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43
목 차
주의 빛과 진리를 보내소서(시 43:1-3) 21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시 43:3) 26
빛과 진리를 보내소서(시 43:3) 31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는 길(시 43:4) 36
영혼을 향한 권고(시 43:5) 41
시편56편 강해 1
시편43편 강해 1
시편43편 강해 1
시편43편 강해 1
시편43편 강해 1
시편43편 강해 1
주의 빛과 진리를 보내소서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시 43:1-3)
본문해설
이 시는 다윗의 시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42편, 44편이 ‘고라자손의 시’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사이에 끼어 있어서 같은 사람의 저작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고라자손의 시’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다윗의 작품이고 고라 자손이 보관을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43편이 다윗의 시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의 시라고 생각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정확한 답은 우리가 모른다는 것입니다. 뒷절에 보면 후렴구가 나옵니다. “내 영혼아 내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불안하여 하는고”라는 후렴구가 나와서 42편과 43편이 짝을 이루는 쌍둥이 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고라자손의 시일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이 시를 다윗의 시로 보든지 고라자손의 시로 보든지 42편과 연장선상에서 동일한 하나님의 갈망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송사를 변호하소서˛
시인은 송사를 변호해달라는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습니다. 송사라는 것은 결국은 재판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캐고 멸시하고 압박하는 모든 사람들을 자기를 고소하는 사람들로 본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내 송사를 변호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의 송사는 별것이 아닌데 우리 자신의 양심이 송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양심의 기능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정죄하는 기능이고 하나는 송사하는 기능입니다. 송사라는 것은 “얘가 이러이러한 잘못을 했대요.” 하고 이르는 것입니다. 정죄는 “너는 이러이러한 형벌에 해당한다.”라고 판결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 두 작용이 양심의 가장 대표적인 기능입니다. 양심은 내 안에 있으면서 이상하게 내가 죄를 지을 때는 내가 아닌 것처럼 내 안에서 또 다른 내가 되어서 죄를 지은 나를 정죄하고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윤리학자들은 이 양심을 “인간 안에 마지막으로 남은 하나님의 목소리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양심신성설’입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결국 누구편입니까? 자기편입니다. 그런데 유독 자기편이 안 되어 주는 것, 자기가 죄를 짓고 자기의 기쁨을 위해서 악을 행할수록 더욱더 자기편이 되지 않는 그 무엇이 인간 안에 있습니다. 그것이 양심입니다. 그것이 송사를 하는 것입니다. 이 기능은 올바로 유지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믿을 만하고 올바르다면 이 세상이 이렇게 혼란스럽지는 않을 것입니다.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 양심은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됩니다. 양심도 영혼의 기능이기 때문에 영혼과 마음이 죄에 점령되면서부터 양심의 작용에도 올바르지 않는 구분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양심도 우리가 신뢰가 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보면 송사를 한다고 했는데, 송사는 “이 사람이 죄를 지었습니다.” 하는 고발입니다. 송사할 때는 그 사람이 죄지은 사실을 가지고 송사하지만, 정죄할 때는 율법을 가지고 정죄를 합니다. 양심은 율법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두 개의 율법을 새기셨는데, 하나는 돌 판에 새기시고 하나는 사람의 마음에 새기신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과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거슬렀다는 사실을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핑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송사들을 많은 나라들로부터 받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라’라는 것은 많은 백성들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시인이 무엇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했는지는 모르지만, 이것이 다윗의 시라면 다윗이 악을 행한 것에 대한 징벌로 나라가 망했다고 비난하는 자국 백성들이 될 것이고, 고라의 자손의 시로 본다면 이것은 이방의 땅에 망명을 왔을 때 그 땅에 있는 사람들이 송사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서 깊은 서러움을 느꼈을 것인데, 이 송사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서 “하나님이여 나의 송사를 변호해 주시옵소서”라고 탄원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옵소서”라고 하나님 앞에 탄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는 나의 힘이시어늘˛
그러면서 하나님에 대해 회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견딜 수 없는 절망과 두려움에 휩싸였을 때 그 곳에서 벗어나는 경건의 기법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상입니다.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이것은 다윗의 시편 18편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이런 표현 때문에 다윗의 시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이것은 마치 42편에 나오는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의 주를 기억합니다”라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요단과 헤르몬과 미살산을 생각하는 것이 민족적으로 하나님이 도우신 것에 대한 회상이었다면 이것은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하나님이 자기를 도우셨던 때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라는 시편 18편의 시도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며 그의 인생의 가장 곤고할 때에 지은 시입니다. 여기에서도 시인이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라고 고백합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이 나의 힘이셨고 지금보다 더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나와 동행하셔서 이기게 하셨는데 나는 왜 이렇게 혼자인 것처럼 놔두십니까?”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호소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향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그렇게 된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시인은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징계를 받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그러면서 비는 기도가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입니다. 결국은 이러한 송사를 받고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으며 국가적인 위기와 난관을 겪고 멸시와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 앞에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42편, 43편을 전체적으로 보면 자기 나라를 뺏은 원수들을 격파해달라는 기도가 안 나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자신의 고통만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똑같이 “원수를 도말 하소서.” 아니면 “왕을 내어 쫓은 저 악한 자들을 징벌 하소서.”라는 기도가 안 나옵니다. 그리고 간절히 비는 것은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입니다.
