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42
목 차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시 42:1-1) 1
눈물로 상한 마음(시 42:3-4) 4
하나님을 바라라(시 42:5) 8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함(시 42:6-8) 12
반석이신 하나님(시 42:9-11) 17
시편56편 강해 1
시편42편 강해 1
시편42편 강해 1
시편42편 강해 1
시편42편 강해 1
시편42편 강해 1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시 42:1-2)
본문해설
2권이 시작이 되는 첫 머리에 42편이 나옵니다. 시편은 다섯 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시들을 1권부터 5권까지 다섯 그룹으로 모아 놓았습니다. 이 시는 주전 1500년경부터 쓰여지기 시작해서 아마도 주전 4세기까지 쓰여졌을 것이라고 봅니다. 하나하나 있던 것들을 모두 모아서 배열을 할 때 1권부터 5권까지 만들어서 이것을 구약에 나오는 5경과 연결시킨 것입니다. 1권에서는 창세기와 관련된 듯한 주제가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 창조의 영광, 하나님의 백성들의 선택과 관련된 주제가 나옵니다. 2권에는 출애굽기에 관련된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언약백성들의 억압받는 삶, 하나님의 구원, 이런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성도가 나그네와 같은 이 세상의 인생길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찾는 장면들이 2권에 많이 나옵니다. 그 중 첫 번째 시로 42편을 여기에 넣은 것입니다.
시인이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이 시가 다윗의 시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표제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고라의 자손의 시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윗이 썼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시편 42편이 다윗이 평소에 보여준 문체와 유사하고 생각을 하고, 고라 자손이 이 시를 보관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고라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할 때 있었던 족속 중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지도력에 반기를 들고 도전을 합니다. 그래서 땅이 갈라지고 고라자손의 모든 족속들이 땅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전대미문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 때 모두 죽은 것이 아니라 후손 중의 일부가 살아남았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면서 자손이 번성해 오다가 다윗 시대에 와서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다윗 시대에 다윗과 함께 나라를 일으킨 후에 이 사람들은 성전에서 수종을 드는 일꾼들로 부름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고라의 자손이 다윗의 왕국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됩니다.
이 시는 아마도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받아서 요단강 건너편으로 갔을 때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던 고라의 자손이 함께 따라가서 지은 시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는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소에서만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압살롬의 반역이 워낙 치밀했고 불의의 습격을 받았기 때문에 이들은 패배하여서 황급히 요단강 건너편으로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하지만 경배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라는 이야기입니다.
원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 형통하고 자유로울 때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환경이 어렵고 막히게 되면 그 사람에게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게 됩니다. 마치 모든 것이 형통할 때는 정말 사랑이 있는 친구 사이인지 모르다가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참된 친구와 거짓된 친구가 드러나게 되는 것처럼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안타깝게 주님을 찾는 모습을 통해 결국은 이 사람의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과 경배의 정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타는 듯한 갈망
이 시는 문화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가을이 사슴들의 교미기입니다. 이때가 되면 사슴들은 타는 듯한 목마름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곳은 물이 흔한 곳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슴이 짝짓기에 나섰다가 엄습하는 목마름 때문에 물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이 없습니다. 이제 헛것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곳으로 내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결국은 쓰러지고 죽을 때 앞발로 땅을 파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시인은 가을철에 시냇물을 찾다가 결국은 그것을 찾지 못해서 죽어가는 많은 사슴들을 보면서 자랐던 것 같습니다.
결국은 대치할 수 없는 갈망, 무엇으로도 바꿔놓을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 목마름, 이런 것이 그의 심령 속에 있던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게 건강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내면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 주님을 뵈옵고 그 교제 속에서 살려고 하는 간절한 몸부림과 갈망, 그런 것을 갖고 고라의 자손이 하나님 앞에 목말라했던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바로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고, 그런 마음이 바로 가난한 마음이고,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시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는 한마디의 간절한 기도는 갈망이 없는 수만 마디의 말보다 더욱 하나님의 시선을 끌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타는 듯한 사모함, 하나님과의 교제를 그리워하는 절실한 갈망, 이런 것들이 우리의 마음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보여줍니다.
