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44
목 차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때(시 44:1-3) 47
주를 의지하는 자의 승리(시 44:4-5) 51
의지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시 44:6-7) 56
우리가 자랑하는 하나님(시 44:8) 59
주께서 우리를 버리실 때(시 44:9-11) 63
믿을 수 없는 하나님(시 44:12-17) 67
마음의 비밀을 아시는 하나님(시 44:18-21) 70
우리를 도우소서(시 44:22-26) 74
시편56편 강해 1
시편44편 강해 1
시편44편 강해 1
시편44편 강해 1
시편44편 강해 1
시편44편 강해 1
시편44편 강해 1
시편44편 강해 1
시편44편 강해 1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열조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저희가 우리에게 이르매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열방을 쫓으시고 열조를 심으시며 주께서 민족들은 괴롭게 하시고 열조는 번성케 하셨나이다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시 44:1-3)
위기 가운데 역사를 회고함
시편 44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큰 은총과 이스라엘에 배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생을 살면서 개인적으로 곤고하거나 공동체적으로 위기에 직면하였을 때 늘 하던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오래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행하신 위대한 역사를 회고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그분의 구원행동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보았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열조의 날’, 조상들의 때입니다. 옛 조상들의 때 우리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부모로부터 들어왔습니다. 그때 이야기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으로 우리를 위하여 많은 나라의 백성들을 쫓아내시고, 거기에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 조상들을 심으셔서 유업을 주셨고, 많은 민족들을 괴롭혔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보호하셔서 번성케 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행하시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 크기는 늘 다르지 않겠습니까? 오늘 아침에 이렇게 건강하게 눈을 뜨고 한주를 예배로 시작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행하신 일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늘 계속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동체적으로 늘 회고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나안을 차지한 사건입니다. 당시 그곳은 비어있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당시로서 최고의 문명을 구가하며 살아가던 나라와 민족들이 땅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레반트 지역이라고 하는데, 이쪽으로는 지중해에 연해있고, 아래로는 이집트, 동편으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원지가 있습니다. 고대로부터 인류가 가장 먼저 살기 시작한 지역이라는 말입니다. 거기에서 발달한 문명을 누리면서 나라들이 이미 세워져 있었습니다. 만약 그곳이 허허벌판이었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거기에 보내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많은 나라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당신의 백성들이 어떠한 백성들인지를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던 사람들을 끌어내셔서 그 나라를 차지하게 하셨으니 이것은 보통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행하시기까지는 하나님의 위대한 기적과 같은 역사가 필요했습니다. 애굽에서의 탈출부터 시작해서 40년에 걸쳐서 가나안에 이르는 과정, 가나안에 들어와서 그 땅을 차지하고 외세의 끊임없는 침략으로부터 보호를 받아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유지되기까지 하나님의 말할 수 없이 큰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을 능력으로 보호하심
그러면서 시인은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물론 그들이 싸워서 이긴 것이지만 자기의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서 ‘팔’은 힘을 나타냅니다. 전쟁을 잘하거나 나라에 큰 힘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창과 칼이나 힘이 아니면 무엇이었겠습니까?
나라는 두 가지를 갖춰야 합니다. 외적으로부터 자기 나라를 보호할 뿐 아니라, 필요하면 다른 나라를 공격해서 국가의 생존을 위한 모든 질서들을 돌려놓을 수 있는 그런 힘, 그리고 또 하나는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국가가 해야 할 중대한 사명입니다. 칼로 땅을 차지하고 힘으로 나라를 누르는 것도 나라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고래로부터 나라가 가지고 있는 기능이고 힘이었습니다.