성산과 장막에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결국은 시인의 갈망이 세상의 영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구하는데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세상 나라와 왕국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려주시기 때문에 그 왕국이 자신들에게 의미가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도하여 성산과 장막에 이르러 그분을 뵈옵는 것이 시인의 간절한 소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인생의 가장 큰 문제들이 해결된다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수 하나하나를 격파하시도록 그들을 향한 한 맺힌 마음을 갖기보다는 자신의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갈망, 주의 임재가 있는 성산과 장막에서 주를 뵈옵겠다는 마음이 시인으로 하여금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를 이기게 했습니다. 결국은 성산과 장막,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 공동체, 그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 된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의 인생의 문제가 많은 것 같아도 결론적으로 보면 좋은 교회에 가서 주님을 제대로 만나고 사는 것이 문제들에 대한 최종적인 답입니다. 문제가 많다고 답도 많은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많아도 답은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거룩한 교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뵈옵고 그 은혜와 사랑에 굳게 붙들려 살 때 인생에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 손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시 43:3)
본문해설
이때까지는 하나님의 집이 장막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원래 장막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이동식 성전을 짓도록 명령하신 규례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광야생활 중에는 한 곳에 정착할 수 없고 계속해서 행진을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동식 성전이 아니면 곤란할 것입니다. 이제 가나안에 들어와서 정착한 후에는 성전을 지어야 되는데 다윗에 이를 때까지 장막의 형태로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것을 ‘장막’, 히브리어로 ‘오헬’(lh,a), ‘tent’라고 하는데, 그런 장막을 이야기는 것입니다. ‘주의 성산과 장막’이라고 했는데, 이 ‘성산’은 예루살렘을 싸고 있는 산지를 가리킵니다. ‘시온’이라는 명사가 바로 그런 산지를 가리키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하신 나라,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왕국에 대한 상징입니다. ‘주의 성산’이 하나님이 선택하신 나라와 백성의 개념이라고 한다면, 뒤에 나오는 ‘장막’은 하나님이 그들 속에 임재하시는 성전으로서의 장막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민족적인 선택의 개념이고, 하나는 종교적으로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임재해 계시는 심장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민족적인 일치를 이루게 되었던 중요한 구도가 바로 성소, 하나님께 경배하고 예배하는 장소의 일치입니다. 그것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 된 연대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나갔던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자기가 맞닥뜨린 삶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들은 공통적으로 모두 하나님의 성소를 바라보았습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해결해 갔던 것입니다. 그런 신앙을 여기에서 엿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시인은 끊임없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신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며 부르짖습니다.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이것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되면 어떻게 자신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입니까? 위대하신 하나님, 당신의 백성과 당신의 이름을 위해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 거기 계신 것입니다. 요단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행하셨던 위대하신 하나님, 그리고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인생의 모든 역경과 어려움에서 구출 받는 것입니다. 시인이 42편에서 “내 영혼이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라고 했을 때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했던 마음이 시인으로 하여금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해달라고 빌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신앙생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여호와의 장막은 단지 하나님 앞에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것 이상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중심으로 자신의 인생이 가지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기쁘고 즐거운 일이 있을 때도 하나님의 성산에 찾아와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과 어려움이 찾아와도 하나님의 성소에서 주님의 능력과 도움을 구하며 그분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희로애락, 그 모든 것이 성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이 세상과 환경 속에서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인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집을 향한 간절한 사모함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이 그곳에 이르게 해달라고 호소합니다. “주의 빛과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지금 상황은 원수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망명을 떠나와서 무시를 당하며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멸시를 당하는 상황입니다. 