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45
목 차
왕이 인생보다 아름다운 이유(시 45:1-2) 79
왕은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함(시 45:3-5) 84
성도의 즐거움의 근원(시 45:6-7) 89
경외하는 자의 영광(시 45:8-11) 93
왕의 자손들의 영광(시 45:12-17) 97
시편56편 강해 1
시편45편 강해 1
시편45편 강해 1
시편45편 강해 1
시편45편 강해 1
시편45편 강해 1
왕이 인생보다 아름다운 이유
“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넘쳐 왕에 대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혀는 필객의 붓과 같도다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와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영히 복을 주시도다”(시 45:1-2)
세상의 왕들
이 시는 왕에 대해서 지은 찬송시입니다. 이스라엘은 왕에 대해 다른 나라에서 생각하기 어려운 독특한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각 나라마다 왕은 모든 권력의 끝입니다. 각 나라마다 왕이 모든 권력의 끝이기 때문에 모든 나라의 질서가 왕을 중심으로 파문처럼 수립이 됩니다. 왕이 모든 나라의 중심입니다. 그러니까 왕 아니겠습니까? 왕은 어떤 의미에서 법 위에 있습니다. 법 자체도 왕이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통치의 의지를 반영합니다. 아주 정확하게 말하면 왕은 그 나라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왕입니다.
중국을 가서 유적을 보면서 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이 왕들이 입는 옷이었습니다. 왕은 옷을 빨아 입지 않았습니다. 항상 진솔만 입고 그 다음에 버렸습니다. 왕의 옷에는 아주 정교한 자수가 놓여 있습니다. 거기에 설명이 나오는데 재킷같이 생기는 것 하나를 만드는 데 4년 반이 걸린다고 합니다. 몇 사람이 만드는지 모르겠지만 한 사람이 만들 수도 있고 두 사람이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4년 반이 걸립니다. ‘왕이 옷을 몇 번쯤 입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저 대여섯 번 입으면 버리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왕의 재킷을 만들 정도로 기술을 익히려면 어느 정도가 되었겠습니까? 열 서너 살에는 못 만들었을 것 아닙니까? 최소한 스물대여섯 살 되어서 만들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일생에 그런 재킷 10벌을 만들면 인생을 접는다는 것입니다. 왕은 그것을 두세 달 입었을 것입니다.
왕국의 모든 역사를 보면 온 세상은 오직 한 사람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두 사람도 아니고 딱 한 사람을 위해 모든 사람이 존재합니다. 그것이 왕입니다. 황제의 경우에는 그것보다 위엄이 더 크지 않았겠습니까?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위엄일 것입니다. 그것이 허망하다는 그런 느낌이 듭니다.
중국에 가면 만신전(萬神殿)이 있습니다. 신들을 모셔놓은 신당입니다. 거기에 가면 엄청나게 높은 건물을 나무 기둥이 떠받치고 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높고 크기도 거대합니다. ‘기계도 없었던 시대에 이것을 어떻게 갖다가 놓았을까?’ 생각했습니다. 설명을 하는데 중국에도 그런 나무는 아무데나 없다고 합니다. 근처에 있으면 가서 베어서 가지고 오면 되지만 어디에 있는지를 모릅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기둥을 찾기 위해 사람들을 전국으로 보냈는데, 거기에 세울 기둥이 될 만한 나무 하나를 잘라오기 위해서 천명이 길을 떠난다고 합니다. 그것은 몇 백 명이 들어야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입니다. 위아래를 다 잘라버린 기둥의 높이도 그만하다고 한다면 실제 나무의 크기는 얼마나 크겠습니까? 나무가 있는 곳에 올라가서 그것을 잘라서 쓰러뜨린 다음에 수많은 가지들을 잘라내고 위를 잘라내고 그것을 산꼭대기에서부터 들고 와야 하니까 이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오십 리 백리 길도 아니고 한없이 먼 길이면 천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들고 옵니다. 그 나무 한 개를 구하기 위해 천명이 떠나는데 돌아오는 사람은 500-600명 정도, 나머지는 결국 병에 걸려 죽거나 사고가 나서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왕의 의도대로 움직이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허용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왕 제도를 세우려는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호세아서에 보면 “분노함으로 내가 왕을 주었고 진노함으로 그 왕을 폐하였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울이 왕으로 세워지기 전까지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습니다. 모든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 홀로 왕이시라는 사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중심축에 계셔서 당신의 나라의 질서를 당신의 마음에 맞게끔 펼치시는데, 보이시지 않는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를 통치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율법 안에 하나님의 통치의 질서들이 제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펼쳐 가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왕은 하나님의 통치의 질서가 더 잘 잡히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었고 그 한도 내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권위를 주셨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역사적으로는 쉽지는 않지만 그럴 수만 있다면 최고의 정치체제입니다. 왕이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는 하나님을 매우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왕에게 부여된 권한을 가지고 그가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고 한다면 가장 좋을 것입니다. 