니" (요일3:22)
- 주 기뻐하시는 바는 생각 속에 있음
- 사랑은 문자 이상을 전하고 알게 함
- 탐구하기에 적합한 마음: caritas
2. "마음에 두라"
- shim~be: 무엇을~에 두다, 보관~
- "마음" (lebab): 지성과 의지 좌소
- 마음: 다양한 삶의 원천적 좌소임
- "말씀을 마음에 둠": 지속적 영향
- 가장 긴 여행: 머리에서 가슴까지
- 스쳐간 말씀들이 남긴 것 무엇인가
- 묵상과 숙고 / 적용과 실천이 필요
- 말씀 지식 많으나 붙들고 산 적 없음
- 깨달은 마음의 기도에 열렬함 있음
- 적은 지식이라도 붙들고 삶이 필요
III. 적용과 결론
- 매듭처럼 얽힌 삶에 질서 부여하라
- 진리의 가치: 세상 복 아닌 질서부여
- 깨닫는 자의 간구로 돌아갈 힘 얻음
- 성령의 역사: 진리 깨닫는 마음에 옴
- 다시 마음으로 진리를 붙들며 살자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3) 2014. 07. 20 주일오전
< 전능자에게 돌아가라 >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네가 지음을 받을 것이며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하리라” (욥 22:23)
I. 본문해설
-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지려는 인간
- 참 지혜는 하나님 안에서 행복 추구
- 하나님께 돌아감으로써 화목 회복
II. 무너진 삶을 다시 세움
- tibaneh "네가 세워질 것이며"
- 마음과 삶의 무너짐: 내면+생활
A. 하나님과의 관계
- 주님과의 바른 관계와 사랑의 질서
- 영혼의 깊음과 환경의 깊음의 관계
- 무너진 삶 뒤편엔 무너진 관계있음
- 육체의 생명과 영혼의 생명 하나님
- 바르고 탁월한 영혼 없이 행복 없음
- 지혜, 용기, 욕망, 정의: 사랑으로
- 말씀과 성령으로 하나님 사랑할 때
B. 사람들과의 관계
- 무너진 삶 한복판엔 관계 파괴 있음
- 사람과의 관계는 하나님 관계 반영
- 대부분의 행복이 관계를 통해서 옴
- 하나님과 관계에서 진리와 사랑 봄
- 지혜와 사랑으로 관계를 바르게 함
- 사랑할 힘 잃어버린 사람을 세우심
C. 자신과의 관계
- 자기 사랑 속에 찢어지는 자신 발견
- "공간은 사랑할 대상을 제시‥‥"
- 은혜 안에 있을 때 자신은 하나가 됨
- 대부분 에너지가 찢긴 자신에 소비
- 하나님 사랑 안에서 자신을 발견함
- 자신 찾는 여행은 곧 주님께 돌아감
- 무너진 자신의 삶을 다시 세우도록
III. 전능자에게 돌아가라
- "네가 만약 전능자에게 돌아가면"
- shadday: a샤다드 b샤두(높은)+아이c쉐(존재)+다이(충족)
A. 하나님을 의지함
- 지혜와 능력에 있어 하나님 의존함
- 인간의 불행은 의존관계를 떠나감
- 전능하심과 무능함의 격차를 인정
- 타락은 자기 능력으로 행복 추구함
- 신적 전능하심의 인식 부족 때문임
- 독립의 교만을 회개하고 돌이키라
B. 불의를 멀리함
- avelah "사악함, 불의, 부정"
- "사악함을 제거하리라"
- 죄와 싸워 이기는 길은 거룩함 체험
- 여전히 사랑하면서 싸우지는 못함
- 죄와의 싸움을 잠시 멈추고 생각함
-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추구하라
IV. 적용과 결론
- 무너진 삶의 현실적 고통 생각하라
- 주 밖에서 행복해지려는 어리석음
- 인생의 주권자인 하나님 인정하라
- 겸손히 하나님 한 분께로 돌아가라
-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4) 2014. 8. 17 주일오전
< 전능자를 보화 삼으라 >
“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욥 22:24~26)
I. 본문해설
-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를 복 주심
- 하나님 의지하며 불의를 버리게 하심
- 하나님 밖에 행복해지길 기대치 않음
II. 하나님께 돌아갈 때
- 돌아갈 대상이 “전능자"라는 말의 의미
- 위험의 불안을 버리고 주님을 의지함
A. 보화를 티끌로 여김
- we shit al apar bachel
- “그리고 금덩이를 티끌 위에 두라”
- 오빌: Af 동해안, Id 서해, Arb 남부
- “오빌의 금” 최고의 보물 (왕상9:28, 사13:12)
- 티끌은 가장 가치 없는 존재 대명사
-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파괴는 욕망
-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함” (마:6:24)“
- 물질 염려와 근심에 메몰 되지 말라
B. 전능자가 보화가 됨
- “전능자가 금덩이들이 되며”
- “그리고 가장 좋은 은이 되리라”
- 하나님께 돌아갈 때 바뀌는 가치관
- 영원, 사랑, 용서, 영광, 죄의 감각
- 영적 각성을 통한 가치 질서의 복원
- “주 가까이 함이 복임(시73:28)
III. 하나님을 기뻐하라
A. 불변하시는 하나님
- 하나님: 전능자, 완전자, 충족자이 심
- 부족함 없지만 부족한 것처럼 비치심
- 인간을 교화하는 방법: 불변성+우연성
- 영원한 하나님이 시간 안에서 일하심
B. 전능자를 기뻐하게 함
- 하나님의 기쁨: 인간의 의지함과 감사함
- 찬양: 주님께 대한 의존과 기쁨의 표현
- 인간의 기쁨 안에서 기뻐하시는 주님
- “얼굴을 들다” tisha paneika
-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함을 암시함
-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추구하라
IV. 적용과 결론
- 하나님 앞에서 사는 기쁨 회복하라
- 그 평화 안에서 담대한 삶을 살아라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5) 2014. 8. 31 주일오전
< 네 기도를 들으실 때 >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을 네가 갚으리라” (욥 22:27)
I. 본문해설
- 하나님과 화목케 된 자의 삶의 행복
- 기도 할 수 있게 됨, 들어 주심(27)
- 결정을 이루심, 빛을 비추심(28)
- 샬롬을 잃을 때: 기도 할 수 없음
II.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A. 하나님을 기뻐 할 때
- 하나님과 화목을 회복함: 기쁨
- 그 기쁨 안에서 하나님을 기뻐하심
- 신적 기쁨: 하나님 행복의 한 국면
- 당신 복됨 안에서 인류 행복 원하심
- 기쁨 없음: 하나님과 화목 상실함
B. 하나님께 기도 할 때
- 기도는 단지 말 아닌 영혼의 활동임
- affection: 영혼의 활발한 움직임
- 영혼의 하등 & 고등한 기능의 활동
- 충분한 정동 속에 기도가 열렬해짐
- 화목의 회복은 은혜의 정동 촉진함
- “추운 겨울 따뜻한 아궁이와 발화”
- 기도 할 수 없어 못하니 은혜로 덥힘
C. 기도를 들으실 때
- 기도 실천에서 신적호불 보이심
- “기도 시간에 칠흑의 담장 내릴 때”
- 불쌍한 사람: 기도와 응답 불가능
- 기도문 여심으로 신적 기쁨 보이심
- 기도 도우심: 회개 때 + 당신 원할 때
- 닫힌 기도문 열고 열린 기도문 유지
- 마음에 있는 기도는 유산될 수 있음
III. 서원을 갚게 함
- 침체된 영혼의 기도는 자기애 중심
- 회복된 영혼의 기도는 하나님 중심
- 하나님께 못다한 자기 의무를 생각
- 서원 이행은 하나님께 봉헌된 표시
- “서원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시15:4)
- 거룩한 의무의 아름다움을 생각함
- 기도의 결국은 신적관계로 회귀
IV. 적용과 결론
- 번잡한 일상에서의 영혼의 고요함
-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생명과 사랑
- 낙담한 심령과 깨진 관계에 소망을 줌
- 감각의 창을 내리고 임재 앞에 나감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6) 2014. 9. 7 주일오전
< 화목을 이룬 자의 행복 >
“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치리라 ” (욥 22:28)
I. 본문해설
- 이제까진 전능자께 돌이킬 때 변화를 다룸
- 28절은 하나님과의 화목의 복됨의 절정을 묘사함
-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보여줌
- 최고행복은 하나님과의 동행: 평화+영광의 추구
II. 화목을 이룬 자의 행복
A. 정한 뜻을 이루심
- "무엇을 결정하면 이뤄질 것이요" (28)
-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의 변화가 아님
- 하나님의 뜻의 성취에 인간의 소원 사용함(빌2:13)
- 이는 신자가 품은 뜻을 기뻐하시는 것
- 하나님과 화목은 기존 사랑의 질서를 재편함
- 하나님과의 사랑의 연합 보여줌(요15:7)
- 이는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심(요8:29)
- 하나님 원하는 일을 마음에 품고 사는 것이 행복
B. 인생길을 비추심
- "네 길에 빛이 비치리라" (28)
- "길"(derek복수): "인생길"을 의미함
- "네 인생길들 위에 빛이 비추리라"
-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삶의 사태들을 만남
- 신앙은 그것을 초월한 인생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
- 육체와 영원, 시간과 영원, 세상과 천국의 대조 속에서
인생을 봄
- 요동치는 삶의 한복판에서 불변하시는 주 붙듦
- 진리의 빛 가운데 삶으로써 이것이 가능하게 됨
- "빛"('or): '등불'과 함께 "진리"를 의미함
-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시119:105)
-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진리의 빛을 주심
III. 적용과 결론
- 매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라
- 그 말씀에 은혜를 받고 거기 붙들려 살라
- 깨닫고 은혜받은 말씀만이 인생길의 빛이다
-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서 존재의 울림 있도록 살자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7) 2014. 9. 14 주일오전
< 하나님이 낮추실 때 >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 ” (욥 22:29)
I. 본문해설
- 화목 회복할 때 누리는 복 열거한 후
- 29~30절: 화목 회복의 실제적 충고
- 쉽게 화목 회복하려 않는 인간 마음
- 다양한 방법으로 인간 마음 낮추심
II. 낮추시는 하나님
- 낮은 자리에서 신앙의 이해가 생김
A. 낮추시는 이유
- 부패하고 제자리 떠나는 인간 마음
- IS 역사: 복 주심-번영-타락-징계
- 미끄러진 마음은 복의 근원을 떠남
- 절묘한 조화 이룸 지성+감정+의지
- 이 모든 작용들이 마음에서 일어남
- 마음을 치심으로 못 보던 것 직시함
- 마음을 치시는 두 방법: 말씀+상황
B. 사람들을 통함
-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29 상)
- "낮추다” hispilu
- 떨어지게 하다
- 실망+비난+상처+모욕+배신으로
- 안주하던 질서의 안정성을 의심함
- 그들과의 관계 통해 자기 결함을 봄
- "만물의 찌꺼기 같이(고전 4:13)
-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의존케 함
III. 하나님이 낮추실 때
A. 교만함을 고백함
- 환란: 일반적 어려움+특별한 시련
- 후자는 우리 고치려는 신적계획 임
- 우리를 당신 앞에 세우시려 하실 때
- 사람과 환경의 도움을 구차히 바라지 않음
- "하나님만 의지하게" (고전 1:9)
- 낮춰야할 만큼 높아진 마음의 불행
- 울지 않을 수 없는 기도 제목의 은혜
B. 겸손한 자를 구원함
- 비굴과 다름은 공포 속 낮아짐 아님
- 자기 질서 버리고 신적 질서 찾아감
- 자기의 미천함과 비천함을 알게 됨
- 자기 자리로 돌아가 하나님 의지함
- 마음을 물처럼 녹이는 하나님 사랑
IV.적용과 결론
- 모든 일에서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 뒤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손을 보라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8) 2014. 9. 21 주일오전
< 죄인을 건지심 >
“죄 없는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으로 말미암아 건지심을 받으리라” (욥 22:30)
I. 본문해설
- 불행과 고난이 죄 때문이라는 확신
- 그러나 죄와 상관없는 특별한 경우
- 죄로 인한 고통은 선하심의 증거임
- 용서와 회복을 통해 신적 성품 배움
- 용서의 경험과 하나님의 사랑을 앎
II. 고난을 보는 인간의 시선
- 화자가 상정한 인간 죄악의 보편성
- 악한 자들은 하나님 판단 없이 생활
- 그런 악인의 자긍함이 우리 모습임
- 인과응보를 신적 섭리의 전부로 봄
- 그러나 인간 고난은 복합적 성격임
III. 죄인을 구원하심
A. 죄인을 건지심
- "죄 없는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라"
- 불행의 원인인 죄를 해결하는 방법
- 자신 힘 아닌 은총: 제사제도 주심
- 십자가로 영원한 속죄의 길을 여심
- 불행을 쉽게 애매한 고난이라 말라
- 오히려 악 속에서 자기 죄 뿌리를 봄
- 하나님의 용서를 바랄 수밖에 없음
B. 깨끗한 손이 됨
- "네 두 손의 깨끗함 통해 구원되리"
- 인간의 두 손은 그의 모든 삶 대표함
- "손 깨끗한 만큼 갚으심" (시 18:24)
- "여호와 산에 오를 자가" (시 24:4)
- 회개와 용서 통해 정결해짐을 뜻함
- 죄: 인식-회개-용서-무죄-정결
- 행복 찾는 과정 통해 신적 관계 회복
- 행복 회복과정 통해 질서로 돌아옴
IV.적용과 결론
-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 잘못 살아도 희망은 하나님께 있음
- 참 행복 구한다면 하나님께 돌아감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 39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 1 (2014.7.6 주일오전)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 2 (2014.7.13 주일오전)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 3 (2014.7.20 주일오전)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 4 (2014.8.17 주일오전)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 5 (2014.8.31 주일오전)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 6 (2014.9.7 주일오전)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 7 (2014.9.14 주일오전)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 8 (2014.9.21 주일오전)
하나님과의 평화를 생각함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은 욥기입니다. 욥이라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책입니다. 욥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주석가들은 크게 두 가지로 유추하는데 첫째는 이 말이 히브리어에서 왔다면 미움을 받는 자 라는 뜻이고, 아랍어에서 왔다면 회개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욥이 거하던 땅이 북부 아라비아 지역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회개하는 자라는 이름이 원래의 뜻이 아닐까 추측을 합니다. 욥이 살던 시대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야곱 시기 정도가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제사장이 없이 개인적으로 족장들처럼 제사를 드리는 광경이 나오고 200세까지 장수하는 이야기와 그리고 ‘케쉬타’라고 하는 화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과 야곱 시대의 통용되던 화폐의 단위였기 때문입니다. 동방의 의인이요 하나님께도 순전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았던 이 욥은 흔히 그 시대에 욥의 친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악을 행했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 욥의 시련을 통해서 욥이 예전에 미처 알지 못했던 자기의 내면세계에 있는 불결들을 보고 그것까지도 하나님이 정화시켜 주시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은 욥의 세 친구 중 엘리바스라는 인물이 욥을 비난하며 언급한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욥의 친구의 발언은 욥이 의인이었는데도 형벌을 받는 이유가 자신의 죄악 때문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 친구들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의 고난이 자기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그런 점에서는 욥의 친구들이 잘못 되었지만 그의 이야기는 욥이 아닌 오늘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통용되는 그러한 영원한 교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II. 복을 주시는 하나님
제일 먼저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말입니다.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악인이든 선한 사람이든 그리고 종교와 나라와 민족, 인종, 혈통과 성별의 차이가 있어도 모든 사람에게 꼭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말의 의미가 한국사람 다르고, 서양사람 다르겠지만 그러나 행복을 갈구하기에는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온 일생의 삶은 행복하기 위해서 행복하기 위해서 몸부림쳐 온 우리의 인생의 발자취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행복한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행복하게 느껴져도 내일은 잃어버려 불행하게 될 행복이라면 오늘 누리는 그 행복도 참된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복이라면 그것은 항구적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A. “하나님과 화목하라”
이런 사람들에게 오늘 성경은 그렇게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말합니다. 화목하라고 번역된 이 번역은 썩 좋은 번역은 아닌 것 같습니다. 히브리어로 ‘샤칸’이라고 하는 동사인데 이것은 원래 ‘유용하다, 쓸모 있다, 익숙하다, 친근하다, 혹은 누구누구와 잘 지내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여기에는 히브리말로 ‘나’라고 하는 ‘내가 원하노니 혹은 제발이라는’ 단어가 번역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번역을 하면 ‘제발 너는 너 자신을 하나님과 친근하게 하라’ 이런 번역이 가능해집니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정말 참으로 복되기 위해서 하나님과 먼저 온전한 관계를 유지해야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의 행복을 가로막는 분이고 그 하나님을 이탈하여 자유롭게 되어질 때에 진정으로 억눌림이 없는 자유를 누리고 그 안에서 자신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시편 73편 28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노래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갖고 그와 화목하게 되는 것이 그 복에 접근하는 비결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모든 불행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고자 하는 데에 있고 복의 근원은 버린 체 또 다른 종류의 복으로 자신을 행복하게 하려는 데에 모든 불행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을 만한 사람이 되어서 그래서 우리가 무엇이 복이고 무엇이 불행인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하나님을 멀리 떠난 우리는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인류가 설탕의 맛을 알고 난 후에 인류의 역사는 크게 변했습니다. 그리고 이 입맛을 달콤하게 하는 설탕을 발견하고 난 후에 사람들은 그것을 섭취하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여겼고, 이로 말미암아서 인간의 육체와 정신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어느 학교에서 미국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한 학교에서는 어느 날 이 설탕의 위험을 알고 한 2년 가까이 학생들에게 급식에서 일체의 설탕을 넣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힘들어 했는데 아이들이 자연식품에 접근하면서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학교는 그대로 설탕을 공급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변화가 일어났냐 하면 설탕을 급식에 제공하지 않은 학교 학생들이 폭력과 난폭함이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원래 이 설탕은 인체에 아주 좋은 무기물을 다량 함유한 아주 건강식품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원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원래 사탕수수를 짜서 만든 원당은 한 숟가락 설탕을 입에 넣고 씹어 봐도 과히 달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풍부한 무기질이 들어있어서 인체에 아주 유익합니다. 그런데 단맛을 더욱 자극적으로 느끼기 위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정제하고 정제해서 다른 것들은 다 버리고 단맛이 나는 순수한 설탕만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게 여러분이 오늘날도 먹고 있는 백설탕입니다. 그것은 몸에 매우 나쁜 것입니다. 패밀리 레스토랑의 쉐프들 사이에 오고가는 유명한 격언이 있습니다. 매출이 안 오르면 무조건 튀겨라, 그 다음에 설탕을 잔뜩 뿌려라. 아무도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인체에 가져다주는 해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설탕을 먹고 사람들은 폭력적이 되고 그리고 작은 스트레스에도 못 견디는 말하자면 인내심을 잃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는 스트레스의 연속입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서 그 스트레스를 잊기 위해서 단 것을 섭취합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꾸 단 것을 먹게 됩니다. 실제로 초콜릿 같은 식품에서는 단 맛을 느끼면서 먹을 때 그 안에서 세라토닌이라는 기분 좋게 하는 물질이 나옵니다. 이러다가 보니까 잠시는 기분이 전환되는 것 같지만 이것들이 설탕이 누적되면서 아주 사람이 말하자면 참을성이 없고 폭력적인 사람이 되어 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우리의 감각이 원하는 대로 먹고 마시고 이렇게 살면 반드시 우리의 육체에도 해로움이 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정말로 좋은 것만을 원했으면 좋은데 좋지 않는 것도 원하기 때문에 나쁜 결과가 우리의 육체에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똑같이 우리의 정신과 마음도 우리의 영혼에, 우리의 인생의 전체적인 행복을 가져다 줄 것만을 바라면 참 좋겠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불화는 불순종으로 나타나고 불순종하는 삶은 뿌리를 캐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영혼이 하나님 때문에 행복해 하지 못하는 침체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불화한 관계가 될 때에 거기에는 두 가지가 도입이 되는데 하나님과의 무한한 거리감과 인격적인 낯섦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침체에 빠지고 주님과 평화를 잃어버릴 때에는 하나님이 아주 멀리 계신 분으로 느껴집니다. 너무나 하늘 높이 계셔서 오늘을 살아가는 나와는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더욱 불순종하게 되고 하나님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침체에 빠지고 하나님과 불화할 때에는 하나님이 한없이 낯선 분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나 자신이 하나님과 거리감을 느끼고 하나님이 매우 낯설게 느껴져서 그래서 마음속에 하나님을 기뻐 할 줄 모르는 그러한 낯선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과 친밀함을 회복하는 길이 필요합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회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깊이 느끼고 그리고 슬픔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회개하고 난 후에는 순종의 삶이 필요합니다. 단지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이 무엇일까?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생활이 무엇일까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배우며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깨달으면서 자기 자신이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위에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수단들,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와 기도와 성찬과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경건한 은혜의 체험을 계속하면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속에서 사귀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회개와 순종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의 사귐이 있을 때에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불화했더라도 다시 화목해질 수 있는 관계를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 앞에 복을 받는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B. “평안하라”
두 번째는 평안하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샬롬’이라고 하는 단어는 평화롭게 되라, 혹은 평안한 상태가 되라 라고 하는 명령형입니다. 여기에서 바로 ‘샬롬’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이 샬롬은 하나님과의 평화 때문에 이웃 모두와도 평화를 누리며 사는 그런 생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과의 평화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평화가 보이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서 나의 이웃들이 내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 혜택을 받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샬롬의 삶입니다. 그런 삶을 살면서 우리는 인간으로서 온전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뿐이시지만 그 모든 복은 하늘로부터 직접 오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사람을 통해서 옵니다. 영적인 복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여 내려주십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섭리의 복들은 사람을 통해서 흘러 들어오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인복이 많고 인덕이 후덕하다고 할 때에 그는 이미 오랜 세월동안 그런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긍휼을 베풀며, 많은 사람들을 섬기며 살아온 지난날이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평안 속에서, 샬롬 속에서 그 사람들이 또한 베풀어준 우리에게 다시 사랑으로 응답하면서 거대한 인류 사회 속에서 아름다운 사랑의 교통들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가 깨지면 따라서 당연히 이웃과의 관계도 깨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우리 이웃과의 관계도 모두 총체적으로 고쳐져야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가족과 불화하다면 하나님과 화해하고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화해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와 원수 맺은 것이 있고 마음속에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을 버리고 용서를 빌고 그리고 그와 다시 화목을 수립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의 총체적인 회복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변화되어야지만 이런 총체적인 회복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하나님 바깥에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복을 구하며 그 안에서 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 바로 그 순간 우리의 방법대로 복을 얻기를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복을 얻을 길을 사모하고 그리고 그 모든 행복해지는 비결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하나님 안에 있다고 고백을 한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 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 안에서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복이 네게 임하리라”