그 때 그는 “원수를 처단하여 주십시오. 왕국을 돌려주십시오. 우리로 하여금 그 나라로 돌아가게 해주십시오.”라고 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해주십시오”, 자기가 다스릴 왕국을 다시 찾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시인의 꿈은 나라와 왕권, 통치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고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것을 그리워했던 것입니다. 이 큰 고난, 왕위를 잃어버리고 신하들과 함께 쫓겨나서 이방의 땅에 망명을 오는 과정을 통해서 다윗은 절실하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주님께 제사를 드리며 살아가는 삶의 행복에 대해 다시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종교의 자유를 누리는 나라가 전 세계에 없습니다. 완벽할 정도로 종교의 자유를 누리며 한없는 자유 속에서 언제든지 원하기만 하면 하나님께 나아오고 그분을 경배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이 완성이 되어서 장소에 매이지 않고 어디서든지 영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우리는 거의 감격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깊이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누리면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싫어버린 까닭에 못 만나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주님의 이름을 자유롭게 부를 수 있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곤고한 일이 있을 때나 시련이 있을 때나 유혹을 받을 때나 하나님의 집에 나와서 주님의 얼굴을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의 빛과 진리를 보내소서˛
시인은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주의 빛’과 ‘주의 진리’라는 것은 같은 말의 반복입니다. ‘주의 빛’, 곧 ‘주의 진리’라는 의미입니다. 캄캄하고 아무 것도 볼 수 없을 것 같은 암흑과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어두운 인생길에 빛이 됩니다. 무지한 사람의 마음에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오고 그의 마음에 빛이 들어오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어떻게 믿고 살아가야 할지 지혜가 생겨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에 들어온 등불은 우리의 인생길을 비추는 빛이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실족치 않고 이 길을 어떻게 걸어갈 수 있을지 깨닫게 해줍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이고 우리의 믿음생활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시편 119편에서 “주의 말씀은 내 길의 빛이요 내 발의 등불입니다.”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이신 진리의 말씀으로 영혼을 깨우실 때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성소로부터 추방된 가운데 그분을 어떻게 믿고 섬겨야 될지에 대한 지혜를 갖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생의 길이 어떻게 하나님에 의해서 인도받게 되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진리는 어두운 마음에 빛이요 알 수 없는 인생의 길에 등불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시련의 때, 오히려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고 인생의 고난이 가득한 때, 진리의 말씀을 꼭 붙들고 의지하며 살아갈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어려움을 풀어나가는 비결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려운 난관에 부딪치게 되면 삶의 현실을 주목합니다. 삶의 현실이라는 것은 의미를 알기 힘들 정도로 꼬여있고 복잡합니다. 그래서 여러 분이 시험에 들고 인생의 어려움을 만나면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게 되면 복잡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의미가 명료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상황 속에서 우리가 왜 이런 상황을 만나게 되었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배우고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삶의 상황과 맞닥뜨려서 혼란이 느껴질 때 문제의 해결은 그 문제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때일수록 주님의 말씀을 꼭 붙들고 주님을 대면하리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매일매일 당신이 기뻐하시는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인생의 길이 보입니다. 그렇게 믿음의 생활을 계속해 나가는 것입니다.
빛과 진리를 보내소서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시 43:3)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철저하게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삶이었습니다. 이 성전은 살아가다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필요한 장소가 아니라 삶과 신앙, 슬픔과 기쁨, 인생의 모든 것에 있어서 경험의 중심이었습니다. 성전은 그들에게 있어서 단순한 종교의 기능을 하는 장소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삶의 중심이 되었던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삶이 보이는 성전, 혹은 성소 중심의 신앙생활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개인적인 슬픔과 고통이 있을 때도 성전에 나아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거기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고, 나라의 큰 위기가 있을 때 성전에 나아와서 하나님 앞에 자기를 돌아보며 회개하기도 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을 받기도 했던 것입니다.