시인이 정말 갈망했던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늘 익숙하게 율법 아래서 율법을 배우며 살던 사람이었고, 늘 하나님 앞에 경배하고 제사하는 문화 속에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정말 만나고 싶은 것은 율법 속에 계신 하나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오고가는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살아계셔서 나를 위해, 나와 함께, 나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이루기 위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일하시고 행동하시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을 절실하게 갈망하는 신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절실한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시인이 왕을 모시고 다시 잃어버렸던 왕궁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간절한 사모함이 있는 한마디의 기도, 절실한 그리움이 있는 하나의 순종하는 행동과 섬김, 이 모든 것들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갈망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기에 계십니다.
눈물로 상한 마음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시 42:3-4)
이방 땅에서 당하는 설움
본문을 보면 망명한 곳에서 당하고 있는 시인의 설움과 과거에 하나님을 섬겼던 추억에 대한 회상이 함께 나옵니다. 망명을 한 곳에 있는 사람들이 시인과 그와 함께한 무리들에게 물었을 것입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라고 말입니다. 제사는 드릴 수 없었겠지만 아마 거기서도 율법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기도는 올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여호와 종교의 행위를 보면서 그들은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뇨? 네가 그렇게 공경하는 하나님이 천상과 천하에 최고의 존재이시고 너를 지키시는 분이라면 왜 나라를 빼앗기고 우리나라에 망명 올 지경이 되었느냐?” 그렇게 물었던 것입니다.
사연이 없는 사람에게는 스쳐지나가는 이야기도 사연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쓰라린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즘은 그러한 말을 많이 안 쓰지만 우리 어렸을 때 한동안은 무식하다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무식하다는 말은 공부를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행하는 일이 조리에 맞지 않고 이치를 잘 모른다는 뜻입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일을 지혜롭지 못하게 했을 때 무식하다고 하면 상처가 안 됩니다. 얼굴 예쁘게 생긴 사람에게 “얼굴도 못 생긴 게.” 해도 별로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기도 많이 하는 사람에게 기도도 안하느냐고 하면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짜로 못생긴 사람은 그 말에 깊은 상처가 되고 싫은 말이지 않겠습니까?
시인이 그런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꼭 조롱하려고 물어보지 않더라도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물어보면 마음에 큰 찔림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마음에 깊은 찔림을 받으면서 그가 보인 반응은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뭐라고 이야기 하겠습니까? “나와 함께 하신다.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면 “그렇다면 어떻게 너희가 나라를 잃어버리고 우리 땅에 쫓겨 와서 더부살이를 할 수 있느냐?” 이렇게 묻지 않았겠습니까?
고통의 때에 과거를 회상함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주야로 음식이 된 눈물은 어떤 종류의 눈물이었을까요? 이 눈물은 단순히 개인적으로 고통스럽고 아파서 우는 상처의 눈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살아서 주님의 징계를 받는구나. 우리가 잘못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책망하시니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 때문에 이방 땅에서 모욕을 받는구나.” 이러한 눈물 아니었겠습니까? 이 눈물이 주야로 음식이 되었다고 하니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는 슬픔 속에서 그는 먹고 마시는 모든 일들조차 기쁨과 참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멀어지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인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과거를 회상하게 되었습니다. 시인의 일은 성전에서 수종을 들며 하나님을 경배하러 오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며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경건한 추억을 인해서 마음이 깊이 상하게 되었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주님을 향한 그리움이 마음속에 더 많이 밀려오게 되었습니다.
어제 병원에 가서 심방을 했습니다. 의사 말로는 곧 임종할 것 같다고 했는데 그 형제가 저를 보고 싶어 해서 갔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꼭 붙들고 이야기했습니다. “마지막까지 희망을 잃지 말아라. 그러나 한편으로는 주님을 만날 마음의 준비를 하거라.” 많이 아프다고 합니다. “아픈 것을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고 짧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주님과 함께 동행 했던 기쁨,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 주셨던 크고 놀라운 일, 따뜻한 사랑, 그것을 깊이 생각하거라. 그렇게 생각할 때 네 마음속에는 주님에 대한 사랑이 가득 찰 것이다. 주님께 뜻이 있으셔서 널 부르실 때 그 때가 세상에 태어나서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순간이 되게 하거라.”
