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통한 복주심
(2015년 수요예배)
설교기간|2015년 06월 17일-2016년 06월 08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8년 3월 28일
목 차
1. 고난을 통한 배움(시 119:71) 2015.06.17. 수요예배 1
2. 고난 중에 위로하심(시 119:50) 2015.06.24 수요예배 8
3. 나의 것이 된 말씀(시 119:56) 2015.07.01 수요예배 16
4. 고난에 대한 태도(민 11:15) 2015.07.29 수요예배 24
5. 고난 속의 아름다움(벧전 2:19) 2015.08.05 수요예배 38
6. 환난 중에 주신 유익(고후 1:5) 2015.08.19 수요예배 46
7. 신자가 고난을 당할 때1(벧전 2:21) 2015.09.02 수요예배 56
8. 신자가 고난을 당할 때2(벧전 2:21) 2015.09.09 수요예배 64
9. 신자가 고난을 당할 때3(시 119:50) 2015.09.16 수요예배 72
10. 고난으로 순종을 배움(히 5:8) 2015.11.04 수요예배 81
11. 고난으로 온전하게 됨(히 5:9) 2015.11.18 수요예배 91
12. 고난과 그 백성의 표지(슥 1:39) 2015.12.16 수요예배 100
13. 환란 날에 지키심(시 27:4) 2015.12.24 수요예배 108
14. 환란 날에 베푸신 은혜(시 27:5) 2016.01.27 수요예배 112
15. 높이시는 하나님(시 27:6) 2016.03.02 수요예배 122
16. 고난 속에서 주를 찾음(시 27:7-8) 2016.04.27 수요예배 129
17. 믿음으로 주를 붙들라(막 5:25-29) 2016.06.08 수요예배 136
고난을 통한 복주심(1) 2015. 06. 17 수요예배
< 고난을 통한 배움 >
“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 (시 119:71)
I. 본문해설
- 두운법의 시로서 교육용으로 사용
- 저자 분명치 않으나 다윗으로 보임
- 하나님 말씀이 마음 안에서 영광됨
II. 고난당하는 신자들
- 불완전 세상 + 죄와 무지 + 악한 사람
- 그것들을 사용하시는 하나님 지혜
- 하나님 향한 신뢰와 그것의 재해석
-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산다는 의미
III. 고난의 유익
A. 내게 좋은 것임
- tob li ki‥∼∼은 내게 좋습니다
- 내가 고난당한, 나를 괴롭히신 것
- 고난 좋은 것 아니지만 좋게 만드심
B. 주의 율례를 배움
- hukkeika 법령, 규례, 규칙, 한계
- 복수인 것은 그 유익의 많음 보여줌
- 고난은 하나님 지식 전달의 도구임
- 금쟁반 아니라 피땀 눈물 보자기에
- 고난의 씨줄과 탐구의 날줄로 엮음
IV. 적용과 결론
- 우리 인생에 왜 어려움 없겠는가?
- 상황보다 선하신 하나님을 믿으라
- 시인은 믿음과 기억 눈물로 이겼다
고난을 통한 복주심(2) 2015. 06. 24 수요예배
< 고난 중에 위로하심 >
“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 (시 119:50)
I. 들어가는 말
- 지난주 "고난당한 유익" 율례 배움
- 최고 선물은 하나님 아는 지식 주심
- 삶의 안정과 존재 울림 어디서 오나
- 삶의 다양한 사태들 초월하는 관점
- 인격적 동행의 경험 속에서 살아감
II. 고난받는 자를 위로하심
A. 소망을 갖게 하심
- 고난 중에 "소망을 갖게"하심 v.49
- "나의 시련 안에 있는 내 위로" v.50
- 고난 중 생각 돌리는 것도 위로가 됨
- 시련 참기 힘듦은 의미 모르기 때문
- 그 의미는 하나님의 생각 안에 있음
- 의미를 깨달으면 신적 계획이 보임
- 방기+무조력+고립⇒지성의 혼란
- 하나님 선하심과 말씀으로 만나줌
B. 영혼을 살게 하심
- hiyateni 말씀이 나를 살아나게 함
- 'imerateka 당신의 말씀 혹은 약속
- 말씀의 능력은 영혼을 살게 하는 것
- "나를 살게했다" 영적면과 육적면
-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히 받은 영혼
- 생명은 새 사람의 삶을 살게 하는 힘
- 성경 말씀 읽고 묵상하며 뜻을 구함
III. 적용과 결론
- 지식은 단지 책 통한 배움만이 아님
- 지식은 영원한 지혜를 얻기 위함
- 지혜 곧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필수
- 도애, 도애의 삶 속에서, 도열의 삶
- 상황에 매몰되지 말고 마음 우러름
고난을 통한 복주심(3) 2015. 07. 01 수요예배
< ‘나의 것’이 된 말씀 >
“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 ” (시 119:56)
I. 본문해설
- 고난 중에 위로가 된 하나님의 말씀
- 나그네 된 집에서 노래가 된 율례들
- 밤에 주 이름 기억하고 주의 법 지킴
- 고난과 시련 깊을수록 말씀 의지함
II. ‘나의 것’이 된 말씀
A. 율법이 ‘나의 것’이 됨
- zot hayeta li: "이것은 나를 위한 것이 되었습니다“
- '이것'은 '당신의 율법'을 가리킴
- 하나님 말씀이 개인적으로 경험됨
- 성경 말씀이 개인적 상황에 주어짐
- 말씀의 객관적 지식과 현재적 경험
- 체계적 신학 지식과 경험적 지식들
- 경험되지 않은 지식은 체계도 안됨
- "강호동"과 "김현준"의 신앙 비유
- 경험했으나 지금은 역사하지 않음
- 지성의 창고에 누워있는 지식의 칼
- 지성의 뜰채로 뜨는 것 친숙을 위함
B. 주의 법도를 지킴
- "왜냐하면 제가 당신의 교훈들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 pikudeika 당신의 교훈들, 지시들
- nazar 지키다, 파수하다, 준행하다
- 상황에 따라 흔들리지 않고 준수함
- "공군 조종사들의 전신균형 훈련"
- 요동치는 삶의 상황에도 굳게 붙듦
- 삶의 굴곡 지나가나 주님은 영원함
- 신앙 좋은 사람의 속임 총체적 드림
- 매순간 말씀 의지하여 살아가야 함
III. 적용과 결론
- 여기서 율법은 총체적 흠없는 계시
- 단순한 의무부과 아니라 영혼 살림
- 붙들고 사는 사람에게 능력 경험됨
고난을 통한 복 주심(4) 2015. 07. 29 수요예배
< 고난에 대한 태도>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 (민 11:15)
I. 본문해설
-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과 반역
- 두 번의 인구조사(1,26)와 불순종
- 603,550(신1:46) / 601,730(신26:51)
- 이스라엘의 원망 통해서 악한 본성을 드러냄
II. 원망하는 백성들
A. 출애굽 직후의 원망
- a: 마실 물(출15), b: 먹을 양식(16), c: 지도자(17)
-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원한
- 원망의 대상은 하나님과 사랑과 자기 자신
- 원망은 낙심에서 시작해서 절망으로 감
- 절망의 끝은 사람에 대한 미움과 배교
-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의 아내
- 이스라엘 통해 신자의 인생을 보여줌
B. 다베라 사건
- “악한말로 원망하매...”(11:1)
- “여호와 귓속에 고난에 관해 불평했다”
- 악한 말이 아닌 “재앙”, “고난” 임
- 음식에 대한 불평: 생선, 오이, 참외, 부추, 파, 마늘(11:5)
- “악으로써 불평했다”는 해석도 가능함
- “다베라” “불타는”, 진노 하시는 하남의 임재.
III. 죽음을 구한 모세
- “즉시 나를 죽여...” (11:15)
- 백성들은 울고 여호와 진노는 컸음
- 모세의 고통: 백성과의 관계 + 능력 부족
- 삶에 “사심 없음은” 살아 갈 때 의미 있음
- 죽는 사람은 마지막 순간 집착을 내려놓음
- 살게 하신 자가 죽음을 구함은 패역임
- “고난당함을 보지 않게 하소서” (15)
- 한때 생명을 버린 헌신자에게도 이런 패역 있음
- 신앙과 사랑은 삶의 현실 받아들이는 것
- 인간의 모든 겪음, 죄나 섭리 결과 모두 감당함
- 신자는 죽는 순간까지 자기 위한 죽음 거부해야 함
- 하나님 사랑 받은 만큼 주권을 인정해야 함
IV. 적용과 결론
- 불평하는 자에겐 고난이 고난일 뿐임
- 믿음으로 반응하며 새로운 기회로 삼음
고난을 통한 복 주심(5) 2015. 08. 05 수요예배
<고난속의 아름다움>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 (벧전 2:19)
I. 들어가는 말
- 고난의 날에 하나님 자녀로 살아감
- 그리스도인 노예로서 집사인 자들
- 다양한 성격의 주인들을 섬겨야 함
- 고난 당할 때 인내와 순결을 강조함
II. 부당하게 고난을 받을 때
- adikos “부당하게”, 정의롭지 않게
A. 부당한 고난 있음
- 어차피 세상은 불완전하고 불공평 함
- 하나님과 우리에 대한 반감과 편견
- 때로는 그들의 이익 따라 고난을 받음
- 의와 사랑을 위한 부르심을 기억하라
B. 하나님을 생각함
- 하나님의 지각(suneidesin) 때문에
- 하나님의 양심, 혹은 지각 때문에 참음
-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참는다는 의미
- 하나님 보이신 인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 아들을 보내심이 인내하는 하나님의 사랑
C. 슬픔을 참음
- 즐거운 고난은 없고 언제나 슬픔 동반
- 슬픔은 원하지 않는 고통과 비참함
- 자원하는 운동과 강요된 노동의 차이
- 슬픔을 통해 하나님 마음과 인간을 앎
III. 결론 : 고난속의 아름다움
- xaris 아름다움, 우아함, 달콤함
- 은총, 호의, 선물 : ∼바람직하다
- 참음의 이유가 그리스를 향한 사랑임
- 당신 때문에 참는 영혼의 슬픔을 기억함
- 슬픔은 잠깐, 영혼의 아름다움은 영원
고난을 통한 복 주심(6) 2015. 08. 19 수요예배
<환난 중에 주신 유익>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 ” (고후 1:5)
I. 본문해설
-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 전달 여행
- 에베소, 마게도냐, 고린도행 계획
- 디모데 파송과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
- 고린도로 직행,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재방문
- 노골적 대적과 눌림 수치 속에 떠남
- 전서와 후서 사이에 한통의 편지 회개함
- 마음 녹아 세 번째 방문, 기대와 회신
II.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침
-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두가지 있음
a. 그리스도의 배타적 구속적 고난
b. 그리스도의 참여적 성화적 고난
- 불완전한 성도가 완전해지는 과정
- 객관적인 고난과 주관적 적용 걸침
-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고난에 참여함
- 그리스도의 고난이 내게 있는가?
- 고난이 하나님 위한 희생이라 생각
- 그러나 주님의 고난을 통해 당신을 알게 하심
III. 그리스도의 위로가 넘침
- 예수그리스도의 구속과 중보로써
- 위로는 고통을 능가한 주님의 사랑을 보이심
- 신적 위로 방법
a. 즉시 고통을 제거함
b. 고통의 의미를 깨달음과 목적을 이해함
c. 고통보다 큰 관계의 사랑을 알게 하심
- 모든 고통 당하는 자가 아니라 추구자
- 관계의 기쁨으로 고통 이기게 하심
- 환란을 통해 더 많은 신뢰를 갖게 하심
IV. 적용과 결론
- 신자로, 인간으로, 사는 목표 일치
- 신자로서 사명 없으면 인생의 방황
- 신자로 행복하지 않고 인간으로도
- 참된 행복을 누리는 신자의 아우라
고난을 통한 복 주심(7)(8)(9) 2015. 09. 02 수요예배
< 신자가 고난을 당할 때 >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 2:21)
I. 본문해설
- 고난 받는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함
- 시련과 고난의 뜻을 복음으로 밝힘
- 복에 대한 성숙한 사유가 신앙 깊이
- 불안정한 세상과 항구적 의미 발견
II. 신자가 고난을 당할 때
- 산돌이신 그리스도와 교회의 생명
- 그 생명으로 세상에서 빛으로 살자
- 하나님 사랑과 순종이 윤리의 동기
A. 선을 행하도록 부르심
- 이방인과 신자 까다로운 주인과 종
- 선을 행하도록 부름 받음과 아우라
- 사람의 자유 억압하는 아우라 아님
- 옳지 않은 양심을 깨우고 반성케 함
- 메아리를 기대하며 선을 행치 않음
- 구원의 사랑이 선행하는 동기가 됨
- 타인에 의해 구겨지기엔 고귀한 삶
- 바람과 구름처럼 자유롭게 선행함
B. 그리스도의 고난 생각함
- 고난을 참는 것은 본성에 합치 않음
- 매 순간 그 의미를 물으며 답을 찾음
- 선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서 나옴
- 예수 고난 당하셨으나 주 사랑하심
- 의로우신데도 고난을 당하셨으니
- 우리 받는 고난 버림 악함 증거 아님
- 본을 끼치심 hypogrammos 밑에 씀
- 초등생 글씨 연습과 유치 그림 연습
- 그 생명 분여 받은 자만 고난에 참여
C. 그의 자취를 따르게 하심
- "그 자취"는 예수 행동 뿐 아닌 마음
- 예수 발자취는 예수 마음의 궤적임
- 신자, 종의 삶을 말하기 전 (벧전 2:9)
- 예수 무명한 자로 진리 밝히심 같이
- 탁월한 섬김은 세상의 실존 자체임
III. 적용과 결론
-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복을 주심
- 삶의 의미에 대한 성숙한 생각 갖음
- 고난 통해 자신 삶에 대해 반성을 함
- 모든 사람 아닌 말씀에 은혜 받을 때
- 마음을 견고하게 고난 속에 기대함
- 사랑하는 자 위해 바꾸시는 하나님
고난을 통해 복 주심10 2015. 11. 4. 수요예배
< 고난으로 순종을 배움 >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히 5:8)
I. 본문해설
-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위로한 편지
- 하나님의 안식을 바라보며 인내함
- 대제사장이신 예수 바라보아야 함
- 예수님의 고난을 바라보며 인내함
- 통곡과 눈물로 기도한 예수 생각함
II.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심
- 신성을 인성 아래에 감추신 예수님
A. 순종을 배우심
- 신성으로는 모르는 것 없으신 하나님
- 인성으로는 배워가신 인자 예수님
- 인간으로서 순종하는 것을 배우심
- 죄와 불완전함에서의 온전함 아님
- 인성으로 경험함으로써 배워가심
- 인간으로 시험받으사 인간을 아심
- 무죄한 인성도 순종을 배워야 했음
- 죄인은 얼마나 더 순종을 배워야 할까
- 자신이 누군지 진리의 빛으로 알아감
- 신자의 일생은 순종의 학교에서 배움
B. 고난을 통해
-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운 예수 그리스도
- 자기깨어짐 아닌 연약함 이긴 순종
- 무죄한 상태의 아담을 생각해보라
- 무죄 상태에서도 순종을 배워야 했음
- 예수는 죄악 세상에서 순종 배우심
- 죄 없으심에 더욱 고통스러우셨음
- 우리의 불리함 a. 죄된 세상 b. 부패함
- 순종치 못함은 인간의 마음의 질병
- 순종치 않는 마음과 병든 마음 상태
- 선한 의지가 오롯하지 않기 때문임
- 마음의 찌끼 쏟아내게 하시는 방법
- 환경 흔들어 마음의 틀 바꾸게 하심
- 피의 펌프질과 마음의 불결을 버림
- 말씀과 마음의 은혜는 고난을 통해 옴
- 고난 자체는 능력이 아니라 은혜의 통로임
- 객관적 고난+믿음=적용 통해 성화
- 하나님 성품을 배워가며 온전해짐
III. 적용과 결론
- 인생의 길을 매순간 믿음으로 살아감
- 예수를 믿음으로써 그 고난에 참여함
-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연합을 경험함
- 모든 고난을 십자가 삼아 온전해져 감
- 슬픔과 고난의 사람이셨던 예수님
- 고통과 아픔을 통해 예수의 성품을 닮아감
고난을 통해 복 주심11 2015. 11. 18. 수요예배
< 고난으로 온전하게 됨 >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히 5:9)
I. 본문해설
- 고난 당하는 성도들을 위로한 편지
- 하나님의 안식을 바라보며 인내함
- 고난의 본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라
- 신성을 인성 아래에 감추신 예수님
- 신성으로는 전지하나 인성으로는 배우심
II. 온전케 하는 고난
- 모든 고난이 다 우리를 온전하게 하는 것은 아님
A. 순종을 배우심
- 완전한 인간이심에도 순종을 배우심
- 여기서 배움은 유아기와의 대조임
- 우리는 죄인으로서 순종을 배워감
- 순종을 배움은 불순종의 본성을 발견함으로
- 고난을 통해서 자신을 발견하게 됨
- 고난 자체가 아니라 말씀의 빛을 통해
- 섭리 신앙에서 인생 만사를 생각함
- 삶에 몰입뿐 아니라 탈출도 필요함
B. 순종을 원하심
- “순종하는 자들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심”
- 순종하신 예수님과 순종하는 자들
a. 자신이 순종하신 것처럼
b. 순종하는 자의 고통을 아심
-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히4:15)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 고통과 희생이 없이 순종은 거의 없음
- 주의 뜻을 거스르려는 본성과의 싸움임
- 자기 깨어짐 없는 생활에서 불순종이 비롯됨
- 모든 고난을 통해 주의 뜻을 발견하려 함
- 자신만이 아닌 모든 이들의 순종을 바람
- 완성된 하나님 나라는 순종의 나라임
III. 영원한 구원의 근원
- "영원한 구원의 그 저자가 되셨다"(히5:9)
히5: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 과거와 미래에서 현재적으로 구원하심
- 고난 속에서 온전해지려면 순종이 필요함
- 순종하는 자는 현실로써 말씀을 덮지 않음
IV. 결론과 적용
-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 고난 속에서 온전케 됨은 말씀 때문임
- 말씀을 지키기 위한 고난을 십자가로 여김
- 슬픔과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함
- 그분의 죽음 안에서 자아의 죽음을 경험함
고난을 통해 복 주심12 2015. 12. 16. 수요예배
< 고난과 그 백성의 표지 >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슥 13:9)
I. 본문해설
- “제카르야” 야훼께서 기억하신다
- 선지자인 동시에 제사장 포로 귀환
- 스룹 바벨 1차 포로 귀환 때 돌아옴
- 메시아의 도래와 예루살렘의 회복
-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실행 9∼14장
II. 예루살렘을 구원하심
- 9∼14장까지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
- 예루살렘의 구원과 승리(1∼9절)
- 하나님 백성의 내적 쇄신(10절ff)
- 죄와 더러움 씻는 샘이 열림(13:1)
- 정화와 양떼 돌본 자들 치심(9절)
II. 남은 자들을 연단하심
A. 은금같이 연단하심
- “내가 1/3을 불 가운데 던져‥”
- 남은 자 불 가운데 던지시는 하나님
- 목자 곧 하나님의 짝이 된 자들 치심
- 택한 자 은총 입은 자를 불에 던지심
- 시련과 연단은 참 목자를 구별해 줌
- 목자는 주님과 연애 결혼한 자들임
- 사랑 없이 양떼의 목자될 사람 없음
- 불 가운데 던지심은 고난 시험 확증
- 고난 통해 개인과 교회 온전케 하심
B. 주님의 이름을 부름
- 고난받을 때 택한 주의 백성의 표지
- 하나님 이름 부름은 단순 기도 아님
- 오히려 범사에 하나님 앙망하는 것
- 하나님의 이름 곧 그 의가 관심사임
- 삶의 모든 사태들을 신앙적 관점화
- 하나님 앞에서 의미와 결말을 찾음
- 그 백성이 고난을 면제받는 것 아님
- “내 이름을 부름” 생명적 전심 의존
- 모두 해명 불가한 삶의 사태와 믿음
- 믿어도 고난의 의미 즉시 알지 못함
- 그 속에서 믿음 간절해지고 강화됨
IV. 인정하시는 하나님
- “내가 들을 것이며” 단순 응답 아님
- 하나님의 인정과 그 은총의 표현임
- “옳다 인정함 받은 자∼” 고전10:18
- 여호와의 들으심 관계에 대한 인정
- 상호 관계에 대해 전심 고백하게 함
a. “이는 내 백성이라”(cf. 출19:6)
b.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라”(9)
- 하나님의 백성의 복은 여호와 붙듦
V. 결론과 적용
- 모든 삶의 사태에서 언약 관계 생각
- 시험과 연단은 신자를 복 주시는 길
- 우리는 복을 자신 아닌 사물로 생각
- 가장 큰 복은 하나님 마음과 하나됨
- 당신 마음 품은 채 살게 하시는 주님
- 시험과 연단 가운데 전심으로 추구
고난을 통해 복 주심13 2015. 12. 23. 수요예배
< 환난날에 지키심 >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 27:4)
I. 본문해설
- 압살롬의 반역의 때에 지은 탄원시
- 고난당하던 때의 다윗의 믿음 표현
- 다양한 삶의 사태들을 맞으며 살아감
- "악인, 원수, 군대, 전쟁" 환란들
- 그 모든 사태들 속에서도 태연한 시인
- 고통 속에서 믿음으로 사는 법 배움
II.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A. 여호와의 집에 삶
- shibti 영구적 거주 나그네가 아님
- 헤어질 수 없는 가족됨의 운명처럼
- 생명적 연합 그 마음과 겪음에 참여
- 연인과 과부의 차이 함께 하는 겪음
B. 그의 아름다움을 바라봄
- noam 유쾌, 즐거움, 기쁨, 은총, 미
- 시련 통해 드러나는 신적 아름다움
- 어릴 때 촛불 응시 경험과 소재 연소
- 하나님 성품 탁월한 이해 고난에서
- 아름다움: 내게좋음vs신적속성
- 아는 만큼 사랑 사랑한 만큼 살아감
- 잔인한 하나님 ⇒ 잔인 아닌 사랑임
- 시련 속 하나님의 아름다움 주목함
B. 여호와를 찾음
- baqar 묻다, 구하다, 찾다, 사모∼
- "성전에서" 그(왕)의 궁정에서‥
- 하나님 통치가 있는 성전에서 구함
- 하나님 추구함과 그의 통치 복종함
- 모든 섬김이 하나님 추구함 되게끔
- 하나님 추구함에 모든 것 걸리게 함
a. 자신 안에 하나님의 충만함
b. 이웃 안에 하나님의 충만함
- 하나님과 평화와 그의 영광 충만함
III. 결론과 적용
- 환란 속 세상의 추함 아닌 신미를 봄
- 그분과의 생명적인 연합 속에서 삶
- 고통 속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 주심
고난을 통해 복 주심12 2016. 1. 27. 수요예배
< 환난 날에 베푸신 은혜 >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시 27:5)
I. 본문해설
- 압살롬의 반역의 때에 지은 탄원시
- 고난당하던 때의 다윗의 믿음을 표현함
- 시련 속에서 인생의 본질을 깨달음
- 한 가지 일을 구함: 여호와의 집+하나님의 아름다움
- 환난 날에 굳게 붙잡았던 확신을 말함
II. 환난 날에 베푸신 은혜
A. 비밀히 지키심
- 타인이 쉽게 발견할 수 없게 숨기심
- 소중하고 값진 것을 은밀히 감추심
- “나를 그의 초막 속”: 성막을 가리킴
- 하나님에게 너무 소중한 성도들임
- 장막 은밀한 곳에 시인을 숨기신 주님
- “초막”과 “장막”은 같은 의미의 반복임
- 시련의 날에 교회를 가까이 하라
- 그럴 때 유익은: 말씀+교제+기도
B. 바위 위에 두심
- “높은 바위” 구원+안전+존귀를 뜻함
- 시련 속에서 피하는 자를 후대하심
a. 구원하심: 대적을 멸함+건지심
b. 안전케 하심: 이스라엘의 바위산
c. 존귀케 하심: 방패, 영광, 머리 듦
- 시련 중에 사람보며 비굴하지 말라
III. 결론과 적용
- 환난 속에서 주님을 더욱 응시하라
- 시련 속에서 우리의 참 소망을 알게 하심
- 은밀한 장막에서 주님의 성품을 보이심
- 시련을 당할 때 더욱 교회를 가까이함
고난을 통한 복 주심(15) 2016. 3. 2. 수요예배
< 높이시는 하나님 >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시 27:6)
I. 본문해설
- 압살롬의 반역의 때에 지은 탄원시
- 고난당하던 때의 다윗의 믿음을 표현함
- 시련 속에서 인생의 본질을 깨달음
- 시인은 환난 날에 주신 은혜를 회상함
- 지키심+장막에 두심+바위에 두심
- 5절: 내적 은혜 > 6절 외적 섭리에 대한 감사
II. 환난 날에 높이심
A. 머리 들게 하심
- “머리”(rosh): 인간의 존엄과 영광을 상징함
- 환난 중에 대적들에게 명예를 잃음
- 내적인 고통과 외적인 시련을 겪게 됨
- “머리 듦” 이전의 수치를 암시함(시69:4)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
- “방패와 영광, 머리 드심”(시3: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 시련의 날에 수치를 견디게 한 믿음
- 사람 앞에 당한 수치보다 주님의 섭리를 묵상함
-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의 명예를 생각함
- 도덕을 구함 > 공명을 구함 > 부귀를 구함
- 영광보다 수치로써 우리를 변화시킴
- 당신을 의지하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심
- 누명을 벗기시고 비천한 자를 존귀케 하심
B. 당신을 섬기게 하심
1. 제사를 드림
- “제사”: 자기 봉헌과 의존의 표현임
- 제사와 함께 기쁨과 슬픔을 표현함
- 속죄+속건+서원+감사+화목제사
- 맘의 정결과 삶의 사태를 극복하게 함
- 하나님 앞에서 환난의 수치를 이기게 하심
- 당신에게 예배는 무엇인가?
- 예배로써 삶의 상황을 초월하심을 찬양함
- 예배를 통해 거룩함을 열망하게 됨
- 천국에서 하나님을 누리는 삶의 예표임
- 환난 속에서 주님만 바라는 것을 배움
2. 노래로 찬송
- “내가 노래하며…찬송 부르리다”
- “노래” 즐거움 “찬송” 하나님을 높임
- 성도의 즐거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 주님을 즐거워하지 않는 것은 영혼이 병든 것임
- 마음을 드리는 예배로 그러한 기쁨을 회복함
- 주님을 찬송함으로써 그분을 인정함
III. 결론과 적용
- 환난 속에서 주님만을 더욱 응시함
- 하나님을 응시함이 곧 우리의 믿음임
- 환난을 통해 주님만이 참소망임을 알게 하심
-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장막으로 피함
-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 높이시는 주님
고난을 통한 복 주심(16) 2016. 4. 27. 수요예배
< 고난 속에서 주를 찾음 >
“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 (시 27:7-8)
I. 본문해설
- 고난의 날에 여호와께 피하는 시인
- 머리를 드시는 주의 은혜를 확신함
- 그런 승리를 바라보며 선택한 수단
II. 환난 날에 높이심
A. 고난은 기도하게 함
승리의 확신으로 교만함이 아닌 기도임
“소리내어 부르짖음” 억제할 수 없음
영혼의 움직임과 기도
마음이 간절할 때 기도는 깊어짐
환난과 시련은 영혼을 위한 양약임
잠든 영혼을 깨우려 환난 중 기도하게 함
B. 주의 얼굴을 찾음
- 고난의 때에 주님의 약속을 기억함
- Hb. “나의 마음이 내게 말하기를 … 찾으라”
- “내 얼굴을 찾으면”(대하7:14): 믿음의 표현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 “내 얼굴을 숨겨∼보이지 않게”(신31:17): 진노의 표현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내림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냐 할 것이라
- “얼굴을 찾는다”는 뜻: 인격적 만남 + 임재
- 따라서 이는 단순한 도움 요청이 아님
- 만약 그랬더라면 두 손을 구했을 것(시106:15)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 신자는 고난 속에서 주님과의 관계를 봄
- 자신의 진정한 필요는 주님 자신임을 앎
- 시련과 고난은 당신 앞에 서라고 주신 것임(창17: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III. 결론과 적용
-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라
- 간절히 기도하라
-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라
고난을 통한 복 주심(17) 2016. 6. 8. 수요예배
< 믿음으로 주를 붙들라 >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막 5:25-29)
I. 본문해설
- 주일학교부터 지금까지 나의 기억
- 달리는 열차 옆에서 차 속도 못 느낌
- 조국교회 시대에 다양한 특징 있음
- 관통하고 있는 흐름 ⇒ 간절함의 결핍
- 어려운 환경이 하나님을 바라게 함
- 빗나간 열정 ⇒ 그거라도 보고 싶다
II. 절망 속에 주를 찾음
A. 비참한 상태에 놓임
- 육체적으로: a. 정도 b. 기간 c. 무력
- 종교적으로(레12:2∼4,15:19등)
레12:2-4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여인이 임신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곧 월경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여덟째 날에는 그 아이의 포피를 벨 것이요 그 여인은 아직도 삼십삼 일을 지내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
레15:19 어떤 여인이 유출을 하되 그의 몸에 그의 유출이 피이면 이레 동안 불결하니 그를 만지는 자마다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
- 경제적으로: "가진 것도 다 허비∼"
- 굳은 의지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희망이 없음
B. 예수의 소문을 들음
- 예수에 대한 적극적 선포나 설득이 아님
- “예수 소문” 믿음 작은 진리에 반응함
- 풍성한 진리가 항상 믿음을 주는 것은 아님
- 예수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 소문을 붙듦
- 진리의 분량 못지않게 믿음의 간절함이 중요함
- 믿음은 언제나 간절함을 동반함
- 먹고 입는 물질 여유와 믿음의 촉수
- 간절함이 있는가?
C. 예수를 굳게 붙든 여인
- 두 손: 싫은 사람과 악수 & 익사 직전
- 간절함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게 함
- 괴롬+허비+악화: but 살려는 의욕
- 유일한 희망+하나님 능력을 믿음
- 대면+만져주심 아닌 옷에 손을 댐
- 의지하던 것 모두 끊게 하시는 주님
- 독서자의 안광이 지배를 철하듯이
- 영혼의 시선을 당신께 고정한 자 보심
- 혈루의 근원이 마름을 스스로 느낌
- 하나님은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심
III. 결론과 적용
- 참된 사랑은 간절함을 동반한다
- 많은 일 하나 역사와 심령의 갱신이 없다
- 간절함은 모든 섬김의 능력을 부른다
- 간절한 섬김에 놀라운 간증이 있다
- 당신의 절망적 상황은 무엇인가?
십자가에 감춰진 은혜 1 (2015.10.19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1. 고난을 통한 배움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녹취자: 김경애
Ⅰ. 본문해설
고난을 통한 복 주심(2015.06.17 수요예배1)
시편 119편은 표제에 저자가 분명하지 않지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다윗이 아닐까하고 생각합니다. 확고한 근거야 내세울 수 없지만 필체나 그 시에 흐르고 있는 것들이 다윗과 유사해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누구든지 단정적으로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시편 119편 전체에서 다루는 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신자의 마음 안에서 영광스러운가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119편에서 그리는 신자의 삶은 평안할 때나, 요동칠 때나, 시련을 만날 때나, 죽음의 위협이 있을 때나,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이야기로 이루어져있습니다.
Ⅱ. 고난당하는 신자들
특히 이 시편 119편은 고난을 통해 깨닫는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에 대해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 시인도 우리와 똑같이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시련과 환난을 만났습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 때문에 시련을 당하기도 하고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려고 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어차피 불완전한 세상에서 우리에게 왜 고통이 없겠으며 또 우리 안에 늘 싸우지만 언제나 죄가 남아있는데 왜 우리에게 시련이 없겠습니까? 또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많은 무지들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고난을 당하고 그리고 여기저기서 악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에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거치는 돌이 될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도 또 고난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을 사용하셔서 우리들을 주님의 말씀으로 다듬으시고 새롭게 하셔서 그래서 우리를 당신의 의로우신 쓰심에 합당하도록 우리를 연단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시련을 결국 인생은 피할 수 없고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그 모든 시련을 피해가는 어떤 통행증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완전하고 죄로 가득한 세상에 살면서 끊임없이 시련을 만날 때 우리가 무조건 이 모든 일에 있어서 피해자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옳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언제나 시련을 당할 때는 우리에게 시련을 준 원인이 되는 사람을 찾는 대신 그런 시련을 통해서라도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정결하게 하시려는 그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배우고 그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통해서 자신이 고통스럽게 여기는 모든 삶의 상황들을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앞에 있는 고난과 시련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한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산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치고 고난이 좋고 행복이 싫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즐겁게 고난의 길을 가는 사람은 없고 고난 자체에서 그런 매력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비련의 쓰라린 러브스토리가 소설로 읽을 때에는 아름답지만 그 소설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Ⅲ. 고난의 유익
A. 내게 좋은 것임
그런데 오늘 시인은 고난의 유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합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뭐라고 나오느냐 하면 ‘토브리키’ 그리고 쭉 문장이 나옵니다. 영어로 말하면 'It is good to me that' 이라는 뜻입니다. ‘이러이러한 것은 나에게 선한 것입니다.’ 혹은 ‘선한 것이었습니다.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고난당한, 내가 고난당한 것’ 또 고대 역본에는 뭐라고 번역되었느냐하면 ‘당신이 나를 괴롭게 하신 그것이 내게는 좋은 것이었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고대역본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성경은 원래 히브리어로 쓰여 졌는데 거기서 번역을 한 것입니다. ‘내가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그렇게 번역됩니다. 그 옛날에 번역이 되었는데 그것은 소위 70인역 이라는 것입니다. 베벨론 포로 이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히브리어를 잊어버리니까 그 당시의 공용어는 헬라어였습니다. 약간 다른 것입니다. 이것이 그냥 사소한 실수일 수도 있지만 히브리어 본문 자체가 다른 사본일수 있다는 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 본분을 받아도 은혜가 되고 저 본문을 받아도 은혜가 됩니다. ‘내가 고난을 당한 것이’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주체가 되어서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나를 괴롭게 하시는 것이’ 그것은 하나님이 큰 섭리 속에서 때로는 잘못이 없는데 악한 사람들을 만나서 괴롭힘을 당하거나 혹은 자기 자신이 잘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징계를 하셔서 ‘너 정신 좀 차려봐라.’ 라고 시련을 주십니다. 그러면 그것은 괴롭히는 주체가 하나님입니다. 나는 그 괴롭힘을 당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괴롭히시는 그것이 나에게는 참 좋습니다.’ 혹은 ‘좋았습니다.’ 어느 쪽을 받아도 아주 은혜롭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고난 그 자체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왜 좋겠습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좋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대표적인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방주사입니다. 메르스가 백신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모두 달려가서 한방씩 맞으면 상황 끝입니다. 그런데 지금 안 됩니다. 그래서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이따가 나갈 때 절대로 악수하지 마십시오. 정말입니다. 그리고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침이 튑니다. 그냥 조용히 흩어지십시오. 저도 저기서 인사를 안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입합니다.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지금은 없어졌습니다만 우리 어렸을 때 천연두 예방주사를 많아서 많이 죽었습니다. 그것은 진짜 독합니다. 한번 맞고 오면 아이가 심하면 3일씩 앓고 쇼크로 죽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일단 몸에 들어가서 이기기만하면 항체가 생겨서 평생 살면서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고난 그 자체는 절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고난도 그게 옛날에 겪은 것이니까 아름다운 것이지 지금 겪는 것 중에서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싫습니다. 하다못해 지렁이 한마리라도 툭 건드려서 아프게 하면 괴롭다고 발버둥을 치고, 늘 꼬리를 치던 강아지도 괴롭게 하면 물려고 덤벼듭니다. 누가 그것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 좋습니다.’ ‘내게 선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하나님은 그것을 가지고 좋게 만드셔서 우리를 바꿔놓으셨다는 뜻입니다.
B. 주의 율례를 배움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시인이 고백하기를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후케이카’라는 단어인데 후크의 복수에다가 2인칭 남성단수를 붙인 것입니다. '당신의 율례들을'입니다. 후크라는 말이 율례라고 번역이 되었는데 뜻이 애매합니다. 성경에서 법령, 규례, 규칙, 한계, 범위 이런 뜻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어떤 법, 혹은 우리의 삶의, 혹의 믿음의 규칙 우리가 여기까지 행할 수 있다는 한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아주 폭넓은 뜻으로 쓰였습니다. 이것이 결국 무엇이냐 하면 복수인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 유익이 얼마나 풍성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은 쓰라리고 너무 고통스러운 것이었는데 그 쓰라린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이 시인은 더 좋은 것을 받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내가 고통을 당한 것이 혹은 당신이 나를 괴롭게 한 그것이 나에게는 선이었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 받는 모든 사람들을 그렇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오직 고난을 믿음으로 통과한 사람들만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지만 이 시인이 고난당한 것이 자기에게 유익입니다. 라고 말할 때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고난을 당했더니 하나님이 돈을 많이 주셨습니다.’ ‘ 고난을 당했더니 건강을 많이 주셨습니다.’ ‘고난을 당했더니 지위를 높게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고난을 당하면서 겪었던 시련 때문에 건강이 나빠질 수도 있고 고난을 통해서 잃어버렸던 명예를 회복을 못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고난을 통해서 잃어버렸던 사회적인 지위를 결국은 회복을 못할 수도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잃어버렸던 재산, 고난을 통해서 잃어버리고 죽음 저편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 고난이 모두 끝나도 못 만날 수 있습니다. 한번 손해가 한 번의 손해가 아니라 영원한 손해일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모두 악한 사람들이 이겨서 가지고 갔어도 혹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내가 상실했어도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도록 하나님이 그 고난을 통해서 시인에게 주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율례에 대한 배움이었습니다. ‘아, 하나님이 우리보고 이렇게 살라고 하시는구나!’ ‘아 하나님이 우리보고 이렇게 믿으라고 하시는구나!’ 그것을 깊이 터득했는데 결국은 그것으로써 해석을 하고보니까 그때는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고통을 받았던, 그 괴로운 일들이 없었더라면 이 아름다운 주님의 율례를 터득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믿음이 시인에게 생겨나게 되니까 하나님을 향해 벅차오르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찬양)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그런 깊은 고백을 하고 나면 그래서 시인에 의하면 이 고난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달하는 도구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당신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제가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조금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는 돈을 주시고 진짜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신을 아는 지식을 주신다고 했더니 그랬더니 누가 하나님은 나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요새는 하나님이 조금만 사랑해주셨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설교의 적용을 아주 기가 막히게 합니다. 그런 말재주는 누구에게 배웠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조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것을 주십니다. 그런데 정말 사랑하신 사람들에게는 당신 자신을 주십니다. 그것이 당신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다 가지고 있을 때 그때에 존재의 울림이 있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칸트라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숭고함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고 예쁜 것은 우리의 마음을 끌리게 한다.’ 예쁜 것을 보면 마음이 막 끌립니다. 그런데 밑에서 끌리는 것이 아닙니다. 대등하게 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숭고한 것을 만나면 두려움이 생기면서 존경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은 참 예쁘다.’ 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불경스러운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숭고함이 주는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니까 예쁜 아름다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름답다고 느낄 때는 예쁜 자매들을 보았을 때 느끼는 그런 느낌이 아니라 숭고하기 때문에 그 앞에 어떤 두려움을 느끼면서 하나님을 우러르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시련 속에서 깊이 만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 자신이 그런 숭고한 울림을 전달하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에 의하면 그렇게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그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아는 그 탁월한 지식들이 괴롭힘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고난 속에서 자신이 고난을 당하는 그 속에서 하나님이 그런 지식을 전달해주는 것입니다. 이 지식이 얼마나 복된지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느냐하면 이 지식 곧 하나님을 아는 것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그것이 곧 영원한 생명이옵나이다.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진실하게 알고 나면 그것이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인생을 알아가는 무한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무시하고 하찮게 깔보고 그래도 거룩한 자존심이 구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왜? 구겨지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그 사람 앞에 뭔가 열등하다는 것을 느낄 때 이 거룩한 자존감이 구겨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자녀들 특히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녀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분을 아는 지식이 곧 영원하고 충만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자,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이 예전에 여러 가지 많은 시련을 당하고 고난을 당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고비를 넘겼을지 모르지만 밤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 눈을 뜨고 싶지 않은 인생의 날들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 왜 없겠습니까? 없으면 그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삶을 살거나 생각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인생은 원래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인생의 길을 지나면서 어떻게 새 힘을 확 얻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누가 와서 ‘이렇게 어려워서 어떻게 해!’ 그러면서 몇 십만 원이 든 봉투를 질러주고 갈 때도 힘이 났지만 영원한 생명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도 우리에게 적잖게 위로가 됩니다.
이번에 제천에 내려가서 그곳에서 성도 한분을 만났는데 우리교회 설교를 매주 듣고 있고 제천에서 올라와서 교리반을 불법으로 수강했습니다. 한주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평생에 수료증을 받아보는 것이 소원인데 담당교역자가 한마디로 안 된다고 딱 잘라서 내가 그냥 하나 해주라고 했습니다. 자기 안방에 걸어놓겠답니다. 그분의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부인하고 차를 몰고 가다가 탑 차를 긁었답니다. 부인이 너무 당황해서 후진을 하다가 한 번 더 긁은 것입니다. 앞으로 가다가 다시 긁은 것입니다. 왔다 갔다 하다가 스타렉스가 걸레가 되었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까 괜찮더라는 것입니다. 원래 가해자의 눈에는 괜찮아 보입니다. 그래서 그냥 가려고 하는데 설교가 생각나더랍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제가 썼답니다. ‘우리 집사람하고 아이하고 타고 가다가 살짝 긁었는데 우리 집사람이 너무 당황해서 앞뒤로 가면서 긁었습니다. 아래 전화번호로 연락해주시면 제가 즉시 수리해드리겠습니다.’ 그랬더니 조금 있다가 문자가 왔더랍니다. ‘만납시다. 고쳐주시오.’ 아니면 ‘어느 공업사에 들어갔습니다.’ 그런 문자가 올 줄 알았는데 ‘딩’ 하고 문자가 왔는데 ‘부인하고 아이들은 안 다치셨습니까?’ 그것이 어떻게 보면 인생을 사는 멋입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당신 차를 긁었습니다. 그렇게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이야기한 사람도 멋있지만 봤을 때 ‘어 그래 고쳐줘!’ 그것이 아니라 ‘안 다치셨습니까?’ 얼마나 멋있습니까? 한참동안 그것이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인생을 사는 동안 그것이 인생의 멋이고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은 아닙니다. 그냥 마음이 좋고 사람이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구나! 따뜻한 것이 있습니다. 항상 어두운 것만 보다가 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한 생명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시련에서 벗어날 때는 항상 하나님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데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딛고 이기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여러분에게 전날까지 없었던 것이 어떻게 주어졌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항상 고난 그 자체가 그것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주님을 간절히 바라보았더니 하나님이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확 하고 깨달아질 때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저께까지 미칠 듯 괴로워하다가 ‘에이씨 그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것이 뭐 인생의 그렇게 본질적인 문제도 아닌 것입니다. 진짜 본질적인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유로워집니다.
한번은 청년들을 가르칠 때였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문상을 갔는데 그 친구가 막내아들이었습니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나를 붙들고 눈물을 펑펑 쏟는 것입니다. 이럴 때 위로를 하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몸을 못 추슬렀습니다. 그래서 그랬습니다. ‘너 왜 우냐?’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냐? 생각을 바꿔봐라.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버지가 너를 보고 우시겠다. 너는 천국을 믿는 사람인데 아버지가 아프셔서 그렇게 고난을 당하고 다 해방되어서 이제는 정말 편안한 하늘나라에 가셨는데 네가 그렇게 몸을 못 가눌 정도로 그렇게 울고 있으면 아버지가 엄청 좋아하시겠다.’ 주위에서 분위기를 맞춰줘야지만 눈물이 계속 날 텐데 아주 쿨 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모든 인간에게는 끊임없이 시련이 있고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해야하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통 자체를 직시하면 인간사는 것이 너무 괴롭고 이 세상에 미운사람 투성이입니다. 그런 것을 모두 하찮은 도구들이라고 생각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그 괴로움과 시련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율례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혹시 여러분 주위에서 살면서 이런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어쩜 하나님에 대해서 저렇게 많이 알까? 지식적으로 입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가방끈 긴 것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왠지 그 사람과 함께 서있으면 진짜 숭고한 존재감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아는 하나님과 내가 아는 하나님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지하실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전해지지 않아서 그렇지 지상에 올라와서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는 작았었습니다. 한 사람이 와서 거의 회심에 이르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는 설교를 듣고 그랬는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예배시간에 어느 자매가 나와서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했는데 낭랑한 목소리로 쭉 기도를 했는데 성령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때 저도 느꼈습니다. 그런데 뭐냐 하면 그 기도를 듣고 나서 그 받은 충격 때문에 설교가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저 자매가 믿는 하나님과 내가 이제껏 알고 있는 하나님이 다른 분이라고 생각되는데 도대체 그런 차이가 나게 만드는 근원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던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가 나에 비해서 탁월한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 카펫 깔린 길을 일평생 걸어온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아는 지식은 너무 고귀하지만 그것을 당신 자신이 웨이터처럼 양손에 금 쟁반에 당신 아는 지식을 받쳐서 우리에게 서빙하시는 적은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어떤 탁월한 지식을 전달해주실 때에는 항상 그것은 눈물과 땀과 피에 젖은 베보자기로 싼 그것으로 우리에게 전달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시련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이 저절로 그런 지식을 주신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끊임없는 눈물의 기도와 하나님을 향한 안타까운 몸부림 속에서 그것을 체화해서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삼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말씀을 우리에게 심으셔서 당신을 아는 지식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시인에게도 그런 모든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 결국은 하나님의 율례를 배우게 하셨고 그래서 그런 고난을 통과하지 않았더라면 짐승처럼 살았을 사람이 그 고난과 시련의 계곡을 모두 통과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회고하면 먹고 마시고 흐드러지게 놀았던 날들은 그렇게 귀하여 여기지 않습니다. 고난과 시련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했던 사람들만이 터득할 수 있었던 지식, 내 인생에 수많은 달콤하고 즐거운 날 속에서는 딸 수 없었던 열매, 그것을 눈물과 많은 인내 속에서 터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가르침이 우리 속에 육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입을 열어서 짤막한 자신의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기까지는 정말 잔인하리만치 긴 세월동안 고난을 받으며 그 말씀으로 다져지고 다져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다른 곳에서 그랬습니다. ‘나는 벌레입니다.’ 얼마나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는지 ‘나는 성도가 아니라 벌레입니다.’ 그것을 체득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아는 것입니다. 고난을 겪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탁월한 지식을 갖느냐하면 그런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 없이 고난을 많이 당한 사람들은 성품이 굽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고난은 고난 자체에는 그런 지식을 주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처음에 짤 때 씨줄과 날줄이 엮이면서 천이 직조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고난과 탐구를 통해서 그래서 믿음의 직조기 위에서 짜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하고 고난이라는 실과 탐구라는 실로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 씨줄과 날줄로 엮어서 그러면서 믿음이라는 기계 속에서 직조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깊고, 믿음이라는 기계가 아주 훌륭한 믿음이고 치열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면 이것이 찢어지지 않는 피륙이 되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양쪽에서 황소를 매달고 잡아당겨도 찢어지지 않는 천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무엇인가 알기는 압니다. 그런데 툭 건드리면 쭉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탄탄한 씨줄과 날줄로 엮어서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기계에서 그 피륙들이 짜지는 것입니다.
Ⅳ. 적용과 결론
그럼 보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을 잘 믿고 의지해도 시련은 있습니다. 하나님 안 믿고 농땡이 치고 불순종해도 당연히 시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후자는 그냥 생고생이 되기가 쉽습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어차피 우리의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우리가 원하지 않는 시련들은 우리에게 늘 있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믿음을 받아들여서 그것을 하나님의 율례로 배우는 기회로 삼느냐는 것입니다.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이 시인이 살았기 때문에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 그런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한 것이 나에게는 참 좋은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여러분이 고난과 시련을 당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그 모든 것을 잘 이기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워 가면 결국 세월이 흐른 뒤에 ‘그때 그 고난을 당한 것은 나에게 참 좋은 것이었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믿음의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고난을 통한 복 주심 (2015.06.24 수요예배2)
2. 고난 중에 위로하심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시 119:50)
녹취자: 김세나
Ⅰ. 들어가는 말
우리는 지난주에 119편의 말씀을 보면서 고난을 당한 유익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시인은 고난당한 것이 자신에게 유익이라고 고백하면서 주님의 율례를 배웠기 때문이라고 노래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를 포함한 모든 인간들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생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유익은 삶의 안정입니다. 이 안정은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육신의 병이 없어서 안정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살면서 어차피 다양한 삶의 사태들을 겪습니다. 누구도 자신이 앞으로 겪게 될 것에 대해서 예측할 수 없고 신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많은 경우에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의 상황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유익은 이 모든 것들을 다 물러나게 해서 가시밭길을 걸어갈 사람이 탄탄대로를 걷고, 지방도로 갈 사람이 고속도로를 타고 가는 것이 신앙의 유익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무지 속에서 자신의 죄 때문에 가시와 엉겅퀴로 가득 찬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고생의 길입니다. 그것들이 자신에게 주는 어떠한 영적 유익도 없이 무지와 오류에 빠져서 그릇된 자기 사랑으로 그 길을 걸으며 온 몸으로 삶의 상황과 부딪히며 피 흘리고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상처를 내게 하면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진리를 알고 난 후에는 어떠한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고 어떠한 인생이 가치 있는 인생일까 압니다. 물론 남아있는 죄와 연약함 때문에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지지만 그 자리에 다시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일어서 그 길을 걷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일체의 시련이나 어려움이 없이 모두 형통하고 평안한 생활만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놓으신 다음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를 거룩하고 온전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셔서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정말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보여주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안정이라는 것은 다양한 삶의 사태들을 만나고 때로는 울고 웃고 가슴이 찢어지듯이 비통하고 열나기에 처하지만 그 모든 삶의 사태들을 따라서 우리들이 인생 전체가 요동친다면 불안해서 어떻게 인생을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전에 그러했던 사람들입니다. 신앙의 유익은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삶의 안정입니다. 요동치고 때로는 가슴 아프고 때로는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 저편에 보내기도 하고 삶의 상황이 자신이 원하는 것과는 반대의 상황에 펼쳐져서 아침에 이러나는 것, 앉아서 아침을 먹고 점심을 먹는 것 자체가 쓰라린 고통으로 다가와도 그것이 인생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기 때문에 삶의 안정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유익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신앙을 잘못 가르치기 때문에 그래서 아주 유약하기 그지없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냅니다. 아주 성공지향 적이고 번영지향 적이고 성취지향 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냅니다. 거기에는 존재의 울림이 없습니다. 존재의 울림은 그러한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삶의 안정과 존재의 울림은 모든 사람들이 처하는 다양한 삶의 시련으로 가득 찬 사태들을 만나면서 그것을 초월해서 이해할 수 있는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눈앞에 요동치는 모든 것에 의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출렁거리는 대신 안정을 갖습니다. 그러한 것은 어떠한 의미에서 이 세상의 수도 종교들도 어느 정도는 줍니다. 기독교는 그 이상의 것이 주어지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인격적인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경험 속에서 고통스러운 삶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기쁨의 씨앗을 뿌려 주시고 그리고 심지어는 죽음의 검은 그림자가 우리의 얼굴 위에 드리울 때에도 우리가 두려움 없이 영원한 세계 속으로 들어갈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만 가질 수 있는 특권입니다.
이러한 신앙을 갖게 되면 고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게 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들이 힘 있는 사람들에 의해 움직이고 어떠한 물리적인 요인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지혜의 측면에서 보면 심지어, 나에게 고통을 주는 악한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의 장기판에 놓여있는 체스에 불과한 것입니다.