이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말합니다. 사실 복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히브리말로 ‘토바’인데 복이라기보다는 좋은 것, 이익 혹은 복락, 유익, 이런 것들입니다. ‘토브’는 원래 남성형으로서 ‘좋은, 선한, 아름다운’ 그런 뜻이지만 ‘토바’는 여성형입니다. 훨씬 구체적입니다. ‘좋은 것, 이익, 복락’, 혹은 ‘유익’ 이런 것들을 가리킵니다. 앞에 하나의 단어가 생략되어 있는데 모든 것을 복원해서 히브리어에서 번역을 하면 이렇게 됩니다. ‘그것들로서’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화목, 이웃과의 평화, 이것들로서 복락은 너에게로 들어온다.” 이런 의미입니다. 인간은 무엇이 정말 좋은 것인지를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복은 좋음이 무엇인가를 아는 지식과 함께 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즉, 깨달음을 통해 하나님이 선의 근원이시고 하나님이 복의 원천이시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과 화목함으로써 나도 하나님 때문에 복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복 있는 상태가 되는 그것이 진정으로 복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샬롬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를 배워가게 됩니다. 놀라운 것은 국민소득이 몇 만 불씩 되고 사회 복지가 잘 되어 있는 선진국보다는 오히려 아프리카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행복지수가 높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우리들이 보기에 절대적인 생활에서 보면 아프리카 사람들이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가전제품도 없고 손으로 다 빨래하고 어떤 마을은 물이 부족하고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세탁기에 대한 욕망이나 텔레비전에 대한 욕망이 없습니다. 인터넷에 대한 욕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우리가 아무리 물질적으로 잘 살게 되도 욕망이 계속 상승하면 언제나 불만족이 늘어갑니다. 그러니까 그런 욕망을 한껏 올려놓고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과 치열하게 경쟁하고 돈을 벌어서 그런 것들을 삽니다.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수많은 광고들을 보면 그 중의 단 하나도 없이 산다면 우리는 매우 불행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광고를 합니다. 그리고 그것 하나만 손에 넣으면 정말 행복할 것처럼 말합니다. 화장품 선전에는 예쁜 여자들이 나와서 누구나 저것을 바르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원판이 다른데 호박에다가 줄을 긋는다고 수박이 되겠습니까? 더욱이 영양제 선전을 할 때에는 아주 건강한 사람이 나옵니다. 원래 골골하는 체질인데 그거 하루에 한 알씩 먹는다고 그렇게 건강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허접한 헬스 기구 하나 갖다 놓고 근육질의 몸매를 자랑하는데 나도 저것을 사면 저 사람처럼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산 사람들 중에 아무도 그렇게 된 사람 없습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욕망을 확대해 갑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불만족한 사람이 되고 그래서 미친 듯이 눈에 들어오는 것들에 대한 욕망이 증대되면서 노예처럼 열심히 일하면서 그것들을 사들여서 자신을 만족하게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행복일까? 오늘 저녁에 와서 새로 산 물건을 좀 누려보고 내일 아침에는 그 할부를 갚기 위해서 새벽부터 뼈 빠지게 일해야 되는 생활, 그런 것들은 잘못된 생활입니다.
의사가 건강에 여러 가지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살을 좀 빼라고 강력하게 권고했습니다. “힘들면 3kg만 좀 빼보라.” 그래서 제가 한 8kg 정도를 뺐습니다. 천천히. 3월, 4월, 5월, 6월. 그러면서 저는 이 음식을 조절하는데 성공하는 비결을 하나 터득했습니다. 예전에 여러 번 실패했습니다. 일단 여러분이 체중을 조절한다고 그러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뭐냐 하면 닭 가슴살부터 먼저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다른 것을 안 먹고 닭 가슴살을 먹을 때 유용한 거지 다른 것을 다 먹고 닭 가슴살을 먹으면 닭 가슴살이 무슨 약입니까? 그러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는 고기도 먹지 말아야 된다, 뭐 먹지 말아야 된다, 그러면서 칼로리 계산을 잔뜩 합니다. 다들 A4 용지에 몇 장씩 써서 외워 봤거든요. 다 쓸데없습니다. 어느 한 순간에 너무 먹고 싶은데 탁 하고 줄이 끊어지면 에이 그러고 가버립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누가 가르쳐 준 것은 아닌데 편안한 방법을 택했습니다. 뭐든지 먹는다, 먹고 싶은 것은 뭐든지 먹고 고기든, 사탕이든, 뭐 사탕은 먹고 싶은 적이 거의 없지만 그러나 어쨌든 먹는다. 그 대신 어떻게 하냐 하면 절제를 합니다. 그래서 기름이 잘잘 흐르는 그런 고기가 너무 먹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먹습니다. 한 점을 딱 집어서 먹을 때 입 안에 육즙이 확 번지면서 꽃등심이 혀를 자극합니다. ‘야, 맛있다.’ 먹어요. 한 점. 두 번째 또 찍어서 먹습니다. ‘아, 맛있다.’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한계 효용의 법칙이 있습니다. 처음에 욕구가 강할 때 탁 먹으면 만족도가 확 올라오고 그 다음에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한 네 점쯤 딱 먹습니다. ‘정말 맛있다.’ 그리고 스스로 말하는 것입니다. ‘됐어. 충분해. 나는 충분히 즐겼어. 충분히 즐겼어.’ 젓가락을 탁 놓습니다. 그리고 속에서 자기가 섭섭해 하면 “괜찮아. 괜찮아.” 말을 하는 것입니다. ‘괜찮아. 내일 또 먹을 수 있어.’ 파인애플 같은 것 당이 아주 높습니다. 너무 먹고 싶으면 먹습니다. 한 쪽 맛있게 먹고 또 한쪽 탁 먹으면서 또 먹고 싶으면 “충분해. 나는 충분히 즐겼어. 나는 먹고 싶으면 자유야. 내일도 먹을 수 있어” 탁 숟가락을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음식을 넘나드는 것입니다. 아무 문제없습니다. 아무 것도 그 맛이 안 납니다. 기름이 막 새카맣게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자장면 아시죠. 자장면을 정말 맛있게 하려면 자장을 이렇게 볶을 때 1인분에 반 공기 정도의 기름을 넣어야지만 맛있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그런 거 볶을 때 거의 한 공기씩 집어넣습니다. 반 공기 정도를 넣습니다. 그것을 다 먹으면 맛있게 비빕니다. 기름이 자장면 집 갔을 때 자장면이 자르르 흐르는 것일수록 그게 안 좋은 것입니다. 자기 얼굴이 비출 정도로 반짝반짝합니다. 광채가 납니다. 그리고 비빕니다. 그리고 먹습니다. 한 점, 두 젓가락, 세 젓가락, 네 젓가락쯤 먹으면 반쯤 먹잖아요. ‘이, 충분해. 나는 충분히 엔조이했어.’ 그리고 젓가락을 탁 놓습니다. 아쉬우면 ‘내일 또 올 수 있어. 오늘은 여기까지.’ 그러면 아무리 먹어도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 모든 인간의 불행은 끊임없는 자기 집착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려놓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그것을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자로서 정당하게 노동을 해서 좋은 화장품을 사고 싶다. 그게 뭐가 잘못된 욕망이겠습니까? 그러나 그것 없이는 못 살겠다 그것은 안 됩니다. 허접한 옷 서너 벌보다는 예쁜 옷을 하나 사 입고 싶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형편이 안 될 수 있으면 그것을 접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카드빚을 내고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서 사지 않을 정도가 되면 이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집착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바깥에서 자신이 행복해지려고 집착하던 것들을 내려놓고 ‘또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왜 내게 하필 이런 상황이, 나는 도저히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이렇게 하던 삶을 바꾸어서 그 현실을 그대로 인정해야 됩니다. 그리고 조용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IV. 적용과 결론
우리는 항상 좋은 것을 통해서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셔서 그래서 우리를 참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하나님은 선하시며 선 자체이시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 안에서 당신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을 배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마음대로 우리의 인생의 삶이 펼쳐지지 않을 때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게 원래 인생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바로 그렇게 안 되는 것 없이 되게 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예전에는 우리 마음대로 인생이 펼쳐지지 않을 때 좌절하고 낙심하고 죽음을 생각했지만 이제는 우리의 영혼과 정신 속에 하늘로부터 오는 자원을 받아서 그것들을 이기고 극복하고 불행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바꾸어 희망으로 돌려놓는 것이 바로 신앙의 유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이 여러분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에 그때 마음을 돌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여러분이 사업에서 겪고 있는 위기, 가정에서 겪고 있는 많은 문제들, 눈만 뜨면 만나는 고통스러운 상황,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여러분이 하나님과 잃어버린 평화를 회복하고 이웃과 잃어버린 화평을 다시 회복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온전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인 줄 누가 알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이렇게 여러분의 마음을 돌려 신실하신 하나님 의지하며 살도록 부르고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나님과 친밀히 하고 그분과의 평화를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하나님과 화목함
“청컨대 너는 그 입에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욥 22:2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행복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공통된 욕망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불행해지는 것도 이 행복해지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마음에 많은 생각들이 오고가게 됩니다.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멀리 떠나 행복해지려고 애를 쓸 때에 인간은 그 욕망 때문에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자신이 찾던 행복보다 더 커다란 불행의 쓰라림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고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먼저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과 사이에 온전한 평화가 이루어지면 마음의 평안이 찾아오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샬롬이 이루어집니다. 이때 그는 비로소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고 바로 그 때문에 그 사람은 복을 받는 것입니다.
II. 하나님과 화목하는 길
A. 교훈을 받음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만 하나님과 화목해질 수 있을까요? 오늘 읽은 22절서부터 24절까지 3절에서 바로 하나님과의 화목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2절은 오늘 이렇게 말합니다. “청하건대 너는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고 말입니다. 제일 먼저 교훈을 받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 상반 절을 히브리어에서 읽으면 이렇게 됩니다. “제발 너는 그 분의 입으로부터 토라를 취하라”고 말입니다. 이 ‘토라’라는 말은 구약 성경에서 원래 모세의 율법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렇지만 이 욥기의 저작 연대가 아브라함 시대쯤 되는 것을 보면 모세가 이 율법을 하나님께 받기 전에 이미 쓰여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토라는 모세의 율법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의미의 율법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율법 토라라고 하는 말이 성경에서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이 되는데 넓은 뜻으로 사용이 되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흠 없는 계시의 총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인간이 누구이고 세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모든 하나님의 계시를 율법이라고 부릅니다. 또 좁게 말한다면 이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살아야 할 도덕적인 삶의 가르침을 뜻하는 것입니다. 아마 여기에서는 좁은 의미의 토라를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이 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인간이 어떠한 삶을 영위해 가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 라고 하는 그 사람의 대답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실제적인 삶의 교훈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에 기초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이야말로 행복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비결입니다. 알아야지만 믿을 수 있고, 또 알아야지만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사랑할 때야 비로소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이 지식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인간 세상에서의 모든 사태들이 불행과 비극으로 점철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이 땅에 있는 자원의 부정만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이 세계에서 맛보고 있는 모든 인간의 비참과 그리고 비극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이 세상이 어떻게 창조되었고,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이고, 또 이웃이 누구이고,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아서 그러므로 내가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으로 행복에 이르는 길인가 하는 지혜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고 그 사랑에 넘치는 은혜 속에서 살 때에는 매일매일 하나님께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것이 우리에게는 기쁨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배우고, 그래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웃이 어떤 존재인지를 이해하고 그래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을 알게 되는 것, 이것이 우리의 큰 기쁨입니다. 날마다 그 진리의 빛의 인도를 받으며 하나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할 때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행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면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정말 여러분의 최고의 기쁨이 하나님의 교훈을 받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이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깨닫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기를 원하는 진정한 기독교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여러분에게 기쁨이 되고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다른 수단과 방법으로 창조하시지를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말씀 한 마디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께서 말씀 한 마디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심으로 우리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위대한 지혜와 능력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드리면서 듣게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천지를 창조하신 위대한 능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될 때에 우리가 믿음으로 그 말씀을 붙들고 살라고 하나님이 이 세계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우리가 원하지 않는 삶의 사태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괴로워하고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삶의 사태들을 변화시켜 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지만 우리 자신의 힘으로 삶의 사태를 변화시킬 수 없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의 사태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받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우리의 마음을 때려 주십니다. 그래서 믿음의 눈으로 우리의 인생을 보면 우리의 마음대로 인생이 풀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여기 앉아있는 여러분 중에 태어나서 이제까지 모든 인생의 일들이 마음먹은 대로 술술 풀렸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발로 걸어와서 하나님을 믿게 될 사람들이 여러분 중에 몇 명이나 있었을까요? 여기에서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이 사람도 인생의 벼랑 끝에서 주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내가 원하는 삶에 사태 속에 있었더라면 나는 영원히 무신론자로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사태를 바꿔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보려고 애쓰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때리고 때로는 찌르셔서라도 우리의 마음을 바꾸심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세로 우리를 돌이키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며 여러분이 왜 나의 인생은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까? 왜 나의 삶의 사태는 이토록 괴롭고 그리고 시련과 고난에 가득 찬 삶을 살게 될까? 마음 한 구석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섭섭함과 마음의 원망까지도 간직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는 수학 공식처럼 그렇게 쉽고 간단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매우 복잡해서 인생을 다 살아보기 전에는 그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당신 바깥에서 행복을 누려 보려고 하는 우리의 마음을 때리십니다.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가 아파할 것을 알면서도 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미움과 증오 속에서 우리를 치고 때리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때리시고 사랑으로 치셔서 그래서 우리가 눈물 흘리고 아파할 때에 오히려 우리보다 더 슬픈 마음으로 우리의 영혼의 상처를 싸매시고 위로하기까지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 모두 여러분이 강퍅한 마음을 녹여 다시 어린 아이같이 겸비한 마음으로 그 말씀의 교훈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봄철에 둥지에 있는 작은 제비 새끼들이 노란 주둥이를 크게 벌리고 작은 벌레 하나 물어오는 엄마의 입을 쳐다보면서 그 모이를 받아먹으려고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서 가난한 심령으로 주님께 매달리던 때가 여러분에게 있었습니다.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다시 당신과 화목하게 만들어 주시고 그래서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고 했던 여러분 자신을 미워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돌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말씀을 마음에 둠
두 번째는 말씀을 마음에 두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아마라유’라고 해서 ‘그의 말씀들’이라고 나옵니다. ‘말’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의 대표적인 두 단어가 있는데 ‘다바르’와 ‘에메르’라는 단어입니다. 다바르는 소리를 내어서 사람들이 귀로 들을 수 있도록 발화된 말입니다. 그러나 에메르라고 하는 이 단어는 발화된 말뿐만 아니라 생각 속에 있는 언어까지도 포함된 것입니다. 이 단어의 동사가 제일 먼저 사용된 것이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더라고 할 때 그것입니다. 직역을 하면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더니 빛이 있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들을 사람이 없는데 하나님이 누구에게 사람의 언어를 가지고 말하시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생각 속에 있는 언어입니다. 그러자 이 세계는 하나님의 생각대로 창조되었던 것입니다. 명시된 하나님의 말씀뿐 아니라 그의 생각까지도 담은 단어가 바로 에메르라는 단어입니다. 참된 신앙은 참된 사랑을 반드시 동반해야 하고, 참된 사랑은 자기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거기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담배를 피우는 것이 죄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술을 먹는 것이 죄입니까? 주일날 이런 저런 행동을 하면 성수주일을 어기는 것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의 이면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벌을 내리시지만 않는다면 갈 데까지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오히려 하라,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그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참 신앙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사도로 불리웠던 요한 사도가 그의 서신서 3장 22절에서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받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의 기뻐하시는 바를 행하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까지도 이루어 드리고 싶어서 적극적으로 그 기뻐하시는 뜻을 찾아서 살려고 애를 쓸 때에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의 모든 기도를 응답하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묻습니다. “기도의 응답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대우 하십니까?” 물론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의 기도를 더 잘 들어 주실까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고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어서 그 말씀이 우리를 주장하고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과 온전한 사랑의 연합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하나님께 요구할 수 없습니다. “부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내가 저 미워하는 놈들 전부 다 다 짓밟아 주십시오. 저 사람들의 모든 물질을 빼앗아서 나를 부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런 식의 기도를 하지 않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 세상에 이루실 때에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당신의 마음을 넣어주셔서 그 예수님의 소원이 자기의 소원이 되어서 그렇게 치열하게 그 일을 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귀한 뜻들을 성취해 가시는 것입니다.