이들은 객관적으로 볼 때, 그럴만한 사람들이 못되었습니다. 이들은 잠시 전에 애굽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었고, 얼마간의 패물이나 제물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곧 없어질 것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농사도 지을 수 없고 목축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40년 가까이 먹이시고, 능히 전쟁을 치러 다른 나라와 겨루어 이길 수 있게 하셨으니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능력으로 그들을 보호하셨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오직 주의 오른손’이라고 할 때 ‘오른손’은 선택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팔’은 힘입니다. 그리고 ‘얼굴빛’은 하나님의 친교와 축복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당신의 큰 능력과 독점적인 은총의 얼굴빛으로 그들을 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적 같은 사건들을 통해서 그들로 하여금 그 땅을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앞에 어려움이 놓여있다고 하더라도 예전에 그 땅을 차지할 때만큼 어려울까?’ 그때도 우리를 건지신 하나님이 지금도 능히 건지시리라는 믿음이 과거를 회상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런 기법들을 가지고 고난의 때를 지나고 이겼던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는 시인의 모습들을 보면서 이중적인 적용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큰 능력으로 선택한 백성들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위대한 일들을 이루셨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녀로서 주님이 그것을 이루시기 원하신다면 언제든 우리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우리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이루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우리의 지금 형편이 이스라엘의 그때 형편과 같다고 할지라도 당신의 큰 능력과 위대한 편 팔로 당신의 일들을 이루시고 우리를 건져내실 것이라는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적용은 이러한 회상의 기법들을 우리의 삶속에 활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고난과 어려움이 많은 때 주님을 의지하며 살기에 좋은 기법이 됩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당신의 큰 사랑과 놀라운 은혜를 베푸셨던 축복의 때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어려웠던 그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극복하고 살 수 있었다면 지금도 하나님의 도움을 입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40년은 넘었을 것 같습니다. 전 국민이 즐겨 청취했던 라디오 프로그램 가운데 ‘절망은 없다’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60년대에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60년대에는 가난해서 먹고 살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어서 방송하는 것입니다. 고생이 극심한 이야기를 하고 그것을 극복해서 지금은 잘 살게 된 이야기를 합니다. 대게 가난, 질병, 사업의 실패로 인한 사연들이었습니다. 결국은 성실하게 버텼더니 하늘이 도왔더라는 내용입니다. 그 프로그램이 미친 영향력은 굉장한 것이었고 많은 국민들이 위로를 얻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을 통해 ‘그래도 나는 저 사람보다는 낫다. 저 사람이 저렇게 극복하고 이겼다면 나도 할 수 있다.’ 이런 위안을 주고 소망을 갖게 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런 기법들을 가지고 고난의 때를 지납니다. 그 사람들은 순수하게 자신의 노력으로 그것을 이룹니다. 그렇게 애를 쓰는 사람 가운데 그것을 이기고 그런 위치에 도달하는 사람들은 정말 소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홀로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선택하시고 끝까지 책임지시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당신의 팔과 얼굴빛으로 구원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낙망하지 않고 주님을 바라볼 희망이 있습니다.
주를 의지하는 자의 승리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려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시 44:4-5)
˚야곱을 구원하소서˛
성경에 보면 ‘야곱’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이것은 개인의 이름을 지칭할 때도 쓰이지만, 이것이 공동체를 지칭할 때는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야곱’을 이스라엘 가리키는 말로 사용할 때, 그 핵심적인 의미는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실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야곱의 일생을 보면, 그는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과 어울리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잔꾀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러함에도 야곱이 남다른 인물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근거는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에 기초합니다. 에서와 함께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형은 미워하고 아우는 사랑하리라.”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약속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앙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가족의 곁을 떠나 마지막으로 라반의 집으로 도주하는 철저하게 고립된 순간에 그는 조상의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분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강권적으로 찾아오셔서 영광을 보여주시는 하나님께 서원을 올리게 됩니다. 그 후로부터 하나님은 자기의 재주로 살아가려는 야곱에게 사람은 변해도 사람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신 도구가 신앙이 훌륭하고 아름다웠던 이삭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자신의 잔재주로 살아가려고 하는 야곱이라는 말입니다.
신기하게 야곱이라는 이름이 공동체적으로 사용될 때는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신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 전통을 알고 있는 시인이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라고 했으니 그것은 결국 “나의 왕이시여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이 기도는 아주 의미심장한 기도입니다. 단순히 “구해주십시오.”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구원해주시지 않았습니까? 야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와 맺으신 언약이 불변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야곱을 구원해주셨습니다. 그것처럼 우리는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족한 것이 많지만, 야곱과 언약을 맺으셨고 거기에 충실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주의 백성으로 삼으셨으니 우리를 보지 마시고 당신 자신의 충실한 성품을 따라 우리를 구원해 주시옵소서.”라는 탄원입니다. 이런 표현 자체는 자신에게는 공로가 없지만 하나님이 한번 맺으신 언약에 충실하신 불변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의지하면서 그의 긍휼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안에만 소망이 있음
신앙생활을 하다가 우리 자신이 대견스러울 때가 있는가 하면, 자신이 아주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안팎으로 어려움을 당해서 밖으로는 우리를 에워싼 많은 난관과 어려움 때문에 우리의 영혼이 파리해지고, 안으로는 “네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그렇게 살아? 그러고도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을 거 같아? 너는 이제 끝났다.” 이런 소리를 우리 안으로부터 끊임없이 듣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질병은 절망이라는 병입니다. 절망은 반드시 그 안에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내포 합니다. 