Ⅱ. 고난 받는 자를 위로하심
오늘 시인은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좋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 시인은 고난 중에서 하나님이 고난 받는 자를 위로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A. 소망을 갖게 하심
첫 번째는 소망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49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저에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고난 중에 있는 이 시인을 하나님이 위로하셨는데 소망을 갖게 하심으로써 위로하셨습니다. 이것을 오늘 여기에서 시인이 “이 말씀이 고난 중에 위로라.”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나의 시련 안에 있는 내 위로”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시인이 당하고 있는 시련도 다른 사람이 동참할 수 없는 시련입니다. 진짜 인간이 어떠한 인생에 있어서 절실하게 고통을 당할 때 그 고통에 완전히 참여하는 사람은 자기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것을 나눠 줄 수 있는 것은 환상입니다. 둘이 결혼을 하였어도 모든 것을 완전하게 나눌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시인이 그래서 “나의 고난” “나의 시련”이라고 표현합니다. 놀라운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한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위로도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아주 독특한 위로를 그 시련 속에서 당신을 바라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님께서 주십니다.
(찬양)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정말 불쌍한 사람은 누구인가 하면 시련을 당한 사람이 가엾은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것을 피할 사람이 없습니다. 가끔 신문 지상에 누가 몇 조를 가지고 있고 전 세계 서열이 가지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본 기록으로는 제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칠십 몇 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삼성 그룹 회장도 그 사람에 비하면 푼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시련을 가지고 있는 것이 가엾은 것이 아니라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시련은 시련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 시련이 바로 남이 알지 못하는 깊은 고통 속에서 홀로 몸부림치지만 그 속에서 이 모든 자신의 인생을 주관하고 인간의 모든 생각을 뛰어넘는 탁월한 지혜로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 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똑같이 다른 사람들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그 사람만의 독특한 위로를 주십니다. 그것은 심지어 그 받은 위로가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아주 작가와 같은 탁월한 표현력으로 사람들에게 전달하여도 그 들은 흔적만을 볼 뿐이지 정말 그렇게 느끼는 짜릿한 기쁨과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 파고드는 그 위로의 위대한 힘을 우리의 영혼을 풀어 녹이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세계는 불신자들에게는 없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갖은 사람은 상처투성이의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위대한 성품들을 발견하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하나님을 모른 채 혹은 그 분과의 인격적인 교제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지식의 빛 없이 살던 사람들은 시련과 고통의 길을 걸으면서 망가진 사람이 됩니다. 상처로 범벅이 된 아주 말하자면 험한 사람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을 갖은 사람과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의 차이입니다.
저녁에는 고통 때문에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깃드는 것을 경험하는데 하나님이 고난 속에서 소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시련은 참기 힘든 고통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시련을 참는 것은 굉장히 힘듭니다. 시련을 참는 것이 정말 힘든 것은 그것을 견딜 수 있는 은혜의 힘이 모자라기 때문이지만 자기가 왜 그러한 시련을 당하는지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도 더 견디기 어렵습니다. 사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은 아주 커다랗고 역사적인 사건들만을 주관하시는 분이 아니라 주님의 주권은 대충 우리의 삶에 퍼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삶이 그 분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공중에 있는 새 한 마리도 주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고 들에 핀 백합화, 잠시 있다 사라지는 들풀들도 주님이 당신의 의지를 가지고 돌보시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피 흘려 우리를 대신해 죽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사신 하나님이 당신이 그렇게 사랑하는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시련을 당하고 고난을 당할 때 주님이 신경을 안 쓰셨기 때문에 그런 고난을 당하였다거나 하나님이 아무 생각 없이 그런 고난을 당하게 하신다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가 예전에 행하였던 어떠한 일을 괘씸하게 마음을 먹으면서 분풀이 하고 계시다면 그 분을 우리들이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면 무슨 뜻인가 하면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가 떨어지지 않고 공중을 나는 것도 거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당신 아들의 핏 값을 주고 산 우리가 매일 아침 눈물로 하루를 시작하고 시인이 고백한 것처럼 시련과 고통으로 인하여 깊은 외로움을 느끼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 시련의 뜻이 없다면 그 분이 하나님이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하나님의 관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생각 속에는 여러분이 지금 당하는 그 고통의 의미가 다 들어있고 그것을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 속에서 여러분에게 펼쳐 보이십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삶입니다. 어떠한 사람들은 재빨리 그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고 사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꽤 믿음이 좋은데도 일생을 살았는데도 그 때 왜 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야 했는지 해명할 수 없는 사람도 많습니다. 해명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소외되었거나 말씀에 무지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예화) 어느 교회에서 심방을 하고 오는 길인데 권사님 한 분이 지금은 없어졌지만 옛날에는 시내버스에 엔진이 앞에 툭 튀어 나왔습니다. 거기에 앉으셨습니다. 고속버스도 아니고 시내버스인데 어떻게 운전하였는지 모르겠지만 엄청난 속도로 달리다가 충돌을 하면서 할머니 권사님이 앞 유리를 깨고 바깥으로 튕겨 나가 버렸습니다. 나간 것을 차가 갈아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험에 들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을까? 그렇게 일평생 하나님을 섬겼던 권사님, 그날도 심방을 하고 오는 길인데 왜 그렇게 최후를 맞으셨을까? 그 이야기를 들은 것이 30년 전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분이 제가 친밀하게 사귄 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누가 그 질문에 대해 답할 수 있는 분이 있을까? 어떠한 것은 영원히 답이 되지 않습니다. 답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시인이 붙들면서 살아온 기록이 시편 119편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그 의미가 있는데 어떠한 것들은 우리에게 알려지고 어떠한 것들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알려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모두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사람들은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 아무도 도울 자가 없다는 한계, 그리고 자신이 모든 사람들로부터 단절되어 고립되었다고 하는 깊은 상실감에 빠져 지성에 혼란이 오게 됩니다. 그것을 쓸어버리게 만드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것은 학문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단순한 믿음입니다. 두 가지에 대한 믿음입니다. 어떠한 처지에 놓여있든지 두 가지를 믿으면 살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선하심, 두 번째는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으로 거기에서 건지신다. 그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시련을 당하고 시험에 들면 지성에 안개가 낍니다. 혼탁해 집니다. 혼란이 옵니다. 사실은 가장 맑은 지성이 되어야 할 때가 언제인가 하면 눈을 뜰 수 없이 시련을 당하고 고통이 엄습할 때입니다. 그 때 우리는 잠시 부대끼는 삶에서 눈길을 떼고 우러러 주님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형언할 수 없는 시련을 당하고 이 시점에서 왜 이러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지만 그 모든 고통 너머에서 선하신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그리고 나의 이웃을 붙들고 심지어 나에게 고통을 주고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까지 그 분의 손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그 주님을 깊이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것은 홀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항상 이 믿음은 이런 상황 속에 있는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 그 중에서도 특별히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믿음으로써 우리의 마음속에 역사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시련을 만나고 마음이 요동치면 번뇌, 눈을 뜨면 앞에 전개되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할 때마다 기도하고 마음을 비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시련을 만나고 고통을 겪고 마음이 분여하게 요동칠 때마다 ‘내가 그 동안 하나님을 참 멀리 떠나 있었구나. 하나님이 내 마음을 때려서라도 다시 나로 하여금 선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좋으신 하나님을 어린아이처럼 신뢰하도록 부르시는구나.’ 깊이 생각하면 눈앞에는 나에게 좋을 것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징조가 하나도 보이지 않지만 아주 탁월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가 그러한 순전한 믿음으로 바라보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것은 증거가 있습니다. 믿음은 은총에 대한 응답이고, 그 믿음에 대해서 하나님은 다시 응답하시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우리에게 상황을 초월하는 놀라운 평강을 주십니다. 그 상황에 무관심해 지는 것이 아니라, 제가 예배의 부름에서 낭독하였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영어성경에서 지각은 understanding이라고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으로는 총명이고 철학에서는 오성입니다. 인간의 직관으로서는 꿰뚫을 수 없는, 인간의 지성으로는 찾아낼 수 있는 한계를 초월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에이레네, 샬롬이 주어집니다. 왜 그렇게 이런 시련 속에서도 그러한 샬롬을 느끼게 되었는가? 도대체 무엇인가? 설명할 수 있으면 그것은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왜 입니까? 그것은 벽돌 쌓듯이 하나하나 수리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고난 받는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몇 년 전까지는 그 성경으로 보았지만 지금은 퇴역하였습니다. 정확하게 44년 된 성경입니다. 갈기갈기 찢어져서 대전에 있는 어느 수도원에 성경책을 보내어서 다 수리해서 꿰매었습니다. 회심하던 이듬 해 구입한 성경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39년 3개월 되었습니다. 성경을 넘겨보면 아슬아슬 바스러집니다. 군데군데 눈물 자국들이 있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때이기도 하였겠지만 고통스러운 때에 성경을 읽었던 때의 흔적입니다. 모든 것이 잘되어가고 세상적으로 잘 나가고 좋을 때는 눈물 자국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무엇인가 너무 절망적이고 절망적으로 어려운 일을 만났다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이 아니고, 정말 잘 나가고 있구나 하는 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자신은 모든 것이 잘 나간다고 교만해 있지만 그러한 사람이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딱 듣고 CT촬영 하듯이 자신의 영혼을 확 보여 주실 때 깜짝 놀랍니다. 자신이 와 있는 지점이 여기이구나 생각하며 놀랍니다. 모르니까 자신이 평안하다, 평안하다, 좋다 생각하는 것이지 실상을 알면 그럴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뚫어지게 잘 압니다. 대부분 자신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의 빛에 비추어 보면서 그러면서 그 안에서 자기를 정확히 보고 그 속에서 주님의 선하심을 발견하고 그 말씀을 자신의 영혼에 닻을 내리는 생활, 이것이 바로 소망을 갖는 비결이고 하나님은 시인이 고난을 받을 때 이러한 방식으로 위로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고통스럽고 괴롭습니다. 오늘 저녁이라도 집에 가서 조용히 말씀을 묵상하고 성경을 펴고 많이 읽으려고 하지 말고 한 장이라도 천천히 읽고 거기에서 주님이 나에게 어떠한 사람이 되라고 그리고 어떻게 살라고 말씀하시는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정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이렇게 소망을 갖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B. 영혼을 살게 하심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영혼을 살게 하십니다. 시인이 고백합니다.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히야트니’라고 나옵니다. ‘하야’ 동사의 강세형인데, ‘확 살아나게 하다.’ 혹은 ‘부흥하게 하다는 의미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확 살아나게 한다는 것은 거의 죽은 것과 같은 상태였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러한 상태에서 이 시인이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물론 육체를 배제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시인이 시련을 만나고 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리면서 고통을 받을 때 육신도 쇠약해지지 않았겠습니까?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영어로 말하면 싸이코쏘메틱한 존재입니다. 정신과 육체가 구분은 있는데 두 개가 밀접하게 링크되어서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기분 좋게 친구들과 함께 대화하면서 밥을 먹을 때 위 속에 카메라를 넣어 찍었을 때의 모습과 누군가가 안 좋은 이야기를 해서 속이 확 뒤집혀진 상태에서 카메라를 쑥 집어넣고 찍었을 때는 위 안에 있는 환경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한 정신에 대해서 육체가 반응을 합니다. 반대로 육체에 대해서 정신이 반응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항상 신앙을 생각할 때, 신앙은 우리의 존재 전체를 포괄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질병이 있거나 몸이 약하면 몸을 돌봐야 합니다. 정신이 너무 지치고 피곤하면 육체의 질병으로 갑니다. 여유를 가지고 돌봐야 합니다. 이러면서 우리의 몸과 정신, 우리의 영혼 모두가 온전하게 주님이 원래 창조하셨을 때 기대하셨던 아름다운 결합의 요소들이 되는 것이 아주 좋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말씀이 나를 살리셨습니다.” 라고 할 때 물리적으로 육체가 살아났다는 말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된 관점은 자신의 영혼 안에 있습니다. 시인이 원수들이 자신을 에워싼 가운데 기쁨의 찬송을 불렀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시니 누가 나를 두려워하리요” 원수들이 자신을 에워쌌어도 기쁨의 찬양을 부를 수 있습니다. 왜 입니까? 영혼이 충만한 생명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모순적인 존재인가 하면 사람이 예전에는 아직 믿음의 연륜도 짧고 그랬을 때 충분히 극복하던 어려움들을 상당히 신앙의 연륜이 오래되었고 지식도 많이 생겼는데도 버티지 못합니다. 그리고 주저앉아 버립니다. 결국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여러분이 교리를 배우고 무엇을 한다고 해서 그것들이 삶 자체를 붙들어 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충만한 생명을 부여받는 하나의 도구들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충만한 생명과 함께 그에게 주어질 때 그러한 시련으로 가득 찬 사태들을 극복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신앙의 연륜이 어렸는데도 말입니다. 주님과 함께 인격적으로 동행하는 경험 속에서 살아가는 생생한 신앙생활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시인이 오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내 영혼을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라고 하였는데, “주의 말씀”, ‘이말레티카’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의 말씀’, 혹은 ‘생각, 약속’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씀은 발화해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의 동사가 창세기 1장에 나오는데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동작이 이 말씀의 동사형입니다. 그것은 소리를 내어서 발화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 속에서 가진 생각의 동작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정말 시련을 당할 때 성경을 읽으면 저절로 은혜가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시련을 당하고 성경을 읽었는데 댓장 넘겼는데 심심하고 그냥 덮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제는 이 성경을 읽으면서 그 말씀을 우리에게 주실 때 그 말씀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군대 다녀오신 분들 꽤 있으실 것입니다. 군대 가서 엄마에게 편지 왔을 때 첫 번째 편지를 받고 마음으로라도 울지 않는 자식은 없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처음으로 그 편지를 보면서 엄마의 마음을 읽습니다. 그 편지지가 고급스러웠기 때문에, 엄마 글씨가 예뻐서, 봉투가 비싼 봉투여서, 봉투 속에 용돈이 들어있어서, 그것이 아니라 그 편지 속에 담겨진 엄마의 마음을 읽으니까 눈물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일병, 상병 달고 돈이나 보내달라고 적을 때쯤이면 다시 엄마의 마음이 읽혀지지 않습니다. 눈물이 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좀 뭐라고 뻥이라도 쳐서 돈이라도 붙이라고 할까? 한 7-8년 전에 한 예화입니다. 일병 때에는 “엄마, 내가 소총을 하다가 망가뜨렸어. 10만원만 보내줘.” 병장쯤 되었을 땐 “엄마, 내가 탱크 타고 가다가 망가뜨렸는데 부속이 100만원이래. 빨리 보내.” 엄마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너무 걱정되어서 전화를 했는데 너는 탱크와 상관없이 PX에서 근무한다고 하더라. 요즘 군대는 빵 받으러 탱크타고 가냐?”라고 했답니다. 엄마 마음을 읽지 못합니다.
신앙생활도 똑같습니다. 여러분이 오래 신앙생활을 하였다고 해서 하나님 마음을 잘 읽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그 분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은혜가 살아있는 사람, 그 하나님이 자기 같은 사람을 위해서 어떻게 자기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셨는지 아는 사람, 그러한 사람들이 주님의 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그러한 때가 있습니다. 성경 한 장을 읽어도 눈물이 쏟아져서 그 다음 장을 넘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끊임없이 살아가게끔 영적인 생명을 주는 작업입니다.
생명은 새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게 하는 힘입니다. 주님의 생명이 충만하게 부어지면 하나님을 향해 전심으로 사람답게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고자 하는 마음이 들게 되고 그것이 더 충만하게 되면 자신만 그렇게 사는 것으로 만족이 안 되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시인이 시편 119편에서 “저들이 주의 율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내 눈에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릅니다.” 고백하고 있습니다.
Ⅲ. 적용과 결론
지식은 단지 책을 통해 배우는 것만이 아닙니다. 지식은 단지 영원한 지혜를 얻기 위한 하나의 도구입니다. 그래서 그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 때문에 너무 그 사람에 비해서 열등하다는 생각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는 지식이 많고 지혜가 없는 것 보다는 지식이 조금 모자라도 지혜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더욱 좋은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만약 시련을 당하고 고통 속에 있다면 눈을 들어서 여러분의 고통 받는 상황을 집중해서 바라보십시오. 마지막에 얻어지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끊임없는 번뇌와 인간을 향한 미움, 자신의 신세에 대한 한탄, 이러한 것들로 여러분의 삶은 전부다 망가져 버리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럴 때 나로 하여금 주의 말씀을 더욱 가까이 하라고 하시는구나,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다가가게 하고 눈앞에 어떠한 상황이 펼쳐지든지 그 모든 것들로부터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고 잠시 장님이 되고 마음을 모두 모아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집중하고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이 상황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사람이 되라고, 어떻게 살라고, 어떻게 주님을 섬기라고, 지금 당하고 있는 이 많은 고통이 나의 신앙과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가르치시는지 그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슬퍼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희열을 느끼면서 결국 그리스도를 사랑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가장 불행한 일은 상황에 매몰되는 삶입니다. 그렇게 되지 말고 마음을 우러러 우리의 이 모든 삶의 상황을 초월하여 계신 하나님을 우러르면서 그 하나님이 나의 유일한 소망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그 주님을 우러르면 하나님이 우리를 실망하게 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을 굳게 신뢰하며 주님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고난을 통한 복주심 (2015.7.1 수요예배3)
3. 나의 것이 된 말씀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시 119:56)
녹취자: 오희열
I. 본문해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와 같이 시인에게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가리켜서 ‘나그네 된 집’이었다고 말합니다. 나그네는 고향을 떠나 타관에 떠도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시인이 얼마나 마음 둘 곳 없이 외로운 인생길을 지나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나그네 된 집에서 하나님의 율례가 자신의 노래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노래는 기쁠 때 만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슬플 때도 마음에서 구슬픈 가락이 울려나옵니다. 실제로 시편에 보면 기쁨으로 찬 감격 속에서 부르는 노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울먹이며 흐느끼듯이 부르는 노래들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런 나그네와 같은 인생길에서 그가 때로는 기쁨으로 때로는 눈물과 슬픔으로 토해 놓았던 노래의 가락들이 하나님의 율례와 함께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밤에 주님의 이름을 기억했고 주의 법을 지켰노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난과 시련이 깊을수록 이 시인은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도우심과 위로를 그의 말씀 속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자녀, 성도의 삶입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셔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뿐 아니라 그 속에 자신의 마음을 초를 녹이듯이 그 말씀 속에 스며들게 하고 또 그 말씀이 녹아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스며들게 해서 그 말씀의 피와 진액을 먹으며 여러분이 그것과 함께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II. ‘나의 것’이 된 말씀
A. 율법이 ‘나의 것’이 됨
오늘 시인은 고난 중에 자신이 어떻게 그 고난을 이길 수 있었는지를 한 소절의 노래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나의 법도들을 지킨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구절을 히브리어 본문에서 살펴 번역하면 ‘조트 하에타 리’, “이것은 나를 위한 것이 되었습니다.” 또는 “이것은 나를 위하게 되었습니다.”가 됩니다. 여기의 ‘조트’ 즉 “이것”이라는 대명사는 바로 앞에 나오는 “율법”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주의) 법”이 가장 뒤에 나옵니다. 그래서 56절로 넘어가면서 마지막 단어로 나온 것을 받으면서 “이것은 나를 위한 것이 되었나이다” 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에서 나오는 ‘토라’ 즉 ‘율법’입니다.
그 율법이 어떻게 시인의 것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율법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데 아주 좁게 사용될 때는 우리들을 정죄하고 우리에게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키는 법을 가리킵니다. 대표적으로 십계명입니다. 좀 더 넓은 의미로는 하나님에 관한 흠 없는 계시의 총체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시인이 주의 율법을 묵상하며 힘을 얻었다는 이야기나 그의 율법이 나를 살렸다는 고백들은 이런 넓은 의미의 율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체적인 말씀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여기에 나오는 율법은 우리말 성경에 “법”으로 번역되었는데 후자의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영혼을 살리고 생명을 주는 충만한 경험들을 인생을 살면서 수없이 했는데 “그 율법이 나의 것이 되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객관적으로 언제나 존재하지만 66권에 나오는 모든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언제나 동일하게 역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 안에서 역사할 때에 그 말씀이 자신에게 경험되면서 그것이 정말 현재적인 자신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설교를 들으면서 고난과 성숙, 하나님이 어떻게 그 고난을 통해서 당신을 아는 지식을 주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성도가 되게 하시는가하는 설교를 듣고 나면 예배에 참석하기 전까지는 이런저런 고난과 시련을 당하면서 마음이 산란하고 괴롭습니다. 누구를 만나고 싶지도 않습니다. 시련이 깊고 괴로우면 사람을 만나서 해결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듯이 자아 속으로 몰두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병적으로 아주 깊어지면 질병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살 때 한걸음 한걸음이 마치 전부인 것처럼 인생을 살아야합니다.
제가 97년부터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97년 10월이었는데 그 전까지는 치료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저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을 한 번 접어놓고 보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교만했던 것입니다. 나쁘게 얘기하면 아주 바닥에 있는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것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든 나타나지 않았겠습니까? 사람이 자기 마음을 어떻게 숨길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인생을 낭비하거나 나태하게 사는 것을 보면 제 마음 속에서 화가 났습니다. 그렇게 치열하게 매 순간을 살았습니다. 그것도 아마 당시에는 체력이 너무 좋아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평생 살면서 힘이 없어서 뭔가를 못한다는 것을 한 10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을 못했습니다. ‘난 이것을 해야 해!’하면, 힘이 발끝부터 솟아났습니다. 대학원 시절에 제 자리에 앉아서 스물두 시간동안 그 자리에서 에세이를 쓰고, 열일곱 시간동안 히브리어 성경을 읽었습니다. 밑에는 요강을 두고 빵과 물 한 병을 두고 말입니다. 어떤 때에는 하룻밤을 꼬박 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은 집회, 강의를 다 하고 저녁에 샤워하고 나서 책을 쓴다고 다음날 새벽 네 시까지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여러 사람을 얼마나 괴롭혔겠습니까? 제가 그때 즐겨 쓰던 말이, “모든 것은 정신의 문제다, 이차돈은 목이 잘리고도 얼마를 걸었다고 한다. 왜 아프냐?, 정신이 흐트러져서 그런 거다.” 했습니다. 후에 하나님께서 “얘야, 네가 인간의 약함을 아느냐?”하시면서 저를 천천히 밟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충분히는 아니지만 많이 이해를 합니다.
율법이 우리의 죄를 보여주고 정죄하는 측면이 있지만 그렇게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오게 되면 우리에게 힘이 솟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육체에도 힘이 솟아나듯이 우리 영혼에도 하나님께서 이런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말씀이 동일한 시기에 동일하게 경험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을 당하고 괴로우면 자신의 자아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데 그때 와서 은혜를 받으면 “고난이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의 전달수단이구..”를 깨달으면서 깊이 은혜를 받고 돌아가면서 마음속에서 그 하나님의 고난에 담겨진 위대한 축복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씀드린 생명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집에 돌아 가봐야 변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그것을 이길 힘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적인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현재적으로 경험될 때에 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공부하라고 하니까, 우리 교회에 철학 교수 한 분이 계셨는데 성탄절에 와서 회심하고 6개월 만에 국내에 존재하는 조직신학 책을 다 읽었다고 합니다. 지식이 왕성한 사람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심해서 생각해야할 것은 객관적인 신학적 지식들을 읽어서 쌓아올린다고 해서 자신의 신앙체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남이 한 이야기들을 자신의 머릿속에서 벽돌 쌓듯이 쌓는다고 해서 자신의 신앙체계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들이 자신 속에 경험되어서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고 그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을 보여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을 되게끔 구원해주셨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신학의 얼개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어떻게 그 수많은 사람들의 옛날에 쓴 책이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는가 생각하지만 말씀 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변화 받은 사람들은 그 교리를 굳게 붙드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풍부하게 경험하면서 신학의 골격들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당연히 객관적인 지식과 주관적인 신앙의 경험들이 같이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는 경험이 있어도 신학적인 지식,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이 가르쳐지지 않으면 그런 하나님의 만난 체험이 이상한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대원에서 가르칠 때의 일입니다. 연세가 좀 있으신 여성분이 대학원 과정에 들어오셨습니다. 이분이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하면서 책을 썼으니 봐달라고 원고 뭉치를 가져왔습니다. 신학교에 온지 석 달밖에 안되었고 학자로서 자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읽어보니 이 사람이 신앙에 있어서 어떤 사건이 있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것을 해설하면서 성경을 끌고 가는 것은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까지 엉터리였습니다. 숨소리 빼고는 모두 틀렸습니다. 그래서 출판하지 말고 겸손하게 더 많이 배운 후에 당신이 주님을 만난 것을 다시 되돌아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체험으로만은 안 되고 객관적인 지식들이 쌓여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험되지 않을 경우에는 지식이 체계가 안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이 있을 때는 경험이 되어도 그것이 그에게 좋은 신앙을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물만 먹어도 살이 찐다고 하는데 그것은 의학적으로 성립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먹어도 칼로리가 없는 물이 살을 찌개하지는 못합니다. 허벌라이프를 몇 달 먹어도 살이 안 빠지고 닭가슴살을 먹어도 살이 안 빠진다고 합니다. 밥 대신 먹어야 빠지지 다 먹어가면서 그것도 먹으니 살이 빠질 수 있겠습니까? 다이어트 하는 사람들에게 제가 하는 이야기가, 아무리 조금 먹어도 운동안하면 소용없고, 아무리 운동 많이 해도 먹으면 소용없다고 말합니다. 덜먹으면 몸에 해롭다고 생각하고 많이 먹으면서 열심히 운동한다고 하면 강호동이 됩니다. 먹고 운동을 안 하면 김준현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에도 똑같습니다. 신앙이 없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열렬히 기도하고 봉사하고 말끝마다 하나님, 예수님이 나오는데 왠지 신앙의 자태나 존재로서의 모습이 예쁘지 못한 형태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존재의 울림이 들리기가 어렵습니다. 존재의 울림은 확고한 체계와 흔들릴 수 없는 신앙의 확신, 하나님께로부터 보여지는 생명의 힘들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경험하지 않은 그리스도인 어디 있겠습니까? 언젠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들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고 때로는 순결에 대해서, 때로는 치열한 충성, 전도, 기도에 대해서 우리를 움직이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움직여서 지성의 창고에 차곡차곡 들어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이해와 지식의 목표는 결국 그것을 사랑으로 결합해서 경건이라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획득하려는 목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마음속에 동시에 그 많은 것들이 느껴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고 성령에 충만한 삶을 살게 되면 그에게 지식을 하나님의 말씀이 말을 건넬 때 즉각적으로 그 말씀이 자신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역사하여 살아있는 말씀으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지금 내 마음의 정동이 잠시 쉬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너희는 순전한 삶을 살아라”하시면, 그러면 이미 깨달은 수많은 말씀 중에서 순전함에 대해서 깨달은 말씀들이 방금 들은 말씀으로 인해서 작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풍부하고 하나님의 사랑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무슨 말씀으로 그의 마음을 두드려도 항상 거기에는 눈물이 있고 기쁨이 있고 감동이 있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거룩하고 풍부한 정동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에 출렁거림이 있는 것입니다. 돌처럼 굳어진 마음은 아스팔트 위에 돌멩이를 던져도 흔들리지 않는 것과 똑같고, 은혜롭고 부드러운 마음은 물위에 돌을 던질 때 출렁거리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솟아나면 그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순전해야하겠다는 도전이 자신의 인격에 울려오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어떤 말씀을 접하든지 수시로 그 마음의 막이 흔들리면서 그런 말씀에 적합한 정동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다양하고 풍부하게 일어날 때 그 사람은 즉각적으로 말씀에 반응하며 순종하고 헌신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 안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시인에게는 수많은 말씀들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 중 어느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영혼을 새롭게 하는 주님의 율법에 의해서 그의 마음이 움직이게 되고 그 율법의 말씀이 “나를 위한 것이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으면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이 성경을 쓰신 것 같고 어디를 펼쳤는데 나를 위해서 거기를 펼친 것 같고 설교를 들었는데 지난 주에 너무 궁금해 하던 것들의 답을 들려주시고 나의 갈 길을 인도하시는 것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그 말씀을 수많은 사람들이 공유한다는 느낌이 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홀로 나를 세워놓으시고 당신의 뜻을 전달해주신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그런 경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이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고 예전에 은혜를 받았다고 칩시다. 요즘은 어떤 말씀들이 여러분의 것이 되었습니까? 어떤 말씀이 여러분을 때리고 울려서 그 말씀 속에 담겨진 우리 주님의 마음까지 전달되게 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 말씀 속에 담겨진 주님의 마음을 전수받아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이웃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주님의 사람이라면 주님의 성품에 대한 지식이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시킬 것이고 여러분이 세속적인 사람이라면 세속의 어떤 지식과 사실들이 여러분에게 감동을 주어서 여러분의 마음을 뛰게 할 것이고 결국 여러분의 삶이 그 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그 율법 중 어느 말씀이 자신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과 신뢰가 생겨났습니다. 푸른 풀밭이 끝없이 펼쳐진 아름다운 초원에서가 아니라, 저잣거리며 물장구치며 놀 수 있는 한가로운 해변이 아니라 눈물 나고 땀 흘리며 피나는 인생의 시련의 계속을 지나면서 수많은 미워하는 자들과 비방하는 자들, 자신을 짓밟으려는 모든 악인들에게 에워싸여서 고난과 시련을 당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위한 말씀이 되는 것을 깊이 체험했던 것입니다.
두 주전에 이 자리에서 말씀드렸던바와 같이 하나님은 당신을 아는 지식을 우리에게 전달하심에 있어서 웨이터 복장을 하시고 나비넥타이를 매시고 금쟁반에 자신을 아는 지식을 담아서 우리에게 전달하시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은혜로 그 지식을 우리에게 주시되 우리를 눈물나게 하시고 우리로 땀을 흘리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피를 흘리게 하시는 그 시련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겸손히 주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당신에 관한 거룩한 지식들을 발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자신에 비해서 정말 탁월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한 사람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분들은 예외 없이 고난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렇게 예전에 경험했지만 지금 또 다시 한 번 그 말씀이 경험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끊임없이 변전하는 삶의 사태들, 그리고 그 모든 시련과 고난들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신앙을 꽉 붙들든지 신앙을 팽개치든지 간에 항상 평탄한 길을 걸어가는 인생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그런 길을 걸어가겠느냐고 묻는다는 저는 사양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모든 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고 뜻대로 다 되는데 그 욕망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절대 행복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 아주 유명한 톱스타 여배우가 있었는데 엄청난 명성과 재산을 손에 넣었습니다. 그녀에게 행복하냐고 물으니 그렇지 않다고 하고, 언제 행복했냐고 물으니 초등학교, 중학교 때 아빠가 택시 운전을 하셨는데 밤에 아빠가 돌아오실 시간에 동생과 밖에 나가서 아빠를 기다리다가 아빠가 와서 자기들을 반겨줄 때가 가장 행복했답니다.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복잡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딱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과거든 현재든 너무너무 행복했을 때는 관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사람들과의 올바른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가난해도 굶주려도 고통 받아도 항상 기쁨은 슬픔을 능가하고 은혜는 현실의 고통을 초월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환경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붙들려서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과거에만이 아니라 현재도 똑같이 그런 원칙이 적용됩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에게 어떤 하나님의 말씀에 “나의 것이 되었습니다.”라는 고백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많은 말씀 중 어떤 것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여러분을 위한 말씀이 되었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시련을 당하고 고난이 우리 앞에 줄지어 기다려도 나의 것이 된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을 바라보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 비밀스러운 기쁨과 하나님의 넘치는 위로가 그에게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이 오고 어려움이 올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귀를 기울이며 그 말씀이 나의 것이 되는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주의 법도를 지킴
마지막 두 번째는 그 율법이 자신이 것이 된 이유입니다.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이렇게 나타납니다.“이것은 나를 위한 것, 즉 율법은 나를 위한 것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당신의 교훈들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피쿠데이카’라는 단어인데 ‘당신의 피쿠드’라는 명사이고 “하나님의 지시, 법”을 의미하는데 특별히 삶을 가르쳐주는 법입니다. 어떻게 살라는 하나님의 지시, 법도, 계명, 명령, 교훈을 가리킵니다. 복수로, 규칙들, 법도들, 교훈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살아라 하시는 교훈들, 법도들, 규칙들을 지켰기 때문에 그 말씀이 나를 위한 것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키다’는 ‘나짜르’라는 단어인데 전쟁이 났을 때, 뭔가를 공격으로부터 파수하고 높은 망대에 올라서 적군이 침투하는지를 보면서 성을 지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어떤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며 지키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련이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새로운 지식을 얻고 남이 모르는 비밀스러운 위로의 세계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동행하심을 경험했다고 하는데 고난당하고 시련당하는 것은 똑같은데 그 뒤는 똑같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 사람은 위로와 지식과 평안을 얻었다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게 아니라 고난, 시련당하는 것은 똑같은데 그 뒤에 혼란스럽고 괴로운 것입니다. 그 이면에는 자신의 상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이 난리인데 언제 교회 가서 한가롭게 말씀을 들을 시간이 있겠어?’, ‘도대체 웬만해야 기도를 하지, 너도 이 상황이 돼 봐, 기도할 수 있나..’ 하는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는 조종사들은 교육을 받을 때 가장 먼저 받는 교육이 ‘전신균형 잡기’랍니다. 다람쥐 쳇바퀴처럼 생긴 것에 사람이 들어가 손발을 묶어 놓고 굴립니다. 몸이 이리저리 뒤집히면서 구르면 정신이 없는데 그런 상황에서 항상 자신의 위치와 균형을 잡는 것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제자 중에서 조종사가 있었는데 그도 많이 훈련하였지만 때로는 어디가 하늘이고 땅인지 구분이 안 된다고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때로는 꽈배기 꼬듯이 비행하기도하고 비행기의 성능이 좋아져서 체력의 조건도 좋아져야한다는 것입니다. 조종사가 입는 조종복도 특수복이어서 비행기가 뒤집힐 때는 상체 쪽이 조여져서 피가 쏠리지 못하게 한답니다. 조종사들이 들고 내리는 헬멧이 2억이라고 합니다. 조종복은 얼마나 비쌀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비싼 장비들을 가지고 수없이 훈련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필요한 게 이것입니다. 신앙이 좋고 열심히 있지만 평지밖에 이용을 못하는 경우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어서 뒤집어지면 그동안 배운 교리나 원칙들을 다 뭉개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성숙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주님을 깊이 만났는가 말입니다. 이렇게 요동치는 상황을 만나면서도 똑바로 응시하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법도대로 살아야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며 굳게 붙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그 율법이 나를 위한 것이 되었나이다.”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공로주의적으로 접근합니다. 시험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해도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법을 잘 순종했다는 공로주의적으로 해석해서, 마치 불교의 보시처럼 하나님이 받으셔서 그 후에 댓가를 주시는데, 시련에서 벗어나고 다시 복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면이 없지는 않겠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제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입니다. 오히려 번지점프나 스카이다이빙을 하고 싶은 충동은 있었어도 롤러코스터를 타고 싶은 생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아마 타고 나면 다 토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롤러코스터를 타도 겨우 견딜까 말까할 텐데, 술을 잔뜩 먹고 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시험이 오는 것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타야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선생이 시험을 당할 때 형통을 구하라는 게 아니라 지혜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련을 당할 때 맑은 정신으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마치 조종사 훈련을 받는 사람들이 빙글빙글 돌면서도 땅이 어디고 하늘이 어딘지를 또렷하게 분별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련을 당하면서 상황들이 나를 힘들고 어렵게 할 때, 명료하게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고 나는 무엇을 지키며 어떻게 하나님을 찾아야하는가 하는 기본적인 신앙의 ABC를 꽉 붙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련과 어려움으로 인해서 우리 지성에 언뜻언뜻 사물에 대한 인상들이 부딪히면서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자신 속에서는 혼란이 생기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법도를 어기고 삶이 요동치게 되면 정신적으로 혼란이 오는 것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만으로도 중심잡기가 힘들지 않은데 위스키 서너 잔 퍼 먹고 정신이 완전히 돌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럼 자포자기가 되어 될 대로 되라고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영원히 그렇게는 못하고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고 은혜 받고 변화가 되는데, 그때 돌아보면 술 먹고 롤러코스터를 탄 결과는 그대로 남아서 자신 앞에 해결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숙제라고 하는 것은 푼 곳까지는 덮고, 다시 돌아가 보면 누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저절로 풀어 놓은 것은 없습니다. 다시 안 푼 곳부터 문제를 풀어야하는 것입니다.
요동치는 삶의 상황 속에서도 이 시인이 얼마나 굳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삶의 굴곡이라는 것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가난하다가 부요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이리치고 저리치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의 자리에 앉기도 합니다. 오늘은 밤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 뜨고 싶지 않을 정도로 괴로운 일이지만 10년 전, 5년 전에 우리를 괴롭혔던 일들이 이제는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그렇게 모두 지나갔듯이 지금 우리가 겪는 것들도 지나갑니다. 그리고 인생이라는 것이 이렇게 수많은 시련을 통과하는 것이려니 생각하면 지나갑니다.
부부 사이에도 섭섭할 때가 있습니다. ‘이 인간을 위해서 열심히 살았는데..’라는 생각도 하면 안 됩니다. 제일 찌질한 사람이, “나는 평생 당신을 위해서 살았다구!” 하는 사람입니다. 솔직히 자기 남편이나 아내를 위해서 수십 년을 살았어도 결국 자기가 좋아서 산 것 아닙니까? 그런데 마치 엄청난 손해를 본 것처럼 얘기합니까? 찌질이 입니다.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 안에서 언제나, 하나님 안에서, 언제나 내 인생의 주체는 “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노예로 살아도 내가 스스로 그리스도에게 노예가 된 것이지, 주님 앞에 절하지 않겠다는 놈을 잡아다가 머리를 잡고 쳐 박은 것도 아니고, 무릎을 안 꿇겠다는 사람의 다리를 차서 억지로 무릎을 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배신입니다. 주님 안에서, 그 사랑과 은혜의 감화에 의해서 내가 남편과 아내를 위해서 산 것입니다. 왜, 본전 생각이 나십니까? 몰라주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자기 인생 아닙니까? 그리고 그런 것 몰라줘도 개의치 말고, 설령 배우자가 “당신은 일평생 나를 위해서 살았어요.” 하더라도, “아니야, 나는 그것이 행복하고 좋아서 그렇게 했을 뿐이고 다시 태어나도 난 그렇게 살 거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렇게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되는 두려움에서 주님이 우리를 해방시켜주신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결국 우리가 우리의 삶의 주체가 되는 것을 하나님이 붙들어 주신 다는 것입니다. 삶의 굴곡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있게 마련이고, 하나가 지나가면 그 다음 것이 오는데, 이렇게 굴곡이 출렁거릴 때마다 기쁠 때는 헤헤거리고 슬플 때는 주저앉아서 한숨을 쉰다면 그때 행복한 것이 진짜 행복한 것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해석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제가 옆에서 봐도 눈물이 나도록 힘든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나갑니다. 그래서 어떤 한 상황이 힘들다고 해서 “될 대로 되라지. 막 살아 버릴 거야.”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신앙인으로서만의 패배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패배입니다. 살면서 아내나 남편이, 나를 사랑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나를 충분히 이해 못해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거기에서 인간으로서의 당당함으로, “내가 우리 주님을 의지하며 살겠습니다.”라는 어린아이 같은 신앙의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으면 내가 이 세상 벼랑 끝에 가 있을지라도 저는 혼자가 아닙니다.” 이런 고백으로 인생을 살아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하나님이 내게 가르치시는 교훈이 무엇인가 생각해야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때로는 쓰러지고 넘어질 때가 있지만 배신을 하면 안 됩니다. 너무 약해서 가다가 주저앉기도 하고 쓰러질 때도 있지만 가던 방향으로 쓰러져야합니다. 그리고는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지팡이를 붙들고 일어서서 다시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약하니까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쓰러지니까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크게 잘못하거나 넘어지거나 혹은 하나님 앞에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국으로 데려가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굳게 붙들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시인은 119편에서 수많은 시련들을 만납니다. 세상을 아무리 돌아봐도 자기편은 없고 시련에 고난이 겹치고, 영혼의 침체까지 겹쳐도 주님의 법도를 생각하며 그 말씀을 지키며 살려고 깊이 몸부림쳤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율법이 이 시인의 것이 되는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는 그렇게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뭘 그렇게 다 알아주겠습니까? 그리고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오해하고 오해를 받고 혹은 미워하고 미움을 받으면서 인생을 살아가는데, 한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살았는가 하는 것은 일평생을 두고 하나님이 지켜보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쓰러졌어도 다시 일어나서 그의 법도를 주시하며 삶이 어떤 식으로 요동치더라도 영혼의 시선을 그 하나에 고정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을 붙들고 살겠다는 신앙을 잃지를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폭풍 같은 시련과 환란이 와도 마음속에서 무엇도 앗아갈 수 없는 지극히 놀라운 평강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이기며 살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여러분이 이런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고통을 통한 복 주심(2015.07.29 수요예배4)
4. 고난에 대한 태도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민 11:15)
녹취자: 김세나
Ⅰ. 본문해설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과 반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내용들 가운데 민수기에서 다시 설명되고 있는 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민수기는 우리말 성경으로 보면 ‘백성들의 수’라는 의미입니다. 원래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렇게 나오지 않습니다만 우리말 성경에는 제목을 그와 같이 붙였습니다. 그런데 두 번의 인구조사 사건이 있습니다. 1차는 광야를 출발 할 때, 신명기 1장에서 하게 됩니다. 2차로는 광야생활이 끝날 때 인구조사를 하게 됩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을 통해서 그들의 악한 본성이 잘 드러난 곳이 바로 여기 민수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과 불평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럴만한 측면도 많이 있기는 하였습니다. 2년 전에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그 당시 드물게도 성지순례를 여름에 가게 되었습니다. 기후가 너무 좋지 않았습니다. 차를 타고 계속 가는데 시냇물 하나 없이 광야였습니다. 그렇게 계속 가는 가운데 누군가 그랬습니다. “3일 만에 물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한 게 정말 이해가 안 되었는데 와 보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 인내심이 탁월한 백성들이네요. 우리 같았으면 아마 하루도 안 되어서 원망을 했을 거예요.” 그렇습니다. 가 봐야 압니다. 정말 재밌는 것은 40년 가까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생활하였습니다. 아이들도 많이 갔을 것 아닙니까?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구조사를 할 때에는 목적 자체가 군사적인 것이었습니다. 전쟁에 나갈 수 있는 남자들의 숫자를 헤아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얼마나 고생하였는지 입증할만한 숫자가 있습니다. 그것은 광야 생활 시작할 때 남자들의 수가 603,550명이었습니다. 26년 동안 번식하고 자손을 낳았을 테니 엄청 늘어야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숫자는 줄었습니다. 마지막 광야생활이 끝날 때 601,730명으로 줄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 입니까? 그 당시 산하제한이 없었으니까 엄청나게 많은 수를 생산해 냈는데 그만큼 죽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도 20-60세 사이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남자들이 그렇게 많이 죽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인지 민수기의 주제는 ‘원망’과 ‘불순종’입니다. 7-8년 전에 민수기 14장을 가지고 ‘신앙과 원망’에 대하여 긴 시리즈를 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들어보시면 원망에 대한 신학적인 견해가 서게 될 것입니다.
Ⅱ. 원망하는 백성들
A. 출애굽 직후의 원망
오늘 읽은 11장에서도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옵니다. 그들이 애굽을 탈출하게 됩니다. 그 절정이 홍해를 가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는 장면이고 이어서 따라오던 애굽의 군대들이 모두 몰살을 당합니다. 거기에서 우렁찬 감격스러운 찬송이 울려 퍼집니다. 그리고 잠깐 지났을 때 마실 물이 없게 되자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원망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출애굽기 15장에 나옵니다. 두 번번째는 먹을 양식이 없어서 출애굽기 16장에서 원망합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즉시 나오는 원망은 모세에 대한 원망이었습니다. ‘왜 저런 사람이 지도자로 섰을까?’ 지도자에 대하여 원망을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능력을 보았던 사람들이 원망을 합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원망하는 것은 그가 예전에 얼마나 커다란 기적을 체험하였는가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가족이든지 인생을 살면서 원망을 안 해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 원망하는 마음은 지금에 도래하게 된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이 자신이 원망하는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이 사실이 아닙니다. 물론 그 사람에게도 책임은 있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그리고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기의 현실의 상황을 신앙적으로 끊임없이 해석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신앙을 갖는 이유입니다. 지난주에 제가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친구가 물에 빠져 죽었는데 주위의 장로님, 권사님이 신앙을 버리는 것입니다. 회심한 지 얼마 안 된 제가 생각하였습니다. ‘이상하다. 저런 때에 쓰려고 신앙을 갖는 것인데…’ 예수 믿은 지 1년도 채 안 되는 제 마음 속에 그런 마음이 드는데 말입니다. 잘못된 것 아닙니까? 은혜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우리의 감정 속에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 전체에 작용해서 현실을 신앙적으로 해석하게 만드는 힘이 바로 은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을 한 대상은 하나님과 사람,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자신을 향한 자책과 원망이었습니다. 이 원망은 원한이 서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면 안 되는데.’ 하는 원망, ‘저 사람이 나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하는 원망, 그 원망은 원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한은 무엇입니까? 무엇인가 적대적인 감정이 한처럼 맺힌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것이었는데, 왜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을까, 생각하고 그것이 원한으로 발전합니다. 원한은 언제나 동반하는 감정이 있습니다. 복수의 감정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다고 할 때, 그것이 원한이라고는 사람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원한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어떻게 복수할 것인가? 그 무한히 크신 하나님께 어떻게 복수할 것인가?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까? 정말 그것은 정당한 것인가? 많은 신학적, 철학적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그럴 수 있으면,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옳으면 그 신은 신이 아닙니다. 왜 입니까? 신이라고 하는 존재는 인간의 모든 지식의 범주를 뛰어 넘어서 그 분으로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합당한 무엇이 있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고 신앙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은 인생을 살면서 그것이 ‘아 그랬구나.’ 하고 이해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언제나 은혜가 밀려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이 불행한 일이었어도 ‘아, 그때는 그러한 일이 일어났어야 했구나.’라고 생각하면 그것이 한 때는 원한을 품을 만한 일이었는데도 후일에 그것이 이해가 될 때에는 감격이 밀려옵니다. 그것입니다.
원망은 낙심에서 시작해서 절망으로 나아갑니다. 절망은 무엇입니까? 우리말로 이야기 하면 희망이 끊어진 것입니다. ‘절’이라고 하는 말이 ‘절대’ 혹은 ‘절망’ 이야기 합니다. 절대는 대를 끊는 것입니다. 서로 짝을 이룰 것이 없습니다. 짝을 이루는 것은 상대입니다. 절망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과 짝을 이룰 수 있는 또 다른 감정이 없습니다. 짝을 이룰 수 있는 감정이 있으면 이렇게 낙심했던 사람이 이렇게 희망을 갖게 되고, 소위 이야기 하는 변증법적인 전환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절망은 그것이 되지 않습니다. 사면 어디를 돌아봐도 완벽하게 희망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사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그렇게 느끼는 것입니다. 절망이든 희망이든 그것은 주관과 객관 사이에 걸쳐 있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상황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거기에서 희망을 발견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똑같은 상황을 보면서 절망을 합니다. 그것은 상황이 이 사람에 의해서 어떻게 해석되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마음이 즐거워서 행복한 사람에게는 새들이 노래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우리는 새가 운다고 많이들 이야기 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새가 노래한다고 말합니다. 마음이 우울하고 한의 정서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구슬픈 울음소리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마음의 틀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쨌든 인간이 절망을 느낀다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인간의 마음이 어떠한 불만족스러운 상황에 도달하게 되면 기대를 걸어봅니다. 그런데 그것이 툭 툭 툭 툭 끊어집니다. 그때 낙심하게 됩니다. 낙심은 절망과는 다릅니다. 낙심하게 되고 그 후에 방치하게 되면 절망으로 가게 됩니다. 낙심한 그 속에서 많은 부패들이 일어나게 되지만 절망을 가게 됩니다.
사람들은 경우에 따라서 주위에서 희망을 이야기 하여도 그것은 절대적으로 끊으면서 절망을 향해 치닫습니다. 그 끝에 무엇이 있는가 하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절망을 끝으로 삼는 것은 하나님의 희망이 아닙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들이 복된 절망에 도달하길 원하십니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나아가고 박차고 올라가는 도약대입니다. 거기에서 절망하는데, 그것은 절대적인 절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를 의지하며 살아갔던 것에 대한 절망입니다.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고 그 껍질을 깨면서 내 인생에 대한 희망이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자신에 대한 절망이 도약대가 되어서 하나님을 향한 희망을 갖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들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항상 그 옆에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라고 합니다. 믿음에는 항상 소망이 있습니다.
결국 모든 것에 대해서 희망을 다 닫고 스스로 절망을 선택했다고 하는데, 그 절망에 대한 선택은 자신의 모든 의지가 끊어지고 절망으로 들어가는 것 같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의지의 힘입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절망하는 인간은 절망하고자 하는 강한 의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절망의 끝은 사람에 대한 미움과 하나님을 향한 배반, 배교입니다. 그것이 절망의 끝입니다. 진실로 거듭난 신자는 이렇게 죽음에 도달하기까지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에서 발전해서 “자살한 사람은 구원이 있는가, 없는가?” 문제는 별개의 것입니다. 그렇지만 신자는 절대적으로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욥기 2장 9절입니다. 욥이 온갖 시험을 다 당하였을 때 아내가 이야기 합니다.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 버려라. 무슨 신앙을 지킨다고 그러냐.” 그것이 바로 절망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을 민수기에서 많이 다루면서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을 통해서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지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민수기를 읽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살고 있고 또 살아갈 가능성이 있는 자신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을 보면서 공감하고 반성하는 것이 바로 민수기 읽을 때의 마음가짐이어야 합니다.
B. 다베라 사건
여기에서 다베라 사건이 나옵니다. ‘다베라’는 ‘타베라’라고 하며 ‘불 태우다’의 의미를 갖습니다. 주석가들도 11장 1-3절까지의 사건과 4절 이후의 사건이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그리고 1절에서 3절까지 백성들이 원망하였다고 하는데 무엇 때문에 원망하였는지에 대한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주석가들도 이것을 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만 제 생각에는 히브리 문학의 서술방식으로 볼 때 1절과 3절에서 이후에 나올 내용에 대하여 간략하게 요약, 보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뒷부분에서 1-3절의 내용을 상세히 보도하는데 히브리 사람들의 글쓰기의 아주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결국 다베라의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소위 이야기 하는 ‘기브롯 핫다아와’라고 하는 11장에서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탐욕을 부림으로 결국 지명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 연장선상에 있는 사건입니다. 같은 사건을 이야기 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렇게 한번 추측을 해 봅니다. 그 생각이 사실에 근접하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11장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라고 나옵니다. 이 부분이 히브리 성경에 얼마나 재미있게 나오는가 하면, “백성들이 여호와의 귓속에 대고 그 고난에 관해 불평하였다.”고 나옵니다. 한 귀도 아니고 두 귀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귀가 계신 분이 아니니까 무슨 뜻인가 하면 어떤 불평을 하였는데 지나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충심에서 우러나왔기 때문에 하나님 마음 깊이 고통을 받으신 장면을 보여줍니다. 가끔 우리가 욕을 합니다. “에이, 멍청한 녀석아. 이것도 못해?” 그런데 보면 친근합니다. 어떤 사람은 욕을 하는데 심하지는 않지만 뼈 속 깊이 미움이 파고들기도 합니다. 그러한 것들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이 형식적으로 나온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뼈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악한 말”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사실 히브리어 성경에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나오는가 하면 “재앙”, “고난”, “악”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라아”라는 단어입니다. “라아”를 불평하였다고 나옵니다. 이것은 해석이 지금 제가 설명한 바와 같이 고난에 대하여 혹은 재앙에 대하여 하나님께 불평하였다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악으로써 불평하였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자연스러운 해석은 아닙니다. 결국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 NIV성경에서도 저의 해석을 받아들이는데 “고난을 불평하였다.”는 말은 “고난에 관하여 불평하였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좋은 해석이라 보여줍니다.