시인은 여전히 마음속의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그 성전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며 자기가 직면하고 있는 슬픔과 고통스러운 상황을 하나님께 호소해야 하는데, 이 성전으로부터 유리당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기도하고 할 수 있는 상황들을 박탈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호소하는 것입니다.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이때까지만 해도 성전이 지어지지 않고 성막으로 성소를 삼았기 때문에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라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소에 다다르게 해달라는 뜻이었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리고 남의 땅으로 쫓겨 왔으니까 더 간절한 기도제목은 성소에 이르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왕궁에 이르게 해달라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왕궁에 이르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성소에 이르게 해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비록 하나님의 큰 섭리 가운데서 징계를 받고 내 나라에서 쫓겨나 이방나라 땅에 와있으나 그의 마음속에 불타고 있는 것은 성소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가장 시급한 소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인생에서 많은 위기와 어려움을 만날 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대답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뵈옵는 생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이런 시련을 만나고 고통스러운 인생의 위기를 겪고 있는지, 하나님 안에서 해답을 찾게 됩니다. 우리들에게 얘기치 못한 행운이 주어져도 그 행운 때문에 교만하지 않고 우리에게 큰 축복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에 것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그분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변화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계획, 하나님의 섭리, 이것들을 염두에 두면서 그는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빌고 있는 것입니다. 한쪽은 반란에 성공해서 나라를 차지했으나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아니고, 한쪽은 반란에 패배해서 나라를 잃어버리고 남의 나라 땅에 도망쳐 왔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주의 빛과 진리를 보내어˛
재미있는 것은 성산과 장막에 이르도록 하나님이 자기를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는데, 군대와 마병을 통하여 당신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주시면 그 빛과 진리의 손에 이끌려서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이미 악한 무리들이 땅을 차지하고 있어서 병거와 무기가 아니면 그들을 누를 수 없고, 그들을 제압하지 않으면 그 땅에 한발자국도 들여 놓을 수 없는 완전히 패배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칼과 병거, 말과 군인들을 통해서 자기를 왕국으로 돌아가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의 빛과 진리를 통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 빛과 진리’라는 말은 같은 말의 반복입니다. 빛이 따로 있고 진리가 따로 있다기보다는 “주의 빛 곧, 주의 진리를 보내어” 그런 정도의 뜻입니다. 성경에서 ‘빛’은 진리,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상징어로 많이 사용됩니다. “주의 말씀은 내 길의 빛이요 내 발의 등이니이다”에서 ‘등’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인생의 길은 캄캄합니다. 캄캄한 것은 세상의 물리적인 어두움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 안에 있는 어두움입니다. 영혼이 어두움이 있으니까 그 캄캄함은 무엇으로도 물러나지 않습니다. 물리적인 어두움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빛을 비추면 어두움은 힘없이 물러가고,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환하게 비춰집니다. 그러나 영적인 어두움은 그렇게 해결될 리가 없습니다. 밖에 환한 대낮인데도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늘 불안하게 길을 걷고 넘어지고 다른 길로 가기 쉽듯이, 영혼의 어두움이 가득하면 그 어두움의 원인이 자기 안에 있기 때문에 물리적인 빛이 환해도 올바른 길을 걷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혼 안에 있는 어두움을 물리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영혼에 빛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이 마음 안에 가득히 비췰 때 그 마음 안에 있는 찬란한 빛을 통하여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진리를 따라 빛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진리의 빛을 비추면 지혜가 생겨나게 되고 명철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됩니다. 자기가 왜 이런 환란과 시련을 당하고 악한 원수들이 승리하게 되는지도 알게 됩니다. 모든 과정들을 통해 결국은 하나님 앞에 사는 삶이 될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은 반드시 기름부음 받은 왕을 당신이 기뻐하시는 성소에 다시 이르게 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들이 꼬여서 복잡해지고, 시련과 환란이 일어나고, 악한 자들이 잠시 이기는 것처럼 보이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결국 이 모든 상황을 종식시키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의 눈이 어두운 가운데 끊임없이 몸부림치면 그것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주 연한 진흙이 있는 수렁에 빠지면 발이 계속 깊이깊이 빠져 들어갑니다. 그때 나오기 위해 몸을 움직이면 진흙과 몸 사이에 공간이 생기면서 몸은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그래서 신중하게 판단하고 움직여야지만 거기서 나올 수 있습니다. 외부에서 줄을 던져주어서 끌어내지 않으면 헤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생의 시련과 어려움들은 대부분 그 원인이 우리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대부분 우리 안에 있습니다.