저는 중국에 갈 때마다 그런 생각을 참 많이 합니다. 1년에 4번, 많이 들어가면 4번 정도 들어갑니다. 정말 힘듭니다. 그리고 가면 언제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다 말할 수 없는 아주 속상하고 힘든 일도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 내가 회의를 다 끝내고 가방을 메고 혼자서 공항을 걸어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누가 편지를 써서 나에게 건넸습니다.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생각합니다. ‘내가 아니면 누가 이런 일을 하랴’ 그게 내가 잘났다는 뜻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그런 마음을 주셔서 그래서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그 일 하게끔 하시는 것입니다.
2. “마음에 두라”
그러면 하나님이 그 한곳에서만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까? 아닙니다. 우리들이 미처 보지도 못하는 교회 구석, 구석, 이 세상 어디에선가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을 당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들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에 대한 꼭 같은 소원을 기뻐하게 만드심으로써 그 일이 예수님의 일인 동시에 자신의 일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가게 되는데 그것을 우리가 쉬운 말로 사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명이 없는 삶은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있는 사람의 삶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일들을 하면서 힘들고 어렵다고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투덜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바라보시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문자 이상의 생각을 전해주고 알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깨닫기에 가장 적합한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가득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기를 “참된 철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씀을 마음에 두라고 했는데 히브리말로 ‘심’이라는 단어입니다. “무엇을 어디에다가 놓다, 두다, 보관하다, 맡기다.” 이런 뜻입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인간의 지성, 의지, 이런 것들이 깃드는 마음의 자리입니다.
사람마다 다양한 삶을 살아갑니다. 악인은 악한 삶을 살아가고 선인은 선한 삶을 살아갑니다. 의인은 정의로운 삶을 삽니다. 그 다양한 삶은 흘러내리는 시냇물과 같아서 그것을 추적하고, 추적하고 마지막에 올라가면 샘물이 나오는데 그 샘물이 바로 인간의 마음입니다. 악인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고, 선인의 마음에는 선이, 의인의 마음에는 정의가 가득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다양한 삶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숙제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자신도 기뻐하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더 쉽게 묘사를 하자면 참으로 성화된 훌륭한 신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하시는 바가 자신에게도 기쁨이 된 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일평생 여행해도 도달할 수 없는 가장 긴 장거리의 여행이 머리에서 시작해서 마음까지 내려오는 여행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일생을 살아도 머릿속에서 마음까지 거의 못 내려오고 인생을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일생을 살면서 수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여러분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 말씀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남겼습니까? 악인도 종종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기뻐하는 때가 있고 선한 사람도 종종 마귀의 유혹을 받고 좋아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항구적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어쩌다 한번 하나님 만나고 눈물로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여러분이 이미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하나님의 말씀이 단지 우리의 정서를 새롭게 하고 우리의 기분을 전환시킨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떨어져서 깊이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거두게 되는 큰 변화를 동반함으로써 우리는 진정으로 그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닫고도 영혼과 삶에 변화가 없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 했는데 바로 숙고와 적용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한번 듣고 스쳐지나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지속적으로 깊이 생각하면서 자신의 심령에 익숙해지게 만들고, 또 그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매일 자신의 삶에 적용해서 실천하려고 할 때에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변화가 오래도록 삶으로 지속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얼마 전에 두툼한 책, ‘주기도문’으로 공과공부를 끝냈습니다. 여러분은 책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공과공부까지 하고 문제를 풀었으니 여러분은 꽤 그 책을 읽은 셈이 됩니다. 그러나 그 말씀들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얼마나 남아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그 모든 책들을 내 머릿속에 있는 지식으로 썼고 부족한 부분들은 선배들이 써 놓은 책들을 이용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어쨌든 나의 머릿속에서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지금 그 주기도문 책을 18번째 읽고 있습니다. 이유는 그 내용 중 내가 모르고 혹은 이해를 못하는 것들이 있어서 그 책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는 이미 내 마음속에서 토해내어 그 책을 썼지만 그러나 써 놓은 그 책의 말씀이 모두 내 마음에 지금 담겨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지식이 많아도 붙들고 살지를 않는다면 그 말씀이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그 말씀을 깨닫고 심지어는 외워서 잘 암기하였다고 할지라도 지성의 창고에 차곡차곡 쌓여있고 마음속에는 실제로 붙들며 살아갈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태만한 삶을 살면서 그 사람이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리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할 것입니다.
깨달은 마음에 비로소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제목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혜가 생겨나게 마련이고, 그러한 지혜가 있을 때에 기도의 열렬함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마음속에 아무것도 담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보다는 아주 적은 지식이라도 올바른 지식을 마음속에 붙들고 살아가는 실제적인 생활을 해나가는 그리스도인이 진정으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나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깁니까? 홀로 조용히 앉아 성경을 읽거나 책을 읽고 나면 그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에 담겨집니까? 그래서 그 말씀이 여러분에게 지식을 주고 감동을 주고 선한 의지를 불러 일으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강력한 욕구를 여러분에게 주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찌하든지 행복해지려고 애를 씁니다마는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이런 저런 것들에 대한 갈망이 여러분 속에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로 돌아가는 것보다 더 행복에 이르는 확실한 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III. 적용과 결론
여러분에게 중요한 것은 매듭처럼 얽혀버린 이 삶의 이 땅의 자원이 한없이 공급되는 것이 아니라 매듭처럼 얽혀서 혼란스러운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질서가 부여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가치는 먹고 입고 마시는 이 세상의 복을 가져다주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무질서한 우리의 삶에 질서를 부여하고 어떤 것이 우리가 사용해야 할 것이고, 어떤 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것이고, 향유해야 될 것인지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그 말씀의 빛 앞에서 우리의 삶의 질서를 깨닫고 그리고 우리가 정말 하나님이 가르쳐 주는 이 진리의 질서를 따라 우리의 삶의 질서들이 온전히 자리 잡혀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눈물과 하나님 앞에 돌이키고자 하는 선한 의지의 결심은 이렇게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하고 이것을 누리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 인간의 아름다운 반응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혼란스러운 우리의 삶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리고 깨달음이 올 때에 우리는 비로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알게 됩니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의 삶을 바꿔놓고 모든 이 세상의 추루한 욕망과 거짓된 것에 사로 잡혀있던 우리의 영혼에 해방을 가져다줍니다마는 이 성령은 자기 홀로 역사하지 아니하고 언제나 진리를 깨닫는 인간의 마음속에 찾아오셔서 역사하여 그래서 그 진리를 알고 그 진리 때문에 우리를 자유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나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이 세상에 있는 헛된 것들을 열심히 찾고 행복해지려고 애쓰시는 대신에 먼저 하나님이 이 땅을 살아가는 여러분을 보며 행복해지시는 하나님이 되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화목으로 돌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다시 우리의 마음을 진리에 불붙여 하나님 앞에서 불꽃처럼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능자에게 돌아가라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네가 지음을 받을 것이며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하리라”(욥 22:2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 보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결국 인간이 불행하게 된 것은 행복해지려고 많이 노력했기 때문에 불행해졌다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지혜는 하나님 안에서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며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행복을 찾는 것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삶의 비결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II. 무너진 삶을 다시 세움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네가 지음을 받을 것이며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하리라” 고 말입니다. 좀 번역이 이상하게 되었지만 ‘지음을 받을 것임이요’ 라고 하는 이 단어는 히브리말로 ‘티바네’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바나’라는 동사, 집, 건물, 자신의 지위 등등을 세우다, 혹은 건축하다 라는 의미를 가진 바나 동사의 수동형입니다.
여러분은 영화 제목 ‘벤허’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원래는 ‘벤훌’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에 나오는 아론과 훌 중에 ‘훌 가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아들을 뜻하는 ‘벤’이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집을 세우다’ 라는 ‘바나’에서 유래되었다는 재미있는 어원적 추적입니다. 여자가 시집을 가서 아들을 낳음으로써 그 집안에서 자신의 지위가 견고해진다고 해서 아들을 낳는 것이 곧 집을 세우는 것과 같다는 의미로 바나, 벤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 나오는 ‘티바네’라고 하는 단어는 아마 제대로 번역을 한다면 ‘네가 세워질 것이며’ 라는 뜻입니다. 세워진다고 하는 것은 언젠가 무너진 것을 염두에 둔 것이고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다시 하나님에 의해서 네가 세워질 것이다 혹은 건축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마음과 삶이 무너지고 그리고 내면의 세계가 파괴되고 생활이 무질서하게 되어진 무너진 그 삶을 하나님이 당신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그 무너진 삶을 다시 세워주실 것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산 것이 아닙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생각 없이 밥을 먹고 그리고 그저 흐느적거리면서 직장 가고 그리고 또 하루 지내고, 자고 또 하루를 맞이하고 이게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냥 생존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하루하루를 핏방울처럼 진하게, 자신이 삶의 주체성을 가지고 인생의 어떤 목표를 가지고 영위해가는 목적 있는 삶이 그게 사는 것이지 그냥 생존해 있는 그것은 살아가는 삶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살다, 삶, 살림, 이 모든 것은 생명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가지고 그 생명을 주신 목적을 따라서 자신이 삶의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 삶이 진정한 삶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가운데 ‘들레쥬’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해체주의 철학의 대가입니다. 이 똑똑한 사람이 불행히도 말년에 치매에 걸렸습니다. 잠시 정신병원에 있었는데 치매 치료를 받는데 잠시 제정신으로 돌아온 시간에 그는 침대에서 내려와서 자기 묶은 것을 다 풀고 그리고 유리창 바깥으로 기어나가서 투신해서 죽어버렸습니다. 평소에 자신의 철학적인 신념을 따라 산 것입니다. 무슨 신념이냐 하면 자기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어서 어떤 목적을 향해 가는 것이 인생이지 생존해 있는 그것은 인생이 아닙니다. 치매 상태가 돼서 자신이 목숨을 연명해 나가는 이것은 자신의 철학에 의하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신념을 따라서 투신해서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A. 하나님과의 관계
우리는 ‘들뢰즈’의 이런 삶에 대한 생각을 모두 긍정적으로 수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삶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셨는데 그 나와 함께 사시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동행하면서 내가 내 삶의 주체성을 가지고 그리고 나의 지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나의 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사랑하면서 어떤 내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 인생이지 생존해 그것이 무슨 인생이냐 이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생명을 가리켜서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무너진 삶으로는 자기가 삶의 주체가 되어서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 의미 있는 삶으로 영위해 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굉장히 많은 자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 당신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라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랑의 질서입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입에다가 달고 사는데 그 올바른 관계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결국은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그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자신의 삶의 모든 질서를 재편해서 통일된 사랑의 질서를 가진 체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한다 라고 하는 말의 핵심적인 의미입니다. 이런 삶을 살지 못할 때 인간의 영혼은 깊음 속에 들어가게 되고 이런 영혼의 깊음을 일깨우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종종 환경의 깊음까지 동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시편 130편에서 시인이 울부짖었던 것처럼 여호와여 내가 깊은데서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라고 하는 탄식의 지경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무너진 삶의 이면에는 반드시 무너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고, 그 무너진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최종적인 사랑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육체가 살아있다고 해서 모두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고 하나님 앞에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육체를 계도할 수 있는 내면적인 어떤 작용들이 있어야 되는데 이것이 영혼의 작용입니다. 그런 점에서 영혼은 육체의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혼도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영혼도 자신을 영혼으로서 올바르게 기능하며 육체를 계도하게 할 수 있는 어떤 생명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아야 됩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영혼의 생명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생명이 영혼이라면 하나님은 그 영혼의 생명이며 그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신의 책 속에서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생명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떠난 것이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극이요, 비참이라고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르고 탁월한 영혼의 상태 없이는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 가지 삶의 사태에 직면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을 하다 위기를 만났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어서 고통을 받고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질병을 얻어서 괴로움 속에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우리에게 매우 현실적인 문제이고 이 현실적인 문제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필요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궁극적인 길은 아닙니다. 물질이 필요하면 하나님이 물질을 주셔야 하고 건강을 잃었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건강을 주셔야지 우리의 삶의 사태들이 올바르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후의 삶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만약에 우리가 바르고 탁월한 영혼의 상태가 없다면 건강한 몸으로 무엇을 할까요? 다시 많아진 물질을 가지고 우리는 무엇을 할까요? 높아진 지위를 가지고 어디에다가 사용을 할까요? 우리 주위에 많은 사람들 보면 차라리 덜 건강했다면, 차라리 돈이 좀 적었더라면, 저렇게 높은 지위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덜 불행했을만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철학자 플라톤은 인간이 참으로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덕이 무엇인가 탐구하면서 네 개의 덕을 꼽았습니다. 지혜와 용기, 욕망과 정의, 이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지혜, 용기, 욕망, 정의, 이런 것이 말하자면 인간으로 하여금 진정한 행복한 삶을 살게 하는 네 가지의 덕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덕을 행하며 살아야 할 궁극적인 대상이 누구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일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래서 플라톤과 그 추종자들의 글 속에는 참회의 눈물이나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경건함, 죄를 뉘우치는 회개와 용서를 비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죄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덕들로서는 인간이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고, 이러한 덕들이 인격적인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통합되어서 재해석되어야지만 인생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이라고 하는 질서 속에서 지혜에 대한 해석은 무엇일까요? 이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질서 속에서 지혜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사랑해야 할 것과 그러지 말아야 될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용기는 무엇일까요? 참으로 사랑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과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는 진정한 기개, 이것이 용기입니다. 정의는 무엇입니까? 참으로 사랑해야 할 것을 참으로 사랑하고, 사랑하지 말아야 될 것을 사랑하지 않고, 원래 그에게 고유한 어떤 몫을 돌려주고, 그것을 귀속시키는 사랑이 그것이 정의입니다. 그런가 하면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인간 속에서 솟아나게 마련이지만 참으로 가치 있는 것들에 대한 욕망이 아닌 것들은 억제하고 가치 있고 영원한 것들에 대한 욕망은 유지시키고 사랑하게 하는 그것이 바로 욕망의 덕입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결국 우리의 영혼과 정신이 바르고 탁월하여 우리의 육체, 우리가 삶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태들을 헤쳐 나갈 수 있을 때에 그때 비로소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이 무너진 삶에 이끌려가는 생활이 아니라 주체성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는 사람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너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렇게 고쳐서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살아가고 있는 삶이 정말 여러분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헤쳐 나가는 의미 있는 삶인지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무너졌다면 먼저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를 회복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사람들과의 관계
두 번째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심으로써 하나님은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우시는 것입니다. 무너진 삶의 한복판에는 사람들과의 관계의 파괴가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의 파괴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이탈을 반영합니다. 인간이 많이 누려도 비교적 부작용이 없는 가치 있는 행복은 대부분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의 부모님과 함께했던 아름다운 기억들, 사랑하는 이웃들과 사랑하는 친구들과 함께 나눴던 정다운 교제에 대한 기억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적인 친교를 나누던 사랑하는 형제자매들과의 영적인 교통의 경험들, 이런 것들은 언제든지 우리가 회고할 때에 마음속에서 은혜가 되고 기쁨을 주고 우리에게 살 수 있는 희망을 줍니다.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영적인 생명의 기운이 허약해지게 되면 이런 사람들과의 관계를 지탱하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예전에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은혜를 많이 만났다고 하더라도 예전에 은혜는 예전의 삶을 살게 하는 동력이 되었고 지금은 지금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고갈되었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자원이 없습니다. 인간의 폭력, 미움, 그리고 불의, 이기심, 이런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 모든 것들을 누르고 덮고 있을 때에는 부족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고, 자기를 희생하며 관계를 지속해 갈 수 있지만 이런 은혜들이 사라지고 나면 밑바닥에 깔렸던 이 모든 악한 것들이 소리치며 다 튀어 올라와서 우리와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은혜가 떨어지고 나면 사람이 거의 인간관계에 있어서 짐승 같은 사람으로 돌변하게 됩니다. 아무하고나 다투고 그리고 아주 사소한 일로 소중하게 오랫동안 계속 되었던 관계를 짓밟아 버리는 것입니다. 얼핏 보기에 자신은 가해자이고 타격을 입은 사람이 피해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 가정의 질서, 교회 안에서의 질서, 이런 것들을 깨뜨리고 짓밟는 사이에 그의 영혼은 만신창이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과연 그가 향기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의 향불을 올릴 수가 있을까요? 과연 그가 청결하고 순수한 어린 아이 같은 마음으로 진리의 말씀을 탐구할 수가 있을까요? 그의 마음속에 흠 없고 티 없는 하늘나라가 그의 마음속에 명상되어질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것입니다.