다베라의 사건이 나오면서 그 뒤에 “기브롯 핫다아와”라는 지명을 얻게 되는 사건이 다시 나오는데 그 뒤에 상세히 무엇 때문에 불평하였는가에 대하여 나오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황당합니다. 음식물 때문에 불평을 합니다. ‘까시’라고 하는 식물을 찾아봐도 현재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하나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이슬이 내릴 때 동글동글한 것이 맺힙니다. 그것을 가져다가 빻기도 하고 가루로 만들어서 혹은 그냥 삶아서 반죽을 하기도 하고 빚어서 만들어 먹든지 하는데 기름 섞은 과자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먹는 세련된 쿠키는 아닙니다. 사실은 그것이 몇 번이야 맛있겠지만 계속 맛있겠습니까?
(예화) 직장 다니는 사람들은 이해할 것입니다. 요즘은 직장이 굉장히 머리가 트여서 직원들의 복지를 아주 잘해주는 회사들이 많이 나옵니다. 어느 유명한 회사는 매 끼니마다 점심을 직원들에게 2만원 상당으로 제공한다고 합니다. 호텔에서나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우아하게 차려 줍니다. 업체 만날 사람들, 손님을 자랑삼아 자기들 회사로 데리고 옵니다. 회사에서 지출이 안 됩니다. 어쨌든 우아하게 호텔처럼 차려놓고 식사를 대접하는 사진을 한번 본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구내식당에서 먹어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구내식당은 아무래도 잘해 준다고 하더라도 직장 다니는 사람들은 그 구내식당에서 밥 하는 사람들이 수십 명이 아니라 한두 사람이 1식 3찬, 4찬으로 해서 줍니다. 그러면 정해진 비용과 기술이 한계가 있으니까 비슷하게 나옵니다. 나중에는 그 구내식당의 냄새조차 맡기 싫어집니다. 그 구내식당에는 밥, 고기, 국, 나물무침도 나오지만 집어던지고 바깥에 나가서 차라리 자장면을 먹습니다. 그것은 잠시 점심시간에 직장을 벗어나는 해방감,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잠시라도 안 보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부장님 안녕하셨어요? 과장님도 오셨네요? 상무님도 오셨네요.” 그것이 싫습니다. 가서 욕도 하고 투덜대기도 하면서 편하게 동료들과 밥을 먹고 싶습니다. 이것은 저의 직접적인 경험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 300원짜리 구내식당 식사가 꽤 괜찮았습니다. 그것을 두고 아래 가서 400원짜리 자장면을 먹습니다. 짬뽕을 먹든지 말입니다. 그것이 심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만 주셨다고 되어있지 야채도 주고 뭐도 주고, 1식 3찬에 계속 일주일 한 번씩 반찬이 바뀌었다고 되어있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아마 계속해서 3일 동안 밀가루로 만든 과자만 주고 밥을 떼우라고 하면 짜증이 날 것입니다. 이해가는 면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만 황당한 것은 사실입니다. 불평을 하는데 “아, 우리가 애굽에서 있을 때”라고 합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무엇을 하고 살았습니까? 애굽에서 벽돌을 구우며 종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생선, 오이, 참외, 부추, 파, 마늘”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울면서 불평하였겠습니까? 진실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일단 현실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하면 엄청난 자기 연민의 감정이 발동합니다. 한없이 자기 연민 속으로 들어갑니다. 여러분 주위에 보면 상태가 안 좋은 사람들이 자꾸 자기 연민 속으로 들어갑니다. 진짜 절망으로 들어가게 되면 사람을 보는 것 자체를 싫어합니다. 여러분을 만나서 투덜거리면서 절망을 이야기 하는 것은 격려를 받고 싶은 긍정적인 마음이 아직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너는 희망이 있다.”고 이야기 듣고 싶은 것입니다. 강하게 이야기 해주십시오. 그것이 격려입니다.
그 음식에 대하여 불평을 하면서 쏟아 놓습니다. 그 이야기를 할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신구조는 어떠했는가 하면 해 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일하였을 텐데, 공사가 바쁘면 횃불을 켜놓고서라도 밤늦게까지 일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노예에게 무슨 품삯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 마늘, 파, 부추, 나오는데 다른 것은 모르겠습니다만 이 세 가지 음식은 당시 노예들에게 많은 나라에서 공급하던 식품이었습니다. 노동력 착출의 수단입니다. 그래서 정력이 우러나게 해서 노역을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고기도 어떤 면에서 이것을 먹고 노동력의 지속적인 공급을 위해서 연료 떼듯이 준 것이었습니다. 새벽 해 뜰 때부터 시작해서 해 질 때까지 일하였을 때 식사 시간이 몇 분이나 되었겠습니까? 우리 인류가 삼시세끼를 먹은 것은 80년 밖에 안 되는 것 아십니까? 그전까지는 모두 두 끼였습니다. 어떤 나라는 법으로 두 끼만 먹는다고 정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할 때 모든 쏠린 정신이 어디 있었는가 하면 마늘과 부추와 참외와 파, 생선, 이러한 것들을 한꺼번에 모두 주었겠습니까? 그 중 일부를 돌아가면서 주었을 것입니다. 먹었을 때 아주 입이 즐거웠고 행복하였던 몇 십 분이 생각이 났고 그 채찍에 피가 나도록 맞으며 벽돌을 만들고 날랐던 생각은 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공정하게 생각났으면 지금 우리의 처지가 훨씬 낫다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원망하는 단계에 들어가게 되면 인간의 정신이 그러한 판단의 공정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은 좋지만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우리의 깊은 경향이 되도록 방치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결국 이렇게 불평하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장면이 11장 뒤편에 나옵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백성들이 아니라 지금부터 말씀드릴 모세에게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렇게 우는 소리가 들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하시는 것이 모세에게 느껴졌습니다. 모세도 그 광경이 기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모세를 더 낙심하게 만들었습니다. 차라리 “네가 왜 우리를 이리로 데리고 왔니?”라고 할 때 돌멩이를 들고 모세에게 나아왔으면 “그래 나를 죽여라”고 하였을지 모릅니다. 그 막되고 폭력적인 백성들이 한 사람 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엉엉거리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하는 이야기가 “우리는 생선도 못 먹고 오이도, 참외도 못 먹는다.”고 하면서 우는데 그것이 지도자에게는 더 큰 낙담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다듬어지지 않은 모세의 본성이 솟구쳐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왜 여호와께서는 나를 괴롭게 하십니까?” 그러면서 “왜 이 백성을 내게 맡기셨습니까? 내가 이 사람들을 내가 낳았습니까? 젖먹이는 아이를 품는 아버지처럼 그들을 품고 가나안 땅까지 들어가라고 하시는 게 그게 정말 옳습니까? 도대체 이 백성들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에서 가져오겠습니까? 울면서 고기를 먹게 해달라고 하는데 나는 이 책임이 너무 막중해서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토로하였습니다.
Ⅲ. 죽음을 구한 모세
그러면서 우리가 오늘 읽은 구절이 나옵니다. “내게 은혜를 베푸십시오. 즉시 죽여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사실은 모세의 이 태도는 어떠한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만큼이나 나쁜 태도입니다. 모세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백성들과의 관계에서 지도자로서 어마어마한 압박을 느끼면서 고통을 받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백성들의 절망하는 모습이 모세의 마음에 투영되어서 모세를 그 절망에 동참시키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모세는 “즉시 나를 죽여 고난당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할 때 이 사람이 삶에 대하여 사심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하게 됩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모세가 살아있는 것이 자신이 가나안에 들어가 영광을 보고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가 되어서 대접을 받고 하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들은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결국 “하나님, 저는 인생에 대하여 티끌만한 욕심도 없습니다. 날 죽여주십시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장면이 삶에 대한 사심이 없는 것이 모두 똑같은 것이라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죽음의 문 앞까지 가본 사람으로서 말할 수 것은 죽음 직전에 이르게 되면 모든 욕망으로부터의 해탈에 이릅니다. 아무도 미운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내 과거에 일어난 모든 가슴 아픈 사연들이 예쁘게 느껴집니다. 조금 전까지는 내가 내 인생의 당사자였는데 죽음의 문 앞에서는 내가 삼자가 됩니다. 이제 죽음의 강을 건너가니까 내 인생은 더 이상 나를 추격해서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현재에서 미래로 나를 구속하는 사슬이 끊어지는 시점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됩니다.
의학적으로도 어느 정도 증명이 됩니다. 의학자들의 설명이 이렇습니다. 죽음의 순간이 되면 우리의 몸에 여러 가지 신경 전달 물질이 있는데 이 주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이 ‘도파민’과 ‘엔돌핀’입니다. 도파민은 남녀가 사랑을 할 때 막 신경 전달 물질이 나옵니다. 뜨겁고 열렬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것이 18개월 정도, 어떤 자료에 보면 3년까지 만들어 준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도파민이 서서히 줄어들면서 엔돌핀이 나옵니다. 그것이 이제 잘 안 나온다고 합니다. 제가 수학과 물리학을 신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표현하는 것이 설교로서는 무리가 있는 줄은 알지만 간단하게 설명을 하면 이렇습니다. 도파민이 나오는 것 하나를 가지고 사랑을 느끼는 존재라고 저는 생각을 안 하고 그리고 엔돌핀 하나 가지고 무엇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의학자들의 설명을 빌자면 이렇습니다. 도파민이 계속 나오면 사랑이 막 싹트고 열렬해지다가 그 시간이 지나면서 양이 줄어들고 도파민이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보고 싶은 감정이 생깁니다. 연애 때 그렇게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엄마, 아빠를 보고 싶고 저 같은 경우 할머니가 보고 싶고, 친구가 보고 싶은 것처럼 그렇게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사랑을 할 때 뭐도 안 해주고 뭐도 안 해주고 나한테 잘해 준 것이 뭐가 있느냐며 다툽니다. 그쯤 되면 “그냥 옆에만 있으면 돼.”하고 승화됩니다. 부부 이야기하다가 여성들이 하얀 머리가 날 때가 되었는데도 남편은 “자기 반지도 안 사주고 꽃다발도 안 사주고…” 하는데 이것은 정신적 미숙아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도파민은 나오다가 나이 먹어서 떨어졌고 엔돌핀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가서는 질병을 통해 고통을 받다가 마지막 순간에 숨이 딱 끊어집니다. 끊어지기 직전에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놀라운가 하면 인간의 몸에 있는 엔돌핀들을 확 분출하고 죽습니다. 죽기 직전에 황홀경 속으로 들어갑니다. 요즘은 드물게 되었지만 한 때 애들이 자기 손으로 자기 목을 조르는 것이 유행하였던 것 아십니까? 대들보 위에다가 줄 매달아놓고 죽기 직전까지 가는 것입니다. 한 10년 전 사회문제가 되었습니다. 몇몇 애들은 잠깐 매달려 있다가 내려온다고 하다가 내려오지 못해 죽은 애들도 나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정신이 몽롱해 질 때 엄청난 환희와 환각 작용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제일 쉬운 방법으로 목매 죽는 방법을 택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사형제도 가운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방법 가운데 가장 자비로운 제도가 교수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용서해서 살게 해주는 것만은 못하지만 비참하게 창을 찔려 죽이고 능지처참하는 것보다는 자비로운 사형제도라고 보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하면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삶에 대한 희망을 끊고나면 누구나 사심이 없어집니다. 의욕이 사라집니다. 그것은 종교에 있어서 덕이 아니고 한 인간으로서의 덕도 아닙니다. 저도 살면서 하나님을 믿고서도 하나님 앞에 “오늘 저녁에 저를 데려가셔도 참 좋겠습니다.”라고 기도한적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말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패역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나서부터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가끔 스스로 기만합니다. 저렇게 열정적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 수많은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비해서 자기는 돈도 사랑하지 않고 심지어 엄마, 아빠와 헤어지는 것도 두렵지 않고, 남편과 아이들과 헤어지는 것도 두렵지 않고, 모든 것을 떠나서 주님께로 간다고 생각합니다. 피할 수 없는 순교의 상황에 이르면 그것이 덕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살아가야할 삶의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죽음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커다란 반역입니다.
우리는 모세의 이 기도를 보면서 모세에 대해서 동정하는 마음을 갖기 보다는 그 지도자인 모세 속에 뼈 속 깊이 베여있는 그도 이스라엘 백성들 중 한 인간임을 배우게 됩니다. 모세는 어땠습니까? 애굽의 공주의 아들로서 모든 영화를 누릴 수 있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 “애굽의 모든 낙을 누릴 수 있었는데 애굽에서의 잠시 낙을 누리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기를 즐거워해서 믿음으로 이 길을 걸어간 사람”이라고 칭찬받고 있습니다. 한 때는 그러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데 그것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말할 수 없이 끓어오르는 사랑으로서 자신의 영화와 모든 성공적인 앞날에 대한 보장을 버리고 결국 애굽 사람을 죽이고 도망하여 왕가에서 쫓겨나 이제는 짐승의 똥을 치우는 목부로 변신하게 됩니다. 우리들 가운데 그 정도로 자신의 입지를 다 바쳐서 하나님 앞에 헌신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진지합니까? 안 진지합니까? 진지합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 앞에 모든 것 바친 것 아닙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사업에 망하고 어려워져서 가서 목부가 되어서 양의 똥을 치우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안 그랬을 때에도 그렇게 왕족같이 산 것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모세는 왕족이었습니다. 애굽의 모든 학문을 능숙하게 전수받으면서 호화로운 삶을 살던 사람이 밑바닥으로 내려갔습니다. 무엇을 배웁니까? 그러한 생애적인 희생과 희생을 위한 결단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더욱 후벼 파고 지나가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목적입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고난을 보지 않게 해 주십시오.” 여기에서 ‘본다.’라고 하는 것은 당한다는 의미입니다. 고난당하기 싫어서 죽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스위치 하나 누르면 화면에서 사라진다면 남아있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더군다나 다시 한 번 눌러서 리셋 해서 돌아올 수만 있다면 아마 우리는 몇 번 씩 사라졌을지 모릅니다. 절망하는 감정은 신앙의 감정과 아주 유사합니다. 신앙을 갖을 때가 되면 삶의 모든 자료들이 소용돌이처럼 휘돌면서 작은 구멍하나로 빨려 내려가듯이 하나님 한분 밖에 없구나 하면서 갑니다. 그런데 절망할 때 보면 수많은 삶의 자료들이 객관적으로 가만히 떠 있지 못하고 휘돕니다. 하나의 구멍으로 휘돌면서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빠져 내려가는데 그것이 바로 절망입니다. 그 절망을 타고 밑으로 내려가면 어두운 소멸로 쑥 들어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만약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절망하는 모든 사람들이 절망을 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서 극소수가 자살을 택합니다. 마지막에 빠져 들어가면 하나님을 욕하고 싶고 인간을 저주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을 실제로 쏟아내기까지 합니다. 그것을 절제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마지막에 다 쏟아내고 싶어 합니다. 그것을 가리켜 저는 하나의 죄의 지향성이라고 부릅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한다고 할 때 마지막 목표는 뭐냐 하면 살인입니다. 살인인데 내가 직접 살인하느냐가 아니라 목표로 하는 것은 부존재입니다. 부존재. 이 사람을 엄청 미워합니다. 그러면 간절히 원하는 것은 이 사람이 존재하지 않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힘이 워낙 커서 내가 힘이 너무 약해서 이 사람을 존재하지 않도록 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차선에 택하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내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절망이 휘돌면서 마지막에 가는 지점입니다. 그 끝에서는 아무 생산적인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한 때 생명을 버리기까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 이러한 모세와 같은 사람에게도 이렇게 뼈 속 깊이 베인 패역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삶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가장 큰 의무입니다. 신앙도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곳에서 나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는데 끊임없이 그 희망을 세상과 자신에게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신앙을 갖은 사람은 그 현실을 다 받아들이는데 현실 때문에 거기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그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절망하면서 하나님께 희망을 받아들이고 그 현실을 하나님 때문에 받아들입니다. 그 받아들이게 하는 힘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 그래서 희망과 믿음과 사랑은 아까 이야기 했듯이 이러한 이치에 의해서 믿음과 소망은 항상 사랑과 동반합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가 항상 있습니다. 인간은 결국 이 세상의 한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이라는 말이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해서 학자들의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마음에 드는 유력한 학설은 ‘살다’에서 나온 것입니다. 살아가는 존재. 삶, 사람, 살다, 심지어 가정 생활하는 살림. 이 모두가 하나의 의미에서 나온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조상들도 사람의 가장 큰 할 일은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삶의 사태에 직면하는 것의 연속입니다. 이것이 바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우리 앞에 전개되는 삶의 사태는 항상 우리가 원하는 것만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우리 인생은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을 가지면 모든 것이 자기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사실은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이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고 원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 일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에 그 일이 계속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 결국 삶을 살아가는데 그 삶이라는 것 자체가 수많은 사태들을 매일 매일 직면하면서 살아가는데 어떠한 것은 자신이 너무 좋아하는 삶의 사태도 있지만 어떤 사태는 자기가 직면하기 너무 싫은, 어떤 것들은 스피노자가 이야기 하는 코나투스를 우리에게 끊임없이 불러 일으켜서 그 사태를 맞이하면 너무 경쾌하고 기쁘고 감사하고, 이러한 사태도 있지만 어떠한 것은 한없이 에너지를 빼앗아 가서 하루를 살고 나서 집에 들어가면 쓰러져서 저녁 때 눈을 감으면 아침에 눈을 뜨고 싶지 않을 정도로 자기 에너지를 빼앗아가는 삶의 사태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관적으로 그것을 느끼느냐 느끼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매일 매일 그렇게 사태를 직면합니다. 그러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고 우리의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몰랐을 때에는 그렇게 삶의 사태들이 전개될 때 기준점이 자신이 행복이었습니다. 나의 행복을 무엇인가 위협하거나 조금이라도 앗아가는 것이 등장한다면 그것은 나쁜 것입니다. 그리고 나쁜 그 상황에는 그 상황을 만든 장본인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자식을 미워합니다. 그리고 필요하고 할 수만 있으면 그것을 제거해 버립니다. 그런데 좋은 사태가 발생합니다. 그러면 희희낙락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좋은 사태만 계속해서 오는 사람도 없습니다. 항상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장마철에 햇빛 들고 구름 끼듯이 수시로 옵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고 인생의 궁극적인 가치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좋은 사태를 만나면 히히덕거리고 나쁜 사태를 만나면 죽어라 사람 원망하거나 절망의 늪에 빠지고 그 다음에 희망을 갖고 이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면 아무리 좋은 사태가 그 사람의 간까지 떨리게 할 정도로 기쁘게 했다고 할지라도 어거스틴에 의하면 “내일 잃어버릴 거면 그것은 진정으로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다.” 왜 입니까? 진짜 행복하고 잘나가던 사람들이 뚝 떨어지면, 제가 이야기 한적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빚 20억이 있어서 자살을 하였는데 죽은 다음에 재산을 정리해 보니까 40억 원이었습니다. 그러면 20억 빚을 갚고 나머지 20억으로 집도 줄이고 그 돈만 가져도 잘 살 수 있는데 왜 그럽니까, 했을 때 그것은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그 사람들은 40억씩 재산을 굴리다가 반 정도를 잃어버렸을 때 말할 수 없는 자존감의 상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신이 이것 밖에 못 산다고 하는 것이 확 밀려옵니다. 그렇게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간다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끊임없는 삶의 사태들을 만납니다. 신앙의 유익은 그것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가슴이 벅차도록 기쁜 일이 있어도 그것 때문에 너무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행복 중 얼마나 많은 부분들이 나의 인생에 있어서 본질적이지 않은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깎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슬픔과 좌절스러운 일들이 밀려오면 도대체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묻습니다. 그 의미를 물으면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사태가 마이너스로 표현하면 주저앉았는데 의미를 물으면 그 의미는 항상 플러스 요인을 갖습니다. ‘내가 이런 인간 밖에 못 되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는구나. 결국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내가 이런 것들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생각을 하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이 아무 것도 나쁜 일이 아닙니다.
제가 얼마나 못된 사람이었는지 아십니까? 저는 타고난 건강을 가지고 있었고 저는 모든 아프고 약한 것은 정신의 문제라고 믿었습니다. 교역자들에게 잘 쓰던 말이 “이차돈은 목이 떨어지고도 몇 미터는 걸었다더라. 생각이 머리 속에 있는데 뚝 떨어져 뒹굴뒹굴 굴러갔는데 정신을 몸이 읽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네. 왜 안 되냐. 그런데 안 되는 것은 욕구가 모자라서 안 되는 거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몇 년 동안 아파보고 나서 이제는 모든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예화) 선교지를 갔습니다. 연세 드신 사모님 한분이 저에게 상담을 하고 싶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나보다 나이 많은 선교사 사모님을 상담하나 싶어서 그냥 끄덕이기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호텔 방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제 방으로 올라오겠다고 하시는 것을 제가 로비로 내려갔습니다. 그 사모님의 말입니다. 자신은 선교사로 20대에 헌신해서 불같이 자기를 쏟아 부으며 살았는데 지금은 그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보고 영적인 이해가 탁월하다고 하면서 사모님 자신을 분석해 달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이신지 물으니까 전에는 선교지에만 가면 영혼들이 너무도 불쌍해서 눈물을 흘렸답니다. 그런데 요즘은 “도대체 하나님을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왜 지옥을 만드셔서 안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 모두를 빗자루를 쓸 듯이 불구덩이에 집어넣으실까? 그리고 우리가 복음을 전한들 저렇게 안 믿는데 몇 명이나 구원하고 죽을까?” 그리고는 남편이 하는 것도 다 섭섭하고 자기 홀로 외톨이가 된 것 같고 그래서 TV나 보고 있을까 싶으면 남편 선교사님이 저녁때 들어와 “잘 한다. 선교사 사모라고 하는 사람이 TV나 보고 쯧쯧쯧.” 하며 문 쾅 닫고 저 쪽방으로 들어간답니다. 정말 자기 자신이 믿음이 없이 세속적인 사람이 된 것 같아서 툭 하고 TV를 끄는데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저를 분석해 주십시오.” 사모님은 죄와 은혜의 지배를 읽었기 때문에 그렇게 쫙 분석해서 당신은 이런 잘못에 빠져 있습니다 라고 진단서를 내놓을 줄 알았습니다. “다 하셨습니까?” “예.” “사모님, 그거 아무 것도 아니에요. 갱년기 우울증이에요. 의사 찾아가셔서 약 처방 받으시고 복용하시고 좀 쉬시고 여태까지 남편 하라는 대로 했으니까 사모님 마음대로 해보세요. 영화보고 싶으세요?” “요새 그것이 유일한 낙이에요.” “제가 비디오 플레이어 하나 사드려요?” “아니에요. 집에 있어요.” “그럼 보세요. 보고 나서 그냥 보지 말고 다 보고 나서 사람들에게 이것을 가지고 신앙적인 이야기를 해 주고 싶다 생각하며 써 보세요. 그러면 우리 교회 열린 신문에 내드릴 게요.” 그 이야기를 우리 친구 목사가 옆에서 듣고 있다가 엄청 은혜를 받으셨습니다.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인간에 대한 이해가 그렇게 깊어지신 줄 몰랐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이해 안 가는 것이 있겠습니까?
인간의 가장 큰 할 일은 여러분이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 삶의 사태들을 마주하면서 안 쓰러지고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더욱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내게 전개되는 삶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심지어 이것을 내가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슬픔, 그리고 내 힘으로는 이겨낼 수 없는 삶의 현실 때문에, 진짜 오늘 저녁에 눈을 감고 싶은 마음들, 그런데 이것은 입 밖에 내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쏟아내는 것 자체가 범죄입니다. 말로 쏟아내게 되면 그것이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한번 그러한 삶의 사태들을 매일 매일 접하는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을 매일 매일 삶의 사태로 접하면서 그것을 해치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의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단지 살아있는 것이 목표가 아니지 않습니까? 살아있는데 결국 애들도 안 버리고 남편도 안 버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냥 애들 시집 장가 갈 때 눈물도 안 나고 다 빨아먹고 가는 자식들 그리고 남편 쳐다보면 평생 못되게 굴다가 이제야 장을 봐온다 파를 다듬는다고 설치는데 그것도 꼴 보기 싫습니다. 결국 남편에게 마음의 문을 딱 닫고 죽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실은 산 자로서 산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능가하여 그 삶의 수많은 사태들을 연료처럼 우리의 마음에 끌어안고 우리 안에서 태워서 녹여서 감사와 사랑의 불길이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힘으로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식 하나가 저녁 때 독한 말로 애들이 사춘기 때 되면 버럭, 까칠입니다. 버럭 소리 지르고 맨날 잘 하는 이야기가 아빠가 나에게 해 준게 뭐가 있느냐고 합니다. 그리고 확 죽어 버릴 거라고 합니다. 엄마는 더 죽고 싶습니다. 날 때부터 죽고 싶어 합니다. 못된 짓이나 하고 말입니다. 뒤 흔들어 놓으면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러한 것까지도 다 끌어안고 이 안에서 녹여내면서 결국 자기 자신의 성숙의 기회로 삼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는 성도 전체가 교회 아픔을 끌어안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인간으로서 마땅한 의무이고 신자가 가야 할 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몇 명이나 이해했는가 궁금합니다. 그것을 깊이 읽으면서 여러분 자신이 결국 교회 속에서 느끼는 모든 아픔들을 태우면서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것 모릅니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그 인간 보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사는 것, 그것이 나의 인생이고 각자의 인생이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안 살면서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다니다가 인생의 주춧돌 없이 끝납니다. 이리 떠밀리고 저리 떠밀리고 그러면서 자기 삶에 한 번도 주체가 되어보지 못한 채 살다가 죽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짐승의 행복이 아닙니다. 진짜 사육 받고 그렇게 사는 행복이 아닙니다. 불행이든지 고통이든지 그것이 어떠한 현실이든지 간에 결국 하나님의 큰 뜻 안에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매순간 그 삶에 직면하면서 어떻게 달콤할 때만 자기 인생의 주체가 되겠다고 하고 쓰라릴 때는 그것이 남의 인생인 것인 양 쓰레기처럼 버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버린 그곳에 사실은 하나님도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은 결국 인간으로 태어나서 수많은 겪음 속에서 인생을 삽니다. 나와는 상관없이 섭리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악 때문에 일어나는 고통이 밀려올 수 있습니다. 그것을 너무 원망하지 말고 ‘저 사람은 악하기 때문에 저런 일들을 만들어서 나에게 이 끔찍한 고통을 주지만 그러나 결국은 저 사람도 도구일 뿐이고 하나님의 큰 섭리 속에서 일어난 거다. 내가 믿음으로 그 현실을 받아들일 때 쓰라리고 아프지만 우리의 몸이 상처를 통해서 저항력을 기르시고 병균을 통해 항체를 생산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나를 그 쓰라린 고통 속에서 결국 나에게 행복을 주시고 악 속에서 선을 열매 맺게 만드시고 절망 속에서 결국 희망을 갖게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나아가는 것이 이것이 바로 믿음이고, 우리가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은혜를 받고 우리가 매일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기도하자고 계속 서로를 권하는 이유도 그것이 없이는 우리의 현실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한순간에 생애적으로 은혜를 주셔서 모두 용서해 주고 그를 위해서 생명까지 버릴 수 있을 정도로 화해했던 사람을 다시 살인하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는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잡고 있을 동안에만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지 놓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죄 때문에 당연히 도래한 결과에 대해서도 그것을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 또한 자신이 믿음으로 감당하면 나의 인생이 비극과 고통을 끝나지 않고 그것도 없었으면 안 될 그 무엇인가처럼 나에게 열매를 해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자가 아무리 잘못해도 당신이 너무 기분 나쁘셨기 때문에 복수를 하시는 분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표현이 성경에 나와도 그것은 목적이 있는 표현입니다. “딸, 너 오늘 학교 마치자마자 집에 들어와야 해. 안 그러면 너 죽여.” 학교에서 끝나서 바로 집에 들어오지 않고 다른 곳으로 새는 순간 엄마가 바로 식칼 들고 꼽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문제는 집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 표현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그것은 우리와 관계를 단절할 수 없는 하나님의 핏빛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 화법을 이해하지 못하면 미성숙한 사람입니다. 결국 신자는 죽는 순간까지 자기를 위한 죽음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살기를 하나님 앞에 구해야 합니다. 살아갈 힘을 구해야 합니다. 내 삶에 어떠한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든지 가슴 저밀 정도로 쓰라린 사태가 일어나든지 고난, 슬픔, 살아있는 매일 매일의 날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동반한다 할지라도 신자의 의무는 살기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한 좌절속에서 죽음을 구하는 기도가 응답되는 신자는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럴수록 이상하게 암도 안 걸리게 하시고 죽을 것 같아서 건강검진 가보면 의사가 배 두드리면서 튼튼하다고 하면서 결국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주체가 되어서 내 인생을 하나님을 향하여 어마어마한 업적을 남기지 않아도 주님을 생각하면서 그 모든 현실들을 감당하면서 살아가는 그 자체가 충성스러운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내가 하나님을 떠나서 어디로 가겠습니까?”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그 삶의 사태는 내가 피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주관하는 하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만큼 그 분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끔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괜찮습니다. 나의 삶의 사태가 어떻게 전개되든지 나는 괜찮습니다.” 그렇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의 자녀가 된 순간 내가 주님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그 순간 저는 이미 나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주님께 바쳐졌습니다.”
Ⅳ. 적용과 결론
불평하는 사람들에게는 고난이 고난일 뿐이지만 믿음으로 그 모든 현실들을 받아들이고 결국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살아가라고 태어났고 끊임없이 우리 앞에 전개되는 삶의 사태들을 직면하면서 나의 인생을 내가 아니면 대신 살아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나는 나의 인생을 하나님과 같은 시각으로 사랑하고 비록 때 묻고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정말 그렇게 태어나고 싶지 않았고 혹은 그런 사람 만나기 싫었고 심지어 그 집안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았고 이런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았고, 그러한 후회가 왜 없겠습니까? 그런데 이미 지나갔습니다. 그것 모두 하나님이 시켰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커다란 섭리 속에서 때로는 우리의 불순종과 죄악까지 개입하면서, 때로는 우리의 신앙적인 결단과 용기까지 개입하면서 아주 정교하게 이루어져 온 현실입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자기 인생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걸레처럼 되었어도 마지막에 그 걸레를 끌어안을 유일한 사람이 여러분의 인생을 끌어안을 유일한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신앙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인간으로서의 존귀함과 삶의 주체성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과 함께 동행 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인가? 다른 사람은 내 인생을 보며 “나는 저렇게 불행하게 태어나지 않은 게 고마워. 난 저 사람처럼 저런 성격 가지고 태어나지 않은 게 나는 너무 좋아. 나는 저런 사람처럼 저렇게 시시껄렁한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은 게 너무 좋아. 저 사람은 나보다 머리도 나빠.” 어쩌면 우리의 인생을 밖에 던져 놓으면 아무도 안 주워 갈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인생을 사랑합니다. 왜 입니까? 지문처럼 누구에게도 주시지 않고 하나님이 나 한 사람에게만 주신 인생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의무는 인생의 어떠한 시련이 닥쳐와도 심장을 에이는 것 같은 고통이 주워져도 그 현실이 나의 인생의 현실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만약에 나의 삶에 주체성을 갖는 길이라면 온 몸에 칼을 맞고 온 몸에 살점이 포처럼 뜯어져 나가도 마지막 하나님이 숨을 쉬게 하는 순간까지는 그 삶의 사태를 직면하면서 거기에서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마지막 숨 거두는 순간까지 생각하며 비록 자신의 몸과 모든 삶이 자기가 생각하고 선택하는 대로 모두 움직이지는 못해도 끊임없이 그것을 생각하고 마치 몸에 장애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하든지 자기가 원하는 행동을 하려고 하는 것과 같이 결국 그렇게 가는 그것이 인간입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속에는 독립하는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 입니까? 주님의 도우심, 그 분의 은혜, 매순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사랑, 감당할 수 없는 삶의 현실 사태들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가 아닌 또 다른 의미로 해석해서 모두들 좌절하는 이 현실 속에서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게 해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화) 우리 교회 싸움을 아주 잘하는 집사님이 한분 있었습니다. 자기는 폭력배들과도 싸운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 나이에 싸움을 잘 할 수 있는가 물었더니 “펀치가 눈앞에 날아올 때도 눈을 감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반격할 구멍이 보입니다.” 가능합니까? 휙 하기만 하여도 눈이 감기는데 말입니다. 주먹이 날아오고 칼이 날아와도 마지막 순간까지 눈을 감지 않습니다. 그 분이 이야기가 재밌습니다. 눈을 겨냥하였으면 감아도 결국 때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눈꺼풀이 얼마나 보호해 주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똑바르게 뜨고 주먹이 왔다갔다 해도 그 속에서 반격할 자리를 찾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인생은 한번 가면 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 것입니다. 그것이 가슴이 저릴 정도로 아파도 그리고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수치스러워도 너무 아름다워도 모든 사람이 보며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을 정도로 덕스러워도 혹은 반대여도 사람들의 그러한 평가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지문과 같은 인생입니다. 우리의 의무는 그것을 다 끌어안는 것입니다. 매 순간 우리의 선택, 선택한 것에 대한 우리의 집중, 우리가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우리의 마지막 자신을 쏟아 붓는 헌신이 항상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고 우리는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할 수 있는 한 매 순간 최선을 선택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였는데도 그것 밖에 못 산 삶을 이 세상 모든 인간이 손가락질 하여도 우리는 그 삶을 끌어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해석해서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야 합니다. 매순간 자기의 피를 찍어서 잉크로 펜으로 한자씩 써 내려가듯이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탁월하게 주님을 위해 헌신하며 살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만 못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끔 길을 잃고 통곡하고 흐느끼면서 피눈물을 흘리고 만신창이 된 후에야 자기가 가는 길이 이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매순간 말입니다.
(찬양)
폭풍 후 흑암 속 해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그러면서 세상에 대한 모든 욕망을 버리고 내가 정성을 들여 삶을 살지만 오늘이라도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면 애착하는 것 없이 살다가 가는 게 인생이어야 합니다. 모세와 같이 탁월하게 비범한 사람도 그 견딜 수 없는 절망적인 사태 속에서 이러한 패역을 보였다면 우리는 얼마나 이러한 패역에 가까이 있겠습니까? 그것을 딛고 잃어서야 합니다. 그래서 “나의 인생에 일어난 모든 좋은 일은 주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 때문이고 나쁜 모든 일은 부분적으로는 나의 죄 때문에 일어난 일이요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이 더욱 좋은 것을 주시려고 내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섭리 속에서 지혜를 보이시려고 당신의 능력을 알리시려고 당신의 사랑의 깊이를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려고 일어난 일입니다. 내 앞에 전개되는 어떠한 비참한 삶의 상황도 당신의 신실하심을 향한 나의 신뢰를 끊을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사는 것이 바로 고난을 대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태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난을 통한 복 주심(2015.08.05 수요예배5)
5. 고난 속의 아름다움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벧전 2:19)
녹취자: 오희열
I. 들어가는 말
베드로전서는 핍박받는 고난의 날에 성도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을 것인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문맥에서는 그리스도인인 노예들로서 아주 하층 노예는 아니고, 청지기처럼, 노예보다는 종, 그리스도인 종들로서 한 집안의 청지기 같은 일에 종사하는 그런 사람들을 두고 사도 베드로가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이제나 저제나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의 자원이 없어서 누군가에게 눌려 지낼 때에는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성격이나 특징들을 충분히 드러낼 기회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의 눈치나 보고 남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높은 지위에 올라서 권력을 쥔다든지, 많은 재물을 손에 넣어서 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게 된다든지, 또는 자신들의 입신양명을 위해서 그 사람에게 잘 보여야하는 아랫사람들이 많이 생기게 되면 이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능력만큼 자기를 그대로 드러내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미친 듯이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손에 넣고 권력 있는 지위에 오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삶은 누구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생긴 대로 사는 것이 정말 편한 삶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종으로 섬기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아주 선하고 너그러운 상전 밑에서 종살이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아주 까다롭고 괴팍스러운 사람 밑에서 고달픈 종살이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사도 베드로는 마지막 날,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충고합니다. 그것은 바로 선하고 자신에게 너그러운 상전이든지 까다롭고 야박한 상전이든지 간에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어떤 악을 행하였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것이 괜찮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혹은 그 사람이 나에게 행한 악이 너무 크기 때문에 내가 행하는 이 악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크기의 것이라고 정당화 시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욕을 욕으로 갚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따라서 이 어두운 시대를 빛으로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하나님의 자녀다운 최고의 특징은 열렬한 전도의 열정도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의 최고의 특징은 탁월한 지식도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의 최고의 표지는 열심 있는 교회 활동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결정적인 특징은 착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착한 것은 모든 사람이 볼 때 무골호인인 것처럼 아무 속없이 착한 것을 성경은 착하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착함은 선이신 하나님과 직결되고 그것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의도와 목적에 연결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에 입각한 견고한 삶속에서 우러나오는 착함인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진리는 하나님 선 자체이기도 하지만 무지한 인간들은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에 도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선이 무엇인지 잘 몰라도 진리를 올바로 알고 그 진리대로 살면 결국 그것이 선을 찾아가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선한 삶을 살 때, 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사람 자신의 인격과 성품이 선하고 착해야 합니다. 그 착함이 무골호인이나 아무 속없이 모든 사람에게 밟히고 씹히는, 만만한 선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무엇인지 진리를 통해서 알고 그 길을 걸어가는데, 그 진리 이외의 비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관용하는 마음을 가져야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 회개까지는 아니지만 반성을 많이 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정신없이 어질러놓고 일을 하다가도 일이 딱 끝나면 깨끗이 정리가 되어야만 마음이 편한 사람이라서 제 방은 언제나 정리가 잘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목회 초창기 때 교회의 여자 성도들이 기도도 열심히 하고 마치 5분 대기조처럼 교회에 일 있으면 집에 있다가도 총알같이 뛰어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심방을 갔더니 무질서 했습니다. 담임목사가 심방을 간다고 했는데도 무질서한 것을 보면 제가 안 가는 평소에는 카오스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심방을 마치고 돌아오고 나면 저는 언제나 그런 사람의 신앙을 30% 정도 깎아서 보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좋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여자는 누구라도 다 집안을 예쁘게 가꾸고 싶어 할 것 같지만 그런 것과 전혀 상관없는 여성들도 아주 많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집안에 들어가서 손가락 하나로 가구 같은 것을 스윽 문질러보면 먼지가 우르르 떨어지는 집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늘 얘기하지만 청결하고 질서 있는 생활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진리보다 그런 자신의 인생관에 어긋날 때 못 견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신앙이고 못 치우는 것은 못 치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대단히 많은 주부들이 격려와 용기를 얻는다면 그것은 설교자의 의도가 아닙니다.
이렇게 까다로운 사람들이 상전으로 있다면 그 밑의 종들은 부당한 방식으로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아마 직장생활 해 보신 분들은 부당하게 고난 받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제가 직장 다닐 때 보았던 일입니다. 어떤 회사에서 직원들을 그렇게 괴롭히는 상사가 있었습니다. 정말 사랑을 못 받게 직원들을 괴롭혔습니다. 하루는 새까만 말단 직원을 불러다가 야단을 치는데, 뒤에 제가 있는데도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일이 그 사람이 다른 곳에 있을 때 있었는데, 야단맞는 사람은 전공(전기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잘못하긴 했지만 잘못에 비해서 야단을 심하게 쳤습니다. 사람이 그래도 잘못한 것에 어느 정도 비례에 맞을 때는 야단을 맞아도 미안하고 수긍이 되지만 그게 너무 지나쳐버리면 분노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이 사람이 그렇게 심한 야단을 듣다가 분노가 나서 “에이, 이까짓 직장 안 다니면 될 것 아냐!” 하면서 책상 앞면을 발길로 찼는데 신고 있던 군화 같은 안전화가 책상 앞판을 뚫고 들어가 버렸고, 그래도 이 사람이 분이 안 풀렸는지 망치를 들고 죽이겠다고 하니까 야단치던 상사는 도망가 버렸습니다.
우리가 정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사람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지위나 재산, 심지어는 외모의 예쁨이나 덜 예쁨, 이런 것들에 의해서 전혀 영향을 안 받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의 성인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그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존엄과 가치를 훼손하는 방식으로 사람을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건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 대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상전들이 그렇질 않았고, 당시는 명백한 계급사회였기 때문에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당하게 고난을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오늘 사도 베드로는 그렇게 고난을 가하는 상전을 책망하는 게 아니라 신자인 그리스도인이 종으로서 그런 상전에게 봉사할 때 어떤 태도로 해야 할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II. 부당하게 고난을 받을 때
A. 부당한 고난 있음
먼저 기억해야할 것은 부당한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당하다는 것은 ‘아디코스’인데, ‘디코’는 ‘디케’, 즉 ‘정의’이고, ‘디코스’는 ‘정의로운’입니다. 그리고 ‘아디코스’는 ‘정의롭지 않은’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 세상의 양심과 인간의 상식과 규칙으로 볼 때 전혀 부합하지 않은, 온당하지 않은 방식으로 우리 신자들에게 고난이 가해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받는 핍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총체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우리가 부하 직원으로서 상사에게만 당하는 게 아닙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불완전하고 불공평 합니다. 결국 이 세상에 산다는 것 자체가 옳고 그름이 자로 잰 듯이 정확하게 되는 사회 속에서 살아야하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그렇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정도는 그렇게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 조금씩은 유익을 누리면서 살아갈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세상은 하나님과 우리에 대한 반감과 편견이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신앙생활, 혹은 우리의 사회생활과 그들의 이익이 충동을 합니다. 그래서 그 때문에 우리가 고난을 받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때 이런 부당한 고난을 받을 때 다른 사람이 부당한 고난을 받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그렇게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지만 우리 자신이 부당하게 고난을 받을 때는 아주 수치스러울 뿐만 아니라 분노가 솟구치게 됩니다. 거기에서 인간의 모든 범죄들이 나오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로마 시대가 그렇게 철저한 계급사회였고, 국가 조직이 그물 짜여지듯 철저하게 짜여진 시대였는데도 심심치 않게 노예들의 반란이 일어났던 것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참기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부당한 고난을 당할 때, 물론 우리는 그런 사회의 구조를 올바로 고치고 자신이 개선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자신의 노력을 기울여서 이런 똑같은 구조 속에서 자기와 같은 피해를 보는 사람이 또 생기지 않도록 헌신하고 돕는 일들은 아름다운 일이고, 그리스도인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직업을 가지고 봉사하고 종사할 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의와 사랑의 길을 걸어가게 하기위한 부르심입니다. 우리가 올바름과 사랑을 어떻게 조화를 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주 실제적인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각자 삶이 놓여있는 삶의 정황이나 환경에 따라서 조금씩 그 대처가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부당한 고난을 당할 때 그가 잊지 말아야할 것은 이러한 세상 속에 우리들이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 불의하고 부당한 방식으로 힘없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를 그것과 투쟁하고 이익을 다투는 전사로서만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런 잘못된 구조 속에서도 하나님의 정의와 함께 사랑을 추구하며 신자의 빛을 잃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늘 결코, 그렇게 애매하게 종들을 학대하고 고통을 주고 부당하게 대접하고 비인격적으로 대우하고 있는 상전을 두둔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종들이 어떻게 신자로서 그러한 삶의 정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빛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당한 고난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을 생각함
그리고 베드로는 하나님을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 여기서 ‘하나님을 생각한다’라고 하는 것은 희랍어로 ‘수네이데신’이라는 단어인데, ‘생각’이라기보다는 ‘지각, 공통된 감각, 양심’이라는 뜻입니다. 즉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이 당한 억울한 일에서 결국은 최종적인 판결을 해 주실 것이라는 지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당하게 고난을 받을 때의 신자의 태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올곧은 양심, 또는 하나님의 정확한 지각에 의한 판단 때문에 참을 수 없는 상황을 참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정말 참을 수 없는 그것을 주님 때문에 참는 것입니다.
(예화) 저는 2년 전쯤 TV에서 충격적인 뉴스영상을 통해 인간의 분노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보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인데 어떤 사람에게 세금이 부당하게 청구가 되어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이의를 제기 했는데 받아들여지지를 않았습니다. 결국 이 사람은 그 결과에 굴복이 되질 않아서 기름을 가득 넣은 경비행기를 타고 자신에게 그렇게 부당하게 세금을 부과한 건물의 2층에 충돌하여 그 사무실을 전소시키고 자신도 사망해버렸습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성질을 부려도 규모가 있고 스케일이 큽니다. 우리 같으면 자동차를 몰고 관공서 철문이나 부딪혀버리고 마는데 이 사람은 비행기를 몰고 가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결국 신앙을 떠나서, 일반은총의 차원에서 이 세상을 봐도 참지 못하는 사람의 인생은 불행합니다. 참아야 합니다. 이 세상이 자기 원하는 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항상 세상이 자기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아, 세상이 이런 것이구나, 이게 우리 인생의 현실이구나.’ 하며 담담하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 때문에 좌절하거나, 한번 잘 된다고 기고만장해서 높이 들뜨거나 하는 것은 인간성 자체가 성숙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앙은 내가 주체가 되어서 내 인생을 살면서 신앙 때문에 인생의 그 소용돌이 속에서 잠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기 오시기 전까지 골치 아픈 일, 죽여 버리고 싶은 인간, 아니면 확 뒤집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 가슴을 태우는 생각, 별의 별 생각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안에도 있지만 바깥에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의 지성이 진리를 찾아가면서 나를 이탈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받기 전까지는 내가 나와 한 덩어리가 되어서 미친 듯이 그 속에서 뒤섞여서 살기 때문에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어디를 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진리의 말씀을 들으면서 한 번 유체이탈 하듯이 튕겨져 나와 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저 인간이 저렇게 살면 안 된다는 반성이 일어나고 불쌍하게 느껴져서 많이 웁니다. 그게 회개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집니다. 처음에는 자기 마음 몰라준다고, 자기 힘들다고 하나님 앞에 떼를 쓰면서 웁니다. 한참을 울다보면 이런 일가지고 울고 있는 자기 자신이 한심해서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체이탈처럼 자신으로부터 이탈해서 객관적으로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특권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지난주에 제가 이 자리에서 절대로 죽기를 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아주 패역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삶에 대한 애착을 끊은 것이 아니라 너무나 다르게 살고 싶은 것은 하나님 앞에 그런 식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의 제일 큰 의무는, 마지막 숨이 끊어져서 의식이 사라지기 전까지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가장 큰 의무입니다. 여기에서 기도도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객관적으로 볼 때 정말 기도해야할 사람인데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꾸 꿈꾸듯이 낙관적인 생각만 갖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은 벼랑으로 가고 있으면서 낙관적인 생각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또 반대로 그렇게 비관적인 상황도 아니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소망을 가지면 길이 있는데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비관을 상상합니다. 그리고 절망 속으로 들어가 버리니까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어버리고 싶은 생각밖에는 안 드는 것입니다. 앞의 경우에도 기도가 안 되고, 뒤의 경우에도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정확합니까? 결국 우리가 은혜라고 하는 것은 우리 속에 얼마나 뜨거운 열정이 솟아나느냐하는 것도 문제겠지만 그 열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를 얼마나 객관화 시킬 수 있느냐, 이것이 바로 은혜의 크기인 것입니다.
(예화) 오래전에 부산을 한 번 내려갔었는데 강사가 가니까 접대한다고 저녁 자리에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저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막 하는 사람은 아니라서 조용히 밥을 먹고 사람들을 보니, 그중에 그날 밥을 산 어떤 장로님이 “목사님,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하며 명함을 주는데 명함이 두 페이지나 되었습니다. “목사님, 부산에서 저만큼 하나님 열심히 섬기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기에 저는 속으로는 ‘이 사람이 미쳤구나.’ 생각하며 “아, 네. 그러시군요.” 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밥을 먹고 여러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경우에 맞는 몇 마디 말만 나누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집회를 마친 후에 교회 마당에서 인사를 하며 악수를 하는데 그 장로님이 제 손을 꼭 잡고 “목사님, 제가 정말 창피합니다.” 그래도 말씀을 한 번 듣고 깨달음이 온 모양이었습니다. 진짜 창피한 사람은 창피하다는 말도 못합니다.