최근에 중국을 다녀왔습니다. 지진으로 죽은 사람들의 숫자가 5만 명을 넘을 것이라고 예상을 하는데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상황입니다. 매몰되어있는 사람들의 수가 엄청납니다. 그 지역에서 학교만 7천 채가 무너지고 어린 학생들이 다 깔렸다고 합니다. 이것은 전부다 부정부패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전문가들이 가서 조사를 했습니다. 5층짜리 빌딩을 짓고 위에는 수천 톤의 물탱크와 여러 시설물들이 들어섰는데 그것을 버티는 데 2층짜리 연립주택을 짓는데 쓰는 철근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저앉은 것입니다. 거기도 뇌물을 먹은 것입니다. 학교 건물을 지은 사람들을 일제히 조사한다고 하는데 크게 벌을 받을 것입니다. 학교가 제일 먼저 주저앉아서 수만 명의 학생이 거기에 깔린 것입니다. 생각 있는 사람은 이것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되었던 지진이라고 합니다. 장강을 막아서 산샤댐을 건설했는데 물 양이 어마어마합니다. 그렇게 안하면 농사를 짓는데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니까 그랬을 것입니다. 지구의 자전축이 움직일 정도로 거기에 물을 부었다고 합니다. 공사시작 할 때부터 몇몇 학자들이 그렇게 댐에 물을 부으면 지진이 난다고 경고했습니다.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지각을 누르게 되면 지각의 변동이 오고 결국 어디서든 지진이 터져서 중국에 피해를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현실화 된 것입니다. 며칠 전에도 진도 5.3의 여진이 있었고 땅이 계속 흔들린다고 합니다. 약 800개 정도 되는 댐에 금이 갔고 산샤댐도 위험하다고 합니다. 토사가 흘러내려서 강을 막아 큰 호수가 생겼는데 하루에 2미터씩 수위가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흙덩어리로 되어있기 때문에 한 번에 쏟아지면 어마어마한 물이 쏟아져 다 밀어버리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몇 십만 명이 대피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모두 자연의 뜻을 거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늘날의 상황은 참 중국적이지 않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자연에 순응하면서 사는 이들이었는데 무분별하게 개발을 해서 인민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습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는 데 있습니다. 자연에 순응하면서 물이 흘러가는 것을 이쪽으로 가도록 저쪽으로 가도록 할 수는 있지만 지구가 흔들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물을 가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고, 하나님 바깥에 있는 행복을 꿈꾸지 말고, 하나님 안에 있는 약속된 행복을 꿈꾸면서 순종하며 사는 것이 진리에 순응하는 삶입니다. 거기에 인생의 행복과 안정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우리의 참된 기쁨을 진리의 말씀에 두고 진리의 말씀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기뻐하는 생활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는 길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시 43:4)
본문해설
시인은 하나님의 전에 나아갈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원수들에게 쫓겨서 남의 땅에 망명와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 하나님의 성소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없이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어디든지 안 계신 곳 없으신 분이시지만 성소에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생각이 다르고 사는 곳도 다르지만 한 장소에 와서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들 모두 사는 곳과 생각은 다르지만 성소를 중심으로 함께 부름 받은 공동체라는 것을 뼛속 깊이 인식하게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소의 단일화입니다. 그래서 여러 곳이 아니라 오직 한 곳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신약시대로 넘어오면 하나였던 장소의 개념, 한 곳에서 하나님을 함께 경배하는 성소의 중앙화의 개념이 기독론적으로 대체됩니다. 장소와 상관없이 어디서든지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을 경배할 수 있도록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이 보여주는 한 배경입니다.