결국은 이러한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통과 은혜의 수단이 주는 유용성들을 상실하게 되면서 영혼의 생명은 급격히 사라지게 되고 그래서 그는 더욱더 말하자면 말랑깽이와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세월이 많이 흐르고 난 뒤에 그렇게 무너진 삶을 자신이 야비한 방식으로 살아왔을 때에 자신이 외톨이가 된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훌륭했는지의 여부는 그가 어떤 지위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얼마나 많은 재물을 소유하게 되었는지가 아닙니다. 높은 지위와 물질을 소유하고 있으면 그 사람과의 인격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아부하는 사람들이 따라 다니게 마련이고 또 어쩌면 반대로 복종하며 따라가야 할 보스들에게 아부하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이 모든 관계에서 끊어져 고립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정말 자신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산 사람들은 이런 진리와는 상관없이 그를 좋아하고 그와의 관계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에워 쌓여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고 성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사람들과의 관계를 지탱해 갈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주시고 하늘의 생명의 자원을 진리와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C. 자신과의 관계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우시기 위해서 당신께로 돌아오는 사람에게 자신과의 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성경에는 자기를 사랑하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왜 등장하지 않느냐 하면 자신이 무가치하기 때문에 등장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면 그 안에서 자신이 하나님과 이웃에게 가장 사랑을 받는 상태가 될 것이기 때문에 성경은 굳이 자기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 사랑의 질서를 버리고 자기 사랑으로 매몰될 때에 그때에 영혼과 정신의 분열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마땅한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고 자기를 사랑하려고 할 때에 마음속에서 하나님 사랑의 질서와 자기 사랑 사이에서 찢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책에서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공간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사랑할 대상을 제시하지만 시간은 우리에게서 그것을 빼앗아 간다”라고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공간 속에서 끊임없는 사물들이 우리에게 제시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아름답게 보이고 예쁘기도 합니다. 마치 하와가 선악과를 모았을 때에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게 느껴졌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깊어졌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눈앞에 있는 것들은 흘러가고 변하고 소멸하여 없어집니다. 없어졌는데도 사랑이 남았다면 사랑할 대상을 잃어버렸으니 사라져 버린 소멸은 남아있는 사람의 마음에 고통이 되기 때문에 그 사랑은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사라지지 않고 아직 남아있는데 마음속에 사랑하는 것이 사라졌다면 사랑하지 않아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는 또한 공간 속에서 제시되는 모든 사랑의 대상에 속임을 당한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수없는 자기의 찢어짐 속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올곧게 하나님이 자신을 이 세상에 창조하고 구원하신 목적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1부, 2부, 3부에서는 이야기를 안했는데 여러분에게 얘기하고 싶은 게 ‘내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이시라는 시리즈를 꼭 한번 들어보십시오. 처음부터 차례대로 그리고 여러분의 삶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하는 내비게이션으로 한번 사용을 해 보십시오. 그리고 어디에서 이탈했는가를 생각하고 방향 수정을 해서 돌아오는 것만이 우리의 남은 인생을 하나님 앞에 의미 있게 행복하게 사는 길입니다.
결국 우리는 은혜 안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 자신이 하나가 되고 찢어지지 않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탁월하고 올바르고 힘이 있는 영혼의 상태로서 가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며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 나라의 소명을 따라서 의미 있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예배에 참여하고 또 기도를 하거나 함께 교재를 하면 어느 정도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대부분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데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찢어진 자신을 지탱하는데 겨우겨우 지탱하는데 소비되기 때문에 그 은혜가 무엇을 생산해 내지는 못합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을 진정을 찾기 위해서 먼 길을 떠나거나 혹은 자아를 찾아 떠나는 깊은 산속으로의 여행 같은 것 필요 없습니다. 누구든지 참된 자기를 찾고자 하는 사람은 곧 주님께로 돌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무너진 자신의 삶을 다시 세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루를 살아도 정말 주님 안에서 내가 예수와 함께 내 삶의 주체가 되어서 의미 있는 인생을 사는 것이 그것이 인생을 사는 것이지 살아있는 그것이 사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III. 전능자에게 돌아가라
그런데 오늘 성경은 바로 이렇게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전능자에게로 돌아감으로써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네가 지음을 받을 것임이요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함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전능자’라고 번역되어 있는 단어는 히브리말로 ‘샷다이’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게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는 아직까지도 논란의 대상입니다.
전능자라고 번역을 했지만 이 ‘샷다이’가 원래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첫째는 ‘샷다이’라는 말이 ‘샤다드’라는 동사에서 왔다고 보는 것입니다. ‘샤다드’라는 동사는 ‘쳐부수다, 파괴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입니다. 아주 느낌이 강한 동사입니다. 그렇다면 아마 이 단어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대적하거나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행하게 하기 위해서 대적하는 원수들을 하나님이 큰 권능으로 쳐부수셔서 보호하신다 라고 하는 의미에서 ‘샷다이’라는 말이 성립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유대 랍비들은 전통적으로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습니다. ‘샷다이’라고 하는 단어는 히브리어에서 존재를 의미하는 ‘쉐’라는 단어와 충족하다 라는 의미를 가진 ‘다이’가 합쳐진 것인데 그래서 ‘샷다이’가 되었는데 이것은 충족한 존재 혹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완전하고 만족한 존재, 이런 뜻이라고 합니다마는 현대의 해석가들은 이 해석을 별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둘보다도 높은 가능성이 있는 하나의 새 해석이 있는데 ‘샤두’라고 하는 바벨론어에서 온 형용사와 ‘아이’라는 접미사가 붙어서 ‘샷다이’가 됐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럴 경우에 이것은 모든 만물위에 아주 높으신 지존자라는 의미입니다. 어쨌든 이 모든 해석들을 각기 다 통합을 해서 살펴보면 ‘샷다이’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규명하기 어렵다고 할지라도 대체로 이 ‘샷다이’라고 하는 의미는 모든 만물들 위에 탁월하게 뛰어 나셔서 큰 권능을 가지고 자기의 백성들을 보호하고 이 세계를 다스리시는 위대한 분이시라고 하는 뜻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대체적인 일치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A. 하나님을 의지함
결국 우리의 불순종과 죄는 어디에서 생기게 될까요? 하나님은 높고 위대하시며 모든 일들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당신이 기뻐하시는 모든 일은 넉넉히 행하실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라는 신앙에서 이탈할 때 모든 불순종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왠지 할 일 없이 허송세월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주님을 의지해도 마지막에 결과는 허당을 밟은 것과 같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이 주님을 의심하게 만들고 전능하신 하나님보다는 자기를 의지하며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하는 의미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관계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 자신이 가장 잘 안다고 믿고 그 지혜를 따라서 선택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행복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또 우리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게으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지만 그러나 행복에 이르지 못합니다. 때로는 혹 정확하게 올바른 판단을 내렸다고 하더라도 올바른 판단을 이행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에 이르지 못합니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결국 지혜와 능력에 있어서 자신을 의존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의 불행은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의도하셨던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의 관계에서 떠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일이 무엇일까요? 우리의 인생의 문제들은 응급처치처럼 부분적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있고,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부분적인 해결은 항상 부분적인 문제들을 또 안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병 고침을 받았던 많은 사람들이 일평생 살면서 한 번도 질병에 걸리지 않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병 고침 이상, 우리에게 물질적인 행복 이상, 우리에게 이 세상의 번영 이상의 그 무엇을 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 그 분의 전능하심과 우리의 무능함의 격차를 깊이 인정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해 보려고 했던 타락한 삶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기에 있는 여러분도 언젠가는 여기에서 주님을 만나고 회개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의 마음이 어땠습니까? 인간의 영혼이 가장 아름다운 경우가 두 번 있는데 하나님을 순전하게 사랑하는 때와 자신의 죄를 진실하게 뉘우칠 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매주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순서를 따라서 말씀을 듣고 얼마간 헌금도 합니다. 이런 저런 프로그램에 함께 붙어서 돌아가며 교회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거기 생명이 있습니까? 이런 교회 생활 자체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는 못합니다. 생명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만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간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몸과 우리의 모든 의식들이 정말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까? 우리의 몸은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오지만 주님을 간절히 찾는 마음의 깊은 갈망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정말 진실하게 회개하고 눈물로 하나님 앞에 당신의 거룩함을 인식하고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고 아무것도 아닌지를 깨닫고 주님의 은혜만을 바라본 적이 언제입니까?
18세기의 위대한 설교자, 전도자였던 조지 휫필드는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식을 때마다 자기가 처음 회심하였던 교회당을 찾았고 그 자신이 앉았던 그 의자에 무릎을 꿇고 입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정말 우리에게 진실한 회개와 돌이킴,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던 인간의 배양하는 삶을 돌이켜 다시 하나님을 향해 전향하고 자신이 주에 대해 슬퍼하고 자신이 불순종한 길에서 돌이키는 그래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생명으로 돌아가는 일들이 우리에게 정말 있었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예배를 마치고 나면 여러분은 일주일동안 정말 자신 있게 은혜 안에서 회복된 여러분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삶의 주체가 되어서 살려져 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인생을 이끌고 주님이 주신 목표를 따라 살아갈 수 있는 그 어떤 추진력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 품에서는 세상이 그립고 세상의 품에서는 왠지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처럼 허전한 느낌이 드는 양다리 걸친 삶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결국이 무엇일까요? 타락은 복잡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능력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타락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전능자라고 하는 인식을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 행복해보려는 교만을 회개하고 다시 주님을 의지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불의를 멀리함
마지막으로 성경은 말합니다.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하리라”고 말합니다. ‘아벨라’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는 ‘불의 혹은 사악함 혹은 부정함, 불결’ 등을 의미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불결을 버려야지만 겨우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그 불의를 멀리하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 모습으로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까? 이 모든 것을 청산하고 내가 깨끗케 된 후에야 하나님께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술, 담배 하나도 못 끊는 것이 인간인데 어떻게 뼛속깊이 베인 죄의 유전자들을 제거하고 그리고 그 불의를 버려 스스로 정결한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먼저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간절히 갈망하는 사람은 이미 은혜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순전한 삶을 살겠다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도와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이미 어느 정도 순전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더 밝은 지식의 빛을, 더 찬란한 진리의 빛을 내게 달라고 울부짖는 사람은 이미 상당한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무지한 사람은 절대로 그런 기도 하지 않습니다. 은혜 없는 사람은 은혜를 달라고 목숨을 걸며 기도하지 않습니다. 순결하지 않은 사람은 순결한 삶을 달라고 몸부림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혜 없이 우리는 이런 갈망조차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십자가가 없는 영광스러운 천국, 죄와 싸우는 투쟁이 없는 성화, 고난이 없는 구원, 회개가 없는 구원을 가르치지만 이것은 모두 성경이 가르쳐 준 복음이 아닙니다. 역사상 쉽게 예수를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한 신앙의 지름길이 있었습니다마는 그것은 모두 사단의 속삭임이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죄와 싸우고 불순종을 꺾고 자기 사랑을 이기고자 하는 그런 신앙의 결단 없이는 결코 우리들은 하나님 안에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이 싸움은 한없이 멀고 우리의 힘으로 극복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놀랍게도 믿음으로 이렇게 주님 앞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능히 이것을 극복하며 살 수 있는 놀라운 힘을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매일매일 넘어지지만 또한 진실하게 하나님께 뉘우칠 때 하나님은 매일매일 용서하시고 우리가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우리가 원하는 대로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불행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의 고통이 없는 축복, 십자가의 아픔이 없는 영광, 통절한 회개가 없는 구원을 열망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복음이 아닙니다. 교회는 여러분이 좋아하는 요리를 공급해주는 음식점이 아닙니다. 무엇이 필요한지는 여러분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40대까지 저는 인간의 모든 아픈 것은 정신의 문제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즐겨 쓰던 고사는 ‘이차돈은 목이 떨어지고도 6m나 걸어갔다는데 정신력이 모자라니까 아프지 왜 아프냐’ 그렇게 굳게 믿었습니다. 혈기 방자하던 시절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의자에 앉아서 8시간동안 일어나지 않고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일어날 때 허리에 마비 증세가 오고 끊어질 것처럼 아픈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게 이제 말하자면 제 허리에 디스크가 시작되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면 병원에 가야 되잖아요. 그런데 교회에서는 별로 사례를 안줬지만 제가 수입이 있을 때였으니까 가서 자기 돈 주고 의사에게 진단을 받고 체계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되잖아요. 안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바쁜 통에 언제 병원에 가서 누워서 줄서서 기다리고 표 받고 그리고 거기 누워서 치료를 받고 그리고 또 집에 오고 그 다음에 오라고 하면 또 가고 그 짓을 하고 있느냐 그래가지고 살아가는데 큰 지장이 없습니다. 통증을 느끼면서 계속 절뚝거리면서 다녔습니다. 그 결과를 지금까지 안고 사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단 하루도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지금은 그런 혈기 방자한 교만이 깨졌습니다. 그래서 아픈 사람을 보면 깊이 이해가 갑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리고 가엾습니다. 얼마나 괴로울까?
저는 평생 불꽃처럼 살다가 돌연사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뜻대로 안됩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그렇잖아도 기도할게 많은데 지난달에도 이비인후과 수술을 하면서 여러분에게 기도 제목을 하나 더 보태주었습니다. 수술하기 위해서 입원을 하러 가는 날 흉부외과 검진이 있었습니다. 의사가 면담을 하더니 “목사님 수술하셔야 되겠습니다.” “수술하러 왔는데 무슨 수술을 또 합니까?” “다시 또 날짜를 잡으셔야 되겠습니다.” 너무 낙심이 됐습니다. 왜 그러냐 그랬더니 심장과 폐 사이에 큰 혹이 있는데 세 개가 흩어져 있답니다. 그래서 악성은 아닌데 조짐이 매우 안 좋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크기가 작아서 몇 년 동안 지켜봤는데 최근 넉 달 사이에 2.몇 센티에서 4. 몇 센티로 확 커져 버렸습니다. “나중에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 수술합시다.” 그때 오디세이아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이제껏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풍랑을 헤치며 왔는데 한두 번 더 시련을 만난들 그게 무슨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목사가 성경 구절이 아니라 오디세이아에서 은혜를 받은 것은 좀 모순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래? 이제껏 살아온 것이 폭풍을 지나고 비바람을 지났는데 한번쯤 천둥이 더 친들 그게 뭐 그렇게 크게 대수인가” 그리고 사인을 하고 날짜를 잡고 왔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의사의 판단에 대해서 할 말이 없습니다. 의사가 첨단 기계로 다 촬영을 해서 그래서 당신이 사람답게 살려면 구멍 세 개 뚫어서 수술을 해야 된다는데 내가 거기서 나는 그게 싫어요, 좋아요, 이렇게 해줘요. 예쁘게 뚫어주세요 그렇게 얘기할 게재가 안 됩니다. 뭐 살살 찢어주세요. 나비처럼 찢어주세요. 얘기할 게재가 아닙니다.
IV. 적용과 결론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을 멀리 떠나서 살아가면서 행복합니까? 나의 지혜와 능력을 의존하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사람과의 관계를 짓밟으며 자기 성질대로 살고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찢어진 채 살아가는 모순된 삶 속에서 우리가 정말 행복합니까?
한 사람이 벼랑에서 굴러 떨어지다 간신히 칡넝쿨을 딱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습니다. 쥐 두 마리가 와 가지고 교대로 긁습니다. 하나는 흰 쥐가 한 번 갉고 지나가면 까만 쥐가 와서 갉고 그렇습니다. 그러면 위기잖아요. 칡넝쿨이 점점점점 파먹어 들어가서 언젠가는 천길만길 떨어질 텐데 위에 꿀 송이가 하나 있습니다. 마침 꿀 송이가 거기에 매달려서 한 방울씩 뚝뚝뚝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혀끝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 달콤한 맛에 이동을 하면 그 꿀을 못 먹잖아요. 그렇게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흰 쥐가 한번 갉아 먹고 검은 쥐가 와서 한 번 갉아먹고 그럽니다. 불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아주 놀라운 이치가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어떤 때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꼭 그 모습입니다. 영혼에 심각한 위기를 만났습니다. 낮과 밤이 교차하면서 인생은 계속해서 소멸되어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사는 날에도 무엇인가 떨어지는 꿀물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쁘기도 합니다. 그 맛에 자신의 근원적인 인생의 위기를 방치한 채 살아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당신이 기뻐하시면 당신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결국 문제는 무엇입니까? 능력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정말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기에 서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교인이 절 보고 그럽니다. 요새 제가 설교하면서 눈물을 잘 안 흘립니다. 은혜가 떨어졌다기보다는 제가 안 그러려고 애를 씁니다. 어느 교인이 저를 보고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목사님 설교가 은혜로워서 자기가 아는 목사님들한테 들어보라고 그랬는데 그 중에 어느 목사님이 저보고 조심하라고 그러대요.” “왜?” 그러니까 “김 목사님 이단 같다.” 너무 놀라서 “왜요?” 그랬더니 “아니 어떻게 설교 시간마다 눈물을 흘리냐? 그리고 그렇게 좋으신 하나님께 예배하면 기쁨이 넘치고 웃음이 나와야지 매일 눈물을 흘리는데 그게 어떻게 건강한 예배라고 할 수 있냐?” “목사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당신들이 많이 울면 내가 안 울게.”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 하니
우릴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정말 보잘 것 없는 비천한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을 눈물로 찾는 사람 가까이 계시는 분이십니다. 어디에 있든지 전능하신 하나님께 돌아가고 싶어 하는 간절한 부르짖음이 있는 사람 가까이 오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말이나 수레를 타고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버린 마음과 하나님 찾는 마음 사이의 거리는 1cm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일평생 인생을 걸어가도 그 1cm도 되지 않는 간격을 좁히지 못하고 사망 가운데서 눈을 감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는 어리석음을 담대히 포기하십시오. 그리고 내 인생의 주권은 우리 하나님에게 있다고 인정하십시오. 그 분이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내가 그 분 편에 있고 내가 그 분을 의지하면 그 분이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자기 아들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당신을 애틋한 정을 보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이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여러분을 초청하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무너진 여러분의 삶을 다시 세움 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고치고 자신과의 관계가 새로워져서 그 충만한 생명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의 주체자로 여러분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전능자를 보화 삼으라
“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욥 22:24-26)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비록 한번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렸지만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용서하고 기뻐해 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당신께로 돌아오는 과정을 통해 그들의 원래의 모습을 보게 해 주시고 불의를 버리게 하심으로써 새사람을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삶은 복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이지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찾는 생활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제 이렇게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어떤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II. 하나님께 돌아갈 때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오늘 성경은 그 돌아가는 자가 돌아가야 할 궁극적인 대상이 전능자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돌아가야 할 하나님의 별명이 전능자라는 의미는 바로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신앙에서 미끄러져서 방황하게 되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모두 맡기고 그분께만 순종하는 동안에는 우리의 영혼은 안전합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이 사라지고 나서 우리의 마음에 신뢰심이 깨지게 되면 하나님 의지하던 사람은 불순종하면서라도 자기를 의지해서 인생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의 모든 미끄러짐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결핍 속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비참한 인생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회개하고 뉘우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화목으로 되돌아갑니다. 이때 마음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의지했던 대상에 대한 사랑을 버리는 것입니다.