절대로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열정이 자기를 객관화시키는 힘이 아닙니다. 신앙의 깊이는 자기를 객관화시키는 힘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버려도 마지막 내편인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겠습니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자기를 떼어 낼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자기를 객관화해서 보는 것입니다. 제가 기도로 하루를 열고 말씀으로 하루를 닫으라고 할 때, 그 말씀을 보면서 자기를 객관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객관화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아십니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번에 『가족』이라는 책이 나왔는데 거기에 저희 아버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가 회심하고 아버지를 다시는 미워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실제로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이 정도까지 꺾어졌으니까 좀 박자를 맞춰주시면 얼마나 은혜롭겠습니까?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 은혜로 꺾어지고 꺾어지면서 제가 발견한 정말 중요한 성경의 진리 하나는 진정한 용서와 사랑은 상대방의 어떤 특징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서 우러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은혜였으니까 그게 가능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사무실에 나와서 잠시 묵상을 하고 아버지 생각을 하는데 그렇게 그립고 보고 싶을 수가 없어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이 나이가 되도록 말입니다. 자연적인 인간에게 자기를 객관적으로 본다고 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자에게도 마찬가집니다. 자연인에게는 그게 정말 어려운 일이라서 어려운 일이지만 신자는 은혜가운데 있지 않기 때문에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분이 은혜가운데 있을 때, 여러분이 회개 정말 많이 할 때는 회개할 게 별로 없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진짜 회개할 게 많을 때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도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왜 생각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은혜, 이 모든 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마음에 안 들어서 단박에 미움의 칼을 던집니다. 그가 나에게 욕을 할 때 나도 욕으로 돌려줍니다. 이런 것이 우리 삶의 전부라면 우리 속에 주님이 없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사도 베드로가 하나님을 생각하라고 할 때, 하나님을 깊이 지각하면서 참는다는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될 것이고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의 시비를 우리 주님의 손에 맡기고 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 때로는 그 섭리가 우리의 기대나 믿음에 역행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떠한 처지에서도 당신을 생각하면서 그 모든 부당한 고난을 견디는 사람들을 배신하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C. 슬픔을 참음
세 번째 마지막으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슬픔을 참으면 아름답다” 즐거운 고난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고난은 언제나 내가 원하지 않는 삶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서 고통을 당하는 것을 고난이라고 합니다. 거기에는 언제나 슬픔이 동반되고 슬픔은 언제나 고통과 비참함에 대한 느낌을 항상 함께 가지고 들어옵니다. 기뻐서 흘리는 눈물도 있지만 그건 슬픈 것이 아닙니다. 또 인간에게는 비장미라는 것이 있어서 어떤 음악을 들으면서도 슬픔을 느껴보고 싶기도 하고 영화나 소설을 보면서도 펑펑 울고 싶은 욕망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정서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환경 속에서 그 환경으로 말미암아 당하게 되는 슬픔은 항상 원하지 않는 고통과 비참함을 동반합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돈도 잘 벌고 사회적인 지위도 있는데 어느 날 많은 부하직원을 데리고 제 3세계에 가서 도랑을 파는 글로벌 사회봉사를 한다고 합시다. 곡괭이를 내리치고,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하다가 곡괭이에 발가락이 찍혀서 피가 나기도 했다고 합시다. 그럼 이게 비참하겠습니까? 안 비참합니다. 그런데 잘 살다가 폭삭 망해서 식구들 입에 풀칠할 돈도 없어서 땅을 파는 곡괭이질을 해야 하고 그렇게 일하다가 곡괭이로 오른발 엄지발가락을 찍어서 피가 철철 나는데, 그래도 한 끼 밥을 먹기 위해서 붕대로 감고 땅을 팔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똑같은 일을 하는데 한 사람은 전혀 슬픔을 동반하지 않지만 한 사람은 비참과 슬픔의 감정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슬픔은 항상 원하지 않는 고통과 비참함을 동반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온전히 우리의 삶의 주체가 되는 것의 정도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슬픔과 비극, 고통들을 겪으면서 그것을 우리 안에서 정화시키고 승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어느 정도 있는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희랍 사람들이 그렇게 비극을 좋아했던 것도 어떻게 보면 희극을 좋아하던 때보다 인생의 쓰디쓴 맛을 더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시대에는 비극을 못하게 했는데, 하루 종일 일하고 저녁에 그 비극을 보고 펑펑 울며 집으로 돌아가면서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숙제는 이 슬픔을 어떻게 이해하고 고통을 어떻게 이해해서 그것이 단지 우리의 인생을 심각하게 갉아먹고 우리를 좌절시키는 부정적인 것으로만 작용하지 않도록 하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거기에서 정말 훌륭한 지지대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그리스도인 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고난을 딛고 시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기독교에 입문하면서 배우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하나님의 공의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로마시대의 이 사람들이 당했던 방식은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이 자본주의 치하에서 그보다 더 야비하고 치사하고 더러운 방식으로 부당한 고난을 당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부당한 고난을 가져다주는 역사의 현실과 싸우고 그것을 개선해 나가면서,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전사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고 우리 자신이 당면한 현실을 극복하면서 우리의 인생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이러한 옳지 않게 당하는 고난의 의미를 새기고, 그것이 나에게 너무나 커다란 타격을 주어서 내 삶을 스스로 영위해가지 못할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그렇게 살아가는 일을 포기해버리는 것, 지난주에 말씀 드렸듯이 모세가 했던 것처럼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올바른 인생에 대한 태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슬픔 속에서 그 슬픔을 참는 것입니다. 참는다는 것은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 슬픔을 자신 속에 녹여내서 자신의 삶의 자원으로 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땅이 있는데 땅에 온갖 오물들이 버려집니다. 땅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면 그런 오물들 자체가 더러운 것인데 땅이 그것들을 품고 상당한 시간을 걸려 녹여내서 그 더러운 것들이 그 땅에서 자라는 식물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도록 바꾸어 놓고야 맙니다. 그런 토양이 가지고 있는 지력과 같이,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왜 슬픔을 만나지 않겠습니까? 왜 이러한 어려운 일들을 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그 속에서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의 지각으로 우리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이 부당한 고난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그 속에서 우리의 삶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은 슬픔이 밀려오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살점을 에이는 것 같은 고통스런 시간의 연속일 수 있습니다. 그때도 부정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내 몫에 태인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하나님의 커다란 섭리 속에서 이런 고통스런 시기들을 지나게 되어있고 내가 오늘날 여기 서 있는 이 시점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래도 아름다운 그 어떤 것들이 내 마음과 영혼에 있다면 이것은 모두 과거에 내가 이러한 불같은 슬픔과 고난의 길을 통과했기 때문에 나에게 남은 것이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이 슬픔과 커다란 고통도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면서 그 길을 걸어가면 옳지 않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그런 것들을 안겨주었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적절히 다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꼭 피 비린내 나는 심판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또 다른 방법을 다루실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자기의 인생을 살아간 것에 대한 몫입니다. 우리는 숨넘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자녀로 주님이 내게 주신 이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엄습하는 슬픔 속에 자기 자신이 무너져 내려서 삶의 주체성을 잃어버릴 정도로 깊은 비극에 잠기고 비참에 잠기는 것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가볍게 팔딱거리는 것도 잘하는 것이 아니지만 말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진리의 말씀으로 이탈해 빠져나와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면 모두 잠시 잠깐 지나는 것들입니다.
III. 결론 : 고난속의 아름다움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것은 이것입니다. “참는다면 이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여기의 ‘아름다운’은 ‘카리스’라는 단어입니다. ‘아름답다’, ‘우아하다’, ‘달콤하다’, 심지어는 ‘은총’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은총’, ‘호의’, ‘선물’이라는 뜻까지 있습니다. 그래서 부당하게 고난을 당해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슬픔을 잘 참고 내게 닥치는 어떠한 고난과 슬픔, 좌절도 내 인생의 주체성을 훼손하지 않게 한다면 그것은 정말 우아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아름답다는 관점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기쁨을 이 세상에서 돈 많은 사람, 말 잘하는 사람, 힘이 있는 사람에게 보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기쁨을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에게 보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음의 이유가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되게 하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을 향해 얼마나 참으셨는지를 생각하면서 참는 것이 어려울 때마다 그분 때문에 참고 견디십시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슬픔도 통과해야하고 그것들도 결국 인생을 살고 보면 잠깐이고 그 잠깐의 슬픔 속에서 연단된 영혼의 아름다움은 훨씬 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여러분, 하나님이 그 고난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복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6. 환난 중에 주신 유익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 1:5)
녹취자: 조원정
Ⅰ. 본문해설
고난을 통한 복 주심(2015.8.19 수요예배6)
유대 지방에 아주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당연히 많은 사람이 양식이 없어서 고통을 받는 상황이 되었고 예루살렘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의 사도로서 이방에 있는 교회들에게 간절히 호소하여 유대인 형제들을 돕도록 연보를 모으게 하였습니다. 얼마인지 액수는 알 수 없지만 바울같이 스케일이 큰 사람이 거액의 연보라고 했으니까 엄청난 돈이 모였던 것 같습니다. 이 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기 위해서 그는 예루살렘으로 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에베소, 마게도니아, 고린도를 거쳐서 예루살렘을 가려고 했습니다. 그 사이에 디모데를 고린도 교회에 보내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사정을 살피고 돌아보게 했습니다. 디모데를 통해서 들려오는 고린도 교회 소식은 심각하였습니다. 교회 안에 심각한 내분이 있었고 도덕적인 문제를 비롯해서 많은 문제들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와 마게도냐를 거쳐서 고린도 가려던 계획을 접고 고린도로 직행을 하게 됩니다. 고린도를 방문했고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서 다른 곳을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두 번째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게 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에 있어서 매우 힘든 방문이었습니다.
두 번째 방문의 때에 고린도 교회는 노골적으로 대적을 했고 바울을 무시하고 수치스럽게 하는 그러한 만남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들과 한번 겨루어서 그들을 정리하는 대신에 조용히 혼자 수치를 당하기로 하고 교회의 평화를 위해서 고린도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가 있고 후서가 있는데 그 사이에 한 번 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는 유실 되었고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 전서는 고린도 상서입니다. 전서와 후서 사이에 한통의 편지가 더 있는데 그 편지를 그 사이에 씁니다.
두 번째 방문을 마치고 너무 가슴 아픈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편지가 전해지지 않으니까 내용을 우리가 알 수 없지만 고린도 후서에 언급된 내용을 보면 준엄한 책망이 그 안에 담겨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바울이 방문했을 때보다 사도 바울이 준엄한 책망을 동반한 꾸짖음과 교훈의 편지를 보냈을 때 이 편지를 돌려 읽으면서 일종의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심오한 죄에 대한 깨달음과 자신도 어찌할 줄 모르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물론 모두는 아니었지만 그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람마다 자신들이 이전에 행한 일들에 대해 가슴 아파하고 근심 아파하는 소식을 듣고 이들이 너무 나의 책망에 마음 아파하고 진실하게 회개하니까 이제 이들의 마음을 좀 다독여야겠다는 마음으로 쓰고 실제로 때리고 돌아서서 마음 아파 눈물을 흘리는 부모의 심정이 되어서 이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 후서입니다. 세 번째 방문을 기대하고 확신한다는 내용을 여기에다 적게 되었던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는 신약의 예레미야서로 불릴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에서 당하게 될 끔찍한 고난과 시련의 이야기들이 여기에 적혀 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이 고난과 시련을 당한 우울한 이야기로부터 고린도 후서를 시작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린도 전서는 여러분이 보다시피 책망하는 어조로 시작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따뜻한 인사로 나오지만 당파가 나뉘는 것부터 시작해서 책망하는 내용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그 유실된 편지를 읽고 심오한 회개가 일어나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낮아질 대로 낮아져서 주저앉은 것입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마음이 많이 상하고 너희들이 고통스럽지만 사실은 우리도 정말 약한 사람들로서 이 복음 사역을 하는 와중에 온갖 시련과 고난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공감을 얻는 것입니다.
Ⅱ.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침
A. 그리스도의 배타적 구속적 고난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쳤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게 말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어떻게 감히 사도바울과 그 일행에 넘쳤겠습니까? 신약성경이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할 때 고난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그리스도의 배타적이고 구속적인 고난입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으로서 누구도 동참할 수 없는 배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허락된 고난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고난을 예고하실 때 베드로는 죽는 때까지 따라가겠다고 했고 다른 제자들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마시려고 하는 그 고난의 잔을 자신들도 마실 수 있다고 호언장담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에 대해서 칭찬하거나 동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십자가는 배타적이고 당신 혼자서 인류의 구속을 위해서 지기 위한 십자가였습니다. 목자를 칠 때 양들은 다 흩어지고 예수님은 당신 홀로 남으셔서 그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의 고난은 성도들이 참여할 수 없습니다. 이 고난은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로서 당하시는 고난입니다. 이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딱 한번 있었습니다.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만 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B. 그리스도의 참여적 성화적 고난
또 다른 그리스도의 고난이 있는데 이 고난은 그리스도의 참여적이고 성화적인 고난입니다. 이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시는 고난이긴 하지만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부활하신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와 함께 겪으시는 고난입니다. 은밀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몸이 겪는 고난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동참하게 하시는 고난입니다. 이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신자들도 동참하게 하는 고난입니다. 모든 인간, 모든 교인들이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신자들만이 당하는 고난이고 그 고난은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따라 교회를 온전하게 하고자 살아가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당하게 되는 고난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고난은 객관적인 상황과 인간의 마음 사이에 걸쳐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참된 예수의 몸이 되었다고 합시다. 그에게 하나님이 어떤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고통이 올 때 내가 왜 이곳에 와서 이런 생고생을 하느냐 하고 그것을 거부하면 고난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참여적이고 성화적인 고난은 본인이 싫다고 안 받겠다고 하면 없는 것입니다. 대신 고생을 합니다. 결국 이 고난은 하나님이 이 땅에서 불완전한 성도들을 그 고난에 참여하면서 완전하게 만들어 가시는 과정 속에서의 고난입니다. 객관적인 상황과 환경, 주관적인 적용, 이 사이에 고난이 걸쳐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똑같이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고난을 당하는데 그 고난 때문에 성격이 망가지고 파괴되고 그렇게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그 고난을 다 당하면서 거룩한 성품이 되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부교역자 시절에 교수 생활을 하면서 인천 쪽에 살았는데 근처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허허벌판에 오셔서 교인 얼마 되지 않는 교회에 오셔서 수천 명의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얼마나 많이 헌신하셨겠습니까? 그런데 교회에서 엄청나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분이 헛소리를 자꾸 하십니다. 중얼중얼 거리며 그래 내가 하나 못하나 두고 봐라. 그러면서 중얼중얼 거립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과로사로 돌아가십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가 하면 하나님의 일도 결국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면서 하는 많은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거룩한 일이 항상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속된 일이 항상 사람을 속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일이 그 사람을 한없는 고통만 줍니다. 성격이 굽고 심지어 우울증까지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지나온 날들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왔던 고난의 날에 주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의 깊이와 넓이를 간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환경은 우리를 망가뜨릴 수 없습니다. 인간이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닙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것이 무언가 하면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성을 가진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 없는 주체성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정말 내가 주체가 될 수 있었습니까? 정말 자유를 찾아서 내 마음대로 살아보니까 결국 내가 나의 삶의 주체가 못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체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보니까 그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올바른 관계를 맺고 내가 서 있을 때 나라는 존재가 무엇이고 이 세계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하는 것들을 깨닫게 됩니다.
확고하게 깨닫고 나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면 붙들수록 확고하게 내 삶의 주인이 나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내가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찾는 하나님을 기꺼이 거스르면서도 내가 이 세상에서 행복을 누려보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내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나의 삶에 주체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아우라가 있는 것입니다.
‘아우라’가 뭔지 아십니까? ‘아우라’가 일본 말인지 압니다. 일본말이 아니라 라틴어입니다. 라틴어 이전에는 고전 그리스어였습니다. 그것을 피타고라스 베르길리우스 같은 사람이 ‘아우라’라는 희랍어를 그대로 가지고 와서 라틴어로 ‘아우라’라고 썼습니다.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도 ‘아우라’입니다. 공기, ‘아우라’입니다. 그것이 비유적으로 사용되면 분위기, 뭔가 압도하는 카리스마, 카리스마라고 까지 말할 수 없지만 뭔가 사람에게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 분명하게 풍기는 분위기, 한참 대화를 하다 보면 저 사람은 아무리 뇌물을 먹여도 씨도 안 먹힐 것 같은 사람, 아무리 봉투를 두껍게 줘도 발로 차 버릴 것 같은 그런 사람 있습니다. 그런 것을 아우라라고 합니다. 울림, 분위기, 반향, 이런 것들을 아우라라고 합니다. 공과 책을 오늘 완성해서 인쇄소에 넘어갔습니다. 다음 공과가 그리스도인의 아우라입니다. 너무 멋있는 제목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아우라가 없습니다. 있으나 없으나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은 그런 것입니다.
손님이 오셔서 오래간만에 식당을 갔습니다. 한동안 안 갔습니다. 어휴, 오래간만에 오셨습니다. 식사를 하는데 부책임자 되는 사람이 오더니 45도로 인사를 하면서 목사님 오래간만에 오셨기 때문에 디저트를 무료로 서비스하겠습니다. 제가 싫습니다. 마음을 다해서 말하는데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미 만들어 놓았다면 정확하게 돈을 받으십시오.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다시 한 번 45도로 고개를 숙이더니 머리가 희끗희끗하신 분이었습니다. “목사님 저도 마음을 다해 말합니다. 오늘은 드리겠습니다.” 그 아우라에 눌려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우라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인의 아우라라고 하는 것은 학식이 많거나 아는 것이 많다고 아우라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머리가 텅 빈 아우라는 없습니다. 뭔가 확고한 무엇인가가 있어서 그 사람 앞에 딱 섰을 때에는 내가 저 사람보다 훨씬 좋은 대학 나왔는데도 이상하게 눌리는 게 느껴집니다. 내가 훨씬 젊은데도 뻐길 수 없게 만들고 돈이 내가 훨씬 많은데도, 돈이 권세를 부리는 것이 누군가하면 그 앞에 있는 사람들이 돈을 좋아할 때 돈이 권세를 부립니다. 그게 뭔데 그러고 발길로 뻥 차면 재벌이 와도 부끄러운 겁니다. 오만 원 자리 봉투를 발로 찰 수 있는 사람이면 백만 원을 쌓아 놓아도 발로 차는 것입니다. 일억을 쌓아도 발로 찹니다. 백억을 쌓아 놓아도 그것은 양의 차이일 뿐이지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아우라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사람을 대할 때 나라는 인간이 이런 인간이라는 것에 대해서 창피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 아우라입니다. 초대 교회에는 이런 아우라는 그리스도인의 기본입니다.
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 너무 중요합니다. 이런 아우라에 의한 선포가 함께 가야 합니다. 옛날에는 교회가 대개 크면 사람들이 와 했습니다. 지금은 안 그렇습니다. 나는 신학을 공부하고 나서 교회가 크다는 이유 때문에 그 교회를 대단하게 생각해 본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나같이 교만한 사람도 그런데 나보다 더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생각하겠습니까? 내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오늘날 잘못된 선교가 무엇인가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성공하는가를 보여줘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웃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60년대 70년대 밥 벌어 먹기 힘들 때에 자가용 타는 것이 소원일 때 지하실 방에 올라 와서 1층에서 한 번 살아보는 것이 꿈일 때에 이야기지 지금은 그렇게 생각 안합니다.
문제는 그런 그리스도인의 아우라라고 하는 것이 한 순간에 성령을 받는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에는 누가 뭘 받다. 누가 기도할 때 셀라셀라 방언을 한다 하면 사람들이 저속에 뭐가 있나 하고 두려워하거나 주목해줬습니다. 요즘은 그렇게 생각 안합니다. 제가 제일 갖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성령 받았다고 뻐기는 사람들입니다. 대부분 가짜입니다. 진짜 성령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겸손과 사랑입니다. 뭐가 무섭습니까? 자기가 나에 대해서 뭘 하겠습니까?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인데 그런 것도 아우라가 아닙니다. 아우라가 무엇인지 여기에서 다 설명하는 것은 오늘 설교의 주 초점이 아닙니다. 이번 토요일에 나오는 책을 보고 공부를 열심히 하십시오.
문제는 그런 그리스도인의 아우라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진실한 회심과 깊이 있는 복음의 체험 속에서 주님을 확실하게 만나는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 하나님의 자녀인지 세상 사람인지 회개를 했는지 아니면 내안에 주님이 계신지 이런 것들이 오락가락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식의 존재 자체가 주는 울림이라고 하는 이런 아우라가, 존재의 울림을 아우라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런 것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자신도 그것이 뭔지를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아우라를 가진 확실한 특징은 확고한 신념입니다. 성경에 기초한 신념, 그렇지만 성경에 의해서 언제든지 검증될 수 있는 유순한 지성의 아우라, 그러나 성경이 아닌 사상에 대해서는 견고한 성처럼 무너지지 않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가치관, 다른 세계관, 인생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런 것들이 깊은 신앙의 체험 속에서 단번에 심겨지지만 동시에 그것은 자신 안에 있는 죄성이 죽고 날마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자기부정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는 진실한 참회, 매순간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의 증진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회개가 없으면 사실상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까칠함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우라는 까칠함이 아닙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회개와는 상관없는 삶을 삽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꺾이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그런 종류의 거룩한 아우라가 있을 수 없습니다. 논쟁을 하고 말을 하면 혀 빨리 움직이는 사람이 이깁니다. 그것은 아우라가 아닙니다. 조용히 침묵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는 사람들이 더 큰 아우라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신학의 발전 과정이 있었을 거 아닙니까? 젊은 시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펄펄 붓는 열정으로 복음을 전하든 초창기로부터 시작을 해서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석양의 무렵에 이를 때까지 신학적인 변화가 없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점점 나이가 먹고 노년에 접어들고 원숙해지면서 복음의 깊은 비밀들을 터득해 가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쓸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25년 내지 30년 세월이 흐른 뒤입니다. 그러면 신앙이 원숙해질 만큼 그런 때입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더 뒤로 갑니다. 아주 농익은 사상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발견한 것은 하나님이 결국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맡겨 주신 이 사명을 감당해 나가기 위하여 끊임없이 우리를 고난당하게 하시는데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런 고난을 당하게 하심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하시고 그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교회를 위해 죽으신 그 죽음을 경험하면서 자기 자신이 조금씩 조금씩 온전하고 순전한 그리스도인이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끔가다 한번씩 불끈하며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한 이틀 정도만 방심하고 두 세끼 정도만 허리띠를 풀고 많이 먹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음식이 좀 당겨서 조금만 정도를 넘어서면 확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때 내가 깨달은 것이 야 이거 기도생활하고 똑같구나! 몰아서 사경회 때 한번 회개하고 아니면 송구영신 예배 때 한번 다 털어 놓고 눈물로 쓸어버릴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자기 자신을 점검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들판에 나가서 보면 구청에서 사람 사가지고 잡초들을 깎아 놓습니다. 소용없습니다. 한 3일만 되면 다시 길같이 자랍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매순간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성찰하면서 우리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의 육체도 우리가 방심하면 망가지고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심각하게 건강의 적신호들이 옵니다. 그것을 잘 유지하려면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살면 안 됩니다. 그러면 빨리 죽거나 아주 질이 낮은 노년을 보냅니다. 우리 중에서 오래 살고 싶거나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 육체적으로나 영혼에 있어서 방임하고 자신을 내버려 두면 우리 자신의 육체이고 영혼이고 망가져 가는 것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고난에 참여하면서 끊임없이 환란을 겪었습니다. 그 사람이 뭐라고 이야기 합니까?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이 끊어지고 우리는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 이게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대사도의 고백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까부는 사람 있으면 죽을지어다. 이 한마디만 하면 될 거 아닙니까?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그런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계셨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쓰시지 않는 것입니다. 기적의 능력만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그렇게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능력을 많이 받으면 그만큼 고난이 적을 것이라 생각하면 안 되고 반대로 능력이 많을수록 고난을 더 많이 당하게 됩니다. 디모데 후서 1장 8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하나님의 능력을 너희가 받은 정도에 맞게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그런 뜻입니다. 많은 능력을 받은 사람, 많은 고난을 당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우리는 그 고난이 하나님을 위한 희생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러한 주님의 참여함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런 고난이 없었더라면 몰랐을 당신의 성품을 알게 하고 깨닫게 하면서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게끔 만드시는 것입니다.
Ⅲ. 그리스도의 위로가 넘침
사도는 고난의 유익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위로가 넘쳤느냐고 말합니다. 그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그럼 고난은? 고난도 “예수 때문에 넘쳤다.” 왜? 예수님이 고난을 줬다는 뜻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자신을 죽음에서 살려내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비전이 없었더라면 그 사람이 무엇 때문에 동족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이방인에게 멸시를 당하면서 그렇게 사형선고를 받은 것처럼 절망적인 고난의 길을 걸어갔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의 몸의 지체가 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그런 일을 하게 되었다.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이 고난을 당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했더니 주님의 위로가 넘쳤더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을 만나고 회심하기 전부터 인생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가졌습니다. 밋밋하고 평안하게 길게 사느니 치열하게 불꽃처럼 온갖 시련을 만나더라도 확 살다가, 짧게 살다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회심하기 전에도 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인생의 의미는 의미의 문제이지 길이의 문제가 아니다. 길게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살았더라. 내 인생은 나에게 매우 즐거웠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였다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구원이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구원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인생이 자기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의도에 맞추어서 살아가는 인생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생각할 때 가슴이 뛰는 인생의 목표가 없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제일 가엾은 사람들입니다. 삶의 향기가 없습니다. 또 불쌍한 사람은 입술로는 목표가 정해져 있다고 하는데 피 냄새가 안 나는 사람, 그 인생의 목표를 따라서 피 흘리며 걸어가지 않는 사람들은 인생에 아무 향기가 없는 것입니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자기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할 뿐이지 정말 행복하지 않습니다.
A. 즉시 고통을 제거함
위로는 고통을 능가하는 주님의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고통당하는 성도들을 하나님이 위로하시는 방법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이 고통을 당할 때 아파하면 고통을 제거하심으로서 하나님이 그를 위로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또 다른 방법으로 여러 방법으로 위로를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커다란 위로의 방법, 항구적인 위로의 방법은 고통을 받을 때에 모든 사람이 고통을 받자마자 그 의미를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항상 우리가 고난을 생각할 때, 옛날에 찬송가에 있었는데 다 빼버렸습니다. 빼버린 것이 나는 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즐겨 고난 길 가도록 나와 함께 동행 하소서. 그건 진짜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많이 고난을 받을 때는 즐겁게 걸어가십시오. 그것은 아무에게나 주는 특권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자기가 현재적으로 그렇게 말하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회상을 할 때 참 고난을 겪었는데 알고 보니 하나님이 고난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이 아니었더라면 도저히 받을 수 없었을 그런 놀라운 위로를 갈피갈피 그 고난 속에서 주셨구나! 아 좋으신 하나님! 우리들이 살아온 우리의 인생의 길이 결코 행복으로 가득 찬 길이 아니었는데도 우리가 마지막 성도로서 죽을 때에 나의 걸어온 인생의 길이 주님과 함께 행복했었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B. 고통의 의미를 깨달음과 목적을 이해함
더 큰 것은 고통의 의미를 몰랐었는데 고통이 정말 컸었는데 그 고통 속에서 그 고통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고통의 의미를 알고 그 고통을 주신 더 큰 목적에 대해서 깨닫게 될 때 그때에 내게 일어나는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터치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럼 어떤 마음까지 드는가 하면 정말 이런 고통을 하나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시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래된 연못 같은 곳에 가보면 연꽃이 핍니다. 연꽃은 아주 밑이 드려다 보이는 맑은 물에서는 안자랍니다. 어디에서 잘 자라는가 하면 아주 지저분한 연못 속에서 잘 자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연꽃에 대한 약간 반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의 상징이니까, 일부러 한번 흙탕물을 끼얹어 봤습니다. 놀랍습니다. 시뻘건 흙탕물을 확 끼얹어도 데구르르 굴러 내리고 그 자태가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뭐냐 하면 세상이 더러우니까 더럽게 산다.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그걸 보면서 느꼈습니다. 어떻게 저 사람들은 저것을 기가 막히게 발견해서 상징으로 삼았을까? 교회에는 그런 상징이 없습니다. 실험을 해보니 한 방울도 그 위에 머물러 있지 않고 굴러 내립니다. 마지막에 가끔 남아 있는 물방울이 있는데 잎사귀 위에 있을 때에도 옆으로 퍼져 있지 아니하고 동그란 구슬처럼 위에 서 잇다가 물결이 흔들리면 데구르르 굴러 내리고 그것은 뽀송뽀송한 채로 있는 것입니다. 썩은 오물들이 있는 연못에서 그 연꽃은 더욱 크게 화려하게 꽃을 피면서 자기 자신의 자태를 뽐내는 것입니다. 사람이 누가 와서 끼얹고 비가 창대같이 쏟아져서 연못의 지저분한 물이 요동칠 때마다 오히려 연꽃은 그 고고함을 드러냅니다.
이런 것입니다. 시대가 너무 부패했습니다. 아니면 교회가도 그런 아우라를 볼 때가 없습니다. 왜 그렇게 타자의존적인 생각만 갖습니까? 그렇게 지저분하니까, 이 세상에 아우라가 있는 사람들로만 꽉 찼으면 웬만한 아우라가지고 거기에서 주름이나 잡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없으니까 그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 내가 아우라를 보여야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우라는 자기가 어떻게 하든지 자기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닮아서 주시는 많은 고난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위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는 동안에 자기가 변화되면서, 진짜 아우라가 있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아우라를 느꼈다고 할 때 황당해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진짜 아우라가 있는 사람입니다. 아 그것 밖에 못 느꼈어? 좀 더 보여 줄까? 내 얘기 좀 들어봐.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줄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 고통의 의미를 하나님 앞에 배웠습니다. 확고하게 이 고통의 목표가 무엇인가? 왜 하나님이 사랑하시면서 이런 고통을 주시는가?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의도하시는가를 배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괴롭게 하고 혹은 어떤 환경들이 자기에게 고통을 주어도 그 의미를 깨닫고 나니까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로가 넘치도록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관용을 사람들에게 알게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당신의 고난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셨습니다. 신성으로 보자면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르는 것도 없고 더 배워야 할 것도 없습니다. 인간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죄는 없으시고 완전한 인간이셨지만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배워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서에 말하기를 그가 아들이라도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우셨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불순종하던 사람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진짜 인성을 입고 오셔서 그 사람의 몸으로 낮아지셔서 멸시와 모욕을 당하시고 마지막에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배반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는 그 모든 고난의 과정을 인성으로 겪으시면서 인성으로서는 그것을 겪기 전에는 알 수 없었던 하나님께 이 육신을 가진 인간들이 순종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가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에게는 쉬운 일이었습니까? 어려운 일이었습니까? 예수님에게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죄가 없으신 그분에게도 그 일이 어려운 일이었다면, 마지막에 뭐라고 하십니까? 아버지여 할 만하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랬다면 죄가 남아 있고 불결한 인간, 신도 아닌 이 인간들이 그 죄와 더불어 내적인 이 부조화 속에서 싸우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순종하면서 걸어가는 그 삶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이었을까 하는가를 예수님이 체험하셨기 때문에 자기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실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은 안 그렇습니다. 긍휼 머리가 없습니다. 자기도 자기 자식 공부 못한다고 쪼입니다. 요즘은 그런 말 안하는데 옛날에는 어른들이 만날 내가 너보고 돈을 벌어 오라고 했나? 땅을 파라고 했나? 사실 그게 더 쉽습니다. 공부 못하는 애들 매일 야단치는 동안에 자기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속 썩인 생각은 새카맣게 까먹습니다. 고난을 통해 아무것도 못 배운 것입니다. 생각을 하면서 애들을 야단쳐야 합니다. 안 되는 것도 있구나. 자기가 다 경험한 것입니다. 하도 엄마가 야단을 치니까 엄마는 고등학교 때 공부 좀 했어?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이 육신을 입은 몸으로서 그 순종을 자신의 온 피를 말리고 살을 태워가면서 배우셨기 때문에 자기의 사람들이 고난과 시련 속에서 당신의 뜻을 살려고 할 때 요만큼 살아도 이만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위로를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늘이라도 좋습니다. 예배 끝난 후에 아 내가 이런 것을 하나님 앞에 순종 안하고 살았구나. 내가 이렇게 살아야겠다. 하고 결심합니다. 그러나 내일 시작해보면 그것이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한번 고통을 견디면서 성취하기로 몸부림 칠 때 우리의 인내심이나 우리의 담대한 결단이 아니라 그렇게 자기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며 손을 뻗어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그분을 붙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신비한 방법으로 힘을 주시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게 바로 이 사도를 만물의 찌꺼기와 같이 여겼던 이 사람을 힘주시는 방법이었습니다.
C. 고통보다 큰 관계의 사랑을 알게 하심
언제나 연약하고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만물의 찌끼와 같은 그 마지막 한계점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그런 물리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시련들을 하나님이 또 다른 물리적인 힘으로 그것을 이기게 해 주실 때도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과 우리 사이에 있는 이 관계가 얼마나 놀라운 사랑의 관계인지를 피 저린 고난의 순간들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각인을 시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이런 분이셨구나. 나를 이런 한계 상황 속에서도 내가 당신의 이름을 부를 때 나를 기억하시는 하나님이시구나.’ 아무리 내가 내편에 서서 내가 섬기며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아도 정말 부끄러운 것뿐인데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련의 순간에서 당신의 이름을 부를 때 귀를 기울이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찬송)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
하나님이 그렇게 관계의 기쁨을 통해서 고난을 이기게 하십니다. 우리 서로 나눈 우리 서로 받은 기쁨은 알 사람이 없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좋은 것 하나도 없는 시련의 길을 헤치면서 왔는데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환란을 통해서 주님을 향한 더 깊은 신뢰를 갖게 하셨습니다.
Ⅳ. 적용과 결론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게 만드는 사명이 있습니까? 밥을 먹다가도 목이 메게 만드는 사명이 있습니까? 어떤 그 일들이 이루어지면 오늘이라도 그 일의 성취와 함께 기쁘게 눈을 감을 수 있는 가슴 뛰게 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자기의 삶의 목표가 있습니까? 그것이 있는 사람들은 고난의 길을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는 사람들은 무미건조한 삶을 살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런 그리스도인으로서 소명이 없는 무미건조한 삶은 신자로서 행복하지도 않고 인간으로서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속에 수많은 혼란과 어두움, 이런 것들이 자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다시 한 번 마음에 손을 얹고 우리의 신앙에 옷깃을 여밉시다.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우리를 당신의 자녀를 삼으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어느 자리에 세워주셨는지를 명심하고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날 아침까지 가슴 설레게 하고 가슴 뛰게 하는 하나님 나를 향한 목표가 있는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고난을 통한 복 주심(2015.09.02 수요예배7)
7. 신자가 고난을 당할 때 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녹취자: 김세나
Ⅰ. 들어가는 말
베드로전서는 핍박으로 고난을 받는 성도들을 위해서 쓴 편지입니다.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베드로는 우리 신자들이 당하는 시련과 고난의 뜻을 복음으로 밝혀야 했습니다. 결국 우리 인생은 끊임없이 시련과 역경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저 사람은 아무 근심이 없겠다고 부러워하는 사람도 사실은 아프고 힘든 시련이 그에게 있었고 지금도 그런 시련을 당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높낮이가 있지만 누구에게나 이 세상사는 동안에 시련과 고난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성숙한 견해가 바로 신앙의 깊이입니다. 그저 아직 신앙이 어리고 얕은 물에서 차각 거릴 때에는 그저 하나님 앞에 모든 복을 자기 혼자 받은 것 같고, 복이라고 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형통과 평안이라고 생각되지만 인생을 더 많이 살아보면 믿음으로 살지 않는 사람에게만 시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도 시련이 있고 옳은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에게도 고난이 있고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것과 같은 그러한 역경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은 결국 그렇게 불완전한 세상에서 끊임없이 요동치는 삶을 살면서 주님 없을 때에는 요동치는 인생 속에서 교만하고 좌절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앙이 깊어지고 난 다음에는 그 요동치는 삶을 초월하는 우리의 인생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행복헤 대한 성숙한 개념입니다.
Ⅱ. 신자가 고난 당할 때
오늘 성경에 보면 신자가 고난을 당할 때 어떠한 생각과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하여 나옵니다. 1장에서는 소망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2장 중반부터는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 연결고리 역할을 2장 1-19절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 연결고리가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생명의 돌, 모퉁이 돌은 모퉁이 돌인데 이방인과 유대인들을 연결하면서 하나가 되게 하시면서 동시에 그 돌은 하나님의 생명을 이방인들에게나 유대인들에게나 공정하게 전달해 주시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 생명을 분여 받음으로써 이 세상에서 빛으로 사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존재의 의미입니다. 주님을 몰랐을 때에는 그러한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이 무슨 빛으로 사는 게 인생의 의미고 의인가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에게도 지식의 빛과 양심의 빛이 있으므로 그러한 덕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인생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배웁니다. 나라를 위해서 큰 일을 하고 죽은 사람들을 보면서 그러한 삶이 아주 훌륭한 삶이라고 교육을 받으며 자랍니다. 그러다 보니까 나라를 위해 장렬하게 죽은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뭉클하고 자신도 그러한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전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지만, 정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 된 다음에는 늘 마음속에서 나라를 위해서 살았던 위대한 사람을 보고 뛰었던 가슴이 정말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으로서 사람으로서 완전한 삶을 사심으로써 이 땅에 참 진리가 무엇인지 보여주셨던 그리스도를 보면서 가슴이 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참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의미를 발견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렌즈로 하여 도대체 국가가 무엇인가, 인간의 존엄이 무엇인가, 교회가 무엇이고 세상은 어떠한 것이고 결국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으로 가치 있게 사는 것인가, 그러한 것들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배우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정말 그렇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아주 풍부하게 가르칩니다. 문제는 그 삶을 살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삶을 살아내게 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결국 그리스도 예수께서 교회의 산돌이 되어서 한번 우리를 구원하여 교회를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끊임없이 오늘도 당신의 교회에 생명과 사랑을 분여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도 결국은 이 생명과 사랑을 충분히 분여 받음으로써만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있고 그 안에서 나도 진정으로 복된 삶을 살 수 있고 나의 이웃들도 나를 통해서 진정한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A. 선을 행하도록 부름 받으심
성경은 신자가 고난을 당할 때 이러한 것을 생각하라고 나옵니다. 첫째는 “부르심을 생각하라.”고 나옵니다. 무슨 부르심인가 하면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름을 받았다.”고 나옵니다. 여기에서 “이를 위하여”는 바로 위에 나오는 “선을 위하여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이란다.” 선을 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 앞에 보면 이제 “나그네와 같은 너희들을 권한다.”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자신의 신앙과 세상과 끊임없이 갈등을 빚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그것이 나그네입니다.
제가 어려서 자란 강원도 동네가 있었습니다. 한 때는 말씀을 준비할 때 가곤 하였습니다. 그 마을에 식당이 하나 있었습니다. 음식을 참 잘하셨습니다. 칭찬을 늘 해 드리니까 저만 가면 무엇 하나라도 더 주시려고 하였습니다. 음식을 참 깔끔하게 맛있게 잘 하셨습니다. “목사님, 오늘 마지막 식사를 해드리는 것입니다.” 이유를 물으니까, 순박한 60대 초반의 아주머니였습니다. 원주로 이사 갑니다. “가게에 손님이 오고 잘 되는데 왜 다른 지역으로 가십니까? 가끔 이곳에 와서 식사를 하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목사님, 살 수가 없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30년, 40년 토박이 사람들이었습니다. 3-4년 전에 원주에서 이사를 와서 식당을 열었는데 주위에 있는 식당과는 게임이 되지 않았습니다. 워낙 잘 하여 사람들이 몰렸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마어마하게 큰 식당도 아니었습니다. 닭백숙, 보신탕, 닭볶음탕을 파는 그런 식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은은한 맛이 있습니다. 다 쓰러져 가는 집인데도 사람들이 계속 오는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시기가 났습니다. 되지도 않는 말로 괴롭히고 동네에서 아무도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떠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제가 느낀 것이 있었는데 “이게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구나.”였습니다. 여러분 수백 년 동안 한 성을 가진 사람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 때 타 성을 가진 사람은 살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잘 하려고 하여도 불가능합니다. 그것을 가리켜 나그네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살 때 무엇인가 잘 안 맞고 끊임없이 갈등을 느끼고 하는 것을 우리들이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치러야 할 대가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악을 행하고 잘못 살지만 않는다면 사실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갈등이 일어나고 부딪히며 고통을 받는 것 자체가 자신이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나그네와 같은 사람들인데 이방인들과, 여기에서 이방인이라고 할 때 성경에서 이방인이 두 가지 의미입니다. 하나는 물리적인 이방인이라고 할 때 유대인의 피가 아닌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기독교 맥락 안에서 이방인이라고 할 때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이방인이라고 봅니다. 그러한 불신자들에게 섞여서 살아갈 때 신자이기 때문에 다른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갑니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너무도 싫습니다. “악을 행한다더라.” 그렇게 비방을 합니다. 이 세상이 상식선에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람들에게 광끼가 있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 사람들의 생각이 확 꺾어지고 나면 상식대로 움직이지 않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때 기독교인이 집단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비난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상황이 되었을 때 신자는 어떠한 사람이어야 하는가? 특별히 여기에서 종들에게 이야기 합니다. 너희가 주인에게 봉사를 하는데 주인이 너그럽고 마음씨 좋은 주인도 있지만 까탈스럽고 못된 주인도 있다. 그런데 너희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안다. 그 사람들을 너희가 대할 때 너희에게 선하게 대해주는 주인에게만 잘 복종하고 그렇게 선을 행하지 말고 나쁜 사람들에게도 선하게 생각하고 너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부당하게 핍박하고 고통을 주면 그럴 때에도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 아픔과 슬픔을 참아라. 그것은 정말 아름다운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아름답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짓밟히고 억압되어서 아주 누추한 사람으로 비난을 받아도 이것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잘 견디면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실 때 정말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참 위로가 되었습니다.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고난 속에서 마음이 거칠어지면서 자신의 삶의 상황에 대해서 불만을 쏟아놓고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그 악을 악으로 대항해서 갚으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불신자와 다를 바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 사람들의 아우라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과시하고 까칠하게 자기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러한 종류의 배타적인 아우라이지만 그리스도인의 아우라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사랑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아우라입니다. 그래서 한 그리스도인이 아무리 거룩하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신앙심이 뛰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을 품고 용납할 수 있는 그러한 아우라여야 합니다. 이것은 그 사람들의 죄와 악행을 용납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존 오웬이 설명한 것과 같이 죄를 미워하더라도 그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고 한 인간이 여러분 앞에서 어떠한 야비한 행동을 하고 악을 행하고 혹은 주위 사람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피해를 입힌다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인이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섬김은 아우라가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옳지 않은 양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깨우치고 그를 반성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이렇게 의롭게 살면 나에게 아주 바람직한 대가가 주어질 것이라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루어진 것이겠습니다. 끊임없이 불의에 항거하고 그 어떠한 권력과 힘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짓밟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방치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행하고 있는 올바른 일에 대해서 메아리를 기대하고 혹은 그것에 대한 마땅한 보상을 바라면서 의를 행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의 정신의 힘이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 결과가 항상 실망스럽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아주 긍정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정말 많은 경우 중에 일부분입니다.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하였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성공한 것도 아닙니다. 불의와 싸우면서 정의를 부르짖었던 사람들 중에는 비명에 간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선을 행하였다고 칩시다.
그러면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가족에게 선을 베풀고 용서하고 은혜롭게 대하고 이웃들과 심지어는 원수에게 까지 그렇게 대하였는데, 지금은 심지어 신앙생활도 오래 하였고 인생도 오래 살았고 연륜도 깊어졌는데 지금은 못하겠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줘봤자 알아주지도 않는 인간들인데 언제까지 내가 그렇게 해야겠는가, 거꾸로 옛날에 내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무슨 유익을 가져왔는가? 자신의 신앙적인 삶에 대한 전반적인 회의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한때 마음을 다해서 용서한 원수를 다시 미워하는 일이 가능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겸손해질수 있습니다. 아, 그때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 나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구나. 그때 그 모습이 나의 참모습이 아니라 지금 이렇게 못하고 있는 것이 나의 참모습이구나. 매일매일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누가 그 점에 있어서 나는 이미 다 이루었다, 나는 완성된 인간이고 나는 그러한 것에서 달관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이미 이르렀다 함도 아니요 그리고 이미 붙잡았다 함도 아니라.”
더욱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핍박을 받거나 혹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어떤 불이익을 당할 때 그들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악으로 갚는 대신 긍휼과 사랑으로 대해주는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단순히 내가 한번 참았다, 두 번 참았다 하는 이야기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자녀는 처음 창조될 때에도 선을 행하도록 선한 일을 위해서 지은 바 되었고 인간의 죄 때문에 좌절되었던 인간 창조의 목적이 구속을 통해서 다시 회복되었는데 그렇게 우리를 거듭나고 새 사람이 되게 하실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선을 행하게 하기 위해서 새 사람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마지막에 그 사람이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지식이나 신앙의 체험이나 신비의 체험이나 심지어는 신학적인 지식을 통해서도 드러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선한 삶입니다. 착한 삶. 정말 주님이 보시기에 선한 삶. 그것이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의 열매입니다. 예수님도 착한 행실을 행하고 선한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해서 당신의 복음 전파 속에서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무의 비유, 열매의 비유, 많은 비유들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선한 사람들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착하지 않습니다. 그냥 단지 예수를 믿을 뿐이지 착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놓으신 계획과는 다른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주변의 상황이 자기 자신을 선한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한다고 말합니다. 자, 성경 속에 나오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이 선을 행하기에 적합한 환경 속에 살았습니까? 선지자들이 그랬습니까? 모세가 그랬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그러셨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까? 아니면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랬습니까? 언제나 그들은 이 세상에서 외인이요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이 세상이 악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인간의 창조의 목적에 맞지 않게 그것을 거스르며 사는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의 본 모습이라고 보았습니다.
오늘날은 그리스도인들조차 우리들이 노력하면 이 세상이 조금씩 조금씩 복음이 없이도 충분히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금씩은 바뀔 수 있습니다. 지금도 40년 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지지 않았습니까? 차 세워 놓으면 바퀴를 뜯어가고 말도 안 되는 세상이지 않았습니까? 전차나 버스 타면 가방 소매치기들이 당하는 일은 일상이었습니다. 나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해 놓으신 그 마지막은 아니지 않습니까? 동성애도 좋다. 상대주의도 좋다. 종교다원주의도 좋다. 모든 것이 다 용납된 가운데 평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그 세상이 사람들은 평화롭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해 놓으신 목적을 이루신 상태는 아닙니다. 그래서 아무리 국민소득이 높아지고 3만 불이 넘었으니까 잘 살게 될 것입니다. 더 잘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곤고한 사람들은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교회에서 예수 믿고 이런 복을 받아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콧방귀도 뀌지 않을 사람들이 많을 시대가 될 것입니다. 그 때 그들에게 무엇을 가지고 선교를 하겠습니까? 사람들을 전도하면 전도된 사람들과 전도한 사람들에게 경품을 주던 시대도 있지 않습니까? 바가지도 주고, 쌀도 주고 밀가루로 주던 시대가 있었는데 그때는 됐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누가 그것을 받으러 교회를 오겠습니까? 그러면 정말 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어제도 교계 지도자들을 만나 이야기 하였습니다.
옛날에는 교회가 크면 사람들이 일단 존중을 하였습니다. 몇 천 명, 몇 만 명 모인다고 하면 그래도 그 안에 뭐라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였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여의도 광장에 수십만 명이 모이고 백만 명이 모이면 아, 기독교인이 아주 굉장하구나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손톱의 떼 만큼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세상 사람들은 이제 그러한 물리적인 덩치나 힘을 가지고 그렇게 무엇인가 과시하는 것들에 대하여 아주 염증을 느낍니다. 작은 아이라 할지라도 권력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무서워합니까?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잘못하였는데 “내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알아?” 하면 뭐라고 하는줄 압니까? 너 잘 걸렸다. 한번 떨어져 봐라. 우리는 어차피 바닥에 사니까 떨어져봐라. 그러한 게 이 세상입니다. 진짜 지금 시대에 이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정말 살아가는 것입니다. 행복하면서도 선한 모습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게 바로 자신들이 너무 너무 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최고의 선교는 자기 실존에 의한 선교입니다. 자기 자신의 존재 자체가 행복한 사람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행복이 돈 벌고 출세하면 얻을 수 있는 종류의 것과는 다른 그 무엇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핍박을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베드로가 보내는 편지의 내용입니다.
어두운 하늘이 있기에 별이 빛나듯이 이렇게 진리를 부인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진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줄 만 한 기회가 온 것이고 사람들이 정말 헛된 행복 속에서 기근 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들이 돋보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잘못된 가치에 의해서 혹은 타인의 힘에 의해서 구겨지고 망가지기에는 너무나 고귀한 삶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러한 고귀함과 아름다움의 진정한 품위를 잃어버린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살지 않는데서 모든 문제가 나옵니다. 여러분이 소위 이야기하는 보수적인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인간은 죄인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다.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죄가 아닌 게 없다. 그 설교를 들으면서 아주 가학적인 인간관을 갖습니다. 그 이야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그렇게 설명할 때에는 반드시, 그 강조점이 어디 있는가 하면 네가 받은 구원이 자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인간은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자기의 모든 존재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이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인간관이 아닙니다. 인간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악을 행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런데 자기가 결정하고 악을 행하면 하나님이 놔두십니다. 그것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인간을 그렇게 자기가 결정하고 할 수 있는 존재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인간이 자기의 의지로 악을 행할 때 존엄이 드러납니다. 그것을 잘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저렇게 악을 행하는데도 손목을 부러뜨리고 발길로 밟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걸어갔다가 그 길이 아닌 것을 알고 주님의 은혜를 구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구나. 인간의 위대함을 보게 됩니다. 인간은 그것을 균형 있게 가져야 합니다.
나의 신학으로 보면 많은 교인들이 가학적인 인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때도 매우 나쁩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죄인 중에 골수까지 죄가 사무쳐서 자기는 정말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 없는 절망적인 인간인데 하나님이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죄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주님의 진리를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자유로운 존재로 살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가학적인 인간관을 그대로 가지고 오히려 자기의 악을 정당화 시키는 수단으로 삼습니다. 그게 무슨 칼빈주의고, 올바른 인간관이겠습니까? 거기에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아직까지 회개하고 있지 않은 인간들이 지옥에나 던져서 태워버려야 할 똥 묻은 뗄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랬다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부터가 모순입니다. 그렇게 아무 가치 없는 인간을 위해서 왜 죽으셨겠습니까? 인식하는 우리는 아무 가치 없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구원하고 싶어 하셨을 정도로 우리를 소중하게 보셨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인간에 대한 자기 자존감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은혜도 그러한 자존감을 가지고 살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기에 정말 쓰레기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도 자기도 옛날에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새카맣게 잊어버립니다. 그 사람을 정죄하고 마치 하나님이 피가 튀기듯이 인간을 심판하셔서 장렬하게 당신의 말하자면 위엄을 보여야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잘못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선을 행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목적도 똑같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항상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편지의 수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편지가 얼마나 가혹한 편지이겠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핍박이 들끓습니다. 수많은 교인들이 잡혀가고 형벌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것 때문에 까다로운 상전에게 계속 박해를 받으면서 그렇게 괴롭힘을 당합니다. 세력을 규합해서 봉기해라. 아니면 너희에게는 천부적인 인권이 있으니까 그것을 짓밟으려고 할 때에는 무력으로 항쟁하라.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그런데 참아라. 인내해라. 그리고 그것이 힘들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왜 입니까? 어떤 악을 행하든지 그리스도인들은 짓밟히면서 비폭력적으로 수많은 밟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렇게 악한 사람들에게 그렇게 까다로운 사람들에게 악의를 품은 사람들에게 네가 이 세상의 지위로는 짓밟히지만 너는 바로 그 때가 참 인간의 고결함이 무엇인가 그리고 선하게 사는 사람이 무엇인가 그것을 보여주어야 할 때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삶의 지시가 9절과 연결이 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 빛으로 드러나게 하신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려 함이라.” 그래서 너희를 하나님이 구원해주신 후에 여전히 죄가 많고 불완전한 세상에 너희를 두신 것이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목적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신자로서 이 세상을 지내며 많은 시련과 고난을 당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잘못하였기 때문에 당하는 것도 있고 사실은 잘못하였지만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잘못하여서 고난을 당한 적도 있고 정말 그러려고 의도하지도 않았고 사실 하나님의 판단으로 볼 때 그렇게 모질게 사람들에게 대우를 받을 정도로 악을 행한 것이 아닌데 그렇게 나에게 되갚아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그리스도인의 하나의 윤리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 악의 최종적인 종착역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나에게 악을 행할 때 복수로 꿈꾸고 악을 악으로 갚으면 이 악이 튕겨져 나와서 온 방을 돌아다니는 공처럼 악이 또 다른 악을 만들고 또 다른 악을 만들면서 가게 됩니다. 그것을 자신의 최종적인 종착역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조용히 침묵하면서 마음속으로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그러면서 흔들리지 않는 걸음으로 똑바로 걸으면서,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습니다. 물론 이런 편지를 받았던 많은 사람들이 사도베드로의 교훈을 따라 그렇게 살았을 것이고, 그렇게 산 모든 사람들이 다 그 핍박 속에서 영광을 받은 것을 아닐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바보같이 뚜벅뚜벅 걸어가다가 뚜벅뚜벅 죽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죽어서도 그 피가 외치는 사람이 됩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자, 문제는 무엇입니까? 과연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이유 때문에, 언젠가 주님을 만났다는 이유 때문에, 언젠가 내가 기독교의 진리에 눈을 떴다는 이유 때문에 내가 현재적으로 그 삶을 살아낼 수 있느냐. 그리고 또한 항상 그렇게 살아낼 수 있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끊임없이 어제 내 생애에 있었던 위대한 신앙의 족족들을 없는 것처럼 덮고 그리고 오늘 아무 것도 없는 사람처럼 주님이 나를 붙들어 주시고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주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자가 고난을 당할 때 기억해야 할 일입니다.