만약에 시인이 인생에서 괴로웠던 일, 자신에게 반역하여 왕권을 빼앗은 반역의 도당들을 생각하며 한을 품고 복수를 꿈꾸는 것에서 그쳤다면, 이렇게 경건한 슬픔으로 자기를 돌아보고 하나님을 찾게 만들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우리 인생의 크고 작은 쓰라린 일, 괴롭고 힘겨운 일,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날 때마다 그 문제를 일으켜서 나에게 괴로움을 주는 사람을 보지 말고, 이 모든 것들을 움직이시는 우리의 삶의 질서의 주관자이시고 우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삶의 상황에서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였던 달콤한 기억을 생각하는 것은 침체에서 벗어나는 오래된 경건의 기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즐겨했던 일이 회상하는 일이었습니다. 회상을 하면 지금 처해있는 여건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을 향한 기쁜 찬송과 경배가 가슴 속에서 우러나오게 됩니다. 시인은 그것을 기억했습니다.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반응함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원래 ‘상한다’는 말을 묘사하면 “부패해서 상한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실컷 두드려 맞거나 어디에 부딪치면 시커멓게 어혈이 듭니다. 그러고 나면 손을 살짝 대기만 해도 자지러질 듯이 아픕니다. 타박상을 입었기 때문에 손가락만 대도 자지러지게 아픈 것입니다. 그런 상태를 가리킵니다. 상하지 않았을 때는 살갗에 웬만한 것이 닿아도 감각이 없을 텐데 상하고 나면 아주 작은 것이 닿아도 감각이 뚜렷하고 통증을 느끼게 됩니다. 마음이 그런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감정, 하나님의 의지, 이런 것들이 느껴질 때 그것에 대해 일일이 반응할 수 있는 감각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감각이 육체가 아닌 마음에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이 고함치듯 말씀하셔도 듣지 못하고, 보여주셔도 보지 못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주 작은 음성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고, 하나님의 아픈 마음, 기쁜 마음들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복잡할 것이 없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마음과 선한 의지, 하나님의 생각으로 가득 찬 마음이 되는 것, 그것이 성령 충만의 핵심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시인은 마음이 아주 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능력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바라라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5)
현실이 눈에 보일 때
과거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은혜를 많이 생각하면 할수록 시인은 현재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있는 고통스러운 상태를 더욱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에 가장 큰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도 보는 것이고, 마음으로부터 보는 것도 보는 것인데, 마음으로 보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을 능가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마음으로 보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에 지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이것이 믿음에 관한 것일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안에 있는 약속과 그분의 능력을 바라보며 그곳에서 친교를 누릴 때는 눈으로 보는 많은 것들을 극복하고 오히려 마음으로 보는 것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특별한 믿음의 작용, 은혜의 역사가 아니면 대게 우리의 마음은 눈으로 보는 것을 따라 오는 경향이 있습니다.
시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나라를 잃어버리고 이방의 땅에 망명을 온 것이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들은 “네 하나님이 어디 있냐?”라고 묻고, 시인은 일행들과 함께 주야로 눈물로 음식으로 삼았다고 하였습니다. 원수는 매우 강하고 자신들은 약하며, 그들은 큰 권력을 잡고 승리하였으나 자신들은 왕국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눈에 보이는 현실이었습니다. 그 현실을 직시하면서 이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함께 즐거이 노래하며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가던 때를 기억하며 마음이 상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음의 눈은 눈에 보이는 것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아무 희망이 없는 것 같은 두려움과 절망이 밀려왔습니다. 본문을 보면 시인은 스스로 고백하기를 낙망하였다고 했습니다.