A. 보화를 티끌로 여김
이것을 바로 보화를 티끌로 여기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그리고 금 덩어리를 티끌위에 두라.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 위에 두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입니다. 티끌이라고 번역된 ‘아파르’(rp;[)라고 하는 단어는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실 때에 사용했던 재료를 나타내는 말로 쓰였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 티끌은 존재의 가치가 가장 없는 미천하고 하찮은 것의 대명사입니다. 금을 그 티끌 위에 둔다고 하는 의미는 자신의 마음속에 최고로 숭배 받던 금을 티끌 위에 둠으로써 그 금에 대한 주관적인 가치의 평가가 티끌과 꼭같은 것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빌의 금이라고 할 때에 오빌은 지명을 의미하는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유명한 금의 산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가 어디였는지는 학자들에 따라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프리카 동해안이라고 주장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인도의 서해 쪽이라고 말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은 아라비아의 남부에 있는 금산지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에는 오빌이라는 지명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열왕기상 9장 28절에 보면 두로왕 히람이 솔로몬에게 조공을 바치기 위해 오빌로 내려가고 거기서 금을 모집하여 수집하여 솔로몬에게 공물로 바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사야 13장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예고하고 있는 장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실제로 시행될 때에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할 것이기 때문에 그때 남아있는 사람들의 수가 얼마나 희귀할 지에 대해서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오빌의 금과 같이 희귀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튼 오빌의 금은 구약 시대에 모든 지방에서 나오는 금 중 최고의 순도를 자랑하는 명품 금이었습니다. 그 금을 가장 가치가 없는 티끌처럼 여기고 계곡에 흔히 버려진 돌멩이와 꼭 같이 여긴다고 하는 것은 신자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에 마음속에서 느끼는 주관적인 가치에 커다란 인식 변화가 생겨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이 명령을 올바로 준행하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욕망 때문입니다.
‘콩쿠피스켄티아’(concupiscentia)라는 이 욕망은 정욕인데 좁은 의미에서는 바르지 않은 성적인 욕망을 뜻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살아가려고 하는 모든 욕망의 덩어리를 총칭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욕망 때문에 결국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사람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기 사랑은 재물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는데 이 재물에 대한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성경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보험에 들거나 미래의 재앙에 대비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행위라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적절히 우리가 미래에 일어날 불행한 일들에 대비하고 또 미래의 궁핍을 대비함으로써 우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웃에게 누를 끼치지 않는 것은 덕스러운 자기 관리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것들을 결코 정죄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탐욕입니다. 이 탐욕은 원초적으로 소극적으로는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적극적으로는 더 많은 쾌락을 누리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 때문에 도입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살지 않는다면 그의 인생은 가치가 없는 쓸모없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면서도 그 소명을 따라 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염려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마라 이는 다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는 오직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염려와 근심이 재물에 대한 집착과 사랑의 원인이 되고, 재물을 사랑하게 되면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 판단이 흐려지게 되고 결국은 하나님 대신 물질을 섬기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래서 이 모든 교훈이 너희를 위하여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이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6:24a)라고 못 박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신앙에서 미끄러질 때 이 세상의 물질과 보화에 대한 탐욕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면 물질에 대한 염려와 근심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매몰되는 것은 우리의 인생의 커다란 실패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될 때 일어나는 가장 커다란 변화는 물질에 대한 탐욕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을 사랑해서 믿음에서 미끄러졌는지 모릅니다.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있는 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집착하고 또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근심과 염려로 자기의 심령을 병들게 만듭니다.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그것을 얻기 위한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경건한 심령을 더럽힙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서 물질이 없는 것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의 기회가 되고 혹은 물질이 있는 것도 하나님을 섬기는 기회가 될 것이니 결국은 물질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 물질과 맺는 우리와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께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은 하나님대신 자신의 마음의 보좌에서 임금노릇 하던 것들을 끌어내려야 합니다. 그것이 만약에 이 세상 물질에 대한 욕망이었다면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이 그 자리에 좌정하시도록 우리는 주님께 우리 자신을 복종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잃어버렸던 당신과의 평화를 주실 뿐만 아니라 물질로 인해서 우리의 마음이 분요하던 정신을 안정시키시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면서도 우리 스스로 얻지 못하였던 진정한 행복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물질에 대한 욕망을 극복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전능자가 보화가 됨
이어서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가 보화를 티끌로 여길 때에 하나님이 우리의 보화가 되어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전능자가 금덩어리들이 되며 그리고 가장 좋은 은이 되시리라고 말입니다. 앞에 나오는 보화도, 뒤에 나오는 보화도 꼭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다만 뒤에 있는 단어는 복수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너희가 금덩어리를 티끌처럼 여기면 하나님이 금덩어리들이 되시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아주 정교한 문학적인 기법입니다. 같은 단어를 사용하면서 단수와 복수를 이용하고 똑같은 단어를 앞 절에서 그리고 뒷 절에서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우리를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화) 옛날에 아주 가난하게 살던 형제가 고기를 잡으러 강으로 나갔습니다. 배를 타고 그물을 던졌는데 고기는 안 잡혔습니다. 그런데 뭔가 묵직한 것이 걸려오는데 꽤 커다란 돌멩이 같은 것이 걸려 올라왔습니다. 형이 이상해서 그것을 물에다가 씻어보았더니 금덩어리였습니다. 그랬더니 동생이 그것을 빼앗아서 들여다보고는 좋아서 깡충깡충 뛰었습니다. “형, 이것 봐. 금이야. 우리가 정말 힘들게 부모님 모시고 사니까 신령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셨나봐. 자 이것을 얼른 시내에 가서 팔아서 그래서 이 가난에서 벗어나 우리 편안하게 살고 부모님을 모시자” 형제는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글썽거리며 좋아했습니다. 그리고는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긴 침묵이 흘렀습니다. 강을 건너기 위해서 동생은 노를 저었고, 침묵 속에서 형은 강의 가장 깊은 곳에 왔을 때 배 위에 놓였던 그 소중한 금덩어리를 던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동생이 소리쳤습니다. “형, 미쳤어? 어떻게 발견한 금인데.” 그러자 형이 말했습니다. “동생아, 나는 일생동안 너를 사랑했고 그리고 너와 나 사이에는 추호의 그늘이 없었단다. 그런데 이 금덩이가 발견된 후 잠깐 동안이지만 내 인생에 최초로 네가 없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금덩어리는 버렸지만 그 금덩어리보다 더 귀한 형제 우애의 금덩어리를 얻게 되었으니 오히려 우리는 더 부자가 아니냐?” 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 이야기에 나오는 똑같은 문학적인 기교를 24절과 25절에서 사용한 것입니다. “네 금덩어리를 티끌로 여기라” 이것은 바로 물질로서의 금덩어리입니다. 그렇지만 전능자가 네 금덩어리가 되시며 이것은 물질적인 금덩어리가 아니라 그 사람을 진정한 행복에 이르게 하는 보화로서의 금덩어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회심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가치관이 바뀌었던 사람들입니다. 인생에 대한 견해, 세계에 대한 견해가 바뀌었던 사람들입니다. 시간밖에 모르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때 영원에 대한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갈등과 고통밖에 몰랐던 우리에게 하나님은 사랑의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용서를 알게 해주셨습니다. 이 땅의 번영 이외에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셨고, 거룩함에 눈을 뜨자 나 자신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죄에 대한 감각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영혼의 각성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물과 일들에 대한 가치의 질서들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가치위에 가장 높으신 하나님, 그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리고 그 분이 있는 그곳에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지와 방황, 번민 속에서 고통스러운 날을 지냈던 시편 73편의 시인이 마지막 성전에 들어갈 때에야 비로소 자기가 얼마나 무지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잠시 머물 이 세상에 사는 인생이 전부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순간은 영원에 이어져 있었고 지상에서의 인생은 하늘에서의 내세와 맞닿아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마치 도기 그릇이 깨지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 없이 번영하던 인간이 심판을 받을 때가 온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이 땅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 이외에 또 다른 삶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고백합니다. “주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은 이 세상에서의 높은 지위나 소유나 젊음이나 인간의 외모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이 세상의 헛된 것이 행복의 근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력에 매달려서 사는 사람들로 가득찬 때에 참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을 가까이 하면서 행복을 느끼면서 사는 그런 삶 속에서 존재의 울림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때문에 행복해 하는 그 사람은 물질에 대한 탐욕 때문에 미친 듯이 경쟁하는 사람들에게 한마디도 말하지 않아도 그의 존재의 울림은 그런 삶이 정말 허무한 삶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와서 나이가 들고 젊었을 때에 못 보던 사회의 면들을 이렇게 보면서 자본주의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대안은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젊은 날에 기왕 기독교인이 되었으니까 언론과 그 다음에 남에게서 주워듣는 이야기나 이런 것들로 빚어지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한번 이런 틀에 의해서, 이런 틀에 항거하면서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자기 판단을 시도해 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자본주의와 역사에 대한 진지한 반성입니다. 특별히 자본주의 속에서 발생하는 그 엄청난 비인간화, 이것은 사회주의에서 발생하는 비인간화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울림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물질에 얽매여 살지 않는 아주 고상한 삶이 있고 그렇게 많은 것을 소비하고 그렇게 이 세상에서 자본주의의 구도 속에서 승리자가 되지 않고도 얼마든지 인간의 존엄과 품격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는 존귀한 삶이 있다는 울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발견합니다. 시편 73편 시인이 도달했던 것처럼 “땅에서는 주밖에 사모할 자가 없나이다. 주께 가까이 하는 것이 나에게는 복입니다.” 라는 존재의 울림,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게 살기로 선택받은 사람이고, 또 우리가 그것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의 최고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일생동안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과 가까이 하고 우리를 둘러싼 삶의 사태들이 물결처럼 요동치고 수없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행복하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오늘 바로 그 지혜를 얻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화로 삼고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하나님을 기뻐하라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렇게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기뻐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에 내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고 말입니다. 언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계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우리가 그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언제나 기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결국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불순종하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면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의 기쁨은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인지 될 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기쁨이 우리 속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주님이 어떤 사람을 향해 진노하고 계시는데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사람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뻐하게 되는 길은 발생할 수 없습니다.
A. 불변하시는 하나님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불변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우리에게 변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느냐인가 입니다. 하나님은 전능자이시고 완전자이시고 충족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능력의 도움도 필요 없고, 우리의 무엇 때문에 온전해지시는 분도 아니고, 또 우리가 무엇을 섬겨야만 주님은 비로소 하나님 되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완전히 충족하고 부족한 것이 없는 분이시지만 부족한 것처럼 우리에게 비취시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인간들을 도덕적으로 교화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이시지만 그러나 시간 속에서 우리와 맺는 관계 속에서는 하나님이 변하시는 분인 것처럼 나타나 주심으로써 그 하나님을 뵈오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희로애락을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께 슬픔을 드리기 때문에 멈춰야 한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가슴 아파하시기 때문에 회개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즐거워하시기 때문에 그 일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도덕적인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 안에 계신 하나님이 시간 안에서 우리와 더불어 관계를 맺으시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당신 자신이 변하시는 분인 것처럼 우리에게 비취심으로써 우리를 도덕적으로 격려하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고백록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은 뜻은 불변하시지만 일은 바꾸시는 분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뜻은 변하지 않지만 일은 바꾸심으로써 불변하시는 하나님이 변하는 시간 속에서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시면서 우리를 도덕적으로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기뻐하시는 일이 있고, 우리가 그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면서 우리도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은 전능자를 기뻐하며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B. 전능자를 기뻐하게 함
하나님의 기쁨은 인간이 마음속에서 그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최상의 감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은 당신의 기쁨을 우리에게 보이십니다. 찬양이 무엇입니까? 찬양은 오선지에 그려진 가락이 아닙니다. 오히려 찬양은 주님께 대한 의존과 그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한 인간의 기쁨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그것이 가락에 담겨 주님께 드리는 예배의 행위가 되었을 때 우리는 이것을 찬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기쁨을 바라보고 기뻐하는 인간의 기쁨 안에서 또한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경건의 표가 우울과 비관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성경적인 견해가 아닙니다. 물론 거룩함에는 현재에 대한 불만족이 있고 미래에 꿈꾸는 영광스러운 일들이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에서 오는 긴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건한 열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한 인격 안에는 경건한 슬픔과 경건한 기쁨이 공존합니다. 세속의 기쁨과 세속의 슬픔은 공존할 수 없지만 경건한 슬픔과 신령한 기쁨은 공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최고의 행복한 삶은 하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는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슬픔을 나의 슬픔으로 삼으며 사는 것이 천국 백성의 소명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회복되어야 할 가장 시급한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눈앞에서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 분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삼고 그 분의 기쁨이 증진되는 그곳에서 나의 기쁨이 증진이 되면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바로 그러한 삶을 사셨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에 내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얼굴을 든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바로 관계의 회복, 죄로부터의 용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친교의 회복이라는 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시인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만나 벗은 발로 황급히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다윗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상상도 못했고 더욱이 일생동안 전쟁터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한 자신의 부하들이 자기를 배반하고 모의에 가담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섬김으로 평화를 누리던 그 많은 백성들이 자기를 모욕하는 대적들이 될 지를 그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그렇지만 시인은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그래서 하나님께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라고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시인의 방패요, 시인을 수치 속에서 건져주시는 영광이시며 고개를 떨구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이 시인의 얼굴을 들어 하나님을 우러러 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커다란 잘못을 하고 왕에게 두려운 심판을 기대하며 떨고 있는 죄인에게 왕은 인자한 말로 명령합니다. “죄인은 짐을 향해 머리를 들라.” 이미 그 안에 용서와 관계의 회복이 암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결국 우리가 인생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행복을 찾기 위해 애쓰지만 올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행복해지려고 애쓴 것 때문에 우리는 불행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장 단순하게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생활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기쁨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이 모든 행복의 근원이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분과 함께 동행하며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살아서 여러분이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고, 여러분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여러분의 마음에 즐거움이 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빕니다.