마지막으로 절망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은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절망의 끝이 우리를 거기로 데려갑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시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소망을 줄 뿐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 안에서 끊임없는 소원을 갖게 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난관과 어려움이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들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이 사람들을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옛날 우리 부모들을 보면 남편이 일찍 죽고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인생에 희망이라는 게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어머니이기 때문에 저절로 강한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는 사랑할 수 있는 자식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를 아주 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강함은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있는 한 소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사랑을 이야기하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란다’는 말이 소망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를 넘어서 자기의 구원의 근거가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좋고 행복한 일이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만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깊이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이때는 역사적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건져주신 출애굽사건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신 성품을 읽어야 했지만, 우리는 출애굽사건보다 더 큰 사건을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깊이 앎으로써 전심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향하여 소망을 가짐으로 주님을 더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 자체가,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상태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우리와 맺으신 언약의 충실하심에 달렸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공로가 있기 때문에 그때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혀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까? 아무도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던 시대가 덜 타락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많았던 때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그 때 하나님은 인간들의 상태와 상관없이 당신의 계획에 따라, 언약에 충실하신 당신의 성품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함
여기에서 시인이 구원을 베풀어 달라고 하는 이 구원이 어떤 것입니까? 문맥을 보니까 원수들에게 짓밟히고 있는 데서 자기를 구해달라는 간증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말합니다.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려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이 ‘밟는다’는 표현은 대적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의미하는 말로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결국은 싸움에서 이기고 원수를 밟는다는 의미는 원수가 땅에 엎드려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땅은 가치 없고 허무한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땅에 원수들이 엎드려진 모습은 원수들이 땅과 같이 무가치하고 하찮은 것이 되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그 승리는 완전한 승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시 재기할 수 없는 완전한 승리, 그런 승리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을 위하여 시인은 “하나님을 의지한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이 왕이시고 자신들은 야곱이며 자신들이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대적들을 누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비록 원수들에게 밟히고 고통을 받아도 모든 권세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온 땅의 질서를 주관하시는 분은 주권자 하나님이시라는 신앙이 확고하게 서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자신이 원하는 질서대로 움직이지 않고 하나님이 주권자이신 것 같지 않은 때조차도 하나님은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언약을 맺으신 언약백성들에게 신실하신 분이며, 언약백성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백성들이라는 공식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언약관계의 위대함을 경험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가장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주님이 위대한 일을 행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나 여호와가 너희를 위하여 행한 위대한 일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존할 때 가장 순수하고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마음의 상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변함없는 언약을 맺고 계시지만 맺은 언약의 위대함은 하나님을 향한 전심의 의존에 있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가 주님께 의탁되어 있는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전적인 의존, 그 안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한 일들을 행하십니다. 마음이 녹는 것처럼 주를 의지하는 마음이야 말로 주께 가장 잘 순종하는 마음이고, 자기를 낮추고 주님의 주권과 계획을 높이는 가장 중요한 마음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온 땅과 온 세상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하지만, 결국은 인간의 마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다른 마음이 아닌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 안에서 친히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의지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이다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케 하셨나이다”(시 44:6-7)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께 있음
전쟁에서는 그 사람이 자비심을 가지고 있는가, 외모가 어떻게 생겼는가, 이제까지 지내온 역사가 어떠한가 하는 것은 모두 소용이 없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얼마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가 입니다. 강한 힘으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노래하고 있는 이 시를 고라 자손이 썼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그들이 보관한 다윗의 시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다윗의 저작이라면 그는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고라의 자손 중 한 사람이 쓴 시라고 하더라도 그 역시 수많은 전쟁을 보고 전쟁에 참여하며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내 활, 내 칼’은 전쟁에서 무력을 나타냅니다. ‘활’은 자신이 원수와 함께 맞붙어 싸우지 않는 원거리에서 적을 제압할 수 있는 무기입니다. ‘칼’은 맞붙어 싸우면서 적을 제압하는 무기입니다. 시인은 전쟁에서 활과 칼로 병거를 의지해서 승리를 거두는 많은 경우를 보았습니다. 활과 칼을 의지해서 원수들을 누르고 제압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 “절대로 내 활로 원수를 이길 수 없을 것이고, 내 활로도 저 원수를 이겨서 저 손에서 나를 구원해 낼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쟁을 늘 보면서 자란 사람이 하기 어려운 고백입니다. 각 나라는 안보를 위해 많은 무기들을 보유합니다. 그 무기들을 끊임없이 현대화합니다. 적의 침략과 도전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보아온 시인이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공격을 당하고 그 속에서 고통을 경험할 때 원수를 이기고 승리를 가져다 준 것이 칼이나 활이 아니라 다른 요인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믿음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칼과 활이 전쟁의 도구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전쟁의 도구가 저절로 승리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님을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경험한 것입니다. 질 전쟁 같은데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움으로 이기기도 하고, 꼭 이길 것 같은 전쟁인데 하나님께서 그 전쟁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거나 전쟁에 나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기뻐하지 않으실 때 그들로 패배를 당하게 하시고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아는 시인은 오직 하나님께만 우리를 구원하시는 큰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당신을 의지하게 하심
어떤 때는 주님께서 우리를 원수의 손에 붙여 원수에게 큰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시고, 또 어떤 때에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원수로부터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가에 대한 답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끊임없는 하나님의 자비, 한 편으로 한없는 은혜와 자비를 받은 그분의 백성들이 언약에 부응하는 순종의 삶을 사는 것, 이 두 가지가 조건이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은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당신의 일방적인 사랑과 무조건적인 선택으로 우리를 언약관계 속으로 불러들여 그 안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언약 관계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은혜가 있지만, 그것은 동시에 우리에게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삶을 요구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신앙생활입니다.