내 영혼을 향한 대화
이런 상황 속에서 시인은 자신의 영혼을 향하여 대화를 합니다. 이것은 스스로에게 신앙을 독려하기 위한 고전적인 경건의 기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신과의 대화입니다. 자신과의 대화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 안에는 두 마음이 함께 있습니다. 물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안에도 두 마음이 함께 있어서 어떤 마음은 양심을 따라 살려고 하고, 어떤 마음은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양심을 거스르려고 합니다. 한 마음이 또 다른 마음을 향하여 갈등하고, 또 다른 마음에게 명령하거나 강요받기는 일이 불신자의 마음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양심의 가책, 또는 양심의 송사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깊이 어두워지고 본성의 빛조차 방해를 받으면 예외인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양심의 기능이 작동하게 됩니다. 비록 신앙은 없지만, 자신의 마음 안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을 토대로 자신이 행한 것, 혹은 행하려고 하는 일에 대해 송사를 하고 율법을 기초로 정죄하는 것입니다. 정죄와 송사의 기능이 양심의 기능인데, 양심은 법을 기초로 작용하는 기능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창조의 목적에 반하는 일들을 스스로 그만두게 되고, 창조의 목적을 따르는 일들에 격려를 받고 그 일들을 행하게 됩니다. 이 때 그 사람은 두 개의 자아를 가진 것처럼 하나님의 율법과 율법을 어기면서도 행하려는 욕망 사이에서 대화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훨씬 고차원적이고 본질적인 영혼의 대화가 신자들에게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마치 두 영혼이 인간 안에 있는 것처럼 오해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한때 빠졌던 마니교에서는 인간 안에는 선한 영혼과 악한 영혼이 있어서 두 개가 서로 싸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한 영혼 안에 두 개의 본성이 작용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그분께 순종하고 사랑하려는 본성과 또 하나는 자신의 뜻대로 살고 자기의 만족을 위해서 하나님을 거스르려고 하는 죄된 본성이 바로 그것입니다. 둘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하여 인간의 마음 안에는 자신이 찢기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싸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눈으로 들어오는 절망적인 상황을 보며 “이제 다윗 왕국은 끝났다. 원수는 이겼고 너희는 패망하였으니 아무 희망도 없다.”라고 외칩니다. 그 소리는 크고 결정적입니다. 거기에 항거할 근거를 자신의 삶속에서 찾을 수 없었으니 상황 자체가 절망적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통해 마음에 전달되는 것보다 객관적인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다윗의 왕국을 선대해주시는 하나님의 과거의 은총의 행적들을 회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과 대화를 하는 고전적인 경건의 기법을 동원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갈등하고 있는 자신의 영혼을 타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놀라운 경건의 기법입니다. 이미 있는 자신의 영혼을 향하여 마치 타자인 것처럼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라고 타이르는 것은 누구입니까? 그것도 역시 영혼입니다. 영혼이 영혼을 향하여 타이르는 것입니다. 타이름을 받는 영혼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여 낙심하는 자신의 본성이고, 타이르는 영혼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주와 함께 동행하며 살았던 기억을 회상하는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또 다른 영혼의 본성입니다. 둘 사이에 충만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둠
하나님을 떠난 영혼이 마지막에 도달하는 곳은 절망입니다. 아무 희망도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질에 있어서는 한줌의 흙과 같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지만, 하나님이 신을 세상에 창조하신 목적을 이해하게 될 때 지푸라기 같은 영혼이 이 땅에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는 보석과 같은 것입니다. 그는 지푸라기 같으나 그를 살게 하신 하나님, 지푸라기와 같은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보석 같은 것입니다. 불로 타거나 사라지거나 없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하나님을 떠난 영혼의 불안에 대해서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만 참다운 안식과 평안이 있지,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들의 마음, 신앙의 눈으로 행하지 않고 단지 육신의 눈으로 행하는 그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는 불안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영혼을 향하여 “하나님을 바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안에 소망을 두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 속으로 소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인하여 낙망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 속으로 소망을 가지라. 하나님 속으로 깊이 들어가 그분과의 깊은 친교 안에서 완전한 영혼이 되어라. 그 안에서 희망을 갖는 영혼이 되어라.” 이렇게 타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얼굴의 도우심’이라는 것은 이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오는 도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얼굴은 하나님과 대면하는 자들이 누리게 되는 하나님과의 친교,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오는 충만한 임재의 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절망스럽고 아무 희망이 없는 것 같아도 마음의 눈으로 보게 될 때 그 안에서 참된 생명과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 안에 인간의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을 끊임없이 바라고,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믿음생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속으로 주님과의 교제 속으로 그 은혜 속으로 깊이 들어갈 때,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시는 분은 없네 ♬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원수에게 에워싸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함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시 42:6-8)
본문해설