기쁨 원천이신 하나님
“하나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여기에서 ‘극락’이라는 것은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극락을 의미하기 보다는 ‘기쁨’을 말합니다. 가장 크고 완전한 기쁨이신 하나님께 내가 이르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가장 완전한 기쁨이요 가장 큰 행복인 하나님께 이르게 될 것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기쁨과 슬픔을 많이 만납니다. 꼭 하나님 안에만 기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든지 하나님 밖에도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그분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될 기쁨과 비교되지 않는 행복과 기쁨이 이 세상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것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고 주님께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왕 가까이에서 모든 영화를 누렸던 사람입니다. 오히려 그는 말하기를 자신의 완전하고 큰 기쁨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자신의 책에서 말하기를 “아무리 많이 기뻐하고 즐겨도 자신의 영혼에 해가 되지 않는 분, 그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곳에서 쾌락을 누리게 된다면 그것은 어떻게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고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한없이 누려도 다함이 없으신 분이고 아무리 많이 즐거워해도 그분은 우리에게 부족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 것들을 깨닫게 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완전한 기쁨의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으로 태어난 행복입니다. 그리고 인간 외에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있는 피조물이 없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과 원수 된 인간들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사랑하고 하나님을 누리면서 사는 참다운 행복을 모릅니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완전한 행복과 기쁨과 영원한 누림의 원천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손으로 쥐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고 구하며 그분께 발견한 진리에 자기를 합치시키기 위해서 믿음과 이성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시인은 하나님 안에 있는 참다운 기쁨, 말할 수 없는 행복과 만족, 이런 것들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뵈옵고 예배할 수 있는 환경을 박탈당했을 때 예전의 그리움과 기쁨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참되신 하나님께 나아감
42편, 43편 전편에 흐르는 광경을 보면, 원수들을 멸해달라는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자신의 인생의 커다란 문제, 원수에 의해 왕위는 빼앗기고 나라는 찬탈당하고 법궤도 잃어버리고 남의 나라 땅에 망명을 온 신세가 되었지만 눈에 보이는 나라의 역사, 우리를 움직이는 삶의 수레바퀴들이 결국은 하나님께 달렸다고 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완전한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맛보는 쓰라림과 고통도 하나님이 참되시기 때문에 경험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이 당신 안에 가지고 계신 생각들을 시간과 공간의 세계 안에 전개해 가시는 것이 우리의 역사이고 인생입니다. 여기에 인간이 기계처럼 참여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뜻을 시간세계 안에 펼치시고 우리는 선악 간에 그분의 뜻을 따라서 그분의 뜻을 이루어 드리면서 시간 세계 안에서 우리의 삶을 펼쳐갑니다. 때로는 우리가 바르게 살지 못할 때, 시련과 환란을 만나 주님 앞에 의롭지 못하게 살아갈 때, 우리는 마음의 고통과 정신의 번뇌를 경험하게 됩니다. 때로는 음식을 입에 넣을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주야로 자신의 음식이 되는 쓰라린 상황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우리가 시간 속에서 그런 것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이 진실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참되시기 때문에 우리가 참되지 못한 길을 걸어갈 때 쓰라리고 고통스럽다는 것은 하나님이 참되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홀로 고요히 계신 것 같으면서도 끊임없이 일하시고 끊임없이 일하시는 것 같으시면서 고요히 계십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자신의 뜻을 바꾸시는 것 같으면서도 어떻게 보면 자신의 생각을 전혀 바꾸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버리고 멀어지면 고통을 당함으로써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사실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 평강과 기쁨을 주시는 것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은 참되시고 사랑이 많으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믿음으로 매일매일 이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 하나님을 친근히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가 자신의 삶 속에서 매일매일 경험되는 것입니다.