Ⅲ.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시련이 와도 마음에 그늘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지나면서 핍박을 받거나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거나 혹은 예수 믿는 방식대로 산다는 이유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그것을 억울해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그러한 인생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신자가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선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신자는 아무리 고매한 성화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이게 무게의 중심추가 여전히 악에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사람이 계속 착한 신자가 되려면 하루도 쉬지 말고 기도하고 말씀의 은혜를 받고 회개하고 다시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악한 사람이 되려면 특별히 나쁜 일을 안 해도 악한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무게 중심이 여전히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큰 섭리 속에서 그렇게 놀라운 구원의 은총을 입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예전에 무지한 어둠 속에 살았을 때와 비교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진리의 빛을 알고 신학적인 지식을 갖게 되었어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선한 삶이 저절로 굴러갈 수 없다는 것을 매순간 보여줍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주님이 주신 것들을 의지한 것은 주님 자신을 의지하는 것과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동의어가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의 빛을 받고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났고 하늘의 신령한 비밀들을 터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오늘 주님께로부터 오는 끊임없는 은혜의 힘이 없으면 비록 그가 죄 없이 애매하게 고난을 올바른 일을 위해 당한다고 할지라도 마지막에 그것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선으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좋은 일, 착한 일을 하다가 마음이 망가지는 일이 없겠습니까? 많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그 선한 목적을 위해서 살아가려고 애 쓰다가 이런 시련과 어려움이 만나서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의도대로 지탱할 수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난을 통한 복 주심(2015.09.09 수요예배8)
8. 신자가 고난을 당할 때 2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녹취자: 오희열
I. 본문해설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 한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 자녀 삼으신 것이 선을 행하도록 부르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종들에게 사도는 말합니다. “선하고 관용하는 주인들에게만 순종하지 말고 까다로운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말입니다. 사람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 부름이 바로 선을 행하도록 부름을 받은 그 부르심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어떤 착한 행실이 메아리가 되어서 돌아올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우리는 실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종 우리 자신이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동기는 자기 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현재적인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II. 신자가 고난을 당할 때
A. 그리스도의 고난 생각함
두 번째로 오늘 생각해보려고 하는 것은 신자가 고난을 당할 때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모든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생명이 있는 것들은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평안하고 행복하고 만족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그 생명의 가치를 느끼면서, 물론 우리들이 전혀 생물을 죽이지 않으면서 생존할 수는 없겠지만, 그리고 또 어떤 생물은 죽이고 번식을 통제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이 세상에 이루는 방법이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생명자체에 대한 존중심을 갖는 일은 우리에게 매우 필요합니다. 그것이 아주 작은 미물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고통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더더욱 하나님이 스스로 만족하고 행복하신 것과 같은 상태를 끊임없이 갈망하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은 고통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을 갖기 전에는,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의미를 찾는 일에 매우 더디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방식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았던 사람들입니다. 왜 입니까? 무엇이 진정한 선인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제까지 내가 살면서 겪었던 모든 불행과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이 하나님의 선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진정한 가치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재물을 누리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수많은 사람을 자신의 권력으로 지배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신 그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데에 인생의 진정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거기서 인생이 의미를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 믿기 전에도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 없이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제가 어떤 엄청나게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교육을 많이 받은 부모 밑에서 학습된 것도 아닌데 열다섯 살 먹은 아이도 교회 가는 길에 논둑에 엎드려 통곡하고 울면서 ‘내가 왜 살아야 하나, 이 세계는 무엇인가, 나는 왜 사람이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을 했는데 그것은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모든 사람들 속에 있는 질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표출을 하고 어떤 아이들은 그게 무언지를 몰라서 스마트 폰에 매달리고 게임에 매달려서 그 일을 눈이 시뻘겋게 되도록 할 뿐이지 결국은 모든 사람들 속에 있는 질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몰랐을 때, 그런 질문을 수없이 던졌지만 그 답을 제대로 찾을 수가 있었습니까? 그래서 눈물을 펑펑 흘리고 일어나서 눈물을 닦으면서 ‘일생동안 나는 철저한 무신론자로 살리라, 신이 있다고 해도 나는 나의 태도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했던 것입니다. 이런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미친 짓인 것입니다. 그런 망상 속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인생의 의미를 집요하게 물으면 물을수록 이상한 확신을 가지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진리와는 다른 방향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거기에도 이상한 의미의 또 다른 존재의 울림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를 반영하는 진정한 울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그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왜 죄 없으신 그분이, 의인도 아니고 훌륭한 사람들도 아닌 이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까? 그것이 단지 비참하게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인간들이 형벌을 받을까봐 불쌍해서 뿐만이 아니라 그들을 다시 살려서 당신이 아니면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그 길을 따라서 살아가도록 만드시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해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였습니다. 거기에서 발견한 것이 ‘아, 그렇구나.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이시구나.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선을 베푸시는 것은 당신의 그 선을 따라 살게 하시기 위함이구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각도에서 바라보니까 이제는 우리의 인생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의 의미를 추적해갈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탈을 쓰고 사는 동안에 끊임없이 멈추지 말아야할 질문이 “의미가 무엇인가?” 이것입니다.
어떤 철학자가 강연에서 말하기를 “똑바로 서서 자기 발끝이 보이지 않는 인간은 사람이 아니다.”했습니다. 저는 이 얘기를 들을 때 너무 마음이 상했습니다. 책에서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식(食)과 색(色)을 통제할 수 없는 인간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니까 각자 자기 견해가 있을 수는 있겠습니다마는, 이 세상에는 먹는 것조차도 자기 마음대로 통제가 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더구나 그것을 색(色)까지 연결시킬 때는 통제가 안 되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런 사람들은 인간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무슨 철학을 하든지 자기가 이미 높은 곳에 오른 것처럼 사람을 깔보면서 하는 철학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지성이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아우라는 그렇게 까칠하게 남을 깔보고 위에서 욕설을 퍼붓고 인간도 아니라는 말을 마구 퍼붓는 그런 아우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아우라에 기죽지 않습니다. 다만 그 사람들이 하는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반응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여러분이 모르는 학문의 세계를 누비면서 무엇을 말한다고 해서 기죽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결론이고 답이지 그것을 전개해가는 과정만이 아닙니다. 저는 왜 이 얘기만하면 열정이 솟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마음도 고쳐야할 것입니다.
결국은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하나님의 선을 흐르는 물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물이 한 방향으로 흐릅니다. 그러면 그 방향으로 떠내려가고 있는 모든 것들은 그 물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 물이 자기가 가고자 하는 같은 방향으로 자기를 밀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거스르고 살고 싶으면 엄청난 저항으로 느껴지고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고통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질서 속에 있는 느낌, 그 모든 정신의 상태가 고통입니다. 내가 그것을 원하지 않고, 이것은 바로 우리 마음속에 있는 악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악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고통을 겪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에 대한 최고의 입증입니다. 그러면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으셔서 우리의 고난을 막지 못하신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최소한, 하나님이 능력이 모자라서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것을 방치하신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형편을 이해하지 못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방치된 상태에서, 그분이 그렇게 하시려고 하신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그렇게 고통을 당한다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넓게 본다면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의지 속에서, 그 의지가 적극적으로 그것을 원하는 의지이든지 소극적으로 허용을 하는 의지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의지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속에서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짧게는 자신의 고통을 종식시키는 길이고 먼 안목으로 바라보면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고통가운데 두시면서라도 그들을 당신의 선 안에서 행복하게 하시려는 계획에 부합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대해서 의미를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신앙에 있어서 이 의미를 묻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만사가 내 뜻대로 잘 된다면 의미를 물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의미를 물을 정도로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없습니다. 둘이 딱 붙어서 가는 것입니다. 성공하고 잘 나갈 때에 신의 이런 번영과 성공의 의미를 아주 정직하게 물으면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은 상당한 신앙의 깊이를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의미를 묻는 것은 괴로워서라도 가끔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 나갈 때에 나의 이 번영의 의미가 무엇일까?, 그리고 사람들이 박수를 치는 그 성공을 객관적으로 놓고 이것이 나에게 주는 의미가 도대체 무엇일까? 내가 이룬 이 업적과 성취, 성공을 마치 나와 상관없는 것처럼 객관적으로 밀쳐놓고 조용히 생각하면서 인생에 대한 그 의미를 객관적으로 묻는 것은 굉장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돈 때문에 시험에 들거나 번영했기 때문에 교만해져서 인생을 시궁창에 곤두박질치게 만드는 일들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난 속에서도 의미를 묻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수없는 펀치를 맞기 때문입니다. 권투를 해 보셨습니까? 싸움을 해보셨습니까? 멀찌감치 떨어져서 싸울 때에는 상대방의 동작이 다 보입니다. 그런데 오른쪽, 왼쪽, 어퍼컷을 맞으면서 별이 세 개쯤 동시에 뜨게 되면 머릿속에서 필름이 다 끊어지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싸움을 정말 잘하는 사람은 이런 때에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주먹이 어디로 들어오는지, 발이 어디로 들어오는지를 보면서 대항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못하기 때문에 싸움꾼이 아닌 것입니다. 정말 싸움을 잘 하는 사람은 벽돌이 눈으로 날아들어도 눈을 똑바로 뜨고 그 벽돌을 본다고 합니다. 어차피 눈을 감으나 뜨나 맞는 것은 똑같기 때문이랍니다. 이처럼 고통 속에서도 이렇게 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잘 나갈 때는 잘나가기 때문에, 고통 속에 들어갔을 때는 고통 때문에 의미를 묻는 자기 자신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 휘말려 들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탕에 취하고 환경에서 받는 고통으로 인한 생활의 염려와 근심에 마음이 다 찢어져버려서 하나님을 향해 모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인생에 있어서 대부분의 시간들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도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사색하는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나방처럼 빛이 비취면 “빛이다!”하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거기에 전기로 해충을 잡는 장치가 있는지, 물에 빠지게 되는지 생각도 안하고 달려들다가 쳐 박히기도 하고 전기에 감전되어서 놀라 도망치다가도 금방 까먹고 다시 그 불빛으로 다시 달려드는 것입니다. 이 일을 머리가 새까맣게 타서 곤두박질 칠 때까지 반복하는 것입니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사색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가 하는 기도는 대단한 기도일 수 없습니다. 그가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감정을 자극하는 내용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색 혹은 묵상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묵상을 하면서 어떤 진리들이 계속 잠겨서 자신의 뼈와 갈피갈피 속에 스며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와 은혜의 지배를 이야기할 때, 죄가 우리의 갈피갈피마다 스며들어 있는 것처럼 진리에 대한 묵상이, 의미를 묻는 우리의 마음 갈피갈피에 스며들어서 그것들을 다 녹여낼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성찰해야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기도가 깊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계속 쌓이면서 진리가 자기 뼛속까지 깊이 스며들었을 때 말하지 않아도 존재의 울림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아우라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것은, 고난을 받을 때에 고난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허공을 향해서 그 의미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선한 목적을 향하여 살려고 몸부림 칠 때 어떤 식으로 이 세상에서 대우를 받으셨는지를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어떤 대우를 받으셨습니까? 요즘으로 말하자면 그분은 이 세상에 오셔서 보건 복지부장관에게도 표창을 받으셔야 했고, 교육부 장관에게도 표창을 받으셔야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가르치고 베푸신 착한 일들을 위해서 당신을 온전히 희생하며 헌신하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시면서 누구를 해롭게 하고 누구의 재물을 빼앗거나, 누구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진리가 아닌 다른 일로 그를 수치스럽게 하셔서 그들의 명예를 더럽힌 적이 있습니까? 진리 자체 이시면서도 무지한 사람들을 향해서 인간도 아니라고 깔보거나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진짜로 사람을 죽이고 민란을 일으킨 바라바는 살려주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그랬습니까? 그분이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이 완전한 선을 추구하며 사신 분이었기 때문에 악한 세상이 그분을 버려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순수한 신앙을 나름대로 추구하면 살려고 할 때, 자기와 맞지 않고 거스르는 사람들이 일생동안 하나도 없었다면 그는 진리를 따라 산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그렇게 선한 세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좌충우돌 부딪히면서 자기 모난 성격 때문에 수많은 사람과 부딪힌 것을 마치 자기가 진리의 화신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처럼 망상에 빠진 사람도 온전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고난을 당하면서도 자신에게 악을 행하여 고통을 준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그리스도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그렇게 모질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향해서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로마 군병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육신으로서 예수님은 예전에도 그런 고통을 못 느껴 보신 분이셨습니다. 육신을 입으시기 전에는 하나님이셨지만 육신을 입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에 대해서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모르시는 것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인성을 입으신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그 고난을 배웠던 것입니다. 그 고난이 얼마나 컸던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하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속에서는 그렇게 당신 자신에게 끔찍한 고통을 가하는 그 사람들로부터 고난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고통을 헤아린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자신을 이렇게 십자가 못 박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을 형벌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그들을 위해서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변명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저희가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저희를 용서해 주십시오.”하며 하나님께 눈물로 비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고난을 당합니다. 대부분의 고난은 우리가 뿌려놓은 씨앗들을 거두는 것이지만 드물게 우리는 그런 잘못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위해서 우리는 고난을 당합니다. 혹은 우리가 뿌려놓은 결과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공정한 법칙에 따르면 내가 잘못하기는 했지만 저 사람들로부터 그렇게까지 미움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고 그렇게까지 짓밟힐 정도로 잘못한 것은 아닐 수 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악한 생각을 나에게 마음껏 퍼부으면서 짓밟히는 일을 당합니다. 그리고 이때 종종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운 마음을 가질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결코 하나님은 고난을 당하며 당신을 찾는 사람들을 그렇게 버리고 복수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저는 ‘가족’이라는 책을 쓰고 나서 요즘은 좀 뜸하지만, 한 달 동안 매일 아침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렸는데 그 기간을 통해서 깊이 깨달은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자식에게는 상처가 되는 일을 많이 하셨지만 그렇게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애절하게 눈물을 흘릴 때, 그분이 잘못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만약 지금 다시 살아 돌아오시면 모두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전에도 그랬습니다. 그런 경험이 저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어거스틴이 자식의 ‘고백록’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마니교에 빠지고 머리에 뭐가 좀 들어갔다고 교만하여 까불면서 가슴은 허하지만 말로는 선악에 관해서 변증하며 자기의 삶을 정당화하였습니다. “나는 그래서 고통스러운 길을 걷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나를 내려다보시며 빙긋이 웃고 계셨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아닌 나 자신에게 놀라운 위로가 되었습니다. ‘아, 그렇겠구나. 나같이 이렇게 못된 인간이, 인간성 자체가 못되고 바탕이 잘못된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가 되니까 그 모든 잘못이 사랑의 관계를 갖는 데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이렇게 절절하게 느껴지는데, 그렇다면 무한한 크기의 사랑을 가진 하나님이 우리 같은 인간을 바라보실 때 어떤 마음일까?’ 물론 이 이야기를 하면서 누가 그러듯이, 하나님의 사랑은 태평양처럼 넓고 우리가 아무리 나쁜 짓을 해봐야 배타고 바다에 오줌 한 번 누는 격이라는 도덕률 폐기론자들의 주장을 반복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이것을 명심해야합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선하신 분이시고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분이시고 우리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실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며칠 전에 시를 한 편 읽었습니다. 시를 읽고 정말 가슴이 에이는 것 같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이 두 살 때에 엄마가 돌아가셨습니다. 시 제목이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정채봉 1946-2001)이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습니다.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하며 써 내려가는데 마지막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엄마가 오시면 그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 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 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이것이었습니다. 최근에 제가 몇 년 동안 읽은 시 중에서 최고의 시였습니다. 머릿속에서 희미하게 돌고 있는 무엇인가 엄마에게 대해서 가지고 있던 그리움이 뭘까 라는 것을 그 사람이 정확하게, “젖가슴을 만지고 싶다, 그리고 일생 살면서 제일 억울했던 일 딱 한 가지만 엄마한테 고자질해 바치고 그 품에서 엉엉 울고 싶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엄마는 객관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애들하고 싸우고 돌아왔는데, 솔직히 자기 아들이 잘못해서 맞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엄마는 항상 중립이 아닙니다. 맞고 온 자기 아이 앞에 서 있는 엄마는 “어떤 놈의 자식이 우리 아들, 우리 딸을!” 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여기 계신 엄마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이것이 엄마로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무조건 자기 아이들 편에 서라는 것입니다. 선악에 대한 개념도 없이 무조건 그렇게 하라는 거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잘난 척하지 마시고,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개념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그 아이가 나이가 오십이 되어서 달려와도 자기가 살다가 친구한테 너무 억울한 일 당한 것을 고자실해 바치고 싶은 엄마의 품, 그런 엄마는 죽었어도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런 엄마가 아닌 사람은 살아있어도 산 엄마가 아닙니다. 그 아이의 마음속에는 엄마가 없는 것입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그렇게 가슴을 만지고 고자질해 바칠 품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품안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이 세상에 있어서 나의 인생을 에워싸고 일어나는 이 고통스러운 일과 끊임없는 근심과 고통, 이런 것들의 의미를 정직하게 물어도 괜찮은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 하나님이시라는 확신입니다.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이 괴로움과 시련, 연단, 미움, 고통, 아픔, 이 모든 것들이 절대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인식을 또렷하게 갖는 길이 의미를 묻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지금 내가 악한 자에게 이끌려 번영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진리에 이끌려 번영하고 있는지에 대한 분별력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본을 끼쳐’했습니다. 희랍어로 ‘휘포그람모스’라는 것인데 아주 재밌는 배경을 가진 단어입니다. ‘휘포’는 ‘아래’라는 뜻이고, ‘그람모스’는 ‘쓰다’입니다. 영어의 그람마가 여기서 나오고, ‘그라포’라는 동사에서 나옵니다. 이 뜻은 우리가 어렸을 때 글자를 잘 모르기 때문에 점선으로 글씨를 인쇄해 놓고 그 점선을 따라 그리면 글씨가 되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혹은 어떤 것을 미리 써놓고 얇은 종이 아래에 놓으면 그 글씨가 비쳐서 그대로 따라 쓸 수 있게 하기도 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쯤의 일인데, 제가 탁월하게 좋은 학생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나쁜 학생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해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이해할 수 없는 숙제를 내 주는 것이었습니다. 자연 교과서를 몇 쪽부터 몇 쪽까지 똑같이 써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든 생각이 ‘도대체 이걸 왜 써야하나?’였습니다. 그리고 4학년 밖에 안 된 어린 학생머리에 불꽃이 튀면서 ‘이건 쓸 필요가 없다.’하고 문방구에 가서 먹지를 샀습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동네 친구가 그 숙제를 한다기에, 먹지를 대고 한 장만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친구는 어차피 자기가 써야하니까 써주었습니다. 책받침까지 받치고 쓰니까 잘 써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노트에 붙여서 냈더니 선생님께서 충격을 받으셨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하시는 선생님께 호되게 맞았습니다. ‘휘포그람모스’는 글씨를 미리 흐리게 써 놓거나 이미 써 놓은 글씨 위에 얇은 종이를 대고 그대로 따라 쓰는 것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먼저 고난을 당하시면서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하는가를 본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습자지 같은 얇은 종이 아래 또렷하게 있고 우리는 그것을 그대로 보면서 글과 그림을 써내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앞서 고난을 당하신 그 일의 가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도의 신학적인 지식이 아니라 공정한 마음으로 신약성경을 한 번만 읽으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지극히 기초적인 성화의 교리입니다. 누구도 그런 인상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신약성경을 다 읽을 필요도 없이 복음서만 읽어도 이것은 명백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본을 끼치시기 위해서 이미 남기신 고난, ‘휘포그람모스’를 연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은 끊임없이 피 흘리는 고통일 뿐이고 심지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증거라든지, 혹은 이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굳이 인생에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역설적인 증거로 생각을 하면서 오히려 고난 속에서 믿음이 약화되는 것입니다. 정의로운 마음도 약화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인생 전체, 역사 전체를 펼쳐놓고 어느 한 구간을 뚝 잘라서 좁은 구간을 보면 선이 항상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한 순간을 잘라보면 악의 승리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조각난 삶의 조각들을 연결시켜보면 이 짧은 구간에서는 도저히 생각하지 못했던 커다란 그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지막에 하나님의 선을 좇는 사람들이 이기는구나, 하나님의 사랑의 편에 선 사람들이 이긴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문제는 이것을 알았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때로 어떤 사람은 너무나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는데, 불의와 타협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과 잘못된 동기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번영하고 대접을 받고 이기는 것을 보고, 자신은 부당하게 악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받고 핍박을 받고 정의가 굽어지는 것 같은 현실을 볼 때에도, 악으로 악을 갚거나 악에 대해서 복수를 꿈꾸지 않고 그 악을 선으로 갚으며 그 원수를 사랑으로 포용하며, 그러한 끊임없는 물리적인 박해나 시련과 깊은 정신적인 고통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옳다고 생각되는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 입니다. 어디서 그 힘이 나옵니까?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답을 못한다면, 단순히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으니까 너희도 그렇게 살아내야 돼, 너희 구원받았잖아, 너희는 그렇게 많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잖아 라고 한다면, 구원받은 것도 사실이고 사랑을 입은 것도 사실이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신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사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예수님이 남기신 ‘휘포그람모스’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고난을 통한 복 주심(2015.09.16 수요예배9)
9. 신자가 고난을 당할 때3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녹취자: 오희열
Ⅰ.본문해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신자가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할 때에 그 고난을 악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잘 인내하면서 그 일이 어려울 때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라고 배웠습니다. ‘본을 끼쳤다.’라는 희랍어는 ‘휘포그람모스’인데 밑에 글씨를 쓰고 그 위에 다시 쓰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렇게 고난을 당하고 어려울 때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인내해야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본성에 적합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고난을 당하면서 천 년을 살기보다는 행복하게 1년을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본성은 결코 고난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의 본성은, 우리의 고난이 아무리 올바른 일을 위한 고난이라고 할지라도 회피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어떤 고난이 있을 때, 그 고난의 의미가 참 고상하고 그 고난이 정말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도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으면 그것이 가치 있고 아름답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견디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어떻게 그 고난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어디서 그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나오겠습니까? 하고 다음시간에 하겠다고 말씀드리고 끝났습니다. 오늘 말씀드리겠습니다.
II. 신자가 고난을 당할 때
C. 그의 자취를 따르게 하심
우리가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시련을 당할 때에 가시는 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봅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고 예수님께서 그 길을 걸어가셨으니까 나도 그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마음먹은 모든 사람이 실제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제시대에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했습니다. 더구나 기독교인들이 일제에 항거할 때에는 가차 없이 교회를 쓸어버리거나 혹은 정치적으로 회유를 하려고 했습니다. 신사참배의 문제가 불거져서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모두 감옥에 가는 시대였습니다. 너무 심각해지니까 목사님들이 모여서 기도회를 했습니다. 평신도들도 마음이 답답해서 뒤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 때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한 목회자가 나와서 이야기를 했답니다. “여러분, 나는 오늘 저녁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왔습니다. 제가 혹시 순교하더라도, 감옥에 가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믿음을 지키고 잘 사십시오.” 이 말에 거기 모인 사람들이 커다란 감동을 받았답니다. 그때 저쪽 구석에서 이름 모를 성도 한 사람이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본인은 그렇게 말할 용기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 달 후에 그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하고, 그 용기가 없다던 성도는 감옥에 갔답니다.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옳은 것을 선택했어도, 넓은 의미에서는 옳은 것을 선택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렇게 선택했다고 해서 그것을 자기가 실행할 힘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을 받을 때에, 예수 고난당하신 것을 생각하면서 그의 자취를 따라가는 것은 올바른 선택입니다. 그렇지만 그 올바른 선택을 모두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한 순간의 눈물이나 감정이 아닙니다. 엄연한 현실입니다. 칼바람이 부는 현실 속에서 한 걸음 한걸음씩 발걸음을 옮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루나 일주일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일평생을 살아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듯이 막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고 잘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길다고 말입니다. 은혜 받고 한 6개월만 살다가 죽는다고 하면 한 번 순전하게 살다가 장엄하게 죽겠는데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죄와 불순종에서 회개하고 눈물을 펑펑 흘리며 새벽기도를 나와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물같이 쏟아놓던 사람을, 10년 뒤에 그 자리에서 발견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우리의 경험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3년 뒤에 그 모습을 그대로 그 자리에서 발견하는 것도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더 양보하면 1년 뒤에 그 자리에서 발견하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내가 그런 올바른 일을 선택한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지만 그 선택한 것을 반드시 실행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없는 또 다른 그 무엇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1년에 한 번이나 6개월에 한 번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매 순간 분초마다 붙드시는 주님의 은혜의 손에 붙잡혀 살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실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어떤 사람이 영웅적인 삶을 살았을 때, 그 사람의 위대함을 찬송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 사람 속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아야 합니다. ‘아, 하나님이 저 사람에게 은혜를 부어주셨구나. 그래서 그 은혜 때문에 이길 수 없는 길을 이기면서 걸어갔구나.’ 이것이 마음속에 배어 있어야 합니다.
제가 외국의 학자들이나 목회자들 여러 사람과 교제하며 사귀는데 우리 교회에도 가끔 오셔서 설교하셨습니다. 머리가 하얗게 되신 웨스트민스터 총장님께서 설교하실 때, 통역을 하면서 설교를 하셨는데 교인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것은 그분이 처음이었습니다. 정말 은혜로웠습니다. 이분을 만나면서 제가 참 많이 배운 것이, 서로 하나님께 감사한 일을 나누는데, 그분은 학교에서 있었던 감사한 일들은 나누었습니다. 학교 캠퍼스가 너무 좁아서 확장을 하려는데 400억쯤 들어가는 공사였다고 합니다. 그때 한 사람이 전화를 해서 만나자고 해서 만나보니 그 자리에서 60억을 기부했다는 것입니다. 너무 감사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 있었던 감사한 일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항상 빼놓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기 마음속에서 나오는 언어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멘” 하십니다. 우리도 그렇게 느끼기는 하지만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그렇게 표현하는 법은 별로 없을 겁니다. 물론 가끔 하기도 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이것이 몸에 배었습니다. 한 시간 대화를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열댓 번은 나옵니다. 이걸 보면서 저는 생각하기를 우리들이 항상 하나님의 시각으로 인간을 바라봐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질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주 탁월하고 우리가 이룰 수 없는 무엇을 이루었을 때, 우리는 사람을 칭송합니다. 이런 것은 성경을 알고 지각이 있는 사람에게는 아주 괴로운 일입니다. ‘아, 저 사람이 저렇게 핍박과 시련을 견디었구나, 하나님의 은혜가 저 약한 사람을 저렇게 붙들었구나.’ 하며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붙든 하나님을 찬송하는 간증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설령 간증을 그렇게 못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은 들을 때에, 그 사람을 넘어서 그 사람을 붙드신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를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글씨를 쓸 때, 하얀 종이를 놓고 그냥 써보면 두 줄만 써도 삐뚤삐뚤해집니다. 그런데 밑에 글자가 있어서 비춘다면 똑같이 그려낼 수 있습니다. 써 놓고 보면 내가 쓴 글씨가 아닌 것처럼 예쁩니다. 이게 얼마나 쉬운 일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본을 ‘휘포그람모스’한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본을 남겨두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흉내 내면 됩니다. 그런데 눈물 없이, 땀이 없이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예수님께서 다 가르쳐주신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 의미가 고통 없이 쉽게 갈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예수님이 고난을 받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본을 남겨주셨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따라서 그대로 살아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본성은 그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작년에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의 맡겨진 사명을 위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기꺼이 고난을 받던 사람이 올해는 심통을 부릴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은혜가 떨어지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가 고난을 당할 때 해야 하는 한 가지가 그의 자취를 따르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종종 신자들이 고난을 당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발자취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그분의 마음이 그려놓은 궤적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살아온 발자취는 그 사람의 마음이 그리고 지나간 흔적입니다. 그러면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는 예수의 마음이 그리면서 지나간 궤적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똑바로 살아라.”를 먼저 말하지 않고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불명확합니다. 예수의 마음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뭔지 제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얼굴은 선해 보이는데 비겁한 마음이 있을 수도 있고, 사람이 굉장히 착해 보이는데 엉뚱한 악을 품고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모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다.” 이 말씀이 다가오질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 마음이 그린 궤적을 보여주면서 보이지 않는 눈부신 예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생각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기를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행동을 통해서 그의 마음이 어떠함을 알게 해 준다.” 고 말입니다.
제가 전도사로 있을 때 구역을 하나 맡은 적이 있습니다. 그 구역의 어떤 아이가 있는데 성격이 아주 불안정했습니다. 엄마에게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저는 주일학교를 가르치면서 논리적으로 가르쳤습니다. 떼를 쓰고 고집을 부리는 아이에게는 “얘야, 이건 이렇지?” 하면 “응” 합니다. “그럼 저건 저렇지?” “응” 합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아이가 할 말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두 다리를 쭉 뻗고 장난감을 집어던지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대여섯 살 밖에 안 된 아이였는데 지금 살아있다면 40세 쯤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한 변화가 없는 한 그런 삶을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서 변화되지 않는 한 말입니다. 어린아이라도 자기가 하는 행동을 통해서 그 마음의 성향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해도 가슴에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좋은 것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고 아주 놀라운 것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는데 그게 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그와 동등됨으로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낮추고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 예수님이 살아가신 삶의 궤적을 다 그리면서, 영원 세계로부터 내려오신, 도성인신으로 시작해서 십자가의 죽음까지 다 그리면서 그분의 생애를 그림같이 보여주면서, “자, 이러한 삶이 어떤 마음에서 나왔겠느냐?” 하시면서 빌립보 교인들로 하여금 추상적인 예수님의 마음이 구체적으로 떠오르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 마음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마음의 궤적이 그려낸 그리스도 예수의 삶을 자기 삶과 비교해보면서 자기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얼마나 먼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들어보십시오. 세상의 나쁜 그리스도인은 죄짓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정말 희망이 없는 나쁜 그리스도인은 자기 성찰이 끊어진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오래 살면 살수록 나쁜 사람이 되어갑니다. 혼자 있는 시간에 눈물 흘릴 줄 모르는 사람, 혼자 있는 동안에 정의를 생각하면 마음 아파할 줄 모르는 사람, 혼자 있는 동안에 자기가 악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가슴이 쓰라리지 않는 사람은, 그 사람이 아무리 형법상의 죄를 저지르지 않고 십계명을 어기지 않고 산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죄를 짓고 가슴 쓰라려하고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참회가 있는 사람이, 훨씬 좋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삶의 궤적을 보라는 말입니다. 그분이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하나님이신데 그와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사람의 몸을 가져서 내려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르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육체에 있는 동안에는 모르는 것이 있도록 그 신성을 인성 아래에 양보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감추고 사람처럼 내려오셔서 배고플 때 배고프시고, 추울 때 추워하시고, 더울 때 더워하시고, 많은 길을 걸었을 때 피곤해하시는 그런 불완전한 인간의 모든 한계를 그대로 떠맡으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참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참 인간의 본분이, 참 인간의 마음이 어떠해야 함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누가 이 세상에서 “나는 이미 다 이루었다. 완전하다.”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누가 그렇겠습니까? 신문이나 방송에 나올 만한 죄를 하루에 한 번도 짓지 않고, 적어도 한 사회의 시민으로서 누구에게 손가락질 받을 일을 안 하고 하루를 살고도 저녁에 들어가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침묵하면, 이렇게 하루를 산 것이 정말 부끄럽게 느껴지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눈물이 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루를 산 궤적은 내 마음이 그려놓은 궤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하려고 노력을 해도 항상 하나님의 표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이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완전한 표준에 우리 힘으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함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하루를 반성하면서 눈물로 하루 일과를 지우는 것입니다. 미워해서는 안 되는데 미워했고, 옳게 고난을 당할 때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대신에 그의 악을 악으로 갚을 마음을 가졌던 이런 모든 것들이 생각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나불거리는 입술의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앞에 있는 삶을 어떻게 하든지 살아내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지 못했을 때는 길이 있습니다. 항상 우리가 예수님처럼 순결한 상태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고난을 당하지만 우리가 개념 없이 행동했기 때문에 인과응보로 고난을 당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우리들이 불순종의 씨앗을 뿌렸기 때문에 그것을 거두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처럼 이렇게 이 세상의 악에 대해서 반응하며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렇게 온전하게는 반응을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불순종으로 뿌려놓은 씨앗으로 거두는 고통인데도 마치 자신은 완벽하게 정의로운 인간이고 저 인간이 하도 더럽고 악해서 끊임없이 자기를 찌른다고 생각하면서 시편을 읽고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악인의 이빨을 치소서, 턱을 날려버리소서! 짓밟아 뭉게 버리소서!” 이런 것을 읽으면서 말입니다. 시편은 그런 식으로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왜 예수님께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한 악인들을 위해서 용서를 비는 기도를 십자가에서 드리셨겠습니까? 그때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성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들이 와서 “당신 같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신은 정말 올바른데 저 인간들이 나쁜 사람들입니다.” 하고 이야기를 해도 자신은, 자신이 뿌려놓은 불순종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 앞에 모자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 고난을 통해서라도 내가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여기에 나를 세우셨다고 생각할 때 그런 고난을 당하면서 어떻게 그 사람들에게 원수를 갚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때 묻은 자신의 모습, 모자란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나를 박해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로부터 진실한 회개가 나오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그렇게 많은 은혜와 진리의 빛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거기까지밖에 되지 못한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죄송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고치지 못하고 떠내려 보낸 자신의 잘못된 신앙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항상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아니면 그가 만약 죄를 지었다면 거기에 하나님의 용서가 있습니다.
제가 몇 주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죄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새롭게 깨닫습니다. 아버지가 저에게 많은 힘든 일을 끼치셨습니다. 그런데 정말 사랑하니까 다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미 살아계실 때도 제가 예수 안에서 용서해 드렸지만 정말 다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인간의 사랑이 어떤 깊은 경지에 들어갔을 때도 이러한데 하물며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깊이 사랑하실 때, 더구나 그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대해서 감읍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때, 하나님이 그를 용서해 주시지 않는다면 사랑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결국은 죄가 커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죄에서 돌이키는 진실한 회개가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던 사람들은 모두 하늘에서 금덩어리가 떨어졌거나 바다가 갈라졌기 때문에 깨달은 사람들이 아니라 죄 가운데서 자신의 힘으로 몸부림치며 죽음 앞에 갔던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받음으로 그 죄의 깊이보다 더 큰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른다고 하는 것은 어느 한 순간에 머리에 붉은 띠를 동여매고 혈서를 쓴다고 해서 따라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자원이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매순간 말입니다. 저는 한때 30대 중반쯤 청교도에 한창 빠졌을 때 순교사를 집중적으로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순교에 대한 기록을 읽으면서 한 3년 동안 순교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직도 그 순교를 못하고 있습니다. 순교한 사람들은 보면, 공통적인 순교의 마지막 순간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이것이 순교사의 공통점입니다. 순교는 어떻습니까? 매를 맞아서 죽는 경우도 있고 가장 흔하게 행했던 것이 교수형이나 참수형, 더 흔한 것은 종교개혁 시기에는 화형이었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이 화형이라고 하고 그나마 가장 편안한 죽음이 교수형이라고 합니다. 화형으로 불이 붙으면 밑에서부터 장작이 타오릅니다. 거기서 죽은 사람은 증언을 못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공통된 증언에 따르면 처음에 불길이 타오르는 순간에는 모두 고통스러워해도 잠간 그 시간이 지나면 환희를 느끼는 것을 본다고 합니다. 물론 거기에는 엔돌핀의 작용과 같은 생체의학적인 면도 있겠지만 공통적인 것은 하나님이 부으시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스데반의 순교의 장면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돌멩이가 날아오는데도 얼굴이 빛나면서 하늘을 쳐다보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내가 보노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매일 잘못 생각하는 것은, 세상을 이길 힘이 세상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돈을 얻어 보려고, 더 많은 지위를 얻어 보려고, 더 많은 무엇을 해보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니라,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은 하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바로 사랑이고 충만한 생명입니다. 이 세상에서 종이 된 자로서 살아가는 신자의 삶을 말하기 전에 정말 필요한 것은, 신자로서 이 세상의 종이 되어 살아가지만 이 세상의 어떤 진리의 빛을 드러내는 것은 지위의 높고 낮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빛된 삶을 살면 더 많이 비췰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폴 포츠’라는 ‘브리튼즈 갓 탤런트’(Britains Got Talent)에 나와 ‘넷선 도르마’(Nessun dorma)를 불러서 인생이 바뀐 사람을 아실 것입니다. 얼굴도 못생기고 뻐드렁니가 튀어나와서 얼짱이 아니라 얼꽝인 사람이었습니다. 휴대폰 팔던 그 사람이 그 프로그램에 나와서 노래를 부르자 심사위원들이 “당신은 지금껏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모든 사람들 중에서 최고다!”라고 했고 그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인생이 바뀌고 나서 노래를 잘한 게 아니라 휴대폰 팔러 다닐 때도 노래를 잘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잘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노래방에서 아무리 노래를 잘 불러도 세상 사람들이 모릅니다.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때 진가를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아름다운 삶을 살면 훌륭합니다.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사람이 봐줘도 빛이고 안 봐줘도 빛입니다.
제가 언젠가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그곳에 있는 이름 없는 꽃들을 보았습니다. 그 꽃잎도 질서 있게 이루어져있고 색깔도 아름다웠습니다. ‘여기는 1년 365일 사람이 안 들어오는 곳인데 이 꽃은 무슨 보람으로 이렇게 피었다가 질까?’ 생각했습니다. 그때 번뜩이며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하나님은 보신다.’였습니다. 그 생각을 하니 어린아이같이 가슴이 벅찼습니다. ‘이 심심산골에 사람이 눈길한번 주지 않는 꽃도 하나님이 보시기 때문에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가 있구나!’ 그렇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따라 살 때, 사람이 보면 그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런데 사람의 눈에 안 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보면서 아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이 왕이 된 다음에야 유명해졌지만 이새의 집에서 아버지도 인정해주지 않고 사랑하지 않았던 소외된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보셨고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그는 내 마음에 하한 자라” 몰라준다고 한들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결국 하나님은 무명한 자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진리를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까다로운 상전 밑에 있는 예수 믿는 종이 있습니다. 그가 정말 순종하고 인내하는데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고난을 받으며 선하게 한 보람이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람이 전혀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를 내려다 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몇 사람이 그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할지라도 그는 거기서 그렇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한행실의 빛을 비추면서 사는 삶의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나는 충분히 만족합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나를 오해하고 혹은 나의 친구가 발뒤꿈치를 들어서 나를 배신하고 악을 행해도,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길을 가려고 애를 쓰고, 또 그렇게 못할 때마다 아픈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려 용서를 빌고 제발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더 많은 은혜를 달라고 간절히 비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내가 좋으면 그것을 충분하다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먼 훗날 “당신이 그런 인생의 위기에서, 내가 친구로서 당신에게 이렇게 악을 행하고 나쁘게 했는데도 묵묵히 참고 견뎌내는 것을 보면서 정말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때는 내가 잘못했습니다.” 해도 “관계없습니다. 나는 당신 때문에 상처를 받은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나에게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로 피하면서 그 진리의 말씀에 나를 비춰보니까 결국 그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님이 나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말로는 예수를 이야기해도 실제로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가지 않는 나를 때려서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당신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요셉이었습니다. 형들이 팔고 걱정이 되어서 거짓말까지 하며 불안해 하니까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에 뭐라고 합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나에게 악을 행했지만 하나님이 그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세월, 형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싹 씻고 미움과 복수를 화해와 관용으로 갚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집안에 피 비린내 날 만한 갈등이 요셉에게 와서 화해하는 집안으로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그런 생애였습니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종종 우리에게 시련을 주십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요한 의도가운데 하나는 우리자신을 만나게 하시려고 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종종 고난에 직면하게 하십니다. 거기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삶의 궤적으로 그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그리신 궤적과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셔서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마음과 얼마나 다른지를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진정한 신자는 진실한 마음으로 뉘우치게 됩니다. 고난이 항상 우리를 반성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때로 고난은 우리의 마음을 할퀴고 우리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을 때에 그 고난의 의미를 새길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의 지성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매일매일 당하는 이 고난과 어려움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요동치는 삶을 초월해서 온 땅과 하늘 위에 홀로 계셔서 항상 선하시고 그 태양이 모든 식물에게 비춰 살아나게 하는 것처럼 우리를 그렇게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심지를 견고히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 세상의 악이 이길 수 없습니다. 결국 악은 그러한 삶의 상황 속에서 타협하고 악을 악으로 갚으려고 하는 마음의 부패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고난을 받고 있다면, 이 고난을 인간의 잔꾀와 술수로 피하거나 극복해보려고 한다면 우리는 수많은 복잡한 상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정상적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할 때에 악을 꿈꾸기도 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심각한 범죄가 청부살인이랍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통사고나 사고로 죽는데 그 사람들 중 상당수가 사연이 있게 죽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지금 우리나라에 엄청나게 많은, 백만 명이 넘는, 불법취업자들까지 하면 150만 명은 될 거라고 하는 근로자들이 있는데, 외국인들 즉 제 3세계의 사람들을 사는 것입니다. 기가 막히게 교통사고로 위장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금액도 정해져있습니다. 깨끗이 지워버리는 데는 1억 5천만 원, 병신 만들어주는 것은 5천만 원. 그렇게 해서 자기에게 원한이 너무 많이 맺힌 사람들에게 청부를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수사 결과로 나온 것입니다. 그것도 모두 밝혀졌겠습니까? 그냥 교통사고가 난 것인 줄 아는 것입니다. 지나가던 자가용을 덤프트럭이 받아서 즉사해버린 것입니다. 그것을 과연 다 캐 들어가서, 아무런 관련이 없는 두 다리, 세 다리 건넌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살인인데 그것을 수사를 통해서 모두 규명할 수 있겠느냐고 하는 데에 저는 회의적입니다. 사고를 내고 사건을 저지르고 혹은 다른 방법으로 제거하기도 할 것입니다. 교통사고는 점잖은 방법입니다. 오늘 입국해서 오늘 정리하고 내일 아침 비행기로 떠나버리면 못 잡는 것입니다.
악에 대한 인간의 마음은 무한한 크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사주하는 사람들은 평소에 우리와 종자가 다른 인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서울시 의회 의원 하나가 살인교살 혐의로 판결을 받고 복역 중인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훌륭한 대학을 나와서 시의회 의원까지 된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가 별종의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닙니다. 인간에게 악한 감정이 받히고,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해소하면서 살지 않으면 누구라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신앙의 유익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늘 말씀드리지만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우리들이 돌짝밭, 험한 계곡을 걸어가던 사람들이 황금길로 가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어도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시련과 고난, 아픔, 심지어는 질병과 고통, 노동의 수고, 사고, 모든 것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그 의미를 모르며 그냥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 의미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나를 인도하시기 위해서 고난을 주시는구나, 하면서 걸어가니까 주님을 믿지 않을 때에는 자살하고 싶을 정도의 좌절스러운 상황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가슴 저리도록 나같은 인간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발견하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는 힘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주어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우리가 신자로서 그렇게 고난을 당할 때에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하겠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붙들게 하는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어디로부터 오겠습니까? 우리가 자가 발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을 다 기울여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가 누구든지 간에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의 편입니다. 죄가 있으면 용서해주시고, 무지하면 깨닫게 하시고, 지혜가 없으면 지혜를 주시고, 물질이 없으면 물질을 주시고, 시련이 있으면 감당할 힘을 주시거나 피할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어떤 위기에 처하거나 시련에 있을 때에 그것을 극복하며 살 수 있는 모든 능력과 힘이 하나님께로 부터만 온다는 것을 주님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인생에 대해서 하나님 없이 과도하게 고민하지 말고,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분 앞에 가지고 나와서 그분께 쏟아놓으며, 이 모든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배우도록, “이 시련을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었다, 내가 고난 받기 전에는 그릇 행했지만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고백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을 빕니다.
10. 고난으로 순종을 배움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 5:8)
녹취자: 김경애
Ⅰ. 본문해설
고난을 통해 복주심(2015.11.4 수요예배10)
오늘 이 히브리서는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위로하는 편지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읽은 이 문맥에서는 하나님의 안식을 바라보며 시련과 고난을 참도록 히브리서 저자는 성도들에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 실제적인 방법으로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바라보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시련을 견디고 고난을 참는 것이 힘겹고 어렵게 느껴질 때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바라보며 인내하도록 간곡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7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기도하는 광경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대제사장의 기도광경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결같이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한 내용이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데 그 위대한 대제사장의 기도를 통곡과 눈물로 드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것이 꼭 예수님이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신 그분의 기도의 방식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늘 기도하던 방식이었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나 뉘우침에서 오는 통곡과 눈물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 세상에 대한 애통함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Ⅱ.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심
A. 순종을 배우심
오늘 성경에 보면 얼핏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모순이 되는 것 같은 구절이 등장합니다. 그것이 바로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신 분이신데 예수님에게 배우는 것이 있었다면 모르는 것이 있었다는 것인데 모르시는 것이 있었다면 그분은 어떻게 하나님이실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미 그 사건이 있을 때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중심을 꿰뚫어보거나 어떤 사물을 꿰뚫어보시면서 직관으로 모든 것을 아시기를 나다나엘의 마음을 아시기까지 하신 사건을 보면 이 구절이 양립하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우리들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양성,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일치하는 조화를 이루었는지를 우리들이 먼저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사람의 인격과 한 사람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본성은 인간 모두에게 공통적인 본성도 있고 개개인의 독특한 본성도 있습니다. 도덕적인 본성도 있고, 음식을 좋아한다든지, 잠을 자는 습관이라든지 자연적인 본성도 사람마다 각기 다르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은 하나의 인격, 사람의 인격과 하나의 본성, 사람의 본성을 가진 것이 우리 개별적인 인간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인격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인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입니다. 만약에 두 개의 인격을 가지고 계셨다면 다중인격이 되고 인격과 인격이 충돌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인격을 가지고 계시고 다만 성품에 있어서는 순전히 하나님이시기만 했다면 사람의 몸을 입으실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성과 아울러 사람의 본성을 가지셨습니다. 인간에게는 사람의 본성과 인격이 동떨어질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하나님의 인격을 이미 가지신 분이기에 인격 없이 인간성만을 취하셔서 인성과 신성을 아울러 가지게 되셨던 것입니다. 인격은 하나이지만 예수님 안에는 신적인 신성에서 나오는 의지도 엿보이고 인성에서 나오는 의지도 엿보입니다. 때로는 두 개가 갈등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그 두 가지가 서로 충돌하지는 않고 결국은 인간의 의지가 신적인 성품의 의지에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을 앞에 둔 기도였습니다. 신성으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죽으실 수 없는 분이셨지만 신적인 의지로써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죽어야했고 인간의 성품으로는 죽으실 수 있는 분이었고 또 죽으시기 위해서 사람의 성품을 받고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인적인 의지로는 그 잔을 피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세 번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께 맡깁니다. ‘나의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김으로 인간의 의지를 신적인 의지에 복종시킨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지식에 관한 묘사들을 보면서 우리는 두 가지 생각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얼핏 얼핏 나오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하시는 사람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대표적인 것 두 가지를 들자면 ‘그 마지막 날이 언제일지는 천사도 모르고 인자도 모르고’ 거기서 모르는 인자는 지금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입니다.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이 아시느니라.’ 그렇다면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기 전에 성자로서의 하나님으로서는 모르시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모르는 것을 성부가 아는 것을 성자가 모르실 수 없고 성령이 모르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에는 예수님이 모르시는 것이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르시는 것은 운명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 한 가지를 보면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보시며 뭐 좀 먹을 것이 있는가하여 다가가셨습니다. 가보니까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무화과나무를 책망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런 경우에 예수님이 하나님이셨다면 어떻게 그 열매가 있는 것을 모르실 수 있을까 그런데 인간의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거기에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있는 것을 모르실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실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으로써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스스로 기쁘게 그 위에 인간의 성품을 덮으십니다. 그래서 스스로 아는 것의 한계가 있으시기를 자처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고난으로 순종을 배웠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순종을 고난을 통해서 우리처럼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거나 죄를 짓는 분은 아닌데 그런데 하나님으로서는 순종에 대해서 모르실 수 있는 것이 없지만 인성으로 신성을 덮으셔서 스스로 모르는 것이 있기를 자처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순종을 배워 가는데 모든 인간들이 순종을 배우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순종을 배우시는 것입니다. 고난을 받으시고 그 고난을 통해서 의미를 되새기고 알고 하는 방법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그 고난 속에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잘못을 뉘우치는 방식으로 순종을 배우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런 순종을 통해서 오히려 당신과 같은 인간의 성품을 지닌 모든 인간들의 죄와 불순종을 당신 자신이 죄가 없이 공감하시면서 고난을 통해서 순종하며 사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죄는 없으시지만 모든 인간들이 공감하는 방식으로 그 순종을 배우시는데 그것을 예수님이 것이 기꺼이 그렇게 하시기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자, 그러면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사변적으로 보이는 이 문제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이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성육신에 담긴 하나님의 놀라운 의도를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죄는 없으신 분이시지만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시기 때문에 시험을 당하는 우리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 사람의 몸을 입고 계시면서 모든 우리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연약한 것들을 당신도 체험하심으로써 진정으로 우리의 대리자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중심으로 마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으로서 우리 편에 서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고 긍휼히 여겨주시도록 하나님께 당신 자신을 제물로 드릴 수 있는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예수님은 스스로 신성을 인성 아래에 감추시고 그렇게 스스로 한계를 자청하시는 방식으로 죄와 불완전함에서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순종하는 것을 배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필요하실 때에는 이 인성에 한계를 초월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아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목수셨지 어부는 아니셨습니다. 그래서 바다에 고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아시고 그리고 인간의 마음까지 꿰뚫어보시고 마주치는 그 여자가 다섯 명의 남편을 가졌던 여인이라는 사실도 아시고 그 여자가 별을 다섯 개 붙이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한번 재혼할 때마다 하나씩 붙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자를 한번을 보시고도 아십니다. 인성이 신성을 덮고 있는 상태에서는 모르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 두 가지가 왔다 갔다 하면서 묘사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는 헷갈리고 그래서 자유주의자들은 뭐라고 결론을 내리느냐하면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아시는 것처럼 묘사하시는 것은 후대에 예수님에 대한 아주 숭고한 흠모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과장해서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으로서 시험을 받으시면서 죄는 없으셨지만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고 시련을 참고 견디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가 하는 것을 배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죄가 없으신 완전하신 사람이신 그분이 울기도 하셨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울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으로서 시험을 받으시면서 인간을 배워가셨고 무지한 인성이었지만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워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그렇게 순종을 배워야했다면 죄인인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종을 배워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순종을 하지 않으실 수 없는 분이었고 하나님께 불순종할 가능성조차도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에게 모순된 일을 행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게 모순된 일을 행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그런 일을 행합니까? 행하지 않습니까? 날씬해지고 싶은데 자꾸 먹습니다. 머리로는 먹으면 안 되는데 너무 맛있습니다. 삼겹살 한 판, 두 판, 세판, 머리로는 한 판도 먹으면 안 되는데 벌써 세 판째 구워먹고 있습니다. 잠을 잘 때는 아쉬운 마음으로 배를 만집니다. ‘내일부터는 조심해야지!’ 어제도 그랬습니다. 이렇게 인간에게 모순된 일을 인간은 많이 행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에게 모순된 일을 행하실 수 없으십니다. 예수님에게는 불순종할 가능성조차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고난을 통해서 정말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가셨다면 우리는 죄악된 세상에 이렇게 자신에게 모순된 일을 행할 수 있는 그런 불쌍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항상 자기와의 씨름이 있습니다.
화요일마다 학교에서 강의를 하는데 두 시간밖에 못한다고 했는데 세 시간을 넣어서 힘들어 죽겠는데 보람은 있습니다. 53명 정도 되는데 애들이 드디어 스마트폰을 반납하기 시작했습니다. 20대 아이들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스마트폰을 포기했습니다. 그중에 어느 학생은 게임에 환상적으로 미쳐있었는데 내 강의를 듣고 이것은 정말 쓰레기 같은 삶이다. 그중에 한 학생이 우리 교수님은 15살에 인생은 무엇인가를 논둑에서 통곡을 했는데 자기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해보니까 똑같은 표현을 쓰자면 멍청이 자식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를 벽에 짓치면서 이렇게 생각 없는 인생을 살도록 훌륭하게 도와준 것 중의 하나는 스마트폰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내려놓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청년들은 이 이야기를 하면 막 웃는데 애들 중에 내려놓는 아이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10년만 그렇게 살면 놀랍게 변할 것이다.