네 기도를 들으실 때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한 것을 네가 갚으리라”(욥 22:27)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하고 평안하게 된 사람이 누리는 현실적인 행복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 입각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기도하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과 화목을 회복한 사람이 누리는 최고의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치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사람의 행복을 확장해 갑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화목하게 된 사람들이 마음속에 결정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이루어주시고 그의 인생의 앞길에 진리의 빛이 가득하게 될 것이라는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릴 때 우리가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충분히 활발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II.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A. 하나님을 기뻐 할 때
그래서 오늘 성경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할 때 우리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뵈옵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화목한 관계가 될 때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때를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커다란 의무는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다만 그 기쁨의 중심이 나여서는 완전한 기쁨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과의 화목에서 오는 기쁨이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데서 오는 행복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고 행복해 하는 바로 그 기쁨과 행복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과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는 삶은 나뉘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만큼 그는 기쁨의 삶을 살 것이고 또 기쁨의 삶을 사는 것만큼 그의 기뻐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대체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행복한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인생을 정말 잘 사는 것인가 하는 원초적인 질문에 부딪칠 때에 항상 기독교 신앙이 이것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많이 해 주셔서 지지난 월요일 날 아침 9시쯤서부터 한 네 시간에 걸쳐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 수술을 받으러 들어가기 전에 들어가면서도 걱정 되었던 게 14일에 1년에 한 번씩 하는 산상세미나를 무엇을 해야 하나 주제를 달라고 그러는 어떻게 하나 그러고 고민을 했는데 토요일 날 기도하면서 책상 앞에 앉아서 어떻게 해야 되나 하는데 아주 놀랍게 한 세 시간 동안에 그때 강의할 모든 줄거리를 한꺼번에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수술하고 병원에 입원하고 가료하고 하는 동안에 그것을 도대체 쓸 시간은 상상도 못했고 또 쓴 것을 책을 만든다고 하는 것은 시간이 한 달 가까이 필요한 거니까 더더욱 안 되잖아요. 그래서 그냥 마음속으로 예전에 써 놓은 것 중의 하나를 가지고 해야 되겠다 이렇게 마음을 먹었다가 줄거리라도 주셨으니까 그 줄거리라도 프린트 해 가지고 가서 그렇게 강의를 할 수밖에 없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월요일 날 수술을 하고 마취 상태에서 월요일에 깨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그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거 14일날 교인들이 뭐 좀 한 번 들어보겠다고 모일 텐데 여태까지 우리가 실망한 적이 별로 없는데 이거 어떻게 하나 주위에서는 장로님들 하지 말라 그러고 쉬라고 그러고 계속 그래서 그래도 하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그러고 이제 핸드폰을 꺼냈습니다. 2G 핸드폰을 꺼내서 그래서 이제 주님, 이게 너무 아프더라구요. 그래서 진통제 먹고 몰핀 맞고 통증이 약간 멎어 있을 때 그때에 이제 한 2시간씩 꺼내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통증이 나면 그냥 못 쓰고 또 진통제 맞으면 쓰고 이렇게 해서 결국은 3일전에 한 7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을 완성을 침대에서 했습니다. 그래서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책을 찾아볼 수는 없고 기억 속에서 핸드폰을 가지고 똑딱똑딱 하면서 이렇게 해서 지금 원고를 넘겼고 그리고 지금 수요일부터 책을 만들기 시작하면 14일 날 여러분 손에 들어가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때에 이제 이 이야기를 상세하게 펼쳐서 여러분에게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 기운이 없으면 제가 소파에 앉아서 강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하나님 자신이 기쁨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처음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처음부터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삼위 안에서 나누는 교제로서 기뻐하고 행복해 하시는 하나님이 되었고 그 기쁨의 하나님이 사람들을 창조하실 때에 당신과 관계를 맺으며 그 기쁨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을 만드시고 인류 사회를 형성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인류가 바로 당신이 행복한 이 복됨 안에서 모든 인류가 당신의 기쁨에 참여해서 함께 이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인간들이 되기를 원하셨고,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 기쁨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바로 이 기쁨으로 우리를 되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신자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은, 최고의 섬김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하나님과의 온전한 화목 안에서 그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선교적인 울림이 있는 삶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주님과 화목을 회복하고 기쁨의 삶을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하나님께 기도 할 때
바로 이때 신자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기도하기 싫어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할 수 없기 때문에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기도는 단지 인간의 말이 아니라 영혼의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에는 기도가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 움직이지 않고 있을 때에 기도는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활발하게 짐을 나르거나 운동을 하고 있을 때에 그럴 때에 짐 하나를 더 드는 것은 쉬운 것입니다. 온 몸이 나른해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없이 깊이 누워서 지쳐있는 사람에게는 아주 작은 물건 하나를 드는 것도 커다란 고역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처럼 영혼이 활발히 움직일 때에 기도를 하기가 쉬워지는데 이 영혼의 움직임에는 영혼의 하등한 움직임이 있고 고등한 움직임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영혼의 기능이 고등한 기능부터 아주 하등한 기능까지 담당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내가 아닌 이 세상이 어떻게 우리와 함께 소통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눈이 있어서 사물들을 보고 귀가 있어서 듣고, 코가 있어서 냄새를 맡고, 그리고 입이 있어서 맛을 보고, 피부가 있어서 감촉을 느낍니다. 무르고, 딱딱하고, 차갑고, 뜨겁고, 뾰족하고, 둥글고 한 모든 감각들이 이 접촉과 오감을 통해서 들어오게 됩니다. 그런 것들이 들어오면 영혼은 그 들어온 정보에 대해서 반응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영혼의 활발한 움직임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어떤 먹을 것을 보았을 때 먹고 싶다는 욕망이 생깁니다. 좋은 장소를 보았을 때 여행을 가고 싶다는 욕망이 생깁니다. 옷을 보고 왔을 때 예쁜 옷을 입고 싶은 욕망, 심지어 우리를 유혹하는 그림이나 영상들을 볼 때에 자기도 그런 쾌락을 누리고 싶은 욕망, 이런 것들은 바로 영혼의 활발한 움직임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영혼의 고등한 기능의 움직임이 아니라 하등한 기능의 움직임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하등한 기능의 움직임이 아무리 활발하다고 하더라도 기도에 도움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영혼의 열등하고 하등한 작용이 아니라 고등한 기능의 작용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이런 열등한 기능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면 고등한 기능이 자꾸 방해를 받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적절하게 이 영혼의 하등한 기능들이 지나치게 활발하게 움직이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절제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고등한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감동을 받는 것, 또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그 안에서 임재의 기쁨을 느끼는 것, 그리고 변천하는 이 세상의 사물들을 바라보면서 이 많은 변하는 사물들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어떠한 가치를 갖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고 파악하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혼의 고등한 기능이 담당하고 있는 일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와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에 은혜를 많이 받으면 우리의 마음속에서 회개도 나오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싶은 마음도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던 우리의 삶에 대해 회개하는 마음도 생겨나고 다시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되겠다는 용기와 결심도 생겨납니다. 이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정동이 일어납니다. 거룩한 정서가 출렁거리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때 영혼의 고등한 작용들이 일어나고 그때 영혼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 위에 기도가 실려지면 기도는 마치 날아가는 새들이 바람을 맞으면서 더 빨리 날아가듯이 그렇게 우리의 기도가 커다란 힘과 놀라운 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항공모함을 보면 어떻게 그 배에서 길이도 그렇게 길지 않는 한 300m, 330m 되는 거리에서 어떻게 그 짧은 거리에서 비행기가 뜰까 그럽니다. 항공모함에서 뜨는 비행기는 특수하게 제작을 합니다. 그리고 거리가 짧게끔 잘 만들고, 그리고 이제 이륙할 때에는 전속력으로 배가 달려가서 거리를 길게 만들고 앞에 활주로 길이를 더 연장하고 그것보다도 더 놀라운 비밀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비행기가 전속력으로 출력을 낸 다음에 팍하고 노면을 박차면서 굴러갈 때에 어느 정도 굴러가고 비행기가 뜨려고 할 때에 밑에서 바람을 쏩니다. 시속 수백 킬로 되는 어마어마한 바람을 쏴서 이 비행기를 공중으로 띄워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짧은 거리에서도 항공모함이 뜨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고등한 영혼의 활발한 움직임은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로 띄어 오르도록 만듭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하면 우리들이 은혜를 받게 되고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사랑을 느끼며 은혜를 받게 되는데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활발한 기도의 움직임, 영혼의 출렁거리는 움직임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드릴 수 있는 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삶의 사태를 만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쏟아 기도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런 간절한 기도 안에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종 기도를 할 수 없어하는 교인들을 만납니다. 기도를 할 수 없을 때에 간절히 기도하려고 애써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시급한 것은 그렇게 이미 멈추어 버린 영혼의 고등한 기능의 활동들을 다시 증진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하는 일입니다. 내가 비록 하나님께 불순종하거나 하나님께로부터 좀 멀리 떠나 있어도 깊이 말씀의 은혜를 받고 다시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다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주님과의 관계로 돌아가고 싶은 강한 결심도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혼이 활동하는 이 시기에 기도는 하나님 앞에 타오르는 불길처럼 번져갈 수 있게 되고 그래서 기도할 수 없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먼저 자신의 마음을 따뜻하게 덥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기도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C. 기도를 들으실 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실천하는 간절한 기도의 생활 속에서 지금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종종 우리의 인생길에 기도 시간에 칠흑 같은 커다란 담장이 내리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고 바로 그 속에서 하나님과의 단절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을 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비록 시련을 당하고 고통 가운데 있어도 기도할 수 있다면 바로 그 고난과 시련 속에서 주님을 더욱 깊이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불쌍한 사람은 하늘을 향한 기도의 문이 닫힌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응답이 들리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멀리 떠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돌아와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문을 열어주심으로써 그들을 향한 당신의 기쁨을 보이십니다. 회개는 닫혔던 기도의 문을 여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화목한 생활은 이렇게 열려진 기도의 문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기도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그리고 내가 이렇게 기도하고 기도 속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일평생 나를 지키고 붙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으며 주님과의 화목한 관계 속에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서원을 갚게 함
마지막으로 오늘 성경은 서원을 갚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들으실 것이요 너의 서원을 네가 갚으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침체된 영혼으로 올리는 기도 속에는 언제나 자기 사랑이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그 기도를 들어주시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보다 이웃이 그 기도를 통해 기쁨을 누리기보다 자신이 가장 많은 이익을 얻도록 그렇게 기도의 구조가 짜여 있습니다. 그러나 회복된 영혼의 기도,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하고 올리는 성도의 기도 속에는 언제나 하나님 사랑이 중심이 됩니다.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무엇인가 해주지 않는 불만들이 꼬리를 물지만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나면 하나님이 자신 때문에 손해 보신 일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침체에 빠져 불순종하는 동안 하나님께 다 드리지 못한 자신의 의무를 생각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서원을 하나님 앞에 다시 이행하는 것은 신자 자신이 하나님께 자신을 봉헌한 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5편에서 시인은 말하기를 서원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충고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살아야 할 본분을 생각나게 만들고 거룩한 의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우리에게 깨닫게 만들어 줍니다. 결국 기도는 하나님을 바꾸어 놓고 하나님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그 간절한 기도의 과정을 통해서 삶의 초점이 하나님이 아니었던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결국은 하나님과의 화목 없이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 보려는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행복을 누리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라는 사실을 알도록 기도하는 우리 자신을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기도는 하나님과의 화목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 안에 있는 기쁨과 그 만족으로 돌아가는 성도의 삶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곤고하던 날 하나님께 매달리며 은혜를 구할 때 주님 앞에 한 약속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주 사소하고 작은 약속으로부터 인생 전체를 드리겠다고 하는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기도에 이르기 까지 우리의 인생길은 수많은 하나님과의 약속으로 가득 찬 인생길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올린 그 약속들은 여러분의 삶에서 어떻게 이행되고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자신의 거룩한 의무에 대한 각성이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 교회의 한 지체로 그리고 가정의 한 구성원으로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것인가 라고 하는 의무, 그 안에서 인간의 보람을 발견하고 인생의 기쁨을 찾으면서 살아가는 생활이야 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이렇게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들을 다시 갚아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IV. 적용과 결론
우리의 일생 중 어느 한 시기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간절히 기도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때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번잡한 일생에서 영혼의 고요함이 없이 살아가고 있는 분주한 요즘 우리의 삶은 바로 이러한 평범한 사실들,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 간절한 기도, 하나님 앞에 거룩한 의무를 이행하며 살아가는 생활, 이 모든 것들을 생각나는 생활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번잡한 일상생활에서 영혼의 고요함을 유지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잠시 이 세상을 향해 난 감각의 창문들을 잠시 닫고 주님의 거룩한 임재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온전히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분의 일생은 고단한 노역의 연대기를 쓰시는 생활이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주한 섬김 속에서도 예수님의 깊은 생활은 계속되었습니다. 이른 새벽 깊은 밤에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대면하여 올리는 기도의 시간 속에서 예수님은 낙담한 영혼들과 하나님과 깨진 관계 속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인류에게 소망을 줄 수 있는 자원들을 얻으셨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생명과 사랑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부어주십니다. 그리고 그 기도 속에서 하나님은 예수님께 그렇게 해주셨던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기쁨과 완전한 만족을 누리며 살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을 극복하고 기도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이길 수 없는 현실들을 이겨내면서 하나님 앞에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붙들려서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이 기도에 충만한 은혜 속에서 살도록 주님과의 화목을 회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화목을 이룬 자의 행복
“네가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취리라”(욥 22:2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제까지는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죄인들이 회개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어떤 변화가 나타나는지를 다루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28절은 하나님과 화목을 다시 회복한 신자들이 누리는 복된 삶의 절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땅에서 우리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하는 삶입니다. 존 오웬은 자신의 글 속에서 신자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과 같이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야 말로 신자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입니다. 오웬 목사님은 한 신자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의 핵심을 두 가지로 제시하였는데 하나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평화,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면서 사는 성도의 인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화목, 하나님과의 완전한 평화,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사는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II. 화목을 이룬 자의 행복
A. 정한 뜻을 이루심
그래서 오늘 성경에는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그 끝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제일 먼저 정한 뜻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열심히 기도해서 하나님의 태도를 바꾸어 보려고 하고, 간절히 기도해서 하나님의 생각을 돌이켜 보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실은 기도에 대한 올바른 접근이 아닙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질 것이요”라고 했는데 이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의 변화가 아닙니다. 즉,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거래의 관계가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잘 해드리면 하나님이 그것을 고마워하면서 그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에게 무언가를 잘 해주시는 것 같은 그런 구도로 신앙생활을 이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과 온전히 화목을 회복한 사람들은 살아갈 때에 삶의 목표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성취하는 것에 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가 하나님과의 온전한 평화를 회복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이제 그의 삶은 하나님 바깥에서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행복을 찾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사는 것이 인간에게도 진정한 행복이 된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당신의 뜻을 펼치십니다. 하나님이 종종 일은 바꾸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신 뜻은 변함이 없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런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실 때에 하나님은 당신 홀로 그 일을 결정하시지만 그 일을 이루심에 있어서는 인간의 소원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어두움 가운데 있는 한 나라를 선교하고자 하실 때에 절대로 하나님 홀로 하시지 않습니다. 그 어두움 가운데 있는 나라를 향한 당신의 안타까운 마음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 선교지를 위해 기도하게 하시고, 또 그 선교지를 사랑하게 하시고, 그 선교지를 위해서 헌신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피를 흘려 순교하고 애써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여러분이 존재의 울림이 있는 거룩하고 질서 잡혀진 삶을 사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때 하나님은 홀로 그 일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원을 품게 하셔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그런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온전히 화목을 회복한 사람이 무엇이든지 마음으로 결정하면 하나님이 이루신다 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이 변심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멀리 떠났던 신자가 변화되어서 이제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하나님과 관계없는 뜻을 품었던 사람이 변하여 하나님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는 뜻을 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불화의 상태에 있을 때에는 자기 사랑으로서 삶의 모든 질서들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과 화목하고 사랑을 갖게 되면 기존의 사랑의 질서를 재편하여 하나님 사랑의 질서로서 모든 삶의 질서들이 다시 방향이 잡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에 대해서 요한복음 15장 7절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이든지’라는 말에 주목하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가르침의 중요한 강조점은 ‘거하고’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와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과 우리 사이에 완전한 일치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거한다’라고 하는 것은 생명적인 연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사랑할 때 우리는 예수 안에 거하는 영적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이 허공에 흩어지고 떠도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우리의 지성 속에서 깨달아지고 우리가 그 말씀을 온 마음으로 받들고 진실하게 사랑할 때에 그때에 예수님의 그 말씀은 우리 안에 생명적인 연합을 이룬 체 우리 안에 거하게 됩니다. 이때에 우리가 주님 앞에 구하게 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 그렇게 예수와 사랑으로 연합되고 예수님의 말씀을 사랑해서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생명이 되고 있다면 우리가 무엇을 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무엇을 원할 것이며 주님이 기뻐하지 않는 어떤 것을 우리들이 바랄 수 있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 원하는 것이 되고, 그 분이 기뻐하시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되고 그 분이 관심이 없는 그것은 우리에게 관심사가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원은 바로 예수님이 당신이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이루셨을 바로 그것이니 어찌 주님이 그것을 이루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맨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저를 속였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복을 받고 네 원하는 대로 잘 될 거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 것도 있었지만 안 되는 것이 훨씬 더 많이 있었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은 후에 그래서 그런 식으로 전도한 적은 없습니다. 결코 우리의 삶은 그렇게 전개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신앙의 유익도 아니고 또 신앙은 우리에게 그런 것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셨을 때에 어떤 삶을 사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요한복음 8장 29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 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시느니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셨을 때 그는 참 한 인간이셨습니다. 하나님이신 동시에 한 인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하고 싶으셨던 모든 일들이 예수님의 마음에 소원이 되었고 그 점에서 예수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소원과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무엇을 정하든지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로부터 들려온 음성이 그것을 입증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입니다.
인생의 가장 커다란 행복은 하나님 등지고 하나님 대적하면서 자기 원하는 일들을 이루려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과 완전한 평화를 누리고 그 하나님의 마음이 자신의 마음속에 충만하게 부어져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주님의 소원을 자신의 소원으로 삼고 삼으며 살아갈 때 이렇게 무엇을 정하든지 하나님이 그것을 이루어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완전한 화목을 이루지 못하며 사는 때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종종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기뻐하시지 않는 일인지 하나님이 직접 경험하게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우리는 체험하게 됩니다.
저의 몸 상태로는 도저히 중국에 갈 상황이 아니었는데 그런데 약속된 일이고 너무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의사 선생님한테 물어보았더니 의학적으로 큰 문제는 없지만 육체적으로 힘이 들 테니까 주의하라는 정도의 권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이제 두 가지 목적으로 갔는데 WRTS 개교 문제하고 그리고 두 권의 책이 출판이 된 것을 기념해서 독자들하고 만남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 갔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여기에 있는 우리들은 모르지만 중국에서 책을 정부의 허가를 받고 기독교 서적을 출판한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지를 1년 동안 보면서 정말 피를 말리는 것 같았습니다. 중국에 많은 기독교 책들이 있지만 상당히 대부분의 수의 책들이 사실은 양해(?) 안에서 돈을 주고 출판을 해서 교회 안에서만 유통하기로 제한이 되어 있는 책입니다. 그래서 그 책에는 ISBN이 없습니다. 국제 서적 번호입니다. 그래서 이제 책 두 권을 번역을 해서 ISBN을 천신만고 끝에 받았는데 얼마나 어려웠는지 출판사에서 성경을 인용한 것까지도 시비를 걸면서 빼야 된다고 하는데 성경 구절을 책에서 빼버리면 그것이 어떻게 기독교 서적이 되겠습니까? 심지어는 주님께만 매달려야 됩니다 그러니까 왜 주님께만 매달려야 하냐 ‘만’자를 빼라 이 그러고 그래서 천신만고 끝에 원고를 거의 수정하지 않고 통과가 됐는데 저는 그것이면 충분한 줄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한 번의 허가가 더 남아있는데 정부 출판국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안 받으면 어떻게 되냐 그랬더니 시중에는 유통될 수 있는데 국가가 설립한 기관에는 그 책을 집어넣을 수가 없답니다. 세상에 무슨 그런 복잡한 것이 있습니까? 그래서 도저히 천신만고 끝에 기도하고 애를 써서 결국은 마지막으로 국가 출판국의 허락을 받고 그래서 제 책 두 권이 중국 국회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모든 학교와 군부대, 어디든지 원하면 그 책을 보낼 수 있도록 정부에서 허락을 해 준 것입니다. 그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우리한테나 감격스러운 일이지 누가 그 책이 새로 나왔다고 오는 사람이 있으랴 그러고 한 30명 모여서 그저 하면 다행일 거다 생각했는데 한 100명 가까이 모여서 아주 앉을 자리가 없이 서점을 꽉 채웠습니다. 그러면서 그 중의 상당수는 책을 벌써 읽고 왔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하고 토론을 하고 하는 그 한 시간 반, 두 시간 동안의 과정을 보면서 마음속에 깊이 들었던 확신이 올까 말까 망설였지만 하나님은 이 일을 참 기뻐하시는 구나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육신적으로 힘들었지만 감격스러운 시간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갈 때에도 이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때에는 주님이 이 일을 기뻐하시는 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느껴집니다. 반대로 주님이 일을 기뻐하시지 않을 때에 무리하게 이 일을 하면 이것이 하나님이 기쁘시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그러면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안 기뻐하시는 일을 우기고 우겨서 기도를 세게 해서 하나님을 팔 꺾기 하듯이 복종시켜서 그래서 자기의 뜻을 이루려고 사는 그것이 진정한 신앙일 수가 있습니까? 오히려 하나님과의 화목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행복은 그렇게 하나님 안에서 뜻을 정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내 마음속에도 기쁨이 되어서 주님의 기쁨이 있는 곳에서 나도 기뻐하고 내가 기쁘게 섬기는 그곳에서 하나님도 즐거워하시는 그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자기의 뜻을 앞세우며 주님 이용해서 인생을 살려고 믿음을 가장한 그런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의 근본은 자기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고요한 중에 기다리니
나의 마음을 주장하사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이렇게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인생길을 비추심
두 번째는 인생길을 비추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치리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길’이라고 하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데레크’라고 하는 성경에 아주 여러 번 나타나는 단어입니다. 보통 명사로서 길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이것이 은유적으로 사용될 때에는 사람들이 걸어가는 인생길을 의미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바로 그 후자의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아무리 눈이 좋고 그리고 도로가 잘 되어 있어도 짙은 어두움이 가득 내리면 좋은 시력도 정돈된 길도 의미가 없습니다. 빛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의 인생길 앞에 진리의 빛을 비추어 올바르게 인생길을 걷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길이 복수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즉 네 인생길들 위에 그 빛이 비추리라는 의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인생을 다 걷고 나서 돌아보면 결과론적으로 우리는 한길로서 인생을 걸어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갈림길도 없이 대로를 걸어가듯이 그렇게 걸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여행가들이 산 넘고, 물 건너, 강 건너고, 들판을 지나 때로는 넓은 길, 때로는 좁은 길을 여행하듯이 우리는 인생에서 수많은 갈래 길을 만나고 때로는 잠시 길을 잃고 다른 길로 들어서서 방황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울기도 하고 때로는 웃으면서 우리는 인생길을 걸어갑니다. 힘차게 달려가도 좋을 아주 넓게 열린 대로와 같은 인생의 때도 있지만 가시밭길로 가득차고 수풀 속에서 그 길을 찾을 수가 없어도 방황하는 길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양한 삶의 사태들을 우리는 만납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예수를 믿어도 안 믿어도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사태들을 만나고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다양한 삶의 사태들, 기쁘고, 슬프고, 가슴 아프고, 눈물 나는 인생의 수많은 사태들을 지나면서 그 사태들 속에서 그것에 의해서 휘둘리는 인생을 살지 않고 그 모든 사태들을 초월한 인생의 의미를 파악하고 흔들림 없이 인생을 걸어가게 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가치인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만으로 보면 강할 때는 즐겁고 약할 때는 눈물 날 수밖에 없지만 영혼과의 관계에서 육체를 생각하면 육체가 아플 때도 그 육체의 아픔 때문에 영혼이 부유함을 누린다면 아픈 것도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책 속에서 고백하기를 나의 영혼을 고쳐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의 육체를 먼저 때리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육체의 연약함이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찾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저도 이번에 수술을 하고 경과를 지나면서 많이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좀처럼 체력이 회복이 되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정말 영적으로 부요한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병상에 누워서 핸드폰으로 쓴 그 책이 드디어 출판사로 넘어갔습니다. 인쇄소로 넘어갔고 다음 주일날 산상세미나에 오시는 분들은 96페이지짜리 예쁜 책 한 권씩을 여러분에게 무료로 출판실에서 여러분에게 그동안 출판실의 책을 사랑해 줬다고 선물하겠답니다. 그런 것입니다.