왕의 권위로 백성들에게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명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의 역사를 보면 왕은 기본적으로 철학자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나라를 잘 다스려서 무엇이 되도록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분명히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그런 개념이 별로 없습니다. 그냥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들이 돈을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살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이미 풍부한 식량과 좋은 자연 조건 속에서 넉넉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그것만을 가지고는 행복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 이상의 무엇을 자기 백성들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이 왕이어야 했습니다. 왕이 되어서 후궁이나 거느리고, 금은보석이나 좋아하고, 기름진 음식이나 좋아하고, 노래나 좋아해서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정치지도자들의 부패라는 것은 항상 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은 아주 독특한 존재였습니다. 다윗같이 훌륭한 임금의 경우, 하나님 앞에 매일 고백하는 것은 “나는 이 나라의 왕입니다.” 이것이 아니라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나는 당신 앞에 비참한 인생일 뿐입니다.”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왕이 아름다운 이유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와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영히 복을 주시도다” 왕이 인생보다 아름다운 이유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왕이 인생보다 아름다운 이유가 왕이라고 하는 지위 자체에 있다는 생각은 세상 나라 왕에 대한 생각입니다. 왕이 모든 인생보다 뛰어나게 아름다운 이유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의 자존감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돈 많은 사람 앞에도 굴하지 않는 당당함, 권력이 큰 사람 앞에서도 주저하지 않는 꿋꿋함, 그 이면에 무엇이 있습니까? 인생의 참된 아름다움이 세상의 영광과 물질에 있지 않다고 하는 사상,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은 영혼이 아름다움입니다.
왕이 아름다운 이유는 큰 나라의 임금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왕의 아름다운 이유는 왕이 거느린 수많은 군사들 때문이 아닙니다. 왕의 아름다움은 나라 안에 넘치는 경제적인 부함, 왕궁의 보물 때문이 아닙니다. 왕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보면 신앙이 돈독해서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은 왕들은 아름다웠습니다. 그들이 왕이기 때문에 아름다웠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은혜 때문에 아름다웠습니다. 은혜 때문에 아름다운 사람이 될 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위와 명예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훌륭한 수단이 됩니다.
신앙생활을 잘 했던 왕,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은혜를 받았던 왕들은 그에게 있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습니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모든 나라를 통치하고 다스리고 모든 것을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었지만, 그 왕 위에는 보이지 않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신앙이 뛰어나고 깊으면 하나님이 눈에 보이고, 신앙이 좋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결론과 적용
세상 살아가는 이치가 그러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물질도 더 많이 소유하고 싶고, 더 높은 지위에 오르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름다운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를 정말 아름답게 하는 것은 이 찬송시의 고백과 같이 은혜를 머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때문에 항상 나를 주인으로 삼고 임금으로 생각했던 모든 삶을 포기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붙들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왕은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함
“능한 자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위엄있게 타고 승전하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두려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왕의 살이 날카로와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시 45:3-5)
본문해설
이것은 전쟁의 문맥입니다. 왕을 찬송하되 전쟁의 문맥에서 왕을 칭송하는 것입니다. “능한 자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 전쟁을 독려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왕이 직접 참가하는 전쟁을 침전(寢殿)이라고 합니다. 국가의 명운이 달린 전쟁일 경우에 왕이 침전합니다. 왕이 전쟁에 참여한다는 이야기는 ‘이 전쟁에 국가의 운명이 달려있기 때문에 이 전쟁에서 지면 왕인 나도 없다.’ 이런 의미입니다. 왕이 이 전쟁에 참여한 것을 보면 이 전쟁이 나라의 명운이 달린 전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왕을 칭송하면서 독려하는 것입니다.