만약에 언약백성들이 그 일에 충실하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원수의 손에 붙이시기도 하고, 충분한 활을 가지고 있음에도 전쟁에서 실패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과의 언약관계에 충실하지 않은 당신의 자녀들에 대한 보복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깨우쳐주지 않으면 결코 당신을 향해 돌이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때때로 우리에게 징계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전쟁은 우리가 하지만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깊이 자각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언약관계에 대한 우리의 불성실함과 하나님을 향한 배신과 도전, 이런 것들은 우리의 교만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한다면 결코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불성실한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힘으로 이기게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매순간 부르십니다. 그것이 우리를 믿음으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큰 능력이고 도움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당신의 뜻대로 살지 못할 때 무한한 용서를 약속하시고, 순종할 힘이 없을 때는 순종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과 힘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언약관계 안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주시는 하나님의 두 가지 보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한 순종의 삶을 요구합니다. 순종하며 살 수 있는 힘이 모자랄 때는 하나님이 혼자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그분을 전심으로 의지하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고 난 뒤에도 스스로 내세울 것이 없도록 하십니다. 정말 훌륭하게 살아왔는데 마지막에는 나의 힘으로 산 것이 아니라 은혜의 힘으로 살았다는 고백을 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사람들은 온갖 쓰라림과 고통 속에서 당신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산 사람들에게는 자기가 일생을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따라 충실하게 산 것이 자기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의 힘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하심으로 당신을 의지하게 하십니다. 떠난 사람들도 당신을 의지하게 하시고, 머물러 있는 사람들도 당신을 의지하게 하심으로써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당신을 의지하도록 만드십니다. 그래서 주권자이신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은 쓰라림 속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어떤 사람은 기쁨과 감사 속에서 경배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홀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거기에 복종하며 주님 앞에 살아가는 신앙생활, 이것이 우리의 믿음생활입니다.
우리가 자랑하는 하나님
“우리가 종일 하나님으로 자랑하였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영히 감사하리이다(셀라)”(시 44:8)
하나님의 이름의 의미
성경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은 동격으로 쓰입니다. 그것이 이름이 가지고 있는 신비입니다. 사물은 사물의 이름으로서 사물을 나타냅니다. ‘사람’이라고 쓰면 그 글자는 사람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다섯 개의 글자의 요소가 합쳐서 ‘사람’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누구도 ‘사람’이라는 글자를 대할 때 그 글자를 주시하면서 글자의 크기나 아니면 글자를 구성하고 있는 것 하나하나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거울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언어는 그런 성격을 갖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을 생각나게 만들어 주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태도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태도와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대하는 태도가 경건하고 사랑으로 가득 차 있으면 하나님 자신을 향해도 그런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에 나타난 이름신앙입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태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태도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한다는 말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동의어이고,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뜻은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과 위로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으로부터 위로를 받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깊이 하나님을 만난 다음에 자기의 변화된 모습에 대해 쓰는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주님을 깊이 만나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 그리스도, 주님, 하나님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폭포를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폭포’라고 하면 가슴에 다가오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아가라 폭포 밑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아 보거나 이과수 폭포를 보면서 깊이 감동을 했던 사람에게 ‘폭포’라는 말은 새롭게 다가오지 않겠습니까? 고아에게는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할 때 가슴에 다가오는 것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로부터 한없는 사랑을 받았던 사람들에게는 그 말 자체가 가슴 저미도록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물에 대한 경험은 언어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할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고 깊이 사랑하지 않고는 그 이름을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여 사는 것과 당신의 이름을 의지하여 사는 것을 동일하게 보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교만한 삶은 하나님의 탁월하신 아름다움과 그 위대하심으로 말미암아 받은 감동이 사라진 데서 비롯됩니다.
중생은 우리에게 존재론적으로 인식론적으로 변화를 가져옵니다. 중생을 하게 되면 인간의 존재가 변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없었던 사랑이라는 경향이 안에서 생겨나게 됩니다. 진정한 사랑은 운명과 같은 것입니다. 자기가 사랑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고, 그렇게 선택하는 것은 운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운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을 거슬러서 행동할 때 그것은 중생과 함께 우리에게 주신 존재적인 성향을 큰 힘으로 거스르는 것입니다. 중생의 존재론적인 변화 후에 사랑이라는 경향이 우리 안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중생한 신자로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것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성향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부패에 흐르지 않으면 사랑은 계속 증진됩니다.