시인이 가장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할 때 오히려 극락의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잘못한 것이 있다고 지적하시면 그대로 인정하고, 주님을 의롭다고 하며 그것을 버릴 것이고, 모든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주님 앞에 설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거기에서 극락의 하나님을 만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당신께 나아오려고 하는 사람들을 이끄시고, 당신 앞에 서려고 하는 사람들을 당신 앞에 세우십니다.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인이 하는 일 자체가 성전에서 성도들을 이끌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수종하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의 고유한 직무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수금으로 찬양할 것입니다.”라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삶의 다양한 환경과 접하면서 삶의 다양한 환경 속에서 보이는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사랑을 발견하고, 자기 안에 있는 참된 기쁨을 삶 속에서 표현하는 것이 성도의 도리입니다. 그래서 시편 150편의 마지막은 “호흡이 있는 자는 주를 찬양할 것이다.”라는 권면으로 끝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참된 행복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시인은 극단적인 고통을 겪으면서도 극락의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했고 그 일을 위해 성소를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성소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장막에 불과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친히 우리의 장막이 되어주셨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그가 누구든지, 어떤 삶의 환경에 처해있든지, 거기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장막 안에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거룩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고 그분 앞에 나아가는 길은 바로 하나님과 만나는 길입니다. 우리를 위해 찢으신 육체 안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옵고, 어떠한 환경에 처해있든지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용납해 주시고 극락의 기쁨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뵈올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그분께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혼을 향한 권고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3:5)
본성과 믿음 사이의 갈등
시인은 마지막 절에서 영혼을 향한 권고를 후렴구 같이 반복합니다.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네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라고 하는 자기 대화입니다. 자기 대화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집니다. 신자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본질적으로 옛 성품과 새 성품의 대화이며, 감각을 통해 보는 것을 알고 판단하는 육신적인 자아와 지성을 통해서 인식하는 것을 알고 감각하는 영적인 자아와의 대화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육적인 자아가 따로 있고 영적인 자아가 따로 있는 것처럼 이분법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의 눈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은 특별한 노력이 없이도 그렇게 됩니다. 우리 육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많은 것들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의 마음속으로 들어옵니다. 그것들은 많은 해석을 우리 안에서 낳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판단을 하고 자기와의 관계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일은 믿음 없이도 하는 일이고 애써서 생각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일입니다. 눈을 뜨고 생활하는 하루 내내 수많은 물상들이 눈에 들어오고, 코로는 수많은 향기들이, 귀로는 수많은 소리들이, 혀끝으로는 수많은 맛들이, 손과 몸으로는 차고 덥고 무르고 딱딱한 것들에 대한 감각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끊임없이 밀려들어오는 정보들을 해석을 하고 자기 바깥의 세계를 이해하고 자기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과 자신의 관계를 상상하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믿음의 속한 것들은 눈으로 들어오듯이 저절로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하는 사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주시기까지 희생하신 사실, 이런 것들은 감각처럼 저절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착념하고 묵상하고 생각할 때 그것이 갖는 의미들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눈을 뜨면 어디서나 하나님의 증거를 볼 수 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긍휼, 사랑과 자비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매우 고양된 상태이고 오래도록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있기 때문에 사고의 방식과 마음의 생각되는 바가 신령한 쪽으로 기울어져있는 사람입니다. 은혜의 지배아래 오래 있게 되면 신령한 사고방식이 우리 마음의 습관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에는 육신의 감각으로 들어오는 정보들은 저절로 들어오지만, 지성의 눈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는 진리와 하나님에 대한 감각들은 육신의 감각처럼 빠르지 않습니다. 더욱이 마음이 죄로 물들어져 있고 육신이 정욕에 빠져있으면, 마음의 경향과 일치하는 쪽만 눈으로 들어오기 십상입니다. 놀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집안의 물건을 바라볼 때 돈으로 보이고, 심지어는 사람조차도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존재처럼 보일 것입니다. 알코올에 중독된 사람들은 물건을 팔아서 그 돈으로 알코올을 살 생각을 합니다. 모든 것을 알코올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생각이 한쪽으로 가기 마련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어느 한쪽을 꺾고 어느 한쪽을 따르게 되면 갈등이 별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의 경우에는 모든 사람이 두 가지 요소를 마음에 지니고 있습니다. 불신자들도 한편으로 죄를 지으면서 한편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것을 보면 이 두 가지가 없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근본적이고 본질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생을 통해 신자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려는 경향을 주십니다.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경향 외에 또 한편으로는 자기를 위해 살려고 하는 경향이 남아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옛 본성과 새 본성의 싸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두 개의 자아가 아닌, 하나의 자아 안에 두 개의 본성이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나의 자아이고 저것도 나의 자아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만약에 신자가 어느 한쪽으로만 쏠린 삶을 산다면 양자의 대화는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데, 죄를 지으려고 할 때 옛 본성과 새 본성 사이에 대화가 일어납니다. 옛 본성이 죄를 짓고자 할 때 새 본성은 말릴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려고 하느냐? 너에게 더 많은 고통이 올 것이다.” “하나님이 널 그렇게 사랑하셨는데 너는 왜 꼭 그렇게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려느냐?” 등등의 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대화 속에서 옛 본성이 지게 되면 그는 범죄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고, 옛 본성이 이기게 되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똑같이 우리는 어느 한쪽으로 쏠려서 커다란 어려움을 만납니다.