왕의 위엄
“능한 자여” 이것은 전쟁에서 잔뼈가 굵어서 전쟁에 능한 것을 가리킵니다. 이 시는 다윗 왕을 가리키는 환송시라고 생각이 됩니다.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 여기에서 ‘왕의 영화, 왕의 위엄’ 이런 것은 사실 이 땅에 하나님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방불한 존귀와 위엄이 왕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존엄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왕의 위엄과 영화와 존엄은 모든 사람이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당신의 위엄과 영광을 보이는 사람을 통해 나타내 보여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위엄과 영광이 모두 하나님을 보여주지는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임금들은 각기 자신을 신격화하고 거기에 합당한 위엄과 영광을 가지려고 했지만 그것을 통해서는 참된 왕이신 하나님을 보여줄 수 없었습니다. 모든 왕은 자신에게 시선이 머무르기를 원했고 한 결 같이 자기를 하늘의 아들이라고 칭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나는 하늘에 계신 신의 아버지다.” 이렇게 떠들었던 왕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왕들은 자기가 신의 후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과의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왕과 통치를 받는 백성들 사이의 불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신의 아들이다.”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신과 자신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통치하는 나와 통치를 받는 너희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간격이 있다. 그러므로 나의 통치에 복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은 달랐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강조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런 점에서 아주 독특한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라는 것을 강조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 모두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종이고 모든 백성들은 자기와 함께 묶여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왕이 된 이유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데 필요해서 왕으로 선택받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한 나라의 왕으로 다스리지만 다른 나라의 왕들처럼 “나는 신의 아들이고 너희들과 나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격차가 있다.”라는 논리가 성립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당신의 종으로서 왕을 택하셨을 뿐이고, 그렇기 때문에 왕이 된 것입니다. 왕이 영화와 존엄을 드러내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왕 사상입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왕이 나라를 통치할 때 자기가 법의 근원이 됩니다. 법으로 통치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만든 법이고 자신은 종종 그 법을 넘어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왕이 영화와 존엄을 가지고 있지만 백성들을 통치할 때는 참 왕이신 하나님의 의지를 구현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의지는 성경 속에 율법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자기의 통치가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는 섬김이라는 조건 안에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영적인 전쟁을 위한 부르심
시인은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위엄있게 타고 승전하소서”라고 합니다. 왕이 전쟁에 나가는데 거기에 반항하는 이방의 무리들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뜻과 의지에 복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거스르려는 자들입니다. 이스라엘 왕의 승리는 곧 하나님의 승리가 되고, 이 전쟁에서 이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통치가 확립되는 것입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통치 질서를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기 때문에 대의명분이 있는 신앙적인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왕들이 전쟁을 할 때는 땅을 넓히거나 노예를 얻거나 자기 나라를 괴롭힌 것에 대한 보복을 하기 위해 전쟁을 합니다. 그런데 이 전쟁은 땅이나 영토, 군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온유와 하나님의 공의를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세상을 섬길 뿐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나타난 왕직을 물려받고 하나님께 부름 받은 왕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전쟁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싸움이요 영적인 전쟁입니다. 비록 눈에 보이게 주어진 지위와 명예는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왕 같은 자녀의 직분을 가지고 세상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혈과 육에 속한 전쟁이었지만 지금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정사와 권세와 이 세상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한 전쟁입니다. 눈에 보이는 창칼보다 더 중한 것은 영적인 창칼입니다.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 그것을 사용하는 기도와 용기, 믿음, 이런 것에 의해 영적 싸움을 싸워가는 것입니다.