중생의 또 다른 인식론적인 변화는 중생하기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중생과 함께 인식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 거의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세상과 육체 안에서만 아름다움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중생하고 나면 마음속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큰 사랑, 하나님의 아름다움, 그리스도의 탁월하심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경험이 우리 안에서 충분한 정동으로 일어나면 그것을 자랑하게 됩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말할 때 그 말하고자 하는 표현의 우선순위는 가슴에서 충만하게 일어난 변화에 비례합니다. 이 순서를 바꾸어서 설명하려고 하면 말이 자꾸 헛나오고 더듬거리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경험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가 우리의 언어생활을 지배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 많이 경험하고 그 큰 사랑과 자비를 경험하게 되면 자신 안에서 출렁거리는 정도가 크기 때문에 그것을 먼저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말해야 할 것을 충만하게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아름다운 내면생활입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 십자가의 큰 사랑,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창조주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말해야 되는데 우리의 마음속에서 출렁대고 일어나는 것은 그것이 아닐 때 우리는 할 말이 없게 됩니다. 그리고 말을 하면 할수록 그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닌 머릿속에서 오가는 개념들을 쏟아낼 뿐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위선을 가져오고 마음에도 없는 지어낸 말들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내적인 생활과 외적인 삶이 온전한 일치를 이루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우리가 종일 하나님으로 자랑하였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영히 감사하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왜 그렇게 자랑하게 되었습니까? 대적들에게 에워싸여서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 하나님을 의지하여 구원을 받고 대적들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능력, 대적을 밟고 이긴 경험을 통해서 나는 매우 약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붙드실 때 그와 같이 위대한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고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신앙생활이 힘겹게 느껴질 때가 어느 때입니까? 이런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입니다. 기도생활이 중요하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말씀의 은혜 속으로 깊이 들어갈 때 내 안에서 말해야 할 것들이 끊임없이 출렁거리게 됩니다. 경험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 없이는 우리의 모든 생각들이 세상의 사물들 속에서 산산이 찢어지게 됩니다. 그것들을 한 군데 모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진리를 향해야만 모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을 자랑하게 되고 주님이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게 됩니다. 무엇을 하려고만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흩어진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모으고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대해 깊이 감사하며 감동받는 가운데 우리의 삶이 새로워지게 됩니다.
주께서 우리를 버리실 때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케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우리를 대적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나이다
주께서 우리로 먹힐 양 같게 하시고 열방 중에 흩으셨나이다”(시 44:9-11)
주께서 우리를 버리실 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기고 구원을 받고, 원수들에게 수치를 베푸시는 승리와 감사의 이야기가 나온 다음에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케 하시고”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42편부터 44편이 압살롬의 반역을 받아서 요단 건너편으로 도망갈 때에 쓰여진 것이라고 봅니다. 42편과 44편은 ‘고라의 자손의 마스길’이라는 제목이 함께 붙어있습니다. 이 표제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이것을 믿을 수 있냐는 것을 가지고 “성경과 똑같은 수준으로 절대적으로 믿어야 된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줘집니다. 42편에서 44편까지 전부 다 같은 상황에서 함께 쓰여졌다고 봅니다.
우리가 읽은 구절 이하의 내용은 당시의 상황과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지게 됩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이 꿈꾸는 것 같은 승리를 주시고 놀라운 일을 행하심으로써 그들에게 크고 놀라운 기적들을 보여 주셨지만 지금은 원수들이 온 나라를 차지하고 자신들은 쫓겨났습니다. 섭리적인 맥락에서 이것도 하나님에 의해 일어났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나라를 빼앗기고 먼 이방 땅까지 망명을 오게 되고, 원수가 득세해서 온 나라를 차지하는 불행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과 지금 나라를 빼앗기고 망명을 온 것 사이에는 어떤 연속성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떠오릅니다. 그런 사건을 통해 언약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다루시는 방법과 섭리에 대해 눈을 뜨게 됩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이 자신들의 편이시고,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언약백성들에게 언제나 큰 은혜와 자비를 베푸실 것이라는 신념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다루시는 방법들을 보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자신들을 붙들고 계셔서 당신과의 관계가 어떠한가에 의해 다루시는 방법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활도 칼도 의지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합니다.”라고 하나님 앞에서 싸우며 구원 받았던 기억이 있는 사람들이 지금에 와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렸습니다. 우리를 전쟁터에서 돌아서게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돌아섰다는 것은 싸우다가 패배해서 도망가는 것을 묘사합니다. 그렇게 싸우다가 결국은 적에게 등을 보이고 후퇴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원수 앞에 우리는 흩어진 양처럼 되어서 맹수에게 아무런 저항 없이 먹히듯이 저 원수들의 밥이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왜 당신의 언약백성들을 원수에게 내주어서 욕을 당하게 하시고, 전쟁에서 패배하게 하시고, 흩어진 무리들이 되어서 원수에게 삼키도록 힘이 없게 하신 것입니까?
은혜의 소중함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잠시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언약백성들을 도우시기를 그치심으로써 당신 없이 살아가는 언약백성의 나라가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자신을 의지할 수 있으면 하나님을 덜 의지하게 됩니다. 자기를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신 안에서 아무런 소망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의지하든지 절망하고 죽어 버리든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자신을 상당히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덜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들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던 왕들은 하나님 없이도 자기의 힘으로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다는 교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창이나 칼, 군대의 숫자를 생각하면서 그렇게 마음을 먹었거나, 아니면 모든 일들이 형통하게 되어 가는 가운데 그런 마음을 먹었거나, 혹은 수많은 보물과 나라의 큰 재산 때문에 그런 마음을 먹음으로 하나님을 덜 의지하고 교만해졌던 것입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심으로써 나라가 큰 위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가지고 계시는 존재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참 소중한 분이시다.’라는 것을 느끼는 때는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게 살아갈 때입니다. 눈을 뜨는 아침이면 항상 하나님이 내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 분이신지가 떠오릅니다. 또 다른 때는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시련과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분이시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부딪히는 어려움들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저 늘 있는 일상적인 어려움이고 자신의 자원과 힘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그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는 이유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미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큰 계시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한때 이런 글을 쓰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데도 깊은 영적인 침체 속에 빠지고 죄의 지배 속에 들어가도록 허락을 하실까?” 여러 가지 답변을 하는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사는 것의 소중함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것을 알아야만 인격적인 신앙이 가능해집니다.