본문에서 회상이 등장합니다. 5절에서 “내 영혼아 내가 어찌하여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는 자아와의 대화에서 나오는 내용을 실천하는 장면이 이제 6절에서 8절에 나옵니다. 그가 회상을 하게 된 이유는 “낙망이 되었기 때문에 제가 회상합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어떠한 희망도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나라는 잃어버렸고 자신들은 낯선 나라에 망명을 와 있으며 사람들은 네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조롱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속히 개선되고 어떤 변화가 올 것이라는 조짐도 보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성전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을 뵈옵는 일들이 불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 시인은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라고 합니다. 직감적으로 볼 때 이것은 요단 땅이나 헤르몬, 미살산에서 일어난 어떤 일을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신들을 특별히 도우셔서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과 자신들을 향한 긍휼을 보여주시는 때라는 것입니다. 요단 땅은 요단강을 끼고 있는 땅들입니다. 거기에서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요단강을 건널 때 하나님께서 물을 말리시고 법궤를 메고 걸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정복하도록 만들어주신 땅이었습니다. 그 땅을 건너고 나서 처음 공격하게 된 것이 여리고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에 의해 큰성 여리고가 무너지고 가나안 정복의 장을 열어주셨습니다. 이러한 위대한 일들이 일어났던 때에 시인이 직접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놀라운 역사를 그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석가에 따라 요단 땅에서 일어났던 일을 저와 같이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시의 저자를 다윗으로 보고, 다윗이 요단강에서 반역을 당했을 때 구사일생으로 구출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것과 요단을 연결시키는 사람도 있지만 제 생각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즐겨 회상하였던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신 사건을 묘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요단강 도하 사건과 요단 땅 정복 사건이 그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증거가 헤르몬산과 미살산의 이야기입니다. 헤르몬과 미살산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여행 중 큰일을 행하고 광야의 여행을 끝내고 가나안 정복을 할 때 일어났던 큰 승리를 기념하는 장소입니다. 헤르몬산과 미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돕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신 하나님의 큰 능력과 위대한 힘을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전적인 경건의 기법이었습니다.
과거를 회상함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하나님 앞에 낙심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개인적인 범죄로 말미암아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낙심될 때가 있지만, 특별히 그런 것이 없더라도 내리누르는 중압감을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살 소망이 끊어지고 더 이상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지 않는 것 같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거리감이 느껴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커다란 죄 때문에 양심의 가책과 함께 이런 것들이 들어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경건의 능력이 서서히 상실됨으로 말미암아 이런 것들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모두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친밀한 교제를 상실한 데서 오는 것입니다. 혹은 사람들의 기질에 따라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으면서도 어느 순간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한없는 거리감이 느껴지고 자신의 죄를 발견하면서 자신은 하나님 앞에 매우 무가치한 존재라는 느낌이 강물처럼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같은 것을 보면, 그는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순간 찾아오는 영적인 절망과 낙담, 이런 것이 자주 일어났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가장 좋은 치유법은 과거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이 과거의 나의 삶속에서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회상하는 것이 낙망과 양심의 송사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의 약속이 자신의 과거의 생애 속에서 틀림없이 실현된 것을 발견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약속은 반드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실현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깊이 깨닫게 될 때 시인처럼 낙담과 우울에서 벗어날 수 있는 놀라운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인간에게 매이지 않고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단 땅과 헤르몬, 미살산에서의 주를 기억했지만, 현실에서는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시인은 나라를 잃어버리고 망명의 길을 떠나는 환란이 원수들의 간교한 계교를 통해서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조금 더 멀리 보면 모든 물결과 큰 폭포소리는 하나님이 직접 내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한 원수들을 두려워하는 대신, 모든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아무리 환란이 많이 와도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생명을 주시면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참 강한 존재입니다. 반면 어떻게 보면 아주 약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너무나 강한 존재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너무나 약한 존재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절망의 때를 이기는 법