이 전쟁의 목적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번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에 구현되기 위해 하나님의 통치를 거스르는 악한 무리들을 복종시키시고 굴복시키고 꺾기 위한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창칼로 수행되고 적들을 향한 적개심으로 이루어지는 전쟁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전쟁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시켜 나가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최고의 가치는 승전하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전쟁에서는 아무리 좋은 것들이 있어도 승리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두려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여기에서 ‘왕의 오른손’이라는 것은 왕이 가지고 있는 오른손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 자신이 바로 의로운 오른손임을 가르칩니다. “나의 의로운 손이 너를 붙들리라”라고 이사야 42장 10절은 말합니다. ‘오른쪽’이라는 것은 선택을 의미하고 ‘손’이라는 것은 권능, 능력, 힘, 이런 것들을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나를 누르시나이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큰 힘으로 자신을 압박하고 계신 것을 가리킵니다. “여호와께서 손을 펴시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손을 펴시면 큰 권능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을 손으로 행사합니다. 그래서 힘을 뜻하는 것입니다. “왕의 오른손, 왕을 붙잡고 계신 하나님이 당신에게 가르쳐 줄 것입니다. 두려운 일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왕의 살이 날카로와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 화살은 생각보다 굉장히 멀리 나갑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거의 430m까지 날아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보통은 330m정도 나가는데 고구려 때 만든 특별한 화살은 430m 까지 날아갔다고 하니 굉장한 것입니다. 화살은 그렇게 엄청난 거리를 날아갑니다. 활자체가 멀리 있는 적을 보이지 않게 처치하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활이 쏜살같이 날아가서 사람을 가격할 때 치명적이지 않은 부위가 있고 치명적인 부위가 있습니다. 얼굴 부위를 맞으면 치명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팔 같은 데 맞으면 치명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왕이 말을 달리며 활을 쏘니까 그 활이 쏜살같이 날아가서 원수의 심장을 꿰뚫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회복되거나 치유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일격필살(一擊必殺)입니다. 한번 맞으면 그대로 즉사하는 무서운 화살입니다.
원수의 염통을 뚫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항하는 원수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갚음입니다. 그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통치가 온 땅 가운데 실현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의 빛 아래에서 이런 시를 해석할 때는 영적인 것들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특정 사람을 향해 “하나님 앞에 처참하게 죽임당해야 할 사람이 있다.”라고 해석하지 말고, 오히려 이 전쟁의 문맥은 오늘날 영적인 전쟁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예표였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세계를 조정하여 역사하는 영적인 원수들에 대한 대적이라고 생각하고, 그것들을 미워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기 위해 영적인 싸움에서 이기는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원수를 뜨겁게 사랑하고 그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원수의 염통을 꿰뚫는 화살의 공격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전의를 가지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도의 즐거움의 근원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시 45:6-7)
즐거움의 기름을 부으심
구약에서 왕이 되거나 선지자가 될 때 하나님이 그에게 기름을 붓게 하여 그로 하여금 그 직무를 감당케 하셨습니다. 기름부음은 하나의 상징인데 이 기름은 성령의 상징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기름부음이 있을 때 충만한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성령님이 충만하게 오셔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성령 안에 있게 하십니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어떤 한 순간에 특별한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게 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어떤 한 사람이 하나님께 특별한 사명을 받으려고 하면 그에게 임하셔서 그 섬김에 필요한 놀라운 능력과 은혜를 주시고 그 사명이 끝나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다윗은 이 기름부음을 세 번 받게 됩니다. 첫 번째는 사무엘이 와서 기름을 부었을 때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충만하게 임하게 됩니다. 그 후로도 두 번을 더 기름부음을 받게 되는데, 본문은 바로 이 기름부음의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즐거움의 기름부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한 충만한 능력을 위해 기름을 부어주시면 거기에는 즐거움의 효과가 따른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거기에서 오는 특이한 기쁨, 이것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도구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감당하는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즐거움의 기름을 왕에게 부으셔서 행복과 즐거움이 왕보다 뛰어나도록 그를 바꾸시고 변화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이한 은혜가 왕으로 하여금 자기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도록 하는 요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행함