방탕한 아들이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도 유산을 청구해서 먼 나라로 떠났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는 떠나기 전에도 아버지와 함께 있었고 방탕하여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허비하고 난 후에도 돌아와서 아버지 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 아버지와 함께 있을 동안에는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의 가치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집에 돌아왔을 때는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동거하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알았습니다. 아버지를 떠나면 죽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난 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아버지의 집의 품꾼 하나로라도 받아들여지면서까지 아버지의 그늘 아래 있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때론 우리가 당신의 말씀을 떠나 방황하는 것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훌륭한 믿음은 실행해 보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좋으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날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며 그분의 은혜를 누리며 그분의 은혜 때문에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진정한 복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어디에도 참된 행복과 안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을 수 없는 하나님
“주께서 주의 백성을 무료로 파심이여 저희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주께서 우리로 이웃에게 욕을 당케 하시니 둘러 있는 자가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주께서 우리로 열방 중에 말거리가 되게 하시며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케 하셨나이다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나를 비방하고 후욕하는 소리를 인함이요 나의 원수와 보수자의 연고니이다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시 44:12-17)
신앙의 눈으로 바라봄
하나님을 믿는 언약백성들은 신앙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역사 속에서 헤아릴 수 있는 독특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생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져있고 이것은 우리의 인생의 길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렇게 일어난 일들이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시인은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우연처럼 보이는 인생의 순간에도 질서를 따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의지와 생각이 깃들여 있다는 것을 시인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일어나는 일들은 과거를 향해서만 의미를 가질 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향해서도 의미를 갖게 됩니다. 사건은 그것만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영원하신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눈을 가지고 자신의 삶 속에 일어나는 사건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그 곳에서 항상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의미로서의 역사와 사건으로서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생각과 뜻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환란과 시련이 일어나면 ‘이것은 원수가 나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이렇게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내가 원수의 멸시를 받으며 그에게 패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파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수에게 나를 넘겨주셨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셔서 복을 주기로 한 당신의 백성이 하여금 원수에게 넘겨져서 짓밟히고 욕을 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향해 가지고 계신 생각과 판단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원수가 나를 괴롭힐 때 원수와 싸우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모든 삶의 상황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원수로부터 받는 수치와 모욕, 비난,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못된 인간인지를 깨닫고 그분과의 관계를 고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자신의 인생을 움직였던 모든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을 받으면서 단지 아프다고 생각하는 것은 짐승들도 할 수 있는 것이고 심지어 식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고통을 받을 때 그 의미를 생각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 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시인은 원수로부터 짓밟히고 모욕을 당하고 많은 고통을 받았지만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인생을 붙들고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좋은 것을 바라면서 살아가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도 자신의 인생을 움직이는 힘이 하나님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인생사들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신앙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전혀 안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걸어온 인생길을 돌아보면 두려울 만큼 신비스럽습니다. ‘그 때 나를 둘러싸고 일어난 많은 일들이 마치 퍼즐을 맞추듯이 기가 막히게 연결이 되어서 오늘 여기에 나를 데리고 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렵게 느껴질 정도로 정교한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까닭은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 우리의 인생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질서대로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질서대로 살지 않으면 항상 자기가 계획하지 못 했던 불행과 고통을 만납니다. 단순히 재수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에 개입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두려움과 떨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 혼자 살아온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철저하게 내 삶에 개입하고 계셨구나.’ 그렇게 주님을 잊지 않고 주님의 언약을 붙들며 살 믿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홀로 있는 것 같고 고통스러울 때 사실은 거기서 하나님이 자기를 연단하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결론과 적용
형통하고 좋은 환경을 통해서만 교훈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살아간 인생의 갈림길에서 혼자 겪는 것 같았던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만나고 의지하면서 사는 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은 항상 옳으시고 나는 항상 틀릴 수 있는 존재로서 오늘 내가 당하는 고통과 많은 아픔이 내 인생길에서 가는 길을 바로 깨닫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마음의 비밀을 아시는 하나님
“우리 마음이 퇴축치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주께서 우리를 시랑의 처소에서 심히 상해하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하나님이 이를 더듬어 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대저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시 44:18-21)
부패하기 쉬운 인간의 본성