시간 안에서만 보면 우리의 늙는 것이 너무 덧없고 젊음에서 늙음으로, 그리고 아름다움에서 추함으로 멀어져 가는 것이 안타까울 수밖에 없지만 영혼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은 또 다른 새로운 것들을 태어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음악론’이라고 하는 책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음악을 아름답다 라고 말할 때 그것은 수많은 음들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기 때문에 또 다른 이어서 나타나는 것들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니 인간도 사라지고 소멸하는 그것이 또 다른 아름다움을 우주 속에서 창조해 내는 것이니 그러니 인생도 그런 영원의 관점에서 본다면 젊음을 잃어버리고 늙음으로 들어가고 또 늙음을 떠나서 사멸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는 것이 속절없이 허무한 일들만 아니다 라고 하는 자각이 생겨납니다. 세상을 세상으로만 보면 가난한 것이 서럽고 부요한 것이 부럽고 높은 권력을 가진 것이 샘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라는 관점에서 대조해 보면 우리가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와 같은 세상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육체와 영혼, 시간과 영원, 세상과 천국의 대조 속에서 인생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신앙의 힘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만나는 인생의 수많은 삶의 사태들에 매몰되지 않고 그것을 초월한 인생의 의미를 파악하며 슬플 때에도 굳세지고 기쁠 때에도 교만하여지지 않고 겸손히 주님과 함께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동치는 삶의 한복판에서 불변하시는 우리 주님을 굳게 붙들면서 그 분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알다시피 한 달 전에 제가 손녀를 보고 드디어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태어난 아이를 이렇게 내려다보니까 참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이를 이렇게 보면서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그것이었습니다. ‘너도 이제 어쩔 수 없이 네 인생을 살아야 되는 구나.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80년 이상 이제 네 인생을 살아가야 되겠구나.’ 그리고 엄청난 인생의 무게가 다가옵니다. 그러면서 아이를 위해서 마음속으로 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떡하겠습니까? 그 인생의 무게는 누가 덜어줄 수 있는 무게가 아닙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빌었습니다. ‘그래 그 인생의 무게는 정말 큰 것이니 크지만 해결의 길은 하나, 네가 일생동안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아라.’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요동치는 삶의 한복판에서 그 삶에 매몰되지 말아야 합니다. 성공하고 그리고 행운의 가도를 달릴 때에도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과 역경을 만날 때에도 슬퍼하지 말아야 하고 비굴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 그 모든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존재의 울림을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진리의 빛 가운데서 삶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나오는 이 빛은 등불과 함께 구약 성경에서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 105절에서 시인은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자에게 주시는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진리의 빛을 주셔서 그 진리를 위하여 깃발을 달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과의 화목을 이루면서 살면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송이 꿀처럼 달게 느껴지고 그 단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매일 먹으면서 아버지의 뜻을 좇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하늘로부터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매일매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계절적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 하기에 좋은 계절이 되었습니다. 부디 그 말씀의 은혜를 받고 거기에 붙들려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 잠시 동안 일어나는 슬픔과 고통, 기쁨과 성공에 취하고 요동치는 사람들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겸손하고 언제나 하나님을 갈망하며 주님의 말씀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깨닫고 은혜 받은 말씀만이 여러분의 인생의 길에 빛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 그래서 주님의 소원을 마음에 품고 주님의 말씀의 빛 앞에서 매일매일 우리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될 때 여러분은 시련을 만나든, 형통한 길을 만나든 언제든지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사는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하나님이 낮추실 때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욥 22:2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앞에서 성경은 하나님과 화목을 회복하게 될 때에 어떤 복을 누리게 되는지에 대해서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29절과 30절에서는 다시 한 번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하기 위한 실제적인 충고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복을 받으며 사는 것을 싫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화목을 잃어버린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사랑하고 집작하는 것들을 버려야 하는 아픔을 통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가는 것은 주님의 도움 없이 인간 스스로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린 사람이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와 화목을 되찾는 것은 사람 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인간의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그래서 그 마음을 다시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II. 낮추시는 하나님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오늘은 마음을 낮추시는 하나님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고 말입니다. ‘이해하다’라는 말의 영어는 'understand'입니다. 문자 그대로 아래에 선다는 뜻입니다. 위에서 교만하게 내려다 볼 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도 낮은 자리에 서서 바라보면 이해가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우리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들을 판단하고 잣대로 재는 동안에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낮아진 마음으로 겸비한 자리에서 주님을 우러러 보면 그 신앙심 때문에 우리의 삶에 얽혔던 많은 문제들을 향한 주님의 뜻이 이해되기 마련입니다. 거기에서 신앙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A. 낮추시는 이유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낮추시는 것일까요?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부패하기 쉬운 음식과 같고 그렇게 부패하면 인간의 마음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이 지정해 주신 자신의 자리를 이탈하게 되어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한번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러면 번영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상실하고 타락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징계하십니다. 그러면 그들이 회개하고 그러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다시 복을 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복 주심, 번영, 타락, 징계, 회개, 이런 복주심이 계속 수레바퀴처럼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의아심을 갖습니다. 왜 사람들은 역사를 통해서 배우지 못하는 것일까? 사실은 이것이 이스라엘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생도 하나님이 복주시면 번영하고 번영 속에서 신앙을 잃어버려 타락하고 그러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회개하고 다시 주님이 은총을 주시고 하는 것들이 되풀이 되어 오면서 우리도 역시 우리 자신의 인생을 통해서 거의 역사의 교훈을 배우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자신의 욕망으로 미끄러진 마음은 반드시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이 마음이 끊임없이 이렇게 부패하게 되게 마련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낮추시고 새롭게 하시는 일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있는 스스로의 부패성으로 하나님 앞에 부패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는데 며칠 전에는 TV를 보았습니다. TV에 보니까 가정을 버리고 방황하는 가정주부들의 이야기들이 실렸습니다. 그래서 뭔가 하고 들여다보니까 동네 여자들이 모여서 계를 했답니다. 먹자계입니다. 먹으러 가면 먹으러 가지 뭐 계까지 들어서 먹으러 가는데 어쨌든 곗돈을 모아서 한 달에 한 번씩 그 계를 타서 뭘 먹으러 갔는데 몇 번 해 보니까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밥 먹으러 가는 게 아니라 그 돈을 가지고 나이트클럽에 갔답니다. 그 다음에는 소설처럼 나오는 이야기 뻔하잖아요. 어떻게 가정을 가진 주부들이 그럴 수 있을까? 그게 인간의 마음입니다.
한번 하나님이 지정해 주신 자리를 이탈하는 것이 어렵지 한번 이탈하고 나면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한없이 미끄러지면서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생각하고 느끼고 결정하는 작용들을 마음속에서 실행합니다. 이것을 좀 어려운 말로 지성, 감정, 의지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의 작용은 하나의 영혼의 상태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셋 사이에 아주 놀라운 일치와 조화를 이룹니다. 예를 들자면, 지성이 아주 참다운 진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너무 기뻐하면 이 속에서 그 진리의 아름다움 때문에 아주 즐거워하는 감정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의지도 그 선한 것을 따라서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반대로 마음속에서 욕망에 충동이 쿵쾅 거리고 일어나면 그러면 자기 마음먹은 대로 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마음에 일어난 욕망이 의지를 불러일으키고 하고 싶어 하는 의지가 생각까지 복종시켜서 그것을 합리화하고 인정해 주도록 요구를 합니다. 그러니까 어느 쪽에서 시작이 되든지 간에 이게 결국은 균형을 이루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나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으러 나올 때 여러분 중에 많은 사람들은 그런 마음으로 나왔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뭐 오늘 정말 절실하게 은혜를 받아야 될 텐데 하면서 바들바들 떨면서 나온 사람 대부분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도 꽤 있을 것입니다. 은혜 생활을 잘하는 사람, 오늘 새벽기도까지도 간절히 은혜 달라고 기도하고 온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아까도 미국에서 오신 분도 있던데 그렇게 멀리서 열린 교회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아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오신 분들이야 그런 마음으로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절반 이상 사람들은 그렇지 않고 그냥 교회 오기 전에 근심, 염려, 걱정 다 가지고 그냥 예배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서 진리가 얼마나 아름답고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를 깨닫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감동 받기 전에 이 지성으로 깨닫습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감동이 오면서 이 마음속에서 이 세상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훨씬 아름다운 것이라는 감동이 생겨납니다. 그러면 예전에는 하나님을 위해서 결심할 수 없었던 것들을 결심할 수 있는 마음의 가벼움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들이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신자들을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것과 세상이 신자들을 타락으로 인도하는 것 사이에 아주 놀라운 일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작용들이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인간이 아무리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정직하게 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높은 신앙의 수준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습니까? 표준과 잣대가 있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뭐냐 하면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그리고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그리고 신학적인 책들이나 이런 것들을 읽는 것들이 중요하다고 자꾸 이야기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런 것들은 객관적인 기준인 진리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기 때문에 그 말씀의 깨달음이 있을 때에 나로부터 이탈해서 바깥에서 나를 볼 수 있는 힘이 생겨납니다. 그때에 감히 나를 향해서 ‘넌 틀렸어. 너는 이 점에 있어서 잘못됐어. 그러니까 너는 회개해야 돼. 고쳐야 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인간은 결국은 자기는 자기편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든 하나님의 자녀, 특히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이렇게 늘 진리의 말씀으로 자신을 객관적으로 성찰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낮추시는 것입니다. 좀처럼 그 마음이 낮아지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때리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때리심으로써 우리가 안일 상태에서 못 보던 것들을 직시하게 하고, 또 우리가 알지 못하던 것들에 대해서 각성하여 눈을 뜨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치시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상황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치십니다. 나의 주위에서 어떤 불행한 일이나 고통스러운 일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처음에 흐르는 시냇물처럼 작게 들리던 하나님의 음성이 천둥과 벼락을 치는 것처럼 우렁찬 소리로 들리고 그 말씀 앞에서 자기 자신을 보게 되고 뉘우치게 됩니다. 그런 방법으로도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입니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시편 1편에서 노래했습니다.
이런 마음이 무디어 질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에 집중하게 하시기 위해서 상황을 흔들어 놓아서 그 상황 속에서 우리들이 고통을 받으면서 자신의 마음을 낮추는 과정을 밟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낮추시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낮은 자리에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깨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과의 깨어진 관계, 잃어버린 화목이 다시 마음을 낮춤으로써 회복되는 것을 굳게 믿고 마음을 낮추시는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겸비해지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사람들을 통함
두 번째는 하나님이 이렇게 마음을 낮추실 때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고 말입니다. ‘낮추다’라고 하는 이 단어의 히브리어는 ‘히스피루’(hispilu)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라파르’라는 동사의 변형입니다. ‘라파르’는 ‘떨어지다’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사역형이어서 ‘떨어지게 하다’ 이런 뜻입니다. 높은데 있는 어떤 물건을 밀어서 땅으로 뚝 떨어지게 만드는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들이 자신의 마음먹은 대로 풀리고 만사가 여의하게 되면 인간은 교만해지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음을 낮추실 때에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낮추시는 것입니다.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실망을 하게 되고 자기가 사랑한 사람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그리고 자기가 신뢰했던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 자기가 진심으로 위하였던 사람에게 모욕을 당하고, 자신이 헌신했던 사람으로부터 배반을 당할 때 그의 마음은 상처를 받게 되고 그의 마음은 뚝 떨어지게 됩니다. 자신이 안주하던 질서에 대해서 의심하게 되고, 자신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던 그 마음이 변하여 자신이 잘못됐을 수 있다고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믿고, 신뢰하고, 사랑하고, 의지했던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거나 비난을 당하고, 실망하고, 상처받고, 모욕, 그리고 배신을 당할 때에 그들과의 관계의 깨뜨려짐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으로부터 멀어진 것을 보게 되고 그렇게 결함 있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자신을 직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충성스럽고 당신에게 헌신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말하기를 자신들이 주님을 섬기면서 만물의 찌꺼기와 같이 된 적이 있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사람들을 의지하며 살고 사람들 속에서 안주하며 사는 삶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받는 좋은 평가, 박수와 갈채, 환영, 사랑받음, 인정받음, 이런 모든 것들 때문에 마음은 부요해지고 주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지고 하나님과 불화해도 사람들과 화목하기 때문에 넉넉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던 이런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을 때리심으로써 하나님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실망하고 상처를 받고 그리고 고통을 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나쁜 것들이지만 하나님은 이 나쁜 것들을 통해서 좋은 것들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한의학에서는 독과 약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상통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이 비단 한의학에서만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대상 포진이나 폐렴 혹은 천연두 백신이나 예방 주사를 맞습니다. 그 주사약을 상당한 돈을 주고 주사를 맞지만 그 속에 좋은 것이 들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폐렴 예방 주사는 폐렴균이 그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비싼 돈을 주고 맞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나쁜 것이지만 그 나쁜 것이 우리의 몸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우리의 인체에 주신 조절 작용을 통해서 그 균과 싸워서 이겨서 저항력을 갖추어서 실제로 그런 균들이 심각하게 침투할 때에 치명적인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의학과 과학의 이치도 반드시 좋은 것을 통해서만 좋은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을 통해서도 좋은 것을 준다면 더욱 인간의 모든 지혜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더 놀랍게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불행과 고통스러운 일들을 사용해서 선하고 좋으신 일을 행하시겠는지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이성적인 것 아닙니까? 특별한 믿음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우리들이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상당부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우리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닙니다. 그런 생각을 빨리 빨리 접어야 됩니다. 나는 자녀들을 교육할 때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못 심어 넣어서 아이들의 인생이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게 자기 뜻대로 된다고 하는 것 때문에 애들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청년들 수없이 결혼시켰잖아요. 그런데 이런 청년들 굉장히 힘듭니다. 집에서 독자 혹은 무남독녀 외동딸로 부잣집에서 자라서 뭐든지 입만 떨어지면 엄마, 아빠가 다해주던 애들, 그 애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은 굉장히 드문 것입니다. 더군다나 똑같은 애들 둘이 만나면 이거 보통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살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두 다리 뻗고 소리 지르면 다해준 것입니다. 그런데 신랑도 그렇게 살다가 온 사람입니다. 둘이 앉아서 서로 두 다리 뻗고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기를 때에 조화를 이루어야 됩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네가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음먹으면 된다는 자신감과 함께 마음먹어도 안 되는 적도 많다 라고 하는 것을 아이들이 공정하게 학습을 하며 자라야 합니다. 그래서 보면 제가 맏이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목사님들도 이렇게 만나면 그래도 만나서 이야기하고 밥 먹고 밥값이라도 내고 마음 쓰는 사람들 보면 맏이 출신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맏이는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을 많이 경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동생하고 투닥 거리고 싸우면 만날 혼나는 것은 동생이 아니라 형입니다. 그리고 맨날 동생 줘라 그래서 뭘 해도 ‘동생 줘라, 어리지 않냐’ 맨날 이렇게 피해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주관대로 뚜렷하게 막 사는 사람들은 대게 둘째입니다. 막내도 아니고 둘째 정도입니다. 그리고 첫째는 항상 치여서 그러는 것입니다. 큰애는 오히려 안 되는 것도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살다가 두 다리 뻗고 나는 그렇게 울어본 적이 없습니다. 왜 그렇게 해도 누가 해주는 가족들이 주위에 없었습니다. 결혼해서 그렇게 하면 아내한테 통할까 그랬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 그런 거 일체 접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 맘대로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다는 것을 같이 학습하며 자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과정들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어떤가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주권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뭐라고 이야기 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좋은 것만 선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들도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쁜 일이 일어나도 그것은 나중에 반드시 좋은 일이 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여러분 중에는 사람 때문에 실망하고, 사람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 많을 것입니다. 이번에 추석에 내려가서 혹시 한판씩 안하고 오셨습니까? 참으십시오. 그리고 ‘아, 하나님이 이렇게 사람들을 통해서 나를 낮추시는구나.’ 믿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II. 하나님이 낮추실 때
A. 교만함을 고백함
그러면 하나님이 낮추실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고 말입니다. 제일 먼저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치셔서 사람들을 통해 우리를 겸비하게 하고 비천하게 하실 때에 그 사람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복수의 칼을 가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끊임없이 상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실 때에는 교만함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환란은 일반적인 어려움과 특별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어려움은 일반적인 삶의 태도를 고치면 개선이 됩니다. 우리가 이처럼 양극화된 자본주의 시대에 살면서 정말 이제는 돈 있는 사람들이 돈을 버는 시대이지 돈 없고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신분상승을 하기는 정말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식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강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주의자나 유물론자일 수는 없지만 목회자니까 그렇지만 이것은 대대적인 수정을 필요로 하는 자본주의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사회, 그리스도의 천국 복음이 성취되었을 때에 이 땅의 모습은 이런 식의 비인간적인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정말 사람의 얼굴을 가진 자본주의, 눈물이 있고 그리고 고통 하는 자들에 대한 연민이 있는 자본주의, 누구도 그러한 연민과 긍휼을 자기 태만과 방종의 기회로 삼지 않는 그런 사람의 얼굴을 한 그런 사회를 우리는 그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고민해야 될 그런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 없이 살면 안 됩니다.