무엇 때문에 남들에게는 주시지 않는 큰 즐거움의 기름을 부으셔서 말할 수 없는 행복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만들어 주셨을까요?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이것이 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에게 친교의 즐거움과 영혼의 행복을 주실까요?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자입니다. 한 나라를 통치함에 있어서 세상의 임금은 자기의 생각과 뜻을 펼치는 것, 거기서 만족과 기쁨을 얻는 것이 통치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들에게는 자신이 나라의 목적이 되지만,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왕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치의 질서들이 세워지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것이 정의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중요한 것이 있고 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과 고양이를 죽이는 것이 다른 것과 같습니다. 그런 질서들이 정확하게 세워지고 사람들이 그 질서를 존중하면서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정의입니다. 그러므로 정의가 무너지는 것은 잘못된 사랑 때문입니다. 사람보다 고양이를 더 사랑하면 그 사람에게는 고양이를 죽인 것이 사람을 죽인 것보다 더 큰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정의는 잘못된 사랑에 의해 무너지는 것입니다. 정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왕은 그러한 질서를 만드는 시발점이고 그 질서를 통해서 얻는 영광과 만족의 마지막 목적은 왕입니다. 그러나 경건한 왕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도 한 나라의 왕이지만 하나님이 펼치시는 정의의 한 부분에 속해 있습니다. 다윗의 시를 보면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라고 끊임없이 고백을 합니다. 지금은 실감이 안 나지만 당시 문맥에서 보면 노예입니다. 주님 앞에 은혜가 필요한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왕이면서도 하나님의 정의를 사랑하고 그 정의를 허무는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분신처럼 나라를 다스려서 나라를 통치할 대권은 자신에게 있지만 그 대권을 행사하는 것이 세상 나라의 임금과 같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의 대권을 행사하시는 훌륭한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큰 즐거움과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신적으로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정의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든지 아니면 하찮은 잡부가 되었든지 상관없이 그 질서를 따라 살 때 하나님의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당신과 끊임없는 교통과 즐거움을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여기에서 ‘홀’이라는 것은 왕이 어명을 내릴 때 사용하는 지시봉입니다. 이렇게 하라고 내미는 것입니다. 통치의 상징입니다. 홀이 영영히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 왕권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흔들리거나 사라지지 않고 영원한 것처럼 하나님의 통치도 영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면서 자신의 왕권을 행사하는 경건한 왕을 복 주셔서 그 나라를 흔들리지 않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보좌는 영영하고 그 나라의 통치가 공평하고 영원하기 때문에 경건한 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세상 나라와 다릅니다. 하나님 나라의 그늘아래 있기 때문에 이 나라는 영원하고 흔들리지 않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나라, 이것이 바로 시인이 왕을 칭송했던 이유라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가 비록 한 나라의 왕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정의를 사랑하고 그분의 통치를 삶 속에서 구현해가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즐거움의 기름으로 우리에게 부으셔서 다른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소멸되는 것처럼 보일 때도 마음을 다하여 당신과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경외하는 자의 영광
“왕의 모든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으며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
왕의 귀비 중에는 열왕의 딸이 있으며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우편에 서도다
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그러하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지어다
두로의 딸이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은혜를 구하리로다”(시 45:8-11)
본문해설
본문은 왕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몰약과 침향, 육계, 이런 것들은 아주 귀한 향품입니다. 이스라엘에 살던 사람에게 몰약을 받은 적이 있는데 아주 좋은 것은 1kg에 삼사백만 원 정도 값이 나간다고 합니다. 송진을 말린 것 같이 생긴 동글동글한 작은 덩어리입니다. 유리같이 딱딱한데 그것을 빻아서 상처에도 바르고 향료로도 바른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주 고급스런 향료입니다. 침향은 알로에를 가리킵니다. 신약성경에 알로에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육계는 계피의 종류라고 하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향기가 있습니다. 진귀한 향품을 넉넉하게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이것들은 존귀와 부귀의 상징입니다.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 여기에서 ‘상아’는 코끼리 뿔을 가리킵니다. 예로부터 상아로 장식품을 많이 만든 궁을 가리켜서 상아궁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음악은 왕을 즐겁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영광일 것입니다. 두 번째는 “왕의 귀비 중에는 열왕의 딸이 있으며” 다른 나라에서 왕을 공경하거나 그 나라가 워낙 강하기 때문에 친선을 맺기 위해 왕의 딸을 그 나라의 비로 보내는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후궁으로 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우편에 서도다” 열방에서 이 나라가 권세 있는 나라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외하는 자를 높이심