우리의 환난과 시련은 대부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릇 행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일어나는 환난과 시련이 항상 우리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과거에 행했던 불순종과 죄 때문에 환난과 시련을 주시기도 하시지만 더 큰 불순종과 죄에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서 미리 환난을 당하게도 하십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으로 회귀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을 믿고 새로 부여받은 순종과 사랑의 본성을 따라 살기보다는 이전에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하던 본성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인간의 영혼 안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하고 순종하며 살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끊임없이 어떤 일들이 일어나서 우리를 붙들어 주어야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물러가서 다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자기를 위해 사는 일은 특별한 작용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냥 내버려두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름이면 음식이 잘 상합니다. 음식을 상하게 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냉장고에 넣지 않고 놔두면 콩나물이든 무침이든 국이든 반나절 정도 지나면 쉰내가 나게 되어있습니다. 만약에 그 신선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내일도 그 반찬을 먹으려고 한다면 소금을 넣거나 끓이거나 냉장고에 넣거나 기름에 담가 두거나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심
시인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하나님 앞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마음이 퇴축치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주께서 우리를 시랑의 처소에서 심히 상해하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마음이 찌그러지지도 않고 삶으로 하나님의 법을 떠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원수들에게 상하게 하시고 사망의 그늘 아래 두셨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게 하실까요? 그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 힘으로 살 수 있을 때는 경건의 힘이 아니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시련의 장벽과 마주칠 때 악한 원수들에게 찢기고 상하는 큰 고난과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앙은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고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자각하는데서 출발합니다. 하나님 뿐 아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지,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 때문에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 자신의 사랑을 제외한 모든 사랑은 의존적인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위대한 힘이 있지만 그 사랑은 의존하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의존 속에서 살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 전에 가장 먼저 영광을 받고 싶어 하시는 것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인간이 보이는 사람과 사물들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할 때, 그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의존 안에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마음이 쉽게 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임을 너무 잘 아셨기에 사랑하는 자녀들이지만 원수의 처소에 거하게 하시고 사망의 그늘로 덮으셔서 그늘 아래 덮인 세상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가시적인 것들 속에서 하나님을 잊고 살기 쉬운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사라지는 것들이고, 불변하고 무변하시는 하나님 한 분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런 의존의 감정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이 인간의 본래 의무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던 날들을 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땅에 살고 있으나 그 갈망은 하늘을 향하고 시간 안에 머물러 있으나 오히려 영원을 직시하며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신앙의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이끄시려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시랑의 처소에서 상해를 당하게 하시고 사망의 그늘로 덮으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언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떠한 죄를 지었든지 하나님의 복수의 대상일 수 없습니다. 혹시 불순종한 당신의 자녀들에게 징계를 내리실지라도 그것은 인간처럼 그릇 행한 것에 대한 보복의 마음으로 내리는 징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이후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더 큰 잘못을 방지하기 위해 잠시 고통을 당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지 않았던 지난날들을 뉘우치고 반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고 주님의 깊은 사랑입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는 삶
시인은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하나님이 이를 더듬어 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대저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마음은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삶의 원천입니다. 그의 삶은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지 머리로부터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머릿속에 올바른 생각이 가득해도 마음이 부패하면 올바르게 살지 않고 부패하게 삽니다. 순간순간 악한 생각이 스쳐가도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올곧으면 그의 삶은 휘청거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마음의 중요성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감추어져 있어서 자신도 자기의 마음을 바르게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는 분이시니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시인의 고백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우리의 개별적인 삶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삶의 원천이 되는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는 삶입니다. 이미 행동을 통해 드러났을 때뿐만 아니라 아직 드러나지 않을 때도 자신의 마음의 움직임과 환경의 변화를 이해하고 수시로 하나님을 찾으며 그분을 의지하고 전심으로 바라는 삶을 살면서 자기 마음을 씻어내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마음의 종교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 받았음에도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은 것을 깊이 아파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진리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깨끗이 씻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향해 올곧은 경향성을 가진 마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매순간 주님을 의지하며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시련과 연단 가운데서 주님의 은혜로 마음이 강해지는 비밀입니다.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우리 영혼은 진토에 구푸리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시 44:23-26)
도살할 양과 같이 여겨짐
양들이 도살을 당할 때 반항을 하지 않고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그리면서 아무런 항거도 하지 못한 채, 고난을 받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투사시키고 있습니다.
저는 양을 죽이는 것을 본 적이 없지만 소를 잡는 것은 어려서 보았습니다. 죽이는 광경을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집 근처에 도살장이 있었습니다. 소가 얼마나 양순한 짐승인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아침 일찍 소를 끌고 도살장에 들어가기 직전에 밤나무골로 데려가서 소고삐를 나무에 단단히 걸어놓고 양동이로 물을 먹이는 광경을 봅니다. 소들이 여기저기 주인 손에 끌려옵니다. 신기한 것은 소가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곳인데 어떻게 아는지 도살장 가까이에 오면 안 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웁니다.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고이고 눈물을 흘립니다. 어린 마음에 그것을 보면서 인간이 참 잔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소고기를 먹으니까 할 말은 없습니다. 소들이 알아채고 큰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고이면서도 주인이 잡아끌면 끌려갑니다. 만약 다른 짐승이었다면, 혹은 덩치 큰 소가 사납게 저항을 한다면 아마 굉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는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고 도살장에 들어갑니다. 양쪽에 말뚝이 서있는 곳에 나란히 줄지어 서있게 되고 한 마리씩 휘장을 열고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소 잡는 사람이 있어서 곡괭이로 정확하게 소의 정수리를 칩니다. 그러면 죽게 됩니다. 거기에서 나는 냄새와 이런 것들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죽어갑니다.