일생을 사는 동안 신자의 가장 큰 적은 절망입니다. 절망은 죄보다도 훨씬 더 무서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파는 죄를 지었고 베드로도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하고 마지막에는 저주하면서까지 모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사람은 나가서 목매어 죽고, 한사람은 다시 회복되어서 하나님 앞에 삽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특히 우리가 양심을 거스르는 죄를 짓거나 악을 행할 때 밀려오는 절망, 영혼의 깊은 침체에 빠졌을 때 ‘나 같은 존재는 별 의미도 없을 거야.’, ‘나는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 내팽겨졌다.’ 이런 생각들은 신자의 삶에서 죄를 짓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사람이 죄를 많이 지었다고 해서 죄의 크기만큼 똑같은 절망감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도 일종의 정동의 작용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심적인 상태가 어떤 상황에 있는가에 따라 절망감이라고 하는 것은 정도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에서 절망이라는 것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회복이나 변화가 아닙니다. 절망이 데려 가는 것은 파멸입니다. 욥기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을 욕하고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절망이 우리를 데리고 가려고 하는 마지막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환란과 시련이 닥치고 낙심될 때마다 항상 과거를 회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깊이 회상합니다. 그 과거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붙드시던 놀라운 은총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영혼의 생명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분께로 오는 은혜의 도움을 받았던 때는 정말 절망적이고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차이점은 그때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있었고, 하나님 앞에서 절망하는 시간보다 더 많이 기도하고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때 절망스러운 상황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하게 공급받게 해주는 시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상황을 통해 우리가 이겨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로 이기는 연단입니다.
저는 목사인데도 살다 보면 낙심이 될 때가 있습니다. ‘아, 이제는 희망이 없다.’ 말로 다 할 수 없지만 낙심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과거를 회상하게 됩니다. 내가 여기 있게 된 것이 우연히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세밀한 하나님의 인도 속에서 왔다는 것, 그리고 이것보다 훨씬 곤고하고 절망스러울 때도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도우셨는지를 생각하면서 그리스도께 피하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 앞에 늘 변하고 변심하고 올곧지 못하게 살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고 언제나 나를 붙들고 이 길을 걸어 오셨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보다 훨씬 더 절망스러울 때도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붙들어 여기까지 오게 하셨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의지할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절망은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분명하게 악한 영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절망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데로 우리를 데려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불신앙이 거기에 함께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절망의 마지막 목표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파멸이라는 말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절망은 우리를 마지막으로 거기에 데려가려고 합니다. 시인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회상하면서 그 약속이 어떻게 나의 인생 속에서 신실하게 시행되었는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감사하는 사람들은 절망에 덜 빠질 수 있습니다. 감사 그 자체가 과거에 대한 끊임없는 회상,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계가 끊어질 때 절망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위기에서도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두 가지,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분은 나를 끝까지 지키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반석이신 하나님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도다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 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 하리도다”(시 42:9-11)
찌르는 칼 같은 고통
시인은 마지막 절에서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며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는 후렴구를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앞부분에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남의 나라 땅에 망명 와서 그곳 사람들이 시인의 일행에게 물었던 것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나라를 빼앗고 왕위를 찬탈한 사람들이 묻는 것 모두를 포함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했다면 다윗을 쫓아내고 나라를 찬탈하는 일은 못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위는 다윗을 통해 하나님이 세우실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기름 부어 세우셨기 때문에 기름 부은 자를 대적하며 싸우는 것은 곧,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인 것이 분명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꺼이 그 일을 감행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조롱하면서 묻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할 때 그 말은 시인의 뼈를 찌르는 칼같이 다가왔던 것입니다. 시인은 전쟁을 많이 경험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표현은 다른 평범한 이야기와 달랐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전쟁 중에 사람을 깊이 찔러 칼끝이 뼈에 닿아 그 뼈를 찌르게 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상만 해도 형언하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그런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백병전에 참여해서 칼로 사람을 찌를 때 칼을 깊이 찌르고 그 칼을 회전시켜서 찌른 부위의 상처를 극대화합니다. 그 때 찌른 칼이 뼈에 닿는다는 말입니다. 그런 것들을 군대에서 훈련시킵니다. 시인이 이런 비난을 받을 때 경험한 견디기 힘든 내면의 고통을 반영한 것입니다. 깊은 고통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은 절망의 고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도움이 모두 끊어진 것 같고 모든 상황은 내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외치는 것 같았습니다. 시인은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라고 하나님 앞에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나를 잊지 마소서˛