결국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워가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앤드류 머레이라는 선교사이자 작가는 말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순간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순종의 학교에 입학합니다. 진짜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월반을 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옥스퍼드에서 학생 하나를 만났는데 나를 안내했습니다. 지금 21살인데 23살에 박사학위를 받을 예정이랍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했더니 계속 월반을 했답니다. 중학교 1학년에서 3학년, 고등학교 1학년에서 잠깐 공부하다 3학년, 대학교에 와서 1학년 공부하다가 3학년, 4학년으로 대학원에서 1년을 살짝 거치고 박사학위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슈퍼스트림이라는 초끈이론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초끈이론에 대해서 1시간 반 동안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 뭐하시는 분이냐고 합니다. 초끈이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흥미롭습니다. 나중에 한번 찾아보십시오. 아인슈타인의 초끈이론입니다. 계속 월반했습니다. 오래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순종의 학교에서 고급학년이 아닙니다. 계속 잘리고 낙제하고 뛰쳐나가서 조폭한테 얻어맞고 들어오고 자퇴하고 정학당하고 퇴학당하고 이 학교에서 저 학교로 왔다 갔다 해서 얼굴이 쭈글쭈글하고 수염이 덥수룩한데 아직 1학년 2학기랍니다. 2학년에 올라갈지 못 올라갈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오늘 집에 가서 조용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학교에 6학년까지 있다면 나는 몇 학년쯤 되었을까? 예수를 믿은 것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순종의 학교에서 말입니다.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계속 월반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카톡이나 하고 있을 나이에 세계적인 학자들로부터 배우면서 박사논문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대단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공부를 잘해서 계속 월반을 해서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순종의 학교에서 월반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아이고 목사님 월반은 고사하고 제때만이라도 올라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월반은 하지 않더라도 제때에는 올라가야합니다. 그래서 한 10년 예수를 믿었으면 방금 예수를 믿기 시작한 사람보다 훨씬 나아야합니다. 순종하고 주님의 뜻에 따를 수 있어야합니다. 신자의 일생이 이 순종의 학교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순종의 그 학교는 고난의 학교입니다. 왜냐하면 순종은 강의실에서 조용히 배우면 향기로운 분필로 칠판에 글씨를 쓰면서 순종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온 삶으로 부딪히면서 그러면서 순종이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일생이 바로 그런 일생이셨습니다. 그러면 죄 없으신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셨으면 우리를 사람 만드시기 위해서 순종을 가르치시려면 우리가 무엇을 겪어야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을 통해야합니다.
여러분 옛날에 총각 때 살던 곳 건너편에 개 훈련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개밖에 안 되는 것들이 석 달 코스인 그곳에 가서 석 달을 배우면 그것은 개가 아닙니다. 놀랍습니다. 걸어가다 탁 치면 낮은 포복으로 엎드립니다. ‘물어와’ 그러면 확 물어옵니다. 개를 한번 밑에 훤히 보이는 다리 위에 올려놓아보십시오. 못 걷습니다. 그런데 사다리까지 타고 올라갑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겠습니까? 수없이 개 패듯이 팹니다. 엄청나게 두드려 맞으면서 배웁니다. 얼마나 놀라우냐하면 이런 덩치의 개를 데리고 오면 옆에 사람이 뭐라고 이야기만 해도 짖고 난리입니다. 물어뜯을 자세입니다. 그런데 개 교관 앞에 가면 아우라가 느껴지나 봅니다. 그래서 개가 마치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을 알고 도살하는 사람을 알아보고 눈물이 글썽거리는 것을 어렸을 때 보았습니다. 도살장 근처에 살았습니다. 똑같습니다. 어쩔 줄 모르는 것입니다. 꼼짝도 하지 못합니다. 끙끙거립니다. 알아보는 것입니다. 수없이 개를 잡아 팬 이것이 아우라가 배어서 개 같은 개가 가서 석 달 만에 주인이 와서 치면 낮은 포복을 하고 ‘가져와’ 그러면 가져오고 ‘발 들어’ 그러면 발을 들고 ‘걸어가’ 그러면 걸어가고 그런 정도가 석 달 만에 되려면 그 개는 그 개를 아끼는 주인이 보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그런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개가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가 훈련을 마치고나면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전의 그 개가 아닙니다. 그리고 털까지 깎고 날렵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냥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어떤 때는 개만도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얼마나 많이 고난을 당해야지만 사람이 되겠는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B. 고난을 통해
그런데 이 세상의 누가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는데 이 고난은 자기 깨어짐에서 오는 고난이 아닙니다. 자기 깨어짐은 무엇에 대한 깨어짐이라고 했습니까? 대단하십니다. 본받으십시오. 언제적 공과공부인데 정확하게 암기하고 있습니다. 암기되지 않은 지식의 내용은 끈 떨어진 가방입니다. 끈을 붙들면 가방이 올라옵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의에 대한 신뢰와 자기 사랑에 대해서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육적인 자기 사랑이나 혹은 자기 의에 대한 신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의 본성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중 어떤 사람 중 자기가 깨어지는 것보다도 비통한 눈물의 기도 속에서 일생을 사셨습니다. 여러분 혹시 남을 위해서 정말 충만한 은혜 속에서 기도해보신적 있으십니까? 죄는 저 사람이 지었는데 내가 그렇게 쓰리도록 고통스럽고 아픕니다. 불행한 일을 이 사람이 당했는데 내가 기도할 때 이 사람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까붑니다. 그런데 나는 너무 슬픔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마치 자신이 깨어지는 것 같은 그런 고통의 눈물 속에서 일생을 기도하게 하셨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그분의 눈물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고난이었고 그분의 깨뜨려지는 것 같은 깊은 고통은 우리의 죄에 대한 예수님의 대속적인 고난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담을 생각해보십시오. 아담은 죄가 없이 살던 때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죄가 없었기 때문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는 것 같은 노동의 불만족이나 깊은 고통이나 그런 것들은 없었을 것입니다. 가끔 느낍니다. 굉장히 고단하게 노동을 했는데 그것이 달콤하게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등산 같은 것을 해도 그렇습니다.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뭐냐 하면 아담도 태어난 것과 동시에 모든 순종을 다 알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죄악 세상에서 죄는 없으셨지만 순종을 배우셔야했고 어떤 의미에서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것이 더 크게 고통스러우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불리함은 이 세상도 죄 된 세상이고 우리 자신도 부패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굉장히 불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결국 그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웠다는 이야기는 고난과 순종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 고난이 순종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죽어라하고 고생하는 사람은 순종의 대장입니까? 절대 아닙니다.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도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 입증됩니다. 우리는 부자하고 여유로운 환경에 사는 사람이 순종하는 삶을 사느냐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고난 그 자체가 순종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하면 그 고난을 통해서 순종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마음이 순종하기에 적합한 마음으로 본성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고난이 그런 변화를 인간의 가져다주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리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고난을 당할 때 그 의미를 물으면서 그 의미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고 자신의 드러난 삶을 통해서 그 재료를 가지고 마음을 성찰하고 자기의 마음을 숙고하면서 어떤 삶이 전개될지를 예측하면서 이것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끔 고쳐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까 늘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최고로 영광을 받으시는 곳은 금이나 은으로 꾸며놓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결국 순종하지 않는 것만큼 마음의 질병입니다. 마음의 질병인 상태입니다. 순종치 못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의 질병이고 순종하지 않는 마음과 병든 마음의 상태는 밀접한 관계가 있고 결국은 의지가 선한 것으로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병든 만큼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결국은 외적으로 뭔가 작동하지 않는 것은 내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 아끼는 폰이 작동이 되지 않습니다. 큰일 났구나. 내 단짝인데 어떻게 하나 A/S 센터에 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너무 오래되어서 부품이 없다고 합니다. 가방에서 똑같은 폰 하나를 꺼내면서 이것을 뜯어서 부품으로 고쳐주십시오. 그래서 바로 고쳐주었습니다. 열어보니까 전선이 끊어져서 망가져있습니다. 보십시오. 뭔가 속에서 망가져있기 때문에 작동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순종하지 않는 것은 그 의지가 병든 것입니다. 그 의지에 병든 것은 마음의 질병에 속하고 마음의 질병은 영혼의 병든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는 그렇게 망가진 사람들은 운명적으로 그런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도 어쩔 수 없이 그런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망가진 마음을 고치고 영혼을 치료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 힘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너무나 많이 망가졌기 때문에 결코 고쳐질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고쳐지는데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통해서 고쳐지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아주 중요한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그렇게 오래 예수를 믿었는데 순종의 학교에서 계속 유급을 당합니까?’ 왜 그렇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성령의 은혜에 의해서 자기가 끊임없고 고쳐지고 변화되는 이 본성의 변화의 역사가 없기 때문에 결국 오래 예수를 믿어서 무늬만 그리스도인이지 사고방식과 가치관과 모든 것들이 그대로 예수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이 살아갑니다. 예전에는 교회 밖에서 불신자들을 만나고 성질을 부리고 잡아 패고 싸우는 그 똑같은 일을 교회에 와서 하는 것입니다. 무대만 달라진 것이지 전혀 바뀐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은 고난을 사용하셔서 고치시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환경을 흔들어 고난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마음의 틀들을 바꾸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난을 받으면서 고난을 겪지 않았더라면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 사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성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도 바뀌고 싶은데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바뀔 수 없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러한 마음을 발견하고 자기도 너무 이런 사람이 되기 싫고 또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면서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때에 자기가 사랑하던 자기와 분리되고 참으로 사랑해야할 자기와 참으로 미워해야할 자기를 분리할 수 있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이 빨래를 짜듯이 짜지는 것입니다. 털어서 널면 괜찮은 것 같습니다. 아무리 해도 물이 안 나옵니다. 자기는 다 짠 것 같은데 그런데 힘센 아들이나 남편이 와서 꽉 차면 물이 쫙 쏟아집니다. 그때 비로소 이 힘이 얼마나 놀라운가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쫙 빠집니다. 그러면서 이제 마음의 찌끼들이 쏟아져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면서 고난과 순종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순전하게 하시고 고난 자체는 능력이 없습니다. 은혜의 통로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고난을 많이 당하는데도 순종을 배우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고난을 조금 당하면서 결국은 순종을 많이 배워서 온전한 사람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고난의 의미를 새기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합니다. ‘이것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성으로 쭉 생각해보면 저놈 때문입니다. 이 인간들이 정책을 잘못해서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 다 수평에 놓고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노가 이 안에서 불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간들에게 대해서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이야기했는데 미국에서 세금이 맞고 하도 열 받아서 항의를 했는데 안 들어주니까 비행기를 몰고 와서 세무서를 들이받아서 2층 전체를 불태우고 자기는 그곳에서 장렬하게 죽어버린 것입니다. 장렬하다는 말이 어울리지도 않습니다. 얼마나 열을 받았으면 그랬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어마어마한 고난을 당했는데 자기 파괴로 가는 것입니다. 고난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되고 고난이 가지고 있는 신앙적인 의미를 거기서 유추해낼 수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그 고난의 의미를 수직적으로 묻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유익이 그런 데에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저 자식 확 찔러죽이고 나도 죽을까?’ 이런 정도밖에 생각을 못했는데 ‘왜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일을 일어나게 하셨을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를 자기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데 왜 나에게 이렇게 처절하게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났는가?’ 그 의미를 묻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고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 속에서 잘 들으십시오. 그 속에서 나쁜 상황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게 일어난 일은 나쁜 일이지만 그러나 좋으신 하나님은 내게 지금 나빠 보이는 이 일이 결국에는 좋은 일이 되도록 만들어주실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내가 그분의 신실함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면 지금은 내가 모든 것을 다 대답할 수 없어도 믿음으로 살면 언젠가는 이 일이 일어난 것이 일어나지 않은 것 보다 정말 좋은 것이었다는 것을 하나님이 내게 깨닫게 하실 것이다. 혹은 백번 양보해서 죽을 때까지 내가 가진 어떤 한계로 말미암아서 지금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의 의미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하나님이 좋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겠다. 이것이 진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분은 정말 좋으십니다. 그런 태도가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한번 그런 경험을 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체험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을 만나도 참을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힘든 일을 참을 수 있는 또 다른 용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고난을 이기고 시련을 이기면서 살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고난을 통해서 의미를 물으면서 평면적인 상황에서는 도저히 배울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지식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을 인간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지식의 분량이 자기 인생의 지혜의 빛이고 그 빛의 크기만큼만 자기는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안에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좋은 일이 일어날 때 시시덕거리고 헤헤거리고 좋아하고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사람들에게 선심도 쓸 줄 알고 어려움이 생기면 성질이 뻗치고 울화가 터지고 우울해지고 뭐든지 때려 부수고 싶은 마음이 들고 그렇게 살아가면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이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것이 다릅니까? 똑같습니다.
Ⅲ. 적용과 결론
그래서 우리들이 고난을 당할 때 고난의 의미를 묻는 것입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고난 자체가 우리의 선생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의미를 묻고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할 때에도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의 사태가 우리 주님의 손에 있다는 것과 그리고 그 뜻을 내가 모두 헤아릴 수는 없지만 내가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사실과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당신을 의지하는 나를 능력이 없어서 돌보지 못하시거나 혹은 내가 과거에 무슨 잘못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앙심을 품고 나에게 복수하는 분이실 수 없다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기서 믿음이라는 것은 자기가 잘될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진실하신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것이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고난을 통해서 온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영국의 스코틀랜드에 가면 조지 휘필드, 존 낙스, 언약도들이 고난을 당한 형무소가 있는데 굴 같은 곳에 사람들을 집어넣고 실제로 우리가 그 굴을 지나가봤습니다. 도저히 앉을 수 없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쑤셔 넣어서 갇혀서 고난을 당하고 죽어가는 동료들의 시체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언약도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강조하면서 그 언약을 충실히 따르려고 몸부림쳤던 사람들입니다. 언약도입니다. 그렇게 살아간 것입니다.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 원래 신실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신실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모두 고난의 과정을 거치면서 신실한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고난의 길을 십자가 삼아서 주님을 배우며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기를 다짐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난을 통한 복주심(2015.11.18. 수요예배11)
11. 고난으로 온전하게 됨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9)
녹취자 : 김세나
Ⅰ. 들어가는 말
히브리서는 이미 핍박이 시작되어서 고난당하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쓴 편지입니다. 사도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시련과 핍박이 다가오지만 하나님의 안식을 바라보면서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고난의 본이 되어 주셨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셨지만 그의 신성을 인성아래 감추시고 그래서 신성으로서는 모르는 것이 없으시고 더 배우실 것이 없는 분이셨지만 인성으로서는 배워가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지난주에 이어서 온전케 하는 고난에 대해서 말합니다.
Ⅱ. 온전케 하는 고난
우리는 이렇게 말하면 고난을 당한 사람은 모두 온전해 지나 보구나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을 많이 당한 사람보다는 모든 것이 평화로운 가운데 살았던 사람들이 인간성도 어질고 모든 것이 편안합니다. 고난을 많이 당한 사람들은 마치 나무와 같습니다. 기름진 땅에서 적기에 햇빛과 습기를 머금고 영양분을 섭취한 나무는 아주 놀랍습니다. 한번 어느 외국에 가서 나무를 보았는데 엄청 컸습니다. 끌어안을 수 없을 정도의 큰 나무였습니다. 그 곳에 있는 분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저녁때였는데 공원을 거닐면서 “목사님, 저 나무가 몇 년쯤 되었을 것 같아요?” 저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어림잡아 여기는 따뜻한 지역이니까 한국 같았으면 600년이요, 그랬을 텐데 “한 300년 되었겠네요.” 그랬더니 “목사님, 놀라지 마십시오. 45년에서 55년 된 나무입니다.” 실제로 나무를 잘라낸 것을 보았는데 한 해에 몇 센티미터씩 쭉쭉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나무는 연합니다. 그런데 바람맞이해서 습기도 별로 없고 영양분도 별로 없는 곳에서 간신히 생명을 부지하고 살았던 나무는 찰지지만 나무가 나이테가 아주 조밀 조밀합니다. 그리고 온전하게 쭉 뻗은 나무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간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을 당한다고 해서 모두 온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고난 속에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 때 온전해집니다.
A. 순종을 배우심
성경을 보면 제일 먼저 예수님이 순종을 배우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셨지, 무한한 인간으로 오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인간성 자체는 무한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으로서 완전하다는 것이지, 무한히 완전할 수 없습니다. 무한히 완전하신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완전한 인간이셨지만, 무한한 인간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선 몸에 갇히셨습니다. 예루살렘에 계실 때에는 사마리아에는 없으셨습니다. 사마리아에 가셨을 때는 당연히 갈릴리에 동시에 계실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인간으로서는 완전한 분이셨지만 그 완전하다는 의미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순종을 배웠다고 나옵니다. 이것은 주석가들에 의하면 유아기와 성년기의 대조라고 봅니다. 하나님으로서는 예수님이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태어나시기 전에도 성자가 계셨고 또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되었을 때에도 인간성으로는 마리아의 태 안에 있었지만 신성으로는 온 우주에 가득하셨고 안 계신 곳이 없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성으로 따지자면 예수님은 배울 것도 없고 모르시는 것이 있을 수 없고 지식이 자라간다는 개념도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성으로 보자면 예수님은 유아기 적에 잘 모르던 것을 성장하면서 학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세상에 대해 배우면서 주님도 지식에 있어서 온전해 가셨을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분은 참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님은 신으로서는 모르는 것이 없었고 학습하실 또 다른 여분의 것이 없으셨지만 인간으로서는 예수님이 잘 모르는 데서, 부족한 지식에서 완전한 지식으로 나아가실 수가 있었던 참 사람이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성도 가지지 않은 그저 인간일 뿐이고 우리 인간인데,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서 배움을 방해하는 것이 없었지만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죄된 본성으로 말미암아 올바른 것, 선한 것을 학습하는데 있어서 배우 거치는 것을 우리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학습이 참 잘 됩니다. 예뻐지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는 어린 여학생들이 화장품 목록을 배우거나 성분을 외우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담배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세계 유명한 담배와 가격을 암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학습하기 매우 쉽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것은 학습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는 이 안에서 인간의 성품 안에서 자연적으로 두자면 하나님께 순종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입니까, 싫어하는 사람들입니까? 그것을 배우는 것이 즐거울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학습이 잘 안 됩니다. 그러면 만약 예수님이시라도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워가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배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며 배움에 있어서 예수님보다 얼마나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인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죽을 때까지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가 모르고 죽기도 합니다. 인간이 바로 그렇게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는데 죽을 때까지 그것을 모르는 채 죽기도 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현실인지 여러분이 짐작이 가실 것입니다.
순종을 배운다는 것은 역설적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빛에 대해 배운다는 것은 어두움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보고 예쁘다는 느낌을 갖는 것은 못 생긴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학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지 않습니까.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아름다움에 이바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수없이 봤기 때문에 장동건이 멋있어 보이고 탐 크루즈가 돋보이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그런 사람들보다 훨씬 더 예뻤더라면 그 사람들의 영광을 제가 가리지 않겠습니까. 누가 그랬습니다. 우크라이나에 가면 감자 캐는 애들도 김태희 정도 된다고 합니다. 거기 가면 감자도 못 캡니다. 그러면 우리는 거기 가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궁금합니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두 예쁘게 생겼으니까 우리가 눈에는 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순종을 배운다고 하는 것은 불순종의 본성에 대해서 깨닫는 것입니다. 사실은 순종을 이야기 할 때 가슴에 깊은 감동이 오고 ‘아, 정말 내가 사나 죽으나 내가 주님께 순종해야 되겠다.’고 하는 그 명제에 대해서 감동을 느끼는 사람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날 동안 불순종하는 자기를 발견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만이 그러한 문제를 놓고 고민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종자가 다릅니다. 그런 것을 살면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은 마주 앉으면 향기가 납니다. 말을 하지 않고도 향기가 납니다. 정말 향기롭습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 이야기해도 그 속에 액체가 묻어 있습니다. 그것은 저는 드물기는 하지만 한국에서 보고 외국에서 목사님들을 만날 때 봅니다. 비록 언어의 차이는 있지만, 엊그제도 누구라고 말씀 드릴 수는 없지만 한분 오셔서 어거스틴 파크에서 저녁 때 앉아 대화를 나누었는데 눈물이 글썽글썽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어린 시절 주님을 만나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는지 이야기를 하는데, 언어의 벽이 있는데도 우리 둘이 앉아 눈물을 글썽거리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끊임없이 자기가 얼마나 미천한 인간인가 자각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깊이 자각하며 괴로워하였던 사람에게만 그러합니다. 저도 설교자이지만 설교자라서 가장 역겨운 순간이 언제인가 하면 설교를 들을 때 그 사람이 설교 속에서 고민한다는 내용이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 그게 사실 누가 입증을 해서가 아니라 직감적으로 느껴질 때. 말을 하기 위해서 성도들도 마찬가지로 대화를 하다가 말을 하기 위해서 그 순간부터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순간 말을 하기 위해서 자신이 엄청나게 고민하는 사람인 것처럼 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히 글쓰기에 있어서 과장을 너무너무 싫어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우리 모두에게 느껴집니다. 우리 모두에게 느껴집니다.
결국 그것은 뭐냐 하면 순종을 배운다고 하는 것은 불순종의 본성을 끊임없이 발견하면서 순종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묻고 싶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순종하실 수 없는 분인데 어떻게 그러면 순종을 배워가셨습니까. 예수님은 다릅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자기 안에 있는 불순종의 본성을 보면서 순종을 배워갔다고 보기 보다는 당신 밖에 있는 세계의 많은 인간들이 어떻게 집요하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저항하는가를 보면서. 그래서 예수님이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뭐라고 하셨습니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탄원하는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사실은 좋은 뜻에서가 아니라 나쁜 뜻에서 우리는 예수님보다 더 풍부한 순종을 배울 수 있는 교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변의 모든 것이 다 조화로워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때때로 사는데 방해되지 않도록 우리의 신앙을 위해 다 이바지할 때조차 우리는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기 싫어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 속에 있는 불순종의 본성을 발견해 갑니다. 어떤 때는 이것이 자신 안에 있는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부딪히고 깨지면서 이 사물이 무엇인가가 드러나듯이, 있으면 모릅니다. 부딪혀 보면 쇠인지 혹은 바위인지 단단한지 무른지 소리를 들어보면 둔탁한 암석 계통인지 쨍그랑 하고 소리 나는 유리 계통인지 알게 되는 것처럼 수많은 삶의 상황과 만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렇기 때문에 고난을 통해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고난 자체를 통해서가 아니라 고난을 받을 때 우리의 관점과 생각을 바꿈으로 우리가 서 보지 않은 각도에 서게 해 주시고 보지 않던 관점으로 우리를 보게 만들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예전에 깨닫지 못하였던 것들을 깨닫게 하십니다. 어느 각도에 있든지 간에 그것을 보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빛, 그 진리의 빛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하십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인생 전체가 순종을 배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우리는 순종의 학교에 입학하는 것이고 입학하면서부터 우리는 학습해 나가는 것입니다.
(예화) 요새 TV에서 보면 군대 가서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오락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과연 저런 프로그램이 좋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뭐 그런 이야기는 필요 없지만, 어쨌든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군대에서도 보면 다릅니다. 다녀오신 분들도 계셔서 죄송하지만 공익이나 방위를 훈련시키는 것과 공수부대나 해병대를 훈련시키는 것은 레벨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해병대 교육시키는 다큐멘터리가 나오면서 가슴이 짠하였던 것이 빨간 명찰을 달기 위해서 마지막 지옥 훈련을 146시간 동안 자지 않는 것을 합니다. 군화도 못 벗고 옷도 못 갈아입은 상태에서 146시간 훈련을 합니다. 앉히니까 계속 좁니다. 그러면 자지 못하게 물대포를 쏩니다. 그것을 보면서 군대가 썩어서 여기저기 문제가 일으키지만 다른 문제를 보면서 군인들이 고맙고 가여운 사람들이다, 저렇게 미친 듯이 훈련을 받아서 최고의 사람이 되어서 나라를 지키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개떡 같은 군인도 많지만 진실한 애국자도 많다고 생각해야 마음이 편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를 우리는 진심으로 바라며 기도 많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릅니다.
주님이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일에 대해 순종을 잘 하면 그 사람에게는 고난이 없고 평탄한 앞날이 기다리는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서, “얘는 좀 수준이 있구나.” 하고 엑셀을 밟으시는 것 같습니다. 계속 개기면 “그래, 너는 계속 공익이나 해라. 너는 대충 열중 셔나 배워서 동사무소에 가서 청소나 해라.” 하며 보내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그것을 절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성화가 안 되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진짜 순종하고, 순종하고 순종하면 하나님이 이제 너는 훈련 끝이다, 그러시면서 붉은 카페트 깐 집에서 파자마 바람으로 뒹굴다가 30년 더 살다가 내게 오거라, 그러시지 않습니다. 수준을 더 높여서 해병대로 데리고 가십니다. 기준이 다릅니다. 그것도 통과하면 미국의 네이비 실 정도로 데려 갑니다. 9000미터에서 낙하산 없이 뛰어내린다고 합니다. 9000미터면 영하 50도 정도 됩니다. 거기에서 총알처럼 뛰어내립니다. 지옥 같은 훈련을 통과시켜서 세계 최고의 군인을 만듭니다. 여러분은 어느 훈련장에 서 있습니까. 공익입니까? 면제? 그것 좋습니다. 대단합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아들이 공수부대를 나왔습니다. 저는 잘 모르는데 자기네들은 참 예민합니다. 낙하산 표시가 있는데 금색이라고 했든가 그것이 천 번 뛰어 내린 사람이라고 합니다. 어느 여자가 그것을 가지고 와서 선글라스를 뛰고 탁 나타나더랍니다. 그래서 모두 경외하는 표정으로 보았습니다. 나는 그런 여자들이 멋있습니다. 나를 구해줄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은 정말 그러십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대적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순전하고 순결하게 살면 살려고 할수록, “얘야, 너는 인간으로 내가 기대하는 순견을 훨씬 넘어섰다. 괴롭혀서 미안하다. 이제는 때 묻은 채로 30년간 살다가 내가 차 보낼 테니 영구차 타고 내게 오너라.” 그렇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주 앞에서 징책을 보는 도다. 매일 매일 온전하라고 꾸짖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람의 표시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받으면서 좀 더 나은 수준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 가는 이 모든 길이 정말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특별대우 받는다고 믿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생활을 할 때 애가 늦은 시간까지 집에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걔는 학교에서 이렇게 늦게 옵니까?” 엄마가 아주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담임선생님이 10등 안에 드는 애들은 10시까지 집에 안 보냅니다.” 그런데 그 표정이 너무 즐거운 표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도서관에 가둬놓고 집에 10시까지 못 가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1등부터는 집에 자든지 말든지 TV를 보든지 관두고 10명씩 뽑아서 다섯 개 반 모아놓고 걔네들을 빡세게 공부시켜서 진학률을 높이는 거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끊임없는 연단 속에서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기 위해서 고난을 받으면서도 믿음이 살아있는 한 낮은 수준에서 질퍽거리면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실 군인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군인들끼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동서울터미널에 내리면 자기들끼리 순서가 나뉘어진답니다. 해병대, 공수부대, 헌병대, 저 밑에 방위. 우리는 그러한 것을 보면서 인생의, 신앙에 있어서 어느 의미를 발견하고 합치를 발견하는 것, 부럽지 않습니다. 뭐가 부럽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부르심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는 길이 고달프고 힘들지만 하나님이 나를 그만한 사람으로 불러주신다고 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 깊은 감사를 가지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어차피 인생 한번 살다가 죽는 것인데 기왕이면 하나님이 보실 때 정말 요긴하게 그렇게 어디든지 쓰여지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입니다. 어차피 악인은 번성해도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 수 없습니다. 사라져 갈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모든 사태들을 신앙의 빛 아래에서 생각을 합니다. 섭리 신앙의 빛 아래에서 하나님이 내 인생에 일어나게 하신 많은 일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순종을 배우게 하시는구나 자각하며 살아갑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대단한 존재도 아닙니다. 수많은 모순과 우리가 원하지 않는 삶의 사태들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따라서 출렁거리면서 좌절하고 희망을 갖고 그러고 살면 사람의 사람이지 하나님의 사람은 아닙니다. 내가 정말 교회에서 영구히 추방되어야 할 단어가 바로 ‘상처 받았다’고 하는 단어입니다. 제가 학교에서도 한 시간을 이것에 대해 강의하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존감과 관련된 용어입니다. 자기라는 존재가 너무나 피동적이기 때문에 어떤 인간이든지 어떤 상황이든지 와서 긁으면 긁힐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물론 긁힐 때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극복하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으며 사는 것이 긁힌 것도 자기의 인생의 일부이지 긁힐 때 왜 갑니까. 그것도 자기의 인생의 일부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난 그 상처 받았다고 하는 것이 다분히 유체이탈적 표현이라고 봅니다. 자기는 아무 잘못 없이 있는데 누군가 와서 훅 긁고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일방 피해자가 됩니까. 나는 그렇게 무기력한 인간인가 하는 것입니다. 상처를 입었으면 도대체 내가 왜 그랬을까, 그 시간에 내가 거기에 서 있었을까. 내가 왜 운전을 그렇게 했을까. 왜 그렇게 긁혔을까. 정신 안 차리고 가다가 반팔 입고 남의 집 담벼락에 긁어서 유리조각에 찔려 피가 났을까. 이것을 반성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지, 나는 아무 잘못 없이 걸어가는데 확 긁겠습니까. 앞으로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게 사람입니까? 고깃덩어리이지 말입니다. 설령 그러한 억울한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주체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그러한 식의 표현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상처받은 자들을 어떤 설교자는 짓밟아 버려야 한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지만 인간 자존감의 문제입니다. 내 인생은 자기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B. 순종을 원하심
그러한 속에서 예수님은 수많은 겪음과 시련을 통해서 순종을 배워 가십니다. 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순종을 배워가셨다면 그러면 우리에게는 무엇을 원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우리에게도 당신의 뒤를 따라오며 순종하기를 원하시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구원받은 자들을 가리켜 별명을 말씀하시는데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들” 이것이 구원받은 자들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들. 자기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찬이라고 하는 것은 ‘크리스티아노스’, 혹은 복수가 ‘크리스챠노이’.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 그리스도께 매달려서 그리스도께 소속되고 그의 소유가 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의 결정적 표가 자기의 욕망에 순종하고 세상에 순종하고 마귀에 순종하던 사람이 변해서 예수께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됩니다.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에 가셨기 때문에 순종하며 걸어가는 길이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그 분의 순종을 보고 배우면서 자신도 그 분을 보고 순종하며 걸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그렇게 불완전한 대서 순종함으로 완전해지시는 길을 인간으로서 걸으셨기 때문에, 죄는 없으시지만 순종하는 자들이 어떤 고통을 겪는지 예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위로와 은혜를 하나님이 한없이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 15절에서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다시 말씀드려서 우리가 순종하려고 할 때 순종하기 좋은 환경도 있지만 매우 어려운 환경도 있음을 우리는 인정할 수 있습니다. 순종하려고 하는 의지가 커도 환경이 순종하기에 매우 어려운 상황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순종할 때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루고 고통을 겪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러한 고통을 불쌍히 여겨주시지 못하실 분이 아닙니다. 왜? 당신도 그렇게 걸어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배웁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우리는 종종 죄와의 싸움, 혹은 자기 안에 있는 자기도 원하지는 않는데 어떤 아주 패역한 기질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계속 맞서려고 합니다. 어떤 때는 후회가 되는데도 돌아서고 나면 내가 나 자신을 이길 수 없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때 가장 시급한 것은 뭐냐 하면 빨리 순종하는 것입니다. 지금 물이 넘쳐서 가구가 물에 젖습니다. 발목까지 물이 빠지는 것입니다. 빨리 물을 퍼내야 합니다. 물을 퍼내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은 수도꼭지를 잠그는 것입니다. 잘못 틀어 놓은 수도꼭지를, 이게 나오나 나오지 않나 확 틀어놓았는데 물이 안 나옵니다. 단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신 안 차리고 가버린 것입니다. 그러다가 콸콸 쏟아집니다. 여기에서 퍼내고 걸레질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빨리 내버려두고 그것부터 막는 것입니다. 아무리 퍼내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면 궁금한 점이 생깁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내가 나 자신을 이길 수 없었는데 한순간에 그것이 가능합니까? 그래서 신앙에 신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숙고하고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배우면 배울수록 정말 칼빈주의가 위대하다는 것을 배웁니다. 칼빈주의라고 해서 어거스틴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인간이 결국 불순종에서 돌이키고 자신의 죄된 본성을 극복하게 하는 모든 것, 순종하게 하는 모든 것, 이것이 결국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어거스틴의 의지로는 아주 간단합니다. 더 줄일 수 없을 정도로 요약하면 이것입니다. “악은 인간의 도움 없이도 악을 행한다. 누구의 도움을 받아도 악을 행하는 자는 자기 자신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전을 행할 수가 없다. 자기가 그것을 의식하든 못 하든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이 없이는 못한다.” 이것이 어거스틴 주의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것이 신비롭게 이루어지는지 이치에 맞게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하나님이 자신이 할 수 없었던 일을 하게끔 만들어주시고 이길 수 없었던 상황을 이기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데서 순종하는 자들의 고통을 주님이 충분히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께서는 당신같이 온전한 순종의 생애를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돕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주 기쁘시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통과 희생 없이 순종은 거의 없습니다. 삶의 상황은 우리를 짓밟을 수도 있고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권력이나 혹은 더 많은 자산과 자원을 가지고 빈약한 우리들을 짓밟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눅 들지 말아야 합니다.
청계산을 산책하는데 거기도 대게 군대처럼 플랜카드를 좋아합니다. 수시로 겁니다. 특히 석가탄신일 가까이 올 때 말입니다. 진짜 맘에 드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자의 울음소리에도 놀라지 않는!” 이것이 표어입니다. 적어 놓고 싶었습니다. 우리의 삶의 상황이 성경에도 나옵니다.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아.” 그런데 하나님을 향해 순종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어차피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될 때 우리의 생명을 그리스도 예수께 반납한 사람들입니다. 사자의 울음소리에도 놀라지 않습니다. 구차한 집착, 그리고 더러운 애욕,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을 잃어버릴 때 두렵고 겁나고 무서운 것이지 모든 것을 다 풀고 내가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좋은 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발견되려 함이라는 고백이 있을 때 두려울 게 없습니다. 그것을 탁 보면서 비겁했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얼굴이 떠올라 부끄러웠습니다. 그것도 존재의 아우라입니다. 사자의 울음소리에도 놀라지 않는.
예수님이 순종의 생애를 사셨지만 끊임없는 고통과 희생 속에서 사셨고 그리스도께서는 죄는 없으셨지만 그 모든 고난을 통해서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아니라 당신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우리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순종을 삶을 살길 바라셨던 것입니다.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는 순종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아멘.
사실 이것은 원고에는 전혀 없는 것인데 해야 되겠다고 하는 감동이 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정신과 모든 것의 한계가 있는데 집중을 해서 그 속에서 많이 긴장하고 순종하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현실과 싸우고 마귀와 싸우고 나에게 고통을 주고 순종하지 못하도록 내 마음을 시험하는 수많은 상황과 싸우다보면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빨려 나갑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제가 30대 때 제가 굉장히 건강하였습니다. 최근에 좀 건강이 안 좋았지 예전에는 덩치도 좋았고 그때 입었던 바지와 요새 입는 바지를 가져다 놓으니까 우리 교회 부목사였던 김찬제 목사가 와서 보고는 뱃살을 잡고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지가 반만 하니까. 그때는 힘이 넘쳤습니다. 오죽했으면 하얀 침대 시트를 덮고 한번 누워서 우아하게 꽃다발을 가져오면 “어, 왔어?”하는 게 소원일 정도였습니다. 요새 너무 자주해서 별로 안 좋습니다. 30대 때 그렇게 건장하였는데 그때도 교회를 아주 열심히 섬겼습니다. 몇 번을 주일에 계단을 내려오면서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금요일까지 강의하고 토요일에 설교준비하고 밤에는 교회 가서 거의 꼬박 철야하고 2시간 자고 새벽설교하고 주일 사역하고 오후에 기도회하고 교사회의하고 저녁때 되면 못 견딜 정도였습니다. 정신이 이 속에서 집중되면서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느 순간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순종을 배우십시오. 고난 없이는 순종을 못 배웁니다. 이것은 무엇과 같은가 하면 먹물 없이 붓글씨를 배우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영리하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목사님, 요새 물 무쳐서 배우는 붓글씨 나왔습니다.” 그런 것 말고 정식적으로 이야기 하면 무릎 꿇고 먹을 가는 것부터 마음을 다스리면서 먼저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고난 없이는 순종을 배우지 못합니다. 그런데 고난을 무제한으로 견딜 수 없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어느 한순간에 그 줄을 확 놓고 싶습니다. 그러한 것을 이기는 비결을 오늘 이야기 하고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그렇게 정신을 집중하며 살면서 힘들고 어마어마한 정신의 에너지를 쏟아냅니다. 그것은 두 가지 방법인데 하나는 말씀과 기도로 위로부터 끊임없이 받습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것 없이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고난을 받을 때 더 많이 기도하고, 그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고 한숨이 변하여 찬송이 되고, 그리고 고난이 사라지기 보다 더 많은 찬란한 빛을 하나님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수직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즐겁게 살아가려고 애써야 합니다. 바이올린이나 첼로 같은 것을 줄을 맞춰서 켭니다. 아름다운 곡의 연주를 마친 후에는 줄을 다 풀어서 보관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장 납니다.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아주 작은 것이라도 주님이 내게 주시는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밤에 잘 때마다 전도서를 한 장씩 읽습니다. 거기에 보면 그러한 행복,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씀하시며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라고 하시면서도 하나님이 수고하여서 네게 누리게 하신 것을 즐기거라, 매 순간 삶속에서 일어나는 순간순간을 즐거워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도 오후에 직원들 모아놓고 차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 하였습니다. “내가 그대들에 인생을 즐겁게 사는 비결을 가르쳐 주마. 오전에 한번 오후에 한번 너 때문에 누군가가 너무 따뜻하게 느끼도록 만들어 줘봐라. 그게 한 사람이든 다수이든지 간에 아, 참 따뜻하다고 느끼게 만들어줘 보라. 그 안에서 행복해 질 거다. 하루에 한번 하나님 앞에 감사한 조건을 찾아봐라. 그러면 분명히 있다.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그러면서 매 순간 주님이 우리가 누리도록 주신 그 기쁨 안에서 모든 것을 잊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아, 오늘 친구 만나는 날이구나.’ 회사에 골치 아픈 일, 교회의 골치 아픈 일 잊어버리고 내려놓고 가서 재미있게 만나서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다시 돌아와 다시 또 숙제를 하면 됩니다. 매순간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끊임없이 즐거운 일을 만들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그것들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살아야 합니다. 왜 입니까. 어차피 우리 인생은 100m 달리기가 아닙니다. 토요일까지만 미친 듯이 전력질주 하고나서 우리의 인생이 끝난다면 금식하고라도 한번 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얼마를 더 살지 모르지 않습니까. 살아있는 동안은 끊임없이 순종을 배울 것이고 그러면 어디에서든지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면 사랑하실수록 우리는 조금 더 높은 단계의 훈련을 받게 될 것이고, 육군 훈련 끝나면 공수부대 훈련이, 공수부대 훈련이 끝나면 해병대가, 해병대가 끝나면 UDT가 기다리고 있는데, 어차피 그것 한꺼번에 갈 것도 아닌데, 그러면서 하나님 의지하면서 매순간 순간의 즐거움들, 하늘나라의 기쁨을 너무 사모하였기 때문에 살아온 70년의 나의 세월은 그날만을 바라보기 위해서 살아온 지루하기 짝이 없는 대기시간이었다고 말한다면 인생이 너무 시시하지 않습니까. 왜 입니까. 그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가르쳐 줍니다.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기뻐하며 감사하면서 받지 못한 것들을 보면서 불평하지 말고 이미 있는 것들을 즐거워하며 내가 고통을 받고 시련을 당해도 만족하고 생각없는 인간들보다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 생각하면서 든든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아우라입니다.
Ⅲ. 영원한 구원의 근원
주님은 그래서 영원한 구원의 근거가 되십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영원한 구원의 그 저자가 되셨다” 저자입니다. 저자. 당신 자신이 창작하신 것입니다. 기원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의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을 과거에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미래의 이 모든 악한 세상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적으로 끊임없이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 그러면서 순종을 배워가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도우십니다. 그래서 고난의 길을 걸으며 순종을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간증이 있습니다.
(찬양)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Ⅳ. 적용과 결론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삶의 상황은 항상 해명할 수 있게끔 명쾌하지 않습니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악한지, 왜 하나님의 자녀들이 끊임없이 기도하는데 우리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나는지, 왜 의롭게 사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고 불의하게 사는 사람들이 형통한지 어차피 우리는 모든 것을 해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우리의 믿음은 시험을 당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참 진실한가 하는 시험을 당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삶의 모순된 현실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덮음으로 자신의 불순종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정말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러한 이해될 수 없는 현실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덮음으로 자기의 불순종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한 모든 고난을 십자가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슬픔과 고난을 당하신 우리 주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주님을 의지하며 매순간 하나님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생활,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 육체 가운데 계시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던 신앙생활입니다. 이 믿음을 꼭 붙들고 신앙으로 사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난을 통한 복 주심 12 (2015.12.16 수요예배)
12. 고난과 그 백성의 표지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슥 13:9)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 이해
스가랴 선지자는 포로 귀환 시대의 선지자였습니다. 원래 이름은 ‘자카르야’로서 ‘여호와가 기억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선지자인 동시에 제사장이었고 스룹바벨의 1차 포로 귀환 때 돌아옵니다. 이 선지자는 메시아가 오실 것과 영적인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하여 예언하였습니다. 그리고 9장부터 14장까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영광스러운 광경과 그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Ⅱ. 예루살렘을 구원하심
제일 먼저 예루살렘을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나옵니다. 9장부터 14장까지 이스라엘의 영적인 회복을 다루면서, 특히 오늘 우리가 읽은 13장은 예루살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그들을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1-9장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12장 10절 이하에서부터 이럴 때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내적으로 놀랍게 새로워지는가에 대하여 다루고, 그러면서 우리가 읽은 13장의 문맥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여기에서 이제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고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화시키시면서 이제 양 떼를 돌보는 목자를 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목자를 많은 주석가들이 그리스도,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이라 해석합니다. 여기에 보면 단수로 나옵니다. 선한 목자이신 메시아가 고난을 당하고, 그 때 양 떼들이 흩어지는데 그 흩어진 자들 중에서 다시 주님께 돌아와 주님을 간절히 찾는 자들이 있을 것임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서 남은 자들을 연단하시는 이야기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고 있으며 오늘 살펴보고자 합니다.
목자를 치니까 양들이 흩어지고, 2/3는 멸망하고 1/3은 거기에 남는다고 하는데 사실 이것은 수학적인 1/3, 2/3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목자를 칠 때 그 때 참된 믿음을 가지지 않았던 사람들은 목자의 고난에 시험을 당하며 결국 신앙 없는 것이 드러나고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목자가 고난을 당해도 그 고난의 의미를 알고 목자를 의지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남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3은 거기에 남는데 남아있는 자들을 굉장히 신앙이 돈독하고 목자가 고난을 당하는 속에서도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려는 사람들인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상을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을 어떻게 다루실지 오늘 성경이 말하면서 “그 남은 자들을 내가 연단할 것이며.”라고 하십니다.
Ⅲ. 남은 자들을 연단하심
A. 은금같이 연단하심
그 연단의 방식이 “금은같이 연단할 것이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목자, 곧 하나님의 짝이 된 자를 치니까 많은 사람들이 흩어지고 소수의 무리가 남는데 그들은 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오히려 연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연단하심으로써 그 연단을 받으면서 참 목자를 따르던 참 신자임을 입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을 보여줍니다.
목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양 떼를 위해 목자가 된 메시아이십니다. 마찬가지로 큰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 영혼을 섬기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그 사람이 동기가 되어 영혼들을 돌보고 양 떼를 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시련을 당하고 연단을 당하면 ‘저 사람이 얼마나 죄가 많아서 저럴까?’ 혹은 심하면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나보다.’ 혹은 ‘하나님이 버리셨나보다.’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성경에 의하면 “은금을 연단하심과 같이” 연단하시는 것은 오히려 그 사람들이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이 택하신 자라고 하는 표임을 보여줍니다.
오늘날은 여러 가지 화학물질을 가지고 은금을 순도를 높이는 기술들이 굉장히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과거에는 은금을 함유하고 있는 철광석이나, 순도가 아주 떨어지는 은금을 순수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제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뜨거운 불을 가해서 고체 상태의 광석을 녹이고 녹인 그 것을 여러 차례 걸러서 깨끗한 은과 깨끗한 금을 빼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은과 금이 순결해지기 위해서는 강한 불을 받고 다른 광석과 함께 녹아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금속이나 물질의 비중에 따라서 각기 다른 형태를 갖게 만들어 거기에서 은과 금들을 순결하게 계속 정화함으로써 순도가 높은 은금이 됩니다. 순도가 높은 은, 아주 순수성이 뛰어난 금은 그렇지 못한 금보다 훨씬 더 많은 불과 불에 제련된 경력이 있는 은, 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목자를 쳤을 때 흩어지지 않고 남아있는 사람들, 그래서 당신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들을 이 땅에 좋은 것으로 보상해 주시는 대신 그들을 더욱 더 연단하셔서, 더욱 더 순수한 신앙을 만들어 주신다는 사실을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은, 금을 연단함 같이 계속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시련을 당하고 연단을 당할 때 하나님이 나를 내가 예전에 행한 어떤 일들에 대해서 복수 하시고 분노를 푸시고 심지어 나에게 고통과 괴로움을 주시기 위해서 연단을 주신다고 우리들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묻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만약에 이러한 연단이나 시련이 우리의 과거의 잘못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복수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만큼 복수하시면 그 분노가 풀리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 때 그 죄를 판단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무한한 권위와 무한한 순결을 갖으신 분이기 때문에 작은 죄라도 무한한 크기를 갖습니다. 어느 정도 우리에게 복수를 하셔야 ‘이제는 네가 죄 값을 다 치루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고난, 시련, 연단, 이러한 것들이 정말 하나님의 사랑 받는 백성의 아주 위대하고 훌륭한 표지라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은, 금을 연단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남은 자들을 불가운데서 연단하심으로 순전한 사람을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은 그때에만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조금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돈을 주시지만 진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은혜를 주셔서 모든 연단과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지만 하나님이 가장 받고 싶어 하는 영광은 우리의 일을 통한 영광이 아니라 우리의 사람됨을 통한 영광입니다. 존재 자체가 빛나는 사람, 그 사람이 여기에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에 이바지하는 사람, 그러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연단하십니다. 시련에 직면하게 하시고 고난을 당하게 하시고 때로는 시험하게 하셔서 끊임없이 연단하셔서 그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고통이라고 하는 것, 시련이라고 하는 것은 객관적인 것이지만 그 객관적인 고통과 시련이 모든 사람에게 연단을 제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연단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단련하고 깨끗하고 순결하게 해서 더 좋은 더 순수한 것이 되게끔 하는 것이 연단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바깥에서 파고 들어오는 끊임없는 고통과 괴로움이 그것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어린 시절 혹은 자라면서 고통을 너무 많이 받고 고생을 하였기 때문에 망가진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오히려 고통과 고생은 그것을 통해서 망가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히려 그 고통과 고생을 안 했더라면 도달하였을 상태보다 그 사람을 나쁘게 할 수도 있습니다.
B. 주님의 이름을 부름
그러면 어떠한 고통과 시련은 그렇게 사람을 나쁘게 만들고 어떤 고통과 시련을 사람을 아름답고 순전하게 만드는데 그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을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부름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고난 받을 때 하나님께서 택한 그의 사랑을 받는 백성의 뚜렷한 표지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찾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하는 것은 단순한 기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단순히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 하나님을 앙망하고 어떤 삶의 상황을 만나든지 간에 그분께 소망을 둔 신자의 정신과 마음의 상태,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그러면서 오늘 성경이 말하기를 “내 이름을 말하리니” 하였습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하는 것은 완벽한 동의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없지만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름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보고 “내가 이름으로 너희를 알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름은 하나의 실체를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은 이 땅에 있는 그 분의 이름을 명예에 대한 열정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이 땅에서 짓밟히든지 말든지 별로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러한 것에 관심 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분의 이름이 이 땅에서 없이 여김을 받거나 짓밟힐 때 자신이 짓밟히고 멸시를 받는 것보다 더 분노하고 가슴 아파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진정한 평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관심사가 하나님과 완전히 일치를 이룹니다. 당신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일하고자 하는 그러한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단순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가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삶의 사태들을 신앙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당하고 있는 시련과 고통의 의미를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밖에서 외부적으로 밀려오는 고통과 괴로움이 그 사람을 연단해서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그 고난과 시련에 대한 반응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나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태초부터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때부터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셨지만 우리가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대해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 내 인생에 진정한 힘이 되고 능력이 된다는 것을 체험하면서 살 수 없었습니다. 어느 순간 우리의 어두운 눈이 열리고 찬란한 복음 진리의 빛이 비취며 하나님의 사랑이 그 은혜가 무엇인지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에 대해 믿음으로 반응하였고 그 때에 이러한 비천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에 붙잡힌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보이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사랑을 체험하면서 우리는 그 사랑을 몰랐을 때 이길 수 없는 시련을 이기고 환란을 견디며 살 수 있는 믿음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똑같이 연단과 시련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과 시련이 아무리 많이 밀려와도 그것이 우리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오히려 끊임없는 감당할 수 없는 시련과 고통의 연속은 사람의 성격을 망가뜨리고 심하면 인간의 정신을 파괴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시련과 고통에 대해서 끊임없이 의미를 물으며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생각하고 그 하나님 앞에서 신앙으로 살아가려고 깊이 몸부림치며 나아갈 때 그 때 우리가 당하는 시련과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믿음의 반응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 받게 만들고 정결하게 만들고 우리를 순수하게 변화시켜 갑니다.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모두 해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해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이성의 논리로만으로 살 수 없습니다. 더욱이 여러분 인생의 모든 것이 잘 풀리고 행복하고 원하는 대로 될 때에는 사람이 의미를 잘 묻지 않습니다. 그냥 성공에 취해서 살아갑니다. ‘어, 돈을 많이 벌었네?’ 눈물을 흘리면서, ‘내 사업이 왜 이렇게 잘 됩니까? 불안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는 사람 없습니다. 위기를 만납니다. 시련이 옵니다. 그러면 인생의 의미를 묻게 됩니다. 그 의미를 물어도 그 의미를 우리의 이성은 모두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일에도 잠깐 설교하였지만 ‘오늘보다 내일이 조금 더 나을 것이다.’라고 하는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것처럼 가련한 인간이 없습니다. 왜입니까? 대부분 사실이 아닙니다. 왜 그렇게 부정직하게 살아갑니까? 우리는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다, 지금은 실패하였지만 미래는 성공할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가지고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그러면 누군가가 미래의 인생은 지금보다 훨씬 더 나빠질 것이고 계속 어려울 것이며 당신은 결국 암으로 죽을 것이라고 하는 절망을 보여주면 자살 하겠습니까? 그렇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의 삶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의미입니다. 그것을 움직이는 힘은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나 내가 행복해 질 것이라는, 부자가 될 것이라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의존해서 사는 인생이 얼마나 가벼운 인생입니까? 오히려 내가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지금보다 더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시련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위해 나를 창조하셨고 그 분을 의지하면서 인생을 살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나를 부러워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내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끊임없이 이 세상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웅장한 철학과 같은 명제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전혀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지 않는 명제들을 부셔버리며 나갈 때 그 때 거기에서 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엄연한 현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힘이 내게는 없다는 사실, 그래서 생사 간에 우리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주님을 의지하는 절대적인 신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오늘 고난을 당하고 남아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은, 금으로 갚아주시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시련을 당하고 남은 사람들을 은금을 연단하는 것처럼 연단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해명 불가능할 때조차도 삶의 사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믿어도 고난의 의미를 즉시 알지 못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시련과 고난의 현실 보다는 나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며 살아간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믿음은 간절해지고 그리고 우리 자신은 더욱 하나님을 붙들고 살 수 밖에 없는 처지라고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실어서 주님을 간절히 찾을 때 거기에서 바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고 자기의 모든 뜻을 꺾고 버리며 주님의 뜻을 좇으며 살아갈 용기와 희망이 생겨나게 됩니다.