시인은 죄를 짓고 눈에 보이는 대로 낙심하며 살게 하는 감각적인 본성과 비참함과 절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를 사랑하시는 약속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소망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나라는 원수들에게 빼앗겼고 자신과 측근들은 남의 나라에 망명을 왔습니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기미는 보이지 않고 절망적인 소식들이 계속 이어지고 망명 온 나라의 사람들은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만약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너는 왜 버림을 받았느냐?”라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시인은 여전히 하나님께 기도하며 묻고 있습니다. 시인은 주야로 눈물로 음식을 삼으며 마음이 쇠잔해지게 되었습니다. 이 속에서 육신의 안목은 희망이 없다고 단언하는 것입니다. 그 때 이 사람 안에서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육신의 안목으로는 아무 희망이 없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는 믿음은 그렇지 않다고 소리칩니다. 안에 있는 한 본성이 자기 안에 있는 또 다른 본성을 향하여 소리치는 것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그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할 인간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분을 바라며 살지 않는 모든 영혼이 끝입니다. 인간은 맨 처음에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 안에 살고 그 안에 있을 때 참 행복하고 기쁜 것입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지렁이들이 땅밖으로 기어 나옵니다. 그런데 날이 갑자기 개이고 햇살이 비치면 어김없이 길바닥 여기저기에 지렁이들이 말라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렁이는 피부로 호흡을 합니다. 그래서 습기가 없으면 살 수가 없는 곤충입니다. 물을 흠뻑 먹고 물기를 머금은 가운데 살 수 있는 생물입니다. 지렁이는 풀숲이나 땅속 깊은 곳, 습기가 잘 보존되는 곳에 삽니다. 비가 오면 온 땅에 습기가 가득합니다.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것처럼 나옵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 비가 그치고 해가 나기 시작합니다. 다시 습기가 있는 땅을 찾은 지렁이는 생명에 지장이 없지만 그렇지 못한 지렁이는 즉시 피부가 마르기 시작하고 호흡이 불가능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죽게 되고 잠시 후면 햇볕이 비춰서 바짝 마르거나 사람들의 발에 밟히게 되는 것입니다. 햇볕이 바짝 나는 동안에는 지렁이가 죽는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가 오고 난 다음에 죽는 지렁이들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어디에서도 “인간이 왜 존재하는 것이며 인간은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 답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안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분의 사랑 안에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품안에서 쉴 때까지 마음과 영혼의 진정한 안식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고 그분의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이 인간의 본분입니다. 시인은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그는 나라를 잃어버리고 남의 나라 땅에 쫓겨 온 상황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기보다는 육신의 눈에 보이는 대로 해석하고 소망을 잃어버리려고 하는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자신의 영혼을 꾸짖으며 “하나님을 바라라”고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것입니다. 소망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환경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수시로 변하고 지나가는 것이지만 우리가 의뢰하고 의지하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도우시는 하나님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여기에서 ‘얼굴의 도우심’이라는 이야기는 대면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대면하실 때 그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진노하셔서 심판하기 위해 대면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대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약백성들을 향해 대면하시는 것은 그들을 알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기 위함이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내 얼굴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할 수 없는 영혼의 친교 가운데서 자기를 도우시는 것을 형상화한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생활인 것입니다.
끊임없이 육신의 눈으로 들어오는 감각들에 의해 울고 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의 눈으로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소망을 가질 때 세상이 흔들리는 것처럼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변함이 없으신 것처럼 우리도 올곧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이 가르침을 명심하며 산다면 영혼의 큰 위로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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