“하나님께 기억한바 된다.”라는 말 자체는 하나님의 큰 사랑과 무한한 보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 않고 기억하신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능력 때문에 기억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큰 도움이 되지 않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신다면 기억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붙드시고 도우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시편이나 다른 성경을 보면 경건한 백성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 않으셨다.”라는 것을 깊은 감격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제목으로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가지고 시인은 하나님 앞에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잊지 않으시는 것은 더 크게는 이스라엘, 하나님이 선택하신 언약공동체를 잊지 않으시는 그분의 각별하신 사랑과 은혜에서 출발합니다. 앞 절을 보면,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주를 기억한다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공동체적 구원이 찬송의 제목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 언약의 백성들의 모임 안에 속해 있는 개인인 나 역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 안에 있을 것이라는 신앙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돌보시고 인도하시지만 그것을 기초로 하나님의 신실함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제일 먼저 언약백성들과 약속을 맺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 그들에게 허물이 있을지라도 끝까지 버리지 아니하시고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면서 변함없이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성실하심의 빛 아래서 개인의 구원과 자신이 하나님 앞에 버림받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잃어버린 신앙이 바로 이런 신앙입니다. 개인이 하나님을 만난 은혜의 체험이 공동체를 향해 베푸신 하나님의 언약의 충실하심의 맥락 안에서 받아들여질 때 구원의 의미가 아주 찬연하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많은 허물들을 공동체적으로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베푸신 크고 놀라운 사랑과 구원의 은혜도 사실은 공동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
시인이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원수들이 자기를 향하여 퍼붓는 비난과 모욕과 압제가 영원한 것처럼 보이지만 무한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에 비하면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것인데 내가 슬프게 다니는 이유는 결국 나의 믿음에 있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이런 의미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입니다. 성경에 보면 ‘반석이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이 표현은 처음부터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반석이신 하나님께’라는 표현이 본격적으로 빈번하게 등장한 때는 출애굽에서 반석에서 물을 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게 된 사건 이후에 이 표현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히브리어로 ‘추르’(rWx)라는 말은 반석, 혹은 바위인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구원입니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하나입니다. “반석이신 하나님” 그러면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의 발을 반석위에 세우시고” 이것은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 위에 나를 두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 역시 공동체적 고백입니다. 물이 없어서 더 이상은 행굼질을 할 수도 없고 살수도 없는 때 하나님이 명령을 내리셔서 모세에게 반석을 명하여 물이 나오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나중에 문제가 되지만 모세가 반석을 칩니다. 거기에서 물이 쏟아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시고 구원을 얻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자신이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고통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으로 건져주시는 중요한 구원사건 중 하나로 기억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모든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받게 될 구원, 특별히 그것을 세례와 관련시켜서 해석했던 것입니다. 반석이신 하나님의 구원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현되는 구속사적인 연결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인은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 나를 건져주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을 건져내신 것처럼 나를 건져낼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반석이신 하나님”을 부른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를 잊으셨습니까? 내가 어찌하여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닙니까?” 한편으로는 잠잠하신 것 같은 하나님께 소리치고, 한편으로는 현실로 인하여 낙망한 자기 스스로를 일깨우고 소망을 갖고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자신에게 촉구하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가 인생을 사는데 가장 위험한 것은 절망에 빠지는 것입니다. 절망에 빠질 때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절망의 마지막은 욥기에 나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망이 우리를 데려가려고 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아무것도 없고 철저한 절망 속에서 우리를 죽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낙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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