왕이 누리고 있는 영광은 세상 나라의 임금이 누리고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영광입니다. 왕이 큰 영광을 누리면서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높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높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왕이 하나님을 어떻게 경외했습니까? 왕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왕이 권위를 가지고 있지만 그 권위는 제멋대로 휘두르고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권위가 아니고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통치권입니다. 왕이 하나님께서 주신 권한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이 땅에 올바로 세워지도록 이바지 하면서 사니까 하나님이 그를 높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동떨어져서 높아지려는 사람은 밟으시고, 생명이신 하나님을 떠나 그분처럼 부해지려는 자들은 미끄러지게 하시고, 하나님 아닌 아름다운 것에 취해서 이 세상에서 자기의 아성을 쌓으려는 사람들을 내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권세, 모든 자원들이 자신의 것이 아닌 줄 알고 그것으로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그 질서 안에서 높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시편에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에게 물질의 복도 주시고 존귀와 위엄을 더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 높아지는 인생의 방법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안에서 복을 받는 사람입니다. 모든 비극은 복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 밖에서 복을 얻으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는 복
시인이 “딸이여”라고 부릅니다. 이 딸은 본문에 나오는 열왕의 딸입니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그러하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왕을 지극히 공경하되 너의 아비의 집을 잊어버리고 지금 이 나라가 너의 고향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이 나라 안에서 복을 누리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왕’은 오실 그리스도의 표상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 주신 권위와 능력, 위엄을 가지셨지만 그분은 그것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데 철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의 위를 영영 무궁토록 이 땅에 세우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는 그분과 혼인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에서 ‘열왕의 딸’이라는 것은 왕의 후궁을 가리키는 것이고 왕후는 왕의 정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혼인한 사이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그리스도와 혼인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도 그리스도와 혼인한 사이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은 자기가 두고 온 아비의 집인 이 세상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앞에 세워지면서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인간이 절대로 하나님 앞에 복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이 높이시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낮추시는 것도 높이시기 위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높아지고 낮아지는 모든 것들은 낮아지면 비굴이요 높아지면 교만일 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40장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말하며 낮은 곳은 돋우고 높은 곳은 다듬어서 평지가 될 것이며 그것이 주님을 만날 만한 마음임을 예고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우리를 회개시키러 왔던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은 예수와 혼인한 사이입니다. 항상 그 사실을 잊지 말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의지하며 주님 앞에 살아가는 생활,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입니다. 날마다 주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왕의 자손들의 영광
“두로의 딸이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은혜를 구하리로다
왕의 딸이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 옷은 금으로 수 놓았도다
수 놓은 옷을 입은 저가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시종하는 동무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 갈 것이라
저희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
왕의 아들들이 왕의 열조를 계승할 것이라 왕이 저희로 온 세계의 군왕을 삼으리로다
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케 하리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영히 찬송하리로다”(시 45:12-17)
본문해설
왕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축복을 노래하는 가운데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의 축복이 왕 자신뿐만 아니라 왕이 거느리고 있는 자녀들에게까지 계속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왕에게 복을 주시니까 왕을 대적하던 원수들이 평정되고, 왕권뿐만 아니라 실제로 나라를 통치할 수 있는 자원들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이셨으니 이는 자신을 왕으로 삼으신 하나님을 참된 왕으로 알고 그분을 공경하는 것에 대한 은총인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왕들이 많지 않습니다. 왕이라는 제도 자체가 사람을 하나님처럼 높아지게 만드는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통치하는 나라에서 질서를 세워갈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을 때 겸손하게 자기보다 더 높으신 왕을 공경하고 높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에서 자기가 원하는 질서를 왕국의 권세와 위엄을 가지고 마음대로 그려볼 수 있는 것이 왕의 자리입니다. 