Ⅳ. 인정하시는 하나님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향해서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그게 바로 이 사람들을 인정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도 응답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정과 그 은총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히브리말로 ‘샤마’라고 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 ‘듣는다.’는 행위 속에는 이미 내적인 순복과 복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을 향한 가장 뛰어난 사랑의 표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뭐라고 하였습니까?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더 낫다.”고 하였습니다. 내적인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순종의 의지가 없는, 끊임없는 제물보다도 더욱 더 훌륭한 것은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는 내적인 순종, 그 하나님을 의지하는 진정한 마음 깊은 곳에서의 복종,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의 표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도 똑같은 태도를 갖으십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들을 들으시는 것입니다. 사무엘이라고 하는 이름이 바로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의 표현이 그들의 기도를 듣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음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부르짖는 기도에 당신의 귀를 기울여서 깊이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그들이 필요한 것을 주시려고 하는 기꺼운 실천의 의지를 가지고 그들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인정과 그 은총의 표현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8절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내가 이러한 삶을 살았다는 자부심이나 자기 과시가 아니라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그래, 너는 시련과 고난 속에서 혹은 끊임없는 진리의 비 진리의 싸움 속에서 너는 내 곁에 있었구나. 너는 내 편에 있었구나.’라고 하는 것을 칭찬해 주실 때 그 때 진정한 인정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도의 최고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시련을 당하거나 고난을 당할 때 이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결해지거나 연단을 통해서 온전한 기회로 삼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을 당할 때 동물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누가 도대체 이런 고통을 나에게 주었을까?’ ‘이 고통에 대해서 책임을 질 사람이 누구일까?’ 심지어는 복수를 꿈꾸기도 합니다. 보복을 꿈꾸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태도로 고난에 반응하기 시작하는 순간서부터 그 신자의 영혼은 거침없이 파괴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삶의 방식은 주님 몰랐을 때에 살던 삶의 방식입니다. 주님 몰랐을 때에는 고통이 오면 도대체 이 고통을 어느 누구 때문에 당하게 되었는가, 도대체 누가 나에게 이 고통을 주었는가 하는 것을 찾아내고 복수를 꿈꿉니다. 심지어 그래서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끔찍한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러한 보복을 꿈꾸면서 적개심과 분노에 사무치게 될 때 혀끝까지 쓴 피가 몰립니다. 그러면서 보이지 않는 그의 영혼은 아주 비참하게 더럽혀 지기 시작합니다. 그게 어떻게 보면 시련과 고난을 당할 때 신자의 믿음을 흔들어 파괴시키려 하는 사단의 계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면서 쓰라리고 가슴 아픈 일을 만나면 만날수록 어렵기는 하지만 그 일이 남의 일인 것처럼 생각하는 그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마치 내가 아닌 제 3자의 일을 보는 것처럼 자기 책임질 일에 유체이탈적인 표현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고난을 당할 때 제 3자의 고난을 보는 것처럼 하면서,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할 때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는 사람을 복수하고 싶어, 복수하고 싶어, 갈아 마실 거야.’라고 이야기 할 때 ‘그래, 죽여 버려. 갈아 마셔.’ 무슨 야채즙입니까? 그렇게 이야기 하는 사람 없습니다. 남의 일이니까 쿨 합니다. ‘그러면 안 돼. 그런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지.’ 이성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남에게는 그래도 자기 자신에게는 그렇게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것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는 자기 인생에 일어나는 그러한 시련을 아주 넓은 각도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함께 모여 길거리에서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와 한 10층 빌딩에서 볼 때와 비행기를 타고 볼 때와 그리고 우주 바깥에서 푸르스름한 지구라는 별을 볼 때의 느낌이 어떻겠습니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 인생에 일어나는 좋은 일들만이 주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나쁘고 고통스러운 일, 심지어는 내 인생에 씻을 수 없는 고통과 수치를 안겨준 사람도 하나님이 필요해서 내 곁에 주셨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신앙을 갖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바라 볼 때, 그때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없어도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이, 모든 만물의 질서가 주님의 손안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질서들은 수시로 바뀝니다. 우리 중 나쁜 사람만 만나며 산 사람이 누가 있고 좋은 사람만 만나며 산 사람이 누가 있고, 형통한 환경만 즐기며 산 사람이 누가 있고, 쓰디 쓴 시련만 만나며 산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언제나 따뜻한 때가 있는가 하면 추운 때가 있고, 쓰라린 때가 있는가 하면 가슴이 시리도록 감동된 때가 있고, 기쁜 때가 있는가 하면 슬플 때가 있습니다. 전도자가 이미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나님과 달리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변천하고 흘러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한 모든 것을 겪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어떤 종류의 신앙이든지 간에 그러한 것 하나하나에 울고 웃으면서 행복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마 어떤 종교도 그렇게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흐르는 물처럼 변화무쌍한 이 세상에서 악인과 의인이 나와 같거나 다른 사람이 혹은 나의 친구와 그리고 나를 헤치는 사람들이 함께 만나며 계곡을 치닫으며 흘러 내려가듯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가슴 아픈 날이 있는가 하면 즐거운 날이 있을 것입니다. 친구들에게 에워싸이는 날이 있는가 하면 적군에게 에워싸여서 우겨 쌈을 당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을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어떻게 우리 주님을 붙들며 믿음으로 살아야 되겠는가 하는 것을 배워가야 합니다. 매 순간 그렇게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는 주님의 마음을 들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비록 나의 삶이 오늘은 내가 원하는 대로 전개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 인생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을 통한 만족이 내가 처한 환경을 통해 얻는 만족보다 더 크고 놀랍다는 것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상호관계에 대한 전심의 고백이 등장하게 되는데 하나님 편에서는 “이는 내 백성이라.” 그리고 이스라엘의 편에서는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 울려 퍼집니다. 그러면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는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시는데 믿음이 없으면 이 말씀이 다가오겠습니까? 목자를 치고 시련의 날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흩어졌는데 소수의 사람들은 주님을 붙들고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것이라고는 연단과 시련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는 내 백성이라.”고 하는 주님의 음성이 가슴에 와 닿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와 닿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설명할 수 없는 우리 인생의 모든 모순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게 병원에 데리고 가서 엄마, 아빠, 심지어 간호사까지 팔을 꽉 붙들고 치료를 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스틸 사진처럼 있고 몇 년 전에는 그 곳에 가서 병원은 부셔지고 없어졌지만 그 담벼락이 50년 세월이 훨씬 더 흘렀는데도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식하게 시골이라 그랬겠지만 펜치를 들고 와서 이빨을 뽑는 것입니다. 6살 쯤 되었을까? 얼마나 울고 몸부림치고 악을 썼는지 그 악이 내게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뽑다가 부러졌습니다. 서울 왔더니 너무 무서웠는데 고모가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의사가 보더니 어느 무식한 사람이 애를 이렇게 만들었냐고 그러더니 마취 주사를 잇몸에 놓더니 톡 치니까 이빨이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펜치를 들고 가서 하였던 것이 아이의 눈에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이상하게 식구들이 그 일에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배신을 이미 6살에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그러니까 14살에 그렇게 통곡하며 울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가족들의 의도는 나에게 고통을 주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빨이 계속 곪으니까 시골에서 그렇게라도 치료를 받게 하려고 돈을 주고 진짜 돌팔이에 가까운 의사에게 협조를 한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는 내 백성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그렇게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삶의 상황에 의해서 재해석 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의 고백이 나옵니다.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사실은 출애굽기 19장 6절에 보면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최대의 언약이 나옵니다. 그 언약을 중심으로 그 약속을 이루는 옛날 방식이 구약이고, 그 약속을 이루는 새 시대의 방식이 신약입니다.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면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며.”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위대한 믿음입니다. 자, 목자를 쳤습니다. 양들이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배반하지 않고 남은 자들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큰 시련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연단하시고 시험하십니다. 그런데 그 고통과 시련 속에서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삶의 상황이 웬만하고 행복하기 때문에 이 고백을 한 것이 아니라 시련과 연단 속에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여전히 내 인생을 붙들고 계시고 이 시련과 연단을 통하지 않고는 내게 주실 수 없는 최고의 아름다운 것을 주시기 위해서 나를 새 사람으로 만들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면서 그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적인 교제와 거기에서 오는 하나님의 신실하고 선하신 성품에 대한 확신이 지금 당하고 있는 이 시련의 고통을 훨씬 능가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고백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Ⅴ. 결론과 적용
시험과 연단은 이 세상에 일반적인 사물의 질서를 움직여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세속의 행복이 아닙니다. 우리는 복을 자기 자신이 아닌 사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자의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당신 마음을 품은 채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시험과 연단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불쾌감의 표현, 혹은 내가 행한 어떤 잘못된 일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는 것, 오히려 믿음으로 내가 이것들을 감당할 때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떠한 것보다도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난을 통한 복주심(2015.12.24. 수요예배13)
13. 환란 날에 지키심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녹취자: 김세나
Ⅰ. 본문해설
이 시가 언제 기록되었는지 정확히 추측하기는 어렵지만 많은 주석가들은 이 시가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받아 고난을 받을 때 쓴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윗은 이 시 속에서 고난당하던 때에 그의 믿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삶의 사태들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우리의 삶이 전개되기보다도 그렇지 않은 상황을 많이 맞이하면서 매일 매일을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단지 희망 때문에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있는 무게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모든 것을 아시는 그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떠한 일을 겪든지 우리가 이 땅에 있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 좋았기 때문에 우리를 창조하시고 다른 곳이 아닌 여기에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지음 받은 하찮은 인간으로서 가장 큰 의무를 절감합니다. 그것은 인생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만나게 되는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며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이고 삶을 살기 때문에 살림이 필요하고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합니다.
악인, 원수, 군대, 전쟁, 이러한 표현들이 짧은 몇 구절 안에 여러 번 등장합니다. 이것은 이 시인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 얼마나 무섭고 치열하였는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인데도 주님의 사랑을 그렇게 많이 받은 시인인데도 끊임없는 이러한 환란들이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은 그 모든 삶의 사태들 속에서도 태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오히려 이러한 시련과 고통 속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하나님 앞에 터득하였던 것입니다. 전쟁, 군대, 원수, 악인들이 에워싸여 있습니다. 마치 목동이던 시절에 어린 양 떼들과 함께 맹수들이 수시로 침몰하던 곳에서 양들을 지켜야 했던 것처럼 그는 그렇게 외로운 사람으로 이 모든 시련 속에 있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으로 번영을 구가하고 높이 여김을 받고 온 권세를 지니고 있을 때에는 아부하는 사람도 많고, 경의를 표하는 사람들에 에워싸여 있었지만 이제 반역을 당하여 망명길에 오르고 홀로 되어서 왕궁을 등지고 법궤를 버려둔 채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망명의 도망 길을 떠날 때 그와 함께한 사람들은 소수였습니다.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그러한 속에서 우리는 항상 마음이 흐트러지게 마련입니다. 정말 여러분이 환란을 당해보셨습니까? 하루의 길이가 한 계절 같고 한 주간의 길이가 일년 같고 일년의 길이가 십년 같습니다. 저녁에 조용히 눈을 감으면 아침에 이 세상에서 다시 눈을 뜨고 싶지 않은 시간들을 지내 보셨습니까? 시인이 그러했습니다. 삶의 모든 즐거움을 빼앗겨 버린 극심한 고난의 때에 그는 믿음이 없어서 출렁거리는 시련의 물결 속에서 에워싸여 시선을 흐트러뜨리는 때신 오히려 그 믿음은 그의 마음의 시선을 하나로 모으게 하였고 그리고 오직 한 가지 일에 꽂혔으니 오늘 시인이 말하기를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라고 말합니다.
Ⅱ.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그 한 가지는 크게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A. 여호와의 집에 삶
첫째는 여호와의 집에서 살고 싶다는 확신이었습니다. 히브리 성경에 ‘시브티’라고 나오는 이 단어는 그냥 잠깐 세 들어 살거나 천막을 치고 잠시 거류하는 것이 아니라 영구히 정착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입니다. 이 세상에서 시인은 자신을 나그네로 자처하였습니다. 그것도 슬픔이 많은 나그네로 자처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시인은 시련과 고난으로 가득 찬 인생의 한 토막을 지나면서 그는 여호와의 집에서는 영원히 살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 시인이 헤어질 수 있는 그러한 친구와 같은 이웃과 같은 사이가 아니라 헤어질 수 없는 가족과 같은 관계의 운명 속에서 살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적인 연합입니다.
애인과 부부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애인은 삶의 일부를 공유합니다. 합의하는 시간에 만나고 교제하고 즐거워합니다. 대화도 나누고 포옹도 합니다. 그러나 부부는 삶 전체를 공유합니다. 그것이 애인과 부부의 차이입니다. 부부는 삶 전체를 공유합니다. 그것이 공유되지 않으면 부부가 아닙니다. 삶 전체를 공유합니다. 남편이 겪는 모든 겪음에 아내는 참여합니다. 아내가 겪는 모든 겪음에 남편은 공감하며 참여합니다. 그 공감이 안 되는 부부가 있습니다. 사실상 남남이 같은 장소에 거주하고 있을 뿐입니다. 함께하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여호와의 집에 살고 싶다고 하는 것은 그 핵심이 그냥 공간적인 여호와의 집에 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여러 해 전에 교인들과 함께 종교개혁여행에 갔을 때 제가 두 번을 방문하였지만 항상 갈 때마다 눈물이 나던 곳이 아이슬레벤이라는 곳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고향이었습니다. 비텐베르그에서 전설적인 종교개혁가의 삶을 살고 그의 건강은 회복할 수 없이 악화되었습니다. 그 때 마르틴 루터가 마지막 남긴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이슬레벤으로 가고 싶어요.” 어릴 적 고향이었습니다. 그 역사의 거인이, 그 역사의 인물이 마지막에 온 몸의 죽음의 기운이 엄습할 때 꿈에도 그리웠던 것은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아이슬레벤의 자신의 집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아버지는 광산업자였습니다. 그 당지 굉장히 부자였습니다. 진짜 호화롭고 평탄한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가정적인 여건이 다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형극의 종교개혁가의 길을 갔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소명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감찰 같은 혁명가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이야기해서 비텐베르그에 가서는 눈물이 나지 않았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저 사이는 너무 멀었습니다.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죽어가던 숨을 거두면서 마지막 남긴 말, “하나님, 저는 아이슬레벤으로 가고 싶어요.” 왜입니까? 집이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집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집만 덩그러니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엄마, 아빠, 형제, 식구, 가족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러한 집에 거하고 싶다고 하는 것입니다.
언제 푹풍과 시련이 이 시인을 에워싸고 전쟁과 같은 삶의 한 과정을 지날 때 그때 그는 유일한 가족과 같은 하나님을 그리워하였습니다. 가족인 그 아들이 반기를 들었고 자기를 죽이고 왕이 되고자 자기를 망명의 길로 내몰았습니다. 그때 그는 정말 이 세상 육신의 집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고백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살며.” 여호와의 집에 사는 것을 간절히 원하였습니다.
삶이 마음대로 되지 않고 시련이 올 때 한번 그렇게 말해 보십시오. “너네 마음대로 한번 해봐라. 인생아, 나를 한번 부딪히고 깔아 뭉개보려면 뭉개봐라.” 한번 담대하게 그렇게 선언해 보십시오. 쫄지 말고 무엇이 그렇게 무서운 것이 있겠습니까?
저는 최근 선비의 정신에 대해서 깊이 성찰하면서 용기가 없는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용기가 없는 진실은 거짓입니다. 용기가 없는 진실은 진실이 아닙니다. 진실한 사람은 진실이라는 것 자체가 진리에 합치하고자 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용기가 없으면 그것은 진실한 것이 아닙니다. 허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피곤하고 힘든 인생을 살 때 우리는 곤고하고 어렵습니다. 그때 누가 그리워집니까? 여호와의 집이 그리워지지 않습니까? 덩그러니 놓인 200억, 300억, 400억, 500억, 600억짜리 예배당 건물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집이라고 하는 건물이 아니라 거기 계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서나 하늘나라. 그게 바로 시인이 시련과 고난의 날에 자신의 영혼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간절히 사모하였던 한 가지였습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B. 그의 아름다움을 바라봄
두 번째,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아름다움’이라고 번역된 ‘노암’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유쾌함, 즐거움, 기쁨, 은총, 아름다움’, 이러한 여러 가지 의미를 함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는 단어 그 자체가 영어나 독일어, 프랑스어와는 다릅니다. 독일어, 프랑스어와 같은 인도-유러피안 어들은 단어를 찾으면 뜻이 비슷비슷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는 전혀 달라 보이는 의미들이 한 단어 속에서 묻어 들어옵니다. 그만큼 서술적인 것이 아니라 그림처럼 서정적인 이미지들을 히브리어가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어떤 아름다운 어떤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면서 내 마음 속에 일어나는 아주 즐거운 정동의 상태, 그리고 기쁨을 느끼는 것, 그러한 것들이 은총으로 주워어는 것, 그러한 모든 것들을 아울러서 ‘노암’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서 시인이 뭐라고 말합니까?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라고 합니다.
질문을 하나 해 봅시다. 저는 조예는 깊지 않지만 저도 미술작품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갈 시간이 없습니다. 오페라나 음악회는 너무 좋아하는데 오페라는 너무 비싸고 음악회는 항상 토요일 아니면 주일에 합니다. 그래서 그림의 떡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그림, 전시회 한다고 해서 가서 한가하게 보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사람, 양재도 꽃시장에 어슬렁 다니면서 냄새를 맡고 쭈그리고 앉아서 그 꽃들을 감상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정신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폭풍 후 흑암 속 헤치며 지나가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러한 여유를 가진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이 뭐라고 말합니까?
악인, 원수, 군대, 전쟁 이렇게 살벌한 피 묻은 언어들을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감상자, 심미자입니다. 아름다움을 깊이 직시하면서 그 바깥에 있는 아름다움을 자기 속에 확 잡아 당겨서 아름다움이 주는 정동을 일으키고 그 정동 속에서 아름다움을 온 몸에서 체관한, 체험하는 그것이 심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 심미된 아름다움을 무엇인가 자신의 사상으로 표현해보고자 할 때 거기에서 문학이 나오고 예술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술을 하는 사람을 하찮은 사람들로 보는 것은 안 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굉장히 정신의 요소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말이 됩니까? 사람이 어떤 아름다움을 보면서 심미를 느끼고 그 심미 속에서 뭔가 정동을 원하는 마음 같은 것들은 여유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지금 시인이 사용할 수 있는 극단적인 언어를 동원하고 있습니다. 악인, 원수, 군대, 전쟁, 에워쌀지라도. 전부다 피로 버무린 단어입니다. 피로 버무린 단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눈을 뜰 수 없는 시련, 그리고 숨을 쉴 수 없는 폭풍과 같은 환란 속에서, 그 시련과 환란이 크면 클수록 그의 모든 산란했던 정신은 오직 하나로 모아져서 쫙 꽂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저만 그랬는지 모르지만 저는 불장난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였습니다. 불을 붙이는 그런 것 말고 촛불이나 모닥불 타는 것을 쭉 응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재미있는가 하면 초가 쫙 탑니다. 휴지를 얇게 단단하게 말아서 대면 처음에 불이 연기가 나면서 붙습니다. 그러다가 재가 남습니다. 재를 계속 불꽃에 댑니다. 촛불에 불꽃이 하나, 둘, 세 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운데는 파랗고, 밝고 그 다음에는 검붉은 색이 납니다. 사실은 속이 열이 높은 것이 아니라 바깥에 와야 열이 더 높습니다. 그것에 재를 대면 눈이 부셔서 볼 수 없을 정도의 필라멘트의 전구가 들어온 것 같은 눈부신 빛이 납니다. 오늘 집에서 하시다가 119 동원하게 하지 마시고, 정말입니다. 그것이 너무 신기하였습니다. 아주 신기한 눈부신 은색 빛이 찬란하게 났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고난과 시련은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면 촛불의 불꽃이 마치 하나님의 성품이라면 우리의 고난과 시련은 거기에 가져다 대는 가연재입니다. 소재가 무엇이 그 불에 닿는가에 따라서 아주 다양한 색깔이 납니다. 구리철사를 감고 있는 전선 같은 것을 대 보면 피복이 떨어지면서 불이 날 때는 시커먼 불이 납니다. 그런데 타는 금속이 뭐냐에 따라서 불꽃 색깔이 달라집니다. 그 원리가 뭐냐 하면 불꽃 원리입니다. 화약이 폭발할 때 어떤 금속과 화학 작용을 하느냐에 따라서 초록, 빨강, 파랑, 총천연색 빛이 납니다. 그래서 한밤에 불꽃놀이 축제 같은 것을 합니다. 두 시간 신나게 놀고 나면 7-8억 어치 불꽃을 쏜다고 합니다. 그것은 정말 화려하게 쏘는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한 3억 원어치 쏘고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멋있는 것은 한 방에 400만원까지 간답니다. 팡 터지면 가슴이 터질 정도로 환상적인 불꽃이 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화약하고 화약 옆에 각기 다른 금속가루를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것을 팡 쏘면 찬란하게 터집니다. 부산에 가면 광안리에서 1년에 한 번씩 불꽃 축제를 하는데 정말 장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항상 주일에 해서 소용이 없습니다. 집회를 갔더니 거기 어느 권사님이 횃 집 한 곳을 안내하였는데 거기에서 보니까 한눈에 광안리가 쫙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언제든지 전화만 하십시오. 불꽃놀이 할 때 비워 놓겠습니다. 저녁 드시면서 보십시오.”하는 것입니다. “좋네요. 그런데 언제 하나요?” “항상 토요일 아니면 주일입니다.” 소용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확 터지는 것입니다.
결국 뭐냐 하면 고난이 없이 밋밋한 인생을 살면 맨날 똑같은 불꽃밖에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고난이 오고 시련이 오면 생전 보지 못하는 불꽃을 찬란하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내가 안 봐도 좋으니까 내가 편한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그러한 길이 있으면 저에게도 가르쳐 주십시오. 그것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난을 당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속성의 찬란한 불빛을 보느냐 하면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사람이 보겠습니까? 고난 그 자체는 쾌락과 마찬가지로 중립적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성품을 선하게도 할 수도 없고 악하게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 하면 그것을 내면화하고 주관화하는 것을 어떤 식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고난이 우리를 망가뜨리기도 하고 고난이 우리를 아주 놀랍게 거룩하게 만들기도 하고 즐거움이 우리의 정신을 한 없이 너그럽고 아름답게 만들기도 하고 우리를 방탕으로 흘러버리게 망가뜨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성경이 바라보는 인간은 우울한 인간관입니다. 인간 스스로 그러한 모든 것들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정상적으로 적용을 해서 그것들을 자신에게 선용할 수 있는 자연적인 능력이 인간들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치열하게 주님을 섬길 때 영력이 필요하겠습니까? 휴식하며 놀 때 더 큰 영력이 필요하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자 입니까, 후자입니까? 전자 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쉬고 놀 때 더 많은 영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왜 입니까? 일을 하는 동안에는 일 자체가 우리를 어느 정도 보호해 줍니다. 찬송 부르다가 고스톱 치러 가는 사람 있습니까? 기도회 하다가 눈물을 씻으면서 노래방 가는 사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자연적으로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우리에게 즐거운 일이 일어나든 슬프고 괴로운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어느 쪽이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절실한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가난하고 힘겹게 살 때에는 그렇게 신실하게 주님을 찾던 사람들이 부자가 되고 넉넉해지고 살만해진 다음에 그 사람들이 뒤로 미끄러지고 물러가서 심령이 부패해지게 된 경우를 많이 보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성품의 탁월한 이해는 고난 그 자체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당할 때 시인처럼 마음을 하나님께로 모으고 그리고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얼마든지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나의 가장 큰 의무는 이 모든 시련과 고난을 당하면서 내 인생을 해쳐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악에 대한 굴복이나 잘못된 구조에 대한 복종이나 자존감도 없이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그러면서 옳은 것을 옳지 않다고 이야기 하고, 옳지 않은 것을 옳은 것으로 이야기 하면서 그렇게 굴복하면서 사는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감당해 나가면서 그 속에서 고난을 당하면서 시선을 하나님께 주목하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하나님이 누구인가 배우는 학교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자산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화) 교수 한 사람이 돌아가셨습니다. 저도 겪었는데, 석좌 교수라고 해서 학교를 들어갔는데 월급을 보내주면 월급 중 얼마를 떼고 저를 주는데 교수 공제회라는 곳에서 쪽지가 날아왔습니다. 가입을 하게 되면 혜택이 너무 많았습니다. 한 달에 16만원씩 넣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신문에 단체가 나왔습니다. 그 전에 집으로 쪽지가 날아왔는데 교수님들이 모여서 공제회를 만들어 교원 공제회로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믿음이 갔습니다. 연리 8.5%를 주겠답니다. 6500만원을 5년인가 맡기면 1억 원을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 집사람이 보더니 “여보, 돈이 있으면 정말 좋겠다.” 하는 것입니다. 맡길 돈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신문에 보니까 그것이 뻥 터졌습니다. 720만원을 열심히 넣었는데 120만원으로 끝내자고 편지가 온 것입니다. 떼 먹혔습니다. 교수 한 분이 일생을 모은 것을 자식들도 모르게 거기에 맡기고 이자를 받으며 살다가 뻥 터지고 3억 9천만 원을 맡겼는데 5천만 원만 찾아가라고 하니까 쓰러지신 것입니다. 그 분은 암에 걸려서 결국 죽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인간이 마지막에 죽음이라는 문턱에 딱 가면 그가 가진 재산, 명예,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무슨 외모, 다 그런 것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아는 것입니다. 그것만 남습니다. 그것이 있는 사람은 죽음의 문턱에서도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교인들 보니까 암으로 사형선고 받았는데 가족들을 계속해서 매일 매일 위로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소망 가운데 빛나고 위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으니까 그게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를 붙들어주고, 그 뿐 아니라 죽음 이후의 순간도 그 지식에 붙들려 사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이 지식보다 훨씬 완전한 지식 속으로 들어가야 되지만 말입니다. 그 보다 소중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목숨이 붙어있고 아직까지 깝죽거리고 사니까 니가 권력이 많네, 적네 하면서 니코가 작으네 크게, 나는 강남에서 했네 그 이야기이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짧게 인생을 보면 정말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죽음 앞에 서게 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제가 20세 때 죽음 앞에 서 봤습니다. 죽음 1mm 앞에 서 봤습니다. 놀라운 것이 세상에 그렇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이 많은데 아무도 미운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습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그것이 나 혼자만의 경험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경험이라고 합니다. 영화에서는 죽을 때 ‘내 하늘이...’ 으악 하고 죽지 않습니까? 자기가 죽음을 자각한다면 죽기 직전에 모든 사람을 내려놓는 마음이 생긴다고 합니다. 김지하 씨가 그랬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사형선도를 받아 감옥살이를 하였습니다. 복역하면서 이를 갈았는데 교도소로 신문이 들어와 소식을 받았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총에 맞아 죽었다고 기사를 보는 그 순간 무엇인가 거대한 성이 자기 안에서 와르르르 무너지면서 모두 용서가 되더랍니다. 그것이 박근혜 대통령을 선거 때 지지해 주고 한 것도 그러한 심리적인 현상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저는 죽음 1mm 앞에까지 가봤는데 아무도 미운 사람이 없고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의학자들에 의하면 죽기 직전에 온 몸에 남아있는 엔돌핀이 확 하고 분출하듯이 쏟아져서 환희 속에서 죽는다고 합니다. 한 때 애들이 대들보에 목을 걸며 시체놀이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친구가 옆에 있고 죽기 직전까지 가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쾌감이, 마약을 먹은 것처럼 샘솟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 풀어서 죽는 중학생 애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우리에게 남는 것은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닙니다. 인생을 한 없이 산다고 생각하니까 모든 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 죽음 직전에 딱 하면 의미 있는 것들이 없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뭐라고 했는가 하면 “지금 살 때 그 죽음의 마지막 순간이 되어도 계속 할 그 일을 하면서 살자.”고 하였습니다. 에드워즈가 결심문에서 쓴 내용입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죽음의 마지막 순간이라 하더라도 하고 있을 그 일을 지금 하면서 살자.” 그것이 영원에 잇대어 사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는 것만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해석을 들어보면 하나님에 대해서 모욕적인 것은 아닙니다. 가끔 동료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참 하나님은 설교자에 관한한 잔인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설교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구도의 길을 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라 보는데, 하나님은 이제껏 가보지 못한 어떠한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 진리의 세계, 은혜의 새로운 경지를 우리에게 보이실 때 꽃밭에서 노는 것 같이 살면서 세계를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살을 찢는 것 같은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우리가 가지 못한 길을 갈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어떤 한 사람이 평신도라 할지라도, 어떤 한 사람이 대화를 나눌 때 여러분이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한 비밀스러운 일들을 알고 있거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여러분이 따라갈 수 없는 어떤 깊은 세계에 대한 앎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여러분 보다 더 많은 고난을 겪은 사람들입니다. 절대적인 면에서 여러분이 더 고생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 사람은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던 진리의 말씀과 붙들고 싸우던 그런 흔적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인이 하나님께 바라던 그 한 가지 속에 있던 두 번째 요소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 집에서 살고 싶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그 모든 시련 속에서 다시 발견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세 번째는 무엇이겠습니까?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고난을 통한 복주심(2016.1.27 수요예배14)
14. 환란 날에 베푸신 은혜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시 27:5)
녹취자: 오희열
I. 본문해설
12월 넷째 주에 4절을 설교했고 오늘 계속해서 그 설교를 잇겠습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시편27편은 다윗이 압살롬에게서 반역을 당했을 때 쓴 탄원시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고난당하던 때에 다윗의 믿음을 이 시는 담고 있습니다. 그는 정말 왕으로서는 겪어본 적이 없는 그런 끔찍한 시련의 시기로 들어갔습니다. 자신이 육체적으로 고난을 받고 고통을 겪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고 그는 이 시련 속에서 인생의 본질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 전체가 뒤흔들렸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던 아들이 자기의 목숨을 노리고, 일평생 전쟁터를 누볐던 신앙의 동지들이 자신을 배반했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존경하며 따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을 멸시하기 시작했고 그는 왕위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모든 시련을 통해서 그는 일찍이 내려가 본 적이 없는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인생, 그것의 비밀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시련 속에서 인생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에게 있는 진정한 소원이 무엇이었는지를 한 가지 일이라고 표현하면서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것과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사모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는 한 나라의 제왕이었습니다. 왕이 되고 정권을 차지하고 왕국을 세우고, 왕국을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자식에게 배신을 당하고, 동지들로부터 배반을 당하는, 그 출렁거리는 모든 삶속에서 처음에 그는 자신을 에워싼 원수들로 인하여 마음이 아프기도 하였을 것이고, 어쩌면 그들에게 복수를 꿈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달랐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생의 모든 사태에서 그 의미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것은 과거에 가진 것을 현재에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신앙이 자신 속에 역사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현재적인 신앙으로써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인은 이런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에 깊은 연단을 겪으면서 그 자신의 삶에 전개되는 끔찍하고 불행한 사태들을 통해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이 본질을 보고나니 왕이 되고 보좌에 오르고 권력을 소유하는 일들이 인생의 본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한 가지 소원을 구합니다. 그 한 가지 소원이 사실은 두 개로 나타나는데 그 둘이 하나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여호와의 집에 머물게 하시고, 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사모하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이제 이것을 설명하겠습니다만,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집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집과 아름다움이 관계가 있는 것은,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지 않은 곳이 없으시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현존을, 당신이 살아계시고 또 우리 가까이 계시다는 놀라운 증거를 공동체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시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 교회에서 하나님은 당신이 이 세계 중에 계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선택하신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주 잘 보여주십니다. 더욱이 교회에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위탁되어 있기 때문에 이 진리의 말씀이 구약시대에는 제사를 통해서 전개되고 율법을 통해서 전개되었고, 오늘날은 복음과 말씀 사역을 통해서 전개되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은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와 만나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집인 이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예수 믿고 회심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았어도 노래방에서 술 마시다가 예수 믿게 되었다는 간증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그 끊임없는 영화와 존귀, 그리고 멸시와 시련과 영광, 이 모든 출렁거리는 것들은 모두 잠시 있는 것들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한 10년이나 20년 전 쯤 인생을 뿌리째 흔들만한 엄청난 사건이 있었다고 합시다. 그게 불행한 사건일 수도 있고 행복한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우리 인생의 본질 자체를 뒤바꿔 놓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인이 그 본질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사모하며 그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 그것은 나를 배반한 내 새끼나 나를 배신한 동료들이 그것을 끊어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자신의 환란 날에 굳게 붙들며 살았던 확신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환란 날에 베푸신 은혜였습니다.
II. 환난 날에 베푸신 은혜
A. 비밀히 지키심
첫 번째는 비밀히 지키시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환란 날입니다. 환란 날이 무엇입니까? 일상적으로 늘 있을 수 있는 그런 날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은 특별히 행복할 때가 있는가하면 특별히 불행할 때도 있습니다. 너무너무 괴롭고 불행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환란의 날에 하나님이 이 시인을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셨습니다. 이것은 시인이 이미 경험한 바 이기도 하고 또 환란 속에서 자기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 앞을 내다본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비밀히 지키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타인이 발견할 수 없도록 숨기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럼 타인은 누구입니까? 다윗을 헤치려고 하는 악한 무리들, 하나님 당신의 자녀들을 보호하실 때, 항상 그 주변에 두루 도는 화염검을 주셔서 그 사람에게 접근하기만 하면 죽이는 방식으로 보호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지 우리는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심지어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한 때는 그렇게 악한 사람들이었는데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올 때까지 우리의 악함을 참으시고,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들도 인내하시면서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다는 것은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오래 참으심으로써 모든 죄인을 향하여 당신의 자비를 거두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과는 어떻게 조화를 이루느냐는 데에까지 질문이 번지면, 우리는 수학공식을 풀듯이 그 모든 것을 정확히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만약 그 모든 것이 공식으로 풀린다면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즉각적으로 자신에게 이익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얼마든지 옳은 일을 했는데, 말씀을 지켰는데, 그것이 자신에게는 이익이 아니라 손해, 또는 끔찍한 핍박들로 돌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도 제가 브라이언 채플이라는 사람의 책을 읽다가 왔습니다만, 그가 자기의 친구 이야기를 합니다. 그 친구의 부인은 제약회사에서 제품의 안정성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사인해주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 친구는 신학교를 다니고 있고 부인은 꽤 괜찮은 제약회사에 취직해서 그 일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새 제품이 나왔는데 그것을 과학적으로 분석해보니까 무엇인가에 오염된 물질들이 그 약 속에 섞여 있더랍니다. 그런데 그것이 해로운지 아닌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확실한 것은 무엇인가 섞여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제품을 회수해서 섞여 있는 것들을 분리해내고 새로운 제약을 출시할 때까지는 엄청난 시간이 걸리고, 비용이 얼마나 더 들지도 모르기 때문에 회사의 윗사람들은 그냥 사인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못 하겠다고 하니까 사인을 하라고 설득을 하고 마지막에는 아주 높은 상급자가 불러서 월요일까지 사인하지 않으면 당신을 해고 하겠다고 전했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여기에 사인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과 남편의 생계가 자신을 의지하고 있을 때, 이 사인을 하지 않고 버티는 것은 수운 것이 아닙니다. 해고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올바르게 했는데도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 매우 나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보다 더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라도 그리스도인은 항상 올바른 길을 선택하며 가야합니다. 그 이야기에서 감동되었던 것은,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정직하게 살았는데 고통을 받았고 엄청난 손해와 불이익을 받게 되었는데 그는 그렇게 산 것만큼 하나님을 섬긴 것이라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삶 자체가 하나님을 섬긴 것이기 때문으로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지 그게 물질로 환산되어서 자신에게 세상의 복으로 돌아오기를 계산하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소중하고 값진 것을 은밀히 감추는 것이지 아주 가치 없는 것을 감추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나를 그의 초막 속에 감춘다.”고 했는데 초막은 성막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막, 장막, 이 모든 것들이 성막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너무나 소중한 성도들이기 때문에 환란의 날에 그들을 장막 은밀한 곳에 숨기셨고, 이 시인도 보호하셔서 악한 자들이 자기보다 훨씬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을 때조차 자기를 찾아낼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감추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비밀히 지켜주신 곳이 성막이었습니다. 그래서 시련의 날에 교회를 더 가까이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실제로 보면 사람들은 시험에 들면 교회를 멀리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람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할 것입니다. “이제 다른 교회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비렁뱅이처럼 이 교회 기웃, 저 교회 기웃거리며 다니겠습니까? 머리가 허옇게 되어서도 겨우 그런 일이나 하면서 인생을 살겠습니까? 머리가 허옇게 된 나이에 정착할 교회가 없어서 이 교회에서 튕겨 나와서 저 교회에 기웃거리고 그 교회에 다니는구나, 했더니 또 다시 그 교회를 욕하고 또 튕겨 나와서 어디론가 돌아다니고 그러다가 죽었는데, 장례를 집례 할 교회가 정해지지를 않았습니다. 그게 성도다운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대답을 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시인을 그 초막에 비밀스럽게 숨기셔서 원수들이 그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성도는 시련의 날에 더욱 교회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렇게 시련의 날에 하나님의 교회에 와서 말씀을 깨달음으로써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바라보아야 할지를 배우게 됩니다.
가죽 공장을 하다가 망한 사람에게 교회가 다시 돈을 버는 방법을 가르쳐 줄 수는 없습니다. 건축경기가 나빠서 벽돌 공장을 하다가 사업의 위기를 만난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다시 벽돌을 많이 팔아서 부자가 될 수 있는지 그것을 가르쳐 줄 수는 없습니다. FTA가 체결되어서 다른 나라의 싼 제품들이 물밀듯이 들어와서 자기 나라의 사업이 위태로워져서 공장이 도산위기에 있을 때, 어떻게 품목을 변경해야 돈을 버는 지를 교회가 가르쳐 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의 사명이 아닙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자신에게 일어나 이 어려운 일의 신앙적인 의미는 무엇인지, 그리고 이 시련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영혼을 지키고 자신의 인생의 참된 주체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믿음으로 이 시련을 극복해 갈 수 있을 것인지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헤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작년에 영국으로 집회를 갔습니다. 그곳 어느 도시에서 두 번 정도 말씀을 전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첫날, 어떤 40대 후반정도 되어 보이는 부부가 설교 후에 찾아왔습니다. 앞자리에 앉아서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말씀을 듣다가 끝나고 저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습니다. “누구십니까?”, “열린교회 설교를 듣고 인생이 바뀐 사람들입니다.”, “무슨 얘깁니까?”, “한 6년 전에 이혼을 하려고 가족이 산산조각 날 위기에 놓였는데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인생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하며 쭉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그 두 부부가 어떤 상황에 사는지, 무슨 사업을 하는지 아직도 잘 모릅니다. 그 남편은 그때 저를 만나고 한 달 정도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모릅니다. 그들은 5, 6년 정도 전의 일이지만 그런 위기가 있어서 헤어질 정도까지 생각한 것입니다. 심심해서 이혼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 위기와 시련이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결해야하는지는 몰라도 자기에게 일어난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나니까 아내로서 남편에게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생겨나고 인생이 바뀐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어디 가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곳이 어디입니까?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유익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건성으로 다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누리고 그 말씀에 은혜를 받고 새로워질 기회를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교회에는 교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르고 마음 깊은 곳에서 열렬한 기도가 쏟아져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기보다는 그냥 버티면서 여기 서 있는 것조차 너무너무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교제가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성도들과 함께 모였는데 그들이 시련 속에서 고난을 헤치고 승리했던 이야기, 그리고 시련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비밀스럽게 감추어주셨는지, 그러한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속에서 감동이 일어나면서 자신도 희망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찬양)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이러한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그것이 교회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익입니다.
세 번째는 교회는 기도의 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서든지 기도할 수 있지만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입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에 있을 때 우리는 주님과 깊이 기도로 교제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함께 기도의 힘을 보태며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젖은 나무를 하나를 가져다 놓고 성냥불로 불을 붙여보려고 하면 성냥 한 통을 다 써도 그 불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잘 타고 있는 불 아궁이 속에 젖은 자작을 갖다 넣으면 처음에는 불이 붙는 게 아니라 김이 납니다. 마르면서 결국은 불이 붙습니다. 시험에 들고 환란을 만나서 영혼이 병들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만나면 안 될 사람들을 만나고 가서는 안 될 장소에 가고, 반드시 있어야 할 그 자리에는 없습니다. 그러면서 영혼은 점점 미끄러져 먼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환란 날에 이렇게 주님의 교회에 피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바위 위에 두심
마지막 두 번째는 “바위 위에 두심”,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시인은 노래합니다.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여기에서 ‘바위’는 히브리말로 ‘주루’라고 하는데, ‘반석’이라고도 번역하고 ‘바위’라고도 합니다.
이 바위는 구약성경에서 구원을 상징합니다. 여기에는 복합적인 문학의 그림이 들어있는데, 구원, 안전, 그 높은 바위 위에 세우시는 것이니까 존귀, 이런 개념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시련 속에서 피하는 자들, 시련 속에서 자신의 힘으로 그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 시련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인간인지 깨닫고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 그 모든 시련 속에서 사람에게 희망을 두지 않고 우리 주님을 의존하는 사람들을, 그분에게 피하는 사람들을 주님은 후대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그 모든 시련 속에서 보호하고 지키십니다. 그리고 건지십니다. 구원하심입니다. 대적을 멸하고 그가 처한 난관에서 그를 건져 올려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 바위는 안전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을 비롯한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모래도 많지만 바위가 많습니다. 그 바위산은 종종 우리가 보기 힘든 종류의 바위산입니다. 거의 나무 하나 없이 커다란 바위들로 이루어진 산입니다. 정말 그 바위틈에 숨어 있으면 불화살이 새카맣게 쏟아져도 맞출 수 없는, 현대전에서도 대포를 쏴서 떨어져도 그 구멍에 대포가 떨어지지 않는 한 절대 죽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안전한 곳이 바위산입니다. 원수들을 시인을 불안하게 보고 언제든지 공격해서 그 목숨을 탈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안전하게 보호한 사람들은 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악한 사람들은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들을 보호하고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약하지만 그렇게 약할 때 강하게 해 주시고, 시련 속에서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보호해 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 때문에 주님 앞에서 사는 길을 주님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런 간증들을 수없이 많이 생산해 냅니다.
시인은 이와 똑같이, 다윗이 그렇게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시편 3편을 지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저는 오래전에 지금은 없어져버린 열린 공간 마당에서 이 말씀을 읽으며 정말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무슨 방패가 있습니까? 무슨 영광이 있습니까? 누가 그의 머리를 들어주셨습니까? 지금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을 당해서 도망하게 되었고, 자신도 고백하기를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습니까?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했습니다. 그리고 저 인간은 하나님도 버리신 인간이라고 낙인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인은 전혀 다른 고백을 하나님을 향해 올립니다. “주님은 나의 방패이십니다.” 희랍시대의 방패는 로마시대의 작은 방패와는 다르게 엄청나게 컸습니다. 그 큰 사각 방패를 세워놓고 몸을 거기에 붙인 상태에서 눕히면 하늘에서 새카맣게 메뚜기처럼 화살이 쏟아져도 단 한 개도 그를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방패입니다. 그리고 “나의 영광이십니다.” 영광은 모든 사람이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게 만드는 높은 힘입니다.
그러면서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했습니다. 이것은 왕궁에서의 관례를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죄인이 와서 잘못했기 때문에, 혹은 임금을 뵈옵는 것이 감당하기 힘들어서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어쩌면 큰 벌을 받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왕이 자애로운 목소리로 “그대는 고개를 들라.”고 합니다. 은총이 약속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들어서 많은 사람 앞에 세워주기까지 할 때, 그때 놀라운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시인이 그러한 하나님의 존귀하게 하심을 경험했습니다. 신앙은 이런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시련 중에 사람을 보며 비굴해 하지 말아야합니다. 그 시련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물질이나 권력의 자원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만나는 많은 시련은, 대부분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 앞에 세우고 싶으셔서 주시는 시련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을 의지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녀들을 바위 위에 두십니다. 그래서 악인이 그를 흔들어 놓을 수 없도록, 악인이 그를 멸할 수 없도록 하나님이 그 큰 바위에서 그를 숨기시고 그를 안전하게 하시면 존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환란을 만났을 때 시인이 경험한 바이고 또 기대한 바였습니다.
III. 결론과 적용
그러므로 말씀을 맺습니다. 환란 속에서 더욱 주님을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련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스스로 깨달아 알게 하십니다. 그런 시련과 고난 속에서 영혼이 위험할 때, 하나님의 집에 더 가까이 계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은밀한 장막에서 주님은 그 모든 시련을 통하여 당신의 성품의 빛을 보여주십니다. 고난 속에서 더욱 교회를 가까이 하여 그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시련을 극복할 지혜를 배우고 그 말씀의 은혜로 교제하는 법을 배우고 그 능력으로 마음을 쏟아 주께 기도함으로 그 모든 시련을 통해 오히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주님을 굳게 붙드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15. 높이시는 하나님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시 27:6)
녹취자: 허혜숙
Ⅰ. 본문해설
고난을 통한 복 주심(2016.3.2 수요예배15)
지난 번 수요예배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시는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 때에 지은 시 입니다. 고난을 당하던 때에 다윗의 믿음을 표현하고 있고 그는 이 극심한 시련 속에서 인생의 본질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환란 날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회상하면서 이 시를 지었습니다. 그는 바로 앞 절에서 하나님이 그 환란의 날에 자기를 지키셨고 또 장막에 감추셨고 그리고 또 바위에 두셨다고 하는 사실을 노래했고 저는 1월 26일에 이 부분을 설교하면서 5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드렸습니다. 만약에 5절이 환란 날에 신자가 하나님 의지할 때에 얻게 될 내적인 은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면 오늘 읽은 6절은 그렇게 하나님을 환란 가운데서 의지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회적인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어떻게 영광을 받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감사를 6절에서 하나님께 올리고 있습니다.
Ⅱ. 환난 날에 높이심
6절의 핵심은 하나님은 환난 날에 사람에게 비굴하지 않고 당신을 전심으로 바라며 의지하는 사람들을 그 환난 날에 높이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A. 머리 들게 하심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니”라고 말합니다. 수동태입니다. 그것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자기가 스스로 높아지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교만입니다. 자신이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원수들 가운데서 높여주신다는 의미입니다. 히브리 성경에 ‘로쉬’라는 단어는 그야말로 ‘머리’를 가리킵니다. 머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맨 처음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펼치면 첫 번째 책이 창세기입니다. 창세기 1절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할 때 그 ‘태초’라는 말이 원래 히브리 성경에 보면 ‘한 시작 안에’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브레쉬트’ 이렇게 나옵니다. 거기에 쓰인 단어가 바로 ‘로쉬’라는 단어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단어는 머리를 가리키기도 하고 맨 위에 있는 것, 혹은 가장 존귀한 것을 가리키는 추상명사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성경에 인간의 머리에 대해 나오는데 성경에 나오는 이 머리는 그냥 단순히 인체의 한 부분이 아닙니다. 손이 한 인간의 재주를 상징하는 제유법적 언어로 사용될 수 있다면 만약에 발이 부지런히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는 이동할 수 있는 상징으로 표현될 수 있다면, 그리고 인간의 심장이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는 한 상징으로 부른다면, 유대들 맥락에서 보면 창자는 영혼이 있는 자리입니다. 그렇지만 이 머리는 그런 인간을 상징하는 한 부분이 아닙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영광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머리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머리카락도 존귀한 것입니다. 우리의 온 몸에 털이 있지만 온 몸에 있는 털에 대해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관념은 일반적으로 우리 인류에게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이 머리와 수염은 다릅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의 인습으로 굳어져서 일제 시대 때 머리를 모두 잘라서 서양머리로 하게끔 일제가 요구를 했잖습니까? 그 때 최익현이라고 하는 선비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차두 가단이나 차발은 불가단이다”(此頭 可斷 此髮 不可斷) “내 목은 자를 수 있어도 내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 그것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다는 사상도 있었지만, 그렇게 따지면 손톱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머리카락 자체가 인간의 존엄과 존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그런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시편 143편을 보면 하나님이 부어주신 축복을 설명할 때 아론의 머리에 기름이 흘러내려서 머리를 적시고 옷깃으로 흘러내리는 것 이것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표현을 합니다. 하나님이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을 기름 부을 때 입을 벌리고 입술에다가 기름을 발랐습니까? 아니면 발바닥에다 기름을 부었습니까? 아닙니다. 머리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머리가 성경에서는 인간의 모든 존엄과 영광, 모든 다른 사람이 아닌 것들과 구별되는 인간의 존귀함을 상징하는 지체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머리를 든다’라는 것은 곧 하나님께로부터 자신이 환란 중에서 대적들에게 명예를 잃어버렸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시련을 만났을 시 수많은 원수에게 에워 쌓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안 그랬던 인생이 별로 없었습니다. 평화로운 시대 때를 제외하고는 왕이 된 후 기름부음을 받은 후 사울과 그 일당들이 그렇게 자기를 험담하고 비방하고 나쁜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한 나라를 세우고 통치를 하였을 때에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그 때에도 다윗에 대한 말할 수 없는 모함과 비난이 온 백성들 사이에 전파되었습니다. 환란과 시련은 이 시인에게 명예를 잃어버리는 비참한 상황과 함께 같이 왔습니다. 그래서 외적인 시련뿐만 아니라 내적인 고통도 계속 그 안에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다른 시편에서도 계속 고백을 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머리를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했는데 그렇게 하나님이 머리를 들어주시지 않을 때에 이전에 그가 당했던 수치를 시편 69편 4절 같은 데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 보다 많고 부당하게 내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고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하나님, 내가 빼앗지도 아니한 것을 물어주게 되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비난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가 하지 않은 일인데, 내가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그것을 빼앗은 적이 없는데, 그렇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비난해서 이미 여론의 대세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에게서 빼앗은 적이 없고 그런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는데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 때 이 시인의 머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수많은 원수들이 짓밟고 지나다녔습니다.