그것은 충분히 인정하면서 자,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워서 끼니가 간 데 없습니다. 그 사람이 갑자기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어서 빌딩을 몇 채씩 가지고 외제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그런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는 나도 모릅니다. 내가 알면 많이 가르쳐 주었지 왜 가만히 있겠습니까? 나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성실히 일해야 된다 라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삶의 태도만 바꿔도 극단적인 굶주림에서는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경제적으로 어려우면서도 삶의 태도가 바뀌지 않습니다. 게으릅니다. 취직하면 두 달을 못 다닙니다. 너무 힘들고 돈은 적답니다. 땀 흘리며 고통스럽게 노동을 해서 차린 소박한 밥상 한 끼는 남의 도움으로 차린 기름진 밥상 열 개보다도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입니다. 사랑의 빚을 지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자존감입니다. 자신의 손이 수고한 대로 먹는 거라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늘 부딪힙니다. 그러면 『손자병법』이라도 읽으십시오. 30에는 손자병법을 읽어야 될 나이이고, 40에는 논어를 읽어야 될 나이입니다. 60이 되어서 머리가 희끗희끗 하고 얼굴이 쭈글쭈글해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는데도 철이 안 드니 그게 손자병법이라도 읽고 그게 너무 두꺼워서 힘들면 『개념없음』이라도 읽으면 좀 낫습니다. 안합니다. 그러고는 하는 말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랄 거라고 하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그거 아무데가 갖다가 붙이는 것 아닙니다. 그렇게 가난하고 끼니가 간 곳 없으면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지 말고 일터를 바라봐야 합니다. 노동을 해야 합니다. 무엇인가 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주 적게 노동을 제공하고 큰 대우를 받으려면 경쟁으로 가득 찬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다른 지식을 가지고 있든지,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든지, 다른 사람에게 많은 유익을 줄 수 있는 어떤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자기 발전을 위해 거의 노력하지 않고 시장에서는 그 사람의 노동력을 그만큼 주는 것도 아깝다고 하는데 현실이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삶의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이게 일반적인 어려움은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면 안 되고 삶의 태도를 고치고 개선해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자신이 참회해서 자신의 삶을 개선해 가야 되는 것입니다. 가난하면 더 근검절약하고 그렇게 해서 나은 생활을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면서 살아가야 되고, 지식이 부족하면 배우려고 애를 쓰고, 기술을 익히려고 애를 쓰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가르쳐 주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종종 이런 것으로 통하지 않는 특별한 어려움이 우리에게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 앞바다에 섰습니다. 뒤에서는 애굽의 병거들이 600승이나 달려오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하려고 합니다. 앞에 홍해가 있습니다. 모세가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왔는데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물을 바가지로 퍼낼 것입니까? 아니면 흙을 짊어다가 홍해를 메울 것입니까? 그러니까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런 특별한 어려움은 하나님이 어떻게 그것을 우리가 극복하는지 재능을 보려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밖에 의지할 분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 잠잠히 그만을 바라보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고치시려고 하나님이 그런 계획을 펼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벌거벗긴 체 당신 앞에 세우시려고 하나님이 그런 특별한 어려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때는 우리가 모든 것을 끊고 인간으로부터 오는 어떤 도움이나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재물이나 어떤 무엇으로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버린 가운데 잠잠하게 무릎을 꿇고 혹은 금식하며 눈물로 주 이외에 나의 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실 분이 없습니다 라는 마음을 가지고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이때는 사람과 환경의 도움을 구차히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 정말 그 말할 수 없는 살 소망이 끊어지고 마지막에는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이 이유는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고 그 분에게만 소망을 두고 그 분만 의지하기 위함이었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낮춰야 할 만큼 높아진 마음은 불행한 마음입니다. 그런 시련을 당하고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그렇게 하시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주님 없이 높아졌던 우리의 마음을 회개하고 뉘우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매일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렇게 울지 않을 수 없는 눈물 섞인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있을 때에 그는 자신의 교만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고 높아진 마음을 낮추지 않을 수 없고, 그리고 낮아진 마음으로 주님께 순종하지 않을 수 없도록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낮추실 때에 교만을 고백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겸손한 자를 구원함
마지막으로 오늘 성경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신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고 말입니다. 겸손과 비굴은 겉보기에 비슷하지만 그러나 그 기반에 있어서 현저하게 다릅니다. 비굴은 공포 속에서 두려움 때문에 낮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겸손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의식했기 때문에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낮아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안타까운 기도의 제목이 있어서 눈물 흘리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사람인지를 깨닫고 주님과의 관계에서 화목을 잃어버린 사실을 발견했을 때에 그때 우리의 마음속에서 기도가 쏟아져 나올 때에는 처음 시작했던 그 기도의 제목을 버리게 되고 오히려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하나님과 잃어버린 화목을 다시 회복하고 싶다고 하는 간절한 갈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떨어뜨려 겸비하게 낮아진 가운데 우리는 자기 사랑의 질서를 버리고 하나님 사랑의 질서를 따라가게 됩니다. 자기가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얼마나 비참한지, 자기가 아름다우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의지하게 되고 이러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지정해 주신 자리가 어디인지를 깨닫게 되고 그리로 돌아가게 되고 거기서 가장 커다란 행복과 안정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서 하나님은 돌처럼 굳어졌던 우리의 마음을 물처럼 녹이셔서 하나님이 당신을 멀리 떠났던 죄인들이지만 변함없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녹이시는 주님의 십자가 사랑 앞에서 우리들은 이 모든 일들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사랑하는 것들을 버려두고라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 그 화목한 관계 속에서 살고자 하는 강한 소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비천해진 사람들이 있습니까?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고 실망하고 모욕과 배신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일어난 이 일은 나쁜 일이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여러분이 교만함을 고백하고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게 하시기 위해서 이 일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어떠한 믿음과 마음으로 이 모든 현실들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고통스러운 일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도하는 일이 될 수도 있고 주님으로부터 더 멀어져 비굴해지는 길로 여러분을 인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바로 그 갈림길에서 주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주님의 도움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주님이 낮추실 때에 그 낮추시는 주님의 겸비하게 하시는 은혜 때문에 다시 한 번 예수님을 붙들고 사는 살아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죄인을 건지심
“죄 없는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으로 말미암아 건지심을 받으리라”(욥 22:3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모든 인간의 불행과 고난이 오직 인간의 죄 때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불행과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그렇게 평면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오늘 이 욥이 당하는 고난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욥은 동방의 의인이요 이 땅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순전한 사람으로서 욥과 같은 이가 없다고 하실 정도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지금 당하고 있는 모든 고난과 끔찍한 불행이 그의 죄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더 큰 죄를 짓고도 평안하게 살아가고 있는 당시 지상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엘리바스는 욥의 친구로서 욥을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이렇게 인간의 고통과 불행에 대한 평면적인 인과응보의 도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욥을 사랑하면서도 욥이 당하는 그 끔찍한 불행과 고통은 자신들이 알지 못하고 욥이 토설하고 있는 어떤 커다란 죄악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 앞에 순전한 사람이었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II. 고난을 보는 인간의 시선
그러면 그가 당하는 고난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할 때마다 자신이 욥의 화신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도 또 극대화한 해석을 할 경우에는 적용의 위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당하는 많은 시험과 고난은 평범한 사람들의 경우 대부분 그 자신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30편에서 시인이 말하기를 사람이 흑암에 거하고 쇠사슬에 메이는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고 정곡을 찔렀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그렇게 평면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욥이 당하고 있는 이 끔찍한 시련과 불행은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결코 욥의 죄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이 욥을 이 세상 끝 날까지 하나님 앞에 연단 받은 그러면서 순전한 믿음을 지킨 사람으로 승화시키시기 위해서 그가 몰랐던 그의 내면 깊이 있던 하나님을 덜 의존하는 마음과 그리고 불신앙까지도 이 불행을 통해서 깊이 드러내 치료하게 되었으니 그의 유명한 고백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과 같이 나아오리라”는 고백에서도 드러납니다. 욥의 이 고백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면 그는 자신을 아직은 불결한 것이 많이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리고 만약에 이 큰 불행과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보게 하는 하나님의 복음의 빛이 없었더라면 그는 결코 이런 수준 높은 고백을 주님 앞에 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 걸음 나아가서 그는 불행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정금과 같이 될 것이라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중보자가 있다고 고백을 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부활을 전망하면서 내가 육체 바깥에서 여호와를 뵈오리라고 노래하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의 생존 연대가 아브라함 시대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계산해 놓는다면 이것은 탁월한 지식의 한계에 도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사람들이 보기에 순전했던 인물인 이 욥을 이 치열한 불행과 고통 속에 연단하심으로 누구도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위대한 성품을 복음의 빛 안에서 보게 하셨으니 어찌 인간의 불행과 고통을 바라보는 인과응보적인 도식만으로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고난을 보는 인간의 시선을 만나게 됩니다. 엘리바스는 화자로서 인간의 죄악이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 하나님 바깥에서 사는 악한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판단과 상관없이 모든 세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혹은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만 구체적인 삶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적인 실천을 거듭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실천적인 무신론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엘리바스가 바라보았던 그러한 악인의 자긍함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의 삶에 있어서 주님의 주권을 얼마나 인정할까요? 매순간 우리 앞에 부딪치는 다양한 삶의 사태들 앞에서 자신의 불행과 고통에 마음 쓰는 대신 자신을 통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고 그의 자비가 두루 시행되는 그러한 세상이 되기를 오히려 더 마음 쓰며 안타까워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이 욥을 통해서 단지 선과 악의 인과응보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섭리하시는 모두가 아니라는 사실을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난이나 다른 사람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을 가볍게 평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너무나, 너무나 복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고 불행을 겪는 이유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에서 비롯된 우리의 죄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든지 혹은 바로 정확히 우리의 죄와 불순종이 뿌린 씨앗을 열매로서 거두는 그런 종류의 불행이든지 간에 우리 모두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그러한 삶의 사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예전에 찬송가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 하시네” 그런 찬송입니다. 거기에 2절인가 3절에 신학교 다닐 때 아주 뜨겁게 부르던 가사가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찬양)
즐겨 고난 길 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그런데 새로운 찬송가에서 그것을 지웠습니다. 아마 신학적으로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엄밀하게 생각해 보면 사실 즐겁게 고난 길을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니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또 우리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를 정말 즐겁게 한 것은 고난 중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위로지 고난 자체가 우리를 즐겁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실 즐겨 고난 길을 간다고 하면 계속 고난만 찾아다녀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도 얘기했지만 나는 맨 처음에 예수님 믿을 때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예수 믿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나중에 그래야 된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처음에야 자신이 행복해지려고 예수를 믿는 거지 무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예수를 믿겠습니까? 또 목사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고 변화되어 보니까 그렇게 좀 고통을 받으면서 살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내게도 기쁨이니까 그 길을 택한 것이라는 점에서 인간은 어떠한 삶의 사태를 만나든지 결국은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게 마련인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우리가 애매히 당하는 고난 때문에 불행해졌거나 혹은 우리의 죄 때문에 불행해졌거나 어쨌든 그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벗어나보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인지상정이고 하나님은 오히려 이것을 믿음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자신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하는 한도 안에서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III. 죄인을 구원하심
A. 죄인을 건지심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죄 없는 자가 아니라도 하나님이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으로 말미암아 건지심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이 죄인을 건지신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보텝니다. “죄 없는 자가 아닐 자라도 하나님은 건지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 불행한 삶의 모든 사태의 근원은 대부분 우리의 죄의 문제에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평탄한 인생의 길만을 걸어가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때로는 불행과 고통을 당하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인생을 끊임없이 불행하게 만드는 그 근원인 죄의 문제에 직면하게 하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로운 각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생활할 때 저를 위해서 기도를 참 많이 해주시던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늘 홀로 사시니까 더 그랬지만 늘 교회를 밤마다 지키셨습니다. 그래서 늘 철야하시면서 기도하시고 저를 참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주일이면 교회 난간에 서 있으면 머리 하얀 권사님이 다가오셔서 내 손을 꼭 잡고 말씀하셨습니다. “전도사님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기도 많이 하세요.” 정말 기도 많이 해 주셨습니다. 그 분의 기도는 참 특징이 있는데 가끔 옆에서 철야하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세 시간, 네 시간 기도하는데 문장이 안 끝납니다. 하나의 문장입니다. 마침표가 없이 그러던 분이었는데 제가 그 교회를 횟수로 한 7년 만에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열린 교회를 개척했는데 언젠가 수요 예배에 그 먼 길을 오셨습니다. 그러더니 예배가 다 끝난 다음에 내 손을 꼭 붙들고 “전도사님 정말 반갑습니다.” 그러면서 손에다가 뭘 하나 건네줍니다. 까만 봉지입니다. 뒤져 보니까 소고기 한 근이 들어있었습니다. 그 할머니가 용돈을 아마 모아서 그렇게 해서 그 고기 한 근을 끊어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평소에 그렇게 말이 없으시던 분이었는데 “전도사님, 오늘 내가 전도사님한테 정말 신기한 간증을 하나하고 가고 싶습니다.” 그럽니다. 그래서 사무실에 들어와서 마주 앉았는데 그 분이 한참동안 그 얘기를 합니다. 자신은 평생 주님 믿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에게 그렇게 커다란 죄가 있으리라고 생각을 안했는데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보여주시는데 많이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분이 이런 비유를 들어주셨는데 아직까지도 귀에 생생합니다. “전도사님 우리가 추운 겨울에 창문을 다 닫고 커튼을 치고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잖아요.” “네” “그리고는 우리가 이제 그 솜이불을 척척 개키고 그리고 요도 정리를 합니다.” “예” “그러다가 커튼을 약간 열면 햇빛이 환하게 들어오는데 그때 우리는 비로소 얼마나 먼지들이 방에 돌아다니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성령의 빛을 제 마음에 비춰주니까 내가 얼마나 많은 죄를 가지고 산 사람인지를 깨닫게 되어서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몇 달 있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소식을 듣고 하나님을 참 찬송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돌아가시기 전에 하나님이 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시기 직전에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아주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데려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게 바로 각성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항상 죄와 친화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하나님이 우리에게 불행과 고통을 당하게 하심으로써 그 불행의 궁극적인 원인이 이 세상의 사물들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는 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에 눈을 뜨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사물들의 질서를 움직이는 것은 대부분 우리의 힘으로 가능한데 이 모든 불행의 궁극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죄의 문제는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맨 처음에 하나님이 인간이 죄를 짓고 난 다음에 사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결단 나야 마땅합니다. 그러면 인간의 삶이 거의 짐승과 같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의미 자체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를 짓자마자 제사의 제도를 주시고 메시야에 의한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그 제사 제도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지은 죄를 대신 짐승이 짊어지고 형벌을 받고 그 사이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잠시적으로 영적인 교통의 길이 열려 죄를 용서 받고 또 하나님의 은총이 주어지는 기회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 교통의 통로는 곧 막힐 것이었지만 그 일들이 계속 반복됨으로 사람들은 그나마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총의 빛을 힘입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 수 있게 되었고 궁극적으로 이 모든 죄의 문제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불행의 모든 근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하나님에 의한 완전한 속죄의 길을 앙망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실제 속에서 이루어지게 될 때에 바로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영원한 속죄의 길이 그리스도에 의해 도입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간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십자가 속죄의 길을 향해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당신과의 생명적인 관계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사실을 믿으며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은 자신의 그 불행이 자기의 죄 때문에 온 것이라면 더더욱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의 은총을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입증되었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의를 믿으며 살아왔던 어리석은 삶에서 회개하고 그 의의 신발을 벗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뿌려진 핏길을 걸어 찢어진 휘장을 지나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그 모든 불행한 삶의 사태로부터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필요한 믿음은 이것입니다. 지금 내가 당하게 된 이 모든 삶의 불행한 모든 사태에 대해서 일체의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접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불행한 사태의 책임이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으며 또 이 속에서 나는 비록 고통을 당하지만 하나님은 이 고통을 통해서 나를 연단하사 정금과 같이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 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을 살게 해 주실 것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보혈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믿음을 가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깨끗한 손이 됨
두 번째는 주님이 죄인을 구원하실 때에 그는 깨끗한 손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네 손이 깨끗함으로 말미암아 건지심을 받으리라” 히브리어 성경에는 “네 두 손의 깨끗함을 통해 구원 되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두 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제유법적인 표현입니다. 제유법이 무엇입니까? 대표적인 것이 ‘펜은 칼보다 강하다’ 그럴 때 그 펜은 글과 사상을 표현하는 것이고, 칼은 무력과 폭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빵으로만 사는가 라고 할 때에 그 빵은 제과점에서 파는 그 빵이 아니라 육신을 위해 필요한 모든 자원을 통틀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학적으로 제유법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두 손의 깨끗함으로 말미암아 건지심을 받으리라 할 때에 이 두 손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모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그의 모든 현실적인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손으로 머리에서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이 손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손으로 자선을 베풀기도 하고 죄를 짓기도 하고 물건을 훔치기도 하고 사람들을 예수님의 손처럼 겸손히 무릎을 꿇어 헌대를 씻어주고 발을 닦아주며 종처럼 섬기고 그들의 행복에 이바지하는가 하면 이 손으로 폭력을 가하기도 하고 심지어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을 살인하기도 하는 손이 바로 이 손이기 때문에 이 손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모든 삶의 제유법적인 표현입니다. 그래서 시편 18편 24절에 보면 “하나님이 손이 깨끗한 것만큼 갚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24편 4절에는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뇨 그의 손이 깨끗한 자가” 그런 사람들이 여호와의 거룩한 산에 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발은 더러워도 된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전 삶이 청결한 사람들이 바로 여호와의 산에 오를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석가들이 해설하는 바와 같이 예전에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고난을 당한 사람이라도 그가 회개와 용서를 통해 정결해져서 하나님 앞에 순전한 삶을 다시 살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성으로 죄를 먼저 인식하고, 그리고 마음으로 그 죄에 대해서 슬퍼하고, 그래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고 주님이 그 죄에 대해 용서의 확신을 주시며 그래서 이제 용서받은 사람으로 일체의 자유함 속에서 그 분을 최고의 가치로 놓고 살아가는 정결한 삶으로 회복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때에 죄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던 많은 사람들은 이제 이 죄의 고통에서부터 놓임을 받게 됩니다. 비록 하나님의 섭리가 보다 높은 질서 속에 있어서 죄를 모두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도 고통이 종식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고통의 과정들을 통해서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더욱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수 있는 영혼의 담대함과 마음에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결국은 인간은 끊임없이 행복을 찾지만 그 모든 행복을 찾는 과정을 통해서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의 올바른 회복 없이는 그 모든 행복을 찾는 과정 자체가 그에게 끊임없는 고통과 불행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면서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어린 아이 같은 열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 바깥에서 행복을 찾아보려다가 불행해진 당신의 불쌍한 자녀들을 다시 당신의 품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하나님 안에 있는 행복을 되찾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자신의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질서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 바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은 이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주님에 의해 건지심을 받는 용서받은 죄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V.적용과 결론
깨끗한 손으로 주님이 나를 위해 하신 일, 그 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자기를 모두 버리신 그 은혜의 계획이 무엇인지 가슴에 새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삶의 사태들을 만나도 여전히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 만 바라볼지라
비록 여러분이 잠시 주님을 멀리 떠나 잘못 살아 영혼에 어두움이 오고 불행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희망은 세상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정말 여러분이 진정한 행복을 구한다면 하나님께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과 화목 하십시오.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과 동행하며 행복해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빕니다.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길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