왕의 자리에 자기를 사랑하고 높이는 마음 없이 오직 하나님을 진심으로 공경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권력과 힘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과 통치의 질서를 펼쳐야겠다고 마음먹으면, 그 왕이 다스리는 나라만큼 하나님의 뜻을 쉽게 이룰 수 있는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대에 그런 임금이 태어났다 할지라도 다음 세대에 그런 임금이 태어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왕국은 끊임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앞에 부여 받은 모든 영광과 권력으로 그분의 통치의 질서를 실현해 나가는 사람들을 한없이 높이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왕의 영광은 큰 나라나 많은 군사와 말, 그리고 소유하고 있는 은과 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을 공경하고 순종하느냐에 의해서 왕의 영광과 왕국의 위엄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나라들이 태어났다가 없어지는데 왜 굳이 이스라엘을 배워야 하는가? 성경을 통해 그 나라의 역사를 그렇게 많이 공부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나라들이 있었지만 그 나라의 크기가 의미의 크기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서 볼 때 크기는 세상 역사에서의 크기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였지만 이스라엘 역사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당신의 지혜와 사랑의 방법을 펼쳐가셨습니다. 그래서 관심이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번영과 쇠약함이 아니라 그 역사에 묻어있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던 왕의 찬란한 영광은 오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고 누리실 영광을 예표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릴 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스리십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육적인 왕국이었으나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영적인 왕국의 한 그림자였습니다. 왕이 하나님을 공경하고 높일 때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입어 이스라엘의 번영을 이루었던 것처럼, 한 사람 예수그리스도의 순종과 복종을 통해서 이 세상에 영적인 왕국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 왕국의 왕의 온전한 순종을 통해 하나님이 그 나라를 번영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어제 친구 목사님의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문상을 갔습니다. 무슬림 선교를 굉장히 열심히 하시는 분인데 굉장히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금 이란의 지하교회가 3,000개 있다고 합니다. 최근에 국가에서 아주 엄격한 법을 통과시켜서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적발되면 처형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법과 상관없이 지하교회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 파송되어 오는 사람들에게 이슬람 교육을 철저히 시키고 교리로 무장을 해서 한국에서 어떻게 생활을 해야 하는지 가르친다고 합니다. 한국에 가면 반드시 기독교인의 도움을 받고, 예수 믿는 여자와 결혼을 하고, 결혼한 후에 이슬람으로 개종시키라는 지시를 받고 온다고 합니다. 굉장히 강한 선교의 의지를 가지고 온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TV를 통해 볼 수 있는 무시무시한 반미데모, 테러들은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런 것과 상관없이 전문가들은 20년 내에 이슬람이 무너질 거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철저한 선교의 의지, 열성적인 반미데모와 테러, 이 모든 것을 움직이는 힘이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열렬하게 데모를 해서 TV에 나오면 자손들이 출세 길이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순전히 자기 번영의 의도를 가지고 헌신하는 것이지 이슬람에 대한 신앙의 헌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슬람도 시간이 흐르면서 신앙이 식어가는 것입니다. 일 세대 이 세대 지나면서 자기 입신양명을 위해 신앙적인 것처럼 보이는 일들을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죽도록 핍박을 하고 심지어 처형도 당해도 지하교회가 이란에 3,000개 정도 되는데 그 수가 우후죽순처럼 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통치하는 나라의 번영입니다.
교회가 시작된 이래로 역사는 교회를 박멸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로마시대에도 그랬고 이후에도 그랬습니다. 수많은 나라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교회를 박멸시키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결코 박멸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교회는 성장해왔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왕국입니다.
대대로 누릴 영광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나라에 복을 주시되 세상 나라의 영광처럼 금이나 은으로 복 주신 것이 아니라 영적인 복을 주셨습니다. 금보다 더한 믿음을 주시고 은보다 소중한 진리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나라로 번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광은 왕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왕의 자녀들이 영광을 누리고 나라를 대대로 통치해가면서 하나님의 왕국의 영광을 드높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스도가 순종하시고 복종하신 것을 보시고 그의 자녀들에게 복을 주셔서 복음의 영광, 진리의 광채, 하나님의 주권의 위엄을 높이며 살도록 그들을 붙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모하고 추구해야 하는 나라는 바로 이런 나라입니다. 세상 나라는 단지 껍질에 지나지 않고 세상 나라와 역사의 껍질을 깨고 나오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왕국이 우리의 완전한 나라이고 영원한 국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의 모든 관심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승리와 영적인 왕국의 흥망 안에 있는 것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이 땅에서 우리의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왕국의 번영, 그리고 교회의 건강한 발전이어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스런 통치를 펼치시고 만민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커다란 그리스도의 왕국과 교회의 왕성한 번영, 그 속에 있는 한 지체의 구성원으로서 이 세상 역사의 파도를 타고 하나님 나라의 왕국의 번영함을 이루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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