한 시대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여 순수한 마음으로 나라를 일으켜 세웠던 그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속에 남아있는 순수한 다윗은 사라지고 개걸거리는 탐욕 속에 인간도 아닌 어떠한 존경과 영광을 표시할 조차도 없는 쓰레기 같은 인간 다윗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말합니다. “하나님, 내가 빼앗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여론이 대세를 이루어서 나를 빚쟁이로 몰고 이제 그 빚을 갚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해가 갑니까? 여러분이 오늘 저녁 집에 들어갔는데 법원에서 통지서가 나왔습니다. “당신이 빌려간 돈 얼마 얼마에 대한 채무를 다음 주까지 상환을 안 하면 차압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친구가 자기 도장을 몰래 가지고 가서 보증을 세워서 돈을 떼어먹고 갚지 않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 그런데 말입니다. 재산을 잃는 것은 조금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건강을 잃는 것은 많이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명예를 잃어버리는 것은 모두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명예를 잃어버리는 것은 목숨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더 어렵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려고 목숨을 끊는 것입니다. 선비는 목숨보다 명예를 훨씬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다윗이 그런 일을 겪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어두움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아야지만 빛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에서 다윗이 “하나님이 이제 내 머리를 드십니다.”라는 감격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가 짓밟혀서 수많은 원수들이 그 머리 위를 밟고 지나다닐 때에 느꼈던 다윗의 그 비참함과 억울함, 그 원한을 이해 못하기 때문에 그 머리를 드신다는 성경 구절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인지 여러분이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설교에서 약간 빗나가긴 했지만 궁금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사람들이 짓밟아서 존귀와 영광의 상징인 머리가 땅바닥에 쳐 박히기까지 다윗은 왜 가만히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회개할 때 땅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땅에 대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절을 할 때에도 극도의 경배를 뜻할 때에 머리를 땅에 박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나는 원래 존귀하고 영광이 있는 사람인데 하나님 당신의 영광에 비하면 나의 존엄과 영광은 티끌과 같습니다.”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래서 대는 것 자체가 일체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민족적으로 극단의 회개를 할 때 바로 사람들이 이렇게 재를 무릅썼습니다. 그 재가 히브리말로 ‘아파르’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1장에서는 흙으로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티끌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뒤집어쓰는 것은 자신과 그것을 일체화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바깥에서 자신의 존귀와 존엄, 영광을 구할 때 그것은 하나님 앞에 내동댕이쳐져서 하나님 앞에 버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편 3편에서 시인이 노래합니다. 압살롬에게 반역을 받아서 황급하게 도망을 갈 때 그 때 시인이 노래합니다. 노래할 때 그 노래 내용이 뭐냐 하면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마지막이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시니이다” 그러면 대답이 나온 것입니다. 왜 그렇게 존귀와 영광이 짓밟힘을 당해서 훔치지도 않은 것을 물어줄 지경에 이르게 되기까지 자기 뱃속으로 나온 아들놈이 자기를 죽이겠다고, 왕이 되겠다고 해서 버선발로 재를 무릅쓰고 도망을 가야할 상황이 되었는데도 다윗은 그 속에서 자신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 칼이나 창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저는 지금 이렇게 반역을 당하여 황망히 도망을 갑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의 방패십니다. 모든 것을 막아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 영광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때문에 존귀한 다윗이 된 그것이 내 영광이지 하나님 없이 훌륭한 임금 다윗, 똑똑한 문학가 다윗, 그리고 용맹스러운 장군 다윗, 이것이 내 영광이 아니다, 하나님이 저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장 감격해서 고백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내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이 노래를 할 때 다윗이 머리가 들려있었습니까? 아닙니다. 평소 같으면 자기 앞에 나와서 얼굴도 들지 못하고 혀도 마비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을 하찮은 것들이 입을 열어서 개소리를 지껄이면서 다윗을 모함하고, 음해하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온갖 더러운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무슨 정의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권좌에서 다윗을 내쫓는 광경을 보면서 많은 군중들이 용기를 얻어서 정치에 대한 불만을 다윗에게 그 당시에 쏟아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뭐라고 했느냐 하면 “하나님은 내 머리를 드시는 자시니이다”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망명을 떠날 때 법궤를 가져가자고 신하들이 이야기 했습니다. 왜? 이 법궤는 왕권의 정통적인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뭐라고 합니까? “놔둬라.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내가 다시 와서 법궤를 보리라.” 그래서 자신의 모든 인생을 그 분의 섭리의 손 안에 맡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으로 하여금 시련의 날에 수치를 견디게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나를 둘러 싼’ 그랬습니다. 히브리말로 ‘사비브’인데 빽빽하게 에워싸고 있는 광경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인은 외롭게 혼자 있는 것이고 원수는 다수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물 셀 틈 없이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광경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수많은 수치와 모욕들이 퍼부어 지는 것입니다. 이러니 시련의 날에 만약에 다윗이 사람에게 당하는 수치를 깊게 생각했다면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하찮은 인간인지를 묵상했다면 이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거기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 앞에 당하는 수치보다는 하나님은 이 치욕스러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내 인생을 어디로 이끄시려는 것일까? 그리고 나에게 무엇을 보여주시려는 것일까?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의 명예를 생각합니다. 한 교회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장로파와 목사파가 대판거리 싸웠습니다. 법정에 가서 끝까지 갔습니다. 대법원까지 갔습니다. 그래서 판결이 났습니다. 목사파가 이겼습니다. 그런데 승리의 기쁨을 전해 줄 교인들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천여 명이 넘는 교인이 백 명이 남았습니다. 자, 목사파가 이긴들 그래서 어떻게 됐다는 것입니까? 그러면 법적으로 옳은 자신들의 명예는 보존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법정에서 인정해 주는 것이지 하늘 법정에서도 똑같은 판결이 내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900명의 교인은 그 사람 자신들이 별로 신앙이 없어서, 혹은 상처를 받아서, 혹은 그 광경을 보면서 힘들어서 다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겼습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 그 때 그 뜨겁던 교회의 영적인 분위기는 재건이 안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점에서 이 시인에게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을 껍데기를 벗겨서 세워야 됩니다. 시인은 자신이 사람들 앞에 당하는 수치보다 하나님의 섭리를 먼저 생각했고 짓밟혀서 치욕을 받는 그래서 사라져버린 자신의 명예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옛 성현의 말씀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도덕을 구하는 자는 공명을 추구하지 아니하며 공명을 추구하는 자는 부귀를 구하지 아니하노니 부귀를 추구하는 자는 무슨 짓이라도 할 놈이다.” 살다가 보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높여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 하나님이 정말 나를 높여주시는구나.’ 연주를 하고 났는데 당신이 세계적인 연주가 같다고 칭찬해 줄 수도 있고 어쩌면 밥을 이렇게 맛있게 하느냐고 칭찬해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가만히 돌아보면 그것은 세속적인 관점에서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고 신앙적으로 보자면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영적으로 변화시킬 때에는 영광보다 수치를 당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조흔석이라는 돌이 있고 혹은 우리가 테스트라고 부르는데 금속이 무슨 성분인지 모를 때 그 조흔 석에다가 확 갈면, 우리로 말하면 줄칼 끌 같은 것에 확 갈면 가루가 됩니다. 고체에서는 초록색인데 갈고 나면 가루색깔은 노란색인 광물들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하나님은 시련 속에서 우리가 수치를 당하게 하심으로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항상 영광만 받게 하실 뿐 아니라 때로는 수치도 당하게 하시고 형통한 삶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도 당하게 하시는 이유입니다. 이 모든 속에서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그렇게 자신이 모든 영광을 잃어버리고 짓밟히고 자신의 영광이 떨어져 티끌처럼 되었을 때에 자기를 믿고 의지하고 스스로 자기를 자랑스럽게 하던 것들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신앙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신앙의 깊이 여부를 보여주는 한 충분한 시금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의 누명을 반드시 벗기시고 비천한 자는 존귀하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리고 시인은 살면서 그런 하나님의 손길을 너무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렇지만 시인 다윗이 반드시 그렇게 치욕과 고난을 당하는 날에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는 주님이 자신의 누명을 벗기시고 자기의 이름을 높이실 것을 믿었지만 다윗의 신앙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재판의 역사를 보면 어쩌면 저럴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명백하게 재판을 해서 절대 죽이면 안 되고 나라에서 상을 줘야 할 사람들을 사형언도를 내려서 죽여 버린 사례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 재심이 이루어져서 국가가 잘못했으니까 유족에게 변상하라고 하는데 죽었던 사람이 살아날 수가 있습니까? 하물며 이 세상에서 양심과 법에 의해서 재판을 행하는 사람도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여론이나 자신의 생각에 따라서 사람들을 판단하고 할 때에 그것이 잘못 된 판단을 할 경우가 얼마나 많을 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어떤 판결들은 사실은 너무나 많이 있었는데 영구히 묻혀서 미제의 사건이 됩니다.
특히 북한에서 지금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 북한의 고위층과 깊은 친분을 맺고 있는 분하고 만났는데 그 집에 가서 아침을 먹는데 부하가 서류를 가지고 오더랍니다. 별 넷인 장군이었는데 명단을 이렇게 보더니 “아홉시에 죽여버리라우.” 최종 판결입니다. 그러면서 계속 식사를 하더랍니다. 그렇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 중의 어떤 사람들은 신앙을 지키다가 죽어간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생전에 머리를 못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역사 속에서 명예가 회복되어서 죽은 영혼이라도 고개를 들어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역사 속으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심정이 있어야 되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머리를 들어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에 겸손히 복종해야 한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해야 한다.” 신앙이 훌륭합니다. 그런 신앙을 꼭 가져야 합니다. 반드시 그 중에서 괄호가 꼭 있어야 합니다.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렇게 해야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의 놀라운 영광은 하나님을 섬겨서 그에 상당한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은 하나님을 잘 섬겨서 그에 합당한 보상을 이 세상에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비천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감히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생활, 그 자체를 영광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영광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런 것을 본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짜를 너무 좋아합니다. 해마다 노벨상 시상식을 하잖습니까? 노벨상 시상식에 약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노벨상 시상식에 식사 자리에 초청을 받습니다. 그런데 서빙 하는 웨이터들만 400명에서 500명이 서빙을 합니다. 얼마나 거기에 초대받아서 밥을 먹고 싶겠습니까? 모두 자비부담입니다. 그런데 그 비용이 모두 합해서 약 60만 원정도 됩니다. 그래도 거기에서 한 번 먹어보려고 수없이 신청을 합니다. 그 중에 엄선된 사람들이 정장을 하고 와서 거기에서 밥을 먹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그렇게 비싼 돈을 주고 거기에서 정장을 하고 밥을 먹을까요? 노벨상 받은 사람을 앞에 앉혀주는 것도 아닙니다. 거기에서 돈은 냈어도 그 자리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 자체, 노벨상 수상자들과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 자체가 말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그렇게 돈을 내고 식사를 해 주면 나중에 상품권을 보내드립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영광인 것입니다. 천사도 부러워하는 일이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기는 일입니다.
그런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인은 바로 그 환난의 날을 하나님이 자신의 누명을 벗겨주실 것을 굳게 믿었고 또 벗겨주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자신의 올바름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지는 그런 일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환난 날에 하나님을 깊이 신뢰합니다. 치욕을 당하면서 그 환난 날에 견뎠습니다.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호소하고 의지하면서 견뎠습니다. 시인의 또 다른 시편을 생각나게 만듭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하나님이 반드시 자신의 모든 일생을 내려다보고 계시고 지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이 환난의 날에 하나님이 자기를 내팽개치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자신의 머리를 들어 명예를 회복시키시고 모든 사람들 앞에 자신의 억울함과 무죄함을 입증해 주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합당하도록 자신에게 합당한 존귀와 영광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비열한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스스로 나는 벌레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나는 사람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시련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의 그 섭리에 자기를 맡기고 주님이 당신의 선하신 주권으로 당신의 뜻을 보여주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그 시련의 날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의 품을 파고들었습니다.
이 다윗과 똑같은 그림을 보여주면서 살았던 사람이 한 사람 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그리스도이셨습니다.
(찬양)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세상이 준 모든 괴롬 잊어버리고 예수님처럼 기도하기를 원해요
예수님처럼 기도하기 원해요
그래서 그분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아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어차피 이 세상에 자기 유익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자기를 다 주어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 재물로 주어 그들을 섬기기 위해서 오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III.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자신의 명예가 더럽혀지거나 여러분 자신이 짓지도 않은 일에 모함이 이루어질 때 그리고 오해를 받거나 비난을 받을 때 마음 깊은 곳에서 정동이 이루어집니다. 확 하고 솟아서 혀끝까지 이루어지게 되고 머릿속은 수많은 언어들이 떠올라서 밤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면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을 때 그런 심정이 있는데 주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졌을 때도 우리가 그랬습니까? ‘주님의 이름이 이렇게 모욕을 받으니, 주님의 영광이 이렇게 수치를 당하니, 내 마음이 찢어지는구나.’ 그분의 이름을 욕스럽게 하는 자들, 그분의 영광을 가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소리치고 싶은 그 분노의 언어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그 무엇이 있었습니까? 신학교 선생이었을 때 우연히 책상위에 놓여진 어느 학생의 책을 봤습니다. 내가 펼친 것은 아니고 펼쳐져 있어서 봤습니다. 교과서 위에다가 그렇게 썼습니다. 자기 손으로 쓴 것이었습니다. “나는 세상이라는 법정에 선 증인이다. 내 평생 예수그리스도의 누명을 벗겨드리리라.” 우리에게 그런 분노의 마음이 있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시련 속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 그래서 모욕을 받고 영광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머리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고 이렇게 의지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16. 고난 속에서 주를 찾음
“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시 27:7-8)
녹취자: 김경애
Ⅰ. 본문해설
고난을 통한 복주심(2016.4.27 수요예배16)
시인은 고난의 날에 악인들에게 에워싸였을 때에 여호와께 피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그런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자기를 지켜주셔서 머리를 들게 하시는 주님의 은총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단지 감상으로만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승리를 바라보면서 그가 선택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Ⅱ. 환난 날에 높이심
A. 고난은 기도하게 함
그러면서 시인은 환난 날에 자기를 높이시는 하나님을 앙망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오늘 우리가 읽은 우리가 본문을 말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부르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옵소서” 우리가 읽은 첫 절에서는 먼저 고난은 기도하게 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자기를 반드시 승리하게 해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결백함을 하나님이 입증해주시고 원수들에게 잠시 짓밟혀 부끄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 모든 수치에서 자기를 벗겨주시고 그 모든 것들 위에 다시 자기의 머리를 들게 해주실 것이라는 것을 굳게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확신이 이 시인을 교만하게하거나 거만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런 확신이 가슴속에 불탔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믿음을 어떤 한 은혜로운 행동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던 믿음의 위인들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은총의 사람인 동시에 그들은 모두 고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는 어쩌면 그렇게 하나님을 받은 사람들의 눈물과 탄식과 울부짖음과 기쁨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이때에 자기의 마음에 있는 신앙의 정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이것은 억제할 수 없는 간절한 소원이 이 시인의 마음속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세속적인 욕망 때문에 불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시인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거룩한 갈망이었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명예를 추구하고, 돈을 추구하고, 권력을 추구하고, 그럽니다. 하나님을 떠나있을 때는 그런 욕망이 가슴에 불붙는 것 같아도 기도할 때 그 욕망이 유지되지 않습니다. 욕망이 유지되지 않는다기보다도 하나님 없는 상황에서 가슴에 활발한 감정의 움직임이 기도시간에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고 있을 때는 눈물이 쏟아지고 가슴이 찢어지는 정이 가득한데도 무릎을 꿇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일반적인 고통을 느끼는 마음과 마음의 정서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부르짖어 간절히 매달리게 하는 은혜로운 정서가 하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때에는 시인의 영혼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때였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열정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면서 영혼의 활발한 움직임이라고 설명합니다. 영혼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우리들이 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어쨌든 영혼이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분노하고, 기뻐하고, 사모하고, 아파하고 하는 것에 대해서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그 움직임이 우리의 마음에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끊임없이 정동에 출렁거리면서 이러한 간절함이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이 간절할 때 기도는 깊어집니다. 환난과 시련이 모든 사람을 기도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 혼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우리가 그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함으로써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서 환난과 고난이 우리를 치열한 기도로 데려가기도 하고 환난과 시련이 우리의 마음을 미끄러지게 하여 아주 포악하고 강퍅한 사람으로 바꾸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우리에게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그렇게 드러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우리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도록 만들어주시고 그리고 그런 시련과 고난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이 있는 사람인지를 확인하게 만들어주십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생각합니다. 주님의 섭리가 무엇이었을까? 주님의 경륜과 은혜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그 고난을 기도할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잠든 영혼을 깨우시기 위해서 종종 하나님은 당신이 너무 사랑하는 자식인데도 오히려 선물로 환난과 시련을 주십니다. 그런 환난과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채찍질하시고 다듬으셔서 우리들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어떤 한계들을 극복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믿음을 갖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환난 날에 하나님은 이런 믿음의 반응을 보이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사람들의 영혼을 그 믿음의 시간에 강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많이 해주셔서 제가 영국과 화란을 다녀왔는데 체류하는 모든 시간들이 집회를 하는 시간들이 정말 은혜로웠고 아주 아쉬워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화란에 가서 틴데일이라는 신학교 학생들이 교수님들과 모두 모였습니다. 큰 신학교는 아닌데 학생들과 교수님들이 강의를 듣겠다고 오전수업을 모두 중단하고 모였습니다. 그래서 강의를 하는데 학생들이 제가 강의하는 내용보다 중간 중간 원고를 덮고 하는 간증에 훨씬 더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중의 하나가 어떤 이야기냐 하면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 공부를 하는데 정말 좋은 학교인지는 잘 몰랐지만 하여튼 힘들게 들어갔는데 엄청나게 공부를 시켰습니다. 1학년 1학기 때 학교를 가기위해서 집에서 7시에 나오는데 저녁에 수업을 모두 끝내고 집에 도착하면 9시 20분이었습니다. 지독하게 공부를 시키던 때였습니다. 그런 때였는데 한번은 에세이를 쓰는데 이것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22시간을 책상에 앉아서 일어나지 않고 에세이를 썼습니다. 물 한 동이 빵 한 조각을 가지고 밑에는 움직이는 변소 하나를 가져다놓고 했습니다. Moving Toilets이라고 하고 요강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이 막 웃었습니다. 이제 이렇게 이야기를 했으니까 무슨 통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학생들이 아주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는 그때에 그런 나 자신으로서는 극복하기 어려운 그렇게 앉아있어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번 혹독하게 통고하면서 책상에 붙어 앉을 수 있는 끈기를 배웠고 그보다 더 어려운 때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런 때에 훈련된 끈기와 집요함으로 많은 난관들을 극복했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하는 날 많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여러 동급생들이 찾아와서 저에게 악수를 청했습니다. 가운을 입고 ‘형님 너무 고맙습니다.’ 제가 나이가 한참 위였습니다. 왜 그렇게 여러 사람이 인사를 했느냐하면 여러 명이 휴학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제가 적극 말렸습니다. ‘휴학은 하지 마라. 정 쉬고 싶으면 졸업을 하고 1년간 사역을 하지 말고 쉬어라. 이 길을 끝까지 가야한다. 너는 할 수 있다. 이것도 힘들어서 가지 못하면 네가 앞으로 외국에 가서 무슨 공부를 하겠느냐? 나 봐라. 나도 산다.’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린 사람이 대여섯 명은 됩니다. 졸업식에서 모두 형님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똑같습니다. 옛날에 해본만큼, 옛날에 이긴 만큼만 이기면 더 이상 진전이 없습니다. 그 한계를 뚫고 나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인내가 어디까지인지를 시험해보는 것입니다. 더 큰 시련, 더 큰 환난이 있어도 이깁니다. 그래서 항상 생각합니다.
오늘도 걸어오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고 느낄 때마다 항상 옛날에 더 어려웠던 때 그런 때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믿음으로 살게 하셨던 것, 고난과 시련 속에서 찬송을 부르며 그 역경을 이겨왔던 것을 생각하면 오늘의 이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짧은 인생이 어디에 가서 살고 어디를 지나고 무슨 일을 한들 우리에게 시련과 환난이 없겠는가? 만약에 그렇게 만나는 시련과 어려움 때문에 우리가 백짓장 같이 모든 기쁨을 잃어버린 창백한 얼굴로 항상 두려워한들 그리고 마치 이 세상이 아주 지긋지긋하게 어쩔 수 없는 의무복무처럼 살아가는 그런 태도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우리가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시련은 시련이고, 환난은 환난이고, 우리가 즐거워해야할 것은 즐거워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시인은 바로 그 고난의 날에 믿음으로 그 고난에 반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마음을 다 기울여 우리 하나님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간절히 주님을 찾으며 주님의 품에 파고들었을 때 그를 에워싼 수많은 악인들의 비난과 핍박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하나님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런 놀라운 특권을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B. 주의 얼굴을 찾음
기도하는 그의 마음이 어땠는지를 오늘 성경이 말해줍니다. 그것이 바로 주의 얼굴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이것은 번역 상에 논란이 있습니다. 원래 히브리어 성경에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내 마음이 당신에 대하여 나에게 말하기를 얼굴을 찾으라”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을 NIV성경에서는 아주 올바르게 번역을 했는데 우리말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내 마음이 주어가 됩니다. “나의 마음이 말하기를” 여기에 따옴표가 들어갑니다. 그러면서 “내 마음이 말하기를”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내 얼굴을 찾으라는 말씀은 여기에 처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구절이 역대하 7절 14절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죄를 사하고 땅을 고칠지라”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따옴표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나에게 말하기를 나를 찾으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말성경에서는 이것을 풀어서 부드럽게 번역을 한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환난이라 시련을 만날 때에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런가하면 신명기 31장 17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얼굴을 숨겨 보이지 않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을 보여주시는 것은 악인에게는 진노의 극단적인 표현이고 언약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주시는 것은 은혜의 표현입니다. 그러면 역으로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다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과 대면하고 싶은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너희가 내 얼굴을 찾으면”이라는 말씀 속에서 환난과 시련을 당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환난과 시련 속에서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콩가루처럼 부수시는구나! 우리는 이제 끝났다. 하나님의 재앙이 우리에게 임해서 우리에게는 아무 희망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시련과 환난 속에서 “하나님은 무엇인가 우리로 하여금 깨닫고 당신에게 돌아오라고 부르신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하나님은 찾는 것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어려움이 있을 때에는 아주 치열하게 기도하지만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어려움을 이기게 해주신 다음에는 태만해지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인격적인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고치고 변화시키는 것은 꼭 하나님이 큰 시련과 환난을 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될 때 그때 느끼는 마음의 아픔의 고통이 환난을 당했을 때 느끼는 아픔과 고통 못지않습니다. 여러분도 아마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랑하는 사람을 여러분이 잘못 대해서 그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나 상심을 주었다면 그래서 그가 괴로워하고 아파하는 것을 보면서 여러분의 마음이 함께 아파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랑은 무한한 공감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할 때 그분의 십자가의 고난이 이미 끝났는데도 우리는 그 고난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재현되는 것처럼 아픕니다. 그것은 사랑이 가져다주는 공감의 능력입니다. 사랑은 그것을 공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런 큰 시련과 환난을 만나지 않아도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고통을 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그 고통 못지않은 독특한 위로와 사랑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래서 말씀의 은혜를 받은 다음에는 아픈 마음으로 회개를 했지만 항상 그 아픈 마음을 안고 집으로 그냥 돌아가는 법은 없습니다. 항상 그 아픈 마음 끝에는 하나님이 율법으로 우리의 죄를 깨달아 아프게 하신 후에는 복음의 은혜를 덧입혀주셔서 그래서 이 벌레 같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 아무 가치 없는 죄인을 이렇게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그 무한한 은혜에 감읍하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이 시인은 바로 그런 고난의 때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것을 결심하였는데 그때 그 마음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것이었습니다. 보십시오. 문제의 해결을 찾았던 것이 아닙니다. 원수들을 복수할 수 있는 무의를 찾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혹은 원수들을 제압하여 누를 수 있는 어떤 세력을 찾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시인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자기가 하나님의 얼굴 앞에 서면, 그리고 자기뿐만 아니라 이 모든 세상 사람들이 주님의 얼굴 앞에 서면, 주님의 질서대로 움직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될 때 자신은 하나님 편에 서있는 사람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다는 것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얼굴이라는 것은 우리의 몸의 사지백체 가운데 우리 인격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의 인품에 손상이 가는 행동을 할 때 얼굴값을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네가 한 인격을 가진 한 피조물이라는 것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그것이 체면입니다. 그리고 품위입니다. 진짜 아름다운 삶은 품격이 있는 삶입니다. 품위가 있는 삶입니다. 인간으로 때로는 버릇없는 사람이 그를 짓밟은 수도 있고, 권력 있는 사람이 누를 수도 있고, 욕할 수도 있고, 그렇지만 집에 돌아가서 왜 그런지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자신이 한 행동이 부끄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그보다 높은 지위에 있지만 무시할 수는 있지만 무관심할 수는 절대 없는 그런 뭔가 존재의 울림이 느껴지는 사람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존재의 이유입니다.
얼굴을 찾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으로 임재의 경험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시인들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했고 심지어 그 얼굴빛을 자신에게 비춰달라고 하나님 앞에 애원했습니다. 따라서 시인이 이 시련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찾은 것은 단순한 도움의 요청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랬더라면 시인이 하나님의 얼굴이 아니라 능력의 두 손을 구했을 것입니다. 시편 106편 15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을 쇠약하게 하셨도다” 그 모든 것을 그들이 욕망하는 대로 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친교와 인격적인 기쁨의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었던 그 고기 메추라기 사건을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손이나 능력만을 탐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습니다. 당신 앞에서 내가 주님의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그리고 주님이 나를 사랑해주시는 분이신 것을 나에게 보여 달라고 빌었습니다. 이처럼 신자는 고난 속에서 주님과의 관계를 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어떤 물질이나 그리고 어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수단이 되는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 이렇게 간절히 부르짖어서 수많은 고난을 이겨갔습니다.
이 시가 언제 쓰였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 지은 시입니다. 왕으로 재직하던 때에 지은 시, 압살롬의 반란에 직면해서 지은 시라고 보는 것이 대부분의 주석가들의 견해입니다. 어쨌든 다윗이 언제 왕이 되고 싶다고, 기름을 부어달라고, 그런 야망을 품은 적이 있었습니까? 그냥 하나님을 사랑했고,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많은 사람들 위에 뛰어났고, 그는 양을 치는 이름 없는 목동이면서도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했고, 그래서 하나님은 그 사랑을 아름답게 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이제까지 누구에게도 맡긴 일이 없었던 커다란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것은 시인이 탐하였던 바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욕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윗이 그 어마어마한 야망을 품고 그 사울의 집안을 멸망시키고 왕위를 빼앗은 것처럼 백성들은 생각했고 그에게 모욕을 퍼부었지만 시인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왕이 되게 해달라고 빌어본 적도, 그리고 왕이 되고 싶은 야심을 품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이 세상에서 임금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스펄전이 자신의 설교 속에서 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누군가가 나보고 한 나라의 임금이 되라고 한다면 나는 너무 바빠서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없다고 전하여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바꾸셨습니다. 목동으로 살았더라면 하나님을 찬송하고 양떼들과 함께 약간의 어려움은 있었겠지만 시나 쓰면서 즐거운 인생을 보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를 많이 주신 사람들을 그렇게 무가치하게 썩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그 은혜를 따라서 하나님이 그를 아주 꼭 필요한 곳에 두셔서 당신의 고난에 동참하게 하시고 때로는 시련을 만나고 고난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바로 그 큰 고난을 통해서 거기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보았습니다. 다윗의 생애는 그 모진 시련과 고난의 칼로 살점과 뼈가 깎여져나가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지식의 확장을 이루어가고 그래서 그는 하늘 위에 지극히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온 땅과 하늘위에 가득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높고 위대하심 그리고 신실하심이 궁창에까지 미칠 그 위대한 하나님을 깨달으면서 그는 그 시련과 고난의 아픔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는 기회로 활용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지만 그 시련의 때마다 이 시인이 방탕하거나 미끄러지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으로 반응하였기 때문입니다. 시련과 고난을 만났을 때 시인의 가슴속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가 드려졌습니다. 하나님이 이 시인에게서 그의 입술로부터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찬양보다도 더 기쁘게 받으시는 것은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예배, 상한 마음으로 드리는 통회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올리는 애끓는 기도였습니다. 이 경건한 몸부림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 시인 전체가 깨뜨려져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기꺼이 바쳐지는 헌신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아름답게 복원이 되었습니다. 고운 밀가루처럼 그가 모두 깨뜨려져 물만 붓고 주님의 손이 움직이면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아주 아름답게 빚어지는 주님의 그릇이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시련과 고난이 우리로 하여금 당신 앞에 서라고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 하라” 창세기 17장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방법으로 첩을 통하여 아이를 낳았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들을 주시리라는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10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주님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영혼의 긴 침체가 있었고 그리고 하나님은 이 아브라함을 그냥 그 어두움 속에서 주저앉다가 눈을 감게 내버려두시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을 뒤흔드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밑바닥부터 다시 그 하나님의 생명을 사랑하도록, 생명이 살아나도록 흔들어버리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들어야했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그는 하나님의 이 능력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수단을 따랐습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 하라 다른 사람들은 짐승처럼 살게 내버려두어라 너는 내가 택한 믿음의 아들이다. 너를 향한 나의 믿음의 기준은 이 세상의 사람들과 같지 않다. 너는 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자이니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온전해져라. 내가 너를 위해 위대한 계획을 보여주겠노라.”는 말씀이었습니다.
Ⅲ.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련과 고난은 하나님이 그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간절히 찾게 하시려고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이때 제일 먼저 시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이렇게 하리라는 약속을 기억하면서 시인이 하나님 앞에 그 약속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찾았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고난 속에서 약속을 기억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주님의 얼굴을 찾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7. 믿음으로 주를 붙들라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막 5:25-29)
녹취자: 허혜숙
I. 본문해설
저는 주일학교를 다녔고 열다섯 살 때 교회를 떠나고 스물한 살 때 회심하기 전까지는 교회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 기억 속에는 빛바랜 사진처럼 지난날의 조국 교회에 대한 기억들이 남아있습니다. 철이 든 주일학교 때부터 시작해서 주일하교 저학년, 고학년,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다니지 않았고 청년이 되어서 목회의 소명을 받고, 직장생활을 하고, 신학교에 가고, 또 교수가 되고 이런 모든 시기마다 한 장의 사진처럼 기억들이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아무리 빠른 속도로 달려도 옆에서 기차가 함께 지나가면 속도를 잘 느끼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도 함께 흘러갑니다. 그렇게 함께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 교회가 어떻게 변하는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우리가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조국교회의 흐름을 지켜보고 사람마다 각기 다른 평가를 내릴 수 있겠지만 그것을 관통하고 있는 일관된 부인할 수 없는 뚜렷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간절함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 기억 속에 주일학교는 제가 회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앙이 별로 없었지만, 어린아이 눈에도 기이하게 보인 것이 목이 시뻘겋게 힘줄이 서서 열렬하게 설교를 하는 설교자, 매번 그렇지는 않지만 그 설교를 듣고 회개하는 교인들, 특히 예배드리기 전에 예배시간에 드리는 기도는 거의 통성기도였습니다. 그것은 매우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그것이 회심하지 않은 나의 기억, 교회마다 조금씩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저는 교회를 개척하고 난 뒤 초창기에 빗나간 열정에 대한 설교를 많이 했습니다. 많이 했다는 이야기는 그런 잘못에 빠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그것이라도 보고 싶습니다. 약간 빗나갔더라도 좋은 것은 아니지만 교정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열렬한 사람들은 이단 밖에 없습니다.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어느 신학교에 가서 종교철학을 전공한 학자를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철학자니까 자기 친구들 중에 불신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해서 자기가 신학교 교수로서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야 공산주의자들이 종교는 아편이라고 했는데 종교는 아편이라고 말을 했을 때 사실 지목했던 가장 우선적인 종교는 기독교였다. 옛날에는 교회에 가면 아편이라도 줬는데 지금은 그것도 없다’ 뭔가 사람을 종교적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그래서 이런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 그것이 옳은 열정을 줬느냐 옳지 않은 열정을 줬느냐 그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옛날에는 교회에 가면 사람을 푹 빠지게 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설교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교회에 나가보면 자기와는 다른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눈에 선명합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쯤 일이었습니다. 시장 어귀에서 어느 부인이 전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전도사 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약 55세 정도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였습니다. 시장 어귀에서 예수님 믿은 것을 이야기하니까 한 두 사람이 모이더니 꽤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약 30~40여명이 모였는데 통행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사람들이 부채꼴로 모였습니다. 이 아주머니는 자기가 서 있는 곳이 너무 낮으니까 옆에 있는 블록을 몇 개 쌓아 그 위에 올라가서 자기가 얼마나 불행한 사람이었고, 남편을 여의고,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생활을 했었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얼마나 기쁜 사람이 되었는지를, 천국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어린아이가 보더라도 그다지 논리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린 마음에 회심도 하지 않았는데 직감적으로 저 속에 뭔가 진실이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여름이었습니다. 하얀 저고리를 입고 아래는 까만색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지만 눈에 띄는 색은 아니었습니다. 땀이 이마에서 구슬구슬 떨어지면서 마이크도 없이 공손한 자세로 시장 어귀에서 복음을 전하던 모습이 한 장의 사진처럼 제 머릿속에 또렷이 남습니다.
교회에 갔을 때 아편을 준다는 것은 그것이 근거가 있든 없든 뭔가 사람으로 하여금 푹 빠지게 만들고 이 세상에 있는 것들과는 다른 어떤 초월적인 가치들을 받아들이게 만들고 그것이 가슴을 뛰게 하는 그 무엇이 거기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도 없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열정입니다. 지금은 그런 열정이 식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 그것을 다 다룰 수는 없지만 부분적으로는 이성주의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에, 놀라운 일, 기적과 같은 일, 초월적인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혹시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이성적으로 애써서 부인하는 것입니다. 평가절하하고 그런 것들에 대한 기대까지도 점점 사라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II. 절망 속에 주를 찾음
A. 비참한 상태에 놓임
어쨌든 이런 상황 속에서 오늘 우리는 주님을 간절히 찾았던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절망 중에 주를 찾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비참한 상태에 놓여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혈루 병이라고 하는 것은 자궁에 이상이 생겨서 계속 피가 흐르는 병입니다. 이 병을 저는 의사가 아니니까 의학적인 원인을 설명할 수가 없지만 열 두 해 동안이나 혈루 증을 앓아왔다고 하니까 사실 이 여자에게 있어서는 일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하는 질병이었습니다. 한 번에 죽어버리는 병이 아니었으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피를 말리는 질병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선 12년이라는 긴 세월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여전히 나으려고 하는 것을 보면 생에 대한 의지와 집착이 굉장히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에게 더 커다란 문제는 종교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레위기 12장 4절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그 여인은 아직도 삼십삼 일을 지내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 15장 19절에는 “어떤 여인이 유출을 하되 그의 몸에 그의 유출이 피이면 이레 동안 불결하니 그를 만지는 자마다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 부정하면 어떻게 됩니까? 성물을 만질 수도 없고, 성소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 여인을 좋아했을까요? 불결하고 위험한 사람으로 기피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이 유대인으로서 신앙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모르지만 예수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의지하는 것으로 보아서 하나님에 대한 의지에 대한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성소에 나가서 하나님을 뵈옵기를 사모한 것만큼 이렇게 혈루가 흐르는 상태로는 종교적으로 이 사람에게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고립감을 가져다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보면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경제적으로도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었을 것입니다.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라고 했으니까 우리는 추측하기를 아주 부자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노숙을 할 정도로 비참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인가 가지고 있었고 가진 것을 다 허비했으니까 집도 팔고, 가지고 있었던 재산도 처분하고 하면서 투병을 했지만 효험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많은 의사를 찾아갔다고 하니까 그 때마다 의사들은 그냥 치료를 해 주지는 않았을 것이고 많은 돈을 썼을 것이고 돌아온 결과는 치료가 아니라 더 많은 괴로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가진 것을 다 허비했고 더 이상 자기를 치료할 수 있는 여력도 없는 상태에서 병은 더 중하여 졌습니다. 그야말로 완벽하게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있는 여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도 종종 하나님이 이런 데로 데려가실 적이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내 인생에 훼방을 놓기로 결심한 것처럼 하는 일마다 안 되고 더 좋아지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했지만 그 기도가 무시되는 것처럼 상황이 더 나빠지고 급기야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 될 때 우리는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그렇게 시련과 고통의 정도를 높이실 때 사실은 하나님이 멀리서 손짓하시다가 큰 소리로 부르시는 것이고 여러분에게 달려와서 여러분의 귀에 외치고 계신 것입니다.
B. 예수의 소문을 들음
바로 이런 비참한 상태에서 이 여자에게 아주 중요한 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성경에 묘사가 아주 재미있습니다. 누가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태어나시고 어떻게 사셨고 죽으셨는지에 대한 전말을 설명해 주었다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소문을 들었습니다. 무슨 소문이었을까요? 자기와 직접 관련된 소문이 제일 크게 들렸을 것입니다. 예수는 병든 자를 고치신다더라. 그래서 눈 먼 자를 뜨게 하고, 절름발이를 낫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신다고 하더라, 그런 소문이 들렸을 것입니다. 큰 진리의 전모가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어떤 일에 대한 소식, 또 좀 더 적극적으로는 이런 이야기도 들렸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병든 자를 고치시는 것을 보니까 예수님은 참 인자하신 분이시더라, 그래서 심지어 문둥병에 걸린 사람은 이 여자보다 더 불결한 사람으로 취급을 받았을텐데 그들도 주님이 어루만지시고 고쳐주셨다는 소식을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예수에 대한 소문은 진리의 전모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 성품의 일부에 대한 지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흐릿해 보이는 소문을 들은 이 사람이 자신의 인생이 바뀌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풍성한 진리가 항상 사람들 마음속에 충만한 믿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지식이 전달되는 것은 그 사람이 믿고자 하는 의욕이 충만할 때에는 아주 풍성한 신앙의 열매를 가져오지만 그러나 아무리 많은 진리가 지식으로 전달되어도 그것을 간절히 붙들고자 하는 의욕이 없을 때 그 진리는 그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종종 같이 대화를 나누어보면 말씀에 대한 지식이나 교리에 대한 이해 그리고 성경자체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도 허술해 보이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연세도 많으시고 글도 잘 모르시는데 천국에 대장부같이 아주 확고하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많은 지식을 듣고 간절함으로 그것을 붙들지 않는 사람의 마음보다는 적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확고하게 붙들고자 하는 불붙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더 충만하게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즐거워하는 것이 좋은 것이지만 그 진리를 지식으로서 이해하고 자기가 궁금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이해함으로서 즐거워지는 차원을 넘어서야 합니다. 오늘 이 여자는 예수에 관한 아주 희미한 소문을 들었지만 그 소문이 들렸을 때 그 진리에 대한 소문에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그것을 붙들고자 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여자는 예수를 위해서 예수를 붙든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그 진리가 담긴 소문을 굳게 붙들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진리의 분량에 대해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간절함이 내가 알고 있는 진리의 분량 못지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우리는 철저한 죄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날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내가 시련과 환란을 당하고 유혹을 경험하지만 믿음으로 살면 주님은 나를 도와주신다, 그리고 험한 이 세상에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죽은 후에는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천국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거기에서 주님이 나에게 의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다.’ 그런 얼마 안 되는 진리이지만 이것을 불타는 마음으로 붙들고 사는 사람은 많은 것을 알고 미지근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보다 훨씬 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 성경이 보여주는 바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믿음을 나오게 하는, 다시 말해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은 사실입니다. 믿음이 말씀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믿음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라서 믿음 그 사실 자체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공로로 내세울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믿고자 하는 사람에게 믿음을 주시고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열렬한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들어도 지루하지 않은 비유는 나무꾼이 장작을 팰 때 언제나 결을 따라서 나무를 패고 나무를 자릅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여자에게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주님을 의지해야 되겠다고 하는 믿음을 주신 분은 주님이시지만 이 여자가 이제껏 자신이 의지했던 모든 의사의 도움과 자신의 모든 노력이 허사임을 깨닫고 전심으로 주님을 의지하고자 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이 여자의 마음속에 누가 먼저 시작한 것을 물을 수 없게끔 간절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주님을 간절하게 찾는 이 여자의 마음은 화합하여 작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진짜 간절하고 열렬하게 주님을 찾았던 때에는 항상 나의 마음을 불타게 하였던 주님의 은혜와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기울여 주님을 찾고자 하는 자신이 혼연일체가 되어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열렬히 주님을 찾았던 회심과 은혜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열렬해 지고자 했던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그렇게 받아주시고 간절하게 하셨던 우리 주님에게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아닙니다. ‘주님이 내가 정말 열렬해 지기를 바라시면 한 번 해 보시죠, 그 때까지 나는 냉담한 채 있겠습니다.’ 성령이 가르쳐주는 바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성경이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가르쳤을까요? 믿음은 언제나 간절함을 동반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 하루 우리가 먹고 입고 쓰는 물질적인 여유가 생겼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사라졌다라고 말합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그런 이야기에 우리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교학자들이 기독교에 대한 뜨거운 관심사가 냉담한 것으로 돌아서는 변곡점이 약 20년 기준으로 연 소득이 미화 5천 달러라고 합니다. 지금은 인플레가 많이 늘어났으니까 만 불 정도 될까요? 우리는 2만 4천불에서 2만 8천불 사이를 오가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이것은 경제적인 문제만 일까요? 그러면 물어보고 싶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난하고 국민소득이 만 불도 안 되는 사람들은 다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복음에 대한 수용성이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이것은 믿음의 문제로 다시 귀결되는 것입니다. 즉 진정으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먹고 입고 쓰는 것이 만족하기 때문에 영혼도 행복하다는 논리로 접근하지는 않습니다. 자, 소득도 넉넉합니다. 건강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나를 부러워하면서 모자라는 것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교인들 중에서도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요?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주님이 그렇게 많은 은혜를 주셨지만 아직도 변화되지 않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지난 주 설교한 것처럼 오랜 동안 함께 살아온 아내를 보면서 저 사람 하나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하는 이기적인 내 자신을 보면서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울어야 할 이유는 너무 많습니다. 사고방식이 육적이고 세속적이 되고 나면 배부르고, 잘 입고, 가고 싶은 데 가고 먹고 싶은 데 가서 먹고 건강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동물의 삶이지 사람의 삶이냐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동물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모든 육체의 문제를 해결해 주어도 고민을 멈출 수 없는 데에 인간의 위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높은 이상을 가진 사람이 불신자라도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고민이 없이 그렇게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나 돼지의 삶과 같은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먹고 입는 물질적인 여유가 있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주님을 간절히 찾지 않는다.. 그 답은 완전한 정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혼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빛이 들어오고 우리의 참 모습이 무엇이고 우리가 이렇게 먹고 마시고 모자라는 것이 없이 사는 이 환경 속에서 우리의 영혼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 행복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때 여러분 중 대다수는 그 현실을 보여주면서 그것은 현실이 아니다 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비참하게 가난했습니다.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날 등장하고 있는 영화나 드라마들은 그 때의 가난을 실감나게 묘사한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비참했습니다. 분명히 우리에게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의지할 것이 없는 상황에서 일주일 내내 열 두 시간씩 심지어 열여섯 시간씩 무한 노동력을 제공하고 인권은 무슨 얼어 죽을 인권입니까? 인권 이야기도 하지 않거니와 고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슈퍼 갑입니다. 왜? 쉽게 이야기해서 6.25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세 끼 밥만 먹여주면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 까지 노동력을 제공하겠다는 건장한 남자들이 줄을 섰습니다. 돈은 무슨 돈입니까? 제가 똑똑히 기억하는데 중학교 1학년 때 특별한 기술이 없이 막노동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일당이 5백 원이었습니다. 짜장 면을 열 그릇 정도 사 먹을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그렇게 비참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니까 견딜 수 없는 슬픔과 불만족과 눌리는 것들이 있었고,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를 도와주신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복을 받는다는 것이 진짜 복음처럼 들렸고, 그들이 그런 설움들을 토해내면서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우리는 무시하면 안 됩니다. 그렇지만 만약에 그것이 전부 다였다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신앙을 안 가진 사람들도 가질 수 있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우리가 보기에 모자라는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신앙의 세계에 눈을 뜨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분을 붙들지 않으면 안 되는 곤궁한 처지에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됩니다. 사살되었다고 보도된 오사마 빈 라덴의 이야기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1957년생입니다. 그가 한참 활동할 때 그의 나이 50대 초반정도였습니다. 재산이 수천억이었습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그런 종교적인 신념을 포기하고 서방세계에 망명해서 그 재산을 통장에 쌓아놓고 살면 하루에 일억씩 써도 평생 다 못 쓰고 죽을 돈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길을 걸었습니다. 그들이 그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신앙이 그의 삶을 결정합니다. 사담 후세인이 결국은 체포될 때 그의 집에서 일억 불이 발견되었습니다. 그가 그 돈을 가지고 망명해서 통장에 넣어놓고 초호화 호텔에서 80먹어 늙어 꼬부라질 때까지 살아도 걱정이 없는 돈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교도도 진리가 아닌 것을 믿는 사람들도 먹고 입고 마시고 쓰는 물질의 견지에서 자신의 인생을 보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견해를 포기하고 또 다른 각도에서 인생을 보도록 획기적으로 다른 길로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전에는 돈 벌어서 가족들 잘 살게 하려고 돈을 번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돈을 벌어서 남 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세상에서 출세하기 위해서 공부를 했지만 이제는 이 지식으로 사람들을 평화롭게 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이 지식으로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권력을 쥐어서 한 번 휘둘러보고 사람들을 지배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주님을 믿은 다음에는 그야말로 섬기기 위해서, 국가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고난을 정의를 이루는데 사용하고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기쁨이 자기같이 쓸모없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간다라고 하는 기쁨과 보람 속에 사는 그런 사람들은 또 다른 이유에서 매일매일 슬퍼하고 가슴아파해야 할 현실들도 만나고 먹고 마시는 것이 전부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으로 행복해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인생을 살 수 있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 여자는 예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간절히 붙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자기의 모든 희망을 다 걸어서 자신의 삶에 찾아오는 이 절망을 반전시키고 싶었습니다. 저는 오늘 묻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이런 간절함이 있습니까? 이렇게 주님을 간절히 찾고 주님이 아니면 이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이제까지 끊임없이 실패하고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지만 그랬기 때문에 ‘희망이 없다.’가 아니라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당신께로 부르셨구나.’라는 믿음이 우리에게 역사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간절한 열정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이 되시도록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동역해 봤습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한 신령한 열망을 가진 덜 유능한 사람들은 유능하면서도 열정이 없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하나님을 섬깁니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 없으면 일이 안 될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항상 생각합니다. 사람을 사랑하지만 사람에게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속에서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열의가 떠나간 사람은 가야합니다. 그리고 부족하지만, 모자라지만, 자신의 자리에 있는 것에 감격하고 주님을 향한 생생한 비전을 갖고 그 속에서 자신이 완성되어 가고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완성해 가는 그 기쁨을 느낄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정말 오늘날은 춤추지도 않고 왜곡하지도 않은 시대입니다. 태만과 흩어 진 정신 상태, 산만해진 삶의 목표, 그래서 아주 뚜렷하게 삶의 정확한 목표가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죽음의 칼이 여러분의 목에 드리울 때 주님께서 ‘네 마지막 한 가지 소원이 무엇이냐’라고 물을 때 그 자리에서 ‘내 소원은 이것입니다. 일평생 내 소원이 가슴에 한처럼 맺혔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저녁에 집에 가셔서 마지막 유언을 남기실 말이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 자녀에게, 신앙의 후배에게, 내 제자들에게, ‘나는 미친 듯이 이 일을 이루고 싶어서 달려왔으나 못 하고 죽는다. 너희들이 이것을 계승해라’ 그것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C. 예수를 굳게 붙든 여인
이 여자는 절망적인 상태에서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뿐입니다. 두 다리 건너서 온 것도 있고 혹은 세 다리 건너서일수도 있고 직접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전심으로 그 소문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전 존재를 소문으로 들려오는 예수님께 걸었습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믿으려면 믿고 안 믿으려면 말고, 자신을 던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를 굳게 붙드는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움켜쥐고 예수를 흔들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옷 가에, 옷 술에 살짝 손을 댄 것입니다. 육체적인 행동으로는 옷에 손을 대었지만 그의 마음을 꽉 붙든 것입니다. 대조적인 붙듦이 있습니다.
어느 사회 심리학자가 ‘악수를 해 보면 그 사람을 안다’라고 했습니다. 손을 위쪽 끝만 살짝 걸치는 사람은 믿지 않은 사람입니다. 마음을 안 주는 사람입니다. 깊이 악수를 하는데 손잡음이 느슨한 사람은 똑같이 신뢰를 안 하는 사람입니다. 유보상태입니다. 힘 있게 꽉 쥐는 사람은 확률적으로 자신과의 관계를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또 다른 종류는 제가 경험을 못 해 봤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살려달라고 붙드는 손은 거의 괴력의 수준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그렇게 강하게 붙들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여자가 예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면 자기가 나을 것이라는 간절함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게 만들었습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의 옷 끝에 한 번 손을 대보고 나으면 감사하고 안 나으면 본전이고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안 된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전략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습니다. 12년 동안이나 괴로움을 당하고 가지고 있던 모든 재물을 허비하고 병세는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철저히 소외되었습니다. 그러나 살고자 하는 의욕은 누구보다 강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지금 처지에서 유일한 희망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뭔가 모자란다는 느낌이 안 듭니다. 우리 같았으면 예수님 옷깃을 살짝 흔들며 ‘예수님 저 좀 보세요.’라고 하든지 아니면 예수님 두 손을 꽉 잡고 자신의 머리에 누르며 ‘저를 안수해 주십시오.’ 했을 것 같은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기 때문에, 이 여자는 왜 예수님 옷 가를 만졌냐면 종교적인 불결 때문에 예수님같이 최소한 거룩한 선지자라고 믿는 분에게 그 분을 불결하게 해 드리는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옷 가를 예수님이 의식하지 않도록 살짝 만진 것입니다. 사실은 그것이 이 여자를 바라볼 때 예수님은 매우 큰 믿음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왜? 자신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절망적인 인간인가 하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으면서 예수님 한 분을 의지한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종종 우리가 의지하던 모든 것을 끊어버리도록 희망이 사라지는 정도로까지 우리를 몰고 가십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그렇게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자신을 실망시키고 자신이 걸었던 기대를 저버리게 될 때 모든 것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한 분만 떠오르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마음을 다해 친구를 잃은 사람의 안광이 종이를 뚫듯이 영혼의 시선을 주님께 응시해서 절망적인 상황을 관통하고 그리스도 한 분을 바라보며 고정된 마음을 갖는 사람들에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옷에 손을 대었을 뿐인데 그는 혈루의 근원이 곧 마르며 병이 순간적으로 낫게 된 것을 오늘 생각으로 깨달았다고 말하지 않고 ‘몸으로 깨달으니라’라고 했습니다. 몸으로 그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긴 세월동안 많은 의사를 찾아가고 많은 괴로움을 당하고 많은 것을 허비하면서 때로는 증세가 완화되고 진정되던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도박하는 사람처럼 더 많은 돈을 걸고 더 훌륭한 의사를 찾기 위해서 혈안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해결은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나 주님은 우리의 인생에 근본적인 뿌리를 겨냥하십니다. 거기로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대면하게 하시고 그 앞에서 자신을 결단하며 주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큰 고난과 절망과 시련을 통해 나를 하나님 앞에 어떻게 다시 살게 하시려는지를 생각하게 만들어주십니다. 여러분도 어떤 삶의 상황에서든지 낙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괴로움과 시련이 더하고 고통이 깊어질수록 영혼의 새벽이 가까운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찬양)
이제 어두움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겠네
찬양 하리 구주예수 놀라운 구원의 능력
노래하리 갈보리에서 죽으신 주님의 사랑
그 주님의 사랑을 꽉 붙들고 한 가지 사실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어떠한 경우에도 나에게 보복하거나 분풀이를 하시는 하나님일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에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고난과 시련을 당하는 우리를 보며 우리가 예전에 주님께 죄 짓거나 불순종했던 것에 대해 보상심리를 느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주님을 떠나 방황하고 헛된 길에서 고통 받고 있는 우리를 돌이켜 당신과의 관계 속으로 돌아오게 하는 분이시라는, 그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도 시련 가운데 종종 데려가십니다. 이 여인과 같이 모든 희망이 끊어진 상태에서 주님은 이 여자를 한 걸음 한 걸음 몰아가시면서 마지막에 한 군데로 데려가십니다.
마지막에 당신의 품으로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그래서 정말 이 세상에서 생사 간에 의지할 분이 주님 밖에 없고 붙들고 살아가야 할 분이 우리 예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하시면서 믿음의 길을 가게 하십니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가 많은 일을 하지만 성령의 역사와 심령의 갱신이 있어야 합니다. 간절해야 합니다. 일을 하는 사람은 일을 하지만 간절한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한 모든 일에는 주님과 만난 간증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간절한 마음으로 행한 모든 섬김에는 하나님을 만난 간증이 있습니다. 이렇게 절망 속에서도 낙심치 않고 주님께 매달리는 사람들이 되시도록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