양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의 모습을 고난당하기 위해서 자기를 버리시고 저항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모습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난을 받고 있는 시인과 시인이 속해있는 공동체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갈 때 진리의 힘이 크고 위대하지만 진리를 알고 진리에 복종하는 사람에게나 그 힘이 위대하고 큰 것이지, 진리에 저항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진리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한 자루의 칼이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칼은 없고 진리만 있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싫어하여 칼을 휘두르면 그들은 위대한 진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죽임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면서 쓰러져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 호소함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신앙을 지키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도움은 없고 대적들은 진리를 이해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진리를 거슬러 살고자 할 때 진리도 자신의 대적이 되고,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도 대적이 되고, 진리를 따라 살려고 하는 언약백성들도 대적이 되고, 그 때 휘두르는 칼과 폭력에 힘없이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언약백성들의 유일한 손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빕니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고난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요령을 피우면서 고생하는 것은 고생이지 고난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의 진리를 붙들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가 고난과 고통을 당하게 되면 이것은 고난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말하기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그렇게 하찮게 여기며 거침없이 자신들을 공격해오고 고난을 가하는 원수들의 무리 앞에서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특권입니다. 하나님께 자신들의 고난을 아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사랑은 한계가 있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사랑한다고 해도 그것은 자신들의 껍질을 버리지 않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 입니다. 당신의 진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까이 계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뜻을 따라 살다가 고난을 당하면 호소할 데가 없습니다. 호소해도 그것은 유한한 인간의 정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께 호소할 길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이자 최고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고백하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의 모든 것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잠시 그렇지 않은 줄로 여기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다는 보이는 세상의 것들을 따라가고, 하나님과 맺어야 자신의 영적 생활보다는 육체를 위한 일에 몰두하였지만,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호소하게 될 때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는 명료하게 수면위로 떠오르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가장 소중한 것임을 깨달으면서 그것을 위하여 헌신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조차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을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깨끗케 하시는 것입니다.
서울시에서 수돗물을 만들어놓고 맛보게 하기도 하고 수돗물을 몇 만개씩 페트병에 담아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합니다. 저는 별로 신뢰가 안 갑니다. 물 자체는 좋습니다. 열심히 잘 만들었으니까 다른 나라 수돗물보다 훨씬 좋을 수도 있습니다. 건수에서 떠온 검증되지 않은 생수보다 위생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수도관입니다. 언젠가 한 번 공사를 하면서 철거하는 수도관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수도관을 잘랐는데 대부분이 막혀있고 구멍은 조금 뚫려있습니다.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수 십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수도관에 녹이 슬어서 그것들이 거의 다 관을 막아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작은 구멍으로 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수압이 녹을 통과하면서 녹을 흠뻑 머금고 수도꼭지로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물 문제를 해결하려면 취수장을 팔당이 아니라 훨씬 높고 훨씬 더 먼 곳으로 옮기고, 서울시에 있는 모든 수도라인을 다시 뜯어서 갈아야 합니다. 다 갈아야 합니다. 녹슬지 않는 금속, 혹은 비금속 같은 재료로 만들어서 그것도 언제든지 청소할 수 있도록 관을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분명히 짚어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큰 고난 앞에서 주님을 진심으로 의지하려 할 때 평소에 받아먹던 수돗물이 흐르는 수도관을 단면으로 잘라서 보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일어나 도우소서˛
그러면서 시인은 이해하기 어려운 기도를 하나님 앞에 하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이것은 절규가 섞인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주무시고 계시다, 혹은 하나님이 졸고 계시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방종한 표현입니다. 시인이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어찌하여 우리를 잊으시나이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이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고난과 많은 시련을 당하면서 믿음으로 살아도 억압 받는 현실을 통해 그 속에서 “하나님은 주무시고 계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잊으셨습니까” 하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잘못된 표현입니다. 믿음을 통해 현실을 봐야 하는데 현실을 통해 하나님을 보니까 하나님은 주무시는 것 같고 우리를 잊으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마지막으로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를 구속하소서”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합니다. 이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기 위해 그런 묘사를 한 것 아니겠습니까? 결론은 우리를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러지신 것도 아니고 누워있는 것도 아닌데 일어나 우리를 도와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어난다’라는 표현은 대부분의 경우, 각성을 동반한 결단을 나타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탕자도 결심할 때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고 하고 요나서에도 보면 다시스로 가는 길에서 돌이켜서 다시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 니느웨로 가는 요나의 결단 가운데도 이와 같은 것이 나타납니다. 어떤 결단을 동반한 일어남입니다. “일어나서 우리를 도우소서” 이것은 자신들이 고난 받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빙자한 자신을 향한 외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에 있을 때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라는 뜻과 함께 또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향한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고난을 받고 시련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과의 언약을 굳게 믿고 일어나서 자신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것입니다. 결국은 고난을 당할 때나 시련을 당할 때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도움으로 일어서는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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